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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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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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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淸海鎭海運 歲月號 沈沒 事故
Sinking of MV Sewol[1]
파일:세월호좌현침몰.jpg
상공에서 촬영한 침몰해 가는 세월호의 모습
<colcolor=#ff0> 발생일 <colbgcolor=#fff,#1f2023>2014년 4월 16일 오전 8시 49분경[2]
발생일로부터 [dday(2014-04-16)]일, [age(2014-04-16)]주년
발생 위치
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동거차도리 인근 맹골수도 해상
(북위 34°13'5.16"동경 125°57'00")
출발 2014년 4월 15일 오후 9시경[3]
인천항 연안여객터미널
도착 예정 2014년 4월 16일 오전 10시경
제주항 연안여객터미널
유형 침몰
원인 확증 불가
탑승 인원 476명[4]
인명 피해 <colcolor=#ff0> 사망 299명[5][A]
실종 5명[7][8]
구조 172명[9][10]
재산 피해 약 6,000억 원 이상
동원 인원 약 700여 명
장비 수상 오토바이, 제트보트, 헬기, 민간 어선

1. 개요2. 사고 정황3. 월별 상황4. 사고 배경5. 사고 전개
5.1. 침몰 당일 오전: 2014년 4월 16일5.2. 오전 8시 48분 - 오른쪽으로 여러 번 회전5.3. 턴의 효과: 급변침5.4. 구조 요청과 초기 대응5.5. 침몰
6. 사고 상황
6.1. 구조 진행6.2. 사고 당시 침몰 신고 녹취록6.3. 세월호에 탑승했던 단원고등학교 학생 인원 및 배치6.4. 선장을 비롯한 선박직 승무원들이 퇴선 지시를 지체한 원인6.5. 사고 전 메시지6.6. 선체 기울기
7. 침몰의 원인8. 구조 및 수습 과정
8.1. 사고 보도 및 가족들의 반응8.2. 구조 및 수습의 어려움8.3. 당시 실종자들의 생존 가능성은 있었나?8.4. 해경의 발표
8.4.1. 비판
9. 피해 상황
9.1. 경기 안산 단원고등학교의 피해 상황
9.1.1. 단원고 학생들과 교사들의 이야기
9.2. 일반인 & 승무원 피해 상황
9.2.1. 일반인 희생자 이야기
9.3. 진도 및 안산 지역 피해 상황9.4. 그 밖의 피해 상황
10. 수사 상황
10.1. 배 운영과 승무원 관련 논란
11. 형사 재판12. 반응
12.1. 외국의 반응12.2. 실종자 가족들12.3. 해양경찰청의 대처12.4. 반응의 배경
12.4.1. 정보 전달 체계의 문제12.4.2. 국가 위기 관리 매뉴얼 축소화 논란12.4.3. 지나친 관심이 낳은 문제
13. 정부의 대응14. 사건 사고15. 사고의 여파
15.1. 경제적 영향 논란
15.1.1. 부정적 영향 주장15.1.2. 부정적 영향 반박
15.2. 한국 연안해운에 끼친 영향
16. 의혹17. 논란18. 인양 관련 사항19. 유사 사건 사고
19.1. 유사 해상 사건 사고19.2. 해상 사고 외 유사 사고19.3. 학생들이 사망했던 비극들
20. 관련 단체, 기관21. 관련 자료/문헌22. 기타
22.1. 노란 리본22.2. 단원고 4.16 기억교실
23. 관련 문서2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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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淸海鎭海運 歲月號 沈沒 事故, Sinking of MV Sewol)는 2014년 4월 16일 인천에서 제주로 오가는 청해진해운 소속 여객선 세월호전라남도 진도군 관매도 부근 해상[11]에서 확증이 불가능한 원인으로 침몰하면서 승객 중 299명[A]이 사망하고 5명이 영구 실종된 대한민국해상사고다. 세월호 참사(歲月號慘事) 혹은 4·16 세월호 참사(April 16th Sewol-Ferry sinking accident, 四一六歲月號慘事)로도 불린다.

2. 사고 정황

그래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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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세월
(191회 / 2018년 4월 17일 방영)
2014년 5월 19일 박근혜 전 대통령의 세월호 참사 대국민 담화[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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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세월호 침몰 사고가 발생한 지 오늘로 34일째가 되었습니다.

온 국민이 소중한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의 아픔과 비통함을 함께하고 있습니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대통령으로서 국민 여러분께서 겪으신 고통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국민 여러분, 지난 한 달여 동안 국민 여러분이 같이 아파하고, 같이 분노하신 이유를 잘 알고 있습니다.

살릴 수도 있었던 학생들을 살리지 못했고, 초동대응 미숙으로 많은 혼란이 있었고, 불법 과적 등으로 이미 안전에 많은 문제가 예견되었는데도 바로 잡지 못한 것에 안타까워하고 분노하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채 피지도 못한 많은 학생들과 마지막 가족여행이 되어 버린 혼자 남은 아이, 그밖에 눈물로 이어지는 희생자들의 안타까움을 생각하며 저도 번민으로 잠을 이루지 못한 나날이었습니다.

그들을 지켜주지 못하고, 그 가족들의 여행길을 지켜주지 못해 대통령으로서 비애감이 듭니다.

이번 사고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최종 책임은 대통령인 저에게 있습니다.

그 고귀한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대한민국이 다시 태어나는 계기로 반드시 만들겠습니다!

이번 세월호 사고에서 해경은 본연의 임무를 다하지 못했습니다.

사고 직후에 즉각적이고, 적극적으로 인명 구조활동을 펼쳤다면 희생을 크게 줄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해경의 구조업무가 사실상 실패한 것입니다.

그 원인은 해경이 출범한 이래, 구조·구난 업무는 사실상 등한시하고, 수사와 외형적인 성장에 집중해온 구조적인 문제가 지속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해경의 몸집은 계속 커졌지만 해양안전에 대한 인력과 예산은 제대로 확보하지 않았고, 인명구조 훈련도 매우 부족했습니다.

저는 이런 구조적인 문제를 그냥 놔두고는 앞으로도 또 다른 대형사고를 막을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고심 끝에 해경을 해체하기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앞으로 수사·정보 기능은 경찰청으로 넘기고, 해양 구조·구난과 해양경비 분야는 신설하는 국가안전처로 넘겨서 해양 안전의 전문성과 책임을 대폭 강화하겠습니다.

국민안전을 최종 책임져야 할 안전행정부도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안전행정부의 핵심기능인 안전과 인사·조직 기능을 안행부에서 분리해서 안전 업무는 국가안전처로 넘겨 통합하고, 인사·조직 기능도 신설되는 총리 소속의 행정혁신처로 이관하겠습니다.

그래서 안행부는 행정자치 업무에만 전념토록 하겠습니다.

해경을 지휘 감독하는 해수부도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해수부의 해양교통 관제센터(VTS)는 국가안전처로 넘겨 통합하고, 해수부는 해양산업 육성과 수산업 보호 및 진흥에 전념토록 해서 각자 맡은 분야의 전문성을 최대한 살려내는 책임행정을 펼쳐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내용을 담은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조만간 국회에 제출하겠습니다.

국민 여러분, 그동안 정부는 우리 사회의 비정상적인 관행과 제도를 바꿔서 정상화화기 위한 개혁 작업을 진행해 왔습니다.

이 개혁 작업을 서둘러 진행해서 이런 잘못된 관행들을 미리 끊어버리지 못하고 국민 여러분께 큰 아픔을 드리게 된 것이 가슴에 크나큰 회한으로 남습니다.

이번 사고는 오랫동안 쌓여온 우리 사회 전반에 퍼져 있는 끼리끼리 문화와 민관유착이라는 비정상의 관행이 얼마나 큰 재앙을 불러올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평소에 선박 심사와 안전운항 지침 등 안전관련 규정들이 원칙대로 지켜지고 감독이 이루어졌다면 이번 참사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해운사들의 이익단체인 해운조합에게 선박의 안전관리 권한이 주어지고, 퇴직관료들이 그 해운조합에 관행처럼 자리를 차지해 왔습니다.

선박 안전을 관리·감독해야 할 정부와 감독 대상인 해운사들 간에 이런 유착관계가 있는 한, 선박 안전관리가 제대로 될 수 없었던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20년이 다 된 노후선박을 구입해서 무리하게 선박구조를 변경하고, 적재중량을 허위로 기재한 채 기준치를 훨씬 넘는 화물을 실었는데, 감독을 책임지는 누구도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민관유착은 비단 해운 분야뿐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에 수십 년간 쌓이고 지속되어 온 고질적인 병폐입니다.

지금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비정상의 정상화 개혁을 반드시 이뤄내서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끼리끼리 서로 봐주고, 눈감아 주는 민관유착의 고리를 반드시 끊어 내겠습니다.

그래서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관피아 문제를 해결하겠습니다.

우선, 안전감독 업무, 이권이 개입할 소지가 많은 인허가 규제 업무, 그리고 조달 업무와 직결되는 공직유관단체 기관장과 감사직에는 공무원을 임명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기관에 대한 취업도 더욱 엄격하게 제한할 것입니다.

현재 퇴직 공직자 취업제한 규정이 있지만, 최근 3년간 심사대상자 중 7%만이 제한을 받을 정도로 규정의 적용이 미약한 실정입니다.

이번 사고와 관련이 있는 해운조합이나 한국선급은 취업제한 심사대상에 들어 있지도 않았습니다.

앞으로 이와 같이 취업제한 대상이 아니었던 조합이나 협회를 비롯해서 퇴직 공직자의 취업제한 대상기관 수를 지금보다 3배 이상 대폭 확대하겠습니다.

또한, 취업제한 기간을 지금의 퇴직 후 2년에서 3년으로 늘리고, 관피아의 관행을 막기 위해 공무원 재임 때 하던 업무와의 관련성 판단기준도 고위공무원의 경우 소속부서가 아니라 소속기관의 업무로 확대해서 규정의 실효성을 대폭 높일 것입니다.

고위 공무원에 대해서는 퇴직 이후 10년간 취업기간 및 직급 등을 공개하는 취업이력공시제도를 도입할 것입니다.

이런 내용을 담은 공직자윤리법의 개정안을 정부입법으로 바로 국회에 제출하겠습니다.

그리고 전현직 관료들의 유착고리를 끊는 것이 중요한데, 지금 정부가 제출한 일명 김영란법으로 불리는 '부정청탁금지법안'이 국회에 제출되어 있습니다.

국회의 조속한 통과를 부탁드립니다.

지금 우리 공직사회는 폐쇄적인 조직문화와 무사안일이라는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창의성에 기반한 21세기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우리 공직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기 위한 개혁이 필요합니다.

저는 관피아의 폐해를 끊고 공직사회를 근본적으로 개혁하기 위해 공무원이 되는 임용부터 퇴직에 이르기까지 개방성과 전문성을 갖춘 공직사회로 혁신하려고 합니다.

이를 위해 민간 전문가들이 공직에 보다 많이 진입할 수 있도록 채용방식을 획기적으로 바꾸겠습니다.

민간 전문가 진입이 보다 용이하도록 5급 공채와 민간경력자 채용을 5 대 5의 수준으로 맞춰가고, 궁극적으로는 과거 고시와 같이 한꺼번에 획일적으로 선발하는 방식이 아니라 직무능력과 전문성에 따라 필요한 직무별로 필요한 시기에 전문가를 뽑는 체제를 만들어 가겠습니다.

현재 과장급 이상의 직위에 민간 전문가가 들어올 수 있도록 개방형 충원 제도를 시행하고 있지만, 결국 공무원들만 다시 뽑아서 무늬만 공모 제도라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이런 잘못된 관행은 현재 부처별로 선발위원회를 두고 공모제도를 시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는 중앙에 별도의 '중앙선발시험위원회'를 설치해서 공정하게 민간전문가를 선발해서 부처로 보낼 것입니다.

이와 함께 공직사회의 문제점으로 계속 지적받아 온 순환보직제를 개선해서 업무의 연속성과 전문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전문성을 가지고 국가와 국민을 위해 헌신하는 공무원들은 더욱 자긍심을 갖고 일할 수 있도록 인센티브와 함께 보다 나은 여건을 만들어 갈 것입니다.

국민 여러분, 이번 사고의 직접적인 원인은 선장과 일부 승무원들의 직무유기와 업체의 무리한 증축과 과적 등 비정상적인 사익추구였습니다.

이번에 사고를 일으킨 청해진해운은 지난 1997년에 부도가 난 세모그룹의 한 계열사를 인수하여 해운업계에 진출한 회사입니다.

17년 전, 3천억원에 가까운 부도를 낸 기업이 회생절차를 악용하여 2천억원에 이르는 부채를 탕감받고, 헐값에 원래 주인에게 되팔려서 탐욕적인 이익만 추구하다 이번 참사를 내고 말았습니다.

이런 일을 더 이상 용납해선 안 됩니다.

앞으로 기업이 국민의 생명과 재산에 큰 피해를 입히면서 탐욕적으로 사익을 추구하여 취득한 이익은 모두 환수해서 피해자들을 위한 배상재원으로 활용하도록 하고, 그런 기업은 문을 닫게 만들겠습니다.

이를 위해, 범죄자 본인의 재산뿐 아니라, 가족이나 제3자 앞으로 숨겨놓은 재산까지 찾아내어 환수할 수 있도록 하는 입법을 신속하게 추진할 것입니다.

이번 사고와 관련해서는 국가가 먼저 피해자들에게 신속하게 보상을 하고, 사고 책임자에게 구상권을 행사하는 특별법안을 정부입법으로 즉각 국회에 제출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크나큰 희생을 당한 분들이 부도덕한 기업과 범죄자들로부터 피해를 보상받느라 또 한 번 고통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할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구상권을 행사하지 못한다면, 죄지은 사람이나 기업의 잘못을 국민의 혈세로 막아야 하는 기막힌 일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이번에 청해진해운이 문제가 되면서 많은 국민들이 청해진해운의 성장과정에서 각종 특혜와 민관 유착이 있었던 것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이를 비호하는 세력이 있었다면 그것 역시 명백히 밝혀내서 그러한 민관유착으로 또다시 국민의 생명과 안전이 위협받지 않도록 우리 사회 전반의 부패를 척결해 나갈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필요하다면 특검을 해서 모든 진상을 낱낱이 밝혀내고 엄정하게 처벌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야와 민간이 참여하는 진상조사위원회를 포함한 특별법을 만들 것도 제안합니다.

거기서 세월호 관련 모든 문제들을 여야가 함께 논의해 주기 바랍니다.

이번 참사에서 수백 명을 버리고 도망친 선장과 승무원의 무책임한 행동은 사실상 살인행위입니다.

선진국 중에서는 대규모 인명피해를 야기하는 중범죄를 저지른 사람에 대해서는 수백 년의 형을 선고하는 국가들이 있습니다.

우리도 앞으로 심각한 인명피해 사고를 야기하거나, 먹을거리 갖고 장난쳐서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 사람들에게는 그런 엄중한 형벌이 부과될 수 있도록 형법 개정안을 제출하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앞으로 대한민국에서 부당하게 이득을 취하는 것이 결코 이득이 되지 않고, 대형 참사 책임자가 솜방망이 처벌을 받지 않도록 만들겠습니다.

국민 여러분, 이번 참사로 우리는 고귀한 생명을 너무나 많이 잃었습니다.

그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대한민국의 개혁과 대변혁을 만들어 가는 것이 남은 우리들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가 개혁을 이뤄내지 못한다면 대한민국은 영원히 개혁을 이뤄내지 못하는 나라가 될 것입니다.

그동안 국민의 안전과 재난을 관리하는 기능이 여러 기관에 분산되어 있어서 신속하고 일사분란한 대응을 하지 못했습니다.

컨트롤타워의 문제도 발생했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안전처를 만들어 각 부처에 분산된 안전관련 조직을 통합하고, 지휘체계를 일원화해서 육상과 해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유형의 재난에 현장 중심으로 대응할 수 있는 체제를 만들겠습니다.

육상의 재난은 현장의 소방본부와 지방자치단체, 재난 소관부처가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 것이며, 해상의 재난은 해양안전본부를 두어 서해·남해·동해·제주 4개 지역본부를 중심으로 현장의 구조, 구난 기능을 대폭 강화할 것입니다.

각 부처에서 주관하고 있는 항공, 에너지, 화학, 통신 인프라 등의 재난에 대해서도 특수재난본부를 두어 적극 대응할 것입니다.

특히 첨단 장비와 고도의 기술로 무장된 특수기동구조대를 만들어 전국 어느 곳, 어떤 재난이든 즉각 투입할 수 있도록 하고 군이나 경찰 특공대처럼 끊임없는 반복훈련을 통해 '골든타임'의 위기 대응능력을 획기적으로 높이겠습니다.

국가안전처의 이러한 기능을 실질적으로 보장하기 위해 안전관련 예산 사전협의권과 재해예방에 관한 특별교부세 배분 권한을 부여할 것입니다.

안전처를 재난안전 전문가 중심의 새로운 조직으로 만들기 위해 선발을 공채로 하고, 순환보직을 엄격히 제한해서 국민과 전문가들이 함께 공직사회를 변화시키는 시범부처로 발전시켜 나갈 생각입니다.

전국의 뜻있는 전문가와 국민 여러분께서 적극 참여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앞으로 국가안전처가 신설되면, 국민 여러분과 재난안전 전문가들의 제안을 광범위하게 수렴하여 '안전혁신 마스터플랜'을 만들어 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11년째 진전이 없는 국가재난안전통신망 구축사업도 조속히 결론을 내서 재난대응조직이 모두 하나의 통신망 안에서 일사불란하게 대응하고 견고한 공조체제를 갖추도록 하겠습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그동안 많은 고민과 관계자들의 의견을 듣고 수렴해서 오늘 국민 안전을 위한 대책과 국가개조 전반에 대해 말씀드리기까지 번민과 고뇌의 연속된 날들이었습니다.

이번 세월호 침몰 사고는 우리 역사에 지우기 힘든 아픈 상처로 기록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 사고를 계기로 진정한 '안전 대한민국'을 만든다면, 새로운 역사로 기록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막중한 책임이 우리 국민 모두에게 주어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국가적으로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하나로 단합해서 위기를 극복한 저력과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좌절에서 벗어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대한민국을 바로 세우고 새롭게 만들어야 합니다.

저는 과거와 현재의 잘못된 것들과 비정상을 바로 잡고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저의 모든 명운을 걸 것입니다.

여러분께 약속드린 경제혁신 3개년 계획과 비정상의 정상화, 공직사회 개혁과 부패척결을 강력히 추진할 것입니다.

우리 앞에 놓인 문제들이 쉽게 해결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단하지 않겠습니다.

국민 여러분과 함께 힘을 모아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만들고, 아이들에게 자랑스런 대한민국을 반드시 만들어 가겠습니다.

이번 세월호 사고에서 한 명의 생명이라도 구하기 위해 생업을 제쳐놓고 달려오신 어업인들과 민간 잠수사들, 각계의 자발적인 기부와 현장을 찾아주신 수많은 자원봉사자들이 계셨습니다.

어린동생에게 구명조끼를 입혀 탈출시키고 실종된 고 권혁규군, 구명조끼를 친구에게 벗어주고 또 다른 친구를 구하기 위해 물속으로 뛰어들어 사망한 고 정차웅군, 세월호의 침몰 사실을 가장 먼저 119에 신고하고도 정작 본인은 돌아오지 못한 고 최덕하군.

그리고 제자들을 위해 최후의 순간까지 최선을 다한 고 남윤철, 최혜정 선생님.

마지막까지 승객들의 탈출을 돕다 생을 마감한 고 박지영, 김기웅, 정현선 님과 양대홍 사무장님, 민간 잠수사 고 이광욱 님의 모습에서 대한민국의 희망을 봅니다.

저는 이런 분들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진정한 영웅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희생자의 넋을 기리고, 안전의 중요성을 되새기기 위해 추모비를 건립하고, 4월 16일을 국민안전의 날로 지정할 것을 제안합니다.

다시 한번 이번 사고로 희생된 분들의 명복을 빌며, 유가족 여러분께 깊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세월호에는 제주도수학여행[14]을 가던 단원고등학교 학생 325명과 교사 14명이 탑승하였으며, 단원고 학생 325명 중 250명이 사망하고 교사 11명이 사망하였다. 일반인 사망자는 43명으로 집계되었으며, 총 사망자는 304명[15]이다. 구조자는 단원고 학생 75명, 교사 3명, 일반인 94명으로 총 172명[16]이다. 어린 학생들의 피해가 컸기에 국민들의 사회적 충격이 엄청나게 컸다.

이 사고로 단원고가 있는 경기도 안산시와 사고 해역이 있는 전라남도 진도군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되었으며, 안산 올림픽기념관[17]과 안산 화랑유원지[18]를 시작으로 전국에서 분향소가 설치되었다. 이 사고로 대한민국에는 엄청난 후폭풍이 닥치게 되었고, 대한민국 현대사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국민들은 참사가 일어난 것에 애통하며 함께 울었다. 일어나서는 안 되는, 막을 수도 있었던 이 사고가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는지 사고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알고 싶었고 책임자는 강력히 처벌받기를 원했다. 하지만 정부는 은폐했고 회피했다. 이해할 수 없는 정부의 태도에 국민들은 분노하며 시국 선언문을 쏟아냈지만, 정부는 유가족 간의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며 국민들의 시선을 돌리려고만 했다. 이후 국민들의 분노는 촛불 집회로 이어졌다. 또한 자녀 교육에 열과 성을 다하기로 소문난 한국 학부모들의 마인드를 크게 뒤바꾸어 놓은 전환점이 된 대형 사고이다.

결국 이 사건은 안전불감증에 빠져 있던 대한민국의 안전 관리 실태와 혼란스러운 사회의 극치를 보여준 비극적인 사건으로 평가된다. 이 참사로 인해 당시 출범 2년차였던 박근혜 정부는 물론 대한민국 사회계, 정치계는 모두 엄청난 후폭풍과 침체, 그리고 공황에 시달렸다. 이후 언론, 정계, 경제계, 교육계 그리고 문화계까지 수많은 갈등이 야기되었는데, 이는 참사를 수습하기는커녕 오히려 갈등을 조장하여 그 상황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했던 정부의 잘못이 크다. 21세기의 대한민국 사회에서 매우 큰 사회적 파장과 영향력을 준 사건 중 하나이기도 하다.[19]

대한민국의 해상 사건 사고 중에서 3번째로 많은 사망자를 낸 침몰 사고이며, 502명이 사망한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와 330명이 사망한 창경호 침몰 사고와 326명이 사망한 남영호 침몰 사고 이후 4번째로 많은 인명 피해를 낸 재난 사고이다. 20세기에 일어난 위의 사건들과 달리 21세기에 일어난 대형 참사이기에 국민들의 충격이 그만큼 컸다. 이 사고는 전 국민들에게 안전의 중요성을 결정적으로 깨닫게 했다. 대한민국의 수학여행 사건 사고 중에서는 가장 많은 사상자를 냈으며, 한 학교의 학년 전체가 참사를 당한 것 또한 최초이다. 이전까지 최대의 참사는 1970년 경서중학교 학생 45명이 사망한 모산 수학여행 참사였다.[20]

태안 사설 해병대 캠프 참사가 일어난 지 약 9개월 만에 또다시 학교 단체 캠프에서 사고가 나면서 태안 때부터 거론되던 수학여행 규제 강화 및 중단이 이 사고를 통해 현실화되었고, 2014년 한 해 동안은 수학여행 및 학교 단체 여행이 금지되거나 자제되는 분위기가 생겼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남영호 침몰사고 같은 대형 재난의 경우 불특정 다수가 피해자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이 참사는 안산시 단원구에 있는 단원고등학교 2학년 학생 및 교직원들이 수학여행을 가던 도중에 발생하면서 사망자의 90%가 같은 학교 소속, 83%가 미성년자였다.

세월호와 관련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있다. 우선 일본에서는 운항이 금지된 노후 선박인 세월호의 수입 운항을 했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실제로는 일본에서 운항하던 18년 된 배를 중고 수입해서 수리하고 한국선급을 통해 증개축 허가를 받았고 배가 처음 건조된 날인 1994년 6월로부터 20년이 지나지 않아 일본에서도 정상적인 운항이 가능한 배였다고 한다.

또 사주인 유병언 일가의 부도덕한 경영과 관련된 무차별적인 보도들도 있었으나, 이와 관련해서 추후에 언론사들의 정정 반론 보도 및 판결을 통해 유병언이 실소유주가 아니었음이 밝혀지기도 했다. [단독] 유병언은 세월호 관계사들 실소유주 아니었다

선사인 청해진해운의 부실한 선박 관리와 안전교육, 이를 방치한 승무원들, 이준석 선장과 항해사의 판단 착오와 늦장 대응, 그리고 그로 인한 시간 지체, 가만히 있으라는 비상식적인 안내 방송[21][22], 그리고 정부와 관료의 선진적이지 못한 대처[23]총체적 난국이었던 최악의 해난 사고라는 의견이 있었다.

사고 당일 세월호에는 차량 150여 대와 승무원 29명, 화물 기사 33명을 포함해 총 476명이 탑승해 있었다. 이 중에는 3박 4일 일정으로 제주도 수학여행을 떠난 안산시 단원고등학교 학생 325명과 교사 14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외국인중국인 2명, 필리핀 가수 2명, 러시아인 1명(슬라바)으로 총 5명이 탑승했으며, 필리핀 가수 2명은 구조되었으나 중국인 2명과 러시아 출신 학생은 4월 21일 수색 작업에서 발견되었다. 러시아 출신 학생은 단원고에 재학 중이던 유학생인데 주니어 수영 선수 출신으로 수영에 매우 능숙했다고 한다. #

오전에 발표된 해운사의 브리핑에서는 탑승자가 477명이라 했지만, 오후 브리핑에서 승선권과 탑승자 명부를 조회한 결과 462명으로 조정되었다. 하지만 이후 23시경 해운사는 475명으로 총인원 수를 정정하였다. 이번엔 CCTV로 탑승자를 일일이 헤아렸다고.[24] 그러다가 4월 18일 오후 10시경에는 476명으로 정정되었다.[25]

8시 48분경 세월호는 오른쪽으로 돌면서 왼쪽으로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세월호는 기울어지기 시작한 지 101분 만에 뒤집히며 가라앉았다. 세월호 침몰 사고는 476명 탑승자 가운데 미수습자 5명을 포함해 304명의 생명을 앗아갔다. 단원고 학생 250명이 사망하고 75명이 살아남았다.

객실에서 대기하라는 방송이 반복되면서 사망자가 많이 발생하는 원인이 되었으며 소위 '말 잘 듣는 학생들(승객들)'이 죽는 결과가 되어 안타까움과 공분이 더 컸다. 이 방송은 누가, 왜 했는지, 이후 탈출지시는 왜 안 했는지 등등이 핵심 쟁점 중 하나였다. 해양경찰의 구조 활동도 참사의 피해 규모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생존자 172명 가운데 절반 이상은 해양경찰보다 늦게 도착한 어선 등 민간 선박에 의해 구조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국민들은 재난사고에서 방송이나 담당자의 말을 불신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26]

오세아노스호 침몰 사고처럼 선장이 튀었음에도 승객이 전원 구조된 사례가 있다는 것을 봤을 때, 세월호도 해경의 대응이 정확했더라면 전원 구조될 수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해경이 도착하여 퇴선방송만 했다면 8분 이내 승객들이 자력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는 시뮬레이션 결과도 있었다.
파일:세월호 4월 15일.jpg
<rowcolor=white> 침몰 전 3월 27일의 모습[27] | 침몰 하루 전 4월 15일의 모습[28]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했던 정부 측 인사인 '해경 123정' 정장이었던 경위 김경일업무상 과실 치사 혐의가 대법원에 최종적으로 유죄(징역 3년)로 결론났다. 가 완전히 침몰하기 전인 9시 30분에 현장에 도착한, 해경에서 간단하게 대피 방송만 했어도 인명 피해가 극심하지 않았을 거란 법원의 판단이며, '부실한 구조 행위'로 대량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후에 야기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한 박근혜 대통령 탄핵 사건과 박근혜 정부의 비참한 몰락도 결국 세월호 참사와 직간접적 연관이 있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한 대통령 탄핵이었지만 탄핵 여론 형성의 시발점이 세월호 참사였고, 궁극적으로는 국민이 세월호 참사의 무한 책임을 정부와 대통령에게 물은 것이기 때문이다. 국회의 탄핵 소추안에 세월호 관련 내용(헌법 제10조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행복추구권[29] 위배)이 포함되어 있던 것도 이 때문이었고, 세월호 참사 직후 박근혜 대통령의 석연찮은 7시간 30분의 행보와 미용 시술 논란, 그리고 피해자와 유가족들에게 가한 부당하고 불합리한 탄압[30] 등은 탄핵 정국에서 박근혜 정부가 지지세를 회복하지 못하게 만든 결정적 요인이었다. 결국 정부를 파멸로 이끌 만큼 이 사건은 정치적으로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사태였던 것이다.

이후 이 문제는 대통령 박근혜의 탄핵 사유 중 하나로서(세월호 7시간 및 생명권 침해) 탄핵안에 포함되어 2016년 12월 9일 국회에서 가결되었으나, 헌법재판소는 2017년 3월 10일에 판결하면서 이를 직접적인 탄핵 사유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아무리 심각한 재난 상황이라도 대통령이 직접 구조 활동 등에 참여할 의무가 직접 도출되지는 않으며, 직무의 성실성 같은 개념은 모호하고 추상적이기 때문에 이것을 탄핵 사유로 직접 인정하기는 어렵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심판에서도 비슷한 논지로 판시된 내용이 있었다. 실제로 이것이 탄핵 사유로 인정되었다면 앞으로 모든 대통령은 어떤 사고라도 일어나면 직접 구호 활동을 하지 않았다며 탄핵될 수 있는 사례를 만들어 버리는 셈이므로 정치적 안정성이 심각하게 저해될 가능성도 있었다.

헌법재판소의 다른 판례들을 종합해 봤을 때 직무불성실로 탄핵감이 되려면 말 그대로 그 어느 액션도 안 하고 가만히 손 놓고 있어야 한다. 실제로 박근혜는 이에 준하는 상태로 있었을 거라는 의심이 되지만, 탄핵 판결 당시에는 세월호 7시간 등에 대한 명확한 정황이 밝혀지지 않았고 어쨌든 세월호 사건이 터진 다음 중대본으로 출석하거나 어떠한 지시를 내린 흔적이 확인되는 상황에서는 직무불성실 등을 문제삼기 어려운 면이 있었다. 그러나 헌법재판관 김이수, 이진성은 보충 의견으로서 당시 박근혜의 태도를 지적했다.[31]

피해자 가족들이 낸 민사소송에서는 국가의 책임이 인정되었다. 이 사고는 단지 선장과 선원들의 탓으로만 돌릴 수 없다. 국가는 안전 점검 등 관리를 소홀히 해 참사의 원인을 제공했고 참사 발생 후에도 초동 대응과 현장 구조를 제대로 하지 못해 피해를 키웠다. 또 국가는 경찰, 국정원, 심지어는 오직 군인만을 사찰할 수 있는 국군기무사령부까지 민간인들 상대로 동원해 직무와 무관하게 피해자 유가족들의 인적 사항과 정치 성향 등을 사찰해 보고함으로써 사생활과 비밀의 자유, 개인정보자기결정권 등 기본권에 대한 중대한 제한을 초래하는 국가폭력 수준의 2차 가해를 저질렀다. 법원은 이 모든 행위를 공식적으로 잘못으로 인정하고[32] 위자료 배상을 명했다.# 1심은 2018년 7월, 2심은 2023년 1월 선고가 있었으며 국가가 상고하지 않아 판결은 그대로 확정됐다. 총배상액은 880억 원으로, 희생자 1명당 2억 원, 배우자 8천만 원, 친부모 각 4천만 원, 형제자매·조부모 등 다른 가족에게 각각 500만∼2천만 원이 책정되었다.#

3. 월별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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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일자 및 시간대별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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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사고 배경

4.1. 세월호의 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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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세월호 제원2.jpg
청해진해운 여객선 세월호 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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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 145.61m (사진에서는 145m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정확히 145.61m이다.)
선폭 22m
무게 6,825t
최대 속력 21노트
운항 구간 인천 - 제주
운항 거리 424.9km
소요시간 13시간 30분
정원 921명
차량 적재 22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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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1994년 6월, 일본 나가사키의 하야시카네선거(林兼船渠)에서 건조한 카 페리선이며, 건조 후 일본 마루에이 페리(マルエーフェリー株式会社, A-Line Ferry Co.,Ltd.)사에서 약 18년간 Ferry Naminoue(フェリーなみのうえ 페리 나미노우에[33])라는 이름으로 가고시마~오키나와 나하 간 운항하다가 2011년 3월 15일에 청해진해운과 MOA를 맺고, 신조선이 취항할 수 있는 2012년 10월 경 인도하기로 하고 10월 1일에 나하발 운항을 마지막으로 청해진해운에 인도되었다. 중고 선박 시장 매물로 올라온 이 선박을 청해진해운이 2012년 10월에 도입하여 개조 작업을 거친 후 세월호(歲月號)라는 이름으로 2013년 3월부터 인천-제주 항로에 투입했다.

인천광역시에서 제주도로 가는 배는 세월호오하마나호뿐이었으며 인터넷에서 세월호나 오하마나호의 정보를 쉽게 찾을 수 있는 것도 이것 때문이다. 2014년 당시에는 해수부의 특혜를 받아 청해진해운이 제주항로를 독점해온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되었으나, 이에 대하여 해수부는 1995년 이후 인천~제주 항로에 다른 사업자가 신규 면허를 신청한 적이 없었다. 이 사고의 배경이 되는 이 항로의 경쟁상대는 김포(GMP)-제주(CJU)노선[34]이었기에 애초에 여객수요로는 게임 자체가 되지 않아서 화물수요의 비중이 높았다. 이외에도 연안여객선 항로 대부분은 수익성이 낮아 99개 항로 중 85개 항로가 각 1개 사업자에 의해 운영되고 있는 실정이라고 특혜의혹에 대해 해명하였다.#

명칭인 세월호는 '흘러가는 시간'이라는 의미의 歲月(해 세+달 월)이다. 사고 직후에는 정확한 한자 표기가 알려지지 않아 가장 흔한 단어로 음차한 명칭인 '歲月號'라는 명칭으로 중국, 대만, 일본 등지에서 보도되었으나 일부 언론에서 나온 '세(世)상을 넘는다(초(越)한다)'는 의미로 유병언 회장이 작명했다고 보도되기도 했다.[35] 중국 방송의 수정 보도(중국어 링크).[36] 하지만 이는 추후에 정정보도되었는데 2015년 7월 26일 구원파 기독교복음침례회 및 유병언 전 회장 관련 정정 및 반론'에 따라 다시 歲月로 정정되었다. #

4.2. 선박 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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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ttachment/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naminoue_old.jpg 파일:세월호_워터마크삭제버전.jpg
페리 나미노우에(4대) 시절 세월호 시절
2022년 발간된 사참위 보고서에 따르면, 청해진해운은 2012년 10월 일본 나미노우에호(6,586톤, 1994년 건조)를 8억 엔(한화 115억 원)에 들여와 인천~제주 항로의 내항 여객선 세월호로 증개축해 사용했다. 청해진해운은 나미노우에호를 들여온 직후인 2012년 10월 7일부터 이듬해 2월 16일까지 전남 영암에 있는 CC조선에서 이 선박의 증개축 작업을 벌였다.

개조 이후 세월호는 많이 바뀌었다. 승객이 머무는 여객실을 증설해 승객 정원은 804명에서 117명 늘어나고 선원 정원은 1명 줄어 최대 승선 인원은 956명(여객 921명, 선원 35명)이 됐다. 객실을 증설해 승객 정원이 늘어나면서 여러 시설도 새롭게 설치되었다. 또한 선수 우현 램프가 제거됐다.

이런 개조 작업으로 선박의 무게는 239톤이 증가했고, 무게중심이 최소 60cm가량 높아진 것으로 평가됐다. 아무것도 싣지 않은 배 자체의 무게를 뜻하는 경하중량은 307톤 증가했고, 이에 따라 선박이 적재할 수 있는 최대 중량을 의미하는 재화중량은 307톤 감소했다.

세월호 증개축에 대해서 참사 직후에는 불법 증개축이라고 알려졌으나, 한국선급에 허가를 받은 것으로 증개축의 위법성은 없었다고 한다.

5. 사고 전개

파일:MBC 시사_PD수첩.png 파일:뉴스타파 로고.svg
<rowcolor=white> 세월호, 101분의 기록
(1124회 / 2017년 4월 18일 방영분)
세월호의 마지막 112분
(2022년 4월 16일 공개분)

5.1. 침몰 당일 오전: 2014년 4월 16일

<colbgcolor=#000><nopad> 파일:세월호 탑승객과 승무원.jpg
2014년 4월 16일 아침, 세월호에 있는 승객과 승무원들
세월호가 출항한 4월 15일 밤부터 다음날 오전 8시 48분 무렵까지 세월호 선박과 운항에서 주목할 만한 이상 징후가 있었다는 증언이나 자료, 증거는 그동안의 여러 수사와 조사과정에서 보고되지 않았다.[37] 세월호는 사고 전까지 대체로 순조롭게 항해해 왔다.

2014년 4월 16일 수요일 아침 7시 30분, 3등 항해사 박한결과 조준기#가 이전 당직조의 항해를 맡았다. 이때 세월호는 약 20노트(37km/h, 23mph)의 속도로 항해하며 레이더 장치 2개를 가동하고 있었다.

맹골수도 진입을 앞둔 오전 8시 20분경 박한결은 조준기에게 조타장치를 자동조종에서 수동조타로 바꾸라고 지시했다. 오전 8시 27분 세월호가 맹골수로에 도착했을 때 풍속은 초속 4~7미터(8~14노트), 파고는 약 0.5미터로 가시성이 좋았다. 맹골수도는 조류가 강해 배를 조종할 때 각별한 주의가 필요했다.# 사고 당시 상황은 조용했고, 세월호는 평소 이용하는 경로를 따라 가고 있었다. 검찰과 일부 언론은 박한결이 항해에 대해 익숙하지 않아 경험이 부족한 것으로 보도한 반면, 해양안전심판원 조사보고서에는 박한결이 다른 선박을 타고 해당 수로를 여러 차례 통과한 사실이 기재돼 있다. 세월호가 침몰에 가까워질 때 식당에서는 아침식사가 제공되고 있었다.##

오전 8시 40분에 촬영된 CCTV 영상에는 단원고 학생들이 갑판으로 나오고 일반적인 활동을 하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생존자 최은순은 사고 직전 담배를 피우러 갑판으로 올라갔다고 회상했다.#

세월호 참사 당시에는 세월호가 물살이 센 맹골수도를 지나며 조타 실수로 세월호가 급격히 기울었고, 위험한 구간인 맹골수도를 지나면서 선장이 직접 지휘하지 않아 사고가 났다는 보도가 많았다. 그러나 사고가 난 곳은 협수로인 맹골수도가 아니라 맹골수도를 지나서 펼쳐진 병풍도 해상이었다.[38] 사고 직전인 8시 46분, 세월호는 오른편의 병풍도와 0.9마일 정도 거리를 두고 약 18노트 속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당시 병풍도는 물결이 잔잔했다. 사고의 중대한 이상 징후는 8시 48분 무렵 시작되었다.

5.2. 오전 8시 48분 - 오른쪽으로 여러 번 회전

사고 직전 박한결과 조준기는 선교의 조타대 근처에 나란히 서 있었다. 이준석은 당시 선교에 없었다.# 오전 8시 46분, 세월호가 약 136도 방향에서 18노트(33km/h; 21mph)의 속도로 항해하고 있을 때 박한결은 조준기에게 진로를 135도에서 140도로 변경하라고 지시했고, 조준기가 조타에 착수했다.

박한결의 증언에 따르면, 박한결은 레이더를 이용해 세월호의 침로 변경과 새로운 침로가 140도로 정침된 것을 확인한 뒤 조준기에게 배의 침로를 145도로 더 변경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명령은 오전 8시 48분에 내려졌다. 배가 심하게 좌현으로 기울어지고 선수가 오른쪽으로 선회하는 것을 깨닫고 타륜을 좌현으로 돌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명령을 내리자 조씨가 당황한 목소리로 “타가 작동하지 않는다”고 외침과 동시에 배는 좌현으로 급횡경사되기 시작했다.

조준기의 증언도 박한결의 증언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약간의 차이가 있다. 조준기는 140도로 방향을 바꾸라는 명령만 받았을 뿐, 145도로 방향을 바꾸라는 명령은 받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140도로 바꾸라는 명령에 이미 선회가 시작되었다고 주장했다. 조준기는 이때 박한결이 타를 '반대 방향'으로 돌리라는 지시를 내렸고, 이에 따라 타를 왼쪽으로 더 돌려 최종적으로 방향타가 왼쪽으로 15도가 되었다고 증언했다.

사고 초기에는 조준기의 조타가 미숙하여 선회와 급경사가 시작되었다는 검찰의 발표가 있었지만, 수사와 조사 활동을 통해 조타 미숙으로 배가 기울어진 것이 아님이 밝혀졌다. 그 이후로 어떤 이유로 배가 기울어지게 되었는가 하는 사고의 원인을 조사하는 여러 활동이 있었지만 여전히 사고의 원인은 확증이 불가능한 상태이다.

5.3. 턴의 효과: 급변침

파일:세월호_항적.jpg
급변침 당시 세월호의 항적
오전 8시 25분 21초에 서거차도와 죽도 사이 바다로 진입하던 세월호가 좌현으로 방향을 급변경하여 오전 8시 26분에 좌현으로 심하게 방향타를 튼 뒤 선체 좌현으로 기울었다.
이후 오전 8시 27분에 복원력과 반동 때문에 우현으로 다시 기울었다. 이후 오전 8시 28분에서 47분까지 지그재그로 흔들리며 병풍도 동북쪽 방향 바다까지 이동했다.
오전 8시 48분에 세월호는 다시 우현으로 방향이 급하게 바뀌었고 선직됐던 승용차와 컨테이너를 고정시켜 놓았던 나사와 밧줄 등이 부서지며 기운 갑판을 따라 쏟아져 여객선 내에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후 우현으로 급변침이 되었고 오전 8시 49분에 세월호는 침몰했다.
이후 해양수산부가 세월호 항적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선박의 자동식별시스템(AIS)이 8시 48분 37초부터 8시 49분 13초까지 데이터가 누락된 것으로 드러났다. 결과적으로 국방부와 진도 VTS는 36초의 데이터가 없었다.

초기 보도와 조사에서는 정전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됐으나,## 검경합동수사단 전문가자문단 허용범 위원장은 AIS 장애가 시스템 한계 때문이며 '사고 원인과는 관계가 없다' 라고 증언했다. #

AIS 데이터에 따르면 선박의 각속도는 8시 49분 26초부터 40초까지 14초 동안 초당 1.50도, 1.67도, 2.00도, 1.33도로 천천히 돌아갔다. 이 수치는 공선 상태의 해상시운전에서 얻은 값과 거의 비슷했다.[39] 이때의 세월호는 좌현으로 약 24도 기울었는데, 사참위에서 CCTV 영상을 판독한 결과 이때까지도 화물의 이동은 없었다고 한다. 이후 8시 49분 47초까지도 세월호는 각속도 1.33정도로 천천히 선회했다. 세월호가 천천히 선회하고 있던 그 때, 세월호 내부 화물 칸에 실려있던 차량의 블랙박스 화면에 녹화된 쇠사슬의 기울기를 측정한 결과 약 37도에 이르는 것이 확인 되었다. 이 시간 전후로 화물 이동이 시작되었고 배는 더욱 기울어지게 되었다.[40]
<nopad> 파일:세월호_급변침.png 파일:2014042117402089873_1.jpg

세월호의 조타수 조씨는 세월호가 10도 우회전을 해야하는 곳에서 이르자 평소 하던대로 5도씩 나누어 조심스럽게 조타했다.[41] 첫번째 조타에서 세월호가 우회전하며 좌현으로 살짝 기울어졌다. 평소와 다름 없었다. 그러나 두번째 조타에서는 평소와 달랐다. 그가 조타를 멈췄음에도 세월호의 우회전은 계속되었다. # 조씨는 처음 기울어진 이후 약 2~3분 정도 기울어짐이 지속되었다고 증언했다. 이 기간 동안 자신의 선실에서 자고 있던 비번인 조타수 오용석이 선실의 좌현 쪽으로 던져져 깨어났다.#

사고 당시 개인 선실에 있던 이준석은 즉시 함교로 달려갔다. 짧은 기간 후에 배의 동료들과 조타수들도 모두 그곳에 도착했다.# 이 무렵 박기호는 엔진을 멈췄지만, 한 쪽 엔진이 완전히 멈추지 않았고 이준석의 명령에 따라 최종적으로 두 엔진이 정지되었다. 배가 기울어진 후 박기호는 기관실에 있던 기관사에게 전화를 걸어 기관실에서 나오라고 지시했다. # 그러던 중 박한결은 갑작스러운 사건에 놀라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것은 적어도 오전 9시 6분까지 지속되었다.## 엔진이 꺼진 상태에서 세월호는 방향을 바꿀 수 없게 되었고 옆으로 표류하기 시작했다. 승객은 나중에 배가 표류를 시작한 후 (약 36초간) 불이 꺼졌다고 증언했다. #

5.4. 구조 요청과 초기 대응

[kakaotv(57989559)]
사고 발생 30분 후 최초로 세월호 침몰 속보가 송출된 YTN의 당시 보도 (YTN 기사)
[ 침몰 중 반복으로 방송되었던 세월호 안내방송 펼치기 · 접기 ]
||<tablealign=center><tablewidth=100%><tablebgcolor=#fff,#1f2023><tablebordercolor=black,gray><rowbgcolor=#000><width=88><rowcolor=#fff> 시간 || 방송 내용 ||
오전 8시 52~54분 승객 여러분께 잠시 안내 말씀 드리겠습니다. 현재 자리에서 움직이지 마시고 안전봉을 잡고 대기해주시기 바랍니다. 안전봉을 잡고 대기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동을 하시면 지금 위험하오니 안전봉을 잡고 대기해주시기 바랍니다. 선내 승객 여러분들께 다시 한번 안내 말씀 드리겠습니다. 현재 있는 자리에서 이동하지 마시고~ 바랍니다. 현재 있는 자리에서 움직이지 마시고 안전봉을 잡고…. 현재 계신 자리에서 이동하지 마시고~ 현재 위치에서 움직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승객 여러분들께 안내 말씀 드립니다. 현재 계신 위치에서~ 현재 계신 위치에서~ 현재 자리에서 이동하시면 위험하오니~.
오전 8시 56분 현재 계신 장소에서 움직이지 마시고 주변에 잡을 수 있는 봉이나 물건을 잡고 대기해주시기 바랍니다. 안내 말씀 드립니다~ 절대 움직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전 9시 6분 선내 단원고 학생 여러분 및 승객 여러분께 안내 말씀 드립니다. 현재 위치에서 절대 이동하지 마시고 대기하여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절대 이동하지 마시고~ 승객분들께서는~ 다시 한번 안내 말씀 드립니다. 구명동의가 착용 가능하신 승객 여러분들께서는 구명동의를 착용하여주시고~ 승객 여러분들께서는 현재 위치에서 절대 이동하지 마시고 대기하여주시기 바랍니다.
오전 9시 7분 선내 다시 한번 안내 말씀 드립니다. 구명동의가 손에 닿으시는 분들께서는 다른 승객들께 전달 전달하셔가지고 입으실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주시고 현재 위치에서 절대 이동하지 마시고 대기해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안내 말씀 드립니다. 현재 위치에서 절대 이동하지 마시고 구명동의가~ 한 곳에 있으신 분들께서는 전달, 다른 승객분들께 구명동의를 전달하셔서 다른 분께도 구명동의를 착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현재 위치에서 절대 이동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전 9시 14분 현재 위치에서 절대 움직이지 마세요. 움직이지 마세요. 움직이면 더 위험하니까 움직이지 마세요.
오전 9시 26분 선내 승객 여러분께 안내 말씀 드립니다. 해경 구조정 및 어선 접근 중, 10분 후 도착 예정입니다. ~하시고, ~서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오전 9시 28분 선실이 더 안전하겠습니다. 단원고등학교 학생들에게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오전 9시 29~30분 소리를 질러~ 권○○ 어린이! 권○○ 어린이 지금 3층에서 움직이지 마시고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현재 위치에서~ 어선들이 접근 중에~ 현재 위치에서 이동하지 마세요. 현재 위치에서 안전하게 안전하게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현재 해경 헬기가 본선 접근 중입니다.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오전 9시 35분경 해경이 오고 있으니 현재 위치에서 움직이지 말라.
오전 9시 37분 선내 안내 말씀 드리겠습니다. 현재 구명동의를 착용하신 승객분들께서는 구명동의에 매여 있는 끈이 제대로 묶여 있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셔서 잘 묶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안내 말씀 드리겠습니다. 구명동의를 착용하시고 계신 승객분들께서는 구명동의에 매여 있는 끈이 잘 묶여 있는지 확인을 다시 한번 하시기 바랍니다.
오전 9시 42분 현재 위치에서 이동하지 마시고 안전하게 대기하시기 바랍니다. 현재 위치에서 안전하게 기다리시고, 더 이상 밖으로 나오지 마시기 바랍니다. 현재 위치에서 안전하게 기다리시고 더 이상 밖으로 나오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월호가 침몰하기 시작한 오전 8시 52분 쯤부터 세월호에는 가만히 있으라는 안내 방송이 시작되었다.# 이는 강혜성이 한 것인데#, 사고가 발생하면 승객들은 구명조끼를 착용하고 선장의 지시가 있기 전까지는 배 안에서 대기하도록 해야한다는 매뉴얼에 따른 것이었다. 안내 방송은 물이 객실에 범람하기 시작했을 때에도#, 선장 이준석이 배에서 탈출하는 순간에도 계속 되었다.
<nopad> 파일:GYH2014042200110004400_P4-1.jpg

첫 번째 긴급전화는 여객선에 탑승한 단원고 최덕하 학생[42]이 걸었다. 오전 8시 52분, 그는 119에 전화를 걸어 세월호가 침몰되기 시작했다고 전라남도 소방서에 신고했다. 최덕하는 오전 8시 54분 목포해경과 연결돼 선박 위치의 위도와 경도를 알려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3분 뒤 목포해경 상황실은 123호 경비정에 현장으로 출동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선박은 오전 8시 58분에 진수되었다.##[43]
<nopad> 파일:2852924_210.jpg

오전 8시 55분, 세월호 선원들은 제주VTS에 첫 번째 조난전화를 걸고 여객선이 굴러가고 위험에 처해 있음을 해양경찰청에 통보해 줄 것을 요청했다. 오전 8시 56분, 제주VTS는 제주해경에 전화를 걸었다. 3분 뒤 제주해경은 목포해경에 전화를 걸어 이미 경비정이 출동한 것을 확인했다.#

오전 9시 1분쯤 세월호 승무원이 청해진 인천지사에 전화해 상황을 보고했고, 제주에 위치한 청해진 본사는 오전 9시 3분 이준석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그 후 인천지사는 35분 동안 5번의 전화 통화를 통해 일등항해사와 대화를 나눴다.#

오전 9시 6분 목포해경으로부터 진도VTS에 전복 사실이 통보됐다. 이 무렵 세월호 선원들은 자신들의 위치에서 가장 가까운 진도VTS와 통신을 시작했다.# 다음 2분 동안 진도VTS는 다른 두 척의 선박에 세월호가 침몰하고 있음을 경고했고, 한 척은 선박과 시각적으로 접촉했음을 확인했다. 오전 9시 7분쯤 여객선 선원들은 선박이 전복되고 있음을 확인하고 해양경찰청에 도움을 요청했다. 오전 9시 14분, 선원들은 선박의 경사각으로 인해 탈출이 불가능하다고 진술했다. 이 무렵 123호정의 정장이 현장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4분 후, 세월호 선원들은 여객선이 좌현 방향으로 50도 이상 기울어졌다고 VTS에 보고했다.

오전 9시 23분 VTS는 승무원들에게 승객들에게 구명조끼를 착용하라고 지시했다. 승무원이 방송 장비에 문제가 있다고 대답하자 VTS는 승객들에게 구명조끼와 추가 복장을 직접 착용하라고 지시했다.# 오전 9시 25분쯤 VTS는 이준석에게 정보가 부족해 결정을 내릴 수 없다며 신속히 선박에서 탈출할지 결정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준석이 구조 상황을 묻자 VTS는 10분 안에 경비정이 도착하고 1분 안에 헬기가 도착할 예정이라고 답했다. 이준석은 헬리콥터에 승객이 너무 많다고 대답했다. 이 시간 동안 이준석은 승객들에게 객실에 머물라고 말했다. 선원들은 선박의 인터콤을 사용하여 승객들에게 움직이지 말라고 반복적으로 명령했다.

오전 9시 33분 인근 선박들이 구조 활동에 자원한 것을 확인한 VTS는 모든 선박에 승객들을 위해 구명정을 내려주라고 지시했다. 오전 9시 38분쯤 VTS와 세월호 간 모든 통신이 두절됐다. 모든 통신이 끊긴 지 약 3분 후, 약 150~160명의 승객과 승무원이 배 밖으로 뛰어내렸다.

5.5. 침몰

<colbgcolor=#000><nopad> 파일:세월호_밤수색.jpg
2014년 4월 16일 밤, 전남 진도군 조도면 병풍도 북쪽 20km 해상에서 해경과 해군 수색 대원들이 조명탄과 서치라이트를 밝히고 야간수색하고 있는 모습 (#)
세월호가 침몰되는 동안 조타실 직원들은 청해진해운 직원들과 여러번(7차례) 전화통화를 했다.# 또한 일부 선원들은 침몰 중에 구조를 기다리면서 캔맥주를 마셨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승객들은 지시에 따라 선실에 머물렀고 이 선장과 선원들은 배를 떠났다. 사고 현장에 도착한 해경 123정은 선원들을 먼저 구조했다.

선장을 포함한 선박직 선원들이 탈출하는 동안 세월호는 전복되고 물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승객들은 물이 들어오는 순간에도 안내 방송에 따라 자리를 지켰다. 대부분의 단원고 학생들도 안내 방송에 따랐다.# 안내 방송을 따르지 않은 승객 중 일부는 배 위로 올라가거나 물에 뛰어들어 구조되기도 했다.# 침몰 당시 승객을 녹화한 영상이 복구됐다. 일부는 승객들에게 자리에 머물면서 구명조끼를 착용하라는 안내 방송을 녹음했고, 일부는 승객들이 농담을 하고, 구명조끼를 입고, 작별 인사를 보내는 모습을 녹화했다.

승객들은 침몰 과정에서 전화를 걸고, 문자 메시지를 보내거나, 카카오톡 모바일 메시지를 보냈다. 마지막 메시지가 오전 10시 17분에 전송되었다.#[사진] 침몰 후에도 여전히 갇힌 생존자들이 올린 것으로 의심되는 문자 메시지와 소셜미디어 게시물이 언론에 유포됐지만, 사이버테러대응센터 조사 결과 갇힌 승객 중 휴대전화를 사용한 사람은 한 명도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4월 16일과 4월 17일 오전 10시까지의 기간 동안 보고된 생존자들의 메시지는 모두 위조되었다고 밝혔다.#
<colbgcolor=#000><nopad> 파일:세월호침몰선수.jpg
▲ 선체의 대부분이 가라앉고 선수 부분[45]만 수면 위로 노출된 모습

세월호가 선수 일부만 남겨둔 채 완전 전복되어 침몰한 시간은 1시간 41분이 걸렸고 뱃머리 부분마저 물에 잠겼을 때까지 2일 정도가 걸렸다. 4월 16일 10시 30분경, 세월호는 좌현으로 기운채 완전히 전복되어 침몰했다. 4월 16일 오전 11시 18분경, 선미는 물에 잠겼고, 선체 부분은 높이 약 2미터(6피트 7인치), 길이 20~30미터(66~98피트)가 물 위로 드러났다. 4월 16일 정오 12시, 구근 뱃머리의 50센티미터(20인치)만이 물 위에 떠 있었다.# 이후 뱃머리(구상선수)만 물 위에 떠 있다가 약 2일 후인 4월 18일 낮에 뱃머리마저 물에 잠기면서 배는 완전히 수면 아래로 침몰했다.#

6. 사고 상황

<colbgcolor=#000><nopad> 파일:세월호 72시간.png
세월호, 72시간의 기록[46][47]

6.1. 구조 진행

파일:external/static.news.zumst.com/SSI_20140421034206_V.jpg
해상사고 요약도
발생일 발생 시각
2014년 4월 16일 오전 8시 49분
유형 발생 위치
운항 중 침몰 대한민국 전라남도 진도군
동거차도 인근 해상
탑승 인원 구조
일반인: 151명 단원고교생: 325명 일반인: 97명 단원고교생: 75명
사망 미수습
일반인: 51명 단원고교생: 248명 일반인: 3명 단원고교생: 2명
기종 연안 여객선
총합
탑승: 476명 사망: 299명 미수습: 5명 구조: 172명

(2017년 6월 5일 17:42 기준, 단위: 명)

6.2. 사고 당시 침몰 신고 녹취록

최초 신고자는 세월호에 있었던 단원고 학생 최덕하가 최초로 세월호 침몰 상황을 신고했다. 이후 녹취록이 공개되었다.## 그리고 최덕하 외에 다른 승객들도 침몰 상황을 119, 심지어 112에 신고하는 승객들도 있었다. 아래는 일부 승객들의 신고 녹취록이다.

6.3. 세월호에 탑승했던 단원고등학교 학생 인원 및 배치

파일:external/i59.tinypic.com/lbse9.jpg
연합뉴스 측에서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학생들은 이미지와 같이 선실에 배정되었다고 한다. 도면상으로 확인되는 선실 절반의 출입구 방향이 선체가 기울어진 쪽 반대 방향이다.

선체가 90도 이상 기울면서 출입구 쪽 벽면이 천장으로 바뀌었고 아래 후술하지만 벽을 타고 올라갈 수가 없는 구조였기 때문에 대피하기가 더 어려웠을 것이라고 한다.[49] 배의 창문을 깨는 등으로 출구를 확보하는 건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구조 영상에서도 볼 수 있지만 승객들이 창문을 깨기 위해서 의자로 유리창을 내려쳤는데 결국 깨지 못했듯이, 여객선의 창문을 일반인이 주위의 물건으로 깨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탈출 선원들 "구조순서 밀릴라"...승객대피 안 시켜.

세월호가 침몰했을 때 휴가 중이었던 선장이 선박의 복원력이 저하됐다고 사측에 의견을 제시했지만 묵살당했다고 합동수사본부(이하 합수부)는 전했다. #

6.4. 선장을 비롯한 선박직 승무원들이 퇴선 지시를 지체한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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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와 진도 VTS 교신 내용[50]
선장 이준석이 구속될 때 언론 인터뷰에서 말했듯이 사고 해역은 맹골수도로 물살이 굉장히 빠른 지역이다. 구조선이 도착하기 전에 지나치게 빨리 바다에 뛰어들 경우 빠른 조류의 영향으로 사고 지점에서 상당히 멀리 떠내려가서 생존 확률이 급격히 떨어진다.

세월호 침몰 당시 사고 해역의 수온은 약 11~12도 정도로 추정되며 그 정도의 수온에서는 구명조끼를 입어서 물에 떠 있다고 하더라도 생존 시간이 일반적으로는 1시간, 최대 2시간 정도에 불과하다. 조류로 떠내려갈 경우 바다에서 1시간 이내에 다른 선박에 발견되어 구조되기는 지극히 힘든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9시 20분경, 사고 지점에 최초로 도착한 유조선 두라에이스호는 2,700톤급 선박으로 작은 가 아니다. 충돌 우려 때문에 세월호에 가까이 붙여서 구조할 수 있는 배는 아니었다.
주변 어민: 사람이 나와야 뭐 건질 거 아니어요 다 나왔어 안 나왔냐요 몇 백 명 실었다 한디 막 사람이 어여 나와야 된디 뭐 사람이 안 나와요 사람이 왜 안 나오냐고 아이, 지금 저 물속에 다 반은 반도 넘게 잼겼것소. 배가 반 들어갔는디 반 더 들어갔는디 물 속에 지금 선실에 다 갇혀있지.

진도 VTS: 지금 말씀하시는 국 어디십니까?

주변 어민: 현장이라고 사고현장

진도 VTS: 사고 현장에 그 승객들이 안 나와있습니까? 바다로 혹시 이탈한 사람들 없습니까?

주변 어민: 와 있어. 옆에 와 있는데 헬기로만 구조하고 사람이 안 따라와

주변 어민 2: 배가 좌현으로 넘어가는데 사람이 왜 안 나오지

주변 어민: 사럼 몇 명 구하고 말겄소. 저, 형님. 저저, 나올 수가 없지 저렇게 되면. 다 들어갔는디 완전 잠수했는디 어디로 해서 나오겄어. 배가 다 들어갔는디 사람들이 지금 하나도 안 나오고 있어. 지금. 사람이 나와야지 지미 XX 배가 다 들어가부렀는디 사람이 뭐 4백 명인디 뭐 사람 몇 명 나오도 않고 어찌라고.

어째 거... 못나오나? 못나온당께?[51] 못 나오고 있은께 깝깝하네. 배는 다 들어갔구만. 이제 저기서 어쩌케, 저 뭐냐 후미에서 선수로 짤러갔고 들어가가지고 구조해내기 전에는 틀렸재.

주변 어민 2: 넘어가분다. 넘어가부러여. 넘어가부러.

진도 VTS: 선장님, 선장님. 그 사항에 대해서 사진으로 사진으로 쫌 찍어주십시오.

주변 어민: 알았소
가까이 가지마 배 들어가분다. 들어가부러. 손 쓸 길 없이 쏙 들어가. 배 들어가분다 뒤에서부터 들어가분께 가까이 가지 말라고.[52]

진도 VTS: 진도 코스탈 VTS 페신저쉽 페신저쉽 세월 나우 싱킹
(해석: 여기는 진도 관제 센터, 여객선 세월 지금 침몰 중)

주변 어민: 사람 몇 명 구하도 못 하고 저 큰 배가 쏙 물에 잠수해버리네요. 음마, 음마. 이거 큰일 났구만 이거. 더 이상 안 가라앉겄소 완정히 들어가겄소요. 아, 니미 들어가부러, 들어가부러. 사람이 안 나와부네. 이거 뭐 다 죽게 생겼...
사람 거 헬기로 몇 명 구하고 나머지 싹 들어갔어. 요거 어치케 살아나오겄어요. 아이고메. 죽겄구만, 에이고. 순식간에 아이, 요 구조도 못하고 들어가고만 잉. 배가 기울어 있으면 구명조끼 입혀서 딱 사람을 빠쳐머려야지, 물로다가. 선장이 뭐하는 것이여. 옴마옴마 다 죽고 한 사람도 못 구하네. 들어가분다. 들어가부러. 니애미 XXX 사람도 못 구하니. 진짜 오메. 사람 몇 명 구하고 말았겄소. 이거 환장해 죽겄네. 들어가분다. 들어가부로 에이 니미 XX. 한 사람도 구조... 옴마옴마
한 오백 명 죽어, 오백 명. 몇명 구하고 다 죽네. 들어가부러, 들어가부러
10:07 - 10:26 사이 세월호 침몰현장 주변 어민 교신 음성
위 내용은 사고 당시 세월호 주변에서 항해 중이던 어민과 진도 관제 센터간 통신 내용이다. 이 통신이 이루어지던 사이 배는 더욱 기울었고 결국 자신들이라도 먼저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대피 방송이고 뭐고 일단 빠져 나오는 데 급급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순직한 서비스직 승무원 박 아무개가 무전으로 계속 퇴선 명령 여부를 조타실에 문의했음에도 이를 무시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 선박직 선원들은 해경 123정의 보트에 의해 기관직 승무원들 다음 두 번째로 구조되었지만 자신들의 안전이 확실히 확보된 이후에도 승객 퇴선 명령은 내리지 않았고 해경에 그 사실을 알려주지도 않았다.

승무원 중 1등 항해사 강 아무개는 구조된 이후에 자기 소지품인 휴대폰을 챙기려 배에 다시 올라 자기 휴대폰은 챙겨 오면서도 퇴선 명령(선실 옆 객실에 탈출하라고 소리치지도 휴대폰으로 전화하지도)은 끝내 내리지 않았다.

그냥 아무 지시도 없이 줄행랑을 친 것도 아니고 안내 방송으로 승객들의 발을 묶어 놓고 자신들은 안전하게 구조된 이 행동이 어찌나 기이했는지 처음 사고 소식을 듣고 현장에 출동했던 어선의 선장은 갑판 위에 나온 사람들이 아무도 없어서 사고 현장 상황을 배가 화물선이어서 승선 인원이 얼마 안 되거나 이미 상당수 인원이 구조되었던 상황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안내 방송을 담당한 승무원에게도 문제가 있었다. 안내 방송 담당 서비스직 직원 강 아무개는 사고 최초 시점에서 기운 배에서 움직이면 위험할 거 같아서 자기 판단하에 첫 안내 방송(#)을 했고 이후 조타실 지시에 따라 선내에 대기하라는 안내 방송을 했다.

그리고 9:30분 이후 선원들이 탈출하여 더 이상 추가 지시가 없어서 어쩔 줄 몰랐다. 이 와중에 해경에 공치사에 치중하느라 전원 구조의 보고를 청와대에 보냈었다.

세월호 참사 당일 청와대와 해경 본청이 주고받은 통화 내용이다.
< 2014년 4월 16일 오전 9시 53분 >
[청와대 관계자 : 지금 언론에는 90% 이상 기운 걸로 나오는데…]
[황영태/당시 해경본청 상황실장 : 90%면 배가 완전히 넘어갔다고 보시면…]
[청와대 관계자 : 아, 그러니까 저건 사실이 아닌 거예요?]
[황영태/당시 해경본청 상황실장 : 예. 현장에서 무선으로 TRS 교신하면서 확인한 거거든요]

하지만 이 때 현장에선 배가 거의 기운 상태였습니다.

4분 뒤 "다 구조될 것 같다"는 통화도 이어집니다.

< 2014년 4월 16일 오전 9시 57분 >
[청와대 파견 직원 : 그 사건 사람 구조가 다 될 것 같습니까?]
[임근조/당시 해경본청 상황담당관 : 다 시켜야죠.]
[청와대 파견 직원 : 아, 다 될 것 같아요?]
[임근조/당시 해경본청 상황담당관 : 예.]

소방 헬기 11대가 출동하고서도 왜 '대기'만 했는지를 추정할 수 있는 기록도 있습니다.

< 2014년 4월 16일 오전 10시 42분 >
[소방방재청 상황실 : 저희 헬기가 11대 출동했거든요. 공중에서 해경 헬기가 지휘를 하셔야 돼서 말씀드리려고…]
[해경본청 상황실 : 아, 잠깐만요]

긴박한 순간, 해경 간부들은 홍보에 치중하는 듯한 대화도 나눕니다.

< 2014년 4월 16일 오전 10시 47분 >
[이춘재/당시 해경본청 경비안전국장 : 지금 여객선에 우리 항공구조단이 못 내려갑니까?]
[유연식/당시 서해청 상황담당관 : 아직 못 내리고 앞에 선수만 남아 있나 본데, 지금은 내리지를 못할 것 같습니다.]
[이춘재/당시 해경본청 경비안전국장 : 그러니까 진작 좀 내려서 그림이 됐어야 되는데 지금 그게 문제란 말이에요. 우리가 올라가서 유도한 걸 보여줬어야 되는데…]

전혀 사실이 아닌 내용으로 통화를 이어갑니다.

< 2014년 4월 16일 오전 10시 47분 >
[이춘재/당시 해경본청 경비안전국장 : 지금 승객들은 거의 다 나왔어요, 배에서?]
[유연식/당시 서해청 상황담당관 : 예]
[이춘재/당시 해경본청 경비안전국장 : 선내에는 없다는 이야기예요?]
[유연식/당시 서해청 상황담당관 : 예. 내부 수색은 정확하게 안 했는데 거의 다 나온 걸로 지금 확인이 되는데…]
그리고 엽기적인 것은 이 방송이 10시 14분 이후 곧 배가 거의 가라앉기 직전에도 나왔다.

이후 박지영 승무원이 빨리 빠져나가라는 방송을 했지만 이미 대다수 승객들이 늦은 후었다. 단원고 학생들과 일반인 승객들은 물이 차오를 때 빠져나오지 못하고 결국 마지막 생존자 박준혁 군만이 10시 21분 마지막으로 겨우 잠수해서 빠져나왔다.[53]

영화로 잘 알려진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에서도 처음에는 혼란이 있었지만 선박 설계자의 이론적 판단으로 배의 침몰이 확실시된 이후에는 승객들을 모두 갑판 위로 올리고 승객들이 상황을 오판해서 다시 객실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객실의 문을 승무원이 모두 잠갔다. 승객들을 왜 대책 없이 객실에 머물게 했는지는 도저히 납득이 가질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라면 기울어진 배에서 움직이면 넘어지거나 움직이는 물체에 부딪쳐 다칠 수 있다는 원론적인 안전 교육 내용은 떠올려서 자기 판단으로 방송을 했지만 배가 복원 한계를 넘어가 기울면 결국 침몰하며 기울기가 기울수록 물이 급격하게 들어차기 때문에 빠져나오기 어렵다는 생각에는 미치지 못했다. 탈출 지시 여부를 물었으나 선박직 선원들에게서 어떠한 응답도 없는 상황에서 승객들이 동요하자 동요를 막기 위해 (자기도 상황 파악을 제대로 못 하면서) 방송을 되풀이했다.

퇴선 명령을 내릴 권한이 없다고는 하지만 시시각각 배가 기우는 것을 몸으로 느꼈을 상황에 대기 지시 후 무대응으로 일관한 선박직 승무원들에게 무언가 사고로 인해 신상에 이상이 생긴 것 정도로 자체 판단하고 탈출을 지시하거나 차라리 안내 방송을 안 할 수는 없었는지 두고두고 안타까운 부분이다.[54] 게다가 사고 초기 인터뷰 내용을 보면 사고 책임을 의식했는지 안내 방송의 정확한 경위에 대하여 얼버무리는 모습도 보인다.

배식을 담당하던 주방 직원들의 말에 따르면 이 직원은 성실하지만 고지식한 면이 있었다고 한다. 안내 방송 담당 강 아무개도 결국 검찰에 구속되었다. #

그 외에 배 안에서 대기하라고 한 추가적인 이유는 과거 세모그룹 시절 너무 일찍 물 속에 뛰어들어 피해자를 많이 낸 사고가 있었기 때문에 구조선이 올 때까지 배 안에서 기다리라는 것이 청해진해운 회사 내부 지침이었다고 전해진다. 하필 또 이 사고 당시의 승무원 중 하나가 이준석이었다. 즉 이준석에게 '사고 났을 땐 배에 대기시키는 게 안전하다'는 잘못된 경험칙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

6.5. 사고 전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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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1. 희생자들의 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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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선체 기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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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침몰의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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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가 일어나게 된 원인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정확히는 여러 원인들이 있지만 기술적 한계로 인해 확증이 불가능한 상태이다. 사고 원인에서 주목할 것은 최초로 배가 기울어진 이유를 아직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현재까지의 결론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2014년 참사 초기 검찰은 조타수의 조타 실수[55]를 사고 원인으로 발표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2015년 4월에 열린 선원 재판에서 조타기의 고장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며, 조타수의 조타 실수에 의한 과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참사의 원인을 알 수 없었기에 사람들은 세월호의 참사 원인에 대해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 주장했다. 배 자체에 문제가 있었다는 내인설과 외력의 존재를 배제할 수 없다는 주장인 외력설[56]이 대표적이다. 사고 원인을 밝혀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2015년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가 출범하여 사고의 진상을 규명하려 했으나 예산을 삭감하고 위원 임명을 지체하는 등 정부의 방해로 별다른 성과 없이 1년 만인 2016년 9월에 강제 종료되며 종합보고서 대신 중간점검보고서만 내놓고 활동을 접어야 했다. 이후 세월호 선체가 인양되면서 2017년 4월 출범된 선체조사위원회(선조위)에서는 인양된 세월호를 조사하며 조타 장치의 일부인 솔레노이드 밸브의 고장을 사고의 원인으로 지목했다. 그러나 솔레노이드 밸브에 대해서는 선조위 활동이 끝날 무렵에야 직립되어 제대로 된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래서 위원 6명 중 3명 만이 솔레노이드 밸브 고장에 대해 동의하고, 나머지 3명은 솔레노이드 밸브 고장 외에 다른 가능성에 대해서도 조사를 해야 한다며 동의하지 않았다. 결국 선조위 위원들은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솔레노이드 밸브를 원인으로 지목한 내인설과 다른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열린안, 각각의 보고서를 남기고 2018년 8월 활동을 마치게 된다.

솔레노이드 밸브에 대한 조사는 2018년 12월부터 2022년 6월까지 활동한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사참위)에서 이어나갔다. 사참위는 "솔레노이드 밸브 고착이 세월호의 급격한 우선회와 횡경사를 유발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라고 결론 내리며 조타기의 고장 가능성은 없으며, 외력에 대해서는 "외력의 가능성을 열어 놓고 확인한 결과, 세월호 선체 외부 변형 · 손상의 원인은 수중체 접촉에 의한 외부충격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라고 결론지었다.[57] 사참위 또한 세월호 침몰 원인에 대해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8. 구조 및 수습 과정

8.1. 사고 보도 및 가족들의 반응

전원 구조 오보 관련 자료사진[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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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다 구조됐다더니 사망 소식...구조자 오락가락 '분통'
(MBC 뉴스데스크 / 2014년 4월 16일 방송분)
세월호 침몰 사고 당시 학생 "전원 구조" 오보들
구조자 관련 오보가 수정되어 가는 과정[59]
참사 자체의 첫 보도는 선체가 45도경이나 기울어진 시점인 오전 9시 19분 YTN에서 내보냈고 처음 오보를 낸 곳은 MBN[60]이며 오전 11시 1분 7초였다. 뒤이어 MBC26초에 이를 전했으며 타 언론들도 이를 받아 썼다. 2019년 미디어오늘 기사. 초기에 '단원고 특정 반 인원에 대한 전원 구조'라는 발표가 '단원고 전체 구조'라고 잘못된 오보로 이어졌다.[61] 때문에 사건을 처음 속보로 접한 시민들이 인명피해가 크지는 않다고 잘못 생각하게 만들었고 오후가 되어서 이것이 오보로 밝혀지고 180명 미만만 구조가 되었다는 정정 보도가 이어지면서 분노 어린 여론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일부 언론에서는 저 338명 구조 소식을 일단 먼저 내보내고, 이후 이것의 출처가 불분명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는 단원고에서 발표한 거 같다는 엉뚱한 소리를 하였다. 이 내용이 발표될 때는 구조자들이 해경 및 어선을 타고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었다.

또는 사고를 속보로 전하면서 해군 함정도 동원돼서 구조에 참여하고 있다는 오보를 내기도 하였다. 실제 골든아워 이전의 해당 현장에서는 해경 소속 경비정 1척과 민간 어선들이 전부였다.

이는 정부 고위공직자로 하여금 초기 대응에 혼선을 유발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오보를 초기에 낸 곳들 중 가장 심한 예가 MBC인데, MBN 측이 "일단 증언과 여러 곳에서 나온 말들이 다른데 보도가 사실이었으면 한다"고 언급했으나, MBC는 아예 단정해서 보도한 데다 지역 자회사인 목포MBC 기자들 측의 아직 배 안에 갇혀 있는 사람이 있다는 현장 보고조차 무시했다.[62]
파일:밑줄제거버전.jpg
방송통신위원회가 공개한 지상파·종편·보도채널의 '학생 전원 구조' 오보 시간

5월 21일 최민희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의원이 방심위 자료를 받아서 오보의 최초 진원지는 MBC라고 주장했는데, 이에 MBC 측은 다른 방송사가 먼저 오보를 냈다고 주장했다가 22일 <뉴스데스크>를 통해 짧게나마 사과했다. 그 외에 KBS도 기자들의 요구에 따라 언론 불신 및 자사 보도에 대한 비판도 겸허히 받아들이겠다고 9~10번 꼭지에서 다뤘고, <SBS 8 뉴스> 역시 김성준 앵커와 유가족 간 대담에서 언론 불신을 다루는가 하면 중앙일보는 2면 전면에 사과문을 냈고, 한겨레도 15일 창간 25주년을 맞이해 반성과 각오를 다지는 칼럼을 냈다.

2014년 4월 18일 저녁부터 5월 8일까지 팩트TVGO발뉴스가 공동으로 취재하며 세월호 사고 현장을 생중계(대부분 시간은 현장 방송을 재방송으로 함)하였다. 이후엔 합동 생방송을 종료하고 각자 보도했다.

다른 방송은 여기(욕설이나 실신 등 자극성이 심한 장면이 찍힐 경우 방송이 잠시 끊기기도 한다). 아무런 지원이나 방송사 관계 없이 한 남성이 독자적으로 방송하였으며, 방송 중간에 상황 설명에 대한 코멘트를 하는데 사고자 가족들의 감정이 북받쳐 울음바다가 될 때마다 방송 진행자 역시 울먹이며 방송하고 있어서 안타까움을 더하였다. 혼자 방송하기 때문에 힘든 점이 많다고 토로했으나, 현장에 뛰어들어가 방송하기 보다는 사고자 가족들의 상황을 담담히 전하고 싶다고 4월 19일 오후 방송 중에 밝히기도 했다. 차이점은 카메라 각도와 소리가 좀 작다는 점, 그리고 계속 현장 상황만을 중계한다는 것이다. 4월 22일 오후부터 방송을 중단하고 서울광장 합동 분향소를 중계했다.

당시 사고자의 가족들은 강당에 모여서 구조 관련 소식을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 급하게 현장으로 달려온 학부모들이 많은 관계로 현장에 생필품 등이 부족하였으나 각지에서 구호품이 도착하였고, 4월 19일 이후로 개인 구호품은 접수 받지 않았다.

사고 당시 구조된 사람들은 정신적 충격이 심해서 외부 면회가 통제된 상태이며, 특히 단원고 학생들의 정신적 충격이 특히 심각했다. 단원고 학생들 중 구조된 학생들 중에서 거의 PTSD에 가까운 증상을 보이는 학생도 있었다. # 이에 따라 수학여행을 가지 않은 단원고 1학년과 3학년 전체를 대상으로 PTSD 검사를 실시했다. # 배에 탑승한 2학년 학생들의 PTSD 증상이 매우 심한 관계로 교육부에서는 학교가 아닌 병원에서 수업을 하도록 조치했으며, 수업과 치료를 병행하기로 했다. #

학부모들은 현장 상황이 언론이 전파하는 상황과 많이 다르다고 주장하였다. 수색이 지지부진한 건 둘째 치고 의지조차 있는 거냐며 학부모들의 불신이 커졌으며, 오죽하면 현장 책임자가 경비정에 탑승하고 있는 학부모들을 통해 상황 파악을 하고 있을 정도라고 말하기도 했다. 현장에서 한 학부모와의 인터뷰 내용. 결국 여러 일들로 실종자 가족들은 불신이 커졌고, 같은 해 4월 20일에 청와대로 가겠다는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 와중에 수학여행 총책임자 자격으로 세월호에 동승했던 단원고등학교 교감이 목을 매단 채로 발견되었다. 경찰에 의하면 학생들을 구하지 못하고 자신만 구조된 것에 죄책감을 이기지 못해 자살한 것으로, 그동안 단원고 교감은 "나만 구조됐다"며 자책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교감의 지갑에서 발견된 유서에는 이러한 자책의 감정이 담겨있어 주변 사람들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했다. # 또한 단원고 교감이 사고 당시 가능한 한 생존자들을 구하며 배에 늦게까지 남아있다가 탈출했다는 것이 밝혀져 더욱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

버락 오바마의 지시에 세월호 사고 현장 구조 작업에 투입된 주한미군"아직 포기할 단계가 아니다, 실종자들을 충분히 구조할 수 있다."고 말하며 구조 작업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

2019년 11월에 유가족 등은 오보 책임자인 안광한 전 MBC 사장 및 박상후 전 전국부장, 길환영 전 KBS 사장, 장승준 전 매일방송 사장 등 8명을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 혐의 등으로 검찰에 고발했으나, 2021년에 검찰 세월호 참사 특별수사단 측은 이들에게 '고의성을 인정하기 어렵다'며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8.2. 구조 및 수습의 어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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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당시 실종자들의 생존 가능성은 있었나?

파일:external/img.newspim.com/1604151716001620.jpg

전혀 없었다. 위의 사진은 박준혁 군의 사진으로, 박준혁은 10시 21여분 물이 턱까지 차오르는 세월호를 생존자들 중 마지막으로 겨우 빠져나왔다. 박준혁의 증언으로 보면 10시 30분경에 모든 세월호 방들, 그리고 선박 자체 안에 물이 들어와 짧은 시간에 가득 찼다는 것이다. 세월호 내에서 10시 17분에 발송된 마지막 메시지 이후 시간대에 사망자 304명이 생존해 있었던 흔적이 전혀 없기 때문에, 정황상 적어도 승무원 박지영 씨의 시신이 발견된 시점에 이미 모두 익사한 상태였을 것이다.

사고 직후에는 선내 상황이 얼마나 급박하고 절망적이었는지 알 길이 없었고, 세월호 선체의 구조에 대한 탐구가 많이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배가 침몰한 지 몇 시간이 지나 버린 후에도 생존자가 있지 않을까 하는 헛된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해경의 선체 진입도 없었으므로 객관적으로 바라봤을 때 구조되지 못한 이들 입장에서는 아무런 구조의 손길 없이 그냥 바다로 내던져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과적으로 처음 구조된 인원 172명 외에는 모두 사망했다.

파일:attachment/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20140416172120_TEDRekUs_3EB93B1EC8BA4.jpg

이 사진은 세월호 3등칸의 모습으로, 선수 부분의 대형실들이다. 잡을 것 하나 없는 형태로 되어있어 배가 기울었다면 탈출할 수 없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참고로 세월호만 이런 건 아니고 국내 여객선 3등칸은 대개 저런 형태다. 더 자세한 내부 사진은 이 링크[63]를 참고.
파일:201456481397719191.jpg
<rowcolor=white> 세월호 선내 '에어 포켓' 존재설 (더팩트 기사)
(SBS NEWS / 2014년 4월 17일)

상황이 좀 다르지만, 2013년에 대서양에서 선박 전복 사고로 바다 밑에 갇혀있던 선원이 선내에 남아 있는 공기(에어 포켓, Air Pocket)로 연명하다 3일 만에 구조된 경우(한국어 기사 / 영어 기사)[64]도 있기 때문에 최종 결과가 나오기까지 모두 사망했다는 판단은 금물이라는 주장이 구조 초반에는 지지를 얻었다. 에어 포켓 관련 기사, 시신을 수습하러 갔다가 생존자를 구조한 잠수부 영상 하지만 에어 포켓 생존자설은 허구였던 것이, 일단 하나하나 설명을 하자면 위의 사례는 비교적 따뜻한 바다였고 유속도 느리고 무엇보다도 배가 작아서 수색이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잠수부가 비교적 빠르게 3일 안에 진입할 수 있었다. 세월호는 훨씬 큰 배이기 때문에 구조 작업 자체가 훨씬 어려워서 단순하게 비교하는 것은 애초에 무리였다.

그리고 이런 에어 포켓 주장은 이미 천안함 피격 사건에서도 이미 전 국민을 3일간 감쪽같이 속인 전력이 있다. 당시 천안함은 두 쪽난 채로 침몰했기 때문에 에어 포켓이 형성될 만한 상황이 아니었는데, 언론은 지속적으로 에어 포켓이 형성되었을 경우 내부의 사람들이 69시간 동안은 생존할 수 있으니 69시간이 골든타임이라는 주장을 일관적으로 내보냈다. 그나마 "천안함은 에어 포켓이 형성될 수 있는 수밀격벽 구조이긴 하지만, 자동으로 격실벽문이 닫혀 폐쇄되는 구조가 아니라 수동으로 닫아야만 하는 구조인데 과연 그 급박한 상황에서 문을 닫을 수 있었을까?"라는 의문이 제기되기는 하였으나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나중에 피해자들이 침몰 직후 거의 바로 사망한 것으로 밝혀지자, 그제서야 언론은 "잠수함도 아닌데 물 속에서 어떻게 3일 동안이나 생존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지겠는가?" 또는 "수밀격벽은 맞지만 환풍 통로가 차단되어 있지 않아 환풍구를 통해 물이 들어오기 때문에 결국 완벽한 수밀 구조는 아니다."라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뒤늦게 보도하였다.

이번 역시 에어 포켓 주장은 여전했다. 차이점은 천안함은 처음부터 두 쪽 나면서 가라앉았기 때문에 수밀이 애초부터 불가능했지만, 온전하게 가라앉은 세월호는 에어 포켓이 존재할 가능성이 분명 존재하기는 했다는 점이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뒤집혀서 가라앉은 세월호는 극히 일부이긴 하지만 물 위에 떠 있었다. 이것이 에어 포켓 존재설의 결정적인 증거였다.

에어 포켓을 주장했던 대표적인 사람은 신상철 서프라이즈 대표인데, 그는 내부에 에어 포켓이 존재할 테니 빨리 생존자들을 구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잘 알려진 미디어들 중에서는 오직 JTBC만이 사건 초기부터 실종자들의 생존 가능성을 비관적으로 분석하는 전문가의 인터뷰를 보도[65]했다. JTBC 9시 뉴스에 출연한 전문가들은 에어 포켓은 온몸 전체가 그 공간 안에 있을 때 생존이 가능하다는 것이지, 몸의 일부는 물 속에 있는데 머리 위에 숨 쉴 공간 약간만 존재하는 형태로는 산소 부족의 문제는 없을지 몰라도 체온이 떨어지기 때문에 결국 생존이 불가능하며, 온 몸 전체가 들어갈 만한 에어 포켓은 형성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날카로운 지적을 했다.[66]

기본적으로 세월호는 잠수함이 아니기 때문에 에어 포켓이 존재할 만한 여건이 되지 않았다. 배가 1시간에 걸쳐서 180도 회전하면서 침몰하는 바람에 골고루 물이 차올랐기에 천장 쪽에 에어 포켓이 생기는 것도 여건상 불가능했다. 생존자들이 촬영한 영상에 의하면 배가 옆으로 누운 상태에서 탈출하려 할 때 열려있는 문 쪽에서 물이 빠른 속도로 차오르는 것이 확인된다. 다시 말하자면 배가 누운 상태에서 문은 천장에 해당한다. 이미 이 천장까지 물이 차올랐던 것이다.

즉 1시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배는 이미 물이 가득 찼고, 심지어 해경이 찍은 영상 중에는 배 안에서 분수처럼 솟아 오르는 영상까지 존재한다. 이런 정황 증거들에도 불구하고 전문가들마저 착각하게 만든 요인은 세월호의 뱃머리가 떠있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이 부분에 에어 포켓이 존재하지 않을까 하는 추측이 힘을 얻었다. 하지만 이곳은 원래 배의 균형을 잡아주는 평형수가 채워져야 할 공간이었다. 검경합동수사본부의 수사 결과 세월호는 평형수를 권고 기준의 4분의 1 정도만 채운 것으로 드러났다. 평형수가 부족한 사실을 몰랐던 상황에서 배가 완전히 가라앉지 않은 이유를 에어 포켓에서 찾게 된 셈이다. #

언론의 에어 포켓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은 국민들과 실종자 가족들을 상대로 한 희망고문과 구조 방식 왜곡이라는 좋지 못한 결과를 낳았다. 특히 후자의 경우, 사건 초기에 민간인 잠수부창문으로 사망자를 확인한 뒤 창문을 깨고 시신을 인양하려고 했으나 창문을 깨면 바닷물이 들어가 에어 포켓이 사라진다는 논리로 이를 막은 일, 에어 포켓을 유지하기 위해 공기를 주입해야 한다며 수색에 지장을 준 일 등이 벌어졌다.

최종적으로 4월 16일 세월호가 침몰한 뒤 한 달이 넘는 시간이 지나면서, 애당초 실종자들이 당일 거의 사망했을 것이라는 사실이 표면화되었다. 설령 배 안에 생존자들이 있었다 하더라도 공기와 물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잠수사 1명이 순직했을 만큼 수색 작업은 철두철미했지만[67] 지금까지 단 한 사람도 찾거나 구조하지 못했다.

이같은 에어 포켓에 대한 혼란 때문에 정부나 해경은 더 비난을 받았다. 물론 정부나 해경 입장에서도 억울한 점은 일부 있다. 침몰 후 초기에는 신상철과 황색언론이 왜 에어 포켓 덕분에 생존 가능성이 있는데 구조에 소극적이냐며 희망고문과 동시에 정부를 압박했는데, 몇 달 후 에어 포켓의 존재가 불가능했음이 명백해진 다음에는 신상철이나 황색언론은 사라지고 오히려 정부나 해경이 주도적으로 에어 포켓을 통해 유족들을 희망고문했다는 정반대의 이유로 공격 받았다.

8.4. 해경의 발표

23일, 해양경찰은 민관군 합동 다이버 팀의 수색 결과 에어 포켓이 확인되지 않았다는 우울한 소식을 전했다.

에어 포켓이 확인되지 않았다는 발표에 구조 작업을 포기하고 시신이라도 제대로 회수할 수 있도록 인양 작업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여론이 생성되자, 대책본부는 끝까지 구조한 후 인양 작업을 하겠다는 발표를 급히 내놓았다. 세월호가 침몰한 곳의 정조 시각을 최대한 활용해 탐색을 계속하겠다는 것이다.

8.4.1. 비판

중앙구조본부가 승객 300여 명이 세월호에서 탈출하지 못한 사실을 최종 확인한 시점은 4월 16일 14시 36분경이다. 「주변 해역 대형 해상사고 대응 매뉴얼」과 「해상 수색구조 매뉴얼」 등에 따르면, 해수 온도가 20도 미만일 때는 사고 발생 후 3일 이내 집중 수색을 실시해야 한다. 즉, 구조본부장은 한시라도 빨리 수중 수색 활동에 필요한 지시를 해야 했다.

그러나 해양경찰청 차장, 수색구조 과장과 경감은 중앙구조본부가 수중수색을 위한 종사 명령을 내려야 할 시점에, 청해진해운이 구난업체 언딘과 구난 계약을 체결하도록 종용하고 현장에 도착한 타 업체 장비의 현장 투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이후 수색 작업에 진전이 없었음에도 해경은 4월 16일 15시경부터 수색 상황과 구조 동원 세력을 과장하여 발표(상황보고서 6보)하기 시작했다. 상황보고서 6보는 수중 수색에 해경 118명, 해군 42명 등 160명이 동원되어 격실 등 생존자 확인을 위해 수색을 실시하고 있으며, 해상수색에는 해경 55척, 해군 17척과 관공선과 어선 27척 등 72척, 항공기 18대 등이 동원되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해경의 발표는 현실과는 달랐다. 4월 18일 실종자 가족은 대국민 호소문을 통해 "사고 당일 10시가 넘도록 구조작업이 없었다"며 아이들이 구조작업 없이 죽어가고 있으니 도와달라고 국민에게 호소했다. #

9. 피해 상황

희생자 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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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고등학교 인원
<colbgcolor=#90d42c><colcolor=#fff> 2학년 1반 고해인 김민지 김민희 김수경 김수진 김영경 김예은 김주아 김현정 문지성 박성빈 우소영 유미지 이수연 이연화 정가현 조은화 한고운
2학년 2반 김지윤 오유정 김수정 남지현 송지나 박주희 강수정 박혜선 길채원 허다윤 윤솔 강우영 이혜경 김민지 김소정 김주희 전하영 정지아 조서우 남수빈 양온유 한세영 박정은 윤민지 허유림
2학년 3반 김담비 김도언 김빛나라 정예진 전영수 김소연 김수경 김시연 김영은 김지인 박영란 박예슬 박지우 박지윤 박채연 백지숙 신승희 유예은 유혜원 이지민 장주이 최수희 최윤민 김주은 한은지 황지현
2학년 4반 강승묵 강신욱 강혁 김웅기 김정현 김호연 박수현 박정훈 빈하용 슬라바 안준혁 안형준 장진용 정차웅 김동혁 김범수 권오천 김건우 임경빈 임요한 김대희 김용진 정휘범 진우혁 김윤수 최성호 한정무 홍순영
2학년 5반 김건우 김건우 김민석 김민성 김성현 김완준 박성호 김인호 박홍래 박진리 박준민 서동진 오준영 이석준 이진환 김도현 이창현 이홍승 인태범 정이삭 조성원 김진광 천인호 최남혁 김한별 문중식 최민석
2학년 6반 구태민 권순범 김동영 김동협 김민규 김승태 김승혁 이태민 전현탁 박새도 이세현 정원석 박영인 황민우 서재능 선우진 이다운 신호성 이건계 김승환 최덕하 이영만 홍종영 남현철 이장환
2학년 7반 곽수인 김건호 김기수 김민수 김성빈 김수빈 김정민 박성복 나강민 이준우 국승현 박인배 박현섭 최현주 허재강 서현섭 성민재 손찬우 송강현 심장영 안중근 양철민 오영석 이강명 이근형 이민우 이수빈 이정인 이진형 전찬호 정동수 김상호
2학년 8반 고우재 김대현 김동현 김영창 김제훈 김창헌 박선균 지상준 박수찬 박시찬 백승현 안주현 이승민 이승현 이재욱 이호진 임건우 임현진 장준형 김선우 김재영 전현우 제세호 조봉석 조찬민 최수빈 최정수 최진혁 홍승준
2학년 9반 고하영 권민경 김아라 김초예 김혜선 박예지 오경미 이보미 이수진 이한솔 김해화 임세희 정다빈 정다혜 배향매 조은정 진윤희 김민정 최진아 편다인
2학년 10반 강한솔 구보현 권지혜 김다영 김민정 김송희 이소진 김주희 김슬기 김유민 박정슬 이가영 이경주 이다혜 이단비 이은별 장수정 이해주 이경민 장혜원
교사 고창석 김응현 김초원 남윤철 박육근 양승진 유니나 이지혜 이해봉 전수영 최혜정
일반인
구춘미 권재근 권혁규 김기웅 김문익 김순금 김연혁 리샹하오 문인자 박성미 박지영 방현수 백평권 서규석 서순자 신경순 심숙자 안현영 양대홍 우점달 윤춘연 이광진 이도남 이묘희 이세영 이영숙 이은창 이제창 이현우 인옥자 전종현 정명숙 정원재 정중훈 정현선 조지훈 조충환 지혜진 최순복 최승호 최창복 한금희 한윤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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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를 추모하는 노란 리본들
(2014년 5월 7일)
파일:세월호 피해 정리.jpg
▲ 세월호의 피해 상황
이름을 불러주세요.
(주권방송 / 2016년 3월 14일 업로드)

단원고등학교 학생 및 일반인 승객을 포함해 총 476명의 승선 인원 중 172명만이 살아남아 이번 사고의 생존자 비율은 고작 36%에 불과했다. 거꾸로 말하면 64%가 사망했다는 뜻이다.

참고로 이 사건이 일어나기 102년 전에 일어났던 타이타닉호 사고의 생환 비율이 이와 비슷한 32%다. 전체를 통틀어 겨우 36%에 불과한 생존률이 이 사건의 참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적나라하게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심지어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는 대서양 한가운데, 망망대해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세월호 참사는 진도 앞바다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나마도 배 구조를 알고 있던 단골 손님들(화물차 기사 등), 그리고 배를 두고 도주한 선장과 승무원들로 인해 30% 후반대라도 찍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단원고등학교 학생들의 생환 비율은 고작 23%로 1/4도 되지 않는다. 정확히 13명 중 3명꼴로 생존하여 생존 비율은 3/13이다.

9.1. 경기 안산 단원고등학교의 피해 상황

학급 생존 학생 수 담임교사 생존 여부[68]
2-1반 19/37명[69] X
2-2반 11/36명[70] X
2-3반 8/34명[71] X
2-4반 9/37명[72] O
2-5반 9/36명[73] X
2-6반 13/38명[74] X
2-7반 1/33명[75] X
2-8반 2/31명[76] X
2-9반 2/22명[77] X
2-10반 1/21명[78] O
총 78명 생존(학생 75명, 교사 3명[79])
총 258명 사망(학생 248명, 교사 10명)
총 3명 미수습(학생 2명, 교사 1명)
339명 중 261명 사망
탑승자 77% 사망[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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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원고 학생들이 희생자들의 영정 앞에서 묵념을 하고 있는 모습
정부는 오직 권력의 눈치만 살필 뿐 국민들은 안중에도 없으며, 믿을 수 없는 언론은 참된 진실을 외면한 채 자꾸 유가족과 세월호 참사의 본질을 왜곡하려고 만든다. 이번 참사를 통해 어른들에 대한 신뢰를 잃었고 세상에 대한 신뢰마저 잃었다. 우리나라는 미쳤다. 이 나라를 떠나고 싶은 마음 굴뚝 같다. 겉만 선진국인 우리나라를 바꿀 수 있게 도와달라. 국민이 주인이라는 민주주의 국가가 무엇인지 우리나라를 믿을 수 있도록 이 썩어 빠진 정부를 제발 바꿔 달라. 어른들만 믿다 다시는 볼 수 없게 된 친구들과 그 가족, 그리고 앞으로 비슷한 사건의 재발로 인해 또 다시 희생될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특별법 제정과 친구들이 왜 자신들의 곁을 떠나게 됐는지 그 진상규명을 밝힐 수 있도록 도와달라. 우리가 어른이 되었을 때 어린 학생들에게 또 다시 지금과 같은 나쁜 세상을 물려주어 죄를 짓지 않게 도와달라.
세월호 침몰 사고에서 생존한 여학생의 편지
2학년 학생 325명(남 175명, 여 150명)과 인솔자 14명(단원고 교감 1명+담임교사 10명+비담임교사 3명)이 수학여행에 참가했는데, 학생 325명 중 75명(남 34명[81], 여 41명[82])만이 구조되고 인솔자는 14명 중 3명(교감+담임교사 2명)만이 구조되었다.

참고로 1~3반은 인문계 여자반, 4~6반은 인문계 남자반, 7~8반은 자연계 남자반, 9~10반은 자연계 여자반이다. 숫자가 높은 반으로 갈수록 생존자가 적어지는 이유는 각 반 본래 정원이 이과반이 문과반보다 적었던 점도 있지만, 뒷반으로 갈수록 배의 안쪽 객실을 배정 받아서 빠져나오기 더 힘들었기 때문이다. 6반 학생들이 인접 학급에 비해 비교적 많이 생존했는데, 이는 6반 담임 교사가 '선실에 있지 마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안타깝게도 빠져나오지 못했다. 극단적으로 뒷반인 7~10반은 모두 한 반에 1~2명만 살아남았다. 학생들이 절반 넘게 구조된 반은 1반이 유일하다. 살아남은 담임교사는 4반 담임인 김소형 교사와 10반 담임인 이애련 교사로, 공교롭게도 2명 모두 수학 교사였는데, 사고 후 모두 면직했다.

단원고 2학년 학생 중 항공편으로 제주국제공항으로 가기 위해 김포국제공항에 갔다가 사고 소식을 듣고 급히 안산으로 복귀한 특수반 학생들과 수학여행 대신에 탁구 대회에 참가한 탁구부 여학생 3명(밑의 기타 참고), 그리고 항암 치료로 수학여행에 불참한 남학생 박진수 군[83], 그 외 개인사정으로 못 간 5명 등 15명만 이 사고를 경험하지 않았다.

단원고 수학여행단의 책임자였던 강모 교감(51세, 윤리 전공 교사)은 구조되었으나 학생들을 구하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을 통감한다는 취지의 유서를 남기고 4월 18일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후 당시 사고 현장에서 최소 7~8명을 구조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안타까움을 더했다. #

그런데 후에 공개된 휴대전화 영상으로도 확인되듯이 학생들에게 배가 침몰 중이라는 사실과 심각성은 제대로 전파가 안 되었다. 애진이의 4월 16일 세월호 탈출기 그 외에 바다에서 보내온 편지라고 하여 유족들이 피해 학생들의 스마트폰에서 복구된 동영상이나 사진 등을 JTBC에 제공하여 시리즈로 총 8편이 보도되었다.



단원고 학생들의 생존자 비율은 불과 23.1%로 일반 승객(69%)에 비해 턱없이 낮았는데[84] 이는 일반 승객들은 안내 방송을 듣고 침몰 중임을 직감하고 자체 판단을 해서 생존 대책을 강구했지만 단원고 학생 대부분은 "특히 단원고 학생들 가만 있으라"고 콕 집어 안내하는 방송, 교감 및 일부 교사들의 안내 방송을 따르라는 지시[85]로 인해 침몰 직전까지도 학생 대부분이 꼼짝 안 하고 객실 안에서 대기한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며 설령 그렇다고 해도 해경이 구조 작업을 제대로 했으면 절대다수가 살 수 있었는데[86] 너무나 방만하게 했기 때문이다. 세월호 생존 학생 "구조 과정에서 해경 도움 전혀 없었다". 해경들 중 세월호 안으로 들어온 이는 단 한 명도 없으며 스스로 탈출하는 이들을 배에 싣거나 헬기에 태우기만 할 뿐이었다. 많은 학생들이 같은 피해자인 일반인 승객의 도움으로 탈출했고, 민간 어선이 구한 이들도 수십여 명에 이른다.

구명조끼를 입고 객실 안에서 대기하던 학생들 중에는 배가 침몰 중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전달받거나 인지하지 못한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희생 학생들이 찍어서 남긴 영상을 보면 상황을 잘 파악한 이들도 꽤 있었다. 생존 학생들은 "선원들이 전문가들이니 그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어야겠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질서를 지키고 말 잘 듣고 있다 보면 당연히 해경이 들어와 자신을 구조해줄 것이라 믿었다"고 일관적으로 증언했다. 그러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위험한 것 같다고 여겨 탈출을 택했으며, 상황이 너무 악화되자 너나 할 것 없이 탈출하는 길을 택했으나 때는 이미 늦어서 간발의 차이로 많은 이들의 생사가 갈려버렸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간단한 선박 안전교육조차도 없었던 점을 지적하며, 학교나 청해진해운 측에서 학생들을 집결했었다면 수십 명이라도 더 살았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하는 의견을 표하기도 한다.
세월호참사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었고 참사 피해자들에게는 화인처럼 새겨졌을 '가만히 있으라'라는 말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가만히 있으라'라는 명령의 부당함은 어른들의 말만 믿고 기다린 '착한 바보', 착한 학생의 이미지와 함께 유통되었다. 좋게 말하면 순수하고 나쁘게 말하면 어리석은 어린 희생자의 이미지. 같은 지시에 따랐던 일반인 희생자를 우리는 '착한 바보'라 부르진 않았다. 그나저나 정말 학생들은 가만히 있었던가. 누군가는 의심했고, 누군가는 가만히 있지 않았으며, 누군가는 가만히 있지 않으면 더 위험해질까봐 그 지시에 따르기로 했다. 세월호참사는 피해자들이 가만히 있었기에 당한 사고가 아니라, 저마다 살아내려는 삶의 의지와 도전을 짓밟은 선장과 선원, 나아가 정부가 만들어낸 사건이었다.
-생존자 및 사망자 형제자매 구술 증언록, <다시 봄이 올 거예요> 중에서.
인솔교사 14명 중에는 단 3명만이 구조되었고, 피해 교사들 중엔 학생들을 구하려고 갑판에 나왔다가 다시 객실로 들어가 변을 당한 분들이 있었으며, 자살한 교감을 제외한 나머지 2명은 무기한 병가를 내고 학교로 복귀하지 못하다가 결국 교직을 아예 그만 두었다고 한다.

생존 학생 수는 75명으로 이 중 추가 치료가 필요한 5명을 제외한 70명이 4월 30일 부모와 함께 안산 합동분향소를 찾아 피해 친구들과 선생님들의 넋을 위로했다. # 의료진은 말렸지만, 분향소가 마련된 시점부터 학생들은 조문을 원했다고 한다.

5월 12일부터는 2학년 생존 학생 75명이 병원에서 퇴원하여 6교시 교과 수업을 안산 내 모 시설에서 받기 시작했다. 치유 수업은 방과 후에 진행하고 있으며, 부모와 함께 합숙하는 형태이다. #

이전에는 실종 상태인 학생들의 사망이 시신 인양으로 완전히 확인되어야 교실에 남은 학생들의 물품을 처리하기 때문에 단원고 교정으로는 돌아가지 못하는 상태였지만, 6월 25일에 생존 학생들이 단원고 교정에 복귀했다. #

그리고 2014년 10월 2학년 황지현 양(당시 16세)을 마지막으로 수습자가 2년 7개월 동안 없었다가 2017년 5월 5일에 사고 해역에서 길이 34cm에 사람 정강이뼈로 보이는 뼈 하나가 수습되었다. 신원 파악을 위해 국과수에 정밀검사를 의뢰했다.

여드레 뒤인 5월 13일 세월호 4층 객실에서 조은화 양으로 추정되는 유골이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유골의 형태는 비교적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었으며, 신원 확인을 위해 유전자 감식 중이다. 3년 1개월 동안 바닷물 속에 들어 있었기에 감식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한 달 정도 소요된다.

사흘 뒤인 5월 16일에 세월호 3층 우현에서 또 온전한 사람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단원고 학생의 유골로 추정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인 5월 17일, 5일에 발견된 유골의 유전자 감식 결과 체육교사 고창석 씨(당시 40세)의 뼈로 밝혀졌다. 이로서 단원고 교사 및 학생 사망자는 247명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참고로 고창석 교사는 수영 실력이 뛰어난 편으로 알려졌지만, 세월호 사고 때 제자들을 가장 먼저 피신시키고 자신은 끝까지 남았다가 순직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유골이 선내가 아닌 사고 해역에서 발견된 것으로 알려져 유실될 뻔했던 우려를 낳기도 하였다. 고창석 교사는 세월호 참사의 296번째 사망자가 되었다.

이틀 후인 5월 19일, 사흘 전에 발견된 유골의 신원은 허다윤 양(당시 16세)으로 밝혀졌다. 유골 치아 상태를 검식한 결과 10대 여학생의 치아였음이 입증되었고, 허다윤 양이 과거에 치아 수술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유골 속 치아의 흔적과 일치해 신원이 확인되었다. 이로 인해 허다윤 양이 세월호 참사의 297번째 사망자가 되었다.

그리고 5월 25일, 13일 4층 객실에서 발견된 유골의 신원은 당초 추정대로 조은화 양(당시 16세)으로 유전자 감식 결과가 나왔다. 이로 인해 조은화 양이 세월호 참사의 298번째 사망자가 되었다.

단원고등학교 교사 양승진 씨, 남학생 남현철 군과 박영인 군[87]까지 총 3명이 아직도 수습되지 못했다. 아직도 단원고등학교 학생들의 가슴 속에 남은 상처는 아물지 못한 셈이다.

2017년 6월 5일 2주 전에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던 당시 입고 있던 그대로 온전하게 발견된 유해가 이영숙 씨로 밝혀졌다. 이로써 이영숙 씨는 세월호 참사 299번째 사망자가 되었다.

2017년 6월 5일 이영숙씨 유해 발견을 끝으로 나머지 5명은 2018년 10월 19일 세월호 마지막 수색에도 끝내 발견이 되지 않았고, 안타깝게도 단원고 교사 양승진 씨(당시 57세)와 학생 남현철(당시 17세), 박영인 군(당시 16세) 그리고 일반인 승객 권재근 씨와 권혁규 군은 영구 실종자로 남게 되었다. 사고 당시 모종의 이유로 배에서 이탈한 뒤 구조되지 못했거나 유해가 중간에 유실된 경우라는 이야기가 많다.

9.1.1. 단원고 학생들과 교사들의 이야기

9.2. 일반인 & 승무원 피해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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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탑승객 중 단원고 학생 325명과 교사 인솔진 14명을 제외한 일반인 승객은 104명이었다. 일반인 승객 중 생존자가 단원고 학생에 비해 많았던 것은[149] 일반인들은 사고 당시 인원 통제를 받지 않고 개별적으로 자유로운 상태였고, 성인이어서 사회 경험&자기 판단에 따라 안내 방송을 믿지 않고 각자 살 길을 찾아 행동했던 것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특히 세월호를 자주 이용했던 화물차 기사들은 30명 중 29명이 구조(#)되었는데, 이들이 세월호를 여러 번 타는 과정에서 배의 문제점을 평소에 느끼고 있었고, 배 구조에 익숙하여 비상 상황에서 초행길인 다른 승객들보다 탈출로를 찾는 것이 상대적으로 쉬웠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피해자 중에 단원고 학생들이 워낙 많은 비중을 차지하여 일반인 승객들은 인원 집계 등의 구조 작업부터 보상에 이르기까지 관심을 거의 받지를 못했고, 안산에 설치된 합동분향소에서 일반인 승객들은 영정 등의 배치 등에서 배려를 받지 못해 일반인 유족들이 이의제기를 하기도 하였다. # 이들의 요구사항은 단지 세월호 참사의 같은 피해자로서 동등한 대우와 관심을 가져달라는 것뿐이었다.

향후 설치될 세월호 추모 공원의 대상에서도 일반인 유족들이 제외되어 일반인 유족들이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실정. #

승무원들의 경우 33명 중 23명이[150] 구조되었고, 10명이[151] 사망했다. 이번 사건에서는 선박직 중심의 일부 승무원들의 막장 행각이 워낙에 큰 공분을 일으켰는지라, 승무원 희생자 또는 실종자의 유가족들은 세월호 승무원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죄인이 된 심정으로 숨 죽이고 있었다고 한다. 다만 사고 초기 서비스직 박지영 씨나 양대홍 사무장의 영웅적 일화와 이후 비선박직 승무원들이 선박직 승무원들에게 사고 정황을 전해듣지 못한 채 처절히 버려졌던 정황이 드러나면서 같은 피해자로 보는 상황. 비정규직 아르바이트생 등은 알바라는 이유로 청해진해운으로부터 장례비 지급도 거부 당하여 청해진해운에 맹비난이 쏟아졌다.

한편 언론이 입수한 국정원 보고서와 사망한 김영한 민정수석이 남긴 비망록에 정부가 단원고 유족과 일반인 유족을 분리하고 갈등을 조장하려 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비판을 받고 있다.

사고 발발 후 3년 1개월이 지난 2017년 5월 22일에 일반인 승객으로는 처음으로 이영숙 씨(당시 51세)로 추정되는 유골이 발견됐다. 유골은 구명조끼를 착용한 상태였는데, 복장 상태가 승선 당시 이영숙 씨의 복장과 같고 옷 속에서 이영숙 씨의 신분증까지 발견됐으므로 이변이 없는 한 유골의 신원은 이영숙 씨가 맞을 것이다. 다만 정확한 신원 파악을 위해 역시 유전자 감식 중이다.

그리고 2017년 6월 5일 세월호 선체에서 발굴된 유골 일부를 감식한 결과, 이영숙 씨의 유골이 확인되면서 일반인 희생자로서는 최초로 유골이 수습되어서 299번째 사망자가 되었다. 하지만 권재근 씨, 권혁규 군 부자는[152] 그 이후로도 수습되지 못했고, 1년 4개월 동안 더 수색했지만 끝내 2018년 10월 19일, 마지막 수색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두 사람의 유골이 발견되지 않으면서 세월호에서 내리지 못했다.

9.2.1. 일반인 희생자 이야기

세월호 일반인 희생자들은 단원고 학생들과는 다르게 수학여행이 아닌 개별 여행 및 제주도로 귀농을 하기 위한 목적 등을 안으며 세월호에 올랐었다. 단체 여행으로 있던 단원고 학생들과는 달리 일반인 승객들은 개별 목적 및 여행이 대부분이라 각자가 행동하였기 때문에 단원고 희생자들에 비해서 희생자 수가 적은 편이었다.

그 중 미수습자로 알려진 권재근 씨와 아들 권혁규 군(당시 6세)은 베트남 출신의 부인 또는 어머니[153]와 딸 또는 여동생[154]과 함께 제주도로 새로운 삶을 개척하기 위해 세월호에 타게 되었다. 사고 전까지만 해도 제주도에 가서 감귤 농사를 지으며 제주인으로서의 삶을 꿈꾸었던 이들이었기에 기대도 컸었다. 그러나 세월호 사고로 이들은 제주 땅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진도 해상에서 세월호에 갇혀서 끝내 빠져나오지 못하고 해저에 [age(2014-04-16)]년 동안 수장된 상태로 있는 상황이다. 부인은 이미 숨진 것으로 알려졌고, 당시 5세였던 어린 딸만이 유일한 생존자 및 구조자가 되었다. 현재 딸은 권재근 씨의 형님인 권오복 씨가 보호자로 보호하고 있는 상태이다.

세월호 선원 중 한 명이자 의인으로 알려진 박지영 씨는 20대의 젊은 선원으로 수원과학대를 휴학하고 생업을 위해 청해진해운에 입사하여 세월호 선원(아르바이트)으로 승선하게 되었다. 상관인 이준석 선장과 나머지 선원들이 승객들을 버리고 도망갔던 와중에도 자신은 끝까지 승객들의 대피를 유도하였으며, 동생들과도 같은 단원고 학생들에게 구명조끼를 나눠주고 학생들에게 먼저 탈출하라고 지시하는 등 선장과 나머지 도망간 선원들과는 다르게 선원의 본분을 지키며 승객 일부를 구조하는 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끝내 본인은 세월호에 탈출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희생되어 싸늘한 시신이 되어있었다. 이 당시 박지영 씨의 나이는 한창 젊은 22세였다.

박지영 씨와 함께 세월호 사무장으로 있었던 양대홍 씨는 아이들을 구하러 가야 한다며 부인과의 마지막 통화를 하고 난 후 연락이 두절되었다가 끝내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상관인 선장과 나머지 선원들이 승객들을 버리고 도망갔던 와중에도 동료인 박지영 씨와 함께 승객들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고 가족들에게도 아이들을 구해야 한다는 마지막 말을 남긴 채 사망하였다.

세월호 침몰 때 민간 잠수사로 활약했던 이광욱 씨는 나라를 위해 헌신한다는 목표를 삼으며 인도선을 세월호에 연결하고자 바다에 입수하게 되었지만, 잠수 중 호흡곤란을 앓게 되었다가 끝내 숨지게 되었다.

청해진해운 커플 사원으로 알려진 정현선, 김기웅 씨는 결혼을 앞두고 세월호 승무원으로서 승선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세월호 침몰 당시 무사히 탈출하게 되었지만, 배 안에 갇힌 승객들을 구조하기 위해 다시 배 안으로 들어갔다가 끝내 빠져나오지 못하고 두 사람이 모두 숨지게 되었다. 두 사람의 희생은 한 번 세월호를 빠져나오고 나서 완전히 도망친 상관인 선장과 나머지 동료 선원들과 대비되는 사례이기도 하였다.

미수습자 중 최초로 일반인 신분으로 유골이 발견된 이영숙 씨는 단원고 학생들과 함께 세월호 한 배에 탔던 일반인 승객이었다. 2014년 4월 15일 밤 단원고 학생 및 나머지 일반인 승객들과 세월호에 승선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아침 진도 해상을 항해하던 세월호가 침몰하게 되었을 때 이 씨는 그 당시 세월호 3층 선실에 있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끝내 세월호 선내를 빠져나오지 못하고 세월호 안에 3년 동안 해저에 수장된 상태로 있었다가 2017년 5월경에 신원미상의 유골로 발견되었고, 6월 5일 유골 감식 결과에 따라 이영숙 씨의 유골이었음이 확인되면서 세월호 299번째 사망자이자 일반인 승객으로는 최초로 미수습자 신분에서 해방되었다. 그녀의 유골은 아들 박경수 씨[155]에게 인계되었다.

현재 이 일반인 희생자들의 유해는 모두 인천광역시 부평구인천가족공원에 안장되어 있다.

9.3. 진도 및 안산 지역 피해 상황

사고가 난 지역인 진도 해역에서는 사고 직후부터 인근 어민들이 구조 활동에 많은 도움을 주어 귀중한 생명을 살렸으나, 어민들로서는 사고 때문에 정상 조업을 할 수 없어 나날이 경제적 피해가 누적되고 있다. 그러나 상황이 상황인 만큼 구조 활동에 우선적으로 전력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라 현지 주민들의 속앓이가 깊어지고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세월호에서 흘러나온 기름 때문에 피해는 어업조업 이외에 인근 양식장까지 전반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아직 실종자 수습 작업이 끝나지 않은 상황이라 기름 방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팽목항에 실종자 가족 및 구조 인원이 들어서면서 종래 인근 섬으로 운항했던 여객 운항이 하루 두 차례로 줄어 낙도 주민들 또한 큰 불편을 겪고 있는 상황. #

이번 사고로 피해 인원이 가장 많은 안산 지역의 경우 피해자들이 모두 같은 학교이자 그 인근 지역에 거주하는 관계로 해당 지역에는 인명피해를 입은 가정이 집중되어 있고 이웃, 친족 등의 혈연, 지연 관계로 연계되어 있어 지역적, 집단적으로 안산시는 심각한 트라우마가 우려되는 상황이다.[156]

마침 평준화 된 이후[157]라 집 가까운 고등학교를 가게 된 상황이어서, 심한 경우 한 아파트에서 8가구의 피해자가 나온 경우도 있다. 특히 단원고 인근인 고잔1동과 와동은 두세 집에 한 집 꼴로 초상(初喪)이 난 상태라 동네 분위기 자체가 침울한 상태이다. 그리고 단원중 후배들도 단원중을 나온 단원고 선배들이 사고를 당해서 슬퍼했다. 단원중도 단원고처럼 우울하고 침통했다.

전국적으로도 그렇지만 진도와 안산 두 지역은 특히 소비 심리 및 경제 활동이 극히 위축되고 있고, 대형 사고의 부정적 이미지가 지역 이미지에도 악영향을 미칠까 우려하고 있다. 국가에서 소기업, 상인들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공제 사업만 해도 안산, 시흥 지역에서 폐업 해지를 요청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늘었으며, 이는 사업 출범 후 유례 없는 일이라고한다. 100일이 경과하며 더욱 늘어나고 있다.

진도, 안산 두 지역은 4월 20일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되었으며 진도, 안산의 경제 활동 회복을 위하여 금융 지원 등의 추가 대책 마련이 이루어지고 있다. 안산시에서는 피해 유족에 대한 생활안정자금을 지원해주고 있으며, 피해 단원고 학생들의 유품(옷가지, 책, 책상)을 유품 정리 신청 받는 대로 무상으로 수거하여 시내 소각장에서 무료로 소각해주고 있다. #[158]

9.4. 그 밖의 피해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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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세월호 참사로 인한 수학여행 전면 금지
(KBS NEWS / 2014년 4월 22일)
이 사건의 큰 여파로 배를 이용한 수학여행, 나아가 수학여행 자체가 금지되었으며, 이 때문에 국내 단골 수학여행지로 꼽히는 제주특별자치도, 경주시, 설악산 등의 관련 업체들이 심각한 타격을 입어 해당 지역 경제에 영향을 미쳤다. 또한 관광, 전세버스 업체도 마찬가지로서 4월 무렵이 수학여행으로 이들 업체의 성수기인 점을 감안하면 올해 영업은 거의 못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 결국 단순한 사고 여파로 감수(甘受)하기에는 연쇄적 피해가 현저하자, 안전을 전제로 수학여행을 재개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한다. #

특히 수학여행 관련 업체이라기보다는 사고 이후 관광업계 전반이 꽤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사고 시일이 지나면서 조금 경황을 둘러볼 여유가 생기면서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 정부나 지자체 차원에서 다양한 지원책을 내놓고 있는 상황.

국가적 차원에서 세월호 사고 수습에 들어가는 비용은 직접피해보상액만 최소 5,500억(#)에 달하며, 직간접적 비용을 합친 총 비용은 2조 원에 달한다는 견해(#)까지 있다. 도주 및 책임 회피 중인 유병언 일가를 붙잡아 구상권을 청구한다고 하더라도 이들 비용을 모두 커버하기에는 모자랄 수밖에 없으며, 국세로 충당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이들이 있는 재산을 순순히 내놓을 위인들도 아니라서 처리 과정에서도 지난한 법적 절차와 더불어 온갖 추하고 짜증나는 꼴을 보게 될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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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적인 측면에서도 국민에게 절망감을 주었다. 어른들의 말, '가만히 있으라'라는 말을 잘 지키는 바람에 250여 명의 학생들이 어이없이 수장 당한 것을 보며 단원고 피해 학생들과 그 또래의 아이를 가진 부모들, 혹은 초중고 교사 중에는 방송을 보면서 우는 사람들도 있었다. 특히 당시 고2 학생들은 "나도 수학여행 가서 죽는 거 아니야?", "언제부터 우리가 학교를 목숨 걸고 다녀야 했나..."라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10. 수사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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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해양경찰에 의해 진행된 수사로 선장 이준석과 항해사, 조타수, 기관사 등 배의 운항과 관련된 선박직 직원 15명은 전원 구속 수감되었다. (주)청해진해운의 물류부장 김모와, 물류팀장 김모, 청해진해운 해무 담당 이사인 안모, 그리고 김한식 대표이사도 구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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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해진해운 사장 김한식 전 세모그룹 회장 유병언
세월호의 구명정 정비업체인 '한국해양안전설비'의 대표도 구속되었다. 구명정이 펴지지 않는 불량 상태였는데도 양호하다고 허위로 기재한 검사 결과 보고서를 작성했기 때문이다.

당시 세월호 실소유주가 유병언이라고 지목되었고(이는 추후에 판결과 보도를 통해 실소유주가 아님이 정정 보도되었다) 유병언 전 회장과 관련된 수사들이 시작되었다. 그러면서 유병언 회장의 측근인, (주)아해 전 대표 이강세, 오경석(53세) 헤마토센트릭라이프연구소 대표, 김동환 (주)다판다 감사(48세)도 구속되었다.

유병언의 장남인 유대균(44세)는 검거 시 일계급 특진 조건을 걸고 A급 지명 수배가 되었다. 그의 자택에 체포 영장을 들고 강제 진입했지만 유대균은 없었다. 그러나 7월 25일, 경기도 용인시에서 검거되었다. 유병언의 장녀 유섬나가 5월 말, 프랑스에서 인터폴에 의해 체포되었다. 당시 인터폴은 이미 고인이었던 유병언을 수배 중이었다.

미국에 체류 중인 유병언의 측근 김혜경 한국제약 대표, 김필배 전 문진미디어 대표에 대해서는 여권 무효화 조치와 함께 체류 자격 취소를 미국 국토안보조사국(HSI), FBI에 요청했다. 관련 기사. 미국 국세청(IRS)이 미국 구원파교회 헌금 유용 의혹 제보와 신고, 각종 고소·고발이 있어 자체 조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관련 뉴스.

10.1. 배 운영과 승무원 관련 논란

우선 4월 17일 시점에서 수사본부에서 조사 중인 혐의는 다음과 같다. 선장은 만약 배가 급회전으로 넘어진 게 사고 원인일 경우 업무상과실치사상 혐의가 있고, 안전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면 선박법 위반 혐의도 추가된다. 다른 승선원들은 선장 지시 없이 선박을 떠났거나 인명 구조 조치를 하지 않았다면 선원법 위반 혐의가 있다. #

해경의 발표에 따르면, 사고 당시 본래의 선장이 휴가 중이어서 다른 선장인 이준석이 대리 운항을 했다고 한다. # 하지만 선장의 대리 운항은 자격 조건만 되면 흔히 있는 일인지라 무조건 대리 운항 자체를 나쁘게 보는 건 지양해야 한다. 또한 이후 이준석 선장은 원래 세월호와 오하나마호를 오가며 전문적으로 대리운항을 했던 사람이라는 증언이 나오면서 선장으로서의 능력과 경험은 충분한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능력과 경험은 충분했을지라도 책임자로서의 책임감이 마이너스였다. 책임감 있게 대피 방송과 승객들의 탈출을 지시했다면 299(+실종자 5명)명의 사람들이 비참하게 물 속에서 사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정적으로 한 달에 절반은 '1선박 2선장' 지휘체계 산으로 갔던 세월호라는 증언이 나와, 이준석 선장은 대리운항이 필요할 때만 탄 것이 아니라 평상시에서 한 달에 15일은 세월호를 탔던 전문가라는 점이 입증되었다. 원래의 선장은 신모로, 신 선장은 배의 복원성 문제와 과적 문제를 충분히 인지하고 평상시에도 계속 본사와 인천항만공사에 문제 제기를 하였으나,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고 당일 휴가를 냈다는 설이 있다. 신 선장은 사건 초기부터 JTBC와 인터뷰를 하면서 적극적으로 세월호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에 반해 이준석 선장은 청해진해운에서 퇴직한 후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하다가 다시 계약직으로 채용된 대리 운항 전문 선장으로 평소 회사에 고분고분했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재판에 들어가니 원래 선장인 신선장이 "나는 수습 보조 선장일 뿐 원래 선장은 이준석 선장"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신선장은 사건 초기부터 언론사와 인터뷰를 적극적으로 했었는데, 그때부터 자신의 보조선장 설을 일관되게 주장하면 모르겠지만 재판에 와서 처음 주장하는 것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다만 신선장 말이 사실이라면 왜 잉여인 이준석 선장이 평상시에도 신선장과 함께 배를 탔는지 의문이 해결되기는 하다. 처음 일본에서 세월호를 몰고 왔을 때 이준석이 선장이었고, 신선장이 1등항해사였다. 이 둘은 오래 전부터 호흡을 맞추고 있었다.

사건 초기 이준석은 사고 원인을 묻는 질문에 "암초 충돌은 아니다. 갑자기 가라앉았다. 하지만 정확한 원인은 모르겠다"고 답했다. 이준석은 부상을 당해 옆 침상에 누워있던 경기 안산시 단원고 학생들이 사고 당시 상황에 대해 얘기를 나누자 귀를 세워 듣기도 했다. # 자신이 선장이냐고 묻는 질문에 나는 선장이 아니라 선원이라고 발뺌했던 정황까지 드러나면서 도의적 책임 논란에서 빠져나오기는 힘들어 보인다. # 또한 꼬리뼈에 부상을 입었다며 치료를 원했지만, 병원에서는 이상 없다고 돌려 보냈다. 이후 재판 과정에서도 지속적으로 부상을 호소하는 등 계속해서 면피성 발언만 하고 있다.

사건 초기에는 이준석 선장이 상의는 스웨터를 입고 하의는 팬티만 입고 탈출한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다. 방송 화면 상으로는 상의는 입고 있는데 하의는 담요로 두르고 있거나 바지를 갈아입는 것으로 보여, 온몸이 물에 빠지지 않고 하체만 젖은 채 나온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러나 이후에 물 한 방울도 젖지 않고 안전하게 퇴선한 것이 확인되었다. 그 이유로는 3가지가 꼽힌다.

첫 째로는 선원인 사실을 숨기기 위해 급히 선원복을 벗고 탈출했기 때문이라는 추측이다. 다른 승무원들도 사복으로 갈아입고 탈출했으니 일견 합당해 보인다. 그러나 모두가 이준석 선장처럼 팬티만 입고 탈출한 것은 아니다. 사복으로 갈아입기 위해 승객들이 살려달라고 외치는 객실을 지나서 옷을 갈아입고 유유히 돌아온 선원도 있는 데다가, 조타실에 모여 있다가 탈출할 때까지 한 시간 가량의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서두르다 그렇게 되었다기 보다는 갈아입을 사복이 없었다는 쪽이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또한 사복을 입고 있어 선원인지 모르고 구조했다는 해경의 말도 안 되는 주장을 언론이 그대로 받아 적다 보니 그런가 보다 했지만, 해경에서 찍은 구조 순간의 영상을 보면 다른 선원들은 작업복을 입고 있어서 누가 선원인지 알 수 있었다.

둘째로는 술에 취해 늦잠을 자고 있었기 때문에 옷을 제대로 갈아입을 시간이 부족했을 거라는 추측이다. 이준석 선장 본인은 사고 당시에 대해 담배를 피우느라 자신이 조타실을 잠시 비운 동안 가 급격히 기울어 조타실로 급히 돌아왔다고 진술했으나, # 선원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사고 전까지 어느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평상시에도 술에 자주 취해 있었고, 항해 기간 내내 술을 마시고 늦잠을 자느라 식당에 늦게 나타나 아침을 혼자 먹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그러나 사고 당일 그는 식당에 늦게까지도 나타나지 않았고, 이로 미루어 볼 때 줄곧 늦잠을 자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경우 조타실을 지켰다는 진술은 당연히 거짓이다. 그러나 해경에 의해 구조된 직후 해경이 선원이냐고 묻자 아니라고 거짓 대답하는 바람에 음주 측정이 이뤄지지 않아 그의 음주 여부는 추측에 그친다.

당시 여러 증언들을 보면 사건 발생 이후, 사건을 직접적으로 일으킨 3등 항해사 박한결(여성, 당시 25세)는 구석에서 울고만 있었고[159] 실질적으로 1등 항해사가 지휘를 했다고 한다. 아무래도 이준석이 술에 취해 지휘 능력을 잃은 것은 선장실에 가서 바지도 못 갈아 입을 정도로 몸을 가누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

세 번째는... 전기세가 아까워 간단히 설명하자면 필리핀 여가수랑 방에서 검열삭제를 하다가 갑작스러운 사고에 놀라서 팬티만 입고 도망쳤다는 것인데, 필리핀 여가수의 남편도 배에 함께 탑승해 있었고, 특히 여가수는 선원들이 자신들을 구조할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다고 증언하였기 때문에 이쪽은 언론사들이 기사의 클릭을 유도하기 위해 지어낸 낚시용 루머로 보인다. 그래도 꽤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다. 이들은 조타실 바로 뒤에 객실이 있어서 선장과 함께 1차로 구조되었다.

사고 시각 당시 선박의 운항을 담당하고 있었던 것은 선장인 이준석이 아니라 20대의 3등 항해사인 25세의 여성 박한결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 사건 초기 대부분의 언론들은 왜 경험 없는 3등 항해사에게 조타실을 맡겼냐고 집중적으로 추궁했고, 심지어 키를 잡은 것이 조타수라는 점에 놀라 비난했다. 하지만 이것은 선박의 운전대를 선장이 파이프 담배를 물고 운전한다고 생각하는 막연한 이미지에서 생긴 오류다. 일반적으로 선장은 조타실, 기관실은 물론 탑승객들까지 배 전체를 관리하고 1, 2, 3등 항해사들은 조타수 C, B, A와 각각 짝을 지어 시간대별로 3교대로 운항하는 것이 전 세계 표준이다.[160][161] 그렇기 때문에 사건 초기에 전문가들은 이런 운항 구조에 대해서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언론에서 설명하였다. 그러나 이후 해경 조사에 의하면 위험 지역을 지날 때에는 반드시 선장이 지휘를 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음이 밝혀졌기 때문에, 이 부분을 고려하면 완전히 제대로 운항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세월호의 매뉴얼에는 이러한 규정이 빠져 있다고 한다.

문제가 되는 3등 항해사 박한결은 총 경력 1년 남짓에 해당 노선의 운항 경험은 4개월 정도에 지나지 않은 초짜라는 부분도 언론에 의해 집중적으로 추궁되었으나, 항해사 경험자들에 의하면 항해사들은 이미 해양대에서 실습을 통해 수많은 경험을 쌓는 데다가 하루에 8시간씩 운전하니 1년이면 100일만 운항해도 800시간을 조함하였을 것이기 때문에 경험 면에서는 충분하다고 한다. 그런 데다가 3등 항해사는 조타수 중에서 가장 경험이 많고 노련한 조타수 A(12년 경력)가 짝 지어져 보좌하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다는 주장이다.

언론에서 문제 삼고 있는 또 다른 부분은 다음과 같다. 원래대로라면 국내에서 2번째로 조류가 센 맹골수로는 시간상 1등 항해사가 조함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사고 전날 안개로 인해 출항이 늦춰져 3등 항해사가 조함하는 시간에 맹골수로를 통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항해사 출신들의 인터뷰에서는 해당 시간에 3등 항해사가 조함하는 것은 전 세계 공통임으로 큰 문제가 없으며, 그보다는 위험한 수로에서는 선장이 조타실에서 직접 조함하는 것을 지켜보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문제로 지적되었다.

즉, 경험이 적은 3등 항해사가 하필이면 맹골수로에서 조타실을 맡았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위험한 항해 구간에서 선장이 조타실에 없었다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선장이 조타실에 있었을 경우 항해가 문제 없이 이뤄졌을 거냐면... 많은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세월호는 맹골수로에서뿐만이 아니라 원래 심하게 흔들렸다고 한다. 거기서 사건 첫날 인근에서 조업 중이던 어선에서 당시 맹골수로가 안개도 없고 호수 같이 잔잔했다고 증언했다. 결국 1등 항해사가 조함했느냐 3등 항해사가 조함했느냐, 혹은 선장이 조타실에 있었냐 없었냐는 문제의 핵심이 아닐 수도 있다.

3등 항해사 다음으로 문제가 된 것은 12년 경력의 55세의 조타수 A 조모였다. 조모는 평상시에도 험하게 운전해왔고, 이전에 조타와 관련된 문제를 일으켜 일시적으로 조타 금지를 당한 전력이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성격이 험해 직원들과 불화가 심했기 때문에, 이번 항해를 마지막으로 오하나마호로 보내지기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162] 항해사 출신 전문가들은 왼쪽으로 5도 틀거나 오른쪽으로 5도 틀라고 항해사가 지시하면 그대로 따르는 것이 조타수이기 때문에 경험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듯하다. 작은 상선의 경우는 조리원이 조타수도 하는 등 무경력 초보자도 조타를 한다고 한다.

사건 초기에는 세월호가 과적 상태인 데다가 평형수도 1/4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밝혀지지 않았고, 결정적으로 사고 당시의 항적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조타수가 키를 135도로 무리하게 꺾는 바람에 사고가 발생했다고 알려졌다. 조타수 조모는 구속 당시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키를 많이 꺾기는 했지만 실제로 꺾은 것보다 조타기가 더 많이 돌아갔다고 증언해, 이때에는 선박 조함 장치에 결함이 있어서 사고가 발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정설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후에 세월호 항적 기록이 복원되면서 키는 135도가 아니라 45도밖에 꺾이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났고(키는 구조적으로 35도이상 돌아가지 않는다),[163] 과적 사실과 평형수 문제도 연이어 밝혀지면서 조타수의 평상시보다 조타기가 더 돌아갔다는 말은 면피를 위한 위증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러나 3등 항해사 박모가 아직까지도 검찰 조사에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어 현재로서는 위의 이야기들은 모두 추측일 뿐이다. 신상철 서프라이즈 대표는 45도든 135도든 무리하게 꺾은 게 문제가 아니라 세월호 자체의 복원성이 없었던 게 문제라는 주장을 내놓기도 했다. 세월호는 과적 상태인 데다 평형수도 부족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호수처럼 잔잔한 바다에서도 얼마든지 가라앉을 위험성이 있는 상태였다는 것이다.

네덜란드에서 실시한 시뮬레이션, 그리고 인양한 세월호의 조타 시스템 유압 계통에 이상한 부분이 발견되었다. 그 부분의 고장으로 타가 완전히 돌아갔고, 원래라면 그래도 괜찮아야 했지만 과적과 화물 고정 불량, 지나친 평형수 빼기로 불안정했던 세월호가 기운 채로 항해하다 해수가 유입되고 돌아버리면서 배가 누웠다는 추측이 나왔다. 방향타의 방향 자체는 유압을 잃어버린 다음에는 조류의 흐름과 인양 시 외력이 작용하는 대로 움직인다고 한다. 침몰 시 사진, 침몰 후 스캔 화면, 인양 시 사진에서 모두 달랐다.

이후 배에 기울기 시작하면서부터 실질적인 지휘는 1등 항해사 A가 했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 선박의 항해직은 비정규직 선장 이준석, 경험 많은 1등 항해사 A 강모, 그날 처음 세월호를 탄 견습 1등 항해사 B, 2등 항해사 오모, 3등 항해사 박모로 이뤄져 있었는데, 선장은 현재로서 추정되는 바로는 술에 취한 채 잠들어 있느라 지휘 능력이 없었던 것으로 보이고, 때문에 차선임자인 1등 항해사 A가 지휘를 맡은 듯하다. 선원들이 책임 회피를 위해 입을 맞춘 정황이 포착되어 정확한 내막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그 실질적인 지휘를 맡은 1등 항해사도 다른 항해사들과 조타수들이 조타실에 모여 사복으로 갈아 입고 구명조끼까지 입은 채 구조를 기다리는 동안 객실 사무장에게 "구조선이 없어 위험하니 객실에서 대기하라"는 지시를 내린 이후 객실 승무원들이 10여 차례 무전으로 탈출 여부를 물었으나 답변을 하지 않은 점을 볼 때 딱히 지휘랄 것을 한 것 같지는 않다.[164]

1등 항해사로부터 객실 내에 대기하라는 지시가 내려온 게 아니라 객실 승무원이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지금 밖으로 나가면 위험할 것 같아 전원 객실 내에서 대기하라고 자의적 판단 하에 방송한 후 위로부터의 추가 지시를 기다렸으나 끝내 지시가 없었다는 약간 다른 버전의 기사도 존재하지만, 어쨌든 탈출한 승객들은 공통적으로 객실 직원들이 지시를 기다렸음에도 불구하고 무전기에서 답변이 없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런데 재판 중에 선장인 이준석이 2차례에 걸쳐서 승객들은 객실 내에 있으라고 지시했다는 말이 나왔다. 선장, 1등 항해사, 객실 직원이 서로 자신이 생각해서 방송을 했다고 하니 혼란스럽다. 어쩌면 10여 차례 방송을 했으니 극 초기에는 1등 항해사가 방송하고 이후 술 취한 선장이 뒤늦게 나타나 2차례 방송 지시를 하고, 이후 객실 직원이 무전으로 어떻게 할지 지시를 묻는데 답이 안 오니 자신의 판단에 의해 객실에 있으면 안전할 것 같아서 배가 가라앉기 직전까지 방송한 걸 수도 있다. 다만 사건 초기엔 여자 목소리로 모두 배 밖으로 뛰어내리라는 방송이 가라앉는 순간 나왔다고 해서 또 다른 객실 직원 박지영이 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에 대한 후속 기사를 찾기 힘들다. 월간조선 2014년 6월호에는 객실 직원 박지영이 9시 35분 경비정 123정이 도착한 이후 3층 안내데스크 부근에서 큰소리로 "모두 탈출하라!"라고 소리 질렀다고 하는 정도.

한편 위에서 언급된 선장과 항해사 등의 8명 외에도 기관실에는 기관장 등 7명의 직원들이 있었다. 이들은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선장의 어떠한 지시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기관장의 판단에 따라 배의 엔진을 끄고 탈출한다. 일각에서는 그들이 배의 상황을 알 수 없는 배의 가장 밑바닥, 기관실에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손 쓸 도리가 없을 때까지 남아 있다가 위기의 순간에 어쩔 수 없이 배를 버리고 탈출한 것이 아니냐고 그들을 바라보았고, 기관실 직원들 또한 이런 시각에 힘입어 아무런 죄책감 없이 언론과 인터뷰하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는 배가 침몰할 때 보통은 엔진을 끄지 않는다는 점이다. 배가 침몰하는 경우, 조금이라도 수심이 낮은 곳에서 배가 좌초되어야 탈출 및 구조에 유리하기 때문에 기관실 직원들은 침몰 시에도 각자 맡은 곳에서 임무를 수행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직무를 팽개치고 자신들만이 아는 통로를 이용하여 탈출하였다. 이 선원용 통로는 배의 가장 밑바닥인 기관실에서 배의 최상단에 위치한 조타실까지 한 번에 이동할 수 있는 통로로, 이곳을 이용한다면 배의 바닥 쪽에 있던 승객들을 구조할 수 있었지만 이들은 전혀 구호 활동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탈출 중 객실 직원들인 조리원 2명이 돈까스를 튀기다가 배가 기우는 바람에 부상을 입고 도와달라고 외치고 있는 것을 보고도 못 본 척 했다는 증언마저 나오고 있다. # 이후 해경 123정이 도착하자 이들은 제일 먼저 도망쳤다. 선장이 가장 먼저 도망친 것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최종적으로는 기관실 직원 7명이 선장 등 8명조차 버린 채 제일 먼저 도망쳤고, 그 뒤 2번째로 선장 일행이 도망친 것으로 밝혀졌다.

언론에서 문제를 삼는 부분은 정규직인 기관장이 비정규직인 선장을 평상시에도 무시하였고, 이번 역시 어떠한 지시 없이 독단적으로 탈출했다는 사실이다. 세월호는 항해사 이하 선원들이 대부분 외국인인 다른 선박들과는 달리 임금을 적게 주면서도 착취할 수 있는 구원파 출신들을 선호하였다는 증언이 있고, 임금을 적게 주기 위해 15명의 선박직 선원 중 단 4명만 정규직이었다. 심지어 퇴직 후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던 이준석을 불러들여 270만원이라는 턱없이 적은 돈을 주면서 비정규직 선장을 맡겼다(정규직 선장은 400만 원). 이 때문인지 이준석은 항해 중 대부분의 시간을 자신의 방에서 자거나 술을 마시면서 보냈고, 실질적으로 기관장이 선장 노릇을 했다고 한다. 게다가 원래 선장이었던 신 선장이 운항할 때도 이준석 역시 배에 타고 있었기 때문에 한 배에 지휘자가 2명도 아니고 3명인 사태가 벌어졌다.

결국 15명의 선박직 선원들은 기관장을 중심으로 한 기관사 7명이 먼저 해경 123정을 타고 도망가고, 1등 항해사 A를 중심으로 한 선원 8명은 2차로 해경 123정을 타고 탈출하였다. 이들은 선원복을 벗어버리고 선원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이름까지 속이고 다 함께 팽목항으로 가서 자원봉사자들이 주는 곰탕을 맛있게 먹은 후 후식으로 커피까지 받아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그럼에도 선원들은 자신은 해경과 함께 구조를 도왔다거나 탈출을 지시하는 방송을 했다거나, 5도밖에 꺾지 않았다고 하거나, 잠깐 담배 피우러 나왔을 뿐 조타실을 비운 적이 없다는 등의 밑도 끝도 없는 면피성 거짓말을 계속 쏟아내고 있다. 이들은 이미 외신을 통해 세월호의 악마로 규정되었다.

일반직(객실) 직원 14명은 선박직 직원 15명과는 다른 영웅적인 행동을 보였다. 사무장, 사무원, 조리원 4명, 아르바이트 불꽃놀이 담당(아르바이트는 총 6명) 등으로 이루어진 14명의 객실 직원들은 무려 10명이 사망하고 4명만이 생존하였다. 이 중 조리원 1명, 알바생 1명 등 2명은 양사무장이 구해주어 양사무장의 의로움에 대해 증언하였다. 선장 등 책임자에게 조기 탈출 의혹이 있는 와중에 23세의 여승무원 박지영은 끝까지 남아 승객들에게 구명조끼를 나눠주었는데 한 여고생이 왜 언니는 탈출 안 하냐고 묻자 "선원은 제일 마지막이다. 언니는 친구들 다 구해주고 나중에 나갈게."라는, 선원으로서 당연하나 선박직 직원들은 하지 않은 영웅적 행동을 하고 끝내 첫 번째 희생자가 되었다. # 안내데스크에서 승객들에게 모두 탈출하라고 외친 것도, 모두 배 밖으로 뛰어내리라고 방송한 것으로 추정되는 것도, 다친 사람들에게 휴지를 건네주고 편의점 출입문을 잡아주어 탈출을 도와준 것도 그였다. 더군다나 박지영 씨는 수영을 할 줄 몰랐다고 한다. 자신의 목숨은 다 포기하고 구조 활동을 했던 셈. 사람들은 박지영 씨가 한 일을 보고 "아직 대한민국에는 희망이 있다"라고 말할 정도.

그리고 사무장 양모(45세)는 가족에게 "통장에 있는 돈은 애들 학비로 쓰라. 나는 승객을 구하러 가니 전화를 이만 끊겠다."라고 마지막으로 전화하고 학생들 등 승객들을 지키고 빠져나오게 하려고 최선을 다하다가 끝내 숨졌다. # 아르바이트에 불과한 불꽃놀이 담당인 김모마저 객실 직원이자 결혼을 약속한 여자친구와 함께 목숨을 걸고 수많은 승객들을 구한 업적을 인정 받아 둘이 함께 의사자로 지정되었다. 사건 초기에는 김모 집에서는 예비 며느리가 탄 배가 가라앉았다고 해서 충격을 받았다. 나중에야 자신의 아들이 알바로 세월호에 탄 것을 알았다고. 이후 이 둘은 영혼 결혼식을 올렸다. 아르바이트생들의 부모들조차도 "내 아들은 수영 선수 출신이니 제 몸만 건사하자고 하면 탈출을 못 했을 리가 없다. 아들은 끝까지 학생들을 구조하려다가 탈출하지 못한 것이다. 장하다, 내 아들아!"라고 말할 정도로 전원이 깊은 신뢰를 받고 있다.

여러 가지 정황상 일반직(객실) 직원은 배 운항과 관련된 정보를 바로 접할 수 없기 때문에, 일반직 객실 직원 14명 중 대부분은 선장, 항해사, 기관사 등 배의 운항을 담당해서 배의 침몰 상황을 정확하게 알고 있던 선박직 직원들에게서 같은 회사 소속임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언질을 받지 못한 채로 선내에 남아있다가 승객들과 함께 유명을 달리한 것으로 보인다. 아니 그보다 중요한 건 객실 직원들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상식을 가진 평범한 사람이었고, 선박직 직원들은 상식을 초월하는 사고와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어서, 당시 '한 번 구원을 받았으면 이후 어떠한 악행을 해도 상관 없다'는 교리가 구원파에 있다는 오보 내용이 찌라시로 여기저기 돌아다녔으나, 당시 선장은 구원파 신도가 아니었다. 선원 중에서도 승객을 먼저 대피시키다가 사망하여 의사자로 지정된 1명과 승객을 구하다가 의식불명 상태로 구조된 1명만 구원파 신도였고, 그 외의 선원들은 구원파가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

사고 선장의 2004년 신년 인터뷰가 갑자기 화제가 되고 있다. 원본. 또한 사고 선장은 2010년에는 OBS, 2012년에는 Channel A에서 직원들의 지시만 따르면 자신의 배가 안전하다고 인터뷰했다. # 외신들도 이 부분에 대해 맹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해당 기사.

사고 당시 세월호에게 먼저 다가간 유조선 두라에이스(2720t)호의 선장은 배가 기울어가는데도 탈출하려는 승객이 없었다고 증언했다. 위쪽에 있는, 두라에이스호가 찍은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세월호 선장이 탈출 명령을 내렸다는 진술이 더더욱 신빙성을 잃었다. #

2014년 4월 28일을 기준으로, 생존한 선박직 선원 15명(선장 포함 항해 7명+기관 선원 8명) 전원이 경찰에 의해 구속되었다. 선원들의 처벌 수위와 유사 사례, 각종 논란 등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논란을 참조.

11. 형사 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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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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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외국의 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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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실종자 가족들

현장을 방문한 정부 관계자는 사고 초기에 실종자 전원 구조라고 알린 것(#) 등의 정부의 잘못된 정보 제공 등으로 격앙된 실종자 가족에게 뺨을 맞기까지 했으며, 정홍원 국무총리는 물 세례도 받기도 했다. #

12.3. 해양경찰청의 대처


12.4. 반응의 배경

12.4.1. 정보 전달 체계의 문제

이 상황을 더욱 심화시키는 것은 정보 전달 체계 문제였다. 이미 관련 부서에서는 부정된 배를 들어올릴 것이라는 내용을 사고자 가족에게 계획으로 설명하거나, 생존율을 높이기 위해 산소 공급을 했다고 통보했는데 이후 아직 장비가 도착하지 못해 주입하지 못했다고 이야기하고, 생존 인원과 실종 인원의 숫자가 크게 변동되는가 하면, 선체 내부에 진입했다고 했다가 하지 않았다고 하는 등 중앙대책본부의 번복이 심각하게 잦다. 과거 해군과 국방부로 명령-보고 체계가 일원화되었던 천안함 피격 당시와 달리 이번 사고에서는 중앙대책본부와 해경이 같은 조직이 아니어서 정보 공유나 전달 체계가 미비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에 대해 자세한 문제점들에 대해 제대로 된 설명 없이 일방적으로 통보만 한 사실 역시 문제로 꼽혔다. 사고자 가족들을 안정시키는 것 역시 정부 당국의 역할임을 생각해보면, 이러한 중대사안의 번복은 여러 모로 그 역할을 다 하지 못한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 결국 당국은 상황 전달에 혼선이 잦았던 이유로 사고 현장 브리핑 창구가 분산되어 있었던 것으로 파악하고, 결국 4월 18일 밤 브리핑 창구를 서부해양경찰청으로 단일화하겠다고 발표했다. # 또한 정홍원 국무총리는 혼선이 있었던 사실에 대해 사과하였다. #

이를 갑작스러운 사고이기에 발생할 수 있는 문제로 볼 수도 있지만, 그 대상이 이를 감안할 여유가 없을 정도로 경황이 없고 사소한 소식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할 수밖에 없는 사고자 가족의 마음을 생각해보면, 관련 작업 및 통보들이 보다 세심하게 이뤄지지 못한 것은 분명 아쉬운 일이다. 결국 일련의 사태는 정보 전달 체계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제대로 잡혀있지 않거나, 있더라도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다는 소리이므로, 대참사 앞에서 부실한 정부의 위기 대응 능력이 드러났다는 소리가 된다. 결국 21일 박근혜 대통령은 정부의 초동 조치 미흡과 복지부동하는 공무원들에 대해 반드시 개선해야 한다며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의 모두발언에서 지적하였다.

12.4.2. 국가 위기 관리 매뉴얼 축소화 논란

국가 위기 관리 매뉴얼을 이명박 정부에서 폐기하고 NSC를 축소, 분산시켰다는 지적이 있다. 참여정부 시절 안보와 사회 재난까지 포괄하는 체계적인 위기관리 시스템이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청와대 지하 벙커에 위기관리 센터를 만들어 놓았다. 이것이 어느 정도 강력한 위기 관리 통제력을 갖고 있냐면 정부의 총 27개 안보, 재난 및 안전 관련 상황 정보가 센터 상황실에 연결되어 있어 대통령 필요시에 언제든 국가의 상황 정보를 실시간으로 활용할 수 있으며, 안보/재난 상황 시 정부 주부부처가 어디인지 알려주는 총 33개의 위기 유형에 대비한 국가 위기 관리 기본 지침과 운영 매뉴얼이 있었다. 심지어 27개의 상황정보 중에서 선박 관제 시스템이 있어 500톤급 이상의 선박에 대해 전 세계 어디서든 조난이 발생하더라도 즉각 청와대가 이를 파악할 수 있는 체계가 구축되어 있었다. 이명박 정부는 참여정부의 계획과는 반대로 다중 상황에 대한 일원화된 대응 방안이 실제 상황 발생시 현실적으로 적용하기 어렵다고 판단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10년 천안함 피격 사건연평도 포격전북한의 직접적인 공격 행위가 연속으로 발생하면서 자연스레 정부의 주요 관심사는 안보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매뉴얼은 이명박 정부는 물론 박근혜 정부에 이르기까지 삭제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된 상황이다. 그러나 정부부처 개편을 하면서 방재청 업무가 안전행정부로 이관이 됐는데, 현장 전문성이 부족한 행정직이 지휘 중이라는 의견이 요점이다. # 또한 각 부처별로 재난 관련 부서가 분리되어 있는 등 기존 참여정부가 의도한 일원화된 재난대책 구성과는 차이가 난다는 게 또 하나의 쟁점. # 박근혜 정부에선 이명박 정부 시절 폐지한 NSC 사무처를 다시 부활해 상설화(#) 시켰지만 다원화된 구조 속에서 매뉴얼과 관련 조직이 실제 초기 대응 상황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고, 사고 발생 3일차인 18일 밤에서야 이런 단일화를 시작했다는 점은 분명 초기 대응에 있어서 문제였다고 할 수 있다.

결론을 말하자면 매뉴얼은 없어지지도 않았으며, 이명박 정부 이후에도 계속 유지되고 있다. 다만 정부가 바뀌면서 매뉴얼을 실행해 줄 주체가 변경 및 축소되어서 문제가 불거진 것이다. 참여정부 시절 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차장의 인터뷰에 따르면 참여정부는 포괄적 안보라는 개념 하에 국방뿐만 아니라 자연재해 등으로 인한 사회 시설 마비 등에 청와대가 컨트롤타워로서 대비했었지만, 이명박 정부 때 안보라는 개념이 국방으로 좁아졌고 박근혜 정부가 이를 그대로 계승했기에 기존의 매뉴얼이 힘을 쓸 수 없었다고 한다.[165] #

12.4.3. 지나친 관심이 낳은 문제

그 외에 사고 관련인들에 대한 배려 없이 자극하는 행위도 문제다. 일부 정치인들이 별다른 대책도 없이 재난 지역을 방문하여 사실상의 유세 활동을 벌인 것은 물론, 앞선 총리의 경우도 사고자들의 가족들이 있는 체육관 안에서 언론과 인터뷰를 강행하다 그들을 분노케 했음이 누출 영상에서 드러났다. 생방송 중 욕먹은 기자 역시 구조가 지연되는 와중에 지난 밤의 상황을 진척 상황이라고 전달하다 욕을 먹었다. 답보 상태에 빠진 현 상황을 전달하는 것과 전날의 사태 추이를 마치 지금 벌어지는 것처럼 전달하는 건 엄연히 다른 것임에도, 진척되지 않는 상황에 답답해하는 피해자들의 가족들을 전혀 배려치 않은 셈이다. 결국 20일 새벽에 실종자 가족들과 유가족들이 직접 청와대로 찾아가서 항의를 하겠다는 소동이 일어났다.

당연하지만 사고자 가족들 외에 일부 여론이 모든 공무원들과 구조팀에 비난을 퍼붓거나, 그들에 대한 음모론을 펼치는 것은 도를 넘은 행위임이 분명하다. 사고와 구난에 소극적이었던 관련인들을 제외하면 이 상황에서 가장 애태우는 것이 바로 구조팀이었으며, 주위 어민들과 함께 가장 많은 인명을 구조하고 기울어진 선체로 올라가 당시 사실을 알릴 수 있는 소중한 영상을 촬영했던 전남201호 어업지도선 승무원들 또한 사고 해역 주변에서 불법 조업을 단속하던 해양수산직 공무원들이었다. 실제로 위에서 이야기했듯 진도, 해남 근처 해역은 예로부터 물살이 거세서 과거 삼별초의 항쟁 시에 몽골군과 전투를 치르면서 몽골군이 곤욕을 치른 곳이며, 이순신 장군이 명량 해전에서 활용한 지형이다. 당시 왜군이 외해를 돌아서 공격하는 것을 포기할 정도로 위험한 수역이다. 때문에 물살이 다소 약해진 현 시점에서도 동력선이 간신히 통과할 수 있는 수준. 이러한 상황에서 구조팀을 닦달하거나 비난하는 건 그들의 마음만 조급하게 하고 추가 인명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을 키울 뿐이다. 실제로 천안함 피격 사건 때 서해에서 한주호 준위가 순직했던 건 이런 여론의 닦달 때문에 각종 안전 기준을 넘은 상태에서 기를 쓰고 구조 작업을 진행했기 때문이었다.[166] 이 사고로 여론과 천안함 유가족들은 한주호 준위의 유가족에게 사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일이 다시 발생해서는 안 된다.

5월 6일 결국 민간 잠수사 중 한 명이 기뇌증으로 사망했다.

단원고 학생 이외의 일반인 탑승객에 대한 소홀한 관리 또한 문제다. 세월호 선원 등을 제외한 구조된 일반인 탑승객들은 약 80명 남짓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그마저도 퇴원한 50여명의 위치/행방은 전혀 확인되지 않고 있다(뉴스 링크를 부탁합니다). 학생들에 비해 나머지 실종, 사망자들의 수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고, 치료도 자비를 하며 합동분향소에도 없는 등 그 수가 학생들에 비해 적어서 묻히는 경향이 있다. 이런 일반 승객들의 대한 뉴스조차 적으며 그나마 있는 것도 묻혔다.

세월호 침몰 당시 구출된 6세 여아의 연고자를 찾는다는 트위터가 올라왔는데(#), 17일에 나오기로는 다행히 친척들과 연락이 되었다고 한다. 이 아이는 가족과 함께 제주도로 이사를 가는 중이었다고 하며, 다른 가족들은 여전히 실종 상태이나 친척들이 아이를 돌보고 있다고 한다. # 24일에 아이 어머니의 시신이 발견됐다. 아버지와 오빠는 아직 실종 상태이다. # 구조 당시 가족 중 7세 오빠가 자신의 구명조끼를 벗어 아이에게 입혀줬다고 하며, 현재 오빠는 실종 상태이다. 마지막 수색에도 발견되지 않아 결국 아버지와 오빠 둘 다 영구 실종자가 되었다. 태국의 한 네티즌은 Prayforsouthkorea 캠페인에서 이 사연을 그림으로 그려서 올렸다. #[167]

13. 정부의 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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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사건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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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사고의 여파

이때부터 박근혜 정부총체적인 능력이 매우 부족하다는 평가가 수위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전에도 정부가 비난을 받는 사건들이 터지긴 했지만, 이런 유형들은 이전에도 여러 번 있거나 공공연한 비밀로 여겨지던 부정이어서 '우리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으면 화가 나지만 일단 넘어가겠다.'는 것이 시민 여론이었다.

하지만 세월호 건의 경우 내용과 대처, 피해자들의 신분 등 여러 모로 볼 때 너무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는데도 바로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대통령의 모습을 본 국민의 분노를 일으켰다. 사실 세월호 침몰 사고는 여타 대한민국에 있었던 큰 인명사고 중 대한민국 역사상 거의 처음으로 사고 발발 초기부터 구출 시도 실패로 선체가 완전 침몰하는 과정이 모든 언론의 카메라 영상을 통해 생생히 중계된 사고다. 더군다나 정부 기관인 해경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누워 있던 여객선엔 아직 희생자들이 살아 있었다. 국민들은 이후 배가 완전히 침몰하며 승객들이 희생되는 모습을 봐야 했다. TV만 봤다면 이렇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음에도 취할 수 있는 최악의 결정으로 수백 명의 어린 목숨이 바닷속으로 사라지는 걸 우리 모두가 보게 된 것.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18px-Park_Geun-hye_Presidential_Approval_Rating.svg.png [범례]

2014년 5월 19일 박근혜 대통령이 대국민 담화를 통해 이 사건의 초동 대응 실패와 정경유착 등 구조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해양경찰청을 해체할 것을 발표하였다. 해양경찰의 수사, 정보 기능은 경찰청으로 이관되고 구조, 해안 경비 기능은 신설되는 국민안전처로 이관했다. 경찰은 18년 만에 독립했던 해양경찰의 수사와 정보 업무를 흡수하게 된다. 하지만 이후 조직이나 관련자들이 해경 때와 같이 그대로 유지되었음은 물론, 당시 해경 본청의 주요 요직들은 줄줄이 승진하는 모습을 보여줘 결국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임이 밝혀졌다. 기사. 결국 이 쓸데없는 개편은 문재인 정부 출범 후 국민안전처를 해체하고 해양경찰을 다시 창설하는 것으로 끝났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로 사람들은 각종 재난이 발생해도 안내방송을 안 믿게 되었고, 청소년들이 어른들에 대해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지게 되었다. 즉, ''안내방송 믿는 행위=앉아서 죽는 행위.''로 인식하게 하는 시발점이 된 게 이 사건이다. 이 사건 이후로 사람들은 각종 재난이 발생하면 안내방송을 믿기보다 각자도생식으로 임기응변 대응을 해서 피해를 줄이는 사례가 많아졌고, 어른들의 말을 믿은 청소년들이 허무하게 목숨을 잃게 되자 이들의 말은 믿을 게 되지 못한다는 인식이 청소년들 사이에 널리 퍼지게 되면서 기성세대와 MZ세대가 갈등하게 되는 시발점이 된 사건이다.

15.1. 경제적 영향 논란

15.1.1. 부정적 영향 주장

연초 민간소비와 건설투자가 회복되던 가운데 그야말로 찬물을 끼얹어 버린 사건이었다. 박근혜 정부의 지출이 세월호의 사고 수습에 집중되고 있었고, 시민 사회는 애도의 분위기로 회식이나 야구장의 응원도 자제할 정도였다. 결국 국내 경기가 회복에 대한 기대감에도 불구하고 2014년 1분기 GDP는 전년대비 3.9%의 성장을 보였으나 2분기는 3.4%로 감소했고, 이는 전분기 대비 0.5% 성장에 불과했다. 미국일본의 경기가 회복인 시점에서 벌어진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더 심각한 것은 사후 처리가 정쟁화되고 정부의 대응이 세월호 유족들의 요구를 무시하면서 장기화되자 3~4분기까지 지연이 된 것이다. 3, 4분기 GDP 성장률은 각각 3.3%, 2.7%까지 하락하여 연초 기대감과 달리 점차 하락을 보였다. 동 기간 유럽미국은 경기가 회복임에도 불구하고 해외 경기에 민감한 한국으로서는 이례적인 저성장을 뜻한다. 통상 국가적인 재난의 경우 빠른 수습과 원만한 해결이 관건이다. 길어질수록 사회 구성원의 본업 복귀가 늦어지고 그만큼 경제의 활성화는 늦어지게 된다. 또한 추경을 통해 인위적으로 투자를 늘려야 하나 정부의 세수 부족과 전 정권의 부채 부담으로 인해 추경 편성도 여의치 않은 상황이었다.

15.1.2. 부정적 영향 반박

15.2. 한국 연안해운에 끼친 영향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한국 연안해운에 만재해있던 중고 선박 운용, 중소형 선박 운용 기조가 완전히 뒤엎어졌다. 세월호 침몰의 원인이 중고선이라서, 혹은 중소형 선박이라서는 아니지만 '노후선보다 신형선이 안전하다', '작은 배보다 큰 배가 안전하다, 건조 할 때 안전 장치와 비상용구는 최대한 많이 장착해야 한다'는 생각이 일반 여론만이 아니라 정부, 나아가 해운사들에게까지 확대된 것이다.

그리고 사고 직후의 한국 내 여객선의 인식은 위험한 교통수단이라는 낙인이 단단히 찍혀서 한동안 여객선을 불신하고 기피하는 상황이 되었다. 게다가 유일하게 인천-제주 간을 운항하였던 여객 해운 업체인 청해진해운이 폐업하게 되면서, 사실상 수도권-제주간 이동은 국내선 항공편 밖에는 선택지가 없게 된다. 이렇게 돼서 안 그래도 혼잡하던 김포-제주 항공노선이 극도로 혼잡하게 되었으며, 이는 보잉 747급의 대형기 투입이 늘어나는 상황[169]까지 나오게 된다. 청해진해운의 이러한 만행이 국내선 여객선에 대한 신뢰저하로 이어졌고 이는 곧 국내선 여객선 수요 이탈-국내선 항공편 수요 유입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국내 항공사는 적어도 김포-제주 노선 만큼은 반사이익을 본 것이다.

당장 정부는 2009년 기존 선박 운용 가능 연수를 25년에서 30년으로 연장하는 규제 완화를 시행하였다가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다시 25년으로 환원했다. 세월호는 침몰 시점 기준 20년으로 30년은커녕 25년에도 못 미치니 규제 완화와는 무관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재정 문제로 해운사들이 신조선 건조는커녕 비교적 선령이 젊은 중고선 도입에도 미적지근거리자 연안여객선 현대화 펀드를 도입, 정부에서 건조비 반액을 15년 무이자로 지원하는 조건으로 여객선 신조를 적극 지원하기에 이른다.[170]

그리고 이렇게 건조된 1호 선박 한일고속 카페리 실버클라우드호의 총톤수는 20,263GT로 세월호의 3배에 육박한다. 그리고 연안여객선 현대화 펀드의 경우 정부 주도하에 표준 설계 모델이 확립되었기 때문에, 앞으로 건조될 선박들도 최소 이 정도 규모라고 생각하면 된다. 펀드로 자금을 지원하는 경우라 시일이 걸리긴 하지만, 2030년까진 주요 항로는 다 동급 이상의 신조선으로 바뀌게 된다.

중고선 도입에 있어서도 그 기조가 반영된 건 마찬가지다. 세월호 참사 이래 중단된 인천-제주 여객항로 입찰에 성공한 대저건설 해운사업부[171]의 경우 해당 항로에 투입하기 위해 중국의 중고선 동방명주 8호를 구매, 오리엔탈 펄 8호로 재명명했다. 이 배는 중국 쪽 회사가 서해 한중 카페리로 쓰기 위해 건조했다가 중국 측 항구의 선석 문제 및 회사의 재정 문제로 매각한 것으로, 2018년 구매 시점 기준에서 선령이 2년에 불과하고 총 톤수도 24,747GT에 달했었다.

이렇게 연안 여객선들의 규모가 커지다 보니 기존 중소형선 위주의 여객선 부두가 작아서 각 항만들이 부랴부랴 여객선 부두를 확충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당장 상술한 대저건설 해운사업부의 오리엔탈 펄 8호는 인천연안여객터미널에 접안할 곳이 없어서 사업을 접었고, 2019년에 연안여객선 현대화 펀드에 따라 입찰자로 선정된 하이덱스 스토리지가 현대미포조선에 '비욘드 트러스트'호를 710억원에 주문했다. 국제여객선에도 이게 반영되어, 부산 ~ 오사카 항로에서 운항중인 팬스타 드림호를 대체할 목적으로 2025년 취항을 목적으로 대선조선에서 팬스타 미라클호가 건조중에 있다.

그동안 경제성만을 생각하며 일본제 노후선을 들여와 운행하던 관행이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뒤바뀐 것이다. 그러나 인식만 바뀌었을 뿐, 안전의식이 미비하다는 것은 전 국민들이 다 아는 사실이다.

또한 세월호 사고 이후 모든 3,000톤급 이상 연안여객선에 선박용 블랙박스로 불리는 항해기록저장장치(Voyage Data Recorder) 설치가 의무화 되었다. 세월호 침몰 사고의 원인이 사고 7주년인 2021년까지도 제대로 확정되지 못한 이유가 VDR의 부재로 인해 교신 기록, 자동 항해 시스템의 기록, 조타 기록, 도어 개폐 기록, 항행장치 조작 기록 등을 수집하는 데 조사에 어려움이 생기고 각종 의혹이 나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172]

2021년 5월 세월호 사고 이후 단항되었던 인천-제주 항로에서의 운항 재개를 위해 하이덱스 스토리지의 자회사인 하이덱스 페리가 현대미포조선에 발주한 27,000톤급 대형 카페리선인 '비욘드 트러스트(현 퀸제누비아2호)'[173][174]를 인수 받았고 세월호 사고 7년 8개월 만인 2021년 12월부터 운행을 재개하였다. 현대미포조선에 의하면 대한민국에 큰 아픔을 안겨준 노선에 다시 투입되는 배인 만큼 각별하게 신경 써서 제조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비욘드 트러스트호는 물살이 거세 운항이 까다롭고 세월호가 침몰한 맹골수도를 피해 조금 더 외해에서 항해를 하는데, 이로 인해 항해 시간이 늘어나게 되었다.

16. 의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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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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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인양 관련 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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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유사 사건 사고

"가만히 있으라" '일본판 세월호' 유족들 손배소 승소(2011년 동일본 대지진 쓰나미 때): 세월호 유족들이 오카와 초등학교 추도식에 참여하는 등 양국 유족들의 교류가 이어졌다.

19.1. 유사 해상 사건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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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박명 기준 ㄱㄴㄷ순)

19.2. 해상 사고 외 유사 사고

아래 사고들은 해상사고는 아니지만 세월호 참사와 유사한 사고이다.

19.3. 학생들이 사망했던 비극들

아래의 사고들은 세월호 사건과 같이 학생들이 집단으로 사망했던 안타까운 사고들이다.

20. 관련 단체, 기관

21. 관련 자료/문헌

22. 기타

22.1. 노란 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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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노란 리본.svg

민간전승에 의하여 재회, 혹은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다린다는 의미가 있는 노란 리본을 애도와 무사 귀환의 의미로 사용하자는 집단적인 행동이 일어났다. 사고 발생 당시에는 아직 '실종'이었기에 원래 의미 그대로 이들이 무사히 돌아오길 기원한 것. 안타깝게도 사람들의 소망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후 노란 리본은 세월호 침몰 사고를 추모하는 의미의 대표적인 상징이 되었다.

처음 만든 사람은 당시 통합진보당 당직자였던 조용신 진보당 공동 대표다. 참사 7주기 당시 인터뷰 2014년 4월 19일에 국정원 정치공작 대선개입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집회가 청계광장에서 열릴 예정이었는데, 세월호 참사가 발생하면서 연대하게 됐다고 한다. 사실상 ‘공식 디자이너’로 활동하게 됐다. 본래 미술에 소질이 있었던 그는[189] 사고 직후 대학생들이 무사 귀환을 기원하며 만든 노랑 나비가 화제가 된 것을 보고, 참사 후 첫 주말이 지나고 노란 리본을 만들어보자는 얘기가 나왔다고. 이에 유방암을 예방하는 핑크 리본 캠페인의 리본 모양을 본땄고 노란색을 입혀 만들게 됐다. 일베저장소에서 아래쪽을 뾰족하게 만들어 잘못된 의미로 쓰는 일이 발생하다 보니, 이를 막고자 리본 아래쪽을 넓게 만들기도 했다.[190]

22.2. 단원고 4.16 기억교실

홈페이지

단원고등학교 내부에 희생자들의 유품을 그대로 놔두는 것은 애로사항이 발생하기에 2021년 4월 12일에 4.16 민주시민교육원 맞은편에 교실과 교무실을 원형 그대로 복원시킨 단원고 4.16 기억교실이 개관했다. 희생자들의 유품은 모두 여기로 옮겨왔으며 운영 시간은 평일 9:00~18:00, 공휴일 10:00~17:00이다.
단원고등학교에서 약 1km 떨어져 있으며, 도보 10~15분 거리이다. 고려대학교 안산병원, 고잔역에서 매우 가깝다.

23.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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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해상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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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대 <colbgcolor=#f5f5f5,#1f2023> 2010 ~ 2013년 퍼시픽 캐리어호-현대 컨피던스호 충돌사고 흥아 드라곤호-엘레니호 충돌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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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대한민국의 대형 사고 및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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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일<colcolor=#000>사망사건명
2024년 6월 24일
23
2022년 10월 29일
159 이태원 압사 사고
2020년 4월 29일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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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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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000>사망사건명
2019년 5월 29일
27 25 헝가리 유람선 침몰 사고
2018년 1월 26일
51 밀양 세종병원 화재 사고
2017년 12월 21일
29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 사고
2017년 3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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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2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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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28일
21 장성 효사랑요양병원 화재 사고
2014년 4월 16일
299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2010년 12월 13일
22 제1인성호 침몰 사고
2010년 3월 26일
46 천안함 피격 사건
[ 200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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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000>사망사건명
2008년 1월 7일
40 이천 냉동창고 화재 사고
2003년 2월 18일
192 대구 지하철 참사
2002년 4월 15일
130 중국국제항공 129편 추락 사고
2001년 9월 25일
25 제7호 태창호 사건
2001년 9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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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7월 24일
20 진주 관광버스 추락 사고
2000년 10월 27일
22 장수 88올림픽고속도로 추돌 참사

[ 199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사건명
1999년 10월 30일
56 인천 인현동 호프집 화재 참사
1999년 6월 30일
23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 사고
1998년 10월 29일
27 부산 범창콜드프라자 화재
1998년 7월 31일~8월 1일
103
1997년 9월 3일 65 21 베트남항공 815편 추락 사고
1997년 8월 6일 228 대한항공 801편 추락 사고
1996년 7월 26일
20 철원 군부대 산사태
1996년 4월 4일
21 양평 버스 추락 사고
1995년 8월 21일
37 경기여자기술학원 화재
1995년 6월 29일
502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1995년 4월 28일
101
1994년 10월 24일
29 충주 제5호 화재사고
1994년 10월 21일
32 성수대교 붕괴 사고
1993년 10월 10일
292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1993년 7월 26일
68 아시아나항공 733편 추락 사고
1993년 6월 10일
20 연천 예비군 훈련장 폭발 사고
1993년 4월 19일
34 논산 정신병원 화재
1993년 3월 28일
78
1993년 1월 7일
28 우암 상가아파트 붕괴사고
1992년 10월 22일
28 대양하니호 침몰 사고
1991년 11월 3일
22 인제 버스 추락 사고
1990년 11월 4일
21 소양호 버스 추락 사고
1990년 9월 1일
25 영동고속도로 섬강교 버스추락사고
[ 198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사건명
1989년 9월 17일
24 전북 모래재 버스 추락 사고
1989년 7월 27일
79 대한항공 803편 추락 사고
1988년 3월 25일
22 안양 봉제공장 화재
1987년 11월 29일
115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1987년 8월 29일
32 오대양 집단자살 사건
1987년 6월 16일
29 극동호 유람선 화재 사건
1986년 7월 30일
21 고창 거룻배 전복 사고
1985년 1월 11일
38 양강교 버스 추락사고
1984년 3월 24일
29 영덕 시루봉 CH-53 추락 사고
1984년 1월 14일
38 부산 대아호텔 화재 사건
1983년 10월 9일
25 아웅 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
1983년 9월 1일
269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1983년 4월 18일
25 대구 초원의집 화재
1982년 6월 1일
53 청계산 C-123 추락사고
1982년 4월 26일
62 우순경 사건
1982년 2월 5일
53 제주 C-123 추락사고
1981년 11월 22일
33 부산 금정산 버스 추락사고
1981년 5월 14일
55 경산 열차 추돌사고
1981년 2월 28일
24 대림호 침몰 사고
1980년 6월 5일
23 광주 지하살롱 화재 사고
[ 197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사건명
1979년 10월 27일
26 은성탄광 화재
1979년 4월 14일
44 함백 탄광 폭발사고
1978년 7월 23일
33 한강대교 버스 추락 사고
1977년 11월 11일
59 이리역 폭발사고
1976년 10월 28일
34 동해 어선 조난 사고
1976년 5월 18일
23 답곡리 버스 추락사고
1976년 2월 28일
32 화천 버스 추락사고
1974년 11월 3일
88 대왕코너 화재사고
1974년 6월 28일
28 대한민국 해경 경비정 제863호 침몰 사건
1974년 2월 22일
159 YTL30호 침몰 사건
1973년 8월 12일
32 영동역 유조열차 폭발 사고
1973년 5월 16일
22 영일 건널목 열차 추돌사고
1972년 12월 24일
30 파크로버호 침몰 사고
1972년 12월 2일
53 서울시민회관 화재 사고
1972년 8월 1일
26 의암호 버스 추락 사고
1971년 12월 25일
166~191 대연각호텔 화재
1971년 10월 13일
20 남원역 열차 추돌사고
1971년 5월 10일
80 청평호 버스 추락 사고
1971년 5월 10일
31 질자호 침몰 사고
1970년 12월 15일
326 남영호 침몰사고
1970년 11월 5일
31 의암호 선박 전복 사고
1970년 10월 14일
46 모산 수학여행 참사
1970년 8월 21일
25 추풍령 고속버스 추락 참사
1970년 4월 8일
33 와우 시민아파트 붕괴사고

[ 196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사건명
1969년 9월 17일
37 창녕 기관선 - 남지교 충돌 사고
1969년 1월 31일
41 천안 열차 추돌사고
1968년 10월 30일
48 산청 버스 추락 사고
1968년 1월 8일
41 함양 버스 추락 사고
1967년 10월 16일
42 금릉 버스 추락 사고
1967년 9월 15일
29 삼양수산 원양어선 침몰 사고
1967년 4월 8일
80 서울 청구동 C-46 추락사고
1967년 1월 19일
39 해군 당포함 격침 사건
1967년 1월 14일
93 한일호-충남함 충돌 사고
1967년 1월 1일
41 서문시장 화재
1966년 1월 18일
22 중구 남산동 판자 아파트 화재
1964년 7월 29일
95+ 서해 어선단 실종 사고
1963년 10월 23일
49 여주 조포 나룻배 침몰 사고
1963년 6월 25일
70 거제 장승포 산사태
1963년 1월 18일
140 연호 침몰 사건
1962년 9월 7일
36 한남동 나룻배 침몰 사고
1960년 3월 2일
62 부산 국제고무공장 화재
1960년 1월 26일
31 서울역 압사 사고
[ 195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 사건명
1959년 7월 17일
67 부산 공설운동장 압사 사고
1957년 2월 22일
21 한강 미 공군 C-124A 추락 사고
1956년 1월 12일
66 태신호 화재
1955년 3월 2일
42 부산역 열차 화재
1953년 11월 27일
29 부산역전 대화재
1953년 1월 31일
56 오산 건널목 추돌 사고
1953년 1월 25일
66 행운환 침몰 사고
1953년 1월 9일
330 창경호 침몰 사고
1952년 11월 16일
25 강릉 공항 미 공군 C-46D 추락 사고
1952년 10월 16일
44 양평 미 공군 C-119C 추락 사고
1951년 7월 11일
94 제5편리호 침몰 사고
1951년 7월 11일
30+ 제13호 침몰 사고
1950년 6월 30일
23 부산 미 공군 C-54G 추락 사고
[ 194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사건명
1949년 10월 5일
71 평해호 침몰 사고
1949년 8월 18일
51 대강 터널 질식 사고
1948년 6월 8일
150 미군 독도 오폭 사건
1947년 8월 19일
23 태양환호 침몰 사고
1946년 11월 13일
42 영등포역 열차 충돌 사고
1946년 10월 22일
59 어청도 기뢰 폭발 사고
1945년 9월 29일
73 대구역 열차 충돌 사고
1945년 8월 24일
549​~𔁳,000+
우키시마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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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가 있는 대한민국의 치사 범죄 사건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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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에는 법원의 유죄 확정 판결이 나지 않은 사건도 포함되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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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또는 'Sinking of Sewol ferry(세월 여객선 침몰 사고)'로도 불린다.[2] 침몰 시간은 KST 기준 오전 8시 48분 53초에서 오전 10시 30분경.[3] 파일:세월호출항.gif
본래 예정된 시각은 오후 6시 30분이지만 안개로 인해 출발이 지연되면서 9시 정도에 출발하였다.
[4] 단원고 학생 325명, 교사 14명, 일반인 137명[5] 단원고 학생 248명, 교사 10명, 일반인 41명[A] 미수습자 포함 시 304명 사망.[7] 단원고 학생 2명, 교사 1명, 일반인 2명[8] 이들 모두 언론에서 이름이 공개되었다. 단원고 학생은 2학년 6반 남현철·박영인 군, 교사는 양승진 교사, 일반 승객이었던 권재근·권혁규 부자 2명.[9] 단원고 학생 75명, 교사 3명, 일반인 94명[10] 당시 단원고의 교감은 구조되었다가 죄책감에 시달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11] 물살이 빠른 맹골수도를 지나 잔잔했던 병풍도 앞바다.[A] [13] 담화에는 해경 해체, 해산 및 각 부처 신설, 부패 청산, 법 개정안 등 강도 높은 내용들이 담겨 있었다. 역대 대통령 담화 중에서 이례적으로 평가된다.[14] 세월호 참사 이후 2014~2015년에는 전국의 모든 학교에서 수학여행이 금지되었으며 2016~2017년부터 수련회로 대체되거나 점차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그만큼 큰 사고였다.[15] 정확히는 사망자 299명, 실종자는 5명이다. 실질적으로는 실종 상태지만 실종자는 5년이 지나면 사망으로 처리하기 때문에 사실상 현재는 304명을 사망자로 간주하고 있다.[16] 구조된 단원고 교감은 제자들을 놓고 자신이 먼저 탈출하였다는 죄책감에 사고 이틀 뒤 스스로 생을 마감하였다. 사고 자체만으로도 국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었는데 교감의 자살 소식에 국민들은 또 한 번 큰 슬픔과 충격을 받아야 했다.[17] 임시 분향소(2014. 04. 22. ~ 04. 28.)(7일간)[18] 정부 합동분향소(2014. 04. 29. ~ 2018. 04. 16.)(약 4년)[19] 세월호 침몰 사고 이후 한국 사회에 깊이 뿌리박힌 안전불감증과 정재계의 비리 등이 수면 위로 재조명되었고, 결국 이 사건이 국가의 지도자를 권좌 위에서 끌어내리는 역사적인 사건이 벌어지는 데 간접적으로 일조하였다.[20] 간단히 말하자면 이 사고는 학생들을 태운 버스가 건널목에서 달려오던 통일호 열차와 충돌하여 버스가 학생들을 태운 채 전소한 사건이다.[21] 항공이나 대형 선박 등의 교통수단을 이용하는 승객들이 교통수단을 지휘하는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은 합리적인 일이다. 사고 또는 비상 상황 발생 시 승객들이 따라야 하는 매뉴얼이 일반인 상식에 어긋나는 경우 승객의 단독 행동으로 상황이 더 위험해질 수도 있기 때문에 선박 지휘에 책임이 있는 인물들은 일반적으로 선박을 떠나지 않고 대피와 안전 조치를 비롯한 여러 매뉴얼이 잘 진행되도록 감독하고 (특히 항공의 경우에는) 승객이 대피 또는 지시 사항 이행을 거부하는 승객들에게 물리력까지 동원하는 것이다. 따라서 비록 가만히 있으라는 지시가 잘못되었긴 하지만 승객들이 선장의 지시 사항을 수용한 것은 합리적인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잘못된 지시를 내리고 승객들을 방치한 채 도망친 선장의 잘못이 매우 크다.[22] 이 사고로 인해 추후 교통수단 등에서 비슷한 사고가 일어날 경우 통제에 따르지 않아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늘어날 것이라는 우려도 나왔다. 실제로 얼마 지나지 않아 생겼던 한 지하철 사고에서는 딱히 큰 사고가 아니었는데도 승객들이 패닉에 빠져 지하철을 탈출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23] 사고 발생 이후 재난대응체계의 마비, 구조당국의 무능한 대처와 직무유기, 부패한 기업과 정부의 유착(관피아) 등등 정부의 허술하기 짝이 없는 대처로 이에 대한 비판 여론이 일었다. 진도VTS관제센터의 공무원들이 근무시간에 낮잠을 자는 등의 태도를 보였으며, 해양수산부 관계자들이 청해진해운의 뇌물을 받고 세월호의 불법 운영을 방조하였다. 특히 박근혜는 사고 당일 7시간 동안 행적이 묘연하여 큰 비판을 받았기 때문에 국정운영의 최고 책임자인 박근혜 대통령과 박근혜 정부가 많은 비판을 받는 이유가 되었다.[24] 선사와 정부 발표간의 인원 혼선이 벌어진 이유인 즉, 세월호는 카페리인데 카페리에 승선권을 끊지 않고 트럭째 탑승하는 화물차와 기사들을 포함하지 않았던 숫자였기 때문. CCTV로 확인된 화물 기사는 총 13명.[25] 475명 중에서 2명은 배에 탑승하지 않았다는 게 확인되고, 승선원 명부에는 없지만 그냥 배에 탄 사람들이 3명 확인되었기 때문.[26]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_본권2 59p[27] 해당 블로그 글. 블로그 글이 세월호가 침몰하기 불과 2시간 전에 업로드된 글이다. 다행스럽게도 이 블로거는 침몰 3주 전에 탑승했던지라 무사했다.[28] 이것이 기록된 '멀쩡한 세월호'의 마지막 모습이다. 중앙해양안전심판원여객선 세월호 전복사고특별조사 보고서에서 볼 수 있다.[29] 헌법에는 생명권에 대한 규정이 따로 없지만 모든 기본권의 전제로서 기능한다.(2004헌바81결정)[30] 정부는 언론에 압력을 가해 통제하여 공권력의 잘못이 보도되지 못하게 하려 함과 동시에 유가족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심어지도록 조장했고(이정현이 이것 때문에 유죄를 선고받았다. 유일한 예외가 JTBC.), 심지어 이 사건을 다루거나 추모하는 작품을 낸 문화예술인까지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탄압했고 어버이연합과 같은 어용 단체들을 동원하여 유가족들을 위협하기까지 했다.[31] "국가 최고지도자가 국가위기 상황에서 직무를 불성실하게 수행하여도 무방하다는 그릇된 인식이 우리의 유산으로 남겨져 수많은 국민의 생명이 상실되고 안전이 위협받아 이 나라의 앞날과 국민의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불행한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 되므로 피청구인의 성실한 직책수행의무 위반을 지적하는 것이다." 출처[32] 관련 책임자들도 당연히 형사처벌을 받았다. 이재수(군인) 항목 참조.[33] 마루 자체가 '~호'라는 뜻의 일본어이기 때문에 '나미노우에마루'는 '나미노우에호'라는 말과 같다. 그러나 나미노우에마루는 3세대 선박이며 우리가 아는 페리 나미노우에 4세대와 전혀 다른 선박이다. 사족으로 '나미노우에'라는 뜻은 '파도를 넘어'라는 뜻이며, 기항지인 나하의 명승지인 나미노우에에서 따 온 이름이라고 한다.[34] 세계에서 여객 수가 가장 많은 항공노선이다. 바로 아래에는 HND-CTS가 있다.[35] 애초에 '세상을 넘는다'라고 해석하려면 세월이 아니라 월세여야 한다. 예를 들면 월담 같이.[36] 한국 조선일보를 인용하였다고 되어 있다. 원래 중화권에서는 표음문자의 특성상 외국어의 정확한 명칭을 알아낼 때까지는 가칭을 쓴다.[37]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_본권2 61p[38] 이에 따라 법원은 이준석 선장에 대한 직접 지휘 의무 위반에 대하여 ①세월호가 기울어진 지점 및 지점에서의 조류의 세기 및 형태 ② 세월호 주변 선박 통행량 ③ 사고 지점의 위치, 수심, 날씨 및 바람이나 파고의 정도 ④ 같은 구간에 대한 박한결, 조준기의 운항 경험 등에 비추어 보아 이준석 선장의 직접 지휘의무 위반 사실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세월호 선원 재판 2심)[39] 나미노우에 해상시운전 성적서(B-17)[40] 직나-10 세월호 횡경사 원인과 침수과정 분석 80p[41] 135도 방향에서 140도 방향으로, 곧 이어서 145도 방향으로 두 번에 걸쳐 조타함[42] 항년 16세, 사고 당시 단원고 2학년 6반 34번. 4월 24일에 사망한 것으로 확인되었다.[43] 대한민국 해양경찰청의 수색 및 구조 매뉴얼에 따라, 경비정은 지역 조사와 승객 구조를 "신속하게" 담당하게 되어 있었다.#[사진] 파일:10시17분마지막메시지.jpg[45] 정확히는 선저의 구상선수 부분이다.[46] Daum에서 제작한 타임라인 페이지. 세월호의 출항부터 사고 과정과 구조, 수습 과정, 오보 및 이후 정정 과정 등의 타임라인이 잘 나와 있다. 여기서 사고 초기 대통령 지시는 후에 박근혜 정부 측 조작으로 밝혀진다. 세월호 7시간 참고.[47] 우측 하단에 가 시간에 따라 잠기는 모습이 나온다.[48] 전체 통화시간: 4분 19초[49] 실제로는 배의 기울기가 20도가 넘어가는 시점부터 사람의 이동은 크게 제한된다고 한다. 20도가 뭐 대수인가 하는 사람들은 이 그림을 보자. 원본 문서는 이쪽을 참고.[50] 교신 내용을 들어보면 진도 VTS에서 선장이 직접 판단해 승객 탈출을 결정하라고 지시하자 세월호에선 지금 탈출하면 바로 구조가 되겠냐면서 승객들에게 아무런 탈출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51] 영상의 자막에는 못나온당께.[52] 큰 배가 침몰하면 주변의 물체들도 같이 빨려들어가는 현상이 있기 때문에 작은 배는 함부로 접근하면 안된다는 뜻.[53] 박준혁 군의 발언에 따르면 그와 그의 교사 등 몇몇의 생존자들이 밧줄을 잡고 탈출을 시도했지만 거센 물살이 갑자기 들어닥쳐 그와 김수정 양을 제외한 모두가 다 밧줄을 놓쳤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김수정 양과 같이 탈출을 시도했으나, 2차적으로 들어온 물살 때문에 김수정 양은 탈출을 못 하고 박 군만이 나왔다.[54] 안내 방송 담당 직원들은 승객과 떨어진 채 고립된 곳에 있었던 게 아니라 3층 로비에서 일반인 및 일부 학생 승객들과 함께 있었다. 배 침몰 상황에 대한 안전 교육을 받거나, 관련 지식이 있었다면 기울어져 움직이기 힘든 상황을 보고도 대기 명령을 그대로 따르진 않았을 것이다.[55] 각도를 크게 틀어 배가 기울었다는 것[56] 이를 선조위에서는 열린안이라고 표현한다[57] 4.16세월호참사 진상규명 소위원회 보고서 부속서Ⅱ[58] 해당 오보는 언론인들 사이에서 선정된 21세기 최악의 오보로 뽑혔다.[59] 해당 방송은 TV조선이지만 타 언론들도 마찬가지로 실시간 발표를 같이 듣고 방송하는 것이라 다른 언론도 오보를 내기는 마찬가지였다.[60] 다만 MBN자막으로 먼저 오보를 냈기 때문에 앵커의 멘트, 기자리포트까지 포함한다면 MBC가 먼저 오보를 냈다(오전 11시 1분 26초). MBN이 자막, 앵커멘트로 오보를 낸 시간은 11시 8분.[61] 사실 특정 반 인원에 대한 전원 구조라는 발표도 잘못되었는데 모든 학생이 구조된 반은 단 한 반도 없었고 가장 생존율이 높은 1반도 절반 정도만 구조되었기 때문이다.[62] 이 사례가 2017년 다큐멘터리 영화 <공범자들>에도 다뤄지자, 참사 당시 전국부장이던 박상후는 <뉴데일리> 통화를 통해 오보의 책임은 언론노조 소속 기자들에게 있다고 주장했으며, 오정환 당시 보도본부장도 이들의 실명을 공개해가며 같은 주장을 했다.[63] 사고 26시간 전에 포스팅되었으며 해당 블로그 작성자는 3월 27일에 배를 탔다.[64] 이 생존자는 약 60시간 정도 생존이 가능한 공기가 압축되었던 에어 포켓 속에 있었으며, 물이 아니라 매트리스에 올라타 있었으므로 저체온증을 피할 수 있었다. 물을 찰박거리던 손이 목격되어 구출되었다고.[65] 이때 손석희 사장이 눈물을 흘리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는 장면이 큰 화제가 되었다.[66] 다만 에어 포켓의 존재 가능성을 들어 생존자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던 전문가들도 더 이상 생존자가 있을 수 없다고 판단할 정도로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에 대부분 의견을 바꿨을 때도, JTBC는 아직도 에어 포켓과 생존자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알파인 이종인 대표와의 인터뷰를 보도하기도 했다.[67] 사망 원인은 기뇌증으로 추정된다. 관련 기사[68] 사고 발생 당시 교사들은 대부분 5층에 있어 바로 탈출할 수 있거나 배 밖으로 나온 상황이었다. 그러나 교사들은 학생들을 구하기 위해 다시 선실로 들어갔고 결국 11명이 사망했다. 만약 교사들이 선실로 다시 들어가지 않았거나 적당한 때에 탈출했다면 11명은 생존했을 것이다. 몰론 승객들을 구하지 않은 선장과 같은 사회적 매장/비난은 피할 순 없겠지만.[69] 51.4% 생존.[70] 30.6% 생존.[71] 23.5% 생존.[72] 24.3% 생존.[73] 25% 생존.[74] 34.2% 생존.[75] 3% 생존.[76] 6.5% 생존.[77] 9.1% 생존.[78] 4.8% 생존.[79] 1명(교감)은 구조된 지 이틀 후 자살. 교감이 자살로 사망하면서 세월호 생존 담임 교사는 2명이 되었다. 담임 교사들 8명과 비담임 교사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다.[80] 미수습자 포함.[81] 남학생 19.4% 생존.[82] 여학생 27.3% 생존.[83] 그러나 이 학생도 2015년 6월 16일 1년 2개월간의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향년 17세. 그리고 박진수 학생의 단짝친구인 이다운 학생이 있었는데, 음악을 좋아해 생전에 둘이서 자주 어울려 붙어 다녔다.[84] 그나마 생존자 비율이 가장 높았던 1반도 절반에 그쳤다.[85] 강 교감: "침착하세요. 방송에 귀를 주목하고 학생들에게도 침착하라고 독려 문자 부탁, 움직이지 마시고." 김모 교사: "얘들아 움직이지 말고 있어, 다들 괜찮니?" (새정치민주연합 전해철 의원이 입수한 카톡 메시지 자료 #)[86] 사실 교사들도 피해자이므로 그들을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교사일 뿐 해양 전문가가 전혀 아니므로 전문가인 선원들의 말을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교사와 학생의 비율(14:325)을 생각해보면 아예 교사의 영향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학생도 많았다. 희생 학생들 모두가 교사의 영향 때문에 사망한 게 절대 아니라는 뜻이다.[87] 사고 다음 날인 2014년 4월 17일에 이다운 군의 시신이 처음 수습되었을 때 이 학생으로 신원이 오인된 적이 있었다. 이다운 군의 바지 주머니에서 박영인 군의 학생증이 나와서 신원 파악이 잘못된 것인데, 다음 날 이다운 군의 부모님이 진도에 와서 확인한 후에야 신원이 정정되었다.[88] 이때 정차웅의 부모가 진도로 오고 있었다.[89] 2학년 6반은 가장 많은 학생이 구조된 1반을 제외하면 유일하게 전체 학생의 1/3 이상이 생존한 반이다.[90] 최성호의 트위터에 당시 학교에 시간표가 나오는데 전수영은 문학을 담당했다.#[금] 금구모 소속[92] 이 영상의 출연자 중 전현탁, 한정무, 장준형, 조봉석, 김대희가 희생자다. 조대섭 본인도 서있는 학생 역할로 나왔다.[93] 당시 박호진은 자신도 4살때 부친상을 당해서 ‘애기를 보고서 얘는 무조건 안고 나간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94] 권지연 어린이의 엄마는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 중 유일하게 수습자이자 사망자로 이름은 한윤지다. 남편인 권재근과 아들인 권혁규와 같이 세월호 침몰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사망자들 중 한윤지만 유일하게 차가운 세월호에서 내렸다.[95] 이 영상에서 생일 기간때 참사 사건이 일어났다고 했다.[96] 박준혁의 입장에서 김수정은 ’이름만 아는 사이‘ 혹은 ‘얼굴만 아는 사이’ 정도였고 사고 이후 사진으로 더 많이 봤다고 한다.[빠른생일] [98] 사고 날짜와 반, 번호가 일치한다.[99] B-19[100] 안산 정부합동분향소에 가보면 실제로 두산 베어스 유니폼이 있었는데, 그의 영정사진 밑에 있다. 그 유니폼을 보자 깊은 울음을 터뜨렸던 빈소객이 있었다고. 2018년 4월 16일 후로 분향소가 철거되어서 볼 수 없다.[101] 묘지에는 1974년 6월 16일 출생이라고 적혀있다.[102] 고창석 교사의 유해가 발견될 당시 고창석 교사의 두 아들은 모두 초등학생이었다.[103] 그리고 희생자 故 고창석 교사의 유가족 및 처자식들 중 고창석 교사의 아내만 유일한 홍일점이다.[104] 현재 최성호의 트위터에 올라온 마지막 글에는 그를 추모하는 댓글이 매년 올라오고 있다.[105] 묘지에는 1957년 2월 5일 출생이라고 적혀있다.[106] 김주희(3반)가 <열여덟의 기억, 스물다섯의 약속>에서 교사 한 명이 배 밖으로 튕겨져 나갔다는 말을 했다. 같이 탈출한 박솔비도 정신을 차리니 선생님이 없었다고 이야기했다.[107] 최종 좌초 충격 10여 분 이전에 최초 충격이 있어서 위험을 인지하고 담임으로서 학생들을 챙긴 후 뛰어나가 다른 학생들도 챙기던 와중에 좌초 충격으로 바다에 튕겨져 나갔다는 추측 등.[빠른생일] [109] 러시아식 본명은[110] 슬라바의 친아버지가 한국인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한국 국적이 없다는 점, 한국 이름이 아니라는 점, 만약 친아버지가 한국인이라면 슬라바의 외모가 이상할 정도로 아버지와 안 닮았다는 점 때문에 이 주장은 맞다고 보기 힘들다. 그리고 공식적으로는 '부모님의 이혼 후 재혼한 어머니를 따라 한국에 왔다.' 이렇게 소개한다.[111] 남동생은 한국-러시아 혼혈이며 가장 먼저 배운 한국어가 슬라바였다고 한다.[112] 사랑하는 우리 아들 슬라바. 꿈속에서라도 한 번만 안아보고 싶구나. 사랑한다.[빠른생일] [114] 어머니의 인터뷰에 따르면 생전 보미는 자기 관리에 무척이나 엄격한 아이였다고 한다. 다이어트를 할 때는 방울토마토 하나까지도 칼로리를 체크할 정도로 빡세게 했다고.[115] 노래 믹싱은 신해철이 맡았다.[D] TREN.D 소속[117] 일명 ‘트렌디’. 멤버: 이경주, 강수정, 이연화, 정예진, 오OO[118] 멤버 중 1명인 오OO.[금] 금구모 소속[120] ’금요일 함께 점심을 먹는 9반 모임‘의 약칭. 구성원: 조은정, 김시연, 양온유, 김수정, 이혜경, 정예진, 최OO, 장주이, 전하영, 이다혜[121] 이 중에는 박예슬이 디자인했던 구두도 있었는데, 모 디자이너가 박예슬의 디자인을 바탕으로 직접 만들었다.[122] 어머니 나카지마 야요이는 1992년 서울에서 통일교 주최 합동결혼식을 통해 김종호와 결혼했다.[123] 사후 통일교 측에서 김영은의 성화식을 열었다.[124] 이 말이 박예슬이 한 것으로 잘못 알려져 있으나, 잘 들어보면 "살 건데 뭔 개소리야"와 "살아서 보자"의 목소리가 다른 것뿐만 아니라 박예슬의 입은 움직이지 않았다. 박예슬은 후자만 말했고 전자는 김영은이 한 것이 맞다.[125] 이는 영상에서 박예슬, 김영은 등 대부분의 아이들이 사태의 심각성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상황에서 구조될 것이라는 생각에 안심했지만, 최수희만큼은 이때부터 사태의 심각성을 진지하게 알아채고 있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126] 이 목소리도 처음에는 박예슬의 목소리로 잘못 알려졌으나 박예슬의 동생 박예진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영상에는 박예진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았으나, 타 언론들을 통해 박예슬의 동생 이름이 "박예진"이라고 언급되었다.[금] 금구모 소속[128] 네이버 카페 MFS에도 동일한 영상이 올라왔으나 로그인이 필요하다. 네이버에서 보고 싶거나 페이스북 로그인 팝업이 불편한 이들은 ‘mfs 연애혁명’으로 검색하면 MFS 게시물이 바로 보이니 여기로 접속해서 시청하면 된다.[129] 도언은 4번, 도연은 5번이었다.[130] 하지만 위의 문지성의 케이스처럼 당시 일부 "실종자"들이 생존자 명단에 뜨는 등 혼선이 심각했다.[131] 작사는 생전 같은 반이던 남현철과 함께 했다고 한다.[132] 안타깝게도 2015년에 박진수도 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친구들 곁으로 가게 되었다.[133] 실제로 두 학생은 짝꿍이었고 친했다. 이다운의 주머니에 박영인의 학생증이 나와서 신원이 오인된 것이다. 이다운의 부모가 진도를 오고 나서야 신원이 제대로 확인되었다. 안타깝게도 절친했던 박영인 학생은 미수습자가 되어 돌아오지 못했다.[134] 기억교실에 있는 본인 자리에 써져 있는 글이 단서다.[135] 묘지에는 1986년 8월 1일 출생이라고 적혀있다.[136] 묘지에는 1982년 7월 13일 출생이라고 적혀있다.[137] 정황상 미수습자로 남은 양승진일 것이다.[D] [139] 약전에 따르면 어머니는 이연화가 '공부와 무관한' 네일 아티스트가 되는 것을 반대했으나 담임 교사 유니의 설득 이후로 마음이 바뀌었다고 한다.[140] 김수정의 짝꿍이었다. 수정의 사후 남긴 쪽지에 'JSB'라고 이니셜을 남겨놓았다 이 이니셜에 부합하는 2반 생존자는 조수빈 뿐이다.[141] 당시 수학여행에 불참한 학생들은 평소처럼 학교에 등교했다가 사고가 터지자 오전 10시 10분께 하교 조치되었다. 진의는 귀가 후로도 연화와 계속 연락을 시도했으나 연락이 되지 않았다. 애석하게도 10시 10분은 이미 골든타임을 넘긴 시점이었는데, 세월호에서 온 마지막 메시지는 17분에 왔고 마지막 생존자 박준혁이 탈출한 시간은 21분이었다.[142]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생존자.[143] 말이 '약속'이지, 사실은 그냥 암묵의 룰이라고 한다.[144] 약전에서 '유영'이라고 이름이 언급되었다.[145] 면접에서 지원자의 가족 문제를 추궁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불법이지만 이 또한 물증이 없으면 소용 없다. 그리고 면접이 아닌, 합격 후 같은 동료들끼리 가족 문제를 묻는 것은 불법이 아니다.[146] 당시에도 지금처럼 스마트폰을 쓰던 시대이기는 하지만 인스타그램은 인지도가 그리 높지 않았고, 2012년~2013년에는 카카오스토리를 많이 사용했다. 2014 소치 동계올림픽 이후로 카카오스토리가 퇴물이 되면서 페이스북이 전성기를 달리기 시작하는 흐름으로 가는 시대적 배경으로 인해 페이스북을 더 많이 쓰던 시대였다. 이런 연유 때문인지 당시 단원고 학생들 또한 페이스북을 더 많이 사용했으며 인스타그램은 잘 사용하지 않았다. 실제로 현재도 희생자들의 페이스북 계정은 꽤 많이 남아있지만 인스타그램은 거의 안 남아있으며, 그마저도 대부분은 포스팅이 단 하나도 없다. 생전에 인스타그램에 게시물을 올린 희생자는 유예은 외에 편다인 정도.[금] 금구모 소속[148] 아이들이 직접 이름을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대구 지하철 참사를 언급하는 장면이 나온다.[149] 이 역시 학생들에 비해 높은 것이지 많이 생존한 것은 아니다.[150] 선박직 승무원, 조리원 2명, 아르바이트 2명, 사무원 1명.[151] 조리원 2명, 사무원 2명, 사무장, 아르바이트 4명, 그 외 1명.[152] 이들에 대한 설명은 후술 참고.[153] 이름은 한윤지로,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 중 유일하게 차가운 시신으로 발견되어 수습되는 방식으로 차가운 세월호에서 내렸다.[154] 이름은 권지연이고, 세월호 침몰 사고 피해자 가족들 중 유일하게 생존자다. 권재근, 한윤지 씨 부부의 딸이자 권혁규 군의 여동생인 권지연 양은 세월호 침몰 사고로 고아가 되어 현재는 큰아버지와 같이 살고 있다. 참고로 단원고 출신의 세월호 생존 학생 75명 중 한 명인 박호진 학생이 그녀를 구해주었다.[155] 1986년생[156] 안산은 넓은 도시가 아니다. 사람들이 붐비거나 노는 시내가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시험 기간이 끝나면 늘 중앙역 근처가 안산 시내의 중고등학생들로 붐볐고, 때문에 오며가며 어깨라도 한 번쯤 스쳤던 사이이다. 직접적으로 아는 피해자가 없었더라도 임시 분향소에서 틀어주는 영상 화면 속의 얼굴들은 한 번쯤 보았던 얼굴들이었기 때문에 그저 안타까운 마음으로 분향을 하러 왔다가 충격에 휩싸여 나가는 경우가 굉장히 많았다.[157] 공교롭게도 단원고 2학년 학생들을 비롯하여 안산 지역 1997년생들은 안산 평준화 1세대이다.[158] 2014년 현재 화장장의 유품 소각로가 폐쇄된 지 10여 년이 지났고, 환경 관련 법률로써 개인적인 유품 소각이 금지되어 있어 오늘날의 유족들은 유품을 일부만(옷가지 위주로) 불법 소각하거나(사찰에서 49제할 때 사찰 자체 소각로에서 태우는 경우 포함) 전문 소각업체에 돈을 주고 위탁하고 나머지 유품은 일반 폐기물로 버려지거나 헌옷수거함에 버리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시청 차원에서 피해자의 옷가지는 물론이고, 대형 유품인 책상의 소각까지도 시가 운영하는 대형 소각 시설을 통해 무상으로 소각 처리해준다는 것은 유족한테는 적지 않은 지원이 될 수 있다.[159] 구속 후 포토존에서 사과를 하던 선장, 1등 항해사와 달리 3등 조타수는 울기만 하느라 인터뷰를 안했다. 이후 언론에 의하면 검찰 조사에서 울기만 하느라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160] 즉 전 세계 어디서나 똑같이 3등 항해사는 오전 8시~낮 12시, 2등 항해사는 낮 12시~오후 4시, 1등 항해사조는 오후 4시~오후 8시 순으로 근무하며, 그 다음은 다시 3등 항해사부터 반복된다. 이렇게 되면 1, 2등 항해사가 가장 어려운 야간 항해를 하게 되며, 3등 항해사는 상대적으로 편한 주간 근무만 2번 하게 된다. 즉 비교적 경험이 적은 3등 항해사에 대한 배려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월호 3등 항해사는 운명의 8시 44분에 조타수 C와 조를 이루어 배를 운전하게 된다.[161] 일반적인 선박의 운항 체계에 대해 설명하자면 조타실은 항해장이 지휘하고 기관실은 기관장이, 객실은 사무장, 기타 잡일은 갑판장이 책임자이다. 이 모든 부서를 관리하는 것이 선장이다. 다만 앞서 말한 항해장과 언급 안 한 통신장은 없어지는 추세이다. 대신 1등 항해사가 조타실을 관리하며 기관장과 같은 레벨로 취급된다.[162] 다만 그가 초짜 조타수여서 경험이 적은 3등 항해사와의 조합이 잘못됐다는 증언도 발견되는 등 반되대는 기사도 있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 대로 가장 경험 많은 조타수 A와 가장 경험이 적은 3등 항해사를 함께 묶는 것이 세계적인 표준이다. 물론 세월호가 평상시에도 한 배에 선장이 2명이 있는 상식을 초월한 배라는 것은 감안해야 한다.[163] 이후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적게 꺾었다는 기사가 나온다.[164] 2등 항해사 오모가 바로 선장의 지시로 초단파 무선통신으로 제주 해상교통관제센터에 구조 요청한 사람이다. 승객들의 생명은 안중에 없고 오직 자신이 살기 위해 무전으로 "그게 아니고, 지금 탈출하면 바로 구조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만 외친 전형적인 답정너.[165]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사건,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건, 화산 폭발 등의 사건이 터지면 군이 재난구조 작업을 수행한다. 세월호 침몰 사건의 경우에도 관련 인적, 물적 자원을 가지고 있는 것은 해군 구조부대이며, 해경은 관련 자원이 없다.[166] 서해는 환경 자체가 더 나빴다. 수온이 더 찬 3월 말의 중부 지방 바다였던 데다 수중 시야가 더 나빴고 조수가 심했다.[167] 태국 네티즌들은 비영어권 국가 중에선 이례적으로 뉴스나 사진을 스스로 번역해서 공유하고 있다.[범례] Approve: 지지율
Disapprove: 반(反)지지율
Sinking of Sewol: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Year-end tax adjustment controversy:연말정산 논란
MERS outbreak: 2015년 대한민국 메르스 유행
NK Crisis: DMZ 목함지뢰 매설 사건
Visit to China: 박근혜 대통령 중국 전승절 참석 논란
Defeat in legislative election: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제1원내정당 지위 획득 실패
Park's confidante scandal: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169] 원래 대한항공에서는 해당 사건 이전부터 투입했다. 그리고 기령이 상당히 높은 퇴역 직전의 노후기가 투입되었으며 신형기들은 F급 기체라 제주노선에 들어가면 택싱 중에는 모든 항공기들이 정지해야 되기 때문에 투입될 수 없다.[170] 단, 연안여객선 현대화 펀드의 경우 세월호 참사의 영향 외에도 2016년 조선업 불황을 타개하는 데 약간이나마 도움을 주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다. 연안여객선 현대화 펀드를 신청할 경우 배의 건조는 무조건 국내 조선사여야 한다.[171] 포항-울릉간 선플라워호를 운행하는 그 대저해운이다.[172] 비유하자면 항공사들이 국내 노선만 운항한다고 비행기블랙박스를 안 달고 다녔고, 이를 감독할 법과 규정조차 없던 것과 같다.[173] 파나마 선적, 국제해사기구 등록번호 IMO 9901386.[174] 비욘드 트러스트의 뜻은 '진실된 믿음'이다. 즉, '세월호의 길을 걷지 않고 진실된 믿음으로 안전하게 운행하겠다'라는 의미이다.[175] 물론 이는 중국이 자국민의 인권마저도 필요하다면 단호하게 짓밟는 독재 국가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민주 국가에서는 이런 짓을 하다간 선거 대패가 확정적이다.[176] 이 사고가 터지고 2달만에 세월호 참사가 발생해 또 안타까운 학생들의 목숨을 잃었다.[177]무학중학교.[178] 강북구 번동과천시 서울대공원을 이어주던 시내버스로 1994년 4월 과천선 개통을 계기로 점차 이용 승객이 감소해오다 불과 6개월여 후인 10월 21일 발생한 이 사고의 직격탄을 맞아 응봉역까지 단축 운행하다 1995년 폐선되었다.[179] 어학연수를 가던 학생들이 변을 당했다.[영상끝부분관련참고] 끝에 나오는 노란 리본의 끝이 뾰족해서 '축하'의 의미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노란 리본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추모글에 마침표를 찍으면 안 된다'라는 것과 비슷한 도시전설, 한 마디로 헛소문이다. 그리고 일베저장소에서 사용했다고 하면서 '역시 일본인은 나쁘다', '이건 조롱의 의미로 넣은 거다'라는 사람도 있는데, 순수하게 추모의 의미로 올린 것이니 일본을 싫어하더라도 이 영상에 담긴 뜻을 곡해하지는 말자.[181] 작중에 직접 어떤 사고라고 말한 것은 아니지만, 배경인 2016년 2월로부터 22개월 전에 있었던 사고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었다. 무엇보다 박자기가 펼친 노트에 적힌 날짜는 2014년 4월 16일.[182] 원래부터 성수기에는 B747이 서울-제주 노선에 고정 투입되었었다. 이 사고로 인천 출발 배편이 전멸하여 항공사들이 반사이익을 얻었다.[183] 다만 브라질 월드컵 열기가 덜했던 것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브라질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거듭되는 졸전으로 본선에 진출 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측면도 있다.[184] 집중력 저하, 통신 장애, 사생활 노출, 가정에서의 아동 학대 등.[185] 2021년 4월 30일 진수.[186] 비욘드 트러스트의 뜻은 '진실된 믿음'이다. 즉, '세월호의 길을 걷지 않고 진실된 믿음으로 안전하게 운행하겠다'라는 의미이다.[187] 동시에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이후이자 지방자치제 부활 이후 서울에서 가장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한 사고이다.[188] 공교롭게도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 기사가 나간 날짜도 102년 전 4월 16일이었다.[189] 중학교 때부터 미술 공부를 하고 싶었고, 부모님 몰래 전문대 산업디자인학과에 합격했다가 가로막힌 경험도 있었다고 한다. 고교시절엔 친구들의 이름 알파벳을 그라피트 형태로 써주기도 했다.[190] 조용신은 3주기까지 공식 포스터도 제작했다. 2015년에는 세월호 희생자들의 각기 다른 크기의 사진을 받아 영정 액자에 맞게 모두 같은 크기로 맞춰 달라는 요청을 받아 밤새 편집을 했다고. '모니터 속에선 살아있고 웃음기 있던 표정인 아이들이 모두 세상을 떠났다고 생각하니 울컥했다. 괴롭고 잔인한 작업이었다'고 회고했다.[191] 세월호 사고 당시에도 국가애도기간이 선포되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세월호 침몰 사고때는 국가애도기간이 선포된 적은 없다. 그러나 당시 예능 프로들이 방송을 중단하고 전국에 분향소가 설치되고 어린이날 행사가 대거 취소되는 등 사회적 분위기는 애도기간 그 이상이었고 사실상 국상(國喪) 분위기였다.[192] 이 사고도 또한 수학여행을 가는 도중 나타난 비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