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졌지만 잘 싸웠다/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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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축구2. 농구3. 야구
3.1. KBO 리그3.2. 국제대회3.3. 해외 야구3.4. 기타
4. 테니스5. 올림픽6. e스포츠7. 격투기8. 기타9.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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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축구


2. 농구


3. 야구

3.1. KBO 리그

이에 반해 이 해 우주의 기운을 받아 정규시즌 우승을 차지한 상대편인 KIA 타이거즈는 3주 간의 휴식을 겪었으며, 핵심전력인 선발 4명과 거포들이 모두 SK 와이번스 킬러였다. 대SK전 기록은 아킬리노 로페즈는 5경기에 등판해 2승 무패 평균자책점 2.27, 윤석민은 3경기에 나와 2승 1세이브 평균자책점 0.79, 릭 구톰슨은 6경기에 출전해 2승 2패 평균자책점 3.83, 양현종은 2경기에 나와 승리 없이 1패를 기록했지만 평균자책점 1.23을 기록했다. 그리고 이 해 MVP였던 김상현SK 와이번스전에서 3할 5푼 7리의 타율에 9홈런[71] 13타점이라는 괴물같은 성적을 정규시즌에 보여주었으며, 최희섭이나 나지완SK 와이번스전에서 아주 강했다. 당장 나지완의 프로 통산 첫 만루홈런이 2009년 8월 19일 8회에 이승호 상대로 친 대타 만루홈런이었다. 특히나 KIA 타이거즈 타선은 6회 이후에 점수가 많이 나는 팀인데, 이를 이미 과부하가 심하게 걸린 SK 와이번스 불펜이 감당하기엔 너무나 버거워 보였다.
이를 증명하듯 정규시즌에서 KIA 타이거즈SK 와이번스 상대전적이 야구계의 625 사변을 포함해서 10승 6패 3무로 이미 정규시즌에도 강했다. 간단히 말해 SK 와이번스말, 차, 포 2개씩을 모두 떼어내고 졸병 3개와 상 1개를 마저 떼어난 상태에서 자신에게 강했던 선수와 경기를 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리즈를 7차전까지 끌고 갔으며, 7차전에서도 6회 5대 1까지 리드를 잡았다.(다만 다섯 번째 점수는 오심) 다만 이후 역시나 불펜의 과부하로 인해 투수진이 버티지 못했고 6회와 7회, 단 2이닝 만에 4점차 리드를 모두 내주고(불규칙 바운드 안타-홈런-삼진-볼넷-삼진+도루자-홈런-3루타-볼넷-땅볼-2루타[72]-볼넷-삼진-1루수 파울 플라이) 9회에 끝내기 홈런을 맞아 패권을 내줬지만 부상당한 선수가 모두 복귀한 다음해에 시리즈를 스윕하고 다시 패권을 차지한다.

3.2. 국제대회

3.3. 해외 야구

3.4. 기타

4. 테니스

5. 올림픽


6. e스포츠

6.1. 스타크래프트


위 리스트를 보면 알겠지만 e스포츠의 성지 중에서 EXCO[91],BEXCO[92],염주종합체육관[93]만 빠져있다.물론 이 세 곳도 역사적인 곳이긴 하다.엑스코 - 저그의 온게임넷 스타리그양대 리그 첫 우승,벡스코 - 이제동드래프트 세대 저그 최강자 취임 및 MBC GAME 스타리그 리즈시절의 황혼,염주체육관 - 저 위에 나오는 조용호의 콩라인 탈출 이후 이영호의 스타리그 및 양대리그 최연소 우승 이후 저 위에 나오는 정명훈의 콩라인 탈출.

6.2. 리그 오브 레전드

6.3. 오버워치

6.4. 카트라이더 리그[97]

7. 격투기

8. 기타

9. 관련 문서


[1] 이 당시 스웨덴은 비록 아래의 헝가리의 위상만큼은 아니었어도 헝가리와 이탈리아와 삼벽을 이루던 강팀이었다. 특히 1958 FIFA 월드컵 스웨덴 때는 전 대회 우승국전 대회 준우승국을 꺾어버리고 레프 야신이 이끄는 러시아 축구 국가대표팀마저 이긴 전적을 가진 팀이었다. 당시 러시아 국가대표팀도 유로 1960 우승팀이며 1956 멜버른 올림픽 금메달을 딴 강팀 중의 강팀이었는데 말이다. 그 때문에 외신 기자들은 어차피 볼 것 없다며 그냥 잤다가 경기가 끝날 때 일어나서는 "뭐? 고작 0:12였다고?"라고 기겁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2]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김용식 감독은 절대 이기지 못할 경기를 그래도 자그마한 희망이나 갖게 하자고 스웨덴 별 거 아니라고 기죽지 말라고 했었다. 물론 선수들은 이미 알고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축구장에 축구화가 푹푹 빠질 만큼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거기다가 그 당시 스웨덴 선수들은 군나르 노르달 (페렌츠 푸스카스, 산도르 코츠시스와 삼벽을 이루던 전설적인 선수였다.), 군나르 그렌, 닐스 리드홀름 같은 전설적인 선수들까지 있던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12골 먹은 건 1954년 스위스 월드컵 때처럼 기적이라 봐도 무방했다.[3] 이유는 이승만 대통령이 일본 선수들 꼴도 보기 싫다고 해서 그랬...다는 건 좀 과장된 얘기고, 실제로는 일본이 안방에서 승리할 경우 후폭풍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였다. 이마저도 일본한테 질까봐 출전 자체를 포기하려고 했는데, 당시 대한체육회장이었던 이기붕이 이길 수 있다고 간곡히 설득했고 감독 이유형이 먼저 일본에게 진다면 돌아오지 않고 차라리 현해탄에 빠져 죽겠다고 간청해 간신히 출전할 수 있었다.[4] '매직 마자르'로 불리던 이 당시 헝가리 대표팀이 얼마나 강했냐면, 1950년 6월 4일부터 1956년 2월 19일 동안 총 50전 42승 7무 1패, 딱 한 번 졌다. 그 유일한 패배가 바로 축구 사상 최대의 이변 중 하나인 베른의 기적이었다. 그래서 외신 기자들은 위 사례와 마찬가지로 어차피 헝가리가 20골은 넣겠거니 했는데 겨우 9골만 들어갔다는 것에 또 다시 경악했다.[5] 대다수 축구팬들은 경기 내용만 보고 한국을 조롱했지만, 이 사연을 알고 나서는 한국 대표팀 숙소에 각종 생필품과 옷, 통조림, 그리고 현금 등을 선물로 갖다주기도 했다.[6] 지금으로 말하자면 브라질 최정예가 소말리아를 상대로 축구 경기를 했는데, 겨우 9:0으로 이긴 경우라 하면 된다. 물론 헝가리는 이에 절치부심을 했는지, 브라질, 우루과이를 이기고, 결승에서 서독을 상대로 2:3으로 석패했다.[7] 이후 36년 후의 월드컵에서 아프리카 최초의 4강행을 이루게 된다.[8] 당시 볼리비아는 남미예선에서 브라질을 2:0, 우루과이를 3:1로 격파하며, 아르헨티나를 제치고 남미예선 3위로 24강 본선 94월드컵에 진출하였다. 볼리비아의 홈 고지대를 활용한 이득이 있지만 브라질, 우루과이와 무승부도 아닌 승리를 기록하였으며, 브라질의 남미예선 첫 패배를 기록했다.[9] 사실 이때 이겼다면, 16강 진출도 가능했다.[10] 독일전의 경우 후반 독일이 끝도 없이 밀리면서 관중들의 야유까지 겹치자, 격분한 슈테판 에펜베르크가 관중들에게 가운데 손가락를 날렸다가 바로 교체당하는 것은 물론 강제 귀국까지 당하며 국가대표 메이저 대회 커리어를 마감 당했다. 그리고 당시 2골을 넣었던 위르겐 클린스만"만일 대한민국이 전반전에도 후반전처럼 나왔거나, 후반 추가시간이 5분만 더 주어졌다면 우리 독일이 졌을지도 모른다."라고 회고하기도 했다.[11] 이때 황보관이 당시 대회에서 유일한 득점 기록을 세웠다.[12] 당시 네덜란드 감독이던 거스 히딩크는 '우린 더 많은 골을 넣을 수 있었으나 한국의 골키퍼가 너무 잘 막아서 5골 밖에 넣지 못했다.'고 얘기했었다. 그러던 그가 4년 후 한국 대표팀의 감독으로 부임했고 전설이 되었다.[13] 당시는 호주가 OFC 소속이였다. 이해에 일본도 참가했지만, 한국보다 실망적인 성적을 거두며 1무2패가 되었다 그중 하나의 백미는 신칸센 대탈선슛을 보여주며 한동안 검색어에 회자 될 만큼 인기를 끌었다. 일본의 월드컵 원정경기 최초 승리는 남아공 월드컵 당시, 카메룬 대표팀을 상대로 1:0 승리 였다. 이후 덴마크도 이기며 아시아 국가 사상 최초로 조별리그 2승 이라는 기록도 세웠다.[14] 참고로 우루과이는 남아공 월드컵 조별리그를 무실점으로 통과했기 때문에, 이게 이번 대회에서 우루과이의 첫 실점이다.[15] 이 경기에서 올리버 칸이 정성룡을 비판했다는 루머가 있으나 유튜브, 구글, ZDF등 어디에도 올리버 칸이 그런 발언을 한 자료는 찾아볼수 없다.[16] 2015-16 시즌 라리가 & 코파 델 레이 득점왕, 2015 클럽 월드컵 득점왕 & 골든볼 수상, 2년 연속 2014-15, 2015-16 UEFA 챔피언스 리그 시즌의 스쿼드 선정[17] 최근 2019-20 시즌 라리가에서 팀의 두 번째 골이자 바르셀로나 이적 후 195호골을 기록했다. 이는 278경기 만에 달성한 기록이자 1951년부터 1961년까지 활약했던 라슬로 쿠발라를 제치고 바르셀로나 역대 3번째 최다 득점자로 기록되었다.[18] 참고로 수아레스는 국가대표 113경기 출전에 59골을 기록했는데, 이는 우루과이 축구 대표팀 역대 최다 득점이다. 그래서 인지 우루과이 국민들은 수아레스를 메시급으로 대우하며 우루과이 축구 영웅으로 떠받들고 있다.[19] 특히 전반 6분 때 얻었던 박주영의 프리킥이 들어갔거나, 후반 막판의 이동국의 슛이 두고두고 아쉽게 되었다.[20] 이 당시 프랑스는 팀 내분으로 인해 케미가 완전히 박살나버린 상태였다. 자세한 건 남아공 쇼크 참고[21] 특히 이는 4년 뒤, 북한보다 랭킹이 강한 동아시아팀이 경기를 통해 증명이 되었다.[22] 또한 북한은 월드컵 본선에서 브라질을 상대한 동아시아 4개국 중 브라질을 상대로 가장 잘 싸웠다. 나머진 4실점을 받고 패한 반면(vs 중국 0-4, vs 일본 1-4, vs 대한민국 1-4), 북한은 2실점만 받았기 때문이다.[23] 이때는 첫 경기인 멕시코전에선 0-1로 선방했지만 경기력이 OME였고, 2차전 크로아티아전에선 팀 내 내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4-0로 완패했다. 마지막 브라질전에서도 1-4로 떡실신하며 완전히 승점자판기 취급을 받게 되었다. 2010년은 그래도 덴마크와 네덜란드 상대로 선전했단 평가라도 받았지, 2014년엔 그런 쉴드도 통하지 않을 정도로 말아먹은 것이다.[24] 실질적으로 C조 최강국인 잉글랜드가 매경기 삽질하는 바람에 자책골 포함 2득점 차이로 조 2위 직행.[25] 이전 득점들이 PK 였다.[26] 참고로 이때가 1,2회를 제외하곤 대한민국에게 우승이 가장 가까운 시기였다. 결승전에서 사우디를 상대로 0:0으로 비긴 뒤 승부차기에서 단 한 골 차이로 우승을 놓쳤기 때문이다.[27] 물론 이 당시 네덜란드는 2014 브라질 월드컵 3위 이후, 세대교체 실패에 따른 급격한 전력 약화로 유로 2016 대회 본선 진출 실패에 이어 다음 메이저 대회인 2018 러시아 월드컵까지 본선 진출에 실패하는 침체기를 겪는 중이었다.[28] 카르바할의 가슴에 공이 맞았는데 PK가 선언되었으므로 오심이다.[29] 원래는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가 차야 했는데, 하필이면 어깨 부상으로 결장하는 바람에 비달이 찼고, 비달은 장렬히 관중석으로 대공포를 날려버렸다.[30] 마드리드의 유효슛 12개 중 무려 10개를 막았다. 특히 골문 바로 앞에서 전력으로 때린 호날두의 슈팅을 태연하게 오른팔로 막은 장면이 백미였다.[31] 뮌헨의 오프사이드 상황이였다. 정상적이였다면 정규시간에 끝났어야 될 경기[32] 두 골을 넣었지만 그 사이에 호날두에게 1점을 허용했다.[33] 다만 승자인 레알 마드리드가 오심의 덕을 봤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 애초에 오프사이드였던 라모스의 자책골이 아니었으면 연장까지 올 일도 없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뮐러와 레비의 1대1 찬스를 오프사이드 오심으로 날린걸 생각하면 레알 편향적인 주장이다.[34] 호날두의 세번째 골을 막는 과정에서 마르셀루를 쫓아가다가 갑자기 발을 헛디디며 주춤하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정황상 이 때 골절을 당한 듯하다.[35] 만약 마지막에서 무승부만 하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은 플레이오프로 떨어져 호주를 만났을텐데, 상대가 상대인지라 이긴다고 장담할 수가 없었다.[36] 1차전 1:1 무, 2차전 1:2 패[37] 당시 대한민국 여론과 국민은 알제리 쇼크로 대표되는 2010년대 한국 축구의 암흑기로 불신이 가득했던 상황이었고, 특히 스웨덴전은 수비가 강화된 경기였으나, 스웨덴을 우습게 본 FC 코리아들이 1승 제물(?)이라고 설레발 쳤고, 이기지 못했다고 만족하지 못해서 그 당시에는 좋게 평가받지 못한 경기였다. 이후 스웨덴이 멕시코를 3:0으로 이기고 브라질과 공동 8강을 기록하면서 졌잘싸로 재평가받게 되었다.[38] 해당 경기에 출전했던 미겔 라윤조차도 이 경기력으로 독일을 이길 수 있다고 평가했다.#[39] 역습을 파울로 끊는 것부터가 최소 경고다.[40] 자세히 보면 밟기 직전에 힘을 싣기 위해 테이크 백 동작을 하는 장면까지 있다![41] 2014년 당시 콜롬비아에게 1:4로 졌다.[42] 볼만 죽어라 돌렸다.[43] 쩐민브엉은 2019년 아시안컵에서도 환상적인 프리킥 골을 기록한 바 있다.[44] 아이러니하게도 4위를 한 베트남은 승점이 준우승한 일본보다 1점 높은 16점인데 비해, 3위를 한 UAE 팀은 승부차기를 많이 하느라 승점이 16강까지 간 말레이시아와 같은 6점 밖에 안 됐다.[45] 심지어 선제골을 넣었다.[46] 심지어 07년에는 16팀이 출전해 조별예선만 통과하면 8강이었지만 19년에는 출전국이 늘어나 조별예선+16강을 뚫어야 8강에 오를 수 있었다. 그걸 축구 변방 베트남이 해낸 것이다.[47] 축구 국가 대표팀 전체로는 2010 FIFA U-17 여자 월드컵 트리니다드 토바고에서 얻은 우승이 최고 기록이다. 참고로 여기에 나온 선수 중 대표적인 선수가 바로 2019년 프랑스 여자 월드컵에서 유일하게 골을 넣은 여민지.[48] 참고로 이전 기록은 당연히 2002 한일 월드컵의 4강.[49] 아시아 선수 최초 U-20 월드컵 골든볼 수상자는 2003년 대회 당시 아랍에미리트의 이스마일 마타르.[50] 이 경기로 인해 홀란드, 황희찬, 미나미노 모두 빅클럽 이적 제의가 들어왔으며, 홀란드는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황희찬은 RB 라이프치히, 미나미노는 리버풀 FC로 이적하였다.[51] 결정력 부재와 로테이션을 가동하지 않음에 따른 체력 문제가 주요 패인이었다.[52] 당연히 다른곳도 아닌 레알의 홈에서 2점차는 고사하고 승리조차도 예측하는 사람들이 적었으며, 첼시의 여정은 여기까지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53] 티모 베르너의 3번째 골 이후 베르나베우의 스코어 전광판에 나타난 0:3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기 충분했고, 이 시기 첼시와 투헬의 강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진중 하나로 통한다.[54] 알다시피 2014 브라질 월드컵 당시에는 크로아티아전에서 같은 팀원들끼리 서로 치고받고 싸우는 정신나간 모습(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자기팀 선수 뒷통수를 갈긴게 메인에 실릴 정도였음)을 보이면서 전세계적으로 두고두고 까였고, 그거 외에도 이런저런 것들에서의 부정적인 면들로 3전 전패에 전체 꼴찌라는 심히 민망한 성적으로 대회를 마쳤으며, 8년 후 카타르 월드컵에서는 비록 또 광탈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번엔 절대 이런 정신나간 모습은 보이지 않은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받아 마땅하다.[55] 같은 조인 스페인과 독일/코스타리카가 있어서 여기도 죽음의 조 라는 비아냥을 들었지만 감독은 그거에 아랑곳하지 않고 보여 줄 수 있는 걸 다 보여줬다.[56] 그와중에 박항서 감독이 있는 베트남 대표팀에게도 패배했었다.[57] 허재가 눈덩이가 찢어져 피를 흘리는 그 사진이 바로 이 시리즈였다.[58] 당시 LG의 외국인 선수 퍼비스 파스코가 자신을 집중마크하던 KTF의 장영재와 자신에게 퇴장명령을 내린 심판을 연달아 코트에 밀어 넘어뜨려 구단으로부터 퇴단조치되었고 연맹으로부터 영구제명 조치되었다.[59] 전자랜드의 경기에 인천삼산월드 체육관의 수용인원을 초과하는 8,765명의 관중이 몰려오면서 2018-19시즌 KBL 최다 관중 기록이을 세웠다. SK 와이번스의 경기에는 7,000여명의 관중이 왔다.[60] 당시 4위팀은 선동열조계현,홍현우, 방위병 신분인 이종범 4명에서 야구를 했었다.[61] 플레이오프 LG전 4경기 한국시리즈 OB전 4경기[62] 단일시즌 현재도 깨지지 않는 기록[63] 당시 해태는 한국시리즈 역대 최다 챔피언 이였고 한번도 패퇴를 한 경험이 없다.[64] 사실 현대를 포함한 해태는 96년 시즌 개막부터 하위권으로 분류 되었었다. 이유는 방위병 신분인 이종범과 이대진의 제대가 아직 좀 남아있고 타선으로는 김성한의 은퇴 및 선동열의 일본진출로 나름 타격이 있었다.[65] 1차전 해태 타선의 맹공과 3차전 이강철의 완봉승 쇼를 제외하면[66] 시리즈 도중 김동주가 손가락에 미세 골절상을 당했다. 그래도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들긴 하였으나 수비는 할 수 없었다.[67] 이 당시 현대는 구단 최다승 신기록인 91승 2무 40패라는 압도적인 성적을 냈다. 이 신기록은 2016년 두산 베어스가 93승을 달성하며 깨졌다.[68] 이 시리즈 준우승 이후 두산은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 패배하면 준우승을 하는 징크스가 생겼다. 그러나 이 징크스는 2020년 한국시리즈에서 깨졌다.[69] 일반 필승조 계투들도 80이닝 던지는 경우는 많진 않다. 그런데 거기에 선발로 50이닝을 더 던진 것이다.[70] 시즌 종료 후 연봉점수 계산으로 SK 와이번스에서 팀 내 투수 중 1위였다.[71] 시즌 자신의 홈런이 36홈런인데 이 중 4분의 1을 SK전에 몰아쳤다는 뜻이다. 당장 3연타석 홈런이 2009년 8월 8일 SK 와이번스전이었다. 그것도 좌투수, 사이드암, 우투수로.[72] 다만 원히트 원에러를 주는 게 더 낮다는 의견이 많다.[73] 2017 WBC만 봐도 두산의 선발 엔트리 반이 대표팀으로 뽑혀나간것도 문제이다.[74] 그것도 우습게도 화분 정리하다 이렇게 된거다.[75] 한유섬은 2018년 한국시리즈에서도 우승을 위한 결정적인 홈런을 쳤고,결국 MVP가 되었다.[76] 팀의 구심점이자 멘토인 거포 박병호를 FA계약은 커녕 타팀에 넘겨주듯이 버렸었다.[77] 이 해 스즈키 이치로가 MVP와 신인상을 모두 쓸어갔다.[78]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마크 그레이스 안타 - 데미안 밀러 송구실책 세이프 - 제이 벨(투수 타석 대타) 3루 주자 아웃 - 토니 워맥 우익수 방면 1타점 2루타 - 크레이그 카운셀 사구 - 루이스 곤잘레스 끝내기 안타로 이어졌다.[79] 1차전과 2차전, 6차전과 7차전을 홈에서 치른다는 이점은 있었다. 다만 당시 컵스의 승리 중 3번이 인디언스의 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 옥의 티..[80] 패패패승승패로 겉으로 보면 그렇게 좋지는 않은 성적이지만, 완전히 압살당한 1차전을 제외하면 이기거나, 지더라도 불과 1점 차이로 졌다.[81] 김인섭과 그의 최대 라이벌 유리 멜리첸코(카자흐스탄), 여기에 역시 세계 정상급 기량의 딜쇼트 아리포프(우즈베키스탄)가 한 조에서 예선을 치러야 했다. FIFA 월드컵으로 따지면 FIFA 랭킹 1~4위 팀이 한 조에 묶인 꼴인데, 시드 배정으로 강팀들끼리 초반에 맞붙는 것을 어느 정도 방지하는 FIFA 월드컵과는 달리 올림픽 레슬링은 시드 배정 제도가 없다.[82] 현재는 경기 종료 후 어떠한 경우에도 이의제기를 할 수 없다. 판정이 석연치 않을 경우 경기중 선수당 1회에 한해 푹신한 물체를 매트에 던져 이의제기를 할 수 있고,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상대에게 1점을 내주게 된다.[83] 정작 같은 대회 레슬링 자유형 경기에서 대한민국 측이 제기한 두 번의 이의제기는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84] 양쪽 어깨가 1초간 매트에 닿았을 때 바로 해당 선수의 패배로 경기가 끝난다. 유도의 한판, 복싱의 KO와 같은 개념이다.[85] 페널티 스토로크는 축구승부차기와 같다고 보면 된다. 현재 방식인 페널티 슛아웃 제도는 2011년부터 시행하기 시작했다.[86] 특히 배구회관 건물 매입으로 인한 대출금 상환으로 애초에 배구협회 살림이 빠듯했고, NH농협금융지주(KOVO V-리그 공식후원사)의 지원금 2억 원 중 출정식 연회에만 8,000만 원을 쓰고 남은 1억 2천만 원으로 올림픽을 치렀다고 한다. 김형실 감독, 홍성진 코치, 최광희 전력분석관 단 3명만 코칭스텝으로 참여하여 대표팀 운영은 물론 행정적 업무도 병행한 일과 함께 180cm 넘는 선수들이 비행기 이코노미석을 타고 런던에 갔다는 안타까운 소식도 있었다. 거기에 배구협회장인 모 정당 대통령 경선후보의 입방정은 덤.[87] 정반대의 사례는 바로 2018 팔렘방 아시안 게임 야구에서의 선동열호.[88] 올림픽 복싱은 선수 보호 대책으로 별도의 동메달 결정전을 치르지 않고, 준결승에서 패배한 두 명의 선수 모두에게 동메달을 수여한다.[89] 이 당시 SKT T1은 2라운드 새턴리그에서 최하위를 기록하면서 3라운드에 진출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당시 머큐리리그 최하위 헥사트론 드림팀과 10위 결정전을 치른 끝에 겨우 이겨서 3라운드에 진출했는데, 당시에는 최하위 한 팀이 다음 라운드에 출전하지 못하는 규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 문제의 규정은 2005년 시즌 전기리그에서 이네이쳐 탑이 후기리그에 진출하지 못한 것을 마지막으로 폐지되었다.[90] 오영종에게는 기쁠.[91] Gillette 스타리그 2004 결승전 장소다.[92] 곰TV MSL 시즌4 결승전 장소다.[93] CYON MSL 결승전,박카스 스타리그 2008 결승전,박카스 스타리그 2010 결승전 등 결승전만 세 번이나 치른 장소다.[94] 이 당시 skt는 엑소더스로 강팀이란 강팀이 죄다 박살날때 유일하게 전력을 보존, 오히려 보강한 팀으로 스토브리그에서 이미 롤드컵 우승이 확정되었다는 평가를 받았고, 실제로도 타이거즈에게 당한 세트 1패를 제외하면 전승우승을 했다.[95] 만약 페이커가 조금만 더 못했었다면 미스피츠가 4세트까지 충분히 이길 수 있었던 경기였으나 하필 페이커가 슈퍼플레이를 연발한 탓에 이에 힘입은 뱅이 탄력을 받고, 5세트에서는 후니와 블랭크도 분전하면서 승기가 기울었던 게임을 뒤집고 SKT를 4강에 올려놓았다. 경기가 끝나고 원딜 한스사마가 SKT는 이겼지만 페이커는 이길 수 없었다 술회하고, 감독도 인터뷰에서 이길 수도 있었지만 선수들이 너무 긴장하여 패배한 점을 안타까워하면서 페이커가 왜 LOL 역대 최고의 선수인지 알 수 있었다고 답했다. 이 경기를 Misfits가 이겼다면 페이커 입장에서 졌지만 잘 싸운 경기가 됐을 지도 모른다.[96] 당시 대회 버전은 8.13이고 라이브 버전은 8.14 였는데, 8.14 버전에서는 강타를 든 라이너를 억제하는 패치를 했다. 게다가, 이 날 경기 이후 다음 주에는 8.14로 버전이 바뀌는 상황이었다.[97] 2019 시즌 이후 기준. 모두 팀전 결승 블루 라이더로 참전했던 팀들이다.[98] 2022 S2[99] 2022 SC[100] 22 수퍼컵 노준현박현수, 김승태를 상대로 그나마 2점을 따내주며 "무득점 패배"라는 굴욕은 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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