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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7년 ~ 1918년 | ||
국가전쟁기 | ||
표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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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성 | ||
합동 육군 황립 및 왕립 해군 황립 및 왕립 란트베어 왕립 헝가리 방위군 왕립 크로아티아 도모브란스트보 | ||
총 병력(1917년) | ||
약 780만 명 | ||
전투함 전력 | ||
드레드노트급 전함 3척(1척 추가, 2척 손실) 전/준드레드노트급 전함 9척 해방전함 4척(1척 손실) 장갑순양함 3척 방호순양함 7척(3척 추가, 2척 손실) 구축함 25척(5척 추가, 4척 손실) 잠수함 5척(21척 추가, 8척 손실) | ||
주요 사건 | ||
1867년 창군 1901년 의화단 전쟁 참전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1918년 해체 |
1. 개요2. 체계3. 수뇌부
3.1. 1914년
4. 역사4.1. 신성 로마 제국 합스부르크 왕조 시절(~ 1806)4.2. 오스트리아 제국 시절(1804 ~ 1867)4.3.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절(1867 ~ 1918)4.4. 해산
5. 상세5.1. 특징5.2. 장비5.3. 군복5.4. 문제점
6. 편제7. 군종5.4.1. 민족 및 의사소통 문제5.4.2. 탈영병 문제5.4.3. 예산 문제
5.5. 외국과의 관계5.4.3.1. 과도한 해군
5.4.4. 장비 부족5.4.5. 지정학적 문제5.4.6. 밀실 외교 개입5.4.6.1. 반론
5.4.7. 탄압과 전쟁범죄7.1. 육군
8. 계급9. 주요 인물10. 주요 참전 이력11. 관련 서적12. 기타13. 각종 매체에서의 등장7.1.1. 근위대7.1.2. 합동 육군
7.2. 황립 및 왕립 해군7.1.2.1. 황립 및 왕립 항공대
7.1.3. 황립 오스트리아 및 왕립 보헤미아 란트베어7.1.4. 왕립 헝가리 방위군7.1.4.1. 왕립 크로아티아 방위군
7.1.5. 예비군과 비정규병, 외인부대[clearfix]
1. 개요
1913년, 빈에서 열린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와 바그람 전투 100주년 기념식에서 행진하는 제국군 | 1917년, 풀라 항에 정박한 제국 해군 주력함대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군대이다. 신성 로마 제국 합스부르크 왕조의 사병인 황제군을 기원으로 한다. 이후 오스트리아 제국군을 거쳐 1867년 대타협으로 재편되어 창설되었으며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 패전으로 제국이 해체됨에 따라 해산되었다.
해체 후 유산은 오스트리아 연방군과 체코슬로바키아군, 유고슬라비아 왕국군, 헝가리 왕국군과 폴란드군 등으로 흡수되었다. 역사적으로 이들을 공식적으로 계승한 것을 표방하는 군대는 현대의 오스트리아군과 헝가리군이다.
2. 체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두 나라가 연합 형태를 취하고 있던 제국의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매우 복잡했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합동 육군을 중심으로 오스트리아 및 헝가리 각자의 방위군인 란트베어와 혼베드를 포함한 육군 3개와 해군으로 구성되었다.2.1. 황립 및 왕립 전쟁성
▲ 빈 제1구 슈투벤링의 전쟁성 청사. 1913년 건설되었다. 현재는 오스트리아 연방정부 청사(Das Regierungsgebäude)로 이용 중이다. 정문 앞의 동상은 요제프 라데츠키 원수의 기마상이다.
K.u.k Kriegsministerium
제국의 중앙 군사 업무는 1867년 대타협으로 인해 설립된 빈의 전쟁성에서 관장하였다. 오스트리아 제국군 시절의 중앙전쟁위원회(Hofkriegsrat)를 계승한 전쟁성은 평시에는 합동 육군과 해군에 대한 군정권만을 가지고 있었으나, 전시에는 모든 방위군을 표괄했다.
예하제대에 대한 내용은 전쟁성 문서로.
2.2. 황립 및 왕립 군사령부
자세한 내용은 황립 및 왕립 군사령부 문서 참고하십시오.2.3. 구성국 향토방위군 국방성
2.3.1. 황립-왕립 국방성
2.3.2. 왕립 헝가리 국방성
란트베어의 평시 군정권은 빈의 오스트리아 제국 황립-왕립 국방성(K.k. Ministerium für Landesverteidigung)에서, 헝가리 혼베드의 군정권은 부다페스트의 왕립 헝가리 국방성(K.u. Honvédministerium)에서 관장하였다. K.k 국방성은 오스트리아 제국 정부에, K.u 국방성은 헝가리 왕국 정부에 속했다.3. 수뇌부
통수권자는 당연히 황제였다.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제국의 설립 이전부터 1914년까지 총사령관(Oberkommandierender der Streitkräfte Österreich-Ungarns)을 역임했다. 그러나 황제 본인이 1866년의 보오전쟁 이후 군사 문제에 직접 관여하는 것은 꺼린 데다 노환으로 인해 막중한 군사 업무를 수행하기에는 무리가 있었기에, 1차 대전이 터진 이후 테셴 공작 프리드리히 대공에게 직책을 위임했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사후에는 새 황제인 카를 1세가 총사령관직을 물려받았고, 제국 멸망 직전 헤르만 쾨베시 폰 쾨베슈하저 원수가 마지막으로 잠시 총사령관직에 올랐다.그 다음 직위라 할 수 있는 전군총감(Generalinspektor der gesamten bewaffneten Macht)과 1914년 1차대전 발발 이후 신설된 육군 총사령관(Armeeoberkommandant), 그리고 해군감(Marineinspekteur) 역시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을 비롯한 합스부르크 황실 일원이 맡았다. 이 직책들은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대리인에 가까웠다. 그 외에도 군의 원로였던 프리드리히 폰 벡지코프스키 등이 총사령관 대리 자격으로 군 문제에 관여하였다.
그러나 실질적인 군의 운용은 당연히 전쟁성 장관 알렉산더 폰 크로바틴 대장과 K.k 국방성 장관 프리드리히 폰 게오르기 보병대장, 그리고 K.u. 국방장관 자무엘 폰 허저이 중장이 가지고 있었다. 또한 야전의 병력 운용은 황립 및 왕립 군사령부 소속의 일반참모부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개전 이후에는 일반참모부가 개편된 육군총사령부(Armeeoberkommando)가 담당하였다. 육군총사령관은 테셴 공작 프리드리히 대공이었으나 실권은 그 밑의 참모총장(Chef des Generalstabes)이 가지고 있었다. 황제와 독대가 가능했다는 점에서 총참모장직의 위세를 잘 알 수 있다. 1914년 당시 참모총장은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보병대장으로, 그는 황제의 매(Falke des Kaisers)라 불리기도 했다. 또한 콘라트를 포함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원수의 자리에 도달했던 인물은 오직 9명뿐이었다.[1]
자세한 내용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제국원수 문서 참고하십시오.
해군의 경우에도 실 작전 권한은 해군감인 카를 슈테판 대공이 아닌 해군총사령관(Oberkommandant der Marine)이자 함대사령관(Flottenkommandant)인 안톤 하우스 대장이 쥐고 있었다.
3.1. 1914년
- 제국 수뇌부
통수권자 | 오스트리아 제국 총리 | 헝가리 왕국 총리 | 오스트리아 제국 외무장관 | 성 이슈트반 왕관령 외무장관 |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 | 카를 폰 슈튀르크 백작 | 티서 이슈트반 백작 | 레오폴트 폰 베르히톨트 백작 | 부리안 이슈트반 백작 |
전군 총사령관 육군감 [겸임.] | 합동 육군 사령관 황립 및 왕립 전쟁성 장관 [겸임.] | 육군 참모총장 |
육군 보병대장 프리드리히 폰 외스터라이히테셴[4] | 육군 포병대장 알렉산더 폰 크로바틴 남작[5] | 육군 보병대장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남작[6] |
- 황립 및 왕립 전쟁해군 수뇌부
해군감 | 해군최고사령관 전쟁성 해군부장 함대사령관 [겸임.] |
해군 대장 카를 슈테판 대공 | 해군 대장 안톤 하우스[8] |
- 구성국 육군 수뇌부
오스트리아 제국 | 성 이슈트반 왕관령 | ||||
황립 및 왕립 국방성 장관 | 황립 및 왕립 란트베어 사령관 | 왕립 헝가리 국방성 장관 | 왕립 헝가리 방위군 사령관 |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 영작 | 왕립 크로아티아 방위군 사령관 |
육군 보병대장 프리드리히 폰 게오르기 남작[9] | 육군 보병대장 프리드리히 폰 외스터라이히테셴[겸임] | 육군 소장 자무엘 폰 허저이 남작[11] | 육군 기병대장 프란츠 로어 폰 덴타 남작[12] | 이반 스케를리치 남작 | 육군 소장 슈테판 사르코티치 폰 로프첸 남작[13] |
4. 역사
4.1. 신성 로마 제국 합스부르크 왕조 시절(~ 1806)
자세한 내용은 황제군 문서 참고하십시오.4.2. 오스트리아 제국 시절(1804 ~ 1867)
자세한 내용은 오스트리아 제국군 문서 참고하십시오.4.3.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절(1867 ~ 1918)
4.3.1. 대타협
4.3.2. 19세기 말
4.3.3. 20세기 초
4.3.4. 7월 위기
사라예보 사건이 일어나 황위계승권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사망하자 오헝 제국은 사건 주동자인 검은 손의 배후에 세르비아 왕국이 있다고 생각했다. 오헝 제국의 외교를 담당하던 외무장관 레오폴트 폰 베르히톨트는 이를 제국에 대한 도전이라고 생각했다. 더불어서 보스니아에 눈독을 들이며 영향력을 펼치려고 하는 세르비아가 제국에게 가장 큰 위협이라 여겼던 제국군 참모총장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또한 무력을 써서라도 세르비아를 제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동안 유화노선을 채택해 온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마저 사라졌으니, 콘라트의 전쟁 불가피론은 의회를 휘어잡았다. 레오폴트 폰 베르히톨트 외무장관,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참모총장, 오스트리아 제국 총리 카를 폰 슈튀르크 백작, 재무장관 레온 폰 빌린스키, 국방장관 알렉산더 폰 크로바틴이 대표적인 예방전쟁을 주장한 인물들이었다. 사라예보에서 황태자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오스카르 포티오레크 보스니아 총독도 강경파에 합류했다. 이 6인의 전쟁론자들은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 안그래도 빛이 바래가는 합스부르크의 영광을 되찾고 세르비아의 싹을 잘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베르히톨트는 전쟁 불가피성을 인식하면서도 순서가 있다고 주장했으며, 일단 세르비아에 반오스트리아 조직을 해체하고 피격사건의 책임자를 축출할 것을 요구하는 게 우선이라고 주장했다. 선전포고는 그 다음이었다.초기에는 각료들의 반대가 적지 않았으나 시간이 흐름에도 세르비아가 발뺌하자 헝가리의 총리 티서 이슈트반 백작을 제외한 의회 모두가 찬성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그러자 슈튀르크 총리는 강경파와 온건파의 얘기를 종합해 “수사 상황을 좀더 지켜보고 결정하자”고 주장했다.[14] 한편 가장 중요한 군 통수권자이자 제국의 수장인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반대에 가까운 편이었다. 티서와 같은 의견이라서가 아니라, 혹시라도 전쟁이 일어난다면 슬라브인들을 전쟁에 동원해야 하고 그러려면 슬라브인들에게 많이 양보해야 하니 전쟁에 매우 부정적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기에는 황실의 후계자가 적국이 배후로 보이는 암살단에게 대낮에 저격을 당한 상황에서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다. 베르히톨트는 최후 통첩안을 작성하여 황제에게 전달하였지만 황제는 독일의 지지 없이는 전쟁을 할 생각이 없었다.
한편 베르히톨트가 가장 우려한 것은 세르비아와 전쟁을 벌이면 범슬라브주의를 주창하는 러시아가 개입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었다. 세르비아와 전쟁을 벌인다면 승리를 장담할 수 있겠지만 열강 중 하나인 러시아가 세르비아를 도와 가세한다면 전쟁이 국지전에서 그치지 않고 최악의 경우 장기전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은 매우 높았으므로,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독일의 지지가 필수적이었다. 그래서 베르히톨트는 독일의 의중을 확인하기 위해 헝가리의 외무 보좌관 알렉산더 폰 호요스 백작(Alexander Graf von Hoyos)을 베를린에 보냈다. 호요스는 베르히톨트가 작성하고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서명한 서한을 들고 베를린에 도착했고, 베를린 주재 오스트리아 대사는 7월 5일 포츠담 궁을 찾아 빌헬름 2세와 오찬을 하면서 국서를 전달하고 황제의 의중을 물어보았다. 빌헬름 황제는 오스트리아의 세르비아 침공계획에 “전폭적으로 지지한다”면서 내각과 의논해 보겠다고 했다. 빌헬름 황제는 그날 테오발트 폰 베트만홀베크 총리와 참모총장 등을 불러 자신의 견해를 물어보았다. 총리와 군부는 황제의 생각에 모두 동의했다. 베트만 총리는 황제의 대답을 ‘백지 수표’(blank cheque)나 다름 없다고 보았다. 즉 오스트리아가 전쟁을 벌이면 독일은 무조건 지원한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판단에는 오스트리아의 정당성이 명확하므로 전쟁이 세계대전으로 확전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빌헬름 황제의 낙관적인 판단이 바탕이 되었다. 그러다 군부는 빌헬름 황제와 생각이 달랐다. 전쟁이 세계대전으로 확대될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리하여 콘라트와 베르히톨트는 마침내 독일의 지지를 받아내었다. 충분한 명분을 가진 상황에서도 고심하던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독일의 지지를 확인하였고, 그제서야 베르히톨트가 내민 동원서에 동원 명령을 서명하고 만다. 미온적으로 굴다가 끝내 결정한 행동이 프란츠 요제프 1세 인생에서 가장 치명적인 실수였다.[15]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선 내각과 군부가 참여한 합동회의가 열렸다. 강경파는 세르비아를 기습 공격하자고 주장했다. 이에 티서 총리는 전쟁에도 절차가 있으며, 개전 이전에 합법적 명분을 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날 회의에서는 세르비아에 최후통첩(ultimatum)을 보내기로 합의했다. 최후통첩은 전쟁으로 가는 선행단계에 불과했다. 세르비아가 수용할 수 없는 강력한 요구가 들어가야 했다. 수차례 문구 수정을 거쳐 최종 문서가 7월 19일에 마련되었다.[16] 최후통첩을 보내고 답변을 기다리는 사이에 군부는 병력을 동원하고 전쟁물자를 조달하는 시간을 갖기로 합의했다. 세르비아로서는 적국 황위 계승자를 죽였다는 원죄를 안고 있었기에 오스트리아의 최후통첩 가운데 가능한 한 요구를 받아들이려 노력했다. 최후통첩 10개 항목 가운데 주권 침해요소가 강한 두 개 항목을 제외하고 모두 수용했다. 테러 배후인물인 탄코시치 소령도 두나브(Дунав) 사단 감옥에 수감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막지 못했다. 황태자를 잃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분노가 워낙 강했기 때문이었다.[17]
4.3.5. 전쟁 계획
1914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러시아 제국의 병력 분포. 오헝 제국군은 R 계획에 따라 러시아 방면에 4개 군을, B 계획에 따라 세르비아 방면에 3개 군을 배치했다. 한편 러시아 제국군은 오헝 제국과 접한 남서전선군 휘하에 4개 군을 배치했다. 러시아는 독일이 프랑스 방면에 집중할 경우 A 계획을 발동하여 이들 4개 군을 오스트리아 방면으로 진격시킬 예정이었다. 만일 독일이 러시아 방면에 주력군을 배치한다면 G 계획을 발동하여 남서전선군의 제4군을 독일 방면으로 빼낼 계획이었다. |
원래 오스트리아는 양면전쟁을 고려할 필요가 딱히 없었다. 19세기의 오스만 제국은 오늘내일하는 유럽의 환자였던데다, 발칸 방면으로 슬금슬금 남하하는 러시아에 대항한다는 측면에서는 오스트리아의 동맹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그리하여 제국의 부황제(Vizekaiser)라고까지 불리던 노장 프리드리히 폰 벡지코프스키[18] 백작이 총참모장이었던 세기말과 20세기 초에 오헝 제국군은 주력군을 전부 러시아 방면으로 배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발칸반도 국가들이 오스만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특히 1903년 세르비아에서 벌어진 쿠데타로 친오스트리아적 오브레노비치 왕조가 참살되고 친러시아 정부가 수립되면서 오헝 제국의 남부 전선 또한 안전을 담보할 수 없게 되었으며, 이는 제국군 총참모부에게 쉽지 않은 난제로 작용했다. 특히 1910년대의 발칸 전쟁으로 세르비아가 급격하게 성장한 것은 결코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추가적으로 동맹인 이탈리아 또한 미심쩍은 대상이었으며, 루마니아 또한 완전히 신뢰할 수 없는 국가였다. 제국군 총감찰관이 된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개혁에 앞서 황제에게 벡지코프스키의 해임을 요구했고, 1906년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를 총참모장 자리에 앉혔다.
공격이 최우선이라는 지론을 가지고 있던 회첸도르프는 우선 시급한 문제인 러시아와 세르비아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러시아만을 상정한 R 계획, 세르비아만을 상정한 B 계획, 러시아와 세르비아를 모두 상정한 R+B 계획, 그리고 부가적으로 이탈리아를 상정한 I 계획이 수립된다. 군 또한 크게 3개 집단군으로 나뉘었다. 동원 가능한 48개 사단의 절반 가량은 A 집단군 소속이 되어 러시아를 상대했으며, 만일 이탈리아가 전쟁에 참전한다면 이들 또한 상대할 것이었다. 발칸 최소집단군에는 8개 사단이 배속되어 남부 국경을 지키고 유사시 세르비아로 진격하는 선봉장을 맡을 것이었다. 그리고 나머지들은 B 집단군 소속으로서 상황에 따라 A 집단군과 발칸 최소집단군을 지원할 것이었다.
이는 일견 어정쩡해 보이는 계획이지만, 오스트리아 입장에서는 최선의 계획이기도 했다. 우선 세르비아와의 전쟁이 조금이라도 장기전으로 가면 러시아가 개입할 것은 자명했다. 그렇다면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와 세계 2위의 러시아 육군의 압도적인 공격에 포위되고 말 것이다. 제국은 분명 열강이었으나, 이러한 상황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오스트리아 입장에서는 러시아가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전에 전쟁을 발칸에서의 국지전으로 국한하고, 압도적인 군대를 투입해 세르비아를 빠르게 끝내버리는 것이 이상적인 선택이었다. 가능하다면 충분한 명분을 가지고 세르비아를 먼저 쳐서 빠르게 없애버림으로써 후환을 제거하는 것이 군사적으로 보다 더 이상적인 결과였다.
하지만 문제는, 이 계획이 만일 실행되었을 때 러시아 제국군이 예상을 깨고 갈리치아를 침공한다면 이를 막을 수 없다는 점에 있었다. 지도에서 볼 수 있듯 러시아 남서전선군 병력만 하더라도 역시 4개 집단군에 육박했다. 그렇기에 이 시나리오대로라면, 오스트리아군이 세르비아로 몰려간 동안 러시아는 여유롭게 보헤미아 왕국이나 카르파티아산맥의 통로들을 장악할 수 있었다. 이는 오헝 제국의 심장부가 위험에 빠진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오헝 제국은 세르비아 방면의 군사적 승리와는 별개로 전쟁에서 완전히 패배하게 된다.
그래서 러시아 쪽에 대부분의 군사력을 집중하는 것이 조금 더 리스크를 줄일 수 있는 선택이었으나, 이 또한 문제가 있었다. 결국 이는 러시아의 참전과 장기전을 전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헝 육군의 대부분을 그러모아도 러시아 육군과 유의미한 승부를 띄울 수는 없었으며, 상술한 대로 장기전은 오스트리아의 패배를 의미했다. 또한 이는 공공연히 보스니아를 노리면서 분쟁을 일으키는 세르비아를 놔둔 채, 빈과 헝가리 평원 등 제국의 중심부로 향하는 고속도로인 다뉴브강과 세르비아가 그토록 원하는 남슬라브인들의 땅[19]의 관문인 보이보디나를 내어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발칸 전쟁으로 인해 세르비아의 군사력은 증가하고 있었으므로, 오스트리아는 안전을 위해 발칸 최소집단군 정도는 남쪽에 남겨 놓아야 했다. 그리고 러시아의 간섭 명분을 사전에 차단해버릴 수 있는 세르비아와의 단기일전의 이점을 포기할 수는 없었기에, B집단군도 예비로 빼두어야 했다. 이들을 곧바로 세르비아 방면으로 투입한다면 전쟁 종결을 앞당길 수 있으며, 러시아 쪽의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더라도 발칸 전선에서 빼오는 것보다는 좀 더 빠르게 갈리치아로 증원군을 보낼 수 있을 것이었다.
즉 오헝 제국군의 이 유동적인 계획은 모든 가능성과 선택지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오스트리아의 지정학적 딜레마가 반영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가능성들을 살펴보았을 때, 모든 결론들은 러시아의 참전 가능성과 오스트리아의 열세라는 암울한 결과를 가리켰다. 그래서 오스트리아가 전쟁 계획 수립과 별개로 동맹 독일의 참전 약속을 받아내기 위해 그토록 애썼던 것이다. 만일 독일 제국군이 참전한다면 오스트리아와 함께 러시아령 폴란드에 포진한 러시아 제국군을 남북에서 포위섬멸할 수 있을 것이었다. 이것이 그나마 오스트리아 입장에서 현실적으로 이뤄낼 수 있는 가장 최선의 결과였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동상이몽을 꾸고 있었다. 독일은 자신들의 작계인 슐리펜 계획의 성공을 위해서 오스트리아가 러시아를 상대해주기를 원했으나, 정작 독일군의 주력은 프랑스를 향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두 국가 간에는 긴밀한 공조가 필요했지만, 막상 전쟁 직전까지 두 군대는 서로의 계획에 대해 전혀 논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불통에 대해 사학자 A.J.P 테일러는 저서 "기차 시간표 전쟁"에서 '놀라울 정도'라고 표현했다. 심지어 독일의 슐리펜 계획은 독일 외무부조차 모르고 있던 내용이었다. 독일은 독일대로, 오스트리아는 오스트리아대로 서로에 대해 막연한 기대감을 가졌을 뿐, 어떻게 군을 움직일 것인가, 공동의 우선적인 목표는 무엇인가 등에 대해 전혀 합의점을 마련하지 않았다.
결과는 대혼란이었다. 러시아가 동원령을 선포하고 독일이 슐리펜 계획을 발동하자 오스트리아는 최악의 상황에서 최악의 적을 맞게 된다. 당초 세르비아만을 상정하여 플랜 B를 발동했던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의 총동원 소식과 독일의 닦달로 B+R 계획으로 전환, B집단군을 다시 갈리치아 방면으로 보내야 했다. 이 때문에 후방의 세르비아를 상대하려 병력을 쪼갠 상황에서 A 집단군은 B 집단군이 도착할 때까지 러시아군 주력을 홀로 상대해야 했다. 심지어 러시아군은 프랑스의 도움[20]과 독촉 덕에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예상했던 것보다도 더 빠르게 동원을 마무리지은 상태였다. 반면 발칸 최소집단군은 증원 예비대가 갑자기 빠져 버리면서 홀로 세르비아 침공에 나서야 했다. 작계가 뒤섞이며 꼬여버렸으니, 당연히 결과는 1914년 말의 파멸적인 패배 뿐이었다.
4.3.6. 제1차 세계 대전
제국군은 전면전을 대비한 동원령이 발령될 경우 16만이었던 병력을 최대 330만까지 증강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국력의 쇠퇴에 따른 재정 부담으로 인해 국방비를 지속적으로 절감해 왔기에 단지 병력만 늘린다고 전력이 대폭 증가되기는 어려운 상태였다. 전쟁 전 오스트리아의 국방비는 독일이나 러시아의 25퍼센트 수준 밖에 되지 않아 당연히 질적 수준이 뒤질 수밖에 없었다. 황제의 서명을 얻어낸 것이 무색하게도, 제국군은 제대로 된 준비를 하지 못했다. 콘라트가 제국군의 처한 상황을 직시하지 않은 채 세르비아를 어떻게 조질 것인가만을 생각하여 동원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부랴부랴 서둘렀기 때문이었다. 오스트리아는 구경 120mm가 넘는 중포(重砲)를 오늘날 1개 포병연대 전력에도 미치지 못하는 불과 40여문만 동원할 수 있었는데, 이는 세르비아군보다 조금 많은 수준이었다.콘라트는 사회진화론을 기반으로 공세가 유일한 효과적인 방어 형태인 "존재하기 위한 끊임없는 투쟁"을 통해서 삶이 이루어진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1906년에 세르비아에 대한 예방전쟁을 처음 제안했었던 경우를 예로 볼 수 있다. 콘라트에겐 큰 야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제국에 장차 위협이 될 세르비아를 가만히 두기보다는 선제 전쟁을 벌여서 세르비아를 무력화시키는 동시에 오스트리아의 지배하에 더 많은 슬라브인을 편입시키는것이었다. 이는 헝가리에 대항하는 이중왕정 내부의 정치적 균형을 변화시키고자 하였다.[21] 그러한 신념을 기반으로 이론과 전술에 대해 광범위하게 연구하고 저술을 했으며, 보병 전술에 관련되어 작성한 책들이 출판되어 잘 팔릴만큼 적어도 군 전문가로서의 능력은 있었기에 이를 눈여겨본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그를 제국군의 참모총장으로 임명했었다. 참모총장에 임명된 콘라트는 제국군의 현대화를 이끈 선구자였다. 일례로 이탈리아 왕국이 발칸반도에 야망을 가지고 있음을 내다봤었고, 이탈리아 왕국과 예방전쟁을 해야한다면서 무리하게 주장하다 해임되기도 했지만 재기용될 정도였다.
이렇듯 콘라트는 군재에 대해서는 확실히 능력이 있었으나, 정치에는 젬병이었다. 콘라트는 세르비아만을 보느라 러시아 제국의 참전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콘라트는 6주안에 승리를 거둘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다. 더불어서 러시아가 군대를 동원한다 해도 한 달이 걸릴거라 생각했기에 2주안에 세르비아를 점령한다는 생각도 있었다. 50만의 발칸군(Balkan Army)으로 공격을 개시한 후 곧바로 50만의 예비대를 후속 투입해 속전속결로 세르비아를 석권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예상은 빗나갔다. 갈리치아에서 러시아군의 이동이 포착되자 콘라트는 갑자기 계획을 변경하여 예비대를 이곳으로 보내야 했다. 그리고 전쟁 개시한지 3주도 안 돼서 러시아가 참전을 하였으며, 120만으로 추정되는 러시아군이 국경에 모습을 드러내자 콘라트의 계획은 완전히 틀어져 버렸다. 이는 뒤를 봐주기로 한 독일도 당황한 부분이었다. 독일은 콘라트와 마찬가지로 러시아군이 전선에 투입되는 데 한 달 정도가 걸릴 것으로 예상해 동부전선은 그다지 우려하지 않았고, 오스트리아 혼자 세르비아를 충분히 공략할 수 있을 것이라 보았다. 그러는 동안 프랑스를 먼저 쳐서 서부전선을 안정화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군대를 양과 질적인 면에서 과대 평가했던 콘라트의 제국군이 개전 초반부터 세르비아에게 패배를 당하며 기세가 꺾이고 만다. 오스트리아는 먼저 전쟁을 개시했으면서도 세르비아 영내로 진입하지 못하고 계속 국경 밖에서 맴돌아야 했다. 그러다가 결국 이듬해 말 간신히 세르비아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였지만 그뿐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세르비아 점령은 독일의 지원과 불가리아의 참전 덕분에 달성되었을 뿐, 본래 제국군의 상태로 단독 점령은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일이었다. 또한 세르비아의 거센 저항때문에 제국군도 큰 피해를 입었고 사실상 전쟁을 계속 수행할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야전사령관이었던 오스카르 포티오레크는 황태자의 원수인 세르비아를 반드시 처벌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열성적으로 전쟁에 임했지만, 정작 콜루바라 전투 등 패전과 삽질을 거듭하며 무능한 행보끝에 해임되었다. 이 시점 부터 제국군은 공세에서 수세로 자세를 바꾸게 된다. 콘라트는 실패 원인을 독일 제국의 군사적인 지원이 부족해서라고 비난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기 전, 독일 제국은 일단 전쟁이 터질 경우 단기전으로 끝날 것이라고 예상했으며 동부전선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작전 협조를 할 필요성도 별로 느끼지 못했다. 따라서 1896년~1909년에 양국 참모부 간의 교류는 거의 완전히 정지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후 콘라트의 주장에 따라 양국 참모부 간의 교류가 재개되기는 했지만, 1914년 당시 양국 간에는 대러시아전을 염두에 둔 어떠한 합동 작전계획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개전과 동시에 향후 전쟁의 전망에 대한 양국 간의 견해 차이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개전 당시 총 80개 사단 가운데 70개 사단을 서부전선에 투입할 계획이었던 독일 제국은 프랑스 공화국을 처리하는 데 36일~40일이 걸리는 동안, 동부전선에서는 나머지 10개 사단으로 방어에 전념한다는 전략을 세워두고 있었다. 독일 제국의 속셈은 일단 서부전선을 정리한 후 80개 사단을 모두 동부전선에 투입해서 러시아 제국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줌으로써 평화를 애걸하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반면 콘라트는 러시아령 폴란드(바르샤바 돌출부)의 남쪽 측면을 최우선으로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2] 콘라트는 러시아 제국에게도 반격하기 위해 프리비슬린스키에 대한 공세를 시작했지만, 1915년, 갈리치아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10개 사단을 손실했으며, 잇따른 패배로 인하여 콘라트는 독일 제국에 의해 동부전선에서 점차 소외되었다. 이런 와중에도 콘라트는 러시아 제국의 뻔히 보이는 위협을 무시한 채 1915년에 해낸 반격의 대성공으로 러시아 제국이 당분간은 공세로 나올 여력이 없을 것이라 오판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이탈리아까지 협상국으로 참전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사실상 나락으로 가버리게 되었다. 이탈리아 왕국은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의 삼국 동맹을 맺고 있었지만 같은 게르만어권인 오스트리아-헝가리만 감싸는 독일과 상당히 사이가 멀어진 것도 있었고[23] 사실 오스트리아와는 뿌리깊은 적대 관계로 영토 분쟁이 끝나지 않은 상황이기도 했다. 조약에서는 공수동맹인지 방어동맹인지 나타나 있지 않아 이탈리아의 자의적인 해석으로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오스트리아와 독일이 선제 공격한 것이라는 명분으로 삼국 동맹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물론 베르히톨트도 그러한 점을 알고 있었다. 세르비아 침공 당시 이탈리아 왕국은 중립을 지켰지만 전쟁 양상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베르히톨트가 동맹으로서 이탈리아의 참전을 유도하려고 하였다. 참전은 아니더라도 동맹국 이탈이라는 초유의 비상사태만큼은 막으려 하였다.[24] 하지만 이탈리아는 도와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탈리아 내부적으로는 전쟁이 국민 통합과 쥐트티롤, 이스트리아반도, 달마티아 등의 미수복지를 수복할 기회라는 주장이 힘을 얻는다. 협상국이나 동맹국 모두 한 나라라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외교전을 펼쳤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그래도 자기 동맹이니 이탈리아도 동맹국에 가담할 줄 알았다. 하지만 이탈리아가 프랑스와의 비밀조약에 의거해 동맹국 측에 군사력 제공을 거절하자 실망했다. 이에 오스트리아측은 이탈리아를 끌어들이기 위해 프랑스가 점령하고 있는 아프리카 튀니지를 가져가라고 했다. 협상국도 이탈리아를 끌어들이려 했다. 그 후 이탈리아는 양측의 조건을 재다가 협상국으로부터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이탈리아권 영토와 해외 식민지 약속을 받아내고 1915년 5월 23일 오스트리아-헝가리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6개월후에 독일에 대해서도 선전포고를 하면서 협상국 측으로 참전했다. 이탈리아는 알프스에서 아드리아해 동해안에 이르기까지 350km의 긴 전선을 펼치며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벌였다. 특히 티롤을 둘러싼 알프스 전투는 산악 지형과 기후와의 싸움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주력군은 이미 러시아와의 전투에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티롤에는 예비병력 1만7,000명만 남아 있었다. 이탈리아군은 30만명으로 제국군과는 군사비에서 20대1의 절대적 수치를 가지고 있었다. 화력에서도 이탈리아군은 10대1로 압도적이었다.
때문에 콘라트는 동부전선에서 러시아 제국에 대비해 1915년에서 1916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기간동안 수십여 겹의 철조망과 삼중사중으로 구축된 참호선으로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했고, 협상국으로 참전한 이탈리아 왕국에 맞서기 위해 10개가 넘는 사단을 이탈리아 전선으로 보냈다. 콘라트는 3월 이손초 전투에서의 이탈리아 왕국군 5번째 공세가 실패하자 트렌티노에서의 공세를 위해 독일 제국군 참모총장인 에리히 폰 팔켄하인에게 9개 사단가량의 지원병력을 요청했지만 팔켄하인도 서부 전선에서 대규모 공격을 계획중이었으므로 이 청을 거절하였다.
이에 콘라트는 무리하게 발칸전선과 동부전선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정예부대를 차출하였다. 그 병력의 공백은 강력한 방어선으로 만회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때문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 전선에 투입할 수 있었던 것은 공세 당시 기준으로 39개 보병사단, 10개 기병사단 약 50만여 명이었다. 결국 이로 인해 러시아 제국은 오헝 제국군이 이탈리아 전선에서의 공세(5월 트렌티노 공세)를 위해 10개가 넘는 사단을 빼며 전선에 공백이 생겼다는 것을 간파했다. 1916년 6월 4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전 동부전선에 걸쳐 러시아군의 일제 포격이 개시되는 것으로 브루실로프 공세의 막이 올랐다. 러시아군은 꾸준한 항공정찰과 관측으로 이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참호선의 중요 시설과 취약점의 위치를 파악한 상태였고, 정확하기 그지없는 포격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참호선은 곳곳에서 기능이 마비되었다. 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예비 병력이 제대로 전선에 투입되는 것을 막았고, 초기 러시아군의 공세를 막아내지 못하는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가뜩이나 열악한 상황에 러시아가 대대적인 침공을 개시하고 알렉세이 브루실로프의 공세로 제국군이 대패하면서 콘라트는 결국 동부전선의 지휘권을 독일에게 양도할 수밖에 없었는데. 말이 좋아 양도이지 독일 군부에게 단단히 찍힌 콘라트는 더이상 동부전선에 발을 들이밀 수가 없었다. 콘라트는 동부전선에서 밀려나 이탈리아 전선에만 집중하게 되었지만, 그의 공세 본능은 죽지 않았고 방어에만 집중하던 동부전선과는 다르게 이탈리아 전선에서는 엎치락 뒤치락하면서 반격을 엿보고 있었다.
한편, 이탈리아의 참전으로 전쟁이 확장되자 베르히톨트는 외무장관 자리를 내려놓는다. 사실상 경질이었다. 제국의 후임 외무장관은 헝가리 외무장관인 부리안 이슈트반 백작(rajeczi gróf Burián István)이 맡게 되었다. 이렇게 세르비아 침공을 주도했던 내각과 군부의 주요 인물들이 이탈하게 된 1915년부터 제국은 더이상 전쟁을 지속할 능력도, 의지도 잃어버렸음을 의미하게 되었다. 제국을 결집시킬 수 있는 돌파구로 세르비아와의 국지전으로 승리를 거두겠다는 선택을 했었지만 결과는 국지전은 커녕 사실상 제국을 멸망으로 이끌어버리는 총력전으로 가는 길이었다. 내각과 군부는 황실에게 썩은 동앗줄을 던진 꼴이었다. 황실은 안이한 판단으로 그 동앗줄을 잡아버렸고, 제국은 그대로 전쟁의 수렁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전쟁이 발생하는 동안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과도한 업무 끝에 노환에 걸린 폐렴으로 붕어하였고, 전쟁을 주도한 외무장관 레오폴트 폰 베르히톨트는 세르비아 침공 실패로 인한 책임으로 해임, 참모총장인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는 삽질 끝에 해임, 오스트리아 총리인 카를 폰 슈튀르크와 헝가리 총리인 티서 이슈트반은 둘 다 암살당하는 등, 수뇌부에 많은 공백이 생기면서 제국은 방향을 상실하고 만다.
4.4. 해산
5. 상세
5.1. 특징
5.1.1. 제국의 표상
▲ 《황제의 감사(Kaisers Dank)》 종군 화가인 루트비히 코흐의 1915년 작품이다. 제국의 신민들과 군인들이 프란츠 요제프 1세를 우러러보고 있다.
"우리의 군대는 제국의 모든 국민을 아우르는 공통의 터전이며,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이뤄낸 그 많은 성취의 근원이다."
- 1918년 10월 24일, 황제 카를 1세. 신성 로마 제국 시절부터 보편 제국 체제의 수호자로 기능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역사적인 의의를 한데 집약하고 있다.[25]
- 1918년 10월 24일, 황제 카를 1세. 신성 로마 제국 시절부터 보편 제국 체제의 수호자로 기능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역사적인 의의를 한데 집약하고 있다.[25]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전통적으로 정부, 황실, 군대에 대한 인기가 높았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1278년부터 수백 년 동안 지배 체제를 유지하며 1806년까지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는 독일에서 일어난 개신교의 전파와 오스만 제국으로 대표되는 무슬림의 침공을 막는 역할을 수행했고, 합스부르크의 지배자들은 자국을 정통 기독교 신앙의 보루로 여겼으며, 국민들도 마찬가지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군대는 대외 전쟁보다는 경찰과 같은 치안 사무를 주로 맡고 있었고, 군사 훈련이 힘들지 않았으며[26] 규율이 엄격하지도 않았다. 상관의 명령을 받지 않은 행동이라도 결과가 좋으면 주는 훈장[27]도 있었다.
또한 육군의 제복이 민족별로 색깔이 다르고[28] 연대별로 칼라장이 다른 등 당대 유럽에서 가장 화려했고, 오스트리아식 야전모는 많은 나라의 군대들에게 영향을 줄 정도였다. 그리고 황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한 각종 행사를 많이 벌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들 중에서도 트란실바니아나 갈리치아 같은 지방은 특히 미개발된 곳이었기 때문에, 그런 곳에 치안을 위해 육군 병력이 주둔하는 것은 합스부르크 황제의 힘을 과시하는 중요한 선전 효과를 주기도 했다. 오스트리아, 헝가리, 보헤미아, 달마티아 등 서로 다른 민족들이 각자의 지역에서 모여 국가를 지키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군대는 국민들의 애국심을 고취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한 문필가는 제국이 없어진 이후 사람들이 더이상 '깃털 달린 모자를 쓴 군인들'을 볼 수 없다는 것에 매우 불평한다고 쓰기도 했다.
5.1.2. 지역 연대 전통
영국군처럼 오헝 제국군은 지역 연대 전통이 강했다. 1개 연대는 특정 지역을 방위하고, 그 지역 내에서의 모병, 훈련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징집 연령이 된 오헝 제국 남성은 자신이 거주하는 지역 연대의 모병소에 들어가 해당 연대의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고, 이웃 주민과 전우가 되어 함께 싸우다, 전사하면 해당 연대의 상징이 적힌 묘지에 묻혔다.각 연대들은 귀족 출신 연대장의 이름이나 지역명을 따라 명명되었고, 오랜 전통을 자랑했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군복과 군기, 기념일, 군가, 그리고 후술할 연대만의 언어를 가지고 있는 하나의 공동체이기도 했다. 연대 구성원들의 종교에 따라서 신부나 목사, 이맘이나 랍비가 상주하며 부대원들의 정신적인 단결을 유도하기도 했다. 같은 나라 군대라고 볼 수 없는 수준이었으나 공통점이 있다면 이들 부대에는 황제의 초상화가 항상 따라다녔다는 사실이다. 이로써 오헝 제국군은 지나친 민족적 혼란을 억제하고 병사들의 소속감을 증대시킴으로써 전술적 약점을 보완하면서도, 다같이 '황제 폐하'를 위해 싸운다는 인식을 불어넣음으로써 군 전체의 단결을 유도할 수 있었다.
5.2. 장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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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국군 보병 제식 소총인 만리허 소총.
▲ 체코 스코다 사의 42cm 곡사포. 해안 방어용으로 사용되었으며, 드레드노트급 전함을 상대하기 위해 관통력이 높았다. 훗날 독일 국방군이 독소전쟁 당시에도 사용했다.
▲ 1차 세계대전 당시 체코 스코다 공장의 해군 함포탑 조립 공정.
오스트리아의 무기들은 해외에도 많이 수출되었다. 가령 19세기 중반 제식 소총이었던 로렌츠 소총은 미국 남북 전쟁 당시 세번째로 많이 사용된 무기이다. 남군에서는 미시시피군의 주력 소총으로, 북군에서는 컴벌랜드군과 율리시스 S. 그랜트의 테네시군이 주력으로 사용했다.
만리허 소총은 발칸 국가들에서 폭넓게 사용되었고, 스코다 사의 공성용 중박격/곡사포는 독일에서 리에주 요새를 부수겠다고 부대째 빌려가거나 영국이 라이센스 생산하는 등 명성이 매우 높았다. 독일의 420mm 빅 베르타보다 위력은 약했으나 방열과 기동이 용이해서 운용 탄력성이 좋았기에, 독일 제국군 장성들은 자국산 크루프제 중포보다 스코다 중포를 더 선호했다. 그 외에도 항공기들 역시 생산량은 적었으나 오스트로-다임러 사의 고성능 엔진으로 인해 매우 신뢰할 만했다. 카르만 효과를 발견한 테오도어 폰 카르만은 육군항공대에 복무하며 극초기형 헬리콥터를 개발하기도 했다.
해군의 경우, 1860년부터 드라헤급 철갑함을 생산한 것을 시작으로 20세기에는 구축함부터 잠수함, 최신예 드레드노트급 전함까지 모든 종류의 함선들을 보유할 수 있었다. 특히 로버트 화이트헤드가 오스트리아 해군을 위해 개발한 화이트헤드 어뢰는 최초의 어뢰였으며, 오스트리아 제국 해군 조반니 루피스 대령의 어뢰를 개량한 것이었다. 해당 어뢰는 당시 비대칭 전력으로서 급부상하던 어뢰의 가치와 청년학파 사상 덕분에 말 그대로 불티나게 판매되었다. 1880년대가 되면 주요 열강과 해군을 꾸릴 여력이 되는 중소국가들 전부가 화이트헤드 어뢰로 무장한다.
5.3. 군복
▲ 1914년 개전 당시의 군복. 푸른 빛이 감도는 회색인 헤히트그라우(Hechtgrau) 색상 전투복과 오스트리아식 야전모를 착용했다.
▲ 1916년 이후의 군복. 독일식 슈탈헬름을 착용했다. 색상 또한 옅은 초록빛이 감도는 회색인 야전회색(Feldgrau)으로 변경되어 시인성이 더 낮아졌다. 왼편의 회첸도르프 원수를 비롯한 장교들은 여전히 오스트리아식 야전모를 쓰고 있다.
[29] |
파이크 그레이/헤히트그라우(Pike Grey/Hechtgrau) |
5.4. 문제점
오헝 제국군은 후대 사람들의 생각보다 더 강한 군대였다. 제국은 발칸의 패권국이자 독일의 가장 믿을만 한 우방이었으며, 이탈리아 왕국의 최대 숙적이었다. 주변 국가들 중,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맞설 만한 군사력을 가진 국가는 러시아 제국과 독일 제국을 제외하면 없었다. 비록 하술할 문제점들을 안고 있었음에도 제국군은 엄연한 열강의 군대였다. 주변 국가들과 국지전이나 일반적인 규모의 전쟁이 벌어진다면, 제국군은 승리를 거둘 능력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가장 심각했던 언어 문제마저도, 전술적인 측면에서의 취약성이었을 뿐이다.그러나 세계대전과 총력전이라는, 제국이 감당할 수 있는 규모를 넘어선 극한 상황은 달랐다. 새로이 등장한 민족주의 사상은 그동안 황실에 집중되었던 권위를 조금씩 흔들었다. 상대적으로 부족한 산업 능력과 예산은 장비의 보충과 개발에 제약을 걸었고, 장병들의 언어적 다양성은 전술적 유연성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양면전쟁을 넘어서는 사면 전선이라는 최악의 상황은 제국의 국방력을 분산시켜 특정한 전선에 대한 집중을 억제하며 제국이 수동적으로 끌려 다니도록 만들었다. 비록 험준한 산지에 의해 본토가 보호받는 상황이긴 했으나 사방의 전선에서 끊임없이 벌어지는 출혈은 제국과 제국군의 힘을 끊임없이 소모시켰고, 1차대전으로 그 끝을 맞이하고 말았다.
5.4.1. 민족 및 의사소통 문제
전체[*] | 총 51,356,465명 (1910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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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지도는 미국의 지리학자인 윌리엄 R. 셰퍼드 박사가 1911년에 작성한 지도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개략적인 인구분포를 표현하고 있다.[30]
▲ 세르보크로아트어 화자들을 크로아티아인, 보슈냐크인, 세르비아인으로 분리한 지도이다. 또한 이탈리아계에서 라딘어와 프리울리어 화자들 또한 분리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징집 인원은 연평균 15만 9,500명으로, 전체 인구대비 비율로 따졌을 때 독일 제국보다 20퍼센트 이상 적었지만, 러시아 제국에 비해서는 오히려 약 50퍼센트나 높았다. 그래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에게 평화시 병력 확보는 엄청난 문제였다. 1910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총 인구는 5,000만 명 이상이었지만, 징집이 가능한 인원은 12만 5,000명에 불과했다. 평화시 오스트리아군 병력은 50만 명 이하였으며, 총동원령이 떨어지면 355만 명으로 늘어났다. 이는 향토예비군, 동원예비군, 대체예비군과 같은 예비군 병력과 헝가리의 예비 병력인 혼베드 등과 같은 다양한 2선급 부대들이 포함된 숫자였다. 이론적으로 19세 이상의 신체 건장한 남성은 징병 대상이 되어 2년을 현역으로 복무하고 예비군에 편입되도록 되어 있었다. 이 모든 인원들을 독일계와 헝가리계로 채울 수는 없었으며 제국의 다양한 민족들은 자신들의 환경과 역할에 맞추어 군대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일각에서 오해하는 것처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구성하는 민족들이 전부 딴 마음을 품고 전쟁 내내 어깃장을 놓거나 사보타주를 일삼았던 것은 아니다. 제국의 정통성은 그들을 전부 한데 묶을 수 있을 정도로 강력했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또한 그러했다. 오스트리아군 연대 대다수는 17세기 오스만 제국군과 싸웠던 연대들에 그 뿌리를 두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유럽 기독교 세계의 입장에서 제국군은 이슬람 이교도들의 확장을 막는 방패이자 로마 제국의 신성한 법통을 이은 황제와 교회의 수호자였다. 프랑스 혁명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 당시에도 '불순하고 신성모독적인' 자유 평등 박애 사상을 전파하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프랑스 대육군의 최대 맞수는 아무리 박살을 내줘도 오뚜기처럼 일어나던 오스트리아 제국 군대였다.[31] 당시에도 민족과 언어 문제가 있었으나, 위대한 오스트리아 사직을 지킨다는 오랜 근왕주의적 사명 앞에 그런 '하찮은' 것들은 통합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후에도 19세기 동안 오스트리아는 유럽 구체제의 상징 그 자체이자 체제를 지키는 세 경찰[32] 중 하나였다. 그렇기에 민족주의가 들불처럼 번짐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 제위와 제국은 후세인들의 생각보다 더 공고했다. 제국 특유의 관용성을 발휘한 대타협으로 제국 내 최대의 적 헝가리를 파트너로 받아들인 이후부터 그 안정성은 타 민족들을 어느 정도 포용하는 방식으로 발전하였고, 이는 19세기 중반부터 내환에 시달리던 제국에 큰 안정성을 부여해 주었다. 독일계가 많았던 보헤미아 왕국에서는 프란티셰크 팔라츠키를 중심으로 제국의 틀을 유지하되 동등한 주권을 받아내고자 하는 오스트로슬라브주의를 펼쳤으며[33] 크로아티아인은 제국의 오랜 군사적 근원 중 하나로써 자신들의 위치에 대체적으로 만족했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폴란드 귀족들과 러시아의 동화 시도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주는 제국 체제에 충성했다. 심지어 폴란드인 지식인들마저도 오스트리아의 지배가 싫지만 자신들의 정체성을 말살하려 드는 러시아나 독일보다는 낫다는 대안부재의 심정으로 제국에 충성했다. 그 외에도 대부분의 농촌 주민들은 근대적 교육이 부재했기에 신앙과 황제의 수호자라는 제국군의 타이틀에 순종했다. 그랬기에 사라예보 사건이 벌어졌을 당시 제국 전역의 대부분의 신민들은 딴 마음을 품기보다는 안타깝게 죽은 '황태자 전하'의 복수를 부르짖으며 전쟁을 원했다. 전쟁이 벌어지자 너나할 것 없이 입대하던 풍경 또한 독일이나 프랑스, 러시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5.4.1.1. 군 내 민족 갈등의 대두
다만 이는 1918년 완전히 패색이 짙어지기 전까지의 일이었다. 기나긴 전통과 역사성과는 별개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다민족성이 제국과 제국군에 있어 불안 요소로 남아 있던 것은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황실의 수호자라는 공통 의식은 각 민족들 간의 갈등을 어느 정도 봉합하여 하나로 움직이게 기능하였으나, 이미 자랄 대로 자라고 있는 각 민족들의 독자적인 인식을 완전히 가리지는 못했다. 애초에 오헝 제국을 탄생시킨 대타협 자체가, 앞으로 황실과 구체제는 각 민족들의 자치를 보장하고 그들의 지지가 있어야만 유지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제국이 19세기에 무너지지 않았던 이유는 각 민족들이 황실과 제국 체제가 자신들에게 이득이 된다고 판단하고 이를 적절히 이용하기 위해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각 민족의 온건 지식인들은 민족주의가 없는 황제와 제국 덕에 자신들이 주변의 거대 민족국가들로부터 그나마 보호받을 수 있으며, 피비린내나는 수라장으로 빠져들지 않고도 제국의회에서 말로 투쟁함으로써 갈등을 적절히 해소하고 자신들의 권익을 어느 정도 보장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제국에 충성했다. 그러나 그들의 판단이 달라진다면, 다시 말해 제국과 황실이 자신들의 민족에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황실의 정통성은 무너질 수밖에 없었으므로, 오헝 제국은 안정적이면서 동시에 불안정했다.그랬기에 제국을 부정하지는 않더라도 제국 안에서의 정치적, 경제적 계급과 위치 차이로 인한 민족 간의 이권 갈등은 여전히 심각했다. 누구보다 황제에게 충실한 신하였던 크로아티아인은 헝가리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어했으며, 이는 슬로바키아인과 루마니아인도 마찬가지였다. 헝가리인과 슬라브인-루마니아인들의 반목이 어찌나 심했던지 이들을 한 부대에 함께 배치할 때는 많은 주의가 필요했다. 특히 헝가리인들은 자신들의 독립을 앞장서서 가로막은 크로아티아인을 철천지 원수로 여겨 매우 혐오하였다.[34] 한편 크로아티아인과 보슈냐크인은 자신들을 통합 대상이자 갈라진 동포로 보는 세르비아인과도 갈등 관계였으며, 거리가 멀어 세르비아에 비교적 온건한 입장이었던 슬로베니아인조차도 세르비아 중심의 남슬라브라는 대세르비아주의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보헤미아 왕국 국왕이라는 가장 중요한 작위의 기반이자 제국이란 거대한 틀의 핵심적인 경제권을 틀어쥐고 가장 윤택한 삶을 살던 체코인은 자신들이 독일계와 헝가리인들보다 정치적으로 밀린다는 사실에 항상 불만을 표했고 에드바르트 베네시 같은 민족주의자들을 중심으로는 아예 독립해야한다는 의견을 표출했다.[35] 폴란드인과 우크라이나인은 과거 폴란드-리투아니아 시절의 주종관계로 인해 서로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폴란드인은 오스트리아의 지배가 독일이나 러시아보다는 낫다는 것을 인정할지언정 마음으로는 폴란드 분할에 일조한 오스트리아를 결코 좋아하지 않았다. 적지 않은 이탈리아인은 제국의 가상 적국인 이탈리아 왕국에 합류하고 싶어했다. 마지막으로 유대인들은 독일어를 쓰는 체코계 유대인이었던 프란츠 카프카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온갖 반유대주의적 편견과 음해에 시달렸으며, 일부는 시온주의를 주창했다.[36]
▲ 황제 카를 1세의 사열을 받는 보슈냐크인 병사들. 페즈를 쓰고 있다.
또한 그 외 전통적으로 오스트리아 황제를 모신 적이 없다가 19세기에 편입된 민족들이나 비가톨릭 민족들은 처음부터 그닥 못미더운 존재들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민의 거의 3분의 2가 주변 국가들과 민족적 배경을 공유하고 있었다. 제국의 서부에 이탈리아 왕국과 인접한 티롤 후백국, 오스트리아 연안 지대에는 이탈리아계와 슬로베니아계가 다수 거주했고,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에는 루신계, 우크라이나계와 폴란드계가, 루마니아 왕국과 인접한 지역인 부코비나 공국과 트란실바니아는 루마니아계가 다수를 차지했다. 세르비아 왕국과 인접한 달마티아 왕국과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 그리고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공동통치령에 보슈냐크계, 세르비아계가 살고 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평화 시 제국의 세력이 강성할 때에는 그닥 내색하지는 않았으나[37] 전쟁이 벌어지자 자신들의 동족과 싸워야 한다는 사실에 굉장히 동요했으며 제국의 영향력에서 이탈하고자 했다. 이를 막기 위해 특정 민족으로 구성된 부대들을 해당 민족의 본거지로부터 먼 곳에 배치하려는 시도도 있었지만,[38] 슬라브계 병사들 없이 슬로베니아계, 이탈리아계, 독일계 오스트리아인이나 헝가리인 부대들만으로는 동부전선을 모두 감당할 도리가 없었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독일계, 헝가리 및 유대계는 슬라브족에 비해 교육도 더 잘 받았고 충성심도 높았기에 주로 장교층으로 복무하거나 포병, 공병, 기병 등의 특수병과에 배치되는 경우가 많았다. 유대인들은 다수가 의무관으로 복무했다. 반면, 소위 일반 보병이라고 불리는 보병 연대들은 배치되는 병력의 거의 70퍼센트가 슬라브계였다. 독일계, 헝가리계처럼 잘 교육받은 슬라브계는 체코계와 크로아티아계뿐이었으며 당연히 그들도 특수병과에 배치되었다. 체코계는 포병부대의 다수를 차지했고, 용기병 부대의 주축이었다. 한편 크로아티아인들은 보병으로도 복무했으나 남슬라브계 부대의 지휘부를 구성하기도 했다. 이탈리아계의 경우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10만명 이상이 입대를 했는데, 그들은 다양한 전선에서 싸우도록 파견되었지만 이탈리아 왕국이라는 잠재적 적국이 있는 이상, 이탈리아계 오스트리아인들은 주로 동부전선의 갈리치아로 배치되어야 했다.
하지만 이렇게 비슬라브계 소수민족들을 긁어모아 징집해도 광대하게 늘어진 갈리치아 전선을 막기에는 부족하였다. 결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어쩔 수 없이 슬라브계 부대들도 동부전선에 투입했지만, 1916년 중반 이후 슬라브계 부대들이 대러시아전에 투입하기에는 신뢰할 수 없는 존재들이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가령 체코와 슬로바키아계의 경우 탈영하거나 러시아에 포로로 잡힌 이들이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이라는 일종의 외인부대를 결성하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러시아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은 자그마치 5만명에 달했다. 슬라브계 외의 제국의 다른 소수 민족들도 초기에는 황실에 충성심을 보이긴 했었다. 총동원에 질서 있고 순종적인 방식으로 대응하였으나, 이후 제국의 몰락이 명약관화해진 1918년이 되면 대부분의 민족들이 각자도생을 선택하며 제국은 급격히 붕괴하게 된다.[39]
5.4.1.2. 육군 분열
민족 문제는 제국군 체제에도 악영향을 미쳤다. 제국 육군은 자그마치 세 개 또는 네 개로 나뉘어 있었는데, 이 또한 각 민족의 주권 문제 때문이었다. 대타협 이후 제국 절반의 지배자가 된 헝가리는 자신들의 군대를 요구했고 이는 곧 헝가리 방위군(혼베드)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같은 시기 헝가리의 독립에 반발한 크로아티아와 헝가리 간 타협으로 인해 크로아티아 방위군(도모브란) 또한 설립되었다. 그리고 이 모습에 불만을 품은 독일계는 폐지되었던 향토방위군(란트베어)를 부활시켰다. 과거 한몸으로 움직였던 강력한 제국 육군은 넷으로 나뉘었고, 결국 예산 또한 네 개로 나뉘면서 제국군의 현대화에 악영향을 끼쳤다.5.4.1.3. 언어 문제
보다 군사적으로 직결된 문제는 민족 정체성보다는 언어 문제였다. 제국 정부가 군대 내에서의 공용어를 독일어 단독으로 지정했음에도, 장병들 사이에 쓰이는 언어가 달라서 제대로 된 의사소통이 힘들었다. 슬라브인 출신 병사들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80개 정도의 명령어만 정리한 '군대 슬라브어(Armee-Slawisch)'라는 체코어 기반의 일종의 피진이 나오기도 했지만 장병들끼리 말이 안 통하는 상황 때문에 독일계와 헝가리인 출신 장교들과 슬라브인 출신 병사들 사이에서는 아예 대화가 나오지 않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슬라브인들을 징집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앞서 서술했듯 당시 제국 인구의 절반 이상이 슬라브인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이들을 제외했다가는 제국을 지키는 군인들의 숫자가 매우 부족해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뽑을 수밖에 없었다. 장교층은 독일계와 헝가리인, 체코인이 주로 맡았고 유대인도 도합 약 18퍼센트나 차지했다.이 때문에 의사소통 문제는 일상이었다. 장교층은 독일어를 사용했으나 하급자들은 이를 못 알아듣는 일이 많았으며, 이는 경직된 전술과 혼란으로 이어졌다. 상급제대에서 각 연대 지휘부에 독일어로 명령을 내리면 연대에서는 '연대 언어(Regimentssprache)', 즉 그 연대의 다수를 차지하는 민족들의 언어들로 명령을 내렸다. 한 민족이 지배적이면 그나마 나았으나 독일 연대들 같은 경우는 독일계, 체코인, 폴란드인이 각각 30퍼센트씩 차지하는 경우도 있었고, 이 경우 세 언어가 전부 연대어였으니 장교들 입장에서는 아주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모집된 지역과 병과별로 민족들을 다르게 배분하여 최대한 같은 민족끼리 모이도록 했음에도 불구하고, 연대어가 1개인 연대들은 합동 육군에 고작 15개, k.k 란트베어에 19개 뿐이었다. 대부분의 연대들은 두 개의 연대어를 가지고 있었고 몇몇은 세 개, 심지어는 네다섯 개나 되는 연대도 있었다. 가령 시게투마르마치에이 지역에 있던 합동육군 제85보병연대는 헝가리인 28%, 루테니아인 33%, 루마니아인 10%, 그 외 10%로 구성되었으므로 연대어는 헝가리어, 우크라이나어, 루마니아어 세 개였다.
각 연대에 배치되는 장교들은 적어도 3년 내에 해당 연대어를 전부 익힐 능력이 요구되었지만 이는 매우 큰 노력을 요하는 일이었다. 오스트리아만큼이나 다양한 민족적 출신 배경[40]을 지녔던 영국군은 적어도 영어로 의사소통이 수월하게 진행되었기 때문에[41] 작전 수행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나, 오헝 제국군은 그렇지 못했다.
5.4.2. 탈영병 문제
자세한 내용은 녹색 군단 문서 참고하십시오.1914년 이래로 해마다 전황이 악화되면서 제국군 내에는 탈영병들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녹색 군단이라 불린 이 탈영병들은 해마다 수만 명이 체포되었을 정도로 많았다. 이는 치안과 제국군의 군사력을 심각하게 약화시켰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5.4.3. 예산 문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국방 예산 지출의 절대명제는 '무조건 절약'이었다. 1911년까지만 해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국방 예산은 독일 제국의 4분의 1도 채 되지 않았고, 러시아 제국 국방 예산의 4분의 1을 겨우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 병력 규모도 1911년 말, 전시 군사력을 90만 명에서, 150만 명으로 증가한다는 계획이 채택되면서 늘어나기는 했지만, 주변 열강들과 비교하면 여전히 적은 수준이었다. 그 결과 개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무장 상태는 자국이 자랑하는 만리허 소총이라는 우수한 무기를[42] 제식 소총으로 택했음에도 러시아 제국군과 비교해서 그다지 나을 것이 없었다. 하술한 대로 육군이 3개로 나뉘어 있던 점도 이러한 예산 부족 현상을 부채질했다. 이 때문에 적국의 첩보 기관에 매수되는 장교들이 나오기도 했는데, 1913년 일어난 알프레트 레들(Alfred Redl) 대령 사건[43]은 오스트리아 군부 최악의 사건이었다.이는 1873년 발생한 장기불황 당시 제국의 경제가 무너지면서 그 전까지 전체 예산의 약 25%를 차지하던 군비가 격감했기 때문이었다. 1900년대가 시작되며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원수의 개혁에도 불구하고 예산은 여전히 작았다. 전체 예산의 단 3퍼센트만이 국방에 사용되었는데, 오늘날에야 충분하지만 당시에는 매우 적은 비율이었다. 그리고 그 작은 예산도 육군 안에서만 세 갈래로 나뉘어 쓰이다 보니 합동 육군의 현대화는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었다. 구성국 정부 중에서도 특히 헝가리 왕국이 자신들의 지역방위대인 혼베드에 예산을 몰아주고는 했기 때문이다.
5.4.3.1. 과도한 해군
오스트리아 해군은 제국과 유럽을 제외한 나머지 세계를 이은 가교였다. 동아시아를 비롯한 각국에 합스부르크가와 제국의 위세를 떨치고, 해외 무역로를 개척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1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우수한 사관들이 이끄는 함대는 열세 속에서도 분투하며 협상국의 오스트리아 해안 진입을 끝까지 봉쇄했다.하지만 근본적으로 오스트리아는 육상 국가였다. 제국은 잠재 적국인 러시아와 세르비아와 기다란 육상 국경선을 맞대고 있었으므로 중요한 것은 육군이었다. 해외 식민지가 국부에 큰 영향을 차지하는 영국 같은 국가들과는 사정이 달랐던 셈이다. 오스트리아에게는 그저 오트란토 해협으로의 적 함대 침입을 막아낼 적당한 규모의 함대만이 필요했으며 이는 오스트리아 스스로가 1차 대전에서 구축함대와 잠수함대, 그리고 해군 항공대를 유기적으로 운영하면서 이뤄낸 전과로 입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는 1900년대 이래로 필요 이상의 대함대를 건설하려 시도하였으며 이는 제국군의 예산 문제를 악화시켰다. 해군이 자그마치 13척이나 되는 전함들을 건조하는 동안, 개선이 절실했던 포병들을 비롯한 육군 장비들의 현대화는 밀려났다. 이렇게 건설한 해군은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당시 리사 해전이나 1917년의 오트란토 해협 해전에서 알 수 있듯 여러 차례의 대승을 거두었으나, 그들의 승리는 지정학적인 이유로 인해 오스트리아의 국가안보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또한 막상 그렇게 건설한 전함전대를 지나치게 소극적으로 운용하였다는 비판 역시 피하기 힘들다.
5.4.4. 장비 부족
제국의 근대화 지체 현상은 긍정적인 측면도 있긴 했다. 농업에 종사하던 대다수의 신민들은 매우 보수적이었으며 신성 로마 제국 시절부터 수백년 간 중서유럽의 유일한 정통 황실로 변함없이 군림하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절대적 권위에 대해 충성했다. 이는 민족주의 광풍 속에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다민족 국가인 오헝 제국에 큰 안정을 가져다주었다.그러나 미개발 지역 신민들의 다수는 문맹이라 명령과 전술, 규율에 대한 이해력이 매우 떨어졌으며, 이는 연대어 문제와 엮여 제국군의 전술적인 능력을 크게 저해했다. 그리고 산업적인 측면에서는 어떻게 봐도 완전한 재앙이었다. 전체 면적의 20퍼센트도 안되는 체코와 오스트리아, 부다페스트에서 생산되는 제품들의 품질은 국제적으로 봐도 좋은 편이었으나, 제국의 전반적인 공업력은 보병 장비 외의 전체 군 장비들을 현대화시키거나 인접한 열강들과의 총력전을 수행할 규모는 아니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오헝 제국 군대에서는 중장비, 특히 적절한 성능으로 대량 양산되어 일선의 보병 및 기병 부대들을 지원해줄 야포와 산포의 문제가 심각했다. 이는 특히 제국이 해군력을 확충하면서 세계대전 발발 직전까지 주요 자원이 건함에 집중됨에 따라 심화되었다. 원래 오스트리아군은 포병 시스템 혁신에 있어 상당히 획기적인 군대였으나[44] 공업화에서 오스트리아가 쫓아가지 못하면서 기술적으로 매우 큰 문제가 생겼다.
1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 오스트리아 야전포병대의 숫적 주력이었던 9cm M96 야포와 10cm M99 야포를 예로 들자면 포신에 달린 주퇴복좌기가 없었고, 대신 가신에 스프링이 달려 있었다. 그 때문에 반동 흡수가 제대로 되지 않았고, 방열 시 흙에 가신발톱을 박아도 한번 쏠 때마다 포가 80cm씩 뒤로 밀려났다. 해당 포가 개발된 1900년을 전후로 다른 열강들은 이미 주퇴복좌기를 적용한 포를 속속 배치하기 시작했으므로 이는 상당히 뒤진 것이었다. 그리고 보다 심각한 문제는 해당 포의 포신이 강철이 아니라 자긴가공법[45]으로 강화시킨 청동, 일명 '강철 청동' 재질이었다는 사실이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이 '강철 청동'을 두고 외산 강철에 의지하지 않아도 되는 혁신적인 국산 신소재라고 대외적으로 선전했으나 실제로는 당연히도 모든 면에서 강철에 뒤떨어졌다는 사실을 본인들부터가 잘 알았다. 한동안은 중포들도 이런 식으로 만드는 바람에 제국 포병대는 독일 크루프 사의 강철제 대포를 더 선호했다. 이 때문에 의욕적으로 빼돌린 자긴가공법 기술을 바탕으로 황립 및 왕립 포병공창을 세운 프란츠 폰 우하티우스 포병대장은 굴욕을 참지 못하고 자살 시도까지 했었다.[46] 심지어는 1차 대전 직전까지도 제국 내에서 강철제 포신을 제조할 수 있는 공장은 단 한 곳, 보헤미아 왕국 플젠의 스코다 공장뿐이었다. 또 다른 포신 생산 공장인 빈의 황립 및 왕립 포병공창은 여전히 청동 포신만을 생산 가능했다. 상술한 대로 강철 생산량이 항상 충분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나머지 열강들을 보자면 영국, 독일 제국과 프랑스는 물론이고 러시아 제국마저도 적어도 1880년대부턴 야포에 강철을 쓰기 시작했으며, 1890년대 말부터는 다양한 방식의 주퇴복좌기를 장착하기 시작했다. 1890년대 말 시점에서 청동 대포를 쓰던 국가는 당시 막 산업화에 시동을 걸던 일본 제국[47]이나 이탈리아 왕국[48], 쇠락하던 오스만 제국[49] 정도였으나 그들마저도 1900년대 중반부터는 크루프 사의 라이센스를 도입하면서 주퇴복좌기가 달린 강철제 야포들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나마 1900년 배치된 24cm M98 박격포부터는 오스트리아도 독일 크루프 사의 설계를 기반으로 하여 유압스프링식 주퇴복좌기와 강철제 포신을 도입하며 큰 개선이 이루어지기 시작하면서, 적어도 중포에 있어서는 문제가 해결되었다. 그리고 1907년경부터는 8cm M.5 야전직사포를 시작으로 포신에 주퇴복좌기가 달린 야포를 생산할 수 있었다. 다만 해당 야포도 재질은 여전히 청동이었다. 오스트리아 제국군이 강철제 포신과 주퇴복좌기가 모두 달린 야포를 공급받기 시작한 건 세계대전이 시작된 1914년 개발된 10cm M14 야전 곡사포였고, 심지어 그나마도 초도생산분은 청동제였다. 주퇴복좌기도 유기압식이 아닌 유압스프링식이었기 때문에 기술적으로는 여전히 한 단계 뒤떨어진 대포였다. 그러나 포신에도 곧 강철이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대다수 문제는 얼추 해결되었다. 유압스프링식 주퇴복좌기도 어디까지나 유기압식에 비해서 뒤떨어진 거였지 심각할 정도로 뒤떨어진 건 아니었다.
전쟁 초반에 구식 대포들을 가지고 고생하던 제국 육군으로써는 다행스럽게도, 1915년부터 대대적으로 공장들이 확충되었다. 보스니아 북부와 사라예보 일대의 새로운 철광석 광산들이 개발되면서 자체적인 강철 수급량도 늘어났다. 그리고 여기서 생산된 신형 대포는 대략 7000문 이상이 군에 보급되면서 구닥다리 대포들을 점차 교체했다. 그 중 다수는 제국의 붕괴 이후에도 신생국들과 이탈리아 포병대에 의해 제2차 세계 대전 때까지 절찬리에 사용되었다.
▲ 191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전쟁 채권 구매 독려 포스터.
물론 그래도 여전히 오헝 제국은 자원 부족에 허덕였다. 그리하여 전쟁을 빌미로 민간 수요를 국가가 강압적으로 통제하곤 정해진 가격에 금속 원광을 수매하여 무기 생산에만 집중시켰으나, 이 덕분에 군수산업 이외의 산업은 거의 고사 직전에 이르게 된다. 제국 주민들은 '자발적'으로 각종 금속류로 된 생필품들을 국가에 헌납할 것을 강요받았고, 세르비아 등 제국의 점령 지역 주민들은 제국 군대에 의해 아주 가혹하게 수탈당했다. 반발하는 점령 지역 주민은 반역자로 간주되었고[50], 간단한 재판을 거쳐 총살되었다. 이는 1차 대전의 독일 제국, 훗날 2차 대전 당시의 나치 독일, 일본 제국에서 재차 반복될 일이었다. 그럼에도 전쟁 말기에는 교회 종까지 떼어다 녹이는 수준이 되었다. 양모를 대체하기 위해 쐐기풀을 뜯어 인견으로 가공해야 했으며 울창한 숲은 면화약의 재료가 되어 파괴되었다. 총력전을 위해 제국의 군수공업을 극한까지 짜내면서 벌어진 이 모든 비극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5.4.5. 지정학적 문제
전략적 측면에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 사항이다. 사실 상술한 제국의 공업 능력 문제만 하더라도, 이 지정학적 문제만 아니라면 별로 문제될 게 없었다. 가령 비슷한 수준의 경제력을 보유했던 프랑스, 그리고 제국보다 더 약한 경제력을 보유했던 이탈리아의 경우 독일 및 오스트리아와 호각으로 싸울 수 있었는데, 이들은 단 하나의 전선에 자신들의 모든 여력을 끌어모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강제 공출과 군수산업 비대화 문제라고 한다면 독일과 프랑스도 겪었던 현상이기도 하고.[51] 언어 문제도 끽해야 연대 정도의 전술적인 측면의 약점일 뿐이었다.하지만 오스트리아는 잠재 적국으로 둘러싸인 상황이었으므로 하나의 전선에 투사할 수 있는 능력은 실질적으로 그들보다 부족했다. 지정학적 문제는 언어, 그리고 산업 문제와는 차원이 다른 중대성을 지닌 것이었다. 동쪽에는 러시아 제국, 동남쪽에는 루마니아 왕국, 남쪽에는 세르비아 왕국, 서쪽에는 이탈리아 왕국이 있었고 이들 모두가 잠재 적국이었다. 세르비아는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를 병합 대상으로 보며 사사건건 제국에 도전했고, 러시아는 오스만과 오스트리아를 무너뜨리고 지중해에 진출하기 위해 범슬라브주의를 내세워 뒤에서 세르비아를 부추겼다. 한편 루마니아는 트란실바니아를, 이탈리아는 내심 트리에스트와 달마티아, 티롤을 원했다.
이들 국가들은 러시아를 제외한다면 모두 오헝 제국보다 몇 단계 약한 국력을 지닌 국가들이긴 했으나, 오헝 제국은 이들을 전부 견제하기 위해서 병력을 사방으로 분산해야 했다. 제국은 독일과 함께 이탈리아를 동맹국에 끌어들여 서쪽에서의 위험만이라도 일부 낮추려 시도했으나 역사적인 악연으로 인해 이탈리아를 완전히 신뢰할 수 없었으며, 실제로 이탈리아는 1차 대전이 발발하자 중립을 지키다가 협상국에 가담하며 제국에 통수를 날려버린다.
5.4.6. 밀실 외교 개입
제국이 놓인 당대의 외교적 상황은 작은 갈등도 쉽게 확전될 수 있는 구조였다. 오헝 제국은 지정학적 입지 상 얽혀 있는 그물망의 한복판에 있었기 때문에 전화가 들불처럼 번진다면 사방에서 포위당할 위험이 매우 높았다. 귀족 엘리트들로 구성된 오헝 제국 군부는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말마따나 제국이나 각 민족이 아니라 황제 개인에게 충성했고, 그 어떤 국가들의 군부들보다도 더 정부와 분리되어 있었다. 하지만 사라예보 사건이 벌어지자 제국 군부의 크로바틴 장관과 회첸도르프 참모총장, 그리고 외무부의 베르히톨트 장관은 제국의 외교적, 군사적 상태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 없이 황제에게 전쟁을 부추겼다.전쟁은 매파가 대부분이던 7인의 공동각료회의, 즉 밀실에서 결정되었으며 유일한 온건파였던 헝가리의 티서 총리도 곧 설득되고 말았다. 그리고 군부의 콘라트와 크로바틴을 필두로 한 이 매파의 결정은 외교적 회의체가 없는 국제 상황과 맞물려 제국과 유럽을 세계대전으로 순식간에 몰고 들어갔다.
5.4.6.1. 반론
오스트리아와 제국군의 1차 대전 개전 책임은 없다고는 할 수 없으나, 일부 경감된다. 당대 열강들은 공동방위조약을 맺은 두 개의 군사 동맹에 얽혀 있었으나 그들 간의 이해관계를 해소할 수 있는 유엔이나 국제연맹 같은 초국가적 국제기구는 없었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주도로 출범한 만국평화회의, 일명 헤이그 회의[52]가 있었으나 비상설이었고 그 권한은 크지 않았다. 많은 수의 조약들은 야합이라 할 수 있는 밀약들이었으며, 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감춰진 동맹과 갈등 관계들은 큰 오해와 몰이해를 불러일으켰다.심지어 각 국가들 안에서도 내각과 군부, 황실이 따로 놀며 손발이 맞지 않았다. 공적 토론을 통해 종합적인 논의를 하기보다는 각 분야의 엘리트들이 자기들끼리 모이거나 편지를 주고받으며 자체적으로 결정하는 일이 많았다. 우선 당대 각국의 군주들은 혼인 등으로 전부 엮여 있는 한집안이나 다름없었고, 그랬기에 그들 간의 사적 관계도 국가의 공적 외교정책에 직간접적으로 반영되곤 했다. 그들은 중세적 전통과 새로이 대두된 민족주의의 중심으로써 무한한 권위를 누렸으나 시민사회와 관료제의 고도화로 인해 실권은 갈수록 사라져갔다. 그리고 그런 군주들을 대신하는 민간 정부는 민족주의와 관료제, 시민사회의 발전에 힘입어 국가 정무 대부분을 처리했으나, 여전히 왕권에 의해 제약을 받았으며 군부를 완벽하게 통제하지도 못했다. 한편 귀족 엘리트들이 독점한 군부는 군주의 신성한 권위를 빌어 정부와 분리된 또다른 정부로 기능하면서, 오직 전쟁만을 준비하는 좁은 시야로 정부의 영역인 외교와 국정에 간섭했다. 현대의 시각에서 보면 아연실색하겠지만 당대 열강들의 외교부는 군대가 짜놓은 작계의 존재를 몰랐고 반대로 군부는 외교적인 해결법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기에, 같은 문제에 있어서 두 조직의 말이 다른 경우는 비일비재했다. 현대의 국가안전보장회의와 같이 각 부서를 아우르는 회의체도 없었다. 이는 해당 국가뿐만 아니라 상대국에게도 혼란을 초래했다. 그 와중에 군주는 군주 나름대로 타국에 자신의 개인적인 견해가 담긴 밀서를 보내며 혼란을 가중시켰다. 그 결과, 당시 유럽에 자신들이 처한 외교적인 상황을 객관적으로 이해할 능력이 있는 국가는 거의 없었다.
이런 관행적으로 반복되는 국가간 밀실 야합과 각 정부 기관 사이의 불통은 오헝 제국뿐 아니라 당대 모든 열강 국가들의 공통 문제였다. 회젠도르프와 크로바틴 등 오헝 제국 군부의 전쟁 결정 책임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게 말하자면 독일 군부의 소 몰트케와 슐리펜 및 팔켄하인, 그리고 러시아 군부의 수호믈리노프와 야누시케비치 모두 똑같이 비판받아야 한다.[53] 오랜 평화와 식민지 건설의 장밋빛 시기에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으나, 당대 유럽은 자그마한 충돌로도 오판이 누적되어, 얼기설기 엮인 이해관계라는 족쇄에 모두가 한꺼번에 딸려 갈 위험이 내재되었던 것이다.
현재는 7월 위기라고 불리는 이 기간 동안 꼬일 대로 꼬여버린 외교 관계가 1차 세계대전의 직접적인 원인이며, 각국은 자기 몫의 책임을 분명히 지고 있으나 그렇다고 세계대전의 최종적인 책임을 지지는 않는다는 일종의 공동책임론이 학계의 일반적인 시각이다. 오스트리아 또한 전쟁 발발에 책임이 있고 오헝 군부가 분명 이를 조장한 것은 사실이지만, 잠재적국에 의해 황태자가 암살당했다는 점에서 개전의 명분이 있었다.[54] 그리고 다른 국가의 정부와 군부도 비슷한 실책들을 저지르며 세계대전을 확대했으므로, 오헝 제국 정부와 제국군만이 독보적으로 비난받을 이유는 없다.
5.4.7. 탄압과 전쟁범죄
▲ 제국군 전쟁법정(Kreigsjustiz)에서 유죄를 언도받고 교수형에 처해진 현장
빈 체제의 설립 이후, 오스트리아 제국군은 유럽의 경찰로서 구 질서를 유지하는 핵심 축 중 하나였다. 독일 연방, 이탈리아, 빈, 프라하, 부다페스트, 사라예보 등 중부 유럽에서 벌어진 민족운동과 시민운동, 노동쟁의를 총칼로 잠재우며 시대착오적인 구체제를 20년간 지탱해온 선봉장은 다름 아닌 독일 연방의 맹주인 오스트리아의 군대였다. 수많은 시민들이 제국군의 총칼에 쓰러져갔고, 여러 도시들이 불탔다.[55] 그리고 비록 잘 알려져 있진 않으나 1차 대전 이전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전쟁범죄 역시 극심했다. 의화단 전쟁에서는 베이징 민간 구역을 파괴했고, 보스니아 일대에서는 체트니크 의심자들을 색출해 살해하였다.
또한 제국은 소위 '반역 행위'에 대해서 매우 강경하게 대처했다. 오헝 제국 국적이었으나 자신의 민족적 모국에 가담한 이들의 경우 포로로 잡히면 그대로 총살하거나 약식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하고 교수형에 처했다. 물론 이는 분명 반역이었고, 다민족국가의 특성상 제국군은 해당 반역 행위에 더욱 강경히 대처했던 것이다.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경우 이 때문에 포로로 잡히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고, 이탈리아인들 중에서도 이탈리아 왕국에 가담했다가 제국에 잡혀 처형된 이들이 꽤 있었다. 가장 유명한 이들은 군가 피아베강의 전설에도 언급되는 나차리오 사우로, 체사레 바티스티.
가장 심각했던 것은 남슬라브인들에 대한 탄압이었다. 1차 세계 대전은 세르비아인 비밀결사의 오스트리아 황태자 암살로 시작된 만큼, 이후 점차 제국 내의 남슬라브인에 대한 유무형의 탄압이 가시화되었다. 또한 이는 전선으로 확대되어 이후 세르비아를 공격하며 발칸반도의 점령 지역에서도 발생했다.
▲ 세르비아군 포로들을 처형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56]
세르비아의 도시 샤바츠(Šabac)에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군대의 조직적인 약탈과 방화가 이뤄졌고, 이로 인해 상당한 수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또한 제국군의 군사 법정 역시 조직적인 전쟁범죄의 일환으로 작동했다. 오헝 제국의 붕괴로 인해 제대로 된 기록은 남지 않았으나 약 11,400명에서 36,000명 가량의 민간인들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군사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교수형으로 살해당했다.#, # 추가적으로 세르비아인들에 대한 민족 말살 정책 또한 추진하여 키릴 문자의 사용을 금지시키기도 했다.
한편 오스카르 포티오레크 보스니아 총독의 경우 1912년 보안대 설립 계획을 입안하였으며, 사라예보 사건이 터지자 이를 보슈냐크인들로 채워넣고는 세르비아인 마을들에 대대적인 파괴 행위를 벌였다. 수천의 세르비아인들이 살해당했으며, 그 이상의 사람들이 강제 이주당했다.
마지막으로 부코비나 공국,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 등 동슬라브, 서슬라브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동부 지역들과 러시아 점령 지역에 대해서는 강제수용소를 운영했다. 제국은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대러시아주의를 매우 경계했으며, 갈리치아와 카르파티아 일대의 루신인과 우크라이나인들이 러시아에 기울어지거나 러시아화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여기 갇힌 동슬라브인들은 매우 열악한 환경에서 생활했고, 스스로를 러시아와 독립된 '우크라이나인'이라고 받아들여야만 풀려났다. 이 전범 행위는 새로 즉위한 황제 카를 1세가 제지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5.5. 외국과의 관계
5.5.1. 한국과의 관계
▲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조선식 두정갑. 1892년 조선과 오스트리아의 수교 과정에서 당시 조선 국왕 고종이 선물한 것.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은 아시아 국가들과 제국의 외교를 이은 중요한 행위자이다. 이는 한국과의 외교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오스트리아 선박으로서 최초로 한국을 방문한 것 또한 제국 해군의 포함인 SMS 나우틸루스 함이다. 나우틸루스 함은 1884년부터 동방 국가들을 친선 방문하는 장거리 탐사 항해 중이었고, 1886년에 조선에 들렀다. 나우틸루스 함은 러시아 제국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를 찍고 다시 돌아갔다.#
이후 제국 해군은 조선에 몇 차례 더 방문했다. 1890년에는 블라디미르 폰 키텔 함장이 지휘하는 코르벳함 SMS 즈리니가 제물포에 정박해 독일 영사의 환대를 받았다. 즈리니 함을 타고 온 대사들은 당시 한창 준비되고 있던 신정왕후 조씨의 장례식 때문에 국왕 고종을 알현하지는 못했지만, 대신 조선 독판교섭통상사무(외교부 장관) 민종묵과 만나 양국의 외교관계 수립을 논의했다. 분위기는 퍽 우호적이었다고 전한다. 이후 귀국한 즈리니 함은 본국 외무부에 논의 내용을 전달했다. 그리고 1892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일본 주재 아시아 전권대사 뤼디거 폰 비겔레벤 남작(Rüdiger Freiherr von Biegeleben)[57]을 통해 조선과 조오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다. 해당 통상조약의 조문 중에서는 제8관이 제국 해군과 연관이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은데, 4번째 조항 등에서 이 조약이 불평등 조약의 성격을 띄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제8관
1. 양국 군함(軍艦)은 서로 피차의 각 항구에 갈 수 있으며 배의 수리 재료 및 각종 식료품, 일체 필요한 물건은 모두 피차 서로 구매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상의 선박은 통상 및 항구 장정을 준수할 필요가 없으며 구매한 물품에 대해서는 모든 세금과 각종 소정 수수료를 모두 면제한다.
2. 오스트리아 군함이 조선의 통상하지 않는 항구에 갈 때에는 승선한 관원, 무관, 병역(兵役)은 상륙을 허가한다. 다만 여권을 소지하지 않은 사람이 내지에 가는 것은 허가하지 않는다.
3. 오스트리아 군함에서 쓰는 군장(軍裝) 물자 및 일체의 군량과 군수품은 조선의 각 통상 항구에 보관할 수 있으며, 오스트리아에서 위임하여 파견한 관원에게 넘겨주어 간수한다. 이런 군장 물자에 대해서는 모두 세금 징수를 면제하며 일로 인하여 전매(轉賣)할 경우에 산 사람은 납부해야 할 세금을 규례에 따라 더 지불하여야 한다.
4. 오스트리아 군함이 조선 연해에서 항로 상태를 조사할 경우에는 조선 정부에서도 힘껏 도와주어야 한다.
고종실록 29권, 고종 29년(1892년) 5월 29일 병술 2번째 기사
1. 양국 군함(軍艦)은 서로 피차의 각 항구에 갈 수 있으며 배의 수리 재료 및 각종 식료품, 일체 필요한 물건은 모두 피차 서로 구매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상의 선박은 통상 및 항구 장정을 준수할 필요가 없으며 구매한 물품에 대해서는 모든 세금과 각종 소정 수수료를 모두 면제한다.
2. 오스트리아 군함이 조선의 통상하지 않는 항구에 갈 때에는 승선한 관원, 무관, 병역(兵役)은 상륙을 허가한다. 다만 여권을 소지하지 않은 사람이 내지에 가는 것은 허가하지 않는다.
3. 오스트리아 군함에서 쓰는 군장(軍裝) 물자 및 일체의 군량과 군수품은 조선의 각 통상 항구에 보관할 수 있으며, 오스트리아에서 위임하여 파견한 관원에게 넘겨주어 간수한다. 이런 군장 물자에 대해서는 모두 세금 징수를 면제하며 일로 인하여 전매(轉賣)할 경우에 산 사람은 납부해야 할 세금을 규례에 따라 더 지불하여야 한다.
4. 오스트리아 군함이 조선 연해에서 항로 상태를 조사할 경우에는 조선 정부에서도 힘껏 도와주어야 한다.
고종실록 29권, 고종 29년(1892년) 5월 29일 병술 2번째 기사
1893년에는 알로이스 폰 베커 제독이 지휘하는 방호순양함 SMS 카이제린 엘리자베트[58]가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59]을 태우고 세계 일주 항해를 하던 와중에 제물포에 도착했다. 이들은 서울로 상경하여 독일공사관에서 통상조약을 승인하는 제국의회와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의 비준서를 조선 측에 전달하고 고종의 답을 받아갔다. 다만 페르디난트 대공이 조선에 오지는 않았는데, 당시 그는 이미 직전의 기항지인 일본에 내려 수행원들과 일본 여행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준서 교환 후 조선 측은 연회를 열어 사신단을 배웅했고, 베커 제독은 선물로 소총 20자루와 탄약 3통을 전달했다.[60] 2022년 공개된, 고종이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선물한 조선 두정갑은 바로 이때 답례로 전달된 것으로 보인다. 베커 제독과 카이제린 엘리자베트함은 조선에서의 일정을 마지막으로 귀국길에 올랐다. # # #[출처]
1901년에는 의화단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함선들이 대한제국을 찾았다. 톈진 대고구 요새 공방전에 투입되었던 방호순양함 SMS 센타 함은 일본 조선소에서 수리를 마치고 임무에 복귀하는 길에 제물포에 잠깐 들렀는데, 훗날 제국 해군의 잠수함 에이스이자 뮤지컬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주인공으로 유명한 게오르크 폰 트라프 소령이 소위 신분으로 승선 중이었다. 한편 장갑순양함 SMS 마리아 테레지아 함도 의화단의 난 진압에 참여하다 제물포에 정박한 적 있었는데, 당시 테레지아 함에는 제국 해군의 현대화를 주도하는 루돌프 몬테쿠콜리 제독(당시 소장)이 승선 중이었고, 훗날 제국 해군의 주요 요직을 겸직하며 1차 세계대전에서 활약하는 안톤 하우스 원수가 대령 신분으로 함장 직책을 맡고 있었다. 마리아 테레지아함과 카이제린 엘리자베트함, 센타 함, 어뢰정 레오파르트함 네 척이 대한제국에서 기항하며 보급과 휴식을 취했다. 몬테쿠콜리 소장은 덕수궁에서 고종 황제를 알현하고 한국 정부가 베푼 환영 연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1907년, 대한제국에서는 제국 육군 후사르 기병대 대위이기도 했던 작센코부르크고타코하리 가문[62] 레오폴트 클레멘트 필리프 아우구스트 마리아 공자에게 대훈위 금척대수장을, 그 부관 로렌츠 미하엘에게 태극장을 수여하였다. 가장 접근성 높은 기록인 조선왕조실록에는 수여 사실만 적혀 있는데다 다른 외교 문건들에 대한 접근성은 매우 낮아, 레오폴트 공자가 어느 경위로 금척대수장을 받았는지는 아직까지는 불명이다. 그는 독일 제국의 하인리히 폰 프로이센 왕자와 함께 단 둘뿐인 비아시아권 금척대수장 수상자이다.[63]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영-일 연합군과 독-오 동맹군이 칭다오 전투에서 맞붙을 때 일부 조선인 역시 일본군 소속으로 참전하였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훗날의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이다. 그는 대한제국군 육군무관학교에서 교육받다 경술국치 이후 일본 육사에 편입된 상태였으며, 일본군 제10사단 소속으로 칭다오 전투에 참전하여 무공을 쌓았다. 다만 그가 오스트리아인들과 실제로 대면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4년 후 그는 일본군에서 탈영하여 만주로 가 독립운동에 가담한다.
반대로 또 오헝 제국군에서 탈영한 체코 및 슬로바키아인들이 결성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이 서부 러시아로 쇄도하는 오헝 제국군과 독일군의 손길을 피해 시베리아로 건너오던 와중에 한국 독립운동가들과 접촉하기도 했다. 다름아닌 청산리 전투 당시 독립군이 썼던 무기의 원 소유주가 바로 이들이다.
한편 유럽 동부전선에서도 러시아 제국군 소속 한인들(고려인) 중에서 동맹국에 포로로 잡힌 이들이 있었다. 일부는 오스트리아 측에도 잡혔다고 전해지나, 자세한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다.
5.5.2. 중국과의 관계
중국과의 관계는 상당히 부정적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청나라는 1869년에 외교 관계를 맺었으나 사실상 교류는 거의 없었다. 그러던 두 국가가 1900년에 갑자기 제대로 충돌하게 되었으니, 바로 의화단 전쟁 때문이다. 오헝 제국군은 8개국 연합군의 일원으로서 제국 해군의 함선 총 4척을 동원하여 중국을 침략했고, 톈진시에서 청나라 북양함대 소속의 대고구 요새를 파괴했다.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는 톈진시에 자신들의 조계지를 두고 소수의 해군육전대원들을 주둔시켰다. 극동함대는 독일령 교주만에 독일 제국 해군과 함께 주둔했다.[64] 이는 오스트리아가 유럽 대륙 외에 유지했던 사실상의[65] 유일한 식민지였다.1912년에는 신생 중화민국 북양정부에서 청일전쟁과 뒤이은 혼란기로 인해 무너진 해군의 재건을 위해 오스트리아 측에 12척의 구축함을 주문했다. 후사르급 구축함의 설계를 따른 첫번째 함선은 1913년에 완성되어 룽퇀(龍湍) 이라는 함명을 부여받았으나, 이듬해 벌어진 전쟁 때문에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압류하여 SMS 바라스디너(Waradiner)란 이름으로 자국 해군에 편입시켰다.
6. 편제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역사
- 제국군 조직 구조
- 제국 합동 육군 및 항공대
- 1차세계대전 당시 편제
- 비행부대 목록
- 크로아티아 방위군[66]
- 지역별 향토예비군, 란트슈투름, 니펠켈리슈
- 그렌처, 이탈리아 국경요새
- 폴란드 군단, 우크라이나 시치 소총병대, 알바니아 군단
- 보안대
- 제국 해군 및 항공대[67]
- 해외 파병 부대
7. 군종
제국군은 그 복잡한 역사와 행정구역, 그리고 민족구성만큼이나 군사 편제도 다양했다. 육군의 경우 크게 세 가지로 나뉘었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양국의 합동 육군이 제국 전체의 방위를 맡았지만 오스트리아 제국과 헝가리 왕국, 그리고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 각자의 방위군들 또한 별개로 존재하였다. 현대 미합중국의 연방군 미군과 별개로 각 주의 주방위군이 존속하는 것과 유사하다.7.1. 육군
7.1.1. 근위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근위대는 총 5개 부대가 존재했다. 연대나 사단급, 심지어 군단급 근위대를 운영하던 주변 국가들과 달리[68] 각각이 최대 중대급으로 매우 작았다. 전장의 전투에도 투입되지 않았다.- 황립 및 왕립 선임근위궁사대
k.k. Erste Arcièren-Leibgarde.
- 왕립 헝가리 근위대
Magyar királyi nemesi testőrség(헝), k.u. Leibgarde(독).
- 황립 및 왕립 트라반트 근위대
k.k. Trabantenleibgarde.
- 황립 및 왕립 근위기병중대
k.u.k. Leibgardereitereskadron.
- 황립 및 왕립 근위보병중대
k.u.k. Leibgardeinfanteriekompanie.
7.1.2. 합동 육군
독일어: Gemeinsame Armee, k.u.k. Armee헝가리어: Közös Hadsereg
한국어: 합동 육군
▲ 합동 육군의 체코인 병사들.
황립 및 왕립 육군, 또는 합동 육군은 제국 전체를 방위하는 상설 육군이다. 신성 로마 제국 황실군의 직계이자 가장 핵심적인 육군 군종이다.
이름의 황립(Kaiserlich)은 오스트리아 제국을, 왕립(Königlich)은 성 이슈트반 왕관령을 의미하며 줄여서 k. u. k.(카 운트 카)라고 부른다. 1914년 기준 49개 보병사단과 8개 기병사단으로 구성된 16개 군단이 존재했다. 남부의 세르비아 왕국, 서부와 알프스 방면의 이탈리아 왕국, 동북부의 러시아 제국을 주적으로 한다.
합동 육군은 황립 및 왕립 전쟁성의 소관에 놓여 있었다. 반면 황립 및 왕립 란트베어는 빈에 있는 시스라이타니아의 국방부 소속이었으며, 왕립 헝가리 혼베드는 부다페스트에 있는 헝가리 왕국 국방부와 아그람의 크로아티아 수상부에 분속되어 있었다. 편제도 차이가 있었다. 합동 육군 보병연대는 당대 표준이었던 사각편제에 기반해 네 개 대대로 구성되었으나, 란트베어와 혼베드는 3각편제였다. 전쟁 발발 시 합동 육군은 란트베어와 혼베드를 지휘할 권한이 있었다. 이들은 제국 전역에서 모집되었으며 병과와 지역, 민족에 따라 종류가 갈린다.
일반 사관학교로는 빈의 테레지아 육군사관학교(Theresianische Militärakademie)가 있었다. 학제는 3년. 상술한 대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당시 마리아 테레지아의 지원으로 세워진 학교이며, 세계적으로 보아도 매우 이른 시기에 설립된 사관학교이다. 초대 교장은 황실군의 명장인 레오폴트 요제프 원수. 제국 멸망 이후에도 현대까지 오스트리아 연방군의 사관학교로 기능하고 있다. 한편 참모교육을 위한 학교로는 1852년 2월 14일에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명으로 설립된 황립 및 왕립 전쟁대학(k.u.k. Kriegsschule)가 있었다.
특수병과의 사관학교로는 황립 및 왕립 기술군사대학(k.u.k. Technische Militärakademie)가 존재했다. 1717년 사부아 공자 외젠의 요청으로 세워졌으며 포병, 통신, 철도 등 특수병과의 기술진과 장교들을 육성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학제는 역시 3년제였다. 테레지아 사관학교와 달리 제국 해체와 함께 사라졌다.
- 보병(Infanterie)
지역에 따라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 독일 연대
Deutsche Regimenter. 시스라이타니아에서 모집된 보병연대들이다. 독일계, 체코인, 폴란드인, 슬로베니아인, 우크라이나인 등으로 구성된다. 도합 57개였다. - 헝가리 연대
Ungarische Regimenter. 트란스라이타니아에 기반한 보병연대들이다. 헝가리인, 크로아티아인, 루마니아인, 세르비아인, 이탈리아인 등으로 구성된다. 도합 45개였다. 크로아티아 지방 보병연대들은 그렌처 연대들의 후손이었으며, 특유의 강인함으로 유명했다. -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보병대
Bosnisch-Hercegovinische Infanterie.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공동통치령에서 모집된 보병연대들이다. 보슈냐크인들과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으로 구성된다. 오스트리아식 야전모를 쓴 다른 연대들과는 달리 정식 군모로 페즈를 썼다. 총 4개 연대가 존재했다. 출신 성분을 보면 의아할 수 있으나, 가장 용맹했던 부대로 손꼽힌다. 군가로도 작곡된 '보슈냐크인들이 온다!'는 말도 있었다.
- 경보병(Jäger)
척후병들. 오스트리아군이 군사 역사에 남긴 가장 대표적인 유산이라 할 수 있다. 주로 산악지대 주민들이 많았다. - 황립 및 왕립 카이저경보병연대
k.u.k. Kaiserjäger. 경보병연대들로, 총 4개가 존재했다. 1895년에 수립되었다. 티롤인들 뿐만 아니라 제국 전역에서 모집되었다. 3분의 2가 독일계, 나머지 3분의 1은 이탈리아계였다. 오스트리아의 최정예부대 중 하나로, 황실 친위대 역할도 소화했다. 현대까지 이어지는 오스트리아군 경보병대의 직접적인 조상이다. - 황립 및 왕립 야전경보병대대
k.u.k Feldjäger. 경보병 독립대대들이다. 마찬가지로 제국 전역에서 모집되었으나 주로 독일인들이었다. 29개 대대가, 그리고 보스니아 보병대 산하에 1개 대대가 편성되어 있었다.
- 기병(Kavallerie)
세 병종으로 구분된다. 기병대의 경우 민족 전통에 크게 좌우되었기에 특정 민족에 대한 편중이 심했다. - 황립 및 왕립 용기병 연대
k.u.k. Dragoner. 시스라이타니아에 기반하는 기마보병 병과. 독일계와 체코인들로 구성되었다. 란트베어와 혼베드에는 없는 병종이었으며, 총 15개 연대로 구성되었다. - 황립 및 왕립 후사르 연대
k.u.k. Husaren. 트란스라이타니아에 기반하는 검기병 병과이다. 후사르라는 병종이 세르비아계 헝가리인들의 전통 병종이다. 절대다수가 헝가리인들이었으며, 총 16개 연대가 존재했다. 그와 별개로 하술할 혼베드에 왕립 후사르 연대들이 별도로 있었다. - 황립 및 왕립 울란 연대
k.u.k. Ulanen. 시스라이타니아, 그 중에서도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에 기반한 창기병 병과이다. 울란이라는 병종이 폴란드 윙드 후사르의 후신이므로 이는 당연한 결과였다. 절대다수가 폴란드인과 우크라이나인들이었으며 총 11개 연대가 있었다. 그리고 그와 별개로 하술할 란트베어 소속의 울란 연대가 별도로 6개 가량 존재했다.
- 포병(Artillerie)
포병은 크게 세 개로 나뉜다. 주로 독일인들과 체코인들이 구성했다. - 야전포병
보병, 또는 기병대를 지원하는 포병부대들. 야전직사포병연대(Feldcanonen Regiment), 야전곡사포병연대(Feldhaubitz-Regiment), 기마포병대대(Reitende Artillerie Division), 중포병대대(Schwere Haubitz Division) 등이다. 이들은 속한 전쟁 발발 시 예속된 사단과 똑같은 번호를 부여받았다. 1915년부터는 개편이 이루어지면서 보병사단 휘하에 1개 포병여단이 배속되었고, 그 산하에 곡사포병연대와 직사포병연대, 그리고 중포병대대가 각각 하나씩 추가되었다. 야전곡사/직사포병연대는 각각 4문의 대포[69]를 가진 4개 포대와 대공포대 하나를 배속받았고, 중포병대대는 2개 중곡사포 포대와 1개 10cm 직사포 포대로 구성된다. 결국 1개 보병사단은 64문의 야포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 산악포병연대
Gebirgsartillerie Regiment. 전쟁 발발 직전 10개가 존재했다. 산악포를 주 무장으로 사용했다. 그 외 야전포병과 차이점이 있다면 이들은 한 연대 내에 곡사포대와 직사포대가 혼성 편제되었다는 점이었다. - 요새포병연대
Festungsartillerie Regiment. 각지의 요새 주둔군 소속의 포병연대들이었다.
- 지원 병과
공병, 의무 등 전투지원부대들을 의미한다. 독일계와 헝가리, 체코계가 대다수였다. 유대계는 의무관들의 대다수를 차지했다.
오스트리아는 각 민족들의 환경과 전통, 특성에 따라 각기 다른 병과에 배치했다. 덕분에 이들 민족들은 적어도 자기 분야에서는 매우 뛰어났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부터 헝가리인은 용맹한 척탄병과 후사르 경기병으로 유명했고, 티롤의 이탈리아인과 크로아티아인은 충성심이 강한데다 가장 끈질긴 산악 경보병들이었다. 독일계는 왕조에 대한 충성심이 가장 강했으며 체코인은 포병 등 중장비에 강점이 있었고, 루마니아인은 프랑스군이 지옥에서 굴러나왔다고 혀를 내두를 정도로 잔혹했다. 세르비아인과 보슈냐크인도 용맹함으로는 전설적인 수준이었다. 폴란드인과 우크라이나인은 보병으론 믿을 만하지 못했으나 창기병으로써는 세계 최고였다. 다만 이들이 섞이는 보병대의 경우 언어 문제가 특히 매우 심각하게 불거져나오면서 전투력을 약화시켰다.
보병의 제식 소총은 오스트리아의 슈타이어 만리허 사가 개발한 풀 스트레이트식 볼트액션 소총인 만리허 소총이며, 지원용 기관총 역시 슈타이어의 슈바르츠로제 기관총이었다. 포병 및 중장비의 경우 주로 체코의 스코다 사가 제작한 장비들을 사용하였다.
7.1.2.1. 황립 및 왕립 항공대
독일어: Kaiserliche und Königliche Luftfahrtruppen헝가리어: Császári és Királyi Légjárócsapatok
▲ 황립 및 왕립 항공대 소속 외파크 153(Oeffag 153) 전투기. 알바트로스 D.III 전투기의 면허생산기이다.
육군 항공대의 경우 1893년 열기구 부대로 시작하여 1912년 본격적으로 창설, 1918년까지 존속했다. 1914년 기준 14개 대대에 147대의 항공기를 보유했다. 주력 전투기는 다양했으며, 자체 생산하기도 했으나 독일에서 수입하거나 면허생산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 중 독일 알바트로스 D.III의 면허생산기인 외파크 153 전투기는 안 그래도 좋은 전투기였던 원판보다도 뛰어난 성능을 자랑했다. 폭격대의 경우 한자-브란덴부르크 G.I를 운영했으나 독일 제국과는 달리 비행선은 없었다. 주된 항공기 생산 업체는 헝가리의 UFAG와 오스트리아의 로너 사였다.
오헝 제국의 낮은 공업 생산력으로 인해 항공기 생산량은 그리 많은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 초반에는 세르비아와 이탈리아의 항공 전력은 더 형편없었기에, 이들과 대치한 알프스와 발칸에서 제국 항공대는 별다른 저항을 받지도 않고 도시와 전선을 맹폭격하며 악명을 떨쳤다. 이탈리아-알프스 전선에 주로 배치되었는데 알프스의 난기류로 인한 비전투 손실도 상당했다. 아드리아해에서는 해군 항공대와 함께 해안을 방위하기도 했다. 오스트리아 최고의 에이스는 폴란드계였던 고드빈 폰 브루모프스키(Godwin Karol Marian von Brumowsky)로, 이손초 전선에서 총 35기를 격추했다.
그러나 넓은 전선을 전부 커버하기에 제국 항공대의 총전력은 항상 모자랐다. 동부전선의 러시아 제국 공군과 이탈리아에 지원 온 프랑스 육군 항공대, 그리고 영국 육군 항공대는 버거운 적수였고, 이탈리아도 전쟁 가담 후에는 평균적으로 매년 6000기의 항공기를 작정하고 쏟아내었다. 이는 오헝 제국이 전쟁 4년간 생산한 전체 항공기 숫자인 5000기에 맞먹는 숫자였다.
7.1.3. 황립 오스트리아 및 왕립 보헤미아 란트베어
독일어: Kaiserlich-königliche Landwehr(k.k. Landwehr)▲ 프란츠 로어 폰 덴타 상급대장의 10군 소속 란트베어 제6연대 장병들의 모습. 티롤 전선이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향토방위군. 란트베어란 단어 자체가 지역방위군을 의미한다. 명칭의 황립(Kaiserlich)은 당연히 오스트리아 제국을, 왕립(Königlich)은 헝가리가 아니라 보헤미아 왕국을 뜻한다. 줄일 때에는 합동 육군과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k.u.k.가 아닌 k.k. 란트베어로 표기한다. 빈에 있는 황립 및 왕립 국방성의 소관으로, 평시에는 합동군을 관할하는 전쟁성과 완전히 독립되어 있었다. 자체적인 사관학교로는 빈의 k.k. 프란츠 요제프 군사학교를 가지고 있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1808년 카를 루트비히 대공의 주도로 이루어진 군 개혁의 일환으로 창설되었다. 창설 이유는 소진된 오스트리아 정규군의 전력을 싸고 빠르면서도 확실하게 보충하기 위함이었다. 란트베어 부대원들은 고향 땅을 지킨다는 애향심으로 모집되어 2선급 무기, 자비 구매한 군복으로 무장한 채 예비역 장교들의 지휘를 받았다. 그러나 이들은 민병대가 아니었고, 혁명적인 국민의 군대였던 프랑스군을 벤치마킹하고자 하는 야심찬 목적을 가진 오스트리아의 차기 군대이자 동원예비군으로 설계되었다. 징집 연령은 18세에서 55세 미만이었다.
하지만 막상 실전에서는 부족한 훈련으로 인해 야전을 버티지 못하고 자체 붕괴하는 바람에 보통은 예비 또는 치안군 전력으로 사용되었다. 의욕이야 나폴레옹의 프랑스군 못지 않게 넘쳤지만 주말마다 연병장에 집합해 몇 시간 훈련받은 게 다였기 때문이다. 이들의 졸전을 보다 못한 오스트리아 정부는 이들을 두 개로 다시 나누어, 정규군과 비교해도 손색없다 평가받는 1급 란트베어와 그에 못 미치는 2급 란트베어를 구분하였다. 후자는 지역 치안이나 포로수용소 경비 임무를 수행하였고, 후술할 란트슈투룸 예비군이 되어 갈라져나간다. 한편 란트베어는 헝가리 의회의 반대로 헝가리에서는 모집되지 않았고, 갈리치아에서는 반오스트리아 성향이었던 폴란드인들을 못 믿겠다는 이유로 모집되지 않았다. 당시에는 사실상 보헤미아 왕국만이 유일한 란트베어 공급처였다. 1859년 잠시 해산되었다가, 대타협 이후인 1869년 재창설되었다. 독립된 자신들만의 군대를 원했던 헝가리가 지역방위군인 혼베드를 창설하자 오스트리아 제국 또한 자신들의 향토방위군인 란트베어를 부활시킨 것.
다만 1869년부터 전부 소집된 것은 아니다. 티롤의 란데스슈첸들을 제외한 일반 란트베어 보병연대들이 설립된 것은 1889년 오스트리아 의회에서 오스트리아 국가방위법이 제정된 이후였다. 법안 제정 직후 빈에 주둔한 제1보병연대부터 크라쿠프에 주둔한 제16보병연대까지 총 16개 연대가 설립되었다. 기병의 경우에는 보병보다 설립이 빨라 1883년부터 울란 연대들이 설립되었다. 가장 늦은 것은 포병연대들이었는데 1909년이 되어서야 만들어졌다.
1917년 이후로는 란트베어(Landwehr 향토방위군)란 명칭이 사라지며, 대신 슈첸(Schützen 총병)으로 바뀐다. 1914년 기준으로 7개 보병사단에 속한 37개 보병연대, 3개 산악연대와 2개 란데스슈첸 기병대대, 6개 울란 창기병 연대, 8개 야전직사포병대대와 8개 야전곡사포병대대로 구성되었다. 징집된 병사가 란트베어에 갈 지는 선착순이나 뽑기로 결정되었으며, 의무복무기간은 보병 2년, 기병과 포병은 3년이었다. 전역 이후에는 10년간 예비역 란트베어 대원으로 편성되며 총 20주의 예비역 훈련을 받았고, 그 후에야 란트슈투름으로 빠질 수 있었다. 편제는 합동 육군과 달리 삼각편제였으며, 2선급이었기에 인적 자원도 좋지 않았다. 지원복무자들은 1년간 복무하면 전역했을 정도다.[70] 그러나 장비의 질은 합동 육군에 비해 좋은 편이었다. 이는 오스트리아 정부가 자신들의 군대인 란트베어에 예산을 몰아주려 노력한 결과였다. 헝가리 또한 마찬가지로 혼베드에 집중하는 바람에 합동 육군의 현대화는 항상 지지부진했다.
- 보병
- 보병연대
K.k. Landwehr Infanterieregimenter. 일반적인 보병연대들. 1914년 시점에 총 37개 연대가 존재했다. 사단으로 치면 총 7개 사단 규모이다. - 란데스슈첸 보병대
K.k. Landesschützen. 1871년 설립된 티롤 후백국과 포어아를베르크의 보병대. 10개 대대, 다 합해 3개 연대 규모였다. 1917년 이후로는 카이저슈첸(Kaiserschützen)으로 명칭이 바뀐다. - 황립 오스트리아 및 왕립 보헤미아 산악부대
K.k Gebirgstruppe. 오스트리아 란트베어 산하에 티롤 지역 방위를 위해 편제된 특수 부대. 1906년 제8보병사단의 사단장으로 재직중이던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의 주도로 상술한 란데스슈첸 산악보병대대들과 란트베어 보병연대[71], 하술할 란데스슈첸 티롤 기병대대들을 통합하여 만든 산악전 전문 부대이다. 주적인 이탈리아 왕국군 산악전 부대인 알피니 연대들의 영향을 짙게 받았다.
산악전 부대이니만큼 주로 경량화된 카빈 소총이나 산포 등으로 무장했다. 깎아지른 알프스 산맥과 빙하 지대가 작전 구역이었으니만큼 스키나 고글, 설피나 레펠 등의 극지, 산지용 장비도 군장에 포함되어 있었다. 따뜻한 여름에는 알프스의 산장과 각종 베이스캠프들을 기지 삼아 능선을 오르내리며 훈련했고, 겨울에는 계곡으로 내려와 스키를 통한 기동 훈련에 매진했다. - 기병
- 란데스슈첸 기병대
Reitende Landesschützen. 달마티아와 티롤에 기반한 2개 기병대대. 검기병 부대이며, 세이버와 리볼버로 무장했다. 이들 역시 1917년 이후에는 카이저슈첸 기병대로 명칭이 변경된다. 두 대대 중 티롤 대대는 하술할 란트베어 울란 1연대와 함께 란트베어 기병여단을 구성했다. 전시에 티롤 대대의 1중대와 3중대는 란트베어 보병사단에, 2중대는 헝가리 방위군 보병사단에 배속되었다. - 황립 및 왕립 란트베어 울란 연대
k.k. Landwehr Ulanen Regimenter. 1869년 용기병 및 울란 창기병 중대들로 형성되어 1883년에 6개 연대들로 재조직되었다. 2개씩 묶여 3개 기병여단을 구성했으나, 보병사단들에 배속되어 작전을 뛰기도 했다. - 포병
- 야전곡사포병
k.k. Landwehr Feldhaubitzdivision. 1909년에 설치되었다. 총 8개 대대 규모이다. 오헝 제국군 기병, 포병 및 철도 병과의 Division은 사단이 아니라 대대를 의미한다. - 야전직사포병
k.k. Landwehr Feldkanonendivision 1913년에 설치되었다. 역시 총 8개 대대 규모이다. - 기타
- 황립 및 왕립 헌병군
K.k. Gendarmerie. 국가 헌병대로, 1848년 혁명 당시 이탈리아 혁명가들을 진압하기 위해 창설되었다. 범죄자 체포와 반란 진압 임무를 띄었다. 대타협 이후에는 란트베어 산하 조직으로 개편되면서 헝가리 왕국령의 관할권을 신생 헝가리 혼베드 헌병군에 넘겨주었다. 제국군 해산 이후에도 오스트리아 공화국의 헌병군으로 살아남았으나 최종적으로 2005년에 오스트리아 연방경찰청에 통합되어 사라졌다.
7.1.4. 왕립 헝가리 방위군
헝가리어: Magyar királyi Honvédség독일어: Königliche ungarische Landwehr
▲ 동부전선 참호 속의 왕립 헝가리 혼베드 제309연대 병사들
성 이슈트반 왕관령 중 헝가리 왕국의 향토방위군. 혼베드란 헝가리어로 국가방위군을 의미한다. 란트베어와 마찬가지로 헝가리 왕국 자체의 왕립 국방성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합동 육군을 관장하는 전쟁성과는 독립된 존재였다. 독일계는 헝가리 란트베어라 부르기도 했으며, 이때는 왕립 헝가리를 의미하는 Königliche ungarische를 줄여서 K.u.(카우) 란트베어라고 표기한다. 헝가리 왕국의 군대이지만, 부다페스트의 헝가리 수상부와 아그람의 혼베드 6관구를 통해 크로아티아 도모브란 또한 간접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다.
1867년 대타협으로 창설되었다. 1848년 헝가리 혁명 당시 봉기를 일으켜 독립 직전까지 갔다가 오스트리아와 크로아티아, 러시아에 진압당했던 헝가리 공화주의 독립군의 역사와 명칭을 계승한다. 이름의 유래에서 알 수 있듯 헝가리 왕국 정부와 헝가리인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던 군대 안의 군대였다. 오스트리아에 맞선 헝가리 왕국의 주체성의 상징이었으며, 영토 내의 모든 민족들을 헝가리인으로 강제 동화하는 첨병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합동군과 란트베어의 공용어는 독일어였고 그 밑에 연대어들은 연대별로 전부 달랐던 반면 혼베드는 모든 언어를 헝가리어로 통일했다.[72]
이는 1848년 혁명이 진압된 이후 1867년까지 독일계의 동화 위협을 받았던 헝가리인들이 혼베드를 민족 문화의 수호자이자 전파자로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당대 대부분의 국가들의 군대처럼, 혼베드도 헝가리의 '국민 만들기'의 가장 중요한 학교로 기능했다. 그러나 타 민족들 입장에서 혼베드는 매우 배타적이고 제국주의적인 군대였다. 특히 헝가리의 주된 동화 대상이자 1848년 당시의 헝가리 독립군이 트란실바니아에서 벌인 대량학살의 트라우마를 기억하는 루마니아인들은 자신들의 민족성을 억압하는 혼베드를 매우 싫어했다. 헝가리와 역사적으로 사이가 좋지 않던 크로아티아인들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1870년대 이후 오스트리아 란트베어 헌병군이 트란실바니아와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의 경찰권을 혼베드에 넘긴 후부터는 더했다. 그래도 크로아티아인들은 자신들의 문화와 언어를 보장해주는 자체적인 국군인 도모브란이 있었기에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물론 일개 제후국 군대 주제에 초반부터 이런 무지막지한 권한을 누렸던 것은 아니었다. 제국 입장에서는 제국 전역을 관장하는 합동군도 있는 마당에 제국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적이 있는 헝가리에게 대군을 쥐어 줄 필요가 당연히 없었다. 때문에 창설 당시 혼베드에는 고작 4500명의 보병과 2000명의 후사르 기병뿐이었으며 포병이나 기타 보조병과는 없었다. 그야말로 지역 치안군에 어울리는 규모였다. 복장도 이 때는 합동군의 군복을 조금 손질한 수준으로 거의 차이가 나지 않았다. 한때 이랬던 혼베드는 헝가리 민족주의자들과 정치인들의 오랜 노력으로 조금씩 성장했다. 그들은 제국의회에서의 로비와 설득, 타협과 협박을 통해 제도적으로 혼베드의 크기를 점차 키워갔고, 개인적으로 중장비를 구매해 기증하기도 했다.
그 결과 1914년 시점에 혼베드는 6개 군관구에 편성된 32개 보병연대와 10개 후사르 연대, 8개 도보포병연대와 1개 기마포병연대가 주축이 된 거대한 군대로 성장했다. 란트베어와 마찬가지로 1개 연대 내에 3개 대대가 있는 삼각편제였다. 그 외 각종 보조 부대들과 합동군 소속 제국 헌병군과는 별개의 왕립 헌병대도 가지고 있었던데다 부다페스트에는 자체적인 사관학교인 루도비커(Ludovika) 군사학교를 두고 헝가리 민족 문화와 군인을 양성했기에 혼베드는 거의 완벽한 독립 작전이 가능했다. 군복 또한 헝가리 전통의 아틸라 재킷 등이 포함된, 헝가리 민족주의적인 색채를 강하게 띄었다. 장비 또한 신형 무기를 보급받았기에 매우 좋았으며, 병사들은 합동군이나 란트베어와 달리 같은 언어와 같은 민족이라는 구심점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헝가리가 제국 정계에서 큰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 혼베드 전력이 뒷받침해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혼베드 또한 오스트리아의 파트너로써 제국의 절반을 차지하는 헝가리의 정치적 위치를 바탕으로 대대적으로 확장했다.
그래서 전쟁성과 합동 육군, 란트베어와 황립해군은 'U상황[73]', 즉 혼베드와 합동 육군의 헝가리 보병 연대들, 그리고 후사르 연대들의 반란 상황에 대비한 작계도 세워 두었다. 반란 발생 시 육군이 부다페스트를 포위하며 반란 부대들을 상대하고 해군 도나우 전대의 포함들이 도나우강을 따라 시내에 진입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작전이었다. 실제로 1905년 러시아에서 피의 일요일 사건이 일어나고 오헝 제국에서도 이에 영향을 받은 소수민족들의 시위가 벌어지자 이 계획은 한 번 발동될 뻔했으나, 혼베드 병사들이 순순히 통제에 따르고 헝가리 의원들이 황제에 충성맹세를 하면서 상황은 별 문제 없이 끝났다. 이후 헝가리 의원들이 오스트리아와 타협하여 혼베드를 지역 방위가 아닌 제국 국방의 최전선에 세우되, 보다 더 전력을 강화하는 것을 허락받으면서 혼베드는 포병대도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제국의 절반인 헝가리가 혼베드에 쏟아붓는 국방비가 증가하면서, 반대급부로 합동군의 전력 증강은 더욱 지지부진해졌다. 전쟁이 벌어진 후에도 혼베드는 전쟁성의 지휘를 받을지언정 합동군과 란트베어와 혼성 편제된 적은 없었다.
제국이 붕괴된 후에 혼베드 부대원들은 제국군의 다른 부대에서 복무하던 헝가리인들과 함께 헝가리 왕국군의 주축을 이루었다. 그리고 1922년부터 헝가리 왕국군은 혼베드의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 왕립 헝가리 혼베드로 이름을 바꾸었다. 심지어 1990년대 동유럽 혁명으로 헝가리 인민공화국이 붕괴된 이후 창설된 현대 헝가리군도 '왕립'만 뺀 채 혼베드의 명칭을 씀으로써 정신적인 계승 의식을 드러내고 있다.[74] 추가적으로 축구 클럽 부다페스트 혼베드 FC의 명칭 또한 여기서 따왔는데, 이는 한때 헝가리군이 해당 클럽의 스폰서였기 때문이다.
- 왕립 헝가리 헌병군
Magyar Királyi Csendőrség. 헝가리 왕국령을 관할하는 헌병군으로, 1881년 혼베드 산하에 창설되었다. 일반적인 경찰 업무나 대민 지원도 당연히 했으나, 헝가리 왕국의 가장 충성스러운 부대이자 마자르화 정책과 소수민족 및 노동자 탄압의 기수이기도 했기에 많은 증오를 받았다. 상술한 대로 트란실바니아의 루마니아인들이 특히 싫어했는데, 이들에 의해 학살을 당한 적이 여럿 있기 때문이었다.
제국 멸망 이후에도 독립된 헝가리 왕국의 헌병군으로 존속했으나 1944년 헝가리를 점령한 로디온 말리놉스키 원수의 소련군이 헝가리를 괴뢰국화 하는 과정의 첫 제물이 되어 해체되었다. 사유는 소련 각지에서의 학살과 1944년 헝가리 유대인들을 나치 친위대에게 넘겨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로 보내버렸다는 혐의 때문이었다. 과장된 면도 없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거짓도 아니었기 때문에 이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7.1.4.1. 왕립 크로아티아 방위군
크로아티아어: Kraljevsko hrvatsko domobranstvo독일어: Kroatisch-slawonische Landwehr
헝가리어: Horvát-szlavon Honvédség
▲ 제42향토방위보병사단, 일명 '악마 사단'의 배지
▲ 알프스 전선 참호 속의 도모브란 포병대
성 이슈트반 왕관령 중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의 향토방위군. 크로아티아어로 도모브란스트보는 본토 방위군을 뜻하며, 줄여서 도모브란이라고도 한다. 독일계는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란트베어, 헝가리인은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혼베드라 부르기도 했다. 반대로 크로아티아인들도 혼베드나 란트베어를 오스트리아/헝가리 도모브란이라 불렀다. 1868년 헝가리-크로아티아 타협으로 창설되었다.
헝가리 혼베드 6관구 관할 지역에 속해 있었으나 헝가리 국방부와는 독립된 군대로, 크로아티아 영작[75]부에 속했다. 그러나 크로아티아 부왕부가 부다페스트의 헝가리 왕국 수상부의 관할하에 있었으므로 결과적으로 헝가리의 하부 조직이었던 것은 맞다. 크로아티아인들과 일부 세르비아인들이 주축이며, 헝가리-크로아티아 타협의 결과 세르보크로아트어를 사용할 권리와 크로아티아 전통 복식 및 깃발을 사용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총 5개 연대가 국경을 따라 배치되었다. 과거 군정국경지대[76]을 경비하던 그렌처 연대들의 포지션을 일부 계승했다고 할 수 있다. 크로아티아계 고위 군인 다수가 여기서 경력을 쌓았다. 훗날 이손초 전선에서 명성을 날리는 스베토자르 보로예비치 폰 보이나 원수도 군 경력을 도모브란에서 쌓으면서 사령관을 역임한 후 합동 육군으로 나아간 케이스이다.
전시에는 4개 연대가 모여 제42향토방위사단을 구성했다. 별명은 '악마 사단(Vražja Divizija)'이었는데, 이들의 높은 충성도와 훈련도에 감명받은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직접 붙여 준 별명이었다. 세계대전 당시에는 도모브란의 사령관이던 스체판 사르코티치 소장[77]이 사단장으로써 지휘했으며, 세르비아 침공 당시 세르비아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대량 학살과 파괴 행위, 강간 등의 끔찍한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 이후 갈리치아로 보내졌다가 브루실로프 공세에 제대로 휘말려 다수의 병력을 잃었다.
2차 대전 당시 독일 국방군의 크로아티아인 외인부대인 제369보병연대/사단은 악마사단이란 별칭을 계승했으며, 크로아티아 독립국 산하의 지역방위군도 도모브란의 이름을 계승했다. 90년대 크로아티아 독립전쟁 당시에는 크로아티아군 소속 일부 부대가 도모브란의 명칭을 계승했다.
7.1.5. 예비군과 비정규병, 외인부대
- 그렌처
Grenzer. 국경 지대 사람이라는 뜻이다. 오스만 제국과 접한 남부 국경 지역에 설치한 군정국경지대(Militärgrenze)에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피해 들어온 기독교인 난민들을 정착시켜 편성한 국경 경비용 민병대로, 후사르와 그 기원이 같다. 세르비아인과 크로아티아인들, 왈라키아인 도적들이 다수였다. 민병대였으나 전시에는 오스트리아군 사령부의 통제를 받았으며, 나폴레옹 전쟁 때에는 오스트리아군의 주력 보병대 중 하나로 편입되면서 제국전쟁위원회의 관할을 받으며 정규군화되었다. 19세기 중반에는 크로아티아 왕국 부왕[78]의 관할이 되었다. 18세기 말부터 오스만이 쇠퇴하면서 남부 국경의 위험성이 감소함에 따라 군정국경지대는 1869년부터 점진적으로 철폐, 비무장지대화되어 1881년 완전히 폐지되었다. 이때부터 그렌처들은 군사적 존재 의의를 잃었으며, 오히려 국방에 위험 요소로 간주되어 점차 그 규모와 지원이 축소되었다. 이후 합동육군 헝가리 연대들의 일부로 편입된다.
- 향토예비군
란트슈투름-Landsturm(독일어), 니펠켈리슈-Népfelkelés(헝가리어). 향토예비군으로, 34세에서 55세 사이의 남성을 대상으로 한다. 이들 또한 오스트리아 향토예비군과 헝가리 향토예비군으로 나뉜다. 세계대전 발발 시점에서 시스라이타니아에 기반한 오스트리아 향토예비군이 40개 연대, 트란스라이타니아에 기반한 헝가리 향토예비군이 32개 연대 규모였다.
- 슈탄드쉬첸
Standschützen. 티롤 지방의 향토 방위 민병대. 민병대이기에 장교와 사령관도 대원들이 직접 뽑는다. 사령관의 계급은 소령이었다.
그 근원은 15세기까지 올라가나, 직접적인 조상은 나폴레옹 전쟁 당시인 1805년 결성된 안드레아스 호퍼의 티롤 저항군이다. 당시 나폴레옹은 티롤을 오스트리아에서 떼어 바이에른에 넘겨주었는데, 지역 주민이었던 안드레아스 호퍼는 이에 반발하며 오스트리아에 충성하는 저항군을 결성하였다. 그의 반란군은 바이에른을 몰아내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곧이어 들이닥친 프랑스군에 진압되었으며 이후 호퍼는 오스트리아 애국자의 상징이 되었다. 티롤 슈탄드슈첸 사령관의 계급이 소령인 이유도 호퍼의 계급이 소령이었기 때문.
무기도 구식에다가 대원들도 태반이 미필이라 통제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이탈리아와의 전쟁이 벌어지자, 이들은 갈리치아로 차출된 란트베어 산악부대의 빈자리를 메꾸고 성공적으로 일대를 방어해냈다.
- 보안대
슈츠코어-Schutzkorps.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공동통치령에서 11개의 대대로 조직된 보슈냐크인 민병대로, 일종의 내무군 역할을 수행했다. 공동통치령이 1908년부로 완전히 오헝 제국에 합병되자 세르비아인들은 매우 큰 불만을 품었는데, 이를 눈치챈 제국 정부는 보슈냐크인들을 주축으로 결성된 이 민병대에 힘을 밀어주며 세르비아인들을 진압하는 역할을 맡겼다. 특히 체트니크가 주된 목표였다.
물론 말이 진압이지 곳곳에서 민간인 대상으로 학살이 벌어졌고, 제국 정부는 남슬라브인들의 분열을 유도하기 위해 고통을 호소하는 세르비아인 신민들의 상소를 전부 묵살했다. 이들의 학살은 20세기 내내 발칸의 유고 지역에서 벌어질 대량 학살의 첫 단계였다. 크로아티아에 우스타샤와 도모브란이, 세르비아에 유고슬라비아 인민군과 체트니크가 있었다면 보슈냐크인들에게는 한트샤르와 이 보안대가 있었다.
- 폴란드 군단
Legiony Polskie/Polnische Legionen. 1914년 전쟁 발발 직후 폴란드인들을 모아 결성한 일련의 외인부대들을 칭한다. 제국의회 내의 폴란드계 의원들의 노력 덕분에 폴란드인 장교들이 지휘권을 보유했다. 3개 여단이 존재했으며 각 여단은 보병연대 3개와 기병연대 하나, 포병대대 하나로 구성되었다. 목적은 독립 폴란드의 건설이었다.
그러나 1917년 러시아가 혁명으로 나가떨어졌음에도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폴란드를 독립시켜 주기는 커녕 괴뢰국인 폴란드 섭정왕국을 세우자 이들은 반발하기 시작했다. 1917년 7월 독일 제국군이 폴란드 군단원들에게 충성 서약을 강요하자 1여단과 3여단은 거부했으며, 이로 인해 해산당했다.[79] 이후 오헝 제국 국적자들은 오헝 제국 육군에 강제로 징집되어 병력 분쇄기나 다름없던 이탈리아 전선으로 보내졌다. 한편 2여단은 충성을 맹세하여 섭정왕국 국방군의 폴란드 보조부대로 격하되었으나, 이후 부대 전체가 무장탈영하여 러시아 육군 소속이었던 폴란드 2군단과 연합하였다. 이들은 카니우 전투에서 독일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으나 중과부적으로 항복하였고, 포로가 되어 강제 노역장으로 끌려갔다. 이들이 이민족들 사이에서 힘든 군 생활을 하며 부르던 블랙 코미디스러운 노래가 바로 군인의 힘든 시간(Ciężkie czasy legionera)이다.
이후 이들 폴란드 여단 출신자들은 폴란드군의 주축이 된다. 당장 최고지도자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원수부터가 1여단과 3여단장을 겸직했던 인물이었다. 폴란드 인민군의 미하우 롤라지미에르스키 원수 역시 폴란드 군단 출신이다. 따라서 이들은 사실상 현대 폴란드군의 정신적인 조상이라 할 수 있다.
- 알바니아 군단
알바니아인 의용병 부대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알바니아 군집단 제19군단 예하에 제47보병사단, 제81보병사단, 제220란트슈투름여단으로 꾸려져 있었다.
- 우크라이나 시치 소총병대
Українські cічові стрільці/Ukrainische Sitschower Schützen. 우크라이나인 의용병 부대. 1894년부터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학생들이 결성한 비밀결사와 동호회들을 기반으로 오랜 로비 끝에 1913년 제국의 승인을 받아 공식적으로 창설되었다. 사실 군대라기보다는 우크라이나 민족운동의 보이스카우트였으며 시치라고 불린 우크라이나인 공동체들 전반을 아울렀다.
1914년 의용군으로 재조직되었으며 전쟁이 벌어지자 오헝 제국군의 일원으로 참전했다. 일부 인사들은 오헝 제국에도 저항했으나 이들 분파는 주류가 아니었던데다 제국의 승인을 받지 못했으므로 소수였다. 대다수는 나머지 우크라이나를 점령 중인 러시아 제국을 적으로 여겼으며 사라예보 사건으로 전쟁이 발발하자 제국군에 입대를 독려했다. 이들의 사령관마저도 합스부르크 황가의 일원인 빌헬름 프란츠 폰 합스부르크였다.[80]
1917년 러시아가 붕괴하고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이 러시아로부터 독립하자 이들은 우크라이나 인민군의 주력이 되어 볼셰비키 및 폴란드와 전쟁을 벌였다. 오헝 제국과 독일 제국이 붕괴한 이후에는 외세로부터 드디어 완전히 독립한 인민공화국의 군대로써 볼셰비키 적군을 막아내었으나 중과부적으로 밀렸다. 설상가상으로 서부에서 폴란드가 밀고들어오면서 우크라이나가 멸망하자 해산되었다. 일부 인사들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으로 흘러들어가기도 했다. 그들은 2차 대전 이후 소련의 추적을 받아 암살되었다.
시치 소총병대원들은 정신적인 측면에서 현대 우크라이나군의 조상이다.[81] 군사 분야 말고 현대 우크라이나 스카우트들도 이들의 후손임을 자처하고 있다.
7.2. 황립 및 왕립 해군
자세한 내용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 문서 참고하십시오.8. 계급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는 육군과 해군뿐 아니라 공직에 있어서도 모든 장교, 관료 및 공무원은 급여와 일반 우선 순위 모두에서 12개의 계층적 클래스(Rangklassen) 중 하나로 등급이 매겨졌다. 그 중에서도 장성급 계급체계는 독일식 계급체계와 유사했으나 일부 차이가 있었다. 소장 - 중장 - 대장(병과대장) - 원수로 올라가는 형태였다.준장으로 명명된 계급이 없었기에 소장이 타국의 준장과 소장의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육군 병과대장 계급 중에서 포병대장(Feldzeugmeister)의 경우, 독일식으로 '~병과의 대장(General der XXX)' 형식으로 구성되는 보병 및 기병대장과는 다른 독자적인 형태를 띈다. 한편 육군 중장의 경우 오해하기 쉬운 계급명을 가지고 있다. 직역하면 부원수(Feldmarschall-leutnant)라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대장(General), 그리고 훗날 도입된 상급대장(Generaloberst)보다 낮은 계급이다. 원래 원수를 보필하는 부사령관을 가리키는 직책명이었다가 군사 계급화되었고, 그 위로 대장과 상급대장이 차례로 도입되며 밀려나 중장 정도의 계급으로 고정된 것이다. 때문에 만일 19세기 이후의 오스트리아 제국군 장성이 부원수라고 표기되어 있다면 문자 그대로 부원수가 아니라 그냥 중장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원수의 경우 신성 로마 제국 시절부터 이어져 온 야전원수 계급을 그대로 계승한다. 그러나 육군에서는 대타협 이후부터 1차대전까지 임명된 적이 없었다. 총사령관인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와 제국군 감찰관이었던 테셴 공작 알브레히트 대공만이 유이한 원수였지만 둘 다 대타협 이전에 수여받은 것이었다. 이 기간 동안 최고위 계급은 사실상 병과대장이었다. 그러다 1차대전 개전 직후 총사령관 테셴 공작 프리드리히 대공이 원수에 임명되면서 본격적으로 수여되기 시작한다.
육군 상급대장 계급은 1915년 9월 13일에야 병과대장과 원수의 사이에 있는 등급으로 공식적으로 도입되었다. 본래 없던 계급이 도입된 이유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사이의 정치적인 갈등 때문이었다. 독일이 파견한 제9군을 오스트리아-헝가리 육군 최고 사령부가 지휘하고자 하였지만, 독일 육군 최고 사령부는 제9군이 외국군에게 종속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당시 오스트리아 참모총장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의 직급이 보병대장이었는데, 독일 제9군사령관 리하르트 폰 슈베르트(Richard von Schubert)도 포병대장으로 직급이 같았다. 그래서 독일 육군 최고 사령부는 파울 폰 힌덴부르크 상급대장을 신임 제9군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오스트리아 군 실질 서열 1위보다도 독일의 일개 야전사령관의 계급이 더 높은 꼴이 되므로, 오스트리아 군부 측에서 간섭하기 어렵게끔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콘라트 또한 독일에게 종속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때마침 이탈리아 전선에 나가있던 오이겐 대공이 임시로 상급대장 직급을 달게 되었다. 오이겐 대공은 대장으로서 이탈리아 전선에서 2개의 군을 지휘하게 되었는데, 그의 지휘를 받아야 할 두 명의 사령관이 직급이 같은 기병대장, 보병대장인데다 나이 또한 대공보다 많았다는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이들을 효과적으로 지휘하기 위해 오이겐 대공을 임시로 상급대장에 임명하였다. 오헝 제국은 이러한 전례를 들어 콘라트 또한 상급대장으로 진급시키고자 하였다. 그래서 고를리체-타르누프 공세에서 전투가 끝나마자 곧바로 콘라트가 공로를 세웠다는 명목하에 상급대장으로 진급시켜,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독일군에게 종속되는 모양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3개월이 지나서야 상급대장은 공식 계급으로 도입되었다. 다만 콘라트 이후로는 상급대장이 된 장군이 한동안 없었다가 5개월이 지나서야 6명의 장군들을 한꺼번에 상급대장으로 진급시켰다. 이때부터 병과대장은 현대의 중장급 계급이 되어 한 단계 낮아진다.
한편 해군의 경우 원수 계급이 없었다. 오스트리아 해군의 대제독(Großadmiral) 계급은 독일과 달리 상급대장에 해당한다.
- 육군
<colbgcolor=#8da9c5><colcolor=#191919> 순위 | <colbgcolor=#8da9c5><colcolor=#191919> 계급 | <colbgcolor=#8da9c5><colcolor=#191919> 독일어 / 헝가리어 |
1st | 원수 | Generalfeldmarschall / Tábornagy |
2nd | 상급대장 | Generaloberst / Vezérezredes |
3rd | 병과대장 | General der Waffengattung / Gyalogsági tábornok, Lovassági tábornok, Táborszernagy |
4th | 중장 | Feldmarschallleutnante / Altábornagy |
5th | 소장 | Generalmajor / Vezérőrnagy |
6th | 대령 | Oberst / Ezredes |
7th | 중령 | Oberstleutnant / Alezredes |
8th | 소령 | Major / Őrnagy |
9th | 대위 | Hauptmann / Százados |
10th | 중위 | Oberleutnant / Főhadnagy |
11th | 소위 | Leutnant / Hadnagy |
12th | 직급이 없는 직원[82] | Gagisten ohne Rangklasse / Gagisták rang osztály nélkül |
계급 목록
병과 목록
9. 주요 인물
- 육군 원수 및 참모총장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 육군 원수 오이겐 대공
- 육군 원수 스베토자르 보로예비치 폰 보이나
- 육군 원수 헤르만 쾨베시 폰 쾨베슈하저
- 육군 원수 에두아르트 폰 뵘에르몰리
- 육군 원수 프란츠 로어 폰 덴타
- 육군 원수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
- 육군 원수 알렉산더 폰 크로바틴
- 육군 원수 프리드리히 대공
- 해군 중장 호르티 미클로시
- 육군 기병 대령 카를 알브레히트 폰 외스터라이히테셴 대공
- 해군 소령 게오르크 폰 트라프
- 육군 포병 중위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 우크라이나 시치 소총병대 소위 빌헬름 프란츠 폰 외스터라이히테셴 대공
- 계급별 인물 및 기타 유명 인물
10. 주요 참전 이력
11. 관련 서적
현재 오헝 제국군의 군사사에 관하여 전문적으로 서술한 서적은 국내에 단 한 권도 번역되어 있지 않다. 국내 서적들 중에서는 전쟁사 또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역사, 7월 위기를 다룬 외교사 서적들에서 부분적으로 오헝 제국에 대해 다루고 있다.이하 목록은 오헝 제국군사에 대하여 추가적으로 참조하기 좋은 서적들이다. 전부 영문 혹은 독문이다.
- 신과 황제를 위하여(For God and Kaiser)#
리처드 바셋의 2015년 도서. 오스트리아 제국군의 역사를 황제군 시절부터 1918년의 패망까지 다루었다. 오스트리아 제국군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간략히 훑어보기에 좋은 서적이다.
- 강철의 고리(Ring of Steel)#
알렉산더 왓슨의 2014년 도서. 1차 대전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과 독일 제국의 전쟁 수행에 대하여 다루었다. 2014년 구겐하임 레르만 상 군사사 부문 수상작.
- 철과 피: 1500년 이래 독일계 민족들의 군사사(Iron and Blood: A Military History of the German-Speaking Peoples since 1500)#
피터 H. 윌슨의 2023년 도서.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를 포함한 독일계 민족들의 군사사를 다루었다.
- 전쟁 계획 1914(War Planning 1914)#
2010년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출판한 서적으로, 1914년 각국의 전쟁 계획에 대해 다루었다.
- 동부전선: 대전쟁의 역사 1914 - 1918(The Eastern Front: A History of the Great War, 1914-1918)#
닉 로이드의 2024년작 도서. 1차 세계대전의 동부전선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다루었다.
-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해상정책 1867-1918(The Naval History of Austria-Hungary 1867-1918)#
로렌스 손다우스의 1994년 도서. 대타협 이후 오스트리아 제국 해군의 역사를 다룬다. 제국 해군사를 한 권으로 훑어보기에 가장 좋은 서적이다.
-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마지막 전쟁, 1914-1918(Austria-Hungary's Last War, 1914-1918)#
오스트리아 연방 국방부에서 편찬한 총서. 오헝 제국의 1차대전 수행 역사를 다룬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편찬이 시작되어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에 전권 발간 완료되었다. 오스트리아의 전쟁 수행, 특히 동부전선과 이탈리아 전선 및 발칸 전선에 대해 집중적으로 기술했다. 현재 영어로 번역 중에 있다. 1차 대전에 관한 러시아의 공식 역사서는 혁명으로 인해 편찬되지 못하였으며 이탈리아와 세르비아의 공식 역사서는 영어로 번역되지 않았기에, 본 총서의 가치는 남다르다. 2023년 1권이 영어로 출판된 것을 시작으로 2024년 10월 현재까지 총 3권까지 번역되었다.
- 최후의 예포가 울릴 때까지(Bis zum letzten Flaggenschuss)#
사운드 오브 뮤직의 주인공으로 유명한 게오르크 루트비히 폰 트랍 소령의 자서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잠수함 함장으로서 겪은 일들을 담고 있다. 원문은 당연히 독일어이지만 소령의 손녀 엘리자베스 캠밸이 영문으로 번역하였다. 영문 제목은 'To the Last Salute'이다.
- 오래된 군대의 종말(Das Ende der alten Armee)#
1915년부터 제국 멸망 때까지 초급장교로 복무했던 프리츠 베버의 회고록. 이탈리아 전선의 모습과 제국군의 붕괴 당시의 모습을 담았다.
- 정찰(Erkundungen)#
빈 대학교 역사학과와 오스트리아 연방 국방부의 지원을 받아 출판된 논문집이다. 1차 대전 직전 오스트리아, 독일, 러시아, 그리고 이탈리아 군사정보국의 활동에 대해 연구한 논문들이 포함되어 있다.
- 헝가리를 위한 삶(Ein Leben für Ungarn)#
헝가리 섭정 호르티 미클로시의 회고록. 1953년 독일어로 출판되었으며 현재 영어로 재간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뿐 아니라 훨씬 중요한 그의 그 이후의 삶 전반에 대해 서술하였다.
- 황제의 매(Des Kaisers Falke)#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원수의 전기.
- 황제의 외젠 공자?(Des Kaisers Prinz Eugen?)#
헤르만 쾨베시 폰 쾨베슈하저 원수의 전기.
12. 기타
- 건군 직후인 1872년에는 당대 제국주의 국가들이 으레 그랬듯이 북극 탐험대를 보내기도 했다. 카를 바이프레히트 해군 중위와 율리우스 리터 폰 파이아 육군 중위를 선장과 단장으로 하는 해당 탐험대는 북극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중 조난당했다. 그들은 대신 노바야제믈랴 섬과 스발바르 제도 사이의 섬들을 발견하여 황제의 이름을 따 프란츠 요제프 군도라 이름붙인 뒤 귀환하였다. 다만 해당 제도를 영토로 편입하지는 못했다. 이곳은 현재 러시아의 영토이지만 여전히 원래 지명을 유지하고 있다.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보유한 적이 없기 때문에 프랑스나 영국, 독일, 이탈리아, 포르투갈처럼 흑인 부대는 없었다. 그러나 단 한 명의 흑인 병사가 헝가리 혼베드에 복무한 기록은 남아 있다. 시몬 페리스라는 인물인데, 원래는 세네갈 또는 콩고 출신으로 부다페스트에 거주하는 한 터키인의 시종이었다. 그러나 고용인이 죽어 일자리를 잃자 그는 제국군에 입대 신청을 했고, 몇 번의 시도 끝에 입대에 성공했다. 그는 어린 시절에 헝가리에 건너왔기 때문에 스스로를 헝가리 사람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고 입대 신청을 한 이유는 헝가리 사람으로 인정받고 예쁜 헝가리 아내를 얻고 싶어서였다고 1915년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그러나 인터뷰 이후 전선으로 돌아간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 살았는지 죽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 오스트리아 출신이고 오헝 제국 국적을 가졌던 아돌프 히틀러 또한 원래대로라면 오헝 제국군에서 복무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징집을 회피하였고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독일 제국으로 넘어가 바이에른 왕국군에 입대했다.
13. 각종 매체에서의 등장
- 《구스틀 소위(Leutnant Gustl)》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1901년작 소설. 예비역 장교이기도 했던 슈니츨러는 그 특유의 내적 독백 기법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오스트리아군 장교단의 명예의식과 허례허식을 꼬집었다. 이 작품이 출판된 직후 제국군은 자신들의 명예가 손상되었다며 격분했고 이 때문에 슈니츨러는 예비역 군의관 신분을 박탈당한다. '구스틀 소위'는 대표적인 세기전환기 작품이자 독문학에 의식의 흐름 기법을 최초로 도입한 기념비적인 소설이다. 국내에도 당연히 번역되었다. - 《생도 퇴를레스의 혼란(Die Verwirrungen des Zöglings Törleß)》
로베르트 무질의 1906년작 소설. 군사학교의 생도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중심에 있는 퇴를레스의 내적 변화를 다룬다. 작가 자신의 사관학교 경험에서[83] 기반한다. 무질에게 심리학자로써의 명성을 안겨 준 작품이며, 전설적인 독문학 비평가인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가 꼽은 20권의 독문학 정전(Der Kanon) 중 하나이기도 하다. 국내에도 여러 차례 번역되었다. - 《라데츠키 행진곡(Radetzkymarsch)》
요제프 로트의 1932년작 소설. 19세기 중반부터 1차 세계대전의 종전까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몰락을 한 가문의 흥망을 통해 보여 준다. 제목은 오스트리아 제국군의 군가이자 제국 절대주의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라데츠키 행진곡'에서 따왔다. 이것 역시 라이히라니츠키가 꼽은 20권의 독문학 정전 중 하나다. 후속작은 1938년에 출간된 '황가의 무덤(Die Kapuzinergruft)'이다. 한국에서는 창비에서 세계문학전집 5호로 번역해 출간하였다. 역자는 황종민. - 《라데츠키 행진곡》
위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오스트리아 드라마. 1994년에 상영하여 호평을 받았다.
- 《빙하와 어둠의 공포(Die Schrecken des Eises und der Finsternis)》
위의 제국군 북극 탐험대의 기록을 바탕으로 한 소설. 작가는 오스트리아 현대문학의 거장 중 하나인 크리스토프 란스마이어이다. 1984년에 출간된 그의 초기작이다. 한국에서는 문학동네에서 세계문학전집 74호로 번역해 출판하였다. 역자는 이화여자대학교 독어독문과 진일상 교수.
- 《배틀필드 1》
다이스의 FPS 게임. 제1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한다. 동맹국인 독일 제국군, 오스만 제국군과 함께 등장 세력으로 등장한다. 캠페인에서는 알프스 전선에 참전한 이탈리아 왕국군 아르디티 병사의 시점에서 적으로 등장한다.
[1] 군주는 제외[겸임.] [겸임.] [4] 최종 계급 원수[5] 최종 계급 원수[6] 최종 계급 원수, 최종 작위 백작.[겸임.] [8] 최종 계급 상급대장[9] 최종 계급 상급대장[겸임] [11] 최종 계급 상급대장[12] 최종 계급 원수[13] 최종 계급 상급대장[14] 물론 슈튀르크 또한 외교적 행동으로는 세르비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베르히톨트와 의견을 같이하였다.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으면 남부 슬라브 지방(보스니아)이 제국에서 이탈할 것이라고 생각했다.[15] 전쟁에 서명을 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얼마 안 가 3주 동안 긴 여름 휴가를 떠난다(...).[16] 세르비아가 혐의를 인정하지 않고 있어야 선전포고를 개시할 명분이 마련되기 때문이었다. 베르히톨트는 내심 세르비아가 최후통첩을 무시하길 바란 것이다.[17] 다만 의회와 군부는 사건을 빌미로 세르비아를 상대로 전쟁을 벌여 승리를 거두어 영광을 되찾고 발칸에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계산도 있었다. 제국의 신민들은 순수히 황태자의 죽음에 세르비아에게 크게 분노하였다.[18] 당시 성은 벡(Beck).[19] 크로아티아까지 합하면 제국 영토의 거의 4분의 1이다.[20] 러시아에 투자하여 독일 방면의 철도망을 확충하도록 했다.[21] 콘라트는 헝가리를 안 좋게 생각하였다. 그는 헝가리가 본질적으로 제국에 충성하지 않고 오스트리아 제국이 가진 독일계로서의 정체성을 약화 혹은 희석시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은 독일의 주도권을 프로이센 왕국에게 내주었고, 이는 대타협이라는 결과를 내주었다. 즉 콘라트는 발칸의 슬라브인들만이라도 제국의 지배하에 둔다면 헝가리도 더 이상은 제국에 반발하지 않을 것이란 속내였다.[22] 동맹국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와 같은 동부전선과 서부전선 사이의 우선순위 문제를 놓고 끝내 해결하지 못했다.[23] 전쟁 직전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에게 최후통첩을 준비할 때 명색이 동맹인데도 이탈리아와 상의를 하나도 하지 않고 오로지 독일과 상의를 하는 모습을 보고는 끝내 미련을 버렸다.[24] 세르비아 침공 전만해도 베르히톨트는 독일이 제국을 도와줄지만을 걱정하였었다. 고의든 아니든 베르히톨트에게 이탈리아는 안중에도 없었다. 애초에 잠재적 적국 취급인지라 고려할 이유도 명분도 없었다.[25]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카를 1세가 이 말을 하던 시기는 제국이 멸망하기 바로 직전이었다. 리처드 바셋의 "For God and Kaiser"에서 발췌.[26] 대학생은 1년만 복무하면 되었다.[27] 테레지아 훈장. 병사가 상관의 명령을 받지 않은(직접적인 명령 불복종은 제외) 자발적인 행동으로 공을 세웠을 경우 포상한다.[28] 자세한것은 해당 사이트 참조 #[29] 황립 및 왕립 카이저경보병연대의 군복이다[30] 실제 제국 내 언어사용자 분포는 위 지도보다 더 복잡했다. 특히 헝가리 왕국 남부 보이보디나와 바나트 지역의 경우, 마을 단위로 서로 다른 민족이 뒤섞여 있었다. 크로아티아인, 보슈냐크인, 세르비아인들 역시 세르보크로아트어 화자로만 표현되었다.[31] 프랑스의 최대 적수이자 워털루에서 백일천하를 끝장낸 영국은 주로 해군을 통한 봉쇄와 대륙 동맹국들에 대한 자금 지원을 통해 프랑스를 상대했으며, 직접적으로 육군이 개입한 적은 많지 않다. 나폴레옹을 결정적으로 몰락시킨 러시아는 1812년 러시아에 원정 나간 프랑스군이 말라 죽어버리기 전까지는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었던데다 한동안은 프랑스의 대륙 동맹국이었다. 한편 군사 선진국이라는 자만에 찌들었던 프로이센은 초반에는 프랑스의 확장에 편승해 독일 내에서 자신들의 위상을 높이는 데 집중했으며, 본격적으로 전쟁에 개입하자마자 박살이 나버리곤 1813년까지 사실상 속국 상태였다. 1790년대부터 1815년까지 25년간 프랑스와 계속해서 맞붙었던 유일한 국가는 오스트리아였다.[32] 다른 둘은 프로이센과 러시아.[33] 대다수의 체코인, 특히 상공 계층에서는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한 불만이 많았지만 팔라츠키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좋건 싫건간에 제국이라는 틀에서 벗어난다면 범게르만주의를 앞세우는 독일과 범슬라브주의를 앞세우는 러시아 사이에서 좋은 꼴을 보기 힘들 것이라 예상했다. 실제로 제국이 붕괴된 이후 체코는 독일에 병탄을 당하고 러시아에게 탄압을 당하는 수난을 겪었다.[34] 1848년 헝가리 혁명이 진압당한 결정적인 원인이 바로 요시프 옐라치치와 크로아티아 왕국군이었다.[35] 합스부르크 가문은 30년 전쟁 이래 체코인을 절대로 믿지 않았으며, 체코인에게 동등한 주권을 주게 된다면 그 여파가 다른 민족들에게도 퍼질 것이라 우려했다. 거기다 자국 내 소수민족들의 불만을 억누르고 강제동화시키려는 헝가리의 체코인 견제도 주효했다. 만약 체코인이 동등한 주권을 가진다면 헝가리 내 소수민족들도 결코 가만있지 않았을 테니까. 결과적으로 이러한 체코인 억압정책은 토마시 가리크 마사리크가 제국을 버리고 독립을 선언하는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로 작용한다.[36] 시온주의의 탄생지가 오스트리아 빈이다. 그 주창자인 테오도르 헤르츨 또한 오스트리아 유대인이었다.[37] 세르비아계 제외. 애초에 황태자를 암살한 것부터가 이들이었다. 다만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세르비아 왕국부터가 제국 내 세르비아계의 분리주의를 자극시키며 선동을 유도하였기 때문에 세르비아계의 이탈 움직임은 외부요인을 많이 받은셈이다.[38] 슬로베니아계, 이탈리아계 병사들은 주로 동부전선으로 배치되었고, 크로아티아계, 세르비아계, 폴란드계, 루신계 병사들은 주로 이탈리아 전선으로 배치되었다.[39] 특히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사망이 결정타였다. 사실상 프란츠 요제프 1세라는 인물 자체의 카리스마와 그에 의한 결집력에 의해 그나마 유지되고 있었던 제국이 그의 사망 이후에 2년도 안돼서 제국이 붕괴되고 만다.[40] 의외로 국가 체제와 민족 구성에 있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가장 유사한 국가는 대영제국이다. 두 제국의 중심은 왕실이었고, 주류 민족(잉글랜드인과 독일인) 외에도 동군연합을 통한 파트너 민족들(스코틀랜드인과 헝가리인)이 있었다. 그러나 그 외의 피지배민족들 또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며 제국의 유지에 필수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영국 왕실의 군대 내에는 수많은 피지배민족들이 복무했는데, 잉글랜드를 증오하는 아일랜드인들이나 라이벌인 스코틀랜드인들은 영국 육군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했다. 인도 제국군과 제국 의용병대는 다양한 모어를 사용하는 인도인들이 주축이었으며 뉴질랜드와 호주, 캐나다의 ANZAC과 캐나다군은 애초에 본토와는 대륙과 환경부터 달랐다. 그 외 소위 '전투민족'이라 불리던 영국 제국 전역의 수많은 민족들은 곳곳에서 영국군의 보조병들로 활약했다. 오헝 제국처럼, 그들 없이 대영제국은 유지될 수 없었다. 따라서 두 제국은 엇갈린 운명을 가졌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사실상 도플갱어나 다름없었다.[41] 임팔 작전 관련한 기록에서 보듯 인도제국군 내 인도인 병사들의 경우 무굴 제국군의 유산 덕분에 일선 병사들 사이에서 우르두어가 공용어로 기반이 확고하였다. 서너다섯가지 언어를 사용해야 하는 오헝제국군과 우르두어와 영어를 한 차례 통역만 하면 되는 영국령 인도제국군 사이에 누가 더 의사소통이 수월하게 진행될지는 자명한 문제였다. 즉 오헝제국군 군대는 대영제국의 해외 식민지의 군인들보다도 의사소통 관련하여 문제가 많았다.[42] 특유의 스트레이트 풀 방식 덕분에 1차대전기 제식 볼트액션 소총 가운데 최고 수준의 연사력을 자랑했다. 다만 극한 환경에서의 신뢰성이 다소 부족했고, 엔블록식 클립 사용으로 인해 이물질에 상대적으로 취약하다는 단점도 가지고 있었다.[43]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첩보 장교 알프레트 레들 대령의 사치스러움과 동성애 성향을 파악한 러시아 제국 정보부가 1902-1903년에 걸쳐 그를 포섭하여 이후 무려 10년간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작전계획을 넘겨받은 사건. 하필 그가 방첩 담당이었기 때문에 오헝 제국의 내부 방첩망은 완전히 구멍이 숭숭 뚫려버렸다. 이게 드러난 것은 1차 대전 발발 1년 전인 1913년이었다. 레들 대령은 추문을 덮으려는 군부의 압박을 받고 자살했고, 1년 뒤의 전쟁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이미 방어계획을 소상히 알고 있던 러시아 제국군에게 추풍낙엽처럼 밀려버렸다. 1985년 오스트리아에서는 레들의 인생을 주제로 한 '레들 대령'(Redl Ezredes, Colonel Redl)이란 영화를 제작했다. 레들 역에는 아웃 오브 아프리카, 007 네버 세이 네버 어게인 등에 출연한 클라우스 마리아 브란다우어(Klaus Maria Brandauer)가 배역을 맡았다. 다만 영화에서는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레들을 정신적으로 몰아붙이는 악인으로 등장하는 오류가 있다.[44] 18세기 요제프 벤첼 1세의 개혁은 프랑스 그리보발 시스템의 원형이 되었고, 오스트리아 포병대는 나폴레옹 전쟁 당시 맹활약하면서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대패시켰다. 1866년 보오전쟁에서도 고전하던 오스트리아 보병대와 달리 포병대는 프로이센 왕국군 병력을 맹포격하며 큰 출혈을 강요했다.[45] 오토프레타즈. 포신의 구경을 원하는 구경보다 작게 만든 뒤 내부의 압력을 높여 팽창시키는 방식. 훗날 일본이 야마토급 전함의 주포를 만들 때 썼던 방식이다.[46] 자긴가공법은 미국에서 개발되었다. 그러나 카네기 등으로 대표되는 제강업이 하늘을 뚫을 기세로 발전하던 미국 사정상 사장된 기술이었던 것을 우하티우스 대장이 라이센스도 없이 도입한 것. 우하티우스 대장은 오스트리아군의 현대화를 위해 수단방법 안 가리고 노력했던 인물이었다. 베세머 전로법이 개발되기 전에 본인의 이름을 딴 우하티우스 강철 생산 공정을 개발했고, 키네토스코프를 최초로 만든 인물이기도 했다. 공중 폭격이라는 개념도 1848년에 이 사람 머리에서 나왔다.[47] 전통적으로 일본은 금, 은, 구리같은건 꽤 있으면서도 유독 철광석만큼은 부족한 땅이었고 그 부족한 철광석마저도 대부분 사철이라 품질이 좋지 않았다. 일본의 본격적인 제강업은 1887년 세워진 이와테현의 다나카 제철소가 1894년부터 근대화되면서 시작되었는데 그 외에는 1901년 세워진 후쿠오카현의 야하타 제철소 정도만이 존재했다. 특히 야하타 제철소는 후쿠오카의 석탄을 바탕으로 성장하여 1차 대전 직전 일본 강철 생산량의 대다수를 차지했으나, 제대로 자리잡기까지 수 년의 시간이 소요되었기 때문에 그동안 일본 제국은 강철 부족에 시달렸다. 이 때문에 러일전쟁 당시 일본 육군 야전포병대의 주력 무기는 주퇴복좌기가 없는 청동제 대포인 31식 야포였으며, 강철제에다 주퇴복좌기까지 달린 러시아군 야전포병에 대응하는 데 엄청나게 애를 먹었다. 이후 일본 제국은 불평등 조약을 맺은 중국에서 주요 제철 원료들을 헐값에 수입하거나 1905년부터 영향권에 넣은 대한제국에서 충당했다. 대한제국 황실과 프랑스가 합작하여 야심차게 개발했던 평양 탄전도 이때 일본 손에 들어갔다.[48] 철광석과 석탄, 그 중에서도 석탄이 특히 부족했다. 주로 엘바 섬과 북부 토리노 근처의 아오스타 계곡에서 철광석을 채굴했다. 이탈리아는 이를 타개하기 위해 스페인령 모로코의 리프 계곡에서 철광석을, 그리고 프랑스와 미국에서 고철을 수입했고, 알프스의 수력발전을 이용한 전기로를 개발해 요긴하게 써먹었다. 1930년대 말에 가서는 싸구려 황철석을 전기로에 녹여 철을 뽑아내기도 했으며, 프랑코를 도와 준 대가로 스페인 빌바오산 철을 수입했다.[49] 원래 발칸 지역에서 금속을 생산했으나 19세기에는 서구 열강과의 경쟁에서 밀려버린데다 발칸 지역 대부분을 상실하여 대다수의 강철을 수입해야 하는 처지였다. 튀르키예의 제강업은 1937년 카라뷔크에 제철소가 세워지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발전한다.[50] 오헝 제국이 점령한 세르비아 지역을 제국에 편입해버렸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세르비아 국민들은 졸지에 적국의 신민이 되어버렸다. 당연히 엄청난 반발이 일어났으나 오헝 제국은 여기에 총칼로 화답했다. 티서 이슈트반 헝가리 수상 등 일부 제국 고관들은 이런 병합에 반대했으나 결국 강행되었다. 거기다 이는 헝가리를 무시하는 처사이기도 했다. 전쟁 전 전쟁을 반대하던 헝가리는 오스트리아에 '세르비아의 주권을 존중하고 영토를 점령하지 말 것'을 자신들이 전쟁을 지지하는 조건으로 내걸었고, 오스트리아가 이를 수용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51] 특히 독일은 순무의 겨울이라고 부를 정도로 유명하기도 하다.[52] 한국사의 헤이그 특사가 바로 이 회의에 보낸 대한제국의 특사이다.[53] 그러나 전제군주제 성향이 강한 국가였던 오스트리아-헝가리, 독일 제국, 러시아 제국이 이 문제를 가장 심각하게 겪은 케이스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나마 이 문제에서 자유로운 국가는 의회민주주의 입헌군주국이었던데다 제국국방위원회를 통해 국방 문제에 관한 국내 정부기관들의 의사를 하나로 수렴할 수 있었던 영국이나 전통적으로 귀족 및 군사문화에 대한 반감이 강하고 군의 규모가 작던 미국, 그리고 유럽 열강 중 유일한 공화국이었던 프랑스뿐이었다.[54] 정부 인사인 레오폴트 폰 베르히톨트 외무장관과 카를 폰 슈튀르크 총리도 군부와 의견이 일치하여 전쟁을 지지하였다.[55] 물론 타 국가들의 군대들도 다를 바 없긴 했다. 프랑스군의 유혈 진압은 소설 레 미제라블에 묘사된 것으로 유명하다. 가장 보수적이었던 러시아 제국군은 폴란드 민족운동을 총칼로 잠재웠으며, 체르케스인들을 거의 멸족시켰다. 데카브리스트의 난 때에는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내 한복판에서 포도탄을 퍼붓기도 했다. 프로이센 왕국군 또한 빌헬름 1세가 왕자 시절 '포도탄 대공'이라는 별명을 얻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자유주의자들에 대해 유혈 진압을 서슴지 않았다. 영국군이 그나마 상대적으로 나았으나 아서 웰즐리가 벌인 피털루 학살 등 오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인도 등의 식민지에서는 영국이라고 별반 다를 것 없었다.[56] 이전까지의 서술에서는 무고한 민간인에 대한 학살인양 적혀있었지만, 사진에서 쳐형당하는 인원들은 1917년 2월 지역에 잔존한 세르비아 패잔병들과 민족주의 민병대가 토플리카에서 오스트리아군, 불가리아군을 공격하며 시작된 토플리카 봉기 과정에서 체포된 병력들이다.[57] 조선왕조실록의 표기는 로제트 비르게본. 뤼디거 남작의 프랑스어/영어식 이름인 로저 드 비겔레벤(Roger de Biegeleben)을 한자로 음차해서 표기하면 '洛蕊特畢格勒本'인데, 이것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하면서 차이가 생긴 것.[58] 칭다오 전투에서 일본군에 침몰한 그 함선 맞다.[59] 사라예보 사건으로 암살당하는 그 사람 맞다. 당시에는 그의 아버지인 카를 루트비히 대공이 제국 추정상속인이었다.[60] 만리허 소총과 그 탄약일 가능성이 높으나, 확인되지 않았다.[출처] 민회수. (2009). 조선-오스트리아 수호통상조약(朝墺修好通商條約) 체결의 정치적 의의. 규장각, 35, 151-184.[62] 작센코부르크고타 왕조의 헝가리계 분가이다.[63] 여담으로 벨기에의 루이즈의 아들이기도 한 그는 꽤나 험하게 죽었다. 평민인 카밀라 리비카와 결혼하려다가 귀천상혼으로 재산을 잃을까 두려워 결혼을 취소했는데, 분노한 카밀라가 그의 얼굴에 황산을 뿌리고 리볼버를 난사했다고. 끔찍하게도 그는 바로 죽지 않고 6개월이나 더 고통받다가 사망했다.[64] 톈진 조계는 1차대전에 중국이 참전한 1917년에 안휘군벌 중국군이 수복했고, 극동함대는 1914년 칭다오 전투에서 일본 제국 해군과 싸우다 패배하여 포로가 되었다.[65] 오스트리아는 18세기부터 안다만니코바르 제도에 식민화 시도를 했기에 톈진이 최초의 식민지는 아니다. 하지만 해당 지역에서는 제대로 된 행정력을 발휘하지 못했으며 최종적으로 1886년에 식민화에 실패한다.[66] 부대 목록[67] 함선 및 항공기 목록[68] 가령 영국군 근위대는 사단급 크기이며, 독일과 러시아의 근위대는 근위대라기보다는 차라리 수도군단에 가까운 군단급 제대였다.[69] 1917년부터 6문으로 증강.[70] 다만 이들은 개인 장구를 직접 마련해야만 했다.[71] 제4, 27연대[72] 그래도 이들 또한 독일어를 알아야 했다. 다른 부대들과 같이 전투에 나가려면 독일어로 된 상급제대의 명령을 이해할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73] Fall U. 독일어로 헝가리를 의미하는 웅가른(Ungarn)에서 따왔다.[74] 다만 현재 헝가리군의 실질적 전신은 헝가리 인민군이며, 이 때는 민족주의적인 색채가 강한 혼베드의 명칭을 쓰지 않았다.[75] 반(Ban)이라고도 하는 남슬라브인들의 민족 지도자를 의미. 영작, 부왕, 총독 등으로 번역된다. 그 중에서도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의 반은 헝가리 왕, 다시 말해 프란츠 요제프 1세를 대리하는 일종의 부왕 역할이었다. 현대 영연방 왕국의 총독직과 유사하지만 실권이 있었다. 형제뻘 되는 세르비아에도 동일한 작위가 있었으며, 반이 다스리는 영토를 바나트라 한다.[76] 크로아티아 왕국과 슬라보니아 왕국, 보이보디나 공국의 남쪽 국경을 따라 설정된 군사 구역. 해당 지역 주민들은 민병대를 겸하며 오스만의 침입을 경보하고 일차적으로 저지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77] 스베토자르 보로예비치의 후임자이며, 사단장 임기 만료 이후 세르비아 군정 사령관이 되었다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총독으로 부임하였다. 최종 계급은 상급대장(국군의 대장급 계급).[78] 상술한 반(Ban)을 의미.[79] 이 사건은 맹세의 위기로 불린다.[80] 물론 빌헬름 프란츠 대공은 우크라이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고 우크라이나인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81] 다만 실질적인 선조는 소련군의 키예프, 오데사, 카르파티야 군관구와 3개 항공군이다.[82] 가기스트(Gagist)란 장교 및 상급 부사관을 통칭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군사 체계 용어이다.[83] 무질은 유년사관학교 출신이다. 포병장교로 훈련받기 위해 황립 및 왕립 군사기술대학에 재학하던 중 결국 적응하지 못하고 퇴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