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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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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항목에는 가장 대표적인 용어 하나만 표기하며, 황실과 왕실에서 사용하는 용어가 다를 경우 '/' 기호로 구분한다. 두 단어가 밀접한 관계에 있거나 각기 다른 서열과 지위를 가질 경우 ',' 기호로 구분하여 표기한다.
-기호 또는 빈칸은 동아시아 황실/왕실 체제에서 해당 의미를 나타내는 단어가 없거나 관련 문헌에서 확인되지 않는 경우를 나타낸다. 당시에는 이러한 경우 특별한 호칭 없이 이름이나 관직명을 사용했다. 그러나 본 틀에서는 문헌 기록이 없더라도, '왕세녀', '국서'처럼 근현대에 새롭게 자리잡은 번역어의 경우 포함해 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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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왕후와 왕비3. 황비4. 한국사의 경우
4.1. 고대4.2. 고려 시대
4.2.1. 고려 초기4.2.2. 목종 이후4.2.3. 원 간섭기~고려 말
4.3. 조선시대
5. 오스만 제국6. 카툰7. 나무위키에 문서가 개설된 왕의 정실부인
7.1. 실존 인물
7.1.1. 한국사7.1.2. 세계사(동양)7.1.3. 세계사(서양)
7.2. 가공 인물
8. 언어별 명칭

1. 개요

왕비()또는 왕후()는 아내를 뜻하는 한자어다.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뜻을 가질 수 있다.

{왕비}{왕후}
제후국에서 가장 높은 신분의 여성이기는 하지만, 여왕과는 다른 개념으로 여왕은 본인이 여성 군주일 경우, 왕비는 남성 군주와 결혼한 여성이다. 내명부 수장이면서 외명부의 수장인데 조선의 경우 모든 여성들의 수장이였다.[1] 현대식으로 말하자면 대통령 영부인겸 여성가족부 장관 정도 된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사실 전혀 다르다. 가장 신분이 높은 여성이니 비슷하다고 생각할수도 있지만 사실 현대에는 왕비와 매칭되는 직업 자체가 없기도 하고. 애시당초 대통령 영부인은 그 어떤 법적 근거 자체가 존재하지 않으며 누군가의 아내여야 한다는 점에서 대통령이 임명하는 여성가족부 장관과도 전혀 다르다.

편의상 본 문서는 왕의 정실부인에 대해서 다룬다.

2. 왕후와 왕비

동아시아에서 군주의 정실부인은 국가의 정체(政體)마다 명칭이 달랐다. 황제국은 황후(),[2] 제후국은 왕비(王), 자주국(외왕내제국)은 왕후()라고 한다.

동양 한자문화권은 일부일처다첩제[3]가 대부분이었고 왕의 정실부인과 왕의 첩들의 위계질서를 구분하는 후궁 제도가 있었다. 한국사에서는 신라, 고려 때까지는 정실부인이 여러 명+후궁도 여러 명인 경우가 있었는데 2번째 이후 정실부인(차비)들도 엄연히 정식 왕비라 후궁보다 격이 높았다. 조선 초부터 정실부인은 사별 후 재혼하지 않는 이상 단 1명, 그 외엔 후궁으로 규정된다.

본래 군주의 정실부인이 받을 수 있는 작위는 후() 뿐이고, 비()와 빈()은 후궁 또는 제후의 정실부인이 받는 작위였다. 갑오개혁 이후의 조선과 대한제국에서 비(妃) 작위를 받은 후궁으로 황귀비 엄씨[4]가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후(后)와 비(妃)를 동급으로 여기는데, 이는 고려 시대원 간섭기조선 시대에서 비롯된 것이다. 고려는 전체적으로 조선만큼 내명부 체계가 엄격하지 않았고 원 간섭기부터는 체계에 혼란이 생겼다. 원 간섭기 이후부터 고려 왕의 정궁은 왕비로 격하되었다. 원 간섭기 때가 끝난 후로도 고려에서 왕후 칭호를 찾아보기 힘들고, 일부다처제 성격을 띠게 된다.

조선명나라청나라의 제후국이었으나 자주성을 암묵적으로 내세워 고려처럼 황제국 군주에게만 붙일 수 있는 '조/종' 묘호를 임금의 사후에 올린 것처럼, 왕비(중전)에게도 사후 '왕후'라 격상 추존하는 형식을 택했다. 그래서 조선 왕비의 시호에는 왕비란 단어가 없고 왕후란 단어가 있는 것이다. 실제로 광해군일기의 기록을 보면 광해군이 자신의 생모인 공빈 김씨를 왕후로 추숭하려 하자 신하들이 반대하면서 "왕후가 아니라 왕비로 추숭하자"고 주장한 기록이 존재한다.[5]

한국사에서도 자주국일 때는 왕의 정실부인을 왕후로 불렀지만[6][7] 이 사실은 인지도가 높지는 않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자주국 왕의 정실부인을 왕후가 아닌 왕비로 호칭하는 경우가 많다. 서양과 동양의 작위 체계를 1대1 대응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므로 서양 국가 군주의 아내를 왕후, 왕비 신경쓰지 않고 그냥 왕비로 번안하지만, 한자문화권에서의 왕비는 전술되었듯 제후국 왕의 정실부인이므로 정확한 번안이라고 보기에는 애매하다.

queen은 여왕, 의 아내, 왕의 어머니 등 다양한 뜻을 지니고 있다. 여왕은 queen regnant, 왕의 아내는 queen consort, 왕의 어머니는 queen mother라고 하는 것이 정식이지만 대체로 줄여서 queen이라고만 하기 때문에 오역할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3. 황비

간혹 순정효황후를 황비라고 부른다거나, 순헌황귀비에 대해 설명할 때 '황귀비'라 써야 할 부분을 '황비'라고 쓴 경우가 발견되는데,

4. 한국사의 경우

4.1. 고대

왕성(姓)은 부여씨(夫餘氏)로 ‘어라하'(於羅瑕)라 부르며, 백성들은 ‘건길지'(鞬吉支)라고 부르니 이는 중국어로 모두 '왕'이라는 뜻이다. 왕비는 ‘어륙'(於陸)이라 호칭하니, 중국어로 '왕비'라는 뜻이다.
《주서》(周書) 〈이역열전〉(異域列傳) 백제(白濟)
우리 백제왕후(百濟王后)는 좌평(佐平) 사택적덕(沙乇積德)의 딸로서 오랜 세월[광겁曠劫] 동안 선인(善因)을 심으시어 금생에 뛰어난 과보[승보(勝報)]를 받으셨다.
번역문 출처: 김상현, "금제사리봉영기", 익산 미륵사지 석탑 사리장엄, 국립문화재연구소 (2014), 59.

고구려백제, 가야, 발해 왕비들의 시호는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중국의 기록에 백제에서는 왕비를 '어륙'이라고 불렀다고 전해지고, 일본서기에서는 고구려와 백제의 신분 높은 부인을 '오리쿠쿠'라고 칭한 것을 볼때 ㅇㄹㅋ 자음을 쓰는 단어가 왕비의 칭호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백제의 금석문인 무령왕릉 묘지석, 미륵사지 석탑 봉영기 등에서는 왕후 칭호를 사용하였음이 기록되어 있다.

중국 문화가 들어온 후 신라의 왕비들은 주로 부인이라는 형식의 시호로 삼국사기 등에서 전해진다. 후술할 고려에서도 부인 칭호를 쓰기도 했지만 신라의 경우 정실부인도 부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단 여러 부분에서 나타나는 단편적인 기록을 통해 신라 등의 나라에서도 당대에는 왕태후, 때로는 황후 등의 중국식 미칭 역시 사용했던 것은 확인할 수 있다. 가령 문명왕후는 문명황후로 기록되기도 했다.

무열왕 이후로 생전에는 ~부인이라고 부르다가 죽으면 왕후로 추존하는 식으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문명왕후 이후의 모든 왕비들에게 왕후가 쓰인 건 아니지만, 이는 기록 누락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

대체로 1명의 왕의 정실부인만 기록되지만, 왕의 2번째 정실부인이 기록되는 사례가 종종 있는데, 이에 대한 내용은 차비 문서 참고.

4.2. 고려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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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1. 고려 초기

초기 고려에서는 왕후(王后)와 부인(夫人)으로 나눠 전자를 정실로, 후자를 후궁으로 삼았다. 호족과 결혼할 때는 '지역+(궁/원)부인'이었다. 왕건후궁들이 호족의 여식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이 부인들의 칭호 대다수가 출신 지역의 이름을 따서 '지역+(원)부인'이라고 불렸다. 예를 들면 광주지역의 대호족 왕규의 딸들은 각각 광주원부인, 소광주원부인이라는 칭호가 내려졌다. 성종 대까지 고려시대의 후궁제도는 비교적 단순하게 나뉘고 정리가 되지 않은 것이 보통이었다.

한국사상 가장 많은 후궁을 둔 태조 왕건의 경우도 왕후가 6명이고 부인은 24명이었다. 그런데 정처인 신혜왕후가 하동군부인이라고 불린 적이 있고, 고려사 열전에 따르면 생전 하동군부인으로 중국에서 책봉받았고, 신혜왕후가 시호였다. 대부분의 다른 부인들이 '~부인'으로 불린 것으로 보아, 왕후들도 생전에는 왕후로 칭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장화왕후신명순성왕후는 아들이 왕이 된 경우이다. 신명순성왕후는 왕후가 된 기록이 전해지지 않고, 왕태후로 추존된 기록이 남아있다. 신정왕후 황보씨는 왕의 장모이자 손자가 왕이 되면서 왕후 추존, 신성왕후는 손자가 왕이 되면서 왕후 추존, 정덕왕후는 외손자가 왕이 되면서 추존된 것으로 보인다.

광종 이후 족내혼을 하면서 '건물 이름+전/궁/원부인' 형태로 불렀다. 왕태후>왕후(왕의 정처 특히 왕족 출신, 어머니, 조모, 외조모)>궁부인>원부인>궁인 순으로 보인다.

4.2.2. 목종 이후

보통 중후기는 왕태후>왕태비(왕대비), 왕비>궁주(궁비)>원주(원비)>궁인 혹은 택주 순이었다.

이 문단에서 보통 목종부터 원 간섭기 이전인 원종까지를 일컫는 고려 중기에는 왕비와 후궁에게 보통 건물을 하사하고 그 건물의 이름을 따라 ㅇㅇ궁주()[11], ㅇㅇ원주[12] 등으로 불렀다. 이는 고려 초기의 ㅇㅇ궁부인, ㅇㅇ원부인이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이와 별개로 왕태후(왕의 어머니이거나 할머니)-왕후,왕비-ㅇ비(귀비,덕비,현비,숙비)[13] 순으로 봉작을 내렸다. 예를 들어 용신왕후는 처음엔 혜비(妃)로 책봉됐고 후에 정신왕비(妃)로 봉했다. 죽은 뒤 용신왕후라고 추증했다. 왕후 ㅇㅇ궁주 귀비 ㅇㅇ원주, 덕비 ㅇㅇ궁주, 왕비 ㅇㅇ 전주 등으로 동시에 봉작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실생활에서는 궁주(전주)나 원주로 많이 불리면서 이 탓인지 후기까지 궁주인 동시에 비(妃)인 경우가 많았다.

왕후나 왕비가 중궁(中宮)이기는 했지만 조선시대와 달리 ㅇ비(妃)와 엄격한 차이가 있지 않았다. 또한 생전 왕후와 왕비는 보통 1명씩이었으며 칭호가 공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생전 왕후의 경우 몇 명 없고 왕의 마음대로 세웠기 때문에 왕후가 없는 경우도 많았다. 생전 왕후는 원정왕후, 경성왕후, 의정왕후 등이 있다. 생전 왕후는 보통 왕족이었지만 정종의 왕후인 용의왕후(容懿王后)처럼 왕족 출신이 아닐 때도 있었다. 반면 왕비의 경우 칭호가 기록에서 다수 발견되고, 왕족 출신이나 후궁 중 한 명이 되었다.

왕족 출신은 특별하여 왕녀일 경우 무조건 생전 왕후, 왕비이며 왕족 출신일 경우 최소한 궁주부터 시작하여 사후에 왕후로 추증되었다. 그리고 생전에 왕비의 자리에 올랐던 자도 사후에 왕후로 추증되었다. 왕비의 경우 소생이 없어도 자리에 올랐다면 왕후로 추존하였다. 왕을 낳았으면 태후가 되거나 고인인 경우에 남편이 왕후로 추숭을 하고, 아들이 즉위하면 한 단계 높은 태후로 다시 추존했다. 그러나 원 간섭기에 왕의 정비(正妃)가 원나라 공주로 정해지면서 이 규칙은 사라진다.[14]

이러한 규칙은 현종의 비를 사후 추존할 때 과도기적 면모를 볼 수 있다. 문종 때는 생전 왕비가 아니었고 자식도 없었던 원목왕후에게도 왕후의 시호를 올렸다. 대신 능호를 만들지 않고, 에서 제사를 그만두는 등 차등을 두었다. 이는 신하들이 또 다른 현종의 비 원순숙비(생전 경흥원주 덕비)의 장례를 치를 때 문화왕후(문화대비)의 예에 의하여 장례를 치르되 그 능호는 없이 했는데, 원순숙비와 원목왕후 둘 다 선왕의 비이니 예우가 달라서는 안 된다고 건의했기 때문이다. 한편 선평왕후의 경우, 의종 때 왕태비로 책봉되었다. 이유는 생전 왕비였으나 자식이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죽은 뒤 왕후로 추존되었다. 반드시 자식이 없는 왕비가 태비(대비)로 추존되는 것이 아니며, 선왕의 비라면 태후 밑의 대비 격으로 대우했던 듯하다.

궁주가 원주보다 높았고, 전주가 궁주와 비슷하나 격이 조금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원주인 후궁이 궁주로 승진하거나[15], 궁주는 선왕의 후궁[16] 왕비, 높은 후궁 등을 가리켰고 공주 역시 궁주(전주)로 봉작했다. 공주 역시 건물을 내려 그 건물의 이름을 따서 칭호를 정했다.[17]

전주는 후궁에서는 잘 볼 수 없는 칭호이며 좀 더 높은 신분이었다. 왕태후는 전주였다. 태후가 거주하는 곳의 건물이름은 주로 ㅇㅇ전이었기 때문이다. 왕후, 왕비, 가끔 공주의 칭호에서 보인다.

궁주는 보통 왕족이나 귀족 출신 여인이었고 양인 이상 궁인이 총애를 받고 아들을 낳은 경우 봉작을 받고 승격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혜종 때 궁인인 애이주를 제외하고 원성왕후, 정종의 왕비 용의왕후, 선종의 후궁 원신궁주이다. 이들과 대조적으로 무비는 3남 9녀를 낳을 정도로 의종의 총애를 받았지만 관비 출신이었기 때문에 봉작받지 못했다. 고려시대에 천민 출신 궁인이 봉작을 받은 것은 금기였다.

궁인의 칭호 중 목종 때 요석택궁인(邀石宅宮人)이라는 칭호가 보여 궁인의 칭호가 택주로 발전했을 가능성도 보인다. 또한 강종의 서녀가 정화택주(靜和宅主)의 칭호를 받았으므로 딸이 어머니의 작위를 따라갔던 궁주 등의 고려의 칭호로 미루어 볼 때 택주가 궁인과 딸에게 쓰였을 가능성이 있다. 이로보아 봉작을 받지 못한 궁인의 딸은 왕족에게 시집가지 못간 듯 하다. 궁주(전주)는 고려 족내혼의 전통을 따라[18] 왕의 왕후가 되거나 종친에게 시집갔는데, 궁인의 딸은 신하에게 시집갔다.

다만 "충혜왕 때 내명부 관제가 무너져 천민에게 택주와 옹주 칭호를 주었다"고 고려사에서 나오므로, 이전까지 천민 출신 궁인은 택호를 받기 어려웠음을 알 수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양민 이상 궁인의 아들은 정식으로 봉작받았으나, 천민 출신 궁인의 아들은 출가해 승려가 되어야 한 것을 알 수 있다.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고려사에서 가끔 원비(元妃)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보통 이 단어는 정비(正妃)와 같은 뜻으로 쓰이나, 고려 시대 때는 왕의 정실부인이 1명이 아니며 정실부인과 후궁의 구별이 엄격하지 않았기에 왕이 처음 맞은 아내를 일컫는 말로 쓰였다. 고려는 위계 체계가 엄격하지 않아, 왕이 처음으로 맞은 아내면 품계나 서열이 낮아도 원비라고 불렸다. 사숙태후선종의 정비라고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으나 선종의 원비는 아니기 때문에, 그녀의 신위를 종묘에 모시려고 했을 때 예종이 적서의 예를 고려해야 한다며 미루는 모습을 보인다.[20]

4.2.3. 원 간섭기~고려 말

후반기부터는 태후[21]>대비[22]

왕비=몽골 공주>공주>비(妃), 원주>옹주>택주 혹은 궁인 순이었다.

원 간섭기 이후에는 왕실 관제가 상당수 격하되고 내명부의 수장과 그 구성원 일부가 원나라 공주가 되면서 내명부 관제가 사실상 무너졌다. 법제상 내명부의 수장이 제후국의 왕후로서 비(妃)이면서도 한편으로는 후궁들의 최고 품계는 제후국 군주의 첩인 빈(嬪)이 아니라 여전히 황제국의 첩인 비(妃)인 상태가 계속되었다. 사실 원나라가 고려의 관제와 왕실 용어들을 격하시키기는 했지만 이 격하는 사실 눈에 띄는 주요 부서들에게 주로 행해진 것이며 고려의 관제 모두를 속속들이 격하시킨 것이 아니었다. 3성이 죄다 격하되었어도 그 안에 있는 관제들이 격하되지 않아 고려 행정의 위계성에 황제급과 제후급이 섞여 혼란이 생긴 것이다. 후궁제도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당시로선 무조건 원나라 공주가 정비(正妃)가 되었다. 원나라 출신이면 고려인 부인들보다 서열이 앞섰다. 반드시 공주 출신이 아니었어도 원나라 출신이면 정비로 대우받았다. 국왕의 정비는 원나라의 공주로 정해졌지만 여전히 국왕은 여러 부인을 정식 부인으로 둘 수 있었다. 이때 여성들은 ㅇ비(妃) 형태로 책봉되었다. 당시 기록상으로는 비(妃)가 붙은 이들은 모두 국왕의 왕비나 왕비에 가까운 후궁으로 간주했다. 봉호의 종류는 이때 더욱 다양해져 의비, 정비, 신비, 혜비, 순비 등 붙일 수 있는 칭호들은 대부분 붙여졌다. 몽골 공주가 황제로부터 고려 왕비 책봉을 받았으나 이후 고려에서 왕후나 왕비 칭호를 찾아보기 힘들고 일부다처제 성격을 띄게 된다.

또한 호칭적인 면에서 궁주가 사라졌다. 정확히 말하면 원나라 공주가 공주의 칭호를 가지고 가는 바람에 '공주=궁주'라고 여기던 고려의 왕실 칭호에서 원나라 출신이 아닌 이상 공주나 궁주를 쓸 수 없게 되었다. 공주 칭호는 원나라의 공주, 원나라 출신 후궁들과 그들의 딸들이 쓰게 되어, 칭호가 격하된 것이다. 후비와 왕녀가 칭호를 공유하는 고려 왕실의 전통에 비추어 어머니를 따라 왕녀는 궁주 칭호를 쓸 수 없게 되었다.

궁주=공주가 격하되어 고려인 출신 후비와 그들의 딸이 쓸 수 없게 된 것을 짐작할 수 있는 기록은 정화궁주, 정화궁주의 딸인 정녕원비(靖寧院妃), 충혜왕의 딸 장녕공주이다. 정화궁주는 제국대장공주의 눈밖에 나서 부고에 가둬진 뒤에 정신부주라고 칭호가 바뀌었고, 정녕원비는 아버지 충렬왕이 즉위할 당시 궁주로 책봉되었지만 시호는 한단계 낮은 원비가 되었다. 반면 장녕공주는 덕녕공주의 딸이었다. 궁주의 칭호는 원간섭기를 벗어난 공양왕과 조선 초기 때 복구된다.

옹주(翁主)라는 칭호가 충선왕 때 궁주를 대체하며 후궁과 왕녀에게 처음 사용되었다. 그러나 충선왕 때부터 옹주 칭호는 궁주보다 낮은 원비(원주)보다 낮게 쓰여 본래의 목적을 상실한다. 충선왕에게 의붓딸이 되는 순비 허씨의 딸들과 충선왕의 친딸 수춘옹주(壽春翁主)는 모두 옹주로 책봉되었다. 이들은 궁주가 족내혼을 하던 왕실의 전통을 따르지 않았다. 충선왕 때 이르러 왕녀와 종실 간의 혼인을 금지했으므로, 옹주가 궁주를 대체한 것처럼 보이지만, 수춘옹주의 출신에 주목해야 한다.

수춘옹주는 고려사 열전의 공주에서 누락되어있다. 천인 궁인이나 왕자를 낳지 못해서 봉작을 못받은 양인 궁인 소생은 아예 고려사의 왕자나 공주 항목에서 기록이 누락되는 것이 빈번하다. 그리고 수춘옹주의 어머니는 이복형제 덕흥군의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기록에 없다. 천인 출신 궁인이 낳은 왕자는 왕위를 잇지 못하고 소군이라 불리며 출가한 고려 왕실 전통을 따라서 덕흥군은 출가했다. 수춘옹주의 어머니도 덕흥군의 어머니와 같은 궁인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녀가 궁주를 대신해 옹주의 칭호를 받은 것은 희박해보인다.[23]

게다가 충선왕의 후궁 중 원비의 칭호를 받은 이가 보여, 수춘옹주가 원주(원비) 칭호를 받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충선왕의 의붓딸들 역시 친부가 종실이었으나 친딸은 아니었기에 원주의 칭호를 받지 못했다고 예상할 수 있다. 이처럼 옹주는 궁주보다 낮게 사용되어 천민출신 후궁 등에게서 보이며 왕실 관련 외명부 봉작에서 남발되었다.

한편 충혜왕이나 우왕 때는 출신이 천민 출신인 기생이나 사노비, 관비 등이 품계를 받은 사례가 있다. 충혜왕의 후궁 은천옹주와 우왕의 여러 후궁이다. 충혜왕 때는 내명부의 관제가 무너져 궁인 중 천민 출신이 택주와 옹주를 받았다는 기사가 고려사에 나온다. 또한 우왕의 후궁들은 대부분 노비나 천민, 기생이어서 ㅇ비(妃)와 옹주로 책봉되자 백성들이 놀랐다는 기사가 고려사에 나온다. 그러나 천민출신 은천옹주의 아들은 왕위계승권은커녕 신분 때문에 얄짤없이 출가했다. 예외로 우왕이 있지만 이는 우왕이 공민왕의 하나뿐인 아들이고 당시 공민왕의 형제 중 살아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으로, 그런데도 불안했는지 당시 왕실의 최고 어른이었던 공원왕후 홍씨가 손자 우왕 대신 혈통이 온전한 종친을 왕위에 세우려 했다. 이만큼 고려에서 신분와 혈통의 벽은 높았다.

혹은 원주가 후궁과 서녀의 칭호로 정착되고 옹주가 이를 대신했다는 시각도 있다.출처 그러나 고려 말기로 갈수록 옹주 칭호가 서왕녀와 후궁에 그치지 않고 남발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다 공양왕 3년 왕자의 정비(正妃)와 왕의 유복(有服) 동성자매(同姓姉妹), 조카딸, 군(君)의 정처(正妻) 등에 한하여 사용하게 하였다. 이는 조선시대 때 그대로 이어진다.

원 간섭기와 후반기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조선시대에 비해 고려는 적서 차별[24]이나 남녀 차별이 느슨했다. 호칭상이나 명예상에서 약간의 서열이 존재하기는 해도 동등한 왕의 여자라는 점 때문에 왕비와 후궁의 구별이 조선보다 엄격하지 않았고, 이는 왕의 자식들도 마찬가지였다.[25] 혜종 때 왕실을 뒤흔들었던 왕규의 난만 봐도 이 내명부 서열이라는 게 얼마나 의미 없는 것인지를 보여준다. 조선이었다면 현재의 국왕이 선왕의 장남이고, 위로 선왕의 왕자들이 바글바글한데 선왕의 16번째 부인 소생인 광주원군을 왕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이 나올 수는 없었다.[26] 조선시대 같으면 감히 상상도 못할 일로, 서자인데다 서열이 높지 않은 왕자를 왕으로 만들려고 한다는 것은 고려 당시 적서차별이 거의 없었음을 반증하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더군다나 성종 이전에는 원래 왕위계승자들만을 위한 칭호인 '태자'가 남용되어 왕의 아들이라면 개나 소나 태자 칭호를 받게 되어 새로 맏아들이라는 뜻의 '정윤(正胤)'이라는 칭호가 만들어지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기도 했으니 내명부는 말할 것도 없었다.

간혹가다 과부도 후궁이나 왕후가 되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 성종의 제1비인 문덕왕후와 충렬왕, 충선왕의 후궁인 숙창원비, 충선왕의 후궁인 순비 허씨(順妃 許氏)가 있다. 심지어 순비는 전 남편과의 자녀가 8명이나 있었다.

4.3. 조선시대

조선에서는 태종이 내명부 체제를 개편하여 왕비가 한 명만 있을 수 있었다. 사회 전반에도 적서차별을 두어 제사를 받들 정실부인인 처(妻)는 오직 한 명이고 그 외에 부인은 모두 첩(측실)으로 제한했다. 태종이 처첩·적서차별을 강화한 것은 앞서 언급했듯이 고려시대 말기에 지배층의 문란으로 생긴 일부다처제의 암묵적인 용인으로 아버지 이성계가 고향(함경도)과 개경에 2명의 정실부인을 뒀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엄연히 정략 결혼을 한 경처였던 강씨가 왕비가 되는데 무리가 없었고, 왕권의 라이벌로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인 무안대군의안대군이 늘었다. 이로 인해 죽을 뻔하다가 왕자의 난으로(...) 구사일생했던 태종 본인의 경험이 반영되어 결국 왕실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도 집안의 후계구도를 깔끔히 처리하겠다는 의도로 이어진 것이다. 자세한 과도기적 체제는 한국사의 후궁 제도 문서 참조.

왕비가 되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1. 세자빈 또는 종친의 부인으로 간택되었다가 남편이 왕위에 올라서 같이 격상되는 경우
2. 처음부터 왕비로 간택된 경우[27]
3. 후궁이었다가 왕비가 죽고(또는 쫓겨나고) 승진 책봉되는 경우[28]

왕비의 호칭은 사극을 통해 잘 알려진 중전. 왕비가 거처하는 중궁전(교태전)에서 따온 말로, 중궁, 내전, 곤전, 곤궁 등의 호칭 역시 사용되었다. 경칭은 왕과 같은 전하, 마마, 마노라이지만 사극에서는 으레 중전마마로 호칭하는 편.

조선 후기 갑오개혁이 실시되면서 고려 초중기와 같이 자주적인 의미를 강화해 생존시 칭호가 '왕비'에서 '왕후'로 다시 격상되었다. 공식적인 경칭으로써, '왕비 전하'로 불리다가 갑오개혁으로 국체가 격상된 이후엔 '왕후 폐하'라고 불렸다. 또한 '왕세자빈'도 다시 '왕태자비'로 격상되었다. 이후 조선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왕후의 호칭 역시 '황후'로 격상되었다. 하지만 명성황후는 사후 추존으로 황후가 된 경우인지라 현직에서 황후 자리에 앉았던 사람은 순정효황후 한 사람, 그것도 단 4년 남짓 정도였다.

조선시대에는 왕비의 친정이나 관향인 고을을 높은 격으로 승격시켜 주기도 하였다.

5. 오스만 제국

특이하게도 오스만 제국에서는 16세기 초반까지 태후(Valide Sultan)는 있어도 왕의 정실부인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는 오스만 제국의 후계 구도가 하렘을 중심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송가이 제국 등 하렘을 둔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29] 이런 경향은 쉴레이만 1세휘렘 술탄과 정식으로 혼인하면서 바뀐다.

6. 카툰

ᠬᠠᠲᠤᠨ(몽골어)/خاتون‎(페르시아어)/可敦(가돈)

몽골계 귀족 칭호로서, 칸 또는 카간의 여성형이다. 다른 문화권의 왕비나 황후에 해당한다.

흉노탱리고도선우의 정실부인을 閼氏(연지)라고 불렀다고 중국 기록에 남아있고, 그 후 사용된 '카툰'이라는 말은 소그드에서 기원한 것으로, 이슬람교가 중앙아시아에 전래되기 한참 전부터 돌궐 지배자들의 아내 및 여자 왕족들을 카툰이라고 불렀다. 칭기즈 칸을 비롯한 유목 군주들은 여러 명의 카툰을 거느렸으며, 그 중 유력한 카툰들이 유목 제국의 내명부라고 할 수 있는 오르도를 관리했다.

옛 몽골 제국의 영향권이었던 지역들에서 오늘날 사용되는 언어인 우즈베크어, 튀르키예어, 우르두어 등에서는 "카툰"에서 유래한 어휘들(우즈베크어: xotin, 터키어: kadin, 우르두어: khatun)이 그냥 "여자"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된다.

7. 나무위키에 문서가 개설된 왕의 정실부인

7.1. 실존 인물

황후, 왕후 포함.

7.1.1. 한국사

7.1.2. 세계사(동양)

7.1.3. 세계사(서양)

7.2. 가공 인물

황후, 황비[31] 포함. 실존 인물인지 아닌지 모호한 경우도 이곳에. 정실부인이 아닌 경우에는 후궁 문서로.

8. 언어별 명칭

<colbgcolor=#f5f5f5,#2d2f34> 언어별 명칭
한국어 왕비()
한자 (왕비)
독일어 Königsgemahlin
러시아어 Королева-супруга
몽골어 Хатан
베트남어 Vương phi
스페인어 Regina consorte
아랍어 عقيلة ملك
영어 Queen consort[64]
이탈리아어 Regina consorte
일본어 [ruby(王妃, ruby=おうひ)]
중국어 [ruby(王妃, ruby=wángfēi)]
포르투갈어 Rainha consorte
프랑스어 Reine consort
힌디어 पटरानी
에스페란토 Reĝedzino


[1] 역사적으로 처첩제도가 거의 없는 서양 왕실에서는 내명부가 없지만 외명부라고 할 수 있는 귀족 및 신하들의 부인의 수장인건 마찬가지였다. 대신 조선의 왕비보다 왕비 본인의 실질적인 권한이 제한적일뿐이며 왕 유고시에는 신하들과 왕족들을 중재하는 역할을 수행하는것도 똑같다.[2] 춘추전국시대까지는 황후가 없었으므로 왕후()가 천자국의 칭호였다.[3] 다만 예기(禮記)에 따르면 육궁(六宮)을 세워서 삼부인(三夫人)을 두고, 구빈(九嬪)을 두며, 이십칠세부(二十七世婦)를 두고、 팔십일어처(八十一御妻)를 두어서 천하의 내치를 듣는다고 쓰여있기 때문에 초기에는 일부다처제였을 것으로 보인다.[4] 귀인에서 순빈을 거쳐 순비로 오르고 그 후 황귀비가 되었다.[5] "(상략) 우리나라에서는 생존하였을 때에는 비(妃)라 칭하고 별세하면 왕후라 칭하는 것은 이미 조종조에서 이루어 놓은 준례입니다만, 고전(古典)을 상고해 보건대 왕비를 왕후로 올렸다고 하였으니, 왕후와 왕비는 등급이 다소 다릅니다. 지금 마땅히 추존하여 왕비를 삼아 다소 높이는 분별을 보여 주고 휘호를 더하여 별묘(別廟)에 제사를 올리는 것이 지극히 높이는 것입니다. (후략)" 광해군일기[중초본] 26권, 광해 2년 3월 23일 기해 2번째 기사의 일부에서.[6] 원 간섭기 이전까지는 자주국이었고, 원 간섭기부터는 제후국 체제가 되었다. 근대에는 1894년 청일전쟁으로 조선이 자주국이 되면서 왕대비를 왕태후로, 왕비를 왕후로 호칭을 바꾼 바가 있다.[7] 왕대비 전하(王大妃殿下)를 왕태후 폐하(王太后陛下)로 하자는 데 대해서도 아뢴 대로 윤허하였으며, 왕비 전하(王妃殿下)를 왕후 폐하(王后陛下)로, 왕세자 저하(王世子邸下)를 왕태자 전하(王太子殿下)로, 왕세자빈 저하(王世子嬪邸下)를 왕태자비 전하(王太子妃殿下)로 하고, 전문(箋文)을 표문(表文)이라고 하자는 데 대해서도 모두 그대로 윤허하였다. (고종실록 32권, 고종 31년 12월 17일 기미 1번째 기사)[8] 로맨스 판타지물에서는 정비가 황후, 후궁이 아닌 후비를 황비라 쓴다.[9] 좀 민감한 작가일 경우 '両陛下(양폐하)'까지[10] 근대 이전의 중국이 무대라면 이는 틀린 표기가 아니다. 자세한 사항은 폐하참고.[11] 혹은 전주나 궁비()[12] 원비(妃)[13] 주로 ㅇ비라고 봉작을 내리다가 죽은 뒤 귀비, 덕비, 현비, 숙비 등으로 추증하였다.[14] 정화궁주충선왕의 3비 정비(靜妃)는 본래 왕족 출신의 정비(正妃)였지만 밀려났고 왕후로 추존받지 못했다. 공민왕의 3비 익비는 왕족 출신이지만 '정비 사후 들인 새로운 정비'가 되지 못했다.[15] 고려사 현종 후비 열전 "원성왕후는 연경원주(延慶院主)라고 불리다가 아들을 낳자 원(院)을 고쳐 궁(宮)으로 고쳤다.[16] 고려사 현종 후비 열전 "흥성궁주와 경흥원주는 두 분 다 선왕의 비이니.."[17] 고려 초기 왕자나 왕족이 이렇게 불린 경우가 있다. 문원대왕의 아들 천추전군(千秋殿君)이나 정종의 아들 흥화궁군(興化宮君)이 예이다. 오등작제가 시행되고 난 이후에도 낙랑궁, 부여궁, 진한궁 등 나라의 이름나 지역의 옛지명 등을 붙인 별궁에 살았다. 이들의 봉호 역시 사는 궁궐에 따라 낙랑후, 부여후, 진한공 등이었다.[18] 흔히 고려의 족내혼은 초기의 경우가 널리 알려졌지만 고려는 멸망 때까지 왕실의 전통을 지켰다. 특히 공주의 경우 더 엄격해서 족내혼을 하지 않은 경우가 손에 꼽힐 정도이다.[19] 수안택주(遂安宅主). # 선종(고려)사숙태후의 딸이었으며 태어날 때부터 맹인이었다.[20] 고려의 적서 개념은 조선시대와 많이 달랐다. 고려시대 때는 장유유서 순으로 적서를 따졌다.[21] 대비를 추증[22] 원 간섭기 이후 왕의 어머니 혹은 할머니. 왕대비는 왕태후의 격하된 버전이다. 국대비는 공양왕 이후 왕대비와 구분해 공양왕의 생모 복녕궁주를 국대비라고 불렀다.[23] 수춘옹주와 덕흥군의 차이점은 덕흥군의 어머니의 출신이 짐작할 수 있다는 점이다. 수춘옹주의 어머니가 궁인인 것은 분명하지만 양인인지 천민인지 알 수 없다.[24] 고려는 적서 차별의 개념이 달랐다. 먼저 태어나거나 먼저 들어온 부인 순으로 적서를 따졌다. 장남은 태자가 됐다.[25] 다만 왕족이나 귀족 출신 후궁과 그 자식들 한정이고 천출 후궁과 그 자식들은 조선보다 더 심하게 차별했다.[26] 단 광주원군을 보위로 올리려 했다는 부분은 진정성을 의심받고 왕규 측이 패배자이기에 조작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많이 받는다. 정황상 왕식렴의 난이라고 봐야한다는 말도 있고, 왕식렴에게 왕규, 박술희 등의 혜종파가 학살당하고 왕식렴의 거사의 명분을 위해서 왕규가 누명을 뒤집어쓴 것이라고 여겨지기도 한다.[27] 왕이 어리지 않은 이상 왕비 간택은 대부분 계비 간택이다. 계비 간택의 경우 왕이 몇 살이든 계비는 혼인적령기의 여성이어야 하기 때문에 세자·세자빈 내외보다도 나이가 어린 경우가 많았다.[28] 의외로 이런 경우가 꽤 있었다. 다만 희빈 장씨를 제외한 모든 왕비가 된 후궁들은 명문가 출신의 간택후궁이었다.[29] 이슬람 문화권이라고 모두 왕비가 없었던건 아니다. 같은 시기 사파비 왕조무굴 제국 군주들 역시 하렘을 두긴 했지만 일부다처제 개념이긴 해도 베굼, 파드샤 베굼이라고 불리는 왕비, 황후와 결혼했다. 미천한 출신의 유럽 및 캅카스 여성이 대다수였던 오스만 제국 황제의 배우자들과 달리 베굼은 페르시아계 귀족 여성, 지방 토후 및 부족장의 딸, 황실의 황녀, 페르시아의 공주 등 고귀한 신분 출신들이었다.[30] 본명은 마틸다이며 잉글랜드의 왕위를 두고 스티븐 왕과 오랫동안 분쟁을 벌였다. 잉글랜드 왕위를 주장하기 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5세의 아내였으며 이때 제국 신민들에게 불리던 호칭이 모드 황후.[31] 황제의 정실부인을 가리키지만 '황비'로 표기한 경우만 해당.[32] 본명 불명. 아델라이와 라르트의 생모. 외전에서 트리제가 라르트에게 황위를 물려주면서 상황후가 되었다.[33] 외전에서 트리제가 라르트에게 황위를 물려주면서 라르트의 아내인 루시 또한 황후가 된다.[34] 남편 차르밍이 아고니 왕국의 국왕이라 아고니 왕국의 왕비인 셈이지만 녹탑의 탑주로 더 유명하다.[35] 원래는 황후의 곁붙이 노릇을 하던 후궁이었지만, 황후의 승하 후에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이 위험에 처하는 것을 보고 황제의 제안을 받아들여 황후가 되었다.[36] 외전에서 유드고가 정식으로 황제가 되면서 마르실라도 황후가 되었다고 한다.[37] 이쪽은 신적 존재인 마이아이고, 싱골도리아스를 공동통치하는 만큼 여왕에 가깝다.[38] 국왕 대리도 겸한다.[39] 다미안 발두르 왕태자와 결혼하기 이전에는 샤를로테 에베르프레이야 드로셀이었다.[40] 미르칸의 황후.[41] 정략결혼으로 황후가 되었으나, 아들을 낳고 이혼 후 공작이 되었다.[42] 에스테반과 파시피카가 이혼한 후 새로이 황후가 되었다. 이후 메이블을 낳고 사망.[43] 로이드, 알렉, 에이지 황자의 어머니 현 시점에서는 고인이다.[44] 타야르의 선왕 라이칸의 아내, 즉 타야르의 선왕비였었다.[45] 원래는 고아 왕국의 공주였으나 살리카법 때문인지 대신 남편인 스테리가 왕이 되면서 왕비가 된 케이스.[46] 선대 왕 바트라 리오네스의 아내이자 마가렛 리오네스, 베로니카 리오네스의 친어머니이며 현 왕비 엘리자베스 리오네스의 양어머니.[47] 마신왕비[48] 작중 대부분의 기간을 후궁으로 있었지만 최후반부에 황후로 즉위한다.[49] 이름이 공개되지 않았다[50] 유(의윤), 요, 선혜의 어머니. 남편 태가 황제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황후 자리에서 물러났다.[51] 후반에 남편 유(의윤)가 황제가 되면서 황후가 되었다.[52] 동대제국 황후였으나 소비에슈 황제와 이혼하고 옆 나라 하인리 황제와 재혼했다.[53] 도망 노예 신분이기에 원래라면 황후 자리에 절대로 오를 수 없으나, 라스타의 뱃속 아이를 적자로 만들려는 소비에슈에 의해 신분 세탁을 받아 외국 몰락 귀족의 양녀로서 소비에슈와 결혼식를 올리고 정식으로 동대제국 황후로 즉위한다. 그러나 친자검사 소동 이후로 그동안의 악행들도 대중들에게 공개되고 결국 황후 자리에서 쫓겨난다.[54] 본래는 서왕국이었으나 나비에와 하인리의 결혼식에서 칭제했다.[55] 선왕 워턴 3세의 왕비. 남편이 사망하고 즉위한 하인리가 나비에와 결혼하면서부터 선왕비가 되었다.[56] 드미트리가 왕국이 된 후부터. 로만이 황제가 되어 드미트리 제국을 세운 후에는 황태후가 된다.[57] 아르카디아가 왕국이 되면서 왕비가 되었다.[58] 마리벨 멜 브리타니아와 차녀 율리아 멜 브리타니아의 어머니.[59] 클로비스 라 브리타니아와 라일라 라 브리타니아 남매의 친모.[60] 오빠가 기쁨의 나라의 왕자이자 서자이다.[사실은] 자연임신이 아닌 본인의 기쁨의 에너지와 감정을 담는 인조인간과 융합해서 나온 인공생명체이다.[62] 레안과 라틸 남매의 친모이자 선황제의 황후. 라틸이 즉위한 시점에서는 황태후.[63] 에페란토 제국의 현 황후이자 이아로스 오르나 에페란토의 어머니다.[64] 줄여서 queen이라고 하기 때문에 여왕으로 오역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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