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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25 00:47:39

피로스의 승리

상처뿐인 승리에서 넘어옴
1. 개요2. 기원3. 유사 개념4. 진실5. 예시
5.1. 현실5.2. 창작물
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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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키네아스는 이탈리아 원정 준비로 바쁜 피로스를 찾아왔다.
"폐하, 로마는 대단히 호전적인 나라라고 합니다. 만약 그런 나라를 물리칠 수 있게 된다면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하실 생각이십니까?"
"물을 필요도 없는 말이 아닌가. 로마를 정복하게 된다면 그리스인이건, 다른 야만인들이건 우리에게 저항할 수 있는 나라는 더 이상 없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탈리아는 우리의 차지가 되는 것이지."
피로스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키네아스는 잠시 후 다시 물었다. "그럼 이탈리아를 정복하신 다음에는 무엇을 하시렵니까?"
피로스는 키네아스가 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었다.
"이탈리아 옆에는 아주 부유한 시칠리아가 있지 않은가? 그곳은 지금 온 나라가 혼란에 빠져 있으니 손에 넣기에 수월하지 않겠는가?"
"그렇겠지요. 그렇게 된다면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전체를 지배하시게 되겠지요. 그러면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하시렵니까?"
피로스는 크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야, 편안히 쉬면서 날마다 즐거운 이야기나 나누지 뭐⋯⋯."[1]
그러자 이렇게 이야기를 끌어온 키네아스는 말했다.
"폐하는 지금도 편안히 쉬면서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실 수 있습니다. 아무런 노력과 고통 그리고 위험 없이도 이미 그렇게 할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고생을 하시려고 합니까?"
《그리스와 로마의 영웅들》 p. 158~159
고대의 유명한 일화이자 시사용어. 이겼으나 손해뿐인 승리를 의미한다. 즉, 승리하긴 했으나 패배한 것이나 다름이 없거나 승리해도 승리한 것 같지 않은 찝찝한 결과를 낳게 되는 상황을 뜻한다. 피로쓰인 승리

2. 기원

고대 그리스 북서부 에페이로스 왕국의 왕 피로스 1세알렉산드로스 3세 이래 서양 최고의 전략·전술가로 회자되었고 이탈리아 반도와 시칠리아 섬에 대규모 원정을 감행했다. 그로 인해 발발한 피로스 전쟁에서 로마군을 상대로 승리를 여러 번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거둔 승리에 비해 아군의 손실이 너무 많았다.

로마군과 첫 결전을 벌인 헤라클레아 전투에서는 휘하 병력 3만 5천 중 4천을, 그 다음 해에 치른 아스쿨룸 전투에서는 병력 4만 명 중 3천 명을 잃는 큰 손실을 입고 말았다.[2] 플루타르코스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피로스는 자신의 승리를 축하하는 이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가 로마인들과 싸워 한 번 더 승리를 거둔다면, 우리는 완전히 끝장날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유래하여, 승리자에게 엄청난 손실을 안겨 결국에는 패배를 안길 승리를 피로스의 승리라고 칭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피로스는 전투에서는 로마군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두었으나 그에 따르는 손해를 자체적으로 감당하지 못했던 데다 동맹이었던 이탈리아 내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지원 태만으로 힘이 빠지면서 끝내 전쟁에서 패하게 되고 에페이로스로 물러나게 된다. 물론 이기지도 못한 로마군의 피해는 산술적으로 볼 때 훨씬 더 컸지만, 그럼에도 이미 이탈리아 반도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로마는 멀리 원정온 데다 본국의 규모도 훨씬 작았던 피로스에 비해 여력이 남아있었기에 전쟁으로 인한 손해를 감당할 수 있었다.

3. 유사 개념

언뜻 파비우스 전략과 비슷하거나, 같은 결과에 대한 다른 해석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양측 모두 전쟁에서 막대한 인적, 물적 손실을 입는다는 공통점을 보이기 때문. 하지만 피로스의 승리는 공격자의 입장에서, 적에게 큰 피해를 입혔음에도 불구하고 당초 의도했던 전략적 목적(예: 영토 쟁탈, 적의 정치적 굴복)을 거두지 못했다는 점과 달리, 파비우스 전략은 큰 피해를 입어도 전략적 목적(예: 영토 수비, 적의 후퇴)을 달성했다는 점에서 분명 차이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실제로 희생이 아무리 많은 전투라도 전략적 목표를 달성한 전쟁들은 피로스의 승리라고 부르지 않는다.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독소전쟁으로, 당시 소련은 천문학적인 피해를 입었음에도 결국 나치 독일을 무너뜨리는 전략적 대승을 거두었기에 이를 피로스의 승리라 부르는 국가는 없다.

피로스 외에도 '피해가 너무 큰 승리는 오히려 패배한 것과 다를 바 없거나, 더 나쁠 수도 있다.'라고 주장한 사례는 있다.
그러므로 천하가 어지러울 때 다섯 번을 싸워 이긴 나라는 결국 재앙을 면치 못할 것이요, 네 번 만에 이긴 나라는 피폐해질 것이며, 세 번 만에 이긴 나라는 패자(覇者)가 되고, 두 번 만에 이긴 나라는 왕(王)이 될 것이며, 한 번에 쳐 이긴 나라는 황제[帝]가 되리라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여러 번 이겨서 천하를 손에 넣은 자는 드물고, 망한 자가 오히려 많습니다.
오자
是故百戰百勝, 非善之善者也, 不戰而屈人之兵, 善之善者也. 故上兵伐謀, 其次伐交, 其次伐兵, 其下攻城.
시고백전백승, 비선지선자야, 불전이굴인지병, 선지선자야. 고상병벌모, 기차벌교, 기차벌병, 기하공성.

백 번 싸워서 백 번 이기는 것이 최상이 아니다.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키는 것이 최상이다. 그러므로 최상은 병력으로 적의 싸우려는 의도 자체를 깨는 것이고, 다음은 적의 외교를 깨는 것이고, 그 다음은 적의 병사를 깨는 것이고, 성을 공격하는 것은 최악이다.
손자

4. 진실

다만 상술했듯 피로스가 물러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로마와의 전투 그 자체보다는 피로스를 불러온 이탈리아 남부 그리스계 도시국가들의 무성의한 태도가 훨씬 더 큰 문제였었다. 진지하게 논하자면, 안약 이들이 일찍이 충분한 지원을 해주었다면 피로스는 전력의 복구가 한층 더 수월했었을 것이며, 로마에게도 더 큰 위협이 됐을 것이다. 30만 명을 준다는 약속도 막상 가보니 1만 명이었고 심지어 로마와 싸우는 도중 카르타고한테도 어그로를 끌기도 했다. 심지어 해군도 비슷한 수준이 아니라 카르타고가 훨씬 막강해서 피로스는 결국 카르타고 해군에게 대패하여 큰 피해를 입는다. 그래도 새롭게 얻은 병사들이 막장인 상황에서도 로마와 카르타고를 상대로 연승[3]을 했던 것이 인상적이었는지 천하의 한니발조차도 피로스를 자신보다 뛰어난 지휘관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알려진 대로 병력의 피해는 로마군의 피해가 피로스군보다 훨씬 더 컸다. 헤라클레아 전투에서 로마군은 손실이 전사자 약 7천 명, 포로 7천 명이었던 반면, 피로스군은 손실 3~4천 명 정도만 있었으니 전투만 보면 피로스의 완승이다. 아스쿨룸 전투에서도 로마군의 피해는 약 8천 명이었으나 피로스군의 피해는 3천 명으로 피로스군이 더 잘 싸웠다. 결국 피로스가 로마에서 철군한 이유에는 그리스 도시들의 지원이 없어서 돈 준다는 시칠리아나 다른 곳에서 전력을 소모한 것이 컸다.

결론적으로 피로스의 승리에는 승리의 질적 문제보다는 승리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문제보급의 문제가 더 컸다. 이 말의 원전이 그리스인(로마 시민이기도 했지만) 플루타르코스의 작품인 만큼 그저 로마인들의 '자화자찬'이나 정신승리라고 보기는 좀 어려울 것이다.[4]

그러나 이걸 그리스 도시국가들만 탓할 수도 없는 것이, 폴리스들에게 30만명은 커녕 그 1/3이라도 피로스에게 지원할 여유가 있었다면 피로스에게 원군을 요청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외세까지 끌어들인 시점에서 로마보다 한참 열세로 밀리는 상황이었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 또한, 피로스가 로마를 이긴다고 하더라도 전쟁의 달인인 피로스가 로마를 대신해 새로운 상전이 될 수 있음을 생각하면 타란토 등이 피로스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것을 망설일 만도 했다. 그리고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물론 에페이로스까지 합쳐도 국력에서 한참 우위를 점하는 로마를 상대로 공수표 약속만 믿고 무모하게 싸움을 건 피로스 본인도 원정 실패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5. 예시

5.1. 현실

5.2. 창작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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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가 설명하는 작품이나 인물 등에 대한 줄거리, 결말, 반전 요소 등을 직·간접적으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악역의 경우 장렬하게 전사하는 아군을 더욱 의미있고 극적으로 만들 수 있으며, 악역의 적대감의 개연성이 생기고, 결정적으로 주인공의 승리에 현실성이 생기기 때문에 자주 이용된다.

주인공의 경우 긴장감이 높아지며, 작품 전체가 어둡거나, 후속작을 염두에 두고 이런 설정을 차용하기도 하며, 전쟁 영화의 경우 전쟁의 참상과 허무함을 보여주는 장치로써 기능하기도 한다.

6. 관련 문서



[1] 다만 역사적으로 보면 보통 저런 대대적인 정복전쟁이 성공적으로 끝날 경우 점령한 토지의 민심을 안정화시키며 융화 작업을 펼쳐야하는 동시에 점령 지역을 탐내는 자국의 유력자나 귀족들을 상대로 지배력을 행사해 억눌러 왕권을 강화시켜야 하며 그 외에도 이런저런 일이 많다. 그렇기에 정복자는 절대 쉴 수 없다. 키네아스가 위에서 언급한 나라들을 죄다 먹었다면 보통 피로스 시대에서도 무리고 길면 피로스의 다다음 왕까지 가도 안정화가 끝낼까 말까한 수준이다. 한마디로 피로스의 발언은 땅을 먹을 생각만 하고 이후는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 이러면 나라가 망하기 딱 좋은데, 다른 것도 아닌 그 마케도니아알렉산드로스 3세가 정복전쟁을 끝내기도 전에 요절해버리자 바로 나라가 쫄딱 망했다. 마케도니아인과 페르시아인의 융화 작업을 이미 하고 있었는데도! 그나마 피로스가 이것까지 고려했다면 '전쟁이 끝났을 경우 정복지 내에서 내 지지도는 땅바닥을 칠 테니 나는 그 적의를 전부 짊어지고 은퇴하며 그 대신 비교적 무난한 내 후계자를 세워 안정화를 시작한다.'라고 생각하고 말했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이 일화나 후술할 모습을 보면 그럴 가능성이 낮다.[2] 아스쿨룸 전투 때 잃은 병력들 중에는 장교들이 많아서 타격이 더 컸다.[3] 물론 피로스는 신병들을 고평가하지는 않았는지 이겨도 자신의 본래 부하들이 죽을 때마다 우려가 많았다.[4] 플루타르코스는 로마에 꽤 우호적 이었지만 그렇다고 그리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5] 다만 카르타고가 한니발을 방치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몇번이나 병력을 편성하여 한니발을 지원하려 했으나, 그럴 때마다 다른 곳에서 로마군에게 대패하여 긴급하게 병력 충원이 필요하게 되어 그쪽으로 보낸 것이다. 어쩌다 이탈리아 본토로 증원된 병력도 대부분은 지중해를 건너다 로마 해군에게 걸려서 몰살당하거나, 운좋게 상륙해도 전염병이나 로마 육군의 요격으로 족족 괴멸되었다. 괜히 전쟁은 혼자 하는 게 아니라는 격언의 대표적인 예시로 한니발이 거론되는 게 아니다.[6] 다만 형양-성고 라인의 고제와 팽월, 한신은 따로 싸웠다기보다는 대전략 하에서 유기적으로 싸운 것이므로 어느 하나만 떼어놓고 생각할 수는 없다. 애시당초 고제-한신-팽월은 따로따로 싸운 것이 아니라 대전략 하에서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싸우고 있었기 때문. 즉, 고제-한신-팽월 그 전부를 합쳐서 항우의 피로스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7] 사실, 이릉이나 이광, 사마천 문서를 보면 한무제의 인재를 보는 안목은 매우 처참한 수준임이 드러나는데, 한무제가 위청과 곽거병을 발탁된 이유는 그들이 한무제가 총애하던 무사황후 위씨의 동생과 조카였기 때문이다. 즉, 자신이 총애하던 위씨의 외척들을 밀어주다보니 운 좋게도 명장인 위청과 곽거병이 발탁되었던 것.[8] 애시당초 사마의의 아들 사마소는 자기네 사마씨 가문이 당시 신하이면서도 위나라 황제 조방을 살해했기 때문에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위나라를 승계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지들은 황제를 죽여놓고 자기들한테 충성을 바치라고 해봤자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이기 때문. 그래서 이들은 촉을 쳐 멸망시키는 방법으로 진나라 건국을 정당화하려 한 것이다. 한마디로 촉한은 후한의 뒤를 잇는 국가이므로 우리가 촉한을 쳐서 물리쳤으니 우리가 이제부터 황제국이라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논리.[9] 원나라 시절 몽골족과 더불어 지배민족 지위에 있었던 색목인(정확히는 그 중에서 무슬림)이 명나라 건국 이후 명 황실의 정책에 의해 강제로 한족에 동화되어 이슬람교 신앙만 겨우 지켜낸 것이 오늘날 후이족의 직계 기원이다.[10] 북주의 신하 출신이던 양견에서부터 시작된 수나라 황실 혈통과 수나라의 신하 출신이던 이연에서부터 시작된 당나라 황실 혈통부터가 선비족의 혈통이 있다.[11] 사타족 중 일부는 장기적 차원에서 몽골계 민족(요나라나 원나라 때)이나 퉁구스계 민족(금나라나 청나라 때)에 동화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12] 특히나, 명청전쟁 당시 청나라 군사력의 핵심이었던 팔기군은 청 말기에는 전성기 당시의 전투력은 완전히 쇠퇴한 채 기득권의 상징이 되어버려 쇠퇴하는 청의 원인 그 자체나 다름이 없었고, 청 말기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한 것은 증국번을 필두로 한 한족 출신의 의병들이었다.[13] 한일관계에 대입하면, 일제강점기일본 제국한민족에게 강요했던 야마토 민족 전통문화를 한민족이 역으로 빼앗은 격이라고 볼 수 있다.[14] 당나라가 동아시아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고구려를 멸망시키려던 것이었던 만큼, 고구려와 전쟁을 치르기 전 가장 위협적인 북방민족이었던 돌궐을 미리 제압하는 등 준비 과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당나라의 예상보다 고구려의 저력이 훨씬 강력했던 점이 피로스의 승리가 된 근본적인 원인이었다.[15] 다만 그래도 이라클리오스가 페르시아에게 승리하였기 때문에 로마 제국이 살아남았다고 볼 수도 있다. 이라클리오스에게 패배한 사산조 페르시아는 아예 이슬람에게 멸망해버렸다. 또한 이라클리오스는 군사력을 보존시켜 아나톨리아는 유지했고 2세기 후 로마 제국은 다시 한번 중흥기를 맞게 된다.[16] 만약에 패배했더라면 오히려 동로마의 멸망이 앞당겨졌을 가능성이 높다. 일단은 이슬람 세력이 집단력이 강하게 뭉친 군사들이 많았는데 동로마가 페르시아에게 패배했다면 페르시아가 멸망하는 날에 자신들에게도 칼날이 날아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승리해서 병력을 보존시켜 퇴각한 덕분에 어느 정도 대처가 가능했다.[17] 다만 정상참작 해야 하는 게 전대 황제인 포카스의 실정이 너무 컸으며, 페르시아 방면에 총력을 기울인 탓에 발칸과 이탈리아 전선은 완전히 붕괴되었으며 설상가상으로 페르시아 전쟁 종전 2년도 안 되어 아라비아 반도를 통일한 이슬람의 팽창이 시작되는 등 시대가 그와 동로마 제국을 따라주지 않았다.[18] 발해계 요나라 유민들과 한족계 요나라 유민들은 요나라 내에서 피지배민족이었기 때문인지 거란계 요나라 유민들에 비하면 고려 내에서 그나마 대접이 나았던 편이다.[19] 다만 이건 어쩔 수 없었던 것이 이 당시 어떤 매국노 놈이 송나라가 건국되기도 전에 요나라에 원군을 요청하는 대가로 연운 16주라는 요충지를 그냥 넘겨버렸기 때문이었다. 이 땅들은 만리장성 남쪽에 위치한 곳이라서 이를 되찾지 않으면 설령 요나라나 금나라를 멸망시켜도 아무런 성과가 없었던 거나 마찬가지였다. 즉, 요와 금을 멸망시켜서 완충지대가 사라졌다기보다는 이미 예전에 완충지대가 홀라당 넘어가서 그 완충지대를 되찾으려고 무리하게 전쟁을 일으켰던 것이다.[20] 얼마나 심했으면 임진왜란 내내 땡땡이만 쳤던 다테 마사무네도 이 전투에 참전했을 정도이며, 고니시 유키나가는 아예 심유경에게 대놓고 "어쩔 수 없이 쳐들어가야 하니 차라리 성을 비우는 게 더 나을 거요!"라고 언질을 줬을 정도였다.[21] 이후로는 딱히 별 대규모 전투 없이 일본과 명나라의 강화회담으로 흘러가며, 조선은 이미 명나라가 회담 주도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다 할 의견을 내기 힘들었다.[22] 사실 노량 해전도 임진왜란의 다른 해전들과 달리 침략해오는 일본 수군을 격파하는 게 아니라 도망치는 일본 수군을 포위하여 섬멸하는 거라서 임진왜란의 다른 해전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원거리 공격이 줄어들고 근접전이 많아진 탓에 필연적으로 피해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이순신은 본인마저 전사할 만큼 조선 수군의 피해가 컸던 노량 해전마저 조선 수군이 승리한 해전으로 만든 명장이다.[23] 지금이야 명량 해전이 조선이 제해권을 탈환하게 만든 통쾌한 승리로 여겨지지만, 명량 해전에서 조선군이 승리한 직후의 시점에서만 보면 겨우 그 승리만으로 조선이 정유재란에서 승리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사실상 없다시피 했다. 애초에 명량해전조차도 승리 가능성이 거의 제로인 거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고, 이순신 본인조차도 난중일기에 천행이었다고 기재했을 정도였다.[24] 죽지 않고 잠수탄 것이라는 설도 있다.[25] 이들이 도쿠가와 진영에 합류한 이유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정권에 반기를 드는 것이 아닌 도요토미 정권을 위협하는 서군의 이시다 미츠나리를 비롯한 간신들 처단을 명분으로 내세웠기 때문이다.[26] 신성 로마 제국 중 가톨릭 세력. 당시 제국 내 개신교 세력은 스웨덴을 지원하였다.[27] 국왕이 최전방으로 시찰을 나가다 갑자기 몰아닥친 안개에 길을 잃고 헤메다가 재수없게도 지나가던 적 기병대에 발각돼서 사망.[28] 사실 부르봉 왕가의 사치는 루이 14세 시기부터 시작되어 루이 15세 때 절정을 맞았기에 루이 14세와 루이 15세의 책임이 크다. 루이 16세는 오히려 상당히 검소했으며, 사치스런 생활을 한 것으로 유명한 마리 앙투아네트도 의외로 검소하게 살았다. 특히 사치스럽게 살려 해도 당시 프랑스의 재정이 파탄났기에 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선대 왕들의 사치가 너무 쩔어줘서 두 내외가 아무리 아끼고 아껴봐야 기울어가는 나라를 살리는데는 택도 없었고(…), 이를 해결할 능력이 부족했을 뿐이었다. 나중에 프랑스 왕실을 몰락시킨 혁명정부도 루이 14세와 루이 15세가 망친 재정 문제는 끝끝내 해결하지 못했다.[29] 이 때문에 이 전투는 "The imprisoned got out of their cell, punched the jailer & then returned." /"죄수가 감방에서 나와 간수를 후려치고 다시 감방으로 돌아갔다."고 흔히 평가된다. 다만 유틀랜드에서 독일 해군의 목적은 봉쇄를 뚫는 게 아니라 영국 해군에 피해를 입혀 이후에 봉쇄를 뚫기 더 용이하게 하려는 것이었으므로 유틀랜드 해전 자체에 대하여는 잘못된 비유이며,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전쟁 전체의 상황에 훨씬 더 어울린다.[30] 일선에서 진격해야 한다고 간언했지만 히틀러와 룬트슈테트가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진격하는 것에 대한 불안감으로 거부했다.[31] 정확히는 전사 및 실종 12만 7천명, 부상 18만명, 포로 5천여 명, 전차는 1200여대에서 3500여대까지 격파당하고 항공기는 261기에서 515기까지 격추당해 인적, 물적 손실이 엄청났다.[32] 미국에서 칠면조는 총으로 사냥하면 보다도 잡기 쉬운 만만한 사냥감 취급을 받는다. 그만큼 미국 쪽이 일방적으로 학살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는 뜻이다.[33] 여러 건물들로 얽혀 있는 부코바르의 도심 지형을 이용해 유고 인민군과 세르비아인 민병대들에게 기습전과 비정규전으로 공격하여 타격을 입혔다.[34] 이는 역사적으로 중국베트남이 서로 천하의 적대관계였던 탓도 있다. 사실상 동남아시아판 한일관계인 셈이다.[35] 다만 싸운 끝에 얻은 것이 피로스의 승리인 게 아니라 애초에 최종 목적이 달성되면 숙청당할 처지였다. '무력에 의한 분쟁 근절'을 표면적인 목적으로 내걸었지만 본래의 목적은 솔레스탈 비잉에 대항하기 위해 세계가 하나가 되도록 하는 것이었기 때문.[36] 바르칸과의 전투로 인해 헤르메스 길드는 최상위권 유저들의 감춰둔 스킬들이 전부 방송으로 보여지게 되었고, 또한 엄청 고생해서 잡았지만 이미 위드에게 전리품이 털려서 전혀 쓸모없는 잡템만 주게 되었다.[37] 덤으로 오즈마의 남은 기운을 흡수하려다 반야의 방해, 여기에 미카엘라가 개입해 오즈마의 기운을 모두 흡수하는 바람에 사상 최초사도의 기운 수집 작전이 실패했다.[38] 순혈자 두명의 피를 가진 반야랑 잠식에서 벗어나 전장을 이탈한 K, 그리고 오닉스 블랙과 콜링 제이드가 죽지 않았다. 다만 반야는 현재 실종 상태.[39] 이 과정에서 같은 Z전사들인 야무차, 천진반, 피콜로(드래곤볼), 차오즈와 베지터의 동료였던 내퍼는 전투 도중 목숨을 잃고 만다.[40] 애시당초 불행과 절망에 빠지지 않으면 기술 자체를 사용할 수 없으므로 이 기술을 사용했다면 설령 이기더라도 피로스의 승리는 보장되어 있는 셈이다.[41] 다만 피로스의 승리는 단순히 승리는 했지만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전술적으로 승리하긴 했지만 전략적인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을 때 사용하는 말인데, 타노스는 최종 승리를 차지했고 목적도 달성했으며 타노스 본인도 이에 만족했기 때문에 정말로 피로스의 승리에 해당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제로 지구에 핑거스냅이 있고 나서는 자연이 회복되었다는 말도 있었고.[42] 그리고 캡틴 아메리카는 과거로 돌아가 여생을 보낸 후 노인이 되어 현대로 되돌아와 은퇴하고 만다.[43] 안다롱은 순이, 소희, 윤미가 서로 물어뜯고 싸우는 걸 예상하고 있었었다.[44] 결국, 공주까지 제물로 바쳐질 위기에 처해 스쿼드의 리더는 완전히 멘붕에 빠졌으며, 현재 복수귀로 각성한 누군가에게 전원 처단당할 위기에 처한다. 다행히 미카의 복수는 사오리의 사연을 듣고 멈췄고 함께 아츠코를 구한 뒤 에덴 조약 편의 만악의 근원을 처단함으로써 무사히 문제를 해결했다.[45] 트리니티 측에서는 티파티의 키리후지 나기사, 미소노 미카, 유리조노 세이아, 시스터후드의 리더인 우타즈미 사쿠라코가 없어 공중분해 전까지 갈 뻔했으며, 게헨나 측에서는 소라사키 히나라는 강력한 지휘관이 부상당해 혼란을 트리니티 못지않게 겪는다.[46] 그래도 선생 암살 건은 실행자 본인의 의지가 아니라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일어난 것이라 선생 본인도 이 일에 대하여 걸고넘어지지 않았다.[47] 총 소모턴 수가 1,000 턴을 안 넘어가더라도 배드엔딩이 되는 소모 턴 수만 넘기고 다른 조건을 충족시키지 않으면 같은 배드엔딩이 나오지만, 보통은 총 소모턴 수가 1,000턴을 넘어가는 상황이 압도적으로 많다.[48] 섬라국은 보통 태국을 가리키지만 수호후전에 나온 배경은 작품을 쓴 시대의 상황을 감안하면 대만으로 보는 편이 자연스럽다.[49] 좀 이상한 게, 한 나라의 정보국장이 와 있는데 호위 병력은커녕 동네 경찰도 없다.[50] 외적으로 보자면 이후 이야기가 스타워즈 클래식 삼부작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피로스의 승리에 적합하지 않다.[51] 사실 이 장면은 굉장히 논란이 많은 부분이다.[52] 마르샨이라는 나라가 소수를 제외하면 마녀의 인식이 열악하며 두려워하고 싫어한다. 야슈무는 막내 여동생인 루루가 마녀 오타쿠인 탓에 마녀타령을 질리도록 들었는지라 여동생의 이런 모습 탓에 마녀를 싫어하는 것도 한몫했다.[53] 후에 여제로 즉위.[54] 알드노아를 지구에 제공하고 화성 양륙성의 철수하는 것이 평화협정의 조건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55] 버스제국의 황족은 알드노아의 기동권한을 부여하고 빼앗을 수 있다. 그래서 알드노아 드라이브로 움직이는 지구연합군의 전함인 듀칼리온은 아세일럼 공주가 필요했다.[56] 기지의 아레이온의 절반이 파괴되었고 지상 시설은 아예 포기했으며 화성제국군이 침투했으므로 지하 시설에도 심각한 피해가 있었을 것이다.[57] 전투 후 카이즈카 유키의 독백에서 양측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언급된다.[58] 여기에 기근까지 와서 수많은 사람들이 사망했다.[59] 이렇게 신하들한테 권력을 빼앗겨 꼭두각시 노릇을 한 왕이 작중에서 아에곤 3세가 유일하다.[60] 슈트리건 편대와 싸우지 않으면 죽을 상황이라 살기 위해 싸운 것이란 해석도 있으나 이때 가루다 2 섐록과 공중조기경보통제관 고스트 아이 사이의 대화 맥락을 보면 섐록이 그레이스메리아에 있을 가족을 떠올리고 눈이 돌아서 독단적으로 행동한 것에 가깝다.[61] 한편 이와 별개로 만약에 작전 중단이 이뤄지지 않고 에메리아군이 그대로 진격했다면 에스토바키아군이 대량살상무기로 에메리아의 수도 그레이스메리아를 작살낼 예정이었으므로 에메리아군 전체도 폐허가 된 그레이스메리아가 기다리는 피로스의 승리가 되었을 것이다.[62] 연출만 보면 전형적인 해피 엔딩 같은 오해를 불러오기 딱 좋다.[63]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긴 것과 이긴 덕에 사람들에게 정의의 수호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준 것, 더욱이 불러온 칠무해들은 별 도움도 안 되었으니 정상전쟁의 공은 거의 다 해군 것이다.[64] 다만 버기가 사황이 된 건 크로커다일쥬라큘 미호크버기즈 딜리버리를 끌어들여 크로스 길드를 창설한 이후였는데, 이들이 버기에게 접근한 계기는 세계정부의 칠무해 폐지였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세계정부와 해군 측의 자업자득이라 할 수 있었다.[65] 이들을 쓰러뜨리고 나서 티리온 폴드링이 상처뿐인 승리라고 언급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시험장은 리치 왕에 대항할 최정예 용사를 선발하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자존심 싸움 때문에 그런 용사들을 상잔시킨 것이 이 전투기 때문이다.[66] 개발진 피셜로는 호드의 승리지만, 호드는 얼라이언스의 병력을 소모시켰을 뿐 그 외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다. 또한 얼라이언스도 목표였던 실바나스 윈드러너언더시티 중 어느 것도 확보하지 못했다.[67] 일단 승리자는 실바나스지만, 사울팽의 도발에 넘어가 그 안 좋은 의미로 유명한 '호드는 아무것도 아니야!'라는 대사를 치는 바람에 대족장 직위에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68] 실은 박 일병이 후임병을 상대로 갑질하고 선임병을 상대로 하극상을 일으키는 등 황제 복무 논란으로 수많은 악행을 저질렀으나 반성하는 기미를 보이지 않고 부모 인맥을 악용해 "제 아버지 이름을 걸고 맹세합니다."라고 아전인수 식으로 당당한 태도를 보였다. 이전 부대의 소대원들은 박 일병의 황제 복무 논란에도 방관하고 조만필을 배척한다.[69] 이 두 곳은 나중에 병자호란 이후에 청의 압력으로 돌려받는다.[70] 다만 이 부분은 영화 특유의 코믹성이 과장된 연출을 비극으로 해석한 평에 가깝다. 영화를 보면 성룡이 공업용 알코올을 들이킨 뒤 침을 바닥에 뱉자 불이 생기거나 입에서 커다란 방울을 뿜는 모습 등은 비극성보다는 코믹 액션에 중점을 두고 있다.[71] 원작에서는 전쟁의 원인인 스로르가 영화에서는 아자눌비자르 전투중 아조그에게 죽음을 맞는 것으로 바뀐다.[72] 이 작품은 사실 주인공 세력인 인류제국이 이긴 전쟁은 거의 다 피로스의 승리다.[73] 다만 바우어리 킹이 도와준다는 암시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