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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본명이 저유지(褚裕之)로 유유의 휘를 범하여 자인 숙도(叔度)로 표기되었다.
(3) 본명이 장유(張裕)로 유유의 휘를 범하여 자인 무도(茂度)로 표기되었다.
(4) 본명이 왕유지(王裕之)로 유유의 휘를 범하여 자인 경홍(敬弘)으로 표기되었다.
(5) 본명이 왕욱(王彧)으로 유욱의 휘를 범하여 자인 경문(景文)으로 표기되었다.||<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3f51ba><tablebgcolor=#3f51ba> ||
<colbgcolor=#3f51ba><colcolor=#fff> 권양남(觀陽男) 毛德祖 | 모덕조 | |
시호 | 없음 |
작위 | 천릉현후(遷陵縣侯) → 권양현남(觀陽縣男) |
성 | 모(毛) |
휘 | 덕조(德祖) |
자 | 불명 |
생몰 | 365년 ~ 429년 |
출신 | 형양군(滎陽郡) 양무현(陽武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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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진 및 송나라 인물. 동진에서 예주자사를 지낸 모보의 먼 친척.2. 생애
모덕조와 그의 집안은 본래 북방에 거주하였다. 그러나 동진 말기에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도적에게 살해당하자, 모덕조는 5명의 형제들과 함께 장강을 건너 동진으로 망명했다. 그를 포함한 그의 형제들 모두 무예에 재주가 있어 동진에 출사하였고, 모덕조는 관군장군, 보국장군을 지냈다. 이후 형주자사 유도규에 의해 건무장군으로 옮겨져, 시평태수, 부릉태수를 역임했다. 유도규가 노순을 토벌하러 갈 때, 그의 참군이 되어 시흥(始興)에서 노순의 측근 서도복(徐道覆)을 토벌하는 공을 세웠지만, 이내 모친상을 치르기 위해 사직했다.의희 11년(415년) 정월, 태위 유유는 형주자사 사마휴지가 강릉(江陵)에서 형주의 민심을 얻는 일을 무척 꺼렸다. 결국 사마휴지를 토벌하기로 결심한 유유는 사마휴지의 차남 사마문보(司馬文寶)와 조카 사마문조(司馬文祖)를 처형하고, 병사를 일으켜 강릉으로 진공했다. 사마휴지 또한 유유의 죄상을 퍼뜨리고 평소 유유를 경계하던 옹주자사 노종지와 손잡고 맞섰다. 이때 유유의 참군으로 종군한 모덕조는 사마휴지와 노종지 토벌에 공을 세워, 의양태수에 임명되고 천릉현후(遷陵縣侯)에 봉해졌다. 그리고 얼마 안가 남양태수로 옮겨졌다.
의희 12년(416년) 8월, 내부의 적을 정리한 유유는 군공을 세우기 위해 북벌을 감행했다. 유유는 왕진악을 용양장군으로 삼은 뒤, 모덕조를 건무장군으로 삼고 그의 사마로 배속시켜 보좌하게 했다. 모덕조는 왕진악의 선봉에 서서, 후진의 영삭장군 조현(趙玄)을 백곡(柏谷)에서 격파해 참수하고, 홍농태수 윤아(尹雅)를 이성(梨城)에서 대파했다. 또, 경수(涇水)에서 적장 요난(姚難)을 격파하고, 진북장군 요강(姚強)을 참했다. 이후 왕진악을 따라 위교(渭橋)에서 요홍까지 크게 무찌르니, 요홍은 장안성 석교(石橋)로 도주했다가 장안을 바치고 왕진악에게 투항했다.
의희 12년(416년) 9월, 장안에 입성한 유유는 후진의 황족 100여 명을 주살하고, 요홍을 건강으로 압송해 저자에서 참수했다. 모덕조는 장안 평정의 공을 인정받아 용양장군, 부풍태수에 임명되었다.
의희 12년(416년) 11월, 건강에서 유유를 대신해 국정을 맡고있던 유목지가 사망하자, 유유는 의지할 사람을 잃어 도성으로 귀환하고자 했다. 유유는 12세에 불과한 계양공 유의진을 안서장군에 임명해 장안을 수비하게 하고, 모덕조를 진주자사, 천수태수, 중병참군으로 삼아, 왕진악, 심전자 등 다른 장수들과 마찬가지로 유의진을 돕게 했다. 이후 모덕조는 정로장군 왕진악의 사마, 안서장군 유의진의 참군, 남안태수, 빙익태수를 역임했다.
의희 14년(418년) 11월, 유의진은 북하의 압박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장안성을 버리고 동진으로 도망치려 했다. 유의진의 동진군이 청니(靑泥)에 이르렀을 때, 북하의 대선우 혁련발발의 습격을 받고 대패해 여러 장수와 병사들을 잃었다. 모덕조 또한 패주하여 유의진과 함께 동진으로 돌아갔다. 유유는 모덕조를 독사주지하동평양2군제군사(督司州之河東平陽二郡諸軍事), 보국장군, 하동태수로 임명하고, 병주자사 유준고(劉遵考)를 대신해 포판(蒲阪)을 지키게 했다.
원희 원년(419년) 정월, 북하의 장수 질노후제(叱奴侯提)가 보•기 20,000여 명을 거느리고 포판을 침공했다. 강성한 북하 군세를 당해낼 수 없을 것이라 여긴 모덕조가 하동군을 버리고 팽성(彭城)으로 물러나니, 유유가 그를 세자중병참군으로 삼았다.
원희 원년(419년) 2월, 형양, 경조2군태수에 제수받고 호뢰(虎牢)에 주둔해, 하동(河東), 평양(平陽), 하북(河北), 경조(京兆), 영천(潁川), 진류(陳留) 총 9개의 군사를 관할했다.
영초 원년(420년) 6월, 송왕 유유가 공제 사마덕문으로부터 선양받고, 황제에 즉위해 송나라를 건국했다. 이때 모덕조는 유유를 위해 공을 세운 것이 인정되어 권양현남(觀陽縣男)에 봉해지니, 식읍이 400호에 달했다. 또, 사주, 옹주, 병주 3주의 군사를 추가로 관할하게 되고, 관군장군, 사주자사에 임명되었다.
영초 3년(422년) 10월, 무제 유유가 붕어하고, 소제 유의부가 그 뒤를 이어 황제에 즉위했다. 북위의 명원제 탁발사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오병장군 공손표(公孫表), 송병장군 주기(周幾), 사공 해근(奚斤) 보내, 대대적인 남정을 개시했다. 북위의 군대가 활대(滑臺)에 이르자, 동군태수 왕경도(王景度)가 호뢰로 사람을 보내 급박함을 알려오니, 모덕조는 사마 적광(翟廣) 등 보•기 3,000명을 보내 왕경도를 구원했다. 그러나 북위가 쳐들어 온다는 소식에 멸망한 동진의 황족인 사마초지(司馬楚之)가 북위에게 항복한 뒤, 형주자사에 임명되어 동진의 변경을 어지럽혔다. 이에 모덕조는 장사현령 왕법정(王法政)에게 500명의 군사로 소릉(邵陵)을 지키게 하고, 장수 유련(劉憐)에게 기병 200명을 주어 옹구(雍丘)를 지키게 함으로써 적에 대비했다.
영초 3년(422년) 11월, 유련은 사마초지를 물리치는 데에 성공했으나, 활대는 북위군에 의해 함락되고 왕경도는 도주했다. 모덕조가 파견한 사마 적광까지 토루(土樓)에서 북위에게 격퇴당하니, 해근 등은 승세를 타고 호뢰를 압박해왔다. 모덕조는 북위군과 격돌하여 여러 차례 그들을 격파했다. 하지만 모덕조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북위의 흑삭장군 우율제(于栗磾)가 별동대 3,000명을 이끌고 낙양의 금용성을 함락시켰고, 북위의 중령군 아청(娥淸), 기사후 여대비(閭大肥)의 군대가 태산(泰山), 고평(高平) 등 연주 각지를 점거해나가면서 전세가 매우 불리하게 흘러갔다.
경평 원년(423년) 3월, 명원제의 지원군이 도착하면서 호뢰를 더욱 강하게 압박하자, 모덕조는 호뢰성 내에 7장(丈) 깊이의 땅굴을 뚫고 여섯 갈래로 나누어 북위의 포위망을 밖으로 나가는 길을 만들었다. 그리고 참군 범도기(范道基)로 하여금 결사대 400명을 이끌고 땅굴을 통해 포위망 바깥 쪽에서 적을 습격하게 하니, 후방을 갑자기 습격당한 북위군은 금세 혼란에 빠져 도망치기 시작했다. 범도기의 결사대는 적 수백 명을 참수하고는 병장기를 불사르고 돌아왔다.
해근과 공손표가 도망치던 군대를 겨우 수습한 뒤, 해근은 3,000명의 별동대를 선발해 허창(許昌)을 공격했고, 공손표는 남아서 더욱 맹렬하게 호뢰성을 공격했다. 모덕조는 일전의 승리로 사기가 올라간 병사들을 거느리고 성 밖으로 나와, 아침부터 오후까지 북위군과 혈전을 벌이며 적 수백 명을 사살했다. 그러나 영천태수 이원덕(李元德)을 순식간에 무찌르고 허창을 점령한 해근이 예정보다 일찍 돌아오는 바람에 모덕조는 대패하고 중갑병 1,000여 명을 잃었다. 모덕조는 다시 성문을 굳게 닫고 농성했다.
모덕조는 과거 동진에 내려오기 전, 공손표와 친분이 있었는데, 그것을 이용해 공손표와 해근을 이간질하려는 계책을 꾸몄다. 그는 먼저 공손표에게 안부를 묻는 서신을 보내는 동시에, 해근에게도 사람을 보내 공손표가 자신과 내통하고 있다는 것을 믿게끔 유세하게 했다. 결국 이간책에 넘어간 해근이 명원제 탁발사에게 이 사실을 고하니, 탁발사는 공손표를 의심하여 암살자를 보내 공손표를 목 졸라 죽이게 했다.
경평 원년(423년) 4월, 공손표를 죽인 탁발사는 직접 출정하여 성고(成皋)에서 호뢰의 수로를 끊어버렸다. 비록 모덕조와 그의 부하들은 열심히 호뢰성을 지키며 수많은 북위군을 척살했으나, 본국의 지원이 없이 병사들만 계속 죽어나가면서 점점 힘을 잃어갔다. 호뢰성이 포위된지 200여 일 동안에 성을 지키는 정예병은 모두 전사했는데, 북위군은 황제까지 직접 나서면서 점차 늘어만 갔다. 북위군이 이내 3중으로 되어 있는 호뢰성의 첫번째와 두번째 성벽을 부수자, 모덕조는 마지막 성벽에 의지해 밤낮으로 북위군과 싸웠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해 병사와 장수들이 눈병에 걸릴 정도로 고된 전투였지만, 모덕조의 인망 덕에 배신한 이는 없었다.
호뢰성은 수로가 막힌 뒤로 성 내의 우물에 의지해 겨우 버티고 있었는데, 이를 알게 된 북위군이 땅을 파 우물의 물을 새게 했다. 이로 인해 성 안에서 물을 구할 수 없게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전염병까지 퍼지기 시작하면서 호뢰성이 마침내 함락되었다. 장수와 병사들이 모덕조를 부축해 도망치려 하자, 모덕조가 말했다.
"나는 이 성과 운명을 함께 하기로 각오하였다!"
호뢰성에 입성한 명원제는 모덕조의 기개를 흠모하여 좌우에 명해 모덕조와 그의 부하들을 생포할 것을 지시했다. 이에 북위의 장수 두대전(豆代田)이 나아가 모덕조를 비롯한 나머지 인원들을 사로잡았고, 오직 참군 범도기만이 200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북위의 포위망을 돌파해 본국으로 돌아갔다.원가 6년(429년), 북위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65세. 그의 사망 소식은 송에도 전해져, 명제 유욱이 그의 조카 모후지(毛詡之)로 하여금 권양남 작위를 잇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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