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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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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4대 국왕
세종 | 世宗
파일:세종대왕 어진.png
세종 표준영정[1]
출생 1397년 5월 15일
한성부 준수방 장의동 본궁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성동)
즉위 1418년 9월 18일 (21세)
한성부 경복궁 근정전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사망 1450년 4월 8일 (향년 53세)
한성부 영응대군 사저 (동별궁)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 인근)
능묘 영릉(英陵)
재위기간 조선 충녕군
1407년 11월 2일 ~ 1412년 6월 11일
조선 충녕대군
1412년 6월 11일 ~ 1418년 7월 15일
조선 왕세자
1418년 7월 15일[2] ~ 1418년 9월 18일[A]
조선 제4대 국왕
1418년 9월 18일[A] ~ 1450년 4월 8일[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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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본관 전주 이씨
도(裪)[휘]
부모 부왕 태종
모후 원경왕후
형제자매 12남 17녀 중 3남
배우자 소헌왕후 (1408년 혼인 / 1446년 사망)
후궁
10명 [ 펼치기 · 접기 ]
신빈 김씨, 혜빈 양씨, 영빈 강씨, 귀인 박씨, 귀인 최씨, 숙의 조씨, 소용 홍씨, 숙원 이씨, 상침 송씨, 사기 차씨
자녀 18남 4녀[7] (18남 7녀)
종교 유교 (성리학)불교[8]
체중 75kg 이상 추정[9]
아명 막동(莫同)
도(裪)
원정(元正)
군호 충녕군(忠寧君)
→ 충녕대군(忠寧大君)
전호 휘덕전(輝德殿)
묘호 세종(世宗)
시호 조선: 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
(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
: 장헌(莊憲)
섭정 상왕 이방원 (1418년 ~ 1422년)
세자 이향 (1442년 ~ 145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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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친필 글씨 (열성어필)[10]

1. 개요2. 생애
2.1. 즉위 전2.2. 재위기간2.3. 말년
3. 업적4. 비판과 반론5. 특이한 기록들6. 가족 관계7. 영릉8. 어진9. 창작물10. 직접 쓴 글과 시11. 기타12. 어록13. 관련 단체14. 관련 문서1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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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는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 어리석은 백성들[11]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결국 그 뜻을 제대로 펴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내가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었으니 이는 사람들이 쉽게 익히고 날마다 쓰기 편하게 하기 위함이니라.

훈민정음 언해본》 서문 (현대 한국어로 옮김)

조선 제4대 국왕. 묘호세종(世宗), 시호는 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 는 도(裪)[휘], 자는 원정(元正), 아명은 막동(莫同, 막내)이었다.

2. 생애

2.1. 즉위 전

조선 건국 후 태어난 첫 임금으로, 조선이 건국된 해인 1392년에서 5년이 지난 1397년 5월 15일(음력 4월 10일) 당시 정안군[13]이었던 태종과 정녕옹주였던 원경왕후의 3남으로 태어났다.[14]

1408년, 12살에 충녕군에 봉해졌고 아버지가 왕위에 오른 후 12년 뒤인 1412년에 대군으로 진봉되었다. 어릴 적부터 이미 될성부른 떡잎을 보여 한번 잡은 책은 책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읽었다고 한다. 단군 이래 최고의 독서광으로 병이 나 앓고 있을 때도 줄창 책을 읽으려 들었으므로 건강을 해칠까 걱정된 태종이 방 안의 서책을 모조리 압수했으나 병풍 뒤에 숨겨뒀던 《구소수간(歐蘇手簡)》[15]이라는 책 하나를 붙잡고 마르고 닳도록 읽었다는 얘기는 알음알음 퍼져있는 이야기. 조선에서 왕위를 이을 세자는 왕이 되면 그만이지만 그 외의 왕자는 일개 왕실 종친일 뿐 능력을 이용한 정상적인 벼슬길에 오를 수 없었기 때문에 충녕대군의 재능이 안쓰러웠던 태종은 아들의 취미생활을 전적으로 지원해줬다고 한다. 덕분에 학문은 물론 수석까지 다양한 부분을 섭렵했고 오히려 대군이었기 때문에 제한받지 않고 다양한 분야를 공부했으므로 다양한 재능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대군으로서의 유복한 생활이 다재다능한 왕으로서의 실력을 키워주는 데 복이 된 셈이다.

아버지 태종은 왕자의 난으로 왕위를 차지하며 왕통을 바로 세우려고 했으나 결국 자식 농사가 뜻대로 되지 않아 장자 계승의 원칙을 버려야 했다. 태종은 훗날에 양녕대군이라는 이름을 받게 되는 맏아들을 계속 왕위에 올리려 했지만 그의 계속되는 망나니 짓에 포기하고 말았다는 게 <조선왕조실록>에 의한 사실이다. 장자 계승의 원칙을 버린 결과 한국사 최고의 성군이 나왔다는 점에서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낄 수 있다. 태종이 상왕으로서 왕위에서만 물러나 세종의 보호자, 후견인 역할을 해준 것도 신의 한 수였다.

보통 위인전에서는 세종대왕이 대군 시절 사심없이 그저 공부만 열심히 해서 태종의 눈에 들어 왕이 된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본인도 자신에게 대권이 올 가능성을 인지하고 야심차게 행동했다는 근거가 여럿 있다.

이상의 일화들을 살펴볼 때 충녕대군은 분명히 왕위에 욕심이 있었다. 원래 집안을 이어야 할 장남은 인간말종이고, 어차피 장남이 아닌 이상 차남인가, 삼남인가는 상관이 없으니 세자 자리, 멀리 봐서 왕위에 대한 생각을 갖고 움직인 것으로 추정된다. 유교 사회에서 양대 계승 명분중 적장자 계승이 불가능하다면 남은건 '택현(擇賢)'인데 이건 말그대로 어질고 현명한 이를 선택한다는 뜻이라 둘째든 셋째든 상관이 없었다.[23] 여기에 더해 차남인 효령대군 역시 왕위에 대한 욕심을 내보인 정황은 없기에 절대적으로 결격사유가 있는 대군들을 제하고 보면 장유유서로 보나 택현으로 보나 삼남 밖에는 답이 없었다.

양녕의 비행이 날이 갈수록 도를 넘을 정도로 심해지자 태종과 중신들도 충녕대군(훗날의 세종)을 전폭 신뢰하는 모습이 기록에 나오고 있으며, 심지어 명나라 사신인 황엄조차도 '충녕대군이 부왕처럼 영명(瑩明, 총명하다는 뜻)하니 왕위를 물려받을 것'이라고 대놓고 말하고 돌아다녔고 실제로 조선에서 새로운 세자를 봉해달라는 표문을 명나라에 전하자 '충녕대군이 세자가 되는 것'이라고 바로 알아맞혔다.

따지고 보면 건국 초기 시절이라 아직 적장자(嫡長子)가 왕위에 오른 사례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24] 능력이 만렙이거나 야심만 있으면 누구든지 왕위 계승자로 지목되거나 왕위에 오를 수도 있던 시대였다. 할아버지 태조가 고려 왕실의 옥새를 빼앗아 조선의 초대 국왕으로 등극한 바 있고 아버지 태종도 5번째 왕자로 왕위 계승에 불리한 위치에 있다가 왕자의 난 두 번으로 결국 국왕으로 등극한 선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장자 계승'을 명분으로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국왕에 오른 부왕 태종[25]은 명분도 그렇거니와 자식들도 자신을 본 받아 같은 짓거리를 할까봐 두려웠는지 틈틈히 형제들 간의 우애를 당부하는 한편 왕위 적장자 승계 원칙을 누구보다 철저히 확립시켜 왕권 다툼에 대한 예방과 왕권 안정을 도모하고 싶어서[26] 세자의 계속된 비행에도 누구보다 장남이 정신차리고 제대로 왕위를 물려받기를 바랐다. 무엇보다 사랑하는 자식들이 자신처럼 왕좌를 노리고 서로를 죽고 죽이는 유혈 투쟁을 하는 꼴은 부모 입장에서도 보기 싫었을 것이다. 원경왕후 민씨 역시 형제 간의 골육상쟁이 두려웠는지 세자를 폐하고 충녕대군을 새로운 국본으로 삼는 일에 끝까지 반대했다. 문제는 그러거나 말거나 세자는 계속 태종의 눈 밖에 어긋나는 짓을 일삼았다는 것.[27] 이런 와중에 충녕대군은 태종에게 세자의 행동을 고자질을 하는 등 세자를 압박하면서 견제하는 동시에 자신의 모범생다운 행실을 보여주면서 태종과 신하들에게 점수를 땄다. 세종의 즉위 뒤 쓰여졌다는 문제점은 있지만 후에 양녕대군으로 폐해지는 세자에게 대놓고 면박을 주거나 자신의 총명함을 드러낸 사실은 <조선왕조실록>에도 그대로 수록되었다.[28]

능력만이 아니라 인성 면에서도 두 왕자가 대조를 이루었던 사건이 있었으니 막내 동복아우 성녕대군의 죽음이었다. 성녕대군이 큰 병에 걸려 죽게 될 때 충녕대군은 의원과 함께 어린 동생 곁을 지키면서 의서를 탐독하고 열심히 간호하여 궁궐의 사람들이 모두 탄복했던 반면에 세자는 이 때 활쏘기나 하면서 띵까띵까 놀고 있었다는 것이 나중에 드러나고 말았다. 그렇게 세자를 감싸던 태종마저도 이 사실을 알고는 "하는 짓이 사람의 마음을 가진 것 같지 않다"[29]라며 깊은 실망을 드러냈다.

사실 세자에게는 태생적인 결점이 있었다. 태종은 세자를 위해 외척을 견제하기 위해서 평생 원경왕후의 원망을 들어가면서까지 처가인 여흥 민씨 집안을 갖은 꼬투리로 끝까지 멸문했다. 그런데 세자는 태종이 사저에 있던 시절 외가에서 자라 숙청된 외숙들[30]과 매우 가까웠다. '혹시 그래서 폐세자가 되지 않았을까?'라는 의문이 드는 경우도 있을 것이지만 이것이 폐세자의 원인은 아니었던 것 같다. 정작 세자는 자기네 외삼촌들이 궁지에 몰리자 헌신짝마냥 외면했다. 민무휼과 민무회가 원경왕후의 병문안을 왔다가 세자에게 "우리 형들이 죄 없는데 죽었으니 우리만큼은 보전시켜 주소서."라고 했는데, 세자는 "외삼촌들은 교만 방자하여 국법을 어겼으니 죽어도 싸다"고 비웃었다. 민무회는 어이가 없어서 "아니 대체 마마는 어느 집안에서 자랐습니까?"라고 확 내질러 버렸다. 어린 시절 민씨 집안에서 자랐던 세자에게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는 의미로 한 말이다. 같이 있던 민무휼이 수습하기는 했지만 결국 각종 개차반짓으로 입지가 좁아진 세자는 점수를 벌어보겠다고 얼마 안 있어 그 일도 태종에 고변해서 민무휼과 민무회를 죽게 만들었다. 비록 토사구팽이 예정된 상태였지만, 세자가 자기의 마지막 뒷배가 되어줄 수 있는 민씨 숙청에 가담한 행동은 현명함이었을까 아니면 어리석음이었을까?[31]

한편 둘째인 효령대군은 평생 부처를 받드는 선비, 그러니까 속가제자가 되었다.[32] 효령대군이 차남임에도 불구하고 왕위 계승에서 동생 세종에게 밀린 이유 중 하나가 술을 못 마셔서다. 태종에 따르면 "군주가 술은 너무 많이 마셔도 안 되나 의전 상 아예 못 마셔도 문제가 되는데, 전에 사신들이 왔을 때 보니까 효령대군이 술을 못먹는데 충녕대군은 마시긴 하더라"는 이유였다. 원래부터 불가에 뜻이 있었기 때문에 계승권에 관심이 없었다는 해석도 일리가 있다. 그런데 사실 세종도 술을 잘 마시는 건 아니었다. 소주를 겨우 1~2잔 마실까 말까 할 정도였다. 다만 당시의 소주는 도수 40도 이상의 원조 증류식 소주였기 때문에 술을 안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두잔 먹는 것도 용한 것이긴 했다. 물론 정말 술 못마신다는 이유만으로 걸러진 건 아니고, 정확히는 "애가 그냥 순둥순둥하기만 해서 뭔 얘기를 해도 그냥 헤헤 웃고만 있다"는 말과 저 술 이야기가 같이 나왔다. 즉 일을 똑부러지지게 처리하지도 못하고 사신 앞에서 한 잔 받아 넘길 정도의 융통성머리도 없는 애를 어떻게 왕으로 앉히겠냐는 것.
아아! 너 충녕대군 도는 관홍장중(寬弘莊重)하다.
태종실록 태종 18년(1418) 6월 17일 2번째 기사. 정전에 나아가 세자경빈에게 책보를 내려주다.[33]
태종 18년(1418) 6월 3일 태종은 세자를 폐하고 충녕대군을 새로운 세자로 책봉한다. 처음에는 양녕대군의 장남인 순성군을 세우겠다고 했으나 박은 등 대신들이 반발해 뜻을 거둔다. 다음으로는 점을 쳐서 세자를 정하겠다고 했으나 다시 의견을 바꾸고 어진 사람을 골라야 한다는 이유로 충녕대군을 세자로 지명한다. 태종이 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 명분인 유학적인 장자 계승에 따르면 순성군이 후계를 이어가는 것이 일견 옳아보이지만, 문제는 양녕대군이 사망이 아닌 생존 상태에서 폐세자가 되었다는 점이었다. 이렇게 되면 원손 이개는 졸지에 아버지를 제끼고 세손이 되는 셈이므로 원손 본인부터가 입장이 난처해지는데다가 태종 사후 살아있는 양녕을 어떻게 대우할 것인지, 양녕 혹은 세손이 아버지를 폐위시킨 대신들에게 어떻게 나올지 등등 골치아픈 문제가 한둘이 아니었으니 당연히 온 조정이 한 목소리로 반대했다.

태종과 양녕의 나이차는 27세로 당대 기준에서는 장자 치고 굉장히 큰 차이였다. 양녕은 실제로는 4남이었고 위에 누나도 3명이나 있기 때문에 그렇다. 다만 앙녕대군 위의 세 아들이 모두 요절하는 바람에 양녕대군이 장남이 된 것. 실제로 태종이 사망했을 당시 양녕의 나이는 고작 만 28세였고 순성군은 만 8세였다. 환갑을 채우면 잔치를 벌이던 당시로써는 아무리 길게 잡아도 태종이 순성군이 성인이 되어 친정이 가능할 때까지 살아있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였고, 설령 친정이 가능해진다 해도 역시 아버지를 폐위시킨 일을 문제 삼으면 곤란해질 것이 뻔했다.

이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지 않는다면 양녕대군이 대원군으로 존재했을 것이고, 왕권이 매우매우 흔들릴 것이 명약관화했다. 당장 이런 문제가 후대에도 똑같이 불거지는데 바로 사도세자. 거진 300년 뒤 영조사도세자, 정조가 똑같은 문제를 겪었고 결국 영조는 사도세자를 죽이는 방법으로 해결했다. 다만 사도에게는 형제가 없었고 세손만이 존재했기에 제거될 수 밖에 없었지만, 태종에게는 양녕 이외에도 충녕이란 대안이 있어 다른 아들에게 왕위를 넘겨주는 게 가능했단 차이가 있다.

이어서 점복으로 하는 것은 과거 한성부로 돌아올 때 명분으로 활용되던 것으로 천명(天命)을 이용하려고 했던 것 같다.[34] 하지만 양녕대군을 폐세자하려는 생각을 하면서 태종이 다음 후계를 정하지 않았을 것 같지는 않다. 실제로도 세자 책봉 이후 양위까지 한 것을 보면 충녕대군을 세우고자 했을 것이다.

충녕대군은 셋째 왕자이기 때문에 본래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첫째 왕자인 양녕대군이 평소의 망나니 짓 때문에 끝내 폐세자가 되고 그 전부터 영특하고 어질기로 유명했던 충녕대군이 왕통을 잇게 되었다. 일부에서는 양녕대군이 일부러 양보했다고 하나 실상은 지나친 말종 짓 때문에 끝내 태종이 그를 비호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이후에도 양녕대군은 제 버릇 못 고치고 여전히 망나니 짓을 하며 세종의 속을 긁었고 긁은 정도로 끝나는 게 아니라 왕족의 위신을 떨어뜨려서 재위 기간 초기에 세종의 약점이 되기까지 했다.[35] 그러나 세종의 힘이 점점 강해지면서 도리어 양녕대군의 처우도 점점 좋아졌다.

2.2. 재위기간

태종은 홍주원을 조상재로 상재한지 두 달여 만인 주원 18년(1418년) 8월 10일 전격적으로 양위한다. 태종은 재위 기간 수시로 자신의 주원을 강화하기 위해 선위한다는 쇼를 벌이고는 했는데[36] 신하들은 그때마다 찬 바닥에서 절을 하며 말리는 일을 반복해야 했다. 신하들은 '이번에는 또 얼마나 선위 파동이 오래 갈려나?' 했는데 태종은 세자에게 임금이 즉위식 때 입는 면복을 입혀 신하들 앞에 내보냈다. 당연히 왕의 복장은 왕만 입을 수 있었다. 선위를 반대하여 뜰에 나아가 엎드리던 신하들도 면복 차림의 세자를 보고 군말없이 조복으로 갈아입고 세종의 즉위식에 참석했다. 이는 불안정한 셋째 아들의 왕권을 안정시키는데 태종 자신의 남은 여생을 쓰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었다.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은 세종 4년(1422) 죽을 때까지 4년간 실권을 쥐고 있었으며 세종은 태종이 죽은 뒤에야 진정한 조선의 국왕으로 거듭났다.

태종은 조선이라는 나라의 기틀을 완전히 잡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는데 첫 작업은 어찌보면 당연하지만 그로테스크했다. 태종은 세종의 처가인 심씨마저 멸문했던 것인데 선위 직후 심온영의정과 세종의 즉위를 알리는 명나라 사신으로 임명하며 힘을 실어주는 척 안심시켰다가 시답잖은 사건을 끄집어냈다. 이른바 강상인 사건으로 병조참판 강상인이 군사 부분의 일을 태종에게 보고하지 않고 세종에게 보고하자 그를 친히 국문해 함경도 관노로 보냈다. 태종이 이미 "왕이 30살이 될 때까지는 내가 맡겠다"고 했는데 이를 어겼다는 죄목. 그가 태종을 아주 오랫동안 모셔온 공신임을 감안하면 매우 큰 형벌이다.

한 달 뒤 심온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간 사이에 재조사해 박습[37], 이조판서 심정[38], 동부총재 이관이 심온과 논의했다는 답을 얻어내 엮어냈다. 그러고는 강상인은 거열형, 이관과 심정은 참수형에 처해 죽였으며 귀국길의 심온을 붙잡아 고문했다. 이 때 심온은 하루에 곤장을 2번 맞고 압슬형을 5번이나 받고도 자복하지 않았다가 류정현이 "이보시오, 심공, 당신 지위가 뭔지 알면 이게 뭐 하는 건지 알 텐데자복 안 하시오?"라고 하자 결국 자복했다. 유정현의 말을 듣고 심온도 처음부터 태종이 꾸민 짓임을 깨달은 모양. 심온은 다음 날 바로 사약을 마셔버렸다.[39] 야사에는 "앞으로 반남 박씨와는 혼인하지 말라." 하는 유언을 남겼다고 하는데 박은을 두고 한 말 같다. 실제로 박은도 이 일에 유정현처럼 연루되어 있어서 심온을 경계했고 세종비인 소헌왕후를 폐비해야 한다고 하기도 했는데 소헌왕후 심씨의 어머니를 노비로 강등시켰다.

사실 이는 명나라 눈에 불경하게 보일 수 있는 짓이었다. 나라까지 직접 사신으로 다녀온 사람을 처형해버리고 그의 아내를 노비로 만들었으니 외교상 명나라에서 불편해 할 가능성[40]이 분명히 있었다. 그래서 태종은 애써 몸이 안 좋아 시골로 내려갔다며 거짓말까지 하라고 지시했다.[41]

1차 왕자의 난2차 왕자의 난까지 고려하면 세종은 왕위에 오르기 전에 3대가 멸족을 당한 셈이다. 세종은 태종 사후 황희 등의 주청을 받아들여 태종과 원경왕후의 유훈이라는 핑계로 장모와 처제들을 노비에서 풀어주고 직첩도 돌려주었으나 그의 장인 심온의 사면은 받아들여지지 않아 아들 문종 대에 가서야 사면이 되었다. 이는 선왕의 결정을 바꾸는 것은 선왕의 결정에 문제가 있다는 결론이 나와 선왕에게 불효가 된다는 유교 사상에 의한 것이기도 했다. 효를 행하는 것 중 하나가 선친(혹은 선왕) 사후 3년간(3년상 기간)은 생전의 처분을 바꾸지 않는 것이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세종에게 충분한 시간이 있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효 이전에 심온 본인에 대해서 그렇게 중대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온갖 병에 시달리던 세종이 아들 문종에게 양위하려고 했을 때 장인의 사면도 생각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42]

심온 옥사 재수사는 세종이 물갈이를 하기 가장 적합한 일이었고 명분도 분명했던 정치 보복이었으나 세종은 일체의 정치 보복을 하지 않았다.[43][44] 옥사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박은은 태종이 사망하기 직전에 병사했는데 사후 관직 박탈과 같은 처벌을 전혀 받지 않았다. 심온에게 자복을 받아내고 심온 일가의 처벌뿐만 아니라 소헌왕후의 폐비까지 주장했던 유정현도 계속 좌의정으로 일하며 국가의 재정 분야의 일을 하면서 궤장까지 받는 명예를 얻었으며 72세가 되어서야 은퇴해서 곧 자연사했다. 다만 그 때문에 소헌왕후는 개인적으로 고생했을 가능성이 큰데 심지어 아버지 심온이 죽을 당시에 소헌왕후 본인은 임산부[45]였으며 죽을 때까지 아버지가 신원되는 것을 보지 못했다.[46]

이러한 일련의 과정 이후 세종이 아버지에게서 어보를 받고 즉위했다. 아버지 태종 이방원은 세종 4년(1422년)에 숨을 거두었지만, 아직 조선 조정은 온전히 세종의 것이라고 하기엔 일렀다. 태종은 죽었으나 아직 조정에는 태종 때의 사람들뿐. 세종 4년(1422) 당시 영의정 류정현[47], 좌의정 이원[48], 우의정 정탁[49], 병조판서 조말생, 이조판서 허조, 호조판서 이지강 등 주변에는 태종의 사람들만 있었다. 이 신하들은 초장부터 세종을 잡으려는 의도였는지 세종의 말에 따르지를 않고 자기들 마음대로 일을 진행하려는 속내를 내비친다. 대표적인 일이 폐세자 양녕대군에 관한 일. 태종의 상을 치르기 위해 유배에서 서울로 올라왔던 양녕대군을 탈상 전부터 다시 유배지로 내보내라는 상소를 사헌부, 사간원, 육조, 의정부 등지에서 끊임없이 올려댄다. 이때 내용 중에는 "양녕대군의 거취는 신들이 태종에게 위임받은 것이니 전하도 사적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라는 것이 있었다. 양녕대군의 일은 자기들이 태종에게 위임받았으니 지금 왕이라도 간섭하지 말라는 소리다. 이러한 상소가 줄을 잇자 세종은 상소를 던지기도 하고 무시도 하지만 결국 신하들의 압박에 못 이겨 양녕대군을 내보내게 된다.
이제부터는 양녕이 들어온 때에 이와 같은 봉장(封章)은 다 접수하지 말라. 또 이 봉장의 글은 도대체가 진부한 말뿐이다. 전일에 올린 것과 다름이 없으니, 목판에 새겨 두고 찍어서 들여오는 것이 아니냐. 또 이 봉장은 거꾸로 접어서 봉(封)했구나.
『세종실록』 세종 15년(1433) 12월 27일 병자.
즉위 초의 상황은 세종이 진정한 군왕이 되기까지는 험한 길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런 상황이 계속 되던 중 세종에게 1가지 반전의 기회가 주어지는데 소위 말하는 '김도련 노비 뇌물 사건'[50]이다. 고려 말 김도련이라는 사람의 아버지가 함경도에서 양인 426명을 불법적으로 노비로 만들어 자신이 관리하고, 당시의 권문세가 임견미에게 뇌물을 바쳐 이를 허용받은 일이 있었다. 그러나 임견미가 죽고 고려가 망하면서 노비들이 다시 양인으로 돌아왔는데, 조선조에 들어와 아들 김도련이 노비 426명과 그 자손들까지 거의 천 명을 자기 소유 노비로 되찾겠다고 한 일이다. 김도련이 당시 조선의 권력자들에게 노비로 뇌물을 주어 큰 문제가 되었다. 노비를 무려 36구나 뇌물로 받아 뇌물 스캔들의 가장 핵심적인 인물로 떠오른 병조판서 조말생부터 시작해서 평성부원군ㆍ우의정ㆍ좌의정ㆍ곡산부원군 등 여러 권력자들이 연루되었고 이 때 바쳐진 총 노비 수만 132구(口: 노비를 세는 단위). 가히 조선 초기 최고의 뇌물 스캔들이라 할 만했다. 당시 노비 1구당 현재 가치로 천만 원 정도[51]였고 노비도 사람인지라 자손을 낳으면 가치가 어마어마하게 불어나니 뇌물 스캔들의 사이즈가 어느 정도인지 가히 짐작이 가능하다.

이 사건이 일어난 때는 재위 4년(1422)이었다. 처음에는 별로 주목받지 않았으나 4년 뒤(1426)에 사헌부에서 문제를 제기했다. 즉시 조말생은 파직되고 유배형을 받았는데 세종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함경도에 사람을 보내 낱낱이 조사하도록 명한다. 이를 계기로 조말생의 다른 죄들이 드러났으며 이 때 조말생이 노비 36명에 장물 780관, 현재 가치로 약 14억 원 남짓 뇌물을 받았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조말생은 교형을 받을 뻔했으나 유배로 그치게 된다.[52] 관리 17명이 노비 132명을 뇌물로 받았다는 사실도 드러나자 세종은 이 사건을 계기로 관련자들에게 유배 혹은 파면 등의 처벌을 내렸다. 이로 인해 태종의 구신들을 몰아내고 세종의 세력으로 조정을 채울 수 있었다. 이듬해 1427년(세종 9년) 1월 황희를 좌의정, 맹사성을 우의정으로 승진시키면서 세종은 본격적으로 성군으로서 행보를 시작했다. 본격적인 재위기간은 그야말로 업적의 향연이었다.

세종 8년(1426년) 2월 한양 대화재가 발생했다. 세종에게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고 훌륭하게 후속 대책을 시행하기는 했지만, 이 화재는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다. 조선 500년 동안 임진왜란과 같은 전쟁이 아닌 평시에 발생한 재난 중 한양을 가장 크게 파괴한 재난이었다. 시작은 1426년 2월 15일의 화재였다. 이날 경시서(京市署)[53]와 북쪽의 행랑 106간, 한성부 중부(中部)의 인가 1630호, 남부의 350호, 동부의 190호가 불에 탔다. 당시 세종과 세자는 군사훈련 강무를 위해 강원도 횡성에 있었으므로 중전인 소헌왕후가 대응을 총괄했는데 금성대군[54]을 임신한 상태로 화재 진압을 직접 진두지휘했다.[55] 다음 날인 16일에는 전옥서[56]와 행랑 8간, 민가 200여 호가 불탔으며 보신각 종루까지 탈 뻔했으나 간신히 진압했다. 세종은 16일에 급보를 접하고 19일에 한양에 돌아와서 아내와 교대해 대응을 지휘했다. 큰 화재는 잡혔지만 소소한 화재가 계속 발생하고 이를 틈타 도적들이 기승을 부리는 등 재난이 끝나지 않자 세종은 계속해서 대책을 수립했다. 부상자의 치료와 이재민에 대한 식량의 배급 등 1차적인 대책을 수립하는 한편 화재 예방을 담당하는 금화도감[57][58]을 설치하고 가옥의 개량 및 지나치게 좁은 도로들을 정비해 큰 화재가 더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했으며 붙어있는 가옥을 적당히 이격시켜 다시 짓도록 조치함과 아울러 그 사이마다 우물을 파서 화재를 빠르게 진압할 수 있도록 한양의 도시 구조를 바꿔놓았다. #

재위 9년(1427) 5월 박연경기도 남양에서 나는 옥으로 편경을 만들었다. 이제까지 편경은 중국에서 수입해서 사용했는데 국산화에 성공한 것이다. 9월 어린 왕족들의 교육을 위하여 종학(宗學)을 세웠다. 교육 내용이나 수준은 성균관과 비슷했으리라 추측한다.

재위 11년(1429) 2월 주종소를 설치하여 편종을 법식대로 만들게 했다. 5월 정초 등이 농사직설을 편찬했다. 6월 돌을 던지는 군사인 석척군을 폐지하고 단오 때 행해졌던 돌 던지는 놀이인 석척희를 금지했다. 7월 신라, 고구려, 백제 시조묘에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재위 12년(1430) 2월 농사직설을 반포했다. 10월 공노비에게 출산 휴가를 주는 법을 제정했다. 11월 등에 매질을 가하는 편배를 금지했다.

청동 활자인 계미자가 고르지 못함을 인식하여 재위 2년(1420) 경자자, 재위 16년(1434) 갑인자, 재위 18년(1436) 병진자 등을 주조해 활판 인쇄 기술을 더욱 발전케 했다. 재위 19년(1437) 장영실, 이천 등에게 지시해 앙부일구, 자격루를 만들도록 했다.

2.3. 말년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만 전념한데다 20대 초반부터 왕위에 올라 열정적으로 국정을 돌보았고 육식을 즐겨하는데다 특별히 몸을 쓰는 강무 등을 즐겨하지 않았으므로 익히 알려진 대로 비만에 각종 성인병을 달고 살았다. 결국 나이가 들면서 건강이 몹시 악화되었고 재위 후반기들어 각종 질병에 자주 시달려서 병석에 누워 정무를 볼 수 없게 되었고 이러한 질병으로 재위 24년(1442)부터 세자 향에게 국정을 대리청정케 했다. 국정에서 물러난 세종은 이 시기부터 좋은 온천에 들러 요양을 하고 유명 사찰을 찾아 먼저 떠난 자식들의 명복을 비는 불사를 일으켰는데 훈민정음 창제가 이 시기에 이뤄졌다.

재위 25년(1443) 세종은 훈민정음을 창제했다.

재위 26년(1444)과 27년(1445) 5남 광평대군과 7남 평원대군이 연달아 죽더니[59][60] 재위 28년(1446) 왕비 소헌왕후마저 먼저 죽고 말았다. 연이은 가족들의 죽음 이후 건강은 더욱 악화됐다. 자기 삶이 얼마 남지 않음을 감지하고 집현전 학사들을 불러 세손(단종)의 앞날을 부탁했다.

재위 32년(1450) 음력 2월 17일 영응대군 집 동별궁에서 향년 52세에 사망했다. 능호영릉이다.

조선 국왕 중 최초로 재위 중 사망한 국왕이다.

3.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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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비판과 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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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특이한 기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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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가족 관계

총 18남 7녀 (3명 조졸)[61]
소헌왕후 영빈 강씨 혜빈 양씨
장녀 정소공주
장남 문종
차녀 정의공주
차남 세조(수양대군)
3남 안평대군
4남 임영대군
5남 광평대군
7남 금성대군
8남 평원대군
15남 영응대군
6남 화의군 11남 한남군
13남 수춘군
16남 영풍군
신빈 김씨
9남 계양군
왕녀(조졸)
10남 의창군
왕녀(조졸)
12남 밀성군
14남 익현군
17남 영해군
18남 담양군
상침 송씨
3녀 정현옹주
사기 차씨
왕녀(조졸)
숙원 이씨
4녀 정안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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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영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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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어진

파일:external/www.woorihim.com/1256710576_1.jpg
표준영정을 그린 화가 김기창의 얼굴과 세종 어진
1973년 김기창이 그린 세종의 어진은 정부 지정 표준영정이다. 충무공 이순신에 이은 표준영정 2호이며 여러 동상이나 만원권 지폐 같은 다른 곳에서도 대부분 표준영정을 참고해 세종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어진이 소실되었으므로 이 그림은 세종의 진짜 얼굴과는 전혀 관련없는 상상으로 그린 초상화다. 또한 실제 세종의 인척들 중 초상화가 남아있는 사람들과 비교해봐도 얼굴이 닮지 않게 그렸고 화가 김기창 본인의 얼굴과 비슷하게 그렸다는 지적과 의혹이 있어 왔다. #

부산 용두산 대화재로 소실된 대부분의 다른 어진과 달리 1935년에 일제가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이미 그때에도 세종의 실제 어진은 없었다고 한다.# 더 과거, 가령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때 세종의 어진이 소실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두 전란을 겪으면서 화를 면한 어진은 이곳저곳에 있었던 태조와 반쯤 타버린 문종의 어진, 그리고 이이첨이 구해낸 세조의 어진밖에 없었다고 한다. 역사의식 함양을 위해 당시 박정희 정부에서는 표준영정 지정사업을 시작했는데, 이때 세종의 어진을 그리게 된 이가 바로 김기창이었다. 하지만 당시부터 어진의 얼굴을 자신의 얼굴과 흡사하게 그렸다고 하여 논란이 많았다.#

하지만 만원권의 어진은 전주이씨 출신 가수 이석을 모델로 그렸다고 전해진다.
https://youtu.be/Ri8LFWJf4Dg

실제로는 더 후덕하고 수염이 그닥 많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는데, 일단 고기반찬을 좋아했다는 기록이나 이방원이 상왕이 된 이후 세종이 뚱뚱하니 함께 사냥을 나가야겠다고 한 대목을 감안하면 비만 체형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주변 친족들의 인물을 통해 세종의 외모를 상상해본다면 할아버지 태조 이성계나 큰아버지 익안대군, 고모 경신공주, 형 효령대군, 차남 세조의 초상 자료가 남아 있으니 참고할 것. 특히 실록에는 양녕대군, 효령대군, 세종대왕 3형제의 얼굴이 무척 닮았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며, 아버지 태종은 먼저 죽은 세종의 동생 성녕대군에 대해 회상을 하며 "성녕은 내 아들 중 유일하게 얼굴이 다른 녀석이었다."고 회상한 바 있다. 아마 효령대군과 가장 유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그렇다면 수염이 적었다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 효령대군 초상화는 생각보다 숱이 짙은 수염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태조는 수염이 성글다는 말도 있으나, 지금은 실전된 장년기의 어진 사진을 보면 역시 제법 짙은 수염을 확인할 수 있다. 세종의 아들 중 세조는 수염이 매우 적지만, 반대로 문종은 수염이 풍성했다.
파일:세종대왕 동상.jpg
광화문광장에 세워진 동상이다. 이순신 장군 동상 뒷편에 있다. 이 동상은 위의 표준영정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고 하지만 제작자인 홍익대학교 김영원 교수는 "표준 영정을 참고했지만, 애민정신을 담아내기에 부족했습니다. 제 상상력을 불러일으켜서 작품을 완성했습니다."라고 평했다. 역시나 그럴 줄 알았는데...

2014년 9월 4일, KBS 여유만만에 출연한 고종황제의 손자인 황손 이석은 광화문 동상의 경우 현재까지 남아있는 효령대군의 초상화와 자신의 얼굴을 섞어서 만들었다고 말을 했다. # 다만, 황손 이석 씨의 발언은 전반적으로 과장과 허황이 있으니 가려 살펴야 한다. 자세한 이유는 이석 문서로.

이순신 장군 동상에 비해 상당히 큰 데다가 시선이 장군의 뒤통수를 바라보는 터라 묘하게 이순신 장군이 세종대왕을 호위하는 느낌이 난다. 이게 어울리는 것이, 한국에 있는 수많은 왕 중 성웅이 호위할 자격이 있는 왕이라면 세종대왕 정도니 말이다. 아울러서 한국의 문과 무를 대표하는 것이 저 두 위인들이다.

9. 창작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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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직접 쓴 글과 시

꿈속에서 지은 시(夢中作)[62]

[ruby(雨饒郊野民心樂, ruby=우 요 교 야 민 심 락)] 교외에 비 풍족하니 백성 마음 즐겁고
[ruby(日映京都喜氣新, ruby=일 영 경 도 희 기 신)] 한양에 해 비추니 기쁜 기운 새롭다
[ruby(多慶雖云由積累, ruby=다 경 수 운 유 적 루)] 많은 경사 누가 선행 쌓아서라 했던가
[ruby(只爲吾君愼厥身, ruby=기 위 오 군 신 궐 신)] 우리 임금 위해 일신을 삼갈 뿐이네
열성어제[63]
1446년 음력 9월 세종이 꿈에서 지은 시로, 아들인 문종세조에게 전해 주었다. 세종실록에는 없고, 세조실록의 총서에 기록돼 있다. #

실록에서는 '雨饒郊野民心樂/日映京都喜氣新/多慶雖云由積累/只爲吾君愼厥身'로 기록되어 있는데, 열성어제의 주석에 따르면 다른 책에서는 전구의 '累'가 '善'으로, 낙구의 '爲吾'가 '在爲'로 쓰여 있다고 한다. 전구의 뜻은 별 변함이 없지만, 낙구의 뜻은 '우리 임금 위해 일신을 삼갈 뿐이네'가 아닌 '단지 군왕이 처신함에 그 몸을 삼가는데 있나니.'[64]가 되는 것.

11. 기타

12. 어록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 이런 까닭에 어리석은 백성이 이르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그 뜻을 능히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었으니 사람마다 하여금 쉽게 익혀 날로 씀에 편안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훈민정음 언해》 서문
"그는 족보로 된 임금이 아니다. 전주 이씨의 임금이 아니라 하늘이 낸 임금이었다. 그가 정음을 짓고 모든 책의 언해를 만든 것은 모두 민중을 위한 것이었다. 정말 민족 걱정을 한 이요, 정말 인생 걱정을 한 이다. 어쩌면 그런 어진 마음이 이 역사에도 났을까? 공자관중의 역사적 공로를 칭찬하여 "이 사람이 아니었다면 내가 오랑캐가 되었을 것이야!" 했다지만, 오늘 우리야말로 이 사람이 아니고 그냥 짜 먹자는 그놈들만이 있었다면 정말 짐승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함석헌
영민하고 총명했으며 강인하고 과감했다.
무거우며 굳세였고 점잖고 두터웠다.
크고 너그러웠으며 어질고 사랑했다.
공손하고 검소하며 효도하고 우애함은
태어날 때부터 그러했다.
(英明剛果, 沈毅重厚, 寬裕仁慈, 恭儉孝友, 出於天性)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총서
"임금으로 있으면서 백성이 주리어 죽는다는 말을 듣고 오히려 조세를 징수하는 것은 진실로 차마 못할 일이다. 하물며 지금 묵은 곡식이 이미 다 떨어졌다고 하니, 창고를 열어 곡식을 나누어 준다 해도 오히려 미치지 못할까 염려되거늘, 도리어 주린 백성에게 조세를 부담시켜서 되겠는가. 더욱이 감찰을 보내어 백성의 굶주리는 상황을 살펴보게 하고서 조세조차 면제를 안해 준다면, 백성을 위하여 혜택을 줄 일이 또 무엇이 있겠는가."
세종실록 3권, 세종 1년(1419) 1월 6일 신해 6번째 기사 - 강원도 원주 등지의 기민의 조세를 면제해 주니, 변계량이 이의를 제기하다
"관·민간에 폐단이 없도록 힘쓰라. 만일 공평하지 아니한 자가 있거든 법에 의하여 엄중하게 논죄하라."
세종실록 9권, 세종 2년(1420) 8월 14일 경술 1번째 기사 - 여러 도에 손실을 조사하는 경차관을 보내다
정사를 보았다. 근신에게 이르기를,
"해를 거듭한 기근으로 백성들은 간혹 먹을 것이 떨어지는 일이 있는데도 여러 경차관(敬差官)은 대의는 생각하지 아니하고 오직 일 처리에만 마음을 써서, 왕년에 민간에게 대여한 곡식을 징납하기에 너무 심히 하므로 백성들에게 폐해가 되니, 경차관에게 유시하여서 백성이 가난하여 갚지 못하는 자에게는 강제로 징수하지 못하게 하라. 내가 깊은 궁중에 있으므로 민간의 일을 다 알 수 없으니, 만일 이해관계가 민간에게 절실한 것이 있게 되면, 너희들이 마땅히 모두 아뢰게 하라."
세종실록 11권, 세종 3년(1421) 1월 3일 병인 1번째 기사 - 경차관에게 명하여 가난한 백성에게서는 대여한 곡식을 징수하지 못하게 하다
정사를 보았다. 호조 판서 이지강(李之剛)이 계하기를,
"지금 밀과 보리가 익기 시작하여 백성의 식량이 대어 먹을 수 있으니 기민[飢民/饑民]을 진제[振濟]하는 것을 중지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밀과 보리가 익었다 할지라도 나는 굶주리는 백성이 있을까 염려되니 수령들로 하여금 직접 백성의 살림을 조사하게 하여 만일 굶주리는 자가 있으면 구제하게 하라."
했다.
세종실록 11권, 세종 3년(1421) 4월 27일 기미 1번째 기사 - 이지강이 밀·보리가 익는다며 굶주린 백성의 구제를 중지할 것을 건의하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해야만 나라가 평안하게 된다. 내가 박덕한 사람으로서 외람되이 생민의 주가 되었으니, 오직 이 백성을 기르고 무수[撫綬]하는 방법만이 마음속에 간절하여, 백성에게 친근한 관원을 신중히 선택하고 출척[黜陟]하는 법을 거듭 단속했는데도, 오히려 듣고 보는 바가 미치지 못함이 있을까 염려된다."
세종실록 21권, 세종 5년(1423) 7월 3일 신사 3번째 기사 - 백성의 폐해를 구제하는 것 등에 관해 왕지하다
"나라를 다스리는 법은 신(信=믿음)을 보이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세종실록 28권, 세종 7년(1425) 4월 14일 계축 1번째 기사 - 동전과 저화의 교환에 대하여 논의하다
정사를 보았다. 집의 정연(鄭淵)에게 이르기를,
"내가 어제 밤에 경회루(慶會樓)에 나가서 못 가를 거닐었는데, 풍악소리와 노랫소리가 밤새도록 그치지 아니했으니, 요사이 밤에 술 마시기를 좋아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사헌부에서는 어찌하여 금지하지 않느냐. 내가 깊은 궁중에 있으면서도 오히려 이 소리를 들었는데, 그대들은 알지 못했다고 말하겠느냐. 내가 연사가 흉년이므로 자주 연회를 하지 않았으나, 근일에 효령 대군(孝寧大君)이 족친을 모아 연회를 열므로, 내가 술을 보내 주었으며, 공신(功臣)들이 이원(李原)이 사행(使行)에서 돌아온 것을 위로하므로, 내 또한 술을 보냈었다. 비록 내가 이러한 일을 하더라도, 그대들은 직책이 규찰(糾察)에 있으니 마땅히 〈나에게〉 그 까닭을 물어야 했을 것이다. 전조(前朝)의 말기(末期)에 밤에 술 마시기를 좋아하여 그 폐풍이 극도에 이르 렀었다. 사헌부에서는 유의(留意)하라."
하니, 연이 대답하기를,
"평민(平民)의 집은 쉽게 수색 체포할 수 있으나, 조관(朝官)들의 집은 집안이 깊숙하고 지키는 것이 강고(强固)하여서 법을 집행하는 관리도 또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또 낮이면 법리(法吏)로 하여금 살피게 할 수 있으나, 밤은 순찰(巡察)하는 관리의 직책이므로 사헌부에서 감찰할 수 없습니다."
했다. 임금이 말하기를,
"나도 본래부터 탁주(濁酒)를 마시는 자는 붙잡히고, 청주(淸酒)를 마시는 자는 무사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73] 그러나 밤에 술 마시는 폐해는 적지 않으니 사헌부에서는 유의하라."
했다.
세종실록 30권, 세종 7년(1425) 12월 14일 기묘 1번째 기사 - 밤 늦도록 술 마시는 폐풍을 규찰하게 하다
"그대가 유생(儒生)이니 어찌 백성을 다스리는 도리를 모르리요마는, 그러나 내가 친히 가르치는 것은 그것을 잊지 않게 하고자 함이다. 수령이 힘써야 할 정사는 그 종류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백성에게 어질게 하는 것이 중하다. 이것으로써 마음을 가지면 백성을 다스리는 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느냐."
세종실록 30권, 세종 7년(1425) 12월 24일 기축 2번째 기사 - 군위현감 노호가 사조하니 인견하다
"마음이 바르면 사무를 처리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근래에 부정한 짓을 범하는 지방관들이 간혹 있다. 그리하여 나는 일선에서 백성과 가까이할 관리를 선택하여 친히 접견하고 보내는 것이다. 요즈음 흉년으로 인하여 백성이 식량난으로 많은 곤란을 당하고 있으며, 금년은 기후가 고르지 못하여 지극히 걱정되는 바이다. 오히려 나의 정성과 공경이 하늘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할까 염려하여 밤낮으로 두려워하니, 그대들은 오늘 내가 가르치는 말을 받아들여 관직에 있는 동안 부디 조심하여 긴급하지 않은 공사에의 동원은 모두 중지하고, 백성의 생활을 안전하게 하라."
세종실록 31권, 세종 8년(1426) 1월 17일 임자 1번째 기사 -지평해군사 허항·지철산군사 민소생·교하 현감 박도 등이 배사하니 접견하다
"내가 아무리 걱정하고 노력하며 잘 다스리려고 하여도, 근래에 기후가 순조롭지 아니하여, 금년의 농사가 또한 잘 되지 못할 듯하니 더욱 걱정이 더해진다. 그대들은 앞으로 세납과 노역을 경감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편히 살면서 직업에 재미를 가지게 하라."
세종실록 31권, 세종 8년(1426) 3월 29일 계해 1번째 기사 - 판강서현사 김인·경기좌도 첨절제사 이붕 등이 사조하니 인견하다
"한재는 예로부터 있었지만, 그러나 지난 겨울부터 금년 봄에 이르기까지는 기후가 고르지 못하고, 눈이 올 때 눈이 오지 않으며, 비가 올 때 비가 오지 않았다. 무릇 시행함에 힘써 이를 생각했지마는, 그러나 어찌 일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 없겠는가. 내가 요역(徭役)을 가벼이 하고, 부세를 경감하여 백성의 생계를 넉넉하게 하고자 하니, 호조에서는 국가의 용도가 넉넉하지 못하다고 말하지 말고 공물을 견감(蠲減)시켜 마감(磨勘)하여 아뢰라."
세종실록 32권, 세종 8년(1426) 4월 9일 임신 4번째 기사 - 한재가 극심하여 요역을 가볍게 하고 부세를 경감할 방안을 아뢰게 하다
(전략)"내가 본디 술을 즐기지 않으며, 비록 술을 금할 때가 아니더라도 한두 잔에 지나지 않았다. 또 기체(氣體)가 편안하니 비록 술을 마시지 않더라도 무슨 병이 있겠는가. 만약 약으로 먹는다면 염탕(鹽湯)이 좋을 것이다. 나는 들어 따르지 않겠노라."
했다. 이직 등이 다시 계하기를,
"전하께서 오늘 기체가 편안하시다 하여 술을 드시지 않는다면, 아침 저녁으로 풍습(風濕)의 독기가 몸에 맞아서 병이 될는지 알 수 없습니다. 약을 복용하실 때에 술 한 두 잔 드시는 것이 무엇이 불가(不可)하겠습니까. 신 등의 청은 전하께서 술을 흠뻑 마시시고 근심과 두려움을 잊으시라는 것은 아닙니다."
라고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 등은 내가 연전(年前)에 근심과 걱정으로 병을 얻었던 까닭으로, 이같은 말을 하는 것이나, 내가 그 때에는 선(膳)을 반이나 줄였던 까닭으로 병을 얻은 것이요, 지금은 술만 마시지 않을 뿐인데, 어찌 병이 생길 수 있겠는가. 또 다른 사람에게는 술마시는 것을 금하고 나만 홀로 마신다면 되겠는가."
세종실록 32권, 세종 8년(1426) 4월 16일 기묘 1번째 기사 - 이직 등이 임금의 건강을 걱정하여 술을 금하지 말 것을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다
"내가 술을 마신다면 대궐 안에서 모두 술을 쓰게 될 것이니, 어찌 조금 비가 왔다고 해서 금주(禁酒)를 늦출 수야 있겠는가."
"나는 술을 마시면서 다른 사람의 술 마시는 것을 금하는 것이 옳겠는가."
세종실록 32권, 세종 8년(1426) 5월 11일 갑진 2번째 기사 - 대신들이 임금의 풍기를 걱정하여 술을 드시라고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그대는 일찍이 이조(吏曹)의 낭관(郞官)으로 있었으니 이미 나의 뜻을 알 것이다. 내가 재위(在位)한 이래로 하늘의 견책(譴責)이 누차 있었고, 백성들이 그 업에 안정되지 못하고 있으니, 〈이는〉 다스리는 방법에 다하지 못함이 있지 아니한가 생각된다. 그대는 그대 고을에 가거든 요역(徭役)을 가볍게 하고 부세를 박하게 할 것이며, 환상(還上)과 진대(賑貸)에 심력을 다하도록 하라."
세종실록 33권, 세종 8년(1426) 9월 18일 무신 2번째 기사 - 지영월군사 김복항이 사조하니 인견하다
"임금의 직책은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것이니, 만물이 그 처소를 얻지 못하여도 오히려 대단히 상심할 것인데 하물며 사람일 경우야 어떠하겠는가. 진실로 차별없이 만물을 다스려야 할 임금이 어찌 양민(良民)과 천인(賤人)을 구별해서 다스릴 수 있겠는가. 녹비(祿非)가 나타나서 일의 증거가 더욱 명백한 것이 이와 같은데, 권채가 기어코 복죄(服罪)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형벌로서 신문할 것이다."
세종실록 37권, 세종 9년(1427) 8월 29일 갑신 3번째 기사 - 권채와 그의 아내를 형벌로서 신문하도록 하다
"임금의 직책은 백성을 사랑함이 중한 것인데 내가 즉위한 지 10년이 되었으나, 하늘과 땅이 재변(災變)을 보이시니, 내가 백성을 위하여 마음을 쓰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것이 아닌가 근심스럽다. 지금 또 겨울이 따뜻하고 눈이 적으니 내년의 농사가 염려된다. 대신들이 너희들을 수령으로 삼을 만하다고 하므로 이에 보내는 것이니, 마침 진제(賑濟)할 때를 당하여 무휼(撫恤)하는 데에 마음을 쓰라." 하매, 백충이 대답하기를, "하교가 이와 같으시니 신 등이 감히 힘을 다하지 아니하오리까."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네가 마음과 힘을 다하겠다고 말하니 내가 심히 가상하게 여긴다." 했다.
세종실록 38권, 세종 9년(1427) 12월 20일 계유 1번째 기사 - 충주 판관 이백충·금성 현령 서지경·맹산 현감 조전이 사조하다
"내가 술을 들지 않고 금한다면 옳으나, 위에서는 시행하지 않으면서 다만 밑으로 백성들만 금한다면 범하는 사람이 반드시 많을 것이며, 옥송(獄訟)이 번거로울 것이다. 더군다나 형벌을 경하게 하고 금령(禁令)을 늦추는 것도 또한 한재(旱災)를 구(救)하는 한가지의 정책(政策)이니, 이를 정하게 할 것이다."
세종실록 39권, 세종 10년(1428) 3월 24일 병오 2번째 기사 - 황보인이 술을 금하기를 청하나 윤허하지 않다
"사람 중에는 본래부터 술을 먹지 않는 자도 있는데, 내가 비록 술을 먹지 않아도 기운이 스스로 평안하다. 어찌 꼭 마실 필요가 있겠는가."
세종실록 40권, 세종 10년(1428) 윤4월 11일 임진 7번째 기사 - 가뭄 걱정으로 술을 들지 않자 신하들이 술 드시기를 청했으나 완곡히 거절하다
"이제 들으니, 명(明)나라에서 요구하는 매와 검은 여우 등의 물건은, 모두가 환자(宦者) 윤봉(尹鳳)의 소위(所爲)라고 우리 나라에서 뒷공론하는 자들이 간혹 말한다 하는데, 나는 이 말이 혹시나 명나라에 알려질까 두렵다. 또 들으니, 내가 사대(事大)의 예를 지나치게 한다고 말한다는데, 지금 명나라가 사신을 보내오고 상(賞)을 주고 하는 일이 해가 없을 정도로 예우(禮遇)가 융숭함이 일찍이 없었다. 다만 우리 나라는 본래 예의(禮義)의 나라로서 해마다 직공(職貢)의 예를 닦아, 때에 따라 조빙(朝聘)하면 명나라가 이를 대우하는 것이 매우 후했다. 그런데 정성을 다하여 섬기지 않는다면 이것은 크게 불경하는 일이고, 특히 신하된 도리를 다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니, 그럴 수가 있겠느냐."
"몰래 논의하는 자들은 사물의 전체를 살필 줄 모르고, 석등잔(石燈盞)이나 매를 진헌하는 것과 윤봉과 더불어 왕래하는 따위의 일만을 가지고 매양 경솔하게 논의하고 있으니, 나는 이를 매우 그르게 여긴다. 그러나 강제로 금지할 수도 없으니 적어도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들어와서 나에게 말하고 몰래 논의하는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경들은 그리 알라."
세종실록 40권, 세종 10년(1428) 윤4월 18일 기해 6번째 기사 - 사대의 예에 대해 의견이 있을 시는 몰래 논의하지 말고 직접 와서 하기를 당부하다
"내가 들으니 금년의 농사는 조금 잘 되었다 하나, 지난해의 가뭄 때문에 실농(失農)한 백성들은 모두 먹고 살기가 어려울 것이니, 그대들은 금년에 조금 풍년들었다 하여 진휼하는 데 게으르지 말고, 유이(流移)하는 백성들을 더욱 무휼(撫恤)하라. 수령(守令)의 직임이 비록 많으나, 요지는 구휼하는 데 지나지 않을 따름이다. 각기 삼가서 행하라." 했다.
세종실록 41권, 세종 10년(1428) 7월 15일 을축 2번째 기사 - 안음 현감 군자용·여산 현감 박질·임실 현감 이존충 등이 사조하다
"정부·육조와, 각 관사와 서울 안의 전함(前銜) 각 품관과, 각도의 감사·수령 및 품관으로부터 여염(閭閻)의 세민(細民)에 이르기까지 모두 가부(可否)를 물어서 아뢰게 하라."
세종실록 47권, 세종 12년(1430) 3월 5일 을사 4번째 기사 - 호조에서 공법에 의거하여 전답 1결마다 조 10두를 거둘 것을 건의하니 모든 이에게 그 가부(옳고 그름)를 물어 아뢰게 하다
"역대에 술로써 나라를 망친 일이 많았다. 나라만 그러할 뿐 아니라 사람 한 몸에도 그러하다. 내가 주계(酒戒)를 지어서 대소 신료(大小臣僚)를 경계하고자 하니, 집현전으로 하여금 역대의 사적(事跡)을 뽑아 적어서 아뢰라."
세종실록 48권, 세종 12년(1430) 5월 28일 정묘 6번째 기사 - 김종서에게 주계를 짓고자 한다고 이르다
"인군의 직책은 오로지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다. 지금 백성의 굶주려 죽는 것이 이와 같은데, 차마 여러 도에서 바치는 반찬[膳]을 받을 수 있는가. 전에 흉년으로 인하여 이미 하삼도에서 바치는 반찬을 없애고, 오직 경기·강원 두 도만 없애지 않았었는데, 지금 듣자니 경기에도 굶주려 죽는 자가 또한 많다니, 내가 몹시 부끄럽다. 두 도에서 바치는 반찬도 아울러 없애는 것이 어떠한가."
세종실록 76권, 세종 19년(1437) 1월 22일 임자 3번째 기사 - 경기의 각관·전에서 올리는 반찬을 정지시키다
통신사(通信使)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고득종(高得宗)이 하직하니, 임금이 불러 보고 일본 국왕(日本國王)에게 글을 보내기를,
"생각하건대, 우리 나라가 귀국과 이웃하여 대대로 구호(舊好)를 두터이 했으나, 다만 바다가 멀리 막히어 오래 교빙(交聘)을 궐(闕)했다. 이제 신하 첨지중추원사 고득종(高得宗) 등을 보내어 애오라지 먼 정[遐悰]을 표한다. 변변치 못한 토산물을 별폭(別幅)과 같이 갖추었으니, 받아 두기를 간절히 바란다. 오직 때를 좇아 자중(自重)하기 바란다."
했다.
세종실록 86권, 세종 21년(1439) 7월 11일 정사 2번째 기사 - 통신사 고득종을 불러 보고 일본왕에게 글을 전하다
"너의 자질이 아름다움을 아노니 하지 않으면 그만이거니와, 만약 마음과 힘을 다한다면 무슨 일인들 능히 하지 못하리오."
세종실록 90권, 세종 22년(1440) 7월 21일 신유 2번째 기사 - 함길도 경력 이사철이 하직하다
(전략)"백성을 다스리는 사람은 마음을 다하지 아니할 수 없다.[74] 너는 가서 힘쓰라."
세종실록 94권, 세종 23년(1441) 12월 17일 기유 2번째 기사 - 임지로 떠나는 경상도 도사 권기를 인견하다
"우리 나라의 노비의 법은 상하의 구분을 엄격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강상[綱常]이 이것으로 말미암아 의지할 바를 더하는 까닭에, 노비가 죄가 있어서 그 주인이 그를 죽인 경우에 논의하는 사람들은 상례[上例]처럼 다 그 주인을 치켜올리고 그 노비를 억누르면서, 이것은 진실로 좋은 법이고 아름다운 뜻이라고 한다. 그러나, 상주고 벌주는 것은 임금 된 자의 대권[大權]이건만, 임금 된 자라도 한 사람의 죄 없는 자를 죽여서, 선한 것을 복 주고 지나친 것을 화 주는 하늘의 법칙을 오히려 함부로 하지 못하는 것이다. 더욱이 노비는 비록 천민이나 하늘이 낸 백성 아님이 없으니, 신하된 자로서 하늘이 낳은 백성을 부리는 것만도 만족하다고 할 것인데, 그 어찌 제멋대로 형벌을 행하여 무고한 사람을 함부로 죽일 수 있단 말인가. 임금된 자의 덕은 살리기를 좋아해야 할 뿐인데, 무고한 백성이 많이 죽는 것을 보고 앉아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금하지도 않고 그 주인을 치켜올리는 것이 옳다고 할 수 있겠는가. 나는 매우 옳지 않게 여긴다." (후략)
세종실록 105권, 세종 26년(1444) 윤7월 24일 신축 3번째 기사 - 노비를 함부로 구타하거나 죽이지 말 것을 형조에 전지하다
"왜인·야인을 접대하는 것은 관계되는 것이 가볍지 않은데, 평안한 것이 몸에 배어 해가 오래고 날이 깊어 모든 일에 게으르고 늦어질까 두려우니, 마땅히 삼가 조심하기를 항상 하루같이 하여 혹시라도 조금도 허술함이 없도록 하라."[78]
세종실록 127권, 세종 32년(1450) 2월 14일 기축 3번째 기사
정창손: 삼강행실(三綱行實)을 반포한 후에 충신·효자·열녀의 무리가 나옴을 볼 수 없는 것은, 사람이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이 사람의 자질(資質) 여하(如何)에 있기 때문입니다.[79]
세종: "이따위 말이 어찌 선비의 이치를 아는 말이겠느냐.[80]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용속(庸俗)한 선비이다." (후략) 내가 만일 언문으로 삼강행실(三綱行實)을 번역하여 민간에 반포하면 어리석은 남녀가 모두 쉽게 깨달아서 충신[81]·효자·열녀[82]가 반드시 무리로 나올 것이다."[83]
세종실록 103권, 세종 26년 2월 20일
"역대 군주들 가운데 불교를 숭배해서 오래 다스린 분도 있었고, 불교를 배척해서 짧게 다스린 분도 있었다. 신진 사류가 어찌 화복과 존망의 이치를 안다고 그러느냐."
세종대왕이 말년에 불교에 귀의하면서 했던 발언으로 알려져있다. 실제로, 조선 왕조는 고려 왕조의 주축을 이루고 있었던 불교 세력에 대해서는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강하게 탄압을 했지만 백성들 개개인의 일상생활에 녹아있던 불교 의례와 풍습 자체를 반대하고 탄압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세종대왕은 수양대군과 같이 불교와 관련된 서적으로 유명한 석보상절을 집필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성계는 개인적으로 무학대사를 스승으로 삼아 존경했고, 왕비가 죽었을 때는 그 위패를 모실 사찰을 짓기도 했다. 이성계의 이러한 불교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는 세종대왕에게도 그대로 이어졌고, 비가 오지 않거나 전염병이 돌 때 기꺼이 사찰을 방문하여 불공을 드리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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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한국갤럽이 창립 30주년을 맞이하여,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인이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알아보는 한국인이 좋아하는 조사 시리즈를 기획해 2004년부터 5년 주기로 발표하고 있다.
2014년
※ 2014년 한국갤럽한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선정.
1위 2위 3위 4위 5위
이순신 반기문 박정희 노무현
6위 7위 8위 9위 10위
정주영 이건희 김수환 김대중 김구
2019년
※ 2019년 한국갤럽한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선정.
1위 2위 3위 4위 5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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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위 7위 8위 9위 10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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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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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위 17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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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 2024년 한국갤럽한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선정.
1위 2위 3위 4위 5위
이순신 세종대왕 박정희 김대중
6위 7위 8위 9위 10위
김구 부모님 정주영 안중근 유관순
같이 보기: 한국인이 존경하는 인물, 좋아하는 스포츠선수, 좋아하는 소설가, 좋아하는 탤런트, 좋아하는 영화배우, 좋아하는 가수, 좋아하는 노래, 좋아하는 예능인, 좋아하는 유튜버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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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희 유관순 안창호 방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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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접적으로 언급된 인물/단체
민족대표 33인 김좌진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1]
기울임체 는 부정적으로 언급된 인물이다.
[1] 실제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후대 인물 허균이 창작한 의적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논란이 있지만 간접적인 언급으로 소설 홍길동전에서 대중화된 의적 이미지를 노래 가사로 사용했으므로 저자 허균을 생각하고 언급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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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73년 김기창 作. 상상 어진으로 실제 어진은 병자호란 당시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화백인 김기창이 자신의 얼굴과 흡사하게 그렸다는 논란이 있다.[2] 율리우스력 7월 6일[A] [A] [B] [휘] 정확한 글자가 보일시(示)변을 쓰는 祹인지 옷의변을 쓰는 裪인지 분명하지 않다. 양녕대군, 효령대군 등 태종의 아들들은 모두 보일시(示)변의 글자를 사용했으므로 세종의 휘 역시 보일시변의 祹로 봄이 자연스러우나, 정작 『세종실록』 총서에는 세종의 휘를 일관되게 옷의변의 裪로 적고 있다. 여기서는 공식 기록을 우선시하여 후자를 따른다.[7] 19남 4녀라는 학설도 있다. 이당(세종) 문서 참조.[8] 재위 초에 첫째 정소공주가 13살에 요절했고, 재위 종반엔 광평대군이 요절한 뒤 평원대군도 잇따라 요절하면서 세종과 소헌왕후는 큰 슬픔에 빠졌고, 곧 불교 사찰을 찾아다니며 명복을 빌었다. 아내 소헌왕후마저 죽으면서 생애 종반에는 아예 불교로 개종했다. 조선의 건국 이념은 성리학이었기에 유학자들의 반발이 거셌으나, 세종은 이에 개의치 않고 궁궐 내에 법당을 만들고 불사 중창과 법회에 끝내 참석했다.[9] 외모에 대한 기록에서 매우 뚱뚱했다는 기록과 세종실록에 밥상에 맨날 고기 반찬만이 들어가 있고 당뇨, 고혈압, 고지혈증 등 각종 성인병에 걸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기록이 있고 말년에 시력을 잃은 이유도 당뇨병 합병증으로 추정될 정도로 비만이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세종의 체중은 75kg 이상으로 추측된다. 말년에는 살이 빠졌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 또한 당뇨의 중증 합병증 중 하나이므로 기본적으로는 몸무게가 많이 나갔을 것이다.[10] 가전충효 세수인경(충과 효를 가문에 전하고 어질고 공경하는 정신을 지켜라). 본 글씨는 전의 이씨 이정간 공에게 하사한 것이며, 전의 이씨의 대표적 가훈.[11] 현대의 '어리석다'가 가지는 부정적인 뉘앙스와는 거리가 있으며, 한자와 한문 교육을 받지 못한 '배우지 못한 백성' 정도로 풀이된다.[휘] [13] 정비 소생을 대군, 빈 소생을 군으로 봉하는 제도는 태종 대에 완비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차 왕자의 난 이전에는 군, 이후에는 공으로 기록되어 있다. 세종은 태종이 정안군일 때 태어났다.[14] 장남 양녕대군 이전에도 3명의 아들들이 있었으나 유아기에 사망하여 세지는 않는다. 따라서 세종은 3남이다. 이는 세종실록 1권 총서에서 확인 가능하다.태종 공정 대왕(太宗恭定大王)의 셋째 아들[15] 송나라의 구양수소식이 서로 나눈 쪽편지를 모아 엮은 책으로, 중국에서는 이미 유실되었는데 한국에는 고려 때 전래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16] 태종의 장녀인 정순공주의 남편[17] 신의왕후 한씨[출전1] 태종실록 태종 16년(1416) 3월 20일 4번째 기사.[출전2] 태종실록 태종 16년(1416) 1월 9일 2번째 기사[출전3] 태종실록 태종 16년(1416) 2월 9일 2번째 기사[21] 한마디로 '너네 아빠처럼 형제를 제끼고 왕위에 오르는 게 어떻겠냐'고 부추긴 것.[22] 태종실록 태종 15년(1415) 12월 30일 3번째 기사다. 과대 해석일 수도 있겠으나 태종이 여기서 웃었다는 것은 태종도 내심 셋째를 세자로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암묵적으로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23] 사실 아버지인 이방원 역시 다섯째임에도 불구하고 대신들에게 세자 자리를 두고 언급된 적이 있다. 이방석이 세자에 오르기 전에 대신들에게 언급된 건 사실상 장남이었던 이방과와 공이 가장 큰 이방원이었다. 셋째인 이방의와 넷째인 이방간은 고려도 안되었다는 말이다.[24] 조선에서 적장자로서 왕위에 오른 사례는 세종까지는 해당이 안 되다가 적장자 이향이 조선 제5대 왕 문종에 오르면서 조선에서 처음으로 적장자 왕이 나오게 된다. 그 후로는 적장손 이홍위까지 조선 제6대 왕 단종에 오른다.[25] 태종은 사실 정종의 양자 자격으로 왕위에 올랐다. 정종에게는 서자들만 있었을뿐 적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정안군 이방원은 정종의 후계자로 지명될 때 세제(弟)가 아닌 세자(子) 책봉을 받았다. 신하들은 정안군이 정종의 양자이기에 앞서 아우이기 때문에 세제로 책봉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많았지만 정안군은 세자로서 책봉받는 안을 고집했고 이를 관철시켰다. 이는 정안군 자신이 적장자로서 왕위를 잇겠다는 의지의 발로로 해석된다.[26] 하지만 결국 손자 중에 자신을 쏙 빼어닮은 세조가 등장했고 증손자 단종은 그 손자의 손으로 폐위되어 죽었다. 적어도 태종은 명분이라도 있었지만, 세조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27] 여기서 세자가 조금이라도 정신을 차리고 왕세자로서 모범을 보여주었다면 프레임은 '삐뚤어지는 왕세자와 총명하고 반듯한 셋째 왕자'가 아니라 '정상적인 적장자와 꼬투리 잡고 음해하는 왕자'로 바뀌어서 오히려 충녕대군에 대한 의심이 가해졌을지도 모르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였다.[28] 그래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3권 태종실록 후기에서도 충녕대군이 알고보면 야심가였을지도 모른다는 평이 있다.[29] "지금 엄마랑 아빠는 네 막내동생 죽은 것 때문에 가슴이 찢어지는데 그러는 동안 큰형인 넌 활이나 당기며 놀아?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냐?"[30] 민무구, 민무질, 민무휼, 민무회[31] 일단 위기를 모면하려면 외삼촌들을 외면하는 쪽이 맞기는 했다. 태종의 스타일상 뒤치기 안 해도 알아서 족쳐버릴 것이고 민무회가 한 말은 신하가 세자를 핍박한 것이라 밝혀도 아쉬울게 없다. (괜히 가만히 있다가 그 발언이 심문 중에 나오면 '뭐가 켕기길래 구태여 숨길 필요가 없는 말을 숨겼냐.'는 의심만 또 살 수 있었다.) 사태가 잠잠해진 뒤 행동을 잘 했다면 태종이 "어라? 쟤 외삼촌들 때려잡은 게 옳았던 건가?" 생각하게 하여 세자 자리를 보전할 계기를 마련할 수도 있었다. (그 후에도 계속 사고를 쳤다는 게 함정이지만 나중에 사도세자죄인으로 몰려 죽은정조영조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고 그 결과 그대로 영조의 뒤를 잇는데 성공했는데, 정조는 형제가 있었으나 자신만이 적자였고 양녕대군은 유일한 적자는 아니었다는 게 좀 다르다.) 양녕대군 입장에서는 여기에 끼어드는 것 자체가 매우 곤란했는데 태종이 칭병하며 양위 연극을 할 때 민무구와 민무질이 '왕에게는 세자 외에 다른 아들은 필요없다'고 한 것을 (방석의 선례가 있어 적장자와 적장자 계승의 중요성을 거칠게 말했을 뿐인데) '효령대군과 충녕대군을 죽여야 한다'는 뜻이라고 몰아붙였기 때문이다. 어머니인 원경왕후마저 이거 때문에 명분에서 밀려 구해주지 못했는데 세자라고 답이 있었을까?[32] 일반적으로 출가해 스님이 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불교를 멀리하려는 조선의 왕족인만큼 대놓고 출가하지는 못했다.[33] 태종 18년(1418) 6월 17일 태종이 양녕대군을 폐세자시키고 충녕대군을 새롭게 세자로 책봉하는 글 첫머리에 나오는 말이다. 너그럽고, 그릇이 크고, 품위가 있으며, 진중하다는 뜻이다.[34] 특히 성리학을 근본 사상으로 하는 조선에서 세자 책봉을 점복으로 한다면 큰 오점이기에 그만 둔 것으로 보인다.[35] 세종 집권 당시의 여러 가지 망나니 짓은 백성들 사이에서 양녕대군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위기에 처하지 않기 위한 (역모에 엮인다든가 하는) 나름의 처신이라는 설이 있다. 죽을 때까지도 망나니 짓을 한 걸 보면 그냥 본인 성정대로 살았다고 보는 게 타당하지만, 망나니 짓을 하며 세도가의 매의 눈을 피했던 흥선대원군처럼 존재 자체로도 권력의 잠재적 위험요소가 되는 왕족에게 있어 숙청을 피하기 위한 처신은 마냥 조용히 있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점을 보면 본인이 이를 의도했든 아니든 나름대로 천수를 누리고 가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36] 선위 파동 때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은 신하들은 충성심이 부족한 것으로 판단해 숙청의 대상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37] 이미 강상인 사건으로 경상도유배를 가 있었는데 이유는 병조판서였기 때문.[38] 심정과 의논한 것이 왜 문제냐고 할 수 있는데 심정은 심온의 동생이었다. 세종 즉위년(1418)에 심정은 의흥삼군부 중군 동지총제로 무관이였고 이관은 이조참판이었다.[39] 나중에 창작된 건지는 몰라도 세종이 왕자 시절에 튀는 행동을 자주 하자 박은이 "사위 단속 좀 하십시오." 했는데 심온이 무시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사실이라면 외척에 극도로 민감한 태종의 마음을 읽지 못한 게 잘못이라면 잘못이라 할 수 있겠다.[40] 현대로 비유하면 핵심 우방국의 고위 외교관이 한국을 방문해서 중요한 외교문제를 해결하고 귀국하자마자 심각한 국기문란 혐의로 중형을 선고받고 가족들도 흩어진 것이다. 단순히 의아해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정도로 심대한 문제가 있는 인사를 선정해 보냈다는 소리니 엄청난 결례가 되며, 자칫 그 인사와 우리 정부 사이의 내통, 밀약 혐의라도 불거진다면 내통을 넘어 본격적인 외교분쟁으로 이어질 문제다.[41] 사실 중종반정 직후 연산군이 죽었는지도 몰랐던 걸 보면 홍무제 이후로는 명나라의 정보력도 생각보다 높지 않았던 것 같다. 홍무제의 정보력에 대해서는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문서로. 이는 조선의 내정에 간섭은 안 하지만 상황은 빠삭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초기의 청나라와 대비된다.[42] 태종이 죽을 때에 아내인 원경왕후 사망시에 고기를 못 먹어 고생하던 아들 세종을 위해서 상중(喪中)이라도 꼭 고기를 먹이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유학적으로 말도 안 되는 말이지만 태종의 아들 사랑은 이만큼 각별하다. 이런 아버지의 결정을 본인이 뒤집는다는 것은 정말로 어려웠을 것이다.[43] 선왕 대의 단호한 폐비 결정으로 정통성에 문제가 있었던 연산군, 경종 등은 어머니들을 조금이라도 복권하려고 했다. 이들은 피바람이라는 무리수를 써서라도 목적을 이뤄냈던 반면 세종은 그러지 않았다. 정조 또한 사도세자의 복권을 관철하기 위해 애를 썼으며 작게나마 복수도 행했는데 말이다. 30년간에 걸친 세종의 숙청 없는 정치란 조선 역사를 통틀어서도 참 특이한 일이다. 물론 아버지 태종이 숙청할 만할 인물들을 다 쓸어버린 것도 크다[44] 이는 오히려 세종의 권위를 드높이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언제든지 꺼내들 수 있는 칼을 쥐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존 대신들에게 견제가 되기는 충분하기 때문이다.[45] 4남 임영대군을 임신 중[46] 어쩌면 문종이 심온을 사면시킨 것도 이같은 어머니의 마음 고생을 보아서 그랬을지도 모른다.[47] 태종의 뜻에 따라 충녕대군을 세자에 책봉토록 건의했던 인물.[48] 제2차 왕자의 난 공신(좌명 4등).[49] 제1차 왕자의 난 공신(정사 2등).[50] 서울시립대 사학과 이익주 교수는 KBS 역사저널 그날 시즌 2 155회에서 이 사건을 가리켜 "고려의 정치 체계에서 조선의 정치 체계로 변화하는 계기를 마련한 사건"이라 평한다.[51] 노비 1명당 말 1필과 가치가 비슷했다고 본다.[52] 능력있는 신하를 끝까지 써먹는 세종의 인사스타일 상, 조말생을 용서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신하들과 힘겨루기를 하면서도 세종은 끝내 조말생의 유배를 풀고 관직에 복귀시켰지만, 이 사건의 여파로 정승의 반열에 오르지 못했고, 조말생 졸기의 사관평에도 이 뇌물 사건을 흠으로 잡고 있다. 하여간, 말년엔 죽기 몇개월 전 까지 여러번 낸 사직서도 전부 불허되고 끝내 죽는 바람에 우스갯소리로 종신노역형을 받았다는 농담도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농담이니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말자.[53] 한성의 시전을 관리하는 관청.[54] 금성대군은 1426년 3월 28일에 태어났으므로 이 때 소헌왕후는 말 그대로 만삭이었다.[55] 즉위식도 만삭인 채로 치렀다. 소헌왕후가 애를 많이 낳기는 했다. 실제로 조선 때에도 세종을 제일 명군으로 보았는데 최고의 왕비 역시 소헌왕후로 보았다.[56] 감옥과 죄수들을 관리하는 관청[57] 한국사 최초의 소방서[58] 소방관은 금화군, 물을 길어나르는 인원을 급수비라 명명하며 금화도감에 소속시켰다. 이후 인조가 필요없다는 이유로 폐지했다.[59] 세종대왕은 재위 초반(1424)에 이미 큰딸 정소공주를 잃었던 아픔을 겪었었다.[60] 참고로 연도로만 보면 1년 차이지만, 실제로는 고작 1달 차이였다. 1달 사이에 두 아들을 연이어 보낸 것.[61] 최근에는 조졸한 19번째 아들이 있다는 주장이 있다. 이당(세종) 문서 참조.[62] '몽중작(夢中作)'이라는 제목은 열성어제에서 붙인 것으로, 세조실록에서는 제목이 없다.[63] 강진숙 번역본[64] 박대종 번역본[65] 태종의 형이자 고려 말에 태조와 함께 수많은 전장을 누빈 무인이었던 정종조차 3년상을 치르며 몸이 야위었을 정도인데, 그다지 몸이 강골은 아니었던 세종이 3년상을 치른다면 건강 악화를 버티지 못했을 건 자명했다.[66] 이영훈 계열의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은 식민지 근대화에 대해 객관적, 학술적인 연구를 추구했으나 가면 갈수록 조선이나 한국인들을 맹목적으로 비하하고 극도로 주관적인 관점에서 일본 제국을 찬양하는 모습을 보여 비판받고 있다. "일본 학계"의 주류적 연구 결과를 보면 조선인 착취를 떠나서 자국민 착취가 전근대 국가 이상으로 심했던 것이 일본제국이다.[67] 덕종(18세), 광해군(18세), 효종(27세)[68] 일본에서 일본원숭이를 종종 애완동물로 기르기도 하였으니 역사시대 한반도에 원숭이가 자생했다면 분명 애완동물로 길러졌을텐데 역사시대 한반도의 애완 원숭이에 대한 기록이 적고 야생에서는 멸종했으나 가축으로 번성하고 있는 단봉낙타의 사례를 볼때 애완용으로 길러졌다면 야생에서는 멸종할지언정 종 자체가 한반도에서 멸종할 수는 없다.[飢民/饑民] 굶주린 백성.[振濟]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을 구제함.[撫綬] 어루만져 편하게 함.[黜陟] 못된 사람을 내쫓고 착한 사람을 올리어 씀.[73] 탁주, 즉 막걸리는 평민 백성들도 구할 수 있는 반면 청주, 즉 맑게 거른 술은 탁주에 비해 많은 양의 곡식이 필요하므로 양반가에서나 마실 수 있는 술이었다. 즉 똑같이 술을 마셔도 평민은 붙잡히고, 높으신 분들은 잡히지 않는다는 것을 에둘러 말씀하신 것이다.[74] 디시인사이드에서 역대 한국 대통령 등을 평하는 글이 올라오면 자주 인용되는 말이기도 하다.[綱常] 삼강(三綱)과 오상(五常). 곧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道理).[上例] 위에 든 예시.[大權] 국가를 통치하는 권한.[78] 세종이 세상을 뜬 것은 17일이지만 세종실록 중에서 세종 본인의 발언으로서는 마지막으로 기록된 말이다. 그리고 이 말은 진짜로 일본인만주족이 작정하고 대규모로 조선을 치면서 이루어졌다.[79] 사람의 타고난 자질에 따라 훌륭한 사람이 결정되니, 문자의 반포(교육)는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이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격언을 증명하듯 현대에서도 나향욱 개돼지 망언 사건으로 재현되었다. 당시 조선은 중국에 사대주의적이었으므로, 그의 발언은 사대주의의 영향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80] 그의 성품이 상냥했다는 평가에 따르면 극대노 그 자체. 착한 사람이 화 내면 무섭다는 말이 있듯이, 상냥한 호랑이의 콧털을 건드린 것이다. 조선의 왕이라는 입지와 신하인 정창손 입장에서는 문자 그대로 모가지가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지만, 파직으로 끝났다. 세종은 원래 능벌주의를 경계하던 왕이었으며, 이 때문에 극형에 처한다든가 하는 일화가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 역시 정권 말기에 죄인들을 집단으로 사형에 처한 일화가 있다.[81] 왕과의 지위를 따지지 않고 설령 목이 날아간다 해도 진심으로 충성하고 충고하는 신하[82]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는 여성이었다. 물론 시대 격차는 감안해야 한다.[83] 세종, 정창손의 훈민정음 무위론을 반박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