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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트 아인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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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연구 업적 <colcolor=#000,#fff>상대성 이론 : 일반(등가 원리아인슈타인 방정식중력파중력 렌즈 효과) • 특수(상대성 원리질량-에너지 등가원리)
광전효과 • 유도 방출 • EPR 역설(양자 얽힘) • 보스-아인슈타인 응집브라운 운동정적 우주론(우주 상수) • 통일장 이론
생애 아인슈타인 생애
소속 베른 대학교취리히 대학교프린스턴 대학교
관련 학자 닐스 보어베르너 하이젠베르크막스 보른에르빈 슈뢰딩거
기타 양자역학벨의 부등식타키온블랙홀시공간(민코프스키 다이어그램) • 아인슈타인 합 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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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뢴트겐 헨드릭 A. 로런츠 피터르 제이만 앙투안 베크렐
<rowcolor=#cd9f51> 1903 1904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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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퀴리 마리 퀴리 존 라일리 필립 레나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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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프 톰슨 앨버트 마이클슨 가브리엘 리프만 굴리엘모 마르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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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브라운 요하네스 판 데르 발스 빌헬름 빈 닐스 달렌
<rowcolor=#cd9f51> 1913 1914 1915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 파일:영국 국기.svg 파일:영국 국기.svg
헤이커 오너스 막스 폰 라우에 헨리 브래그 윌리엄 브래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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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바클라 막스 플랑크 요하네스 슈타르크 샤를 기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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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닐스 보어 로버트 밀리컨 만네 시그반
<rowcolor=#cd9f51> 1925 1926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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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프랑크 구스타프 헤르츠 장 페랭 아서 콤프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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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윌슨 오언 리처드슨 루이 드 브로이 찬드라세카라 라만
<rowcolor=#cd9f51> 1932 1933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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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너 하이젠베르크 폴 디랙 에르빈 슈뢰딩거 제임스 채드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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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터 헤스 칼 앤더슨 클린턴 데이비슨 조지 톰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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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엔리코 페르미 어니스트 로런스 오토 슈테른 이지도어 라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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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프강 파울리 퍼시 브리지먼 에드워드 애플턴 패트릭 블래킷
<rowcolor=#cd9f51> 1949 1950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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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카와 히데키 세실 파월 존 콕크로프트 어니스트 월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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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블로흐 에드워드 퍼셀 프리츠 제르니케 막스 보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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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보테 윌리스 램 폴리카프 쿠시 윌리엄 쇼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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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바딘 월터 브래튼 리정다오 양전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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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벨 A. 체렌코프 일리야 프란크 이고르 예브게니예비치 탐 오언 체임벌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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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오 지노 세그레 도널드 글레이저 로버트 호프스태터 루돌프 뫼스바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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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프 란다우 유진 위그너 마리아 메이어 한스 옌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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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타운스 니콜라이 바소프 알렉산드르 프로호로프 리처드 파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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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앨버레즈 머리 겔만 한네스 알벤 루이 네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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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니스 가보르 존 바딘 리언 쿠퍼 존 슈리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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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서니 휴이시 오게 보어 벤 모텔손 제임스 레인워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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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턴 릭터 새뮤얼 팅 필립 워런 앤더슨 존 밴블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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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빌 모트 표트르 카피차 아노 펜지어스 로버트 윌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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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 피치 니콜라스 블룸베르헌 아서 숄로 카이 시그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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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스 윌슨 수브라마니안 찬드라세카르 윌리엄 A. 파울러 카를로 루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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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 판 데르 메이르 클라우스 폰 클리칭 에른스트 루스카 게르트 비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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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로러 요하네스 베드노르츠 카를 뮐러 리언 레더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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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빈 슈워츠 잭 스타인버거 한스 데멜트 볼프강 파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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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롬 프리드먼 헨리 켄들 리처드 테일러 피에르질 드 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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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샤르파크 러셀 헐스 조지프 테일러 버트럼 브록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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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퍼드 슐 프레더릭 라이네스 마틴 펄 데이비드 모리스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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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글러스 오셔로프 로버트 리처드슨 윌리엄 필립스 스티븐 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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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 코엔타누지 대니얼 추이 로버트 러플린 호르스트 슈퇴르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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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라르뒤스 엇호프트 마르티뉘스 펠트만 조레스 알표로프 허버트 크뢰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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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 킬비 칼 위먼 에릭 코넬 볼프강 케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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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먼드 데이비스 고시바 마사토시 리카르도 자코니 비탈리 긴즈부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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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세이 아브리코소프 앤서니 레깃 데이비드 그로스 데이비드 폴리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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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윌첵 로이 글라우버 존 홀 테오도어 헨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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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 미국의 시사잡지인 라이프에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미국인 100인을 선정했다. 순위는 없으며, 만장일치로 선정된 인물은 헨리 포드라이트 형제뿐이다.
제인 애덤스
<사회 개혁가>
무하마드 알리
<권투선수, 인권 운동가>
엘리자베스 아덴
<사업가>
룬 알레지
<방송 경영자>
루이 암스트롱
<재즈 뮤지션>
조지 발란신
<안무가>
존 바딘
<물리학자>
어빙 벌린
<작곡가>
에드워드 버네이스
<홍보 책임자>
레너드 번스타인
<작곡가, 지휘자>
말론 브란도
<배우>
베르너 폰 브라운
<로켓 공학자>
데일 카네기
<작가>
월레스 캐러더스
<발명가, 화학자>
윌리스 하빌랜드 캐리어
<에어컨 발명가>
레이첼 카슨
<작가, 해양생물학자>
빙 크로스비
<가수, 배우>
클래런스 대로
<변호사>
유진 데브스
<노동운동가, 사회주의자>
로버트 더그래프
<포켓북 창업자>
존 듀이
<철학자>
월트 디즈니
<기업가, 애니메이션 제작자>
W. E. B. 듀보이스
<NAACP 설립자>
앨런 덜레스
<CIA 국장>
밥 딜런
<포크 뮤지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물리학자>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
<시인>
윌리엄 포크너
<소설가>
에이브러햄 플렉스너
<교육자>
헨리 포드
<기업가>
존 포드
<영화감독>
베티 프리댄
<페미니스트 여성 작가>
밀턴 프리드먼
<경제학자>
조지 갤럽
<여론 분석가>
아마데오 지아니니
<은행가>
빌리 그레이엄
<목사>
마사 그레이엄
<댄서, 안무가>
데이비드 와크 그리피스
<영화감독>
조이스 홀
<사업가>
어니스트 헤밍웨이
<소설가>
올리버 홈스 주니어
<법학자>
존 에드거 후버
<FBI 초대 국장>
로버트 허친스
<교육자>
헬렌 켈러
<인권 운동가>
잭 케루악
<시인, 작가>
빌리 진 킹
<인권 운동가, 테니스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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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렘 콜프
<생명과학자>
레이 크록
<맥도날드 창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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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 발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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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개발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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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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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C. 마셜
<군인, 정치인>
루이스 B. 메이어
<영화 제작자>
클레어 매카델
<패션 디자이너>
조지프 매카시
<변호사, 정치인>
프랭크 맥너마라
<신용카드 발명가>
마거릿 미드
<인류학자>
칼 메닝거
<정신과 의사>
찰스 E. 메릴
<주식 중개인>
미스 반 데어 로에
<건축가>
로버트 모세
<공무원>
윌리엄 멀홀랜드
<토목 기사>
에드워드 R. 머로
<종군기자>
랠프 네이더
<소비자 보호가, 환경보호가>
라인홀드 니부어
<윤리학자>
존 폰 노이만
<물리학자, 수학자>
유진 오닐
<극작가, 작가>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물리학자>
윌리엄 S. 페일리
<방송 경영자>
잭슨 폴록
<화가>
에밀리 포스트
<소설가, 작가>
엘비스 프레슬리
<가수>
재키 로빈슨
<야구선수>
존 데이비슨 록펠러 주니어
<기업가>
리처드 로저스
(로저스 앤 해머스타인)
<뮤지컬 작곡가, 작사가>
윌 로저스
<배우, 작가>
엘리너 루스벨트
<FDR의 아내, 사회운동가>
베이브 루스
<야구선수>
조너스 소크
<소아마비 백신 개발자>
마거릿 생어
<사회운동가>
앨프리드 P. 슬론
<사업가, 산업가>
벤자민 스팍
<소아과 의사>
앨프리드 스티글리츠
<사진작가>
로이 스트라이커
<공무원, 사진작가>
빌 윌슨
<AA 창립자>
앤디 워홀
<화가>
얼 워런
<대법원장>
제임스 듀이 왓슨
<생물학자, 유전학자>
토머스 왓슨 주니어
<사업가, 정치인>
테네시 윌리엄스
<극작가>
월터 윈첼
<신문기자>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건축가>
라이트 형제
<최초의 비행기 제작자>
말콤 엑스
<인권 운동가>
출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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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AOL디스커버리 채널에서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투표한 ‘가장 위대한 미국인’ 명단이다.
1위 2위 3위 4위 5위
로널드 레이건 에이브러햄 링컨 마틴 루터 킹 조지 워싱턴 벤저민 프랭클린
6위 7위 8위 9위 10위
조지 W. 부시 빌 클린턴 엘비스 프레슬리 오프라 윈프리 프랭클린 D. 루스벨트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빌리 그레이엄 토머스 제퍼슨 월트 디즈니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토머스 에디슨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존 F. 케네디 밥 호프 빌 게이츠 엘리너 루스벨트 랜스 암스트롱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무하마드 알리 로자 파크스 라이트 형제 헨리 포드 닐 암스트롱
영문 위키 참고.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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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11월 독일의 공영TV인 ZDF가 독일 국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독일인 1백인’을 발표한 명단이다.
TOP 10
1위2위3위4위5위
콘라트 아데나워 마르틴 루터 카를 마르크스 한스, 죠피 숄 남매 빌리 브란트
6위7위8위9위10위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오토 폰 비스마르크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11위~100위
11위12위13위14위15위
아돌프 콜핑 루트비히 판 베토벤 헬무트 콜 로버트 보쉬 다니엘 퀴블뵈크
16위17위18위19위20위
콘라트 추제 요제프 켄테니히 알베르트 슈바이처 카를하인츠 뵘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21위22위23위24위25위
헬무트 슈미트 레진 힐데브란트 알리체 슈바르처 토마스 고트샤크 허버트 그로네메이어
26위27위28위29위30위
미하엘 슈마허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빌헬름 콘라트 뢴트겐 귄터 야우흐 디터 볼렌
31위32위33위34위35위
얀 울리히 슈테피 그라프 사무엘 하네만 디트리히 본회퍼 보리스 베커
36위37위38위39위40위
프란츠 베켄바워 오스카 쉰들러 네나 한스 디트리히 겐셔 하인츠 뤼만
41위42위43위44위45위
하랄트 슈미트 프리드리히 대왕 임마누엘 칸트 패트릭 린드너 하르트무트 엥겔
46위47위48위49위50위
힐데가르트 폰 빙엔 헤이노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마를레네 디트리히
51위52위53위54위55위
로베르트 코흐 요슈카 피셔 카를 마이 로리오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56위57위58위59위60위
루디 푈러 하인츠 에르하르트 로이 블랙 하인츠 하랄트 프렌첸 볼프강 아펠
61위62위63위64위65위
알렉산더 폰 훔볼트 피터 크라우스 베르너 폰 브라운 디르크 노비츠키 캄피노
66위67위68위69위70위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 세바스티안 크나이프 프리드리히 실러 리하르트 바그너 카타리나 비트
71위72위73위74위75위
프리츠 발터 니콜 프리드리히 폰 보델슈윙흐 오토 릴리엔탈 마리온 돈호프
76위77위78위79위80위
토마스 만 헤르만 헤세 로미 슈나이더 스벤 하나발트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여공작
81위82위83위84위85위
빌리 밀로위치 게르하르트 슈뢰더 요제프 보이스 프리드리히 니체 루디 두치크
86위87위88위89위90위
카를 레만 베아테 우제 트뤼머프라우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 헬무트 란
91위92위93위94위95위
알브레히트 뒤러 막스 슈멜링 카를 벤츠 프리드리히 2세 라인하르트 메이
96위97위98위99위100위
하인리히 하이네 게오르크 엘저 콘라드 두덴 제임스 라스트 우베 젤러
출처
같이 보기 :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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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지 선정 20세기의 인물
Time Person of the Century
파일:attachment/1101991231_400.jpg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 ||
<colbgcolor=#000><colcolor=#fff,#ddd>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Albert Einstein[1]
파일: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컬러).jpg
출생 1879년 3월 14일
독일 제국 뷔르템베르크 왕국 울름
(現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 튀빙겐 울름)
사망 1955년 4월 18일 (향년 76세)
미국 뉴저지 주 프린스턴
학력 아라우 주립학교 (졸업)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 (학사)
취리히 대학교 (박사)
소속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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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ddd> 종교 무종교[2]
사상 사회주의[3]
국적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 독일 제국 (1879-1896)
무국적 (1896-1901)

[[스위스|]][[틀:국기|]][[틀:국기|]] (1901-1955)
파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국기.svg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1911-1912)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 독일 제국 (1914-1918)
파일:독일 국기(3:2 비율).svg 바이마르 공화국 (1918-1933)

[[미국|]][[틀:국기|]][[틀:국기|]] (1940-1955)
주요 업적 상대성 이론
아인슈타인 방정식
브라운 운동
광전효과
질량-에너지 동등성
보스-아인슈타인 응집
우주 상수
EPR 역설
부모 아버지 헤르만 아인슈타인 (1847-1902)
어머니 파울리네 코흐 (1858-1920)
배우자 밀레바 마리치 (1903년 결혼 / 1919년 이혼)
엘사 아인슈타인 (1919년 결혼)
자녀 리제를 아인슈타인 (1902-1903?)
아들 한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1904-1973)
아들 에두아르트 아인슈타인 (1910-1965)
서명
파일: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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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유년 시절2.2. 대학 시절2.3. 초기 직장 생활2.4. 특허청 시절2.5. 연애와 결혼2.6. 1906 ~ 1932 (취리히 - 베를린)2.7. 미국으로 망명하다2.8. 사망
3. 학문적 업적
3.1. 상대성 이론3.2. 통계역학
3.2.1. 보즈-아인슈타인 통계
3.3. 고체물리학
3.3.1. 아인슈타인 고체 모델
3.4. 양자역학
3.4.1. 광양자 가설(광자)3.4.2. 브라운 운동3.4.3. EPR 역설3.4.4. 유도방출
3.5. 현대 우주론
3.5.1. 정적 우주론우주 상수3.5.2. 아인슈타인-드지터 모델3.5.3. 가속팽창과 우주 상수
3.6. 통일장 이론
4. 평화주의와 반핵 운동5. 일화
5.1. 아인슈타인과 수학5.2. 종교관5.3. 개인적 일화와 인간성5.4. 양자역학에 대한 반감5.5. 노벨상 이야기
6. 어록7. 대중매체에서8. 논란
8.1. 밀레바 마리치의 기여 논란8.2. 중국인·아랍인·스리랑카인 비하

[clearfix]

1. 개요

독일 제국 출신[4] 유대계 스위스-미국 국적의 이론물리학자이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이론물리학자라고 여겨지며 대중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다.[5]

그가 이룬 놀라운 지적 업적들과 독보적인 창의성은 그의 이름이 천재와 동의어가 되는 결과를 만들었다. 그의 헤어스타일, 표정, 얼굴 주름, 패션, 눈빛 등 사소한 개인적 이미지 또한 천재의 상징과도 같아졌으며 타임지20세기를 대표하는 세기의 인물로 아인슈타인을 선정하였다.

1905년, 당시 26세이던 아인슈타인은 한 해 동안 공간, 질량, 시간, 에너지에 대한 개념을 완전히 바꾸어버리고 물리학의 근간을 뒤흔드는 창조적이고 혁명적인 논문 네 편을[6] 발표하며 현대 물리학의 발전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는데, 이 해를 한 명의 사람이 기적을 일으킨 해라고 하여 기적의 해(라틴어: Annus mirabilis)라고 부른다. IUPAP (International Union of Pure and Applied Physics)에서는 기적의 해 100주년이 되는 2005년을 '세계 물리학의 해'로 기념하기로 결정했는데 이것은 유엔에 의해 승인되었다. 심지어 2016년에 증명된 중력파의 존재를 100여 년 전에 예측하는 등 아인슈타인은 작고한 지 오래지만, 그의 영향력은 21세기에 들어서도 여전히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아인슈타인의 연구는 패러다임을 바꿀 만한 물리법칙들을 밝혀내 인류가 자신이 속한 세계와 우주에 대해 새로운 시야를 가질 수 있게 만들었다. 물리학과 현상과학 등 자연과학 뿐만 아니라 전자공학, 무기공학, 원자력공학 등의 응용 학문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산업계에도 그의 이론을 기반으로 탄생한 GPS, LED, 레이저, 핵무기, 태양전지 등의 다양한 발명품들은 국가간의 외교전략과 인류의 생활양상을 완전히 바꾸어 버렸을 정도로 현대 문명의 핵심이 되었다.

2. 생애

2.1. 유년 시절

1879년 3월 14일 오전 11시 30분 독일 울름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천재성을 보이는데 12~16살에는 미적분을 혼자서 공부했다고 하며, 특히 어린 시절에 유클리드원론을 읽으며 그 논리성에 감탄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어린 시절에는 전혀 천재답지 못한 일화도 있었는데 지적장애는 없었지만 3살 가까이 되어도 쉽게 말을 잘 하지 못 했고, 7살이 되었을 때도 부모님이 시키는 간단한 심부름도 제대로 못 했을 정도로 인지적인 발달은 꽤 늦었던 편에 속했다고 한다.# 그리고, 평소에도 매사에 말수가 적은 편인데다 과묵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청소년기에는 김나지움에 진학했는데 수학, 물리학에 심취하여 당시 교육과정을 뛰어넘어 교사들도 쩔쩔매는 질문을 해 유명한 학생이 된다. 이런 아인슈타인의 초월질문에 교사들은 "너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라고 대꾸했는데, 이게 와전되어 아인슈타인이 공부 못하는 아이였다는 식으로 떠돌게 된 것이란 얘기도 있다. 이는 교사들의 잘못이 아니다. 그 당시 정립되어있던 이론을 일개학생이 반박해봤자 받아들일 사람은 없었을테니까. 또한 공부 못하는 아이였다는건 토머스 에디슨에게 적용되던 레퍼토리였다.

당시 독일의 주입식 교육[7]에 굉장한 반감을 가지기도 하였다. 이것은 훗날 학풍이 보다 자유로운 스위스로 유학을 떠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여튼 1894년 말에는 의사에게 진단서[8]를 받아서 자퇴를 하고 가족을 찾아 떠나는데, 이 시기에 쓴 첫 번째 논문이 'On the Investigation of the State of the Aether in a Magnetic Field'(자기장에서의 에테르의 상태)이다. 참고로 이때가 한국 기준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9]

1895년 중순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의 입학시험을 쳤으나 낙방하고 말았다. 남달리 뛰어난 수학 실력과 물리학 실력은 최고점을 받았을 정도로 인정을 받았지만 어학 성적에서 낙제를 하는 바람에 공과대학 입학 시험에 낙방한 것이다. 그래서 학장이 김나지움 고등학교 졸업장을 따오면 입학시켜주겠다고 해서 배려로 1년 후에 입학하게 되었고 17세 때 스위스 아라우 주립학교에 다녔다. 당시 교수의 집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는데, 교수의 딸이었던 첫사랑인 마리 빈텔러(Marie Winteler)를 만났다.[10] 이후 아인슈타인은 연애편지를 자주 썼는데, 1896년 아인슈타인이 대학에 진학을 하고, 마리가 교사가 되고, 이사를 가면서 사이가 멀어졌다. 둘은 계속 연락을 했지만 아인슈타인이 먼저 연락을 끊고 싶다고 했고, 마리는 그런 아인슈타인을 잔인하다고 비난했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남아있는 편지들 중에는 찢어진 것도 있다고 한다. 아인슈타인은 1903년에 밀레바와 결혼하고도 사이가 좋지 않아서 마리에게 계속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신문기사.

1896년 9월 스위스 고등학교 졸업 시험을 통과했다. 스위스에서는 졸업 시험을 1~6으로 평가하는데 6이 최고점이다. 아인슈타인은 대수학, 기하학, 물리학에서 6을 받았다. 지리학 등 세 과목에서 4점, 프랑스어에서 3점을 받아서 한국 인터넷에서는 '아인슈타인은 낙제생이었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한다. 이는 아인슈타인이 다닌 아라우 주립학교가 이전 학기는 등급제로 수학, 물리학을 등급제로 표기하여 1로 적었으나 다음 학기부터 점수제로 표기하여 6을 적어 생긴 오해이다. 당시 독일이 등급제였기 때문에 그의 성적을 본 이들이 그가 이론 물리학자임에도 불구하고 낙제점을 받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낙제한 것은 대입 시험 시의 수학과 물리학 외의 지리, 프랑스어 등의 과목에서와 대학시절 '장 페르네의 기초 물리학 실험' 수업에 자주 출석을 하지 않아 화난 교수가 1점을 부여하여 그 수업에 낙제한 것이 전부였다.

물론, 별로 흥미가 없었던 어학 관련 과목은 실제로 성적이 나빴고, 어쨌든 낙제를 하기는 했다. 현대 한국의 상황으로 굳이 비유하자면, 수학과 과탐은 1등급이 나오는데, 언어와 영어는 5~6등급대에서 노는 극단적인 이과 덕후라고 보면 된다. 그리고, 날이 갈수록 잘하던 수학마저도 흥미가 떨어지고 게을리해서 캠퍼스 커플이었던 밀레바의 수학 노트를 빌려보면서 도움을 받기도 했었다.

그래도 밀레바가 도움을 준 덕분에 아인슈타인은 수업을 자주 빼먹고도 무사히 졸업 시험을 통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아인슈타인에게 노트를 빌려 준 밀레바는 수학 시험 성적이 좋지 않아 졸업에 실패했다. 이 해에 독일 제국 뷔르템베르크 왕국 국적을 포기해 무국적자가 되었는데, 학창시절 내내 겪었던 독일의 강압적인 군국주의에 대한 반발심으로 군대를 싫어했기에 독일 제국의 병역을 거부하려는 의도이기도 했다. 아인슈타인의 위인전에도 그가 어린 시절부터 전쟁과 군대에 반감을 품고 있었다는 내용이 등장하며, 이는 평화주의자로서의 면모를 강조하는 근거로 인용된다.

2.2. 대학 시절

취리히 연방 공대(ETH Zurich)에서 '수학 물리 교육과정'을 전공했다.[11] 즉, 오늘날 대한민국으로 치면 사범대학 수학교육과물리교육과 이중전공. 덕분에 졸업할 때 교원 자격을 땄으며, 이 자격증으로 과외 광고를 낸 적도 있다.

잘하던 물리학과 수학 중에서, 대학 진학 후에는 물리학에 더 큰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 이유는 수학에는 흥미로운 문제가 너무 많아서 무엇을 풀어야 할지 모르겠는데, 물리학에는 그러한 문제가 수학보다는 덜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절대 아인슈타인의 수학 실력이 평범했다는 것은 아니다. 일반 상대론에서 쓰는 리만기하학은 당시 수학의 최전방 분야의 하나였고, 논문을 찾아서 봐야했으니 관심있는 수학 전공 학부생이나 그 상위의 코스를 밟고 있는 자가 아닌 이상 알기 힘들던 시대였다. 사실 지금도 수학과 학부과정에서 미분기하학이나 미분다양체 관련 과목은 학부 후반기에나 그럴싸하게 다루는 편이다. 사실 그가 대학에 와서 수학을 등한시하고 물리학에 심취한 배경엔 대학 시절 교수였던 헤르만 민코프스키와의 트러블도 원인이 되었다고 여겨지는데, 민코프스키는 아인슈타인이 너무 불성실한 학생이라 졸업한 것이 놀랍다고 말하기도 했다. 교수와의 트러블은 아인슈타인이 대학을 졸업하고도 교수 추천서를 받아내지 못해 취직에 어려움을 겪게 된 이유 중 하나로 거론되기도 하는데, 그 외에도 시민권이나 여러가지 복합적인 사유가 있었다.

하여튼 아인슈타인은 대학 시절에 자신이 좋아하는 과목을 제외하고는 출석을 거의 하지 않았다고 한다. 시험이 다가오면 친구들의 노트를 빌려서 벼락치기나 하고 (아내 밀레바에게도 도움을 받았다) 시험만 겨우 통과하는 식이었다. 이런 일은 그의 경력에도 문제였지만, 결론적으로 그를 도와주는 사람은 친구들 이외에 별로 없게 된다. 그래도 완전히 논 건 아닌지 1899년에는 물리학에서 5.5점을 받는 등 평균평점 5.7/6점을 받아서 6명 중 1등을 하기도 했다. 1900년 졸업시험 때는 평균평점 4.91/6을 받아 6명 중 4등을 했다. 그리고 밀레바를 제외한 5명은 졸업을 한다. 하지만, 위에서도 서술되어있듯이 아인슈타인은 밀레바의 수학 노트를 빌려서 공부하기도 했었다.

2.3. 초기 직장 생활

아인슈타인은 다소 엉뚱하게도 대학전공과는 무관한 보험회사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한다. 왜냐하면 상술했듯이 아인슈타인의 지도교수가 그의 자만심과 불성실한 자세를 싫어해서 추천서를 써주지 않은 탓에 전공인 물리학 쪽으로 마땅한 취직자리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아인슈타인은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했고 능력으로도 별다른 문제는 없었기 때문에 취직을 못한 것은 딱히 중요한 이유가 있던 것은 아니었고, 시대상으로 반유대주의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던 시기였던만큼 유대인 출신이라는 것에 대한 인종차별이 겹친 것으로 보인다.[12]

결국 월급만으론 생활이 어려워 과외알바를 시작한다. 이때가 1902년 봄. 아인슈타인은 베른 신문에 다음과 같은 광고문을 내었다. (아래 절반)

파일:external/1.bp.blogspot.com/Inserat.jpg
Privatstunden in
Mathematik u(nd) Physik
für studierende und Schüler erteilt gründlichst
Albert Einstein, Inhaber des eidgen(össischen)
polyt(echnikum) Fachlehrerdiploms,
Gerechtigkeitsgasse 32, 1. Stock.
Probestunden gratis.
개인 교습
수학과 물리학
전 학년 학생 대상으로 철저한 지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스위스) 연방 이공학 교사 자격증 소지.
게레히티크카이츠 가(街) 32번지, 1층.
시범 강의 무료.[13]

참고로, 이 광고를 보고 오라는 학생은 오지 않고, 아인슈타인과 비슷한 나이의 '학생' 2명이 이 광고를 보고 물리학을 배우겠다면서 아인슈타인을 찾아와 친구가 되었다. 이 모리스 솔로빈, 콘라트 하비히트 2명은 아인슈타인의 결혼식에 들러리로 참석했다.

허나 이 아르바이트 문제로 상사와 싸운 뒤 해고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 무렵 딸 리제를의 출생, 아버지의 사망이라는 사건까지 함께 겪게 되며 우울한 시기를 보내게 되었다.

2.4. 특허청 시절

실업자가 된 아인슈타인은 대학 동창으로 절친한 친구였던 마르첼 그로스만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로스만의 아버지[14]특허청 고위공무원에게 부정청탁해서 아인슈타인은 간신히 위기를 탈출했다. 1901년 스위스 국적을 취득하면서 스위스의 병역의무가 부과되어 받게 된 징병검사에서 평발정맥류가 있어 병역면제를 받았는데, 이에 아인슈타인 자신은 놀랐다고 한다. 1902년 아인슈타인은 스위스 베른으로 이주했다.

특허청 심사관은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출원된 특허 서류를 검토하면서 이게 특허 등록이 가능한 건지 아닌지 판정하고 허가를 내리는 일을 한다. 심사관 한 사람이 연간 300여 건[15]의 특허를 처리하는 데다 심사관 한 사람이 다양한 분야의 특허를 처리해야 하므로 심사관으로 근무하면서 자투리 시간에 연구를 해서 연구자로서 성과를 내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나 당시의 특허명세서는 자신이 개발한 기술(발명)의 상용화를 위해 이해 및 재현할 수 있도록 작성해야 했는데(#), 실험을 좋아했던 아인슈타인으로서는 그들이 실험을 대신 해주는 것처럼 여겼을 것이다. 또 아인슈타인이었기에 특허명세서만 보고도 문제점과 개선점을 바로 알아냈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16]

그 덕분인지 1905년에 5편의 논문을 독일의 물리학 연보(Annalen der Physik)에 연속으로 발표했다. 5월에 '브라운 운동', 3월에 '광양자 가설', 6월에 '특수 상대성 이론'에 대한 논문을 연달아 발표했고 4월에는 분자 크기 결정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 7월에는 '고체를 이루는 분자의 운동과 에너지'에 대한 주제로 취리히 대학교[17]의 박사 학위 논문을 지도교수 알프레드 클라이너와 함께 발표했다. 9월에는 'E=mc2'로 잘 알려진 질량-에너지 등가원리에 대한 유명한 논문을 발표한다. 12월에는 브라운 운동에 대해 보충하는 논문을 발표한다.

5편의 논문 중 5월에 발표된 세편의 논문은 엄청난 것으로 3가지 논문 모두 이후 물리학의 세부 학문을 만들어내면서 이중 광양자 가설으로 노벨상[18]을 수상하게 되었다. [19] 이 외에도 아보가드로수 관련 논문을 썼다고 한다.

이럴 수 있었던 이유는 상술했듯이 아인슈타인이 당시 심사관으로서 시계들의 동기화(synchronization)를 하는 기계에 대한 특허를 많이 접했기 때문이다. 19세기 말은 현대화가 가속되는 시점이었기 때문에 여러 시계들(이를테면 전국의 기차역들에 있는 시계들)을 동기화하는 것은 사업가들에게 중요한 문제였다. 또, 19세기 말은 제국주의의 시대였고 본국과 점령지들 사이의 시계를 동기화 시키는 것(시간을 지배한다는 것)은 정치적으로도 의미가 있었다. 이런 시대적 배경이 있었기에 시계들을 동기화하는 것에 당시 사람들의 관심은 컸다. 당연히 그 중에는 전자기현상(빛)을 이용해 시계를 동기화하겠다는 아이디어도 있었고, 아인슈타인은 특허청에서 일하면서 이런 아이디어들을 자연스럽게 접하였다. 때문에 아인슈타인에게 절대 시간, 여러 관찰자들 사이의 변환 등의 개념은 단순히 추상적 사고 대상이 아니라, 여러 특허들을 보며 현실적으로 풀어야 할 과제였던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이런 특허 서류들을 보면서 전자기학에 대한 사고 실험을 많이 했고, 시간이 남을 때마다 도서관에 갔으며 그것이 굉장히 즐거웠다고 한다. 오늘날 GPS 등에서 시계를 동기화 하는데 상대성 이론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생각하면, 당시 아인슈타인이 특허청에서 일했던 경험의 영향은 결코 적지 않았을 것이다.

1909년 아인슈타인은 특허청에 사표를 냈다.

2.5. 연애와 결혼

다음 사항들을 철저히 준수하시오.
  • 내 옷과 빨랫거리를 잘 관리하시오.
  • 세 끼 식사를 제시간에 내 방으로 가져오시오.
  • 내 침실과 서재를 깨끗하게 정돈하고, 특히 내 책상은 나만이 사용하는 것임을 명심하시오.
  • 사회적으로 필수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나와의 모든 개인적인 관계를 포기하시오. 구체적인 예를 들어,
    • 집에서 당신과 함께 앉아 있는 일
    • 당신과 함께 외출하거나 여행을 하는 일
나와 당신 간의 관계에 있어, 다음 사항들을 준수하시오.
  • 나에게서 어떠한 친밀한 관계도 기대하지 말 것이며, 나를 어떤 식으로든 비난하지 마시오.
  • 내가 요구할 경우 즉각 침묵하시오.
  • 내가 요구할 경우 일체의 항의 없이 즉시 내 침실이나 서재에서 나가시오.
  • 우리 자녀들의 앞에서 나를 깎아내리는 말이나 행동을 하지 마시오.

― 아인슈타인이 결혼한 후 사이가 나빠진 뒤, 그의 부인 밀레바에게 제시한 요구서[20]
그의 과학적 업적과는 별개로, 한 인간으로서 가장 크게 비판받는 부분이라면 아무래도 결혼 생활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혼을 두 번 했는데, 우선 첫 번째 부인 밀레바는 결혼하기 전부터 아인슈타인의 집안 쪽에서 그녀에 대한 반대가 있었다고 한다. 가장 큰 이유는 밀레바가 아인슈타인보다 나이가 많고[21], 아인슈타인과 동시에 물리학을 전공했으며, 세르비아계 외국인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22] 일설에 의하면 아인슈타인의 어머니가 밀레바를 '늙은 마녀'라고 불렀다는 기록도 있다. 밀레바는 1900년 대학 졸업 시험에서 떨어져 다시 졸업장을 따려고 시험 준비를 할 생각이었는데, 1901년 아인슈타인과의 사이에서 원하지 않는 임신으로 인해 시험 준비가 좌절되었으며, 1903년에 둘은 결혼했다.

아인슈타인은 일반적으로 너무 연구에만 매달려 부인이나 가정에 소홀했다는 식으로 알려져 있는데, 연구도 연구지만 아인슈타인은 유대인으로 제1차 세계 대전 도중 중립국으로 피신했고, 첫 번째 아내인 밀레바와 떨어져 있는 시기 동안 친척 누나이자 당시 과부였던 엘자와 친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23] 그리고 엘자와 결혼하기로 결정하면서 밀레바를 소홀히하고 결국 이혼하게 된다. 그렇게 1919년 밀레바와 이혼한 후 같은 해에 엘자와 결혼했다. 물론 아이들이 보는 것을 전제로 하는 위인전 같은 책에서는 이런 일을 상세히 기술하기 곤란하므로, 대부분 연구에 몰두하다 보니 가정에 소홀해 사이가 멀어져서 이혼했다는 정도로만 기재하는 편이다.

문제는 이혼 후 밀레바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들에게[24] 신경을 써 주지 않아 밀레바와 자식들을 고생시켰다는 것. 그녀는 아인슈타인과 이혼한 이후 피아노 가정 교사로 활동하며 자식들을 홀몸으로 키웠는데, 밀레바와 이혼할 당시 아인슈타인이 이후 노벨상을 받게 되면 그 상금을 모두 밀레바에게 양도하기로 계약했기 때문인지 나중에 그녀가 경제적인 지원을 요청해도 들어준 적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밀레바와 자식들이 아인슈타인을 평생 미워했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인슈타인과 밀레바 사이의 차남이었던 에두하르트[25]정신분열증을 심하게 앓는 바람에 밀레바와 장남 한스를 힘들게 했다.[26] 결국 에두하르트는 20대에 집에서 느닷없이 발작을 일으켜 난동을 부리고 어머니 밀레바의 목을 졸라서 죽이려 했던 일 때문에 형 한스의 신고로 출동한 스위스 경찰에게 체포되어 평생 스위스의 정신병원에 사실상 수감되다시피 입원한 채로 살다가 1965년, 55세의 나이에 뇌졸중으로 죽었다. 그래도 밀레바는 차남 에두하르트를 아껴 그가 정신병원에 수감되었을 때도 스위스에서 살며 정기적으로 아들을 찾아오며 돌봐주었고 1948년에 73세로 사망할 때도 스위스에서 죽었다.

밀레바의 장남 한스[27]는 부모의 뛰어난 지능을 물려받아 총명해서 버클리 주립 대학에서 수력학 교수를 역임했으며, 나중에 뛰어난 토목공학자가 되었다. 특히 한스는 아버지 아인슈타인과 달리 결혼 생활은 원만했고, 아내와 자식들과 손자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비록 정신분열증을 앓던 동생 에두하르트 때문에 힘들어하기도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생을 생각해주어 스위스로 어머니에게 생활비와 동생의 병원비를 보내주었고[28] 동생이 말년에 가서 건강이 악화되었을 때는 병원비를 스위스 정부로부터 지원받게 해주고 스위스의 요양원으로 옮겨주어 살게 했다. 게다가 1965년에 동생이 사망했을 때 지역 신문에 장문의 글을 쓴 부고를 실어 동생의 죽음을 슬퍼했다.

하지만 한스는 자신과 어머니와 동생에게 무관심했던 아버지를 평생 미워했고 부모 취급도 하지 않았다. 특히 결혼하고 손자를 얻어도 아버지에게 연락하거나 찾아가지 않았으며 아인슈타인의 부고를 듣고도 전혀 슬퍼하지 않았고, 장례식장에 찾아가지도 않았으며 나중에 신문에 짤막한 애도문을 몇 줄 낸 것이 전부였다고 한다. 아버지의 무책임한 도피 이후 일련의 불행을 겪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아인슈타인의 죽음을 보면 알 수 있듯 아인슈타인 본인도 여생에 큰 미련은 없었던 것 같다. 이처럼 아인슈타인은 과학자로서 높은 성취와는 별개로 아내와 자식들에게 좋은 남편이자 좋은 아버지라고 말하기는 힘든 인물이었다.

2.6. 1906 ~ 1932 (취리히 - 베를린)

아인슈타인의 커리어를 통틀어 가장 괄목할 업적은 일반 상대성 이론, 즉 새로운 중력 이론이다. 그는 일반 상대성 이론을 완성하기 위해 1907년부터 1915년까지 거의 9년을 소비했으며, 결코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1907년 발견한 등가 원리는 훗날 아인슈타인 스스로 생애 가장 행복한 생각이라 부른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아이디어를 크게 발전시키지 못하고 곧 양자 문제에 눈을 돌렸다. 1911년 10월 ~ 11월에는 복사와 양자 문제를 중심으로 첫번째 솔베이 회의가 열렸다. 아인슈타인은 이곳에서 로렌츠, 마리 퀴리, 어니스트 러더퍼드 등과 교류하였다.

그는 1911년 4월 프라하 카렐 대학교(Charles University)의 이론 물리학 교수가 되자 밀레바와 함께 프라하로 이동하였고, 양자 문제를 뒤로 하고 빛의 굴절, 정적 중력장 이론 등 상대성 이론 관련 논문을 연달아 물리학 연보에 게재하였다.# 1912년에는 드디어 중력이 시간과 공간의 곡률과 관련되어 있다는 아이디어를 얻어냈다. 그러나 그는 공간의 기하학을 기술하는 수학을 알지 못했고, 8월 모교인 취리히 연방 공대(EHT)의 이론 물리학 교수가 되면서 취리히로 돌아간 직후 동료 수학자인 그로스만(Grossmann)의 도움을 받았다. 이 때 그로스만이 소개해준 수학이 바로 일반 상대성 이론의 토대가 되는 미분 기하학(절대 미분학)으로, 1901년 리치, 레비치비타가 집대성했기에 상당히 최신 수학에 속했다. 아인슈타인은 이 수학을 익히는 데 매우 어려운 시간을 보냈다고 회고하였다. 한편 1912년 4월에는 친척인 엘사 로웬탈(Elsa Lowenthal)과의 교제가 시작되었다.

1913년 7월 그는 막스 플랑크의 추천을 받아 프로이센 과학 아카데미(Prussian Academiy of Sciences)의 회원이 되었고, 학생 교육에 대한 의무를 지지 않고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1914년 4월 취리히에서 베를린으로 이주함과 동시에 7월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면서 그는 매우 혼란스러운 환경에 놓이게 되었으며, 부인 밀레바와의 관계는 악화되어 별거할 지경에 이르렀다. 매우 어려운 시간 속에서 아인슈타인은 중력 이론의 완성에 완전히 전념하였고, 몇몇 물리학자(노르드스트룀, 아브라함 등)들과 수학자(힐베르트 등)와의 교류를 통해 이론을 끊임없이 수정하여 1915년 11월에는 중력장 방정식을 완성하고 일반 상대성 이론 또한 마무리지었다.

이로써 그는 자신의 상대성 이론 체계를 완성하였고, 이후 중력파, 우주론 등과 관련하여 슈바르츠실트, 드지터, 슈뢰딩거 등 몇몇 물리학자들과의 학문적 교류를 이어나갔으며 특히 철학적 함의에 관심을 갖는 철학자들의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전쟁이 끝난 직후 1919년 런던 왕립 학회의 지원을 받은 에딩턴의 개기일식 실험이 성공하자, 그는 단숨에 세계구급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는 영국(뉴턴)과 독일(아인슈타인)의 화합을 상징하는 장면을 연출한다는 점도 크게 작용하였다.

아인슈타인은 이후 1922년에 1921년분 노벨물리학상을 받는다. 수상 근거는 "이론 물리학에 대한 공로, 특히 광전 효과 법칙의 발견"(for his services to Theoretical Physics, and especially for his discovery of the law of the photoelectric effect)이었다. 수상식 연설문에 의하면 "이론 물리학"은 상대성 이론, 브라운 효과, 그리고 광전 효과 세 가지였다.#[29]

2.7. 미국으로 망명하다

1930년대가 되자 독일은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유대인 탄압이 시작되었다. 상대성 이론을 비롯한 그의 연구, 책들도 유대인의 연구라는 이유로 공개적으로 불태워지고 독일에 남아 있던 재산도 모두 뺏기는 수모를 당했다. 여기에 필립 레나르트, 요하네스 슈타르크 등을[30] 필두로 한 저명 과학자들마저 '독일 물리학'이라는 명목 아래 아인슈타인 등 유대인 과학자들의 연구 업적을 부정, 배척하는 주장을 공공연히 내세웠다. 유대인이었던 아인슈타인도 나치 독일 정권으로부터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당시로서는 엄청난 거액이었던 5만 마르크의 현상금까지 걸리게 되면서 신변에 위협을 받게 된다.

결국 아인슈타인은 1933년에 유대인을 탄압하는 나치 독일 정권을 피해 미국으로 피신하여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31]이후 독일에 있던 재산은 나치에 의해 전부 몰수되었는데 배는 팔아치우고 집은 히틀러 유겐트 숙소로 만들었다. 당시 이렇게 미국으로 도망친 유태인들은 꽤나 많았는데 볼펜을 발명한 헝가리 국적의 유대인이었던 비로 라슬로 역시 비슷한 시기에 아르헨티나로 망명했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을 비롯해 프로이트 등 몇몇 유명인사들 역시 나치를 피해 망명했다.

아인슈타인은 미국으로 망명한 후 미국 국적을 취득하였고,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물리학 강의를 하였다.[32] 나치를 피해 망명하면서 "권위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이 진실의 가장 큰 적이다." 라는 말을 남겼다.

1939년에는 나치가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이후, 나치가 자신의 상대성 이론을 이용해 원자폭탄을 만들려고 하는 소문을 듣고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미국도 이에 대응해 원자폭탄을 만들기를 촉구하는 편지를 보냈고 결국 미국은 원자폭탄 개발을 세계 최초로 성공하게 된다. 그러나 1945년에 일본과 전쟁 중이던 미국이 히로시마나가사키원폭을 떨어뜨려 수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들은 아인슈타인은 자신 때문에 이런 무서운 일이 벌어졌기 때문에 크게 경악할 수 밖에 없었고, 그 이후 핵무기 반대 운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유대인 건국 운동인 시오니즘에 대해 처음에는 부친의 영향으로 부정적이었지만, 나이가 들면서 점차 지지하는 입장으로 선회했다. 다만 열성 지지자는 아니고 '이름만 빌려준' 정도에 그쳤다. 이스라엘이 건국된 후인 1952년에 대통령직(내각제 정부에서의 상징적인 지위)을 제의받기도 했지만, 이미 고령이어서 사양했다.

이렇게 미국으로 망명한 덕분에 아인슈타인은 나치의 박해로부터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2.8. 사망

아인슈타인의 공식적인 사인은 복부 대동맥류 파열로 인한 내출혈이다. 이스라엘 건국 7주년 기념행사의 연설을 준비하다가 쓰러졌는데, 병원으로 실려갔을 당시
"I want to go when I want. It is tasteless to prolong life artificially. I have done my share, it is time to go. I will do it elegantly."
"나는 내가 떠나고 싶을 때 떠나고 싶소. 인간의 기술로 삶을 늘리는 건 천박한 짓인 거 같소. 내 사명은 이제 끝냈으니, 우아하게 갈 때라오."
이 말을 하며 수술을 거부하였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까지 연구를 계속하다가 결국 사망했다.

유명인물 치고는 유언이 알려져 있지 않은데, 죽을 당시 미국에 있어서 주위에 찾아와 있던 미국인 지인들이 그가 죽기 직전 내뱉은 독일어를 알아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때문에 위의 말을 사실상 아인슈타인의 유언으로 간주하는 경우가 많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을 화장하길 원했고, 실제로 화장되긴 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사체 부검을 맡았던 프린스턴 병원의 병리학자 토머스 스톨츠 하비(Thomas Stoltz Harvey, 1912~2007) 박사는, 아인슈타인이 죽기 전에 미리 동의를 구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의 뇌를 무단으로 적출한 뒤 240조각으로 잘라내어 보관해 두었다. 관련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아인슈타인은 죽은 지 하루도 안 되어서 화장되었고, 그의 뇌는 하비 박사가 적출해서 포르말린 용액에 보관했다고 한다. 최초 적출 상태에서는 조각내지 않고 보관했었고, 주기적으로 관리되었다고 한다. 그 후 비밀리에 아인슈타인의 손녀를 만나기도 하고, 뇌 연구가들에게 일부분이 제공되기도 했다. 아인슈타인의 뇌는 그 이후 흑백으로 전후좌우 사진을 찍은 후 조각내졌다. 현재는 뇌의 일부분만 제한적으로 공개되고 있으며, 전체적인 조각은 다큐 방송 이후로 비공개 상태로 보관 중이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하비는 학자로서 윤리 의식이 결여되어 있다며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이에 하비 박사는 과학의 발전을 위한 것이었다는 주장을 하며 맞섰다. 웃긴 사실은 아인슈타인의 뇌가 보관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수많은 과학자들이 같이 연구하자는 진풍경이 펼쳐졌다고. 덕분에 비난은 얼마 가지 않아 사그라들었고 이후 아인슈타인의 뇌는 박물관에 보관된다. 이 부분은 2015년 6월 28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루었다.

이와는 별개로, 아인슈타인의 뇌는 생각보다 크기가 크지 않고 일반인과 비슷하였다. 또한 뇌의 전체적인 무게는 오히려 일반인의 것보다 가벼웠다고 한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이 죽은 나이가 나이인만큼 늙으면서 뇌의 부피가 줄어들었기에 지능에 비해 뇌의 크기가 작게 측정됐다는 의견도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아인슈타인의 지능을 이야기할 때는 40대 정도까지의 업적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아인슈타인의 리즈시절에는 뇌가 훨씬 컸을 수 있다는 것. 게다가 공간 지각 능력, 수학, 사물에 대한 이름짓기, 복잡한 문법, 운동 명령을 담당하는 두정엽은 일반인보다 15~30%가량 컸다고 한다. 이는 뉴런의 양이 많아진 것이 아니라 특정 뉴런이 발달한 것이라고 학자들은 설명한다.

3. 학문적 업적

그는 과학이 지배했던 이번 세기에서 가장 뛰어난 과학자였습니다. (폭탄, 빅뱅 이론, 양자물리학, 그리고 전자공학 등) 모든 과학적 영역의 기준엔 그의 흔적이 닿아있습니다.[33]
He was the pre-eminent scientist in a century dominated by science. The touchstones of the era ―the Bomb, the Big Bang, quantum physics and electronics― all bear his imprint.
파일:타임지 로고.svg. 2000년 1월호, 세기의 인물 평 中.
아인슈타인은 고전 물리학의 마지막 세대로 시작하여 소위 상대성 이론과 양자 역학으로 대표되는 현대 물리학의 성립에 핵심적 역할을 한 물리학자이다. 그의 깊고 폭넓은 연구는 현대 물리학의 발단 및 초기 발전과 관련된 거의 모든 문제(양자 역학, 상대성 이론, 고체 물리학, 통계 역학, 우주론)에 걸쳐있으며, 그 중 많은 부분에 있어서는 핵심을 관통하는 것이었다. 아인슈타인이 만든 상대성 이론은 시간, 공간, 물질, 우주에 대한 인류의 관점을 혁명적으로 바꾸었고, 양자 역학의 탄생에 영향을 주었다. 20세기 이후 현대 물리학을 지배하는 양자 역학은 그의 광양자 가설로부터 이어진 물리학계의 다양한 기여 끝에 탄생하였으며, 그가 양자 역학과 관련하여 벌인 수많은 철학적 담론은 양자 역학의 철학 및 해석에 많은 영감을 주었다. 아인슈타인 특유의 과학적 방법론인 사고실험 또한 과학계의 많은 인용과 연구의 대상이 되어왔다.

아인슈타인의 업적과 영향력은 종종 고전 물리학을 일으켜 세운 아이작 뉴턴의 현대 물리학 버전으로 비유된다. 구체적으로, 아인슈타인이 1905년 물리학 연보(Annalen der Physik)에 연속적으로 발표한 광전효과, 브라운 운동, 특수 상대성 이론, [math(E=mc^2)]은 하나같이 현대 물리학의 기반을 마련하는 중요한 논문이라 뉴턴의 업적(1665 - 1666년; 미적분, 광학, 중력)에 비유되어 소위 기적의 해(annus mirabilis) 논문이라 불린다.

3.1. 상대성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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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IVITY : the special and the general theory (1920)
대중을 대상으로 아인슈타인이 저술한 상대성 이론 설명서이다.
[34]
아인슈타인을 대표하는 업적인 상대성 이론(Theory of Relativity)은 1905년에 발표한 특수 상대성 이론과 이후 1915년에 발표한 일반 상대성 이론으로 나뉜다. 상대성 이론의 등장은 뉴턴이 세운 물리학에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한 최초의 사건으로, 태양에 의한 별빛의 굴절을 확인하기 위해 에딩턴이 수행한 개기일식 관측실험의 성공은 과학사상 가장 극적인 장면 중 하나이다.

상대성 이론은 시간과 공간, 물질, 중력에 대한 인류의 이해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시간과 공간은 관측자의 운동 상태에 따라 상대적일 뿐만 아니라[35] 물질, 에너지와 상호작용하면서 중력을 만든다. 이는 시간과 공간에 관한 철학적 담론의 수준을 한 단계 진화시켰다.

상대성 이론의 영향력은 철학적 차원에 한정되지 않는다. 이론적으로는 절대적 시간과 공간 개념의 지배를 받는 고전 역학의 방정식들을 모두 수정한다. 속도가 빛의 속력에 준할 정도로 빠르지 않으면 고전 역학이 다시 유도되지만, 근본적으로 고전 역학은 일상 범위에서의 근사 법칙임이 드러난 것이다. 양자 역학 역시 기본적으로는 고전적 시공간 개념을 활용하기 때문에 훗날 특수 상대성 이론과 양자 역학을 결합한 QED가 도입되었다.

현재 상대성 이론은 입자 물리학, 천체 물리학, 우주론의 근간이 되는 중요한 이론이다. 입자는 매우 빠른 속력으로 가속시킬 수 있기 때문에 입자 물리학 분야에서 특히 상대성 이론의 역할이 중요하며, 그간 실효성이 미묘했던 중력의 경우에도 관측 천문학을 통해 중성자별, 블랙홀, 중력파가 실제로 관측됨으로써 상대성 이론의 역할은 더욱 커졌다. 궁극적으로 상대성 이론은 우주의 진화와 구조를 설명하는 데 필수적이다. 또한 우리가 쓰고 있는 GPS 장치는 상대성 이론이 없으면 작동이 불가능한 기술이다.[36] GPS가 없다면 자동항법장치도 나올 수 없고 스마트폰에 있는 지도 앱이나 운동 앱들은 탄생조차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미 실생활에 너무 많이 적용되어 설명하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유명해진 뒤로는 그가 일했던 스위스 특허국에 수많은 물리학자들이 그를 찾아오고는 했다. 어느 물리학자를 만난 후 아인슈타인이 "실제로 물리학자를 보는 것은 처음입니다."라고 하자 "당신은 매일 거울도 안 보십니까."라고 받아쳤다는 일화도 있다.

세 논문(광전 효과, 브라운 운동, 특수 상대성 이론)으로 아인슈타인은 유명해져 1908년에는 베른 대학에서 강의를 맡게 되고, 이듬해에는 취리히 대학 교수, 1911년에는 프라하 Karl-Ferdinand 대학 교수, 1914년에는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 소장과 베를린 대학교 교수직을 맡는 등 출세길에 오른다.

3.1.1. 특수 상대성 이론

상대성 이론은 물리학에서 하나의 학문 분야를 이룰 정도로 방대하기 때문에, 그 안에서도 하나하나의 업적이 사실 개별 항목에 속한다. 아인슈타인은 몇가지 근본 가설로부터 상대성 이론의 기본 체계를 통째로 일으켜 세웠다. 일반 상대성 이론은 이러한 가설 체계가 학자에 따라 크게 다르지만, 특수 상대성 이론은 아직까지 아인슈타인이 도입한 두 가설이 정석으로 남아있다.

광속 불변의 원리는 이미 맥스웰의 전자기파 이론이 성립된 이후로 물리학계에서 크게 논란이 되었던 사안이다. 피조(Fizeau)의 실험, 마이콜슨 몰리 실험 등 다양한 실험 결과는 이 원리를 지지하고 있었는데,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로런츠, 피츠제럴드, 푸앵카레 등이 나름의 이론체계를 구축하였다. 로런츠는 빛의 매질을 가정한 에테르 이론을 체계화하여 에테르가 정지한 계를 정지계로 보고 나머지를 운동계로 보았다. 그리고 운동계에서는 시간과 공간 측정이 달라진다는 가설을 세웠는데, 국소 시간(local time), 로런츠-피츠제럴드 수축 등이 그 일부이다. 로런츠는 추후 이것을 로런츠 변환으로 일반화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들은 에테르라는 Ad Hoc 가설을 제거하지 못한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1905년 아인슈타인은 실험적으로 검증된 광속 불변 원리에 상대성 원리를 집어넣어, 절대 정지라는 개념을 부여하는 에테르의 존재를 부정하고 시간과 공간에 대한 비로소 올바른 현대적 이해를 제시하였으며, 이것이 특수 상대성 이론의 시작이다.
3.1.1.1. 질량-에너지 등가원리
파일:xCn069h.png
아인슈타인이 [math(E=mc^2)]를 설명하는 장면을 찍은 유일한 사진으로 알려져 있다.
1934년 피츠버그.#
특수 상대성 이론이 발표된지 몇 개월 후 아인슈타인은 간단한 사고실험으로부터 에너지가 [math(L)]만큼 감소하면 질량은 [math(L/c^2)]만큼 감소한다는 결론을 도출해냈는데, 그는 이 공식이 에너지와 질량이 사실 같은 실체로부터 다른 방식으로 나타난 것임을 알려준다고 보았으며, 특히, 에너지 보존법칙이 질량 보존의 법칙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유도되는 것으로 생각했다.[37] 이 관계는 이후 [math(E = mc^2)]으로 정리되었는데, 이 공식은 물질파, 디랙 방정식 등 양자 역학의 정립 및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상대론이 말하는 질량에 관해서는 여러 논의가 있었으나 현재는 질량은 정지 질량으로 고정하고, 대신 운동량이 변하는 것으로 본다. 이 때 운동하는 물체는 [math(E^2 = m^2c^4 + p^2c^2)]이라는 관계를 갖게 된다.

3.1.2. 일반 상대성 이론

3.1.2.1. 등가 원리
아인슈타인은 특수 상대성 이론(상대성 원리)이 근본적으로 서로에 대해 등속운동하는 계에만 적용된다는 점(절대 가속도의 부여), 그리고 중력을 포괄하지 못한다는 점을 매우 불편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다 1907년 베른 특허청 의자에 앉아 있다가 다음과 같은 발상을 떠올린다.
내가 (베른에서) "Jahrbuch der Radioaktivität und Elektronik"(잡지)에 제출할 특수 상대성 이론에 대한 포괄적인 요약을 작성하느라 바빴을 때, 동시에 나는 뉴턴의 중력 이론을 특수 상대성 이론에 맞게 수정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방향은 일부 성과가 있었으나 물리적으로 불안정한 가정을 바탕으로 하였기에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 때 나는 다음과 같이 생애 가장 행복한 생각(der glücklichste Gedanke meines Lebens)을 하게 되었다.

중력장은 전자기 유도에 의해 만들어지는 전기장과 같이 오직 상대적으로만 존재한다. 왜냐하면 지붕에서 자유낙하하는 관찰자는 떨어지는 동안 (최소한 순간적으로) 중력장을 느끼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즉, 관찰자가 어떤 물체를 놓으면, 물체는 특정 화학적, 물리적 본성에 관계없이 그에 대해 정지나 등속도 운동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따라서, 관찰자는 자신의 상태를 '정지해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아인슈타인, "상대성 이론의 발전과정에서 제시된 근본 발상과 방법" (Fundamental Ideas and Methods of the Theory of Relativity, Presented in Their Development) (19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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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은 동일한 중력장에 놓은 물체는 모두 동일한 중력 가속도로 자유낙하한다는 실험적 결과로부터 착안하여, 관찰자가 함께 자유낙하를 한다면 아무런 힘을 느끼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자유낙하하는 좌표계는 관성 좌표계로 볼 수 있다는 등가 원리를 제안하였다. 반대로 말하면, 중력장은 좌표계를 가속시키면 얻을 수 있게 된다. 이 원리를 이용하여 아인슈타인은

는 사실을 예측하고, 태양에 대한 예측값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여 천문학자들이 실험해주기를 재촉하였다. 특히, 빛의 굴절은 개기일식을 활용하면 된다는 실험 방법까지 같이 제시하였다. 빛의 굴절은 1919년에 다이슨(Dyson)과 에딩턴(Eddington)이, 적색 편이는 1960년 파운드(Pound)와 레브카(Rebka)가 실험적으로 증명하였다. 이들은 천문학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천체들이 일으키는 중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중요한 보정 효과이다. 등가 원리는 일반 상대성 이론의 주요 원리이기도 하며, 중력이 시공간의 기하학적 성질이라는 현대 중력의 대원칙을 제시한다.
3.1.2.2. 중력 렌즈 효과
중력 렌즈 효과는 중력에 의한 빛의 굴절이 다발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아인슈타인은 1912년 쯤 태양 이외의 별에 의한 중력 렌즈 효과의 크기를 계산해보았으나 너무 작아서 논문으로 출판하지 않았다. 1936년 결국 이것을 출판했지만 결론은 효과를 실제로 확인할 일은 절대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후 외부 은하(허블이 발견하였다.)에 의한 중력 렌즈 효과가 관측되었고, 특히 1960년대 정체불명의 전파원이었던 퀘이사(quasar)가 외부 은하에 의해 중력 렌즈 효과가 발생한다는 관측 사실로부터 퀘이사가 까마득하게 멀리 떨어진 천체임을 확인시켜주었다.
3.1.2.3. 아인슈타인 방정식
일반 상대성 이론을 하나의 이론체계로 완성시켜준 것은 바로 가우스, 리만, 크리스토펠, 리치, 레비치비타 등이 완성시킨 미분 기하학이다. 아인슈타인은 1912년 자신의 접근 방법에 한계를 느꼈는데, 그 이유는 회전하는 계에서 유클리드 기하학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1] 즉, 아인슈타인의 아이디어에 따라 중력을 제대로 기술하기 위해서는 휘어진 공간에 관한 수학이 필요했다. 아인슈타인은 취리히에서 수학자였던 친구 그로스만(Grossmann)의 도움을 받아 미분기하학을 배우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이론을 재구축하였다.[2][3]

그 결과 아인슈타인은 1915년 11월 일반 상대성 원리(일반 공변성)를 만족시키는 이론 체계를 완성하고[4][5], 자신의 이론이 (1) 특수 상대성 이론과 뉴턴의 중력 법칙을 일반화하며 (2) 오랫동안 해결되지 못한 수성의 근일점 세차운동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었다. 앞서 등가 원리만으로 잘못 예측했던 빛의 굴절량을 올바른 값으로 수정하는 성과도 있었다.[6] 이 수정은 에딩턴의 1919년 관측 실험에서 일반 상대성 이론이 확실한 승리를 거머쥐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무엇보다, 일반 상대성 이론의 핵심은 중력장을 결정하는 방정식인 아인슈타인 방정식(Einstein field equations)으로, 1915년 11월 25일 방정식이 완성됨으로써 일반 상대성 이론의 체계가 마무리되었다.[7]

[math(\displaystyle R_{\mu\nu} - \frac{1}{2}Rg_{\mu\nu} = \frac{8\pi G}{c^4}T_{\mu\nu})]

좌변은 4차원 시공간의 곡률을 나타내며, 우변은 물질 분포를 나타낸다. 따라서, 이 방정식은 일반 상대성 이론의 "물질 분포가 시공간을 구부려 중력장을 형성한다"는 핵심 개념을 잘 요약해준다.

참고로 이 방정식은 수학자였던 다비드 힐베르트와의 경쟁일화가 있는데, 아인슈타인이 1915년 11월 일반 상대성 이론을 완성하느라 바쁜 한편 힐베르트는 아인슈타인의 중력 이론과 미에(Gustav Mie)의 전자기 이론을 수학적으로 통합하여 물리학의 기반을 마련하는 논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둘은 편지를 통해 밀접하게 교류 중이었다.) 그러다가 11월 20일 힐베르트가 먼저 중력장 방정식을 유도하는 액션(힐베르트 액션)이 담긴 논문을 발표하여[Hilbert(1915)] 오랫동안 힐베르트가 먼저 방정식을 완성했다고 여겨지기도 했지만 1997년 힐베르트의 논문 초고가 발견된 뒤에는 일반적으로 아인슈타인이 방정식을 먼저 완성했다고 여겨진다.[Corry(1997)][40] 일반 상대성 이론이 워낙 거대한 업적이고 인물이 인물이다보니 뉴턴-라이프니츠 논쟁 못지 않게 논쟁이 꽤 오래 지속되었지만 이 정도면 보통 동시/독립적 발견으로 보며 각자의 역할이 매우 뚜렷하게 나뉜다. 힐베르트가 중력장 방정식의 완성에 얼마나 큰 공이 있었는지는 매우 복잡한 문제이나, 아인슈타인-힐베르트 액션을 발견함으로써 일반 상대성 이론의 변분법적 기초를 마련한 인물임은 확실하다. 물론, 일반 상대성 이론의 물리적 내용과 수학적 방향성을 대부분 결정한 아인슈타인이 이 이론의 주인임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일반 상대성 이론의 수학적 아름다움은 힐베르트를 시작으로 헤르만 바일, 펠릭스 클라인, 에미 뇌터 등 중요한 수학자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일반 상대성 이론과 미분 기하학의 동반 초기 발전(1915~1925)에 큰 도움이 되었다. 헤르만 바일은 일반 상대성 이론과 맥스웰 이론을 통합하기 위해 게이지 이론을 도입했고, 이는 양자 장론의 방법론에 영향을 주었다. 에미 뇌터는 일반 상대성 이론의 에너지 보존 문제에 답을 하는 과정에서 뇌터 정리의 일부분을 완성하기도 하였다. #
[1] A. Einstein, "Lichtgeschwindigkeit und Statik des Gravitationsfeldes", Annalen der Physik 38 (1912) : 355–369. #
[2] A. Einstein & M. Grossmann, "Entwurf einer verallgemeinerten Relativitätstheorie und einer Theorie der Gravitation ; I. Physikalischer Teil von Albert Einstein. II. Mathemathischer Teil von Marzel Großmann." Leipzig & Berlin: B. G. Teubner (1913) : 38pp. #
[3] A. Einstein, "Die formale Grundlage der allgemeinen Relativitätstheorie", Königlich Preußische Akademie der Wissenschaften (Berlin). Sitzungsberichte (1914) : 1030–1085. #
[4] A. Einstein, "Zur Allgemeinen Relativitätstheorie", Königlich Preußische Akademie der Wissenschaften (Berlin). Sitzungsberichte (1915.11.04.) : 778–786. #
[5] A. Einstein, "Zur Allgemeinen Relativitätstheorie (Nachtrag)", Königlich Preußische Akademie der Wissenschaften (Berlin). Sitzungsberichte (1915.11.11.) : 799–801. #
[6] A. Einstein, "Erklärung der Perihelbewegung des Merkur aus der allgemeinen Relativitätstheorie", Königlich Preußische Akademie der Wissenschaften (Berlin). Sitzungsberichte (1915.11.18.) : 831–839. #
[7] A. Einstein, "Die Feldgleichungen der Gravitation", Königlich Preußische Akademie der Wissenschaften (Berlin). Sitzungsberichte (1915.11.25.) : 844–847. #
3.1.2.4. 중력파
일반 상대성 이론은 천체의 급격한 변동에 의해 주변 시공간이 뒤틀리는 형태로 시간에 따라 에너지가 주변에 퍼지는 중력파(Gravitational wave)를 예견한다. 아인슈타인은 1916년에 중력장이 약한 조건에서 처음으로 중력파를 이론화하였다. 아인슈타인의 중력파 이론에 따르면, 중력파는 사중극자 모멘트(quadrupole moment)에 의해 발생하며[41], 전파 속도는 언제나 광속이다.

중력파에 대해서는 지난 100년 간 매우 다양한 논의와 논쟁이 오갔다. 전파 속도는 얼마인지, 중력파가 실재하는지, 아인슈타인의 사중극자 모멘트 공식이 얼마나 정확한지 등... 문제는, 중력파가 심각하게 작기(진폭 [math(10^{-21})] 수준..) 때문에 당대에는 엄두도 못낼 정도로, 중력파 이론을 구체적으로 검증해볼 방법이 전무했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수식으로만 논의가 오가다보니 어떤 논의는 붕뜨기도 하였다. 1937년 아인슈타인과 로젠은 좌표 변환 기법으로 중력파가 없다는 결론을 골자로 한 논문을 제출하려...했으나 논문을 검토하는 하워드 로버트슨 교수가 오류를 찾아서 흐지부지되었고, 재검토를 거쳐 반대의 결론으로 바뀌었다. 우여곡절이 많았음에도 시간이 지날수록 전문가들의 노력으로 중력파의 실재나, 중력파가 전달하는 에너지에 관한 이론들이 점차 확고해졌다.

1970년 이후, 웨버 막대를 시작으로 중력파를 직접 검출하려는 시도가 줄을 이었고, 1974년 발견된 쌍성 펄사(테일러-헐스 쌍성)에서 이후 발견된 궤도 감쇠(orbital decay) 현상은, 두 펄사가 공전하면서 그 에너지가 중력파의 형태로 주변에 방출되고 있음을 보여주어 중력파의 실재, 그리고 아인슈타인의 사중극자 공식 또한 정확하게 증명되었다. (1993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

결국, 딱 100년 뒤에 중력파가 처음으로 직접검출되었다. 블랙홀 쌍성이 충돌하면서 발생한 중력파를 포착한 것인데, 일단 이 자체로 블랙홀 쌍성의 존재가 검증되었다. 2017년에는 중성자별 쌍성의 충돌이 포착되었는데, 이 중력파는 전자기파 신호가 함께 포착되었기 때문에 광속과의 비교가 가능해지는 등 (2초 이내 오차) 또다른 성과를 내놓았다. 이외에, 허블 상수를 측정하는 새로운 도구로 활용할 수도 있다. 이처럼 중력파는 전자기파에 이어서 우주를 연구하는 새로운 핵심 도구가 되고 있다.
3.1.2.5. 아인슈타인-로젠 다리
일반 상대성 이론을 연구하여 아인슈타인은 1935년 네이선 로젠과 함께 아인슈타인-로젠 다리를 고안하였다. 블랙홀을 나타내는 슈바르츠실트 해는 특이점을 가진다는 문제가 있다. 슈바르츠실트 해에서 특이점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아인슈타인과 로젠은 시공간을 다리처럼 이어주는 해를 찾아낸다. 아인슈타인-로젠 다리는 중력에 대한 연구를 촉발시켰으며 중력을 양자역학적으로 다루는 도구로써도 응용되고 있다.
3.1.2.6. 아인슈타인-카르탕 이론
일반 상대성 이론을 확장한 이론이다. 통일장 이론의 후보였으며 1920-40년대에 아인슈타인이 중점적으로 연구한 대상이다.

3.2. 통계역학

3.2.1. 보즈-아인슈타인 통계

세상을 이루는 입자들 중 보즈 입자들의 분포에 관한 함수식이다. 물리학자 보즈는 광자의 분포에 대해서 통계식을 만들어냈는데 이를 아인슈타인이 보손 전체로 일반화시켰다. 통계역학 참조.

맥스웰-볼츠만 통계는 고전적인 '근사식'이 되고 보즈-아인슈타인 통계는 페르미-디랙 통계와 함께 현대 통계역학의 기본 개념으로서 자리잡게 된다.

3.3. 고체물리학

3.3.1. 아인슈타인 고체 모델

파일:external/fisicafacil.files.wordpress.com/einsteins-solid.jpg 파일:external/chemwiki.ucdavis.edu/Heat_Capacity.gif
실험적으로 고체의 열용량(비열)은 상온 근처에서는 크게 변하지 않지만, 극저온에서는 급격하게 0으로 떨어진다. 그러나 고전 역학(뒬롱-프티 법칙)에서는 비열이 온도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에 실험과 맞지 않는다. 아인슈타인은 각각의 원자를 독립적인 3차원 조화 진동자(Harmonic Oscillator)로 취급하여, 에너지 준위가 [math(\hbar\omega)] 단위로 이루어져 있다는 모델을 구상하여 통계역학적인 방법으로 고체의 열용량에 대한 일반식을 유도해냈다. 이 식은 간단한 발상에도 불구하고 실제 고체의 열용량 거동과 거의 일치한다.[42]

아인슈타인 모델은 이후 1912년에 Debye가 제시한 훨씬 정확한 모델로 대체되지만, 처음으로 고체의 비열 문제를 (실험과 대체로 맞는) 양자 역학적 모델로 극복했다는 의의가 있다. 이 문제는 사실 에너지 준위의 양자화를 통해, 특히 최초로 복사 이외의 영역에서 초창기 양자 역학이 성공한 중요한 사례 중 하나이다. 여기에서 아인슈타인은 플랑크 공식이 흑체 복사 뿐만 아니라 모든 물질에 적용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3.4. 양자역학

양자역학은 오늘날 현대 물리학의 핵심을 이루는, 아원자 수준의 물리세계를 다루는 학문이다. 양자역학의 소위 비결정론으로 대표되는 철학적 함의의 파장은 실로 엄청나서, 그러한 세계관을 반대하던 아인슈타인은 관련 문제로 보어와 격렬하게 논쟁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와 양자역학의 관계는 이리저리 얽혀있는 양자역학의 역사만큼이나 복잡하다.

일단, 그는 초창기의 고전적 양자역학을 물리학계에 이식하기 시작한 선구자였다. 플랑크의 양자 가설을 빛에 적용하여 광양자 가설을 도입하고 광전효과를 설명하였으며 양자 가설을 복사에 한정하지 않고 최초의 양자역학적 고체 모델을 고안하였다. 이후 보어가 양자론적 원자 모형을 도입하자 이를 응용하여 훗날 레이저의 원리가 되는 유도 방출을 도입하였다. 이는 최초로 양자역학의 확률적 성격을 포착한 논문이다. 재밌게도 이 시기 동안 아인슈타인은 광양자 가설을 두고 거의 전적으로 부정적이던 물리학계(특히 보어)와 홀로 논쟁을 펼쳤다. 결국 광양자 가설은 1920년대 이후 컴프턴의 산란 실험에 의해 어느정도 실체가 입증되고 물리학계에 점진적으로 수용되었다. 파동 함수의 배경이 되는 드브로이의 물질파 이론은 아인슈타인의 적극적 홍보에 의해 물리학계에 알려졌으며, 보손 입자에 관한 분포를 표현하는 보즈 통계 역시 아인슈타인이 발굴하여 보즈-아인슈타인 통계로 일반화하였다.

이후 드디어 슈뢰딩거의 파동역학, 하이젠베르크와 보른의 행렬역학이 등장하여 현대적인 양자역학이 탄생하였다. 이 때 아인슈타인은 슈뢰딩거의 파동역학을 지지하였다. 행렬역학은 직관적이지 않았다. 하이젠베르크는 불확정성 원리를 제시하였고, 보른은 파동함수는 입자의 상태에 관한 확률분포함수로 해석했는데, 그들의 해석이 점차 양자역학의 중심이 되자 아인슈타인은 양자 역학에 반대하기 시작한다. 처음에, 아인슈타인은 불확정성 원리 자체가 틀렸다 보고 다양한 반증 실험을 제시하며 보어와 몇차례를 다투었으나 논쟁에서 승리하지 못했고 양자 역학은 확립 수순에 돌입했다. 어쨌거나,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을 크게 발전시킨 하이젠베르크와 보른을 인정하고 1928년 둘을 동시에 "양자 역학의 창시자"로서 노벨 물리학상 후보로 추천하였다.

이후, 아인슈타인은 불확정성 원리 자체가 틀렸다는 견해를 포기하고 대신 숨은 변수 가설을 제시하였으며 당시의 양자 역학이 궁극적으로 불완전한 해석임을 증명하려 하였다. 1935년 아인슈타인은 포돌스키, 로젠과 합작하여 양자 얽힘 현상에 대해 다루는 EPR 역설을 제시하였고, 이 논문은 20세기 물리학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 중 하나가 되었다. 양자 얽힘은 양자 역학이 현실 세계를 기술하는 데 불완전함을 증명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지만 결국 아인슈타인 사후에 실재함이 증명되었다. 흥미롭게도 우주론에서의 우주 상수처럼 양자 얽힘 역시 아인슈타인이 의도치 않게 해낸, 양자 역학에서 매우 중요한 발견 중 하나로 여겨진다.

이후 아인슈타인의 자취는 통일장 이론으로 이어진다. 이 역시 양자 역학을 직접 반박하는 것이 아니라 중력과 전자기력을 통합하게 되면, 전자기로 이루어진 물질들이 중력과 그간 숨겨져 있던 상호작용을 하면서 양자 역학의 비결정론적 해석에 대한 보다 근본적 해석을 제공할 수 있을 거란 기대 때문이었다. 통일장 이론은 실패로 마무리되었지만, 비슷한 아이디어는 이후 표준 모형 등으로 이어진다.

아인슈타인의 양자 역학에 대한 견해와, 그에 대한 전략은 계속해서 바뀌었지만 각각의 순간마다 아인슈타인의 비범한 아이디어는 학계에 거대한 영향을 주었고 이 때문에 아인슈타인은 양자 역학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 물리학자로 여겨진다.

3.4.1. 광양자 가설(광자)

빛의 본성이 입자인지, 파동인지에 대한 논의와 연구는 광학을 일으켜 세운 뉴턴 때부터 꾸준히 있어 왔다. (뉴턴은 입자설을 밀었다.) 그런데 근대에 이르러 빛이 슬릿을 통과하여 보이는 회절-간섭 무늬 패턴이 빛이 파동이라는 확실한 증거로 나타남으로써, 빛은 파동이라는 것이 정설로 자리잡게 된다. 특히, 맥스웰의 전자기파 이론은 빛이 파동이라는 것을 이론적으로 더욱 확고하게 만들어주었다.

하지만, 맥스웰의 전자기파는 빛의 에너지를 강도(intensity)로만 설명하며 진동수(frequency)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한다. 실제로, 19세기 말엽에는 빛의 진동수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현상들이 발견되기 시작했다. 1887년 헤르츠, 1899년 레너드의 논의를 거쳐 확립된 광전효과(photoelectric effect)라는 현상이 대표적이다.(광전효과에 대해서는 후술)

한편 독일의 막스 플랑크는 1900년 흑체 복사의 자외선 파탄(Ultraviolet catastrophe)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최초로 빛은 원자와 상호작용하면서 [math(E = h\nu)]와 같이 불연속적인 에너지만을 교환한다는 양자 가설(quantum hypothesis)을 도입했다. 이 가설은 흑체 복사 문제를 절묘하게 해결함으로써 양자 역학을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해법은 매우 비약적이었고, 자신이나 동료들이나 이것이 본질적인 해석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아인슈타인은 플랑크의 양자 가설의 영향을 받아, 광전 효과 현상이 광양자 개념에 의해 매우 적절하게 설명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빛이 오랜 시간 공간을 나아가면서 만드는 간섭 무늬 실험은 두말할 필요 없이 파동설을 지지하지만 광전 효과나 흑체 복사는 모두 빛의 방출이나 흡수 순간과 관련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에 착안하여, 아인슈타인은 1905년 논문 에서 흑체 복사, 엔트로피, 광전 효과 등 빛의 방출 및 흡수와 관련된 다양한 현상을 모아서 광양자 가설(light quanta hypothesis)을 확립하였다. 플랑크와 다른 점은, 아인슈타인은 광양자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입장에 가까웠다. 이후 그는 복사 문제 뿐만 아니라 고체의 비열 문제 등에도 양자 가설을 적극적으로 적용하기 시작했다.

광양자 가설은 1905년 기적의 해 논문들 중 아인슈타인이 스스로 "혁명적"이라고 부른 유일한 논문이다.[43] 그의 광양자 개념은 학계에서 가장 느리게 받아들여진 학설로, 플랑크를 포함해서[44] 1920년대까지 물리학계에서 거의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Stuewer(2005)]
(1) 맥스웰의 전자기파 이론은 빛의 간섭과 회절을 매우 잘 설명한다.
(2) 아인슈타인의 광양자에 대한 통계적 접근은 생소하고 이해하기 까다롭다.
(3) 1910~1913년 연구를 통해 톰슨(J.J.Thomson), 조머펠트(A.Sommerfeld), 리처드슨(O.W.Richardson)이 아인슈타인의 공식을 고전적인 방법으로 유도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4) 막스 라우에(Max Laue) 등은 1912년에 X-ray가 회절된다는 것을 밝혀내 짧은 파장에서도 빛이 파동처럼 행동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5) 보어는 1913년에 수소 원자의 전자가 에너지 준위를 바꾸면서 광양자가 아닌 전자기파가 방출된다고 주장하였다.
아인슈타인은 오랫동안 사실상 유일하게 광양자를 지지하는 학자였다. 그는 10년 가까이 홀로 연구를 진행하였으며 1909년에는 간단한 사고실험을 통해 빛이 파동과 입자의 성질을 모두 가진다는 최초의 파동-입자 이중성(Wave-Particle duality)을 제안하였고, 이 자리에서 훗날 입자설과 파동설을 통합시키는 융합 이론(fusion theory)이 나올 것이라 예견했다.
또, 1916년에는 플랑크가 "불완전하게" 설명했던 흑체 복사 문제를 보어의 원자 모델을 기반으로 최초로 완전히 양자론적으로 설명하는 데 성공하였고, 플랑크 공식 [math(E = h\nu)]이 성립한다면 광양자는 [math(p = h\nu/c = h/\lambda)]의 운동량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보였다.(빛은 정지질량이 0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결과이다.) 이 결과로부터 아인슈타인은 광양자의 존재를 확신하게 되면서도 극심한 피로를 느껴 그의 친구 미셸 베소(Michele Besso)에게 1918년(1917년?) 다음과 같이 말했다.
I do not doubt anymore the reality of radiation quanta, although I still stand quite alone in this conviction.
이제 복사 양자의 "실재"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어. 아직 이걸 확신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 것 같지만.#
광양자 가설은 1914년 밀리컨의 실험을 거쳐 1922년 콤프턴(Compton)의 산란 실험에 의해 빛의 운동량이 입증되면서 비로소 본격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이후에도 닐스 보어를 중심으로 BKS 이론이 광양자 개념을 배제하기 위해 등장했으나 1924년 실험적으로 부정되고, 그 때서야 광양자 가설은 완전히 정설로 자리잡았다.

광양자 가설은 1920년 중반 현대적 양자 역학의 발생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드 브로이는 거꾸로 물질이 파동의 성질을 갖고 있으리란 발상을 바탕으로 1924년 전자의 파동(물질파)이론을 제안하였다. 드 브로이의 이론은 실험적 근거나 맥락이 없었기에 검토하던 교수(폴 랑주뱅, Paul Langevin)는 긴가민가했지만 그의 지인이었던 아인슈타인이 받아보고는 "거대한 베일의 한 구석을 들어올렸다."(He has lifted a corner of the great veil.) #며 극찬하고 논문 통과는 물론, 자신 또한 드 브로이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논문을 학회에 제출하는 등 그의 이론을 퍼뜨리기 위해 노력하였다.[46]# 아인슈타인의 노력은 드 브로이의 성과가 널리 퍼지는 데 큰 도움이 되었으며 슈뢰딩거는 드 브로이의 물질파를 일반화하여 전자를 파동함수로 기술하는 슈뢰딩거 방정식을 제안하게 된다.
3.4.1.1. 광전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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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전효과란 금속에 특정 파장의 빛을 쬐었을 때 전자(베타선)가 방출되는 현상으로, 전자의 방출(운동 에너지)은 전적으로 빛의 진동수에 의해 결정되며 빛을 얼마나 오래 쬐는지와는 관련이 없다.

1905년 논문 『빛의 발생과 전환에 관한 발견법적 관점』[Einstein(1905)]에서 광양자 가설을 도입한 아인슈타인은 광전 효과의 기전에 대해 매우 깔끔하게 설명하면서 전자의 운동 에너지가

[math(E_k = hf - W)]

즉 진동수에 대하여 선형적(비례 상수 [math(h)]; 플랑크 상수)으로 증가한다는 관계를 제시했다. 당시까지 광전효과는 빛의 진동수에 따라 효과가 커진다는 사실만 알려져 있었고, 그것이 정확히 어떤 식으로 증가하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았다.

밀리컨(Millikan)은 아인슈타인이 주장한 선형 관계(비례상수 [math(h)])를 측정하고자 수년간 노력을 들여 광전효과 실험을 진행하였다. 그 결과는 1914년에 나왔는데,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전적으로 옳다는 결론이 나왔다. 사실, 밀리컨 본인은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반박하기 위해 실험을 계획한 것이었고, 결론이 나온 이후에도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실험적으로 만족스러움에도" 설득력있는 이론적 근거(광양자 가설)를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라면서 이것을 대체할 수 있는 이론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이러한 입장은 다른 물리학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밀리컨의 실험은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무엇을 바탕으로 하던 간에 광전 효과를 가장 잘 설명하는 이론임을 보여주었고, 아인슈타인은 1922년 광전효과의 법칙을 규명한 공로로 노벨물리학상을 받게 된다. 주의할 것은 광양자 가설 자체가 아니라 광전효과를 설명한 것만 인정했다는 것이다. 그때까지도 광양자 가설은 물리학계에서 대부분 배척되었다.

광전효과는 양자역학을 태동시킨 중요한 계기이기도 하지만 LCD, LED 등 디스플레이 소재 등의 발광소자 등의 기본원리이며, 이미 20세기 초반에 현대 물리의 가장 중요한 개념인 기본 입자중 하나인 광자를 규명했다는 것에서 그 중요성은 절대로 상대성 이론에 뒤지지 않는다.

3.4.2. 브라운 운동

브라운 운동이란 1827년 영국의 생물학자 브라운이 발견한 현상으로, 물에 작은 입자를 집어넣었을 때 외부의 특별한 간섭이 없어도 여기저기로 움직이는 현상이다.

브라운은 꽃가루로 실험했었기 때문에 자신이 당시에 유행하던 학설이던 생기(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특별한 기운)를 발견했다고 생각했으나, 나중에 아무 입자든지 작기만 하면 같은 행태를 보인다는 것이 관찰돼서 물리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아인슈타인의 업적은 이것이 물 분자의 열운동에 의해 그 입자의 통계 역학적 임의 보행(Random walk) 운동하는 현상이라고 설명한 것이다. 예를 들어, 정지한 물통에 아주 아주 아주 작은 입자를 하나 넣었다고 해보자. 그러면 입자는 물 속에서 물 분자들과 충돌하여 이리저리 움직이며,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지는 예측불가능에 가까워서 랜덤워크라는 것이다. 물통에 들어간 입자가 충분히 크다면 역학적 평형관계를 이루지만, 입자가 너무너무 작으면 계속해서 움직인다는 것. 아인슈타인은 이런 가설로부터 미소입자의 움직임을 나타내는 식을 만들었는데, 이는 추후에 프랑스 물리학자 바티스트 페렝이 실험으로 검증해냈다.[48]

이 업적의 중요한 부분은 당시에는 생소했던 확산(Diffusion)이나 임의보행과 같은 개념을 도입하고 이론화 한 것이다. 즉, 무작위과정(stochastic process)이 물리학에서 중요개념으로 데뷔한 사건으로 그 중요성이 같은 해에 발표된 광양자가설이나 특수상대론에 비해 결코 처진다고 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그 이전까지 원자는 자연현상을 편리하게 설명하기 위한 가상의 개념이란 견해가 많았는데, 이는 원자의 존재가 실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루트비히 볼츠만 등의 물리학자는 원자론의 개념으로 기체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원자론을 받아들이지 않는 진영의 맹비난을 받고 조롱거리가 되기도 한다. 아인슈타인은 원자개념이 없이는 브라운 운동을 절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입증해냈고 이후 원자가 실재하는 개념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아인슈타인이 만든 확산-임의보행모델은 통계역학에서 중점적으로 연구되었고, 수학에서도 확률미적분학 등으로 발전했다. 그 영향력은 오늘날에는 경제학의 경제예측 및 시계열분야, 주식/채권을 분석하는 금융경제학에서도 연구대상이 되고 있을 정도. (이래서 경제학계에서 순수 수학 / 이론 물리학자들을 대거 채용한 적이 있었는데[49] 이들을 통칭 '로켓과학자'라고 불렀다.)

대표적인 예로, 이 브라운 운동은 파생상품인 옵션의 가격을 계산하는데 쓰인다. 시카고 대학 경제학과의 Fischer Black과 Myron Scholes는 주식 가격이 로그 정규분포를 따른다고 가정하고[50] 주식과 옵션과의 관계를 수식으로 만들어 보았더니 옵션 가격에 대한 편미분 방정식을 얻었다. 이것의 해를 구해야 옵션 가격을 계산하는데, 편미분 방정식에 대해 조금이라도 안다면 이해하겠지만, 편미분 방정식의 해를 구하는 건 도통 어려운게 아니다. 블랙과 숄즈 두사람이 GG치고 자기들보다 수학 잘하는 물리학과에 가서 도움을 요청했는데... 이거 브라운 운동 아님? 아인슈타인 등등 물리학자들이 이미 다 풀었는데? 하고 해를 구해주었다고... 이 해가 블랙-숄즈 옵션 가격 계산식(Black-Scholes Option Pricing Model) 으로, 옵션 매매에 필수로 사용되는 계산식이다. 숄즈는 이 계산식으로 1997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다.[51]

3.4.3. EPR 역설

파일:NYT_May_4,_1935.jpg

1935년 5월 4일 NYT 기사[52]
Einstein, Podolsky, Rosen 세 사람의 앞머리를 따서 이름 붙여진 양자역학의 역설이다.[53]

양자얽힘에 관한 역설을 말하고 있는데 다들 한 번씩 비문학 지문에서 읽어봤음직한 내용일 것이다. 얽혀있는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입자의 상호작용이 즉시 전달되는가 아니면 상대론에 따라 빛보다 느리게 전달되는가를 말하고 있다. 국소성의 원리에 대한 문제로, 아인슈타인의 주장에 따르면, 태양이 사라져도 곧바로 지구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처럼, 양자적인 규모에서도 어떤 현상이 다른 곳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아야 한다.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소수의 이론 물리학자들은 양자계의 상태에 대한 서술이 근본적으로 확률적이라는 코펜하겐 해석을 인정하지 못했다. 양자적인 규모에서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모든 것이 확률적이며, 심지어는 관측이 거기에 영향을 미친다는 코펜하겐 해석은 라플라스의 악마로 대표되던 고전적인 세계관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신은 주사위 놀음을 하지 않는다."는 유명한 말도 코펜하겐 해석에 대한 이야기.

상대론의 확실함을 알고 있었던 아인슈타인은 이를 통해 양자역학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지적하였으며, 확률적인 코펜하겐 해석 대신에 국소성의 원리에 맞는 숨은 변수 이론을 주장했다.

다만 존 벨(John Bell)이 벨의 부등식을 발견했는데, 이는 어떤 형태로든 국소적 숨은 변수가 존재한다면 그 이론이 반드시 만족해야 할 부등식이다. 만약 이 부등식이 참이라면 양자역학은 완전히 틀린 이론이 된다. 실험 결과 벨의 부등식은 거짓으로 밝혀졌고, 물리학자들은 국소적 숨은 변수는 없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었다. 아인슈타인이 틀린 것으로 밝혀진 것들 중 한 사례.

3.4.4. 유도방출

1917년 '복사의 양자이론에 대하여' 라는 논문[54]을 통해서 유도방출의 개념을 제시했다. 아인슈타인은 들뜬 상태가 광자를 내고 흡수하는 과정을 연립 방정식을 통해 정리했다. 그 과정에서 광자의 방출이 다른 광자로 자극받아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이를 응용하여 많은 원자를 들뜬 상태로 두면 알맞은 에너지의 광자가 연쇄반응을 일으켜 결맞은 빛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알려지고는 유도방출을 구현하려는 여러 시도가 이루어졌다. 1950년대에는 유도방출을 실제로 응용한 레이저가 개발되기에 이르른다. 이 논문은 이차양자화를 도입하였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3.5. 현대 우주론

3.5.1. 정적 우주론우주 상수

전체로서의 우주를 수학적으로 다루는 현대 우주론은 시공간과 중력을 통합한 일반 상대론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아인슈타인은 1917년 일반 상대론에 기반한 최초의 수학적 우주 모델[1]을 발표했다. 그의 우주 모형은 흔히 정적 우주론(static universe)이라 불리며 우주 공간이 구 모양으로 닫혀 있으며 정적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 모델의 의의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예측했느냐보다는 처음으로 일반 상대론에 근거하여 우주 전체의 구조에 대한 수학적 해명을 시도함으로써 현대적인 우주론이 시작되었다는 데에 있다.[55]

일반 상대론은 상상 이상으로 정확해서 당시에는 전혀 생각치도 못했던 많은 사실을 정확하게 예언했는데, 당시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이론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는 우주에 대한 기존 지식, 즉 우주 공간이 가만히 정지해 있다, 따라서 밀도와 곡률이 시간에 따라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준으로 거꾸로 우주 해를 특정하거나 필요하다면 방정식을 수정하려 했다. 그 결과가 잘 알려진 우주 상수이다.

[math(\displaystyle R_{\mu\nu} - \frac{1}{2}Rg_{\mu\nu} + \red{\Lambda}g_{\mu\nu} = \frac{8\pi G}{c^4}T_{\mu\nu})]

1915년 기준의 중력장 방정식을 풀면 수학적으로 정적인 우주해는 존재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이것을 기준으로 일반 상대론에 따르면 우주는 정적일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겠지만 "이론과 수학"보다는 경험주의를 중시한 아인슈타인은 그런 사고 방식을 좋아하지 않았고, 분투 결과 결국 우주 상수라는 탈출구를 찾아냈다. 이후 드지터, 프리드만, 르메트르 등 여러 우주론 학자들이 이 소위 "람다(λ) 문제"에 달려들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이론에 따르면) 우주가 정적이지 않을 가능성이 점점 커져갔다. 사실 아인슈타인의 우주는 불안정한 평형 상태임이 훗날 밝혀졌다.

이후 1929년 에드윈 허블이 외부 은하들의 적색편이를 관찰함으로써 일반 상대론이 예측했던 우주 팽창의 흔적이 정확히 확인되었으며, 그 당시까지만 해도 모든 은하들이 한 지점에 멈춰 있다고 생각되어 왔던 우주의 패러다임이 한꺼번에 뒤집혔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학설, 특히 우주 상수를 미련없이 삭제했다. 이후 아인슈타인은 "나의 일생일대의 실수는 우주 상수를 방정식에 집어넣은 것이다."(My biggest blunder)라는 말을 남겼다고, 조지 가모프의 말을 빌려 전해진다[56]. 이는 가장 널리 알려진 아인슈타인의 인용구 중 하나이지만 일부에서는 이 표현이 가모프가 아인슈타인과의 대화에 살을 덧붙이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일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마치 엎질러진 물을 주워담는 것처럼, 이미 발견이 되어버린 우주 상수를 다시 철회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사실 우주론이라는 맥락 밖에서 봤을 때 우주 상수는 수학적인 이유로는 도입할 정당성이 충분했다. 우주 상수는 아인슈타인의 값을 선택했을 때만 정적 우주를 유도하며 아인슈타인과는 다른 상수값을 선택하면 전혀 다른 우주 모델이 나올 뿐이다. 우주론 학자들은 우주 상수의 의미를 분석하고, 이 상수의 효과를 어떤 식으로 검출할 수 있는지(주로 팽창 속도에 관한 것이다)에 관한 연구까지 해놓았다. 우주 상수가 철회되려면, 예측되는 효과가 실제로도 0에 가까울 정도로 작아야만 되는 것이었다.

3.5.2. 아인슈타인-드지터 모델

아인슈타인의 우주론에 관한 기여는 사실 이후로도 몇차례 있었다. 그는 바로 동적 우주로 넘어가지 않고 한 때 훗날 프레드 호일 등이 1949년 주장한 정상 우주론(steady state universe)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1931년). 그러나, 자신의 공식에서 심각한 결함이 있음을 발견한 아인슈타인은 그 모델을 버리고 논문으로 출판하지 않았으며, 정상 우주론을 더 키우려는 시도 역시 하지 않았다.
이후, 아인슈타인은 1932년 드 지터(De sitter)[57]와 함께 "아인슈타인-드지터 모델"(Einstein-De sitter model)을 개발하였다.[2] 이 모델은 우주 상수와 우주의 곡률을 0으로 두었는데, 이 우주는 영원히 팽창하지만 점차 팽창 속도가 느려진다. 사실, 우주의 곡률을 0이라 두는 것은 우주에 물질이 무한히 있다고 주장하는 거라 팽창 우주 못지 않은 파격이었다.(당시 대부분의 학설은 종전의 아인슈타인처럼 우주가 닫혀있다고 가정했다.) 이 모델은 수학적으로 가장 단순한 해이고 각종 변수들이 바로 정해진다. 이는 20세기 전반에 걸쳐 가장 대표적인 우주 모델이었다. 특히, 우주 배경 복사에 대한 분석 결과 실제로 우주의 곡률이 0으로 밝혀짐으로써 1980년대에 유력한 실제 우주 모델로 각광받았다. 현재는 우주 상수가 물리적 정당성을 얻음으로써 가장 정확한 모델은 아니게 되었지만, 우주 상수가 워낙 작아서 아직도 근사적으로는 얼추 맞다.

한편, 인지도에서는 밀리나 말년에 아인슈타인과 그의 조수 어니스트 스트라우스(Ernest Straus)는 1945년 우주가 팽창한다면 정적인 중력장을 가정하는 슈바르츠실트 해는 얼마나 정당화될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을 내놓았다. 이들의 해답은, 팽창 우주 모형에 (전체는 영향을 받지 않도록) 구멍을 낼 수 있고, 구멍의 중앙에 점질량을 끼워넣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면 구멍 내부는 슈바르츠실트 시공간이 된다. 이것을 스위스 치즈 모델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우주론에 불균일 요소를 도입하는 대표적인 접근법으로 남았다.[3]

3.5.3. 가속팽창과 우주 상수

우주 상수의 실질적 가치는 1990년대에 우연한 계기로 밝혀졌다. 우주 상수가 없는 아인슈타인 방정식은 (아인슈타인-드지터 모델에 따라) 점점 팽창속도가 감소하는 우주를 예측한다. 그런데 브라이언 슈밋, 애덤 리스, 그리고 솔 펄머터는 Ia 초신성들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우주가 가속 팽창을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결국 우주 상수는 0이 아니었던 것이다. 천재는 실수조차도 옳았다 아인슈타인의 우주상수는 이제 우주를 유지시키던 힘에서 더 빨리 팽창시키는 힘, 즉 암흑에너지로 변모하여 현대 우주론에 돌아왔다. 물론 암흑 에너지가 무엇인지 아직 알려진 것이 거의 없기 때문에 정말로 '상수'의 형태를 취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일단 가장 간단한 형태이기 때문에 사용되고 있다. 비록 아인슈타인 스스로가 폐기하긴 했어도 현대 들어 다시 재조명되어 실제로도 설득력을 갖춘 개념이라는 데서 그의 천재성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아인슈타인의 우주 상수와 암흑 물질을 포함하는 우주 모형을 람다시디엠(ΛCDM) 모형이라고 부르는데 표준 우주 모형이라고도 불린다. 이유는 현재까지 관측되어온 전반적인 우주 관련 데이터가 이 모형과 부합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우주배경복사초신성, 은하단 등의 정밀한 관측을 통해 우주에 존재하는 물질과 암흑에너지의 비율과 함께 암흑에너지의 상태방정식을 결정할 수 있는데, 현재까지의 결과에 따르면 암흑에너지는 신기하게도 음의 압력을 가진 유체, 즉 우주상수의 특성을 가졌을 것이 유력시되고 있다.
[1] A.einstein, "Kosmologische Betrachtungen zur allgemeinen Relativitätstheorie", Sitzungsberichte der Königlich Preußischen Akademie der Wissenschaften (Berlin) (1917) : 142–152. (독일어영어)
[2] A.Einstein, & W.de Sitter, "On the Relation between the Expansion and the Mean Density of the Universe", Proceedings of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PNAS) 18(3) (March 15 1932) : 213–214. : pp.51–52 #
[3] A.Einstein, & E.G.Straus, "The Influence of the Expansion of Space on the Gravitation Fields Surrounding the Individual Stars", Reviews of Modern Physics 17(2&3) (April 1945) : 120–124. #

3.6. 통일장 이론

아인슈타인은 1925년 이후의 커리어를 통일장 이론(Unified Field Theory)에 거의 전념하였다. 아인슈타인의 통일장 이론은 고전적인 관점에서 중력(일반 상대성 이론)과 전자기학을 결합하려는 시도를 의미한다. 통일장 이론의 기본적인 사상은 독립적으로 보이는 현상들을 하나의 법칙으로 설명하려는 유서깊은 사고 방식에서 나오며,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이나 맥스웰의 전자기력이 대표적인 예이다. 아인슈타인도 이미 일반 상대론을 통해 관성과 중력을 통합적으로 해석하는 데 성공하였다.

아인슈타인이 통일장 이론에 대해 가지는 생각은 여러 번 바뀌었다. 통일장 이론의 시도는 최대 1915년 다비트 힐베르트의 이론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데, 이 시도에 대해서 당시 아인슈타인은 잠깐 관심을 가졌다가 이내 "그의 물질에 대한 가정은 유치한 수준이다"라 할 정도로 부정적으로 바뀌고 (실제로 힐베르트의 이론은 실패적이었다.) 줄곧 무관심 상태였다.
그런데 이후 바일(Weyl, 1919 - 게이지 이론 도입), 칼루차(Kaluza, 5차원 이론), 에딩턴(Eddington, 1923 - 아핀 기하학) 등의 시도가 줄줄이 이어졌고, 아인슈타인은 1925년부터 본격적으로 통일장 이론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아인슈타인은 에딩턴의 방법으로부터 영향을 크게 받았는데, 기본적인 접근법은 아핀 접속의 일반화이다. 일반 상대성 이론은 계량 텐서가 자동으로 평행이동되는 레비치비타 접속(Levi-Civita connection)을 채택하고 있는데, 이 조건을 무시하면 접속의 대칭성이 깨지면서 시공간에 열률(비틀림, Torsion)을 도입할 수 있다.

[math(T^{\alpha}_{\mu\nu} = \Gamma^{\alpha}_{\mu\nu} - \Gamma^{\alpha}_{\nu\mu})]

아인슈타인은 이 과정에서 팔라티니 방법(Palatini Method)[58]을 고안하는 등 수학적 성과를 내기도 하였다. (이탈리아 수학자 아틸리오 팔라티니(Attilio Palatini, 1889~1949)가 사용했던 방법으로 여겨져 그의 이름이 붙었으나, 현재 쓰이는 형태는 대체적으로 아인슈타인이 1925년에 발견했다고 지적되었다.[59])

그는 죽을 때까지 여러 편의 통일장 이론에 관한 논문을 썼으나 가장 잘 알려진 것은 1929년 1월 30일 발표한 논문[1]이다. 아인슈타인 스스로도 고무적이었고 외부에서 특히 큰 주목을 받았다. 이내 근사적으로만 맞는 등 오류가 발견되었지만 [60] 아인슈타인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나아갔다. 심지어 대동맥류 파열로 입원했을 때에도 통일장 이론을 붙잡고 있었던 아인슈타인은 통일장 이론을 완성하지 못한채 죽음을 맞고 만다. 오늘날 물리학계에서는 그의 통일장 이론에 대한 시도들을 실패적인 것으로 평가한다. 무엇보다, 당시 잘 알려져 있지 않던 강력과 약력을 포함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론의 실패는 예견되어 있었다.

통일장 이론에 대한 그의 집념은 말년으로 갈수록 학문적 고립이 심해지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당시 물리학계는 갈수록 양자역학에 집결한 반면, 아인슈타인은 그러한 흐름을 거부하고 통일장 이론에 홀로 매달렸다. 이는 통일장 이론이 물질에 관한 이론에 영향을 주어 양자 역학의 흐름에 변화를 줄 수 있을 것이란 기대와도 맞물려 있다. 그러나 그의 이론은 동료들이 보기에는 갈수록 의미없는 수식 뭉치가 되어갈 뿐이었다.[61] 말년으로 갈수록 아인슈타인은 동료들을 피했는데, 프린스턴 고등연구소(IAS)에서는 거의 수학자 쿠르트 괴델과만 밀접하게 친분을 이어갔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62] 아인슈타인의 시도는 비록 실패적이나, 그럼에도 그의 유산은 남아 자연계의 기본 힘을 모두 통일하여 설명하는 통일장 이론의 꿈은 후대 물리학자들인 와인버그와 살람의 표준모형과 같은 명맥을 만들기에 이른다.
[1] A.Einstein, "Zur Einheitlichen Feldtheorie", Sitzungsberichte der Preussischen Akademie der Wissenschaften (1929) : 2-7.

4. 평화주의와 반핵 운동

"If I had foreseen Hiroshima and Nagasaki, I would have torn up my formula in 1905."
"내가 만약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일을 예견했었다면, 1905년에 쓴 공식을 찢어버렸을 것이다."
맨해튼 계획을 실시하도록 편지를 보낸 것에 후회하며
아인슈타인의 또다른 업적 중 하나는 독실한 평화주의자이자 세계 최초로 핵무기 반대운동을 시작한 인물들 중 하나라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1939년 8월에 나치 독일의 원자력 연구에 위험성을 느꼈다. 여기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첫 번째는 엔리코 페르미와 레오 실라드 등의 저명한 과학자들이 아인슈타인에게 독일의 원자력 연구가 사실은 핵무기 개발이라면서 그 위험성을 경고한 것이고, 둘째는 나치 독일이 체코 등지에서 우라늄의 판매를 중단시킨 것이였다.

또한 결정적으로 과학계에서 독일의 과학자[63]인 오토 한과 프리츠 슈트라스만이 우라늄을 쪼개는 데 성공한 것도 당시 아인슈타인의 생각에 영향을 주었다. 이는 당시에는 "우라늄은 쪼갤 수 없다"는 반응이 대세였기 때문이였다. 쉽게 설명하자면 큰 원자핵에 작은 방사능을 쏘니까 못 쪼개는 게 당연하다는 것이었는데, 문제는 이 쪼개는 과정에서 생기는 에너지가 굉장히 막대하다는 것이였다. 핵분열에서 원자량의 일부가 에너지로 변환되는데, 그가 고안한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이 에너지는 다이너마이트 수백~천 톤의 폭발량으로 전환된다.

이 때문에 아인슈타인은 당시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나치 독일원자폭탄 보유에 대응하기 위해 연구를 진행할 것을 권유하는 실라드의 서한에 서명을 하였는데, 그렇게 시작된 것이 바로 맨해튼 프로젝트였다. 그런데 정작 나치 독일은 핵무기 개발을 제대로 진척시키지 못한 채 연합국에 항복했고, 그제야 마음이 놓인 아인슈타인은 "원자폭탄 개발을 더 이상 안 해도 괜찮겠습니다"라는 편지를 다시 보냈다. 이 편지도 본래는 맨해튼 프로젝트의 착수를 권유한 실라드가 주도적으로 쓰고, 인지도에서 보다 앞선 아인슈타인이 서명하는 형식을 취했다. 말하자면 원자폭탄이 개발된 전후 과정에서 아인슈타인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그의 명성, 권위를 빌려주는 것에 국한되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미국 정부 입장에서는 20억달러(한화 약 2조)에 달하는 예산을 사용한 비밀 프로젝트의 성과물을 써보지도 않고 없애기 곤란했다. 게다가 원자폭탄 개발의 동기를 제공한 나치 독일은 항복했으나 아직 일본과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미국은 일본 본토 상륙에서 수반될 막대한 병력 손실을 줄이고 싶었다.[64] 이러한 점들이 겹치면서, 결국 미국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투하를 강행하고야 말았다.

이러한 결과에 충격을 받은 아인슈타인은 이후 당시 서한에 서명한 것을 평생 후회하며 핵무기 폐지에 지지했다. 그는 1955년, 영국의 철학자인 버트런드 러셀[65]과 함께 대대적인 핵군축과 평화를 촉구하는 러셀-아인슈타인 성명을 발표하였는데,[66] 이 성명이 계기가 되어 전세계 과학자들이 과학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핵무기 사용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군축과 세계평화를 논의하는 퍼그워시 회의(Pugwash Conference)가 개최되었다. 이 모임은 21세기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다.[67]

한편 아인슈타인의 반전 운동을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에 대해 그와 같이 러셀-아인슈타인 성명을 발표했던 버트런드 러셀은 "아인슈타인이 이해하지 못할 얘기할 때는 그를 현명하다고 하고,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얘기를 하는 순간 그 사람에게서 지혜가 떠나버렸다고 생각한다." 라고 평하기도 했다.

히로시마·나가사키 사건 이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핵개발에 후회하고 반대했다는 점에 들어 아인슈타인이 일본을 편드는 일빠가 되었다는 망언이 퍼진 경우도 있는데, 아인슈타인은 반민족주의자였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아인슈타인은 독일과 일본의 전쟁 범죄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고 애초에 이를 막기 위해 핵개발 서한에 찬성한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핵개발을 반대하게 된 것은 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지도층들은 살고, 민간인들만 잔인하게 학살당한 것 때문이다. 일부 저서에서는 아인슈타인을 포함한 핵개발 과학자들이 일빠가 되었다는 등의 기가 막힌 정보가 실려있기도 하지만, 실제로 일본 문화 같은 것에 심취했다고 한들, 군국주의나 전체주의를 옹호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그런 것들을 혐오했던 아인슈타인에게는 딱히 문제될 것도 없다.

참고로 당시 일본의 어느 반핵 운동가가 말년의 아인슈타인에게 핵개발의 책임을 따지는 편지를 보내 고뇌하게 만들었던 적이 있는데, 나중에 NHK 다큐멘터리 팀이 아인슈타인 등신대 인형[68]과 함께 늙어버린 그 운동가를 찾아갔더니 인형을 보자마자 내가 그때 너무 심한 짓을 한 것 같다며 울었다고 한다.

냉전 체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무렵인 1949년 리버럴 저널리즘(Liberal Journalism)의 기자 알프레드 배너(Alfred Werner)가 제3차 세계 대전에 사용될 무기가 무엇이냐고 물어보자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I know not with what weapons World War III will be fought, but World War IV will be fought with sticks and stones.
저는 제3차 세계대전 때 뭘로 싸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4차 세계대전 때 나뭇가지와 돌멩이로 싸울 것이란 건 알 것 같군요.[69]
출처 : Liberal Journalism 16호 기사 중

5. 일화

5.1. 아인슈타인과 수학

물리학자치곤 수학이 꽤나 약해 주변 연구자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거나, 그가 초기에 내놓은 이론에 나오는 공식 계산은 전부 아내인 밀레바가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70] 상술했듯 그녀와 아인슈타인은 같은 대학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전공했다. 이 때문인지 광양자 이론은 둘이 공동 연구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고, 실제로 스위스 베른 소재 아인슈타인 박물관의 전시물 중에는 아인슈타인이 그녀의 공적을 훔친 거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는 언급이 소개되어 있으나, 초기 논문의 아인슈타인-마리치는 공동 저자를 표시한 게 아니라 스위스의 관습적인 서명 방식(아내의 성을 뒤에 붙임)을 사용한 것이며 밀레바가 어떤 도움을 줬을 거라는 증거나 증언이 하나도 없어 없다고 결론 지은 바 있다. 애당초 밀레바는 독자적으로 학문적인 활동을 한 이력이 없다. 자세한 논박 내용은 한국어 위키피디아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밀레바 마리치 문서에 출처와 함께 상세히 기술되어 있으니 참고하도록 하자. 여튼 이후 아인슈타인은 노벨상을 받은 후, 그 상금을 이혼한 밀레바에게 준다.

아인슈타인은 수학에 능통하여 중학교 때 미적분학 교재를 풀던 사람이었다. 거기다 '수학 및 물리학의 교사 과정' 졸업시험을 통과하고 학사 학위를 받았으니 수학교육과물리교육과 복수전공자라 해도 그리 틀린 말이 아니다.[71] 대학교 시절엔 미적분학은 물론 대수학, 편미분방정식 등 10여 개의 수학 과목을 수강하기도 하였다.

상대론에 대한 연구를 할 때 그는 중력으로 휘어진 공간을 표현하지 못해 친구 수학자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는 소위 말하는 비(非)유클리드 공간에 대한 것이었다. 그런데 비유클리드 기하학은 19세기 중반 베른하르트 리만이 제창하고 난 후 19세기 말에나 가야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졌고, 중력을 기술하는 데 필수적인 미분기하학과 텐서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진행된 것은 1900년 전후로,[72] 일반 상대성이론에서 매우 잘 사용되는 텐서는 1900년에 발표된 개념이다. 당시만 해도 그 분야의 전문가가 아닌 이상 쉽게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인슈타인은 수학의 최첨단 분야가 발표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능수능란하게 다룰 수 있을 정도로 수학에 조예가 있는 사람이라는 말이 된다. 아인슈타인이 1916년에 일반상대론을 설명하기 위해 쓴 논문에는 기하학에 익숙하지 않은 물리학자들을 위해 미분기하학을 설명하는 데 전체의 반 이상을 할애하고 있다.

아인슈타인은 텐서 표기법중 하나인 아인슈타인 표기법을 일반상대성이론과 동시에 세상에 발표하여, 수학에도 이름을 남겼다. 리만 다양체의 특수한 경우인, 아인슈타인 다양체라는 개념에 기여하기도 했다.

상대성 이론도 수학은 부인 밀레바의 도움을 받은 거 아니냐는 설이 있는데, 상술했듯이 이 역시 가능성이 낮다. 광양자 이론 이후 아인슈타인은 그녀보다는 다른 동료들에게서 도움을 받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서 상대성 이론을 내놓을 즈음엔 밀레바는 그의 연구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밀레바는 졸업 시험의 수학 과목을 재수까지 하였으나 결국 통과하지 못해서 졸업하지 못했다. 아인슈타인과 관련된 일화에 대해서는 Abraham Pais가 쓴 Einstein Lived Here(Oxford University Press, 1994)를 참고하기 바란다. 국내에도 번역서가 출판되었으나 역자가 비전공자인 관계로 과학 용어가 오역된 것이 많으니 주의할 것.

상술했듯 그의 대학 시절 수학 교수였던 헤르만 민코프스키는 수업을 자주 빼먹던 아인슈타인과 사이가 좋지 않아 "아인슈타인은 게으른 개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다만, 진심으로 싫어했던 건 아닌지 특수 상대론에도 상당 부분을 기여했다.

2015년 5월 17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아인슈타인이 수학을 못하여 아내의 도움을 받았다는 소문을 다루었다.

5.2. 종교관

내게 있어 다른 모든 종교와 마찬가지로 유대교는 가장 유치한 미신의 전형일 뿐이다. 그리고 내가 기꺼이 속해 있고, 그리고 내가 그 정신을 깊이 사랑하는 유대인도 내게 있어 다른 모든 사람들과 비교해 다른 어떤 특징도 발견할 수 없다. 내 경험에 의하면 유대인은 권력을 얻지 못해 가장 사악한 암으로부터 보호될 수는 있었지만 다른 인종에 비해 우수할 것은 전혀 없다. 그들이 선택받았다고 한다면 이렇게 설명하는 것 외에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중략..)
나의 종교적 신념에 관하여 당신이 읽은 것은 물론 거짓말이며, 조직적으로 반복되고 있는 거짓이다. 나는 인격적인 신(personal God: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의 신)을 믿지 않는다. 그리고 이를 부인한 적도 없으며, 분명히 그렇게 설명했다. 만약 종교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것이 내 속에 있다면 그것은 우리 과학이 밝힐 수 있는 이 세계의 구조에 대한 무한한 찬양이다.
1952년 유대인 철학자 구트킨의 책 "삶을 선택하라: 저항을 향한 성서의 부름"을 읽고 그에게 보낸 편지 중
한 쌍의 수레바퀴처럼 종교가 과학과 짝을 이루려면 그 종교는 과학적으로 증명되고, 과학자와 예술가에게 영감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종교가 ‘우주적 종교(COSMIC RELIGION)’이다.[73]
A. Calaprice (Hrsg.): 아인슈타인이 말하다: Zitate, Einfälle, Gedanken. Piper, 2005, S. 180.[74]

공식 기록에 의하면 인격신을 부정하였으며 자신이 믿는 신은 자연질서에 가깝다고 밝혔다. 김성구는 아인슈타인의 우주적종교에 가장 근접한 것은 불교라고 주장한다. 다만 아인슈타인이 직접적으로 불교를 언급한 공식 기록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5.3. 개인적 일화와 인간성

파일:2018_CKS_16447_0038_000(don_quixote_and_the_bible_are_my_favourite_books_berlin_15_march_1926).jpg
파일:external/image.hnol.net/201102111316417591-167450.jpg
파일:external/wmn.hu/Einstein-Frank-Aydelotte-and-wife-3.jpg
[79]
이 사진에 대해 학교대사전은 "천재들은 왜 일찍 죽을까? 안 죽고 오래 살면 노년에 이런 사진이 남기 때문이리라"라고 평한 바 있다. 그 예로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도 추가해야 할 것 같다.

5.4. 양자역학에 대한 반감

"아인슈타인, 난 자네가 부끄러워. 자네는 새로운 양자론에 대해 예전에 자네의 상대성 이론 반대자들처럼 반박하고 있잖아."
- 파울 에렌페스트
아인슈타인은 그 당시 주류를 이루던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을 싫어했다. 많은 사람들은 아인슈타인이 양자역학 자체를 부정했다고 알고 있는데, 이건 사실이 아니다. 양자역학이 맞는 이론이냐에 대해서는 애초에 큰 논란이 없었다. 실험 결과들이 양자역학의 예측과 딱 맞아떨어졌기 때문.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의 한 주춧돌을 놓은 인물이기도 했지만 기계론적 결정론을 부정하는 보어와 하이젠베르크의 해석에 대해서는 깊은 반감을 품었다. 그들의 해석에서 미시적인 물질의 구체적인 행동양식은 본질적으로 측정 불가능하며 구체적 상태에 대한 질문 자체가 의미 없다고까지 여겨졌는데, 아인슈타인은 이들의 해석이 가지는 추상적이고 관념론적인 태도에 대해 크게 반대했다. 대신에 양자역학에 숨은 변수(hidden variable)가 있어야 직관적이고 완전한 이론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양자역학이 확률을 통해 표현되는 것은 불완전한 중간단계의 이론이기 때문이며 완전한 이론에는 확률을 만드는 숨은 변수가 있을 거라는 논리였다.

아인슈타인은 코펜하겐 해석을 반대하는 과정에서 당대의 누구보다도 양자역학의 본질에 대해 깊게 탐구하여 심오한 통찰력을 발휘했다. 결과적으로 1935년에 이른바 EPR 역설을 꺼내서 양자역학에서 나타나는 본질적인 한계점을 지적하는데 성공한다.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라는 유명한 말도 아인슈타인이 한 말이다. 정확하겐 이 내용은 아인슈타인이 막스 보른에게 보낸 편지글에서 처음 등장한다.
양자역학은 정말로 인상적이다. 하지만 나의 내면의 목소리는 내게 이것이 아직 진짜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론은 많은 것을 설명해 주지만 옛 존재(Old One)의 비밀을 밝혀주지는 않는다. 나는 어떤 경우에도 신이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Quantum mechanics is certainly imposing. But an inner voice tells me that it is not yet the real thing. The theory says a lot, but does not really bring us any closer to the secret of the Old One. I, at any rate, am convinced that He does not throw dice.
이후 자신이 쓴 표현이 마음에 들었는지 아인슈타인은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표현을 많이 언급하고 다녔고, 때문에 이 표현이 유명해진다.

이에 대해 그의 동료 닐스 보어
"신이 주사위 가지고 뭘 하든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마라"
Stop telling God what to do with his dice.
라고 말했다.[81]

뒷날 스티븐 호킹은 저기에 덧붙여
"아인슈타인의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는 말은 틀렸다. 블랙홀을 생각해 보면 신이 주사위를 던질 뿐만 아니라 어쩌면 그가 가끔 우리를 혼동시키기 위해 주사위를 안 보이는 곳으로 던지는지도 모른다.
So Einstein was wrong when he said "God does not play dice". Consideration of black holes suggests, not only that God does play dice, but that He sometimes confuses us by throwing them where they can't be seen."
라고 말했다.

5.5. 노벨상 이야기

아인슈타인은 1910년부터 꾸준히 노벨상 후보로 추천되었고 1922년 마침내 수상하기까지 건수는 점점 증가했다. 1910~1914년의 추천 대상은 거의 전부 특수 상대론이었고, 이 때 노벨 재단에서는 시기상조라며 관련 보고서를 만들지 않았다. 아직 실험적 검증이 되지 않았다거나, (노벨의 유언대로) 인류에 큰 공헌감이 되지 않는다는 의견, 심지어는 물리학이 아니라 철학 이론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1915~1919년에는 대부분 특수/일반 상대론으로 지명되었지만, 노벨상 위원회에서 아인슈타인에 대한 특별 보고서를 마련한 건 1919년 브라운 운동 관련 건이 처음이었다. 당시 노벨 물리학상(Jean Perrin) 및 화학상(The Svedberg) 후보가 모두 아인슈타인의 브라운 운동 연구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기에, 시상의 완결성을 위해 아인슈타인에게 브라운 운동으로 상을 주자는 의견에 대해서 아레니우스(Arrhenius)에게 특별 보고서를 주문했고, 그는 "아인슈타인에게 상대성 이론이나 양자론 이외의 업적으로 상을 주는 건 이상하다"라는 의견을 내었다. 지명자들 또한 대부분 상대성 이론으로 지명한 것이기 때문에 바깥에서 보는 눈도 이상할 것이 뻔했다.

1920년에 결국 에딩턴의 개기일식 관측 보고서가 나오면서, 아인슈타인, 그 중에서도 상대성 이론에 대한 지명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검증도 되었는데 뭐가 문제냐! 라는 것이었다. 결국 노벨상 위원회는 1921년 상대성 이론과 광전 효과에 대해서 각각 특별 보고서를 만들었는데, 위원회에서는 굴스트란드(Gullstrand)가 상대성 이론에 관한 보고서를 준비하고, 아레니우스가 광전효과에 관한 보고서를 준비하도록 하였다. 그곳에서 굴스트란드는 상대성 이론의 주요 예측들을 나열하고는, 수성의 세차운동과 에딩턴 실험 등 기존 실험들이 충분히 정확하지 않다는 의견들을 모아 ("경험을 벗어난 현상들은 특히 엄중한 확증이 요구된다") 상대성 이론의 예측들이 검증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사실, 굴스트란드는 상대성 이론이 순전히 믿음의 영역이라 주장했고 개인적으로는 상대론에서 오류를 찾으려고 혈안이었기에 긍정적인 보고서를 써줄리 만무했다.
한편, 아레니우스는 플랑크가 이미 1918년 양자론으로 상을 받았으므로 다시 비슷한 분야에서 상을 주기 곤란하다고 피력했고, 또한 광전효과가 양자론에 핵심적이라거나 원자 현상의 설명에 중요하다는 의견을 부정하였다.
결국, 1921년 노벨 물리학상에 적절한 후보가 없다는 결론이 나오면서 상은 다음 해로 유보되었다. 당대 노벨상 위원회는 실험과학자 내지 실험주의자들로 꽉 차있었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이렇게 이론물리학이 홀대되는 기조는 20세기 중반까지 지속되었다.

1922년에는 지명이 더 많아졌고, 굴스트란드가 상대성 이론, 오신(Oseen)이 광전효과 보고서를 작성하게 되었다. 굴스트란드는 사실상 전년의 요지를 반복했으며, 오신의 경우, 사실 당시 스웨덴에서 몇 안되는 상대성 이론 지지자였지만 국내에서 상대성 이론이 얼마나 논쟁거리였는지 잘 알고 있었고 그러다가 아인슈타인에게 시상할 찬스를 놓쳐선 안되었기에, 고민 끝에 다른 시상 후보였던 보어와 함께 양자론으로 엮어서 동시 수상을 하도록 유도했다. 오신은 광전효과를 "아인슈타인의 법칙"이라고 소개하는 등 상당히 긍정적인 어조의 보고서를 제출하여, 플랑크의 법칙이 물리학계에서 거의 배격당할 때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이 얼마나 양자론의 발전에 중요했는지, 그리고 보어의 원자론이 일정 부분 아인슈타인의 법칙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역설했다. 결과적으로, 오신의 잘짜인 전략으로 아인슈타인의 광전효과는 보어의 원자론과 함께 묶여 1921년 분의 노벨 물리학상을 받게 되었으며 (아인슈타인과 보어는 서로 동시에 상을 받는 것을 매우 기쁘게 여긴 것으로 보인다.) 굴스트란드 등 또한 상대성 이론이 수상 대상이 아닌 데에 나름 만족할 수 있었다. 아레니우스는 다음과 같이 시상 연설문을 작성하였다.#
오늘날의 물리학자 중 알베르트 아인슈타인만큼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진 사례는 없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논의는 그의 상대성 이론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인식론에 관련되어 있으며 따라서 철학계의 뜨거운 논란 주제가 되어왔습니다.
다른 철학자들이 전적으로 이 이론을 칭송하는 한편, 저명한 철학자 파리의 베르그송이 이 이론에 이의를 제기한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문제의 이론은 천체물리학에도 영향을 미치며 현재 엄격한 검증의 대상입니다.
There is probably no physicist living today whose name has become so widely known as that of Albert Einstein. Most discussion centres on his theory of relativity. This pertains essentially to epistemology and has therefore been the subject of lively debate in philosophical circles. It will be no secret that the famous philosopher Bergson in Paris has challenged this theory, while other philosophers have acclaimed it wholeheartedly. The theory in question also has astrophysical implications which are being rigorously examined at the present time.
아레니우스는 아인슈타인의 가장 대표적인 업적이 상대성 이론이라 여기고 있었고, 실제로 (적어도) 브라운 운동이나 광전효과로는 상을 주기 아깝다고 여긴 듯하나, 그의 표현은 당대 상대성 이론이 세간에 어떻게 인식되었는지 -물리학 이론이기 이전에 인식론(epistemology; 지식을 어떻게 얻는가의 학문)의 영역으로- 보여준다.

1922년 11월 10일, 베를린의 아인슈타인에게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가 되었다는 전보가 갔다. 하지만 그 때 아인슈타인은 베를린이 아니라, 부인 엘자와 함께 일본행 배에 타고 있었다. 그곳에서 아인슈타인은 상대론에 관한 대중 강연을 하고, 1923년 3월에야 돌아왔다. 사실, 아인슈타인은 전처 밀레바와 1919년 이혼하는 과정에서 노벨상 상금을 밀레바한테 모두 주겠다고 약속할 정도로 노벨상에 대해 꽤나 확신하고 있어서 그에게 뜻밖의 소식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또한 9월에는 동료였던 라우에가 아인슈타인에게 "12월에 유럽에 있는 게 좋아"라고 편지를 썼는데, 당연히 노벨상을 받는다고 넌지시 알려준 거지만 아인슈타인은 굳이 일본으로 떠난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인슈타인이 당시 유럽의 정세에 상당한 위협을 느꼈던 것이 그 하나로 여겨진다. 1922년 6월에는 아인슈타인의 유대인 친구이자 정치인이었던 발터 라테나우(Walter Rathenau)가 극단적 국수주의 세력에 암살당했는데, 그만큼 당시 독일에서는 반유대주의가 본격화되고 있었다.

한편, 노벨상 상금을 받으려면 수상 대상에 관한 해설 강연(노벨상 강연)을 해야 하는 의무사항이 있다. 여기에는 몇가지 암묵적인 원칙이 있는데, 첫째로 수상 6개월 이내에 해야 하며, 둘째로 스톡홀롬(왕립 스웨덴 학회)에서 진행해야 한다. 셋째로, 당연한 사실이지만 수상한 업적으로 강연해야 한다. 아인슈타인은 모두 지키지 않았다. 아인슈타인은 수상 "7개월"이 지난 1923년 7월 11일에 스웨덴의 "예테보리"(Gothenburg)에 가서 "상대성 이론"을 강연했다. (“Fundamental ideas and problems of the theory of relativity”#) 사실 아레니우스가 아인슈타인에게 강연 요청 편지를 보내면서 "상대성 이론으로 강연해주면 좋겠다"라고 제안했고, 아인슈타인은 그대로 강연 주제를 상대성 이론으로 정해버렸다.
아레니우스에게 강의록을 전달받은 노벨 재단 내부에서는 굉장히 당혹스러워했지만, 승인을 이미 해준 상황이었다. 일부에서는 이 강의를 재단의 누가 통과시켰냐며 격분하는 목소리까지 나왔는데, 결국 "시상식에서 이뤄진 강연이 아니어서 광전 효과를 언급하지 않았다"고 둘러대는 수밖에 없었다.
예테보리에서 노벨상 강연을 하는 아인슈타인 (1923)

한편 아인슈타인은 8차례 노벨 물리학상 후보를, 1차례 노벨 화학상 후보를 지명했는데, 이들은 모두 해당 노벨상을 수상했다.#

6. 어록

신은 난해하지만, 심술궂진 않다. (Raffiniert ist der Herrgott, aber boshaft ist er nicht.)[82]
- 1921년 4월, 미국의 프린스턴 대학교를 처음 방문했을 때.
내 상대성 이론이 성공적으로 증명된다면, 독일은 내가 독일인이라고, 프랑스는 내가 전 세계의 시민이라고 선언할 것이다. 내 이론이 틀렸다고 증명된다면, 프랑스는 내가 독일인이라고, 독일은 내가 유대인이라고 선언할 것이다.
- 1922년 4월 6일, 소르본 대학교에 보낸 편지에서. 결국 아인슈타인은 독일을 떠나 미국으로 망명했다.
비렉(Viereck): "당신은 자신을 독일인과 유대인 중 어느 쪽으로 보십니까?"(Do you look upon yourself as a German or as a Jew?)
아인슈타인: "둘 다입니다. 저는 저 스스로를 '사람'으로서 보고 있으니까요. 확실한 것은 민족주의는 소아병과도 같으며, 인류의 홍역이라는 것입니다."(It is quite possible, to be both. I look upon myself as a man. Nationalism is an infantile disease. It is the measles of mankind.)
조지 실베스터 비렉(George Sylvester Viereck)의 1929년 10월 Saturday Evening Post에서
삶은 자전거 타기와 같단다. 균형을 잡으려면 계속 움직여야 하거든.
- 1930년 2월 5일, 아들 에두아르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위대한 인물들은 항상 평범한 지성에서 비롯된 폭력적인 반대에 직면했습니다. 이 평범한 지성은 상투적인 편견에 맹목적으로 굴복하길 거부하고 대신 씩씩하고 정직하게 자기 의견을 표현하는 사람을 이해할 만한 능력이 못 됩니다.
- 1940년 3월 19일, 뉴욕 시립대학교의 철학과 명예교수인 모리스 라파엘 코헨에게 버트런드 러셀의 강사직 임명을 변호하며.
종교 없는 과학은 절름발이며, 과학 없는 종교는 장님이다.
- 1941년에 출판된 "과학과 종교(Science and Religion)"에서.[83]
“세상을 사는 자세에는 2가지가 있다. 기적 따위는 없다고 믿거나, 그 반대로 세상의 모든 것이 기적이라고 믿는 것이다.”
“There are two ways to live your life. One is as though nothing is a miracle. The other is as though everything is a miracle.”
직관적인 마음은 신성한 선물이고 이성적인 마음은 충실한 하인입니다. 우리는 하인을 기리고 그 선물을 잊어버린 사회를 만들었습니다.
“The intuitive mind is a sacred gift and the rational mind is a faithful servant. We have created a society that honors the servant and has forgotten the gift.”#
독일군이 원자 폭탄 제작에 실패했다는 걸 알았다면, 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을 겁니다.
- 1947년 3월 10일, 언론사 뉴스위크(Newsweek)와의 인터뷰에서. 하지만 너무 늦었다.
누구든지 자신이 진실과 지식의 심판자라고 가장하기 위해 기도하는 자는 신들의 웃음소리에 파멸했다.
- 1953년에 출판된 '레오 벡 평전'(Essay to Leo Baeck)에서.
Sich verlieben ist gar nicht das Duemmste, was der Mensch tut-die Gravitation kann aber nicht dafiir verantwortlich gemacht werden.
사랑에 빠지는 것은 사람이 하는 가장 미련한 짓이 아니며 중력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없다.[84]
- 1979년에 출판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 인간적인 모습'(Albert Einstein: The Human Side)에서.
...Wenn aber der Gang des Alltaglichen, Erwarteten unterbrochen wird, bemerken wir, dass wir sind wie Schiffbriichige, die im offenen Meer auf einer elenden Planke balanzieren und vergessen haben, woher sie kommen, und nicht wissen, wohin sie treiben. Wenn man sich aber einmal in diese Erkenntnis wirklich hineingefunden hat, lebt sichs leichter, und es gibt keine einzige Enttauschung mehr.
(전략) 하지만 삶의 일상생활에서 예정되어 있던 순서가 방해받았을 때, 우리는 망망대해에서 어디서 왔는지도 잊어버리고,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도 모른 채 초라한 널빤지에 올라탄 조난자들처럼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걸 완전히 받아들이는 순간, 삶은 보다 쉬워지고 더 이상 실망할 게 없습니다.
- 1945년 4월 26일, 나치를 피해서 온 피난민들을 돕던, 자녀(혹은 손주)를 잃은 의사 부부에게 보낸 위로의 편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 인간의 측면'(Albert Einstein: The Human Side)에서.
I do not know with what weapons World War III will be fought, but World War IV will be fought with sticks and stones.
나는 제3차 세계 대전이 어떤 무기로 치러질지 모르지만, 제4차 세계 대전은 막대기와 돌로 싸울 것이라 예상한다.
- 1949년 알프레드 웨이너와의 인터뷰에서.[85]
This crippling of individuals I consider the worst evil of capitalism. Our whole educational system suffers from this evil. An exaggerated competitive attitude is inculcated into the student, who is trained to worship acquisitive success as a preparation for his future career.
개인을 불구로 만드는 것은 내가 보기에 자본주의의 최대 악이다. 이 악 때문에 우리의 교육체계 전반이 고통을 겪고 있다. 과장된 경쟁을 벌이는 태도가 학생들에게 주입됐고, 그래서 학생들은 미래 직업을 위한 성공을 숭배하게 됐다.

I am convinced there is only one way to eliminate these grave evils, namely through the establishment of a socialist economy, accompanied by an educational system which would be oriented toward social goals. In such an economy, the means of production are owned by society itself and are utilized in a planned fashion. A planned economy, which adjusts production to the needs of the community, would distribute the work to be done among all those able to work and would guarantee a livelihood to every man, woman, and child. The education of the individual, in addition to promoting his own innate abilities, would attempt to develop in him a sense of responsibility for his fellow men in place of the glorification of power and success in our present society.
이런 악을 제거하는 길은 오직 하나 뿐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것은 사회적 목표를 추구하는 교육체계를 동반한 이른바 사회주의 경제를 확립하는 것이다. 이런 경제에서는 생산수단을 사회 전체가 소유하며 계획된 방식으로 이를 활용한다. 생산을 사회의 필요에 맞추는 계획경제는 일감을 일할 능력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 분배할 것이고 모든 사람(남자든 여자든 어린아이든)에게 생활을 보장할 것이다. 개인의 교육은, 현재 우리 사회의 힘과 성공을 칭송하는 대신에 자신의 타고난 능력을 신장하고 동료들에 대한 책임감을 자신 속에 심으려 시도하는 형태가 될 것이다.
미국의 사회주의 잡지 먼슬리 리뷰 창간호에 기고한 '왜 사회주의인가?#'에서 발췌
이 시대의 중대한 문제들은 그것을 만든 사람과 비슷한 수준으로 생각해서는 풀리지 않는다.
"The signification problems of our time cannot be solved by the same level of thinking that created them."
"Peace cannot be kept by force. It can only be achieved by understanding."
평화는 힘에 의해 유지될 수 없다. 오직 이해로써 성취될 수 있다.[86]
- 1930년 12월 14일 미국 뉴욕의 신역사학회(New History Society)에 참석해 연설한 내용의 일부.
세상은 악한 일을 행하는 자들에 의해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 악한 자들을 다만 지켜보기만 하는 사람들에 의해 멸망할 것이다.[87]
"The world will not be destroyed by those who do evil, but by those who watch them without doing anything."
Stilles bescheidenes Leben gibt mehr Glück als erfolgreiches Streben, verbunden mit beständiger Unruhe.
조용하고 검소한 생활이 끊임없는 불안에 묶인 성공을 추구하는 것보다 더 많은 기쁨을 준다.
-1922년 일본 제국의 호텔 직원에게 팁 대신 작성해 건넨 메모[88]
I have deep faith that the principle of the universe will be beautiful and simple.
나는 우주의 원리가 아름답고 단순할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이론이 경험으로부터 귀납적으로 기인한다고 믿는 이론 물리학자들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89]
Technological progress is like an axe in the hands of a pathological criminal.
기술의 진보는 마치 병적인 범죄자의 손에 든 도끼와 같다. [90]
1917년 하인리히 장거에게 보낸 편지 중 발췌.

가짜 명언들도 상당히 많다.

7. 대중매체에서

상대성 이론과 뉴턴 역학과의 관계 때문에 아인슈타인이 뉴턴을 '극복'했다는 식으로 표현하는 글들도 볼 수 있다. 심지어는 다음과 같이 뉴턴을 풍자하는 시도 있다. 영국의 시인인 알렉산더 포프가 뉴턴을 찬양하면서 남긴 시에 대한 대구 겸 패러디 시이다.
“Nature and Nature's laws lay hid in night:
God said, Let Newton be!
and all was light.”
자연과 자연의 법칙은 어둠에 숨겨져 있었네.
신이 가라사대, ‘뉴턴이 있으라!’
그러자 모든 것이 광명이었으니.”
알렉산더 포프의 원작 시[91]
It did not last: the devil, shouting "Ho."
"Let Einstein be,"
restored the status quo.
“끝이 아니었으매 악마가 ‘호!’하고 외치며
아인슈타인이 있으라!’
그러자 모든 것이 원래 상태로 되돌아갔으니.”
존 콜링즈 스콰이어(Sir John Collings Squire)의 패러디 시

8. 논란

8.1. 밀레바 마리치의 기여 논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밀레바 마리치의 협업에 관한 논문(영문)

결론부터 말하면 밀레바가 아인슈타인의 학부시절 저술에는 분명 기여했지만, 이후 좀 더 심도있는 논문이 발표되면서 밀레바의 연구적인 기여는 없었다. 특히 우리가 보통 '아인슈타인의 업적'이라고 언급될만한 수준의 고차원적인 연구에는 기여한 부분이 없다.

아인슈타인의 첫 아내인 밀레바 마리치가 아인슈타인의 초기 업적, 그 중에도 1905년 소위 '기적의 해'에 씌여진 광양자설과 특수 상대성 이론 논문들에 관여하였다는 주장이 한동안 논쟁거리가 된 적이 있었다. 특히 1905년에 발표된 아인슈타인의 논문 초기 버전에는 '아인슈타인-마리치'라는 이름으로 작성된 것이 논란을 촉발시켰다. 그러나 역사가들과 물리학자들의 조사를 통해 그녀가 과학적 연구에 기여하였다는 특별한 증거는 없는 것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아인슈타인-마리치'라고 아내의 처녀 시절 성씨를 이어붙인 저자 기재 방식은 당시 스위스에서 관습적으로, 서명할 때 뒤에 아내의 옛 성을 붙여 넣던 방식을 사용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는 '밀레바 아인슈타인'의 연구 기여를 논문에 추가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아인슈타인 본인의 이름을 그렇게 표현한 것 뿐이었다. 이마저도 최종 버전에는 빠져있다. 이를 보고 자칭 아인슈타인 전문가라 이야기한 '크리스토퍼 폰 비야크네스'가 본인의 저서에서 "아인슈타인의 업적은 아내의 업적을 도둑질 한 결과물이다."라는 과격한 주장을 펼쳤고 이를 국내 TV 서프라이즈가 보도하여 곡해한 적이 있다. 하지만 위 내용에서 볼 수 있듯이 이는 성씨의 표기 방식에 의한 차이일 뿐, 아내의 이름을 의도적으로 삭제한 것이 아니다. 애초에 논문에서 연구자를 열거할 때 '성씨'만 언급하는 경우는 없다. 심지어 당시 밀레바는 아인슈타인과 결혼했기 때문에 이름이 '밀레바 마리치'도 아니었다. 정말로 밀레바가 논문에 기여한 부분이 있었다면 초기 버전에서부터 '밀레바 아인슈타인'이라고 명시했을 것이다.
(1901년은) 알베르트와 밀레바에게 굉장히 흥분되는 한 해였다. 아인슈타인이 그 연구를 두 사람의 공동 연구로 보았음은 자명하다. 1901년 4월 4일, 알베르트는 96번 편지에서 밀레바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냈다. "그(미셸 베소)는 우리의 조사에 굉장히 흥미를 보였어... 그저께, 그는 날 대신해서 그의 삼촌이자 이탈리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교수 중 한명인 융 교수를 만나러 갔지. 그는 물론 융 교수에게 우리의 논문을 드렸어."
It was a time of great excitement for Albert, and also Mileva. It is clear that Einstein saw this work as the product of their collaboration. On the 4th April 1901, Albert writes to Mileva in letter 96, “He (Michele Besso) is very interested in our investigations... The day before yesterday, he went on my behalf, to see his uncle, Prof. Jung, one of the most influential professors of Italy and also gave him our paper.”
출처

물론 아인슈타인과 밀레바가 대학 동기이자 학교 커플이었던 만큼, 아인슈타인의 학부생 시절에는 밀레바가 분명히 도움을 준 것이 사실이다. 위 편지는 아인슈타인이 졸업한 직후인 1901년에 자신과 밀레바가 쓴 논문을 교수들에게 보여줬고 흥미로워 했다고 아인슈타인이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내용이다. 잘 보면 분명히 '우리의 논문(our paper)'이라고 적고 있다. 즉 공동 저작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1900년에 취리히 공과대학을 졸업했으므로 위 논문은 비록 아인슈타인이 천재적인 재능을 가졌다고는 하나 후일 그의 세계적인 연구 업적과는 거리가 먼, 말그대로 학부생 졸업 논문 정도의 논문이었다.

즉, 이러한 루머는 아인슈타인이 학부생 시절 쓰던 논문에는 밀레바가 분명히 기여를 했으며 그녀가 아인슈타인의 대학 시절 수학 노트를 보여줬다는 일화와 아인슈타인 본인이 수학에 어려움을 토로했다는 내용이 한데 섞여 확대 재생산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대학 시절에 아인슈타인에게 수학 노트도 보여줄 정도의 여자였으니 아인슈타인 연구 인생 전반에도 도움을 주지 않았겠냐는 것. 허나 밀레바 마리치의 학문적 성취가 아인슈타인과 나란하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마리치는 애초에 두 번이나 도전했음에도, 수학 성적의 부족으로 대학 졸업에 실패했다.[95] 수학 노트를 보여줬다는 일화도 잘 생각해보면 밀레바가 아인슈타인을 가르쳤다기 보다는 학과 수업 필기노트를 보여준 것에 불과하다. 즉 아인슈타인 본인이 학과 커리큘럼 중 수학 과목에 흥미를 잃어 수업은 빼먹었지만 낙제는 하고 싶지 않았기에 수업에서 강의한 내용을 보여달라고 한거지 밀레바가 그를 가르친게 아니다. 정작 수업을 자주 빼먹은 아인슈타인이 졸업에 성공했고 밀레바는 수학 점수가 문제가 되어 졸업에 두 번이나 실패했다는 점을 생각해 보자.

생애와 학문적 업적 부분에서도 언급하지만 아인슈타인이 수학을 어려워했다는 점은 당시로선 그것들이 최신 수학 연구주제이자 미개척 분야였기 때문에 어려워한 것이지 밀레바가 이해하고 대학생 시절 함께 공부했던 '대학교 학부생' 수준의 수학 내용은 아인슈타인이 훨씬 더 잘 알았다고 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은 마리치와 1914년 이혼한 이후에도 국제적인 명성을 얻으며 지속적으로 왕성한 과학적 활동을 하였으나 그녀는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의 졸업에 실패하였을 뿐만 아니라 독자적인 과학적 결과물을 출판했던 적이 없다. 또한 마리치 본인은 그녀의 친구와 (아인슈타인 본인이 수없이 많은 연구 아이디어를 공유했던) 그의 동료에게 그녀 본인이 그의 연구에 관여되었다는 언급을 단 한번도 한 적이 없다. 그녀의 가장 가까운 친구인 헬레네 사비치(Helene Savić)에게 보낸 어떤 편지에서도 아인슈타인의 과학적 연구에 관여하였다는 힌트는 보이지 않는다. 부부의 첫 번째 아들 한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그녀가 결혼과 동시에 과학에 대한 열의를 상실하였다고 증언하였다. 마리치 역시 ETH 공과대학에 입학할 정도로 물리학과 수학에 대한 조예와 실력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아인슈타인의 결혼 이후로 학술적인 활동을 한 행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과 한스의 증언을 종합해 보면 마리치의 학자로서의 인생은 결혼과 함께 거의 끝났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물론 아인슈타인의 아내로서 그가 연구에 전업할 수 있는 가정 환경을 만들어주었고 여러모로 논란이 있기는 해도 어쨌든 굵직한 아인슈타인의 업적이 완성될 때까지 원만한 가정을 유지해준 그녀의 업적은 무시 못할 일이긴 하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아인슈타인 개인의 인생사에서 내조를 잘 해준 것이지 논문 연구분야에서 말하는 진짜 '공동저작'과는 거리가 먼 경우라고 볼 수 있다. 마리치가 공동저작을 했다고 하는 물증도 논문의 서명뿐이며 이도 상술했듯 증거로서 받아들일 만한 설득력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과학계에서 이 논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경우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8.2. 중국인·아랍인·스리랑카인 비하

아인슈타인, 日記에 동양인 비하글
아인슈타인 일기에는 인종주의적인 내용이 상당히 많다
아인슈타인 동양인 혐오

2018년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는 아인슈타인이 1922년부터 1923년까지 중화민국일본 제국, 영국령 실론 등지를 여행하며 남긴 일기를 정리해 출간했다. 이에 따르면, 아인슈타인은 특히 여행 중 만난 중국인들을 폄훼하는 기록을 다수 남긴 것으로 보인다. 그는 당시 중국인들을 가리켜 “근면하지만 더럽고 우둔하다”고 평가했다. 또 “중국인들은 의자에 앉아서 식사하지 않고 유럽인들이 숲에서 용변을 보듯이 쭈그리고 앉아 매우 조용하고 얌전하게 밥을 먹는다”고 기록하기도 했다.

또 아인슈타인은 “나는 중국인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거의 모르겠다”거나 “중국 여성에게 도대체 무슨 치명적인 매력이 있길래 가공할 만큼 아이들을 많이 낳는지 모르겠다”는 등의 표현도 일기에 남겼다. 아인슈타인은 스리랑카를 여행하던 중에는 현지 사람들이 “거대한 쓰레기 속에서 살아간다”며 “적게 일하고 적게 필요로 하는 것이 단순한 삶의 경제적 사이클”이라고 적었다. 이와 반대로 서양 문물을 빠르게 수용하고 나서 근대화를 이룩해낸 일본인에 대해서는 비교적 우호적인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만난 일본인들을 “겸손하고 품위있으며 매우 매력적”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 나라의 지적 욕구는 예술적인 욕구에 비해서는 약한 것 같다. 타고난 기질인가?”라며 지적 욕구가 약하다는 식으로 기록하기도 했다. 아인슈타인 일기 프로젝트를 진행한 지브 로렌크란츠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 교수는 “많은 언급이 상당히 우리를 불쾌하게 했는데 특히 중국 부분이 그랬다”며 “이는 위대한 인도주의자로서의 그의 이미지와 상반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기록을 더 자세히 읽어보면 동북아 민족들에 대해서만 평가를 한 것이 아니다. 유럽계 백인들과 역사적으로 교류가 많았던 이집트인들에 대해서도 "고함을 지르고 과도한 몸짓을 하는 다양한 색깔의 레반트인들이 우리 배를 향해 뛰어든다. 지옥에서 뿜어낸 인간들처럼 보인다"라고 평가한다.

아인슈타인도 엄연히 19세기에 태어난 유대계 백인으로서 그 시대 보편적인 인종관을 가지고 있었고, 그 당시 이러한 인종관을 뛰어넘은 사람은 애초에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비판하는 측은 비슷한 시대를 살아간 소설가인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도 친구와 교류할 때 쓴 개인적인 편지들이 공개되어 후세대에게 비판받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러브크래프트의 경우는 아예 타인에게 보내는 편지에 인종차별적 발언을 쓴 것이고 아인슈타인은 필자 본인만 읽기 위해 쓴 일기장에다 적은 것이기에, 이 둘을 동일선상에서 비교하기엔 무리가 있다. 러브크래프트는 남이 읽으라고 보내는 편지에 해당 발언들을 썼던 것이니, 벌어지진 않았지만 공석에서 해당 발언을 할 가능성이 존재했었다. 반면 아인슈타인은 남 보라고 쓴 것이 아닌 일기장에 작성했다가 사후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공개된 것이다. 이것을 제외하면 딱히 공적으로 문제되는 언행도 없어서, 고작 일기장 가지고 꼬투리를 잡기엔 과도한 비난이라는 것이다.


[1] 영어식 발음인 '알버트 아인스타인'으로도 알려져있다. '아인'과 '슈타인'으로 나눠 해석하면 '돌 하나'라는 뜻이지만, 독일어 ein은 영어의 하나(one) 또는 부정관사(a/an) 중의적 의미가 있다. stein은 stone이라는 뜻. 따라서 einstein은 one stone(돌 하나)라기보다는, a stone 즉 '돌'이라는 뜻. 근데 독일어는 애매하지만 영어로 따져보면 부정관사 'a'는 단수에 붙기 때문에 돌 하나란 뜻도 맞다. 성씨 문서에서도 보이듯 유럽 성씨 중에는 조상의 직업이 많다. 즉 적절히 의역하면 그냥 석공. 이 성씨로 아마 아인슈타인의 조상이 석공이였을 가능성이 있다라고 유추해볼 수 있다.[2] 아인슈타인의 종교관에 대해선 종교적 불신자, 불가지론자, 범신론자, 스피노자의 신을 긍정하는 자 등 다양한 의견이 있다. 아인슈타인의 종교관을 서술한 장문의 위키문서가 있을 정도."스피노자의 신" 개념설명은 여기 참조.[3] 사회주의에 대해 작성한 에세이 Why Socialism?[4] 독일인이었지만 어린 시절에 겪었던 독일의 폭압적인 제국주의에 질려서 성인이 될 무렵에 독일 국적을 포기하였다. 그런데 정작 아인슈타인 본인은 후술된 어록에 나온 말처럼 유대-독일계 등의 인종적 구분엔 연연하지 않았다. 이것은 아인슈타인이 민족주의를 거부하는 탈민족주의 혹은 반민족주의자였기 때문이다. 민족주의를 소아병적인 인류의 홍역이라고 비판한 적이 있었을 정도.[5] 대중적으로 아이작 뉴턴과 더불어 가장 잘 알려진 과학자이다. 아무리 과학에 관심이 없을지라도 이름은 들어보았을 것이다.[6] 차례로 광전효과, 브라운 운동, 특수 상대성 이론, 질량-에너지 동등성을 다뤘다.[7] 현재 독일은 과거의 이런 주입식 교육이 결국 전쟁을 불러일으켰다고 생각하여 전쟁이 끝난 후 대대적인 교육 개편을 진행한다.[8] 신경쇠약증으로 알려졌다고 한다.[9] 근데 18~19세기만 해도 천재들이 이런 경우는 많다. 카를 마르크스는 이 나이에 '어느 젊은이의 직업선택에 대한 고찰'이라는 고등학교 졸업 논문을 썼다. 내용은 직업선택이 개인의 소명뿐만 아니라 인류의 미래에 끼치는 도움까지 고찰해서 결정되어야 한다는 대규모 관점의 논문이다. 당시 유럽 고등학생은 사실상 지금 대학생급 사회적 교육지위를 갖던 시대라, 퀄리티 자체야 천재와 평범한 사람들이 차이는 나지만 일단 고등학교 들어간 이상 어른 취급을 하며 논문 정도는 누구나 다 기본으로 써야 했다. 사실 이런 문화가 이어지기 때문에, 유럽의 전체적 분위기는 한국과 달리 지금도 웬만하면 선생님 등 성인들이 고등학생들에게 공식적으로 말할 때 "당신", "해 주세요" 등에 해당하는 성인 대우 존중표현을 쓰는 분위기다. 반대로 미국에서 고등학생을 바라보는 시선은 한국과 비슷한 고삐리 정도이다. 유럽과 북미의 사회가 얼마나 다른지 보여주는 일례다.[10] 1877년생으로 아인슈타인보다 두 살 연상인데, 이 뒤로도 아인슈타인은 이상할 정도로 연상인 여자들과만 엮였다고 한다. 한편 아인슈타인의 여동생 마야는 그 교수의 아들 폴 빈텔러와 결혼했다.[11] 당시엔 이름이 연방 기술전문학교(Swiss Federal polytechnic school)였다. 많은 사람들이 현재까지도 아인슈타인이 ETHZ가 아닌 취리히 대학교에서 학사 과정을 밟은것으로 오해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위키피디아에 검색하면 고등학교로 오해하기 쉬운(school) 이름 밑에 취리히 대학교를 졸업했다고 나오기 때문. 취리히 대학교에서는 박사과정을 밟았다.[12] 실제로 훗날의 나치 독일 정권이 유대인 출신을 노골적으로 차별하고, 학살하는 만행까지 저질렀고 아인슈타인의 시민권까지 박탈한다. 심지어, 시간이 흘러서 나치 독일 정권은 아인슈타인에게 5만 마르크의 현상금까지 걸었고 신변의 위협을 받게 되자, 미국으로 피신하여 망명길에 오르기까지 했다.[13] 이 짤방은 세계 최강의 과외 알바로 유명하다.[14] 유서깊은 가문 출신이자 방직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15] 1997년 한국 기준. 공휴일 빼고 일 1개의 특허를 처리하는 꼴이다.[16] 실제로 앗! 시리즈물리학 편인 "물리가 물렁물렁"에서는 영구기관의 무용성을 쉽게 알려주기 위해, 두 특허심사관이 영구기관과 관련된 허무맹랑한 특허가 아직도 계속 날아든다며 서류더미 속에서 눈물을 흘려가며 웃는 장면이 나온다.[17] ETH 취리히는 당시 박사 학위를 수여할 수 없는 기술 교육기관이었다. 오늘날은 ETH 취리히에서 박사를 받을 수 있다.[18] 사실 상대론이 직간접적으로 물리학의 패러다임 자체를 바꿨으며 가장 유명한 업적이라 볼 수 있겠으나, 1921년 수상 당시 상대론은 물리학자 사이에서 아직도 논란이 있었기에 이 부분은 물리학의 이론적인 발전에 대한 기여라고 표현을 바꿨다. '스웨덴 왕립 학술원은, 1895년 11월 27일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에 따라 제정된 규정에 준거하여, 1922년 11월 9일 회합하여, 가능한 검증 이후 상대성과 중력 이론에 부가될 수 있는 가치와 무관하게, 1921년에 물리학의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 또는 발명을 이룬 사람에게 주어지는 상을, 이론 물리학, 특히 광전 효과의 발견에 공헌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에게 수여하기로 결정하였다.'. 광전효과로 아인슈타인이 노벨상을 받을때 수상문.[19] 때문에 오늘날 과학계는 아인슈타인이 이들 3개 논문을 발표한 1905년을, 뉴턴이 만유인력을 발견한 1666년과 함께 '기적의 해'라고 부른다. 이에 따라 100주년인 2005년에는 전세계적으로 각종 기념 행사가 열렸었다.[20] 물론 결혼 초기부터 대뜸 이런 통보를 한 것은 아니었고, 사이가 나빠진 후에 보낸 메모라고 한다. 당연히 밀레바가 이러한 요구를 지킬 리 없었고, 이 메모를 보낸 것 때문에 부부 관계가 더욱 나빠져 아인슈타인은 결국 이혼당하고 만다.[21] 밀레바는 1875년 12월 19일생으로 아인슈타인보다 3세 연상이다. 지금이야 3세 정도의 연상연하 커플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당시만 해도 여자가 남자보다 1살이라도 많으면 꺼리는 분위기가 저변하게 깔려 있었다. 다만 재혼도 사촌누나랑 한데다 첫 여친도 두 살 연상이었던 걸 보면 아인슈타인의 여성 취향이 확고히 연상쪽이었던 모양...[22] 출생지가 현재의 세르비아 보이보디나 티텔로, 당시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령이었던 지역이다. 즉 민족 배경으로 보나 실제 국적으로 보나 외국인이다.[23] 1876년생. 아인슈타인의 아버지의 사촌의 딸이자, 아인슈타인의 어머니의 언니의 딸이다. 따라서 이종사촌 누나 겸 6촌 누나가 된다. 출생 당시 성은 아인슈타인이었는데, 결혼하면서 남편인 막스 뢰벤탈(Max Löwenthal)의 성을 따라 성이 뢰벤탈로 바뀌었다가 아인슈타인과 재혼하면서 성도 도로 아인슈타인으로 되돌아갔다. 자녀로는 전 남편 소생의 딸 2명이 있었다.[24] 장녀인 리제를은 태어난지 1년 만에 요절했다.[25] 1910년 7월 28일생[26] 음란한 사진으로 자신의 방을 도배하고 헛소리를 하며 횡설수설하고 발광을 심하게 했다고 한다.[27] 1904년 5월 14일생[28] 한스가 미국에서 직장을 구하기 전에는 밀레바가 에두하르트의 병원비를 대주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밀레바는 한스가 병원비와 생활비를 지원해주기 전에는 경제적인 어려움에 시달렸다.[29] 1919년 이혼소송 당시 만일 노벨상을 받으면 상금을 자녀 양육비로 첫 번째 부인 밀레바 아인슈타인에게 주기로 돼 있었기 때문에 상금은 그의 몫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는 모르지만, 미리 수상 가능성을 암시하는 말을 들었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극동 여행을 떠나 있어서 수상식에는 참석하지 못했다.[30] 이들 두 사람은 각각 1905년과 1919년에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31] 아인슈타인이 부인 엘사와 함께 패서디나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를 방문중이던 이 해 2월과 3월 게슈타포베를린의 집을 습격했다가 두 번 다 허탕을 치고 돌아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아인슈타인은 3월 28일 벨기에 앤트워프로 와 독일 영사관에서 시민권을 포기하고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 잠시 머무르는 동안에도 여기는 무서워서 한시도 더 못 있겠다고 엘사가 보챘다고 하며(해외라 할지라도 독일 영사관인지라 두려움이 있었을 것이고, 벨기에는 독일 접경국이다.) 대서양을 건널 배를 타러 가는 길은 벨기에 왕실에서 경호해 주었다.[32] 프린스턴의 정식교수는 아니었다. 공식적으로는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일원 자격으로 물리학 강의를 계속하며, 프린스턴 물리학 교수진들과 협력했던 것. #[33] 현대 기술 중에서 아인슈타인 이론의 영향이 들어가 있지 않은 기술 자체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을 정도이다. 당장 이 글을 읽는 당신 집의 현관문 센서등도 아인슈타인의 광전 효과를 기반으로 만들어져 있다(...)[34] 초판은 독일어로 1916년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쓴 『일반 상대성 이론의 기초』[Einstein(1916)]와 함께 출판되었다. 둘 다 독일에서는 크게 성공했으나 에딩턴의 관측실험이 성공한 후 미국에서 인지도가 급상승하자 1920년 영문 번역으로 출판된 책이 이것이다.[35] 사실, 상대성 이론의 주요 철학은 물리법칙의 불변성이다. 이 때문에 "불변 이론"(Invariantentheorie)이라는 이름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아인슈타인이 이 용어를 좋아하였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그는 "시간과 공간의 상대성"이라는 개념 또한 즐겨 인용하였다.[36] 인공위성이 수신기에 신호를 보냈을 때 그 신호가 가는 시간을 이용, 위성을 중심으로 걸린 시간을 통해 구한 거리만큼의 구를 구하고 그 구의 접점들의 위치로 현 위치를 알아내는 GPS의 원리상, GPS에 탑재된 원자시계는 지상의 수신기에 있는 시계와 동기화되어야 하는데, 위성과 지상의 중력 차이와 위성과 지상의 속도 차이로 인해 두 시간은 지속적으로 어긋나게 되어 있다. 중력에 의한 시간차를 상대성이론으로 보정해주지 않는다면, 도저히 사용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오차가 생긴다. 간단히 말해서 상대성 이론이 없다면 위성과 지상의 거리 오차는 매일 약 12km씩 차이나게 된다.[37] 사실, 아인슈타인의 1905년 유도 과정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1911년 라우에(Laue)가 보다 정확한 증명을 내놓았다.[Hilbert(1915)] David Hilbert, "Die Grundlagen der Physik. (Erste Mitteilung.)", Nachrichten von der Gesellschaft der Wissenschaften zu Göttingen, Mathematisch-Physikalische Klasse (1915.11.20.) : 395–408 #[Corry(1997)] Leo Corry & Jürgen Renn & John Stachel, "Belated Decision in the Hilbert-Einstein Priority Dispute", SCIENCE, 278 (1997.11.14.) : 1270–1273 #[40] 1915년 12월 6일자 힐베르트의 논문 초본. #[41] 전자기력에 대응되는 전자기파는 쌍극자 모멘트(dipole moment)에 의해 발생할 수 있다.[42] 통계물리나 열역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이게 얼마나 간단한 착상과 쉬운 계산으로 되어있으면서 실제와 거의 정확히 맞아 떨어지는지 알고 있을것이다. 보통 물리 계산식은 여러가지 치환 공식과 복잡한 계산 절차를 거쳐야 하지만 아인슈타인 고체 모델은 식 자체도 짧고 간결하며 단독으로도 완벽하지 않지만 거의 근접하게 계산 된다.[43] 1905년 5월 친구 Conrad Habicht에게 쓴 편지: "이 논문은 빛의 복사와 에너지의 성질에 대해 다루고, 매우 혁명적이야. "(Sie handelt über die Strahlung und die en- ergetischen Eigenschaften des Lichtes und ist sehr revolutionär...)#[44] 1913년 아인슈타인을 프로이센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추천하면서 "(아인슈타인의) 추측이 가끔은 엇나가곤 했지만(광양자 가설처럼), 이러한 이유로 그를 못마땅하게 봐서는 안 될 것입니다..."(That he may sometimes have missed the target in his speculations, as, for example, in his hypothesis of lightquanta, cannot really be held too much against him...)라 하였다.[Stuewer(2005)] Roger H. Stuewer, "Einstein's Revolutionary Light-quantum hypothesis" #[46] A. Einstein, "Quantentheorie des einatomigen idealen Gases. 2. Abhandlung", Sitzungsberichte der Preussischen Akademie der Wissenschaften (Berlin), Physikalisch-mathematische Klasse, 1925, 3-14[Einstein(1905)] A.Einstein, "Über einen die Erzeugung und Verwandlung des Lichtes betreffenden heuristischen Gesichtspunkt", Annalen der Physik 17 (1905) : pp.132–148 독문영문[48] 참고로 이 현상은 분자의 존재를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 중 하나다.[49] 그래서 대학원을 경제학으로 가기 위해 노리고 수학과를 지망하는 사람들도 꽤 있는 편이다.[50] 이 가정을 쓰면 주식 가격이 일종의 확산-임의보행모델이 된다.[51] 블랙은 수상 2년 전인 95년에 사망하여 받지 못했다.[52] 아인슈타인이 양자론을 공격하다 / 과학자와 두 동료가 '사실이더라도'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밝히다 / 보다 완전한 것이 가능하다고 보다 / "물리적 실재"에 대한 온전한 기술이 결국 가능해질 것이라고 믿다[53] 기존에 아인슈타인은 숟가락만 얹었다고 되어있었는데, 논문 쓰기 전 토론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논문 발표 후, 슈뢰딩거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생각한 핵심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고 안타까워 하기까지 했다.
"...언어의 이유 때문에 이는 토론을 거친 후 포돌스키에 의해 쓰여졌다. 그러나 이 논문은 내가 본래 원했던 대로 잘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말하자면 박식함 때문에 핵심이 질식되었다..." Fine, A.,1986, The Shaky Game: Einstein, Realism and Quantum Theory
[54] Einstein, A. Zur quantentheorie der strahlung. Phys. Z., 18, 124.(1917)[55] Cormac O’Raifeartaigh, a Michael O’Keeffe, a Werner Nahmb and Simon Mitton, "Einstein’s 1917 Static Model of the Universe: A Centennial Review", 2017 #[56] 가모프의 1956년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기사와 1970년에 나온 그의 자서전[57] 아인슈타인의 정적 모델에 대하여 드 지터 우주를 제시하여 1917~1920년에 뜨겁게 논쟁하였다.[58] 힐베르트처럼 계량만으로 변분하는 게 아니라, 계량과 접속을 분리하여 변분하는 방법. 일반 상대성 이론의 양대 변분법 중 하나이다.[59] M. FERRARIS and M. FRANCAVIGLIA "Variational Formulation of General Relativity from 1915 to 1925 "Palatini's Method" Discovered by Einstein in 1925", General Relativity and Gravitation, VoL 14, No. 3 (1982) #[60] G.C. McVittie, “On Einstein’s Unified Field Theory” in Proceedings of the Royal Society of London 124, No. 794 (June 4 1929): 366-374[61] 오죽하면 어떤 물리학자가 아인슈타인을 만나러 왔다가 통일장 이론에 관련해 아인슈타인이 써놓은 수식들을 보고 다른 물리학자들은 "대(大)학자 아인슈타인 앞에서 차마 이걸 엉터리라고 할 수도 없고...그렇다고 나도 명색이 물리학자인데 이 정도밖에 안되는 걸 멀쩡하다고 할 수도 없고..."라며 고민하다가 그냥 도망나오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62]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서 매주 화요일에 하는 무도회에 나가는 것이 자신의 유일한 역할이라고 회고하기도 했다.[63] 나치 소속 과학자라는 의미가 아님.[64] 아울러 핵무기가 기존의 재래식 무기와는 전혀 차원이 다른 성격의 정치적 영향을 일으킬 수 있는 존재임을 아직 깨닫지 못했고, 핵무기 개발 기술이 자신들의 적대 세력(특히 소련)에도 전파될 가능성을 간과했던 당시 미국 정부의 판단도 작용했다. 실제로 소련은 맨하튼 프로젝트에 미리 심어둔 첩자(대표적으로 클라우스 푹스)들을 통해 불과 4년 후인 1949년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했다.[65] <서양철학사>, <행복의 정복>등의 저서를 남긴 20세기의 대철학자다. 1950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66] 해당 성명에는 아인슈타인, 러셀을 포함해 11명의 세계적 석학들이 서명했는데, 그중 절대다수인 10명이 노벨상 수상자였다. 성명은 같은 해 7월에 발표되었으며, 아인슈타인은 이보다 앞선 4월에 타계하였다. 말하자면 러셀과의 성명은 아인슈타인이 생전에 수행했던 마지막 공개 활동이었던 셈이다.[67] 1회 회의는 1957년 7월 캐나다 퍼그워시에 10개국 22명이 참여하였다. 당시 방사능의 위험성을 경고하면서 핵실험 중지를 요구하였고, 매년 전 세계를 순회하면서 계속되고 있다. 과학적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핵과 각종 대량살상무기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안전책을 요구하고 있다. 따로 사무국은 없으며 개인참가형식이고 1995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68] 이 인형은 다큐멘터리 시리즈 내내 등장한다.[69] 3차대전에서 쓰일 무기들의 엄청난 화력으로 문명은 전부 다 망해버린다는 의미와 함께 그런 꼴이 되고서도 인류는 전쟁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뜻도 있다.[70] 실제로는, 이런 신빙성 없는 썰과는 반대로 밀레바는 아인슈타인보다 수학을 못했다. 일례로 밀레바는 졸업 시험의 수학 과목을 재수까지 하였으나 결국 통과하지 못해서 졸업조차 하지 못했다.[71] 시험이 쉬운 것도 아니었다. 가령, 부인 밀레바의 경우 두 번이나 졸업시험에서 떨어져 학위를 받지 못했다.[72] 지금은 미분기하학은 수학과 3학년에서 배운다.[73] 아인슈타인은 왜 불교를 '우주적 종교'라 말했나 - 불교신문[74] Einsteins_kosmische_Religion - 독일 위키백과[75] 근데 아인슈타인은 4~5살 되기 전까지 말을 거의 못했다. 그리고 나서도 말을 더듬거려서 부모가 "얘는 안 되겠구나" 하고 포기했었다. 상술된 것처럼, 아인슈타인은 어학 시험에 여러 번 낙방하였는데 이러한 점이 영향을 미친 것일 수도 있다.[76] 참고로 아인슈타인 자신은 상술한 당시 독일 교육 환경의 권위주의적인 분위기에 질려서 자퇴하고, 가족들이 있는 밀라노로 갔다. 당시 이탈리아이탈리아 통일 전쟁의 여파로 인한 자유주의적인 분위기가 만연해있어서, 교육 현장에서도 권위주의적인 부분이 거의 없었는데, 아인슈타인은 이런 환경에 대단히 만족스러워 했다.[77] 롤프 도벨리의 「스마트한 생각들」에서 인용한 찰리 멍거의 "운전사의 지식"에 관한 이야기도 이 버전(플랑크, 강연 외운 운전사)을 따르고 있다. 어쨌든 여기서 유래한 "운전사의 지식"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만 하는 지식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다.[78] 누가 봐도 독일어를 못 하는 기자가 독일어로 질문을 하니 아인슈타인이 답변을 하기도 전에 조금씩 웃는 사람들이 보인다. 아인슈타인은 '당신의 서투른 독일어를 보니 웃겨서 기분이 좋다'라는 뜻으로 기자를 가볍게 놀렸다.[79] 옆에서 웃는 사람은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장을 지낸 바 있는 프랭크 아이델로트(Frank Aydelotte) 박사. 반대편은 그의 아내이다.[80] When asked regarding the statement that there were only twelve persons in the United States whose mentality was sufficient to grasp the principles of his theory, Prof. Einstein laughed. "Everywhere I go some one asks me that question", he said. "It is absurd. Anyone who has had sufficient training in science can readily understand the theory. There is nothing amazing or mysterious about it. It is simple to minds trained along that line and there are many such in the United States." (Chicago Daily Tribune, May 3, 1921.)#[81] 보어와 아인슈타인 모두 특정 종교에서 말하는 인격적인 차원에서의 신을 지칭하는 건 아니고 과학법칙을 주관하는 선에서 설계자로서의 신이라고 해석하는 게 적절하다. 즉, "과학법칙이 이렇게 생겨먹었고 실험적으로도 증명했으니, 우리 우주가 이렇게 생겨먹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정도로 이해하면 쉽다. 과학자들이 신이라는 단어를 쓸 수밖에 없을 정도(물론, 신의 존재를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로 양자역학의 탄생은 당시 과학자들의 기계론적 세계관에 충격을 주었다.[82] 이후 말년에 통일장 이론을 연구할 때 신은 심술궂은 것 같기도 하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고 한다.[83] 아인슈타인의 종교적 관점에 대한 연구는 활발히 있어왔는데, 주류 종교들의 인격적인 신을 포함한 모든 인격적인 신은 믿지 않았고, 생전에 17세기 범신론자인 스피노자를 언급한 내용과 유명한 우주의 법칙을 신에 비유하여 언급한 내용 등으로 그는 범신론자이자 기독교와 같은 유일신교적 회의론자였다. 하지만 그의 범신론적인 사상이 일반적인 범신론과 다르다고 보는 시각도 있으며, 일반 대중이 생각하는 '신'이라는 이미지가 아닌 우주 전체의 법칙이나 과학적으로 밝혀낼 수 있는 어떠한 형태를 신이라고 표현한 특수한 범신론이라고 보는 것이 주류다. 그가 불교에 대해 언급한 “현대 과학의 요구에 부합하는 종교가 있다면 그것은 곧 불교가 될 것이다” 라는 말이나 그가 일반적인 무신론자의 범주안에 포함된다고 여기는 것이 타당하다. 아인슈타인이 쓴 "Science and Religion"을 보면, 위의 어록 바로 앞에 "But science can only be created by those who are thoroughly imbued with the aspiration towards truth and understanding. This source of feeling, however, springs from the sphere of religion."라고 쓰여있다. 해석하면 "그러나 과학은 진리와 이해를 향한 열망에 완전히 빠져있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만들어질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느낌의 원천은 종교의 영역에서 시작된다." 인데, 그는 인간의 운명과 삶에 관여하거나 인격을 가진 신을 강조하면서 부정해왔다는 것과 불교에 대한 그의 긍정적인 평가 등을 봤을 때 확실히 반종교인은 아니었다.[84] 다른 표현으로 "사랑에 빠지는 것은 사람이 하는 가장 미련한 짓이 아니라, 마치 중력처럼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것이다."가 있다. 낭만과학자[85] 제3차 세계 대전에서 문명은 다 망할 테니 제4차 세계 대전은 석기시대로 돌아가 저런 걸로 싸우게 된다는 의미(...). 유명한 어록인 만큼 변형이 많다.[86] 참고로 정면으로 대치되는 말로 군사학 논고"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가 있다. 다만 군사학 논고가 로마 제국 시절에 나왔다는 것을 감안할 것. 대군을 유지하는 것이 핵심인 고대와 핵무기 하나로 세상을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는 현대를 같은 선상에 놓을 수는 없다. 다만 전쟁이 남을 침략하는 전쟁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방어 전쟁도 있으므로 국력을 키워 타국의 침입에 대비하란 뜻으로도 볼 수 있다.[87] 18세기 영국의 사상가 에드먼드 버크도 비슷한 취지의 말을 한 적이 있다. 칼 포퍼도 "추상적인 선을 실현하려고 하지 말고 구체적인 악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하라."라는 미묘하게 비슷한 말을 남겼다.[88] 직원에게 팁을 줄 현금이 없자 쪽지에 적어서 건네주며 "아마 당신이 운이 좋으면 이 메모가 보통의 팁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됐다.[89] 과학 이론이란 단순히 관찰 결과를 요약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관찰로 보이는 것들이 '무엇'인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사고하는 방식을 만들어가는 아주 복잡하고 창의적이며 독창적인 과정이라는 뜻[90] 리뷰엉이가 영상을 표절하는 유튜버를 고발한 영상에서 언급된 어록이며 이 어록에 대해서 "AI를 도둑질에 사용하는 이런 상황에 가장 적절한 말이네요."라고 말했다. 자세한 내용은 노아AI 표절 사건 참고.[91] 흔히 뉴턴의 묘비명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 묘비명은 이와는 다르다. 아이작 뉴턴 문서에 나와 있다.[92] H.G 웰스가 쓴 동명의 고전 SF 소설을 영상화했다.[93] 아인슈타인 본인은 전쟁을 싫어하는 평화주의자였지만 Dr. 와일리는 세계 정복을 꿈꾸는 매드 사이언티스트.[94] 영화 자체가 줄거리 전체를 관통하는 아인슈타인의 조언으로 마무리 된다. 주인공 오펜하이머와 학술적 견해가 달랐으며 맨해튼 프로젝트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는 않는 모습이 그려졌음에도 비중이 가볍지 않다.[95] 물론 마리치는 졸업 시험을 더 치려고 하였으나 아인슈타인과의 결혼으로 인해 졸업을 포기했다. 다시 말해 밀레바의 최종 학력은 대학교 중퇴, 즉 고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