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2007년 12월 25일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안양동 우양파크빌 놀이터에서 명학초등학교에 재학중이었던 2학년 우예슬 양[1]과 같은 학교에 재학중이던 4학년 이혜진 양[2]이 친구들과 헤어진 후 실종되었다가 다음 해인 2008년 3월 11일 이 양, 3월 19일 우 양의 시신이 발견된 사건.참고(사건 일지)
3월 17일에 용의자 정성현이 검거되어 용의자의 이름을 따 '정성현 사건'이라고 하기도 한다. 특명 공개수배 방영 당시 사라진 크리스마스라는 부제로 소개되었다.
2. 사건 발생
피살자 이혜진 양(당시 10세)과 우예슬 양(당시 8세).[3]
실종 당일 오후 3시 30분 경 이 양과 우 양은 친구들과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함께 놀다가 헤어졌으며, 16시 10분경 안양문예회관 앞 야외 공연장 CCTV에서 포착되었다. 이들은 오후 5시경 안양문예회관 인근 상가 주인에게 마지막으로 목격된 후 행적을 아는 이가 없었다. 가족들이 모두 귀가했는데도 늦도록 돌아오지 않자 익일 오전 0시 30분경 두 어린이의 가족이 경찰에 미귀가 신고를 하면서 수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마지막 목격자가 나타난 이후 목격자와 제보가 전혀 없어서 사건은 미궁으로 빠져들었다. 실종 4일째 되던 날 경찰은 먼저 양측 부모에게 공개수사를 제의했다. 하지만 양가 부모들은 모두 "혹시 그러다가 아이들이 잘못되면 어떻게 하냐"는 반응을 보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부모들은 며칠 안에는 두 아이가 돌아오리라고만 믿었다. 협박 전화도 한 통 없었기에 납치나 유괴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공개수사는 다시 사흘이 지난 7일째 날 12월 31일부터 이루어졌다.
전국적으로 TV 방송이나 뉴스, 버스정류장 화면에서 2008년 3월 초까지 앰버 경보를 했다. 수사본부 수사관 70여명, 전경 8개 중대 600여명, 수색견 3마리가 동원됐다. 또다시 1주일이 경과되며 두 아동의 집 주변 1㎞ 내 주택에 대한 탐문수사가 이뤄졌지만 별다른 흔적이 없었다. 안양 전 구역에 대한 탐문 수사를 벌이고 있다. 정화조, 맨홀, 엘리베이터 1층 밑 빈 공간도 뒤져보았지만 감감무소식. 헬기를 동원한 항공수색도 이뤄졌다. 평소 아이들이 자주 올라가 놀았다는 집 인근 수리산은 물론 4㎞ 떨어진 과천 청계산 매봉 자락까지 수색이 확대됐으나 찾은 것이 없었다. 안양지역 성폭력 범죄 출소자 30여명을 포함해 성폭력 및 약취유인 동종 전과자 250여명을 발췌해 조사를 벌였지만 특별한 혐의점은 찾지 못했다.
계속 성과가 없자 2008년 1월 8일에 신고보상금을 2천만 원에서 3천만 원으로 올리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사건은 사실상 2달 동안 공백이 되었다. 실제로는 이 과정에서 수사가 부실하고 비합리적이었다는 수사 관계자의 내부 고백이 있었다.[4]
2008년 3월 11일 오후 4시 경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호매실동 호매실IC 칠보산에서 동원훈련 중이던 예비군에 의해 암매장된 여아의 토막시신이 발견되었다. 실종 77일 만이었다. 시신은 30cm 깊이로 암매장되어 있었고 무려 열 토막으로 잘려 있었으며 일부 신체 부위에서 톱 자국이 발견되었다.
3월 13일, 국과수의 DNA 검사 결과 위에 서술한 대로 시신은 이혜진 양으로 확인되었고, 이혜진 양의 생환을 기다리던 가족들을 주저앉게 만들었다. 시신 상태로 미뤄 보았을 때 실종 직후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었으나 정확한 사인과 사망 시점은 확인되지 않았다. 이혜진 양은 1남 2녀 중 막내딸로 온 가족의 귀여움을 받고 자랐기에 충격이 더욱 컸다고 한다.
3월 17일, 이 양은 안양의 메트로병원[5]에서 장례식이 치러진 후 다음날 수원시연화장에서 화장되었다.
2008년 3월 11일, 이 양의 시신이 발견된 뒤 우 양의 생존 가능성도 장담할 수 없게 되었다. 3월 14일, 경찰은 이 양의 집에서 고작 130m쯤 떨어진 곳에 혼자 살고 있던 대리운전 기사 정성현이 사건 당일 동안구 관양동 렌터카 회사에서 뉴 EF 쏘나타를 빌렸다가 그 다음날에 반납한 사실을 확인했고 해당 차량의 트렁크에서 혈흔을 채취하였다. 3월 16일, 혈흔의 주인은 다름 아닌 우 양과 이 양이란 것이 드러났다.
2008년 3월 16일, 경찰은 정성현을 충남 보령의 정성현의 어머니 집에서 검거했다. 정성현은 당일 집안에만 있었다고 진술했으나 경찰이 DNA 증거가 나왔다고 하자 "두 아이를 교통사고로 숨지게 한 후 당황하여 시신을 유기하였다고 말을 바꿨다. 경찰은 교통사고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하고 거기다 혈흔 및 렌터카 대여 기록을 증거로 대면서 압박을 하자 3월 17일 낮 12시경, 사건 당일 크리스마스 예배 후 두 초등학생들에게 접근하여 자기네 집에 아픈 강아지를 돌봐 달라고 자신의 집으로 유인하여 성추행을 하려다 저항하자 살해 후 시신을 토막 내어 각각 호매실IC 인근 야산에 암매장하고 시흥 군자천에 버렸다고 자백했다.
그러나 자백 이후에도 “아이들이 귀여워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데 반항해서 죽였다” “담배를 사러 집을 나왔다가 두 어린이를 마주치곤 어깨에 손을 얹었는데, 소리치며 반항해 양손으로 입과 코를 막고 벽으로 밀어붙여 죽였다”며 계속된 거짓말과 허위 진술로 수사당국의 혼선을 유발했다.
3월 18일, 정성현의 영장이 발부되었고 당일 경기도 시흥시 정왕동 군자천을 수색하던 해병전우회 회원이 오후 4시 43분경 군자천 군자7교에서 군자8교 사이 제2간선 수로에서 우예슬 양의 시신이 돌에 걸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어서 오후 6시경 상류쪽으로 1㎞쯤 떨어진 군자6교와 군자7교 사이에서 시신 일부를 추가로 발견했으며, 오후 6시 30경에는 군자5교 인근에서도 찾아냈다. 실종 88일 만이었다.
3월 24일 오전 7시 50분경 시화호 군자천 주변 갯벌 지역에서 시체 일부가 발견되었고, 공사장 인부 김모씨에 의해 우예슬 양의 머리도 발견되었다. 치아 구조와 DNA 분석 결과 국과수는 이 토막 사체들이 우예슬 양이 맞다고 발표하면서 우예슬 양의 사망도 공식적으로 확인되었다. 정성현은 이 양의 시신은 토막낸 후 야산에 한 곳에 매장했지만 우 양의 시신은 군자천에 버리는 바람에 여기저기 흩어진 것이다.
우 양은 시신 대부분이 발견되었지만 상반신 몸통 일부는 끝내 발견되지 않아 장례식이 늦어졌다. 부모는 ‘시화호 물을 다 퍼서라도 예슬이 몸을 다 찾고 싶다’고 했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4월 17일 오전 6시 50분경, 관이 안양 메트로병원을 나와 모교인 명학초등학교[6]에 도착했다. 모교에서 추모 속에 오전 8시 40분경 경기 수원 연화장으로 가서 화장되었다. #
3. 사건의 전말
2007년 12월 25일, 정성현은 아침 7시까지 대리운전을 마치고 대학교 선배와 소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리를 옮겨 생맥주를 2000cc 마셨다.[7]이후 그가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을 때 시각은 오전 11시였다. 빈집에 돌아온 정성현은 또 소주를 마시고, 그것으로도 부족했는지 급기야 비닐봉지에 본드 흡입까지 했다. 경찰 수사 과정에서 정성현은 "환각 상태에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오후 5시 30분경, 집을 나선 정성현은 때마침 동네 놀이터에서 놀다가 어머니 선물을 사고 귀가하던 이혜진 양과 우예슬 양을 발견했다. 정성현은 아이들에게 '집에 강아지가 있으니 보러가자'는 핑계로 아이들을 자기 집으로 유인해 성추행했다. 이후 신고가 두려워 아이들의 코와 입을 막아 살해했다. #
정성현은 곧바로 시신을 유기할 것을 마음먹고 근러 철물점에서 톱을 사온 후, 시신의 발목부터 무릎, 허벅지 순으로 잘라내고, 이혜진 양의 시신을 빨간색 플라스틱 통에 담아 렌트한 차량 트렁크에 싣고 수원시 권선구 인근에 야산, 그리고 근처 하천으로 가 암매장하였다.
12월 26일 새벽 4시쯤에는 똑같은 방법으로 우예슬 양의 시신을 아까와는 달리 시흥시 군자천에 유기하였다. 정성현은 아침이 밝아 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선배가 운영하는 회사를 찾아가 태연히 컴퓨터를 고쳐줬고 오후 3시 쯤에는 렌터카를 반납했다.
정성현은 유년기에 아버지로부터 폭력과 학대를 당하였고 초등학교와 중학교 재학 당시에는 친구들로부터 집단따돌림을 당하여 고등학교도 적응하지 못하였다. 이후 청년기에 접어들면서 여성들로부터 원인 모를 배신감과 혐오증을 갖게 되었고 이로 인해 범행을 계획하게 되었다고 진술했다.
자세한 내용은 정성현(범죄자) 문서 참고하십시오.
정성현은 사망한 두 초등학생과 전혀 모르는 사이는 아니었다. 이웃집 아저씨였으며 평소 안면이 있었다. 따라서 '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속담을 다시 한번 깨우치게 만드는 사건 중 하나로, 경찰도 이 사건이 부실수사였다는 것을 인정했다. #
정성현은 검찰에 송치되기 전 '본드를 마시고 환각상태에서 범행했다'고 진술했다. 이는 비정상적인 상태에서의 범행으로 자신의 죄를 희석시키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하지만 검찰 수사결과 사건당일 오후 5시30분에서 6시 두 어린이를 집으로 데려와 살해하기 전까지 술이나 본드를 흡입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다만 두 어린이를 살해한 후 오후 7시30분에서 오후 8시 사이 본드를 조금 마셨고 화장실에서 시신을 훼손하기 직전인 오후 10시30분께 본드를 다량 흡입했다.
4. 추가로 밝혀진 사건
정성현에게는 이 사건 이전에 알려지지 않았던 또다른 범죄가 있었다. 2004년 군포 부녀자 상해치사 사건이었다. 2004년 7월 17일 새벽 1시경, 경기도 군포시 금정동 금정역 인근 W 모텔에서 성관계 대가를 너무 많이 요구한다는 이유로 44살 정 모 여인을 때려 숨지게 한 뒤 시신을 토막내어 집 근처 야산 등에 버렸다. 당시에는 밝혀지지 않은 미제 사건으로 남았지만, 이후 안양 초등생 사건으로 수사를 받게되면서 이 사건이 정성현의 범행이라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이 사건은 살인의 고의를 입증할 증거가 없어 정성현의 진술을 토대로 상해치사로 처리되었으며, 안양 아동 납치 살해 사건과 함께 재판이 이루어졌다.
5. 재판
2008년 6월 18일, 수원지방법원 형사2부(재판장 최재혁 부장판사)는 정성현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나이 어린 초등학생 등을 무참히 살해하고 유족들에게 영원히 치유될 수 없는 고통을 가하는 등 범행결과가 중대하고 수법이 잔악하며, 재범의 위험이 큰데다 가족과 국민들을 경악케 하는 어린이 상대 범죄가 더 이상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예방적 차원에서 법정 최고형을 선고할 필요가 있다”고 양형이유를 밝혔다. 다만 군포부녀자를 살해하고 암매장해 검찰이 기소한 살인 및 사체은닉 혐의에 대해서는 “살인의 고의성이 보이지 않는다.”며 상해치사죄를 적용했다.# 1심 판결문정성현은 네 차례에 걸쳐 반성문을 제출하고 지난 공판에서 "술과 본드를 마신 환각상태에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선처를 호소했으나 사형 판결이 나오자 다음날인 6월 19일 항소장을 제출했다.
2008년 10월 17일, 서울고등법원 형사8부(최성준 부장판사)는 정성현에게 1심과 같이 사형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은 나이 어린 피해자들이 무사히 귀가하길 바라던 가족과 국민의 기대를 무참히 짓밟아 크나큰 충격을 줬다"며 "이러한 극악한 범죄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법원의 책무"라며 이같이 판결했다.
범행 당시 술을 마시고 본드를 흡입해 심신미약 상태였다는 정성현의 주장에 대해서도 "유인 과정을 소상히 기억하고 살해 후 행동도 차분하고 치밀해 정상적 판단능력을 보유했던 것으로 보인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 2심 판결문
2009년 2월 26일, 대법원 형사2부(주심 김능환 대법관)는 정성현에 대한 상고심에서 사형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3심 판결문
대법원 2009. 2. 26. 선고 2008도9867 판결 (주심 대법관 김능환) (전략) 피고인이 사소한 이유로 성인 여성 1명을 때려 숨지게 하고, 몇 해 지나지 않아 다시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를 방어하기 힘든 여자 어린이 2명을 유인하여 강제추행한 다음 살해한 점, 그 후 이를 은폐하기 위하여 치밀한 계획 아래 사체들을 여러 토막으로 절단하고 이를 야산에 나누어 묻거나 하천에 버리는 등 그 범행수단이 잔혹하고 무자비하여 온 사회를 경악하게 만든 점, 이 사건 각 범행에 이르게 된 동기에 전혀 납득할 만한 사정이 없는 점, 피고인의 수사기관과 법정에서의 진술 태도에 비추어 피고인이 진심으로 그 잘못을 뉘우치고 있는지에 대하여 의심이 가고, 오히려 여성 및 사회를 탓하면서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하려는 경향이 있으며 개선교화의 여지도 거의 없고, 또한 동일한 범행을 반복한 점에 비추어 재범의 위험성이 매우 큰 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피고인에게 사형을 선고한 조치는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고, 그 형의 양정이 심히 부당하다고 인정할 현저한 사유를 찾아볼 수 없다. |
6. 사건 이후
6.1. 피해자 유가족
이혜진 양 가족들의 삶은 막내의 죽음 이후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해졌다.10여 년간 인쇄업체에서 일했었던 아버지는 극심한 충격과 고통으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됐다. 몇 달은 버텨보려고도 했지만, 일을 하다가도 문득문득 막내딸이 생각나면 울음을 터뜨리며 뛰쳐나가는 일이 반복되는 등, 도저히 일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사실상 제대로 된 직장생활이 불가능해졌다. 8개월 정도를 그 상태로 보내면서 결국 직장을 그만둘 수밖에 없게 되었다. 2008년 11월의 일이었다. 그 이후로는 공공근로사업에 나가거나 폐지를 모아 팔기도 하며, “아픈 상처를 갖고 살아가는 사람은 나 하나로 충분하다.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며 실종아동찾기 캠페인에 참석하기도 했지만 끝내 다시는 일정한 직업을 갖지 못했다. 하루하루를 눈물과 술에 의지해 보냈고, 술로만 살다 보니 건강은 악화일로였다. 몸무게가 65kg에서 50kg 이하로 줄어들 정도로 수척해져 허리사이즈는 24인치까지 줄었고, 균형을 잃고 쓰러져 바닥에 얼굴을 부딪치는 바람에 멀쩡하던 이까지 다 부서지기도 했다.
아버지의 실직으로 생계마저 막막해졌다. 안 그래도 아이를 찾겠다고 전단지 뿌리고 이를 도울 사람을 고용하느라 든 돈은 고스란히 빚으로 남은 상태였다. 그동안 어머니가 시간제 파출부나 식당 일 등을 나갔지만 생활비를 마련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결국 가족은 전기료, 도시가스비도 못 낼 정도의 생활고에 시달리게 되었다고 한다. 국민 성금 4천만원이 들어왔지만 써보지도 못했다. 받은 지 단 하루도 지나지 않아 보이스피싱을 당해 모조리 날렸기 때문이다. 범인은 "잘못된 계좌로 돈이 입금됐다"고 속였는데 지금처럼 보이스피싱 수법이 잘 알려져 있던 때도 아니고, 의지할 곳이 없던 이들은 어쩔 도리 없이 속을 수밖에 없었다. #
참고로 이 양 유족에게 지급된 위로금은 고작 1000만원이다. 가족들의 어려움을 해결하기엔 터무니없이 적은 돈이었는데, 범죄피해자 보호법이 시행된 것이 사건 3년 후인 2011년부터이며 소급적용이 되지 않았기 때문. 그나마도 딱히 국가에서 먼저 손을 내민 게 아니라 어쩌다 지인에게 긴급구제 제도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어머니가 신청해서 받은 것이었다.
물론 범죄피해자 지원센터에서 친분을 쌓은 것을 계기로 오랫동안 긴밀한 유대관계를 가지면서 50여 회에 걸쳐서 가정방문, 상담, 심리치료를 해 왔고 생계비와 생활필수품 지원, 주거환경 개선(도배 지원 등)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지만 상담치료와 약물치료, 각종 지원에도 사랑하는 딸을 잃은 고통은 나아질 줄 몰랐다. 범인이 사형선고를 받은 것도 그에게 위안이 되어 주진 못했다. 오히려 '그런다고 우리 딸이 돌아오느냐'며 울분을 터뜨렸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리움만 커져 갔다고. 딸이 변을 당한 날이 하필 평범한 날도 아닌 기념일인 크리스마스라 더 이상 크리스마스는 축제일이 아닌 '악몽의 날'로 변했다. 유족들은 그가 그날만 되면 "그리워서 환장을 했다"고 표현했다. 그날 주려고 샀다가 끝내 전해주지 못한 인형을 끌어안고 울고... 이 양은 어려웠던 살림살이가 조금 나아졌을 때 이 씨가 얻은 소중한 자식이었으며, 하루에도 열두 번씩 전화할 정도로 애교도 많았기에 그만큼 그는 막내딸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 5주기 추모식 때 "너를 안고 잘 때가 가장 행복했는데...이렇게 추운 날 널 먼저 보낸 애비를 용서해라”며 오열했던 그런 아이를 허망하게, 그것도 너무나 끔찍하게 잃자 그는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6년만에 딸을 뒤따라가고 말았다.
2014년 3월 3일, 이양의 아버지 이창근 씨는 향년 5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인은 심근경색으로 인한 심장마비이다. 뿐만 아니라 부검 결과 간에도 매우 심한, 간암으로 악화될 수준의 간경화 증세가 있었다고 한다. 간이 거의 살아날 가망이 없을 정도로 굳은 상태였다고. 딸을 잃은 트라우마와 깊은 슬픔의 영향으로 매일매일 술을 너무 마셨기 때문이다. 아버지마저 끔찍한 범죄의 또 다른 희생양이 되고 만 것이다.
그의 시신은 수원시연화장에서 화장되어 앞서 딸이 묻힌 안양 청계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장례식장은 공교롭게도 딸의 장례를 치른 그곳이었고, 장례식장 풍경도 쓸쓸했다. 생전에 이미 인간관계가 거의 끊기다시피 한지라 찾는 사람은 친척 포함 겨우 10여명, 조화도 범죄피해자대책지원본부 등에서 보내온 5개가 전부였다.
남은 가족도 마찬가지로 고통받는다는 점에선 다를 것이 없다. 어머니의 고통 또한 설명이 필요없을 것이다. 어머니는 못 먹고 못 자고 스트레스 등으로 성한 치아가 하나도 없고, 아이를 그렇게 잃은 후 한번도 웃어 본 적이 없다고 한다. 형제자매들(언니와 오빠) 역시 정신적 충격과 경제적 어려움으로 대학 진학까지 포기해야 했다. 게다가 이 사건이 처음에는 실종 사건이어서 아이의 신상이 다 공표되었고 장례식에도 학교 친구들이 조문을 왔었기에 '그 사건 희생자 유족'이라는 걸 주변 사람들이 다 알고 있어서 주위의 시선에 상처가 많다고 한다. 동네 사람들이 "부모가 못나고 아이를 관리 못해서 그런 일을 당했다"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부모 귀에까지 들어왔고, 가족이 취업을 해도 직장에서 '꼬리표'가 따라붙는다고. 예를 들자면 식당에서 일하던 어머니의 얼굴을 알아본 단골 중 한 명이 "이제 식당엔 그만 나오는 게 좋지 않겠냐"고 오지랖을 떠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사건 이후 1년이 채 지나기 이전의 일이었다. 그런데 사실은, 거절 못할 부탁을 받고 일주일쯤 주방일을 도우려던 것이 남편의 실직이 겹치면서 계속하게 된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형제자매들이 처한 상황도 대동소이했다.#
10년 뒤인 2017년 근황이 알려졌다. #
오빠 이모 씨는 성인이 된 후 끔찍했던 사건을 지우고, 굳세게 살아보려고해병대에 자원입대했으나 하필 복무 중 연평도 포격전을 겪으면서 PTSD를 하나 더 얻고 말았다. 후유증으로 불면 등 불안증세에 지속적으로 시달리고 있다고. 이 소식은 안 그래도 약해졌던 아버지에게 더욱 큰 충격을 주었다고 한다. 친구 앞에서 펑펑 울면서 “아들마저 잃는 줄 알았어… 혜진이가 살아 있을 때 지 오빠를 그렇게 좋아하더니 하늘나라에서 지켜줬나 보다.” 이렇게 털어놓았다고 한다.
한편 우예슬 양 가족들은 2008년 4월에, 장례를 치르고 나서 바로 안양을 떠나 먼 곳으로 이사했다. 알던 이들과 아예 연락을 끊고 친척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잠적했다.[8] 곧바로 피해자와 돌림자가 같았던 언니의 이름도 개명시켰다. 성본변경까지 신청해 아예 성까지 바꾸며 이름을 완전히 갈아엎었다고 한다. 아직 어린 큰딸이 끔찍한 사건을 잊는 데 도움이 되기 위한 조치였다. 그 뒤에는 도와주던 사람들조차도 그들과 연락이 안 되고[9] 추모제에도 발길을 끊었다. 혜진 양 가족들은 범인의 재판을 참관했지만 이들은 법정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사와 개명 사실 외에 이들에 대해 알려진 것이라고는 이 가족 또한 사건 이후 충격으로 건강이 안 좋아지고 힘들게 생활하고 있다는 풍문이 거의 전부로, 언론 취재도 일절 거부하여 근황 파악조차 되지 않는 상태이다. # 이 사건 피해자 유족이라는 것을 철저히 숨기고 사는 듯, 완전히 사회와 단절된 상태.[10]
6.2. 반성 없는 범인
정성현은 사형수 신분으로도 온갖 민원과 고소·고발을 남발해 관계자들이 그에 대해 아주 학을 떼게 만들며 살고 있다. 2010년엔 한 언론사에 편지를 보내 “안양 초등생 사건에서 성추행을 하지 않았고 두 어린이를 우발적으로 죽였지만 고의적 살인은 아니었다. 기사에 납치·살해라고 쓰는 것은 허위사실 유포에 의한 명예훼손”이라고 주장했다.또 자신을 기소한 검사에 대해서도 “검찰에서 협박, 강요를 당해 허위자백을 했기 때문에 해당 검사가 처벌을 받을 때까지 항고와 재정신청을 할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서울구치소에서 징벌 처분을 받자 이를 취소하라며 행정소송을 제기했고, 조사과정에서 경찰관들로부터 협박과 강요를 당했다며 국가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2014년 10월 10일에는 몇몇 언론사들을 상대로 서울중앙지방법원에 민사소송을 냈다. 관련 기사 정성현은 이들 언론사가 보도한 기사의 내용 가운데 '정성현은 2009년 2월 세명(안양 초등학생 2명, 군포 부녀자 1명)을 살해한 혐의로 대법원에서 사형을 확정받았다'는 문장을 지적하며 군포에서 그가 정 모 씨를 때려 죽인 혐의는 살인죄가 아닌 상해치사죄로 판결을 받은 사실을 들어 "언론사가 사용한 '살해'라는 표현은 잘못되었고 이 정확하지 않은 표현으로 인하여 정성현이 명예훼손을 입었다."며 명예훼손죄로 각 언론사에 배상금을 200만 원씩 청구했다.
그러나 판사는 '일반적으로 살해라는 용어를 사용함에 있어 반드시 고의에 의한 죽임만을 뜻하는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다.'며 '언론사들이 상해치사와 살인을 구별하지 않았다고 허위사실을 보도했다고 인정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그 외에도 정성현은 그가 유죄를 선고받은 연유 가운데 '강제 성추행'이라는 혐의 대신 '성폭행'이라는 표현이 사용된 점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했지만, 판사는 '성폭행이라는 용어는 국어사전에 수록되지 않은 용어로 그 개념은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다.'며 그가 제기한 문제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때문에 잊혔던 안양 초등학생 유괴 살해 사건이 잠시 재조명되었다.
2017년에 정성현은 그를 '살인마'라고 표현한 기자에 대한 소송장을 법원에 제출하여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물론 바로 각하됐다.
2022년에도 블랙 시즌1에서 자신의 사건을 다루려 하자 채널A에 편지를 보내 또다시 ‘경찰이 증거를 조작해 누명을 썼다’는 취지의 주장을 폈다.
7. 사건의 여파
- 이 사건 이후 초등학생 자녀를 둔 부모들이 자녀에게 핸드폰을 사주는 일이 급격히 늘었다. 이 사건 이전만 해도 초등학생들이 가장 선물로 받고 싶은 품목 1위가 핸드폰이라는 설문조사 결과가 여러 차례 기사화될 정도로 초등학생들이 핸드폰을 소지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초등학생의 경우 일부 고소득층 부모의 자녀들이 핸드폰을 소지하는 정도였다. 피해 아동들도 마찬가지였다.[11]
그러나 이 사건 이후 자녀의 안전을 염려한 부모들이 너나 할것 없이 통신비 부담과 자녀의 핸드폰 중독 가능성을 무릅쓰고 핸드폰을 사주기 시작했다. 또한 각 초등학교 주변 문구점, 상점 등을 중심으로 '아동안전지킴이집'[12]이 다수 지정되었고 각 학교에서는 아동들에게 유괴 및 성범죄 예방교육을 강화하는 한편 하교시간 이후로도 학교 주변의 순찰을 강화했다.
다만 초등학생이 핸드폰을 소지하고 학교에 등교하는 데는 많은 교사들이 회의감을 나타냈는데 아동들이 수업에 집중하지 못할 우려가 있는 데다 학교 일과 중 문제가 생기면 눈앞에 있는 교사가 아니라 떨어져 있는 부모에게 전화를 해서 해결하려 할 우려가 있어 교권이 침해된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2017년, 인천에서 휴대전화를 빌려 통화를 하려던 초등학생이 유괴당한 후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사실 이 사건 피해자의 부모도 당시 아이 몫의 핸드폰을 사놓았지만 '악영향'을 우려해 미처 주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하여 실제로 갖고 있던 전화기가 없었던 아이는 전화기를 빌리려고 아무에게나 말을 걸었다가, 하필 그 여자가 아무 어린아이나 한 명 잡아다 죽일 생각으로 가득차 있던 미친 범죄자라 참변을 당해버리고 만 것이다. 이 사건의 충격이 사회적으로 결정타를 날려 이제 초등학생들은 거의 90% 정도 핸드폰을 가지고 있으며 최소한 저가폰이라도 가지고 있다.
- 공교롭게도 이 사건 이후인 2008년 7월 경기도 이천시의 모 초등학교에서 담임교사가 아이들을 빗자루로 체벌하는 동영상이 유포되어 큰 파문이 인 적이 있었다. 이 사건은 초등학교 체벌 문제를 드러나게 한 나비 효과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 이 사건의 피해 어린이들의 시신이 발견되어 대한민국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준 지 얼마 되지 않은 2008년 3월, 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 대화동의 한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초등학생 여아 강모 양이 성범죄 전과자에게 납치당할 뻔한 사건이 발생하고 SBS가 이 사건을 보도하자 학부모들의 불안감은 증폭되었다.# 경찰이 늑장대응을 했다는 의혹이 불거지자, 이명박 당시 대통령이 관할 일산경찰서를 찾아와 담당 경찰관들을 강하게 문책했고, 단 하루도 지나지 않아 범인은 서울특별시 강남구에서 검거되었다.
안양 사건과 이 사건으로 인해 대두된 아동안전은 4월 9일 치러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최대의 이슈로 급부상했고, 여야 각 당은 학부모들의 표심을 잡기 위해 각종 아동안전 공약을 앞다투어 내놓았다. 특히나 대통령이 관할 경찰서까지 직접 찾아가 관계자들을 호되게 문책하는 모습은 초등학생 자녀를 둔 학부모들의 큰 호감을 샀고 이것이 당시 집권여당이었던 한나라당 지지율에 상당히 긍정적으로 작용하여, 한나라당은 민주화 이후 치러진 총선 수도권 지역에서 보수정당 역사상 최대의 성과를 올렸다.
- 2008년 6월 13일부터 '성폭력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 개정 시향됐다. 입법예고 당시 유사 범죄의 발생을 방지하겠다는 뜻에서 '혜진·예슬법'이라고 별칭 하려 했지만, 유가족 본인들이 거부하고 여론도 반대해 무산됐다. #
- 보험업계는 어린이 유괴 및 납치와 관련된 상품까지 내놓았다. 전술한 일산 초등학생 납치 미수 사건까지 터졌기 때문.
- 이 사건은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간접적으로 어떤 미제사건을 해결하는 데 공헌을 하기도 했다. 2006년 8월 22일 서울특별시 중랑구 중랑천 하수구에서 몸통만 있는 여성 변사체가 발견되었는데, 시신의 신원을 알 수 없어 수사는 답보였다. 미궁으로 빠져들었던 이 사건은 안양 초등학생 납치 살해 사건을 계기로 각 경찰서에 실종전담팀이 설치되면서 급진전을 이루기 시작했는데, 서울성동경찰서 전담팀은 2년 전 실종신고가 들어왔던 40살 김 모 씨의 어머니의 유전자와 변사체의 유전자를 비교한 결과 변사체의 신원이 김모씨라는 사실을 특정했다.
경찰은 이에 따라 김씨의 남편을 유력한 용의자로 여겨 그의 행방을 추적하기 시작했고, 2008년 9월 17일 그를 체포했다. 체포된 그는 '그녀가 다른 남자를 만난다는 이유로 2006년 5월 17일 중랑구 자택에서 아내와 다투었고 그녀의 목을 졸라 살해했으며 이후 시신 유기를 쉽게 하고자 사체를 절단하였고 절단된 사체를 세 비닐봉지에 담아 중랑천 하수구에 버렸다'는 모든 혐의 사실을 경찰에서 시인했다. 자세한 내용은 중랑구 아내 토막 살인 사건 참조.
8. 유사 사건
- 도쿄, 사이타마 연쇄 유아납치 살해사건(1988 ~ 1989)
- 화성 초등학생 실종사건(1989)
- 정춘옌 살해 사건(1994) - 1994년 4월 10일 대만 신주현 신주시에 거주하던 13세의 여중생 정춘옌(曾春燕)이 28세의 범인 추준슝(邱俊雄)에 의해 납치되어 강간한 뒤 살해한 사건이다. 추준슝은 사형 선고를 받고 1997년 5월 23일 대만 형법 규정에 의해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 고창 연쇄 살인 사건(2000)
- 김길태 사건(2010)
- 통영 초등생 유괴 살인 사건(2012)
- 나주 초등생 성폭행 사건(2012)
- 어금니 아빠 살인사건(2017)
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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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99년 7월 28일생.[2] 1997년 12월 18일생.[3]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서준이가 사라졌다' 편에서 실종사건(을 가장한 살인사건)을 언급하던 도중에 8살 솔이와 10살 민지가 실종된 사건을 언급했다. 솔이와 민지는 각각 예슬 양과 혜진 양을 가명으로 처리한 것이다.[4] #.[5] 인산의료재단 산하의 종합병원으로 1983년 안양중앙병원으로 개원. 2002년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6] 1978년 3월 1일 개교.[7] 어느 주간지에서 위의 선배와 인터뷰를 가졌는데, 인터뷰 마지막에 기왕 술 먹은 거 왕창 먹여서 하루 종일 집에서 잠이나 자게 만들 걸 하고 후회했다고 한다. 또 담배 사러 나갔다가 피해자들을 보고 집으로 유인했다는 말에도 담배나 한 갑 사줘서 보낼 걸 하고 후회했다고 한다.[8] 참고로 혜진 양 가족들도 인근의 다른 동네로 이사했지만 결국 안양을 떠나지 못했다. 아버지는 '딸이 그립다', 어머니는 "우리가 떠나면 혜진이도 떠나야 된다. 막내가 다시 찾아올지도 모르는데 여기를 어떻게 떠"라고 했고, '이미 세상에 얼굴이 다 알려진 상황이라 차라리 이해해주는 사람들 속에서 사는 게 낫겠다 싶었다'고도 인터뷰했다.[9] 아버지는 “이제 와서 정부가 나선다고 딸이 살아 돌아오지는 않는다”고 말했다고 하며, 장례식 뒤 실종아동 부모 모임과 더 이상 연락하지 않았다.[10] 혜진 양 가족이 일터에서 겪은 황당한 일들을 보면 '차라리 우리가 누구고 어떤 일을 겪은 사람인지 주변에서 아예 모르는 것이 낫다'고 여기는 것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는 일이기도 하다.[11] 당시에는 중고등학생들도 폰이 없거나 일부 고소득층 자녀들이 겨우 갖는 수준이었다.[12] 만화가 이현세 화백이 아동안전지킴이집 안내 그림을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