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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00d45,#94153e><colcolor=#f0ad73> 조선 개국공신 청해백(青海伯) 양렬공(襄烈公) 이지란 李之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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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331년(충혜왕 1) |
쌍성총관부 삼살 건주여진 거촌[1] (現 함경남도 북청군) | |
사망 | 1402년 5월 19일[2] (음력 태종 2년 4월 9일) |
함경도 함흥부 (現 함경남도 함흥시) | |
묘소 | 함경도 북청부 |
봉호 | 청해군(青海君)1392년(태조 1) 청해백(青海伯)추증 |
시호 | 양렬(襄烈) |
본관 | 사성 전주 이씨 → 청해 이씨 |
이름 | 퉁[佟] 쿠룬투란티무르[古倫豆蘭帖木兒] 퉁두란이상 여진 이름 이두란고려[3] 이지란조선 |
자 | 식형(式馨)불명 |
종교 | 불교 |
가족 | 아버지 아라부카[阿羅不花] 첫 번째 부인 혜안택주(惠安宅主) 함안 윤씨(尹氏) 두 번째 부인 군부인(君夫人) 곡산 강씨(康氏) 자녀 4남[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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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여말선초에 활약했던 장군이자 조선의 개국공신. 이성계의 의형제이자 심복이었으며 개국공신들 중에서 가장 많은 토지를 하사받은 전쟁 영웅.2. 생애
원래 북청 지역에서 활동하던 여진족 족장이자 몽골의 금패천호인 아라부카(阿羅不花)[5]의 아들로 아버지의 벼슬을 이어받아 천호(千戶)가 되었다.1371년 휘하의 1백 호를 거느리고 고려 조정에 귀순하여 이성계의 휘하에 들어갔다. 이지란은 이성계를 처음 만났을 때 사냥한 사슴을 가지고 다투다가 서로에게 활을 쏘는 대결을 했는데 이성계가 이지란의 화살을 모두 피하는 신기를 보였다고 한다. 이에 이지란은 스스로 패배를 인정하고 이성계의 의형제가 될 것을 자처하였다.[6] 또한 이지란이 이성계 보다 4살 많은데 동생이 되었다.
1380년 의형 이성계를 따라 왜구 토벌에 나서 지리산 근교의 운봉(雲峯)[7]에서 왜적장인 아지발도를 제거해 전승을 올렸다. 활 솜씨는 확실히 이성계 못지 않아서 황산대첩에서 고려군을 괴롭힌 왜구 대장 아지발도의 숨통을 끊은 것도 바로 이지란이다. 이성계가 아지발도의 투구 끈을 맞춰서 아지발도의 투구를 벗기자 곧바로 화살을 쏴서 아지발도의 얼굴에 명중시켰다고 한다. 황산대첩에서는 달려드는 왜군을 이성계가 미처 보지 못하자 이지란이 2번이나 위험하다고 부르짖은 다음 바로 활을 쏘아 거꾸려뜨렸다는 기록이 있다.[8]
1383년 7월, 요심(遼瀋)의 초적 40여 기가 단주(端州)[9]로 쳐들어왔는데, 북청의 천호인 이지란, 단주의 만호(萬戶)인 육려(陸麗), 청주의 만호(萬戶)인 황희석(黃希碩) 등이 함께 이들에 맞서 서주위(西州衛), 해양(海陽)[10] 등에서 우두머리 6인의 목을 베며 승리한다. 적의 침입 경로와 마지막 결전지 및 참여한 이들의 신분을 보면 당시 고려는 외부의 침략자에 의해 전 국토가 유린당하는 형편이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1383년 8월, 호바투(胡拔都)가 단주로 거듭 침략해 들어왔는데, 부만호(副萬戶) 김토부카(金同不花)가 내응하는 바람에 고려군이 패했다. 당시 이지란은 어머니가 사망하여 고향 북청에서 상을 치르고 있었는데, 이성계의 부름으로 상복을 벗고 종군하였다고 한다.
1385년 함흥(咸興) 토아동(兎兒洞)[11]에 쳐들어온 왜구를 이성계와 함께 나아가 격퇴하여 공로를 인정받아 선력좌명공신(宣力佐命功臣)의 칭호를 받고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었다. 이후 이성계와 함께 전장을 누비다가, 1388년 위화도 회군 이후 상의동지밀직사사(商議同知密直司事) 회의도감사(會議都監事)가 되었고, 창왕 때에는 지밀직사사를 맡았다.[12] 이성계를 따라 전쟁터에 동행하면서 전공을 세워 공양왕 시절 지문하부사 판도평의사사 벼슬을 받았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된 이후 1등 개국공신에 책록되고 청해군(青海君)에 봉해졌다.[13] 이후에는 경상절도사가 되어 왜구의 침략을 막아냈고, 이어 동북면도안무사가 되어 고향인 북청을 돌보았다. 그의 건의로 조선에서는 적극적으로 조선인과 여진족의 결혼을 장려하는 정책을 펼치기도 하였다.
1398년 1차 왕자의 난과 1400년 2차 왕자의 난에서는 조카 이방원을 도왔다.[14][15] (정종 3권, 2년(1400년 경진/명 건문(建文) 2년) 1월 28일(갑오) 3번째 기사) 그래서 정사공신과 좌명공신에 이지란의 이름이 올라와 있다. 이후 이성계가 양위하고 함흥으로 갈 때 함께 함경도로 갔으며, <연려실기술>의 기록에 따르면 말년에는 살생을 많이 한 것을 참회하는 의미로 불교에 귀의하고 승려가 되어 은둔했다고 전한다. 태조의 심장에 대못을 박은 태종의 편에서 싸운 것 때문에 태조에게 매우 미안해했다고 한다.
1402년 세상을 떠났는데, 시신을 여진족의 풍습에 따라 화장해서 고향인 북청에 묻어달라고 유언하여 사망 후 북청부에 묻혔다. 현재도 이지란의 묘는 함경남도 북청군에 있다.[16] 이후 태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3. 가족
- 부인
- 혜안택주 함안 윤씨: 원래 판서 김세덕(金世德)의 부인이었는데 남편이 죽자 한동안 재혼하지 않고 연애만 하고 살다가 나중에 부모가 서의(徐義)라는 사람과 재혼시켰다. 그런데 윤씨가 서의를 싫어하여 며칠 만에 집안에서 쫓아내는 바람에 사헌부로부터 탄핵 및 연금 조치를 당하게 되었다. 사건을 무마시키기 위해 윤씨가 당시 권력자였던 이인임에게 뇌물을 주자 이인임은 사건을 무마시키는 대신 이지란과의 재혼을 주선해주었다.
- 곡산 강씨: 이성계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조카딸인데 정작 이지란은 신덕왕후의 정적인 이방원 편에 가담했다는 게 아이러니. 사실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 시점에서 신덕왕후 강씨는 이미 사망한 뒤였고, 그 강씨의 이종조카인 신극례와 그 누이는 아예 대놓고 이방원파였다.[17] 자식은 태종실록에 따르면 3명이고 실제로는 4명인데 모두 곡산 강씨 소생으로 되어 있다.
- 아들들
- 이화상: 공조 전서를 지냈다. 이지란 신도비에는 아들 4명 중 둘째 순서에 올라있다.
- 이화영(李和英, ? ~ 1424): 여진 이름은 역리불화(亦里不花)이며 삼산천호이기도 했다. 18세에 낭장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하여 약관부터 이성계를 따라서 개국원종공신이 되었으며, 이후 사복정 등을 거쳐 태조 7년에는 상장군, 태종 1년에는 예조 전서에 이르게 된다. 그러다가 다음 해인 태종 2년에 아버지인 이지란이 사망하여 동북면에서 상을 치르던 중 조사의의 난이 일어났는데, 이 때 상을 중지하고 동생인 이화미를 포함한 가족들과 더불어 동북면을 벗어나 태종 측에 합류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때문인지 그 직후 좌군동지총제에 임명되는 것에 이어 태종 6년 2월에는 임오년 2등 공신이 되었고, 이어서 삼군부의 도총제부터 판도총제부사에 이르는 무관직을 중심으로 지의정부사, 의정부 참찬 등을 두루 지내게 되는데, 여기에 더 나아가서 동북면에서 천호들이 사사로이 사람을 부리는 것을 금하는 와중에도 공신인 아버지와 더불어 공이 있다는 이유로 그만이 거의 유일하게 본래 부리던 이들을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는 권한까지 갖기에 이르게 된다. 이지란 신도비에는 아들 4명 중 첫째 순서에 올라있다.
- 이화미(李和美, ? ~ 1414): 상호군, 첨총제 등을 지냈다.
- 이화수(李和秀)
4. 여담
이지란 초상화.[18] | 초상화 촬영본 추정 |
- 이성계의 최측근으로 활약한 뛰어난 무장이었던데다 여진족 출신이라는 점 때문인지 사극에서는 한 덩치하는 털보 아저씨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으나 실제 기록에는 이지란의 모습이 여자처럼 단정하고 예쁜 용모였다고 묘사되어 있다. 실록에 기골이 장대하고 풍채있는 전형적인 보스 체형으로 묘사되는 이성계와 묘한 대비를 이룬다. 실제로 남아있는 이지란의 초상화를 보면 통통하고 얼굴이 동글동글한데 당시 최고 미인으로 여겨졌을 원나라 황후들의 초상을 보면 이지란과 비슷하게 통통하고 얼굴이 동글동글한 것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이지란의 초상화는 어디까지나 노년의 것임을 기억해야 하는데 청년 시절의 외모를 노년까지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꽤나 '고운 느낌'을 주는 것은 사실. 다만, 현대 아이돌상 미소년 이미지라기 보다는 거친 야외에서 야전 장수 활동을 오랜 시간 했음에도 피부가 맑고 희었다는 느낌으로 이해하는게 맞다. 이 사실이 알려지기 전까지 과거 드라마에 나온 이지란은 전형적인 호걸상으로 삼국지의 장비 같은 이미지였다면[19] 근래에 묘사되는 이지란은 굉장히 샤프하고 미중년으로 나오곤 한다.[20]
- 이성계의 의동생으로 알려져 있는게 일반적이나 실제로는 이지란이 이성계보다 연상이라 정확히는 의형이라고 봐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나이가 적어도 지위가 높거나 인품이 뛰어난 사람이 의형이 되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21] 이성계가 이지란의 의형이라고 해서 이상할 것도 없다. 이성계가 이지란의 성을 따른 것이 아니라 이지란이 이성계의 성을 따랐다는 점에서 서열관계가 어디에 있었는지는 잘 보인다. 조선 건국 과정에서 이성계를 많이 도와주었기 때문에 조선 후기까지도 왕들이 사당에 제사를 지내는 일이 있었다. 이방원과도 친했는데 태종이 이지란의 이름을 팔아먹는 바람에 이성계가 말년에 골머리를 앓았다고 한다. 이방원이 정몽주를 죽일 계획을 세우고 이를 집안의 형들과 이지란에게 알렸는데 당시 이성계는 딱히 정몽주를 죽일 생각은 없었고 이지란 역시 "어르신(이성계)께서 반대하시는 일을 할 수는 없다"면서 이방원이 끈질기게 설득했어도 끝내 일에 참여하지 않았다. 확실히 이성계의 심복이라고 부를만한 인물.
- 이지란의 여진족 사촌(육촌을 넘어가는 종형제라는 설도 있다.)의 후손이 청나라의 전신인 후금을 건국한 누르하치라고 한다. 정확히는 이지란은 여진족 중에서도 건주 여진 출신인데 종형제 중 하나가 같은 부족의 아이신기오로 먼터무. 그의 6대손이 누르하치이다.
- 조선이 멸망한 뒤인 일제강점기에 독립군의 군가인 용진가의 가사에서 '여진국을 토멸하고 개국'한 인물로 언급된다.[22] 본인이 여진족 출신인 것은 함정. 물론 여말선초의 여진족은 부족별로 분열된 상태고 이성계 밑에서 다른 여진족과 동북면에서 싸운 적이 있으니 틀린 말은 아니다. 훗날 여진족을 재통일한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조차도 엄밀히 말하자면 아이신기오로 씨족에 적대적인 다른 여진족들을 죽이거나 굴복시키는 과정을 통해 여진족을 통일했으니...[23]
- 조선 후기 《화원악보》(花源樂譜)란 시집에 이지란이 남긴 것으로 전해진 시조가 기록되어있다.초산(楚山) 우는 호(虎)와 패택(沛澤)에 잠긴 용(龍)이토운생풍(吐雲生風)하여 기세(氣勢)도 장(壯)할시고
진(秦)나라 외로운 사슴은 갈 곳 몰라 하노라
- 조선 중기의 문인 홍만종(洪萬宗)의 《순오지》(旬五志)에는 야사가 실려있다. 길에서 물동이를 이고 가는 여자를 이성계가 철환으로 구멍을 뚫었으나 이지란이 바로 조그만 진흙을 뭉치게 한 뒤 던져 물이 흘러나오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역시 순오지에 따르면, 은근히 이성계를 해하고 싶었던 이지란이 밤에 뒷간에 있는 이성계에게 활을 3발 쏘았고 이성계가 죽었을 것으로 예측했다. 허나, 이성계는 나온 뒤 화살을 돌려주었고 이후 이러한 일이 생기지 않았다고 한다.
- '이지란'은 조선 귀화 이후 개명한 이름이고, 여진족 시절의 성은 퉁(佟), 이름은 쿠룬투란티무르(古倫豆蘭帖木兒)[24]로서 보통 '퉁두란'으로 불렸다. 이름은 그대로 두고 태조의 의형제가 된 후 성씨를 사성받아 이씨 성을 붙여서 '이두란'으로도 불리기도 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지란과 이두란이라는 이름이 섞여서 기록되어 있고, <용비어천가>[25]에는 "고론투란터물"이라 표기되어 있다.
- 청해 이씨의 시조다. 청해 이씨 족보에 따르면 남송의 명장 악비(1103 ~ 1142)가 간신 진회의 참소로 죽게 되자 악비의 5남 악정(岳霆)이 화를 피해 북쪽으로 올라가 여진족 행세를 하게 되었으며 이지란은 악비의 7대손이 된다. 이러한 이유로 한중 수교 이후 청해 이씨 문중은 중국에 있는 악왕 묘에 참배하러 가는 등 정기적으로 중국 쪽 악씨 문중과 교류 활동을 하고 있다. 사실 한 국가의 지배층이 적국에 귀화하는 사례가 없지는 않지만 옛날 사람들은 온갖 가문을 주장하고 다닌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신뢰성은 알 수 없다.[26]
- 이성계의 의형제답게 무력이 강대한 용장으로 <용비어천가>에 따르면 이성계가 이지란을 가리켜 "이두란의 말 달리고 사냥하는 재주야 그만한 사람도 있기는 하겠지만 싸움에 임해 적군을 무찌르는 데는 이두란보다 나은 사람이 없다."고 평가한 대목이 있을 정도.
- 나름대로 신중하고 사려가 있는 성품이었던지 이지란의 비문인 이지란 신도비에 따르면 고려 우왕이 서쪽으로 사냥을 나왔을 때 이성계가 나서서 활을 쏘아 한 발에 과녁을 맞히자 우왕이 기뻐하였으나 이지란은 "뛰어난 재주를 어찌하여 남에게 많이 보이십니까."라며 넌지시 꼬집었고 이성계가 반성하면서 이지란의 지혜에 감탄했다고 한다. 이인임을 비롯해 중앙 정계의 경계를 받았던 이성계인 만큼 굳이 재주를 과시해 꼬투리를 잡힐 일은 하지 않는게 좋겠다는 의미였던 것으로 보인다.
5. 대중매체
- 1996년 KBS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는 배우 강인덕[28]이 연기했다. 용맹하고 우직한 이성계의 심복 장수로 등장하는데 위화도 회군 직전 이성계가 있는 막사로 달려 들어와 "채비를 마쳤습니다. 이제 고려의 관복을 벗어던질 때입니다!"라는 첫 대사로 회군의 시작을 알렸다. 이방원을 가장 좋아하는 인물 중 한 명이며,[29] 부모님과 동복형제에 대해선 효자 그 자체인 이방원도 이성계의 의동생인 이지란에게는 숙부님으로 칭하며 늘 예의바르게 행했다. 왕자의 난 와중에 부자간, 형제들간의 분란을 막으려[30][31][32] 동분서주하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2차 왕자의 난 이후 벼슬을 버리고 불가에 귀의하여 말년을 보내는 것으로 나온다. 떠나기 전 이성계에게 하직하는 편지로 "이제 그만 방원이를 용서해 주시라"는 말을 남기고 이성계는 "나를 두고 어디를 간다는 말인가, 이런 못돼먹은 사람 같으니..."라며 씁쓸해한다. 이성계와는 젊은 시절부터 함께한 우애 돈독한 의형제이자 동지로 이성계보다 나이가 많으나 이성계를 형님으로 모시는 것으로 묘사된다.[33] 그래서인지 이성계도 이지란에게 "아우님"이라고 반존칭을 쓰고 사적으로 있을 때는 이지란이 "형님 전하"라는 정체 불명의 표현을 쓴다.[34] 제91화에서 함흥에 있으며 이방원을 타도하기 위해 벼르던 이성계에게 이지란이 산의 암저에 머물다가 좌선 상태로 죽어서 발견됐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이성계는 "이지란 같은 명장이 그렇게 허망하게 죽을 수 있냐"면서 비통해하고[35] "이방원만 아니었으면 자기 곁을 떠나 그렇게 산 속에서 혼자 쓸쓸하게 죽었을리 없다" 라며 더욱 노여워하게 된다.[36] 6년이 지나 이성계가 세상을 떠나기 전 꾼 꿈에 나타나 반갑게 맞이하자 이성계가 놀라고 반가워하며 "오오, 아우님 아니신가!?"라고 말한다.
<정도전>에서의 이지란(선동혁) | <육룡이 나르샤>에서의 이지란(박해수) | <태종 이방원>에서의 이지란(선동혁) |
- 2014년 KBS 드라마 <정도전>에서는 배우 선동혁[38]이 연기했다. 이성계의 심복 장수이자 의형제로 등장하는데 경계인이라는 설정을 강조해서 함경도 출신인 성님 이성계처럼 이지란이 여진족 출신이라는 캐릭터성을 강조하기 위해 동북 방언을 구사한다.[39] 용맹하고 우직하지만 한편으로는 은근히 깐족대고 익살스러운 면이 있는 개그 캐릭터로 이성계와 같이 있으면 둘이서 1편의 시트콤을 찍는 등 약방의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이지란(정도전) 문서 참조.
- 2015년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배우 박해수[40]가 연기했다. 예쁘장한 외모의 소유자라는 사료의 기록이 어느 정도 반영된 듯 종래의 경우와는 다르게 샤프한 외모인데 극 중 이미지는 누가 봐도 천생 장수이다. 대사가 사투리인데도 긴 방영 기간 동안 잘 소화해냈다.
- 2021년 KBS 드라마 <태종 이방원>에서는 <정도전>에서 이지란을 연기한 배우 선동혁이 다시 연기했다. 여기서는 장남 이화상(태항호 분)도 등장하는데 <정도전> 때와 마찬가지로 감초 캐릭터 역할을 한다. 이지란(태종 이방원) 문서 참조.
[1] 조선 건국 이후 함경도 북청부가 된다. 당시 그의 생가는 북청부 뿐만이 아니라 조선 온성부 유포면에도 있었다.[2] 율리우스력 5월 10일[3] 고려사에 나타나는 이름.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고려 왕조에서 있었던 사건을 서술할 때는 이두란으로, 조선 건국 이후에는 이지란으로 되어있다.[4] 태종실록에 따르면 3남[5] 조선 정조 시대에 세워진 이지란 신도비에는 아원(雅遠)이라 적혀 있다.[6] 공민왕과 우왕 시기에, 이지란은 이성계와 의형제가 되었는데, 이들의 의형제가 되는 관계가 명확하지 않다. 몽골식 의형제인 '안다(Анда)' 관계라는 설도 있고 단순 나이를 감안한 형과 아우의 맺음이었다는 말도 있으나 의형제가 된 과정에 대한 명확한 과정이나 전승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이지란 신도비에는 단순히 형제의 의를 맺었다고만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어쨌든 이후부터 이지란은 이성계의 성인 이씨 성을 따랐다.[7] 전라북도 남원시와 경상남도 함양군 사이로 비정하고 있다.[8] 이 때 이지란이 이성계에게 "뒤를 보시오! 뒤를 보시오!"라고 2번이나 다급히 외칠 정도로 급박한 상황이었다. 사실 기록이 한문으로 돼서 그렇지, 급한 상황에 긴 문장을 말했을지도 미지수다. 뒤! 뒤! 이렇게 말했을 수도 있으나 공문서에 형님에게 반말로 적을 수도 없는 셈.[9] 복주(福州) 혹은 미림금촌(美林金村)라고 불렸던 곳으로 현재의 함경남도 단천시를 말한다.[10] 현재의 길주군.[11] 함주.[12] 위의 기전체 서술은 <고려사> 및 <용비어천가> 참고.[13] 청해는 북청의 별칭이다.[14] 단, 1차 왕자의 난의 경우에는 정황상 이름을 도용당했을 가능성도 있다. 다른 케이스지만 한 것도 없는 조준과 김사형도 1등 공신이다.[15] 다만 조준과 김사형도 비록 1차 왕자의 난에서 한 일은 없어도 이전부터 꾸준히 이방원을 지지해오던 이들이었던 만큼 이지란도 1차 왕자의 난에서는 한 게 없어도 그전부터 이방원을 지지했다고 해도 이상할 일은 아니다. 거기다 신의왕후 소생 아들들은 예전부터 함경도에서 활동해온 처지라 이성계의 아들이라고 하면 곧 신의왕후의 아들들이라고 여겼을 테니 함경도에서부터 이성계를 섬겨왔던 이들은 대부분 잘 알지도 못하는 개경 출신 신덕왕후 소생 아들들보다는 함경도 출신인 신의왕후 소생 아들들을 은근히 지지해왔다.[16] 태종 3권, 2년(1402년 임오/명 건문(建文) 4년) 4월 9일(신유) 3번째 기사 청해군 이지란의 졸기.[17] 지지한 정도가 아니라 신극례는 아예 무인정사의 핵심 멤버로 병력을 지휘했다.[18] 현 용인 경기도박물관 소장. 이지란을 모시던 포천의 청해사(靑海祠)에 있던 초상화로 당대의 그림인지는 미상이다.[19] 조선왕조 500년의 국정환, 용의 눈물의 강인덕, 정도전의 선동혁이 대표적인 예.[20] 대풍수의 김구택과 육룡이 나르샤의 박해수가 대표적인 예.[21] 삼국지의 등장인물 유비도 사실 관우보다 연하였다는 말이 있다.[22] 이성계를 가사에 넣기에는 건국 시조의 이름을 함부로 올리기 뭐해서 개국공신 이지란을 가사에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23] 칭기즈 칸 역시 비슷한 과정을 거쳐 몽골 초원의 칸이 되었다.[24] 투란은 여진어로 쌍둥이, 티무르는 중세 몽골어로 철을 뜻하는 말인 테무르의 다른 말이다.[25] 권7, 53장[26] 그 악비가 맞써 싸운 상대가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이니 더더욱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원숭환의 아들로 아버지가 처형된 후 후금으로 도망쳐 한인팔기가 되어 명나라를 공격한 원문필의 경우 등을 보면 사실일 가능성도 없진 않다. 사실이라 보는 쪽이든 거짓이라 보는 쪽이든 이렇다할 객관적 증거는 없는 상태.[27] 1983년 KBS 드라마 <전우>에서는 주인공인 소대장 역.[28] 2000년 KBS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유금필 역.[29] 작중 역할 속 김무생이 이성계는 이방원이 자신을 너무 빼닮아 싫어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이지란 역시 그가 이성계와 제일 빼닮았다고 말하며 가장 마음에 들어 했다.[30] 이방원이 정몽주를 죽였다는 것을 알고 분노한 이성계가 이지란을 시켜 이방원을 죽이라고 하는데 몰래 사람을 보내 이방원에게 피신하도록 일러주었다. 1차 왕자의 난으로 이방석과 이방번이 죽고 이방과에게 양위한 뒤 문안하러 편전에 정종과 중전, 이방원 부부가 함께 찾아오자 이방원을 보고 "황천에서 온 죽은 귀신" 취급하면서 "그 백정놈 내외가 따라붙었어!"라며 4명 모두 만나지 않으려는 이성계를 극구 말리면서 이방원을 편전으로 들이기도 한다.[31] 2차 왕자의 난에서도 이방간이 잡혀간 뒤 이방원을 향해 "자네들은 그래도 형제다. 이것만큼은 꼭 내가 말해야겠다"며 우애를 강조하며 물러난다.[32] 1차 왕자의 난 때도 크게 이방원을 부정하지 않으며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느낌을 보여주기도 했다. 다만 정도전, 세자, 무안군 등을 모두 죽인 후에는 그렇게 피를 많이 봐야 했냐며 화를 내기도 했지만. 이방원이 자객에 의해 죽을 뻔한 후 누워 있었을 때에도 이성계와 똑 닮았다고 한 뒤에는 피를 보면 안 된다고 당부했다.[33] 다만 이성계 역을 맡은 김무생이 이지란 역의 강인덕보다 9살이나 연상인지라 이런 설정과 별개로 진짜로 한참 형님처럼 보인다. 용의 눈물이 첫 방영하던 당시 김무생은 56세로, 실제 이성계가 즉위하던 당시 56세와 같은 나이였기에 싱크로율이 높은 반면(첫화이던 위화도 회군 당시 53세), 강인덕은 당시 40대 후반이라 설정에 비해 상당히 젊은 외모이다.[34] 같은 작가가 시나리오를 담당한 후속작 <태조 왕건>에서는 왕건의 심복이자 의형제 설정으로 유금필(강인덕), 신숭겸(김형일)이 '형님 폐하'라는 표현을 써서 오마주됐다.[35] 그 전에도 함흥에 머무르면서 이지란이 떠돌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이지란을 찾으라고 부하들에게 명한다. "권력에 눈이 멀어 서로 피 튀기며 싸워대기나 하는 자식 놈들 따위보다 훨씬 의지가 되는 소중한 가족"이라고 말한다.[36] 이방원 역시 박석명에게 이 소식을 듣고는 "그래서 아버님께서 과인을 더 미워하시는거"라며 죄책감을 감추지 못한다.[37] 영화 범죄도시에서 곽국태 역을 연기했다.[38] 현대 미남상과는 거리가 있으나 초상화와 싱크로율이 높다. 1996년 KBS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는 이숙번 역. <용의 눈물>에서 이방원을 연기했던 배우 유동근이 이성계로 출연하면서 배우개그가 탄생하는데 이지란이 이숙번을 보고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드립을 친다.[39] 실제로는 지금의 동북 방언은 조선 시대에 하삼도 백성들을 대규모로 사민시킨 이후에 생겨난 것이기에 이지란과 이성계가 이런 악센트를 썼을 가능성은 없다. 이후 작에서의 이지란도 동북 방언을 쓰면서 이지란의 동북 방언 캐릭터 속성을 추가시킨 셈.[40] 2012년 MBC 드라마 <무신>에서는 김윤후 역, 2021년 오징어 게임에서 조상우 역을 맡았다. 실존 인물에 비해 나이가 굉장히 어리다. 해당 시점에서 이지란은 50대 ~ 60대 정도인데, 배우는 무려 30대 중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