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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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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龍[1]|Jackie Chan[2]
MBE[3]
파일:jackiechanlatest.jpg
본명[4] 房仕龍(방사룡)
(Fong4 Si6 Lung4(퐁시룽), Fǎng Shìlóng(팡스룽)
출생 1954년 4월 7일 ([age(1954-04-07)]세)
영국령 홍콩[5] 중구 빅토리아 피크
(現 홍콩 홍콩섬 중서구 빅토리아 피크)
국적
[[틀:국기|]][[틀:국기|]][[영국령 홍콩|]] →
[[틀:국기|]][[홍콩|]][[틀:국기|]]
원적 안후이성 우후시
신체 174cm, 74kg, AB형[6]
가족 아버지 방도룡(1914년 12월 18일생, 2008년 2월 26일 사망)
어머니 진월영(1916년생, 2002년 2월 28일 사망)
배우자 임봉교(1953년 6월 30일생, 1982년 결혼 ~ 현재 )
아들 방조명(1982년 12월 3일생)
딸 오탁림(1999년 11월 19일생)
학력 홍콩 공연예술학교 (드라마학 / 졸업)
데뷔 1962년 영화 '대소황천패'
직업 배우, 영화감독, 각본가, 프로듀서, 무술가, 가수
언어 광동어, 표준 중국어, 영어, 한국어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 파일:시나 웨이보 아이콘.svg |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서명 파일:성룡 싸인.png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스턴트맨 시절2.3. 전성기 시절
3. 역할
3.1. 영화 배우3.2. 영화 감독 및 제작자
4. 애니 및 게임 캐릭터5. 한국과의 관계6. 정치적 행보
6.1. 활동 내력6.2. 활동 고찰
7. 사생활 논란
7.1. 여자 문제7.2. 아들 문제
7.2.1. 성장 환경7.2.2. 대마 사건
7.3. 내연녀 및 딸 문제7.4. 기타 각종 문제
8. 가족9. 여담10. 가수 활동11. 성가반12. 이소룡과의 비교13. 필모그래피
13.1. 영화13.2. 드라마13.3. 광고

[clearfix]

1. 개요

홍콩배우영화감독.

2. 생애

2.1. 어린 시절

학교에 입학한 이후 계속 짖궂은 장난을 치다가 초등학교 1학년 무렵 퇴학을 당한 성룡은 양친이 모두 돈을 벌기 위해 호주로 떠나자[7] 혼자 남겨진 채 우점원() 희극학교(경극학교)에 들어가 10년 동안 연기무술 훈련을 받았다.

입학 초기에 굉장한 어려움을 겪었는데, 희극학교에 입학할 당시 성룡의 아버지와 우점원 사이에 계약을 하는 과정에서 1, 3, 10년간 희극학교의 소속으로 사망하더라도 학교측에서 일체의 배상책임이 없다는 계약을 했다고 한다. 그때 당시의 훈련이 어찌나 혹독했던지 일찍이 고문이라고 회고한 바 있다. 영화 《패왕별희》를 보면 경극학교에서의 교육이 얼마나 혹독한지 알 수 있다.

당시 우점원 희극학교 4년 선배 홍금보와 4년 후배 원표가 있었는데, 이들은 훗날 1988년에 제작된 유가위 감독에 홍금보가 주연한 영화로 이름을 떨친 칠소복()이 바로 해당 시절을 그려낸 영화다. 우점원(于占元)의 이름 끝 글자 원(元)을 성으로 삼아 이름을 만들었으며, 이 시절 홍금보는 '원룡', 성룡은 '원루'란 이름으로 불렸으나 이후 독립하면서 각자의 이름을 만들게 된다. 홍금보나 성룡과는 달리 원표, 원덕, 원태 등은 그 시절 그대로의 이름을 유지하고 있다.

2.2. 스턴트맨 시절

희극 학교를 졸업한 성룡은 1971년 겨우 17살[8] 나이에 난데없이 부끄러워할 정도로 엄청난 허접 영화였으며 2년이나 개봉도 못한 광동소노호(廣東小老虎, 1971)의 주연으로 나왔다.[9][10] 이후 선배인 홍금보의 추천을 받고 귀노천(1971)에서 남주한테 한 방에 맞고 죽은 홍금보의 부하 스턴트맨으로 출연했다.

이후 이소룡이 주연으로 나온 정무문용쟁호투에서도 스턴트맨으로 활동했다. 정무문에서는 이소룡의 발차기에 맞고 날아가서 죽은 최종보스인 일본인 관장 스즈키 히로시의 스턴트[11]를 했고, 용쟁호투에서는 이소룡에게 머리채를 잡힌 채 목이 꺾이고, 엘리베이터에서 다시 나온 뒤 장봉에 맞아 쓰러지고 마지막에 달려들어와 쌍절곤에 맞고 물에 빠지는 역할을 맡았다.[12].

이후, 성룡은 홍콩과 한국을 오가면서 여러 편의 무협영화에서 엑스트라로 연기하면서 연기자의 길에 나서게 된다. 이때 성룡은 그야말로 온갖 엑스트라 및 조연을 맡았는데, 심지어 에로틱 영화인 《금병매》(1974), 《花飛滿城春(화비만성춘)》(1975)에 조연으로 출연하여 베드씬을 찍기도 했다. 이 당시에 출연한 《여경찰(女警察:영어 제목은 Police Woman)》 같은 경우는 훗날 국내에서 《성룡의 영 타이거》라는 제목을 붙여 비디오로 출시되었는데, 이 제목은 일본에서 토에이가 《ジャッキー・チェンのヤングタイガー》라는 제목으로 비디오 발매한 것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미국에서는 《Rumble in Hong Kong》이라는 제목으로 개봉했다.[13] 이외에도 The Heroine, Here Come Big Brother 등 여러 제목으로 개봉하였다.출처: HKMDB 여경찰 정보

제목도 그렇고 마치 성룡이 주연인 양 포장된 탓에 멋모르고 빌려보던 이들이 성룡이 얼굴에 점을 붙이고 찌질이 악당 졸개로 나와 주인공인 택시기사(배우는 대만 출신 배우인 진상림(秦祥林, 친샹린) 1948~ )에게 맞아 뻗는 모습에 놀라는 추억을 겪기도 했다. 우습게도 10년도 안가 영화 오복성에서 진상림과 성룡은 또 같이 나오게 된다. 이 영화에서 둘이 대화도 없지만 말이다.
파일:attachment/e0006522_4e82b5a567ba5.jpg
성룡이 찌질이 악당 졸개로 나오는 《성룡의 영 타이거》(1973) 국내 비디오 표지.[14]
그나마 엑스트라 치고는 의외로 비중이 높기는 하지만, 주인공에게 맞다가 애원하며 빌고, 주인공이 그냥 가자 뒤에서 비겁하게 반격하다가 맞아 나가떨어지며 퇴장한다.

여담으로 이 영화는 2016년에《성룡의 폴리스맨》이라는 더 이상한 제목으로 재개봉하였고, IPTV에 이 제목으로 유통되고 있다. 다음 영화 정보도 엉터리인게 이 영화 감독이 오마(午馬, 1942~2014)라고 나왔는데, 천녀유혼에서 도사로 나오고 성룡의 미라클에서 조직 중간보스로 나온 배우이다. 이 영타이거 감독은 주목(朱牧, 1938-2007)이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RumbleInHongKong_DVDcover.jpg
미국 발매판 DVD도 성룡을 주연인 양 세우고, 전혀 다른 사진을 갖다붙였으니 다를 거 없다.

사실 이 영화는 개봉 당시에는 흥행에 실패해서 묻혔는데 비디오 시장에 내놓는 시점에서 성룡이 이 영화에 출연한 배우 중 최고로 유명해서 이렇게 된 것이다. 주연이고 나발이고 제일 유명한 사람의 이름값에 묻어가려는 심보가 역력하다.[15]
파일:attachment/e0006522_4e82b575741af.jpg
영 타이거 장면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왼쪽 턱 근처에 큼직한 점을 붙이고 나오는데, 정말 악당 그 자체로서 나와 여자도 가차없이 죽인다.

성룡이 쌍꺼풀 수술을 하기 전이기 때문에 얼굴의 느낌이 뭔가 낯설다. 아래의 사진은 주인공에게 맞아서 뻗고 빌면서 애원하는 장면인데, 나중에 자주 보여주는 익살스런 표정이 저 사진에도 보이기는 한다.

결국, 배우로서 성공할 가망이 없다고 스스로 판단한 성룡은 일을 접고 부모님이 살고 있는 오스트레일리아로 가게 된다. 그러나 1년이 채 안되어, 이소룡의 홍콩 영화 데뷔작인 《당산대형》과 《정무문》의 감독 나유(, 뤄웨이) 감독이 《정무문》 촬영 중, 이소룡과 불화가 생긴 이래로 이소룡을 대체할 만한 배우를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스턴트맨이 아닌 주연으로 영화에 출연할 수 있다는 생각에 홍콩으로 돌아온다.

오디션에 합격한 성룡[16]은 나유와 함께 《신정무문》부터 전형적인 이소룡식의 비장미와 천편일률적인 내용의 작품에 줄기차게 출연하기 시작한다. 성룡이란 예명도 새끼 용(소룡)을 뛰어넘는 어른 용(성룡)이 되라는 뜻으로 나유가 지어준 것.

1977년작, 《풍우쌍류성》(한국 제목 : 유성검의 대결) 때부터는 쌍꺼풀 수술을 한 뒤라 외모도 배우로서 손색없는 호남형으로 바뀐다.[17]

그러나 당시 쿵후 영화는 그야말로 '마구 찍어낸 공장제 쌈마이 영화'였고, 특히 나유와 노예계약에 가까운 조건으로 고만고만한 영화를 찍던 성룡은 회의를 품으면서 점차 나유와 사이가 벌어진다.
파일:attachment/성룡/신정무문성룡.jpg
쌍꺼풀 수술 전《신정무문》에서의 성룡
묘하게 추성훈과 닮았다. 헤어스타일 때문에 각도에 따라서는 축구 선수 박주영과도 꽤 닮았다.
파일:attachment/성룡/유성검의대결성룡.jpg
쌍꺼풀 수술 후 《풍우쌍류성(유성검의 대결)》에서의 달라진 모습의 성룡.[18]
아무튼 성룡은 쌍꺼풀 수술의 성공적인 사례 중 하나다.

2.3. 전성기 시절

그러던 와중에 성룡의 커리어를 역전시킨 일이 발생한다. 1978년 당시 액션 연기뿐만 아니라 서구형의 외모에 개구장이 + 훈남 인상으로 홍콩에서 대스타였던 배우 부성()[19]이 스케줄 문제로 원화평 감독의 《사형도수》(1978) 주연에서 하차하자, 나유가 원화평과 오사원에 대한 의리로 사원영화사에 성룡을 잠시 대여해 준 것이다.

사형도수》(1978)가 히트하자 원화평은 곧장 《취권》(1978)의 제작에 들어갔고, 이 작품이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성룡의 인지도는 수직상승하게 된다.[20][21]

하지만 이대로 나유와 계속 영화를 찍다가는 평생 소모품으로 살다가 끝나리란 절망감에 빠져있던 성룡은 《취권》이 성공하자 몰래 대한민국으로 야반도주를 하려다가[22] 나유의 부인 유량화에게 들키게 된다. 자초지종을 들은 유량화가 '그럼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냐?'고 성룡에게 물었고, 성룡은 이에 '자신이 출연하는 영화를 직접 감독하고 싶다.'고 요청했다. 나유는 성룡의 요청을 흔쾌히 허락했고, 마침내 성룡의 첫 감독작인 《소권괴초》(1979)가 제작된다. 《소권괴초》에서 그는 《취권》과 마찬가지로 코믹을 가미한 액션을 내세웠고, 괜찮은 흥행 성적을 올린다.

그러나 이때, 성룡은 세상물정을 잘 모르는 젊은 나이여서 그랬는지 큰 실수를 저지른다. 나유 감독과의 계약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다른 영화사의 계약서에 서명을 해버린 것이다. 비록 몰랐다고는 해도 분명히 잘못이기는 했다. 이에 두 영화사는 성룡을 사이에 놓고 대립했고, 관련된 삼합회까지 개입하면서 일이 커진다. 이에 나유 감독은 성룡을 데리고 외국으로 도망가버린다. 이것이 이른바 “성룡 납치사건”으로, 당시 홍콩의 연예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이다. 이때 삼합회에도 상당한 영향력이 있을 뿐더러 홍콩의 액션배우나 무술배우들도 눈치를 보던 왕우(王羽)가 개입하여 이를 해결해줬고, 이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성룡은 왕우가 제작하거나 관계한 영화들에 한하여 배역을 가리지 않고 출연하는 것으로 답례를 했다. 《미니 특공대》[23], 《화소도》 등이 그 예이다.

덕분에 성룡은 골든하베스트로 이적하게 되고, 여기에서 내놓은 첫 작품이 바로 《사제출마》(1980)다. 《사제출마》는 이전까지의 홍콩 영화의 액션 연출을 바꿨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으며,[24] 홍콩의 영화 흥행 기록도 경신하는 대성공을 거둔다. 이 영화에 등장한 최종 보스이자 무시무시하게까지 보이는 악역이 바로 우리나라의 합기도 원로 황인식이다.

사제출마의 성공 이후 성룡은 이소룡처럼 할리우드에 진출하려는 야망을 품게 되고, 때마침 골든하베스트사에서도 해외 진출에 적극적이었기 때문에, 그는 《배틀 크리크》(1980)를 첫 작품으로 할리우드에 진출하게 된다. 하지만 할리우드에서 성룡은 어디까지나 이방인이었고,[25] 워낙에 완벽주의와 자유로운 스타일을 중시하는 그에게 할리우드의 액션 영화의 제작과정[26]은 원칙에 치중하고 제약이 심해 답답한 방식이었다. 결국, 성룡의 첫번째 할리우드 진출 시도는 실패로 끝난다.[27] 다만, 배틀 크리크는 미국 흥행은 실패했지만, 해외 흥행으로 제작비 3.5배 정도로 꽤 흥행했다.

첫번째 할리우드 진출 시도가 실패로 끝난 뒤에 성룡은 1982년 개봉한 《용소야》의 감독과 주연을 맡음으로서 홍콩으로 복귀했고 이듬해 홍금보 감독의 《오복성》(1983)에 출연하면서 골든하베스트의 흥행 삼총사 가화삼보의 일원이 되어 성공적으로 재기했다. 이후 《프로젝트 A》(1984)부터는 스스로 감독과 주연을 맡아, 할리우드 체류(滯留) 시절 주변에서 자신과 비슷한 면이 있다며 권하기에 접했던 버스터 키튼의 영향을 받은, 과격한 아크로바틱 묘기와 좋은 유머 감각을 결합한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다. 성룡이 홍콩으로 복귀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찍은 영화는 《프로텍터》(1984)라는 작품으로, 홍콩 자본에 미국인 감독 제임스 글릭켄하우스[28]가 감독한 작품이다. 참고로 성룡은 역동적이지 못한 액션에 선정적인 장면까지 삽입된 미국 편집판을 보고 경악해서[29] 드라마 부분을 보강하고 성룡이 자비로 배우들을 다시불러 주요 액션 장면들을 재촬영하고, 편집한 홍콩판 버전인 위룡맹탐을 따로 만들어서 2개월 가량 먼저 개봉했다. 아니나 다를까 후에 게봉된 미국판은 악평과 함께 본고장인 미국에서까지 외면받으면 성룡의 이름에 먹칠을 하게된다. 당연히 재편집판의 평이 압도적으로 좋은 편이다.

이 당시의 성룡은 경극학교 시절부터 사형제지간이었던 홍금보, 원표와 같은 영화에 출연한 경우가 굉장히 많다. 때문에 당시 이 세 명을 합쳐서 가화삼보라고 부르기도 했다. 다만, 이들의 영화를 그저 '세 명의 합작품'으로 도매금 취급해버리는 것은 좀 부당한 대우라고 봐야 한다. 물론, 어릴 적부터 절친한 사이였으니 서로가 많은 영향을 주고 받았을 수는 있지만, 1980년대 초중반 가화삼보의 전성기에도 이들 셋은 연출과 액션에 대해 추구하던 방향성이 꽤나 달랐다. 특히, 각자 자신이 주연 내지는 감독을 맡은 작품의 경우는 각자의 색이 매우 뚜렷했다. 가령 똑같이 가화삼보가 출연한 프로젝트 A(성룡 감독)와 오복성(홍금보 감독)을 비교해봐도 색이 굉장히 다르다는 게 눈에 띈다. 홍금보의 스턴트팀 홍가반은 개개인의 특성을 살린 다이나믹하고 현실적인 액션을 중시한 반면, 성룡의 스턴트팀 성가반은 구성원이 똘똘 뭉쳐 아크로바틱한 모션을 바탕으로 치밀하게 합을 짜서, 무모하다 싶을 정도의 위험한 장면을 연출하는 데 중점을 둔다. 그외에도 액션의 리듬감이라든가 구성 등 작은 디테일에서도 둘은 꽤 차이가 나오는 편. 성룡 액션과 홍금보 액션의 차이

항상 과격한 스턴트와 액션을 선보였기 때문에 이제까지 수많은 영화를 촬영하면서 온몸에 부상을 입지 않은 곳이 없고 몇 번은 사경을 헤메기도 했다고 한다. 《프로젝트 A》(1984)부터 성룡은 고소공포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높은 시계탑에서 떨어지는 스턴트를 했다. 게다가 작 중 이 낙하장면을 여러 번 보여주는데 매 장면마다 다르다. 즉, 높은 시계탑에서 떨어지는 걸 여러 번 반복해서 찍었다는 것이다.[30]

NG 장면의 추락씬을 보면 머리부터 거꾸로 추락하는 바람에 성룡이 매우 고통스러워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때 성룡은 심각한 허리 부상을 당했으며, 무릎팍도사에서 밝히길 성룡은 이 장면을 찍고 1년 내내 후유증으로 머리가 아팠다고 한다. 시계탑 장면은 성룡과 성가반의 스턴트 배우인 화성과 주윤견도 참여했는데 이 둘도 성룡만큼 여러번 떨어졌다. 영화에서 사용된 장면은 주윤견과 성룡의 순서로 그리고, NG컷에서 사용된 장면은 화성이다.

이후 《폴리스 스토리》(1985) 한 편을 찍으면서 척추 골절, 무릎 부상, 고관절 탈구라는 중상을 입었으며 1986년 유고슬라비아에서 《용형호제》를 촬영하던 도중에는 성벽을 점프해서 건너가는 장면에서, 붙잡았던 나뭇가지가 부러지면서 추락, 두개골이 함몰되고 말았다. 성룡은 이 사고의 후유증으로 인해 우측의 청력을 잃었고, 머리부분만 35바늘을 꿰매는 바람에 큰 흉터가 생겼다고 한다.

이 사고 장면은 《용형호제》의 엔딩 크레딧에서 여과없이 나온다.[31] 부상을 치료한 후에 성룡은 영화의 나머지 부분을 촬영하여 영화를 완성시켰는데, 부상 부위를 가리기 위해 머리를 길게 기르고 카메라 앞에 나섰다. 덕분에 영화 도입부에는 데뷔부터 고수해오던 장발을 버리고 짧게 깎은 머리를 선보였는데, 부상 이후 그 부위를 가리려다보니 영화 도입부 이후에는 다시 장발로 돌아간다. 이후 골든 하베스트의 추문회 사장은 성룡의 헤어스타일을 장발로 유지하라는 엄명을 내렸다고 한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는 예전처럼 장발보다는 단정한 커트 스타일을 유지 중. 1994년 《홍번구》를 촬영할 때 교각에서 운행 중인 호버크래프트로 뛰어내리는 장면에서 착지를 잘못하는 바람에 우측 발목이 90도로 꺾이면서 골절상을 입었다. 깁스 자국을 가려야 했기에 운동화 모양을 본떠서 만든 특수 양말을 신고서 촬영을 마쳤다. 이 역시 엔딩 크레딧에서 확인 가능하다.

성룡의 작품에서는 스턴트 중의 사고, NG 등을 모아서 엔딩 크레딧에 올리는 전통이 있다.(이는 서구권에서 촬영된 영화에도 남아 있다.) 엔딩 크레딧의 NG 영상을 보면 성룡이 NG를 내면서 촬영 스태프들과 함께 웃고 즐기는 화기애애한 장면이 나오다가, 성룡이 스턴트를 하다가 다쳐서 고통스러워하거나 촬영 스태프가 다치거나 심지어는 사망자가 아닌가 싶은 사람이 실려 나가는(실제로 사망하지는 않았다.) 아찔한 장면이 나오기도 하는데, 성룡은 이를 통해서 실생활에서는 위험하니 영화에서 나오는 장면을 함부로 따라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32]

성룡이 와이어나 대역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영화 마케팅 측면에서의 과장된 수사일 뿐,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성룡이 잠시 다치기라도 하면 영화 촬영 스케줄 자체가 밀려버리는데, 이는 영화사의 입장에서 엄청난 손해이며, 출연 중인 다른 배우들에게도 엄청난 피해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 장면에서 대역을 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예를 들어, 《비룡맹장》(1988) 일부 고난도 장면은, 극장에서 보던 관객이라도 눈썰미가 좋은 사람은 식겁할 정도로 대역이라는 것이 티가 났다.[33] 다만, 이 부분은 성룡이 충분히 할 수 있는 스턴트이지만[34] 바쁜 스케줄 문제 때문이지 일부러 대역을 쓰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대역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온전히 대역에게 스턴트를 맡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포함한 성가반 멤버들과 수차례 시도해서 가장 멋있게 나온 장면을 넣는다고 한다.

현재 성룡의 스턴트 팀인 성가반은 홍금보의 홍가반, 원화평의 원가반과 함께 홍콩에서 손꼽히는 스턴트 그룹이며, 보험회사에서는 여전히 그를 요주의 인물로 기피하는 블랙리스트 1순위라고 한다. 딴지일보에서는 그의 이러한 대인배 기질을 "내 몸이 특수효과" 정신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실제로 기네스북에도 현재 살아있는 연기자 중 가장 스턴트 액션을 많이 한 사람(Most stunts by a living actor)라는 제목으로 등재되어 있다.

프랑스에서 시작된 신종 스포츠 파쿠르의 창시자인 세바스찬 푸캉, 다비드 벨 등이 인터뷰에서 성룡의 독창적인 액션 시퀀스에 영향을 받은 부분이 있다는 것을 밝히기도 했다. 물론 파쿠르에는 성룡식의 액션 스턴트 외에도 다양한 동작과 기술이 포함되어 있고, 무엇보다 파쿠르의 창시자인 세바스찬 푸캉, 다비드 벨 등은 직업적으로 파쿠르를 연습하고 행하는 전문가들이니 일반인은 따라하지 않는 것이 좋다.

2012년 말에는 무려 22년만에 나온 《용형호제》 3편 격의 《차이니즈 조디악》(중국명은 십이생초)에 출연했다. 제목이 《용형호제 3》가 아닌 이유는 1, 2편의 제작판권을 가진 골든하베스트 영화사가 문을 닫았고 영화 판권이 미국 워너 브라더스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참고로 권상우가 조연으로 같이 나왔다. 이미 나이 예순이 다 되어가는 나이라 그런지 성룡이 영화 촬영 중 무척 힘들어하는데, 이 때문에 이 영화가 사실상 성룡의 마지막 액션 코미디물이라는 말이 많았다. 이에 성룡은 스케일이 큰 '초대형' 액션은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이라는 의미일 뿐, 액션 연기 자체를 그만두는 것은 아니라고 본인이 직접 해명했다.

2013년 2월에 개봉한 영화 《차이니즈 조디악》의 프로모션을 위해 한국을 찾아 《무릎팍 도사》와 《런닝맨》에 출연해서 아직 녹슬지 않은 그만의 재치와 인생이야기를 보여주었다. 특히, 《무릎팍도사》에서 강호동이 "왜 그렇게까지 몸을 사리지 않고 연기하느냐"고 질문하자 성룡의 답변이 예술이었다. "예전에는 돈이 없어서 몸으로 때우려니까 어쩔 수 없이 그런 위험한 연기를 해야만 했었지만, 이제는 어떻게 하면 팬들을 즐겁게 해주느냐가 관건이다."라고 한다. "물론 죽는 게 무서운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팬들이 즐거워하면 되니까 그냥 한다고"

결국 2015년 2월 22일 스턴트를 가장 많이 한 배우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이와 동시에 가장 많은 액션 영화를 제작과 동시에 주연을 담당한 기록으로 하나 더 등재되었다.

3. 역할

3.1. 영화 배우

영화 배우로서 다른 액션 배우들에 비해 연기력이 상당히 출중한 편이다. 슬픔에 괴로워하는 연기에 특히나 강한데, 그런 성룡의 연기력을 제대로 맛 볼 수 있는 영화가 홍금보가 바보 형으로, 성룡이 경찰 동생으로 나오는 《용적심》과, 부하들을 죽게 만들었다는 자책감에 빠진 진국영 반장 역을 맡았던 《뉴 폴리스 스토리》이다. 그 외에도 《러시 아워 3》의 마지막 에펠탑 투 등, 눈물을 머금고 소리치는 장면은 성룡만의 또 다른 트레이드 마크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코믹 무술 이미지가 커서인지, 진지하게 나온 영화들은 해외 흥행이 신통치 않다. 《중안조(1993)》라든지, 《뉴 폴리스 스토리》, 《신주쿠 사건》 같은 영화들은 평은 괜찮을지언정, 해외 흥행은 참혹했다. 홍콩 흥행도 마찬가지로 그다지 안 좋았다.《더 포리너》는 평점도 나쁘지 않았고 예산에 비해 상당히 흥행했다.

물론 액션배우인 만큼 전문적인 파이터나 무술가들만큼 뛰어나진 않겠지만 그래도 무술 실력이 제법 강하다고 알려져 있다. 홍콩 영화판이 워낙 무술인들이 많기도 하고, 영화를 찍으면서 여러 무술들을 섭렵했던 것으로 보인다.[35] 워낙 이미지가 코믹하다보니 되려 그런 면모가 잘 드러나지 않지만 뛰어난 운동신경과 무술 실력이 있기에 액션 배우로 이렇게까지 활약하는 게 가능하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몸이 엄청난 강골인데 안 그랬으면 하술한 사고를 당했을 때 이미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촬영을 하면서 큼지막한 사고들을 많이 당하고도 살아남을 정도로 강하다.



성룡의 액션 스타일 분석(한글 자막 있음)

3.2. 영화 감독 및 제작자

액션 배우로도 유명하지만, 그보다 더 높이 평가받아야 할 것은 바로 영화 감독 및 제작자로서의 역량이다. 특히 성룡을 스타덤에 올린 1980년대 중후반의 작품들[36]은 모두 성룡이 감독을 맡았던 작품들이다. 성룡은 첫번째 할리우드 진출 시기에 접했던 버스터 키튼의 영화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키튼의 영향을 받기 전의 성룡의 액션이 단순히 쿵푸에 코믹을 가미하는데 그쳤다면, 이후에는 정교하게 계산된 움직임과 과격한 스턴트를 펼쳐 보는 이들의 탄성을 절로 자아냈다. 일부 미국의 평론가나 영화 매니아들은 성룡의 영화를 접한 뒤에 '버스터 키튼의 진정한 후계자는 미국이 아니라 홍콩에서 나타났다'라는 평을 해주었을 정도다.

또한 액션 영화 말고도 관금붕[37] 감독의 작품도 제작에 참여했는데 인지구(1987), 완령옥(1992),[38] 장한가(2005)가 대표적이다.

수많은 거장들이 그랬듯, 성룡 역시 지나치게 완벽주의를 추구했기에 제작기간은 갈수록 길어졌고, 매해 홍콩 영화의 최대 제작비를 스스로 갱신할 정도로 자본을 엄청나게 쏟아부었다. 골든하베스트 영화사가 무너진 이유 중 하나로 성룡 때문에 날아간 막대한 제작비를 거론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이니... 결국 1989년에 단단히 마음먹고 제작한 미라클의 흥행이 개봉 당시 벌어진 중국의 천안문 6.4 항쟁의 영향으로 그저그런 수준에 그치고, 주윤발로 대표되는 홍콩 느와르, 주성치로 대표되는 엽기 코믹물이 대박을 터뜨리자[39] 1990년에 제작한 용형호제 2를 마지막으로 성룡은 감독 자리에서 물러나고 전문적으로 영화를 공부한 다른 감독들이 성룡의 영화를 감독하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그 구성이나 재미에 있어서는 성룡 초기작에 영 미치지 못한다.

전성기 시절의 성룡은 본격적으로 감독 노릇을 하기 전부터 감독이 찍은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자신이 직접 영화 촬영에 개입하는 배우로 유명할 정도로 파워가 강했고,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의 완벽주의자였다. 한 장면을 무려 1,000번 가까이 반복하여 찍은 적도 있다고 한다. 감독으로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은 이후로는 완벽주의가 더 심해져서, 자신이 감독을 맡은 영화가 아님에도 사실상 감독처럼 권한을 휘두르는 경우가 잦았고 실베스타 스탤론만큼이나 각본 수정과 제작 과정에 개입을 많이 했다.[40] 때문에 감독과 성룡 사이의 불화나 트러블은 수도 없이 많았다.

가령, 《폴리스 스토리 3》를 찍을 당시, 당계례 감독과 성룡 사이에 갈등이 많았던 터라, 당계례 감독은 당시 인터뷰에서 영화 3편을 찍으면서 받을 정도의 스트레스를 이 작품 하나로 받는다며 투덜거렸고, 《중안조》 촬영 당시에는 황지강(黃志強) 감독과 의견 충돌이 있었다. 《취권2》에서는 무술 연출에 관해 의견이 엇갈려 유가량(劉家良) 감독과 대놓고 싸우다가, 빡친 유가량이 초반부의 격투 장면만 완성시킨 후에 아예 메가폰을 놔버렸다.[41] 그 결과 영화의 대부분을 성룡이 직접 감독해서 《취권2》가 완성되었다. 이후 유가량은 《취권2》의 흥행에 고춧가루를 뿌리고자 유덕화를 기용해서 《취권3》를 제작했고 동시기에 같은 제목의 영화가 개봉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러나 결과만 따지자면 되려 《취권3》가 발리고 만다.

왕정 감독의 전성기에 《성룡의 시티헌터》로 왕정 감독과 협업한 적이 있었지만, 왕정이 지나치게 다작(多作)하는데다 영화를 대충대충 찍어댄다는 이유로 성룡이 불만을 품어서 촬영 당시에 두 사람의 사이가 무척 안좋았다. 이에 왕정은 《성룡의 시티헌터》 이후로 이연걸 주연의 《탈출》(원제목은 《서담용위(鼠膽龍威)》)(1995)이라는 성룡을 까는 영화를 만들었다. 장학우[42]가 맡은 룡위란 인물의 기믹을 외모는 이소룡 짝퉁이지만, 성격이나 사생활에서는 누가 봐도 성룡임을 짐작하게끔 만들어놓고 주색잡기와 실제 무술 실력은 별로라는 설정을 집어넣었으며, 한술 더 떠서 아예 스턴트를 직접 한다고 구라치고 대역을 쓰는 장면까지 등장시켰다. 그리고 룡위의 매니저를 맡은 아버지[43]와 매니저 진자강까지 성룡의 주변 인물들의 모습과 흡사하게 설정함으로서 누가 봐도 한 눈에 알게끔 만들어서 성룡을 조롱했다. 하지만 후반부에서는 룡위가 부친이 구타당하는 걸 보고 분노하여 멋지게 테러리스트를 때려잡는 장면을 집어넣었다. 이에, 제아무리 서로 간의 감정이 좋지 않다고 해도, 상관도 없는 성룡의 주변인들까지 공개적으로 희화화시킨 것에 대해서는 비판을 많이 받았다.

성룡의 썬더볼트 촬영 당시에도 진가상 감독과의 관계가 껄끄러웠는데, 진가상이 기획한 시나리오에 성룡이 개입해서 시나리오를 수정한 것은 물론이요, 진가상에게 감독을 맡겨놓고서 정작 레이싱 장면에는 진훈기와 당계레를 영입해서 촬영했고, 무술 장면은 홍금보에게 연출을 맡겼기 때문이다.

4. 애니 및 게임 캐릭터

인기를 반영하는 듯 미국에서 애니메이션 시리즈가 나왔다. 바로 《재키 찬 어드벤쳐》 시리즈. KBS에서 방영했다. 오프닝을 보아도 성룡이 나오며 마지막에 진짜 성룡과 몇 마디 인터뷰를 하는 씬도 있고, 주인공 성우가 진짜 성룡이라는 뜬소문이 있지만, 사실 James Sie와 Paul Robert Langdon이 나눠서 했다. 뒤의 진짜 성룡 목소리와 확연히 다르다.[44] 국내 더빙판에선 성룡의 전담 성우들 중 한명인 김일이 맡았다. 오프닝 영상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약간 미국식 쌈마이 삘이 나는 전형적인 개그 애니메이션.

철권 시리즈레이 우롱 등 여타 캐릭터에도 영향(4편부터 성룡의 느낌이 강하다.)을 끼쳤다.

성룡을 주인공으로 한 게임도 가끔 나온다. 2013년 하드코어게이밍 101에서 성룡 특집 기사를 냈으니 여기 언급된 게임 외에도 궁금한 것이 있으면 이 링크(英)를 보자.

몇 개 꼽자면, 패미컴PC 엔진으로 발매된 허드슨의 '성룡' 플랫폼 액션게임 《성룡의 액션 쿵푸》,[45] 성룡이 직접 모션캡처를 담당한 PS1로 나온 《재키 찬 스턴트 마스터》가 있고, 제작과정과 인터뷰 영상 스턴트 마스터를 비판한 STAR 영상이 있다.



우리에게 너무나도 잘 알려진 《스파르탄 X》도 실은 성룡 주연의 《쾌찬차》가 모티브인 게임이다. 정작 분위기는 원작과 거리가 먼 오히려 《사망유희》류의 이소룡 영화스럽게 나왔지만…그리고 비공식 해적 게임이기는 하지만, 《홍콩97》에서도 얼굴을 비춘다.

그러나 흑역사가 있었으니 바로 카네코에서 발매된 《재키 찬 - 쿵푸 마스터》라는 실사 격투게임이다. 비슷한 게임으로 《모탈 컴뱃》이 있다. 잔혹한 피니쉬까지 비슷하다. 이 게임에서는 성룡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만약에 그런다면…《재키 찬 - 쿵푸 마스터》는 카네코에서 제안해서 나온 것으로, 《성룡의 썬더볼트》에서 자세히 보면 경주차와 유니폼에 회사의 로고가 새겨져 있다. 이 게임은 성룡 자신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였다고 인정한 흑역사다. 마메 롬도 풀려서 직접 해볼 수도 있는데, 뭐라 말조차 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묻어나온다. 이 게임에서 성룡은 직접 플레이어블로 고를 수는 없고, 중간보스최종 보스로 등장(후속작에서는 셀렉트가 가능하다.), 3가지 배리에이션이 나오며 코스츔과 무술이 달라진다. (동물의 움직임을 흉내 낸) 오형권(노란옷), 취권(연갈색옷), 팔괘장(흰색 장교복). 코스튬에서 오형권은 《권정》 때의 복장, 취권은 《취권2》 때의 복장이고, 팔괘장은 《프로젝트 A》 때의 복장이다.

그리고 어떤 종류의 성룡이든 간에 성룡을 쓰러뜨리면 성룡이 따봉을 준다. 근데 성룡 외에는 그렇다 할 임팩트가 없다. 나머지 플레이어 캐릭터를 담당한 배우나 전체적인 게임 분위기가 너무 싼티 나 보여서 캐릭터의 네임도 담당한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썼다. 토어스텐(Thorsten, 장발의 격투가인 남성캐릭터)은 《성룡의 썬더볼트》에서 나온 악당역의 배우이고, 김마리(Kim Maree, 레슬링을 하는 금발 여성)는 《폴리스 스토리 3》에 나오며 샘(Sam, 쿵푸보이)과 라이온(Lion, 사자탈 캐릭터)을 맡은 배우는 성가반의 스턴트팀 리더이다.고전 게임 해상도 상으로 봤을 때, 유덕화와 생김새가 비슷하고 해당 캐릭터의 명칭 및 성씨가 하필 Lau(유)라 발생한 오류이다. 실제 유씨 캐릭터를 연기한 사람은 《성룡의 썬더볼트》에 나왔던 스턴트맨 중 한 명이며, 이 사람은 영화 내 몇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링크 그 외에는 봉술을 쓰는 여캐인 영(Young)도 있다. 링크

그런데 이 게임 후에 《재키 찬 - 성룡전설》이라는 후속작이 있다. 캐릭터나 그래픽은 그대로지만 의외로 놀랍게 게임성이 엄청나다. 지금 나오는 격투게임 못지 않다. 정말이다. 대회 영상.

아무튼 이 게임은 AVGN에서도 모탈컴벳 아류작 특선 에피소드에서 언급했는데 거론된 게임들 중 그나마 호평한 축에 속한다.

철권 시리즈》의 레이 우롱은 특별한 언급은 없지만, 아무리 봐도 성룡을 오마주한 캐릭터. 현재는 성우 현지화를 추구하는 철권 시리즈답게 레이도 영어를 사용하지만, 전 캐릭터를 일본 성우가 담당했던 3편까지의 레이의 성우는 성룡 전담 성우였던 이시마루 히로야였다.

짱구는 못말려 미방영판의 홍콩편에서도 나온다. 악당의 졸개로 나오지만 실상은 국제경찰 스파이였다.

5. 한국과의 관계

저는 반(半)한국인입니다. (我是半個韓國)[56]
홍콩이 한국처럼 시위도시됐다.[57]
성룡은 1980년대부터 친한적 행보를 펴왔으며, 21세기 들어 일부 한국 팬들이 성룡의 정치적 행보에 대해 비판적 견해를 표하고 실제 이미지 하락도 불러왔다. 그런데 성룡이 항상 친한적 입장을 유지했던 것은 아니었다. 2012년에 홍콩의 ‘시위 문화’를 지적하며 ‘홍콩이 한국처럼 시위도시됐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 성룡이 본격적으로 한국에서 스타가 된 것은 1979년 한국 개봉한 영화 취권부터로, 헐리웃 진출 이후 1998년작 러시 아워 등으로 월드스타가 되기 전인 1980년대에도 성룡은 한국에서 큰 인기를 모았다. 성룡도 이를 인지하고 한국에서 자신의 신작이 개봉될 즈음에는 방한을 하거나 혹은 국내 영화잡지와 독점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서서히 감소하기는 했지만, 1990년대에는 명절 시즌만 되면 성룡을 비롯한 홍콩 영화를 지상파 TV에서 자주 틀어줬다.[58] 이는 성룡의 인지도에 더해 주로 하는 영화 장르가 코믹액션류로 시청 재미가 있으면서도 유혈이 낭자한 스타일은 아니라 가족들과 보기에 상당히 무난한 작품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명절=성룡 영화'라는 공식이 꽤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다. 21세기 들어서도 케이블에선 종종 틀어준다.

1980년대 방영판에서는 주로 배한성이 성룡을 더빙했는데 《유성검의 대결》(왕우 주연에 성룡 악역. 극장 개봉판의 왕우는 김태연, 성룡은 유강진이 했었다. 재미있게도 MBC판 더빙이 배한성(성룡) - 양지운(왕우) 콤비였다. 이후 재더빙때는 왕우를 안지환이, 성룡을 홍시호가 더빙했다.)이나 《권정》, 《소권괴초》, 《사제출마》 같은 MBC 방영판에서 연기했다. 참고로 권정과 사학팔보, 당산비권은 당시 유행하던 한홍합작 영화들인데 개봉 당시 더빙판이 존재한다. 권정 개봉판 및 KBS 더빙판은 고 김태연, 사학팔보는 고 이강식, 당산비권은 유강진이 더빙을 했었다.댓글 보기 그러다가 1990년대 초중반부턴 장세준이 전담성우가 되면서, 《폴리스 스토리》 시리즈나 《미라클》, 《용적심》, 《쾌찬차》, 《용형호제》 같은 영화에서 연기했다. 장세준1997년 8월 불의의 여객기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후에는 홍시호(SBS, MBC), 김일(KBS)[59]을 주축으로 가끔씩은 엑시덴탈 스파이에서 이재용(KBS), 중안조에서 박지훈(MBC) 등 다른 성우가 가끔씩 맡기도 했다. 그리고 《취권》은 거의 필수요소 수준으로 꼭 집어넣었다.

무명이던 18~20살 시절, 대역 겸 배우 역할로 한국에 와 2년 여간 머물면서 한국 - 홍콩 합작 영화를 여러편 찍었다. 덕분에 박봉에 타국 생활이라 고생은 좀 했지만, 한국어는 많이 늘었다고 한다. 한번은 명동 근처를 싸돌아댕기다 1970년대 군사정권 당시 시대상 경찰의 장발 단속에 걸려 머리가 깎일 뻔 한 적이 있었는데, 유창한 한국어 덕분에 외국인이라고 해도 잘 믿지 않아 난감했다고 한다.[60] 결국 친구가 여권을 보여줘서 겨우 풀려났다고. 사족으로 홍콩 구룡반도의 '스타의 거리'에 있는 그의 동판을 보면, 핸드 프린팅과 함께 본인이 직접 쓴 4개국어로 사인이 적혀있는데, 그중 하나가 한국어다. 후술되어있듯 한국인 여자친구와 8년간 사귀기도 했다. 사실 한국어 실력이 빨리 좋아진 것도 여자친구 덕분이 컸다고.

MBC의 《영원한 따거 성룡》이란 프로에서 그의 여러 가지 면모를 보여줬다. 성룡이 젊을 시절, 한국은 홍콩 영화의 촬영지로 인기가 많았는데 홍콩은 영화 촬영할 배경도 한정적이고, 중국 대륙은 아직 개방 전이라 영화 찍기 힘들었던데다 한홍 합작영화는 많은 규제를 피할 수 있는 여러 장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 본토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를 촬영할 때 안성맞춤이었던 것이다. 이때 불국사창덕궁 등에서 로케 촬영을 하게 되면서 오래 지내게 되었고[61] 이 당시 한국 음식과 문화를 익혔다고 한다. 방송 중 식사로 육개장을 먹는데, 정말 빨리 먹는다.[62] 먹고 나선 휴지로 자리를 깨끗이 닦는다…! 이 장면 후에 고아원 어린이들과 축구를 하고 짜장면을 먹는데, 김치를 달라고 귀여운 투정도 부린다. 근데 자기가 좋아하는 배추김치가 아니라 생소한 열무김치가 나오자 잠깐 시무룩해하지만, 싫은 내색 없이 맛있게 먹는다. 또한 이 방송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콜렉션을 공개하기도 하였다.

자신이 한국에서 어려운 생활을 할 적에 하루 종일 쫄쫄 굶은 날이 있었는데, 이날 밤에 거리를 하염없이 걷다가 길가에 걸터 앉아 소리죽여 훌쩍거리고 있던 와중 어떤 한국인 부부가 자신에게 육개장 한 그릇을 사주었고 그 때의 감동과 고마움을 잊지 못 한다고. 당시는 한국어가 많이 서툴 때라 그저 고마움의 표시만 했다고 하는데 그게 한국에 우호적인 감정을 가지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고 아직까지도 고마워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 예능에서 A(음식이름)vs육개장을 고르는 게임을 할 때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항상 육개장을 고를 정도다.

당시 정윤희와 열애설이 나기도 했지만 거짓으로 판명되었다. 한국에서 영화 촬영을 하던 당시에 일반인 한국 여성과 사귀며 약 8년간 장거리 연애를 했다고 밝혔다. 후에 폐간된 영화 잡지 《로드쇼》와의 인터뷰에서는 그 여성을 진정으로 사랑했었지만, 여성쪽 집안의 반대로 결국 헤어졌다고. 그리고 1984년에 대스타로 한국을 방문했을 때 몰래 그녀를 다시 만났다고 했다. 이미 그녀는 유부녀가 되었지만, 서로 오래전의 추억을 이야기하면서 작별인사를 나누었다고 한다. 《무릎팍도사》에서도 그 여성에 대해 언급했는데, 만약 그 시절에 지금처럼 스마트폰이 있었다면 계속 연락을 취했을 것이고 아마 결혼했을 거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한국어도 이 장거리 연애 덕분에 능숙해졌다고 한다.

참고로 취권은 코믹한 무술을 만들려던 성룡이 에 취한 채로 펼치는 권법을 만들면 어떨까 궁리하면서 탄생한 무술이라는 이야기가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는 당시 홍콩에서 활약했던 한국인 무술배우 황정리가 만든 무술이다. #

한편, 신인 시절에 최무룡과 한국 - 홍콩 합작영화에서 대결을 펼친 적이 있는데, 훗날 《신화》에서 최민수와 대결, 보기 드물게 부자 2세대와 맞겨뤄본 사나이가 되었다. 그 밖에도 한국에서 촬영하거나 한국 - 홍콩 합작영화에서 여럿 나왔는데, 이 시절 악당 1, 2, 3으로 나오던 배우 가운데 조춘도 나와서 성룡에게 두들겨 맞기도 했다.


한국 노래도 제법 할 줄 알았다. 국내 예능에서 가요를 부르는 성룡(노래는 9분 50초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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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처음 방문했을 때, 당시 한국의 유명 개그맨인 이경규와 만나서 같이 사진을 찍었는데, 훗날 다시 방한했을 때 이경규가 '그때와 다르게 너무 늙어서' 성룡이 그를 못 알아봤다. 하지만 처음 만났을 때와 비슷한 포즈로 같이 사진을 찍었다.

1989년 영화 《미라클》 홍보를 하러 한국에 왔는데, 당시 KBS2 방송에 나와 유쾌한 한국어로 "안녕하세요. 내가 한국말 많이 잊어서 많이는 못해요."라고 웃으며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63] 사족으로 비슷한 시기 홍보 겸 한국민속촌한복을 입고 돌아다녔는데, 마침 수학여행 온 일본 학생들과 만나서 학생들이 성룡 사인을 받느라 왁자지껄한 적도 있었다. 참고로 홍콩 영화가 한국에서만큼 흥행하진 못했던 일본에서도 몇 안되게 히트한 스타가 성룡이었다. 유튜브에도 당시 일본방송에 출연한 영상이 몇 남아있다.

2009년에 자신이 소유한 전 재산에 대해 기부 의사를 밝혔다. 이때 기자가 "아들이 있으면서 왜 물려주지 않고 기부를 하는가?"라는 질문을 하자, "내 자식에게 능력이 있다면 내가 물려주지 않아도 알아서 벌 것이고, 내 자식에게 능력이 없다면 물려줘봤자 탕진할 것이다."라고 답했다. 또한 기부를 많이 하기로 유명한 김장훈에게 직접 한국어로 편지를 보내 그의 기부활동을 응원하고, 자신도 4,000만 달러를 기부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이건 좀 신빙성이 떨어지는 것이 4,000만 달러란 금액도 금액이지만, 애초에 김장훈은 타인에게 돈을 받아 기부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아마 그런 이유에서 실제로 제의를 했더라도 김장훈 측에서 안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이외에도 비공식으로 종종 내한하여 고아원에 기부를 하고 돌아가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성룡은 겉으로는 많은 기부를 하는 사람처럼 이미지 매이킹을 하고 있지만 정작, 2018년 9월 베이징사범대학 뉴미디어전파연구센터 등이 발간한 ‘중국 연예인 사회책임연구보고서(2017 - 2018)’에선 기부 금액이 0%로 당시 한동안 행적이 묘연했던 판빙빙과 함께 공동 꼴찌를 기록했다. 관련기사 관련기사2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어떤 인연이 있었는지, 1990년대 군입대를 피해 해외도피해 한국 입국을 금지당한 유승준의 중국 활동을 2000년대부터 밀어주기 시작하면서, 2010년에 개봉한 《대병소장》(大兵小將: Little Big Soldier)에 같이 출연하기도 했다. 국내에선 그다지 이슈가 안됐지만, 스티브 유의 군입대 기피를 지적하는 이들 중에서 이런 부분을 들어 성룡까지 까는 이도 일부 있었다.

2011년 《런닝맨》 홍콩 특집에서 영상을 통해 출연한 적이 있었다. 미션 지령자로서 출연하여 유재석을 메뚜기라고 지칭하기도 했다. 그리고 2013년 3월 2일 녹화본에서는 슈퍼주니어 시원과 함께 실제로 출연했다. 그리고 해당 화에서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귀요미스러움과 입담, 예능감으로 말도 통하지 않는 멤버들과 잘 어울리며 웃음을 선사했다. 다만 나이가 나이인지라 체력이 딸리는지 후반부엔 달리지 못하고 걸어다니기도 했다.

의외로 유창한 한국어 발음을 과시하기도 했는데, 어려보인다는 말에 자신이 40세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멤버들이 항의하자 "그럼 41?" 하는 모습이 압권이었다. 거기다 하하의 폰번호 요청에 "넌 여자 아님!! 여자만 됨!"이라고 하며 송지효를 보다가 월요남친의 견제에 한판 붙자며 결투자세를 취하는 등 출중한 예능감을 뽐냈다. 은근히 욱하는 기질도 있어, 유재석이 실수를 하자 괴성을 지르며 퍽하고 한대 치다가 다음턴에서 본인이 실수를 하자 "어 미안^^"이라고 사과를 하며, 유재석을 황당하게 만들기도 했다. 알람토크 때에는 덩실덩실 춤을 추거나 불리한 질문을 하며 상대팀들을 탈락시키는 등 종횡무진 활약. 막판에 한국의 팬들에게 인사를 해달라는 말에 사랑해요 쪽쪽쪽쪽쪽!! 하며 키스를 날리는 모습이 연세에 어울리지 않게 매우 귀요미하다.

1980~90년대만 해도 극장 개봉을 자주 하던 단골 스타였으나, 2000년대 와선 홍콩 영화 자체의 침체기와 더불어 한국에서도 한풀 흥행이 꺾이면서 《신해혁명》처럼 개봉도 못하는 일이 발생한다. 2013년엔 권상우랑 합작으로 나와 화제가 된[64] 《차이니스 조디악》 개봉 전에, 한국 방문 및 한국 지상파 방송에 나와 열심히 얼굴을 드러냈지만, 전국관객 27만에 그치는 기대 이하 흥행을 기록했다. 1979년 《취권》 당시엔 무려 서울 관객만 89만[65]을 기록했던 것과 비교하면 격세지감.

이병헌의 결혼식에 축하 영상 메시지를 보내주기도 했는데, 그때도 유창한 한국어를 선보였다.

2014년 1월 23일 목요일, 《해피투게더》에 성룡은 나르샤, 최시원과 같이 출연하여 야간매점 메뉴 등극까지 성공했다. 다음 영화에 초청하겠다고 해서 출연진들을 포섭했으나, 사실은 그냥 구경 오게 해주겠다는 페이크였다.

성룡의 친한파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예로, 홍콩에 가면 할리우드처럼 명예의 거리가 있는데, 거기에 있는 성룡의 핸드프린팅과 사인에는 한글로 '성룡'이라고 함께 적어 놓고 있다. 그리고 2014년 1월에는 《폴리스 스토리 2014》의 내한 레드카펫 행사에서 스스로를 半한국인으로 말하기도 했다.#

2000년대에 중국에서 성룡이, 우리도 헐리웃과 한류를 넘어서자는 뉘앙스의 발언을 했다가 한류 폄하 발언을 했다고 기사가 난 적이 있는데, 한밤의 TV연예에서 성룡 자택으로 직접 취재를 하러 가자 그들을 맞이하면서 철저한 오보이자 오해라고 반박한 적이 있다. 참고로 성룡이 김희선의 연기력에 대해 형편없다고 디스하고, 한류가 별볼일 없다고 말한 소위 한류 폄하 발언(2006)의 출전은 대만 언론이라고 한다. 다만 실제로는 반대로 성룡이 김희선의 결혼식에 축하 영상을 보내기도 했고, 환갑잔치에도 초대했을 정도로 둘의 사이는 양호하다고 한다. 이때 재미있었던 점은 MC였던 서경석이 성룡팬인지 대놓고 취재화면 내내 성룡 쉴드를 쳤다는 것이다. 그 정도로 그 나이대의 한국 남성들에겐 주윤발과 함께 어린 시절의 큰 추억이라는 방증이다.

사실 조금만 자세히 알아보면 폄하는 얼토당토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항간에는 성룡이 "대장금은 마치 중국의 원조인 침술을 한국 것인양 우긴다"라고 말한 것처럼 알려져 있지만 이 발언의 당사자는 성룡이 아니라 장궈리라는 배우로, 둘의 발언이 같은 기사로 보도되면서 마치 성룡이 한 것 마냥 소문이 퍼졌다. 성룡이 했던 발언의 요지는 "한국 배우에 홍콩인들이 열광하며 대문짝만하게 기사를 실어주지만, 반대로 한국에서는 홍콩 영화판을 시장으로 취급하지도 않을 정도다. 이 정도로 현 홍콩 영화 시장이 무너졌으며, 우리가 바뀌지 않는다면 이러다 홍콩 영화 진짜 싸그리 망한다"라는 내용이었다. 즉, 홍콩 영화인으로서 홍콩 영화의 몰락을 안타까워하고 자성을 촉구하는 내용이었지, 한류를 무시하는 발언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소재의 다양성과 좋은 시나리오로 승부하려는 한국 영화에 비해 현 홍콩 영화는 스타 몇 명이 돌려막기식 출연을 하고 있으며 B급 영화 위주로 물량으로만 승부 보는 상황이 되어버렸다는 발언도 했다. 즉, 한류 폄하는커녕, 한국 영화계가 대단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자기 나라 영화계를 대차게 까는 발언으로 볼 수도 있다. 친한이고 아니고를 떠나 성룡이 자기가 속한 홍콩 영화계의 명운을 걱정하는 것은 당연지사다.

2010년대 통영시 명예시민 겸 홍보대사였다. 덕분에 해저터널이나 미륵산 케이블 카에 성룡이 직접 쓰레기를 들고 있는 사진과 함께 쓰레기 좀 버리지 말라는 글이 쓰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2014년 한국에서 자신이 프로듀싱한 7인조 보이그룹 JJCC를 출범했으나, 사실 한국에선 당시 홍보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을 정도로 인지도가 낮았고 결국 활동도 거의 없어 해체된 듯 하다.

2014~15년에 성룡 영화들이 국내에서 우르르 재개봉이 이뤄졌다. 그런데 1970년대 영화 소권괴초나 비도권운산을 비롯하여 프로젝트 A, 쾌찬차, 폴리스 스토리, 대복성 등이 재개봉하는 건 좋은데 전국에서 1~2개 정도 상영관에서 1, 2번 정도 대충 상영한 것이 전부였다. 홍보도 거의 없었고 포스터도 정말로 대충 만들었다. 사실상 꼼수 개봉으로 대충 상영한 거다. 덕분에 관객이 무려 1~10명 수준이었다. 그나마 비도권운산이 전국 342명을 모았고 미라클이 전국 5천 명을 기록했다. 그런데 굳이 위안을 삼자면 성룡 영화 뿐만 아니라 오래된 재개봉 영화들이 대부분 이런 취급을 받는 게 현실이다. 물론 재개봉하여 되려 첫 개봉보다 대박을 거둔 재개봉 관객 50만에 가까운 전설인 이터널 선샤인이라든지 전국 30만 관객을 넘긴 타이타닉이나 올드보이 같은 경우도 있지만 이는 상당히 특별한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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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9일 평창 올림픽 성화 봉송 주자로도 참여를 했는데, 김여정 등의 북한 특사단이 온통 언론의 주목을 가져가서 크게 다뤄지지는 않았다. 사실 세월이 지난 것도 있고 정치 행보 관련 논란도 있어서 2010년대 성룡이 내한했을 당시 인기는 최전성기에 비하면 많이 내려간 편이긴 했다.

2024년 3월 1일 방탄소년단 와 함께 촬영한 'SimInvest' 광고 영상이 공개됐다. #

6. 정치적 행보

6.1. 활동 내력


성룡은 홍콩 출신이지만, 21세기 들어선 가장 대표적인 친중 성향 배우 중 한명으로 이름을 알리고 있다. 성룡이 친한파이고 홍콩 배우이던 시절부터 인기가 있었기에 그동안 국내 언론에서도 자주 언급하진 않아온 경향이 있지만, 그는 조국 중국을 이끄는 중국 공산당의 행보에 대해 심지어 독재적인 부분까지 긍정적인 발언을 제법 하는 편이라 이를 알고 놀라는 국내 팬들도 상당히 많을 정도다. 이러한 점 때문에 서방권이나 인권을 중시하는 단체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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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처음부터 친중공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1989년 5월 30일, 성룡은 중국에서 대학생들이 민주화를 요구하며 "천안문 시위"를 벌일 당시 이들을 지지하는 의미로 홍콩에서 콘서트에 참여한적이 있었다. 하지만 후에 친중으로 전향하며 노골적인 중국공산당 지지 성향을 드러낸다.

1997년 7월 1일, 홍콩 반환 시점부터 성룡은 본격적으로 중국공산당과 연을 맺었다. 가령, 중국공산당으로부터 홍콩 반환 기념콘서트에 출연해줄 것을 요청받은 성룡은 곧바로 참가해서 그가 직접 선곡한 '용의 후예'라는 제목의 ‘중국과 중화민족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이후 2000년대로 접어들며 홍콩 영화의 흥행이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하자, 본격적으로 중국공산당 정권에 유착하게 된다.

2004년 3월 28일, 성룡은 상하이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최근의 대만 총통선거야말로 세계 최대의 우스개였다. 1백년 동안은 그 얘기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것이다. 수치스런 일이었고 보기에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너무 화가 나 잠도 이룰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같은 발언은 대만의 케이블 TV인 CTI를 타고 그대로 방영돼 대만 집권당인 민진당을 분노케 했다. 대만 집권 민진당의 장쉬청(張旭成) 의원은 성룡의 정치적 발언에 항의하기 위해 그가 사과할 때까지 '성룡 영화 안보기 운동'을 촉구했다. 장 의원은 "성룡의 발언은 대만 주민들의 감정을 상하게 했으며 대만을 욕보인 것"이라고 말했다.

2004년 3월 31일, 중국정부는 성룡을 중국 환경문화촉진회 부회장에 임명했다. 이 날은 그가 대만 비판발언을 한지 3일 뒤였다. 성룡이 중국에서 공식 직책을 맡은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중국 환경문화촉진회는 외형상 비정부기구(NGO)이나 판위에(潘岳) 중국 환경보호총국 부국장이 회장을 맡고 있는 사실상의 정부산하기구다. 성룡은 "환경문제는 모든 사람이 관련된 일"이라며 "환경보호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기꺼이 부회장직을 수락했다.

2005년부터 중국에서 사업을 시작하며 중국공산당과 가까워진 성룡은 그들과 협력하며 사업을 추진했고, 중국공산당은 홍보를 위해 그의 인기를 이용했다. 이후 성룡은 중국공산당 창당을 기념하는 노래 <조국>을 내놓으면서 노골적으로 공산정권을 찬양하기 시작했고, 인민해방군문화대혁명을 찬양하는 이야기를 오페라로 리메이크해 공산당 홍보에 열을 올렸다.

2008년 4월 21일, 성룡과 중국공산당의 협력은 그가 2008 베이징 올림픽 홍보대사로 활동하면서 절정에 달했다. 베이징 올림픽 성화봉송 때는 중국정부의 티베트 유혈진압사태에 대한 반발로, 티베트 독립운동 시위자들이 티베트의 인권문제를 환기시키기 위해 봉송되는 성화를 끄려고 하는 등 크고 작은 시위가 일어났다. 그러자 성룡은 "성화봉송을 막으려하는 티베트 독립요구 시위자에겐 따끔한 쿵푸의 맛을 보여주겠다"라는 발언을 했다가 각종 시사평론가들의 풍자만평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

2009년 4월엔 중국 하이난에서 개최된 경제 포럼의 자리에서 중국 정부의 미디어 규제와 영화의 검열에 대해 의견을 제시했을 때, 성룡은 홍콩민주화 운동을 비하하는 발언을 했다. "자유를 갖는 것이 반드시 좋은 일인지 모르겠다. 중국인은 강력한 통제를 받아야 한다. 지나친 자유가 지금의 홍콩의 모습을 만들었다. 마찬가지로 대만도 매우 혼란스럽다. 통제되지 않으면 모두가 하고 싶은 대로만 할 것이다." 라는 발언을 해서 특히 홍콩이나 대만 등 민주 제도가 실시되고 있는 지역으로부터는 더 강하게 비난을 받았다. 이때 당시 홍콩 신문 빈과일보는 "성룡은 비겁한 노예" 라는 제목의 톱기사로 그를 비난했다.

200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기념행사에 참가했던 성룡은 이날 행사에서 중국 가요 ‘국가’를 부르면서 “강성한 나라가 있어야 부유한 백성이 있게 된다”고 노래했다. 행사 직후 중국 관영 인민망 등 현지 언론과 가진 인터뷰에서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기 전에는 나는 국적이 없는 중국인이었다. 중국인도 아니고 영국인도 아니었다.”면서 “우리 조국에 천지개벽의 변화가 일어났고 나는 중국인이 됐다.”며 감격스러운 느낌을 전했다.

2010년 8월 필리핀에서 버스 인질로 납치돼 살해된 8명의 홍콩인들에 대해, "이런 일은 전세계에서 항상 일어난다. 걱정말라! 우리는 미워하지 않는다." 라는 글을 올렸는데, 당시 이 말에 홍콩시민들은 분노하여 성룡을 '냉혈인간', '홍콩의 수치'라고 불렀다. 당시 네티즌들은 성룡이 '필리핀 사업' 때문에 해당 발언을 했을 것으로 추측했다. 실제로 성룡은 자신의 블로그에 "필리핀 지역 사업을 시작했으며, 중국정부 고위 관리가 이를 수락했다." 고 게시한 바 있다.

2012년 12월, 성룡은 홍콩의 ‘시위 문화’를 지적하며 ‘홍콩이 한국처럼 시위도시됐다’고 비난했다. 중국 남방일보(南方日報) 자매지와의 인터뷰에서 “과거에는 시위하면 한국을 떠올렸지만 지금은 홍콩이 시위의 도시가 됐다. 사람들은 중국과 중국지도자들과 모든 것에 불평하고 모든 일에 항의하고 있다. 당국이 어떤 이슈는 시위할 수 있고, 어떤 문제는 시위할 수 없는지를 규정할 필요가 있다.”라면서 시위를 비난했다. 성룡의 이런 발언이 알려지자 칼럼니스트 겸 문화비평가인 량원다오(梁文道)는 "성룡은 홍콩인들이 왜 거리로 나설 수밖에 없는지를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당국이 하는 일은 모든 것이 옳은 일이라는 사고방식을 가진 것 같다."고 비난했다. 또한 전 홍콩 입법의원인 위러웨이(余若薇)는 "만약 정부가 영화인들에게 어떤 영화는 만들 수 있고 어떤 영화는 만들 수 없다고 한다면 어떻겠는가? 영화계가 수치스러워해야 할 실언이다."라고 지적했다. #

2012년 12월, 성룡은 홍콩 ‘봉황TV’에 출연해 “미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부패한 나라”라고 발언해 눈길을 끌었다. “부패에 대해 말하자면 전 세계에서 미국만한 부패국이 또 있을까? 세계에서 가장 부패한 나라!”라며 “금융위기도 미국의 실패에서 비롯됐다”고 말했다. 반면 중국에 대해서는 “지난 10년간에 비로소 진정한 성공을 이뤘다. 중국 내부에서는 여전히 해결해야 할 문제를 인식하고 나아지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해외에 나가서는 중국이 위대한 나라임을 알려야 한다. 중국의 문제를 외부에 알릴 필요는 없다. 강해진 중국을 사람들이 걸고 넘어지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덧붙였다.

2013년 3월, 성룡은 ‘중국인민 정치협상회의 위원(=정협위원)’이 됐다. 줄여서 '인민정협'이라고 불리는 ‘중국인민 정치협상회의’는 공산당 및 기타 정당, 각 단체, 각 정계의 대표로 구성되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책자문기구다. 중국은 예전부터 성룡같은 대중에 친숙한 유명 연예인이나 체육인을 ‘정협위원’으로 위촉해 공산당 이미지 개선에 활용해왔다.

2014년 8월, 성룡의 아들인 ‘방조명’이 대마초를 피우다가 공안에 적발되었다. 이 사건에 관해 특히 한국팬들은 아들이 체포됐던 2014년 이전까지는 성룡이 친정부활동을 전혀하지 않았다고 거짓말했다. 그리고 2014년 이후를 시작으로 그가 아들을 살리기 위해 친중으로 전향했다는 ‘가짜뉴스’를 만들어 퍼뜨렸다. 이미 2014년 이전부터 성룡의 수많은 정치활동 사례들이 명백히 존재함에도 그들은 거짓으로 일관하며 그를 옹호했다.

2014년 9월 '우산혁명 시위'에 대해서 자신의 웨이보에 "최근 홍콩에서 일어난 사건(=우산혁명)으로 3,500억 홍콩달러(한화 약 48조 4,000억 원)의 경제적 손실을 겪었다는 뉴스를 보고 마음이 불편해졌다. 이성을 되찾아 달라! 강성대국(=중국)없이 번성하는 곳은 없다." 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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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대만 국립고궁박물원의 남부 분원 완공 기념식에 마잉주 당시 총통 등과 함께 참석했다. 중화문화의 총본산으로서 국립고궁박물원의 위상[66]이나 마잉주 정부의 친중국적 양안관계 정책 등을 고려한 듯 보이지만, 과거 대만의 민주주의를 비하했던 전력을 생각하면 엇갈릴 수 있는 행보.[67] 덤으로 진품이 아닌 모조품을 분원에 부조 작품으로 기증해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2019년 6월에 홍콩 범죄인 인도법안 조례 개정안을 둘러싼 반정부시위가 심해졌을 때 성룡은 16년 만에 낸 그의 첫 앨범 <나는 재키 찬이다>(I Am Jackie Chan)의 쇼케이스 행사 홍보를 위해 대만을 찾았다. 이 행사에서 홍콩시위와 관련된 대만언론의 질문에 성룡은 "홍콩에서 큰 시위가 있었다는 걸 어제 처음 알았다. 나는 이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밝혔다. 대만언론은 2014년 9월 우산혁명을 공개 비하한 성룡이 그것의 10배에 달하는 규모의 시위를 몰랐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고 의문을 표시했다.

2019년 8월에는, "세계 어느 곳에서든 중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을 느끼며, 오성홍기는 전 세계인의 존경 대상입니다. 홍콩은 제가 태어난 곳이고 고향입니다만 중국은 제 조국입니다"라고 발언한 바 있고, 자신의 웨이보에 ‘나는 오성홍기수호자’라고 밝혔다. 호가, 우징, 심지어는 홍콩 국적 아이돌 잭슨(GOT7)#, 대만 국적의 라이관린# 등의 많은 중국 활동 중화권 탑스타들이 같은 리포스팅(8월 4일자)을 했다.[68]

2019년 10월, 중국이 국경일을 위해 준비한 프로그램에 출연한 성룡은 "중국은 그동안 놀라운 발전을 이뤄냈다. 중국이 재채기를 하면 전체 지구가 흔들린다. 그리고 과거 중국을 무시했던 헐리우드 제작자들도 이제는 중국시장의 입맛을 최우선으로 고려한다. '중국이 싫어한다'는 한마디면 그들은 고치고 고치고 또 고칠 수밖에 없다." 고 말했다.

2019년 11월 8일 남중국해 분쟁에서 중국의 영유권을 강하게 주장했기 때문에 분쟁 당사자인 베트남에서 입국 금지를 당했다.

2020년 2월 16일, 홍콩도 코로나로 비상이라 시민들이 생필품 사재기까지 할 정도로 혼란스럽던 상황에 성룡은 증지위, 알란탐, 노혜광 그리고 홍콩 시위 때 강경 진압을 주도한 친중파 경찰청장 ‘크리스 탕’과 함께 연회를 즐겨서 비난을 받았다. 크리스 탕은 "제가 경찰이 된 것도 다 성룡 형님을 보고 배운 덕입니다"라고 말했다.#

2020년 5월 28일, 중국 전국인민 대표대회(전인대)가 홍콩에서의 반체제 활동이나 외국의 개입을 막는 국가보안법 도입을 결정하자 성룡은 자신을 비롯한 많은 배우들의 지지성명을 받아 중국에 전달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뜬금없이 이소룡이나 장국영 등 이미 한참 전에 사망했거나 반대 성향이었던 배우들 이름까지 적어 손가락질을 받았다.#

2020년 5월 30일, '홍콩 국가보안법' 제정에 관해 배우 증지위, 리자 왕, 제작자 임건악, 황백명 등 영화계 인사들과 함께 지지 성명을 발표했다. "국가안보 수호가 홍콩에 중요하다는 걸 충분히 이해한다. 홍콩 보안법 제정을 지지한다. 이번 법제정이 국가안보의 구멍을 막고 문화예술계의 정상적인 창작의 자유와 발전 공간을 보장하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2021년 7월에는 베이징에서 열린 심포지엄에 참석해 중국공산당을 향한 찬사를 쏟아냈다. 그는 “나는 중국공산당의 위대함을 볼 수 있다. 공산당의 약속은 100년도 안 되어 결과로 나타날 것”이라며 “나는 공산당원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이날 개최된 심포지엄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공산당 창당 100주년 기념 연설에 대해 중국 영화 관계자들이 모여 의견을 나누는 자리였다. 참고로 이 말만 보면 의외로 성룡은 세간의 인식과 달리 공산당 당원은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입당하고 싶다는 발언만 했을 뿐 아직 입당은 못했다. 진성당원만 받다보니 생각보다 입당 절차가 까다로워 사생활 논란 등 문제가 많은 성룡의 입당은 쉽지 않다. 이후 실제로 입당할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 할 대목.#

2022년 7월 1일, 홍콩반환 25주년 기념 축하행사에서 중국 전통 의상을 착용하고 큰 북과 함께 등장한 성룡은 쿵푸 무대를 꾸미며 ‘중화의 힘’을 열창했다.

6.2. 활동 고찰

사실 여러 가지 이유로 성룡을 옹호하거나 비판하는 글들이 많이 있지만, 그의 행적을 보면 사고관을 관통하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중화민족'이라는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아주 뚜렷한 민족주의자라는 것이다. 그는 중화민족으로 후술되어있듯 어찌됐든 식민지격인 영국령 홍콩에 굉장한 반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기에, 반환 이후 대국이 되어가는 중국을 보고 설령 그것이 독재국가일지라도 민족적 자부심을 느꼈을 수도 있다.

성룡은 1990년대까지만 해도 정치일선에 잘 나서진 않았으나, 그럼에도 A계획속집에서는 등장인물 마여룡의 입을 빌어 대륙인과는 구별되는 홍콩인의 독자성을 이야기하기도 했고, 1989년 5월 30일에는 천안문 6.4 항쟁을 지지하며 "중화 민주주의 헌정 콘서트"(民主歌聲獻中華)를 여는 등[69] 베이징과도 어느정도 거리를 두고 있었다. 허나 이 당시에도 자신이 각본에 참여한 여러 작품(프로젝트 A, A계획속집)에서 중화주의자적인 면모는 제법 드러냈다. 즉, 홍콩인에 대한 베이징의 간섭은 거부하지만, 홍콩인이 대중화의 일원이라는 것은 부인하지 않았다.

성룡이 영국령 홍콩 당시부터 영국의 홍콩 지배를 안좋게 본 것은 확실한 듯 하다. 1980년대 홍콩 영화는 절정이었지만, 성룡은 미라클 제작 중에 한국의 한 연예잡지(스크린)와의 인터뷰에서 "홍콩 정부가 영화 산업에 너무 간섭한다"라고 비판적으로 인터뷰했다. 프로젝트 A, A계획속집을 봐도, 초기 홍콩에서 영국인들의 홍콩인 차별을 은근히 꼬집고 있으며, 취권 2는 아예 영국과 이에 부역하는 매국노들의 문화재 침탈에 맞서 싸우는 내용이다. 성룡이 성장해서 염정공서가 등장하기 전의 젊은 시절까지 홍콩은 부정부패와 빈부격차가 정말 심각했다. 중국 정부에 비판적인 사람들도 1971년 취임한 25대 머레이 맥클레호스 이전 홍콩총독들의 통치를 크게 긍정하진 않는다. 28명이나 되는 홍콩 총독들 중에 홍콩과 홍콩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생활수준 향상에 제대로 기여한 사람이 드물었다는 것이다.

1990년대부터 홍콩 자체영화가 쇠락하고 폴리스 스토리 3[70]부터 중국 시장을 겨냥하거나 중국이 배경인 영화를 내면서 중국에 자주 드나들고 중국 고위층의 호의적인 대접을 받으면서 친중적인 성향이 강해진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애국주의만을 강조한다면 그러려니 넘어가줄만 하지만 예를 들어 2009년 4월에, "중국인은 강력한 통제를 받아야 한다. 지나친 자유는 홍콩대만처럼 혼란을 불러올 수 있다" 와 같은 발언은 권위주의나 심할 경우 전체주의를 옹호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어 눈총을 사고 있다.

이러한 발언들에 대해서, 성룡 본인이 중국 본토에도 진출하여 연예활동하는 입장이라, 중국 정부나 중국 국민에게 밉보이는 발언을 하기 어려운 상황이란 걸 감안할 필요가 있다고 옹호하는 소리도 있다. 성룡은 다작왕으로 중국대륙 내수용 작품도 만만찮게 다작하므로 어쩌면 이러한 친중국적 정치 행보는 영화를 위한 당연한 선택일지도 모른다는 것. 허나 그렇다손 치더라도 회사를 비롯해 딸린(?) 식구들이 많으니, 주윤발처럼 중국 입장에서 거슬릴 수 있는 언행은 하지 않더라도, 이연걸[71]이나 다른 홍콩 배우들처럼 그냥 입 다물고 가만히 있으면 될 거 가지고 왜 그렇게 나서야 했는가 하는 의문은 들기 마련. 특히나 성룡은 자유 홍콩의 산물이자 그 번영을 상징하다시피 한 인물이기에 그의 정치적 스탠스는 더욱이 의아한 부분이다.

이런 태도로 인해 기회주의자로 비판받기도 했다. 다만 그가 미국 헐리웃에서도 제법 성공한 스타라는 점과 중국이 개선해야 할 점에 대해서도 꾸준히 쓴소리를 한다는 점에서 그 의도가 단순히 기회주의라고만 보긴 어렵다는 의견도 있다. 미국 언론에서도 성룡이 중국 애국주의 입장에서 반미적인 국제관을 가진 것을 조금 의외라는 식으로 지적한 바 있다. 2013년의 한 중국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성룡은 미국에 대해 "세계에서 가장 부패한 나라"라고 비판했다.# 본인이 할리우드 진출 초기에 당한 게 있다고 하더라도[72] 이정도 언사는 잘 이해는 되지 않는 부분.

일각에선 성룡은 배타적 중화주의자라기보다는 아시아 우월주의자 아니냐는 추론도 한다. 중국에서 떼돈을 버는 성룡 입장에서 "잃어도 무방한 시장"인 한국일본에 대해 그는 아직까지 우호적인 스탠스를 유지하고 있다. 국제정치학적인 입장에서 한일은 중국과 대립하는 면이 있지만, 성룡이 미국에는 저렇게 극언을 하는 반면 두 나라에 대해서는 반감을 공개적으로 내비친 적이 없다.

성룡이 아직 홍콩인이었던 시절 홍콩 노년인들은 영국 지배하에서 상당히 차별을 받았고, 이는 1960년대 홍콩 내의 반영폭동으로 촉발된 바 있었는데 이것이 그의 친중 성향에 영향을 주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어쨌든 전인대의 정협 의원으로까지 활동하는 걸 보면, 정치적으로는 확실히 베이징 정부인사들과 뜻을 같이 하는 듯. 2014년 홍콩 민주화 시위에 대해서도 시위대의 자제를 촉구하는 등 친정부적인 건 확실해보인다. 시위대를 지지한 주윤발과도 여러모로 비교되고 있다. 링크

한편, 경제적인 관점에서 보면 성룡의 행보가 이해가 되는 면도 있다. 홍콩의 중국 반환 이후 홍콩의 영화시장은 쪼그라들고 쇠퇴하는 반면 중국 본토 영화 시장은 계속 커져서 세계 최대가 될 것이 확실하며, 성룡은 이미 은퇴할 나이가 넘은 노년이지만, 중국 연예인 최고수익 순위 1위에 랭크될 정도로 중국에서 얻는 그 수익이 막대하기 때문이다. 사실 성룡도 1990년대 중후반 홍콩스타들이 너도 나도 할리우드로 진출할 때 잠시 간을 본 적이 있는데, 러시 아워 시리즈, 상하이 눈은 그럭저럭 흥행했지만 턱시도, 메달리온, 80일간의 세계일주 등은 흥행에 실패했다.

이후 성룡은 더이상 할리우드에 미련을 갖지 않는 듯하다. 영어 연기의 어색함 및 인종적 문제 때문에 할리우드에서 성룡은 철저히 동양계 무술 특화 코믹 캐릭터로 겉돌았으며, 비슷한 스테레오 타입을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성룡에 대한 할리우드의 반응은 식상하다는 반응이었고, 성룡 또한 이런 배역만 맡기는 할리우드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진 듯.[73] 오히려 자신을 영웅으로 대접해주고, 훨씬 더 큰 수익을 안기는 중국 시장을 자신의 주무대로 삼은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당연히 물주인 중국 국민 정서에 맞춘 발언을 할 수밖에 없다.

7. 사생활 논란

7.1. 여자 문제

성룡은 친근감 있는 외모로 옆집 아저씨같은 푸근한 느낌을 주지만 사실 중화권에서는 여러 여성들과 숱한 염문설을 뿌리고 다니는 ‘스캔들 메이커’로 유명하다. 성룡의 스캔들 리스트는 일명 ‘성룡의 여인들’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며 해를 거듭하면서 거의 매년 한 명씩 늘어가고 있다. 그래서 홍콩에서는 난잡한 여자 문제로 인해 그에 대한 평이 좋지 않다. 오죽하면 성룡의 본명인 房仕龍(방사룡)을 비꼬아 房事龍이라는 별명까지 생겼을 정도였으니...

언론에 공개된 사실들을 보면,

1970년대 한국 홍콩 합작영화 촬영이 빈번했던 시절, 17살~18살의 성룡은 한국에 거주했었다. 그는 당시 통금 때문에 집에 가지 못하고 있는 ‘한국인 여성’에게 반해 말을 거는 것을 시작으로 그녀와 8년간 교제했다. 그리고 한국인 여성과 만나고 있는 도중에 ‘미설(米雪, 미쉘 임)’이라는 여배우와도 만나 8년동안 사귀며 양다리를 걸쳤다. 그러니까 1970년~1979년 사이에 2명의 여자를 각각 8년씩 동시에 만났던 것이다. 결국 한국인 여성과는 만나는 횟수가 줄면서 헤어졌다.

1979년 성룡은 ‘미설(米雪, 미쉘 임)’과 사귀다가, 미국에서 가수 ‘등려군’과 만나게 되었고 등려군과 사랑에 빠져 양다리를 걸친 끝에 미설을 차버렸다. 그 배신감에 미설은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언, 아직까지 독신으로 지내고 있다.

1981년 그렇게 등려군과 사귀다가, 여배우 ‘임봉교’와 만나 또다시 양다리를 걸쳤다. 임봉교는 1970년대 청순미로 이름을 날렸던 대만의 하이틴 스타로[74] 당시 문맹이었던 성룡에게 대본을 읽어주면서 그와 사랑에 빠진 것으로 전해진다.

1982년 성룡은 임봉교가 자신의 아이를 임신하자 등려군을 버리고 임봉교와 결혼했다. 성룡이 결혼할 것이라는 뉴스가 전해지자 2명의 팬들이 자살하는 소동이 일어났기 때문에 성룡과 임봉교는 미국 LA에서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리며 정식으로 부부가 되었다. 임봉교는 이제 갓 스타덤에 오른 상태에서 성룡의 아들 방조명을 혼전임신한 탓에 배우로서 꽃을 피워보지도 못한 채 은퇴해야만 했다.

성룡은 임봉교와 정식으로 부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84년에 1973년부터 활동을 시작한 일본의 ‘원조 아이돌 출신’ 탤런트, ‘미즈사와 아키'와 불륜을 저질렀다. 이때가 아들 방조명이 2살 때였다. 그녀는 일본 방송사 리포터로 스페인의 '쾌찬차' 촬영 현장에 가게 되었고 당시에 유부남이었던 성룡을 취재하다가 사랑에 빠졌다. 두 사람은 1년간 사귀다가 헤어졌다. 그녀는 어느 버라이어티쇼에 나와서 "성룡은 친절했고 특히 몸이 좋았던 남자" 라고 회고했다.#

1985년 영화 '폴리스 스토리' 에 같이 출연한 장만옥과 염문에 휩싸였다.

1986년 영화 '용형호제'에 같이 출연한 관지림과 열애설이 났다.

1987년 대만 출신의 여성 액션 스타 호혜중과 열애설이 돌았다. 성룡과 호혜중은 복성고조 등 복성 시리즈에서 함께 출연한 바 있고 성룡은 호혜중의 단독 주연작 패왕화(1988)의 제작자였다. 패왕화는 성룡이 제작에 참여한 액션 영화들 중 유일하게 성룡 본인이 감독을 맡거나 영화에 출연하지 않은 작품이다.

1989년 여배우 이가흔과 열애설이 돌았다. 특히 이 두 사람이 1991년, 자동차 경주장에 함께 나타나면서 소문이 달아올랐다.

1993년 여배우 오가려가 성룡과 껴안고 뽀뽀하자 사람들은 그들이 사귀고 있다고 의심했다.

1997년, 성룡은 자신보다 18살 어린 미인대회 출신 여배우 오기리(吳綺莉, 우치리, 일레인 응)와 모임에서 만나 불륜을 저질렀다. 그는 외모가 뛰어난 오기리에게 즉시 매료되었다. 성룡은 “아내와 이혼하고 너와 결혼하겠다.” 라는 말로 그녀를 유혹했다고 한다. 참고로 성룡은 1954년생, 등려군이 1953년생, 임봉교도 1953년생, 오기리는 성룡의 조카뻘인 1972년생이다. 성룡의 아들 방조명이 1982년생이라 오기리는 방조명보다 10살 누나이다.

1999년 2월, 성룡과 오기리의 불륜이 수면 위로 불거졌다. 당시 성룡은 이를 부인했지만 동년 10월, 오기리가 성룡의 딸을 임신한 사실이 알려지며 부적절한 관계가 폭로되자 결국 그도 불륜을 인정했다. 이 때 성룡이 친구들에게 오기리의 유혹에 넘어가 생각지도 않은 잠자리를 함께 했다고 토로했다는 사실이 보도돼 빈축을 샀다. 결국, 오기리는 그 해 11월 19일, 딸 오탁림(吴卓林, 우줘린, 에타 응)[75]을 사생아로 낳았다. 오기리에 의하면 성룡에게 자신이 임신했다는 소식을 전하자 성룡은 그 즉시 오기리와의 연락을 끊고 잠수를 탔다고 한다.

1999년, 신인 여가수 용조아가 성룡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그의 개인용 세단으로 이동하던 사진이 찍힘으로써 두 사람의 열애 사실이 들통났다.

2000년 성룡은 미스 홍콩 출신 여배우 향해람과 염문에 휩싸였다. 성룡이 매번 헐리우드에서 영화를 촬영한 후 홍콩으로 돌아오는 이유가 향해람의 집을 방문하기 위한 것이라는 소문도 나돌았다.

2001년 성룡은 영화 '러시 아워 2'를 촬영하면서 장쯔이와의 염문설에 휘말렸다. 언론들은 성룡이 장쯔이의 생일 파티에서 키스를 하며 서로 다정히 마주 앉아 포도를 먹여주고 있는 사진을 공개하는 등 앞다투어 스캔들을 퍼뜨렸다. 또한 베이징 국제영화제에서 성룡이 장쯔이와 손깍지를 끼고 등장해 또 한번 구설수에 올랐다.

2002년, 성룡의 영화 <나이스 가이>의 여주인공으로 캐스팅되어 연예계에 데뷔한 대만의 '인공미녀'로 불리는 배우 이정의(李婷宜)가 성룡과 술집 홀에서 서로 담소를 나누다 연락처를 교환했다는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2003년 3월, 영황 엔터테인먼트가 개최한 파티에 성룡과 여배우 ‘정희이’가 함께 참석했는데 정희이의 손목에는 성룡이 선물한 10만 홍콩달러(한국돈: 1,500만 원)의 명품 시계가 걸려있었다. 비록 다른 여자 연예인들에게도 손목시계를 선물한 적이 있는 성룡이지만, 정희이는 '성룡의 애인'으로 불렸다.

2005년에 성룡의 영화 신화: 진시황릉의 비밀에서 여주인공으로 출연한 대한민국 연예인 김희선 역시 영화 촬영을 계기로 성룡과 잠시 사귀었다는 의혹이 있다. 상기한 뉴스의 껴안는 장면 외에도 성룡이 김희선의 옆이마에 키스를 하는 등 당시 두 사람은 여러모로 논란의 여지가 있는 스킨쉽을 자주 하였다.

2011년 2월 22일, 중국매체들은 성룡과 여배우 서정뢰가 차 안에서 키스하는 모습이 담긴 사진을 공개하며 두 사람의 스캔들이 불거졌다. 매체들은 "최근 성룡과 서정뢰가 차 안에서 진한 키스를 나누는 순간이 포착됐다. 성룡은 서정뢰와 식당에서 나와 차에 올라탄 뒤 진한 키스를 나눴다"라고 보도했다. 이와 관련 성룡은 "평범한 친구일 뿐, 사진 속 키스는 단지 굿바이 키스였다"고 밝히며 스캔들을 부인했다. 서정뢰 역시 자신의 웨이보에 "이게 어디를 봐서 '격렬한 키스'를 하는 것처럼 보이느냐? 정말 사람들을 잘도 속인다"라는 말로 불쾌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2011년 4월 7일, 중국 광저우 '다양왕' 등 중화권 매체들은 "성룡이 베이징에 있는 한 호텔 레스토랑에서 벌인 자신의 생일 파티에서 미녀 배우 "린펑"의 볼에 키스를 했다"고 일제히 보도했다. 매체에 따르면 성룡은 생일 파티에 참석한 이들을 위해 감사의 말을 전하면서 "서정뢰식 키스법으로 키스를 하겠다"며 옆에 있던 린펑에게 기습 키스를 했다. 이에 린펑은 싫지 않은 듯 웃음으로 화답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2년, 성룡은 '천녀유혼'과 '초한지'의 히로인 유역비(劉亦菲)와 공사석을 불문하고 스킨쉽을 하는 등 연인 사이라고 의심할 만한 모습을 자주 보여주었다. 이에 대중들 사이에서 둘의 관계가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성룡은 베이징에서 펼쳐진 모터쇼에 등장해 유역비의 허리에 손을 감아 자신에 바싹 달라붙게 한 채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받기도 했다. 이에 홍콩 언론들은 "두 사람은 이전에도 자선행사 등에 동반하면서 친밀한 모습을 자주 보여줬다. 성룡이 유역비를 껴안는 건 다반사고 귀에 얼굴을 대고 속삭이는 것을 보면 누구라도 연인 사이로 의심할 것이다." 라고 보도했다.

2014년 3월 17일, 베이징 평화우애콘서트 발표회에서 성룡은 게스트로 나온 유명 여자 아나운서 ‘춘니’의 목덜미를 잡고 볼을 비비는 행동을 노출해 또다시 중화권 언론과 온라인을 달궜다.# 춘니는 다소 어색한 표정으로 성룡의 접촉을 피하지는 않았다. 처음엔 '성룡이니까, 저 정도야...' 하던 중국 네티즌들도 시간이 갈수록 '지나치다', 또는 '상대가 유부녀라 더욱 문제 된다'는 쪽으로 비난 수위를 높여갔다.

2015년 성룡과 판빙빙서로 진한 스킨쉽을 하는 장면이 파파라치에 포착되며 중화권 대중들에게 두 사람이 연인 관계라는 설이 돌았다. 두 사람은 2009년 <신주쿠 사건>이라는 영화에 같이 출연한 바 있었다. 스캔들이 터지자 판빙빙은 자신이 성룡과 연인 사이라는 소문을 강력히 부인했고 얼마 후인 2015년 5월 29일, 배우 리천과의 열애를 공식 발표했다.

2022년 3월 9일, 중국남방항공 소속으로 알려진 한 여자 승무원이 자신의 계정에 성룡과 찍은 사진을 게재했다. 사진에서 성룡은 승무원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한손으로는 엄지를 치켜들며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사진과 함께 성룡과 만났던 당시 비하인드 스토리를 덧붙였다. 그녀는 성룡에 대해 "정말 나이스하다. 사진도 찍어주신 데다, 내게 주소와 전화번호를 달라며, 선물을 보내주신다고 했다"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이 여성은 성룡에게 선물 받은 자서전 사진도 함께 업로드했다.

그런데 성룡 미담으로 끝날 것 같던 이 글은 뜻밖에도 논란을 야기했다. 성룡이 이 여성에게 전화번호와 집 주소를 요구했다는 것 때문. 성룡은 여성 편력으로 유명하고 과거 내연녀와 혼외자녀 문제로 논란을 일으킨 바 있어 그의 의도가 순수하지 않다는 시선이 뒤따랐다. 댓글창에는 실제로 성룡의 저의가 따로 있다는 의미의 댓글들이 다수 달렸다. 한 네티즌은 "70대에 가까운 나이의 노인이 잘 알지도 못하는 미모의 20대 여성에게 전화번호와 주소를 요구하는 게 안전해 보이지는 않는다"고 지적했다. 결국 이 승무원은 해당 글을 삭제했다.

사실 이미 1980년대부터 홍콩의 대중들은 성룡의 난잡한 사생활을 카더라로 상당히 알고 있었다. 다만 삼합회에서 두목급 대접을 받는 배우 왕우가 성룡의 뒤를 봐주기도 했고 각종 루머를 퍼뜨리기로 유명한 홍콩 언론도 자국에서 가장 유명한 톱스타를 흠집 내는 것은 꺼렸기 때문에 처음에는 성룡의 사생활을 그다지 캐내지 않았다. 그러다 1990년대 후반부터 성룡이 본격적으로 해외에서 활동을 시작함과 동시에 다른 나라에서도 그에 대한 이런저런 가십성 소문이 많이 퍼지게 되고 1999년 성룡이 오기리와 불륜을 저질러서 사생아까지 생겼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본격적으로 중화권 언론에서 성룡의 난잡한 사생활에 대한 기사가 많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는 한국일본에서도 비슷했다. 성룡은 중화권 뿐만 아니라 한국과 일본에서도 인기가 상당히 많은 연예인이었고, 한국과 일본의 기자들이 홍콩 연예계 사정에 밝을 리도 만무해서, 두 나라의 언론에서는 성룡에 대한 안좋은 보도를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카더라가 돌아도 해외 배우의 특성상 찌라시 수준으로 여기기 일상이었다. 게다가 당시는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었다. 때문에 한국과 일본에서는 2000년대까지 성룡의 사생활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특히, 한국에서 성룡은 대표적인 친한파 중화권 배우 중 한명으로만 기억되었기에 좋은 이미지를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었다.

7.2. 아들 문제

7.2.1. 성장 환경

성룡의 아들 방조명은 아버지의 무한지원 하에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최고의 교육만을 받으며 성장했다. 비록 중퇴지만 미국 명문대인 윌리엄 앤 메리 대학(College of William & Mary)을 다니기도 했다. 아버지의 명성과 풍요로움 하에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자랐다.

2008년 5월 29일, 방조명은 연예프로그램 '징쥐리'에 출연해 "어머니는 나 때문에 이혼하지 않고 참고 사셨다"라고 털어놨다. 그의 어머니 임봉교는 청순한 이미지로 1970년대 홍콩 남성들의 우상으로 군림했던 톱스타였으나 1982년 성룡과 결혼하면서 연예계를 은퇴하고 가정주부의 길을 걸어왔다. 그는 어머니 임봉교가 20여 년의 결혼 생활을 불행하게 지냈으며 그가 청소년이었던 1997년부터 2003년까지 엄마가 자신의 눈을 피해 집에서 숨어서 울고 있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고 밝혔다.

방조명은 "어머니가 몰래 화장실에서 울 때에 창문을 통하여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나 고민 끝에 가서 달래주기보다는 모른 척 하는 쪽을 택했다"고 말해 출연자들의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자신이 숭배하는 우상은 톱배우인 아버지 성룡이 아니라 희생적인 사랑과 지혜를 몸소 보여준 어머니라며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드러냈다.

그는 또한 "어머니가 아버지와 이혼을 하지 않은 이유는 아들을 훌륭한 성인으로 키워내기 위해서였다. 어머니는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아무런 내색 없이 이를 악물고 이를 버텨내신 강한 분이셨다"고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방조명은 성룡의 어떤 점이 어머니를 힘들게 했는지 방송에서 구체적으로 밝히진 않았지만 당시는 성룡이 여배우 오기리와 불륜이 났던 시기였다. 이혼의 위기를 맞은 가정 속에 방조명은 안정적인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자랄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옆집 아저씨 같은 친근한 이미지와는 달리 '스캔들 메이커'로 이름을 날린 성룡의 행적을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는 것이 방송을 본 시청자들의 중론이다. 그는 아버지 성룡에 대해서는 "언젠가 언론에 아버지가 잘못한 일을 공개하고 어머니에게 용서를 비는 일을 도와줄 수도 있다. 어머니처럼 좋은 부인을 둔 아버지는 정말 행운아다." 라고 강조했다.

방조명이 어렸을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 성룡이 아내와 거친 언쟁 후에 화가 나서 밖에 나갔다 들어왔다. 그 때 아내가 그녀의 여자친구와 이야기를 나누고 웃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그를 화나게 만들었다. 그 순간 어린 아들이 뛰어들어와 손을 들어 성룡에게 겨누고는 "빵!"이라고 외쳤다. 그러자 성룡은 화가 나서 아들을 한손으로 들어 바닥에 내던졌다. 다행히 소파로 떨어져서 부상은 피할 수 있었다.

아들이 기억하는 어린 시절부터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아버지인 성룡을 만난 횟수는 여섯번 밖에 안된다고 말했을 정도로 성룡은 모자에게 소홀했다. 또한 성룡은 직접 손으로 속옷과 양말을 빨고 화장실에서 볼일 볼 때도 휴지 2칸만 사용하는 짠돌이로도 유명한데, 몇 번 만나지도 않은 아들에게 이러한 습관을 강요하는 등 지나치게 아들에게 엄격했다.

이에 대해 나중에서야 성룡은 자신이 좋은 아버지가 아니었다고 방송에서 밝혔다. "나는 수시로 바람을 피웠고 음주운전을 했으며 폭력적인 아빠였다. 아들 교육은 아내에게 전부 맡겨도 된다고 생각했다. 배우로 바쁜 삶을 살다보니 아들에게 소홀했고 바깥활동으로 바빴기 때문에 어느정도 방관적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7.2.2. 대마 사건

2014년 8월, ‘방조명’은 베이징 소재 성룡 소유의 호화별장에서 대만배우 ‘가진동’과 함께 대마초를 피우다가 적발이 되었다. 해당 사건을 알게 된 성룡은 분노하며 "미리 알았다면 때려죽여서라도 아들의 탈선을 바로 잡았을 것이다."라며 아들의 변호사에게 자기 대신 아들을 주먹으로 때려달라고 말했다.

방조명은 대마초 흡연을 시작한지 8년 이상 됐고 행실이 나쁜 친구를 만나 대마를 접하게 됐으며 힘들 때마다 손을 댔다고 말했다. 그는 재판에 앞서 구치소에서 수감생활 중 어머니에게 보낸 3장 분량의 편지에서 "이번 일이 발생한 것은 모두 자신의 책임"이라며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한편 부친 성룡에 대한 원망 또한 드러내며 ‘마약에 손댄 건 아버지 때문’이라고 고백했다.

성룡이 영화 촬영으로 바쁘다보니 방조명은 모친과 주로 시간을 보냈고 커서는 곧바로 연예계 생활을 시작했다. 부자간의 관계는 계속해서 소원해져 갔고 방조명은 편지에서 ‘아버지 성룡의 사랑을 받지 못해 마약에 손을 댔다’고 말했다. 이어 방조명은 "아버지는 단 한 번도 내게 따뜻한 눈길이나 말을 건넨 적이 없다. 또 너무 바빠서 얼굴 조차 보기 어려웠다"고 성룡을 향한 원망을 드러냈다.

특히 방조명은 "아버지의 사랑이 그리웠던 그 시절 불량한 친구들을 만났고 대마초를 시작하게 됐다. 마음이 불편할 때마다 대마초를 찾았다. 결국 되돌리기 어려운 실수를 했고 나를 망치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모친 임봉교에 대한 그리움을 나타내며 자신 때문에 손가락질 받는 어머니에 대한 미안함을 표현했다. #1. #2. 분명 방조명의 행동이 정당화될 순 없지만 그는 청소년 시절 아버지의 불륜으로 어머니가 눈물로 밤을 지새는 것을 수 차례 지켜봐야 했고 본인도 아버지로부터 방치되어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자랐기 때문에 마음고생이 컸을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이 국내에 알려지자 팬들은 성룡을 변호할 목적으로 사건의 본질을 보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방조명의 단편적인 겉모습만 보며 ‘아버지 얼굴에 먹칠하는 아들’이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방조명이 대마초에 손을 댄 근본 원인은 성룡의 불륜 및 아들에 대한 방치, 무관심으로 인한 방황 때문이었다. 즉, 아들이 어긋나게 된데에는 성룡의 잘못이 결코 작다고할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성룡의 과오를 덮기 위해 모든 잘못을 아들 방조명 탓으로만 돌렸다.

성룡의 열성팬이었던 각종 방송매체들은 성룡을 옹호하며 아들이 문제라는 식으로 내용을 보도했으며 특히 한국내 유튜버들은 성룡의 잘못이 공론화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희생양이 필요했다. 결국 그들은 아들 방조명을 희생양으로 택했고 최대한 그를 나쁜인간으로 매도하여 성룡에게는 아무잘못이 없는 것처럼 면죄부를 주는 영상을 만들어 퍼트렸다. 이로인해 방조명은 한국에서는 천하의 불효막심한 ‘망나니 아들’로 지탄받았고 성룡은 철없는 아들때문에 고통받는 ‘죄없는 아버지’로 동정을 받았다. 이렇듯 팬들은 성룡이 비난받는 것을 막으려고 진실을 왜곡했다.

그리고 이 일을 성룡의 정치적 활동을 변명하기 위한 수단으로도 이용했다. 성룡의 지지자들은 그가 아들을 살리기 위해 이 사건을 계기로 큰 부성애를 발휘해, 중국정부와 어쩔 수 없는 협력을 시작한 ‘위대한 아버지'라며 칭찬했다. 그들은 성룡이 2014년 이전까지는 친중활동을 한적이 전혀없고 2014년 이후부터 아들을 지키기 위한 부성애 때문에 친중으로 돌아섰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것은 절대 사실이 아니다.

성룡은 아들 방조명이 마약혐의로 체포됐던 2014년보다 훨씬 이전인, 1997년 홍콩반환 시점부터 친중인사로 전향해 중국공산당 정부와 협력해왔다. 다시 말해 그가 아들을 위해 중국정부에게 고개 숙였다는 주장은 시간순서상 앞뒤가 맞지 않는다. 정확히는 친중공을 먼저 시작하고 이후에 아들이 체포된 것이 맞다. 그렇게 친정부활동을 이어가는 도중에 아들사건이 발생한 것이지 아들사건 때문에 친중을 시작한 것이 아니다.

성룡의 팬들은 1997년 홍콩반환 시점부터 2014년 아들 체포사건 사이에 틀림없이 있었던 성룡의 수많은 정치활동 자체를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며 부정했다. 물론 정말로 내용을 몰라서 그렇게 주장하는 이들도 일부 있겠지만 상당수는 실제로 그 기간 동안에 그와 중국정부의 협력활동이 있었고 그 모든 일이 아들의 마약사건 이전에 일어났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걸 인정하게 되면, 그들이 계속 발언해왔던 ‘성룡이 2014년부터 아들의 마약사건을 무마시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중공과 손을 잡았다’라는 주장은 거짓임이 들통난다. 그들은 이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속으로는 알고 있지만 겉으로는 애써 현실을 부정하고 있다.

더군다나 성룡의 팬들은 성룡의 정치활동을 변명해주고 감싸주기 위해 그의 부성애를 강조하고 있지만 성룡은 오히려 대마초 사건 전까지는 그의 아들에게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방치했으며 내연녀 사이에서 낳은 친딸은 아예 없는 사람으로 여기는 등 부성애와는 정반대되는 행동을 했다.

참고로 국내에는 중국에서 마약 관련 범죄를 저지르면 무조건 사형인 것처럼 잘못 알려져있지만, 실제로는 마약에 엄격한 중국이라도 다른 마약에 비해 위험성이 현저하게 낮은 대마초는 처벌 수위가 그렇게 높지 않은 편이다. 실제로 방조명은 6개월 복역 이후 출소했다. 하지만 한국내 성룡의 지지자들은 이 또한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중국내 모든 마약관련범죄는 무조건 사형이라고 끝까지 고집을 피운다. 그렇게 해야 아들의 사형을 막기위해 성룡이 어쩔수 없이 친중활동을 했다는 명분이 생기는데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성룡을 옹호할 명분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2015년, 성룡은 출소한 아들의 머리를 직접 깎아주며 그가 다시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게 독려하였다. 그리고 이후부터는 함께 같은 영화에 출연하는 등 아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가지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2016년 7월, 아버지와의 관계가 어느 정도 회복된 후 방조명은 성룡에게 닫혀있던 마음을 조금씩 열었다. 그리고 중국 매체와 영상 인터뷰를 통해서, 마약 혐의로 체포됐을 당시 그가 고백한 ‘부친 때문에 마약을 복용했다’라는 발언을 번복했다. 방조명은 "아버지 때문이 아니다. 그 때 나는 18세가 지난 성인이었다. 내 스스로가 했던 잘못된 선택이었고 다른 어떤 이들과는 관계가 없다. 아버지는 굉장히 멋있는 배우다. 힘든 일도 거리낌 없이 도전한다. 자기 시간을 가질 수 없을 정도로 바쁘다"라고 이야기했다.

7.3. 내연녀 및 딸 문제

이처럼 성룡은 정실부인에게서 얻은 아들에게는 자식으로써의 애정은 있었다. 그러나 그의 사생딸인 ‘오탁림’에게만은 잔인할 정도로 매정했다. 성룡은 내연녀 오기리와 사생딸 오탁림 두 모녀에 대해 언급조차 하기 싫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오탁림 또한 인터뷰에서 아버지 성룡에 대한 관심이 없다고 말하면서도 한편으로 친부가 성룡임을 알게된 후 미디어에서 긍정적으로 비춰지는 성룡의 모습을 보고 많은 상처를 받았다고 고백했다.

결국, 오탁림은 친딸인 본인을 외면하고 방치한 성룡에 대한 원망과 충격으로 정신적, 육체적으로 엄청나게 망가져 버렸다. 오탁림은 자살을 시도하고 정신병원에 오랫동안 입원하기도 했다. 그리고 긴시간 방황끝에 그녀는 레즈비언으로서 커밍아웃했다. 그런데 한국내 성룡의 지지자들은 성룡이 딸에게 행한 철저한 외면, 방치, 무관심으로 인해 그녀가 망가지고 커밍아웃했음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성룡의 팬들은 그녀에게 ‘레즈비언이 되어 아버지 성룡의 얼굴에 먹칠한 딸’이라며 성소수자 혐오적 비난을 퍼부었다. 아들 방조명 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성룡의 과오를 덮기 위해 모든 잘못을 딸의 탓으로만 돌렸다. 그들은 사건의 본질을 보려 하지않고 동성애자라는 단편적인 겉모습만 보며 그녀에게 손가락질했다.

한국의 언론, 방송매체들, 유튜버들은 성룡의 열혈팬이다. 성룡을 좋아하는 자체는 팬으로써 당연하지만, 문제는 성룡의 잘못을 숨기려고 타인을 죄인으로 몰아가는 것이다. 그들은 오직 딸의 커밍아웃에만 촛점을 맞췄다. 그리고 그녀에 관한 이야기 앞뒤정황을 모두 생략하고 일절언급하지 않으며 오탁림이 원래부터 레즈비언이어서 성룡이 딸을 외면했다는 식으로 사건을 보도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성룡의 과오로 인해 오탁림이 방황한것이고 그 방황끝에 레즈비언으로 전향한 것이다. 즉, 전후관계가 반대라는 뜻이다. 진실은 항상 그 스타의 팬들에 의해 왜곡된다.

1997년 성룡은 자신보다 18살 어린, 조카벌 나이의 여배우 ‘오기리’와 모임에서 만났다. 그리고 “본처와 이혼한 후 너와 결혼하겠다.” 라는 말로 그녀를 유혹했다. 성룡은 시도 때도 없이 오기리에게 집적거리며 남자로서 할 수 있는 온갖 이벤트와 선물 공세를 퍼부었다. 그녀는 처음에 이를 거부했으나 결국 성룡의 명성과 재력 앞에 굴복하고 말았다.

1999년 오기리는 언론에 성룡과 불륜관계를 맺어 임신했다고 고백했고 딸 오탁림을 출산했다. 성룡은 기자회견에서 "실수를 저지른 게 맞다"고 외도 사실을 인정했다.

2002년 딸의 안정적인 생활을 위해서 오기리는 홍콩을 떠나 상하이의 저택을 구입한다. 그녀가 구입한 집은 상하이에 원래 있었던 부동산을 처분한 돈으로 구입한 것이며 성룡으로부터는 어떤 도움도 받은적이 없다.

2005년 유치원에 다니고 있는 오탁림의 모습이 언론에 보도된다.

2007년 오기리는 딸을 '상하이 아메리칸 스쿨'에 입학시켰는데 한 언론에서 그녀가 매일 4시간씩 운전해서 딸의 등하교를 함께하는 사진을 찍었다.

2011년 오탁림은 아동신분증을 발급받으면서 아버지 이름 표기를 거부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당시 이를 보도했던 중국 세계일보망은 출생 이후 한번도 자신을 찾지 않은 성룡에 대한 서운함에 오탁림이 이 같이 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전했다. 오기리는 이미 딸에게 성룡이 친부라는 사실을 가르쳐 준 것으로 알려졌다.

2015년 3월, 15세의 오탁림은 엄마로부터 폭행을 당했다며 이 사실을 학교에 알렸고, 학교 측이 경찰에 신고했다. 오기리는 아동 학대 혐의로 체포됐다. 이후에 보석으로 풀려나 조사를 기다리면서 "딸에게 안정감을 주지 못했다." 라며 미안해 했다. 모친 오기리가 자신이 성룡에게 버림받았다는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해 지속적으로 딸을 학대했던 것이다.

오탁림은 병원에 입원해 안정을 취하면서 "엄마는 매일 밤 술을 마시고 줄담배를 피웠다. 엄마가 취하면 정신적으로 이상해져 모녀관계가 틀어졌다. 그래서 알콜중독인 엄마를 말렸지만 이를 듣지 않아서 도움을 청한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오기리는 2개월간 접근금지 명령을 받았다. 이후 두 사람은 다시 함께 살게 됐지만 모녀 불화설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성룡 측은 이같은 상황이 벌어진데 대해 현지 언론을 통해서 "전혀 알지 못하는 일"이라고 일축했다.

오탁림은 홍콩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아버지 성룡이 보고싶냐?"는 질문에 "생각해본 적 없다. 흥미없는 주제다. 그렇지만 상처받은 적은 있었다. 어렸을 때 낚시와 자전거를 좋아했는데 친구들이 아빠와 함께 등교하거나 낚시를 즐기고 자전거를 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상처를 받았다. 지금은 그에게 화가 나거나 보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아버지에 대해 어떠한 감정도 없다. 이제는 아버지 없는 생활에 익숙해졌다."고 말했다.

또한 "성룡의 작품을 본적 있느냐?"는 질문에 "나는 그를 전혀 알지 못한다. 그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평가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내 인생에 그는 없기 때문이다. TV를 통해 그를 보더라도 아버지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성룡은 그저 한 명의 배우라고밖에 할 수 없다"고 말했다.

2017년 3월이 되자 오탁림은 엄마를 또한번 학대 혐의로 홍콩 경찰에 신고했다. 그리고 그녀의 페이스북에 태국으로 떠난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2017년 3월 30일, 오기리는 변호사 및 동료들과 함께 성룡에 대한 ‘폭로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녀가 성룡과 처음 만났을 때 “아내와 이혼하고 너와 결혼하겠다.” 라는 말을 하며 너무나 잘해줬다는 것이다. 그녀도 처음에는 거부했으나 성룡의 명성과 재력 앞에 굴복하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꿈꾸며 임신까지 했는데 성룡에게 임신 소식을 통보하자마자 바로 잠수를 탔다고 말했다. 그리고 생활고에 시달리던 그녀가 성룡에게 경제적인 지원 요청을 했지만 '단 한 푼도 줄 수 없다'는 강경한 답변을 받았다고 말하며 눈물을 보였다. 오기리와 함께 동행한 변호사 겸 배우 옹정정은 "오기리는 딸 오탁림이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성룡에게 단 한 푼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

항간에 '성룡은 오탁림이 성인이 될 때까지 양육비로 매달 10만 위안(약 1,857만 원)의 돈을 지급했다'라는 루머가 있다. 하지만 이는 성룡의 공식발언이 아니라 성룡의 팬들이 그를 옹호할 목적으로 만든 거짓주장에 불과해 신빙성이 없다. 더군다나 오기리 측이 기자회견에서 "딸 오탁림이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성룡에게 단 한푼도 받지 못했다." 라고 발언했을 때 성룡은 이에 대해 어떠한 반박도 하지 않았다. 사실상 성룡은 오기리에게 양육비를 지급한 적이 단 한번도 없다.

2017년 4월 2일, 태국으로 떠난다는 오탁림이 홍콩 병원에 입원했는데 자신의 손목을 그어서 자살 시도를 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대해 성룡은 "애를 어떻게 키운 거야?" 라며 오기리를 책망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자살 시도 후 간신히 목숨을 건진지 몇 달이 지나자 오탁림은 학교를 자퇴하고 가출했다. 오기리는 딸이 가출 후 연락이 안되자 홍콩 경찰에 실종신고를 했다. 그녀는 "딸의 친구들에게 연락해봐도 다들 모른다더라. 딸의 심리상태가 매우 불안한 관계로 무슨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하루 빨리 찾아달라. 돌아오면 꼭 심리적인 문제에 대해 치료를 받게 하겠다"고 하소연 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7년 10월, 오탁림은 인스타그램을 통해 자신이 캐나다에 머물고 있으며 또한 공개적으로 ‘앤디 오텀(Andi Autumn)’ 이라는 12살 연상의 캐나다인 동성연인과 커밍아웃했음을 선언했다.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홍콩 현지 매체는 성룡에게 심경을 물었고, 성룡은 거의 남 얘기 하듯 "아이가 좋다면 그걸로 됐다."고 짧게 답했다.

그로부터 6개월후 노숙자 차림의 그녀가 캐나다에서 불법체류자 신세가 되어 폐품을 주워 생계를 이어간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하지만 성룡은 딸의 이런 소식을 듣고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이를 두고 중화권 네티즌들은 "어떻게 자기 딸한테 이럴 수 있지. 냉혈한인가?", "동물도 자기 새끼는 아끼는데 성룡은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아무리 혼외 딸이라도 그렇지 너무 잔인하다" 등의 댓글을 남기며 성룡을 비난했다.

2018년 4월 30일, 중국 시나연예는 "오기리가 캐나다에서 노숙하는 오탁림에게 매주 돈을 보내주고 있으며, 곧 딸을 홍콩으로 데려온다"고 보도했다. 결국 오기리는 오탁림과 여자친구 '앤디 오텀' 모두를 홍콩으로 데려와 돌봤지만 다시 그들을 내쫓았다. 그녀는 SNS에 특히 딸의 여자친구 '앤디 오텀' 에 대해 “내 딸에게 돈만 받아 쓸 줄 알지 아무것도 할 줄 모른다”면서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글을 올렸다.

2019년, 중국 유명 기업의 재벌 2세이자 연예계 마당발인 황이칭(黃毅清)은 자신의 SNS 웨이보에서 성룡이 과거 내연 관계였던 홍콩 배우 오기리에게 "성룡은 헤어지는 조건으로 오기리에게 8,000만 위안(약 133억~150억)을 지불했다. 내연녀 오기리가 임신했을 당시 성룡이 낙태를 권하자 그녀는 이를 빌미로 성룡에게 4억 위안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결국 그녀는 아이를 낳았고 성룡은 앞으로 다시 연락하지 않는 조건으로 8,000만 위안을 건넸다. 그리고 성룡의 혼외 딸 오탁림이 탈선과 캐나다에서의 노숙을 반복하며 험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성룡은 딸에게 생활비를 보내줬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글을 올리면서 그는 성룡과 친분 관계가 있음을 암시하듯 과거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도 함께 게시했다. 주장의 요지는 ‘비록 성룡은 오기리와 불륜을 저질렀지만 그래도 그녀에게 150억을 지불했으니 최소한의 도리는 했다’라며 성룡을 변호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이에 대해 오기리는 싱가포르 매체인 '8days'를 통해서 이같은 황이칭의 주장을 강하게 반박하며 "나는 성룡으로부터 단 한푼의 생활비도, 양육비도 받은 적이 없다."라고 밝혔다.

그런데 150억을 지불했다는 주장은 성룡의 측근인 황이칭이 성룡을 옹호하기 위해 만든 거짓루머라는 의심이 크다. 왜냐면 이전에도 황이칭은 성룡을 옹호하려고 딸 오탁림에게 양육비를 지원한 적이 없는데도 성룡이 지원해줬다는 루머를 퍼뜨렸다가 거짓임이 드러난 전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성룡이 오기리에게 150억을 지불했다는 확실한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다시 언급하지만 오기리와 그녀의 변호사 옹정정은 경제적인 어려움을 토로하며 성룡에게 금전적인 지원을 요청했지만 ‘단 한 푼도 줄 수 없다’는 강경한 답변을 받았다고 기자회견 등을 통해 여러차례 밝혔다. 딸인 오탁림조차도 ‘성룡에게 어떠한 연락이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오탁림은 캐나다에서 노숙하며 무료급식소에서 끼니를 때우고 있다. 만약 황이칭의 주장대로 정말로 성룡이 150억을 지불했다면 그녀는 노숙할 필요가 없으며 무료급식소에서 밥을 먹을 이유도 없다. 하지만 현실의 그녀는 노숙자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황이칭의 발언은 거짓일 가능성이 높다.

한편 한국내 방송매체와 성룡의 지지자들은 성룡에 대해 우호적이기 때문에 황이칭의 주장이 맞다고 기정사실화한다. 그리고 방송에도 성룡이 150억을 지불한 것처럼 보도한다. 그런데 중국내 방송매체와 팬들은 한푼도 받은 적 없다는 오기리의 주장이 맞다고 인정하며 그녀의 발언을 더 신뢰하는 편이다. 진실은 당사자만 아는 사항이기 때문에 확실한 증거가 나올 때까지는 성룡이 150억을 지불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한국팬들은 여전히 성룡에게 불리한 내용은 왜곡하고 유리한 내용은 확인되지 않았어도 사실인양 퍼트리기 때문에 150억을 지불했다고 단정해버린다.

2022년 7월 22일, 오기리는 ‘앤디 오텀’이 오탁림에게 저지른 죄상을 글로 작성, SNS에 올리며 공개적으로 앤디를 저격했다. 오기리는 앤디에 대해 "오탁림이 학교를 그만두게 만들고, 집에서 물건을 가지고 나가서 팔게 하고, 5년 동안 톱스타 행세를 하며 사람들이 자기들을 알아보게 하고, 아이와 앵무새처럼 커플룩을 입고 거리를 걷다가 주변에 의해 사진이 찍힌다"고 어린 오탁림을 휘두르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오기리는 "경찰에 신고해 저 외국인을 캐나다로 돌아가게 하려 했지만 아이가 그녀를 따라가려 했다. 방법이 없었다"며 "35살짜리 어른이 자기는 아프다며 23살짜리 아이에게 책임을 미룬다"고 충격적인 폭로를 이어갔다. 오기리는 이들을 방치한다는 이유로 낯선 이로부터 "왜 사느냐"는 비난의 전화까지 받아야 했다고 호소했다.

2023년 7월에는 영화 '라이드 온'의 홍보를 위해서 성룡과 그의 딸 역할을 했던 여배우가 함께 다정하게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리며 감동하는 영상이 공개됐는데, 이는 바이럴을 위해 만든 것이라는 게 드러나 다시 한번 복잡한 부녀 관계가 조명됐다. #

7.4. 기타 각종 문제

성룡은 1999년에 펴낸 자서전에서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지만 노년이 다되어 펴낸 자서전 <성룡: 철들기도 전에 늙었노라(成龍: 還沒長大就老了)>(2015)에서는 젊은 시절 성매매, 외도, 여성 편력, 사생아, 음주운전 등의 흑역사를 솔직하게 고백했다.

해당 자서전에서 성룡은 한때 매춘에 몰입된 적이 있었다는 어두운 과거도 털어놨다. 우연히 한 클럽에서 'No.9'로 불리던 나이 어린 '콜걸'을 만나 오랫동안 비밀교제를 했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밝힌 것. "처음 클럽에 갔을 때가 기억납니다. 전 속으로는 수줍었지만 어쨌든 대범한 사람처럼 행동했어요. 그때 만난 소녀가 'No.9'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두 번째로 방문했을 때, 나는 간단하게 'No.9가 여기 있습니까?'라고 물었죠. 그리고 그 후로는 매번 그랬습니다." 라고 썼다.

자서전에서 성룡은 왁자지껄한 분위기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매우 좋아했기에 매일 많은 사람들과 술을 곁들인 파티를 열었고 덕택에 식비만 1년에 1600만 홍콩달러를 넘게 썼다고 밝히기도 했다. 또한 매일같이 술을 마시다보니 음주운전이 생활화되어 술에 취한 채로 아침에는 포르쉐, 저녁에는 벤츠를 몰다 교통사고를 내어 차를 파손시킨 적도 있다고 고백했다. 당시에는 홍콩의 경찰들이 음주운전 단속을 그다지 철저하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논란을 피해 갈 수 있었다고 밝혔다.

이외에도 친구들을 위해 하루 저녁 200만 달러 짜리 디너 파티를 베풀기도 했고, 영국에서는 출연진을 모두 데리고 나가 2만 달러짜리 고급시계를 사주는 등 총 500만 달러어치 쇼핑을 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같은 책에서 성룡은 자신이 스타가 된 후 가난했던 시절 지위나 재산을 과시하며 자신에게 굴욕감을 준 사람들에게 복수하고 싶어서 무식한 졸부짓을 했다고 고백했다. 무명 시절 자신에게 면박을 준 명품점에 스타가 된 직후 성가반 팀원들과 함께 찾아가 옷들을 모조리 달라고 한 뒤 마치 쓰레기를 버리듯 옷을 바닥에다 툭 던지면서 한참을 쇼핑하다가 직원이 꺼낸 옷들을 모두 다 살테니 계산해달라고 했다거나, 무명 시절에는 길을 가다가 페닌술라 호텔을 지나쳐도 감히 처다도 못 봤었는데, 자신이 스타가 되고 호텔에서 열리는 파티에 초대되자 복장 규칙이 있는 것을 알았음에도 일부러 무시하고 반바지와 민소매 차림으로 호텔에 가서 직원에게 옷을 가져오라고 명령한 후 파티장에서 옷을 갈아입는 행동을 했다고 한다.

8. 가족

9. 여담

성룡의 실제 육성

* 천진난만 하고 장난스런 외모와는 달리 실제 목소리는 굵직하다. 장세준의 더빙[85]과 비디오의 목소리를 기억하는 사람은 의외라고 생각할텐데, 사실 1980년대 한국에서 상영된 성룡의 목소리는 성룡이 아닌 표준 중국어 전문 성우가 더빙한 것이고 출연한 영화 자체가 대부분 후시녹음을 했다. 광동어판은 거의 등영홍(鄧榮銾, Charles Tang)[86]이라는 홍콩 성우가 더빙을 했다.[87] 일반적으로 광동어는 성조가 많기 때문에 한국인이 듣는 입장에서는 표준중국어보다 거칠게 느껴진다. 성룡의 실제 목소리가 사용된건 1990년대 이후부터이다. 지금이야 나이가 들어서 외모와 목소리의 갭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전성기 때에는 목소리와 외모의 갭이 상당했다.

10. 가수 활동

한국에서는 성룡을 영화배우로만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실제로 성룡은 가수로도 많은 활동을 했다. 중화권에선 대부분의 배우가 가수 활동을 병행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성룡은 가수 활동을 많이 한 편이다. OST를 포함해 지금까지 100곡 이상을 발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초기에는 영어, 일본어, 광동어로 발표했으나 홍콩반환 이후에는 표준 중국어로만 발표하고 있다.

1992년 십대중문금곡 우수국어가곡상 수상 - 명명백백아적심

1992년 황비홍2의 남아당자강을 불렀다.

2005년 CCTV 춘완에서 남아당자강을 불렀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폐막식에서 유덕화와 함께 노래했다.

2009년 CCTV 춘완에서 노래했다.#

2017년 CCTV 춘완에서 노래했다.#

2018년 CCTV 춘완에서 오경과 노래했다.#

2018년 절강위시 링파오2019에서 덩차오남아당자강을 불렀다.#

2019년 CCTV 춘완에서 진위정, 등륜과 노래했다.

2020년 CCTV 춘완에서 만리장성영부도를 불렀다.#

2020년 절강위시 2020과년만회에서 노래했다.#

2021년 CCTV 춘완에서 노래했다.#

2022년 TVB 경축홍콩회귀조국25주년문예만회에서 중화역량#을 부르고 유덕화, 알란 탐, 사정봉, 진위정과 가창조국을 불렀다.#

2023년 CCTV 춘완에서 노래했다.# #

2023년 CCTV 원소만회에서 노래했다.#

2023년 CCTV 대만구영화음악만회에서 만리장성영부도를 불렀다.#

2024년 허난위시 춘완에서 중화역량을 불렀다.#

2024년 CCTV 원소만회에서 노래했다.#

11. 성가반

성룡이 키워낸 스턴트맨들과 함께 작업했던 무술가들의 집단. 홍금보의 홍가반[92], 원화평의 원가반과 함께 홍콩 영화계에서 고난도의 스턴트 장면을 작업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개개인이 각자의 무술을 선보이는 성향의 홍가반과는 달리, 이쪽은 모두가 하나가 되어 큰 그림을 그리는 무술을 시도하고 있다.

성룡은 자서전 <성룡: 철들기도 전에 늙었노라(成龍: 還沒長大就老了)>(2015)에서 자신이 이끄는 스턴트 팀인 성가반이 당시 홍콩에 존재하던 수 많은 스턴트팀들 중에서 돈도 제일 많고 제일 번듯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성가반 팀원들에게 5만 홍콩달러씩 줄테니 자비로 2만 달러 정도 보태서 각자 자동차 한 대씩을 사라고 명령했다고 털어놨다. 이후 성가반이 모일 때면 17대의 자동차들이 똑같이 움직였기에 그 뒤로는 어딜 가든 사람들이 "저들이 바로 성룡의 성가반이다."라고 알아보게 되었다고 한다.

구성 인원들은 아래와 같다. 다만, 위키백과의 정보를 가져온 것이라 영어 이름이기도 하지만, 중국식 이름을 알더라도 얼굴이 안 알려진 사람이 많고(...), 개중에는 한국인도 있다.

※ 이전 멤버와 현재 멤버 모두 포함되어 있다.

2017년 중국 저장TV의 한 예능 프로그램인 '왕패대왕패'라는 프로그램에서 신작 '쿵푸요가'의 홍보차 성룡이 출연했는데, 이때 성가반의 원년 멤버들이 성룡에 대한 좋은 기억들을 담은 인터뷰 영상을 방영했다. 성룡이 언제나 겸손했으며 인기와 부를 얻기 전부터 팀원들을 재정적으로 도와주고, 결국 성룡과 함께 작업한 것이 자신의 커리어에 큰 영향을 주었다며 성가반 원년 멤버들이 성룡과의 인상적인 추억들을 회고하자 스튜디오 내 많은 방청객들은 물론 성룡의 눈가도 붉어졌다.

영상 재생 후 성룡이 '원년 형제들을 못본지 오래 되어 보고 싶다.'라는 멘트를 하자 성룡과 함께 나와있던 현직 성가반 뒤로 인터뷰 영상에 출연한 원년 성가반들이 몰래 스튜디오에 들어오고, 성룡은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깜짝 놀라며 눈물흘리며 재회를 기뻐했다. 스튜디오는 눈물바다...

관련영상

한국어 번역버전

2017년 1월에 올라온 이 영상은 1,000만회 이상 조회되었다.

12. 이소룡과의 비교

성룡은 이소룡과 굉장히 많은 부분에서 비교된다. 물론 성룡은 이소룡의 사망이 임박한 시절 데뷔해서 그 둘이 겹치는 작품은 정무문용쟁호투밖에 없으며 여기에서조차 성룡은 스턴트맨 내지는 보조출연자였다. 그 외에는 이소룡이 활동하던 시절은 성룡이 아직 무명이던 시절이고 성룡이 본격적으로 활동하던 시기는 이소룡이 이미 사망한 이후였다. 두 배우가 활동한 시기도 다르고 정적이고 사실적인 격투연기를 했던 이소룡과 과감한 스턴트 연기를 했던 성룡은 근본적으로 다른 성격의 배우이기 때문에 이러한 비교는 우열을 나누는 것이 아닌 각 배우간의 특징,차이를 비교하는 목적으로 봐야 한다
사실 이렇게 나열하면 둘이 정반대의 스타일을 지녔다고 생각이 드는데, 이는 성룡이 어쩌면 의도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소룡이 죽고 이소룡을 따라하는 수 많은 아류 영화들이 나왔는데, 성룡은 오히려 이소룡의 정반대의 모습을 추구했다고 한다.[96]

13. 필모그래피

13.1. 영화

※ 출처 - Daum 영화, 영문 위키피디아. 엑스트라, 카메오도 포함되어 있다.
1962 대소황천패
1963 양산백과 축영태
1964 진향련
1966 양호십팔표, 대취협
1970 황강여협
1971 도불유인, 귀노천, 협녀, 광동소로호
1972 정무문, 흑연비수(합기도), 당인객, 향홍과객
1973 용쟁호투, 소노호, 북지연지,[97] 분노의 주먹, 여경찰,[98] 철왜, 마두대결투, 매복, 석파천경, 기린장
1974 제패, 금병쌍염,[99] 사왕일후, 악호촌
1975 화비 만성춘, 이소룡여아, 말잔치, 밀종성수
1976 신 정무문, 소림 목인항,[100] 소림 용호문, 유성검의 대결
1977 삼십육미영권, 이소룡 일대기 생과 사, 신 당산대형
1978 사학비권, 비도권 운산, 사형도수, 취권, 권정(금강혈인), 오룡대협(소권), 흑대한
1979 소권괴초(감독), 당산비권(용권), 조수괴초
1980 사제출마(감독), 배틀 크리크[101]
1981 캐논볼[102]
1982 용소야(감독)
1983 대복성, 소권괴초 2 - 용등호약, 오복성, 프로젝트 A(감독)
1984 쾌찬차, 캐논볼 2[103], 신용쌍향표[104]
1985 프로텍터,[105], 복성고조[106], 하일복성(칠복성), 용적심[107], 폴리스 스토리(감독)[108]
1986 용형호제(감독), 유계잡패군[109]
1987 A계획속집(감독)
1988 비룡맹장,[110] 폴리스 스토리 2 - 구룡의 눈(감독)
1989 미라클(감독)
1990 액션 진기명기[111], 화소도
1991 용형호제 2(감독)[112]
1992 폴리스 스토리 3 - 초급경찰[113], 쌍룡회,[114] 성룡의 시티헌터, 서장소자
1993 프로젝트 S, 중안조
1994 취권 2[115]
1995 성룡의 썬더볼트
1996 폴리스 스토리 4, 홍번구
1997 나이스 가이
1998 러시 아워, 성룡의 CIA, 뮬란(목소리)
1999 젠 엑스 캅, 희극지왕,[116] 빅타임
2000 이소룡 - 전사의 여행, 엑시덴탈 스파이,[117] 상하이 눈
2001 러시 아워 2
2002 아트 오브 액션, 턱시도
2003 트윈 이펙트, 메달리온(영화), 상하이 나이츠
2004 트윈 이펙트 2, 뉴 폴리스 스토리, 80일간의 세계일주, 대료애미려
2005 신화: 진시황릉의 비밀
2006 사대천왕, BB프로젝트
2007 러시 아워 3
2008 쿵푸팬더(목소리), 포비든 킹덤 - 전설의 마스터를 찾아서
2009 건국대업, 성룡의 쿵푸 마스터, 신주쿠 사건
2010 대병소장, 쿵푸팬더 홀리데이 스페셜(목소리), 스파이 넥스트 도어, 베스트 키드, The Legend of Silk Boy(목소리)
2011 쿵푸팬더 2(목소리), 신해혁명, 샤오린: 최후의 결전
2012 진바오의 모험(목소리)
2013 차이니스 조디악, 개인 맞춤 제작[118], The Unbelievable,[119] 폴리스 스토리 2014[120]
2014 구화영웅
2015 드래곤 블레이드: 천장웅사,[121] 신서유기 : 몽키킹의 부활(목소리)
2016 쿵푸팬더 3(목소리), 스킵트레이스 : 합동수사,[122] 레일로드 워
2017 쿵푸 요가, 지구: 놀라운 하루, 넛잡 2, 레고 닌자고 무비, 더 포리너, 블리딩 스틸, 해우잡화점
2019 퇴마 포송령 천녀유혼전, 위시 드래곤, 프로젝트X, 아이언 마스크: 용패지미
2020 뱅가드(急先锋)[123]
2021 총시유애재격리(總是有愛在隔離), 증경상애적아문 (曾经相爱的我们), 레일로드 워
2023 라이드 온 (龙马精神)[124], 닌자터틀: 뮤턴트 대소동, 히든 스트라이크
미정 신화 2

대표작 혹은 눈여겨 볼 작품들만 간단히 추리면 아래와 같다. 순서는 시간순서.

* 1978년 - 취권 1, 2
성룡의 명실상부한 대표작이다. 참고로 3편에는 성룡이 안 나온다.

* 1983년 - 프로젝트 A 1, 2
1편의 경우에는 성룡, 원표, 홍금보 트리오가 처음으로 공동 출연한 작품으로 이동진 평론가가 4.5점을 주었다. 2편은 성룡 단독 주연작으로 1보다 강화된 액션 장면과 홍콩의 중국 반환에 대한 당시 홍콩인들의 생각을 잘 볼 수 있는 각본이 시너지를 일으킨, 홍콩의 액션 영화 중에서도 명작인 영화로 손꼽힌다.

* 1984년 - 쾌찬차
성룡, 원표, 홍금보 트리오, 일명 가화삼보의 대표작.
* 1985년 - 폴리스 스토리 1, 2, 3, 4, 뉴 폴리스 스토리, 폴리스스토리 2014
성룡의 명실상부한 대표작이다.

* 1986년 - 용형호제 1, 2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와 비슷한 활극물이다.

* 1989년 - 미라클
1930년대 홍콩 거리를 완벽히 재현한 걸로 평가가 높고 당연히 제작비도 매우 많이 들었다.

* 1995년 - 홍번구
홍콩 영화 중 처음으로 미국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했다.

* 1998년 - 러시아워 1, 2, 3
헐리웃 진출 이후 최고 인기작이라고 볼 수 있다.

13.2. 드라마

2010 신화

13.3. 광고


한국에 방영된 광고만 서술한다.


[1] 한국어로는 성룡, 표준 중국어으로는 청룽, 싱룽(광동어). 신해혁명 이후의 중국인은 모두 표준 중국어 발음을 따라 쓰도록 되어 있는 외래어 표기법을 따르자면 일단은 '청룽'이라는 표기가 맞을 것이며 한국 기자들도 실제로 그렇게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절대 다수의 일반 언중은 수십 년 동안 불러온 성룡이라는 이름 대신 청룽이라는 이름에 생소해하는 상황이라 혼란이 있다. 중국어 한글 표기 논쟁 참고. 성룡 본인은 그냥 재키 찬으로 불러달라든지 아니면 한국 발음인 성룡으로 써달라고 한 바 있다. 이렇듯 표기와 대중들이 인식하는 차이와 더불어서 본인도 성룡이라 써달라는 요청도 있어서 그런지 기자들이나 대중매체에서도 다시 성룡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2] 영어 이름에서 쓰는 Chan(찬)이라는 표기는 '성룡' 베이스가 아닌 하술할 진항생(천강성)이란 이름을 베이스로 陳(진)씨의 광동어 발음을 사용하고 있다.[3] 1989년 대영제국 훈장 5등급(MBE) 수훈#[4] 본명으로 알려졌던이름 陳港生(진항생)
(Can4 Gong5 Sang1(찬공상), Chén Gǎngshēng(쳔강셩).
[5] 일부에서는 원적지인 안후이성 우후시 출신으로 보기도 한다. 링크[6] #[7] 아버지는 주홍콩 미국 총영사관에서 요리사로, 어머니는 가정부로 일하며 생계를 꾸려나갔다.[8] 한국 기준 고등학교 2학년.[9] 당시 광동소노호의 감독이었던 위해봉은 이후 기린장의 촬영감독을 맡았는데 이소룡 문서에서도 나오듯이 이소룡이 어릴 적부터 친구이던 이 영화 주연배우 소기린을 위하여 도운 것을 무단으로 영상으로 써먹는 짓을 해먹고 광동소노호 못지않은 허접 영화로 소기린은 듣보잡 조연배우나 활동하다가 1987년 교통사고로 죽었다.[10] 성룡이 취권으로 히트를 치자 부랴부랴 1979년 금흠 감독에 의해 조수괴초(刁手怪招) 라는 제목으로 재편집했는데 이젠 대스타가 되어버린 성룡을 쓸 수 없으니 다른 대역을 무술 실전 체험이라며 눈을 가리고 얼굴을 가리며 싸우게 하는 투로 재촬영하여 섞여놓았던 괴작으로 한국에서 1989년 취권 개봉 10주년이라며 개봉해 욕만 쳐먹었다. 당시 영화월간지 로드쇼의 독자 감상란에 대역을 성룡이라고 나오게 하는 씬이 참 허접이고, 성룡이 아니라는 사실이 전부 드러났다고 엄청 분노어린 악평을 할 정도였다. 2007년에 미국에서 DVD가 나왔다.[11] 당시 한 사람이 장비없이 날아간 거리로는 최고였다.[12] 여담으로 이소룡이 장봉을 세게 휘두르다가 실수로 부상입힌 성룡에게 다가가 사과의 의미로 다음 영화에서 조연이라도 꼭 출연시켜주겠다고 약속까지 했을 정도였지만, 《용쟁호투》 개봉 6일 전인 1973년 7월 20일에 사망했다. 다만 성룡 본인은 이때 이소룡에게 진심으로 감동받았는지 이후에도 한 번씩 이 일화를 회상하곤 한다. 이후 인터뷰 자리나 사석에서 맞은 부위가 하필이면 코라서 지금 코가 이렇게 크다며 본인도 우스갯소리로 그때의 일을 가끔씩 이야기하고 있다. 유튜브에서 검색하면 나오는 성룡의 말에 의하면 이소룡에게 맞은 후, 컷 사인이 났을 때 이소룡이 “이런 젠장!!”이라고 외치며 달려왔는데, 이미 이쯤엔 더이상 아프진 않았음에도 이소룡에게 안겨있고 싶어서 머리를 쥐고 아픈 척을 했더니 이소룡이 일개 스턴트맨인 자신의 이름과 배운 무술을 물어보더니 녹화하는 내내 자신을 알아주었다고 자랑을 한다.3분 30초부터 영화는 용쟁호투였으며, 전체 액션 시퀀스는 이 영상을 참고[13] 이는 북미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하며 성룡의 이름을 미국에 알린 성룡의 미국 출세작 <홍번구>의 영문판 제목 <Rumble in the Bronx>에서 따온 것으로, 어떻게 보자면 제목낚시.[14] 엉뚱한 사진을 박아놓아서 이것만 보면 전혀 예측을 할 수 없다.[15] 제임스 카메론 문서에 나오듯이 그의 감독 데뷔작 피라냐 2도 듣보잡 감독이던 카메론 뜻과 무관하게 편집된 영화인데 카메론이 유명해지자 그의 이름으로 비디오와 DVD, 블루레이까지 나와 홍보한다.[16] 나유의 부인이 《소림문》에 출연했던 성룡의 실력을 보고 추천했다고 한다.[17] 여기에도 비화()가 있다. 한 유명 무협소설작가이자 각본가가 성룡의 외모에 대해, 자신의 작품에 출연하기에는 전혀 맞지 않는 얼굴이라며 외모를 혹평한 것이다. 성룡은 그 작가와의 설전을 피하고, 조용히 성형외과를 찾아 수술을 했다고 전해진다. 이 작품은 각본을 무려 신파무협의 거장 고룡이 썼는데, 아마 고룡이 한 발언이 아닐까 싶다.[18] 참고로 유성검의 대결은 왕우 주연 영화이며 성룡은 페이크 최종 보스 뒤에 나오는 진 최종 보스이다. 1980년대 명절이면 국내에서 MBC 더빙으로 종종 방영했는데 왕우는 양지운, 성룡은 배한성이 더빙을 맡았다. 1998년 7월 11일 오후 1시 10분 토요 스폐셜 외화로 방영한 것이 가장 최신 방영했으며 성룡이 참 악역치곤 허무하다.[19] 출처 안타깝게도 부성은 1983년, 29살의 나이에 영화 촬영장으로 가다가 교통사고로 요절하는데, 만약 그가 계속 활동했었다면 1980년대 성룡의 위상은 지금 같지 않았으리라 평가받는다.[20] 이 당시 영화 《취권》의 인기는 실로 대단하여, 우리나라에서는 당시 서울의 단성사 한 곳에서만 상영을 했는데도 너무 많은 관객이 계속 몰려와 장기상영을 했고, 집계된 관객수는 서울에서만 약 90만 명이라는 대기록을 세운 바가 있다. 1970년대에는 관객이 10만 명만 넘어도 성공이라고 했다. 이는 요즘으로 환산하면 1,500만 명 정도에 가까울 것이다. 이 기록은 이후 서편제의 전국 100만 명 동원 때까지 깨지지 않았다.[21] 참고로 취권으로 뜨기 전의 성룡은 진지한 역 쪽이었다. 코믹 이미지로 성공한 다음에도 《화소도》(1990), 《중안조》(1993), 《뉴 폴리스 스토리》(2004), 《신주쿠 사건》(2009), 《더 포리너》(2017) 등 나름 꾸준하게 진지한 캐릭터와 내용에 도전하고 있다.[22] Jackie Chan: My Story(1998)에서 인터뷰.[23] 대복성이란 제목으로 개봉하고 비디오 출시, 2001년에 SBS에서 미니 특공대란 제목으로 더빙 방영했다.[24] 이전까지의 홍콩 액션은 느리면서 합을 주고 받는 약속 대련같은 액션이었지만 사제출마부터는 동작이 한층 빨라지고 진짜로 치는 것처럼 타격감이 살아있는 액션으로 바뀌게 됐다. 또한 공격하는 쪽뿐만 아니라 공격을 받는 쪽의 연출도 화려해지기 시작했는데, 이른바 '홍콩스핀'이라 불리는 강렬한 공격을 받아 날려간 이가 공중에서 회전하는 연출도 이 영화에서 처음 등장했다.[25] 심지어 미국 버라이어티 지로부터 아시아의 듣보잡 D급 배우라며 비웃는 기사로 매도당한 적도 있다.[26] 홍콩식 격투액션은 테이크당 조밀한 동작구성하에 주고받는 식이다 보니 호쾌해 보이지만 그에 비해 미국식 액션은 단타로 쓰러뜨리는 등 동작구성이 초라하다보니 밋밋하고 엉성한 느낌을 주며 치고받는 것보단 어지간해선 총기를 활용한다. 배틀 크리크 이후에 촬영된 1985년작 프로텍터에서도 여지없이 이 미국식 액션 공식을 따랐기에 성룡이 권총을 쏘는 장면도 있고 그의 파트너는 적과 격투할 때는 주먹 한두 방에 처리하는 등 이질감이 든다. 성룡은 이 미국식 편집판을 싫어해서 홍콩에 돌아와서는 일부 재촬영 후 편집을 다시해 홍콩판으로 새로 내놓았다.[27] 1996년, 《홍번구》가 미국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며 할리우드에도 성공적으로 재진출하였다. 버라이어티 지는 12년 전의 그 D급 배우가 이젠 A급으로 할리우드에 왔다고 보도하였다. 다만, 홍콩에서 만든 영화에서는 악동부터 열혈남아까지 다양한 캐릭터를 맡았지만, 2차 할리우드 진출 작품들은 캐릭터가 '웃기는 동양인 꼰대'로 굳어버렸다. 근래 들어서 나이 탓인지 젊을 때의 그 아크로바틱함이 줄어들어 많이 아쉽지만, 그래도 여전히 실력은 좋다.[28] 1950년 생인 제임스 글릭켄하우스는 1975년부터 영화 제작, 각본, 감독을 맡아 20년 동안 활약하던 미국 영화인으로, 집안이 엄청난 부자라서 누구 눈치 안 보고 마음껏 영화를 제작하던 인물이다. 세계적으로 페라리 광으로 유명하며, 무려 110대가 넘는 페라리, 그것도 개인 디자인으로 주문한 세계에서 1대뿐인 페라리가 수두룩하다. 2010년대에도 여전히 부자로 페라리 수집광으로서 활약 중. B급 액션물 《솔져》라든지 《엑스터미네이터》(제목만 보면 《터미네이터》 아류 같지만 완전히 다르고, 더 먼저인 1982년에 나온 영화이다. 화염방사기를 주무기로 싸우는 액션영웅을 다룬 작품으로 나중에 각본가가 글릭켄하우스가 빠진 2편을 감독했으나 쫄딱 망했다.) 같은 액션물은 흥행에 꽤 성공했고, 아들인 카메론 미셸 글릭켄하우스가 주연을 맡은 스릴러 《지옥의 슬로터》나 모험물 《타임마스터》까지 감독하고, 1995년 이후로는 영화 관련 일을 안하고 있다.[29] 국내에서도 이 미국 편집판으로 개봉했는데, 여성의 앞부분 나체가 등장하는 부분과 NG장면은 잘린 채 개봉되었다. 다행히도 1989년에 세경문화영상에서 출시된 비디오판은 성룡이 편집한 홍콩판으로 출시되었다. NG장면은 일본 개봉판 및 나중에 재편집판에서 나오고, 유튜브를 찾으면 볼 수 있다.[30] 시계탑 추락씬은 영화에서의 장면과 NG 장면까지 합쳐서 세 번이 나오는데 실제로는 더 많이 찍었다고 한다.[31] 1986년 국내 신문광고로 '성룡이 용형호제를 찍다가 몇 바늘을 꿰맸을까'라는 퀴즈를 내기도 했었다.[32] 스태프 중 한명이 쓰러져 실려 나가는 장면은 영화 《폴리스 스토리4 : 간단임무》 엔딩 크레딧에서 나온다. 《용형호제》 1편 엔딩 크레딧의 경우에는 당시 성룡이 얼마나 위험한 부상을 당했는지를 보여준다.[33] 이때 대역은 대부분 전가락과 성가반의 화성이 맡았다. 성룡은 당시 스케줄이 바빠서 부득이하게 자리를 비우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특히, 전소호의 동생이며 홍가반의 성룡 전담 스턴트맨이자 본인 역시 액션배우인 전가락은 홍금보와 성룡, 원표가 서로 두들겨 패고 싸운 다음에 등장하는 술집에서 엑스트라로 출연했다.[34] 문제는 그 범위가 엄청나게 넓다는 것이다.[35] 격투 전문가들도 그의 실력을 전문 파이터급의 격투센스를 가지고 있다고 평가한다. 실제로 무술 연출을 하는 이들 중에는 상당한 실력자들이 즐비하다. 원표, 견자단 등등은 상당한 무술 실력을 가졌다.[36] 프로젝트 A 1, 2, 폴리스 스토리 1, 2. 용형호제 1, 2.[37] 홍콩을 포함한 중화권에서 왕가위 감독과 쌍벽을 이룰정도로 '홍콩 뉴웨이브의 거장'이라는 평을 받는 감독이다. 허안정, 지하정, 완령옥, 장한가 등등의 수작을 연출했다[38] 1905~1934년까지 산 실존여배우 완령옥 일대기를 그린 영화로 온갖 연예계 소문에 시달리던 완령옥은 "귀신보다 무서운 게 사람의 입"이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 이 영화로 장만옥이 홍콩배우들 최초로 베를린 국제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게 된다.[39] 이 시기에 성룡이 한 인터뷰에서 "나는 머리가 깨지고 다리가 부러져가면서 영화를 찍는데, 다른 배우들은 카메라 앞에서 농담 몇마디 하고서도 내 영화보다 훨씬 수익이 좋다"라며 한숨을 쉬었다는 루머가 거의 사실처럼 돌아다닐 정도다.[40] 과거 두 사람은 람보 4에 같이 출연할 뻔 했는데, 역시나 각본 문제로 엄청나게 다투다가 성룡이 출연을 거부했다. 원래의 각본대로라면 성룡이 악당으로 나와서 람보 덕분에 갱생하고 람보를 돕는다는 줄거리인데, 성룡은 이 각본을 보고 아시아인 악역이 백인 덕분에 갱생하는 내용은 아시아에 대한 모독이라며 격분했다고. 그런데 어차피 성룡의 요구대로 각본을 바꿨더라도, 제작이나 연출면에서 두 배우가 서로 충돌했으리라는 전망이 압도적이다.[41] 유가량은 홍콩의 유명 무술가 출신으로 부친인 유심(劉湛)은 황비홍의 제자였던 임세영(林世榮)의 제자였다고 한다. 거기에 의형제인 유가휘(劉家輝, 본명 승금희(冼錦熙))와 유가영(劉家榮)도 무술가로 유명하다.[42] 공교롭게도 장학우의 영어 이름이 Jacky Cheung이라서 성룡과 비슷하다. 이쪽의 발음은 재키 청 또는 재키 정에 가깝다.[43] 천녀유혼에서 도사로 나온 오마(1942 - 2014)가 맡았는데 오랫동안 국내에서는 우마라고 오타로 알려졌다.[44] 물론 제작자로서 직접적으로 제작에 참여한 것은 맞다.[45] 성룡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다른 플랫폼 게임에서는 즉사로 끝날 상황들이 그냥 데미지만 입고 끝난다는 게 특징이다. 참고로 해킹롬도 존재하는데 얼굴을 피카츄로 바꾼 <Barve boy Kung Fu Pikachu>라는 게임으로 이 해킹롬은 Vinny가 리뷰한 바 있다.[46] 레이 우롱과 마찬가지로 성룡의 전담 성우인 이시마루 히로야가 목소리를 담당했다.[47] 애니메이션 오리지널 캐릭터.[48] 이름의 모티브는 웅대림(슝다이린), 기본 복장의 모티브는 이소룡이지만 격투스타일 자체는 성룡의 취권에서 모티브를 따왔다.[49] 메이는 재키 찬의 DNA를 복제한 클론 소녀라는 설정이다.[50] 김갑환과는 약간 악우에 가깝고 한국에서 함께 수련한 동기이며, 김갑환의 아내가 되는 김명숙과 사귈 때 중간에서 도와주었다고 한다. 성룡과 한국의 인연을 반영한 설정.[51]모탈 컴뱃 시리즈보라이쵸홍금보가 모티브로 보인다.[52] 이름이나 일부 격투 스타일에서 성룡을 오마주 했다.[53] 용호의권1편에서는 용형호제모습과 비슷한점이 있다.[54] 건 모습이 성룡하고 홍콩인들과 비슷해보이기도 하여, 스타가디언으로 합체시 적을 약올릴땐 취권을 하는것처럼 보이게 된다.[55] 우선 담당 성우부터 성룡이다. 실제로도 캐릭터성과 사용 권법도 성룡에게서 많이 따왔다고 한다.[56] 폴리스 스토리 2014 한국개봉을 앞두고 프로모션을 위해 한 말인데, 중화권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어, 성룡을 골수 중화 - 애국주의자로 알고 있던 중국인들에게 거부감을 주었다. 어쨌든 성룡은 중화권 언론에서도 상당히 친한적인 위치로 알려져 있다. 성룡이 저 말을 할 법한 게 한국에서 오랫동안 활동하기도 했고, 이소룡척 노리스와의 관계를 유지했듯 성룡 역시 취권 시절부터 한국의 영화배우인 황정리와 같은 관계를 유지하며 평생 절친으로 지내고 있다.[57] 2012년에 홍콩의 ‘시위 문화’를 지적하며 성룡이 했던 말이다.[58] 성룡과 비슷한 명절 단골 손님으로는 미스터 빈도 있었는데, 미스터 빈 단편들을 명절 때 MBC 등에서 틀은 적이 있다. 그외에 인터넷 이전 Prank 쇼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는 한 캐나다산 코미디쇼가 MBC에서 <폭소앨범>이라는 제목으로 미스터 빈 못지 않게 방영했었다.[59] 다만 김일이 SBS 폴리스 스토리4에서 딱 한 번 맡은 적도 있다. 이후 그도 사망하면서 거의 홍시호가 전담하고 있다.[60] 물론 이후 한국어 하는 거 보면 원어민 수준까진 아니라, 약간 과장은 있을 것으로 보인다.[61] 이 시기 홍콩 쿵후 영화들을 보면 불국사가 소림사 간판을 걸고 있는 장면을 볼 수 있다.[125] 다보탑과 석가탑 사이에서 와이어로 휙휙 날아가면서 액션을 벌이는 장면이 있기도 했다. 역사물이나 무협물을 찍으려면 동아시아 전통 건축물에서 찍어야 하는데 홍콩은 좁아서 그런 곳이 거의 없다보니 별 수 없이 한국 사찰을 빌려 촬영한 것이다.[62] 여기서 성룡은 육개장의 건더기를 젓가락으로 건져 먹고, 그 뒤 밥을 살짝 적셔서 후루룩 먹는다.[63] 나중에 MBC 주말예능에 특별출연했을 때도 한참 중국어로 얘기하다가 이경규가 "전에 오셨을 땐 한국말 잘하시더니?"라고 묻자 한국어로 "예전에는 잘했는데 지금은 못해요"라고 대답하여 웃음을 주었다.[64] 권상우가 이소룡을 동경하는 학생역할로 주연한 말죽거리 잔혹사, 성룡을 동경하는 주인공으로 나온 청춘만화를 보고 눈여겨 봤다고 한다.[65] 당시에는 서울관객 20만도 대박이던 시절이었다. 물론 그 당시 관객집계의 신뢰성은 감안해야 하지만, 저 정도 수치는 오차를 감안해도 엄청 많은 관객수다.[66] 장제스대만섬으로 떠날 때 진귀한 문화재를 수송선 1척 채울 만큼 챙겨가서, 문화재 규모나 양이 엄청나다.[67] 물론 마잉주의 경우 당시 중국국민당 소속 주석으로 민진당과 달리 하나의 중국을 지지하기 때문에 크게 엇갈리진 않을 수도 있다. 다만 국민당도 "중국 대륙의 민주주의가 실현되어야 하나의 중국이 가능하다"는 입장이라 공산당과 입장이 100% 일치하진 않는다.[68] 성룡이야 본심이겠지만, 다른 연예인들은 울며겨자먹기로 포스팅한 측면도 있을 수 있다. 이런 관제 리포스팅을 거절하면 중국 정부에 어떤 불이익을 당할지 알 수 없기 때문. 멀리 갈 것도 없이 한국만 해도 독재자 찬양가 만들지 않았다고 방송 활동 금지당한 신중현 사례가 있다.[69] 이 콘서트는 진압 직전인 5월 30일 열렸는데, 성룡을 포함한 많은 홍콩의 탑스타들(주윤발, 유덕화, 등려군, 증지위, 나문, 알란 탐, 장학우, 매염방)이 나와서 베이징 정부가 대학생들의 요구사항을 받아들이고 이들을 탄압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성룡은 이 콘서트의 마지막을 장식했다.[70] 이 영화는 아예 중국 경찰과 협력해 수사하는 게 주 내용이다.[71] 독실한 티베트 불교 신자이며 싱가포르로 국적을 바꿨다.[72] 캐논볼 2와 프로텍터를 촬영했을 때, 할리우드에서 굉장한 푸대접을 받았으며, 홍번구가 히트하자 그제서야 할리우드가 성룡을 인정했다.[73] 성룡의 할리우드 성공작인 2008년 베스트 키드와 2018년 더 포리너는 약간 맥락이 다르다. 베스트 키드는 배경이 중국인데다 미중 양국인의 우정을 다룬 영화라서, 2018년의 더 포리너는 중국 자본으로 만들어진 할리우드 영화서 1990년대말~2000년대 초반의 할리우드판 성룡 영화와는 조금 맥락이 다르다. 두 영화 모두 성공했다. 더 포리너는 블록버스터급 영화는 아니지만, 성룡이 코믹 캐릭터가 아닌 진지한 역을 맡았는데, 그럼에도 준수한 연기력을 보여주었다. 수익율만 보면 이전의 할리우드판 성룡 작품보다 훨 낫다.[74] 집안의 가난 때문에 학교를 자퇴하고 19세부터 영화에 출연했다.[75] 오(吳)의 광동어 발음.[76] 홍콩에서 태어났다는 뜻. 홍콩의 한자를 한국어로 읽으면 향항, 보통어로 읽으면 샹강, 광동어로 하면 헝공이다. 홍콩이라는 이름 자체가 제대로 된 발음이 아니라 당시 지배자였던 영국이 광동어 발음을 지금과 다른 표기법으로 표기한 이름에 유래한 것이다. 헝과 홍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hong이라고 쓴 것이다.[77] 이를 이용한 것인지 유청운, 탕웨이 주연의 2015년작 영화 '사랑, 세 도시 이야기'에서 주인공 부부의 아들인 진항생이 성룡이라고 소개되어 있다.[78] 진항생은 성룡의 어머니쪽 성을 사용한 이름이고, 방사룡은 성룡의 아버지 쪽 성을 사용한 이름.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은 본인의 부계식 이름이 밝혀진 것. 성만 바꾼 것이 아니라 부계식, 모계식 이름을 따로 갖고 있는 정말 보기 드문 케이스다.[79] 다이리 밑에서 일했었다고 한다. 공식적인 인터뷰로는 비밀임무에서 잦은 총기사고를 내서 빨리 해고되어서 사업을 했던 걸로 되어 있다. 홍콩에 간 것 자체가 임무를 위해서가 아니라 망명을 위해서였다고 한다.[80] 아버지 역시 가명인 진지평을 사용했고, 어머니 진월영(陳月榮)은 진려려(陳麗麗)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다. 광동 지역은 진씨가 많기로 유명하다. 아마도 아버지가 자신의 신분을 숨기기 위해 가족 전원이 어머니쪽 성을 이용한 가명을 쓴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는 제대한 후라고는 하지만 본명을 계속 숨긴 채 성룡의 영화에 카메오 출연도 몇 번 했다는 걸 생각하면 참...[81] 상술한 이유로 진씨인 진조명(陳祖明, 천주밍)이라는 이름을 사용했지만 원래 성으로 바꾼 케이스다. 다만 영어 이름은 여전히 제이시 찬이라 이쪽은 진씨이다.[82] 요즘에는 케이블에서 방송한다.[83] 짱구는 못말려에서도 패러디한 적이 있을 정도로 크게 성공했다.[84] Jacky Chan을 일본식으로 옮긴다면 쟉키 찬이 되어야 하겠지만, 陳이라는 성을 표준 중국어로 읽어서 Chen으로 만든 뒤 그걸 다시 일본식으로 표기한 것이다. 참고로 일본식으로 읽었다면 '친'이 된다. 이는 상당히 특이한 경우이다.[85] 성룡의 데뷔 초기 무협극은 대체로 배한성이 담당했다.[86] 대표작은 기동전사 건담샤아 아즈나블.[87] 예를 들어 폴리스 스토리 트릴로지 중에서 1,2가 등영홍의 목소리이고 3이 성룡의 목소리이다.[88] 홍금보는 특히 스턴트에 있어서는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으며, 스턴트맨들의 안전을 고려하지 않고 강렬한 스턴트를 추구하는 것으로 악명 높다. 대신 강단있고 강직한 성격 덕분에 삼합회로부터 위협을 받던 중국 배우들을 보호하는 데도 앞장서왔다.[89] 원래는 4위로 들어왔었으나 3위였던 레벨리온 팀의 차량 검차과정에서 규정위반이 발견되어 실격처리되었고, 3위로 올라갔다.[90] 이 중에서 장만옥과 관지림은 성룡, 이연걸, 유덕화, 견자단, 주성치 등 당대 홍콩 대표 남자 배우들과 모두 영화에 출연한 경력이 있다.[91] 정확히는 베트남 화교 출신이었다가 월남전 때 홍콩으로 도피, 이후 미국으로 건너갔다.[92] 1999년 해체[93] 광동어 발음을 Ze라고도 쓰기도 하고 실제 발음은 '제'나 '쩨'에 가깝다. 한국에서 김씨를 Kim이라고 쓰는 격.[94] 아마도 2층에서 거꾸로 떨어지면서 대형 항아리를 몸으로 부수는 스턴트였던 듯.[95] 이마저도 사망유희는 촬영 도중 용쟁호투의 제작때문에 본인이 완성하지 못하고 사망한지라 실질적으로는 4작품이 전부다.[96] 이소룡이 항상 하이킥을 하니 본인은 로우킥을 위주로 액션씬을 찍었다던지[97] 《금병쌍염》과 마찬가지로 단역으로 출연했는데, 염정영화라 성룡 본인이 흑역사 취급 한다. 참고로 염정영화는 우리나라로 치면 에로영화로 볼 수 있는데, 그렇다고 작품성이 떨어지는 3류 포르노는 아니다. 《북지연지》와 《금병쌍염》은 홍콩의 손꼽히는 거장인 이한상 감독의 대표작이다.[98] 성룡이 찌질이 악역 행동대장로 나옴에도 불구하고 5년 후 성룡이 《취권》으로 엄청 유명해지자 제목이 영 타이거(한국어 버전)/럼블 인 홍콩(영어 버전)으로 바뀌고 비디오시장에 나왔는데 마치 성룡이 주인공인 것처럼 포장지를 왜곡되게 묘사해 놓았다. 또한 2016년에 《성룡의 폴리스맨》이라는 제목으로 재개봉하였다. 그리고 여기에 낚여서 안빡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비중이 단역 수준은 아니다. 악당들 중에는 그나마 대사가 있는 편이고, 캐릭터 자체가 플룻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중요한건 이 영화 자체의 완성도가 상당히 떨어진다는 점 . 다만 당시 홍콩 사회의 모습이 어땠는지 알아보기엔 썩 괜찮은 영화다.[99] 무대랑을 도와주다 서문경에게 밉보여서 서문경 패거리에게 끔살 당하는 단역으로 출연했다.[100] 소림 목인방이라고도 하며 항 이라는 단어는 거리 또는 골목을 뜻하지만 건물에 있는 좁은 통로, 복도를 의미하기도 한다. 영화상에서의 표현은 소림사에 있는 목인들의 길목으로 표현했다.[101] 첫번째 헐리웃 데뷔작. 그러나 헐리웃 영화 제작 스타일은 성룡과 맞지 않았고, 헐리웃 영화 스탭들은 홍콩에서 넘어온 동양배우의 의견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뜻때로 액션신을 찍었다. 결국 영화는 밋밋한 액션장면으로 흥행에도 실패했다. 국내 비디오판 제목은 '성룡의 살수호'라는 제목으로 출시되었다.[102] 카메오 출연.[103] 카메오 출연.[104] 카메오 출연.[105] 촬영은 1984년, 개봉은 1985년.[106] 《폴리스 스토리》 촬영 준비(pre-production)와 프로텍터의 아시아판 추가촬영으로 인해 바빠서 성룡이 출연한 영화 중 유독 대역 장면이 많은 작품. (《복성고조》의 개봉일은 1985년 2월이었고, 《폴리스 스토리》의 개봉일은 1985년 12월이었다.) 영화의 초반부에 홍금보(극 중 자고채 역)가 동료 죄수들에게 임청하의 사진을 보여주는 장면이 있고, 영화 마지막 장면은 놀이공원과 놀이공원 유령의 집 내부에 있는 악당들의 아지트에서 펼쳐지는데, 홍금보(극 중 자고채 역)가 칠복성 형제들과 원표를 구하기 위해 성룡(철력위/계골초, 2가지 이름으로 나옴)의 지시에 따라 악당들과 접선하면서 성룡의 사진을 보여줄 때 성룡의 모습이 《폴리스 스토리》 극 중에 경찰으로 분한 성룡의 사진이다.[107] 《폴리스 스토리》의 본격적인 촬영과 편집 작업으로 인해 같은 해 출연한 복성고조, 칠복성 등과 마찬가지로 성룡 출연분에는 대역을 많이 썼다.[108] 이 영화야말로 성룡 본인과 성룡 팬들이 최고의 수작으로 꼽는 영화다. 그런데 이 영화에 숨은 비화가 있는데 이는 바로 한국 개봉 문제다. 1985년 12월 홍콩에서 개봉한 후, 예정대로라면 1986년 새해나 설 연휴에 개봉했어야했는데, 당시 5공 정부 심의에 걸려서 1988년 7월이 되어서야 개봉했다. 이유는 사실적인 폭력(격투)장면과 비리경찰이란 주제를 들어서 개봉을 미루다 정권이 6공으로 바뀌고 나서야 겨우 개봉했다. 한국 개봉일이 7월 23일인데, 하필 하루 전날 개봉한 《영웅본색 2》에 밀려서 흥행성적은 서울관객 19만 명으로 끝났다. 《영웅본색 2》는 서울관객 26만 명.[109] 카메오 출연.[110] 이 영화도 복성시리즈와 마찬가지로 폴리스 스토리 2의 촬영일정과 맞물려 유독 대역이 많이 들어간 영화다. 특히 마지막 장면인 마약공장 격투 장면에서 성룡의 대역장면(전가락과 화성이 담당.)이 떡하니 나온다. 베니 어키데즈와 1대1 격투에서 성룡이 사이클론킥으로 베니를 무력화하는 장면(홍가반의 성룡 전담 스턴트맨인 전가락이 대역을 했으며 베니도 대역이다.)과 나오는데 돌려차기로 마무리(이 장면은 화성이 대역)하는 장면은 조금만 자세히 보면 성룡이 아님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극 중반부 온미령과 유람선 선상 데이트 장면에서도 격투 장면이 나오는데, 유람선 야외 계단에서 몸을 뒤로 돌려 뒷발차기 하는 장면도 성룡이 아닌 대역(역시 전가락이 대역)이다.[111] 다큐멘터리.[112] 감독 크레딧에 성룡 이름이 들어간 마지막 영화. 성룡의 골수 액션이 들어간 최후의 작품이다. 이 영화를 끝으로 성룡은 코믹의 비중을 높이고 액션의 비중을 줄이게 된다.[113] 촬영은 1991년, 개봉은 1992년.[114] 홍콩 영화감독협회 기금마련을 위해 만들어진 작품으로, 서극과 임영동이 공동감독했다. 서극은 후반부 자동차검사장 격투 장면에서 카드놀이를 하는 회사원으로 나오는데, 중간에 수염 나고 마른 사람이 바로 서극 감독이다. 이외에도 여러 감독들이 카메오로 나오는데 왕정, 오우삼, 유가량이 나오니 잘 찾아보는 것이 좋다. 특이하게도 두 명의 성룡이 주인공인데, 영상 합성 방법 중 하나인 크로마 키를 정교하게 구사하여 지금 봐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한 화면 속 두 명의 성룡을 볼 수 있다.[115] 감독 크레딧에 올라간 이름은 황비홍의 직계 제자로 유명한 유가량이지만 제작 초기부터 정석 액션에 더 공을 들이는 유가량과 아크로바틱한 액션에 공을 들이는 성룡간의 불화가 끊이지 않았고 결국 유가량이 메가폰을 놔버려서 성룡이 나머지 분량을 직접 감독했다고 한다. 사실상 성룡이 감독한 작품인 것.[116] 카메오 출연.[117] 서울 하얏트 호텔이 촬영지로 나왔다.[118] 카메오 출연.[119] 단편 영화.[120] 원제는 《폴리스 스토리 2013》이며, 중국에서는 2013년 12월 개봉했으나 국내에서는 2014년 개봉하며 제목이 변경되었다.[121] 로마 병사들이 중국에 오게 되며 벌어지는 이야기로, 로마 황제 역은 자그마치 에이드리언 브로디에, 로마 병사 역은 존 쿠삭. 최시원도 출연한다.(《해피투게더》에서의 약속을 지킨 모양.)[122]잭애스》의 쟈니 낙스빌과 판빙빙과 함께 하기로 한 작품. 연정훈도 출연한다고 한다. 원래는 2014년 말이 목표였으나 한참 연기되었고, 2016년에 개봉했다. 감독은 다이 하드 2,클리프행어, 컷스로트 아일랜드,딥 블루 씨로 알려진 레니 할린.[123] 급선봉이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있다.[124] 액션/코미디 영화. 개봉은 5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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