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letter-spacing: -0.9px; word-break: keep-all" {{{#000,#999 | <colbgcolor=#536349> 연표 | 사건 |
1936년 | 3월 라인란트 재무장 | 7월 스페인 내전 발발 | 12월 방공 협정 | |
1937년 | 7월 중일전쟁 발발(루거우차오 사건) · 제2차 국공합작 | 8월 상하이 전투 | 12월 난징 전투(난징 대학살) · 파나이 호 사건 | |
1938년 | 3월 오스트리아 병합 | 6월 1938년 황허 홍수 | 7월 하산 호 전투 | 9월 뮌헨 협정 | |
1939년 | 4월 스페인 내전 종결 | 5월 할힌골 전투 | 8월 독소 불가침조약 | 9월 폴란드 침공(제2차 세계 대전 발발) · 가짜 전쟁 | 11월 겨울전쟁 | |
1940년 | 4월 노르웨이 침공 | 5월 프랑스 침공 · 됭케르크 철수작전 | 7월 영국 본토 항공전 | 9월 삼국 동맹 조약 | 10월 그리스 침공 | |
1941년 | 5월 비스마르크 추격전 | 6월 바르바로사 작전(독소전쟁 발발) · 계속전쟁 | 9월 레닌그라드 공방전 | 10월 모스크바 공방전 | 12월 진주만 공습(태평양 전쟁 발발) · 말레이 해전 · 남방작전 | |
1942년 | 4월 둘리틀 특공대 | 6월 청색 작전 · 미드웨이 해전 | 7월 엘 알라메인 전투 | 8월 스탈린그라드 전투 · 과달카날 전역 | 11월 과달카날 해전 · 횃불 작전 · 노르웨이 중수 사건 | |
1943년 | 1월 카사블랑카 회담 | 2월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 | 4월 바르샤바 게토 봉기 | 7월 쿠르스크 전투 ·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 9월 이탈리아 왕국의 항복(이탈리아 내전 발발) | 11월 카이로 회담 · 테헤란 회담 | |
1944년 | 4월 대륙타통작전 | 6월 바그라티온 작전 · 노르망디 상륙 작전 · 필리핀해 해전 · 사이판 전투 | 7월 브레턴우즈 회의 ·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 8월 바르샤바 봉기 | 9월 마켓 가든 작전 | 10월 레이테 만 해전 | 12월 벌지 전투 | |
1945년 | 2월 얄타 회담 · 드레스덴 폭격 · 이오지마 전투 | 3월 도쿄 대공습 · 연합군의 독일 본토 침공 | 4월 베를린 공방전 · 오키나와 전투 | 5월 나치 독일의 항복 | 7월 포츠담 회담 | 8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 만주 전략 공세 작전 · 일본 제국의 항복 | 9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 |
※ 매년 전황·추세 등 상세한 내용은 연표 해당 연도 참고 | }}}}}}}}}}}} |
<colbgcolor=#536349> 베를린 공방전 Берли́нская стратегическая наступательная операция[1] Schlacht um Berlin[2] Battle of Berlin | ||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소전쟁 일부 | ||
라이히스탁에 소련 국기를 꽂는 소련 육군 장병 | ||
<colcolor=#FFF> 날짜 | 1945년 4월 16일 ~ 5월 2일 | |
장소 |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 |
교전국 | 소련 폴란드 인민군 | [[나치 독일| ]][[틀:국기| ]][[틀:국기| ]] |
지휘관 | ||
● 제1벨로루시전선군 - 전선군 사령관 게오르기 주코프 - 제8근위군 사령관 바실리 추이코프 ● 제1우크라이나전선군 - 전선군 사령관 이반 코네프 ● 제2벨로루시전선군 - 전선군 사령관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 - 나치 독일 총통 아돌프 히틀러† - 나치 독일 총리 겸 베를린 방위총감 요제프 괴벨스† - 나치당 당수부장 마르틴 보어만† - 국방군최고사령부 총장 빌헬름 카이텔 - 국방군최고사령부 작전부장 알프레드 요들 - 육군참모총장 한스 크렙스† - 국방군 총통 수석보좌관 빌헬름 부르크도르프† - 친위대 국가지도자 부관 헤르만 페겔라인X - 무장친위대 위생총감 겸 총통 주치의 에른스트 로베르트 그라비츠† - 게슈타포 수장 하인리히 뮐러실종 ● 비스툴라 집단군 - 집단군 사령관 고트하르트 하인리치 - 집단군 사령관(명목) - 집단군 사령관(실질) 쿠르트 폰 티펠스키르히[4] ● 중부 집단군 - 집단군 사령관 페르디난트 쇠르너 ● 베를린 방어군 - 방어군사령관 헬무트 라이만 - 방어군사령관 헬무트 바이틀링 ● 슈타이너 분견군 - 분견군 사령관 펠릭스 슈타이너 - 9군 사령관 테오도어 부세 ● 12군 - 12군 사령관 발터 벵크 ● 티어가르텐 방어군 - 티어가르텐 방어군 사령관 빌헬름 몽케 | |
결과 | ||
소련군의 승리 | ||
영향 | ||
나치 독일의 멸망 유럽 전선 종결[5] 연합국 4개국[6]의 독일 분할 | ||
전력 | 소련군 250만 명 - 폴란드 인민군 155,900 ~ 200,000명 - 기갑차량 6,250대 - 항공기 7,575기 - 야포 41,600문 | 독일군 76만 명 - 기갑차량 1,519대[7] - 항공기 2,224기 - 야포 9,303문 - 준군사조직[8] 다수 |
피해규모 | 소련군 - 총 사상자 361,367명 - 전사 및 실종 81,116명 - 부상 280,251명 - 전차 1,997대 손실 - 야포 2,108문 손실 - 항공기 917기 격추 - 폴란드 인민군 - 2,800명 전사 | 독일군 - 92,000 ~ 100,000 명 전사 - 부상 220,000 명 - 포로 480,000 명 - 민간인 22,000 명 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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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를린 공방전의 1분 전개[9] |
파시스트의 소굴, 앞으로 50km
-소련군 전차의 낙서
-소련군 전차의 낙서
제2차 세계 대전의 막바지였던 1945년 5월 소련군이 나치 독일의 수도 베를린을 함락시킨 전투이다. 독일 총통이었던 아돌프 히틀러는 베를린 함락이 임박하자 자살했고 히틀러에 의해 후임 독일 대통령[10]에 임명된 해군 원수 카를 되니츠 제독을 수반으로 하는 플렌스부르크 정부는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했다. 알프레드 요들 상급대장이 소련을 배제하고 항복 문서에 서명하자 소련의 이의 제기로 빌헬름 카이텔 육군 원수가 베를린에서 소련을 포함해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 앞에서 항복 서명을 했다.[11]
2. 배경
1944년 여름에 펼쳐진 소련군의 대규모 공세인 바그라티온 작전의 결과로 동부전선 독일군의 주력인 중부집단군이 완전히 붕괴했고, 이에 따라 독일군은 벨로루시에서 철퇴하여 비스와 강을 경계로 소련군과 대치하게 되었다. 그리고 곧바로 벌어진 소련군의 남부 공세 때문에 독일군은 우크라이나에서도 물러났고, 이때 독소전쟁 초기부터 독일군의 동맹국이었던 루마니아와 핀란드는 소련과 강화를 맺고 소련군 측으로 돌아서서 독일군을 공격했다(라플란드 전쟁). 이러한 동부전선의 붕괴와 함께 설상가상으로 서부전선에서는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하여 순식간에 프랑스를 해방시키고, 독일 본토로 접근했다.소련군은 1944년 가을을 끝으로 공세를 중지하고 재편성에 들어갔다. 이는 모스크바 전투 이후의 반격 작전과 제3차 하리코프 공방전에서 강박감에 의해 공세종말점을 억지로 넘어가면서까지 진격을 고수하다가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 이끄는 독일군에 역습당해 참패하고 탈환한 영토를 다시 빼앗긴 전훈에 따른 것이었는데 문제는 히틀러가 이것을 가지고 전세를 오판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동부전선에서는 우리 독일군이 소련군을 패퇴시켰으니까 서부전선에서 영•미군만 패퇴시키면 독일은 다시 영토를 되찾을 수 있다.'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보급 문제로 진격이 둔화된 서부의 영미 연합군에 대한 공세작전을 계획했다.
이것은 상당히 도박적인 작전이었는데 당시 기갑 웨이브로 무자비한 파상 공세를 펴던 소련군에 맞서고 있던 동부전선의 정예 기갑 부대를 빼내어 투입했기 때문에, 당시 동부전선의 총책임자였던 총참모장 하인츠 구데리안은 히틀러에게 항의했다. 심지어 아르덴 대공세가 실시되기 전에 나치 독일의 군수장관이었던 알베르트 슈페어마저도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당연히 동부전선에 전력을 집중할 것이다."
라고 말할 정도였다. 슈페어는 군사학 교육을 받지 않은 민간인이었지만 동부전선은 중요했는데 히틀러의 전략은 동부전선의 방어를 포기하고, 서부전선에 올인한 셈이었으며 이게 성공했다면 제3제국의 수명이 조금은 더 연장될 수 있었겠지만 초반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제공권도 없이 보급을 노획으로 해결한다는 말도 안 되는 전략을 가지고 움직인 독일군은 참패했고, 공세가 실패한 서부전선 뿐만 아니라 이미 붕괴된 동부전선에 더욱 더 거대한 전력 공백을 초래했다.한편 독일군의 서부 공세에 당황한 서방 연합국은 압력을 덜기 위해 소련군에게 동부전선에서 공세를 개시해 줄 것을 요청했고 소련군의 위력을 과시하고 싶었던 이오시프 스탈린은 흔쾌히 이에 응해 공세를 개시했다. 그러는 한편 전쟁 종결의 거대한 상징이 될 베를린 점령의 영광을 소련에 넘겨줄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전쟁 기간 동안 서방 연합군이 입은 인명피해도 적진 않았지만 소련군 및 소련인들의 어마어마한 피해에 비하면 경미한 수준이었고, 서방 연합군의 지휘관들은 전후 자신들의 입지를 위해 더 이상의 많은 희생자를 내고 싶지 않아했기 때문에 이에 동의했다.[12] 이러한 양측의 이해에 따라 베를린 공략은 소련군의 몫이 되었다. 독일 서부를 순조롭게 진격하던 서방 연합군은 베를린에서 약간 떨어진 엘베 강 인근에서 진격을 멈추었다. 이것이 유럽 전선에서 서방 연합군의 마지막 활동이었다.
이후 젤로 고지 전투 직전까지의 상황은 비스와-오데르 대공세 문서 참조.
3. 전투
1945년 4월 16일부터 25일까지 포위되는 베를린 일대의 전황. 청색이 독일 국방군, 적색이 소련군이다. 그리고 서남쪽의 보라색은 미군, 동북쪽의 주황색은 폴란드 인민군이다.[13] X가 5개 쳐진 가장 큰 사각형은 집단군이며[14] 그 사이 그어진 선은 4월 16일자 전투지경선이다. X가 4개 쳐진 사각형은 군(야전군), 3개는 군단이다. 한편 OKW는 국방군최고사령부를, OKH는 육군최고사령부를 뜻하며 Armeegruppe는 독일식 군집단을 의미한다. 사각형 측면에 표기된 SS는 독일 친위대임을, Pz.는 기갑 제대임을, mech.는 차량화소총병 제대임을, Kav.는 기병 제대임을, Geb.는 산악부대임을, 그리고 Gd.는 소련 근위군임을 뜻하며 Stoß라 쓰인 제대는 소련 충격군을[15] 의미한다. 9일 동안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의 제1벨로루시전선군(1. Weißr.)이 오데르 강을 도하하여 프랑크푸르트 암 오데르와 퀴스트린(Küstrin) 일대를 지나 동북쪽에서부터 서진하고 있으며, 이반 코네프 원수의 제1우크라이나전선군(1. Ukr.)이 동남쪽에서부터 급속하게 북진하며 주코프 군과 함께 베를린을 양익으로 포위하고 있다. 지도 서남쪽에서는 코트니 호지스 대장의 미국 제1군이 데사우(Dessau) 일대를 통과하며 동진하다 엘베 강에 면한 토르가우(Torgau)에서 소련 제1우크라이나전선군 소속 제5근위군과 조우하고 있다. 이에 저항하는 독일 바익셀 집단군(HGr. Weichsel)과 중부집단군(HGr. Mitte)은 소련군의 진격을 저지하지 못하고 전투 끝에 결국 돌파당했다. 젤로(Seelow) 고지에서 격파당한 테오도어 부세의 제9군 잔존세력 약 8만 명은 지도 중앙의 슈프레 강 이남 베스코프(Beeskow) 일대에 포위당하고 말았다. 펠릭스 슈타이너 SS대장이 이끄는 슈타이너 군집단은 소련군의 포위망 밖인 베를린 북쪽 오라니엔부르크(Oranienburg) 일대에, 서쪽 브란덴부르크와 데사우 사이 엘베 강 일대에는 발터 벵크 대장의 제12군이 있었으나 그들은 너무나도 거대한 전력 차이로 인해 베를린 구원을 단념했다. 제12군은 엘베 강 방어전에 전념했으며 9군 역시 지도에 표시되지는 않았으나 제1우크라이나전선군 제대들 사이의 틈으로[16] 필사의 탈출을 감행했다. 그들 대부분은 할베(Halbe) 전투에서 코네프와 주코프가 보낸 추격대와 조우하여 수만의 사상자와 포로를 냈으나 결국 2만 5천 가량은 서부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본 지도는 2020년 독일 연방군에서 제작하였다.# |
<rowcolor=white> 1945년 3월 9일, 히틀러유겐트 소속 16살의 빌리 휘브너와 악수하는 국민계몽선전부 장관 파울 요제프 괴벨스 |
1945년 4월 20일, 히틀러 소년단 대원들을 격려하는 아돌프 히틀러 |
3개월 간의 대규모 공세를 성공적으로 끝마친 4월, 스탈린은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게오르기 주코프, 이반 코네프 등 전선군 사령관들을 모스크바로 소집해 베를린 공략에 대해 논의했다. 모든 사령관들이 역사에 길이 남을 베를린 공략을 맡고 싶어 했지만, 스탈린은 특정 사령관에게 베를린 공략을 맡긴다고 하지 않은채
"베를린에 제일 먼저 도착하는 전선군이 베를린 공략을 맡을 것이다."
라고만 이야기했다. 이 때문에 전선군 사령관들은 회의를 마치자마자 자신들의 사령부로 돌아가 부하들을 닦달하며 이 경쟁에서 이길 생각만 했다.베를린 주위에 포진한 소련군은 3개 전선군으로 구성되었고 병력은 약 250만 명, 전차 6,250대, 전술기 7,500대, 각종 야포 40,000문 등 많은 전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에 맞서는 독일군 수비대는 70만 명의 병력과 1,519대의 AFV[18], 2,000여 대의 전투기, 9,000문의 야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모든 분야에서 3:1 ~ 4:1의 전력 차이가 나고 있었고, 그나마 저 독일군 병력 수치도 전부 멀쩡한 병력은 아니고 움직일 수 있는 부상자, 병자, 지상 전투에 숙달이 덜 된 독일 해군과 독일 공군에서 차출한 병력, 그보다도 못한 전투 경험이 부족하거나 전무한 국민돌격대와 히틀러 유겐트의 소년병까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독일군은 소련군에 수적으로뿐만 아니라 질적에서도 확실한 열세를 보이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서방 연합군이 담당한 서부전선에서도 연합군이 베를린 방면으로 접근하고 있었기 때문에 안 그래도 적은 병력을 서부전선으로 돌렸다가 동부전선으로 복귀시키는 힘든 작업을 수행해야 했다.
한편 독일군 사령부는 서부전선에 마지막으로 남은 병력조차 베를린으로 데려오라고 시도했다. 대표적으로 아돌프 히틀러는 서부전선의 엘베 강 방면을 담당하고 있었던 발터 벵크 장군과 그가 지휘하던 제12군[19]에게 베를린을 구원하라고 명령했다. 벵크와 12군은 어찌어찌 포츠담까지는 진격해서 소련군을 격파했지만, 서부에서 미군의 뒷치기를 우려한 벵크가 12군을 다시 서부전선으로 보내버리면서 12군의 베를린 구원은 없던 일이 되었다. 이 사실을 들은 히틀러는 분노하면서 벵크에게 베를린 구원을 지속적으로 명령했으나, 벵크는
더 이상 한 개인의 운명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라고 말한 뒤 그대로 씹었다. 그리고 후술하겠지만, 이후 12군의 병력들은 제9군과 연합해서 독일 민간인들과 부상병들을 탈출시키는 엘베 강 방어 작전에 투입되었다.<rowcolor=white> 베를린 전투에서 사로잡힌 독일군 포로들. |
<rowcolor=white> 참호에서 판처파우스트로 무장한 국민돌격대 대원들. |
3.1. 젤로[25] 고지 전투
<rowcolor=white> 젤로 고지를 돌파하고 베를린으로 진격하는 소련 육군의 T-34-85 중형전차. |
북쪽의 로코솝스키의 제2벨로루시전선군은 오데르 강을 건너 25일 제틴을 탈취하고, 베를린의 동북쪽으로 진출했다. 남쪽의 코네프 군은 독일의 쇠르너 군을 쉽게 돌파하고, 4월 25일 동진하던 미합중국 육군 부대와 엘베 강 연안의 레크비츠(Leckwitz)에서 조우했다.[26][27] 이로서 독일군은 남북으로 분단되었고, 로코솝스키의 제2벨로루시전선군도 영국 육군과 엘베 강 연안에서 만났다.
<rowcolor=white> 다리를 건너는 미군을 도와주는 소련군. |
<rowcolor=white> 엘베 강에서의 미군과 소련군. 서로 방탄모와 우샨카를 바꿔 쓰며 장난을 치고 있다.[28] |
"이런 녀석들이 어떻게 그 독일군을 이겨 온 거지?"
라는 의문을 품었다고 한다. 반공 사상이 강했던 몇몇 미군들은 "저 정도 수준의 소련군이라면 나중에 우리가 소련과 붙어도 쉽게 이길 수 있겠다."
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또한 동양계 장병들이 다수 소속된 소련군 부대를 보고, 소련군들은 훈족의 후예라고 생각한 미 육군 장교도 있었을 정도로 미국인들은 소련을 얕잡아보았다. 물론 몇 년 후에 미그 앨리에서 예상 외의 대가를 치르고 나름 대비에 들어갔지만, 미국은 실제로 1957년 소련이 스푸트니크를 발사한 뒤에야 소련이 절대로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것을 깨닫고 본격적인 대응에 들어갔다.이와 반대로 소련군들은 미군의 부유함에 크게 놀라면서도 미군의 행동이나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대표적으로 방탄모를 들 수 있는데, 미군은 모두 M1 철모를 썼던 반면 소련군들은 상당수가 철모 대신 개리슨모나 정모를 쓰고 있었다. 소련이 밀리던 독소전쟁 초반에는 많은 장비들을 잃고 공장들을 옮기느라 철모가 많이 부족했지만, 그 후 소련의 생산력이 나아지면서 소련군 또한 개개인들에게도 방탄모가 부족하지 않게 지급되었다. 그러나 그동안 이미 방탄모 없이 다니는데 익숙해진 소련군 장병들은 '어차피 방탄모 써도 몸통에 총 맞으면 끝장이고 괜히 무겁기만 하다.'[29]라는 핑계를 들며 방탄모 쓰는 것을 선호하지 않았는데, 전원이 철모를 쓰고 있는 미군들의 모습이 그들에겐 이상해 보였던 것이다. 미군의 경우 철모의 보급도 충분히 완료된 데다가, 전장에서 납득할 만한 사유[30] 없이 방탄모를 쓰지 않을 경우 꽤 거액의 벌금을 급여에서 공제했기 때문에 방탄모 착용을 그 어느 국가보다 충실히 했다. 또한 미군의 총검도 소련군들의 주의를 끌었는데, 그저 찌르기밖에 할 수 없는 자신들의 꼬챙이 모양의 스파이크형 총검[31] 대비 제대로 단검의 형상을 하고 있어 찌르기 외에도 베기에 적합하고, 초근접전에서 총검만 빼들고 사용하거나 각종 도구로 사용할 수 있는 미군 총검의 기능성과 고급지고 튼튼한 품질에 모두 감탄했지만 미군들이 그 좋은 총검을 근접전보다는 통조림 따는 데 더 많이 쓴다고 얘기하는 걸 듣고는 실망했다고 한다.
<rowcolor=white> 베를린으로 향하는 소련군. |
하인리치는 소련군이 오데르 강변의 아우토반을 타고 베를린으로 진격할 것을 정확하게 예측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공병 부대를 투입해 오데르 강 연안의 저수지를 역류시켜 진격로를 습지로 만들어 놓았고, 이 뒤로 참호와 벙커, 대전차호로 이루어진 세 겹의 방어선을 만들어 놓은 채 소련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전략적으로 조성된 인공적인 습지뿐만 아니라 봄철의 해빙까지 겹쳐 도로가 진창이 되는 바람에 소련군의 진격은 한층 어려워졌다. 하지만 주코프는 누구보다 베를린을 먼저 공략해야 한다는 조급함에 사로잡혀 이에 대한 대비를 하지 않았고, 늘 해 왔던 것처럼 그저 압도적인 병력을 이용한 진격으로 이를 돌파하려고 했다.
<rowcolor=white> 전황이 악화되자 굳은 표정의 게오르기 주코프. 주변의 다른 장교들도 표정이 굳어 있다. |
"동무, 왜 이렇게 느리오? 코네프 동무가 대신 베를린으로 가도 되겠소?"
라며 닦달했다. 주코프는 이 말을 들고 더욱 조급해져서[33]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예비 병력까지 투입하는 오판을 저질렀으며,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회를 하거나 조금만 기다렸다가 먼저 적진을 돌파한 다른 전선군의 도움을 받았으면 쉽게 공략할 수 있었던 곳에서 결국 엄청난 사상자를 냈다. 이 때문에 젤로 고지 전투에서 독일군의 사망자가 10,000여 명에 불과했던 반면, 소련군은 적어도 30,000명의 사망자를 냈다고 알려졌다. 병력 차이가 10:1인 압도적인 우세 상황속에서 이렇게 적군보다 더 큰 피해를 낸 것은 명백한 지휘 부실이었으며 주코프의 흑역사로 알려져 있다. 이 전투는 사실상 동부전선에서 독일군이 거둔 마지막 승리로 평가된다.소련군의 사망자가 3만명이라고 알려져있었으나, 실제 소련군 각 부대의 보존기록을 바탕으로 더 정확한 연구가 2010년 Isaev에 의해 이루어졌다. 해당 연구에 따르면 소련군은 당시 6천명의 사망자와 2만명의 부상자가 생겼다. 기존 사망자 3만은 단순 추정치 였으며, 새로운 연구는 내부 기초자료 연구로 이루어져 신뢰도 높아 현재 학계의 의견은 바뀐 상태이다.
그러나 병력이 워낙 열세인 데다가 보급과 증원도 거의 없었던 독일군은 더 이상 소련군을 저지하지 못했고, 소련군은 3일 간의 맹공과 큰 희생 끝에 결국 젤로 고지를 가까스로 돌파하는데 성공하며, 베를린 공략의 주공은 주코프가 맡았다. 참고로 경쟁에서 패배한 코네프는 끝내 베를린에 가지 못하고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에서 멈춰야 했고, 로코솝스키는 베를린 대신 독일 북부 지역의 공략을 맡았다.
3.2. 포위되는 베를린
4월 26일부터 5월 2일 사이 소련군의 포위와 진격을 나타낸 전황 지도. 서북쪽부터 시계방향으로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가 이끄는 제1벨로루시전선군 소속 보이치에흐 베우지우크 소장의 폴란드 제1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 보병사단,[34] 세묜 보그다노프 상장의 제2근위전차군, 바실리 쿠즈네초프 상장의 제3충격군, 동쪽에서부터 니콜라이 베르사린 상장의 제5충격군이 도시로 진입하고 있으며 그 아래 미하일 카투코프 상장의 제1근위전차군, 바실리 추이코프 상장의 제8근위군이 동남부에서부터 방어선을 돌파해 들어오고 있다. 남부에서는 이반 코네프 원수의 제1우크라이나전선군 소속 알렉산드르 루친스키 중장의 제28군, 그리고 파벨 리발코 상장의 제3근위전차군이 진격하고 있다. 도시를 방어하는 독일 군사집단은 매우 빈약했다. A구역과 B구역에 에리히 베렌펭어 소장의 국민돌격대가, 동남부 C구역에 구스타프 크루켄베르크 SS소장의 무장친위대 제11SS의용기갑척탄병사단이, 남부 D구역에 베르너 무메르트 소장의 뮌셰베르크 기갑사단이, 서남부 E구역에 한스 라우흐 공군소장의 제18기갑척탄병사단이, 서북부 F구역에 아우구스트 하이스마이어 SS대장의 히틀러유겐트와 국민돌격대가, 그리고 G구역과 H구역에 해리 헤르만 대령의 제9공수사단이 포진했으며 중앙의 핵심 지역인 Z구역에는 빌헬름 몽케 소장의 무장친위대가 방어를 맡았다. 본 지도는 독일 연방군에서 제작하였다.# |
<rowcolor=white> 베를린 근교에서 소련군에게 항복하는 독일군. |
<rowcolor=white> 베를린 시내에서 중심지를 향해 포격을 하는 소련군. |
<rowcolor=white> 베를린 근교에서 포격을 하는 소련군. |
하지만 히틀러는 여전히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했다. 오데르 강변에 있었던 부셰의 9군은 후퇴를 요청했지만 전선을 유지하라는 히틀러의 명령에 의해 결국 고립되었다. 여기에 코네프 방면의 쇠르너가 말로만 히틀러를 안심시키고, 측면에서 소련군에게 성공적인 공격을 했다고 허풍을 친 것도 히틀러의 오판을 도왔다. 한편 엘베 강에서 미군과 대치 중이던 벵크를 베를린으로 불러들이고, 무장친위대 장성인 펠릭스 슈타이너 대장에게 새로운 부대를 창설해 소련군의 진격을 막을 것을 명령했다. 하지만 이 명령은 병력과 물자 모두가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유명무실한 허세에 불과했고, 히틀러는 제대로 보고도 받지 않은 채 이 부대가 이미 편제를 완료했다고 판단한 후 공격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슈타이너에게는 그때까지도 한 줌밖에 안 되던 병력 밖에 없었고, 사방팔방으로 밀려드는 소련군에 맞서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호헨리헨에 있었던 하인리히 힘러는[36] 항복 협상을 위해 자신의 무장친위대 병력 15,000~20,000명을 몰래 빼돌려 놨고, 자신과 친한 슈타이너에게 히틀러와 사령부의 명령을 무시하라고 지시했다.
4월 23일에 열린 작전 회의에서 슈타이너가 공격하지 않았던 걸 알고 히틀러는 욕을 퍼부으면서 직접 헤르만 페겔라인을 파견했다. 참모진들은 머뭇거리다가 결국 슈타이너의 부대가 아직 제대로 편제도 되지 않았고 공격도 당연히 실행되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24일에도 슈타이너가 공격에 나서지 않자 히틀러는
"나는 전쟁에서 졌다!"
고 소리쳤고, 탈출하느니 차라리 자살할 것이라고 말했다.[37]<rowcolor=white> 베를린은 독일에 남아있을 것이다'란 표어와 그것을 비웃듯 지나가는 소련군의 ISU-122 자주포. |
4월 30일 히틀러는 권총 자살했다.
<rowcolor=white> 판처파우스트로 무장한 국민돌격대의 대원들. |
<rowcolor=white> 교수형에 처해진 독일 육군의 시체와 톰슨 기관단총을 들고 죽은 독일군을 보고 있는 미 육군. 베를린 전투 때의 사진은 아니다. |
3.3. 나치 정권의 몰락과 붕괴
<rowcolor=white>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 앞의 독일군 시신. 시체 바로 위와 문 아래쪽이 어색한 것에서 알 수 있듯 소련에서 촬영, 합성한 선전사진이다. |
<rowcolor=white> 제11SS의용기갑척탄병사단 '노르트란트' 소속 Sd.Kfz. 250 장갑차에 끼어 죽어 있는 독일 여성 간호사.[39] |
<rowcolor=white> 나치 독일의 상징인 국가수리 장식을 밟고 올라선 소련군. |
<rowcolor=white> 베를린 시내로 진입하는 소련군의 T-34-76 전차. |
<rowcolor=white> 베를린 시내에서 교전 중인 소련군. |
<rowcolor=white> 강 건너를 주시하는 소련군. |
<rowcolor=white> 포로가 된 독일 국민척탄병.[41] |
<rowcolor=white> 건물에 사격하는 소련군의 SU-76M 경자주포 |
<rowcolor=white> 베를린의 소련군. [44] |
<rowcolor=white> 브란덴부르크 문 앞의 IS-2 중전차 |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한 히틀러는 4월 29일 비서에게 총통 직책을 다시 둘로 쪼개 카를 되니츠에게 독일 대통령 직위를, 파울 요제프 괴벨스에게 독일 총리 직위를 물려주고 페르디난트 쇠르너를 육군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한다는 유서를 작성하도록 했다. 헤르만 괴링은 히틀러에게 총통 자리를 넘겨 달라고 했다가 찍혀서 이미 신임을 잃고 있었고, 하인리히 힘러 역시 총통 몰래 친위대 병력을 빼돌려 스웨덴의 중재로 연합국과 강화협상을 하려던 것이 발각되어 마찬가지로 승계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이어 에바 브라운과 결혼식을 올리고 4월 30일, 마지막 식사를 마친 뒤 에바를 총으로 살해한 후 자살했다. 자살 직후 히틀러와 에바 브라운의 시체는 유언에 따라 측근들에 의해 기름을 부어 화장되었다. 히틀러는 자신의 시체를 철저하게 훼손시키라고 명령했지만 시체에 불을 붙이자마자 총통 관저에 소련군의 포격이 떨어지기 시작하여 측근들은 모두 퓌러붕커로 도망가 버렸다.
<rowcolor=white> 당시 소련군의 진격도.[46] |
<rowcolor=white> 종전 직후 촬영된 동물원 대공포탑.[50] |
베를린이 거의 다 점령된 상태에서도 소련군은 이 요새의 사각을 피해 다녀야 했는데 제국의사당은 그 사각에 고스란히 들어올 뿐더러 사이에 있는 티어가르텐(공원)이 이 상태여서[52]엄폐가 될 리가 없었으므로, 대공포탑이 건재한 이상 제국의사당을 점령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결국 끝내 파괴는 못 하고[53] 4월 30일에 소련군이 사절을 보내 항복시켰으며, 대공포탑이 항복한 바로 다음날 제국의사당이 함락되었다.
깃발 게양 이후에도 제국의사당과 그 주변에 있었던 독일군과 소련군은 밤새도록 치열한 교전을 벌였다. 일례로, 국기 게양 직후 제국의사당 반대편에 있었던 크롤 오페라하우스에서는 잔존 독일군이 티거 2 중전차를 이끌고 반격을 시도, 일시적으로 크롤 오페라하우스를 재점거했다가 퇴각하는 일이 벌어지는 등 양군의 교전은 매우 치열했다. 제국의사당 주변 독일군과의 교전은 국기를 정식으로 게양한 날의 낮이 되어서야 일단락되었다.
그 외에도 몇 가지 일화가 더 있는데, 실은 이오지마 전투의 성조기처럼 적기를 2번째로 걸고 있는 사진이며 처음 게양했을 때는 전투가 치열하던 한밤중이어서 사진 촬영을 할 수 없었고, 처음 게양된 국기는 제대로 된 국기가 아니라 빨간 식탁보 3개를 이어붙여 급조한 깃발이었다. 전투가 종료되고 며칠 뒤 찍힌 사진은 연출된 사진이라 제대로 된 깃발을 걸고 있고, 아래 보이는 거리도 소탕이 다 된 시점이라 한산해 보인다. 해당 위키피디아 항목 사진 촬영에 동원된 두 사람은 모두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수여받았으며, 칸타리야는 이후 압하지야 사회주의 공화국의 최고 회의 의원을 지내다가 소련 해체 이후 그루지야-압하지야 분쟁 중 고향에서 쫓겨나 트빌리시로, 다시 모스크바로 이주하던 중 1993년 12월 27일에 사망했다. 예고로프는 유제품 통조림 공장에서 일하다가 1975년 6월 20일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 사진을 촬영한 칼데이 해군 중위는 전쟁 중 유명한 기록 사진들을 다수 찍었으며,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도 취재했다. 그가 유대인이라 소련 측이 상징적으로 그를 투입한 것일 수도 있으나, 그걸 빼더라도 칼데이 중위가 소련 내에선 실력 좋고 유명한 사진 작가였기에 투입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전후에도 칼데이 중위는 전역한 뒤 언론인 겸 사진 작가로 계속 근무했고, 소련 외부에서도 해당 분야에서 명성을 날렸다.
또한 사진의 국기는 굳이 따지자면 '재현 오류'이다. 실제 소련의 국기에 있는 낫과 망치 위에 있는 별은, 금색 테두리에 붉게 칠해진 형태이어야 하지 저렇게 금색 전체로 칠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프로파간다 사진에서조차 틀리게 묘사할 정도로 소련 내에서도 이 규칙은 그다지 엄격하게 지켜지지 않은 편이다. 자세한 내용은 소련/국기 문서 참조.
제국의사당 구역을 지키던 11 SS의용장갑척탄병사단 노르트란트는 제국의사당을 방어하던 중 전멸했다. 나머지 부대들도 대부분 격렬한 시가전으로 전부 소모되었고, 몇 안 되는 잔존 부대만이 최후의 티거 2 2량으로 탈출을 시도했다. 이 티거 2 2량의 전차장이 각각 티거 2 항목에도 나와있는 SS제 503 중전차대대 소속 카를 쾨르너 SS 기갑원사(SS-Hauptscharführer)와 게오르크 디어스(Georg Diers) SS 기갑하사(SS-Unterscharführer)였다. 이들은 수많은 소련군 기갑차량들을 격파하면서 성공적인 분투를 했으나[55] 도저히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후퇴했다. 이후 쾨르너 원사는 탄약이 바닥난 자신의 티거 2를 자폭시켰고, 디어스 하사의 티거 2는 이동하던 도중 독일군 대전차지뢰를 밟아 기동 불능이 되어 버려졌다고 한다. 이때까지 살아남아 있었던 대다수의 장병들은 사살되거나 소련군에게 붙잡혔고, 극소수의 스칸디나비아 의용군들만이 살아서 엘베 강에 도착할 수 있었다.
<rowcolor=white> 항복한 독일군 장성급 포로, 제일 왼쪽 인물이 헬무트 바이틀링 육군 포병대장이다. |
제국의사당이 소련군에게 점령된 직후, 베를린 방어 사령관이었던 바이틀링 장군이 소련군에 항복했다.
1945년 4월 30일, 총통께서 자살하여 그에게 충성을 다하던 사람들의 곁을 버렸다. 독일 제군은 총통께 충성을 바쳤고, 제한된 탄약 공급에도 불구하고 베를린에서 계속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의 저항은 무의미하다. 즉시 사격을 중단할 것을 명령한다. 매 시간 교전이 계속될 때마다 베를린 시민과 부상자들들의 고통은 늘어갈 것이다. 소련군 최고사령부와의 협정에 따라 지금 즉시 전투를 멈추기를 명한다.
전 베를린 방어 사령관 포병대장, 헬무트 바이틀링.
전 베를린 방어 사령관 포병대장, 헬무트 바이틀링.
이로서 공식적으로 베를린 전투가 끝났다. 5월 2일 낮, 바이틀링 장군은 소련군의 요청에 따라 시내에서 저항을 계속하는 독일군에게 항복을 명령하는 방송을 했다. 폐허가 된 베를린 시내 곳곳에 방송차량이 다니며 바이틀링의 항복 명령을 전달했다. 이 명령을 듣고 항복한 장병들도 더러 있었지만 대개는 항복하지 않고 서부의 미/영 연합군 진영으로 탈출하기 위해 개별적으로 전투를 계속했다. 베를린 시내의 잔존 독일군과의 교전은 첫 항복 조인식이 열리던 5월 8일이 되어서야 마무리되었다.
<rowcolor=white> 제국의사당 점령을 축하하는 제1벨로루시전선군 제3충격군 소속 제79소총병군단 제150 '이드리츠카야' 소총사단 소속 병사들.[56] |
<rowcolor=white> 전투 종료 후 촬영된 독일 국회의사당(라이히스탁) 전경. |
<rowcolor=white> 전투 종료 후 찍힌 독일 국회의사당 내부. 벽마다 소련군이 해 놓은 낙서로 빼곡히 차 있다. |
<rowcolor=white> 독일 국회의사당 함락 장면의 기록화.[57] |
<rowcolor=white> 퓌러붕커를 점령한 소련군. |
<rowcolor=white> 베를린 전투 직후에 촬영된 퓌러붕커 내부. |
협상 결렬 후 추이코프는 한스 크렙스에게 들었던 히틀러의 사망 소식을 스탈린에게 전했다. 괴벨스는 공군 중사로 전선에 나갔다가 포로로 사로잡혀 있었던 양아들 하랄트 크반트를 제외한 자기 자식들을 모두 독살한 뒤 아내와 함께 동반 자살했고, 협상이 실패한 뒤 돌아온 크렙스와 그의 사관학교 동기인 빌헬름 부르크도르프 대장도 마찬가지로 자살을 선택했다.[58] 나머지 잔존 병력과 인사들은 탈출을 시도했지만, 이들도 극소수를 제외하고는[59] 소련군에게 사살당하거나 포로로 잡혔다.
베를린 전투가 종료된 직후, 수많은 피난민과 잔존한 9군 병력들이 베를린으로부터 쏟아져 나와 서방 연합군의 점령지를 향해 필사의 탈출을 시도했다. 엘베 강에 도달한 이들은 다리가 붕괴되어 있었던 관계로 손에 잡히는 것 아무거나를 동원해 도강을 시작했다. 베를린에서 살아남아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소수의 기갑 차량들과, 전술했던 발터 벵크와 그의 지휘하에 서부전선에 주둔하던 12군 전부가 이들의 후미 엄호를 맡았다. 이 방어전은 5량의 티거 2를 주축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들은 엘베 강으로 통하는 길목을 막고, 붉은 해일이 되어 밀려오는 소련군을 상대로 지연전을 펼쳤다. 이들은 몰려오는 소련군을 상대하며 자신들의 목숨을 수많은 피난민의 목숨과 맞바꾸었다.
당시 증언에 따르면 미군은 강을 건너는 독일 민간인들이나 잔존 병력을 공격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서진 다리를 고쳐준다거나 하는 식으로 적극적으로 돕지도 않고 중립적인 태도를 취했다고 한다. 유튜브에 탈출에 성공한 독일군과 피난민이 엘베 강에 도달하여 도강을 대기하는 영상이 몇 개 있는데, 대부분의 미군은 강 반대편에서 지켜보고 일부 미군들이 강을 건널 수 있는 부서진 철교와 인도교의 중간 지점까지 진출하여 강을 건너오는 독일군이 휴대한 무기를 압수하고 비무장 상태로 보내는 모습이 보인다. [60] 참고로 사실 당시 미군의 입장을 생각해 본다면 저게 당연한 행동이긴 했다.
참고로 탈출작전을 지휘한 발터 벵크는 마지막으로 엘베 강을 도하했는데, 강을 절반쯤 건너던 도중 그가 탄 보트가 뒤따라온 소련군의 기관총 사격을 받았고, 벵크 자신은 무사했지만 이로 인해 같은 보트에 탄 장교 몇 명이 중상을 입었다. 철수작전이 얼마나 급박했는지 보여주는 증거이다.
베를린 시내에서 교전이 벌어지던 도중 난데없이 코끼리와 얼룩말 등의 동물들이 시내를 뛰어다녔다는 일화가 있다. 교전 과정에서 베를린 티어가르덴 구역에 있는 동물원 우리가 부서져 우리 안에 있던 동물들이 뛰쳐 나온 것이다.[61] 반대로 전투 전에 동물들이 모두 살처분되었기에 이런 일은 없었다는 주장도 있다.
3.4. 유럽 전선의 종결
<rowcolor=white> 베를린에서 붉은 깃발을 걸고 있는 소련군 병사. |
<rowcolor=white> 나치 독일이 항복했다는 신문을 보고 있는 프랑스계 캐나다 여성.[62] |
<rowcolor=white> 브란덴부르크 문의 반파된 동상에 붉은 깃발을 거는 소련군 병사. |
<rowcolor=white> 제국의사당 앞에서의 소련군. |
<rowcolor=white>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소련 해군 장병들을 촬영중인 미국 육군. |
<rowcolor=white> 소련군의 감시하에 이동 중인 독일군 포로들. |
<rowcolor=white> 5월 9일 항복 문서에 서명하는 빌헬름 카이텔 OKW 사령관. |
<rowcolor=white> 독일의 2번째 항복이 이루어진 방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박물관에 있는 전시물. |
모스크바에서 전해드립니다. 소비에트 정부의 발표를 전해드립니다. 제1 벨라루스 전선군의 사령관인 소련의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가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 사령관인 소련의 이반 코네프 원수의 도움을 받아 치열하게 진행된 시가전 끝에 베를린을 지키던 독일군을 모조리 궤멸시키고 전투를 종료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5월 2일, 독일의 도시이자 수도인 베를린을 완전히 점령했습니다!
-소련 아나운서 유리 레비탄 [63]
-소련 아나운서 유리 레비탄 [63]
소련군은 공식적으로 베를린을 점령했지만 아직도 골목 등 일부 지역에서 항복을 거부하는 패잔병들이 산발적인 전투를 벌이고 있었고, 외곽 지역에선 한 명이라도 더 서방 연합군 점령지로 보내기 위해 저항하는 독일군 잔여 부대와 소련군의 전투가 지속되었다. 이후 독일 정부가 공식적으로 5월 8일에는 서방 연합군에, 9일에는 소련군을 포함한 전체 연합군에 항복하면서 유럽 전선은 종결되었다. 이후 미국, 영국 등 서방 연합국은 5월 8일을, 러시아는 5월 9일을 전승 기념일로 삼고 있다. 2000년대 이후로는 러시아의 5월 9일 전승 기념 행사에 미국, 서유럽 정, 관계 인사들도 초청받아 참석하고 있다.[64]
<rowcolor=white> 전투 종료 후 히틀러 벙커 근처의 부서진 의자에 앉는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65] |
<rowcolor=white>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 모여 있는 소련군과 IS-2. |
<rowcolor=white> 불타는 제국의사당 앞에 망연자실하게 앉아있는 독일군 패잔병. |
이 전투에서 소련군 병사 80,000여 명이 작전 기간 동안 전사했다. 그리고 이들 중 30,000여 명이 베를린 시가전에서 운명을 달리했으며, 그 외 280,000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 중에서도 시가전인 만큼 기갑 전력의 피해가 특히 커서[66] 전투 기간 동안 약 2,000대[67]에 달하는 전차가 파괴되었다.[68] 한편 베를린에서는 소련군이 전투원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 공격을 가했기 때문에 군인들은 물론 민간인의 피해도 심각해 450,000명이 죽거나 다쳤다. 물론 민간인을 놔주지 않은 독일군의 문제가 더 크지만.
<rowcolor=white> 피난을 가다가 소련군에게 접수된 독일 민간인들. |
<rowcolor=white> 함락 직후 베를린의 모습. 승리를 축하하는 소련 해군 장병들과 폐허의 모습이 보인다. |
<rowcolor=white> 전투 이후 뒤따라 베를린에 입성한 영국군의 소식을 알리는 영상. 전투 막바지에 203mm B-4 곡사포와 다양한 야포의 직사 사격으로 토벌전을 펼치는 소련군, 소련의 포고문을 읽고 잔해를 치우는 베를린 시민들, 히틀러가 화장된 구덩이를 살펴보는 연합군 장병들, 폐허 위에서 히틀러[69]와 그 추종자들을 따라하며 노는(...) 영국군 장병들[70] 및 자국 관할 구역에서 퍼레이드를 벌이는 영국군의 모습이 보인다. |
4. 기타
4.1. 소련군의 전쟁범죄
자세한 내용은 연합군에 의한 독일 점령 기간의 강간 문서 참고하십시오.<rowcolor=white> 독일 민간인의 자전거를 구입하려다가 실랑이를 벌이는 소련군 병사. |
우린 점령 지역에서 가끔 마주친 여자들을 가릴 것 없이 무조건 잡아다가 강간했다. 부대원들이 차례로 돌아가면서 윤간했다. 폴란드 여자는 집으로 돌려보내주었지만[72] 독일 여자는 폭행하고 학대했다. 마지막에는 총으로 쏘아 죽였다.
어느 소련 병사의 증언
어느 소련 병사의 증언
당신은 당연히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을 읽었겠지요? 당신은 인간의 정신, 인간의 심리가 얼마나 복잡한 것인가를 알겠죠? 그렇다면, 스탈린그라드에서 베오그라드까지 전우와 가장 소중한 사람들의 주검을 넘어서 쑥대밭이 된 조국의 땅 수천 km를 지나며 싸워온 남자를 상상해 보았습니까? 그런 남자가 어떻게 정상적인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까? 그리고 그런 참상 뒤에 그가 여자하고 재미 좀 보는 것이 뭐 그리 심한 일인가요? 당신은 붉은 군대를 이상적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붉은 군대는 이상적이지 않고, 그럴 수도 없습니다. (중략) 중요한 것은 붉은 군대가 독일과 싸운다는 것입니다.[73]
포화 속에 수천 km를 달린 병사들에게 그런 즐거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당신은 이해하지 못합니까?
이오시프 스탈린,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원 밀로반 질라스가 소련군의 여성 강간에 대해 항의할 때 한 말.[74]
포화 속에 수천 km를 달린 병사들에게 그런 즐거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당신은 이해하지 못합니까?
이오시프 스탈린,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원 밀로반 질라스가 소련군의 여성 강간에 대해 항의할 때 한 말.[74]
소련군이 베를린을 점령한 뒤, 소련에서 독일군이 저지른 참혹한 학살극을 직접 보고 들으며 복수심에 불타는 소련군에 의해 수많은 약탈과 강간이 벌어졌다. 역사가들은 소련군에 강간당한 여성은 최대 2,000,000명, 베를린에서만 100,000명 가량의 독일인 여성이 강간당했고, 10,000명이 그 여파로 사망했다고 추산한다. 고아와 임산부들을 위한 자선단체인 하우스 데흘렘(Haus Dehlem)에서는 갓 출산을 끝낸 여성들과 임산부들까지 소련군에 강간당했다는 증언도 있다. 1945~1946년 사이에 전시 강간으로 태어난 독일-러시아 혼혈 신생아가 3.7%라 집계될 정도였다.
소련군 사령부는 이런 비행을 알고 있음에도 대체로 눈감아 주는 편이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 병사들의 비행이 지나치며 점령지 통치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되자 NKVD 소속 부대를 동원해서 단속에 나섰다. 강간범들은 현장에서 정치장교에게 즉결처분당하거나, 피해자 앞에서 총살되거나, 굴라그로 보내졌다. 유명한 반체제 작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자전적인 소설 《수용소 군도》에 나오는 굴라크 감방 동기 두 명은 바로 이렇게 잡혀온 강간범들이었다. 소련군 사령부나 내무인민위원회가 주둔군 병사들의 비행을 스탈린에 대한 불경을 범한 정치범(= 솔제니친)과 똑같은 중범죄로 다루었음을 알 수 있다. 미국 역사가 노먼 나이마크는, 종전 시점인 1945년에 가장 많은 강간이 일어났지만, 1947~48년 겨울에 항구적인 부대 주둔지가 마련되어 부대장의 허가없는 외박이 금지될 때까지 간헐적으로 계속되었다고 지적한다. 강간 피해자는 최연소가 8세였고, 최고령이 80세였는데 노•소를 가리지 않고 독일에서 여자만 보이면 잡아다가 강간했다. 서독 수상 헬무트 콜의 영부인 한네로레 콜도 12세 나이에 모친과 함께 소련군에게 강간당해서 그 후유증으로 평생 고생하다가 말년에 건강을 비관하여 자살했다.[75]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도 민간인 학살은 전쟁법과 전쟁 관습법에 의해 금지된 상태였기 때문에, 연합군에게 대의가 있다고 해서 민간인 개개인에 대한 전쟁범죄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소련군의 전쟁범죄를 처음으로 공론화한 전쟁사학자 앤서니 비버는 소련군이 나치의 세계 정복을 막아낸 공로를 높이 평가하는 학자이지만, 독일 여성들에 대한 소련군의 보복은 역사상 최대 규모의 집단강간이었다고 주장하며 혀를 찼다.
소련군이 이 같은 행위를 벌인 이유는 소련이 제2차 세계대전의 최대 피해자였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소련은 약 2,000~2,700만 명의 인명피해를 겪었으며 소련에서만 천만건 이상의 강간이 독일군에 의해 자행되었다. 즉, 이들이 저지른 짓은 대의를 위해서라기보단 단순히 복수심과 스트레스에서 발로된 것이다. 사실 강간 뿐만 아니라 이 복수에서 기인한 수많은 범죄들도 있었다. 하지만 복수라 해도 본인과 직접적으로 얽힌 바 없는 민간인에 대한 학살과 강간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이며, 이는 누구보다 나치 독일에 대한 증오에 가득 찼던 소련군 수뇌부조차 주지한 사실이다.
주목할 점은 점령군에 의한 집단 강간은 독일군으로부터 영토를 탈환한 후, 프랑스군 및 민간인들에 의해서도 많이 자행되었다는 것이다.[76] 다만 피해 대상자가 독일인 여성이라기보다는 독일인과 성관계를 한 적이 있었던 프랑스 여성을 대상으로 했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소련군이 한 성폭력이나 프랑스인이 한 성폭력이나 국가간의 문제로 보기보다는 군인의 전시 성폭력이라는 관점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그런 반면 소련 당국은 독일인들의 민심을 얻으려고 식량 보급에 힘썼는데, 1945년 베를린을 점령하자마자 점진적으로 식량을 배급하기 시작했으며 1947년에 본격적으로 식량을 배급했다. 영화 <베를린의 여인>에 나오듯이 점령군에게 몸을 바쳐 배급이나 안전을 확보하려는 독일 여성들도 꽤 있었다.
소련군의 약탈에 재미있는 일화들이 상당한데 냉전 시기 영•미 측의 선전으로 부풀려진 것도 있다. 이 가운데 하나는 병사들이 독일에 진입하고 나서 민가의 수도꼭지를 죄다 빼갔는데 이를 본 장교들이 왜 그걸 빼 가냐 물었더니 병사들이
"어머니를 편하게 해 드리려고 한다."
는 말을 하며, 수도꼭지만 있으면 물이 콸콸 나오는 줄 알았던 것이었다는 신빙성이 희박한 이야기이다. 이미 당시 소련의 주요 도시들은 물론, 여러 지역들에는 급격한 공업화로 인해 상수도가 건설되고 있었으며, 하다못해 신병훈련소에서도 수도꼭지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일화가 나온 유일한 근거는 《라이프 제2차 세계대전》인데, 이 책은 영•미권에서 냉전시대에 학자가 아닌 언론인에 의해 쓰여졌기 때문에 프로파간다를 검증없이 받아들인 내용이 상당하다.[77]다만 2015년 러시아 모스크바 고등경제대학의 역사학자 올렉 부드니츠키는 영국 BBC 라디오와 가진 인터뷰에서 "소련군 병사들이 독일에 도착했을 때 매우 놀랐다. 그들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800만 명의 소련 국민이 해외를 방문했던 것이다. 소련은 폐쇄된 국가였다. 그들이 외국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실업, 기아, 착취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유럽 특히 독일에 왔을 때, 그들은 사회주의 체제인 소련 사회와는 매우 다른 모습을 보았다. 소련군 병사들은 독일인들이 그렇게 부유한데도 왜 자신들보다 더 가난한 소련으로 쳐들어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그래서 분노했다."라고 밝혔다.
사실 종전 후 미국과 서독에서 반공주의가 성행하게 되면서 소련군의 전쟁 범죄는 과장하고, 나치 독일의 전쟁 범죄나 서방 연합국 지도자들의 전쟁 범죄는 어둠 속으로 묻히게 되었다.[78] 그리고 서독에서 역시 즉각적인 나치 청산이 흐지부지되어 진정한 의미의 과거사 청산까지 약 20년 가량을 더 기다려야 했다.[79]
4.2. 스탈린그라드에서 베를린까지
<rowcolor=white> 제국의사당 앞의 제150소총사단 병력. |
베를린 공략을 직접 맡은 부대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용맹을 떨친 소련군 제62군이 개편된 제8근위군(1943.4.16 부로 개편)이었다. 스탈린그라드의 맹장 바실리 추이코프 중장(후에 소련 원수로 최종 진급)은 그 이후에도 이 부대를 맡아 2년간 계속 지휘했고, 이 부대는 결국 베를린 공략 부대라는 소련군에서 가장 명예로운 역할을 맡았다. 이 부대는 스탈린그라드에서 익힌 시가전 전술에 매우 능했으며, 그때 익힌 노하우를 적극 이용했다. 수류탄, 박격포, 기관총, 화염방사기를 갖춘 10여 명의 분대가 분대장의 독자적이고 자율적인 판단하에 독일군이 점령하고 있는 건물에 돌입하여 적을 소탕하는 작전이었다. 이 부대는 종전 직후 그대로 베를린에 눌러 앉았고, 통일과 소련 붕괴 후에도 러시아군으로서 남아 있다가 군사 협정 후 철수할 때까지 계속 주둔했다.
한편 베를린의 제국의사당을 직접 점령한 제150소총사단은 오로지 제국의사당에 소련 국기를 게양할 것을 직접 명령받은 9개의 사단 중 하나로 그 위업이 특별시되어 쿠투조프 훈장 2급 훈장을 수여받았으며, 지금도 승리의 날 퍼레이드 때 가장 처음으로 행진하는 의장대는 러시아 국기와 함께 이 부대의 깃발을 들고 행진한다.[81] 그야말로 소련군 전설의 부대[82]로 제150소총사단은 전쟁 종결 직후인 1946년 해체되었으나 70년 후인 2016년 러시아군이 부활시켰다. 부활한 제150소총사단의 정식 명칭은 '제150 이드리차-베를린 쿠투조프 훈장 2등급 기동소총사단(150-я Идрицко-Берлинская ордена Кутузова 2-й степени мотострелковая дивизия)'.
서베를린에 세워졌던 소련군 전사자 추모 동상.[83] |
4.3. 모든 것을 쥐어짜다
당시 독일은 야크트티거 등 완전히 소모된 일부 차량을 제외한 모든 기갑전력을 베를린 방어에 동원했다. 1호부터 6호 B형까지 제식 전차가 모조리 사용됨은 물론이고...<rowcolor=white> 제1차 세계 대전기의 유물이던 영국제 Mk V도 독일군이 사용했다. |
일각에서는 A7V도 쓰였다고 하는데 1차 대전 유물까지 나온 마당이니 가능성은 있지만 A7V는 생산수가 21대 밖에 안 되었기 때문에 실제로 쓰였을 가능성은 낮다.
<rowcolor=white> 격파된 보르크바르트 4호. [87] |
6호 전차 티거 선정때 헨셸 차량에 밀려 탈락한 포르셰의 VK 45.01(P)가 베를린 교외에서 격파되었다. 이 차량은 종래의 8.8cm KwK 36 56구경장이 아닌 8.8cm KwK 43 71구경장이 장착되어 있었다.[88] 소련군이 이놈한테 관심이 없었던 탓인지 이 차량은 사진으로는 남아있지 않고 기록에만 남아있다.
<rowcolor=white> 베를린 최후의 티거 2의 모습. |
참고로 위 사진을 보면 311호는 측면에 방수포 비슷한 것이 씌워져 있는데, 티거 2의 표준 3색위장이 시가지에서는 눈에 너무 잘 띄는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한시가 급한 독일군 입장에서 전차를 다시 도색할 여유도 없었으니 결국 임시방편격으로 저런 조치를 취했다고.
<rowcolor=white> 포탑을 뒤로 돌린 베를린 최후의 티거 1인 323호 티거의 사진 |
<rowcolor=white> 격파된 훔멜 자주포. [91] |
<rowcolor=white> 베를린의 판터와 그 위에서 뛰노는 아이들. [92] |
<rowcolor=white> 베를린으로 이동 중이던 초기형 KV-1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린 교량. 철십자 마크로 보아 독일군 노획 버전인 Pz.Kpfw. KV-1A 753(r)임을 알 수 있다.[93] |
<rowcolor=white> 베를린 전투가 끝난 뒤 소련 본토로 보내서 고철로 스크랩할 용도로 소련군이 모아둔 파괴/유기 전차들. |
기갑병기뿐 아니라 개인화기 쪽 사정도 처참했다. MG08, MG30, MP507, MP18, Gew98, Gew88, Gew71, MP3008 같은 대전 후기에 급조된 무기들은 물론 1차 세계대전의 무기부터 화승총까지 사용되었고 그 중엔 루이스 경기관총이나 MAS-36같은 프랑스 침공 때 상당수 노획한 무기도 지급했으며 이탈리아군의 카르카노를 독일의 7.92mm 마우저탄이 들어가게 개조한 것 등 온갖 것이 마구잡이로 지급되었다고 한다. 이 중에서 소련군이 극소수의 EMP44를 들고 나온 국민돌격대와 교전한 일화도 있었는데 생김새가 당연히 이상한 까닭에 소련군은 그냥 무시했으므로 멀쩡히 남은 총기가 거의 없다.
장비 외에도 인력도 쥐어짰는데 소련이 동부전선 초반에 그랬던 것처럼 베를린의 민간인들이 방어선 구축에 동원되었다. 노면 전차로 방어벽을 만들고 방어호를 구축했으며, 곳곳에는 대공포대가 세워졌다. 물론 인력난은 심각해서 베를린에 설치된 대공포 조작 요원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고 외인부대, 히틀러 유겐트는 물론이요 심지어는 소련군 포로와 절멸 수용소에 징집해온 유대인들까지 동원되었다. 이 때문에 대전 말 베를린에선 다음과 같은 블랙 유머가 나돌았다.
신사(패잔병, 늙은이), 숙녀(여자들), 어린이(히틀러 유겐트), 교활한 고리대금업자(유대인), 동무(소련군 포로) 여러분!
한편 베를린 공방전에는 나치에 협조하는 약 7천여 명의 프랑스인들로 구성된 외인부대인 샤를마뉴 사단도 참가하여 독일군 병사들과 함께 최후의 순간까지 소련군에 맞서 싸웠다. 샤를마뉴 사단은 반공주의 성향을 가진 프랑스인들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나치 독일이 강력한 반공주의 성향을 지녔기에 반공주의를 따르는 프랑스인들은 나치 독일을 두고 함께 공산주의에 맞서 싸울 동지라고 여겼던 탓이었다[95].
4.4. 지하철의 비극
<rowcolor=white> 베를린 지하철에 진입하는 소련군. |
<rowcolor=white> 지하철 입구에서 전복되어 있는 소련군 T-34-85. 방향상 후진하다가 굴러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
<rowcolor=white> 베를린 지하철 내부의 모습. |
<rowcolor=white> 지하철역에서 나와서 항복하는 독일군, 밑의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루프트바페 소속 공수부대인 팔쉬름예거도 베를린 전투에 동원되었다.[98] |
5. 이후
베를린을 점령했지만 이오시프 스탈린은 여전히 만족하지 않았다. 스탈린은 연합군이 선수를 치기 전에 한 뼘이라도 땅을 더 차지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5월 경, 이반 코네프가 지휘하는 제2 우크라이나 전선군과 예레멘코의 제4 우크라이나 전선군은 미군의 조지 S. 패튼의 제3군과 함께 합동으로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도 프라하를 점령하기 위해 공세를 했다. 소련군과 폴란드군은 5월 6일부터 공세를 시작해 이틀 만에 드레스덴과 바우첸, 괴를리츠를 점령한 뒤 프라하로 진격했다. 프라하에는 소련군의 오랜 숙적인 독일 중부집단군 잔존병력 600,000여 명이 있었고, 이들은 바그라티온 작전과 비스와-오데르 대공세의 여파로 궤멸적인 타격을 입어서 거의 전투 불능이 된 상태였다. 그렇기에 소련군은 이들을 기필코 멸절시켜야만 했다. 5월 10일부터 프라하에 진주한 소련군은 중부집단군 병력 대부분을 소탕하거나 포로로 잡은 뒤 11일, 플젠에서 미군과 접선하게 되면서 소련군의 마지막 대독일 군사작전은 드디어 막을 내리게 된다.4년전인 1941년 6월 22일, 소련인들에게 독소전쟁 개전 사실을 알렸던 아나운서 유리 레비탄이 라디오를 통해 승전 사실을 발표한 뒤 소련인들은 영광스러운 승전의 기쁨을 만끽하였고, 급기야 1945년 5월 10일에는 전 소련에서 보드카가 품귀 현상을 빚었다. 소련인들이 승리의 기쁨을 즐기며 술을 진창 마셔댔기 때문이다.#
이후 나치 독일은 공식적으로 연합군에 항복하여 유럽에서의 전쟁은 끝이 났다.
<rowcolor=white>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베를린에 진주한 영국 육군 전차 승무원들. 땅에 고정된 판터의 포신에 타고 있다.[100] |
1945년 7월 무렵의 베를린 시가지 [101] |
종전 후 패전국이 된 데다가 무조건 항복으로 그 어떠한 권리도 주장할 수 없었던 독일인들은 1947년 마셜 플랜이 시작되기 전까지 전후를 힘겹게 버텼는데 특히 엄청난 양의 폭격과 포격을 받고 시가전 와중에 대파된 베를린의 독일인들은 재건 과정에서 힘겹게 살아가야 했다.[102] 또한 거의 모든 성인 남성[103]이 전쟁에서 이미 죽거나, 살아남은 남성들도 포로 생활을 했기에 여성과 노인들이 특히 힘들게 살았다.[104] 베를린 공방전이 끝난 직후 베를린 인구의 무려 70%가 여성이었으며, '잡석 여성들(Trümmerfrauen)'이라 불린 이들이 거리의 잔해들을 치웠다. 공방전 중 생긴 잔해가 어찌나 많았는지 이 잔해를 모아 놓은 돌더미가 베를린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산[105]이 됐다. 이때의 독일 민간인들의 생활상이 독일 영화인 <독일 영년>에 잘 나와 있다.
냉전이 시작됨에 따라 베를린에서의 승전국들의 구역은 자연스레 서부 연합군의 서베를린, 소련군의 동베를린으로 나누어졌고, 이후 미군과 소련군의 전차가 대치하는 베를린 위기 등 냉전의 최전선에 서게 된다.
6. 어록
증오가 아주 깊어졌다. 전쟁을 끝내고 싶어졌다. 우리를 죽이려 한 저들을 전멸시키자. 저들을 없애자. 1명도 빠짐없이!
소련군 병사 요제프 프라우포프
소련군 병사 요제프 프라우포프
절망적이다. 모두들 아무 소용없는 짓을 하고 있다.
막스 펨젤 대장, 베를린 수비 방어선을 시찰한 후
막스 펨젤 대장, 베를린 수비 방어선을 시찰한 후
소련군이 이 방어선을 돌파하는 데는 1시간이 걸릴 것이다. 허술한 방어선의 꼬락서니를 본 소련군이 55분 동안 웃으며 뒹굴다가 5분 안에 깨끗이 거덜내 버릴 것이니까...
전투 당시, 독일군 사이에 퍼진 농담.
전투 당시, 독일군 사이에 퍼진 농담.
그리고 나는 외치고 싶었다. 러시아, 벨라루스, 폴란드의 땅 속에 누워 있는 이들, 우리가 거쳐온 모든 땅에서 영원히 잠든 이들에게 소리치고 싶었다.
'동무들, 우리가 해냈소!"
소련 종군기자 바실리 그로스만, <전쟁의 해들(Годы войны, Years of the war)> 중
'동무들, 우리가 해냈소!"
소련 종군기자 바실리 그로스만, <전쟁의 해들(Годы войны, Years of the war)> 중
승리의 날이여. 이를 위해 얼마나 멀리 달려왔던가.
승리를 위해, 불타 버린 머나먼 길을 달려왔고
이날을 위해 우리 모두 장렬하게 싸워 왔네.
유럽의 반을, 천하의 반을 큰 걸음으로 달려왔네,
이날을 위해 우리 모두 장렬하게 싸워 왔네!
소련 군가 <승리의 날> 중.
승리를 위해, 불타 버린 머나먼 길을 달려왔고
이날을 위해 우리 모두 장렬하게 싸워 왔네.
유럽의 반을, 천하의 반을 큰 걸음으로 달려왔네,
이날을 위해 우리 모두 장렬하게 싸워 왔네!
소련 군가 <승리의 날> 중.
7. 대중문화
- 독일 영화 <다운폴>(Der Untergang, 2004)은 베를린 전투 중의 독일 내부 사정을 잘 묘사했다. 배우 브루노 간츠의 명연기를 통해 보이는, 파멸을 앞둔 히틀러의 심리묘사가 일품이다.
그리고 인터넷 역사에도 한 획을 그었다.
- 독일 영화 <베를린의 여인>은 당시 한 익명의 여성이 쓴 일기를 원작으로 한다. 소련군의 강간과 살기 위한 매춘 등이 묘사된 원작은 출간되자마자 독일과 여성에 대한 모독이라며 공격받았고, 더는 출판되지 않았다. 작가의 사후에야 다시 재평가를 받았다.
- <베를린 1945>(《게르만의 기사》에 수록)-유명 전쟁 만화가인 고바야시 모토후미의 작품. 베를린 전투를 매우 자세하게 묘사했다. 핀란드 의용사단인 '노르트란트' 소속 무장친위대 대위 하르츠가 주인공으로 나온다.[107] 베를린 전투 막바지에 부하들은 탈출시키고, 국회의사당 옥상에 소련기를 세우려는 소련군들에게 달려들어 같이 떨어지며 자폭한다.
- 1981년작 TV영화 <Le Bunker> 또한 마지막을 앞둔 히틀러를 그리고 있는데, 여기서는 안소니 홉킨스가 히틀러 역을 맡아 열연한다.
- 소련 영화 <베를린 함락>(Падение Берлина, 1949)은 총 두 편으로 된 영화로서 베를린 전투뿐만 아니라 제2차 세계 대전 전반을 다루고 있다. 물론 마지막은 베를린 함락으로 끝난다. 스탈린이 함락된 베를린에 비행기를 타고 와서 신처럼 강림하는 마지막이 꽤 인상적이다. 일부 사람들은 이 영화를 들어 스탈린이 베를린에 온 적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스탈린은 포츠담 회담에 참여하기 위해 오긴 했다. 단, 비행기가 아니라 기차로 왔다. 이를 제외하면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되어 나온 영화라 소련군 장비나 복장 재현은 꽤 충실하다. 여기서 괴링은 비단옷을 입고 보물로 집을 도배하고 다니는 등의 모습으로 나오지만 이 무렵엔 이미 괴링은 보물들을 대부분 팔아 치우거나 파괴했고, 그와 그의 가족들은 이미 피난민들의 대열에 합류하여 베를린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이 영화는 스탈린의 우상화가 극에 달했을 때 제작된지라 스탈린이 거의 신처럼 묘사되는 선전영화나 마찬가지였고, 스탈린을 다룬 영화의 단골 감독이었던 미하일 치아우렐리가 감독을 맡았고,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가 OST(...) 작곡을 맡는 등 소련 최고의 스탭들이 제작에 참여했다. 여담이지만 출연 배우들이 실제 인물들과 매우 비슷하게 생겼다. 1편, 2편 히틀러 역을 맡은 배우 블라디미르 사벨례에프(Vladimir Savelyev )는 그 광기나 억양을 러시아어로 재현하는 대단한 연기력을 보여준다. 유튜브에서는 러시아어 원어 버전도 있지만 북한의 조선중앙텔레비죤에서 더빙한 더빙판도 보인다. 찬양 목적이 아니라면 불법이 아니니 코렁탕 걱정은 없다. 참고로 흠좀무한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평지에 베를린 규모의 세트장을 지어놓고 촬영했다는 말이 있다(!!!)
- 영화 <레지스탕스>에서는 주인공이 베를린 공방전에서 히틀러 유겐트로 소련군과 싸운다. 그러나 자신의 첫사랑은 눈앞에서 강간 뒤 살해당했고, 자신은 소련으로 끌려가 KGB 중위가 된다.
-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 2>에서는 마지막 미션으로 나온다. 독일 국회의사당(라이히스탁)을 점령하는 것이 최종 목표이지만, 소련을 의도적으로 비하하는 게임 플롯상 영광에 찬 국기 게양 같은 건 없고, 오히려 베를린 전투의 클라이막스가 되어야 할 국기 게양을 매우 허무한 일로 묘사하고 있어 플레이어에게 감동을 전혀 주지 못한다는 게 문제.
패배자 주제에[108] 독일 국회의사당은 중립 건물 블록이 여럿 합쳐진 거대한 건물로 묘사되며, 그 앞에 펼쳐진 참호의 밭을 무시무시한 손실을 각오하고 뚫어야 한다.[109] 특이 사항이라면 독일 국회의사당 주변의 적을 정리하고 안심할 무렵 갑자기 티거가 2대 튀어나오는데, 미션 흐름상 대전차 전력을 그때까지 딱히 마련할 필요가 없는채로 진행해서 확 쓸릴 가능성이 높다. 최대한 빨리 해결하려면 콜인으로 부르는 IS-2 전차들을 이용하는 것이 차라리 편할 정도.
- <콜 오브 듀티 시리즈>에서는 <콜 오브 듀티>와 <콜 오브 듀티 : 월드 앳 워>에서 베를린 전투가 묘사된다. 둘 다 소련군 마지막 미션으로 제국 의사당 공격을 다루고 있다. 다만 1에서는 아쉽게도 주인공이 다른 병사가 의사당 건물에 붉은 깃발을 게양하는 걸 그냥 지켜보기만 한다. 반면 <월드 앳 워>에서는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다룬 첫 번째 미션을 제외한 모든 소련군 미션이 베를린 전투를 다루고 있다. 젤로 고지 전투부터 시작하여 베를린 시가전, 그리고 제국의사당에서의 최후의 전투가 묘사된다. 그리고 이쪽은 주인공인 디미트리 페트렌코가 직접 의사당 옥상에 소련기를 꽂는다!
1하고 적절히 섞었으면 명장면일 텐데
- <콜 오브 듀티: WWII/나치 좀비>의 '가려진 왕좌' 챕터의 주무대다. 인트로에서 소련군 전차가 진격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등. 원 역사대로 흘러가는가 했지만, 나치가 좀비들을 풀어놓는 바람에 전장이 난장판이 된다.
- 위 작품들의 시리즈 후속작인 <콜 오브 듀티: 뱅가드>에서도 막판에 잠시 묘사된다. 다만 뱅가드 팀의 원맨쇼에 취중하느라, 베를린 전투의 연출 부분은 전작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다.
- <메달 오브 아너: 얼라이드 어썰트> 확장팩 스피어 헤드의 최종 미션이 베를린 전투를 다룬다.
- 스웨덴의 메탈밴드 사바톤의 노래 <Attero Dominatus>는 베를린 전투를 소재로 하고 있다. 1절에는 주코프가, 2절에선 스탈린이 "손해가 얼마나 나든 상관 말고 베를린을 차지해라!"라고 말하는 가사가 나온다. 그만큼 베를린은 소련에게 중요한 곳이였다.
- 모바일 게임 <SD 세계대전>에서는 독일, 영미연합, 소련의 세 진영의 캠페인 마지막 시나리오로 등장하는데 구성 요소는 차이가 있다. 독일은 중앙에서 자원을 캐면서 동서남북에서 일정 주기로 쳐들어오는 소련군을 막는 디펜스 게임이고, 소련군은 독일 진영을 함락시키기만 하면 되는 정석적인 임무이다. 영•미연합군은 소련 개입 이벤트가 발생하면 명령대로 공장 지대를 점령할 것인지, 패튼답게 명령 씹고 베를린으로 진격할 것인지에 대한 선택지가 생기는데, 공장 지대를 택하면 정상적인 역사 진행으로 흘러가지만, 베를린을 함락하면 소련군과 또 맞붙어야 한다. 소련군과 싸워서 이기면 "이런 게 어딨어! 원래 싸우면 안 되잖아 ㅠㅠ"라고 절규하는 스탈린을 볼 수 있고, 패튼은 한술 더 떠서 이 기세로 소련까지 박살내자고 폭주하지만, 독일더러 무조건 항복하라고 퇴짜 놨던 아이젠하워가 역사에 없던 일이라며 딴죽을 건다.
- 닌텐도 DS 게임 <탱크비트2>에서 소련군, 독일군 진영 양쪽에서 마지막 미션으로 등장한다. 소련군의 엔딩은 베를린 점령 이후 주인공과 전차 부대원을 전쟁 초기 때부터 틈만 나면 숙청할 거라며 갈구던 정치장교가 파괴된 티거 위에서 자신만만해하다가 그 파괴된 티거가 유폭하는 바람에(...) 정치장교는 산산조각났고 주인공과 부대원은 이를 비웃으면서 끝난다. 독일군 진영에서는 티거 II로 이루어진 최후의 전차 부대들을 이용해 소련군을 막아내면서 피난민들이 서쪽으로 갈 수 있도록 시간을 버는 미션이다.
- 1950년대 소련을 배경으로 한 영화 <차일드 44(영화)>에선 초반부에 이 당시 국회의사당 전투가 잠깐 묘사된다. 또한 국회의사당에 국기를 게양할 때의 장면도 각색해서 등장한다. 맨 처음 깃발 게양을 하려던 병사가 시계를 여러 개 차고 있자 사진을 찍으려던 간부가 이를 제지하고, 뒤에서 대기하던 주인공인 레오 데미도프를 불러다가 대신 깃발을 걸게 한다. 사진을 찍은 당사자인 칼데이 해군 중위도 등장한다.해당 장면
- <기동전사 건담>의 아 바오아 쿠 공방전의 모티브이다.
- <진군하라 전차도>의 마지막 전투는 베를린 공방전을 모티브로 한 것이다. 똑같이 쿠로모리미네를 공격하던 프라우다 대신, 오아라이의 승리로 굳히기 위해 주인공이 직접 학원 건물 위로 올라가서 깃발을 걸며 종전.
- <워 썬더>에서도 베를린 공방전 맵이 등장한다.
- <Dies irae>의 프롤로그 파트가 바로 베를린 전투로, 아돌프 히틀러의 자살 직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성창 13 기사단 단원 13명이 모두 모여 라인하르트의 창조 위계를 영구 전개하기 위한 의식을 치른다. 이들은 피아를 가리지 않고 학살을 펼치며 스와스티카를 개방하고 이자크를 제물로 바쳐 라인하르트의 그라즈헤임을 영구 전개하는 의식을 펼쳤다. 이때 대대장 3명은 라인하르트를 따라 그라즈헤임으로 들어갔으며 라인하르트의 육체는 발레리아에게 넘어가 그의 성유물이 되었다. 그리고 이때의 광기를 목격한 베아트리스는 흑원탁에 반역을 획책하게 된다.
- <헬싱>에서 소령의 회상으로 등장한다. 소령 또한 전투 과정에서 소련군에게 두들겨 맞고, 정치장교로 보이는 이에게 권총 네발을 맞는데, 이때 부상으로 몸을 개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 <검은머리 미군 대원수>에선 유진 킴의 활약으로 서부 연합군이 원 역사보다 빠르게 진격함에 따라[111], 소련군이 아닌 미군의 주도로 치러지게 된다. 따라서 국회 의사당에 걸린 국기도 소련기가 아닌 성조기이며, 이 와중에 패튼은 젋은 시절 멕시코에서 그랬던 것처럼 입수한 히틀러의 시신을 전차에 장식하고 독일군을 능욕한다.
- <용사가 돌아왔다>에선 이 전투에서 빙결의 용사 아이반 푸쉬킨, 개조의 용사 마리 스티븐슨, 보옥의 용사 펜드래곤이 힘을 합쳐 믿음의 용사 한스 요제프 벨기스를 봉인했다. 이 과정에서 치명상을 입은 펜드래곤은 끝내 사망했다.
- <스트라이크 위치스 3기>가 베를린 전투를 모티브로 했다.
- 울펜슈타인 3D를 둠 시리즈 엔진 기반으로 리메이크한 모드 브루탈 울펜슈타인 3D에서는 미군 주인공 B.J. 블라즈코윅즈가 단신으로 총통 벙커에 들어가 히틀러를 암살한 오리지널 울펜슈타인 3D와 달리 소련군들과 함께 총통 벙커에 침투해[112] 소련군의 시체를 넘고 넘어 히틀러 암살에 성공한다.
[1] 베를린 전략 공세 작전[2] 베를린 전투[3] 하인리치가 휘하 병력을 북부로 이동시킨 행위로 인하여 비스툴라 집단군 지휘관직에서 해임당하자 하인리치의 후임으로 임명되었으나, 베를린으로 가던 중 영국군에게 체포되는 바람에 실질적으로 집단군을 지휘하지는 못했다.[4] 영국군에게 체포된 슈투덴트 대신 하인리치의 후임으로서 실질적으로 비스툴라 집단군을 지휘했다.[5] 전선이 종결된 것일 뿐 유럽에서의 모든 전투가 끝난 건 아니었다. 베를린 공방전 이후로도 미군과 독일 국방군, 항복파 무장친위대가 항전파 무장친위대를 상대로 싸운 이터 성 전투가 있었고, 이 외에도 서쪽으로 탈출하려는 독일군과 소련군 사이에서도 여러 전투가 벌어졌다.[6] 미국, 영국, 소련, 프랑스[7] 이 중 대다수는 전차가 아닌 장갑차였다. 당시 동부전선에 남아있었던 대부분의 전차를 2개월 전 실시한 봄의 새싹 작전과 아르덴 공세를 위해 서부전선으로 배치했다가 연료 부족으로 유기해서 날려먹었기 때문이었다.[8] 국민척탄병, 국민돌격대, 히틀러 유겐트, 질서경찰, 추축국 잔존 세력의 병력 등. 이 외에도 소련군 포로, 강제 수용소에서 징집된 유대인들도 동원되어 대공포 조작이나 방어선 구축에 투입되었다.[9] 서쪽에서 다가오는 것은 서방 연합군이며, 동쪽에서 다가오는 것이 소련군이다. 또한 베를린 남쪽에서 포위망을 뚫어가며 기어이 서쪽으로 나아가는 부대가 하나 있는데, 이들이 바로 독일 제9군이다.[10] 총통이 아니다. 히틀러의 총통직은 나치 집권 직후 통과된 <수권법>으로 독일 대통령과 독일 총리가 합쳐져 만들어진 것이었으며, 히틀러는 원래 총리였다가 당시 대통령이었던 파울 폰 힌덴부르크의 사망으로 대통령직을 승계해 총통이 되었던 것이다. 대통령으론 칼 되니츠가, 총리론 파울 요제프 괴벨스가 임명되었으나 괴벨스 역시 히틀러가 자살한 직후 부인과 하랄트 크반트를 제외한 어린 자녀 6명과 같이 자살했다.[11] 독일은 이 무렵 소련의 보복을 굉장히 두려워했는데 이는 독일이 일방적으로 불가침조약을 깨면서 벌어진 독소전쟁으로 인해 소련 전체 인구의 20%에 해당하는 3,000만 명이 사망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나마 독일에 관용적이었으며 민주주의 국가였던 미국과 영국 측에만 항복하려 했으나 이미 미, 영, 중, 소 등 주요 연합국들은 타 연합국을 제쳐두고 일방적으로 추축국과 협상하지 않는 대원칙에 합의했기 때문에 이러한 시도는 좌절될 수밖에 없었다.[12] 서방 연합군은 이 결정을 통해 실리를 챙겼는데 소련이 단독으로 베를린에 입성했음에도 서베를린을 확보했다. 아무리 패망하는 나치라 할지라도 적국 수도에서의 시가전은 연합군에게도 어마어마한 피해를 강요할 것임이 당연했기에 연합군은 베를린의 영광을 차지하는 대가로 소련군이 대신 죽게 함으로써 자국 군인들의 인명피해를 어느정도 최소화하였다. 다시 말해, 서방 연합군은 베를린 입성이라는 영광을 소련에 넘기는 대신 비교적 적은 피해로 서독은 물론 소련 점령지인 서베를린까지 차지하는 나쁘지 않은 결과를 이끌어낸 것이다.[13] 스타니슬라프 포플라프스키 소장의 폴란드 제1군이 주코프 휘하 제1벨로루시전선군 소속으로 포위에 가담했다.[14] 소련의 경우 동격 제대인 전선군.[15] 소련군 특유의 제대. 다수의 보병으로 구성되며 여러 중자주포와 중곡사포 및 중전차들을 지원화력으로 보유한다. 공세의 제1파로써 적 전선에 구멍을 내는 역할을 맡았다.[16] 코네프의 급격한 진격으로 인해 공백 지대가 발생했다.[17] <월드 앳 워>에서 레즈노프의 입을 빌어 어린 놈, 늙은 놈, 병든 놈까지 끌고 왔다며 이를 조소한다. 철십자의 각 부분에 그 셋이 각각 배치되는 디자인도 볼 만하다.[18] Armoured fighting vehicle. 전차, 구축전차, 돌격포, 장갑차 등 장갑을 두른 모든 차량 및 전차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당시 독일군 수중에 남아 있었던 모든 전투차량이라는 것이다.) 독일군은 1945년 3월 봄의 새싹 작전에서 상당수의 남은 전차, 구축전차, 돌격포를 상실했기 때문에 이 1,519대의 AFV 상당수는 장갑차였을 것으로 보인다.[19] 사실상 대전 말기, 북부 독일에서 유일하게 제대로 된 전력을 갖추고 있었던 야전군이었다.[20] 공군 특유의 카라장과 가슴 부분에 독일 육군과는 다른 날개를 접은 형태의 독수리 오버로크가 박혀 있음을 통해 공군소속임을 알 수 있다.[21] 밑단이 짧은 네이비 블루 색상의 수병용 피코트를 입고 있다.[22] 이때 독일 해군은 사실상 전멸했다. 또는 군함을 버리고 후퇴해서 민간인인 척 하며 육군에 입대하는 인간들도 있었다.[23] 일례로 해군은 아예 후방에서 교관으로 활동중이었던 유보트 에이스들을 데려와서 부대의 대대장을 맡길 정도였다(...). 물론 당시 나치 독일은 국민돌격대 지휘관 자리에 소방관이나 경찰을 임명하는 정도까지 갔기 때문에 이상할 건 없다. 이들이 다 못 싸운 건 아니고, 전후에 되니츠 제독의 경호부대역까지 맡은 U-333의 함장인 잠수함 에이스 페터 크레머 소령이 이끄는 잠수함 승조원으로 편성된 해군 대전차대대는 종전 직전 판처파우스트 등을 써서 전차가 포함된 영국 육군 병력을 피해 없이 격퇴시키도 했다.[24] 근무모로 착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저 개리슨모 형태의 모자는 엄연히 전투시 철모를 미착용할 경우 쓰게 되어 있는 전투모다. 육군은 전투모, 해군은 함상모, 공군은 비행모라 불렀다. M43이라 불리는 챙과 귀덮개가 달린 모자를 전투모, 개리슨모 형태의 모자를 근무모로 혼동하는 이들이 있으나, M43 전투모는 기존 개리슨형 전투모의 대체품이지 전혀 다른 개념의 모자가 아니다.[25] 많은 자료들에서 '젤로프'라고 쓰고 있지만 Seelow에서 w는 o의 장음 역할을 하기 때문에 발음되지 않는다. 이 같은 발음법은 동부 지방의 지명이나 인명을 읽을 때 사용된다.[26] 많은 역사서에 여기가 아니라 '토르가우'(Torgau)로 오기되어 있다.[27] 승전 30주년이 된 1975년에 진행된 역사적인 미/소 합작 우주 미션 아폴로-소유즈 테스트 프로젝트에서도 양측 우주비행사 알렉세이 레오노프와 토머스 스태퍼드는 이 엘베 강 상공에서 처음 악수를 할 예정이었으나 간발의 차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상공에서 만났다.[28] 여담으로 이런 광경은 며칠 후에 오스트리아에서도, 몇 달 후에 한반도에서도 비슷하게 펼쳐졌지만, 안타깝게도 이 사람들의 파일럿 전우들은 불과 5년 뒤 압록강 상공에서 서로 죽여야 했으며 후손들은 20년 뒤 서로 악수가 아닌 총과 핵무기를 겨누며 대치하게 되었다.[29] 이 시대의 방탄모는 소총탄을 막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케블라를 압축해서 만드는 현대의 방탄모도 중량 등 실용적 이유로 권총탄 방호를 방호력의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교전 거리 내의 소총탄은 못 막을 가능성이 크다. 이 시대의 방탄모는 그저 파편을 막는 것에 의의를 두는 수준이었다. 다만 파편에 의한 사상자가 상당히 많았기에 이 정도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었던 것이고, 이는 현대에도 마찬가지이다.[30] 전차병 등 특수한 병과거나 전투 중 분실했는데 남은 방탄모 수량이 없어서 쓸 게 없었을 때였다.[31] 이것도 나름 이유가 있는데, 생태가 순식간에 동태가 될 정도로 추운 러시아의 총검이다 보니 적이 입은 두꺼운 방한복을 뚫기 위해 이런 형태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래서 당대의 소련군 총검은 다른 국가들의 총검보다 길쭉하고 뾰족한, 총검이라기보다는 총창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디자인을 하고 있었다.[32] 이런 일선의 요청 사항들을 반영했는지 훗날에 나오는 AK용 총검 특히 6X3은 제2차 세계대전 시대의 총검보다 도구로써의 쓰임새(철조망 절단 기능이나 작은 톱날 추가 등)가 더 많아졌고, 미군 역시 이에 영향을 받아 M9 총검을 만들었다.[33] 당시 스탈린이 주코프의 제1벨로루시전선군과 코네프의 제1우크라이나전선군의 전투지경선을 없애 버리기까지 해서 경쟁을 더욱 부추기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주코프는 이 때문에 여유가 없이 굉장히 급한 상황이었다.[34] 사단을 의미하는 X가 2개 쳐진 주황색 작은 사각형으로 표시된 제대다. 폴란드 인민군의 군대 중 제일 먼저 창설된 부대이며, 부대명은 전설적인 폴란드 독립운동가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의 이름에서 따왔다. 제1사단은 공산 폴란드군을 대표해 베를린 진격에 참가하여 독일에 대한 복수에 성공한다. 그들은 티어가르텐 근처를 지나 독일 정치의 심장인 독일 국회의사당 인근까지 진격했다.[35] 우연히도 이 날은 히틀러의 생일(4월 20일) 바로 다음날이었다.[36] 베를린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에 베를린에서 탈출했다.[37] 영화 <몰락>에도 나오는 그 장면의 실제 상황이다.[38] 민간인의 경우는 독일 드라마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에 등장하는 주인공 일행인 그레타가 술집에서 병사들에게 한 마디 했다가 바로 수용소로 끌려가는(이때는 베를린 전투 때처럼 급박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끌려갔다.) 것으로 묘사되었고, 군인의 경우는 <퓨리(영화)>와 <콜 오브 듀티: 월드 앳 워>, <배틀필드 V>에서 묘사된다. <다운폴>에선 아예 전투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도, 심지어 다 끝나갈 때조차도 도망치려는 민간인을 처형하는 그라이프코만도(Greifkommando)가 시내를 돌아다니고 있었다.[39] 프리드리히슈트라세 거리에서 촬영되었으며, 소련군으로부터 탈출하던 도중 집중 사격을 받아 장갑차는 격파되고, 간호사는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베를린 전투의 중요한 사진으로 취급된다. 참고로 이 사진은 영화 <다운폴>에서도 재연된다.#[40] 철거 당시 사진,[41] 사진 앞줄 중앙의 인원을 자세히 보면, 가슴 주머니가 없는 1차 대전기 독일 제국군 복식을 칼라 부분만 고쳐서 입었단 게 보인다. 전투 병력들에게 입힐 복장조차 모자라서, 30년 전의 유산까지 꺼내 입은 것이다.[42] 헤르만 괴링과 하인리히 힘러 등이 모두 그에게 탈출을 권유했으나 거부했고, 심지어 베를린 전투가 시작됐을 때 총통 관저 바로 앞에 비행기를 몰고 온 한나 라이치의 간절한 요청도 거부했다. 이들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탈출 권유를 했다.[43] 이 때문에 잘 싸우고 있었던 고트하르트 하인리치는 자신의 병력을 북부로 이동시키던 중 후퇴한다는 누명을 쓰고 보직 해임되었다. 하인리치가 베를린에서 얼마나 대활약했는지는 젤로 고지 전투 참고.[44] 교전이 끝나고 정리된 구역이라 분위기가 한산하다. 앞의 시체는 군복 칼라장을 보면 무장친위대 대위인데, 옆에 놓인 무장은 공수부대(팔시름예거) 장비인 FG42이다. 전황이 워낙 급박하니 공수부대 소속이 아님에도 일단 쥐어주고 교전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국민돌격대야 철모, 군복, 계급장이 부족해 잡다하게 섞인 복장을 한 경우가 많았지만 그보다 보급 순위가 우선이었을 훈련받은 군인조차(사진 속 군인은 철십자 훈장도 패용하고 있다.) 자기 부대 편제가 아닌 장비를 쓸 만큼 베를린의 독일군이 막다른 곳에 몰렸음을 알 수 있다. <다운폴>에서도 통상 육군 군복이 아닌 크릭스마리네, 루프트바페, 슈츠슈타펠, 팔시름예거 군복은 물론 아예 민간인 복장에 나치 완장만 치고 있는 사람 등 '이 사람은 우리 독일군이다'라고 인식할 수 있을 정도로만 무장을 시켜둔 병사들이 보인다.[45] 이 때문에 4월 21일에 베를린에 진입하고, 4월 30일에 제국의사당을 함락하기까지 1주일이 넘는 시간이 걸린 것이다. 스탈린그라드가 왜 지옥이었는지 기억해 보자.[46] 붉은색 선이 소련군의 진격선이고, 파란색 선이 독일군의 반격 경로이다. 참고로 독일군과 소련군 사이에 길게 그려져 있는 파란 선은 독일군이 전차를 막기 위해 인위적으로 조성한 수로이다. 퓌러붕커는 지도 우하단 브란덴부르크 문보다 살짝 남쪽, 지도의 거의 정확히 우하단 꼭지점 부근에 있었다.[47] 위 지도의 다리들 중 왼쪽에 있는 다리이다.[48]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 이후로 나치 독일 국회는 실제로는 크롤 오페라하우스에서만 열렸기 때문에 어찌보면 제국의사당과 동급 내지는 그 이상의 중요성을 가진 건물이었다.[49] <콜 오브 듀티 : 월드 앳 워>에선 제국의사당 내부에서 SS 의장대가 방어를 하는 것으로 그려졌다. 게임과 마찬가지로 제국의사당은 이때 돔이 붕괴된다.[50] 사진으로만 봐도 매우 튼튼하게 생겼고, 실제로도 전화(戰火)의 한가운데 있었음에도 거의 손상을 입지 않은 것이 보인다.[51] 하나의 포로 대공/대전차 모두를 담당했던 88mm 대공포와는 달리 12,8cm는 대공포(12,8cm FlaK)와 대전차포(12,8 cm PaK 44)가 별개의 물건이었다. 12,8cm FlaK은 그대로 대전차포로 실전에서 사용하기엔 너무 크고 거추장스러웠기 때문이다. 88mm 대공포의 FlaK36과 FlaK41의 관계와 유사하다. 물론 일단 이 대공포탑과 같은 곳에 설치된 상태에서는 대지 사격에 사용해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 처음부터 대지 사격도 감안해서 상하각도를 -3도까지 만들었기도 하고.[52] 왼쪽 위 작게 보이는 건물이 제국의사당이고, 대공포탑은 사진엔 안 나왔지만 오른쪽 아래에 있었다[53] 저런 초대형 콘크리트 요새는 '현대의 성'이라고 불릴 정도로 강하여 당시 존재하던 기술력으론 지진폭탄이나 신형 16인치~18인치급 이상 전함의 함포 사격, 열차포 정도를 동원해야 파괴할 수 있지, 소련군이 현장에서 사용하던 곡사포나 자주포로는 쉽사리 파괴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물론 21세기의 기술로는 벙커도 아닌 저런 지상의 요새는 고정표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54] 다만 후술하겠지만 당시에는 교전 상황이 워낙 급박했기 때문에 제대로 된 소련 국기가 아니라 식탁보를 이어붙여 만든 임시 소련 국기를 게양했다.[55] 대표적으로 카를 쾨르너 원사는 39발의 탄약을 가지고, 39대의 소련군 기갑차량을 격파했다. 한마디로 백발 백중이었던 것.[56] 제2차 세계대전 승전을 기념하는 승리의 날 군사 퍼레이드에는 항상 이 부대 이름이 새겨진 소련 국기가 등장했다.[57] 이 건물이 소련군 수중에 떨어진 시간은 한밤중이었지만, 교전으로 생긴 불길 및 시야 확보를 위해 온갖 조명 수단을 동원해 현장은 비교적 밝았다. 그럼에도 처음 게양된 소련 국기를 관측하던 군관은 밤의 어두움 때문에 저게 소련 국기인지 아닌지 잘 보이지 않아 조마조마하며 식별했다고 한다.[58] 영화 <다운폴>에서 이 둘이 자살한 직후 이들의 시체에 수건을 덮어주는 로후스 미슈의 모습이 나온다.[59] 대표적인 것이 바로 핫소 폰 만토이펠이었다. 자신의 사령부로 침입한 소련군들을 직접 쏴 죽인 다음 서방 연합군 진영으로 탈출했다.[60] 강 반대편에 도달한 독일군과 피난민은 몇 명씩 무리를 지어 미군 점령지 후방으로 행군했다.[61] 한국에서 이대영(미술인)은 이를 소재로 한 디오라마를 제작하기도 했다.[62] 신문 기사 제목이 영어로 적혀 있고 The Montreal Daily Star라고 써져 있다.[63] 유리 레비탄은 독일의 침공 사실을 알리며 독소전쟁 개전 선언을 알렸던 바로 그 당사자다.[64] 심지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리는 행사에는 가끔 미군이 초청받아 러시아군과 함께 시가 행진을 하기도 한다. 물론 2014년 이후 러시아와 서방의 관계 악화로 미국과 서유럽 인사들이 참여하지 않는 사례가 더 많아졌다.[65] 오른쪽의 두 명은 소련군 장교들이다.[66] 당시 국민돌격대와 독일군 병사들은 건물 잔해 뒤에 숨어 있다가 기습적으로 판처파우스트를 발사하는 전략을 썼는데, 여기에 당한 소련군 전차가 엄청나게 많았다.[67] 정확히는 오데르-나이세 공세부터 베를린 시가지 소탕 작전 완결까지의 총 전차 손실이 1,997대, 항공기 손실이 997대이다.[68] 일견 이해가 안될 수도 있는데 독일군이 아무리 상태가 안 좋았어도 독일군은 독일군이었고, 전투의 형태가 소모가 극심하다는 시가전인 데다가 베를린은 독일의 수도이니만큼 절대 작은 도시가 아니었다. 독일군은 방어자의 입장에서 되는 대로 온갖 준비를 하고 전투를 했다.[69] 칫솔 수염과 기름 바른 머리까지 재현했다.[70] 소련군도 웃겼는지 같이 웃고 있다.[71] 저 소련군이 러시아어로 소통을 시도해서 아예 언어 차이로 인해 대화가 안 됐거나, 소련군이 독일어로 소통을 시도했으나 독일어가 서툴렀거나 러시아 억양 때문에 발음이 부정확해서 말을 못 알아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나중에 독일어에 능숙한 소련군 장병이 통역을 해 줘서 실랑이가 풀렸다고 한다.[72] 이 증언을 한 병사의 부대에서는 부대장이 이런 원칙을 세워 폴란드 여성은 돌려보냈을 지도 모르나, 당시 소련군의 점령지역 약탈 및 강간은 체계적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었기에 소련편이었던 국가의 여성이나 나치 독일의 피해국인 폴란드 및 체코슬로바키아 여성들도 소련군이 강간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애초에 소련군 최상위 지휘부의 공식적인 원칙은 강간을 하지 말자는 쪽이었지만, 현장에서는 지켜지지 않았고, 부대 간부들의 성향에 따라 결정되었던 것이다. 현재 조사된 기록상 독일계가 아닌 순수 폴란드계 여성도 최소 100,000명이 소련군에게 강간당했다. 사실 전세가 뒤집히기 전 나치 독일군의 전성기였던 전쟁 초•중기에는 그보다 더 많은 폴란드 여성이 독일군에게 강간당했다[73] 출처: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Russia's War), 351쪽[74] 밀로반 질라스의 회고록은 서구 및 반스탈린 성향의 학자들에 의해 상당히 많이 인용되는 편이다.[75] 참고로 전후 1950년대에 소련과 동독이 피해자들에게 배상을 위해 방문했으나 오히려 피해자들이 그 정도 해준 것만도 되려 고맙다고 말한 바 있었다는 얘기가 있는데 정확한 출처나 진위 여부는 밝혀진 바가 없어 거짓일 가능성이 높다. 오히려 동독 민간인들은 소련이 베를린에 세워놓고 간 소련군 무명용사의 무덤을 "무명강간범의 무덤"이라고 부르곤 했는데, 자신들에게는 반성이 "강요"되고, 소련군의 비행에는 면죄부가 주어진 것을 동독인들은 불만스럽게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냉전 말에 소련과 동독 정부가 당시 피해자들 중 일부에게 어느 정도의 배상을 한 적이 있고, 전후 소련에서 배상은 못해도 사죄는 해야 되는 게 아니냐는 여론이 일부 있긴 했다. 소련과 동독이 전후 배상하려 했다는 것을 두고 '이는 동독과 소련측의 주장이니 가려 들을 필요가 있다'고 악담하는 경우도 있다.[76] 미군이나 북유럽 쪽에서도 성폭력 사례들이 있다.[77] 그런데 2023년 현재 전쟁중인 우크라이나에서 유럽연합이 러시아를 상대로 변기 등 화장실 용품 수출을 제한하자 러시아군 병사들이 우크라이나에서 변기를 약탈해 본국으로 보내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78] 물론 추축국 가운데 나치와 일제는 용서받을 수 없는 악질 중의 악질이었음이 분명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소련군 역시 연합군 내에서 가장 잔악한 군대였다. 미군과 영국군은 카틴 학살과 같은 점령지 내 민간인 대학살은 물론 추축국 민간인에 대한 개인적인 보복은 되도록 자제한 편이었다. 반면 소련군은 주요 추축국 3국 중 가장 온건했던 이탈리아보다도 훨씬 악질적이었다. 단지 소련은 주요 승전국이었고, 또한 독소전쟁에서의 피해가 소련이 폴란드, 핀란드, 발트 3국 등 주변국에 입힌 피해를 크게 초월하게 되었기 때문에 소련의 전쟁범죄는 유야무야 넘어간 것이다.[79] 지금 분위기를 생각하면 상상하기 힘들지만, 히틀러와 나치당이 독일에서 절대악처럼 비판받고 프랑스, 폴란드, 체코, 네덜란드 등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로부터 피해를 입은 주변 유럽 국가들에게 나치 침략사에 대해 사과 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 것은 더 훗날의 이야기이다. 미국은 소련을 적으로 삼고, 반공을 강조하기 위해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에 관련된 과거사 청산에 비교적 소홀했다. 참고로 서독이 지금의 독일과 같이 나치즘 관련 과거사 반성 및 사죄에 철저하게 된 것은 68운동과 동방 정책 이후인 1970~80년대부터였다.[80] 독소전쟁사에 대해 약간의 이해도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소련군 병사가 스탈린그라드에서부터 베를린에 이르기까지 3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수많은 전투에 참전해서 끝까지 살아남는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이해할 것이다. 당장에 스탈린그라드 전투만 보더라도, 전투가 가장 치열하던 시기에는 스탈린그라드에 처음 투입된 소련군 병사의 평균 생존 기대 시간이 고작 하루에 불과했을 정도로 암담한 상황이었고, 스탈린그라드 이후로 전세가 소련 쪽으로 기울었다고는 하지만 이후로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수백 회의 치열한 전투를 더 치르며 무수히 많은 소련군 병력들이 죽어나가야 했다. 이처럼 지옥같았던 독소전쟁에서, 스탈린그라드 전투부터 참전해서 3년여 동안 베를린까지 진격해 나가면서 그토록 치열하고 참혹했던 수많은 전투의 최전선에서 싸우며 끝까지 살아남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들은 가히 전설적인 존재인 것이다. 단순히 수치적으로만 생각해 봐도, 1개 사단의 편제 병력이 1만 명이 넘는 정도인데 여기에 3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손실 병력이 지속적으로 충원되었을 것을 고려하여 연인원으로 환산하면, 대략 수십만 명의 인원 중 처음부터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이 단 18명에 불과한 것이다.[81] 정식 부대명칭은 붉은 군대 제1벨로루시전선군 제3충격군 제79군단 제150 '이드리차' 소총사단이다.[82] <월드 앳 워>의 소련군 미션 주인공인 디미트리로 플레이할 때도 미션 시작시 이 부대 소속으로 표시된다.[83] 하술하겠지만 원래는 소련군 점령지역이었을 때 공사를 했지만 베를린을 분할하던 과정에서 영국군 구역으로 넘어가게 되었다.[84] 콜은 아내가 12살 때 소련군에게 강간당했지만 독일 총리였기 때문에 공사 구분이 뚜렷했다. 따지고 보면 콜의 아내가 강간당하는 근본적 원인을 제공한 장본인은 아돌프 히틀러였다.[85]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서베를린 쪽으로 약간 더 들어가야 한다.[86] 요약하면 적백내전으로 들어온 Mk 전차가 종전 후 다른 1차대전 병기들과 함께 전시되었다가 전시하던 지역이 독일군에게 점령당한 뒤 베를린으로 넘어왔다는 이야기다.[87] 그중에서도 판처슈렉 6문 탑재형인 보르크바르트 4호 "Wanze" 이다.[88] 월탱에서 포르쉐 티거를 풀업하면 나오는 사양이다.[89] 이 과정에서 포수가 사망했다고 한다.[90] 이렇게 적어놓으면 왠지 전투력이 떨어지는 것 같지만, 불량품이 아닌 이상 어차피 다 같은 티거 전차 부속품들이라 저렇게 만들어도 하자는 전혀 없었다.[91] 훔멜은 본래 포병용 자주포이나 전황이 급해지자 직사 사격으로 운용하다 격파된 것으로 추정된다.[92] 사진 속 판터는 위 사진에 토치카로 쓰인 판터와 달리 치메리트 코팅조차 되어있지 않은 초기형이다. 훈련용을 꺼내 온 것으로 추정되며 큐폴라와 포방패의 모양으로 보아 A형으로 보인다.[93] 다만 이 사진은 베를린 전투가 아니라 동부전선의 다른 전투에서 찍혔다는 주장이 존재하는 만큼 사실 확인이 필요하다.[94] 독일군이 베를린 전투에서 노획한 셔먼 전차를 사용했다는 기록은 없는 관계로 저 셔먼은 소련군이 랜드리스로 공여받은 셔먼 전차로 추정된다.[95] 출처: 제국의 지배/ 티머시 H.파슨스 지음/ 장문석 번역/ 까치[96] 본래 지하철은 전쟁 발생시 자연스럽게 민간인과 군인들의 방공호 역할을 맡는다. 일단 어느정도 깊이가 있는 지하에 지어지기에 포격과 공습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안전하고, 역들끼리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동도 용이하다.[97] 베를린은 마지막 빙하기가 끝날 때 빙하가 녹으면서 생긴 늪지대에 세워진 도시라 땅을 2~3m만 파도 지하수가 쏟아져 나온다. 오죽하면 이름부터 고대 슬라브 선주민의 언어로 "물기 많은 땅", 즉 습지라는 뜻이다.[98] 맨 마지막 사진에서 독일 군인이 쓰고 있는 철모가 팔쉬름예거 용으로 개발된 특수 슈탈헬름이다. 일반 슈탈헬름과는 귀덮개의 유무로 구분할 수 있는데 강하할 때 귀덮개가 걸리적거린다는 공수부대원들의 의견을 고려해 설계해서 그렇다. 다만, 실제로는 이미 궤멸직전이었던 팔쉬름예거보다는 그냥 팔쉬름예거용 철모를 쓴 국민돌격대/국민척탄병 대원일 가능성이 더 높다.[99] <콜 오브 듀티: 월드 앳 워> 소련군 베를린 미션 중에서도 위 사건을 묘사한 장면이 나와 디미트리 페트렌코와 빅토르 레즈노프가 익사할 뻔한다.[100] 유심히 보면 알수 있겠지만 이 판터는 3.3 문단의 그 판터다.[101] 위 동영상에 4:21초에 보면 Reichskanzlei(수상관저) 동판에 "Ну вот твою бабушку и мы здесь" 라고 적혀 있다. 직역하면 "뭐 우린 여기에 너네 할머니하고 같이 있어." 의역하면 '너네 할머니랑 함'이다.[102] 특히 소련이 본인의 국가를 재건하기 위해 악착같이 있는 거 없는 거 털어갔고, 점령지에서 독일인을 지켜줄 이가 없다보니 강도나 성폭행 문제도 심각했다.[103] 약 4,000,000명 이상의 독일군 포로가 소련의 포로수용소에서 살았으며, 많은 수가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죽어나갔다.[104] 그러나 이때 여성의 힘이 커졌기에 독일은 유럽에서 가장 여성의 인권이 발달되었다. 미국과 영국의 군인들이 전쟁이 끝나고 돌아와 자국 여성이 남성 대신 가지고 있던 것들(직장, 참정권)을 빼앗은 것과는 대조되는 것이 아이러니하다.[105] 해발 120m인 토이펠스베르크(Teufelsberg). 서베를린 쪽에 위치했으며 이 산에는 미군의 감청 기지가 들어섰다.[106] 독소전쟁의 상황을 보면 1944년부터 독일군이 초반의 기세를 잃고 패퇴하게 된 데는 대부분 이 인간이 있었다. 물론 1943년에 쿠르스크 전투의 결과로 이미 전세는 소련에게 기울어진 상황이었으나 아직까지는 상당한 전력을 갖춘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소련군이 공세를 시작했을 때 기동 방어를 금지하고 무조건 위치 사수를 명령해 포위-섬멸되게 만드는 원인을 제공했다. 물론 저런 지시가 없었어도 기동력의 차이로 포위-섬멸을 피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1944년 8월 19일 이후 이미 패전이 보이는 상황이기는 했어도 안 그래도 부족한 병력을 공세에 투입한다며 서부전선에 배치시켰다. 이 야심찬 공세는 연료 부족으로 인해 실패했고 패전을 몇 달 앞당기게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그 버릇을 못 고쳤다. 덕분에 연합군은 보다 적은 피해로 보다 빠르게 전쟁을 끝낼 수 있었다.[107] 장갑척탄병의 주인공 프란츠의 친구. 프란츠는 베를린 1945에서도 잠깐 등장한다.[108] 나치가 집권한 뒤로 쓰이지도 않던 건물이라는 식으로 묘사한다.[109] 여기서 그 유명한 Flak 41 8.8cm 대공포까지 깔려있다.[110] 실제 역사처럼 양측 장비류가 모두 나오는 맵이기도 하다.[111] 다만 '주인공 대단해' 정도로 전개된 것은 아니고, 발터 모델의 반격으로 원 역사에선 없던 손실인 미 육군 2군단의 완전 소멸을 불가피하게 겪어야 했다. 킴 본인도 죄책감을 드러내며 씁쓸해한 부분.[112] 본 모드에서 소련군은 우호적 NPC가 아니라 그냥 시체들로 등장하며 베를린 공방전이 진행중이라 에피소드 초반 몇 레벨은 소련군의 포격으로 인한 지진 효과로 조준점이 흐트러진다. 개중에는 바르샤바 봉기나 벨라루스 초토화관련 레퍼런스인지 비밀 구역 중에는 슈츠슈타펠 화염방사병들이 재미로 소련군 포로들을 불로 태워 죽인것을 암시하는 공간도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