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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5-04 12:35:25

조선(고종, 군밤의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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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선국
大朝鮮國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파일:대한제국 국장.svg
국기 국장
파일:1607273688.png
▲ 진한 녹색은 본토, 연한 녹색은 통치권은 없는 영향권을 의미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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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국 1392년
한양 천도 1394년
훈민정음 반포 1446년
경국대전 반포 1474년
임진왜란 1592년 ~ 1598년
병자호란 1636년 ~ 1637년
계해환국 1863년
을축변법 시행 1865년
을축양요 1865년
참의원 개회 1869년
신미병정 시행 1871년
정축년 북벌 1877년
대조선국 국제 제정 1879년
경진약조(조일동맹) 체결 1880년
교린삼장 반포 1881년
제1회 전국 참의대부 및 총리대신 추거 1888년
신촌향약 시행 1888년
유라시아 동맹[1] 체결 1890년
태양력개국기년 도입 1893년
황란 1893년 ~ 1896년
제1차 경제개발 오개년계획 시행 1894년
사대관계 청산 1895년
한양 선언 발표 1898년
평양 아주대회 개최 1904년
창의단 파견 19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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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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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개경(開京)(1392 ~ 1394년, 1399 ~ 1405년)
한성부(漢城府)(1394 ~ 1399년, 1405 ~ 현재)
면적 약 22만 km²
접경국 파일:청나라 국기.svg 대청, 파일:러시아 제국 국기.svg 러시아 제국 }}}}}}}}}
인문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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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20,000,000명 이상(1912년 기준)
민족 조선민족
언어 조선어 (근대 한국어)
문자 국문 (한글), 한자
종교 유교(성리학), 불교, 가톨릭, 개신교, 천도교, 유대교
군대 조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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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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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체제 군민공치, 단일국가, 총리직선제, 단원제, 다당제
국가원수 국왕 이형 ,(1864년 ~ 1913년), → 이척 ,(1913년 ~ 현재),
정부수반 영의정총리대신 박은식
역대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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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박규수[2] ,(1866년 ~ 1871년),
2대 이유원[3] ,(1871년 ~ 1880년),
3대 홍순목[4] ,(1880년 ~ 1884년),
4대 심순택[5] ,(1884년 ~ 1888년),
5대 최익현[6][7] ,(1888년 ~ 1892년),
6대 민태호[8][9] ,(1892년 ~ 1894년),
7대 김옥균[10] ,(1894년 ~ 1898년),
8대 김홍집[11] ,(1898년 ~ 1902년),
9대 전봉준[12] ,(1902년 ~ 1906년),
10대 김옥균[13][14] ,(1906년 ~ 1912년),
11대 박은식[15] ,(1912년 ~ 현재),
주요 정당
개화당
만민공산당
자유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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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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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연호 개국(開國)
시간대 UTC+9
공식 화폐 조선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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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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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colcolor=#fff> 수교국 <colbgcolor=#fff,#1f2023>●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프랑스 1865년 조불수호조규 체결
파일:영국 국기.svg 영국 1865년 조영수호조규 체결
파일:러시아 제국 국기.svg 러시아 1865년 조러수호조약 체결
파일:스페인 국기.svg 스페인 1865년 조서수호조약 체결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 1867년 조일수호조규 체결
파일:청나라 국기.svg 대청국 1868년 조청수호조규 체결
파일:미국 국기(1896-1908).svg 미국 1868년 조미수호조규 체결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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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www.worldstatesmen.org/vn_tonki.gif 대남국 1883년 조남수호조약 체결
파일:류큐 왕국 국장.svg 류큐국 1886년 주조선 공사 부임
파일:태국 국기.svg 시암 1890년 주조선 공사 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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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왕실
2.1. 왕사2.2. 궁전
3. 행정구역4. 정치
4.1. 국제
4.1.1. '전제'에 대한 해석
4.2. 행정부
4.2.1. 국제 제정 이전4.2.2. 국제 제정 이후(총리직선제 이전)4.2.3. 역대 총리대신4.2.4. 역대 내각구성
4.3. 입법부
4.3.1. 정당4.3.2. 추거
4.3.2.1. 1874년 보궐 추거4.3.2.2. 역대 추거
4.4. 사법부4.5. 외교
5. 문화
5.1. 언론5.2. 학교5.3. 종교5.4. 시설5.5. 스포츠5.6. 영화5.7. 속담
6. 경제
6.1. 산업6.2. 기업
7. 군사
7.1. 육군7.2. 해군
8. 인물9. 개변된 역사10.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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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문피아, 네이버 시리즈, 카카오 페이지, 조아라, 리디 등에서 연재된 대체역사소설 고종, 군밤의 왕에 등장하는 조선을 소개하는 문서.

2. 왕실

2.1. 왕사

이름 이명복(李命福) → 완정군(完靖君) 이재황(李載晃) → 고종(高宗) 이형(李㷩)
아내 왕비 민자영(閔玆暎)
자녀 장남 이름 대군 (1871년 11월 4일 ~ 1871년 11월 8일): 장폐색으로 사망
장녀 이름 공주 (1873년 2월 3일 ~ 1873년 9월 28일)
차남 이름 왕세자 이척(王世子 李坧): 1874년 3월 25일 ~
아내 왕세자빈 김명숙(王世子嬪 金明淑)
자녀 선경군주 이연(璿慶郡主 李姸): 1894년 ~
왕세손 이은(王世孫 李垠)[16]: 1895년 ~
삼남 이름 안양대군 이규(安陽大君 李邽): 1875년 4월 5일 ~
아내 창녕부부인(昌寧府夫人) 조별단
자녀 군(君): 1901년 ~
현주(縣主)[17]: 1902년 ~
사남 이름 경양대군 이영(慶陽大君 李坽): 1878년 2월 18일 ~
아내 섬라국부인(暹羅國夫人) 발라야 알롱꼰(วไลยอลงกรณ์): 1884년 4월 16일 ~
자녀 현주(縣主): 1911년 ~
군(君): 1912년 ~
귀남이 아무리 주변에서 강하게 권하여도 자영 외에 다른 비빈을 들일 생각을 하지 않아 후궁이 존재하지 않으며 이에 따라 완친왕, 덕혜옹주 등 서자와 서녀가 태어나지 않았다. 반면 원 역사에서 몸이 약했던 세자 이척, 군호를 짓기도 적에 요절한 민비의 3남과 4남은 세자 척이 태어나기 전에 두 자녀를 잃은 귀남이 내의원을 엄히 질책하여 조선의 의학이 개화 이후 급속도로 발전한 결과 건강히 자라고 있다. 경양대군의 경우에는 어렸을 때부터 개화식, 즉 양식을 즐겨 먹어 태조의 환생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기골이 장대하다. 그리고 원 역사에서 성불구자라는 의혹이 있는 척이 나이 스물에 벌써 자식이 둘이다.

2.2. 궁전

3. 행정구역

1879년 국제를 제정하면서 오백 년을 거치며 경계가 난잡해진 팔도의 부·군·현을 크게 정리하였고, 사람 많거나 땅 넓은 도는 둘로 쪼개어 각각 관찰사를 두었다. 수령은 여전히 중앙에서 임명하지만, 김홍집 내각에서 수령에게 참견할 권한을 재차 확인받은 군현 각지의 향회에서 '작은 참의원' 모양새를 갖추어 민심을 대변한다.

4. 정치

4.1. 국제

제1조: 대조선국은 자주지방으로, 항만세(恒萬歲) 불변하오실 전제정치(專制政治)이니라.

제2조: 대조선국 국왕께서는 무한하신 위엄과 권세를 향유하옵시나니, 이는 무릇 이륜을 크게 일으켜 만백성을 이롭게 함이니라. 이에 문무백관을 거느리시고 소임에 따라 맡기시느니라.

마지막 조: 무릇 제도라 함은 시일이 오래되면 폐단이 따르기 마련이니, 이에 대조선국 국왕께서는 때로 손수 발의하시어 본 국제의 절목을 고치도록 하유하실 수 있으시니라.[19]

4.1.1. '전제'에 대한 해석

국제 1조에서 대놓고 전제정치를 명언하였으나 바로 2조에서 '만백성을 이롭게 하기 위해'라는 제한을 걸어버려서, 군주의 위엄과 권세가 신의 뜻이나 당연한 전통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법에 의해 보장되고 제약된다는 해석이 되어버렸다. 이 때문에 작중에서도 외국인들은 이게 도대체 전제군주정인지 입헌군주정인지를 혼란해하는 상황. 조선 측에서는 글귀 그대로라며, 당신네 정치체제 구분을 어찌 유교적 전통에 따라 구성된 조선의 국제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겠느냐고 해명했다. 최익현은 이에 대해 군민공치(君民共治)라는 표현을 제시했다.

조선시대에 전제(專制)라는 단어는 오늘날 쓰이는 것과 정반대의 뜻으로 쓰였으며 오늘날의 쓰임새는 근대에 일본에서 들어온 것이기 때문에 작중 시점에서의 전제정치란 사실 입헌군주제를 뜻한다는 팬들의 해석이 있으나 그런 경우라면 1조와 2조의 해석에 충돌이 없이 바로 입헌군주제로 해석되므로 외국인들이 '조선은 도대체 전제군주국인지, 입헌군주국인지'를 물으며 혼란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해당 단어는 오늘날의 쓰임과 같이 사용되었으며, 국제를 외교관 등에게 소개하는 과정에서 '전제정치'가 'despotism'으로 번역되었으리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4.2. 행정부

국제를 제정하면서 겸직을 가능한 한 없애고 통리기무아문 아래 12사와 기존 육조를 합쳐 의정부 아래에 두었다. 의정부의 수장은 영의정이며 총리대신을 겸한다.[20] 총리는 추거를 통해 선출된다. 임기는 4년이며 중임제를 채택했지만, 두 번 연이어 역임하지는 못하게끔 하였다. 총리는 임금을 대신하여 육조를 지휘하고 인사권을 행사하며 임기 중에도 당직 겸직이 가능하다.

육조의 체제는 예부터 율령 따라 내려오는 것이므로 바꾸기 저어되는 바, 대신 육판서 아래 십이참판을 두어 그 맡는 바를 나누었다. 그리고 궁내의 법도를 크게 바꾸어 환관 채용을 중단하고 궁녀들도 모두 혼사 치를 수 있도록 하였다.

열흘에 한 번 임금과 총리대신을 비롯한 중신들이 경복궁 사정전 또는 경무대에 모여 '기무회의(機務會議)'를 통해 국사를 논하고 나라의 대계를 정한다. 비록 임금이 회의에 임석하지만, 옛 상참(常參)이나 차대와 그 제도가 다르다. 나라의 소소한 일은 스스로 처리하고 후에 임금께 아뢰는 것이 자리를 잡고 있다.

4.2.1. 국제 제정 이전

4.2.2. 국제 제정 이후(총리직선제 이전)

4.2.3. 역대 총리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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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역대 총리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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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함 이름 임기 정당 비고
취임 퇴임
통리기무아문 총리대신 1 박규수 1866년 1871년
개화당
을축변법 시행
명전법 시행
2 이유원 1871년 1880년 - 연병법 시행
국제 제정
영의정 겸 총리대신 3 홍순목 1880년 1884년 - 조일동맹 체결
교린삼장 반포
4 심순택 1884년 1888년 - 경복궁 중건
5 최익현 1888년 1892년
자유당
첫 직선 총리대신
신촌향약 시행
유라시아 동맹 체결
6 민태호 1892년 1894년
만민공산당
양력 및 개국 연호 도입
계사황란
7 김옥균 1894년 1898년
개화당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시행
을미정난
만국평화회의 개최
8 김홍집 1898년 1902년
자유당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시행
격치물성청 설치
9 전봉준 1902년 1906년
만민공산당
평양 아주대회 개최
10 김옥균 1906년 1912년
개화당
1910년 이후로 전시거국내각
11 박은식 1912년 현재
자유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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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4. 역대 내각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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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역대 내각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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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직책 최익현 내각 민태호 내각 제1차 김옥균 내각 김홍집 내각 전봉준 내각 제2차 김옥균 내각
의정부 영의점 겸 총리대신 최익현 민태호 김옥균 김홍집 전봉준 김옥균
좌의정 민태호 어윤중 김홍집
우의정 김성근 어윤중
이조 판서 김윤식
호조 판서 어윤중 어윤중 홍종우 홍종우 이용익
재무참판 홍종우 홍종우 이용익
예조 판서 김윤식 김홍집 박영교 유길준 민종식
외무참판 김홍집 손병희
문교참판 이건창 정병하
병조 판서 정하원 홍영식 김기범
형조 판서 오경석 서광범
공조 판서 김병시 이용직
공상참판
기기참판 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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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입법부

국회를 참의원, 국회의원을 참의대부라고 부른다. 참의대부는 종4품이며 각 군현에서 추거로 총 300명이 뽑힌다. 임기는 4년이다. 참의대부 추거 출마는 진사 이상의 사람 중에서 실직에 있지 않은 자들만 가능하다. 과거에 합격하지 않아도 관직을 제수받은 적이 있다면 외국인이라도 참정권이 주어진다. 그리고 외명부에 속하여 관등을 받은 문무대신의 아내들도 추거에 출마할 수 있다. 일례로 엘리노어는 정경부인 자격으로 출마하여 조선 최초의 참의'부인'이 됐다. 의장은 참의원정이다. 유 · 산당 시기에는 조정에서 파견한 인물이 맡았으나, 제도가 안정된 이후로는 원내 정당이 돌아가며 맡고 있다.

유림에서는 조광조가 창안했던 현량과의 단점을 개선, 장점을 계승한 제도로 보고있다. 이백년 붕당 정치의 경험 덕분인지 의회 정치가 초창기부터 원활히 작동하였다. 삼당 모두 서로 대립이 약하고 협조하는 경향에서 간부정당과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 밀실정치의 면모도 나타나지만 공론과 평판을 중요시하는 전통 덕분에 일부 상쇄된다. 을미정난을 계기로 국왕이 각 당 영수에게 종2품 특진관을 제수하여 경연에서 조언을 받는 것이 관례가 됐다.

국헌상으로는 참의원이 국용산정 권한, 즉 예산안 편성권을 가지고 있지만 내각의 권한이 막강하여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이에 저들 고장이나 대의를 위하여 발의하고 싶은 사업이 많은 젊은 참의대부들 사이에서 조금씩 불만이 일고 있다.

전봉준 내각부터는 내각대신 후보자를 전형회(청문회)를 통해 검증할 수 있게 되면서 행정부에 대한 견제 장치가 마련되었다.

참의원 의사당은 운현궁 건너편 마당에 있는 양관이다. 그래서 대원군이 세상을 떠난 후로는 구름재가 운현궁이 아니라 참의원을 돌려 이르는 말이 됐다.

4.3.1. 정당

참의원 개원 초기에는 유당과 산당, 그리고 무소속의 양당 체제였고, 참의원 후기에는 개화당, 만민공산당, 자유당의 3당 체제가 되었다.

4.3.2. 추거

4년을 주기로 총리 추거와 참의대부 추거가 동시에 실시되었으나 94년 보궐선거 이후 2년씩 번갈아 이뤄진다. 총리의 경우 중임이 가능하지만, 연임은 불가하다. 일정 규모 이상의 부세를 내는 자, 향시를 통과한 생원 또는 진사만 투표권을 가진다. 매단자(유권자) 수가 늘면서 추거단자(투표용지)를 팔아 걷던 방식을 고쳐 관청이나 각 동리에 지정된 서원 혹은 서당에 투표소를 마련하였고 추거일자도 농한기로 한정하였다. 개표 과정은 다음과 같다. 각 군현에서 미리 개함하여 표의 많고 적음을 헤아리고, 그 결과를 도성으로 보내어, 광화문 앞 육조거리에서 한성 5부의 개함과 더불어 발표한다. 이때 혹시나 있을 부정선거를 방지하기 위해 국왕이 개함례에 참관한다. 국왕이 친람하므로 만에 하나 단자를 모으거나 세는 데 있어 잘못이 있으면 그대로 기군망상(임금을 속이고 업신여긴다는 뜻)하는 꼴이 된다. 전통적으로 기군죄는 반역과 동등하게 처벌했으니, 결과적으로 선거조작을 하면 최대 사형까지 갈 수 있는 무시무시한 나라가 되어버렸다. 명시적으로 연좌제를 폐지했다는 서술은 없었지만 서양 법제도 참고했을 것이니 그나마 삼족멸이 벌어질 일은 없다는 게 다행일 정도.

길일을 택해 행사를 치르는 관습이 남아있어, 총리대신 취임일은 그때그때 조금씩 다르다. 단 기상학의 발달과 함께 길일은 이제 날씨가 좋고 온난한 날로 의미가 변했으며, 서쪽 중국의 기상정보가 전보를 타고 전해지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일기 예측이 가능해져 그에 따라 길일을 택하게 되었다.
4.3.2.1. 1874년 보궐 추거
4.3.2.2. 역대 추거
파일:대한제국 국장.svg
역대 총리대신 및 참의대부 추거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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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년 제1회 전국 참의대부 및 총리대신 추거
정당명 개화당 자유당 만민공산당
총리후보 김병시 최익현 민태호
결과 2위 당선 3위
의석수 3당 2당 1당
비밀선거와 평등선거의 원칙이 보장된 첫 전국단위 추거. 진보적인 정책 공약들로 백성들의 반향을 일으킨 공산당이 과반을 차지하여 다수당이 되었으며, 박규수 사후 방향성을 잃은 개화당이 참패를 겪었다.
1892년 제2회 전국 참의대부 및 총리대신 추거
정당명 개화당 자유당 만민공산당
총리후보 박정양 민태호
결과 2위 불출마 당선
의석수 3당 1당 2당
개화당은 금권선거란 비난을 무시하며 재보를 열심히 뿌려댄 결과, 세도가의 과거사 문제가 불거졌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선거보다 약진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에 반해 공산당은 호황을 만끽하던 시골 유지들이 등을 돌리며 원내 2당으로 내려앉았다. 양당 사이에서 자유당이 어부지리로 다수당을 차지하며 각 3당이 미미한 차이로 비슷한 의석수를 가져갔다. 총리 추거는 자유당이 인재 부족으로 후보를 내지 않고, 개화당 유력 후보 김옥균도 출마하지 않으면서 일명 '여의[24] 총리 추거'라 불리게 되었다.
1894년 제3회 총리대신 추거
정당명 개화당 자유당 만민공산당
총리후보 김옥균 ??? ???
결과 당선
민태호 사직 여파로 공산당이 힘을 못쓰는 가운데 구관이 명관이라 최익현이 자연스레 돌아올 것이라 여기는 이들이 많았지만, 지난 추거 때 끝내 나서지 않았던 김옥균이 방대하고 짜임새 있는 경제공약을 내세워 본래 자유당을 지지하던 사람들의 단자까지 빨아들여 총리 자리에 올랐다.
1896년 제3회 전국 참의대부 추거
정당명 개화당 자유당 만민공산당
의석수 1당 ??? ???
1894년에 총리대신 보궐추거를 치렀기 때문에 참의대부만 선출하였다. 개화당이 황란 극복, 북양군 정벌 등 김옥균 내각의 업적을 내세웠으나 하는 일은 옳아도 그 뒤에 있는 마음씨 옳지 못하다 여기는 이들, 다시 늘기 시작한 공장 노동자들이 각각 자유당과 공산당에 표를 던져 개화당이 과반에 아슬아슬하게 못 미치는 의석을 확보했다.
1898년 제4회 총리대신 추거
정당명 개화당 자유당 만민공산당
총리후보 어윤중 김홍집 전봉준
결과 당선
김옥균이 총리대신 임기를 늘려 참의대부와 같이 선거를 치루게 하는 개혁을 밀어붙였으나 실패하여 원래대로 임기가 끝난 후 이뤄진 총리대신 선거. 프랑스에서 돌아온 이후 자유당에 영입된 김홍집이 '민생지질(삶의 질)'을 아젠다로 내세워 공산당으로 갈 표심을 뺏고, 개화당이 경제공약 아래 내세운 어윤중을 꺾고 당선되었다.
1900년 제4회 전국 참의대부 추거
정당명 개화당 자유당 만민공산당
의석수 1당 ??? ???
개화당이 추거를 앞두고 학제개혁이라는 정책안을 내놓으면서 이를 두고 공산당과 자유당 내에서 당론이 크게 갈려 개화당이 일찍 우세를 점했다. 김옥균이 논설 '무비시론'을 낸 직후 라이트형제의 비행이 성공하면서 곤란에 처할 뻔 했지만 근근이 1당을 차지하였다.
1902년 제5회 총리대신 추거
정당명 개화당 자유당 만민공산당
총리후보 홍영식 최익현 전봉준
결과 당선
1902년 쌀소동을 계기로 세계 최초의 대선 토론 '국사공론회'가 유·무선 생중계로 열렸다. 유권자들 중에서는 쌀 태워먹은 일에 대해 이제 쌀만으로는 밥벌이가 되지 않으니 이해할만 하다는 이들이 좀 더 많았고, 양당을 논박한 최익현에게 개화당으로 갈 표가 옮겨가며 근소한 차이로 만민공산당이 총리직을 차지했다.
1904년 제5회 전국 참의대부 추거
정당명 개화당 자유당 만민공산당
의석수 ??? ??? 1당
공산당이 또 다시 득세하여 자유당과 손잡으면 쉽게 과반석을 넘을 수 있게 됐다.
1906년 제6회 총리대신 추거
정당명 개화당 자유당 만민공산당
총리후보 김옥균 ??? 김기범
결과 당선
자유당 유력 후보였던 이완용이 출마하지 않고, 다음 후보로 거론되던 김홍집도 자유당이 개화당의 협력 제의를 수락하며 나서지 않게 되었다. 공산당에서는 지난 전형회를 통해 이름을 널리 알린 김기범이 나섰다. 전봉준 재임 중 이룩한 일도 많고 경제 공약도 대개 지켜진데 비해 예상했던 것만큼 성과가 크지 않아 김옥균이 다시 총리직을 탈환할 수 있었다.
1908년 제6회 전국 참의대부 추거
정당명 개화당 자유당 만민공산당
의석수 ??? ??? 1당
힘 잃을 것 같던 자유당이 일진회 덕에 젊은 층의 지지를 받으며 도로 약진하여 순위는 그대로 유지되었지만 정립한 세 당 간의 차이는 확연히 줄었다.
1912년 제7회 전국 참의대부 및 총리대신 추거
정당명 개화당 자유당 만민공산당
총리후보 ??? 박은식 ???
결과 당선
의석수 ??? 1당 ???
전임 내각의 2년 임기연장으로 20년만에 동시에 치뤄진 추거. 유럽 전란에서의 최익현의 활약과 종전 확정 소식이 알려지며 자유당 일색의 결과로 끝이 났다. 총리 당선인 박은식은 자신의 지재가 아닌 최익현의 덕으로 당선되었다며 이와 같은 국정 기조 이어가겠다고 천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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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사법부

형조사헌부의 기능 일부를 분리하여 국제 제정과 함께 사법원을 새로 설치하였다. 감영과 개시를 둔 전국 각 도시에 지방법원 격인 판심청(判審廳)을 설치해 각종 민형법에 관한 재판을 진행하며, 그 위에 최고법원인 평리원(平理院)을 두었다. 민간에서는 판심청을 지방 관아인 '동헌'의 서쪽 부지에 주로 지어졌다 하여 '서헌'이란 속칭으로 부른다. 법과 고시를 통해 법관을 선발한다.

여전히 원님 재판 시절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의 인식과 달리 대명률대전회통을 더 이상 법전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각각 민법과 형법에 해당하는 '민률'과 '형률'에 따라 재판한다. 법관과 검사를 각각 판사, 심사라고 하며 하는 일이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변호사·법무사격인 대송인이 있다. 대송인의 경우 현재 법과 등과자들로는 서헌 꾸리기도 빠듯하여 대대로 율관하던 이들이나 그 일가붙이들이 주를 이룬다. 고작해야 소장 양식 외우고, 수령에게 아첨하고, 아전들에게 기름칠 하던 그 옛날 율관들과 달리 나름대로 학식 있는 이들이 많다. 그래서 사회적인 인식도 좋은 편이지만, 점잖은 대가에서는 스스로 국법을 배우거나 한미한 선비를 거두어 그 문중 송사를 맡아보게 하는 것을 선호한다.

4.5. 외교

열강은 조선을 총칼로 깨우쳐야 할 비문명 야만인이 아니라 나름의 원칙과 도덕을 지키며 살아가는, 대화가 가능한 상대로 여기고, 조선은 자신감과 여유를 갖추어 서구 문명을 무분별하게 추종하지 않고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것을 당연스레 생각하고 있다. 또한 여러 국제적 사건이 발생하면 어느샌가 조선이 끼어들어 선의의 제안을 해오는데 열강에서는 '적어도 손해는 안 본다. 우리가 바라는 결과가 나오지도 않지만.'라고 인식하고 있다. 동시에 이상한 짓을 많이 하는 순박한 괴짜 이미지도 박혀있다.

동양 국가들도 대체적으로 조선에 우호적이며, 청나라에는 도리어 조선을 본받자는 개화론자도 많다. 청 조정조차 조선의 '조언'은 '적어도 손해는 안 본다'라고 인식을 가지고 있다. 반면 일본은 조선의 번영을 바라보며 자신들이 먼저 개화했는데 왜 이렇게 차이가 났는지, 이 번영이 일본의 것이 되어야 하지 않았는지 질투하기도 한다. 조일동맹을 통해 조선이 이익을 독점하고 있다는 국민감정이 발생할 정도.

전반적으로 조선과 외교관계를 맺은 국가들 사이에서는, 조선의 국왕이 전쟁을 꺼린다는 인식이 퍼져 있다. 원세개가 조선의 세자가 전쟁이 나면 최전선에 서겠다고 자처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그것을 전쟁 위협으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나라 안에서 누가 함부로 전쟁하자고 하면 곧 세자를 위험한 최전선에 세우고 싶다는 말이 되니 전쟁하자는 소리를 못하도록 만든 것이다"라고 받아들였을 정도다.

그런데 조선이 원세개의 쿠데타에 대응하기 위하여 근대 병기로 무장한 60만을 순식간에 소집하는 것을 보고 북양군은 수나라 상대하던 고구려 심정을 느꼈고, 유럽은 조선에 대한 인식을 30년 동안 조용히 힘을 기른 극동의 프로이센으로 격상시켰다. 결국 조선의 '이상한 짓'에 조금 더 신경을 기울일 수밖에 없게 되었고, 그렇잖아도 하도 '선의'에 당한 나라가 많아서 조선과 외교할 때는 외교적 수사로 말 돌리지 말고 가능한 한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게 상식이 됐을 정도.

이후 조선의 외교적 영향력이 더욱 증가하자 주요 열강이 조선에 설치된 공사관을 대사관으로 승격시켰다.

여담으로 귀남이 언로를 육조거리 수준으로 넓힌 탓에 국제 1조에 떡하니 조선은 전제군주정으로 적혀 있는데 유럽에서는 조선은 자유주의자, 사회주의자들의 소굴이라는 소문이 돈다.

4.5.1. 아시아

4.5.2. 유럽

4.5.3. 아메리카

5. 문화

5.1. 언론

5.2. 학교

5.3. 종교

아래 모든 종교에는 신자 수에 맞춰진 종교세를 매긴다. 또한 신교의 자유를 인정하지만, 예조의 문교참판이 혹 다투거나 강상 어기는 일 없도록 지켜본다.

5.4. 시설

5.5. 스포츠

1886년 팔각정 석전 사건 이후 서재필윤치호가 육체사라는 모임을 꾸려 본격적으로 서양 스포츠를 보급했다. 초기에 한양과 평양 석전꾼을 각각 데려다 축구와 야구 규칙을 가르쳤지만 어설프게 따라하다가 결국 석전 모양새로 돌아갔다. 축구를 하다가 몸싸움을 벌이고 야구를 하다가 방망이로 상대편을 때리기도 하였지만 석전보다는 크게 다칠 일이 줄어들었다. 오히려 서로 등패나 갑주 등으로 보호구 차리고 나오면서 구색 갖춘 경기를 보이게 되었다.

물푸레나무 몽둥이와 푹신한 공을 쓰게 된 석전이 이후 여러 지역과 사람 거치면서 나름대로 발전하는데, 인천부에서는 노동자들이 다치면 공장주들 손해이기 때문에 축구처럼 순수하게 공만 가지고 발로 차는 놀이가, 평양에서는 석전꾼 자신들의 장기를 살려 공을 손이나 몽둥이로 때려 상대방을 맞추어 자빠뜨리면 이기는 놀이가 만들어졌다. 영어로도 누군가 옮겨 닫지보올이라 이름 붙였다. 1904 평양 아주대회에서는 석전이 '피구희'라는 이름으로 시범 도입되었다.

자동차의 빠른 도입과 아주대회 개최로 인한 영향으로 자동차 경주가 활성화될 듯하다. 육예(六藝)의 '어(御)'에도 해당되는데다 소나 말도 괴롭히지 않고, 자전거에 비해 단정한 의복으로 몰 수 있는 만큼 선비들의 스포츠로서도 적합하다는 것을 큰 이유로 내세웠다.

제1회 나가사키 아주대회에서 예(페어플레이)와 사격을 비롯한 여러 종목들에서 옥패를 차지하여 옥패 수로 전체 1위를 거머쥐었다. 석전 경기로도 먹고 살 돈이 나오는 척석군들처럼 아주대회에 출전하는 국가대표 선수(국사)들에게도 기업을 통해 후원을 받도록 하고 있다.

1904 평양 아주대회 파트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자동차 경주를 의미하는 '어(御)'는 무세와 문세로 나뉘는 데, 무세(武勢)는 굳세면서 빠르게 움직이는 형상을 나타내며 문세(文勢)는 매끄럽게 운행하는 형상을 나타낸다. 보통 정적인 요소가 큰 문세보다는 무세가 더 인기가 있다고 한다.

5.6. 영화

5.7. 속담

6. 경제

아주연합 블록 내에서 끈끈한 경제교류를 이루고 있다. 아시아 내에서는 에 이어 국내총생산(GDP) 2위 자리를 두고 일본과 경합을 하던 시기가 있었으나 현대에 이르러서는 인구에서 앞서는 일본이 2위를 확고히 하였다. 하지만 1인당 소득 부문에서는 조선이 항상 우위에 있다. 청국과 비교해서는 첨단기술의 핵심 분야에서 딱 한 치 앞서며 기술 선도국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6.1. 산업

6.2. 기업

7. 군사

프랑스 군사 고문단의 교육에 힘입어 빠른 속도로 근대적인 군사 제도를 갖추었다. 상비군은 약 20만이며 그중 실질적인 전투병력은 1895년 기준으로 15만이다.[33] 군 근대화 사업 초기에는 실질적인 전력이 7만명이었고 나머지는 제방 등 중요 인프라 건설에 투입됐다.[34] 장교는 군관, 부사관은 사관, 병은 군졸이라 부르며 장교의 계급은 정부참, 부사관의 계급은 상중하 체계이다. 장교는 더 이상 무과로 취재하지 않고 사관학교 '엄익관'과 학사장교 제도를 통해 체계적으로 선발하며, 부사관은 징병된 양반가의 자제들이 맡는다.

징병제를 시행하고 있으며 복무 기간은 3년이다. 징병제 역사가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국법'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오래되어 '남자 두엇 모이고 술 들어가면 군대 얘기가 나오는' 수준까지 군사화됐고, 그 결과 1895년 동원령을 선포했을 땐 60만명을 소집했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막대한 전비 부담을 각오하고 투입한 병력이 약 30~50만명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충분한 지역강국.[35]

벨로네 백작과 로즈 제독의 책임 회피용 언론 플레이 덕분에 막 개항했을 때부터 대외적으로 '의외로 강한' 준문명국의 군대로 알려졌다. 러시아에서 시베리아 철도 사업을 추진하면서 조선군의 점령 가능성을 고려했을 정도이다. 병조는 1880년 기준으로 조선군의 전력을 대마도를 무력으로 병합할 수 있는 수준으로 보고 있으며 이는 사실에 가깝다. 그리고 1895년에 근대 화기로 무장한 병력 60만을 순식간에 동원하자 대외적인 인식이 극동의 강군으로 격상됐다.

귀남의 기억 속에 한국전쟁이 강하게 남아었어 병자호란 이후 이인좌의 난, 홍경래의 난과 같은 내부 반란이나 효종 시기 청나라의 파병 요청으로 소규모 부대를 파견해 러시아와 싸운 것 말고는 제대로 된 전쟁 한 번도 없었음에도 군축은커녕 지속적인 무기 국산화와 개발, 군비 정예화를 끊임없이 추구하고 있다. 예를 들어 귀남의 지시로 조선군이 막 미니에 라이플을 도입했을 때부터 자동소총 설계에 들어가 윤음 내려온 지 20년 만에 반자동소총 설계도가 나왔다.

초기에는 원 역사의 대한제국군 군복을 사용했다. 실제 역사에서도 꽤 멋있다고 평가받는 검은색 제복이지만 이는 이후 귀남의 지시로 '어제국방색'이라고 불리는 쑥색 군복으로 바뀌었다. 멋은 없어도 흙먼지 묻어도 티가 나지 않고 또 숲이나 들에서 눈에 잘 띄지 않는 묘한 색이라 일선 군졸들이 좋게 여긴다. 당초 사용하던 대한제국군 군복은 예복으로 대체됐다. 아직 단발령이 내려지지 않아 군모 대신 전립을 쓰고 다닌다.

군가로 희망가, 월남 김상사 타령 등이 있다. 귀남이 기억하고 있던 선율에 친제한 가사를 적당히 붙인 것이다.

병부 산하 싱크탱크로 정강사가 있다. 원래 흥선대원군이 북벌을 목표로 몰래 꾸린 사조직이었지만, 비행기 개발을 시작으로 군 내 공식 조직이 됐다.

7.1. 육군

서양과의 수교 이후 기관총, 라이플 등 신무기 도입과 징병제 실시로 원 역사의 대한제국군보다 더 진보를 이룬 상태이다.

7.2. 해군

원 역사에서는 열악한 환경 탓에 제대로 된 해군을 육성하지 못하였던 것과 달리 작중에서는 목선이 기선으로 대체되고 징병제를 도입하여 수영(水營) 체제가 유지되고 있다.

함대의 편제는 제도적 관성을 따라 통제영(경상+전라), 통어영(경기+황해+충청) 체제로 운영된다. 상황에 따라 통솔권한이 옮겨지던 충청수영이 통어영 예하로 들어갔고 함경·강원 양 도의 수군을 합쳐 덕원수영을 두었으며 유사시에는 통제영에서 관할한다.

1894년 기준으로 운용하는 함선의 총 톤수가 일본 해군에 버금가는데, 조선이 따라잡은 것이 아니라 일본이 쫓아온 것이다. 심지어 일본은 신무기인 어뢰로 조선 해군을 저지할 수 있다는 청년학파 적 발상으로 해군을 육성하고 있다. 조선의 선의에 물들어 평화주의 기조도 있고, 조선의 60만 대군[36] 상륙전을 막기 위해 전투함의 숫자를 늘리는 방향으로 간 것으로 추정된다.

건제함을 들여온 이래 예산 문제 때문에 거함보다는 조선 혹은 청국 조선소에서 나오는 자잘한 전선을 위주로 전력을 확충했다. 그런데 이 '자잘한 전선'도 십수 년 전에 나왔더라면 가히 일대의 균세한 형국을 흩뜨려 놓을 만한 규모이다.

8.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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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개변된 역사

작중에서 등장하는 조선의 긍정적인 변화 양상은 노론 음모론안티테제라고 해도 될 정도로 서인-노론 세력의 개혁안(군신공치, 서얼허통, 노비제도 혁파 등)과 매우 유사하다. 그리고 그 정점이 바로 북벌(을미정난). 물론 소설 속 을미정난의 실상은 많이 쳐줘도 무력 시위이고, 실제로는 역도를 규탄하기 위해 황실에 직접 지부상소를 한 수준이지만 어쨌든 이러한 변화 양상은 진정한 의미로 서인-노론의 개혁이 성공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심지어 연해주 개척 소식을 듣고 새로 유럽에서 들어오는 이들도 태반이 조선과의 교역에만 관심을 가졌다. 결국 원하던 조항이 필요 이상으로 들어갔다며 영국의 반발을 무마시키기 위해서 녹둔도를 조선의 영토로 인정했을 정도로 김칫국을 마시던 러시아에서 조약을 체결한 지 한 해도 지나지 않아 재개정을 간청했다. 조선의 반응은 "어찌 나라간에 맺은 조약을 한 해도 되기 전에 바꾸겠는가. 시간을 두고 논의해 보자."였다. 한 마디로 "응, 싫어."

10. 기타

대통령 각하 만세에 등장하는 대한민국과 자주 비교된다. 주인공이 각각 선인형, 악인형이기도 한데다 결말부에서 보여준 두 나라의 모습이 극명히 대비되었기 때문.

[1] 조선, 프랑스, 러시아.[2] 초대 통리기무아문 총리[3] 제2대 통리기무아문 총리[4] 제236대 영의정[5] 제237대 영의정[6] 제238대 영의정[7] 전국 추거로 뽑힌 첫번째 총리대신이다.[8] 제239대 영의정[9] 황란에 대한 책임을 지고 중도사임[10] 제240대 영의정[11] 제241대 영의정[12] 제242대 영의정[13] 제243대 영의정[14] 전시 거국내각 선포로 임기 2년 연장[15] 제244대 영의정[16] 원 역사 영친왕과 동명이인.[17] 현주는 본디 세자의 서녀에게 주어지는 봉호이고 경국대전이 편찬된 이후로는 대군의 딸은 따로 봉호를 받지 않았으나, 작중에서는 축첩제가 폐지되어 더 이상 세자의 서녀가 태어날 수 없으므로 현주가 대군의 적녀에게 주어지는 봉호가 된 것으로 보인다.[18] 은나라가 멸망하고 조선에 온 기자평양에 설치했다고 전해지는 정전.[19] 별칙으로 참의원의 삼분지이의 동의가 있을 시에도 국제 개정 발의가 가능하도록 정하였다.[20] 관제를 고쳐 총리대신 하나만 겸직하게 됐지만, 그것만 해도 이전 영의정들에 비할 수 없을 만큼 바빠졌다.[21] 얼굴의 일곱 구멍, 즉 눈구멍 두 개, 콧구멍 두 개, 귓구멍 두 개, 그리고 입.[22] 이 사정을 모르던 벨로네가 보고서에 산당을 산악파(La Montagne)로 번역하는 바람에 프랑스에서 웬 자코뱅들이 조선에 나타났는가 놀랐다는 후문이 있다.[23] 대체역사갤러리에 올라온 독자 팬아트. 볏단 사이에 공(共) 자 그려졌다는 작중 묘사에 기반하여 작품 공지에 등재되었다.[24] '너나 가져라'라는 뜻에 한강 여의도의 이름을 따왔다.[25] 악연이 있던 장동 김문의 김병학이 생전에 양악을 즐겨 들었다.[26] 지폐 도안에 누구든 얼굴을 넣는 것은 카이사르가 시작했을 뿐인 서양 전통이라며 그냥 문양만을 이용한 지폐를 만들고 있다.[27] 봉천, 흑룡강, 길림 일대의 만주[28] 전화로 왕명 등 예를 갖추어야 할 일을 전달할 때의 예법이 문제되었는데, 귀남이 "그러면 예를 차릴 일이 아닌 것만 우선 전화를 쓰면 어떤가?"라고 별 생각 없이 한마디 했다가 그것이 그대로 굳어졌다.[29] 1호는 진공관, 2호는 기계식, 3호는 천공카드, 4호는 시연 중 폭발, 5호는 개발 중단[30] 작중은 아직 자동차산업 초창기이기에 자동차의 속도가 느린데 귀남은 전생의 자동차와 비교해 엄청 느리다고 평가하고 있다.[31] 이게 자본가들 입장에서는 골때리는게, 그냥 휴가를 늘려달라는거라면 얼마든지 트집을 잡을 수 있지만, 나랏님이 말씀하신대로 관광을 다니고 싶다라며 어명을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는 지라 거부할 수도 없다.[32] 여담으로 조선중앙통신사(Korean Central News Agency)의 약자도 조중통이다.[33] 같은 시기 북양군의 총 병력이 10만 명이었다.[34] 이것만 해도 체계적으로 병력자원을 관리하고 동원하며 집단행동을 몸에 새겨넣을 수 있다는 의미인지라 엄청난 발전.[35] 이 당시 조선 전체 인구는 약 2000만이다. 반면 원래는 작중 시점으로부터 10년 뒤 벌어지는 러일전쟁당시 일본은 최소 4000만 이상의 인구를 보유했다. 이는 절반도 안되는 인구로 더 늦게 개화했음에도 더 많은 군대를 징병하여 원정을 보냈다는 것을 의미한다.[36] 바로 얼마 전까지 결박동맹 관계였으므로 조선의 군사력을 알고 있을 것이다.[37] 어차피 서원이 결국 학교고 학교라는 게 다 거기서 거기 아니냐는 생각으로 일축하였다. 실제로 현대의 사립학교도 재단의 비리 등 각종 문제가 많았던 것을 보면 틀린 판단으로 보기도 힘들다.[38] 작가 : "작가의 말장난일까요, 아니면 역사의 억지력일까요?"[39] 원 역사에서도 같은 주장을 신문에 실었다.[40] 귀남 본인이 6.25 당시 징집된 경험이 크게 작용했다. 그때 그의 첫째형은 전사통지서 한 통이 되어 돌아왔고, 둘째형은 한쪽 팔·다리를 잃고 집에 돌아왔다가 다시 나간 후 실종되었다. 본인은 전쟁 말기가 되어서야 징집되어 사지는 멀쩡히 돌아왔으나 빨치산과 지뢰·굶주림·추위에 시달렸고 돌아와 보니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서 먹고 살기 위해 혈혈단신으로 서울에 올라왔다.[41] 원 역사의 고종은 서기 1886년에 노비세습제를 폐지하였다.[42] 광둥성과 광시성.[43] 해주 인근 재령군과 은율군 일대에는 상당한 규모의 철광이 있다.[44] 조선 중기 이후 육의전 상인의 조합.[45] 이 과정에서 헌법 제정도 나오게 되나 헌법 제정은 이로부터 조금 뒤의 일.[46] 그 사람이 오늘내일하는 통에 정신이 없더라도 수상 가능.[47] 실제 역사에서 주변 마을 소녀와 애까지 만든 스탈린이 아니더라도, 수용소장의 가혹한 대우에 항의해 독극물로 집단자살한 사례가 있다. 독극물을 대량으로 입수하는 게 가능하다는 이야기.[48] 작중 묘사로는 불장난을 하다 보면 연기에 놀란 이웃이 대문 박차고 뛰어들어 물을 퍼붓기도 하는 법이다.[49] 당시 에디슨은 전구를 새로이 개발한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던 전구의 효율성을 개선한 것이었다. 에디슨 이외에도 이런 식의 전구 개선 특허가 비슷한 시기에 다수 있었다고 한다. 그 중의 한 명이 맥심.[50] 119화 39. 배우고 때로 익히면(2)[51] 오늘날의 기획재정부, 한국은행 등을 모두 합친 기구.[52] 먼 나라와 이웃 나라의 사정을 논함[53] 예산 부족 때문.[54] 현실에서 영국 왕실 종친이 모범을 보이기 위해 현역으로 활동하다 짖궂은 상관에게 갈굼받았다는 이야기가 있긴 하지만 김귀남 치세에 들어 위상과 권위가 하늘을 찌르는 조선 왕실에서 그러다간 김귀남이나 종친의 뜻이 어찌되었든 간에 바로 공안서로 끌려가서 밤새도록 진지한 이야기를 나눌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55] 실제 대원군은 젊은 시절 상갓집 개나 파락호와 거리가 먼 모범적인 종친이었다.[56] 반달가슴곰우수리불곰이 모두 포함된 듯 싶다.[57] 작중 서술을 빌리자면, 팔도가 멈추었다.[58] 귀남은 전생 합해 백 년은 되었을 경험에도 전장이라면 학을 떼었으므로 진짜로 갈 생각은 없었다.[59] 그것을 원해야 한다는 것이 슬퍼서 비원이며 누군가가 먼저 만들기 전에 국제협력으로 같이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각오 비장해서 비원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온갖 대체역사소설과 실제의 핵실험에서 '국가의 운명을 건' 각종 적극적이고 선전적인 이름이 붙은 것과는 맥을 달리한다.[60] 국내 이학박사 1호인 우남 이원철 박사(1896~1963)일 것이다. 실역사에서는 한국 천문학을 발전시키고 대한민국 기상관측업무 및 항공기 운항업무에 지대한 공헌을 한 분이지만 일제에 쫓겨나기 전까지는 연희전문학교 수물과 교수 및 학과장이었으므로 본 세계관에서는 원자력공학에 참여할 가능성도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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