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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02:02:56

허생전

허생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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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줄거리3. 작품 외적인 내용4. 시대적 한계5. 패러디6. 리메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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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연암 박지원의 소설. 그의 대표작으로 유명하다. 조선 후기에 연암 박지원이 당시 조선의 현실을 풍자하기 위해 한문으로 쓴 풍자 소설로, 2024년 현재 고등학교,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는 허생전이 현대 한국어로 번역되어서 수록되어 있다.

원래는 열하일기 안에 있는 《옥갑야화(玉匣夜話)》에 나오는 이야기였다. 박지원과 비장[1]들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박지원 자신이 윤영(尹映)에게서 들은 변승업[2]의 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와 허생에 있던 이야기를 펼친 것이, 바로 허생전의 내용이다.
김혈조 교수가 번역한 열하일기 3편 300페이지에 허생전 후기가 나온다. 허생전의 후기에 윤영에 대한 자세한 글이 나오는데, 박지원이 스무살에 머문 절에서 만난 노인이 바로 윤영이었으며, 그곳에서 허생의 이야기를 듣고 전기를 짓겠다 그에게 약속했다. 그로부터 수년이 지나고, 박지원이 다른 절에서 그 노인을 만났을 때, 노인은 자신이 윤영이 아니라, 신색(辛嗇)이라고 말했으며, 왜 이름을 바꾸었느냐는 말에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오히려 화를 냈다고 기록했다. 박지원이 문을 닫고 나올 때, 노인이 안에서 중얼거리길,
"애처롭게 되었구나. 허생의 아내는 필경 또 다시 굶주리게 되었을 터이지."

참고로, 《북학의》를 쓴 박제가압록강 동쪽에서 손에 꼽을 만한 문자라고 칭찬한 바 있다.

또한 로버트 그린(Robert Greene)의 권력의 법칙에서도 날개 부분에 수록되어 있다. 한국어판과 영문판 배치 순서가 다르니 찾아보려고 할 경우에는 주의해서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3]

2. 줄거리

한국고전종합 데이터베이스 원문(옥갑야화)
주인공인 허생은 가난한 형편에도 10년 글 읽기를 기약하며 매일 글을 읽고 있었는데 7년째 되는 어느 날 아내가 허생에게 내가 당신 다 먹여살리는 건 아시냐, 선비 일도 장인 일도 장사도 못 하면 차라리 도둑질이라도 해서 돈을 벌어 오라고 하소연한다. 허생은 아내의 절절한 말에 글 읽기를 멈추고 집 문 밖으로 뛰쳐나간다.[4]

허생은 한양에서 제일 갑부라는 변씨를 찾아가 당당하게 1만 이라는 거금을 빌려달라고 하는데, 변씨는 허생의 행색은 거지지만 눈빛과 말투가 예사롭지 않은 것에 흥미를 느껴 이름도 안 묻고 1만 냥을 내준다. 허생은 그 돈으로 바로 안성시장에 가서 과일을 싹쓸이해서 10배의 폭리를 취하고 제주도로 가서 말총을 다 싹쓸이해서 망건 값을 10배로 올려 처음 꿨던 돈의 100배로 불린다. 이때 떼돈을 벌어 기쁘지 않냐는 시종에 말에 오히려 "1만 냥만 가지면 팔도를 뒤흔들 수 있으니 심히 한탄스럽도다!" 라면서 원시적이고 전혀 발전하지 못한 조선의 경제체계에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 뒤 변산에서 들끓는 도적 떼를 회유하여 살기 좋다는 무인도[5]로 데려가서 새 삶을 살게 하고 나가사키(장기, 長崎)의 기근을 도와주면서 은 백만 냥을 벌게 되었다. 그러나 땅이 좁은 것에 한탄하면서 돌아가기로 마음먹으며 섬에 드나드는 배를 모조리 불태우고 바다에 50만 냥을 그냥 버린다. 그리고 섬에 있는 사람 중에 글을 아는 자들을 골라내어서 배에 태워 함께 조선으로 돌아왔다.

허생은 조선을 돌아다니며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고 그러고도 남은 10만 냥은 몽땅 변씨에게 갚는다. 변씨는 깜짝 놀라 허생에게 절까지 하며 이자를 1할(10%)로 쳐서 11,000냥만 받겠다고 하지만 허생은 자신이 장사치로 보이냐며 화를 내고 거절한다. 대신 변씨가 몸소 허생의 집에 종종 찾아가 양식과 옷을 필요한 만큼만 챙겨주는 것으로 허생은 만족한다. 이후 3년 넘게 허생과 친분을 쌓은 변씨로부터 허생 이야기를 듣고 어영청이완 대장이 깜짝 놀라 허생을 찾아간다. 이완이 정중히 청나라를 꺾을 방법을 묻자 허생은 세 가지 답[6]을 내놓았는데, 이완이 모두 어렵다고만 했다. 그러자 허생이 이완을 꾸짖으면서 로 찌르려고 위협했고 놀란 이완 대장은 뒷문으로 도망갔다. 그 다음 날 이완이 다시 찾아가 봤지만, 허생은 이미 사라져 그 행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3. 작품 외적인 내용

본 작품이 다루는 당시의 사회상은 다음과 같다.

4. 시대적 한계

5. 패러디

내용이 짧고 주제와 전개가 굉장히 명료하기 때문에 패러디가 쉬워, 인터넷을 타고 수많은 패러디를 양산했다. 무언가가 화제가 된다면 거의 한 번씩은 허생전으로 패러디가 된다.

또다른 패러디의 집결점은 윤오영의 수필 방망이 깎던 노인. 이쪽은 수필이라 허생전에 비해 좀 더 담백한 맛이 난다. 둘 다 단어만 바꾸면 훌륭한 패러디가 완성되는 마법의 문장들.

6. 리메이크

채만식의 소설. 박지원이 쓴 허생전의 리메이크작으로 1946년작이다.
허생(許生)은 부인의 성화에 못 이겨 집을 나가 변 진사에게 돈 만 냥을 빌려 안정성의 과일을 매점(買占)하여 석 달만에 열 배의 이익을 남긴다. 허생이 쌀을 매점하라는 강 선달의 권유를 물리친 후 도적들이 돈을 훔치러 온다. 허생은 도적들을 굴복시켜 새 달 보름까지 강경(江景) 장터로 모이라 하고 돈을 주어 돌려 보낸다. 허생은 변 진사에게 이만 냥을 갚고, 강경 장터에서 물건을 사들이고, 조직을 갖추어 사천여 명의 사람들을 배에 싣고 강경을 떠난다. 허생은 제주(濟州) 목사의 횡포를 듣고 그를 제주에서 떠나게 하고 삼 년 동안 제주에 낙천지를 이룬 후 제주를 떠난다. 변 진사가 이완(李浣)을 데려 오자, 허생은 이완에게 장기적인 북벌(北伐) 계획을 제시한 후 사라진다.
박지원(朴趾源)의 "허생전"과 이광수(李光洙)의 "허생전", 그리고 설화로 전해지는 이야기를 참고하여 집필한 소설이다. 사건이나 인물 설정에서 현실성과 구체성을 중시하여 일부 요소가 바뀌어 있다.
채만식과 이광수 이외에도 오영진도 박지원의 허생전을 기반으로 하여 리메이크한 희곡을 만들었고, 이외에도 최시한의 '허생전을 배우는 시간', 이남희의 '허생의 처' 등 허생전은 현대의 문인들이 현대적인 시각으로 재해석해 만든 작품들이 제법 많은 편이다.
[1] 비장이라고 함은 오늘날의 호위 무사 내지는 수행 비서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애초에 박지원부터가 사신단 총책임자였던 정사 박명원(박지원의 8촌형이다.)의 수행원격으로 동행했다.[2] 참고로 실제 인물희빈 장씨의 외외재당숙(외할머니 초계 변씨의 당조카다.)이자 사돈(육촌형부 변이창의 아버지다.)인 역관이었고 중국을 오가면서 사무역으로 치부를 해 거부가 된 인물이다. 허생전의 거부 변씨의 모델로 작품 안에서는 변씨의 윗대 조상으로 나온다.[3] 처음에 허생이 변씨에게 큰 돈을 빌려내고 주위에서 변씨를 질책하자 변씨가 허생은 꼴이 거지 꼴이지만 저렇게 당당한 사람은 뭔가 해낼 만한 사람이라며 돈을 빌려준 이유를 말하는 장면이다.[4] 이후 5년 넘게 허생이 돌아오지 않아서 아내는 허생이 가출한 날을 기준으로 제사를 지내왔다고 한다.[5] 장기도와 사문(沙門) 사이라는데 사문은 동남아 근처로 보이지만 어딘지 알 수 없으며, 장기는 나가사키를 말한다. 교과서에선 사문이 마카오라고 나온다.[6] “내가 와룡선생을 천거할 테니 임금께 아뢰어 삼고초려를 하게 할 수 있겠느냐?(인재 등용)”, “종실의 딸들을 명나라 후손에게 시집보내고 훈척(勳戚)의 세력을 빼앗겠느냐?(명분 획득)”, “우수한 자제들을 가려 머리를 깎고 호복을 입혀, 선비들은 유학하게 하고 소인들은 강남에 장사하게 하여 그들의 허실을 정탐하고 그곳의 호걸들과 결탁하여 천하를 뒤엎고 국치를 설욕할 계책을 꾸미겠느냐?”(정보전)[7] 다만 이건 현대적 관점에서 허생을 비판한 부분을 박지원의 것으로 둔갑시킨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다. 이 소설에서 허생은 긍정적 인물이고, 유교적 선비관에 대한 허생의 관점은 대단히 일관적이다. 자신을 장사치로 아느냐고 비판하고, 장유유서를 가르치고, 처사의 삶을 산다. 때문에 허생을 비현실적 유학자로 비판하면, 허생을 통해서 대상을 비판하는 것에 있어서 의미가 약해진다.[8] 거상. 요즘 말로 떼부자, 돈 많은 도매상이라고 보면 된다. 조선이 작은 나라인것도 있으나 당시의 조선은 외부와의 교류를 제한적으로 하는 폐쇄적인 국가인터라, 국제 무역 같은 걸 할 리 없었기에, 이러한 도고들이 횡포를 부리기 일쑤였다.[9] 허생이 매점매석으로 벌어들인 돈을 땅에 풀어놓고 도적들에게 "니들 들고갈 수 있는 힘껏 최대한 많이 들고 가라!"고 말했지만 너무 굶은 나머지 힘이 없는 도적들은 하나같이 몇푼 들고가질 못했으며, 명색이 도적이라는 작자들이 이 정도로 힘이 없다는 것은 이들이 생계형 범죄자라는 증거도 된다.[10] 웃기는 사실은 그 효종도 오늘날의 주류 역사학계에서는 왕권 강화를 위한 블러핑의 목적으로만 북벌론을 들먹였다고 평가받는다. 박지원이 이를 알고서 비판했는지는 알기 어렵지만, 이 부분을 짚고 넘어가자면 상당히 파격적인 묘사라고 할 수 있다.[11] 이건 조선만의 문제가 아니다. 일본이나 유럽도 토지 외의 경제활동에서 세금을 거두기 시작한 역사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고, 심지어 근대 들어와 발생한 현실 사회주의조차 상업은 생산활동을 보조하는 어떠한 공적 영역으로 이해하지 1, 2차산업과 동등한 산업활동으로 쳐주지 않는다.[12] 현대에 조선은 딱히 생산력이 없어서 무역할게 없었다는 이해를 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건 비교우위가 반직관적인 개념이라 현대인임에도 전근대인처럼 상업이 생산을 한다는 것에 대해 이해를 못하는 것이다. 돈 될만한 재화를 팔면 돈이 된다는건 고대인도 뻔히 알고 있던 이야기지만, 아무것도 재배하지 못하는 사막이라도 무역을 하면 생산력이 생긴다는 아이디어가 현대 자유무역질서와 산업혁명을 이끈 비교우위 개념이고 실제로 고대에도 농업 자체가 불가능한 땅을 점유해 생산력이 극도로 희박한 아랍의 사막 베두인족과 중앙아시아 초원지대의 유목민들은 사실상 내내 무역으로인한 생산력으로 먹고 살았다.[13] 보통 허생전 패러디하면 공생전보다 이쪽이 더 인지도가 높다. 무엇보다 고시공부가 허생의 과거공부와 상통하는 포지션이기 때문이다.[14] 똥3 오리지널 시기의 폐단을 잘 담아내고 있다[15] 이완을 비롯한 무신들은 병자호란 패전을 앙갚음하는 것을 목적으로 내세웠는데, 허생은 여기에 '단순히 고구려의 고토를 되찾는 것'이 목적인지 아님 '우리가 업신여겼던 오랑캐들(거란족, 몽골, 만주족)도 한 번씩 차지해 본 중원을 우리가 가져보는 것'이 목적인지부터 확실히 하라며 이 계획들의 실현에 걸리는 까마득한 시간을 언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