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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19-12-29 19:19:13

대인배/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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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절대자 / 종교 지도자2. 단체 및 집단3. 개인
3.1. 국내3.2. 해외
4. 기타5. 가상의 인물

1. 절대자 / 종교 지도자

참고: 모든 사람에게 대인배라는 것은 아니다. 당장 종교 충돌 문제나 행적문제로 인해 대인배로 보지 않는 사람이 꽤 되는 종교 지도자도 있기 때문이다. 짚고 넘어갈 부분은 대인배라는 단어는 비표준어일뿐 아니라 어원 자체가 의도한 의미와 뜻조차 맞지 않는 어그로 신조어이므로 인터넷공간 이외 실제 현실에서는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2. 단체 및 집단

3. 개인

3.1. 국내

3.2. 해외

4. 기타

5. 가상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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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말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 라는 뜻으로 아무리 소중한 것이라도 사람보다는 못함을 비유하는 고사성어. 공자네 집 마구간에 불이 났는데 이에 공자는 사람이 다쳤냐고만 물어보고 말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고 한다. 현대로 치면 차고에 불이 났는데도 사람은 무사하냐고 물어본 것과 마찬가지. 모든 사람이 똑같은 가치를 지닌다는 사상이 묵가같은 예외를 제외하면 근대 이후에나 전파되었다는걸 감안하면 파격적인 사상이다[출처] #[3] 1962년 발롱도르 위너.[4] 보통 기증자의 신원은 장기이식법 제31조에 의거 비밀에 부쳐진다. 언론에 보도되는 경우는 동조 제2항4호에 의해 본인이 공개를 동의한 경우.[5] 협회에서 금전적인 문제 때문에 결승전 개최를 강행하려고 했으나 아틀레티코 나시오날에서 그런식으로 나온다면 우리는 결승전에서 유소년 선수를 내보내거나 시작부터 자책골을 넣어 어떻게든 샤페코엔시가 우승하게 하려 할 것이라고 밝혀 결국 협회도 기권을 받아들였다.[6] 왼쪽 발목과 오른쪽 발등이 잘렸는데 왼쪽은 어떻게 안 돼서 무릎 아래를 절단하고 의족을 하고 계신다. 오른쪽은 특수화를 신어서 겨우 보조하는데 상처가 자주 터진다고…[7] 자신의 아이를 구해준 거야 고맙다고 생각하겠지만 피해자한테 해 줘야 할 보상과 사람들한테 받을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안 찾아왔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유야 어쨌든 이 분이 없었다면 아이가 어떤 꼴을 당했을지 생각하면 최소한 예의상이라도 찾아가야 했다.[8] 사고 당시에도 그랬고 이후에도 그런 위험한 상황에서 우리 철도 직원들이라면 누구나 그랬을 것이라고 하신다.[9] 지금도 인터뷰를 하거나 하면 아이와 부모에 대해서는 묻지 말 것을 요구하신다고 한다.[10] 단순히 모에후커가 더 번역이 좋다는 걸 넘어서, 매니저가 단순과 같이 쓰면 충돌한다는 개드립까지 남겼다. 애초에 모에후커가 단순 기반이라는 걸 생각하면 말 그대로 적반하장이다.[11] 심지어 자신조차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본어 읽기를 제대로 못한 수준이었다![12] 물론 코드 추출의 노고를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봉사자적인 마인드를 가진 단순에 비해서는 포스가 떨어진다는 것.[13] 사실 그는 그 전에 배구 연맹으로부터 드래프트 거부라는 이유로 징계를 받은 적이 있기 때문에 각종 수상 자격을 박탈당했다가 다시 구제되었다.[14] 그렇지만 감독으로서의 능력은 뛰어난던 건 아니니 별개로 구분하자.[15] 하지만 애꿎은 박재홍 부모님은 경기장 갈때마다 함부로 고개를 들지 못했다고 한다.[16] 그것도 이천수를 인터뷰한 기자의 주선하에 억지로 이뤄졌다.[17] 참고로 본인이 이전에 맡았던 키움 히어로즈는 3위까지 치고 올라갔다.[18] 이유가 어이 없는 게 유재석이 짜장면보다 조금 더 비싼 다른 음식을 시켜서…[19] 윤동주의 연희전문학교 친구인 강처중이 썼다.[20] 게다가 이 사람은 당시 깡패들과는 달리 전과가 하나도 없었다. 본인도 죽을 때 까지 이 점을 자랑스러워하였다.[21] 어장관리를 했다는 것 자체는 사실이나 어장관리 피해자들이 없는 사실을 지어내 마녀사냥하려했다는 것이 밝혀져 '팀 내 경징계로 끝나면 되는 부분이었는데 왜 굳이 은퇴까지 시키게 만드냐'며 여론이 바뀌었다.[22] 유명인이라면 무조건 까고보는 그 악명높은 디시위키조차 온갖 표현을 쓰며 칭찬했다(...).[23] 그때가 지금보다도 훨씬 똥군기가 만연했던 1970년대였다는 점을 감안하면..[24] 하지만 당시 군대는 지금과 달리 병장은 병 중에서 대우를 달리했을 뿐 아니라, 짬 낮은 소위 정도는 역으로 갈구기도 했다. 이 때문에 월북한 장교도 있는 등, 물론 좋은 문화는 아니었다. 다만 당시 병장이라면 그냥 짬 좀 되는 간부가 넌지시 얘기하는 식으로 끝났을 거다.[25] 정말로 억울한 상황이 맞지만 사실 그는 억울하다고 말한 적이 거의 없다.[26] 나병이나 문둥병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실제 투병중인 환우분들께 실례가 될 수 있는 표현이니 한센병이라 칭하는게 맞다.[27] 일반인의 면역 수준으로는 접촉으로 균을 접해도 대부분 발병하지 않으며 감염된다 해도 자연사멸되는 경우가 대부분, 원인균에 대한 면역력이 매우 떨어지는 경우가 아니라면 발병하지 않으며 감염된다해도 약물치료가 가능하다. 2011년 KBS 모 기자는 취재하면서 직접 한센병 환우들과 식사까지 함께 했다.[28] 자세한 건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의 3-1 항목 참조.[29] 지금이야 프로야구 트레이드는 아무렇지 않지만 1980년대 당시 트레이드는 방출과 다름없었다. 특히 최동원은 롯데 자이언츠의 프렌차이즈 스타였기 때문에 더욱 더 충격적인 사건.[30] 매일일보에서는 1975년에 죽었다고 보도했다. 또한 1995년 7월 2일자 동아일보 신문에서는 이한웅이 1970년에 죽었다고 언급했다.[31] 남편이 죽을 당시에 그녀는 불과 27세였다. 다시 말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재혼할 수 있는 나이인데다가, 30세가 넘어도 결혼 못하는 사람이 많은 지금과는 달리 당시 여성들은 20대 중후반에 거의 다 결혼하는 분위기여서 주변 압력 때문이건 아니면 본인 자의건 간에 얼른 결혼했을 가능성이 높았으며, 결정적으로 당시 기준으로 볼 때에는 혼인 적령기는 약간 지난 나이였지만, 새 시가에 한 몫을 두둑히 해줄 전 재벌가 맏며느리 출신의 여자를 거절할 집안이 70년대 당시의 한국에서 얼마나 있었을까?[32] 그나마 다행인 건 이 아이스크림 가게가 잘 되었다고는 하지만, 젊은 나이에 재혼은 커넝 무려 18년(매일일보 기록을 따르면 20년) 동안 자기 손자를 기르고, 남편을 잊지 않고 정절을 지킨 것에 대한 것에 비해 터무니 없는 보상을 해 준 것 자체만으로도 문제가 많다. 실제로도 사고 당시에 기자들이 그녀와 만나 인터뷰하기 전 까지만 해도 그 기자들은 추경영을 삼풍 임직원 정도로 생각했다가 구조된 그녀와 한 인터뷰로 인해서 추경영이 힘들게 살아왔음이 알려지자 안 그래도 최악이었던 이준 일당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가 더욱 부채질하는 결과를 가져왔다.[33] 물론 그녀의 사과 장면을 TV로 당시 국민들은 그녀를 비난하기는 커넝, 그녀에게 씁쓸한 안타까움을 표하며 동정하였고, 이 사건을 일으킨데다 자기 맏며느리를 사지로 내몰았던 이준 일당을 비난했다.[34] 현미와 옥주현의 나이 차가 40살이 넘는다.[35] 다른 사람도 왕과 부딪힌 것이니 신하들이 충공깽에 빠진 상황이었지만, 잠깐의 실수를 가지고 중히 벌할 수 없다며 관대한 처분을 내렸다.[36] 왕이 사실상의 허수아비로 전락한 세도정치 기간인 헌종 때에도 왕명에 의해 유배를 간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전문] 사실 같이 일하는 PD들 중에 홈쇼핑 광고 좀 그만 하라는 사람도 있어요. 하지만 제 입장에서는 어려울 때 같이 해왔던 사람들인데 이미지 관리를 핑계로 냉정하게 거절할 수가 없어요. 저는 홈쇼핑 광고를 너무 부정적으로 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제품은 다 똑같은 것이고, 저는 성우로서 맡은 일에 얼마나 충실하게 임하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38] 교황으로 재위하던 중에 한 아이가 장난삼아서 소방관용 헬멧을 씌워주자, 이를 제지하려는 경호원들을 물리고 진짜로 헬멧을 쓰고 아이와 함께 웃어 보인 일이 있었다.[39] 사실 시스 로드(...)같은 이미지도 교황 선출 이후 과중한 업무으로 인한 피로로 눈에 다크서클이 생기면서 나온 것이다. 결국 이를 인지한 바티칸 당국이 2008년부터 베네딕트 16세의 외모 관리와 건강 관리에 신경쓰고 교황을 찍은 사진도 보정시켜서 공개하는 조치를 취하였다.[40] 파스칼리나 레네르트 항목을 들어가보면 알겠지만, 그녀는 자신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했던 교황 비오 12세가 종교적인 업무에만 신경쓰겠다며, 모든 정치적 실권을 그녀에게 부여한 것을 계기로, 추기경들을 길들이기 위해 일부러 갖가지 핑계를 대며 추기경들의 교황 알현을 방해했다. 개중에는 추기경 시절의 요한 23세도 있어서 당시의 교황과 자신이 열렬한 팬을 자처하던 미국 배우 클라크 게이블교황을 알현한다는 이유로 요한 23세를 추운 밖에서 바람을 맞힌 일이 있었다. 심지어 그가 나중에 교황으로 선출되자, 기자가 '그때 그가 교황이 될 줄 알았더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했다.[41] 다만 개인 레벨에선 나쁘게 평하자면 민폐, 좋게 봐도 마이페이스 속성 보유자라는 얘기가 자주 들리며 GNU 내에서도 급진 과격파라 충돌을 빚는 경우가 많다.[42] 다만 스캇의 엉성한 경기 진행으로 반응은 좋지 않았다.[43] 취미가 궁전 정원에 있는 텃밭을 일구어서 나오는 농산물을 귀부인들과 나눠먹는 것이었다고 한다.[44] 해당 문서와 루이 16세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정말로 억울하게 처형당했다.[45] 히틀러는 항복하거나 패배한 인물들을 패배주의자라고 매도하고 고위직 장성이라도 즉결 처형이 가능하도록 하였다.[46] 티거는 워낙 생산된 물량이 적었던 탓에 독일군에서도 정비에 우선순위를 부여받았고 금이야 옥이야 떠받들 정도로 당시 독일군도 보급받기가 상당히 힘든 편이었다.[47] PBS가 비영리를 추구하기도 했었고.[48] 일제 강점기 시기에 그것도 일본인으로서 덕혜옹주와 혼인했기 때문에 민족주의적 여론에 의해 근거없는 비방을 당했기 때문이다.[49] 다만 불행하게도 그의 이런 헌신은 아내인 덕혜옹주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소 타케유키가 조현병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에 정신과 의사를 찾기 보다는 마사지사를 불러서 안마만 받게 했기 때문이다. 사실 당시로서는 정신과 의사를 찾아갔어도 뾰족한 대안은 없었을 것이다. 당시의 조현병의 치료법이라는 게 최면치료나 전기충격요법이 고작이었기 때문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도 정신질환의 치료법이 최면치료에 그치는 것에 한계를 느끼고 독자연구를 시작했고, 이렇게 해서 세워진 이론이 바로 정신분석학이다.[50] 그래도 제너는 운영하던 개인병원이 매우 잘 되었고, 천연두 백신의 대성공으로 세계 각국에서 기부금과 연구비를 지원해줘서 부자가 되었다. 나중엔 첫 예방접종자 핍스와 그 가족에게 자기가 살던 집을 줄 정도였다.[51] 당시에는 대전이 충청남도 관할이었고 1981년에 직할시로 분리되었다.[52] 이 후유증으로 그는 다리 근육이 상해 보행이 불편하게 되었지만 그나마 평소 걷기를 많이 한 덕분에 절단은 면했다고 한다.[53] 참고로 아인자츠그루펜은 아래 쿠르트 크니스펠 항목에 보면 알겠지만 무장친위대마저도 수치로 여겨질지경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들 사이에서 민간인을 구출했다는 거는 보통 용기로 하는게 아니다.[54] 직링크는 직링크를 당한 홈페이지에 심각한 부하를 주는 행위이다.[55] 쿠레나이 와타루 역을 맡은 세토 코우지, 미나미 코타로 역의 쿠라다 테츠오와 함께 역대 시리즈 주인공 담당배우가 원래 배역으로 출연한 경우. 쿠레나이 와타루가 전작 주인공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역대 주인공 배우들 중 유이하게 재출연한 사례[56] 영화 300에서 이 대사로 유명한 크세르크세스 1세는 키루스 2세의 외손자인데 아버지 다리우스 1세는 키루스 2세의 사위, 어머니 아토사는 키루스 2세의 딸이었다.[57] 나치 독일의 인종청소부대. 점령지에서 공산당 간부, 소수민족, 유대인을 학살한 것으로 악명을 떨쳤고 국방군 뿐만 아니라 무장친위대조차 독일군의 수치라며 혐오하던 집단이었다.[58] 그 것도 로저스 자신이 아니라 들고 있는 인형을 상대로 말을 하는 식이었는데, 평소에 자신이 비웃음을 당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직원들이 창피해하지 말라고 배려하는 차원에서 인형을 세우고 인형의 목소리로 말을 한 것이다.[59] 안타깝게도 하나이 젠키치 선생이 별세하신 후, 소록도는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이후 군사독재정권기까지 벌어진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온갖 잔학한 인권침해 행위의 온상이 되고 말았다. 하나이 선생의 노력과 헌신이 물거품이 되어버린 것이다.[60] 다른 한 명은 독립운동가 박열의 부인인 사회운동가 카네코 후미코이다.[61] 서로 유감이 없다고는 하지만 이 둘은 성격이 성격인지라 트러블이 진짜 심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