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일본
동아시아의 정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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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승인국 |
<colbgcolor=#fe0000><colcolor=white> ▲ 일본 국회의사당 |
▲ 일본 중의원 본회의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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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정치 정보 | ||
<colbgcolor=#fe0000> 부패인식지수 | 73점 | 2023년, 세계 16위[1] |
언론자유지수 | 62.12점 | 2024년, 세계 70위[2] |
민주주의지수 | 8.40점 | 2023년, 세계 16위[3][4] |
일본의 정치를 설명하는 문서다.
일본의 정치 체제는 1947년에 제정된 일본국 헌법에 기초하여 구성되어 있다. 일본은 입헌군주제와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있는 민주주의 국가다.
2. 천황
자세한 내용은 천황 문서 참고하십시오.일본은 동아시아에서 유일한 입헌군주국으로 천황이 군주이다. 일본국 헌법에서는 천황의 지위를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만 규정하고 주권이 국민에게 있음을 명시하지만, 천황은 상징적 국가원수[5]의 역할을 하고 종신직이며 그 지위도 자자손손 영원히 세습되므로 군주로 해석된다. 이러한 이유로 현대 일본의 천황제를 상징천황제(象徴天皇制)라고 한다.
천황이 국가의 일에 대해 독자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은 명목으로라도 없다. 많은 민주주의가 확립된 입헌군주제 국가에서는 명목으로라도 거부권이나 의회 해산 등을 독자적으로 행사할 수 있지만 관례에 따라 행사하지 않는데, 일본의 천황에게는 이런 권한이 아예 없다. 천황의 모든 국사에 관한 행위(법률 공포권, 의회 해산권, 사면권 등)는 내각의 승인을 얻어야만 행사할 수 있도록 헌법으로 명문화되어 있다. 이런 특징 때문에 일본 학자들 중 일부는 현대 일본의 천황제를 스웨덴의 군주제와 함께 입헌군주제와는 별도의 상징군주제(象徴君主制)로 정의하기도 한다.[6]
민주주의가 확립된 여타 입헌군주제 국가들과 달리 일본은 군주제 폐지 여론이 극히 적다. 주요 정당인 자유민주당과 입헌민주당 등은 천황제가 현대 일본의 발전에 기여했다고 주장해왔으며, 국민들 사이에서도 군주제 폐지 여론은 찾기 어렵다. 현대 일본의 원내 정당 중 천황제에 비판적인 정당은 일본공산당 정도가 거의 전부다. 공산당은 국회 개회와 천황 즉위식 거부로 우회적인 천황제 비판을 지속하는데, 이유는 일본 국회가 제국의회 시절의 천황 참석 개회 관습을 그대로 이어받았고, 신화 기반의 즉위식이 정교 분리에 위반한다는 이유 때문이다. 또 공산당은 천황제 폐지에 대한 당론도 존재한다.
군주국이라 주요 직위의 호칭도 대한민국에 비해 많이 다르다. 예를 들면 정부의 각 성(대한민국의 부에 해당)의 부총리~장관급 각료는 대신[7]이라 하고, 정부의 최고 권력자 총리도 정식 명칭이 내각총리대신이다.
3. 삼권
3.1. 입법부
자세한 내용은 일본 국회 문서 참고하십시오.자세한 내용은 중의원 문서 참고하십시오.
자세한 내용은 참의원(일본) 문서 참고하십시오.
3.1.1. 양원제
일본 국회는 양원제로, 상원인 참의원과 하원인 중의원으로 구성된다. 정부 공식 서열상으로는 참의원이 중의원에 앞서지만 중의원이 조약 승인권, 총리 지명권, 내각 불신임권, 예산안 승인권 등을 가지고[8] 법률안 의결시 헌법상 중의원이 가결한 법률안을 참의원이 부결시키더라도 중의원이 출석 의원 3분의 2 이상 찬성으로 재의결하면 법률로 확정되는 만큼 사실상 하원 격의 중의원이 더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9] 이는 일반적인 양원제 국가에서 상원이 귀족의, 하원이 평민의 모임이었던 것에 기원한다. 민주화로 귀족들이 실권을 잃었기 때문에 상원의 힘은 점차 약화되었고 이것이 전통으로 남은 것으로, 유럽 국가들도 대부분 하원이 상원보다 막강한 권한을 가진다. 예외는 처음부터 귀족 같은 게 없는 미국 정도.[10] 따라서 4년에 한 번씩[11] 행해지는 중의원 의원 총선거가 사실상 일본의 정치 구도를 결정한다고 볼 수 있다.참의원은 중의원과 더불어 국가의 주요 인사에 대한 동의권을 지닌다. 다만 이를 곡해하여 참의원만이 인사 동의권을 독점한다고 하면 잘못이다. 내각 각료가 아닌 일본은행 총재[12], 일본의 각 공기업 사장(특히 NHK) 등에 대해서는 중의원과 참의원 모두의 동의를 얻도록 하고 있다.[13]
일본 제국 시기에는 영국처럼 상원은 귀족원이고, 하원은 중의원(서민원)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 제국이 무조건 항복하면서, 귀족원은 참의원으로 전환되고 중의원은 그대로 이어지며, 참의원은 귀족원의 역사를 계승하지 않는다. 선거 대수를 보면 명확하다. 참의원은 귀족원을 승계하지 않기 때문에, 1946년 선거가 첫 선거이고, 중의원은 1946년 첫 선거가 제2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였다. 이것은 연합군 점령하 일본의 결정이었다.
21세기 들어서 선진적인 학자들 사이에서 참의원 폐지에 대한 주장이 많이 나오고 있다. 양원제가 전세계적으로 쇠퇴 추세인데다 일반적인 양원제 국가와 달리 일본은 연방제도 아니고, 평화헌법 제정시 참의원 선거도 국민의 투표에 의해 결정되도록 바뀌어서 영국처럼 귀족원 성격의 상원을 유지할 필요가 없으며, 사실상 실권이 하원에 있어서 참의원의 존재 가치가 시간 끄는 거 말고는 별로 없는 만큼 잉여롭게 세금 깎아 먹는 사람들 수를 조금이라도 줄여보자는 취지에서다. 하지만 의원직이 소위 높으신 분들의 세습직이라 필사적으로 반대하는데다 일반 국민들도 다른 세상 이야기로 여기고 있기 때문에 반향은 적은 편이다. 그리고 대선거구제를 채택하고 있는 일본 참의원은 제도적으로 한 당이 싹쓸이 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는 반면, 소선거구제를 채택하고 있는 중의원은 한 당이 싹쓸이를 하기 쉽다. 때문에 참의원이 날아가면 2005년 우정 해산 이후 한 당이 극단적으로 싹쓸이하는 것이 일상화된 일본 선거 특성 상 의회가 제기능을 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중의원 회의록 중의원들의 회의록이 정보 기록화 되어 있는데, 한국인들의 이름(한자)도 찾아보면 그 동안 몰랐던 정치 비사들이 나오기 때문에 정말 요긴하게 쓰인다.
3.1.2. 회의 진행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영국의 의회 구조를 가져와 도입하였기 때문에 많은 점에서 비슷하다. 특히 의회에서 대정부 질의 및 국정 현안에 대한 심의시, 여/야의 실무자 및 총수와의 설전 싸움이 매우 치열한 편이다. 이는 영국 의회 항목의 영국 의회 심의 영상에서 잘 나타나 있는데, 일본 역시 이러한 설전이 자주 벌어진다. 특히 가장 압권은 영국의 'Prime Minister's Questions'와 비슷하게 총리이자 여당 총수인 아베 신조를 대상으로 야당(민진당, 공산당 등)에서 현안 및 의혹들에 대해 폭풍 같이 몰아치며 질의하는 시간이 있는데, 아베가 워낙 달변가인 터라 야당 의원들이 압도당해 제대로 이겨본 적이 없다. 게다가 간간히 터트리는 해학으로 판을 뒤집기 때문에 아베의 계략에 말려버린다.[14] 다만 야당 측에서도 아베의 경쟁자가 될만한 사람인 무라타 렌호 입헌민주당 부대표가 있어 둘이 의회에서 질의응답을 가질 때는 상당히 볼 만하다.[15]3.2. 행정부
3.2.1. 내각
자세한 내용은 국가행정조직/일본 문서 참고하십시오.자세한 내용은 일본국 내각총리대신 문서 참고하십시오.
자세한 내용은 국무대신 문서 참고하십시오.
일본국 내각 국무대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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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각부설치법상 의무적으로 임명. | ||||||
총리 직속 · 중앙성청 | }}}}}}}}} |
행정권은 중의원(형식적으로는 참의원 포함)에서 지명하고 천황이 임명하는 내각총리대신과 그가 지명하는 국무대신(=대한민국의 장관급 각료)[16]으로 구성되는 내각이 행사한다. 총리는 국회의원이기만 하면 누구나 입후보 자격이 있으므로 이론상으로는 참의원 의원도 총리를 할 수 있지만 전후 귀족원이 참의원으로 대체되고 일본 제국에서 일본국으로 전환된 후의 역대 총리들은 모두 중의원에서만 나왔다. 일본 제국 시절에는 귀족원에서도 총리를 많이 배출했다.[17]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있으므로 내각을 구성하는 각료인 국무대신은 대부분 중의원 의원으로 채워지며, 참의원 의원이 내각에 입각할 수는 있으나 관례적으로 참의원 의원을 내각에 입각시키는 경우는 전체 대신 수의 1/3 정도만 입각시킨다.[18]
국회의원이 아닌 자를 내각에 입각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이 경우 각료(대신) 총원의 절반 미만으로 상한선이 정해져 있다.(일본국 헌법 68조) 이렇게 국회의원이 아니면서 대신이 되는 사람들을 민간인 각료(民間人閣僚)라 하는데 역대 내각에서 민간인 각료는 손에 꼽으며, 현임 기시다 총리는 한 명도 민간인 각료를 두지 않고 있다. 역대 가장 많은 민간인 각료를 뒀던 내각은 고이즈미 전 총리의 1차 내각으로 17명 중 3명이 의원이 아닌 자였으며, 그 외에도 고이즈미는 자신의 임기 내내 요직인 재무대신을 민간인으로 기용한 이례적인 사례를 남겼다.[19]
많은 국무대신은 대한민국의 장관처럼 중앙 부처의 장을 겸하지만, 일본은 과거 대한민국의 정무장관이나 특임장관처럼 중앙 부처의 장을 겸하지 않는 국무대신도 있다. 이들은 내각부특명담당대신(内閣府特命担当大臣)이라 하여 정권(내각)에서 중요 과제로 취급되는 정책을 담당한다. 이 직위를 표기할 때는 공식적으로는 '내각부특명담당대신 (금융담당)'처럼 괄호 안에 담당하는 정책을 표기하며, 줄여 부를때는 '금융담당대신', '금융담당상' 등의 형식으로 표기한다. 내각부특명담당대신은 어떤 직책을 둬야 한다고 법적으로 결정된 것은 아니므로 정권에 따라서 자리가 새로 생길 수도 있고 없어질 수도 있는데, 오키나와 및 북방영토 담당대신(沖縄及び北方対策担当大臣), 금융담당대신(金融担当大臣), 소비자 및 식품안전담당대신(消費者及び食品安全担当大臣)은 내각부설치법에 그 근거가 마련되어 있어 어느 정권에서도 빠진 적이 없다.
3.2.2. 관료
일본 내에서도 세금 도둑의 인상이 강하지만 일본의 관료제가 지니는 효율성은 상당하다. 관료제의 장점과 단점을 극한으로 겸비한 것이 일본이다. 매뉴얼, 전례가 없으면 극도로 허둥지둥하고 전산화 비중이 바닥이라서 수신호, 유선전화, 우편, 대면 접촉, 종이서류 보고 등 1990년대 수준의 아날로그 스타일을 고수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단점이나, 대응 매뉴얼 자체는 꽤 성실하게 준비하는 편이고 자연재해 같은 위급 상황은 매뉴얼이 거의 완벽하게 만들어져있어서 위기관리 시스템이 그야말로 기계적으로 초고속 발동한다.[20] 2011년의 동일본 대지진 이후 재난 대비 매뉴얼을 한번 싹 갈아엎었다고 한다. 또한 일본 관료 조직은 “한 번 당한 일은 두 번 다시 당하지 않는” 시스템 구축을 만드는 데에 특화해 있다.일본의 관료 계층이 제일 무서운 집단인 것을 알 때가 바로 경제, 통상 분야이다. 경제 분야에서는 대장성 - 재무성으로 이어지는 경제관료들의 중노동 대응 매뉴얼과 기업들 통제 전략, 국회/국민 설득 방안 등에 대한 매뉴얼도 전부 따로 작성해 놓고 있다. 이 때문에 미국과 유럽에서는 일본 경제관료들을 연구하는 경제학, 행정학 분야가 따로 있다. 또한 일본은 통상 협상에서 미국보다도 더한 악질로 정평이 나 있다. 무역/통상 협상을 하러 가면 일본은 이미 실무진들을 통해 상대국에 대한 세밀한 분석을 해 두고, 그 국가의 협상 전략까지 세세하게 파고들어서 대응 전략을 마련해 두고 협상에 들어온다. 이 때문에 협상 상대국이 일본의 페이스에 말려들어서 제대로 된 협상을 하지 못하여 협상 자체가 결렬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한번 협상을 제대로 하면 가장 빠른 속도로 진척시키기도 한다.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이 TPP 탈퇴를 발표했을 때 다 TPP의 위기라 했지만 일본은 TPP의 일부 조항을 동결하고 미국이 재가입할 수 있게 유인책을 삽입해놓는 기지를 발휘해 TPP를 부활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다만 대한민국 정부에 비해 일본 정부는 전자화가 미진하여 정부 내부 교류에서 수신호, 유선전화, 우편, 대면접촉 등 무슨 90년대식 시스템인 것은 일본 내에서도 단점으로 지적받고 있다. 융통성이 낮고 각 부처별로 벽이 높다고 꼽히는 원인이 바로 이런 미비한 전자정부 아니냐고 할 정도이다. 아베 신조 2차 내각 들어서 전자정부 계획을 세워 2022년을 목표로 완료한다고 말했지만, 제대로 진척되는 것 같진 않다. 달리 말하면, 저런 90년대식 시스템으로 미친듯이 효율적인 관료 조직을 운영한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효율성도 이제는 옛날 이야기가 되고있다는 평가가 많다. 특히 이는 관료집단과 정치권 사이의 균형이 깨진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보는 분석이 많은데, 내각인사국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먼저 알아야만한다.
2009년에 민주당으로 정권이 교체되고 2012년에 다시 자민당 정권으로 교체되면서 아베정권이 가장 먼저 단행한 일이 바로 내각인사국의 신설이다. 일본정치권은 수십년전부터 관료집단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의 막강한 힘을 통제하기위해 여러모로 노력해왔는데, 2009년 정권을 잡은 민주당 정권은 이 문제에 있어서 가장 적극적으로 대응해왔다.[21] 그러나 동일본 대지진이 터지고, 민주당 정권의 관료집단에대한 목줄죄기에 반발하는 관료들의 집단 행동으로 대지진 수습이 지지부진해지자, 자민당 정권은 손 쉽게 민주당 정권을 물리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등장한 아베 정권은 민주당 정권의 실패를 본보기삼아 보다 확실하게 관료집단을 통제하기위한 시도를 단행하는데, 그것이 바로 내각인사국의 신설이다. 내각인사국은 2008년에 신설된 법안인 '국가공무원제도개혁기본법'을 기반으로 2014년 신설된 내각부 내각관방 산하의 비독립적 중앙인사기관이다.
이 기관 신설 이전까지만해도 부처 내 상당수의 고위직 인사는 관료 출신의 사무차관이 맡는 게[22] 불문율에 가까웠으나, 이 기관의 신설로 총리와 관방장관이 심의관급 이상 600명가량의 고위 관료에대한 승진과 배치를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게 되면서, 마침내 정치권이 관료집단의 목줄을 확실하게 쥘 수 있게된것이다. 이러한 변화가 이루어진 이후부터 관료에 대한 정치의 우위가 두드러진 결과 관료들이 필요할 때에도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정치권이나 여론몰이에 휘둘리는 일이 늘어나고있다는 평가가 많다.
예를 들면 2019년의 초계기 비행 사건이나 한일 무역 분쟁[23], GSOMIA 파기 논란[24]에서 일본이 보인 비일관적인 태도나 2020년의 코로나 19 유행에 대한 무기력한 대응은 정치권의 입장[25]에 눌려 관료들이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한 데 따른 결과로 보기도 한다. 이는 아베 신조 정권의 초장기집권으로 관에 대한 정치의 우위가 너무 심화되어 생긴 문제이기도 하다.
3.3. 사법부
자세한 내용은 일본/사법 문서 참고하십시오.4. 지방자치
일본의 지방자치 역사는 길다. 센고쿠시대부터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다이묘들이 각 번과 영지를 다스리던 봉건제였고, 메이지 유신으로 중앙집권제가 확립되어 지방정부 수장은 중앙정부에서 임명해 내려보냈지만 지역마다 제한선거를 통해 선출된 의회가 존재했고 이들이 지방정부 수장 후보군을 중앙정부에 추천할 수 있는 등 지역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1947년부터 본격적인 지방자치제도를 확립해 지방자치단체장 및 지방의회 의원에 대한 보통선거제가 도입되었다.현재 일본은 전국이 47개의 도도부현으로 나뉘어 지방 분권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역사적인 이유로 인해 대한민국보다 지방 분권이 잘 이루어져 있고 이 덕에 각 지역마다 전통대대로 내려져온 축제나 풍습이 잘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지방자치제가 너무 강한 나머지 각 지방마다 전입 신고서처럼 관공서 신청 양식이 제각각이라서 통일성이 없다는 것도 어느정도 문제점이 있다.
각 도도부현은 시정촌(시초손)으로 구성되며 두 단계의 지방자치단체가 지방의 행정을 담당한다. 모든 도도부현과 시정촌에는 의사기관인 의회와 집행기관인 수장(도·도·부·현 지사와 시·정·촌 장)이 있으며, 지방의회 의원과 지자체의 수장은 각각 주민의 선거로 선출하며 지방자치단체는 법률의 범위 내에서 각각의 조례를 지정할 수 있는데, 지방자치단체의 위상이 큰 만큼 이러한 자치 입법은 대한민국과 비교해서 일반 주민들의 생활에 상당히 큰 영향[26]을 미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에는 지역정당이 많다.
지방자치단체장과 임기는 4년이다. 다른 점은 대한민국은 3선, 대만은 재선까지만 가능하지만 일본은 임기 제한이 없다. 지방선거에서는 대한민국과 달리 정당 공천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금지된 건 아니지만, 지자체장은 거의 전부 무소속으로 출마하며, 정치인이 출마할 때도 보통 탈당을 하고 출마하는 경우가 많다. 대신 정당들의 지지 선언을 받는데[27], 상대적으로 중소도시인 경우에 자유민주당과 공명당과 입헌민주당, 일본유신회, 국민민주당이 같은 후보를 지지하여 일본공산당 추천 후보와 맞붙는 경우가 많고, 대도시인 경우에는 양자대결의 경우 자유민주당+공명당+일본유신회 vs 입헌민주당+국민민주당+공산당 또는 자유민주당+공명당 vs 입헌민주당+국민민주당 vs 공산당의 구도인 경우가 많다.[28] 또한 대한민국, 대만과는 다르게 지자체장이 궐위되어 보궐선거로 뽑힌 지자체장에게도 4년의 임기를 보장해준다. 그렇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전국동시지방선거 격인 통일지방선거에서 뽑히는 지자체장은 이름과는 다르게 전국의 지자체장 중에서 단 7%에 불과하다.
지방의회의원의 임기도 4년이다. 지방의회의원은 거의 모두 공천을 받고 출마한다. 그러나 대한민국처럼 농어촌 지역일수록 정당보다는 인물을 보는 경향이 강해지기 때문에 농어촌으로 갈수록 지자체장과 지방의회의원 대다수가 무소속인 경우가 많다. 마찬가지로 지방의회 역시 전국 곳곳에서 잇따르는 행정구역 병합과 일부 지역 한정으로는 해산 규정도 있기 때문에 통일지방선거에서 선거가 치러지는 경우가 7% 뿐이다.
이 때문에 후보자 개인의 성향을 꽤나 잘 파악해야 누구에게 투표해야 될까를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만큼 정치를 잘 알아야 하기 때문에 투표를 포기하는 사람들도 많아진다. 게다가 임기 제한이 없다보니 지역에서 잘 다스리면 이론적으로 죽을 때까지 가능하지만 나쁘게 말하면 지역과의 유착이 심해진다. 보통 현지사, 대도시 시장은 이 정도는 아니지만 시골에서는 이런 경우를 꽤 볼 수 있다. 애시당초 시골의 경우 할 사람이 없어 무투표 당선으로 마무리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29]
기초자치단체격인 시정촌이 대한민국의 시군구에 비해 상당히 작고 농어촌 지역의 인구가 줄면서 행정 효율화를 위해 지자체간 합병이 잦다.
하지만 지방자치가 대한민국에 비해 잘 되었다는 일본도 대한민국처럼 중앙정부가 실질적인 힘이 크다. 일본의 지방의회의원은 공무원이 아닌 전문직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보니, 지방의회의원 출신에서 중앙정치로 가는 인물들이 많지가 않다. 그나마 간다해도 지방 민심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의원 의원, 참의원 의원이 낙선되고 정치적 마감 준비를 위해 시장직에 출마해서 당선된 경우가 있다.
지자체장(도도부현지사, 시정촌장)은 지역주민 직선으로 선출되지만, 내각제처럼 지방의회의 불신임결의를 당할 수 있다. 재적 4분의 3 이상의 표를 받으면 불신임결의안이 통과되고, 10일 이내에 지자체장은 사임하거나 의회해산을 해야 한다. 의회해산을 하는 경우, 새로 선출된 의회가 다시 불신임투표를 하여 1/2 이상의 표가 나오면 지자체장은 사임해야만 한다.
주민소환제도가 있어서 일정 서명수를 모아 조례의 제정이나 개폐, 감사, 의회해산, 의원이나 지자체장의 사직, 공무원의 사직 등을 주민투표에 부칠 수 있다.
이외에도 특례법에 따라 의원 4분의 3 이상 재석, 5분의 4 이상 동의로 의회 스스로 해산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 특례법은 1965년 도쿄도의회에서 자민당 의원들이 대거 뇌물을 받아챙기는 사건(일명 도쿄도의회 검은 안개 사건)이 일어난 것을 계기로 제정되었다. 도도부현 의회의 자주해산은 도쿄도의회(1965년 6월), 이바라키현의회(1966년 12월)의 사례가 있다. 시정촌의회의 경우 임기만료일이 지사나 시정촌장선거와 가까운 경우 예산감소 등의 이유로 선거를 같이 치르게 하기 위해 자주 해산하는 사례가 있다.
5. 정당
자세한 내용은 일본/정당 문서 참고하십시오.6. 선거
일본의 주요 선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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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투표용지는 유권자가 직접 후보이름을 적는 자서식이다.[30] |
투표 장면 |
중의원 의원 총선거,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통일지방선거, 대법원 판사 국민 심사 등이 있으며 여러 사안으로 주민투표를 시행하는 경우도 많다.
제4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때 시가현 중의원 지역구 선거에서 투표함을 분실하여 표의 개수가 맞지 않을 위기에 처하자 선거관리위원회로 파견되었던 직원 3명이 여분으로 가지고 있던 투표용지[31] 수백장을 넣은 가짜 투표함으로 대체했다가 적발되는 대형사고가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무효표가 1236장이나 나왔고, 투표용지 개수가 맞지 않아 선관위가 당황해하고 있었는데 3개월 후 내부고발이 나와 진실이 알려졌다. 해당 사건 이후 진짜 투표함을 뒤늦게 발견했으나 직원들이 몰래 불태워버렸다. 다만 집권당 후보가 15000표 이상 차이로 압승하면서 재선거는 하지 않고 그냥 넘어갔다.
인구감소가 심각하다보니 참관인에 대해서 원격으로 허용하고 있다.#
6.1. 선거 제도의 특성
- 안분표 - 일본만 시행하고 있는 선거 제도. 일본 정치의 문제점으로 지적받고 있는데, 이는 하술할 자서식 투표제도에 기인한다.
- 석패율제 - 일본의 권역별 불구속명부식 비례대표제.
- 코스타리카 방식 - 1인 2표제 전술 중 하나이다.
- 당선에 필요한 최저득표수 규정이 있다. 중의원 지역구와 지자체장은 1위 후보가 각각 유효표 총수의 1/6과 1/4을 넘지 못했을 경우, 참의원 지역구와 지자체의회 의원은 각각 유효표 총수/당선인 정수의 1/6과 1/4를 넘지 못한 사람이 나왔을 경우 재선거[32]를 한다.
6.2. 자서 투표제
자세한 내용은 자서 투표제 문서 참고하십시오.6.3. 선거 일람
- 국정
- 지방
7. 문제점
일본은 55년 체제 이래 자민당 혼자서 여당으로 군림하고 있고 야당은 부진하는 일당우위 정치가 장기간 지속되고 있다.# 이때문에 겉으로는 민주주의 체제이지만 실상은 공산당처럼 일당독재나 다름없다고 일본 정치를 꼬집는 발언도 있을 정도다.
자민당 정권의 별명이 자민막부일 정도이고, 현재 일본의 정치의 문제점들은 자민당의 장기집권 체제와 더불어 다양한 문제점이 결합하여 파생된 것이다. 대한민국에서도 의원내각제를 거론할 때 후술할 일본 정치의 각종 문제점들이 회자되기도 한다.
냉전기 아시아에는 일본을 제외하면 제대로 된 민주주의 국가가 거의 없었고, 대한민국을 포함하여 주변 아시아 국가들은 국가의 발전이라는 명분 하에 군부의 힘을 업어 독재 등의 정치적 혼란 상태에 놓여 있었다. 반면 일본은 전후부터 재선을 통한 연임은 있어도 독재를 하는 사람은 없었기에 오랜 기간 일본은 아시아의 몇 안되는 선진 민주주의 국가로 여겨져왔다.[34]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웃나라 대한민국이 민주화 운동을 통해 민주주의를 꽃피우기 시작하고, 공산권을 제외한 주변 국가에서도 민주주의가 정착, 발전한 반면, 일본 정치는 문제점이 해결되기는커녕 심화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2010년대 후반부터 일본의 정치에 대해 의문을 갖는 경우가 늘기 시작했다.
일단 야당의 세가 너무 약하다. 대한민국은 역사적으로 독재정권 시기에도 야당의 역할이 만만치 않았으며, 집권여당이 정치적으로 독주하려 들면 야권이 서로 연대해 이에 맞섰다. 반면 일본은 야당의 세력이 그렇게 크지 않은데다가[35][36] 민주당을 제외한 나머지 군소정당들은 서로간의 정치적 아젠다가 너무 달라서 연합은커녕 자민당 견제조차 못 하고 있는 실정이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대한민국의 야당은 중도층을 노리기 위해 기존 이념을 일부 융통성 있게 바꾸면서 스펙트럼이 다채로워지고 있지만, 일본은 3년 천하였던 민주당 정권 집권시기를 제외하면 야당 세력이 점점 작아지고 있다.#
현실적으로 의원내각제 하에서 수십년을 집권하고 의석 과반을 쥔 자민당은 소속 의원들도 내각과 당에서 국가의 일을 처리하며 숙련도와 경험이 쌓이는 반면 야당 의원들은 내각과 정부부처에서 일할 기회도 없으며 할 수 있는 것은 날카로운 질의로 국가정책에 비판을 가하거나 딴지를 거는 것 정도이다. 야권의 집권 경험이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기에 정작 수권을 하게 되면 미숙한 모습을 보이게 되며, 그 모습이 국민에게 제대로 각인된 것이 2009-2012년 민주당 정권이다.
일본의 제1야당인 민주당은 처음으로 쥐게 된 권력의 힘을 알게 되자 빠르게 부패하였고 이 3년 집권 시기 내내 비리가 계속 터지면서 이미지가 크게 실추되었다. 비리가 있어도 일은 잘했으면 모르겠으나 국방은 센가쿠 열도 분쟁 때 중국에게 굽신거리며 추태를 보였고 경제 성적도 바닥이었기에 야당이 집권하면 달라 질 거라 기대한 중도층은 크게 실망하였다. 최종적으로 도호쿠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 때 보여준 막장 대응으로 인해 '민주당에게 맡겼더니 자민당보다 더 못한 행보를 보인다'는 국민들의 실망이 더욱 커져서 결국 국민들이 여태껏 잘 해오던 자민당을 지지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2019년 기준 일본의 민주주의 지수 세부 지표를 보면 정부 기능, 시민의 자유는 동북아시아 내에서 높은 편이지만 반대로 시민들의 정치 참여, 정치 문화가 다른 선진국에 비해 낮은 편이다. 이 때문에 이제 일본이 완벽한 민주주의 선진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일단 젊은 층들의 정치에 관심을 가지며 선거에 적극적으로 투표를 하는 것부터 가야 현재 일본이 가지고 있는 정치 문제를 개선해야 가능하지 않냐는 의식이 존재 한다.
한국과 같이 국회의원 특권 논란이 있으며, 2022년에는 교통비 수당을 두고 논란이 일어나다가 결국 편법으로 특권 지키기에 나선 사태가 있었다.#
“대한민국은 국민들의 피와 땀으로 민주주의를 일궜습니다. 대한민국은 이제 민주주의의 튼튼한 뿌리 위에서 세계의 큰 봉우리가 될 것입니다. 반면 일본은 민주주의를 스스로 일구지 못했습니다.[37] 그 결과 일본은 군국주의에 사로잡혀 급격히 우경화되고 주변국과 큰 갈등을 일으킬 것입니다.”
“일본 왜 우경화하냐면” 김대중 전 대통령 혜안
김대중 전 대통령이 2006년 10월 11일 전남대에서 ‘한반도의 현실과 4대국’이라는 강연회에서 스스로 민주주의 일군 대한민국과 달리 일본은 민주주의 주체세력이 없어 군국주의가 부활할 것이라며 일본의 우경화를 경고한 적이 있었다.“일본 왜 우경화하냐면” 김대중 전 대통령 혜안
전직 총리이자 현직 부총리의 입에서 나치 독일의 수법을 배우자는 말이 나온다.[38] 물론 아무리 야당이 기를 못편다 하더라도 저 말은 국제적으로도 상당한 문제가 될 수 있기에 융단폭격을 맞고 철회하기는 했다.
이렇게 문제점의 항목이 길기는 하지만, 2021년 기준 영국의 시사 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발표하는 민주주의 지수(Democracy index) 순위를 보다시피 일본은 17위로 16위인 대한민국보다 단 한 계단 낮아 현재 일본이 선진 민주주의 국가임은 부정하기는 힘들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크게 3가지로, 영향력이 큰 신문사가 다양하지 못한 것과 투기자본세력과 정치세력 간의 유착, 그리고 북한의 존재 때문에 필요악에 가까운 법률들이 공고하게 유지되고 있는 것이 문제가 되고 있다. 대신에 일본은 앞서 말한 3가지의 문제가 정치 세습과 정치 무관심으로 귀결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일본 정치하면 뭔가 노회한 할아버지들이 할 듯한 이미지가 있지만, 이는 의원수가 한국보다 훨씬 많은 데서 오는 착각이다. 절대적인 수가 많은 만큼 고령 의원도 한국보다 눈에 띄지만, 의원 평균 연령은 양국이 비슷하고 40대 이하 의원의 비율은 오히려 더 높다. 물론 이는 일본 특유의 지역구 세습에서 기인한 바도 있지만[39], 굳이 세습정치인이 아니더라도 일본 정치인들은 대체로 한국보다 어린 나이에 정치를 시작하는 편이다. 다만 한국처럼 정치인 물갈이가 활발하지는 않고 고령까지 정계에 철밥통처럼 남아 있는 경향이 강해 평균 연령은 한국이랑 비슷한 것이다.
그리고 일본 정치 역사를 보면 알겠지만 암살당하는 정치인이 좀 있는 편이다. 막말로 일본 정치사는 암살이 전통이란 말이 있을 정도.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 운동으로 암살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극단적으로는 최근에 살해된 아베 전 총리가 존재한다.
7.1. 지역구 세습
자세한 내용은 정치인 가문 문서 참고하십시오.[40] |
2018년 기준 중의원 전체의 약 23.4%가 세습의원이며, 집권 자민당으로 범위를 좁히면 1/3 수준이다. 내각에 한정지어서 보면 일단 기시다 후미오 총리부터 3대 세습이고 대신의 절반이 세습의원들이다. "일본에서는 정치가라는 직업이 세습직"이라는 한탄이 있을 정도로 문제이다. 이 때문에 자민당에서도 '세습금지법' 등의 논의가 있었으나 전부 무위에 그쳤다. 문제는 이런 식으로 정치가 이뤄지니 새로운 피가 수혈되기 어렵고, 세습이라는 형태를 띠기 때문에 민주정치와도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보통 정치가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3방(三バン)을 갖춰야 한다는 말이 있다. 지반, 간판, 가방이란 건데 이 세 단어 모두 일본어 발음상으론 방으로 끝난다.
- 지반(地盤) = 지역구 후원회(後援会)[41] 조직 및 지역 유지들과의 유착 관계. 조직표와 자금을 모으는 데에 중요하다.
- 간판(看板) = 여러 정치인을 배출한 자기 가문의 높은 인지도. 가문 이름은 다들 기억하고 있고 이름은 간단하게 -타로, -지로 식으로 지으니 자서 투표제를 채택한 일본 선거제도에서 극히 유리하다.
- 가방 = 정치자금관리단체. 고액의 공탁금과 선거 경비 등을 지불할 돈가방이다. 정치자금을 모금하는 파티를 열거나 이익단체들에게 후원을 받아 자금을 채워넣는데, 모금 과정은 관리를 하면서 정작 그 용처는 관리가 없으니 사실상 포켓 머니. 특히, 정치자금관리단체에 대한 기부와 상속은 비과세이기때문에, 자식에게 합법적으로 정치자금을 세금 한 푼 안 떼이고 넘겨줄 수 있다.[42]
어느 나라에도 가문의 후광을 등에 업고 등장하는 2세 정치인[43]들은 있기 마련이다.[44][45] 하지만 일본은 단순한 부모의 후광을 등에 업는 수준이 아니라, 센고쿠시대처럼 다이묘가 자기 봉토를 자식에게 세습하듯 특정 가문이 해당 지역구를 세습한다. 이들의 행태와 지역에서의 영향력은 사실상 과거의 다이묘와 다른게 없는 정치귀족이다. 실제로 정치인 가문들의 과거는 대부분 다이묘 가문, 다이묘의 가신 가문, 다이묘에게 하사 받은 땅을 다스리는 명주[46] 가문이다. 이는 지방분권적 특성이 강한 일본 특성상 옛날부터 지역 유지가 정계에 진출해 지역 발전에 기여하고 지역 주민들은 그 보답으로 해당 가문에 대한 계속적인 지지를 보내 세습 의원을 만들어주는 전통이 형성돼 있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정치인을 배출한 고노 가문은 예전부터 가나가와현을 다스리던 명주(名主) 가문이었다. 고노가의 고노 다로는 1996년에 아버지에게 가나가와현 국회의원 직을 세습받고 현재까지 국회의원을 하고 있다. 사실상 고노 가문이 몇백년동안 가나가와현을 통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정치인 가문에서 태어난 2세~3세들은 상류층, 귀족 가문들만이 다니는 일관제 명문사립학교에서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한번에 마친다. 일본의 명문 사학재단에서는 보통 유치원-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대학까지 운영하며, 학생들은 유치원에 입학하면 대학까지 무시험으로 계속 다니게 된다.[47] 개중에서도 가장 많은 세습 정치가를 배출한 게이오기주쿠대학 부속 초•중•고등학교이다. 게이오기주쿠는 등록금이 아주 비싸기에 초등부부터 올라온 구성원 대부분이 사회지도층이나 부유층 자녀이다. 특히 뉴욕에 있는 게이오 뉴욕학교는 장소의 특수성까지 더해 그 정도가 더 심하다. 그로 인해 이들 정치가 자녀들은 아주 어릴 적부터 서민들과 동떨어진 삶을 사는 것이다.
하지만, 사립 명문대학 법인에 속해있는 부속학교만 고집하지는 않는데, 부자들이 다니는 학교가 아니라 전국구 입시명문교인 카이세이고등학교, 아자부 고등학교, 무사시 고등학교에 진학해 입시를 쳐 대학에 가는 경우도 있으며, 의원 본인의 가족은 도쿄가 아니라 지역구에서 생활하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48] 자식을 지역구에서 키워서 해당 지역에 있는 명문고등학교를 나오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에는 서민들과 동떨어진 삶을 사는 비율이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지만, 그래도 엘리트들의 모형정원 출신인건 매한가지기에 서민적 감각과의 거리감은 어느정도 존재한다.
케이스별로 분석해보자면 나카소네 야스타카는 전형적 게이오 보이로, 게이오기주쿠 초-중-고-대학을 거쳐왔으며 지역구인 군마에서 자란 적은 없다. 기시다 후미오는 명문사립대 부속이 아닌 전국구 입시학교 카이세이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그렇다고 지역구 히로시마에서 자란 적은 없고 도쿄 토박이다. 마지막으로 하야시 요시마사는 도쿄 태생이지만 아버지가 의원이 된 뒤로는 지역구 야마구치로 이사를 와 지역 명문고를 거쳐 도쿄대학에 진학하였다.
이러나 저러나 정치가 자녀들은 부자들이 다니는 명문 사립 부속교, 혹은 엘리트들이 다니는 명문 입시학교를 거쳐 엘리트 코스를 타기 때문에 일반 서민의 생활에 대한 감각이 없다. 시험이라도 쳐 봤으면 다행이지, 유치원부터 에스컬레이터 진학을 해서 심하면 아베 신조처럼 입시란 걸 치러본 적 없는 이들도 있다. 공부를 잘하는 정치인 자녀는 경쟁사회에서 치열하게 살며 도쿄대학을 거쳐 관료나 변호사로 일하기도 하지만[49] 대부분 세습 자녀들은 에스컬레이터로 명문대 입학 - 아버지 추천서로 해외유학 - 낙하산으로 대기업에 들어가 근무[50] - 자신과 유사한 상류층 가문[51]과 사실상 정략결혼 - 회사 퇴직후 국회의원인 아버지의 비서로 몇 년 근무[52] - 아버지가 선거 직전에 은퇴선언을 하면 곧바로 후원회(後援会) 조직을 물려받아 당선되는 루트를 탄다. 이때 만약 정치인한테 아들이 없다면, 가문에서 양자를 들이거나 아니면 형제 조카나 데릴사위, 친척 외가한테 물려준다.[53] 혹은 그것도 여의치 않는 경우, 자신의 곁에서 일했던 비서 등 심복 측근한테 물려준다.[54]
일본은 유력 정치인이 은퇴하고 자신의 지역구에 자녀를 출마시키는 지역구 세습이 꽤 일어난다. 일본의 세습정치가 어느정도냐면 1993년 6월에 취임한 호소카와 모리히로부터 현재 재임중인 기시다 후미오까지 15명[55]의 총리대신이 거쳐갔는데, 이중에 11명이 가문의 후광으로 정계에 입문한 세습정치인들이다.[56] 1991년부터 2021년까지 근 30년간 세습정치인이 아닌 사람이 총리였던 시기는 무라야마 도미이치 1년 6개월, 간 나오토 1년 3개월, 노다 요시히코 1년 4개월, 스가 요시히데 1년으로 다 합쳐도 5년을 간신히 넘는 수준이다. 자민당으로 한정해보면 1980년부터 지금까지 자민당이 배출한 총 19명의 총리 중에서 12명이 세습정치인이다. 여기에 2차대전 이후 역대 총리 중에서 지역구를 세습하지 않은 인물은 1956년 단 2달 동안 총리를 지냈던 이시바시 단잔과 미키 다케오[57], 가이후 도시키[58] 등 몇 명뿐이다. 그외의 모든 총리들은 자기 아들, 딸, 사위, 조카, 손자 등 혈육에게 지역구와 후원회를 넘겼다. 설사 본인은 세습이 아니라도 일단 의원배지를 달면 자기 자식들에게 물려주는 것이다.[59]
이 정도로 일본 정치에서 지역구 세습은 흔하게 이루어지는 현상이고, 이런 세습 정치인들의 일본 정계를 휘어잡는 자민당의 주류이다. 이에 대해, 주요 정당(특히 자민당) 관계자들의 관점에서 볼때, 아무 기반도 없이 자수성가한 정치신인은 "정상적인 삶의 궤도를 이탈해서 문제가 있다고 보거나, 근본 없어서 사고칠 XX"라고 판단하고, 잠재적으로 물의를 일으킬 존재로 취급하기 때문에, 아무리 능력이 좋아도 기용하는 것을 꺼리는 경향이 강하다.[60] 만에 하나 기용된다고 해도, 선거 운동 기간 또는 당선 직후 정도에만 주목받는 정도이고, 이후에는 당에서 존재감 없이 겉돌다가 차기 선거에서는 공천에서 거의 언급도 안되고[61], 당선 1회를 끝으로 정계에서 사라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훗날 총리대신이 될만한 인재들은 검증하기 어렵고, 정치적 기반이 없는 자수성가형 인물 보다는, 검증하기 쉽고, 최소한의 정치적인 기반을 갖춘 인재들을 등용해서 이들을 육성하는 경향이 강한편이다.
일본에 세습제 문화가 아직 남아있는 이유로는 기본적으로 일본 국민들이 세습제를 용인해주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민심에 반하는 정치 문화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듯이 일본 내에서는 세습제에 관해 그냥 아무런 생각이 없는 사람이 다수고 싫어하는 사람이 좀 있는 정도지 절대 반대하는 사람들이 압도적인 상황은 절대로 아니다. 일본에서 세습제가 용인이 되는 이유는 센고쿠 시대의 종결 이후 사회 전체의 기득권이 갈아엎어질 정도로 큰 사건이 없어 에도 막부 시대에 굳어진 기득권이 단 한번도 교체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상 신분제가 헌법상으로만 사라졌을뿐 그대로 남아있는 셈이다. 그로인해 서민은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되는 것 외에는 자신의 신분을 상승시킬수 있는 기회가 없고, 철저하게 자기 일에만 충실하고 신분 상승 욕구를 가지는 것 자체를 원천봉쇄하도록 남의 일을 넘보지 않고 자기의 본업에만 충실하게 사는 것을 장인정신, 잇쇼켄메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는 것이다. 그렇게 지역별로 굳어진 지방자치, 토착유지가 존중 받는 일본의 사회문화가 정치분야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이다.
그리고 돈과 조직을 움겨쥔 후원회 문화도 있다. 보통 일본정치는 정당이 아니라 코엔카이(後援会)라고 불리는 후원회가 선거를 주도하는 구조이다. 후원회는 지역구의 유력자들, 향토기업, 이익단체들을 관리하면서 이들을 통해 정치자금을 모으고 정치자금을 후원한 기업들은 그 대가로 여러가지 이권을 배분하고 선거에서는 이들을 조직표로 동원한다. 즉 일본 정치는 후원회가 누구를 지원하느냐가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일본 선거에서 당락을 좌우하는 요소로 3가지를 꼽는데 첫째 인지도, 둘째 조직표, 셋째 정치자금이다. 하지만 세습정치인들은 인지도는 "OO의 자식"이라는 식으로 홍보하면 해당 지역구 주민들에게 압도적인 몰표를 받을 조건이 되고, 조직과 자금은 후원회를 물려받으면 게임 끝이다. 심지어 후원회가 모금한 정치자금은 일체 비과세로 이것도 상속이 가능하다.
이러다 보니 정치신인들은 설사 자민당급의 거대정당의 공천을 받더라도 상대방이 세습한 정치인과 붙는다면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인지라 상대조차 안 된다. 정치신인이 자민당급의 정당 공천을 받고서 석패율제로 간신히 비례대표로 당선된다고 해도, 선거 이후, 후원회를 등에 업은 세습 정치인이 복당 또는 입당을 하게 되면, 해당 지역구의 지부장(대한민국으로 치면 당협위원장)자리를 놓고 경합하게 되는데, 정치신인은 백이면 백 후원회를 등에 업은 세습정치인에게 경쟁에서 밀리게 된다. 결국, 이후 선거의 공천에서 완전히 밀려나버려서 불출마를 택하고, 이후 소속 원(院)을 바꾸거나[62], 아예 중앙 정계에서 떠나는 경우가 꽤 있다. 설사 공천결과에 불복해서 무소속으로 출마한다고 해도, 이전처럼 자민당급 정당 간판을 등에 업고서 선거를 치르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대로 낙선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히 대한민국과 달리 지방자치가 잘 되어있고 지역기업이 여전히 활성화된 경우가 많은데 아예 몇 대째 세습정치가 가문이면서 해당 지역의 재벌이기도 한, 재력과 금력을 고루 갖춘 집안도 많다. 아소 다로는 집안이 아소 그룹이라는 매출 5조원대 재벌을 운영하며, 하야시 요시마사는 시모노세키시의 지방 재벌이면서 고조부때부터 5대가 국회의원을 지내는 중이다. 호리우치 노리코의 경우는 후지 급행을 운영하는데다 야마나시현 제2구의 세습 정치인인 호리우치 가문의 며느리이다.
아울러 해당 지역구민들은 노년층은 기존 잘 알던 정치인의 가족에게 투표하고 젊은층은 애초에 정치에 대한 관심도가 떨어져서 기존의 잘 알려진 정치인의 가족에게 투표를 하게 된다. 또한 핵심 지지 기반층 역시 마치 재산을 상속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 가족들에게 '상속'이 된다. 게다가 자서 투표 방식은 이름이 덜 알려진 정치 신인보다 이름이 잘 알려진 기성 정치인 및 그 가족에 대한 투표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기무라 타쿠야가 주연으로 나온 드라마 체인지에서 이런 상황을 충실하게 그려냈다.
기시다 이후로 거론되는 차기, 차차기 총리 후보들도 상당수 세습의원일 정도로 이런 관습은 계속되고 있다. 이렇다 보니 국내외에서 꾸준히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 #
세계 각국의 국회에서 세습의원이 차지하는 비율 각국의 국회의원의 2세 정치인의 퍼센테이지를 보면, 일본은 48회 중원선 이후 중의원 기준으로 세습의원들이 무려 26%에 달하는 반면에 미국은 2015년 기준으로 상-하원 평균이 약 6%, 영국은 세습인 귀족원을 제외한 하원의 경우 2009년 기준으로 겨우 3% 정도이다. 심지어 1990년대 이후 현재(2020년 4월)까지 일본 총리를 역임한 역대 정치인들 중 세습정치인의 숫자만 해도 총 10명 중 8명으로 무려 80%에 달할 정도이다. 정확한 통계로 중의원 소선거구제가 도입된 1996년 이후 8차례의 총선에 출마한 후보 8,803명의 당락을 분석하면 부모가 국회의원이었거나 3촌 이내 현역 의원으로부터 지역구의 전부 혹은 일부를 물려받은 세습 정치인은 전체 후보의 13%였으며, 세습 후보의 당선 확률은 80%인데 비해 비세습 후보의 당선 확률은 30%였다.[63] 세습 후보의 70%는 집권 자민당 후보로 출마했다.#
참고로 대한민국의 경우 20대 총선 253개 지역구 중에 가문의 선대가 국회의원을 지냈던 곳에서 당선된 사례는 고작 5명에 불과하며[64] 이들 중에 일본처럼 아버지가 은퇴하면서 곧바로 자식한테 지역구를 물려주는 형태로 승계한 사례는 아무도 없다. 모두 아버지가 사망 혹은 낙선으로 정치를 떠난 뒤에 다른 정치인들이 몇번 하다가 자식이 다시 도전해서 된 경우라, 일본과 양상이 다르다. 20대 이전으로 돌아가도 선대의 지역구를 곧바로 승계한 사례는 극히 드물다. 1987년 민주화 이후로 본다면 1998년 아버지 남평우 의원의 급작스러운 사망으로 치러진 보궐선거에 출마해서 당선된 남경필 정도가 거의 유일한 사례이다. 이때도 남경필 본인은 정치에 뜻이 없었고, 한나라당 사무국에서도 따로 준비해둔 후보가 있었는데 이회창 총재가 젊은 피 수혈 차원에서 30대의 남경필을 설득해서 선거에 내보낸 것이었다. 아버지 남평우의 선거운동조직을 그대로 물려받긴 했으니 결과적으로 세습이긴 한데, 일본처럼 의도한 세습은 아니었다는 이야기. 21대 총선에서도 6선경력의 문희상 의장의 아들 문석균이 은퇴가 예정된 아버지의 지역구에 출마선언을 했으나, 날로 먹는 지역구 세습이라는 여론의 반발로 결국 민주당 공천에서 탈락했다. 그리고 이에 불복하여 자신을 지지하는 당원 수백여명과 함께 집단탈당해서 무소속 출마했으나 고작 8.5% 득표율로 3위에 그치면서 낙선했다.
직계자손이 아니더라도 피선거권 제한을 받아 출마하지 못하거나 사망한 배우자를 대신하여 해당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된 케이스는 대한민국과 일본 모두 공존한다. 먼저 대한민국에 경우 남편 이제학의 피선거권 제한을 당한 후 남편이 역임했던 구청장직에 출마하며 당선된 김수영이나 남편 김근태의 사망 이후 해당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된 인재근 등이 있다. 일본의 경우 홋카이도 11구에서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그래도 일본 역시 시간이 지나면서 세습 문화가 옛날같지 않은 상황이다. 전체 의원 중 50%에 달하던 세습비율이 최근에는 25% 이하로 내려갔으며 2005년 기준 51%에 달하던 자민당의 세습 비율도 현재는 1/3 수준으로 내려왔다. 특히 일본의 야당은 좌우 가릴것 없이 정치적 격변이 심해 세습의원이 살아남기 어려운 환경이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 현재의 영미수준으로 떨어질것이라는 전망이 있다. 뿐만 아니라 민진당은 아예 공천의 경우 3촌 이내 친족이 같은 선거구에서 연속 출마하는 것을 금지하기로 하기도 하였는데 2018년 들어서 자민당의 세습규제안은 또다시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2021년 치러진 49회 중원선에서도 어김없이 세습되는 지역구가 생겼다. 에히메현 제1구의 시오자키 야스히사 - 시오자키 아키히사, 미에현 제2구의 가와사키 지로 - 가와사키 히데토, 사이타마현 제10구의 야마구치 다이메이 - 야마구치 스스무 등으로 모두 부자세습이다. 이건 당을 불문하고 있는 일이라 입헌민주당에서도 홋카이도 제3구 아라이 사토시의 후계자로 아라이 유타카를 세웠다.
7.2. 일당우위제로 인한 자민당의 권력 독점
자민당 창당 이후 치러진 선거에서 자민당과 이를 제외한 야당들의 의석 수 차이이다. 보면 알겠지만 진짜로 자민당이 정권을 뺏겼었던 2009년을 빼면 딱히 이렇다할 차이가 없다. 물론 공명당 같은 연정 세력도 포함되었지만, 이를 제외한다고 해서 크게 변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2012년 실각 이후로는 야권의 힘이 그 이전보다 약해져서 국민들에게 대안세력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위의 여러가지 요소들이 결합하여 나타난 현실이 바로 자민당의 장기집권이다. 1955년 이래 자민당의 일당우위체제가 계속 이어지면서 기울어진 운동장은 계속 악화되고 있다. 실제로 1993년, 2009년에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지만 불과 몇 년 만에 뒤집어졌으며 이후 자민당의 1당 독주가 다시 재개되었다.
일당독주 체재가 러시아의 경우처럼 독재와 유사한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기 때문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으나, 제대로 된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특정 정당이 정권을 계속해서 잡는 일은 종종 일어나기 때문에 그 과정만 정당하다면 일당이 우위를 점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65] 문제는 자민당 독주가 초장기화되며 타 정당의 정치적 역량 저하가 일어나고 있고, 이로 인해 정치적 경쟁 자체가 사전 차단되는, 일종의 사다리 걷어차기처럼 기능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민당은 수십년간 집권하며 꾸준히 의원들을 국정에 참여시켜 왔고, 총리 및 각료 경험자가 다수 포진해있다. 내각에 참여하지 못한 의원들이라 해도, 당내에서 정무조사회(정책위원회)에 참여하고 있는데, 이 위원회들은 국정 전 분야에 분과를 가지고 있는데다 여당이기 때문에 당정협의의 형태로 실질적 국정에 참여하게 된다. 이러니 자민당은 국정 운영 능력 면에서 야권과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나고, 행정부의 관료들과도 관계가 깊다. 아예 선수에 따라 맡는 직책도 어느정도 정형화되어 있어 초선 시절에는 정책위원회 참여부터 시작하여 3선이 되면 정무차관, 6선이 되면 대신이 되는 식으로 경험을 쌓을 기회 또한 보장되어 있다. 반면 야권은 연립 내각을 구성해 국정에 참여해 봤거나 2009년-2012년 민주당 정권때 내각에 참여한 극소수의 인원 외에는 국정 참여 경험이 아예 없다. 특히 그나마 해본 3년의 집권조차 경험해보지 못했던 2009년 당시의 민주당은 국정을 이끌어갈 능력이 없었고, 이미 자민당과 오랫동안 일해와 친자민당화된 관료들과 타협도 설득도 하지 않아 관료들과 정책 차이로 싸우기 일쑤였다. 이러한 무능이 미증유의 대재난인 동일본 대지진, 후쿠시마 원전 사고와 겹치면서 대안세력으로서의 지지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동일본 대지진 당시 해당 지역에 지역구를 둔 민주당의 거물인 오자와 이치로는 지역구를 버리고 일본 반대편으로 도망가 유유자적 휴가를 보내는 추태를 보였으며, 이건 당시 사이가 나빴고 지역구에 남았던 오자와의 부인[66] 이 나서서 비판할 정도였다. 반면 사고 이후 아베 신조는 매년 후쿠시마 피해지역을 방문해 시찰했으며, 자민당이 재집권한 뒤로는 후쿠오카에서 지진이 발생했을 때, 지구 반대편 페루에 있었음에도 17분 만에 긴급 기자회견을 가지며 피해 상황 및 후속대책을 발표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47회 중원선 당시 아베는 경제 정책의 호평으로 인해서 압승했다고 자평했지만, 사실 당시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지지할 정당이 없어서 자민당을 지지한 것이었다. 2014년 12월 요미우리 신문의 여론 조사가 그것을 대변한다. 여당의 압승 이유 - 다른 정당보다 낫다고 생각된다 : 65%, 아베 총리에 대한 기대가 높았다 : 9%,경제 정책이 호평 받았다 : 7%, 여당으로서 실적이 호평받았다 : 6%, 그 외 : 3% 대답 안함 : 9%. 이때문에 아베 사학 비리 문서 변조 의혹이 사실로 밝혀졌을 때 하시모토 도루는 일본 정치의 가장 큰 문제점은 총리가 사임할 비리가 터졌는데도 정권 교체가 가능한 야당이 없다는 점을 꼬집었다.(外)
일본의 리버럴 정당이 쉽게 세력을 회복하지 못하는 이유도 민주당 집권 당시 미성숙한 국정 운영의 기억이 일본인들의 뇌리에 강하게 남아있어 야당에게 선뜻 표를 주기가 망설여지기 때문이다. 2014년 중원선에서 자민당은 2009년 중원선에 비해 190만표를 적게 받고 전 지역구를 싹쓸어갔다[67]. 민주당으로 정권 교체가 이루어진 2009년 중원선 당시 69%에 달하던 투표율은 2014년 중원선에서는 52%로 떨어졌다. 민주당의 대패는 민주당 지지층과 무당층의 상당수가 투표하지 않아서 벌어진 일이다. 그리고 최근에 벌어진 49회 중원선에서도 비슷한 양상을 보여줬다.
헌법 개정과 관련된 대학생 시위조직인 실즈(SEALDs)의 활동이 있었지만 결국 무위로 끝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특히 아베 이후 일본은 대졸자 취직률이 사상 최고치를 찍고 실업률이 2%로 역대 최저치를 만든 상황에서 일본 야당이 여당인 자민당을 공격할 이슈가 없기 때문이다. 아베 신조의 부인인 아베 아키에의 사학비리와 군국주의 교육 논란이 이슈가 되긴 했지만, 어물쩍 넘어간 듯 하다. 아베노믹스의 성공으로 경기 동향 지수가 90년대 버블경기때 만큼 회복되는 등 일본 경제가 호전되어 20년 불황을 극복했다고도 평가받는 상황에서 이때문에 아예 아베의 4연임에 찬성하는 젊은 층들이 50%가 넘는다.# 되려 현재 일본의 40대 이하 세대에서는 민진당, 일본공산당이 오래된 정당로 인식되며 자민당, 일본 유신회가 혁신적인 정당으로 인식 받고 있다.(外)
2023년 아사히신문 여론조사에서 정권교체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54%로 그동안의 40% 비하면 새로운 정치를 갈망하는 사람은 늘고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1야당인 입헌민주당의 지지율은 10% 근처를 오가는 등 현실성있는 대안세력이 없는 실정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자민당의 실책이 계속 이어지면서 2024년 중의원 선거에서 정말 오랜만에 자민당 공명당 연립 과반에 실패하는 대사건이 벌어졌다. 이게 왜 대사건이냐면 앞서 서술했듯이 야당의 세가 약한 일본이고, 1야당 입헌 민주당은 한때 2야당으로 밀려난다는 예측도 많았을 정도였는데도 불구 자민당이 과반에 실패했다는 건 다른 나라면 정권 교체나 다름없는 참패이기 때문이다.
7.3. 파벌 정치와 밀실 합의
자세한 내용은 자유민주당(일본)/파벌 문서 참고하십시오.본래 의원내각제 체제에서는, 총리를 의회가 선출하고 따라서 다수당인 집권 여당의 영향력이 매우 크다. 하지만 일본은 이 정당 내 계파들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크다. 즉 총리는 민의보다는 혈연-지연으로 나뉜 계파간의 담합으로 선출된다. 이는 투표가 아니라 계파의 이합집산에 의해 정부가 구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실질적 민주성이 크게 떨어진다. 내각제이니 총리를 직접 뽑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당내 민주주의를 통해 민의를 반영해야 하는데, 그런 시스템이 없거나 부실한 것이다.
그래서 선출권력이 정부를 통제한다는 민주적 통제성이 약하다. 국민이 아니라 계파가 만든 총리, 내각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일본의 대신들은 전문성이 약한 경향을 보이며[68] 대중정치 훈련도 안 된 수준미달의 인사들인 경우도 있다. 다만 일본의 경우 정무차관의 파워가 사무차관에 비해 떨어지는 편이라 사실상 캐리어 출신인 사무차관이 주도하고 있다. 이러다보니 실질적으로 행정권력을 실무관료들이 장악하는 현상이 발생한다. 실제로 일본에서 국정을 운영하는 것은 사무차관 이하의 엘리트 관료들인 것이다. 대한민국에서는 대통령을 중심으로 하는 청와대와 장관들이 관료들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옥죄지만, 일본에서는 그러한 통제 기능이 약하다. 물론 일본의 고급관료들은 도쿄대 등 명문대를 졸업하고 국가고시에 합격한 초엘리트로 구성되어 있어 평소에 국정 운영에 큰 차질이 빚어지거나 하지는 않지만, 국가적 위기 상황이나 갈림길에서 정치적이고 굵직한 결단을 내려야할 때 빠르게 반응하지 못하는 걸림돌로 작용한다.
이 때문에 일반적으로 총리들의 리더십이 취약한 편으로 1987년에 퇴임한 나카소네 야스히로 이후 2020년까지 시점에서 3년 이상 재직한 총리가 고이즈미 준이치로, 아베 신조를 빼면 아예 없다. 게다가 일본 정치인들의 로망이 히카루 겐지나 에도시대 오고쇼처럼 바지사장으로 임기 몇 년짜리 총리를 앉혀놓고 막후 실세로 상왕 노릇[69]이라 계파 정치가 사라지지 않는다.
이러다보니 일본은 잃어버린 10년을 만회하기 위한 제대로 된 개혁이 어려운 상황이다. 정권 교체로 기대를 모은 민주당조차 계파 싸움으로 인해 제대로 된 개혁을 하지 못했고, 국정운영 능력조차 부족해 결국 3년만에 다시 자민당에게 정권을 헌납하고 말았다. 정치가 이런 식이다 보니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기 위해 총리를 국민이 직접 뽑는 총리 직선제[70]를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헌법을 개정해야 하기에 현실성이 낮고 부작용도 만만치 않으며 애초에 집권당인 자민당에서 총리 직선제에 관심이 없는지라 실현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 애초부터 총리직선제는 세계적으로 성공한 사례가 없기 때문에[71] 앞으로도 도입될 일은 없을 전망이다.
7.4. 대중의 탈정치화에 따른 민주적 역량 약화
일본은 2010년대 이후 국민의 정치에 대한 무관심이 강해 투표율이 50% 전후에 불과해 미국과 함께 주요 선진국들 중에선 최하위에 머물고 있다. 그 덕분에 소선거구제의 맹점인 사표가 선진국 중에선 심하게 나타나고 있다. 물론 투표율이 낮으면, 조직표(즉 콘크리트 지지층)의 영향력이 엄청나게 크기에, 위의 사표론과 겹쳐져서 자민당, 공명당 연립내각의 일당우위체제와 우경화가 지속되는데 기여를 하고 있다.원래 46회 중의원 선거 이전만 해도 일본에선 투표율이 60%대로 정치 참여가 꽤 높았다. 특히 중선거구제를 채택하던 시절에는 70%대까지 간 적도 빈번했고 45회 중의원 선거 당시 투표율이 69%에 이르렀다. 하지만 45회 중의원 선거에서 승리해 집권한 민주당이 자민당보다 국정운영 능력이 심각하게 부족했고 도호쿠 대지진,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일어났지만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국민들 사이에서 민주당 정권에 대해 불신하게 되고 결국 46회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다시 집권하게 되었다. 이후 "어느 당이 집권 해도 마찬가지"라는 인식이 확산되어 투표율과 정치 참여가 낮아지게 된다.
그래서 시민들의 정치 참여에 대한 의욕도 대한민국, 미국, 유럽 등 다른 민주주의 국가들에 비해 낮아 풀뿌리 민주주의가 성장하기 어렵다. 잊을 만 하면 수만 명이 모여서 시위 등의 의사 표시를 하는 대한민국[72]과 달리 전체 인구가 대한민국보다 두 배 넘게 많은데도 불구하고, 만 명정도만 모여도 큰 규모의 시위로 칠 정도다.
정치적 무관심으로 인한 문제는 이미 여러 방면에서 드러나고 있는데, 일례로 국회에서 후쿠시마의 방사능에 오염된 흙을 도로와 제방 등에 쓰겠다는 계획이 국회에서 발의되었으나 일본에선 그 법안이 이슈가 되지도 않았던 것이다. 다른 민주주의 국가였으면 나라가 뒤엎어질 일.# 나중에 뒤늦게 알려진 후 국내외에 대차게 비판받아서 다행히 그 법안이 통과되지는 않았다.
자민당 개헌 초안 21조 ① 집회, 결사 및 언론, 출판, 그 밖에 모든 표현의 자유는 보장된다.
② 1항의 규정에도 불구하고, 공익 및 공공의 질서를 해하는 것이 목적인 활동을 하거나, 그러한 목적으로 결사를 조직하는 것은 허용되지 아니한다.
② 1항의 규정에도 불구하고, 공익 및 공공의 질서를 해하는 것이 목적인 활동을 하거나, 그러한 목적으로 결사를 조직하는 것은 허용되지 아니한다.
또한 사진에서처럼 2016년 12월 5일 기준 국민들의 집회 결사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할 수 있는 조항이 제1정당의 개헌안에 들어가 있다. '공공의 이익과 질서를 해하는 어떤 결사나 모임도'라고 되어 있지만, 그 공공의 이익에 해를 끼친다는 게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 악용될 소지가 매우 다분한 법이다. 그러나 제1정당에서 이런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개헌안이 제안된다는 것에도 일본 국민들은 무관심할 정도로 국민들의 정치에 대한 무관심이 심각하다. 대한민국도 비슷하게 국보법 및 집시법이 국민들의 집회, 결사의 자유를 제한하고는 있지만, 적대국 북한의 존재라는 특수성이 있으며, 이는 헌법이 아니라 법률이며 개정하거나 철폐하라는 요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일본은 적대국이 있는 것이 아닌데도 헌법에 국민들의 집회, 결사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안을 집어넣으려는 것이다. 헌법과 법률, 두 법의 위상이 어떻게 다른지, 어느 쪽이 더 고치기 어려운지는 명백하다.
2019년, 통일지방선거에서 무려 31%가 무투표 당선되었다.# 한국과 달리 통일지방선거는 모든 지방공직인원을 선출하지 않지만 이 정도면 문제가 있는 것이다.
지지정당 없음(支持政党なし)이라는 장난 정당이 유의미한 득표율을 보여주는 것도 정치적 무관심을 보여주는 일례이다. 이 장난 정당은 2016년 참의원 선거 때 무려 64만여 표를 득표한 바 있었다.
이렇다 보니 여론조사에서도 정치에 관심이 없는 일명 "무당층"은 아예 정치 사안에 대해서 묻지도 않는다, "일본 국민의 절반 내지 그 이상이 극우"란 말은 이러한 일본 일반 국민들의 정치적 무관심 사실을 쏙 빼놓고 나온 말이다.[73] 실제론 '유권자의 절반이 무관심하고 나머지 절반의 절반 내지 3분의 2가 극우적이다' 라고 결론 내야 사실에 맞다.[74] 이러한 극우 유권자들의 정치 참여만 활발해지는 반면 다른 유권자들은 아예 정치를 거들떠 보지도 않고 참여를 안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러다보니 야당에서 투표율 10% 올리는 것에 대한 서명운동을 할 정도다.#
오랜 기간 자민당의 일당우위 체제에서도 그나마 일본의 리버럴, 진보세력을 지탱해온 지방 시민사회세력들이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 지방자치에서도 정치적 무관심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지방선거 유세가 대한민국, 유럽, 미국과 달리 국가와 중대한 상황과 직결될 수 있는 지방 선거에서 너무 조용하다. 게다가 투표율도 50%에도 아예 못 미친다. 특히 대한민국과 비슷하게 인물정치는 있으며, 소속이 있는 것과 달리 무소속으로 나오다 보니 여러 당이 지지하는 현상이 있다.
7.5. 외교 상황의 선전을 통한 내집단 결집
7.5.1. 북풍 이용
2002년 북한이 과거의 일본인 납치를 스스로 자백하고 북한과의 관계가 완전히 단절되고부터, 일본의 정계에서 북한은 '현저한 위협'으로서 특정한 방향의 여론을 조장하는데 적극적으로 이용되고 있다. 중국이나 러시아와 달리 북한의 군사적 행보가 더 직접적이며, 강경책을 펼쳐도 경제적 보복 등이 들어오지 않는 것도 한 이유이다. 특히 북한이 핵과 미사일 개발을 계속하면서 민간 레벨에서 반북정서가 폭발했기 때문에 효과가 매우 컸다. 아베의 경우 비리 문제 등으로 지지율이 하락할 때 마침 시기 좋게 북한의 미사일 발사가 이뤄져서 쟁점이 북한문제로 이동하고 아베 정권의 지지율이 반등하는 일이 있었다.북한의 미사일 도발이 대부분 동해상으로 발사되기 때문에 상당수가 일본 근해에 떨어지게 되고, 심한 경우 일본 열도를 관통해 태평양에 낙하한 적도 있기 때문에 북한의 이러한 도발행위가 일본에 실질적인 안보위협이 되는 것 자체는 명백한 사실이다. 북한의 도발을 상수로 여겨 항상 군사적 대비를 하고 있을 뿐 아니라 국민적 인식도 '저런 관종 XX들에게는 관심 주면 안 됨' 쯤으로 여기는 대한민국의 입장에서는 북한의 미사일 도발이 대수롭지 않은 일이지만, 일본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북한의 위협을 빌미로 주변국이 우려하는 군비확장이나 평화헌법 개정 등을 추진을 계속한다는 점이다.
7.5.2. 혐한, 혐중 여론 조성
2010년대 장기 불황의 늪에 빠진 일본의 옆에서 대한민국과 중국이 성장해 어느덧 일본을 위협할 수준의 국력을 갖추게 되었는데, 이것이 일본인들의 자존심을 건드린다는 점을 이용해 정한론자의 후예들인 보수방류를 중심으로 대한민국과 중국을 때려 혐한, 혐중 감정을 조성해 자국내 불만을 혐한, 혐중으로 돌리려는 정치적 시도를 하게 되었고, 그 최전선에 있던 아베 신조 정권 시절의 한일관계는 정치적으로는 상당한 경색에 이르렀다.문제는 아무리 세 국가가 역사적 은원관계가 있다고 해도 몇 안되는 인접국이라 경제교류가 활발하고 문화교류가 활발하기 때문에 세 국가간의 관계가 악화되면 일본의 국익에도 부정적인 영향이 초래될 수도 있다. 특히 대한민국의 수요에 상당히 의존하던 서일본 지방 소규모 도도부현들이 일본 불매운동으로 관광업을 중심으로 큰 타격을 지역경제가 크게 나빠진 상태이다. 그리고 비자까지 끊어버려 지역의 경제적 손해는 더 커질 것이다. 게다가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영향으로 중국인 비자도 끊었기에 중국인 관광객으로 메꾸는 것도 기대할 수가 없다.
일본 정치인들중 지각이 있는 사람들은 이런 분위기를 모르는 게 아니라서 2020년 기준 현 자민당 중의원인 안도 히로시는 "대한민국, 중국을 용서할 수 없어!" 라고 발언하면 '보수 정치인'으로 여겨지는 일본의 사회 분위기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했다.#[75] 하지만, 양국간 뿌리깊은 역사적 대치국면이나 이걸 정치적 수단으로 오래 삼아온 일본의 상황 때문에 일본 정치인들의 혐한, 혐중몰이는 쉽게 사라지기 어려운 지경이다.
그러나 혐한 기류는 좀 상황이 달라지고 있는데 2022년 윤석열 정부가 처음 들어섰을 때는 일본 정부측은 일본의 해상초계기 도발에 대해 한국 책임이 있다며 사과하라고 압박했었으나 2022년 2월에 발발한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전이 된 것과 북중러 3국이 밀착하는 모습을 보임에 따라 신냉전이 도래했다는 것을 체감하게 되자 한국과 일본이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여론이 힘을 얻게 되었고, '일단 과거 일은 접어두고 적의 적은 나의 친구다' 라는 기류가 흐르기 시작하면서 일본 정치인들의 혐한성 발언이 나오지 않고 있다. 단, 이런 정치인과 달리 재특회나 일본제일당과 같이 말도 안 통하는 극우 정치단체는 한국이나 중국이나 둘 다 싫다며 혐한/혐중 기조를 둘 다 뿜어대고 있으나 일본 젊은 세대들은 '차라리 민주주의 정치를 하고 있고 언론의 자유가 있는 한국이 중국보다 친근하다.'며 극우단체를 병먹금 취급하고 있다.
7.6. 팽배한 정계 엘리트주의
일본 내에서는 정치는 '제대로 배운 사람'이 해야 한다는 인식과 분위기가 만연해 있다. 문제는, '제대로 배운 사람'의 기준이 상당히 애매하여 연줄에 의해 형성되는데다가 이러한 엘리트주의로 인하여 특정 정치인 가문이 형성되며 이를 세습하고, 관료주의로 인해 폐쇄적으로 정치가 이루어진다. 게다가 이로 인해 국민들이 상대적으로 정치에 무관심해지고 무능한 정치인이나 관료들을 양산하는 악순환까지 벌어지게 된다. 엔자이가 일본 사법계의 대표적인 문제점이고, 정치인의 지역구 세습과 국민들의 정치적 무관심이 일본 정계의 문제점이라면, 일본 사회의 엘리트주의가 이런 문제점들을 만들어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대표적으로 1951년에 시작한 '벚꽃을 보는 모임'(桜を見る会)이 있다. 그러다가 2019년에 논란이 터졌고 코로나19와 함께 이 모임은 사실상 끝났다.
물론 레이와 신센구미, NHK로부터 국민을 지키는 당 등과 같이 대중주의를 표방하는 정당 또한 존재하며, 일본의 주류정당인 자민당도 2001년부터 어느 정도는 대중주의적인 모습도 보여주고 있다.[76]
7.6.1. 폐쇄적 '정치 학원' 문화
일본만의 독특한 정치 문화가 바로 '숙(塾, じゅく)'인데, 전/현직 정치인이 세운 일종의 정치 학원이다. 최근 도쿄도 지사로 당선된 고이케 유리코가 정치 학원을 세워 일본 내에서 약간의 말들이 있었는데 일본 거물급 고위 정치인들은 이렇게 자신의 이름을 내건 정치 학원을 신설해 운영하며 자신의 파벌 소속 정치인을 양성하는 독특한 시스템을 갖고 있다. 실제 이런 정치인들의 정치 학원에는 정치인의 꿈을 갖고 입학하는 정치 지망생 외에 일반 시민들도 입학하여 매달 수강료를 내며 유료 세미나를 수강한다. 실제로 위의 고이케 유리코 도지사는 대한민국에도 심각한 문제로 제기되고 있는 이른바 '쪽지 예산'[77]을 도쿄도 내에서 완전 철폐를 선언하고 추진해냈다.물론 일본이 자국 정치에 대해 비교적 무관심한 것은 사실이지만, 무능해서라기 보다는 시민들에게 자신들의 정책을 소개하고 알리는 기회도 많이 제공하며 비교적 일처리를 잘 하기 때문이다. 이 점은 대한민국 역시 마찬가지이다. 대한민국 역시 공청회나 지역구 국회의원 홈페이지를 방문해보면 자신들의 공약이나 정책에 대해 충분히 소개하고 있다. 다만 그걸 제대로 안 지키는 게 문제일 뿐. 또, 일본은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모두 상당히 강한 나라이기에 지역구 후원회에서 지지를 선언한 정치인을 일방적으로 뽑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지역구 정치인들 역시 후원회로 대표되는 이익 집단 위주로 정책을 짜기 마련이다. 대한민국은 시민들이 정치에 대해서 학원을 다니는 식으로 체계적인 교육까지는 받지 않지만, 시위를 하거나 투표를 한다던가 술자리에서 나름의 정치적 견해를 자유롭게 주고 받다가 싸움나는 등의 크고 작은 정치적인 참여가 잦다. 반면, 일본은 원하는 자가 체계적인 정치 교육은 받을지언정 시민들이 직접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것에 소극적이었지만, 최근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가 자민당 당적에서 탈퇴하고 자신만의 독자적 정치세력을 추진하는 배경에는 자신의 정치학원 및 그동안의 정치 활동에 대해 자신의 정치 철학에 동조하는 지지자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에서도 최근 들어서는 정당 차원에서 정치학원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민주당의 정치대학 과정은 경쟁률도 높은 편이었고.
일본의 정치 학원 같은 경우, 파나소닉 창업자였던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1979년에 설립한 마쓰시타 정경숙이 가장 유명하다. 일본인 뿐만 아니라 한국인 졸업생도 유명하며 마쓰시타 정경숙에서 배출한 중의원 숫자가 2010년 31명에 이른다. 일본 정치의 문제점 목차에 기재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런 정치학원 문화는 정치 전업자나 관료, 전문직, 혹은 정치인 가문출신이 아닌 일반 직장인이나 지역사회 종사자, 그리고 평범한 정치지망생 등의 정치권 진입을 보다 쉽게 하는 기능도 분명히 있다. 그렇기에 지부장 선임 후 공천에 성공하는 루트나 정치인 가문이 아니면 발판을 놓기가 힘든 자민당과 달리 공명당이나 호헌 야당 소속으로는 한국에 비해 일반인의 정치권 진입의 진로나 루트는 다양하고 어느정도 보장되어 있는 편이다
7.7. 언론과 정치 견제 문제
또한 일부 일본 언론의 집단화, 그리고 권력 비평 및 견제의 부재가 논란이 되고 있다. 도쿄 찌르기 사건 당시 잠시 동안의 자민당에 대한 비판은 있었지만 언론의 의도적인 심리전[78]으로 말짱 도루묵 되고 말았다. 이 풍토는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는 비판이 있다.# 다만 아사히 신문을 비롯한 일본의 신문사 상당수는 좌파성향이며 자민당에 비판적이었고 자민당과의 대립은 항상 존재하고 있다. 당장 일본의 5대 일간지중 2개[79]가 진보,좌파 성향이며 지역지 상당수[80] 또한 진보, 좌파 계열이라 자민당 비판이 강하다. 심지어 일본공산당의 일간 기관지인 아카하타의 경우, 일요판 기준으로 100만부 가까이 팔린다.자민당의 기본적인 대언론정책인 '대립과 컨트롤'이란 자민당에 우호적인 언론에는 독점 인터뷰나 취재편의를 주되, 적대하는 언론과는 불이익을 주는 홍보정책인데 언론사 압박이 가능하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일본은 신문의 경우, 광고료 보다는 구독자의 구독료로 자립하는 수입구조를 가지고 있어 이러한 언론정책만으로 언론을 통제하기 힘들다.[81] 오히려 보수우파 성향이 요미우리 신문보다 강한 산케이 신문의 경우, 자금난을 겪고 있는 실정이다.[82]
또한 일본 정치의 풍토 때문에 몇몇 당파의 영수급 인물들의 스캔들이 터졌을 때 핀포인트로 찔러서 강하게 비판하는 경우가 있다. 적의 적은 아군이라는 식으로 정치권력의 견제관계를 이루는 축이라고 본다면 일본의 언론은 충분히 정치적 영향력이 있다. 대한민국도 보수/진보 성향의 언론이 있는 것처럼 일본 역시 보수/진보 성향의 언론이 존재한다. 실제로 같은 사안을 다룬다 하더라도 언론사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다른 뉘앙스의 논조를 보이는 것이 그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진보성향의 마이니치 vs. 보수성향의 산케이 신문를 들 수 있다. 당장 아사히 신문이 폭로한 모리토모 스캔들만 봐도, 아베 정권을 고사 직전까지 내몰았으며 지금도 언제 또 터질지 모르는 시한 폭탄에 가깝다. 특히 정치적 영향력까지는 아니지만, 일본에서 많이 팔리는 타블로이드지 같은 경우도 모두까기 성향이 강해 내각의 실책이 보이면 조롱하는 수준으로 까는 경우가 많다.
최근 일본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공모법', 즉 특정비밀보호법에 대한 언론들의 비판이 거센 상황이다. 이 때문에 탄탄대로이던 아베 내각과 아베에 대한 지지율이 상당 수준 내려갔다. 더욱이 이를 계기로 그동안 수면 아래 몸을 낮추고 있던 자민당 내 파벌 영수(아소 다로, 기시다 후미오, 니카이 도시히로 등)들이 아베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며 차기 총리로서의 존재감을 나타내고 있는 상황이다. 이는 당 총재가 정당 전체를 통제하는 대한민국의 정당 권력구조와는 전혀 다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또한 미국의 국제 인권 단체인 프리덤 하우스는 Freedom in the World (세계의 자유) 2016년 국가 보고서에서 특정비밀보호법이 전반적인 언론 매체의 활동에 크게 활동 저하를 가져오지 않았다[83]고 평가했다. 프리덤하우스 2016년 국가보고서에서는 전체 44위로 "언론자유국" 타이틀을 잃지는 않았다.
하지만 국경 없는 기자회의 언론자유지수에서는 2019년 67위를 기록했다. 이는 정부의 언론통제가 심하며 언론의 불완전한 자유를 의미하여, 일본 언론인들이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음을 반영한다. 참고로 일본 민주당 정권 시절 일본의 언론자유지수 순위는 20위 안에 있었다.
2019년 뉴욕타임즈에서 "일본은 언론의 자유가 헌법에서 소중히 다뤄지고 있는 현대 민주주의 국가이지만, 정부는 가끔 독재 체제를 연상시키는 행동을 한다"고 비판했으며, "어떤 언론인들의 기자회견 접근을 거부하거나 기자들을 통제하기 위해 정치와 언론사 경영진 사이의 사교 관계를 활용한다"고 지적했다.# 대표적인 예로 자민당과 기자 간의 식사 자리이다.#, ##, 아베 신조 전 총리 기자회견 문제점 스가 요시히데 총리 기자회견 문제, ##
8. 관련 문서
[1] 점수가 높을수록 부패하다고 인식되는 국가 #[2] 수치가 높을수록 언론 자유가 있는 국가, 언론자유 최상은 100점, 언론자유 최악은 0점, 2013년 이전 자료는 수치가 넘어가는 것도 존재한다, https://rsf.org/en/ranking[3] 점수가 높을 수록 민주주의가 발달된 국가, 가장 발달된 국가는 10점, 최악은 0점이다. 2020년 기준 일본은 완전한 민주국가다. 한국의 경우 2021년 기준 8.16점으로 세계 16위에 해당한다.[4] https://en.m.wikipedia.org/wiki/Democracy_Index[5] 천황의 국가원수로서의 성격에 있어서, 일본 헌법학계에서는 원수성부정설이 통설로 자리잡고 있다. 원수성부정설의 입장에서 '원수'란 대외적으로 일본을 대표할 권한을 가진 국가기관을 의미하는데, 천황에게는 이에 관한 실질적 권한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해석에 의하면 '극히 일부이긴 하지만 외교에 관해 나라를 대표한다는 생각에 기초하여, 천황을 원수라고 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라고 하여 원수성긍정설을 채택하고 있다.(1988.10.11 참의원내각위・내각법제정국견해)[6] 스웨덴 국왕 역시 1975년 개헌 이래 명목상의 법안 거부권이나 의회해산권도 없는 완벽한 허수아비다.[7] 편의로는 그냥 뒤에 상(相)만 붙인다. 예) 재무대신 → 재무상 등.[8] 참의원도 의결권을 가지고 있으나 양원의 의견이 엇갈린 경우에 중의원의 결정을 국회의 결정으로 하기 때문에 사실상 중의원이 단독으로 가진 거나 마찬가지.[9] 다만 헌법 개정의 경우 양원 각각 총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 이 때만큼은 양원이 동등하다.[10] 미국은 주마다 2명씩 뽑는 상원이 주별 인구 비례에 따라 뽑는 하원보다 권한이 더 막강하다. 예외적으로 예산 승인권은 하원에 있다.[11] 또는 중의원 해산시[12] 일본은행 총재는 참의원 재적 과반수의 찬성이 없으면 임명되지 못한다. 참의원에서 인사 동의권을 가진 인사 중 가장 권력이 센 인사. 미국 연방준비제도 의장 역시 미국 상원의 재적 과반수 찬성이 필요하다. 한국은행 총재는 국회에서 인준 동의가 필요 없이 대통령 결정으로 임명되므로, 독립성이 떨어진다는 평을 듣는다. 영국의 영란은행 총재는 영국 하원 재적 과반수의 찬성으로 임명되며 상원인 귀족원은 결정 권한이 없다.[13] 일본은행 총재에 관하여는 일본은행법 제23조, NHK 회장에 관하여는 일본의 방송법 제52조로 정한다.[14] # 일례로 아베가 야당의 질의에 대해 답변하던 중 야당 측에서 조롱하며 비난하자, 'あれ? なんが あります?(어라? 뭐 할 말 있으신가요?)라고 웃으며 말한 뒤, '民進党だから, タウンミーティング的にやるのかなと思ったんです.(민진당이라 타운 미팅 식으로 발언하는 줄 알았습니다)'라고 에둘러 비꼬았다. '타운 미팅'이란 이해당사자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왁자지껄하게 토론하는 것을 말하는데, 즉 아베는 '지금은 다같이 토론하는 타운 미팅 시간이 아니고 내가 질의에 답변하는 시간인데 왜 방해하느냐'는 말을 돌려 말한 것이다.[15] 두 사람의 연설 양식이 전혀 다르다. 아베는 정치 고단수답게 사안에 대해 조리 있게 설명하면서도 여유가 있으며 간간히 유머도 섞어 좌중을 압도하는 반면, 렌호 입민 부대표는 똑 부러지는 발음과 강단 있는 어법, 대사를 읽는 듯 흐트러짐 없이 말을 이어나가는 양식으로 서로가 극과 극의 양식이라 상당히 재미있다. 유튜브에도 아베와 렌호와의 질의 응답 영상은 조회수가 높은 편이다.[16] 일본에도 장관이 있지만 급으로 따지면 대한민국의 '청장'에 해당된다. 예를 들면 경찰청장이란 직함은 없으며 경찰청 장관이며, 국세청장도 없고 국세청 장관이다. 내각관방장관만 예외적으로 장관이라는 이름을 가지면서도 국무대신이지만, 관방장관도 원래는 그 자체로 국무대신이 아니라 국무대신이 관방장관을 겸직하는 형태로 있다가 나중에야 그 직 자체를 국무대신으로 규정하게 된 것이다.[17] 전후 첫 총리인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과 두 번째인 시데하라 기주로도 귀족원 의원이었다. 그 다음인 요시다 시게루부터 본격적으로 중의원에서 총리를 독점한다. 시데하라는 총리 재임 시절에는 귀족원 의원이었으나 총리직에서 퇴임하고 국체가 일본국으로 전환된 후에 재선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었다. 전후 귀족 제도가 폐지되어 다이쇼 덴노의 직계 황족을 제외한 모든 황족과 귀족들이 황족 및 귀족 작위를 잃고 평민으로 강등되었기 때문에 기존 귀족원 의원들도 중의원 의원 피선거권을 갖고 있었다. 귀족원 폐지 후 귀족원 의원들은 대다수가 참의원 의원 선거에 재출마해 당선되었고 일부는 중의원 의원이 되기도 했다. 오히려 이제는 귀족원이 없어졌기 때문에 황족들이 국회의원 피선거권을 상실하였고 황족들은 정치 개입도 일절 금지되었다.[18] 자유민주당 정권에 내각일 경우 자유민주당 소속 참의원 의원 정치 인생 중 한 번만 내각에 국무대신으로 입각할 수 있다는 당 내 관례가 있다. 즉 자유민주당에선 내각에 참여할 해당 참의원 의원이 몇선을 하던지 전혀 상관없고 전체 참의원 의원 생활 중 한 번만 국무대신으로 입각이 가능하다. 여당을 유지한 채 자유민주당 총재선거로 인하여 내각총리대신이 교체되어 새로운 내각이 성립되더라도 재입각이 관례상 불가능하다는 것이다.(보통의 경우 지키는 경향이 있지만 관례일 뿐이기에 예외적으로 여러번 내각 국무대신으로 입각하는 경우도 있고 최근들어 이런 관례가 줄어들고 있다.) 중의원 의원은 당 내 이런 제한, 관례가 없으며, 자유민주당을 제외한 다른 당(입헌민주당 등)에서는 이런 관례가 없다.[19] 고이즈미가 자민당 내 파벌의 영향력을 최대한 배제하기 위해서 민간의 신선한 아이디어를 받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행한 조치였다. 고이즈미는 주요 보스들간의 뒷거래로 모든 게 결정되는 자민당의 파벌 정치를 극도로 혐오했던 인물이다.[20] 세계적으로 지진, 홍수, 화산 폭발, 폭동 같은 긴급 상황이 발생했을 때 자국인 여행자들에게 가장 빨리 연락을 해서 안전한 피신 경로를 통지하는 건 보통 일본의 외교 공관이라고 한다. 그래서 자연재해가 벌어졌을 때 잘 모르겠으면 그냥 일본인 여행자를 따라가면 된다고.[21] 정치인의 힘이 강하고 청와대/백악관에서 절대적인 인사권력을 통해 관료들을 통제하는 미국이나 대한민국과 달리 일본은 관료들이 독자적인 파벌을 형성했으며 정치인과 충돌하는 일이 많았다.[22] 법적으로는 장관(대신)에게 권한이 있었으나 사무차관이 한 것을 그대로 장관이 결재하는 것이 관례였으며 이 사무차관은 내부승진한 관료이다.[23] 제재 사유에 대한 이유가 오락가락했는데, 처음에는 대북제재 위반을 지적하다가 대한민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청구권 인정 판결에 대한 반발로 바꾸는 등[24] 무역 분쟁의 시발점이 되는 제재를 걸고도 GSOMIA 연장을 희망한다는 입장을 밝히거나, 대한민국 측에서 파기 입장을 밝혔을 때 일본 측에서 당혹스러워하는 반응을 보이는 등[25] 2019년 한일간 갈등의 경우 아베 정부의 민족주의적 기조나 반한(反韓) 지지층을 만족시켜야 한다는 정치적 압박, 2020년 코로나 19 유행의 경우 도쿄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해야 한다는 것이다.[26] 이는 도쿄도 같은 초대형 지자체에서는 더욱 심하다. 만화 등 에서 'XX금지 조례 발령' 이라는 대사가 자주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참고로 이 금지조례라는 것은 대한민국에서는 존재하기 힘든데, 현행 한국 헌법은 주민의 권리를 제한하는 것은 법률만이 가능하도록 명시하기 때문이다.[27] 이런 특유의 문화가 자리잡은 이유에는 여러가지 분석이 있다. 일본의 지방정치가 중앙정치의 견제 차원에서 발달했기 때문이라는 설, 지속적인 지방의 재정자립도 하락으로 지역 정치인보다 중앙 공무원 출신이 지자체장 후보로 공천되는 경우가 많아지며 지역기반이 취약한 중앙정당들이 사실상의 연합공천을 하는 경우가 많아서라는 설, 한국처럼 지자체장을 전국적으로 같은 날에 동시에 뽑는 게 아니기 때문에 정당론보다 인물론이 발동되기 쉬운 환경이라는 설 등.[28] 해당 지역에 유력 지역정당이 있는 경우에는 상기한 5당이 한 후보를 지지하는 경우도 있다. 일례로 2019년 오사카시 시장 선거에서는 유력 지역정당인 일본 유신회의 마츠이 이치로 후보에 대항하여 5당이 한 후보를 지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츠이 이치로가 큰 표차로 당선되었다. 그만큼 지방선거에서도 정당을 최우선적으로 보는 대한민국에선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29] 일본의 기초의회의원선거의 선거구는 일반 시정촌일 경우에는 1개의 시정촌 전체가 한개의 선거구로 구성되어있고(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시의 시모노세키시의회는 선거구가 대한민국처럼 쪼개진게 아니라, 시전체가 선거구인 대선거구제 형태로 되어있다.), 정령지정도시의 경우에는 각 행정구가 한개의 선거구로 구성되어있는 형태로 있다.[30] 단, 모든 선거에서 자서식 투표를 시행하는 것은 아니다. 지방선거에서는 해당 지자체의 조례를 통해 타국과 비슷한 기표식 투표용지를 적용할 수 있다. 도도부현지사 선거에서는 아오모리현, 이와테현, 시마네현, 오이타현, 구마모토현의 5개 현이 기표식 투표를 적용하고 있으며, 시정촌장 선거에서는 전국 시정촌의 약 12%가 기표식 투표용지를 사용중이다. 기표식으로 투표하는 오이타현지사 투표용지[31] 무효표[32] 결선투표제가 아니다. 재선거에서 기존에 출마했던 후보들만이 아닌 새로운 후보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33] 통일지방선거라고는 하지만 대한민국과는 달리 일본에선 재보궐선거로 당선된 지자체장이나 의원들에게도 임기를 보장해주기 때문에 모든 지자체에서 치러지는 건 아니다.[34] 현재도 아시아에서 선진 민주주의 국가는 냉정하게 대한민국, 일본, 대만 정도를 제외하고는 찾아보기 힘들다.[35] 우리나라의 경우 여대야소라고 해봐야 최대로 차이가 나도 여당 180석, 야당 120석 정도인데(6대4) 일본의 경우에는 수십년째 자민당이 300석 이상을 가져가는 동안 야당은 150석 정도이다.(2대1) 또한 우리나라에서는 여대야소라고 하더라도 여당이 야당과 합의없이 마음대로 독단적인 정치를 하면 다음 총선, 대선 때 정권심판론이 나와 순식간에 여소야대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여당이 야당을 아예 무시하기는 어렵다. 일본에서는 자민당이 독단적으로 진행하는 것에 불만을 가져도 "민주당이 하는 것보다는 낫지"라는 생각이 만연해있어서 정권심판론이 고개를 들기 어렵다.[36]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여대야소의 최대치가 저 정도인데 반해 일본에서는 자민당 체제 내내 저 수준이다.[37] 다만 일본은 1925년 대규모 시위를 통해 보통선거(여성은 제외)의 권리를 획득한 역사가 있다.[38] 참고로 유럽이었으면 독일에서도 즉시 사회에서 매장당했을 발언이다. 독일은 나치에 빠졌던 기억으로 인해 집단적 군국주의에 대한 거부감이 상상을 초월한다. 단적인 예로 유대인 페스티벌 중 퍼레이드를 보며 카페에 앉아있던 독일인 남성이 그들을 조롱하듯 나치식 경례를 하여 3년형을 선고받은 바를 보면, 아소 다로처럼 독일 내에서 정치인이 저와 같은 발언을 할 경우 사회적 매장은 물론이거니와 법적인 처벌을 받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39] 쉽게 말해 일본 정계에는 김진재 아들 김세연, 남평우 아들 남경필, 장성만 아들 장제원, 정석모 아들 정진석, 노승환 아들 노웅래, 김상현 아들 김영호, 문희상 아들 문석균 같은 케이스가 수두룩하다는 것.[40]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세습정치인 출신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는 우정민영화를 위해 중의원을 해산해 기존 세습 정치인을 배제했다. 결과적으로 자민당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둠으로써 역으로 자민당 내 세습정치인들 상당수를 날려버려 2005년 중원선 이후 자민당 내 세습정치인 비율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중원선에서 고노 요헤이, 가이후 도시키 등 한 때 거물급 정치인이었거나 거물급 정치인이던 의원들 대부분이 정계은퇴하거나 낙선하게 된다.[41] 일본 정치활동의 핵심이다. 후원회장은 물론 정치인의 제1의 서포터이니만큼 지역구 유지 중에서도 대장급이 맡으며 조직적으로 정치활동을 보조하며 그 대가로 이권 따내는 데에 정치인에게 도움을 받는다.[42] 정치자금관리단체의 대표를 자녀에게 물려주면 그대로 그 돈가방의 주인이 되는 거고, 죽기 전에 개인자산까지 기부해 버리면 상속세도 안 내고 물려받을 수 있다. 은퇴하고 정치자금관리단체를 해산하면 그 단체의 자산은 어떻게 사용해도 무관하기에 사실상 정치가의 개인자산이다. 이처럼 세법 자체가 정치가에게 극히 유리하다. 그래서 정치가는 공개되는 자산이며 상속세 대상인 예금을 안 하는 것이다. 사실 이 부분뿐이 아니라 재산 공개만 해도 대한민국 국회의원은 주식, 부동산 등 전부 공개해야 하는데 일본 국회의원은 토지/건물의 과세표준액, 주식을 제외한 유가증권, 예금자산만 공개하면 된다. 그래서 그 부국 일본의 세습 귀족 중의원 의원들의 평균 자산이 적어보이는 것이다. 세습 정치가 가문은 지역구에서 가족기업을 직접 운영하는 경우도 많고, 가문의 정치자금관리단체의 포켓머니를 생활비로 쏙쏙 빼먹기도 하는 등 일본 정치인의 실제 재산은 드러난 부분보다 훨씬 많다. 재벌가 장남에 시부야에 50억엔짜리 저택을 보유한 아소 다로가 자산 공개에는 5억엔 정도밖에 안 잡히는 것도 이런 이유다.[43] 미국인 경우 아버지 부시와 아들 부시로 2명의 대통령을 배출한 부시 가문, 케네디 가문, 루스벨트 가문 등등 정치 명문가가 있지만 특정 대를 기점으로 정치 명문가의 명맥이 끊긴 가문이 많다.[44] 당장 국내로만 따져봐도 부녀가 대통령을 지낸 박정희 - 박근혜 전 대통령 부녀와 아들 3명이 모두 국회의원을 지낸 김대중 전 대통령 - 김홍일, 김홍업, 김홍걸 부자를 비롯해 장성만 - 장제원, 김진재 - 김세연, 홍우준 - 홍문종 등 대를 이어 국회의원을 지낸 경우는 있지만 이들은 적어도 선거에 나가서 낙선을 하거나 경선에서 져서 공천을 못받는 경우, 중앙당에 의해 컷오프를 당해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는 등 부모의 후광만으로 국회의원이 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대표적으로 위에 언급된 장제원, 김세연, 홍문종은 모두 중앙당에서 공천을 주지 않아 무소속으로 출마한 경력이 있다.[45] 더 알기 쉽게 설명하자면 한국에서는 부모 후광보다 중앙당 공천이 훨씬 중요하다. 물론 경선에 떨어지고 무소속으로 나서서 당선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 경우 대부분 중앙당에서 낙하산으로 보낸 인사에 대한 반감 + 해당 의원이 지방 토박이라 텃밭을 매우 잘 가꾼 경우에나 가능한 정도다. 당연하지만 이것도 운이 좋아야 하는 거고 당연히 한국이라고 세습 정치인에게 호락호락 표를 주거나 하지도 않는다.[46] 에도시대 기준으로는 원래는 세습촌장가문 쯤 되는 위치였다.[47] 일본은 대한민국과는 다르게 중학교, 고등학교를 갈 때 입시를 봐야 한다. 이 때문에 명문 고등학교의 입학에 사활을 거는 학생도 있다. 특히, 사립 명문대학의 학교법인에 속해있는 부속학교(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는 어지간한 모지리가 아닌 이상 자동으로 내부진학이 되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경쟁률이 상당히 높은 편이다.[48] 의원이 도쿄에 있으면서 지역구에 내려오지도 않으면 친근감이 부족하거나 오만하다고 비춰져 선거에 떨어지는 경우도 있다. 또한 자식이 차후 세습할 때에도 자식이 지역에서 고교를 졸업했는지 아니면 어릴적부터 도쿄에서 살아 지역구엔 가끔 오는 별장 정도의 인식인지에 따라서 지역 주민들이 그 자식에게 느끼는 친근감 수준이 다르다.[49] 호소다 히로유키는 통산성 과장 출신이며 시오자키 아키히사는 대형 로펌 파트너 변호사 출신이다.[50] 주로 덴츠같은 대형 미디어계가 낙하산이 많고, 미쓰비시상사같은 전통있는 재벌계는 집안, 학맥도 중시하는 곳이라 들어가기 수월하다.[51] 주로 돈을 갖춘 기업가 가문이 많다. 아베 신조는 모리나가제과 오너일가의 아베 아키에와 결혼했다. 반면 아소 다로는 본인이 재벌가 출신이고 아버지는 중의원 3선 정도를 한터라 스즈키 젠코 총리의 딸과 결혼해 정치 후견인을 얻었다.[52] 대학 졸업하고 곧장 아버지의 비서로 들어오기보단 일정기간 대기업에 들어가서 사회생활을 하다가 아버지의 비서로 들어오는 경우가 많다. 아베 신조는 철강회사, 기시다 후미오와 이시바 시게루는 은행, 고노 다로는 후지 제록스를 거쳤다.[53] 데릴사위를 들이는 경우도 은근히 보인다. 가토 가쓰노부, 오노데라 이쓰노리, 노다 다케시 등.[54] 물론 그렇게 물려주는 비서 등 심복들도 결국은 양자나 데릴사위로 들이는 게 대부분이겠지만.[55] 호소카와 모리히로 - 하타 쓰토무 - 무라야마 도미이치 - 하시모토 류타로 - 오부치 게이조 - 모리 요시로 - 고이즈미 준이치로 - 아베 신조 - 후쿠다 야스오 - 아소 다로 - 하토야마 유키오 - 간 나오토 - 노다 요시히코 - 아베 신조 - 스가 요시히데 - 기시다 후미오.[56] 모리 요시로는 아버지, 할아버지가 지방자치단체장에 해당하는 기초자치단체장이였고 나머지 10명은 가문의 중의원 지역구를 물려받았다.[57] 자민당 내 진보파였고 떼거리 정치를 혐오했던 사람이라 세습하지 않았다. 다만 의사의 부인인 딸이 미키가 죽고 10년 정도 지나고서 미키의 지역구 도쿠시마에서 참의원을 지내기는 했다만 지역구를 그대로 세습한 것은 아니다.[58] 의정활동 50년의 타이틀에 집착해 여든을 바라보는 노년에도 은퇴 없이 계속 출마하다, 마지막 선거인 45회 중원선 당시 정권 교체의 열풍 속에 낙선해 의정생활 50년 타이틀을 못 얻었다. 아들은 미국에서 프로듀서로 일하던 터라 세습하지 않았다.[59] 또 자식한테 물려주지 않는 경우 혹은 자식이 정치 안한다고 거부하는 경우에는 비서한테 넘겨준다.[60] 자민당의 경우 당선 횟수가 곧 서열인 곳이라서, 당선 횟수가 낮은 정치인이 튀는 행동을 못하게끔 강력히 제지한다. 일본의 경우, 대형 선거 이외의 선거가 거의 매달 한번 있는 상황(일본의 지방선거는 제각기 다른 시기에 치러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이라서 이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자칫하면 감표 요인이 될수도 있기 때문이다.[61] 특히, 중의원의 경우에는 임기 도중에 해산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해산에 대비해서 차기 중원선에 지역구 후보로 출마할 사람을 미리 정해놓는데, 여기서 밀려나면 공천될 확률은 사실상 0%라고 봐도 된다.[62] 대부분 중의원에서 참의원으로 전향하는 케이스이다. 참의원이라고 해서 세습제 문화가 없는 건 아니지만, 중의원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세습제 문화가 약한 편이다. 이 때문에 중의원에 비해 진입 장벽이 상대적으로 낮지만, 참의원은 중의원 보다 권한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편이고, 유명인사 출신이 아니면, 대중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63] 국회의원 세습에만 초점이 맞춰져서 그렇지, 지방의회의원을 세습하는 경우도 상당수 존재한다. 지방의회의원까지 세습의 범위에 포함할 경우, 비세습 후보의 당선 확률은 실질적으로 30% 미만일 가능성이 높다.[64] 경기 의정부시 을-홍문종(아버지 홍우준), 충남 공주시·부여군·청양군-정진석(아버지 정석모), 부산 금정구-김세연(아버지 김진재), 부산 사상구-장제원(아버지 장성만), 서울 마포구 갑-노웅래(아버지 노승환). 물론 지역구에 상관없이 2세, 3세 정치인으로 범위를 넒히면 좀 늘어나지만 그래봐야 10~20명 수준이다. 대한민국은 워낙에 정치적 격변이 심하고, 선거때마다 정권심판론이라던가, 기존 지역구 의원의 비리 의혹 혹은 논란이 될만한 사건이 일어나면 정치 생명에 큰 타격을 입는 등의 여러가지 요인으로 인해 물갈이가 심해서 정치세습은 드문 편이다. 그러나 정계-재계-고위관료-사학재단들이 혼맥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이 분야에서의 세습은 대한민국도 많이 이뤄진다.[65] 스웨덴에서 사회민주노동자당이 42년 동안 집권한 예가 있다. 현재는 집권 여당이 아니다.[66] 부친이 니가타의 대형 건설사 후쿠다구미의 회장으로 갑부였으며 다나카 가쿠에이의 후원회장이기도 했다. 다나카의 주례로 결혼했으나, 오자와는 여성 편력이 매우 화려했기에 사이는 당연히 나빴으며 오자와의 대저택에서 다른 건물에 기거했고 이혼할 때엔 오자와의 자식들이 전부 어머니를 따라갔을 정도였다.[67] 2009년 : 2730만표 - 119석, 2014년 : 2546만표 - 293석[68] 정치인이 여러 부처의 수장을 지내는 것은 외국에서는 드물지만 일본에서는 흔하다. 고이케 유리코는 환경대신이었다가 방위대신이 되었고, 고노 다로는 외무대신에서 방위대신이 되었다가 디지털대신이 되었으며, 이시바 시게루는 국방대신이었다가 농림수산대신이 되었고 아소 다로처럼 파워가 센 정치인은 외무대신, 총무대신, 재무대신까지 역임했다. 이렇게 정치인이 파벌에 따라 대신이 되면 대부분 전문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국회에서의 질의응답 같은 것들은 관료들이 대필해준다고 한다.[69] 이걸 제대로 실현한 정치인이 대표적으로 다나카 가쿠에이. 아예 당대에 불린 별명이 어둠의 쇼군이었다.[70] 일본에선 총리공선제라고 한다.[71]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내각제의 본질과 완전히 충돌하는 얘기이며, 직선제로 갈거면 차라리 대통령제로 가는 게 여러 면에서 합리적이다 .[72] 6월 항쟁과 박근혜 퇴진 운동에선 한번에 최대 200만여명이 참여하기도 했다.[73] 애초에 저랬다면 평화헌법 개정은 진작에 됐을 것이다.[74] 물론 저 정도 숫자 역시 다른 선진국들에 비하면 크다. 여기에 투표율이 낮으면 나라가 극우들 의도대로 흘러가게 된다. 다만 그 숫자가 과장된 바가 있다는 것이다.[75] 2분 48초부터[76] 엘리트주의가 강한 자민당이 대중주의노선을 걷게 된 계기는 2001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집권 이후이다. 고이즈미 총리는 여론을 적극적으로 이용 했고 이러한 노선을 배경으로 2005년 총선때 압승하기도 했다. 또한 세습의원 비율이 절반 가량 되던 자민당 중의원 또한 2005년 총선 이후 어느 정도 감소했다.[77] 예산안 심의 과정에서 국회의원들이 자신의 지역구에서 요구하는 선심성 정책에 대한 예산을 타내는 것을 말한다. 이로 인해 실제 배정된 예산보다 더 많은 예산이 집행되어 국고 낭비를 초래한다. 물론 선심성 정책에 들어가는 돈인 만큼 눈먼 돈이 될 가능성도 높고 비효율적 사업이 될 가능성도 높다.[78] 클로즈업을 사용한 자민당 의원의 우는 사진 배포[79] 아사히 신문, 마이니치 신문[80] 주니치 신문, 홋카이도 신문, 도쿄 신문 등[81] 대한민국의 언론 수입구조는 일본과 정반대로 오히려 광고료 수입의 비중이 높다.[82] 산케이 신문은 2020년 10월 전국 일간지 지위를 포기했다.[83] The 2013 passage of the Act on the Protection of Specially Designated Secrets enacted strict punishments for leaking classified information and was highly unpopular with the media. However, it does not seem to have had any chilling effect on the media in general. - 2013년 특정비밀보호법의 통과는 기밀로 지정된 정보를 누설하는 것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가능하게 하였고 대다수의 언론에서 반대하였으나, 언론 전반에 크게 활동 저하를 가져오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 위 링크 내용의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