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에 개봉한 영화에 대한 내용은 유관순(1959년 영화) 문서
, 2019년에 개봉한 영화에 대한 내용은 1919 유관순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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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02년 12월 16일[1] |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 (現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유관순생가길 18-1[2]) | |
사망 | 1920년 9월 28일[3][4] (향년 17세) |
경기도 경성부 현저동 서대문감옥 (現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서대문형무소역사관) | |
본관 | 고흥 류씨[5] |
부모 | 아버지 유중권[6], 어머니 이소제 |
형제자매[7] | 언니 유계출 오빠 유우석[8] 남동생 유인석 남동생 유관석[9] |
신체 | 151.5cm[10][11] |
학력 | 이화학당 고등부 (1학년 재학 중 순국) 이화여자고등학교 (명예졸업)[12] |
종교 | 개신교 (감리회)[13] |
서훈 | 건국공로훈장 단장[14] 추서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201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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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colbgcolor=#0047A0> 유관순 표준영정 변천 과정 | |
<colbgcolor=#0047A0> 빙그레✕디마이너스원 독립운동 캠페인 '처음입는광복' 유관순 영정 | |
국가보훈부 제작, 〈잊지 말아야 할 독립운동가-유관순〉 |
내 손톱이 빠져 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15]
오 하나님, 이제 시간이 임박했습니다. 원수 왜(倭)를 물리쳐 주시고, 이 땅에 자유와 독립을 주소서. 내일 거사할 각 대표들에게 더욱 용기와 힘을 주시고, 이 민족의 행복한 땅이 되게 하소서. 주여, 이 소녀에게 용기와 힘을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이자 열사. 여성 독립운동가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다.2. 생애
1902년(광무 6)[16]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현재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에서 유중권과 이소제의 3남 2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17]충청남도 공주에 있는 영명학당에서 수학하다가 1916년, 미국 여성 감리 교회 선교사 사애리시(史愛理施)[18] 부인의 권유로 서울의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교비생[19]으로 편입학했다. 당시 이화학당은 대부분의 학생들이 기숙사 생활을 하는 학교였고, 집이 멀었던 유관순도 자연히 가족과 헤어져 기숙사에 살며 공부하게 되었다. 재학 중에는 교내 학생 자치 단체 이문회(以文會)에서 활동하며 하란사 선생의 지도를 받았다.
유관순이 이화학당 고등과 1학년에 진급한 1919년, 3·1 운동이 시작되었다.[20] 교장 룰루 프라이[21]는 학생들의 안전을 염려하여 참가를 말렸지만, 학생들은 학당의 담을 뛰어넘어 기어이 전원이 참가했다. 이 여파로 1919년 3월 10일에 일제는 전국 모든 학교들에 강제로 휴교령을 내렸고, 함께 이화학당을 다니던 사촌언니 유예도와 함께 고향 천안으로 귀향해 만세 운동에 참여했는데,[22] 3·1 운동 중 '천안 아우내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23][24] 만세 운동 중 유관순의 부모가 모두 일본 헌병에게 살해당했고, 이 과정에서 유관순도 일본 앞잡이 노릇을 한 친일파 조선인 정춘영에 의해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유치장에 갇힌 후 열흘 만에 공주지방법원으로 이송된다. 그리고, 공주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는데, 재판 당시 "다시는 독립운동을 하지 않고, 대일본제국 신민으로서 살아가게 될 것을 맹세할 것인가?" 하는 일본인 재판장의 질문에 유관순은 "나는 왜놈 따위에게 굴복하지 않는다! 언젠가 네놈들은 반드시 천벌을 받고 반드시 망하게 되리라!"라며 재판장에게 의자를 던졌다. 이에 법정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징역 5년형이라는 중형이 내려졌다. 하지만, 이는 법에 따른 정상적인 형량이 아니었고, 이에 유관순 열사는 지인들의 도움으로 항소하여 복심 법원에서 3년형으로 줄어들게 되었다.[25] 이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뒤 옥중에서도 일제 항거를 한 지 1920년, 3·1절 1주년 기념으로 '대한 독립 만세'를 불러 일제에게 고문을 받았음에도 끝까지 항거했다. 이후 1920년 4월, 동경 이왕세자와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 여왕의 결혼 기념 특사로 1년 6개월로 감형되었다.[26]
<colbgcolor=#0047A0> 서대문 형무소 수감 시절 유관순[A] |
2013년에 밝혀진 바로는 유관순은 옥사가 아니라 일본 헌병들에게 장살을 당해 사망했다고 한다. 쉽게 말해 일본 헌병들에게 맞아 죽었다는 것. # 하지만, 고문을 당하다 죽었는지, 고문 후유증으로 죽은 것인지, 따로 죽인 것인지는 불확실하다.연합뉴스 2019년 3월 8일자 기사 - [팩트체크]② 유관순 열사 고문·순국에 대한 사실 왜곡[29][30]
서대문형무소 측이 시신을 반환하기 이전에 '일곱 토막'을 냈었다는 말도 인터넷과 위인전 등지에서 거진 전설로 받아들여지는데, 사실인지 아닌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당대 수기에는 전혀 나오지 않고, 윤봉춘이 1949년에 만든 영화 〈유관순〉에서 처음 비롯된 말이다. 소설가 조흔파도 《왜경고문비화》에서 '시신 훼손설'을 주장했으며, 김삼웅 독립기념관장도 2006년 서대문형무소역사관 8주년 심포지엄에서 유관순 시신 훼손설을 언급했다. 유관순이 생전 다녔던 매봉교회 지하 전시실에서는 석유 상자 사진이 유관순 시신을 담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언론인 정운현은 이정은 저서 등을 인용해 '시신 훼손설'을 반박했고, 오늘날과 같이 시신을 냉동했다가 넘겨주거나 방부 처리를 하는 시대가 아니라서 일시 가매장 후 넘겼다고 주장했다.(다음 스토리펀딩 글)
결국 1920년 10월에 시신을 반환받아 10월 14일에 장례를 치렀고, 유해는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일본이 이후 이태원동 공동묘지를 군용기지로 사용함에 따라 미아리 공동묘지로 이장할 예정이었으나, 안타깝게도 이미 부모가 전부 순국하고 오빠가 투옥되는 등 여러 사정들로 인해 무연고 묘역이 되어 버린 터라 파묘 이후 유실되었고, 정황상 다른 무연고자 유해들과 같이 합장묘로 옮겨졌을 것으로 보인다.[31] 2018년 이화여고 동창회와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 등의 주도 하에 합장묘 옆에 '유관순열사 분묘 합장 표지비'가 세워졌다. #
반면,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에서 1989년 10월에 매봉산 기슭에 초혼묘를 만들었다. 현재 유관순의 묘에 있는 석관에는 시신이 들어 있지 않다.[32][33] 비슷한 사례로는 안중근 의사가 있다.[34]
유관순이 아우내(併川; 現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의 천안 아우내 만세 운동을 계획·지휘하기는 했지만, 현재의 유명세는 후세 사람들이 3·1 운동의 아이콘적인 존재로 유관순을 지목해 그 가치를 끌어올린 덕분으로 보는 게 적절하다. 당대의 공판 기록을 보면, 다른 사람이 실질적인 주동자로 나오는데. 그 사람이 훗날 미군정청 경무부장과 민주당 당수 등을 지낸 유석 조병옥의 부친 조인원이다.[35]
1962년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으로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공로훈장 단장(現 건국훈장 독립장, 3등급)이 추서되었다. 1972년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36] 용두리와 탑원리에 있던 유관순 열사의 생가터가 사적 제230호로 지정되었으며, 생가 옆에 매봉교회를 짓고, 유관순의 유지를 받들어 기념하고 있으며, 매년 2월 28일에 3·1절 경축 전야제를 개최한다. 유관순 열사 사적지 참고 사진 #1 #2 1974년 유관순의 모교인 이화여자고등학교에는 그의 이름을 딴 '유관순 기념관'이라는 강당이 지어졌으며, 1985년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가 설립되었고, 1996년 이화여자고등학교는 유관순 열사에게 명예 졸업장을 주었다.
2019년 2월 26일, 국무회의에서 유관순 열사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을 추가로 추서할 것을 의결했다. 상훈법상 훈장은 같은 공적으로 중복 수여할 수 없으나, "광복 이후 3·1 운동과 독립운동의 상징으로서 국민 통합과 애국심 함양에 기여하고, 비폭력·평화·민주·인권의 가치를 드높여 대한민국의 기초를 공고히 하는 데 기여했다."라는 것을 독립운동에 대한 기여와 별도의 공적으로 인정하여 대한민국장을 추가로 추서하기로 했다. 정식 추서는 2019년 3월 1일 제100주년 3·1절 기념식장에서 훈장을 유족에게 전달함으로써 이루어진다.[37] 시민 단체와 지역 정계의 격상 요구/학계의 신중론은 꾸준히 대립했고, 3·1절 100주년 격상 이슈는 1월 28일 문재인 대통령과 이낙연 총리가 "이번 3·1절을 맞아 유 열사의 서훈을 상향 조정하면, 국민께 좋은 선물이 될 것."이라는 취지의 대화를 나눴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중앙정계서 현실화 가능성이 떠올랐다. 그리고, 유관순 열사 서훈등급 격상을 위한 국회 대토론회가 국회 도서관대강당에서 2월 13일에 열렸다. 그러나 이 토론회에서도 서훈 격상 반대 측의 발표가 나오자, 매국노 운운하며, 야유로 뒤덮이는 바람에 제대로 된 토론조차 되지 않았다. 보훈처는 다른 독립운동가도 국민적 열망이 있으면, 격상 논의를 할 수 있다고 밝혔는데, 이는 인기와 지명도로 격상을 결정했다는 사실의 재확인에 불과하다.[38]
3. 평가
유관순이 훌륭한 활동을 하고, 순국한 것은 맞지만, 3·1 운동 당시와 그 이후로도 수십 년간 무명의 참가자였다. 광복을 한 1945년까지 그 어떠한 신문기사에서도 유관순의 이름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여성 독립운동가 중 1920~30년대 근우회나, 여성동우회 등 활발한 활동을 했던, 현재는 유명하지 않지만, 당대에는 이름이 알려졌던 신여성 엘리트들만 있다. 유관순은 1947년부터 갑자기 국내 신문에 첫 등장했다.어떻게 유관순이 유명해졌는가 살펴보면, 유관순은 해방 이후 누군가의 적극적인 발굴에 의해 순국의 아이콘이 되었다. 1946년, 이화학당 출신의 박인덕[39]과 이화여중고 교장 신봉조[40]는 이화학당을 알릴 인물을 찾는다. 신봉조가 박인덕에게 "이화학당 출신 중 국가와 민족에 공헌한 사람이 있으면 소개해 달라."고 요청한다. 이에 박인덕이 3·1 운동 때 순국한 유관순을 제안하면서 비로소 유관순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두 사람은 유관순을 널리 알리기로 하고, 유관순 기념사업회를 구성한다.
그런데 많은 항일 학생운동가들 중에서 유독 유관순이 선택된 배경에는 이들이 자신의 친일 행위를 덮으려는 목적이었다는 의혹이 있다. 신봉조는 일제 말기에 전형적인 친일파 노릇을 했다.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조선임전보국단 등에 간부로 참여하여 한국인을 일제가 벌이는 전쟁터에 내보내는 데 앞장섰다. 박인덕도 대표적인 신여성이자 엘리트였으나 마찬가지였다.
해방 이후, 그들은 자신들의 수치스런 친일 경력을 가릴 방패막이가 필요했다. 이화학당 출신의 애국자를 발굴해 크게 부각시킴으로서 자신들의 죄를 덮으려 했고, 그에 딱 알맞은 인물로 유관순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유관순을 실제 이상의 영웅으로 신화화하는 데 몰두한다. 박인덕도, 최초로 유관순의 전기를 쓴 전영택도, 유관순을 조선을 구한 잔 다르크로 표현하면서 유관순을 신통한 능력을 가진 신화적인 존재로 승격시켰고, 정부 수립을 앞둔 시기에는 이러한 유관순의 희생정신을 건국정신으로 기려야 한다면서 우파 정치인들이 띄우기도 했다.[41] 이러한 상황 때문에 과대포장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3·1 운동 당시 목숨을 잃은 사람은 대략 7,500여 명이다. 유관순이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가 옥사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나, 유달리 특기할 만한 업적이 크게 없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다. 나머지 7,500여 명의 열사들이 희생을 당했다는 것도 후세에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42]
박은식의 주장 외에 일본 측의 기록을 보아도, 3개월간의 진압과정에서 사망자 7,509명, 부상자 15,961명, 구금자 46,948명으로 나온다. 유관순은 저 중 사망자 혹은 부상자가 아닌 구금자 46,948명 중의 한 명인 것이다. 유관순이 사망한 것은 일제의 3·1운동 진압 과정이 아니라, 감옥에 수감된 1년 6개월 후인 1920년 9월 28일이다. 유관순이 훈장을 받는다면, 그에 앞서 3·1 운동 중 사망한 7,509명에게도 동급 혹은 그 이상의 훈장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사실이다. 7,509명의 사망자 안에는 유관순의 부모님 모두 포함되어 있다. 아버지 유중권, 어머니 이소제 두 사람은 건국훈장 애국장(4급)을 추서했다. 죽은 부모님은 4등급 훈장, 살아남은 딸은 1등급 훈장이다. 독립운동 과정 중 목숨을 잃은 사람보다 일본 경찰에 잡혀서 옥사한 사람에게 더 높은 훈장이 수여된 것이다.[43]
유관순이 1심에서 받은 형량은 3년으로, 민족대표 33인이 받았던 형량과 동일하다는 점도 지적되나, 3·1 운동은 오히려 민족대표 33인보다 당시 현장에서 저항했던 사람들이 훨씬 높은 형량을 받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개신교 출신이라는 점에서 당시 천주교 내 보수파는 "안중근 의사처럼 거물도 하나 못 죽였는데, 열교(개신교)들은 미화가 너무 심하고, 우린 천주교 내 친일경력도 반성했다."라고 주장했다. 불교 보수파 측은 "만해 한용운 선생은 독립운동을 한 것이 맞는데, 친일파라고 음해받고, 불교의 독립운동사는 왜 말이 없고, 왜 기독교는 유관순 열사만 띄우냐?"라고 했다.
실제 4.1 아우내 만세운동을 주도했다고 알려진 조인원 선생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데 반해,[44] 유관순은 3·1 운동의 상징처럼 굳어졌다.
유관순보다 독립운동 경력이 긴 수많은 여성 독립운동가를 제치고, 유관순이 여성 독립운동가의 대표격이 된 건 정치적 이유 때문이다. 유관순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발탁된 과정에는 여러 정치적 고려가 있었다는 점, 1945년까지 변절하지 않고, 투옥을 반복하며 독립운동을 했지만, 대중에게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여성들도 많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유관순을 3·1 운동의 대표격으로 강조하는 것은 역사관, 전시관들도 예외가 아니며, 이와 관련하여, 다른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문제제기를 한 경우도 있다. 유관순과 8호 감방에 함께 수감되었던 노순경의 외손자 김영준은 서대문형무소역사관 8호 감방의 전시물 내용에 오류가 있음을 확인하고, 국가보훈처[45] 측에 시정을 요구했다. 해당 전시물에는 선교사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한국명: 석호필) 박사가 세브란스 병원 간호사이자, 노백린[46]의 딸인 노순경을 돕기 위해 면회를 왔다는 내용이 담겨있으며, 스코필드와 노순경의 사진도 있는데, 정작 제목은 〈스코필드 박사와 유관순〉으로 되어 있었다. 얼핏 보면, 스코필드 박사가 노순경이 아닌 유관순을 면회하기 위해 서대문형무소에 방문했다는 오해를 사게할 수 있다. 이는 유관순을 부각한 나머지, 다른 독립운동가의 행적과 이름이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다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의 연장선에서 김영준은 '유관순과 8호 감방'으로 되어있는 표지판을 '여자 8호 감방'으로 바꿀 것과 유관순 조각상의 존재에 의문을 품는 내용의 공문을 국가보훈처에 전달했다. 여옥사는 유관순만 수감되었던 곳이 아니며, 유관순 조각상만 있는 것은 다른 수감자에 대한 차별 논란이 생길 수 있다는 이유였다. 즉, 유관순만을 중심으로 하는 전시 풍조를 지적한 것이다.[47]
4. 기타
}}} ||<width=33.2%> ||<width=36.3%> ||<colbgcolor=#0047A0> 유관순의 저화질 사진(위) 및 고화질 사진(아래). 왼쪽은 서대문형무소 수감 시절, 오른쪽은 이화학당 재학 시절에 촬영한 사진이다. | <colbgcolor=#0047A0> 이화학당 재학 시절 유관순(왼쪽). |
- 1986년 지정된 월전 장우성 화백의 표준영정이 대중들에게 알려져 있었지만, 세월이 지나 당시 생존했던 유관순의 이화학당 동창들이 "얼굴이 너무 다르다."라며 지적하자, 2007년 윤여창 충남대학교 회화과 교수가 그린 오른쪽 초상화를 새로 지정했다. 실제 인물은 청초하고 갸름한 얼굴이었다고 하니 감옥에서 받은 고초가 얼마나 심했는가를 생각해 볼 수 있을 듯하다.[48] 그러나 이후 공개된 3·1 운동 1년 전 사진을 보면, 동일인임을 의심할 정도로 차이가 나는 얼굴은 아니다. 얼굴 윤곽이 동일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2019년 5월 21일,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이화학당 시절 유관순의 미공개 사진 2점을 최초로 공개했다. 맨 오른쪽 사진에서 왼쪽에 있는 색깔 있는 저고리를 입은 사람이 유관순이다.
- 유관순이 징역 3년이라는 형량을 받으면서 정말 고문을 받았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일제의 법령에 따르면, 여성은 법정 최고형이 7년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사실 유관순은 징역 7년을 받고 들어간 것이었고, 이것은 현대로 따지면, 무기징역과 똑같은 의미라고 봐야 한다. 더군다나 당대 일본 제국은 근본적으로 인권을 보장하는 나라가 아니었다.[49] 비록,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한 보통선거와 인권 신장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시행하기로 했지만, 실제로 실현된 것은 훗날 미군정기이다. 또한, 당대 공판 기록에도 사상범 부부가 같이 기소되는 경우에는 형집행정지로 나오는 여성들이 무척 많으며, 이런 점이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공훈 정리에 불이익을 주기도 한다. 그렇다고 여성에 대한 처우가 괜찮았다는 것은 결코 아니며, 이런 식으로 법적으로 대놓고, 혹은 암묵적으로 동일 범죄를 저질러도 여성에게 관대하게 판결을 내리는 경우는 전반적으로 여성의 지위가 낮아 여성을 '보호'의 대상으로 보고, 낮은 지위에 대한 배상책의 일환으로 존재했던 것이다. 사실 1920년대나 1930년대 초반의 신문을 보면, 단순한 절도 내지는 참고인 조사 과정에서도, 나체 고문 내지는 고문치사, 성적인 학대로 인한 자살 사례가 보도될 정도였다. 국립중앙도서관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나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등으로 일제강점기 《조선일보》, 《동아일보》, 《시대일보》, 《중외일보》 등 민족계 신문들을 검색해 보면, 오히려 한국의 1980년대 이상으로 자세한 고문 고발 기사가 다이쇼 시대에는 버젓이 실렸음을 알 수 있다. 더군다나 신문에 잘 안 나거나 갑자기 사망 등으로 은폐된 경우도 많다는 것을 보면, 유관순에 대한 무서운 일은 일반적으로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조갑제의 회고에 따르면, 30년 전만 해도 경찰서에 고춧가루통을 가지고 가는 순경들이 많았다고 한다.
<colbgcolor=#0047A0> 서대문 형무소 수감 시절 유관순. 사진에 한자로 '三七一'이 쓰여있다.[A] |
- 5만 원권에 들어갈 여성 인물로 유력하게 거론되었으나, 신사임당에게 밀렸다. "얼굴이 퉁퉁 붓고, 수심이 가득찬 얼굴이라 고문 받기 전 사진을 찾기 힘들어서."라고 밝혔다. 유관순 외에도 김구가 들어갈 예정이었던 10만 원권은 아예 발행이 무기한 연기되었다.
- 유관순의 아버지, 어머니, 형제들 역시 만세를 부르다가 군경에 의해 사망한 독립운동가임에도, 유관순 본인에 비해 인지도가 거의 없다. 아마 유관순의 상징성 때문에 묻힌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도 3·1 운동의 아우내 부분에서 유관순이 아닌 만세의 주도자인 '김구응'이라는 남성 독립운동가를 대표적으로 내세웠다. 단, 여기서 같이 잡힌 사람 중에 이화학당 출신의 학생이 있다는 기록이 유관순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유관순의 아버지인 유중권은 일찍 감리회에 입교한 개신교 신자라 마을 유지들과 협력해 교회도 세우고 사재를 털어 학교도 세우는 등 교육과 계몽에 힘을 기울인 인물로, 유관순 역시 이러한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유중권의 장남이자, 유관순의 오빠인 유우석[51] 역시 독립운동가로 공주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다 투옥되었으며, 공주지방법원 재판에서 유관순과 잠시 해후하기도 했다. 유관순 사망 이후에도 유우석은 활발히 항일 투쟁을 벌였고, 1968년 5월 28일에 향년 70세를 일기로 자택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 1990년, 그에게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 2010년 초, 교육과학기술부에서 초등학교 교과서 4학년에 수록된 유관순 전기를 삭제하려 했다가, 다행히 유관순 관련 단체 및 여론의 반발로 삭제는 취소되었다.
- 유명 인터넷 논객 김완섭은 2003년에 낸 저서 《새 친일파를 위한 변명》을 통해 유관순이 폭력 시위를 계획하고 주도했다며 '여자 깡패'라는 비난을 했다. 이에 유관순의 조카 유제우가 소송을 걸어 2011년에 대법원은 그가 유관순이 주도한 시위는 폭력적이었다고 하지만,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와 유관순에 대한 판결문 및 번역본 판결문에 의해 '당시 시위는 평화 시위였음'이 확인되는 바, 김완섭의 기술은 '허위 사실 적시'에 해당되어 '사자에 대한 명예훼손'으로 700만 원 벌금형에 처한다고 판결했다(2008도3120). 그러나 유관순이 '여자 깡패'라는 김완섭의 표현은 모욕적인 표현에 해당하지만, 국내 형법상 사자 명예훼손죄는 있어도 사자 모욕죄는 없기 때문에 무죄 판결을 내렸다.
- 이화여자대학교에서는 유관순 동상 건립 운동도 일어나고 있다(#). 해당 기사에서 나오는 김활란은 스승이라는 도시 전설이 있는데 그는 이화학당 시절 선배로 유관순과의 나이는 5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52] 실제 스승은 박인덕이다. 박인덕도 3·1 운동 후 여러 가지 활약을 했지만, 일제강점기 말엽에는 당연히 친일의 길에 접어들었고, 그것을 별도로 하더라도 고위층과의 연애 플래그나 세계 일주[53] 등으로 화제를 일으킨 여성이었다. 유관순이 각광받으면서 유관순의 스승으로 같이 인식된 것은 박인덕 등 친일반민족행위자들과 그들에 동조하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더러운 행적을 숨기고, 유관순 찬양과 동시에 자신들을 미화하기 위한 것이 컸다. # 실제 1990년대 어린이 위인전기에는 아예 박인덕을 주인공으로 한 스토리도 나왔다. 소설 《화수분》으로 유명한 소설가 전영택도 친일 행위를 하던 걸 숨기고자 유관순과 알던 사이라는 걸 늘 강조하며 자랑하기도 했다.[54]
- 가끔 유관순이 개신교 신자가 아닐 것이라는 주장을 하는 부류들이 있다. 이용하는 근거는 유관순의 이화학당 기숙사 룸메이트인 '보각'이란 비구니의 주장을 토대로 하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55] 유관순이 기도할 때 하나님 대신 '명태님', '굴비님'이라고 부르면서 킥킥거렸다."[56], "예수님은 춥겠어. 벌거벗은 채로 늘 매달려 있잖아?"란 말에 "뭐 그래야 사람들이 불쌍하게 여겨 관심을 기울일테니 춥다고 불쌍히 여길 것은 없어."라고 대답했다든지 하는 것이다. 그러나 보각의 주장만으로 유관순이 신앙적이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이미 역사적으로 밝혀진 사실만으로 따져도, 그의 가족들은 모두 천안 병천면의 감리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한 개신교 신자이고, 유관순 역시 어렸을 때부터 개신교 미션스쿨인 이화학당에 다녔고, 서울에서 정동제일감리교회에 출석했던 개신교 신자이다. 그리고, 유관순은 자신이 존경하는 인물로 플로렌스 나이팅게일과 잔 다르크를 뽑았다.[57] 만약 보각의 주장이 사실이라고 해도 유관순이 다소 개구진 성격이었다거나 그 나이대가 현재의 중학생~고등학생이기도 하니 그 또래들이 보여주기도 하는 다소 짖궂은 면이 있었다는 추측만이 가능하고, 정기적으로 신앙 생활을 하던 개신교 신자라는 것에 반론할 수 있는 근거는 되지 않는다.
- 북한에서 유관순 자체를 모른다는 주장이 있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던 것이, 애초에 해방 이후 유관순이 재조명된 것은 1947년 이후 남한에서만 한정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58] 그런데 저 주장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실제로 1990년대 초까지 북한에서는 유관순을 몰랐지만, 현재는 유관순과 그의 활동이 알려져 있다. 사실, 북한에서는 김일성 일가와 그 주변을 제외한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잘 부각하지 않았고, 지금도 그렇다. 더군다나 남한에서만 조명되었던 유관순을 북한에서 언급할 일이 없었다. 그런데 1992년 김일성의 자서전인 《세기와 더불어》의 3·1 운동 파트에서 유관순이 등장했다. 김일성이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직접 언급한 역사 인물은 반드시 교육을 시킨다는데, 그래서인지 1992년 이후부터 유관순이 북한 매체에서 등장하기 시작했다.[59] 1999년 북한의 백과사전인 《조선대백과사전》에 '3·1 운동에 참여한 여학생'으로 언급되었고, 2015년부터는 역사교과서에 유관순의 행적을 소개한다. 그래서 북한의 젊은 세대들은 유관순을 어느 정도 알지만, 중년 이상은 잘 모르며, 나이가 지긋한 탈북민들의 대부분은 한국에 와서 처음 알았다고 한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유관순을 남한처럼 3·1 운동을 대표하는 열사로 기리지는 않고, 김일성 일가의 활동을 우상화하는 북한 정권의 특성 상, 김일성 집안이 주도한(...) 3·1 운동에 참여한 인물로 왜곡하여 소개하는 정도로만 언급한다. 그래서 모르는 사람이 아직도 많기는 하다. 정리하면, 유관순의 존재 자체를 북한에서 모른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지만, 사회 차원에서 기리는 것도 아니고, 일부 책 등에 간단하게 언급되는 정도여서 모르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사실이다.
- 2014년 8월 한국사 교과서에서 유관순이 누락된 것이 발견되었다. 이를 두고, 언론 일각에서 국정교과서에 힘을 싣는 여론이 조성되기도 했다. 하지만, 역대 고교 국정교과서 모두를 확인해도 그 어느 책에도 유관순이 없었다. 확인해 본 바에는 6차 교육과정에 '각주1 부분에 유관순 열사의 순국' 부분 간략히 기술한 부분이 있긴 하다.# 두산동아, 금성출판사, 천재교육, 미래앤 4종의 교과서이다.#[60]
- 대한민국 해군은 2015년 3월 1일 삼일절에 손원일급 잠수함 6번함의 함명을 유관순함(SS-078)이라 명명했다. 여성으로는 최초로 대한민국 해군 함정의 함명으로 결정된 것이다.
- 유관순의 이화학당 시절 친구로 2010년 4월 3일 106세의 나이로 사망한 남동순이 있다. 그는 유관순 열사가 사망한 이후 독립운동 단체[61]에 들어가 활동을 했다고 한다. 심지어 1945년 8월 14일에도 작전을 했다고 한다.[62] 광복 이후에는 고아원을 설립했다.
- 2015년 6월 서울게임아카데미에서 주최한 '게임 컨셉아트 공모전'에서 수상한 수상작이 유관순 열사를 성적 대상화한 것으로 밝혀져 논란이 되었다. 미니스커트 입은 유관순 열사? 게임 아카데미 수상작 논란
- 2018년 3월 28일(현지 시간) 뉴욕 타임스(NYT)가 유관순 열사에 대한 부고기사를 총 8페이지에 걸쳐 게재했다.[63]
- 2019년 미국 뉴욕 주 의회에서 그해 3월 1일을 '유관순 열사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일'로 제정하는 결의안을 채택했고, 뉴저지 주 의회도 3월 1일을 유관순의 날로 제정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유관순 열사 조카손녀 뉴욕 거주 유혜경씨 “우리 할머니 유관순··· 미주서도 기념 감격스러워”
- 유관순의 형제들은 매우 어렵게 살아야 했다. 오빠 유우석은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이 있던 당일에 공주면 읍내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고, 이후 영명학교와 경성법학전문학교에 다니면서 조국수호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했다가 퇴학당했고, 이후에도 항일운동을 지속했다가 총 11번에 걸쳐 수감생활을 해야 했다. 동생 유인석과 유관석은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일제의 탄압이 두려워 누구도 보살피려고 하지 않자, 갈 곳 없이 떠돌게 되었다. 그러다 공주에서 양양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조화벽의 보살핌을 받게 되었고, 이 인연으로 조화벽은 유우석과 혼인했다. 유인석의 손녀 유혜경에 말에 따르면, 유인석은 양양과 원산 등지를 떠돌아 다니며 탄광 일을 하는 등 힘들게 살았고, 광복이 되어서야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유관석은 1남 1녀를 남기고, 32세의 이른 나이에 사망했다.
- 유관순의 고향인 천안에 그의 이름을 딴 유관순체육관이 있으며, 현재 V-리그 남자부 천안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의 홈구장으로 사용된다. 참고로, 유관순 열사의 동상은 충남 천안시 서북구 쌍용2동의 충무병원 앞에 위치해 있다. 여담으로, 동상이 있는 인도에서 횡단보도 2개를 건너면, 2019년 초에 있었던 천안 라마다호텔 화재사고가 일어났던 그 호텔이 위치한다. 아울러 천안시의 상징인 구 마스코트 횃불낭자, 신 마스코트 나랑이 역시 누구를 묘사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천안시를 연고로하는 천안 시티 FC의 전마스코트인 나랑이의 모티브이기도 하다.[64]
- 2020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판 EBSi 《수능특강》 한국사 영역의 표지 모델로 사용되었다.
-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여성 독립운동가로 유관순 열사를 떠올리지만, 더 많은 활동을 한 독립운동가들 중에는 많은 여성들이 있다. 구한말의 의병장 윤희순, 영화 밀정의 실제 모델인 남자현, 김마리아,[65][66] 박자혜, 권기옥, 차경신, 박차정, 등등. 좌파 계열로는 먼저 조선의용대에서는 대단한 활약을 해 백마 탄 여장군이라 불린 김명시 장군이 있었다. 경성 트로이카(=이재유 그룹)는 활동가들의 성별 비율이 비슷한 독립운동 조직으로, 여성 최장기간 수감자(12년)인 박진홍, 이효정, 이병희, 이순금 등 수많은 여성 독립운동가가 활동했다. 그 외 수 많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있지만 알려지지 않았다.
-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여성 친일반민족행위자를 꼽아 보면, 김활란, 모윤숙, 노천명 등을 들 수 있는데, 이 3명이 모두 이화학당 출신이다. 이들은 해방 이후에도 이승만 정부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역시 이화학당 출신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였던 박인덕이 앞장서서 유관순 열사의 3·1 운동 업적을 내세웠다는 것이다. 독립운동이 자신을 쉽게 드러낼 수 있는 활동이 아니기 때문에, 숨겨진 인물들이 많이 있어서 이화학당 출신 독립운동가들이 얼마나 많은 활약을 했는지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다만, 대표적인 여성 친일반민족행위자 3명이 모두 이화학당 출신이라는 것은 이화여자대학교의 영원한 흑역사로 남을 것이다. 이화여자대학교에는 아직도 김활란의 동상이 있다.[67]
- 그가 독립운동 활동을 했던 것을 기리기 위해 활동지였던 이화학당 인근의 버스정류소인 '서대문경찰서.농협은행'을 '서대문경찰서.농협은행.유관순 활동 터'로 병기한다.
-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5절에도 등장한다.[68]
- 집안 전체가 개신교 집안이라 유관순도 자연스럽게 어린 시절부터 개신교 신앙을 접하고 믿게 되었다. 천안에서 살 때는 온 가족이 매봉교회에 출석했고, 이화학당에 입학한 이후에는 정동교회에 나갔다. 사실 정동교회가 이화학당에서 가장 가까운 교회라 이화학당의 학생들과 선교사들은 주일이 되면, 이 교회를 나갔다. 당시 정동교회의 손정도 목사가 설교 중에 독립운동과 나라 사랑을 자주 이야기하고는 했는데 유관순은 손정도 목사의 설교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3·1 운동이 일어나기 전 자신이 어린 시절 살던 매봉산에 올라가 한 기도가 유명하며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에도 자주 기도를 하고 다른 수감자들에게 개신교에 대해 이야기해 유관순에 감명을 받아 개종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1920년 순국한 뒤 당시 이화학당의 룰루 플라이 교장은 개신교식으로 유관순의 장례를 치러주었으며, 당시 장례 예배는 손정도 목사가 집례했다. 현재도 개신교에서 개신교 독립운동가로 큰 비중과 명성을 차지하며, 개신교계는 유관순에 대한 추모 예배를 자주 올리기도 한다. 2015년 유관순의 신앙적인 면을 다룬 영화 〈소녀의 기도〉가 개봉했고, 2019년 3월 이화학당의 후신인 이화여자고등학교 학생들이 3·1 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만세 운동을 재현하고 유관순의 동상 앞에서 헌화 예배를 하기도 했다. 유관순 열사는 영국 선교사로 부터 닥스(daks) 로퍼를 선물받아 독립운동 참여시 항상 착화를 했다고 전해진다.
- 복역 기간 중 겪은 혹독한 고문과 폭력으로 인해 1년만에 몸 전체가 만신창이가 되었다. 피부는 찢기고 지져졌으며, 몸을 지탱하는 모든 부위의 뼈가 탈골되거나 부러졌다. 심지어 위장, 소장, 대장, 간, 폐, 신장 등등 내부 장기도 심하게 손상되어 음식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몸이 내외적으로 망가지면서 죽어간 것으로 보인다. 그가 죽기 전 이루어진 최후의 가족면회 당시에는, 교도관의 도움이 없이는 제대로 서지도 못할 정도로 상태가 심각했다고 한다. 1920년 9월 30일 가석방으로 출소했다고 해도, 온 몸이 고문으로 인해 만신창이가 되었기 때문에 얼마 못 가 세상을 떠났을 가능성이 높으며, 설령 오래 살았다고 해도, 생식 기능이 망가졌기 때문에 자녀를 낳지 못 했을 것이다.
- 인도의 독립운동가이자, 훗날 독립 초대 인도 총리를 지낸 자와할랄 네루는 영국에 의해 투옥되었을 당시에 자신처럼 인도의 총리를 지내는 자신의 딸 인디라 간디에게 보내는 옥중 편지에서 당시 식민지 조선의 3·1 운동과 유관순 열사의 의거를 극찬하며 일본 제국 역시 영국과 다를 바 없는 제국주의 침략자라고 비판하는 동시에 식민지 조선인들과 유관순 열사의 행동을 본받을 것을 딸에게 주문했는데, 이 편지는 《세계사 편력》이라는 이름으로 책으로 출간되었고, 세계에서 가장 긴 편지라는 타이틀로 기네스북에도 등재되었다.
- 2022년 8월, 30대 남성이 인천의 한 중학교 운동장 국기 게양대에 걸린 태극기에 유관순 열사에 대한 욕설을 써 국기를 모독하고, 일장기를 대신 건 혐의로 검거되었다. 뉴스1 기사
- 2023년 3월 1일, 3·1절에 세종특별자치시 한솔동의 첫마을 3단지 아파트 베란다에 자칭 일본인이라고 소개했던 이 모 목사 부부가 유관순에 대한 허구론#을 제기했다. 해당 설은 2013년 박근창이 먼저 저서 《이 세상의 주인은 사람이다》를 통해 "유관순은 교회가 만든 가공인물"이라 주장했고, 2017년 저서 《유관순은 허구인물이다》를 통해 교육과정마다 다른 교과서상 유관순의 생년 및 사망연월일,[69] 수형기록 카드 사진상 유관순이 부녀자의 상징인 쪽머리를 했던 점,[70] 일본 경시청 정보공개 시 1919년에 만세운동을 하다 순국한 유관순은 없고, 1920년에 절도하다 복역한 동명이인이라고 들었다는 주장[71] 등을 토대로 실존 인물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유관순의 수형기록 카드는 물론 판결문, 당시 이화학당 학우들의 목격담, 같이 수감된 독립운동가들의 회고 등으로 보아 근거가 부족하다. 박근창 측은 2016년 국가보훈처의 유관순 독립운동 공적 재심사 불가 회신에 대해 서울행정법원에 처분취소 소송을 냈지만, 2017년 기각되었고,(2016구합1127) 2021년 유관순을 다룬 초등학교 국어교과서 내용에 대해 미래엔을 상대로 무효 및 국정도서 취소 소송을 서울중앙지방법원에 냈으나,(2021가합1518) 2023년 2월 기각되어 현재 항소심 진행 중이다.(YTN 기사, SNU 팩트체크)
5. 대중매체에서
- 영화감독 윤봉춘은 1948판, 1959, 1966년 총 3차례에 걸쳐 〈유관순〉이란 제목으로 영화를 만들었는데 이로써 윤봉춘은 '유관순 전문 감독'으로 불렸다. 유관순 역은 고춘반(1948년판), 도금봉(1959년판), 엄앵란(1966년판)이 각각 맡았다.
- 1974년 개봉한 영화 〈겨레의 꽃 유관순〉에서는 이화여자고등학교 3학년이던 학생 문지현이 맡았다.
- 2013년 나온 모바일게임 〈독도디펜스〉에서 현대 복장으로 어레인지되어 등장했다.
- 2014년 웹툰 〈21세기 영웅전〉에선 아군 측에 유관순의 힘을 쓰는 계약자가 등장한다.
- 2019년 2월 개봉한 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에서는 배우 고아성이 연기했다.
- 2023년 6월 개봉한 영화 〈만해 한용운 님의침묵〉에서는 배우 서지우가 연기했다.
- 대체역사소설 《동방의 라스푸틴》에서 러시아 제국으로 유학을 와서 3·1 만세운동을 펼친다. 그 후 유총리라고 불리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총리가 된다.
- 2024년 마이크로소프트에서 발매하는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인 〈아라: 히스토리 언톨드〉에서 대한민국 문명의 지도자 중 1명으로 등장한다.[74]
6. 관련 단체
-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
- 백석대학교 유관순연구소
- 유관순정신계승사업회
7. 관련 문헌
- 《유관순: 3·1운동의 얼》 -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기획, 이정은 저. 역사마당. 2004.
[1] 족보상 1904년 3월 15일.[2] 지번 주소로는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 305.[3] 족보상 10월 12일.[4] 자료에 따라 9월 28일 설과 10월 12일 설이 존재한다.[5] 검상공파 27세손.(대동보)[6] 그도 역시 딸과 같은 독립운동가였으며, 유관순의 성격은 여러모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7] 원래 모두 류씨가 맞으나, 유씨로 표기한 이유는 1921년(한글맞춤법의 역사 참고) 두음 법칙이 생기면서 편의상 '류관순'을 '유관순'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이가 고유명사화 되어서 그렇다. 교과서에도, 대중적으로도 '류관순'보단 '유관순'이라는 이름이 훨씬 더 퍼져 있어서 이런 부분에 있어 혼란을 막기 위해 2014년부터 '유관순'으로 바뀌었다.[8] 한때 '유준석(柳俊錫)', '유관옥(柳寬玉)' 등의 가명을 사용하기도 했다.[9] 족보명: 유칠석(柳七錫)[10] 1930년대 경성제국대학에서 조사한 여학생 평균 신장이 150cm였다고 한다. 평균보다는 약간 큰 셈이다.[11] 그러나 수감기록증에 애매한 글씨체로 쓰는 바람에 5척 0촌이 5척 6촌처럼 보이게 되었고, 이로인해 유관순이 당대로서는 굉장히 체격이 큰 169.7cm인 것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12] 이화학당 개교 110주년을 맞아 심의를 거쳐 1996년 5월 30일에 명예졸업장이 추서되었다. 따라서 실질적 학력은 이쪽이며, 공식적으로 이화여고 동문임을 인증한 셈이다. 다만 그가 수훈을 받았을 당시 법적으로는 명예졸업이 졸업으로 인정되지 않았으나, 세월호 참사 이후 법적으로 명예졸업 학적을 신설했다. 명예졸업의 목적을 생각해보면, 일종의 상훈, 추모라고 할 수 있다. 법적 문제와는 별개로 지금 와서는 교육 활동 중 사망한 사람의 명예 학위 및 명예졸업을 실제 학력 비스무리하게 인정하고 있는 추세다.[13] 어렸을 때는 천안 병천에 있는 매봉교회, 이화학당 시절에는 서울 정동의 정동제일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다. 가족이 모두 개신교 집안이다.[14] 지금의 건국훈장 독립장.[15] 《한국 근대사 산책》 6권, 강준만. 이외에도 서울시 홈페이지, 《경향신문》, 《조선일보》 등에서 보도한 바 있다. 이 말은 미국 독립운동을 하다가 순국한 미국 군인 네이선 헤일이 죽기 전에 남긴 말로도 알려져 있다.[16] 한때는 1903년이나 1904년이라고도 했는데, 최근에 정확히 1902년으로 최종 확인되었다. 그래서인지 2010년대 이전 위인전 연표에는 1904년에 태어났다고 기록된 자료가 다수였다.[17] 이 중 언니 유계출만 모친이 다르다. 유계출의 모친은 청주 한씨이며, 유계출이 태어나고 얼마 뒤에 사망했다.[18] 본명은 앨리스 해먼드 샤프(Alice Hammond Sharp). 미국 감리 교회 선교사인 남편과 함께 공주시에서 활동하다 교우를 심방하고 오던 남편이 병에 걸려 순직하자, 혼자서 활동했다.[19] 학비를 면제받는 대신, 졸업 후 모교에서 교사로 근무하기로 된 학생.[20] 학교 바로 옆에 덕수궁이 있는데, 고종이 사망하면서 술렁거리고 혼란스런 분위기가 이화학당까지 들렸다고 한다. 오늘날도 이화여자고등학교와 이화여자외국어고등학교는 덕수궁 옆에 있다.[21] 1910년, 이화학당에 대학과를 개설했다. 대학과는 1925년 이화여자전문학교로 개편되어 1935년에 신촌으로 이전해 1946년, 오늘날의 이화여자대학교가 되었다.[22] 실제 천안 아우내 만세 운동의 지휘자는 조인원(조병옥 선생의 아버지)이다. 참고로 조병옥은 유관순 열사가 다녔던 영명학당을 졸업했다.[23] 1919년 양력 4월 1일, 음력 3월 1일[24] 3월 1일 기미독립선언서 낭독부터 4월 말까지 2달간 전국 각지에서 지속적으로 발생한 모든 만세 운동을 3·1 운동으로 본다.[25] 2007년 〈병천·동면계 형사사건부〉 발견 전까지는 '7년형 설' 등이 유관순 지인의 입을 통해 유포되어 왔으며, 위인전 등지에까지 나왔다.[26] 2심은 판결문이 남아 있으나, 1심은 5년 형을 받았다는 기록만 남아 있다.[A] 사진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 유관순. 이 사진은 1965년 3월 2일 서울 치안국 감식계 창고에서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졌다. 이 사진을 본 유관순의 친척은 사진을 복사하여 오빠 유우석에게 전달했다고 한다.[28] 1980년대 모 시사 잡지에서 취재한 서대문 형무소 관련 이야기에 따르면, 며칠 정도 가매장 후 시신을 인도했다고 한다.[29] 확실한 것은 사형은 아니라는 것. 애초에 사형은 정식 법 절차를 받아 집행하는 것인데, 어차피 얼마 뒤에 출소할 기결수를 굳이 복잡하게 죽일 필요는 없었다. 다만,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악랄했던 일제이니만큼, 옥 중에서도 가열차게 투쟁한 유관순이 출소한 뒤에도 후환이 될 것으로 판단하여 석방 직전에 불법으로 살해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30] 유튜브나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 사회 전반에 유관순이 미꾸라지 고문 등 입에 올리기 힘든 각종 성고문을 당하다가 사망했다는 엽기적인 내용들이 퍼졌는데, 어떠한 근거도 없는 말이다. 왜 기록이 없냐고 물으면, "일본이 그런 짓을 했던 흔적을 필사적으로 숨겼기 때문이다."라고 하는데, 고문이 자행되었다는 사실 전체를 숨기면 몰라도 특정 방법의 고문만을 숨긴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될 뿐더러 가능하지도 않다. 시신을 수습한 이화학당 관계자들이나 친지들에게서도 이런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다. 게다가 여성 독립운동가들에게 가해진 고문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는데, 정작 유관순 외에 저런 고문을 당한 여성 독립운동가는 전혀 거론되지 않는다.[31] 유관순의 유해를 받들어 조선 독립 운동의 구심점이 될 가능성이 있어 일본이 고의적으로 이장 전에 무덤을 훼손하고, 유골을 파괴했다는 설이 있다.[32] 실제로 가서 보면, 봉분이 아닌 6각뿔 모양의 석관묘 형태로 조성해 놓았다. 석관 각 면에는 유관순에 대한 글귀가 적혀 있다.[33] 이로 인해 국립서울현충원에는 위패가 안장되어 있다.[34] 현재 안중근의 시신이 매장된 곳으로 추정되는 곳은 세월이 지나 건물이나 아스팔트 등으로 도배되었다. 유력한 매장 장소에 대해서도 3곳이 거론되지만, 아직도 확실하지 않다.[35] 조병옥 박사는 앞서 말한 유관순 영화를 싫어했다고 한다. 단순히 주동자가 잘못 인식된 것을 넘어 자기 아버지를 연상할 수 있는 인물이 찌질하게 "아, 관순이가 나서니 내가 부끄럽구나."라는 식의 대사를 하기 때문이다.[36] 병천 순대로 유명한 곳이다.[37] 다만, 3등급 훈장도 결코 낮거나 보잘 것 없는 격이 아닌데도 서둘러 격상해 버린 모양새이다. 유관순의 서훈 격상 논의에 학계에서 회의적인 반응이 나온 데는 이유가 있다. 청와대와 보훈처의 논리는 결국 '유명세 = 광복과 민족단결과 인권의 가치에 기여'라는 것. 사후에는 행적이 있을 리가 없으므로, 생전의 공적으로 서훈을 결정하는 체계에선 형평성이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런 신중론 자체는 26일 격상 이전부터 꾸준히 제기되었다.[38]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저평가되거나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를 다루는 것과 유관순 서훈 격상은 별개의 문제인데 이를 동일시하며 변명하는 것이다. 격상 후에 이런 상황을 더 악화시킨 것에는 언론의 말 바꾸기도 한몫했다. 이 서훈 격상이 이뤄지기 전 언론에선 "유관순이 겨우 3등급에 머물고 있다."라며 지적했다가, 이후 등급을 격상하자, 형평성을 지적하면서 말을 바꾸는 양상을 보였기 때문이다.[39] 인덕공업고등학교와 인덕대학교를 설립한 교육자.[40] 이화여자고등학교 최초의 한국인 교장이자 남자 교장. 이화여자대학교 최초의 한국인 교장(총장)은 김활란이다.[41] 실제로 신봉조와 박인덕의 주도로 유관순기념사업회가 설립되었을 때 조병옥과 이승만같은 여러 유명 우파 정치인들이 사업회의 고문으로 초빙되기도 했다.[42] 다시 말하지만, 유관순의 애국심과 업적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유관순과 비슷한 행적을 남긴 독립운동가들의 수가 많다는 이야기이다.[43] 다만, 유관순의 옥중 만세운동도 그 자체로 독립운동인만큼, 유관순 역시 독립운동 과정 중에 목숨을 잃었다고 할 수 있다.[44] 아이러니하게도 조인원 선생의 장남이 그 유명한 조병옥이다. 아들의 유명세에 의해 묻힌 상황.[45] 현재 국가보훈부.[46] 독립운동가이다. 즉, 부녀가 함께 독립운동에 투신한 것.[47] 그렇다고, 김영준이 유관순 자체를 비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김영준도 유관순을 훌륭한 독립투사로 존경하며, 다만, 사실을 왜곡하여 기술하는 것이 유관순에게도 명예롭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한다.[48] 이 점은 사실 장우성 화백이 의도적으로 다르게 그린 것은 아니다. 애초에 문화공보부 동상/영정심의위원회에서 흐릿하게 찍힌 이화학당 시절 사진 탓에 제대로 얼굴을 복원하기 어려웠던 나머지, 투옥 시절의 사진을 통해 자문을 내려줬다는 점도 있었다. 박목월 선생의 전기 등에서도 유관순의 한자 이름도 때로 기록이 서로 다른 점이 나올 정도였다.[49] 1980년대 이전에 이미 1920년대 평양에서 '성고문'으로 떠들썩했던 사례가 있다. 게다가 당시는 일제강점기 중 그나마 인권을 보장해주는 척이라도 하는 시늉을 했던 문화통치기도 아니었다.[A] [51] (1899~1968. 아명인 '유관옥'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52] 그도 3·1 운동 때 체포되었으나, 이후에 친일파로 전향하여 맹활약을 하게 된다.[53] 당시 세계 일주는 일본인들도 하기 어려웠다.[54] 실제로 전영택의 《유관순 전기》는 박인덕의 증언에 의해서만 기록되었다고 공언하며, 전기 내용 중 '관순이'의 영특함을 과시하는 대목에서 항상 질문에 답변하고, 좋은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은 박인덕이다.[55] 이 외에는 래퍼런스가 없다.[56] 기도할 때 하나님 대신 명태님이라고 붙여 기도하게 된 사연인즉 당시 기숙사 룸메이트의 집에서 보내준 명태 반찬을 맛보고 나서 그 맛에 감탄한 나머지 저런 일이 벌어졌다고 한다. 이 기도를 들은 같은 방 학생들이 전부 빵 터지는 바람에 순시를 돌던 기숙사 사감에게 딱 걸렸고, 결국 유관순과 룸메이트들 전원은 품행 낙제점을 받았다고.[57] 물론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을 존경한다고 기독교인이라는 보장은 없다고 주장하는 부류들도 있지만, 애초에 유관순이 개신교 신자라는 근거는 차고 넘치기 때문에 딱히 유효한 의문이라고 볼 수 없다.[58] 북한에서 남한의 유관순처럼 중요시하는 여성 독립운동가는 첫 번째가 다름 아닌 국부 김일성의 아내 김정숙이고, 그 다음이 허정숙이다.[59] 북한에서는 두음 법칙 적용을 일절 하지 않기에, '류관순'으로 표기하고 부른다.[60] 이 부분은 다소 설명이 필요한데, 유관순은 초등학교 교과서에서는 매우 비중 있게 다룬다. 중학교에서는 조금 약하게, 고등학교는 3·1 운동의 구조적 측면에 좀 더 관심을 기울이는 측면이 있다. 이 과정에서 오해가 생기게 된 것. 7차 교육과정 고등학교 국정 국사 교과서에도 유관순은 실려있지 않다. 천재교육 한국사 집필자인 주진오 교수의 경우처럼, 고등학교에서 유관순이 빠진 동일 저자의 중학교 교과서에는 유관순이 나온다.[61] 자금전달, 정보수집, 심지어 무장투쟁까지 했다고 한다.[62] 체포된 동료를 구하는 작전이었다고 한다.[63] 자사 부고기사를 분석한 결과 저명한 백인 남성 위주였다며, 이를 반성하는 차원에서 지난 8일부터 '오버룩드'(overlooked·주목받지 못한) 코너를 마련했다. 매주 일요일 부고기사 지면에 게재되는데,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평가받지 못한 여성들 이야기를 다루었다. 유관순 열사가 재조명된 것도 그 일환이다.[64] 2024년 3월 10일 다럄쥐인 호람이로 마스코트를 변경했다.[65] 박마리아와 이름이 같아서 착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전혀 다른 사람이고, 살아온 길도 전혀 다르다. 이름만 같을 뿐. 박마리아는 대표적인 친일파 중 한 명이고, 나중에 이승만 정권의 핵심 인물이 되기도 한다(이기붕의 아내). 그리고, 친일파 박마리아도 이화학당 출신이다. 독립운동가 김마리아(1891-1944)는 연동여학교(現 정신여자중학교, 정신여자고등학교) 출신이다.[66] 김마리아(1903-1970) 라는 이름을 가진 분이 또 있는데, 독립운동가 이범석 장군의 아내로, 이 분 역시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치신 훌륭한 분이다. 대한민국 설립 후, 이범석 장군이 초대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이 되면서, 이범석의 아내 김마리아와 이기붕의 아내 박마리아가 권력다툼에 휘말리기도 했다. 이범석이 밀려나면서, 권력에서 멀어지게 되기는 했지만(이기붕과 박마리아의 최후를 생각해보면, 오히려 다행일 수도 있다.).[67] 2017년 11월 13일 이화여자대학교 학생들이 김활란 동상 앞에 '이화는 친일파 김활란의 동상이 부끄럽습니다.'라는 제목의 현판을 세웠지만, 11월 27일 학교 측에서 현판을 철거했다.[68] '만세 만세 유관순'[69] 류정우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 회장 측은 사망연월일 변경 이유가 호적상 음력으로 된 걸 양력으로 환산한 점, 실제 사망일은 9월 28일인데 시신 인수일이 10월 12일이어서 그런 것이라 한다.[70] 국사편찬위원회 측에 의하면, 쪽머리로 유부녀를 구분하는 건 조선 시대에나 있던 풍습이며, 1876년 개항 이후 서양 문물을 수용하기 시작했기에 1919년 시점에는 이미 복식이 근대화되었고, 머리 스타일로 신분을 구분하는 개념이 이미 희석되었다. 해당 도서에서 저자가 전부 댕기머리를 했다고 주장한 배화여학교 학생 21명 중 8명이 쪽머리를 했다.[71] 저자 측은 절도설은 근거가 전무하다고 했고, 책을 쓸 당시 저자와 통화한 지인은 일본 경시청으로부터 자료 미비 통보를 받았다고 밝혔다.[B] 참고로, 정미숙과 이새아는 후에 〈반요 야샤히메〉 애니판에서 출연하게 되는데, 정미숙은 히구라시 카고메 역을 목소리로 연기했고, 이새아는 히구라시 토와 역을 목소리로 연기했다.[B] [74] 다른 1인은 세종대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