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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8 14:44:13

박진순

파일:박진순.jpg
<colbgcolor=#0047a0><colcolor=#fff> 출생 1898년
러시아 연해주 파르티잔스크
사망 1938년 3월 19일 (향년 40세)
러시아 모스크바
본관 고령 박씨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한인사회당2.3. 코민테른2.4. 고려공산당2.5. 이후의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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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6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박진순 본인이 작성한 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1898년 러시아 연해주 파르티잔스크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한다. 그는 이력서에서 자신이 고성 박씨이며, 16세기 초 선조가 모든 권리와 신분을 박탈당하고 함경북도로 귀양왔다고 기술했다. 그리고 1890년대에 아버지가 연해주로 이주했다고 했다.

이력서에는 그의 출생지가 수찬(파르티잔스크)이라고만 적혀 있지만, 1979년 <원동에서 소비에트 권력을 위해 싸운 한인 국제주의자들>을 집필한 마트베이 티모피예비치 김은 니콜라예프카 마을이라고 좀더 자세히 기록했다. 니콜라예프카는 한인 김공심(김막심 니콜라예비치)에 의해 개척된 마을로, 그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인들은 신영동(新營洞)이라고 불렀다.

박진순은 1905년부터 한인학교를 다녔으며, 1912년 러시아 학교로 진학하여 1916년까지 학업을 이어갔다. 마트베이 김에 따르면, 박진순이 다닌 러시아학교는 한인들이 다우지미 또는 큰영이라고 부르던 블라디미로-알렉산드로프스크시에 있었는데, 이 학교에서 자신의 사상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준 교사 А. Н. 야료멘코를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박진순은 그를 통해 사회주의 사상을 습득하고, 러시아에서혁명운동의 전개과정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러시아혁명 이후 내전 기간 자신이 쓴 일기를 토대로 <공산주의자의 일기(Дневник Коммуниста)>를 펴낸 야료멘코는 1918∼1919년 올가 지역에서 제자인 박진순과 함께 빨치산 활동을 했음을 기술했다.

그러나 정작 박진순은 이력서에서 자신이 1917년 러시아 혁명 이전에는 사회주의자가 아니었다고 기술했다. 그는 1915년에 안중근의 전우였던 김응렬이 조직한 비합법 혁명조직인 ‘대한독립단’에 입단했으며, 1917년 2월혁명 직후에는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국민회의 비서로 일했다는 것이다. '대한독립단'의 실체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알려진 바 없다. 박진순은 1937년 진술서에서 자신이 1917년 5월까지 혁명적 민족주의자였으며, 이상적인 정부 형태는 민주공화국이라고 여겼다고 진술했다.

2.2. 한인사회당

1917년 4월, 이동휘가 '독일정탐', '동중철도 파괴공작'의 주도인물이라는 혐의로 러시아 헌병대에 체포되어 군감옥에 수감되었다. 이후 이동휘는 하바롭스크로 이감되었다가 다시 아무르주 알렉세예프스크의 군감옥으로 이감했다. 박진순은 2명의 동지와 함께 이동휘 석방을 위한 대표로 선정되어 러시아 정부 당국과 교섭했다. 그러나 교섭은 실패로 돌아갔고, 이동휘는 7개월이 지난 11월 하순 정권이 뒤집히고 나서야 석방될 수 있었다.

박진순은 자신의 이력서에서 1917년 5월부터 볼셰비키의 강령을 받아들여 한인들 사이에서 볼셰비키의 정신을 확산하는 운동을 하였다고 기술했다. 그는 자신이 한인사회당 창립대회 소집을 위한 조직위원회에 들어가 1918년 4월부터 열린 위원회의 위원을 맡았다고 이력서에 기록했다. 그러나 ‘한인사회당 창립대회 소집을 위한 조직위원회’는 박진순의 이력서 외에는 발견되지 않는다. 더구나 박진순이 한인사회당 창립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다는 기록은 그의 이력서에서만 찾을 수 있다. 한인사회당 발기인 중 한 명이고 창립대회에 참가하였던 이인섭의 회고에도 박진순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1918년 6월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개최된 제2차 전로한족중앙총회에 참석한 그는 얼마 후 체코 군단의 봉기가 일어나고 백군과 외국군이 연해주 일대를 장악하자 올가로 향했다. 1919년 4월 25일 블라디보스토크 교외에서 열린 한인사회당 제2차 당대회에서, 그는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대회에서는 한국 혁명이 나아갈 방향에 대한 논의를 한 후 강령을 채택하였다.

1919년 3월 초 모스크바에서 결성된 코민테른에 가입하기로 하고 박진순, 이한영, 박애 등 3명의 대표를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대회가 끝난 후 3개월이 지난 7월, 3명은 모스크바를 향해 출발하였다. 그러나 내전이 진행되고 있던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모스크바까지 가는 길은 순탄치 않았다. 이한영은 옴스크에서, 박애는 예카테린부르크에서 병이 들어 계속 갈 수가 없었다. 박진순만이 무사히 모스크바에 도착할 수 있었다.

2.3. 코민테른

파일:코민테른대회에 참석한 박진순.jpg
1920년 7월 19일부터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제2차 코민테른 대회에 참가한 박진순(빨간 원으로 표시된 인물). 그의 바로 왼쪽에 있는 사람은 다름아닌 블라디미르 레닌이다.

1919년 11월 말 천신만고 끝에 모스크바에 도착한 박진순은 먼저 한인사회당 당원 명부와 한인사회당 2차 당대회 결과를 밝힌 보고서 <조선에서 사회주의운동(Социалистическое движение в Корее) 을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 제출하고, 코민테른에 가입의사를 밝혔다. 이 보고서는 곧바로 코민테른의 기관지인 <공산주의 인터내셔널(Коммунист И нтернационал)> 7-8호 합본에 게재되었다.

또한 그는 러시아 정부 외무인민위원부와 교섭에 나섰다. 1920년 1월 러시아 SFSR 외무인민위원 대리 레프 카라한에게 편지를 보내 러시아혁명이 아시아의 피압박 민족들과 국제적 제휴를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리고 동아시아에 사회주의 사상을 확산시키기 위한 출판사와 선전부를 설립할 자금을 한인사회당에게 지출해 줄 것을 요청했다. 5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전권대표로 한형권이 도착하자, 그와 협력하여 러시아 정부로부터 금화 200만 루블을 제공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1920년 6월, 박진순은 다가오는 코민테른 제2차 대회 참석을 준비했다. 그는 당시 코민테른 의장이던 지노비예프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에게 코민테른 대회 석상에서 한국문제와 동양문제에 대한 보고를 맡겨달라고 요청했다. 그해 7월, 박진순은 코민테른 제2차 대회에 의결권을 가진 정식 대의원 자격을 가지고 참석하였다. 민족식민지문제위원회에 배속되어 그 문제에 대해 보고를 하기도 했다. 대회 마지막 날인 8월 7일, 박진순은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대회가 끝난 뒤, 박진순은 '코민테른 재외전권위원'이라는 직위를 가지고 9월 초 상하이로 향했다. 그의 임무는 동양혁명을 촉진할 한, 중, 일 세 나라 혁명가들의 연합기관인 ‘동양공산당’을 조직하는 것이었다. 또한 앞서 지급받기로 약속받은 200만 루블 중 40만 루블을 먼저 받아냈다. 이때 그는 40만 루블이 한인사회당 중앙위원회에 지급되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이것은 이후 독립운동가들 사이의 분열을 야기하는 요인이 된다. 자세한 내용은 국제공산당 자금사건 참조.

상하이에 도착한 박진순은 이동휘 등 한인사회당 동지들을 만나고 중국과 일본의 공산주의자들을 접촉하며 ‘동양공산당’ 조직 준비에 착수했다. 그는 바쁘게 움직였다. 당시 상하이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던 러시아 외무인민위원부 원동전권위원 빌렌스키가 파견한 보이틴스키와 김만겸이 코민테른 동아비서부를 설치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동아비서부는 박진순의 지휘 아래로 들어와야 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박진순이 모스크바를 떠난 직후인 1920년 9월 15일,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원동에 코민테른 비서부를 조직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곧 동양민족부를 중심으로 비서부 조직사업이 착수되었다. 1921년 1월 15일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상무국은 러시아공산당 시베리아국 동양민족부를 코민테른에 이관하고 슈먀츠키를 원동 주재 코민테른 대표자로 임명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에 따라 이르쿠츠크에 “원동의 모든 공산주의사업과 일반적인 혁명사업을 조정하는 기관”으로 코민테른 원동비서부가 조직되었다. 조선문제에 대한 결정권도 코민테른 원동비서부로 이관되었다. 슈마츠키가 전권위원을 맡았고, 보이틴스키가 책임비서에 선임되었다.

코민테른 원동비서부의 조직은 ‘코민테른 재외전권위원’으로서 박진순의 직위를 정지시킨다는 것을 뜻했다. 코민테른 동아비서부도 역시 해체되었다. 이는 코민테른의 동양혁명 노선이 ‘지원’에서 ‘직접 지도’로 전환되었음을 의미했다. 물론 박진순이 공식적으로는 여전히 ‘코민테른 재외전권위원’이라는 직위를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그가 그 직위를 맡을 수 있었던 이유는 코민테른 제2차 대회에서 한인사회당이 코민테른의 지부로 가입하고 한국혁명에서 그 역할을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 코민테른은 한인사회당을 동양혁명의 중추기관으로 인정하고 박진순을 통해 한인사회당을 간접적으로 지도하고 후원하는 역할을 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코민테른 원동비서부의 설립은 기존에 박진순이 해왔던 사업을 모두 부정하는 조치였다.

2.4. 고려공산당

이에 박진순은 활동의 방향을 고려공산당 창당으로 바꾸었다. 한인사회당 중앙위원이었던 박진순은 1921년 4월 1일 이동휘 등과 함께 ‘한인사회당총간부대표’의 명의로 제3회 한인사회당 대표회 소집통지서 를 공표했다. 하지만 상하이에서 한인사회당을 고려공산당으로 바꾸려던 시도는 뜻하지 않은 분열을 불러오게 된다.

당시 상하이에는 1920년 5월경 조직된 한국공산당이 활동하고 있었다. 한국공산당은 앞에서 살펴본 코민테른 동아비서부의 김만겸과 상해 임시정부 내 한인사회당의 연합전선이었다. 여기에 상해의 저명한 독립운동가들인 여운형, 조동호, 안병찬, 최창식 등도 가담하였다. 즉 한국공산당은 상해의 한인사회당 세력이 코민테른 동아비서부의 협조를 얻어 진보적 민족주의자들까지 포함하여 전한국의 공산당을 창건하기 위해 조직한 기관이었다.

그런데 1920년 겨울 박진순이 “엄청난 양의 돈과 상해에서 비슷한 대회를 소집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상해로 오자 한인공산당 내 한인사회당 세력과 김만겸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 사이에 알력이 생겨났다. 이 모스크바 자금의 처분권을 한인공산당에 넘기라는 요구를 거부하면서 이동휘는 3월 20일 열린 중앙총회에서 “자기와 김립, 이한영은 한인사회당 간부요 공산당원은 아니라”고 하며 한인공산당에서 탈당하겠다고 공식 선언하였다.

이를 계기로 한국공산당의 남은 세력들은 이르쿠츠크 그룹과 결합하였다. 김만겸과 안병찬은 1921년 5월에 이르쿠츠크에서 열린 고려공산당 창립대회에 한국공산당을 대표하여 참가하였으며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그 후 상해에서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상해지방위원회를 조직하고 그 위원이 되었다.

한편, 박진순이 주도한 한인사회당 3차 당대회는 1921년 5월 20∼23일에 상하이 프랑스 조계 내에서 개최되었다. 한국 내지, 중국, 만주, 일본 등지의 한인 공산단체를 대표하는 30여 명이 참가하였다. 러시아지역 공산단체 대표자들은 출석하지 못했다. 다만 이동휘, 박진순, 김립, 김하구, 장민섭, 조응순 등이 노령 대표를 자임하였다. 대회 마지막 날 참가자들은 한국 사회주의운동을 지도할 최고기관인 고려공산당이 성립되었음을 선포하였다. 당의 중앙기관은 ‘고려공산당 중앙 총감부’로 명명되었다. 박진순은 17명으로 구성된 중앙총감부 위원에 선출되었다.

새롭게 창립된 고려공산당은 코민테른과의 연락을 위해 3명의 전권대표단을 선정했다. 박진순은 이동휘, 홍도와 함께 전권대표단에 선정되었다. 이들은 대회가 끝난 지 약 한 달이 지난 6월 18일 모스크바로 출발하였다. 시베리아 경유 노선을 택한 홍도와 달리 이동휘와 박진순은 뱃길을 택했다. 베를린으로 유학을 가고자 했던 이극로가 동행하였다. 일행은 4개월의 긴 여정 끝에 10월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11월 26일 박진순은 이동휘, 홍도와 함께 레닌을 접견하였다. 이때 그는 자유시 참변의 부당함을 호소하는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레닌을 접견한 이후 대표단은 본격적인 외교전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당시엔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인사들이 안발 앞서 모스크바에 와서 자신들의 입장을 코민테른에 전달했기에 그들의 우세가 굳어져 있었다. 박진순을 비롯한 상해파 고려공산당 대표단 이 상황을 역전시키고자 했다. 그들의 외교 노력은 전방위적이고 다층적으로 전개되었다. 그 결과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산하에 한국 사회주의자들의 분쟁문제를 다룰 한국위원회가 설립되었다.

한국위원회에서는 1921년 11월 15일 이른바 ‘11월 결정서’로 불리는 한국문제 결정서를 내놓았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한국위원회는 이듬해인 1922년 4월 이른바 ‘4월 결정서’로 불리는 한국문제 결정서를 또 내놓았다. 이것은 ‘11월 결정서’ 이후에도 해결되지 않은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4월결정서’는 2항에 징계안을 제시했다.
“박진순, 박애, 최고려, 김규식 동무는 고려공산당이 통합될 때까지 당 사업에 직접 간여함을 금지한다”

당무정지의 처분을 받은 후 근신 기간이 여러 사유로 길어지자, 박진순은 그 기회를 이용해 학업을 계속하고자 1922년 모스크바국립대학교 사회학부에 입학하여 1925년 졸업하였다. 그는 모스크바 대학에 재학하면서 동방노력자공산대학, 국제사관학교에 강사로 출강하며 유물사관 과목을 가르쳤다.

2.5. 이후의 행적

1925년 여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와서 고려공산당창립대표회준비위원회(오르그뷰로)의 권유에 따라 중국 북간도의 당 학교와 신문 편집 사업에 관여하였다. 1925년 10월 천도교 산하 단체인 조선농민사의 농민인터내셔널[크레스틴테른] 가입을 위한 해외 대표로 선정되었다. 1926년 초 조선농민사 대표단의 일원으로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활동하였다.

박진순은 1926년 6월부터 1927년 1월까지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서 조선 문제에 관한 보고자 자격으로 일했다. 그는 1929년 중국 간도에서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 기관지 <볼셰비키>의 편집에 참여하였으며, 1936년 러시아 모스크바에 있는 외국인노동자출판사 조선과에서 교정인으로 근무하였다.

그러나 1937년 이오시프 스탈린대숙청이 그를 덮쳤다. 테러 단체에 참여했다는 혐의로 체포된 그는 소련 최고재판소 군협의회에서 총살형을 선고받았고, 1938년 3월 19일 총살되었다. 그 후 1956년 7월 18일 소련 최고회의 군협의회 결정으로 복권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박진순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