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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18-10-26 22:41:19

호부견자(실존인물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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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를 들면 부모는 성품이 나쁘고 자녀는 무능한 것으로 불일치한 경우.[2] 다만, 이 부분은 좀 논란이 있다. 모본왕 문서 참조.[3] 본명 곽현식.[4] 실제로 IMF만 아니였으면 지금보다 훨씬 평가가 좋았을 거라는 분석도 있다.[5] 실제로도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정상적으로 수행한 증거가 있는데, 김윤태가 신태일 일행과 어울려서 하남에서 인천으로 옮겼을 때 며칠 안 되어서 펑펑 울고 하남으로 되돌아왔다는 언급이 있다. 또한 김윤태가 떡볶이집을 쉬는 날에 기름때를 닦은 일화도 있다.[6] 반면 김윤태의 양형과 양누나는 별 사고를 일으키지 않았던 점을 고려해보면 착한 형과 못된 아우에도 해당된다.[7] 박철언에게 정치자금을 주었다고 한다. 덕분에 YS가 집권하고서 같이 날아갔던 것.[8] 김호연은 빙그레를 가지고 독립.[9] 만일 남주성이 범죄를 저지르지만 않았어도 남경필의 경우 인품이나 능력 면에서 대통령 감으로도 충분한 인물이었으며, 설령 대통령이 되지 못해도 경기도지사로서 연임이 가능했었다. 하지만 큰아들이 그 막장 짓거리를 벌여서 유승민, 원희룡, 안희정 등 동료 정치인들에 비해 엄청난 핸디캡이 생겨버린 셈. 이런 면에서 차남 남주형과 못된 형과 착한 아우 클리셰에도 들어가기도 한다. 남주형은 딱히 물의를 일으키지는 않았던 편.[10] 손자가 서울 숭의초등학교 수련회 집단폭행사건의 가해자들 중 하나라고 한다!! 참 가지가지도 한다. 이 녀석의 아빠이자 박삼구의 아들 되는 사람은 대체 어떤 인물일까?[11] 이 때문에 신숙주는 변절자라는 비판도 있으며 이 점에서는 견부견자이기도 하다.[12] 일제에게 암살당했다는 설이 있다. 안중근은 생전에 안분도가 신부가 되기를 원했다고.[13] 그 때문에 독립투사 안경근(안중근 사촌동생)과 안준생 사이가 벌어졌고(중국 당국이 거절하게 된 것도 안경근이 장제스에게 눈물을 흘리며 살려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다.) 김구 장례식 때도 나타나질 않았다.[14] 2차대전이 끝난 뒤로 중국에서도 친일반민족행위자라고 소문나서 무시당했으며 경제적으로 무척 어려워져서 온갖 영양실조로 고생했다. 게다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로 더 어려움에 빠진 끝에 1951년 몇몇 식구와 안경근이 보는 앞에서 44살로 죽었다.[15] 참고로 장례식에는 안경근이 봐줬다고 한다. 그때 안경근이 한 말이 "미안하다... 준생아... 삼촌이 널 버렸구나..."라며 손을 잡아 주었다.[16] 안준생이 억울한 피해자였을 가능성이 높은 게 우선 뼛속까지 독립운동가였던 여운형 선생이나 한용운 선생에 대해서도 일본이 이런 식의 언플을 시도한 전례도 있고, 결정적으로 실제로 안중근 의사의 가족들에 대한 언플질이 있었다는 증거가 나왔다.캡쳐본,유튜브 그러니 주류 학계에서조차 안준생이라는 인물을 평가하기가 조심스러워진 상황이다.[17] 살아서 끌려가긴 했지만, 그것도 셋째 연남산의 배신 때문이었다.[18] 조선에 임해군이 있다면, 고려에는 효은태자가 있다![19] 다만, 공민왕도 해당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그토록 사랑하던 노국대장공주가 사망한 이후말기에는 차츰 방탕해졌고 끝에서는 자신의 측근들에게 살해되는 비극을 맞았다.[20] 아버지나 할아버지에 비하면 매우 무능한 편이다. 아버지가 만들어놓은 여러가지 제도들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놓은 것이 한둘이 아니고, 특히 군사제도는 정말 개판으로 만들어놔서 대규모 전쟁이 없었을 때는 별일 없었다만 이후엔 큰 전쟁이 벌어지자 엄청난 피해를 보고 나라가 망할 뻔했다. 또한 할아버지가 그렇게 공신들을 견제를 넘어서 숙청해놨는데도 공신들한테 의지하는 정책을 벌여서 정치도 막장으로 만들어놨다. 공신전을 마구 뿌려서 토지제도도 엉망으로 만들어놓은...[21] 게다가 위의 각주를 봐도 알겠지만, 안준생이 실제로는 친일파가 아니었다는 증거가 나오고 있는 중이다.[22] 출처[23] 다만 대원군이 원래부터 쇄국정책을 지향하는 인물은 아니다. 처음엔 천주교에 대해선 온건한 입장이었고, 서양식 무기를 도입하려는 노력도 있었다. 또 이양선 출몰&행패와 당시의 민심을 고려한다면 쇄국정책을 비판할 수만도 없다.[24] 상평통보의 100배나 되는 금액의 화폐다.[25] 특히 필리버스터 발언 시간이 은수미의 기록을 깨게 된다.물론 이 타이틀은 이종걸에 넘겼지만[26] 여기에는 조카들 교육 똑바로 시키라면서 싸웠다는 이야기도 있다.[27] 변방에서 뺑이 치기는 싫은데 여기서 파면되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 이런 행동을 벌였다.[28] 그전에 최태민이 최윤성과 부자지간이라는 것부터가 구라일 가능성도 있다.[29] 부모는 최준희가 1살 때 이혼, 어머니 최진실은 2008년 자살, 외숙부 최진영도 2010년 자살, 아버지 조성민까지 2013년 자살. 이러니 어려서부터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받을 수가 없었고, 2년 주기로 양친에 외숙부까지 극단적인 선택을 했으니, 정서적으로 문제가 안 생기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수준. 여기에 언론의 과한 취재 등까지...[30] 다만 칼리굴라는 소위 영화에서 묘사하는 그런 괴물은 아니다. 검투사 경기를 선호한 점에서 볼 수 있듯이 로마인들조차 인정할 만큼 잔인한 면이 있었고 돈을 물쓰듯 썼으며 여동생 드루실라 신격화 등 의심갈 짓을 많이 하긴 했지만 후대의 콤모두스 같은 진짜 막장 황제들과는 거리가 있었고 물쓰듯 쓴 돈도 자기에게 들어간 것은 의외로 얼마 없고 대부분은 각종 잔치, 건축 등 '대중이 원하는' 것을 제공하는 데 쓰인 것들이었다. 문제는 그 스케일이 너무나도 컸기 때문에 3년 반만에 티베리우스가 20년간 쌓아온 견실한 재정을 다 말아먹었다는 점이다.[31] 위소왕이 장종의 황후를 싫어하여 장종의 유복자를 임신 중이던 후궁이 사실은 황후의 꼬드김으로 인해 임신한 척하고 있는 거라는 말을 하면서 황후가 후궁과 함께 피살당하게 되었다. 아마 위소왕 입장에서는 자신의 정통성에 해가 갈까봐 그랬던 것일 가능성이 크다.[32] 챔피언쉽 1번, 프리미어 리그 1번[33] 다만 아버지 스스로 자초한 면도 없잖아 있긴 한데 퇴출과 관련해서 항의를 하고 아들을 감싼것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심각한 사안이라도 감독과 전혀 상의없이 선수를 내쫒은 것은 엄밀히 말해 감독의 권리를 침해한게 맞긴 하다. 그리고 아들의 행위를 감싼 것은 감독이 아닌 아버지로써 행한 행동으로 이해한다면 약간의 동정의 여지는 있다.[34] 요숭과 함께 재상을 역임했던 노회신의 아들이다. 노회신은 현종 시절 메뚜기로 인해 흉년이 들었을때 요숭이 메뚜기 퇴치를 주장하자 "옛 성현들이 '메뚜기를 잡으면 가뭄이 든다'고 했다"며 상소를 올린 사람으로, 부지런하고 겸손하기만 했지 무능했다고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노회신과 노혁의 관계를 따지면 견부호자일듯하다.[35] "밧세바의 일을 제외한 모든 부분이 하느님의 마음에 합당하였다"는 내용이 실제로 성경에 적혀 있다.[36] 성전을 짓는데 7년을 들인 건 그래도 종교적으로는 의미가 큰데(사실 다윗이 재산을 모아둔 것도 성전 건축을 준비하겠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뒤 자기가 살 왕궁을 짓는데 무려 13년을 들였다... 치세에 끊임없이 세금과 노역을 무겁게 내린 탓에 백성들의 불만이 크게 쌓였고, 이는 훗날 이스라엘 분열의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한다.[37] 솔로몬 사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훗날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되는) 여로보암을 내세워 "못 살겠으니 세금과 노역을 줄여달라"고 르호보암에게 탄원했다. 솔로몬 때부터 출사한 노장파 신료들은 "그 말을 수용하고 백성들을 섬겨야 한다"고 간언했으나, 르호보암 또래의 소장파는 "백성들을 더 가혹하게 다뤄야 왕의 위엄이 산다"며 충동질을 했다. 결국 르호보암은 자기 듣기 좋은 말을 따라서 "아버지가 채찍으로 너희를 다스렸다면 난 전갈로 너희를 다스리겠다"며 Po허세wer를 시전했고.[38] 다만, 조건이 있다. 당고종의 건강이 멀쩡했어야 한다. 개 수준의 체력이었다면 할 말이 없지만.[39] 인도에서 개종은 한국에서 호적을 파는것과 같다.[40] 본명 메구로 토라이치[41] 본명 카도니시 야이[42] 게다가 이 막장 여성편력은 아들 중 하나에게도 이어졌다.[43] 이 경우는 아버지가 일찍 사망해서 할아버지가 키운 경우이므로 세 사람 다 싣는다.[44] 스에 하루타카 토벌만해도 모리 타카모토의 강력한 주장때문이었다. 또한 모리 타카모토는 모리 가문의 당주로서 모토나리의 그림자 하에서도 여러 해를 활약하였으나 독살 의심을 받을 정도로 일찍 죽는 바람에 역량을 다 쓰지 못했다.[45] 모리 타카모토는 성실하고 온화하여 당대 주코쿠의 패자였던 오우치 요시타카의 인질 신세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양사위가 되는등 매우 사랑을 받았고, 의리 또한 있어서 요시타카가 스에 하루타카의 배반으로 사망하자 상대적으로 약소했던 세력임에도 불구하고 복수를 주장하여 복수를 성공시킨 의리남이고, 할아버지인 모리 모토나리는 효웅으로서의 이미지가 강하나 애처가로서 유명하고, 자식들에게 특히 술 마시지 말라고 시시콜콜하게 잔소리하는 편지들이 엄청나게 남아있는 등 실제의 모습은 역사속의 이미지와는 상당히 달랐다고 한다.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의 모토나리의 이미지가 효웅으로서의 이미지라면, 전국무쌍의 모리 모토나리의 이미지는 최근의 온화한 모습을 바탕으로 함.[46] 사실 이 사람은 그저 바지사장에 불과했지만 이 사람이 최소한 우유부단한 성격만 아니었어도 가문은 그대로 보전될 수 있었다.[47] 농성하던 적을 못 뚫은거라면 이해가 가지만 이건 경계를 게을리하다 기습에 당한거다.[48] 일반적으로 權은 2성, 犬은 3성으로 다르지만, 3성이 연속으로 된 단어에서는 앞의 3성을 2성으로 발음한다.[49] 이전 버전에서는 '삽질만 하고' 라고 되어 있었는데, 너무 무리하게 밀어붙여서 그렇지 대운하 공사는 당나라를 비롯해 이후의 제국들에게 지대한 도움을 준. 꼭 필요한 공사였다.[50] 견부견자에 속하는 케이스다.[51] 아버지는 전쟁 말인 1945년 2월 비행기 추락사고로 죽을 뻔했다가 혼자 간신히 구조되었는데, 이때 추락해서 포로로 잡힌 그의 다른 동료들은 전부 인간의 탈을 쓴 일본의 미친 악귀에게 잡아먹히고 말았다. 그러니까 이 사람도 만약 붙잡혔다면 아들 부시는 아마 안 태어났을지도 모르고동료들과 똑같은 꼴이 될 수도 있었던 것! 그래서 사적으로 일본을 굉장히 싫어했다고 한다.[73] 다만 공적으로 대통령으로썬 일본과의 관계를 중시해서 일본을 대 소련 포위망을 위해 비 NATO 주요 동맹국으로 지정하는 등[74]의 일을 했다. 한마디로 공과 사는 구분한 것.[52] 사실 후미히토는 실제로는 극우가 아니고, 단지 형인 나루히토를 견제하느라고 극우 코스프레를 한다는 지적도 많이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극우주의자들과 결탁한 것 자체가 문제이고, 게다가 설령 그가 실제로는 극우가 아니라고 해도 워낙 하는 짓이 개초딩 수준이라서 어차피 옹호받을 부분도 없다.[53] 다만, 이 쪽은 아버지가 갑작스레 죽은지라 가독 상속 준비도 다 안 된 상태에서 가독을 상속받은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게다가 우지자네는 사람들에게서 완전 무능력하다고 여겨지지만 실제론 교양에 어느 정도 재능이 있었다.[54] 제갈근도 역시 신숙주처럼 저놈이 집안을 망칠 거라고 호부견자 인증했다.[55] 다만 제갈각은 남동생과는 달리 능력은 출중해서 오나라 2세대 장수 중에서는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다.[56] 오나라에서 제갈근의 대가 완전히 끊기는 동안 제갈교는 숙부인 제갈량의 양아들로 들어가 있었고, 제갈첨이 태어나자 숙부의 허락을 맡고 제갈근의 가문을 계승했다.[57] 엘리자베스 1세의 명성 때문에 묻히는 수준을 넘어서 축적된 국력까지 날려먹은 무능한 군주로 인식받기도 했지만, 현대에는 재평가를 받아서 상당한 능력을 가진 국왕이었으며 비판적으로 봐도 엘리자베스 1세를 능가하는 명군은 결코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기력한 암군은 더더욱 아니라는 해석을 받고 있다.[58] 현재의 유니언 잭의 프로토타입이었던 잉글랜드 국기와 스코틀랜드 국기를 합친 깃발이 제임스 1세의 치세에 처음 등장한 것이다. 다만, 당시에는 다소 안습하게도 잉글랜드로부터는 국기의 붉은 십자가가 스코틀랜드 국기 때문에 작아져 보인다고 까이고, 스코틀랜드로부터는 세인트 앤드류 기가 잉글랜드 국기인 세인트 조지 기의 십자가 때문에 4토막이 났다고 디스당했다.[59] 찰스 1세는 그동안 스스로를 잉글랜드인으로 생각해서 스코틀랜드를 무시하는 정책을 마구 폈는데, 막상 내전이 터지고 잉글랜드 내부의 왕당파가 밀리기 시작하자, 본인은 스코틀랜드로 냅다 도망가버려 잉글랜드스코틀랜드 양쪽의 공분을 샀다. 결국에는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 정부로부터 거액의 돈을 받고, 찰스 1세를 폐위시켜서 잉글랜드에 넘기면서 내전이 끝났다.[60] 보통 총독이라고 번역한다. 네덜란드어로는 스타트홀더르(Stadtholder)[61] 다만, 40만이라는 주장은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렵고 약 10만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조나라가 큰 타격을 받긴 했지만 그래도 진의 전면적인 침공 이전까지 그럭저럭 국력을 유지했고 진의 침공 이후에도 상당기간 버텼을 생각해보면 더욱 그렇다.[62] 다만 실제로 말아먹은 것은 조나라 왕이고 조괄은 희생양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조괄 문서 참고.[63] 결국,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종준과 종산은 살려주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64] 사실 말이 3대지 항씨가문이 내세운 황제를 중심으로 진나라 이곳저곳이 야금야금 갉아먹히던 중이라 호해의 아들이 영제로 올랐을땐 이미 진나라는 제국은 커녕 왕국이나 영토라고 불러야 할정도로 쇠락한 상태였고 내정이나 군사등은 진시황시절에 비해 훨씬 처참했다.[65] 다만 체차와 체차의 여동생인 리디야 벨리코비치는 언니의 남편이자 형부였던 아르칸이 2000년도에 죽고 이후 범죄 혐의로 수감되었던 언니가 복역생활을 마치자 서로 화해를 하였다. 원수 같은형부가 사망하고 나서 언니와 같이 찍은 사진도 돌아다닐 정도.# 심지어 어린 시절 아르칸과의 결혼 과정에서 부모와 갈등을 빚고 친정 부모님과 의절하며 결혼 생활을 하다 남편을 암살자의 총탄에 잃고 범죄 혐의로 자신도 감옥까지 갔었던 잘못된 인생을 살아왔던 일에 후회를 느꼈는지 체차는 남편이 사망한 이후 여동생이 결혼하려고 하자 여동생과 제부의 결혼을 반대하지 않고 허락해줬다.대인배.[66] 당시 라틴어는 국제적 학술 용어였으므로, 이베리아 반도 쪽 언어밖에 하지 못했다는 소리. 독일어에 스페인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플랑드르어 등등 다양한 언어에 능했던 카를[75]에게는 크게 못 미쳤다. 다만 이건 카를 쪽이 대단하다고 할 일이지, 펠리페를 깔 이유는 못 된다.[67] 이런 연유로 카를로스 2세는 이 문서에서 제외한다. 참고로 지적장애나 선천적인 정신병이나, 정상인이었지만 실권이 없거나 사회의 흐름이 부모 세대와는 달라서 본인이 노력을 해도 안 되는 경우 중에 하나가 해당하기 때문.[68] 당시는 결혼 전[69] 미노도 장인이 바이에른 뮌헨에서 해고된 이후 쭉 무적 상태로 기록돼 있다.[70] 이와 비슷한 사례로 네덜란드베르트 판 마르바이크 - 마르크 판 보멀이 있다. 이쪽도 장인과 사위 사이. 유로 2012 당시 판 마르바이크 감독은 가족애가 너무 지나친 나머지 기량 다 떨어져 가던 판 보멀을 다른 선수들보다 우선적으로 사용해 선수단 분열을 자초했고 결국 네덜란드는 전패로 유로 2012에서 떨어졌다. 둘 다 국가대표팀에서 하차한 건 당연지사.[71] 당시 일본 전국의 절반이 헤이케 가문의 영지였을 정도로 세력이 강했다.[72] 프랑코 독재정권 시절 당시 독재자 프랑코 총통의 입맛에 맞게 지명되었던 왕위계승자였던 만큼 영국이나 네덜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같은 유럽 왕국들의 왕이나 여왕들처럼 입헌군주제가 아니라 전제군주제 통치를 할 것이라는 예상과 우려가 당시에 많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