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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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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당
(송시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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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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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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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인한정후겸 외척
(홍국영)
소론
(서명선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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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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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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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김씨, 풍양 조씨, 반남 박씨 등)
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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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양 조씨, 안동 김씨, 남인, 소론, 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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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화파)
흥선대원군 여흥 민씨
(+ 온건 개화파)
고종 순종
급진 개화파 여흥 민씨 김홍집
(+ 친일파, 친미파, 친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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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3대 국왕
태종 | 太宗
파일:태종대왕어진영.jpg
태종 상상 어진[1]
출생 1367년 6월 21일[2]
(음력 공민왕 16년 5월 16일)
동북면 함주목 귀주동 이성계 사저
(現 함경남도 함흥시 사포구역 소나무동 함흥본궁)[이북5도]
즉위 1400년 12월 7일[A] (33세)
(음력 정종 2년 11월 13일)
개성부 수창궁 정전
(現 개성시 남안동)
사망 1422년 6월 8일[B] (향년 54세)
(음력 세종 4년 5월 10일)
한성부 수강궁 천달방(泉達坊) 별전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능묘 헌릉(獻陵)
재위기간 조선 정안군
1392년 8월 25일 ~ 1398년 10월 10일
조선 정안공
1398년 10월 10일 ~ 1400년 3월 8일
조선 왕세자
1400년 3월 8일[6] ~ 12월 7일[A]
(음력 정종 2년 2월 4일 ~ 11월 13일)
조선 제3대 국왕
1400년 12월 7일[A] ~ 1418년 9월 18일[C]
(음력 태종 즉위년 11월 13일 ~ 태종 18년 8월 10일)
조선 상왕 | 조선 국왕 섭정[10]
1418년 9월 18일[C] ~ 1421년 10월 17일[D]
(음력 세종 즉위년 8월 10일 ~ 세종 3년 9월 12일)
조선 태상왕[13] | 조선 국왕 섭정
1421년 10월 17일[D] ~ 1422년 6월 8일[B]
(음력 세종 3년 9월 12일 ~ 세종 4년 5월 10일)
서명
파일:태종 서명.svg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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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본관 전주 이씨
방원(芳遠)[16]
부모 생부 태조 고황제
생모 신의고황후
양부 정종
양모 정안왕후[17]
형제자매 부황 기준 8남 5녀 중 5남
모후 기준 6남 2녀 중 5남
배우자 원경왕후 (1382년 혼인 / 1420년 사망)
후궁 19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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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빈 김씨, 의빈 권씨, 효빈 김씨, 신빈 신씨, 선빈 안씨, 소빈 노씨, 정빈 고씨, 숙의 최씨, 숙의 이씨, 숙공궁주 김씨, 의정궁주 조씨, 혜순궁주 이씨, 신순궁주 이씨, 덕숙옹주 이씨, 혜선옹주 홍씨, 순혜옹주 장씨, 서경옹주, 후궁 김씨, 이씨
자녀 12남 17녀 (18남 19녀)[18]
종교 유교 (성리학)
유덕(遺德)
봉호 정안군(靖安君) → 정안공(靖安公)[19]
전호 광효전(廣孝殿)
묘호 태종(太宗)
별호 성종(聖宗)
존호 성덕신공건천체극대정계우
(聖德神功建天體極大正啓佑)[20]
시호 조선: 문무예철성렬광효대왕
(文武睿哲成烈光孝大王)[21]
: 공정(恭定)
}}}}}}}}}

1. 개요2. 묘호와 시호3. 이름과 작위4. 생애5. 평가6. 일화7. 직접 쓴 글과 시8. 기타9. 가족 관계10. 대중매체11. 관련 문서12. 외부 링크13.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뜻을 성취할 사람은 반드시 너일 것이다.
태조실록》 1권, 총서 中#
조선의 제3대 국왕. 묘호태종(太宗), 시호는 공정성덕신공건천체극대정계우문무예철성렬광효대왕(恭定聖德神功建天體極大正啓佑文武睿哲成烈光孝大王), 는 방원(芳遠),[22] 자는 유덕(遺德).

1367년(공민왕 16년) 6월 13일, 아버지 이성계와 어머니 신의왕후의 5남으로 태어났다. 17세의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고려에서 관료 생활을 처음 시작하였으며 이후 아버지의 역성혁명을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도왔다. 1398년(태조 6년)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계모신덕왕후의 소생이자 이복 막내동생인 왕세자 이방석과 그 친형인 무안군[23], 세자를 지지하던 개국공신 정도전남은, 심효생 일파를 모두 숙청하고 권력을 장악하였고, 마침내 조선의 제3대 국왕으로 즉위, 격동기였던 여말선초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

즉위 후에는 왕권의 강화를 위해 정적 뿐 아니라, 왕권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되면 자신의 집권에 기여한 공신들과 외척들이라 할지라도 가차없이 냉정하게 숙청하였는데, 이는 조선이 초기부터 안정된 중앙집권제 국가로 형성되는데 크게 기여한 중대한 작업이었고 자신의 후계자인 세종의 훌륭한 치세, 더 나아가 태종 본인의 현손[24] 성종까지 이어지는 태평성대의 바탕이 되었다. 그 외에도 혼란스럽던 건국 초기의 상황을 잘 수습하고 신생 국가 조선의 기틀을 마련하며 사실상의 2대 군주로서 그 책무를 훌륭히 수행함으로써 태종이라는 묘호에 어울리는 업적을 쌓았다.

2. 묘호와 시호

"고애자(孤哀子) 사왕(嗣王) 신(臣) 【휘(諱).】[25]는 삼가 재배(再拜) 돈수(頓首)하고 상언(上言)합니다. 삼가 큰 덕(德)과 높은 공(功)은 전고(前古)에 뛰어나니 큰 이름을 시책(謚冊)에 나타내어 후세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이 마땅합니다.

삼가 떳떳한 전장(典章)에 따라 휘호(徽號)를 올립니다. 공손(恭遜)히 생각하건대, 황고(皇考) 성덕 신공 태상왕(聖德神功太上王)께서는 총명(聰明)하고 신성(神聖)하며 용감하고 지혜로우며 너그럽고 어질어서 고려의 국운(國運)이 이미 다한 때를 당하여 천심(天心)의 돌아가는 바를 알고 태조(太祖)를 도와서 만세의 터전을 비로소 개척(開拓)하였습니다.

중국에 들어가 고황제(高皇帝) 를 뵈올 때 세 번이나 접견(接見)하는 총영(寵榮)을 받았습니다. 일이 기미(幾微)[26]가 아직 나타나지 않을 적에 환하게 알아서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길이 평안(平安)하게 하였습니다. 천부(天賦)의 사랑이 오직 어버이에게 깊어 승안(承顔)[27]의 효(孝)에 지극히 독실(篤實)하였고,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우애(優愛)하여 이에 양덕(讓德) 의 빛을 내려 주었습니다.

무위(武威)는 바람과 우레보다 엄숙(嚴肅)하고 문치(文治)는 해와 달보다 밝았습니다. 교린(交隣)하는 데 도(道)가 있고 사대(事大)하는 데 정성(精誠)으로 하니, 덕화(德化)가 먼 데나 가까운 데나 흡족하여 은혜가 동물이나 식물에까지 미쳤습니다. 외람되게 큰 왕통(大王統)을 이어받은 것을 생각하여 나이가 오래되시도록 영화롭게 봉양(奉量)하리라 기약하였더니, 어찌 갑자기 승하(昇遐)하여 이에 말명(末命)[28]을 남기십니까?

울부짖고 통곡하는 마음을 견디기가 어려워 이에 현양(顯揚, 이름과 지위를 세상 높이 드높이는 일)의 의식을 거행합니다. 삼가 옥책(玉冊)을 받들어 존시(尊謚)를 ‘성덕 신공 문무 광효 대왕(聖德神功文武光孝大王)’이라 올리고, 묘호(廟號)를 ‘태종(太宗)’이라 하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밝으신 령(靈)이 충감(沖鑑)을 굽어 내리어, 길이 다복(多福)을 주시어 자손(子孫)을 무궁한 앞날에 보호하시고, 국가의 계책(計策)을 그윽이 도와주어 하늘과 땅과 더불어 구원(久遠)하게 하소서. 삼가 말씀드리옵니다."
- 《태종실록》 36권, 태종 18년(1418년, 명 영락(永樂) 16년) 11월 8일 (갑인) 4번째기사#

我馬帶矢 于廐猝來 願陪聖宗 九泉同歸
말이 화살을 맞아 마구에 들어오거늘, 성종[29]을 모셔 구천에 가려 하시니.
- 《용비어천가》 10권, 제109장 中#

태종이란 묘호 자체가 조선을 건국한 태조의 공에 버금갈 임금에게 바치는 최고 영예의 묘호이다. 사후에 업적을 인정받아 묘호가 태종으로 정해졌고 신하들의 절대적 찬사를 받는 영광을 누렸다.[30]

또한 용비어천가에서는 태종을 달리 불러 성종(聖宗)[31]이라 칭하였다. 일종의 '별호'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아버지인 태조의 별호는 '성조(聖祖)'였었다.

3. 이름과 작위

파일:태종 서명.svg
태종의 수결(手決, 서명)
개국 전에 태어나 원래 왕족이 아니어서 피휘를 염두에 두고 이름을 짓지 않은 왕족이 왕이 되면 피휘 문제 때문에 개명하는 경우가 많은데, 태종은 승하할 때까지 개명 없이 흔히 쓰이는 꽃다울 방(芳)멀 원(遠)자를 휘로 계속해서 사용했다.[32] 사실 피휘에 대한 규칙을 담고 있는 예기 단궁 하(檀弓 下)편에는 공자의 모친 안징재의 예를 들면서, 피휘할 이름이 두 글자로 이루어진 경우에는 그중 한 글자만 쓰는 것은 허용된다고 했다. 하지만 이때까지는 두 글자 이름도 실질적인 피휘 대상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위 규칙을 따라 개명과 피휘를 모두 하지 않은 대표적인 사례는 중국사당태종 이세민(李世民)인데, 그가 죽은 뒤 낱글자 피휘 금지가 후손에 의해 뒤집히면서 책 한 권에 100번은 나올, 방원보다 더 흔해빠진 한자들인 세(世)와 민(民)이 따로 쓰이는 경우까지 모두 피휘되고 말았다.[33] 그 바람에 이 두 글자의 형태가 변형되거나 아예 뜻이나 모양이 비슷한 다른 한자로 대체되는 바람에 복잡한 한자로 된 문서들이 당나라 때 잔뜩 생겨났다. 이런 사례를 의식해서인지 아버지 이성계는 왕이 되고 '이단'(李旦)으로 개명했고, 형인 정종 이방과는 '이경'(李曔)으로 이름을 바꾸었음에도, 정작 자기 아들들의 이름은 전부 외자로 지어놓고도 본인만은 원래 이름을 고집한 이방원이 정말 독특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현재에는 아버지 이성계처럼 본명인 '이방원'으로도 유명하다. 위의 수결(手決, 서명)도 이름자인 '방원'을 갈겨 쓴 것이다.

자기 이름에 대한 애착이 있긴 했었겠으나, 피휘는 왕의 권위에 훨씬 더 중요한 예의였음에도 불구하고 선비와 양민들 불편하지 말라고 피휘 관리를 과감히 포기한 걸 보면 시원한 인품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34] 아니면 단순히 자신의 권위에 자신감이 넘쳐 후대가 감히 자신의 결정을 뒤집지 못하리라는 생각에서 나온 과시적 행위일 수도 있다. 실제로 같은 시기 이전 왕조들에 비해 강력한 군주권으로 유명했던 명나라 황제들은 이전 시대와 달리 역시 흔한 한자로 된 이름을 가진 명태조 주원장(朱元璋)을 시작으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한자가 들어간 두 글자 이름을 여러 세대에 걸쳐 잘만 썼고, 이에 따른 낱글자 피휘 금지도 잘 지켜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방원은 자기 아들들의 이름은 비교적 흔하지 않은 부수를 사용한 외자로 지음으로써 본인의 사례를 관행으로 만들지는 않았고, 이 때문에 조선에서는 이방원이 독보적인 사례가 되었다.

왕자였을 때 받은 작위는 '정안군', '정안공(靖安公)'이다. 정안대군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나, 조선왕조실록 원문에는 정안군 또는 정안공이라고 적혀있다.[35] 태조 시절에는 정안군으로 기록되어 있고, 정종 시절에는 정안공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 건국 직후 태조 대에는 고려 말기의 왕자 봉작제를 따랐다. 따라서 태조 대의 이방원의 호칭은 정안군이었다. 이후 1398년(태조 7년) 9월 1차 왕자의 난 직후 왕친의 봉작이 개정되어 임금의 친왕자의 호칭이 공(公)이 되었다. 이에 《정종실록》에는 이방원의 호칭이 정안공으로 기록된다. 이후 태종 본인이 임금으로 즉위한 직후 1401년(태종 원년) 1월 공(公)이라는 호칭을 부원대군(府院大君)으로 개정했고, 이후 다시 대군으로 변경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에서 최초로 대군이 된 사람들은 정종을 제외한 이방원의 친형제들이었다. 태종의 아들들인 효령대군, 충녕대군은 관례를 마친 후인 1412년(태종 12년)에 대군으로 봉해졌으며, 1414년(태종 14년) 태종은 여덟살의 아들을 성녕대군으로 봉하며 왕의 아들로서 왕비 소생은 대군(大君), 후궁 소생은 군(君)으로 호칭을 완전히 법제 확정하였다.[36] 따라서 이방원과 이방과는 '정안군 / 정안공', '영안군'이었지 '정안대군', '영안대군'이었던 적이 없었다. 반면 이방원의 친형인 이방의와 이방간은 1401년(태종 원년), 태종의 호칭 개정에 따라 각각 익안대군, 회안대군이 되었다. 그들도 이방원, 이방과와 마찬가지로 아버지 태조 시절에는 익안군, 회안군이었고, 1차 왕자의 난 이후에는 익안공, 회안공이었다.

연려실기술처럼 후대에 쓰인 책들에서 즉위 이전의 태종을 언급할 때 '정안대군'이라는 호칭을 쓰며, 조선왕조실록이 번역되기 이전의 예전 사극이나 소설 등[37]에서도 정안대군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기도 했다. 정안대군이 틀린 표현이라며 이를 비난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후에 확립된 표기를 따라 관례적으로 대군이라 칭하는 것을 지적하는 것 자체도 옳지 않다는 의견도 있다. 태조의 왕자들은 조선 시대야사집이나 사적인 자리에서 옛날 일을 말할 일이 생기면 대군이라 호칭되었을 것이다. 왕과 왕비 사이에서 태어난 친아들을 대군이라고 하는 것이 후대에는 자연스럽게 여겨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장 이성계의 직계 선조들이 싸그리 임금으로 추존되는 판에 나머지 왕자들을 대군으로 호칭하는 것은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공적으로는 이미 왕이 된 정종과 태종을 대군이라고 부르는 경우는 딱히 없었다. 이는 이미 더욱 높은 자리인 왕이 된 사람들을 가리키면서 일반적으로 아무개 임금이라고 하지 아무개 왕자라고 하지 않는 데다, 어쩌다 왕자 시절의 호칭을 언급하더라도 대군 호칭 사용 이전의 과거 발언이나 표현을 인용하는 과정에서만 나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중 인물의 대사로 나오면 고증 오류.

4.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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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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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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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직접 쓴 글과 시

명나라 영락 황제에게 바치는 시
자줏빛 봉황 편지 물고 하늘에서 내려오더니
먼 지방의 기쁜 기분 노래로 감응하네
오랫동안 숨어 있던 용과 범은 소리로 응대하고
죽지 않은 고래들은 기세 오히려 씩씩하네
만 리 강산에 정통성이 돌아왔고
백 년 인생이 맑은 조정을 보네
노안에 황제의 명령으로 새로운 변화 보게 되니
백발에 너그럽지 않음을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열성어제[E]
마니산 제단
외진 지역 인적 드문 곳에서
깨끗한 마음으로 밤낮 재계한다
국화꽃은 우물물을 내려다보고
흰 이슬은 섬돌 이끼에 스며든다
장수 기원함이 얼마나 절실한가
샛별 응당 자연히 배열하리라
봄가을 제사 기일 어기지 않아
임금의 덕 또한 생각나는구나
열성어제[39]
마니산 제단
왕명 받들고 이 재궁에 다다르니
눈에 가득한 가을 산 비단에 붉은 수놓았다
소나무 창가 꿇어앉아 하는 일 하나 없는데
휘영청 달빛 성 동쪽에 빠져있구나
열성어제[E]
1390년(공양왕2)에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에서 쓴 시 두 편이다.
회안대군 방간에게 내려준 글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백형 부자가 순천으로 옮기던 날에 말을 달려서 피하려고 한 일이 있었습니다."라고 하였는데, 내가 경진년(1400년, 정종 2년) 봄[41]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백형을 보전하려고 하는 마음이 날로 두터웠습니다. 근래에 김여생과 중 묘봉 등이 망령되게 "백형이 난을 꾸몄다."라고 일컬었으므로 이미 조사하여 밝혀서 반좌율[42]에 처하였고, 또 일전에 조사의가 동북면에서 군대를 일으키자 백관들이 대궐에 나아와 백형을 제주로 내치자고 청하였는데, 내가 제주는 바다를 사이로 너무 멀리 있기 때문에 청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백형께서는 의혹을 품지 마시기 바랍니다.
열성어제[E]
1402년 음력 12월 2일 형인 회안대군 방간에게 보낸 글이다. 이방간은 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 인물로 태종 이방원과 마찰이 있었다. 글을 보면 태종 이방원은 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 다음부터 이방간을 잘 보호하려고 했다고 한다.

8. 기타

9. 가족 관계

총 12남 17녀 (9명 조졸)
원경왕후 신빈 신씨 의빈 권씨
장녀 정순공주
차녀 경정공주
아들(조졸)
아들(조졸)
아들(조졸)
3녀 경안공주
장남 양녕대군
차남 효령대군
3남 충녕대군
4녀 정선공주
6남 성녕대군
왕자(조졸)
5남 함녕군
6녀 정신옹주
7남 온녕군
7녀 정정옹주
8녀 숙정옹주
9녀 숙녕옹주
11녀 소신옹주
13녀 소숙옹주
16녀 숙경옹주
왕자(조졸)
5녀 정혜옹주
정빈 고씨
9남 근녕군
숙의 최씨
10남 희령군
숙의 이씨
11남 후령군
선빈 안씨 소빈 노씨
8남 혜령군
12남 익녕군12녀 경신옹주
14녀 숙안옹주
10녀 숙혜옹주
효빈 김씨 후궁 김씨
4남 경녕군 15녀 숙근옹주
알 수 없음 궁인 이씨
왕자 2명(조졸), 옹주 2명(조졸) 17녀숙신옹주(숙의에게 양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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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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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관련 문서

12. 외부 링크

1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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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임체 는 부정적으로 언급된 인물이다.
[1] 실제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후대 인물 허균이 창작한 의적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논란이 있지만 간접적인 언급으로 소설 홍길동전에서 대중화된 의적 이미지를 노래 가사로 사용했으므로 저자 허균을 생각하고 언급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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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재 효령대군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실제 어진은 이미 조선 시대에 소실되어 전주 이씨 헌릉 봉향회에서 2013년에 새롭게 제작한 상상 어진이다. 아버지 이성계나 셋째 형 익안대군, 차남 효령대군, 그리고 손자인 세조의 얼굴을 통해 태종과 세종의 얼굴을 가늠해 볼 수 있다. 특히 친형인 익안대군의 초상화는 아버지인 태조와 태종의 아들이나 손자 얼굴의 중간적 특성을 지니고 있기에 태종의 용모를 짐작할 수 있는 좋은 참고자료가 될 수 있다. 또한 어진에서는 홍룡포를 입고 있지만 실제로는 1444년 세종 26년부터 홍룡포를 입었고 그 전까지는 청룡포를 입었다. 익선관을 쓰고 있는데 조선초에는 조선왕과 세자가 사모를 썼다는 기록이 일부 등장하기 때문에 익선관을 썼는지 고려왕들처럼 오사고모를 썼는지 알 수 없다.[2] 율리우스력 6월 13일[이북5도] 이북 5도 행정구역 상 함경남도 흥남시 본궁동 (법정리: 궁서리)[A] 율리우스력 11월 28일[B] 율리우스력 5월 30일[6] 율리우스력 2월 28일[A] [A] [C] 율리우스력 9월 9일[10] 상왕 및 태상왕 신분으로 4년 동안 병권 등 일부 분야를 섭정하였다.[C] [D] 율리우스력 10월 8일[13] 세종이 즉위한 이후 부왕인 태종을 태상왕으로 높히려 계속해서 시도하였으나 태종이 극구 사양하였고 결국 태종은 마지못해 승하하기 1년 전인 1421년(세종 3년)에서야 성덕신공태상왕(盛德神功太上王)의 존호를 받았다.[D] [B] [16] 조선 시대 군주 중에선 아버지인 태조 이성계(즉위 후 이단(李旦)으로 개명)와 함께 묘호보다 이름이 더 잘 알려진 군주이며, 피휘와 외자 이름을 쓰지 않은 조선 사상 유일한 군주다. 태종은 자신의 이름에 쓰인 글자를 마음껏 써도 된다고 허락하였다.[17] 태종(조선)/생애 문단 참고.[18] 후궁을 많이 들인 탓에 조선 군주 중 가장 자녀가 많다.[19] 왕의 적자를 대군으로 봉하는 관작 제도는 태종이 왕이 된 후 시행한 것이기 때문에 그 당시 각각 국왕과 상왕이었던 태종과 정종은 대군 작호 소급 적용 대상이 아니었다. 진안대군은 왕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소급된 것이다. 자세한 것은 대군 또는 후술 문단으로.[20] 굵은 글씨는 1871년 고종이 추가로 올린 존호이다.[21] 굵은 글씨는 1683년 숙종이 추가로 올린 시호이다.[22] 조선 역대 왕들 중에서 아버지 이성계와 더불어서 묘호보다 본명이 더 유명하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왕위에 오르기 전 행적들이 더 유명하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군주 중에는 매우 드물게도 피휘를 안 했던 것도 영향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위 후 피휘를 고려하여 개명을 안 하는 대신 피휘 관리(처벌)도 안 하겠다는 관대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23] 무안군은 원래 세자 문제와 관련 없었기에 왕자의 난에 참가했다면 살려주려 하였으나,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이자 태종의 바로 윗 형인 회안군이 "역적의 씨앗은 하나라도 살려둘 시 화근이 된다. 살려둬선 절대 안된다"고 하면서 성 밖을 떠나는 방번을 길거리에서 그대로 죽여버렸다.[24] 현손이라 하면 족보로는 멀어보이지만 태종 기준으로 아들인 세종이 32년으로 꽤 장기집권한 이후로 손자 문종이 2년, 증손 단종이 3년 집권하곤 쿠데타로 손자 세조가 14년, 증손 예종이 단 1년으로 세조를 제외하곤 한국사에서 손꼽힐 정도로 단명한 국왕들이 이 라인에 속해 있어서 태종과 성종의 사이에는 52년 밖에 차이가 안 난다. 이는 영조의 재위기간과 일치하는 정도다.[25] 세종이 승하한 부왕(태종)에게 올리는 글이므로, 여기에 들어갈 휘는 세종의 본명인 '이도(李祹)'가 된다. 그러므로 비록 조선왕조실록 사이트에는 뒤에 오는 조사가 '은'으로 쓰여 있지만, '이도'를 적용하면 뒤에 오는 조사는 '는'이 맞는다.[26] 낌새[27] 즐거운 얼굴로 부모를 뵘.[28] 마지막 유언.[29] 聖宗, 이방원을 지칭함[30] 또한, 종묘에 불천위(不遷位)(옮겨지지 않는 위패. 세실은 종묘에 대대로 모셔도 5대의 대수에 포함되지 않는 큰 공덕을 쌓고 평가받은 왕에 한하여 종묘 정전(宗廟 正殿)에 계속 모시는 것을 말한다)로 지정, 존재되어 종묘에서 신주를 별전인 영녕전(英寧殿)으로 내보내더라도 세실로 정함으로써 아버지 태조와 함께 영원히 종묘 정전에 모시는 정말 크나큰 혜택을 누리게 된다.[31] 조선 제9대 왕인 성종(成宗)의 묘호와는 음만 같을 뿐, 한자 뜻이 아예 결이 다르다.[32] 이것 때문에 문제가 된 것이 중국사 대표 피휘 사례 중 하나인 한나라의 고조 유방이다. 이름이 '邦'(나라 방) 자인데, 건달에서 황제가 된 뒤에도 이름을 바꾸지 않아서 이 글자를 갑자기 못 쓰게 되어 버렸고, 그래서 그때까지 '수도' 라는 뜻으로 쓰이던 '' 자가 나라를 뜻하는 글자로 대신 쓰이게 되었다.[33] 세(世)는 준7급, 민(民)은 아예 8급 한자이다.[34] 태종이 틀에 박힌 관습에 얽매인 사람이 아닌, 실리적인 사람이었다는 걸 보여주는 일화는 그 외에도 수없이 많다. 조선이 대역죄인에게 형식적으로는 능지형을 내리나, 실제로는 극히 비윤리적인 능지형을 안하고 거열형만을 하게 된 부분(물론 거열형도 끔찍하지만 능지형은 비교도 안되게 죽음의 고통을 너무 길게 가져간다)도 기록상 이방원이 언급하였기에, 이방원의 영향인 것으로 알려진다. 또한 왕이 죽으면 그 자식들은 음식을 가려 먹는게 당시 지극히 당연한 법임에도, 그 중에 제일 중요한 아들인 세종이 고기를 매우 좋아했다는 것 때문에, 자신이 죽어도 상중에 고기(육선)를 마음껏 먹으라고 유언을 그렇게 남기고 죽은 인물이기도 하다.[35] 후술되어있는대로 왕의 적자에게 내리는 대군 칭호는 태종 본인 때에 제정된 것이기 때문.[36] 효(孝)령, 충(忠)녕, 성(誠)녕의 봉호는 돌림자 '-녕'을 제외하고 의도적으로 유교의 중심 가치인 효와 충성을 의도하여 작명되었고, 이후 왕자들은 원래대로 명목상 봉토로서 땅 이름으로 봉호를 삼았다.[37] 조선왕조실록과 연려실기술을 같이 활용한 용의 눈물에선 정안군, 정안공, 정안대군 3가지 호칭을 모두 들을 수 있다.[E] 강진숙 번역본[39] 강인숙 번역본[E] [41] 2차 왕자의 난을 뜻한다.[42] 무고죄를 처벌하는 법 정도 된다.[E] [44]맹꽁이 서당》에도 이에 관한 이야기가 있는데 이 대성일갈을 들은 메뚜기가 "무식한 말씀 마시오. 메뚜기는 초식 곤충이라 곡식 외에는 안 먹소이다."라고 대꾸했다.[45] 태종의 애민정신을 엿볼수 있는 대표적인 설이다.[46] 이 둘은 서로 비슷한 점이 많은데 아버지를 도와 국가를 세우는데 큰 공을 세웠으며 경쟁자였던 형제를 제거했고 후계자를 세울때 문제가 많은 첫째 아들을 폐하고 셋째 아들에게 넘겨주었다.[47] 송충이가 크게 번져 현륭원 근처의 소나무가 모두 고사하여 말라죽는 일이 일어났다. 인부들이 잡아온 송충이를 집어 "내 아비가 억울하게 죽어 이 곳에 누워 계신데 그 나무를 갉아먹는단 말이냐?"하고 호통을 치고 그 송충이를 냅다 씹어 삼켰다. 그러자 하늘에서 까치떼와 까마귀떼가 내려오더니 그 송충이들을 다 먹어치웠고 이후로 무덤 근처에 송충이가 싹 사라졌다는 전설. 당태종이나 조선 태종의 일화가 백성을 위한다는 애민(愛民)의 면모를 강조한다면 정조의 일화는 효심을 강조하는 전개다.[48]조선왕조실록》에서는 귀는 파초잎과 같고 눈은 작고 네 다리는 통나무, 코는 누에와 같다고 나온다.[49] 現 전라남도 여수시 율촌면의 장도로, 현대에는 율촌산단을 조성하면서 매립해서 육지가 되었다.[50] 만약 1500여 년 전 로마에서 잡혔다면 코끼리는 황제 앞에서 글자를 쓰는 등의 재주를 익혀 나름대로 쓸만한 수준이 되었겠지만 조선은 코끼리 서식지와 멀리떨어져있고 중국 최남단 지방이나 동남아 국가에서 사육사를 데리고 오는게 만만치 않은 일이었고 그걸 감안해도 코끼리는 키우는 데만 많은 비용이 소모되는 동물이었다. 오죽 비용이 많이 들면 아시아코끼리가 자생하는 남아시아 지역에서는 왕이 미워하는 신하에게 코끼리를 하사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코끼리를 키우려니 살림이 거덜나고 그렇다고 죽이거나 다른데 넘기려니 왕이 직접 하사한 놈이라 불충이 되기 때문...[51] 이는 다른 여러 문화권에서도 비슷한 입장인데, 영어권에서 white elephant라는 말은 애물단지를 가리키곤 한다. 특정 문화권에서 흰 코끼리 (알비노)는 신의 축복이란 설이 있었는데, 그래서 흰 코끼리가 태어나면 잘 보살펴야만 했다. 일이나 전쟁 등에 써먹는 것도 당연히 금지였으니, 이 코끼리 하나 맡으면 지방 영주의 재정이 망가지는건 순식간.[52] 이방원이 형 이방간을 살려준 것에는 정치적 의도도 있었는데 이미 1차 왕자의 난으로 인해 왕실 내에서 피바람이 몰아친 마당에 동복형제까지 죽였다가는 아무리 진압의 명분이 정당하다 해도 민심이 매우 흉흉해질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앞으로 본인의 집권에 방해가 될 뿐만 아니라 조선 왕실 전체의 정통성에도 흠집이 날 수 있었다. 그래서 책임을 박포에게 모두 몰고 형 이방간의 목숨을 살려준 것. 이성계이방과가 동의한 것도 가족에 대한 애정뿐만 아니라 이 부분도 있었다.[53] 세종의 장인 심온의 경우 과민 반응이었다는 비판이 있다. 다만 이 경우 아들이 어떤 인물로 자라날지 모르므로 최대한 아들왕 노릇을 편하게 해주기 위해 내린 당시 기준으로는 나름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결과적으로 세종은 결단력과 총명함을 겸비한 명군(성군)이었지만 만약 세종능력은 뛰어나나 정에 약해 이리저리 휘둘리는 사람이었고, 심온의 가족들이 권력욕이 있었다면 외척들에게 휘둘릴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 실제로 심온 본인은 몰라도 그의 집안 사람들은 여러모로 자중하지 않고 태종의 심기를 꾸준히 건드렸다. 청송 심씨 가문의 권력 자체도 이미 태종이 숙청한 여흥 민씨에 못지않게 강력해 안 그래도 어그로가 뿜어져나오는 가문이었는데 몸을 사리기는 커녕 대놓고 숙청해달라는 수준으로 깝치고 나대고 다녔으니 태종의 숙청의 레이더에서 끝내 벗어날 수가 없었다.[54] 유일하게 아버지인 태조와 태조의 셋째 아들인 익안대군,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차남 효령대군의 초상화는 남아있다.[55] 참고로 막내아들 성녕대군을 두고는 "성녕대군은 내 아들 중 유일하게 다른 외모였다"라고 언급한 기록이 있다. 성녕대군은 기록에 의하면 깨끗하고 단정한 용모였다고 한다.[56] 이를 볼때 성녕대군의 외모는 모친 원경왕후양녕대군,세종, 효령대군외 나머지 아들들은 부친 이방원을 닮은 것으로 추정된다.[57] 그리고 아들이 그 멀고 위험한 명나라에 가겠다고 하니 기특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했을 것이다. 사실 조선 건국 전까지 태조에게 가장 자랑스러운 아들이 태종이었으니 비록 건국 후에는 정몽주 문제나 후계자 문제로 반목했다고 하나 안타깝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니 저렇게 애절하게 표현했을 수 있다.[58] 장남인 정진은 임금을 모시고 있어서 살아남았지만 수군으로 천역을 치러야 했다. 이후 1407년(태종 7년)에 복직되었고 세종 시기 형조판서까지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다.[59] 하지만 그 패악질을 보기는 싫었는지 죽기전 양녕을 도성밖으로 내쫓고 다시는 불러들이지말라고 세종에게 말했다. 그렇지만 세종은 아버지와 똑같이 제 육친을 너무나 아꼈던 나머지 태종의 유훈을 들며 반대하는 신하들을 꺽고 기어코 양녕대군을 다시 도성으로 불러들였으나... 기어코 이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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