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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8-27 12:48:10

왕술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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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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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0080><colcolor=#fff> 남전간후(藍田間侯)
王述 | 왕술
시호 (穆) → 간(間)
작위 남전현후(藍田縣侯)
(王)
(述)
회조(懷祖)
생몰 303년 ~ 368년 9월 16일
출신 태원군(太原郡) 진양현(晉陽縣)
부모 부친 - 왕승(王承)
자녀 아들 - 왕탄지(王坦之), 왕처지(王處之), 왕위지(王褘之)
딸 - 왕전(王荃)
1. 개요2. 생애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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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진의 인물로 명사 왕승의 아들. 차분한 성격의 소유자로, 토론할 때 하객들이 자신의 주장을 강압적으로 주장하더라도, 이에 동요해 함께 언성을 높이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으로 응대했다고 한다.

2. 생애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그의 작위를 이어받아 어머니를 모시며 살았는데, 효자로 명망이 높았다. 왕술의 집안은 가장을 일찍 잃어 가난에 시달렸지만, 왕술은 오히려 이를 안락하게 여기고 출세에 뜻을 두지 않았다. 그가 서른 살이 되었음에도 이름이 알려지지 않자, 그를 가리켜 '바보'라 부르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이에 궁금증이 생긴 사도 왕도는 왕술을 중병속(中兵屬)으로 삼은 후, 그를 만나보기 위해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왕도가 왕술에게 다른 말도 하지 않고 오직 강동의 쌀값에 대해서만 물으니, 왕술은 단지 눈을 부릅 뜨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왕도가 말했다.
"왕연(王掾: 왕술)은 바보가 아닌데, 사람들은 어찌하여 바보라 말했는가?"
또 한번은, 일찍이 왕도가 매번 무슨 말을 꺼낼 때마다 좌중에 있는 모든 사람들 중 칭송하지 않는 자가 없는 것을 눈치챈 왕술이 정색하며 왕도에게 말했다.
"인간은 요순(堯舜)이 아닐진대, 어찌 모든 일에 다 선할 수 있습니까!"
왕도는 즉시 낯빛을 고치고 왕술에게 사례를 표한 뒤, 유량(庾亮)에게 이르길,
"회조(懷祖)는 청렴하고 지조가 곧아, 간결하고 귀함은 그의 할아버지, 아버지 못지 않소. 허나, 관대함과 담백함은 그들에게 조금 미치지 못하는 듯 하오."
라 하였다.

함화 9년(334년), 낭야왕 사마악이 표기장군에 임명되자, 사마악은 왕술을 불러 공조로 삼고 원릉현령에 임명했다. 태위부와 사공부에서 빈번히 그를 징소하고, 조정에서도 상서이부랑에 임명하려 했으나, 왕술은 전부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이후 정로장군 유빙(庾冰)의 휘하에서 장사(長史)를 지냈다.

함강 8년(342년) 2월, 무창(武昌)에 진수하던 유빙의 동생, 형주자사 유익(庾翼)은 요괴가 출몰하거나 맹수가 집 안에 들이닥치는 등 요사스런 일들을 자주 겪었다. 유익은 이를 불길하게 여기고, 주둔지를 낙향(樂鄕)으로 옮기기 위해 조정에 상주해 허락을 구했다. 이때 왕술은 유빙에게 서신을 보내, 유익이 주둔지를 옮기게 해서는 안 된다며 그를 설득했다. 결국, 유빙이 반대하면서 조정에서도 그의 결정에 따라 불허하였고, 유익은 계속 무창에 주둔하는 수밖에 없었다. 왕술은 이후 임해태수, 건위장군, 회계내사를 차례로 역임했는데, 그는 정무를 처리함에 있어 항상 엄숙하고 공정하여, 그가 근무하는 동안 하루종일 별다른 사건이 터지지 않았다. 회계내사로 근무하던 중, 모친상을 이유로 사직했다.

영화 10년(354년) 2월, 중군장군 양주자사(揚州) 은호의 북벌이 잇달아 실패해 조야의 인심이 흉흉해지자, 환온은 이를 이용해 은호를 탄핵시켰다. 마침 상을 무사히 마친 왕술은 은호를 대신해 양주자사에 임명되었고, 정로장군도 겸하였다. 오래지 않아, 조정에서 왕술을 중서감에 삼고자 했으나, 왕술은 굳게 사양하며 여러 해가 지나도록 취임하지 않았다. 조정에서는 하는 수 없이 왕술의 양주자사와 정로장군 직책을 유지시키는 대신, 도독양주서주지낭야제군사(都督揚州徐州之瑯邪諸軍事), 위장군, 병기유평4주대중정(並冀幽平四州大中正)를 더하였다.

영화 12년(356년) 8월, 권신 환온이 강족 수장 요양을 격파하여 낙양을 평정하고, 조정에 누차 표를 올려 진나라의 옛 도읍인 낙양으로 천도할 것을 주청했다. 조정은 근심과 두려움에 휩싸여 시중을 파견해 환온을 어떻게든 말리려 했다. 그때 왕술이 말했다.
"환온은 허세를 부려 조정을 위압하려 했을 뿐, 진심으로 수도를 옮기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따라주는 척만 하더라도 실제로 행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과연 왕술의 말대로 환온은 수도를 옮기려 하지 않았다. 또, 환온은 낙양에 있는 대종과 종거(鐘虡)를 건강으로 옮겨 오겠다 청했다. 이에 왕술이 다시 간했다.
"영가의 난 이래로 나라는 오랑캐의 핍박을 이기지 못해, 잠시 강좌(江左)로 도읍을 옮겼을 뿐입니다. 아직 사방은 평정되지 않았고, 이제 옛 도읍만 겨우 되찾았는데, 마땅히 선제의 원릉(園陵)부터 이전할 것이지, 종거를 옮기는 것이 선행하여서는 아니 됩니다."
조정에서도 왕술의 말에 따라, 조서를 내려 환온에게 종 옮기는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

흥녕 2년(364년) 5월, 산기상시, 상서령으로 옮겨졌고, 장군직은 전과 같이 하였다. 왕술은 직위를 받들 때마다 거짓으로 사양하는 정치적인 쇼를 벌이지 않았고, 만약 그가 직위를 사양한다면 그건 정말로 거절하겠다는 뜻이었다. 이에 아들 왕탄지가 관례에 따라 일단 사양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나서 직위를 수여받아야 한다 간하니, 왕술이 말했다.
"너는 내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생각하느냐?"
왕탄지 답했다.
"아닙니다. 다만, 자신을 누르고 사양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이는 칭송할 만한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왕술이 말했다.
"감당할 수 있다면 대체 무엇을 위해 여러 번 사양하라는 게냐! 사람들은 다들 네가 나보다 낫다고 말하지만, 너는 틀림없이 내게 미치지 못할 것이다."

태화 2년(367년), 노령을 이유로 사직을 청했지만 조정에서 불허하는 바람에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태화 3년(368년) 8월 18일[1], 세상을 떠났다. 향년 66세. 사후 시중, 표기장군, 개부로 추증되었다. 시호는 본래 '목(穆)'이었으나, 효종 목황제 사마담의 시호와 겹치는 불상사가 생겨, '간(簡)'으로 고쳐졌다.

3. 기타



[1] 양력으로 계산할 시, 9월 1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