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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29기 중에서 유일하게 개그콘서트에 출연하지 못했다. }}}}}} || 역대 진행자
| 주요 수훈 이력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대한민국 문화훈장 수훈자 | |||||||||||||||||||||||||||||||||||||||||||||||||||||||||||||||||||||||||||||||||||||||||
<colbgcolor=#980000><colcolor=#EDE4D3> 연도 | <colbgcolor=#EDE4D3><colcolor=#980000> 2022년 | |||||||||||||||||||||||||||||||||||||||||||||||||||||||||||||||||||||||||||||||||||||||||
이름 | 송해 | |||||||||||||||||||||||||||||||||||||||||||||||||||||||||||||||||||||||||||||||||||||||||
분야 | 희극인, 연극인 | |||||||||||||||||||||||||||||||||||||||||||||||||||||||||||||||||||||||||||||||||||||||||
금관문화훈장(1등급) | ||||||||||||||||||||||||||||||||||||||||||||||||||||||||||||||||||||||||||||||||||||||||||
연도 | 2014년 | |||||||||||||||||||||||||||||||||||||||||||||||||||||||||||||||||||||||||||||||||||||||||
이름 | 송해 | |||||||||||||||||||||||||||||||||||||||||||||||||||||||||||||||||||||||||||||||||||||||||
분야 | 희극인 | |||||||||||||||||||||||||||||||||||||||||||||||||||||||||||||||||||||||||||||||||||||||||
은관문화훈장(2등급) | ||||||||||||||||||||||||||||||||||||||||||||||||||||||||||||||||||||||||||||||||||||||||||
연도 | 2003년 | |||||||||||||||||||||||||||||||||||||||||||||||||||||||||||||||||||||||||||||||||||||||||
이름 | 송해 | |||||||||||||||||||||||||||||||||||||||||||||||||||||||||||||||||||||||||||||||||||||||||
분야 | 희극인 | |||||||||||||||||||||||||||||||||||||||||||||||||||||||||||||||||||||||||||||||||||||||||
보관문화훈장(3등급) | ||||||||||||||||||||||||||||||||||||||||||||||||||||||||||||||||||||||||||||||||||||||||||
연도 | 2001년 | |||||||||||||||||||||||||||||||||||||||||||||||||||||||||||||||||||||||||||||||||||||||||
이름 | 송해 | |||||||||||||||||||||||||||||||||||||||||||||||||||||||||||||||||||||||||||||||||||||||||
분야 | 희극인 | |||||||||||||||||||||||||||||||||||||||||||||||||||||||||||||||||||||||||||||||||||||||||
화관문화훈장(5등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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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선정 · 등재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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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광역시 달성군 홍보대사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송해† | 신유 | 크리스 존슨 | 전무송 | 최종원 | 보겸 |
}}} ||
<colbgcolor=#0047a0><colcolor=#fff> | |||
본명 | 송해 (宋海)[1] | ||
출생 | 1927년 4월 27일[2] | ||
황해도 재령군 재령면[3] (現 황해남도 재령군 재령읍) | |||
사망 | 2022년 6월 8일[4] (향년 95세) | ||
서울특별시 강남구 도곡동 삼성아파트 자택 | |||
본관 | 은진 송씨 (恩津 宋氏)[5]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6] | ||
장지 |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읍 기세리 546 송해공원[7]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8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text-align: left" | <colbgcolor=#0047a0><colcolor=#fff> 신체 | 158cm[8], 250mm, A형 | |
가족 | 아내 석옥이(1934년 3월 3일~2018년 1월 20일) 장녀 송숙경[9] | 차녀 송숙연 장남 송창진(1966년~1986년)[10] 사위 양희천 외손주 김혜림, 양정우, 양정하 | ||
학력 | 해주음악전문학교 (성악과 / 졸업)[11] | ||
병역 | 대한민국 육군본부 통신병 만기전역[12] | ||
보훈 | 참전유공자 (6·25전쟁) | ||
상훈 | 화관문화훈장 (2001년)[13] 보관문화훈장 (2003년) 은관문화훈장 (2014년) 기네스 세계 기록 (2022년)[기록내용] 금관문화훈장 (2022년, 추서) 대통령표창 2회[15] KBS 한국방송 명예사원 | ||
종교 | 불명[16] | ||
데뷔 | 1955년 창공악극단 | ||
별명 | 국민MC, 일요일의 남자, 국민 오빠, 국민 아버지, 국민 할아버지, 딴따라, 해형 | ||
취미 | 운동, 목욕[17] | ||
좋아하는 음식 | 소주[18], 우거지 국밥[19], 소고기, 된장찌개, 더덕구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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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국노래자랑 사회자, 일요일의 남자 송해가 인사부터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다시 한 번 (크게) 안녕하세요~"
"저 어디 위에 계신 분들, 저 어디 밑에 계신 분들 안녕하세요~"
송해의 전국노래자랑 오프닝 멘션 2[20]
대한민국의 방송인."여러분, 안녕하세요~ 다시 한 번 (크게) 안녕하세요~"
"저 어디 위에 계신 분들, 저 어디 밑에 계신 분들 안녕하세요~"
송해의 전국노래자랑 오프닝 멘션 2[20]
본래는 성악을 전공한 가수였으나, 코미디언으로 연예계에 데뷔하여 코미디언 활동을 가수 활동보다 더 많이 했기에 사실상의 본업은 코미디언이며, 2022년 사망 직전까지 현역 최고령 MC로 활동한 인물이다.
2. 생애
송해는 생전에 방송사를 넘나들며 왕성하게 활동한 덕분에, 그의 생애에 대해 본인이 직접 출연해 이야기한 방송 자료, 인터뷰 자료가 꽤 많이 누적된 편이다. 예능 포맷의 프로그램 중에 직접 그가 출연하여 그의 인생을 돌아본 작품으로는 힐링캠프(2014, SBS), 나를 돌아봐(2015, KBS2), 대화의 희열(2018, KBS2), 라디오 스타(2021, MBC) 등이 있고, 다큐멘터리로는 실향민으로서의 아픔을 언급한 송해야 고향가자(2019, MBN)가 있으며, 다큐멘터리 영화로는 송해 1927(2021)이 있고, 그의 일생을 전기 형태로 극화한 예로는 여러분 고맙습니다 송해(2022, KBS2[21])가 있다. 그 외에도 아침마당 출연을 자주 한 편으로, 패널로 출연해 진솔하게 이야기를 풀어낸 것이 기사 자료로 전해지는 예가 많다.일반적으로 고령자의 기억은 명확치 않거나 옛 시대의 저장매체 부족 때문에 검증이 어려운 경우가 많아 후대 사람이 그들의 생전 기록을 정리할 때 어려움을 겪을 때가 많다. 그리고 연예인들은 인터뷰에서 자신을 추켜세우거나 예능적 재미를 주려고 과장을 섞기도 한다.[22] 그러나 송해의 인생에 대한 회고는 비교적 명확하고 일관성이 있어 그런 문제가 적은 편이다. 물론 출생 연도에 대한 부분이나 몇몇 에피소드는 그의 기억의 한계 때문이거나 잘못된 기록을 방치한 때문이거나 기자 등 인터뷰어가 잘못 받아적은 탓에 오류가 몇차례 발견되었으나, 객관적 자료나 교차검증을 가능케 하는 타인의 인터뷰 등이 많아서 오류를 어렵지 않게 잡아낼 수 있다.
이하 서술은 위에 언급된 자료나 뉴스 인터뷰 등을 바탕으로 정리한 것이다.
2.1. 데뷔 이전
본인이 직접 언급한 바에 따르면 송해는 1927년 4월 27일, 황해도 재령군 재령읍에서 태어났다. 그는 자신의 고향인 재령평야를 나무리벌이라는[23] 좋은 쌀이 나는 옥토로 기억하였다. 실제로 나무리가 먹고 입고 쓰고도 남는다는 뜻이라 할 만큼 송해의 어린 시절에는 김소월이 '나무리벌 노래'라는 시에서 언급할 정도로 한반도의 대표적인 곡창지대였다. 그래서, 송해는 자신의 고향인 재령군을 이야기하면서 "나무리뻘 연백평야(재령평야)가 유명하죠. 김제 만경평야를 연상하면 될 거요. 일제의 조선 총독이 나무리뻘 쌀만 먹었다는 얘기가 있잖아요. 밥을 하면 워낙 기름져서 파리가 앉지 못했다는 얘기도 있지요." 라고 이야기를 했을 정도였다.[24]어릴 적부터 끼 많은 개구쟁이로 동네에서 꽤 유명했다고 전해지며, 노래 부르는 것도 좋아했다고 한다. 윤극영의 《반달》 같은 노래를 어렸을 때 불렀다고 한다. 14살 때부터 공연에서 아코디언을 연주했다고 한다. 아버지, 어머니, 형, 여동생이 있었는데, 형은 자신이 해주음악전문학교에 입학할 즈음에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의 갈 길을 가겠다며 집을 나갔다고 한다. 위로 형제가 더 있었지만 영아 사망률이 높던 시기라 숨진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가 소상인이기에 이사를 많이 했는데, 이 과정에서 결석을 많이 하여 소학교는 남들보다 2~3년 늦게 나왔다고 한다. 소학교를 마치고 재령제2중학교를 나왔다고 한다.
1949년 황해도 해주음악전문학교[25]에 만 22세 나이로 그의 끼를 눈여겨 보며 예술을 전폭적으로 지원해 준 어머니의 영향 하에 아버지의 반대를 뚫고 입학해 성악과에 들어가 성악을 공부하였다. 이는 그가 월남 후 남한에서 전공을 살려 방송인의 삶을 산 계기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학교에서는 1년에 한 번씩 경연대회를 했는데, 그때마다 합창단원으로 평양의 모란봉극장 무대에 섰다고 한다. 스스로 이념이나 분단 등을 잘 몰랐던 때로 언급하며, 예술이 좋았고, 평생 그 일을 하고 싶었다고 한다. 전쟁이 터질 때까지 누가 누구의 편을 드는지도 파악을 못했다고 한다.
2.1.1. 6.25 전쟁과 월남
하지만 학업은 오래 가지 못하고, 이듬해인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초기에는 고향(재령)에 머물렀는데, 이 당시 구월산 일대에 활동하던 공산당 유격대의 모병, 대한민국 국군의 북진 후에는 마을 사람들과 같이 2~3천여명 규모의 패잔병의 약탈을 피하려고 인근 마을에 숨었다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1950년 12월 북한군과 중공군이 남하하던 때 다시 나가려는데, 당시 어머니에게 "얘야, 이번엔 조심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이에 "걱정 마세요."라면서 어머니와 여동생을 두고 나왔는데, 그것이 생전의 마지막 인사였다. 조선일보의 6.25 관련 인터뷰에서 밝히기를, 저 대화를 하고 어머니가 준 가래떡이 마지막으로 집에서 먹은 밥이라고 한다. 또한 북한군과 중공군의 진주와 포격을 피해 재령에서 남쪽 항구인 해주항으로 피난을 갔다 보름 정도 걸린 이 길에서 북한군의 포격과 기관총 세례를 피하다 철교에서 떨어져 죽을 뻔했다고 한다.북한 땅이 되어 버린 해주에서 건너편의 섬 연평도로 은밀히 나룻배를 타고 도착한 뒤, 연평도에서 LST선에 타면서 부산까지 내려왔다. 이때 실향민으로 배 위에서 “바다야 내 갈 길 어디냐”는 생각에 지금의 이름, 즉, 바다 해(海) 자를 예명이자 아호로 쓰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는 훗날 주민등록 체계가 확립되고 나서 그의 본명이 된다.
피난선을 타고 도착한 부산항에서 그는 앞 사람만 따라다니다 군에 입대해 통신병으로 복무하면서 1953년 7월 27일 휴전 메시지를 직접 타전하였다.[26] 그때 당시 쓰던 모스 부호를 말년에도 또렷이 기억해내었다.[27] 그리고 당시 군대 선임이 혼자인 그에게 여동생을 소개해 줬는데, 그녀가 바로 그의 부인 석옥이다.[28] 데뷔 이전의 내용이라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송해 역시 6.25 전쟁 참전용사라 국가유공자이며[29], 그의 사후 장례식장에 국가유공자증이 영정과 함께 진열되면서 대중들에게도 알려지게 되었다.
2.2. 데뷔 이후
2.2.1. 코미디언으로서의 활동
1955년, 28세 시절의 송해 (왼쪽) |
사실 그가 코미디계에서 왕성히 현역으로 활동한 기간은 짧게 잡아도 20~30년은 되었고 전국노래자랑 진행이 성공적인 가장 큰 요인은 그의 이러한 코미디 연기 경력이 탄탄한 기반이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가 코미디 연기 당시 가장 잘 하였던 가벼운 딴죽 걸기, 리액션을 하며 판을 깔아주는 빌드업 역할은 그의 진행 스타일에도 그대로 계승되어 활용했다. 그의 진행에서 나오는 익살과 해학은 많은 시청자들을 끌어모을 수 있었다.
2.2.2. 정극 배우 활동
1980년대 당시까지 그를 설명하는 가장 대표적인 직업은 코미디언이었으나, 그는 이미 1960년대부터 다수의 영화 및 TV 드라마에도 출연하였고, 드라마 주제곡도 부르는 등 (당시 가창 앨범),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멀티 엔터테이너의 원형(原型)이라 할 수 있다. 오랜 연예 활동에 비해 정극 연기 경력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나 1980년대까지 약 1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여 어느 정도 중견 연기자 수준의 필모그래피를 갖췄다. 여기에 1990년대 이후로는 전국노래자랑이 소재로 등장하는 드라마나 영화에 특별출연한 예가 몇 차례 있는데 이를 모두 더하면 20여 편 정도의 정극 연기를 하였다.2.2.3. 가수 활동
1970년, 43세 시절의 송해[31] |
2.2.3.1. 가요무대 출연 내역
자세한 내용은 송해/가요무대 문서 참고하십시오.2.2.4. MC 활동
KBS 2TV 개국특집쇼 'KBS 새가족'의 진행을 맡은 송해[32] |
특히 선배 코미디언 겸 MC로 성공한 1세대 전방일(1916~1998)의 영향을 많이 받아 그에게 무대 진행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우고 참고하게 되었고 이후로 능수능란한 화술과 진행 능력, 그리고 정확한 발음으로 1975년 동양방송이 매일 아침 AM 라디오 채널을 통해 방송하던 생활정보 프로그램 '가로수를 누비며'[33]의 진행을 맡아 운전자들 사이에서 '송 기사'라는 애칭을 받는 등 큰 인기를 누렸다. 특히 이때 운전자들이 교통 통신원을 조직하여 그 제보를 활용한 시스템은 현재도 각종 라디오 프로그램이나 교통방송에 쓰인다. '가로수를 누비며'는 매주 일요일 라디오 공개홀에서 공개방송을 했는데 전국노래자랑과 같이 노래 경연을 했고 이는 훗날 전국노래자랑 진행의 밑거름이 되었다. 그러나 1986년 하나뿐인 아들의 오토바이 교통 사망사고 이후 그 충격으로 한동안 모든 방송 활동을 중단하면서 [34] 3년 후 1989년에 14년[35] 동안 맡아온 진행자 자리에서 완전히 내려오게 된다.[36] 그리고 이후 그는 그의 인생을 대표하는 '전국노래자랑'으로 한국 방송사에 남을 전설적 활약을 하게 된다.
2.2.4.1. KBS 전국노래자랑
전국노래자랑 진행 초창기 시절이던 1988년의 송해[37] |
2005년, 78세 시절의 송해[38] |
앞 문단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송해는 하나뿐인 아들을 일찍 잃은 슬픔에 방송을 쉬었으나, 당시 전국노래자랑 PD 안인기(안성기의 친형)는 코미디 프로그램을 연출하면서 송해와 인연이 있어 그의 진행 능력을 눈여겨보다 직접 그를 찾아가 "송 선생님, 이렇게 쉬고 계실 때가 아니올시다. 우리 바람이나 쐬러 다닙시다."라고 하며 그의 방송 복귀를 적극 설득했다고 한다. 송해가 진행을 맡기 전 MC는 당시 KBS 아나운서 최선규로, 최선규는 당시 전문 MC 경험이 부족하다 보니 돌발 상황이 잦은 현장 녹화에서 매끄러운 리액션이 부족했고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지도 못해 출연자들이 부르는 곡을 온전히 이해하기 쉽지 않았던 탓에 적절한 멘트를 하기에 어려움이 있었다.(송해 1927 내 인터뷰 중 발췌) 안인기의 설득 끝에 송해는 전국 노래자랑을 통해 방송에 복귀하였고, 송해는 가수 출신으로 다져진 가창력으로 때때로 분위기를 띄워주고, 서민적이고 푸근한 이미지와 재치 있는 멘트로 방송의 재미를 살렸으며 오랜 진행 경력에서 오는 매끄러운 진행 능력으로 방송의 콘셉트와 완전하게 맞아들어갔다. 이를 바탕으로 송해의 진행은 오래지 않아 전 국민을 매료시켰다. 그때부터 시작된 전국노래자랑과 그의 30년이 넘는 동행은 한국 방송사의 전설 중의 전설로 남게 되었고, 첫 방송 때 이미 환갑을 넘긴 송해는 전국노래자랑 진행을 기점으로 비로소 '인생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말 그대로 전국노래자랑이다 보니 괴짜 참가자들도 한두 번씩 출연하기 마련인데, 가장 유명한 사례로 2010년에 온 몸에 벌들을 붙이고 나온 양봉업자[41]가 있다.[42] 이때 송해가 보여준 대처 능력은 관록의 극치임과 동시에 대인배 인증이라고 할 수 있다. 저 방송 직후 KBS 시청자 게시판은 송해를 찬양하는 글과 저런 사람(양봉업자)을 왜 내보냈냐는 글이 반반이었다. 그 밖에도 특이한 이름인 손고장난벽시 출연자도 있었다.
특히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들에게 인기가 높으며, 80살이 돼도 90살이 돼도 여전히 "우리 오빠", "송해 오빠"[43]로 불리는 자타가 인정하는 "일요일의 남자"가 되었다. 앨범도 내고 개인 콘서트를 연 적도 있을 만큼 노래 실력도 수준급이다. 전국노래자랑에서 초대 가수 오승근의 '내 나이가 어때서'를 열창하는 송해
이러한 꾸준함은 송해에 대한 후대의 평가도 높였다. 젊은 시절 송해는 비슷한 연배의 구봉서, 배삼룡, 서영춘, 곽규석 등에 가려진 인물이었다. 그러나 동년배 다른 스타들이 하나둘 먼저 세상을 떠나거나 은퇴하는 동안 그는 전국노래자랑에서 사람들과 직접 전국 방방곡곡 살을 맞대며 90세를 넘기면서까지 현역으로 왕성히 활동했고 별다른 잡음도 없이 생활한 덕에 국민MC 1인자로 사람들에게 기억되게 되었다.
2010년, 83세 시절의 송해 |
2012년 9월, 전국노래자랑에 불참한 이후로 2022년까지 10년 동안 그의 건강과 관련되어 보도가 자주 되었고, 또래 연예인인 이순재와 함께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기라도 하면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 줄 알고 철렁하는 가슴을 한껏 쓸어내린다는 방송인이었다.
2012년 9월 22일, 전국노래자랑 녹화 촬영을 돌연 불참하였다. 이유는 피로 누적. 그것도 녹화 때 리허설을 하다 피로 누적과 통증 호소 등으로 바로 병원으로 이송되었다고 한다. 일각에서는 80대의 최고령인 점 때문에 와병설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있었지만 건강에는 지장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당시 85세라는 고령의 나이 때문에 건강에 대한 불안은 여전히 주목받을 일. 해당 녹화 진행은 전국노래자랑의 단골 심사위원인 작곡가 이호섭이 하였다. 그리고 추석특집 외국인 노래자랑에도 불참해 후배 방송인 허참이 대신 진행하였다. 2012년 11월 18일에도 개인 사정으로 불참하고 이호섭이 대신 녹화를 진행하였으나, 다음 주 진행에는 문제가 없다고 한다.
2016년 11월 19일 89세로 가수 유지나와 함께 출연한 <아버지와 딸> 무대 |
2016년 11월 19일, 트로트 가수 유지나와 함께 《아버지와 딸》이라는 노래를 발매했고, 발매 당일 MBC 쇼! 음악중심에 특별 무대로 출연하였다. 예상치도 못한 프로그램에 등장하면서 방송 직후 큰 화제를 모았고, 실시간 검색어 상위권에 오르는 바람에 '송해 선생님 무슨 일 터진 줄 알았더니 음중에 친히 나오셨다더라'와 같은 반응도 많았다.
2018년 1월 20일에 아내를 지병으로 떠나보냈다. 부부가 같이 입원했는데, 아내가 먼저 숨진 것이다. 발인식에서 "붙잡으면 무슨 소용 있나. 조금 먼저 갈 따름이야. 열심히 애들 보살필 테니까 마음 놓고"라며 비통한 심경을 전했다.
2019년 12월 31일 다시 입원했는데, 처음에는 폐렴으로 알려졌지만, 이후 감기몸살로 보도되었다. 연합뉴스 보도 때문에 전국노래자랑 측은 2020년 1월 12일 설 특집 녹화는 다른 MC가 대타로 대신 진행할 예정이라고 한다. # 이를 두고 네티즌들은 전국노래자랑의 32년을 맞는 송해의 빠른 쾌차를 바라는 댓글을 올렸다. 이후 회복하여 퇴원했다고 한다.
2.2.5. 코로나19 사태 이후 행보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하여 대부분의 방송이 타격을 입게 되었으며 전국노래자랑도 타격을 입게 되었다. 2020년 3월 1일 ~ 2020년 6월 28일까지는 스페셜 방송 다시보기 형식으로 대체되었으며, 2020년 7월 5일부터 다시 하는 녹화는 지방 촬영 대신 스튜디오에서 연령별 노래자랑과 특별판으로 대체했다.[44]2021년 9월 13일, 유튜브 근황올림픽에 출연해 근황을 알렸다. 몸무게가 7kg 정도가 빠진 야윈 모습으로 등장하여 영화 송해 1927을 홍보하는 시간을 가졌다.
2021년 10월 21일, 전국노래자랑으로 친분이 깊은 現 악단장 신재동이 진행하는 라이브 '콩자반쇼'에 출연하여 영화를 홍보하였으며 고령의 나이인지라 1부만 출연했다.
2021년, 94세 시절 라디오 스타에 출연한 송해[45] |
2022년 1월 31일에는 KBS 2TV에서 그의 일대기를 다룬 뮤지컬 '여러분 고맙습니다 송해'를 방영했다. 공교롭게도 다음날인 2월 1일에 평소 송해가 본인 다음으로 전국노래자랑 진행을 맡으면 좋겠다고 밝힌 허참이 간암으로 인해 72세의 나이에 먼저 세상을 떠났다.[46]
2022년에는 코로나19 예방백신을 3차까지 접종 완료했으나 돌연 코로나19(돌파감염) 확진 판정을 받았다. #
4월부터 정상적으로 전국노래자랑을 녹화하며 MC 활동을 재개한다는 소식이 떴다. 송해, ‘전국노래자랑’ MC 복귀 “9일 녹화 참여”
2022년 5월 14일 오후 서울 아산병원에 입원했다.
2022년 5월 15일에 방영한 전국노래자랑(충남 당진시 스페셜로 스튜디오 녹화로 대체)에서 다음과 같은 클로징 멘트를 하였고, 이 멘트는 송해 생애 마지막으로 전국노래자랑에서 한 클로징 멘트가 되었다.
요즘 철도 좋고, 여러분들 뭐 오랫동안 시달리고, 답답했습니다. 사실 이 화창한 계절이 돌아왔으니까, 여러분들 활짝 열린 세상 나오셔서 금수강산의 맛을 실컷 보시기 바랍니다. 아, 시간이 다 되었죠? 네, 자 저희들은 여기서 끝내겠습니다. (한 박자 쉬고) 안녕히 계십시오.
이날 보조 MC로 같이 스튜디오 녹화에 참여하였고 클로징 멘트도 함께 한 임수민은 송해의 사망 소식이 알려진 뒤인 6월 8일 KBS 뉴스 패널로 참석해 당시 상황을 설명했는데, 그날 녹화일에 송해가 부쩍 건강이 좋지 않아 보이고 멘트 반응도 조금씩 늦는 느낌은 있었지만 그래도 금방 건강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2022년 5월 17일 이데일리 보도에 따르면 송해 스스로 “더 이상 ‘전국노래자랑’ 진행을 맡는 게 어렵지 않겠느냐”는 뜻을 제작진에 밝혔다고 한다.
한마디로 표현해서 여러분들, 하늘을 찌르는 듯한 기분이라고 그러는데 초월한 기분입니다.
2022년 5월 23일 기네스북의 최고령 TV 음악 경연 프로그램 진행자(Oldest TV music talent show host) 등재를 기념하는 공식 인증서 전달식에 참석하여 직접 소감을 밝혔고, 이 날까지도 투병 전에 비해서는 부쩍 수척해졌지만 또렷한 발성으로 소감을 밝히는 등 건강에는 큰 문제가 없어 보였다. 전국노래자랑 제작진 또한 송해의 건강 상태를 최우선으로 고려하며, 지방 현장 녹화는 어렵더라도 스튜디오 녹화라도 진행하는 식으로 송해의 방송 복귀를 고민하던 상황이었다.
2022년 6월, 그가 모델로 출연한 야놀자 앱의 광고가 송출되기 시작했다. 당시 그가 광고 촬영을 하기에는 건강상 여의치 않아서, 방송에 나오는 그의 모습은 AI 합성 기술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주변인들의 진술에 따르면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날까지도 서울 종로구에 그의 이름을 따 조성된 '송해길'을 거닐고 식사를 하였으며 그곳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도 정상 출근하였다고 한다. 이에 대중들은 그가 머지 않아 방송에 복귀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지만...
2.3. 사망
공식 영정[51] |
사실 송해의 건강 상태는 연초부터 좋지 않았다. 3월 코로나19에 감염되어 입원했고, 퇴원 뒤에도 건강이 나빠 5월에도 다시 한 번 서울아산병원에 입원해 치료받았다. 사망 약 2주 전인 5월 23일 기네스 세계 기록 등재 수여식 당시 인터뷰를 가졌는데, 살이 많이 빠지고 수척해진 모습이 나왔다.[53] 사망 4일 전인 6월 4일부터 전국노래자랑의 야외 녹화가 2년 만에 재개되었는데, 장거리 이동 등이 어렵다는 이유를 들어[54] 불참했을 정도로 이미 건강 상태가 상당히 악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5월 입원 당시 언론에는 건강에 큰 이상이 없다고 발표한 바 있지만 언론의 보도와는 달리 건강이 이미 많이 상해있었던 것. 팬데믹 이전까지 전국을 누비며 왕성히 활동하다 갑작스레 장기적 활동 중단에 이르다 보니 건강이 점차 악화된 것으로 보이며[55], 설상가상으로 코로나19 감염이 건강을 크게 상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후배 코미디언 엄영수는 팬데믹만 아니었어도 훨씬 오래 전국노래자랑을 진행할 수 있었을 거라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빈소는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되었고, 장례 형식은 대한민국방송코미디언협회장으로 3일간 치렀다. 원래 5일장으로 예정되었으나, 유족의 뜻에 따라 3일장으로 축소되었다. 유족들은 원래 가족장을 희망했다고 하나, 합의 하에 협회장으로 치러졌다.
장례위원장은 코미디언협회장 엄영수가 맡았으며, 코미디언 석현, 김학래, 이용식, 최양락, 유재석, 강호동, 이수근, 김구라, 코미디언이자 지상파 3사 코미디실장을 맡은 김성규(KBS), 고명환(MBC), 정삼식(SBS)이 장례위원을 맡았다. 조세호, 유동근, 이순재, 이미자, 임성훈, 김흥국, 전현무, 김숙, 임백천, 장민호, 장윤정, 양상국, 쟈니 리, 심형래, 송가인, 정동원, 이상벽, 전원주 등 다수 후배 코미디언, 가수, 배우, 방송인들과 김동연, 황교안, 주호영 등의 정계 인사들이 조문했으며, 나훈아, 이준석, KBS 예능센터장 조현아 등의 인물들이 조화를 보냈다.
그의 사망 소식에 많은 동료 연예인들은 물론 네티즌들도 하나같이 큰 충격이라는 반응과 함께 그를 추모했다. 오랫동안 전국노래자랑을 진행해오며 시청자들에게 친근한 인상을 쌓았고, 무엇보다 현역 최고령 연예인이라는 명예로운 타이틀 때문에 시청자들의 충격이 큰 편이다. 정치권에서도 그의 죽음에 여야를 불문하고 애도를 표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그의 사망 소식을 접한 후 조화를 보냄과 함께 깊은 애도를 표하며 문화체육관광부장관 박보균을 통해 금관문화훈장(1등급)을 추서했다. #
생전에 송해는 죽을 때까지 전국노래자랑을 진행하겠다고 약속했다. 그의 마지막 방송이 사망 1달 전인 5월 15일 충남 당진시 편이기에 송해는 사망 24일 전까지 녹화를 진행했다. 전국노래자랑이 코로나 사태 이후 정상적인 방송 진행을 거의 못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송해는 자신이 시청자들에게 했던 약속을 끝내 지키고 떠났다. 해외 특집은 물론 금강산과 평양에서도 전국노래자랑을 진행했지만 자신의 고향 황해도 재령군에서의 녹화는 끝내 하지 못했다.
미국의 워싱턴 포스트와 AP통신, 일본의 NHK 등 여러 외신들도 송해의 사망을 보도하며 추모했다.
송해의 영결식 현장 |
시신은 김천시 화장장에서 화장했고, 생전에 "석 여사(아내)의 묘지 곁에 영면하겠다는[58] 송해의 뜻을 따라 아내의 고향인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읍 기세리에 안장되었다.
송해의 사망으로 현역 최고령 연예인은 1934년생인 이순재가 되었다.[59] 또한 초대 MC 이한필(위키 리)에 이어 전국노래자랑 역대 MC들 중 두 번째로 세상을 떠났다. 3대 MC 고광수는 송해가 세상을 떠난 지 약 1개월만인 7월 4일에 사망하였다.
그렇게 송해가 세상을 떠나면서 대한민국 1세대 코미디언들은 전부 하늘의 별이 되었고[60], 악극단과 극장에서 시작해 우리네 안방극장을 울리고 웃긴 그들은 대한민국 연예계의 역사 속으로 영원히 남게 되었다.
3. 출연 작품
3.1. 방송
<rowcolor=#fff> 연도 | 방송사 | 제목 | 비고 |
1969년 ~ 1972년 | 파일:MBC 로고(1969-1974).svg | 웃으면 복이와요 | |
1976년 ~ 1980년 | 고전유모어극장 | ||
1981년 ~ 1985년 | 코미디출동 | ||
1983년 ~ 1984년 | 유머 1번지 | ||
1984년 ~ 1986년 | 유모어 극장 | ||
1986년 ~ 1987년 | 명랑소극장 | ||
1987년 ~ 1990년 | 코미디 하이웨이 | ||
1988년 5월 8일 ~ 2022년 5월 15일 | 전국노래자랑 | MC[61] | |
2001년 5월 3일 / 11월 29일 | 아침마당 | with 김인협 | |
2002년 11월 28일 | 피플 세상속으로 - 딩동댕 14년, 송해의 전국노래자랑 출장기 | ||
2003년 8월 14일 | 피플 세상속으로 - 송해의 평양노래자랑 | ||
2005년 2월 10일 | 이홍렬 박주미의 여유만만 | 인생 79년, 방송 50년 - 송해 | |
2008년 2월 18일 | 아침마당 | ||
2010년 8월 2일 | 놀러와 | 300회 특집[62] | |
2010년 11월 26일 | 김승우의 승승장구 | ||
2015년 ~ 2016년 | 나를 돌아봐 | ||
2016년 11월 19일 | 쇼! 음악중심 | [63] | |
2017년 5월 28일 ~ 7월 16일 | 세모방: 세상의 모든 방송 | [64] | |
2020년 1월 5일 | 슈퍼맨이 돌아왔다 | [65] | |
2020년 | 부캐선발대회 | [66] | |
2021년 | 라디오 스타 | ||
2021년 ~ 2022년 | 부캐전성시대 | [67] |
3.2. 영화
<rowcolor=#fff> 연도 | 제목 | 배역 | 비고 |
1966년 | 요절복통 007 | 주연 | |
1967년 | 우주괴인 왕마귀 | 조연 | |
1968년 | 남자 미용사 | ||
단벌 신사 | |||
어머니는 강하다 | |||
1969년 | 남편 | ||
내 팔자가 상팔자 | 주연 | ||
신세 좀 지자구요 | 조연 | ||
특등비서 | |||
1970년 | 구혼 작전 | 주연 | |
남대여 | 조연 | ||
운수대통 일보직전 | 주연 | ||
2002년 | 울랄라 씨스터즈 | 단역 | |
2003년 | 동해물과 백두산이 | 전국노래자랑 사회자 역 | 특별출연 |
2013년 | 전국 노래자랑 | 본인 역 | |
2021년 | 송해 1927 |
3.3. 드라마
<rowcolor=#fff> 연도 | 방송사 | 방송명 | 배역 | 비고 |
2011년 | 드림하이 | 본인 역 | 특별출연 | |
2013년 | 사춘기 메들리 | |||
2015년 | 프로듀사 | |||
2020년 | 기막힌 유산 | |||
2023년 | 웰컴투 삼달리[68] |
3.4. 라디오
<rowcolor=#fff> 연도 | 방송사 | 방송명 | 비고 |
1970년대 초반 | MBC 라디오[69] | 유공쇼 | [70] |
1975년 ~ 1989년 | KBS 라디오서울 | 가로수를 누비며 | [71] |
3.5. 광고
- IBK기업은행
- 나르지오 - 사망 이후로는 장민호로 교체되었다.
- 동국제약 인사돌
- 명인제약 이가탄
- 야놀자 - 상술하다시피 사망 직전에 작업했으며, 사망 이후 강호동이 대신 잠시 출연하였다.
- 하이면
- 상지식품 해바라기표 소세지[72]
4. 음반
자세한 내용은 송해/음반 문서 참고하십시오.5. 노래방 수록 목록
자세한 내용은 송해/노래방 수록 목록 문서 참고하십시오.6. 대인 관계
자세한 내용은 송해/대인 관계 문서 참고하십시오.7. 사건 사고
7.1. 건강보조식품 사기 사건
1996년 11월 8일 MBC 뉴스데스크의 《카메라 출동》에서 송해가 경로잔치에 참석해 8만 원짜리 건강보조식품을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속여 26만 원에 사도록 부추겼다는 내용의 보도를 했고(#, 카메라 출동 영상[73]), 관련 연예인들과 함께 검찰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은 후 # 같은 해 12월 7일 불구속 기소됐다. # 사실 송해보다 선배인 배삼룡, 구봉서와 같은 1세대 방송인들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한편으로는 같은 시기 KBS 추적 60분에서 이상용의 공금 횡령 의혹을 제기한 것에 대해 MBC에서 보복성으로 송해를 건드린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7.2. 2016년 사망 루머
고령 방송인의 대명사격 인물이다 보니 사망할 때까지 주기적으로 사망설이 돌았는데, 그중에서도 2016년 12월 30일에 퍼진 악성 소문이 유명하다. 이 때문에 송해의 기획사에서 서울 경찰청 사이버수사대에 의뢰했을 정도였다. # 그러나 송해 측에서는 되려 오래 살란 의미 아니겠냐며 수사 의뢰를 취소해 허위 사망설 유포자를 용서해줬다. #7.3. 2017년 출연자 성추행 논란
자세한 내용은 전국노래자랑 문서의 사건사고 부분을
참고하십시오.2017년 3월 26일, 전국노래자랑 서산시 편에서 당시 초등학교 2학년인 남성 참가자(임도형)의 성기를 만져 논란이 된 적이 있다. 초등학교 2학년 참가자가 심연옥의 '아내의 노래'를 불렀는데, 노래가 끝난 뒤 송해가 인터뷰를 하는 순서에서 임도형에게 뒤로 돌아보라고 말한 뒤 성기를 만진 것. 송해는 임도형이 "뭐하세요 지금?"이라고 묻자 "고추 만졌어. 이 노래가 심연옥 선생님이라고 오래된 분인데 여자 분 노래를 잘 불러서 한번 만져봤지"라고 답했다. 이게 그대로 방송에 나가면서 방송심의위에서 '권고' 조치를 받았다.
일단 송해의 나이를 생각할 때, 성추행이라는 인식을 전혀 하지 않고 행동했을 가능성이 높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어르신들이 "고추가 잘 익었나 보자~"라고 하며 남자 아이들의 성기를 만지는 일이 흔했고, 이를 단순히 짓궂은 장난 정도로만 생각하고 성추행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송해가 어렸을 때만 해도 남자 아이들은 그냥 성기를 드러내놓고 다니기도 했다. 이러한 송해의 나이와 연식 때문에 '권고' 조치를 받고 넘어간 것이다. 이게 문제가 되지 않는 일이라는 건 당연히 아니지만, 워낙 고령인 송해의 나이와 시대상을 감안하여 내려진 조치인 듯 하다.
8. 여담
8.1. 전국노래자랑 관련
- 전국노래자랑은 한국인들의 많은 사랑을 받아 일본, 미국, 평양(2003년 8월)에서도 공연했다. 전국노래자랑이 가장 멀리 공연을 간 곳은 1995년 8월에 제작된 파라과이 편이다. #
- 평양 공연 당시에 북한에서 그의 6.25 전쟁 참전 경력을 문제 삼았던 탓에 출입이 어려웠다. 북한에서는 신천군 사건과 관련하여 당시 자경단이나 치안대 활동을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송해는 신천군이 아닌 재령군 출신이고, 남하하기 전까지는 적극적인 무장반공활동을 한 것이 아니라 공산당 별동대의 모병을 피하기 위해 피신했지만, 어쨌든 해당 사건과 연관이 있는 것은 사실이므로 좋게 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신천·재령 사건을 미군과 우익의 전쟁 범죄라고 교육시키는데, 송해는 공산당의 만행을 두 눈으로 손수 목격했으니 말이다. 본인은 월남 그 자체가 북한 입장에서 배신이기에 싫어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 대구광역시 달성군은 2016년 말까지 옥포읍 기세리 옥연지 일대에 송해공원을 조성한다고 밝혔다. 원래 이 공원은 옥연저수지를 이용한 단순한 경관 공원으로 조성키로 했으나, 2011년 달성군 명예군민, 2012년 달성군 명예 홍보대사 위촉 이력이 있는데다, 부인 석옥이 여사가 이 곳 출신인 점[74], 달성군은 공원 명칭 및 성명권, 초상권 사용에 대한 협의와 관련, 본인이 최종적인 동의를 해 옴에 따라 공원 착공에 나서기로 했다. 송해공원에는 산책로를 비롯해 쉼터, 송해 흉상 등이 들어섰으며 방문객이 산책로를 거닐면 공원 곳곳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송해 음성을 들을 수 있다고 한다. 송해공원 인근에는 2021년에 개관한 송해기념관이 있으며 기념관에서 마을회관 방향으로 가면 송해 가족 묘소가 있다.
- 2016년에 중학교 1학년 학생한테 "해형"이라는 호칭을 듣자 아버지가 몇 살이냐 물으니 46살이라는 대답에 송해는 잠시 머뭇거리다 욱하는 바람에 너네 아버지가 46세인데 나 보고 해형?! 해형이라니!라고 꾸짖은 적이 있다. 해당 장면은 전국노래자랑 레전드로 남았다.[75]
그런데 나중에 조우종은 방송에서 친해진 후에는 실제로 이렇게 부른다고 한다. 그리고 평소에는 할아버지 소리는 싫어했다. 참가자가 할아버지라 부를 때와 형님 또는 오빠라 할 때의 반응이 다르며, 과거 오마이걸 승희가 어릴 적 전국노래자랑에 출연했을 때 송해 할아버지라고 부르자 "떽!"하고 소리쳤다.
- 백세인생이 나온 이후 2016년 경상남도 남해군 편에서 마늘 홍보[76]를 위해 마늘을 들고 나온 출연자에 의해 마늘을 한 알 먹어보고는, 백세인생을 개사해 "백 세[77]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남해마늘 다 못먹어 못 간다고 전해라~"고 가사를 읊었다.
- 2008년 경상남도 거창군 편에 1박 2일 팀(시즌1)이 출연했을 당시 1박 2일 팀이 특별 인기상을 수상했을 때 MC몽이 무대로 올라와 꽃가루를 날리며 세레머니를 하자 "예끼!"라고 소리치며 꾸짖었다. 이때 강호동이 송해를 보고 그랜절을 올리자 나머지 멤버들도 강호동을 따라 송해에게 그랜절을 올렸다.
- 2003년 평양노래자랑 프로그램을 위해 방북한 동안 송해를 담당한 북측 안내원과 친해져 어느샌가 말을 놓고 편하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러다 평양노래자랑 종료 후 뒤풀이에서 같이 술을 마시던 와중에, 안내원이 재령을 코 앞에 두고 가지 못한 송해에게 "선생님, (재령에) 가보셔야 거기 안 계십니다."며 나름의 위로를 보냈고, 그 말을 오해한 송해가 월남한 자신 때문에 가족들이 모두 죽은 거냐고 묻자, 그 말이 아니라 흐르는 강이든 솟아있는 산이든 동네든 마을이든 52년의 그 세월 동안 모든 것이 다 달라졌다고 대답하며, 송해가 알던 재령의 모습은 더 이상 없다는 뜻을 전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서야 송해는 자신이 월남하고 52년의 세월이 흘렀다는 것을 실감했다고 하며, 생전에 다시는 어머니를 만날 수 없을 것이란 걸 깨달았다고 한다. 그의 평생 소원은 고향 황해도 재령군에 다시 와서 전국 노래자랑을 여는 것이었으나 결국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 KBS 같이삽시다와 KBS StarTV: 인물사전이라는 KBS 유튜브 채널들이 있는데, 이 채널들에 전국노래자랑이 올라온다. 지금은 송해가 고인이 되어 '다시 한 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역시 송해 선생님만큼 사회 잘 보시는 분은 없다.' 등의 추모의 댓글도 여럿 있는 반면 일부 무개념 악플러들이 송해가 아직 살아 있었을 당시에는 제발 송해 좀 짜르라거나 송해 영상은 그만 좀 올리라는 식의 악플을 달아댄 경우가 있었으며[78], 송해의 사망 이후에도 고인이 된 사람으로 제발 돈 좀 그만 벌라는 말 같지도 않은 악플도 달리는 경우가 있었고[79], 또한 진작에 송해만 잘랐으면 이럴 일은 없었을 텐데 왜 안 자르고 여태껏 그렇게 쓸데없이 버티고 있었냐는 악플이 달리는 경우도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현재 이 악플러들은 더 이상 이 곳에 출몰하지 않고 있다.
8.2. 일상 생활 및 나이, 연예계 관련
- 2022년에 사망한 인물이고, 그 직전까지 현역으로 활발히 활동한 인물임에도 상당수의 웬만한 역사속 인물들보다[80] 출생 연도가 빠르다. 1927년생으로 95세까지 살았기 때문. 1927년생이 2022년까지 살 확률은 4.1%로 약 24~25명 중 한 명, 남자 한정으로는 2.4%로 약 42명 중 한 명 꼴이다.
- 생전 자동차, 휴대 전화, 큐카드[81] 이 3가지를 가지지 않았다고 한다. 개인 차는 없지만, 대형/특수차량 면허는 취득했다고 나를 돌아봐에서 밝혔다. 자동차가 없는 대신 'BMW'를 이용한다고 방송에서 밝혔는데, 이는 BUS, METRO[82], WALKING을 뜻하며, 대중교통 또는 걸어서 이동한다는 의미다. 휴대폰의 경우에도 노년층들 사이에선 아직도 수요가 많다는 피처폰조차 가지지 않았으며, 이 때문에 나를 돌아봐에서 이경규가 자신이 제작한 영화 전국노래자랑에 섭외하는데 가장 힘들었다고 한다. 섭외 혹은 연락하는 것보다 지하철에서 보는 게 더 쉽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을 정도. 큐카드는 교감, 소통을 위해 갖지 않는다고 했으며 어느 방송에서는 촬영이 있는 곳의 전날에 미리 내려가 그 동네 목욕탕에서 주민들과 함께 목욕하면서 교감을 가진다고 밝혔다. 예외로 시상식을 진행할 때는 사용한 적이 있다. 실제로 큐카드를 고의로 사용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큐카드 자체가 정형화된 대본인데 그가 진행한 전국노래자랑에서는 누가 출연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진행을 출연자에 맞게 능동적으로 해야만 한다. 그리고 송해의 철학이 출연자와 소통하고 출연자에 맞춰 본인이 전국노래자랑을 진행하는 것이 출연자에 대한 예우와 존중이라고 생각하기에, 그래서 고의로 큐카드를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
- 한 가지 더 없는 것을 말하자면 안티팬으로, 인터넷 투표에서 '안티팬 가장 없는 연예인'으로 조용필, 현숙과 함께 꼽혔다고 한다. 실제로 인터넷 기사나 유튜브 등지에서 송해를 비난하거나 디스하는 댓글을 함부로 썼다가는 욕을 오지게 먹는다.[83] 위에 언급된 초등학생 남아 성추행 사건에 대해 비판을 받기는 하지만, 90대를 바라보는 고령의 나이와 시대상 성추행이라 인식하지 못했을 점을 참작하여 조심하라는 의견이 더 많다. 대부분 "오래오래 사세요!"나 "뉴스나 검색 순위에서는 안 봤으면 좋겠다." 같은 의견들이 주를 이루며, 오죽하면 디시인사이드나 에펨코리아 등의 커뮤에서도 송해를 까면 욕먹을 정도다. 송해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과거 가짜 약 판매 사건을 들먹이며 비하하는 글과 동조하는 댓글들이 여럿 올라오기도 했으며, 단순히 재미를 위해 죽음을 희화화하는 드립을 치는 댓글이 여럿 있었지만, 넌씨눈 취급 당하기 일쑤.
- 운동이나 대중교통 외에 또다른 장수의 비결들을 밝혔는데, 첫 번째로 한 달에 두세 번은 치과 가기, 두 번째로 생전 우거지와 우거지국밥[84]을 즐겨 먹기, 세 번째로 매일 16시에 목욕탕에서 새로운 물로 목욕하기, 네 번째로 22시에는 잠을 자려 애쓰기와 꾸준히 아침 식사 잘 챙겨 먹기.
- 위에 말했듯 대중교통을 이용해 지하철, 특히 수도권 전철 3호선에서의 목격담이 자주 들렸다. 자택이 있는 아파트의 소재지가 매봉역 인근인 서울특별시 강남구 도곡동이라고 알려졌으며, 그가 주로 나타나는 곳이 종로3가역 인근으로 그 역 1번 출구 앞, 탑골공원 동쪽에 '송해길'이 조성되었다. 본인이 황해도 실향민 출신이라 종로구 낙원동에 '연예인 상록회'라는 사무실을 열고, 이 곳을 기점으로 활동을 펼쳐왔다. 이에 종로문화원은 오랜 기간 대중문화 발전에 힘써온 그의 공을 기리기 위해 2016년 8월 송해길을 만들었는데, 참고로 해당 길은 실제 도로명은 아니며, 실제 도로 명칭은 수표로로, 수표로 중에서 종로2가~낙원상가에 해당되는 구간의 명예 도로명이 송해길이다. 실제 도로명에는 생존 중인 사람의 이름을 사용할 수 없는 까닭이다.[85]
- 후배 코미디언 이주일은 2002년 낸 회고록 '인생은 코미디가 아닙니다'에서 송해를 언급하면서 서영춘, 이기동 등이 모두 먼저 갔는데 송해만 오래 있고 전국노래자랑을 오래 진행을 하다 보니 선배들보다 더 오래 사는 것 같다는 언급을 하였다. 생년에 있어서는 이주일이 송해보다 13세 연하고 데뷔로도 10년 후배지만, 폐암으로 20년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86]
- 2006년 건강검진에서 대장암 판정을 받았지만, 수술을 통해 완치 판정을 받았고 투병생활 중에도 전국노래자랑 녹화 등 스케줄을 하나도 쉬지 않고 소화해내는 초인적인 모습을 보였다.
- 송해는 구봉서보다 1살 연하로 구봉서를 형님이라고 부르며 친하게 지냈다. 2016년 구봉서가 세상을 떠나면서 한국 희극계의 최고 원로가 되었으며, 본인을 비롯해 희극계의 아우들이 형님의 뒤를 위해 뛰겠다고 말하였다. #
* 6.25 전쟁 당시 송해의 사진이라고 이 문서에 올라온 사진이 있었는데, 1950년대인 20대 중반~30대 초반에 찍힌 사진 속 송해의 얼굴보다 나이가 든 것으로 보아, 대략 40대 정도로 보여 6.25 전쟁이 아닌 베트남 전쟁 위문공연 당시 촬영된 사진인 것으로 추정된다.[87]
- 1984년 '코미디 반세기'라는 프로그램에서 송해가 사회를 보았는데, 송해의 윗세대 원로 코미디언인 복원규(1909), 명진(1913), 김윤심(1914), 전방일(1916), 박응수(1917), 양석천(1921), 장소팔(1922), 양훈(1923), 박시명(1924) 등이 출연해서, 같이 출연한 구봉서를 막내[88] 혹은 군이라는 호칭으로 부르는 등 한국 코미디계의 계보를 보여주었다. 이 프로그램을 촬영할 때 원로 코미디언 명진은 대기실에서 탈진해 누웠는데, 젊은 코미디언들이 그를 돌봐주고 있는 와중에도 자신이 개인적으로 얼굴을 알고 심부름 시킬만한 후배가 송해 밖에 없어서 57세의 송해에게 청심환 심부름을 시킬 정도였다. 이 프로그램에서 송해는 연세가 지긋한, 송해보다 18살 연상의 삼촌뻘 복원규 같은 대선배를 소개할 때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 2011년 추석을 목표로 단독 콘서트를 준비해 성공리에 서울 공연을 마치고 10월까지 전국 순회공연을 진행했다. 생애 첫 콘서트로 이름은 '(나팔꽃 인생 60년) 송해 빅쇼'다. 당시 만 84세의 나이로 최고령 단독 콘서트 부문 세계 기네스북 기록 등재를 추진했지만 등재되지는 못했다.[89] 대신 사망하기 직전에 최고령 TV 음악 쇼 진행자로 등재되었다.
* 2010년대 들어서면서 광고에도 간간이 출연했는데, 후배 코미디언 강호동과 함께 명인제약의 잇몸 치료제 이가탄 광고를 찍었고[90], 2012년부터 2017년까지는 IBK기업은행 홍보대사에 위촉되어 광고에 특별출연했다. 특히 기업은행 광고의 경우, 노년층들에게 'IBK기업은행에 기업이 아닌 개인이 예금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만으로도 막대한 규모의 예금이 들어온다고 하며, 직접적으로 '송해 광고를 보고 찾아왔다'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다고 한다. 노인들 사이에서 송해의 힘과 인지도와 위상이 얼마나 되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 여담이지만, 같이 기업은행 광고를 찍은 김유빈과의 나이차는 78살로, 김유빈은 2005년 생(2005년 당시 송해는 만 78세)이다. 2016년에 나온 기업은행 광고에서는 딘딘과 함께 랩을 선보였다.
* 전원주와는 12살 차이의 띠동갑으로 같은 토끼띠다.
- 정치적인 발언을 많이 하진 않았지만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 당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고 유세단에 참여해 선거유세를 하기도 했다.[91] 다만 박지원, 이낙연 등 민주당계 정당 인사들과도 두루두루 어울려 지냈고 문재인 정부 당시 남북정상회담과 화해 무드를 지지하며 기대를 표하는 등 다각적인 시각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여러 사회적 이슈들에 대해 열린 자세를 보여주기도 했는데 퀴어 축제에 대해서도 “배울 점이 많다” 라고 칭찬을 하는 등 성소수자들에 호의적인 시각을 보여주었고[92] 과거 장애인들을 업신여기던 시절 전국노래자랑에 장애를 가진 참가자들을 기꺼이 출연시켰다.
- 가수 손인호와 동갑이다. 게다가 둘 다 고향이 이북으로 실향민 출신이다. 손인호는 2016년 7월 16일 오전에 간경화로 6년 먼저 사망했다.
* 조선인민군 총참모장, 인민무력부장,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한 김영춘과 닮았다. 그래서, 송해는 김영춘의 사진을 보고 "내가 해야 할 걸 왜 자네가 하고 있어?" 라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93] 사진은 TV조선 토크쇼 노코멘트 송해 편에 등장했다.
- 불후의 명곡 2015년 3월 21일 방영분에 황해도 대표로 특별출연하였다. 역대 최고령 게스트로, 분위기도 폭발적이었다. 비록 우승은 하지 못했지만, 인상적인 무대를 보여줬다. 부른 곡은 자신의 이야기를 닮은 유랑청춘이다. 또한 위에 나오듯 드라마 프로듀사 12화에 특별출연하여 KBS 신입 PD 백승찬이 인터뷰하는 장면에서 술을 할 줄 아냐는 모습을 보여줬다.
- 2015년 9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KBS 나를 돌아봐에 출연했다. 매니저 역할은 조우종. 이 프로그램으로 KBS 연예대상에서 조우종과 함께 베스트 커플상을 받았다.
- '해이드'라는 별명을 나를 돌아봐에 출연하여 얻게 되었는데, 부산광역시에서의 에피소드에서 조우종이 그를 낚은 것도 있고 같이 못 자겠다고 하는데 조우종이 계속 같이 자야한다고 하자 결국 폭발해버린 것. 이 에피소드 당시 조우종은 대선배이자 어르신에게 도가 지나쳤다며 대차게 까였다. 나를 돌아봐에서 해이드 말고 얻은 별명은 '해형'이다.
- 나를 돌아봐의 '우종데이' 에피소드에서 조우종이 진행한 조우종의 뮤직쇼에 스머프 분장을 하고 출연했다. 얼굴 전체와 목에 귀까지 모두 파랗게 칠하는데, 당시 분장할 때는 불편해하다 막상 분장이 끝나니 귀엽다는 말이 기분이 좋아진 듯. 파랗게 칠해진 자신의 얼굴을 보며 "야! 이런! 이런! 이런!"이라고 호통치며 놀라는 모습이 압권이다.
- 제19대 대통령 선거 KBS 개표방송에 개표 그래픽으로 출연했다. 제목은 전국노래자랑을 패러디한 '전국 득표자랑'이다. 이 그래픽에서 시작할 때 "전국 득표자랑"을 외치며 시작하고 1위 후보자에게 박수를 쳐주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 2018년 7월 23일, 앨범 딴따라를 발매했다.
- 2018년 11월 어느날, 서울대병원 방문 당시 본인의 손주뻘 되는 A군이 팬이랍시고, 반갑다며 갑자기 껴안았다.
- 편강한방연구소에서 '구전녹용'의 명예 모델로 송해를 발탁했다고 한다.
- 가요무대에도 자주 출연하였다. 경력에서 알 수 있듯이 노래 실력이 매우 뛰어나다. 그리고 고령이라서 현대적 트로트라는 장르가 정착되기 전인 해방 전후에서 1960년대 노래를 그 시절 창법으로 부를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
- 2020년 엠넷 부캐 선발대회에 '아리송해'로 출전해 등장하는 순간 모든 출연자가 기립하고 공손해지게 하는 힘을 보여줬다. 인순이 역시 참가자였는데 본인이 가장 고참인줄 알았으나 송해의 등장과 함께 양손을 모으고 90도로 인사하는 모습으로 변했다.
- 전국노래자랑 후계자로 이상벽이 적당하다고 말했는데, 그 때문에 이상벽이 자꾸 "그 자리를 언제 줄거냐?"고 물어보면 "아직 한참 남았다."고 말해 이상벽이 울상을 지으면서 "그럼 제 나이가 90살이 넘어가 버립니다"라고 말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사실 이상벽도 송해보다 20세 연하라서 그렇지 어느새 팔순이 다 된 상황이다. 그리고 결국 그 자리는 한참 후배 김신영이 이어받았다.
- 2021년 11월 18일, 송해의 인생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송해 1927이 개봉하였다.
- 2022년 설연휴 중이던 2022년 1월 31일, KBS 2TV에서 설 대기획 프로그램 '여러분 고맙습니다 송해'라는 프로그램을 편성하였다. 송해의 인생을 트로트 뮤지컬로 재구성한 것으로, 가수 정동원, 이찬원, 영탁, 신유 등이 나이별로 송해 역을 맡아 무대에 올랐다.
- 과거에 골초였다고 한다. 30대 중반까지는 하루도 담배 없이는 못 살 정도로 담배를 입에 물고 다녔다고 하며, 담배를 3갑 ~ 4갑 피웠다고 한다. 그 당시 병원에 찾아갔을 때 의사로부터 폐 건강이 안 좋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 말을 듣고도 병원 옆 동산에 올라가 담배를 입에 물었고 그 순간 '이걸 계속 피우면 죽는구나!'라고 깨달았다고 한다. 결국 담배를 완전히 끊었다고 한다.
- 유희열과도 인연이 있다. 아내 석옥이 여사가 유희열의 고모와 절친한 사이다. 대화의 희열에 출연하기 전, 유희열의 고모로부터 '희열의 어머니가 많이 아파서 상심이 클 것이다'라는 말을 해 주었고, 이에 방송 중 송해가 유희열을 위로해줬다. 이에 유희열도 장난스럽게 송해의 손등에 얼굴을 묻었다가 갑자기 감정이 북받쳐올랐는지 오열하는 모습이 방송을 탔다.
- 2013년 3월부터 쓰는 안경이 기존의 타원형 안경[94]에서 남색 테의 둥근 안경으로 한 차례 바뀌었다. 다만 2016년에 카카오톡 이모티콘으로 출시되었을 때에는 타원형 안경 시절과 남색 둥근테 안경 시절의 얼굴 사진을 병용했다.
- 90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병원에 자주 입원하기는 했지만, 죽는 날까지 딱히 지병을 앓지는 않았으며, 휠체어는 물론 지팡이조차도 사용하지 않았고, 사망 전날까지도 스스로 걸을 수 있을 정도로 정정했다.
- 금요일 오전 진행되는 뮤직뱅크 출근길에 종종 모습을 들어냈다. 전국노래자랑 회의차 매주 금요일 KBS에 출근하는데, 뮤직뱅크 녹화일과 겹치다 보니 일어난 일이다. 아이돌 찍덕들이 찍은 사진들이 구글에 자주 돌아다니고, 유튜브에도 있다. 찍덕들에게 포즈도 취해주고,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 몬스타엑스, 앨리스와는 직접 사진도 찍었다.
8.3. 성향, 취향 관련
- 연예계가 다 아는 대단한 주당. 이용식, 김학래 등의 후배 연예인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게 송해와의 술자리라고 할 정도이니 말 다한 셈이다. 퀴즈쇼 사총사에서 자신의 주량이 소주 다섯 잔이라고 했지만, 김인협이 소주 5병이라고 증언하였다. 관련 영상[95] 예능 프로그램에서 한 번 이상은 언급하는 게 송해의 인생사 아니면 술자리 이야기인데, 그 중 술자리 얘기는 하나같이 깨알이 넘치게 재미있다. 아래는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 제주도에서 친한 이상벽과 술자리를 가졌는데 이상벽이 먼저 술에 취해 송해가 업고 숙소로 온 적도 있다. 방송에서 밝히기를 제주도에 방송차 내려왔다 우연히 송해도 오게 되어 호텔 아래의 횟집에서 오랜만에 만나 작정하고 술을 먹었는데 새벽 2~3시까진 기억이 났지만 이후 이상벽이 필름이 끊겨 호텔 지배인에게 물어보니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아무리봐도 이상벽이가 송해를 업어야 할 것 같은데 송해가 이상벽을 업어 착시현상 같았다고 한다. 참고로 이상벽 역시 한창 때는 술집에 들어갈 때 술의 재고를 물어보고 들어갔다고 할 정도로 방송인들 사이에서 송해 뺨치는 주당으로 소문난 인물이다.
- 전국노래자랑을 녹화하기 전날, 해당 지역의 자치단체장이 마련한 술자리에서 술을 많이 마시는 바람에 송해와 자치단체장이 술에 취해 다음날 녹화에 지장이 생길 뻔한 일이 자주 있었다고 한다.
- 전국노래자랑 악단장 신재동이 녹화 전날에 제작진과 송해와 함께 술자리를 가졌는데, 송해의 주량을 따라가지 못한 신재동은 숙소의 아무 방이나 들어가 숨어버렸다. 그리고 송해는 마스터키를 들고 숙소의 방문 하나하나를 다 따가면서 신재동을 주구장창 찾았다고 한다.
- 드라마 프로듀사에 카메오로 출연할 때 주당 소재를 활용했다. 송해 인터뷰는 일종의 KBS 신입 PD 신고식으로 불린다고 한다.
- 이용식은 송해와의 술자리가 길어지자 큰 그릇을 밑에 숨겨두고 술을 마시는 척 그릇에 따라 버렸는데, 송해가 한참 술을 마시다 "넌 꼭 그렇게 모아서 마시는 거 좋아하더라."는 말과 함께 들켰다고 한다.(관련 영상[96])
- 신재동(전국노래자랑 2대 악단장)과 김명선이 진행하는 '콩자반쇼'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코로나19로 전국노래자랑의 야외 공연이 중단된 이후 지인이나 친구와 약주를 하였다고 밝혔다. 95세의 나이임에도 체력이 아직 남아 있어 술이 입에 들어간다는 건재함을 과시하였다.
- 상술했듯이 우거지국밥을 매우 좋아하였으며 그 외에 소고기를 굉장히 좋아한다.
- 목욕 마니아다. 장수의 비결을 매일 16시에 목욕탕에서 새로운 물로 목욕하는 것이라고 밝혔으며 발가벗고 주민들과 대화를 하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할 정도라고 한다. 송해가 목욕하면 뽀송뽀송해라는 아재 개그가 있다.
- 지각하는 것을 굉장히 싫어한다고 한다. 상술한 예능 프로그램 '나를 돌아봐'에서 조우종이 늘 지각했을 때 송해가 혼낼 정도였다. 이외에도 장윤정이 신인 시절 때 지각을 해 혼난 적이 있었다고 한다.
- 지각을 하거나 격식을 차리지 않을 경우 불같이 화를 내는 성격이지만 주변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금방 누그러지는 성격이라고 한다. 금방 화낸 사람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녹화 진행을 한다고 한다. 생전 거의 완벽주의 성향을 가졌으며 장기간 리허설임에도 불구하고 고령의 나이임에도 절대로 앉는 경우가 없었다고 한다.
- 걸그룹 여자친구의 팬이라고 한다. 여자친구의 최연장자인 1995년생 소원과는 68년, 1996년생 예린과는 69년 차이, 1997년생 은하와 유주와는 정확히 70년 차이, 1998년생 신비와 엄지와는 71년 차이가 난다. 여자친구 멤버들은 거의 증손녀뻘, 아무리 낮게 잡아도 손녀뻘이다. BUDDY에는 고연령층 팬이 많다고 한다.
- 김혜수의 팬이다. 어느 정도냐면 나를 돌아봐에서 조우종이 김혜수를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보게 해준다고 약속을 하여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는데 김혜수가 오지 않아 빈정상해 서울로 가겠다고 할 정도.
- 가장 좋아하는 할리우드 배우는 에바 가드너였다. 힐링캠프에서 여러 유명인들과 송해의 나이를 비교하는 코너를 할 때, 이경규와 김제동이 마를린 먼로를 언급하자 "먼로 좋아해요? 에바 가드너만 못해~"라며 팬심을 들어내기도 했다. 참고로 에바 가드너는 송해보다 고작 5살 연상이며 마를린 먼로는 송해보다 1살 누나다.[97]
8.4. 사망 전후 관련
- KBS 측에서는 송해가 건강을 회복하는 대로 전국노래자랑 녹화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 본인이 의사를 밝힌다면 건강 상태 등을 고려하여 이에 대한 검토와 계획을 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끝내 고인이 됨에 따라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워낙 고령에다 건강도 좋지 않아 머나먼 지방 원정은 무리일 수도 있고, 대신 자택과 가까운 KBS 본관 스튜디오에서의 녹화 방송 등을 계획하였다고 한다.
- 사망 당일에는 긴급 편성으로 생로병사의 비밀과 더 라이브 방송은 결방하고 22시에 추모 특집 여러분 고맙습니다 송해를 편성하였으며 클로징 멘트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그를 추모하였다. 또한 9일 19시 40분에는 한국인의 밥상을 결방하고 국민 MC 송해 추모 다큐 '내 인생 딩동댕'을 편성했다. 내 인생 딩동댕의 내레이션은 전국 노래자랑 스페셜을 함께 진행한 임수민이 담당했다. 원래 KBS 1TV의 19시 40분 시간대는 지역방송 시간대이지만, 월요일과 목요일은 전국 방송으로 진행되어 전국에 방송했다.
- 12일에 방영한 전국노래자랑은 송해 추모 특집 생방송으로 편성되었다. # 이호섭과 임수민의 진행과 신재동을 위시한 악단의 연주로 생방송으로 진행했고, 패널로는 현숙, 엄영수, 설운도, 배일호, 박서진이 나왔으며, 방송 말미에는 장윤정도 나왔다. 침울한 분위기에 설운도는 너무 슬픈 나머지 송해의 '유랑청춘'을 제대로 부르지 못하고 통곡하였다. 차분히 진행하던 이호섭도 송해와의 추억 회상에 결국 눈물을 쏟았다고.
- MBN에서는 22시 30분부터 송해야 고향 가자를, TV CHOSUN에서는 22시에 추모 특선 영화로 송해 1927을 편성해 방영하였고, iHQ는 6월 12일 은밀한 뉴스룸 송해 특집편인 30회를 재방송하여 송해를 추모하였다.
- 송해가 사후 추서받은 금관문화훈장은 문화계 훈장 중 가장 높은 등급으로, 방송예술인으로는 윤여정 이후 두 번째, 희극인으로는 최초의 수훈 사례가 되었다. 금관문화훈장이 수훈된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위대한 근현대 문화예술계의 위인들에게만 허락된 훈장이라는 점에서, 그가 대중문화에 미친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실감할 수 있다.
- 야놀자에서 AI 딥페이크를 이용해 송해를 모델로 내세운 광고를 게재했으나, 5일 만에 부고가 들려오는 바람에 매우 난감하게 됐다. 야놀자는 송해 관련 광고 캠페인 게재를 전면 중단했으며, 유가족과 상의한 후에 광고 진행 여부를 결정했다. 유튜브 영상은 영원한 국민MC 송해 선생님을 기억하겠습니다.라는 타이틀로 바꿔 재업로드하였고, 이후 추모 형식의 광고도 업로드하였다. 원래 광고는 나중에 "건강한 모습으로 즐거움을 전하고자 하셨던 故 송해 선생님의 뜻에 따라 사전 제작됐습니다"라는 메시지를 전반부와 하단에 붙여 다시 게재했다. TV로는 2주 동안 송출했다. 이후 야놀자에 따르면 강호동이 송해가 찍은 광고 컨셉 그대로 이어받아 출연하기로 했다고 한다. 수익은 코미디언들을 위해 기부하기로 했다고.
- 송해와 절친인 작곡가이자 전국노래자랑 악단장 신재동은 김명선과 같이 목요일마다 진행하는 콩자반쇼 라이브 방송에 불참하였다.
- 2021년 9월 13일에 송해와의 인터뷰 동영상을 업로드한 근황올림픽은 부고 소식이 전해지자 댓글을 수정하여 송해를 추모하였으며 수익 창출을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 사망일은 공교롭게도 전국노래자랑 의왕시 예심 경연이 있던 날이다. 담당 작가는 예심을 진행해야 할지 마음이 무거웠으나, 오히려 즐겁게 진행하는 것이 고인의 뜻에 맞는다고 생각하여 예정대로 예심을 진행하였고, 6월 10일로 예정된 현장 녹화도 정상 진행했다.
- 2022년 6월 9일 KBS 1TV를 통해 방영한 추모 다큐에 의하면, 송해는 투병 이후 부쩍 체중이 줄어 다음 방송 출연을 위해 새로 양복을 맞추어 두었다고 한다. 그런데 맞춤 양복은 공교롭게도 그의 사망일에 완성되어 그 옷을 입을 수 없게 되었다. 오랫동안 악단장으로 송해와 전국노래자랑에 동행한 신재동은 송해가 지인에게 맞춤 양복을 주문했던 이유는 그 양복을 입고 마지막 인사를 국민들에게 해야 되겠다는 인사를 하기 위해서였다고 그 의미를 밝혔다. 인터넷에서 도는 입관식 영상에는 그 양복이 아닌, 평범한 삼베 수의를 입고 입관한 것으로 보인다.
- 세상을 떠나기 하루 전에도 '송해길'에 있는 단골 백반집에 들러 식사를 했다고 한다. 더덕구이나 된장찌개를 주로 즐기는 송해는 그날은 된장찌개를 먹었는데, 보통 밥 한 공기를 다 비우던 송해가 그 날만큼은 반 공기밖에 먹지 못했다고.
- 장례 중에 송해의 수양딸이라고 주장하는 한 50대 여자가 빈소에서 난동을 피우려다 쫓겨난 사실과 정치병 환자인 한 클리앙 유저가 송해가 "박정희 시대 유신만이 살 길이다 외치고 평생 호의호식했다"면서 "고평가됐다"는 허위사실이 적힌 악플을 쓴 사실들이 밝혀져 논란이 되었다.[99]
- 송해 사망 소식 이후 네이버 뉴스의 기사 하단 감정 스티커를 없앤 것의 부작용이 생겼다. 네이버 뉴스의 감정 스티커는 원래 '좋아요', '훈훈해요', '슬퍼요', '화나요', '후속기사 원해요' 등 다섯 가지였으나 4월 28일부터 '흥미진진', '후속강추', '쏠쏠정보' 등 부정적이거나 슬픈 감정을 쓰지 못하도록 바꾸었다. 이 때문에 어떠한 감정 표현을 골라도 모두 고인드립이 되어버리는 문제가 발생하였고 이를 지적한 댓글이 베스트 댓글에 올랐다. #반응
- 추모사와 추모글로 '전국'과 '천국'이 발음이 유사함을 이용한 '천국 노래자랑'이 많이 쓰였다. 고인드립이 아니냐는 지적도 있었지만 영결식에서 이용식이 추모사에 이 단어를 사용하면서 이러한 논란은 잦아들었다.
- 6월 19일 송해의 제2의 고향인 대구 달성군 송해공원에서 서예가 김동우와 고살풀이 춤 보존회장 이희숙이 송해를 추모하는 서예 퍼포먼스를 펼쳤다.
- 6월 19일 드림 콘서트 트롯에서 MC 이찬원이 눈시울을 붉히면서 송해와의 추억을 회상하며 송해가 있었기에 후배 트롯 가수들이 무대에 설 수 있게 됐고 크게 될 수 있었다며 감사와 영원한 딴따라로 가슴 깊이 영원히 새긴다고 추모하였다.
- 송해가 사망한 6월 8일 이후 전국노래자랑과 송해에 많은 시청자들의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6월 둘째 주 콘텐츠영향력 3위를 차지하였다. 기사.
9. 어록
"사람이 살아가는데 '절망'이란 것은 필요 없다"
"노래자랑을 할 때마다 어떤 게 소중하냐 '땡'이 좋으냐 '딩동댕'이 좋으냐 딩동댕이 다들 좋다고 그렇죠? 그러나 '땡'을 맞아보지 못하면 '딩동댕'의 정의를 모릅니다. 그래서 늘 전국노래자랑에서 내 인생 딩동댕으로 남고 싶었습니다"
2022 설 대기획 여러분 고맙습니다 송해 中[101]
2022 설 대기획 여러분 고맙습니다 송해 中[101]
10. 수상
<rowcolor=#fff> 연도 | 시상식 | 수상 | 작품 |
2002 | KBS 연예대상 | 공로상 | |
2003 | 제15회 한국방송프로듀서상 | TV 진행자상 | |
2003 | 제30회 한국방송대상 | 심사위원 특별상 | |
2004 | 2004 KBS 바른언어상 | 바른언어상 TV진행부문 | |
2008 | 제44회 백상예술대상 | 공로상 | |
2015 | KBS 연예대상 | 베스트 커플상 | 나를 돌아봐[102] |
2022 | 제49회 한국방송대상 | 심사위원 특별상 | |
2022 | KBS 연예대상 | 20주년 특별 공로상 | [103] |
11. 관련 문서
- 황해도
- 재령군
- 전국노래자랑
- 달성군
- 송해공원
- 문화훈장 - 옥관문화훈장을 제외한 모든 문화훈장을 받았다. 최고 등급인 금관문화훈장은 사후 추서.
- 수표로 - 송해길이 포함된 도로이다. 정확하게는 낙원상가부터 YBM 건물 건너편까지가 송해길이다. 낙원상가 앞쪽엔 송해의 사무실이 있고, 해당 거리에는 송해의 30년이 넘는 단골 국밥집이 있다.
- 기네스 세계 기록
[1] 출생 당시 부모가 지어준 이름 즉 아명(혹은 초명)은 송복희 (宋福熙)였으나, 6.25 전쟁 당시 연평도로 피난을 갔다 미군함에 실려 부산으로 피난을 가는 도중 바닷물로 밥을 지어 먹었다 하여, 바다 해(海) 자를 따와, 이름을 송해로 지은 것이 주민등록상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 일제강점기 시절 창씨개명으로 사용한 일본식 이름은 기무라 후키(木村福)로 나무 목(木)은 송(宋)씨에서 따와 村을 붙여 일본의 흔한 성씨인 기무라로 만들고, 복(福)은 본명인 '복희(福熙)'에서 따 왔다.[2] (음력 3월 26일), 이 생일이 음력이라 알려져 1925년생으로 오기되었을 당시에는 음력에 맞춰 4월 19일 또는 5월 19일로 나온 적도 있었다. 만악 4월 27일이 음력이라면 5월 27일이 된다. 2022년 기준 일부 언론에서는 1925년생이라는 설 자체가 잘못되었다며 알려진 지 무려 8년이 흘렀는데도 당시 정정 내용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나이를 1925년생 나이로 표기하는 경우가 있으며, 어떤 기사에는 1923년생으로 오타가 나오기도 했다. 처음 1925년생으로 알려졌을 당시에 송해 본인도 1925년생이 맞다는 식으로 해명을 해서 생긴 해프닝이다. 구봉서 등이 왜 나이를 속이냐고 언론에 언급한 후로는 송해 본인도 직접 1927년생이 맞다고 정정했다.[3] 관련 내용. 본인은 고향을 재령읍이라고 언급하였으며, 재령을 도시로 묘사하였다. 이와 유사한 지정면은 사실 1920년대에는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를 참조하면 읍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았으나, 청주, 상주, 안동 등 한국의 이런 과정을 겪은 지자체는 1931년에 "조선총독부제령 제12호"를 통해 읍으로 개칭되었다고 본다. 재령면은 지정면이 아닌데도 1920년대에 재령읍으로 묘사되었다. 재령읍으로 승격된 것은 1937년 6월 28일에 조선총독부령 제80호가 나오면서였다. 북한 당국이 1945~1952년 이곳을 재령면으로 강등시킨 적이 있으나 군면리 대폐합을 거치며 읍으로 복구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에서는 군소재지인 지역에만 읍을 붙인다.) 재령읍이 한국의 제도적인 행정구역이자, 본인이 또렷이 기억한 행정구역이다.[4] 음력 5월 10일[5] 장례식장 위패에 은진 송씨를 뜻하는 '은진송공복희(恩津宋公福熙)'라고 적혔는데 이 때문에 개명을 한 것에 대해 위패에 새겨진 명칭이 다르다고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으나 한국에서 족보에 새기는 이름은 항렬자를 따라서 적어야 하다 보니 정식으로 등록된 이름과 다르게 나오는 것이 흔하고, 설령 개명한 이름으로 족보를 수정한다고 해도 그 과정이 여간 복잡한 것이 아니라서 이름을 바꿔도 그대로 두는 경우가 허다하다. 목사공파 20세손 ○희(◯熙) 항렬이다.[6] 일제강점기 때 태어나 6·25전쟁 전까지는 북한에 거주했다.[7] 1983년에 매입했으며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가 안장되어 있다가 이후 본인이 세상을 떠나면서 합장되었다. 옥연지 근처에 자리해 있다.[8] 2015년 KBS2 나를 돌아봐에서 공개한 신체 검사 결과. 다만 체중의 경우 2021년 9월에 유튜브 채널 근황올림픽에 출연했을 때 영상 제목에 7kg 야윈(60kg) 국민MC라고 적기도 했고(영상 인터뷰에서 송해 본인이 직접 7kg 줄어들었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동년 11월에 KBS 1TV 아침마당에 출연했을 때는 체중이 한 6kg(약 54kg)이 빠졌다고 밝혔다. 출처 기사[9] 가족과 함께 고상섭이 목사로 있는 그사랑교회에 다녔고, 집사 직분을 가졌다. 어머니 석옥이로부터 물려받은 모태신앙인 듯 하다.[10] 1986년 제3한강교(現 한남대교)에서 오토바이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송해는 평생 한남대교 근처에 가지 않았다.[11] 출처: 20세기 북한예술문화사전[12] 1951년에 입대하여 6·25전쟁 기간을 포함해 3년 8개월 동안 하사관으로 군복무를 이행했다. 여담으로 통신병으로 복무 당시 6·25전쟁의 종지부를 찍을 휴전 전보를 모스부호로 쳐서 전달했다고 한다.[13] 영정 사진의 대통령표창의 훈장 2개와 함께 달은 그 훈장이다.[기록내용] 최고령 TV 음악 경연 쇼 진행자(Oldest TV music talent show host)[15] 영정 사진 왼쪽 가슴에 달린 것을 확인할 수 있다.[16] 불교로 예상한다. 종교에 대해 되도록 언급을 피했지만, 불교계 방송에 출연한 것과 불교방송 뉴스에서 불자 방송인이라고 보도를 한 것과 불교신문 인터뷰도 있으므로 사망 당시까지 불자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또한 송해 본인의 사망 당시에는 빈소에 아무 종교적 표식도 나오지 않았다. 우상숭배로 보아 터부시하기 때문에 하지 않는, 상에 과일을 올리고 향을 피우거나 절을 하는 등 개신교식 장례와는 모습이 많이 다르기 때문에 개종했을 가능성은 많이 낮은 편이다. 게다가 장례 후 49재를 치렀으니 불교일 가능성이 더 높아졌다. 다만 이 뉴스에 따르면 불자여서 그렇게 한 게 아니라 살아생전에 친분이 깊은 용천사 주지승 지거와의 인연으로 생전 고인과의 약속이라고 한다. 입관식은 불교와 개신교 측에서 함께 실시했고, 화장 행렬과 이후 장례 절차 등에 승려가 참석했다. 하지만 이 과정들은 대부분 고인의 남겨진 가족들에 의해 정해지기 때문에 정확한 것은 알 수가 없다. 개신교를 믿는 크리스천인 딸과 손녀는 송해가 개종하는 것을 기도 제목으로 삼았고, 세상을 떠나기 전 손녀의 영접기도에 아멘한 적도 있다고는 하지만, 세례를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참고로 2018년 1월 22일, 독실한 개신교 신자인 부인 석옥이의 경우에는 위패 위에 붉은 십자가가 있었다. 발인식 날에 당시 운구차를 옆에 두고 송해가 찬송가를 부르기도 했지만, 아마도 세상을 떠난 부인을 배려해서 불렀을 가능성이 크다. 참고로 그의 고향인 재령군은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개신교의 세가 강했던 지역이다.[17] 16시면 서울 종로 낙원동에 있는 대중목욕탕(낙원동사우나)에 간다고 밝힌 적이 있다.[18] 후술하겠지만 엄청난 주당이었다.[19] 술 마신 다음에는 꼭 우거지 국밥으로 해장을 한다고 밝혔다. 2,000원이면 충분하다고 한다. 송해가 생전에 즐겨 찾았던 우거지 국밥집(소문난집)이 송해의 주 활동 무대인 서울 종로구 낙원동에 있는데, 2015년 MBC 무한도전 생활계획표 특집에도 이 가게가 등장했다. 관련 기사[20] 이 레퍼토리가 워낙 유명해 말년에는 위의 레퍼토리를 가사로 쓴 나팔꽃 인생이라는 음원까지 취입했다. 노래의 가사대로 일명 일요일의 남자 송해쏭이라 불린다.[21] 동년 6월 8일 재방송은 KBS1에서 추모방송으로 재방영했다.[22] 전인권, 김태원이 그 예시다.[23] 2015년 그가 발표한 노래 《유랑청춘》에서 등장하는 지명으로, 황해도의 다른 유명한 연백평야와 헷갈린 인터뷰도 있지만 그곳은 인천 교동도 건너편의 재령에서 남동쪽으로 60~70km 떨어진 곳이다.[24] 실제로 조선 총독이 먹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 재령 쌀의 명성이 대단했던 것은 사실이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경성일보의 1927년 11월 29일 기사에서 재령 북률면 쌀의 질이 조선 쌀 전체를 대표할 정도로 최고라고 칭송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전 조선시대에도 재령평야에서 생산한 쌀은 왕실에도 진상되었을 정도로 품질이 매우 좋았다.[25] 1946년에 설립된 3년제 학교로 북한 최초의 음악전문학교로 성악과, 기악과, 작곡과 등의 전공자가 1948년까지 백여 명에 이르는 규모였다. 정율성이 설립자로, 김순남이 교수로 재직하였다. 1952년에 국립음악학교와 통합한 김원균명칭 평양음악무용종합대학에 흡수되었다.[26] [황규인의 잡학사전] 6.25 전쟁 휴전 소식 처음 알린 건 '송해' 송해 본인의 생전 언급으로는 고향에 돌아갈 길을 끊는 메시지를 그가 직접 타전했다고 한다.[27] 송해가 말년에 예능에 출연했을 때가 기아 K5의 초창기 광고가 나오던 대였는데, 당시 광고에 삽입된 "쓰돈쓰 돈돈돈돈돈" 시그널을 그대로 K5라고 복호해 주는 장면이 나왔다. 다만 송해가 휴전 소식을 "처음 알렸다"는 물증은 없으며 송해 본인이 그렇다고 주장하는 것 뿐이다. 정황을 보면 실제로 제일 처음 알렸거나, 그 일대에서 처음 알린 것이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전투 중지 명령은 정전 협정 발효를 기해 동시다발적으로 내려졌으므로 소식을 처음 알렸다는 말 자체가 애매한 면도 있다.[28] 본인이 혈혈단신이었던 터라 결혼식을 올리지 못한 채 지내다 63년 만인 2015년 나를 돌아봐 출연 당시 처음으로 결혼식을 올렸다.[29] 그래서 송해는 최소 국립호국원 안장자격을 가지고 있었다.[30] 당시엔 정극 배우든 희극 배우든 방송국 전속으로 활동하는 것이 대세라 이적이 쉽지 않았으나 송해는 비교적 방송사들을 많이 옮겨가며 활동한 편이다.[31] 이 무렵부터 안경을 끼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건 1998년 4월 이후이다.[32] 1980년, 53세 시절.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미용 기술과 메이크업이 발달하지 않았다는 것을 고려해 보면 40대 초중반 수준의 외모로 꽤나 동안인 편에 속한다. 10년 전인 43세 시절과도 차이가 없다. 심지어 2020년대 현재 치고도 50대 초중반으로 보여 노안으로 보이지 않는다. 여담으로 전쟁 시절 사진은 20대 때 일어난 6.25전쟁이 아니라 베트남전쟁 시기라 40대 시절의 사진이며, 당시 40대를 감안하면 지극히 정상적인 얼굴이다. 참고로 1980년 당시 평균적인 53세 얼굴은 이미 할아버지가 되었을 정도로 늙었다.[33] 5공 때 언론통폐합 후 KBS 라디오서울로 옮겨 계속 방송되었고 1990년 라디오서울이 폐국된 뒤에는 KBS 제2라디오에서 방송했다.[34] 이 때문인지 송해는 오토바이를 볼때마다 꼭 1명씩은 가는 것 같네 라며 방송에서 씁쓸한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35] 17년 동안 진행했다고 알려졌는데 1975년부터 진행하여 14년 간 진행했다. #[36] 교통사고 이후 하차하였다고 알려졌는데 교통사고 3년 후인 1989년에 하차하였다. 전국노래자랑에 전념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37] 61세 시절[38] 대중들이 가장 잘 기억하는 송해의 활동 모습으로, 같은 연배의 연예인들이 조금씩 현역에서 물러나던 시기였지만 송해는 전국노래자랑으로 자기 인생사 최전성기의 왕성한 활동을 했다.[39] 마지막 스튜디오 녹화 출연분은 2022년 5월 15일 스튜디오 녹화(스페셜 방송)이지만, 정식 하차가 최종 확정되기 전인 2022년 6월 8일, 향년 95세의 일기를 끝으로 세상을 떠남에 따라 방송일을 기준으로 볼지, 하차일을 기준으로 볼지에 따라 최종 방송일에 대한 의견은 갈린다. 특히 이후 2회분도 현장 녹화 재개 전 스페셜 방송으로 과거의 송해가 출연하는 영상이 재방송되는 형태인지라 간접적으로 출연 자체는 했다고 볼 여지가 있다. 다만 실질적으로는 그가 작고한 2022년 6월 8일에 전국노래자랑에서 하차한 걸로 보고 있다.[40] 기록 달성일: 2019년 11월 3일. 종전 기록은 25년 15일간 KBS 가족오락관을 진행한 허참이다. 라디오 프로그램까지 확장할 경우, 각각 36년과 33년 간 싱글벙글쇼를 진행한 강석과 김혜영, 그리고 배철수의 음악캠프를 30년 이상 진행하는 배철수가 있다. 그러나 가족오락관 허참의 기록도 2023년 6월 초쯤 SBS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의 임성훈, 박소현이 경신할 가능성이 높다.[41] 당시 55세(1955년생)의 김영호라는 남성이다. 56세는 세는 나이다. 시상 현장에는 몸에 벌들을 다 떼고 나왔다.[42] 이로 인해 송해 또한 얼굴에 망사를 쓰고 나왔으나 벌이 마이크에 자꾸 붙는 등으로 진행에 방해가 되어 벌에 7방을 쏘였고, 바로 다음에 나온 마을 이장인 당시 68세(1942년생)의 김갑수라는 남성이 2번이나 땡을 맞는 피해를 봤는데 벌 때문에 틀렸다는 이유로 송해가 정상참작하여 무려 3번이나 기회를 줬다. 그리고 나서 한 말이 압권인데, 벌들을 향해 "빨리 가서 꿀 따!"라고 말했다. 이후 굿모닝 대한민국 라이브로 알려진 바에 따르면 김영호가 자신의 바로 다음에 나온 김갑수에게 자신의 농장에서 나온 벌꿀을 직접 선물하고 본의 아니게 피해를 끼친 것에 대해 정중히 사과했다고 한다.[43] 나를 돌아봐에서 조우종은 "해형"이라고 불렀다. 그 외에도 일부 남자들도 "송해 형"이라고 부르는데 주로 남자 어린이나 남중고생들이 그렇게 부르며 가끔 청년들도 그렇게 부른다.[44] 스페셜 방송부터 송해의 마지막 녹화까지 임수민이 파트너로 함께 했다. 그 와중에 다시 병원 입원도 한 적이 있어 7월 12일 방영분은 송해 대신 작곡가 이호섭이 진행한 적도 있다. 참고로 이호섭은 작곡계의 내로라하는 유명인사 중 하나로, 전국노래자랑 심사위원으로도 여러 번 나왔다. 또한 임수민과는 KBS 해피FM에서 지금은 종영된 '희망가요'라는 프로그램을 같이 한 적도 있는 친분이 있는 사이다.[45] 이때만해도 얼굴에 살이 차 있었는데 이 다음에 출연한 부캐전성시대의 송해 프로필 사진을 보면 점점 광대뼈 쪽에 살이 빠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아픈 것도 아픈 것이지만 몸이 고목처럼 메말라가는 것을 보여준다.[46] 참고로 이 날은 2022년 설날 당일이었다.[D] 95세.[48] 2021년 사진과 비교해보면 살이 빠져 광대뼈 쪽이 홀쭉하다.[D] 95세.[50] 생전 공식석상에서의 마지막 모습이 되었다.[51] 패용한 훈장은 2001년 수여받은 화관문화훈장과 생전 두 차례 수여받은 대통령 표창이다.[52] 뉴스에서는 사망 1시간 뒤부터 속보로 보도되었다.[53] 결국 이것이 그의 생전 마지막 공식 석상이 되었다.[54] 전라남도 영광군에서 녹화했다.[55] 실제로 야외 녹화 중단 이후로 체중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바쁘게 일하던 사람이 갑자기 일을 그만두면 되려 건강이 안 좋아지는 케이스. 송해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위드 코로나 선언 후 방역 수칙 준수 아래 야외 녹화에 돌입했어야 그를 오래 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일각의 아쉬움도 있다.[56] 송해가 사망 전날까지도 들린 곳이다.[57] '석별의 정'으로 알려진 그 노래 맞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절 애국가 멜로디로 쓰인 곡이기도 하다.[58] 송해는 아내의 장례식 당시 고인이 된 아내의 무덤 옆에 따로 가묘를 한 개 더 만들었는데, 그것이 송해 본인의 묏자리라고 한다.[59] 생전 두 사람은 다른 분야에서 활동했지만 친분이 있었다. 이순재 역시 송해에 대해 여려차례 덕담이 담긴 언급을 한 바 있다.[60] 송해는 1세대 코미디언들 중에서도 유일하게 2020년대까지 꾸준히 활동한 인물이다. 1세대 코미디언들은 1990년대 말 개그콘서트의 런칭과 함께 점차 현역에서 물러났고, 2000년대 초중반까지 폭소클럽과 쇼 행운열차 등에 종종 출연하다 완전히 방송을 떠났다.[61] 무려 33년 7개월 간 진행하며(두 진행기간을 합한수치이다.송해의 전국노래자랑 진행기간에 대해자세한건 전국노래자랑의 4.진행자문단 의 4.1 역대MC문단참조.) 그의 노년기를 인생의 최전성기로 만들어 준 대표작이자, 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손을 놓지 않은 유작이다. 2022년 '최고령 TV 음악 경연 프로그램 진행자(Oldest TV music talent show host)' 부문으로 기네스 세계 기록에 올랐다.[62] <전국 방송 자랑> 이란 내용으로 이상벽, 이상용과 함께 출연했다.[63] 트로트 가수 유지나와 함께 발매한 <아버지와 딸>로 특별 무대를 꾸몄다.[64] 임백천, 허참, 이상벽과 함께 MC계의 전설들로 출연하였다.[65] 당시 출연진 중 도경완 가족분에 등장했는데, 도경완이 슈퍼맨 촬영 중에 라디오 뉴스 방송이 있어서 KBS에 아이들을 데리고 왔으며, 라디오 뉴스 이후에는 양파의 음악정원(KBS 해피FM) 생방송과 가요무대 녹화장도 방문하였다. 참고로 해당 장면들 촬영일은 2019년 12월 19일이었다.[66] '아리송해'라는 이름의 부캐로 출연하였다.[67] '플렉송'이라는 이름의 부캐로 출연하였다.[68] 사후 출연. AI 딥러닝 합성으로 제작했다.[69] 당시 MBC 라디오는 표준FM이 없었고, 오로지 AM으로만 방송했다.[70] 싱글벙글쇼의 전신 프로그램으로 이순주와 공동 진행을 맡았다. 참고로 여기서 유공쇼의 '유공'은 지금의 SK에너지를 뜻하는 것이다. 당시 라디오 프로그램은 기업의 협찬을 받아 프로그램명에 회사 상호를 대놓고 넣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2020년대였다면 SK 엔크린쇼[71] 최초의 교통방송. 1986년 자신의 외아들이 오토바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뒤, 이에 따른 충격을 극복하지 못해 3년 뒤인 1989년 하차하게 되었다.[72] 1970년대 말 경의 TV광고로, 송해가 식사를 하려고 수저를 드는데 마침 켜 놓은 TV에서 요리 프로그램이 시작된다. 그 프로그램에 나온 요리사가 오늘의 요리라며 소개한 해당 소시지 제품이 한가득 담긴 바구니가 화면을 채우는데, 송해가 "이야~ 해바라기표 소세지" 하며 화면 속의 소시지를 바구니째 꺼내는(!) 내용이었다.[73] 보도가 나간 날은 엄기영의 MBC 뉴스데스크 1차 마지막 진행일이다. 1996년 11월 8일.[74] 본인은 이북 출신이지만, 그의 부인은 남한인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읍 기세리 출신이다. 기세리는 전체 40여 가구의 주민들 모두가 석씨인 충주 석씨 집성촌으로 알려져 있다. 송해공원이 조성되면 전국노래자랑 달성군 편 유치를 추진한다고 했고, 2016년 10월 8일 대구 달성군에 개최했다. 전국노래자랑 1823회.[75] 출연한 중1 학생은 2003년 생으로, 송해와는 76살 차이다. 거의 증조할아버지 뻘에 가깝다.[76] 경상도에서는 의성군, 창녕군, 남해군이 마늘로 유명하다.[77] 당시 송해의 나이는 만으로 89살, 세는나이로 90살이었다.[78] 어느 회차에서는 '요즘 안 그래도 젊은 사람들 청년실업 문제가 상당히 심각한데 송해 때문에 젊은 사람들은 더 취업길 막힌다. 그러니 제발 송해 좀 하루빨리 짤라야 한다.'라는 악플이 달린 적이 있다.[79] 이런 개논리대로라면 허참의 가족오락관도 절대로 올리지 말아야 된다는 논리가 된다. 근데 기가 차는 건 가족오락관 영상에는 이런 악플이 달리는 일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80] 안네 프랑크, 체 게바라, 마틴 루터 킹 등등. 물론 이 셋은 젊은 나이에 요절한 것도 원인이며, 마틴 루터 킹처럼 자연사가 아닌 인물도 있다.[81] 대본 등이 적힌 종이.[82] 특히 수도권 전철 3호선을 가장 애용하셨다.[83] 실제로 후술했듯이 전국노래자랑 영상에 "KBS는 송해 당장 짤라라" 같은 악플을 작성한 안티팬들이 있었는데 당연히 구독자들에게 비난 폭격을 받았었다.[84] 우거지는 섬유질이 풍부하며, 우거지를 통해 칼슘과 비타민 A, C, B1, B2 등의 영양소를 섭취할 수 있다.[85] 일종의 불문율. 마찬가지로 군주가 아닌 이상 화폐 도안 인물에는 생존 인물을 쓰지 않으며, 설령 쓰더라도 본인의 허락부터 반드시 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제는 고인이기 때문에 어쩌면 수표로가 송해길로 바뀔 가능성도 있지만, 수표로 자체가 워낙 오래전부터 존재해 온 이름이고, 고치는 데에도 비용이 무척 많이 드는 점을 감안하면 그냥 계속 명예 도로명으로 남길 가능성이 높다.[86] 송해는 당시 장례식에서 직접 추도사를 읽기도 하였다. 2009년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정치를 하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힘들어했다며 안타까운 마음을 들어내기도 했다. #[87] 뒤에 있는 기관총은 나치 독일제 MG34로, 독소전쟁 당시 소련군이 독일군으로부터 노획한 물건을 베트남 전쟁 당시 월맹군에게 지원해준 것을 다시 국군이나 미군이 노획한 것으로 추정된다. 기관총의 기구한 운명[88] 구봉서는 당시 58세로 후배들도 많고, 당시 기준으로 할아버지의 나이라서 원로축에 들어감에도, 이날 자신에게 '막둥이'라는 별명을 선사한 영화 오부자(1959)에 같이 출연한 선배 코미디언들이 옆에 있었지라, 자신은 영원한 막둥이라고 하면서 시청자들에게 웃음을 주었다.[89] 2011년 당시에는 송해보다 출생이 빠른 아티스트들이 상당수 살아있었다. 84살 이상의 유명인들 중 현역은 계속 많아지는 추세다.[90] 이 광고는 강호동이 2011년 가을에 탈세 논란으로 연예계에서 잠정 은퇴한 뒤에도 광고 계약이 만료될 때까지 계속 나왔다.[91] 이런 인연으로 2015년 연말 청와대 만찬에 초대됐는데, 참가자 중 최고령이었음에도 행사 내내 분위기를 주도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참고로 송해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어머니인 육영수 여사보다 1살 동생이다.[92] 보통 한국의 고연령층들 상당수가 동성애를 불결한 것으로 여기는 것과는 상당히 대조적이다.[93] 참고로 김씨 3대 오른쪽에 선 사람은 북한군 총참모장을 역임한 조선인민군 차수 리영호. 1936년생이라니 송해보다 9세 연하다. 평양 방문 시에 김영춘과 대면할 기회는 없었고, 말로만 닮은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다 김승우의 승승장구에 출연했을 때, 사진을 보고 본인과 닮았다는 것을 인정했다.[94] 거의 투명에 가까운 안경으로, 장례식 당시 영정사진에 쓴 안경과 똑같다.[95] 당시 송해, 악단장 김인협, 작곡가 이호섭, 가수 박상철이 출연했으며, 주당 부분은 해당 영상의 1분 50초(즉, 시작하자마자 나온다.)부터 2분 15초 사이에 잠깐 나오는데, 방청객들이 웃을 정도다.[96] 위에 설명한 것 중에 두 번째의 내용도 포함되었다. 참고로 해당 영상은 '해피타임'의 편집본이다.[97] 먼로는 1962년 36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사망했고, 에바 가드너 역시 67세에 사망했다. 송해가 얼마나 오래 장수하며 활동했는지는 알 수 있는 부분.[98] 해당 사진을 올린 편집장 이영비는 추모의 의미를 담아 사진을 사용하고자 한다면, 맥심이 출처라는 점만 표기한다면 누구나 사용해도 좋다고 첨언했다.[99] 실제로 송해가 유신 체제에 대해 적극적인 지지를 나타냈다고 해도, 당시 박정희 체제 하 국민들의 90%에 가까운 대다수가 이를 지지했고 박정희의 집권 이후 몸으로 겪었을 엄청난 경제적 성장, 그로 인해 기성세대들의 대다수가 박정희를 필두로 한 우파 정권을 열렬히 지지한다는 사실을 안다면 이것이 애초에 비판받을 이유조차 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다.[100]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송해를 만났을 때 해준 말이라고 한다.[101] 딩동댕을 성공으로, 땡을 실패로 바꾸면 '실패를 맛보지 못한 사람은 성공의 정의를 모른다'란 뜻이 된다. 실패를 하더라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뜻을 이루고자 포기하지 말라는 메시지.[102] 매니저 역할을 한 조우종과 공동 수상.[103] 사후에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