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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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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colcolor=#fff>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三豐百貨店 崩壞 事故
Sampoong Department Store Collapse
파일:attachment/삼풍백화점 붕괴사고/sampoongc.jpg
<colbgcolor=#bc002d> 발생일 1995년 6월 29일 17시 57분
[dday(1995-06-29)]일([age(1995-06-29)]년)[1]
발생 위치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동 1685-3 삼풍백화점 A동
,(現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중앙로 188, 아크로비스타 A동 부지),
유형 건물 붕괴
원인 부실 공사 및 부실 관리
인명
피해
<colbgcolor=#bc002d><colcolor=#fff> 사망 502명[2]
실종 6명[3]
구조 40명[4]
부상 937명[5]
재산 피해 약 2,700억 원
동원 인원 약 68,600명
장비 크레인, 덤프트럭 등 약 2,400대

1. 개요2. 붕괴 원인
2.1. 부실 공사2.2. 부실 관리2.3. 사고의 결정적 원인
3. 붕괴 전조 현상4. 사고 당일 일지
4.1. 붕괴 당일 오전4.2. 대책 회의와 영업 강행
4.2.1. 경영진은 미리 백화점을 빠져나갔다?
4.3. 붕괴4.4. 붕괴 직후
4.4.1. 절도 행위
5. 언론 보도6. 구조 작업
6.1. 구조 일지6.2. 최후의 생존자 3인
7. 재판과 손해배상
7.1. 국가 배상 부정
8. 사고의 여파
8.1. 안전 평가 실시8.2. 사회에 미친 영향8.3. 건축계에 미친 영향8.4. 소방 방재에 미친 영향8.5. 의학에 미친 영향
9. 대중문화에서10. 사고 이후
10.1. 위령비 및 추모 관련10.2. 잔존 흔적
11. 관련 영상 자료
11.1. KBS 뉴스 911.2. MBC 뉴스데스크11.3. 내셔널 지오그래픽 - 삼풍백화점, 예고된 붕괴11.4. 내셔널 지오그래픽 - 삼풍 참사의 진실11.5. 디스커버리 채널 - Blueprint for Disaster11.6.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 4회11.7. KBS 다큐 인사이트 모던코리아 시대유감, 삼풍
12. 삼풍백화점 괴담13. 관련 어록14. 관련 문서15. 외부 링크16.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멀쩡한 백화점이 무너졌다. 초능력자, 역술가까지 불러 기적을 바랐던 비극 '삼풍백화점 붕괴' [6]
1995년 6월 29일 목요일 오후 5시 57분[7] 발생한 대규모 건축물 붕괴 사고.

서울의 삼풍백화점이 붕괴하여 502명이 사망했으며 부상자도 937명에 달했다. 대한민국 단일 사건 중에서는 최대 사망자 수를 기록했다. 당시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 폭발 사고 이후 2개월 만이며, 이전해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사고 이후 8개월 만의 사고였다. 세계의 건물 붕괴 관련 참사 중 사망자 11위를 기록했다. 위키백과[8]

원인이 부실공사로 밝혀지자 성수대교 붕괴 사고와 함께 안전불감증의 대표적 사례로 거론되었고, 전국적인 건축물 안전 실태 조사와 건축법의 강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사회적으로 매우 큰 충격을 주어 많은 작품들에서 소재로 삼기도 했다. 고객의 생명보다 자신의 회사에 대한 티끌만 한 이익을 더 중시했던 삼풍건설산업의 모습에 국민들의 분노가 들끓게 되었고 앞선 성수대교 사건과 더불어 문민정부사고 공화국이란 오명을 씌워버린 대표적인 사례로 남게 되었으며, 한편으로 이 사건은 곧 한국 사회에 만연해 있던 이른바 '천민자본주의'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 되기도 했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전시관은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광릉수목원로 1040에 있으며, 사고 현장에서 32km 이상 떨어져 있다.

2. 붕괴 원인

2.1. 부실 공사

파일:attachment/삼풍백화점 붕괴사고/Sampoong.jpg
1987년 우원건축사무소[9]에서 설계한 삼풍백화점의 초기 설계도
원래 삼풍백화점은 삼풍쇼핑이라는 이름으로[10] 바로 옆에 있던 삼풍아파트 주민들을 위한 대단지 종합상가[11]로 설계되어 우성건설[12]에서 시공을 맡는 것으로 최초 발주가 되어 공사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거의 완공에 가까워질 무렵 건축주 이준은 건물 용도를 돌연 백화점으로 변경하고 시공사에 원래 예정돼 있었던 4층 위에 1층을 더 얹어 도합 5층으로[13] 건물을 시공할 것을 요구했지만 시공사인 우성건설 측은 붕괴 위험성을 이유로 증축을 거부했고[14], 이에 이준은 결국 우성건설과의 시공 계약을 중도에 파기시키고 본인의 운영사인 삼풍건설산업이 시공을 이어가게끔 했다. 사실 백화점 같은 복합 건물은 설계 변경 시 구조 전문가의 검토가 필수적이나[15] 이준은 그저 수익을 얻을 요량으로 건물의 안전성도 무시한 채 독단적으로 구조 설계를 변경해버린 것이다. 만일 건축 안전법을 준수하여 무리한 설계 변경만 하지 않았더라면 사고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량판 설계도 무량판 종류
파일:external/img02.bibliocad.com/flatslabdetail_68977.gif 파일:external/www.scielo.br/en_a04fig01.jpg
제대로 된 무량판의 예시 삼풍백화점의 상황
파일:external/civildigital.com/flat-slab-construction-with-drop-panel-and-column-head.jpg 파일:external/psoutowood.files.wordpress.com/6a01101627f77c860c01240bb03509860e.jpg
삼풍백화점은 무량판 구조로 대들보가 없이 바닥이 직접 기둥으로 하중을 전달하는 구조로 설계되었는데[16], 설계상으로는 기둥과 위층 바닥 사이에 하중 전달을 보조하는 지판(Drop-Panel)이 하나 더 설치되어 바닥 철근과 기둥 철근이 잘 연결되도록 했으나 실제로는 지판의 두께가 충분하지 않았으며, 일부 기둥은 지판 자체가 없어서 바닥과 기둥의 철근 연결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바닥 끝 쪽 철근도 ㄴ자로 꺾인 형태로 시공해서 건물 상판의 침하로 연쇄 붕괴가 일어나려고 해도 철근의 끝부분이 일종의 갈고리 역할을 하여 제동 장치 역할을 하도록 해야 하나, 삼풍백화점은 갈고리도 없이 끝부분을 조금 더 연장하는 식으로 단순하게 시공했다. 백화점이 붕괴할 당시 마치 발파 방법으로 철거될 때처럼 아무런 제동도 없이 순식간에 무너졌던 것도 바로 이 철근의 끝부분을 ㄴ자로 꺾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음 링크의 영상은 지판의 역할을 잘 보여준다. # 나무젓가락 여러 개를 세운 뒤 그 젓가락 위에 둥근 종이 스티커를 붙이고, 위에 또 얇은 알루미늄 호일을 바닥으로 만든 층을 하나 얹은 뒤 위층에 물을 부어 하중을 가하는 실험이다. 여기서 나무젓가락이 기둥, 종이 스티커가 지판 역할을 하는데, 물을 꽤 많이 부어도 호일 바닥이 뚫리지 않는다. 심지어 기둥을 하나 제거해도 잘 버틴다. 그러나 종이 스티커를 제거한 뒤에 재실험한 결과 이전 실험보다 물이 적게 투입되었음에도 곧바로 바닥이 뚫린다.

게다가 이것도 모자랐는지 삼풍백화점은 기둥들의 지름을 25% 정도 깎기도 했으며 몇몇은 용도에 따라 없애기까지 했다. 본래 1987년 우원건축사무소(당시 대표이사 문정일)가 설계한 삼풍백화점 설계도에는 기둥이 32인치(81.3cm)였으나 실제로는 23인치(58.4cm)로 시공되었다.[17] 또한 에스컬레이터에 방화벽을 설치하기 위해 에스컬레이터가 있는 부분은 마치 피자 조각을 하나 떼어내듯 기둥의 4분의 1을 자르거나 깎아내기도 했다.

또한 삼풍백화점은 준공검사도 무시하고 가사용 승인만으로 개점하였다. 어떠한 신축 건물이든간에 준공 승인을 받기 전까지는 공식적으로 개점해서는 안 되는 것이 원칙임에도 삼풍건설은 이를 무시해 버렸다. 심지어 4층과 5층은 공사도 아직 다 끝나지 않은 상태였고, 이 층들은 1990년 봄에야 새 단장을 맞아 오픈했다. 삼풍백화점이 정식으로 준공 승인을 받은 때는 개점 9개월이 지난 1990년 8월이었다. 게다가 붕괴 여덟 달 전인 1994년 10월에는 기초 부분인 지하 1층에 구조 변경 공사를 했고[18], 다음 달인 11월에는 위법 건축물 판정을 받기도 했다.

2.2. 부실 관리

철근 콘크리트 건물을 건축할 때는 일반적으로 더 많은 무게를 버틸 수 있도록 설계하고, 삼풍백화점 역시 계획보다 2.5배 무게를 버틸 수 있도록 지어졌다. 하지만 개장 이후부터 지나치게 용도를 자주 변경했기 때문에 건물은 결국은 버틸 수 있는 한계를 넘겨버리고 말았다.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20주년-우리는 죄인이 아니다' 편에서 인터뷰한 당시 청소부의 증언에 따르면 휴점일에도 매장을 재배치하고 공사를 하느라 쉬는 날이 없었다고 한다.
당시 삼풍백화점 층별 구성[19]
<rowcolor=#fff> A동
(백화점 / 붕괴 된 동)
B동
(근린시설 / 붕괴되지 않은 동)
5F 전문식당가 아트홀 삼풍스포츠맥스(수영장, 헬스클럽, 실내골프장) 5F
4F 문화, 가정용품, 혼수용품 삼풍스포츠맥스(사우나, 이발소, 미용실) 4F
3F 남성의류, 캐주얼, 스포츠 중앙광장 문화센터, 갤러리, 업무시설[20], 내과, 치과, 미술관 3F
2F 여성의류 업무시설(증권사)[21], 상가 2F
1F 잡화, 해외수입브랜드, 화장품 업무시설(은행)[22], 약국, 상가, 고객휴게실, 사진관, 커피전문점(아로마), 한일투자신탁 1F
B1 식품관, 주방용품[A], 가전제품[A], 유아용품[A], 수퍼마켓(A동), 서점(A동)[B] B1
B2 지하주차장 입구(B동), 창고, 임대매장 B2
B3 지하주차장, 직원식당, 미화원 대기실 B3
B4 기계실 B4
부실공사도 문제였지만 건물의 상가 배치도 상당히 기형적으로 된 탓에 그보다 더 심각했다.[27] 불법 증축으로 추가된 5층은 개점 초기에는 비교적 바닥 무게가 가벼운 롤러장을 설치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롤러장은 고급스러운 백화점의 이미지와 맞지 않는다는 백화점의 입장 때문에 롤러장 설치는 전격 취소되고 식당가가 대신 들어섰다.[28] 이 때문에 무게가 무거운 냉장고 및 주방기기들과 세라믹 식기들이 들어섰다. 사실상 이렇게만 해도 1m²당 하중이 원래 롤러장보다 360kg 이상이 추가되는데, 5층의 면적이 한두 평도 아니고 6710m²이니 무려 2415톤이 추가된 것이다. 자동차 1대의 무게가 1톤이니 5층에 자동차가 2415대가 동시에 들어온 것이고 성인이라면 무려 3만 4510명이 추가된 것이다.

게다가 개점 당시인 1980년대에는 좌식 식사 문화가 보편적이었기 때문에 좌식 보일러 난방 시설까지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보일러 난방 시설은 당연히 상상 이상으로 무겁다. 돌을 깔아 직접 데우는 온돌은 물론, 온돌의 직계 후손이자 흔히 보일러라고 부르는 바닥 아래에 깔린 파이프로 뜨거운 물을 흘려보내 바닥을 덥히는 난방 장치 또한 물이 잔뜩 들어가기 때문에 상당히 무겁다.[29] 한국 전통 건축이 대부분 단층 구조인 것도 무거운 온돌 시스템을 목조 기둥이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2층 이상 짓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이다.[30] 이런 마당에 5층에 온수 보일러 시설이 잔뜩 깔린 식당가를 배치해 버렸으니 붕괴되지 않는 게 이상한 것이다.

이런 부적절한 방식으로 식당가 설계를 할 경우 온수 난방 장치의 무게만 해도 건물 3층 정도를 쌓는 정도의 큰 무게이기 때문에 오늘날의 백화점 한식당은 전통적인 난방 장치 대신 전기 패널을 놓고 온돌처럼 꾸미기만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나마도 1988 서울 올림픽 이후 외국인들의 불편함 호소 및 좌식 문화 자체[31]가 점차 사라져 가면서 이제는 보기 힘들다. 그럼에도 여전히 백화점 푸드코트들이 대부분 지하나 1층에 있는 이유가 다 이 삼풍백화점 사고 때문이다. 물론 2010년대부터는 공법과 설계 기준의 상발 전소화와 동선 분석의 변화로 푸드코트를 지하에, 고급 식당가를 최고층에 놓는다.[32]

게다가 여기에 건물 붕괴를 더욱 가속화시킨 사업이 또 있었다. 사고 1년 전인 1994년 1월, 삼풍백화점이 2층에 삼풍문고라는 이름의 서점을 입점시킨 것이다. 이사나 리모델링을 경험했거나 서점, 책방, 도서관 같은 과 관련된 일터들에서 일해본 사람이라면 바로 체감할 수 있겠지만 보통 종이 수백~수천 장으로 구성된 책은 단위 면적당 무게가 상당히 높은 물품이다. 특히 대한민국의 책들은 더 하얗게 하려고 종이에다 돌가루를 많이 넣고 표지도 두꺼운 골판지를 사용해서 외국 책보다 훨씬 더 무겁다. 2009년에 정해진 구조 설계 기준 백화점 2층 이상의 설계 하중은 단위 면적당 400kg, 서고는 750kg이다. 용도 변경으로 실하중이 설계 하중을 초과한다면 반드시 진단 및 구조 검토를 거쳐 보강 등 조치를 해야 하지만, 삼풍백화점은 별다른 조치 하나 취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33]

이듬해 3월, 삼풍문고는 지하 1층으로 전격 이동했지만 가뜩이나 약했던 건물의 무게를 지지하던 구조물들에 가해진 서점의 무게는 건물의 붕괴를 앞당겼고 후에 별도의 보강 공사도 없었으므로 이미 때가 늦은 상황이었다. 요즘은 건축 공법이 발전해서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많은 대형 서점은 대부분 건물 지하층이나 1층에 위치한다. NC웨이브 전주점이 그 예인데, 지하에 문구점인 교보핫트랙스교보문고가 있으며 대한민국은 물론 세계 최대 규모의 백화점인 신세계백화점 센텀시티점은 본관 5층에 있던 교보문고를 철수시킨 후 몰 지하 2층에 반디앤루니스를 입점시켰다.[34] 그리고 멀리 안 가도 이 곳 근처에 있는 반디앤루니스 신세계강남점 역시 지하 1층에 있었지만 롯데백화점 센텀시티점 교보문고는 7층에, 롯데백화점 광복점영풍문고가 5층에 위치한다.[35]

당시 무너지지 않은 B동 역시 물론 몇몇 건축물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비정상적인 용도 변경이 있긴 했지만[36] A동과 비교하면 그나마 양반인 편이었다.[37] A동 붕괴의 결정타였던 후술할 에어컨 냉각탑이 그 쪽에는 없어서 옥상은 다행히 파손되지 않았고, 원래 용도 역시 사무실 및 레포츠 센터로 계획되어 A동과 달리 기둥을 깎아내거나 줄이는 등의 무리한 설계 변경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B동 건물도 기존 설계였던 4층과 달리 5층으로 멋대로 증축된 건물이었고, 바로 옆 A동 붕괴의 영향으로 안전성에 크게 영향을 받아 사고 반 년 뒤인 1995년 12월에 B동도 철거하기로 결정했고# 1999년 초에 완전히 철거되어서 없어졌다.

B동 고층 수영장의 존재는 A동 붕괴와는 별개이지만 당시 내막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 고층 수영장을 붕괴 원인으로 의심하는 경우도 있었고, 과민하게 대응할 만한 이유가 되기도 했기 때문에 삼풍백화점 붕괴 이후 옥상에 있던 수영장을 모조리 밑으로 내려보내거나 아예 없애버리는 일도 많았다. 이 사고 전후로 고층 수영장이 없어진 백화점들 중에는 이전부터 수영장과 관련해서 문제가 있었던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 마산시의 성안백화점에 있던 수영장은 이전부터 매장으로 수영장 물이 새는 등 자잘한 문제가 많이 발생해서 결국 사라졌다. 더불어 성안백화점 자체도 이후 부도로 인해 폐업되었고 건물 자체는 리모델링 공사 후 신세계백화점 마산점으로 새로이 개장했다.

백화점 수영장들이 없어진 이유는 삼풍백화점 붕괴 때문이라기보다는 물이 새는 문제[38]와 레저 문화의 대중화로 스포츠센터가 우후죽순 생겨버린 영향이 크고, 무엇보다 경제난 및 운영비 문제[39]로 인해 지하로 옮긴 것에 가깝다. 실제로 고층 수영 시설은 고급 호텔 쪽으로도 많이 흡수되었다. 호텔은 백화점보다 고층인 경우가 많으므로 단순히 삼풍백화점 붕괴 때문에 고층 건물에서 고층 수영장이 사라졌다는 것은 잘못된 해석인 것이다. 실제로 롯데백화점 동래점 수영장은 현재도 운영 중이고 현대백화점 부산점갤러리아 타임월드 수영장은 2010년 이후에야 사라졌다.

물론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이후로 한동안 지어진 대한민국의 모든 백화점들은 물론, 대다수 상가 건물에서 푸드코트나 서점 등 무게가 무겁게 실릴 만한 시설들은 전부 지하에 설치되었다.[40] 요즘은 건축 공법의 발전으로 고급 식당가가 고층에 위치하는 경우도 무척 흔해졌다.[41] 흔히 볼 수 있는 배치는 아예 몽땅 지하에 있거나, 지하에 푸드코트, 최상층부에 고급 식당가로 구성하는 식이다. 당연하지만 이 상층부의 식당들은 입식 문화가 자리잡은 21세기에는 굳이 온돌을 사용할 이유가 없다.

2.3. 사고의 결정적 원인

수많은 부실 공사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5년 반 동안 어찌저찌 버티고 있던 삼풍백화점 건물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힌 것은 옥상에 위치해 있던 3대의 에어컨 냉각탑이었다. 이 냉각탑들은 1대당 12톤으로 총 36톤, 냉각수까지 채우면 무려 87톤으로 옥상이 견뎌낼 수 있는 하중의 4배가 넘는 엄청난 무게[42]라서 개장 초기부터 미세한 진동과 물이 새는 현상이 벌어졌다.

건설 초기에 냉각탑은 삼풍백화점 옥상 동쪽에 설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냉각탑 소음으로 근처의 서초 삼풍아파트 주민들로부터 민원이 끊이지 않자 삼풍백화점은 1989년 11월부터 1989년 12월 정식 개장 전까지 이 냉각탑들을 반대편 우면로 측으로 옮겼다.
파일:attachment/rooftop-weight1.jpg 파일:attachment/rooftop-weight2.jpg 파일:attachment/rooftop-weight3.jpg
그런데 에어컨 냉각탑 같은 무거운 물건은 건물에 미칠 영향을 고려해 크레인을 써서 한 번에 옮겨야 하지만, 삼풍백화점 측은 이동 비용이 아까워서 크레인을 사용하지 않고 냉각탑 아래에 롤러를 장착하여 옥상 상판 위에서 천천히 끌어가며 반대쪽으로 옮기는 실책을 저질렀다. 그 때문에 1대당 12톤이나 되는 냉각탑이 옮겨지는 과정에서 옥상 바닥과 지지 구조물에 엄청난 압력을 줬고, 특히 건물 붕괴의 단초 부분이었던 5E 지주 부분에 큰 충격이 가해졌다(위 첫 번째, 두 번째 사진). 또한 개장 이후 냉각탑에서 발생한 진동은 옥상을 비롯한 5층 구조물에 지속적으로 전달되어 갈라짐을 발생시켰다(위 세 번째 사진). 이것은 첫 번째 사진처럼 5층은 물론 건물 전체의 기둥까지도 영향을 주었다.

3. 붕괴 전조 현상

사실 삼풍백화점의 붕괴는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다. 붕괴 전부터 건물 전반에 위험 신호가 여럿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설계 후 초기 단계에서도 건물 내부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지고 미세한 균열이 보이는 등 붕괴의 징후를 여러 차례 보였다. 붕괴 2년 전인 1993년에는 삼풍백화점 옆 레포츠 센터 2층에 있었던 금융동[43]을 1층으로 옮기고 내부 공사를 한 후 삼풍문고라는 대형 서점을 들여놓은 뒤 1994년 1월 5일부터 영업을 개시했다.

하지만 대형 서점의 특성상 무게 괴물인 책장에다 또 엄청나게 많은 수의 무거운 책들이 들어차는 바람에 건물이 버틸 수 있는 한계점을 초과하기 시작했다.[44][45] 그 때문에 레포츠센터와 중앙홀 지역에서도 균열이 1995년 여름에 사고가 발생할 때까지 1년 동안 셀 수도 없이 늘었다. 결국 삼풍백화점 총관리부는 서점을 입점한 지 1년 2개월 만인 1995년 3월 2일에 지상에 있던 삼풍문고를 지하로 옮겼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고 균열은 점점 심각해졌다. 중앙홀과 A동의 건물까지 균열과 뼈대 구부러짐 현상이 일어나면서 백화점 건물 전체가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으며 붕괴 당일까지 지속되었다.

또 붕괴 2개월 전인 1995년 4월에는 5층 북관 식당가 천장에 균열이 발생했다. 5월부터 이 균열에서 미세한 콘크리트 알갱이와 골재가 떨어지기 시작했고, 5층 바닥은 서서히 내려앉기 시작했다. 그러나 삼풍백화점 관계자들을 비롯해 상당수는 이러한 붕괴를 전혀 예측하지 못했고 변변한 자가진단조차 없었다. 5월 들어 균열의 수가 눈에 띄게 증가하자 관리자는 5층을 폐쇄하고 토목 공학자들을 불러 기본적인 검사를 한 결과 건물 붕괴 위험이 있다는 당연한 결론이 나왔다. 상식적으로 이쯤 되면 건물 전체를 폐쇄하고 접근 금지령을 내려야 정상인데 이준 일당은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이미 이 시점에도 붕괴가 진행 중이었다는 뜻이기 때문에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챙길 수 있는 물건들만 빨리 챙기고 즉시 전 직원과 고객을 대피시켰어야 했다.

4. 사고 당일 일지

4.1. 붕괴 당일 오전

파일:attachment/sampoong06.jpg
1995년 6월 29일 오전 10시, 즉 붕괴 사고 당일이자 붕괴 약 8시간 전에 촬영된 사진.
펀칭(뚫림 전단)[46]이라고 불리는 현상이 나타나는 백화점 옥상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사고 전날부터 이미 지붕에 철근이 올라오는 펀칭 현상이 목격되었는데, 사실상 이때부터 붕괴가 시작된 것이라 봐도 무방하다. 삼풍백화점 대표이사 이한상을 비롯한 경영진이 이에 대한 대책이라도 짜려고 했던 때는 너무 늦게도 사고 당일인 6월 29일이었다. 그들은 이날 오전 5층에 있었던 일을 보고 비상 사태임을 직감했다.

오전 9시, 5층 식당가 춘원 전주비빔밥 전문점 주인 김서정이 긴급 전화를 했는데 '춘원 전주비빔밥 전문점 바닥에 돌출 부분이 2cm 정도 생겼고 천장이 조금 내려왔다. 빨리 와서 보라.'는 내용이었다. 직접 가서 확인해 보니 5층 기둥에 무려 20cm나 되는 균열이 발견되었고 천장이 뒤틀려 내려앉아 있었다. 오전 9시 40분, 삼풍백화점 측은 바닥 침하 현상을 직접 확인했고 이에 시설부의 권유로 춘원 식당은 휴업에 들어갔다.
파일:attachment/punching2.jpg 파일:attachment/sampoong07.jpg
마찬가지로 사고 당일인 1995년 6월 29일 오전 10시에 촬영된 균열이 발생한 천장과 바닥이 침하된 5층 식당가의 사진이다.
탁자가 기울어진 현상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바닥이 기울어졌다.
오전 10시, A동(북관) 4층 상품의류부 직원(당시 31세)도 건물 4~5층에서 들려오는 '뚝뚝, 드르륵' 소리와 함께 약 3분 간 무거운 진동을 느꼈다. 이한상 사장은 오전 11시쯤 이영길 시설이사 및 건축과 이완수 차장과 함께 5층 현장을 직접 눈으로 확인했다. 1시간 쯤 뒤 우동 전문점 '현지'와 냉면 전문점 '미전'의 천장에서 물이 쏟아지고[47] 바닥이 내려앉기 시작하였다. 바닥이 심하게 기울면서 주방 조리대가 넘어지는 일도 있었고, 균열로 인해 천장에서 콘크리트 부스러기가 음식에 떨어지는 일도 있어서 손님들의 항의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오후 12시 무렵, 백화점 측은 건물 설계 감리 회사인 우원건축에 연락하는 한편 옥상의 에어컨 가동과 5층 입주업소에 대한 가스 공급을 중지시켰다. 또한 5층 행사 매장의 도자기, 가구들을 각각 4층, 지하 3층으로 옮기기 시작했고 식당가와 같이 있던 상품권 매장도 1층 로비로 이동시켰다.

붕괴 약 5시간 30분 전인 오후 12시 30분 경, 이한상 사장, 이영길 이사 등이 5층의 균열 현장을 둘러보았다. 이때 5층은 이미 심하게 뒤틀려 있었고 많게는 약 10cm까지 침하된 곳도 발견했다. 수행 중인 건축 설계사는 5층 식당가와 4층 귀금속 코너의 대피를 건의하였고 이를 받아들인 삼풍백화점 측은 5층의 대부분의 점포와 4층 귀금속 코너의 영업을 중단시켰다. 또한 무게와 진동 때문에 균열의 원인으로 지목된 옥상의 냉각탑 작동도 중단되었으며 이때부터 오후 2시까지 냉각탑의 배수 작업이 진행되었다.

사고 당일이었던 6월 29일, 삼풍백화점이 위치했던 서초구에서 관측된 일 최고 기온은 29.0℃였는데 안개로 인해 습도까지 매우 높아서 체감 온도 및 불쾌 지수가 굉장히 높았다. 이런 상황에서 냉각탑을 배수하며 에어컨이 꺼지는 바람에 삼풍백화점 안은 천여 명이 넘는 사람들의 열기로 인해 순식간에 찜통이 되었다. 붕괴 당일 삼풍백화점을 방문한 쇼핑객들은 백화점에 들어서면서 숨이 콱 막히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사고 발생 직전에 너무 더워서 견디지 못해 쇼핑을 그만두고 백화점을 미리 빠져나가 참사를 피한 사람들도 제법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개그맨 이상해와 국악인 김영임 부부.

4.2. 대책 회의와 영업 강행

붕괴 약 3시간 전인 오후 3시경 구조기술사 이학수가 도착하였고 삼풍백화점 임원진과 대동하여 안전 진단을 실시하였다. 이학수 기술사의 지시로 5층의 기둥과 바닥을 파보니 균열이 더욱 커져 주먹이 들어갈 정도가 되었다. 오후 4시에 임원회의실(당시 삼풍백화점 남관 3층)에서 이준 주재로 2차로 긴급 대책 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임형재, 이학수 등은 해당 건물의 설계법이었던 무량판 공법부터 차근차근 설명하며 원인 분석을 브리핑했다. 임형재 소장은 건물 안전에 중대한 이상이 발견되었고 속히 영업을 중단하고 긴급 보수를 해야 한다고 경영진에게 권했다.

그런데 이학수는 여기서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 "붕괴 위험은 없다."라고 보고하고 보강 방법으로 철제 빔으로 슬래브를 받치는 방법, 기둥 주위에 철제 빔을 받치고 철제 와이어로 기둥과 기둥 사이를 받쳐주는 포스텐션 공법이 있다고 임형재의 "빨리 긴급 보수를 해야 하며 고객들을 대피시키라."는 조언과는 상반되는 제안을 한 것이다. 그리고 이준은 이학수의 의견을 지지했고 영업 중지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사태를 심각하게 바라봤던 이영길 이사는 나머지 이사들과 함께 다시 이준에게 즉각 고객들을 대피시켜야 한다고 건의했으나 오히려 이준이 경제적 피해[48]를 생각하여 노발대발하며 반대했고 나머지 경영진도 이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대책 회의는 삼풍백화점의 영업 중지 없이 보수 공사만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결론이 났고, 사고의 피해를 최소화할 골든 타임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만일 이때라도 영업을 중단하고 고객과 직원들의 대피를 실시하고 삼풍백화점 주변의 통행을 전면 통제시켰다면 건물과 기자재만 피해보고 인명 피해는 거의 없는 선에서 피해가 최소화됐을지도 모른다.

보수 계획 논의가 1시간이 넘게 진행되는 동안 임형재는 설계 도면을 찾으러 서초동에 있던 사무실로 돌아갔다. 이후 중앙홀 2층의 행사전을 모두 스포츠센터 1층으로 옮기고 2층은 통행을 금지했다.

삼풍백화점 측은 이런 위급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고객들에게 전화를 돌려 행사를 안내하면서 백화점 방문을 권유하고 있었다. 하필 이날은 세일 시작 전 우수 고객들을 상대로 사전 세일을 하는 날이었다. 이 사전 세일도 불법에 해당한다. # 실제로 전화를 받고 삼풍백화점을 방문했다가 사고를 당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결국 삼풍건설과 이준은 결과적으로 볼 때 티끌만큼의 작은 이익에 집착해 안전을 등한시한 대가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차라리 돈이 약간 깨지는 한이 있더라도 안전을 감안했더라면 이준의 말대로 경제적 손해는 조금 볼 수 있었을지라도 그 정도 손해는 얼마 안가서 곧 메워졌을 것이다. 또, 회사가 망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그나마 부실 공사 등 일부 책임 추궁 등 이런저런 잡음은 피하기 어려웠더라도 최소한 이렇게 재기가 불가능한 수준으로까지 파멸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49]

4.2.1. 경영진은 미리 백화점을 빠져나갔다?

최초 보도는 경영진이 붕괴 전에 미리 빠져나갔다고 전해졌으나 실제로는 경영진 모두 붕괴 시점에도 대책 회의를 하느라 백화점 건물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상처 하나 없이 무사했던 이유는 이들이 머물던 회의실이 A동이 아니라 B동에 있었는데 무너진 A동과 달리 B동은 멀쩡했기 때문이다. 청문회에 따르면 삼풍백화점의 경영진은 붕괴 바로 직전까지 건물 보수에 필요한 자재와 인력을 수급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고 한다. 이는 사건이 발생한 지 꽤 한참 지났음에도 오랫동안 정정되지 않고 사고 25년이 지난 2020년이 되어서야 KBS 아카이브 프로젝트 모던코리아 <시대유감, 삼풍>에서 정정되었다.

물론 미리 빠져나가지 않았다는 사실이 삼풍 경영진에게는 면죄부가 되지 못한다. 거기다 좀 거칠게 말하자면 붕괴 당일, 경영진은 미리 빠져나가지 않은게 아니라 멍청하게 가만히 있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애초에 백화점 건물이 무너진 핵심적인 원인은 경영진이 일절 안전을 도외시하고 오로지 돈에만 눈이 벌개진 경영 방식 그 자체였다. 삼풍은 공무원에게 뇌물을 먹이고 백화점을 지을 수 없는 자리에 백화점을 지었다.

거기에 건축주 이준은 원래 설계에서 1층을 더 얹고자 했고, 건설사가 요구를 거부하자 아예 그 건설사와의 계약을 파기하고 자기 계열사인 삼풍건설산업으로 하여금 이를 강행하게 했다. 돈에 눈이 멀어 건물의 안전성을 염두에 두지 않고 독단적으로 설계를 변경한 것이다. 게다가 불법 증축으로 추가한 5층에 불법으로 식당가를 들였고 안전 검토도 하지 않고 2층에 서점을 입점시켰다. 더하여 크레인 동원 비용을 아끼겠다고 에어컨 냉각탑을 옥상에서 롤러를 이용해 끌어서 움직이며 건물 골조 악화에 결정적 원인 제공을 한 사람도 삼풍의 회장 이준 본인이었다. 이같은 만행은 건물의 하중을 지지하던 구조물이 부실 공사로 빈약해진 상황에서 건물의 붕괴를 가속화시키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구조기술사 이학수가 붕괴 가능성을 일축한 것 또한 극심한 인명 피해가 발생한 원인이지만, 그의 의견을 지지하고 영업 강행을 결정한 사람은 다름아닌 삼풍의 수장 이준이었다. 그래서 삼풍이 공중분해되고 경영진이 최고 형량을 받은 것이다.

4.3. 붕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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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괴 전 중앙광장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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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괴 이후 중앙광장의 모습
그 사람이 가고 저희끼리 "아니, 가스도 새고 금도 가고 그러면, 어? 이 백화점 무너지는 거 아냐?" 그러면서 농담했어요. 굉장히 웃긴 언니가 하나 있었는데 그 언니가 "야, 이거 무너지면 어떻게 하냐? 흔들면 무너지는 거 아냐?" 이러면서 포즈도 취하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진짜 무너진 거예요. 그날. 진짜로.
당시 삼풍백화점 직원 김현주의 증언이다.# 안타깝게도, "언니"라고 언급된 해당 직원은 해당 붕괴 사고로 사망했다.

붕괴 약 1시간 전인 오후 5시, 4층의 천장까지 가라앉기 시작하자 백화점 측은 고객들이 4층으로 가는 것을 막았다.

붕괴 27분 전인 오후 5시 30분, 임원실 회의장에서는 야간보수공사 준비를 위해 떠난 일부 임원들을 제외하고 회의를 계속 하고 있었다. 이때 A동으로부터 탕 하는 소리가 났다.

오후 5시 40분, 4층 천장이 뚝 소리를 내며 움직였고, 5층 천장에서 시멘트가 떨어졌다. 또한 옥상의 바닥이 조금씩 내려앉아가고 있었다.

오후 5시 47분, 다시 뚜둑 하는 소리가 들려 4층에 있던 사람들은 비상구와 B동 방향으로 대피하기 시작했다.

오후 5시 50분, 삼풍백화점에서 비상벨이 울렸다. 이때 A동 5층에 있던 이영철 부장[50]은 B동 지하 1층 창고에서 야간 보수공사를 준비하는 이완수 차장에게 전화로 현재 붕괴가 진행 중인 것 같다고 다급하게 알렸다. 그리고 전화 1분 뒤 건물 전체에 굉음이 발생하기 시작했음과 동시에 완전 붕괴가 시작되었다.

오후 5시 51분, 옥상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5층의 뒤틀림이 가속화되어 균열이 실시간으로 번지고 곳곳에서 흙먼지가 뿜어져 나왔다. 심상치 않음을 느낀 5층 직원들은 비상계단을 통해 탈출하기 시작했다.

다른 지상층에서는 다소 늦었지만 일반 직원들이 도망가라고 소리치며 고객들을 대피시키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붕괴 직전까지 필사의 탈출이 이어지며 많은 사람들이 비상구로 몰려들었고 일부는 아직 붕괴 징후가 없었던 B동으로 대피하기도 하였다. 이때 비상구로 대피한 행렬에는 비상계단을 가로막은 상품과 자재들 때문에 극심한 병목이 발생해 많은 사람들이 탈출에 실패하였다. 비상구를 창고로 활용하던 당시 백화점 업계의 관행 때문이었다. 당시의 생존자들은 만일 비상계단에 물건이 쌓이지 않았다면 훨씬 많은 사람들이 살 수 있었을 것이라 아쉬움 섞인 증언을 하기도 했다. #

한편 붕괴 시작 지점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던 지하층에서는 붕괴 징후를 가장 늦게 파악하여 탈출의 마지막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완전 붕괴 20초 전, 5E 지주 부분의 4층 슬래브가[51] 4층 바닥으로 완전히 주저앉았고 이 충격으로 4층부터 지하 3층까지 연쇄적으로 붕괴하는 수직붕괴가 일어났다.[52]



위 영상은 실제 붕괴 영상이 아닌 재연된 시뮬레이션 영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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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 붕괴 30초 후의 모습[53]

결국 1995년 6월 29일 오후 5시 57분, 삼풍백화점은 옥상으로부터의 붕괴 시작 5분 만에 땅을 향해 완전히 주저앉고 말았다.

[당시 붕괴된 삼풍백화점 지붕의 형태. 사람에 따라 불쾌할 수도 있으므로 접음. / 펼치기·접기]
파일:삼풍백화점 지붕.jpg

붕괴된 A동의 측면 모습. 5층부터 1층의 지붕이 샌드위치처럼 쌓여 있다. 이 때문에 삼풍백화점 A동의 지상층 구조물들은 그 자체로 거대한 프레스기가 된 것이다. 맨 위의 단층이 5층 지붕이고, 맨 아래의 단층이 1층 지붕이다. 위에서 서술했던 부실시공 때문에 기둥이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면서 5층 지붕부터 내려앉으며 연쇄적으로 붕괴되어 지붕들이 켜켜이 쌓인 형상이 되었다. 이로 인해 A동 지상층에 머물던 사람들 중 미처 건물 밖이나 B동으로 탈출하지 못한 인원들은 단 한 명도 생존하지 못하고 압사당했다. 즉, 사진의 지붕 사이사이에는 수백여 명이 압착당한 채로 죽어 있는 것이다. 붕괴 이후 매몰지에서 구조된 사람들은 전부 지하에 있던 사람들이었다.[54]


지하 4층은 A동 쪽에는 없고 B동 쪽에만 있기에 붕괴되지 않았다. 부상자들은 붕괴 초기에는 뿌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건물이 한쪽으로 쏠리다 갑자기 밑으로 떨어졌으며 이에 놀란 쇼핑객들이 여기저기서 "악!", "사람 살려!"라고 소리쳤다고 하며 사고의 순간을 전했다. 심지어, 그 당시의 긴급 뉴스에서 사망자 소식을 전할 때 2살, 4살 정도의 어린 아이들도 숨졌다는 소식이 들려서 더더욱 탄식하는 반응도 많았다.[55]

이와 관련한 일화로 당시 상품권 매장[56] 직원의 후일 증언에 따르면 지하 사무실에서 쉬다가 굉음 소리를 듣고, 사무실 문을 여는 순간 연기가 가득해서 에어컨이 폭발한 줄 알고 다른 직원들과 함께 비상구를 통해 B동으로 올라왔다고 한다. 그때 로비에 있던 친구가 생각나 로비 쪽을 보는 순간 탁 트여 있던 로비가 잔해로 막혀 있는 것을 보고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고 한다.

생존자 수는 937명이지만 이들의 대부분은 붕괴 순간 또는 사고 직후 자력으로 탈출한 인원들이었다. 사건이 마무리된 후의 집계치에 따르면 결과적으로 구조활동으로 구출된 생존자는 단 40명에 불과하다. 붕괴 당일 밤 사상자 집계치는 사망 22명, 부상 696명이었는데# 당시에는 이 최초 집계치 때문에 대부분의 시민이 탈출한 줄 알고 안도하는 사람들도 많았으나 이후 날이 갈수록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사망자 수를 보며 충격에 빠졌다.

삼풍백화점 참사의 총 사망자수는 총 502명이었는데 그 중 직원이 306명, 그들 중 파견직원이 221명이었다.[57] 다시 말해 일반 쇼핑객 희생자는 200명 남짓으로 저 정도 규모의 백화점 치고는 거의 텅 빈 수준에 가깝다. 우선 냉각탑 정지로 백화점 내부가 상당히 더워서 상당수 고객이 불쾌감을 느끼고 쇼핑을 포기했고 붕괴 10분 전 즈음부터 건물 전체에 굉음과 비상벨이 울려댔기 때문에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빠져나간 손님들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반면 직원들은 전조가 계속 있었음에도 직원이기 때문에 쉽게 자리를 떠날 수 없었으므로 큰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이외에도 수많은 행인들과 인근 건물에 있던 사람들까지 무너진 콘크리트에 깔렸다. 주변에 있던 일부 사람들은 몇 년 후 일어난 미국 9.11 테러에 휘말린 사람들처럼 먼지를 뒤집어쓰고 호흡기에 심각한 손상을 입는 등 후유증을 겪었다.

특히 호흡기 문제 부분에서 석면 문제도 심각하였다. 2009년 이전에 건설된 건물은 거의 100% 석면이 함유된 건축 자재를 상당히 많이 사용했고 삼풍백화점 역시 마찬가지였다. 부상자, 구조대, 시민, 기자 등 수많은 사람이 상당량 석면을 호흡기로 마셨다. 붕괴 당시 뉴스를 보면 사고 현장에 석면 먼지가 가득하다는 표현이 등장할 정도이다. 당시 한국 기준으로는 위험하다는 인식이 없었다.[58]

생존자는 대부분 지상 1~2층에 있었던 사람들이었고[59] 그때 당시 지하 1층 식품관에 있었던 사람이 상당히 많아서[60] 그 사람들이 거의 사망했다.[61] 지하 2층과 3층은 주차장이라 애초에 사람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62] 사망자는 여성이 396명, 남성이 106명인데, 붕괴 시간이 하필 저녁반찬을 사러 장 보러 나온 주부들이 많은 시간인데다 백화점 특성상 직원이 여성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 정도로 압도적인 차이가 난 것이다.

거대한 먼지 구름은 한 시간도 안 되어서 서초구, 강남구 전체와 잠실 일대까지 휩쓸고 지나갔다. 저 때가 하필 초저녁 시간대라서 놀이터에 아이들이 많이 나와 있었는데 하늘 멀리서 웬 먼지 폭풍이 날아오더니 아파트 단지 전체를 휩쓸자 놀란 부모들이 황급히 달려나와 아이들을 도로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기도 했다. 이 먼지폭풍은 근처의 서울고등법원서울지방법원 맞은 편까지도 영향을 미쳤다.

생존자들의 진술을 바탕으로 작성된 당시 기사에서 붕괴 직전의 긴박함을 알 수 있다. 기사 링크

B동은 건물 자체는 멀쩡했지만, 붕괴 당시 먼지와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이 뒤섞여서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당시 B동에 있던 시민의 증언, 붕괴의 충격으로 아수라장이 된 B동 1층[63]

사진 속에서 보이듯 A동이 완전히 붕괴된 반면 B동은 외관상 멀쩡했으나 역시 붕괴의 위험이 크다는 이유로 폐쇄 조치한 후 1998년 10월에 철거 공사에 들어가 이듬해 1월에 완전히 철거되었다. 붕괴 사고 사흘 후 실시된 현장조사 결과 B동도 마찬가지로 설계강도보다 모자라게 시공되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B동이 붕괴되지 않았음도 딱히 안전하게 설계된 덕이 아니라 A동이 먼저 무너진 뒤 그저 운이 좋아서였을 뿐이었다. 까딱했으면 B동도 A동이 붕괴했을 때 같이 연쇄 붕괴되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4.4. 붕괴 직후

파일:Sampungdept26.jpg

붕괴된 삼풍백화점 잔해, 가운데 핑크빛 도는 정육면체 형태가 그 문제의 냉각탑이다.


붕괴 사고 직후 지상파 3사인 KBS, SBS, MBC의 뉴스 속보다.

당시엔 저렇게 큰 건물이 부실 공사로 그대로 무너졌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부실 공사가 원인임을 알기 전까지 대다수의 건축가가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을 수 없다. 외부의 충격이 없이 붕괴된 모습이 이렇게도 처참하다니 말도 안 된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사고 직후 영국 언론에서는 외부의 충격 없이 건물이 저런 형태로 완전히 붕괴하는 것이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북한테러 가능성을 주장하기도 했는데 결국 원인이 부실 공사로 밝혀져 여러모로 더욱 충격을 주었다.[64]

이 참사와 가장 비슷한 참사였던 1993년에 발생한 청주시우암 상가아파트 붕괴사고도 부실 공사가 근본 원인이긴 하지만 LPG 폭발이 건물 붕괴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고, 삼풍 참사로부터 불과 2개월 전에는 미국에서 오클라호마 폭탄 테러(4월 19일)가, 한국에서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폭발 참사(4월 28일)가 발생했기에 참사 직후 초기에만 해도 테러 혹은 가스 폭발로 인한 충격으로 건물이 붕괴했으리란 추정이 대세였다. 하지만 건설 전문가 사이에선 붕괴 사고 초기부터 원인은 부실 공사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하여튼 붕괴 사고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당시 MBC 김은혜 기자가 119 구조대원의 옷을 빌려 입고 붕괴 현장에 들어가 건물의 설계도를 꺼내 와서 # 부실 공사로 인한 붕괴#였음을 보도하자 온 국민이 분노했다.[65] 사실 와우 시민아파트 붕괴사고처럼 부실공사로 인한 폐단이 하루이틀의 문제도 아니었다. 허나 삼풍 백화점 붕괴사고는 그동안 이어진 부실공사로 인한 붕괴사고의 정점을 찍은 참사로, 서울 한복판에 존재하는 고급 백화점에서마저 이런 믿기 어려운 대형사고가 일어났음은 심리적으로 더 충격적이었다.


▲ 백화점 붕괴 직후 소방관 및 기자들이 출동하여 촬영한 영상. 붕괴로 인한 먼지 폭풍에 휘말린 주차 차량이 뒤집혔으며 가운데 유리창도 모두 깨져나갔다.

반면 사고에 직접적으로 휘말리지 않은 지나가던 일부 시민들은 그냥 삼풍이 무너졌다는 투로 무덤덤하게 말하고 의료진과 구조진 그리고 취재진이 출동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냥 태연히 근처 마켓에서 쇼핑을 했다는 목격담이 있다고 한다. 피해 규모를 잘 몰랐고 이때까지만 해도 사망자가 수백 명이 나오리라고는 예상도 못하던 시점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이로부터 두 달 전에 미국에서 오클라호마 폭탄 테러 사건이 일어났기에 붕괴 직후에는 북한[66]의 폭탄 테러라고 생각한 주민들도 많았으며 저 큰 건물이 저절로 무너지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실제 주민들의 경험담을 들어 보면 사고 당시 현장에서 약 400m 떨어진 아파트 주민들은 땅이 울리는 느낌에 지진이 났다고 착각해서 경비실에 연락했다고 한다. 백화점이 무너졌다는 충격적인 말에 설마하며 그저 '백화점 신축 공사 현장에서 무거운 골재들이 무너졌나 보다.' 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사고 직후 강남소방서, 서초경찰서 등 관내 관공서들의 전화는 시민들의 신고 전화가 폭주하면서 불통이 됐다. 관공서 관계자는 물론 기자들조차 이 소식을 못 믿고 '건물에 금 정도 갔겠지.' 정도로 치부했으나 잠시 후 현장에 도착한 뒤 모두 할 말을 잃었다. 임기 마지막 날이라 송별파티를 열고 있다가 소식을 들은 최병렬 서울특별시장이틀 전 지방선거로 당선된 조순 서울시장 당선인도 현장으로 달려갔는데, 그들이 아무리 고위공직자라 한들 그 현장에선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넋을 놓고 펼쳐진 지옥도를 지켜보는 일뿐이었다. 오죽하면 최병렬 시장은 한동안 아무 말도 못 하다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1994년 10월 서울 한복판에 있는 성수대교붕괴된 직후 기껏 8개월 남짓 열심히 근무했건만 퇴임 전날에 또 대형사고가 터졌고, 심지어 둘 다 안전불감증으로 인한 부실공사 때문에 벌어진 참사였으니 눈물을 흘림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붕괴된 A동 중 엘리베이터와 비상계단이 위치한 앞쪽 코어 부분은 무너지지 않았기에 서둘러 대형 크레인들이 와서 쓰러지지 않도록 노력을 했다.

그리고 삼풍백화점의 위치가 부촌인 서초구이고 주 고객 중 부유층이나 법조인도 여럿 있어서 당시 대기업들도 혹시 자신의 회사 관련자들이 휘말리지는 않았는지 촉각을 곤두세웠다고 한다. # 실제로 당시 삼성에선 박영운 삼성건설 고문과 이윤우 삼성전자 공동대표 부인, 입점업체 제일모직 직원 3명이 그 자리에서 숨졌고 김경태 삼성자동차 고문 부부도 부상을 당해 인명 피해만 무려 35여 명에 달했다. LG 측은 입점업체 LG반도패션 점장[67]구본무 그룹회장의 숙모[68]를 잃었다. 대우 측은 김태구 대우자동차 회장 부인이 사망했다. 반면 김영원 진도그룹 회장은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69] 법조인 중에선 변호사 정광진은 세 딸을 모두 잃었으며 검사 윤연수도 부인과 두 자녀를 한꺼번에 잃었다. 서석준 前 경제부총리[70]의 딸 역시 변을 당했다. 물론 이들 외에도 수많은 사람이 현장에서 숨을 거두었다.

4.4.1. 절도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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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괴 후 현장에 있던 모든 이들은 공황 상태에 빠졌거니와 이런 참사를 상정하여 사전에 마련된 대응수칙도 없었기에 초기 단계에서 사고현장을 통제하기란 불가능했다. 당시의 붕괴 현장을 찍은 CCTV나 취재 동영상들에 일부 몰지각한 이들이 이런 분위기를 틈타 붕괴 현장에서 무너지지 않은 B동의 슈퍼마켓 계산대를 털거나 A동의 무너진 잔해 더미 속을 파내며 희생자들의 소지품이나 매몰된 상품들을 훔치는 등 돈이 될 만한 것들을 찾아 헤매는 추태를 보이는 장면이 나와 논란이 되기도 했다. 또한 구조 자원봉사자인 척 현장에 접근하여 절도를 저지르는 사람들도 많았다.
파일:삼풍백화점 악마의미소.jpg
당시 보도 영상. 영상 시간 00:01 ~ 00:07에서 해당 여성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71]

이러한 사례의 대표적인 사진이자 많은 사람들이 악마의 미소로 기억하는 이 사진은 많은 커뮤니티에서 언급되었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2 삼풍백화점 편에서도 얼굴에 모자이크 처리된 위 사진이 자료로 등장했다. 사족으로 사진 속 여성의 행방에 대해 '자신의 사진이 공개된 이후 비난을 당해서 수치심으로 자살했다', '현장에서 계속 물건을 훔치다가 2차 붕괴로 죽었다', '삼풍 참사 이후 다른 사고를 당했다' 등 사망설 또는 자살설이 널리 퍼졌으나 진위 여부는 알 수 없다.

이 외에도 그 정신없는 상황에서 저 사람처럼 백화점 물건을 도둑질하는 사람이 제법 많아서 이를 개탄하는 기사나 사설도 쏟아졌다. 당시 서초경찰서 강력반에 근무했던 한 형사[72]증언에 따르면 이 당시 절도로 입건된 사람이 무려 400여 명에 달했으며[73] 붕괴 사고 이후 서초경찰서에는 매일 저녁만 되면 수십 여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절도 혐의로 줄줄이 들어오곤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때 입건된 사람 중에는 당시 판매가 17만 원이던 바지를 무려 10벌이나 껴입고 있던 사람이 있었는데 경찰이 추궁하자 "추워서 입었다."며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했다고 한다. 위에도 언급되어 있지만 사고 발생 시기는 초여름에 해당하는 6월 하순으로 무더위가 서서히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는 시점이었다.[74] 그만큼 현장 주변의 타인의 출입 통제가 매우 엉망진창이었다.

5. 언론 보도

이 사고를 먼저 보도한 곳은 1995년 3월 1일 케이블 방송 출범 이후 당시 막 개국한 YTN이었다. YTN은 18시 뉴스를 시작한 지 3분 만에 앵커의 멘트로 사고 소식을 전한 데 이어, 4분쯤 사고현장 인근 삼호가든아파트 주민의 제보 전화를 연결해 사고 소식을 상세히 전했다.

이 사고를 최초로 보도한 이상순 YTN 기자는 사고 20년 뒤 YTN 뉴스 인에 출연해 이를 회고했는데#, 당시 초년 기자였던[75] 그는 삼풍백화점 바로 앞인 서울가정법원[76]이 출입처였다. 이상순 기자는 그날도 가정법원실에 모여 기자들과 같이 판결문을 보고 취재를 하고 있었는데, 오후 6시 즈음 바깥이 웅성거려 복도 쪽 창을 보니 백화점 건물 한쪽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고 한다. 그 길로 이상순 기자는 바로 회사에 "삼풍백화점 반이 날아갔습니다."라고 전화를 건 뒤 사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뉴스 진행자인 호준석도 이야기를 전했는데, 당시 조순 민선 1기 서울특별시장 당선인의 당시 서울지하철공사[77] 방문을 따라갔다가 회사의 연락을 받고 사고 현장으로 차를 몰고 갔는데, 하필 무너지지 않은 B동 쪽으로 들어와서 반대쪽(A동)이 무너진 것을 못 보고 "어? 멀쩡한데요?"라고 회사에 전화했다가 온갖 욕을 다 들었다고 한다. 물론 그 욕을 들어가며 코너를 돈 직후 한쪽이 없어진 걸 보고 기겁했다고 한다. 인터뷰에 같이 참석한 경광숙 당시 도봉소방서 구조대장[78]은 같은 날 휴일이어서 책자 발간을 위해 광화문 교보문고에 갔다가 사고 소식을 듣고 나오던 중 마침 사이렌을 울리며 출발하는 동아일보의 취재 차량을 얻어타고 사고 현장에 도착했다. 동아일보 사옥이 있는 세종로사거리에서 사고 현장인 서초동까지는 아무리 빨리 잡아도 20~30분이 걸리나 이들이 찍은 시간은 불과 7분이었다.

YTN의 사고 보도에 이어 지상파인 3년 반 전인 지난 1991년 12월 9일에 개국한 SBS부산, 대구, 광주, 대전지역민방[79]이 오후 6시 4분 만화 영화 <명탐정 셜록하운드> 방송 도중 자막으로 사고 소식을 전했으며, KBS 1TV는 <재미있는 동물의 세계>를 방송하던 오후 6시 5분에, KBS 2TV는 돌고래 요정 티코 방송 도중 자막으로 사고 방송은 오후 6시 5분에, MBC TV는 만화 영화 '개구쟁이 태즈'[80] 방영 도중 "MBC 뉴스속보 서울 삼풍백화점 붕괴 인명피해가 클듯" 자막이 뜬 후 프로그램이 끝남과 동시에 바로 MBC 뉴스속보가 나왔다. 그리고 곧 5분 뒤 사고 발생을 보도한 뒤 KBS, SBS, MBC 3사 모두 사고 보도를 내보내 도합 100시간 이상 생중계됐다. 라디오의 경우 오후 6시부터 저녁종합뉴스를 방송하는 CBS에서는 저녁종합뉴스 진행 중에 곧바로 사고 뉴스를 속보로 전했다.

사고 현장 화면을 가장 먼저 내보낸 곳은 KBS였다. KBS는 사고 발생 소식을 접한 뒤 뉴스 중계차를 파견했으나 중계장비 설치에 걸리는 시간 때문에 현장 화면을 녹화한 다음 오토바이로 테이프를 수송해 18시 30분쯤 현장 화면을 방영했다. 이어 MBC, YTN, SBS의 현장 화면 보도가 각각 10~20초 간격으로 잇따랐다. 각 방송사는 중계차 4~8대를 사고현장및 병원에 대거 동원해 18시 40분쯤부터 구조 현장을 생중계했다. 위 개요란에 있는 뉴스 특보 방송 영상은 사고 직후인 7시 전후에 방송됐다.

방송 3사는 사고 직후부터 이튿날인 30일 저녁까지 만 하루 동안 모든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사고현장을 중계했다. 이 당시에 여기저기서 벌어졌던 대형사고 보도치고는 가장 적극적으로 대처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두 달 전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폭발 참사 당시 축소 보도 시비에 시달린 점을 의식한 방송사들이 오명을 벗으려는 움직임이었던 모양이다. 대구 참사 당시 공보처[81]의 불허와 뉴스 비중 미달을 이유로 연장방송을 하지 않았던 MBC는 공보처에 신고를 생략하고 연장방송을 자체 결정해 대조되었다. 주말 예능들 다수도 이 주간에는 일제히 결방하였다.[82] MBC와 SBS는 각각 토요일(OB 베어스(현 두산 베어스) vs. 해태 타이거즈(현 KIA 타이거즈), 광주)과 일요일(삼성 라이온즈 vs. LG 트윈스, 잠실)에 예정된 프로야구 중계까지 사실상 취소하였다.

사고 당일 밤 뉴스 속보 시청률은 동시간대 평균 시청률 41.0%를 훨씬 뛰어넘는 58.8%이었다. 방송 시작 30분만인 18시 45분 44.3%(평균 시청률 28.7%)로 치솟은 이날 시청률은 22시 70.7%(평균시청률 49.3%)로 절정을 기록했다. 또 평소 시청률이 0.8%에 불과한 1시 15분에도[83] 21.1%에 달해 적지 않은 국민들이 밤새 사고방송을 지켜봤음을 증명했다.

한편 이 사고를 세상에 처음 알린 YTN은 구조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광고방송을 일절 중단하고 사고 방송만 내보냈다. 이 당시 실종자 현황을 당시 서울시 대책본부의 공식 발표와는 달리 YTN 독자적으로 집계했고 기자가 취재하러 잔해더미에 들어갔다가 생존자를 사고 7시간만에 구출해 내는 등 여러 성과를 거두어냈다.[84] 또 최후의 3인 중 두번째인 유지환의 생존 속보를 먼저 보도하는 등 개국한 지 석 달 만에 뉴스 채널의 이미지를 굳히는 데 성공했다. 실종자 가족들이 대기하고 있던 서울교대 체육관에 YTN을 틀기 위해 긴급하게 케이블 TV 망을 뚫기도 했으니 말 다 했다. 이런 개가에 신난 당시 YTN의 주인이던 연합뉴스(당시 연합통신)는 매일매일 홍보성 기사를 작성하며 그 치적을 남겼다. 20년 뒤 당시 YTN 취재진의 회고다.

이 사고에서 가장 큰 활약을 한 장비는 로봇카메라였다. 직경 50mm, 길이 200m짜리 케이블 끝에 어둠 속에서도 물체를 발견할 수 있는 CCTV를 설치한 이 카메라는 사람이 들어갈 수 없는 좁은 공간을 비집고 들어가 29일 밤에만 백화점 지하 1층에 깔려 있거나 갇힌 생존자 10여 명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해 구조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TAP 전자산업이 제작 운용했던 이 장비가 구조현장을 생생히 보여주자 현장에 접근하지 못한 각 방송사들은 이 화면을 그대로 받아 생방송으로 내보내기 위해 선점경쟁을 벌이기도 했는데 당연히 이 또한 문제가 되었다.

당시 방송에서는 현장을 한눈에 보여주는 항공촬영도 한몫 했다. KBS는 지난 3월 새로 구입한 항공 촬영용 신형 헬기로 가장 안정된 화면을 방송할 수 있었다. 기종은 벨230으로 동체 전면에 특수카메라 웨스캄을 탑재했다. MBC 역시 자체 헬기로 항공 촬영을 했으며 SBS와 YTN은 경찰 헬기를 타고 공중에서 현장의 모습을 전했다.

당시 재난 방송은 '랜턴, 절단기, 곡괭이, 들것 등이 필요하다.'는 안내 방송, 추가 붕괴에 따른 인근 아파트 주민 대피령, 헌혈 지원 등을 속보로 방송한 것이 실례며 자원봉사자, 주민들의 복구 지원·구호 활동을 수시 방영해 시민 정신을 북돋아 성수대교 붕괴 사고,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 폭발 참사 등 그동안의 재난 방송보다 한 단계 진일보했다는 평과 함께 발빠르고 성실했다는 평을 들었다.

문제도 만만찮았다. "갇혀있던 생환자가 밖으로 나오면 눈이 부셔 실명케 돼 담요로 감싸고 있다."고 말하면서 화면에는 생환자 얼굴에 눈부신 조명을 비춘다거나, 구조작업을 벌이는 비좁은 공간에서는 산소가 부족하기 마련인데 거기까지 취재진이 들어왔다거나, 구조대원들이 잠시 휴식을 취하는데 마이크를 들이대는 등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또 위에서 얘기한 지나친 항공취재 경쟁에 따른 헬기의 소음으로 후속 붕괴가 우려되기도 했으며 구조대원들의 목소리나 생존자들의 구조 외침이 소음에 묻혀 구조활동에 장애가 되기도 했다. "소방헬기로 저건 물을 뿌려야 된다.", "저 사람은 산다, 못산다." 등 지나치게 성급한 예단도 있었다. 하지만 초기에 생환자들이 어느 병원으로 이송되었는지 알려주는 필요정보는 충분치 않았다.

포털에서 '삼풍백화점 붕괴' 검색어를 이용해 오래된 기사 순으로 검색하면 그 당시 연합뉴스가 된 연합통신에서 출고된 기사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사고현장의 시간별 상황이나 피해자 구조·치료 현황, 자원봉사 현황, 사고 원인에 관한 기사뿐만 아니라 기자들이 출입하던 정부 부처의 분위기를 다룬 스케치 기사, 사고 직후 PC통신에 올라온 글들도 기사화했다. 기사가 올라온 시각을 보면서 읽다 보면 당시의 긴박하고 참혹했던 분위기를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민정부는 삼풍 보도논조가 불쾌한 듯한 태도를 취했다. 7월 14일자 한국방송노조건설준비위원회 기관지 <방송노보>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7월 4일 이원종청와대 정무수석비서관롯데호텔 서울에서 지상파 방송 3사 사장들을 불러 "삼풍 등 여러 재해 사건사고에 대해 국민 여론이 김영삼 전 대통령에 대한 비난으로 집중된 건 언론 탓이다."라고 말하였다. 이 모임 이후 각 방송사 뉴스에서 삼풍사건 미담 위주 연성보도 횟수가 늘고 5일에는 <뉴스위크> 아시아판 10일자 일부 내용을 크게 과장해 '대통령 무책임론'을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김영삼 전 대통령은 사고 21일이 지나서야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는데 여기서 그 유명한 (동남 방언으로) "이카면 되겠제?"(이렇게 하면 되겠지?)[85] 발언이 나왔다.[86]

6. 구조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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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생존자 중 한 명을 구조하는 모습.[87]





안타깝게도 이런 대형사고에서 조심스럽고 효율적이어야 할 구조작업이 너무나 비효율적이었다. 이제는 이런 사고에서 초기 구조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지만 당시 한국인들은 이런 붕괴 사태가 일어날 줄 미처 몰랐고 대규모 구조작업을 체계적으로 한다는 개념 역시 부족하여 구조가 매끄럽게 진행되지 않았다. 또한 후속대책을 제대로 세우지 못해 허점까지 많이 드러났다. 이런 대형 긴급사고에 대비한 매뉴얼도 없었을 정도였다.

그 이전에 대형긴급사고가 없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대응체계가 후진적이었다. 사고 이후 소방서와 경찰과 인근의 육군 수도방위사령부육군특수전사령부 예하 부대들을 비롯하여 지역주민과 민간 자원봉사자, 해병대 전우회, 심지어 주한미군 육군까지 수많은 기관과 인원들이 사고 현장에 몰렸는데 이 와중에 소방본부와 경찰과 서울시 그리고 중앙재해대책본부 등이 서로 관할권을 주장하면서 체계적인 지휘통제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청와대가 개입해서 소방본부가 현장 지휘를 하기로 합의하였으나 여러 기관들과 유족들, 그리고 민간자원봉사자들 사이에 각종 불협화음이 계속해서 속출했다. 아래에 서술된 각종 앞뒤 막힌 뜨뜻미지근한 상황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구조대 인원 통제나 운영 등이 거의 주먹구구였고 구조장비나 절단기 등 기본장비가 미리 확보하지 않아 구조가 지연되는 등 모두가 우왕좌왕하였다.

게다가 사고 당일 매몰 현장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소방차로 불을 끄고자 하였는데 붕괴 사고로 수도가 끊기는 바람에 주변 옥외 소화전이 작동을 하지 않아 진화 작업이 지체되기도 했다. 이후 이 불은 자동차 엔진오일과 휘발유에서 난 불로 판명되어 구조대의 잘못된 대응에 논란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지진 속 구조 현장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건물이 붕괴되면 어디에서 어떤 이유로 불이 났는지 확실히 알아낼 수는 없다.

이후 실제로 붕괴된 동의 북쪽 엘리베이터 타워가 서서히 붕괴된 A동 파편 위로 기울고 있다는 진단이 나왔다. 이 때문에 안전을 위해 H빔을 설치하느라 활발했던 구조작업도 잠시 지연되었다. 매몰 52시간 만에 환경미화원 24명이 구출되었다.

화재의 열기와 소방수 때문에 생존자들의 희비도 엇갈렸다. 지하 1층에서 70여 시간 만에 구조되었다가 이송 도중 사망한 이은영은 몸에 2~4도 화상을 입고 왼쪽 눈이 파열되어 청색증에 시달린 채 발견되었고 그 다음에 발견된 생존자인 최명석의 근처에 있던 다른 생존자들 중 한 사람은 안타깝게도 구조대원들이 뿌린 물 때문에 익사하였다. 반면 유지환과 박승현은 화재로 인한 열기로 초기에는 상당히 견디기 힘들었다가 위에서 떨어지는 소방수 덕분에 수분을 섭취하며 견딜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증언과 더불어 사고 당시 줄기차게 나왔던 1967년 9월에 발생했던 충남 청양의 갱도 붕괴사고에서 열엿새 만에 구출된 생존자 광부 양창신의 인터뷰가 계속 방송되었다. 인터뷰 내용은 그가 무너진 갱도 안에서 물만 마시며 16일을 버텄다는 내용이었다. 사실 이 소방수(水) 덕분에 11일차에 발견된 최명석이나 13일차에 발견된 유지환 씨 그리고 17일차에 발견된 박승현이 생존할 수 있었다.

소방수의 목적은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당시 지하주차장까지 붕괴되었기 때문에 그로 인해 지하에 붕괴된 콘크리트 더미 어딘가에 있는 차량의 화재로 발생하는 연기를 소화하기 위한 목적과 매몰자들의 생존을 위한 식수, 그리고 당시 여름의 더위로 인해 혹시나 있을 생존자의 탈진을 막기 위한 온도 조절용으로 사용되었다. 단순히 철거 시 발생한 먼지를 줄이겠다고 소방수를 뿌리지는 않았다. 당시 지하 3층 구조물까지 모두 붕괴된 상황에서 철거작업을 하겠다고 사람이나 장비를 집어넣지는 않았다. 모든 작업은 구조 위주였고 철거작업은 그 와중에서 행한 부수적 결과일 뿐이었다.

당시 이러한 논쟁 사항 중에는 포크레인 투입 여부도 있었다. 포크레인으로 작업하다가 혹시나 있을 생존자가 다치거나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굴삭기가 작동할 때 굴삭기의 삽 부근에서 구조대원들이 생존자 및 희생자의 확인도 병행하고 있었으므로 그러한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최명석도 굴삭기로 해체하다가 발견되었다.[88]

당시 몇몇 구조 장비와 행위 중에는 모든 구조행위를 일시적으로 멈추고 실종자들의 삐삐 번호로 일괄적으로 전화를 해서 삐삐 소리로 생존자를 구조하려던 시도가 있기도 했다. 이를 위해 미군이 생존자 발견에 사용한다는 음파를 이용한 구조장비 스톨스(STOLS)를 하와이에서 공수했지만 붕괴 현장에선 잡다한 소음이 너무 많은 탓에 이 장비 때문에 발견된 생존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89] 방송 및 구조자 탐색을 위해서 직경 5cm 정도 되는 시추공 탐지카메라를 다수 투입하였다.

붕괴사고 며칠 후 자원봉사자들이 지하 3층으로 내려가 생존자를 찾아봤지만 철수했고 구조 대원들은 건물 붕괴 위험으로 생존자 수색조차 잠정 중단했다. 사고 초기 서울시는 실종자를 200여 명으로 집계하다 결국 400여 명으로 2배 정정하는 어처구니없는 행정을 하였다. 붕괴 사고가 단일 사고 최다 인명 피해를 내었음에도 실종자 접수 하나 제대로 못하 는 서울시에 국민들은 크게 실망했다. 더하여 팔다리가 잘려나간 시신들이 건축 잔해물과 뒤섞여서 유가족들이 거세게 항의하는 일도 있었다. 당국은 팔 2개+다리 2개+머리+몸통=시체 1구로 피해자 인원을 추산하여 언론에 보도되기도 하였다. 나중에 겨우 찾아낸 시신의 팔다리가 맞지 않는 상황이 계속 벌어지자 그제야 잔해를 갖다버린 난지도 쓰레기 매립장을 뒤져서 시신 142구를 추가로 수습하는 황당한 일도 있었다.# 사망자의 시신이 제대로 수습되지 못하고 쓰레기장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것이다.[90]

이에 유가족들은 격노하여 거리 시위를 하기도 했다. 특전사와 민간인 그리고 유가족 등 50여 명이 사비로 절단기 등을 구입해 생존자 구조에 박차를 가했으나 현장 지휘소에서는 이들에게 철수하라고 했으며 재진입을 허가하지 않았다.[91]

초기에 우왕좌왕하던 구조본부도 시일이 지나며 체계를 갖추어 삼풍백화점 건너편 삼풍주유소를 구조본부로 삼고 구조 작업을 진행했다. 그러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구조본부는 자원봉사자를 모두 철수시키고 전문 구조대원만으로 구조활동을 한다는 방침을 정한 뒤 전문 인력으로 구성된 구조대를 구성했다. 이런 방침이 내려온 이유는 자원봉사를 핑계로 범죄를 일삼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일부 자원봉사자들이 봉사를 한다는 핑계로 봉사자들에게 나눠주는 물품을 취득하고 백화점 안에 있는 물건들을 무단으로 절도하는 사례가 발견된 것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유족들에게 접근하여 시체 발굴을 이유로 금품을 요구하는 사람까지 나온 것이다. 한두 건 정도도 아니었으며, 당시 절도 혐의로 구속된 이들의 숫자만 400여 명에 달한다. 이들 대부분은 나중에 모든 혐의가 들통나서 구속됐다.

이와 다르게 사회 각 계층에서는 온정이 전해졌다. 근처 군부대 장병들은 혈액이 모자란다는 소식을 듣고 헌혈을 했고 위에도 서술되어 있듯이 건너편 삼풍주유소는 영업을 중단하고 사무실을 통째로 서초구 재해대책본부로 내놓았으며 인근 부녀회원들이 컵라면과 빵 등을 작업자에게 배식했다. 경쟁업체 현대백화점도 직원 30~50명을 사고 현장으로 즉시 파견해 구조대원들에게 커피와 라면을 제공하면서 '비록 경쟁업체이지만 같은 백화점 업계끼리 이럴 때 서로 도와야 한다.'는 입장을 내놓았다고 한다. 당시 코미디언 조정현은 운영하던 뷔페 직원들과 사고 현장에서 봉사활동을 했다. 그리고 한 외국계 호텔에서도 음식을 내놓았다. 또한 용접 도구가 필요하다는 방송을 듣고 용접공 수십 명이 달려왔고 한 업체에서는 최신식 조명 도구를 설치하여 현장을 밝혔다. 그 외에도 부상자 응급처치를 도와주기 위해 수녀들이 왔었고, 한 상인은 우의 수백 장을 자원봉사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한편 미국, 러시아, 프랑스가 사고 현장에 구조대를 파견할 용의가 있음을 밝혔으나 정부에서는 자체 수습이 가능하다고 판단, 이들의 제의를 사양했고 위에 나와 있듯 일부 주한미군 병력과 하와이에서 음파 탐색 장비와 함께 온 소수의 미군 지원 병력이 구조를 돕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92]

사고 현장에서 발견된 시신들은 시내 병원들로 후송되었는데 잔해에 깔리거나 늦게 발견된 시신일수록 더위 등으로 부패되어 타버리거나, 백골화가 진행되기도 하여 종전처럼 인상착의나 지문만으론 신원확보를 할 수가 없었다. 이에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서울교대에서 실종자 가족 150명의 혈액을 채취해 당시 최첨단 기술이었던 'DNA 감식기법'을 시도했다.# 그럼에도 결과적으로 급격하게 붕괴한 건물에 깔린 시신들 중 상당수는 말 그대로 증발했다고 봐도 될 정도로 시신훼손이 매우 심각했고 실종자들 중 아예 시신을 찾지 못하거나 시신의 일부분만 찾은 경우도 상당했다.[93]

6.1. 구조 일지

<rowcolor=#eee,#111> 구분 구조 시점 구조 장소 이름/나이 기타
1 6월 30일 오전 7시 50분 지하 1층 아이스크림 매장 이행주(여.25) 매장 직원
2 30일 오전 7시 50분 지하 1층 아이스크림 매장 추경영(여.43) 매장 사장
이준 회장의 큰며느리
3 30일 오전 9시 지하 1층 슈퍼마켓 권은정(여.25) 매장 직원
4 30일 오전 9시 31분 지하 1층 슈퍼마켓 홍성태(남.39) 백화점 고객
5 30일 오전 9시 37분 지하 1층 슈퍼마켓 이미영(여.39) 백화점 고객
6 7월 1일 오전 1시 30분 지하 1층 박선미(여.23) 1층 의류매장 직원
7 1일 오전 2시 15분 지하 3층 주차장 박미선(여.25) 백화점 고객
8 1일 오전 2시 15분 지하 3층 주차장 문은주(여.25) 백화점 고객
9 1일 오전 3시 15분 지하 1층 철제더미 임해진(여.25) 1층 의류매장 직원
10 1일 오전 3시 16분 지하 2층 주차장 김현정(여.27) 4층 의류매장 직원
11 1일 오전 3시 16분 지하 2층 주차장 이동호(남.31) 4층 의류매장 직원
12 1일 오전 5시 40분 지하 1층 철제더미 장미숙(여.22) 매장 직원
13 1일 오전 5시 40분 지하 1층 철제더미 정복실(여.24) 1층 귀금속 매장 직원
14~37 1일 오후 8시 57분 지하 3층 환경미화원 휴게실 환경미화원 24명 현장에 있던 사람들 전원 생존
38 9일 오전 8시 52분 지하 2층 에스컬레이터 옆 최명석(남.20) 백화점 아르바이트생
39 11일 오후 3시 47분 중앙홀 아래 유지환(여.18) 백화점 아르바이트생
40 15일 오전 11시 15분 지하 1층 아동복 매장 박승현(여.19) 마지막 생존자

6.2. 최후의 생존자 3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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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풍백화점 붕괴사고 최후의 생존자 3인 - 유지환, 최명석, 박승현.
지하 1층 매장에서 근무하다가 매몰됐다. 누운 상태에서 옴싹달싹 못하는 가운데 붕괴된 콘크리트가 점점 내려와 얼굴과 맞닿은 상황까지 왔으나 극적으로 구조됐다. 같이 매몰된 동료 직원들과 대화를 하며 버텼으나 시간이 지나자 자신 혼자만 살아 있었다고 증언했다. 구조 후에 상당히 유쾌한 모습을 보였는데 구조된 직후의 소감으로 "구조대원 오빠랑 데이트하고 싶다. 아이스커피가 마시고 싶다."는 약간 엉뚱한 말을 해서 소소하게 웃음을 남기기도 했다. 결혼 후에 조용히 가정주부로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이후 2021년에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2에 생존자 중 한 사람으로 출연하여 그날의 비극을 다시 전하기도 했다. 가명 처리가 되지 않고 본명 그대로 출연한 드문 사례다.[94]
상당히 운이 좋은 편에 속했는데 차차 구조 열기가 식어가면서 물도 뿌리지 않아 갈증에 시달리던 중 장대비가 쏟아져 빗물을 마셔 연명할 수 있었고 그 다음 날 에스컬레이터를 철거하던 중에 굴착기 기사가 발견하였다. 삼풍백화점에서는 비정규직으로 근무하였으며, 하청 직원으로 파견나갔다가 사고를 당했다. 구조 뒤 콜라를 먹고 싶다고 해 두산그룹이 곧바로 코카콜라 40박스를 보내거나 LG건설 구자욱관리담당 부사장(53) 등 임원진 3명이 최군이 입원한 서울 강남성모병원 중환자실을 찾아와 학비 전액 지원과 졸업 후 이 회사 취직을 보장하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95] 광주서석고등학교에서 한문교사로 재직했던 최모 교사(최명석의 삼촌)의 언급에 따르면 구조 이후에는 해병대에 입대했는데 원래는 병역면제였지만 자원입대했다고 한다.[96]
이후 다른 생존자 박승현의 고교 동창을 소개받아 결혼했으며 대학에서 공부한 전공을 살려 GS건설에서 재직 중이다. 답답하고 좁고 어두운 공간에 갇혀 있는 동안 자기 주변에 떨어져 있던 장난감 기차를 발견하고 이를 가지고 놀면서 삶의 희망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말이 가지고 노는 거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최대한 고통을 잊고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필사적으로 정신을 집중하게 해 준 물건이었을 것이다.[97][98] 그의 옆에는 2명의 여성도 갇혀 있어서 같이 살아나가자고 서로를 위로했지만 25세 직원 이승연과 다른 1명의 중년 여성은 콘크리트에 깔려 부상이 심해 모두 목숨을 잃었다.
훗날 사고 당시의 일을 술회했는데 매몰되어 있느라 깜깜해서 보이는 게 없었기에 자신의 기억은 청각이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주변에 사람들이 많이 살아 있어서, 얘기도 나누고 서로서로 힘내라고 응원도 했지만 점점 그 소리가 줄어들었다고 한다. 전술한 소방수 때문에 익사한 사람의 마지막 말을 들었는데, 그의 유언은 "물이 차올라와요... 허리까지 찼어요... 그쪽은 꼭 살아 나가세요... 안녕."이었고 그 다음엔 '꼬르륵, 꼬르륵' 물속에서 사람이 숨이 막혀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 그 소리는 평생 못 잊을 거라고... 일반인과 함께 외국을 여행하는 형식의 어느 TV프로그램에 이스라엘 지역 여행자로 섭외되어 출연한 적이 있는데 주변 지인들을 테러나 전쟁으로 여럿 잃은 경험이 있는 이스라엘 현지 청년이 '나는 죽음을 항상 곁에 두고 산다'고 말하자 민감하게 반응하며 '그 마음이 이해가 간다'고 말하더니 그날 밤 프로그램 PD에게 들려준 이야기다.[출처]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에서 가장 마지막에 생존자로 구출된 인물.[100] 박승현 양이 구출되기 전까지 대한민국의 매몰 사고 최장 생존기록은 15일 8시간을 기록한 1967년 청양 구봉광산 매몰사고의 김창선 씨였다. 차이점이라면 김씨는 외부 연락이 가능했던 반면[101] 박승현은 외부와의 연락이 완전히 끊긴 고립 상태에서 17일(정확히는 377시간)간 생존했고 따라서 대한민국의 매몰 사고 생존기록을 경신했다.[102] 사고 직후 근로복지공단에 특채되어 '삼풍 참사 최후의 생존자'라는 타이틀로 산업재해 지원을 담당했으나 IMF 사태 때문에 계약직으로 전환당하면서 2000년에 그만두었다. 2005년 근황

7. 재판과 손해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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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시설이사 이영길[103], 사장 이한상[104], 구조기술사 이학수[105], 그리고 회장 이준[106][107]
역사상 유례가 없는 대참사에 국민들은 분노를 쏟아내며 관련자들에 대한 엄정한 처벌을 요구했다. 그 전해인 1994년 10월 21일성수대교 붕괴 사고가, 그 해인 1995년 4월 28일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 폭발 사고가 터지는 등 근래에 유사한 대형참사가 이미 두 번이나 있었던 데다 이 사고는 그 둘보다도 압도적으로 참담했다. 또한 앞의 두 사고와는 달리 건물 붕괴 조짐이 사전에 감지된 데다 고객들을 대피시킬 기회 또한 충분히 있었음에도 백화점 경영진이 경제적 피해로 사실을 묵살하고 영업을 강행하다가 일어난 것이기도 했다.[108] 따라서 이준 회장을 비롯한 백화점 경영진에 대한 당시 국민들의 분노와 비난의 수준은 연쇄살인범에 대한 비난 수준 이상[109]으로 엄청났으며 철저하게 진상규명을 하고 엄중한 처벌을 하라는 시위를 벌였을 정도였다.

상술된 것처럼 경영진이 붕괴 직전 백화점을 버리고 도주했다는 설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이들은 백화점 건물 내에서 보수 대책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붕괴 사실을 인지했다면 그 순간까지 보수에 필요한 자재와 인력들을 수급할 필요도 없었을 터. 특히나 전문가인 구조 기술사 이학수가 붕괴의 가능성을 일축했기 때문에 경영진은 그의 말을 믿고 따른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잘못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일부 인간들이 이 사실을 이용해 옹호한다면 지탄해야 할 지점. 이 부분은 KBS 아카이브 프로젝트 모던코리아 <시대유감, 삼풍>을 통해 자세히 알아볼 수 있다.
대법원 1996.8.23. 선고 96도1231 판결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업무상횡령)·업무상과실치사·업무상과실치상·수뢰후부정처사·뇌물수수·부정처사후수뢰·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뇌물공여·허위공문서작성·허위작성공문서행사][집44\(2)형,821;공1996.10.1.\(19),2937]
【판시사항】
[1] 건물 붕괴의 원인이 건축계획의 수립, 건축설계, 건축공사공정, 건물 완공 후의 유지관리 등에 있어서의 과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데에 있다고 보아 각 단계별 관련자들을 업무상과실치사상죄의 공동정범으로 처단한 사례

[2] 상대방인 수뢰자의 처벌 없이 뇌물공여자만 처벌하는 것이 헌법 제11조 제1항에 위배되는지 여부(소극)

[3] 업무상과실치사상죄의 공소시효 기산점

[4] 공소장에 적용법조의 오기나 누락이 있는 경우, 공소장 변경을 요하는지 여부(한정 소극)

[5] 행정청의 내부방침에 위배하여 허위의 복명서를 작성한 후 대규모소매점개설신고서를 수리한 행위가 형법 제131조 제2항 소정의 '직무상 부정한 행위'에 해당한다고 한 사례
【판결요지】
[1] 건물(삼풍백화점) 붕괴의 원인이 건축계획의 수립, 건축설계, 건축공사공정, 건물 완공 후의 유지관리 등에 있어서의 과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데에 있다고 보아 각 단계별 관련자들을 업무상과실치사상죄의 공동정범으로 처단한 사례.

[2] 뇌물공여죄의 상대방인 수뢰자가 처벌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뇌물공여자만 처벌을 받게 된다 하여 헌법 제11조 제1항에 위배된다고 할 수 없다.

[3] 공소시효의 기산점에 관하여 규정한 형사소송법 제252조 제1항 소정의 '범죄행위'에는 당해 범죄의 결과까지도 포함되는 취지로 해석함이 상당하므로, 업무상과실치사상죄의 공소시효는 피해자들이 사상에 이른 결과가 발생함으로써 그 범죄행위가 종료한 때로부터 진행한다.

[4] 공소장에 적용 법조를 기재하는 이유는 공소사실의 법률적 평가를 명확히 하여 피고인의 방어권을 보장하고자 함에 있는 것이므로, 적용 법조의 기재에 오기나 누락이 있는 경우라 할 지라도 이로 인하여 피고인의 방어에 실질적인 불이익을 주지 않는 한 공소제기의 효력에는 영향이 없고, 법원으로서도 공소장 변경의 절차를 거침이 없이 곧바로 공소장에 기재되어 있지 않은 법조를 적용할 수 있다.

[5] 행정청의 내부방침에 위배하여 허위의 복명서를 작성한 후 대규모소매점개설신고서를 수리한 직무위배 행위 역시 형법 제131조 제2항 소정의 '직무상 부정한 행위'에 해당되고, 관계 법령상 대규모소매점개설신고의 요건을 심사하여 수리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행정청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여 달리 볼 것은 아니라고 한 사례.

이 판례의 주문과 이유 부분에 대해서는 판결문 전문을 참고 바람.96도1231

이후 1996년 8월 23일, 대법원에서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관련 피고인들에 대한 판결이 확정되었다. 삼풍백화점 회장 이준에게는 업무상과실치사상죄를 적용하여 징역 7년 6개월이 확정되었으며 삼풍백화점 측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설계변경 등을 승인해 준 전 서초구청장 이충우, 황철민에게는 각각 징역 10월에 추징금 300만원과 징역 10월에 추징금 200만원이 확정되었다. 전 서울특별시청 상정계장 정상기, 우성건설 형틀반장 김수익, 전 서초구청 주택과장 김재근 등 피고인 10명도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과 추징금 300만원에서 선고유예 및 추징금 100만원으로 원심형량이 확정되었다. 2심에서 징역 7년형을 받은 삼풍백화점 사장 이한상(회장 이준의 차남) 등 12명은 상고를 포기하여 형이 최종 확정되었다.[110]

당초에는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죄(사형·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를 적용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으나 검찰은 수사 결과 고의성을 입증하기는 어렵다고 보아 업무상 과실치사죄(5년 이하의 금고 또는 2천만 원 이하의 벌금)가 적용되었다. 판단 기준에는 여러가지 학설이 있지만 대략 '건물이 붕괴되어 사람이 죽더라도 상관없다.' 라고 생각했다면 미필적 고의, '건물이 붕괴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했다면 과실범이다.

거기에 뇌물공여죄까지 적용되었으므로 경합범 가중(1/2배 가중)하면 사실 이준이 선고받은 징역 7년 6개월은 원칙 하에서 법원에서 할 수 있는 가장 무거운 처벌이었다. 이후 그는 2003년 4월에 만기출소했고 10월 4일 지병으로 사망했다.

한편 삼풍백화점의 사장 이한상2002년 10월에 출소했다. 2000년 당시 이준의 부인, 그러니까 이한상의 어머니가 대한민국 법무부에 가석방을 탄원했지만 당연히 시민단체 등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법률의 한계로 인해 이준 일가에 내려진 형벌은 솜방망이에 가까웠지만 벌금은 매우 무거웠다. 여론의 질타에 떠밀려 이준 일가는 전재산을 추징금 + α 손해배상금 명목으로 서울특별시청에 헌납하고 손해배상 처리를 서울특별시청에 일임했다. 징역의 기간이나 벌금의 액수는 형벌이라 법에 써 있는 만큼만 부과해야 하지만 손해배상금은 민사재판의 영역이라 '불법행위로 인해 피해를 끼쳤음'이란 사실만 인정되면 법관의 판단 하에 일정범위 내에서 자유롭게 부과할 수 있다.

사상자가 너무 많아서 손해배상액은 재벌인 이씨 일가 전재산으로도 부족했으므로 결국 서울특별시청에서 모자란 금액을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사망자 1인당 3억 8천만 원씩 지급되었고 배상금 총액은 3317억 원에 달했다.

그래도 금융권 부채를 탕감하고 난 후 추정되는 삼풍그룹의 나머지 자산이 3천억 원 정도는 되어서 보상액의 거의 대부분을 책임진 셈이기에 무임승차로 나 몰라라 한 것까지는 아니었고 삼풍의 부실공사를 눈 감아준 정부와 서울특별시청의 책임도 일정 부분 있음은 사실이기에 서울특별시청 입장에서는 부족분을 책임지는 게 억울하다고도 할 수 없다. 다만 정부가 부담하는 그 결손액은 엄밀히 말하자면 세금으로 충당되는 것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국민들에게 책임을 물린 것이나 다름없는 꼴이 돼버렸다.

붕괴 사고가 발생할 당시까지만 해도 지방자치제가 아닌 관선 체제였기에 서초구청 공무원이 뇌물을 받아먹었으면 서초구청장만의 책임으로 한정짓지 않고 정부와 서울시의 직접적인 책임까지도 성립될 수 있었다. 부패한 사람을 중앙정부가 직접 서울시장으로 앉혔으니 당연히 책임을 져야 했기 때문이다. 관선제 시절의 전임 서울특별시장과 서초구청장이 벌인 실책 때문에 민선으로 선출된 후임 서울특별시장과 서초구청장이 고생하게 된 것이긴 하지만 당시 서초구청장이었던 조남호는 격분한 유족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KBS, MBC[111]

그가 서울특별시청에 헌납한 재산 목록 중에는 제주특별자치도 중문관광단지에 위치한 여미지 식물원[112]이 있었다. 그래서 한동안 제주도에 소재한 관광 명소를 서울특별시시설관리공단에서 관리하는 괴상한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이후 2005년 부국개발에 인수됐으나 2007~2017년까지 정리해고 문제로 노사갈등이 빚어졌다. 게다가 학교법인 숭의학원 역시 관선이사 체제를 거쳐 1999년 영안모자에 매각됐다.

이 사고 이후로 1996년 중소 재벌이던 삼풍건설산업흑역사를 남긴 뒤 사실상 공중분해됐고, 이 사고와 그로 인한 후폭풍으로 인해 중소기업 1100여 곳이 부도 처리되어 사고의 직접적인 피해자는 아니었지만 삼풍에서 일했던 직원, 관련 중소기업 직원 등도 하루 아침에 실업자로 전락해 길바닥에 내몰리는 처지가 되었다. 특히 삼풍건설에서 근무하던 사람들은 일반 직원은 물론 고위직들마저도 이 사고로 인해 얼마 가지 않아 직장을 잃어버린 또 다른 피해자였음에도 자신이 다니던 회사 자체가 국민들에게 악의 축으로 찍히는 바람에 사회의 따가운 시선에 시달렸다. 설상가상으로 얼마 후 닥쳐 온 1997년 외환 위기와 함께 삼중고를 겪으며 다른 곳에 가서 취직하는 것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한다. 결국 여러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도 모자라 살아남은 다른 사람들도 못살게 만든 셈이 된 것이다.

7.1. 국가 배상 부정

대법원 1999. 12. 21. 선고 98다29797 판결
【판시사항】
[1] 승소판결에 대한 상소의 허용 여부(소극)

[2] 공무원의 직무상 의무 위반으로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가 배상책임을 지는 경우의 직무상 의무의 내용 및 상당인과관계 유무의 판단 기준

[3] 설계변경 승인이 설계도서 등과 다른 위법 시공을 한 후 사후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이유만으로 위법한지 여부(소극)

[4] 허가관청이 건축허가사항대로 시공된 건축물의 준공을 거부할 수 있는지 여부(소극)

[5]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와 서초구청 소속 공무원들의 직무의무 위반행위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없다고 한 사례
【판결요지】
[1] 상소는 자기에게 불이익한 재판에 대하여 유리하게 취소·변경을 구하기 위한 것으로 승소판결에 대한 불복상소는 허용할 수 없다.

[2] 공무원에게 부과된 직무상 의무의 내용이 단순히 공공일반의 이익을 위한 것이거나 행정기관의 내부의 질서를 규율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또는 부수적으로 사회구성원 개인의 안전과 이익을 보호하기 위하여 설정된 것인 이상, 공무원이 그와 같은 직무상 의무를 위반함으로 인하여 피해자가 입은 손해에 대하여는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되는 범위 내에서 공무원이 소속한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배상책임을 지는 것이고, 이 때 상당인과관계의 유무를 판단함에 있어서는 일반적으로 결과 발생의 개연성은 물론 직무상의 의무를 부과하는 행동규범의 목적이나 가해행위의 태양 및 피해의 정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야 한다.

[3] 설계도서 등과 다른 위법 시공을 하였다 하더라도 그 건축이 건축관계 실체법규에 저촉되지 않는 경우라면 그에 맞추어 설계변경허가를 받음으로써 설계도서와 시공상태가 불일치하는 위법상태를 시정할 수 있으므로 그와 같은 설계변경허가신청이 있을 경우 행정청으로서는 위법 시공 후의 사후 신청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를 거부할 수 없으므로, 설계변경 승인이 사후에 이루어졌다는 이유만으로 위법하다고 할 수 없다.

[4] 준공검사는 건축허가를 받아 건축한 건물이 건축허가사항대로 건축행정목적에 적합한가의 여부를 확인하고 준공검사필증을 교부하여 주는 것이므로 허가관청으로서는 건축허가사항대로 시공되었다면 준공을 거부할 수 없다.

[5]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와 서초구청 소속 공무원들의 직무의무 위반행위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없다고 한 사례.

이 판례의 주문과 이유 부분에 대해서는 판결문 전문을 참조 바람.98다29797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는 붕괴사고와 서초구청 소속 공무원들의 직무의무 위반행위 사이에 인과관계가 없다는 1999년 12월 21일 대법원 판결에 의해 국가배상이 부정되었다.

인과관계가 부정된 이유는 건축법의 규정은 적합하게 공사가 실시되고 있는지의 여부, 즉 건축물이 허가된 설계도서에 맞게 시공되고 있는지의 여부를 육안으로 확인하는 것이어서 이러한 과정을 거친다고 하여 붕괴사고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설계·시공상의 잘못을 지적하여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할 수 없고, 준공검사는 건축허가를 받아 건축한 건물이 건축허가사항대로 건축행정목적에 적합한가의 여부를 확인하고 준공검사필증을 교부하여 주는 것이므로 허가관청으로서는 건축허가사항대로 시공되었다면 준공을 거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고승덕이 본 사건에서 서울특별시 서초구(상고인)의 소송대리변호사로 뛰었다.

8. 사고의 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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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7월 1일 당시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현장을 찾은 김영삼 당시 대통령(체크무늬 점퍼).
사진 가장 왼쪽에는 이인제경기도지사가 있었고, 그 오른쪽에 김덕룡민주자유당 국회의원[113]이, 오른쪽에 노란 모자를 쓴 조순서울특별시장김용태내무부장관이 있다.[114] '붕괴 직후' 문단의 사진에도 보이지만 오른쪽의 고층 건물은 서울중앙지방법원서울고등법원이다.
문민정부 출범 이후의 대형 악재들이 늘 그렇듯 대부분의 부실공사와 졸속 관리는 이전부터 축적되었던 군부독재 정권 시대의 무리한 실적주의, 무분별한 개발, 관료와 기업의 부정부패, 관료들의 무사안일함 등이 어우러져서 터진 사고다. 즉 그동안 독재의 억압으로 감춰져 있던 압축성장의 폐해들이 민주화가 되고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드러난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 당시 야당 대변인이었던 박지원"그럼 경복궁이 무너지면 흥선대원군 책임이라고 할 것이냐?"는 발언으로 일침을 놓았고 원인은 과거 군부독재 정권이 만든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해야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문민정부의 관리 감독의 책임이 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삼풍백화점도 건축 허가는 전두환 정권 시절에 받았고 공사와 개장은 노태우 정권 시절에 했지만 관리감독 책임이 당시 문민정부에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지방자치제 시행 이전으로 임명직 시장이 행정을 도맡아서 하는 시기였기 때문에 문민정부는 여론의 비판을 피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당시 일반적으로 주거환경을 구성하고 있는 대형 건축물이 졸속으로 건설되어 곧 붕괴할 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그 사건이 발생하기 이전까지 어느 누구도 예상하기는 힘든 일이었다. 실제로 삼풍백화점 붕괴 직후 이 사건의 충격과 여파로 후술하겠지만 대통령이 직접 지시하여 특정 시기에 건축된 건물 전체에 대한 안전검사를 실시했다.

문민정부는 붕괴 장소를 사상 최초로 특별재난지역으로 지정했으며 구조와 사고 수습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그동안 은폐된 부실공사와 잇따른 대형참사를 거치면서 그 동안 미비했던 체계적인 사고대응체계의 수립과 훈련된 전문구조인력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그래서 소방본부가 단순 화재진압뿐 아니라 각종 안전사고에 대한 대응까지 맡도록 하였고, 1995년에는 소방본부에 119구조단을 신설하여 유사시에 즉각 출동할 수 있는 전문구조인력 양성에 힘썼다.[115]

결과적으로 이 사건으로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고층 건물의 설계를 다시 살펴보기 시작했으며 설계부터 확실하게 하자는 인식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전후로 터진 성수대교 붕괴 사고와 함께 20세기 말에 가장 충격적이고도 비극적으로 사람들에게 안전에 대한 의식을 심어준 사고라 할 수 있다. 대중이 부실공사를 '재수없으면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짓'이 아니라 진짜로 사람을 죽이는 짓임을 똑똑히 인식하게 되었음은 이 사고가 끼친 긍정적인 영향이다. 부실공사의 근본 원인이 공사비 착복과 해당 공무원들의 비리라는 점 때문에 이에 대한 관심도 높아져서 나름대로 비리 척결에 한 몫 했다.

사고 발생 이후 대한민국의 건축 기술에 대한 불신이 높아져서 해외 공사 수주율이 뚝 떨어졌지만[116] 그 뒤 공짜나 다름없이 지어주면서 위기를 넘긴 다음 다시 회복되었다. 그럼에도 지금도 외국의 공과대학생 혹은 건축과 학생들 앞에서 대한민국 국민이 건축기술의 우수성을 자랑하면 어김없이 그들 입에서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와 성수대교 붕괴 사고가 떡밥으로 튀어나와 데꿀멍하게 만든다.[117]

시간이 지나서 외국에서 잊힐 가능성도 별로 없는 것이 이 사건은 21세기에도 심심하면 최악의 참사를 꼽을 때 순위권 안에 들어가는 거대한 참사 사건이고 디스커버리 채널에서도 이 사건을 다루는 프로그램을 만든 적이 있다. 즉, 앞으로도 심심하면 관련 프로그램이 제작되고 방영될 만큼 비중이 매우 큰 사건이다. 이러한 두 사건 때문에 나라 망신을 제대로 당한 데다 애꿎은 다른 건설 회사까지 피해를 보는 셈이다.

그런데 당시 언론에서는 이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와 더불어 성수대교 붕괴 사고를 가지고 "국민성이 나빠서 문제다. 빨리빨리로 대표되는 성급한 국민성을 고쳐야 한다."는 식으로 책임을 불특정 다수에게 돌리는 식의 발언들을 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애초에 붕괴 사고가 난 이유는 건물의 안전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고 안전 문제를 희생해서라도 돈을 더 벌으려고 했던 악덕 건물주가 문제였음에도 그런 책임은 전혀 물지 않고 엉뚱하게 국민들한테 책임을 떠넘겼던 것이다[118].

8.1. 안전 평가 실시

붕괴 사고 이후 삼풍이 지어진 것과 비슷한 시기인 1980년대와 1990년대 초에 지어진 건물들에 대한 공포와 회의적 시각이 확산되었다. 이로 인해 정부는 전국의 모든 건물에 대한 안전 평가를 실시했고 그 결과는 매우 충격적이었다!

이로 인해 당산철교를 비롯한 여러 구조물이 철거된 다음 다시 지어졌다.[119] 특히 당산철교의 경우 제2의 성수대교 붕괴 사고가 나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엉망진창이라고 밝혀지기도 했다. 최일구의 기자 시절 업적 중 하나가 바로 이를 고발해낸 것이었다. 다행히 이 이후로 이뤄진 대형참사에 대한 대책과 노력으로 문민정부 후반부터는 삼풍, 성수대교급 대형참사는 줄어들었으나 안전불감증과 과거에 행해진 부실시공, 그리고 수박 겉핥기 식의 안전진단이 누적되며 일어나는 참사는 현재도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다.

8.2. 사회에 미친 영향

사고 이후 일반 국민들과 재한 외국인들 사이에서 '백화점 및 대형건물 기피현상'이 만연해져[120] 백화점 등 유통업체 매출이 줄어드는가 하면 화투판에선 '풍'패 3개면 패도 못 돌리고 죽는다는 로컬 룰인 이른바 '삼풍 고스톱'이 유행했다. 패를 먼저 뗀 사람은 기초공사를 잘못 했다고 2배, 패를 돌린 1등은 부실 공사를 했다고 2배씩 내고 5명 이상이 참가하는 게임이면 그 둘은 다음 게임에서 아예 빠졌다고. # 거기에 1997년 외환 위기까지 겹쳐 백화점이 다시 활기를 띤 것은 2000년 하반기 이후 정도로 추정된다. #

8.3. 건축계에 미친 영향

삼풍백화점은 이른바 무량판 구조(flat slab construction)로 지었다. 이것은 기둥과 바닥 사이에 보가 없이 바닥이 기둥에 직접 연결되어 있는 구조로 실내에 있는 사람이나 물건의 하중과 바닥 구조체의 무게가 기둥으로 직접 전달되는 방식이다. 보를 생략한 구조이기 때문에 부실공사 등으로 기둥과 슬래브 사이 철근 정착에 문제가 생기면 펀칭전단파괴 현상이 발생하여 여러 층이 연쇄적으로 무너져 내리는 위험성이 있는 구조이다. # 무량판 구조 자체는 해외에서는 아직까지도 널리 사용되고 있으나,[121] 국내 건설업계에서 삼풍백화점 사고 이후의 무량판 구조는 일종의 금기가 되면서 건축주나 설계자가 꺼리게 되었다.

삼풍백화점 사고 이후 서울시는 무량판 구조를 채택한 건물에 대하여 전수조사를 하였으며 같은 무량판 구조를 가진 논현동 나산백화점은 붕괴 위험으로 폐쇄되었고[122] 상계동 미도파 백화점은 보강공사 조치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로는 공기 단축 등의 장점이 다시 부각되어 무량판 구조를 채택하는 건물이 다시 늘어나고 있긴 하다. 기둥에 주두나 지판은 물론 철근 정착까지 해당 사항이 구조기준에 명시되어 있고 2방향 슬래브 전단강도 산출 공식도 도입되어 뚫림전단 파괴를 방지하고 있다.

그리고 삼풍백화점 이전까지 대한민국에서는 모든 건축물은 부재를 탄성상태로 보는 허용응력 설계법(WSD)으로 설계했으나 삼풍백화점이 붕괴한 이후 콘크리트 건축물은 극한강도 설계법이나 한계상태 설계법으로 설계한다. 삼풍백화점이 부재의 역학적 해석방식까지 바꿔 버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실제로 극한강도 설계법(USD)과 한계상태 설계법(LSD)이 학계에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사고 당시 기준으로도 40~50여 년 전부터였다. 미국이나 일본 등에서는 1970~80년대 이미 구조기준에 해당 설계법을 도입한 상태였다. 미국의 경우 1956년에 강도설계법을 부록 기재, 1963년에 허용응력 설계법과 같이 본문에 기재, 1971년 허용응력 설계법을 부록으로 수록하고 본문에 강도설계법을 기재하였다. 부록 기재부터 치면 까마득하게 늦게 도입된 셈이다. 대한민국의 콘크리트 구조기준은 2000년 전후로 그간 논의를 거쳐 극한강도 설계법을 전면 도입하고 균열이나 처짐 등에 한정하여 허용응력 설계법을 운용하고 있다. 한계상태 설계법의 경우 도로교 설계기준에 도입되었는데 2015년 개정 기준으로 그 전에는 재량적으로 도입하였다가 그 후부터 기준에 전면도입 되었다. 한계상태 설계법은 차치하더라도 극한강도 설계법 도입에 삼풍백화점 사고가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 사고 발생 후 해외의 건축물 발파 해체 공법 종사자들이 다 몰려와서 삼풍백화점 붕괴 현장을 보고 발파 공법을 한 단계 발전시켰다는 이야기도 있다.

안타깝게도 안전해진 것은 오직 건축공법뿐이었다. 이후로도 계속해서 사라지지 않는 안전불감증으로 시공불량에 의한 대형 안전사고는 끊임없이 발생했고 그때마다 담당자들과 관련 기관들의 부실하고 허술한 대처가 그 사고의 피해를 키우는 패턴이 반복되었다.

8.4. 소방 방재에 미친 영향

상기한 바처럼 당시까지는 이런 대규모 재난에 대한 대비를 전혀 하지 않고 있다가 사태가 발생하자 경찰, 소방서, 군, 자원봉사자들이 모두 달려오긴 했으나 서로 손발이 맞지 않아 구조활동에 우왕좌왕했다. 심지어 주한미군이 도우러 와서 지휘본부가 어디냐고 물어도 답해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구조활동은 말그대로 주먹구구식으로 진행되다가 며칠 후에서야 청와대가 교통정리를 하여 소방본부 중심으로 현장지휘본부를 꾸렸다.

그 당시 달려온 소방대원들은 열심히 구조활동을 펼쳤으나 이런 대규모 재난사태에 대한 대처메뉴얼이나 구조에 관한 의학지식이 없어서 구조자들이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현장에서 죽어가기도 했다.

사실 이런 재난재해 대응 매뉴얼 부재에 대한 지적은 바로 전 해 발생한 성수대교 붕괴 사고 당시부터 지적된 것이었다. 성수대교 붕괴 사고를 조사한 서울지검은 이에 모든 조사 내용과 대응 매뉴얼을 백서 형식으로 발간하였는데, 그 발간 날짜는 1995년 6월 30일이었다고 한다. 삼풍은 백서 발간 불과 하루 전에 무너졌다. 어차피 발간되어도 이에 맞춰 교육하는 데만 시간이 꽤 걸리기 때문에 바로 반영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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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아지라고 해서 부상자들을 후송하는 데에도 어떤 사람을 먼저 보내야 하는지 우선순위를 정한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당장 응급처치를 받지 않으면 죽지만 받으면 살 확률이 높은 환자를 최우선적으로 병원에 보내야 한다. 그런데 당장 병원에 보내지 않아도 생명에는 큰 지장이 없는 경상자들을 우선 근처 병원 응급실로 바로 보내는 바람에, 막상 중상자들을 치료하려면 먼 병원 응급실로 보내야 했다. 그러나 소방차, 구급차, 방송국 차량 등이 섞인 교통대란 속에서 운행이 어려웠다. 결국 중상자를 장시간에 걸쳐 구급차로 이송하거나 구조대원들이 직접 업고 이동해야만 했고 그 결과 이송 중 사망하거나 구급차 또는 근처 병원에서 대기 중에 사망하곤 하였다.

또한 붕괴된 잔해에 깔린 구조자를 위해 무턱대고 잔해를 치워보니 쇼크로 인해 요구조자들이 사망하였고 이후 '잔해를 막 치우면 매몰자들이 쇼크로 사망[123]한다'는 내용이 일선 소방관들에게 전해져 구조 방법을 바꿔 보라는 방침이 전파되었지만 이번에는 잔해를 살짝 들어올리고 요구조자들을 끌어당기는 식으로 구조 방법을 바꿨다가 잔해에 깔린 요구조자들의 다리나 팔 부분이 그 과정에서 절단당하는 불상사도 일어났다.[124] 그리고 끝없이 느린 이송 도중에 과다출혈로 사망했다.

하지만 이 사태를 계기로 중앙119구조본부가 창설되어 국가적 재난에 대비할 수 있는 초석이 되었고 이때 구조활동에서 얻은 노하우도 이후의 크고 작은 구조활동에 큰 도움이 되었다. 특히 이전까지 사람들은 소방서라고 하면 화재 시 불 꺼주는 곳 정도로 생각했는데 이 사태 이후 유압식/전동식 장비들이 적극 활용되면서 사람을 구조해 주는 곳이라는 인식이 제대로 생겼다. 이후 이 노하우들을 가진 119구조본부는 해외의 대규모 재난(지진 등) 발생 시 현장에 파견되어 활동하는 등 국제적 구조활동도 돕는다.

또한 당시 119구급대로 활동하는 구급으로 채용된 소방공무원이 있었지만 간호조무사나 군 의무병 전역자를 특별채용하는 등 소방공무원의 의학적 수준이 매우 낮은 상태였다. 제대로 된 외상 응급처치 장비도 없었고 구출이후 사진을 보면 경추고정대나 척추보호장비 없이 단순히 사람이 직접 들어 옮기거나 들것에만 옮겨지고 있는 사진만 있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이후 의학계에서 응급의료체계가 대두[125]되면서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의 응급의료기금을 통해 119구급대에도 제대로 된 외상 응급처치 장비, 자동심장충격기 등 전문 응급처치 장비가 보급되었다. 전문 응급처치 장비가 보급되자 간호사, 응급구조사도 채용하게 되었다. 이후 이인명구조사 등의 자격을 취득했다던지, 체력이 좋다던지 하여 인사이동 등을 통해 일부가 구조대로 전보하게 되면서 119구조대에도 간호사 출신 등의 인력들이 늘었다.[126]

8.5. 의학에 미친 영향

아이러니하게도 극한 상황에서 인간의 항상성 보존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쉽게 말하면 '사람이 굶어 죽어가는 과정'을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됐다는 얘기다.

사실 현대 사회에서 저런 '굶어 죽어가는 과정'을 볼 수 있을 만큼 극심한 기근을 겪는 국가들은 대체적으로 정치적, 사회적으로 불안한지라(아프리카 내전국들처럼) 안정적인 모니터링이 어렵고 반대로 안정적인 모니터링이 쉬운 국가는 정치적, 사회적으로 안정적인지라 저런 극심한 기아가 일어날 일이 없기 때문에 관찰이 어려웠는데 이 사건이 발생함으로 인해 기존에 보기 힘들었던 사례들을 관찰할 수 있게 되었다. 전쟁의 아이러니와 맥락이 닿는다.

삼풍백화점 붕괴 후 11일만에 발견된 최명석은 구조 후 갑작스런 과다한 영양섭취로 인해서 간에 손상을 입고 자신보다 나중에 구조된 유지환, 박승현보다 더 오랜 기간 병원 생활을 해야 했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이전에 지하갱도 붕괴나 기타 여러 가지 사유에 의해서 장기간 기아 상태의 환자가 갑작스런 영양소 과다 섭취에 대한 신체 반응에 대한 한국의 연구나 임상이 전무해서 벌어진 일화다. 조선시대에는 오래 굶은 사람이 갑자기 보통 음식을 먹으면 위험하므로 묽은 미음 따위를 먹여 서서히 기운을 차리게 해야 한다는 구휼법(일례로 세종실록의 기록)이 알려져 있었지만, 옛날 사람들이 경험으로 체득한 것이었으므로 현대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고 과학적 원리를 검증할 생각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아이러니한 일이 발생한 것이다. 이로 인해 북한에서 타국을 거치지 않고 내려온 탈북자의 경우 자극적이지 않고 적당한 양의 음식을 주도록 되어있다.

압좌증후군(Crush syndrome)이 재조명받기도 했다. 압좌 증후군이란? 무거운 잔해에 짓눌린 동안 조직이 괴사해 독성물질을 품었다가 구조된 후 그것이 혈액을 타고 온몸에 퍼짐으로써 발생하는 증후군이다.

또한 이 사고를 계기로 대형 재난 시 부상자들의 치료를 담당하는 응급 의료체계의 개편이 필요하게 되었다. 당시 붕괴사고로 인한 부상자들은 경상자와 중상자의 분류없이 사고 현장과 가까운 대형 종합병원인 강남성모병원(현재의 서울성모병원)과 영동세브란스병원(현재의 강남세브란스병원)및 삼성서울병원으로 이송했다.
하지만 사고의 규모가 규모이니만큼 예상보다 너무 많은 환자가 몰린 탓에 이 세 병원들은 큰 혼란을 겪었다. 이 병원들이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대형병원이긴 했지만 한꺼번에 부상자들이 너무 많이 몰리자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중상자 응급처치, 수술이 늦어지거나 일단 세 병원으로 이송했다가 다른 병원으로 재이송하는 과정에서 귀중한 시간들을 허비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후 응급의학 및 응급의료체계의 중요성을 두고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1995년에 응급의학이 전문 진료과목으로 인정받았다. 1996년부터 응급의학전문의가 배출되었다.

9. 대중문화에서

한국에서 손에 꼽을 만큼 거대한 인재이면서 반대로 풍요로운 현대 자본주의를 표현할 때 자주 등장하는 백화점이 무너진 사고였기에 문화계에 준 영향도 컸다. 당시 성공만을 향해 무분별하게 앞만 보며 달려가던 한국 사회의 욕망이 위풍당당하게 서있던 삼풍백화점의 붕괴와 함께 추락한다고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한국근현대사에서 반드시 언급되는 사건인 만큼 많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간간히 회자되는 대형사고로 묘사하곤 한다.

10. 사고 이후

1995년 9월에 A동의 잔해가 먼저 철거되었으며, B동은 3년 넘게 남아 있다가 결국 안전 진단에서 위험성이 대두되자 입점업체들을 내보냈고 1998년 10월경에 철거가 시작된 뒤 3개월 후인 1999년 1월 완전히 철거되었다. KBS, MBC

삼풍백화점 인근의 서초동강남 지역에서도 손꼽히는 부촌 중 한 곳이라 고급 아파트에 대한 수요가 매우 높긴 했지만 워낙 악명 높았던 최악의 참사가 일어났던 곳인 만큼 매각이 잘 되지 않을 것으로 보였다. 그러다가 1996년 11월 미원그룹 계열 미원건설(현 동서건설)이 서울특별시청의 부지 매각 공개입찰에서 2만 2700여 ㎡(6870여 평)의 해당 부지를 2052억 4300만 원에 낙찰받아 1999년 8월에 낙찰가 및 지연금을 모두 완납하여 최종 인수했다. 이후 시공사로 대림산업을 선정해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가 2004년에 아크로비스타라는 고급 주상복합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서초동에서도 요지 중의 요지인 삼풍백화점 터가 아크로비스타의 착공 전까지 5년이 훨씬 넘도록 어떠한 건물도 들어섬이 없이 거의 폐허와 같이 방치된 것은 단순히 참사의 이유로 매각을 꺼린 상황에서 비롯된 게 아닌 것이 이미 사고 1년 뒤에 경매에서 대상그룹이 낙찰을 받았기 때문으로, 대상그룹이 부지 경매에서 낙찰받고 금액납부를 3년씩이나 지연해서 공사가 늦춰진 것이다. 대상그룹이 미원 등으로 식품 부문으로 유명한 재벌이긴 해도 당시 2천억 원[146]이라는 거액의 자금을 마련할 정도로 기업 규모나 시가총액 수준이 그리 높은 것은 아니었던 데다 1997년 외환 위기 등의 경제적 위기 상황까지 감안하면 낙찰가 납부를 위한 자금 마련이 내부적으로 쉽지 않았다.

이 사고가 반면교사가 되었는지 16년 후인 2011년 7월 5일 강변 테크노마트 건물 진동 사고가 일어나자 즉시 손님과 상인들이 철수하고 대책회의를 열며 급히 문제 분석에 들어갔다. 근데 건물주 측은 빠른 움직임을 보인 데 반해 입주 상인[147]들과 롯데마트 강변점은 돈 한 푼이라도 벌겠답시고 철수를 곧바로 하지 않았다.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참사로 사고 구조과정에서 지하 바닥이 드러나기 전까지 생존자가 간간이 구조되어 거의 보름간 뉴스는 삼풍 구조 소식이 차지했다. 그런지 몰라도 상당수 다른 사고들은 세월이 지나면 잊혀지는 반면 이 삼풍백화점 사고만큼은 아직도 상당수가 기억하고 가끔씩 얘기하면서 안전불감증에 대해 몸서리치곤 할 정도로 대한민국 국민들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 최악의 참사로 남았다. 그래서 이 사고에 대해 언급한 현대사 책도 있다.

실제 삼풍 참사가 발생한 지 며칠 지나지 않은 시기에 롯데백화점 영등포점에서 영업 중 정전 사고가 났는데 쇼핑하던 고객들이 공포에 떨며 비명을 지르거나 기둥을 붙잡는 등 건물의 진동이 전혀 없었음에도 극도로 불안감을 표출하는 반응을 보였다. 위에서도 언급한 2011년에 발생한 강변 테크노마트 건물 진동 사고에서도 건물에 있던 사람들이 마찬가지의 불안감을 표출하게 된 것은 기본적으로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다만 대한민국의 안전불감증이 불러온 대표적 역대급 참사임에도 이런 사고가 있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지금은 교육 현장에서는 언급되는 일이 드물어졌다는 말도 있다.[148] 그나마 대학 공학윤리 과목에서는 필수 소재가 되었고 외국 교재에서도 자주 인용될 정도이다.[149]

그리고 이 사고의 주요 원인인 이준은 처참하게 몰락했다. 7년 6개월 동안 교도소에서 살았고 재산은 압류당하고 지인들도 관계를 끊었으며 감옥에서 신장병에 걸려서 출소하자마자 병원에 입원했고 결국 출소 6개월 만에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당시 가족들 외엔 아무도 없었다고 하는데, 그의 장례식장에는 큰며느리가 왔다고 한다. 이 사람은 본인도 피해자인데[150] 사건 이후 장본인인 시아버지 이준 대신에 사과했다고 한다. 여론은 이 사람도 피해자였던지라 동정했다고 한다.

당시 구조에 힘썼던 구조 대원들이 20주기를 계기로 한 자리에 모였다.#

이 사건 이후 사망자가 300명 이상 발생하는 사고는 19년 동안 일어나지 않았으나 2014년 세월호 사고가 일어났다. 공식적으로는 299명 사망이긴 한데 실종(미수습)자 5명을 포함하면 304명이 되기 때문이다.

법조인들 중 사법연수원 26기 출신들은 하마터면 이 사고에 휘말릴 뻔 했다. 당시 사법연수원은 서초구 서초동의 서울법원종합청사 3별관[151]에 위치해 있었다. 여긴 삼풍백화점의 바로 길 건너편이다. 사고 당시 연수생들은 예술의 전당에서 국악 공연을 관람하고 있었다. 관람을 마치고 사법연수원으로 돌아와 보니 백화점이 폭삭 무너진 걸 발견한 것이다. 당시 연수생들은 연수원과 가까운 삼풍백화점을 자주 방문했기 때문에 이 공연 관람이 아니었다면 개인적으로 백화점을 방문했다가 사고를 당한 사람이 생겼을 수도 있었다. 사고 이후 처음엔 삼풍주유소에 설치했던 사고수습 지휘본부를 연수원 건물로 이전했고 연수생들도 구조대원들에게 물과 음식을 나눠주고 헌혈에 참여하는 등의 봉사활동을 행했다. 참고로 26기 출신 유명인사들로는 천종호, 송영길[152], 이미선, 도진기 등이 있다. #

이후 삼풍백화점이 가지고 있던 고급스럽고 화려한 이미지는 한화갤러리아갤러리아 명품관(주)신세계신세계백화점 강남점으로 옮겨갔다.[153]

대한민국 토목공학건축학과 종사자들에게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는 그야말로 한국에서 토목과 건축이라는 학문과 건축업이라는 산업 자체를 송두리째 뿌리뽑아 버릴 뻔한 최악의 흑역사이다. 현재도 많은 대학의 토목과나 건축과 강의에서 교수들이 주요 사고 사례들을 언급할 때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가 반드시 꼽힐 정도로 그 여파는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다.

1990년대에 정장 브랜드로 유명했던 캠브리지멤버스(Cambridge Members)의 브랜드명 원소유주는 삼풍섬유공업주식회사였다. 삼풍섬유공업주식회사는 1987년에 (주)캠브리지삼풍으로 변경하였는데 여기서의 삼풍은 삼풍백화점의 삼풍건설산업과는 전혀 무관한 동명이인(법인)이다. 다만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 후 이미지 추락 문제 때문에 (주)캠브리지삼풍은 아예 법인명에서 "삼풍"을 떼내 (주)캠브리지로 바꾸었으며[154] 그 후 2010년에 코오롱에 인수합병되면서 현재 캠브리지멤버스는 코오롱인더스트리 산하의 브랜드이다.

옛 삼풍백화점 부지에 세워진 공동주택 아크로비스타윤석열 대통령이 당선 전부터 거주하던 곳이었고, 취임하고 나서도 용산구 한남동에 있는 관저로 이사할 때까지 거주하던 사저였다.

10.1. 위령비 및 추모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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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풍백화점 참사 위령탑
삼풍백화점 참사 위령비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긴 하나 그 장소에 대해서 말이 많은데, 사고가 일어났던 위치가 아니라 엉뚱하게도 4km나 떨어져 있는 양재시민의 숲에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155] 위령비가 사고 현장에 세워지지 않은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사고 현장에 세우지 못할 경우 차선으로서 300m 이내에 있는 서리풀공원에라도 세우는 게 지극히 정상적인 조치였을 것이나, 사고 현장에서 먼 곳으로 굳이 쫓아낸 이유는 결국 땅값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다.[156] 더군다나 먼저 지어진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위령비에 밀려 한쪽 구석에 있다.[157]

1999년 10월에는 삼풍 사고 때 아내와 아들을 한꺼번에 잃어버린 40대 남성이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이 위령비 옆에 있는 나무에 목을 매어 자살하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뉴스 보도 위령비 근처에는 자그마한 정자도 하나 있는데, 주로 인근 aT센터에 있는 서울 코믹월드 때 쉬는 장소로 자주 쓰인다.[158] 이 위령탑에 관련된 충격적인 일이 하나 더 있는데, 추모를 위해서 혹은 피해자 가족들 등이 놓고 가는 꽃을 가지고 가는 일이 수시로 벌어진 것인지 유족 측이 경고문을 걸어놓기까지 했던 것이다.[159] #

즉 삼풍백화점 부지에 아파트가 세워진 것과 이후 현장에 위령비조차 못 세운 이유는 당시 사고를 잊고 싶어하는 정서와 보상 비용 마련 등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에 가까웠다. 당시 삼풍 또한 이 사건으로 망하는 게 확정되었고, 당시 보험 제도 등도 미비했기 때문에 이렇게라도 해야 피해자들에게 보상을 조금이나마 해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한국에서 사고를 기억하려는 움직임은 21세기가 되어서야, 그것도 대구 지하철 참사라는 엄청난 사건을 겪은 후 간신히 형성되었고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까지 경험하고 나서야 대형 참사를 덮는 분위기가 본격적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10.2. 잔존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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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괴 이후 남은 A동. 중간에 B동을 이어주는 중앙홀 부분도 철거했다.

사고 당시 대책본부가 설치되었던 삼풍주유소는 2011년에 문을 닫았다.

A동에 입주했던 조흥은행 지점은 붕괴 사고 이후 백화점 밖으로 빼고 현재까지도 영업 중이다. 옛 삼풍백화점 뒤쪽(삼풍아파트 후문)에 있는 신한은행 삼풍지점이 삼풍백화점에 있던 지점의 후신이다.[160]

백화점 뒷편의 삼풍아파트의 단지 내 안내도(#사진)에는 2011년까지 삼풍백화점이 표시되었으나 안내도가 교체되어 사라졌다.[161] 인접한 서래마을에 있는 서래아파트에는 아직도 삼풍백화점 마크가 새겨져 있는 쓰레기통이 존재한다. # 쓰레기통은 1994년, 그러니까 붕괴 사고 1년 전에 삼풍백화점 측에서 홍보용으로 아파트에 설치한 것이다. 2018~2019년 쓰레기통이 모두 철거되었다고 알려졌으나 한 블로거가 2022년 반포미도1차아파트에서 쓰레기통을 발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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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5월경부터 단지 안내도가 교체되며 쇼핑센터(삼풍백화점)라는 문구가 아크로비스타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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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항공 사진의 A, B동 1996년 항공 사진의 B동

V-World의 과거 항공 사진으로 지금도 삼풍백화점을 볼 수 있다. 1989년 항공 사진에서는 A, B동 모두 볼 수 있지만 붕괴 사고 이후인 1996년 항공 사진에는 A동은 공터가 되고 B동만 남아 있음을 볼 수 있다. 89년에는 자세히 보면 A동의 냉각탑이 우면로 쪽으로 옮기기 전 삼풍아파트 쪽으로 되어 있고 B동의 지붕이 완성되지 않아서 완공 전의 사진이다.

국토지리정보원 국토정보플렛폼 국토정보맵 항공 사진으로도 나온다. 아크로비스타 검색 후 항공 사진을 찾아보면 삼풍백화점이 건설되고 있을 즈음인 1988년부터 이후까지 나온다.

11. 관련 영상 자료

11.1. KBS 뉴스 9

사고 당일 방영분

11.2. MBC 뉴스데스크

사고 당일 방영분

11.3. 내셔널 지오그래픽 - 삼풍백화점, 예고된 붕괴

내셔널 지오그래픽 - 삼풍백화점, 예고된 붕괴(Deadly Design, 2005)

2005년에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에서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와 관련하여 처음으로 제작한 다큐멘터리다. 붕괴 후 17일간 생존하여 구조된 박승현씨의 사례와 인터뷰를 중심으로 붕괴 상황을 설명하며 미국인 구조 전문가의 인터뷰를 중심으로 원인 분석이 이루어지며 당시 붕괴사고 조사단장인 단국대학교 건축공학과 교수 정란의 인터뷰도 비중 있게 들어가 있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를 다룬 첫 다큐멘터리여서 그런지 몰라도 기승전결이 없고 원인 분석 또한 다소 겉도는 느낌으로 완성도가 비교적 떨어진다. 특히 건축 구조학적인 설명에 너무 치중하여 유사한 다른 참사들의 분석 같은 불필요한 부분까지 할애한 탓에 상대적으로 삼풍백화점 붕괴 원인 및 과정에 대한 내용이 부실하다. 건축공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추천하지만 대형 참사를 소재로 한 일반적인 다큐멘터리로는 비교적 부족하다. 참사 원인 및 과정에 대해서 다각적으로 분석하여 더욱 상세히 알고 싶은 경우라면 이 다큐멘터리보다는 아래 문단에 있는 2007년작을 보는 것을 권한다.

11.4. 내셔널 지오그래픽 - 삼풍 참사의 진실

내셔널 지오그래픽 - 삼풍 참사의 진실(Superstore Collapse, 2007)

다큐 보기

2007년에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은 다큐멘터리 시리즈인 사상 최악의 참사를 통해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를 다시 한 번 다뤘다. 같은 방송사에서 만든 2005년작 다큐멘터리의 구성과는 완전히 다른 스타일로 제작되었다. 생존자 유지환씨를 인터뷰했고 피해자 가족을 대표하여 인터뷰에 응한 생존자 박승현의 친구 서혜진[162]의 사고 당시의 심정 및 관련 에피소드 등을 중심으로 하여 다큐멘터리가 전개된다. 원인 분석에 있어서는 구조 전문가의 인터뷰 중심이었던 전작과 달리 이번에는 정란의 인터뷰가 거의 단독으로 중심이 되어 인용되고 마지막 부분에는 생존자 박승현의 인터뷰도 있다.

세계적인 참사를 소재로 하는 사상 최악의 참사 시리즈 특유의 시간에 따른 설명 및 기승전결이 돋보이며 전작 다큐멘터리의 불필요한 관련 사고 인용을 없앤 대신 사고원인에 대해 한층 자세하고 분석적으로 접근하고 생존자의 경험담 및 피해자 가족들의 사연들도 나름 비중 있게 다루면서, 참사에 대해 상당히 다각적으로 접근하여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를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 중에서 완성도가 가장 뛰어나다. 2005년에 제작된 전작은 설계오류 및 오랫동안 이루어진 하중과도와 냉각탑 때문에 구조물이 약화되어 건물이 결국 무너졌다는 식으로 건축구조학적인 원인 분석으로만 결론을 내 버렸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단순히 부실시공이라는 원인 이전에 테러, 가스 폭발 등 조사 초기에 거론되었던 다양한 원인 및 가능성들에 대해서도 분석적으로 접근을 시도하면서 자세히 파고 들어가 말미에 냉각탑 이동 후에 진동에 의한 구조물의 약화 과정까지 상세하게 묘사하여 사고의 원인과 전반적인 정황 및 현상에 대해 기승전결을 가지고 차분하게 설명하여 완벽히 이해를 시켜준다.

전작에서 재연 배우의 어색한 발음 및 연기 문제를 인지하고 있었는지 이번에는 생존자 대역부터 사고 관련 책임자 및 기타 주변 인물들 대역까지 모조리 오리지널 한국인 재연 배우들을 투입시키고 필요한 장면들은 한국 현지 장소에서 촬영하는 등 세심한 부분까지 개선을 했으나 한국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에서 방영되었을 때는 영어 내레이션과 유지환이나 정란 교수 등의 인터뷰에서 나오는 한국어는 전부 영어 더빙 처리된 상태에서 한국어 더빙 편집을 전혀 하지 않고 자막만 집어넣어 방송되었고 심지어 해외 방송분에서는 버젓이 있는 일부 붕괴 과정 장면들과 유지환 씨와 박승현 씨의 일부 인터뷰 내용들이 임의로 편집되어 버리는 등[163]의 문제점 때문에 다소 아쉬움을 남겼다. 전작은 한국어 더빙까지 제대로 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내용 중 사실과 다른 부분이 하나 있는데 본 다큐멘터리에서는 붕괴 2년 전에 에어컨 실외기를 옮겼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개장 전에 옮겼다. 2005년작에도 있었던 문제.

11.5. 디스커버리 채널 - Blueprint for Disaster

디스커버리 채널 - Blueprint for Disaster(재앙의 청사진)

보기

Discovery 채널의 다큐멘터리다. 과거 대한민국에도 몇 번 방영된 적이 있다. 사고 당시 생존자와 구조대원, 사고 원인을 조사한 박사들과의 인터뷰가 전부 실려 있고 다른 붕괴사고와 비교하는 등 붕괴 원인을 자세히 다룬다. 단점이 있다면 재연 배우가 외국인이기 때문에 발음이 어색하다.

퀄리티 자체는 좋은 편으로, 사상 최악의 참사처럼 당시 조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인터뷰로 구성되어 있다. 특이사항으로 지진으로 인해 붕괴된 것인지 분석하는 장면도 들어갔다.

이 다큐멘터리는 이후 한국의 다른 케이블 채널에서도 방영되었다고 한다. 다만 정식으로 허가를 얻어 방영은 했지만 디스커버리 채널의 마크 등은 나오지 않았다.

Blueprint for Disaster는 전세계에서 일어난 재난을 다루는 다큐멘터리인데,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는 이 다큐에서 나온 재난 중 사망자가 가장 많다.

11.6.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 4회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에서 2015년 삼풍 20주년을 맞아 제작되었다. 당시 사고 직후 영상을 공개했고, 유가족들의 증언, 난지도 매립장에 잔해를 버린 것, 그리고 최후의 3인 중 유지환을 인터뷰했다.

11.7. KBS 다큐 인사이트 모던코리아 시대유감, 삼풍

#다시보기(KBS 홈페이지)

2020년 2월 6일 KBS '다큐 인사이트'의 연속기획 'KBS 아카이브 프로젝트 - 모던코리아' 6부작 중 제4부로 방영되었다. 88/18의 이태웅 사단[164]이 참여하고 걸어서 세계속으로의 염지선 PD가 CP를 맡았다. 삼풍백화점을 다룬 해당 회차는 구상모 PD가 연출하였다.

2021년 기준으로 가장 최신의 다큐멘터리이면서 KBS 아카이브 내부에 발굴되지 못하고 잠들어 있던 당시 자료를 풍부하게 인용하였다. 또 러시아 모처에 살고 있는 이한상 당시 삼풍백화점 사장(이준의 아들)을 찾아내어 인터뷰하면서 유가족 중 한 분과 교차 편집하여 인상적인 영상을 만들어냈다. 한국 현대사에서 차지하는 역사적 의미를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12. 삼풍백화점 괴담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삼풍백화점 괴담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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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관련 어록

탐욕의 종말 삼풍 대학살
- 1995년 7월 13일 한겨레21 제67호 표지 문구
무너진 백화점, 끊겨진 다리는 무엇을 말하는가. 그 어느 누구도 비난할 수 없다, 우리 모두 공범일 뿐
- N.EX.T, 세계의 문 Part 2-우리가 만든 세상 중
“다음 곡이,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165]인데요. 사실, 상식적이지 않은 것이 상식화되어가는 그런 모습들이 많습니다. 주변에. 오늘 뭐, 또. 비상식적인 일들이 또 한번 벌어졌더군요. 삼풍백화점 무너졌다고 그래서.. 일찍 오신 분들은 모르시죠? 900명이 뭐 이렇게 깔려있다고.. 뭐 여튼 정확한 숫자는 모르겠고요. (객석이 술렁이자) 술렁거리시네.. 다 끝나고 확인해보십시오. 무너졌다 그래서, 걱정돼서 집에 전화해봤더니 집사람이 삼풍백화점에 갔대요. 그래서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봤더니 3시 반에 나왔대요. (웃음소리 들리자) 무슨 얘기인지... 참. 황당한 일이 많이 벌어져서 마음이 좀 붕~뜨는 것 같습니다. 하여튼, 많이들 안 다쳤으면 좋겠고요.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 시작하겠습니다.”
김광석, 1995년 6월 29일 당일, KMTV 슈퍼콘서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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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관련 문서

15.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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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대한민국의 대형 사고 및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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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일<colcolor=#000>사망사건명
2024년 6월 24일
23
2022년 10월 29일
159 이태원 압사 사고
2020년 4월 29일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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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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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5월 29일
27 25 헝가리 유람선 침몰 사고
2018년 1월 26일
51 밀양 세종병원 화재 사고
2017년 12월 21일
29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 사고
2017년 3월 31일
22 스텔라 데이지호 침몰 사고
2014년 12월 1일
27 501오룡호 침몰사고
2014년 5월 28일
21 장성 효사랑요양병원 화재 사고
2014년 4월 16일
299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2010년 12월 13일
22 제1인성호 침몰 사고
2010년 3월 26일
46 천안함 피격 사건
[ 200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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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000>사망사건명
2008년 1월 7일
40 이천 냉동창고 화재 사고
2003년 2월 18일
192 대구 지하철 참사
2002년 4월 15일
130 중국국제항공 129편 추락 사고
2001년 9월 25일
25 제7호 태창호 사건
2001년 9월 11일
2,996 28 9.11 테러
2001년 7월 24일
20 진주 관광버스 추락 사고
2000년 10월 27일
22 장수 88올림픽고속도로 추돌 참사

[ 199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사건명
1999년 10월 30일
56 인천 인현동 호프집 화재 참사
1999년 6월 30일
23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 사고
1998년 10월 29일
27 부산 범창콜드프라자 화재
1998년 7월 31일~8월 1일
103
1997년 9월 3일 65 21 베트남항공 815편 추락 사고
1997년 8월 6일 228 대한항공 801편 추락 사고
1996년 7월 26일
20 철원 군부대 산사태
1996년 4월 4일
21 양평 버스 추락 사고
1995년 8월 21일
37 경기여자기술학원 화재
1995년 6월 29일
502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1995년 4월 28일
101
1994년 10월 24일
29 충주 제5호 화재사고
1994년 10월 21일
32 성수대교 붕괴 사고
1993년 10월 10일
292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1993년 7월 26일
68 아시아나항공 733편 추락 사고
1993년 6월 10일
20 연천 예비군 훈련장 폭발 사고
1993년 4월 19일
34 논산 정신병원 화재
1993년 3월 28일
78
1993년 1월 7일
28 우암 상가아파트 붕괴사고
1992년 10월 22일
28 대양하니호 침몰 사고
1991년 11월 3일
22 인제 버스 추락 사고
1990년 11월 4일
21 소양호 버스 추락 사고
1990년 9월 1일
25 영동고속도로 섬강교 버스추락사고
[ 198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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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000>사망사건명
1989년 9월 17일
24 전북 모래재 버스 추락 사고
1989년 7월 27일
79 대한항공 803편 추락 사고
1988년 3월 25일
22 안양 봉제공장 화재
1987년 11월 29일
115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1987년 8월 29일
32 오대양 집단자살 사건
1987년 6월 16일
29 극동호 유람선 화재 사건
1986년 7월 30일
21 고창 거룻배 전복 사고
1985년 1월 11일
38 양강교 버스 추락사고
1984년 3월 24일
29 영덕 시루봉 CH-53 추락 사고
1984년 1월 14일
38 부산 대아호텔 화재 사건
1983년 10월 9일
25 아웅 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
1983년 9월 1일
269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1983년 4월 18일
25 대구 초원의집 화재
1982년 6월 1일
53 청계산 C-123 추락사고
1982년 4월 26일
62 우순경 사건
1982년 2월 5일
53 제주 C-123 추락사고
1981년 11월 22일
33 부산 금정산 버스 추락사고
1981년 5월 14일
55 경산 열차 추돌사고
1981년 2월 28일
24 대림호 침몰 사고
1980년 6월 5일
23 광주 지하살롱 화재 사고
[ 197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사건명
1979년 10월 27일
26 은성탄광 화재
1979년 4월 14일
44 함백 탄광 폭발사고
1978년 7월 23일
33 한강대교 버스 추락 사고
1977년 11월 11일
59 이리역 폭발사고
1976년 10월 28일
34 동해 어선 조난 사고
1976년 5월 18일
23 답곡리 버스 추락사고
1976년 2월 28일
32 화천 버스 추락사고
1974년 11월 3일
88 대왕코너 화재사고
1974년 6월 28일
28 대한민국 해경 경비정 제863호 침몰 사건
1974년 2월 22일
159 YTL30호 침몰 사건
1973년 8월 12일
32 영동역 유조열차 폭발 사고
1973년 5월 16일
22 영일 건널목 열차 추돌사고
1972년 12월 24일
30 파크로버호 침몰 사고
1972년 12월 2일
53 서울시민회관 화재 사고
1972년 8월 1일
26 의암호 버스 추락 사고
1971년 12월 25일
166~191 대연각호텔 화재
1971년 10월 13일
20 남원역 열차 추돌사고
1971년 5월 10일
80 청평호 버스 추락 사고
1971년 5월 10일
31 질자호 침몰 사고
1970년 12월 15일
326 남영호 침몰사고
1970년 11월 5일
31 의암호 선박 전복 사고
1970년 10월 14일
46 모산 수학여행 참사
1970년 8월 21일
25 추풍령 고속버스 추락 참사
1970년 4월 8일
33 와우 시민아파트 붕괴사고

[ 196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사건명
1969년 9월 17일
37 창녕 기관선 - 남지교 충돌 사고
1969년 1월 31일
41 천안 열차 추돌사고
1968년 10월 30일
48 산청 버스 추락 사고
1968년 1월 8일
41 함양 버스 추락 사고
1967년 10월 16일
42 금릉 버스 추락 사고
1967년 9월 15일
29 삼양수산 원양어선 침몰 사고
1967년 4월 8일
80 서울 청구동 C-46 추락사고
1967년 1월 19일
39 해군 당포함 격침 사건
1967년 1월 14일
93 한일호-충남함 충돌 사고
1967년 1월 1일
41 서문시장 화재
1966년 1월 18일
22 중구 남산동 판자 아파트 화재
1964년 7월 29일
95+ 서해 어선단 실종 사고
1963년 10월 23일
49 여주 조포 나룻배 침몰 사고
1963년 6월 25일
70 거제 장승포 산사태
1963년 1월 18일
140 연호 침몰 사건
1962년 9월 7일
36 한남동 나룻배 침몰 사고
1960년 3월 2일
62 부산 국제고무공장 화재
1960년 1월 26일
31 서울역 압사 사고
[ 195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 사건명
1959년 7월 17일
67 부산 공설운동장 압사 사고
1957년 2월 22일
21 한강 미 공군 C-124A 추락 사고
1956년 1월 12일
66 태신호 화재
1955년 3월 2일
42 부산역 열차 화재
1953년 11월 27일
29 부산역전 대화재
1953년 1월 31일
56 오산 건널목 추돌 사고
1953년 1월 25일
66 행운환 침몰 사고
1953년 1월 9일
330 창경호 침몰 사고
1952년 11월 16일
25 강릉 공항 미 공군 C-46D 추락 사고
1952년 10월 16일
44 양평 미 공군 C-119C 추락 사고
1951년 7월 11일
94 제5편리호 침몰 사고
1951년 7월 11일
30+ 제13호 침몰 사고
1950년 6월 30일
23 부산 미 공군 C-54G 추락 사고
[ 194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사건명
1949년 10월 5일
71 평해호 침몰 사고
1949년 8월 18일
51 대강 터널 질식 사고
1948년 6월 8일
150 미군 독도 오폭 사건
1947년 8월 19일
23 태양환호 침몰 사고
1946년 11월 13일
42 영등포역 열차 충돌 사고
1946년 10월 22일
59 어청도 기뢰 폭발 사고
1945년 9월 29일
73 대구역 열차 충돌 사고
1945년 8월 24일
549​~𔁳,000+
우키시마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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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22년 11월 14일 사고 발생 10000일 경과.[2] 한국 최초의 500명대 사상자를 남긴 참사이자 6.25 전쟁 같은 국가적 재난을 제외한 기준으로 한국 최다 인명 피해다. 부실한 초기 건설 단계와 막대한 피해로 인한 구조 지연으로 인해 수많은 사상자를 남겼으며 이후 세월호 참사이태원 압사 사고 등 100여 명대의 인명 피해를 기록한 사고가 발생하였음에도 수십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최악의 참사 기록이며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손님이 가장 많이 오는 주말이 아닌 평일(목요일)이었고 당시 냉방시설 고장으로 인해 더위를 못 이기고 건물 바깥으로 나간 손님들이 많았고 수많은 붕괴 전조 현상이 나타나며 직원들이 손님을 뒤늦게나마 대피시켰기 때문에 사망자가 500여 명에 그쳤다는 것이다. 만약 붕괴 사고가 주말 피크 시간대에 냉방시설도 잘 작동할 때 발생했었다면 사망자는 몇천명 이상 단위로 상상도 못할 엄청난 수로 늘어났을 것이다.[3] 시신이 발견되지 않은 사망추정자.[4] 전부 지하에서 구조되었다. 1~5층에 매몰된 사람 중에는 생존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다.[5] 자력으로 탈출했거나 붕괴 잔해 때문에 다친 사람이다. 아래에서 후술하겠지만 붕괴 조짐이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무사히 대피하거나 생존한 사람도 몇 명 있었다.[6] 크랩 KLAB의 영상[7] 한때 오후 5시 52분에 붕괴했다는 의견과 오후 5시 57분에 붕괴했다는 의견으로 나뉘었었고, 위키백과나무위키를 포함한 대다수의 칼럼에는 오후 5시 52분으로 기재되어 있었으나 가장 중요한 붕괴 당시 현장 CCTV 영상에는 오후 5시 57분으로 표시되어 있었고 후술할 생존자들의 증언으로 봐선 오후 5시 57분에 붕괴되었을 가능성이 높아 현재는 57분에 붕괴되었다는 것이 중론이다.[8] 참고로 1위는 23만 명이 사망한 1975년 중국의 반차오댐 붕괴 사고. 댐 붕괴 사고를 제외하면 기원전 27년 이탈리아 원형극장 붕괴 사고(2만여 명), 2013년 방글라데시 라나 플라자 붕괴사고(1129명)에 이은 3위이다.[9] 1975년에 문정일, 조성룡 건축가에 의해 설립되어 1980년대 중반~1990년대 초반에 전성기를 구가했었던 서울의 건축설계업체로, 아시아선수촌아파트, 올림픽선수기자촌아파트, 분당시범단지 설계에 참여한 적이 있으며 삼풍백화점 붕괴사고가 일어나기 고작 8개월전에 상명초등학교, 중ㆍ고등학교 건축설계로 1994 한국건축문화대상 대상을 수상할 정도로 유망했었던 건축설계 업체였으나,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에 연류되어 이미지가 실추되면서 결국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나마 조성룡 건축가는 삼풍백화점 설계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똥을 피해서 조성룡도시건축을 따로 설립해 독립해 나가면서 이후로도 승승장구 했으나, 문정일 건축가는 이전까지만 해도 대한민국의 유망한 건축가 중에 하나였으나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이후 삼풍백화점을 설계한 건축가라는 오명을 쓰고 커리어가 끝장나 버렸다. 다만 이쪽은 정말로 억울한게 설계는 정상적으로 했는데 삼풍건설산업이 시공하면서 독단적으로 설계를 멋대로 고치고 부실시공을 한것이었기 때문. 하지만 이런 내막이 잘 알려지지 못하는 바람에 억울하게 같이 독박을 써버린 것이었다.[10] 1988년 당시 신문 광고에 광고를 낸 바 있는데, 신문 광고에 냈던 건물 샘플은 이 문단의 첫 번째 자료 사진으로 나와있다.[11] 대치동은마아파트에 있는 종합상가를 생각하면 쉽다. 은마아파트의 종합상가는 크기는 당연히 백화점보다는 작지만 당대 일반적인 아파트 상가보다는 큰 지하 1층~지상 4층 규모로 되어있으며, A데크와 B데크로 나뉘어 운영할 정도로 크다. 게다가 옆의 하이마트 본점 및 본사보다 부지도 더 넓다.[12] 다만 우성건설도 삼풍백화점 붕괴 이후 같이 망하기는 했다. 사실 근본적인 원인은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에 신도시 건설로 일감이 크게 늘어나면서 무분별하게 사업 확장을 했다가 콘도와 백화점 사업이 별로 수익을 거두지 못한 데다가, 부동산 시장이 침체기에 들어가면서 미분양 물량이 쌓여서 이를 감당하지 못한 것이지만 삼풍백화점을 시공했다는 사실이 알려져서 이미지에 큰 타격을 받은 것도 사실이었다.[13] 사실 대형마트도 아닌 명색이 백화점인 곳이 특수 목적으로 낮게 지어진 것이 아니라면 5층보다 낮은 게 더 이상하긴 하다. 삼풍백화점보다 반세기 전인 1937년에 지어진 화신백화점이 지상 6층이었으니. 어지간하면 8~10층 이상인 요즘 백화점들은 물론이고 당대에도 백화점이라 하면 최소 5층 이상으로 짓기는 했다. 문제는 애초에 이 건물의 구조 자체가 백화점으로 지어서는 안 되는 건물이었다는 것.[14] 당연하지만 이럴 경우 지하로 내야 한다. 1980년대 당시는 소소한 부분에서의 건설 비리와 부실공사가 빈번하다 못해 아예 일상적일 만큼 횡행하던 시절이었다. 오히려 그렇지 않은 기업이 더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 이를 감독해야 할 건설 공무원들도 거의 대부분 건설사들과 긴밀하게 유착되어 있어 시공사가 당초 설계를 무시하고 발주처의 요구대로 조금 증축 및 개축하는 것 따위는 얼마든지 가능했다. 그런 시절에 건설사가 발주처의 요구를 거부하고 붕괴 위험성을 경고할 정도였다면 삼풍백화점의 무리한 증축이 당시로서도 정신 나간 짓이었음을 알 수 있다.[15] 백화점은 일반 가게나 슈퍼마켓, 편의점과는 달리 건물의 규모도 상당히 크고 서적, 가전제품, 가구, 차량 등 적게는 수천 킬로그램에서 많게는 수백 톤이 나가는 고가의 물건들을 보관 및 진열하는 곳이기 때문에 증축할 때는 당연히 안전을 꼭 확인해야 한다. 설사 증축한다고 해도 고층에는 무거운 짐을 절대로 올리지 못하게 하기에 대형마트나 백화점의 식당가는 거의 대부분 지하에 있다. 예를 들면 광주광역시 북구 유동에 위치한 NC백화점 광주역점과 같이 고층에 무거운 시설을 설치할 때는 아래의 설명처럼 그런 점들을 염두에 두고 더욱 보강해서 짓는다. 그곳은 지하 1층에 푸드코트가 있고 A동 5층에 식당가가 있으며, 심지어 B동 5층에는 수영장을 포함한 스포츠센터도 있었다.(스포츠센터는 지금은 운영을 종료했다.) 그러나 삼풍백화점은 이런 것들도 아예 무시하고 5층에 물을 이용하는 온돌을 깔고 무거운 냉장고와 가스 시설까지 올리는 등 무리한 설계 변경까지 시도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수많은 전문가가 이를 보고 "저 따위로 지어놓고도 5년이 넘게, 설계를 바꾸고도 1년 버텨온 게 용하다!"라고 말했을 정도였다.[16] 한옥의 지붕에 대들보를 설치한 이유도 지붕의 무게가 분산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17] 이는 공사 관계자가 공사 비용 착복을 위해 자재를 줄였기 때문으로 밝혀졌다. 기둥이 버틸 수 있는 하중은 그 단면적에 비례하고, 특히 기둥이 원 모양이라면 원의 단면적은 반지름의 제곱에 비례하므로 실제 만들어진 기둥은 기존 설계와 비교해서 고작 51% 정도밖에 버틸 수 없게 되었다.[18] 불법 구조 변경 공사를 한 부분에는 기존 4층에 있던 가정용품 매장들과 유아용품 매장들을 일부 이동시키고 4층에는 가구 매장들을 추가 입점시켰다. #[19] 출처[20] 당시 삼풍건설산업 입주. A동이 붕괴될 때 이한상 사장 등이 대책을 마련하고 있던 장소였다.[21] 당시 한진투자증권(現 메리츠증권), 쌍용투자증권(現 신한투자증권)[22] 당시 서울은행(현재 하나은행으로 합병)[A] B동 4층에서 지하층 확장공사를 통해 지하1층으로 이동[A] [A] [B] A동 2층에서 이동[27] 특히 쇼핑몰이 몰린 A동이 무너진 탓에 인명 피해가 더 심했다.[28] 이 또한 담당 행정 기관의 승인도 받지 않고 시행하였기 때문에 당연히 불법이었다.[29] 현재는 난방 배관 대신 전기 열선을 이용한 전기 온돌도 있고, 이는 무게가 훨씬 가볍고 설비도 간단한 편이지만 이런 시설이 본격적으로 보급된 것은 2000년대 이후이다. 단점은 전기 요금 누진제가 적용되는 가정에서는 쓰기가 부적절하다는 것이다.[30] 그나마 경신대기근 이전에는 난방을 포기하고 복층을 택한 2층 건물이 종종 있었으나 난방 효율의 문제로 조선 후기에는 더 이상 생겨나지 않았다.[31] 근골격계에 악영향을 주며 노인이나 어린이, 장애인 같은 심신미약자들은 취하기 힘든 자세다.[32] 1990년대 초반까지는 백화점 고층에 식당가(푸드코트)가 위치하는 경우가 흔했다. 즉 지하 1층 식품 매장, 1~4층 매장, 5층 식당가 형태가 보편적이었으나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이후에 바뀐 것이다. 사실 이는 일본의 백화점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21세기에는 건축 기술이 개선되어서 고층에 식당을 차려도 될 정도로 안정된 시공을 하고 있다. 롯데월드몰이 그 예시로, 여긴 아예 8~10층을 파이프만 5천 개인 대형 파이프 오르간이 있는 콘서트홀로 쓰고 있다.[33] 실례로 특허청이 입주한 정부대전청사 4동은 면적당 하중 제한이 340kg/㎡인 1, 2, 3동과 달리 두 배가 넘는 700kg/㎡이다. 쉽게 말해 다른 건물보다 두배 더 튼튼하게 지었다는것이다. 당연히 특허청이 보유한 방대한 서류들의 무게를 견디기 위함으로, 2023년 기준 도서관 서고의 등분포활하중인 750kg/㎡보다는 덜하지만 사무실 문서보관실의 500kg/㎡은 훨씬 넘는다. 정부대전청사 준공 당시에는 개가식 서고가 700kg/㎡이었다.[34] 후에 경영난으로 인해 2021년에 영업을 종료했다.[35] 물론 층수가 높은 곳에 서점이 입점한 건물도 다른 지역들에도 꽤 많지만, 이런 곳들은 당연히 사전에 관련 규정을 철저히 지켜서 건축하였다. 가령 부산광역시에 있는 서점영광도서는 이름처럼 건물 자체가 서점이다. 당연히 설계 단계에서부터 책의 무게는 물론 서고의 무게까지 모두 철저하게 고려했다. 예전에는 건물 통째로 서점이라 골조만 튼튼하게 하면 되었지만 리모델링 이후에는 서점은 지하층과 1층에 있다. 2층은 문구점이고 3층부터는 서면답게 병원이다. 하지만 중간에 도시락집 정도까지는 있다. 이것도 다 사전에 계산한 것이다. 애초에 영광도서에서도 출입구 앞에 전단지를 붙여놓고 도시락 비치대를 만들어 놓았다. 애초에 건물주가 영광도서의 관리자이다. 그러니 처음부터 책의 무게 정도는 기본적으로 반영될 수밖에 없다.[36] B동 5층에 수영장을 운영하였다. 수영장도 물이 몇십 톤 단위로 자주 이동하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건물에 무게가 많이 더해져 악영향을 준다. 물이 얼마나 무거운지는 대야물통, 주전자, 양동이, 항아리, 옹기, 페트병 등 물을 담을 수 있는 각종 통들이나 비닐봉투를 한 번 떠올려 보자. 이것들은 아무것도 담겨져 있지 않을 때는 가벼워서 한 손으로 들어도 되지만 물을 한 통 담은 뒤에 이동시키려고 하면 너무 무거워서 한 손 따위로는 어림도 없고 두 손으로 들어서 옮겨야 하며, 심지어는 두 사람 이상을 동원시켜야 하기도 한다.[37] 당시 A동 건물이 이상해서 B동으로 이동한 사람도 있었고 붕괴 당시 B동으로 대피한 사람도 있었다.[38] 파이프 파손이나 콘크리트 균열 등으로 물이 새는 것도 있지만 결로 현상 등으로 인해 생기는 물방울 등 여러 문제점들이 있다. 이 때문에 옥상에 수영장이나 연못 등이 있는 건물들은 최상층 사이에 따로 공간을 만들거나 층고를 더 높게 잡는다.[39] 수영장 물만 해도 수 톤이나 되는데 그 물을 상층부로 쏘아올리려면 그만한 배수로와 파이프관, 펌프는 물론이고 이걸 관리 및 유지하는 비용 자체가 상당히 많이 들어간다.[40] 서점이 지상에 있는 경우도 있지만 이들은 상가 배치상 순위가 밀려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경우가 대부분이며, 이런 경우에도 당연히 충분히 건물을 보강한 후에 입점한다. 위에 쓴 영광도서가 바로 그 예시.[41] 일부 대형마트에서도 2000년대 이후에도 2층, 높으면 4층 혹은 5층 쯤에 푸드코트를 설치하기도 한다. 다만 이 경우에도 온돌 따위는 절대로 깔지 않고 무조건 의자와 식탁 구성으로 딱 고정한다.[42] 당시 대형 건물 에어컨들은 냉각수를 증발시켜 열을 흡수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20세기에 지어진 대형 건물 위나 근처에 있는 볼록한 형태의 냉각탑들이 전부 이런 방식을 사용한 에어컨 실외기다. 이 방식의 실외기는 기존에 이미 설치된 곳들을 제외하고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이후 새로 설치하는 것을 전면 금지했다.[43] 당시 한미은행, 조흥은행, 서울신탁은행, 한진투자증권이 입점해 있었다.[44] 도서관이나 서점은 1mm²에 평균 6g 남짓 하중을 견딜 수 있게 설계하는데, 이는 일반 주택의 두 배 정도 되는 수치다. 부산의 영광도서가 대표적인 사례다. 물론 여기는 처음부터 서점을 입주시킬 계획으로 건물을 지었기 때문에 빡빡하게 설계되었다. 그런데 삼풍백화점은 일반 주택보다도 못한 하중 설계를 적용한 상태에 서점까지 입주시켰으니 한계점을 넘어도 한참 넘은 상태였다.[45] 종이는 생각보다 무거운 물건이다. 이사할 때도 부피당 무게가 가장 나가는 사물이 책이며 이삿짐 센터 직원들이 벽돌이라고 부르면서 기피하는 물건 중 하나가 바로 책이다. 물론 지금도 백화점 상층에 서점이 있는 경우가 여럿 있지만 이는 서점이 입점할 것을 예상하여 그만큼 미리 튼튼하게 지은 것으로 완공 이후에도 수시로 점검한다. 이런 특수한 사정이 있지 않은 이상 서점은 어지간하면 1층이나 아예 지하에 자리잡는다. 여기에다가 2010년대 이후처럼 스마트폰이 활성화되고 독서량이 줄은 사회도 아니어서 책의 수요가 많았다.[46] 파일:attachment/punching1.jpg 무량판 구조의 건물에서 바닥과 지판이 기둥으로 전달할 수 있는 하중을 넘어서면서 바닥이 처지고 기둥이 바닥을 뚫고 올라오는 현상이다. 건물 기둥과 지판의 결속 구조가 무량판 구조물 안전성의 핵심임을 감안하면 당시 삼풍백화점 건물은 구조적으로 치명적인 손상을 입은 상황이었고 이는 다시 말해서 이미 건물이 무너지기 시작했음을 의미했다. 위의 실험에서 나무젓가락이 알루미늄 포일을 뚫고 올라온 모습을 생각하면 된다.[47] 건물이 뒤틀리면서 천장에 있던 상수도관이 끊어져 물이 샜을 가능성이 높다.[48] 삼풍백화점은 당시 전국 백화점 영업이익의 7위를 기록할 정도로 승승장구했지만, 이는 삼풍백화점만 그렇고 원래 본업이었던 삼풍건설은 도급순위가 800위대를 넘어가는 등 거의 망하기 직전이었다. 사실상 그룹의 운명을 삼풍백화점에 전부 맡겨놓은 셈.[49] 당시 삼풍그룹의 자산 규모는 4천여억 원이었는데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무려 1조가 넘는 규모다. 더군다나 1997년 외환 위기가 닥치기 전이라 외부적 위험 요소도 없었다. 그래서 만일 삼풍백화점 사고가 없었거나 인명 피해 없이 건물만 무너졌더라면 새로운 경영진으로 물갈이를 한 후 현재까지도 기능을 했을 수도 있다. 물론 당시에도 핵심 계열사였던 삼풍건설산업이 죽을 쑤고 있어서 어차피 IMF를 전후로 무너질 가능성이 높긴 했으나 설령 그렇다고 해도 이름 자체는 남아있었을 가능성도 있다.[50] 붕괴 후 한동안 잠적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후에 잔해 속에서 숨진 채로 발견되었다.[51] 4층 천정에 해당한다. 흔히들 옥상부터 내려앉은 것으로 잘못 알고 있으나 실제로는 앞서 설명된 잘못된 옥상 냉각탑 운용으로 옥상층 균형이 쏠리면서 충격으로 훼손된 5E 기둥이 비틀렸고, 이 영향으로 4층 슬래브 접합부가 파괴되면서 내려앉은 것이 시작이었다. 옥상층은 거기에 뒤딸려 내려온 것이다.[52] 붕괴의 원인은 삼풍백화점과는 다르지만 9.11 테러제1 세계무역센터제2 세계무역센터붕괴한 양상도 최상층부터가 아닌 피격층에서부터 붕괴가 시작되었으므로 삼풍백화점과 동일하다.[53] 위 자료사진은 백화점 맞은 편 삼보상호신용금고 건물 5층에서 촬영되어 서울시에서 발행한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백서> 본문 첫장에 인용된 사진이다. 해당 문건에는 이 사진 외에도 구조대가 오기 전 상황 사진 4장이 시간 순서대로 나열되었고 사진 촬영자 신상 정보까지 있다. 이 사진 자료들은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이후 최초의 기록물이기에 가치가 대단하다. 다큐멘터리, 영화 등 많은 삼풍백화점 관련 매체들이 이 사진자료를 참고하였다. # 여기 들어가면 상단 사진이 찍힌 각도에서 담은 여러 사진도 볼 수 있다.[54] 단, 1~5층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죽었다는 뜻은 아니다. 사진에서 보듯 붕괴되지 않고 위태롭게 서있던 A동의 기둥부에 매달려 있던 생존자들도 있었다. 여기서 단 한 명도 생존하지 못했다는 건 매몰된 사람들 중에선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는 것.[55] 96' 기자가 본 100대 뉴스, 한국편집기자회. 471 페이지[56] 원래 A동 5층 식당가에 있었으나 붕괴 당일에는 5층이 폐쇄되어 1층 로비에 임시매장을 설치했다.[57]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 -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20주기... 우리는 죄인이 아니다 '편 중[58] 건축에 석면 사용을 완전 금지하는 법률은 2009년 1월 1일에 제정되었다.[59] 지상 1층은 출입구와 가까웠기 때문에 붕괴 당시 바로 대피한 사람이 많았다. 지상 2층은 관리실 직원들이 고객들에게 대피시키기 시작한 상태였기 때문에 연결통로를 통해 B동으로 대피한 사람들이 많았다. 다만 대피 도중 중앙홀 연결통로가 끊어져서 그 자리에서 사망한 사람들도 있었다.[60] 사고 발생 시간이 마침 저녁거리를 사러 장 보러 나온 주부들이 많은 시간대였다.[61] 지하 1층에는 생존 가능한 공간이 일부 있었고, 실제로 며칠 동안 살아남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구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사망한 경우도 많았다. 또한 슈퍼마켓 쪽은 붕괴 정도가 심하지 않아서 붕괴 직후 자력으로 빠져나온 사람들도 있었다.[62] 지하주차장은 붕괴 후에도 자력으로 탈출할 만한 일말의 여지가 있었다. 붕괴 직후 주차장에서 탈출한 생존자의 증언이 있다. #[63] 옥외주차장 쪽 출입구에서 중앙홀 쪽을 바라본 모습이다.[64] 사실 영국에서도 런던 킹스 크로스 역 화재사건 초기에 IRA의 테러 가능성을 의심했던 적이 있다. 물론 이쪽도 실제 원인은 테러가 아니라고 밝혀졌지만 말이다. 공교롭게도 IRA 요원이 북한에서 군사 훈련을 받은 적이 있다는 증언도 나왔다. #[65] 다만 아무리 기자 정신으로 가득한 기자였더라도 소방관이나 경찰관이 아닌 일반인이 붕괴 현장에 무단으로 진입하여 물건을 빼오는 건 위험한 행동이며 이는 엄연히 절도에 해당하는 범죄다.[66] 바로 전해(1994) 7월 8일 김일성사망남북관계가 어떤 식으로 변할지 초긴장 상태가 되기도 했고 서울불바다 발언까지 나오기도 했을 정도로 상당히 살벌했다.[67] 판매직원이 대피한 후 사망했다.[68] 구인회 LG 창업주의 5남인 구자일 일양화학 회장의 부인이기도 하다.[69] 부인과 함께 삼풍백화점에서 가구코너에 들렸다가 직원들이 위험하다고 말려서 비상계단으로 나갔는데 건물 밖을 나갔을 때 건물이 붕괴했다. 다만 아무 곳도 안 다친 본인과 달리 부인은 부상을 당해서 한동안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고 한다. 즉, 김영원이 조금이라도 머뭇거리며 늦게 나왔거나 건물 깊숙한 곳에 있었다면 재벌그룹 회장까지 사망하는 참사가 벌어졌을 것이다. 대기업 중 유일하게 인명 피해가 없던 곳이 현대그룹이었는데 임직원 대부분이 계열사인 현대백화점을 자주 이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70] 1983년 아웅 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으로 순직했다.[71] 등에 피가 묻은 붕괴 생존자 혹은 구조 봉사자로 보이는 남성이 손으로 때리면서 만류하기까지 하는데도 끝까지 웃으면서 옷을 챙기는 모습을 볼 수 있다.[72] 이 형사는 삼풍 참사 1년 전인 1994년 지존파 검거에 참여한 사람이기도 하다.[73] 경찰에 실제로 잡힌 사람 숫자만 헤아린 게 이 정도였다. 심지어 잡히지 않은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이 현장을 털었을지는 짐작조차 하기 힘들다.[74] 더구나 사고 당일인 6월 29일은 29℃의 무더위가 있었던 데다 에어컨까지 고장난 바람에 더위를 견딜 수가 없어서 쇼핑을 포기하고 백화점을 빠져나간 덕에 생존한 사람도 있었을 정도였다.[75] 동년 5월 1일에 입사했다고 한다.[76] 사고 당시에는 서울가정법원이 현재의 서울중앙지방법원 별관 내에 있었다. 2012년에 양재동으로 이전했다.[77] 해체 전까진 서울메트로였던 서울지하철공사가 서울도시철도공사와 합병되면서 해체되었다. 서울교통공사가 합병 후 후신이다. 공사 사옥이 방배동에 있어 삼풍백화점 사고 현장에서 매우 가까웠다.[78] 최후 생존자 3인 중 첫 테이프를 끊은 최명석 씨를 구출한 인물이기도 하다.[79] 당시 SBS의 지역민방은 1995년 5월 14일에 개국했으므로 이제 막 개국한 지 얼마 안 되었고 이외에는 개국 전이었다.[80] 루니 툰의 스핀오프인 태즈매니아다.[81] 문화체육관광부 본부 산하의 국민소통실의 전신이다. 단 방송 관련 업무는 방송통신위원회로 이관되었다.[82] 단, KBS는 추모방송이 길게 이어질 경우 국민들의 불안심리를 자극한다는 이유로 일요일부터 정상 방송되었다.#[83] 당시 지상파 평일방송은 보통 다음날 0시쯤 끝났다.[84] 이때 무너진 백화점 주변의 옷들을 훔치면서 웃는 아줌마의 모습도 포착됐는데 윗 문단의 사진이 YTN에서 촬영한 것이다. 그 웃음이 상당히 섬뜩하여 종종 언급된다.[85] "그래 그럼 되겠제?"라고 들리기도 한다.[86] 당연히 방송이 다 끝난 뒤 참모에게 개인적으로 한 말이다. 방송이 나가는 중인데 대놓고 저런 말을 한 것은 당연히 아니다.[87] 서울시 소방재난본부 보유 사진.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4.0 국제[88] 반대로 이걸 안 하고 그냥 싹 밀어 버려서 그 '불상사'가 발생한 사건이 중국에 실제로 있었다. 니콜라에 차우셰스쿠1977년 루마니아 지진 때 이와 비슷한 일을 했다는 말이 있지만 이는 지진 수습 후 불도저로 부쿠레슈티 시가지를 밀어버리고 인민궁전 같은 과시용 건축물을 지은 게 와전된 것이다.[89] 미세한 소리를 탐지하는 장비라 주변 환경이 최대한 조용해야 한다. 그래서 장비를 사용하는 동안에는 구조활동을 멈춰야 하는데 실종자 가족들이 차라리 그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빨리 구조활동을 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해서 미루다가 우여곡절 끝에 구조활동을 멈추고 탐지를 했다. 하지만 역시나 붕괴현장의 잡소리가 너무 많아서 의미 있는 결과를 내지는 못했다.[90] 이러한 불상사는 대구 지하철 참사 직후에도 반복되었다.[91] 21세기에 벌어지는 사건 사고를 들여다 봐도 사고 수습 과정에서 구조원들의 추가 인명 피해가 발생하는 경우가 심심찮게 존재한다. 메뉴얼이 확립되고 이에 대비해 충분한 훈련을 거친 사람들도 이렇게 희생되는데 이 당시 구조 대원들 또한 메뉴얼이 없는 상황이라 그 대응이 심히 허술했다.[92] 실제로 다국적 구조대가 편성되면 명령의 주체가 흐려질 수 있으며, 의사소통이 힘들어 사망자나 체계적인 구조가 힘들어진다. 이러한 구조대는 삼풍과 같은 백화점 한 채 범위의 국지적인 재난보다는 광역적인 인재 및 자연재해와 같은 상황에서 더 효과를 발휘한다.[93] 잔해에서 팔 부분만 찾아서 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로 신원을 확인한 경우도 있었을 정도였다.[94] 얼굴은 공개하지 않고 블러처리한 것으로 볼 때 개명했을 가능성이 높다. 애초에 '지환' 이라는 이름 자체가 꽤나 남성적인 이름으로 여성에게는 다소 맞지 않는 이름이기도 하다.[95] #, #, #[96] 관련 내용은 기사에서도 언급된다.[97] 기사[98] 실제로 사람이 절망에 빠져 의지를 잃어 교감신경이 폭주하게 되면 반대로 부교감 신경에 매우 좋지 않은 영향을 주므로 정신을 가다듬고 살아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포기하지 않는것이 생존 제 1원칙임을 전문가들이 강조하고 있다. 인간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다, 그 상황을 극복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지만 위급상황에서는 꼭 극복해야 한다.[출처] 김형민, <접속 1990>[100] 최초 발견자는 당시 고양소방서 구조대장이었던 안경욱[101] 매몰 지점에 광산 전화가 있었고 다행히 김씨가 해병대 통신병으로 한국 전쟁에 참전한 경력이 있어서 끊긴 전화선을 복구하는데 성공했다.[102] 참고로 극한 상황에서 최장 생존기록 세계 1위는 1979년 오스트리아의 18세 청년 Andreas Mihavecz가 세운 18일이다. 이 청년은 교통사고를 내고 경찰서 지하 유치장에 갇히게 되었는데 경찰관들이 깜빡 잊고 이 청년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가 18일 만에 구출되면서 세운 기록이라고 한다.[103] 그래도 이쪽은 사전에 건물의 붕괴 조짐을 인지하고 이준 회장에게 적극적으로 고객들의 대피를 요청했기에 옆 사람들급으로 크게 비판받은 인물은 아니다.[104] 이준 회장의 아들이었고 그 덕분에 사장 자리에까지 오를 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백화점 최종결정권자는 회장 이준이긴 했지만, 이영길 이사와는 달리 고객 대피를 적극적으로 요구하지 않고 방조했기 때문에 비판을 피해갈 수 없었다. 후일의 인터뷰에서도 이 점에 대해 가장 후회된다고 말했다. 한때 몽골에서 선교사 활동을 한다고 알려졌는데 인터뷰 중 사고를 두고 무책임한 발언을 하여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이후 KBS가 취재해 보니 이후에는 러시아에 거주 중이라고 한다.[105] 앞서 나왔듯이 신 공법으로 보수공사를 하자고 한 인물. 다만 이한상 사장과 마찬가지로 이 사람에게 모든 책임을 묻기 힘들다. 이 사람 역시 의견을 잘못 낸 것이 죄일 뿐, 최종 결정권자는 이준이었기 때문이다.[106] 사진의 왼쪽에서 두 번째에 있는 아들과 비교해 봐도 대놓고 태도가 너무 비교가 된다. 아들도 이후에 몽골로 가 선교사가 되어 말이 안되는 소리를 해서 또 문제가 되기는 하였지만, 적어도 당시에는 아무 말도 못한 채 그저 머리만 숙이고 눈도 못뜨고 있는 판국에 아버지라는 작자는 그런 일말의 행위마저도 없었으니 말이다. 2003년 사망하기 직전에 본인의 죄를 자각하기라도 한 건지 "나는 죄인이다."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그래봤자 대중들의 이준에 대한 신뢰감은 이미 경계선을 긋고 떠난지 한참 뒤의 상태였으니 사과조차 이미 늦어버린 셈.[107] 이준 대신 사과를 하고 다닌 사람은 죽은 장남 이한웅의 아내, 즉 큰며느리 추경영이었다. 이 사람은 남편이 중동에서 사고로 사망한 이후 재혼할 수 있었음에도 아들을 키우며 이 집안에 며느리로 남았고 이준이 백화점 내에 아이스크림 가게를 차려줘서 가게를 운영했다. 본인도 피해자로, 사고 당시 백화점에 있다가 사고 14시간 만에 극적으로 구조되었다. 그리고 사고 이후 이준 일당을 대신하여 사과를 했다고 한다. 처음에 국민들은 삼풍 관계자겠지 했지만 위의 사실이 밝혀지자 오히려 동정했고 되려 이준의 뻔뻔함을 욕했다. 이후 이준의 장례식에도 참석했다.[108] 반대로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 폭발 사고는 순식간에 벌어진 데다 대구백화점보다는 표준개발 쪽 잘못이 더 컸고 게다가 당시 대백 회장 구본흥이 직접 무릎 꿇고 사죄를 했다. 그래서 아직까지 회사가 유지되는 것이었다.[109] 특히 이준의 뻔뻔한 태도와 피해자 중에 이준의 며느리가 있다는 것 때문에 더더욱 욕을 먹었다.[110] 다만 바로 아래 문단을 보면 알겠지만 이 처벌은 당시 법령에서 가능한 최고 형량으로 처벌한 것이다.[111] 한편 조남호는 민선으로 당선되기 전 관선으로 서초구청장을 역임했고 1993년 8월 삼풍백화점에 지하 주차장 증축과 용도변경을 승인해 준 경위 관련으로 조사를 받기도 했기에 유족들 입장에서는 사고와 무관하게 볼 수 없었던 부분도 있다. 다만 수뢰 등의 혐의는 모두 무혐의 처리되었다.[112] 여미지식물원은 이 백화점이 개장하기 2달 전에 개원하였다.[113] YS의 분신 같은 존재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삼풍백화점이 지역구(서초구 을)에 위치해 있었다.[114] 이인제와 조순의 경우 사고 발생 당일에는 당선인 신분들이었다가 저 사진을 찍은 날 각각 경기도지사와 서울특별시장으로 취임했다.[115] 2004년 행정자치부 소방국이 '소방청'이 아닌 '소방방재청'으로 승격한 것은 이렇게 재난재해 대응 업무까지 맡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소방청은 과도기로 2014년에 국민안전처를 거쳐 2017년에 신설되었다.[116] 참고로 말레이시아에서 스팡에 신공항을 지었던 당시 한국 기업들은 거부당했는데 이러한 부실공사 관행으로 말레이시아 측에서도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117] 물론 어지간한 선진국에서도 오래 전 건물의 부실공사는 큰 문제다. 당장 미국에서도 아파트가 무너지는 등의 대형 사고가 2020년대에도 일어날 정도다.[118] 이는 1997년 외환 위기의 책임을 두고 "국민들이 과소비를 해서 그렇다."라는 식의 주장을 하는 것과 같다. IMF로부터 구제 금융을 받게 한 외환 위기의 진짜 원인은 기업들의 부실한 재무 관리와 분식회계였음에도 그러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엉뚱하게 국민들한테 책임을 돌렸던 것이다.[119] 근데 사실 이 부분에서 가장 큰 책임을 안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전두환 정부다. 5공 때 잘못 지어진 게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물론 문민정부가 들어서자마자 이러한 위험을 인식 후 대대적인 수리를 했더라면 이런 일들은 없었겠지만 사실상 사건들이 터지기 전에는 이러한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우선 일반적인 사람들이 보기엔 멀쩡해 보이고 누군가의 사유재산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장 핵심은 2%를 제외한 모든 건물이 부실공사 상태였다는 것은 그 동안의 대한민국 표준 자체가 부실공사였다는 것이기 때문이다.[120] 원 출처: <한국도시 60년의 이야기> 2권 - 손정목 저. 한울. 2005. p266.[121] 다만 일본 등 지진 발생이 많은 국가에서는 지진 발생시 펀칭파괴 우려로 거의 사용되지 않는 구조이다.[122] 나산백화점은 이후 흉물로 방치되다가 철거 과정에서 결국 붕괴되었다.[123] 압좌 증후군이다.[124] 해당 현상은 압좌증후군 혹은 크러쉬 신드롬이라고 불리는 현상이다. 무거운 물체에 신체 일부가 오랜 시간 깔리면 끼인 부분의 세포가 죽으면서 독소가 생긴다. 그런데 무턱대고 위에 놓인 물체를 치우면 그동안 쌓인 독소가 전신으로 퍼져 사망에 이른다. 압좌증후군이 의심되는 상황에서는 차라리 절단하는 편이 낫다. 사지를 살려 보겠다고 했다가 쌓인 독소가 전신으로 퍼지면 막을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절단 또한 상당히 위험하기에 대응하기 쉽지 않다고 한다. 의학 드라마 House M.D.의 시즌 6 피날레 22화에서 이 증후군을 다루는데 하우스가 사고 현장의 잔해 속에서 찾아낸 한 여자가 4시간이 넘게 깔려 압좌증후군에 걸린다. 다리를 잃고 싶어하지 않는 여자와 다리가 불편해 그 심정에 공감한 하우스는 다리를 살려보려고 하나 결국 절단한다. 하지만 절단 과정에서 생긴 지방색전으로 여자는 병원으로 이송 중에 사망했다. 이 에피소드의 내용은 실제로 건물 붕괴에서 깔린 사람들에게 종종 일어나는 이야기라고 한다.[125] 한국 병원에 별도의 응급의학과가 생긴 때가 1995년이다. 삼풍 붕괴 사고로 인해 바로 창설하지는 않았다. 1988 서울 올림픽 때부터 필요하다는 목소기라 나와서 몇 년간 준비한 끝에 1995년에 생긴 것이다. 하지만 삼풍 붕괴 사고로 인해서 의학계 내부에서 응급의료체계의 중요성이 다시 한 번 부각되었고 응급의학과가 빠른 시일 내에 자리잡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126] 오영환임소미의 경우 구급으로 입직했다가 구조대로 전보된 대표적인 인사다.[127] 파트 1은 "유년의 끝"이란 부제, 조용한 곡조와 신해철의 자전적 내레이션이 붙었다. 2번째 파트부터가 사실상 본래의 프로그레시브 락 본편이다.[128] 모르고 보면 처음엔 그냥 여러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기만 할 뿐인 군상극으로 보이는데 나중에 이 여러 사람들이 각자의 이유로 백화점에 와 있거나 회사 측의 인물들이 백화점의 위험을 간과하다가 백화점이 붕괴함으로써 절정을 맞는다.[129] 32인치에서 23인치로 줄임.[130] 조필연이 국무총리 자리에 오르고자 정계에 로비할 자금을 조민우를 시켜 빼돌렸다.[131] 작가들의 후기를 보면 웹툰이 먼저 기획되었으나 작업을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소설 집필이 선행되었다고 한다.[132] 공교롭게도 사고 18주년이 되는 날이다.[133] 바로 사고에 큰 역할을 한 온돌 바닥의 5층 한식당으로, '사고의 원인' 문단에서 알 수 있듯이 바닥과 지붕이 심하게 꺼지자 사고 당일은 문을 닫았다. 이때 점원으로부터 지하 웬디스 매장을 추천받았을 때 안 간 것이 천만다행이다. 웬디스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생존 가능한 공간 없이 완전히 매몰된 구역이기 때문이다.[134] 퇴원을 앞둔 아내를 위해 아내가 좋아하는 만두를 사러 갔다가 변을 당했다.[135] 누구인지는 정확히 밝히지 않았다.[136] 장동민이 무한도전 6번째 멤버로 거론되자 과거 여성혐오 발언이 발견되어 시끄러웠을 때였다.[137] 이에 고소인은 고소를 취하했다.[138] 주소지는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광릉수목원로다.[139] 그 대표적인 예가 캠브리지. 1995년 이후에 회사명을 주식회사 삼풍에서 주식회사 캠브리지로 바꿨다. 그 회사마저 2007년에 코오롱그룹으로 팔려 '캠브리지코오롱'이 됐다가 2011년 코오롱인더스트리에 합쳐져 FnC 부문의 하위 브랜드가 됐다.[140] 원래 해태그룹 계열사였으나 1988년에 민후식 창업주의 아들 민병헌이 독립 후 벨기에의 Milco사와 제휴해서 우유를 만들었다. 그리고 현재는 동원그룹에 인수되어 동원데어리푸드를 거쳐 동원F&B에 흡수된 상태다.[141] 해태유업의 모체는 해태그룹이 맞지만, 1980년대에 계열 분리가 된 것이다.[142] 1978년 최초로 밀라노 유학을 한 한국인. 유명 백화점의 패션 담당 바이어, 무대의상 디자이너와 교수로 활약했고 '살바토레 페라가모', '막스마라' 등 이탈리아의 명품 브랜드를 한국에 런칭했다. 대한민국의 진솔한 문화를 서양에 전하던 전직 문화 코디네이터이자 패션 컨설턴트로, 대한민국-이탈리아 교류 공헌을 인정받아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다.[143] 엄지는 부장을 입지 않았고 동탁은 머리에 가벼운 상처를 입었다.[144] 대구 지하철 참사, 미군 여중생 압사 사건,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성수대교 붕괴 사고[145] 세월호 참사에 대해서도 이 참사에 대해 지겹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비판하고 피해자들에 대한 연대를 이어가는 행보를 보인 바 있다.[146] 단순물가상승률 대비 2014년 기준 7천억 원 수준이다.[147] 특히 보석가게 상인들은 혼란을 틈타 자기 가게 물건을 훔쳐가는 사람들이 생길까봐 철수를 안 했다.[148] 2020년은 삼풍백화점 붕괴 25주년이다.[149] 세계 제3위의 건물 붕괴 사고이니 그럴 만도 하다. 이 외의 소재가 되는 것은 챌린저호 폭파 사고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 등이 대표적. 포스코 명예회장 박태준이 시공 원칙에 입각해 볼트 하나하나까지 세세하게 현장에서 체크해 가며 철저하게 지은 결과 2017년 포항 지진에도 별다른 피해를 안 입은 포스텍과 비교되며 영원히 까일 신세다.[150] 지하 1층에서 아이스크림 가게를 운영하던 중 사고를 겪었고, 이후 극적으로 구조되어 생존했다. 즉, 이준 회장은 자신의 큰며느리도 버렸다는 말이 된다.[151] 현재의 서울회생법원 자리이다.[152]계양구 을 국회의원, 前 더불어민주당 대표[153] 물론 (주)현대백화점현대백화점 압구정본점도 붕괴 직후 삼풍백화점의 고객들을 거의 흡수해갔으나 이후 경쟁력이 약해졌다.[154] 하지만 삼풍을 떼어냈음에도 유튜브에 유물로 남아있는 캠브리지멤버스 광고 동영상에 여전히 캠브리지멤버스와 삼풍백화점이 관련 있냐는 식의 질문이 올라올 정도다.[155] 주소: 서울특별시 서초구 양재동 227-3[156] 2021년 6월 10일 방송된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2에서 이 문제를 다루었다.[157] 남영호 침몰사고를 비롯해 성수대교 붕괴 사고,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사고와 같이 이런 참사가 터질 때마다 희생자들을 애도하겠다며 추모비를 세우는 경우가 많은데 님비 현상으로 사고 장소 근처도 아니고 엉뚱한 장소에 세우는 것도 모자라서 정작 세워놓은 위령비조차도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경우가 다반사다.[158] 문제는 이 근처에 윤봉길 의사 기념관이 있어서 잘못할 경우 큰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159] “왜! 위령탑 앞에 있는 꽃을 가져가십니까? 자식을 가슴에 묻은 엄마의 마음으로 꽃을 해 놓는데 제발 부탁입니다. 꽃을 가지고 가지 마세요. 자꾸 이런 짓을 하면 당신 가정에 안 좋을 일만 생길 테니까 제발 부탁입니다. 유족 어머니 마음”[160] 현재 신한은행인 이유는 외환 위기 이후 조흥은행이 신한은행에게 역합병되었기 때문이다.[161] 이 지도에는 쇼핑센터라고 표시되었다. 이 지도에는 지금의 e편한세상 아파트와 유원아파트 자리에 경복여상(現 경복비즈니스고등학교)도 표시가 있는데 이미 삼풍백화점이 개장하기 직전에 강서구 등촌동으로 이전하였다. # 즉, 삼풍아파트 입주 당시에 제작된 지도인 걸로 보인다.[162] 무슨 가족도 아닌 친구가 피해자 가족들 대표로 나오냐고 의아해하겠지만 서혜진은 박승현의 절친으로 사고 당일 박승현과 만날 약속을 잡고 있었다가 사고 소식을 듣고 현장으로 달려와 승현의 부모와 함께 박승현이 구조될 때까지 여느 피해자 가족 수준으로 절박하게 기다렸다. 인터뷰 내용도 보면 붕괴사고 당시 현장으로 바로 달려가 아무 생각 없이 손에 잡히는 대로 잔해를 파내기도 하고 끔찍한 시신 사진을 뒤져보며 이들 중에 박승현이 있는지 찾아 돌아다녔던 후일담이 주로 나오기에 당시 피해자 가족들이 처했던 상황과 심경을 대변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했다.[163] 마지막 엔딩 크레딧 직전에 "내 가족이 쓸 거라 생각하고 건물을 짓고 관리하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유지환의 뼈가 있는 중요한 인터뷰 내용도 한국 방송분에서는 삭제되었다.[164] KBS 스포츠국의 이태웅 PD를 비롯한 민혜경 작가, 김기조 디자이너 등이 뭉친 프로젝트 집단이다.[165] 원래는 이 곡이 아닌 다른 곡으로 진행하려고 하였으나 공연 진행 도중 붕괴 소식을 듣고 이 노래를 불렀다. 모순된 것들로 이루어진 사회를 풍자하는 노래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