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서는 1919년 3·1운동을 통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건립 이후 현재까지 이어지는 대한민국의 역사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1919년 이전 한반도의 역사에 대한 내용은 한국사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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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012년 MBC의 제18대 대통령 선거 개표방송에서 나온 대한민국의 현대사[1] |
히스토리 채널 2011년 다큐 <South Korea : A nation to watch>[2] |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하고 제2차 세계 대전이 종전되자 광복을 맞았다. 그러나 해방됨과 동시에 미국-소련 양국의 분할 점령과 신탁 통치를 겪었고, 미소 군정기의 정국 속에서 벌어진 혼란한 시국 아래에서 냉전 초기의 극도의 좌우 이념 대립을 겪게 되었다. 여운형, 김규식 등의 중도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친미 우익 세력과 친소련 좌익 세력의 반목은 심화되었고, 소련 당국이 남북총선거를 위한 UN한국임시위원단의 북한 입장을 거부하면서, 결국 가능한 남한 지역에서만 선거를 실시하기로 해 선거를 통해 제헌국회를 구성하였다.
1948년 8월 15일, 미군정에게서 정권을 이양받으면서 한반도 이남 지역에 정부를 수립하였다. 이후 6.25 전쟁을 거쳐 나라 전체가 극빈함에 시달렸으며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의 권위주의 통치를 국민들의 퇴진운동으로 몰아냈지만, 민주당(1955년)을 중심으로 의원내각제를 기반으로 세워진 제2공화국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정파간에 첨예한 대립으로 국정운영이 제대로 되지않았고, 국내에 혼란한 정세를 틈타 박정희는 5.16 군사정변으로 쿠데타를 일으켜서 기존의 내각을 무너뜨리고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수립한다. 그 후 의원내각제에서 대통령 중심제로 바꾸는 개헌안을 마련해 1962년 국민투표를 실시하며 이후 제5대 대통령 선거로 제3공화국을 세움에 따라 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군부독재 정치가 시작된다.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 발전 5개년 계획, 새마을 운동 등으로 국가 경제를 발전시키고 산업화를 이루었으나, 유신 개헌, 독재 등으로 민주주의를 탄압했다. 10.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 당한 뒤 전두환은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다. 전두환은 폭압적으로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탄압하였으나 민주주의를 향한 국민들의 거센 요구는 계속되었고 결국 5.18 민주화운동, 6월 민주 항쟁 등을 거쳐 6.29 선언에 따른 9차 개헌을 통해서 제도적인 민주화를 이룩하게 되었다. 그리고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 석달만에 불법 사조직 하나회를 완전히 해체시키면서 군부독재 정치는 완전히 끝이 나게 된다.
이 와중에도 경제 개발을 시작하고 대성공하여, 1988 서울 올림픽, GDP 1만 달러 돌파, OECD 가입 등으로 1980년대~1990년대 중반은 경제 부흥으로 대한민국의 자신감이 가장 부풀어올랐던 시기였다. 하지만 1997년 외환 위기라는 충격을 받은 뒤 한국 국민들은 언젠가 자신들이 지금 누리는 부가 다시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위협을 받게 되었다. 이후 2000년대 들어 2만 달러대까지 성장한 뒤 2018년 3만 달러를 돌파하였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한강의 기적을 성공적으로 이뤄내면서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이뤄냈으며 21세기에 들어서 선진국으로 들어선 몇 안 되는 국가이다. 또한, 한국은 세계최초로 원조를 받던 수원국에서 원조를 주는 공여국으로 바뀐 국가이기도 하다.#
물론, 시대가 빠르고 급작스럽게 변화하면서 많은 사회 문제들이 생겼다. 그리고, 조금씩 해결되는 기미가 보이지만 아직까지 대한민국 내부에서 여러가지로 해결해야 될 산적한 문제들이 많이 사회 밑바탕에 남아있다.
2. 시대별
1919년 이전의 한민족과 한반도의 역사에 대한 내용은 한국사 문서 참고하십시오.
이 문서는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부터의 근현대사(대한민국의 역사)만을 다루고 있다.
2.1. 독립 선언 및 임시정부 수립
3.1운동에 대한 내용은 3.1운동 문서 참고하십시오.
1919년 4월 10일,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에서 각 지역의 교포 1천여 명과 신한청년당이 주축이 되어 29인의 임시의정원 제헌의원이 모여 의정원 회의에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민주공화제를 골간으로 한 임시헌장을 채택한 뒤 선거를 통해 국무원을 구성했다. 행정수반인 국무총리에 이승만을 추대하고 내무총장에 안창호, 외무총장에 김규식, 군무총장에 이동휘, 재무총장에 최재형, 법무총장에 이시영, 교통총장에 문창범 등 6부의 총장을 임명한 뒤 4월 11일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대한민국으로 국호를 정하게 된 계기는 다음과 같다. 3.1 운동 직후 임시정부의 수립이 당면 과제로 부각되자, 국내외 독립지사 29명이 1919년 4월 10일 밤, 중국 상하이의 허름한 셋집에 모여서 그들의 모임을 ’임시의정원‘으로 정하고 다음날인 11일, 역사적이고 중요한 결정을 내리게 되었는데 "국호를 무엇으로 정하느냐?"였다고 한다.
그래서 임시정부에서 국호를 정할 때, 여운형 등은 "대한제국이 짧은 기간 안에 망했으므로 '대한' 대신 '조선'으로 칭하자."라고 주장했으나, 임시정부 초대 교통총장을 지낸 신석우가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흥하자."라는 의견이 임정 요인 다수의 지지를 얻으면서 대한으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8.15 광복 이후에 열린 1948년 7월의 제헌 국회에서도 대한·조선·고려 등의 여러 의견이 나왔으나, 투표 결과 대한민국으로 결정되었다. 사실, 이미 북한에서 '조선'이라는 칭호를 가져간 탓도 있긴 했었다. (예: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그리고, 1948년 7월 제헌 국회에서 공식적으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확정하였다.
대한민국 3년 1월 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신년 축하 사진 |
초기 임시정부는 내무총장 안창호의 주도로 연통제(국내의 비밀행정조직망)와 교통국(임시정부 통신 기관)을 조직하는 한편 독립신문을 발행하였으며, 각종 외교 선전활동 등을 전개하였다. 또한, 애국공채 발행과 국민의연금을 통해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이승만과 안창호가 독립운동의 방략 상으로 대립하였으며, 이념적으로도 국무총리인 이동휘는 사회주의 혁명을 부르짖었고 대통령 이승만은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를 주장하여 서로 충돌하였다.
1920년 12월 8일 이승만이 대통령 취임을 위해 상하이로 들어오자 독립운동가들은 이승만의 독단적인 구미위원부 설치 건과 국제연맹 위임통치 청원 사건에 반대하였는데, 특히 러시아 연해주 거류 동포사회에서 조직된 대한국민의회가 임시정부에 통합되며 그들의 대표로 국무총리가 된 이동휘는 미국교포의 독립자금을 축내며 외교운동으로 위임통치를 주장하는 이승만이 대통령을 맡는 것에 대하여 반대한다며 국무총리직을 사임하였다. 이동휘가 사임하고, 이승만에 반대하는 신채호 등이 이탈하자 임시정부는 혼란에 빠졌다. 안창호는 코민테른 자금을 임시정부에서 사용하는 것을 반대하였고, 이동휘는 고려공산당을 만드는 데 이 자금을 사용하여 이승만을 견제하였다. 이승만은 혼란을 수습하는 것이 불가해지자 다시 미국으로 떠나버렸다.
1921년 임시정부는 소련의 레닌으로부터 혁명자금 200만 루블을 지원받았는데, 그가 보내온 40만 루블과 20만 루블을 수령한뒤, 자금분배 과정에서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동휘는 한형권, 김립을 보내 60만루블을 수령해 오게 하였다. 그러나 이동휘 등은 임시정부에 지원금을 납부하지 않았고, 이에 김구는 이동휘 일파를 추격하여 김립을 암살하고 이동휘, 한형권 등을 비롯한 임시정부 내 사회주의자들을 모두 추방하였다.
1923년 1월부터 6월까지 5개월 동안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 각지의 200여명의 대표가 참석하였다. 국민대표회의는 임시정부의 해체와 재건을 주장하는 창조파와 임시정부의 개혁을 주장하는 개조파로 분열되어 결국 아무런 결실을 얻어내지 못하였으며, 내무총장 김구는 유명무실해진 국민대표회의에 대해 해산 명령을 내렸다.
1925년 이승만이 임시의정원을 통해 대통령직에서 탄핵되고, 뒤이어 취임한 박은식 대통령은 대통령제를 국무령제로 고친 뒤 사임하였으며, 초대 국무령 이상룡이 서간도에서 상하이로 왔지만 내각 조직에 실패하여 다시 서간도로 돌아갔다. 그 뒤, 1925년 2월 양기탁을 국무령에 천거하였으나 사퇴하였고 5월 안창호를 국무령으로 천거하였으나 사양하여 의정원의장 이동녕이 국무령을 맡게 되었다. 홍진이 제3대 국무령으로 뽑혀 진강으로부터 상하이에 와서 취임하였으나 역시 내각 조직에 실패하였다. 1927년 12월 이동녕의 권유로 김구가 국무령에 선출되었으며, 김구는 국무령제를 집단지도체제인 국무위원제로 개편하였다. 1928년 이동녕을 국무령으로 추대하고 김구는 내무부를 맡아 임시정부의 실질적인 지도권을 행사하였다.
1921년 이후 임시정부는 연통제, 교통국과 같은 국내 비밀행정조직망의 파괴와 외교 선전활동의 무성과, 심각한 재정난 등으로 오랜 침체기를 겪었다. 인원도 줄어들어 초창기에 천여 명에 달하던 독립운동가들이 수십 명으로 감소하였다. 조선총독부는 밀정을 파견하여 임정 요인에 대한 체포, 납치, 암살 공작을 단행하였고, 김희선, 이광수, 정인과 같은 자들은 친일파로 변절하여 국내로 돌아가버렸다.
2.2. 광복 및 군정기
UN은 대한민국을 한반도 유일의 합법 정부로 인정하였다. 오른쪽은 유엔 총회의 대한민국 승인 직후, 우리 정부가 만든 기념 포스터. |
대한제국이 경술국치로 주권을 상실한 뒤, 일본 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수모를 겪으면서 30~40년 동안 수난과 고통의 일제강점기 시대를 겪어야만 했다. 그러나 1945년 일제가 태평양 전쟁에서 패망함으로써 한국은 일제로부터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하지만 승전국들이 카이로, 얄타, 포츠담 회담에서 합의한 바대로 해방과 동시에 38도선이 그어짐에 따라 한반도는 진주한 소련군과 미군에 의해 둘로 점령되게 되었다. 여운형과 좌우익의 각 인사들이 모여 만든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했지만 미군정에 의해 부정되었으며 38도선 이북 역시 소련군정의 정치가 계속 되고 있었다.
한반도 전체가 신탁통치에 따른 입장의 차이와 급속한 이념의 대립에 따른 분단의 불안감, 좌우 대립으로 인한 수많은 적색 테러 ・ 백색테러, 무질서한 경제 등 심각한 사회혼란을 겪고 있었으며 미소공동위원회와 좌우합작운동 등이 있었으나 유엔총회 후 38도선 이남은 소련의 38도선 이북에 대한 총선거 반대에 따른 유엔의 결정으로 남한만이라도 단독선거를 실시하기로 했고 제헌의회를 구성, 의회 간선제를 통해서 미군정과 한국민주당의 지지를 받는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하면서 대한민국 정부를 1948년 8월 15일에 수립하게 된다.
대한민국의 역사적인 제헌국회 개원식 (1948년 5월 31일) | 대한민국 정부 수립 국민 축하식 (1948년 8월 15일) |
8.15 대한민국 정부 선포식 당시 실제 현장 육성이 담긴 촬영 영상 (25분)[3] |
8.15 대한민국 정부 수립 경축사 전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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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8월 15일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언했다.
이에 반응해 38도선 북부에서는 9월달, 소련 군정의 지지를 등에 업은 김일성이 대한민국 수립 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세워 대한민국과 대결 양상을 벌였다.[5]
남한은 6.25 전쟁 전까지 암살, 방화, 국지전, 반란, 북한과의 대립 등으로 혼란스러운 고통의 시기를 보냈다. 특히, 남로당은 대한민국 정부을 전복하기 위해 2번의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것이 제주도에서 발발한 남로당 무장 봉기와 제주 무장봉기의 진압군이었던 14연대가 반란을 일으킨 14연대의 반란이었다. 또한 사회적 혼란으로 인한 초인플레이션으로 경제적으로도 고통의 나날을 보냈다. 군사적으론 1949년부터 북한에게 열세였고 이는 결국 6.25 전쟁이 일어난 원인 중 하나가 된다.
분단과 전쟁을 막기 위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김구, 부주석 김규식 등이 남북을 하나로 만들려 노력했지만 이미 미소 양국의 이해관계와 이승만, 김일성으로 양분되어 만들어진 남북 분단 체제를 바꿀 수 없었다. 이승만과 김일성 두명 모두에게 통일이 거부당하고 중도 성향의 독립운동가 출신 인사들이 하나 둘 의문의 암살을 당하게 되자, 통일된 한국을 만들려는 노력은 사그라들게 되었고, 남북은 각각 군대를 창설해 38도선을 경계로 중소규모의 국지전을 벌이게 되는 위험한 상황을 지속하게 되었다.[6]
2.2.1. 한국의 민족 분열과 분단의 요인
- 만주국을 무너뜨린 소련은 곧바로 한반도로 남하하여 한반도 이북지역에는 소련군이 진주하며 이어 한반도 전체가 점령될 태세에 놓이게되자, 이에 놀란 미군은 북위 38도 선에서 양군이 진주할 것을 제안하고 소련은 이를 승인했기 때문에 미군과 소련군의 군정이 시작되었고 이는 분단의 1차적 요인이 되었다. 또한 미군과 소련군정 당국 모두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정부를 세우기 위해 정치 세력을 후원하거나 솎아내는 작업을 하여 한반도 남쪽과 북쪽에서 반대되는 정치세력이 일소됨으로써(박헌영, 조만식) 이것도 분단의 원인이 된다.
- 중국의 공산화를 들 수 있다. 미국이 지원한 장제스의 국민당이 ‘국부천대’ 로 대륙을 포기하고 타이완 섬으로 철군하면서 마오쩌둥의 중국공산당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하였다. 드넓은 중국이 공산화되었기 때문에 미국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원래 미국은 중국을 현재 일본과 같은 역할(아시아 지역의 미국의 대리)을 하게 만들려는 계획이었다. 일본은 많은 공업설비들을 해체하고 농업과 목축이 주를 이루는 아시아의 스위스와 같은 국가로 만들 계획이었고[7] 이를 위해 제2차 세계 대전의 전범을 처벌하고 일본의 사회당(현 사회민주당) 세력을 우대했으나 다시 전범 세력이 정계를 장악하게 되었고 사회당 세력은 축소되었고 공산당 세력은 추방되었다. 이 사건을 ‘역코스(reverse course)’라고 한다. 한국에서도 좌우 합작에 우호적(여운형, 김규식 우대)이던 미국이 시큰둥하게 되었고 대한민국 단독 정부 수립의 방향으로 기울게 되었다. 이 사건은 한국과 일본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일본의 화족 세력을 중심으로 한 전범 세력을 처벌하지 못함으로써 일본 정치는 급격히 우경화되었고 일본의 파벌 정치, 세습 정치 등의 고질적인 구태의 원인이 되었다. 또한 과거사가 청산되지 않음으로써 현재 전시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같은 과거사와 독도 영토 문제가 지금까지도 계속되게 된다. 한국에서도 분단-한국전쟁 등으로 상호간의 악감정이 생겨나 분단이 고착화하는 원인이 된다.
2.3. 6.25 전쟁과 제1공화국
<rowcolor=white> 6.25 전쟁 당시 창녕군 남지읍 박진나루에서 돌격하고 있는 대한민국 국군 | 사사오입 개헌당시 항의하고 있는 야당 의원들 | 1950년대 서울특별시에 있던 판자촌 |
일제 치하에서 벗어난 지 5년 만에 북한의 침공으로 6.25 전쟁이 발발한다. 6.25 전쟁은 수백만 명 이상의 무고한 희생자와 행방불명자들을 낳았고 엄청난 경제적 손실과 양극화를 발생시켰다. 전후 북한에서 건너온 실향민들과 베이비붐으로 엄청난 인구가 폭증하였지만 사회 구조는 여전히 농업사회에 머물러있었다. 이 시기의 가난함은 한강의 기적 참고. 1961년 포린 어페어에 기고된 기사를 보면 말그대로 총체적 난국이었던 전후 상황을 알 수 있다. 이땐 먹을 거리가 없어서 자기 몸의 때를 먹었다는 증언도 있을정도로 너무나도 끔찍했다.기사. 이렇듯, 1950년대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암울한 시대로 인식하기 쉽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1950년 ~ 61년에 미국에게 제공받은 경제원조는 27억 달러에 달하였고 이 외에 많은 군사원조도 주어졌다. 이러한 막대한 원조는 전후 시설 복구 및 극도로 어려워진 민생고를 그나마 유지하는데 크나큰 역할을 하였으며, 이승만 정부는 원조를 바탕으로 공업 생산에 투자를 하여 제조업이 급속히 성장하였다. 더욱 괄목한 변화는 의무교육을 제정해, 국민학생은 1960년까지 총 360만 명으로 (1945년 대비) 2.6배 증가했고, 중학생은 53만 명으로 10배 증가했고, 고등학생은 26만 명으로 3.1배 증가했고, 대학생은 7800명에서 9만 8천 명으로 12배 이상 증가하여 당시 영국의 대학입학률을 능가하게 되었다. 선진국에 유학을 떠나는 대오도 활발해져, 1951년 ~ 59년에 5000여 명이 떠나고 훗날 이들은 대거 귀국하여 국가 발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러한 교육의 확산은 1960년대부터 전개된 고도성장에 적응할 수 있는 노동력을 공급하게 되었다.
한편 제주도에서는 이념 갈등으로 인한 피비린내 나는 학살이 지속되어, 제주 4.3 사건으로 인해 무려 약 3만 명[8], 당시 제주도 인구의 약 10분의 1이 살해당하는 참사를 겪었다. 탄압과 학살은 1949년부터 시작되었지만, 1956년까지 7년이나 지속되었다.
2.4. 4.19 혁명과 제3공화국 ~ 제4공화국과 경제계획
<colbgcolor=#254170> |
<colcolor=white> 4.19 혁명의 방아쇠를 당긴 마산상업고등학교 학생 김주열 |
시위에 참여하는 서울 수송국민학교 어린이들 부모 형제들에게 총부리를 대지 말라 라는 문구가 쓰여있다. |
4.19 혁명 당시 서울의 시위대와 계엄군이 합세한 모습 |
시민들의 환호와 야유속에 철거되는 이승만 동상 |
결국 혼란스러운 정국을 틈타 박정희 소장을 중심으로 하는 군부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켜 5.16 군사정변으로 제2공화국을 무너뜨렸다.
<rowcolor=white> 5.16 군사정변 당시 서울을 장악한 쿠데타군의 M4A3E8 셔먼 전차들 | 새마을운동의 깃발 |
이때는 제국주의를 야기한 선진 열강들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체제의 차이를 떠나 종속이론에 입각해 항구를 봉쇄해 원료부터 제품생산까지 자립공업을 일으키고 국영기업을 육성하는 계획을 추진하는 시기였는데 이전의 실패에 교훈을 얻어 1964년에 이전까지 하던 계획을 뜯어고치는 당시 후진국의 대세와 정반대인 약한 산업은 관세와 정부의 보조금으로 충당해주고 일정한 단계가 달성되면 해외시장에 진출하는 수출주도 산업화로 방향을 틀었다.
3년간의 군정을 통해 정치 기반을 다진 박정희는 정치자금을 받아서 선거를 준비하였고 상대의 종북몰이를 역으로 이용, 전라도와 경상도 농민들의 표를 받아 마침내 1963년 12월 국민 선거를 통해 5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대일차관기업의 부실화와 자금문제는 골칫거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일수교에 의한 물품과 기술의 유무상 공급, 고강도 노동 및 월남전 참전 특수에 따라 경제 규모는 성공적으로 커졌고 노동집약형 경공업과 조선, 자동차 등 노동집약형 중공업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대한민국 산업화의 시작을 알린 시기이다. 대한민국 제3공화국 참고.
70년대에 이르러 미국은 베트남 전쟁으로 막대한 인명피해와 돈을 투입해 국력이 소모되어 닉슨 독트린이 발표한데 이어 리처드 닉슨이 중국을 방문해 6.25 전쟁이래 적대관계를 유지하던 미중관계는 해빙기를 맞았다. 이러한 국제정세를 데탕트로 불린다. 이에 비해 박정희는 국내외적으로 경제, 정치적 위기를 맞았다. 월남 특수 종료와 함께 미국발 불황이 국내에 찾아와 경제성장률이 급락하고 외채상환 압박, 부실기업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다. 이에 대통령 박정희는 8.3 사채 동결 조치 등을 실시하는 한편, 북한의 무장공비에 의한 군인 및 민간인살해가 번번한 것을이유로 들어 1971년 대통령에 비상대권을 부여하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해 출판, 언론, 방송에 대한 검열을 합법화하고 정치활동, 집회의 자유를 불법화하였다. 한편으로는 6차 개헌을 통해 대통령의 3선 제한을 철폐, 52%의 득표로 7대 대통령에 취임해 1972년 10월 17일 19시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여 헌법의 일부 조항 효력을 중지시키며,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및 정치단체들의 활동을 중지시키며 효력이 정지된 조항은 "비상국무회의"가 주재하고 10월 27일까지 개헌안을 마련하여 국민투표에 붙인다는 "10.17 특별성명"을 발표하여 제3차 국민투표로 통과되었다. 이는 4공화국의 성립이었다.
1972년 들어 한국경제의 성장을 견인한 경공업 수출만으로는 더 이상 고도성장을 지속할 수 없게 되었다. 이는 옷, 합판, 신발, 가발 등의 품목들이었는데 이 같은 수익이 별로 남지 않는 품목들로서는 성장 동력의 전망이 분명치 않았다. 이해 5월 박정희 대통령은 청와대 집무실에서 오원철 당시 경제담당 수석 비서관에게 100억 달러 수출이 가능한지 물어보고 오원철은 일본이 중화학공업을 육성한덕분에 100억 달러 수출을 이루었다고 대답하했다. 이에 박정희는 그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박정희 정부는 1973년 6월에 철강, 비철금속, 기계, 조선, 전자, 화학을 6대 전략 업종에 선정해 이들 분야에 10년간 90억 달러를 투자해, 1981년까지 전체 공업비중에서 중공업비중을 51%로 늘리고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 수출 100억 달러 달성한다는 중화학공업 육성계획을 발표하였다.
주철, 강철, 기계, 조선업, 화학은 산업혁명이래 선진국이 독점해온 산업들로서 막대한 자본 투입과 수많은 기술인력 양성이 필요해[10] 스페인도 진출하지 못하던 분야이고 마오쩌둥이 무한정 자원과 노동력을 동원하다 파국을 초래한 분야이다. 이것은 지나치게 모험적인 투자로서 자칫하면 한국경제는 대대손손 빚더미에 오를 수 있는 위험천만한 전략이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이것에 과감히 도전하였으며, 1974년 원유도입값이 3배 이상 폭등한 오일 쇼크가 발생해 물가상승률이 8배 이상 치솟고 막대한 무역적자가 발생해 부도 위기에 처하기도 했으나 대출을 통해 이를 막고 연간 수출증가율은 40%를 경신하는 동시에 노동집약 건설업을 통해 중동지역에 많은 노동인력을 건설투자에 투입함으로써 다량의 오일달러를 벌어옴으로써 성장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리고 새마을운동이라는 새로운 돌파구를 내며 농촌발전에 집중적으로 투자하여 도시보다 현저하게 뒤쳐진 농촌은 70년대 말에 이르러 가구당 소득이 도시를 역전하였다. 이를 오늘날 해마다 많은 개발도상국에서 찾아 배우러오며, UN에서도 아프리카 빈곤퇴치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지정하였다.
그 결과 대한민국의 1인당 GDP는 1970년대에 더욱 빠른 속도로 성장하면서 원조 농산물을 시장에 판 돈이 예산의 절반을 차지하는 매우 가난한 농업 후진국에서 15여년만에 공업이 발달한 중진국으로 발돋움하였다. 그러나 박정희의 안정적인 장기집권을 실현하였다고 평가받는 유신 체제는 곧 각종 반발로 강하게 이어졌으며 유신 정부는 긴급조치들을 선포해 이를 탄압했다. 그러나 YH 사건 등으로 부마항쟁이 일어나고 계엄령이 선포된 와중에 박정희 대통령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피살당하는데, 이를 10.26 사태라고 한다. 제4공화국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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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 성공 후 12월 14일에 사진을 찍은 하나회 조직원들 |
서울로 진격하는 반란군 |
반란군으로부터 특전사령관을 보호하다 전사한 김오랑 중령 |
10.26 이후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10.26 사건을 수사하기 위한 합동수사본부의 본부장으로 임명되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전두환은 10.26 사건 수사 기록을 마음대로 조작하고 군 내 정보를 독점 하는 등 월권행위를 일삼았다. 이에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은 전두환을 보직해임 시키려 했으나 전두환은 자신의 불법 사조직인 하나회의 인맥으로 이를 사전에 인지하고 있었다. 정승화를 제거하기 위해 전두환은 10.26 사건 당시 정승화가 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를 들어 정승화를 불법체포하며 12.12 군사반란이 발생한다.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 김진기 육군 헌병감 등이 반란을 진압하려 했으나 당시 진압군 측 최고 지휘관이었던 윤성민 육군 참모차장의 우유부단한 대처와 하나회 소속 장교들의 배신으로 인한 병력 부족으로 결국 실패한다. 12.12 군사반란으로 갑종장교, 육사 8 ~ 10기 중심의 기존 군부는 몰락하고 하나회와 육사 11기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탄생한다.
2.5. 신군부의 통치와 3저 호황
1980년대의 사건 | |
시기 | 사건 |
1980년 5월 17일 | 신군부의 5.17 내란 |
1980년 5월 18일 | 광주 시민들의 5.18 민주화운동 |
1981년 5월 28일 | 국풍81 |
1981년 11월 17일 | 88올림픽고속도로 착공 |
1982년 1월 5일 | 3S정책의 일환으로 야간통행금지령이 해제 |
1982년 3월 27일 | 3S정책의 일환으로 한국프로야구가 출범 |
1983년 1월 11일 | 일본 총리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전후 처음으로 대한민국을 공식 방문 |
1983년 6월 30일 | KBS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방송 |
1983년 8월 3일 | 삼성반도체가 64KB D램을 개발 |
1983년 10월 9일 |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
1984년 5월 1일 | 과천 서울대공원 개원 |
1984년 9월 6일 | 전두환 대통령 전후 처음으로 일본 방문 |
1985년 9월 30일 | 63빌딩 개장 |
1986년 5월 3일 | 인천 5.3 운동 |
1986년 9월 20일 |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
1987년 1월 14일 |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
1987년 6월 9일 | 이한열 피격 사건[11] |
1987년 6월 10일 | 6월 민주 항쟁 |
1987년 6월 29일 | 6.29 선언 |
1987년 11월 29일 |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
1987년 12월 16일 | 제13대 대통령 선거 노태우 당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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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 운동 당시 도청으로 진격하는 계엄군 |
항쟁 도중 숨진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끌어안고 있는 어린이 |
화정동 외곽을 돌파해 시가지로 돌진해 들어오는 계엄군 전차부대 |
1979년, 12.12 군사반란으로 군내의 반대 세력을 없앤 신군부는 1980년에 모든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5.17 내란을 일으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한다. 신군부는 5월 17일, 전국 모든 대학에 대한 휴교령과 함께 새벽에 이화여대를 급습, 전국학생회을 체포해 학생운동을 무력화 시켰고 33사단 병력으로 국회을 점령, 사실상 모든 헌정을 중단시켰다. 또한 정치적으로 적이 될 수 있는 국회의원들이나 삼김을 체포나 가택연금으로 무력화시켰다. 대한민국 국회와 모든 학생회가 무력화가 된시점에서 유일하게 학생회가 무력화가 안된 광주광역시에서만 계속 시위을 진행했고, 전두환하고 신군부는 게엄군을 광주에 보내 광주시민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한다. 광주시민들은 저항권을 발동, 시민군을 결성해 계엄군과 맞서 싸우지만 끝내 계엄군에게 진압당하면서 5.17 내란은 반란세력의 승리로 마무리됐다.
1980년에는 오일 쇼크로 인해 셰계경제는 성장이 곤두박질 치고 때마침 막대한 자본이 소요되는 중공업을 육성중이던 한국 경제에 치명타를 가해 경제성장률이 집계하기 시작한 1954년이래 최초의 마이너스 성장인 -1.7%, 물가상승률 28.7%라는 큰 충격이 가해졌으나 전두환 정부의 강력한 물가안정 정책과 함께 이전까지의 정부주도 개발에서 민간부문의 자율성을 크게 확대하는 방향으로 고성장 기조로 복귀하여 유지되었고 1인당 실질 소득은 7여년만에 2배 불어났으며, 여기에 엔고에 의한 저달러, 저유가, 저금리 시대의 이른바 삼저호황까지 겹치며 80년대 말 ~ 90년대 초중반까지의 이른바 단군 이래 최대 호황기가 찾아오기 시작한다.
1986년에는 서울에서 제10회 아시안 게임을 개최하게 되었다. 당초 1970년에 개최하기로 했으나, 대한민국 정부가 개최권을 반납함에 따라 태국 방콕에서 대신 개최하였다.
이 시기에는 각종 악법들이 시도 때도 없이 만들어졌다. 정치풍토쇄신특별조치법, 제3자개입금지법 등이 제정되어 정적이었던 정치인사들과 무고한 국민들을 억압하였으며,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과 명성그룹 파동, 국제그룹 파동 등 권력형 비위/비리 사태까지 줄지어 터졌다. 이런 짓을 자행하는 독재에 맞서야 하는 언론은 보도지침으로 재갈이 물렸다. 이런 상황 속에서 민주화 운동이 계속되는 도중에 결정적으로 1986년 7월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이 터졌으며,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터지게 되었다. 그외에도 수많은 고문과 성고문 등이 발생했다.
1987년 4월 13일, 전두환 대통령은 헌법 중 대통령 간접선거 조항을 사수하겠다는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자, 이제껏 쌓여왔던 국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6월 9일, 이한열 열사가 시위중 최루탄에 피격당하자 6월 10일을 기하여 국민들은 저항권/시민불복종을 진행하고, 항쟁을 시작한다. 결국, 6.29 선언으로 신군부는 국민에게 항복했으며 이는 40여년 지속된 권위주의 정권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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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루탄에 직격당해 쓰러지는 연세대학교 학생 이한열 |
6월 민주 항쟁을 상징하는 사진 "아! 나의 조국"[12] |
오늘 기쁜날 차값은 무료입니다 -가회다방 주인 백- 6.29 선언을 환영하는 소공동 찻집 주인의 메시지 |
6월 민주 항쟁은 대통령 직선제를 비롯한 헌법과 정권의 개혁안을 발표하게 만든 사건이다. 이후 한국 사회에서 민주화와 자유화의 물결이 본격적으로 대두되었고, 훗날 각종 공안사건들은 재심을 받은 뒤 무죄선고를 받게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제정된 대한민국 헌법 9차 개헌안이 현재까지 한국 정치와 법률 운영의 기초가 되고 있다.
이후,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여당인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후보가 36.64%를 득표하며 당선되었다.
2.6. 민주주의의 시대
보수당과 민주당 양당이 번갈아가면서 집권하는 양당 체제의 시대였다.2.6.1. 1988년~1997년
1988 서울 올림픽 주제가 손에 손 잡고 |
1988년에는 1988 서울 올림픽을 개최하여 국제올림픽위원회 회원국 160개국이 참가하게 되었고, 특히 당시 동서냉전으로 갈등과 분쟁을 벌여왔던 미국과 소련, 그리고 서유럽과 동유럽 국가들이 한 자리에 모두 모여서 참가하였다. 이 대회에서 대한민국은 종합 4위를 달성하면서 주최국으로서의 강한 저력을 발휘하였으며 대한민국이 더욱 선진화가 되고 불굴의 신화를 입증하는 한강의 기적과 국력을 전세계에 과시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까지도, 대한민국은 북한과 체제, 국력, 외교적인 측면에서 끊임없이 경쟁을 벌이는 중이었다. 과거에는 공산권의 전폭적 지원을 얻는 북한보다 국력이 열세였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경제성장을 이룩하고, 공산권의 침체나 여러 외교적 성과, 그리고 1988년 서울 올림픽의 유치 등은 대한민국의 저력을 전세계에 조금씩 알리고 과시하는 계기 중의 하나가 되었고, 이렇게 한국인들은 "우리가 북한과의 체제경쟁에서 완전히 이겼다!" 라는 확신을 얻게 되는 자긍심을 갖게 되었다.
실제로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6.25 전쟁 이후 완전히 폐허가 된 서울을 바라보면서 "이 나라가 (대한민국이) 다시 재건하는데는 100년이 넘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라면서 비관적인 예상을 하였다. 하지만, 대한민국 국민들은 열심히 일을 하여 최빈국이었던 대한민국을 완전히 선진국으로 재건하는데 성공하면서 한강의 기적을 일으켰고, 나아가 1988년 서울 올림픽까지 성공적으로 개최하면서 그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가도록 만들었다. 또한, 2020년대에 들어서는 국제기구에서도 대한민국을 선진국으로 인정하게 되면서 더욱 큰 의미가 있게 되었다.
더불어 공산권의 몰락에도 일정 영향을 끼쳤는데, 미국-소련의 대립으로 인해, 서구권과 동구권 국가들은 몇 년 동안 올림픽에서 서로 마주하지 못하다가 서울에서 결국 올림픽에 함께 모여서 참가하였고, 동구권의 국가들은 직접 '서울'을 방문하고 충격을 받았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대한민국이 일본 식민지에서 8.15 광복이 되었지만 6.25 전쟁으로 박살났고, 1950년~1960년쯤에는 거지들이 들끓는 서울이었는데 전혀 딴판으로 변한 것이었다.
게다가 북한은 동구권 국가들에게 "우리는 지상락원이지만 남조선은 거지 천국이다."라는 선전을 해댔기에 공산권의 국가들은 자신들이 알던 사실과 전혀 다른 서울을 목격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동구권 인민들이 공산주의에서 자본주의로 돌아서게 되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이후 1991년에는 남북한이 동시에 유엔에 가입했다. 그리고 1994년, IMF, UN, 세계은행의 통계에서 한국의 1인당 GDP가 1만 달러를 처음으로 넘었다.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보수정당인 신한국당의 김영삼 후보가 41.96%를 득표해 당선되며 정권 재창출에 성공하였다.
1990년대, 마지막 군인 정권 출신으로 여겨지던 노태우 정부와 그 후 문민정부의 시대를 열게 된 김영삼 정부때 민주화와 더불어 고도성장 시대에 누적되어있던 여러가지 어두운 문제점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3당 합당의 정치적 후유증으로 골머리를 썩혔으며 성수대교 붕괴 사고,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등으로 '사고 공화국'이라는 비아냥을 받았다.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의 데뷔로 인해 가요계를 넘어 대한민국의 대중문화의 소비층과 시스템에 큰 변화가 시작되며 이후 현재 정착된 K-POP시스템의 초석이 된다.
1993년에는 대전에서 세계박람회(엑스포)를 개최해 성공적으로 마무리를 하였다.
2.6.2. 1998년~2003년
1999년, 대한민국 대중문화의 파급력을 호칭하는 '한류'라는 단어가 중국의 언론 등에서 먼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한류라는 단어가 대한민국의 대중문화를 거론하는 고유명사로 각인된다.
2000년에는 분단이후 최초로 남북 정상이 만나 6.15 남북공동선언이 성사되었고, 이에 햇볕정책의 효력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이후 김대중 정부 말기인 2002년에는 대한민국과 일본에서 FIFA 월드컵이 동시에 개최되었으며 대한민국은 4위를 달성하면서 아시아 최초로 4강 신화를 이뤄내기도 했다. 그러다가 월드컵 말기인 6월 29일 3,4위전 당시에[13] 제2연평해전이 발생하기도 했으며 같은 해 8월에 부산에서 제14회 아시안 게임이 개최되었다. 이는 같은 해에 같은 나라에서 국제 스포츠 대회를 연속 개최한 역사적인 순간이며 이때 사상 최초로 북한이 공식 참가하여 남북한이 동시 입장하기도 하였다.
2002년 12월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계 정당인 새천년민주당의 노무현 후보가 48.91%를 득표해 당선되며 정권 재창출에 성공하였다.
이듬해 참여정부가 출범한 2003년에 사스 사태로 세계 경제가 약 48조원의 경제 피해를 입었다. 안 그래도 2003년에는 한국이 IMF 외환위기[14]의 후유증이랑 2002년에 발생한 카드대란 사태에 한창 시달릴 때라 사스 피해까지 받아서 그 당시 한국경제는 암울했다.
2.6.3. 2004년~2013년
그러나 경제성장과 민주화로 풍요롭게 살고 있는 신세대들과 과거 가난을 겪으며 자라거나 보수적인 사상에 익숙한 기성세대들간의 세대갈등부터 지역개발의 차이에서 오는 지역갈등같이 사회문제에서 오는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편협한 시각이나 돈이면 다 해결된다는 황금만능주의, 성장을 위한 지나친 경쟁사회로 인해 일어나는 인간소외현상, 지나친 개발로 인한 자연파괴 등 여러 사회 문제가 발생했다.
ペ・ヨンジュンBYJ, Ardent love?! Report Image! |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보수정당인 한나라당의 이명박 후보가 48.67%를 득표하며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2010년 ~ 2011년 K-POP을 중심으로 신한류라는 단어가 등장하였다. 특히 2012년에는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말 그대로 전세계적으로 열풍이 불게 되었고 한국 음악 역사상 처음으로 짧은 기간이었지만 한국 음악이 전세계의 음반 시장을 뒤흔들었다. 중남미,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일부에서 한류가 더욱 확산되었다.
2012 서울 핵안보정상회의 |
경제적으로는 2006년에 IMF, UN, 세계은행의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1인당 GDP가 처음으로 2만 달러를 넘었다. 2011년 1월 14일, 대한민국의 저축은행 중 한 곳인 삼화저축은행이 PF로 인한 부실을 털어내지 못해서 영업정지 처분을 받게 되는 등 다수의 상호저축은행들이 건설사들에게 빌려준 자금을 회수하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2012년 3월 15일엔 한미 FTA가 발효되었다.
2012년 5월 12일부터 8월 12일까지 전라남도 여수시에서 세계박람회를 개최했다.
2013년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보수정당인 새누리당의 박근혜 후보가 51.55%를 득표해 당선되며 정권 재창출에 성공하였다.
2.6.4. 2014년~2019년
2014년에는 인천광역시에서 제17회 아시안 게임을 개최했으며 2018년에는 강원도 평창군에서 동계올림픽이 개최되었다.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
|
2016~2017년 촛불집회 |
2017년 5월 9일, 조기 대선으로 제19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고 기호 1번 더불어민주당의 문재인 후보가 득표율 41.1%로 당선되면서 대한민국 헌정 사상 3번째 정권교체를 이뤄냈다. 이는 대통령 선거 역사상 가장 많은 득표 차이로 당선되었으며, 이전까지는 531만 7,708표 차이를 기록한 17대 대선이었지만, 이번 19대 대선에서 1, 2위간의 득표 차이가 557만 951표를 기록하면서 갱신됐다. 또한 경제적으로는 2017년, IMF, UN, 세계은행 통계 기준 최초로 한국의 1인당 GDP가 3만 달러를 넘었다.
2018년, 참여정부 이래 처음으로 남북 정상들이 만났다. 사진은 2018 제1차 남북정상회담이며, 좌측은 북한 최고지도자 김정은, 우측은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 문재인.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전후 남북관계는 빠르게 발전하였으나, 2019년 2월 북미정상회담과 2020년 6월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 사건 이후 남북관계는 다시 냉각된다.
한편 2019년 후반기에는 조국 전 법무부장관을 둘러싼 논란과 의혹인 조국 사태가 사회를 양분시켰다. 이는 대규모 집회로까지 이어져서 진영별로 각각 조국 전 법무부장관 규탄 집회와 검찰개혁 촛불문화제로 이어졌다.
2.6.5. 2020년~2024년
윤석열 대통령 취임선서 | 한국형 우주발사체 누리호 미션 패치 |
2022년 제20대 대통령 선거에서 보수정당인 국민의힘의 윤석열 후보가 0.73%라는 역대 최소 격차로 당선되었다. 이로써 5년 만에 정권교체가 되며 제6공화국 출범 이후 이어져 오던 보수-진보 정권 10년 주기설은 깨지게 되었다.
2022년 6월 21일, 누리호 발사에 성공하면서 세계 11번째로 스페이스 클럽에 가입하게 되었다.
2024년 12월 3일, 6.29 민주화 선언 이후 처음으로 대통령 윤석열이 비상계엄을 선포하는 헌정 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계엄령과 함께 발표된 포고령에는 국민의 기본권을 위헌적으로 제한하는 내용(언론, 집회, 출판의 자유 등 제한)이 다수 들어가 있었으며, 국회에 헬기가 착륙하고 계엄군이 진입하였다. 그러나 민주화 이전의 비상계엄과 달리 인터넷, SNS 등 대중매체의 발달과 시민들의 성숙한 민주의식, 국회의 신속한 해제 요청 덕에 실질적 권력 변동 없이 사태가 신속히 일단락되었다. 이에 국회에서는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 소추를 가결하였다.
3. 대한민국에서 개최한 주요 국제 행사
- 1960년: 1960년 AFC 아시안컵
- 1986년: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 1988년: 1988 서울 올림픽, 1988 서울 패럴림픽
- 1991년: 제17회 세계스카우트잼버리
- 1993년: 1993 대전 엑스포
- 1997년: 1997 무주·전주 동계 유니버시아드, 부산 동아시아 아시안 게임
- 1999년: 1999 강원 동계 아시안 게임
- 2002년: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 2003년: 2003 대구 하계 유니버시아드
- 2007년: 2007 FIFA U-17 월드컵 대한민국
- 2010년: 2010 G20 서울 정상회의
- 2011년: 2011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
- 2012년: 2012 여수 엑스포, 2012 서울 핵안보정상회의
- 2014년: 2014 인천 아시안 게임, 2014 인천 장애인 아시안 게임
- 2015년: 2015 광주 하계 유니버시아드
- 2017년: 2017 FIFA U-20 월드컵 코리아
- 2018년: 2018 평창 동계올림픽, 2018 평창 동계패럴림픽
- 2019년: 2019 광주 세계수영선수권대회
- 2023년: 제25회 세계스카우트잼버리
- 2024년: 2024 강원 동계청소년올림픽
- 예정
4. 관련 링크
5. 관련 문서
- 한국사
- 대한민국/정치
- 대한민국/경제
- 대한민국 대통령 일람
- 대한민국 임시정부
- 조선인민공화국
- 미군정
- 대한민국 제1공화국
- 대한민국 제2공화국
- 대한민국 제3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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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영상에서는 1945년 8월 15일 8.15 광복, 1950년 6월 25일 6.25 전쟁, 1960년 4월 19일 4.19 혁명, 1970년 새마을운동&경부고속도로, 1980년 5.18 민주화운동, 1987년 6월 항쟁, 1988년 1988 서울 올림픽, 1994년 10월 21일 성수대교 붕괴 사고, 1997년 12월 1997년 외환 위기, 2000년 6월 15일 2000 남북정상회담, 2002년 2002년 한일월드컵, 2008년 2월 10일 숭례문 방화 사건, 2008년 2008년 촛불집회, 2009년 1월 20일 용산4구역 철거현장 화재 사건, 2010년 2010 G20 서울 정상회의, 2011년 7월 6일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2012년 싸이의 강남스타일 열풍 순서대로 등장한다.[2] 자막은 없지만 고화질인 버젼도 있다.[3] 00:20 각계 인사들 중앙청으로
02:15 개회
03:01 이승만 대통령 연설
09:48 맥아더 장군 연설
16:28 하지 장군 연설
20:56 유엔 한국위원단 의장 연설
23:52 주한 미 대사 연설
24:33 폐회
24:45 참석한 내외 귀빈들 퇴장[4] 정부 수립 후 9월 25일 단군기원 연호가 법제화되기 전까지 이승만 행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사용한 대한민국 연호를 사용하였다. 대한민국 연호 사용 경위에 대해서는 해당 문서 참조.[5] 분단의 원인이 이승만인지, 김일성인지, 미국인지, 소련인지는, 입장에 따라서 여려 의견이 대립하고 있다.[6] 6.25 발발전의 38도선은 완전한 경계선이 아니었다.[7] 다만 스위스는 당시에도 공업이나 금융이 발달하였다.[8] 많게는 6만 명이 넘는다. 브루스 커밍스는 8만 명일 수 있다고 말했다.[9] 당시 언론계부터 학계, 교육계를 비롯 한민족문화대백과, 두산백과 등이 망명이라 표현한다. 심지어 이승만 본인도 하야 직전에 학생 대표들과 면담하며 원하는 것이 내가 망명하는 것이냐고 물었다.[10] 내수시장에서 품질을 테스트한 다음 세계시장에 진출하는 단계가 필요한 만큼 최소한 인구는 7000만 명이 넘어야 한다고 여겨졌다.[11] 7월 5일 사망.[12] 보도사진연감 1988년판에는 "쏘지 마시오!"라는 제목으로 기재되어 있다.[13] 터키(현 튀르키예)전[14] 외환위기는 1997년 12월 3일에 채결되어 외환위기 사태가 시작되었고, 2001년 8월 23일에 완전히 끝나 경제주권을 회복하였다.[15] 이 덕분에 1940~50년대 태생이었던 사람들은 전 세계에서 흔치 않게 농업사회, 공업사회, 정보화사회를 모두 겪은 케이스로 불리기도 한다.[16] 대표적으로 2014년 4월 16일 발생한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가 있다. 이 외에도 경주 마우나리조트 붕괴사고, 아산 오피스텔 붕괴사고 등이 있다.[17] 서부전선 포격 사건, DMZ 목함지뢰 매설 사건
02:15 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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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48 맥아더 장군 연설
16:28 하지 장군 연설
20:56 유엔 한국위원단 의장 연설
23:52 주한 미 대사 연설
24:33 폐회
24:45 참석한 내외 귀빈들 퇴장[4] 정부 수립 후 9월 25일 단군기원 연호가 법제화되기 전까지 이승만 행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사용한 대한민국 연호를 사용하였다. 대한민국 연호 사용 경위에 대해서는 해당 문서 참조.[5] 분단의 원인이 이승만인지, 김일성인지, 미국인지, 소련인지는, 입장에 따라서 여려 의견이 대립하고 있다.[6] 6.25 발발전의 38도선은 완전한 경계선이 아니었다.[7] 다만 스위스는 당시에도 공업이나 금융이 발달하였다.[8] 많게는 6만 명이 넘는다. 브루스 커밍스는 8만 명일 수 있다고 말했다.[9] 당시 언론계부터 학계, 교육계를 비롯 한민족문화대백과, 두산백과 등이 망명이라 표현한다. 심지어 이승만 본인도 하야 직전에 학생 대표들과 면담하며 원하는 것이 내가 망명하는 것이냐고 물었다.[10] 내수시장에서 품질을 테스트한 다음 세계시장에 진출하는 단계가 필요한 만큼 최소한 인구는 7000만 명이 넘어야 한다고 여겨졌다.[11] 7월 5일 사망.[12] 보도사진연감 1988년판에는 "쏘지 마시오!"라는 제목으로 기재되어 있다.[13] 터키(현 튀르키예)전[14] 외환위기는 1997년 12월 3일에 채결되어 외환위기 사태가 시작되었고, 2001년 8월 23일에 완전히 끝나 경제주권을 회복하였다.[15] 이 덕분에 1940~50년대 태생이었던 사람들은 전 세계에서 흔치 않게 농업사회, 공업사회, 정보화사회를 모두 겪은 케이스로 불리기도 한다.[16] 대표적으로 2014년 4월 16일 발생한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가 있다. 이 외에도 경주 마우나리조트 붕괴사고, 아산 오피스텔 붕괴사고 등이 있다.[17] 서부전선 포격 사건, DMZ 목함지뢰 매설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