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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뭐, 원래 배우들 하는 한마디 한마디가 쉽고도 빠르게 전달되거든. 모든 게 영락없는 진실처럼 들리고 말이야. 그래서 대중의 인기는 정말 무서운 거야."
〈야인시대〉 64화, 문영철의 대사[1]
〈야인시대〉 64화, 문영철의 대사[1]
무리한 김두한 미화, 무비판적인 자서전 내용 수용, 드라마의 친 우익적인 성향 등으로 인해 드라마 내 왜곡되거나 말도 안 되는 부분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야인시대〉 유튜브 스트리밍 채팅창이나 인터넷 커뮤니티 곳곳에서 나오는 야인시대가 시트콤같다는 소리 역시 〈야인시대〉 합성물의 영향도 크지만, 이렇게 허술하고,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의 과도한 김두한 미화가 사람들에게 김두한이 정말 대단하다는 인식을 심어주기는 커녕 오히려 웃음거리로 다가오기 때문인 것도 있다.
주의할 것은, 김두한의 〈노변야화〉 방송이나 자서전, 혹은 소설 《야인시대》나 다른 김두한을 다룬 미디어들과 드라마 〈야인시대〉 내용이 다르다는 이유로 재현 오류라고 이야기하는 예가 있는데, 그 점은 조심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소재들 역시도 재현 오류가 한 두 가지가 아니며, 김두한이나 김두한 주변 사람이 직접 이야기한 바가 있는 내용 역시 사실이 아니거나, 과장되거나, 미화된 것도 다수 존재한다. 그러니 신뢰할 만한 자료로 교차검증하지 않고서는 주먹들이 직접 한 말이든, 〈야인시대〉나 다른 미디어들이든, 사실로 받아들이기 곤란하다.
다만, 설명에 앞서 드라마의 친 우익 성향을 명확히 정의할 필요가 있다. 〈야인시대〉는 어디까지나 해방 이후 백색테러와 정치깡패를 미화해서 친 우익적인 것이지, 이승만이나 박정희 정권을 우호적으로 그려서 친 우익 드라마는 아니라는 점이다.[2][3] 애초에 김두한 자체가 극우 활동을 했던 것도 몇 년 정도고, 자유당 탈당 이후로는 대부분 기간을 야당 인사로 지내다보니 자연히 이승만과 박정희가 김두한에 우호적인 포지션으로 그려질 리는 없다.
2. 역사적 관점의 왜곡
이 이야기는, 암울했던 민족의 수난기와 격동기의 역사를 살다가 갔던 영원한 야인, 김두한의 삶을 극화한 것이다. 본 드라마에 소개되는 사건과 인물은 본인의 회고록과 취재록, 자료수집 등, 대부분 실화에 그 근거를 두었다.
그러나 드라마의 원만한 진행을 위하여, 시대와 역사적 상황을 운영하는 인물 일부분에서는 픽션을 가감했으며 실존 인물의 개인적 인권을 보호하기 위하여 상당부분의 생존인물에 대해서는 가명을 사용했음도 아울러 밝혀둔다.
〈야인시대〉 1화, 첫 부분 나레이션.
친일 변명, 상인들한테 가한 횡포 실드, 백색테러 정당화, 김두한의 범죄 왜곡, 마지막회에서 나온 김두한에 대한 평가 등, 온통 김두한 행적 미화로 가득 찼다. 가장 심각한 악영향은 현재 유튜브로 〈야인시대〉를 보는 사람들은 1부야 지나치게 판타지성이 강하니 코웃음치며 넘어간다 쳐도, 진짜 2부처럼 김두한이 김좌진의 유지를 이어 아버지의 복수를 하고, 공산당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폭력을 쓴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4] 위와 같은 왜곡을 사람들이 사실로 받아들이게 하고, 김두한이 잘못한 일까지도 모조리 정당화시키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그러나 드라마의 원만한 진행을 위하여, 시대와 역사적 상황을 운영하는 인물 일부분에서는 픽션을 가감했으며 실존 인물의 개인적 인권을 보호하기 위하여 상당부분의 생존인물에 대해서는 가명을 사용했음도 아울러 밝혀둔다.
〈야인시대〉 1화, 첫 부분 나레이션.
2.1. 일제강점기
2.1.1. 항일 주먹 김두한?
시장통의 불쌍한 이들을 돌보는 것도[5] 독립운동일 수가 있지. 허나 너는 범의 아들이다. 결코 거기에 머물러서는 아니 된다. 너는 호랑이 새끼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야 해.[6]
〈야인시대〉 26화 중 김두한의 친할머니
이 드라마에서 김두한은 애국심이 투철하고 일본인에게서 조선 상인을 보호해줬으며, 부하들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조선총독부에게 협력한 것으로 묘사된다. 그나마 안재모가 연기한 김두한은 총독부에 협력한 일을 자아비판하기도 했으나, 김영철이 연기한 중년 김두한은 일제와 맞서 싸운 행위로 포장했다.〈야인시대〉 26화 중 김두한의 친할머니
하지만 김두한이 미군에게 한 증언을 보면 실체가 다르다. 또한 당시 조선의 주먹패들이 일본 야쿠자와 싸운 것도 어디까지나 폭력조직간 이권 싸움이었고, 합의되자 더 이상 싸우는 경우가 없었다. 오히려 이들의 행동은 일본 식민지 통치시대의 먹고 살기 힘든 조선 상인들을 착취한 것에 불과하다. 조선총독부에 내는 세금도 감안하면 세금을 두 번 내는 셈이니 정당성은 없다. 애초에 실제 김두한 본인도 주먹으로 일제와 맞섰다는 식의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더욱 가관인 점은 김두한 패거리가 '힘없는 조선 상인들을 보호하기 위함'이란 의미를 부여하는데, 싸움질하며 상인들 가게나 물건들을 깨부수는 장면이 여럿 나왔음에도, 이를 사과하거나 보상하는 장면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심지어 종로2정목 털보 패거리는 자신들의 영역이라는 종로회관에서 정진영을 구타하면서 테이블에 놓은 술과 안주들을 모조리 박살을 내버렸건만, 업체 측에 사과조차 하지 않고, 되레 2차 술을 마시러 나가기까지 했다.
만약 정말 상인들을 생각했다면, 아무리 상대가 먼저 시비를 걸어왔다 해도, 장터에서의 싸움은 최대한 피하거나, 좀 더 넓은 장소에서 싸워야 할 텐데, 꼭 가게 앞에서 싸운다. 이런 행위는 상인들에게 상당한 민폐다. 가게 깨부수는 것도 그렇지만, 오던 손님까지 내쫓는 행위이니 말이다. 극중 김두한 일당에게 호감을 보이는 재래시장 상인들의 모습은 사실상 스톡홀름 증후군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다. 심지어 마루오까가 김두한 졸개들에게 세금을 왜 걷냐고 지적하자 한 상인이 "저 사람들은 아무 잘못 없고 우리가 좋아서 주는 거니 그러지 마라."라며 실드를 치기도 한다. 김두한 이전에 구마적 패가 세금을 걷어 갈 때는 한숨을 푹푹 쉬면서 "이거 어쩌나?" 하고 탄식만 하던 것과는 정 반대의 반응이었다.게다가 "거리의 독립군" 미화도 묘사가 상당히 허술해서 김두한 패거리들이 도대체 왜 싸우는지에 대한 정당성을 제대로 부여하지 못했다. 혼마찌가 종로에 진출하면 조선 상인들이 삶의 터전을 잃을 것이라고 하지만, 일본 상인들이 조선 상권을 잡아먹는다는 내용도 자세한 횡포 묘사없이 단 몇 마디 언급으로 퉁쳐버린다. 오히려 같은 조선인인 구마적 패거리들이 세금 걷겠다며 상인들에게 횡포를 부리는 장면이 더 자세하게 묘사되었다.[7]
그렇다고 혼마찌 세력이 조선인들 상대로 횡포를 부리거나 주도적으로 온갖 악행을 저리는 것도 아니다. 종로에 진출한 나미꼬나 시바루 일행만 해도 일반적인 악역과 거리가 멀다. 이들은 말 그대로 장사를 한 것 뿐이고, 심지어 나미꼬는 시대의 한계를 벗어나 주도적으로 뭔가 이뤄내려 한 명석한 여자이며, 이들의 지적[8]은 시대상으로 보면 오히려 당연한 것이었다.[9] 또한 시바루는 극중에서 가장 신사적이며, 정의로운 주먹 중 하나다. 게다가 하야시는 무력이나 뒷배를 이용해 종로의 상권을 빼앗거나 헐값에 강탈하기는 커녕 수많은 자금을 조선 상인들에게 지불하고, 정당하게 상권을 사들였다.[10] 그런데 여기 맞서는 김두한의 논리는 단지 '조선의 심장인 종로에 쪽바리는 절대로 들어올 수 없다.'라는 것이었다.
그 외에도 작중에서 김두한이 독립운동을 하려고 만주로 가려다가 좌절하여 조폭이 되는 걸로 나오는데, 정말 독립운동이 하고 싶었다면 조폭 두목이 된 이후 부하들을 이끌고, 국내에서 과격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실제 김두한에게는 그런 행적 자체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11] 아래 서술되는 부민관 폭탄의거 사건 등의 국내 독립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도 '아 나도 저렇게 해야 하는데.'라는 탄식은 해도 막상 행동은 하지 않는다.[12] 딱 하나 비슷하게 한 거라고 해봐야 친일 연극에서 뱀을 풀어서 방해하는 정도에 불과하다. 나름대로 독립운동을 하려면 할 수 있는 힘과 충성심을 가진 조직을 갖고 있어야 함에도 정작 한다는 것이 이런 장난질에 가까운 질떨어지는 행위라는 점에서 과연 김두한이 독립군 운운할 만한 자격이 되는가?라는 의구심이 든다.[13] 바로 이 부분이 〈야인시대〉가 조폭미화물이라고 불리는 이유 중 가장 큰 점이며, 영화 〈장군의 아들〉과는 주먹패의 본질 자체가 많이 다른 특징을 보인다. 〈야인시대〉는 '건달들이 거리의 독립군이며 상인을 보호하고 그 명목으로 세금을 걷는다.'라는 주먹패의 활동에 정당성을 상당히 부여한다.
〈장군의 아들〉과 비교해볼 때 〈장군의 아들〉 같은 경우는 그저 본인들의 생활을 위해 주먹을 쓰고 상인들에게 세금을 걷는 주먹패들을 묘사했다. 〈장군의 아들〉 1탄 초반에는 상인들이 세금 문제로 인해 원성이 자자하다는 묘사를 했으며, 2탄에서는 종로 주먹패 몇몇이 강제로 삥을 뜯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또 그들은 자신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한다는 표방을 하지 않고 그들에게 적이 되는 존재는 조선인이든 일본인이든 대립하여 싸우는 식으로 표현했다. 즉, 〈야인시대〉와 〈장군의 아들〉의 주먹패는 판이하게 그 본질이 다르다는 것이다. 〈장군의 아들〉 시리즈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극중 주먹패들이 자신들이 독립군이라고 운운하는 장면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종로패 오야붕이었던 김기환이 "만주에서 독립군들이 배곯아가면서 싸우고 있지만 우리는 종로에서 싸우고 있다."라는 말 정도가 거의 전부다. 2탄에서는 아예 주인공 김두한을 그저 날건달인 양 디스하는 대사도 나온다. 김두한의 라이벌 김동회가 하야시패에 속해 있던 것을 두고 괴로워하자 히로인이었던 송채환이 "두한씨도 자신을 위해서 주먹을 쓴 것이지, 조선 민중들을 위해 쓴 것이 아니에요!"라며 김동회를 위로한다. 독립군이라는 단어는 아니지만 김두한이 '협객'이라는 단어를 쓴 것도 마루오카와의 일전에서 쓰게 되는데, 이러한 면을 보면, "독립군"이니 "협객"이니 대사를 남발하는 〈야인시대〉와 〈장군의 아들〉은 정말 큰 차이를 보인다. 〈야인시대〉는 스스로 "독립군"이니 "협객"이니, 의로운 사람이라 생각하면서 주먹패 생활을 하지만, 〈장군의 아들〉은 그저 '생존'을 위해서 주먹패 생활을 할 뿐이다. 실제 〈장군의 아들〉 원작 소설에서도 '이들은 그냥 야쿠자였다.'라는 작가의 말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거기에 김두한이 스스로를 거리의 독립군으로 지칭하는 상황 묘사도 실로 엉망이다. 김두한이 거리의 독립군을 운운하는 상황들이 경찰에 체포되어 취조를 받는다던가 같은 상황들이 대부분이다. 심지어 광복된지 한참이 지난 국회 오물 투척사건 직후 시점에서까지도 거리의 독립군 레퍼토리를 반복하는데, 당연히 보는 사람들에게 김두한이 진짜 거리의 독립군이구나라고 인식되는 경우는 당연히 없고, 그저 자신의 악행을 정당화하기 위해 헛소리를 늘어놓는 것처럼 보여서 비웃음만 사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차라리 자국인들을 돕거나 소극적으로라도 반일활동을 하는 시점에서 거리의 독립군을 운운했다면 그래도 훨씬 나았을 것이다.
당시 김두한이 친구 정진룡을 죽였을 당시 미군에게 한 증언이다.
나의 오랜 친구 정…김두한의 이야기는 한국에 대한 일제 강점기까지 되돌아간다.…김의 제일 친한 친구는 정진룡인데 그는 그 들이 일본인에게 고용되어 경방단(Police Assistance Association)을 조직 운영하기 전까지는 그와 더울 일본 정부당국과 마찰을 빚고 있었다. 경방단에 가입한 후 김과 정은 일본인을 위한 합법적인 테러리스트 겸 정보제공자가 되었다. 종전과 더불어 실업자가 되면서 모든 지위를 상실한 것을 알게 되었을 때 큰 고려 없이 청년들로 모아서 정치 정당의 돌격대로 고용되었다. 유일한 문제는 정은 남로당을 위해서 일하는 조선전위대를 택했고, 김은 우익주의자 장덕수의 정당에 고용되었다. 그때부터 김은 "나에 오랜친구 정"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정에게는 불행하게도 김은 한국 전체의 싸움 왕이었다. 처음에 김은 서울의 거리에서 정과 정의 부하 두 명을 때렸다. 다음에 정이 김에게 권총을 겨누었으며 김 역시 정에게 권총을 겨누고 정의 권총을 떨어뜨린 후 정의 무릎에 총을 쏘았다. 1947년 4월 우익 한국인들이 그들 국가의 미래의 국부로 간주했던 이승만의 귀국을 열렬히 기다리고 있는 동안, 좌익도 나름대로 그들의 계획을 수행하고 있었다. 정진용과 그의 무리들은 이승만을 사기꾼이고 자기중심적인 정치인이라고 비방하는 팜프렛을 배포하기 위해서 동원되었다. 4월 20일, 김두한은 이 시점이 그의 오랜 친구를 다시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할 좋은 기회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그는 부하들을 보내서 반 이승만 유인물을 배포하는 사람들을 잡아오게 했다. 김의 부하는 극장과 서울의 시장거리를 배회하면서 정과 그의 부하를 잡아들였다. 김과 그의 부하들은 그들이 그들의 과거의 잘못을 인식하기를 희망하면서 이들을 폭행하기 시작했다. 폭행을 길고 단단한 일본 단풍나무로 만든 몽둥이로 행해졌다. 정은 박헌영 부재 시 남로당의 대표였던 허헌에게서 명령을 받았다고 했고 그는 공산주의 지도자들의 모든 명령에 복종한다고 말했다. 그는 심지어 이승만을 역적이라고 말했다. 이 순간에 김이 이성을 잃고 정의 가슴을 찼다. 그는 그의 오랜 친구에게 철회를 요구햇지만 정은 거절했다. 김은 또 한방을 더 때렸고 그것으로 인해 정은 체내 출혈이 시작되었고 곧바로 죽었다.
History of the Counter Interlligence Corps, pp.92-94, 김봉진, 미군정기 김두한의 '백색테러'와 대한민주청년동맹, 대구사학 97, 2009, 56쪽에서 에서 재인용.
History of the Counter Interlligence Corps, pp.92-94, 김봉진, 미군정기 김두한의 '백색테러'와 대한민주청년동맹, 대구사학 97, 2009, 56쪽에서 에서 재인용.
사실은 "일본인을 위한 합법적인 테러리스트 겸 정보제공자"를 하다가 종전 때문에 "실업자"가 된 테러리스트다. 오히려 김두한 자신은 그 탓에 "모든 지위를 상실"했다고 한다.
2.1.2. 부민관 폭탄의거 왜곡
이 드라마에선 김두한이 부민관 폭탄의거에 간접적으로 관련된 것으로 묘사되었다. 정확히는 몇몇 노동자들이 다이너마이트를 달라고 하자, 김두한은 마치 안전 불감증에 걸린 것처럼 그냥 폭탄을 주었고, 그게 부민관 의거에 사용된 것으로 묘사되었다. 의거를 주도했던 조문기는 그걸 보고 매우 분노했다.몇 년 전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김두한이 폭탄을 건네주는 것으로 나와. 유 동지가 얼마나 고생하며 구한 폭탄인데 말이지.
1945년 ‘부민관 폭파’ 주역 조문기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링크
1945년 ‘부민관 폭파’ 주역 조문기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링크
심지어는 제작진이 미리 재현을 위해 조문기를 찾았는데, 그런데도 재현 오류를 낸 것은 고의로 볼 수밖에 없다.
〈야인시대〉 담당 PD가 드라마와 관련해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싶다며 조문기를 찾아온다. 조문기도 그를 꼭 만나고 싶던 참이었다. 김두한을 항일애국지사로 부각시키는 것이 가당치도 않았고, 역사를 온통 거짓 투성이로 왜곡하는 것이 언짢기도 했지만 부민관 폭파사건에 관련해 크게 걱정되는 일이 있었다.
이환경씨가 쓴 소설 《야인시대》에서 부민관 거사에 사용한 폭약은 김두한이 건네준 것이고 그것이 발각되어 김두한이 모진 고문을 당하고 고생하다 감옥에서 8.15 광복을 맞는다는 내용이다. 그 소설가 이환경씨가 곧 드라마 작가이고,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기에 그렇잖아도 걱정하던 차였다.
조문기는 담당 PD에게 부민관 거사를 그런 내용으로 왜곡하지 말라고 호통을 쳤건만, 드라마는 소설 원작 그대로 방영되었다. 연구소에서 그 담당 PD에게 전화를 걸어 항의를 했더니 그 PD는 “그냥 드라마는 드라마로 봐주세요.”라고 하더란다.
〈야인시대〉라는 드라마는 첫화부터 마지막회까지 김두한에 관한 스토리뿐만 아니라 그 시대에 있었던 여러 사건들 (나석주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 투척부터)을 종합 선물세트처럼 모두 보여주고 싶어하는 느낌이 상당히 든다. 단지 김두한 뿐만 아니라 그 시대에 있었던 굵직한 사건들을 모두 담고 싶어하는 경향이 보여서, 이게 드라마인지 〈역사스페셜〉인지 구분이 안 가는 장면이 종종 있다. 아무튼 그런 시대적 여러 사건들을 드라마에서 보여주려면 김두한과 엮을 수 밖에 없는데, 그러다보니 무리수를 둔 것이 상당히 많다. 장르 자체는 드라마인데, 만약 부민관 사건을 따로 구성해서 보여주면, 다큐멘터리가 될 수 밖에 없고, 드라마 전개의 특성상 그 사건을 김두한의 스토리와 연계시켜 보여주다보니 그런 역사 왜곡마저도 서슴치 않게 하는 것이다. 〈야인시대〉를 보면 그런 내용들이 꽤 많다. 초반 2화때 김두한과 나석주가 엮이는 것도 그렇고, 대부분의 역사적 굵직한 사건들이 알고보면, 사실 김두한과 관련이 실제로 전혀 없는 내용인 것들이 많다. 원만한 드라마 진행을 위해 픽션을 넣는다고는 하지만, 이게 역사 왜곡이 되어서 시청자들로 하여금 잘못된 정보를 심어주게 되니,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환경씨가 쓴 소설 《야인시대》에서 부민관 거사에 사용한 폭약은 김두한이 건네준 것이고 그것이 발각되어 김두한이 모진 고문을 당하고 고생하다 감옥에서 8.15 광복을 맞는다는 내용이다. 그 소설가 이환경씨가 곧 드라마 작가이고,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기에 그렇잖아도 걱정하던 차였다.
조문기는 담당 PD에게 부민관 거사를 그런 내용으로 왜곡하지 말라고 호통을 쳤건만, 드라마는 소설 원작 그대로 방영되었다. 연구소에서 그 담당 PD에게 전화를 걸어 항의를 했더니 그 PD는 “그냥 드라마는 드라마로 봐주세요.”라고 하더란다.
2.2. 광복 이후
2.2.1. 김두한
김두한은 자기 옛날 친구였던 정진룡과 그 일행들을 불법 납치고문하는데, 그 과정에서 정진룡을 살해한다.김두한이 미군에게 한 말을 따르면 "정진룡과 그의 무리들은 이승만을 사기꾼이고 자기중심적인 정치인이라고 비방하는 팜플렛을 배포하기 위해서 동원되었다. 4월 20일, 김두한은 이 시점이 그의 오랜 친구를 다시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할 좋은 기회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그는 부하들을 보내서 반 이승만 유인물을 배포하는 사람들을 잡아오게 했다. 김의 부하는 극장과 서울의 시장 거리를 배회하면서 정과 그의 부하를 잡아들였다. 김과 그의 부하들은 그들이 그들의 과거의 잘못을 인식하기를 희망하면서 이들을 폭행하기 시작했다. 폭행은 길고 단단한 일본 단풍나무로 만든 몽둥이로 행해졌다. 정은 박헌영 부재 시 남로당의 대표였던 허헌에게서 명령을 받았다고 했고 그는 공산주의 지도자들의 모든 명령에 복종한다고 말했다. 그는 심지어 이승만을 역적이라고 말했다. 이 순간에 김이 이성을 잃고 정의 가슴을 찼다. 그는 그의 오랜 친구에게 철회를 요구했지만 정은 거절했다. 김은 또 한 방을 더 때렸고 그것으로 인해 정은 체내 출혈이 시작되었고 곧바로 죽었다." 고 한다.[14]
그런데 이 내용이 드라마에선 정진영 측이 김두한 측을 공격하려다가 반격을 당해 납치를 당했고, 김두한이 살려주려 했는데 김두한을 죽이려하니 김두한이 쏴죽인 것으로 왜곡을 해놓았다.
3. 재현오류 / 옥에 티 / 각색한 부분
3.1. 전반적
- 실존 인물들과 배우들의 극 중 외모 차이가 다소 있는 편이다. 물론 완전히 비슷한 배우를 캐스팅하기는 어려우나, 그걸 감안하더라도 신체, 얼굴이 너무 차이나는 경우가 많다. 일단 주연인 김두한과 이정재, 시라소니부터 그러하다. 실제 김두한은 체구와 외모가 상당히 후덕했으나, 극중 배역을 맡은 김영철은 도리어 보통 중년 남성보다 약간 마른 체형이고, 실제 김두한보다 이목구비의 선이 뚜렷하다. 그리고 쌍꺼풀이 뚜렷하게 져 눈이 부리부리하게 큰 실제 이정재와 달리 극중 배우 김영호는 눈이 굉장히 가늘다. 또한 시라소니 역의 조상구는 머리가 길고, 콧수염이 있지만, 실제 인물은 전혀 그렇지 않고, 오히려 약간 머리가 벗겨졌으며, 수염을 기르지 않았다. 조연들을 보면, 김영태는 2부로 넘어오면서 콧수염이 났지만, 이는 나이든 것을 표현하는 장치일 뿐, 실제 인물은 콧수염을 기르지 않았다. 또한 김관철이 날렵한 몸매로 나오는데, 실존인물 김관철은 120kg 가까이 되는 거구였다. 그리고 실제 신영균은 단신이었지만 극에서는 장신 축에 속하는 윤용현이 맡았으며, 유지광은 평범한 키인데, 여기서는 186cm의 장신 배우인 유태웅이 연기했다. 유진산은 극에 처음 등장한 시기인 1945년 말에 이미 안경을 쓰고 있어야 하지만, 마지막회까지 쓰지 않았다.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실제 인물과 상당히 비슷하긴 한데, 1970년대 후반 모습과 흡사하며, 등장한 시점인 1960년대 중반과는 사뭇 다르다. 황병관은 실제로 73kg 이하 경량급 레슬링 선수로, 사진에서 묘사된 모습은 그렇게 덩치가 크거나 둔해보이는 스타일이 아니나, 극에서는 레슬러에 대한 선입견답게 덩치가 크고 살집이 있는 인물로 나온다. 신정식은 돼지라는 별명과 달리 실제로는 깡마른 체격이었지만, 극에서는 뚱뚱한 체격의 배우 함재석이 맡아서 뚱뚱한 체격으로 나온다.
- 실제보다 일찍 죽은 인물들이 있다. 김두한의 친할머니, 신영균이다. 김두한의 친할머니는 1949년 10월 22일에 사망했으나,[15] 극에서는 김두한이 막 우익 청년활동을 시작하는 1946년 초에 사망한 것으로 처리했다. 아무래도 1부에서 이어진 캐릭터들 중 앞으로 이어질 스토리와 별 연관없는 인물들의 원활한 퇴장을 위해 일찍 하차시킨 듯 하다. 신영균은 1987년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한 기사가 있는 것을 보아 최소 그 이후에 사망했으나, 극에서는 김두한이 국회 오물 투척 사건으로 수감 중이던 1966년에 죽은 것으로 나왔다. 그리고 번개처럼 〈야인시대〉 방영당시에도 살아있었던 사람까지 있다.[16]
- 플랜카드나 띠, 종이 등에 쓰인 글씨에서도 오류가 발견된다. 일제강점기 ~ 유신시대라는 극 중 배경에 맞게 손으로 직접 글씨를 써둔 경우가 많지만 몇 몇 부분에서는 컴퓨터 글꼴 궁서체나 HY백송B체가 나온다. 이건 2000년대 이후 근현대사를 다룬 작품들에서 종종 보이는 오류이다. 그 전에 있던 드라마들은 그런 오류가 덜하거나 없었지만, 한국 근현대사 드라마 중 100부작이 넘는 장편은 〈야인시대〉가 처음이기에 아마도 극에서 필요한 분량을 전부 손으로 쓰기엔 무리가 있어 부분적으로 컴퓨터로 인쇄하여 사용한 듯 하다.
- 김두한이 싸울 때 늘 정장을 입고 싸운다. 김두한의 증언에 따르면 대부분은, 특히 일제강점기에는 거의 편한 활동복을 입고 싸웠다.[17] 사실 정장이라면 〈야인시대〉 조폭들 대부분이 고정적으로 입었다.
- 옥에 티에 가깝지만, 극 중 역사적 사건의 계절 배경이 뒤죽박죽이다. 나석주 의사 폭탄 투척은 실제로는 12월 한겨울인데 드라마상에서는 한여름으로 나오고 반대로 부민관 의거와 경성에 미군 전투기가 날 때는 7월이라고 자막까지 써놓았는데 등장인물들이 코트를 입고 있다. 또 1월 한겨울에 일어난 단성사 저격 사건도 여름에 벌어진 걸로 나오며 아이스께끼 장수까지 보인다. 김두한이 사망한 날인 11월 21일은 늦가을 ~ 초겨울인데 가로수 나무가 낙엽이 져 앙상하기는커녕 나뭇잎이 단풍도 들지 않은 채로 무성하게 달려 있다. 또한 당연히 여름이어야 할 8.15 광복 당시 극중 인물들은 모두 긴팔에 긴옷을 입었고, 배우들 입김까지 나는 등 오류가 있다. 촬영상 스케줄 문제인데, 그래도 시청자 입장에선 이질스러울 수밖에 없다.
- 일제강점기 경성 거리와 8.15 광복, 6.25 전쟁 이후 서울 거리가 달라진 게 없다. 단순히 세트만 같은 것이 아니라 간판도 거의 비슷하다.[18] 즉, 극 중 서울의 1930년대 ~ 1960년대 모습은 동일하다. 광복 이후 일본식 간판은 대거 사라지고 또 한국 전쟁으로 대부분 건물들이 파괴된 뒤 새로 복구하는 과정에서 한자식 간판도 대부분 한글 간판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야인시대〉에서는 이런 시대 흐름을 세트에 반영하지 못했다. 물론 시대별로 일일이 맞게 짓는 것이 무리일 수 있으나,[19] 적어도 상대적으로 제작 비용이 거의 들지 않는 간판만은 변화를 많이 주었어야 했다.[20] 그리고 일본어로 적힌 전차 정거장 표지판 역시 1950년대를 다룰 때에도 보이는데, 이건 그냥 구석에 치워놓기만 해도 되며, 당연히 비용은 한푼도 안 든다. 그러나 그대로 냅둔 것을 보아서는 제작진이 거리의 시대 변화 반영을 태만하게 다뤘다고 볼 수 밖에 없다.
- 종로 패 중 김두한에 이어 넘버 2인 종로꼬마 이상욱이 등장하지 않는데, 이것은 유족이 반대했기 때문이다.[21] 그 다음 서열인 망치와 김무옥 중에서 망치가 등장하지 않는다. 위와 마찬가지 이유로 보여지고 오히려 유지광 부하로 망치라는 같은 별명을 쓰는 주먹이 등장하는데, 망치라는 별명을 쓰는 주먹이 그만큼 흔하다. 그 다음 위치의 부하주먹인 문영철에 대해서는 다른 견해가 있다. 문영철은 본래 이름이 아니고, 실제로 권투선수로 유명했던 사람이며 8.15 광복 전이 아니라 이후에 우익 활동을 같이 하게 되면서 김두한과 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다만, 김두한은 자서전이나 〈노변야화〉같은 회고에서 종로꼬마 이상욱이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당장 장충단공원에서 하야시와 싸운 이야기에도 등장한 부하가 자서전에서는 '내 왼팔 오른팔인 김무옥과 문영철'을 데리고 셋이 싸웠다고 되어있으며,[22] 〈노변야화〉에서는 김무옥과 문영철 등 자신 포함 6인으로 언급되어있다. 그리고 〈노변야화〉에서 해방 후 정치깡패질 하는 이야기를 할 때 조 동지, 신 동지(정황상 조희창(상하이 조)와 신영균을 지칭) 등 성으로 말하는 몇몇 사람들이 있었지만 이상욱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23] 당시 김두한 패가 연루된 정진룡 살해사건도 이상욱의 이름은 보이지 않으며, 1980년대 《경향신문》에서 신영균과 박용직의 증언에도 이상욱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24] 이상욱이 우미관 패 2인자였다는 증거 자체가 있는지 의문이다. 김두한의 증언만 따르자면, 문영철과 김무옥은 〈야인시대〉에 나온대로 김두한의 왼팔과 오른팔이 맞다. 우미관 패 2인자이자 고문 격으로 나온 김영태 정도가 버프가 된 편이다.
- '서대문형무소'가 8.15 광복 이후에도 그 이름으로 나온다. 실제로는 광복 직후인 1945년 11월 '서울형무소'로 바뀌었고, 1961년에 '서울교도소'로 개칭되었다가, 다시 1967년에 지금 이름인 '서울구치소'가 되었다.[25] 즉, 광복 후부터 5.16 군사정변까지는 '서울형무소', 그 뒤에는 '서울교도소'로 나와야한다.[26] 등장인물들이 예전부터 익숙했던 이름 '서대문형무소'로 부른다고 할 수도 있고, 실제 당시에도 사람들이 '서대문형무소'로 더 많이 부르기는 했다. 다만, 아예 감옥 정문에 대놓고 '西大門刑務所(서대문형무소)'라고 붙여놓은 것이 문제였다.
- 김영태는 실제로는 김두한보다 2살 어리다. 그리고 김두한 부하들 가운데 고보 학력 이상인 사람이 그 밖에 없어서 그랬는지 고문이자 조직 내 2인자인 것으로 묘사되었는데, 실제로 그 정도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27] 그리고 작중에선 김두한이 처음 주먹 세계에 입문했을 때부터 만났으나, 실제로는 김두한이 청년단 활동을 했을 시기인 1943년에서 1944년경에 만났다.
- 총격전 시 사용된 총기에 재현 오류가 있다. 대표적으로는 베레타 92 모델이 사용된 것이 있다. 해당 모델은 1972년에 공개되었고 1985년에 미군 제식 총기로 채택되어 1985년 이후에서야 대중에게 알려진 모델이므로〈야인시대〉에 나오는 것은 재현에 맞지 않는다. 6.25 전쟁과 김동진 습격 장면에 등장하는데 그 당시라면 M1911을 사용해야 맞다.
- 픽션이라 해도 가공의 인물들이 너무 많다. 반대로 나오지 않는 실존인물들도 여럿 있다.
3.2. 1부
- 김두한 어머니 박계숙은 일본 경찰의 고문으로 죽었다.
→ 거짓말이다. 김두한의 생모는 김두한이 어릴 때 자신의 어머니(김두한의 외할머니)와 아들을 두고 가출했다. 왜냐하면 김좌진이 가정을 책임지지 못하자 형편이 어려워졌기 때문이었다. 나무위키 김두한 항목에 자세한 내용이 있다. 그리고 실제 이름은 김계월이다.
- 1부 메인 악역인 미와 와사부로가 어린 김두한을 쫓았으며, 젊은 시절 김두한을 늘 괴롭히면서 1945년까지 종로경찰서경부로 있다가 자살했다.
→ 역시 거짓말이다. 실제 미와 와사부로는 1884년 생으로, 1920년대 이후 승진을 거듭해서 1934년에 충청남도 경찰부 고등과장이 될 때까지만 종로경찰서에서 근무했다. 최종 계급은 경시. 이후 함경도 일대에서 경찰서장 등을 역임하고 조선총독부 촉탁으로 근무하다 은퇴했다. 즉 김두한이 종로에서 주먹 좀 쓴다며 설치고 다니던 시절에 미와는 50 ~ 60대 나이로 이미 종로경찰서를 떠난 지 한참 지났던 것. 다만, 현재 확인할 수 있는 마지막 공식자료인 《매일신보》 1944년 3월 27일 자에 '종로총궐기위원회(鍾路總蹶起委員會)' 특별위원으로 참가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보아 퇴임 이후 종로에서 머물면서 이런 저런 활동을 했으며, 김두한이 그 동네 건달이었던만큼 1940년대쯤에는 어느 정도 안면을 텄을 가능성은 있다. 그리고 후술할 징용 문제에서 깡패들이 하도 사고를 쳐 조선총독부 촉탁이던 미와가 건달들을 징용보내라고 했기 때문에 사이가 안 좋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도 어쨌든 계속 고위층이었던 사람[28]이 다른 거물급 독립운동가들 놔두고 깡패 두목 하나에 집착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된다. 다만, '독립군 김좌진의 아들인 조직 두목'이란 점 때문에 다른 건달들보다는 더 눈여겨보고 경계했을 가능성은 있다. 그리고 미와의 1944년 이후 행적에 대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미와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사망했는지 확인할 방법은 없다. 김두한 본인은 인터뷰에서 해방 직후 자신이 끌고 가서 죽였다고 했지만, 이 역시 검증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29]
- 1929년부터 1957년까지[30] 종로경찰서였던 곳이 1920년대 초중반에도 경찰서로 나온다.
→ 야인시대 촬영장에서 재현한 경찰서 세트의 모티브는 원래 대한제국 평리원 건물로 이후 경성복심법원과 경성지방법원이 사용했다가 1929년 8월부터 종로경찰서에서 사용했고, 1957년 3월에 신신백화점을 지으면서 헐렸다. 1920년대 초중반 종로경찰서는 옛 한성전기회사 사옥[31]으로 1936년에 철거된 뒤 그 자리에 지금까지 남아 있는 장안빌딩이 건립되었다. 4.19 혁명 당시인 1960년을 다룰 때에도 이 세트가 종로경찰서로 나오는데, 실제 그 당시에는 지금의 SK 재동주유소 자리에 있었다.[32]
- 작 중 대부분의 결투, 특히 1부에서는 거의 90%의 싸움이 우미관 앞에서 일어나고 또 군중들이 주위를 둘러싸서 구경한다.
→ 실제로는 그러지 않았다. 그 일대 길도 사람 세네 명이 겨우 지나갈만할 정도로 좁았다. 더군다나 일제강점기에는 광복 직후보다 훨씬 폭력에 대한 단속이 심했기 때문에 대부분 깊은 밤에 으슥한 골목에서 몰래 싸웠다.
- 김두한이 원노인 사후 거지촌에 잠시 있다가 쌍칼의 부하가 되었다.
→ 실제로는 이문설농탕[33]과 조선극장 등에서 여러 잡일을 했었고 이후 우미관 매점에서 일을 하다가 구마적 부하가 되었다.
- 2화에서 김두한이 원노인과 경성으로 귀환했을 때 우미관 앞에 만국기를 걸어 놓은 모습이 나오는데, 그 중에 단풍잎이 있는 캐나다 국기와 나이지리아 국기가 있다.
→ 현 캐나다 국기는 1965년에 제정한 것이다. 그리고 저때 나이지리아는 독립국이 아니었다.
- 2화에서 조선총독부 청사 준공식에 걸린 만국기에 현재의 그리스 국기와 러시아 국기가 있다.
→ 당시 그리스 국기는 4종류가 있었는데, 현재의 국기는 외교 업무와 상선에서 사용되었으며, 올림픽 등의 행사나 정부기로는 다른 국기를 사용했다.[34] 러시아 국기는 존재하긴 했으나, 당시에는 러시아가 아닌 소련이었기 때문에 러시아 국기가 걸려있는 것은 재현 오류이다.
- 1925년 ~ 1926년 경[35]인 4회에서 만해 한용운이 YMCA에서 "여러분! 개성에 송악산이 있어요! 그 송악산에서 흐르는 물이 만월대의 티끌을 씻을 지 몰라도, 선죽교에 어려있는 충혈들의 피는 결코 씻을 수 없습니다!" 의 연설을 한다.
→ 실제로는 1921년 12월에 있었던 일이다. 한용운의 애국심을 보여주는 일화를 등장시키려 일부러 시기를 늦춘 것.
- 5회에서 나석주 의사가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져 폭파시켰고 이후 조선식산은행 쪽으로 가서 들어가지도 않고 유리창을 깬 뒤 폭탄을 던졌다. 그 때 폭탄은 불발했으며, 출동한 경찰들과 시가전을 벌이다 총알이 떨어져 일본 경찰들의 총에 맞아 병원으로 이송된 직후에 순국했다.
→ 오류가 많다. 동양척식주식회사에 던진 폭탄은 실제로는 불발했다. 그리고 순서도 다르다. 동양척식주식회사의 경비 현황을 먼저 탐색한 후에 조선식산은행 실내로 들어가 폭탄을 투척하고,[36] 그 다음에 다시 동양척식주식회사로 가서 직원들을 쏘고, 불발한 폭탄을 던진 것이다. 또한 순국 과정도 사실과 다르다. 실제로는 총알 22발이 남았음에도, 나석주 의사가 체력의 한계를 느껴 전봇대에 기대어 가슴에 총을 쏴 자살을 시도했다. 병원으로 이송된 직후에 순국한 것은 사실이다.
- 6회에서 김두한이 원노인을 만나고 거지촌에서 나와 새 옷을 사 입고 나오는 건물이 화신백화점 서관이다.
→ 이 건물은 1935년 화재로 불탄 3층 화신백화점 자리에 1937년에 지은 것이며, 그 때 김두한은 이미 주먹패였다.[A]
- 최동열의 집에 김좌진이 가서 애국 헌금을 걷을 때 대학생인 최동열에게 "경성제대에 다닌다지?"라고 한다.
→ 경성제국대학(약칭 경성제대)은 1924년에 세워졌는데, 그때 최동열은 이미 학교를 졸업하고 《시대일보》의 기자로 일하고 있었다. 그리고 김좌진은 1918년 만주로 망명한 이후 두 번 다시 살아서 조선에 들어오지 못했다. 즉, 저 장면은 최소 1918년 이전으로, 김좌진이 '경성제대'를 언급하는 것이 오류다.
- 11화에서 구마적이 하야시에게 자신의 이름을 고희경이라고 말한다.
→ 실제 이름은 고시형(또는 고시경)이다. 김두한의 회고담 〈노변야화〉에서 김두한의 발음이 잘 들리지 않은 것때문에 잘못 전해진 것.
- 16화에서 수표교 거지들이 구역이 다른 숭례문에 동냥하러 갔다가 그 쪽 염천교 거지들에게 걸려 도망간다.
→ 아마 서울역 근처 염천교로 설정한 것 같은데,[38] 실제 일제강점기 당시 거지들이 있던 염천교는 남산에서 발원해 지금의 방산시장 근처에서 청계천으로 흘러들던 묵사동천에 있었다. 사족으로, 서울역 염천교는 인왕산 무악재 부근에서 발원한 무악천에 있던 또 다른 염천교에서 이름만 따온 것이다.관련 기사.
- {{{#0000CC 16화에서 거지들이 염천교에 구걸하러 갈 때 철로를 지나는 기차[39]전차선에 철도 건널목을 지나는 자동차가 등장한다!]와 23화에서 김무옥, 문영철이 개성 깡패들과 싸우고 간신히 탄 열차[40], 그리고 24화에서 구마적이 만주로 떠나면서 탄 열차[41]와 48화에서 마루오까를 피해 도주한 다나까가 타려던 열차가 전부 통일호다.}}}
→ 통일호가 처음 생긴 것은 1955년, 8.15 광복 이후다.
- 21화에서 김두한이 아버지 노름 빚으로 팔려 갈 위기에 처한 애란을 구하려고 하야시 집을 찾아가 도둑질했다.
→ 김두한 회고에 나온 것으로 사실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실제 김두한 증언에 따르면, 부하 몇 명과 같이 지나가던 행인들에게 술지게미를 뿌리고 폭행해서 돈을 갈취했다.[42]
- 22화에서 김두한이 구마적 패거리의 눈을 피해 작은 암자에 숨어있을 때 최동열이 김동삼 장군의 옥사를 언급한다.
→ 실제 김동삼 장군은 1937년 4월에 옥사했으며, 극 중 시점으로 그때는 김두한이 이미 우미관을 차지한 후였다.
- 23화에서 김두한이 구마적과 대결하기 하루 전, 개성역에서 김무옥과 문영철이 경성으로 가는 기차표를 끊을 때 뒷 편에 '조선철도 12년 계획수립' 현수막이 있다.
→ 이때가 1936년[A]인데, 조선철도 12년 계획은 1927년부터 시행한 것으로, 저 시기에 걸려 있는 것은 어색하다. 마치 청계천 복원 사업 광고판이 2020년대 기준으로 시내 한복판에 붙어 있는 느낌이다.
- 24화에서 구마적이 김두한에게 패한 후 만주로 떠나 사라졌다.
→ 당시 기록을 보면 1942년까지만 해도 김두한의 두목으로 있었으며, 도리어 김두한 소개로 친일단체 시천교와 친일 단체 대동일진회 분쟁에 개입하여 대동일진회에 소속했다.[44]
- 25화 ~ 41화에서 김두한과 박인애가 풋풋하면서도 가슴 아픈 사랑을 한다.
→ 김두한이 〈노변야화〉에서 회고한 이야기를 각색한 것이었다. 김두한의 회고에는 그냥 박씨인 여성으로 나온다. 드라마에 등장시키기 위해 작가가 임의로 '인애'라는 이름을 지은 것. 그리고 극 중에서는 전문학교 학생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타자치는 일을 배웠다.[45] 드라마처럼 김두한이 구해주고 사귄 것은 맞지만,[46] 김두한의 회고에 따르면, 김두한의 힘 자랑과 그로 인한 실수 때문에 정이 떨어졌고,[47] 결정적으로 일본 제국 육군 헌병대와 붙은 사건으로 박씨 여성 집안에서 서둘러 결혼시켜 헤어졌다고 한다. 그러니까 회고를 보면, 김두한이 일방적으로 좋아한 건데, 극에서는 정말 서로 영화같은 사랑을 한 것으로 각색된 것이다. 그러니 33화 ~ 34화에 나온 박인애 납치 사건 누명으로 감옥에 간 적도 당연히 없다. 또한, 박씨 여성 집안도 친일파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잘 대해 줬다고 본인이 증언했다. 이를 이환경이 극적 전개를 위해 왜곡시킨 것이었으며, 만약 실제 박씨 여성 집안에서 알았다면 충분히 고소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여담으로 김두한 증언에 따르면 그 여성에게는 여동생이 하나 더 있었는데 첫 데이트하는 날 자기는 박씨 여성과 짝을 맺었고, 문영철에게 그 여동생을 붙여주려고 했다고 한다.
- 26화에서 와싱턴이 처음 등장하면서 우미관 패에게 자신의 명함을 주는데 전화번호를 'Tel. 6853. 6854', 주소를 'Kongphyungdong 8. Jongro2jeongmok kyungsungbu'로 적었다.
→ 전부 오류. 컴퓨터 글꼴인 것은 제쳐두더라도 내용 면에서 문제가 많다. 우선 일제강점기 전화번호는 분국명을 앞에 쓰고, 그 다음에 번호를 적었다. 예를 들어 광화문 분국이 관할하는 《동아일보》의 전화번호는 '光1900番(광(화문) 1900번)'으로 표기했다. 따라서 명함 속 같은 번호가 나올 수 없다. 그리고 주소도 문제다. 일제강점기 서울의 '동(洞)'들을 일본식 행정구역인 '정(町)'으로 바꿨기 때문에,[48] '공평동'이 아닌 '공평정'으로 적어야 한다. 또한 '정목(丁目)'을 'jeongmok' 으로 적었는데, 'ㅓ'를 'eo'로 쓰는 표기 자체가 해방 이후에 생긴데다가, 정식으로 자리 잡은 것은 1954년 한글의 로마자 표기법을 제정한 후다. 한국어 발음대로 쓰려면 차라리 'jongmok' 으로 쓰는 게 적절했다. 또한 애초에 일제강점기 때는 서적, 지도같은 출판물이나 명함이나 엽서, 성냥갑같은 판촉물 등에 한자로 된 인명이나 지명을 로마자로 표기할 경우 한글의 로마자 표기가 아니라 일본어 발음(특히 헵번식)에 맞추어 표기했다. 그러므로 '公平町 八. 鐘路二丁目, 京城府.'를 로마자로 적고자 한다면 'Kōheichō 8. Shōro 2 Chōme, Keijōfu' 정도가 되었을 것이다. 물론 정식 로마자 표기를 모른다면 개인 이름의 로마자 표기처럼 창작해 낼 수도 있으나 지명은 공식적인 로마자 표기가 정해져 있다.
- 26화에서 독립운동가 이재유가 미야케 교수 집에 숨었다가 미와가 들어닥치기 직전에 학생으로 변장해 탈출하고 미야케는 경찰들을 보고 웃으면서 시치미를 뗀다.
→ 전부 오류. 이재유가 미야케 교수 집에 굴 같은 걸 만들고 숨어있었던 것 자체는 사실이나, 탈출 과정이 실제와 다르다. 이재유가 은신하던 도중 미야케 교수가 경성제국대학 적화공작 사건으로 체포당했고, 고문을 견디면서 이재유 신변에 대해 증언거부를 하는 사이에 이재유가 도망가고 나서야 저 사건의 전말이 드러난 것이었다.[49] 드라마같이 이재유는 쏙 빠져나가고, 증거가 없는 상태에서 미야케 교수가 미와를 비웃으면서 실실 웃는 여유있는 분위기가 절대 아니었다. 그리고 드라마에서는 백발의 늙은 교수로 나와 미와에게 늙은이 소리를 들었지만, 실제로는 미와보다 15살 어린 30대 중·후반의 젊은 교수였다.
- 34화에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김두한을 면회하러 큰어머니, 최동열 등이 서대문형무소 면회실 로비에서 기다릴 때, 간수가 김두한의 생년을 '1918년'이라고 말했다.
→ 일제강점기에는 서력기원 대신 일본 연호가 공식 연호였다. 민간에서 서력기원을 병용하기는 했지만, 형무소같은 공식 기관에서는 일본 연호만 사용했다. 따라서 '1918년' 대신, '다이쇼 7년'이라고 해야 적절했다. 방영 당시 다이쇼 연호를 낯설어하는 시청자들을 배려한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자막으로 설명하면 충분했다. 이러한 문제는 후술하겠지만, 제1공화국 시기에도 연도를 서력기원으로 언급한 것에서 다시 불거진다.(당시에는 단기 연호를 사용했다.)
- 36화에서 김두한이 나미꼬를 희롱한 일본인 축구선수들과 싸웠다.
→ 이 역시 김두한 회고에서 유래한 것으로, 사실관계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런데 회고의 내용과 극중 묘사가 완전히 다르다. 회고에 따르면, 상대는 평양 출신 조선인 축구부였다. 싸운 이유도 다르다. 당시 조선에서 제일 인기있던 더비 매치인 경성 vs 평양 축구경기에서 평양 팀이 이긴 날에 경성 팀 팬이었던 김두한이 종로 어느 바에 술마시러 갔다가 하필 옆 자리에서 축하연을 즐기던 평양 팀을 보고 시비를 걸어 싸웠다고 한다. 한마디로 훌리건 짓. 그리고 평양축구팀은 숭실전문학교, 대성학교[50] 출신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이 학교 학생들 항일 의식은 남다른 수준이었다.[51]
- 37화에서 최동열은 일본군의 행진을 본 뒤, 조선총독부의 우민화 정책을 언급하면서 일본이 '학도병'이라는 명분으로 조선의 학생들을 총알받이로 밀어넣으며, 조선인들이 말이 자원이지, 실상은 무언의 압력을 받아서 군대에 입대한다고 현실을 비판한다.
→ 물론 조선인 지원병 제도에서 자발적인 입대보다 관의 종용이 더 많았던게 일제 기록에도 보인다. 그러나 조선인들을 만주에 배치한 것은 1941년부터고, 이 때 시점이 중일전쟁이 막 벌어지던 1930년대 말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묘하게 재현에 맞지 않는다. 조선인 지원병제도와 태평양 전쟁 말기에 시행된 학도 특별지원병 제도를 섞은 것으로 보인다.
- 김두한 패 5명과 하야시 패 40명이 장충단공원에서 싸워 김두한 패가 이겼다.
→ 장충단 결투는 물론, 하야시의 존재 자체가 거짓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김두한과 하야시 결투는 사실인가? 참조. 하야시를 조선인 선우영빈으로 아는 경우가 많은데, 이 설에 따르면, 선우영빈은 야쿠자와는 전혀 상관없는 별개의 인물이라는 것이다.
- 40화에 등장한 신불출의 만담에서 그의 창씨개명한 이름이 '구로다 규이치(玄田牛一)'로 나온다.
→ 실제로는 '에하라 노하라(江原野原)'라는 이름을 주로 사용했다. 그리고 '구로다 큐이치(玄田牛一)'는 일본 욕설인 '칙쇼(畜生)'를 파자한 것으로,[52] 이를 빗대서 창씨개명을 까는 드립 차원에서 나온 이름이다.
- 41화의 부민관 뱀 소동 사건 직후 ~ 김두한과 황병관과 만난 시간대
→ 묘하게 꼬여있다. 사건 직후 정진영이 김두한에게 신문(작중 시점으로 어제자 신문)을 읽어주는데, 오늘을 기해 국민징용령을 실시한다는 언급이 나온다. 그리고 최동열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정간되었다고 언급하는 장면이 나오며, 김두한 친척들이 김두한의 친할머니에게 김두한에게 창씨개명을 하라고 청을 넣다가 퇴짜를 맞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국민징용령은 일본 본토에서 1939년 7월부터 실시되었으며, 창씨개명은 1940년 2월부터 시작되었고,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1940년 8월에 정간되었다. 한 회만에 1939년 ~ 1940년으로 시간이 지나간 것일 수도 있겠으나, 작두가 황병관을 소개시켜준다는 언급 이후에 저 장면들이 나왔기에, 거의 비슷한 시간대 라고 봐야 한다. 42화 ~ 44화에서 김두한이 육군 헌병대에 붙들린 시간대도 묘하다. 분명 진주만 공습 이전임에도(김두한이 풀려나고, 설향과 관계를 청산하는 장면 이후에 태평양 전쟁 발발 장면이 나온다.) 벌써부터 조선인들, 심지어 주먹패마저도 징용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김두한이 '경성특별지원청년단'을 1943년도에 만들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44회에 1941년 ~ 1943년을 압축했다고 봐야 한다.
- 41화에서 김두한이 황병관을 소개받고 술을 마시다가 일본 육군 헌병 2명에게 죽을 뻔한 황병관을 구해주었다.
→ 이 역시 김두한의 회고를 바탕으로 한 에피소드이다. 그런데 해방 후 태릉선수촌 선수들 인터뷰를 담은 책에서 황병관이 한 이야기를 보면,[53] 유명한 싸움꾼인 김두한과 식당에서 시비가 붙었고,[54] 그가 발차기한 것을 그대로 잡아서 쓰레기통에 거꾸로 쳐박았으며, 나중에 김 모라는 걸 알고 나서는 "더 패 줬을 걸."이라 했다는 일화가 나온다. 사실 관계야 전혀 알 도리가 없지만, 여기서 핵심은 '실제로 자신을 구해 준 사람에 대해서 저렇게 말하지는 못할 것'이란 점이다. 그래서 김두한 회고 및 그것을 바탕으로 한 극 중 내용이 꾸며낸 것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당시 상황에서 건달인 김두한이 육군 헌병 장교를 팼다는 것은, 요즘으로 말하면, 조폭이 검사를 반 죽도록 팬 일과 마찬가지다. 그런 대사건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을 리는 없고, 설령 맞은 게 부끄러워서 외부로 정보를 차단했다고 쳐도, 어떤 일이 있어도, 김두한이 살아서 나올 수 있는 일은 절대 아니었다.
- 44화 ~ 45화에서 김두한을 처음 본 신영균이 애송이라면서 무시한다.
→ 실제 신영균은 김두한보다 불과 1살 많은 1917년 생으로 그런 말할 입장은 아니었다. 물론 초면이니만큼, 나이를 몰라서 그런 걸 수도 있다.
- 45화 ~ 46화에 등장한, 징용을 피하기 위해 단게 국장과 만나 담판을 짓는다.
→ 전부 거짓이다. 극 중 김두한이 단게 국장에 대해 증언한 것이 실제 인물과 전혀 맞지 않다. 단게가 65세 ~ 66세 정도인 노인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1899년 생, 그러니까 저 당시 40대 초반에서 중반 넘어가는 나름 젊은 나이였다. 만약 진짜 만났다면, 어지간한 노안이 아닌 이상은 저렇게 증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현실에서는 이준영이란 사람이 조선총독부 보안과장 야기와 우미관 패를 연결시켜 로비를 했고, 이에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니시히로가 징용에서 벗어나게 봐주었다. 단게가 개입한 흔적은 전혀 없다. 하나 더하자면, 극에서 단게는 순사부터 올라간 인물이라 하는데, 실제로는 도쿄제국대학 졸업에 고등문관시험 합격자 출신이었다.
- 50화의 시작 부분에서 미와가 "여운형의 건국동맹인가 뭔가 하는 것들부터 조사해 봐"라고 하고, 그 이후 김두한을 완전히 죽이지 못하면서 "건국동맹이나 체포하라고!"라고 한다.
→ '건국동맹' 이란 용어 자체가 해방 후에 생겼다. 보안을 위해 이름없는 비밀결사로 있다가[55] 광복 후 제대로 활동을 할 때 필요해서 지은 이름이 '조선건국동맹' 이다.
- 50화에서 8.15 광복 당일 군중들이 거리에 태극기와 플랜카드를 들고 만세를 부른다.
→ 8·15 당일은 한국인들이 해방 사실을 알지 못해 별 일 없이 넘어갔고, 다음날부터 서서히 대중들이 일제 패망 사실을 알기 시작했다고 알려진 탓에 이 장면이 오류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런데 이는 조정래 소설의 영향으로, 실제 당시의 모습에 대해서는 설왕설래가 많다. 자세한 것은 8.15 광복 문서 참조. 다만, 35년간 일제 지배를 받았는데,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들었다해서, 군중들이 그날 곧바로 태극기와 그럴듯한 플랜카드를 만들어 나온다는 것은 무리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이 장면은, 재현 오류라기보다는 시대가 변하고, 드라마도 2부로 넘어간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치에 가깝다.
3.3. 2부
3.3.1. 군정기
- 8.15 광복 이후 김두한이 절에 몇 달 있다 돌아올 때, 아직 김을동은 태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김을동이 태어난 후에 미군이 들어왔다.
→ 김을동은 1945년 10월 10일 생[56]이다. 그러니까 해방 이후 두 달도 채 안지났을 때 태어났다. 그리고 미군은 김을동이 태어나기 한 달 전에 들어왔다. 다만, 실제로는 초가을인데 촬영 당시 한겨울이라 어쩔 수 없이 몇 달 뒤로 설정한 듯 하다.
- 김두한 패가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자경단일파로 멋대로 칭하고 활동하던 중, 경성에 있던 일본 해군무관부를 습격한다.
→ 없었던 일이다. 그리고 해군이라면서 죄다 일본 육군 옷을 입었다.
- 김두한이 박용직과 김후옥을 광복이후 처음 만났다.[57] 그리고 박용직이 김후옥보다 서열이 높다.
→ 실제로는 그 이전부터 안면이 있었다.[58] 그리고 실제로는 김후옥이 나이도 세 살 많고 사회적 지위도 더 높았다. 박용직에게 형님 운운하며 굽히는 건 오류였다.
- 삼수가 김두한의 지시를 받고 YMCA회관에서 나오는 박용직을 자동차에 태우고 우미관으로 간다.
→ YMCA(현재 주소: 서울 종로구 종로 69)와 우미관(현재 주소: 서울 종로구 종로14길 4)은 종로를 사이에 두고 대각선으로 마주보고 있으며, 직선거리로 140m 정도로, 걸어서 불과 2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 납치하는 등의 범죄를 저질러 차가 필요한 것도 아닌데, 이 정도 거리를 차를 타고 이동하는 것은 어색하다.
- 시라소니가 김두한을 만나러 우미관에 갔다가 김두한 부하들과 싸우는데, 중간에 우미관과 옆 건물 사이 틈으로 타워크레인 이 보인다.
→ 당연히 저 당시 우리나라에 타워크레인은 없었다.
- 해방 공간에서 활약한 조선공산당산하 청년 단체가 '조선청년전위대'이다.
→ 전위대는 김두한이 책임자였다가 1945년 말에 우익으로 전향하면서 곧바로 사라졌으므로 반영 오류다. 극 중에서는 김두한이 탈퇴, 해체 선언을 했으나, 공산당측에서 이를 무시한 후 새 전위대장에 정진영을 임명하여 활동을 계속 한 것으로 나온다. 극중 전위대에 대응하는 실제 공산당 청년 단체는 '조선민주청년동맹'이다.
- 김두한이 우익진영에서 활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 야쿠자들과 아편밀매를 시도한다.
→ 실제 있던 일을 각색한 것이다. 《중앙신문》[59] 1946년 2월 15일 기사를 보면 김두한과 부하들, 그리고 일본인 몇 명이 이 사건으로 재판을 받았는데 무죄 판결로 석방되었다는 내용을 볼 수 있다.# 단, 이 때 조병옥을 처음 알게 되었다는 것은 드라마의 각색이다.
- 대한민청 결성 후에 심영을 습격했다.
→ 실제 심영 습격은 1946년 3월이고, 대한민청 결성은 한 달 뒤인 4월이다.
- 신불출이 1946년 6.10 만세 운동 20주년 기념주간 행사에서 태극기4괘를 강대국으로 묘사하면서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만담을 하다가 극장에서 김두한 패 습격을 받고 납치당해 다리 한 쪽이 부러진 후 곧바로 월북했다.
→ 사실과 다르다. 김두한의 증언에 따르면, 무사히 공연을 마친 후 집으로 가던 길에 김두한과 그 부하들에게 총을 맞았다고 한다. 총탄은 왼쪽 어깨와 왼쪽 팔 옆구리를 뚫었으며, 신불출은 도망가다가 과다출혈로 쓰러졌다. 직후 김두한과 그 부하들이 쫒아가 죽이려고 했으나, 주변 목격자들 때문에 겨우 목숨을 구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언론보도에 따르면, 신불출은 김두한에게 테러를 당한 것이 아니다. 만담 공연을 보러 갔던 우익 성향 관중들이 태극기 드립에 격분하여 공연 현장에서 신불출을 집단으로 구타했고, 이때 중상을 입어 백인제 외과에 입원했던 것. 그리고 《조선일보》의 기사에 따르면, 가해자로 구속된 사람들은 국학전문학교 재학생 강덕수, 주학건, 박창진 등이었다. 당대 언론기사가 사실이라면, 신불출 테러와 김두한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 김두한의 증언을 최대한 사실로 받아들인다쳐도, 구타한 그리고 저 드립친 걸로 치안 교란, 연합군 비방 등의 죄로 구속당한 뒤 재판을 받아 1년 징역 살다가 1947년에 출소한 후 월북했다.
- 김두한과 대한민청대원들이 극좌 군대인 국군준비대를 습격해 해산시켰다.
→ 완전 거짓. 애초에 국군준비대는 극좌도 아니었고, 김두한 쪽에서 해산시킨 것도 아니다. 물론 기본 성향은 좌익 쪽이었는데, 신탁통치 반대노선이었으며, 구 일본군에 만주군 출신자까지 있는 등 생각보다 다양한 계열이 구성원으로 존재했다. 그러니까 굳이 따지자면 "반탁 중도파". 또 당시 상황을 보면 해방 직후 남한에는 국군준비대를 비롯, 학병동맹 등 무려 아흔 여섯 무장 단체들이 난립했다. 그러나 미군정은 이러한 단체들의 움직임을 용인하지 않았고, 1946년에 문제가 있는 단체들을 해체했다. 이후 〈사설군사단체 해체령〉을 발포함과 동시에 '남조선 국방경비대 설치법'을 마련했다. 이에 온건한 군사 단체는 남거나 국방경비대로 흡수되었는데, 이런 흐름 속에서 국군준비대 역시 해체했던 것. 다만, 1946년 2월, 우익 요인 암살을 위해 우미관 부근에서 밀회하던 국군준비대원들을 종로경찰서에서 체포한 것을 보아 국군준비대 중 김두한 패를 노린 대원들이 있었다는 건 추측할 수 있다.#
- 개코가 파업 현장에서 성추행 누명을 쓰고 김두한에게 사살당했다.
→ 역시 사실이 아니다. 애초에 개코 자체가 이환경이 만든 인물이다. 이 에피소드는 김두한이 얘기한 이야기에서 딴 것이다. 부하들이 대규모 민간인 학살을 저지른 탓에 책임을 묻기 위해 부하들을 창고에 가두고, 불을 질렀다는 것이었다. 현실성도 없고 내용도 썩은 이 따위 이야기를 '성추행으로 오인받자 일벌백계'로 바꿔 묘사한 것이며, 극 중에서 이 부하들을 개코라는 한 인물에게 투영한 것이다.
- 대한민청 사건 당시 정진룡살해 정황.
→ 전체 왜곡됐다. 자세한 것은 위에서 언급한 부분을 참고. 그리고 김천호의 죽음도 오류이다. 실제 인물은 이 때 기적적으로 살았다.# 다만, 기사에서 중상이라고 나온 것을 보아 얼마 뒤에 죽었을 가능성도 크다.
- 정진룡 살해사건으로 재판을 받은 김두한이 법정에서 할복 소동을 일으켰다.
→ 실화다. 《중앙신문》 1948년 2월 13일 기사를 보면 군정재판을 받을 수 없다며 깡통 조각으로 배를 3번 그었다고 했다. 하지만 피만 좀 났을 뿐 큰 상처는 아니었다고 했다. #
- 대한민청 사건으로 수감당한 김두한이 오키나와 형무소로 옮겨가 미군병사와 킥복싱을 했다.
→ 역시 거짓. 당시 신문자료나 청년운동 관계 기록을 보면 서대문형무소에서 이태원동 미군 형무소로 옮겼다가, 형 확정 이후 다시 대전형무소로 옮긴 뒤 정부 수립 직후인 1948년 9월이나 10월에 가석방된 것으로 보인다.# 간 적도 없는 오키나와에서 결투를 할 리가 없으니 명백한 거짓이며, 무엇보다 킥복싱이 정규 스포츠로 등장한 시기는 1960년대다.
- 미군소속으로 인도계 미국인이 워태커 소령으로 등장한다.
→ 이는 당시 국내에 영어와 한국어를 둘다 자연스럽게 구사할수 있는 백인 연예인이 얼마 없어서 이리됐음을 감안할 수 있지만, 실제를 대입해보자 하면, 당시 미국에는 인도계가 3,000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60] 유색인종이 높은 직위로 향하는 일이 적었다고 하는 것을 감안하면 어색하게 느껴진다. 굳이 영어와 한국어를 자유자제로 사용할 수 있는 백인배우를 구하기 힘들었다고 하면, 설정상은 한국계 미국인을 소령으로 캐스팅 할 수도 있었다. 일단 당시 기준으로는 인도인보다는 한국인이 미국으로의 이민이 흔했다.
3.3.1.1. 심영 습격 사건 관련
- 김두한패가 중앙극장에서 심영의 공연을 방해한 뒤 연막탄을 터트렸고, 상하이 조가 도망가는 심영을 향해 총알을 쐈다.
→ 실제 1946년 3월에 일어난 심영 저격과 4월에 일어난 중앙극장 습격 사건을 하나로 합쳤다. 심영은 국립극장[61]에서 연극 '님' 공연을 무사히 마치고 귀가하던 길에 광통교에서 김두한이 직접 쏜 총알에 맞았다. 중앙극장 습격은 심영 저격과 별개로 좌익 세력이 한 중앙극장 공산당 홍보 영화 상영을 방해한 사건으로, 〈야인시대〉 심영 저격 초반부(극장 습격 부분) 에피소드로 들어갔다. 장소가 중앙극장인 점, 연막탄을 터트려 영화 상영을 방해한 점, 연막탄을 터뜨릴 때 수류탄 터트린다고 외친 점, 마무리로 좌익 홍보 영화 필름을 파기하기 위해 영사실을 폭파시켜버린 점 등이 바로 그것이다. 사실 김두한이 스스로 테러했다고 한 사람들 중 친일 행위를 저지른 자는 심영만이 유일하기 때문에 두 사건을 섞어 극적으로 각색하고 심영을 극단적으로 비참하고 우습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상하이의 p38의 슬라이드가 반동으로 후퇴하지 않는다.
- 중앙극장 습격 사건당시 김두한이 극장에 들어가기 전 문영철과 대화하면서 "도대체 심영이나 문예봉이란 배우가 저렇게 인기가 있단 말인가."라고 말한다.
→ 그 시대에 유명했던 배우들을 마치 처음으로 안 듯이 말하는 것은 좀 어색하다. 심영이나 문예봉은 습격 사건 때에는 실제로 약간 위상이 주춤했어도 엄연히 톱스타였다. 더군다나 김두한은 극장(우미관)에서 활약했으며, (드라마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당시 최고의 인기 배우 중 한 명이던 김승호를 데뷔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정도로 연예계 발이 넓었다. 2010년대 중·후반으로 비유하자면 연예계에 지인이 많거나 연예계 정보통이라는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아무 것도 모르거나 난생 처음 안 것처럼 "와, 대단한데? 송중기와 수지가 저렇게 인기가 많고 위상이 높냐?"라고 말하는 느낌이다. 단, 이 대사는 64화 타겟으로 등장한 심영[62]과 그 동료 문예봉 같은 배우들의 당시의 위상과 인지도를 방영 당시에는 잘 몰랐던 시청자들에게 설명하고 높이기 위해 넣은 극적 허용이다. 하지만 그럴 거였으면 차라리 문영철과 김두한의 대사를 서로 바꾸거나 "역시 심영이구만!" 하는 정도로도 충분했다는 점에서 확실한 오류.
- 심영이 고자가 되었다.
→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는 하복부에 총상을 입었다. 그리고 고자설은 드라마 〈제3공화국〉을 집필한 정치인 출신 이영신 작가가 책 《비밀결사 백의사》에서 처음에 언급한 것이다. #
- 심영이 총알에 맞고 입원한 병원이 백병원이다.
→ 실제로는 김성진 외과. 『高協(고협)』 沈影氏(심영씨) 拳銃怪漢(권총괴한)에게 被襲(피습). 백인제의 병원 이름은 당시엔 '백인제 외과의원'이었고 백병원으로 정식으로 출범한 해는 1946년 12월이다. 단, 백병원 입원설은 김두한의 증언에 따른 것으로, 심영 습격에 대한 증언이 모두 사실이라면 모종의 이유로 백병원으로 이송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본작에서는 다른 병원에서 안 돼서 백병원으로 옮겼다고 설명했다.
3.3.2. 정부 수립 이후
3.3.2.1. 자유당 정권기
3.3.2.1.1. 6.25 이전 및 6.25 당시
- 80화에서 이승만이 "나는 주로 미국에서 살아서 한문은 잘 모른다"는 말을 했다.
→ 실제 이승만은 미국에서 오래 살았지만, 조선 시대에 태어나서 30살까지 조선에서 살았던 사람으로, 서당에서 한학 교육을 받았으며, 역대 대통령 중 가장 한문과 서예에 능통했다.
- 전쟁이 일어난 다음 날 문영철 생일이라고 다같이 놀자고 할 때, 김두한이 "이번에 죽다 살아왔으니 한 번 제대로 놀아보자." 고 했다.
→ 대한민청 사건 이후 6.25 발발까지 극 중에서 김두한 패와 관련한 사건은 없었으므로, 저기서 말하는 죽다 살아온 일은, 아마 대한민청 사건으로 수감되었다가 풀려나온 것을 말하는 듯 하다. 그런데 그 사건과 6.25는 2년 차이가 있으므로, 새삼스레 저런 말을 하는 것은 어색하다. 아마 극 중에서 대한민청 사건과 6.25 발발 사이의 회차가 불과 2 ~ 3회 정도라서 시청자 입장에서는 그냥 그러려니 넘어갈 것으로 생각한 듯 하다.[63]
- 1950년 6월 27일 새벽, 김두한과 부하들이 사무실에서 방송을 들었을 때 나왔던 라디오가 제니스 트랜스오셔닉 H500이다.
→ 실제로는 1년 뒤인 /1951년에 나온 단파라디오다.
- 6.25 전쟁개전 직후 이승만이 6월 26일 대국민 담화를 녹음했고 6월 27일 새벽에 서울을 떠나면서 자신의 목소리가 나오는 라디오를 듣고 침울해했다.
→ 명백한 오류다. 이승만은 6월 27일 피난 이후 도착한 대전에서 서울로 담화를 올려보냈다.
- 최동열이 중앙방송국에 가서 녹음 방송 테이프가 돌아가는 것을 보고 분노해 방송용 테이프를 뜯어내 방송을 중단시켰다.
→ 실제로는 혼란 속에서도 방송인으로서 사명을 가진 일부 직원들이 방송국에 남아 임시 새벽 방송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끝났다.
- 이승만이 서울을 떠나면서 차안에서 이기붕에게 라디오를 틀라고 할 때 '라지오'라고 했다.
→ '라지오'는 일본식 발음으로, 구한말부터 미국에서 쭉 살았던 이승만이 일본식으로 발음할 리가 없다.[64] 즉, 재현에 맞게 한다면, '레이디오'라고 발음해야 한다.
- 김두한이 부하들과 함께 피란을 갔다.
'''→ 실제로는 각자 흩어져서 갔다.
- 인민군 군관이 김두한 집에 들어왔다가 김좌진 사진을 보고 경례를 올리고 갔다.
→ 김좌진은 공산주의자들과 다툼 가운데 암살당했고, 김좌진이 공산주의 진영에 저지른 테러들도 만만치 않다보니, 북한에서 김좌진은 민족 영웅과는 한참 먼 이미지였다. 특히나 저 군관이 만주에서 활동하던 갑산파 출신이었다면, 현실에서는 남은 김두한 가족들이 죄다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다만, 2020년 10월 25일에 방영한 〈선을 넘는 녀석들 - 리턴즈〉 60회에서 김두한의 외손자 송일국이 관련 일화를 언급한 것을 보아,[65] 이환경의 창작이 아니라 김두한 가문의 증언을 토대로 이 에피소드를 넣었을 가능성이 있다.
- 황병관이 1950년 8월에 김두한 패와 함께 노동자들 권익을 보호하려다 부산깡패 고사이마찌(고영구)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66]
→ 실제로는 1952년에 사망했다. 그것도 적산가옥 문제로 시비가 붙어 패싸움을 벌이다 죽은 것이다. 그리고 고사이마찌 원래 별명은 '마사이찌'고, 이름도 '고영목'이다. 그리고 애당초 김두한과 마사이찌는 적대관계가 아니었고, 친한 사이였다.[67]
- 김두한이 6.25 전쟁 중 부산 항만 파업을 이끌었다.
→ 파업 자체는 사실이고, 대한노총의 간부가 김두한이었던 것도 사실인데, 당시 파업을 이끈 게 김두한이라는 주장은 교차검증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과정 속에 있었던 그 유명한 4달러 에피소드는 김두한이 DBS 라디오 〈노변야화〉에서 한 이야기를 각색한 것이다. # 당시 김두한은 100원이었던 임금을 400원으로 바꾸었다고 말했는데, "원래는 800원을 불렀다가, 400원으로 타결했다."라고 하니, 협상 개연성상으로는 실제 김두한의 발언이 훨씬 그럴 듯 하다. 물론 김두한이 〈노변야화〉에서 허세와 허풍을 잔뜩 섞어 푼 썰이 많지만 말이다. 이후 1987년 발간된 홍성유의 소설 《장군의 아들 김두한》에서는 달러로 협상 통화를 바꾸어 놓았다. ##
- 김두한이 부하들과 학도병을 데리고 영천 전투등에 참전했다.[68]
→ 김두한이 이 때 참전했다고 회고했으며, 당시 참전한 군인들 중에서도 김두한과 그의 부하들이 참전했다고 증언한 사람들이 몇 명 있다.# 그러나 공식적인 기록으로는 확인되지 않는다. 물론 당시 우익청년단체원 일부가 전투에 참여했다는 것은 사실인데, 당시 상황이 여기저기 틀어막느라 정신이 없다보니, 김두한의 참전을 확증할 자료가 없다는 것이다.
- 87화에서 이정재와 김기홍이 동대문상인연합회를 만들 때, 김기홍이 조직원으로 이석재를 천거하자 이정재가 "들어본 이름"이라고 한다.
→ 이석재는 이정재의 친척 동생이다.[69] 친척동생을 두고 새삼스레 저렇게 말하는 것은 어색하다.
- 88화에서 국민방위군을 설치하고 장정들에게 입대를 권유하는 경찰들 차에 붙어있는 권고문에 '...(생략) 중공 괴뢰군이 압록강을 넘어 지금 평양{{{#0000CC 을 지나고 있습니다. (생략)...' 로 적혀있었다.}}}
→ 당시 맞춤법으로는 [[읍니다|'읍'''니다']]가 맞다.
- 89회 발췌개헌 묘사에서 장택상이 직선제 개헌 요지를 설명하면서 국회의원들의 공격을 받았다. 그리고 국회를 둘러싼 관제데모 장면에서 유진산과 전진한이 상황을 심각하게 바라보았다.
→발췌개헌 항목 참조. 첫 번째 직선제 개헌안 제출 당시 국무총리(서리)는 허정이었으며, 장택상은 정치파동 이전인 4월에 국무총리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유진산과 전진한은 모두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해서 당시 국회의원이 아니었다.
3.3.2.1.2. 6.25 이후
-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김두한의 기호가 1번이었다.
→ 이 링크 이미지에 따르면, 1번인데, 다른 링크 이미지로는 3번으로 적혀있다.
- 건중친목회를 운영하는 위치에 섰지만, 똑똑한 홍영철에 열등감을 느낀 김관철을 김두한이 정신 개조하려고 그가 보는 앞에서 허공에 총을 쏘았다.
→ 김관철 살인미수사건을 저렇게 묘사했다. 실제론 밀가루와 설탕 입찰, 즉, 이권을 둘러싼 갈등이 배경이며, 김두한이 화가 나서 권총으로 위협사격을 한 사건이다. 참고로 김두한은 대질심문 중에서조차 또 한 차례 김관철을 폭행했다고. 즉, 드라마처럼 계몽 목적은 전혀 없었다. 다만, 김관철이 재판에서 김두한을 두둔하면서 "충고 차원에서 때린 것으로 생각했다."라고 증언했다는 신문 기사가 있기는 하다.#
- 자유당이 김두한을 영입하려고 했으나, 독재를 싫어하는 김두한이 거절했다. 그러자 김관철 살인미수 사건으로 협박하여 김두한은 할 수 없이 입당했다. 그리고 반독재 활동으로 제명당할 상황에서 탈당했다.
→ 역시 거짓. 현실은 자유당 공천을 받으려 했었다. 그리고 공천을 받지 못하자, 당에서 문제적 행동을 하다가 제명당했고, 이후 일단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한 다음에 다시 들어간 것이다.(국민의힘이나 더불어민주당 등의 유력 정당에서 공천을 받지 못해 무소속으로 출마했다가, 당선된 이후 다시 입당하는 정도로 비유할 수 있다.) 당시 자유당에 돈보따리를 들고 와 공천시켜달라는 사람들이 즐비한 상황에서 굳이 김두한을 공천시킬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나중에 탈당한 것도 이범석 및 족청계 세력에 위기감을 느낀 이승만이 이들을 대거 토사구팽했고, 이범석과 가까운 김두한 역시 숙청 1순위에 들어갔기에 위기감을 느낀 김두한이 스스로 나온 것이다.
- 자유당뿐만 아니라 민주당도 영입하려 했으나 김두한 본인이 거절했다.
→ 실제로는 둘 다 꺼렸다. 상식적으로 테러로 악명이 높고 나이까지 상당히 어렸으며,[70] 배운 것도 하나 없는 건달 출신에 각종 범죄 및 깡패들과 엮인 관계가 현재 진행 중인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을 환영할 곳은 거의 없다. 물론 자유당과 민주당 양 쪽에 기피대상으로 찍힌 것과는 별개로, 야당 의원들과 가깝게 지내기는 했고, 10년이 지난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드디어 민주당 후신이자 제1야당인 신민당 후보로 출마했다.
- 이기붕이 김두한이 자신들과 뜻을 달리한다고 아쉬워하면서 이승만이 내무부 장관직까지 맡기려 했다고 언급했다.
→ 이 역시 김두한의 허풍에서 비롯된 거짓이었다. 아무리 이승만이 망령났다 해도 이런 제의를 했을 가능성은 없다.
- 홍영철은 김두한에게 끝까지 우호적이었고 유지광에게 자신들과 함께 하자는 제안을 받으나 거절했다.
→ 실제로는 홍영철도 유지광과 함께 반공청년단에 활동했고 군사정권때 수감당했다.[71][72]
- 동대문 패에 10공주파 두목 이영숙이 소속했다.
→ 이영숙은 가상인물이다. 원래 같은 작가가 썼던 무풍지대에서 주인공 유지광과 멜로를 위한 창작 캐릭터였는데, 야인시대 2부 후반이 〈무풍지대〉를 사실상 복사하다시피 하면서 같이 따라온 것이었다. 단, 야인시대 주인공이 김두한이기에 유지광과 러브 스토리는 빠졌다. 다만, 미국 대사가 타고 다니던 고급 승용차를 김관철이 이끄는 건중친목회가 5만환으로 사려하자 120만환을 제시했던 이영숙이란 사람이 있었다는 의견은 있다. 사실 관계는 알 수 없으나, 설령 저게 사실이었어도, 실제 이영숙이란 사람이 조폭이란 내용은 없으니, 극중 이영숙을 주먹패로 묘사한 것은 창작이 맞다.
- 시라소니 린치 사건 당시에 시라소니가 야외에서 동대문파 습격을 받았다.
→ 실제로는 실내에서 당했다고 한다.
- 동대문파 린치로 심각한 부상을 입고 바로 백병원에 입원한 시라소니에게 이석재가 찾아와 쇠절구공이로 다리를 부러뜨리는 등 2차 린치를 가했다.
→ 이석재가 백병원에 들이닥쳐 2차 가해를 시도한 것은 사실이나, 그 전에 시라소니는 종로 5가 반도병원에 입원했다가 옮겼는데, 이에 대한 언급이 없다. 또한 실제로는 방심한 틈을 타서 시라소니가 깁스로 이석재 얼굴을 쳤으며, 그 소란을 들은 간호사가 들어오는 바람에 그대로 도망쳤다고 한다.
- 이승만의 종신제 집권을 위한 개헌을 추진할 때 김두한이 장경근의원을 때리고 경무대에 불려가 이승만 면전에다 "손문(쑨원)선생도 장개석(장제스)선생에게 정권을 물려주었고요" 라고 말했다.
→ 실제로 쑨원은 권력을 물려주기는커녕 장제스를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하지 않았다. 장제스는 쑨원 사후 후한민, 왕징웨이, 랴오중카이 등과 경쟁하면서 정권을 쟁취했다.
- 사사오입 개헌당시 김두한이 자유당계략으로 감금당해 국회에 못갔다.
→ 실제로는 멀쩡히 국회에 가서 개헌안 투표에 반대표를 던졌다. 改憲案表決(개헌안 표결) 이 날 議事堂 內外表情(의사당 내외표정) 기사 참조. 애초에 사사오입 개헌의 쟁점은 찬성표가 정족수인 203석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136표에서 하나 모자란 135표라서 부결이 된 걸 정족수(203석 중 3분의 2=135.33...)에 반올림을 적용해 135표는 가결이라는 논리로 통과시킨 사건이다. 한편 원작격인 〈무풍지대〉에서는 김두한도 표결에 참가하여 반대표를 행사했다.
- 김기홍이 자유당몰락을 예견하고 자유당과 관계를 끊자 하지만 이정재가 듣지 않아 동대문사단을 떠났다.
→ 이 역시 각색이다. 그리고 시기도 실제와 다르다. 극 중에서는 이정재가 자유당에게서 지령받은 제3요인 암살을 김동진에게 맡겼으나 배신당한 이후에 김기홍이 떠났지만, 실제로는 그 전이며 저 암살요인 명단에 김기홍도 있었다. 要人暗殺陰謀(요인암살음모)했다[73]
- 사사오입 개헌 당시 투표 결과를 부결에서 가결로 바꿔 선포할 때 이기붕이 바로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 실제로는 이기붕이 퇴장은 커녕 국회의장으로서 이후 회의를 본인이 진행했다.[74] 애초 통과 선포로 회의를 끝낸 게 아니었고, 여야 의원들끼리 사사오입 적용에 관해 격렬하게 토론을 했다. 국회의원들끼리 다툼 및 방청석 내 소란은 사실이나, 그것도 의원들이 연설하던 도중에 있었던 것이다.
- 이전에는 영락없는 까막눈으로 나왔던 김두한이 국회의원이 된 후 자신의 사무실에서 신문을 읽는 모습이 나왔다.
→ 설정 오류나 재현 오류로 생각할 수 있지만 해당 묘사가 아주 틀린 건 아니다. 실제로 김두한은 깡패 시절에는 완전 까막눈이었지만 정치인 시절에는 그래도 어느 정도는 글을 깨쳤으며, 이후 중학교 입학자격 검정고시에 응시해 합격했다. 그래도 김영삼 등 동료 의원들은 '머리는 좋았지만 글은 못 읽던 사람'이라고 증언한 걸 보면, 기껏해야 한글과 간단한 한자 몇 글자나 읽을 수 있는 수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 1955년에 일어난 단성사 저격 사건당시 김동진을 영화관으로 꾀어내기 위해 임화수가 단성사와 국도극장에 올린 서부극이 〈형제는 용감했다〉와 〈OK 목장의 결투〉이다.
→ 〈OK 목장의 결투〉는 1957년에 개봉했던 영화이다. 당시 실제로 국도극장에서 상영했던 서부극은 〈황야의 역마차〉이다.#
- 단성사 저격 사건당시 권력의 뒷배로 수사 도중 담당 검사가 바뀌고 원래 해당 사건 담당이었던 김윤도 검사가 분노해 한격만 검찰총장에게 바로 사표를 냈다.
→ 현실에서는 그 후에도 검찰에 있으면서 다른 사건들을 맡다가, 지방으로 전보받자, 그 해 말에 사직했다. 그리고 실제로는 한격만이 김윤도보다 먼저 검찰에서 나왔다. 김윤도 검사의 한자 이름도 원래는 '金允燾'인데 극중에서는 '金閏道'로 잘못 표기되었다.
- 김동진이 백병원에서 퇴원하고 나오면서 시발자동차에 탑승했다.
→ 시발자동차는 김동진이 퇴원하고 몇 달이 지난 1955년 9월 말에 출시되었다. 더군다나 자유당창당동지회 에피소드가 김동진의 퇴원 이후에 등장했는데, 자유당창당동지회는 1955년 7월 말에 발족되었다. 따라서 김동진이 퇴원하면서 시발자동차를 타는 것은 오류이다.
- 시라소니와 이정재가 직접 맞붙었다.
→ 실제로는 그런 적이 없다. 현실에서 이정재는 씨름선수답게 힘은 장사였지만, 둔하고 기술이 부족해 싸움 실력은 시라소니, 김두한은 물론이고, 웬만큼 주먹 쓴다는 이들과 비교해도 한참 떨어져서 행동대장급만 되어도 이정재를 힘만 센 찐따 취급했다고 한다. 이 장면은 시라소니 역 조상구가 이정재 역 김영호와 한 번 붙게 해달라고 PD에게 이야기를 해서 넣은 것이다.
- 김희갑 구타 사건이 제3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진 1956년에 일어났다.
→ 김희갑 구타 사건은 1959년의 일이다. 단, 극에서는 1956년 선거 당시 자유당과 동대문 일파 만행을 세세하게 다뤘고, 이런 분위기를 확실하게 나타내기 위해 시간대를 바꾼 듯 하다.
- 1956년 7월 27일에 국회의원들이 지방선거운동탄압을 규탄하며 거리에서 시위할 때 저지하는 경찰 수십 명을 김두한 혼자서 때려 눕혔다.
→ 실제 시위에서 몸싸움이 있었던 것은 맞다. 그러나 극중 묘사는 김두한이 동아방송 프로그램 〈노변야화〉 76회[75]에서 과장한 것을 더 부풀린 것이다. 당시 사건을 다룬 1956년 7월 29일자 《동아일보》와 《경향신문》에 따르면, 〈지방자치법안〉 문제로 야당 의원들이 가두시위를 할 때, 사복경관과 무장경관들이 몰려와서 김선태 의원을 잡아가자 행진을 시작했고, 그 때 선봉에 서서 경찰들하고 몸싸움했던 인물이 김두한과 이철승이었다. 그리고 경찰에서 이 시위에 야당 책임을 묻겠다면서 경찰 14명이 다쳤다는 이유로 김두한 등 5인에게[76] 소환장을 보냈는데 김두한은 이를 무시했다. 그걸 두고 김두한이 "14대 1로 싸웠으며, 다시 자기를 소환한 경찰들을 팼다."라고 과장한 것. 현실적으로 저게 말이 될 수가 없다. 저걸로 소환이 안 될 일이었다면, 그 동안 김두한이 경찰로 끌려간 건 더 센 놈이 있어서였겠나? 물론, 독재에 맞선 시위에서 일어난 일이었기에 오히려 김두한이 잘했다고 말할 수도 있는 일이긴 하지만, 어쨌든 무쌍과는 좀 거리가 있는 사건이다. 그리고 김두한의 복장도 오류이다. 극 중에서는 모자에 작업복을 입고 워커를 신었으나 실제로는 반팔 와이셔츠에 양복 바지를 입고, 구두를 신었다.실제 당시 사진
- 국회의원들의 거리 시위 이후 이정재가 국회에서 김두한에게 시비거는 사건을 다룰 때 김두한과 이정재가 결투를 벌였다.
→ 실제로는 이정재와 그 패거리가 협박만 늘어놓았고, 김두한은 꾹 참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 사건이 일어난 날은 1956년 2월 14일로, 국회의원들의 거리 시위보다 무려 5달이나 앞섰다.#
- 장충단집회 방해 사건직후 충정로 도끼 사건이 일어났다.
→ 실제 두 사건은 전혀 관계 없다. 시기상으로도 1년 4개월이나 차이난다. 장충단 집회 방해 사건은 1957년 5월, 충정로 도끼 사건은 1958년 9월이었다.
- 충정로 도끼 사건 때 정팔과 맨발의 대장도 참여했고 이후 구속당했다.
→ 저 둘은 애당초 피고인이 아니었다. 당시 정팔은 손을 씻고 사업하고 있었고, 맨발의 대장은 저 사건을 다룬 기사에 피고인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삼우회 일원이었던 아오마스 심종현이 그 때 명동파 편에서 싸우다가 같이 들어갔는데, 당시 사건을 다룬 기사들을 보면, 모두 큰 처벌을 받지는 않았다. 다만, 저 사건을 계기로 이화룡이 손을 씻고, 영화계에 투신한 건 사실이다.
-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당시 국회의원 후보자 등록 마감일이었던 1958년 4월 11일 밤에 이천경찰서 서장실에서 이정재와 이기붕을 비롯한 자유당 인사들이 모였을 당시 내무부 치안국장으로 나온 사람은 김종원이었다.
→ 김종원은 1957년 3월 21일에 치안국장에서 물러났고, 제4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에는 후임자인 서정학이 치안국장으로 재직했다. 따라서 저 자리에 김종원이 나오는 것은 명백한 고증오류이며, 이전에 부하 경찰들에게 동대문패 조직원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장면과 이기붕의 비서실장인 한백수가 이정재를 찾아와서 김종원더러 갈 때가 되었다는 말을 운운하는 장면도 역사적 사실에 맞지 않다. 만일, 해당 장면에서 치안국장이 나와야 했다면, 서정학이 나왔어야 했다. 다만, 김종원은 이승만 정권 당시 권력의 빽을 믿고 온갖 악행을 저지렀지만, 서정학은 훗날 강원도지사 재임 당시[77] 부정선거를 진두지휘하던 이기붕의 말을 거역하다가 파직될 정도로 강직한 인물이었던 만큼, 그를 해당 장면에 등장시켰다가는 본인[78]이나 가족, 검도계 고위 관계자[79], 그와 친분이 있는 은퇴한 공직자들과 같은 친인척들로부터 강력한 항의가 들어오거나, 심하면 소송까지 갈 가능성이 높았다.[80] 그럴 바에는 미군정기부터 자유당 시절까지 수 없이 저지른 악행 때문에 어지간한 보수 인사들마저 진작에 외면하고 있는 김종원을 계속 등장시키는 것이 안전했다. 또한, 시청자들의 입장에서도, 6.25 전쟁 이후 경찰 측 최고위 악역은 김종원으로 각인된 만큼, 해당 장면에서 갑작스럽게 배역을 교체했다가는 불필요한 혼란이 일어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거기다 김종원이 분량은 단역보다는 좀 더 많은 수준이기 때문에 굳이 추가적으로 배우를 섭외해서 새 인물을 투입하는 것보다는 원래 있던 사람을 그대로 쓰는 것이 더 편했다.
-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0000CC 때 김두한이 '노동당' 후보로 나왔다.}}}
→ 실제로는 '노농당'이었다. 아마 '노동당'이 일반적으로 익숙해서 '노농당'을 오기로 본 모양인데, 당시는 6.25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 사회에 레드 컴플렉스가 극심해서 대놓고 '노동당'을 걸었다가는 아마 국가보안법으로 철퇴를 맞았을 것이다. 실제로도 진보 성향이었던 진보당이 진보당 사건으로 해산되었고, 당수 조봉암은 사형당하기도 했다.
-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이후 이기붕을 비롯한 자유당의 당직자들과 장관들이 향후 정국을 논의할 때, 장경근이 제3대 대통령 선거를 두고, "지난 56년 선거 때(후략)."라고 언급했다.
→ 동대문파와 김기홍의 결별을 다룬 단락의 각주에서도 언급했지만, 당시 대한민국 공식 연호는 단기였고, 공식석상 및 문서 뿐 아니라 일반에서도 단기 연호가 사용되었으며, 심지어는 공식연호가 서기로 전환된 후에도, 한동안 일상에서 단기를 병용한 국민들이 많았다. '쌍팔년도'가 대표적인 용례. 따라서 시대 상황을 반영한다면, "지난 89년(단기 4289년) 선거 때."라고 하는 것이 적절했다. 단기에 익숙하지 않은 시청자들을 배려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자막으로 표기해도 충분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있다.
- 경찰이 고려대학교 4.18 학생 시위이전에 첫 발포를 했고 4.18 당시 깡패들이 대낮에 습격했으며, 김주열 열사시신 발견 후 2차 시위가 벌어진 마산에 최인규가 직접 내려와 지켜봤다.
→ 고대생 습격 사건은 저녁에 일어났다. 그리고 최인규는 저때 마산에 가지 않았다.
- 122화에서 이기붕일가가 단체로 사망하는 장면에서 이기붕 둘째 아들이자 이강석 남동생인 이강욱이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소년으로 나왔다.
→ 실제 이강욱은 1940년 생이며, 1960년 사망 당시 막 성인이 된 21살(만 19세)였다.[81] 물론 작중에서 중요한 역할이 아니어서 그런지 캐스팅에 신경을 크게 쓰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일단, 이강욱 역 배우는 당시 청소년이었던 듯 하다. 사실 김두한 역을 맡은 김영철만 봐도 그렇듯 〈야인시대〉라는 드라마에서 나이대에 맞지 않는 캐스팅을 한 경우가 적은 편이 아니다.
3.3.2.2. 군사 정권기
- 이화룡이 5.16 군사정변이후에도 잡혀가지 않았다.
→ 실제로는 잠시나마 잡혀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 박치옥 대령이 같은 최고위원이자 이화룡의 소학교[82] 동창 송찬호 준장이 부탁해서 풀어주긴 했는데, 이러한 얘기를 들은 차지철 대위가 분노해[83] 결국 중앙정보부로 찾아가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던 김종필 중령에게 자초지종을 말했고, 이에 김종필은 중앙정보부 직할 부대를 동원해 이화룡을 다시 체포했다. 자세한 내용은 MBC 드라마 〈제3공화국〉 6회에 나온다.
- 이정재및 정치깡패들이 혁명재판이 끝난 후 형무소에 나와 거리에서 조리돌림당했다.
→ 실제로는 5.16 군사정변이 일어난 지 불과 5일 뒤인 1961년 5월 21일에 국토건설단이 있던 덕수궁에서 출발했다.
- 신정식이 돼지라는 별명답게 살집이 상당하며 1961년 12월 21일에 임화수, 곽영주, 최인규와 함께 사형당했다.
→ 실제로는 오히려 일반인들과 비교해도, 꽤 마른 편이며 돼지란 별명은 성격 때문에 붙은 것이다. 또한 실제로는 이정재와 같은 날인 10월 19일에 사형당했다.
- 신정식에게 사형 선고를 내릴 때, 재판장이 "신정식, 일명 돼지"라고 했다.
→ 당연하지만, 실제로는 그냥 본명만 불렀다. 단, 돼지의 이름이 극 중에서 거의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시청자들 이해를 돕기 위해 저렇게 대사를 쓴 듯 하다.
- 차지철이 안 나온다.
→ 실제로 국회에서 김두한과 차지철이 맞붙을 뻔했다. 차지철은 4선 의원이었는데 다른 국회의원들을 때리는 아주 못된 버릇이 있었다. 참다 못한 김두한이 상의를 탈의하고 차지철에게 현피를 신청했으나 차지철이 자리를 피했다. 이후 차지철의 보직은 국회의원에서 대통령 경호실장으로 변경된다.
- 1963년에 애국단을 조직한 김두한이 조언을 구하기 위해 최동열을 찾아갈 때 한일협정 반대 시위를 목격했다. 그리고 저 때 최동열이 "(군사정권에서) 정보기관을 만들어 국민의 눈과 귀를 감시할 것이다." 라고 했다.
→ 물론, 저 당시에도 한일간 물밑 접촉이 있긴 했지만, 본격적으로 반대시위가 거세지기 시작한 것은 1년 뒤인 1964년이다. 또 중앙정보부는 그보다 2년 전인 1961년 5.16 직후에 생겼다.
- 국회 오물 투척 사건당시 김두한이 탑골공원화장실에서 오물을 펐다.
→ 실제로는 자택 변소에서 펐다.
- 오물 사건 당일, 김두한이 검은 양복을 입고 국회에서 연설했다. 그리고 연설 도중 '국무위원들을 피고로 다루겠습니다! 죄를 지은 피고!' 라고 할 때 비장한 분위기 속에서 의원들이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 실제 그 대목에서는 의원들이 웃었다. 당시 속기록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김두한이 똥물투척 직전에 연설을 늘어놓은 것은 사실이나, 진지하고 폼나는 연설은 아니었다. 도리어 장황한 횡설수설에 가까웠으며, 자극적이고 풍자적인 느낌이 강했다. 그래서 이를 듣던 의원들은 웃음을 터뜨린 것이다. 또한, 실제 당일 김두한 양복은 회색이었다.
- 오물 사건 이후 구속당한 김두한이 조사받으면서 검사에게 "우리 안동 김씨가문 조부님 되는 분이 김옥균"이라고 말했다.
→ 물론 같은 가문 할아버지 뻘 친척은 맞다. 하지만 둘은 친조손 관계가 아니다. 김옥균과 김두한은 12촌으로 촌수가 꽤 멀다. 그런데 저 말만 보면 자신의 친할아버지라고 오해하게 할 만 하다. 1부 40회에서도 김옥균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 땐 일가, 조부 뻘이라고 제대로 언급했다.[84]
- 1966년 12월에 김두한이 석방된 직후 차를 타고 가면서 이찬오 보좌관에게 '유진산이 신민당총재로 선출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 실제 유진산이 신민당수가 된 것은 약 4년 뒤인 1970년이며, 애초에 신민당 자체가 1967년에 창당되었다.
- 1967년 초에 김두한이 박정희를 만나 앞으로 다시는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했다.
→ 실제로는 풀려난 뒤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 한 번 더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당연히 이때 언급되는 정릉유원지 개발사업권을 박정희에게 받았다는 내용은 사실이 아니다. 다만, 생전에 광산업에 개입한 것 자체는 사실이고, 이 때문에 그가 평소에 하던 말실수들, 예를 들면 선거 유세 중 "수틀리면 국회 터트리겠다."는 발언을 중앙정보부 등에서 트집잡기가 더 쉬웠다. 광산업에 손을 댔다면, 광산에서 갱도 개척용으로 사용하는 폭약을 입수하는 것도 용이할테니.
- 김두한이 절에서 그 동안의 잘못을 참회하다 거리에서 쓰러져 죽었다.
→ 사실과 다르다. 그 죽음에 대해서 말이 많기 때문에 논란을 피하기 위해 저렇게 설정한 것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1972년 11월 18일에 김두한이 주먹계 옛 후배였던 조일환을 만나고 헤어지던 중에 센트럴 호텔 객실에서 고혈압으로 쓰러졌고, 이 때 곧바로 숨을 거둔 것은 아니었으나, 신원 미상의 누군가에 의해 고려병원으로 옮겨진 후, 3일이 지난 11월 21일에 숨을 거두었다.
- 드라마 대단원을 장식하는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김두한 장례식 행렬에서 멀리 현대에 볼 수 있는 아파트가 보였다.
→ 불멸의 크리넥스는 대놓고 실수로 현대의 물건을 안 치운것인데 이 경우는 세트장에서 멀리 떨어진 아파트(부천 상동신도시)가 살짝 화면에 잡힌 장면이다. 사실 김두한이 사망한 1972년에 서울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모습을 가진 아파트들이 어느 정도 꽤 있긴 했다.[85] 하지만 그런 아파트토 십몇 층이 넘어가는 고층아파트는 아니었다. 즉, 아파트 자체는 나와도 문제가 안 되지만, 그게 고층이면 말이 안 된다. 그런데 극중에선 고층 아파트가 보였으니 옥의 티로 볼 수 있다.
3.4. 문화예술 관련 재현
3.4.1. 음악
근현대사 시대극인만큼, 이따금씩 당시에 유행했던 가요들이 나온다. 그런데 실제와 연도가 맞지 않는 경우가 더러 있다.- 1화에서 어린 김두한이 외할머니와 함께 우미관 앞을 지날 때 극장 홍보하던 악단이 연주하던 음악이 〈サーカスの唄〉이다.
→ 작중 시점은 1924년인데, 저 노래는 1933년에 발표되었다.
- 4화에서 신마적이 종로회관에서 술 마시며 울분을 토할 때 가수가 불렀던 노래가 〈사의 찬미〉이다.
→ 극 중 아직 1926년 6월 10일에 일어난 6.10 만세 운동이 나오기 전인데, 〈사의 찬미〉의 발매는 그 해 8월이다. 그리고 가사도 훗날에 달라진 버전으로 나왔다.
- 극 중에서 김두한이 종로 2정목을 거쳐 조선 주먹 황제가 되는 시기는 만 18세인 1936년이고 드라마상으로는 24화인데, 그 이전 회차에서 1936년 이후에 발매된 노래들이 나왔다.
- 15화에서 아직 쌍칼 부했던 김두한이 신마찌 야쿠자들로부터 조선인 여성을 구하고, 다방에서 부하들과 함께 그 여성에게 돈을 주는 장면에서 나왔던 노래는 1940년에 나온 이화자의 〈화류춘몽〉이다.
- 16화에서 구마적을 지원하러 온 주먹패들을 구마적이 맞이할 때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가 작곡한 〈왈츠 II〉가 나왔다. 이 음악을 발매한 시기는 1956년[86] 이후이고, 초연은 1988년에 했다. 클래식스러운 분위기때문에 간과하기 쉽지만, 극에서 나온 음악들 중 실제와의 연도 차이가 가장 심하게 나는 음악.
- 25화에서 나미꼬와 김두한이 처음 만났던 장면[87]과 35화에서 박인애가 결혼 직후 친구와 커피 마셨을 때, 그리고 41화에서 박인애 오빠가 김두한에게 박인애 편지를 전해줬을 때 카페에서 나왔던 음악이 그리스국민 작곡가 테오도라키스가 작곡한 〈기차는 8시에 떠나네〉이다.
→ 이 곡은 애초 나치에 저항했던 그리스의 한 젊은 레지스탕스를 기리며 만든 노래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발표되었다. 당연히 일제 치하 조선에서는 나올 수 없다.
- 32화에서 와싱턴이 담배꽁초버리면서 불렀던 노래가 백년설의 〈대지의 항구〉였다.
→ 4회 차 뒤인 36화에서 우미관에 영화 〈역마차〉 간판이 걸려있고, 같은 회차에 종로회관에서 가수가 황금심의 〈외로운 가로등〉을 부르는 것을 보아, 36화 시간대는 1939년인 듯 한데,[88] 〈대지의 항구〉 발매는 2년 뒤인 1941년이다.
- 52화에서 우미관패와 명동패가 술을 마셨을 때, 68화에서 금강이 술집에 있었을 때 흘러나왔던 노래, 64화 첫 장면에서 시라소니가 공산당 전위대원들과 싸운 뒤 걸어가면서 불렀던 노래가 남인수의 〈가거라 삼팔선〉이다.
→ 앞서 말한 시기들은 김두한이 대한민청 사건으로 구속당하기 한참 전으로, 최소 1947년 이전이다. 그런데 〈가거라 삼팔선〉 발매 시기는 1948년이다. 극 중 1948년은 76화 ~ 79화이므로, 그 이후에 나와야 맞다.
- 마지막회에서 1966년 말, 김두한이 출소 후 차 안에서 보좌관들과 대화했을 때 나왔던 BGM이 〈새마을노래〉이다.
→ 이 노래는 1972년 처음 나왔으며, 새마을운동 자체도 1969년에 관련 법을 제정한 뒤 1971년부터 시행한 것이다. 재현 오류이긴 하지만, 이는 한국 사회가 본격적으로 경제개발 시기에 접어들었다는 분위기를 나타내기 위한 극적 허용이다.
3.4.2. 영화
주먹 시절 김두한 주 무대가 영화관인 우미관이니만큼 극장 내외부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이 역시 오류가 많다.- 일제 강점기 영화관 객석은 나무 의자였지만, 극 중에서는 안락한 의자다. 하지만 당시 내부 촬영이 가능한 영화관들 중 일제때 모습을 하고 있는 영화관은 없으므로, 어쩔 수 없었다. #
3.4.2.1. 간판
- 극 중 1936년 경인 14회 ~ 17회에[89] 〈임자 없는 나룻배〉[90] 간판을 걸었다.
→ 이 영화는 1932년에 개봉한 작품으로, 한참 예전 영화를 메인으로 홍보할 리 없으니 오류이며, 결정적으로 이 영화는 우미관이 아닌 단성사에서 상영했다. 사족으로 우미관이 철 지난 영화를 틀어준 적이 있긴 했는데, 그건 1959년 화재 후 YMCA 뒤로 옮겨 재개관 했을 때 이야기다.
- 25화 ~ 28화에 〈오몽녀(五夢女)〉 현수막과 간판을 걸었다.
→ 단성사에서 개봉했다.[91]
- 김두한이 징용을 피하기 위해 '경성특별지원청년단'을 창단한 44화 ~ 46화에 1941년 개봉한 〈반도(半島)의 봄〉 현수막이 보였다.
→ 이 영화는 명치좌[94]에서 상영했다. # 더군다나 이 〈반도의 봄〉은 해방 이후 장면에도 더 등장하는데, 특히 53화와 54화에서는 아예 메인 간판이다. 그리고 42화부터 현수막으로 나왔다가, 44화부터 47화까지 메인 간판으로 등장하는 〈선라이즈〉는 무려 1927년 영화이다.[95]
- 1945년 광복전후를 다룬 50 ~ 51화에 〈복지만리(福地萬理)〉 현수막을 펼쳐놓았다.
→ 〈복지만리〉는 1941년작이며 경성보총극장[96]에서 틀었다. # 그리고 이 영화는 조선인 만주 이민 장려를 위한 친일 영화로, 해방 이후에도 걸어놓는 것은 말이 안 된다.
- 56화부터 60화까지 〈자유만세(自由萬歲)〉 간판과 현수막이 보였다.
→ 이 영화는 1946년 10월에 개봉한 것으로, 같은 해 4월에 있었던 대한민청 결성(60화) 및 3월에 있었던 심영 습격 사건(63 ~ 64화)[97]보다 이전 회차에 보이는 것은 재현 오류다. 60화부터 보이는 〈안중근 사기(安重根 史記)〉도 5월에 개봉했으므로, 시기상 맞지 않다.
- 김두한이 1954년에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후 우미관앞에서 종로구 을[98]구민들에게 감사 인사 퍼레이드를 하는데, 걸려있던 우미관 간판의 영화가 〈성벽(城壁)을 뚫고〉이다.
→ 이 영화는 1949년작이며, 당연히 저 시기에 걸려 있지 않았다. 사족으로, 저 때 드라마에서는 중절모를 썼지만, 실제로는 맨머리였다.
4. 관련 문서
[1] 원래는 심영과 문예봉, 황철 등의 공산당 연극 배우와 그들의 프로파간다에 대해 늘어놓는 대사다. 극작가의 의도와는 다르게도, 마냥 심영 일당에게만 해당되는 말은 아닌 듯 하다.[2] 이승만의 인품에 대해 다소 미화로 볼 수 있는 부분은 있지만,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후엔 지나치게 고집이 센 꼰대로 전략하고 측근들에게 휘둘리는 전형적인 무능한 군주로 묘사된다. 박정희 정권 역시 드라마 기준으로 우익 정치투사였던 김두한을 빨갱이라며 잔혹하게 고문하는 묘사가 있다.[3] 하지만, 어째선지 박정희가 김두한에게 다시는 정치에 손을 뻗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땅을 주고 사업을 하도록 도와줬다는, 사실과 무관한 나레이션이 흘러내린다. 김두한은 동료 의원들과 끝까지 박정희 정권에게 반항하는 인물이었기에 박정희를 통해 땅을 받은 적도, 사업을 한 적도 없다. 각본가 이환경이 현재는 무산된 인간 박정희라는 드라마를 계획한 적이 있었다. 원래 이환경은 젊은 시절인 1990년대 이전에는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는 드라마인 〈훠어이 훠어이〉를 집필한 경력이 있었을 정도로, 군부정권에 비판적인 스탠스에 서 있었지만, 3당 합당과 김영삼 정권기 이후로 정치적인 스탠스가 변화해서 박정희에게 우호적인 인물이 되었으며, 이 때문에 박정희에게 유화적인 부분을 넣은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4] 2010년대 후반기에 들어서 〈야인시대〉 붐이 다시 일어난 건 김두한이 우익 진영 백색 테러리스트로서 좌익 진영의 배우 심영을 습격한 에피소드가 인터넷에서 유행을 탔기 때문인데, 그에 따라 유튜브 등으로 다시 보는 시청자들 관심도 6.25 전쟁 직전 좌, 우익이 대립하던 시절의 김두한에게 쏠려 있다.[5] 사실 이것조차 제대로 했다고 보기도 어렵다.[6] 그러나 후술하겠지만 김두한은 제대로 된 항일 운동을 한 적이 없다.[7] 다만 당시 구마적 패거리는 야쿠자보다 더 상인들을 못살게 굴었다고 하니 아주 틀린 묘사는 아니다.[8] 왜 일본인은 여기서 장사를 하면 안 되는가?[9] 심지어 나미꼬는 김두한에게 세금까지 바치겠다고 했다.[10] 하야시는 종로 가게를 사들이며 "돈을 아끼지 말아라."라는 말을 분명히 한다. 가치가 있으니 시세보다 더 주고라도 가게를 사겠다는 의도지 절대로 무력이나 권력을 이용하지 않았다.[11] 작중에서도 이래저래 조선 상인들을 보호한다는 핑계만 나올 뿐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하는 장면은 안 나온다.[12] 극중에서도 김두한은 46회에서 이 사실을 인정하고 한탄한다.[13] 해방 이후 이념전쟁에서 우미관 패가 총격전, 폭탄테러 등 극도로 위험한 김두한의 명령을 곧이 곧대로 수행하던 점에서 김두한이 '힘이 없어서 독립운동을 못한 것'이 아니라 '할 의사가 없어서 안한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좌익계를 테러하는데는 그렇게 열성적으로 총질 폭탄질을 하던 세력이 '독립군'을 자칭하면서도 일제를 상대로는 뱀이나 푸는 장난질을 하는데 그친다는 건 아무리 봐도 말이 안 된다. 다만 해방 전후의 상황이 다르다는 것은 고려해야 한다. 해방 후에야 경찰과 정치인들이 뒷배를 봐주니 얼마든지 총기로 난동을 부려도 좌익 제거로 퉁치고 넘어갈 환경이었지만, 해방 전에는 무장 봉기는 커녕 우미관패가 권총 몇 자루만 가지고 다닌다는 제보만 들어오면 바로 미와 경부가 달려와 싹 잡아가는 게 가능할 만큼 운신의 폭이 없었다.[14] US Army lnteligence Center, History of the Counter Intelligence Corps, XXX: CIC During the Occupation in Korea(March 1959), p.92-94, 김봉진, 같은책, 22, 56에서 재인용.[15] 1949년 10월 25일 《동아일보》 기사. 金佐鎭 將軍(김좌진 장군)의 慈堂 廿二日別世(자당 입이일별세). '자당(慈堂)'은 타인의 어머니를 높여부르는 말이며 '입(廿)'은 '20(二十)'을 한 글자로 쓴 것이다.[16] 언급된 번개는 〈야인시대〉 제작현장을 방문하기도 했었다.[17] 김두한이 〈노변야화〉에서 자신이 싸우러 갈 때 어떤 옷을 입고 갔는지에 대해서 꽤 자세히 설명한 부분들이 있다.[18] 광복 이후 일부 간판은 바꾸었는데, 그 수가 적다.[19] 제작진이 애초에 1920년대 ~ 1970년대라는 긴 시간대를 다루는 특성상, 세트장 내 대로변에는 재현을 어기더라도, 임의로 서양식 일반 건물 세트를 건립했다고 했다. 참고로 1930년대에는 종로 큰길가에도 기와집과 초가집이 있었다는데, 그 모습대로 1960년대와 1970년대 서울 시내의 풍경을 연출하기에는 무리다.[20] 예를 들어 영화 〈말모이〉는 러닝타임이 진행될수록 거리에서 한글 간판이 줄어들고 대신 일본어 간판들이 그 자리를 채우게 된다. 일제의 한국어 말살 정책을 은연중에 비판하는 연출했다.[21] 종로꼬마 이상욱의 사망이 2000년 초였는데, 〈야인시대〉 방영 당시 부인을 포함한 그 유족들이 멀쩡히 살아있던 시절이었다.[22] 이 때 김두한이 말한 일본 야쿠자 두목은 하야시도 아닌 와께지마였다.[23] 성으로만 지칭한 사람들 중에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이 없다.[24] 정진룡 살해사건이나 김두한의 〈노변야화〉 그리고 훗날 《경향신문》의 신영균, 박용직 인터뷰에 따르면 〈야인시대〉에 등장한 우미관 패 중 언급되지 않는 사람은 실존 인물이 아니거나 실존인물로 확인되지 않은 삼수와 아구, 갈치, 털보, 번개, 와싱턴, 개코 정도이다. 오히려 야인시대에 등장하지 않고, 김두한 회고에도 등장하지 않는 이름들 중 김두한의 활동에 여러 번 함께 한 레귤러급 인물들도 여럿 이름이 보이는데, 그 이름 중에도 김동회네 이상욱이네 하는 이름은 전혀 없는 것.[25] 1987년에 현재 자리인 경기도 의왕시 포일동으로 이전했다.[26] 김두한이 서울구치소 시절에도 수감된 적이 있지만, 그 모습은 나오지 않았다.[27] 한참 급이 낮은 사람 아니었느냐는 이야기도 있으나, 중앙극장 습격 사건에서 연막탄을 터뜨리는 임무를 책임진 것이 김영태라는 신영균의 증언도 있고, 정진룡(정진영의 모티브가 되는 인물) 치사 사건 당시 조선민청 대원들을 기습한 대한민청 별동대를 이끌기도 하는 등 신영균과 더불어 대한민청 관련해서 언급이 많은 인물이었다는 걸 감안하면 김두한의 측근으로 볼 여지는 충분하다.[28] 김두한이 사법계 쪽이라면 모를까, 고등계에서 촉각을 곤두세워가며 신경을 쓸 급까지는 못 되었다.[29] 김두한이 잡아 죽인 경찰은 사실 미와가 아니라 조선인 경찰 유승운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이 사람도 1935년 폐결핵에 걸려 퇴직한 이후부터는 행적이 알려져 있지 않아 확인이 불가능하다.[30] 1950년, 6.25 전쟁으로 잠시 대구, 부산 등지로 옮겼다가 서울 수복 후 상경했다.[31] 이 건물을 모티브로 지은 세트는 해방 이후 대한민청이 사용한 동본원사로 나온다.[32] 현재 자리 바로 옆이다.[33] 〈수요미식회〉 설렁탕편에서 김두한이 아르바이트했다고 나온 적이 있다. #[34] 자세한 내용은 그리스 왕국 문서의 2번째 문단 참조.[35] 1회 시작 배경이 1924년이라 나왔고 2회에서 1년이 지났다고 하며 6.10 만세운동 직전이므로 저렇게 연도를 추론한다.[36] 이 때 폭탄은 불발했는데, 이건 재현을 했다.[A] 극 중 설정이다.[38] 수표교 거지 일행 중 한 명이 도망가다 붙잡히는데 그 곳이 열차 철로 위였다.[39] 철도 건널목 경보기를 잘 보면 경보등에 고장정지표시기가 달려 있다. 이설 전 휘경4 건널목, 현재는 폐쇄된 경원선 초성3 건널목, 학답2 건널목과 동일한 장치다. 그리고 도망가는 장면이 나올 때[40] 소화물차 부분에 철도청 마크가 있다.[41] 잘 들어보면 디젤 기관차 구동음이 들린다.[42] 김두한 증언에 따른 스토리는 〈장군의 아들〉1부에 잘 나와있다. 그리고 금액도 〈장군의 아들〉에서는 150원인데, 〈야인시대〉에서는 무려 5,000원. 당시 좋은 직장에 다니던 화이트칼라들 월급이 100원이 안 될 때인만큼, 어느 쪽이 사실과 가까울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긴다.[A] 극 중 설정이다.[44] 사상에 관한 정보(경찰서장), 경종고비 제1721호 1, 1942.04.07 16쪽, 同年2月19日自宅において被疑者金斗漢の紹介により其親分俗称旧馬賊こと高時亨(京)改め高山勲を知り、前掲両名に対する如き好言を述べて獲得し : 동년 2월 19일 자기 집에서 피의자 김두한 소개로 그의 두목인 속칭 마적(馬賊), 곧 고시형(또는 고시경. 高時亨, 高時京)을 알게 되어 위 두 사람에게 한 것과 같은 감언으로 획득했다.[45] 소설판에서는 제대로 나온다. 허나 타자수로 일하기 위해서는 중등교육 이상을 받아야 했으므로, 중학교 내지 고등학교 이상 학력과, 극 중 박인애처럼 대학에 다니거나 대졸인 여성도 많이 있었다.[46] 극 중에서는 우미관 뒷 골목에서 싸웠지만, 김두한의 회고에 따르면, 서대문에 있는 동양극장(현재 《문화일보》 자리) 뒷 골목에서 싸웠다고 한다.[47] 상당히 민망한 이야기를 직접 말한 것이다. 데이트를 한다고 한강에 놀러갔다가 역기 같은 걸 들고 운동하는 장정들을 보더니 힘 자랑한답시고 그걸 들려다 못 들어서 망신당하고 빡쳐서 장정과 시비가 붙었다고 한다. 그 모습을 보고 박씨 여성이 꽤나 질색팔색을 했다고 한다.[48] 원래 차별하는 의미에서 일본인 구역만 '정(町)'을 사용했고 조선인 구역은 옛날 그대로 '동(洞)'으로 썼지만, 1920년대 이후 동화(同化)를 목표로 하면서 '동'을 전부 '정'으로 바꿨다.[49] 당시 사회주의 비밀결사들은 주로 일대일 점조직이었는데, 한 사람이 잡혀가면 다른 한 사람이 피할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서 하루 이상 진술을 거부하다가, 그래도 못 참겠으면 진술하는 불문율이 있었다고 한다.[50] 당시에는 폐교된 상황이었지만, 출신 인물들이 꽤 활약을 많이 했었다.[51] 애당초 대성학교 설립자가 도산 안창호이다.[52] 玄(검을 현)과 田(밭 전)을 합치면 畜(가축 축)이 되고, 牛(소 우)와 一(한 일)을 합치면 生(날 생)자가 된다. 합치면 (畜生).[53] 엄밀히 말하면, 황병관의 후배라는 레슬링계 원로가 황병관에게 들은 이야기를 구술한 것이다.[54] 책에는 김 모라고 나오는데, 그 작가에 의하면, 훗날 국회의원까지 했다고 나오니 확실히 김두한이다.[55] 이는 이름이 있으면 임원 한 명이라도 체포되었을 시에 죄다 드러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원칙이 삼불(三不)이었는데, '말하지 않는다'(不言), '문서로 남기지 않는다'(不文),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不名)였다.[56] 음력 1945년 9월 5일.[57] 박용직은 전위대 창단식, 김후옥은 박용직 소개로.[58] 박용직 증언에 따르면, 이전부터 김두한과 형 동생 하던 사이일 정도로 꽤 가까웠으며, 그리고 정진룡과도 구면이었다고 한다.[59] 이 신문에 대한 내용은 링크 참조. 참고로 국립중앙도서관 - 국가서지LOD 홈페이지에 들어가 검색하면 《중앙신문》을 읽을 수 있다.[60] 미국으로의 인도인의 이민열풍은 60년대부터 시작되었다.[61] 현재의 명동예술극장.[62] 단, 심영이 첫 등장한 회차는 57화다. 다만 이후 64화까지는 별 비중 없는 단역 정도였다.[63] 다만, 신영균 말에 따르면, 작년 문영철의 생일 때는 한강에서 유람선을 타고 놀았다고 했다.[64] 일제강점기에 이승만이 조선에 있던 기간은 1910년 10월부터 1912년 3월까지 약 1년 5개월 정도에 불과했다.[65] 정확히는 사진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고, "영웅의 가문이라 북한군이 살려두었다더라."라는 이야기를 한 것이었다.[66] 사망 직후 김두한 패가 전투에 참여하는데 전투 이후 김석원이 인천 상륙 작전을 언급한다. 생략된 것을 고려하면, 8월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67] 전쟁 이후에도 가깝게 지내다가, 나중에 술자리에서 시비가 붙어서 다퉜으며, 결과는 비겼다.[68] 드라마에선 김석원 준장의 수도사단에 배속되었다고 하지만 이 당시 김 준장은 수도사단 동쪽 3사단을 맡았고, 수도사단은 송요찬 준장이 맡았다.[69] 정확히는 6촌이다. 4촌이라는 기사도 있다.[70] 나이 어린 걸로 태클거는건 좀 아니지 않나 할 텐데 조선 시대가 끝난 지 불과 40여 년밖에 안 지났음을 생각해보자. 참고로 그 당시 대부분 정치인들 평균 나이가 어려야 40대, 그리고 대부분 5 ~ 60대였으며 대통령은 무려 80대였다. 그런데 김두한은 겨우 37세에 국회의원이 되었다.[71] 유지광 자서전 대명에 언급되었다.[72] 같은 감독이 만든 〈무풍지대〉에서는 가명 홍대호로 등장하고 처음부터 이정재 편으로 등장한다. 오히려 그 쪽이 더 잘 재현한 것이다.[73] 기사에 나온 87년은 단기 4287년, 서기로 1954년을 말한다. 당시엔 단기가 대한민국 공식 연호였다.[74] 최순주는 가결 선포 후 바로 내려왔다.[75] 1970년 1월 20일 방송.[76] 양일동, 김상돈, 이철승, 유옥우, 김두한 의원이다.# 사족으로, 유옥우 의원의 손자가 배우 유지태이다.[77] 모든 지자체장을 선출직 공무원으로 뽑는 전면적 지방자치제와 행정안전부 직할의 지방경찰청 제도가 동시에 시행되고 있는 현대와는 달리, 제1공화국은 미군청청 시절에 존재하던 경무부와 관구경찰청을 치안국과 10개 도청의 경찰국으로 축소하고 나서 내무부가 모든 도청의 고위직(예를 들면 대한민국 대통령→도지사/국무총리→부지사/내무부 장관→국장/내무부 차관→과장)을 임명하여 파견하는 방식으로 경찰국을 통제했다. 따라서 오늘날의 대한민국 행안부 산하 경찰청장에 해당하는 내무부 치안국장을 하던 사람이 일개 도지사로 전보되는 것이 이상하지 않았다.[78] 〈야인시대〉 2부 방영 당시인 2003년에 서정학은 살아있었다.(서정학은 〈야인시대〉가 종영된 지 1년 10개월 2일이 지난 2005년 7월 2일에 별세했다.)[79] 서정학은 젊었을 당시부터 본고장인 일본에서 검도를 가르치는 사범직에 있었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바탕으로 하여 대한검사회를 창립한 데다 중장년 시절에는 대한검사회의 후신인 대한검도회 회장직을 맡은 만큼, 해당 분야서는 원로급 대접을 받았던지라 발이 매우 넓었다. 이들은 당연히 자신들의 대부격 인물이 〈야인시대〉에서 악역, 그것도 부정선거에 반대하다가, 강원도지사에서 쫓겨나게 만든 이기붕과 자유당 인사로서 이정재에게 국회의원 선거를 포기하라고 강권하는 역할로 나오는 것을 반기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80] 실제로 〈야인시대〉에서 묘사된 임화수에 대하여 분노한 유족들과 생전에 그와 친분이 있던 사람들이 제작진을 고소하려고 시도했으며, 드라마에서 임화수가 최무룡을 구타하는 장면을 본 최민수는 자기 아버지를 모욕적으로 묘사했다는 이유로 분노했다가, 이 나라를 떠나겠다는 말까지 한 적이 있다. 이외에도 같은 작가가 쓴 작품이자 〈야인시대〉 2부 후반부 방영분의 프로토타입격인 〈무풍지대〉에서는 눈물의 곡절(차민섭)이 드라마 내용에 불만을 품고 방송국에 폭탄을 들고 찾아가겠다는 협박을 한 적이 있다.[81] 실제로 동시대를 다룬 〈제2공화국〉에서는 실제대로 이강욱이 청년으로 나왔다.[82] 일제강점기에 초등학교를 불렀던 이름 중 하나. 이화룡과 송찬호는 평양소학교 동창이다.[83] 이 때 차지철 대위는 "이정재가 자신에게 외가 쪽 먼 형뻘이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구명하려고 하지 않았다."라고 한다. 저 말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이정재는 이승만-박정희 정권 하에서 막강한 권력을 지녔던 경호실장 2명을 동생으로 둔 셈이다. (한 명은 혈연관계가 없지만, 친분이 매우 두터웠다.)[84] 정확히는 고노에가 나미꼬에게 김두한이 김좌진 아들이란 얘기를 들은 뒤 김두한이 고균 선생 일가라고 언급한 것과 김두한을 집으로 초청해 이야기나눌 때 김두한에게 김옥균을 "자네에겐 조부 뻘이 되실 걸세."라고 말해준 것이다.[85] 일례로 우리가 흔히 아파트 하면 떠올리는 최초의 아파트인 마포아파트는 1962년도에 건축이 완료되었다.[86] 항목을 참고하면 알 수 있듯, 쇼스타코비지차 이 음악을 정확히 언제 작곡했는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원곡으로 쓰인 영화의 OST가 1955~1956년에 작곡된 것이라 1956년 이후 작곡된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87] 24화 마지막과 이어지는데, 그 때는 이 드라마의 OST 중 하나인 Odysseus가 나왔다.[88] 두 작품 다 1939년에 처음 나왔다.[89] 15회에서 손기정 선수 1936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 수상을 다루었다.[90] 당시 및 극 중 표기로는 〈님자업는 나루배〉.[91] 춘사 나운규의 유작이다.[92] '도생록'은 44회까지 나왔다.[93] 해방 이후 ‘수도극장’, ‘스카라극장’으로 바뀌었다가, 2005년 철거.[94] 지금 명동예술극장. 실제 심영이 연극 〈님〉을 공연했던 극장이다.[95] 번안한 제목인 〈日出(일출)〉로 적었다.[96] 국도극장의 전신이다.[97] 회차 적은 순서는 오타가 아니다. 원래 대한민청 결성이 심영 습격보다 이후인데, 드라마에서는 순서를 바꿨다.[98] 김두한의 지역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