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론 브란도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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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파일: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영화 심볼.jpg 영화 | ||
입성날짜 | 1960년 2월 8일 | ||
위치 | 1765 Vine Street |
}}} ||
<colbgcolor=#8DD1E7><colcolor=#fff> 말론 브란도 Marlon Brando | |||
본명 | 말론 브란도 주니어 Marlon Brando Jr.[2]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
출생 | 1924년 4월 3일 | ||
네브래스카 주 오마하 | |||
사망 | 2004년 7월 1일 (향년 80세) | ||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 |||
직업 | 배우, 영화감독, 사회 운동가 | ||
활동 | 1944년 – 2001년 | ||
신체 | 175.2cm, O형 | ||
서명 | |||
링크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8DD1E7><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말론 브란도 시니어 (1895년 1월 11일 – 1965년 7월 17일, 향년 70세) | |
어머니: 도디 브란도 (1897년 2월 7일 – 1954년 8월 16일, 향년 57세) | |||
남매 | 첫째 누나: 조슬린 브란도 (1919년 11월 18일 – 2005년 11월 27일, 향년 86세) | ||
둘째 누나: 프란시스 브란도 (1922년 9월 1일 – 1994년 4월 2일, 향년 71세) | |||
배우자 | 안나 카쉬피[3] (1931년 9월 30일 – 2015년 8월 16일; 향년 83세) (1957년 – 1959년, 이혼; 1남) | ||
모비타 카스타네다[4] (1916년 4월 12일 – 2015년 2월 12일; 향년 98세) (1960년 – 1962년, 무효화; 1남 1녀) | |||
타리타 테리파이아[5] (1941년 12월 29일생; [age(1941-12-29)]세) (1962년 – 1972년, 이혼; 1남 3녀) | |||
총 6남 4녀[6] | |||
자녀 | 장남: 크리스찬 브란도 (1958년 5월 11일 – 2008년 1월 26일) 차남: 미코 C. 브란도 (1961년 2월 26일생) 삼남: 사이먼 테이호투 브란도 (1963년생) 장녀: 리사 브란도 (1964년생) 차녀: 레베카 브란도 (1966년생) 사남: 마이클 길먼 (1967년생) 오남: 스티븐 블랙하트 (1967년생) 육남: 딜런 브란도 (1968년 – 1988년) 삼녀: 타리타 샤이엔 브란도 (1970년 2월 20일 – 1995년 4월 16일) 사녀 페트라 브란도 코발 (1972년생) 오녀 마이미티 브란도 (1977년생) 육녀: 라이아테아 브란도 (1982년생) 칠남: 워렌 브란도 (1985년생) 칠녀: 니나 프리실라 브란도 (1989년생) 팔남: 마일스 조나단 브란도 (1992년 1월 16일생) 구남: 티모시 가안 브란도 (1994년 1월 6일생) 팔녀: 안젤리크 브란도 | ||
슬하 9남 8녀[7] | |||
정당 | |||
종교 | 무종교(범신론?)[8][9][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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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는 표식(表式)이다. 영화 연기의 역사는 브란도 등장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He is the marker. There’s ‘before Brando’ and ‘after Brando’. ― 마틴 스코세이지 |
미국의 배우, 영화감독, 사회운동가.
2. 생애와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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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리 코왈스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1951) | 테리 말로이, 《워터프론트》 (19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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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비토 콜레오네, 《대부》 (1972) | 폴,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1972) | 월터 E. 커츠 대령, 《지옥의 묵시록》 (1979) |
1924년 4월 3일,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에서 1남 2녀 중 막내로 출생하였다. 청소년기에는 문제아 취급을 받았으며, 보다못한 아버지의 강권으로 사관학교에 입학했으나, 이내 중퇴하고 뉴욕에 상경하여 뉴스쿨의 드라마 워크숍에 등록했다.
브란도는 거기서 스텔라 애들러 여사[11]에게서 연기를 배웠는데 그녀는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의 연기론을 적용하여 연기에 진정성을 불어넣기 위해 고안된 메소드 연기법을 강조했다.
한번은 애들러 여사가 수업 시간 중 제자들에게 전쟁이 벌어진 상황에서 닭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를 연기해보라 했고, 모든 학생들은 제각기 푸드덕거리는 온갖 난리 요란법석을 떨며 닭들을 연기하는데 반해 브란도 혼자만 조용히 웅크리며 알을 품는 닭을 연기했었다. 애들러 여사는 말론 브란도의 연기만 인정하며 푸드덕거리는 다른 학생들에게 "이 바보 멍청이들아! 닭들이 전쟁난 걸 어떻게 안단 말야!"라고 호통친 것은 유명한 일화다.
이렇게 브란도는 메소드 연기법에 천부적 재능이 있었고 이 연기론을 적극 수용했다. 이 당시 가장 존경하는 배우로 프레드릭 마치를 꼽았다.[12]
1944년에 《엄마를 기억해》로 브로드웨이 무대에 데뷔하였다. 1947년 브로드웨이의 연극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A Streetcar Named Desire)에서 스탠리 코왈스키 역을 맡으면서 굉장한 호평을 받았다. 그리고 이 무렵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자신의 대타 배우였던 잭 팰런스와 권투를 하다가 그만 코가 부러져 매부리코가 되는 사고를 겪고 말았다.
어쨌든 이로서 일약 브로드웨이의 간판스타로 자리 잡은 그를 스카웃하기 위해 할리우드는 온갖 공을 들였지만, 말론은 장기적인 계약에 따르는 제한들 때문에 모두 거절했다. 그러나 6년 후에는 그도 뜻을 굽히고 신체가 마비된 군인들의 이야기인 《맨》(1950)으로 장편 영화에 데뷔했다. 불과 1년 후, 1951년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A Streetcar Named Desire) 동명의 영화판(엘리아 카잔 감독)에서도 주연을 맡으면서 생애 첫 번째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장편 영화계에 데뷔한 지 1년밖에 안된 신인 영화배우가 후보에 오른 셈이다.
그 다음에는 위험한 질주(The Wild One 1953년작)에서 1950년대 막 문화의 중심으로 떠오른 청년세대의 반항기를 표현함으로서 당대 청년문화의 아이콘이 되었다. 영화에서, 도시를 휘젓던 폭주족으로 출연한 브란도는 당시 반항적인 미국의 비트 세대에게 우상이나 다를 바 없었고, 그의 모터사이클과 가죽자켓, 청바지, 엔지니어 부츠는 반항적인 젊은이의 상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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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니 스트라블러, 《와일드 원》 (1953)[13] |
이 영화 속 말론 브란도의 패션은 매카시즘 시대의 청춘인 비트 세대를 대표하는 아이콘이었다. 반항아 연기로 여러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제임스 딘도 원래는 말론 브란도의 연기를 모방한 것이며, 그를 동경하며 여러 면에서 닮으려고 노력했다 한다.
1954년에는 엘리아 카잔 감독의 《워터 프론트》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거머쥐며 할리우드의 정상급 배우로 성장했다. 이후 동명의 뮤지컬을 영화화한 《아가씨와 건달들》(1955), 《젊은 사자들》(1958), 《바운티호의 반란》(1962) 등으로 연기력과 흥행력을 과시했다.
이후 1960년대에는 다소 주춤하는 듯 했으나, 1970년대 들어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명작 《대부》(1972),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문제작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1973)로 화려하게 재기했다. 6년 뒤에는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지옥의 묵시록》(1979)에서 카리스마적인 연기력을 보여줬으며, 《슈퍼맨》(1978)에도 슈퍼맨의 부친 조-엘 역으로 출연[14]하기도 했다.
브란도는 이런 연기력을 바탕으로 할리우드에 이른바 성격파 배우 전성기를 열었던 인물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모든 성격파 배우들은 브란도에게 빚지고 시작하는 것이다. 브란도 이전의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은 언제나 정의로운 보안관이나 역사상 유명한 전쟁 영웅 아님 장애를 이겨낸 실존 인물 등등의 바른 생활 사나이들에게만 주어졌고 안 그러면 주연상 후보에도 못 오르는 게 당연시되었다. 오늘날로 치면 톰 행크스 스타일의 배우들만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거나 후보에라도 오를 수 있었던 것. 하지만 브란도는 술먹고 도박하며 마누라나 패고 처제를 강간하는 쓰레기(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돈 받고 사람 패주는 해결사(워터프론트), 깡패 두목(대부), 섹스 중독에 빠진 중년 변태남(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전쟁의 광기에 미쳐버린 군인(지옥의 묵시록) 등의 기존 체제에 반항하는, 홀딱깨는 비정상 캐릭터로도 얼마든지 스타가 될 수 있음을 그 스스로 증명해냈고, 잭 니콜슨 같은 성격파 배우들이 설자리와 무대를 마련해주었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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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아노 사파타, 《비바 자파타!》 (1952) |
하지만 브란도는 자신에게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안겨준 《혁명아 자파타 Viva Zapata!》(1952)처럼, 같은 전쟁 영웅이라도 오늘날까지 역사적 논란의 중심에 서있는 역할에만 흥미를 보였고 이런 역할만 찾아다녔다. 제2차 세계 대전 직후라 일본에게 노골적인 적대감을 보였던 1950년대 미국에서 과감히 일본 여인과 사랑에 빠지는 파일럿 《사요나라 Sayonara》(1957)을 연기하거나, 당시 A급 톱스타들에겐 금기시되었던 나치장교 역 <젊은 사자들 The Young Lions>(1958)도 앞장서서 거침 없이 해버리던 것이 말론 브란도였다. 그로 인해 이제 배우들의 캐릭터는 단순한 선역, 악역의 경계를 넘어서서 기존의 극연기법보다 더 현실적인 리얼리즘과 입체감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영화사에 길이 남을 또 다른 위대한 배우, 폴 뉴먼에게도 동경과 질투심을 불러 일으키고 결코 넘을 수 없다는 상실감을 안겨준 거대한 존재이기도 했다.[16]
영화 속 이미지 만큼이나 실제로도 반골 기질이 다분했고, 흑인이나 아메리카 원주민 인권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대부'로 오스카 남우주연상을 수상했을 때, 인디언 협회 대표라는 젊은 원주민 여성을 대신 내보내 수상 소감 대신 미국 내 원주민 인권 문제를 거론하게 한 것은 유명한 일화. '미국원주민운동(AIM)' 창립 멤버로 관여했고 원주민운동 지도자들의 보석금과 거처를 제공해주기도 했다. 아메리칸 원주민의 인권문제를 다룬 영화를 만들기 위해 시나리오 작업을 하기도 했고 이에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도 참여했으나 아쉽게 무산되었다.
1973년 아카데미 시상식 생중계 영상으로, 말론 브란도가 지명되자 아파치족 출신 인권운동가 사친 리틀페더가 침착하게 담담한 어조로 말론 브란도가 직접 작성한 연설 원고를 낭독하였다. 실제 분량은 더 길었으나 오스카 측에서 강력하게 압박을 넣어서 극히 일부분만 발언할 수 있었으며, 이마저도 사실 아예 출연하지 못할 뻔 했다. 원주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객석에서는 중간에 야유가 나오기도 했지만 이내 격려의 박수에 묻혔고, 사친의 낭독은 별 문제 없이 끝났다. 이후 오스카는 이 사건 당시 압력을 행사한 사실을 인정하고 두 인물과 인디언 인권계에 공식 사과하였다.[17]
그가 인권운동에 열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던 이유는 1970년대 중반 이후의 영화 촬영계약이 개런티를 최소화 하는 대신 출연분을 단기간에 집중해서 찍는 방식이었던 데 있다. 그렇기에 사실상 브란도 필모그래피의 마지막 불꽃은 《대부》와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커리어의 전성기가 일찍 끝난 것의 가장 큰 원인은 브란도 개인의 불우했던 신변문제와 우울증에 있었다. 1979년의 《지옥의 묵시록》이 마지막 걸작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체중조절에 실패하고 다소 불성실하게 촬영에 임하는 등 배우로서의 자의식과 집중력이 예전에 비해 확연히 떨어진 상태였다. 이로 인해 코폴라는 촬영에 상당한 제약을 받아야만 했으며, 수많은 재촬영과 편집을 거쳐야만 했다.
불과 30살에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모두 수상한 천재 배우는 너무 이른 나이에 삶의 아이러니와 회의를 깨닫고 느껴버렸다. 말론이 1989년 9월에 촬영하고, 10월 7일에 방영된 "Saturday Night with Connie Chung"과의 인터뷰에서 9년간의 긴 공백을 깨고 활동을 재개할 당시 "역사상 최고의 배우란 세간의 평가에 동의하시나요?"란 질문에 "What's the point of it?"(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요?)란 이런 말을 하는 시점에서 말론의 배우 경력은 끝났다고 보는 이들도 있으나, 본디 진정한 천재는 오로지 자기 자신만이 자신을 죽일 수 있는 법이다.
말론 브란도 스스로 꼽은 자신의 최고작은 〈번!(Burn!)〉(1969)이다.
3. 사생활
동시대 대부분의 할리우드 스타와 달리 자신의 양성애 성향에 대해 감추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덕분에 커밍아웃하지 않았던 다른 동료들까지 본의아니게 끄집어내는 결과가 되기도 하는데, 2006년 출간된 전기에서 브란도와 관계를 맺었을 거라 주장한 유명인들만도 폴 뉴먼, 몽고메리 클리프트, 버트 랜캐스터, 로런스 얼리비에이, 제임스 딘, 타이론 파워 등을 포함하고 있다.그러나 전형적인 난봉꾼 할리우드 스타의 가십 같은 이야기 속에 나름 순애보 같은 이야기도 있는데, 바로 평생 친구 겸 동성애인으로 지낸 배우 겸 코미디언 월리 콕스(Wally Cox)의 경우. 말론 브란도는 1973년 사망한 콕스의 시신을 화장하고 남은 재를 평생 보관하며, 가끔 외로울 땐 재를 담은 단지를 앞에 두고 식사를 했다고. 브란도 사망 뒤 그의 유해는 유언대로 화장되어 콕스의 재와 섞여 같이 타히티와 데스밸리에 나뉘어 뿌려졌다. 말론의 장례식은 잭 니콜슨이 주관했으며 영화 제작자 마이크 매더보이(Mike Medavoy) 저택에서 치러졌다. 워렌 비티, 아네트 베닝 부부와 숀 펜 등등이 참석했고, 유족의 뜻을 받아들인 잭 니콜슨이 언론 노출을 최소화시킨 비공개로 치른 가족장이었다 한다.링크
생전의 한 인터뷰에서, "콕스가 여자였음 결혼해 평생 행복하게 잘 살았을 것이다"라고 언급하기도 한 그였으니.[18] 이 부분은 2015년 1월 4일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뤄졌다.해당기사,마성의 양성애자 말론 브란도. 작가이자 접지 편집장이었던 뷰리가드 휴스턴-몽고메리의 증언에 의하면 그가 대마에 취해 있을 때 콕스와 사랑하는 관계였다고 고백하기도 했다고.[19] 콕스의 사망은 브란도에게 엄청난 충격을 줬다고 하며 콕스의 사후 앞에 언급됐던 것들을 포함해 그의 파자마를 입고 취침을 하거나 창가에서 그의 유골 단지를[20] 껴안는 등 배우자를 잃은 사람처럼 행동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당시 콕스의 부인이 그의 유품들을 브란도한테서 돌려받기 위해[21] 법적으로 소송하려고 했지만 "브란도가 더 필요할 것 같다고" 생각해서 포기했다고 한다.[22]
연기자로서의 성공과는 달리 사생활에서는 여러모로 불운했다. 여러 번의 결혼 실패에다 1990년엔 아들이 살인죄로 구속되기에 이른다. 게다가 아들이 살해한 상대는 다름아닌 딸의 약혼남. 말론의 딸도 충격을 이기지 못해 자살하고 말았다.[23] 이처럼 평생동안 안정된 가정을 꾸리지 못했고 우울증과 알코올 의존증에 시달렸다. 말년에는 우울증으로 인한 폭식으로 몸무게가 무려 150kg을 넘는 뚱보가 되기도 했다. 사실 청년기의 인기에 비해서는 말년으로 갈수록 출연작이 드문드문하고 아들이 재판을 받느라 돈이 급해서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영화에 나오느라 작품의 수준도 떨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슈퍼맨이나 지옥의 묵시록 이후론 사실상 인상적인 출연작이 없었을 정도. 다른 남자배우들이 대부분 50대에 전성기를 맞는다는 걸 생각하면 40대 이후 브란도의 필모그래피는 좀 부실한 감이 있다.
1980년 이후로는 거의 매스컴에 얼굴을 비추지 않고 은둔 생활을 했다. 다만 인권운동에는 적극적인 활동을 보였다. 1990년 아들이 잡혀들어간 이후 《프레쉬맨》,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돈 후앙》, 《닥터 모로의 DNA》 등에 나오면서 오랜만에 활발한 필모그래피를 선보였다. 그의 마지막 작품은 2001년에 에드워드 노튼, 로버트 드 니로와 함께 찍은 《스코어》였다.
2002년에는 할리우드에서 그의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연기 세미나를 열기도 했다. 세미나는 총 10일동안 개최되었으며, 이 모습이 〈Lying for Living〉이라는 다큐멘터리를 통해 공개되기도 했다.
2004년 폐질환으로 8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스코어》 이후 3년 만에 신작에 나오겠다고 약속을 한 터라서 팬들의 안타까움이 더했다.
3.1. 가족관계
총 3명의 아내와 1명의 사실혼 관계. 그리고 여러 나라에서의 입양과 생모가 밝혀지지 않은 아이까지 있다. 이런 자녀들 사이에서 1990년 5월, 브란도와 첫번째 아내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 크리스티안 브란도가 세번째 아내와의 자녀인 5녀 샤이엔의 애인 다그 드롤렛(Dag Drollet)[24]을 살해. 즉, 오빠가 여동생의 애인을 살해한 비극도 벌어졌다.사연은 이렇다. 샤이엔은 연예인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모델이 됐으나, 교통사고로 얼굴을 다쳐 은퇴한 이후로 자살 시도를 수차례 하는 등 극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오빠 크리스티안에게 애인이 자신을 학대한다고 얘기하자, 분노한 그가 술에 거하게 취해 애인을 총으로 쏴 죽여버린 것. 하지만 크리스티안은 애인이나 여동생에 대해 잘 아는 편이 아니었다. 이후 여동생이 극심한 우울증 환자였음을 알게 된 후론, 우울증 환자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자신이 바보 같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더 가관인 것은 애인이 죽을 때, 여동생은 만삭의 몸이었고, Tuki Brando는 사건 한 달 후 태어났다. 다그 드롤렛(Dag Drollet)의 유복자라 아버지의 성을 못 가지니, 당연히 성은 브란도. 원래는 Tuki Drollet이었으나, 이후 출소한 이 사건의 원흉 크리스티안 브란도가 입양해 Tuki Brando가 된다. 자크 드롤렛(Jacques Drollet)은 자신의 아들을 죽인 자의 혈육이라 Tuki를 미워하며, Drollet이란 성을 쓰는 것도 싫어했지만, 아내이자 Tuki의 할머니인 리제트 드롤렛(Lisette Drollet)은 Tuki를 많이 아끼고, 사랑했다. 그러다 그 Tuki Brando가 5살 되던 해, 어머니마저 자살해버리니, 사실상 Tuki Brando는 이 사건의 최대・최고 피해자이다. 한편, 크리스티안은 살인 혐의로 1991년 구속 및 수감되었지만, 5년 뒤인 1996년 출소하였다. 이런 비극적인 가정사까지 발생할 정도로, 할리우드 내에서도 여러모로 가정사가 복잡한 인물이었다. 자식들간의 유산싸움도 여러번 일어났고, 법정싸움까지 여러번 갔었다.
위의 프로필에는 자녀의 숫자가 9남 8녀로, 총 17명인 양 표시되어있지만, 그 중 2명은 말론 브란도가 아버지인지에 대해 상당히 불확실한 상황이고, 나머지 3명도 확인되지 않는 상태이다. 확실하게 법률상 자녀로 밝혀진 경우는 총 11명이고, 그 중에 3명은 입양아들이다.
- 세번째 부인 (1962년-1972년)
- 타리타 테리파이아 (1941년 12월 29일 ~ ) : 보라보라 섬에서 태어난 폴리네시아 원주민. 타히티에서 살고있다.
- 아들: 사이먼 테이호투 브란도
- 딸: 타리타 샤이엔 브란도
- 사실혼 관계
- 입양
- 아버지는 말론 브란도이지만, 어머니를 알 수 없는 케이스.
3.2. 유언장
2004년 8월 25일, 말론의 유언장 공개를 법원이 승인했다.출처 그가 유언장을 통해 밝힌 재산은 총 $120 million(한화 159,784,200,000원)이며 대부분이 테티아로아 섬의 부동자산으로 묶여있었고, LA와 타히티 자택 2채 외 유동자산 대략 $26 million(한화 34,619,910,000원)를 남겼다.한편 그의 유산을 상속받을 인물로는 총 10명이 적혀있었는데, 이 중 32세의 양녀와 손자 1명(Tuki Brando)은 제외되었다.출처
4. 논란
4.1. 상대 배우 동의 없이 강간 장면 촬영 논란
1972년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서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이 오로지 말론 브란도와만 상의하고 상대 여배우 마리아 슈나이더(1952~2011)에게 일체의 동의 없이 항문 강간 장면을 촬영한 것이 밝혀졌다. 베르톨루치 감독도 인터뷰에서 인정했다.#마리아 슈나이더는 2007년 7월 19일자 인터뷰[26]에서 “I felt humiliated and to be honest, I felt a little raped, both by Marlon and by Bertolucci.”(나는 굴욕감을 느꼈고, 솔직히 말론과 베르톨루치에게 약간 강간당한 것 같았다)라고 밝혔다.Daily Mail 인터뷰 원문 매일경제 기사
슈나이더는 한동안 약물 중독과 자살 시도 등 매우 괴로운 시간을 보냈으나, 말론 브란도는 마리아 슈나이더가 이런 감정을 느낀 사실 자체를 몰랐을 확률이 매우 높다. 애초에 마리아 슈나이더는 1972년부터 브란도가 사망한 2004년까지 32년이란 긴 시간 동안 이에 관해 그 어떤 입장도 표명하지 않았었다.
베르톨루치 감독은 2013년 2월 1일자 인터뷰에서 “Poor Maria. I didn't have the occasion to go to ask her to forgive me. She was a 19-year-old who, like the actors in Me and You, had never acted before. Maybe, sometimes in the movie, I didn't tell her what was going on because I knew her acting would be better. So, when we shot this scene with Marlon Brando using butter on her, I decided not to tell her. I wanted a reaction of frustration and rage.”(불쌍한 마리아. 그녀에게 용서를 구할 기회가 없었다. 그녀는 19세로, 〈미 앤 유〉에 나오는 배우들처럼 연기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어쩌면, 영화에서 가끔 나는 그녀의 연기가 더 좋아질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말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말론 브란도가 버터를 바르는 장면을 찍었을 때, 나는 그녀에게 말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나는 좌절과 분노의 반응을 원했다.)라고 주장하였다.# 말론 브란도가 2004년, 마리아 슈나이더가 2011년에 사망하였기 때문에 사건의 완전한 내막은 영영 알 수 없게 되었지만, 윤활제든 뭐든 사전 조율이 무엇보다 중요한 신을 촬영함에 있서 상대 배우와 충분한 합의 없이 성적 모욕감을 준 것에 대해서는 어떤 변명으로도 비판을 면할 수 없어 보인다.
다만 2016년 12월 7일, 2016년 12월 5일에 2013년의 베르톨루치 감독의 인터뷰가 발굴되어 입방아에 오르기 시작한 지 불과 이틀 뒤#, 당시 현장에 있던 촬영감독 비토리오 스토라로는 자신이 촬영감독인 만큼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목격했는데, 슈나이더의 말은 거짓말이며 감독의 말이 맞다고 증언했다.#1#2 촬영 당시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비토리오 스토라로, 말론 브란도, 마리아 슈나이더 이 4사람을 제외한 다른 스태프들 출입은 엄격히 통제됐으므로 이 4사람을 제외한 증언은 모두 거짓말일 가능성이 높다. 2대의 카메라로 촬영된 해당 장면은 당시 촬영장엔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비토리오 스토라로, 말론 브란도, 마리아 슈나이더 단 4사람만이 있었고, 단 한 번의 테이크로 완성되었다. 이후 비토리오 스토라로 증언 뒤 이 논란은 잠잠해졌다. 일단 비토리오 스토라로 반박에 태클을 거는 여론은 없다.
또한 마리아 슈나이더는 말론 브란도 생전에 이를 문제 삼아 소송을 걸어도 전혀 문제가 없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말론 브란도 생전에는 이를 문제 삼지 않았고, 말론 브란도 사후엔 그를 기리는 다큐멘터리 브랜도에도 출연해 고인이 된 말론 브란도를 추모했다.
5. 필모그래피
- 볼드체로 표시된 배역이 주요 배역.
연도 | 제목 | 배역 | IMDb 평점 | 박스 오피스 |
1950 | 더 맨(The Men)[27] | 켄 | 7.2 | - |
1951 |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A Streetcar Named Desire) | 스탠리 코왈스키 | 8.0 | $8,000,000 |
1952 | 혁명아 자파타(Viva! Zapata) | 에밀리아노 사파타 | 7.5 | $1,900,000 |
1953 | 줄리어스 시저(Julius Caesar) | 마크 앤소니 | 7.4 | $3,920,000 |
1953 | 위험한 질주(The Wild One) | 조니 스트래블러 | 6.9 | - |
1954 | 워터프론트(On The Waterfront) | 테리 말로이[28] | 8.2[29] | $9,600,000 |
1954 | 데지레(Désirée)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 6.4 | $9,000,000 |
1955 | 아가씨와 건달들(Guys and Dolls) | 스카이 매스터슨 | 7.3 | $9,063,000 |
1956 | 8월 달의 찻집(The Teahouse of the August Moon) | 사키니 | 6.9 | $8,925,000 |
1957 | 사요나라(Sayonara) | 로이드 글루버 | 7.3 | $26,300,115 |
1958 | 젊은 사자들(The Young Lions)[30] | 크리스천 | 7.3 | $4,480,000 |
1960 | 퍼기브 카인드(The Fugitive Kind) | 발렌타인 자비에르 | 7.2 | $2,100,000 |
1961 | 애꾸눈 잭(One-Eyed Jacks)[31][32] | 리오 지코 | 7.2 | $4,300,000 |
1962 | 바운티호의 반란(Mutiny on the Bounty) | 플레처 크리스찬 | 7.2 | $13,680,000 |
1963 | 어글리 아메리칸(The Ugly American) | 해리슨 카터 맥 화이트 | 6.8 | $3,500,000 |
1964 | 베드타임 스토리(Bedtime Story) | 프레디 벤슨 | 6.8 | $3,000,000 |
1965 | 모리투리-유보트(Morituri) | 로버트 크래인 | 7.0 | $3,000,000 |
1966 | 체이스(The Chase) | 칼더 보안관 | 7.3 | $2,300,000 |
1967 | 황금 눈에 비친 모습(Reflections in a Golden Eye) | 웰던 펜더튼 | 6.9 | $1,500,000 |
1967 | 홍콩에서 온 백작(A Countess from Hong Kong)[33] | 오그덴 미어스 | 6.1 | $1,100,000 |
1968 | 캔디(Candy) | 그린디 | 5.4 | $16,408,286 |
1968 | 나이트 오브 더 팔로잉 데이(The Night of the Following Day) | 운전사 | 6.2 | $1,500,000 |
1969 | 번!(Burn!) | 윌리엄 워커 | 7.5[34] | - |
1971 | 악몽의 별장(The Nightcomers) | 피터 퀸트 | 6.1 | - |
1972 | 대부(The Godfather) | 비토 콜레오네[35] | 9.2[36] | $291,100,000 |
1972 |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Last Tango In Paris) | 폴 | 7.2[37] | $96,300,000[38] |
1976 | 미주리 브레이크(The Missouri Break)[39] | 리 클레이튼 | 6.6 | $14,000,000 |
1978 | 슈퍼맨 1(Superman: The Movie) | 조-엘 | 7.3[40] | $300,500,000[41] |
1979 | 지옥의 묵시록(Apocalypse Now) | 월터 E. 커츠 대령 | 8.5[42][43] | $150,000,000 |
1980 | 포뮬라(The Formula) | 아담 스테이펠 | 5.6 | $8,894,289 |
1989 | 백색의 계절(A Dry White Season) | 이안 맥켄지 | 7.0 | $3,766,879 |
1990 | 프레쉬맨(The Freshman) | 카민 사바티니 | 6.5 | $21,500,000 |
1992 |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The Discovery) | 토마스 데 토르케마다 | 4.4 | $8,251,071 |
1994 | 돈 주앙(Don Juan DeMarco)[44] | 닥터 잭 믹클러 | 6.8[45] | $68,792,531 |
1996 | 닥터 모로의 DNA(The Island of Dr. Moreau) | 닥터 모로 | 4.4 | $49,627,779 |
1997 | 더 브레이브(The Brave)[46] | 맥카시 | 6.4 | - |
1998 | 프리 머니(Free Money) | 워른 스벤 소렌슨 | 5.0 | - |
2001 | 스코어(The Score)[47] | 맥스 | 6.8[48] | $114,379,918 |
6. 언급
그는 우리에게 자유를 줬다!
잭 니콜슨
잭 니콜슨
나와 같은 세대의 모든 배우들은 말론 브란도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로버트 드 니로
로버트 드 니로
그는 내 영감의 원천이었다.
알 파치노
알 파치노
그는 내가 평생에 걸쳐 이룬 것을 불과 30살에 모두 이루어 버렸다.
폴 뉴먼
폴 뉴먼
모두가 말론 브란도처럼 말하고 걸었다. 누구나 그처럼 되고 싶어했다.
로버트 듀발
로버트 듀발
저의 또 다른 아버지 말론 브란도 사랑합니다.
마이클 잭슨
마이클 잭슨
7. 평가
1950년대~2000년대까지 오랜 기간동안 활동하며 근세의 사람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고전 배우이면서 현대적인 영화배우의 틀을 잡은 인물이기도 하다.[52] 1950년대에 엘리아 카잔 감독과의 협업[53]을 통해 원래는 연극판에서만 사용되던 연기방법론이었던 메소드 연기를 영화판에 도입시켰다.1960년대에 스스로 감독한 영화 《애꾸눈 잭》(1961)의 실패 이후 몰락하기 시작, 과거의 영광을 잃고 쇠락하는 듯 했으나,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영화 《대부》(1972)에서 마피아 가문의 보스 비토 콜레오네 역을 맡아 재기하여 생애 두번째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하였다. 중장년기에 접어든 1970년대에는 단순히 본인의 건재함을 넘어서서 전성기였던 1950년대보다 더 뛰어난 연기력과 명작들을 남겼다.
그러나 《지옥의 묵시록》 이후 가정사 스트레스에 의한 폭식으로 인해 체중관리에 실패하여 나중에는 무려 150kg의 거구가 된, 어떻게 보면 암울한 노년을 보냈다. 79세 때 사진 그리고 성추행 의혹과 괴팍한 성격 탓에 많은 구설수에 오른, 문제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영화 산업의 연기의 새 지평을 연 인물이자 1950년대의 아이콘으로, 나아가 할리우드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으로 꼽힌다. 뉴 할리우드 시대를 이끈 미국의 원로 명배우들인 잭 니콜슨, 더스틴 호프먼, 로버트 드 니로, 알 파치노, 마틴 신, 로버트 듀발, 제임스 칸, 데니스 호퍼를 비롯한 1930~40년대 생 출신 대부분의 연기파 명배우들뿐만 아니라 조니 뎁, 러셀 크로우, 에런 테일러존슨 등등의 다양한 연령대의 팬들이 있다.영상1영상2
이들 대부분이 말론 브란도가 배우로서 영화판에 첫 선보인 새로운 연기법과 자유분방하면서 반항적인, 당대 영화사에 유례없었던 캐릭터에 빠져들어 연기자로서의 꿈을 꾸거나 그를 모방하면서 연기 실력을 키워나간 것이 비춰진다. 한 마디로 모두가 말론 브란도처럼 되고 싶어 했던 것이다. 일례로 러셀 크로우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의 말론 브란도의 연기를 본 뒤 배우를 꿈꿨고, 무명시절 기타를 치며 '말론 브란도처럼 되고 싶어요'란 자신의 자작곡을 길거리 공연하기도 했다. 러셀 크로우 팬이라면 다 아는 유명한 일화. 이들 중 특히 1930~40년대 생 출신 대부분의 연기파 명배우들은 후기 비트 세대 내지는 초기 히피 세대로서 1960~70년대 뉴 할리우드 시대에 괴물 신인들이자 아이콘들로서 활약하며 말론 브란도가 남긴 연기적 자양분을 토대로 걸출한 커리어와 큰 존재감을 알렸고 지금 세대 젊은 배우들에게 연기적으로 나아가야 할 표상으로 자리 잡게 된다.
영화 뿐 아니라 대중문화에도 큰 영향를 끼쳤는데 1950년대 할리우드 황금기의 마지막 시기를 화려하게 장식하며 비트 세대에 어필해 그때까지 속옷 취급을 받던 비주류 의상인 티셔츠를 일상복이자 보편적인 패션 아이템으로 바꾸었으며 가죽재킷과 베레모, 오토바이를 당대 청년들의 필수요소로 유행시킨 장본인이었다. 제임스 딘이 퍼뜨린 것으로 간주되는 청바지를 영화 《와일드 원》에서 먼저 입은 것도 바로 브란도였다. 가죽 재킷, 베레모, 오토바이 같은 현재 폭주족 패션의 필수 요소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도 브란도가 시조다. 한 명의 헐리우드 배우가 동세대는 물론 그 이후의 패션 개념을 완전히 밑바닥부터 바꾸고 그걸 일상으로 자리잡게 할 정도의 인기를 구가하며 당대 청년층에 어필한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를 대중음악으로 따지면 록 음악계의 선구자 중 한 명이자 해당 장르를 대중적으로 크게 알린 역할을 한 엘비스 프레슬리[54]를 보고 비틀즈, 롤링 스톤스등의 걸출한 록 스타들이 등장한 것과 비슷한 모습이다. 말론 브란도는 현 세대 전설적인 명배우들에게 있어서 롤 모델이자 선구자였던 셈이다.
그리고 폴 뉴먼을 비롯한 말론 브란도와 동 세대 내지는 살짝 뒷 세대의 연기 아이콘들에게 있어서도 그는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목표 내지는 당대 영화계 1인자로서 군림해온 것이 증언을 통해 전부 드러난다. 폴 뉴먼은 그를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줄곧 칭해왔고 제임스 딘은 아예 그를 모방하면서 등장한 것이 그 증거이다.
8. 여담
- 할리우드에서 가장 같이 일하기 싫은 배우로 젊은 시절부터 악명이 자자했다. 영화가 싫어졌는데 계약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촬영을 해야 하면 촬영하다 말고 바지를 입은 채 소변을 봐버리기도 했다고. 덕택에 불쌍한 스태프와 조연, 그리고 힘없는 감독은 이를 갈면서도 말론 브란도의 비위를 맞추어야 했다 한다.
- 잭 니콜슨은 첫 장에 '너무나 젠틀한 말론에게, 잭 니콜슨 (For Marlon, who definitely is too gentle, Jack Nicholson)'이라 적은 제임스 카바노의 <늑대들과 살기엔 너무나 젠틀한 그들(There Are Men Too Gentle To Live Among Wolves)>이란 시집을 말론 브란도에게 선물하기도 했고,[55] 브란도 말년엔 그의 집을 자주 방문해 병간호도 해줬다. 자신이 직접 말론 브란도를 데리고 병원에 갔다.링크 말론 브란도는 친구 칼 말든과 통화에서 자주 밝혔듯이 평소에 병원 가는 거 아주 싫어했는데, 잭 니콜슨의 "그러지 말고 병원 갑시다."란 권유엔 항상 군말 없이 따랐다.[56] 브란도 사후에는 그의 저택을 사들여 선배로서의 그를 경의하는 예를 표하기도 했다.링크 현재 이 저택에서 거주 중이시다.링크 전 주인 말론 브란도보다 더 오래 거주 중이다.
- 잭 니콜슨, 워런 베이티와 집 앞 로터리를 공유할 정도로 가까이 살았다. 말론 브란도, 잭 니콜슨, 워런 베이티 셋 다 왕년엔 소문난 바람둥이다 보니, 주변에선 이 교차로를 "Bad Boy Drive"라고 불렀다고. 또 이 세 사람 저택 근처에 플레이보이 소유주 휴 헤프너의 저택이 있어 비밀통로로 이어져있다는 루머도 돌았다. 워런 베이티가 그레이엄 노튼 쇼(The Graham Norton Show)에 출연해 그런 거 없다고 해명하기도 했다.영상 워런 베이티는 아네트 베닝과 결혼 후 거짓말처럼 바람둥이 생활 청산했지만 말론 브란도와 잭 니콜슨은 휴 헤프너와 서로 왕래가 잦았다(...).
- 할리우드 역대 최고 몸값을 자랑하기도 한 배우이다. 슈퍼맨 1에서 10분 정도 출연에 150억 원을 받았는데 이게 90분짜리 영화로 환산하면 개런티가 1억 불은 가볍게 넘어버린다. 이 기록은 아직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 사실 나오기 싫어서 일부러 무리한 요구를 하고 이만하면 제작자가 포기하겠지 했더니만 슈퍼맨 제작자인 일라이어 솔카인드가 좀 고민하다가 좋소! 라고 허락하자 오히려 브란도는 "미쳤어?"라고 어이없어했다고. 그러나 막상 솔카인드는 은근슬쩍 약속을 어기려들었다. 결국 브란도는 "그러기에! 처음부터 날 캐스팅하지 말아야지! 이래놓고 계약을 어겨? 어디 제대로 맛좀 봐라!" 분노해 소송을 제기하면서 결국 그는 모두 350만 달러에 영화 흥행에 따른 러닝개런티까지 포함 1천 5백만 달러가 넘는 출연료를 챙겼다....우습게도 11년이 지난 뒤에 나온 배트맨에서도 잭 니콜슨이 이런 요구를 했는데 이 양반은 덤으로 영화 촬영조건으로 항상 7시까지 촬영을 마쳐야 하며 촬영 후에는 자신이 무엇을 하든 제작진은 간섭을 하지 말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그래서 니콜슨은 7시가 끝나면 칼같이 퇴근해서 자신이 묵고 있는 최고급 호텔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촬영지인 영국 여행을 했다고 한다. 문제는 조커 분장이 10시간이 넘게 걸리는 작업이라서 조커가 등장하는 모든 장면은 3시간 이내에 촬영됐다. 이러니 제작진들 고생은... 브란도 못지 않았다고 한다.
- 마이클 잭슨과도 매우 절친한 사이어서 말년에 자신이 죽으면 그가 조장을 시켜주기를 바라기도 했다. 말론의 아들 미코는 마이클 잭슨의 80년대 말 로드 매니저이기도 했다. 말론은 마이클 잭슨의 30주년 기념 공연에 참석하기도 했고, 마이클 잭슨의 You Rock My World 뮤직비디오에 말론 브란도가 직접 출연하기도 했다. 참고로 장편영화 기준으로는 스코어가 생에 마지막 작품이지만 모든 영상매체를 기준으로 하면 이 뮤직비디오가 말론의 생전 마지막 출연작이다.
- 조니 뎁이 가장 존경하는 배우이기도 하다. 조니 뎁은 1995년 〈돈 주앙〉에서 브란도와 함께 출연하기도 했다. 또한 〈다크 섀도우〉에 나름 말론 브란도 닮은 꼴인 조니 리 밀러 캐스팅에 힘을 보탰다.
- 40대 후반에 <대부>에서의 늙은 조폭 두목 역할을 위해 분장과 더불어 입에 보정기까지 물었다.
- 참고로 <대부>를 찍을 당시에는 나이가 좀 있어서 젊은 시절의 포스가 없지 않겠나 생각하는데 큰 오산이다. # 브란도는 이때 겨우 48세로(그가 연기한 콜레오네는 60세), 자기 아들 역인 제임스 칸과 16세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
- 그의 자서전에 의하면 <홍콩에서 온 백작부인>에서 감독 찰리 채플린과 갈등이 있었다고 한다. 채플린은 극중 인물의 연기를 자신이 먼저 보여주고 배우들에게 그대로 따라하라고 주문하는 스타일의 감독이었고, 브란도는 자신의 메소드 연기에 대한 자존심이 무척 센 배우였기 때문에 충돌이 자주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브란도는 자서전에서 채플린을 '자기중심적인 독재자이자 구두쇠'라고 표현했다. 채플린도 자서전에서 브란도와 일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토로하면서 같이 공연한 소피아 로렌과도 불화가 끊이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했다.
- 에이드리언 브로디가 피아니스트로 29살에 최연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 기록을 깨기 전까지 30세로 최연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 기록 보유자는 말론 브란도라 알려졌으나 리처드 드레이퍼스이다. 둘 다 30세는 동일하나 리처드 드레이퍼스의 생일이 말론 브란도 보다 늦다. 다만 에이드리언 브로디 역시 1973년생으로 2003년 30세 되던 해에 신기록을 달성했다. 생일이 지나기 전이라 만 29세의 기록을 세운 것이다.
- 2007년 <브랜도>라는 그의 전기 다큐멘터리가 나왔다. 영어가 되는 분들은 한번 구해서 보시기 바란다. 알 파치노, 에드워드 노튼, 숀 펜, 존 트라볼타, 마틴 스코세이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조니 뎁, 로버트 듀발, 존 보이트 등등의 어마어마한 배우와 감독들이 말론 브란도의 존재가 얼마나 영화사에 중요한 존재였는지 잘 설명해주고 있다.링크
- 브랜도는 폴 뉴먼와 더불어 할리우드에서 남자 배우 스타일을 결정하는 양대산맥 중 하나이다. "너는 반항아인가? 신사인가?"이 둘을 잘 비교 설명해놓은 좋은 블로그 글이 있어 소개한다.링크
- 한때 인터넷에 돌아다니던 고전 미남 배우 움짤의 주인공이 말론 브란도이다.
- 생전 인터뷰에서 배우는 아무나 하는 겁니다. 프로이트, 간디, 마르크스, 이런 사람들이 세상을 바꿉니다. 영화 연기는 너무나도 따분하고 유치한 활동입니다. (A movie star is nothing important. Freud. Gandhi. Marx. These people are important. But movie acting is just dull, boring, childish work.)라는 말을 남겼다고 알려져 있다. 배우로서의 활동에 빠르게 회의를 느껴버린 그이기에 그렇게 말할 만도 하다. TIME 링크
- 첫 애니메이션 더빙작인 'Big Bug Man'으로 복귀할 예정이었으나, 말론 브란도의 사망과 더불어 제작사의 재정난 등의 악재가 겹쳐 결국 제작이 중단되었다. 브랜든 프레이저가 주인공을 연기하고, 말론 브란도는 악역 노파 역할이었다. 당시 에이전트에 따르면 말론 브란도는 살아 생전에 한 번은 여자 캐릭터를 연기하고 싶어해 이 역할을 맡았고, 죽기 직전에도 이 캐릭터를 무척 재밌게 연기했다고 한다.
- 첫째 누나 조슬린 브란도(Jocelyn Brando)도 배우다. 글렌 포드 주연의 빅 히트(1953)가 유명하다. 아버지 말론 브란도 시니어(Marlon Brando Sr.)가 사관학교에서 사고 치고 집으로 돌아온 막냇동생을 자꾸 천덕꾸러기 취급하자 조슬린은 말론을 뉴욕으로 데리고 온다. 그녀는 당시 뉴욕 AADA(The American Academy of Dramatic Arts)에서 연기 공부 중이었고, 브란도의 둘째 누나 프란시스 브란도(Frances Brando)도 대학생으로 학업을 위해 당시 두 자매는 뉴욕에서 함께 거주 중이었는데 누나 둘과 뉴욕에서 지내며 연기학원을 다니기 시작한 것이 배우 말론 브란도의 시작이다. 말론에겐 평생 은인들이자 말론을 배우로 만들어 준 일등공신들이라 할 수 있다.
- 안셀 엘고트는 말론 브란도의 사진이 새겨진 옷을 입기도 하고 성대모사한 적도 있는 걸 보아 팬인듯하다.영상
-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과 페르소나 관계의 인물인 배우 미후네 토시로와 같은 비행기에 탑승한 적 있는데 말론 브란도가 먼저 찾아가 인사를 건넸다.출처
- 톰 하디가 말론 브란도 닮은 꼴로 꼽힌다. 구글에서도 tom hardy looks like marlon brando가 자동완성 문장으로 뜬다.링크 톰 하디 본인 역시 이 사실을 알고 있다. 다만 톰 하디 본인은 '말론 브란도와 닮은 꼴'이란 세간의 평이 살짝 부담된다고 한다. 2012년 5월, Vulture 지와 인터뷰에서 〈8월 달의 찻집〉의 브란도의 연기를 〈티파니에서 아침을〉 에서 미키 루니가 동양인 연기한 것과 비교하며 "These are legends, and even legends are fallible."(그들은 전설들이지만, 전설도 때론 실패할 수 있어요.)란 미묘한 답변을 남겼다.#1#2
- 말론이 2002년 할리우드에서 열었던 연기 세미나 현장을 찍은 다큐멘터리 〈살기 위해 거짓말한다(Lying for Living)〉가 2002년 11월, 영국에서 공개되었다.# 다큐멘터리까지 포함하면 이 작품이 마지막 출연이다.
9. 대중매체에서
- 슬립낫의 노래인 Eyeless에 보면 "You can't see California without Marlon Brando's eyes"라는 가사가 있다. 보컬인 코리 테일러에 의하면 길에서 본 노숙자가 중얼거리던 말이라 한다.
- 아기공룡 둘리: 얼음별 대모험에서는 마이콜의 노래 가사 중간에 말론 브론도가 들어갔는데, 직접 출연은 아니지만 도우너가 말론 브란도, 또치가 마릴린 먼로 코스프레를 한 모습이 잠깐 나왔다.#
- 2004년 7월 11일 방영된 파리의 연인 10화에서 영화관 직원 일동이 강사인 척 사기 치는 교육생의 주도로 방영 시점에서 사망한 말론 브란도를 위해 묵념하는 장면이 있다. 2004년 당시만 해도 드라마는 지금처럼 사전제작이 아니라 다음 주 방영분을 이번 주에 촬영해서 10일 전 사망한 말론 브란도를 기리는 장면을 넣을 수 있었던 것. 파리의 연인 남주인공 배우 박신양이 담당 PD에게 요구해서 넣은 장면이라 한다. 박신양은 러시아에서 메소드 연기를 공부한 배우이다. 다만 미국의 메소드 연기와 박신양이 러시아에서 배운 '스타니슬랍스키 시스템(Система Станиславского / Stanislavski's System)'은 많이 다른 연기법이다. 이는 1934년 여름, 프랑스 파리에서 말론 브란도의 연기 스승 스텔라 아들러와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가 만나 5주 동안 함께 무대공연을 준비한 적이 있는데, 이때 스텔라 아들러와 나눈 담화에서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 본인도 인정한 부분이다.출처1출처2
- 2015년, 다큐멘터리 《리슨 투 미 말론 (Listen to Me Marlon)》이 나왔다. 평이 좋은 편.
[1] 1953년 시상식부터 연기부문 시상.[2] o로 끝나는 성 및 〈대부〉에서의 활약으로 이탈리아계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으나, 실제로는 영국, 아일랜드, 독일, 네덜란드 등의 혈통을 물려받았으며, Brando라는 성은 Brandau라는 독일계 성에서 유래한 것이다.[3] 인도-영국계 미국인 여배우.[4] 멕시코계 미국인 여배우.[5] 보라보라 섬에서 태어난 폴리네시아 원주민이다.[6] 가족관계에 대해서는 하단 참조.[7] 가족관계에 대해서는 하단 참조.[8] Annie Laurie Gaylor, "Marlon Brando", ffrf.org[9] "The Religion and Political Views of Marlon Brando", hollowverse.com[10] "Marlon Brando", celebatheists.com[11] 1901.02.10–1992.12.21 할리우드의 전설적인 스타 제조기. 또한 그룹 시어터(Group Theatre) 멤버 중 메소드 연기를 창시한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를 파리에서 직접 만나 함께 협업도 해본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다.[12] 실제로 말론 브란도는 프레드릭 마치와 존 가필드를 잇는 성격파 터프가이 배우로 꼽히기도 한다.[13] 사진의 얼굴 부분이 컷아웃되어 비틀즈의 페퍼상사 앨범에 추가되기도 했다. 초기 비틀즈 멤버의 인형 뒤에 위치해 있다.[14] 10분 정도 출연하는 데 40억 원이 넘는 출연료를 받았고, 영화가 대박을 터뜨리자 옵션까지 붙어 총 150억 원 정도를 받았다. 자세한 건 항목을 참고할 것.[15] 험프리 보가트는 터프가이였지 기존 체제를 완전 갈아엎자는 반동분자는 아니었다. 보가트의 대표작인 《몰타의 매》의 샘 스페이드는 말보단 주먹이 먼저인 인물이지만 엄연히 기존 체제 아래 순응하던 인물이었다! 그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더티 해리의 원조격인 인물이다.[16] 신인시절 영화사측이 뉴먼을 "제 2의 말론 브란도"라는 콘셉트으로 홍보하자 뉴먼이 크게 반발하기도 했다.[17] 여담으로 사친 리틀페더는 2022년에 사망하였는데, 그녀의 사망 이후 친자매들이 사친은 아메리카 원주민이 아닌 히스패닉이었다고 밝혀 논란이 됐었다. 이전에도 꾸준히 사친의 혈통에 관한 의문이 제기되었는데 친자매들에 의해 폭로되면서 논란의 여지가 없어진 셈. 그녀를 옹호하는 쪽에선 혈통을 조작했다 하더라도 사친이 일궈낸 업적까지 폄하해선 안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사친은 명성에 비해 많은 사익을 취하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18] 당시 동성결혼이란 걸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시대라 콕스가 "여자였으면" 결혼했을 것이라고 발언한 것으로 추정된다. 말론 브란도와 월리 콕스가 적어도 8-90년에 태어난 인물들이였으면 둘의 결혼이란 충분히 가능했을 일이다. 시대에 맞지 않게 태어난 안타까운 비운의 연인.[19] 마초남인 말론 브란도와는 달리 월리 콕스는 왜소하고 부드러운 인상을 가졌다.실제론 근육졌지만...[20] 말론 브란도가 당시 콕스의 부인에게 직접 그의 재를 뿌리기 위해 콕스의 유골 단지를 넘겨달라고 요청했고 그녀는 브란도를 믿고 넘겨줬는데... 이후 뿌려진 게 아니라 브란도가 그녀 몰래 보관하고 있다는 것에 매우 놀랐다고 한다.[21] 미국은 누군가 사망하면 법적상 배우자가 모든 것의 우선권을 갖고있다. 즉, 콕스의 부인이 죽은 남편의 유골함을 남에게 넘겨준 것도 브란도를 매우 신뢰했다는 건데 그녀를 속인 것도 모자라 남편의 재를 자기 것 마냥 가지고 있던 브란도에게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다.[22] 다만 콕스의 전 부인들은 남편과 말론의 관계는 친구 이상으로 넘어가지 않았다고 했으며 그들의 소문은 단순한 루머라고 단정지었다. 하지만 콕스의 죽음 후 말론의 기이한 행동들을 포함해 그가 언급한 발언들 및 콕스의 유품 소송 포기를 생각하면 둘의 친밀한 관계를 인지는 했으나 아내로서 부정하는 것인지 아니면 사후 콕스의 이미지를 더럽히기 싫어서일 수도 있다. 당시 동성애는 큰 화제거리의 요소였으며 배우의 이미지를 더럽히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23] 기이하게도 브란도가 《대부》에서 맡은 역할인 비토 콜레오네 역시 극중에서 아들이 딸의 약혼남을 살해했다. 배역의 상황이 비극적이게도 배우의 현실에서도 나타난 것. 이 일화가 한국의 신비한TV 서프라이즈에 소개되기도 했다.[24] 타히티 프랑스령 폴리네시아 의회(Assembly of French Polynesia) 의원인 자크 드롤렛(Jacques Drollet)의 아들이다.[25] 말론 브란도의 친구가 입양하였다.[26] 당시 말론 브란도는 이미 고인이었다. 즉, 이는 어디까지나 전적으로 마리아 슈나이더만의 주장이다.[27] 거장 프레드 진네만 감독 작품이자 말론의 데뷔작.[28] 첫번째 아카데미 남우 주연상 수상작.[29] 메타 스코어 88점.[30] 고향 선배 몽고메리 클리프트와 공동 주연.[31] 말론의 처음이자 마지막 감독작.[32] 안필립 출연작.[33] 찰리 채플린 감독의 영화. 그냥저냥인 평가와는 달리 흥행은 제작비의 반도 못 건져내고 쫄딱 망했다. 찰리의 구식 연기 지도를 말론은 맘에 들어하지 않아 충돌이 잦았다고...[34] 메타 스코어 75점.[35] 두번째 아카데미 남우 주연상 수상작.[36] 메타 스코어 100점. 대부의 위엄...[37] 메타 스코어 77점.[38] $1,000,000의 제작비로 만들어져 $96,300,000를 벌어들인 말론 브란도 필모 중 제작비 대비 가장 높은 흥행 수익을 기록한 영화.[39] 잭 니콜슨과 공동 주연.[40] 메타 스코어 86점.[41] 말론 브란도 최고의 흥행작.[42] 메타 스코어 90점.[43] 사실상 배우의 최후의 주요 작품. 이후로는 내리막길.[44] 조니 뎁과 공동 주연.[45] 메타 스코어 63점.[46] 영화 배우 조니 뎁의 감독 데뷔작.[47] 말론 브란도 생전 마지막 출연작이다.[48] 메타 스코어 71점.[49] 《지옥의 묵시록》이후에는 여러가지 사정으로 인해 돈 문제가 급해서 돈 때문에 죄다 졸작 내지 망작 급 영화에 많이 출연하게 되었고(아니면 끽해야 평작인 작품들에) 이는 팬들이 그의 필모에 조금 아쉽게 느끼는 부분이다. 그나마 유작인《스코어》가 꽤 좋은 평가를 받았으니 그걸로 위안을 삼아야 할지도.[50] 대부에서 말론 브란도(비토 콜레오네)의 장남 소니 콜레오네를 연기한 배우.[51]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원작자.[52] 오드리 헵번, 마릴린 먼로와 동시대의 인물이다.[53]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혁명아 자파타〉, 〈워터 프론트〉[54] 공교롭게 엘비스 프레슬리는 실제로 말론 브란도와 친한 사이였고, 배우로서 영화 〈Love Me Tender〉(1956), 〈블루 하와이〉 등에 출연 당시 자신의 연기 롤 모델은 말론 브란도와 제임스 딘이라 밝히기도 했다.[55] 말론은 이 시집을 러셀 크로우에게 선물한다.[56] 아이러니하게 비극적으로 자살로 생을 마감한 브란도의 딸 타리타 샤이엔 브란도의 유복자 즉, 말론 브란도의 손자 투키 브란도(Tuki Brando)의 직업은 의사다.[57] 이 섬은 1966년부터 ~ 2065년까지 말론 브란도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