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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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0080><colcolor=#fff> 자귀남(秭歸男) 袁耽 | 원탐 | |
시호 | 없음 |
작위 | 자귀현남(秭歸縣男) |
성 | 원(袁) |
휘 | 탐(耽) |
자 | 언도(彥道) |
생몰 | 불명 |
출신 | 진군(陳郡) 양하현(陽夏縣) |
부친 | 원충(袁沖) |
아들 | 원질(袁質)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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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진의 인물. 유학가로 명망이 높고 서진 시기 급사중을 지낸 원준(袁準)의 손자. 광록훈을 지낸 원충(袁沖)의 아들.2. 생애
젊은 시절부터 재기가 있고 기개도 뛰어나 남의 위세에 휘둘리지 않으니, 뭇 선비들로부터 칭송받았다. 성품도 소탈하여 상 중임에도 잠시 상복을 벗고, 노름에 재산을 탕진해 채권자들로부터 도망다니던 젊은 환온을 도와주기도 했다. 소준의 난이 일어나자, 사도 왕도의 부름에 응해 그의 참군이 되어 함께 석두성(石頭城)을 지켰다.소준이 관군을 무찌르고 도성 건강(建康)을 장악했을 때, 소준의 심복인 노영(路永), 광술(匡術), 가녕(賈寧) 등이 왕도를 비롯한 조정의 대신들을 숙청할 것을 권했으나 소준이 따르지 않았다. 때마침 소준과 손잡은 예주자사 조약마저 의군에게 패퇴하니, 노영 등은 최종적으로 반란이 실패할까 두려워 다른 마음을 품었다. 왕도는 이를 눈치채고 원탐을 보내 노영을 설득시키자, 노영은 자신의 두 아들과 함께 동진에 귀순했다. 소준이 완전히 평정된 후에는 자귀현남(秭歸縣男)에 봉해지고, 건위장군, 역양태수에 임명되었다.
함강 원년(335년) 4월, 후조의 석호가 남쪽을 순수해 장강 이북까지 이르렀다가 돌아갔다. 이때 석호는 척후로 기병 10여 명을 역양으로 보냈는데, 원탐은 조정에 이를 보고하면서 기병의 수를 누락했다. 당시 후조의 국력은 무척 강성했기에, 원탐의 보고에 건강의 동진 조정은 크게 놀라 두려움에 떨었다. 사도 왕도가 스스로 토벌에 나서기를 청하자, 성제 사마연은 왕도를 대사마로 삼아 출병을 준비케 하는 한편, 건강성 광막문(廣莫門) 앞에서 친히 군대를 정비하며 후조의 침략에 대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원탐이 기병의 수가 적었고, 적은 이미 모두 돌아갔다는 보고를 다시 올리니, 동진 조정은 비로소 건강에 내려진 계엄을 철회하고 왕도를 다시 사도로 돌렸다. 조정에서는 원탐의 경망스러움으로 인해 벌어진 소동에 대한 책임을 물어, 그를 관직에서 파면시켰다.
얼마 후, 왕도가 원탐을 종사중랑에 임명해 다시 관직에 복귀시키고 그에게 중임을 맡기려 했으나, 원탐이 그 전에 사망해버렸다. 향년 25세.
아들로는 원질(袁質)이 있으며, 낭야내사, 동양태수를 역임했다고 한다. 《구당서》 「경적지」에 따르면 원질은 문집을 2권 정도 저술했지만 모두 소실되어 이름조차 전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