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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 관련 정보/역사 관련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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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한국사의 미스터리3. 세계사의 미스터리4. 다른 문명 및 초고대문명설 관련 정보5. 경제학 및 경제사 관련 정보6. 고고학 관련 정보7. 법, 제도, 정치학 관련 정보8. 서지학 및 금석문 관련 정보9. 신화 및 종교 관련 정보10. 언어학 관련 정보11. 인류학 및 민속학 관련 정보12. 지리학 관련 정보13. 예술 관련 정보14. 스포츠 관련 정보

1. 개요

본 문서는 역사학 및 역사학과 연계된 인접 학문들(고고학, 문예사조, 문화사, 문화인류학, 법제사, 사상사, 사회경제사, 서지학, 언어학, 지리학 등등)과 관련된 미스터리를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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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국사의 미스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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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세계사의 미스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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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다른 문명 및 초고대문명설 관련 정보

역사 이후의 세계사가 아닌 고대 문명에 관한 가설이나 미스터리에 관한 내용을 기술한다.

5. 경제학 및 경제사 관련 정보

6. 고고학 관련 정보

7. 법, 제도, 정치학 관련 정보

8. 서지학 및 금석문 관련 정보

9. 신화 및 종교 관련 정보

10. 언어학 관련 정보

11. 인류학 및 민속학 관련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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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지리학 관련 정보

13. 예술 관련 정보

14. 스포츠 관련 정보



[1] 일단 주류 학계는 신석기 시대의 인류가 스톤헨지나, 괴베클리 테페같은 건축물을 짓느라고 사용한 석재를 운반한 흔적이거나, 당대의 농업용 수로라고 추정하고 있다.[2] 레무리아는 그나마 완전한 날조는 아닌데, 대륙이동설이 밝혀지지 않았던 19세기에 아프리카 동부에서 인도 아대륙에 이르는 여우원숭이(lemur)의 생태에 대해 생물학자들이 양자를 잇는 가상의 대륙을 가정하여 설명하던 것에서 유래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인도 신화의 서사시인 마하바라타의 내용과 그 내용의 모델이 된 해일로 수몰된 고대 인도의 실존하는 도시유적에 대한 조사 결과의 내용이 덧붙여지면서, 전설 속의 대륙으로 이야기가 크게 와전된 것이다. 결국 대륙이동설이 사실로 밝혀지면서 레무리아 가설이 부정되었고, 선술한 이야기도 전부 상상 속 이야기가 되었다.[3] 미노스 문명 시기만 해도 크레타키프로스그리스인이 주류 민족이 아니었다. 당대의 이 두 섬의 주류 민족이 누구였는지는 아직 수수께끼에 쌓여있지만, 동시대의 그리스에 비하면 상당히 발전한 문명이었기에 아틀란티스의 모티브가 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하지만 이곳은 자연재해로 인해 멸망했다는 플라톤의 기술과 큰 차이가 있는데다, 당시에도 그리스 본토와 꾸준히 교류했을 만큼, 그리스인들에게 너무나도 잘 알려진 곳이라서 이곳이 아틀란티스였을 가능성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는 학자들도 많다.[4] 도거랜드란 오늘날의 영국네덜란드, 덴마크 사이에 있는 해저 지형인 도거 뱅크의 위치에 존재했던 육지를 말하는데, 현재까지 가장 이른 시기에 있었던 빙하기뷔름 빙하기에 해수면의 하강으로 인해 형성되었다. 이곳에서 구석기 시대의 거주지 유적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여기가 바로 아틀란티스라고 보는 학자들도 많다. 마침 이곳의 거주지는 빙하기가 끝나고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도거랜드가 바다 속으로 가라앉으면서 멸망했기 때문에, 아틀란티스가 자연재해로 인해 멸망했다는 플라톤의 기술과 일치한다. 하지만 도거랜드의 거주지는 도시를 이루고 살 정도의 문명은 절대 아니었던지라, 고도로 발달한 문명이었다는 기술과 배치되므로, 이곳이 아틀란티스가 아니라고 보는 설도 존재한다.[5] 모로코에서 인간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정체불명의 지형이 발견되면서 새로이 주목받고 있는 학설이다. 지형의 모양이 플라톤이 묘사한 아틀란티스의 묘사와도 일치하고, 페니키아의 탐험가들이 모로코까지 가서 식민지를 건설하기도 했므로, 이곳이 아틀란티스의 모티브가 됐을 가능성이 유력해지고 있다. 문제는 이 지형이 진짜로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냐는 것과, 문제의 지형이 있는 지역이 실제로 자연재해를 겪었던 곳이냐가 밝혀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지역에 대한 조사도 거의 불가능한 것이, 여기는 모로코 왕실 소유의 토지고, 왕실 측에서 이곳에 대한 조사에 대해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6] 플라톤이 기술한 아틀란티스의 모습과 가장 유사해서 한때는 이곳이 아틀란티스의 실체라는 설이 제기되었지만, 문화재들이 보존되기에는 최적의 환경인 사하라 사막 한복판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류 거주의 흔적이 전혀 발견되지 않아서, 현재는 주류 학계에서 부정론으로 돌아선 상태다.[7] 그래서 이 사태의 간접적인 원인이 제1차 세계 대전이었다는 것과 결과이자 해결책이 뒤이어 벌어진 제2차 세계 대전이라는 견해로 보아, 이 초유의 사태가 사실 비밀결사의 소행이 아니냐는 음모론이 있을 정도다. 한편 이와 별개로 로스차일드 가문같은 유대 자본이 벌인 공작이라는 음모론과 이 사태에서 유일하게 공산주의 이념으로 건국한 소련만이 상대적으로 피해를 덜 보았기 때문에 한때 소련이나 공산당 측의 공작이 아니냐는 음모론도 등장한 적이 있었다. 물론 이런 음모론은 거의 신빙성이 없다고 보면 된다.[8] 세계 대공황의 발생 원인을 대침체의 발생 원인과 결부시켜서 설명하는 주장도 있다. 2008년의 경제위기의 원인이 신자유주의 체제의 모순이었듯, 대공황 역시 당대에 널리 퍼진 자유방임주의의 모순때문이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현재 경제학계는 이쪽에 크게 무게를 둔다.[9] 대침체의 원인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리먼 브라더스 파산 사태로 충분히 설명이 가능하다. 대침체 문서도 참고하자.[10] 적어도 월가 점령 시위가 일어났던 2011년에도 지속되었음은 확실하다.[11] 선술한 아이신기오로 울히춘의 남편이다.[12] 다만, 쌍룡검 자체는 진짜로 이순신이 사용한 것이 아닌, 후대에 그를 기리기 위해 제작한 소장용 검이라는 설이 대한민국의 역사평론가인 박종평에 의해 제기된 바 있다.[13] 2024년 현재까지 밝혀진 바로는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실물 사진을 촬영한 유일한 에도 막부의 쇼군이다.[14] 한국에서는 삼태성이라고 부르던 부분이다.[15] 2014년도 리부트판 코스모스를 보면 선사 시대부터 인류는 사냥과 농사를 시작할 시기와 더불어 당대에는 하나의 과학 이론으로 당당하게 인정받던 점성술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 계절에 따른 의 움직임을 읽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고 한다. 그리고 예로부터 상식적으로 농부가 자기 땅의 넓이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할 텐데, 이때문에 고대로부터 기하학에 대한 지식이 중요했다. 꼭 이집트인이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문명을 이룩한 민족들은 상당한 수준의 기하학천문학 지식을 갖추곤 했다. 고대 그리스 문명이나, 황하 문명, 마야 문명 등이 그 예다. 또 기하학과 천문학 이외에도 미적분학에서 미분이 17세기 뉴턴라이프니츠가 활동하던 시기에야 정립된 것에 반해 적분은 이런 고대 시절부터 개념이 성립할 수 있었던 원인이기도 했다.[16] 피라미드는 아니지만, 당태종안시성 전투 당시에 안시성 공략을 위해 쌓은 흙더미로 된 산의 높이가 성벽의 높이보다도 컸다. 단순히 성벽을 넘어가려고 인위적으로 쌓은 것도 성보다 거대해질 수 밖에 없었는데, 남아있는 피라미드에서 그런 비탈길을 만들었다는 흔적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흙으로 이렇게 높은 구조물을 쌓아올리면 구조물 자체가 너무 불안정하여 쉽게 무너진다. 선술한 당태종의 공성용 토산도 난데없이 내린 폭우로 와르르 무너져 버렸는데, 뻑하면 나일 강이 범람하는 이집트에서 건설용 비탈길이 공사가 끝날 때까지 무사했을 리는 없다.[17] 최근에는 한국의 한 고고학자가 기중기가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공교롭게도 피라미드 주변에서 기중기의 부품으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돌이 발견된 바 있다.[18] 당대의 기술로 기자의 대피라미드같은 무식하게 큰 건축물을 안정적으로 쌓아올리는 데는 한계가 분명했다. 당장 쿠푸 왕의 선대 왕인 스네프루 왕의 사례를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스네프루 왕은 엄청난 건축덕후로, 종래의 계단식 형태이던 초창기 피라미드의 모양을 오늘날 우리가 아는 깔끔한 정사각뿔 모양으로 만들고자하는 욕심에 정사각뿔 모양의 피라미드를 지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결과는 첫번째 것은 기술의 한계로 인해 폭삭 무너져버렸고, 두번째는 무너지기 일보 직전에 놓인 바람에 중간에 비스듬하게 꺾인 모양이 되었다가, 세번째에서야 간신히 우리가 아는 모양이 되었다. 이걸 더 크게 짓는다고 하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19] 현존하는 기록에 의하면, 맨 처음 이 피라미드를 도굴한 사람은 압바스 왕조알 마아문인데, 문제는 그가 처음 이곳에 도굴단을 파견했을 때는 이미 아무것도 없었다는 점이다. 물론 이 거대한 피라미드를 보고 흑심품은 놈들이야 많았을 테니, 벌써 누군가가 털어가지 않겠냐는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는데, 전술한 대로 미라나 부장품이 있었다가 도굴된 흔적이 전혀 없었다. 알 마아문도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보였다는 기록을 남겼고, 이후의 고고학자들의 연구를 통해서도 피라미드 안에 무엇을 안치한 흔적조차 발견되지 않았다.[20] 후자는 피라미드 따위는 장식이고 실제 쿠푸 왕의 무덤은 따로 있다는 설과도 이어진다.[21] 정확히는 전한에서 후한으로 넘어가는 극초기 시대의 양식[22] 사마천고자되기와 연관이 깊은 사람이다. 흉노의 대규모 기마 부대를 알보병들만으로 무려 8번이나 막아내었다가, 누적되는 막심한 피해를 견디지 못하여 중과부적으로 흉노군에 항복했다. 문제는 당시 전한의 황제인 무제가 전후사정은 알아보지도 않은 채, 항복한 사실만 가지고 트집잡아서 이릉의 일족을 멸해버렸다는 것이다. 결국 이 때문에 빡친 이릉이 정말로 흉노에 귀순해버렸다.[23] 이 유적지에서 출토된 유물에 한자가 쓰인 것이 많았다.[24] 전사자들의 유골에서 청동제 무기로 공격당한 흔적이 대거 발견되었지만, 정작 청동기 유물은 그리 많이 출토되지 않았는데, 이로 인해 고고학자들은 당대에는 꽤 귀한 물건이었던 청동기들을 승리한 쪽이 전리품으로서 탈취한 것으로 추정했다.[25] 괴짜 예술가의 예술 작품이라는 설에서, 지역 주민들이 마을에 특색을 주고자 일부러 그렸다는 설, 당대의 사이비 종교 교단들이 제의를 목적으로 그렸다는 설 등이 제기되고 있다.[26] 단순한 장난이 아니라, 2000 시드니 올림픽 유치의 성공을 기념해서 그린 것이라는 설도 있다.[27] 켈트족이 영국 본토에 정착하기 훨씬 이전부터 존재하던 거석유적으로, 용도와 제작한 민족에 관련돼서 재대로 밝혀진 것이 없다. 일단 원시종교와 관련되 유적이라는 설과 이베리아인이라는 민족이 만들었을 것으로 강하게 추측될 뿐이다.[28] 1. 사람을 죽인 자사형에 처한다. / 2. 사람을 다치게 한 자곡물로 갚게 한다. / 3. 도둑질을 한 자는 노비로 삼되, 용서를 구하려면 50전을 내야 한다.[29] 고조선은 국가의 실존 가능성을 제외한 많은 부분이 불분명했었다. 그러나 저 3개의 조항 덕분에 사람의 목숨은 몰라도 적어도 인력을 중시했다는 것과 사유 재산을 인정했다는 점, 그리고 고조선 시대에도 노비제도 자체가 존재했음을 알아 낼 수 있었다.[30] 대표적으로 금주단속 관리관이 있는데, 미국은 당시에도 인구가 1억명에 가까웠음에도 관리 인원은 주 단위도 아닌 국가단위로 고작 4000여명 밖에 산정하지 않았다. 그런 수의 인원으로 단속이 가능했을지는 독자의 상상에 맡긴다.[31] 다만 대통령령이나 일반 입법은 냅두고 왜 굳이 헌법까지 갔냐는 것 자체는 미스터리가 아니다. 동서양을 막론한 법의 일반적인 원칙인 상위법 우선의 원칙 때문인데, 사회문화 현상에 특성상 금주법을 미국인 100%가 찬성하라는 법은 없어서 대통령령이나 법률만으로 했다간 반대파가 언제든지 위헌 선고를 이끌어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당연하고 당시의 미국 헌법으로도 금주법을 법률로 만들었다간 충분히 위헌을 선고받을 가능성이 높았다.(수정 헌법 제17조까지. 금주법은 18조, 폐지 조항은 21조이다.) 따라서 대통령령이나 법률을 뛰어넘는 최고법인 헌법에다가 아예 박아버려서 위헌 판결같은 귀찮은 가능성을 없애버리려던 것이다.[32] 아나톨리아 반도에도 인도유럽어족 계열 민족들이 살았으므로 상관없는 것 아니냐 하겠지만, 이 지역의 선주민은 인도유럽어족 계통이 아니라 초기 유럽 농경민으로 불리는 이들이다. 그래서 아나톨리아 반도의 토속신들이 그리스인들이 원래 섬기던 신이었는지는 확신하기 어렵다.[33] 그리고 이 주장에서 인도유럽어족의 기원 및 분화 과정과 관련된 중요한 가설인 아르메니아 가설이 등장했다. 때문에 신화 연구가 역사 연구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예시로 자주 거론되는 게 이 그리스 로마 신화의 연구에 대한 부분이다.[34] 현재로부터 4만년 전에 발생하여 1만년 전에 종결된, 역사 시대 이후에 간간이 발생한 소빙하기를 제외하면, 인류가 경험한 마지막 빙하기다.[35] 다만, 호주에는 우기 때만 이 되어 흐르는 와디가 여럿 있긴 하다.[36] 오늘날의 보스포루스 해협에 해당하는 곳이다.[37] 이 사건 이전의 흑해는 거대한 호수였다. 이 당시 해안선이 넓어지는 속도는 하루에 12km 정도였다고 추정되는데, 이 정도라면 이 주변에 거주하던 인류가 하루종일 차오르는 바닷물을 피해 이동해야 겨우 생존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38] 마찬가지로 인도 고전 문법학을 집대성한 문법학자이자 베단타 사상가인 바르트리하리와 불교 승려 바르트리하리, 서정시인 바르트리하리가 모두 동일인인지 동명이인인지도 불확실하다. 다만 바르트리하리가 베단타 이전에 잠시 불교에 몸담았던 적이 있었다는 전승이 있긴 하다.[39] 그 유명한 파라오투탕카멘의 아버지이자, 미인으로 유명했던 왕비인 네페르티티의 남편이다.[40] 유대교가 유일신 종교로서 정체성이 정립된건 BC 622년 요시야 임금의 개혁때도 이미 사례가 있고, 이 시기는 신명기의 뼈대가 된 텍스트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시기다. 즉 바빌론 유수는 유일신 신앙의 생성이 아닌 강화의 시기로 봐야 할 것이다.[41] 단순히 종교 유물이 의외의 장소에 전래되는 일은 생각보다 흔하다. 가령, 중세 유럽바이킹 유적지에서 불상이 출토된 바도 있는데, 바이킹의 문화 양식에서 불교의 흔적이 전혀 나타나지않으므로, 고고학자들은 이를 단순히 러시아를 통과해서 중동이나 동로마 제국으로 통하는 무역로를 이용해서 구입해온 기념품에 불과한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당대 동북아시아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는 상당히 현지화되어 성당을 불교의 과 유사한 양식으로 세우고, 불교 승려들을 본떠서 신부주교들이 삭발을 했으므로, 절터로 추정되는 유적에서 네스토리우스파와 관련된 유물이 나왔다고 이를 바로 기독교인들의 흔적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상황이다.[42] 백제 멸망 직전에 백제를 돕고자 군대를 파병한 바 있어서, 진구 황후의 실제 모델로 유력하게 지목되고 있다.[43] 이 경우는 일본 최초의 국가인 야마타이국의 위치 논쟁과도 엮이는데, 때문에 몇몇 학자들은 진구 황후 전설은 히미코와 같은 여성 군주의 통치 하에 있던 야마타이국이 벌인 일본 열도 내에서의 세력 확장을 위한 정복 전쟁이, 임나일본부설과 같은 내용으로 둔갑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44] 이 설에 의하면, 일정 지역의 정복과 지배 목적이 아닌 약탈이 목적이라고 한다. 실제로 신라 초기부터 왜구에 대한 기록이 나오기 때문에, 이쪽도 꽤 주목받는 설이다.[45] 언어학자알렉산더 보빈의 주장이다.[46] 실제로 시바의 경우는 인더스 문명에 대한 고고학자들의 연구에서 오늘날의 시바의 모습과 거의 흡사하게 묘사된 정체불명의 신을 숭배하고 있었음이 밝혀지면서, 본래는 인도유럽어족계통의 민족들이 들어오기 전에 드라비다인들이 믿었던 전통신앙의 신이 아닐까하는 추정이 나왔다. 이 설을 원(原) 시바 가설이라고 하며, 이 추정에 따라 비슈누와 그의 여러 아바타라들도 역시 드라비다 신화의 신들이나 영웅들이었으리라는 추정이 나왔다.[47] 일례로, 베다 신화의 신들 중 하나인 바루나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우라노스에 대응한다.[48] 이유는 크게 3가지가 있는데 첫째, 불교가 힌두교에 비하면 꽤나 금욕적인 부분이 많다는 점 때문이다. 불교가 창설될 당시에는 극단적인 고행을 강요받던 수행자들의 수행법을 크게 간소화하여 금욕주의적인 요소를 많이 줄이기는 했지만, 훨씬 더 후대에 나온 힌두교보다는 당연히 빡빡한 부분이 많았다. 당장 스님들의 음주와 육식이 제한되고, 결혼마저 금지되는 것을 생각해보자. 소고기를 금한 것 빼고는 금욕 따위는 장식에 불과한 종교가 힌두교인 걸 보면 당대의 많은 인도인들이 불교에서 힌두교로 갈아탔으리라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다. 당장 힌두교에서 소고기를 금지한 것도 원래는 불교에서 육식을 크게 제한한 것이 그 기원이었다. 두번째 이유는 브라만교, 힌두교의 유력자들도 바보는 아니었던지라 불교가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는 현실을 수수방관하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증거로 현재도 힌두교에서는 비슈누의 수많은 아바타르 중에는 석가모니도 있는데 이는 브라만교, 힌두교가 불교로부터 당대의 헤게모니를 탈환하기 위한 의도적 전략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해당 프로파간다를 퍼뜨릴 초창기에야 당연히 불자들로부터는 개소리 취급받을 게 뻔하지만 세대가 교체될수록 이러한 전략에 적대감이 줄어드는 부분을 이용하여 융화 정책을 꾀했던 것. 이러한 전략은 헬레니즘 제국, 고대 로마 등지에서도 자주 활용했던 방법으로 가령 점령지의 이집트인을 포섭한다치면 현지인과 제국 본토의 신앙을 융화하여 제우스+오시리스=세라피스, 헤르메스+아누비스=헤르마누비스 같은 식으로 제국 본토 문화에 손쉽게 복속시킬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인도의 이슬람화도 불교에 크게 타격을 주었는데 힌두교야 이미 종교적 헤게모니를 탈환하고 확고히 자리를 잡은 지 오래였으므로 이슬람이 다시 약세가 된 후 또다시 종교적 헤게모니를 탈환할 수 있었지만 불교는 이미 인도에서는 그 세가 많이 쇠약해지고 힌두교에 융화된 부분도 없잖아있었기에 더욱 타격이 컸던 것.[49] 신화를 재구하는 게 세계사와 아무 관련 없는 것 같지만, 신화의 재구 과정에서 해당 신화를 믿어온 민족의 성립 과정과 그 와중에 밝혀지지 않은 많은 부분을 밝혀내는데 막대한 역할을 하므로 절대로 그냥 넘어갈 수 없다. 당장 그리스 로마 신화의 기원을 밝히는 과정에서 그리스인과의 동계 민족으로 추정되는 민족들을 찾아낼 수 있었고, 힌두교의 성립 과정을 밝히는 과정에서 인더스 문명을 구성하던 민족에 대한 단서를 하나하나 찾을 수 있었다.[50] 대한민국의 옛 장애인등급제도 상, 1급 지적장애의 특수한 사례(IQ 지수가 20 미만인 경우)에 속한다.[51] 물론 그의 석연치않은 사망 과정이 카스파 하우저 본인의 자작극으로 의심된다는 점에서, 그가 야생아였다는 것 자체도 거짓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긴 하다. 허나, 비좁은 공간에 감금당해 살았던 과거를 상세히 설명했다는 점과, 이런 내용들이 실제로 겪지 않으면 앞뒤가 안 맞았을 부분이라는 점, 결정적으로 대부분의 야생아들처럼 사회성이 크게 떨어졌다는 점에서, 일단 카스파 하우저도 실제 야생아의 사례가 맞다는 것이 정설이다.[52] 지니의 경우, 구조된 후에도 위탁 가정에서 재차 학대를 당했고, 그녀를 학대했던 아버지 클라크도 지니가 선천적인 지적장애인이라는 증언을 한 바 있다. 설령 지니의 지적장애가 선천적인 것이 아니더라도, 클라크가 가한 학대가 워낙 잔혹하고 비상식적이어서, 성장하는 와중에 극심한 뇌손상이 와서 언어 습득이 불가능해졌을 가능성도 있다.[53] 다만, 슬라브어파 계열 어휘는 언어학자들에 의해 대강 재구되고 있는데, 현재로선 슬라브조어로 을 가리키는 원래의 단어는 *vьstъ일 가능성이 유력하다고 한다.[54] 다만, 인도유럽조어로 암컷 말을 '*marko'라고 하므로 여기서 유래했을 가능성은 있다. 실제로 영어로 암말을 뜻하는 어휘 'mare'가 여기서 유래했다.[55] 참고로 이 문서에는 무려 은하가 나온다. 은하라는 개념이 처음 밝혀진건 19세기 말엽의 일이며, 그 존재가 확실히 입증된 건 1917년에 미국천문학자에드윈 허블에 의해서였다. 그래서 중세시대의 문서에 어떻게 은하가 나올 수 있겠냐고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는데, 옛날에는 은하의 정체를 모른 채로 그 모양만 알아서 이를 '소용돌이 성운'이라는 이름의 성운의 한 종류라고 인식했기 때문에, 중세기의 기록에 은하가 나오는게 그리 이상한 건 아니며, 단지 은하로서 인식된 게 아니었을 뿐이다. 그리고 이 은하 그림때문에 이 문서의 정체가 중세 유럽의 자연과학 관련 백과사전 내지는 교양과학 서적이라는 설이 다시 힘을 얻기 시작했다.[56] 만주어, 베트남어 등의 동북아시아 및 동남아시아 쪽 언어라는 주장도 있고, 아랍어히브리어라는 주장도 있으며, 문서의 저자가 창안한 인공어라는 주장도 있다. 어느 쪽이든 문서에 적힌 언어를 기술하는 데 쓰인 문자의 정체가 밝혀지지 않아서 모두 가설에 불과한 상태이다.[57] 2017년에 이 문서를 해독했다는 주장이 나왔으나, 오류로 끝났다. 다만, 문서 해독 방식에서 유의미한 진전은 있었다. 항목 참조.[58] 정확히는 가야를 고대 한국인과 잔존한 선주민들이 공존하는 상태로 파악하고 있다. 이에 따라 가야의 언어 환경도 선주민들의 언어가 조금씩 고대 한국어에 동화되던 과도기로 보거나, 최소한 지배층에서나마 고대 한국어가 링구아 프랑카로 널리 쓰이던 양층 언어 상태로 파악하는 여론이 우세해졌다.[59] 알렉산더 보빈은 이들의 정체를 원삼국시대를 전후하여 한반도에 유입된 부여계, 고구려계 유이민들로 보았으나, 주류 언어학계한국고고학계에서 밝혀낸 여러 역사적 사실들을 바탕으로, 신라백제를 건국한 고대 한국어 화자들을 훨씬 이전에 고조선-연 전쟁의 여파로 인해 한반도로 이주한 고조선계 유이민으로 보고 있다.[60] 양웅이 살았던 시대에는 이미 고조선이 멸망하여 한나라의 행정구역인 한사군이 설치되어있었다.[61] 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동이는 순전히 중국 동부에 사는 비(非) 한족계 민족들을 뭉뚱그려서 가리키는 말이며, 환빠들의 주장과는 달리 모든 동이족이 한민족인 건 아니다.[62] 현대 일본인류큐인의 공통조상으로 추정되는 민족이다.[63] 다만, 트랜스유라시아어족 가설은 억지춘향으로 끼워맞춘 결과에 가까워서, 주류 언어학계로부터 철저히 무시받았다. 이 가설은 상술한 고고학적 성과를 바탕으로, 한국어와 일본어족, 퉁구스어족, 몽골어족, 튀르크어족이 모두 하나의 어족으로 묶는 설이고, 기존의 알타이 제어 가설을 더욱 확장한 것이지만, 기초어휘 수준에서 차이가 크게 나는데다, 어원 상 서로 무관한 어휘를 억지로 끼워맞추는 식으로 동원어라고 주장하는 등의 문제가 많았다.[64] 그래서 제주 방언의 음성학적 자료들은 중세 한국어의 음운론적 특성을 규명해내기 위한 자료로 요긴하게 쓰인다.[65] 탐라국의 전신으로 추정된다.[66] 유리도라와 동일인물이라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도동음률을 유리도라의 이명이 아니라, '유리도라가 동음현으로 가서 신라에 복속했다'는 문장을 오독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67] 비주류 학설로 제주 방언을 독립된 언어로 간주하여 한국어족으로 분류하는 가설이 있다.[68] 고대에도 한국인들이 토하라인이나 스키타이인 등의 여러 인도유럽어족유목민과 접촉하여 영향을 주고 받았다는 설도 있지만 물증이 부족하고, 일단은 인도유럽어족 계통 언어가 한국어에 처음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 것은 구한말 때인 현대 한국어 시기부터라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물론 근대 이전에 산스크리트어도 영향을 끼치긴 했지만 불교에 한정되어 있고 그조차 직접적인 영향이 아닌 중국(한자)을 통한 간접적인 영향이었다.[69] 정확히는 일본어족한국어에서 분리되어 나왔다고 보았다.[70] 이 정도의 해독률로 어떻게 연구가 됐을까 싶지만, 사실 해독이 안되는 글자가 대부분 한 번만 등장하는 글자이거나 일종의 고유명사였고 해독이 되는 글자의 경우 단순한 자형은 현대 한자와 거의 일치해서 내용의 해독 자체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이후 시대에 제작된 금문이 갑골문의 자형과 거의 일치했던 것도 한 몫했다.[71] 케트어가 속한 언어군으로, 시베리아예니세이 강 일대에 화자들이 주로 분포해있다.[72] 나바호어, 애서배스칸어, 에야크어 등이 속한 언어군이며, 북아메리카 서부에 화자들이 주로 분포해있다.[73] 이누이트의 사촌뻘되는 민족이며, 이들의 언어인 유픽어이누이트어와 함께 이누이트알류트어족으로 분류된다.[74] 유픽족이나 이누이트들은 아메리카 원주민으로 분류되는 다른 민족들과는 기원이 전혀 다르다. 이들을 제외한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코카소이드동아시아인의 공통조상인 고대 북유라시아인(ANE)계이고, 유픽족이나 이누이트족은 그 이후에 형성된 동아시아인 계통이다.[75] 아메린드어족 가설이라 하여, 이누이트유픽족, 알류트족이 쓰는 이누이트알류트어족 계통 언어들을 제외한 아메리카 원주민 언어 전체를 하나의 어족으로 묶는 가설은 있지만, 주류 언어학계로부터 기정사실로 취급되고 있기라도 하는 데네예니세이어족과는 달리, 완전히 가설로만 취급되고 주류 학계에서 진지하게 논의되는 학설이 아니다.[76] 유목민이라도 문명 사회에서 살아가는 민족이면 모두 등재할 수 있다.[77] 몽골계 민족들 중에서 정주농경 생활을 주로 하는 민족은 단 넷 뿐인데, 둥샹족다우르족, 투족, 보안족이 있다.[78] 현재는 유럽 토착민이라는 설이 유력하다.[79] 원시 드라비다인을 인더스 문명을 건설한 이들로 보아서 오늘날의 이란 등지에서 이주한 수렵채집민들의 후손으로 보는 설과, 인도 아대륙의 남부에서 기원한 토착민으로 보는 설로 나뉘어있다.[80] 이들은 이라크 내의 다른 아랍계 주민들과는 달리 피부색이 다소 검은 편인데, 이는 압바스 왕조 시기에 아프리카에서 팔려온 흑인 노예들과의 혼혈이 있었던 탓에 그렇다.[81] 일본아이누족과는 전혀 다른 민족이다.[82] 이런 언어를 고아어(orphan language)라고 한다. 알바니아어 이외에는 인도유럽어족그리스어아르메니아어가 있다.[83] 스파르타를 세운 이들이다.[84] 알바니아인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1세기경의 동로마 제국의 문헌이다.[85] 다만 유전적으로 비슷하다고 해서 실제로 그 민족이랑 가깝다고 보긴 어렵다. 당장 이웃의 튀르키예인이 그리스인이랑 비슷하지만 그리스인과 가까운 민족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실제로 알바니아인이 사용하는 언어인 알바니아어그리스어아르메니아어와 같은 어파를 이룬다는 설이 있었으나, 주류 언어학계에 의해 부정되고 독자 어파로 분류되었다.[86] 인도유럽어족 인도이란어파의 서이란어군에 속하며, 페르시아어, 다리어와 함께 방언연속체를 이룬다.[87] 상술한 야마토 민족이다.[88] 대표적으로 유전병 문제가 있다.[89] 근친혼의 위험성은 생각보다 옛날부터 대부분의 민족들이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고 한다. 괜히 인구밀도가 극히 낮은 시베리아몽골 초원지대의 유목민들이 혼인 상대를 엄청나게 멀리 떨어진 곳에서 찾는 것이 아니다. 물론, 정글 지대같이 고립된 환경이라서 이런 위험성을 피할 수 없었던 곳은 정말로 절멸 위기에 몰린 인족 집단들이 꽤 나오는데, 가령 미얀마중국의 국경지대에 사는 중국티베트어족 계통의 수렵채집민타론족은 오랫동안 정글 지대에서 고립되어 지내다보니 미얀마령 지역의 주민들은 근친혼으로 인한 유전병때문에 전멸하고 생존자들도 대부분 중국령 지역으로 피난해버렸으며, 대서양 한가운데에 있는 영국령 섬인 트리스탄다쿠냐의 주민들은 주변에 가까운 유인도가 없는 탓에 부득이하게 행해온 오랜 근친혼으로 인해 선천적으로 호흡기 질환과 안과 질환에 시달리는 상황이다.[90] 이 이야기는 《총, 균, 쇠》에 실리기도 하였다.[91]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취재한 어떤 부족은 나무로 AK-47 모양을 깎아서 자기네 부족의 수호신에게 바치는 제물로 쓰기도 했다.[92] 스스로는 '숲 속의 사람'이라는 뜻의 '오랑 림바(Orang Rimba)'라고 칭하며, 오스트로네시아어족 계통의 언어를 사용하는 말레이화전민 종족이다.[93] 여자나 아이들이 카메라에 찍히면 부정을 탄다고 믿어서였다.[94] 문명의 이기를 거부하는 이들에게는 돈이 쓸모 없어서였는데, 정작 당장 벌금으로 지불할 많은 옷이 없던 벌목꾼들과 그들의 고용주는 취재 당시에 옷 대신 돈으로 벌금을 지불했다.[95] 동남아시아의 대륙에 속하는 부분인 인도차이나 반도말레이 반도 일대는 물론, 인도네시아필리핀의 도서 지역과 내륙 지역에도 이런 비문명 지역은 수두룩하며, 전술한대로, 이들의 대부분은 가혹한 식민 지배를 피해 달아난 부족들이다. 이런 부족 중의 하나인 라오스말레이계 민족인 라오퉁은 라오스 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타이계 민족들의 탄압으로 인해 라오스의 고산 지대로 달아나 오늘날에 이르고 있으며, 그 이외에도 19세기에 청나라 조정의 핍박을 견디지 못해 중국에서 라오스 영토로 달아난 소수 민족들이 꽤 있었다. 그리고 미국 지배 시기의 필리핀에서 태어나 자랐던 라몬 막사이사이는 어린 시절에 친미 성향의 필리핀의 지배층들의 착취를 피해 숲속으로 숨어든 부족민들을 만나 그들과 사냥을 하러 다닌 경험이 있었다.[96] 절대 이분들을 놀라게 하면 안돼 짤방의 주인공들 맞다.[97] 참고로 유럽인으로서는 최초로 아마존 강을 탐험했던 사람인 프란시스코 데 오레야나가 남긴 기록에 의하면, 본래 유럽의 선교사들이 선교 활동을 위해 투피족들에게 배워서 사용하던 투피어가 전혀 통하지 않는 원주민 종족들과 조우한 내용이 나온다. 투피어는 당시 아마조니아 정글 지대의 원주민들 사이에서 굉장히 널리 쓰이던 언어였고, 따라서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콩키스타도르들이나 선교사들도 원주민들과의 우호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자주 배웠던 언어였다. 그런 언어가 통하지 않는 민족과 조우한 경험은 오레야나에게는 굉장히 생소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물론 투피어나 그 친척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아마조니아 원주민 민족들은 많지만, 프란시스코 데 오레야나가 언급한 위치 등으로 미루어보면 그가 접촉한 이들의 정체는 16세기 경의 와오라니족이나 그 조상격 종족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마침 와오라니족이 사용하는 언어인 와오라니어비교언어학적인 분류 상으로는 고립어로 들어가며, 투피어투피과라니어족으로 분류된다.[98] 그래서 이후에 멀리 대한민국의 방송국인 SBS에서 이들을 촬영하겠다는 제안을 하자, 와오라니족 측에서 흔쾌히 허락해줄 정도가 되어, 김병만의 정글의 법칙 아마조니아 편에서 이들의 모습이 방송을 탔다. 뭐 한국에서는 결과적으로 절대 이분들을 놀라게 하면 안돼같은 흑역사만 남았지만, 비록 SBS 제작진들의 주작이 좀 섞였을지언정 와오라니족들은 굉장히 호의적인 분위기 하에서 자기들의 전통 문화를 상세히 보여주었다.[99] 일단, 문화인류학자들은 이들의 정체를 안다만 니코바르 제도에 속한 다른 섬에 살던 원주민들 중에서 우연히 노스센티널섬으로 흘러들어간 부류라고 추정하고 있다.[100] 덕분에 아프가니스탄은 위의 동남아시아뉴기니 섬 일대와 함께 민속학 연구에서 매우 중요한 곳으로 꼽힌다. 가령, 이곳에는 인도아리아인들이 인도 아대륙에 처음 유입되던 시기에 산악 지대에 정착한 이들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칼라쉬인이나, 이란아프가니스탄 일대에 거주하는 몇 안되는 드라비다계 민족인 브라후이인도 있으며, 고립어부루샤스키어를 쓰는 훈자 지역민 등과 같은 매우 다양한 민족이 거주하고 있다. 민속학자문화인류학자, 언어학자들에게는 매우 이상적인 연구 장소가 아닐 수 없다.[101] 다만 시골에서는 집안 웃어른에 한해서만큼은 따로 밥상을 차려 드리는 풍속이 80년대에서 90년대 초까지 남아 있었다.[102] 조선 시대에 아버지가 겸상을 하려는 아들을 때려 죽인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103] 이러한 독상 문화의 소멸로 인해 소반의 명맥도 끊기게 되는데, 과거에는 통영반, 나주반, 해주반 등 지역에 따라 여러 가지 다양한 형태의 소반이 제작되었으나 현재는 통영반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명맥이 끊겼고, 나주반은 현재 민간 차원에서 복원이 진행 중인 상태다.[104] 특히 몽골은 전통적으로 어류를 비롯한 해산물을 기피하는 성향이 있으며 특히 새우를 벌레로 여기며 먹지 않는다.[105] 단, 2021년에 올라온 영상을 보면 테디베어 정도의 물체는 3달, 그 이상의 크기를 가진 물체들은 6개월에서 1년까지 걸린다고 해당 동굴 관리자가 말하고 있으니 본 문서의 서술은 과장하고 있는 것 같다.#[106] 단원풍속도첩에 실린 그림들이 위작설의 대상으로 지목되었다.[107] 이렇게만보면 뭔가 음침한 배경이 있는 곡이라고 오해할 수 있지만, 사실 이 노래는 밝고 흥겨운 분위기의 록 음악이며, 공개된 가사도 무난한 내용이다.[108] 곡 발표 당시는 서독.[109] 조지 해리슨이나 링고 스타가 작곡한 곡들은 제외.[110] 예를 들어 Yesterday, Hey Jude는 폴 매카트니 혼자 작곡한 곡임에도 크레딧을 레논-매카트니로 표기했으며, Yer Blues 등 존 레논 혼자 작곡한 곡들도 마찬가지였다.[111] 이게 논란이 되는 이유는 크게 2가지인데, 먼저 헤치스 경이 이걸 발견했다고 기고한게 1924년(20세기)이므로, 상술한 유통 과정의 맥락을 감안해도 꽤 제작된지 오래된 작품이 되며, 두 번째로 현대에 오컬트에 관심 많은 예술 장인들이 이것을 만들고 있고, NGC에서도 복제품을 만들어봤지만 이것과 완전히 같은 수준의 모습을 재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21세기에도 구현하기 힘든 기술을 19세기에 구현했다는 것.[112] 오랫동안 1860년에 니커보커 규칙을 제정해 발간한 미국알렉산더 카트라이트가 처음 야구의 규칙을 창안했다고 알려졌으나, 2010년에 경매장에서 닥 애덤스가 제정해 발간한 야구 규정집이 발견되면서 사실이 아니라고 밝혀졌다.[113] 한때 미국메이저리그 사무국역사왜곡까지 일삼으면서 야구의 기원이 자국이라고 주장했으나, 유럽을 포함해 전세계 여러 나라에서 야구와 유사하게 공을 던져서 방망이로 쳐내는 스포츠가 고대로부터 전해져왔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야구의 미국 기원설은 부정되었다.[114] 우선 문제의 '베이스볼'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700년에 영국성공회 신부인 토머스 윌슨이 남긴, '주말에 베이스볼을 즐기다가 방망이가 부러졌다'는 기록이다. 그 이후인 1744년에 영국의 동화작가인 존 뉴베리가 집필한 그림동화책인 《작고 귀여운 포켓북》에 수록된 베이스볼이라는 단편 동화에서는 세 명의 요정들이 방망이와 공, 글러브를 이용해 베이스볼을 즐기는 그림이 나오며, 1748년에 웨일스귀족인 해리슨 터너가 친구인 사우스위든 백작에게 일요일에 베이스볼을 하자는 편지를 보낸 것이 현존하고 있어서, 이 명칭이 영국에서 기원한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막상 이 스포츠의 규칙이 어떠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부족하여 영국의 '베이스볼'이 정확히 어떤 스포츠였는지는 불분명하며, 이것이 야구와는 명칭 이외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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