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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7 23:41:27

고대 이집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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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집트
𓆎𓅓𓏏𓊖[1]
Ancient Egypt
파일:external/www.ancient.eu/538.png
이집트 신왕국 시대의 최대 판도
기원전 3150년[2] ~ 기원전 30년[3] / 기원후 4세기[4]
위치 이집트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제정일치
국가 원수 파라오
주요 파라오 나르메르
쿠푸
멘투호테프 2세
아흐모세 1세
람세스 2세
클레오파트라
언어 고대 이집트어
종교 고대 이집트 종교
주요 사건 기원전 3150년 이집트 초기 왕조 시작
기원전 2686년 이집트 고왕국 시작
기원전 2181년 제1중간기 시작
기원전 2055년 이집트 중왕국 시작
기원전 1650년 제2중간기 시작
기원전 1550년 이집트 신왕국 시작
기원전 1077년 제3중간기 시작
기원전 664년 이집트 말기 왕조 시작
기원전 304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작
멸망 이후 로마 공화국
1. 개요2. 지리3. 역사4. 건축
4.1. 갤러리
5. 종교6. 언어7. 문자8. 사회9. 경제10. 군사
10.1. 해군
11. 예술12. 문학13. 의복
13.1. 화장품
14. 장례
14.1. 입을 여는 의식14.2. 《사자의 서
15. 천문학16. 수학17. 식문화18. 의학19. 성문화20. 흥미로운 이야기들21. 대중매체22. 고대 이집트 파라오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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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집트고대 문명 시기.

사실 '고대'라고 하나의 말로 묶긴 하지만, 이집트의 역사가 워낙 오래되었다 보니 단일 시기 분류로 묶기에는 매우 방대한, 3000년이 넘는 기간이다. 남은 자료가 많지 않고 다른 문명권과 같이 묶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단일 시기로 퉁친 것에 가깝다.

고대 이집트 문명이 하필 이집트에서 발달한 데는 나일 강의 특성이 크게 기인했다. 나일 강의 가장 큰 특징은 정기적으로 범람한다는 것이다. 강이 가끔 범람하는 것이야 비가 많이 오면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나일 강이 정기적으로 범람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즉 범람 시기를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는 뜻이다. 강이 범람하는 이유는 청나일 강 상류 에티오피아 고원 지대에 5월 무렵 내리는 계절성 폭우 때문인데, 이런 범람은 9~10월쯤에 나일 강 하류 이집트에 도달해 영양소가 풍부한 부엽토 및 부식토를 하류 이집트에 가득 옮겨준다. 땅이 홍수에 잠겼다가 11월쯤부터 다시 드러나면 지력이 매우 높아진다.

이처럼 나일 강의 범람 시기는 예측이 가능하므로 사람이 사는 곳은 물이 많아져도 닿지 않는 안전한 곳에 만들고, 범람 시기에 맞춰 농사를 지으면 작물이 잘 자라게 된다. 대략 7월에 작물을 수확하면 10월에 다시 홍수가 와서 지력을 보충해주었다. 이러한 나일 강의 존재로 인해 고대 이집트는 비료나 농법이 발달하기 전, 농경 사회를 이어 나가기에 최상의 환경이었다.

공간적 이유는 이렇고, 시간적으로 상당히 오랜 시기부터 발달해 온 것은 구석기 시대에 있었던 인류의 대확산과 무관하지 않다. 아프리카에서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현생 인류는 해당 시기 아프리카 초원을 벗어나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이집트는 퍼져 나가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맞닿뜨리는 비옥한 토지이자 강 유역이었다. 나일 강 처럼 문명을 만들기 좋은 지역이 다른 곳에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다른 지역까지 정착하는 데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렸다.

게다가 지금으로부터 약 1만 500년 전(기원전 8500년) 빙하기가 끝나고 해수면이 급상승하던 시기에 북아프리카 일대에 몬순이 갑자기 내려 건조했던 사하라 사막이 잠시 초원으로 바뀌고 인간 집단 약 7천여 개 남짓이 현재의 사하라 일대에서 유목 문화를 이어가다가 홀로세 최적기가 끝나고 지구의 기온이 점점 낮아지면서 기원전 5300년경 이집트를 시작으로 몬순 기후가 점차 끊기고 다시 사막 기후가 확산되면서 사하라 사막이 다시 부활했고, 북아프리카 초원에 거주하던 인간들은 오아시스와 나일 강으로 몰려들게 되었다. 지금처럼 사하라 사막이 완전히 건조해진 시기는 기원전 3500년으로, 초기 이집트 문명이 형성되던 시기와 일치한다. 따라서 가장 먼저 정착을 시작하고 고효율의 농업 생산이 가능하며 북아프리카 초원의 사막화로 이주민이 몰려들어 대규모 인력이 동원되는 관개 농업이 가능한 이집트에서 문명이 탄생한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언제부터 고대 이집트의 역사가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약 6,000년 정도 이전(대략 기원전 36세기)부터 상이집트, 하이집트[5]로 나뉜 국가가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이집트의 역사가 얼마나 유구한지를 언급할 때 바로 이 시대가 인용된다. 즉 아직 북유럽 끝자락에 매머드가 남아 있을 때, 이집트에서는 파라오가 등장했다.[6] 2016년에는 지금으로부터 무려 7,300년 전, 즉 기원전 5316년 무렵의 도시 유물이 발견되기도 했다. 기사 참고 청동기 시대 원시인인 외치가 태어나기 2,000년 이전에 이집트에선 이미 도시 문명이 등장했다.

기원전 3100년 무렵에 처음으로 통일된 이집트가 되었다. 기원전 3세기 이집트 역사가 마네토가 쓴 기록에 의하면 메네스가 제1왕조를 창시하면서 상이집트와 하이집트를 통일했다. 한국단군처럼 이집트인들에게는 메네스가 시조로 여겨진다. 다만 유적 발굴 조사에 의하면, 이집트 제1왕조의 초대 파라오는 나르메르란 인물인데 이 인물이 메네스와 동일 인물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혹은 나르메르의 아들이란 설도 있다. 이후 이집트 문명이 발달하여 당시의 기술력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토목 기술과 의학, 예술 등이 발달했고, 세계에서 처음으로 발효된 오븐을 만들었으며, 히에로글리프도 이때 만들어졌다. 피라미드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참고로 기자의 대피라미드가 건설된 시기는 이집트 문명이 시작된지 약 1,000여 년이 지난 시점인데 중국 상나라의 갑골 문자가 사용되기 1,000년 전이었을 정도로 이집트 문명은 오래되었다.

고대 이집트의 통일 왕조는 크게 세 시기로 나누는데, 처음 통일된 시기인 기원전 32세기 즈음부터 왕국이 혼란에 빠지는 기원전 22세기 즈음까지 약 1,000년간의 고왕국 시대, 혼란이 수습된 기원전 21세기 이후부터 힉소스인에게 정복당한 기원전 18세기까지 약 300년간의 중왕국 시대, 그리고 힉소스로부터 독립한 후인 기원전 16세기부터 제20왕조가 멸망한 기원전 11세기까지 500년간의 신왕국 시대이다. 이게 얼마나 기냐면 각각의 기간과 간극은 대략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보다도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런데도 기원전이 안 끝난다. 피라미드가 처음 건립된 시기부터 클레오파트라 7세가 있었던 시기 사이의 간격보다 클레오파트라 7세가 있었던 시기와 iPhone이 출시된 시기의 간격이 더 짧다.

고대 로마 시절, 로마인들에게도 피라미드는 이미 고대 유적 취급을 받았고, 그 시절에도 이미 관광 코스였다. 그 유명한 카이사르클레오파트라 7세가 나일 강 유람을 즐기면서 피라미드를 구경했다는 기록도 있을 정도이다. 그 밖에도 제정 이후 로마인들이 이집트에 관광을 와서 바가지가 너무하다는 불평을 한 기록이 많다.[7] 콜로세움이나 판테온 등, 로마인들이 남긴 건축물들도 현대인들에겐 '고대' 유적으로 취급 받는 걸 보면 얼마나 그 간격이 긴지 알 수 있다. 현대인이 보기에 콜로세움이 2,000년 된 고대 유적이듯, 고대 로마인이 보기에는 피라미드가 2,000년 된 고대 유적이었다.

좀 더 세세하게 숫자+왕조로도 구분하는데, 마지막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까지 굵직한 왕조만 총 32개 왕조가 있었다.[8] 엄청나게 많아 보이고 사실 실제로 많은 것도 맞지만 동양식 역사 구분으로 따지면 신라, 조선 같은 구분이 32개나 있었던 개념은 아니다. 예를 들어 제3왕조 마지막 파라오인 후니와 제4왕조 초대 파라오인 스네프루 사이의 정치적 단절은 없었고, 꼭 역성혁명이 아니라도 한국사의 원성왕, 신덕왕, 세조 같은 사위 계승이나 방계 계승이 일어나도 왕조 교체로 친 것이었다.

유구한 역사이니만큼 인류 역사에서 강대국의 자리를 매우 오랫동안 유지했다. 이집트라는 지역은 항상 고대 지중해 세계의 중심지 중 하나였고, 중세 이슬람 제국 시절에도 중요했다. 냉전기에는 중동전쟁의 주역으로서 냉전의 최전선에 선 채 능동적으로 지역을 움직이곤 했다. 현대의 이집트 역시 중동에서는 역량 있는 지역 강국 중 하나이며, 지금도 아프리카에서는 손꼽히는 강대국이다.

참고로 고대 이집트와 현재 이집트 주민이 유전적으로 다르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집트에서 발굴된 미라에서 검출한 DNA를 다른 지역 고대인들의 DNA와 비교해 보면 사하라 이남 지역보다는 레반트 지역 주민들과 유사하다고 한다. 현재 이집트인의 DNA를 고대 미라의 것과 비교해 보면 현대 이집트인의 DNA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나 로마군의 침입을 거치면서도 고대 미라들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영향이 15~25% 정도 나타난다고 한다. 크라우스 박사 팀에 의하면 이는 나일 강 유역에서 노예 무역을 포함하여 상호 교역을 많이 했기 때문이거나, 중세에 이슬람이 사하라 남쪽으로 확산되면서 사하라 이남 지역과 접촉한 결과인 듯하다. # 사실 너무나 당연하고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사실인 것이, 역사가 시작되던 무렵의 혈통을 현대까지 있는 그대로 쭉 유지해 오고 있는 집단은 노스센티널섬과 같이 고립된 원시 부족 말고는 없기 때문이다. 당장 고대 이집트 왕조들 중에도 흑인 왕조가 존재했다.[9]

이집트 본토에서는 당연히 학교에서 역사 및 사회 과목에서 자세히 가르치고, [10] 거의 대부분의 나라에서 세계사 교육 과정에서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함께 앞머리에 반드시 언급되다보니 존재감이 강하다. 더군다나 메소포타미아와 이라크가 같은 지역에 위치해있다는것을 모르는 사람도 이집트는 바로 떠오르는 경우가 많다.

2. 지리

이집트 문명은 나일 강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나일 강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흘러 지중해로 빠져나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아래쪽이 강의 상류이고, 위쪽이 강의 하류이다. 그래서 이집트의 아래(남)쪽 지방을 상(上)이집트라고 부르고, 위(북)쪽 지방을 하(下)이집트라고 부른다. 상이집트의 중심 도시에는 현재의 룩소르인 테베, 그리고 하이집트의 중심 도시에는 멤피스알렉산드리아 등이 있었다. 아무래도 하이집트가 풍요로운 삼각주 지대이다 보니 인구도 더 많고 더 부유했다. 하지만 상이집트도 딱히 하이집트에 밀릴 만한 세력은 아니어서, 역사적으로도 끊임없이 하이집트와 경쟁하는 등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다.
파일:ancient_egypt_map.webp
고대 이집트의 도시들의 전반적 위치를 나타낸 지도. 위에서부터 살펴보면 지중해 해안가에 푸른 점으로 표시된 알렉산드리아가 보인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절 이집트의 중심지였고, 알렉산드리아의 등대알렉산드리아 도서관으로 유명하다. 그 아래에는 기자의 대피라미드가 있는 기제가 있다. 그 옆에는 태양신앙의 중심지 헬리오폴리스, 고왕국 시대 이래 하이집트의 중심지 멤피스, 조세르의 피라미드가 위치한 대도시 사카라 등이 자리한다. 물론 이 외에도 수없이 많은 도시와 마을들이 있었지만 대표적인 하이집트 도시들은 이 정도이다.

나일 강 상류의 상이집트 지방, 즉 이집트 남부에도 여러 대도시들이 있다. 세계 최대 중교중심지 카르나크 신전투탕카멘의 무덤, 왕가의 계곡이 있는 테베가 바로 이 상이집트에 있다. 크눔 신전으로 유명한 엘레판틴 섬도 이 상이집트 지방에 있고, 필라에 신전은 상이집트에서도 남쪽에 있었다. 암벽 신전으로 이집트의 랜드마크나 다름없는 아부심벨 신전은 상이집트 최남단에 있다. 고대 이집트 시절에는 아부심벨 신전이 누비아 문화권과 고대 이집트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사원이었다고 한다.

파라오 시대 이집트는 전국을 42개의 행정구역인 (Nome)으로 구분했다.[11] 왕조가 바뀌고 시간이 흐르면서 약간 놈의 경계와 종류가 변하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이집트에는 언제나 42개의 놈이 존재했다. 무려 3,000여 년동안 거의 비슷한 행정구역을 유지했던 것이다. 상이집트에 22개의 놈이, 하이집트에 20개의 놈이 있었다. 한 개의 놈에는 한 명의 총독, 즉 노마치(Nomarch)가 부임했다. 노마치의 지위는 세습도 가능했고 파라오가 직접 임명하기도 했다. 왕권이 강한 시절에는 모두 파라오가 직권으로 임명하는 임명직이었고, 약한 시절에는 모조리 세습직이었다. 왕권이 약해지면 노마치들은 서로 힘을 길러 싸우기도 했는데 이게 가장 심했던 시절이 바로 이집트 제1중간기였다.

구획을 정해놓은 '놈'들에 번호를 붙일 때도 나름대로 순서가 있었다. 하이집트의 경우, 남쪽에서부터 순서를 매기기 시작해서 북쪽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위도가 비슷할 경우에는 나일 강변 서쪽의 놈에게 번호를 먼저 부여했고, 나중에 동쪽에 있는 놈에 번호를 붙였다. 상이집트는 놈들이 나일 강변에 거의 일직선으로 나열된 상태였기에 그냥 순서를 남에서 북으로 쭉 붙였다. 우리가 아는 모든 대도시들은 이 놈들에 소속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왕가의 계곡카르나크 신전으로 유명한 테베는 상이집트 4번째 놈 '와세트' 소속이었고, 고왕국의 수도 멤피스는 하이집트의 첫 번째 놈 '이네부-헤지'에 속했다.

놈 제도 자체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멸망한 이후인 로마 제국 시대에도 지속되었다. 약간의 변형이 있긴 했지만 충성의 대상이 파라오에서 로마 황제로 바뀐걸 제외하면 모든게 비슷비슷했다. 그러나 서기 300년대부터 놈 대신 파기(pagi)라는 새로운 행정구역 제도가 도입되면서 놈 제도는 서서히 밀려났다. 노마치들은 신흥 세력인 파가르치(pagarch)들에게 권력을 빼앗겼다. 얼마 가지 않아 파가르치들이 조세 징수권과 통치권을 노마치들로부터 모두 넘겨받으면서 놈 제도는 서기 300년대 중후반에 들어서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파일:800px-UpperEgyptNomes.png
파일:800px-Middle_Egypt_Nomes.jpg
파일:Lower_Egypt_Nomes_01.png
하이집트의 놈 [펼치기ㆍ접기]
||<-5> 하이집트 ||
서수 고대 이집트식 지명 한국어 뜻 주도 수호신
1 이네부-헤지 흰 벽 멤피스 프타
2 케페시 소의 허벅지 레토폴리스 호루스
3 이멘테트[12] 아피스 서쪽 하토르
4 니트 레수 남쪽 방패 프케카 세베크, 이시스, 아문
5 니트 메헤테트 북쪽 방패 사이스 네이트
6 카'수 산악 황소 사카 아문-라
7 후이-게스 이멘티 서쪽 작살 다만후르 [13]
8 후이-게스 이아브티 동쪽 작살 피톰 아툼
9 안제티 안제티[14] 부시리스 오시리스
10 켐-우르 검은 황소 후트-헤리브 이시스
11 헤세부 헤세브 황소 타레무/이케누[15] 이시스
12 트제브-네체르 송아지와 소 체브누체르 안후르[16]
13 헤카-레즈 번영하는 홀 헬리오폴리스[17]
14 켄티-이아브티 극동 타니스 호루스
15 제후티 제후티[18] 헤르모폴리스 파르바 토트
16 하트 메히트 물고기 멘데스 바네브제데트[19]
17 베데트 호루스의 왕좌 세마베데트 아문-라
18 임티-켄티 남쪽의 왕자 부바스티스 바스테트
19 임티-페후 북쪽의 왕자 레온토폴리스 타니스 와제트
20 셉주 페르-솝두 솝데트[20]

상이집트의 놈 [펼치기ㆍ접기]
||<-5> 상이집트 ||
서수 고대 이집트식 지명 한국어 뜻 주도 수호신
1 타-세티 활의 땅 엘레판틴 크눔
2 웨체스-헤르 호루스의 왕좌 에드푸 호루스
3 네켄 사원 히에라콘폴리스 네크베트
4 와세트 테베[21] 아문-라
5 네체루이 두 마리의 게브투
6 메셰 악어 덴데라[22] 하토르
7 바트 시스트럼[23] 셰셰쉬 하토르
8 타-웨르 위대한 땅 티니스 안후르
9 메누 이프
10 와지트 코브라 체부 하토르
11 세트와 관련된 동물 샤쇼텝 크눔
12 드주-페트 독사 산 히에라콘 호루스
13 네즈페트 켄테트 상 시카모어와 독사 자우티 아푸아트[24]
14 네즈페트 페테트 하 시카모어와 독사 쿠사에 하토르
15 웨네트 하레 케메누[25] 토트
16 마-헤즈 오릭스 헤르웨르 호루스
17 인푸트 아누비스 사이노폴리스 아누비스
18 넴티 세트 후트네수트 아누비스
19 와브위 두 개의 홀 페르-메제드 세트
20 나'르트 켄테트 남쪽 시카모어 헤넨-네수트 헤리샤프[26]
21 나'르트 페테트 북쪽 시카모어 셰나켄[27] 크눔
22 메드니트 테피후 하토르

3.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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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집트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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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왕조
기원전 9000년 ~ 기원전 3150년
하이집트
기원전 6000년 ~ 기원전 3150년
상이집트
기원전 7500년 ~ 기원전 3150년
초기 왕조
기원전 3150년 ~ 기원전 2686년
제1왕조
기원전 3150년 ~ 기원전 2890년
제2왕조
기원전 2890년 ~ 기원전 2686년
고왕국
기원전 2686년 ~ 기원전 2181년
제3왕조
기원전 2686년 ~ 기원전 2613년
제4왕조
기원전 2613년 ~ 기원전 2498년
제5왕조
기원전 2498년 ~ 기원전 2345년
제6왕조
기원전 2345년 ~ 기원전 2181년
제1중간기
기원전 2181년 ~ 기원전 2055년
제7왕조
제8왕조
기원전 2181년 ~ 기원전 2160년
제9왕조
기원전 2160년 ~ 기원전 2130년
제11왕조
기원전 2134년 ~ 기원전 1991년
제10왕조
기원전 2130년 ~ 기원전 2040년
중왕국
기원전 2055년 ~ 기원전 1802년
제11왕조
기원전 2134년 ~ 기원전 1991년
제12왕조
기원전 1991년 ~ 기원전 1802년
제2중간기
기원전 1802년 ~ 기원전 1550년
제13왕조
기원전 1802년 ~ 기원전 1649년
제14왕조
기원전 1725년 ~ 기원전 1650년
제13왕조
기원전 1802년 ~ 기원전 1649년
제15왕조 (힉소스 왕조)
기원전 1650년 ~ 기원전 1550년
제15왕조 (힉소스 왕조)
기원전 1650년 ~ 기원전 1550년
제16왕조
기원전 1649년 ~ 기원전 1582년
제15왕조 (힉소스 왕조)
기원전 1650년 ~ 기원전 1550년
제15왕조 (힉소스 왕조)
기원전 1650년 ~ 기원전 1550년
제17왕조
기원전 1580년 ~ 기원전 1550년
신왕국
기원전 1550년 ~ 기원전 1077년
제18왕조
기원전 1550년 ~ 기원전 1292년
제19왕조
기원전 1292년 ~ 기원전 1189년
제20왕조 (람세스 왕조)
기원전 1189년 ~ 기원전 1077년
제3중간기
기원전 1077년 ~ 기원전 664년
제21왕조 (타니스 왕조)
기원전 1077년 ~ 기원전 943년
제22왕조 (부바스티스 왕조)
기원전 943년 ~ 기원전 716년
제22왕조 (부바스티스 왕조)
기원전 943년 ~ 기원전 716년
제23왕조
기원전 837년 ~ 기원전 728년
제24왕조
기원전 732년 ~ 기원전 720년
제25왕조 (누비아 왕조)
기원전 744년 ~ 기원전 656년
말기 왕조
기원전 664년 ~ 기원전 332년
아시리아 제국
제26왕조 (사이스 왕조)
기원전 664년 ~ 기원전 525년
페르시아 제국
제27왕조
기원전 525년 ~ 기원전 404년
제28왕조
기원전 404년 ~ 기원전 398년
제29왕조
기원전 398년 ~ 기원전 380년
제30왕조
기원전 380년 ~ 기원전 343년
페르시아 제국
제31왕조
기원전 343년 ~ 기원전 332년
헬레니즘
기원전 332년 ~ 기원전 30년
아르게아스 왕조
기원전 332년 ~ 기원전 305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기원전 305년 ~ 기원전 3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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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이집트 선왕조

고대 이집트 문명이 발원한 나일 강 유역은 예로부터 축복받은 지역이라고 불릴 정도로 토질이 비옥했다. 매년 주기적인 범람이 일어나 상류의 진흙과 양분들을 쓸고 내려왔고, 생산량이 극도로 높은 거대한 충적평야를 형성했기에 이집트에서는 이미 약 100만년 전부터 구석기 시대가 시작되었을 정도로 인류가 일찍 거주했다. 이집트는 구석기와 중석기, 그리고 신석기를 거쳐 점차 거대한 도시들과 성읍들이 형성되었고, 본격적인 정착과 함께 농경 문화가 이루어지면서 빠르게 발전했다. 당시 이집트는 크게 남쪽 나일 강 상류 쪽의 상이집트, 그리고 북쪽 나일 강 하류의 삼각주 쪽의 하이집트로 나누어진 상황이었다. 다만 아직 하이집트는 제대로 개발이 된 곳이 아니었기에 갈대와 진흙이 가득한 늪지대에 불과했고, 때문에 문명의 발전도나 문화는 인류가 더 일찍 개척한 상이집트가 훨씬 더 뛰어난 상황이었다.

이렇게 본격적인 통일 왕조가 들어서기 전 인류의 정착부터 상이집트와 하이집트 시대까지를 이집트 선왕조라고 부른다. 선왕조 시기 상이집트에서는 3기에 걸친 나카다 문화(Naqada Culture)가 나타나 진보된 형태의 도자기를 만들거나 무기를 제작하는 등 초기적인 국가의 모습이 드러났다. 결국 상이집트 출신의 나르메르가 기원전 3100년경 하이집트를 정복하고 전 이집트를 통치하는 파라오로 즉위하면서 이집트 초기 왕조가 시작되었다.

3.2. 이집트 초기 왕조

학계에서는 사료가 부족한 제1왕조제2왕조를 묶어 이집트 초기 왕조로 부른다. 초대 파라오 나르메르를 비롯하여 , 카아, 세네지 등 그의 뒤를 이은 군주들은 상하 이집트를 하나로 통합하는 데에 힘썼다. 또한 이 시기에 이집트의 전통적 종교관, 세계관, 사회관의 기반이 형성되면서 이후 몇천 년간 지속될 이집트 문화의 토대를 놓았다.

3.3. 이집트 고왕국

기원전 2686년에는 파라오 조세르가 등장하여 제3왕조를 개창하면서 이집트 고왕국이 열린다. 고왕국 시대는 이집트의 피라미드 건축의 황금기로 불리는데, 제4왕조 시대에 활동한 쿠푸 때에 세계 7대 불가사의들 중 유일하게 현재까지 남아 있는 기자의 대피라미드가 지어졌다.

또한 쿠푸의 뒤를 이은 카프레, 멘카우레 등 명군들이 그 옆에 2개의 피라미드를 더 세우면서 현재 우리가 기자에서 볼 수 있는 거대한 피라미드 3기를 완성했고, 이와 같은 크기의 피라미드는 그전에도, 그 이후에도 더이상 지어지지 않았다.[28] 고왕국은 멘카우레 이후에도 페피 1세 등 걸출한 명군이 등장하며 오랜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고왕국도 점차 쇠락했으니, 제6왕조 출신의 페피 2세가 지나치게 오래 장수하면서[29] 후계 구도가 무너지고 왕권이 약화된 것. 결국 얼마 가지 않아 고왕국은 붕괴했고 혼란기인 제1중간기가 도래한다.

3.4. 이집트 제1중간기

이집트 역사상 최초로 찾아온 중간기인 제1중간기에 수많은 파라오들이 즉위와 암살을 반복했다. 이집트 제7왕조의 경우 그 존재조차 불확실하며, 이 시기 이집트를 다스렸던 제8왕조, 제9왕조, 제10왕조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조차 별로 없는데, 확실한 것은 70일간 파라오 70명이 설칠 정도로[30] 당시 이집트가 혼란스러웠다는 것이다. 이집트는 하이집트를 차지한 제9, 10왕조와 상이집트 일대를 차지한 이집트 제11왕조로 반토막났다. 끝없는 내전이 반복되다 보니 고왕국 시절 기껏 지어놓았던 신전과 도시들이 불타 무너져 내렸고, 민심은 흉흉해졌으며 이 시대는 제대로 남긴 유물조차도 몇 없다. 결국 제11왕조 출신의 멘투호테프 2세가 마침내 기원전 2055년경에 하이집트의 제10왕조를 무릎 꿇리고 130여 년 만에 이집트를 재통일하면서 제1중간기가 끝난다.

3.5. 이집트 중왕국

멘투호테프 2세 이후의 통일 이집트를 이집트 중왕국이라고 부른다. 멘투호테프 2세는 즉위하자마자 제1중간기 시절 지나치게 강화된 지방 귀족들의 힘을 빼놓기 위해 다양한 술수를 썼다. 곳곳에 파라오 직속의 지방관들을 파견하여 귀족들을 견제하는가 하면 귀족들의 자제를 볼모로 잡아 은연 중에 귀족들을 협박했다. 멘투호테프 2세의 이같은 노력 덕에 그를 이은 중왕국의 파라오들은 훨씬 안정된 왕권을 가지고 평화로운 통치를 할 수 있었다.

특히 이집트 제12왕조세누스레트 3세는 활발한 정복 활동을 펼쳐 중왕국의 영토를 사방으로 넓혔고, 워낙 그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전설로 남았던 덕분에 나중에는 그가 유럽 일대까지 원정을 갔다는 믿거나말거나식 설화가 전해지기까지 했다. 세누스레트 3세의 후계자 아메넴헤트 3세는 내치에 신경을 써서 거대한 건축물들을 건립하고 중왕국의 문화 예술을 크게 후원하며 이집트 중왕국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다. 파이윰에 신전을 짓거나 운하를 파는 등 거대한 건설 프로젝트들이 연달아 삽을 떴고, 중왕국은 풍요를 만끽했다. 그러나 중왕국 역시 아메넴헤트 3세 사후 왕권이 약화되며 서서히 몰락했다. 12왕조가 끊기면서 두 번째 혼란기인 제2중간기가 시작되었다.

3.6. 이집트 제2중간기

이집트 제13왕조이집트 제14왕조는 매우 혼란스러웠던 시기로 왕사조차 정확히 알 수 없으며 결국 기원전 1650년경 힉소스인들의 침략으로 이집트 제15왕조가 세워졌다.

당시 힉소스인들은 전차라는, 이집트인들이 듣도 보도 못한 신무기를 가지고 이집트를 침략했다. 전차의 뛰어난 기동성에 무력했던 이집트 군대는 그대로 쓸려나갔고, 힉소스인들은 하이집트의 나일 삼각주 일대를 장악한 후 파라오를 칭했다. 이를 제15왕조라고 부른다. 한편 이집트 원주민들은 남쪽으로 밀려나 상이집트를 중심으로 이집트 제16왕조를 세웠다. 그러나 이들도 상황은 녹록치 않았으니, 북쪽에서는 힉소스인들이 행패를 부렸고 남쪽에서는 쿠시 왕국의 누비아인들이 허구한 날 약탈하러 들어오면서 양면에서 치이고 살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기원전 1582년경 힉소스인들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제16왕조의 수도 테베가 함락되며 제16왕조는 그대로 멸망했고, 그 잔해 위에 또다른 이집트계 왕조인 이집트 제17왕조가 세워졌다.

제17왕조는 천천히 힘을 기르며 이집트를 통일할 기회만을 노렸다. 초기에야 힉소스인들을 상대할 힘이 부족했기에 굽히고 들어갔으나, 점차 국력이 커지면서 목소리도 함께 커졌다. 이때 힉소스인들은 멀리 떨어진 테베의 신전 연못에서 기르는 신성한 하마들의 울음소리가 시끄럽다고 이집트인들에게 이를 죽일 것을 요구했다. 물론 머나먼 하이집트에서 상이집트에 사는 하마들의 소리 따위가 들릴 리가 없었으니 단순한 시비였다. 안그래도 쌓인 게 많던 제17왕조는 이를 계기로, 세케넨레 타오[31]의 지휘하에 힉소스인들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이후 몇십여 년에 걸친 수복 전쟁 끝에 아흐모세 1세가 마침내 기원전 1550년경 힉소스인들을 몰아내고 제18왕조를 개창, 이집트를 재통일하면서 이집트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인 이집트 신왕국이 시작된다.

3.7. 이집트 신왕국 (이집트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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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800px-CairoEgMuseumTaaMaskMostlyPhotographed.jpg
카데시 전투 투탕카멘의 황금 마스크
이집트 신왕국은 이집트 제국이라고 불리기도 할 정도로 이집트의 영광이나 부유함이 정점을 찍었던 시대였다. 또한 현대인들에게도 유명한 파라오들 대다수가 바로 이 신왕국 시대의 파라오들인데, 가장 대표적으로 여성 파라오 하트셉수트, 전쟁왕 투트모세 3세, 최초의 유일신앙을 내세운 아케나텐, 소년왕 투탕카멘, 이집트 최고의 군주 람세스 2세 등이 모두 이 신왕국의 군주들이다. 신왕국은 이집트 제18왕조의 하트셉수트와 투트모세 3세의 시절에 크게 영토와 영향력을 넓히며 인근을 아우르는 대제국으로 성장했고, 투트모세 3세의 후계자 아멘호테프 3세 역시 전쟁에서 승리하거나 신전들을 건립하며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다. 아멘호테프 3세 사후 즉위한 아케나텐은 갑작스레 이집트의 전통 신앙을 부정하고 유일신 아텐 신앙을 내세우며 사회의 급변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아케나텐이 죽자 이집트는 옛 신앙으로 돌아갔고 아케나텐의 아들 투탕카멘 시대에 이집트는 아케나텐이 없던 것처럼 되어버렸다.

단명한 투탕카멘 이후[32] 여러 파라오들을 거쳐 마침내 이집트 신왕국은 이집트 제19왕조람세스 2세 대왕에 이르렀다. 람세스 2세는 중동의 패권국 히타이트카데시 전투를 벌여 오리엔트의 패권을 다투며 이집트의 최대 강역을 이룩했고, 아부심벨이나 라메세움 등 수많은 건축물들을 건설해 이집트의 황금기를 오랫동안 통치했다.[33] 람세스 2세 시기는 고대 이집트의 국력이 전성기에 이르렀지만 람세스 2세가 지나치게 장수하면서 자식들이 너무 많이 본 탓에 후계자 문제가 발생하기 쉬워졌고 이는 메르넵타 사후에 아멘메세스세티 2세를 후계자로 결정한 것에 반기를 들고 누비아 지역을 근거지로 삼아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되었고[34] 세티 2세 사후 뒤를 이은 십타가 급사한 뒤, 십타 재위 시기부터 막후에서 권력을 행사한 세티 2세의 계비인 투스레트가 단독으로 파라오 자리에 올랐으나, 람세스 2세의 손자나 증손자 출신으로 추정하는 세트나크테가 군사력을 바탕으로 투스레트를 축출하여 제19왕조가 멸망하고 제20왕조가 뒤를 이었다.

하지만 제20왕조가 개창되던 시기에 지중해 세계 전체에서 일어나던 '후기 청동기 시대의 붕괴'가 일어났다. 정체불명의 해적 집단인 바다 민족들이 등장해 지중해의 미케네 문명, 소아시아의 히타이트 등 전통적인 지중해의 강대국들에게 치명타를 입히고 문명 세계를 암흑으로 되돌린 사건으로, 세트나크테의 뒤를 이은 최후의 위대한 파라오인 람세스 3세는 바다 민족의 함대가 나일 강변의 도시들을 공격하자 이에 대항하여 2번의 전투를 벌여 모두 승리하여 이들을 토벌했다. 하지만 후기 청동기 시대의 붕괴로 인한 여파는 이집트도 피해갈 수 없었다. 주변 국가들의 멸망과 무역로 단절, 이상기후로 인한 생산력 감소 등 여러 문제가 겹치며 이집트는 내리막길을 걸었다. 이에 따라 파라오의 권위와 위세는 줄어들고, 반대로 람세스 4세 때 테베의 아문 대신관으로 임명된 람세스낙트가 조세 징수권과 감사권을 바탕으로 빠르게 세력을 확장했다. 그는 람세스 9세 재위 초까지 아문 대신관 직을 맡으면서 유력 귀족 가문들과 혼인 관계를 맺어 권력을 더욱 강화했으며 중부와 상이집트 지역에서 자치를 누렸고, 국고까지 관리하게 되어 기념물 건축에 투입되는 인부들의 임금까지도 대신 지급할 정도였다.

제20왕조의 마지막 파라오인 람세스 11세가 즉위했을 때, 파라오가 있는 하이집트마저도 이미 당대 아문 대신관의 아들로 추정하며 훗날 제21왕조의 개창자가 되는 스멘데스 1세의 손에 있었다. 람세스 11세가 사망한 기원전 1077년에 왕조가 단절되며 신왕국이 멸망했고 전대 파라오의 장례를 집전한 자가 뒤를 잇는다는 전통에 따라 스멘데스 1세가 장례를 집전하고 파라오로 즉위하니 이집트 제3중간기와 제21왕조가 시작된다.

3.8. 이집트 제3중간기

한편 신왕국이 무너지고 찾아온 세 번째 중간기인 제3중간기는 이전의 제1, 2중간기와는 다른 양상이 보였다. 제1, 2 중간기 시대에는 통일왕조가 존재하지 않았고 2개의 왕조가 서로 경쟁을 벌이다가 어느 한쪽이 국력을 키워 이집트를 통일하는 것으로 종결되었으나 제3중간기는 제21왕조~제22왕조 중기, 제25왕조가 통일왕조였고 외래 세력인 아시리아의 침략으로 종결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다르다.

제21왕조에는 파라오가 하이집트만을 실질적으로 통치했고 중부와 상이집트의 테베의 아문 대신관이 자치권을 행사했으나 제21왕조의 파라오들 대부분이 테베의 아문 대신관의 아들이거나 혈연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완전히 분열되지는 않았다. 제21왕조의 마지막 파라오인 프수센네스 2세는 현직 아문 대신관의 신분을 유지하면서 파라오에 즉위하여 사실상 이집트 전역을 지배했다.

제22왕조는 프수센네스 2세의 사위이면서 군 총사령관, 수석 자문관 등의 높은 직위를 차지하고 있던 세숑크 1세가 그 시조로, 오소르콘 2세까지는 통일 이집트를 유지할 수 있었으나 이후 즉위한 셰숑크 3세 시기에 정통성을 문제삼은 타켈로트 2세가 분계 왕조인 제23왕조가 등장하면서 여러 도시국가들이 난립하는 혼란기가 도래했다.

이러다가 세숑크 5세 재위 시기에는 나일강 삼각주 서부의 도시인 사이스를 근거지로 삼은 제24왕조가 등장하여 세력을 확장하고. 지방 통제력을 상실하여 제22왕조는 겨우 수도인 타니스와, 가까운 부바스티스만을 다스리는 지방정권으로 전락했다. 이런 양상은 제23왕조도 마찬가지여서 마지막 파라오인 루다멘 치세 때 상당한 영역을 잃었고, 그가 사망하면서 아예 왕조 자체가 소멸해버렸다. 이로 인해 헤라클레오폴리스의 페프트자우와위스트, 테베의 이니, 레온토폴리스의 이우푸트 2세, 헤르모폴리스의 님로트 같은 지방 지배자들이 병립하여 이집트 전역이 분열과 혼란에 빠졌다.

이런 난장판을 수습한 것은 누비아쿠시 왕국이었다. 이집트의 영향을 오랫동안 받았던 누비아인들은 제3중간기 때 이집트의 세력이 약화되자 세력을 확장해 예전에 쿠시 총독이 머무르던 나파타 시를 점령하고 수도로 삼았다. 이 시기를 나파타 왕조라 하는데 그 2대 왕인 카슈타는 상이집트에 세력을 투사해 자신의 친딸인 아메니르디스 1세를 당대 테베의 아문 대신녀인 셰페누웨트 1세에게 양녀로 삼도록 했고[35], 그 아들인 피이는 재위 20년도에 상이집트를 시작으로 하이집트까지 제패하여 혼란상을 수습하고 다시 한 번 이집트를 통일하고 제25왕조를 개창했다.

제25왕조의 파라오들은 에티오피아계 흑인이었기에 학계는 이들을 '흑인 파라오'라고 부른다. 제25왕조는 약 100년 동안 신왕국 시절과 비견될만한 영화를 누렸다. 나일 강을 따라 신전과 기념물들을 새로 짓고 개축했으며 이집트 방식을 모방한 피라미드를 쌓아올렸다. 그러나 동쪽에서 세력을 늘리던 아시리아가 주변 국가들을 복속시키며 이집트에 창끝을 겨누었고 타하르카 치세에 아시리아의 침입으로 하이집트를 상실했다. 그 뒤를 이은 타누타멘이 수복 전쟁을 벌여 멤피스를 비롯해 일어버린 영토를 상당부분 회복했고 아시리아의 꼭두각시였던 네카우 1세를 처형했으나 재정비하여 밀고 들어오는 아시리아에게 패배하여 제25왕조는 완전히 이집트를 상실했고, 제3중간기가 종결되면서 고대 이집트의 황혼기인 말기 왕조가 시작되었다.

3.9. 이집트 말기 왕조

이집트 제26왕조는 태생부터 아시리아의 신하였기에 정당성이 부족했다. 때문에 이집트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 제26왕조를 괴롭혔고, 아시리아의 전성기를 이끈 아슈르바니팔 이후 아시리아가 급속도로 쇠퇴하자 제26왕조는 아시리아의 잔재를 흡수한 신바빌로니아, 나중에는 아케메네스 페르시아라는 최악의 강대국들과 연이어 맞서 싸워야만 했다. 결국 페르시아의 캄비세스 2세가 이집트를 침략하여 파라오 프삼티크 3세를 포로로 잡아 죽인 뒤[36] 페르시아의 제1차 점령기를 시작했다. 이 페르시아의 통치기를 '이집트 제27왕조'라 부르며, 때문에 제27왕조의 파라오직은 곧 페르시아의 황제들이 겸임했다. 다리우스 1세 등 페르시아 군주들은 이집트의 종교를 존중하며 나름 관대한 지배를 했다. 그러나 페르시아가 그리스와의 페르시아 전쟁에 막대한 전비를 투입하며 재원이 부족하자 페르시아는 부유한 이집트에서 세금을 쥐어짰고, 여기에 오랜 세월 동안 독자적인 문명을 이루고 살았던 이집트 토착민들은 외부 정복자들에게 매우 적대적이었기에 페르시아가 후계자 문제로 혼란해지자 그 틈을 타 다시 토착민 왕조를 개창했다.

이후 이집트에서는 제28왕조, 제29왕조, 제30왕조가 연달아 세워지며 페르시아를 지독하게 경계했으나, 결국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가 350,000명에 이르는 대군을 몰고 침략하며 무너졌다.[37] 페르시아의 2차 통치기를 이집트 제31왕조로 구분하지만 정복 11년만인 다리우스 3세 시대에 페르시아가 무너지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집트를 정복하며 페르시아의 식민 지배는 끝이 난다.

3.10.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이집트 제32왕조)

파일:cleopatra-thomas-francis-dicksee.jpg
파일:1200px-Castro_Battle_of_Actium.jpg
클레오파트라 악티움 해전
페르시아를 멸망시키고 오리엔트의 패자로 등극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대왕이 붕어하자 그의 신하들이 제국을 나누어 가졌는데, 그중 이집트 지방은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차지했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기원전 304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38]를 건국했고, 이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약 300년 정도 이집트를 통치했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알렉산드로스의 제국을 회복하겠다는 야심 따위는 갖고 있지 않았고, 오히려 부유한 이집트를 제대로 꽉 잡고 가기만을 원했다.

이집트에만 집중했던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정책은 그대로 적중했고 그의 후계자 프톨레마이오스 2세,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경제를 발전시키며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다. 특히 프톨레마이오스 3세 시대에는 셀레우코스 왕조바빌론까지 밀어붙이는 기염을 토하며 지중해 세계의 최강자로 군림하는 영광을 누렸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4세 시절부터 점차 국력이 약해지기 시작하더니 셀레우코스 왕조에게 시리아, 팔레스타인, 레반트 지방을 연달아 상실하며 쇠락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신흥 강대국 로마의 힘을 빌어 목숨은 보전했으나 날로 상황은 악화되었고, 결국 최후의 파라오 클레오파트라[39]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이끌던 로마 해군에 대패하며 멸망했다.

3.11. 로마 제국 (아이깁투스)

프톨레마이오스 이집트는 총독이 없이 로마 황제가 직접 통치하는 로마 제국의 아이깁투스(Ægyptus) 속주가 되었다. 국가로서의 고대 이집트는 멸망했으나 고대 이집트의 문화는 4세기 기독교가 번창하기 전까지 유지되었다. 로마 황제들은 스스로를 파라오로 칭하지 않았으나 이집트인들은 로마의 황제를 파라오로 간주하고 이집트식의 호루스 이름, 즉위명(프리노멘), 출생명(노멘) 등을 부여했다. 313년 이전에 활동한 거의 대부분의 로마 황제가 파라오의 이름을 받았으며, 카르투슈가 발견되지 않은 황제는 비텔리우스, 엘라가발루스, 다섯 황제의 해 중 4명, 몇몇 군인 황제들 뿐이었다. 313년 이후부터는 이와 같은 '로마 파라오'가 등장하지 않았으며, 기독교가 로마를 장악함과 동시에 고대 이집트의 신전들이 폐쇄되고 신관들이 탄압받으면서 고대 이집트는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4.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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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잘 보존되었다고 평가받는 에스나크눔 신전. 채색의 흔적이 남아 있다
고대 이집트 문명은 사막 지방에 세워졌기에 나무가 희귀했다. 따라서 대부분의 건물들은 말린 벽돌이나 바위들로 지어졌고, 오히려 썩기 쉬운 나무가 아니라 영구적인 석재로 만들어진 덕분에 몇천 년 동안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대다수의 석재들은 석회암, 사암, 화강암 등으로 지어졌다. 흔히 아부심벨처럼 거대한 암석들을 통짜로 깎고 쌓아 만든 유적들이 유명하기는 하지만 이집트인들은 건물을 지을 때 말린 진흙 벽돌을 많이 썼다. 나일 강에 쌓여 있는 진흙들을 틀에 넣어 굳힌 후, 이를 햇빛에 건조시켜 그대로 쌓았던 것이다. 비가 많이 오는 지방에서는 진흙이 흘러내리기 때문에 이렇게 짓지 못한다. 비가 거의 오지 않는 건조 기후의 이집트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집트 건축의 주요 특징으로는 매우 좁고 개수도 적은 창문, 수직적이고 직선을 강조하는 건축 양식,[40] 두꺼운 벽과 좁게 빽빽하게 세워진 굵직한 기둥, 사다리꼴 모양의 탑문 등이 있다. 특히 신전이나 왕궁처럼 중요한 건물의 내부는 기둥부터 천장, 벽까지 모조리 히에로글리프와 색색의 그림들을 넣어 장식했다. 염료가 지워져 쓸쓸한 현재의 모습과는 달리 고대 이집트 시대에는 붉은색, 푸른색, 초록색, 황금색 등 수많은 색들이 칠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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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둥주 장식 카르나크 신전의 평면도[41]
신전들의 기둥들을 보면 굉장히 인상적인 모습들을 하고 있다. 기원전 2600년경 전설적인 건축가이자 재상이었던 이모텝이 식물 뿌리, 파피루스, 연꽃, 야자수 등의 모습을 본떠서 기둥주 장식을 최초로 고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연꽃 모양이 보통 가장 아름다워 보이는 기둥주 장식으로 꼽는데, 제5왕조 시대 들어서 본격적으로 많이 쓰이기 시작했으며 이후 중왕국, 신왕국 시대에도 주된 기둥주 장식으로 사용되었다.

후기에 들어서는 펼쳐진 모양의 연꽃 장식이 위로 갈수록 다시 오므라드는 연꽃 봉오리 모양으로 발전했다. 특히 룩소르의 카르나크 대신전에 이 연꽃 주두를 가진 기둥들이 많이 세워져 있다. 굳이 연꽃 모양을 기둥 주두 장식으로 애용했던 이유는 종교적인 이유도 있다. 이집트 신화에 의하면 세계는 늪지대 속에서 태어났는데, 진흙 속에서 자라나는 연꽃에서 세계의 창조 모티브를 보았다는 것. 물론 연꽃 장식이라고 해서 모두 똑같은 연꽃 모양은 아니고 지역이나 시대에 따라 모두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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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기둥 양식. 그리스 양식과 비교해보면 좋다.
가장 왼쪽의 기둥은 '종상형 기둥'이라고 한다. 꽃봉오리를 형상화한 건데 대표적인 예시는 카르나크 신전아멘호테프 3세 신전. 하이집트의 상징 파피루스와 상이집트의 상징 연꽃 디자인을 섞어서 만들었다. 하이집트와 상이집트의 통합을 의미했기에 북쪽과 남쪽 주랑에 많이 배치했다. 두 번째 기둥은 '야자수형 기둥'이다. 야자수의 모습을 본땄고 이집트 역사 가장 초기에 쓰였지만 제5왕조부터는 잘 쓰지 않았다. 다섯 번째 기둥은 하토르 여신의 머리를 새긴 독특한 모양의 기둥으로, 중왕국 이래 많이 쓰였고 매우 흔한 기둥주들 중 하나였다. 가장 대표적인 예시는 덴데라 신전이다. 여섯 번째 기둥은 연꽃형 주두인데 사원에서만 사용했다. 고왕국중왕국 시대에 많이 쓰이다가 신왕국 시절에 빈도가 뜸해졌지만, 이후 그리스-로마 시대에 다시 인기를 얻었다. 마지막 기둥은 파피루스형 기둥이다. 가장 오랫동안 이집트인들에게 사랑받은 디자인인데 화려하고 기품있는 분위기 덕분에 여러 신전에 즐겨 사용됐다.

고대 이집트 건축의 대명사인 피라미드의 경우 대략 4,500여 년 전 제4왕조를 중심으로 한 이집트 고왕국 시대에 가장 많이 지어졌다. 물론 후대의 왕조들도 조금조금씩 피라미드들을 짓기는 했지만, 기자에 세워진 대피라미드카프레, 멘카우레의 피라미드처럼 거대한 피라미드들은 건설하지 않았다. 파라오의 무덤으로 세워졌던 피라미드들은 왕의 권위와 신성성 그 자체였으며, 워낙 크기가 엄청났기에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경탄했다고 한다. 고층 건물들에 익숙한 현대인들이 봐도 놀라울진대 고대인들의 눈에는 더욱 위대하게 보였을 것이다. 특히 로마 시대에 이미 피라미드는 유명한 관광 코스였다. 현재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지만 피라미드 바로 옆에는 장대한 장례 신전들이 줄세워 세워져 있었고, 역대 파라오들은 정기적으로 이곳에서 제사를 올렸다. 또한 외벽의 대리석 포장재가 모조리 뜯겨나가 울퉁불퉁한 현재의 모습과 달리 고대에는 피라미드 외벽이 백색 대리석으로 덮여 매끈매끈해 꽤나 아름다웠다. 현재 카프레의 피라미드 위쪽에 조금 남아 있는 것이 바로 백색 대리석.

피라미드의 맨 꼭대기에는 '피라미디온'이라고 해서 황금으로 도금한 캡 스톤을 얹었다. 카프레의 피라미드 앞에는 이집트에서 가장 거대한 스핑크스가 하나 조각되어 있는데, 석회석을 다듬어 만들었고 높이는 약 20m 정도 된다. 피라미드 내부는 딱히 복잡하지 않다. 현대인들은 미디어나 게임의 영향으로 피라미드 내에 미로가 있거나 비밀 통로들이 많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실제로는 중앙 통로를 통해 곧바로 관이 있는 묘실까지 직행하는 굉장히 단순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기자의 피라미드를 포함해 중앙 통로를 제외한 대부분의 통로들은 도굴꾼들이 뚫은 것. 가끔씩 피라미드의 건축가들이 만든 통로들도 있지만, 지반의 경도를 실험해보거나 어디까지 파낼 수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 만든 거기 때문에 연결된 보물 같은 거는 없다.

피라미드가 등장하기 이전 이집트에서는 '마스타바' 형식의 무덤에 시신을 안장했다. 피라미드의 초기 단계이기도 했던 마스타바는 직육면체 모양의 무덤으로, 건물 아래에 미라를 묻었다. 직육면체 모양이어서 아랍어로 '직사각형의 벤치', 즉 마스타바라고 불리며 현재처럼 마스타바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지표면에 드러나있는 직육면체 모습의 건물 안에는 간단한 장례 신전과 기도실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로 통로를 뚫어 지하에 매장실과 부장실 등을 만들었다.

매장실로 내려가는 계단은 모래나 자갈 등으로 막아 도굴꾼들의 침입을 방지했고, 매장 절차가 끝난 이후에는 혹시 모를 침입을 막기 위해 아예 거대한 판석으로 통로를 완전 봉쇄했다. 마스타바에 묻힐 수 있는 사람들은 파라오나 고위 귀족에 한정되었고 일반인이나 평민들처럼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그냥 간단하게 시신을 천에 싸서 사막에 묻는 경우가 많았다. 마스타바는 주로 이집트 선왕조 시대와 이집트 초기 왕조 시대에 많이 지어졌는데, 현재는 남아 있는 것들이 많지 않으며 그마저도 대부분 다 도굴당해 버렸다.

사실 거대한 피라미드를 짓는 일은 도굴꾼들에게 제발 내 무덤 좀 털어가 달라고 동네방네 광고하는 짓이나 다름없었다.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다가 피라미드를 지어놨으니 대부분의 피라미드들은 몇백 년도 가지 못하고 이미 고대에 깡그리 도굴당했던 것이다. 당연히 파라오들도 이 현실을 잘 알고 있었는데, 제 무덤만큼은 절대 도굴당하기 싫었던 파라오들이었기에 나중에는 왕가의 계곡이라는 곳에 석굴을 파서 그 안에 미라를 묻는 방법을 썼다. 무덤에는 미라와 함께 온갖 화려한 부장품들이 묻혔으며, 무덤의 위치는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졌다. 하지만 이 방법도 도굴꾼들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도굴꾼들이 눈에 불을 켜고 왕가의 계곡을 샅샅이 뒤지면서 거의 대다수의 무덤들이 도굴당했고, 살아남은 건 투탕카멘의 무덤 딱 하나뿐이다. 뿐만 아니라 신왕국 멸망 후 혼란기가 도래하자 자금난에 시달리던 파라오들이 대놓고 선대 파라오들의 무덤을 털어 그 안의 부장품들을 꺼내는 일도 있었기에 멀쩡한 무덤이 있었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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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이집트 신전의 구조 카르나크 신전의 내부 복원도[42] 오페트 축제가 열리는 카르나크 신전
이집트의 고대 신전들을 보면 기본적으로 사다리꼴 모양의 탑문 2개가 정문으로 세워져 있다. 널찍한 정문을 지나면 그 뒤에 천장이 열린 뜰들과 열주들이 빽빽한 홀들이 여러 개가 있으며 이들을 지나면 신전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구조였다. 보통 뒤쪽으로 들어갈수록 공간이 좁아지고 더욱 어두워졌다. 가장 바깥쪽을 에워싸고 있는 사원 외벽은 굉장히 두껍고 높았다. 신전 자체가 신이 거하는 곳이자 천상계의 현신이었기에 이를 보호한다는 의미로 높은 벽을 쌓았기 때문이었다. 이집트 말기 왕조 시대 들어서 적군의 침입이 빈번해지자 진짜 공성에 사용하기 위해 벽을 높게 지은 경우도 있다.

신전 내부와 바깥쪽에는 신성한 연못을 파 의식에 쓸 물을 담아놓거나 의식을 치르기 전 신관들이 몸을 씻는 장소로 사용했다. 또한 정문 바로 앞에는 스핑크스 석상들과 오벨리스크들이 연이어 쭉 세워져 있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사람들이 이 길을 따라 정문으로 들어오면 천장이 열린 안뜰을 지나 기둥들이 촘촘하게 세워진 내부의 홀로 들어갈 수 있었다. 모래 폭풍 때문에 창문을 크게 내지 않던 이집트라 홀 내부는 꽤 어두웠고, 이 어둠이 오히려 사원 내부의 신성한 분위기를 더했다. 이 홀을 지나면 다시 천장이 열린 안뜰이 나왔고, 이를 지나치고 더욱 깊숙이 들어가서야 신상이 모셔진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었다. 보통 신전의 권위가 높거나 중요할 수록 지성소에 이르기까지 거쳐야 하는 홀과 안뜰의 수가 많았다.

신관들은 성소에서 치러지는 예식의 장엄함을 극대화하기 위해 일부러 성소로 비쳐드는 햇빛을 막거나 창문을 내지 않았기에 성소는 굉장히 어두운 분위기였다.[43] 보통 신전의 맨 뒤쪽에 자리해 모든 뜰과 홀들을 통과하고 나서야 들어갈 수 있는 굉장히 신성한 장소였는데, 대부분의 의식들이 이곳에서 치러졌으며 이집트인들은 이곳에 신이 직접 존재한다고 굳게 믿었다.

지성소에는 보통 황금과 보석으로 치장한 신의 석상들이 조각되어 있거나 죽은 파라오의 상들이 모셔져 있었다. 혹은 영혼이 출입한다고 믿었던 '가짜 문'이 조각되어 있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이집트인들은 이 문을 통해 현세가 사후세계, 그리고 천상계와 통한다고 믿었다. 보통 성소의 장식이 신전 전체에서 가장 화려했는데, 일부 신전에서는 금을 녹여 상형문자를 새겨 넣거나 금판을 통째로 벽에 두르는 등 호화찬란하기 짝이 없게 성소를 꾸미기도 했을 정도였다. 성소 옆에는 보조 신전들이 여러 개 있었다. 신전에서 모시는 신 외에 다른 신들이 이곳에 모셔졌으며, 아니면 제례 의식에 사용할 도구를 보관하는 용도였다. 성소가 신전 맨 뒤쪽에 있었기에 오히려 신전의 뒤쪽 외벽이 굉장히 성소와 가까운 구조였는데 신전에 들어가지 못했던 평민들이 이 사실을 알고 일부러 이 뒤쪽 외벽에 와서 기도를 올리고는 했다.

이집트에서 남아 있는 유적들을 보면 하나같이 신전과 사원 밖에 없고 궁전이나 왕궁은 찾아보기 힘들다. 평민들의 가옥이야 대충대충 지었을테니 남아 있는 게 없을 수 있다지만 나름 크게 지었을 왕궁 유적이 왜 없는지에 대해서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건 궁전을 진흙 벽돌로 지어서 그렇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신성하고 영원해야 할 신전과 무덤은 암석을 통째로 깎아서 쌓거나 아예 암벽을 파서 지었다. 그랬기에 수천 년이 지나도 현재까지 상당수가 보존될 수 있었다. 하지만 주거용 건물은 모두 진흙 벽돌을 쌓아서 지었는데, 파라오가 사는 궁전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만 크기가 더 크고 화려한 것이 차이가 있었을 뿐. 그래서 대부분의 이집트 왕궁 유적들은 이미 시간이 지나며 삭아서 내려앉았고, 현재 남아 있는 이집트 왕궁 유적지는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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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조각 기법의 수준을 알려주는 룩소르 신전의 스핑크스. 파손된 덕에 조각상 내부에 공간을 두었다는 점을 알 수 있게 되었다. 한반도에서 7세기 초까지만 해도 석불의 팔과 몸 사이에 공간을 두는 것이 고급 기법으로 여겨지던 것과 비교해보면 돌의 재질을 차치하더라도 대단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집트의 석조 건축은 엄청난 규모에 세밀함까지 갖춘, 근대 이전 최고의 수준을 자랑한다.

4.1.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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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부심벨 대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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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세스 2세 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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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완 필라에 신전

5. 종교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이집트 신화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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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의 종교는 성경이나 쿠란처럼 일원화된 경전이나 교리가 있는 종교가 아니었다. 교리나 도덕 준칙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삶의 일부분이자 일상생활에 더 가까웠던 것. 이집트인들은 2가지의 신을 믿었다. 하나는 태초부터 존재했던 자연의 신들. 우리가 익히 아는 오시리스호루스, 아누비스 등이 여기에 속한다. 나머지 부류는 신격화를 통해서 후대에 신으로 등극한 존재였다. 세상을 떠난 파라오, 성스러운 동물들은 이 부류의 신들이었다. 이집트에서는 오직 왕족만이 사후에 신으로 추앙받을 수 있었지만 정말 능력이 특출난 경우에 한해서 일반인도 신이 될 수 있었다. 대표적인 예시가 이집트 최고의 지성으로 꼽히는 재상이자 건축가 임호텝이다.

고대 이집트 신관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사제의 역할을 하지 않았다. 신관들은 대중들에게 설교하거나 전도하지도 않았다. 성경처럼 단일한 교리나 경전도 딱히 없었고[44] 지역에 따라서 그 믿음도 달랐다. 신전과 신관은 누구보다 세속적이었다. 신전은 엄청난 양의 재산과 토지, 노예를 소유했고[45] 신왕국의 마지막 왕조인 제20왕조 때는 테베의 아문 대신관이 중부와 상이집트를 장악하고 사실상 독자 정권까지 수립할 정도였다. 그 다음 왕조인 제21왕조는 테베의 아문 대신관의 자식들이 파라오가 되었다.

제사장과 신관들은 결혼도 가능했고 자녀도 낳을 수 있었다. 보통 사제들은 4개의 성직을 한꺼번에 맡았는데, 그래서 12달에 3달만 실제로 성직 업무에 봉사했다. 나머지 기간동안은 개인사업을 벌이거나 경제활동을 했다. 성직에 봉사하지 않을 때는 무슨 짓을 해도 상관이 없었지만, 성직 업무를 보는 3개월 동안은 몸을 정결히 해야만 했다. 이 기간에는 성관계를 금했고, 오직 리넨과 파피루스로 만든 옷만을 입었다. 가죽 옷은 불결하다 해서 입을 수 없었다. 몸 전체에 난 체모를 싹 밀었고 특정 음식도 못 먹었다. 제례를 지내기 직전에는 신전 앞에 있는 저수지에서 몸을 씻으며 향유로 입을 헹궜다. 제사를 지내는 방식은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달랐지만 일반적으로는 다음과 같았다.
1. 아침 해가 수평선 위로 떠오를 때 '위대한 신이여, 평화로이 깨어나소서'로 시작되는 새벽 찬송을 읊는다.

2. 대사제가 불이 꺼진 성소 안으로 들어가 성소의 봉인을 풀고 문을 개방한다. 신을 대면하는 것은 오직 파라오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으므로, 일개 신관들이 신을 영접하기 위해서는 미리 '신을 만나러 저를 보낸 분은 왕이십니다'라는 내용의 주문을 외웠다.

3. 작은 마아트 여신의 신상을 신 앞에 바친다. 신상 앞에서 기도문을 4번 반복해서 읊조린다. 이 기도문을 읊으면 신의 영혼이 신상으로 들어가 지상에 현신할 수 있다고 믿었다.

4. 기도문을 읊고나면 향유로 신상을 문지른 다음, 걸쳐져 있던 옷을 벗기고 그 앞에서 향유를 태운다. 절차를 마치면 새 흰색 리넨 옷을 입히고 향과 화장품을 바른다. 보석황금으로 치장하기도 했다.

5. 옷을 입히면 이제 신에게 먹을 것을 바칠 차례였다. 빵, 고기, 꿀, 케이크, 과일과 야채 바구니, 그리고 포도주맥주 등 다양한 음식들을 바쳤다. 신에게 바칠 음식은 모두 신전에 소속된 신성한 밭이나 과수원에서 재배한 것이었다. 신에게 바칠 짐승을 도축할 때도 절대로 피가 땅에 떨어지게 하면 안되었다. 신상이 보이는 앞에서 짐승을 도축해서도 안되었다.

6. 신이 음식을 다 먹었다고 생각되면 음식을 물렸다.[46] 그런 다음, 성소 전체에 성수를 가볍게 뿌리고 소다와 수지 다섯 알갱이씩을 흩뿌렸다. 더 많은 향을 태우고 불을 지핀 다음, 다시 문을 닫고 봉인했다. 성소를 봉인하기 직전에는 성소 내부에 인간의 자취를 모두 지우기 위해 빗자루질 한 다음 뒤로 걸어나왔다.

7. 똑같은 의식을 아침, 점심, 저녁 총 3번 반복한다. 아침 제례가 가장 성대했고 점심과 저녁 제례는 상대적으로 더 간소했다. 아침 제례에는 성소의 문을 개방했지만 점심, 저녁 제례 때에는 성소의 문을 절대로 열지 않았다.
보통 일반적인 종파라면 신관들을 2개의 계급으로 나눴다. 상위 신관들은 '신의 종'이라는 의미의 'hm-ntr'이라 불렀다. 이들은 신상과 가까운 곳에서 일할 수 있었고 그리스인들은 이들을 '선지자'라고 높여부르기도 했다. 신탁과 신의 뜻을 해석하는 자들이 바로 이 상위 신관들이었기 때문. 상위 신관들 사이에서 최고 대신관이 나왔다. 대신관은 신분이 고귀한 자들 중에 나이와 경험이 많은 자들 중에 뽑았는데, 'hm-ntr-tpy' 또는 '첫 번째 선지자'라고 불렀다.[47] 위대한 신들을 모시는 대신관들은 따로 특별한 호칭을 붙여 쓰는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 창조신 프타의 대신관은 '기술을 잘 지휘하는 자', 의 대신관은 '보는 것에 탁월한 자', 토트의 대신관은 '둘 사이의 중재자', 크눔의 대신관은 '만물을 빚어내는 자' 등의 타이틀을 썼다.[48]

상위 신관들 아래에는 하위 신관들이 있었다. 고대 이집트어로는 '순수한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상위 신관들이 하지 않는 잡다한 일들, 예를 들어 제사에 필요한 물을 떠오거나 퍼레이드에서 신상을 짊어지고 나르는 일 따위를 맡아했다. 웬만하면 기술도 다룰 줄 알아야 해서 장인처럼 예술품이나 공예품을 직접 만드는 경우도 허다했다. 이 하위 신관들이 오랫동안 봉사하면서 경력을 쌓으면 'it-ntr', '신의 사제'라고 불리는 중위 신관으로 승급할 수도 있었다. 중위 신관들은 아직 상위 신관으로 올라가지는 못했지만 하위 신관들을 관리감독했으며, 몇몇은 잘하면 신상을 직접 돌보는 업무를 맡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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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집트식 제례의 모습.
신의 모습을 새긴 신상(神象)은 신전 밖에 나가는 경우가 거의 없었지만 유일한 예외가 축제 기간이었다. 축제 기간에는 나무로 만든 방주에 신상을 올려놓고 퍼레이드를 벌였다. 이 퍼레이드는 평민들이 신상을 직접 영접 가능한 유일한 기회였다. 이집트인들은 신상을 직접 바라보면 병들이 씻은 듯이 낫는다고 믿었다. 이 기간 동안 신탁을 구하는 것도 가능했다. 바닥에 예/아니오를 새긴 돌 조각을 깔아놓고, 신상을 얹은 방주가 그 위를 지나갈 때 신에게 질문을 하는 방법이었다. 신관들의 어깨에 실린 방주가 앞으로 가면 '예', 뒤로 가면 '아니오'라는 뜻이었다. 항상 신전에 있는 신상에게만 질문을 하는 건 아니라서 가정마다 하나씩 마련해놓은 미니 신상에도 기도를 하거나 질문을 할 때도 많았다.

하루하루가 똑같은 일상이던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종교 축제는 단조로운 일상을 깨주는 흥미로운 일이었다. 가장 대표적인 축제는 '오페트 축제(Opet Festival)'이다. 아문 신과 파라오를 찬양하는 목적으로 열리던 축제로, 테베를 중심으로 매년 음력 2월에 열렸다. 다른 축제들만큼 역사가 오래되진 않았지만 신왕국 시절에는 국가적인 최고의 축제였고 특히 제20왕조 시절에는 무려 27일이라는 기간에 걸쳐 열리기까지 했다. 오페트 축제는 나일 강의 범람으로 농부들이 쉬는 휴경 기간에 열렸다. 사제들은 카르나크 신전에 안치되었던 아문 신상을 꺼내 방주 위에 얹은 다음 어깨에 들쳐메고 룩소르 신전까지 행진했다. 룩소르 신전에 도착하면 미리 기다리던 파라오가 아문 신상을 맞았고, 그 안에 들어가 비밀스러운 의식을 치렀다. 이 오페트 축제가 유난히 인기가 많았던 가장 큰 이유는 나라에서 평민들에게 음식과 술을 아낌없이 뿌렸던 덕이었다. 기원전 12세기의 한 기록에는 이 축제에 빵 11,341 덩어리와 맥주 385 항아리를 평민들에게 공짜로 제공했을 정도였다고.

오페트 축제만큼 유명하고 중요한 축제는 '헤브-세드 축제'였다. 파라오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축제로, 파라오가 즉위하고 30년이 된 해에 처음 치렀고 그 후부터는 매 3년부터 축제를 개최했다. 매년 개최한 오페트 축제와는 다르게 헤브-세드 축제는 아마 살면서 한번 볼까말까한 축제였다. 파라오에게는 제2의 즉위식이나 다름없는 행사였기에 정말 호화롭게 개최했다. 이 축제만을 위해서 '세드 제전'이라는 이름의 새 건축물을 지었을 정도. 세드 축제는 오페트 축제와 달리 아무나 참석할 수도 없었다. 선택받은 일부 귀족과 신관들만이 참석했다.[49] 왕이 여러 기물들을 들고 세드 제전 안을 행진하면 신관들이 왕을 축복했다. 이후 왕에게 새 관을 씌워준다음, 파라오가 사방으로 4개의 화살을 쏘았다. 이 화살은 이집트의 대적들을 몰아낸다는 의미였다.

6.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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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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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사회

이집트 사회는 굉장히 계층적이고 수직적인 사회였다. 인구의 절대다수가 밭을 경작하는 농부들이었으나 이들을 지배하는 이들은 극소수의 귀족신관 계급이었다. 대부분의 농부들은 신전이나 귀족 대가문들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생산량이 높은 토지는 거의 지배층의 소유였다. 농부들은 생산량의 대부분을 세금으로 바치는 동시에 나라나 신전에서 하는 개수 공사나 운하 공사에 강제적으로 참여해야만 했다.

그나마 전문적인 기술을 가진 대장장이장인, 예술가 등은 농부보다 처지가 나았다. 그러나 이들 역시 국가나 귀족, 신전에 예속된 것은 마찬가지였기에 그들이 시키는 대로 작품들을 만들거나 이들을 찬양하는 내용의 물건들을 생산하는 일을 맡았다. 이들을 중간에서 관리하고 직접적으로 지휘하는 중간 계급, 예를 들어 서기나 실무 관리들은 '백색 킬트 계급'이라고 불렸다. 이들이 멀리서도 눈에 잘 띄는 맑은 하얀색의 킬트로 만든 천을 두르고 다녔기 때문. 매일같이 흙먼지 속에서 뒹구는 평민이나 농부들은 절대로 할 수 없는 옷차림이었고, 고대 이집트에서는 옷의 청결도나 재질만 보아도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나 계급을 판단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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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집트의 계급도
이 관리들 위에서, 그리고 이집트 사회 꼭대기에는 귀족과 사제 계급을 포함한 지도층이 있었다. 정교분리가 확실치 않았던 이집트에서는 파라오 본인이 아문의 대신관 직을 맡거나 귀족들이 사제들과 결혼, 아니면 아예 신관직을 차지하는 일이 비일비재했기에 사실상 동일한 계급이라고 본다. 이들은 평생 육체 노동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고, 손가락 하나 까딱 하지 않은 채로 막대한 부를 누렸다. 이렇게 불평등한 사회였음에도 불구하고 고대 이집트에서 사회 반란이나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던 이유는 당시 이집트가 엄청나게 종교적인 사회였기 때문이었다. 신관들은 평민들에게 참고 견디면 내세에서 영원한 삶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달콤한 말로 꾀었고, 평민들은 이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워낙에 사후 세계와 종교, 그리고 신에 대한 신앙이 강렬했던 이집트 사회였기에 신관들의 가르침은 더더욱 효과가 강력했다. 이집트의 사회의 정점에는 호루스의 현신이자 인세에 강림한 현인신인 파라오가 있었다. 파라오는 말 그대로 살아 숨쉬는 신과 비슷한 대접을 받았고, 왕의 권위는 기타 문화권과 비교해도 압도적이었다.

이집트 사회에서는 의외로 남성과 여성의 권리가 동등했다. 뿐만 아니라 파라오를 제외하면 귀족이나 평민, 노예들도 선천적으로는 평등한 관계라고 여겼는데, 덕분에 노예 출신이지만 출세에 출세를 거듭해 재상직에 오르는 경우도 있었고 아니면 역으로 대귀족 출신이었지만 바로 노예 계급으로 떨어지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노예들은 물론 사유 재산으로 취급당했고 그 대우도 혹독한 편이었지만, 일을 열심히 해서 돈을 모아 주인으로부터 자유를 사들일 수도 있었고 의사에게 정식으로 치료받을 권리도 인정받았다.

남녀의 경우에는 거의 비슷하다고 보아도 될 정도로 그 대우가 공평했는데, 타 문명권들과는 다르게 여자에게도 계약을 체결할 권리, 재산을 사고팔 권리, 결혼하거나 이혼할 권리, 상속받을 권리, 소송을 걸 권리 등이 인정되었다.[50] 또한 결혼한 이후에도 아내에게 독자적인 재산을 따로 축적하는 것이 인정되었으며, 남편들에게는 부인과 제 자식을 부양할 의무가 분명히 존재했다. 동시대 메소포타미아, 심지어는 몇천 년 후의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의 여성 인권보다도 크게 진보한 부분이 있었던 것. 하트셉수트클레오파트라 같은 여성 파라오들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도 이렇게 여성에게 개방적이었던 고대 이집트 사회의 분위기 덕분에 가능했다.

이집트인들은 외모에 매우 관심이 많았다. 거의 매일같이 나일 강에서 목욕하며 때와 땀 등을 닦아냈다. 이집트에서는 동물 지방과 나무를 태운 재로 만든 세계 최초의 비누도 등장했다. 남성들은 청결을 위해 머리털, 음모 등을 포함해 온 몸에 나 있는 체모를 깨끗하게 밀어 버렸고, 피부에 향유를 바르거나 향수를 뿌리기도 했다. 평민들의 경우 하얀 천으로 만든 단순하게 생긴 킬트나 로인클로스를 걸치고 다녔고, 귀족이나 돈 많은 상인 계급은 값비싼 염색 천으로 만든 옷을 두르고 보석으로 몸을 장식했다.

어린이들은 성년에 이르기 전까지는 옷을 아예 입지 않고 돌아다녔고, 특히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머리 일부분에 머리카락을 남겨 놓고 싹 밀어 버린 후 이 남아 있는 부분의 머리카락을 길게 길러 꽁지머리처럼 땋았다. 성년이 되어서야 이 꽁지머리를 잘라 버리고 완전한 성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 상대적으로 기대 수명이 짧았던 이집트에서는 보통 12세를 넘어가면 성인으로 봤다.

음악도 굉장히 즐겼는데, 하프플루트 같은 초기적 형태의 악기들이 등장하면서 인기를 많이 끌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오보에, 트럼펫, 파이프와 비슷하게 생긴 악기들도 나타났고, 아시아에서는 심벌즈, 드럼, 탬버린, 종 같은 타악기들도 들여 왔다. 류트리라도 이집트 후기 들어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여가 생활에 음악 외에도 게임을 즐기기도 했다. 현대에도 그나마 잘 알려진 게임으로는 세네트 등이 있고, 그 외에도 메헨이나 '자칼'이라는 보드게임들도 있었다. 보드 게임은 평민이나 귀족, 왕족 너나할 것 없이 모두가 즐기는 여가 생활이었는데, 일례로 제13왕조 시기의 파라오 아메넴헤트 4세의 무덤, 그리고 테베의 평민들의 무덤에서 동시에 세네트 보드 게임판이 발견된 바 있다.

아이들은 머리를 쓰는 보드 게임보다는 공놀이나 저글링 등 즉흥적인 게임을 더 좋아했고, 가끔씩은 레슬링을 벌이기도 했다. 부유한 집안의 자제들의 경우 돈이 많이 드는 사냥이나 낚시, 아니면 배 타기 등의 유흥을 즐겼다. 물론 이 정도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만 가능했지 일반 평민들에게는 꿈 같은 이야기였다.

9. 경제

고대 이집트 문명의 주산업은 당연히 농업이었다. 애초에 나일 강이 정기적으로 범람한 덕에 생긴 비옥한 땅 위에 생겨난 문명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나일 강은 8월부터 상승하기 시작해 9월에 수위가 최고조에 달했고, 이때는 삼각주 유역이 약 1.5m 정도의 물에 잠겼다. 10월부터 범람한 물이 빠지면 그동안 쌓인 비옥한 퇴적토가 남았다. 이 에티오피아 고원에서 온 퇴적물들은 엄청나게 비옥했고, 이 퇴적물들이 공짜 천연비료 역할을 한 덕분에 이집트인들은 딱히 비료나 퇴비를 주지 않아도 풍성한 수확이 가능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메소포타미아인들과 함께 세계 최초로 대규모로 농경을 시작한 민족들 중 하나기도 하다.

이집트인들은 다양한 작물들을 재배했지만 개중 가장 대표적인 작물은 빵을 만들기 위해 길렀던 보리였다. 그 외에 함께 먹을 렌즈콩이나 콩류도 많이 길렀다. 양파마늘, , 같은 뿌리채소들도 주요 작물이었으며 양상추파슬리 같은 것들도 재배했다. 기호식품으로는 과일을 키웠는데, 주로 포도수박, 올리브, 사과, 석류 같은 것들을 길러 팔았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대 들어서는 복숭아가 외부에서 전래되기도 했다.

꼭 먹기 위한 식품만을 기르는 건 아니었다. 이집트인들은 밭에서 수백여 종의 약초들을 길렀는데 대부분이 약용이나 향신료로 팔려나갔다. 의외로 유명한 파피루스는 기르지 않았다. 굳이 기르지 않아도 야생에서 워낙 많이 자라 쉽게 구할 수 있는 작물이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파피루스는 굉장히 유용한 식물이었는데, 뿌리는 식용으로 먹을 수 있었고 줄기는 종이를 만들거나 배, 밧줄, 집을 만드는 데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길렀는데 주로 이집트인들의 의복 재료인 아마포를 만들기 위한 목적이었다. 헤나는 염료를 만들기 위해 길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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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집트가 고립된 왕국이었다는 편견이 있는데 그건 아니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일단 중왕국 시대부터 꾸준히 시리아와 저너머 메소포타미아 문명과도 교역하면서 무역을 진행했다. 주로 무화과황금, 삼나무 등이 주요 수입원이었고 전성기 시절에는 심지어 저멀리 아프가니스탄에서 라피스 라줄리를 들여오기도 했다. 광대한 사하라 사막을 넘어 그 반대편의 부족들과 소규모로 무역을 전개하기도 했다. 사막 중간중간에 있는 오아시스들에 초소와 숙소를 만든 다음 이를 거점으로 카라반들을 보냈던 것이다. 주로 사하라 이남의 부족들에게 풍부한 상아를 얻기 위한 목적이었지만 대메소포타미아 무역, 대지중해 무역에 비하면 훨씬 규모가 작았다.

이집트가 막대한 이익을 벌어들인 루트들 중 하나가 해상 무역이었다. 이집트인들은 이미 기원전 3000년도 되기 이전부터 배를 만들고 조선술을 익혔는데,[51] 주로 밧줄이나 갈대, 파피루스 따위로 배를 만들고 활발한 해상 무역을 진행했다. 다만 배 자체가 튼튼하지 못하다는 근본적 한계로 멀리까진 나가지 못했고 기껏 해봐야 시나이 반도 해안가나 그리스까지가 한계였다. 특히 그리스, 페니키아와 무역을 많이 했다. 태양빛이 지나치게 쨍쨍하고 사막 기후인 이집트 특성상 질 좋은 포도 생산이 쉽지 않아서 일부러 포도가 특산품인 장소들을 찾아갔던 것이다.

수에즈 운하를 처음으로 착공하려 시도하기도 했다. 역대 파라오들이 대대로 꾸준하게 나일 강홍해를 잇는 대운하를 만들려 시도했는데, 안타깝게도 고대 기술력으로 성공하기에는 워낙에 거대한 프로젝트라서 성공한 파라오는 없었다. 훗날 아케메네스 왕조다리우스 1세의 시대에 들어서야 파라오들이 짓다가 실패한 운하를 이어받아 결국 운하 건설에 성공한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의하면 트리에레스들이 서로 노를 펴고 교차 운행이 가능할 정도의 폭이었고 깊이도 꽤나 되었다는 말이 있는데 이후 1,000년 간 잘 쓰이다가 아바스 왕조 시대에 반란이 일어나면서 막혀버렸다.

10. 군사

고대 이집트 군대는 전성기 시절 그 규모가 10만 명이 넘었으며 지중해 세계에서 손꼽힐 만큼 굉장히 강력한 정예군이었다. 다만 훈련도가 높고 막대한 군비 지출 덕분에 정예군이었던 것이지 기술이나 전술 따위는 다른 국가들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고왕국과 중왕국 시절까지만 해도 이집트 군대는 원시적인 창과 칼, 그리고 가죽을 덮어 만든 나무 방패 등이 주요 무기였으며 별다른 점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제2중간기힉소스인들이 침략하면서 상황이 반전된다. 힉소스인들은 신무기였던 전차를 몰고 이집트에 들어왔고, 힉소스인들을 상대하면서 전차의 위력을 실감한 이집트인들은 제2중간기가 끝나고 들어선 신왕국 시대에 본격적으로 거대한 전차 부대를 운용했다.

힉소스인들이 이집트에 들여온 것은 전차뿐만이 아니었다. 과 합성궁도 힉소스인들과 함께 유입되었는데, 이로 인해 이집트 군대의 구성이 급속도로 바뀌었다. 또한 인근의 히타이트가 조악하기는 하지만 분명히 철로 주조한 철제 무기의 사용으로 급격히 강력해지자 이집트 역시 철기를 받아들여 군대의 질을 급격히 높였다. 덕분에 신왕국 시대 이집트 군대는 역사상 최강의 세력을 자랑할 수 있었다.

신왕국의 첫 왕조인 제18왕조는 군마와 궁병을 군대에 도입하는 한편 거대한 수의 전차를 만들어 전차 부대를 아예 따로 만들었다. 이집트인들은 단순히 전차를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전차를 신식으로 개량했다. 이로 인해 이집트의 전차는 중동의 전차들보다 훨씬 가볍고 기동성이 좋았다. 보통 전차에는 2명이 탔다. 전차를 모는 기수가 앞에서 말의 고삐를 잡고 있으면 그 뒤쪽에 병사가 타서 적군을 공격하는 방식이었는데, 주로 활을 쏘아 멀리서부터 적을 제압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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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오와 병사의 모습[52] 일반적인 전차병들의 모습
화살을 다 쏘면 가지고 있는 짧은 창을 뽑아 싸웠으나, 전차를 탔다고 해도 적진을 휘젓고 다니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기에 화살이 떨어지면 즉시 본진으로 귀환했다. 또한 병사와 기수는 모두 상체에만 가볍게 비늘갑옷을 걸쳤는데, 하체는 전차가 막아주었기에 굳이 무거운 갑옷을 입을 필요가 없었던 것. 하지만 이 비늘갑옷조차 입지 않고 넓은 가죽 밴드에 방패를 달아 그걸 달고 다니는 경우도 많았다. 보통 파라오가 전장에 직접 나서면 이 전차에 탄 모습이었다. 파라오가 모는 전차는 4마리의 말들이 끌었으며 왕은 보석과 황금으로 호화롭게 치장된 갑옷을 따로 입어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었다. 하체에도 킬트 하의에 구멍을 뚫고 청동판들을 달아 보호할 수 있도록 했다.

참고로 고대 이집트 보병들은 대부분이 갑옷을 입지 않았다. 혹독한 아프리카의 더위 때문에 안 그래도 체력 소모가 심한 전장에서 갑옷을 입고 다니는 건 득보다 실이 더 컸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전차병 정도나 되어야 비늘갑옷이라도 입고 다녔지, 일반 보병은 갑옷은커녕 그냥 킬트에 천옷 차림으로 전투에 임했다. 이집트 고왕국과 중왕국 시대에는 아예 갑옷이라는 존재 자체가 없었으며 그나마 신왕국 시기부터 몇몇이 갑옷을 입기 시작했는데 그것마저도 어깨와 복부를 가로지르는 넓은 가죽 밴드를 착용하는 것에 그쳤다. 갑옷도 없으니 당연히 전투모도 헬멧도 없었다. 파라오는 예외적으로 푸른 왕관 '케프레시'를 쓰거나 특별한 황금 투구를 쓰곤 했는데, 이 역시 머리를 보호하는 실용적인 용도보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컸다.

'고대 이집트 무기'하면 떠오르는 독특한 형태의 칼은 코피스라고 부른다. 전체적으로 휘어진 곡도의 외양에 맨 끝부분만 날카롭게 버려진 모습인데, 길이는 약 50~60cm에 이른다. 검의 안쪽 휘어진 칼날을 이요해 적의 팔을 가두거나 적의 방패를 쳐낼 수 있었다. 기원전 3000년부터 기원전 1300년까지는 널리 사용되었는데 심지어 투탕카멘의 무덤에서도 투탕카멘이 직접 사용하던 코피스가 발견된 바 있다. 하지만 이집트 신왕국 이래로 점차 사용 빈도가 감소하더니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대에는 거의 사라졌다.[53] 하지만 그 독특한 외양 덕분에 인기를 얻어 사실상 고대 이집트를 상징하는 무기 중 하나로 꼽힌다.

이집트 군대는 화살을 알차게 써먹었다. 멀리서부터 적들을 제압할 수 있었던 활은 이집트 군대에 안성맞춤이었고, 덕분에 활은 이집트 보병의 핵심무기로 완전히 굳어졌다. 이집트인들이 쓰던 활은 모두 나무로 만들었다.[54] 고왕국과 중왕국 시기에 쓰던 활은 나무를 깎아 몸통을 만들었고, 동물의 힘줄이나 식물 섬유를 꼬아 활줄을 만들었다. 선왕조 시절에는 이중 곡률을 가진 활도 썼지만 고왕국 시대에 들어오면서 단일 아치를 가진 단순한 형태의 활이 주로 쓰였다. 화살은 갈대로 만들었고, 꽁무니에 새 깃털 3개를 붙였고 앞쪽에는 돌이나 청동으로 만든 쐐기촉을 붙였다. 활의 크기는 대략 1m에서 2m 정도의 사이즈였고, 보통 가죽을 활에 감아 강화했다.

신왕국 시대에는 힉소스의 유산으로 합성궁이 출현했다. 현재 우리가 떠올리는 일반적인 활의 이미지가 바로 합성궁이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무기였던 합성궁은 크기 대비 훨씬 빠르고 유연하게 공격을 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사정거리는 이전보다 훨씬 증가했고, 합성궁이 등장하기 이전에 쓰이던 단궁은 합성궁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합성궁도 단점이 있었다. 당시 이집트의 합성궁은 일단 재료가 비쌌고, 습기에 약했으며 재장전을 하기 위해서는 옆에 있는 사람이 따로 화살을 끼워주어야 했다. 당연히 아무나 쏠 수 있는 활이 아니었고, 높은 신분의 사람들이나 전문적인 최정예병들만이 쓸 수 있었다. 일반 병사들은 그냥 이전부터 쓰던 단궁을 써야만 했다.

활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무기가 바로 슬링이다.[55] 고대 이집트에서는 극초기부터 창을 개발해서 쓰고 있었으며 창병은 이집트 군대의 핵심 병종들 중 하나였다. 창은 만들기도 쉬웠고 생산단가도 저렴해서 많은 병사들이 애용했다. 가끔씩 청동으로 날을 달아주는 경우도 있었으나 청동이 그렇게 값싼 물건이 아니라서 상당수 이집트인들은 그냥 나무를 날카롭게 깎거나 돌을 창끝에 붙여서 사용했다. 특히 전차병들은 창을 하나씩 구비하고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전차병들이 화살을 다 쏘고나면 창으로 도주하는 적들의 등을 찔러 제압할 수 있었기 때문. 파라오 세티 1세가 직접 창을 사용하기도 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그 외에 반원형 도끼, 철퇴, 단검 등도 즐겨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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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집트의 병사들
방패는 선왕조 시대 이래로 이집트 병사들이 반드시 들고 다니는 필수품이었다. 나무틀 위에 소가죽을 씌워 만든 1~1.5m 사이즈였고 위쪽으로 갈수록 뾰족해지는 형태였다. 초창기에는 방패도 사이즈가 컸다. 아직 소아시아 국가들과 싸우기 전까지는 주로 이집트인들끼리 화살 공세를 퍼부었는데, 이때 넓은 방패는 매우 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점차 소아시아와 충돌이 잦아졌고, 전투용 도끼나 검을 휘두르는 소아시아 병사들을 상대로 근접전을 벌이기 위해서는 기동성이 극대화되며 시야가 보장되는 작은 방패가 더 나은 선택이었다. 결국 신왕국 시대 들어 방패는 점점 크기가 작아졌고, 방패를 아래로 내려찍기 위해 아래쪽이 점점 뾰족해졌다. 병사들은 방패에 달린 끈을 들고 다니기도 했고, 아니면 양손을 쓸 수 있도록 어깨에 끈으로 매달아 몸 한쪽만을 보호하는 용도로 사용하기도 했다.[56] 신왕국 시대에 돈 있는 사람들은 특별히 청동으로 방패를 만들기도 했다.[57]

이집트 군대는 크게 보병과 기병, 그리고 전차병으로 이루어졌다. 보병은 징집병과 용병이 섞인 혼성 군대였는데, 보통 봉급을 받거나 전쟁에서 얻어낸 전리품을 나눠주는 방식으로 보상을 해주었다. 보병들은 출신들도 가지각색이었는데, 고왕국 시기부터 누비아인들이 본격적으로 합류했고 나중에는 시리아, 소아시아, 페니키아, 그리스 등 수많은 곳들에서 이집트에 몰려와 돈을 받고 대신 싸워주었다. 이집트 군대의 핵심은 보병이 아니라 전차병이었다. 기원전 1550년경에 세워진 신왕국 이래 전차 병단이 탄생했는데, 전차라는 무기 자체가 만들기도 어렵고 관리하는 데에도 돈이 많이 들어갔기에 보통 전차병을 맡는 사람들은 부유층이거나 신분이 높은 고관 계급이었다.

일반적으로 2마리의 말들이 전차를 끌었다. 전차는 기동성이 극도로 뛰어나 치고 빠지기에는 그만이었고, 특히 말들의 엄청난 진격 속도로 인해 파괴력도 엄청났다. 그래서 파라오나 군 사령관들은 전투 초기에 멀리서 활을 쏴 적진에 혼란을 불러온 다음, 직후 전차병들을 진격시켜 적의 진형을 무너뜨리고 전차를 물린 다음 적들이 흩어진 틈을 타 쓸어버리는 전술을 주로 썼다. 보통 전차 하나에는 2명의 병사가 탔다. 기수 '케이젠'은 말의 고삐를 잡고 전차를 조종했고, 나머지 한 명의 병사 '세네니'가 기수 뒤에 서서 활이나 창, 칼을 쓰면서 적병들을 죽였다. 전차의 주력인 세네니는 귀족 출신인 경우가 많았고 케이젠은 경험 많은 병사나 시종이 맡아 세네니를 보호해주는 역할을 했다. 특히 아멘호테프 2세가 전차를 기막히게 잘몰았다고 한다.

전차병들은 이집트 군대 내부에서도 최고의 엘리트병들이었다. 전차병들은 '마르야누', 즉 '젊은 영웅'이라고 하여 특권 계급을 형성했고 파라오들은 항상 전투에서 전차를 타고 적들을 쏘아 죽이는 모습으로 묘사됐다. 하지만 전차가 무적은 아니었다. 전차는 지형을 크게 탔는데 조그마한 돌덩이 하나에 아예 뒤집어질 수도 있었고 현대의 탱크와 비교하기에는 미안할 정도로 돌파력이 약했다. 당시의 전차는 현대에 비해 훨씬 내구력이 약했기에 돌진해서 빽빽하게 모여 있는 적의 진영을 분쇄하는 건 힘들었다.

10.1. 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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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집트의 함선 모습
고대 이집트가 사막 지방이다 보니 해군의 존재가 유명하진 않지만 당대 이집트에는 상당한 규모의 고대 해군이 존재했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해군의 이미지와는 달리, 지중해로 나가 싸우기보다는 나일 강 유역을 유유히 항해하며 지방을 방비하는 것에 그쳤다. 고대 이집트 배들의 절대다수는 갈대를 엮어 만들었는데 당연히 허접한 갈대 배를 타고 지중해로 나가기란 불가능했다. 그래서 일부러 바다용 함선은 레바논에서 수입해온 삼나무를 사용하여 만들었다. 하지만 삼나무가 비쌌기 때문에 나무로 만든 목재 함선은 수가 많지 않았으며 대부분의 이집트인들은 갈대 배를 타고 다녔다.

해군의 핵심 목적은 해전을 벌이는 게 아니라 병사들을 최대한 빠르게 전장까지 데려놓는 것이었다. 이집트는 워낙 지형이 험난하고 척박하여 병사들이 빠르게 이동하는 것이 어려웠기에 나일 강의 배를 통해 빠르게 병사들을 운송한 것이다. 일부러 나일 강변에 해군 기지와 초소들을 세워놓고 보급을 했으며, 반란이 일어나거나 외국의 침략이 있을 때 유용하게 써먹었다.

해군이 가장 빛을 발하던 시기는 바다 민족이 쳐들어왔던 이집트 신왕국 시대였다. 바다 민족들은 지중해와 접해있는 나일 강 하류를 통해 쳐들어왔는데 이때 해군을 이용해서 바다 민족들을 격퇴한 것이다. 이때 해전도 많이 일어났는데 사실 고대 이집트의 해전 전략은 별다른게 없었다. 갈고리를 던져 상대 함선을 끌어당긴 다음 거기로 건너가 백병전을 벌이는 게 전부였다.

고대 이집트의 함선들에는 가로로 거대하고 네모난 돛이 달려있었으며, 대부분은 돛대가 1개에 불과했다. 뱃머리에는 적들에게 공포를 주겠다는 의미로 사자 머리나 사람의 두개골이 장식되어 있곤 했다고. 당시에는 내장형 방향타가 발명되기 이전이라 2개의 방향타용 노가 달려 있었으며 배 양 옆으로 노들이 각각 한 줄씩 있었다. 한 척에 보통 노잡이들이 50명 정도 들어갔고 함선의 무게는 무려 70~80톤에 달했다. 이 노잡이들은 평소에는 노를 저었지만, 적들과 백병전이나 해상전을 벌일 때에는 바로 무기를 잡고 직접 싸우기도 했다.

고대 이집트에서 기록된 주요 해전 중에 '아바리스 해전'이 있다. 이집트 제2중간기 시절 제17왕조는 힉소스인들과 전쟁을 벌였는데, 이때 힉소스인들의 도시 아바리스를 점령하기 위해 나일 강의 운하 위에서 해전을 벌였다고 한다. 그 외에도 람세스 3세가 바다 민족들의 함선을 격퇴할 때에도 수없이 많은 해전이 일어났다. 참고로 이때 람세스 3세는 바다 민족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는데,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바다를 건너온 바다 민족의 배는 원양 항해용이라 둔중하고 속도가 느렸던 반면, 이집트 해군은 가볍고 속도가 빠른 소형 전선이었기 때문. 람세스 3세는 바다 민족을 하류 쪽으로 유인하여 해전에서 대승을 거두었다고 한다.

11. 예술

고대 이집트 언어에는 '예술'을 의미하는 단어가 없었다. 당시 이집트에서 예술이란 신과 파라오를 섬기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고, 현대미술처럼 예술 그 자체를 중요시하지 않았기에 예술을 뜻하는 단어조차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 때문에 고대 이집트 예술은 순수 미술이 아니라 대부분이 신과 관련된 종교 예술이거나 왕을 찬양하는 왕실 미술에 한정되었다. 주제가 모조리 이런 것들이었으니 당연스레 엄숙하고 장엄한, 그리고 틀에 맞춰진 양식의 예술들이 발전했다. 고대 이집트 시대에 만들어진 것들 중에 개인의 감정을 표현하거나 작가 자신의 느낌을 묘사하는 내용의 예술품은 거의 찾아보기가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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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탕카멘의 관 사자의 서[58] 투탕카멘의 왕좌 호루스의 목걸이
이집트 회화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은 사람 얼굴은 측면을 바라보고 있지만 몸은 정면을, 다리는 다시 측면을 향해 있다는 것이다. 인체의 비율도 이미 양식이 딱딱 맞추어져 있어서 바닥부터 이마의 머리 라인까지, 얼굴부터 어깨까지 등 모든 비율이 이미 다 정해져 있었다.[59] 회화 속 인물의 자세도 매우 제한적이어서, 수많은 벽화들을 뒤져봐도 거의 서있거나, 무릎을 꿇고 있거나, 앉아 있거나 그런 자세들 밖에 없다. 또한 남자의 경우 왼쪽 발을 앞으로 뻗은 상태로, 여자는 발을 가지런히 모으게 그렸다.[60] 인물을 그릴 때 인물만의 개인적인 특성을 살려 그리지도 않았다. 벽화 속 그려진 파라오들의 얼굴을 봐도 다 거기서 거기인 이유. 대신 그 위에 왕명을 새겨넣거나 장식품들을 통해서 그 인물이 누군지를 알려주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굳이 모든 그림을 2차원적으로 그린 이유는 이집트인들이 사실주의보다는 인체의 가장 대표적인 부분만 따서 그리는 걸 더 중요시했기 때문이다. 이집트의 예술가들은 일종의 모사가였다. 창조신 프타가 만든 세계를 복제해 표현하는 일종의 복제가로 여겨졌던 것이다. 그렇기에 세계 전체를 표현하는 예술가로서는, 사람 개개인의 특성을 하나하나 구현하기보다는 그 사람의 핵심적인 특징, 예를 들어 팔다리나 얼굴의 윤곽을 나타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겼다. 개인의 모습은 최대한 간략화해 그린 대신에, 그 옆의 글과 그림들을 통하여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세계에 대한 완전한 정보를 제공하려 시도했다.

그 외에도 조각상을 깎을 때에 남성의 석상은 여성의 석상보다 더 어두운 색의 돌을 사용해 만들었으며, 석상이나 회화 너나없이 중요한 인물은 크게, 중요성이 떨어지는 인물은 상대적으로 더 작게 그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또한 이집트 회화는 굉장히 상징성이 강했다.

이집트에서는 4개의 색을 기본으로 해서 색을 칠했다. 검은색을 의미하는 '켐', 백색을 나타내는 '헤지', 초록색[61]을 상징하는 '와지', 붉은색 계통의 색을 주로 하는 '데셰르' 이렇게 4개의 색을 기본으로 삼았다. 이 색깔들은 모두 각자 의미하는 뜻이 있었는데, 예를 들어 푸른색이나 초록색은 다산과 풍요를 상징했다. 때문에 풍요의 신 오시리스는 초록빛 피부를 가진 것으로 묘사했다. 검은색 역시 사후세계, 풍요와 나일 강을 상징했기에 주로 파라오들의 부장품을 검은색으로 많이 칠했다. 죽음의 신 아누비스가 흑색 피부로 묘사되었으며, 죽은 왕의 조각상 역시 흑색 돌을 이용해 깎았다. 이집트인들은 을 신들의 살로 보았고 을 '백금'이라 부르며[62] 신들의 뼈로 여겼다. 붉은색, 주황색 등 붉은 계통의 색들은 태양이나 사막의 신 세트와 연관이 있었다. 파라오를 태양신으로 묘사할 때에 붉은 암석을 사용했으며, 세트의 석상에도 붉은빛 돌들을 애용했다.

이집트 도자기는 석상이나 회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유명한 것은 아니지만 굉장히 그 폭이 다양하며 예술성도 매우 뛰어나다. 대리석 가루와 석회석, 식물을 태운 재 따위로 만들었는데 이를 모두 섞은 뒤 유약을 발라 가마에 구워서 제작했다. 최소한 이집트 선왕조 시기부터 도자기를 구웠던 것으로 추정되며 중왕국, 신왕국 시대를 거치며 도자기 제작 기술의 황금기를 찍었다. 도자기에 푸른 빛을 내게 하는 유약을 발라 구우면 아름다운 푸른 빛을 내도록 만들 수 있었는데, 이 푸른 색깔이 터키석이나 라피스 라줄리의 빛과 상당히 흡사했기에 비싼 보석들을 살 돈이 없는 사람들이 대용품으로 이 도자기를 이용해 부장품을 만들거나 집을 장식하곤 했다. 푸른색뿐만 아니라 붉은색, 노란색 등 다른 색의 도자기도 구울 수는 있었지만 푸른색 도자기가 색감 면에서는 워낙 독보적이었기에 고대 이집트에서는 푸른색이나 연녹색 색깔의 도자기를 가장 많이 만들었다.

도자기와 비슷한 유리 공예품도 많이 제작했다. 다만 유리를 불어 만드는 기술이 당시로서는 매우 고급 기술이었기에 신왕국에 해당하는 18왕조 초반에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유리 제품들이 많이 제작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리 자체는 굉장한 사치품이었으며, 왕실 일가나 대귀족 정도나 되어야 사용할 수 있었던 거지 일반 평민들은 구경조차 하기 힘들었다. 도자기와 유리를 만들 때 가장 많이 사용한 이집트식 염료가 바로 유명한 '이집션 블루'다. 대리석과 알칼리 물질을 섞어 만들었고, 눈에 잘 띄고 아름답다는 특징 덕분에 도자기, 유리 등 수많은 분야에 넣어 썼다.

금속 공예품들도 쏟아져 나왔다. 이집트에서 가장 먼저 사용했던 금속은 구리로, 선왕조 시대부터 조물을 만들어 구리 제품들을 생산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때 이미 어닐링[63], 냉각 및 망치질 기술이 보급되었으며 덕분에 이집트의 금속 주조술은 빠르게 발전했다. 이집트의 구리 공예 기술은 고왕국 시대에 절정을 찍었고, 이후 황금이나 은, 청동 등 기타 금속들의 제련법이 등장하며 구리 외에도 여러 금속들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이집트인들은 을 최고의 광물로 쳤다. 시간이 흘러도 부식되거나 변하지 않는 황금의 불변성을 신의 영원성과 결부시켜 금을 신성시했기 때문.

이집트인들은 황금을 신들의 살로 여겼고, 파라오의 관을 매장하는 무덤의 매장실을 '황금의 방'이라고 불렀다. 오벨리스크나 피라미드의 맨 꼭대기에는 금으로 도금한 캡 스톤을 얹어 마무리했고, 신전에서도 가장 중요한 신상이나 제기들은 언제나 금으로 만들었다. 은 주로 레반트 지방에서 수입했다. 초기에는 은의 공급이 적어 심지어 금보다도 희귀한 금속으로 여겨졌지만 이후 중동 지방에서 막대한 은이 유입되면서 금보다 가치가 낮아졌다. 물론 은도 비싼 광물이었던 것은 마찬가지였고 금이 신들의 살이었다면 은은 신들의 뼈로 여겨졌다. 고대 이집트에 마지막으로 등장한 광물이 바로 이다. 그러나 말기 왕조 시대까지 철기 제조법은 보급되지 않아 모조리 수입해서 사용했고, 철제 도구들은 로마 시대에 이르러서야 보편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미신을 숭배했던 이집트인들은 부적을 굉장히 좋아해 많이 지니고 다녔다. 가장 애용하던 부적은 라피스 라줄리나 황금으로 만든 스캐럽, 혹은 호루스의 눈[64], 이시스의 매듭[65] 등을 새겨 넣은 목걸이 등이었다. 딱정벌레를 형상화한 스캐럽은 행운을 가져오고 반대로 액운을 막아준다고 해서 많이 쓰였는데, 특히 사후세계에 쓸 용도로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

이집트 신화에 따르면 사람이 죽으면 사후세계의 법정으로 들어가 거대한 저울에 자신의 심장을 얹어 그 죄를 판결받는다고 했다. 한쪽에는 자신의 심장을, 다른 한쪽에는 정의의 여신 마아트의 깃털을 얹었다. 죄를 많이 지을수록 심장이 무거워졌기에 만일 심장 쪽으로 저울이 기울면 그 사람은 지옥으로, 깃털 쪽으로 저울이 기울면 천국으로 가는 방식. 그러나 고대 이집트인들도 사람이었던지라 죄를 짓지 않고 사는 것은 불가능했고, 자신이 죽어 지옥에 갈까 두려워했던 이집트인들은 미리 자신이 죽으면 심장 바로 위에 이 스캐럽 부적을 올려달라고 부탁했다. 이유인 즉슨 이 스캐럽 부적이 심장의 죄를 묶어놓아 심장이 제 죄를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치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 이집트인들은 신분을 막론하고 이 스캐럽 부적만큼은 반드시 가지고 관에 묻혔다. 물론 파라오나 귀족들은 보석이나 황금으로 만든 스캐럽 부적을 가지고 묻혔지만 평민들은 흙이나 돌, 나무 따위의 스캐럽와 함께 관 속에 잠들었다. 스캐럽 부적 외에도 목걸이나 반지도 유행했다. 사람들은 신성한 황금이 악령을 몰아낸다고 믿었기에 금으로 만든 액세서리들을 많이 차고 다녔다고 전해진다.[66]

11.1. 아마르나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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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신왕국 시기 종교 개혁을 이끌었던 파라오 아케나텐은 단순히 종교뿐만 아니라 사회와 예술 전반에 걸친 대개혁을 단행했다. 아케나텐의 종교 개혁은 그의 죽음 이후 무위로 돌아갔고 그가 야심차게 지었던 수도 아마르나는 버려졌지만, 아케나텐의 시절에 만들어진 예술품들은 그 이전과 이후에 만들어진 기성 작품들과는 확연히 모습이 다르기 때문에 따로 '아마르나 미술'이라고 부른다. 아마르나 시대 만들어진 석상의 가장 큰 특징은 목과 머리 등이 과장되게 긴 모습을 하고 있고, 이마와 코가 유난히 경사져 있으며 뺨이 두드러져 있고 귀와 입술이 크다는 것. 그 외에 허리가 잘록하고 엉덩이 부분이 커진 모습을 하고 있어 유연한 여성스러운 느낌을 주기도 한다.

아마르나 시대에 제작된 석상들 중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위의 아케나텐의 석상이다. 아케나텐 이전에 만들어진 파라오의 석상들을 보면 굉장히 정적인 자세로 딱딱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면, 아케나텐의 석상은 훨씬 자연스럽고 섬세해 보이는 듯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이 차이점이다.[67]

아마르나 미술의 대표 작품이 바로 위의 '네페르티티 흉상'이다. 현대인들이 보았을 때에도 위화감이 없을 정도로 세련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어 많은 이들을 경탄케 한 걸작으로, 아마르나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손꼽힌다. 네페르티티는 파라오 아케나텐의 아내였는데, 왕비라는 지위 덕분에 그녀를 모티브로 한 작품들이 많이 만들어졌으나 아케나텐 사후 대부분의 작품들이 고의적으로 파괴되었기에[68] 남아 있는 것은 현재의 이 흉상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흉상은 1912년 아마르나의 유적에서 한 독일인 고고학자가 발굴했다. 범상치 않은 흉상의 자태를 보고 그 가치를 직감했던 독일 고고학 팀은 바로 이 흉상을 독일로 반출하고 싶어했다. 연구 팀은 이집트 통관 관리에게 일부러 흉상을 제대로 찍은 사진을 보여주지 않거나 그 가치를 깎아내리는 등 치졸한 방법으로 이집트 세관을 속였고, 결국 흉상을 빼내 독일 박물관으로 가져가는 데에 성공했다. 이 같은 수법으로 유물을 국외로 반출했기에 타임지는 이 흉상을 '약탈당한 세계 10대 작품'이라고 부르기도 했을 정도. 흉상은 석회석으로 만들어졌고, 높이는 약 48cm이며 염료로 색칠했다. 참고로 흉상의 왼쪽 눈이 미완으로 남아 있는데, 학자들은 이미 고대 시절부터 미완성된 상태로 땅에 묻혔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흉상을 최초로 발굴했던 독일 고고학 팀 역시 처음에는 이 왼쪽 눈 파편이 어딘가에 떨어져 있을 것이라 여기고 이 왼쪽 눈에 1,000파운드의 상금을 걸었다. 인부들은 인근을 모조리 뒤졌으나 결국 찾아내지 못했다.

12. 문학

당대 문해능력이 곧 권력이었던 고대 이집트에서는 아무나 읽거나 쓸 수 없었다. 전체 인구의 약 1% 만이 글을 읽고 쓸 수 있었던 것이다. 그 1%는 대부분이 서기신관, 아니면 귀족들 중 엘리트층이었다. 현대까지 남아 있는 기록들은 모두 이들이 남겨놓은 것들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서기 교육과 엘리트층과 관련된 내용들, 예를 들어 교훈과 잠언집, 그리고 도덕 지침 따위가 가장 종류가 많고 다양하다. 고고학자들은 고대 이집트 문학을 큰 틀에서 '가르침', '이야기', '애가와 예언', '시와 노래, 찬송가', '서한', '전기 및 자서전' 이렇게 6개의 장르로 구분한다. '이야기' 장르만이 산문 형식을 사용했지만 운문을 사용하는 경우도 많았다. 대부분의 문학 구절은 2행시 형식이나 가끔은 3행시나 4행시도 썼다.

고대 이집트인 본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장르는 '가르침'이었다. 고대 이집트어로는 '참되게 사는 법'이라는 뜻의 '세베이트'(Sebayt)라고 불렀다. 주로 교훈적인 내용이 대다수고 사회에 잘 순응해야 한다, 이러이러한 행동을 해야 한다 식의 지극히 교과서스러운 내용이다. 중왕국 시대 이래 서기들이 학교에서 달달 외울 정도로 배우던 장르였기도 하다. 애초에 교과서와 훈계 목적으로 만들어졌기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도 '알다'(rḫ)와 '가르치다'(sbꜣ)이며, 일반적으로 'X를 위한 Y의 지시'라는 식의 제목이 달려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예시는 《프타호테프의 격언》,[69] 《아메넴헤트의 가르침》,[70] 《아메네모페의 가르침》[71] 등이 남아 있다. 이중에서 《프타호테프의 격언》과 《아메넴헤트 1세의 가르침》은 전형적인 중왕국 시대의 작품이지만 《아메네모페의 가르침》은 전형적인 신왕국 시대의 작품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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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옵스 왕의 궁정》이야기가 담긴 '웨스트카 파피루스'.[72]
'이야기' 장르는 고대 이집트 작품들 중에서도 가장 희소하고 남은 것도 거의 없는 장르다. 이쪽은 교훈을 담는다기보다는 재미나 탐험기를 기록해놓은 것인데, 가장 유명한 건 《두 형제의 이야기》, 《케옵스 왕의 궁정》[73], 《네페르카레와 사세네트 장군》,[74], 《유창한 농부의 이야기》,[75] 따위가 있다. 주로 재미를 위해 만들어진 장르지만 역사적 가치도 충분하다. 예를 들어 《시누헤의 이야기》[76]에서는 파라오 아메넴헤트 1세의 죽음에 관해 설명하고, 《웨나문의 보고서》[77]에는 람세스 11세 시절 삼나무를 사기 위해 저멀리 페니키아까지 여행한 이집트인들의 경험이 생생히 녹아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소설 장르의 초기적인 형태라는 점에서 문학적인 가치도 높다.

'애가와 예언'은 중왕국 시대에 가장 활발하게 창작된 장르였다. 말은 거창한 '예언'이라고 써놨지만 사실상 왕조의 정당성을 찬양하는 장르였다. 한국의 《용비어천가》와 비슷한 느낌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장르가 가장 많이 쓰인 시대는 아메넴헤트 1세의 재위기인데, 그가 전대 파라오인 멘투호테프 4세를 강제로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아메넴헤트 1세가 자신의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해서 장려했다고 보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예시는 《네페르티의 예언》이다. 고왕국 시절인 제4왕조의 신관 네페르티의 예언이라는데, 그 내용은 고왕국이 멸망하고 혼란기가 닥쳐올 것이며, 그 후에 '아메니'라는 이름의 영웅이 나타나 이집트에 평화를 되찾아올 것이다... 라는 내용이다. '아메니'라는 이름에서 감이 오겠지만 아메넴헤트 1세를 찬양하기 위해서 후대에 창작한 허구에 불과하다. 이후 예언 장르는 신왕국 시대에는 별 인기가 없었지만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로마 제국 시대 들어서 다시 인기를 얻는다. 예언 장르와 위의 '가르침' 장르를 섞어놓은 것도 있는데 대표작이 《어떤 남자와 그의 영혼의 대화》이다.

'시와 노래, 찬송가' 장르는 고왕국 시대 이래 활발하게 창작된 분야였다. 주요 목적은 파라오와 신을 찬양하거나 망자가 무덤에서 사후세계로 평안히 가도록 도와주는 것. 현재까지 남아 있는 가락들은 거의 없지만, 그나마 멤피스의 파라오를 찬미하는 세누스레트 3세의 찬양가, 저녁 만찬에 손님을 맞을 때 사용되던 <하프 연주가의 노래> 등이 있다. 가장 유명한 건 아마르나아톤 신전에서 발견된 아케나톤의 <아톤의 대찬양가>이다. 《성경》 <시편> 104의 원형이 이 <아톤의 대찬양가>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사랑과 관련된 발라드 노래가 분명 존재하긴 했지만 신왕국 이전의 사랑 노래들은 남아 있는 게 없다. 이 이집트의 사랑 노래는 연인들이 서로를 부르는 방식 등을 포함해서 훗날 《성경》의 <애가>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서한'은 고대 이집트인들이 서로에게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썼던 편지이다. 보통 장거리로 보낼 때는 파피루스에 글을 써서 밀랍으로 봉인했고, 굳이 숨겨야 할 내용이 아닐 때는 도기 조각이나 사금파리에 글을 써서 보냈다. 왕족이나 외교 공문의 경우 암석에다가 문자를 새기는 일도 많았다. 이집트에서 가장 오래된 사적 편지는 제5왕조 시절까지 연혁이 거슬러올라가며, 이후 제6왕조부터 시작해서 수많은 편지 서한 양식들이 발전했다. 서기들은 편지에만 쓰는 특수한 문체와 인사에 사용하기 좋은 미사여구들을 따로 배웠을 정도였다. 제19왕조에 쓰인 '아나스타스 파피루스'에는 당시 서기 지망생들이 베껴 썼던 수많은 문서들이 적혀 있는데, 여기에는 현생과 후생에 대한 적절한 인사말, 수사학, 격언의 해석 등 편지를 쓰고 읽을 때 필수적인 요소들이 다 들어 있다. 이 파피루스에 보면 심지어 요즘 학생들서아시아의 지역 지명만 달달 외우지 그 자세한 내용과 세부 요소는 외우지 않는다고 신랄하게 비꼬는 내용도 있다.

'전기 및 자서전'은 인물의 생전 업적을 줄줄이 나열해놓은 목록이었다. 자서전의 주인공이 스스로 구술하거나 집필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현대적인 개념의 제대로 된 자서전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사망 이후 타인이 주인공의 일생을 대필하는 전기에 더 가까웠던 것이다. 위대한 파라오의 업적을 남긴 전기를 가장 많이 남겼지만, 파라오뿐만 아니라 일반 정부 관리들도 자신의 전기를 써서 남겼다. 제6왕조 시절부터 일반인들의 일생을 담은 전기들이 등장했고 중왕국 시절에는 관리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까지 내용이 확장된다. 신왕국 시대에는 서기와 귀족들의 전기만 쓰이던 데에서 더 나아가 군 장교와 군인들에게까지 그 범위가 넓어졌다. 물론 모든 전기들은 생전 고인의 성공적인 삶을 축하하는 고리타분한 내용이다.

문학의 장르에 포함된다고 보기에는 애매하지만 '법령과 연대기, 왕의 목록'도 매우 중요한 기록이다. 사원과 유적 벽과 기둥에 그득그득 그려진 것들이 모두 여기에 들어간다. 고고학자들이 고대사를 재구성할 때 가장 참고를 많이 하는 분야로 투트모세 3세람세스 2세의 업적 같은 중요한 역사적 사실들을 세세하게 기록해놨다. 수백 명에 달하는 파라오들의 목록을 알 수 있는 것도 이 '법령과 연대기, 왕의 목록' 장르 덕분에 가능했다. 제5왕조의 팔레르모 석, 그리고 이 분야의 끝판왕이나 다름없는 마네토의 《왕명표》도 여기에 속한다. 마네토는 기원전 3세기의 역사가로 우리가 아는 왕조의 구분을 처음으로 분류한 사람이다. 고대 이집트 역사를 최초로 포괄적으로 편찬한 인물이라는 엄청난 타이틀도 있는데, 모든 파라오들의 목록을 빠짐없이 다 적어놔서[78] 현대 이집트학의 대부분은 이 마네토에게 의존하는 경우가 잦다.

고대 이집트 기록이라고 하면 하나같이 엄숙하고 진지한 기록들만 생각하지만 이집트인도 사람이었던지라 낙서를 즐겼다. 신왕국 시대에 옛 유적지들을 탐방하던 사람들이 사원과 피라미드 구석에 대놓고 낙서를 하는가 하면, 자신이 남긴 낙서가 지워지지 않도록 일부러 손이 잘 닿지 않는 곳에다 낙서를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물론 일부 서기들은 기도문이나 찬양가를 써놓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낙서들은 자신이 왔었다는 걸 알리거나 음담패설 등 쓸데없는 내용이었다. 건축물의 주인공을 비난하거나, 경쟁적으로 서로의 글씨체가 엉망이라고 욕하거나, 해당 서기의 조상을 모욕하는 등 지극히 인간적인 내용의 낙서들도 많이 남아 있다.[79]

13. 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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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인들은 사막 기후에 살았기에 헐렁한 킬트나 바람이 잘 통하는 옷들을 주로 입고 다녔다. 돈이 많지 않았던 평민 남성의 경우 기본적으로 허리에 셴디트라 불리는 로인클로스나 사각형의 천을 대충 두르고 허리띠를 매어 고정했다. 평민 여성은 상체의 가슴까지 가려야 했기에 롱 스커트와 비슷하게 생긴 잘록한 원피스를 걸쳤다. 이집트의 벽화를 분석한 결과 여성들이 입었던 옷들은 대개 하늘하늘한 옷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더운 날씨 탓에 어깨까지 옷이 트여 있었다. 부유한 여성들은 반투명한 리넨 옷감으로 옷을 만들어 썼다.

남성보다 여성에게 훨씬 보수적인 이집트 사회였기에 남성은 허리와 사타구니의 치부 정도만을 가리는 경우도 많았던 반면 여성의 옷은 대부분 최소 무릎 아래까지는 내려가 있었다. 부유한 남성도 일반인들과 마찬가지로 무릎까지 내려오는 킬트를 걸친 것은 동일했으나, 그 위에 헐거운 셔츠나 망토를 걸치는 등 나름대로 꾸미고 다녔다. 다만 아무리 화려하게 차려입는다고 해도 날씨가 워낙 더우니 옷을 겹겹이 껴입고 다니지는 않았고, 대신 보석류나 황금을 이용한 악세사리들을 착용했다. 고대 이집트 유물들 중 유난히 목걸이나 반지 등이 많은 이유가 바로 이것. 너무 더워서 제 몸을 꾸밀 수단으로 화려하지만 긴 옷보다는 악세사리류들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고대 이집트 벽화를 보면 고위 계급들은 하나같이 목에 넓은 칼라 모양의 목걸이를 하고 있는데, 이걸 '우셰크'라고 부른다. 주로 색칠한 돌 구슬이나 황금, 보석들로 만들었고 목 뒤로 끈을 묶어 연결해 달고 다녔다. 이집트인들은 우셰크를 하고 다니면 신들의 가호를 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남자들은 모두 허리에 로인클로스를 입었는데, 왕족들이나 고위층들의 조각상을 보면 특이하게 로인클로스가 삼각형 모양으로 앞쪽에 툭 튀어나온 모습을 볼 수 있다. 마치 햇살이 퍼져나가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고대 이집트에서는 권력의 상징이었다. 여성들은 가슴을 드러내고 어깨끈으로 고정한 스커트나 린넨 천에 목둘레 선을 내고 양 옆 선을 앞으로 접어 허리띠를 맨 '칼라시리스'를 입었다. 바로 아래에 첫 번째 그림의 여성이 입은 게 칼라시리스다. 이 칼라시리스는 남성과 여성 모두 입을 수 있었다. 당장 위의 그림만 봐도 남자들이 비슷한 칼라시리스들을 입고 있는 걸 볼 수 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우아한 느낌이 강해 여성들이 더 즐겨 입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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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왕조 시대에 들어서는 여성들의 옷이 파격적으로 변하기도 했다. 당시의 옷을 보면 천은 오직 허리 아래만을 가리고 있고, 상체 부분에는 얇은 끈 두 개가 어깨에서 내려와 가슴에 걸쳐진 후 허리 부분과 연결되어 고정되어 있었다. 현대의 가는 끈 비키니를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편하다.[80] 상체 앞부분을 가리는 것이 가느다란 끈 2개밖에 없었기에 여자들은 가슴을 그대로 노출하고 다녔는데, 다만 유륜과 유두는 가리는 게 예의여서 끈에 캡을 달아 그 안에 간신히 넣어 가렸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속이 비치는 시스루, 망사를 입거나 헐벗고 다녔다면서 성적 판타지가 구현된 세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일단 이집트 여성들이 안의 실루엣이 비치는 반투명한 옷감으로 옷을 지어입었던 건 맞다. 그리고 실제로 일부 여성들이 젖가슴이 그대로 드러나는 노출이 굉장히 심한 옷차림을 하고 다닌 것도 사실이다. 예나 지금이나 이집트는 워낙 더웠기 때문이다. 이집트의 벽화에서 묘사되듯이 이집트 무희들은 아예 벌거벗은 상태로 궁정에서 춤을 추기도 했고, 그 외에 망사로 만들어진 드레스나 몸에 딱 붙는 원피스를 입고 다니는 경우도 많았다. 허나 이는 오직 고위층들만 가능한 옷이었다. 주로 부유한 젊은 귀족 여성들 정도가 이렇게 얇은 옷을 입고 다녔고, 그럴 여유도 경제력도 없는 일반 평민들은 이런 옷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게다가 이집트에서는 여성들도 고된 육체 노동을 했기에 지나치게 얇은 옷을 입고 다니면 오히려 찢어지기에 딱 좋을 뿐이었다. 고대 벽화에도 이런 스타일의 옷을 입은 인물들을 보면 대개 신화의 여신이거나 왕족들이다.

여자 무희는 거의 옷을 걸치지 않았다. 기껏해봐야 젖가슴에서 발목가지 내려오는 얇고 하늘하늘거리는 흰색 리넨 천만을 입고 다닐 뿐이었다. 신왕국 시대에는 무희들의 의상이 더욱 노골적으로 변했다. 성인 무용수들은 엉덩이에 벨트나 스카프 하나만 차고다녔고, 때로는 안이 그대로 투명하게 비치는 얇디얇은 옷을 입었다. 넓고 긴 투명한 망토를 입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때도 오른쪽 가슴을 노출하는 기교를 부렸다. 무용수들은 팔찌와 리본, 화환을 착용했다. 가슴에는 리본을 달았으며 향밀랍으로 만든 장신구를 썼다. 춤을 추며 체온이 올라가고 땀이 나면, 이 밀랍이 녹아내리면서 좋은 향을 냈다. 눈에는 짙은 아이라인을 그렸다.

무희들은 허벅지와 배에 다산과 출산의 신 베스의 문신을 새겼다. 무희들이 여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남성 무희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짧은 머리를 하고 표준적인 남성복을 입었지만 남자들 역시 헐벗는 경우가 잦았다. 고왕국 시대에는 앞면이 둥근 앞치마를 두르기도 했다. 성인 남성 무희들은 목걸이나 사슬을 목에 걸었고, 소년 무희들은 발에 팔찌를 착용했다. 소품도 다양하게 사용해서 짧게 휘어진 막대나 지팡이를 이용해 춤을 추곤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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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집트의 무희들
옷가지 말고도 자신을 꾸미는 데에 신경을 많이 썼다. 이집트인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 가발을 착용하고 화장을 했다. 이집트에서는 모든 성인 남성들이 머리를 빡빡 밀었다. 그러나 아직 성년이 되지 못한 어린아이들은 머리를 전부 밀지 않고 이마 옆쪽의 일부 부분은 남겨놓았다. 머리를 밀지 않은 부분을 길게 길러 땋아 꽁지머리처럼 하고 다녔는데, 이 머리는 성년식을 치르는 과정에서 잘랐다. 주로 파라오의 아들들이나 귀족 자제들이 이러한 꽁지머리를 하고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성년식을 치르면 얄짤 없이 모든 머리털을 깔끔하게 밀어버린 후 대신 가발을 썼다.

이 가발은 보통 실제 인모에 야자수 섬유를 섞어 만들었으며, 컬을 많이 넣어 꼬불꼬불하게 파마한 머리처럼 만들었다. 이집트에서는 이 가발 위에 향료를 섞은 밀랍을 얹고 다니기도 했다. 그러면 더운 날씨 때문에 밀랍이 녹아 가발 위로 흘러내리는데, 이 과정에서 향기가 퍼져나갔기 때문.

보통 파라오가 쓰고 있는 모자하면 생각나는 줄무늬가 들어간 두건은 '네메스'라고 부른다.[81] 두건을 머리에 씌운 뒤 띠를 둘러 고정했고, 두건을 양 갈래로 나누어 어깨로 늘어뜨렸으며 뒤쪽을 묶어 마무리했다. 띠의 앞쪽 이마 부분에는 코브라 모습을 한 여신 와제트독수리 모습을 한 여신 네크베트가 또아리를 틀고 있는 모습으로 장식했다. 여신 와제트는 하이집트의 수호신, 여신 네크베트는 상이집트의 수호신으로 이는 파라오가 상하 이집트를 모두 아우르는 대왕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상징성이 크다.

네메스 외에도 다양한 왕관들을 사용했다. 하이집트의 붉은 왕관 데슈레트와 상이집트의 하얀 왕관 헤제트를 합쳐 만든 이중관 '프셴트'를 쓰기도 했으며 전시에는 '케프레시'라고 하는 독특한 모습의 푸른색 전투모를 착용했다. 앞에는 태양신의 상징 우라에우스가 장식되었으며 제2중간기 시절부터 사용된 것으로 여겨진다. 마지막으로 파라오들이 들고 다니는 독특한 모습의 갈고리와 도리깨는 각각 '헤카'와 '네카카'라고 불렀는데, 원래 오시리스의 상징이었다. 갈고리는 왕권을 상징했고 도리깨는 풍요로움을 의미했다.

13.1. 화장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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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집트의 화장술[82]
이집트인들은 화장품도 많이 사용했는데, 가장 대표적으로 눈가에 '코올'이라 불리는 검은색 아이라인을 그렸다.[83] 이는 미적 효과뿐만 아니라 뜨거운 태양빛이 눈에 들어오는 것을 일부 막아주는 것도 있었다. 입술에는 붉은색이나 동물지방에 색료를 넣어 만든 푸른색으로 립스틱처럼 발랐다고 한다

참고로 이집트인들의 화장은 굉장히 진한 편이었다. 가장 중요한 건 눈화장이었다. 앞서 말했듯 눈이 크게 만들어주는 검은색 아이러이너 '코올'을 칠했고 공작석을 갈아만든 초록색 화장을 눈두덩 전체에 발랐다. 우리가 흔히 이집트식 화장하면 생각나는 진한 눈화장이 바로 이 것이다. 화장을 하지 않는 눈은 악마의 공격에 취약하다고 여겼기에 화장은 단순한 미용이 아니라 생활에 필수적이었다. 눈이 가장 중요하지만 입술도 중요했다. 보통 붉은 황토를 발랐는데 오래 지속되도록 레진이나 지방을 섞기도 했다. 클레오파트라의 경우 꽃, 황토, 물고기 비늘, 으깬 개미, 밀랍, 카민 등으로 만든 독특한 붉은 립스틱을 바르고 다녔다.

뺨을 더 생기있게 만들기 위해 붉은색으로 칠했다. 땅에서 파낸 산화철 점토를 햇빛에 말려 가루로 만들었는데 더 강렬한 색상을 얻기 위해 일부러 탈 정도까지 말리기도 했다. 이걸 붓을 사용해 바르면 감탄할 정도의 홍조가 나왔다. 상류층과 하류층 모두 뺨에 붉은색을 칠했는데 이는 이집트의 강렬한 태양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해주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차이라면 상류층은 전문 제조업자가 만든 고급 염료를 사용한 반면 하류층은 그냥 집에서 만들어 썼다는 것 정도.

그 외에도 손톱을 다듬기 위해 헤나를 사용했다. 왕궁에는 전문 매니큐어사가 따로 있었으며 상류층들은 손톱을 주황색이나 노란색으로 물들였다. 손톱이 길다는 것은 곧 험한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상류층이라는 표식이었기에 일부러 손톱을 기르고 다듬었다. 특히 여자들의 경우에는 피부에 막대한 공을 들였는데, 동물성 지방으로 만든 크림과 오일을 바르면서 피부에 주름이 생기지 않도록 유지했다. 좋은 향기는 신성한 것이라고 믿었기에 백단향, 백합, 창포, 유향, 몰향과 같이 꽃 등에서 추출한 재료들을 가지고 향수를 제조하기도 했다. 햇빛에 타지 않아 하얗고 매끄러운 피부는 고귀한 상류층의 상징이나 다름없어서 사람들은 일부러 피부에 엄청 신경을 썼다.

화장품 뿐만 아니라 화장대 역시 중요한 부분이었다. 이집트의 화장대는 크게 각종 화장품들을 담은 항아리, 광물들을 가루로 갈아 만들 조그마한 절구, 각종 향수병, 화장품을 피부에 펴바를 붓이나 숟가락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유물이 바로 나르메르 팔레트, 물론 저 팔레트 자체는 실용적인 용도보다는 장식용이 더 크지만 어쨌든 저렇게 생긴 팔레트에 화장품들을 갈아서 그걸 피부에 발랐다. 이집트의 귀부인들이 화장품들을 어찌나 좋아했던지 최소 2개 정도의 립스틱은 가지고 무덤에 묻혔으며, 화장대와 화장품 풀 세트를 무덤까지 가지고 가기까지 했다. 화장대 자체는 코끼리 상아나 동물 뼈, 흑단 나무 등을 사용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거울도 있었는데 금이나 은같은 금속을 얇게 도포해서 비치게 만들었다.[84]

14. 장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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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문명만큼 사후세계와 죽은 이후의 삶에 대해 관심이 많은 문명권은 드물었다. 사람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평생 동안 내세를 준비했고, 죽은 이후에는 생전 가장 소중하게 여기던 물건들과 부장품과 함께 무덤에서 안식을 찾았다. 이집트인들의 장례 의식은 시대에 따라 조금조금씩 변화가 있지만, 전체적인 내용이나 핵심 제례들은 몇천 년 동안 거의 엇비슷했다. 이집트에서는 고인이 세상을 떠나면 일단 시체를 곱게 눕혀 안치했다.

만일 고위 귀족 남성이 죽었을 경우에는 조문 행렬이 얼굴에 진흙을 바르고 가슴을 쥐어뜯으며 관을 들고 시가 행진을 벌였다. 이때 대신 울어주는 여인들을 고용했다. 이 여인들은 모두 푸른 옷을 입고 있어 알아보기 쉬웠다. 행진이 끝나고 문상객들이 어느 정도 한 번씩 얼굴을 비치고 돌아가면 그때부터 본격적인 미라를 만드는 작업을 시작했다. 보통 시체가 죽으면 길어야 이틀 안에 넘겨주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젊은 여성이 죽었을 경우에는 미라 제작자들이 몰래 시간(屍姦)을 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일부러 며칠 정도 시신이 부패하기를 기다렸다가 미라 제작자들에게 넘겨주었다.[85] 반대로 익사했거나 타살당한 사람의 시신은 시체의 급격한 부패를 막기 위해 곧바로 미라로 만들었다.

이집트인들은 오시리스가 다스리는 사후세계에서 부활하기 위해선 현세의 육신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믿었다. 때문에 시신이 썩지 않도록 방부 처리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했는데, 이 과정 속에서 유명한 미라가 탄생한 것이다. 미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일단 가장 썩기 쉬운 내부의 장기와 수분을 모조리 빼내야 했다. 미라 제조업자들은 시신을 눕혀 놓은 뒤에 코로 꼬챙이를 집어넣어 코와 사이의 연골을 부순 다음 그 속을 휘저었다.

꼬챙이로 한참 머리 속을 누비다 보면 콧구멍으로 분쇄된 뇌가 흘러나오는데, 이 뇌는 모조리 버렸다.[86] 두개골 속에 남아 있는 뇌 조각들은 약품을 넣어 다시 깨끗하게 씻어냈다.[87] 뇌를 빼낸 다음에는 , , , [88]을 각각 배 속에서 끄집어내어 카노푸스 단지에 각기 보관했다. 이 카노푸스 단지 뚜껑은 호루스의 네 아들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인간의 머리를 가진 임세티(Imesty), 개코원숭이(비비)의 머리를 가진 하피(Hapy), 자칼의 머리를 가진 두아무테프(Duamutef), 의 머리를 가진 케베세누프(Qebehsenuf)를 본떠 만들었고 순서대로 간, 폐, 위, 장을 깨끗이 씻어 담았다.

이렇게 장기를 빼낸 후, 시신 내부를 송진, 향신료와 허브로 속을 채운 다음 향유, 술로 씻어내리고 다시 배를 실로 꿰맸다. 심장을 제외하고는 모든 장기를 빼냈다. 심장만을 남겨둔 이유는 이 심장이 있어야 오시리스의 법정에서 저울로 심판을 받을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 고대 이집트인들은 심장이 인체에서 가장 중요한 장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심장은 따로 빼내서 특수 처리를 거친 다음 다시 제 자리에 넣고 실로 꿰맸다. 이 과정이 모두 끝나면 부패가 되지 않게 나일 강에서 채취한 암염 덩어리로 시신 겉과 속을 덮어 염장했다. 이 과정을 거치면 시신 내부의 잔여 수분이 모두 쪽 빠져나오게 되는데, 대략 40여 일 정도를 이렇게 그대로 놔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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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일이 지난 후에는 시신을 소금에서 꺼내 다시 향유와 포도주로 깨끗하게 씻어 냄새를 없앴다. 이렇게 시신을 씻는 과정을 몇 차례 계속 반복했는데, 이는 단순히 시신 소독뿐만 아니라 뼈 등이 붕대로 감는 과정에서 부러지는 것을 예방하기 위한 목적이 컸다. 또한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황금빛 수지를 전신의 피부 위에 한 번 얇게 발랐다. 이집트인들은 이 신의 피부라고 믿었기에 이렇게 하면 인간이 신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여겼다.[89] 이게 끝나면 이제 시신을 리넨 붕대로 둘둘 감았다. 붕대를 감을 때마다 사이사이에 신성한 부적이나 보물들을 넣었고, 한 차례가 끝날 때마다 신관들이 옆에서 축복을 내렸다.

풀을 이용해 미라의 붕대를 붙이는 작업을 완료하면 이제 얼굴 부분에 생전 고인의 모습을 재현한 데스마스크를 씌웠다. 또한 그 위에 목걸이를 걸어주거나 부적을 놔두기도 했고, 손이나 발, 머리, 무릎 등의 부위에는 추가적으로 붕대를 더 감아주어 보강했다. 이렇게 하면 마침내 미라를 제작하는 작업이 완료된다. 보통 이 과정을 모조리 거치면 약 70일 정도가 소요되었다. 이 기간마저도 이집트인들이 의도한 것인데, 이집트 신화 속에서 죽음의 신 오시리스가 70일 만에 부활했다는 이야기가 있고, 또한 하늘의 별 시리우스가 이집트 세계관의 천공에서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주기였던 것.

참고로 위에 나와 있는 미라 제작법은 파라오나 대귀족들이나 하던 매우 값비싼 최고급 미라 제작법이었다. 소귀족이나 중산층의 미라는 죽은 시체를 특수처리한 기름 속에 푹 넣어둔 후, 꺼내 소금으로 염장했다가 시간이 흐르면 다시 꺼내는 상대적으로 단순한 방법을 썼다. 이렇게 하면 기름이 내장들을 녹여 함께 빠져나오며 기름 때문에 조직이 약화된 근육, 지방 조직이 소금에 완전히 녹아버린다. 결과적으로는 피부와 뼈만이 남아 있게 되는데, 이를 그대로 관에 넣어 매장했다. 한편 가난한 사람들도 사후세계는 가고 싶었기에 미라를 만들었다. 다만 기름이나 향유 따위를 살 형편이 아니었기에 보통 장기를 꺼낸 시체를 소금 속에 약 70일 간 넣었다가 꺼낸 후 그냥 붕대를 감아 묻어버렸다.

14.1. 입을 여는 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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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오의 경우 미라가 완성되면 황금으로 제작한 관에 넣어 성대한 예식과 함께 장제전에서 장례식을 치렀다. 이후 장례용 배 위에 관을 얹어 무덤까지 행진했다. 무덤 바로 앞에서 유명한 '죽은 자의 입을 여는 의식'이 치러졌다. 이 의식은 이집트 장례 예식의 핵심이었는데, 보통 고위 신관이 집전하는 게 보통이었다. 관을 수직으로 세워놓으면 신관이 관에 새겨진 얼굴 부분의 입술을 흑요석으로 만든 칼로 살짝 건드리며 신성한 주문을 외웠다. 이렇게 하는 순간 고인이 사후세계에서 듣고 말하고, 앞을 볼 수 있다고 여겼기에 이 의식은 파라오든 노예든 누구든지 미라를 매장할 때에는 치르는 풍습이었다.

이집트인들은 입을 여는 의식을 정식으로 치르지 않으면 죽은 사람이 나중에 부활한다고 하더라도 입이 열리지 않아 먹거나 말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참고로 저 칼을 이집트어로 '폐셰스카프'라고 불렀다. 흑요석이나 검은빛 돌로 만들어졌으며 모습은 물고기의 꼬리처럼 생긴 형상을 하고 있었다.
프타가 나의 입을 열었노라 나의 고향신이 내 입의 속박을 헐겁게 하셨노라

토트가 마침내 제 주문을 완전히 하였고 내 입에서 세트의 속박을 헐겁게 하셨노라

아툼이 나의 손을 들려주니 신들이 나의 수호자가 되었음이라

내 입이 나에게 주어졌고, 그가 신들의 입을 열었듯이, 프타가 그의 쇠끌로 나의 입을 여시니

나는 천상의 서쪽에 거하는 세크메트-와제트이다

나는 온의 영혼 사이에 거하는 사힛트이다[90]
시신 매장에서 가장 중요한 의식답게 엄청나게 길었다. 무려 75단계에 걸친 기나긴 예식이었는데, 간단히 정리해보자면 1단계부터 9단계까지는 시작의 단계, 10단계부터 22단계까지는 신상을 불러일으키는 단계, 23단계부터 42단계까지는 상이집트에서 바치는 공양 단계, 43단계부터 46단계까지는 하이집트에서 바치는 공양 단계, 47단계부터 71단계까지는 고인에게 바치는 식사였으며 마지막으로 71단계부터 75단계까지가 의식을 마치고 폐막하는 단계였다.

추가적으로 이 예식은 단순히 시체나 미라에게만 하는 의식은 아니었다. 새롭게 만든 신상이나 조각상들에게도 이 의식을 치렀다. 이런 석상들에게까지 실제로 신들이 깃들어 거한다고 믿었기 때문. 이렇게 상징성과 역사성이 매우 깊었던 의식이었던지라 '입을 여는 의식'은 이집트 고왕국 시대에 처음으로 시작되어 심지어 로마 시대까지 전해져 내려갔다. 기원후 이집트를 정복한 로마인들이 오히려 이 예식을 보고 감명받아 자기네들의 장례식에 이 의식을 추가했을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입을 여는 의식을 포함한 모든 의식이 다 끝나면 마침내 관을 무덤 내부의 봉안당에 들여놓았다. 무덤에는 생전 고인이 좋아하던 물건들을 포함해 정말 온갖 것들이 다 함께 묻혔다. 사후세계에서 고인이 사용할 의자, 장롱, 신발, 옷, 책상 같이 일반적인 가구들은 당연히 들어갔고, 심지어는 주인이 심심하지 않도록 함께 놀아줄 애완동물들도 같이 미라로 만들어져 묻어졌다.[91] 부유할수록 더욱 많은 부장품들을 묻었는데, 이집트 최고의 권력자 파라오는 정말 막대한 양의 황금과 보석류들을 가지고 무덤에 묻혔다. 제18왕조 시기 이름도 흐릿하고 별다른 업적도 없었던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수많은 값비싼 보물들과 하다 못해 전차까지 출토된 것을 생각해보면 웬만한 파라오들은 싸갈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싸서 무덤에 넣었다고 보아도 된다.[92]

또한 주인 대신 사후세계에서 노동을 해줄 샤브티를 챙겨가기도 했다. 사후세계에서 주인이 해야 하는 의무나 노동을 대신 해주는 시종들이었으며, 원래는 실제 사람을 순장해서 묻었으나 시대가 진보하며 샤브티를 대용품으로 썼다.[93] 부장품을 모두 정리해 넣고 마지막으로 사제들이 무덤의 입구를 회반죽으로 발라 막고 봉인을 찍은 후 모래로 묻어버리면 길고 긴 장례 의식이 끝난다.

14.2.사자의 서

이집트 사후세계에서 죽은 사람이 천국까지 도달하려면 수도 없이 많은 관문과 시련을 견뎌야만 했다. 그 모든 시련들을 이겨내는 방법을 단순히 머릿속에 외워놓고 가기에는 지나치게 위험부담이 컸으므로 이집트인들은 미리 해법을 종이에 적어 무덤에 함께 묻었다. 이 것을 바로 그 유명한 《사자의 서》라고 부른다. 《사자의 서》는 이집트 제2중간기 시대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제2중간기 끝바지에 있는 제17왕조 시기에 처음으로 왕족뿐만 아니라 귀족들, 평민들까지 사용이 확장되었으며, 이집트 신왕국 시대에 완전히 그 모습을 갖췄다. 람세스 2세 재위기에 해당하는 제19왕조 때에 그 내용이 매우 풍부해져서 나중에는 겹치는 구절이 나왔을 정도로 길이가 많이 길어졌다. 제3중간기 시대에 이르자 상형문자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 더 익숙한 민중문자로 번역이 되어 대중화되었고, 이집트 말기 왕조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대에도 여전히 장례식에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문서였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후기로 갈수록 그 사용례가 줄어들었으며 기원전 1세기 즈음에 이르자 거의 쓰이지 않았다고 한다. 《사자의 서》가 아예 사용되지 않았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신왕국 시대에 비해서는 확실히 자취를 감췄다. 《사자의 서》 대신 《호흡의 서》나 《영원의 여행서》 등을 장례식 때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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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死者)의 서[94]
현재까지 학자들은 《사자의 서》에서 약 192절 정도를 해석해냈다. 대부분의 구절들은 고대 이집트 발음으로 '로'라는 단어로 시작한다. 이 단어는 이집트어로 '입', '말하다', '주문' 정도에 대응하는 단어로, 워낙 규칙적으로 반복되다 보니 고고학자들은 이 단어를 《사자의 서》를 대략적으로 분류하는 기준으로 삼는다.

다만 《사자의 서》 자체가 워낙 난해하고 구성이 중구난방으로 맞춰져 있다 보니 기승전결식으로 깔끔하게 분류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고학자들이 굳이 분류해본 바에 의하면 《사자의 서》는 1장부터 16장까지는 죽은 자가 무덤에서 일어나 지하 세계에서 움직임과 언어 능력을 회복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17장부터 63장까지는 신과 세계의 창조 신화에 대해 설명하고 있으며, 죽은 자가 떠오르는 태양과 함께 부활하는 내용을 말한다. 64장부터 129장까지는 죽은 사람이 의 태양 방주를 타고 하늘을 가로질러 오시리스의 법정으로 향하는 과정을 묘사하고, 마지막 130장부터 189장까지는 시련을 겪고 재판까지 통과한 죽은 자가 마침내 신성을 획득해 신과 같은 반열에 올라 영원을 누리는 과정이 적혀 있다.

《사자의 서》에 의하면 망자의 영혼은[95] 무덤에서 나와 '두아트'라 부르는 지하 세계로 내려갔다. 지하 세계에는 동굴과 언덕 등 다양한 관문들이 버티고 있었다. 악어 등 다양한 동물들의 머리를 한 무시무시한 괴물들이 이 관문들을 수호하고 있었고, 망자가 관문 앞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사자의 서》에 쓰여진 주문들을 단 하나의 오차 없이 정확히 읊어야 했다. 주문들을 정확히 말하면 수호 괴물들은 아무 제지없이 망자의 영혼을 통과시켜 주었고, 오히려 다른 위험으로부터 망자를 보호해주기도 했다.
오시리스이자 서기인 아니가 말하나니, '나의 심장 나의 어머니, 나의 심장 나의 어머니, 나의 심장 나의 존재여! 나의 심판에서 그 어떠한 것도 나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하소서, 찻차[96]에 나의 대적이 없도록 하소서. 저울을 관장하는 이의 존재와 나 사이에 그 어떠한 갈라짐도 없게 하소서. 나의 몸을 단정히 하시고 나의 팔다리를 강하게 해주소서. 내가 나아가는 행복의 장소로 다다를 수 있게 하소서. 셰니트가 내 이름을 악취 나게 만들지 못하도록 하소서. 나와 신들의 존재 사이에 그 어떠한 거짓도 없게 하소서. 이리하면 나에게 좋은 일이 들릴지어다.'

오시리스의 수많은 신들의 훌륭한 동료이자 법정의 공정한 재판관 토트가 말씀하시길, '대저울이 대칭을 이루었음에 이 자의 심장이 참됨이 나타났으니 그에게서 악함이 발견되지 아니하며 신전에 헌물을 헛되이 하지 아니하였고 그 행위로 해를 끼치지 아니하며 그 동안 악한 소문을 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살아생전 선한 삶을 살았도다.'라고 하시느니라. 토트가 이리 말하시매 케멘누의 신들이 답하기를, '그렇다면 아니는 거룩하고 의로운 자라. 그는 죄를 짓지도 않았고 우리에게 악을 행하지도 않았으니, 포식자 암무트가 그를 집어삼키는 일이 없도록 하라. 그에게 고기 제물을 올리고 오시리스의 관문으로 입장케 하라. 호루스의 추종자들에게 그러한 것처럼 그에게도 세케트헤테푸의 영원한 집이 함께 주어질 것이라.'

이시스의 아들 호루스가 오시리스에게 고하기를 '오 위대한 우네페르시여 제가 이곳에 왔습니다. 제가 이곳에 아니의 영혼을 함께 데리고 왔습니다. 그의 심장은 천칭에서 대칭을 이루었으며 그는 살아생전 신과 여신들을 모욕한 적이 없나이다. 토트가 그의 심장을 재었고 신들이 그의 진실됨을 증거하나이다. 그는 정직한 자입니다. 그에게 빵과 맥주를 내려주소서. 그가 오시리스의 관문을 지나게 하소서. 그가 호루스를 따르는 자들과 같은 길을 걸을 수 있게 하소서.'

아니의 영혼이 말하기를 '오 아멘테트의 군주시여 이곳에 제가 왔나이다. 저는 죄가 없는 순결한 몸일지니, 저는 거짓 증언을 하지 않았고 거짓된 마음으로 일을 저지른 적이 없나이다. 내 주위에 있던 사랑받는 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내가 다시 부활하기 위해 당신의 크나큰 은총을 입게 하소서. 세계의 군주로부터 사랑받는 자여, 가장 아름다운 자에게 사랑받는 자여, 저는 왕실 서기관 아니이니 저를 사랑하는 당신 앞에서 제가 승리를 거두게 하소서!'

- 《사자의 서》. '아니의 파피루스' 중(中)[97]
관문들을 통과한다고 해도 오시리스의 법정 바로 앞까지 당도하기 이전까지는 안심할 수 없었다. 뱀과 악어, 벌레 등 수많은 거대한 괴물들이 끊임없이 영혼들을 호시탐탐 노렸는데, 이들을 피하는 주문 역시 《사자의 서》에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이렇게 겨우겨우 두아트를 통과해 오시리스의 법정으로 가면 또 그곳에서 재판을 받아야 했다. 죽음의 신 아누비스가 망자를 오시리스 앞으로 끌고 가면 망자는 재판관들 앞에서 자신이 총 42개에 달하는 죄들[98]을 생전 짓지 않고 살았음을 고백히는 것이 순서였다. 고백을 마치고 나면 심장을 저울에 올려 무게를 쟀다.[99] 저울의 반대쪽에는 정의의 여신 마아트의 깃털이 올라갔다. 죄를 많이 지을수록 심장이 무거워졌기에 저울이 심장 쪽으로 기울면 지옥행. 이 경우 암무트라는 괴물이 심장을 먹어치워 버렸다. 그러면 망자는 영원히 안식을 찾지 못하고 고통받아야 했다. 반대로 깃털 쪽으로 기울거나 대칭을 유지하면 천국행이었다. 이때 심장이 자신이 생전 죄를 일러바칠 것을 두려워한 이집트인들은 일부러 스캐럽 부적을 미라의 심장 위에 올려놓았다. 그렇게 하면 스캐럽 부적이 심장이 자신의 죄를 함부로 발설하지 못한다고 믿었다.

오시리스의 재판까지 통과한 망자의 영혼은 마침내 사후세계의 천국으로 향했다. 이집트인들은 천국이 갈대밭이 가득한 장소라고 믿었다. 강, 호수, 사막, 산, 들판 등 현세에 있던 것들은 거의 모든 것이 동일했지만 유일한 차이점은 천국답게 모든 것이 풍족하고 고통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 이곳에서 축복받은 망자들은 엔네아드들과 함께 영원한 평안을 누렸다. 다만 이곳에서조차 노동에서 완벽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망자들에게도 매일 일정량의 노동이 필수적으로 요구되었고, 이 노동량을 채우지 못하면 신들에게 벌을 받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챙겨간 것이 바로 대신 노동을 해줄 시종인 샤브티였다. 작은 인형 모양을 한 샤브티는 흙으로 빚었으며 천국에서 주인 대신 고된 노동을 맡았다. 흙으로 만든 샤브티는 죽은 후 무덤에 함께 묻는 것이 전통이었는데, 쟁기질하는 샤브티, 소를 모는 샤브티, 쟁반을 들고 시중을 드는 샤브티 등 모양도 직업도 가지각색이었다. 특히 이집트인들은 샤브티를 눈코입과 팔다리까지 달린 완벽한 인간의 모습으로 만드는 것을 꺼렸다. 만일 샤브티를 지나치게 인간과 닮게 만들 경우 자아를 얻어 주인을 해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고.[100] 죽어서까지 일을 하기 싫었던 사람들은 최대한 많고 다양한 수의 샤브티를 무덤에 넣었고, 파라오들은 많으면 1,000개에 달하는 샤브티를 가지고 묻히기까지 했다.

15. 천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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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집트의 천문학서 별들 사이를 항해하는 파라오[101]
고대 이집트의 천문학 수준은 이미 지중해에 널리 퍼져 있을 정도로 대단히 뛰어났다. 이미 기원전 3000년경부터 지구의 공전 주기가 365일인 것을 파악하고,[102] 1년을 365일로 정한 태양력을 사용하고 있었으며, 나일 강의 범람 주기를 확인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별자리의 순환과 회전을 관측했기에 이집트의 천문학 기술은 타 국가들에 비해 압도적인 수준이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의 천문 기술이 매우 탁월했다는 증거는 건축물 유적들에서도 쉽게 확인해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기자의 피라미드들의 배치가 북극성을 향해 정렬되어 있고,[103] 카르나크 대신전은 동지의 태양이 뜨고 지는 방향에 맞추어 세워져 있다. 그뿐만 아니라 태양과 달, 별들의 순환을 주기로 삼아 매년 정례적인 축제를 개최하는 등 천체의 변화를 곧 하늘의 뜻으로 여겼기에 이집트인들은 현대인들이 보아도 감탄스러울 정도로 당시로서는 엄청난 천문학 수준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집트 천문학자들은 아마 변광성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미 유럽인들보다 수천 년 일찍 변광성 '알골(Algol)'의 변광 주기를 관찰해 남겨놓은 기록이 있기 때문. 5,000년 전부터 365일로 구성된 1년 달력을 처음으로 제작한 건 고대 이집트의 가장 대표적인 업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고대 세계에서 하루를 체계적인 시간 단위로 나누려 시도한 것도 이집트인들이었다. 여름과 겨울에 따라서 낮의 길이가 달라졌기에 초기에는 '하루'의 개념이 들쭉날쭉했지만 시행착오를 거치며 '1일 = 24시간'이라는 공식을 만들어냈다.[104] 람세스 2세의 시대인 기원전 1220년에는 천문학자 '아메노페'가 당시 알려진 주요 별자리들을 수록한 일람표를 작성해 남기기도 했다.[105]

원래는 이집트인들도 음력을 사용했다. 하지만 음력과 양력의 기본적인 차이 때문에 시간이 지날 수록 오차가 눈에 띄기 시작하자 결국에는 1년을 365일로 한 새 달력을 만든 것이다. 이집트의 1년은 3개의 계절로 이루어졌다. 한 계절은 각각 120일씩이었고, 한 계절은 30일씩 총 4개월로 나뉘었다. 이렇게 구분하면 1년에 5일이 남는다. 이집트인들은 날짜를 맞추기 위해 마지막 계절의 끝에 5일을 추가했다. 이 5일은 각각 오시리스. 이시스, 호루스, 네프티스, 세트의 생일이었다고. 고대 이집트인들은 1년이 약 365.25일인 것을 알고 있었지만, 달력에 윤일을 넣기보다는 축제일이나 농경과 관련된 날짜를 변경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그나마 프톨레마이오스 3세가 윤일을 도입하려 시도는 해봤지만 대부분의 이집트인들이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무위로 돌아갔다. 더 자세한 내용은 이집트력 문서 참조.

이집트 천문학은 선왕조 시대부터 발전을 거듭하더니 특히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대 들어 그리스인들의 과학적인 사고방식과 결합하며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이성과 합리를 중시하던 그리스인들이 이집트에 들어왔고, 이들의 사고방식이 몇천 년간 축적되어 온 이집트인들이 남긴 자료들과 합쳐지면서 시너지 효과를 내었던 것. 때문에 이미 이집트인들은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을 따로 구분해 행성으로 분류하고 있었으며, 후기에 들어서는 기초적인 형태의 지동설까지 이르는 등 과학적인 학설들을 다수 제기하기도 할 정도였다.

이집트 천문학자들이 천체의 관측을 위해 사용했던 도구는 그저 다림추[106]와 조그만 관측 도구 몇 가지 정도밖에 없었다. 이토록 기초적인 도구만을 가지고 매우 정확한 수치를 통계내었다는 것이 경탄스러울 정도. 이집트의 에라토스테네스는 태양이 만드는 그림자의 경사 차이를 이용해 역사상 최초로 지구의 반지름을 측정했다. 이후 로마 시대의 이집트 천문학자 클라우디오스 프톨레마이오스가 등장해 고대 천문학의 경전이라 불릴 만한 대표작 알마게스트를 남겼다.

16. 수학

세계 최초로 수학이 태동한 곳들 중 하나라고 할 만하다. 이집트인들은 자신들만의 독특한 수 체계를 따로 만들어서 사용했고, 곱하기나 분수도 사용했다. 특히 기하학이 크게 발전했다. 기하학이 발전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나일 강 때문이다. 나일 강이 매번 범람하고 물이 빠질 때마다 다시 토지를 사람들에게 재분배해야 하는데, 이때 표지석들이 다 물에 쓸려나간 통에 처음부터 토지의 크기를 재측정해야할 필요가 있었다. 이 과정에서 기하학이 크게 발전했던 것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3차원 도형들의 표면적과 부피를 측정할 수도 있었으며 이차방정식과 같은 대수학도 다루었다.

이집트인들은 10진법을 기반으로 숫자도 히에로글리프처럼 만들어서 썼다. 1은 작대기 하나, 2는 작대기 두 개 이런 식이었고, 10, 100, 1,000, 10,000, 100,000 등의 숫자에는 모두 따로 대응하는 기호가 있었다. 숫자 10을 상징하는 문자는 소의 발굽의 모습이었고, 100은 꼬인 밧줄, 1,000은 연꽃, 10,000은 손가락, 100,000은 개구리, 1,000,000은 손을 들고 신을 경배하는 자세를 취한 사람의 모습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아래의 그림을 보면 대강 이해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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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들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10을 단위로 숫자들을 만들어 썼음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자릿수 체계라는 개념은 아직 존재하지 못해서 40을 표시할 때는 그냥 10을 상징하는 기호 4개를 연달아 쓰는 방법을 썼다. 숫자를 쓸 때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쓸 수도 있었고 위에서 아래로 쓸 수도 있었다. 오른쪽으로 갈수록, 아래로 갈수록 숫자의 값이 작아지는 방식이었다. 초기적인 형태의 0도 사용했다. 다만 이걸 수의 개념으로 쓴 건 아니고, 건축을 할 때 도면에서 기단부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했다. 이 기선을 중심으로 위와 아래를 구분했다.

정말 기초적인 형태의 분수를 쓰는 경우도 있었다. 이집트인들은 독특하게 단위분수를 사용해서 유리수와 분수를 표시했는데, 예를 들어 5/8은 1/2 + 1/8로, 13/12는 1/2 + 1/3 + 1/4로 표시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단위분수에만 분수가 고정된 건 아니었기에 2/n 꼴을 여러 방법을 사용해 나타내려 시도했는데, 이 방법이 린드 파피루스에 나와있다. 린드 파피루스에 따르면 소수인 홀수 p에 대하여 2/p 꼴을 나타낼 때는 1/(p+1)/2 + 1/(p(p+1))/2 으로 써서 나타냈다고 한다. p의 값이 커지면 소수가 아닌 수 A를 도입하여 2/p = 1/A + (2A-p)/Ap 형태로 만들어서 계산했다.[107]

일차방정식이차방정식을 사용하는 법을 적어놓은 린드 파피루스가 존재하는데, 이 파피루스에서는 미지수 x를 '아하'라고 불렀다. 예를 들어 린드 파피루스의 문제 24번은 '아하와 아하의 7분의 1의 합이 19일 때 아하를 구하라' 이런 식이다. 이집트인들은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일단 아하에 7을 대입해봤다. 그러면 합이 8이 나오는데, 문제에 따르면 8이 아니라 19가 되어야 한다. 19는 8의 19/8배이므로 역시 7도 그에 19/8을 곱해주어야 한다. 이러면 아하의 실제 값이 7 X 19/8인 133/8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차방정식에 대한 내용은 베를린 파피루스에 존재한다.

이집트 수학의 최고봉이나 다름없는 기하학도 큰 발전을 이룩했다. 이집트인들은 팔꿈치에서 가운뎃손가락 끝까지의 길이를 '1큐빗'으로 정하고 이를 기반으로 도형들의 길이를 측정했다. 이집트인들은 삼각형, 사각형, 원, 반구의 겉넓이와 부피를 구할 줄 알았고 기초적인 구분구적법을 쓸 수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원통, 직육면체, 절두체들의 부피를 계산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다. 또한 린드 파피루스를 보면 원의 넓이를 구할 때 '지름의 9분의 1을 뺀 후 그것을 제곱한다'라고 나와 있는데 파피루스가 시키는 대로 해보면 원주율의 값이 약 3.16049.... 정도가 나온다. 파이의 실제 값이 3.14 정도인 걸 생각하면 놀라운 정확성이다.

17. 식문화

이집트인들의 주식은 이었다. 그러나 이집트인들이 재배했던 에머 밀 품종은 유난히 껍질이 단단하고 제대로 벗겨지지가 않아 가루를 내기가 대단히 까다로웠다. 보통 하는 것처럼 단순히 밀대를 땅바닥에 내려치는 식으로 탈곡하는 것으로는 껍질이 떨어져 나가지도 않았고, 오히려 속 낟알이 부서지기만 했다. 이집트인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확한 밀알을 물에 불린 다음 절구에 넣고 살살 빻아 껍질을 벗겨낸 뒤 햇빛에 말린 다음 항아리에 담아 창고에 보관하는 방법을 고안했고, 이를 맷돌에 갈아 밀가루로 만들거나 다양한 요리에 넣어 먹었다.

이집트인들은 이렇게 만든 밀가루로 대개 빵을 만들어 주식으로 삼았다. 벽돌로 쌓아올린 화덕 안에 밀가루와 물을 섞어 만든 반죽을 붙여놓았고, 이 반죽은 구워지면서 알아서 떨어졌다. 오늘날의 을 탄두리에다 굽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돈이 있는 사람들은 반죽에 코리안더(고수) 씨앗, , 대추야자 등을 넣어 먹었지만 대다수의 가난한 사람들은 그냥 물에 밀가루만 섞어 만든[108] 맛없고 딱딱한 빵을 먹었다.

참고로 이집트인들이 빵을 만들 때 사용했던 에머 밀 품종은 글루텐 함량이 적은 편에 속했다. 글루텐이 많으면 많을수록 빵반죽이 쉽게 늘어나고 유연해지는데, 글루텐이 적으니 반죽을 제대로 섞기 어려웠고 고대 이집트식 빵은 부드럽다기보다는 뻑뻑하고 거친 편에 가까웠다. 글루텐이 많으면 우리가 생각하는 가볍고 구멍이 송송 뚫려 부드러운 빵이 나오는데 고대 이집트는 그런 빵을 먹을 수가 없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먹었던 빵은 현대의 사워도우 빵을 더 딱딱하고 신 맛이 나도록 한 것과 비슷한 맛이 났다고 한다. 빵은 팬케이크나 고깔 모양으로 구워졌는데, 밀도가 높아 무겁고 양도 많다보니 한 덩어리를 통째로 사서 조금씩 떼어먹거나 나누어먹는 방법으로 먹었다.

밀로는 빵 말고 맥주 '헤케트'도 만들어 마셨다. 이집트인들은 맥주를 물 마시듯이 마셔댔는데, 워낙 소비량이 많았기에 물물교환을 하면서 맥주를 화폐 비스무리하게 쓸 정도였다. 고대 이집트 맥주는 오늘날의 맥주와 달리 을 넣지 않았고, 잘게 부스러뜨린 맥주용 빵을 물과 함께 항아리에 넣고 어둡고 서늘한 곳에서 몇 주 정도 발효시켜 만들었다. 이렇게 만든 맥주는 건더기가 매우 많아 불투명해 보일 정도였으나 대신 영양분이 대단히 많았다. 섭취할 수 있는 식품이 한정적이었던 고대에 맥주는 정말 귀중한 영양분 공급원이었다. 사람들은 단백질, 미네랄, 비타민 등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양분들을 이 맥주로 섭취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맥주를 담기 위해서 일부러 목이 가늘고 아래가 볼록한 특이하게 생긴 맥주용 항아리도 만들었는데, 이 항아리들은 심지어 무덤의 부장품으로까지 쓰일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부유한 사람들은 맥주에 꿀을 첨가하거나 대추야자 열매를 넣어 먹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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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0522D 고대 이집트식 빵[109]4,500년 된 고대 효모를 이용해서 만든 빵이다. 고대 이집트 유적에서 효모를 발견했고, 이 효모를 되살린 뒤 당시의 레시피대로 빵을 만든 것이다. 맛은 사워도우 빵에 신 맛이 더 첨가되고 빡빡한 느낌이었다고 한다.]}}} 고대 이집트식 맥주[110]
고대 이집트인들의 맥주 사랑은 상상을 초월했다. 남녀 심지어 어린아이까지 맥주를 마셨고 맥주는 술이 아니라 생활에 꼭 필요한 필수품 대접을 받았다. 고왕국 시대에는 익힌 빵덩어리를 물에 섞어 항아리에 넣고 발효시켜서 만들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맥주는 붉고 걸쭉한 모습이었는데 마치 와 비슷해서 피에 미친 세크메트 여신을 달래기 위해 만들기도 했다.[111] 중왕국과 신왕국 시대를 지나가면서 점차 맥주를 만드는 방법도 바뀌었다. 더이상 빵을 만들지 않고 대신 처음부터 밀과 보리를 물과 섞어 으깬 다음, 항아리에 넣고 가열해서 발효시키는 쪽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맥주는 호박색을 띠었고 알코올 함량이 상당히 낮은 편에 속했다.

마늘이나 대파는 이집트인들이 먹던 가장 대표적인 채소였다. 물론 그 외에도 상추, 셀러리, 오이, 멜론, 양파 등 다양한 채소들을 골라 먹기는 했지만 일반적으로 평민들이 제일 많이 섭취하는 음식은 마늘과 파였다. 이집트식 종이의 원재료인 파피루스 역시 자주 먹었다. 보통 파피루스의 줄기와 뿌리를 생으로 먹거나 구워서, 아니면 밀가루에 가루를 내어 섞어 먹었는데, 매우 영양가가 높아 이집트인들이 즐겨 먹던 식재료들 중 하나였다. 게다가 강가에 가면 널린 것이 파피루스였으니 구하기도 쉬워 평민들이 많이 먹었다. 파피루스 외에도 수련 같은 수생식물들의 뿌리를 말려 가루를 내어 먹거나 구워 먹는 사람들도 많았다. 기근이 들었을 때에는 나무껍질 대용으로 먹는 음식이기도 했다.

과일의 경우 대추야자가 제일 흔했고, 무화과, 포도, 코코넛, 대추, 석류 같은 것들도 구할 수 있었다. 특히 평민들은 흔하고 당도도 상당히 높은 무화과를 가장 많이 먹었다. 무화과는 먹을만한 단 식품이 없던 고대 이집트에서 평민들이 거의 유일하게 당을 섭취할 수 있는 수단이었고, 때문에 인기가 매우 많았다고 한다. 그 외에도 포도를 말려 건포도를 만들어 먹거나 대추야자를 꿀에 재어 먹기도 했다. 그러나 건포도나 절인 대추야자의 경우 비교적 구하기가 어려운 식품이었기에 귀족이나 돈 많은 상인 가문들에서만 먹는 것이 보통이었다. 특히 건포도는 정말 귀했다. 건포도를 말리기까지 긴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으므로 평민들로서는 굳이 바로 먹으면 되는 포도를 말려서까지 먹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

고기는 귀중한 단백질과 지방 공급원이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걸 먹을 여유가 없었다. 소고기의 경우 소를 함부로 잡지 못했기 때문에 쉽게 볼 수 없는 별미였다. 지위가 높은 사람들만 양껏 먹을 수 있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축제 기간에 사원이나 부잣집에서 나눠주는 고기로 만족해야 했다. 이집트인들은 소를 30가지 부위로 나누었으며 개중 소 앞다리 부분을 최고급으로 쳤다. 부자들은 가축들을 더 이상 살찔 수 없을 때까지, 스스로 도살장에 걸어갈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살찌웠다. 충분히 살이 찌면 도축한 다음 얇게 썰어 건조하거나 소금에 절여 보관했다.

이집트인들은 양과 염소, 돼지고기도 먹었으나 그 양은 소고기와 마찬가지로 많지 않았다. 그 외에 가젤, 하이에나, 심지어 까지도 먹었지만 잡기도 힘들고 수도 적어 주식이라기보다는 이색적인 별미에 불과했다. 헤로도토스는 사람들이 돼지가 파괴의 신 세트와 비슷하다고 여겨 먹지 않았다는 내용을 적었는데,[112] 새로운 조사에 따르면 그런거 없었고 그냥 다 즐겨 먹었다고 한다. 대부분의 유적에서는 도축된 돼지 뼈가 발견됐고 미라에서 돼지 기생충이 발견된 적도 있다. 동물의 형상을 한 신들을 숭배했던 이집트인들이었기에 특정 개체를 신의 현신으로 삼아 신전에서 모시며 정말 극도로 호화로운 대접을 한 경우도 있지만, 그건 정말 극소수의 경우였고 이집트인들은 대부분의 동물들을 그냥 가축으로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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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에게 음식을 바치는 모습 벽화에 그려진 음식들
소, 돼지, 염소 같은 크기가 큰 가축들은 함부로 잡아먹는 게 경제적으로 만만치 않았기에, 평민들은 가금류로 육류를 섭취했다. 두루미, 자고새, 메추라기, 거위, 유럽물닭, 비둘기, 펠리컨 등 온갖 새들을 다 잡아먹었다. 새들은 상대적으로 경제적 부담도 작고 야생에도 많아서 구하기도 쉬웠기 때문. 이집트인들은 일부러 새에게 배가 터지기 직전까지 케이크를 쑤셔넣어 살을 찌웠는데 이게 바로 푸아그라의 원조다. 새는 목을 비틀어 죽였으며 소금 항아리 안에 넣어 염장하거나 석탄 불에 구워 먹었다. 이집트 신왕국 시대부터는 이 유입되면서 대표적인 가축동물로 자리잡기도 했다.

하지만 종종 가금류마저도 잡아먹을 재력이 없거나, 기근이 들어 야생 가금류들의 씨가 말라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경우 이집트인들에게 유일한 단백질 섭취 방법이 있었으니 바로 나일 강의 물고기와 생선들이었다. 생선은 잡은 즉시 신선하게 구워 먹을 수도 있었지만 자연 건조시키거나 소금에 절여 보관하기도 했다. 특히 생선 알이나 난소를 소금에 절여 만든 음식 '보타르가'를 만들어 먹기도 했는데 이건 아직까지도 이집트를 포함한 지중해권 국가들에서 즐겨 먹는 요리다. 당시에는 최음제의 일종으로 간주됐다고.

대부분의 평민들은 대파 한 묶음, 양파 조금, 투박한 빵 덩어리가 한 끼 식사의 전부였으나 부유한 사람들은 호화로운 디저트를 즐겼다. 고대 이집트에는 설탕이 없어서 대신 이나 과일로 단맛을 냈다. 가장 대표적인 디저트가 바로 '타이거넛 과자'다. 기원전 1600년에 만들어진 레시피에 따르면 호두의 일종인 타이거넛을 잘게 자르고 다진 대추야자, 꿀, 향신료 등을 섞어 돌돌 굴려 한입 크기의 작은 공 모양으로 만들었다. 식사 때 식기를 쓰지 않았던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손가락으로 집어먹기 쉬운 타이거넛 과자는 식후 입가심용으로 최고였다. 밀가루 반죽을 기름에 튀긴 다음 그 속에 과일, 꿀, 견과류를 채운 꿀 케이크도 인기였으며, 염소 젖, 버터, 꿀, 코코넛과 으깬 대추야자를 반죽해 만든 대추야자 빵도 좋아했다.[113] 그 외에 밀꽃 반죽을 기름에 튀겨 계피를 뿌려 먹는 디저트도 있었다고 한다.

고고학자들은 대피라미드 인근의 작업장에서 엄청난 수의 소와 돼지, 오리 등의 유골을 발견한 적도 있다.[114] 고기 외에 우유달걀 같은 낙농업 관련 식품들도 많이 먹었다. 고된 노동을 해야 했기에 칼로리 소모가 극심했지만 차마 고기를 사먹을 돈이 없던 평민들에게 이런 제품들은 유일한 단백질 섭취원이었다. 이집트인들은 고기를 구울 때에 진흙을 바른 뒤 구웠다. 일정 시간이 흐르면 진흙이 말라 갈라지는데, 이때 겉에 묻은 진흙을 털어내고 익은 고기를 먹는 것.

요리사는 썩 존경받는 직업이 아니었다. 어린 아이들을 훈육하는데 썼던 텍스트에 '빵 굽는 사람은 아들에게 발을 붙잡도록 시킨 뒤 뜨거운 오븐 속에 머리를 집어넣어야 한다. 아들이 실수로라도 발을 놓치면 그대로 오븐 속에 빠져 죽는다'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니 당시 요리사가 얼마나 고된 노동을 했는지 잘 알 수 있는 부분. 남자와 여자 모두 요리를 했지만 보통은 여자가 요리를 했다. 남자들은 여자와 어린아이들과 따로 식사했고, 대부분의 경우 둘 다 땅바닥에 앉아 밥을 먹었지만 가끔씩은 남자들만 의자에 앉아서 밥을 먹기도 했다.

18. 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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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윈 스미스 파피루스[115] 치료받는 이집트인
이집트의 의술은 다른 나라에도 널리 퍼질 정도로 경지에 다다른 수준이었다. 말기 왕조 시대 페르시아의 황제 캄비세스 2세가 파라오에게 제 병을 고쳐줄 의사를 좀 보내달라고 부탁했을 정도. 기원전 440년에 이집트를 방문한 그리스의 헤로도토스도 방문 후 이집트의 의술서를 베껴 갔고, 대 플리니우스 역시 이집트의 의학에 대해 논한 바 있다. 그 외에도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 헤로필로스, 에라시스트라투스, 갈레니우스 등 많은 저명 학자들이 아멘호테프 시절 만들어진 이집트의 의학서를 참고했다고 알려져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이집트의 의술서는 몇 없으나, 그나마 에베루스 파피루스,[116] 에드윈 스미스 파피루스, 허스트 파피루스, 런던 의술 파피루스 등이 보존되어 내려오고 있는 형편이다. 특히 이중에서 에베루스 파피루스는 877개의 처방전에 대해 자세히 수록하고 있고 심지어는 악성 종양을 제거하는 외과 수술에 관한 내용도 들어 있다. 에드윈 스미스 파피루스의 경우 동물, 식물, 광물 등 다양한 천연 재료들로부터 약물을 추출해내는 방식을 설명하고 있으며, 관찰과 처방, 후속 치료 등 과학적인 치료 방법이 나와 있다.

고대 이집트 의학서들 중 가장 대표적인 서적이었던 '에드윈 스미스 파피루스'의 경우 48가지의 질병 증상들을 소개하고 그에 대한 치료법을 소개하고 있다. 파피루스에 의하면 의사는 환자를 보고 그 증세를 '치료할 수 있는 병', '치료를 시도해 볼 수 있는 병', '치료가 불가능한 병' 이렇게 세 가지로 분류해야 한다. 첫 번째와 두 번째 경우에 해당할 경우 지체 없이 치료를 하거나 손을 쓰라고 나와 있지만,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판정났을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신에게 기도하는 것만이 답이라는 내용이 있다.

그 외에도 파피루스는 피부가 긁히거나 찢겨 상처가 났을 경우에는 일단 로 소독한 후 생 고기를 얹어 피가 흐르는 것을 멈추게 하라고 나와 있다. 이후 피부가 어느 정도 안정되면 실과 바늘로 상처를 꿰메고 붕대를 감아 치료한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두개골을 쪼개 머리 내부의 압력을 낮추는 천공 수술에 관해서도 상세히 나와 있는데, 이는 1,000여 년 후의 히포크라테스 시절보다도 발전된 면이 있었다. 이집트인들은 를 다치면 몸의 일부분에 마비가 온다는 사실을 이미 인지하고 있었으며, 척추 골절로 인해 하반신 마비가 오거나 영구 장애가 발생한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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콤 옴보 신전 벽면에 새겨진 고대 이집트의 수술 도구들.
이집트 의학은 미라 제조를 통해 발전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미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썩기 쉬운 내장 기관들을 모조리 들어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해부학과 생의학 등이 전폭적인 발전을 거듭했다는 것이다. 또한 이집트인들은 만일 시신이 온전치 못하다면 고인이 완전한 모습으로 부활하지 못한다고 믿었기에 시신의 일부분이 훼손되어 있을 경우 금속이나 나무 따위로 모형을 만들어 붙였다. 코나 발가락, 손가락, 다리 등 그 부위도 가지각색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집트인들은 이 기술을 단순히 시체를 염하는 데에만 사용하지 않았다. 전투나 사고로 신체 일부를 잃어버린 사람들을 위하여 나무나 금으로 의족, 의수 등을 만들어 붙여주었고, 심지어 한 기록에는 황금으로 한 귀족의 코를 만들어 붙였다는 내용도 전해져 내려온다.

치의학도 나름 존재했다. 물론 외과의 한 부분이었고 독창적인 의학 분야로까지 나아가지야 못했지만..... 이집트는 모래가 많은 사막 지방에 위치하고 있어 음식을 씹을 때에 자연스럽게 모래가 같이 섞여 들어가는 경우가 잦았다. 허구한 날 그런 일들이 반복되니 이집트인들의 치아 상태는 좋지 못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치의학이 발전한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이집트인들의 치과 기술은 좋은 수준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왕국 시절 람세스 2세 역시 말년에 극심한 충치로 고통을 받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가장 좋은 치료를 받았을 파라오마저도 충치 하나를 제대로 해결치 못했으니 고대 이집트 치과의의 기술이 썩 그닥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집트 치과의사들이 알고 있는 유일한 치과 치료법은 바로 이빨을 뽑아버리는 것이었다. 종종 멀쩡한 생니를 뽑아버리는 경우도 많았으니 당연히 막대한 통증을 수반했고, 의사들은 이 고통을 달래기 위해 마약 아편을 활용했다. 이집트 유적에서 한 번도 제대로 된 발치 도구가 발견된 적이 없으니 당시 이집트인들은 정말 엄청난 고통을 견디면서 이빨을 뽑았을 것이다.

참고로 충치는 꿀이나 대추야자처럼 다디단 음식들을 마음껏 먹을 수 있었던 파라오나 가지던 질병이었다. 평민들은 그런 단 음식들을 비싸서 사먹지도 못해서 충치가 있는 경우가 드물었다.

19. 성문화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고대 이집트/성문화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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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흥미로운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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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수센네스 1세의 마스크[120] 아메네모페의 마스크 프수센네스 1세의 은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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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250년 경의 노동자 결근 사유를 적어놓은 문서.[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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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대피라미드에 새겨진 고대 일꾼들의 낙서. '쿠푸의 친구들'이라는 익살스러운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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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세스 5세의 무덤에 새겨진 그리스인들의 불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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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케나톤의 황금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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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세스 2세의 목관

21. 대중매체

22. 고대 이집트 파라오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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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왕조 람세스 1세 세티 1세 람세스 2세 메르넵타 아멘메세스 세티 2세 십타 투스레트
제20왕조 세트나크테 람세스 3세 람세스 4세 람세스 5세 람세스 6세 람세스 7세 람세스 8세 람세스 9세 람세스 10세 람세스 1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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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왕조 테프나크트 바켄레네프
제25왕조 피이 셰비쿠 샤바카 타하르카 타누타멘
제26왕조 네코 1세 프삼티크 1세 네코 2세 프삼티크 2세 와히브레 아흐모세 2세 프삼티크 3세
제27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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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왕조 네파루드 1세 하코르 프삼무테스 네파루드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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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왕조
(아케메네스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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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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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집트 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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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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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흐모세-메리타몬 아흐모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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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페르티티 메리타텐 안케세나멘 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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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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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네베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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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트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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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전 이집트어 표기. 'km t'인데 이집트 상형문자는 모음 표기를 하지 않아 정확한 발음은 알 수 없으며, 이집트학에서는 후대 언어로 모음을 표기하는 콥트어의 모음과 대조하여 모음 e와 ə를 넣어 '케머트'라고 읽지만, 편의상 케메트(Kemet)로 표기한다. 해석하자면 나일 강의 검은 땅 정도의 뜻이 된다.[2] 고대 이집트 문명이 기원전 3150년에 시작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집트에서는 기원전 100만 년 전부터 이미 구석기 시대가 시작되었고, 제1왕조(초기 왕조 시대)가 들어서기 이전인 이집트 선왕조 시대에도 왕과 도시들이 엄연히 존재했다.[3] 정치적 측면[4] 문화적 측면[5] 여기서 상•하는 나일 강의 상•하류를 의미한다. 그래서 북쪽이 위로 가게 그리는 일반적인 지도에서는 지중해중동 지역에 가까운 윗부분이 하이집트에 해당하고(지중해에서 지금의 카이로까지), 카이로 남쪽의 고왕국 당시의 수도인 멤피스부터 지금의 아스완 댐 근처의 급류 지역(First Cataract라고 불리는 지역)까지가 상이집트에 해당한다. 거기서부터 남쪽은 이집트 본토로 안 쳐주었다고 한다.[6] 사실 파라오라는 명칭이 대내외적으로 쓰인 때는 기원전 1500년을 전후한 중왕국 시기인데, '고대 이집트의 지배자=파라오'라는 생각이 널리 통용되는 터라 그렇게 쓴다. 매머드북극해의 몇몇 섬에서 기원전 1700여 년경까지 생존했던 것으로 보인다.[7] 놀랍게도 이때도 기념품이라는 게 있었다. 주로 작은 피라미드 모형, 은제 동상, 알렉산드리아의 등대가 그려진 항아리 등을 팔았다고 한다.[8] 이런 시대 구분은 현대인이 만든 것이 아니라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절의 역사학자 마네토가 고안한 시대 분류를 현대까지 사용하는 것이다.[9] 단일민족으로 유명한 한국도 예맥(고구려-말갈)과 한(삼한)이라는 두 민족이 합쳐져서 지금의 한민족이 된 것이다.[10] 다만 역사가 긴 나라인 만큼 배워야할 분량이 너무 방대하기 때문에, 주입식으로 주요 사건들과 파라오 정도의 행적 정도나 교육시킨다는 평이 많기는 하다.[11] 지역을 의미하는 고전 그리스어 노모스(νομός)에서 유래했다. 고대 이집트어로는 세파트(Sepat)라고 불렀다. '노모스'나 '놈'이라고 부른 것은 그리스계 왕조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대부터였다.[12] 혹은 아멘테트.[13] 태초의 땅을 의인화한 신. 창조신 아툼과 동일한 신으로 여겨진다.[14] 고대 이집트 여신의 이름이다.[15] 그리스어로는 레온토폴리스.[16] 전쟁의 신. 주로 아비도스 일대에서 숭배되는 남신이다.[17] 현대의 카이로가 있는 행정구역이다.[18] 지혜의 신 토트의 또다른 이름이다.[19] 황소의 머리를 한 남신. 크눔 신과 동격이다.[20] 북극성을 의인화한 여신이다. 여신으로는 이시스, 남신으로는 아누비스와 동격의 신으로 여겨지기도 한다.[21] 왕가의 계곡, 카르나크 신전, 룩소르 신전 등 이집트 유적이 대규모로 집중된 고대 이집트 최고의 대도시들 중 하나.[22] 보존이 잘된걸로 유명한 덴데라 신전이 위치한 곳이다.[23] 고대 이집트인들의 대표적인 악기[24] 지역에서 숭배되던 전쟁의 신[25] 헤르모폴리스 마그나[26] 라나 아툼과 동일시되는 황소머리 신.[27] 현재의 파이윰 일대다.[28] 물론 이집트 중왕국이나 신왕국의 파라오들도 지으려면 지을 수는 있었겠지만 재정 상의 이유로 짓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크다. 피라미드는 축조하는 데 너무 많은 돈이 들어갔고, 무덤으로서는 지나치게 눈에 띄어 도굴당하기 딱 좋았기에 피라미드 건축을 포기한 것이다.[29] 무려 94년이라는 세월 동안 왕좌를 지켰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 재위한 인물.[30] 이것은 문자 그대로 70일간 70일의 파라오가 있었다는 것은 아니고, 그만큼 많은 파라오들이 짧은 기간 재위하다가 사라졌다는 것을 암시하는 비유로 보인다. 이집트에서 '70'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기에 이런 표현을 썼다.[31] 세케넨레 타오는 정말 파라오들 중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잔혹하게 살해당한 것으로 유명하다. 학자들은 그의 시체를 부검한 결과 전투 도중 최소한 2~3명의 힉소스인 장정들이 도끼나 칼 등으로 그를 내려쳐 죽인 것으로 보고 있다. 그의 미라는 턱뼈와 이빨이 모조리 부서졌고 두개골에 끔찍한 금이 가 있는 등 보기 힘들 정도의 처참한 모습을 하고 있다. 카이로 박물관에 보관된 여러 미라들 중 가장 보존 상태가 좋지 않으며, 때문에 이 미라를 전시할 때 워낙에 악취가 풍겨 관람객들이 차마 들어오지 못했다고 한다. 세케넨레 타오의 미라는 영화 <미이라 시리즈>에 등장하는 괴물 이모텝의 외형적 모델이기도 하다.[32] 지금이야 투탕카멘이 유명하지만 당시에는 정말 존재감이 없던 군주였다. 하지만 오히려 그랬기에 무덤의 크기도 작고 아는 이들도 없어 무덤이 도굴당하지 않고 세상에 발견될 수 있었다. 너무나도 존재감이 없어 현대에 가장 유명해진 아이러니한 케이스.[33] 참고로 람세스 2세는 91세에 죽었다. 미라를 부검해본 결과 그가 죽을 시점에 이미 관절염, 충치 등 수많은 지병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한다.[34] 아멘메세스의 출신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으나 세티 2세의 이복형제로 추정된다.[35] 이 시기의 아문의 대신녀 직은 정치적으로 매우 큰 의미가 있었다. 파라오가 자신의 친딸을 임명했으며, 그 후계자는 대신녀 본인이 미리 양녀로 들이는 방식으로 지명했는데 차기 파라오의 친딸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 따라서 카슈타가 자신의 친딸을 후계자로 들였다는 건 그만큼 쿠시 왕국의 영향력이 매우 강했다는 의미다.[36] 프삼티크 3세는 살아남기 위해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거지처럼 구걸하며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프삼티크 3세가 몰래 꾸미던 캄비세스 2세 축출 시도가 발각되면서 프삼티크 3세는 바로 페르시아의 수사로 끌려갔다. 프삼티크 3세는 훗날 자살한 것으로 전해진다.[37] 이집트 독립기의 마지막 왕조인 제30왕조는 이집트인들이 세운 최후의 독립 왕조였다. 이후 들어선 제31왕조는 페르시아 왕조였고, 제31왕조를 꺾고 세워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그리스계 왕조였기 때문이다.[38] 혹자는 지도자를 파라오라 칭한 최후의 왕조라는 점에서 '제32왕조'라고도 한다.[39] 엄밀히 말하면 최후의 파라오는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의 아들이자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공동 파라오였던 카이사리온이었다. 그러나 카이사리온은 독립적으로 재위하지도 못했으며 그마저도 클레오파트라 사후 쫒겨났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더 임팩트가 강렬한 클레오파트라를 보편적인 마지막 파라오로 본다.[40] 제4왕조 시절 아치가 등장하기는 했으나 주류는 쭉 뻗은 직선이었다.[41] 대신전을 수직으로 잘라놓은 모습으로, 내부에 굉장히 기둥들이 빽빽하게 세워져 있음을 볼 수 있다.[42] 현재와 달리 모두 색이 화려하게 칠해져 있었다. 참고로 카르나크 대신전은 이집트 내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웅장했는데, 카르나크의 기둥들은 그 높이가 21m에 달했다.[43] 다만 태양신 아텐의 신전만은 예외였다. 아케나텐은 햇빛 자체를 신성시했으며, 직접 햇빛을 보아야만이 아텐 신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아텐 신의 성소는 천장이 뚫려 있어 매우 밝았다.[44] 다만 종교적 문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45] 람세스 3세 시대 카르나크 신전은 무려 433개의 과수원, 421,000마리의 가축, 65개의 마을, 83개의 선박, 46개의 작업장을 소유했다. 수백 에이커가 넘어가는 농토를 보유했으며 81,000여 명이 넘어가는 인력을 직접 부렸다. 헬리오폴리스의 라 신전은 수백 에이커의 농토, 64개의 과수원, 45,544마리의 가축, 103개의 마을, 3척의 함선, 5개의 작업장에 12,700여 명의 인력을 소유했다.[46] 이 음식은 하위 신들에게 차례로 돌아간 다음, 나중에는 신관들이나 신전 인부들이 먹었다.[47] 따라서 고위 신관이 될 수 있는 고귀한 신분을 가진 사람이라도 최하위 신관부터 차근차근 경험을 쌓아야만 했다. 람세스 2세 때 테베의 아문 대신관 자리에 오른 바켄콘수(Bakenkhousu) 2세가 사각 석상에 자신의 인생을 서술했는데, 최하위 신관으로 4년, '신의 아버지' 성직을 12년, 아문의 세번째 예언자로 15년, 두번째 예언자로 12년, 아문의 대신관으로 27년을 봉직했다고 적었다.[48] 고왕국 시절 하토르네이트처럼 여신들의 경우에는 여신관이 최고 대사제를 맡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여자가 신관직을 맡는 일은 점차 사라졌고, 여자는 기껏해야 댄서, 음악가, 무희에만 머물렀다. 물론 파라오의 총애를 받는 여자 왕족들이 가끔씩 성직에 임명될 수는 있었다.[49] 물론 세드 제전으로 향할 때 성대한 퍼레이드를 벌였는데 이 퍼레이드는 일반 평민도 직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세드 제전 내부에서 벌어지는 축제의 핵심 코스는 일반 평민이 보는 게 불가능했다.[50] 현대에야 당연해 보이지만 고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당장 《성경》만 보아도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여성의 권리가 남성에 비해 크게 제약되어 있었음을 볼 수 있다.[51]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75피트 크기의 배가 이집트에서 출토되었다.[52] 파라오가 쓰고 있는 저 독특한 모습의 푸른색 관을 '케프레시'라고 부른다. 보통 파라오가 전투에 나갔을 때 착용하던 왕 전용 전투모였다. 또한 병사가 들고 있는 특이하게 생긴 휘어진 검은 코피스라고 한다.[53] 물론 아예 사라진 건 아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대에 만들어진 로제타석에도 코피스의 모습이 상형문자로 새겨져 있다.[54] 파라오가 쓴 활은 고급 상아나 무소 뿔로 만들었다.[55] 돌을 날리는 돌팔매는 전투에서 활화살 다음으로 많이 사용되는 무기였다. 전장에서 바로바로 무기 수급이 가능했고 경제적이었을뿐더러 사용하는 방법도 쉬웠기 때문. 허나 벽화에 돌팔매가 묘사된 경우는 극히 드물다.[56] 이러면 방어력은 확연히 떨어지지만 대신 기동성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졌다.[57] 청동 방패가 항상 나무 소가죽 방패보다 방어력이 좋지는 않았다.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고대 이집트식 방패를 재현하려고 청동 방패와 나무 소가죽 방패를 하나씩 만들었는데, 청동 방패는 충격에 깨어진 반면 소가죽 방패는 공격을 잘 막아냈다고 한다.[58] 왼쪽부터 오른쪽 방향으로 각각 이시스, 오시리스, 파라오, 호루스다. 이집트인들은 오시리스를 초록빛 피부로, 호루스를 매의 머리를 가진 인물로 묘사했다.[59] 다만 이 비율은 파라오나 그림의 주인공처럼 중요한 인물에만 적용했던 것이지 전쟁에서 잡힌 포로나 하인 같은 경우에는 비율이 맞지 않았다.[60] 심장이 위치한 왼쪽은 신성한 것으로 여겨졌다. 왼쪽 발을 내미는 것은 남성의 강인함과 힘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반대로 여성은 내조와 차분함을 중시했기에 가지런하게 발을 모은 자세로 그렸다.[61] 푸른색도 함께 나타냈다.[62] 우리가 아는 백금의 개념과는 다르다.[63] 일정 온도 이상에 금속을 노출시켰다가 재결정화해 금속을 더욱 부드럽게 만드는 작업.[64] 고대 이집트를 상징하는 표식들 중 하나. '우제트'라고도 하는데 세계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와 깨달음을 상징했다.[65] 사랑의 여신 이시스의 상징. 이집트어로는 '티엣'이라고 해서 여인들이 차고 다니던 허리띠 모양을 하고 있었다.[66] 물론 금으로 만든 것뿐만 아니라 터키석, 라피스 라줄리, 은, 벽옥 등 다양한 종류의 재료들을 사용했다.[67] 아케나텐을 왜 이렇게 묘사했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갑론을박이 갈린다. 보통 파라오들을 조각할 때에는 남성성을 강조하기 위해 근육질에다가 각진 남성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는데, 오히려 아케나텐의 석상은 근육이 잘 보이지 않고 팔다리가 길쭉길쭉한 모습이기 때문. 학자들은 아케나텐이 병을 앓고 있어 몸에 기형이 있었다든지, 아니면 이같은 묘사가 아텐 신에 바치는 헌사의 표현이었다는 등 여러 학설들을 내놓고 있다.[68] 기존의 신관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부정하고 종교 개혁 시도를 한 아케나텐을 혐오했다.[69] 제5왕조의 재상 프타호테프가 자신의 젊고 성급한 아들을 위해 남겨놓은 지침서다. 예를 들어 '네가 권위 있는 자라면, 청원인의 말을 들을 때 인내심을 가지라', '네가 지도자라면, 너에게 맡겨진 일들에 대해 책임을 져라' 같은 말들이 쭉 나열되어 있다.[70] 살해당한 제12왕조의 파라오 아메넴헤트 1세가 아들 세누스레트 1세에게 전하는 가르침이다. 아메넴헤트 1세는 아들에게 자신이 어떻게 살해당했는지 묘사한 다음, '그 누구도 믿지 말라'라는 짧고 강렬한 가르침을 안겨주고 떠난다.[71] 서기관 아메네모페가 자신의 아들을 위해 남긴 유작. 갈수록 살기 팍팍해지는 현실에서 어떻게 해야 내적으로 행복할 수 있는지에 관하여 설명했다. 《성경》의 <잠언>과도 내용이 비슷해서 유명한 편이다.[72]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20명의 궁녀들에게 망사 옷을 입히고 노를 젓게 한 쿠푸 왕의 이야기다. 노를 젓던 도중 한 궁녀가 공작석으로 만든 물고기 브로치를 물 속에 떨어뜨렸다. 궁녀는 브로치를 찾기 전까지는 절대 노를 저을 수 없다고 버텼다. 그러자 파라오가 수석 마법사에게 시켜 호수를 반으로 접어 호숫바닥의 브로치를 찾아내어 돌려준다는 이야기다. 이집트의 마법과 관련된 이야기들 중에서는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73] 쿠푸 왕의 시대에 마법사들이 부린 기적에 대한 이야기. 예를 들어 밀랍으로 악어를 만들어 마을 사람을 삼키게 한다거나 부적으로 호수를 접어서 떨어뜨린 시녀의 브로치를 찾는다거나 하는 이야기다.[74] 이 이야기는 동성애스러운 느낌이 나서 여기에 등장하는 파라오 페피 2세가 동성애를 즐기지 않았나하는 의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75] 가난한 농부가 고위 관리의 재산을 우연히 발견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결국 정의가 구현되고 농부를 협박하던 고위 관리가 재산을 탈탈 털리면서 끝난다.[76] 세누헤는 세누스레트 왕자를 리비아까지 동행하는 관리였다. 도중 파라오 아메넴헤트 1세가 붕어하자 겁에 질린 세누헤는 저 멀리 가나안으로 도망쳤고, 그곳의 사나운 부족들을 정벌한 뒤 부족장 지위에까지 올랐다. 모든 적들을 평정한 시누헤는 말년에 이집트로 귀환하기를 희망했다. 이를 전해들은 세누스레트 1세가 그의 귀향을 허락하면서 결국 시누헤는 고향에서 편안히 눈을 감는다는 해피엔딩 스토리이다.[77] 카르나크 대신전의 사제였던 웨나문은 이집트 최전성기의 끝자락인 신왕국 시대의 이집트인이었다. 그는 아문 대사제의 명을 받들어 삼나무를 사기 위해 페니키아의 비블로스 지방으로 향했는데, 그곳에서 환대는커녕 적대받자 큰 충격에 빠졌다. 그는 비블로스에서 1년을 머무르다가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는 도중 길을 헤맸는데... 여기서 이야기가 끊긴다. 당시 이집트의 쇠락하는 국력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다.[78] 아케나톤, 투탕카멘, 아이처럼 기록말살형을 당해버린 파라오들의 이름은 없다. 마네토도 직접 보고 적은 게 아니라 이전 기록들을 참고해서 적었기 때문이다.[79] 하트셉수트 여왕의 신전에는 대놓고 섹스를 하고 있는 남녀를 그린 고대 이집트인의 낙서도 있다.[80] 하트셉수트(문명 온라인)의 게임 속 모습과 나름 비슷하다. 다만 게임이 다연령이라 옷에 어느 정도 규제가 들어간거고, 실제로는 더욱 노출이 심했을 가능성이 있다.[81] 투탕카멘의 가면 영향으로 보통 이집트 왕관하면 이쪽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82] 참고로 두 번째 사진의 여인은 영화 클레오파트라(1963)에 등장한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모습이다.[83] 석탄, 황화납, 산화망간 등을 갈아서 만들었다.[84] 다만 이 거울은 값이 비싸서 도굴꾼들의 표적이 되어버린 바람에 현재는 남아 있는 유물이 많지 않다. 심지어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발견된 거울 역시 거울판이 사라져버린 상태.[85] 시신에 대한 모욕은 그때나 지금이나 사회적으로 금기시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집트를 방문했던 그리스인들이 이런 사례가 많다고 언급한 것을 보면 할 사람은 다 했던 모양.[86] 고대 이집트인들은 뇌가 하는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농담이 아니라 뇌의 기능이 콧물을 훌쩍이는 게 다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87] 초기에는 뇌를 제거하지 않고 그냥 놔두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이런 경우에는 미라를 흔들면 안에서 말라붙은 뇌 조각이 딸깍딸깍거렸다고 한다.[88] 대장과 소장을 같이 넣었다.[89] 또한 박테리아나 벌레들이 꼬이지 않게하는 효과가 있었다.[90] 사자의 서에 나오는 입을 여는 의식에 사용하는 신성한 주문. 해당 해석본은 멤피스에서 발굴된 파피루스 문서의 것이다.[91] 주로 개나 고양이 등이 묻혔지만 파라오의 경우에는 사자나 악어를 미라로 만들어 묻기도 했다.[92] 투탕카멘의 무덤 외에도 유명한 무덤에는 프수센네스 1세의 무덤이 있다. 파라오들의 무덤 중 유일하게 도굴당하지 않은 무덤이다. 투탕카멘의 무덤은 고대에 소규모로 몇 번 도굴당한 적이 있다.[93] 투탕카멘의 무덤에는 200여 개가 넘는 샤브티들이 들어 있었다.[94] 흰색 옷을 입은 붉은 얼굴의 사람이 망자의 영혼이다. 맨 왼쪽에 죽음의 신 아누비스가 망자의 손을 잡아 이끌고 있고, 저울 아래에는 괴물 암무트가 네발로 버티고 있다. 저울 오른쪽에 있는 동물 머리의 신들은 각각 지혜의 신 토트, 왕권의 신 호루스다. 맨 오른쪽에 있는 백색 옷에 왕관을 쓴 초록 피부의 신이 바로 재판관 오시리스이다.[95] 이집트어로는 '카'라고 한다.[96] 고대 이집트에서 동서남북 4방위를 부르는 용어였다. 사방을 관장하는 신 메스타, 하피, 투아마우테프, 케브센누프를 가리켰다.[97] 현존하는 《사자의 서》 사본들 중 가장 보존 상태가 양호한 것들 중 하나다. 더 자세한 내용은 《사자의 서》 문서 참조.[98] 예를 들어 '나는 살인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도둑질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신을 거스르지 않았습니다' 등의 고백문이 42개 있었다.[99] 그나마 영화 <갓 오브 이집트>에 잘 묘사되어 있다. 다만 지나치게 판타지스럽게 묘사되어 있다는 것이 단점이다.[100] 이와 비슷한 내용의 괴담은 동아시아권에도 있다. 그림의 눈동자를 찍거나 손을 그리면 그림 속 인물이 튀어나와 사람을 죽인다는 괴담 등등.[101] 해당 부조는 람세스 6세의 무덤에서 발굴된 부조로, 아직 푸른 도색이 남아 있다. 이집트인들은 파라오가 죽으면 별들의 바다를 지나 사후세계로 향한다고 믿었다.[102] 공전 주기가 365일이라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을 뿐, 지동설의 개념이나 지구가 허공에 떠서 태양 주위를 공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는 못했다. 단순히 태양이 뜨고지는 위치와 하늘에 그리는 궤적이 365일마다 주기적으로 반복된다는 관찰 사실을 알고 있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의 우주관을 살펴보면 하늘의 여신 누트가 땅의 신 게브 위에 엎드려있는 모습이고, 누트의 몸 표면에 별들이 박혀있는 모습이다. 즉 지구의 공전이나 궤도 개념은 잘 몰랐던 것이다. 지동설고대 그리스에 가서야 최초로 등장한다.[103] 세차운동 때문에 당시의 북극성은 현대의 폴라리스가 아니라 용자리의 희미한 별 투반이었다. 기원전 4000년부터 기원전 2000년까지는 이 투반이 북극성이었다.[104] 다만 '1시간'의 개념을 확실하게 정립하는 데에는 실패했다.[105] 여담이지만 고대 이집트인들은 그 누구보다 별자리를 중시했다. 이집트 제1중간기 시절에는 관짝 뚜껑 안쪽에 별자리들을 그려 넣기도 했다.[106] 지반 등이 수직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실에 추를 매어 늘어뜨리던 도구.[107] 예를 들어 2/37을 계산한다고 하면, A를 24로 잡고 2/37 = 1/24 + 1/111 + 1/296으로 계산하는 식이다. A를 잡을 때는 소수가 아닌 수들 중에 가장 크기가 작은 수를 골라 썼다.[108] 당시에는 효모가 없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부드러운 빵이 없었다.[109] 놀랍게도[110] 현대인들이 고대 이집트식 그대로 제조한 맥주를 마신다면 아마 술이라기보다는 과일 주스에 더 가깝다고 느낄 것이다. 맛을 내기 위해서 대추야자와 꿀을 첨가했기에 일반적인 술과는 달리 과일 향과 단맛이 굉장히 진하게 난다. 하지만 알코올 농도는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높은 편이어서 술맛이 안 난다고 마구 마셔대다 보면 금방 취한다.[111] 세크메트 여신이 피에 미쳐 날뛰는 것을 막기 위해 피 대신 피처럼 붉은 맥주를 바치는 것이었다. 맥주를 마시고 취한 세크메트 여신은 잠들어 더이상 학살을 하지 않는다는 내용이다.[112] 게다가 고대 이집트 벽화에 유난히 돼지의 모습이 적은 것 역시 헤로도토스의 주장을 뒷받침하며 오해를 부추겼다.[113] 이 대추야자 빵은 종종 장식 용도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중국의 월병 느낌. 고대 이집트에서는 악어가 행운의 상징이어서 악어 모양으로 주로 만들었다.[114] 이를 근거로 인부들이 고기를 대접받는 등 예상 외로 꽤나 잘 먹었다는 주장이 있다.[115] 고대 이집트에서 가장 권위가 높았던 의학 지침서들 중 하나.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외상 치료 관련 의학서이다.[116] 피임 방법, 당뇨 치료, 기생충 제거 등의 치료법이 있다. 파피루스에 의하면 가죽에 대추야자즙, 꿀, 아카시아 등을 묻혀 여성의 질 내부에 넣어 피임을 하라고 했다. 당뇨의 경우 딱총나무 열매, 식물 섬유, 우유, 맥주, 오이꽃, 대추야자 등을 이용해 약을 제조했다.[117] 아래에 나오는 그의 미라를 보면 미라임을 감안해도 정말로 상태가 좋지 못한데 일단 머리에 구멍이 뚫려있는 상태에다가 한쪽눈은 칼로 깊게 긁힌게 보이는데다가 코는 아에 잘려나간 상태다.[118] 여담으로 프랑스 당국은 국가원수 격식을 갖추어 람세스 2세의 미라를 맞았다. 하지만 그 와중에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람세스 2세 미라의 머리카락과 옷 조각을 몰래 슬쩍하기도 했다.[119] 참고로 인터넷에서 '람세스 2세의 여권'이라고 공개된 사진은 실제 여권 사진이 아니다. 람세스 2세의 실제 여권은 공개된 적이 없다.[120] 투탕카멘의 가면보다 확연히 세공의 질이 떨어지는 걸 볼 수 있다.[121] 프수센네스 1세는 혼란기인 제3중간기 시대의 파라오다. 투탕카멘이 아무리 별볼일없는 파라오라지만 이집트 최고 전성기인 신왕국을 다스렸던 파라오였기에 혼란기 시대의 웬만한 파라오를 압도하는 보물들과 함께 묻혔다.[122] 이집트의 항해술은 대서양은커녕 연안항해에 머물러 있었다. 이집트의 배는 대부분이 그저 나일강을 항해하기 위한 용도에 그쳤으며 대양을 횡단할 수 있을 정도의 기술력은 아예 없었다.[123] 검은색과 적색 잉크로 써놓았다.[124] 더 자세히 말하면 람세스 2세 재위 30주년 겨울의 네 번째 달 24일이다.[125] 정확히 말하면 추정이다. 클레오파트라는 시신이 발견된 적이 없기 때문. 하지만 클레오파트라 7세로 추정되는 초상화 대부분이나 그녀의 모습이 새겨진 것이 확실한 당시 동전에서 그녀는 그리스인의 외모로 묘사되며, 왕조 자체가 그리스 계였기 때문에 그리스인의 외모에 가까웠을 것이란게 합리적인 추측이다. 확실한 것은 일부 후대인들의 주장처럼 흑인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당시 이집트에는 흑인 왕조인 25왕조도 있었지만 멸망시기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는 350년 차이가 난다. 25왕조는 누비아가 이집트를 점령하면서 시작된 왕조이며 이후 이집트에서 밀려나 누비아로 돌아갔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세운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측근인 그리스인이었기 때문에 전혀 상관이 없다. 이집트인들은 흑인, 이집트인, 그리스인, 아시아인을 모두 다르게 그렸는데, 클레오파트라 7세 시기의 여성 파라오을 그린 모습(즉 그녀로 추정되는 모습)은 모두 그리스인이거나 이집트인처럼 그려져있다. 100% 확실한 건 그녀가 그리스인의 후손이란 점이며, 당대에 (동전으로 볼 수 있듯) 그리스인으로 묘사되었다는 점, 그리고 당시 프톨레마이오스 문명은 그리스계 왕조이며, 당시 이집트 사회의 주류사회이던 이집트인은 우리가 흑인이라 부르는 인종적 차이가 있었다는 것이다.(아프리카에 산다고 다 흑인이 아니란 것)[126] 특히 황금관 안쪽의 카르투슈까지 싹싹 긁어내진 것으로 보아 더욱 아케나톤의 것일 가능성이 높다. 단순한 도굴꾼이었으면 그냥 관 자체를 털어가 녹여버렸지, 굳이 이름까지 번거롭게 파낸 다음 방치할 이유가 전혀 없다.[127] 사실 이 목관 역시 투탕카멘의 관처럼 예전에는 금박과 보석들로 상감되어 있었다. 하지만 파라오들이 선대 파라오들의 관을 재활용하는 과정에서 이 관에 덮여있던 귀금속들도 죄다 벗겨진 걸로 추정된다. 이 관은 대략 제18왕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얼굴을 보면 아마 호렘헤브의 것이 아니었을까하는 학자들도 있다.[128] 이쪽은 서양 판타지로 가장 많이 쓰이는 시대다. 엄밀히 말하자면 서양의 중세 + 근대를 섞은 정체불명 시기가 제일 많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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