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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만 공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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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아시아/태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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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만 공습
The Attack on Pearl Harbor
真珠湾攻撃、布哇比 (ハワイ) 海戦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USSArizona_PearlHarbor.jpg
공습을 받고 화염에 휩싸인
펜실베이니아급 전함 BB-39 애리조나
날짜1941년 12월 7일
장소
미국, 하와이 준주 오아후 섬 진주만
교전국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미국|]]
지휘관
[[틀:깃발|
기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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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발 명칭
]][[허즈번드 킴멜|]]
[[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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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발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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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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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모토 이소로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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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발 명칭
]][[겐다 미노루|]]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틀:깃발|]] 구사카 류노스케
전력
미합중국 태평양함대
전함 8척[1]
순양함 8척
구축함 30척
잠수함 4척
기타 함정 50척
항공기 약 390대
제1항공함대
항공모함 6척[2]
전함 2척[3]
순양함 3척
구축함 9척
항공기 441대
갑표적 5척[4]
결과
일본 제국의 승리
영향
미국 해군 태평양함대의 전함 전력 상실
미국의 연합국 합류 및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태평양 전쟁 발발
피해규모
전사 2,334명
부상 1,143명
민간인 사상 103명
전함 4척 침몰[5], 1척 좌초, 3척 손상
순양함 3척 손상
구축함 3척 손상
표적 등 기타 함정 2척 침몰[6], 1척 좌초, 2척 손상[7]
항공기 188기 손실, 159기 손상
항공기 29기 손실, 74기 손상
갑표적 4척 침몰
갑표적 1척 좌초
전사 64명
포로 1명[8]

1. 개요2. 서론3. 배경4. 일본 제국의 진주만 공격 이유5. 전개6. 뒷이야기
6.1. 최선의 전략과 오판6.2. 미국의 격노
6.2.1. 음모론6.2.2. 음모론에 대한 반론
6.3. 일본의 동남아 침공과 대전략6.4. 추축국의 대미 선전포고
6.4.1. 추축국간의 동상이몽과 서로 엿먹이기
6.5. 관련 인물들의 후일담
6.5.1. 미군 측 인물
6.5.1.1. 진주만의 명예훈장 수훈자들
6.5.2. 일본군 측 인물
6.6. 평가6.7. 소련6.8. 이후 태평양 전선의 규모
7. 창작물에서 묘사한 진주만 공습
7.1. 영상물7.2. 게임
8. 여담
8.1. 만약 항공모함들이 모두 있었다면?8.2. 만약 미군의 유류 저장고를 공격 당했다면?
9. 관련 어록10. 관련 문서11.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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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라, 도라, 도라!(トラ, トラ, トラ!)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 개시 직전 보내진 암호문[9]
진주만을 기억하라!(Remember Pearl Harbor!)
진주만 공습 이후 미국 내에서 유행한 슬로건[10]
진주만 공습(, The Attack on Pearl Harbor)[11]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아침(하와이 현지 시각) 일본 제국 해군항공모함 6척으로 편성된 연합함대가 미합중국 자치령 하와이 제도의 오아후섬[12] 북쪽 200마일 해상까지 접근, 400여 대의 일본제국 해군항공대의 함재기가 미국 태평양 함대의 기지가 있는 진주만을 기습 공격한 사건이다.

2. 서론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치욕의 날 연설[13]
Mr. Vice President, Mr. Speaker, Members of the senate, the House of Representatives. Yesterday, December 7, 1941 - a date which will live in infamy -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was suddenly and deliberately attacked by naval and air forces of the Empire of Japan. (중략) I ask that the Congress declare that since the unprovoked and dastardly attack by Japan on Sunday, December 7, 1941 a state of war has existed between the United States and the Japanese empire.

부통령, 하원 의장, 상하원 의원 여러분. 앞으로 치욕의 날로 기억될 1941년 12월 7일인 어제, 미합중국은 일본 제국의 해군과 항공대로부터 고의적이고 기습적인 공격을 받았습니다. (중략) 본인은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일본의 부당하고 비겁한 공격 이후 성립된 미합중국과 일본 제국 간의 전쟁 상태를 의회가 승인해 줄 것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치욕의 날 연설문 중
중일전쟁으로 대표되는 일본 제국의 과격한 군사적 행동에 대해 미국은 일본 제국을 대상으로 한 경제제재로 석유 금수 조치와 철강 수출 제한 조치를 시행했으며, 이와 같은 미국의 일본 제재는 진주만 공습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다. 미국의 이같은 금수 조치에 대한 대응으로 전쟁을 택한 일본 제국은 남방 작전의 일화으로써 1941년 12월 7일 아침, 항공모함 6척을 동원한 대함대를 이끌고 하와이 진주만의 미국 해군 태평양 함대를 기습 공격하였으며 이는 곧 태평양 전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일본 제국의 선전포고 없는 기습 공격으로 12척의 미 해군 함선이 피해를 입거나 침몰하였고 2,334명의 미군 장병과 103명의 민간인이 사망하였다. 불행 중 다행으로 항구에 있지 않았던 태평양 함대의 항공모함 3척과 진주만의 유류 보관소와 무기고 등은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덕분에 미국은 이후 6개월에서 1년 사이에 전력을 원상복구를 할 수 있었다. 이 공격을 계획한 것은 야마모토 이소로쿠이며 지휘는 나구모 주이치가 맡았다.

당시 진주만 공습이 미국에 불러온 충격은 매우 지대했다. 공습 전까지만 해도 미국 국익에 도움이 안되는 전쟁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고립주의자들의 주장이 미국 국민 대다수의 지지를 얻고 있었으며 일본 제국과 나치 독일의 전쟁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원치 않고 있었다. 그러나 진주만 공습은 이러한 추세를 꺾이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공습 다음 날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의회에서 "치욕의 날 연설"로 일컬어지는 유명한 연설로 일본의 기습 공격을 공식 발표했고, 연설 직후 '전쟁 참가법'이 상원에서 만장일치, 하원에서 388:1로[14] 가결되며 미국은 공식적으로 참전을 선언한다.

진주만 공습은 역사상 최장거리의 기습작전이었으며, 또 전술적으로 완벽한 일본 제국의 승리였으나, 전략적으로 보았을 때 미국을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게 만듦으로써 일본 제국, 더 나아가 동맹국 나치 독일 등 추축국 전체를 패망으로 이끈 결정적인 실책으로 평가된다. 일제 식민통치 해방에 기약이 없던 당대에 있어 한국과 대만의 해방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사건이기도 하다.

3. 배경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태평양 전쟁/배경 문서
번 문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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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4. 일본 제국의 진주만 공격 이유

태평양 전쟁/배경 문서에 기술된 내용과 같은 이유로 일본 제국은 미국과의 전쟁을 결정한다. 이제 일본은 전쟁을 시작할 방법을 두고 논의를 벌이는데, 이때 연합함대 총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전쟁계획을 제안한다. 야마모토의 주장에 따르면 '그나마 현실적으로 미국과 싸울 방법'으로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해서, 거기에 기지를 둔 태평양 최강의 함대인 미국 태평양 함대를 전멸 또는 최소한 괴멸 직전 상태로 몰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면 미국이 힘을 회복하는 동안 일본에게 없는 석유를 얻을 수 있는 동남아시아를 점령하고 섬들을 전부 요새화해서 미국의 공세 의지를 꺾고, 가능하면 더 이상의 결전없이 어떻게든 평화협상을 성사시키는 것이고, 정 안 되면 태평양을 종심(縱深)[15]이 깊은 전장으로 삼아 미국의 공세전력을 소모시켜 최종 결전에서 그들을 격멸하고 어떻게든 평화협상을 성사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의 군부가 놓친 점이 있었는데 독일이 제1차 세계 대전제2차 세계 대전 두 전쟁에서 패배한 결정적 계기인 전선이 이중화가 되어 확전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벌어진 원인 역시 중일전쟁을 벌인 육군이 제공한 것이다. 육군이 중국을 다 잡아먹겠다는 행동을 하자 당시 중국에 상당한 비중을 두고 있던 미국과 영국, 프랑스, 특히 미국이 중재자로 나서서 일본에 더 이상의 침략 행위를 자제하라고 했는데, 이걸 일본이 무시한 것이 원인이었다. 더군다나 독일은 1차 대전 당시에는 육군만 따지면 세계 1위, 해군도 세계 2위에 드는 강국이었고 2차 대전 당시에도 탑3 안에는 항상 들었던 강력한 전력으로, 1차 대전 중반에 러시아 제국[16](동부 전선), 2차 대전 초반에 프랑스(서부 전선)를 정리하여 전선 축소까지 해버리고도 결국 패배했다. 그리고 1차 대전 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불가리아, 2차 대전 때 헝가리, 루마니아불가리아, 이탈리아 같이 지리적으로 매우 가까운 위치에 비록 2차 대전 당시에는 유럽에선 제한적인 역할 이상은 수행할 수 없을 정도로 줄어들었으나, 동맹국이 충분히 존재했다.

어차피 둘 사이의 전면전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미국은 유럽 전선의 상황이 정리되는 대로 곧바로 태평양 전선으로 모든 여력들을 돌릴 예정이었으며, 일본의 점령지는 절대로 그대로 놔둘 생각이 없었다. 그 목적의 달성을 위한 태평양 함대의 건조도 착착 진행되어 가고 있는 상황이라 일본의 입장에서는 어느 쪽의 승리로 끝나든 유럽 전선이 결판나기 전에 미국과의 전쟁을 시작한 뒤 적절히 협상하여 끝내고 싶었던 것이다.

당시의 유럽 전선은 추축국이 매우 유리한 형세였으므로 그대로 종전된다면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맺은 일본은 미 대륙을 고립시켜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어나갈 수 있었다. 혹여라도 추축국이 패배하더라도 조금이라도 병력이 분산될 때 일찌감치 결판을 지어놔야 유리한 것은 자명하다. 즉, 미국과의 결전 자체는 충분히 정치적이며 전략적인 결단이었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소련이 모스크바까지 밀린 상태로 독일이 소련을 상대로 승리를 눈앞에 둔 것처럼 보였고, 미국의 경제력이 초반에 입은 타격을 전부 복구하고도 남아돌 것이라고 당시로서는 예상하기 힘들었다.
파일:해군 평형확장판.png
전쟁 발발 전 양국의 해군 평형

지형적 특성상 서로 간에 타격을 주려면 해군이 필수불가결했고, 반대로 이것만 없으면 일본은 상당한 기간 동안 식민지의 점령을 공고히 하고 국제 사회에서 이를 인정받을 기간을 벌 수 있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싸움이라면 적어도 적이 준비를 끝마치기 전에 적이 본인을 공격할 유일한 수단을 미리 잘라놓는 것이 전략적으로 유리한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즉, 나를 공격할 도구인 적의 팔다리를 먼저 다 잘라놓고 회복되기 전에 결정적 타격을 주기 위한 예방전쟁의 전략이었고, 일본의 진주만 공습도 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루어졌다. 물론, 일본의 군부에서 이렇게까지 구상하는 전략은 어디까지나 추축국이 패배하지 않았어야 했다는 것이 전제조건이었다는 문제점을 간과하고 있었다.

실제로도 이런 선제 기습은 청일전쟁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재미를 봤던 전략이기도 하다. 문제는 미국은 동네북이던 청나라나 내실이 부족하고 내부가 혼란했던 당시의 러시아 제국과는 비교도 안 되는 국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해군은 그 특성상 큰 군함이 주체가 되기 때문에 괴멸 상태가 되면 당연히 복구에 시간이 어마어마하게 소요된다. 따라서 미국이 주간 항공모함이라고 불릴 만큼의 배를 찍어내는 무시무시한 공업력을 가진 존재가 아니었다면 태평양함대의 괴멸로 태평양 전쟁의 주도권을 일본이 오래 가질 수 있었을 것이고, 어떻게 활용하는가에 따라서 그 동안 상황을 더 유리하게 만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 당시 파악된 미국의 역량이 지나치게 과소평가되어 있었으니 일본의 원래 의도대로는 다시 돌아갈 수 없었다. 이와 거의 똑같은 사례가 독소전쟁인데, 이 경우도 독일소련을 아주 호구로 여겨서 허접한 소련군 따위는 10주면 처리할 수 있다고 믿고 일을 저질렀지만, 현실은 굳건히 버틴 소련에게 역으로 털리는 결말을 맞게 된다. 설사 적이 협상할 마음이 없다고 하더라도 전면전에서 상대방의 전력을 줄여놓는 것은 초반 전세의 승기를 잡고 후에 교착상태가 되었을 때 좀 더 우위를 가져갈 수 있다는 점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히라타 신사쿠 제독이 1930년에 출간한 '우리가 싸운다면'이란 책에서 일본이 먼저 미국의 하와이를 공습한다면 미군의 사기가 떨어져 미 해군이 괴멸될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런 사례가 당시 일본 군부의 안일한 생각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의 구상의 전제 조건인, 미국과의 전쟁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은 상당히 의심스럽다. 일단 미국이 일본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본격적으로 일본과 한 판 붙어보겠다는 생각까지는 아니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일단 미국 정치인들은 일본보다 당시 세계의 중심인 유럽-대서양에 더 관심이 있었고, 이는 심지어 진주만 공습을 당한 이후에도 비슷하여 유럽 전선을 우선한다는 방침을 내세우고 있었다.[17] 문제는 일본이 중일전쟁으로 설치는 것을 미국이 계속 내버려둘 생각도 없었고 침략으로 먹은 이권을 포기하지 않으면 경제적인 제재를 가하겠다고 경고를 했는데 땅맛을 본 일본 군부의 입장에서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다는 것이다.[18] 물론 일본이 제대로 된 민주주의 국가였다면 이쯤에서 미국의 경고를 곱게 받아들이고 물러났겠지만, 당시 일본은 그렇게 멀쩡한 나라가 아니었다. 애초부터 일본이 제대로 된 민주주의 국가였다면 그 정도로 어그로를 끌지는 않았을 것이고 당연히 사전에 알아서 자제했을 가능성이 크긴 하다.

사실 미국이 독일과의 전쟁에도 주저없이 총력전으로 나설 수 있었던 것도[19]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한 후 히틀러가 일본의 동맹국으로서 미국에다 선전포고를 했기 때문이다. 즉, 미국을 전면전으로 끌어들인 것은 진주만 공습의 결과였다. 아무리 미국의 국력이 대단하더라도 총력전 태세 없이는 국력을 동원하는 데 한계가 있다. 미국 같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국민 대부분의 지지를 얻지 못하면 총력전 태세로 전환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지만, 그 역할을 일본과 독일이 해낸 셈이다.

특히 적당히 유리한 상황을 조성한 후 협상으로 전쟁을 끝낼 생각이었다면 진주만 공습은 어리석은 짓이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이 협상에 응할 것인가 여부는 물론 전세에도 좌우되지만, 국민 감정에 따른 여론에도 크게 좌우될 수밖에 없다. 일본은 전쟁에서의 유불리만을 고려했을 뿐 미국의 일반 국민 및 정치인들의 감정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미국인들이 무슨 생각을 하던 협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만들 능력이 없다면 진주만 공습과 같은 방식을 협상의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되었다.

러일전쟁의 결정적 승리가 상대를 협상 테이블로 끌고 나온 사례로 제시되기도 한다. 1904년 일본 제국은 국력이 3~5배 이상 차이가 나는 러시아 제국을 상대로 러일전쟁을 벌였다. 역시 전쟁의 시작을 선전포고 없는 기습공격으로 제물포 해전을 시작한 것도 진주만 공습과 여러 유사점이 있다. 여기서 일본은 철저한 준비와 여러 호재가 겹쳐 유리한 전장 상황과 1905년 미국의 중재에 힘입어 포츠머스 조약을 맺었고 조선과 만주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러일전쟁 당시 모스크바까지 공격할 계획은 전혀 없었고(물론 그럴 능력도 당연히 없었고), 일본 본토 인근인 블라디보스토크조차 전장이 아니었다. 주요 전장은 만주대한해협으로 국한되었다. 일본은 이 러일전쟁을 주목했고 그 대상이 미국과 태평양으로 변경되었으며, 목표는 아시아로 확대된 것이다.[20] 물론 이번 전쟁의 중재자도 정해놨는데, 그것은 진주만 공습 8개월 전인 1941년 4월 불가침조약을 맺은 소련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 제국의 대동아 공영권 구상은 다음과 같은 이유들로 실패하게 된다.

5.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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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뒷이야기

6.1. 최선의 전략과 오판

기습을 통해 태평양의 미군을 빈사 상태로 만들어버린 뒤, 일본군의 동남아시아 방향으로의 남하를 미국이 용인하게 하는 유리한 조건 하에 강화를 맺겠다는 전략이 당시 일본이 내세울 수 있는 최선이었음에도 결과적으로 오판이었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1번째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의 미국의 정치적 단결력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의 미군 함대는 과달카날 전역 초반까지 계속 수세에서 작전을 했어야 할 정도로 약화되었던 것도 사실이나, 일본군 대본영은 미 해군을 진주만에서 전멸 혹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히고 이후 증원되는 미국 함대 역시 점감요격작전에 따라 차례차례 요격하여 미 해군에게 큰 성과 없이 지속적인 피해를 입게 한다면, 경제적 문제 및 정치적 문제로 인해 미국이 태평양에서 철수하고 일본의 동남아시아 침략을 용인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선전포고도 하지 않고 기습을 했던 일본의 행동은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과 해군의 어니스트 킹이 중심이 되어서 주장하던, 이전까지 미국 내에서 소수파의 주장이었던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이라는 엔진에 제동을 걸기는커녕 강력한 추진력을 넣어준 셈이 되어 버렸으며,[25] 당시 미국에서는 일본에 대한 인종차별적 사상도 만연해 있었던지라 진주만 공습은 전미적으로 큰 공분을 샀고 미국의 반전주의자들조차 소수의 극단적인 반전주의자[26]들을 제외하고 일본과의 전쟁에는 찬성하게 되는 결과를 불러일으켰다. 미국의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을 두고 개입주의와 고립주의 사이에서 갈등을 벌이던 민주당공화당이 일본의 선제기습이라는 국가적 위기 앞에서 단결하면서, 일본은 미국 전체가 일치단결해 총력전 태세에 나서는 바람에 전면전을 강요당하는 역효과만 내고 당초 원했던 미국과의 강화는 아예 불가능해졌다.

2번째는 미 해군의 태평양에서의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시키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초반에 일본군은 진주만 공습으로 미군의 전함전력을 크게 약화시켰으며 이후 이어진 자바 해전에서 USS 랭글리(CV-1)을 대파시켜 미군이 자침시키도록 하고 산호해 해전에서는 렉싱턴급 항공모함 USS 렉싱턴(CV-2)를 격침시키는 등 일본 해군은 미 해군을 상대로 승승장구하였으나, 여전히 태평양 함대의 최후의 주요 전력인 요크타운급 항공모함 3척이 끝까지 일본 해군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따라서 이를 전멸시켜 미국의 태평양 전역에서 확고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진주만 공습의 주역들인 카가, 아카기, 소류, 히류와 공고급 순양전함 2척까지 끌고와 미드웨이 해전을 벌였으나, 결과적으로 미 해군은 위 3척 중 1척을 잃으면서도 위 진주만의 주역들을 모조리 수장시켜버렸다. 거기다가 그 살아남은 2척 중 1척인 USS 엔터프라이즈(CV-6)는 미 해군이 항모를 지속적으로 1척씩 상실하는 동안에도 과달카날 해전까지 끈질기게 버티면서 일본 해군의 발목을 잡아 미 해군이 제해권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었다.

결국 일본 해군은 과달카날 해전까지 미 해군에 비해 우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 해군의 기동방어를 파쇄하지 못하여 끝내 태평양 전역에서 미 해군의 제해권을 상실시키지 못했고, 이후 미국의 물량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하자 그야말로 일방적으로 학살당하며 와해되었다.

3번째로 일본의 생각과는 달리 미국은 태평양의 지배권을 일본과 나눌 생각이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더글러스 맥아더의 경우처럼 미국은 필리핀에 대한 영향력을 놓을 생각이 전혀 없었으며, 주요 동맹이었던 영국프랑스 등의 식민지를 일본군이 침략하는 것을 방관하는 것 역시 당시 유럽전선에서 협력하고 있던 미국의 입장에서는 정치적으로 논외인 부분이었다.

이외에 결정적이라 볼 수는 없으나 진주만 공습 시 전술적 오판 중 하나로 언급된 항공모함과 유류창고 등 기반시설을 파괴하지 못했다는 점,[27] 공격하기로 한 일자가 하필 주말이라 상당수의 인원들이 외박 중이었어서 기지의 방어태세도 낮은 편이었지만 동시에 수병 전력의 인명피해가 기습적 공격에 비해 적었다는 점 때문에 미 해군은 우월한 본토의 공업력으로 배만 찍어내면 바로바로 전력을 복구할 수 있었던 점 등이 있다. 그로 인해 일본 해군은 공습 4개월 뒤 곧장 수도인 도쿄를 비롯한 주요 도시에 미군의 보복공습이 떨어지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28]

4번째로 장기전과 대영 요인에 대한 고려가 결여되었다는 점이다. 실제로 일본 군령부는 미국을 압박하기 위해선 단순히 군사자산만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취약점에 대한 적극적인 공세로 식민지 및 동맹 네트워크를 지속적으로 차단할 필요가 있었다고 보았지만, 연합함대는 이와는 반대로 격전지에 대한 공세를 강화해야 한다는 잘못된 시각을 오랫동안 견지하여 주력함과 해군항공대를 무의미하게 소모하여 1944년의 대공세를 용인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또한 삼국동맹에 근거하여 행동하는 이상 영국의 향방은 곧 일본의 협상에도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므로 진주만 공습과 남방작전으로 약체화된 ABCD 함대를 격파한 뒤 재빨리 인도양과 남태평양에 공세를 가해 ANZAC인도 제국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미-영 측의 전략적인 소모를 강요할 필요가 있었다. 일례로 당시 일본 해군 잠수함대 소속으로 남방작전에 참가한 함장 중 일부가 상부에서 명령만 내렸다면 얼마든지 남태평양 보급선단을 격멸할 수 있었다고 증언할 만큼 인식의 부족 탓에 주어진 기회를 이용하지도 못하였다.

진주만 공습은 당시 일본 해군 작전참모부가 낸 최선의 전략으로 당장은 일본에게 큰 전략, 전술적 이득을 가져다 주고 시간도 벌어주었다. 그러나 미국의 정치적 단결과 국가적 역량을 지나치게 얕보았고, 거듭되는 자만에 빠져 그 시간조차 유용하게 쓰지 못한 채 오판을 반복했기에 미국이 공습의 피해를 수습하고 전력을 회복하자마자 파멸하게 된 것이다.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진주만 공습이 시작된 순간, 일본은 태평양 전쟁에서 이미 패배했다.

6.2. 미국의 격노

공습 다음날인 1941년 12월 8일, 미 국회의사당에서 진행된 미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대일 선전포고 요청 연설. 일명 "치욕의 날 연설(The Day of infamy Speech)"이라 불린다. 루스벨트가 의회에 전쟁 선포를 요청하며 연설을 끝맺자 의원들이 전부 기립하여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40초부터 시작.[29]
"Yesterday, December 7, 1941 — a date which will live in infamy —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was suddenly and deliberately attacked by naval and air forces of the Empire of Japan."
어제, 치욕의 날로 기억될 1941년 12월 7일, 미합중국은 일본 제국의 해군과 항공대에 의해 고의적이며 기습적인 공격을 당했습니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이 1941년 12월 8일 대일선전포고성명을 내면서 의회에서 한 연설 중 일부. 흔히 '치욕의 날 연설(Day of Infamy Speech)'이라고 부른다. 유튜브 자동 재생[30]
{{{#!folding 치욕의 날 연설문 전문 [펼치기 • 접기]
Mr. Vice President, Mr. Speaker, Members of the senate, the House of Representatives.
부통령, 하원 의장, 상/하원 의원 여러분.

Yesterday, December 7, 1941,a date which will live in infamy,The United States of America was suddenly and deliberately attacked by naval and air forces of the Empire of Japan.
어제, 1941년 12월 7일, 치욕의 날로 기억될 이 날에, 미합중국은 일본 제국 해군 항공대에게 고의적인 기습 공격을 당했습니다.

The United States was at peace with that nation, and, at the solicitation of Japan, was still in conversation with its government and its Emperor looking toward the maintenance of peace in the Pacific.
미국은 일본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일본의 요청에 의하여, 일본 정부, 일본 천황태평양의 평화 유지를 위한 담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Indeed, one hour after Japanese air squadrons had commenced bombing in the American island of Oahu,The Japanese Ambassador to the United States and his colleague delivered to our Secretary of State a formal reply to a recent American message.
사실대로 말하자면, 일본 항공 병력이 미국령 오아후에 폭격을 개시한 지 한 시간이나 지나고 나서야, 주미 일본 대사는 국무부 장관에게 최근 미국이 보낸 서한에 대한 의례적인 답변을 보냈습니다.

And, while this reply stated that it seemed useless to continue the existing diplomatic negotiations,it contained no threat or hint of war or of armed attack.
그리고 이는 양국 간 외교관계를 지속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내용을 표방했지만, 전쟁이나 무력 사용에 대한 위협과 암시는 일절 없었습니다.

It will be recorded that the distance of Hawaii from Japan makes it obvious that the attack was deliberately planned many days or even weeks ago.
일본에서부터 하와이까지의 거리를 생각해본다면, 이 공격은 몇 일, 혹은 몇 주 전부터 신중히 계획된 것임이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During the intervening time the Japanese Government has deliberately sought to deceive the United States by false statements and expressions of hope for continued peace.
양국 간의 화해 상태 동안 일본 정부는 평화 지속에 대한 거짓된 성명과 표현으로 미국을 기만하려 치밀한 노력을 했습니다.

The attack yesterday on the Hawaiian Islands has caused severe damage to American naval and military forces.
어제 일어난 하와이 제도를 향한 공격은 미 해군과 미 육군에 심각한 손실을 일으켰습니다.

I regret to tell you that very many American lives have been lost.
많은 미국인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유감스러운 소식을 여러분들께 전해드립니다.

In addition, American ships have been reported torpedoed on the high seas between San Francisco and Honolulu.
더불어, 샌프란시스코호놀룰루 사이의 공해 상에서 미국 군함이 어뢰 공격을 받았다는 사실을 보고받았습니다.

Yesterday the Japanese Government also launched an attack against Malaya.
또한 일본 정부는 어제 말라야에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Last night Japanese forces attacked Hong Kong.
일본군은 어젯밤 홍콩을 공격했습니다.

Last night Japanese forces attacked Guam.
일본군은 어젯밤 을 공격했습니다.

Last night Japanese forces attacked the Philippine Islands.
일본군은 어젯밤 필리핀 제도를 공격했습니다.

Last night the Japanese attacked Wake Island.
일본은 어젯밤 웨이크 섬을 공격했습니다.

And this morning, the Japanese attacked Midway Island.
그리고 오늘 아침, 일본은 미드웨이섬을 공격했습니다.

Japan has therefore undertaken a surprise offensive extending throughout the Pacific area.
그 결과, 일본은 태평양 도처에 기습적이고 공격적인 확장을 시작했습니다.

The facts of yesterday and today speak for themselves.
어제와 오늘의 사실이 이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The people of the United States have already formed their opinions and well understand the implications to the very life and safety of our nation.
우리 국민들은 이미 의견을 형성하였고, 이 사태가 우리 국가의 생명과 안전에 미칠 영향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As Commander-in-Chief of the Army and Navy I have directed that all measures be taken for our defense,
육군과 해군의 최고 사령관으로써 저는 자국 방어를 위한 모든 방책을 지시했습니다.

that always will our whole nation remember the character of the onslaught against us.
이로 인해 우리 국가는 우리에 대한 공격의 성격을 항상 기억할 것입니다.

No matter how long it may take us to overcome this premeditated invasion,
수많은 시간이 걸린다고 하더라도 사전에 계획된 이 공격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면,

the American people, in their righteous might, will win through to absolute victory.
미국의 국민들은 정의의 힘으로 완전한 승리를 향해 나아갈 것입니다.

I believe that I interpret the will of the Congress and of the people when I assert that we will not only defend ourselves to the uttermost but will make it very certain that this form of treachery shall never again endanger us.
제가 우리들이 우리 스스로를 최대한 지켜야 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이러한 배신이 다신 우리를 위협에 빠뜨리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전 그것이 의회와 국민의 의지를 대변했다고 확신합니다.

Hostilities exist.
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There is no blinking at the fact that our people, our territory and our interests are in grave danger.
우리의 국민과 영토, 이익들이 중대한 위협에 처했다는 것은 무시하지 못할 사실입니다.

With confidence in our armed forces,
우리 군에 대한 확신과,

with the unbounding determination of our people,
우리 국민들의 결연한 의지로,

we will gain the inevitable triumph,
우리는 필연적인 승리를 얻을 것이고,

so help us God.
신께서는 우리를 도와주실 것입니다.

I ask that the Congress declare that since the unprovoked and dastardly attack by Japan on Sunday, December 7, 1941,
저는 의회가 1941년 12월 7일 일요일에 감행된 일본의 부당하고 비겁한 공격에 대해,

a state of war has existed between the United States and the Japanese Empire.
미국이 일본 제국에게 전쟁 상태가 되었음을 선언하기를 요청하는 바입니다.}}}
파일:Remember-Pearl-Harbor-1941-US-Flag.jpg
...We here highly resolve that these dead shall not have died in vain... Remember DEC. 7th!
우리는 쓰러진 이들의 죽음이 결코 헛되게 하지 않을 것을 결의한다. 12월 7일을 기억하라![31]

공습 직전까지만 해도 무의미한 전쟁은 절대로 안 된다는 고립주의자들의 주장이 미국 사회의 주류였다. 루즈벨트 대통령을 중심으로 히틀러가 얼마나 또라이인지 아는 사람들은 추축국과 싸워야 한다는 의견을 폈지만, 다수의 미국인들은 20년 전 유럽의 지옥그 지옥불에 딸려온 연옥을 겪어봤기에 고립주의자의 의견에 더 동조하고 있었고[32][33], 미국 전통의 외교 정책인 먼로 독트린에 따라 "우리한테 직접 피해를 주지 않는 이상 괜히 끼어들 필요없다"라는 주장을 강하게 내비쳤다. 그러나 일본이 선전포고도 없이 진주만에 선빵을 날리면서 직접 피해를 준, 미국인들에게 제2차 세계 대전은 고립주의자들이 말하던 "무의미한 전쟁"에서 "정의를 수호하는 전쟁"으로 인식이 바뀌었다. 그야말로 잠자던 거인을 '잠에서 깨운' 정도가 아니라 아예 돌게 만든 셈. 아닌 게 아니라 야당인 공화당의 대표적 고립주의 정치인들조차 공습 소식을 듣자마자 어떻게든 백악관으로 연락을 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일종의 충성 맹세와 함께 전쟁 수행에 대한 전면적인 협조를 약속했다. 역시 고립주의에 참전 반대파였던 한 의원은 기자들 앞에서 결연한 모습을 보이며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일본놈들을 철저하게 때려 눕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즉, 진주만 공습으로 미 정계의 고립주의 계열은 사실상 소멸, 와해되었다. 즉 이 시점에서 이미, 전쟁의 끝을 보기 위해서는 진주만에서 당한 이상으로 일본 본토를 공격해 일본군과 정권을 무너뜨리는 것밖에 없었다. 도쿄 대공습이나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같은 대규모 민간인 피해나 일부 장병들의 시체 훼손 행위 따위는 "Remember Pearl Harbor!"("진주만을 기억하라!") 앞에 무용지물이었다.

공습 다음 날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의회에서 "치욕의 날 연설"로 일컬어지는 유명한 연설로 일본의 불법 기습을 공식 발표했고, 연설 직후 '전쟁 참가법'이 상원에서 만장일치, 하원에서 388:1로 가결되며 미국은 공식적으로 참전을 선언한다. 그리고 분노한 미국 국민들의 입대 러시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의 자진 입대율은 90%에 이르렀다는 말도 있는데, 특히 공수부대나 해병대 같은 일부 월급도 높은 특수전투병과는 지원율이 100%를 넘기며 경쟁적으로 입대했다고 한다.[34] 심지어 신체검사를 통과하지 못해 입대불가 판정을 받은 청년이 낙담한 나머지 자살한 사건까지 있었다고 한다.[35] 자원입대한 사람들 중에는 배우나 운동선수 같은 유명인사들도 많았는데, 조 디마지오처럼 위문공연을 다녔던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폭격기 승무원이였던 클라크 게이블, 제임스 스튜어트[36]나 해군 대공포 사수 밥 펠러처럼 최전선에서 복무했다. 심지어 국회의원 중에서도 몇 명이서 항해국[37]장이던 니미츠 제독을 찾아와 해군에 입대시켜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니미츠 제독은 "해군을 위한다면 입대 대신 의사당으로 돌아가 우리를 위한 예산을 배정해 달라"며 정중히 거절했다. 다만 일부 국회의원들은 진짜 참전했는데[38] 대표적인 사람이 훗날 미국 대통령이 되는 린든 B. 존슨.[39] 고위정치가들의 아들들도 줄줄이 입대했는데, 대표적으론 존 F. 케네디가 있다. 다만 이쪽은 전후에 참전 경력이 유력할 수 있다고 계획적으로 입대한 것이긴 하다. 어뢰정이 격침돼서 죽다 살아나긴 했지만. 캡틴 아메리카가 괜히 군대에 가고 싶다고 그 난리를 친 것이 아니다. 반면 독일, 이탈리아에 대해서는 같은 백인인 것도 있지만 직접 맞은 것이 없었고, 무엇보다 미국으로 이민온 독일계나 이탈리아계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에 상대적 반감은 적은 편이었다.

전쟁 참가법 표결에서 유일한 반대표는 공화당의 지넷 P. 랭킨(Jeannette P. Rankin) 의원이 던졌다. 미국 최초의 여성 국회의원이자 반전주의자였던 랭킨은 이전 임기인 1917년 때도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에 반대표를 던졌던 4명 중 하나였다. 1940년에도 이전 임기처럼 랭킨은 "여성이기 때문에 저는 전쟁에 나갈 수 없습니다. 허나 남자들을[40] 전쟁터에 보내는 것도 반대합니다"라는 말과 함께 "전쟁에 찬성하는 표를 던질 수는 없습니다"는 말로 반대표를 던졌는데, 이때는 국민적인 분노가 1차 세계대전에 비해 훨씬 컸던 상황이라[41] 생명이 위험할 정도라서 신변보호를 받아야 했다고 한다. 많은 비난을 받았으나 "민주주의란 만장일치가 있어서는 안 되는 정치제도"라며 맞섰고[42] 한국 전쟁베트남 전쟁 시기에도 반전운동을 이끌었다. 다만 앞서 언급했듯 진주만 공습으로 인한 미국 전 국민의 분노는 랭킨의 예상을 아득히 초월했다. 혼자 반대표를 던진 탓에 미국인들의 분노가 그대로 집중되어 매일 수많은 사람들과 언론들이 사무실로 전화를 걸거나 찾아왔고 엄청난 반박과 위협들이 쏟아졌으며, 해당 공습으로 아들을 잃은 수많은 부모들의 전화와 랭킨에게 실망했다는 가족, 친구, 친척, 기타 지인들의 전화가 걸려오고 아예 절교당하기도 했다. 랭킨은 결국 이에 굴복하여 이틀 후 하원이 독일과 이탈리아에 차례로 선전포고를 할 때는 찬성에 투표를 던졌으나 이미 때는 늦었으며 이로 인해 그녀의 의원 생활은 다음 중간선거에서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다만 훗날엔 이런 의미 있는 반대도 기려져 사후 미국 국회의사당 입구에 랭킨의 동상이 건립되었다.[43]

태평양 함대의 사령관이 니미츠 대장으로 교체되어 일본 해군과의 일전을 준비하게 되었으며 전함들이 죄다 상실된 까닭에 항공모함을 위주로 작전을 펼쳤다. 하지만 진주만에서 너무 심하게 털려버려 쓸 수 있는 전력이 빈약한 데다 항공모함조차 상실하게 될까 봐 휘하 제독들의 반대가 극심해서 니미츠 제독은 이들을 무마하고 작전을 입안하느라 고생을 많이 했으며, 일본군의 대응도 거의 없어서 전과다운 전과는 거의 거두지 못했고 일본의 남방작전에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다. 그 영향으로 미드웨이 해전까지 태평양 함대는 아무 작전도 못했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도 상당한데, 사실 없지는 않았다. 일본의 호주 침공 가능성을 없앤 산호해 해전이 당시 미 해군의 대표적인 활약이었다. 하여간 이때의 충격이 무척 강렬했던 탓인지 지금도 미 해군은 항공모함 중심 편제와 함께 강력한 대공망을 강조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진주만 공습 이후 미 해군은 항공모함의 가능성에 눈을 뜨게 되었지만 정작 항공모함으로 진주만이라는 대성과를 거두었던 일본군은 점점 항공모함의 활용도가 줄어들기 시작한다. 미드웨이 해전과 과달카날 전투로 대변되는 솔로몬 전역에서의 소모전을 거치면서 항공모함과 함재기들과 숙련병들이 다 수장되었다.

진주만 공습으로 인한 미국의 격노는 일부 인종차별적인 모습으로도 나타났는데, 바로 백악관 행정명령 9066호로 독일, 이탈리아, 헝가리, 일본계 미국인들을 수용소로 몰아버린 사례가 있다. 그 중에서도 일본계 미국인들이 피해를 많이 봤는데[44], 당시 일본계 미국인들 중 진짜로 간첩 비슷하게 활동한 케이스도 있었고, 일본계 미국인 1세대는 물론 심지어 2세대들도 옛 고국에 대한 충성심이 남아 있어서, 미국이 선빵을 맞은 와중에 일본의 승리를 기원하는 병크짓을 하기도 했다. 물론 국적이나 사상적 문제 등으로 일본인의 삶을 잊고 미국인으로 살고 있던 이들도 있기야 했겠지만, 전쟁 와중에 온건 소수파들의 목소리는 묻히고 만다. 이런 기타 내용은 니하우 사건 문서도 참고.

한편 이승만은 1939년 11월에 집필을 시작하여 1941년 여름에 내놓은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 - the challenge of today)》라는 책을 통해 '조만간 일본이 미국에 도전하여 미국과 전쟁을 벌일 것'이라는 주장을 했다. 출판 직후에는 무시당했으나[45] 진주만 공격 이후 이 책은 재발굴돼 저자인 이승만 역시 미국에서 어느 정도 인지도를 높이게 된다. 근데 사실 이미 제1차 세계 대전 직후부터 미국과 일본이 한 판 붙을 것이라는 예측은 난무했다.[46] 다만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런던 해군 군축조약이 체결되면서 가십거리 정도로 전락한 얘기를 1930년대 후반 들어 웬 동양인 듣보잡 망명가가 해 봐야 그만하라는 반응이 나오는 게 이상할 건 없었다. 지금도 수많은 나라들의 가상 전쟁 시나리오설은 돌지만, 현실에서 실현되는 건 극소수에 불과하다.[47]

6.2.1. 음모론

진주만 공습은 미국 정계에도 상당한 후폭풍을 남겼는데, 미국사 최초로 3선에 성공한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진주만 공습 이후 세계대전을 정리하겠다는 명분 하에 4선까지 도전하려 하자 정적들 사이에선 미국 정부가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 작전을 미리 알고 있었으며, 2차대전 참전 명분을 얻기 위해 진주만을 방치했다는 식의 음모론이 생겨났다. 대표적으로 고립주의자이자 반 루스벨트 성향의 저명한 언론인이었던 존 T. 플린(John T. Flynn)이었다. 그는 1944년 10월 17일 <Truth about Pearl Harbor>라는 46쪽짜리 소책자를 발간하여 루스벨트 행정부가 유럽 전쟁에 돌입하기 위한 명분을 찾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이 한때 미국 정계에 큰 영향을 주었기에, 공화당 대통령 후보였던 존 듀이의 캠프에서도 이러한 음모설을 들고 나올 것을 고려하기는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미군이 일본군을 감청한다는 걸 인정한다는 것은 곧, 일본의 암호체계를 전쟁 전부터 해독하고 있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기에 육군참모총장 조지 마셜 장군이 직접 제동을 걸었다. 듀이 또한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국익을 해칠 수 없다며 입을 다물기로 했다. 상식적으로 그가 군부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1944년에 진주만 음모설을 무리하게 논쟁화했다면 국민의 공감을 얻기는 커녕 전쟁 사기를 떨어뜨림은 물론이고 이적행위로 정치 생명이 끝났을 수 있다.

이걸 훗날 한도 가즈토시 같은 일본 학자들이 받아서 비슷하게 주장하기도 했으며, 데즈카 오사무아돌프에게 고한다에서도 정설인 양 등장했다 신나게 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음모론을 놓지 못하는 집착인들도 있는데, 혹자는 당시 뉴딜 정책의 약빨이 떨어진 루스벨트 정부가 생산과잉 및 그에 따른 고용부족을 한방에 해결하고자 전쟁에 참여했다는 식으로 말하기도 하는데, 이건 팩트부터 틀린 게 루즈벨트 1기에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던 뉴딜 정책이 집권 2기 초 2년간 이전보다 약빨이 떨어진 건 사실이긴 했지만[48] 하지만 1939년 들어 경기는 다시 호조세로 돌아섰고 1940년 나치의 프랑스 침공 등으로 서유럽이 대대적인 전쟁 상황에 들어가면서 미국은 오히려 호황을 맞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유럽이 작살나든 말든 우리만 잘 살면 그만이라는 식의 고립주의도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것.

선거 역시 대선, 상하원 가릴 것 없이 루스벨트 정부가 큰 격차로 연승하고 있던 상황이었기에 이 와중에 FDR 정권이 굳이 전쟁 참가라는 무리수를 둘 필요가 전혀 없는 상황이었다. 일각에선 진주만의 급소였던 지상의 원유 공급 시설에는 거의 피해가 없었고, 많은 수의 전함들과 유조선 역시 살아남았다는 결과론적인 이유로 자꾸 이걸 정치적인 음모론으로 엮으려고 하는데 이에 대한 반론은 후술된 음모론에 대한 반론 항목 참조.

이원복 작가의 먼나라 이웃나라 미국 역사 편에 따르면 1941년 초 일본 주재 미국 대사인 조셉 그루는 일본의 진주만 공격 계획을 미국 정부에 알렸지만 "유럽의 전쟁에 관심이 쏠린" 미국 정부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고 한다.[49]

대놓고 노렸다기보다는 어느 정도 공격이 들어올 것은 알고 있었겠지만 정확한 장소나 방법, 피해 규모는 예측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컸다고 볼 수 있다. 실제 당시 미국은 중일전쟁을 벌이는 일본을 좋게 보지 않고 중국에서의 철수를 압박하며 석유 제한 조치 등 각종 딴지를 걸고 있었기에 미일 관계가 험악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협상으로 풀려는 와중에 선빵을 때린 건 결국 일본이었다.

6.2.2. 음모론에 대한 반론

진주만 음모론의 경우 한국에서 유명한 남침유도설과 비슷한 점이 많은데, 정확하지 않은 정보를 이용하여 현대시대의 관점으로 대충 끼워맞춘 경향이 강하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진주만 및 해전과 당대 시대상황의 이해만 있어도 쉽게 논파할 수 있는 음모론들이다.

먼저 자주 언급되는 주장으로 2차대전 해전의 핵심인 항공모함들을 미리 빼두었다는 주장은 앞뒤가 바뀐 주장으로 항공모함이 주력이 된 이유는 진주만에서 전함들이 다 털려서였다.[50]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항공모함은 해상작전의 보조격으로만 활동했고 해군력의 주력은 진주만에서 가라앉아 버린 전함들이었다. 즉 항공모함이 중요하니까 빼놓은 게 아니라, 비행기 수송이나, 수리를 이유로 당시 진주만에 항공모함이 없었고, 박살난 태평양 함대가 운용할 수 있는 게 항공모함뿐이라 급하게 항공모함만 가지고 운용했는데 의외로 항공모함이 무지막지하게 뛰어난 전력이라는 사실을 발견한 것. 천대받던 항공모함들이 항공기의 급속한 발전으로 성능이 올라갔고, 전함들이 전투 불능이 돼서 주전력이 될 기회를 얻자 실전을 치르며 자신의 가치를 증명한 것이다.

또한 당시 미군의 태평양 함대 소속 항공모함들은 일부러 빠진 것도 아니고 전부 정비[51]나 임무 중[52]이라 각각 다른 곳에 흩어져 있었다. 거기다 진주만에 들어올 예정이던 엔터프라이즈는 예정대로라면 공습 전날에 들어왔어야 했으나 도중에 폭풍을 만나서 우회하느라 공습 당일에도 못 들어왔다. 만약 음모론자들의 주장대로라면 미국 대통령이 신에게 사주하여 진주만 공습 하루 전에 엔터프라이즈가 지나가야 할 항로에 태풍이라도 내린 것인가?[53]

무엇보다 항공모함의 중요성을 일찍 인지하여 각국이 항공모함을 최우선 자산으로 생각했다면 워싱턴 군축조약런던 해군 군축조약에서 전함이 아니라 항공모함을 규제했을 것이 상식적으로 맞을 것이다. 심지어 조약국들이 이미 만들어놓은 함체를 버리기 아깝다고 하자 그 함체로 항공모함을 건조할 수 있는 조항도 존재한다. 하다못해 조약 폐지 이후에도 미국은 그렇게 중요한 항공모함을 건조하는 게 아니라 사우스다코타급을 필두로 한 고속전함을 건조하고 있었다. 만약 미국이 진주만 이전에 항공모함의 중요성을 알았다면 항공모함을 건조하기도 빠듯한 시간에 고속전함이나 만들며 놀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태평양 전쟁 이전까지는 항공모함이 전함을 보조하는 편성이였으나, 태평양 전쟁 중반쯤 되면 전함들이 항공모함을 보조하고 호위하는 편제로 변화한다. 여담으로 일본 역시 야마토급 전함무사시 같은 대형 전함들을 아끼기 위해 꽁꽁 숨겨두고 항공모함을 들이밀었는데 훗날 미군은 일본 해군의 항공모함 전력을 모조리 털어먹고 강제로 전함 위주 교리를 하도록 해준다.

참전명분이 필요했다면 상식적으로 진주만 공습을 당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 엄청난 피해를 입을 필요까지는 굳이 없는 것이라서 일고의 가치도 없다. 비록 미 해군의 군함들이 일본군함보다 속도 면에서 열세였지만[54] 당시 진주만의 미 해군전력은 전함 8척에 순양함 6척. 구축함 29척 등 일본군 전력과 비등한 규모였고 전투기도 400여 대 정도로 상당한 전력이었다. 게다가 해당 작전은 해상전이 아니라 항구방어이니 당연히 육상 대공포대와 비행장 등의 지원도 받을 수 있다. 즉 진주만 공습 직전에 초계를 하고 방어태세를 갖추기만 했더라도 피해를 엄청나게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어찌되었건 기습 선빵을 맞는다는 시점에서 전쟁 명분은 충분히 서기 때문에 미리 공습 사실을 알았더라면 우주방어를 하면 되었지 루즈벨트 입장에서는 굳이 엄청난 병력 손실을 감수하면서 반대로 적들을 온전하게 돌려보낼 이유가 전혀 없다. 일본군조차도 족히 절반 정도는 피해를 감수했던 작전인데 미군이 굳이 연합함대를 거의 온존시켜 돌려보내줄 이유가 어디에도 없다.

거기다 참전명분이 필요했다는 것도 애매한 것이 당시 미국 선적의 배들이 대서양을 건너 영국으로 물자를 실어나르고 있었고, 당연히 독일 U보트의 공격에 격침된 미국 국적 함선들도 존재했다. 미국 입장에선 이미 1940년부터 참전 명분은 충분했다. 미국이 참전하지 못했던 것도 미국 내의 고립주의 성향과 괜히 참전해서 피보지 말자는 입장 때문이었다. 당시 미국은 먼로 독트린을 필두로 한 고립주의 성향을 보이는 국가였고 최근에 겪은 전쟁이 하필이면 인류 역사 최악의 전쟁 중 하나인 1차 세계대전이였으며 그 후유증으로 대공황보너스 군대 사건까지 겪으면서 가뜩이나 국민여론도 안 좋은 데다 1940년에는 대선까지 있었던지라 참전하고 싶어도 여론에 밀려 참전하지 못했던 것이다. 실제로 훗날 미군은 통킹만에서 미군 구축함이 공격받아 경미한 피해를 입은 것을 과장해서 베트남전에 참전할 명분으로 삼았으며, 1차대전 참전 명분 중 하나도 루시타니아 호격침으로 인한 자국민 사망 및 독일계 미국인들의 사보타지, 치머만 전보다. 심지어 루시타이나 호는 영국 상선이고 루시타이나 호의 공격 자체도 위법이 아니었다.[55] 그런데도 미국은 참전할 수 있었다는 점 하나만 보고 굳이 커다란 피해를 감소하면서까지 참전명분을 만들 필요가 있었을까.

무엇보다 미국은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 함대가 박살나버려서 태평양 섬들이 일본의 공격을 받을 때 아무것도 못하고 6개월간 신명나게 털려야만 했다. 필리핀, 괌, 웨이크 등지에 지어놓았던 요새, 장비, 병력을 신나게 날려먹었으며 이 시기 너무 패전만 하자 백악관에서도 군의 사기가 말이 아니고 국민여론도 시들해진다며 벌린 깜짝쇼가 둘리틀 특공대이다. 미국이 다시 기세를 잡은 건 그 6개월 뒤인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의 공세를 겨우 저지시킨 때이고, 음모론자의 주장대로 미국이 제대로 된 반격을 시작한 것은 1년 뒤인 과달카날 점령 이후의 이야기이다. 미국의 국력을 총동원했는데도 일본군에게 반격을 시작하기까지 1년은 걸렸는데 루즈벨트가 아무리 명분이 필요했어도 이런 도박을 했을 이유는 없다. 음모론대로면 새러토가는 공창에 들어가있고 요크타운은 대서양으로 돌려놓은 상태에서 6개월 넘게 고생할 필요도 없이 둘을 만반의 준비상태로 만들어놔야 한다.

그리고 음모론의 근거들도 설득력이 떨어지는데, 첫째로 미국의 태평양 함대를 정말로 '곤란하게' 만들 수 있었던 드라이 독이나 원유 공급 시설이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일본 해군의 지휘관들이 지원시설의 전략적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지 않고 공습 대상에서 제외했기 때문이다.[56] 만약 이런 시설의 공습이 이뤄졌다면 태평양 함대는 더 오랜 시간 진주만에 발이 묶였을 수도 있고, 추가 공습에 의해 궤멸당할 위기에 빠졌을 수도 있다. 이 경우 연합군은 동남아시아에 가지고 있던 교두보들은 물론 무방비 상태였던 호주와 뉴질랜드도 모두 상실했을 가능성이 높아지고, 최악의 경우에는 미드웨이 사수도 실패하여 하와이와 미국 서해안이 일본군의 공격에 노출될 수도 있었다. 당연하지만 어떤 지도자도 전쟁에 참전하자고 이런 심각한 위험을 감수하지는 않는다.

게다가 진주만에서 가라앉거나 손상을 입은 전함들이 1차 대전부터 사용되던 구형 전함이라고 하지만 당시에는 워싱턴 군축조약으로 인해 전세계적으로 신형함이 귀했던 시절이다. 당장 동시대 해군 강국인 영국도 전간기에 만든 후드가 최고의 함이였으며 신형함이였던 킹 조지 5세급 전함이나 넬슨급 전함 모두 조약에 묶여 하자가 있는 상태로 건조되었으며, 가장 빡세게 구른 전함이자 최고의 수운함들 대부분이 1차대전 시기에 만들어진 퀸엘리자베스급이나 리나운급이었다. 적군인 일본도 상황은 비슷해서 공고급 순양전함이 마르고 닳도록 구르며 활약했고, 1920년대에 만들어진 아오바급 중순양함이 활약했던 시대이다. 당연히 미 해군도 다를 게 없어서 격침당한 전함들도 오래되긴 했지만 미해군의 주력함들이었다. 심지어 격침된 함선 중에는 미군도 아니고 전 세계에 7대밖에 없는 16인치 전함인 콜로라도급의 3번함 웨스트버지니아(전함)도 포함되어 있었다. 진주만이 공습당했을 때 사우스다코타급 전함은 건조 중[57]이었고 노스캐롤라이나급은 취역했으나 함체의 진동과 대응방어[58] 등이 문제가 돼서 실전 투입을 미루고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그렇게 가라앉은 전함들이 정말로 쓸모가 없었으면 비싼 돈과 인력을 들여가며 굳이 인양해서 수리+개장해서 다시 투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전함만 공격하고 보급시설을 공격하지 않은 것은 미군이 아니라 일본군이다. 이 주장이 받아들여지려면 루즈벨트가 일본제국이 선전포고 없이 공격을 하되 하와이의 보급시설은 공격하지 않는다는 광범위하고 복잡한 합의를 하고, 더불어 보급시설 공격을 방지하기 위해 루즈벨트가 일본제국에 하와이와 태평양 함대의 정밀 지도 및 작전계획 같은 중요정보를 넘겨줬다고 봐야 하는데 상식 선에서만 봐도 이해하기 힘든 음모론이다.

둘째로 일본이 위협적인 행동을 거듭하자 미국을 공격할 가능성이 높다는 예상은 미국 정부도 이미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선전포고 이전부터 일본 본토에 가까운 섬들의 방어태세를 강화한 것도 그런 이유다.[59] 미국이 한 '실수'는 전쟁을 예상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설마 일본이 국제법을 위반하면서 선전포고 없이 공격을 할 것이라는 점과, 첫 공격을 일본에 가까운 동남아시아의 미군 기지를 놔두고 일본에서 한참 떨어진 태평양 한복판의 하와이 진주만에 가할 것, 그리고 공격 이후에야 선전포고문같지도 않은 날림 선전포고문을 들이밀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점이다. 진주만 공습은 '쟤들이 설마 여길 때리겠어' 라고 모두가 상식적으로 생각했고, 그 상식이 열심히 박살나 있던 일본군이 저지른 완벽한 기습이었기에 해전사에 길이 남을 작전이 될 수 있었다. 만약 진주만 공습이 항공모함만을 이용한 평범한 기지공습이었다면 현대 해전의 상식을 뒤바꾼 작전이라는 평가를 받겠는가?

마지막으로 루즈벨트 대통령이 참전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진주만 공습을 사전에 알았으면서도 일부러 '묵과했다'는 것 자체가 지나치게 공허한 주장이라는 점이다. 현실 정치나 군사는 게임이 아니다. 만약 미국 정부가 진주만 공습을 알았다면 이는 대통령에게 바로 보고되는 게 아니라 정보기관이나 외교관을 거쳐 국무장관과 국무회의라는 복잡한 정식 절차에 따라 해당 부처에 보고된다. 보고 과정에서 사실을 알게된 모든 중간 관료들의 입을 대통령 혼자서 막을 수 있을까? 또는 적의 공습이 예상된다는 '설득력 있는' 정보를 듣고도 대응하지 말라고 막을 수 있을까? 둘 다 어림도 없는 소리다. MK 울트라 프로젝트에서 알 수 있듯이 아무리 소수인력에게 돈을 쏟아부어준다 해도 결국 정보는 어디선가 흘러나오기 마련이다. 심지어 냉전의 절정기라 평가받는 1960-1970년 사이에도 이런 식으로 정보가 새고 대중들에게 알려질 정도인데, 1940년 전후의 평화로운 미국에서 대통령과 여당이 겨우 임기 연장하겠다고 자신들의 정치생명은 물론이고 관련된 인사들의 현직은 물론 목숨[60]을 걸고 할 만한 도박인지는 상식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답이 나올 것이다.

6.3. 일본의 동남아 침공과 대전략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 함대의 견제가 사라진 일본은 남방작전으로 동남아시아의 미국과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의 연합국 식민지를 점령했다. 이후 미국에게 충격을 선사했다고 본 일본은 향후 전략에 대해서 논쟁을 하기 시작했다. 진주만 공습 직후부터 일본 외무성에서는 미국과의 평화협상에 대한 준비작업을 시작했고, 이에 대본영, 육군, 해군, 야마모토 제독 모두 평화협상을 일본이 먼저 제안하는 건 체면이 서지 않는다며 반대했으나, 미국이 평화협상을 제안해오면 받아줘야 한다는 헛된 망상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위에서 본 대로 미국은 역사상 전례가 없던 분노 속에서 칼을 갈기 시작했고, 이에 일본 정계와 군부는 이보다 더 큰 충격을 줘서 미국이 협상장에 나오도록 해야 한다는 건 동의했으나 그 방법을 두고 논쟁을 벌였다.

우선 일본 육군은 자기들이 점령한 동남아의 방어를 굳히고 지배를 공고히 하면, 동남아 점령으로 막강해진 일본제국의 힘을 상대하기 부담스러워진 미국이 협상하러 나올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고,[61] 해군은 호주 점령을,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은 점감요격 따위 때려치고 하와이를 바로 점령해 미국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호주는 처음부터 점령을 위한 병력 및 물자가 모자랐고 하와이는 보급선 유지가 안 된다는 문제가 있었다. 결국 육군, 해군, 야마모토 제독이 각각 자기들 주장을 내세우며 옥신각신하고 있는 와중에 미국의 항공모함은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공습을 하고 있었고[62] 이 모습을 본 야마모토 제독은 미 항공모함이 가장 큰 적이라 결론을 내리고 미국의 항공모함을 유인하여 섬멸하기 위해 미드웨이를 공격하지만 패배했다.

6.4. 추축국의 대미 선전포고

일본과 동맹 관계이던 나치 독일이탈리아 왕국은 4일 후에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였고, 이러한 선전포고가 추축국 최대이자 최후의 실책이라는 분석이 있다.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선전포고가 없었다고 해도 미국은 참전했을 가능성이 있으나, 무기 지원, 경제 원조 등을 넘는 수준의 대대적인 참전은 나치 독일이 미국에 먼저 선빵을 치지 않는 이상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시각이다. 치욕의 날 연설에서도 볼 수 있듯이 미국은 진주만 공습 직후 추축국 전체가 아닌 오로지 일본 단 한 나라에게만 선전 포고를 했다. 일본 제국 패망사에 따르면 당초 루즈벨트 행정부 각료들은 일본의 동맹국인 이탈리아와 독일에도 동시에 선전포고를 할 것을 주장하였지만 루즈벨트는 이를 거부하고 의회에서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를 요구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진주만 공습이 있는 상황에서도 독일과 이탈리아의 선전포고가 없었다면, 미국의 유럽 전선 참전이 늦어졌으리라는 분석이 있다.[63] 독일과 이탈리아의 선전포고 하루 뒤, 독일의 영향력 아래 있던 불가리아 왕국, 루마니아 왕국,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도 독일을 따라서 연달아 선전포고를 했고 이와 별개로 둘의 동맹국이었던 호르티 미클로시헝가리 왕국 역시 1941년 12월 15일 미국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했다.[64]

하지만 미국인들이 진주만 공습 이후에도 여전히 대일전이 아닌 대독전 개전에 회의적이었으리라는 오해와 달리 독일의 대미 선전포고 직전과 직후에 각각 집계된 여론조사에서 미국인들의 90~91%가 대독전 개전에 긍정적인 입장을 보였고 오직 7% 정도만 이를 반대했다.[65] 또한 12월 7일 이전에도 미국은 영국에 전쟁 물자를 암암리에 지원했고, 미국 국적의 상선들이 독일의 공격을 받고 미국 군함이 독일 잠수함을 공격하는 등 미국과 독일은 사실상 준전시 상태에 가까웠다. 더군다나 루스벨트는 본래 진주만 공습 이전부터 대독전 수행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했으나 먼로주의 이후 고립주의 관성에 젖은 미국인들의 반전 여론으로 인해 영국에 대한 물자 지원을 제외하면 중립을 지키고 있었던 것일 뿐이다. 그리고 이렇게 어쩔 수 없이 중립을 지킬 수밖에 없었던 이유인 그 국민 여론이 진주만 공습을 계기로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에 루스벨트에게는 대독전 수행이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했을 리 만무하다. 따라서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선전포고가 없었더라도 루스벨트에게 차라리 의회 설득이 어려우면 더 어려웠지 대국민 설득은 사실상 필요가 없었다. 다만 독일이 먼저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다면 의회 설득을 비롯한 여러가지 절차 때문에 1942년에 바로 독일전선에 개입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어찌되었건 진주만 공습이 터지고, 아돌프 히틀러환호작약하며 미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는 일본이 직접 공격을 받을 경우에만 독일이 나서서 일본을 도울 의무가 있다는 점을 강조했지만, 히틀러는 곧바로 카이텔과 요들에게 달려가서 환호하면서 소리쳤다.
이제 우리는 질 리가 없다. 이제 우리에겐 3,000년 동안 한 번도 패한 적 없는 동맹국이 생겼다.[66]
ㅡ 존 키건 《2차세계대전사》360P
아래는 존 톨랜드의 책 《아돌프 히틀러 결정판 2》에 나오는 내용이다.
전시 본부에서 일본의 진주만 공습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오토 디트리히였다. 그는 12월 7일 오후 늦게 히틀러의 벙커를 찾아 매우 중요한 전갈이 있다고 알렸다. 히틀러는 방금 러시아 전선으로부터 좋지 않은 소식을 받고 우울했는데, 디트리히가 더욱 나쁜 소식을 가지고 왔을까 걱정했다. 디트리히 공보처장이 급하게 메시지를 읽자 그의 표정은 정말로 매우 놀라는 모습이었다. 그는 밝아졌다. 그러고는 매우 흥분해서 "이 보고가 정확한 것인가"라고 물었다. 디트리히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확인 전화를 받았다고 말했다. 히틀러는 보고서를 낚아채더니 코트와 모자도 두르지 않고 군사 벙커로 한 걸음에 달려갔다. 카이텔과 요들 장군은 히틀러가 상기된 얼굴로 전문을 들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카이텔에게는 일본과 미국과의 전쟁이 히틀러의 악몽을 떨쳐내준 것처럼 보였다. 지도자는 헤벨과 함께 목소리에서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는 우리는 전쟁을 질 수 없다고 외쳤다. 우리는 지난 3천 년간 패배한 적이 없는 파트너가 생겼다.
아돌프 히틀러 결정판 2 p.336

위에 적힌 것만 보면 히틀러가 이때다 싶어서 자발적으로 대미 선전포고를 한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진주만 공습 이후 일본이 독일에 대해 대미 선전포고를 요구했단다. 일본의 입장에선 미국의 병력을 분산시키기 위해서 독일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으며, 독일도 독소전쟁의 역전을 위해 일본의 도움을 필요로 했는데, 일본이 독일에 "독일이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면 일본도 독소전쟁에 참전하겠다."고 설득한 것이다. 그러나 당연히 일본은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으며, 히틀러는 일본의 달콤한 제안만 믿고 덜컥 대미선전포고를 질렀다가 뒤로는 일본의 통수를 맞고, 앞으로는 미군의 공세를 맞이하며 스스로 파멸을 자초하게 되었다. 상세는 후술된 문단을 참고.

히틀러의 반응과 별개로 일선에서 소련군과 영국군을 맞아 싸우고 있던 상당수의 독일 육/공군 상급장교들이나 하급 장교들을 비롯한 일반 사병들은 공식 방송이 나오고 나서야 깨달았을 정도로 정황이 없었고, 그만큼 구체적인 반응 역시 기록되어 있지 않다. 41년 12월 당시 최대 공방전이었던 레닌그라드 공방전, 모스크바 공방전이 진행 중이었고, 그 외에도 독일군의 빈약한 동계전투 준비로 소련군의 전 전선으로부터 반격을 받고 있었다. 후술하겠지만 독일은 일본이 소련 뒤를 쳐서 극동 소련 정예군을 붙들어주기를 바랐으나 일본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고, 소련은 이 겨울 동안 긴급수송으로 극동 정예군을 투입해 독일군의 진격을 저지했다. 그만큼 당시 동부전선은 급박하게 전투가 전개 중이었기 때문에 상급 장교들은 일본이 동쪽에서 무슨 짓거리를 하든 신경 쓸 상황이 되지 않았다.

반면에 독일 해군은 이전부터 미국과 싸움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찬성하는 편이었는데, 이미 대서양에서 미국과 독일 해군 간의 대립이 심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67] 그리고 추가적으로 일본이 극동의 영국군을 공격해 영국 해군의 시선을 인도양으로 끌어주어 고전을 하고 있던 독일 해군의 상황을 개선해 주길 기대했다. 하지만 오히려 일본은 극동 영국 해군을 박살내긴 했지만 미국의 반격으로 인해 태평양 방면으로 집중할 수밖에 없었고, 인도양 방면의 극동 영국 해군은 살아남았으며, 미국이 일본 해군을 상대하는 동안 영국은 안심하고 이미 노르웨이에서 상당수의 구축함을 잃어버리고 독일 해군의 자존심 비스마르크까지 침몰당해 껍데기만 남아 있던 지중해의 크릭스마리네+이탈리아 해군을 심해 끝까지 털었다. 그리고 그 덕에 에르빈 롬멜이 이끄는 북아프리카 전역의 북아프리카 군단은 연료 및 물자 부족에 시달려야 했다. 이에 더하여 선전포고 이후 미국은 어느 정도 상황이 나아질 때마다 꼬박꼬박 U보트를 사냥하러 해군을 지원했다.

독일의 전쟁 수행 능력에도 크게 영향을 받게 된다. 이제는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이야기지만 Deutsche-Amerikanische petroleum(DAPG) 등 독일의 기술에 미국의 자본이 결합한 미국 회사의 독일 자회사들이 당시 독일에 많았는데, 이들의 상당수는 독일의 전쟁수행에 크게 도움을 주던 중이었다. 즉, 공습 이전까지 이들 미국계 독일 회사를 이용,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려는 미국 기업들의 계획이 진주만 공격으로 틀어지게 되고 결국 독일의 전쟁수행까지 방해받게 된다.

6.4.1. 추축국간의 동상이몽과 서로 엿먹이기

독일은 이 선전포고로 일본이 소련을 공격해주기를 바랐지만, 일본은 1945년 8월에 소련이 소-일 불가침 조약을 파기하고 공세를 시작할 때까지 계속 평화를 유지했다. 황당한 것은 독일은 중일전쟁 당시 중국에 무기를 팔았고, 일본 또한 폴란드 망명정부를 지원하며 서로에 빅엿을 먹였다는 것이다. 물론 독일의 의도는 중국 공산당을 국민당을 이용하여 없애기 위해 지원한 것이기는 하지만, 당시 국민당은 공산당보다 일본을 더 위협적인 적으로 봤었기 때문에 문제. 아예 장제스 휘하 부대는 중일전쟁 전부터 독일식으로 무장하고 있었고, 군사고문관으로 한스 폰 젝트 장군까지 파견된 판이었다.[68]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 문제는 독일이 통수친 게 아닌 일본이 먼저 통수쳤던 것에 가깝다. 중일전쟁이 터진 1937년보다 훨씬 더 이전인 1926년에 이미 독일과 중국 국민당은 협력 관계에 있었고, 히틀러가 권력을 잡기 한참 전의 일이니 공산당을 때려잡기 위함이니 뭐니와는 처음부터 별 관계가 없었다. 이 협력은 독일에 있어서는 경제적 협력이었으며, 군사적인 지원은 장제스가 공산당을 포함해 여러 군벌들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이후인 1933년이 되어서 한스 폰 젝트가 군사고문으로 파견되는 등 중국과의 관계를 가속화 시키긴 했는데 젝트 역시 중일전쟁과는 별 관련이 없는 사람이다. 후임자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과 교대하면서 귀국하여 1936년 사망했기 때문. 여튼 이 역시 공산당 때려잡으려고 가속시킨 것이 아닌 희소자원을 위해서였다. 애초에 더욱 거대한 공산주의의 위협인 소련을 놔두고 아시아 어디 붙어있는지도 모를 중국공산당 따위를 견제한답시고 국민정부에 군사적 지원을 할 정도로 히틀러가 한가하진 않았다.

이후 1936년, 방공협정으로 일본과의 접점이 생기지만 동맹 정도의 관계는 아니었고, 중일전쟁이 터지기 전인 1937년 5월 경, 쿵샹시가 외교적인 목적으로 독일을 순방하며 나치 고관들과 회동했을 때만 해도 히틀러는 소련과 동유럽 문제가 더 크다고 직접 말했을 정도이며, 방공국가인 중화민국과 일본 제국이 전쟁을 벌이지 말아야 한다고도 말했다.

물론 실제로는 37년 7월, 중일전쟁이 터지자 히틀러는 방공 파트너로 군사적 능력이 월등한 일본을 염두에 두고 있었고, 8월 채결된 중소 불가침 조약으로 히틀러는 마음을 더욱 굳히게 된다.

다만 아예 포기한 것만은 아니었는데, 독일 입장에서는 중일 양국이 싸우는 것은 그다지 좋은 일이 아니었고, 여기에 중재의 실질적인 계획안도 존재했다. 하지만 12월, 난징이 함락되며 이 중재안은 허공으로 날아가버렸고, 다음 해 4월, 독일이 만주국을 공식적으로 인정해버리며 사실상 중화민국을 포기함을 선언해버렸다.

이후 독일은 중화민국과의 관계를 정리하기 시작했는데, 무역 거래를 끊고, 일본의 요청으로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과 군사고문단을 소환했다.

아시아에 대한 히틀러의 관심 저하로 외교관계는 사실상 끊겼지만 유지 자체는 되고 있었기에 중화민국은 지속적으로 재협력 협상을 진행시켰다. 하지만 진주만 공습 후 히틀러는 대미 선전포고를 하며 왕징웨이 정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했고, 중화민국은 연합국에 공식적으로 가입, 독일에 선전포고하며 중국-독일 관계는 끝장나버린다.

이렇듯 일본이 먼저 중국의 뒤를 봐 주던 독일의 통수를 치긴 했지만, 대소참전을 하지 않은 결정적인 이유는 독소 불가침조약으로 방공협정의 당사자이던 일본에는 한마디 말도 없이 독단적으로 진행한 조약이었기 때문이다. 즉, 서로 통수치는 사이였고 상호 신뢰가 거의 없었다. 이럼에도 독소전 개전에 일본의 참전을 기대하는 것도 참 우스운 일이다.

게다가 다른 쪽으로 일본이 뒤통수 친 것도 있었는데, 미국의 랜드리스 지원을 사실상 묵인한 것. 일본은 비전투물자를 소련 선박이 운송한다는 조건으로 극동 지역을 통한 랜드리스 지원을 허가했다. 이를 통해 소련은 전체 랜드리스 물자의 거의 절반을 극동 지역을 통해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일반적으로 군사 동맹은 동맹국이 3자로부터 공격받았을 경우 원조의 의무가 부여되지만, 동맹국이 3자를 공격했을 때 원조의 의무를 부여하지는 않는다. 독일이나 일본이나 각자 선제공격했기 때문이지 주축의 동맹이 연합에 비해 특별히 약했던 것은 아니다. 게다가 소련의 경우에는 폴란드 분할 때까지만 해도 사실상 독일의 우호국이었다.. 즉, '동맹의 수준'이 문제가 아니라, 군사와 외교가 따로 놀았다는 것이 문제. 거기다 6호 전차 티거 문서를 봐도 알겠지만, 유럽의 추축국과 완전히 반대편인 아시아에 있던 일본 제국 사이에는 소련이라는 장애물이 있어 어떻게 상호 지원을 할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바다로 가자니 보급 문제도 문제인 데다가 자칫 잘못하면 연합국의 해상 세력에 완전히 궤멸될 판이었다.[69] 그리고 일본은 이전에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맺은 상태였다. 일본은 독일과 달리 불가침조약을 맺은 상태에서 쳐들어가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다. 물론 이것은 일본이 착해서는 당연히 아니고 소련군한테 한 번 크게 데인 적이 있어서 기본적으로 소련에게 상당히 쫄아있었던 데다, 이미 세계에서 인구수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중국, 미국과 동시에 싸우는 상황에서 나머지 하나인 소련과의 전선을 늘릴 상황도 아니었던 것이 크다. 그래도 양국은 동맹국이랍시고 어떻게든 기술지원을 해 주었지만[70] 양쪽 다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는 못했다. 어쨌든 히틀러는 소련이라는 강적을 상대하는 데 생각만큼 잘 안 풀려서 힘들어 죽으려는 상황에다가 이탈리아의 관종짓으로 강제 참전하게 된 지중해와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영국 세력을 다 축출하지도 못했는데 아무 생각 없이 루즈벨트가 바라던 대로[71] 선전포고를 하면서 파멸을 앞당겼다.[72]

6.5. 관련 인물들의 후일담

6.5.1. 미군 측 인물

아무리 기습이었다고는 하나 다수의 전함을 포함하여 막대한 피해를 눈 뜨고 당했기에 책임자 처벌을 피할 수는 없었다.

먼저 태평양함대 사령관이었던 허즈번드 킴멜 대장은 소장으로 2계급이 강등되고 퇴역 처리되었다. 또한 월터 쇼트 육군 중장도 1계급 강등되어 소장이 되며 퇴역되었다. 두 장성이 가졌던 해군대장과 육군중장 계급은 정규 계급이 아닌 전시 진급[73]한 임시 계급이었기 때문에 이들을 처분한 수뇌부에서도 크게 부담을 가진 건 아니었다. 또한, 전역과는 달리 퇴역 처리되며 예비역 소집 대상에서조차 제외당했다. 판단 미스로 기습을 불러 경계에 실패한 책임을 물은 것으로, 징계로 2계급 강등한 뒤 나이가 있어서 어차피 예비역 소집은 불가능한 상태라 그냥 강등 후 강제전역시킨 것인데, 이게 진주만 공습 대처 미스라는 배경과 겹쳐서 사실상 불명예 전역으로 간주된 것이다. 그래도, 이들은 퇴역군인으로써의 혜택은 제대로 받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계급 강등 후 전역당한 것 자체가 오명인지라 본인들 스스로 명예회복에 힘썼고, 그들 사후에 유족들 또한 명예를 회복해달라며 계속 대통령에게 청원을 냈다. 이들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차라리 그들이 군사재판에 회부되었으면 무죄가 되어 명예를 회복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단, 킴멜 제독은 본래 소장 계급이었고 대장이 부임하는 자리인 태평양함대 사령관에 부임시키기 위해 임시로 대장으로 진급시킨 것이고 그의 전임자들도 많은 경우가 임시로 대장을 달았다 임기 종료 후 정규 계급으로 돌아갔는데, 이것은 미국 건국부터 상비군을 소규모로 뒀던 미군의 전통 상 고위 계급의 상설화가 어려웠던 여건(그 해소 시점이 바로 2차대전으로 그 영향은 현재까지 작용하고 있다)에서 인사적체를 해소하기 위한 방법으로 활용되었고 평시 상황이라면 킴멜 또한 동일했겠지만 킴멜이 재직할 당시엔 미국이 전쟁에 대비해 군비를 막 팽창시키던 시점으로 만약 진주만 기습을 잘 방어하고 개전 이후의 성과가 괜찮았다면 대장 계급을 정식으로 달았을지도 모르나 결과론적 제기일 뿐이다. 후임 니미츠 제독 역시 소장 계급이었는데, 사령관으로 부임하며 임시로 대장으로 진급했다. 물론 니미츠는 엄청난 전과를 올리며, 이후 정식으로 대장 계급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원수까지 달았다.[74]

진주만 공습을 허용한 것에 킴멜 제독과 쇼트 장군에게만 책임을 몽땅 전가하는 것은 확실히 과한 감이 없잖아 있고,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논란이 존재한다. 헐 노트가 거부당한 시점에서 미국은 일본과의 개전이 임박했음을 인지하고 있었고, 일본이 여태까 그래왔던 것처럼 기습으로 개전을 시작할 수 있다는 점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일본군이 과연 어디를 공격할 것인지에 대한 많은 논의가 있었지만 미국의 전략가와 정책 결정자 중에 진주만을 예측한 사람은 없었다. 국무부 장관 헐은 마닐라나 괌을 예측했고 해군참모총장 스타크 대장은 동남아시아에 일본의 공격이 있을 것으로 예측했다.관련글

이 둘도 억울했는지 군사재판을 자진해서 신청하는 걸로 시작해서 거절당하고 전역한 뒤에도 계속 회고록을 펴내서 자신들을 스스로 변호했고 이들이 희생양에 불과하다는 르포 작가들의 책도 자주 나왔다. 특히, 킴멜의 자식들 중 1944년에 잠수함 USS 로발로(Robalo) 함의 함장으로 재직 중 함을 잃고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사망한 장남 매닝 킴멜 소령을 제외하고 차남 토마스 K. 킴멜(해군 대령 퇴역)과 삼남 매닝 킴멜 3세는 부친이 작고한 이후로도 부친의 명예회복 운동을 주도해나갔다. 킴멜 소령 역시 살아생전 부친의 명예회복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킴멜 소령은 복무 시절 무리하게 교전에 임한 경우가 많아서 상부에서도 이를 우려한 적이 있었는데, 아버지의 명예 회복을 위해서 전공에 매달린 것으로 추정한다.

매닝 킴멜 소령은 해군 내에서 자식에게까지 패장의 자식이라고 욕하거나 하진 않고, 도리어 연좌제 같은 거 없으니 제발 좀 자제하라고 할 정도로 의욕있게 복무했다. 함을 잃고 포로가 된 이유도 전공을 세우기 위해 무리하게 공격하려다가 역습을 당했다는 해석이 많다. 차남 토마스 킴멜 대위도 형과 마찬가지로 잠수함 장교로 복무했는데, 형 매닝이 전사하자 어니스트 킹 참모총장의 직권으로 함선 근무에서 강제로 배제되어 후방 지상 근무를 해야 하자 격렬히 반대했으나, 결국 명령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 역시 연좌제가 아니라 오히려 토마스의 목숨을 지키기 위한 킹의 결단이었다. 만일 토마스까지 사망하면 킴멜은 자식들을 한꺼번에 모두 잃게 되기 때문에 킹이 이런 결단을 내린 것으로, 토마스 킴멜은 1968년까지 해군에 근무하며 대령까지 진급했다. 삼남 매닝 킴멜 3세는 전쟁이 끝난 뒤에 태어났다.

이러한 청을 받아들여 1999년 미국 상원은 투표에 부쳤는데, 찬성 52 반대 47이라는 아슬아슬한 결과가 나와 이들의 계급을 회복시켜주도록 대통령에 권고했으나 당시 대통령 빌 클린턴은 물론 후임 대통령 조지 워커 부시도 거절했다. 물론 유족들은 승복하지 않고 계속 명예회복을 추진하고 있다. 일단 현재까지는 되지 않았으며 이들은 따라서 퇴역(retired) 소장 신분으로 되어 있다.

두 척의 갑표적 잠수함을 격침한 USS 워드 함의 함장 아우터브리지 소령은 구축함 함장으로 근무한 지는 며칠 되지 않았으나, 갑표적을 발견해 격침시킨 공로로 능력을 인정받아 해군 십자장을 수훈했다. 이듬해엔 워싱턴 DC의 해군수송사령부에 배치되었다가 알렌 M. 섬너급 구축함 DD-725 오브라이언(O'brien) 함의 함장으로 다시 바다에 나갔고, 이 구축함은 태평양이 아닌 대서양으로 배치되어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도 참여했다. 오브라이언은 다시 태평양으로 돌아와 레이테 해전에도 참가했으며, 이 때 가미카제의 공격으로 손상을 입는다. 공교롭게도 그가 첫 함장을 맡았던 구축함 워드 역시, 진주만 공습 3년 뒤인 1944년 12월 7일에 가미카제 공격으로 격침되었다. 종전 후 해군대학 교장 및 구축함 전대장 등 구축함 관련 업무를 맡다 소장으로 1957년 퇴역, 1986년 9월 20일에 80세의 나이로 숨졌다.

일본 해군 항공기들을 제일 먼저 발견하고도 제대로 경보하지 않아 재판에 회부되었던 당직사관 커밋 타일러 육군 대위는 무죄를 선고받아 계속 근무했다. 무죄판결의 가장 결정적 사유는 B-17 폭격기들의 비행일정을 통보받은 이후이기 때문에 레이더의 항적을 적기가 아닌 본토에서 오는 B-17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지극히 합리적이라는 것.[75] 이후의 경력도 딱히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미합중국 공군 창설 후엔 공군으로 전군해 중령으로 퇴역했다. 후일 인터뷰에 따르면 당시의 판단을 후회하고 여러 번 악몽에 시달리긴 하였단다. 또한 당시 자신의 행동을 비난하는 편지들이 종종 오기도 했단다. 하지만 그 때의 판단 자체는 문제가 없었다고 말했다. 2010년 1월 23일, 96세로 샌디에이고에서 별세했다. 커밋 타일러의 부고 기사

위의 유명한 전문을 보냈던 램지 소령은 미드웨이 주둔 부대의 작전관으로 미드웨이 해전에도 참전했고, 항공모함 CVE-21 USS 블록 아일랜드(Block Island) 함의 함장을 지내며 항모가 격침됐을 때 생존한 50명 중 한 명이 되기도 했다. 이후 소장 계급으로 퇴역한 뒤 1972년 9월 26일, 73세를 일기로 작고했다.

도리스 밀러는 항모 엔터프라이즈 함상에서 체스터 니미츠 제독에게 직접 해군십자훈장을 수여받았고,[76] 이는 최초의 흑인 수병 출신 훈장 서훈 기록이다. 또한 그는 전쟁영웅으로서 전쟁채권 판매홍보에도 동원되고, 해군 모병 포스터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이후 호위항공모함 CVE-56 USS 리스컴 베이에 배치되어 근무하다 타라와 전투가 끝난 직후 길버트 제도에서 이 항모가 일본 잠수함의 어뢰 공격으로 격침될 때 실종 및 전사 처리되었다.[77] 최종 계급은 조리하사였다. 2015년에는 오바마 정부 때 밀러 하사의 훈장을 명예 훈장으로 승격하자는 움직임이 있었으며 2020년에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지시로 제럴드 R. 포드급 항공모함 4번함(CVN-81)의 함명이 도리스 밀러로 확정되었다. 전통적으로 미해군 항공모함에는 미해군에 대한 업적이 있는 전직 대통령, 전직 장관, 전직 제독 또는 전쟁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함선의 이름이 붙었다. 도리스 밀러는 사병 및 흑인 최초로 미해군 항공모함의 이름이 될 파격적인 사례다.
6.5.1.1. 진주만의 명예훈장 수훈자들
공습 이후 여러 사후평가들을 통해 12월 7일 개전 당시의 공훈을 사 진주만에서 총 15명의 명예훈장 수훈자가 탄생했고, 그중 10명이 사후 수훈이었다.

아래는 사후 수훈자 명단이다.아래는 생존 수훈자 명단이다.이들 15인 외에 역시 공습 당일 미드웨이에서 공습을 당하는 와중에도 지휘부를 재편성하고 부하들을 피신시키다가 전사한 조지 H. 캐넌(George H. Cannon) 해병 중위까지 총 16명을 태평양전 최초의 명예훈장 수훈자로 본다.

6.5.2. 일본군 측 인물

나구모 제독은 진주만 공격과 연이은 남방작전에 항공모함 부대를 지휘한 공을 세웠지만, 야마모토와 달리 일본 군부 내에서의 영향력은 전혀 늘어나지 않았다. 그러다 6개월여 뒤 미드웨이 해전의 패배라는 최악의 결과를 거두면서 나구모는 항공모함 부대 지휘관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후 다시 복귀하여 과달카날 전역에 참가했지만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상처뿐인 승리[82]를 거둔 끝에 결국 항공모함 기동부대 지휘관의 자리에서 물러났고, 이후 수상함대 사령관직을 이어가다가 사이판 전투에서 자살했다.
항공참모 겐다 미노루 중좌와 진주만 공격을 공중에서 실질적으로 총지휘한 후치다 미쓰오 중좌[84]는 모두 전후까지 살아남았다. 둘은 해군병학교 동기였고 매우 친한 친구로 영화 도라 도라 도라에서도 이것이 잘 묘사되어 있다. 둘 다 진주만 공습 직전인 10월 15일자로 중좌로 승진하였다. 이들은 미드웨이 해전에도 참가했다가 아카기가 격침될 때도 함께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두 사람 모두 대좌까지 진급했고, 겐다는 전후 항공자위대로 들어가 막료장항공막료장까지 지냈고 후에 자민당 일본 참의원이 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록히드 사건 당시 수뢰혐의로 욕을 바가지로 먹기도 했다.

후치다는 미드웨이 해전에서 중상을 입었고 이후 종전 때까지 지상근무를 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 군부는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이 패한 사실을 숨기기 위해 허위 보도를 하는 한편 귀환한 부상병들에게 연금생활을 강요했으며 이에 후치다는 전쟁에 회의를 품게 되었다고 한다. 패전 후 진주한 미군 조종사에 의해 기독교를 접하고, 선교사가 되어서 간증하러 1970년대 한국도 방문하여 일본의 식민 지배를 사죄하는 연설을 하였다. 한편으로는 미드웨이 해전에 대한 회고록을 펴내면서 태평양 해전사 연구에 오랫동안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또한 <진주만 공격 총대장의 회심>이라는 회고록을 내어 진주만 공습의 준비와 전투 과정을 잘 증언해 놓았다.[85]

한편 이 계획을 실질적으로 입안한 연합함대 참모장 쿠로지마 카메오 대좌는 소장으로 전쟁을 마쳤고 전후 기업가로 변신했다.

6.6.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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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지금도 정신 나간 극우파들이나 역사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한 일부 일본인들은 진주만 공습을 일본이 미국에 타격을 가했다는 것만으로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5ch 등에서는 넷 우익들이 "우린 세계 초강대국과 세계 최대 규모의 전쟁을 치른 역사가 있다!"라고 정신승리하는 꼴을 자주 볼 수 있다. 또한 극우들이 일본제국을 옹호할 때 태평양 전쟁과 진주만 공습은 미국이 강제로 유도하여 일본의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벌인 일이라고 정당화하며 여기에서 헐 노트를 만능 카드로 내세운다는 점이다. 허나 이것이 일본에 대한 면피라는 건 당시 중일전쟁을 벌인 주체가 누구이며, 열강들의 중화 대륙에 대한 이권다툼이 왜 중요했는지만 논해도 답이 나온다. 결정적으로 중일전쟁을 누가 시작했는지만 봐도 이미 끝났다.

그러나 겉보기에는 이 진주만 공습의 화려해보이는 전과와는 달리 역사와 군사사의 전문가 뿐만 아니라 전사에 대하여 조금이나마 아는 자들은 진주만 공습이 일본제국의 패배, 더 나아가 일본제국을 포함한 추축국들의 패망으로 향하는 시발점이었다는 역사적 분석에 의의를 둔다. 이는 후대인들 뿐 아니라 야마모토 이소로쿠와도 같은 당대의 일본 식자들도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고 있었던 바였다. 결국 선전포고도 하지 않은[87] 선제 공격은 미국인들을 분기탱천하게 만들었으며, 초강대국 미국을 전쟁에 적으로 끌어들인 결과, 일본은 압도적인 미국의 힘에 결국 밀려 처참하게 허덕이다가 패하여 몰락하기에 이른다.

왜 일본 연합합대 사령부가 이 완벽한 기습공습에 대해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을지를 생각해보자. 진주만은 미국의 가장 중요한 해군 군사시설임에 틀림없었고 이 곳에 대한 선제공격은 바로 미국과의 전면전을 의미했다. 즉, 진주만 자체를 함락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더라도 태평양 함대 자체를 괴멸 직전까지 몰고 간 후 최대한 복구 시간을 지연시켰어야 했는데, 일본군이 비록 미 태평양 함대에 큰 타격을 주긴 했지만 가장 중요한 항공모함을 단 한 척도 잡지 못했고[88] 유류시설 파괴도 하지 못했다. 일본 입장에서는 이미 함대를 다 격침시켰으니 석유만으로는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오히려 함대 공격보다는 유류시설을 전부 파괴하는 데에 집중했다면 미국은 공습 이후 연료부족 문제에 시달리며 단기간에 태평양 함대를 복구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89] 즉, 미국이 가장 해결하기 쉬운 부분에 모든 공격을 집중했으니 태평양 함대에 대한 일시적 복구가 가능했고 결국 미드웨이 해전에 결과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또한 미국이 전통적인 고립주의에서 벗어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진주만 공습 이전의 미국은 먼로주의의 영향으로 국제 분쟁에서 자국이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지 않는 이상 개입을 가급적 자제해 왔다. 게다가 국제적 질서 구축에 대한 참여에도 소극적이었다. 일례로 1차대전 이후 국제연맹 창설은 당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제안한 것이었지만, 정작 미국은 고립주의가 강했던 미 의회의 반대로 참여하지 못 한 바 있다. 그러나 최초로 대규모 선빵을 당한 진주만 공습을 겪은 이후로, 미국은 현대에는 먼 나라의 분쟁이 곧 자국의 안보에 직접적인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인식하였다. 이에 따라, 전후 미국은 국제연합 창설을 주도하였고, 예방전쟁(preventive war) 차원에서 타국의 분쟁에 적극적이고 선제적인 개입을 하는 세계의 경찰 역할을 하기 시작한다. 대표적인 예가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 걸프전쟁 등이다. 즉, 진주만 공습은 오늘날 세계 질서 형성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건이라고 할 수 있겠다.

6.7. 소련

흥미로운 점으로는 진주만 공습의 정확한 일자가 소련으로 새어나갔다는 사실이다. 소련의 전설적 스파이 리하르트 조르게가 진주만 공습의 정확한 일자를 알아내 소련에 보냈기 때문. 조르게는 독일 침공도 미리 알고 보고했었던 성과가 있으니 보고 자체는 믿었겠지만, 이오시프 스탈린이 진주만 공습과 미국 참전의 시작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불명이다. 당시 미국은 유럽 내 전쟁에는 중립적인 입장이었고 소련은 독일군이 모스크바 바로 앞까지 진격하는 등, 제 코가 석자라서 신경 쓸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혹은 독일의 동맹국인 일본이 블라디보스토크를 공격해서 자신들의 랜드리스 보급선을 막는 것을 우려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르게가 빼낸 일본군 남방작전은 소련에 큰 도움이 됐다. 조르게는 "모스크바가 함락되지 않는 한은 일본은 중립을 지킬 것"이라고 타전했다. 소련은 그 정보를 접하고 시베리아에서 일본군과 대치하고 있던 정예사단 중 일부[90]를 열차로 실어 와서 모스크바 공방전에 투입하였고 이들은 독일군을 저지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또한 일본은 독일이 모스크바를 점령하면 소련을 후방에서 공격하겠다고 독일에게 알렸었는데 일본의 행동으로 결국 독일의 모스크바 공략이 더 어렵게 됐으니 독일 입장에서는 일본의 팀웍은커녕 팀킬도 이런 팀킬이 없었을 것이다.

물론, 동맹이랍시고 할힌골 전투 직후의 독일과 소련의 불가침 조약과, 바르바로사 작전 직전의 소련과 일본의 불가침 조약을 생각해보면 애초에 팀워크가 있었는지도 의문이지만 말이다.

6.8. 이후 태평양 전선의 규모

일부에선 "진주만 공습에 격노한 미 정부가 국력의 10%를 태평양 전선에 썼다"는 식으로 잘못 알려져있기도 한데, 물론 미국이 일본보다 독일을 때려잡는데 더 많은 국력을 쏟아부은 것은 사실이다.[91] 이는 독일이 일본보다 더 위험한 적이라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인데 이는 중국을 제외하면 타국의 식민지를 공격하던 일본과 달리 독일은 국제외교의 중심이던 유럽 본토를 공격했기 때문이다. 또한 진주만 공습과 독일의 선전포고 이후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이 즉각 미국으로 달려가 유럽 전선이 우선이라는 약속을 받아냈으며 미국이 대독전선에 집중한 것도 이러한 약속의 일환이기도 했다.[92]

그러나 인터넷에서 떠도는 국력 10% 설은 거짓이다. 당시 일본해군은 ABDA 연합해군을 격파하고 아시아 쪽에선 꽤나 선전하고 있었고, 미 해군이 실제 일본군과의 전투를 치르고 나서 당시 일본군이 절대 만만히 볼 세력은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다.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국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며 사실상 태평양 전쟁의 기세를 빼앗아오자 미 육군 쪽에서 "미드웨이에서 이겼으니까 이제 유럽 쪽에 집중해도 되지?"라는 식의 뉘앙스로 보급 우선권을 주장했다. 이에 열받은 미 해군이 1942년 12월 카사블랑카 회담에서 유럽으로 보내지만 말고 태평양 전선에도 보내달라고 요구하는 근거로 댔던 게 연합군의 전체 전쟁자산 중 15% 정도만 태평양 방면에 투입된다는 것인데 이것도 정확한 산출이 아닌 왜곡이 들어간 수치였다. 그런데 우습게도 당시 미 육군은 지중해 방면에 군을 집중하려 했던 처칠에게 반감을 가진 상태였고[93], 이 말을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직설적으로 하질 못하니 걍 해군 보고서를 지지하는 쪽으로 방향을 모색했다고 한다. 결국 보급권을 가지고 갈등하던 미 육해군이 처칠이라는 공공의 적 앞에선 한데 힘을 모은 셈. 그런데 그것이 이리저리 굴러다니더니 작금에 와선 10%로 변질되어서 사실인 양 통용되고 있다.

결론적으로 100% 전력이 아닌 미국에게 일본이 패한 것은 사실이지만, 미 해군의 주력함들은 거의 태평양 쪽에서 작전을 수행했고 전쟁 발발 이후 해군은 오히려 대서양 방면의 전력을 태평양으로 차출하기도 했으니[94] 적어도 해군의 경우에는 오히려 태평양이 주전장이니 주전력(특히 주력함)의 거의 100%[95]가 일본을 상대하는 데 투입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대서양에는 크릭스마리네가 잠수함을 제외하면 별 볼 일 없는 상대인 데다가 동맹인 영국 해군이 크릭스마리네를 압도하는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미 해군 전사를 봐도 2차대전 내내 대서양에서는 이렇다 할 주력함간 대규모 해전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7. 창작물에서 묘사한 진주만 공습

태평양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공습이어서, 태평양 전쟁을 다루는 창작물에선 직간접적으로 1번 이상은 언급하는 편이다. 역사적으로도 미국의 고립주의를 깨트린 중요한 분기였기 때문에, 2차 세계대전에서 분기하는 대체역사의 가능성들에서 중요한 트리거중 하나로 다루어지기도 한다.

7.1. 영상물

7.2. 게임

8. 여담

8.1. 만약 항공모함들이 모두 있었다면?

예정상 진주만 공습 당일 항공모함은 새러토가, 렉싱턴, 엔터프라이즈, 요크타운 모두 4척이 진주만에 있어야 했다. 이 네 척은 모두 태평양 전쟁 초반부에 적극적으로 싸운 수훈함들이다. 그러나 진주만 공습 당일 새러토가는 긴급 기관 문제 발생으로 샌디에이고 조병창에서 수리 중이었고, 문제의 엔터프라이즈는 폭풍이 와서 하루 늦게 입항하는 등 단 한 척도 진주만에 주재하지 않았다. 만약 이들이 진주만에 정상적으로 있었더라면 분명 참혹한 꼴을 면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주 큰 문제는 아닌데, 진주만 공습은 12월 7일이고 이들이 본격적으로 활약을 시작한 것은 이듬해 3월 경부터이다. 진주만에서 항공모함들이 정박해 있을 곳은 얕은 동부 해안의 정박장이므로 이들이 폭탄을 맞았다고 해도 좌초 이상의 피해를 입었을 것이라 보기 어려우며, 4개월이면 실제 역사상 미국의 공업력으로는 항공모함 네 척 수리할 시간이 충분하다. 리처드 홀시 베스트[102]가 진주만 공습에 희생되는 바람에 일본 항모가 미드웨이 해전에서 살아남는다든지 하는 소설적인 일이 벌어지는 게 아니면 별 차이는 없었을 것이다.

8.2. 만약 미군의 유류 저장고를 공격 당했다면?

사실상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원활히 이끌어 나갈 수 있는 방도는 이외에 찾기 힘들다. 일본군은 미군의 주력함대를 격멸하는 데에 집중하느라 유류 저장고를 파괴하기 전에 이미 탄약, 폭탄 등을 다 써 버렸고, 때문에 3차 공습으로 유류 저장고를 치려다가 중단하고 돌아왔다. 당시 미군의 유류 저장고는 태평양 함대 전체를 지탱하는 물자의 기둥이었고, 만약 일본군이 탄약이 넉넉하고 항공기들의 피로가 적어 3차 공습을 했더라면, 그래서 이것이 파괴되었다면 미군은 태평양 전쟁 진행에 심대한 타격을 받았을 것이다.

일부 전문가들[103]은 "미국의 석유 생산량이 막대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해도 달라질 건 많지 않다"고 평하지만, 적어도 한 달 내지 두어 달 정도의 여유라도 벌 수 있다면 일본군은 남방작전을 끝마치지도 못한 채 미드웨이 해전을 감행할 필요성도 적어지고, 더 나아가서는 미 태평양 함대의 재건에 사용될 물자가 유류 공급과 저장용에 돌려져야 하므로 어쨌든 미군의 기동력과 전투력을 심대하게 저하시킬 몇 안 되는 가능성의 길이다.

그러나 결국 여전히 일본군이 하와이를 점령할 능력이 있었다 보기에는 회의적인 시각이 많으며 미국의 막대한 공업력이 본격적으로 전쟁에 투입되기 시작했을 때 일본군이 그걸 당해낼 방도가 없었으므로, 어디까지나 전쟁의 주도권을 잡고 미국과의 협상의 여지를 더 만드는 정도에 불과했을 것이다.

9. 관련 어록

우리는 진주만을 향해 진격했고, 나는 암호를 크게 외쳤다. 도라, 도라, 도라
야마모토 이소로쿠

우리 황국의 운명은 이 일전에 달려 있다.
나구모 주이치

우리는 잠자던 거인을 깨우고, 결기를 불어넣었다.
진주만 공습의 성공을 보고받은 후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이 한 독백.

"이제 우리 연합군이 이겼다. 히틀러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무솔리니의 운명도 결정되었다. 일본인의 경우는 가루가 되어버리겠지."
진주만 공습 소식을 듣고 난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의 반응[104][105]

"그래, 난 이리 될 줄 알았어!"
진주만 공습을 부관으로부터 보고 받은 어니스트 킹 제독의 반응

우리는 질 리가 없다. 우리는 3000년 동안 결코 패배한 적이 없는 국가를 동맹국으로 두게 되었다.
진주만 기습 공격의 소식을 듣고 아돌프 히틀러가 한 말[106]

이 전쟁이 끝나기 전에 일본어는 지옥에서나 쓰는 언어가 될 것이다.
윌리엄 홀시, 엔터프라이즈를 몰고 피바다가 된 진주만에 입항한 뒤[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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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네바다, 오클라호마, 펜실베니아, 애리조나, 테네시, 캘리포니아, 메릴랜드, 웨스트버지니아[2] 아카기, 카가, 소류, 히류, 즈이카쿠, 쇼카쿠[3] 공고급 순양전함 기리시마, 히에이[4] 갑표적이란 겨우 사람 2명 들어가고 배수량은 50톤 남짓인 공습을 위해 작게 설계된 잠수정이다.[5] 웨스트버지니아캘리포니아는 인양 후 수리하여 복귀, 애리조나는 폭침으로 인해 수리 불가로 손실, 오클라호마는 인양 했으나 복귀 포기하고 스크랩을 위해 이동중 태풍에 손실[6] 이중 표적함으로 쓰인 플로리다급 전함 2번함 USS 유타도 포함.[7] 베스탈 포함.[8] 갑표적 중 1척의 정장사카마키 카즈오 해군 소위로, 태평양 전쟁 중 최초의 일본군 포로라는 타이틀을 지닌다.[9] 동명의 영화도 여기서 유래했다.[10] 제1차 세계대전에서 복무한 적 있는 루이스 프레스턴 해리스(Lewis Preston Harris, 1896~1963.) 해군 사령관이 만든 구호다. 공습 10일 후 동명의 노래가 만들어져 빌보드 차트 3위에 오르기도 했고, 동명의 선전영화가 방영되기도 했다.[11] 공중에서 공격했다는 공습(空襲)이 아니라 급속히 공격했다는 뜻으로 습격과 유의어이다. 다만 함재기 공격이었으므로 空襲이라 해도 말이 통한다.[12] 하와이에서 세번째로 큰 섬으로서 주도 호놀룰루가 있어 하와이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도서이다.[13] 진주만 공습 다음날인 1941년 12월 8일 미국 국회의사당에서 발표.[14] 반대 1표는 밑에서 언급되는 지넷 P. 랜킨 의원이다. 단, 이 사람은 이전의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에도 반대표를 던진 적이 있는 반전주의자였다.[15] 군대의 전방에서 후방까지의 거리.[16] 전쟁 중 러시아 혁명으로 인하여 소련으로 변경[17] 단, 이런 방침과 별개로 해군은 병력을 태평양으로 거의 집중해서 대서양에서는 대잠 임무에 투입할 구축함이 부족해서 영국한테 대잠 어선을 빌려오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하지만 대잠용 항공모함은 미국이 미친듯이 보내줬다. 물론 독일 해군이 잠수함 전력을 제외하고 개전 이래 영국 해군에게 떡실신 당하고 있었기에 미 해군이 대서양은 대잠만 신경쓰고 태평양으로 수상 전력을 집중할 수 있었던 것도 있다.[18] 게다가 이렇게 되면 그동안 중국에 투자한 자본과 시간이 모두 허사가 되며, 그럴 경우 군부는 실패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하는 상황이었다. 나라를 생각한다면 순순히 권좌에서 물러나는 게 정상이었지만, 권력에 취한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이기적인 판단을 내리고 만다.[19] 미국인들은 1차 세계대전을 치르고도 얼마 안 돼서 또 다시 크고 끔찍한 전쟁을 일으킨 유럽에 학을 떼고 있었으며, 이는 미국이 2차 세계대전 초기 영국 혼자 외로이 독일과 맞서는 동안에도 유럽과 선을 긋고 고립주의를 표방하며 개입하지 않은 원인이었다. 루즈벨트는 영국이 점령당한다면 영국까지 집어삼키고 더 강력해진 나치와 미국이 홀로 겨루는 것은 매우 불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국민들의 동의를 얻을 방법이 없던 차에 진주만 공습이라는 9.11 테러급 사건에 이어 독일이 선전포고까지 해 주자 국민들의 분노가 폭발하면서 울고 싶은데 뺨 맞은 격으로 전격 참전하게 된다.[20] 일본은 제국주의 초창기인 1900년대부터 아시아주의를 표방하였다. 지정학적으로 동아시아에 위치한 일본이 조선이나 중국을 침략할 명분으로 이용한 것이다. 일본이 나치독일을 도와 소련을 공격해야 했다는 가정이 어려운 것은 소련은 아시아에 대한 지분이 없었고 반대로 연합국인 인도영국이나 필리핀미국, 베트남프랑스, 인도네시아네덜란드가 더 지분이 있었다. 따라서 일본은 아시아에 대한 침략 확대를 위해 추축국에 가담할 수밖에 없었고, 시기를 재다가 전격적으로 미국을 공격한 것이다.[21] 현재로 비유하면 대한민국과 미국의 GDP 격차와 비슷하다. 2021년 기준 대한민국과 미국의 GDP 격차는 12.7배 정도 된다.[22] 정작 이 원인은 일제 자신들이 제공했다. 바로 이 진주만 공습 때문에 미국 태평양 함대의 전함 전력이 초토화되어버려 남은 항공모함으로밖에 함대를 운용할 수밖에 없었고, 마침 태평양 함대를 지휘하던 니미츠 제독은 항공모함의 능력을 신뢰했기에 항공모함을 적극적으로 운용했던 것이다. 태평양 전쟁 중 미 해군 최고의 전훈함인 CV-6 엔터프라이즈가 폭풍을 만나 예정일보다 진주만에 하루 늦게 도착한 것도 일본에겐 엄청난 불운이었다.[23] 물론 당시 수에즈 운하가 있었지만, 러시아와 100년이 넘도록 세계 패권을 두고 경쟁해왔고, 영일동맹까지 맺은 수에즈 운하의 주인인 대영제국이 러시아에게 순순히 운하를 열어줄 이유는 없었다.[24] 일본 시간으로 8월 9일. 참고로 이 날은, 일본이 나가사키에 팻 맨을 맞은 바로 그 날이었다.[25] 농담이 아니라 일본 제국의 이 짓으로 인해 당대 미국 내에서 고립주의자들이 중심이 되어서 주장하던 '무의미한 전쟁'이라는 논리의 반전 여론은 사실상 사라져 버렸다. 아래를 보면 알겠지만, 고립주의를 지지하던 공화당조차 민주당 소속이던 대통령에게 일본 제국, 그리고 추축국 전체를 상대로 확대된 전쟁의 수행에 대한 아낌없는 지원을 약속하면서 사실상 충성 맹세를 한 수준이었다. 어떤 고립주의 파벌의 공화당 의원도 기자들에게 "이제부터 우리가 할 일은 저 일본 놈들을 철저히 두들겨 패는 것."이라고까지 말했다고 한다.[26] 제1차 세계 대전 때부터 전쟁참가 반대론자였던 자넷 P. 렌킨은 이쪽이었다.[27] 유류창고는 시야 방해를 이유로 파괴하지 않는 뻘짓이 있었다고 지적하지만 유류탱크가 54개나 되고 기습의 이점이 사라진 상황에서 이를 모두 파괴하는 건 불가능했다. 애시당초 공습의 목표는 전함과 항공모함, 그리고 진주만의 항공세력이였다. 항공모함의 경우는 의도한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진주만 공습의 최우선 목표물 중 하나에 그들이 있었다. 그저 작전 당일까지도 그 위치를 파악하지 못했고 마침 당일에 모두 운 좋게 진주만에 없었을 뿐이다. 또한 진주만 공습은 어디까지나 일본 함재기들의 안정성과 조종편의성을 희생하여 얻은 항속거리로 초장거리에서 해온 공격이기 때문에 공습 능력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미군처럼 대규모로 B-29같은 쑥재배기를 날린 게 아니기 때문이다.[28] 해당 공습을 당한 뒤 일본 해군은 미 해군을 태평양 멀리 밀어내기 위해 미드웨이 해전을 감행해야만 했다.[29] 이 연설은 미국의 프로파간다와 선전 포스터에도 사용되었다.[30] 참고로 이 부분은 콜 오브 듀티: 월드 앳 워 인트로 영상에도 나온다.[31] 사건 이후 진주만 공습을 잊지 말자는 의미에서 발행된 포스터. 뒤의 배경은 불타는 진주만의 모습을, 찢어진 성조기는 미국이 입은 피해를, 그리고 조기로 걸린 국기는 이 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군인들에 대한 추모를 뜻하며 그럼에도 꺾이지 않고 서 있는 깃대는 온 미국의 의지를 나타낸다.[32] 예를 들어 미국 민간 함선들이 대영제국으로 향하다 독일 U보트에 의해 침몰해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해도 보상금 정도만 받고 끝내려 했을 정도였다. 다만 미국 정부는 유럽의 전체주의화를 두고 볼 수 없었기에 무기대여법 등을 통해 서유럽을 최대한 지원하고 있었다. 이때 FDR이 한 말이 미국은 '민주주의의 병기창'이 되어야 한다는 것.[33] 다만 전세가 점점 격화되면서 미국인들의 생각도 점차 바뀌기 시작하는데 1940-41년의 갤럽 여론조사 결과에서 볼 수 있듯이 1940년 1월쯤이 되면 전쟁을 감수하더라도 영국을 지원해야 한다는 의견이 더 우세해졌고 41년 4월에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약 68%가 독일을 굴복시키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 전쟁뿐이라면 참전을 해야 한다고 답하였다. 지금 당장 참전해야 한다는 의견은 여전히 극소수였지만 미국도 언젠가는 전쟁에 개입해야 한다는 여론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던 것이고 이것이 거의 모든 국민의 전쟁 지지로 바뀐 계기가 바로 진주만 공습인 것이다.#[34] 이렇게 자진 입대율이 높다는 점을 악용해 군대를 빠진 사람들도 상당했다.[35]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참전 용사 인터뷰 장면에서 이 얘기가 언급된다.[36] 폭격기 승무원으로 전후 준장까지 진급했다.[37] 당시 미 해군의 인사사령부 역할도 맡는 부서였다.[38] 주 단위에선 주지사 외에 그 휘하, 의회의 정치인이나 공무원들, 그 외에 소도시의 시장들, 각 지역의 중견 명사들(전문직 종사자)이 전쟁 전부터 주 방위군 장교/장성으로 복무했던 경우가 많았고 전쟁이 발발하면서 전쟁 내내 풀타임으로 참전했다.[39] 전쟁 이전에 하원의원 재직 중에 해군소령으로 복무했는데 진주만 공습이 터졌고 주로 감독관으로 활동했다.[40] 원문은 "다른 사람(anyone else)"이지만, 당시 여군은 후방 지원 임무를 맡았고 소수였기에, 군대에 입대해 최전선에서 싸우는, 흔히 생각하는 총 들고 적과 싸우는 군인은 남자밖에 없었으므로 사실상 의미하는 바를 쉽게 유추할 수 있다.[41] 1차 대전 당시에는 단순히 "미국을 치자"라는 비밀 전보가 흘러들어와 배신감에 괘씸해서 참전했다면 진주만 공습에는 미국이 직접 공격당하여 막대한 피해가 발생한 것에 진심으로 분노하여 참전한 것이다.[42] 불편한 진실에서도 만장일치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왔는지 역사가 이를 증명했다. 이것으로 인해서 독재가 발생했고 수많은 불의가 '다수결의 원칙'에 의해 일어났다. 하지만 자국에서 시작된 민주주의 대통령 중심제의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부터 만장일치로 당선된 인물이라는 명백한 반례도 존재한다. 워싱턴이 사후에도 유명해진 이유는 엄청난 인기나 만장일치 당선이 아닌, 그 인기로 얻은 권력을 스스로 내려놓은 퇴임이었다. 물론 워싱턴은 매우 예외적인 사례이며, 대부분은 만장일치로 인해 좋지 않은 결과를 낳았기에 여전히 지넷 랭킨의 주장은 유효하다.[43]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랭킨 스스로 각오한 엄청난 자충수여서, 1942년 중간선거를 포기하고 정계 은퇴를 해야 했다. 상술한 한국전 및 베트남전 반전 운동은 정치인이 아닌 사회운동가로서 했다. 1차 대전 참전에 대한 반대투표 때는 높아진 인지도를 바탕으로 상원의원에 도전했었는데 완전히 상황이 반대가 된 것이다. 그리고 랭킨의 선거구인 (공화당에게 매우 유리한) 몬태나 주 제1선거구는 랭킨이 은퇴한 1943년부터 선거구가 사라지는 1993년까지의 50년 중 겨우 4년, 즉 선거로는 단 2번만 공화당이 이겼으니 당 입장에서는 밭 하나를 날려먹은 셈으로 피해가 컸다.[44] 다만 당시 조선인들은 미국에서도 별개로 봐 해당 사항이 아니었다.[45] 작가 펄 벅아시아에서 오래 거주한 경험이 있는 극소수의 사람들은 일제의 팽창욕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어 이런 가능성을 인정하거나 주시하기도 했으나, 일본과의 전쟁을 진지하게 고려했던 쪽은 해군 지도부 일부 정도였고, 오랫동안 미국이나 일본이나 서로에 대해 진지하게 전쟁을 고려한 적은 없어 무시당했다.[46] 대표적으로 미 해군 제독 어니스트 킹. 항목에도 나와 있는 것처럼 킹은 일본이 언젠가는 미국과 한판 붙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실제로 진주만 공습 보고를 듣자 무릎을 탁 치면서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을 보였다.[47]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며 전쟁은 엄청난 정치적 경제적인 반발을 무릅쓰고 각오해야 할 수 있는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2022년 우크라이나전쟁을 일으킨 러시아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 국가들로부터 엄청난 경제 제재를 받았다.[48] 다만 이것 역시 대공황 시절에 비하면 애교 수준이었고, 무엇보다 애초에 이때 뉴딜 정책은 당시 보수주의자들의 반발에 오히려 예산이 감축되는 등 후퇴했던 상태라 오늘날 경제학자들 간에도 갑론을박이 다분한 주제이다. 폴 크루그먼 교수 같은 경우 오히려 이때 경제적 보수주의자들의 반발로 뉴딜 정책을 원래대로 시행하지 못하면서 일시적 불황이 왔다고 분석할 정도.[49] 한편 조셉 그루는 일본이 진주만을 공습하고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미국과의 국교를 스스로 단절할 때까지 주일대사로 근무했으며 개전 즉시 억류되었다가(둘리틀 특공대의 공습 당시에도 아직 억류되어 있었다) 미일간 합의에 의해 포르투갈령 동아프리카(오늘날의 모잠비크)에서 주미일본대사 노무라 키치사부로, 대미 특사 쿠루스 사부로 등과 교환되어 반 년간의 억류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다.[50] 당시 미국의 전함이 총 16척이었는데 그중 8척이 진주만에 정박해 있었다. 진주만 자체가 군항인 점과 천운이 겹쳐 인양, 수리할 수 있었던 거지 거함거포주의가 만연했던 해군들 시각에선 해군력의 절반이라고 해도 무방한 규모가 전멸 가능하게 놔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오히려 항공모함을 더 잘 알고 잘 써먹던 쪽은 일본 해군이었으며 그 사령관인 야마모토 이소로쿠부터가 항공모함 운용의 선구자격인 존재이자 신봉자였다. 하지만 진주만 공습의 성공 이후 일본은 항공모함을 여러 곳으로 나눠 분산 운용하는 오판을 하게 되고 오히려 일본을 보고 배운 미국이 집중 운용하게 된다.[51] 항공기 엘리베이터나 케터펄트 등은 다른 함선에서는 쓰는 게 더 이상한 수준인지라 수리시설이 제한적이다. 하지만 하와이 쪽에 그런 시설이 없었고 기술진도 부족해서 본토에 가야 정비가 가능했다. 무엇보다 아무리 하와이가 큰 군항이라고 해도 결국 조그마한 섬이라 본토보다 자원공급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52] 아래에서도 언급하겠지만 미국 정보부도 바보는 아니라서 일본과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다만 그게 진주만이 아니라 일본 본토 근방의 섬들이라 생각했고 그 섬들에 대한 방위를 강화하고 있었다. 당연하지만 그 방위강화 계획 중 필요한 항공전력을 수송하기 위해 항공모함이 투입된 것이다.[53] 사실 엔터프라이즈가 진주만에 들어오지 못하면서 진주만의 해군 기지로부터 적을 찾으라는 명령을 받고 적을 찾기 위해 추적하고 있었으나, 방향이 달라서 허탕을 쳤는데, 이것도 행운에 가까웠다. 만약 이 때 엔터프라이즈가 일본군을 찾았으면 엔터프라이즈 혼자서 일본군 해군 제1항공함대 전체를 상대해야 하는 상황이다. 과달카날에서 운용 가능한 항공모함이 엔터프라이즈 한 척밖에 안 남았을 때 엔터프라이즈 소속의 한 수병이 엔터프라이즈 함교에 써 놓은 'Enterprise VS. Japan'이 그대로 터지게 되는 것이다.[54] 일본군은 급유함과 잠수함 말고는 28노트의 카가가 가장 느린 함이었다. 그에 비해 미국은 고속전함이 등장하기 전까진 터보일렉트릭이란 요상한 엔진을 사용해서 보조함은 일본과 비슷했지만 주력인 전함은 거의 21노트 정도. 거기에 상당히 까이는 새장형 마스트를 필수적으로 장착했다.[55] 민간여객상선에 군용무기 선적[56] 실제로 일본군은 당시 함대결전사상에 심취해 단기간에 미국을 제압하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2차대전 내내 지원함보다 항공모함이나 전함을 우선 공습, 뇌격한다. 적 주력전력의 궤멸에 집착하고 보급 및 지원세력을 경시하는 풍조와 당대 일본 해군 내의 주류였던 함대결전사상만 봐도 이상함을 느낄 것도 없다. 또한 현실적으로도 이들 표적에 대한 공습은 쉽지 않았다. 원유저장고가 하나의 탱크가 아니라는 점은 앞서도 설명했을뿐더러, 일단 공습 규모에 비해 한번에 출격시킬 수 있는 함재기의 규모가 한정되었기 때문에 최대한 고가치 주력전투함 격침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고, 그나마도 적의 요격을 대비해 요격기들을 섞어서 보냈기 때문에 실제 폭격전력은 생각보다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했다. 진주만 공습을 흔히 현대 항모전술의 전환점이라고 평가하지만, 따지고 보면 항모 타격 전술의 한계 역시 여실히 보여준 사례다.[57] 사우스다코타급 전함들은 1942년 4월부터 취역하기 시작한다.[58] 노스캐롤라이나급도 위에서 언급된 워싱턴 군축조약으로 인해 탄생한 하자있는 물건 이었다. 원래는 14인치급 함선이었으나 후에 일본의 조약탈퇴로 인해 어거지로 개조하다보니 함체의 언벨런스 + 대응방어 불가능 등 상당히 하자있는 물건이 된 것.[59] 위에서 언급하다시피 항공모함들이 진주만에서 빠져나간 것도 일본 본토 근방 섬들의 방위를 위해 비행기들을 운송하다가 빠진 것이다.[60] 그나마 정치인들은 해외도피라도 가능할지 몰라도 군부인사들은 걸리면 얄짤없이 법적 처벌을 피할 수 없다.[61] 정확하게는 육군은 더 이상 태평양 전선에서 작전을 확대하는 것보다 이미 교착 상태가 된 중일전쟁을 마무리하고자 이런 주장을 했다. 태평양 전선은 바다를 끼고 작전을 하기 때문에 해군이 주연이고 육군은 조연 취급을 받는 반면 중일전쟁을 승리한다면 온전히 육군의 공적으로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62] 대표적인 게 항공모함에서 육상 폭격기를 발진시킨다는 기상천외한 발상으로 백주대낮에 도쿄를 공습한 둘리틀 특공대가 있다.[63] 사실 진주만 공습 이전까지만 해도 미국은 랜드리스 등으로 1차 대전 초기 때처럼 무기팔아먹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유럽 전선과 동아시아 모두 미국 본토와 한참을 떨어져 있던 데다가, 미국인 대부분이 '설마 감히 미국을 공격하겠어?'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64] 과정도 아주 졸속이 따로 없었는데, 당시 총리였던 바르도시 라슬로(Bárdossy László)가 의회 및 섭정과 최소한의 협의도 거치지 않고 냅다 전쟁을 선포한 것이기 때문이다. 헝가리는 이후 전쟁선포가 아니라고 번복했다가 다시 전쟁을 선포한 게 맞다고 말을 바꾸는 등 혼란스러운 입장 표명을 하였다. 미국과 헝가리가 직접 전선에서 맞붙는 일은 거의 없다시피 했지만 아무튼 미국은 이를 잊지 않고 살러시 페렌츠페케테헐미-체이드네르 페렌츠처럼 공산당을 피해 자국 측에 항복한 헝가리 전쟁범죄자들을 전부 본국 공산정권에게 송환해 버렸다. 바르도시 역시 스위스에서 추방된 이후 미군에 체포되어 항복했다가 이렇게 공산정권에 송환되어 처형당했다.[65] 참고자료 1, 참고자료 2.[66] 물론 수도가 함락당한 기준으로 보면 외세의 공격이 받은 적이 없다지만 일본이 쳐들어갔다 대판 깨진 사례는 상당히 많았다. 우리나라 관련으로만 봐도 광개토대왕 시기 고구려와 왜의 전쟁을 시작으로 백강 전투, 성덕왕 시절 침입, 조선시대 당시 임진왜란 등이 있으며, 또한 세계사만 놓고 봐도 당장 진주만 공습 2년 전인 1939년, 할힌골 전투에서 소련에 패한 바 있다. 사실 이런 부분은 서양에선 당시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고 또한 수많은 구대륙 국가와 달리 본토가 점령된 적이 한 번도 없었으며 일본이 개항되며 서양과의 교류가 활성화된 이후 일제가 청일전쟁, 러일전쟁, 제1차 세계 대전 등 굵직굵직한 전쟁들에서는 연승한지라 이러한 인식이 생겼다. 한편 윈스턴 처칠은 동일한 소식을 듣고서도 "3천년 동안 한 번도 진 적이 없다고? 그렇다면 이번엔 우리가 이길 때가 한 번 되었군!"이라고 낙관적으로 말했다. 사실 처칠은 이전부터 어떻게 해서든 미국이 세계 대전에 참전하게 만들려고 기를 쓰고 있었다. 단, 처칠은 미국이 혹시나 대일전 수행에 집중하고 유럽 전선을 소홀히하지 않을까 우려해 미국으로 가서 루즈벨트로부터 유럽 전선이 선결 과제라는 확약을 받는다. 이를 'Europe First', 혹은 'Germany First'라 부른다. 실제 미 행정부는 전쟁 내내 유럽전선에 훨씬 더 많은 인력과 물자를 투입했으며, 대일전선 장성들은 정부가 너무 대독전선에만 힘을 쏟는다고 푸념을 늘어놓기도 했다.[67] 이런 이유로 진주만 공습 이전까지는 아무리 미국의 선박이라도 봐주지 말고 닥치고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을 한 카를 되니츠를 오히려 히틀러가 반대할 정도였었다.[68] 심지어 중국군이 슈탈헬름까지 착용한 사진까지 있다. 후일 중국군이 한국광복군을 원조하면서, 광복군이 독일군의 장비인 Kar98k 막대형 수류탄을 들고 나오는 해프닝까지 벌어졌다.[69] 사실 이런 지정학적 사항은 독일과 일본에 둘러싸인 상태였던 소련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연합국은 북대서양 서부와 남대서양 전체, 그리고 서인도양의 수상함 세력에서 완벽한 우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북미의 북서대서양에서 출발한 수송선이 남동대서양으로 쭉 내려와서 남아프리카 희망봉을 지나 서인도양 쪽의 이란에 하역하여 지상으로 옮기는 어마어마한 여정의 운송로를 실행이라도 할 수 있었고, 또한 미국과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하던 시기에도 소련 측 배는 태평양을 통해 미국발 비전투 물품을 운반할 수 있었기에 사정이 훨씬 나았다. 하지만 일본 해군은 가장 잘 나가던 시절에도 동인도양의 제해권을 확보하는데 그쳤다. 물론 그 정도라도 영국은 똥줄이 타들어갔지만 말이다. 정확히는 양쪽 다 더 싸울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에 가깝기는 하다. 일본은 다시 태평양 쪽으로 공격하려고 하고 있었고, 영국도 유럽 전선이 급했다.[70] 믿기 힘들지만, 일본도 군함 건조 기술을 독일에 전수해주기도 했다. 바로 그 유명한 그라프 체펠린. 그런데 하필이면 원 모델이 아카기라...[71] 진주만 공습 이전 미국의 참전론자들은 독일을 상대로 전쟁을 벌일 것을 주장했다.[72] 물론 히틀러가 전쟁을 선포 안 했어도 미국의 참전은 진주만 공습으로 기정사실이 되었다. 다만 그 시기가 문제였을 뿐.[73] 전시 진급과는 약간 다르다. 애당초 태평양 함대 사령관은 미 해군에서도 대장만이 보임 가능한 직책이기 때문에 임시 진급한 것.[74] 전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기 전까지 미군은 대부분 전시계급을 부여하고 잘하면 유지 못하면 원래 계급으로 복귀시켰으며 1차 세계대전에서도 마찬가지였다.[75] 사실 이런 경우에서 정확한 판단과 착오는 얇디얇은 종이 한 장 차이다. 훗날의 일이지만 냉전우발적 핵전쟁이 벌어질 뻔한 상황에서 지극히 단순한 보고 하나로 지구를 구한 사나이 스타니슬라프 페트로프 같은 경우도 있다.[76] 당시에 명예 훈장을 서훈해야 한다는 논란이 상당히 크게 벌어졌다. 프랭크 녹스 해군 장관은 밀러의 명예 훈장 서훈에 반대하여 많은 비난을 받았다. 자세한 것은 도리스 밀러 문서 참조. 아이러니한 것은 녹스의 이름을 딴 녹스급 호위함 FF-1091에 밀러의 이름이 붙었다는 것.[77] 시신도 찾지 못하여 일단 전투 중 실종 처리하였다가 나중에 전사 처리하였다.[78] 화재가 진압되고 난 뒤 구호반이 함교에 진입했을 때 유일하게 수습한 건 키드 제독의 함교에 눌러붙은 해사 임관 반지와 정복 단추가 전부였다고 한다. 그나마 키드 제독의 가방을 선내에서 발견해서 유족들에게 전달되었다.[79] 시신은 1943년 전함 오클라호마가 인양되었을 때 선내에서 수습되었지만, 시신의 신원을 확인할 수 없어서 호놀룰루에 위치한 국립 태평양 기념 묘지에 무명인으로 안장되어 있었다가, 2015년에 시신 신원 확인 작업을 위해 다른 무명인과 함께 무덤이 발굴되었고 이후에 신원이 확인되었다. 신원 확인 후인 2021년에 고향인 미시간 주 샬럿에 매장되었다.[80] 피터 토미치는 원래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령 류부스키(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류부스키) 출신이였지만, 1913년에 미국으로 홀로 이민했었고 제1차 세계 대전에 미 육군으로 참전했다가 1919년에 전역 후 미 해군으로 재입대 했다.[81] 영화 도라도라도라에서 그의 활약상을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82] 함정 피해는 미군이 컸지만 항공력의 피해는 일본군이 더욱 컸고, 이후 일본 항공모함 부대는 필리핀 해 해전때까지 재건에만 매달려야 했다.[83] 연공서열만 아니었으면 나구모보다 먼저 항공모함 기동부대에 앉았어야 할 사람이 바로 레이테 만 해전에서 윌리엄 홀시 제독을 항공모함 즈이카쿠로 낚은 오자와 지사부로 제독이다.[84] 아카기의 비행대장. 항공모함에서 지휘하는 비행단장은 중좌, 직접 비행하며 지휘하는 비행대장은 소좌이다. 후치다는 소좌 계급으로 항모 아카기의 비행대장이였다. 그러나 기존의 함장/비행단장이 비행대를 지휘하던 방식 대신, 공중에서 항모 4척의 비행대 전체를 통합지휘할 필요성 때문에 후치다가 실질적으로 비행대를 총 지휘하였고, 공습 직전에는 중좌로 승진하였다.[85] 후치다는 회고록 초안에 '전 진주만 공중 공격대 총지휘관, 현 기독교 평신도 전도사'라고 직함을 썼는데, 출판사 측에서 '공중'이라는 단어를 빼놓아 "진주만 공격 총대장은 나구모 주이치인데? 얘는 누구?"라는 의구심을 들게 만들었다. 출판사 측의 네이밍 마케팅? 책에는 다른 중요한 순간에는 하느님이 직접 자신에게 나아갈 바를 귀뜀해주어 난관을 해쳐나갔다고 했는데, 유독 진주만 공습에만은 이러한 하느님의 도움이 없었다고 한다.[86] 그 와중에 프랑스는 강대국임에도 불구하고 저울에 올라가지도 못하고 꼴까닥한 상태로 있는데, 이유는 진주만 공습이 터지기도 전에 나치 독일에게 프랑스가 겨우 6주 만에 항복해버리고 이후 곧바로 나라가 통째로 넘어가버려서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한달만에 항복한 폴란드와 1달도 못버틴 벨기에, 네덜란드, 하루만에 백기를 올린 룩셈베르크, 간신히 한달을 넘긴 노르웨이나 이탈리아군한텐 잘 싸우다가 독일군이 오자 바로 박살난 그리스는 올라가 있는게 코미디[87] 선제공격 후 선전포고는 국제법 위반이다.[88] 상술한 것처럼 당시 미국은 항모보다는 전함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전함이 이 공습에서 대부분 전투 불능 상태에 빠졌고, 그나마 주력함으로 쓸 수 있는 군함들이라곤 항모들 뿐이였기에 어쩔 수 없이 이를 중심으로 운용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본의 아니게 항모의 진가가 드러났으니 오히려 전화위복인 상황이 나왔다고도 할 수 있다.[89] 다만 이 부분도 미국이 마음 먹고 해결하려고 들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게 함정. 당장 서부전선에서도 장갑차조차 굴릴 기름이 없어져서 쩔쩔대던 독일군 앞에서 구덩이에 석유를 때려붓고 불을 붙여 손을 녹이는 미친 짓을 하는 곳이 당시 미군의 현주소였다.[90] '전부'는 아니다. 소련은 만에 하나 일본군이 공격해서 양면전쟁이 벌어지면 골치아프다는 것을 잘 알았고, 이 때문에 모스크바 공방전 때는 물론이고 독소전쟁 내내 수십 개 사단의 병력을 극동 전선에 상시 배치했다.[91] 영국(본국)과 소련이라는 막강한 동맹의 존재에도 독일을 때려잡는 게 쉬운 일은 아니라 투입된 물자와 병력, 피해가 훨씬 많았다. 영국과 소련에 제공한 랜드리스까지 감안하면 양 전선에 투입된 물자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92] 이를 유럽 우선 원칙(Europe First) 혹은 독일 우선 원칙(Germany First)이라 부른다. 이는 미국과 영국은 독일과 일본 공동의 적을 두고 양 전선에서 협력하나 진주만 공습을 일으킨 장본인이 일본임을 감안해도 더 위협적인 적은 독일이라는 사실을 항상 주지하며 더 많은 인력과 물자를 대독전선에 투입하겠다는 원칙이다. 실제 처칠의 약속 이전에도 미국이 바보가 아닌 이상 추축국의 리더격인 독일이 더 위협적이라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으므로 진주만 공습과 미국의 대일 선전포고 직후 아직 유럽전선이 개전하지 않은 상황에도 미국 신문의 사설들은 일본 뿐 아니라 독일에 대해 강도 높은 비난을 했다.[93] 당시 미 육군의 마셜 장군은 1943년에 프랑스에 상륙해서 1944년에 독일을 항복시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94] 이 때문에 윈스턴 처칠이 유보트에 공격당하는 영국 말아먹는다고 미 해군 제독 어니스트 킹을 비난하기도 했다. 사실 이 부분에 한해서는 영국도 할 말은 있다. 영국이 안 막아주면 당장 크릭스마리네가 미국 동해안에까지 출몰하게 된다. 실제로도 일부 유보트들이 미국 동해안까지 접근한 적도 있었다.[95] 물론 구형 구축함이나 호위항모, 수송선 등을 영국에게 제공하긴했으니 완전히 100%는 아니다.[96] 원래 역사와 달리 경선에서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낙선되어서 케네디가 대신 당선되었다. 그는 심각한 고립주의 정책에 대공황을 개선하려는 전면적인 정책은 추진하지 않아 미국 패전의 단초를 제공했다.[97] Chip Soon Kim, 66. 홈페이지나 매체에 따라서는 Soon Chip Kim이나 Kim Soon Chip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만약 이 사망자가 한국인이 맞다면 김순집으로 추정된다.[98] 자국에서는 미국과 영국에 대한 선전포고를 사전에 발표했지만, 선전포고문을 영국 측에 전달은 하지 않았다.[99] 이 조치가 취해졌던 시대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던 전시에 벌어진 극단적 제재였으며, 미국 본인들도 이게 너무 극단적이었다는 걸 깨달은 뒤에는 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100] 애초에 1905년 러일전쟁 와중에 포츠머스 회담 소식이 알려지자 일본인들은 러시아로부터 연해주와 캄차카 반도 및 30억 엔의 배상금을 받기 전까지는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며 히비야 방화 사건을 일으킬 만큼 제국주의의 열망에 불타 있었다.[101] 물론 모든 일본인들이 다 그러는 것은 아니고 일본 내에서도 일본 제국이 미국을 침공했다는 것 말고 미국인들이 당연한 일상을 빼앗기는 충격과 공포에 초점을 맞추라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102] 하루만에 일본 항공모함 2척에 폭탄을 명중시켜 인류 역사상 최고의 공격 파일럿 중 하나가 된 인물.[103] 특히 토크멘터리 전쟁사 진주만 공습 편에서 이를 부정적으로 다루었다.[104]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이 막대한 피해를 입자 전세계가 미국을 안타까워 했지만 유일하게 처칠만이 미국이 참전하게 된 것을 기뻐하였고, 그의 예상은 정확했다.[105] 홀로 독일의 공세를 견뎌야 했던 영국은 미국의 참전을 간절히 원했지만, 미국인들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난지 얼마 안됐는데 또 대전을 일으킨 유럽에 질려 있었으며 당시 미국인들은 대공황의 원인이 쓸데없이 유럽의 전쟁에 끼어들었기 때문이라 생각했었다. 따라서 유럽의 일은 유럽이 알아서 하라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미국의 개입을 간절히 원했던 처칠은 연애편지 급으로 절절한 서신을 루즈벨트에게 보냈으나 루즈벨트는 각료들에게 편지를 보여주며 "이거 한번 보세요 처칠이 이런 웃기는 편지를 다 보냈습니다." 같은 반응이었다(역전다방에서 방영된 이야기). 그런데 일본이 진주만을 선빵 때려주고 독일이 일본을 위해 굳이 안해도 되는 선전포고를 알아서 해 주니 처칠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쾌재를 부를 수밖에 없는 지경이다.[106] 정작 처칠도 역사는 당시 250년도 안 됐지만 외세에 의해 멸망해 본 적 없는 나라를 동맹으로 두게 되었다.[107] J. Bryan (1947). Admiral Halsey's Story. Whittlesey House. pp. 75–76. ISBN 978-1-4325-669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