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조선국 大朝鮮國 | |||||
국기 | 국장 | ||||
▲ 진한 녹색은 본토, 연한 녹색은 통치권은 없는 영향권을 의미 | |||||
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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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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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적 | 약 22만 km²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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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환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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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 조선어 (근대 한국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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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유교(성리학), 불교, 가톨릭, 개신교, 천도교, 유대교 | ||||
군대 | 조선군 |
정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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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문피아, 네이버 시리즈, 카카오페이지, 조아라, 리디 등에서 연재된 대체역사소설 고종, 군밤의 왕에 등장하는 조선을 소개하는 문서.2. 왕실
2.1. 왕사
이름 | 이명복(李命福) → 완정군(完靖君) 이재황(李載晃) → 고종(高宗) 이형(李㷩) | |||||
아내 | 왕비 민자영(閔玆暎) | |||||
자녀 | 장남 | 이름 | 대군 (1871년 11월 4일 ~ 1871년 11월 8일): 장폐색으로 사망 | |||
장녀 | 이름 | 공주 (1873년 2월 3일 ~ 1873년 9월 28일) | ||||
차남 | 이름 | 왕세자 이척(王世子 李坧): 1874년 3월 25일 ~ | ||||
아내 | 왕세자빈 김명숙(王世子嬪 金明淑) | |||||
자녀 | 선경군주 이연(璿慶郡主 李姸): 1894년 ~ | |||||
왕세손 이은(王世孫 李垠)[16]: 1895년 ~ | ||||||
삼남 | 이름 | 안양대군 이규(安陽大君 李邽): 1875년 4월 5일 ~ | ||||
아내 | 창녕부부인(昌寧府夫人) 조별단 | |||||
자녀 | 군(君): 1901년 ~ | |||||
현주(縣主)[17]: 1902년 ~ | ||||||
사남 | 이름 | 경양대군 이영(慶陽大君 李坽): 1878년 2월 18일 ~ | ||||
아내 | 섬라국부인(暹羅國夫人) 발라야 알롱꼰(วไลยอลงกรณ์): 1884년 4월 16일 ~ | |||||
자녀 | 현주(縣主): 1911년 ~ | |||||
군(君): 1912년 ~ |
2.2. 궁전
- 경복궁
1875년에 설계를 시작하여 1886년에 중영의 대업을 마쳤다. 처음 설계를 할 때만 하더라도 심심찮게 존재하던 유럽식 전각은 그래도 명색이 나라의 법궁인데 국초의 제도를 함부로 변경하기 저어된다고 하여 경무대만 남기고 경운궁으로 넘겼다. - 근정전
정전(正殿). - 사정전
편전. 기무회의가 열리는 곳으로 안에 있는 서양 기물은 천장에 달린 전등 하나 뿐이다. 일월도 병풍 앞에 용평상 놓였고, 어떤 나라가 어디 붙어있는지 아무리 들어도 잘 머리속에 들어오지 않는 귀남을 위해 용상 앞에 좌우로 늘어선 서안들 뒤편에 새로 그린 천하전도와 신증동여도가 서 있다. - 경무대(景武臺)
후원에 위치한 전각. 양옆에 청기와 올린 행랑채를 끼고 있는 복층 전각으로 귀남이 저의 기억 속에 경무대, 즉 청와대 있던 자리에 반쯤 장난삼아 세웠다. 편전과 침전을 겸할 수 있도록 큼직하게 지었으며, 입식과 좌식 두 방식대로 차린 방이 각각 따로 있다. 서양식 난방 기능이 구비되어 있어 겨울에는 사정전 대신 경무대에서 모임이 또 하나의 상례가 되었다. - 건순각
교태전 부속 전각. 창호만 열면 곧장 정원 정경이 눈에 들어와 자영이 교태전 본전보다 더 자주 머무르는 곳이다. - 흥복전
침전. 귀남과 주요 정당 영수들이 경연을 하는 곳이다. 테슬라가 발명한 전기장판 시제품 검증 과정에서 발생한 작은 화재 때문에 일부 훼손됐다. - 만춘전
사정전 보조 편전. 흥복전을 대신하여 잠시 경연장으로 사용됐다. - 향원정
후원에 위치한 정자. 귀남이 외교사절을 접견하는 곳으로 종종 사용한다.
- 창경궁
창경원을 기억하고 있는 귀남이 경복궁이 중수된 김에 창경궁 한 곳 정도는 백성들이 즐길 수 있는 공원으로 사용하자고 제안하였으나 신료들의 필사적인 반대로 없던 일이 되었다. 귀남이 경복궁으로 이어한 이후로는 작첩이 금지되어 빈 방이 많아서 창덕궁과 더불어 장성한 대군들의 처소로 사용되고 있다.
- 경운궁
경복궁 중건할 때 더불어 고쳐 지었다. 공사관이 밀집되어 있는 곳이 부지이다 보니 국격을 고려하여 여차하면 행궁 정도는 될 수 있도록 고치고 남은 터는 나라의 큰 행사가 있을 때 쓸 수 있도록 유럽 양식으로 전각과 정원을 두었다. 세자 척의 가례가 이루어진 곳도 경운궁의 유럽식 전각이다. - 구성당
원 역사의 덕수궁 구성헌. 공연장으로 쓸 수 있을 정도로 구성헌과는 규모에서 큰 차이가 있다. 무성 사극 활동섭영(영화) '실록영연'의 첫 작품 '조개홍업(肇開鴻業)'이 처음으로 상영된 곳이다.
- 온양행궁
행궁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왕실 박물관이다. 본래 귀남은 전생에 즐겼던 창경원을 미리 조성한다는 생각으로 창경궁을 개방하여 백성들이 즐길 수 있도록 하려 했으나, 차마 추억 어린 창경궁을 민간에 개방할 수 없었던 후대의 왕들이 창경궁 대신 온양행궁을 궁궐 비슷하게 꾸미고 왕실 관련 문화재 몇몇을 전시하며 민간에 개방하였다. 활동섭영(영화) 찍을 때 세트장으로 쓰거나, 궁궐의 후원과 똑같이 꾸며진 후원을 구경하러 서울에서도 종종 내려오곤 하는 명소가 되었다.
3. 행정구역
1879년 국제를 제정하면서 오백 년을 거치며 경계가 난잡해진 팔도의 부·군·현을 크게 정리하였고, 사람 많거나 땅 넓은 도는 둘로 쪼개어 각각 관찰사를 두었다. 수령은 여전히 중앙에서 임명하지만, 김홍집 내각에서 수령에게 참견할 권한을 재차 확인받은 군현 각지의 향회에서 '작은 참의원' 모양새를 갖추어 민심을 대변한다.- 도(道)
- 함경도
개정된 조러수호조약에 따라 러시아인은 함경도 땅에서 통상과 이동, 그리고 거주의 자유를 갖는다. 그래서 시베리아 곳곳의 정치범 유형수들 몇몇이 연해주를 경유하여 함경도로 도주하기도 한다. - 황해도
동철에서 융통해온 자금으로 지은 철정국(제철소)이 황해도 재령에 있다. - 전라북도
1902년 기준으로 이승우가 관찰사로 재직 중이다.
- 부(府)
- 한성부
조선의 수도. 개항 이후 날로 성장하여 김옥균이 아주의 가운데 도시라고 자부할 정도로 번영한 대도시로 거듭났다. 기존 5부에 마포부와 교남부가 합해져 7부가 되었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늘기 시작한 인구가 일거리 찾아 한양으로 몰리기 시작하면서 치안이 나빠지고 있다는 소리가 나오고 있다. - 정동
한성부 하위 행정구역. 원 역사대로 외국 공사관이 밀집된 곳이다.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이 차린 정동구락부가 있다. - 작은 파리(Le Petit Paris)
프랑스 신정부의 박해를 피해 조선으로 망명한 옛 파리 코뮌 구성원들이 모여 살았던 동네. 한성부 서부에 위치한 선혜청 창고 쪽 골목으로 들어가면 나온다. 제물포 오갈 일이 많은 망명객들이 숭례문 근처 집값 헐한 곳을 찾다 보니 이쪽에 몰리게 됐다. 카페 겸 술집인 삼월 카페(Cafe de Mars), 일명 삼월당이 있다. - 이태동(異胎洞)
옛 선혜청 부근을 속되게 이르는 말. 작은 파리가 코뮌 망명객들이 귀국한 뒤에도 한몫 챙기러 넘어온 국외인들이 그 빈자리를 채움으로써 동을 칭할 만큼 넓어져 '이태동'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름난 심양의 외국인 거리만 하겠냐만 제법 이국적인 곳이다. 이태동에서 태어난 혼혈들은 자신을 조선인이라고 생각하므로 이태동이라는 말을 싫어한다. - 밤섬
원자폭탄을 연구한 격치물성청 부속 연구소가 있는 곳이다. 본청에서 쉽게 오갈 수 있으면서도 인마 오가는 것을 통제할 수 있는 곳이라서 부지로 낙점됐다. - 인천부
조선 최초의 개항지. 개항 이후 대외 무역이 활성화되고 각종 공장들이 들어서면서 한양, 평양, 개성, 동래와 함께 조선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대도시가 되었다. 늘어나는 교역에 비례하여 인천부에 자리를 잡은 외국인들도 늘었다. 인천항에 파리외방전교회가 프랑스 정부의 지원을 받아 세운 경일학당이 존재하며, 그 옆 고을에 큼직한 기기창과 인천목을 뽑아내는 관립 방적공장이 있다. 노벨이 세운 화약 공장 역시 인천부에 있다. 이렇게 공장들이 밀집되어 있는 만큼 고공들의 수도 많아 만민공산당의 텃밭이다. - 경흥부
인천에 이어 원산, 동래와 함께 개항지로 선택됐다. 개항 초기에 연해주에 양곡을 넘기고 모피를 받아왔는데 블라디보스토크에 정착한 러시아인들이 적어 별 재미를 보지 못했지만, 8년 정도 지나자 러시아 군인들이 근무 끝나고서 두만강 건너와 '경흥개시'에서 술 한 잔 걸치고 가는 것이 일상적인 풍경이 됐다. 조러수호조약이 개정되어 국경이 개방된 이후로는 두만강변 초소와 초소 사이가 논밭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 원산부
인천에 이어 경흥, 동래와 함께 개항지로 선택됐다. 이후 강원도에서 가장 큰 항구도시로 성장하여 덕원부에서 분리되었다. 일본을 오가는 선인들이 종종 배를 대며, 포경하는 미국 어민들도 가끔 드나든다. 시베리아에서 탈출한 <무엇을 할 것인가>의 저자 니콜라이 체르니셰프스키의 은신처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일본 영사관이 있다. - 동래부
인천에 이어 경흥, 원산과 함께 개항지로 선택됐다. 개항 이후 일본 오가는 사람과 배가 늘어나면서 동래부 본래 읍내보다 부산항이 더 커졌다. 통제수사에서 가장 신경 써서 방비하는 곳이다. 일본 영사관이 있다. - 평양부
예로부터 조선에서 내로라 하는 대읍이었는데 개항 이후로는 한양, 인천, 개성, 동래에 치여 다섯째로 떨어졌다. 경의선이 심양, 연경까지 이어져 옛 성세를 어느 정도 되찾기는 했지만 이미 적잖은 평양 주민들이 일자리를 찾아 도성과 인천 일대로 유출됐다. 게다가 기전[18] 발굴에 실패하여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기도 하였다. 그래서 1904년 평양 아주대회에서 부민 1천명이 개막식에서 1년 동안 연습한 매스게임을 선보였을 정도로 열과 성을 다했다. - 수원부
원 역사와 달리 군으로 강등되지 않고 2013년까지도 부 지위를 유지했다.
- 군(郡)
- 운산군
운산 금광이 있는 곳. 광무총국 현장 사무실이 있다. 금광업으로 부를 축적한 곳이라 운산에서는 개도 1원짜리 종잇돈은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는 속설이 있다. - 울도군
개항 후 어쩌면 울릉도가 중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여, 군을 설치하고 백성을 여럿 보냈다. - 양평군
양근와 지평을 통합하여 군을 설치했다. 화서학원이 있는 곳이다. - 김제군
나날이 개간하여 김제 한 곳의 소출이 선왕대 팔도의 소출에 맞먹는다는 농이 있을 정도이다. - 순풍군
순흥부와 인접한 풍기, 그리고 옆 영천(오늘날 영주시의 일부)의 일부를 합쳐서 만든 곳. 순흥과 풍기 두 고을 모두 유풍이 강한 곳이라 자유당의 텃밭이다. 숙종에게 단종 복위 운동을 인정받은 사실에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 함흥군
용흥지지(龍興之地)요 풍패지향(豊沛之鄕)이라지만 배 드나들기로는 원산이 훨씬 좋고, 함흥평야 벗어나면 온통 험산준령뿐이라 썩 흥성하지 못하다가 그 험산 덕분에 조선 최초의 비료공장이 세워졌다. - 온양군
원 역사와 달리 아산시에 편입되지 않고 2013년까지도 독립된 군으로 존재한다. 명소로 사실상 박물관이 된 온양행궁이 있다.
4. 정치
4.1. 국제
제1조: 대조선국은 자주지방으로, 항만세(恒萬歲) 불변하오실 전제정치(專制政治)이니라.
제2조: 대조선국 국왕께서는 무한하신 위엄과 권세를 향유하옵시나니, 이는 무릇 이륜을 크게 일으켜 만백성을 이롭게 함이니라. 이에 문무백관을 거느리시고 소임에 따라 맡기시느니라.
마지막 조: 무릇 제도라 함은 시일이 오래되면 폐단이 따르기 마련이니, 이에 대조선국 국왕께서는 때로 손수 발의하시어 본 국제의 절목을 고치도록 하유하실 수 있으시니라.[19]
제2조: 대조선국 국왕께서는 무한하신 위엄과 권세를 향유하옵시나니, 이는 무릇 이륜을 크게 일으켜 만백성을 이롭게 함이니라. 이에 문무백관을 거느리시고 소임에 따라 맡기시느니라.
마지막 조: 무릇 제도라 함은 시일이 오래되면 폐단이 따르기 마련이니, 이에 대조선국 국왕께서는 때로 손수 발의하시어 본 국제의 절목을 고치도록 하유하실 수 있으시니라.[19]
4.1.1. '전제'에 대한 해석
국제 1조에서 대놓고 전제정치를 명언하였으나 바로 2조에서 '만백성을 이롭게 하기 위해'라는 제한을 걸어버려서, 군주의 위엄과 권세가 신의 뜻이나 당연한 전통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법에 의해 보장되고 제약된다는 해석이 되어버렸다. 이 때문에 작중에서도 외국인들은 이게 도대체 전제군주정인지 입헌군주정인지를 혼란해하는 상황. 조선 측에서는 글귀 그대로라며, 당신네 정치체제 구분을 어찌 유교적 전통에 따라 구성된 조선의 국제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겠느냐고 해명했다. 최익현은 이에 대해 군민공치(君民共治)라는 표현을 제시했다.조선시대에 전제(專制)라는 단어는 오늘날 쓰이는 것과 정반대의 뜻으로 쓰였으며 오늘날의 쓰임새는 근대에 일본에서 들어온 것이기 때문에 작중 시점에서의 전제정치란 사실 입헌군주제를 뜻한다는 팬들의 해석이 있으나 그런 경우라면 1조와 2조의 해석에 충돌이 없이 바로 입헌군주제로 해석되므로 외국인들이 '조선은 도대체 전제군주국인지, 입헌군주국인지'를 물으며 혼란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해당 단어는 오늘날의 쓰임과 같이 사용되었으며, 국제를 외교관 등에게 소개하는 과정에서 '전제정치'가 'despotism'으로 번역되었으리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4.2. 행정부
국제를 제정하면서 겸직을 가능한 한 없애고 통리기무아문 아래 12사와 기존 육조를 합쳐 의정부 아래에 두었다. 의정부의 수장은 영의정이며 총리대신을 겸한다.[20] 총리는 추거를 통해 선출된다. 임기는 4년이며 중임제를 채택했지만, 두 번 연이어 역임하지는 못하게끔 하였다. 총리는 임금을 대신하여 육조를 지휘하고 인사권을 행사하며 임기 중에도 당직 겸직이 가능하다.육조의 체제는 예부터 율령 따라 내려오는 것이므로 바꾸기 저어되는 바, 대신 육판서 아래 십이참판을 두어 그 맡는 바를 나누었다. 그리고 궁내의 법도를 크게 바꾸어 환관 채용을 중단하고 궁녀들도 모두 혼사 치를 수 있도록 하였다.
열흘에 한 번 임금과 총리대신을 비롯한 중신들이 경복궁 사정전 또는 경무대에 모여 '기무회의(機務會議)'를 통해 국사를 논하고 나라의 대계를 정한다. 비록 임금이 회의에 임석하지만, 옛 상참(常參)이나 차대와 그 제도가 다르다. 나라의 소소한 일은 스스로 처리하고 후에 임금께 아뢰는 것이 자리를 잡고 있다.
- 의정부
영의정 겸 총리대신, 좌의정, 우의정으로 구성되어 있는 내각의 최고 의결기관이다. 영의정이 행정부의 수반인 총리대신직을 겸하게 되면서 좌·우의정이 그 위상과 별개로 실권이 상대적으로 격하됐다. 김옥균 총리 재임 중 총리대신 직속으로 유공자 보훈을 주관하는 기충보훈국(구 충훈부)이 설치되었다. - 육조
- 이조
인사, 내무, (교육) 담당 부처. 경무서를 관할 아래 두고 있으며, 여러 해에 걸쳐 꾸준히 나라의 행정을 가다듬고 있다. 과거시험에서 국문이 허용되고나서 나랏말을 연구하는 국문교정청이 이조 산하에 세워졌는데, 이를 빌미로 예조에서 '학교흥' 관련 업무를 이관해왔었다. 국제 제정 당시 통리아문과 육조를 합치는 과정에서 고통을 받았던 전적이 있다. - 호조
재무, 세무 담당 부처. 호조탕약의 원조. GDP 개념의 탄생지. 국고가 차면서 가장 목소리 커진 곳이면서 황란 이후로 야근을 밥먹듯이 하며 열심히 공밀레를 당한 곳이기도 하다. 야근 때 마시는 커피값도 아까워서 물을 타서 절약해보려 만들어진 것이 바로 호조탕약이다. 귀남이 고생하는 어윤중이 안쓰러워서 육조 중 한둘만 유난히 바쁜 것도 옳지 않다 언급했더니, 다른 부서들이 새로운 탕약 앞에 자신들의 부서 이름이 붙을까 서로 긴장하고 있다. 재무 부서답게 다른 부서에서 예산 늘릴 일 만드는 것에 가장 예민해하며, 쓸데없이 돈 나갈 일을 만드는 신료에게 "아직 커피 맛을 덜 본 듯하니 대야 가득 호조탕약을 담아 칠공[21]을 모두 적셔 주마"하고 비난을 날리는 등 야근으로 인해 독기가 한껏 올랐다. 참판직으로 재무참판을 두고 있다. 특허권 심의를 결정한다. - 예조
외교, 교육, 문화 담당 부처. 업무 범위가 워낙 넓은 대형 부처라 판서 아래 참판직을 외무참판, 문교참판으로 나누어 두고 있다. 문교참판은 전국의 교육기관과 여러 종교들을 총괄한다. 서양 국가들에게는 '외무부'라는 일반명사 대신 '예조' 이름 그대로 고유명사로서 불린다. - 병조
국방 담당 부처.세자 때문에 호조에 이어 두 번째로 갈리게 된다. - 삼군부
비변사가 혁파되며 최고 군령기관으로서 다시 부활하였다. 을축양요 때문에 대원군의 계획과 달리 통리아문에 그 자리를 넘겨주고 말았지만, 연병법 시행으로 통리아문과 병조만으로 감당할 수 없게되자 어쩔 수 없이 세워졌다. 원 역사 삼군부 위치인 의정부 앞 예조 터에 통리아문이 들어서고 대신 궁궐에서 조금 떨어진 위치에 자리잡았다. 그 덕에 다른 관청보다 어려움 없이 3층까지 올려 지을 수 있었다. - 정강사
군사 안보 싱크탱크. 서양에는 '국경방위연구소'로 알려져 있다. 흥선대원군이 북벌 계획을 논하기 위해 꾸린 군내 사조직 '정강계'의 후신이다. 대원군의 잔병치레가 늘며 유명무실해졌었으나, 1900년, 앞으로 닥칠 천하 대란에 대한 대책을 수립하기 위해 옥균이 추진하였던 개화당의 싱크탱크를 흡수하여 공식 기관으로 부활했다. 대외적으로 신기술을 무기에 접목시키는 연구 기관을 표방하여 본 목적은 철저히 숨기고 있어 대군들마저 이를 알지 못한다.
이곳에서 의결된 사안은 어명과 다를 것이 없을 정도로 위상이 높으며 비밀(秘)로서 처리된다. 원자폭탄 두 발에 일본이 날라갔듯 거함거포에 매달려봤자 기술의 발달에 따라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귀남에 의해 갓 발명된 비행기에 기관총과 진천뢰를 탑재하려는 등 신문물의 병기화를 빠르게 추진하고 있다. 아문 아래 편성된 이후 첫번째 업무로 천하 대란의 원인에 대해 예측하는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정강사는 장차 유럽 나라끼리 그 본토에서 싸운다면 모든 당사국이 서로 상대가 보불전쟁처럼 단판 싸움을 원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서로 처음 내지른 창이 막히게 되면, 방패를 들이밀며 힘싸움으로 어느 한쪽이 먼저 힘 다하기만 겨루게 될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 형조
법무 담당 부처. - 공조
산업, 건설, 기술 담당 부처. 나라가 발전하며 쓰임새 많아지고 점점 규모가 커지는 중이지만 육조 중 말단 취급인 것은 여전하다. 참판직으로 공상참판, 기기참판을, 산하 공기업으로는 광무총국과 융비총국을 두고 있다. 특허권 심의에 호조와 함께 관여한다. 녹화회를 후원하여 신문물의 안전성과 유효성을 검증하도록 돕고 있다. - 격치물성청
국립연구소. 공조참의 소관 기관으로 퀴리부부와 니콜라 테슬라, 프리츠 하버가 소속되어있다. 밤섬의 부속 연구소에서 도호부 하나를 능히 없앨 수 있는 흉포한 진천뢰를 연구하여 고종 사후 완성시키고, 실험을 통해 전쟁의 공포를 상기시킨다. 핵무기 개발 이후 상호확증파괴 논리로 인해 강대국간의 전쟁이 사라진 현재와 비슷하다. 그러나 현실과 달리 실전엔 쓰이지 않았다.
- 삼사
- 사헌부
감찰 담당 부처. 사법 기능을 평리원 및 판심청으로 이관하여 근대적인 감찰 기구로 거듭났다. 이들에게 걸리면 어찌나 무서운지 차라리 공안서에 잡히는 것이 나을 거라 할 정도.
- 공안서
조선의 정보기관. 수장은 총관이다. 육조거리 삼군부 근방에 청사가 있다. 대원군이 전국 서원에 교과서를 배부한다는 명목으로 보부상 무리를 모아 창설한 익문사의 후신이다. 도중 결성 시위 당시 익문사가 도중 시위대와 사사롭게 충돌하면서 나중에 문제가 또 생길 것을 우려해 대원군의 사조직 익문사를 왕명을 받는 공안서로 개편했다. 동맹국인 프랑스와 러시아에게 각각 조선의 헌병대, 오흐라나로 알려져 있다. 익문사 시절에는 권학도감, 예조에 소속되어 있었다. 운종가 도중 시위를 계기로 지금의 공안서로 개편된 지금은 기무회의 의결을 따르는 독립기관이다. 대원군이 숨을 거두면서 운현궁 사병에서 점차 독립적인 정보기관으로 거듭났다. 공안서의 첩보망은 국내외를 가리지 않는데 청나라는 이미 북경에서 강남까지 곳곳에 깔려있는 상태이다. 벌열을 극도록 경계했던 대원군의 색채가 강하게 남아있어 자본가들을 집중 관리하고 있다.
- 궁내부
- 명부사
내·외명부를 통합하여 만든 관청. 궁중의 법도를 단속한다. 벼슬 노리는 여학 출신 여성들이 주로 들어가는 관청으로 나름 들어가기 어려워 들어간 젊은 궁인들로서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 기타
- 구급서
무관 한규설의 노력으로 경무서에서 분리되어 창설되었다. 1891년 초 도성 화재 때 큰 역할을 했다.
4.2.1. 국제 제정 이전
4.2.2. 국제 제정 이후(총리직선제 이전)
- 의정부
- 육조
- 삼사
- 사헌부
- 기타
4.2.3. 역대 총리대신
조선의 역대 총리대신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직함 | 대 | 이름 | 임기 | 정당 | 비고 | |
취임 | 퇴임 | ||||||
통리기무아문 총리대신 | 1 | 박규수 | 1866년 | 1871년 | 개화당 | 을축변법 시행 명전법 시행 | |
2 | 이유원 | 1871년 | 1880년 | - | 연병법 시행 국제 제정 | ||
영의정 겸 총리대신 | 3 | 홍순목 | 1880년 | 1884년 | - | 조일동맹 체결 교린삼장 반포 | |
4 | 심순택 | 1884년 | 1888년 | - | 경복궁 중건 | ||
5 | 최익현 | 1888년 | 1892년 | 자유당 | 첫 직선 총리대신 신촌향약 시행 유라시아 동맹 체결 | ||
6 | 민태호 | 1892년 | 1894년 | 만민공산당 | 양력 및 개국 연호 도입 계사황란 | ||
7 | 김옥균 | 1894년 | 1898년 | 개화당 |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시행 을미정난 만국평화회의 개최 | ||
8 | 김홍집 | 1898년 | 1902년 | 자유당 |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시행 격치물성청 설치 | ||
9 | 전봉준 | 1902년 | 1906년 | 만민공산당 | 평양 아주대회 개최 | ||
10 | 김옥균 | 1906년 | 1912년 | 개화당 | 1910년 이후로 전시거국내각 | ||
11 | 박은식 | 1912년 | 현재 | 자유당 |
4.2.4. 역대 내각구성
조선의 역대 내각 구성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소속 | 직책 | 최익현 내각 | 민태호 내각 | 제1차 김옥균 내각 | 김홍집 내각 | 전봉준 내각 | 제2차 김옥균 내각 |
의정부 | 영의점 겸 총리대신 | 최익현 | 민태호 | 김옥균 | 김홍집 | 전봉준 | 김옥균 | |
좌의정 | 민태호 | 어윤중 | 김홍집 | |||||
우의정 | 김성근 | 어윤중 | ||||||
이조 | 판서 | 김윤식 | ||||||
호조 | 판서 | 어윤중 | 어윤중 | 홍종우 | 홍종우 | 이용익 | ||
재무참판 | 홍종우 | 홍종우 | 이용익 | |||||
예조 | 판서 | 김윤식 | 김홍집 | 박영교 | 유길준 | 민종식 | ||
외무참판 | 김홍집 | 손병희 | ||||||
문교참판 | 이건창 | 정병하 | ||||||
병조 | 판서 | 정하원 | 홍영식 | 김기범 | ||||
형조 | 판서 | 오경석 | 서광범 | |||||
공조 | 판서 | 김병시 | 이용직 | |||||
공상참판 | ||||||||
기기참판 | 변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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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입법부
국회를 참의원, 국회의원을 참의대부라고 부른다. 참의대부는 종4품이며 각 군현에서 추거로 총 300명이 뽑힌다. 임기는 4년이다. 참의대부 추거 출마는 진사 이상의 사람 중에서 실직에 있지 않은 자들만 가능하다. 과거에 합격하지 않아도 관직을 제수받은 적이 있다면 외국인이라도 참정권이 주어진다. 그리고 외명부에 속하여 관등을 받은 문무대신의 아내들도 추거에 출마할 수 있다. 일례로 엘리노어는 정경부인 자격으로 출마하여 조선 최초의 참의'부인'이 됐다. 의장은 참의원정이다. 유 · 산당 시기에는 조정에서 파견한 인물이 맡았으나, 제도가 안정된 이후로는 원내 정당이 돌아가며 맡고 있다.유림에서는 조광조가 창안했던 현량과의 단점을 개선, 장점을 계승한 제도로 보고있다. 이백년 붕당 정치의 경험 덕분인지 의회 정치가 초창기부터 원활히 작동하였다. 삼당 모두 서로 대립이 약하고 협조하는 경향에서 간부정당과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 밀실정치의 면모도 나타나지만 공론과 평판을 중요시하는 전통 덕분에 일부 상쇄된다. 을미정난을 계기로 국왕이 각 당 영수에게 종2품 특진관을 제수하여 경연에서 조언을 받는 것이 관례가 됐다.
국헌상으로는 참의원이 국용산정 권한, 즉 예산안 편성권을 가지고 있지만 내각의 권한이 막강하여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이에 저들 고장이나 대의를 위하여 발의하고 싶은 사업이 많은 젊은 참의대부들 사이에서 조금씩 불만이 일고 있다.
전봉준 내각부터는 내각대신 후보자를 전형회(청문회)를 통해 검증할 수 있게 되면서 행정부에 대한 견제 장치가 마련되었다.
참의원 의사당은 운현궁 건너편 마당에 있는 양관이다. 그래서 대원군이 세상을 떠난 후로는 구름재가 운현궁이 아니라 참의원을 돌려 이르는 말이 됐다.
4.3.1. 정당
참의원 개원 초기에는 유당과 산당, 그리고 무소속의 양당 체제였고, 참의원 후기에는 개화당, 만민공산당, 자유당의 3당 체제가 되었다.- 유당(儒黨)
참의원 개원 초기 기정진을 구심점으로 삼남과 기호 지방의 선비들이 뭉친 파벌. 천진 교안 때 청과 합수단을 꾸려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고 동요하는 민심을 위무했다.
- 산당(山黨)
참의원 개원 초기 전 아오지 만호 이백능을 구심점으로 차마 선비라고 하기 어려운 북부 출신 진사들이 뭉친 파벌. 유당에서 저쪽은 그저 북변 산속에서 올라온 산척 무리들이라며 비꼬며 붙인 이름이다.[22] 수로 따지면 유당에 비할 바가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기세만은 높았다.
- 개화당(문명과 진보의 당)
박규수가 창당한 조선 최초의 정당. 안동 김문 등 문벌에서 재벌로 거듭난 명문거족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부르주아 정당이다. 경제발전을 최우선으로 여기며 외교적으로 유학생 출신이 많아 친유럽 성향이 강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도중(노조)들과 불편한 사이다. 제1회 참의대부 추거에서 대패 후 당내 중진들의 갈등으로 혼란스러운 와중 김옥균이 김문 세력과 당내 젊은 세대의 지지를 받으며 새로운 권력으로 부상하였다. 이후 경화시보를 설립하며 민족주의를 당론으로 내세우고 있다. 최초의 정당 싱크탱크 설립을 구상하였으나 국영 싱크탱크인 정강사에 흡수되었다.
- 만민공산당(인민의 공산당)
만민공산당 당기(버전 1), 만민공산당 당기(버전 2)[23]
흥선대원군이 자기 입맛대로 뜯어고친 공산당 선언을 정강으로 채택하여 창당한 반세도가 정당이다. 당 실세 오경석이 역관 출신이라 중인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과거 시험이 고시로 개편되면서 난이도가 대폭 상승하여 이대로라면 장차 공산당 대부의 씨가 마를 지경이라 줄기차게 참의대부 요건 완화를 외치는 중이다. 세족 중에서는 여흥 민씨 일부가 왕후 민씨와 대원군의 관계를 이용해보려고 참여중이다.
유럽 진또배기(?)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 뜨거운 감자 같은 존재로, 독일 사회민주당이 원내 5당을 지켰다고 만족할 때 첫 총선에서 당당히 과반을 차지하여 참의원 제1당이 된데다 2회 선거에서는 당당히 총리까지 배출하여 여당 자리를 차지하는 거대한 성과를 거두면서 무시할 수 없는 인지도를 쌓은데다 사회주의의 시초인 카를 마르크스의 딸이 주요 당원으로 가입하며 정통성 문제도 함부로 제기할 수 없게 되면서, 유럽 사회주의 내에서는 만민공산당처럼 체제 내부에서의 투쟁이 필요하다는 온건파와 만민공산당은 애초에 제대로 된 공산당이 아니라는 보수파 진영으로 나뉘어 싸움을 벌이고 있다. 그 반대급부로 세르게이 비테 등 사회 기득권층들에게는 사람의 도리를 아는 공산당으로 호평 받고 있다.
군비 증강을 반대하는 전봉준의 기고문과 여학 설립 등의 정책 공약 덕에 백성들 사이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며 제1회 전국 참의대부 추거에서 단독 과반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고, 2회 추거에서는 개화당의 약진과 지방 토호의 외면 때문에 원내 1당 자리는 뺏겼으나 대신 어부지리로나마 총리대신 자리를 가져왔다. 이후에는 1당 자리와 총리대신 자리는 가져오지 못하고 있으나, 어찌됐든 3당 중 하나로서 여학을 세우고 야독당(야학)을 세우며 무당 등 사회적으로 천시당하는 이들을 결집시키는 등 평등주의를 내세워 신분제의 잔재를 메우고 사회적 약자들의 표를 가져오며 존재감을 뽐내고 있다.
주요 지역기반은 인천부다. 공산당 깃발만 든다면 김옥균이 나와도 뽑힌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
- 자유당
총리대신 추거에 출마하기로 결심한 최익현이 얼치기 청년 제국주의자들의 모임 '자강사'를 흡수하고 반세도가 유림파 관료들을 모아 창당한 제3정당. 성리학을 바탕으로 한 실용주의적 자유주의를 표방하며 만백성의 선비화를 목표로 삼고 있다. 사실상 최익현 1인 정당으로 시작했으나, 최익현이 창당 1년만에 대권을 잡고 그 후로도 당세를 불려나가며 어엿한 규모를 갖추었다. 안인수에 이어 안태훈을 따르는 신흥재벌까지 거액을 후원하여 광통교 옆 인적 많은 곳에 당사를 넓게 차지하고 있지만, 최익현의 성정따라 호화로운 양옥 대신 기왓집으로 우직하게 일관 중이다. 이건창이 낸 당의통략에 근거해 당쟁 화해론을 제시하였다. 추거가 국법으로 굳어져가며 공산당과 자유당이 점차 하나로 붙는 현상이 생기고 있다. 이에 서로 불만을 품고 있지만 개화당보다는 낫다는 생각에 어쩔 수 없이 같이 가는 부분이 많은 상황이다. 양당 사이 저울추 역할만으로 충분하다는 최익현, 황현을 위시로 한 선비들과 달리, 집정에 욕심이 있는 당내 신진 세력은 이승만 등 원역사 독립운동가를 주축으로 한 교양사와 이완용 등 원역사 친일파를 주축으로 한 일진회 두 파벌로 다시 갈라져 대립 구도에 있다.
4.3.2. 추거
4년을 주기로 총리 추거와 참의대부 추거가 동시에 실시되었으나 94년 보궐선거 이후 2년씩 번갈아 이뤄진다. 총리의 경우 중임이 가능하지만, 연임은 불가하다. 일정 규모 이상의 부세를 내는 자, 향시를 통과한 생원 또는 진사만 투표권을 가진다. 매단자(유권자) 수가 늘면서 추거단자(투표용지)를 팔아 걷던 방식을 고쳐 관청이나 각 동리에 지정된 서원 혹은 서당에 투표소를 마련하였고 추거일자도 농한기로 한정하였다. 개표 과정은 다음과 같다. 각 군현에서 미리 개함하여 표의 많고 적음을 헤아리고, 그 결과를 도성으로 보내어, 광화문 앞 육조거리에서 한성 5부의 개함과 더불어 발표한다. 이때 혹시나 있을 부정선거를 방지하기 위해 국왕이 개함례에 참관한다. 국왕이 친람하므로 만에 하나 단자를 모으거나 세는 데 있어 잘못이 있으면 그대로 기군망상(임금을 속이고 업신여긴다는 뜻)하는 꼴이 된다. 전통적으로 기군죄는 반역과 동등하게 처벌했으니, 결과적으로 선거조작을 하면 최대 사형까지 갈 수 있는 무시무시한 나라가 되어버렸다. 명시적으로 연좌제를 폐지했다는 서술은 없었지만 서양 법제도 참고했을 것이니 그나마 삼족멸이 벌어질 일은 없다는 게 다행일 정도.길일을 택해 행사를 치르는 관습이 남아있어, 총리대신 취임일은 그때그때 조금씩 다르다. 단 기상학의 발달과 함께 길일은 이제 날씨가 좋고 온난한 날로 의미가 변했으며, 서쪽 중국의 기상정보가 전보를 타고 전해지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일기 예측이 가능해져 그에 따라 길일을 택하게 되었다.
4.3.2.1. 1874년 보궐 추거
- 선거 지역: 한성 서부, 남부, 북부
- 추거일: 음력 1874년(갑술년) 1월 2~6일
- 개함일: 음력 1874년(갑술년) 2월 1일
- 추거 결과
- 한성 서부
전 통리아문 회계고문 백래(약 2900인) - 전 교서관 정자 김병건 - 한성 남부
전 중추부첨지 최한기(약 3200인) - 전 부호군 이원규 - 선달 김신묵 - 한성 북부
참의대부 추거
(한성 북부)관직 전 총리대신 전 통리아문 당상 격차 추거인 후보 박규수 오경석 (1위/2위) 득표수
(득표율)7,520
(51.26%)7,150
(48.74%)+ 370
(△2.52)14670 연희방 가좌동 44.74% 55.26% △10.52 342 양덕방 계생동 37.06% 62.94% △25.88 429 준수방 사포서 50.44% 49.56% △0.88 339 ··· ··· ··· ··· ··· 개화당 출신의 두 거물이 치열하게 맞붙은 만큼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았던 추거였다. 박규수는 요치원(치과) 설립 공약을 내세우며 유권자들의 효심을 자극했고, 이를 향해 오경석은 오원도평이란 만평을 신보에 내걸어 네거티브를 벌였다. 성저 지역에서 호민과 중인 계층의 압도적 지지를 받아 앞서고 있던 오경석은 부내에서 많은 표를 받은 박규수에게 후반 역전을 당하며 패하였다.
4.3.2.2. 역대 추거
역대 총리대신 및 참의대부 추거 결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1888년 제1회 전국 참의대부 및 총리대신 추거 | |||
정당명 | 개화당 | 자유당 | 만민공산당 | |
총리후보 | 김병시 | 최익현 | 민태호 | |
결과 | 2위 | 당선 | 3위 | |
의석수 | 3당 | 2당 | 1당 | |
비밀선거와 평등선거의 원칙이 보장된 첫 전국단위 추거. 진보적인 정책 공약들로 백성들의 반향을 일으킨 공산당이 과반을 차지하여 다수당이 되었으며, 박규수 사후 방향성을 잃은 개화당이 참패를 겪었다. | ||||
1892년 제2회 전국 참의대부 및 총리대신 추거 | ||||
정당명 | 개화당 | 자유당 | 만민공산당 | |
총리후보 | 박정양 | 민태호 | ||
결과 | 2위 | 불출마 | 당선 | |
의석수 | 3당 | 1당 | 2당 | |
개화당은 금권선거란 비난을 무시하며 재보를 열심히 뿌려댄 결과, 세도가의 과거사 문제가 불거졌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선거보다 약진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에 반해 공산당은 호황을 만끽하던 시골 유지들이 등을 돌리며 원내 2당으로 내려앉았다. 양당 사이에서 자유당이 어부지리로 다수당을 차지하며 각 3당이 미미한 차이로 비슷한 의석수를 가져갔다. 총리 추거는 자유당이 인재 부족으로 후보를 내지 않고, 개화당 유력 후보 김옥균도 출마하지 않으면서 일명 '여의[24] 총리 추거'라 불리게 되었다. | ||||
1894년 제3회 총리대신 추거 | ||||
정당명 | 개화당 | 자유당 | 만민공산당 | |
총리후보 | 김옥균 | ??? | ??? | |
결과 | 당선 | |||
민태호 사직 여파로 공산당이 힘을 못쓰는 가운데 구관이 명관이라 최익현이 자연스레 돌아올 것이라 여기는 이들이 많았지만, 지난 추거 때 끝내 나서지 않았던 김옥균이 방대하고 짜임새 있는 경제공약을 내세워 본래 자유당을 지지하던 사람들의 단자까지 빨아들여 총리 자리에 올랐다. | ||||
1896년 제3회 전국 참의대부 추거 | ||||
정당명 | 개화당 | 자유당 | 만민공산당 | |
의석수 | 1당 | ??? | ??? | |
1894년에 총리대신 보궐추거를 치렀기 때문에 참의대부만 선출하였다. 개화당이 황란 극복, 북양군 정벌 등 김옥균 내각의 업적을 내세웠으나 하는 일은 옳아도 그 뒤에 있는 마음씨 옳지 못하다 여기는 이들, 다시 늘기 시작한 공장 노동자들이 각각 자유당과 공산당에 표를 던져 개화당이 과반에 아슬아슬하게 못 미치는 의석을 확보했다. | ||||
1898년 제4회 총리대신 추거 | ||||
정당명 | 개화당 | 자유당 | 만민공산당 | |
총리후보 | 어윤중 | 김홍집 | 전봉준 | |
결과 | 당선 | |||
김옥균이 총리대신 임기를 늘려 참의대부와 같이 선거를 치르게 하는 개혁을 밀어붙였으나 실패하여 원래대로 임기가 끝난 후 이뤄진 총리대신 선거. 프랑스에서 돌아온 이후 자유당에 영입된 김홍집이 '민생지질(삶의 질)'을 아젠다로 내세워 공산당으로 갈 표심을 뺏고, 개화당이 경제공약 아래 내세운 어윤중을 꺾고 당선되었다. | ||||
1900년 제4회 전국 참의대부 추거 | ||||
정당명 | 개화당 | 자유당 | 만민공산당 | |
의석수 | 1당 | ??? | ??? | |
개화당이 추거를 앞두고 학제개혁이라는 정책안을 내놓으면서 이를 두고 공산당과 자유당 내에서 당론이 크게 갈려 개화당이 일찍 우세를 점했다. 김옥균이 논설 '무비시론'을 낸 직후 라이트형제의 비행이 성공하면서 곤란에 처할 뻔 했지만 근근이 1당을 차지하였다. | ||||
1902년 제5회 총리대신 추거 | ||||
정당명 | 개화당 | 자유당 | 만민공산당 | |
총리후보 | 홍영식 | 최익현 | 전봉준 | |
결과 | 당선 | |||
1902년 쌀소동을 계기로 세계 최초의 대선 토론 '국사공론회'가 유·무선 생중계로 열렸다. 유권자들 중에서는 쌀 태워먹은 일에 대해 이제 쌀만으로는 밥벌이가 되지 않으니 이해할만 하다는 이들이 좀 더 많았고, 양당을 논박한 최익현에게 개화당으로 갈 표가 옮겨가며 근소한 차이로 만민공산당이 총리직을 차지했다. | ||||
1904년 제5회 전국 참의대부 추거 | ||||
정당명 | 개화당 | 자유당 | 만민공산당 | |
의석수 | ??? | ??? | 1당 | |
공산당이 또 다시 득세하여 자유당과 손잡으면 쉽게 과반석을 넘을 수 있게 됐다. | ||||
1906년 제6회 총리대신 추거 | ||||
정당명 | 개화당 | 자유당 | 만민공산당 | |
총리후보 | 김옥균 | ??? | 김기범 | |
결과 | 당선 | |||
자유당 유력 후보였던 이완용이 출마하지 않고, 다음 후보로 거론되던 김홍집도 자유당이 개화당의 협력 제의를 수락하며 나서지 않게 되었다. 공산당에서는 지난 전형회를 통해 이름을 널리 알린 김기범이 나섰다. 전봉준 재임 중 이룩한 일도 많고 경제 공약도 대개 지켜진데 비해 예상했던 것만큼 성과가 크지 않아 김옥균이 다시 총리직을 탈환할 수 있었다. | ||||
1908년 제6회 전국 참의대부 추거 | ||||
정당명 | 개화당 | 자유당 | 만민공산당 | |
의석수 | ??? | ??? | 1당 | |
힘 잃을 것 같던 자유당이 일진회 덕에 젊은 층의 지지를 받으며 도로 약진하여 순위는 그대로 유지되었지만 정립한 세 당 간의 차이는 확연히 줄었다. | ||||
1912년 제7회 전국 참의대부 및 총리대신 추거 | ||||
정당명 | 개화당 | 자유당 | 만민공산당 | |
총리후보 | ??? | 박은식 | ??? | |
결과 | 당선 | |||
의석수 | ??? | 1당 | ??? | |
전임 내각의 2년 임기연장으로 20년만에 동시에 치러진 추거. 유럽 전란에서의 최익현의 활약과 종전 확정 소식이 알려지며 자유당 일색의 결과로 끝이 났다. 총리 당선인 박은식은 자신의 지재가 아닌 최익현의 덕으로 당선되었다며 이와 같은 국정 기조 이어가겠다고 천명하였다. |
4.4. 사법부
형조와 사헌부의 기능 일부를 분리하여 국제 제정과 함께 사법원을 새로 설치하였다. 감영과 개시를 둔 전국 각 도시에 지방법원 격인 판심청(判審廳)을 설치해 각종 민형법에 관한 재판을 진행하며, 그 위에 최고법원인 평리원(平理院)을 두었다. 민간에서는 판심청을 지방 관아인 '동헌'의 서쪽 부지에 주로 지어졌다 하여 '서헌'이란 속칭으로 부른다. 법과 고시를 통해 법관을 선발한다.여전히 원님 재판 시절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의 인식과 달리 대명률과 대전회통을 더 이상 법전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각각 민법과 형법에 해당하는 '민률'과 '형률'에 따라 재판한다. 법관과 검사를 각각 판사, 심사라고 하며 하는 일이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변호사·법무사격인 대송인이 있다. 대송인의 경우 현재 법과 등과자들로는 서헌 꾸리기도 빠듯하여 대대로 율관하던 이들이나 그 일가붙이들이 주를 이룬다. 고작해야 소장 양식 외우고, 수령에게 아첨하고, 아전들에게 기름칠 하던 그 옛날 율관들과 달리 나름대로 학식 있는 이들이 많다. 그래서 사회적인 인식도 좋은 편이지만, 점잖은 대가에서는 스스로 국법을 배우거나 한미한 선비를 거두어 그 문중 송사를 맡아보게 하는 것을 선호한다.
4.5. 외교
열강은 조선을 총칼로 깨우쳐야 할 비문명 야만인이 아니라 나름의 원칙과 도덕을 지키며 살아가는, 대화가 가능한 상대로 여기고, 조선은 자신감과 여유를 갖추어 서구 문명을 무분별하게 추종하지 않고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것을 당연스레 생각하고 있다. 또한 여러 국제적 사건이 발생하면 어느샌가 조선이 끼어들어 선의의 제안을 해오는데 열강에서는 '적어도 손해는 안 본다. 우리가 바라는 결과가 나오지도 않지만.'라고 인식하고 있다. 동시에 이상한 짓을 많이 하는 순박한 괴짜 이미지도 박혀있다.동양 국가들도 대체적으로 조선에 우호적이며, 청나라에는 도리어 조선을 본받자는 개화론자도 많다. 청 조정조차 조선의 '조언'은 '적어도 손해는 안 본다'라고 인식을 가지고 있다. 반면 일본은 조선의 번영을 바라보며 자신들이 먼저 개화했는데 왜 이렇게 차이가 났는지, 이 번영이 일본의 것이 되어야 하지 않았는지 질투하기도 한다. 조일동맹을 통해 조선이 이익을 독점하고 있다는 국민감정이 발생할 정도.
전반적으로 조선과 외교관계를 맺은 국가들 사이에서는, 조선의 국왕이 전쟁을 꺼린다는 인식이 퍼져 있다. 원세개가 조선의 세자가 전쟁이 나면 최전선에 서겠다고 자처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그것을 전쟁 위협으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나라 안에서 누가 함부로 전쟁하자고 하면 곧 세자를 위험한 최전선에 세우고 싶다는 말이 되니 전쟁하자는 소리를 못하도록 만든 것이다"라고 받아들였을 정도다.
그런데 조선이 원세개의 쿠데타에 대응하기 위하여 근대 병기로 무장한 60만을 순식간에 소집하는 것을 보고 북양군은 수나라 상대하던 고구려 심정을 느꼈고, 유럽은 조선에 대한 인식을 30년 동안 조용히 힘을 기른 극동의 프로이센으로 격상시켰다. 결국 조선의 '이상한 짓'에 조금 더 신경을 기울일 수밖에 없게 되었고, 그렇잖아도 하도 '선의'에 당한 나라가 많아서 조선과 외교할 때는 외교적 수사로 말 돌리지 말고 가능한 한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게 상식이 됐을 정도.
이후 조선의 외교적 영향력이 더욱 증가하자 주요 열강이 조선에 설치된 공사관을 대사관으로 승격시켰다.
여담으로 귀남이 언로를 육조거리 수준으로 넓힌 탓에 국제 1조에 떡하니 조선은 전제군주정으로 적혀 있는데 유럽에서는 조선은 자유주의자, 사회주의자들의 소굴이라는 소문이 돈다.
4.5.1. 아시아
- 조선-청 관계
1868년, 조청수호조규를 체결하여 기존의 조공책봉 관계를 청산하고 서로를 자주국으로 인정하는 새로운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 대신 조선은 청을 같은 자주국이되 '대국'으로 존중하기로 했다. 청은 천진 교안 때 편을 들어준 조선에게 길림 일대를 경영하는 것을 허용했고, 조선은 그 이후로도 청과 열강들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면 나서서 적절히 중재하는 등 상당히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신사 계층 사이에서 공공연하게 조선을 배우자는 논의도 일어나고 있다.
특히 광서제가 조선에 지극히 우호적이다. 북경 외교가에서 천자가 조선의 말은 결코 무시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이홍장 등 일부 대신들은 소국이라 무시하고 있었던 조선이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발전하는 것을 보고 대단히 경계하고 있으며 청이 다시 천자국에 걸맞은 힘을 되찾으면 기존의 관계로 돌아가야 한다고 믿고 있으나, 이홍장조차 조선이 열강보다야 믿을 수 있는 나라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조선군 30만이 북양군을 제압하기 위하여 압록강을 넘었을 때도 자의원 의원들은 조선이 열강처럼 이권을 갈취하지 않으리라고 믿었고 실제로 조선은 출병에 들어간 비용과 죽은 장병들의 유가족들에게 돌아갈 배상금 정도만 받았다. 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관대한 조건 때문에 이후로도 청은 조선을 적성국으로 여기지 않으며, 조선에게 군축을 미뤄달라고 요청하거나 조선이 신무기를 시연하는데 경계보다 호기심을 갖고 보는 등 양국 관계는 매우 양호하다.
현대에 이르기까지 북경 정계에서는 좌우를 막론하고 조선과 친하게 지내는 것을 외교와 내정의 핵심사항으로 여기고 있다. 정당정치의 역사가 깊으면서 세계에 목소리 낼 수 있는 바탕인 아주연합의 핵심 국가이고, 첨단 기술 부문에서 앞서가는 위치에 있으며, 외성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데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 조선-동삼성 관계
천진 교안이 터졌을 때 조선이 청나라 편에 선 것을 높이 평가한 서태후가 봉금령을 완화하면서 교류가 시작됐다. 뜻있는 만주족 젊은이들이 국문을 숭상하는 조선을 보고 자극을 받아 만주어를 정비하여 그 말로 동서고금의 명저들을 옮기고 있으며, 조선왕조실록에 저들 조상 이야기가 많이 있으리라 여기고서 조선을 방문하는 학자들도 있다. 근래에는 몇몇 외골수 젊은이들이 만주의 본류는 숙신이니 조선과 한 뿌리라 주장하기도 한다.
- 조선-일본 관계
1867년, 수신사를 파견하여 도쿠가와 막부와 조일수호조규를 체결하였다. 그 후 초대 주조선일본공사로 카츠 카이슈가 부임했다. 대체로 우호적이다. 양국의 군사력이 평행을 이루고 있고 의회에서 다수파를 차지하고 있는 동국 세력의 좌장인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막부와 조선의 우호 관계를 자신의 치적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정한론이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쐐기를 박은 것이 1880년의 조일동맹 체결이다.
그러나 자신들이 먼저 개화하였는데 조선에 앞질러져버린 현황에 대한 질투도 있고 영국과 러시아의 그레이트 게임에서 조일이 동맹하고 있는 것이 위험하다는 판단도 있어, 결국 조일동맹을 파기하고 각각 조러, 영일동맹을 체결하되 직접적인 충돌은 없도록 합의했다. 그리고 조선은 영국에 '이러이러해서 일본이 우리와 동맹을 해소하고 영국과 동맹을 맺고자 하니 잘 부탁한다'는 문서를 보냈고, 동맹국은커녕 중립국이 돌아서려는 기미만 보여도 불바다를 만들던 영국은 일본에 대해 적대적인 묘사 하나 없이 참으로 친절하고 자세하게 소개해 주는 조선에 대해 '또 이상한 짓 한다'라고 생각했다.
이후 상술한 조청전쟁 때 조선의 군사력이 일본에겐 상식 밖의 수준임을 알게 되어서 공조증과 같은 공포에 떨게 된다. 무엇보다 서양 외교가에서는 조청전쟁을 프로이센이 프랑스와 싸우기 전에 후방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오스트리아에 관대한 협정을 제안했던 보오전쟁과 같은 함의로 보고 있는데, 조선이 청국과의 사대관계를 청산하고 후방을 안정시켰으면 최종 타겟은 바로 어디겠는가? 안 그래도 독도에서 사상자까지 나오는 해상대치를 한 사례도 있으니. 이런 호들갑도 추가되어서 조선 입장에선 정말로 친선 관계를 유지하는 말을 했는데도 '저렇게 말해도 조선이 언제 우리를 공격할지 모른다!'라는 생각에 빠지게 된다.
그래도 독도 분쟁 이후로는 직접적으로 무력대치를 하지 않은데다 영-불-러 삼국협상이 결성되며 동맹의 동맹 관계가 되기도 했고, 아주대회 등 아시아 국가 간의 교류도 늘어나 드레드노트급 함선을 조청일 공동발주로 주문할 정도로 사이는 그리 나쁘지 않다.
- 조선-류큐 관계
1872년에 귀남이 몸소 일본의 류큐 병합 시도를 저지하여 매우 우호적이다. 류큐 왕국이 청에도 보내지 않은 공사를 조선에 파견할 정도이며, 청은 명목상 상국이고 조선이 실질적인 상국이라는 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 조선-베트남 관계
친구의 친구 정도의 관계다. 양헌수를 공사로 파견하였다. 아직 국제법도 제대로 모르는 월남의 관리들을 가르치고 있다.
- 조선-연해주 관계
경제가 완전히 조선에 종속되어 있다. 조선에서 이를 빌미로 갑질한 적은 없지만, 연해주 지주들은 언제나 노심초사하는 처지다. 일부 고약한 조선인들은 이곳은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가 아니라 연해도 해삼위도호부라는 농을 치기도 한다.
- 조선-시암 관계
1903년 기준으로 조선국 국제를 본떠 군민공치 이룩하자고 하였다가 라마 5세에게 밉보인 쁘릿사당이 13년째 공사로 부임 중이다. 본래 라마 5세는 오랫동안 불교를 탄압하였던 조선과 통교할 생각이 없었지만, 발칸 반도에서 성능이 입증된 조선제 무기를 좀 더 헐하게 들여오기 위해 생각을 바꾸어 안면을 텄다. 그러다가 베네수엘라 사태를 계기로 촉발된 영국 정계의 논란이 어떤 식으로든 시암 근방까지 여파가 닿으리라는 결론이 나오자 아시아에서 의지할 곳을 얻기 위해 큰 마음을 먹고 왈라야 알롱꼰 옹주를 경양대군에게 시집보내 전주 이씨와 짜끄리 왕조가 사돈지간이 됐다.
- 조선-필리핀 관계
스페인 식민지 시절 카티푸난이 아주대회 참가 의사를 밝힌 것을 계기로 인연이 생겼다. 필리핀 공화국이 출범한 이후 호세 리잘의 부탁을 받고 미국을 끌어들여 신생정부의 내부 갈등을 무마시켰다.
- 조선-하와이 관계
흥선대원군의 회갑연 때 아시아 순방 중이던 칼라카우아 국왕이 방문한 것을 계기로 아직 상호 공사 파견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 조선이 황란으로 고생할 때 국왕이 내탕을 털어 지원은 해주었다. 그리고 하와이도 아시아라며 조선에서 준비하고 있는 아주대회에 사람을 파견하기도 했다.
4.5.2. 유럽
- 조선-프랑스 관계
1865년, '조불수호조규'를 체결하였다. 초대 주조선프랑스공사로 앙리 드 벨로네 백작이 부임했다. 프랑스 입장에서 비합리적인(즉 거의 평등한) 조건의 조약으로 나라의 문을 열어준 덕분에 조선이 이웃 나라들에 비해 훨씬 관대한 조건으로 문명화된 세계의 변방에 들어올 수 있었다. 이러한 관대한 조건은 프랑스가 다른 열강을 엿먹이는데 사용된다. 벨기에의 레오폴드 2세가 말하길 자신들이 올라갔다고 사다리를 차는 격이라고. 이후 러불동맹에 조선을 참여시켰다. 조선이 원세개의 쿠데타에 대응하여 근대 화기로 무장한 60만 대군을 순식간에 소집하자 벨로네는 일약 프랑스 외교가의 위인으로 대접받게 되었으며, 이 동맹이 자신의 발상이라며 떠드는 사람이 속속 나오고 있다.
- 조선-영국 관계
1865년, 조불수호조규 체결 직후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 초대 주조선영국공사로 해리 파크스가 부임했다. 똑같이 도덕외교를 추구하는 윌리엄 글래드스턴 내각과 긴밀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글래드스턴이 일선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그저 데면데면한 관계로 우호적이지도, 적대적이지도 않다. 이후 조일동맹이 해소되고 영일동맹을 맺었을 때는 조선의 일본에 대한 상세한 소개에 또 이건 무슨 짓인가 하다가 '조선의 행동을 고민해봤자 이해 못하니 그냥 우리한테 이익되는 쪽으로 합시다.'라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진행시켰다. 1895년, 조선의 군사력이 드러나자 영국에게 중요한 시장인 중국의 핵심 이해당사자인 조선을 끌어들이고, 조금이라도 프랑스가 자랑하는 소위 유라시아 동맹에 균열을 내어보고자 빅토리아 여왕의 다이아몬드 주빌리에 특별히 안양대군을 초청하는 등 공을 들이고 있다.
- 조선-러시아 관계
조러수호조약을 체결하여 프랑스, 영국에 이어 유럽 열강 중에서 3번째로 조선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 초대 주조선러시아공사로 예프게니 뷰초프가 부임했다. 한 때 서로 경제적으로 조치를 취할 만큼 반목하기도 했으나 이내 관계를 회복하여 프랑스-러시아 동맹의 한 축으로 조선을 끌어들이려 시도하고 있다. 자유주의를 탄압하지 않고 러시아에 우호적이라는 소문이 돌아 시베리아에서 유배중인 사상범들이 조선으로 도주하기도 한다. 시베리아 철도를 건설할 때 조선의 철도 점령을 걱정하는 등 꽤 신경쓰고 있다. 이후 러불동맹에 조선을 참여시키는 데 성공했으나, 조선이 북양군을 제압하기 위하여 근대 화기로 무장한 60만 대군을 순식간에 소집하자 연해주가 조선에 종속되는 것뿐만이 아니라 여차하면 철도 타고 밀려올 조선군을 걱정하게 됐다.
- 조선-독일 관계
공사로 윤태준을 파견하였다. 프리드리히 3세는 조선공사가 진상한 바둑판과 바둑돌을 마음에 들어하기도 하고 조선이 쓸만한 패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는 등 꽤 우호적이고 비스마르크도 체스판 위에서 신경을 기울일 정도로 크지는 않은 말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래도 어느정도는 신경을 쓰고 있다. 그러나 빌헬름 2세는 조선의 침술에 안 좋은 기억이 있고 꿈에서 조선이 암운을 몰고오는 것을 보아 개인적으로 싫어한다. 20세기 초에 들어선 동철에 투자한 투자가들과 지난 경제 공황시기 조선 국채를 산 은행가들, 마르크스-전 노선에 찬동한 사회주의자들이 있고 무엇보다도 을미정난 당시 단기간에 청나라에 30만 군대를 투사한 조선의 군사력에 큰 인상을 받아서 경제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조선과 많이 밀접해진 상태이다.
- 조선-스페인 관계
처음 조선이 개항하겠다 하였을 때 수호조약을 체결하고 후에 공사를 파견했지만, 커피 원두 들여오는 것 외에 크게 연 맺을 일이 없어 "서반아(스페인의 원어명인 에스파냐의 음차)를 아시오?"라고 묻는다면 "서반(무반)이 많은 나라요?"라는 답이 돌아올 정도로 인지도가 떨어진다. 심지어 귀남조차 스페인은 알고 있지만 서반아와 워낙 발음이 달라 서반아가 스페인이라는 사실은 모르고 있다. 외려 식민지인 필리핀이 대만 근처에 있어서 더 유명하다.
4.5.3. 아메리카
- 조선-미국 관계
제너럴 셔먼호가 아이즈 번 존황양이파 낭인들의 테러로 침몰한 '요코하마 사건'을 계기로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 초대 주조선미국공사로 찰스 들롱이 부임했다. 한국전쟁때부터 미국의 지원을 체험했고 이후 미국이 세계 최강대국 자리에 오른 것을 알고있는 귀남옹은 미국에 지극히 우호적이다. 정치인들은 조선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지 않지만, 산업계에서는 기회의 땅으로 익히 알려져 있다.
5. 문화
5.1. 언론
- 순보(旬報)
현재 신보의 전신. 개혁 초기, 신법에 대해 온갖 이유로 꼬투리잡는 상소문이 올라오자 제대로 알고서 반박하라는 뜻에서 통리아문이 개혁안의 절목과 문답을 정리해 내었다. 종이는 매일같이 올라오는 상소문을 씻어 사용해도 충분했다고 한다.
- 익정신보
도성 최초의 신문. 민승호가 흥선대원군의 지원을 받아 발행하기 시작했다. 한문과 언문을 섞어 써 백성들까지 보고 읽을 수 있다. 초기에는 성상의 일거수일투족을 찬양하는 왕실 어용 신문이었다. 매일같이 충군애국 운운하는 내용 때문에 재미없다는 오명이 있었지만 도평을 최초로 실으면서 판매부수를 늘릴 수 있었다. 지금은 만민공산당의 정파지 노릇을 하고 있다.
- 해동일보
원래 산당의 정파지 해동신보였으나 산당이 해산된 이후 안인수가 인수하며 이름을 해동일보로 고쳤다. 찍어내는 횟수를 늘리면서 기삿거리를 찾기 위해 채사(취재)하는 사람을 따로 두게 되었고, 안인수의 탄탄한 자본 덕에 천진과 대마도까지 기자를 파견하였다. 심지어 하와이 사건 때 샌프란시스코까지 기자를 보내기도 했다. 초기에는 중립적 기조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안인수가 세도가에 반감을 품게 되며 반 개화당 성향을 갖게 된다. 해괴한 소식도 사람들 눈길 끌기 위해서라면 모조리 싣는다는 악평이 있다. 김옥균과 척을 진 이완용이 편집자로 있었다. 산하에 서국이 있어 이승만의 주도로 여러 교양 서적을 발간하고 있다.
- 청구시무
유당의 정파지. 유당이 해산된 이후에도 계속 발행되어 다른 신보 보기 꺼리던 보수적인 선비들이 애독한다. 선비로 이름높은 최익현이 자신에게 우호적인 청구시무를 통해 만민공산당에 맞서 자신들의 뜻을 알리려 하고 있다. 언문을 쓰는 다른 신보들과 달리 어차피 학문과 거리 있는 사람들이 재미있게 볼 글이 없어 진서로 써내는 것을 고집하고 있다. 젊은 서생들 사이에서 이제라도 갈아탈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 조심스레 이야기하는 경우가 없지 않았지만, 강남 만인소 사건을 계기로 조선에 대한 관심이 늘어난 청나라의 식자들이 진서로 적혀 능히 읽을 수 있는 청구시무를 수입해가다 보니 그런 주장이 쑥 들어갔다. 여담으로 사진을 불필요하다고 여기는 까닭에 안양대군의 교통사고 재판 당시에 청구시무의 기자만이 사진기를 가지고 오지 않았다고 한다.
- 경화시보
김옥균이 개화당에서 운용하던 자잘한 신보사 여럿을 통합하여 발족한 신보. 영문판으로 '서울 타임스'가 있다. 개화당이 민족주의를 기치로 걸자 논설을 실어가며 민족에 대한 개념을 설파하고 있다.
- 경화설총
경화시보 펴내는 곳에서 출판하는 월간지.
- 격물신문
공조에서 펴내는 과학지.
5.2. 학교
- 성균관
조선의 최고 고등교육기관으로 고시 급제자들이 관직으로 나아가기 전 거쳐가는 곳이다. 프랑스의 그랑제콜과 비슷한 방향으로 발전할 듯하다. 노씨권학상의 심사가 이곳 명륜당에서 이뤄진다.
- 엄익관
군제개혁과 함께 1872년 무관 육성을 위해 세워진 사관학교. 중국, 서양의 여러 병서들을 들여와 가르치고 있다.
- 서원
면세 혜택을 잃었지만 제수를 내려준 덕분에 오히려 그 수가 늘어나 일종의 사립 중등교육기관으로 거듭났다. 나라의 풍속이 어떤 재주든 깊게 배우면 그것으로 먹고 사는 것을 그리 천하게만 여기지 않게 바뀌어 현판만 서원이라고 하고서 이런저런 기술을 가르치는 곳이 큼직한 고을이라면 하나씩 있다. 개중에는 농학을 일으켜 고을에 배 곯는 이 없게 하겠다는 곳도 있다. 정축년 북벌을 통해 군졸마다 서원에서 배운 내용이 달라 학력 격차가 크다는 문제점이 발견되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예조에서 교육과정을 통일하였다. 그 결과 향시가 서원 졸업시험에 가까워졌다. 한때 예조 담당자의 실수로 유대인이 세운 서원에도 타 서원과 같은 제수를 내렸었는데, 이 일이 논란이 되자 예조 승인 하에 유대인 학교를 따로 세우기로 결정하였다.
- 향교
서원과 함께 중등교육기관의 역할을 하고 있다.
- 경일학당(리세 시메옹 프랑수아 베르뇌)
을축양요 때 선종한 베르뇌 주교를 기리기 위하여 조선과 프랑스가 협력해서 세운 학당. 인천에 있다. 청, 일본에서 유학생들이 많이 온다. 예를 들어 손덕명이 경일학당에서 의학을 배웠다. 가타야마 센 또한 경일학당에서 전봉준과 함께 공사론을 공부했다. 전-마르크스 부부가 경일학당 바로 바깥에 야학 등을 세워 이를 중심으로 이론을 전파해나가고 있다.
- 공학원
숙련공을 육성하기 위한 학교. 안동 김문이 인천 제물포에 세운 공학원이 대표적이다.
- 대학원(大學院)
이항로와 기정진의 제자들이 차린 화서학원과 노사학원 등 각종 학원들이 고등교육기관으로 자리를 잡았다. 다른 학원들과 구분하기 위해 앞에 큰 대가 붙었다. 유럽의 학위제도를 본떠 저작(=석사), 박사 과정을 두었다. 하지만 제자들은 박사과정을 밟으라고 하면 식겁하며 도망치는 듯. - 화서학원
장동 김문의 후원을 받은 화서 이항로의 제자들이 스승의 호를 붙여 세운 대학. 경기도 양평 양근리에 있다. 조선에서 으뜸가는 대학원으로 정평이 났다. 1902년 고당전쟁의 본말을 정리한 '동사신편'을 내놓았다. 최익현의 주도로 세계 최초로 종횡학(국제정치학) 학과를 설치했다. 옛 제월대에서 바라보이는 공터에 제월당이라는 큼직한 양옥 강당이 있다. - 노사학원
흥선대원군의 후원을 받은 전우와 노사 기정진 문하의 서생들이 스승의 호를 붙여 세운 대학. 충청도 가야산 자락에 있다. - 한주학원
한주 이진상의 호를 붙여 세운 대학. 원래 이진상이 자신의 서재 '조운헌도재'에서 이름을 따온 운도학원이었으나 최근화를 보면 이진상 사후 이름을 바꾼 듯하다. 경상도 성주 성산리에 있다. 소백산에 한주학원 소유의 관성대(천문대)가 있다.
- 여학
만민공산당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전국 군현 향교 옆에 여학 하나씩은 존재한다. 다만 가르칠 교원이 부족하다는 문제점이 있다. 향시가 경의 뿐 아니라 여러 과목을 보게 되고, 시범적으로 선안(선다형)을 도입함에 따라 서당과 여학에서 가르치는 내용이 비슷해져 향시 응시자 비율이 크게 늘고 있다. - 안정여숙
북촌 과부와 대갓집 며느리들이 한두 푼씩 모아 세운 여학교. - 자육원
민자영이 루이즈 미셸의 말을 듣고 마포에 세운 고아원 겸 여학교이다. 원 역사에서 이화학당을 창설한 감리회 선교사 메리 스크랜튼이 교사로 일하고 있다. 안양대군의 본처인 창녕부부인 조별단이 이 자육원의 근로장학생이었다.
- 서당
초등교육기관 역할을 한다. 문교참판이 짜임새 있게 관리하여 훈장이 주먹구구로 학동들 가르치던 예전과 천양지차지만, 서양 물 먹고 들어온 이들 보기에는 영 올바르지 못한 상황이다.
- 야독당
일종의 야학. 만민공산당이 서당에 가기 어려운 집안 아해들을 위하여 경일학당 앞 야학을 본떠 이곳저곳에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5.3. 종교
아래 모든 종교에는 신자 수에 맞춰진 종교세를 매긴다. 또한 신교의 자유를 인정하지만, 예조의 문교참판이 혹 다투거나 강상 어기는 일 없도록 지켜본다.- 천주교
1865년(을축년), 교첩제의 시행과 함께 나라의 금령이 풀리면서 빠르게 세를 불리고 있다. 김옥균 내각에서 종교의 자유를 외치며 교첩제를 폐지하면서 집안 눈치 보던 이들도 대거 세례를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각 교당에는 일괄적으로 종교세를 부과했다.
- 천도교(=동학)
정식으로 종교로 인정받았지만 워낙 가톨릭의 교세가 강해 포교에 어려움을 겪던 중에 원 역사와 달리 목숨을 부지한 최제우가 차라리 해외로 진출하자고 하여 길림성과 연해주 일대에서 세를 구축하고 있다.
- 개신교
선교사들이 노력은 하고 있지만 워낙 천주교 위상이 두터워 공략에 난항을 겪고 있다.
- 불교
흥선대원군 생전에는 흥선군의 든든한 후원 덕분에, 사후에도 흥선군을 그리워하는 하늘같은 나랏님 덕분에 전국의 수령들이 사찰에 함부로 트집잡지 못하고 있다. 종교의 자유화와 함께 신도들이 당당하게 사찰을 오가며 시주도 늘었다. 최근 들어서는 승려의 수도 늘고 있으나, 조선 500년간의 숭유억불 탓에 선승(禪僧)은 많아도 학승(學僧)이 적다는 것이 문제이다.
- 무교(巫敎)(=한민족 전통신앙)
만민공산당의 지원을 받아 회를 꾸려 음사를 제외한 무속의 체계를 정비하고 있다. 일부는 영국에서 그리 잘 나간다는 진령군처럼 개화한 주술을 배워 명성 드높일 생각으로 꿈풀이 용하게 한다는 오스트리아의 선비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찾아가 공부하기도. 결국 1930년대에는 무당들이 정신분석학을 다루고 있어서 정신상담을 전담 중.
5.4. 시설
- 구락부
- 예휘각(藝彙閣)
베베르가 러시아 황실 재정 반절, 조선 왕실 내탕 반절로 꾸린 박물관. 흥선대원군이 평생 그려왔던 서화 작품들이 전시되어있다.
- 열음정(洌陰亭)
윤치호가 강남에 세운 실탄사격장. 안중근이 이곳 단골이다. 총을 쏘는 곳이기도 하거니와 운영하는 이가 명문가 자제 윤치호라서 범상한 사람들은 찾아가 노닐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나중에 윤치호가 이곳 부지를 팔아넘겼는데 엄청나게 오른 강남의 지가 덕분에 몇 곱절의 이문을 남겨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 한강대교
1895년경 완공된 교량으로 철도와 자동차가 다닌다. 한강대교 남쪽 일대의 '교남' 지역이 마포 지역과 함께 신시가지로서 발전하고 있다. 1907년 기준으로 교통 정체가 심한 상태라 제2한강교 논의가 서서히 나오고 있다.
- 강당/공연장
런던에서 토론회 덕을 봤었던 전우가 여민강학을 내세우며 노사학원 이름으로 강당을 세운 이후로 한양에 여러 곳이 따라 생겼다. 공연장의 경우 전국 명창들을 모으고 다녔던 신재효의 제자인 진채선이 세운 것을 시작으로 악공과 소리꾼들이 공연할 곳들이 생겨났다. - 서악원(西樂院)
안태훈이 양악이라면 진절머리 치던 아버지 안인수[25]가 작고한 뒤 음반 사업에 진출하기 위해 정동구락부 바로 옆에 세운 양악 공연장. 큰손이 나서 서양 음악을 후원하는 일로는 처음이라 백우용을 비롯한 악공들이 금방 모여 구색을 갖추었다. - 세악당(世樂堂)
서악원을 두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개화당이 관악산 자락에 세운 양악 공연장. 주변 산기슭에 넓게 공원을 조성하였다. 공사는 건축가로 이름높인 심의석이 맡았다. 악공이 부족해 아직 서악원보다는 솜씨가 못하지만 재력을 이용해 유럽에서 악장을 데려올 생각을 하고 있다.
- 마천루
김병국의 의지로 인천부에 광통이도국 본청을 8층 높이로 새로 지었으나 도성에서는 궁궐 보일까 두려워 한동안 쉽사리 짓지 못했다. - 백방만화각(百邦萬貨閣)
개성의 합자회사 '영신사'가 풍양 조문의 후원을 받아 교남에 지은 12층 마천루. 상점과 전시장, 전망대가 어우러져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옛 육의전 상인들이 이에 질세라 마포에 육 층짜리 상점을 내었다.
- 병원
- 요체원(療體院)
박규수가 추거 공약으로 세웠던 치과인 요치원이 번영하여 모든 부위를 취급하는 종합병원으로 거듭났다. 반남 박씨 문중에서 운영하고 있으며 퀴리 부인을 통해 정형외과에 예(乂)자선(X선) 기기를 들여온 뒤 효 마케팅으로 짭짤한 수입을 얻고 있다.
5.5. 스포츠
1886년 팔각정 석전 사건 이후 서재필과 윤치호가 육체사라는 모임을 꾸려 본격적으로 서양 스포츠를 보급했다. 초기에 한양과 평양 석전꾼을 각각 데려다 축구와 야구 규칙을 가르쳤지만 어설프게 따라하다가 결국 석전 모양새로 돌아갔다. 축구를 하다가 몸싸움을 벌이고 야구를 하다가 방망이로 상대편을 때리기도 하였지만 석전보다는 크게 다칠 일이 줄어들었다. 오히려 서로 등패나 갑주 등으로 보호구 차리고 나오면서 구색 갖춘 경기를 보이게 되었다.물푸레나무 몽둥이와 푹신한 공을 쓰게 된 석전이 이후 여러 지역과 사람 거치면서 나름대로 발전하는데, 인천부에서는 노동자들이 다치면 공장주들 손해이기 때문에 축구처럼 순수하게 공만 가지고 발로 차는 놀이가, 평양에서는 석전꾼 자신들의 장기를 살려 공을 손이나 몽둥이로 때려 상대방을 맞추어 자빠뜨리면 이기는 놀이가 만들어졌다. 영어로도 누군가 옮겨 닫지보올이라 이름 붙였다. 1904 평양 아주대회에서는 석전이 '피구희'라는 이름으로 시범 도입되었다.
자동차의 빠른 도입과 아주대회 개최로 인한 영향으로 자동차 경주가 활성화될 듯하다. 육예(六藝)의 '어(御)'에도 해당되는데다 소나 말도 괴롭히지 않고, 자전거에 비해 단정한 의복으로 몰 수 있는 만큼 선비들의 스포츠로서도 적합하다는 것을 큰 이유로 내세웠다.
제1회 나가사키 아주대회에서 예(페어플레이)와 사격을 비롯한 여러 종목들에서 옥패를 차지하여 옥패 수로 전체 1위를 거머쥐었다. 석전 경기로도 먹고 살 돈이 나오는 척석군들처럼 아주대회에 출전하는 국가대표 선수(국사)들에게도 기업을 통해 후원을 받도록 하고 있다.
1904 평양 아주대회 파트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자동차 경주를 의미하는 '어(御)'는 무세와 문세로 나뉘는 데, 무세(武勢)는 굳세면서 빠르게 움직이는 형상을 나타내며 문세(文勢)는 매끄럽게 운행하는 형상을 나타낸다. 보통 정적인 요소가 큰 문세보다는 무세가 더 인기가 있다고 한다.
5.6. 영화
- 실록영연(實錄影演)
태조대왕 시절부터 숙종 때까지를 차례로 다루는 무성 활동섭영(영화) 시리즈. 자칫 잘못하면 자식 세대에 왕위 계승 문제를 놓고 분란이 발생할 수 있을 정도로 지나치게 높아진 왕실의 권위를 조금 덜 필요가 있다고 느낀 귀남이 전봉준 내각에 제작을 명하여 탄생한 작품이다. 혹시나 누군가 왕실을 무엄하게 다루었다고 지적할 일이 없도록 경양대군과 종친 이지용을 제작 과정에 투입하였다. 비록 영종(영조) 시기부터는 여전히 반가 사이에 그 원한이 내려오고 있어 제외됐지만, 본래 제작 의도에 따라 국초에 있었던 단종대왕의 슬픈 이야기는 가감없이 제작됐다. 그런데 본디 왕실의 권위를 다소 마멸시키려고 만든 활동섭영을 세간 사람들은 정작 재미를 위해 보게 되었다고 한다. - 조개홍업(肇開鴻業)
실록영연의 첫 작품. 1905년 경운궁 구성당(원 역사 덕수궁 구성헌)에서 귀남이 친람하는 가운데 처음으로 상영됐다. 황산대첩과 정몽주 암살 사건 등 태조가 보위에 오르는 과정을 다룬다. 태조 역을 맡은 사람은 다름 아닌 경양대군. 황산대첩 장면을 실제로 그 전투가 있었던 남원에서 엑스트라 수백 명을 동원해 촬영했다. 그런데 시대의 한계 탓에 왜구 고증이 엉망이다. 일례로 왜구는 왜(倭) 자 깃발을 들고 있으며 아기발도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쇠조각을 붙인 철릭을 입고 등장한다.
원 역사와 달리 흥선대원군이 복권하지 않은 정도전이 당당히 등장하고 요승 신돈이나 그가 공민왕에게 시녀 반야를 바치어 마침내 우가 태어났다는 일화가 나오지 않는 등 식견 있는 선비들이 본다면 열심히 설왕설래할 대목이 많다. 이러한 사정을 모르는 프랑스 공사와 이탈리아 공사가 오로지 작품 그 자체에 감탄하여 기립박수를 쳤을 정도로 작품의 질이 높다. 여담으로 경양대군이 직접 제작에 참여하여 연줄 만들 생각 품은 동삼성 만족 유력가들이 이지란 캐스팅을 청탁했지만, 이번에 등장하면 그 다음 만주 사람 나올 때 무조건 나와야 한다는 말에 모두 물러났다. - 불귀차사(不歸差使)
실록영연의 두 번째 작품. 함흥차사를 떠올리게 하는 제목을 보아 태조와 태종의 갈등을 다루는 작품으로 보인다. - 예지출천(睿知出天)
태종~세종 시기를 다루는 작품. 실록에 기록된 양녕대군의 비행을 그대로 옮겨 민간에서 전해지는 양녕대군 양보설이 과연 맞느냐를 두고 설왕설래하게 하였다. - 충혈적토(忠血滴土)
사육신의 이야기를 다루는 작품. 그 충정을 보고서 눈물 흘리지 않으면 선비가 아니라는 평과 함께 수위가 높아 볼 수 있는 나이에 제한 두어야 한다는 말이 함께 나왔다. - 부지란가(不知爛柯)
연산군의 향락 행각을 다룬 작품. 이지용이 일본 영사에게 제 권세를 믿고 주먹다짐을 벌인 것에 대한 벌로서 연산군역으로 발탁되었다. 한번 얼굴 팔리면 돌이킬 수 없게 된다는 걸 알고 있어서 자기 죄를 뉘우치고 있다고.
5.7. 속담
- 신미년 필제 같다
신미병정의 빌미가 된 이필제 사건에서 따온 말로, 한 번 저지른 실수로 끝까지 욕을 얻어먹는다는 뜻.
- 오얏꽃이나 무궁화꽃이나
지폐 도안[26]이 앞쪽은 왕실을 상징하는 오얏꽃, 뒷쪽은 조선 국민을 상징하는 무궁화꽃인데 그건 별로 상관 없고 지폐에 적힌 금액이 중요하다는 것에서 따온 말로, 그 차이는 의미가 없다는 뜻.
6. 경제
아주연합 블록 내에서 끈끈한 경제교류를 이루고 있다. 아시아 내에서는 청에 이어 국내총생산(GDP) 2위 자리를 두고 일본과 경합을 하던 시기가 있었으나 현대에 이르러서는 인구에서 앞서는 일본이 2위를 확고히 하였다. 하지만 1인당 소득 부문에서는 조선이 항상 우위에 있다. 청국과 비교해서는 첨단기술의 핵심 분야에서 딱 한 치 앞서며 기술 선도국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6.1. 산업
- 농업
나라의 근간으로서 아직까지 가장 중요한 산업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개항 초기에는 인삼이 주요 수출품이었다. 동삼성[27]과 연해주의 자유로운 왕래가 허용되면서 벼농사를 중심으로 활발한 식민개척이 이뤄지고 있다. 연병법 실시 이후 북변으로 가지 않고 삼남지방에 남은 병력을 활용해 제언 확충에 힘쓴 결과 1880년대 후반 기준 얼추 마무리가 되었다. 그리고 호남 땅 갯벌도 나날이 개간하여 과장하여 말하기를 지금 김제 한 곳 소출이 선왕대 팔도의 소출에 맞먹는다는 말도 있으며, 1899~1901년 3년간의 흉년이 들었을 때는 촌로들 사이에서는 "이만하면 나 젊을 때는 소풍(小豊)이었다"라고 평했다. 민간에서는 정미소가 세워지고, 신촌향약을 통해 농촌 환경 개선도 점차 이뤄지고 있다. 그리고 드레퓌스 사건 이후 정착한 유대인들의 키부츠가 농협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에 소개되었다.
- 축산업
김병학이 프랑스에서 젖소를 들여와 누구나 마음껏 우유를 마실 수 있게 됐다. 1902년 기준으로 이전에는 이팝에 고깃국이 평생 숙원이었던 백성들도 저들 생일에는 그 바람을 이룰 수 있게 됐다.
- 경공업
- 방직업
인천 제물포의 공장들에서는 방직업이 발달하여 인천목이 청과 일본을 상대로 주요 수출품으로 떠올랐다. 청국 내륙까지 조선이란 나라는 몰라도 인천목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 제지업
박규수가 반남 박문의 가산을 그러모아 스위스 포목상 쥘 브리너와 협력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 제지공장을 세웠다. 비싼 닥종이가 대량의 값싼 양지로 대체되며 신보, 상소문, 서책의 양도 훨씬 늘어났다. - 화장품 산업
매헌규방보국(원 역사 박승직상점)이 원 역사보다 16년 빨리 박가분을 출시했다. 하지만 녹화회가 박가분에 들어간 납 성분의 유해성 문제를 제기하면서 곧바로 대체 상품 개발에 착수했다. - 양조업
전봉준 내각에서 각 군현 공상을 진흥코자 소소하게 집에서 담그던 것을 고을마다 한데 모아 공장처럼 만드는 정책을 추진하자 더 이상 집안에 내려오는 비법을 전할 도리가 없는 청상 과부 몇몇, 그리고 막술보다 품격 있는 약주가 개화된 백성들에게 어울린다며 뜻있는 선비 혹은 이름난 술꾼들이 가주 만드는 법을 고을 양주창(양조장)에 전해주었다. - 기타
자전거가 도입된 뒤에는 안인수가 코뮌 사람들로부터 기술을 배워 자전거 부품 제조업까지 가업을 확장하였다.
- 중공업
- 토목/건축
개화기 접어들며 전국에 도로와 다리, 양식 건물 등이 활발히 지어지고 있다. 이에 김병학·김병국 형제가 창립한 광통이도국(廣通理道局)이 대표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조선의 현재 기술력은 한강을 횡단하는 교량을 독자 기술로도 거뜬히 짓고 전국팔도에 대로를 놓아 막힘이 없을 정도의 수준까지 이르른 상태이다. 양옥 건축법이 빠르게 도입되며 10층 이상의 고층건물도 지을 능력이 되며, 초기에는 주상전하께서 계시는 궁궐을 내려다본다는 비난을 받을까봐[28] 서울에는 짓기를 꺼렸으나 현재는 궁궐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부터 조금씩 조금씩 지어지는 추세다. 제2차 경제개발 오개년계획에 따라 하버트 후버의 제안을 듣고 춘천 소양강에 댐을 짓고 있다. - 전기/통신
1881년, 전영(특허)에 관한 법을 제정해 선제적으로 특허를 보장해줌으로써 미국, 유럽의 첨단기술 관련 특허가 다수 유입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맥안전기공행의 사례와 같은 각종 기술협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1881년 창덕궁 앞 거리에 노명등이 켜진 이래로 전등의 보급이 급속히 이루어져 한성 각지에서는 발전기를 하나씩 들여오고 있다. 조만간 발전소를 지어 발전기 없이도 요금만 내면 전기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라 한다. 전화는 특허법을 통해 국내로 들어온 이후 민간에 먼저 널리 퍼져 조정에서도 왕명 출납을 제외한[29] 사무에 한해 사용하기로 하였다.
테슬라의 자산기[30] 발명으로 컴퓨터 및 전자 기술에서 빠르게 앞서갈 수 있었다. 맥안공행과 태씨공행의 반도체 기술은 원체 선구적이라 공장 지하에서 도깨비 고문이 이뤄지고 있다는 농담이 돌 정도의 수준이다. 가호자산기(PC)로 대표되는 전자기술의 발전과 그 이후 개국 600년대의 효수대혁(디지털 혁명)은 조선 경제를 이끌었다. - 조선/화기
무인년, 세곡과 바꿔온 은 사백만냥으로 청국 강남에서 여러 숙련공들을 데려와 조선 공인들에게 기술을 전수받도록 하였다. 그렇게 세워진 선정국에서 함선을 건조하고 있으며, 한때 동맹국인 일본에 수출하였다.
알프레드 노벨이 설립한 다이너마이트(낙씨작약) 공장이 가동되어 광업이나 토목업 등 비군용 목적 하에 판매하고 있다. 공조 소관의 공기업 융비총국과 맥안공행이 병기 기술개발에 힘쓰고 있다. 맥심이 발명한 기관총(다발총) 등의 무기를 생산해 트란스발 공화국, 아비시니아, 발칸 국가를 비롯한 약소국에게 공공연하게 판매하고 있다. 1900년에는 융비총국에서 반자동소총인 자장방총 시제품을 개발하였다. - 철도/제철/광업
서태후가 큰돈을 출자해 삽을 뜬 동아시아철도회사에 의해 착실하게 건설이 진행됨에 따라 1876년(병자년) 경인선이 개통되어 상업운영을 시작하였고, 1891년 기준 경부선에 이어 경의선도 개통이 되었다. 이들 노선을 연결하기 위해 한강철교(차도 병행)가 독자기술로 건설되었다. 1890년대에는 한양에서 노면전차 노선이 개통되었다. 동아시아철도회사 조선지국은 훗날 '조철'로서 독립한다.
황해도 재령에는 동철의 자금으로 세운 제철소 철정국이 완공되어 철강을 생산하고 있다. 경제개발 오개년계획으로 많은 예산 투자가 있었다.
이광도감의 후신 광무총국은 오페르트의 지휘 아래 조선국 내 금은광을 주도적으로 개발하는 중이다. 운산금광의 막대한 금이 금본위제를 위해 쓰였으며, 황란 극복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광무총국 소속인 허버트 후버의 제안에 따라 광산 전력 수요를 충당할 댐을 운산에 짓게 되었다. - 자동차
카를 벤츠가 오씨양행의 예를 따라 조선 현지에 세운 번씨차창이 있다. 자동차가 비교적 빠르게 보급되면서 20세기가 되기도 전에 차량번호판이 도입되었다. 여담으로 조선에 최초로 들여온 차량은 초창기 벤츠 자동차를 본 귀남이 지적한 것을 바탕으로 대폭 수정한 것이었다.[31] 이후엔 광통이도국의 주도로 아스팔트 포장법이 도입되고, 사람들이 자동차를 사서 자주 타고 다니며, 1900년 아주대회에선 자동차 레이스가 경기종목이 될 정도로 대중화되었다. - 항공/우주
미래에 공군이 중요해질 것을 아는 귀남이 비행장으로 쓸 궁방전과 제작비 등을 흔쾌히 내어줘 지원을 해준 덕분에 라이트 형제가 만든 '건비호'의 첫 비행이 원 역사보다 3년 빨리 조선에서 성공하였다. 라이트형제는 시험비행에 성공한 후 융비총국에 소속되어 비행기에 기관총이나 진천뢰, 화포를 실으라는 정강사의 지시에 따라 후속 연구를 하였다. 1908년 500리(약 200km) 비행이 가능한 수준까지 발전했고, 납품이나 수출까지 하고 있다. 우주 기술도 발전하여 21세기에는 성한(星漢) 3호라는 발사체를 운용하고 있다.
- 서비스업
- 금융
조선, 일본, 러시아가 참여하는 아시아개발은행에 지분을 가지고 있으며, 식주공회라는 이름의 증권거래소가 운영되고 있다. 1890년, 아르헨티나가 원 역사대로 밀 흉작과 공원혁명의 실패로 인해 혼란에 빠지자 미국을 통해 투자를 진행하던 유럽계 자본들이 국운 융성한 조선으로 모여들고 있다. 하지만 황란 당시 여러 난립하던 은행들이 문을 닫기도 했다. - 무역
세도가 중에서는 풍양 조씨가 무역업에 뛰어들었다. 오페르트의 사기업 오씨양행 또한 대표적 무역회사이다. 조선 상인들은 청국 지주들과 친분을 맺고 결탁하며 수출루트에 있어서 독점적 지위를 누리고 있다. 경제가 어려워진 틈을 타 일본에게 많이 따라잡혔으나 중공업 투자로 수출 품목을 확장 중이다. - 관광
옛적부터 산천유람을 즐겨하던 민족답게 대원군이 유구국 유람을 다녀온 뒤로 관광업이 크게 활성화되었다. 부자들은 대원군 따라 유구, 또는 청국 강남으로, 중산층은 국내 관광을 떠났다. 노동자들도 이를 보고 휴가를 제공해달라며 요구할 정도.[32] 이런 흐름에 맞춰 이용익으로 대표되는 부보상들과 여러 거족들이 손탁 호텔을 모방하여 성대하게 빈관과 여각을 세웠다. 북경에도 조선인이 세운 서양식 호텔 '경사대반점(그랜드 페킹 호텔)'이 운영되고 있다.
6.2. 기업
- 광통이도국(廣通理道局)
김병학·김병국 형제가 차린 건설사. 인천 공학원의 후원사이기도 하다. 신작로, 한강대교 준공과 창덕궁·경복궁·경운궁 중수와 같은 각종 대규모 건축사업을 도맡아 하였다. 자체 양회(시멘트) 제조공장을 보유하고 있어 최익현 내각에서 신촌향약 사업을 추진하였을 때 각 군현에 양회 기와를 보급했다. 1899년 파리 세계박람회에 참가한 김병국이 에펠탑을 보고 크게 감명받아 고층 건축물에 도전하여 인천부에 8층 청사를 지었다. 영미권에서 조선도로공사로 알려져 있다.
- 오씨양행(吳氏洋行)
오페르트가 형 율리우스의 명의를 빌려서 조선에 차린 무역회사. 아시아 지역에 다이너마이트를 독점 판매하고 있다.
- 맥안전기공행(麥安電氣工行)
안인수가 하이럼 스티븐스 맥심의 협력을 얻어 세운 가전회사. 주로 약칭인 맥안공행으로 불린다. 안인수가 에디슨의 전구를 모방하여 원시적인 전구를 개발한 데에서 시작되었다. 이로 인해 발생한 특허권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기술협력을 전제로 미국 내 특허권을 국내에서도 보장해주는 법을 실시하였고, 그 결과 하이럼 맥심과 손을 잡아 기계와 기술자들을 들여와 제대로 된 전구를 생산하고 있다. 발전기와 노명등 등 다양한 전기설비를 생산하고 있다. 초창기에는 미국에서 들여온 부품을 조립하는 수준에 그쳤지만, 지금은 부품을 자체 생산하고 있다. 가전 말고도 맥심 기관총을 이곳에서 생산하고 있다. 양품채단이라는 카탈로그를 전국에 흩뿌리며 수차를 비롯한 다양한 기계도 판매한다. 비상장 기업이다.
- 배달상회(配達商會)
어니스트 베델이 세운 물류회사. 초기에는 베델이 직접 지게를 지고 발품을 파는 소규모 회사였다. 그러다가 1898년에 어엿한 상회로 성장했다.
- 한성전차영운국(漢城電車營運局)
한성부 노면 전차를 운영하는 철도회사. 원 역사의 한성판윤 이채연이 젊은 국장(사장)으로 있다.
- 조일동차공사(朝日東茶公司)
조일 두 나라의 자본이 함께 들어간 홍차 회사. 안동 김문 김병국의 양자 김정균이 사장으로 있다. 대만산 홍차를 조청일 삼국 중에서 '차'하면 유일하게 자동차를 먼저 떠올리는 조선에 판매하고 있다.
- 매헌규방보국(梅軒閨房寶局)
박승직이 차린 여성용품 제조회사. '규방'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박가분 같은 화장품부터 호신용 리볼버까지 여성에게 필요한(?) 이런저런 제품을 판매하고 있다.
- 영신사(永信社)
개성 상인연합에서 시작된 금융기업. 풍양 조문의 후원을 받아 교남부에 12층 다목적 마천루 '백방만화각'을 세웠다.
- 번씨차창(樊氏車倉)
자동차 기업 벤츠의 조선 현지 지사.
- 근역비양공국(槿域肥壤工局)
민영환이 당색 무관하게 이곳저곳에서 고루 밑천 끌어와 함흥에 세운 비료공장. 하버법을 통해 비료를 생산한다.
- 육식당(肉食堂)
이학찬이 안문의 후원을 받아 진주에 차린 돼지고기 전문 음식점. 방긋 웃는 돼지머리가 마스코트이다. 이 마스코트를 베낀 고깃집을 끌어들여 체인점을 꾸렸다.
- 효자율(孝子栗)
귀남이 가르쳐 준 군밤 비법으로 천덕만이 만든 밤과자 브랜드. 기무회의에도 납품했으며 멀리 연해주까지 퍼져 러시아인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2013년 기준 효자율제과라는 종합 제과회사로서 크게 성장한 상태이다.
- 육월당(六月堂)
마포 일대 자육원 옆에 있는 면포점(빵집) 겸 다방. 쁘띠 파리의 삼월당에서 기술을 전수받고 상호명도 비슷하게 내걸었다. 의자 대신 마루가 있는 등 어설픈 서양식 인테리어가 특징이다. 안양대군과 조별단이 이곳에서 몰래 만남을 가졌었다. 훗날 효자율제과와 함께 제과업계를 양분한다.
- 회동서관(匯東書館)
서점. 원 역사에서도 존재했던 곳이다.
- 조선중앙통신국(KCBS, Korean Central Broadcasting System)
조선의 공영 방송사. 약자는 조중통.[33]
- 태씨공행(泰氏工行)
테슬라의 공방에서 시작된 가전회사. 자산기(컴퓨터)와 방음기(라디오)를 주로 생산했었으며, 훗날 맥안공행과 함께 반도체 업계를 양분한다.
- 조철(朝鐵)
동아시아철도회사에서 조선지국이 분사하며 설립된 철도회사.
7. 군사
프랑스 군사 고문단의 교육에 힘입어 빠른 속도로 근대적인 군사 제도를 갖추었다. 상비군은 약 20만이며 그중 실질적인 전투병력은 1895년 기준으로 15만이다.[34] 군 근대화 사업 초기에는 실질적인 전력이 7만명이었고 나머지는 제방 등 중요 인프라 건설에 투입됐다.[35] 장교는 군관, 부사관은 사관, 병은 군졸이라 부르며 장교의 계급은 정부참, 부사관의 계급은 상중하 체계이다. 장교는 더 이상 무과로 취재하지 않고 사관학교 '엄익관'과 학사장교 제도를 통해 체계적으로 선발하며, 부사관은 징병된 양반가의 자제들이 맡는다.징병제를 시행하고 있으며 복무 기간은 3년이다. 징병제 역사가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국법'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오래되어 '남자 두엇 모이고 술 들어가면 군대 얘기가 나오는' 수준까지 군사화됐고, 그 결과 1895년 동원령을 선포했을 땐 60만명을 소집했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막대한 전비 부담을 각오하고 투입한 병력이 약 30~50만명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충분한 지역강국.[36]
벨로네 백작과 로즈 제독의 책임 회피용 언론 플레이 덕분에 막 개항했을 때부터 대외적으로 '의외로 강한' 준문명국의 군대로 알려졌다. 러시아에서 시베리아 철도 사업을 추진하면서 조선군의 점령 가능성을 고려했을 정도이다. 병조는 1880년 기준으로 조선군의 전력을 대마도를 무력으로 병합할 수 있는 수준으로 보고 있으며 이는 사실에 가깝다. 그리고 1895년에 근대 화기로 무장한 병력 60만을 순식간에 동원하자 대외적인 인식이 극동의 강군으로 격상됐다.
귀남의 기억 속에 한국전쟁이 강하게 남아었어 병자호란 이후 이인좌의 난, 홍경래의 난과 같은 내부 반란이나 효종 시기 청나라의 파병 요청으로 소규모 부대를 파견해 러시아와 싸운 것 말고는 제대로 된 전쟁 한 번도 없었음에도 군축은커녕 지속적인 무기 국산화와 개발, 군비 정예화를 끊임없이 추구하고 있다. 예를 들어 귀남의 지시로 조선군이 막 미니에 라이플을 도입했을 때부터 자동소총 설계에 들어가 윤음 내려온 지 20년 만에 반자동소총 설계도가 나왔다.
초기에는 원 역사의 대한제국군 군복을 사용했다. 실제 역사에서도 꽤 멋있다고 평가받는 검은색 제복이지만 이는 이후 귀남의 지시로 '어제국방색'이라고 불리는 쑥색 군복으로 바뀌었다. 멋은 없어도 흙먼지 묻어도 티가 나지 않고 또 숲이나 들에서 눈에 잘 띄지 않는 묘한 색이라 일선 군졸들이 좋게 여긴다. 당초 사용하던 대한제국군 군복은 예복으로 대체됐다. 아직 단발령이 내려지지 않아 군모 대신 전립을 쓰고 다닌다.
군가로 희망가, 월남 김상사 타령 등이 있다. 귀남이 기억하고 있던 선율에 친제한 가사를 적당히 붙인 것이다.
병부 산하 싱크탱크로 정강사가 있다. 원래 흥선대원군이 북벌을 목표로 몰래 꾸린 사조직이었지만, 비행기 개발을 시작으로 군 내 공식 조직이 됐다.
7.1. 육군
서양과의 수교 이후 기관총, 라이플 등 신무기 도입과 징병제 실시로 원 역사의 대한제국군보다 더 진보를 이룬 상태이다.- 미니에 라이플 → 드라이제
- 맥심 기관총
맥심이 개발한 기관총. 맥안공행에서 제작해 귀남에게 진상했다.
- 철조망
미국의 특허가 조선에서도 인정되게 된 후 수많은 특허신청서가 쏟아져 들어왔는데, 그 중 철조망도 있었다. 미국의 넓은 평원에서 가축을 관리하기 위해 수많은 발명가들이 우후죽순으로 발명했다고. 귀남옹은 이것을 보자마자 군용으로 사용하라고 지시하였고, 조선군은 산해관 앞에서 하룻밤만에 참호를 파고 철조망을 설치하는 야전축성능력을 보여주었다.
- 자장방총(반자동소총)
'쏜 뒤에 스스로 탄을 재는 그러한 총'을 만들어보라는 윤음이 떨어지고 20년 정도 지난 1900년에 융비총국이 오스트리아-헝가리에서 페르디난트 폰 만리허의 창안을 들여와 아직 시제 소리를 면하려면 갈 길이 멀긴 해도 마침내 초안을 만들어 귀남에게 진상하였다. 이후 브라우닝의 손에 의해 완성되었으며 대전쟁 시기쯤에는 제식화되었다.
- 장갑차와 전차
기술의 미비로 아직 세상에 나오지는 못했으나, 차량에 장갑을 덧대고 기관총이나 속사포 정도를 올린 물건은 이미 제작이 된듯 하며, 본격적인 전차는 융비총국에서 열심히 연구 중이다.
7.2. 해군
원 역사에서는 열악한 환경 탓에 제대로 된 해군을 육성하지 못하였던 것과 달리 작중에서는 목선이 기선으로 대체되고 징병제를 도입하여 수영(水營) 체제가 유지되고 있다.함대의 편제는 제도적 관성을 따라 통제영(경상+전라), 통어영(경기+황해+충청) 체제로 운영된다. 상황에 따라 통솔권한이 옮겨지던 충청수영이 통어영 예하로 들어갔고 함경·강원 양 도의 수군을 합쳐 덕원수영을 두었으며 유사시에는 통제영에서 관할한다.
1894년 기준으로 운용하는 함선의 총 톤수가 일본 해군에 버금가는데, 조선이 따라잡은 것이 아니라 일본이 쫓아온 것이다. 심지어 일본은 신무기인 어뢰로 조선 해군을 저지할 수 있다는 청년학파 적 발상으로 해군을 육성하고 있다. 조선의 선의에 물들어 평화주의 기조도 있고, 조선의 60만 대군[37] 상륙전을 막기 위해 전투함의 숫자를 늘리는 방향으로 간 것으로 추정된다.
건제함을 들여온 이래 예산 문제 때문에 거함보다는 조선 혹은 청국 조선소에서 나오는 자잘한 전선을 위주로 전력을 확충했다. 그런데 이 '자잘한 전선'도 십수 년 전에 나왔더라면 가히 일대의 균세한 형국을 흩뜨려 놓을 만한 규모이다.
- 비연호
훈련함으로 구매한 퇴역 무장상선. 조선군이 개화 초기에 보유하고 있었던 기선 2척 중 하나이다.
- 제연호
개화 초기 조선군이 보유하고 있었던 유일한 철갑선.
- 양연호
덕원수영에서 운용하는 코르벳.
- 영수(寧守)
전노급 전함. 현재 조선 수군이 보유한 최강의 전력이다. 가공의 전함으로 원 역사 후지급 전함과 비슷한 수준이다.
- 사격통제장치
니콜라 테슬라가 발명한 '자산기(테슬라 자동 연산기계 2호)'를 군함에 부착하여 함포 명중률을 획기적으로 개선하였다.
8. 인물
자세한 내용은 고종\ 문서 참고하십시오.9. 개변된 역사
작중에서 등장하는 조선의 긍정적인 변화 양상은 노론 음모론의 안티테제라고 해도 될 정도로 서인-노론 세력의 개혁안(군신공치, 서얼허통, 노비제도 혁파 등)과 매우 유사하다. 그리고 그 정점이 바로 북벌(을미정난). 물론 소설 속 을미정난의 실상은 많이 쳐줘도 무력 시위이고, 실제로는 역도를 규탄하기 위해 황실에 직접 지부상소를 한 수준이지만 어쨌든 이러한 변화 양상은 진정한 의미로 서인-노론의 개혁이 성공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계해환국
효자율이 불러온 나비효과로 철종이 승하하기 전에 귀남을 입궐시켜 자신과 철인왕후의 양자 '완정군'으로 입적시켜 세자로 책봉했다. 그 결과 안동 김문이 원 역사보다 일찍, 더 처절하게 권세를 잃었다. 만약 조선이 칭제건원을 한다면 장조, 정조, 순조, 철종 4대조가 황제로 추존될 것이다.
- 예릉
귀남이 철종의 유지를 받들어 고인에 대한 호의로 강하게 밀어붙여 철종이 서삼릉이 있는 경기도 고양시가 아니라 철종의 어릴 적 고향인 강화도가 보이는 김포시 문수산에 묻혔고 이에 따라 왕릉을 수호하기 위해 문수산 일대의 성보와 해안 각 진의 화포들이 정비되었다. 덕분에 을축양요 때 조선의 방어력이 더 높았던 데다 하필 프랑스와 싸운 곳이 예릉이 있는 문수산성이었기에 이곳이 함락되면 선왕이 능욕당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조선군은 전멸을 각오하고 혼신의 힘을 다해서 프랑스군과 싸웠고 이후 프랑스측은 멋대로 남의 나라에 쳐들어가서는 타국의 왕릉을 공격한 꼴이 되어 엄청난 도의적 감점을 당해 조선에 큰 약점을 잡히는 방향으로 굴러갔다.
- 서원 확충
서원이 철폐되지 않았다. 못 배운 것에 한이 맺힌 귀남이 서원의 폐단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38] 억울하게 무식쟁이 소리 듣는 사람이 줄어들면 그것으로 족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역으로 지원금이라고 할 수 있는 제수(祭需)를 늘려주는 대신 면세 혜택을 회수하여 서원이 국가의 돈을 받아먹고 대신 민중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도록 하는, 다소 온건한 방식으로 폐단을 없애면서 서원 확충을 추진했다. 그 결과 폭발적인 기세로 증가한 서원이 자연스럽게 근대의 학교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됐다. 그리고 서원 철폐를 통한 세수 확충이 이루어지지 않고 제수가 늘자 나라의 곳간이 줄어들며 대원군의 경복궁 재건 계획이 무기한 연기되었다.
- 익문사 조기 설치
원 역사보다 무려 38년이나 먼저 익문사가 설치되었다. 그런데 익문사(益聞社)가 아니라 익문사(益文司)다.[39] 서원 확충이 결정된 직후 대원군이 새로 지어진 서원에 제때 경전을 내려줘야 한다는 핑계로 보부상 무리를 결집해서 만든 일종의 정치깡패 느낌의 사조직인데 대원군은 수족으로 쓰려고 만든것이지만 핑계로 삼은 경전 배부라는 명분에 개화파가 올라타 개화사상 듬뿍 넣은 서원 보급용 교과서(?) '격몽신편'이 배포되어 서원이 늘어난 향촌에 구석구석 보급되면서 세간의 여론이 개화에 우호적으로 바뀌었다. 비록 이름은 다르지만 사실상 제국익문사처럼 비공식 정보기관이다. 한편으로 고을 안에서 이간질을 하며 각종 대립을 일으켜 정부정책에 집단 반발하지 못하게 여론을 갈라놓고 다니던 전적이 있다. 이후 급격한 개혁정책에도 만인소 등 큰 규모의 집단반발 없이 조용했던 것은 이 덕분.
- 을축변법
귀남과 박규수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어 짜낸 신법. 오래전부터 개화를 준비하고 있었던 박규수가 귀남이 미래 지식을 토대로 내놓은 '이러이러하면 좋겠다' 수준의 엉성한 방안에 뼈대를 세우고 살을 붙였다.
내용을 보면 우선 사람의 목을 쌓아올려야 설 수 있는 나라라면 차라리 망해 없어지는 것이 옳다는 귀남의 신념에 따라 국가에서 관리하는 명부에 자신의 이름을 등록하는 조건으로 가톨릭 및 불교, 동학(천도교) 등 기타 신앙을 전면적으로 허용해 종교의 자유를 보장했다. 이로 인해 병인박해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 대신 오가작통의 법에서 따와 그 교인 중 누군가 위법한 일을 저지르거나, 알고도 이를 고변하지 않으면 그 고을의 모든 교인들을 함께 벌하기로 했다.
두번째는 개항이다. 자유 구역으로 지정한 제물포 한 곳에서 관세를 납부하면 이양선과 자유로운 교역을 허용했다. 이는 원 역사의 제물포 개항보다 11년이나 빠른 것으로, 이후 병인년에 경흥, 원산, 동래가 추가로 개항지가 됐다. 또한 양물(洋物)에 관세를 부과하고 이양선 단속의 법제를 마련함으로써 덤핑과 같은 방식으로 나라의 부가 함부로 새어나가는 폐단을 막을 수 있게 시정했다.
끝으로 동원예비군이라고 할 수 있는 민보군을 조직했다.
화경공 이항로를 비롯한 일부 보수적인 선비들은 어찌 사학을 허통하고 양이와 통교할 수 있냐며 거세게 반발했으나 귀남이 직접 이항로를 불러 군밤으로 비유한 일종의 흑묘백묘론을 논설하여 설득하며 감복시키고, 개화당이 익문사를 통해 널리 설파한 변이개화론을 신봉하는 진보파 선비들과 밀무역으로 피해가 막심한 개성상인들의 지원사격 덕분에 왕안석의 신법처럼 좌초되지 않았고 그대로 시행돼 근대화의 기틀을 마련했다.
- 조불수호조규
을축양요 직후 상황이 이렇게 굴러가니 애초에 아무런 트집잡을 명분도 없이 남의 나라에 무턱대고 쳐들어가 그 난리를 피웠는데 전투에서 죽까지 쑨 이번 원정을 마뜩잖게 생각했던 로즈 제독이 지금이라도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자고 압력을 넣었고 벨로네는 안 그래도 약점을 제대로 잡힌 터라 조선이 베르뇌 주교의 죽음을 포함해 모든 일을 덮어주는 조건으로 타 열강이 조선을 압박하면 프랑스가 중재해준다는 내용으로 최혜국 대우나 영사재판권, 해안측량권, 조차권 등 각종 이권을 모두 챙기지 못한 평등조약으로 체결되었고, 이 조규로 인해 다른 열강들도 '우리가 못 가지면 너희도 못 가져'란 입장인 프랑스 공사의 눈치를 보면서[40] 이권침탈적인 조항을 넣지 못해 순조롭게 문명개화의 첫 단추를 끼운다.
- 통리기무아문 조기 설치
원 역사 1880년보다 14년 빠른 1866년에 통리기무아문이 설치됐다.
- 제너럴 셔먼호 사건, 신미양요 ×
조선의 개항이 앞당겨져 발생하지 않았다. 해당 선박은 일본에서 변을 당했다. 따라서 자동으로 신미양요도 발생하지 않았다.
- 수신사 & 조일수호조규
통신사 파견을 조공으로 왜곡한 '야도 마사요시'[41]를 규탄하고 다시는 이런 망령된 말로 두 나라의 신의를 해치는 자들이 나오지 않도록 촉구하기 위해서 수신사 파견이 원 역사보다 9년이나 빠른 1867년에 이루어졌고 이와 함께 흔히 강화도 조약으로 알려진 '조일수호조규'가 일본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독소 조항 없이 조선과 도쿠가와 막부 사이에서 체결됐다. 그런데 조일수호조규에 '조일 양국은 자립국이되 (중국으로부터 책봉을 받았으므로) 자주국은 아니다.'라는 문구가 들어가서 이에 격분한 아이즈 번 존황양이파 낭인들이 테러를 감행하였고 인명 피해는 없었으나 수신사가 타고 온 제너럴 셔먼호가 침몰해 자칫하다간 자국의 재산인 선박을 잃은 미국이 개입할 여지가 생겼다. 이로 인해 조약 재개정 문제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고 결국 일본은 대외적으로 자'주'국이 아니라 자'립'국이 됐다.
- 오페르트 도굴 사건 × & 운산 금광 조기 개발
오페르트가 생각은 했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대신 운산 금광 채굴권을 얻을 생각으로 왕실에 접근했다. 그런데 고종 안에 있는 사람이 전생에 사기꾼에게 사기를 당해본 적 있어[42] 자본주의의 매운맛을 무척 잘 아는 귀남이었기 때문에 금은 나중에 필요할 때를 위해 남겨두기로 하고(별거 아니라고 생각한 오페르트는 일단 이 시점에 금본위제도를 떠올린 귀남을 보고 경악했다.) 광산을 잘 보는 오페르트에게 다른 유용한 광산을 찾아보라고 지시했다. 결국 오페르트는 생각도 못한 '이광도감'의 '도청'이라는 광산 개발 총책임자로 임명돼 졸지에 조선 역사상 최초의 색목인 당상관이 되었고, 후원을 받았던 서양 외교관들은 처음부터 조선의 공직을 목적으로 자신들을 속였다고 적대하여 돌아갈 수도 없게 되었고, 광산 개발이 나라의 공식 사업으로 추진됨에 따라서 이권을 챙기려고 할 때마다 조정의 관료들이 매의 눈으로 달려드는지라 결국 남 좋은 일만 하는 꼴이 됐다. 이후 30년 동안 말이 당상관이지 공노비 신세로 굴려졌으며, 외국인으로 '장성공' 시호까지 받아 대감님 소리를 들을 정도로 출세는 하였으나 퇴직할 때까지 한 고생이 공조에 구전된다. 그래도 수염과 머리가 허옇게 될 즈음엔 서른 살 어린 조선인 아내도 얻었고 수십 년 동안 한 업계에 눌러앉아 나름대로 입지를 다진 덕에 자기를 배신자라며 매정하게 대했던 서양 기업인이나 외교관들마저 함경도 광산의 떡고물 좀 나눠달라며 선을 대려고 고개 숙이는 게 싫지는 않다고.
- 토지개혁
경자유전의 원칙에 입각해 유상매입 무상분배를 골자로 한 토지개혁 '명전법(名田法)'을 시행했다.
- 의회 설치
1868년 귀남이 홍재학의 상소를 읽고 '세력 있는 자들의 핍박 없이 견식 있는 선비들이 거리낌 없이 생각을 나누고 중의를 모아 건안할 수 있는' 기구를 만들라고 하교하여 각 군현에서 추천을 받아 종4품 '참의대부(參議大夫)'로 임명된 자들이 한양에서 정기적으로 회동하여 국정의 특정사안을 논의토록 하는 '참의원(參議院)'이 탄생했다. 참의대부는 진사 이상의 사람 중에서 실직에 있지 않은 자들만 가능하다. 이 조건만 충족한다면 외국인이나 여성이라도 참의대부가 될 수 있다. 정확하게는 여성의 정치참여가 당연하다고 여긴 진보주의적이었던 귀남이 외국인과 여성을 금지하는 것을 깜빡한 거지만. 덕분에 첫 참의원 선거에서 파리 코뮌 출신 프랑스인 참의대부가 나왔다. 자신들이 쫓아낸 이가 조선 의회에 당당히 입성했다는 소식을 들은 프랑스에서는 놀라움 반 씁슬함 반의 반응을 보였다.
- 전국 도로 정비
안동 김문이 경복궁 중건 사업을 맡아 흥선대원군에게 잘 보여 권세를 되찾으려고 수작을 부리다가 귀남 본인이 고층빌딩이 넘쳐나는 유리도시 서울에 상경해서 살았던 탓에 빌딩을 하도 많이 보고 살아서 큰 궁전에 별로 감흥을 느끼지 못했는지라 경복궁에 손을 대기도 전에 엉뚱하게도 팔도의 대로를 닦게 됐다. 이리하여 안동김문은 당장은 가세를 길바닥에 쏟아붓게 되었으나, 19세기의 토목건축 기술력으로 전 국토의 가도를 중대한 사고 없이 정비하는 데 성공하여 전국팔도의 교통이 원활해지고, 안동 김씨도 권세는 줄었으나 팔도의 길을 닦으며 쌓인 노하우를 이용한 토목공업으로 큰돈을 벌며 다시금 명문벌열로 도약한다. 이후에도 의외로 큰 문제가 생겼다는 명시적인 묘사도 없고 19세기 말에 한강에 다리를 놓을 정도의 기술력을 축적했다.
- 간도 진출
서태후가 원 역사보다 대략 10년 빨리 조선의 길림성 일대, 즉 간도 개척을 허용하였다. 물론 공짜는 아니고 경작권을 인정해주는 대신 세금을 납부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 징병제 시행 및 군제개혁
1871년에 이필제가 전쟁 무서운 줄 모르고 북벌 운운하며 청국 공사관을 습격해 뒤집어 엎은 사건이 발생하자 귀남이 진심으로 분노해 이필제를 의금부로 끌고 와 국문하였다. 작품 전체에서 귀남이 이렇게 분노한 것은 자식들이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병에 걸려 오늘내일하자 귀남이 양의를 불러 치료를 부탁했음에도 장폐색에 걸려 연달아 병들어 죽었을 때 왕비의 오라비 되는 민승호가 함부로 '양의(洋醫)가 병을 몰고 와 왕자가 죽었다'며 선동을 퍼뜨려 왕비의 마음에 상처를 입혀 노했던 일을 제외하면 이게 유일하다. 어찌나 심하게 분노했는지, 이게 후대에는 이야기가 더욱 와전되어서 '주상께서 분노하신 나머지 필제에게 벼루를 던졌다는 소문으로 부풀려진다. 철이 들기 전의 경양대군도 이 이야기를 들어서 벼루를 필제에게 던진 일이 사실이냐고 귀남에게 질문했을 정도.
여기서 귀남은 역시 사내는 군대를 가야 전쟁 무서운 줄을 알고 철이 든다고 생각하여[43] '연병법(練兵法)'이라는 이름으로 징병제를 도입하였다. 그리고 통리아문에서 옮긴 서양 병서를 교재로 사용하는 사관학교 엄익관(嚴翼館)을 설치하였고 군관과 군졸 사이에 양반 사족이 복무하는 부사관 계급을 신설했다.
- 프랑스 난민 대거 유입
1871년에 최익현의 활약으로 막판에 정부에 항복한 일부 파리 코뮌의 구성원 중 천 명 정도가 프랑스 제3공화국의 박해를 피해 조선으로 임시 망명했다. 이 난민들 태반이 은행 직원, 학교 교사, 배관사, 회계사 등등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전문직종이라 한창 개혁 중이라 전문, 실무인력이 필요했던 조선의 국력 증진에 큰 도움이 됐다. 곁가지로 공산주의가 원 역사보다 빨리 조선과 일본에 전파되었다. 이후 파리 코뮌에 대한 사면이 실시되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시 프랑스로 돌아갔다.
- 완친왕, 의친왕, 영친왕의 존재 ×
물 떠놓고 승은이 내려지길 기도하는 궁녀가 한둘이 아니지만 귀남이 썩 여색에 마음이 없는 관계로 태어나지 않았다. 결국 중전이 아들 셋을 본데다, 귀남의 뜻에 의해 왕실을 비롯하여 모든 국민에게 축첩 금지 및 궁녀 혼인 허용이 이루어져 귀남에게 서얼은 생기지 않았다.
- 근대 신문의 태동과 성장
앞서 왕자가 병에 걸려 죽었는데 왕비의 오라비 되는 자가 함부로 선동을 해 왕비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짓을 목격한 귀남의 분노를 사 된통 당한 민승호를 본 대원군이 민승호에게 압력을 넣어 자신의 잘못을 알리도록 '익정신보'를 발행케 하여 원 역사보다 12년 빨리 조선땅에 근대적인 신문이 탄생하였고 뒤이어 참의원의 각 정파들이 '청구시무' 등 정론지를 발매하기 시작했다.
- 노비세습제 폐지 & 우정총국 설치 & 자전거 도입
노예제를 폐지하면 차관을 주겠다는 글래드스턴 행정부의 제안을 받아들여 원역사보다 훨씬 더 빨리 노비세습제를 폐지했다.[44] 덤으로 노비가 없으면 서찰은 어떻게 부칠 것이며 가마는 누가 메냐고 투덜거리는 사대부들을 달래기 위해 원 역사보다 일찍 우정총국을 설치하였고 프랑스에서 자전거를 대량으로 수입했다. 귀남이 "백성 중 종복이 없으면 거동할 수 없는 자들은 내 내탕을 털어서라도 자전거든 인력거든 사 주겠노라."라고 해 버려서, 귀남 본인이야 별 생각 없이 말했겠지만 왕실 권위가 하늘을 찌르고 있으니 사대부들은 그저 입을 다물어야 했다.
- 조러수호조약
녹둔도에서 무력충돌이 발생한 것을 계기로 공식적으로 확정된 바 없던 조·러 간의 국경을 확실히 하고, 두 나라 백성의 교역을 자유롭게 한다는 명분 하에 조러수호조약을 체결하였다. 그 내용은 내륙을 통한 교역을 허용하고 조·러 백성들이 양국 접경지대에서 통상, 이동, 거주의 자유를 가진다는 것이다. 협상을 주도한 무라비요프 백작은 조러수호조약을 앞세워 함경도 일대를 차근차근 집어삼킬 속셈이었다. 그런데 예상을 훌쩍 뛰어넘은 규모로 이루어진 조선 농민들의 대규모 개척 러시 때문에 오히려 연해주의 경제가 조선에 종속되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황급히 귀화하고 3년간 정주하지 않으면 종자와 농기구를 제공하지 않겠다고 포고했지만, 그랬더니 대부분의 농민들이 그럼 일만 하다가 겨울에 돌아가겠다는 반응을 보였으며 러시아 측에서 농기구를 제공하지 않으니 농기구 장사를 하기 딱 좋다고 조선인 상인들이 몰려들었다. 심지어는 조선으로 귀화하는 우회로를 쓴 서양인들이 당당하게 조선 호패를 들고 나는 조선인입네 하며 장사하러 드나든다고. 조선 정부에서도 그들은 조선으로 귀화했으니 조선인이 맞다고 인증해버리니 무라비요프 백작으로는 뒷목 잡을 노릇.
블라디보스토크 내에 거주하지 않으면 고용할 수 없게도 해 봤지만 지방 행정이 어설프다 못해 중세적인 구석까지 남아있는 러시아의 지방관들에게 어지간한 평민들도 여차하면 관청에 소장을 쓸 줄은 알 정도로 관을 대하는 데 익숙한 조선인들은 너무나 벅찬 상대였다.
심지어 연해주 개척 소식을 듣고 새로 유럽에서 들어오는 이들도 태반이 조선과의 교역에만 관심을 가졌다. 결국 원하던 조항이 필요 이상으로 들어갔다며 영국의 반발을 무마시키기 위해서 녹둔도를 조선의 영토로 인정했을 정도로 김칫국을 마시던 러시아에서 조약을 체결한 지 한 해도 지나지 않아 재개정을 간청했다. 조선의 반응은 "어찌 나라간에 맺은 조약을 한 해도 되기 전에 바꾸겠는가. 시간을 두고 논의해 보자."였다. 한 마디로 "응, 싫어."
- 참의대부 추거 실시
참의대부는 향회의 추천으로 뽑게 되어 있는데 한성에서는 그 제도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1874년부터 한성 5부에 한해 참의대부를 선거로 뽑기로 하였다. 유권자가 후보자의 이름을 적는 자서식 투표이며 돈을 주고 추거단자(투표용지)를 사야 했다. 이후에는 유권자들이 서당 및 향회에 모여 투표하게 되면서 추거단자 판매는 사라졌지만, 이 때의 관행이 남아 유권자를 '매단자'라고 부르게 되었다.
- 명문거족의 부르주아화
정치권력을 잃은 벌열·거족들이 개화가 피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둘씩 문중의 가산을 털어가며 각종 사업에 뛰어들어 자본가(재벌)로 거듭났다. 예컨대 안동 김문은경복궁 세우려다 팔도의 길을 닦으며 생긴 짬을 살려'광통이도국'이라는 회사를 차려 건설업, 풍양 조문은 무역업, 반남 박문은 연해주로 진출해 제지업으로 목돈을 만지고 있다. 원 역사의 삼성과 LG 등도 양반가들이 세운 대기업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당연한 수순이라 볼 수 있다. 1866년 서얼허통이 이루어지자 명문가의 서얼들이 과거 대신 자발적/강제적으로 상업에 뛰어들게 되었다.
- 만민공산당 출범
흥선대원군이 명문거족의 부르주아화에 위기감을 느끼고 백성의 9할은 될 자잘한 백성들, 즉 무산계급을 근왕파로 육성하기 위해서 자기 입맛 대로 뜯어고친 공산당 선언을 정강으로 채택한 칼 마르크스 피셜 사이비 공산당을 창당했다. 일례로 '잃을 것은 쇠사슬 뿐이요, 얻을 것은 세계 전체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이 문구를 '이처럼 위정의 도가 어그러지면, 잃은 것은 쇠고랑뿐인 가련한 백성들이 천하를 뒤엎고자 일어나게 될 것이다. 만국의 빈궁한 이들이 장차 함께 반민이 될 것이니 천하의 대란이 일어날 근원은 여기에 있도다!'로 옮겼다. 이때가 1874년으로 원 역사의 고려공산당 창당보다 무려 45년이나 빠르다. 수장이 흥선군이라 흥선군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공안서의 비호를 받고 있어 왕의 아버지가 당수로 있는 공산당이라는 기이한 타이틀을 가진 정당이 되었다.
- 전보 체계 구비
원 역사보다 11년 빠른 1874년에 팔도에 전보 체계를 갖추었다. 전선이 들어오고 상술한 것처럼 길이 닦이면서 봉수대와 역참에 묶여 있던 양민들 중에서 머리 좋은 이들은 전신국, 몸 멀쩡한 이들은 우정국의 직원으로 임명됐다.
- 월남 평화유지군 파병
제2차 사이공 조약 체결을 두고 원 역사와 달리 프랑스와 힘싸움을 벌이던 청국이 병력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하자 자칫 잘못하면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수가 있으므로 숙고 끝에 지전보평군이라는 이름으로 평화유지군을 월남에 파병하여 두 대국의 갈등을 중재했다. 이에 따라 제2차 사이공 조약의 내용도 원 역사와 달라졌다. 개변된 역사 문서의 아시아, 월남 문단을 참고할 것.
- 조청 철도사업
월남 문제가 끝난 뒤 서태후의 자기 정치로 조선 내에서 반청 분위기가 고조됨에 따라 어떻게든 유혈 사태를 피하고 싶었던 귀남이 조청 양국의 우호협력관계를 증진하고자 '선의'로 동삼성 철도 공동부설을 제안하였다. 그런데 이런 월척을 내버려둘 수 없었던 이홍장이 판에 뛰어들면서 규모가 크게 확장되어 단순히 만주에 공동으로 철선과 전신을 깔자는 정도였던 제의가 양광(兩廣)[45]에서 경상도까지 철도를 놓는 넉넉잡아 50년간 추진할 일대 대사업으로 확장됐고 이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주식회사인 동양철도, 줄여서 동철이 설립된다.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공상의 영역에 속한다고 여기던 시절이니 당초 '만주 철도사업' 입찰에 뛰어들었던 영프독 삼국의 철도회사들이 난색을 표했으나, 사업의 타당성은 떨어져도 장기적으로 수익성이 천장을 뚫고 치솟을 것이 너무나 명백하므로 결국 청과 조선 양국에 제철소 건설, 기술학교 설립, 설비 국산화 지원 등 대규모 기술이전을 감수하고 공사에 착수했다. 참고로 조선측 제철소는 해주 인근에 지었다.[46] 작중에서 장지동이 30년 정도면 양광에서 경상도까지 노선이 완성될거라고 말하는걸 보면 순탄하게 진행하고 있는 듯 하다. 처음 예정대로 부분부분 개통한 철도에서 이익을 창출해 재투자하기 시작했다고. 이는 본래 역사와 달리 청국의 내정이 안정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이후 서태후가 주식회사에서 과반의 지분을 차지해 최대주주가 되면 회사를 쥐락펴락할 수 있다는 주식회사의 법칙을 깨닫고 황실 내탕금을 빼서 무식하게 돈을 쏟아부어 동철 주식을 마구잡이로 사들인 결과 지분의 과반을 차지해 동철을 자기 손에 넣는다. 서양 투자자들은 그걸 진짜로 하냐며 뽑아도 뽑아도 끝없이 나오는 청나라의 재력에 경악했다.
- 도중(都中)[47] 결성의 자유 인정
1874년, 장승업의 신보도중(신문노조) 결성을 계기로 안 그래도 이리 치이고 저리 처이는 것을 서럽게 여기던 고공들이 너도 나도 우리도 나랏일을 한다며 도중을 결성하여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대규모 노동쟁의가 발생했다. 이에 6.25 전쟁 때 경험으로 공산주의라면 치를 떠는 귀남이 처음에는 강경진압을 생각했으나 아무리 빨갱이라도 백성은 백성이니 마음을 바꿔 고공들을 '존중'할 것을 지시하였고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모이지 않았다'는 전제하에 모든 공장과 국의 고공들에게 관아에 신고하여 도중을 꾸리는 것을 허여했다. 현대식으로 풀이하자면 노동삼권 중에서 단결권을 인정한 셈이다.
- 익문사 혁파 및 공안서 설치
1874년, 도중 노동쟁의 당시 무력충돌을 일으켜 약간의 트러블을 일으킨 익문사를 폐하고 그 대신 조선식 헌병군인 '공안서'를 설치하였다. 간판만 바꿔 단 대원군의 사병이라는 점은 크게 다를 것 없지만, 일단 겉으로는 총관을 따로 두었고 기무회의 의결에 따라 움직이도록 하였다. 대원군의 사병이기에 대원군의 정당 만민공산당에게 우호적이다. 팬덤에서는 '공장주가 노조와 싸우면 비밀경찰이 공장주를 잡아간다', '19세기판 암행어사 아냐?'라는 농담이 돌았다.
- 명성황후의 대군 출산
원 역사처럼 명성황후의 첫 아들과 둘째가 사망했을 때 귀남에게 호되게 질책당한 내의원이 허겁지겁 서양 의학을 받아들여 원 역사와 달리 세번째, 네번째 대군은 죽지 않고 생존했다. 그러므로 본작에서는 세자, 즉 미래의 순종이 고종과 명성황후의 외동아들이 아니다.
- 사법부 설치
귀남이 양이의 기물이 들어오면서 정도를 지키고자 하는 선비들이 설 자리가 사라지고 있다는 최익현의 이야기를 듣고 배운 사람들 할 일 중 세인의 존중도 받을 일이라면 역시 판검사라며 일자리 정책의 일환으로 행정권력에서 벗어난 근대화된 사법부를 설치하였다.[48] 전국 팔도 감영과 개시 둔 도시에 형송의 일을 다루는 판심청을 두었고 그 위로 최고법원 평리원을 두었다.
- 화서학원 & 노사학원
화서 이항로, 노사 기정진의 제자들이 각각 안동 김문과 대원군의 후원을 받아 대학교라고 할 수 있는 고등교육기관 화서학원과 노사학원을 차렸다.
- 한성-제물포 철도 부설
동철에서 몇 리 쯤 미리 놓아서 시범을 보일 심산으로 제물포부터 한성까지 가는 철도를 놓았다.
- 손탁호텔
베베르의 조선 부임이 앞당겨지면서 원 역사보다 빨리 손탁호텔이 세워졌다. 공친왕의 심복 마신이의 암살 미수 사건 당시에는 임시 호텔이었다고 한다.
- 정축년 북벌
공친왕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홍장과 미리 합의했던대로 동삼성에 나가 있는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서 병력 1만을 파견하여 제일 먼저 입국신고부터 한 뒤 아사 직전의 난민을 구휼하고 산적 무리를 토벌하는 등 민심을 수습했다. 규모로 따지면 전조 이래 처음이라 하여도 얻어낸 땅덩이는 없고, 일만 명 장졸을 먹이고 또 구휼까지 하였으므로 고스란히 그 해 재정은 곳간 헐어 충당할 지경이 됐다. 하지만 도성의 신보란 신보는 모두 박규수와 대원군의 손아귀에 있고 두 사람이 이번 출병을 아주 잘 한 일이라고 만족하였으니 감히 얻어낸 것 없이 국용만 축냈다고 글로 비방하는 이는 없었다. 호조판서 김병시는 전비를 너무 많이 썼다며 이를 갈았지만.
- 노씨권학상 제정
노벨상을 어렴풋이 알고 있던 귀남이 다이너마이트의 군용 판매를 허락할 수 없다는 알프레드 노벨을 설득하기 위해 판매 기금으로 매년 전 인류의 번영과 평화에 기여한 우수한 학술적 성과에 대해 표창할 것을 제안하여 유럽 학계의 그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는 가운데 원 역사보다 20년 빨리 수상을 시작했다. 조선에서 심사하고 수여하기에 수상 분야에 유학이 추가되었다. 현실 노벨상과 같이 노씨권학상 역시도 살아있는 사람[49]에게 수상되고 있다. 유학상은 조선에서 다 받아가는 반면, 과학 부문 상은 서양인이 전부 휩쓸어가는 상황인데 굴리엘모 마르코니와 드미트리 멘델레예프를 제외한 모두가 성의 없는 답례만 보여 심사위원들을 무안케 하고 있다. 원 노벨상과 달리 수학 부문이 있는데, 수학이 어찌 인류의 복지에 기여하냐는 노벨의 말을 듣고 온종일 호조탕약에 절여진 채 국고의 세출입을 세고 있는 호조판서 홍종우가 분노하여 산학이 쓸모없다고 하는 놈은 대야에 호조탕약을 가득 담아 칠공을 탕약으로 절여 주겠다고 날뛴 끝에 추가되었다.
- 무인년 은 소동
개화당에서 은본위제 실시를 강하게 주장함에 따라 소문이 빠른 이들이 너도 나도 쌈짓돈을 털어 은을 구매했다. 그런데 공산당이 강하게 반대하여 은본위제 도입이 없던 일이 된 가능성이 높다는 소문이 돌면서 도성 저자에 끼었던 거품이 순식간에 터져 은값이 폭락하고 만다. 그로 인해 비록 수는 적으나 패가망신하여 거리에 나앉은 이들이 나왔으므로 조정에서 이를 마땅히 구휼해야 하는가를 놓고 논의가 이어졌고 귀남이 생각 끝에 민자영의 제안대로 세곡을 풀어 저자의 은을 거두어들였다. 그리고 어윤중과 김옥균에게 이렇게 백성들에게 사들인 은 사백만냥을 들고 청국으로 가 제조국을 돌면서 병기든 사람이든 도움 될 이들을 모두 데려오라고 어명을 내렸다. 그리하여 훈련함 비연호를 타고 상해로 간 윤중과 옥균은 강남제조총국을 포함해 양강 일대의 공창을 후원하는 조건으로 재주 있는 공인들을 대거 스카웃하여 조선으로 돌아왔다.
- 대조선국 국제(國制) 제정
3년간에 걸친 논의 끝에 원 역사의 대한국 국제보다 21년 빠른 1879년에 제정되었다. 무한하고 불가침한 황권, '항만세 불변하오실 전제 정치'를 강조한 대한국 국제와 달리 삼권분립을 명시했다. 이를 근거로 통리아문을 의정부 이하 육조와 통합하여 행정부를 구성했고, 참의원의 자리를 입법부로 공식화하였으며, 삼사를 떼어내고 산림의 선비를 채용해 사법부를 설립했다. 그리고 국왕에게 인사권, 법률안 제출권, 위헌여부 심판 등의 권한이 있음을 선포했다. 또한 교육권, 평등권, 언론의 자유 등 백성의 기본권을 보장했다.
법으로써 군주의 위엄과 그 한도를 정하면 사람은 착한 세자가 용상에 올랐을 때 어지간한 일은 신료들이 알아서 처리할 것이고 외척이나 권신이 발호하여 왕권을 대신 휘두를 작정을 하게 되면 이를 막을 성벽과 같을 터이니 귀남은 이상의 내용에 만족하였지만, 신료들 사이에서 백성들에게 과분하다 할 만큼 내어주는 면이 있으므로 적어도 군주의 위엄을 앞에서라도 세워야 한다는 데 당색 막론하고 합의가 이루어져 국제 1조가 "대조선국은 자주지방으로 항만세 불변하오실 전제정치이니라."가 됐다. 그런데 그 다음 조항이 다음과 같다. "대조선국 국왕께서는 무한하신 위엄과 권세를 향유하옵시나니, 이는 무릇 이륜을 크게 일으켜 만백성을 이롭게 함이니라. 이에 문무 백관을 거느리시고 소임에 따라 맡기시느니라."
이에 대체 조선인들이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급진적인 개혁노선을 천명하고 있다고 보느냐 연일 물어보는 외국 언론사 기자들에게 시달리던 뒤냥이 "그래서 이 나라는 입헌군주국인가, 전제군주국인가?"라고 묻자 최익현이 말하기를 "둘 다 아니다. 애초에 그 둘의 구분은 서양에서 나온 것인데 임금과 백성의 도의가 다른 조선에 끼워 맞추려 하니 가당한 이야기인가? 굳이 따지자면 오직 나라 안 만백성의 이로움과 덕을 위해서 그 무한한 권력을 행사하는 군민공치(君民共治)의 전제군주국이다." 이어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이며 이 이상으로 들어가게 되면 결국에는 유학 경전 이야기 없이는 말할 수 없은 것이라 유럽인들은 더욱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 기묘년 경제공황
위에서 설명한 '조선국 국제'에 영국의 입김 닿았다고 확신한 이그나티예프 백작이 한반도 주도권을 확립하기 위하여 국제를 지금보다 '진중한 내용'으로 수정할 것을 요구했는데 조선이 이를 내정간섭이라는 이유로 거부하자 아시아개발은행의 조선 및 조선인 보유 자산에 대한 추가적인 투자를 무기한 유보하는 경제제재를 실시했다. 그리하여 그 동안 호황 일변도였던 조선에 공황이라는 달갑지 않은 객이 방문했다. 사실 아무리 조선이 경제를 개방하고 산업화 발 걷어붙이고 나섰다고 한들 여전히 그 근본은 농사짓는 데 있으니 외국에서 들어오는 투자가 끊겼다 하여 당장 나라가 끼니를 걱정을 해야 하는 상황은 아니었다. 허나 이 정도로도 지금까지 성공의 열매만 취해오던 조선의 풋내기 산업가와 자산가들에게는 심대한 충격이었다. 이에 대원군은 연해주에 나가있는 상고와 공인들을 일제히 철수케 하면 저들 역시 사세의 불리함을 깨닫고 조치를 물릴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민자영은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개화당을 반자유주의 친러파로 코스프레시켜 화해의 거간으로 삼을 것을 제안했다.
귀남은 고심 끝에 두 사람의 계책을 모두 취해 조선인들이 먹여살리는 연해주 전역의 유지들로 하여금 최근 조선이 반포한 자유주의 한법에 서구식 조항을 넣기 시작한 것은 만민공산당인데 이그나티예프의 경제제재는 헌법 초안을 합리적이고 보수적으로 방향으로 수정한 친러파인 개화당을 곤경에 빠뜨렸다며 이로운 이들을 버리고, 그 반대되는 이들에게만 힘을 실어주는 꼴이 됐으니 부디 치명적인 오해가 러시아의 국익을 훼손하는 일이 없도록 해달라는 청원을 올리게 만들었다. 차르의 기대를 받고 있는 연해주의 러시아 국민들이 이 청원을 극동 바깥으로 꺼내게 되면 러시아의 입지를 제 손으로 삽질해 파헤쳐놓았다는 모함이 자신을 덮칠 것이 눈에 선했던 이그나티예프는 결국 아시아개발은행의 경제제재를 해제했다.
가만히 문명개화를 추진하던 나라가 한 고관의 마음대로 위기에 처할 뻔 하였다는 사실은 적지 않은 젊은 서생들에게 깊이 새겨졌고, 다른 한편으로 극동의 작은 나라가 친러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자유주의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시베리아 곳곳의 정치범 유형수들 중 몇몇은 연해주로의 탈출을 고심하게 됐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의외로 관리가 느슨해서[50] 탈출 자체는 큰 문제 아니었을 거라고.
- 고시(考試) 실시
근래 학도들 사이에서 '국경을 넘어 무산계급을 결집시키기 위한 연대의 방도를 마련해야 한다', '유자의 짐을 지어 천하 만방에 참된 개화를 베풀어야 한다' 따위의 편벽한 잡설을 유행한다고 하여 귀남이 "그런 소리할 시간에 공부하게 만들면 되겠네."라는 논리로 과거에서 보는 과목에 시무의 대책, 양이의 학문, 거기에 산학까지 추가한 새로운 시험 제도 '고시'를 실시토록 하였다. 게다가 학도들이 엄한 주장을 할 때마다 말 없이 고시 과목을 늘리거나 난이도를 올리는 악마같은 개정을 하고 있다. 심지어 갈수록 업무는 늘어나고 새로운 지식이 필요한 부분이 많아지는데, 이미 중노년이라 새로 뭘 배울 여력이 없는 중신들이 앞다투어 이것저것 죄다 시험에 추가하자며 한마음으로 응원중이다.
- 조일동맹 체결
이토 히로부미가 친조노선의 선봉장 요시노부를 실각시키기 위하여 원교근공으로써 정한을 이룩해야 한다고 선동하는 책자 '일본책략'을 유포하였다. 그런데 새로 만든 국제(헌법)에 따라 대책회의를 참관하던 귀남이 듣자하니 사건 수괴가 '귀남이 익히 알고 있는 나쁜 놈' 이등박문이라, 혹시 그 놈이 나쁜 놈인 것 아니냐고 묻고 신하들도 간신이 권력을 잡기 위해 타국과의 마찰을 유발하는 참람된 일이 있을 법하다고 생각해 그놈이 원하는게 뭔지 몰라도 생각대로 안되게 진행하는 방안을 떠올린다. 그것이 조일간에 군사동맹을 맺는 것. 이는 결박동맹이라 하여 가상적국간에 군사동맹을 맺어 서로의 군사활동을 감시함으로서 안전을 확보하는 방법 중 하나다. 물론 자신의 군사활동도 제약되지만 애초에 전쟁할 생각 자체가 없는 조선에게는 전혀 손해가 없고, 현재 조선의 육군은 20만 명으로 일본의 세 배나 되니 알려져도 딱히 무서울 것도 없었다. 거절할 명분이 없었던 오쿠보 내각이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조일동맹이 성립되자 이번엔 극동의 양대 개화국이 군사동맹을 맺었다는 소식에 청국과 러시아가 기겁을 했지만. 한편 불장난이 거하게 실패한[51] 이토는 행동을 같이 하던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조슈 번에게 해군을 넘겨주겠다는 오쿠보의 약속에 넘어가 자신을 팔아버려 권력을 잃고 미국으로 도피성 유학을 떠나게 됐다.
- 교린삼장
귀남이 서태후의 파천을 계기로 마련한 조선의 외교독트린. 약육강식의 시대에 너무 이상주의적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이를 꾸준히 지켜온 이래 많은 나라들이 조선의 '선의'를 알고는 있다. - 대조선국은 다른 나라를 대함에 오직 예와 의를 지켜 함부로 벗어나지 않는다.
- 대조선국은 다른 나라로 말미암아 이익을 얻게 되면 필히 그 나라도 이익을 얻을 수 있도록 돕는다.
- 대조선국은 어려움에 처한 다른 나라가 도움을 청하면 힘닿는 한 돕는다.
- 전구 설치
원 역사보다 6년 빠른 1881년에 전구를 도입했다. 작중 조선의 근대화가 빨리 진행되었기 때문에 전구를 도입할 때 덤으로 창덕궁 돈화문 앞 각사까지 이어지는 가로등을 설치했다. 또한 궁궐 근처에 전력을 공급하는 발전기도 설치했으며 그로부터 시간이 조금 더 지난 시점에서 한양 주점 등에서는 자비로 발전기와 전구를 사서 사용하면서 한양 중심으로 통금이 없어지면서 남녀간에 밤에 만나서 부적절한 짓을 하는 게 아니냐는 소리가 나오는 형편이다. 조선 조정에서도 이러한 상황을 인지하고 일단 발전소를 짓고 한양을 중심으로 한 송전망을 구축하려고 하고 있다. 참고로 작중 조선에서는 맥심과 안인수가 합작한 회사 맥안공행에서 전구를 생산하고 있다. 에디슨이 조선을 우습게 보고 배상금 지급 요구를 한 뒤 조선의 공문을 배상급 협상하자는 내용이겠거니 하고 무시했는데, 그게 '조선에 특허권을 등록하면 인정해주겠다'는 공문이었기에 응답이 없자 조선은 다른 전구 특허를 가진 맥심 쪽에 연락해 특허를 사들인 것이다. 에디슨과 전구 특허를 다투던 맥심은 에디슨이 조선의 공문을 무시한 덕택에 자신이 인정받았다고 굳이 감사 편지를 보냈고티배깅에디슨은 자기가 공문 읽을 필요도 없다고 내친 주제에 내용을 알리지 않았다고 비서를 해고했다.
- 지적재산권법 제정
에디슨과 안인수의 전구 특허권 분쟁을 계기로 조선 조정 차원에서 지적재산권법을 마련했다. 그 내용은 미국 내 특허권자가 나선다면 조선에 기술협력을 하고 공장을 세운다는 전제 하에 그 권리를 보장하고 아시아 시장 진출을 지원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조치에 따라 특허를 자국과 동일하게 대한다는 말에 혹한 수많은 아마추어 발명가들로부터 세계 곳곳에서 특허가 조선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 참고로 이러한 제정에 큰 기여를 한 안인수와 에디슨간의 특허분쟁은 별도의 전구 특허를 가진[52] 맥심과 안인수가 합작하는 걸로 끝났다. 한편 의외로 맥심과 에디슨 사이의 경쟁이 지적재산권법을 계기로 다시 불붙게 되었는데, 에디슨이 발전기 특허를 내면 맥심이 교류전원장치 특허를 제출하는 등의 진흙탕 싸움이 되며 수많은 특허들을 제출해 그 특허들을 심사하는 역할을 맡은 호조와 공조의 업무만 배로 늘어나 야근 문화가 정착되게 되었다.
- 커피
어느 정도 개방이 된 시점[53]에서 이름이 나오지 않은 한 숙수가 귀남이 전생에 마시던 커피를 재현해내자 주인공이 좋아해 포상을 내렸다는 언급이 나왔다. 귀남 전생 시기의 연령이나 사회적 지위 등을 감안하면 자판기 커피 혹은 커피믹스일 것인데, 그걸 19세기에 만들어낸 것이다. 그래서 혹자는 해당 작품의 첫 광기를 19세기에 자판기 커피 혹은 커피믹스 맛 커피를 만들어낸 숙수의 등장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아울러 이 커피는 파리 박람회에까지 출품되었다. 여담으로 아메리카노도 퍼졌는데, 야근을 밥먹듯이 하는 호조[54] 관원들이 즐겨 마셨던지라 호조탕약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퍼졌다. 전생에 먹던 커피보다 저렴해서 계사황란 중에는 귀남도 이를 마셨다. 커피 문화는 이후에도 계속 퍼져 동방가배지국이라는 속언까지 나왔다.
- 국문교정청 설치
1884년부터 경서를 모두 언해로 옮기고 시권을 언문으로 써서 내도 가감 없이 그 내용만으로 판단하기로 결정했다. 더불어 국문교정청을 두어 나랏말의 이치를 궁구하고 널리 알리기로 하였다.
- 정동구락부 & 장동구락부
안인수의 아들 안태훈이 원 역사에서는 구미인들의 사교단체였던 정동구락부를 차렸다. 그리고 이에 질 세라 전 영의정 홍순목의 늦둥이 홍영식이 한양 제2의 구락부 장동구락부를 꾸렸다. 정동구락부는 말만 클럽이고 실제로는 다점에 불과하지만 장동구락부는 양주·연초·당구도 있는 곳이라 그런 여유를 즐길 만한 자제들 사이에서 꽤 입소문이 났다.
- 遠國과 隣國의 事情을 論함[55]
박규수의 유작. 제목만 봐도 알 수 있겠지만, 먼나라 이웃나라의 패러디다. 내용을 보면 둥근 이 세상에 가운데가 있을 수 있냐고 지적하면서 중원 땅의 문물만이 가장 뛰어나며 이는 문헌으로 증험할 수 있다고 하는 의론이 어찌 우활하면서도 무서운 말이 아니겠냐고 통렬히 비판했다. 동시에 대서 땅에도 이와 비슷한 의론이 있으니 저들이 옳고 우리가 그른 것도 아니요, 저들이 그르고 우리만 옳은 것도 아니므로 화이를 가름은 오로지 마음에 달렸고 억만 백성이 함께한다면 능히 만천하가 문명으로 가득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거의 대부분의 글이 언문이고 띄어쓰기 및 여러 문장부호를 도입하여 한문을 몰라도 읽을 수 있어 백성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작중에서 이 언문 표기에 대해서도 논박하며 정당성을 찾고 있다. 그리고 청국에 '만국사정'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 경복궁 재건
대원군의 조바심으로 당백전 발행 등 온갖 무리수가 동원되었던 원 역사와 달리 귀남의 엉뚱한 발언으로 전국 팔도의 길부터 닦는 것을 시작해 팔도의 대로가 닦인 뒤에도 재건할 경복궁 건물들을 설계하는 것으로 차일피일 미뤄지다가 조선이 충분히 강성해지고 나서야 비로소 공사가 진행되어 원 역사보다 19년 느린 1886년에 경복궁이 재건됐다. 처음 설계할 때 서양식 전각도 하나쯤 세우자는 제안이 나왔지만 창덕궁에 이미 하나 있기도 하고 명색이 나라의 법궁인데 국초의 제도로 함부로 변경하기 저어된다고 하여 불발되었다. 그리고 사정전에 전구 하나 설치한 것이 끝일 정도로 서양 기물을 들이는 것을 최대한 배제했다. 대신 후원 한 구석에 조선과 서양의 공법이 어우러진 전각 '경무대', 즉 청와대를 만들었다. 당연히 귀남이 반쯤 장난삼아 지시한 것이다. 한편 일찌감치 공사가 끝난 새 참의원 건물은 경복궁 재건이 완료되자 함께 준공식을 열었다.
- 체스 유입 & 바둑 전파
연해주 다녀온 사람들을 통하여 퍼졌는데 사람들이 '마우재 장기'라고 생각한다. 반대로 바둑 또한 유럽으로 퍼졌다. 본래 역사와 달리 한국식 발음인 Baduk으로 전파된 것은 덤.
- 환관 채용 중단
1885년 가을부터 내시에 환관(고자)만을 선발하는 제도를 폐하였다. 처음에는 다들 어색해하였으나 귀남옹부터 시작하여 차츰차츰 모두가 목소리 굵은 내시에 익숙해졌다.
- 안정여숙(安貞女塾)
카를 마르크스의 딸 엘러노어 마르크스가 입국 중 치근덕대던 조병갑을 때려눕히면서 일으킨 사건으로 여권 신장에 대해 고민하게 된 북촌 과부와 대갓집 며느리들이 한두 푼씩 모아 안정여숙이라는 여학교를 차렸다.
- 전국 참의대부 추거 실시 및 총리직선제 도입
참의대부의 임기를 정하지 않아 한 사람이 계속 연임하는 폐단이 발생하자 한성에서 제한적으로 실시했던 참의대부 추거를 전국적으로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영의정 겸 총리대신도 추거로 뽑기로 했다. 조정 대신들이 조금이라도 추거제를 자기네에게 유리하게 만들고자 "가산에 따라 1인 1표 이상 던질 수 있도록 하자", "공개 투표로 하자" 등 이런저런 택도 없는 제안을 내놓았지만 그 옛날 전국을 뒤집어 놓은 부정선거를 기억하고 있는 귀남이 "그러면 벼락부자한테는 투표권을 주고 가난한 선비에게는 투표권을 안 주는 게 되지 않느냐", "여기 있는 대신들도 내 앞에서 드러내놓고 반대의사를 내기 힘든데 일반 백성들은 오죽하겠느냐"라며 전부 반려해 현대의 선거 4원칙중 3가지, 직접 선거, 평등 선거(1인 1표제), 비밀 선거가 도입됐다. 선거권에 있어서는 보통 선거 원칙은 적용되지 않았고 나라에 내는 부세로 우선 거르되, 향시를 통과한 이들은 예외로 하기로 했다. 재산만이 아닌 교육수준이라는 조건을 집어넣었는데 향시가 서원이나 향교의 졸업시험에 가까워지며 선거권자는 매년 늘어나는 추세이다. 팬덤에서는 투표권 확대 관련 시위가 "공부해서 향시 합격하면 되잖아."라는 이유로 원천봉쇄되었을 것이라고. 또한 유권자의 교육수준이 향상되면 우매한 민중으로 인해 중우정치로 변질되는 사태도 예방할 수 있게 된다.
- 자유당 창당
참의대부 전국 추거 실시를 계기로 총리 출마에 마음을 굳힌 최익현이 박은식이 꾸린 자강당을 기반으로 실용적 자유주의를 채택한 자유당을 창당했다. 안인수의 도움으로 광통교 옆 인적 많은 곳에 당사도 차렸다.
- 신촌향약(新村鄕約)
국력을 기르면서도 동시에 백성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귀남의 기억 속 새마을운동과 최익현이 방도로 내세운 향약이 만나 시작된 사업이다. 그 내용은 초가지붕 교체, 민둥산 녹화, 종두법 보급 세 가지 중 하나만 우선 해줄테니 각 고을에서 알아서 한 가지 청만 정해 내놓으라는 것.[56] 같은 고을이라도 사는 곳이나 처지에 따라 서로 원하는 것이 다르다 보니 의견도 제각각에 혼란의 도가니가 펼쳐졌고, 이 때문에 다른 고을보다 뒤처지면 고을의 지식인인 자신들이 욕먹을 것을 걱정한 각 지역 사족들이 양민들에게 하나씩 양보하기 시작하면서 점차 원시적인 형태의 지방의회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후 지방의회에서도 '개화된 법도'에 따라 선거도 도입하고 제대로 된 의회 구실이 갖춰지고 있다.
- 단발
긴 시간에 걸쳐서 풍속의 변화가 일어나 단발에 대한 인식이 '꼭 할 필요는 없지만, 할 수도 있다'가 됐다. 그래서 나라에서 딱히 단발령을 내린 적은 없지만 도성이나 인천 부근에 단발하고 다니는 사내가 늘었다. 개중에는 망건으로 쓸어올려 상투 시늉은 낼 수 있을 만큼 절묘한 길이로 머리를 자르기도 한다. 동삼성과 인접한 의주에는 더 많다고 한다.
- 1889 파리 엑스포
원 역사와 달리 '해동문화각'이라는 독립적인 국가관을 차렸다. 왕실 레시피 인스턴트 커피와 서양 언어로 번역한 서적을 출품하고 자개와 옻칠로 꾸민 공장 기물을 전시해놓았다. 따로 자리얻은 광통이도국은 코닥 사의 협력을 얻어 조선의 명승을 주제로 사진전을 열였다.
- 학사장교 도입
모름지기 사내라면 군대를 가야 한다는 귀남의 신념에 따라 세자를 비롯한 대군들의 군입대가 현실이 되자 무품 종친들을 병으로 굴릴 만큼 담력이 강하지 못한[57] 군내 인사들이 이 기회에 막료 체계를 가다듬자는 생각으로 향시를 통과하거나 대학원을 마친 이들은 참위(=소위)로 종군케 하는 제도를 마련했다.
- 축첩제 폐지
귀남이 옥균의 제안을 받아들여 1890년에 축첩제를 폐지하였다.
- 궁녀의 결혼 허용
신정왕후 조대비가 평생 독신으로 살아야 하는 궁녀들이 불쌍하지 않냐며 다른 곳은 몰라도 왕실은 축첩을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귀남이 그렇다면 이제부터 궁녀들의 결혼을 허용하면 되겠다고 반응했다. 궁녀들이 궁 바깥과 혼맥이 생기다보면 궁 안의 정보가 바깥으로 새나가는 문제가 생길 테니 이를 통제하기 위해(그리고 오히려 이를 역이용해 궁 바깥의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내명부와 외명부를 합쳐 명부사를 창설하게 되었으며, 중전 민자영이 그 수장이 된다.
- 조일동맹 파기 및 조러불동맹 체결
파리 엑스포에서의 제의는 흐지부지 되었지만, 영국이 독일의 상황이 심상치 않아 위대한 고립을 끝내려는 상황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조영일 동맹을 맺자 조선에 제의한다. 이에 귀남은 조선은 러시아에, 일본은 영국에 붙어 아시아에서 세력 균형에 힘쓰고 만약 조일 간 싸울 일이 있다면 싸우는 시늉만 내자고 제의한다. 이토는 이에 동의해 다시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조선이랑 전쟁이 나면 이기든 지든 자신은 숙청되는지라 조일 간 전쟁이 나지 않도록 힘쓰려 한다.
- 세자의 국혼
세자 이척이 원 역사의 세자빈이었던 순명비 민씨가 아니라 광산 김씨의 영애 김명숙과 결혼했다.
- 무치춘일기(霧峙春日記)
김옥균이 세도가 징벌 여론을 달래기 위하여 대원군과 조력을 받아 내놓은 일종의 팩션. 작가는 원 역사 신소설의 아버지인 이해조로 경화시보에서 연재되고 있다. 상갓집 개라고 불리던 대원군을 모티브로 삼은 주인공 '이하영'이 무너진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 세도가와 암투를 벌이는 내용이다. 제목도 그렇고 내용도 그렇고 김동인의 작품 '운현궁의 봄'의 패러디다. 제목 무치춘을 직역하면 '안갯재의 봄'인데 안갯재는 '구름재', 즉 운현궁이다. 그러니까 '운현궁의 봄'이 '안갯재의 봄'이 된 것이다. 조금 나이를 먹은 사람이라면 어디 산구석 촌부면 모를까 첫구절만 들어도 대원군의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 무치춘일기의 원본이라고 할 수 있는 운현궁의 봄은 그 문학적 성취와 별개로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멀지만,[58] 무치춘일기는 작품 내적으로 대원군의 회고록이나 다름 없다는 점에서 차이가 크다. 메타적으로 생각하면 실제 역사보다 본작 내 대원군의 인생이 '운현궁의 봄'에 가깝다.
조선의 주요 정치인인 대원군이 연관된 만큼 일본이나 청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는데 일생동안 대원군과 정치적으로 치고받은 오쿠보 도시미치도 이 소설을 즐거이 읽었을 정도. 오쿠보 피셜 글 자체로도 꽤 재미있었단다. 공개된 내용은 어린 안중근이 조부 안인수에게 읽어주는 첫 문구 정도지만 그것이 "이제는 나를 위해 살겠노라."로 시작하리만치 강렬한 자아를 표현하고 어둠 속에서의 암투를 생생하게 그려내었기에 일부 팬덤은 '해외에서 조선 선비들 이미지 어쩔ㅋㅋㅋㅋㅋ'이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 광개토대왕릉비 발견
원 역사와 달리 조청 합동발굴단이 1892년에 광개토대왕릉비를 발견하였다. 청나라에서는 혹시 광개토대왕릉비를 근거로 만주 영유권을 주장할까 걱정하였지만 정작 조선의 학자들은 하남성에서 발견된 은허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 양력 및 개국 기년 도입
조선 개국 500년을 기념하던 중 서양 문물을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개화당이 제2회 전국 참의대부 추거에서 세도 늘었겠다 역법을 고치자고 제안했고 받아들여진다. 이를 주청 조선 공사 송헌빈이 광서제에게 알린다. 원 역사의 갑오개혁으로 인한 개국 기년 사용보다 약 2년 정도 빠르다.
- 계사황란
청나라에서 황제 주도로 토지개혁을 펼치면서 반발이 이어지자 군을 동원하여 이러한 반발을 억누르기 시작하는데 자연스레 조선의 상인들과 관계를 맺던 지주들이 피해를 입게되자 소비위축을 염려한 조선 주식시장이 민감하게 반응해 주가가 폭락하기 시작한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원 역사의 1893년 미국발 공황까지 겹치면서 이 여파는 조선 전체로 퍼져 다음 해인 1894년까지 많은 이들이 경제난에 시달린다. 이에 귀남은 조정을 믿고 기다리라는 어지를 신보에 싣는다. 해당 챕터의 이름은 겨울밤 화롯가, 그러니까 노변담화다.
- 독도 분쟁 및 실록 공개
황란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했는데 마침 유럽에서는 그레이트 게임이 한창이었기에 일본과 손잡고 가짜 분쟁을 벌여 유럽의 동맹국에게서 차관을 들여올 계획을 세운다. 그러던 중 일본 측의 실수로 독도에서 군사적 충돌이 일어났고 이를 학술적으로 해결하려던 중 학자들이 원할 시에 실록을 열람하는 것을 허가하게 된다.
- 경제개발 오개년계획
황란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어윤중이 제안하고 귀남이 본래 역사에서 떠올린 이름을 붙인 경제개발 오개년계획을 실행한다.
- 을미년 만주출병
안그래도 청의 변법 때문에 경제적 피해가 막심한데 북양군이 조선의 지분이 들어간 한양조병창의 운영에 개입했다. 이를 거둬달라는 요구를 묵살하고 친조 인사인 광서제를 반조 인사인 원세개가 사실상 유폐시킨 뒤 계엄령을 선포하자, 조선에서는 천자께 지부상소를 하러 가는 유생들을 호위한다는 명목으로 동원령을 선포하여 60만 대군을 소집시키는 한편, 최익현과 황현 등 도끼를 든 유생들을 앞세운 30만명의 병력을 압록강 너머로 파견했다. 원세개의 발악으로 산해관에서 소규모 교전이 일어나 사상자가 나오기 시작했지만 유폐를 탈출한 광서제가 성단을 내려 파면하며 원세개는 몰락했고 조선의 강남 이권을 재확인 받았다. 그리고 조선 기준으로는 작은 돈이 아니지만, 청국 기준으로는 미미한 소정의 배상금을 받았다.
- 영은문과 삼전도비 위치 이전
광서제가 공식적으로 사대질서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함에 따라 병자호란 이래 250여 년 만에 삼전도의 굴욕을 설욕하며 조선이 명실상부한 자주독립국이 되었고 이에 김가진이 영은문과 삼전도비를 정초에 폭파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청을 지나치게 자극함이 도의로 보나 실리로 보나 옳은 일이 아니란 의견이 많아 모화관으로 옮겨 후대의 참고할 바로 삼기로 하였다.
- 녹화회
운산에 광독이 점차 퍼지게 된 것을 계기로 신물질의 유해성을 연구하고 홍보하는 녹화회가 발족했다.
- 해수구제사업
조선의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국토 개발이 이루어질 수록 맹수와의 충돌은 필연이기에 징병제 초기부터 장병들을 동원하여 해수구제사업이 진행되었다. 실제로 홍범도는 한반도 맹수가 거진 씨가 말라 연해주로 사냥터를 옮겼다고 언급했고 테디 루스벨트와 김옥균의 대화에서 그 실황이 더 자세히 밝혀졌다. 언제 한번 한국에 사냥이나 오라는 김옥균의 말에 루스벨트가 아직 호랑이가 남아있냐고 물었고 김옥균은 호랑이는 이미 한반도에서 절멸되어 연해주에나 가야 있고 한반도에는 곰,[59] 아무르표범, 스라소니 정도만 남아있다고 답했다.
- 박가분
원 역사보다 16년 빠른 1900년에 판매되어 조선의 중전인 자영이 사용할 정도로 유행하였는데 녹화회에서 박가분에 들어있는 납 성분이 인체에 지극히 유해하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여 미래가 불투명한 상황이다.
- 공문서 양식확립
관아에서 쓰는 이런저런 소장 양식이 날이 갈수록 번잡해져 나이 많은 이들은 많은 대로, 젊은이들은 젊은 대로 어려움을 겪은 경우가 생겨 귀남이 관공서에 예시로 된 양식을 작성하여 구비해두고 이를 참고하라고 하였다. 이때 예로 들기를 사람 이름을 홍길동으로 하자 하여 어떤 이들은 성상께서 근래 유행하는 홍길동전을 읽어보시고 그 뜻을 갸륵하게 여기셨다 단정하고, 자유당 선비들은 홍길동전이 북인인 허균의 작품이니까 참된 탕평의 뜻을 펴고자 하심을 드러낸 것이라고 여겼다. 또 다른 이들은 얼자가 나라 세워 보위에 오르는 이야기이니, 백성을 아끼시는 한결같은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겠냐며 넘겨짚었다.
- 홍길동전
대학원에서 패관소품 연구하는 이들이 원 역사보다 대략 30년 빨리 홍길동전이 조선 최초의 한글 소설이라는 사실을 발표하였다.
- 국사공론회
총리대신 추거를 앞두고 1902년 쌀 소동에 대한 각 당 후보의 입장을 알리고 시시비비를 가리자고 최익현이 제안하여 세계 최초의 대선 토론회가 열렸다. 개화당의 홍영식, 자유당의 최익현, 공산당의 전봉준이 맞붙었으며, 사회자는 참의원정 이상재가 맡았다. 장소는 참의원 청사였고 경기 일원까지는 라디오 송출로, 전국 각지로는 전화로 생중계되어 지방의 사람들도 라디오가 있는 관아나 전화가 있는 곳으로 몰려가 토론회를 지켜봤다. 개화당과 공산당은 쌀 소동의 잘잘못이 누구인지 가리는 것을 넘어 각자 정책 비전을 내놓았다. 홍영식은 기계로 인력을 대체하여 고용비를 줄이고 소출을 늘리면서도 기계공업을 통해 부국을 이룩하자 주장하였고, 전봉준은 농협을 본받아 농민들을 모아 힘을 합치고, 농가 소출을 곧이곧대로 도회지로 넘기기보다 상품작물을 심고, 남는 쌀로 술이나 떡을 빚어 가치를 높이자 주장하였다. 최익현은 자기 뜻을 발의하기 보다 그 사이에서 주로 양당을 논박하였다. 사실상 최익현 한 사람이 논의를 이어가며 나머지 두 후보와 번갈아 문답하는 형세가 되었다.
- 라듐 발견
새로운 원소를 발견한 퀴리 부인이 연구를 지원해준 조선에 감사의 뜻을 표하기 위해 원 역사의 명칭 '라듐'이 아니라 '조소늄(Josonium)'이라 명명했다.
- 일진회
원 역사에서 친일 포퓰리즘 단체였던 일진회가 차기 총리를 꿈꾸는 이완용이 창설한 반식민주의 단체가 되었다. 이완용이 딱 저 같은 인간들을 모아 창설한 단체라서 라인업이 아주 화려하다. 원 역사 을사오적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과 정미칠적 송병준이 회원이다.
- 종횡학 창시
원 역사의 국제정치학으로, 최익현에 의해 화서학원에 원 역사보다 약 10년 먼저 학과가 개설되었다. 정강사의 안행론에 대응하고 대안을 제시하려는 목적에서 시작되었다. 이름은 옛 제자백가 시절의 종횡가에서 따왔으나, 종과 횡의 가운데 '중(中)'이 있듯 나라 사이, 도리와 이익 사이에서 균형의 길을 찾겠다는 뜻이 있다. 대전쟁 이후 미국이 자신들이 내건 과격한 금융지원 제안이 유럽의 경계를 사서 난처해지자 종횡학 연구 자문 인력을 급히 확충하여 종전 회의에 나섰다.
- 소양강댐, 충주댐 준공
제2차 경제개발 오개년계획에 따라 시작된 사업이다. 후버가 댐 건설 방책을 기무회의에서 조리있게 설명하자 귀남이 댐 이름을 후보제로 하면 좋겠다 했지만, 그런 전례가 없다는 신하들의 만류로 후버에게 소양이라는 아호를 내려 연만 닿게끔 하였다. 1913년 기준으로 이미 완공되어 북한강과 남한강의 치수가 이뤄졌고 한강의 범람도 잦아들었다.
- 옥음방송(玉音放送)
조선이 착실히 발전하면서 1910년 8월 29일은 1910년의 평범한 어느 날로 끝났지만 동시기 유럽에서 보불전쟁을 뛰어넘는 대전쟁이 터지자 조정에서는 어떻게 대응할지 골치를 앓았고 백성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해 위아래로 혼란스럽던 와중, 유럽을 돕고자 결심한 귀남이 몸소 방송으로 백성들에게 호소하기로 결정. 단군 이래 최초로 국가원수가 라디오 생방송으로 목소리를 내는 역사적 순간이 오게 된다. 그렇게 1911년, 전국 2천만 백성들이 귀를 기울인 가운데[60] 연설 첫마디부터 "이보게, 이것 켜져있는거 맞는가?"라며 엉뚱한 NG를 낸 귀남이 이렇게 된거 그냥 솔직하게 할 말 털어놓기로 결심하고 유럽을 돕자는 마음을 그저 생각나는 대로, 나직하게 말하기 시작한다. 할 말 다 털어놓은 귀남이었지만 뭔가 반응이 아니다 싶었는지 "만일 가기 싫다면 내가 직접 가서 도울 것이며 정 안된다면 임금 자리 내놓고라도 갈 것이니 그렇게 알라."라며 숫제 협박이나 다름없는 마무리로 연설을 끝맺는다.[61] 당연히 스튜디오에 있던 안양대군과 관원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것은 물론, 연설에 귀 기울이던 만백성들은 위 아래를 가리지 않고 기겁하였고 온 팔도가 뒤집어졌다. '도와야하느냐 말아야 하느냐'로 갈라진 여론은 '어떻게 해야 구주에 가서 도울 수 있을까'로 뒤바뀌었고 노인들은 곳간 열쇠 쥔 며느리들에게 사람이라면 도와야 한다고 눈물을 흘렸으며,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참여하려는 아우성이 벌어졌고 조선의 옥음방송에 귀 기울이던 대청과 일본도 연설문 내용이 전해지자 마지막에 나온 공갈협박은 생략한 내용의 국문을 돌리고 협력을 제안하는 등, 소소한 해프닝 끝에 1912년 초, 최익현을 수장으로 한 창의단이 유럽으로 향한다.
- 밤섬 계획
격치물성청 본청 근처이면서 출입 인원을 쉽게 통제할 수 있는 밤섬에 격치물성청 부속 연구소를 지었다.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핵 사용과 확산을 예방하기 위해, 아직은 귀남의 기억 속에만 있는 원자폭탄의 개발 가능성을 세계 각국과 함께 미리 연구하였다. 서던 툴레 제도에서 첫 원자폭탄 '비원(悲願)'[62]의 핵실험이 성공하고 만국연합군의 관리 하에 넘어가면서 대황란이 얼마 지나지 않아 불안하던 국제 정세를 안정시켰다.
귀남이 산신령과 함께 미래에서 박물관에 기록된 바를 들으니 실제 역사와 달리 오펜하이머 외에 한국의 이원철 박사[63], 인도의 사티엔드라 나트 보스 교수 등이 참여하였고, 특별히 초청된 마리 퀴리가 기폭 스위치를 눌렀다. 실험 성공 후 오펜하이머가 실제 역사처럼 "나는 죽음, 세계의 파괴자가 되었노라..."하고 바가바드기타의 한 구절을 읊자 인도인인 보스 교수가 '그 구절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순환을 의미한다'고 알려주었다고 전한다.
10. 기타
대통령 각하 만세에 등장하는 대한민국과 자주 비교된다. 주인공이 각각 선인형, 악인형이기도 한데다 결말부에서 보여준 두 나라의 모습이 극명히 대비되었기 때문.[1] 조선, 프랑스, 러시아.[2] 초대 통리기무아문 총리[3] 제2대 통리기무아문 총리[4] 제236대 영의정[5] 제237대 영의정[6] 제238대 영의정[7] 전국 추거로 뽑힌 첫번째 총리대신이다.[8] 제239대 영의정[9] 황란에 대한 책임을 지고 중도사임[10] 제240대 영의정[11] 제241대 영의정[12] 제242대 영의정[13] 제243대 영의정[14] 전시 거국내각 선포로 임기 2년 연장[15] 제244대 영의정[16] 원 역사 영친왕과 동명이인.[17] 현주는 본디 세자의 서녀에게 주어지는 봉호이고 경국대전이 편찬된 이후로는 대군의 딸은 따로 봉호를 받지 않았으나, 작중에서는 축첩제가 폐지되어 더 이상 세자의 서녀가 태어날 수 없으므로 현주가 대군의 적녀에게 주어지는 봉호가 된 것으로 보인다.[18] 은나라가 멸망하고 조선에 온 기자가 평양에 설치했다고 전해지는 정전.[19] 별칙으로 참의원의 삼분지이의 동의가 있을 시에도 국제 개정 발의가 가능하도록 정하였다.[20] 관제를 고쳐 총리대신 하나만 겸직하게 됐지만, 그것만 해도 이전 영의정들에 비할 수 없을 만큼 바빠졌다.[21] 얼굴의 일곱 구멍, 즉 눈구멍 두 개, 콧구멍 두 개, 귓구멍 두 개, 그리고 입.[22] 이 사정을 모르던 벨로네가 보고서에 산당을 산악파(La Montagne)로 번역하는 바람에 프랑스에서 웬 자코뱅들이 조선에 나타났는가 놀랐다는 후문이 있다.[23] 대체역사갤러리에 올라온 독자 팬아트. 볏단 사이에 공(共) 자 그려졌다는 작중 묘사에 기반하여 작품 공지에 등재되었다.[24] '너나 가져라'라는 뜻에 한강 여의도의 이름을 따왔다.[25] 악연이 있던 장동 김문의 김병학이 생전에 양악을 즐겨 들었다.[26] 지폐 도안에 누구든 얼굴을 넣는 것은 카이사르가 시작했을 뿐인 서양 전통이라며 그냥 문양만을 이용한 지폐를 만들고 있다.[27] 봉천, 흑룡강, 길림 일대의 만주[28] 실제로 예전 도쿄역 주변이 이런 이유 때문에 고층건물을 세울 수 없었다.[29] 전화로 왕명 등 예를 갖추어야 할 일을 전달할 때의 예법이 문제되었는데, 귀남이 "그러면 예를 차릴 일이 아닌 것만 우선 전화를 쓰면 어떤가?"라고 별 생각 없이 한마디 했다가 그것이 그대로 굳어졌다.[30] 1호는 진공관, 2호는 기계식, 3호는 천공카드, 4호는 시연 중 폭발, 5호는 개발 중단[31] 작중은 아직 자동차산업 초창기이기에 자동차의 속도가 느린데 귀남은 전생의 자동차와 비교해 엄청 느리다고 평가하고 있다. 나중에는 40km/h로도 충분히 달릴 수 있고 안양대군의 자동차 사고 이후 속도제한을 도입할 정도로 개선되었다.[32] 이게 자본가들 입장에서는 골때리는게, 그냥 휴가를 늘려달라는거라면 얼마든지 트집을 잡을 수 있지만, 나랏님이 말씀하신대로 관광을 다니고 싶다라며 어명을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는 지라 잘못하면 어명을 어긴 죄로 공안서에 끌려갈 수도 있어 함부로 거부할 수도 없다.[33] 여담으로 조선중앙통신사(Korean Central News Agency)의 약자도 조중통이다.[34] 같은 시기 북양군의 총 병력이 10만 명이었다.[35] 이것만 해도 체계적으로 병력자원을 관리하고 동원하며 집단행동을 몸에 새겨넣을 수 있다는 의미인지라 엄청난 발전.[36] 이 당시 조선 전체 인구는 약 2000만이다. 반면 원래는 작중 시점으로부터 10년 뒤 벌어지는 러일전쟁당시 일본은 최소 4000만 이상의 인구를 보유했다. 이는 절반도 안되는 인구로 더 늦게 개화했음에도 더 많은 군대를 징병하여 원정을 보냈다는 것을 의미한다.[37] 바로 얼마 전까지 결박동맹 관계였으므로 조선의 군사력을 알고 있을 것이다.[38] 어차피 서원이 결국 학교고 학교라는 게 다 거기서 거기 아니냐는 생각으로 일축하였다. 실제로 현대의 사립학교도 재단의 비리 등 각종 문제가 많았던 것을 보면 틀린 판단으로 보기도 힘들다.[39] 작가 : "작가의 말장난일까요, 아니면 역사의 억지력일까요?"[40] 프랑스는 조선 정부가 타국과 외교 문제를 빚을때 중재해줄 수 있다는 조항이 들어간 탓에 뒤따라온 영국이나 독일 등의 열강들도 프랑스의 눈치도 보이고 해서 함부로 불평등조약을 맺지 못하고 조불수호조규와 비슷한 수준의 조약만을 체결할 수 있었다. 특히 벨로네 공사는 베르뇌 주교 건으로 최소 자기 모가지가 걸린 상당한 정치적 약점이 잡힌 터라 타 열강이 조선에 손아귀를 뻗치는 것을 내버려 둘 수 없어 불평등조약이나 이권 침탈의 조짐을 보이면 강하게 반발하며 무산시켰다.[41] 원 역사에서도 같은 주장을 신문에 실었다.[42] 노인이 되어 군밤장사를 하며 모은 자그마한 돈이라 큰돈은 아니었기에 귀남은 사기꾼도 얼마나 살기 팍팍하면 없는 노인 돈을 가져갈꼬 하며 한편으로는 혀를 끌끌 차며 측은해했다.[43] 귀남 본인이 6.25 당시 징집된 경험이 크게 작용했다. 그때 그의 첫째형은 전사통지서 한 통이 되어 돌아왔고, 둘째형은 한쪽 팔·다리를 잃고 폐인이 되어 집에 돌아왔다가 어느날 다시 나간 후 실종되었다. 본인은 전쟁 말기가 되어서야 징집되어 사지나 몸은 멀쩡하게 돌아왔으나 빨치산과 지뢰·굶주림·추위에 시달렸고 돌아와 보니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서 먹고 살기 위해 혈혈단신으로 서울에 올라왔다. 그리고 자신의 앞에서 우마차가 지뢰를 밟고 통째로 폭사하는 끔찍한 장면도 목격한 만큼 전쟁의 잔혹한 면을 두 눈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44] 원 역사의 고종은 서기 1886년에 노비세습제를 폐지하였다.[45] 광둥성과 광시성.[46] 해주 인근 재령군과 은율군 일대에는 상당한 규모의 철광이 있다.[47] 조선 중기 이후 육의전 상인의 조합.[48] 이 과정에서 헌법 제정도 나오게 되나 헌법 제정은 이로부터 조금 뒤의 일.[49] 그 사람이 오늘내일하는 통에 정신이 없더라도 수상 가능.[50] 실제 역사에서 주변 마을 소녀와 애까지 만든 스탈린이 아니더라도, 수용소장의 가혹한 대우에 항의해 독극물로 집단자살한 사례가 있다. 독극물을 대량으로 입수하는 게 가능하다는 이야기.[51] 작중 묘사로는 불장난을 하다 보면 연기에 놀란 이웃이 대문 박차고 뛰어들어 물을 퍼붓기도 하는 법이다.[52] 당시 에디슨은 전구를 새로이 개발한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던 전구의 효율성을 개선한 것이었다. 에디슨 이외에도 이런 식의 전구 개선 특허가 비슷한 시기에 다수 있었다고 한다. 그 중의 한 명이 맥심.[53] 119화 39. 배우고 때로 익히면(2)[54] 오늘날의 기획재정부, 한국은행 등을 모두 합친 기구. 나라의 부(富)를 관리하는 업무를 맡은 6조 관청인데 조선이 근대화를 하며 수출입의 일이 크게 늘어나고 특허 문제를 공조와 나눠 맡으며 업무량이 가중되었다.[55] 먼 나라와 이웃 나라의 사정을 논함[56] 예산 부족 때문.[57] 현실에서 영국 왕실 종친이 모범을 보이기 위해 현역으로 활동하다 짖궂은 상관에게 갈굼받았다는 이야기가 있긴 하지만 김귀남 치세에 들어 위상과 권위가 하늘을 찌르는 조선 왕실에서 그러다간 김귀남이나 종친의 뜻이 어찌되었든 간에 신료들과 대원군이 노발대발하며 바로 공안서로 끌려가서 밤새도록 진지한 이야기를 나눌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호조식 고문법이라 불리는 호조탕약을 칠공에 집어넣을 수도 있고.[58] 실제 대원군은 젊은 시절 상갓집 개나 파락호와 거리가 먼 모범적인 종친이었다.[59] 반달가슴곰과 우수리불곰이 모두 포함된 듯 싶다.[60] 작중 서술을 빌리자면, 팔도가 멈추었다.[61] 귀남은 전생 합해 백 년은 되었을 경험에도 전장이라면 학을 떼었으므로 진짜로 갈 생각은 없었다.[62] 그것을 원해야 한다는 것이 슬퍼서 비원이며 누군가가 먼저 만들기 전에 국제협력으로 같이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각오 비장해서 비원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온갖 대체역사소설과 실제의 핵실험에서 '국가의 운명을 건' 각종 적극적이고 선전적인 이름이 붙은 것과는 맥을 달리한다.[63] 국내 이학박사 1호인 우남 이원철 박사(1896~1963)일 것이다. 실역사에서는 한국 천문학을 발전시키고 대한민국 기상관측업무 및 항공기 운항업무에 지대한 공헌을 한 분이지만 일제에 쫓겨나기 전까지는 연희전문학교 수물과 교수 및 학과장이었으므로 본 세계관에서는 원자력공학에 참여할 가능성도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