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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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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영화 시장3. 역사
3.1. 20세기 전반기3.2. 1950-60년대3.3. 1970년대3.4. 1980년대3.5. 1990년대 ~ 2010년대3.6. 2020년대
4. 침체의 원인5. 홍콩 영화의 대표적 장르들6. 배우들
6.1. 주연급 남자배우6.2. 악역: 눈물나는 악당들의 사연6.3. 주연급 여자배우6.4. 조연 및 감초 연기자6.5. 외국인 배우
7. 영화제작자 및 회사
7.1. 주요 감독7.2. 주요 제작사 및 방송사
8. 다른 중화권 영화와의 관계9. 애니메이션 영화10. 한국에서의 영향
10.1. 중국 영화와 혼동
11. 흥행 순위
11.1. 홍콩달러 기준 역대 흥행 순위11.2. 역대 국내 관객수 순위
12. 영화 목록13. 영화관
13.1. 지역 불평등13.2. IMAX
14. 관련 문서

1. 개요

홍콩영화 산업. 영국 식민지 시절인 20세기 초부터 태동하여, 1980년대~1990년대 초반에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장르는 무협물, 쿵후물, 도박물, 홍콩 느와르 등의 액션·스릴러, 로맨스, 강시 시리즈부터 살인마가 등장하는 공포물 등 폭 넓은 장르를 다루었다.

전근대에는 작은 어촌에 불과했지만, 근대 이후 무역 거점으로 떠오르고 국제적인 금융 도시가 된 홍콩답게 중화권을 베이스로 광동 지역 문화와 영국 문화까지 뒤섞인 국제 도시에서 만들어진 홍콩 영화는 다양한 문화적 색깔이 뒤섞여 있었다.

과거에는 중국 대륙[1]을 제외한 아시아를 넘어 서구권의 영화인 중에도 홍콩 영화에 푹 빠진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홍콩 영화가 인기 있던 시절에 감명깊게 보고 자란 아이들이 영화계에 입문하면서 할리우드 영화에는 홍콩 영화의 영향이 많이 보인다.

2. 영화 시장

파일:2019 ex us film.png
미국영화협회의 집계에 따르면, 2019년 홍콩 영화 시장은 북미 영화, 중국 영화, 일본 영화, 한국 영화, 영국 영화, 프랑스 영화, 인도 영화, 독일 영화, 멕시코 영화, 러시아 영화, 호주 영화, 이탈리아 영화, 스페인 영화, 브라질 영화, 대만 영화, 네덜란드 영화, 인도네시아 영화, 폴란드 영화, 아랍에미리트 영화, 말레이시아 영화 시장에 이어서 '도시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세계 20위로 나타났다. 위의 그래픽에서는 북미 영화 시장(114억 달러)이 따로 표시되어있지 않은데, MPAA가 미국 기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을 제외한 국가들만 표로 따로 나온 것이다.#

3. 역사

3.1. 20세기 전반기

대부분의 중화권 영화 산업과 마찬가지로 홍콩 영화 산업의 태동기에도 경극이 큰 영향을 끼쳤다. 홍콩 영화의 주류였던 무협영화는 물론, 코믹 쿵푸 영화도 모두 그 뿌리는 경극에 맞닿아 있을 정도로, 경극이 중화권 공연 예술에 끼친 영향은 막대하다.

중국 영화 《패왕별희》를 보면 거의 아동학대 수준으로 볼 수 있는 혹독한 경극 학교의 수련 과정[2]이 묘사되는데, 홍금보, 성룡을 비롯한 홍콩 액션배우들은 어렸을 적부터 이런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중년까지도 애크러배틱한 액션을 보여줄 수 있었다. 그리하여 초기 홍콩 영화들은 대부분 경극의 무대를 그대로 촬영하거나 경극 배우들을 고용하여 영화를 만들었다. 초기작중 가장 유명한 것은 1913년작 《장자시처》(莊子試妻)라는 무성영화였다.

1차 대전 때는 독일으로부터의 필름 공급이 끊겨 제작이 어려워졌기 때문에 잠시 영화 제작이 중단되지만, 1차대전 후 다시 영화제작붐이 일었다. 1차 대전 후의 영화는 유성영화로서, 홍콩 영화는 중화민국 국어 보급을 강하게 추진하는 중화민국 정부와는 정치적으로 단절되었기 때문에 광동어로 제작되기 시작했다.

중화민국 정부는 광동어 영화에 대해 적대적이었지만, 홍콩의 무협 영화가 워낙 대륙에서 인기가 있었기 때문에 막기가 불가능했다. 다만 1920년대 초반에 중화민국 국민당 정부는 홍콩과 같은 언어를 쓰는 광저우에 주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별도 더빙 없이도 관객의 청해에는 아무 문제 없었다.

이 당시 홍콩 영화계는 상하이와 함께 중화권 양대 영화산업계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홍콩은 영국 식민지임에도 불구하고 항일 애국 영화들이 다수 제작된다. 이미 중화권 영화의 다른 한 축인 상하이는 개전하자마자 일본에 넘어갔기 때문에 영화 제작이 중단되지만, 홍콩은 일본에 점령되는 1941년까지 계속 항일 영화가 제작된다.

3.2. 1950-60년대

중국 대륙이 공산화되자, 상하이는 영화 산업이 완전히 쇠퇴하였고, 홍콩은 중화권 영화계의 중심이 된다.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지배하는 중국은 말할 것도 없고, 대만의 장제스 또한 공산당에 질세라 현실 비판을 엄금하는 억압적인 문화 정책을 실시했기 때문에 창작 및 언론의 자유를 찾아서 많은 영화인들이 홍콩으로 망명해 온 것이다.

영화인뿐만 아니라 많은 대륙인들이 홍콩에 도피함에 따라서 홍콩에서는 대륙인들이 많이 쓰는 중화민국 국어와 홍콩 토박이말인 광동어가 영화 언어로 경쟁했다. 이 때문에 홍콩 영화는 자막을 꼭 붙였다. 이런 한자 자막은 현재도 대부분의 홍콩 영화에 들어가고 있으며, 심지어는 대만이나 홍콩의 TV 프로그램에도 대부분 들어가고 있다. 여기에 배우들 또한 광동어나 표준중국어 둘 중 하나만 유창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더빙도 필수적이었다.

홍콩은 영국의 식민지로서 영국의 법률 체계에 의해 다스려졌기 때문에, 서방 수준의 창작의 자유를 가지고 있었고, 이 때문에 홍콩 영화인들은 금기 없이 수많은 작품을 만들 수 있었다.

이 당시 특기할 만한 작품으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영웅본색의 원작인 동명의 작품(1967)과 추위안 감독이 연출한 '흑장미' 시리즈 등의 광둥어 잔편(殘片)이 있다.[3]

1950년대 중반부터 화교 자본인 소씨형제유한공사(쇼브라더스, Shaw Brothers), 국제전영무업유한공사(전무, 國際電影懋業有限公司, Motion Pictures & General Investment, LTD) 두 회사가 홍콩에 진출하였고, 이 두 영화사는 홍콩 영화 시장을 쟁패하기 위해 거의 전쟁 수준의 치열한 경쟁을 펼쳤지만, 이 경쟁은 전무의 회장이었던 육운도가 1964년 대만에서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면서, 전무의 사세가 기울기 시작하면서 쇼브라더스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전무는 1970년대에는 촬영 장비와 스튜디오를 쇼브라더스에서 갈라져 나온 후발 제작사인 골든하베스트에 넘겨주고, 영화 제작을 접고 영화 배급에만 치중하게 된다.

쇼브라더스와 전무는 주로 표준 중국어로만 영화를 제작하였고, 소방방(蕭芳芳)[4]진보주(陳寶珠)[5]라는 두 아역배우 출신의 아이돌 스타 여배우의 인기로 인해 절정이었던 광동어 영화의 위세는 1960년 후반에는 쇼브라더스의 물량공세에 밀려 완전히 몰락하고 만다.

광동어 영화를 대표하던 거장인 추위안[6]은 쇼브라더스에 입사[7]하여 만다린 영화[8]를 만들어야 했고, 진보주는 영화를 그만두고 말았다.

3.3. 1970년대

흔히 1980년대를 홍콩 영화의 최전성기라고 꼽는데 흥행으로 생각하면 맞는 말이지만, 홍콩 영화인이나 평론가들 중엔 1960~1970년대 홍콩 영화를 최전성기로 꼽는 사람들도 있다. 장철감독이나 검술무협영화의 선구자인 호금전 감독, 홍콩 액션스타의 시발점이 되는 그 유명한 이소룡 같은 이들이 가장 활발하게 활약하던 시절이기 때문이다. 특히 70년대는 홍콩 영화의 고유장르였던 무협영화가 현대 무술물로 진화하기도 하고, 무술물에서 벗어난 여러가지 장르도 나오기 시작한다.

1989년에 창간했던 영화 월간지 로드쇼에서도 이런 분석을 보이며 1989년 당시에는 홍콩 반환이 겨우 8년 남겨둔 상황에 불안하다. 머지않아 홍콩영화 붕괴라는 결과가 나올지 모른다는 예언같은 분석을 보이기도 했다. 로드쇼는 홍콩영화 분석 및 성룡을 초청하는 등, 홍콩 느와르라는 말을 널리 알리던 곳이었다.

쇼브라더스의 맹위 때문에 1960년대 후반부터 몰락하였던 광동어 영화의 인기는 이소룡과 허관문, 허관걸 등의 슈퍼 스타의 등장으로 다시 부흥하기 시작하였는데, 아이러니한 점은 이소룡은 원래 쇼브라더스와 합작을 하려 했었지만, 돈 문제로 인해 쇼브라더스에서 갈라져 나온 골든하베스트와 협력하게 되었고, 이는 허관문도 마찬가지였다.

광동어 영화 시장은 성룡, 홍금보 등의 스타 배우들이 계속해서 등장하였고, 쇼브라더스 산하의 광동어 텔레비전 방송국 TVB 연기반에서 키워낸 연기력이 출중한 광동어 연기자들이 영화계로 진출하기 시작하면서 더욱 흥하게 된다.[9]

이 당시는 천편일률적인 무협 영화를 벗어나서 코미디극도 나오기 시작한다. 허관문-허관걸-허관영 형제들의 막가파 개그물의 효시인 《귀마쌍성》(鬼馬雙星)도 이 때(1974)에 나왔다.

이와 함께 현대적인 무술영화도 제작되기 시작한다. 이 것을 주도한 영화사가 바로 1970년에 추문회가 설립한 골든하베스트사이다. 골든하베스트사는 할리우드에서 단역이나 조연만을 맡으며 푸대접을 받던 이소룡을 홍콩으로 불러 주연으로 삼아 여러 현대 쿵푸물을 제작하며 대스타로 만들었고, 그런 와중에 골든하베스트사도 홍콩의 거대 영화사가 된다. 1973년 이소룡이 요절하자 잠시 주춤하긴 했으나, 성룡을 발굴하여 1980년대 대성공을 거둔다.

이와 함께 한국에 잘 안 알려진 에로물(속칭 3급편)도 이 당시부터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가정용 비디오가 보급되기 전이기 때문에 이런 영화도 극장에 걸렸기 때문이다.

3.4. 1980년대

1980년대 홍콩영화는 찬란한 백화만발의 시대였다. 그건 많은 시간과 경험이 토대를 이루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증지위, 2005년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링크

홍콩영화는 1980년대에 커다란 전성기를 맞는다. 정확히는 1988년 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한 해에 100여편 이상 제작될 정도로 호황을 맞았다. 이는 여러가지 요인이 있는데, 60-70년대부터 쌓여온 노하우나 인력, 인프라가 1970년대 선진국의 영화학교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감독들과 결합되어 시너지 효과를 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 동아시아에서 북한이나 중화인민공화국은 말할 것도 없고 대만과 한국까지 모두 독재 정권 시대로서 자유로운 창작이 어려운 때이기도 했다. 이러한 때에 영국의 통치로 그 이전부터 이미 자유로운 창작이 가능했던 홍콩이 그간의 축적된 힘으로 크게 성장하는 건 당연지사.

표현의 자유는 확실히 인정되었지만, 1950년대만 해도 영국인들은 중국계 홍콩인들을 대놓고 차별했다. 참정권도 1960년대가 되어서야 민주적으로 개혁된 것이지만, 현재보다 더 민주적인 제도는 아니었고, 영국인 총독 추천 입법의원 비율도 꽤 되어서 영국이 마음만 먹었으면 홍콩을 좌지우지 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1960년대만 하더라도 홍콩인들의 친중 반영 시위가 상당히 잦았다.

쇼브라더스와 무협영화는 1970년대 이후 계속 침체였지만, 이소룡 사후 한동안 주춤했던 골든 하베스트가 성룡을 내세운 코믹 쿵푸 영화로 두각을 나타내며 중화권을 넘어 세계 시장에서 두각을 드러낸다.

이렇게 영화가 돈이 된다는 것이 알려지자, 홍콩 영화판에는 자본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홍콩 영화는 무술에 한정되지 않고 여러가지 장르가 나왔다. 칼 대신 권총을 잡은 현대식 무협인 홍콩 느와르(특히 오우삼 감독을 위시한 느와르 작품들), 사극과 특수효과를 버무린 중국 고전 판타지 장르(대표작 《천녀유혼》), 그리고 《최가박당》과 같은 개그물 등등이 있다.

과거 홍콩 영화는 해외 중 한국·싱가포르·대만에서 유독 유행이었는데, 보통 무협 영화, 쿵푸 영화 정도가 해외에서 흥행했던 홍콩 영화가 유독 한국·싱가포르·대만에서는 그 밖의 장르도 반응이 좋았다. 그래서 주윤발, 유덕화, 양조위, 장국영, 왕조현, 임청하, 주성치, 여명, 곽부성 등 무협과 크게 관련 없는 홍콩 스타들도 자주 내한 했고, 국내 CF에도 종종 출연했다.[10][11]

2000년대 이전에는 한국·싱가포르·대만이 홍콩 영화의 최대 해외시장이었기 때문에 그만큼 홍콩 영화계에서도 한국을 많이 신경 써서 내한이 잦은 편이었다.[12] 대만은 홍콩 영화의 주요 수출 국가 중 하나였는데, 위에서 언급한 쇼 브라더스나 골든 하베스트를 제외한 나머지 소규모 영화사들은 배급라인은 고사하고 영화사를 지탱할 자금력이 없었기에 홍콩 영화 제작사들이 한국, 대만, 싱가포르, 동남아 시장에도 기댈 수 밖에 없었다.[13]

1980년대 초반에 20% 이상 늘어났고, 80년대 중후반 중국과의 양안관계가 조금씩 풀리면서 수출비중이 30%까지 늘어난다. 1970년대 부터 대만의 큰 부호들을 중심으로 홍콩 영화시장에 투자하는 비율이 30% 이상 늘어났지만, 이는 삼합회가 개입하는 계기가 되고, 1990년대 초반 홍콩 톱 배우들이 한 해 10여편 이상 다작을 하면서 이미지를 소비하는 데에 이바지하게 된다.[14]

반면 일본에서는 홍콩 영화의 인기가 한국에 비해 훨씬 적었다.[15] 이소룡과 성룡은 일본에서도 아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이연걸, 주윤발 정도로만 넘어가도 일본에서는 인지도가 많이 부족했고, 인기도 없었다.[16] 홍콩 영화 스타일이 일본의 정서와는 이질적이었던 점과 일본내 유사 장르[17]의 선점, 일본이 해외 영화를 다른 나라들보다 훨씬 늦게 개봉하는 자국 영화 보호정책을 철저하게 펼쳤다는 점이 한 몫 한 듯 하다.

그러나 달도 차면 기운다고, 90년대 초반까지 전성기를 구가했던 홍콩 영화는 아래의 여러 이유로 크게 기울게 된다.

3.5. 1990년대 ~ 2010년대

홍콩 영화는 199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쇠퇴기를 맞이한다. 이것은 이미 예견된 일로 1984년 중영공동선언에 의해 1997년에 홍콩반환이 확정되었다. 이 선언에 홍콩의 자유가 보장된다는 조항이 있었음에도 1989년 천안문 항쟁이 일어나면서 중국의 민주화를 요구하던 세력이 어떤 대우를 받았는가를 똑똑히 목격한 홍콩인들은 그 조항이 허울에 불과하다는 공포감이 휩싸였고 반환일인 1997년 7월 1일이 다가올수록 그 공포감은 커졌다. 이 여파로 문화대혁명을 소재로 하거나 배경으로 만들어진 영화들은 제작 중단되거나 상영이 금지되었고, 설사 개봉되었어도 홍콩에서 흥행에 크게 실패하거나 대륙에서는 상영이 금지되었다.[18]

그 여파로 많은 일반 홍콩 시민들은 물론 영화인들도 다가올 중국의 억압 통치를 피해 캐나다나 호주 등으로 이민을 떠났다. 장국영 같은 이들도 캐나다로 국적을 바꾸기도 했다. 밴쿠버에 있는 비싼 저택은 거의 홍콩인들이 대거 구입했다.

하지만 서구권으로 진출한 이방인들이 홍콩에서의 영화 커리어를 이어간다는 것은 불가능했고, 주윤발은 미국 영화와 영국 영화 시장에서 스테레오타입에 국한된 배역으로 계속 겉돌았고, 성룡은 특유의 코믹 쿵푸로 좀 더 성공했지만 끝내 안착하지 못했다.

서극이나 오우삼 같은 연출자들은 이들보다는 진출이 더 쉬웠지만, 결과적으로 이들도 할리우드 주류로 자리잡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렇게 1990년대 중반 홍콩을 떠났던 배우나 스탭들은 2000년대 초반까지는 대부분 홍콩이나 중국 본토로 다시 돌아와서 영화를 찍게 된다.

2000년대 초반 《무간도》(2002)가 개봉하며 반환 이후 후퇴되어 있던 홍콩 느와르의 부활을 알리며 히트를 쳤지만, 이후 나온 은 1편만큼 폭발적인 흥행을 하지 못했다. 그 후에는 홍콩 영화 자체가 쇠퇴기를 맞으면서 콜드 워 시리즈와 《엽문》, 《쿵푸허슬》, 《흑사회》를 제외한 그 이후의 영화들은 예전처럼 폭발적인 흥행력을 보여주는 작품은 나오지 않고 있다.[19]

특히 자국산 영화가 성장하고, 할리우드 직배가 대세가 된 한국에 이제 홍콩 영화는 거의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 광동어로 제작되는 영화는 세대 교체도 잘 안되고 있어서, 20대 홍콩 배우들 중에서 장국영이나 주윤발처럼 폭발적인 주목을 끄는 배우는 하나도 없다.[20]

홍콩 시장은 좁고 중화권으로 반경을 넓혀도 최소한 8, 90년대 전성기를 이끈 홍콩배우들의 포스를 이어줄 배우가 전무한 상태이다. 그러니 60대 환갑에 접어든 유덕화, 양조위나 50대 중반을 넘기고 있는 여명, 장학우, 금성무, 곽부성을 포함한 50·60대 남자배우들이 30·40대 역할을 맡고 있는 형편이다.

더불어 2010년대에 들어서는 홍콩 금상장 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자도 2011년 30회 시상식에서 사정봉이 31세에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이후로 3,40대 배우들 중 현재까지 수상자가 없다. 1980년대에 20대 나이로 남우주연상을 받은 양가휘[21]를 포함하여 1990년대 중, 후반부터 시작된 홍콩영화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할 때 부터 2000년 대 중반까지 당시 홍콩배우들이 3,40대에 남우주연상을 수상했거나 후보에 올랐던 것 과는 정 반대 상황이다. 그나마 유청운이나 최근 홍콩 최고의 스타배우로 등극한 고천락, 오진우, 임가동, 장가휘 등등도 현재 나이가 50대를 넘겼다.[22]

최소한 홍콩 영화계가 쇠락기에 접어들기 시작한 80년대 말부터 신인배우들을 육성했어야 하는데 그럴 시스템이 방송국 배우 양성반 외에는 하나도 없었고 설사 신인배우들이 생겨났어도 기성 배우들이 수십년간 주연급으로 활동한 탓에 기회를 잡기가 아주 어려운 상태에서 반환을 맞이하다 보니 배우 생활을 더 이어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아예 연예계를 떠난 케이스가 의외로 많다. 그만큼 신인 육성에 투자가 제대로 안되다 보니 배우 세대교체가 안 되고 있다는 증거.[23][24]엎친데 덮친격으로 대륙에서만 활동하던 배우들이 80년대 초부터 홍콩으로 넘어오기 시작하여 90년대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하게 되면서 홍콩 배우들은 대만, 대륙 배우들과 총성없는 경쟁을 하게 되었다. 2000년대 들어 대륙배우들 중 금상장 수상자가 나온게 그 증거.

그나마 여배우들은 30대 여배우들을 중심으로 젊은 여배우들이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고 있고 남자배우도 최근들어 갓 스무살에 접어든 배우 이양첸시가 2020년 39회 금상장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르는 등 완전히 기대를 접을 상황은 아닌듯 하나 2010년 중반부터 조금씩 배우 세대교체가 되고 있는 대만 영화 시장과 비교하면 홍콩 배우 연령층이 더 심각한 상황이다. 그나마 이양첸시는 대륙배우임을 감안하면 홍콩 내에서 큰 두각을 보이는 젊은 배우는 사실상 없다고 봐야 할 정도.

특히 홍콩 영화 액션 스타는 견자단을 마지막으로 사실상 그 계보가 끊겼다. 물론 신진 홍콩 액션 배우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성룡, 이연걸, 견자단과 같은 압도적 위상과 인기를 지닌 액션 스타는 찾아볼 수가 없다. 그나마 유일한 보루였던 장가휘마저도 정극 배우로 빠져버렸다.

이 시기에 주목해야 할 신흥 배우 겸 제작자는 바로 주성치이다. 홍콩 영화의 전성기가 지난 다음에 뜨기 시작한 주성치는 전반적으로 홍콩 영화가 쇠퇴하는 가운데서도 홍콩 특유의 막가파 개그를 계승, 발전시켜 중화권 전체에 어필하여 대성공을 거두었다. 독특한 유머 코드와 특수효과, 적절한 멜로를 버무려 팔릴 만한 작품을 만드는 영화적 재능으로 암흑기를 맞은 홍콩 영화에서 홀로 빛나는 별. 그러나 2019년 감독한 신희극지왕을 끝으로 2023년 현재까지 감독 활동을 무기한 중단한 상태. 2020년, 자금난으로 인해 자신이 소유하고 있었던 주택을 담보로 2000억에 이르는 거액의 대출을 받은 사실이 알려졌다.# 2010년대부터는 표준중국어 영화만 만드는 등 중국 시장을 겨냥하고 있다. 그런데 2010년대 서유기, 장강7호, 미인어 등 주성치 영화의 특수효과는 대부분 한국 CG업체가 수주했다. 영어판 크레딧을 보면 한국 스탭의 이름이 줄줄이 나온다.

대부분의 홍콩 영화사도 현재 중국 자본에 넘어갔고, 홍콩 영화인들도 대부분 대륙에서 활동하거나 중국의 위안화에 연명하는 현재의 상황을 감안할 때, 1980년대처럼 홍콩 영화가 중국 본토 영화계와는 독자적으로 재기하기에는 사실상 어려운 실정이다. 이는 대만 영화계보다도 더 심각하다고 봐야 할 지경.

현재는 홍콩의 연예인 지망생들도 대부분 중국 본토에서도 데뷔하려는 실정이다. 좋은 각본이 있으면 대부분 중국 영화쪽으로 넘어가서 제작되며, 중국의 검열기준에 어긋나는 영화는 제작될 수 없다. 홍콩 자체 문제 때문이 아니라, 홍콩 영화는 다른 나라에서는 힘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홍콩 영화의 최대시장이 중국 시장이 되어버린 만큼, 중국 시장에 걸 수 없는 영화는 제작이 어렵다.

설령 제작이 완료되어도 최소 3-4년이 지나거나 길게는 5년이 넘어야 개봉을 할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다. 한 때 홍콩 영화판을 주름잡은 배우들은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나이가 최소 50대 중반이니 조연급으로 내려오거나 배우 생활을 어느정도 접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대체 할 젊은 배우들이 너무 부족하여 계속 주연급으로 활동하니 '홍콩 영화는 너무 올드하다'는 현지인들의 불평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

2014년 홍콩 우산 혁명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에서 많은 영화인들이 편가르기를 하게 되었다. 주윤발, 하운시나 황추생, 엽덕한 등은 시위를 지지했으나, 이에 반해 성룡, 증지위, 양가휘, 임달화, 알란 탐 등은 중국 당국의 조치를 지지하였다. 중국 공산당이 시위를 지지하는 배우들의 영화 출연을 못하게 압력을 불어넣고 있기에 편이 갈리고 있던 시위였다.[25]

3.6. 2020년대

2020년 5월 22일, 시진핑중국 전인대에 정식으로 홍콩 국가보안법을 제출하였다. 2003년 홍콩 국가보안법 반대 시위로 홍콩 입법회를 통한 홍콩 국가보안법 제정은 무산된 바 있다. 그리고 2014년 홍콩 민주화 운동,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으로 인해 홍콩 입법회를 통해 국가보안법을 제정할 가능성이 없으니 중국 전인대에서 직접 통과시킨 이후 홍콩에 전면적 통제권을 행사하는 방법으로 시행할 것으로 예측된다. 기사

중국은 홍콩이 자꾸 자신들의 통제를 벗어나려는 것 같다며, 민주파, 본토파 등의 입을 막아버릴 목적으로 국가보안법을 추진한다는 점을 숨기지 않았다. 다시 말하지만 홍콩의 입법절차가 아닌 중국의 입법절차를 통해 홍콩 정치를 통제하겠다는 것으로, 일국양제 자체가 무너지는 상황이다.기사

홍콩 국가보안법에는 민주화 시위대를 테러리스트로 간주하고, 이들의 활동을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홍콩 기본법이나 중화인민공화국 헌법, 중국공산당 규약을 비판하는 인사는 반체제 인사로 간주하고 최대 징역 30년으로 처벌할 수 있다. 또한 민주화 요구 인사들의 참정권도 박탈할 수 있고, 통신검열도 가능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기사.

중국에 비판적인 영화인들은 설 자리가 없어졌다. 예를 들어 중국 당국에 비판적인 황추생은 2010년대부터 작품 활동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일부에서는 이들이 해외로 이민가면 된다고 하지만, 이미 1990년대 말 대거 홍콩 영화인들이 이민을 갔다가 현지에서 푸대접을 받고 되돌아온 경험이 있기 때문에 중국 지배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정치적 성향을 숨길 수 밖에 없게된 형편이다.

이들이 고려할 만한 나라들인 대만은 시장이 너무 작고 한국은 외국인 연예인들에게 매우 배타적인 데다가 언어의 장벽이 크고, 싱가포르는 시장도 작고 검열이 깐깐하다. 미국, 영국의 경우는 아예 시장이 크다보니 자리잡기가 쉽지 않다.기사

중국에 비판적인 연예인들은 활동이 어려워지는 와중에 홍콩 내에서도 정치적으로 갈리고 있다. 중국 당국에 호의적인 배우들은 오히려 반중파들의 보이콧과 해외의 홍콩영화 팬들의 비난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 예시로 시위를 진압하는 홍콩 경찰지지로 유역비 주연의 영화 뮬란은 보이콧에 시달려야 했던 것이 대표적이다.

2021년 6월 11일. 홍콩보안법에 근거해 영화에 대한 심의를 진행한다고 밝혔다. 일각에서는 영국령 홍콩 시절의 영화도 금지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지만 실제로는 검열 때문에 금지된 과거의 주류영화는 2024년 현재까지 없다.##

애당초 영국령 시절의 홍콩 영화는 유튜브[26] 같은 곳에 모두 풀려 있기 때문에 실효성은 없고, 심지어 중국 본토에도 전성기 홍콩영화 팬도 많고, 본토 중고 샵에는 홍콩 영화 DVD나 비디오 CD, 불법 온라인으로 거의 풀려있기 때문에 어찌되었든지 간에 중국이나 홍콩에서 1980-90년대 홍콩 영화의 유통을 막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2022년에 8월, 홍콩영화계 최고의 스타로 불리고 있는 고천락이 제작과 주연을 맡은 영화 '명일전기'가 '홍콩 영화의 부흥을 일으킬 초대형 작품'이라는 홍콩 영화계의 큰 기대 속에 개봉을 했지만, 기대만큼 큰 흥행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4억 5천만 홍콩 달러(미화 5600만 달러)의 천문학적인 제작비가 들어갔으나 내용 부실과 완성도 부족이라는 혹평을 받았고, 중국에서는 6.79억 위안의 수익을 거두었고, 홍콩에서는 역대 흥행성적 1위 기록을 갈아치웠지만 약 8,182만 홍콩 달러에 그쳤다. 또한 곽부성양조위라는 아시아 최고 배우들이 투탑으로 출연한 대작 풍재기시는 5년 넘게 연기되다가 2023년 2월에 중국에서 먼저 개봉하고 홍콩과 대만에서 개봉하였으나 흥행에 크게 실패했다. 2023년 6월 주윤발과 원영의가 주연한 '별규아도신(나는 도박꾼이 아니다)도 대륙과 홍콩에서 모두 흥행에 참패했고, 같은 해 12월 30일에 무간도의 두 주인공인 유덕화, 양조위가 주연을 맡은 골드핑거가 개봉 되었으나 기대만큼의 흥행성적을 올리지 못했다.

그만큼 현재 홍콩 영화는 빅스타나 대규모 제작비가 들어간 대작들보다는 저예산 영화들이 더 많이 제작되고 개봉되어 흥행에 성공하는 추세이고 이미 촬영을 완료한 대작 영화들[27]은 2025년 이후로 아예 미뤄졌다. 사실상 무기한 연기된 셈.

현재 홍콩에서 제작되거나 흥행에 성공하는 영화들은 신예 제작진과 배우들이 참여하는 비중이 많아지면서 서서히 물갈이가 되는게 아닌가 하는 희망이 보이지만 '홍콩 영화' 자체의 브랜드 가치가 너무 낮아진 탓에 이게 두드러 보이지 않는다는게 안타까운 점이다.

현재 홍콩영화계에서 주목받는 배우는 코미디언 출신 황자화인데 출연작품 모두 흥행에 성공했고, 2022년 중추절(=한국의 추석)에 개봉한 '반희공심'은 7천 5백만 홍콩달러를 벌어들여 흥행에 성공했고, 2023년 춘절(=한국의 설날)에 개봉한 '독설대장'이 1억 3천만 홍콩달러를 넘겨 대박행진을 기록하며 '명일전기'를 제치고 흥행 1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황자화도 배우경력 40년이 거의 다 되어가는 1960년생 배우인데 위에서 서술했듯이 두각을 나타내는 젊은 배우들이 없다시피하고 허리 역할을 해줄 중견배우들이 건강이나 친중의 이유로 홍콩에 남아 있는 수가 많지 않다 보니 관객들의 관심과 인기를 얻을 수 밖에 없는 것.

하지만 2021년 하반기부터 홍콩에서 제작된 영화들이 관객들에게 많은 인기를 얻어 흥행에 성공하는 작품들이 예전보다 많아지고 있고 주목받지 못했던 배우들도 조금씩 두각을 보이고 있기에 이 점에 주목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4. 침체의 원인

홍콩 영화는 1980년대 후반에 연 제작편수가 200편을 넘어갈 정도로 정점을 찍었으나, 1990년대 초반부터 기나긴 침체기에 들어섰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연간관객수는 6,000만 명[28]을 초과했지만 1990년대 중반에 급속히 하락세를 겪기 시작하여 2000년대에는 연간 관객수는 2000만명대 아래로 추락했다. 홍콩 영화의 점유율도 1992년 홍콩 영화의 매출은 15억 달러에 이르렀으나, 이듬해에는 11억 달러로 폭락했는데, 실제로 홍콩 반환 몇 년 전부터 홍콩 영화는 아류작이나 도박물이 계속 나오면서 자국민들로부터 외면받으며 쇠락해가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중국 당국의 홍콩 영화에 대한 본격적인 간섭은 2010년대부터 시작되었으며 199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홍콩 영화의 몰락은 중국 당국보다는 홍콩영화 자체의 문제점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홍콩 반환 후 대륙 시장 덕분에 잠깐의 회광반조 시기를 가졌다. 2000년대 초반 나온 걸작 홍콩영화인 화양연화, 와호장룡[29], 무간도 시리즈[30], 소림축구, 쿵푸허슬이 대표적이다.

홍콩 영화는 아래의 여러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으며, 결과적으로 이런 문제점들 때문에 리즈 시절을 길게 가져가지 못하고 망해버린 것이다. 큰 예시로 해외 영화제 수상 경력만 봐도 알 수 있는데, 홍콩 영화는 왕가위가 1997년 해피 투게더칸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하며 처음으로 세계 3대 영화제에 등판했지만 중국 영화는 10년이나 앞선 1988년부터 장예모를 시작으로 천카이거 등의 감독들이 세계 유수 영화제에서 수상하며 주목을 받고 있었다. 즉, 홍콩 반환의 문제뿐만 아니라 홍콩 영화의 질적인 저하가 심해 발전이 없었기에 자멸한 측면도 있다.

1980년대부터 홍콩 영화를 봐왔던 팬이라면 이미 중국에 홍콩이 반환되기 이전인 1990년대 중반부터는 홍콩 영화가 한국에서 흥행한 경우가 별로 없다는 것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31] 즉 1991년에 나와 서울 관객 43만을 끌어들인 황비홍과 1992년과 1993년에 개봉하여 각각 26만명, 30만명의 관객을 동원한 '신용문객잔'과 '동방불패 2'와 성룡이 출연하여 각각 30만명씩 끌여들인 취권 2, 시티헌터, 홍번구가 한국에서는 거의 마지막으로 흥행한 홍콩 영화다. 1995년 한국에서 개봉하여 한국 영화에 큰 영향을 끼친 중경삼림 조차 서울 15만 명으로 제대로 흥행하지 못했다.[32]

이제 한국 시장에서 홍콩 영화가 돈이 안되기에 홍콩 현지에서 개봉해도 한국에서는 제대로 보기 힘들어졌다. 그나마 운이 좋으면 단관 상영관에서 상영 할까 말까 할 정도이다. 이외에는 중국 관련 케이블 채널이나 '아시아 TV'같은 중화권 드라마 및 영화 전문 채널 혹은 넷플릭스, 왓챠 같은 OTT나 VOD에서 밖에 보기 어려운 상황이다. 과거 국내 TV나 영화 잡지[33]에서 손 쉽게 접할 수 있었던 홍콩 배우들 관련 소식은 트위터나 웨이보, 인스타그램에서 밖에 알 길이 없다.

그와 반대로 한국 영화는 홍콩 영화가 리즈시절을 달리던 1980년대~1990년대에는 계속 침체기였고 1990년대 중후반에도 점유율이 20%대에 머물 정도였지만, 1999년 《쉬리》의 대성공을 기점으로 점유율이 크게 상승하면서 르네상스를 맞이하기 시작했다. 또한 새롭게 떠오르는 신진 영화인들의 세대 교체와 더불어 영화 산업이 선진화 과정을 밟으면서 하나의 거대한 산업으로 발전해 갔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기점으로 그동안 변방의 나라로만 취급받아오던 한국이 민주화 과정을 거치면서 조금씩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고 하부에 기재한 것과 같이 외국에서도 인정받을 정도로 좋은 작품들을 많이 만들어내면서 아시아 영화 중심지를 홍콩에서 한국으로 옮겨오고 있었다. 이 상황을 예의주시하지 못한 홍콩은 중국반환과 맞물려 고인물만 양산하다 보니 자연스레 침체와 몰락의 과정을 겪게 된 셈이다.

침체기에서 다시 전성기를 맞게 된 한국 영화계에서 격언처럼 나돌았던 말이 "내부적인 문제로 망해버린 홍콩 영화계와 일본 영화계를 타산지석으로 삼자"는 말이었다. 그만큼 홍콩 영화계에 문제가 많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교의 적절한 예가 있다. 2000년대 초반, 한국 영화판에는 이런 저런 자본이 흘러들어 1980-90년대 긴 침체를 딛고 중흥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러나 2001년 곽경택 감독의 《친구》가 성공하자[34], 여러 양산형 조폭미화물들이 유행하면서 괜찮을까라는 우려가 상당히 많았다. 다행히 이러한 우려는 2003년에 박찬욱의 《올드보이》,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 김지운의 《장화, 홍련》 등의 "웰메이드" 작품이 나오면서 나오면서 불식된다. 이후 한국 영화에서 조폭 미화물은 숫자가 확 줄어들면서 몰락해버린다.

홍콩 영화 침체의 대략적인 원인으로는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꼽을 수 있다. 1997년 반환 전에 중국 베이징 TV에서 제작 방영한 홍콩 영화 특집 프로그램에 당시 홍콩 영화와 대만 영화판에 영향력을 끼친 배우와 감독 20여명이 출연하였는데 첫번째와 두번째 이유를 많이 언급하면서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어도 홍콩에서 주먹구구식으로 제작되는게 아닌 작품성과 배우의 연기를 중시하는 영화들이 많이 만들어지길 바란다고 했다.

이후 2002년 《무간도》를 시작으로 8~90년대의 홍콩 영화스러운 느와르가 부활하긴 했지만, 몇몇 시리즈에 국한된 상황이라 홍콩 영화계의 판도를 바꿀만한 폭발적인 현상을 보여주지는 못하고 있다. 한국·싱가포르·대만에서는 1990년대 초까지도 홍콩 영화에 대해 유달리 열광[60]했으나 그 후 한국·싱가포르·대만 관객에게도 외면을 받다가 왕가위 감독 위주로 찬양 받고 있다. 심지어 2013년도 영화 《일대종사》의 경우에는 감독이 왕가위이며 주연배우들이 양조위, 장쯔이, 송혜교라는 스타급들이건만, CJ 무비꼴라쥬 배급을 통해 다양성 영화 취급(...)을 받으며 개봉했을 정도니 말 다했다. 참고로 다양성 영화란 예술영화, 독립영화, 다큐멘터리 영화 같은 저예산 비주류 영화를 말한다.[61]

그래도 무간도흑사회콜드 워뉴 폴리스 스토리 같은 범죄물과, 구화영웅(救火英雄) 같은 재난물로 명맥을 잇고 있으며 이 중 무간도는 2016년 봄 재상영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장르인 홍콩식 호러에도 도전하여 '디 아이즈(The eyes)'나 '이도공간', 헐리우드 메이져 영화사와 대만과의 합작으로 제작된 '더블 비전(雙瞳)' 등의 작품이 나왔다. 이도공간은 장국영유작이기도 하다.

5. 홍콩 영화의 대표적 장르들

1. 신이 내린 무술 실력, 액션 영화
호금전 감독, 장철 감독 등의 전통 무협 영화와 이소룡, 이연걸, 견자단 등을 주연으로 한 쿵후 영화. 이 장르는 다른 나라에서는 흉내내기조차 어려운 장르다. 무술가 겸 배우인 스티븐 시걸이나 척 노리스를 앞세운 할리우드식 무술영화가 있긴 하지만, 홍콩 영화의 포스를 당해낼 수는 없다. 하지만 한국의 이동준클레멘타인으로 신기원을 썼다.

2. 멜로와 로맨스 드라마
첨밀밀》, 《중경삼림》, 《유리의 성》 등. 홍콩 멜로 영화의 대표적인 스타로는 임청하, 장만옥, 종초홍 등이 있다. 90년대 말부터는 곽부성진혜림, 금성무가 두각을 나타냈다.

3. 서민적인 일상과 막가파 개그. 코미디 영화
70년대 허관문, 허관영, 허관걸로 이루어진 허씨 3형제[62]가 주축이 되어 촬영한 여러 개그영화[63]를 시작으로 발달하기 시작했다. '최가박당 시리즈' 등이 유행하다가 90년대 들어서 주성치 주연의 영화로 부활한 장르이다. 이 장르는 현재 대륙영화에 그대로 계승되어 흥행하고 있다.

4.미스터리한 중국 전설의 공포. 강시 공포물 및 환타지
《귀타귀》, 《강시선생》 등 강시가 등장하는 코믹 공포물. 당시 아이들 사이에선 부적과 강시놀이가 유행하기도 했다. 서유기나 그밖의 중국식 고전 환타지도 비슷한 종류. 대륙에서 몽키킹 시리즈로 이어가고 있다.

5. 모든 액션이 폭력적인 것은 아니다. 코믹 쿵후
이소룡 사후 침체되어 있던 홍콩 액션 영화의 새 장을 열었다고 볼 수 있다. 1980년대 홍콩 느와르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홍콩 영화하면 가장 떠오르는 장르였다. 이 분야의 대가로는 홍금보, 성룡, 원표 등이 있으며 대표작으로는 《취권》, 《오복성》, 《프로젝트 A》, 《용형호제》 등이 있다. 이 분야도 성룡과 홍금보가 나이를 먹은 이후 더 이상 나오기가 힘들어졌다.

6. 액션은 성인 남자만 하는 건 아니다.
예스 마담》 등의 여성 액션물. '호소자' 등의 어린이 액션물. 이 분야에서 유명한 배우들로는 말레이시아 출신 양자경과 대만배우 양려청(양리칭), '나부락'으로 음차된 신시아 로스록, 엽천문, 그리고 유가령, 호혜중이 있다.

7. 바바리에 성냥, 그리고 쌍권총. 홍콩 느와르
대표작으로는 《영웅본색》, 《첩혈쌍웅》, 《천장지구》 등이 있다. 사실상 한국에서 대대적인 홍콩 영화 붐이 일게 된 계기를 연 장르로 주윤발, 장국영, 양조위, 유덕화 등 많은 홍콩 스타를 배출해냈다. 사실 도검이 총으로 바뀌었을 뿐 화려한 액션, 권선징악, 의리 등 구조가 무협 영화와 흡사하다. 일종의 현대판 무협 장르. 2000년대부터는 무간도 트릴로지와 《콜드 워》, 《흑사회》 등등 '네오 홍콩 느와르'가 인기를 끌고 있다.

8. 인생은 도박이다, 도박물
이 장르의 영화는 1974년에 허씨 형제가 출연한 《[귀마쌍성]]》을 효시로 볼 수 있겠다. 그 이후 한동안 나오지 않다가 1990년대 초반 홍콩이 중국에 귀속되기 직전까지 우후죽순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중국으로 귀속되면서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다. 대표적인 영화로 《정전자》, 《도성》, 《도협》, 《지존무상》, 《지존계상》, 《지존무상 2 - 영패천하》 등이 있다. 이러한 장르의 영화에서는 유덕화주윤발이 자주 나왔다.

9.고전 무협 시대극과 sf, 코믹, 판타지, 멜로가 절묘하게 결합한 홍콩 영화의 마지막 불꽃, 퓨전 영화
천녀유혼》, 《공작왕》, 《동방불패》, 《동사서독》, 《서유기》 등. 주로 남자 스타들이 많이 부각되던 홍콩 영화에서 왕조현, 이가흔 등의 여자 스타들을 배출한 장르이다.

10. 범죄와 공포, 에로가 혼합된 퓨전 공포 영화
1993년 구예도 감독의 《팔선반점의 인육만두》가 대박을 친 이후, 비슷한 유형의 공포 영화들이 홍콩에서 유행했다. 범죄물과 공포물, 에로물을 조금씩 섞어 놓은 듯한 내용이 특징. 주로 살인마나 살인마가 될(?) 선량한 사람, 경찰 또는 형사가 주인공이나 핵심 인물로 등장하며, 폭력적인 살인 장면을 등장시켜 긴장감과 공포감을 유발한다. 뭔가 개연성 없이 등장하는 수위 높은 에로 장면은 덤. 실제 살인사건을 재구성해서 만드는 경우[64]도 있고, 이따금씩 사회 비판적이거나 블랙 코미디, 풍자적인 내용이 들어가기도 한다.[65] 이런 장르의 영화에서는 황추생이 주연으로 많이 등장했다. 대표적인 영화로 《어둠의 딸》(滅門慘案之孼殺)', 《고양의생》(羔羊醫生)[66] 《팽부》(烹夫)[67] 등이 있다.

11. 1990년대 홍콩 반환 이후 새로 등장한 장르인 홍콩식 호러와 재난물
1995년 반환 2년 전 만든 《십만화급》(十萬火急)의 경우 홍콩식 재난물의 시초로 홍콩 판 분노의 역류이다. 구룡반도 신구룡에 소재한 소방서 대원들의 고군분투를 그렸으며, 영국 식민지 시절이라서 현재의 홍콩 특별행정구기가 있는 자리에 유니언 잭이 있는 게 인상적이었다.[68] 그리고 반환 후인 2002년 《디 아이》(The eyes)라는 태국과의 합작 공포영화가 만들어졌으며[69] 헐리우드 메이저 영화사와 홍콩, 대만 제작진들이 공동으로 제작된 '더블비전(雙瞳)'은 양가휘가 주연을 맡았고 종교(도교)를 소재로 한 스릴러 영화이며, 홍콩보다는 대만에서 크게 흥행에 성공했다.[70] 장국영유작이도공간》도 2002년에 제작되었다. 그리고 2013년에는 홍콩에 크리스마스 연휴 기간 동안 블랙아웃이 닥친다는 재난 영화인 《구화영웅》(救火英雄)이 만들어졌다.

12. 에로 영화
한국에서는 엄격한 검열 때문에 거의 들어오지 않아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에로 영화도 대표적인 홍콩 영화 장르의 하나였다. 홍콩 현지에서는 삼급편(三級片)[71]이라고 부른다. 이 이름이 붙은 이유는 홍콩 검열 등급에서 제3등급은 미성년자(18세 미만) 관람불가이기 때문.[72] 1990년대 씨네21에서 홍콩 박스 오피스를 소개할 때, 이런 종류의 작품은 포르노에 대한 정보제공으로 악용될까봐 제목을 그대로 소개하지 않고 그냥 포르노 영화라고 소개하기도 했는데[73], 5위권의 3개 영화가 그냥 포르노라고 표기된 적도 있다. 공포물과 결합해서 퓨전 에로물이 만들어지기도 했고, 심지어 촉수물 요소가 들어간 작품도 있었으며 일본의 AV 배우를 초빙하여(?) 찍은 얀데레 백합물[74]도 있었다(...). 한국에서 알려진 대표적인 홍콩 에로 영화로는 《옥보단》과 《금병매》, 《밀도성숙시》 등이 있다. 이 장르로 유명한 사람은 이려진, 에이미 입(Amy Yip)으로 알려진 엽자미, 대만 배우 서기[75], 엽옥경[76] 등이 있다.

13. SF물
홍콩영화의 대부 서극이 SF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 아시아권에서는 일본의 특촬물과 함께 SF영화가 나오는 몇 안되는 산지이다. 가장 유명한 것은 로보캅 시리즈의 영향을 받았고, 엽천문이 주연으로 나오는 《철갑무적》(1987), 《환영특공》(1998)[77], 그리고 최근작으로는 주성치의 《장강7호》가 있다. 한국 관객들은 할리우드의 입맛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이것보다 기술적으로 떨어지는 홍콩 SF물은 거의 개봉되고 있지 않지만, 홍콩에서는 나름 계속 나오고 있다. 이 밖에도 유덕화가 나오는 《미래경찰 X》(2010), 양자경이 나오는 《실버호크》(2004)도 있다.

6. 배우들

6.1. 주연급 남자배우

6.2. 악역: 눈물나는 악당들의 사연

대개 액션 영화에서 악당들은 오만가지 방법으로 격퇴당한다. 문제는 여기에 코믹성이 들어가면 악당은 얻어맞는 것도 모자라 웃음거리로 전락한다. 게다가 액션 영화 특성상 일반 악당이 아닌 두목급의 역할은 아무나 맡는 게 아니게 된다. 그러다 보니 여러가지 의미로 얼굴을 자주 비추게 되었고, 관객은 "어?! 쟤 XX에서도 악당 아니었나?"라는 궁금증과 "또 당하는 역할이냐..."라는 연민을 자아내게 되었다(…).

대체로 홍콩 4대 악역은 성규안, 하가구, 이조기, 황광량(또는 장요양)로 알려져 있다. 주윤발, 양가휘가 나온 감옥풍운(1987)에서 이 5명을 모두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상당한 명작에 홍콩에서 흥행에 대 성공했는데도 같은 해 나온 영웅본색의 흥행에 가려져 한국에선 잘 알려져 있지 않다.

6.3. 주연급 여자배우

(대만출신은 ★)

6.4. 조연 및 감초 연기자

6.5. 외국인 배우

7. 영화제작자 및 회사

7.1. 주요 감독

7.2. 주요 제작사 및 방송사

8. 다른 중화권 영화와의 관계

위에서 말했듯이, 홍콩 영화는 1990년대까지 중화권의 영화를 이끌어나가는 입장이었다. 이는 중화권에서 거의 유일하게 창작과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데다가, 영화계로 흘러드는 자본이 독보적이었기 때문이다. 홍콩보다 시장이 훨씬 큰 대륙 영화는 1980년대까지는 거의 배달의 기수식의 관제-선전영화만 제작되었고, 대만 영화도 대륙보다는 어느 정도 자유는 있었지만, 장징궈 집권 말기까지는 검열이 악명 높았다.[118] 중화권이라고 볼 수 있는 싱가포르는 대만과 유사한 상황으로, 중국어 영화가 제작되기는 했어도 검열이 심한데다가, 표준중국어에 대한 편견이 있기 때문에[119] 영어 직감이 가능한 싱가포르 관객은 할리우드 영화를 더 선호하였다.

그리하여 다수의 대만 영화인들이 창작의 자유와 더 나은 대우를 찾아 홍콩에 와서 영화에 참여하였다. 홍콩 영화의 특징인 더빙 또한 광동어에 익숙하지 않은 대만 배우들을 다수 출연시키다보니 더욱 굳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대만의 인력을 빨아들이던 홍콩 영화는 1990년대 이후 개혁개방된 중국 영화계가 거대한 시장과 자본을 바탕으로 성장하자 도리어 대륙시장의 인력 공급처가 된다. 이미 1992년에 장국영패왕별희에 출연한 바가 있었고[120], 1997년 전후로 일부 배우들이 대륙영화계 제작진과 합작하기도 했었으며, 이제 홍콩의 주요 스타나 스탭들은 너도나도 중국 영화에 출연하고 있다. 홍콩과 대륙뿐만 아니라 대만 배우들 및 제작진들도 합류하기도 한다.[121] 다만, 이는 경제 법칙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 나은 대접을 찾아 해외로 나가는 인력을 막을 수도 없다. 이는 위에서 이야기한 대로 홍콩 영화의 쇠퇴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9. 애니메이션 영화

실사영화가 발달한 홍콩 영화는 골때리게도 애니메이션 영화는 거의 만들지 않는다. 대만 영화해피니스 로드같은 애니메이션 영화들이 나오고 있는데 홍콩 영화는 그렇지 않다.

2019년 들어서야 7번가 이야기 (繼園臺七號, No.7 Cherry Lane)라는 애니메이션 영화가 딱 1개 나왔을 정도로 드물다.

10. 한국에서의 영향

홍콩 영화는 한국 영화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한국과 홍콩의 첫 합작 영화인 1957년작 《이국정원》을 시작으로 1970년대까지 한국-홍콩 합작 영화들이 무협물을 중심으로 많이 제작되었다. 이렇게 합작을 하면 한국 입장에서는 당대의 깐깐했던 외화 상영 제한 규제를 피할 수 있었고, 홍콩 입장에서는 홍콩 땅이 좁아서 영화 촬영지를 찾기 어렵다는 한계를 극복할 수 있었다. 촬영지가 문제라면 땅이 넓은 중국 본토에서 찍어도 되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당시 중국 본토는 죽의 장막으로 대표되는 쇄국 정책을 펼치고 있어서 영화 촬영은커녕 입국도 쉽지 않았다. 특히 무협 영화쿵푸 영화의 비중이 큰 홍콩 영화 특성상 옛날 건축물이 자주 등장할 필요가 있는데, 한국의 전통 가옥들의 양식이 중국 고건축과 비슷했기 때문에 딱 적당했다. 물론 차선책으로는 일본이나 대만도 있었지만, 일본은 비용과 규제가 걸림돌인데다 건축 양식이 중국과 너무 달랐고 대만은 촬영지의 다양성이 적었기 때문에 한국을 가장 선호하였다. 성룡이 한국어를 할 줄 알고 육개장을 좋아한다거나 하는 것도 소싯적에 한국에서 홍콩 영화를 많이 찍었기 때문이다. 무명 시절에도 한국에 오래 거주하며 영화를 촬영했고, 한국어도 구사할 수 있었으나 현재는 많이 잊어버렸다고 한다. 또한 이소룡 최후의 작품인 사망유희도 원래는 법주사에서 찍을 예정이었을 정도이니 말 다한 셈.

이렇게 상당한 기간 동안 합작 영화를 찍다 보니 자연스럽게 한국은 영화 기법에서 상대적으로 더 선진적이었던 홍콩 영화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었는데, 이 때문에 당대에 촬영된 한국 영화들을 보면 홍콩 영화의 영향이 짙게 느껴지는 작품들을 볼 수 있다.[122] 또한 1980년대 이후로 한국-홍콩 간 합작영화가 크게 줄었음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 초반까지는 주윤발, 장국영, 왕조현 등 홍콩 영화배우들이 한국에서 광고를 찍을 정도로 홍콩 영화가 한국에서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다. 더불어 지상파 TV에서도 꽤나 오랜 기간 동안 홍콩 영화를 명절에 틀어 주었기 때문에 영향을 지속적으로 받을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그래서 홍콩 영화의 인기가 줄어든 2000년대 초반 이후로도 홍콩 영화의 영향이 한국 영화계에 여전히 남아 있어서 범죄, 액션, 무협 장르에서 그 특징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10.1. 중국 영화와 혼동

그런데 국내에서는 한중수교 이전에 홍콩 영화를 즐겨본 장노년층[123]을 제외하면 홍콩 영화와 중국 본토 영화를 혼동하는 경향이 매우 짙다. 예를 들어 "'중국 영화'가 예전에는 참 좋았다"면서 그 예시로 홍콩 영화들을 거론하는 경우가 대단히 많다.

특히 홍콩에서 만든 강시 영화[124]를 중국 공포영화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은 중국공산당유물론에 입각해 사후세계귀신의 존재를 강경하게 부정하기 때문에 공포영화가 기를 못쓰는 나라다. 때문에 강시 영화는 홍콩 반환 이후 (중국 본토와 같은 귀신 검열은 없지만) 홍콩의 영화 제작자들이 중국 공산당의 눈치를 보면서 가장 먼저 쇠락한 장르이기도 하다.[참고]#

사실 이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 외국인 입장에서 아무런 사전지식 없이 대뜸 홍콩 영화를 접하면 그냥 중국 영화로 느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같은 중화권 문화를 공유하는 데서 기인한 특유의 감성도 있고, 무엇보다 홍콩 영화계에서 일하던 영화인들이 중국 본토로 진출해 세를 넓히다 보니 자연스레 중국 본토 영화도 이들의 영향을 받게 되어 체감되는 차이점이 더욱 줄어들었다. 표준 중국어와 홍콩에서 통용되는 광동어도 분명한 차이가 있지만, 어차피 중국 문화에 관심이 깊거나 관련 전공자가 아닌 이상 남들에게는 그저 똑같이 쏼라쏼라 하는 '중국어'로 들릴 뿐이다. 사실 두 언어의 차이를 아는 사람이라고 해도, 과거 국내에 유통된 홍콩 영화는 대부분 표준 중국어로 더빙된 버전이었기 때문에 언어로도 구분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게다가 당시나 지금이나 홍콩 특유의 지역적/정치적/역사적 특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단순히 중국 땅의 일부로만 아는 사람들이 많으니 더 그렇다.

11. 흥행 순위

11.1. 홍콩달러 기준 역대 흥행 순위

아래 기록은 현재 홍콩영화 역대 흥행 순위이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서 홍콩 영화의 흥행이 극히 부진했으므로, 아래 순위는 2000년 이전 자료 기록에서 그다지 변하지 않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2016년 주성치의 신작인 <미인어>가 미화 5억 5천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이 정도면 웬만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뺨치는 수준. 아래 홍콩달러로 표시된 박스오피스와 비교를 위해 환산해보자면, 쿵푸허슬이 미화로 계산하면 1억달러 언저리로 벌어들였으니, 주성치가 얼마나 대성공을 했는지 알 수 있다.[126] 또한 홍콩의 화폐가치가 시대별로 다르기 때문에 1980년대에 2000만 홍콩달러를 번 것과 2000년대에 2000만 홍콩달러를 번 것과는 차이가 많이 난다.

현재 홍콩 영화 역대 흥행 1위는 2023년 춘절에 개봉한 '독설대장'이다. 누적 흥행 $115,060,394를 기록하였다.
[127][128]
순위 영화 수입 감독 주연 홍콩 개봉연도
1위 독설대장 $115,060,394 오위륜 황자화,사군호 2023
2위 구룡성채지위성[129] $103,008,052 정보서/고천락, 홍금보, 임봉,임현제/2024
3위 명일전기 $81,821,966 오현휘/고천락, 유청운/ 2022
4위 반희공심 $77,347,791 진영신/황자화, 등려흔/ 2022
5위 콜드워2 $66,244,171 양락민/양가휘, 곽부성/ 2016
6위 매염방 $62,068,723 양락민/왕단니,고천락/ 2021
7위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61,857,826 구파도/가진동/2011
8위 쿵푸허슬 $61,320,000 주성치/주성치/2004
9위 소림축구 $61,260,000 주성치/주성치/2001
10위 엽문3 $60,422,830 엽위인/견자단/2015
11위 폴리스 스토리 4 $57,518,794/당계례/성룡/1996
12위 홍번구 $56,911,136 당계례/성룡/1995
13위 미인어 $56,225,252 주성치/덩차오,임윤/2015
14위 무간도 $55,030,000 유위강,맥조휘/유덕화,양조위/2002
15위 도신 2 $52,529,768 왕정/주윤발,양가휘/1994
16위 장강7호 $51,440,832 주성치/주성치/2008
17위 심사관 $49,884,734 두기봉/주성치,매염방/1992
18위 가유희사 $48,992,200 고지삼/주성치,장국영/1992
19위 색, 계 $48,750,175 이안/탕웨이,양조위/2007
20위 리틀 빅 마스터 $46,729,492 관신휘/양천화, 고천락/2015

자세한 순위는 여기를 참고하면 된다.

11.2. 역대 국내 관객수 순위

전국관객은 영화진흥위원회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에 올라온 기록 기준으로 국내에서 2000년 이후에 개봉한 홍콩영화 관객수 순위이다.

그러나 국내에서 홍콩영화가 보다 활발하게 관람했던 시기는 통합전산망이 존재 하지 않았던 1970~1990년대였으므로 서울 관객수 순위도 같이 기재한다.
1위 색, 계 1,925,255명 (2007)
2위 쿵푸허슬 963,580명 (2005)
3위 소림축구 761,194명 (2002)
4위 신화: 진시황릉의 비밀 538,381명 (2005)
5위 엑시덴탈 스파이 513,000명 (2001)
6위 디 아이 505,000명 (2002)
7위 뉴 폴리스 스토리 423,487명 (2005)
8위 BB 프로젝트 406,558명 (2006)
9위 무간도 397,448명 (2003)
10위 디 아이2 335,000명 (2004)
1위 취권 898,561명 (1979)
2위 색, 계 738,623명 (2007)
3위 사형도수 (57만 6,953명) (1979)
4위 사제출마 43만 6,631명 (1980)
5위 소권괴초 436,545명 (1980)
6위 황비홍 434,739명 (1991)
7위 용형호제 2 403,802명 (1991)
8위 프로젝트 A 396,434명 (1984)
9위 취권 2 378,715명 (1994)
10위 동방불패 359,463명 (1992)

서울 관객 10위권중 7개가 성룡 영화다. 나머지 3개는 색,계와 황비홍, 동방불패인데 색,계를 제외하면 액션 위주이다.

12. 영화 목록

★ - 느와르
♡ - 로맨틱 코미디 혹은 멜로
史 - 사극 혹은 시대극
武 - 무협 또는 무술
S - SF
F - 판타지
色 - 에로물

13. 영화관

13.1. 지역 불평등

홍콩 영화관들은 홍콩섬에 몰려있다. 홍콩섬 인구는 홍콩 전체 인구 740만명의 1/6인 125만 명이고 동구(인구 60만)에 몰려 있는데 홍콩섬에 있는 영화관은 골때리게도 완차이구(인구 16만) 코즈웨이베이역 일대와 중서구(인구 23만) 애드미럴티역 일대에만 몰려 있다. 구룡반도(인구 210만 명)에 있는 영화관은 홍함역이나 침사추이역, 몽콕역, 야우마테이역 일대(야우침몽구)에 몰려 있다. 하여간 남쪽. 신계(나머지)의 영화관은 샤틴구에 많다. 특히 샤틴역마온산선 연선에 마온산 신도시를 지으면서 시티원역 일대에 영화관이 몰려 있다.

13.2. IMAX

2016년까지만 해도 신계에 한 곳만 IMAX관이 있었다. 그러나 2017년부터 리모델링을 통해 구룡반도에도 IMAX관이 들어섰다. 홍콩섬에는 아직 없다.

이렇게 7개 지점이 있는데 홍콩우주박물관은 일반 영화를 상영하지 않으니 사실상 6개이다.

14. 관련 문서



[1] 당시 중국은 개방 정책 이전이었다. 물론 1980년대를 전후해서 VHS와 VCD 따오판의 형태로 홍콩 영화가 많이 들어왔고, 광저우, 선전시를 비롯한 광둥성 남부 일대에서는 아예 홍콩과 마카오 TV 전파가 잡힌다는 것을 이용해 홍콩 TV에서 방송되는 홍콩 영화와 드라마들을 녹화한 다음에 팔아치우는 경우가 많았다. 이게 인터넷이 보급되기 이전의 일이었다.[2] 경극 배우는 연기력뿐만 아니라, 가창력, 기예에 가까운 액션 모두 겸비해야 한다. 현재는 아동 인권이 향상되어 저런 식의 교육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성룡과 같이 연기력과 무술실력 모두 출중한 액션 배우는 나오기가 힘들 듯.[3] 훗날 유진위 감독이 이 시기의 광둥어 잔편의 향수를 느껴 이를 소재로 하여 '92 흑장미 대 흑장미'를 연출한다. 이 작품은 홍콩 코미디 영화 중에서 걸작으로 평가받는 작품이다.[4] 1947년 상하이 출생으로 1954년에 아역배우로 데뷔한 이래 200 편에 가까운 많은 영화에 출연했다. 90년대 이연걸 주연 홍콩 무협영화 방세옥 1편과 2편에 방세옥의 어머니 역을 맡기도 했으며 홍콩 금상장, 대만 금마장, 베를린 영화제, 아시아-태평양 영화제 등 다수의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배우.[5] 당시 홍콩의 일반적인 샐러리맨들이 한 달 평균 급여로 100 홍콩 달러를 받던 시대에 진보주는 영화 한 편의 출연료로 무려 2만 홍콩 달러라는 거액을 받을 정도였다. 그녀는 1년에 평균 15-20작품을 찍을 정도로 엄청난 다작을 했었는데, 영화 출연만으로 1년에 3-40만 홍콩 달러를 번 셈이다. 이게 그녀의 나이 10대였을 시절의 수입이다.[6] 유성호접검(1976), 초류향(1977), 의천도룡기, 의천도룡기대결국(1978), 영웅무루(1980), 서검은구록(1981), 일겁(1982), 마전도룡(1984 등의 무협영화를 연출했으며 장국영 주연의 우연(1986), 주윤발, 엽천문, 왕조현 주연의 대장부일기(1988)을 연출하기도 했었다. 연출과 각본은 물론, 배우로 참여했던 작품 역시 꽤 되며 폴리스 스토리에선 악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7] 원래는 전무에 먼저 입사를 하였지만, 전무가 영화 제작을 접으면서 쇼브라더스로 이적하였다.[8] 물론 추위안이 쇼브라더스서 만다린 영화만 만들었던 건 아니다. 대표적으로 1972년에 TVB와 쇼브라더스의 스타 배우들을 총동원하여 만든 광동어 코미디 영화 <72가방객>은 엄청난 흥행을 기록하였고, 그 해 개봉한 홍콩 영화들 중 가장 높은 수익을 올렸다. <72가방객>은 유명한 광동어 연극이 원작으로 과거에도 영화화된 적이 있다. 주성치의 <쿵푸허슬>의 돼지촌 세트는 이 영화의 세트에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9] 이렇게 TVB 연기반 출신 배우들은 홍콩 영화계의 뼈대이다. 주윤발, 주성치, 양가휘, 유덕화, 양조위, 오군여, 유가령 등 이고, 무술계 액션배우나 가수가 아니면 대체로 십중팔구는 TVB 탤런트 출신이다.[10] 심지어 한국에선 '누구야?' 소리 듣던 등광영이나 서소강까지 한국에 왔었다. 정확히는 유덕화와 같이 왔던 것이지만.[11] 반면 당시 홍콩에서 인기를 누리던 양가휘는 1992년 '신용문객잔' 홍보차 방한한게 전부였고, 장만옥도 홍콩영화 전성기에 방한한 적이 없다가 2000년 화양연화가 한국에서 개봉할 때 첫 방한했다.[12] 이 세 곳의 공통적인 특징으로는 과거 혹은 현재까지 경제적으로는 제법 풍족했으나 정치적으로는 억압되었다는 점이다. 자유로운 창작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체적인 문화 컨텐츠는 빈약했고, 경제적 여유는 있어서 문화 컨텐츠에 대한 욕구가 있었기 때문에 홍콩 영화로 그 욕구를 충족한 것이다. 동아시아 주요 국가들 중, 중국은 당시 가난한 편이라 시장이 없었고, 북한 역시 가난한데다 폐쇄적이기까지 했고, 일본은 자체적인 문화 컨텐츠가 튼실했기 때문에 홍콩 영화가 끼어들 자리가 없었다.[13] 그나마 이 두 큰 회사들 덕분에 대만을 포함한 다른 아시아 국가에 홍콩 영화를 수출 할 수 있는 통로를 열게 되었다.[14] 홍콩 영화의 부흥기를 직간접적으로 접한 한국인들이 홍콩 배우들이나 홍콩 영화들의 화려함을 사랑하고 그 시기를 그리워하기도 한다. 반면 수입국가의 갑질과 불분명한 소속, 그리고 삼합회 같은 조폭들의 개입 등 홍콩 영화인들의 어려움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15] 한국에 비하면 적은 편이긴 하지만, 이소룡과 성룡 리즈 시절의 작품은 일본에서도 흥행했고, 주성치의 소림축구쿵푸허슬은 일본에서 큰 히트를 기록했다. 일본 매출이 한국 매출보다 높다. 그리고, 홍콩 배우인 양조위같은 경우 영웅적벽대전시리즈로 인지도가 높다. 적벽대전 시리즈는 일본에서 가장 흥행한 중화권 영화다. 적벽대전은 중국 영화긴 하지만, 감독이 오우삼이고 홍콩 영화의 리즈 시절을 이끈 감독이다.[16] 참고로 이소룡, 성룡은 월드 스타고 이연걸은 그래도 영웅포비든 킹덤, 미이라 3같은 작품을 통해 세계적인 인지도를 어느정도는 쌓은 편이다.[17] 홍콩 영화의 주력 장르인 조폭 느와르나 무술 영화였지만 일본 내에서는 이와 비슷한 전통적인 장르가 정착한 상태였다. 특유의 사무라이 찬바라 영화는 홍콩식 무협영화, 일본 특유의 느와르 장르인 야쿠자물은 홍콩식 느와르물과 유사한 결을 가지고 있다. 그러다보니 홍콩 영화는 일본 극장가에서 발을 붙이기 어려웠다. 반면 한국과 대만에서는 1980년대 당시 검열 때문에 범죄조직을 미화하는 느와르 장르는 절대 제작할 수 없었다.[18] 문화대혁명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홍콩영화로는 1991년작 '천년귀사'와 1992년 개봉된 영화 '기왕'이 대표적이다.[19] 일각에서는 2003년 장국영의 자살이 홍콩 영화의 종말이라고 평하는 경우가 있다.[20] 다만 장국영은 화제성에 비해 흥행성은 상당히 낮은 편이다. 공동 주연을 맡았거나 명절 특수를 노린 영화들은 흥행성적이 좋지만 장국영 단독으로 출연한 영화들은 상대적으로 흥행성적이 좋지 않다. 흥행성을 따지면 주윤발, 주성치나 성룡 혹은 유덕화가 더 높고 단독으로 출연한 영화들이 성공을 거두기도 했고 출연만으로도 화제성이 높기도 했다.[21] 현재에도 20대 나이에 남우주연상을 받은 유일한 배우다. 80년대 후반까지 20대 나이에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이들 중에는 장국영, 양조위, 유덕화도 있었다. 하지만 90년대에 접어들면서 이들도 30대가 되었고, 1991년 주성치가 만 29세로 남우주연상 후보로 오른 이후 2,30대 나이로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배우는 한 동안 없다가 2011년 사정봉과 2020년 '소년시절의 너'의 이양천새였다.[22] 이 들도 연기경력이 평균 30년 되는 중견배우다.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은 시기는 90년대 후반 부터다. 장가휘는 배우보다는 액션 스턴트 맨과 제작부에서 오랫동안 일하다가 배우로 넘어온 케이스.[23] 여자 배우들은 대부분 40세가 되면 은퇴 루트를 타거나 활동 빈도가 확 줄어들어 이들을 대신할 젊은 배우들로 교체되기에 세대교체 빈도가 많았다. 남자배우들도 사실 세대교체에 성공할 기회는 있었다. 1990년대 초반, 홍콩영화의 정점이자 내리막길로 접어들던 시기에 그 동안 느와르나 무협장르에만 치중하다가 조금씩 다양한 소재들의 영화들이 제작되고 나름 성공을 거두기 시작했다. 90년대 초중반 금상장 남우주연상 수상자들만 봐도 각자 수상한 작품들의 소재나 장르가 다양했는데 덕분에 세대교체는 어느정도 되는 듯 했다. 문제는 이들의 뒤를 이어줄 신진배우가 없고, 흥행성이 좋은 남자배우 위주로 제작하다보니 기회를 날린것도 있다.[24] 홍콩인들이 90년대 초반부터 자국영화를 외면하기 시작했는데, 현재도 그런 이유가 '그 나물의 그밥'인 배우층 때문이다. 수십년간 쌓아온 정형화된 이미지가 대중들에게 깊게 박혀 어떤 배우가 새 작품에 나오면 예측 가능한 스토리와 이미지가 연상되어 굳이 돈 내고 극장 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25] 2014년 우산혁명 시위를 지지했던 영화인들조차 자신들이 받은 불이익과 더욱더 강경해진 정부 및 경찰의 조치가 두려웠기에 2019년 시위때는 직접 나서지도 못하고 침묵할 수 밖에 없었다.[26] 본토에서는 유튜브에 접속할 수 없으나 홍콩에서는 접속이 금지된 적이 없다.[27] 경찰 내부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그린 '콜드워3', 마약으로 찌든 홍콩 뒷모습을 그린 '풍림화산'이 대표적.[28] 1인당 영화관람횟수가 10회를 넘었다는 얘기이다. 1980년대 당시 홍콩의 영화 산업이 얼마나 발달했는지 알 수 있는 척도이다.[29] 표준중국어 더빙이지만 메인 제작자는 홍콩인 강지강이었고 두 주연인 주윤발양자경은 홍콩영화에서 1980년대부터 활동해온 배우들이었다.[30] 중국판은 검열 기준에 맞추기 위해 삼합회 프락치로 경찰에 잠입했던 유덕화가 원래부터 경찰(...)이었다는 설정이다.[31] 사실 그 흥행도 성룡이나 이연걸 같은 액션이나 주윤발같은 느와르가 중점적이고, 주성치식 코미디나 왕가위 스타일은 흥행이 잘 안되었다. 시기로 보면 성룡의 리즈시절이 홍콩 영화의 전성기라고 봐도 과언은 아니다.[32] 1994년 홍콩 현지에서도 흥행성적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동사서독과 흥행스코어가 비슷했다. 그리고 왕가위 감독 작품같은 경우는 평론가들의 극찬과 작품성과는 별개로 흥행과는 상대적으로 거리가 멀다.[33] 한국은 영화잡지라고 해봤자 '씨네21'이 유일하고 '스크린(1984년 창간해 2011년 폐간)'이나 '로드쇼(1989년 창간해 1998년 폐간)', 월간 키노(1995년 창간해 2003년 폐간),월간 프리미어(1995년 창간해 2009년 폐간),필름 2.0,무비 워크 등도 폐간했다. 같이 홍콩영화나 홍콩배우들의 비중이 많았던 월간 잡지는 10여 년 전에 폐간되었다.[34] 다만, '친구'는 조폭미화물이 아니다. 오히려 동시기에 나온 달마야 놀자, 조폭 마누라, 두사부일체같은 작품들이 연이어 히트를 치는 것이 문제였다.[35] 사실 다작 자체는 본인의 연기력이나 체력만 된다면 큰 문제는 없다. 하지만 출연하는 영화들에서의 이미지가 다 같을 수 없고, 특히 많이 출연 할수록 분명히 이미지의 충돌이 생기는 캐릭터의 배역이 안 나올수 없다. 이러면 관객들은 영화를 보면서 해당 배우가 연기한 캐릭터와 그 배우가 최근에 출연한 다른 영화에서의 캐릭터가 혼동되어 제대로 몰입을 할 수가 없다. 만일 겹치기 출연인데도 캐릭터의 변화가 전혀 없다? 그러면 원 영화의 아류작에만 계속 나왔다는 이야기가 된다.[36] 1997년 1월에 출연한 토크쇼에서 양가휘는 이 사건을 직접 언급하지 않았지만, 조폭들에게 끌려다니며 촬영하느라 너무 지쳐버려 홍콩 공항에 도착하여 가족들에게 전화하면서 울음을 터트렸다는 사실을 고백했다.[37] 작은 영화나 독립영화조차 홍콩 자체에서 해결하기 힘들어졌다.[38] 오우삼이나 서극은 정치적 문제 때문이라기보다는 각각 자기 집까지 저당잡혀 만든 첩혈가두영웅본색 3가 대실패한 후, 더이상 홍콩에서 영화를 만들기 힘들어서 그런 측면이 많다.[39] 그래서 과거 홍콩 스타들의 프로필을 보면 이중국적을 가진 사람들이 상당수 있다.[40] 양자경은 말레이시아 상류층 출신이라 어려서부터 영어로 교육을 받았고 영국 유학까지 해서 영어에 유창했기 때문에(오히려 배우 경력 초기에는 보통화나 광동어 등 중국어를 못 해서 대사가 많지 않으면서 대신 몸을 쓰는 액션영화에 출연했다), 할리우드에 진출하기에 유리했다. 또한 그 시대 여배우 중 드물게 대부분의 액션을 직접 소화해내는 배우라는 희소성이 있어서 할리우드에 안착할 수 있었다.[41] 할리우드 영화계에서 동양계 남자의 배역은 섹스어필이 없는 무술계 스테레오타입이나 우스꽝스러운 단역 정도로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적어도 홍콩배우들의 홍콩이탈이 이어지던 1990년대에는 절대로 할리우드에 안착할 수 없었다. 사실 할리우드의 동양계 차별은 뿌리가 깊다. Hawaii Five-O의 주역인 한국계 대니얼 대 김그레이스 박이 모두 시즌 6에서 캐스팅 차별(같은 드라마에 출연한 백인 동료 배우들에 비해 출연료를 적게 받았음)을 이유로 하차했는데, 이것이 불과 몇 년 전인 2010년대 후반에 생긴 일이다. 그러니 홍콩 영화인들이 미국 진출을 시도했던 1990년대에는 할리우드가 이들에게 훨씬 배타적이었다.[42] 예외적으로 《더 포리너》는 심각한 연기를 보여준다. 다만 이 영화의 제작사는 중국계 완다필름이다.[43] 당시 중국은 개방 정책 이전[44] 당시 중국은 개방 정책 이전[45] 당시 중국은 개방 정책 이전[46] 하지만, 홍콩영화들도 흥행작 속편을 두고 수입사들이 값을 서로 올리는 경쟁을 하여 언론으로 두들겨 맞았다. 황비홍이 대표적으로 56만 달러에 사온 황비홍 2는 경쟁으로 200만 달러 이상으로 값이 올라갔는데 당시 할리우드 대작급 수입가랑 맞먹는 액수였다. 정작 황비홍 2 흥행은 기대 이하였고 욕먹어가며 비싼 돈 주고 수입한 업체는 몇 해 안가 망해 문닫았다.[47] 외국영화 상영관에 테러나 하는 구태의연한 방식 말고, 실력으로 맞서서 승부하자는 의식이 높아졌다.[48] 이러한 영화계의 구세력과 신세력이 본격적으로 제대로 크게 부딪힌 시기가 1990년대 중반이었고, 이게 대형사건으로 발전하여 대중들에게 크게 알려졌던 것이 바로 지금까지도 꾸준히 거론되고 있는, 1996년 제34회 대종상에서의 이른바 애니깽 사태이다.[49] 예를 들어 《영웅본색》 같은 작품은 범죄 조직원들의 우정을 의리로 미화했기 때문에 죽었다 깨어나도 본토에서는 만들어질 수 없다. 이밖에도 에로물인 《옥보단》이나 초자연적 존재(유령)를 다루는 《천녀유혼》 같은 작품, 그밖에 항일 조직을 찌질하게 묘사한 《색계》 같은 작품도 마찬가지다.[50] 현재 중국 대중 문화가 한류와 같은 국제적 유행세를 보이고 있지는 않지만, 적어도 중국 국내에서는 엄청난 흥행몰이를 하며 성장하고 있다. 실제로 중국 현지를 가보거나 중화권 언론 매체를 보면 중국 대륙 자체의 대중문화가 점점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바로 알 수 있다. 검열 때문에 성장 속도가 늦춰지고 있기는 하지만 성장 자체를 안 하는 것은 아니고, 무엇보다 중국 영화시장이 무척 크다 보니 검열받지 않는 식상한 소재로 만들어도 적어도 제작비는 회수할 수 있으며, 애국주의 영화 같은 것은 오히려 정부에서도 관람을 권장하다 보니 배우들의 연기력이나 특수효과 등이 받쳐주기만 한다면 시장의 크기만큼이나 대박을 터뜨릴수 있다.[51] 일반적으로 검열제도가 창작 의욕 및 영화 산업 전반을 억누르고 영화의 예술적 다양성을 줄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혀 성장하지 못한다는 것은 편견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현대 영화 기법 중 여러 가지를 창시했고 소련 영화의 황금기를 만든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은 스탈린 시절에 활동하던 사람이다. 그의 작품 여럿이 상영금지를 맞곤 했지만, 스탈린 시절 및 그 이후 소련 영화계의 인프라가 튼실해지고 여러 걸작을 내놓은 것도 사실이다. 중국의 5세대 거장 감독들은 문화대혁명 시절 청년기를 보낸 사람들이며, 이들이 만든 명작들은 대부분 지금보다 검열이 극심했을 때인 19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에 나왔다. "검열 때문에 영화가 성장하지 못했다.", "아니다. 검열 때문에 괜찮은 작품들이 나왔다." 식의 이분법적인 논리만을 내세울 것이 아니라, 억압으로 인해 다양성이 훼손되기도 하지만 그러한 척박한 환경에서 오히려 영웅이 나오듯 걸작이 나오는 경우도 간혹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52] 중국영화에서 다룰 수 없는 영역은 선정성과 정치성이다. 그런데 상업영화라고 할 수 있는 액션, 코미디나 SF같은 영화들은 이런 주제들을 피해갈 수 있기 때문에 검열이 심한 중국에서도 계속 흥행작이 나오고 있다. 다만, 중국 프로파간다 식의 내용들이 첨가되어 있는 경우도 많다.[53] 어느 나라든 검열 대상 소재는 대충 정해져 있고, 영화판에 오래 있다 보면 감을 잡을 수 있다. 그러다보니 정치적, 사회적 민감한 내용이 없는 순수 오락영화 같으면 대부분 검열을 통과하는데, 검열이 강한 경우라면 그 검열을 통과한 경우는 반대급부로 상영관을 독점, 큰 수익을 볼 수도 있다. 심지어 권력자의 입맛에 맞는 영화 같으면 국가권력이 홍보나 관객몰이까지 해 준다. 수익성만 좋다면 영화는 만들어지고 영화판에 자본이 투입되며 당연 여기에는 우수한 영화 인재들을 필요로 한다. 공산당 홍보물 같은 영화라도 개런티만 많이 준다면 출연을 마다할 리 없다. 특히 화면에 얼굴이 안 나오는 제작 스텝들이라면 더 말할나위 없다. 주연급 배우라면 이미지 문제상 거절할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공산당 홍보 영화에 홍콩영화배우들이 나오는 경우가 종종 목격되고 있다. 2010년대 이후 홍콩이나 대만의 엔터테인먼트계가 무너진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유능한 제작 스텝들이나 PD들이 보따리 싸고 대륙으로 들어간 탓이 크다. 엔터테인먼트는 연예인만 가지고 할 수 있는게 아니다.[54] 하지만 왕정 감독 등 일부 홍콩의 거대 제작자들이 수준미달의 영화들을 계속 제작하다 보니 대륙 관객들도 식상함을 느끼고 있다.[55]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결국 중국에선 개봉금지당해 헛된 노력이 되었고 한국에서 어거지로 북한으로 변경했다고 비난을 받았다. 정작, 한국에서 해외 흥행 1위를 해버렸다.[56] 당시 중국은 개방 정책 이전[57] TVB나 ATV 등의 방송국에서 전속 탤런트를 양성하기 위한 연습생 시스템이 있었고 홍콩의 레전드급 (남)배우들 대부분은 여기 출신이다.[58] 특히 여성 연기자들은 대만출신을 제외하면 거의 예외 없이 미스홍콩 출신이었다. 이 미녀 대회 출신들의 상당수는 진지한 연기보다는 연예계에서 뜨면 재벌과 결혼하여 신분상승하는 것에 더 관심을 가진 사람이 많았고, 실제로 탑레벨의 여배우들이 대부분 이 경로로 은퇴했다. 다만 양자경은 이런 사모님 노릇을 2년 정도 하다가 이혼후 복귀, 2023년에는 아카데미상까지 수상할 정도로 홍콩에서 활동한 배우들 중에서는 가장 글로벌하게 성공했다.[59] 허관걸, 장국영, 매염방[60] 오죽하면 왕가위 감독이 홍콩 느와르란 말에 거부감을 보이면서 1990년 영화지 로드쇼 인터뷰에서 한국 시장이 중요하다보니 홍콩 영화가 한국인 관객들의 눈치를 본다고 한탄할 정도였다. 《황비홍》은 1편이 대박을 치자 수입사들끼리 2편 경쟁이 붙어 수입가가 4배 가까이 오르는 등 언론에서도 비판할 정도였다.[61] 사실 예술영화, 다큐영화 역시 독립영화의 범주안에 들어가는 것이기는 하나, 정치적 논리가 들어가면서 새롭게 만들어진 단어다.[62] 사실은 4남 1녀로, 둘째 허관무는 다른 형제와는 달리 배우가 아니라 스탭으로만 영화계에 참가했다. 막내 허주적(여자)도 평범하게 살고 있다.[63] 일본에서는 이들을 모두 시리즈로 묶어 '미스터 부 시리즈'라는 제목을 붙여 개봉했다. 예를 들어 허씨 3형제의 출세작인 《귀마쌍성》은 Mr.Boo! ギャンブル大将(미스터 부 갬블 대장)으로 개칭되었다. 이렇게 일본에서 홍콩 영화의 제목을 바꾸는 일이 잦았던 이유는 한국어나 중국어에서와는 달리, 중국어의 4자 제목이 일본어의 특성상 일본에서는 꼭 4음절로 맞아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웅본색도 男たちの挽歌(사나이들의 만가)로 번역.[64] '언톨드 스토리'도 1985년에 마카오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살인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이다. 후술할 '고양의생'과 '팽부'도 실제 살인 사건이 모티브. 다만 '고양의생'은 '언톨드 스토리'가 개봉하기 이전에 제작된 작품이다.[65] 순진하고 착한 어린이가 가정폭력을 당해 성격이 비뚤어져 성인이 되어 살인마가 되었다든지, 선량했던 사람이 주위 사람들의 멸시와 폭력, 사회 제도의 부조리함으로 인해 분노하여 살인을 저지른다든지 하는 식으로. 원래부터 맛이 간 상태인 경우도 있긴 있다.[66] 1982년 유리병 살인사건을 실화로 한 작품으로, 모티브가 된 이 사건은 택시 운전사가 4명의 승객을 살해하고 시신 훼손 장면을 녹화하는 등의 상상 그 이상의 잔혹한 연쇄살인사건으로 홍콩대만을 포함한 중화권 전체(중국 본토 제외[132])는 물론 한국의 신문과 지상파 뉴스로 보도될 정도로 홍콩 사람들에게 거하게 충격을 안겨준 사건이다. aTV의 TV 시리즈 <향항기안(香港奇案)>에서는 '구름 낀 밤의 도살자(霧夜屠夫)'라는 타이틀로 방영되었으며 임달화가 주연을 맡았다.[67] 1988년에 실제로 있었던 남편 토막 살해 사건(康怡花園D座312室烹屍案)을 모티브로 한 작품. 영화의 모티브가 된 이 사건은 한 남편의 외도와 불화로 인해 조현병을 앓고 있었던 아내가 그간 쌓여 왔던 분노가 순식간에 폭발하자 남편을 둔기로 잔인하게 타살하고 그 시체를 토막낸 뒤 끓는 물에 익혀서 지인들에게 인육만두를 포함한 식사를 대접한 사건이다. 이는 5년 후 1993년에 영화로 제작됨과 동시에 aTV의 TV 시리즈 <향항기안(香港奇案)>에 영화 제목 그대로 방영되었으며 주연으로 영화에서는 예센얼(葉先兒)과 위즈웨이(于芷蔚) 등이, TV 시리즈에서는 린리산(林立三), 웡훙(翁虹), 치우위에칭(邱月淸), 뤄다화(駱達華) 등이며 감독은 영화에서는 린이슝(林義雄), TV시리즈에서는 덩옌청(鄧衍成)이 맡았다. 참고로 이 사건은 한국에서는 비슷한 시기에 있었던 김선자 연쇄 독살사건이춘재 연쇄살인 사건에 묻혀서 보도 내용이 전무할 정도로 잘 알려지지 않은 사건이기도 하지만 이와 비슷한 사건으로 파주 전기톱 토막살인 사건시화호 토막 살인 사건이 있다. 한편, 이 사건의 범인이었던 아내는 무기한 치료감호 처분을 받고 1995년에 석방되었다. 그러나 정신건강에 매우 해롭기 때문에 이 사건의 명칭 중 한자 삶을 팽(烹)자라도 검색을 절대로 하지 말자. 이유는 이를 검색하면 사진에 토막난 신체부위가 여과없이 나오기 때문이다.[68] 영국 식민지 시절에는 왕실 직할 식민지라고 해서 국기 대용으로 영국의 유니언 잭이나 식민지 홍콩기를 걸었는데 대외 행사때는 유니언 잭에 문장을 추가한 식민지기가 나오고 관공서 등에는 유니언 잭만 게양했다. 현재는 오성홍기와 홍콩 특별행정구기가 동시 계양되고 직급 낮은 관공서는 특별행정구기만 건다. 대외 행사 때는 당연히 특별행정구기가 나온다.[69] 2년 뒤 나온 속편은 주연이 무려 서기였으나 폭망. 되려 동갑인 말레이시아 출신 화교배우인 이심결(李心潔, 1976년생. 영어 이름은 Angelica Lee, 도둑들의 홍콩 여형사로 출연해서 한국에서도 유명해졌다.)이 출연한 1편이 더 흥행했다. 주인공 외모도 1편의 이심결이 더 나았다. 이심결은 서기와 동갑이지만 훨씬 어려보인다. 서기는 이미 90년대 후반부터 이미지 소비가 너무 많이 되어서...[70] 2002년 대만 박스오피스 전체 1위를 차지했다.[71] 에로 뿐만 아니라 잔인한 살육 장면이 주를 이루는 영화도 '삼급편'이라고 불린다.[72] 신문 및 잡지 광고에도 세모모양인 '삼급편' 표지를 붙여 광고한다.[73] 하지만 홍콩의 소위 "3급편"은 성기 노출이 있는 일본 AV와는 달리 하드코어가 아니라, 일본의 로망 포르노와 같은, 스토리가 있는 소프트코어이다. 노출도나 스토리는 한국의 에로 영화와 비슷하다.[74] 1992년에 개봉한 금색(禁色, Pink Lady)이라는 영화로, 일본 AV 배우인 오카자키 히토미(丘咲ひとみ, 영화 크레딧에서는 '이미기(李美琪, 당연하지만 매기 큐와는 전혀 별개의 인물)'라는 가명으로 표시되었다.)와 홍콩 배우 엽려홍(葉麗紅, Yip Lei-Hung)이 주연으로 등장했다. 스토리 초반부는 풋풋한 학원물로 시작해서 에로물로 진행하다가 최후반부에 유혈이 낭자해지는 막장 드라마로 변질되는 작품. 그러나 흥행에는 실패했고, 이 영화의 주인공 역이었던 엽려홍은 이 작품이 첫 출연작이었지만 이 영화를 끝으로 어떤 영화에서도 볼 수 없게 되었다.[75] 서기의 초기 작품은 대부분 에로물이었다.[76] 1990년대 초 정극배우로 전향하여 성공을 거두는 듯 싶었는데, 은퇴했다.[77] 이 영화는 매트릭스보다 늦게 개봉해서 한국에서는 모방 아류작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매트릭스보다 먼저 나왔다.[78] 홍콩에서의 별명은 이름이 삼국지 시리즈로 유명한 일본 코에이사의 한자와 같은것을 이용한 鄧KOEI였다.[79] 벌어들인 액수가 제작비의 1/4에 불과한 전설적인 망작이다. 카더라에 의하면, 이 영화에 투자했던 삼합회측이 왕가위를 죽이려고 했다고 한다. 왕가위는 이 때문에 동사서독 촬영을 핑계로 몇년간 삼합회의 입김이 없는 중국에 도피생활을 했고... 삼합회와 커넥션이 있던 등광영도 삼합회를 말리느라고 진땀뺐다고 한다.[80] 오랫동안 캐나다 국적자였다가 2021년 연예계 정풍운동의 영향으로 캐나다 국적을 포기했다는 뉴스가 떴다. 원래 홍콩국적은 가지고 있었다.[81] 다만 성룡은 2006년 BB프로젝트 이후로는 홍콩 내 활동은 물론 광동어 연기도 하지 않고 있다. 가끔 홍콩 영화에 얼굴을 비추기는 하지만 전부 표준중국어로만 연기하고 있다.[82] 사실 홍콩인이 보통화를 배우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지만, 아예 안 배웠다는 것은 중국 활동에 별 생각이 없었기 때문인 듯 하다. 2000년에 나온 <대영가>를 끝으로 배우 활동은 접었기 때문에 배울 필요도 없고, 현재 가수 활동도 자신이 불렀던 흘러간 광동어 가요를 중심으로 공연을 하니 보통화 신작을 낼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83] 당시 이 역할은 이연걸에게 먼저 주어졌었는데, 자신의 무술 동작을 녹화해 디지털로 보관한다는 것이 무술인의 생명을 해친다고 생각했는지 고사하고 더 원에 출연했다.[84] 성룡 팬이었던 사람이라면 뉴 폴리스 스토리에서 진국영 형사(성룡)를 못마땅하게 보면서도 묵묵히 권총을 빌려주던 반장 역으로 기억할 것이다.[85] 원화의 얼굴은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무술가 중의 한명으로 연회장 신에서 잠깐 등장한다.[86] 동명의 홍콩 기업인이 있는데, 홍콩 자산 2위로 250억 달러의 재산을 가지고 있다고...[87] 1980년대 해태 타이거즈의 전설적인 야구선수인 김봉연과 매우 닮았다. 젊었을 때는 박명수를 연상시킨다.[88] 선역 및 주연 출연작이 있긴 하지만 말 그대로 듣보잡 작품들 뿐이고, 마고일장이란 작품에선 아예 선역으로 나오는 성규안에게 죽는 역이다(...).[89] 해당 영화에서 보여주는 악행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다. 첫 등장부터 자신의 남동생을 내쫓으려 하다가 급소를 걷어차 성 불구자로 만든다. 도박과 약물로 돈을 날리면서 부모와 남동생에게 돈을 달라고 협박하는 것은 예삿일이고, 자신의 아내와 아들을 다른 남자에게 돈을 받고 팔아먹고 남동생의 여자친구를 강간하려 했으며, 심지어 그 때문에 실성한 어머니가 자기 눈 앞에서 자살을 시도하는 모습을 보고서도 자기를 한밤중에 깨웠다고 어머니에게 대놓고 죽어버리라고 호통을 치기까지 한다. 결국 이에 분노한 남동생에게 얻어맞고 처참한 죽음을 맞는다. 형을 죽이고 살인죄로 기소된 남동생은 결국 무죄로 풀려난다.[90] 당시 장국영은 1989년에 출연한 토크쇼에서 엽동을 가리켜 '천재적인 배우'라고 극찬했다.[91] 참고로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굉장히 피터지는 영화다.(...)[92] 사실 성에 쓰이는 葉은 '섭'으로 읽어야 한다. 하지만 홍콩 배우에서는 이런 오독이 한국에서 굳어졌으므로 여기선 모두 "엽"으로 쓴다.[93] 원제는 천약유정(天若有情)이다.[94] 2007년 개명하여 가운데 결자를 뺴고 원영으로 바꾸었다.[95] 한국말로 바꾸면 '명랑소녀대' 정도. 일본 걸그룹 모닝구 무스메나 우리나라의 걸그룹 애프터스쿨처럼 입학-졸업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1990년대까지 활동했으며, 그룹을 거쳐한 가수나 여배우들이 좀 있다. 장학우의 부인인 나미미와 아래 설명할 이려진도 여기 출신.[96] 그런데 류란웅은 사실 이가흔을 만나기 전에 관지림과도 불륜한 전적이 있다. 즉 완전히 상습범.#[97] 武打星. 타격 액션을 많이하는 배우, 즉 여성 액션배우라는 뜻. 양자경-양리칭-호혜중에 이새봉을 합해 4명이다.[98] 활동 자체는 1999년까지 근근히 해 왔고, 2008년에도 출연작이 있긴 있다.[99] 정확히는 20세 연하의 수양아들과의 관계...당사자들은 극구 부인했다.[100] 1980년대 초반의 홍콩 영화계 여주로서는 같은 대만 출신인 임청하의 대항마였다. 홍콩 영화가 한국에서 한창이던 80년대는 이미 30대 중반이었고, 연기보다는 연출이나 각본 쪽으로 돌았기 때문에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또한 한국에서 가장 히트를 친 <최가박당>에서도 터프한 모습으로 일관하여 팬이 생길 여지는 거의 없었다.(70년대 출연한 영화를 보면 묘하게 세정을 연상시킬 정도로 닮았다.) 최근 출연 작품을 보면 중후한 카리스마의 미노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101] 한국 한자음으로 종려시가 아니라 종려제로 읽어야 한다. 하지만 緹(붉은비단 제)는 한국에서 잘 안쓰이는 글자이기 때문에 처음에 번역을 잘못한 듯 하다.[102] 주윤발과 많은 영화를 함께 했다. 순성마, 호월적고사, 가을날의 동화, 귀신랑, 타이거맨, 종횡사해 등[103] 1982년 제1회 여우주연상 수상자이기도 하다.[104] 역사학 전공이었으며 연예계 데뷔 후인 1981년에 졸업했다.[105] 호혜중이 데뷔해서 막 이름을 날릴 당시 임청하는 여러 작품에서 주인공으로 같이 출연했던 유부남 배우 진한과의 불륜 스캔들을 일으켰고 이미지 변신을 위해 더 이상 경요의 작품 여주인공을 맡지 않기로 했는데 이 때문에 경요가 임청하를 공개적으로 비난한 상태였다. "내 작품으로 떴는데 은혜를 잊었다"는 식으로... 결국 임청하는 불륜녀 및 의리없는 여배우로 낙인 찍혀서 대만의 대중들로부터 많은 욕을 먹은 끝에 1980년, 미국으로 도망치듯 떠나버렸다. (이때 임청하를 미국까지 따라가서 위로해주고 챙겨준 게 진상림이었다고 한다.) 이후 연예계로 복귀한 임청하는 활동 무대를 대만에서 홍콩으로 완전히 옮겨서 활동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호혜중은 포스트 임청하로서 80년대 중반까지 대만 사람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106] 복성고조의 조연 중의 하나인 여형사 패왕화를 주인공으로 스토리를 만든 영화.[107] 홍콩에서 활동하기 전에는 일본 특촬물에 자주 나왔고, 1984년 누드 사진집(...)을 펴낸 적이 있다.[108] 태권도 2단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가라데는 일반적으로 승단 심사가 매우 까다롭다.[109] 유진위는 감독뿐만이 아니라 각본가로도 유명하다. 필모그래피 상으로 감독작보다 각본작이 더 많을 정도.[110] 유진위와 왕가위는 각본가 시절부터 절친한 친구사이다.[111] 1960년에 제작되었다.[112] 연기 초보자 양가휘에게 '화소원명원','수렴청정'의 주인공을 맡게 하였고 두 편 모두 홍콩과 중국에서도 흥행에 성공했다. 특히 '수렴청정'으로 1984년 제3회 금상장 남우주연상을 수상했지만 동시에 양안관계가 심했던 당시에 중국에서 촬영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대만 정부에게 불려가 반성문까지 쓰라는 강요까지 받았으나 끝끝내 거절하여 한동안 홍콩 영화계에서 퇴출 된 적이 있었다. 양가휘는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1994년 '연인의 연인'에 출연했으나, 당시 다작을 하고 코믹하면서도 섹시한 이미지로 굳어가는 것을 우려했던 이한상 감독은 양가휘를 크게 혼내기도 했다. 안 그래도 90년대 초반에 다작을 하면서(3년간 40편에 가까운 영화에 출연했다고 한다. 그 시기 홍콩 탑배우들이 그러했었다.) 몸과 마음도 지쳐버리고(하루 수면시간이 1시간도 안되었는데도 멀쩡히 촬영에 임했다 하여 별명이 '梁사신'이었다고 한다.) 태어난 딸아이들을 제대로 못 볼 정도로 아버지 역할을 못한게 한이 맺힌 양가휘는 90년대 중반부터 출연작품 수를 줄임과 동시에 가정에 전념하게 되고 익숙한 이미지를 조금씩 지우기 시작한다. 이한상 감독이 1996년 세상을 떠나자 북경으로 건너가 장례식에 참석하여 직접 관을 운구하기도 했고 이듬해 출연한 토크쇼에서 '더 이상 자신의 스승과 일할 수 없다는게 슬프다'고 밝혔다.[113] 淬 "쉬"는 중국음이 아니라 한국한자음이다. 병음으로는 cuì (추이).[114] 홍콩 영화 강호정의 내레이션에 따르면, 1953년까지 중국은 홍콩-중국 국경을 폐쇄하지 않아서 수많은 사람들이 홍콩으로 망명할 수 있었다고...[115]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한중합작영화로서 스탭들은 대부분 한국인이고, 배경도 제주도인 한중합작영화이다. 초호화 캐스팅이지만, 아무래도 황백명이 늙었는지 흥행에 참패했다. 1980년대 홍콩영화의 분위기가 나기는 하지만 좀 진부한 스토리.[116] 참고로 소일부는 1907년에 청나라 시기때 태어났으며, 무려 100세 이상으로 2014년 1월 7일까지 장수하였다. 여담으로 대영제국 훈장까지 받은 인물이다.[117] 다만 일반적으로 영화관에 내거는 목적의 영화가 아닌 TV 방영 목적으로 만든 영화(텔레비전 영화) 및 마이크로 무비는 80년대부터 현재까지 만들고 있다.[118] 이 당시 대만 영화는 경요 작품을 원작으로 하는 멜로물, 홍콩보다 질이 떨어지던 무협 영화나, 에로 영화가 유명했다. 하지만 한국 영화 암흑기였던 1970-80년대와 비슷한 상황.[119] 싱가포르에서 표준중국어는 공식 언어로 지정되어 있지만 표준중국어의 실제 입지는 좋지 못하다. 표준중국어와 영어를 둘 다 써보면 청자의 태도가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를 체감할 수 있을 정도.[120] 장국영은 이 영화 출연 전까지 보통화를 전혀 못했다고 하나, 이 영화를 앞두고 엄청나게 보통화를 연습했다고 한다.[121] 체계적인 연예인력의 배줄이 아직까지 미흡한 중국의 입장에서는 중화권뿐만 인력 공급원으로 한정하지 않는다. 한국배우나 스탭들(특히 TV PD들)도 점점 중국에 진출하고 있는 형편이다.[122] 특히 액션 영화가 그런 경향이 강하다. 무협 영화를 찍던 제작 인력들이 1990년대에 돈벌이용으로 어린이 영화 제작에 많이 참여했기 때문에 뜬금없이 어린이 영화에서도 홍콩 영화의 영향을 느낄 수 있다.[123] 이 세대는 반공 교육의 영향으로 적대국이었던 중공과 우방국이었던 자유중국(중화민국), 영국령 홍콩을 확실하게 구별한다. 또한 당시에는 한국보다 홍콩이 더 잘나가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선망을 가지기 쉬웠기에 '발전된 홍콩'과 '빈곤한 중국 본토'의 이미지는 천지차이였다.[124] 강시 하면 떠올리는 대표적 이미지인 이마에 부적 붙인 채 콩콩 뛰어다니는 특유의 모습은 중국 본토가 아닌 홍콩의 장례 풍습에서 유래된 것이다.[참고] #[126] 다만 미인어를 홍콩 영화로 보기에는 미묘한 점이 있는데, 이 영화는 보통화로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배우들도 대부분 대륙인들이다. 더군다나 제작사가 중국회사이고 중화권 배급사도 중국회사이다.[127] 2016년 개봉작 '콜드워2'가 1위를 차지하고 있다가 2022년 8월에 개봉한 '명일전기'에 왕좌를 내줬다. 단위는 홍콩달러 이다.[128] 2024년 5월 1일에 개봉한 '구룡성채지위성'이 장기상영에 들어갔으므로 순위가 뒤집어질 가능성이 있다.[129] 2024년 5월 1일 홍콩에서 개봉하여 흥행과 비평에서 큰 성공을 거두고 있다. 한국에서도 2024년 하반기에 개봉예정. 7월 부천 국제 판타스틱영화제 페막작으로 최초공개되는데, 이 영화의 흥행세에 트위터를 중심으로 큰 관심을 가지고있어 예매가 개시되자마자 매진되었다.[130] 홍콩, 미국 합작.[131] 한국메가박스 영화관하고는 관계가 1도 없으니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그냥 이름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