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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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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황
大恐慌 | The Great Depression
파일:12word.xlarge1.jpg
1929년 10월 24일 '검은 목요일' 당시 뉴욕증권거래소의 군중.[1]
※ 하단에 적힌 내용들은 미국의 대공황 시대를 기준점으로 한다.
<colbgcolor=#000,#fff><colcolor=#fff,#000> 시기 1929년 ~ 1939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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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딜 정책 (1933년 ~ 1938년)
진주만 공습태평양 전쟁 발발 (1941년)[4]
이전 광란의 20년대 / 금주법 시대[5]
다음 제2차 세계 대전 시대

1. 개요2. 배경3. 원인
3.1. 원인을 모른다?3.2. 인과가 뚜렷하지 않은 기존 학설들3.3. 마르크스주의적 견해 - 자본주의의 근본 모순 표출
3.3.1. 주류경제학계의 이윤율 저하 이론 반박
3.4. 외부세력의 개입으로 터진 인재(人災)?
4. 사회상5. 경과6. 이후7. 기타8. 참고 자료9.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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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공황( / The Great Depression)은 1929년미국을 중심으로 발생한 세계적인 경제 공황을 이른다.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까지 세계를 강타한 경제 침체 현상이었으며 금융 시장의 혼란과 대규모 실직 사태가 일어나 당시 서구 자본주의 사회 체계를 뒤흔든 사건으로 평가된다. 대공황 이전에도 크고 작은 세계 경제의 부침()이 있었지만 이보다 더 심각한 범세계적 경제 후퇴 현상은 없었다.

대공황으로 인해 경제와 사회가 무너지면서 국민들의 삶의 질이 악화되었고 인종차별이나 노사 갈등을 비롯한 사회적 갈등이 심화됐다. 결국 이는 많은 국가들이 전체주의에 빠지는 데에 일조했다.[6] 반면 당시 소련은 서구와 달리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입각한 계획경제를 통해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따라서 대공황 기간 동안에 약 10만 명미국인들이 소련으로 이민 신청을 했고, 이는 당시 경제발전을 위해 숙련공이 필요했던 소련에게 도움이 되었다.

2. 배경

마치 개미집을 들쑤셔놓은 것처럼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우왕좌왕했다. 그들은 엄청난 양의 주식을 헐값에 제3자에게 팔아치우기에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상당 기간 동안 이들이 내던지는 엄청난 부를 사려는 사람들이 전혀 없었다. 다우지수는 38포인트 폭락해 260으로 주저앉았고, 이로써 최대 폭락기록이 경신되었으며, 주가표시기 작동은 3시간이나 지연되었다. 브로커들은 미친 사람들처럼 고래고래 소리를 내질렀다. 대서양 해저 케이블은 불통되었고, 주가표시기는 고장났으며, 전화선마저 통화량 폭증으로 인해 불통되었다.

거래가 끝나고 2시간 만에 겨우 다시 작동된 주가표시기는 또 한 번 시장참여자들을 공황상태로 몰아넣었다. 다우지수가 또다시 30포인트 폭락해 230을 가리키고 있었고, 거래량은 1,650만 주에 달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 시스템이 태동한 이래 인류가 경험한 가장 큰 공황인 대공황이었다.
- <금융 투기의 역사>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1920년대 호황기를 누리던 세계경제가 거품이 꺼진[7] 1920년대 말에 접어들면서부터 실물 경기 하락을 맞이하고 1929년 9월 20일 영국 최대의 투자자, 기업인, 금융인이었던 클래런스 찰스 해트리(Clarence Charles Hatry, 1888 ~ 1965) 및 그의 동료 수 명이 사기 및 위조죄로 투옥되어 런던 증시가 대폭락했다는 소식이 미국의 해외 시장 투자에 대한 낙관론을 악화시켰다. 참고1

그 해 10월 해트리(Hatry)그룹의 파산이 법원에서 공식적으로 승인되어서 약 2,400만 파운드(2020년 기준으로 1억 4916만 9천 파운드 가치)의 가치로 1929년 월스트리트 폭락에 기여하여[8][9] 1929년 10월 24일(검은 목요일)과 10월 29일(검은 화요일) 미국 월스트리트의 주가가 급작스럽게 폭락(the Wall Street Crash)[10]하면서 그 여파로 세계 대공황이 시작되었다. 대공황 당시 미국의 GDP는 30~40%가 증발하였으며[11] 독일의 경우 노동인구의 44%가 실업자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대공황 이후 3년간 미국 시가총액88.88%가 증발했다.[12]

3. 원인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경제구조의 불안정성이 커진 가운데서 시작됐으며, 여러 가지 원인으로 촉발된 경제 위기이기에 한 가지 원인으로만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이는 단순한 사실관계 문제를 떠나 경제와 사회를 보는 이념의 문제와도 연관된 것이므로 과거의 사건에 국한된 논쟁을 넘어 현재적인 논쟁으로서의 성격을 갖는다.

네오케인지언마르크스주의자들은 무절제한 시장경제의 근본적인 한계가 원인이었다고 주장한다. 모든 소비가 우연히 감소했다는 식의 논의도 있고 스무트 홀리 관세법 등에 기인한 보호무역을 통해 직간접적으로 시장에 개입하던 정부가 원인이었다는 이론도 존재한다.

다음은 대공황을 촉발시킨 원인 중 몇 가지를 소개한다.
  1.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영국, 프랑스 등 열강들이 금본위제도로 돌아간 것. 하지만 오히려 화폐를 과대평가함으로써 각국 수출 시장의 축소를 야기했다. 사실 1928년 말부터 전 세계 실물 경기 지표는 폭락하고 있었다.
  2. 1번으로 인한 과도한 보호 무역론(Protectionism) 대두. 실제로 미국의 스무트-홀리 관세법(Smoot-Hawley Tariff Act)과 근린 궁핍화 정책(Beggar Thy Neighbor Policy)은 근시안 정책의 대표로 손꼽힌다. 하지만 세계는 이미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아니 어떤 시각에서는 오늘날의 자유시장보다도 더 강한 수준의 운명 공동체가 된 상태. 결국 세계 시장에 큰 부담을 안겨주었다.
  3. '협상 가격의 위기' - 이른바 "가위 사태(Scissors crisis)". 여기서 가위는 수요와 공급 곡선의 기울기 극대화를 의미한다. 농산물 가격 하락과 공산품 가격 상승의 결과. 이는 이미 트로츠키사회주의자가 아닌 경제학자들도 10여 년 전에 예견했다.
  4. 독일의 초인플레이션 - 영국, 프랑스 등은 1차 대전 후 독일의 경제적 부흥을 막고자 베르사유 조약에서 막대한 배상금을 요구했다. 이는 바이마르 공화국에게 큰 부담을 안겨주었지만 바이마르 공화국은 화폐를 마구 찍어내 지불 능력이 있다고 과시했고 결국 독일 경제는 끔찍한 초인플레이션으로 박살났다. 연쇄적으로 유럽 경제까지 영향을 받게 되었다.
  5. '구산업'(광산업 등 1, 2차 산업)에서 '신산업'(소비재 등)으로의 변혁 - 대량 생산, 대량 소비의 결과. '신산업'은 경기에 더욱 민감한 경향을 보였다. 흥할 땐 확 흥하고 망할 땐 막 망하고. 라디오, TV가 처음 나왔을 때의 충격과 관련 주식 투자는 닷컴 버블 시절보다 더 심했다.[13]
  6. 상기 사항들을 통제할 국제통화기금의 부재.
  7. 지출 가설 -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주장했다. 1929년 주식시장 붕괴로 자산가치가 떨어지고 불확실성이 증가하면서 소비가 줄었다. 은행이 부도 처리되면서(3년간 1/5가 부도) 투자자금 조달 능력이 떨어져 투자가 감소했다. 30년대의 긴축 정책: 당시 정치가들은 실업이 급증하는 상황에서도 균형 재정 정책에 관심을 가졌다. 결국 정부의 경기 대응이 부재하면서 공황이 심화되었다.
  8. 통화 가설 - 밀턴 프리드먼이 주장. 대개 통화량은 본원 통화(실제 통화)*통화 승수(뻥튀기시키는 변수)에 따라 결정된다. 대공황 때 본원 통화는 18% 늘었음에도 통화승수는 38% 감소하였다. 통화승수가 감소한 이유는 민간이 은행을 이용하려 하지 않았고(망하니까) 은행이 대출을 꺼렸기 때문이다.(지급준비금 증가)
  9. 먼델-토빈 효과 - 대공황기에는 디플레이션이 횡행했는데 이 경우 민간은 앞으로 현금가치가 증가할 것을 예상하고서 투자를 줄인다. 따라서 경기침체가 가속화된다.

이외에도 유동성 함정, 위의 여러 가지 원인들이 합하여 만들어진 복합설 등 각종 지적이 있다.

3.1. 원인을 모른다?

대공황이 발생한 원인과 그 구조에 대해선 다양한 학설이 존재하지만, 특히 미국의 대공황이 왜 세계 대공황으로 확산되었는지에 대한 명쾌한 설명은 현재까지도 찾기 어렵다. 애초에 미국의 대공황으로부터 세계 대공황이 촉발된 것이 맞는지부터 불분명하다.

미국의 대공황에 대해서는 지출 가설과 수정된 통화 가설이 있다. 이와 같은 설명은 사람들이 어느 날부터 갑자기 씀씀이를 줄이면서 현금 보유를 늘려갔다는 점을 강조한다. 사람들이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불경기의 시작 단계에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여기에 부적절한 거시정책적 대응이 맞물리며 큰 파국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왜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도 사람들이 씀씀이를 줄였는지는 다른 설명을 요한다. 각국의 사람들이 씀씀이를 줄인 게 시기적으로 우연히 겹쳤다는 주장 외에는 별다른 설명이 없다. 이처럼 대공황의 전파 과정을 설명할 근거는 대단히 취약한 상태다.

당시 시대상을 통해 원인을 추정하는 경우도 있다. 미국에서는 라디오로 대표되는 미디어의 발달, 버블 경제, 할부 시스템의 보급 등으로 인해 미국인들의 소비가 소득 수준 이상으로 과잉되었고 이것이 한계에 도달하자 소비가 다시 줄어들었다는 식이다. 유럽의 경우에는 제국주의식민지 확장이 한계에 이르렀고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한 경제 손실을 메울 수가 없게 되어 재화 생산과 소비 능력이 줄어들었다고 설명된다.

3.2. 인과가 뚜렷하지 않은 기존 학설들

첫 번째로 지적된 금본위제로의 복귀는 대공황의 전파 기제는 아니지만 역시 문제가 많다. 어느 나라가 금본위제 하에서 과대평가된 통화를 갖게 되었다고 치자. 그 나라야 수출 감소로 경기 후퇴가 있겠지만 그럼 그 상대국은? 호황이 되어야 할 거다. 이건 동시다발적 불황을 설명하지 못한다. 심지어 무역 상대국도 과대평가된 통화를 가졌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두 나라가 통화 가치를 모두 높이거나 낮춘다면 아무 일도 발생한 게 아니라는 점은 위에서 이미 말했다. 물론 반론의 여지는 있다. 국제수지는 환율 외에도 수출국, 수입국의 소득에 영향을 받으니 자국의 수입수요 탄력성이 그닥 크지 않으나 수출 대상국의 수입수요 탄력성이 크다면 설사 환율이 상승해도 그 수출국에서 돈이 없어 물건을 못 산다면 적자가 될 수 있다. 다만 이는 이론상 가능성이고 실제 당시 탄력성이 어떠했는지는 검토가 필요하다.

두 번째 원인으로 지적된 보호무역주의, 대표적으로 Smoot-Hawley 관세설의 허구성을 보면 문제는 분명해진다. 이에 대해 폴 크루그먼이 지적한 부분은 사실 그게 별 거 아니었다는 거다. 동 법은 수입관세를 약 40% 인상했다. 당시 미국의 순수출이 국민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약 6%이니까 이는 미국의 GNP 대비 고작 2.4%의 세율 인상인 셈이다. 일단 이게 미국의 대공황을 야기한 게 아님은 너무나 확실하다. 조세 부담률이 2.4% 포인트 올랐다고 실업률이 25%에 달하는 파국이 된다는 의견은 적절치 않다.

심지어 당시 유럽 국가들이 오직 미국과의 무역으로만 많은 흑자를 기록하고 있었다고 무리하게 가정해도 경상수지 흑자가 오늘날 흑자국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해 보면 기껏해야 5%가 보통이다.[14] 오쿤의 법칙상 이는 실업률의 약 2.5% 포인트에 해당한다. 이것도 수년간 이어지는 게 아니라 단년도로 끝난다. 결국 이 정도로 대공황을 전염시킬 순 없다. 이것은 관세뿐 아니라 환율 인상 등 여하한의 근린 궁핍화 정책에도 적용되는 논리다.

또 경쟁적 관세 인상이 아닌 경쟁적 환율 인상은 더욱 더 공황을 전파시키기 곤란해진다. 한국이 환율을 달러당 1,000원에서 10,000원으로 올렸다 치자. 일본도 이에 대응하여 달러당 100엔이던 환율을 달러당 1,000엔으로 올렸다 치자. 한국과 일본 간에는 원엔 환율 변동이 전혀 없다. 나아가 미국도 도로 10엔당 1달러로 올리면 정말로 아무것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네 번째의 경우 연이은 전쟁 배상 부담의 완화 조치 및 인플레이션의 안정 이후 독일 경제는 사실상 호황기로 진입해 있었다. 물론 곧 나락으로 굴러떨어지고 진짜 인플레이션이 달려왔지만. 선후가 바뀌어 있단 이야기는 이 이야기다.

여섯 번째 국제통화기금의 부재 역시 강력한 영향을 주었다고 보기 힘들다. 국제통화기금이 설립된 후에도 금융위기는 크고 작게 계속 발생하고 있다.

대공황의 국제적 전파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일단 무역에 의한 전파 경로를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다. 무역의 격감이 세계경제의 성장을 저해할 수는 있어도 극단적이고 파국적인 경제 상황으로 이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대신 그들은 국제적 자본 이동 측면을 주목한다.[15]

다른 한편에서는 위에 언급된 1. 협상가격 위기와 신 산업으로의 구조 변화가 2. 그에 아직 적응하지 못한 정부 대응과 맞물려 세계적인 문제가 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이 중 어느 것이 더 결정적인지에 대해 정설은 없다. 두 종류의 주장 모두 당시 사회상을 반영하고는 있지만 포착되지 않은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

결론적으로 세계 대공황이 왜 발생했는지는 아직 정확하게는 아무도 모른다. 물론 완전히 미스터리라는 것은 아니고 여러 사건들이 겹쳐서 발생한 일인데 시장의 위축에 따른 비대한 경제 구조의 붕괴와 이를 막아야 할 적절한 정책의 부재로 인해 발생된 사건이었다고 보면 되겠다. 즉 발생 원인이 너무 많아 파악하기 힘든 것.

1920년대 미국의 자산시장이 감세정책으로 급속히 과열되었던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와 비슷했음을 감안하면 거품경제를 제대로 수습하지 못해서 발생한 일이라는 주장도 있다. 당대 미국의 관료들도 주식시장의 과열에 대해 문제 인식은 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자산시장이 필요 이상으로 과열되었을 때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었으나 문제는 투철하고 적극적인(?) 방임 의식으로 무장한 당시 경제 관료들은 시간이 지나면 경제가 회복되겠지라고 낙관하면서 경제가 붕괴되는 상황에서도 이러한 파국을 내버려 두었다는 것.[16]

1920년대 초반 미국은 감세 정책을 펼치면서 유동자금이 대폭 증가했고 그 자금들이 주식시장으로 몰리면서 활황을 보였지만[17] 이러한 호황이 천년만년 갈 수는 없는 일이고 주식시장의 과열 정도가 심해서 과열에 대한 대비책은 분명히 필요했다. 하지만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에 대한 맹신으로 관료들이 적절할 때 시장 과열을 식히는 데 실패한 데다 이미 사건이 터져 주식시장이 붕괴된 이후 은행들과 기업들이 줄줄히 파산하고 1인당 GDP가 꺾일 때조차 정책 담당자들은 구조조정과 균형재정만 떠들며 그 이전의 경제 불황처럼 짧게 끝나겠지라고 생각하고 우량기업 지원이나 실업자로 내몰린 서민층 구제 같은 경기 부양에 필요한 조치들에 대해 손을 놓았다. 그야말로 무사안일 정책으로 일관했던 것이었다. 이는 시장만능주의, 즉 '시장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는 신념'에 사로잡혀 당장에 필요한 정책도 펼치지 않은 결과였다. 그렇게 발생한 경제 공황의 여파가 주변국 및 전 세계로 퍼지며 세계경제가 동시에 파국을 맞았다.

3.3. 마르크스주의적 견해 - 자본주의의 근본 모순 표출

'자본' 개념은 모든 화폐자산을 통칭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에 투입되는 화폐나 인프라 등'을 통칭하는 것임을 전제하고서 이어질 설명을 읽어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는 '벌어들인 금액/투자한 금액'인 이윤율을 중요시한다. 가령 1년간 1,000억 원을 투자해서 100억 원의 이윤을 남겼다면 이윤율은 10%다. 이 100억 원 중 자본가가 자신의 소비에 쓰고 남은 분량은 자본으로서 다시 생산에 투자된다. 즉. 올해에 1,000억 원이었던 자본이 다음 해에는 1,100억 원 가량으로 증가한다. 이듬해에도 10%의 이윤율을 냈다면 그 다음 해의 자본은 1,210억 원 가량이 된다. 이런 식의 과정이 반복되어 자본이 지속적으로 거대해지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핵심적인 메커니즘 중 하나다.

생산량이 많아서 물건을 많이 팔수록 자본가들의 이윤 축적도 늘어난다. 이를 통해 더 높은 수준의 생산 설비가 개발되어 노동력의 비중을 줄이고 생산량을 증대하며 재화 보급의 속도를 빠르게 한다. 그런데 이윤율을 (이윤)/(총자본)=(잉여가치)/{(불변자본)+(가변자본)}=s/(c+v)로 정의할 때, 분모와 분자를 v로 나누면 이윤율은 (s/v)/{(c/v)+1}로 정의되며, 이때 기계 비중의 증가, 즉 자본의 유기적 구성 c/v의 고도화는 잉여가치율 s/v의 상승이 유의미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이윤율을 하락시킨다. 더불어, 사회 전반의 재화 필요량은 한정되어 있으나 생산이 이를 초과하면 추가적으로 생산되는 재화에 사회적인 필요가 합치되지 않는 상황이 발생한다. 이로써 이윤율이 저하하고 생산량 확대가 어려워지며 과잉생산이 발생한다.

자본가들은 이윤율 하락을 막기 위해 몇 가지 노력을 한다. 그러나 모두 난관에 부딪힌다.
1. 생산수단에 대한 투자 확대. 생산 설비가 거대화되고 생산력이 높아지지만 그 자체로 자본의 유기적 구성을 고도화하여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를 초래하고 비계획적 과잉생산을 초래한다.
2. 임금 수준을 낮춘다. 이는 잉여가치율의 상승을 유의미한 정도로 이루어낼 수도 있지만 노동자 대중의 소비가 침체되는 결과로 이어진다. 그 결과 생산품의 소비가 적절히 이루어지지 않아 과잉생산이 악화된다.
3. 독점 혹은 담합을 위해 자본을 통합한다. 대기업 간의 인수합병이나 작은 기업을 대기업이 사들이는 방식이 대표적이다. 이로써 시장을 독점하거나 못해도 과점 상태를 만든다. 하지만 합병과정에서의 실직이나 과점기업들의 담합으로 인한 가격 상승 등이 노동자 대중의 상품구매력을 떨어뜨린다.
4. 새로운 상품 개발을 위해 투자를 더욱 확대한다. 그러나 기술 수준이 고도화될수록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는 데 요구되는 비용이 커지기 때문에 투자자본 대비 이윤발생량을 충분히 확보하기가 어렵다는 문제가 생긴다.

위와 같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주장한 경제적 과정과 상기 문단에서 다룬 역사적 측면들을 함께 고려하면 '이윤 축적→자본 증식→자본의 유기적 구성 상승, 비계획적 과잉 생산→이윤율 하락, 과잉생산→공황'이라는 과정이 반복된다.

마르크스주의는 이윤율 하락에 따른 공황은 이윤이 생산의 동기가 되는 사회인 자본주의 사회의 근본 모순이라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 각종 예방책이나 대응책을 실시한다 해도 결국 공황이 주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마르크시즘적 예측은 상당히 극단적인 견해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시장경제 시스템 하에서 비대한 경제 구조 전체의 공황이 발생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대공황 이전에 시장경제의 불안점을 지적한 사람들은 마르크스주의자들 외에도 있었고 오히려 자본주의 국가들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예상한 정도보다도 공황에 대비하지 못한 것이었다.

3.3.1. 주류경제학계의 이윤율 저하 이론 반박

주류경제학자들은 마르크스주의의 이윤율 저하 이론을 다음과 같은 이유로 비판한다. 첫째로 생산성이 증가하면 이윤율도 증가하고 둘째로 이윤율의 변화는 매우 복잡하고 예측하기 힘들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자들처럼 단순하게 도식화하기는 힘들다는 반박이다.

대표적으로 1961년에 발표된 '오키시오의 정리'는 실질임금이 동일하다고 가정할 때 새로운 기술, 즉 자본의 유기적 구성을 증가시키는 기술이 도입되면 이윤율은 증가한다며, 이윤율 하락의 원인은 실질임금의 변동에 있다고 설명하였다.[18]

한편 주류경제학에서는 '이윤율 하락' 자체를 효용이론과 균형이론을 통해 설명하기도 한다. 특정 재화가 잘 팔린다는 것은 즉 사회 전체적으로 높은 효용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이며, 이 재화의 생산량이 늘었을 때는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에 따라 그 재화가 가진 효용이 사회 전체적으로는 낮아질 수 있다. 결과적으로 그 재화를 만드는 기업을 소유한 자본가의 이윤율이 저하될 수도 있다. 그러나 반대로 이윤율이 오히려 높아질 수도 있으며 이러한 변화에 의해서 공황이 올지 말지는 알 수 없다.[19]

3.4. 외부세력의 개입으로 터진 인재(人災)?

한편 이 대공황이 자연적으로 발생한 게 아니라 세계를 주무르는 어떤 비밀결사의 개입으로 인해 인위적으로 발생했다는 음모론도 있다. 이 대공황이 제1차 세계 대전에 간접적인 원인이 있고 또 뒤이어 벌어진 제2차 세계 대전이라는 결과를 만드는 데 큰 비중을 차지한지라 배후에 있는 외부세력이 최소 이 세 가지 역사적 사건들을 연달아 일으켜 자기들에게 이득이 되도록 만들었다는 말도 안 되는 음모론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인위적으로 일어난 사태에 대해서 통상적인 방법이나 가설로는 원인을 제대로 알아낼 수 없는 것도 이런 이유로 설명된다고도 한다. 이 가설을 확장해서 사실 이 역사적 사건들은 어떤 배후세력이 엠스 전보 사건을 필두로 철저히 계획대로 만들어진 일종의 대규모 역사개편 작전이자 일종의 만들어진 나비 효과라는 음모론까지 등장했다.[20]

이 배후세력의 정체에 대해서는 주로 프리메이슨-일루미나티 계열의 비밀결사로 지목하지만 화폐전쟁 등의 일부 도서에서는 그 배후를 로스차일드 가문으로 지목하고 있으며,[21] 또한 당시 신생국가였던 소련만이 유일하게 상대적으로 피해를 덜 보았기 때문에 소련이나 공산당의 공작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었다. 물론 공작으로 이 정도 규모의 경제 피해를 낼 수 있었다면 진작에 소련이 전 세계 최강국이 되었겠지만.

하여튼 이 음모론이 생각보다 유구하게 화자되는 음모론이다 보니 젠틀맨 리그, 셜록 홈즈: 그림자 게임, 어쌔신 크리드템플 기사단, MCU하이드라 등의 여러 매체들에서 이 음모론에 대해 어느 정도 묘사했다. 다만 이러한 음모론 류가 으레 그렇듯이 인간 집단의 행동 양상은 계산기처럼 정확히 계산이 도출되지 않는다는 점을 망각하고 있다. 최고의 엘리트들이 모여 있는 미국의 정부기관도 금융시장 하나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인데 거대한 인간 사회를 마음대로 주무른다는 건 그냥 망상에 가깝다.

세계 대공황이 일어나기 전에 나왔던 시온 의정서에는 유대인들이 세계 대공황을 계획하는 내용이 나온다. 하지만 시온 의정서는 반유대주의를 조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위서에 불과하다. 시온 의정서에서 지어낸 내용이 하필 실제 역사와 일치했을 뿐이다.

4. 사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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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조정으로 인해 해고된 실직자들이 시위하는 모습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한 부모와 아이
대공황으로 인한 사회의 변화는 경제적으로 붕괴된 서민의 일상생활에서 나타났다.

우선 음식의 변화가 나타났다. 간 고기를 양파와 섞어 굽는 미트로프(Meat Loaf)라는 요리를 얻을 수 있는 식재료에 따라 땅콩 로프, 콩 로프, 소간 로프 등으로 먹었다. 차갑게 식어 더는 입맛을 당기지 않는 식재료를 먹기 위해 우유와 밀가루를 섞어 끓인 걸쭉한 크림 소스도 각광받았는데 이때 많은 음식들이 크림 소스 범벅이 되었다고 한다. 한국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죽과 미음을 끓여먹듯이 미국에서도 수프는 빈자의 음식이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무료 수프와 빵을 배식받기 위해 줄을 섰다. 이렇게 생활이 궁핍하다 보니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기존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식재료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민들레 이파리 같은 잡초들을 직접 채취하여 샐러드로 만들어 먹기도 했으며, 오렌지 같은 과일도 사 먹기 어려워서 당근으로 잼이나 마멀레이드를 만들어 먹었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대공황 당시 미국인들의 건강은 당시 다른 시기의 미국인들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호전되었다고 한다. 실직 등으로 일이 줄거나 더 천천히 일하고 충분히 자며 돈이 없기 때문에 [22], 담배 소비가 줄어들었고 전체적으로 근로 시간과 이동이 줄어들기 때문에 직장에서의 사고, 교통사고도 감소했다. 출처 물론 대공황 때 수많은 미국인이 식량을 구입할 돈이 없어서 음식도 제대로 구하지 못하여 그 어느 시기의 미국인들보다 훨씬 더 많이 굶어죽은 것도 사실이다.[23] 건강이 호전되었다는 것도 그나마 입에 풀칠이라도 한 미국인들에게 해당되는 얘기지 입에 풀칠도 못 하고 비참하게 굶으며 기아에 허덕인 미국인들 대다수는 건강이 문제가 아니라 내일 목숨이 붙어 있을지를 걱정해야 했다.

즉, 건강이 호전된 것은 어디까지나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살아남은 사람들 중에서도 다소 심한 편의 빈곤에 시달렸던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영양 부족과 면역력 약화 등으로 건강이 악화된 경우도 드물지 않게 존재했을 것이다.

5. 경과

파일:세계대공황 미국 주가 변화와 주요국 실업률.png
대공황기 미국의 주가 변화와 주요 국가의 실업률

세계 대공황은 당시 글로벌 경제, 정치, 사회 그리고 문화에 이르기까지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영향을 끼쳤다. 경기 하락과 이로 인한 위기감은 각국에서 배타적 민족주의의 부활과 민주주의의 침체, 그리고 정치적 극단주의(예: 스페인 내전)를 낳았고 결국 최종적으론 제2차 세계 대전이라는 인류사의 비극을 낳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위기 속에서 각국은 나름대로 안정화를 위한 자구책을 펼쳤다.

당대 세계패권, 경제질서를 유지하던 대영제국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전비로 휘청이며 사실상 파산상태였다.[24] 영국은 약화된 파운드화의 위상을 지키기 위해 1925년 금본위제로 복귀하였으나 대공황으로 경제가 불안정해지자 다시 금본위제를 포기하면서 파운드 스털링의 절대적이던 위상이 붕괴됐음을 알렸다.

또 공황의 진원지인 미국은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급하게 유럽에 투자했던 원금을 회수했고 그로 인해 유럽의 시총 역시 기존의 4분의 1수준으로 토막나게 되었다. 대공황은 미국에서 시작됐지만 그 파급은 전후 재건이 한창 진행 중이던 유럽에 치명타를 가한 것이다. 이런 경제위기를 맞닥뜨린 상황에 영국은 1933년 런던 경제회의를 열어 미국에게 협조를 부탁했지만 당장 급한 불부터 꺼야 했던 미국 입장에선 알 바 아니었고 영국은 미국에 당연히 반발했지만 19세기마냥 더 이상 미국은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었다.

세계 경제 규모의 42%에 달하는 미국 경제가 휘청이고 미국이 자국 시장을 닫아 달러블록으로 대표되는 보호무역을 시작하자 영국, 프랑스도 보호무역으로 전환했다.

5.1.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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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 미국은 Great Depression Era, 즉 대공황 시대라고 부른다. 미국 대공황 시대의 시기는 1929년 ~ 1939년이지만, 미국이 태평양 전쟁으로 2차 대전에 본격적으로 참전하기 전까지를 기준점으로 1929년 ~ 1941년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우선 미국의 경우에는 워런 G. 하딩, 캘빈 쿨리지허버트 후버 정부에 걸쳐 11년간 재무장관직을 지냈던 앤드루 맬런은 경제 대공황이 일어났을 때 “주식을 청산하고, 기업을 청산하고, 노동자를 청산하고, 농민을 청산하라”는 식으로 기업이나 서민들을 구제하기보다는 구조조정과 균형재정을 우선시하고 투자의 책임은 엄연히 개인에게 있으므로 국가는 신경쓰지 않는다는 정책을 펼쳤는데 일단 경제 거품을 빼고 빚투와 영끌 열풍을 막는 것까지는 성공했다. 문제는 이후 디플레이션이 장기화되면서 농작물은 썩고 있는데 서민들은 땡전 한 푼 없어서 음식을 사지 못하는 결과만을 초래했고 그 상황이 몇 년씩 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물론 맬런은 기업인으로서는 유능했고 1920년대 재무부 장관으로 대공황이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많이 오른 세금을 내리는 감세 정책 등을 시행하여 유능한 관료라는 평도 듣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거품경제로 이어졌다는 것이 문제였고 거품이 붕괴되는 과정에서 앤드류 맬런은 이를 수습하지 못하고 무능함을 드러내면서 빛이 바래게 된다. 허버트 후버는 뒤늦게 앤드루 맬런을 해임시키며 경기 부양에 나섰지만, 이미 수습하기에는 때가 너무 늦어버리고 말았다. 오죽하면 후버는 말년에 이 당시를 회상하면서 '나의 정적들은 내가 혼자서 전 세계적인 대공황을 일으킬 수 있는 환상적 지성과 경제적 위력을 지녔다고 칭송했다.'고 자학하기도 했다. 사실 대공황은 후버보다도 전임자였던 쿨리지의 책임이 크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물론 후버 역시 공황이 터졌음에도 뒷수습을 못한 책임은 있지만. 이처럼 미국 정계에도 막대한 영향을 입혀서 대공황 이후 약 20여 년간 미국 정계는 민주당이 독주하는 결과를 낳았다.

다만 미국 내에서도 대공황의 여파에서 자유로운 지역은 있었다. 바로 플로리다다. 왜 이 지역이 대공황에서 자유로웠냐면 1920년대 플로리다 부동산 개발 붐으로 인해 부동산 투기가 과열되었다가 1925년1926년에 걸쳐 부동산 값이 폭락하고 허리케인이 닥치면서 붕괴되어 빚투로 과대평가된 자산을 샀던 사람들이 다 망하고 정상적인 가격에 구입한 사람들은 이미 거품이 다 빠져서 대공황에도 자산이 유지됐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는 역설적으로 보면 남들 다 겪는 대공황을 1926년부터 3년이나 일찍 시작했으므로 좋은 게 당연히 아니다.
[navertv(46471103)]
[다큐] 영상의 세기 PREMIUM 제17부 - 인류의 위기中[25]

그리고 이후 1932년 대선에서 당시 정부의 무능함을 비판하던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당선되고 지금도 회자되는 그 유명한 뉴딜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다. 뉴딜 정책은 루스벨트의 집권 1기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였고, 빈민층들이 루스벨트의 정책에 열렬한 호응을 나타내며[26] 그의 재선에도 도움을 준다. 다만 그런 성과를 바탕으로 재선도 여유 있게 쟁취했지만 집권 2기 초반에 맞닥뜨린 불황으로 인해 아쉬운 점을 남기기도 했다. 여기에 대해서는 사실 학자 간에도 의견이 갈리는데 일단 상대적으로 불황이 왔다는 거지 절대치로 보면 대공황에 비할 수준은 아니라 일시적 현상 정도로 보는 견해도 있고, 1938년 불황은 연방정부가 '이 정도면 됐겠지' 하는 안이한 마음으로 당시에도 반대가 심하던 의회 내 재정긴축론자들과 타협하면서 재정 지출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라는 폴 크루그먼의 견해도 있다. 이 논리대로면 이때의 불황은 뉴딜이 불황을 끝내지 못했다는 증거가 아니라 뉴딜의 후퇴가 오히려 새로운 불황을 가져왔다는 것인 셈.[27]

그러나 뉴딜과 루즈벨트의 여러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경제문제는 완벽하게 해결되지는 않았는데 이를 완벽히 해결해 준 게 제2차 세계 대전이다. 침략 전쟁을 당하자 분노한 전국민이 정부의 정책에 찬성했으며[28] 모든 성인 남성과 여성은 군대와 군수공장으로 가 실업률 1%대를 달성했다.[29][30] 또 전쟁 때문에 무기를 만들 여력이 없는 유럽 국가들은[31] 미국 무기를 돈 되는 대로 사들였고 이는 미국이 금과 달러가 넘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32]

경제와 다른 외교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 시기 미국은 또다시 고립주의와 간섭주의 양쪽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결국 대통령인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유럽에서 대혼란이 일어나면 결국 미국에도 악영향이 온다"라고 강력히 주장하여, 영국을 돕기 위해 막대한 물자를 수송해 줬으나 미 의회의 강력한 견제로 태평양 전쟁 발발 이전까지는 본격적으로 전선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태평양 너머로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서구 열강 대열에 합류한 일본제국주의 야망과 이로 인한 무분별한 영토 확장을 위해 대동아공영권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중일전쟁을 일으켰고, 이에 열받은 미국은 석유 수출을 끊어버리겠다고 일본을 협박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일본은 미국을 한번 세게 치고 협상테이블에 불러오려고 진주만 공습을 실행하여 미국 상대로 전쟁을 걸기 시작하였다. 일본군의 최대의 성공작이자, 이후 패망의 확실한 기초를 다진 이 사건으로 미국인들은 크게 격분했으며, 그 분노가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것임을 일본은 끝끝내 몰랐다.

이후 전쟁이 끝나고 미국은 전후 질서[33]를 바로잡아 초강대국이 되어 전 세계가 미국의 달러와 금만 사용하게 만들었고 이를 바탕으로 위대한 50년대와 지금의 미국이 이뤄졌다.

대공황 이후 주류 경제학의 위치에 올라서게 된 영국의 경제학자인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경제 사상을 적용한 케인스주의가 뉴딜에 적용되었다고 흔히 알려져 있지만 사실 당시만 해도 뉴딜 정책은 케인스주의와 직접적 연관은 적은 편이었다. 각자 비슷한 시기에 따로 제시한 것.[34] 당선 직후 루스벨트는 케인스를 직접 만났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균형재정을 지지하고 있는 상태였기에 그의 수요 위주 경제학에 대해서 "그는 정치경제학자라기보다는 수학자겠구만!(“He must be a mathematician rather than a political economist”)"이라며 비꼬기도 했다. 허나 FDR은 균형재정으론 대공황을 돌파하기 힘들다는 점을 인정하고 이후 균형재정 목표를 후퇴하면서 뉴딜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35] 이때 케인즈가 몇 차례 자문을 해 주기도 했다고.

뉴딜 정책의 영향으로, 이 시기에 비로소 현재 미국의 상징 중 하나인 '사회 보장 제도'가 도입되었다(1933년). 농민들의 경우는 도시의 노동자들보다 좀 더 긴 시간을 고통 속에 보내야 했는데, 하필이면 이 시기 중서부를 휩쓴 몇 년간의 가뭄이 오클라호마를 중심으로 한 중서부 평원 전체를 황폐하게 만들었고 (이 시기의 황무지를 특별히 더스트 볼이라고 부른다.) 수많은 농민이 빈민이 되어 그나마 날씨 좋은 서부 해안으로 새 삶을 찾아 떠났다.[36] 이 시기를 배경으로 다룬 소설로 분노의 포도가 유명하다.

5.2. 영국

1차 대전의 영향에서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을 때 대공황이 터졌기에 더욱 큰 타격을 입었으며 20세기 영국의 가장 크고 가장 심각한 경제 공황으로 기록되었다. 1930년대 초기 국제무역은 위축되고 중공업 생산량은 3분의 1로 떨어졌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실업률이 70%, 실업자는 350만 명에 이르렀고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곳은 잉글랜드 북부,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 웨일스의 산업 및 광업 지역이었다. 때마침 노동당과 자유당이 연합해서 집권하였으나 막상 노동당은 균형정책 유지를 기반으로 하는 구시대적인 경제정책을 펼치며 내부갈등으로 갈팡질팡하다가 결국 노동당과 전국노동당으로 분당되었고, 이후 보수당과 전국노동당, 자유당이 연립정권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긴축정책을 유지하는 선에서 경제를 관리하려 했기 때문에 경제가 빨리 회복되지는 않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영국은 프랑스처럼 자국의 식민지를 통해 대공황을 해결하려 했고 더더욱 식민지를 탄압하는 결과를 만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가난하여 지속적으로 군비를 축소하였고 결국 나치 독일이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는 것을 막지 못하고 그저 바라보다 자신들도 맞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후 영국은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식민지를 다 포기하게 되었다. 이는 아래의 프랑스도 동일하다.

5.3. 프랑스

프랑스는 상대적으로 타격을 덜 입은 편이었다. 1차 세계대전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면서 1920년대 내내 노동력 부족 현상에 시달렸고 이 때문에 경제 대공황기에 들어서도 대량해고가 일어나는 일만큼은 피해서 실업률이 5% 안팎에 그쳤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국토가 전쟁터가 되어 경제 상황도 별로 좋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거품이 덜 형성되어 그만큼 자산가치의 폭락도 덜했다.

그러나 1930년대 중반 이후에는 미국과 독일, 소련이 풍부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경제가 성장할 동안 프랑스는 여전히 경제가 침체되는 형국이 되었으며 물가상승 문제는 여전하였다. 돈이 없기에 독일의 침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여 또다시 전 국토가 전쟁터가 되는 비극을 겪었다.

이후 영국처럼 미국의 마셜 플랜 원조로 다시 활력을 되찾았다.

5.4. 독일국

1차 대전이 끝난 후 협상국베르사유 조약을 체결하면서 독일에서는 독일 제국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출범했다. 허나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기 위해서 돈을 마구 찍어내다 보니 발생한 초인플레이션의 수렁에서 1920년대 중후반에 간신히 빠져나온 뒤 회복하던 경제가, 대공황으로 인한 디플레이션으로 붕괴 직전에 이르게 되었다. 미국보다 일시적으로는 실업률도 훨씬 높아지고 사회가 입은 타격도 더 컸기 때문에 사회 전반에 정치극단주의가 팽배해졌고 '전쟁에서 지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라는 생각에 젖은 독일인들이 차츰 극단주의적으로 변하며 타국에 대한 증오와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한 불신과 불만을 키워가고 있었다. 이때 혜성처럼 등장한 것이 나치당이었다. 나치당은 대공황으로 이득을 무척 보았는데 대공황 이전 나치는 뮌헨 폭동 실패로 완전히 박살나 있었다. 하지만 1929년 대공황으로 독일인들의 눈은 독일공산당과 나치당으로 몰렸고 1928년에 12석이었던 나치당은 1930년 104석으로 엄청난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그럼에도 1932년까지 나치당은 권력의 핵심부에 진입하지 못했고 히틀러의 승승장구는 이들을 온건, 급진 좌파에 대항하기 위한 장기말로 이용하면서 대중적 인기를 확보하고자 했던 프란츠 폰 파펜파울 폰 힌덴부르크 등의 바이마르 공화국 우파들과 복고주의자들이 1933년 1월 아돌프 히틀러를 부총리로 임명하고 나서야 시작되었다.

그러나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이후에도 나치당의 지지율은 30~40%대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에 히틀러는 공산당과 독일사회민주당을 무력화시키고자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을 활용해 수권법을 통과시켰고, 이를 통해 나치당의 가장 큰 경쟁자였던 공산당과 사민당을 무력화시켰다. 이후 당내 과격 좌파 세력이었던 에른스트 룀돌격대(나치 독일) 그리고 나치당을 계속해서 자신들의 통제권에 넣으려고 하며 사사건건 반대하던 독일국가인민당독일중앙당의 복고주의자를 비롯한 전통적 우파를 장검의 밤을 통해 제거하여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안정화시킨 후 얄마르 샤흐트를 경제장관으로 임명했고 샤흐트는 각종 공공사업을 대규모로 입안했다. 그 결과 실업자들은 알바라도 얻어 먹고 살 수 있게 됨에 따라 길거리에 넘쳐났던 노숙자들은 사라졌고 중산층도 회복되자 자산가치 하락에 어느 정도 제동이 걸리면서 경제규모도 회복되었다.

집권 전까지만 해도 히틀러에 대한 뚜렷한 지지를 보내지 않았던 국민들은[37] 점차 히틀러가 국가 기강을 다져나가고 국가계획적 경제정책을 통해 경제를 되살리자 히틀러에게 지지를 보냈다. 그렇지만 이때부터 이후 벌어질 참극은 예고되어 있었다. 나치 자체가 원래 호전적이었지만 전쟁을 일으킨 원인 중 하나가 빚을 갚기 위해서였다고 추측하는 이들도 많다. 당장 아우토반 구축 등 막대한 정부 지출 대부분이 빚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뭐라도 외부에서 가져오지 않으면 답이 없었다.[38]

또 이 와중에 재무장을 명목으로 군비지출을 크게 늘린 결과 1930년대 후반 들어서는 재정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2차 세계대전이 터진 이유 중 하나가 히틀러가 재정위기를 전쟁을 통한 약탈과 채권국들의 붕괴, 점령지들의 식민화 등을 통하여 해결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특히 침략전쟁을 하자마자 1순위로 한 것이 금고를 털어서 금을 빼앗는 것이었다.[39] 샤흐트는 재정난과 군비를 적정 수준에서 유지해서 해결하려고 했지만 1936년부턴 이미 히틀러는 물론이고 독일 경제를 본격적으로 군사화하던 4개년 계획의 책임자인 괴링 등과 갈등을 벌였으며 결국 중앙은행 총재직에서 1939년에 잘리고 1943년 장관직에서도 해임당한다.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으로 인해 히틀러가 국가 내의 반대파들에 무자비한 보복을 할 당시 샤흐트는 체포된 후 라펜스브뤼크 강제수용소, 플로센뷔르크 강제수용소 등을 전전하였지만 종전까지 살아남아 미군이 강제수용소를 점령하며 풀려났다.

5.5. 소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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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황의 얼마 안되는 예외는 당시 신생 국가이자 공산주의 국가였던 소련이었다. 1928년에 이미 1차 대전 이전의 러시아 제국의 경제 규모를 따라잡은 소련은 성장을 계속했으며 1930년대에 소련은 매년 10%가 넘는 경제성장률을 기록하였다. 당시 대공황으로 전 세계의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경이적이었다. 이는 레닌부하린신경제정책을 통해 준비된 경제 구조, 스탈린의 효과적이었던 5개년 계획과 더불어 20세기 초 공산주의의 확산을 경계한 미국-영국-프랑스 이하 연합국 세력이 국제 자본주의 경제 구조에서 소련을 고립시킴으로써 소련 경제는 자력갱생의 구도가 되었고 대공황의 영향도 덜 받을 수 있었다는 평도 있다.

어쨌든 그 결과 낙후한 농업 국가였던 러시아 제국의 국체를 이어받았음에도 소련은 인민들의 영혼까지 끌어모아 이를 중공업에 투자하여 20여 년 만에 프랑스, 영국, 독일을 추월하고 1938년에는 미국에 이은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이 되었다. 러시아 혁명제1차 세계 대전, 러시아 내전으로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평가받은 러시아 제국의 채무를 이어받은 소련이 홀로 달린 결과 불과 15년 만에 발전된 미국까지 넘보는 공업국가가 된 것이다.

그리고 소련의 이러한 성공은 세계 각지에서 소련을 추종하는 사회주의 혁명가와 공산주의 단체들이 등장하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고 당시 중공업 정책 같은 것은 만주국 등이 모방하기도 했다. 물론 서민층의 삶의 질이 그만큼 빨리 향상되지는 않았고, 1933년도에는 우크라이나 대기근이 벌어지면서[40] 수백만의 농민과 유목민들이 굶어죽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5.6. 일본 제국

일본 제국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유럽 국가들이 혈전을 벌일 때 유럽에 무기를 팔면서 돈을 번 결과 중국 무역을 독점하여 나리킨(成金)이라는 벼락부자가 나올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대전 종결 후 다시 유럽 국가들이 무역 전쟁에 뛰어들면서 쌀 소동[41]을 시작으로 1920년대에 불황에 시달리게 되었다.[42] 공업화로 노동자들이 크게 늘었으나 주요 공업국들이 대전기의 폐허에서 일어나자 대전기에 크게 투자한 조선업(造船), 철강업 등 중공업의 경쟁력이 딸리게 되어 수출이 지지부진해졌고 이로 인해 노동 쟁의가 빈발함과 함께 면사의 주 수출시장이던 중국이 일본의 제국주의 행보를 경계하면서 일본 상품 배척 운동으로 일본은 큰 타격을 받았다. 이때 조선은 일제강점기여서 일본에 나라가 강제 합병된 상태였다.

농가의 주 수입이던 생사의 미국 수출도 감소하기까지 했다. 이러다 보니 1920년 3월 도쿄 증권시장의 폭락으로 본격적으로 공황에 빠져들었으며 관동대지진은 여기에 치명타를 입혔다.[43] 이후 1차대전의 특수가 끝나자 1927년 쇼와금융공황이 찾아왔고, 긴축정책의 일환으로 1928년엔 금 해금(金解禁)을 결정하였다.[44] 하지만 얼마 안 가 대공황이 터졌는데 당시 일본은 정부 시스템이 대일본제국 헌법에 따라 정책 결정 시 모든 장관들이 만장일치로 동의해야 하는 등 대공황에 효율적으로 대처하기에는 지나치게 복잡한 구조였다. 때문에 군내에서 '무력한 정부와 싸움질만 하는 정당들을 다 갈아엎고 히로히토 천황에게 절대권력을 줘야 한다!'고 주장하는 황도파 등 극단주의 파벌들이 쿠데타를 일으키는 등 소동을 벌이자 정부는 점점 군의 요구를 들어주게 되고 한술 더 떠 상당수 일본 국민들이 청일전쟁, 러일전쟁, 제1차 세계 대전 등 전쟁경제로 인한 호황을 여러 번 경험했던 만큼 이번에도 징고이즘으로 경제 위기를 돌파한다는 군대의 정신 나간 주장을 지지하기 시작하면서 기다렸다는 듯이 1931년 관동군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국을 세워 수탈하는 방식으로 해결책을 찾기 시작했다. 결국 경제 대공황은 나치즘과 일본 군국주의의 정권 장악에 모두 일조를 한 셈.[45]

참고로 1931년 홋카이도에서는 미증유의 대기근이 일어나 상당수의 가장들이 생계 차원에서 딸까지 팔았다.

5.7. 중화민국

중화민국은 금본위제도를 채택한 미국 등의 다른 나라들과 달리 은본위제도를 채택하고 있었기에 대공황 전반기인 1929년부터 1934년까지는 대공황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고, 오히려 대공황으로 말미암은 은값의 폭락으로 대공황 초기인 1929~1931년에는 은이 싼 값으로 중국에 유입되어 호황기를 구가할 수 있었다.[46] 하지만 1931년부터 영국,일본등의 국가가 금본위제를 포기하며 다시 은값이 오르기 시작했고, 여기에 1934년 미국이 은구입법을 실시하자 중국이 수입해와야 할 은들이 모두 미국으로 가게 된 것은 물론[47], 심지어 중국의 은까지 미국으로 대량 유출되면서 결국 1935년 백은풍조(白銀風潮)로 불리는 디플레이션으로 인한 경제위기가 촉발되었다. 이에 중화민국 국민정부는 은본위제도를 포기하고 법폐개혁을 실시하면서 은구입법을 실시하고 있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행정부와 중미은협정을 체결해 미국에 많은 양의 은을 판매하여 통화 가치를 안정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얼마 안 가 2차 국공내전이 터지며 중화민국은 대만을 제외한 모든 영토를 공산당에게 잃어버렸고 중국 대륙을 차지한 중화인민공화국은 사회주의 개혁을 통해 자본주의에서 벗어났기에 어찌저찌 대공황을 넘겼다. 중공은 1950년대와 60년대에 걸쳐 경제상황이 극과 극을 달렸다가[48] 1970년대 말 덩샤오핑이 집권하고 나서야 안정적인 성장을 하게 되었다.

6. 이후

파일:세계대공황 당시 실직자.jpg
I know 3 trades
전 3가지 일을 할 줄 알고
I speak 3 languages
3개 국어를 할 수 있으며
Fought for 3 years
3년 동안 (나라를 위해) 싸웠고[49]
Have 3 children
3명의 아이가 있습니다.
And no work for 3 months
그리고 3달 동안이나 일을 하지 못했지만,
But I only want ONE JOB
제가 원하는 건 오직 일자리 하나입니다.
세계 대공황 당시 어느 실직자의 구직희망문.

당시 미국에서도 3가지 일을 할 줄 알고 3개 국어를 하는 사람은 고등교육을 받은 고급 인재였다.[50] 더군다나 제1차 세계 대전에 뛰어든 참전용사임과 동시에 먹여 살려야 할 자녀가 3명이나 되는, 정상적인 시대라면 흔히들 성공한 삶이라고 불리는 유능한 가장인 셈이다. 그런 사람이 겨우 일할 곳 하나가 없어서 노숙자처럼 하염없이 팻말을 달고 거리를 돌아다니며 직종에 대한 언급이나 협상 없이 고작 일자리 단 하나만을 구하고 다녔다는 점에서 경제가 박살난 대공황의 심각성을 짐작할 수 있다.[51]

상기했다시피 대공황은 세계 경제와 지역 사회를 말 그대로 박살내면서 시장경제에 대한 회의, 국민들의 삶의 질 악화, 사회 갈등 등을 유발했다. 그리고 그 결과 극단주의 정치 세력이 크면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는 주요한 요인 중 하나로 자리매김한다. 경제학적으론 자유방임주의가 쇠퇴하고 공급이 과도한 불황기에 정부가 지출을 늘리고 유효 수요를 창출시키면 경기가 회복된다는 소위 케인즈주의가 떠오르는 계기가 되었다.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이 시기를 전후해 사회주의 세력도 늘어났는데[52] 복지국가 개념도 베버리지 보고서처럼 대공황의 영향을 받았다.

일부에선 제2차 세계 대전이 글로벌 차원에선 대공황발 경제 위기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주장도 한다. 다만 이건 팩트나 선후 관계가 약간 잘못된 게 당장 당시 세계 중심 지역이었던 유럽은 2차대전으로 직접적으로 초토화되어 전후 마셜 플랜으로 대규모 경제부양정책을 받고 나서야 간신히 살아남았지 전쟁 중에는 오늘내일 하는 상황까지 갔고 천만 명씩 죽어나간 중국이나 봉쇄당한 채 마구 두들겨맞은 일본 등도 마찬가지였다. 즉, 대공황이 2차대전의 한 요인을 불러온 건 맞지만 그 2차대전이 경제 위기를 해결해 준 게 아니라 각국 사정에 따라 대공황을 해결하던 와중 파시즘을 대안으로 선택한 지역들에서 2차대전이 터지고 다 같이 망하나 했는데 그나마 추축국 세력이 패배한 후 전후 복구 과정에서 미국의 지원에 힘입어[53] 시장 회복을 유도했기에 당시 세계경제가 대공황의 여진을 극복했다고 보는 게 더 맞을 것이다.[54] 단적으로 전쟁경제는 해롭다.[55]

7. 기타

8. 참고 자료

9. 관련 문서


[1] 사진 속 사람들의 대부분은 주가가 더 떨어지기 전에 빠르게 자신의 주식을 매각하려고 모였다.[2] 미국이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기 전인 1941년까지로 보는 학자도 있다.[3] 대공황 시대의 서막.[4] 대공황 시대의 종료.[5] 광란의 20년대와 금주법 시대는 따로 분류한다.[6] 실제로 이 당시 나치당나치즘을 표방하며 독일인들에게 개혁과 풍족한 삶을 약속했다. 덕분에 본래 지지율 3%에 못 미치는 약소 정당이었던 것이 대공황 이후 10배 이상의 지지율을 가진 정당으로 성장하였다.[7] 실제로 후술되어 있듯 세계 대공황의 경과가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와 유사하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즉, 자본이 몰리면서 시장에 거품이 형성되었는데 정부가 이를 방임하고 제때 걷어내지 못했다는 견해.[8] 근거: #[9] 빅토리아 시대 이후 금욕적 삶이 남아 있던 당시 영국에서 해트리의 탐욕주색잡기와 난잡함은 사회적으로 알려져서 치명적이었다.[10] 10월 24일부터 29일까지 5일 사이에 기초주가지수(다우 지수)가 299.47에서 230.07으로 약23% 빠졌다.[11] 1인당 GDP도 1929년에 859달러였던 게 1933년까지 455달러로 반토막났다. 이후 대공황 이전 수치는 1941년 969달러를 기록하면서 겨우 회복했다. 참고자료 참고로 당시 미국의 1인당 GDP를 미국 소비자물가지수에 기반하여 2024년 가치로 환산하면 각각 15694달러/10934달러/20591달러다.[12] 9백억 달러 대에서 1백억 달러 대로 축소되었다.[13] 단적으로 비교하자면 닷컴 버블 막바지 시절에 미국 개인들의 가계자산대비 주식비율이 48%였는데, 대공황 직전에는 그것이 무려 51%를 넘었다. 참고로 미국 개인들의 가계자산대비 주식비율은 2024년 현재까지도 저 대공황 시절 비율을 갱신하지 못하고 있다.[14] 한국의 경우 2011년 기준으로 272억 달러로 명목 GDP 8325억 달러의 3%에 그친다. 근데 PPP는 더 높고 경상수지 흑자는 더 떨어질 계획이다.[15] 다시 강조하지만 20세기 초엽 당시 서구는 의외로 국제투자가 극히 활발했다. 오히려 규제가 없었다는 점에서는 지금보다 더 자유롭다고 보는 견해도 많다.[16] 다만 결과론적으로 보면 그렇다는 것이지 이게 현실에선 참 그 타이밍 찾기가 여간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긴 하다. 어떤 방향과 방식으로 시장에 개입하든 경제에 충격은 오니까.[17] 광란의 20년대에는 이러한 경제적 호황이 영향을 끼쳤다.[18] 다만, 오키시오 정리는 마르크스적인 모델이 아닌 스라파적인 모델을 가정하였다는 비판을 비롯해 마르크스 경제학과는 괴리가 있다는 비판이 존재하는 등, 현재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법칙을 완전히 부정한다고 보기는 어렵다.[19] 다만 마르크스주의에서의 이윤율 개념은 (잉여가치)/(총자본)의 개념으로 설명된다. 즉, 주류경제학과의 이윤율의 정의 자체가 달라, 주류경제학적인 도구들로만은 다루기는 어렵다는 것이다.[20] 엠스 전보 사건은 일부 역사학자들이 근대현대로 나뉘는 진정한 분기점으로 규정할 만큼 비중 있게 주목하고 있는 사건이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만약에 이 세계 대공황이 계획된 인재라고 결론짓게 되었다간 최소한 기존 근대라는 역사에서 '현대'라는 새로운 역사가 등장하는 게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현상이라는 다소 경악스러운 결론으로 직결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21] 이 음모론이 확장되어 사실 유대인 배후 세력들이 자기 나라의 건국에 호의적인 여론을 만들어 유도하기 위해 2차 대전까지 일으켰다는 새로운 가설로 발전하게 된다. 하지만 정작 배후로 지목된 로스차일드 역시 대공황의 큰 피해자 중 하나였다.[22] 여기서 말하는 술은 당연히 알 카포네 같은 뒷거래상들이 유통시키던 밀주다. 금주법이 악명을 떨치던 시절이기 때문.[23] 굶어죽었다는 것은 아사뿐만 아니라 영양실조 때문에 질병이나 부상에 취약해져 회복하지 못하고 사망하는 비율이 높아졌다는 것도 포함한다. 양이 제한되고 영양가가 떨어지는 게 문제였지만 정부, 사회복지시설, 교회 등에 의한 배급은 이루어졌기 때문에 미국에서 글자 그대로 아사한 인구는 수만 명에 한 명 꼴이었다. 물론 그렇게 봐도 당시 억 단위에 이르던 미국의 인구에서 만 단위의 아사자가 나왔다는 거니 산업화된 근현대 문명 국가에서는 한 명도 나오기 힘든 엄청난 아사자가 나온 것은 맞다.[24] 보면 GDP 150%가 넘게 빚이 쌓여있었다.[25] 영상 매체가 생겨난 이후 20세기 인류가 직면해 온 세계를 뒤흔든 전대미문의 위기의 이면을 다룬 다큐로, 시간 순서 중반쯤에 경제 공황의 미국 분위기가 일부 자세히 나온다. 2020년 9월 19일 방영.[26] 1932년 선거 때부터 1938년 중간선거 이전까지 미국 민주당의 의석은 상하원 의석의 2/3 수준을 넘어 3/4 수준에 도달했을 정도였다. 반대로 공화당은 1940년대에 사라질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이 나올 정도.[27] 크루그먼은 진정한 코미디는 80여 년 뒤 일부 멍청한 후손들이 이걸 집어들고 재정정책이 대공황에 별 효력이 없었다고 난리를 친다는 점이라고 자칭 신자유주의자들을 비꼬기도 했다.[28] 좌파, 우파 모두 서로 싸우기 바랐지만 전쟁이 터지고 나니 눈 앞의 적을 해결하기 위해 대통령인 루즈벨트의 정책과 명령을 군말 없이 따르며 국가 계획이 막힘없이 바로바로 진행되는 모습을 보였다.[29] 사실상 장애인을 제외한 모든 성인층이 노동을 한다는 이야기다.[30] 1941년 9.9%였던 실업률이 1942년 4.7%, 1943년 1.9%, 1944년 1.2%를 기록했다. #[31] 특히 영국과 소련은 나치 독일의 공격 때문에 군수공장 만들기도 벅차 아이들에게 줄 아이스크림도 못 만들었다.[32] 다만 전쟁 때문에 통계상의 경제 수치가 좋아지긴 했어도, 그게 실제 국민의 삶에 도움이 되는 방향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참고 병사 징집으로 인해 실업률이 하락하고, 전쟁을 위한 정부지출의 증가로 GDP가 증가한 것이다.[33] 특히 동맹국이지만 언제든 적이 될 수 있는 프랑스와 영국을 완전히 휘어잡아 2인자로 만들었다.[34] 다만 정책적으로는 연동되는 측면은 있었다.[35] 물론 균형재정을 완전히 버렸다는 건 아니고 '정기'와 '비상' 예산을 나누어 비상시엔 한시적으로 수입보다 지출을 늘려 균형재정을 후퇴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했다.[36] 캘리포니아 사람들은 이들이 어디에서 왔건 무조건 오키(Oki)라고 불렀는데, 오클라호마 출신 뜨내기란 뜻.[37] 1932년 11월 총선까지 나치당은 원내 1당 지위를 지키고 있었지만 득표율은 30% 중후반에 고착되어 있었다.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 직후 치러진 1933년 3월 총선에서야 나치당의 지지율은 43%를 기록할 수 있었다.[38] 다만 아우토반의 경우 나름 건설 경기 부흥으로 경제에 기여하겠지 생각하고 추진한 사업이었지만 독일인들이 건설 노동자 취업을 꺼린 탓에 의외로 고용 효과는 신통치 않았다고 한다. 이미 독일 경제가 궤도에 올라 3D 업종 기피 현상이 벌어졌기 때문인데 이 문제는 결국 서독에서 튀르키예(터키)인 노동자들을 대거 데려오는 것으로 해결했다.[39] 오스트리아와 합병한 후에도 한 것이 제일 먼저 국립은행에서 금을 빼앗은 것이었고 이후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등 다른 나라를 침략하면 항상 금부터 뺏었다.[40] 우크라이나에서만 벌어진 것은 아니고 가뭄으로 러시아 서남부, 카자흐스탄, 벨라루스 등에서도 벌어졌다.[41] 이 쌀 소동으로 조선총독부 출신인 데라우치가 이끄는 번벌내각이 총사퇴했다. 이에 일제는 조선에서 가져갈 쌀을 늘릴 궁리를 하게 되는데... 산미증식계획 문서 참고.[42] 다만 이때도 경제성장률 자체는 준수했다.[43] 관동대지진은 1922년 국민총생산액의 1/3에 이르는 피해액을 남겼다.[44] 금 수출 금지정책 중단. 당시 일본은 열강으로 인정받던 5개국(영국,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중 금 수출 통제를 마지막까지 시행하던 국가였는데 국가재정 긴축에 들어갔다.[45] 이 과정에서 일본에서 5.15 사건2.26 사건이 터졌다.[46] 다만 호황기를 구가한것은 상하이등의 도시지역 한정으로, 중국의 농촌은 대공황으로 인한 농산물가격의 폭락과 수출감소, 1931년 중국 대홍수와 가뭄 등의 자연재해가 겹쳐 다른 나라들과 다르지 않은 불황을 겪어야 했다.[47] 중국은 경제규모에 비해 은이 많이 생산되는 나라가 아니라서 화폐가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해외에서 은을 많이 수입해와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은이 수입되지 않으면 당연히 디플레이션이 유발될 수밖에 없었다.[48] 당시 중국의 경제 통계를 보면 1950년대에는 전후 복구와 물가안정으로 평균성장률이 +9%가 나왔다가 대약진 운동으로 농업 생산량이 1950년대 초반 수준으로 급락하면서 -20%대 성장률과 수천만의 아사자가 나왔고 대약진 운동이 수습된 시기에는 경제성장률이 +20% 가까운 수치가 나왔다가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경제성장률이 다시 마이너스로 전환되었고 이후 홍위병이 하방되자 2년간은 경제성장률이 회복되는 등 오락가락의 극치를 달렸다. 물론 그 사이에 대만과 홍콩이 안정적인 성장을 해서 국민소득이 중국의 10배를 넘기 시작했다.[49] 시기적으로 보아 1차 대전 참전 군인이 전역 후 복직했으나 대공황이 터지면서 실업자가 된 상황으로 보인다.[50] 21세기에도 3가지 일과 3가지 언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은 직종을 가리지 않고 고급인력에 속한다.[51] 대침체 당시에도 고급 인재들은 자신의 분야에서 조건을 엄청 낮춰야 해서 그렇지 구직 자체가 안 되지는 않았다. 다만 일반적으로 고등 교육을 받은 인력들의 경우 사무직에 특화된 사람들이 절대다수인데 취업난이 극도로 심해진 상황에서 겨우 구한 노동직마저도 적응하지 못하고 나가떨어지는 사람이 수없이 많았다는 것으로 그 참상을 짐작 가능하다.[52] 케인즈주의와 사회주의는 엄연히 다른 사상이다. 비슷한 점도 있지만(사민주의는 케인즈 사상을 받아들인다.) 케인즈주의는 자본주의 내에서 정부의 역할을 강조하는 거고(수정자본주의) 사회주의(맑시즘)는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극복하자는 거다. 애초에 지향점이 다른 셈.[53] 미국이 결코 돈이 남아돌아서 지원을 해준 게 아니었다. 미국에도 상당한 부담이 되었지만 경험으로 고립주의는 또다른 불황을 가져온다는 믿음과 대전 말기부터 대두된 소련의 확장주의에 대한 경계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54] 물론 이것도 우연성의 측면에서 보자면 극단적일 경우 그냥 경기가 회복할 시기가 되었으니 회복된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만.[55] 대표적으로 2차대전의 종전과 함께 전쟁특수가 끝나자 1945년부터 1947년까지 3년간 미국의 실질 GDP 성장률은 음수를 기록했다. # 괜히 미국이 헐값에 최신 군함이나 무기를 폐기처분시키고 동맹국에게 무상으로 나눠준 게 아니다. 만든 값을 생각하면 아쉽지만, 그걸 보수하고 유지하는 데는 그보다 더 큰돈이 들어간다.[56] 사실 호주처럼 고기로 연명한 국가가 있기는 했는데, 이쪽도 소고기나 돼지고기가 아니라 그냥 토끼가 넘쳐서 토끼고기를 먹었을 뿐이었다.[57] 그나마 부대찌개는 멀쩡한 것으로 만들어졌지만 꿀꿀이죽은 개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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