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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6 16:44:05

정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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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고려 의장기.svg
고려 문하시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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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edc89,#670000> 고려 초기
(918~981)
<colcolor=#373a3c,#ddd> 광평시중
김행도 | 박질영 | 류덕영 | 공훤 | 왕철 | 권직
문벌귀족기
(981~1170)
문하시중
최승로 | 박양유 | 한언공 | 김승조 | 최숙 | 류윤부 | 위수여 | 유진 | 최사위 | 유방 | 강감찬 | 서눌 | 황주량 | 최제안 | 최충 | 이자연 | 김원충 | 왕총지 | 김원정 | 박성걸 | 최유선 | 이정 | 문정 | 이정공 | 소태보 | 최사추 | 위계정 | 윤관 | 김경용 | 이위 | 김인존 | 이공수 | 김부식 | 김약온 | 임원후 | 왕충
무신정권
(1170~1270)
정중부 | 두경승 | 이의민 | 조영인 | 최충헌 | 이항 | 이연수 | 김취려 | 최종준 | 최항 | 김준 | 이장용
원 간섭기
(1270~1356)
김방경
(도)첨의중찬 · 도첨의시중 · 도첨의정승
김방경 | 류경 | 송송례 | 원부 | 허공 | 김방경 | 홍자번 | 조인규 | 홍군상 | 홍자번 | 홍규 | 홍자번 | 조인규 | 정가신 | 조인규 | 김혼 | 송분 | 홍자번 | 설공검 | 염승익 | 송분 | 한희유 | 한강 | 한희유 | 송분 | 홍자번 | 한희유 | 채인규 | 한희유 | 안향 | 한희유 | 한희유 | 김혼 | 정인경 | 최유엄 | 김지숙 | 최유엄 | 최유엄 | 이혼 | 류청신 | 홍규 | 류청신 | 권부 | 김이용 | 김이용 | 민지 | 배정 | 김태현 | 윤보 | 최유엄 | 김심 | 민지 | 김이 | 김이 | 윤석 | 정방길 | 윤석 | 김심 | 한악 | 윤석 | 강융 | 권한공 | 조적 | 한악 | 윤석 | 채하중 | 이능간 | 기철 | 채하중 | 한종유 | 왕후 | 김륜 | 김영후 | 김영후 | 인승단 | 노책 | 김영돈 | 왕후 | 노책 | 노책 | 손수경 | 손수경 | 이암 | 이제현 | 손기 | 송서 | 조일신 | 정천기 | 송서 | 조일신 | 이제현 | 조익청 | 홍빈 | 조익청 | 인승단 | 채하중 | 염제신 | 염제신 | 류탁 | 채하중 | 채하중 | 이제현 | 홍언박 | 홍언박 | 윤환
여말선초
(1356~1392)
문하시중 · 도첨의정승 · 도첨의시중
홍언박 | 윤환 | 이제현 | 염제신 | 염제신 | 이암 | 홍언박 | 류탁 | 류탁 | 김일봉 | 김일봉 | 경복흥 | 경복흥 | 류탁 | 경복흥 | 김보 | 이춘부 | 이인임 | 이춘부 | 이인임 | 윤환 | 경복흥 | 염제신 | 경복흥 | 이인임 | 윤환 | 이인임 | 홍영통 | 이자송 | 조민수 | 임견미 | 최영 | 이성림 | 임견미 | 이성림 | 이인임 | 이성림 | 반익순 | 반익순 | 이성림 | 최영 | 이성계 | 최영 | 우현보 | 조민수 | 이성계 | 이색 | 이성계 | 이림 | 심덕부 | 이성계 | 정몽주 | 이성계 | 이성계 | 심덕부 | 배극렴 | 이성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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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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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평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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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edc89,#670000> 고려 초기
(918~981)
<colcolor=#373a3c,#ddd> [내의성] 평장사
최언위
문벌귀족기
(981~1170)
[내사문하성] 평장사
최승로 서희 최량 왕융 한인경 유방헌 위수여 진적 유진 최사위 최사위 김심언 진적 이예균 왕동영 최항 최항 강감찬 강감찬 유방 장영 최항 채충순 유방 이공 이공 서눌 서눌 류소 이단 이단 이단 황보유의 이단 류소 황보유의 박충숙 유징필 황주량 황주량 최충 최제안 황보영 이작충 최충 황보영 김영기 김원충 김원충 이자연 이자연 왕총지 김정준 박성걸 김정준 김원정
[중서문하성] 평장사
김원정 최유선 임종일 김의진 왕무숭 이정 문정 김약진 이정공 최석 이정공 김양감 최석 김양감 류홍 왕석 김행겸 류홍 최사제 정유산 이안 소태보 소태보 이자위 김상기 류석 김상기 임개 최사추 김선석 황영 최사추 위계정 김선석 임간 임간 이오 이오 위계정 오수증 최홍사 최홍사 이오 윤관 김경용 임의 임의 김경용 오연총 허경 오연총 이위 임간 허경 이자겸 김연 이자겸 김연 조중장 강증 김연 오수증 조중장 김준 임유문 김준 한안인 이자량 김고 임유문 최홍재 김약온 김약온 척준경 척준경 이수 이수 박승중 척준경 김부일 김향 최홍재 최사전 김향 문공인 최자성 최자성 김부식 이준양 임원애 최유 임원준 이자덕 최유 이중 이중 최진 최진 한유충 왕충 임원숙 이인실 이인실 고조기 김영관 최유청 문공원 유필 최관 유필 김영석 최자영 최윤의 이지무 양원준 최함 최유청 박순충 김영부 이지무 최유칭 김영윤 허홍재 허홍재
무신정권
(1170~1270)
임극충 서공 임규 양숙 정중부 윤인첨 윤인첨 한취 이광진 기탁성 민영모 송유인 최충렬 이공승 문극겸 한문준 최세보 이의민 박순필 이혁유 임민비 이광정 조영인 기홍수 임유 최당 최당 우술유 기홍수 이문충 최선 임유 기홍수 김준 차약송 최충헌 최충헌 김봉모 노효돈 이극서 조충 류광식 이연수 김의원 최보돈 최보순 왕규 김취려 최홍윤 금의 이규보 이자성 채송년 최린 기윤숙 김창 최자 김태서 류소 최자 김기손 송순 김기손 김기손 이세재 김기손 이세재 이장용 김순 최온 김지대 류경
원 간섭기
(1270~1356)
류경 김전 채정 김방경 김방경 원부 장길 유천우 황보기
(도)첨의찬성사·도첨의중호
유천우 류경 원부 박항 송송례 홍자번 홍자번 한강 한강 조인규 인후 강수형 박구 신사전 홍문계 김련 정가신 강수사 송분 인후 정가신 인후 김혼 차신 송분 한희유 정인경 최유엄 한희유 김지숙 최유엄 임익 이덕손 최수황 류비 김혼 차신 채모 김부윤 김혼 안향 최유엄 류비 오윤부 이지저 민훤 정해 왕유소 설영임 조윤통 류비 이혼 김흔 최충소 이혼 김심 김문연 인후 김심 류청신 이진 류청신 배정 박의 권부 이호 권단 홍선 설영임 설경성 민종유 정지연 최비일 오형 권한공 최성지 김사원 이설 김이용 김이 조연수 오잠 오잠 박허중 오잠 박허중 조련 허유전 박전지 윤보 이호 민종유 송영 권준 김이 한악 임중연 전영보 원충 정방길 강융 임중연 전영보 임자송 원충 전언 채홍철 임중연 조적 채하중 민상정 조위 안문개 홍빈 김인연 정천기 오계유 강윤성 윤환 김륜 권겸 박충좌 유방세 김영후 강윤성 전사의 손수경 안축 윤계종 이군해 류돈 이군해 윤신계 손홍량 윤안숙 염제신 허백 윤신계 이곡 류탁 김인호 조일신 조익청 전윤장 윤시우 김자 류탁 정을보 조유 홍언박 김승택 홍언박 류탁 이공수 강윤충 원호 기륜 강순룡 박새안불화 홍언박 윤환 김경직 김인호 김보 최천택 박수년 허백 황석기 강윤충 권적
여말선초
(1356~1392)
[중서문하성] 평장사·평장정사
류탁 허백 황석기 김용 황석기 김용 전보문 김일봉 김승택 이승경 정자후 이겸 안우 이공수 김용 경천흥 류탁 정세운 정세운 이방실
도첨의찬성사
유인우 김용 이공수 경천흥 황상 이성서 송경 안우경 최영 이인복 이구수 이인복 송경 안우경 최영 이구수 김보 이춘부 이인임 권적 이성서 윤택 안우상 우제
문하찬성사
한방신 황상 안우경 최영 강인유 안사기 목인길 지용기 정몽주 지용기 정몽주 배극렴 설장수 조준 권중화 조준 류만수 권중화 윤호 성석린
}}}}}}}}}}}} ||

파일:고려 의장기 문양.svg 고려 중흥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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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양왕을 옹립한 흥국사 구공신
화령군 개국충의백
이성계
청성군 충의백
심덕부
익양군 충의백
정몽주
충의군
지용기
충의군
설장수
창성군 충의군
성석린
충의군
박위
조선군 충의군
조준
봉화군 충의군
정도전
}}}}}}}}}

파일:고려 의장기 문양.svg 고려삼은(高麗三隱)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
※ 야은 대신 도은 이숭인을 넣는 경우도 있다.

<colbgcolor=#c00d45> 조선 문묘 종사 동국 18현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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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c81e> 서무 종향 <colbgcolor=#fff078> 문창후(文昌侯)
최치원
<colbgcolor=#78f0ff> 홍유후(弘儒侯)
설총
<colbgcolor=#1ec8ff> 동무 종향
문충공(文忠公)
정몽주
문성공(文成公)
안유
문헌공(文憲公)
정여창
문경공(文敬公)
김굉필
문원공(文元公)
이언적
문정공(文正公)
조광조
문정공(文正公)
김인후
문순공(文純公)
이황
문간공(文簡公)
성혼
문성공(文成公)
이이
문열공(文烈公)
조헌
문원공(文元公)
김장생
문정공(文正公)
송시열
문경공(文敬公)
김집
문순공(文純公)
박세채
문정공(文正公)
송준길
<colcolor=#373a3c,#ddd> ■ 진한 색: (동무종향) 조선 5현
■ 진한 색: (서무종향) 조선 5현
{{{#c00d45
적색}}}: 조선 종묘 배향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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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10px -10px"<tablebordercolor=white><tablebgcolor=#fff,#1f2023> 파일:문화부 심볼.svg이달의 문화인물
(1998-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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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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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1월
신윤복
2월
안향
3월
이상화
4월
석주명
5월
이익
6월
송흥록
7월
조철호
8월
윤봉춘
9월
한성준
10월
정태진
11월
최제우
12월
이순신
1999년
1월
이중섭
2월
혜초
3월
유형원
4월
최한기
5월
김창숙
6월
권율
7월
맹사성
8월
황현
9월
김시습
10월
최세진
11월
정부인 안동 장씨
12월
이승훈
2000년
1월
남궁억
2월
나혜석
3월
김육
4월
서경덕
5월
진감국사(혜소)
6월
하규일
7월
정인보
8월
김좌진
9월
김수영
10월
류희
11월
김창하
12월
장승업
2001년
1월
김부식
2월
최용신
3월
강항
4월
함석헌
5월
지눌
6월
이병기
7월
이현보
8월
오세창
9월
허균 · 허난설헌
10월
설총
11월
의천
12월
송만갑
2002년
1월
정약종
2월
김환기
3월
이상재
4월
박두성
5월
박수근
6월
조지훈
7월
성삼문
8월
박효관
9월
김병연
10월
신숙주
11월
김승호
12월
손진태
2003년
1월
안확
2월
양주동
3월
이동백
4월
양팽손
5월
정지용
6월
정몽주
7월
김장생
8월
박세당
9월
유정
10월
월명
11월
이인성
12월
유길준
2004년
1월
조희룡
2월
신흠
3월
이항로
4월
이경석
5월
의상
6월
백광홍
7월
이첨
8월
김창조
9월
조헌
10월
최항
11월
장욱진
12월
박두진
2005년
1월
정정열
2월
이예
3월
강경애
4월
신동엽
5월
임윤지당
6월
김종직
7월
강정일당
8월
이규보
9월
나철
10월
이승휴
11월
효명세자
12월
최북
※ 선정 당시 기관명은 문화부(1990~1993) → 문화체육부(1993~1998) → 문화관광부(1998~2005)였다.
이달의 문화인물(1990-1997) }}}}}}}}}
<colbgcolor=#fedc89,#670000><colcolor=#670000,#fedc89> 고려 문하시중
익양군 충의백(益陽郡忠義伯)[1]
정몽주
鄭夢周
<nopad> 파일:포은선생.jpg정부표준영정(1629년, 김육 作, 대한민국 보물 1110-1호)
[ 전시본 펼치기 ]
파일:attachment/단령/example2.jpg
출생 1338년 1월 21일[2]
(음력 1337년, 충숙왕 복위 6년 12월 22일)
경상도 영천
(現 경상북도 영천시)[3]
사망 1392년 5월 4일[4] (향년 54세)
(음력 공양왕 4년 4월 4일)
개경 선지교
(現 경기도 개성시 선죽동 262 선죽교)
국적 파일:고려 의장기.svg 고려
봉호 영원군(永原君)1387년(우왕 13)
익양군 충의군(益陽郡忠義君)1389년(공양왕 1)
익양군 충의백(益陽郡忠義伯)1390년(공양왕 2)[5]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1401년(태종 1)[6]
시호 문충(文忠)조선
본관 연일 정씨
이름 몽란(夢蘭) → 몽룡(夢龍) → 몽주(夢周)
달가(達可)
포은(圃隱)
가족 아버지 정운관(鄭云瓘)
어머니 영천 이씨
첫째 동생 정과(鄭過)
둘째 동생 정후(鄭厚)
셋째 동생 정도(鄭蹈)
배우자 경주 이씨
장남 정종성(鄭宗誠)
차남 정종본(鄭宗本)
1. 개요2. 생애3. 평가
3.1. 충신은 미화이다3.2. 충신이 맞다
4. 여담5. 대중매체
5.1. 드라마5.2. 서적
6. 관련 문서7.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고려 말의 학자이자 관료. 인 포은(圃隱)으로 유명하다. 조선 건국 직전 이성계신진사대부들의 역성혁명에 반대하다 이방원의 지시를 받은 조영규에 의해 선죽교에서 살해되었다.

그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학문·외교·경제·군사·정치·인품 모든 면에서 특출난 고려 말기의, 고려 최후의 보루. 선비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실제로는 왜구 토벌에도 공을 세웠던 글자 그대로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었다.

고려삼은(또는 여말 3은) 중 한 사람이다. 보통 여말 3은은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를 꼽는다. 여말 3은에는 길재 대신 도은 이숭인이 들어가기도 하는데, 이숭인 또한 정몽주의 제자다. 야은 길재는 이색과 정몽주의 제자이기도 하다. 길재는 조선 왕조를 섬기지 않았으나 영남학파의 영수인 김종직이 맥을 이어 조선 왕조의 후반기 정치사조를 지배한 사림파가 나왔다. 한마디로 조선 시대의 강력한 정치사조는 고려 최후의 충신을 학문적 비조로 삼았다.[7]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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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평가

주인이 잘 살 때 그 밑에서 많은 은혜를 받으며 지내다가, 그 주인이 늙고 병들어 후사를 부탁하는데 어찌 그 손에 침을 뱉을 수 있겠는가. 고려의 명운이 그렇다면 오직 함께 죽을 뿐...
KBS 개국 드라마(1983년 방송) 마지막 회에서 포은 정몽주(송재호 분)가 방원(임혁주 분)에게 내뱉는 간지폭풍의 대사
정몽주의 너무나도 무참한 최후를 슬퍼하는 사람들은 많아도, 정몽주가 왜 이방원의 뜻을 따르지 않았을까 아쉬워하는 사람은 없다. 정몽주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묵묵히 갔을 뿐이다.
<한국의 인간상 1 - 왕가>, 정치가 편 내용 가운데 인용.

살아서는 고려의 마지막 충신, 죽어서는 조선 성리학의 시조격으로 추앙받은 인물이며 대학자로서의 학문적 완결성과 관료로서의 실무적 역량을 모두 갖춘 고려 말기의 명재상이다.

고려 말의 유능한 관리이자 뛰어난 성리학자였으며 성리학의 입장에서 고려를 개혁해보려고 애썼다고 한다. 스승인 이색이 이르기를 동방 이학(理學)의 비조. 고려 시대 수도인 개성에 5부학당과 지방에 향교를 세웠는데 이런 교육체제는 조선에서도 그대로 계승했다. 주자가례를 실천한 최초의 인물이라고도 한다.

외교적으로는 친명파로서 명나라와의 외교관계 진작에 앞장섰으며 일본과의 대외교섭도 맡았는데 실제로도 뛰어난 성과를 남겼다. 당시 명나라 태조 홍무제고려북원의 사이를 의심하고 또 고려를 견제하기 위해 상당히 까다롭게 굴었는데 그 때문에 당시 대명외교는 지난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몽주는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홍무제에게 억류당한 이전 고려 사신들을 풀려나게 해주고 고려의 입장을 이해시켜 목적을 달성해냈으니 그 능력을 보면 알 만하다. 이는 홍무제에게 감명을 준 여러 사건들 때문이기도 했다.[8]

대() 일본외교 또한 대단한 수완을 발휘하였는데 당시 포악하기로는 손꼽히는 왜구들한테 거의 단신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찾아가 국제관계를 설명하고 설득하여 잡혀온 고려인 포로 수백 명을 구출했는데 이 때의 상황이 눈물겹다. 당연히 처음부터 왜구나 일본의 영주가 설득에 응한 것은 아니어서 시간이 걸렸고 준비해간 돈도 떨어져서 앞으로 어찌해야 하나, 하고 탄식하는 시도 남겼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애쓴 끝에 고려인 포로를 데리고 돌아왔고 이후에도 왜구의 노비로 혹사당하는 고려 양민들을 구출하기 위해 사재를 털고 다른 대신들을 설득하여 돈을 모아 그들을 고려로 데리고 오기도 했다. 정몽주의 이런 노력에 감탄한 일본의 영주가 그때마다 고려인 포로를 백여명씩 돌려보내주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통틀어 끌려간 양민구출에 이렇게 노력을 기울인 관리가 상당히 드물다는 것을 볼 때, 사재까지 털어가면서 그들을 구출한 점은 실로 높이 평가해야 할 부분이며 또한 언변이 대단히 뛰어났다. 스승인 이색은 정몽주를 가리켜 "횡설수설이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 없다."[9]라고 하면서 동방이학의 비조로 추대한다고 하였으며, 명나라홍무제 또한 정몽주의 언변이 뛰어나서 고금의 예에 어긋남이 없다고 평하였다.

꼬장꼬장하고 문신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실제로는 대단히 배포가 크고 호방한 인물이었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그가 남긴 시와 기록을 보면 당대에서부터 현재까지 호방하다는 감상이 꼭 등장한다. 또한 대단히 침착하여 큰 일을 결단하는데 낯빛이 변하는 일이 없었고 극비로 처리해야 하는 일에서 한 치의 허투름도 없었다고하니 세상 사람들이 그를 일컬어 왕좌지재라 하였다. 게다가 직접 왜구 토벌전에도 참전하는 등 무관의 경험도 있었다.

또한 명나라의 법인 대명률을 참고한 신율을 편찬해 법률의 정비로 국가의 혼란을 수습코자 노력했다. 군사적으로도 어느 정도 능력이 있어 이성계의 왜구토벌 등에 따라 여러차례 종군한적이 있고 의창을 재건하여 빈민을 구제하는 정책을 펼쳤는데 이후 이 의창은 조선왕조가 들어선 이후에도 그대로 이어지게 된다.

또한 왜구의 침략으로 황폐화된 조운시설을 재건하여 국가 재정을 회복시켰고[10], 원칙도 없이 엉성하게 처리되던 회계출납도 개혁하여 담당관리를 두고 엄중히 관리하여 부정을 막았으며 인재를 뽑아쓰는 일에도 이전과 다르게 엄중히 살펴서 행하여 허투른 인물이 발탁되는 일이 없어졌다고 한다.

이런 일화들을 볼 때 그야말로 만능 관리였던 것 같다. 한마디로 학문의 대가이면서 외교, 군사, 법률 및 행정에도 뛰어났던 대단한 인물이다.

이러한 능력과 인품으로 민중들 사이에서 인망도 대단히 높았다. 여말선초를 살았던 박신이라는 관리는 백성들이 무기의 병화를 입지 않고 편안히 먹고 자는 것이 모두 선생의 공적이라고 말할 정도. 게다가 한창 세를 불려서 고려에서 상대할 자가 없던 이성계 일파와 맞서 팽팽히 대결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정치력 또한 보통이 아니며 그만큼 나라에 대한 충성심과 용기도 강하였다. 하지만 끝내 이방원에게 살해당해 고려의 멸망을 막지는 못했다. 이렇듯 다방면에 걸친 뛰어난 능력과 업적에 더해 충절까지 겸했기에 후대에 평가가 매우 높았다.

정몽주의 충절은 조선 극초기에는 조선 건국에 반대했다고 하여 언급조차 안되었지만 세종 이후 유교적 충효를 강조하기 위해서 다시 부각되기 시작했다. 재미있게도 정도전과 함께 정몽주를 때려잡은 태종 이방원은 왕자의 난을 정당화할 목적으로 정도전을 폄하함과 동시에 대립했던 정몽주를 다시 띄워주기 위해 자신의 즉위 원년에 정몽주를 영의정으로 추증하고 익양부원군으로 봉하였으며 세종은 삼강행실도에 정몽주의 충절 항목을 실어 그의 충절을 본받게 하고자 했다. 실제로 세종은 고려사를 편찬하면서 고려 왕조의 충신들에 대해서 상당히 객관적으로 평가하려고 노력했는데 그 중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여말 삼은에 대해서 평가하기를,

라고 하여 이색이나 길재와 비교해도 매우 좋은 평을 내리면서 그가 충신임에 대하여 재론이 필요없다고 하였으며 그 학문적 능력에 대해서도 높이 평가했다. 이와 같이 정몽주는 단순히 그 충절만 평가된 것이 아니라 외교적 업적같이 관리로서의 능력도 높이 평가되었는데 워낙 충성심이 강조되다보니 현대에 들어서는 충신이라는 것 빼고는 한 게 뭐가 있냐고 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 다만 객관적으로 보면 당연히 명신이자 충신으로 존경받을 인물이었지만 조선왕조 개국을 반대한 점 때문에 조선 왕들에게 많은 딜레마를 안겨주기도 했다. 실제로 고려사 편찬에 있어서는 정몽주를 높이 평가했던 세종대왕은, 신왕조 건국 선전물(...)인 용비어천가에서는 정몽주를 반역의 괴수이자 천명을 거스르는 인물로 묘사했는데 읽고 있으면 거의 대마왕 같다.

그러나 시대가 흐르면서 그에 대한 평가는 계속 높아졌고 조선 왕들도 후대로 갈수록 역적도당이 아닌 충신으로 인정하게 된다. 중종은 사림파의 요구를 받아들여 문묘에 정몽주의 위패를 안치하게 했고 명종 대에는 정몽주의 고향에 그를 추모하기 위하여 임고서원이 창건 되었다.

중종은 정몽주가 이씨의 원수라고 하면서도 그 충절을 포장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는데, 이는 성리학 윤리와 질서를 추구하며 건국되었으면서도, 건국과 찬탈 과정에서 그 윤리와 현실이 벌어졌던 조선의 정치와 윤리의 괴리를 보여주고, 그러면서 자신들의 명분이 손상됨에도 성리학 윤리를 버릴 수도 없었던 왕들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11]

정몽주의 묘에 비석을 세울 때는 그가 고려의 신하로 죽은 뜻을 더럽혀서는 안된다고 조선왕조가 추증한 벼슬을 새기지 않았을 정도였다.[12] 이와 같이 조선 초기는 물론 훗날 송시열을 비롯한 사림파들도 정몽주를 찬양해 마지 않았다.

조선왕조 성종실록에 의하면 '그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 '만약 한 번 마음만 바꾼다면 개국(開國)의 원훈(元勳)이 될 것이니, 누가 그를 앞설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나, 정몽주는 끝내 신하로서의 절개를 지켜 죽어도 의(義)를 잃지 않았던 것입니다.'라고 평가된다..또한 후대로 갈수록 이러한 경향은 현저해진다. 영조는 과거시험에서 정몽주의 후손이 장원급제한 것을 알고 기뻐하는 시도 남겼으며 숙종은 정몽주의 시를 모방하여 여러 편의 시를 남겼다.

정치적 라이벌인 정도전 또한 그를 가리켜 "도덕의 으뜸"이라고 평가했는데 실제로 이 둘은 상당히 막역한 사이기도 했지만 청렴한 관리기도 했던 정몽주의 도덕성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의 충신 이미지 때문에 간과하는 경우가 있는데 정몽주는 상당한 경지에 들어선 시인이다. 위에서 정몽주의 능력을 설명할 때 유능한 관리이자 뛰어난 성리학자였다고 평한다. 성리학자로서 가진 사상과 식견을 자신의 시에 고도로 승화시켰다. 한문학이나 그에 관련된 전공을 한다면 한 번씩 짚고 넘어가게 된다.

3.1. 충신은 미화이다

정몽주의 행적을 연구한 일부에서는 정몽주를 충신으로 보는 것은 지나친 미화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이런 시각에서는 정몽주는 충신이 아니라 단지 대세를 잘 살펴서 줄타기를 잘한 노회한 정객일 뿐이라고 평가된다. 이러한 정몽주가 충신으로 미화된 것은 그를 충신으로 미화, 격상하여 표본으로 삼음으로써, 조선조가 가장 두려워하는 역성혁명을 방지하기 위한 선전 수단으로 활용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볼 수 있는 소지는 정몽주가 이인임의 친원정책에 반기를 들어 같은 신진 사대부들과 함께 반대운동을 벌인데서부터 시작된다. 얼핏 이인임의 친원정책에 반대한 것은 외교문제일 수도 있었지만 속내는 친원파인 이인임의 권력을 견제하려는 목적이 강했다. 그러나 신진 사대부들의 반이인임 운동은 실패로 돌아갔고 정몽주를 비롯한 반이인임 운동에 관여한 자들은 유배되거나 죽임을 당했다. 그런데 정몽주는 1년만에 유배에서 풀려나왔다. 이는 강경파로서 완전히 찍혀 유배지에서도 훼방을 받았던 정도전은 물론[13], 다른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상당히 빠른 것으로 능숙한 외교관이었던 정몽주는 당시의 집권세력인 친원파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즉, 정몽주는 줄타기를 매우 잘한 것이다.[14]

정몽주를 충신으로 보기에 어렵게 만드는 요인은 이성계에 대한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정몽주는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는데에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지 않았고 오히려 회군 결정에 대해서 찬성하였으며 최영의 죽음에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고 심지어 이성계가 우왕창왕신돈의 자식이라고 주장하며 그들을 폐위하려 할 때 이를 반대하기는커녕 오히려 적극적으로 찬동해 공양왕을 옹립하기까지 했었다. 우왕을 자기 집에 초대해서 성대한 잔치까지 벌였던 사람이 말이다. 물론 이성계가 역성혁명의 뜻을 가지고 있었다는걸 처음에는 몰라서였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어찌되었든 이성계의 초반 행보에 반대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 동참했다는 것은 이성계와 손을 잡고 권력을 잡으려는 목적에서 그랬다는 시각이 생겨 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정몽주가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반대했던 건 고려에 대한 충심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역성혁명에 찬동해도 자신에게 돌아올 이득이 적다면 고려 왕실을 유지해서 자신이 권력을 잡는 편이 낫다고 계산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정몽주가 백성을 위한 민본주의적 성리학을 도입했다는 걸 충신의 예로 들기도 하는데 백성에 대한 애민은 고려 왕실에 대한 충성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 역사적 평가를 봐도 고려의 멸망은 백성들에게 훨씬 나은 결과를 가져왔다. 즉 정몽주가 고려의 멸망을 막으려고 한 시도는 애민의 입장에서 볼 땐 뻘짓이 되는 것이다. 고려 왕조와 고려 백성을 분리시킨 다음에 백성에 대한 애민정신도 뛰어났으므로 그는 충신이었다는 주장을 하는 것은 논리적 근거가 없는 그냥 끼워맞추기에 불과하다. 애초에 전근대시대에 백성이란 윗 사람이 혜택을 베푸는 대상이었지 충성의 대상이 된 적은 없다. 성리학적 민본주의 또한 백성은 나라의 토대이므로 나라가 잘 돌아가기 위해선 윗 사람들인 왕실이나 관리들은 그들을 함부로 괴롭히면 안 되고 관대한 마음으로 시혜를 베풀어야 한다는 입장이었지, 결단코 백성에게 주권이 있으므로 그들이 충성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주권은 천명을 통해 하늘의 통치권을 위임받은 군주에게 존재했고 따라서 오로지 군주만이 충성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자유권을 가진 개개인에게 일단 주권이 있고 정치인의 통치권은 정치시스템을 통해 국민에게 위임받은 것에 불과하므로 국민이 충성의 대상이 된 근현대의 민주주의와는 엄연히 다르다.

또한 이와는 별도로 인품이 고결하고 도덕적으로 훌륭한 점도 과장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한 예로 이성계가 낙마한 틈을 타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시도할 당시 정몽주의 행동을 보면 고결한 도덕군자의 모습은 보기 힘들다. 간관들을 조종해 공양왕에게 이성계 일파를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몰아붙이는가 하면, 관원들을 시켜 이성계 일파를 고문해 죽여야 한다고 엄명을 내리는 등 대단히 냉혹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15]

이런 정몽주가 만고의 충신이 된 이유에 대해서는 조선 왕조가 역성혁명에 부정적인 성리학자들을 회유하기 위해 성리학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치는 정몽주를 미화하고 떠받들었다는 것이다. 정몽주가 충신으로 미화된 근본적인 이유는 새로운 역성혁명을 방지키 위한 측면이 크다 할 수 있다. 역성혁명으로 건국된 조선왕조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다른 역성혁명에 의해 전복되는 것이다. 때문에 조선왕조의 건국을 가장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몽주를 성인으로 격상하면서 충의 표본으로 삼아 그를 통해 전 대신과 백성들에게 충효사상을 주입하여 역성혁명을 근원적으로 방지하려는 했다는 것이다.

3.2. 충신이 맞다

우선 명백히 해야 하는 것은, 단지 해배가 빨랐다는 것만 들어서 정몽주가 이인임 등 친원파와 긴밀한 소통관계에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은 냉정히 말해서 그 앞뒤 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견강부회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정몽주의 해배가 함께 유배된 다른 사대부들보다 빨랐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해배된 직후인 1377년 정몽주는 당시 들끓는 왜구 세력의 억제를 부탁하기 위해 일본에 사신으로 보내졌다.

그런데 이 당시의 일본은 끝없는 전쟁 상태였고,(남북조 시대~무로마치 막부 시대였다) 왜구들 또한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해 노략질에 나선 도적떼가 아니라 내전에서 패배한 세력들의 잔당으로 구성된 것이 상당수였다. 즉, 일본 본토에 찾아간다는 것은 왜구들의 마굴에 제발로 걸어들어가는 것이나 다름없는 매우 위험한 일인 것이다.

결국 정몽주의 빠른 해배는 이런 위험한 곳에 보내지기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것은 전후사정을 살펴봤을때 누가 봐도 대놓고 가서 죽으라는 소리지 절대 은근히 싸고도는 짓으로는 해석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정몽주는 이 헬게이트에 당당히 찾아가서 외교적 성과를 거두는 것은 물론이고 고려인 포로들까지 더불어 데리고 오는, 직전 나흥유의 봉변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충격적인 대업적을 이루었다. 국가 중대사에서 이 정도로 혁혁한 성과를 보인 인물이니, 정몽주에 대한 친원파의 소극적인 압박은 '봐줬다'기 보다는 아무리 그들이라도 '함부로 건드리기 어려울 정도로' 정몽주의 공이 컸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성계위화도 회군에도 찬성하였고 최영의 죽음에 대해서도 침묵하였으며 심지어 우왕창왕을 차례로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하는 데에도 적극 찬성했다는 점을 근거로 정몽주는 사실 권력의 중심에 서고자 했을 뿐 진심으로 고려와 고려 왕실에 대한 충성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는 식의 비판은 충분히 상식적인 비판이기는 하지만,[16] 정몽주 이외에도 변안열 등의 인물들 역시 정몽주와 비슷한 태도를 취하면서도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킨 사례들이 있으며 무엇보다 위화도 회군과 최영의 죽음, 우왕과 창왕의 폐위와 공양왕의 옹립은 친원파 권문세족들의 거세를 도모해 고려와 고려왕실에 대한 충심에서 발로된 행동들이었다.

위화도 회군의 단초가 된 제2차 요동정벌은 객관적으로 보았을 시에 승률이 너무나 낮은 싸움으로 잘못하면 고려명나라와의 전면전으로 완전히 멸망할 수도 있는 매우 위험한 도박이었으며 그러한 점에서 회군에 찬성하는 것도 정몽주의 입장에서는 고려에 대한 충심에서 충분히 선택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최영의 죽음에 침묵한 것 또한 최영이 바로 제2차 요동정벌을 적극적으로 밀어붙힌 당사자인 이상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며 우왕 또한 그런 점에서 정몽주의 생각으로는 폐위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되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우왕은 제2차 요동정벌과는 별개로 폭군으로 악명이 자자했으니 폐위의 사유는 충분했다고 볼 수 있다.

당연하지만 우왕의 아들인 창왕이 그대로 왕위를 물려받는 것도 이러한 상황속에서는 폐위된 암군의 아들이 왕위를 계승하는 거라 매우 비합리적으로 보였을테니 정몽주가 창왕의 폐위에도 찬성하고 공양왕을 옹립하는 것에 찬성한 것은 상식적으로는 당연한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겠다. 애초에 정몽주에게 있어 충성의 대상은 '고려'와 '고려왕실'이었지 우왕창왕 같은 개개인들에 대한 충성심은 결코 아니었으므로 이러한 행동들 또한 '고려'와 '고려왕실'에 대한 충성심에서 나온 행동들이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으로 치면 중종반정을 주도한 세력이 연산군 개인에 대한 충성심을 버렸을 뿐, 조선과 조선왕실에 대한 충성심을 버린 건 아닌 점과도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더군다나 '충성의 대상은 백성'이라는 관점에서 보아도 정몽주는 분명 충신이 맞았다. 앞에서 언급된 일본에 잡혀 간 포로들을 송환해 온 것이 별 것 아닌 걸로 보일 수도 있지만, 고려시대는 물론 조선시대까지 통틀어 외국에 포로로 잡혀간 백성들을 구해오기 위해 그처럼 발벗고 노력한 정치가는 정몽주 외에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당시 중국과 일본은 모두 전란에 휩싸여 있어서[17] 여기에 사신으로 가는 것만으로도 목숨을 보장할 수 없었지만 정몽주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이는 명나라와의 외교에서도 마찬가지로, 태풍으로 표류하기까지 하는 고초를 겪으면서도 계속 사신행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만 봐도 대단한 인물이다. 심지어 명나라로 갈 때는 죽는 게 거의 확정사항일 정도로 위험한데도 거절하지않고 가서 기어코 목적을 달성했다. 이러한 행동은 결코 노회한 정객이나 권력에 눈 먼 대신에게서 나올 수 있는 행동이 아니었다. 당시 부패한 고려 말의 정치판에서 그만큼 청렴하고 양심적인 정치인이 드물었던 것도 사실이었으며 그리고 외교활동만 한 게 아니라 자신의 사재까지 털어가며 일종의 모금운동까지 벌였다. 그의 충성의 대상은 '조정' 이전에 바로 '백성'이었던 셈이었다. 즉, 고려의 마지막 기둥이자 양심적이고 청렴결백했던 정치가였음은 변함이 없다. 그의 죽음이 알려지자 평범한 백성이나 상인들도 그 죽음을 애도한 것은 이러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유교의 민본주의 사상을 지나치게 끌어내어 짜맞춘 논리라고 보는 사람도 있지만 이건 애시당초 정몽주가 유교(성리학)를 본격적으로 도입한 당사자로서 유교의 가르침에 따라 행동했을 것임을 고려하면 그가 민본주의를 받아들인 건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유교고 뭐고를 떠나서 예나 지금이나 정치가가 백성을 위해 노력했다면 당연히 좋게 평가받는 것이다. 요즘 정치인들도 부정부패에 찌들어 탄핵당하거나 감옥 가는 자들이 태반인 걸 생각해 보자.

사실 백성에 대한 충성을 비현실적인 소리로 본다고 하여도 정몽주에 대한 충신 이미지가 사라지진 않는다. 바로 왕氏 고려라는 왕조에 대한 충성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왕창왕을 끌어내렸지만 새로 옹립한 공양왕도 결국 왕씨이다. 왕위에 앉아있는 사람만 변했지 왕씨가 다스리는 고려 왕조라는 대전제는 결코 변하지 않은 것이다. 즉, 정몽주의 입장에선 왕이 계속 왕씨 혈통이라면 타협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여차하면 무장의 지배도 뒤집힐 수도 있는 것이고 애초에 고려는 무신정권을 겪었던 나라며, 심지어 공양왕은 정몽주 사후 대놓고 이성계에게 '군신동맹'을 운운하며 '이씨 무신정권'을 공식적으로 제의했다. 만약 이러한 '이씨 무신정권'이 성립되었다면 정몽주는 잘하면 왕가도나 정지상, 못해도 왕실의 보호자 정도의 위치는 충분히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건 당시 정몽주의 현실판단력이라면 충분히 고려할 수 있는 선택지였다.[18] 문제는 이후 조선의 건국 세력들인 신진사대부들은 이전의 권력자와는 달리 왕씨 왕실 자체를 폐하려 했기에 충돌한 것이다. 애시당초 대중매체에서 드러나는 정몽주의 묘사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고려가 망해도 쌀 정도로 썩어가고 있다는 건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 바로 정몽주 본인이었다. 비록 이성계와는 의견차이로 관계가 틀어질 수밖에 없었지만 그를 고려의 권신으로 추앙하면서까지 뜻을 함께 하며 활동했던 것도 그와 함께라면 고려의 썩은 부위들만을 잘 도려낼 수 있다는 희망에서 비롯된 점임을 고려해야 한다.

또한 상기의 비판 문단에 있는 “조선왕조의 수립이 백성의 생활에 더 나은 결과를 가져왔으므로 고려왕조를 지키려고 했던 그의 행동은 뻘 짓이다.”라는 요지의 비판도 원인과 결과가 배치된 대단히 결과론적인 주장이다.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입장에서 보면 조선왕조 전반기 명군들의 출현을 알고 있으므로 정몽주 측의 행동이 답답하게 여겨질지 모르나 당대 사람에게 그러한 사실은 예측불가능한 미래의 일이었다는 것을 명심해야한다. 고려말 당시 상황에서 이성계 측이 과연 백성을 위하여 역성을 주장하는지 권력을 탐하는 것인지는 판단이 불가능한 사항이다. 이것은 예측이 아니라 예언의 영역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당장 고려 말에 “새 나라가 건국되면 뛰어난 명군이 나타나서 전성기를 맞게 될 테니 역성혁명에 찬성해달라.”고 했다면 미친 소리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실제 상황이 조선 초에 일어났다는 것 또한 고려할 필요가 있다. 왕씨 대학살과 고려 충의파에 대한 숙청 및 배제로 많은 피가 흘렀으며 그 이후에도 조선 개국 세력 내에서 권력다툼으로 두 차례에 이르는 왕자의 난이 발생하여 조선 초 정국은 대단히 불안했다.[19] 태종은 철혈의 명군이었고 그의 뒤를 이은 세종 역시 손꼽히는 명군이었으며 그 뒤를 이은 문종마저도 분명 명군의 자질을 타고난 훌륭한 군주였었기 때문에 조선 왕조가 건국 초기에 곧바로 전성기를 맞은 것은 그저 우연에 불과한 일이었다. 만약 운이 나빠서 왕조의 정통성이 아직 취약했던 시기에 악재가 연이어서 계속 이어졌다면 조선 건국이라는 선택은 고려 말보다도 더 심한 혼란의 시대를 불러들일 가능성이 있는 도박이었다.

오히려 당시 일반적인 상식론과 과거 사례에 입각해서 예측해본다면, 역성으로 나라가 뒤집히게 되면 새로운 왕조가 구 왕조의 왕족과 지배층을 대량학살하거나 숙청하는 피바람이 불 것이며 심한 경우 내란이 발생할 수도 있다. 이 정도로 정국이 불안해지면 백성의 생활에도 악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 실제로 조선이 개국되자 왕씨 대학살과 고려 충절파에 대한 탄압이 있었던 것만 봐도 이것은 충분히 고려해야만 하는 사항이었다. 반대로 만약 이성계 측이 역성 혁명을 단념하고 개혁에 주력했다면 왕조 교체와 함께 숙청된 온건 개혁파 인물들까지 참여한 개혁이 가능했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또한 이성계 일파의 조선건국은 이념적으로는 맹자역성혁명론에 기반하고 있는데, 우왕이라면 모를까 창왕공양왕은 폭군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물론 우왕과 창왕은 신돈의 후손이라는 의혹이 있었고, 거기다 창왕은 폐위당한 폭군의 친아들이니 그 자체로 문제가 있었을 것이며 실제로 정몽주 역시도 여기까지는 이성계 일파와 뜻을 같이했다. 하지만 공양왕의 경우를 보자. 공양왕은 명백한 왕씨로서 우왕과 창왕 부자처럼 혈통에 관한 의혹도 전혀 없었고, 역성혁명을 당해야 할 정도의 폭정도 전혀 없었다.[20]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공양왕 대신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한다는 것은, 맹자의 역성혁명론을 제대로 구현했다 보기 어렵다.

즉, 정몽주는 자신의 이상에 대한 일편단심을 진정으로 지켰고, 세상에 순응하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공상에 빠져 비현실적으로 살지도 않았던 것이다. 혁명과 쇄신 중에는 후자가 더 어려운데도 불구하고 정몽주는 어려운 길을 택했고, 이를 현실에서 이룰 뻔 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훗날 태종이 정몽주를 영의정에 봉하고 사대부들의 귀감으로 삼은 것 역시, 물론 왕조에 충성을 다하라는 프로파간다의 목적이 있었겠지만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충성의 표본을 제시하기 위해서라면 정몽주 이외에도 왕조를 위해서 목숨을 아끼지 않은 충신들은 역사 속에 많이 있었고, 태종 입장에서도 단지 프로파간다의 목적을 위해서 자신이 살해한 정몽주를 충의의 화신으로 내세우는 것은 오히려 왕조의 정통성에 적지 않은 위험부담을 지는 셈이다.

태종이 당시 고려의 주춧돌이나 다름없던 정몽주를 살해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단순히 프로파간다만을 고려해서 그를 존숭하기에는 정치적 부담이 매우 컸다. 아무리 말을 잘 포장해도 결국 충신이며 명신을 살해했다는 결론은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왕조의 정통성에 다소 흠결이 생기더라도 정몽주를 인정하고 추증함으로써 얻는 이로움이 더 크리라는 태종의 계산이 들어갔을 것이며, 따라서 이것은 오히려 당대 정몽주의 위상이 그의 사후에도 영향력을 끼칠 정도로 거대했다는 반증이 될 수 있다. 애초에 이성계가 정적들 중 유일하게 정몽주에게만 미온적인 태도를 보인 것도 정몽주의 존재 자체가 거대한 명분 역할이 될 수 있을 정도로 함부로 하지 못할 정도이며, 정몽주의 위치를 고려하면 정몽주가 얼마나 고려에 있어 크나큰 주춧돌이자 정몽주가 고려에 대한 충성심이 얼마나 깊은지를 알려주는 요소다.

이렇게 따지면 프로파간다의 목적으로 정몽주를 끌여다 붙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몽주를 어떻게든 존숭할 필요가 있었기에 자기모순의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정몽주를 높일 수밖에 없었다고 해석하는 것도 결코 무리한 비약은 아닐 것이다.[21]

또한 이방원의 회유에 따라서 이성계 편에 붙었다면 손쉽게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22] 그런데 정몽주가 이성계에게 합류했다면 이성계와의 우애, 집안, 명망 + 고려 왕조의 최후의 보루가 싸움을 포기하고 양위를 도와줬음을 고려하여 최고의 자리를 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드라마 정도전에서 왜 정도전이 정몽주를 아예 문하시중으로 점찍고 나라를 구상하는지 생각해보자. 충절을 지켜 고려왕조에 순절한 점, 사리사욕이나 탐욕을 부리지 않았던 점 등을 볼 때, 단순히 권력을 추구했다고 보기는 힘들며, 초기에 이성계에게 협조했던 것은 그 시점에서는 아직 그가 역성혁명을 노린다는 점이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는 것이 옳다.[23] 그리고 정몽주로서는 고려왕조를 개혁하기 위한 실질적인 무력의 뒷받침을 해줄 수 있는 인물로 그때까지 고려의 변방 출신인데다 같이 목숨을 걸고 싸운 적이 있는 이성계를 신뢰했을 것이라는 추측 또한 가능하다. 당시 최영은 충신이긴 했으나 정몽주를 비롯한 신진사대부가 추진하는 개혁에 반대편에 선 인물이었으므로 개혁을 통한 고려왕조의 지속을 노린 정몽주로서는 그를 몰아내기 위해 최영과 반대편에 선 무신세력의 도움을 필요로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다소 마키아벨리즘적인 인식이긴 하지만, 위에 언급된 정몽주의 냉혹한 면모는 목적 달성을 위해 불가피했다는 해석도 있다. 정몽주가 상대한 이성계 일파는 이미 조정의 모든 실권(특히 군사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이들을 제거하기 위해선 비정상적인 방법도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도덕적 정당성만으로는 왕조를 지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도전(드라마)에서는 이러한 해석 위에서 군자 정몽주가 정쟁의 온갖 수단을 사용하며 느끼는 갈등을 묘사한다.

4. 여담

飮酒(음주)
客路春風發興狂 [객로춘풍발흥광]
나그네 길 봄바람 만나니 미친 흥 절로 난다

每逢佳處卽傾觴 [매봉가처즉경상]
아름다운 곳 만날 때마다 술잔을 기울이네.

還家莫愧黃金盡 [환가막괴황금진]
집에 돌아와 돈을 다 썼다고 부끄러워 말자

剩得新詩滿錦囊 [잉득신시만금낭]
금낭(錦囊)[38]에 한 가득 신시(新詩)를 얻었으니.
相思曲(상사곡)
雲聚散月盈虧 [운취산월영휴]
구름은 모였다가 흩어지고 달은 찼다가 이지러지나

妾心不移 [첩심불이]
첩의 마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緘了却開添一語 [함료각개첨일어]
(편지를) 봉함하였다가 도로 열어 한 마디 덧붙이는데

世間多病是相思 [세간다병시상사]
세간에서 병 많은 것이 상사(병)이라 하더이다.
정몽주가 9살 때 여종을 위해 대필해준 연애편지

5. 대중매체

드라마들을 비교해보면 정몽주 평가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 수 있다. 과거에는 강직한 인물로 고려를 마지막까지 지킨 충신 이미지가 강했다면 최근에는 강직한 인물로 그려지는 것은 맞지만 결국 새 나라를 열려는 세력에 맞서는 최후의 정적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 진정한 정몽주의 모습은 다 드러난 것이 아닌데 드라마에서 정몽주를 다룬다고 하면 고려 최후의 충신으로서의 모습을 묘사하는데 집중한다. 반면에 여러 업적과 유능한 외교관 겸 행정가로서의 면모나 문신이면서 직접 전쟁터에 나서는 모습은 언급도 되지 않는다. 천재이자 엘리트이면서 유배와 사신행, 조난과 전쟁 참전 등 많은 일화와 복합적인 면모를 가진 인물인데도 여전히 평면적인 묘사에 그치는 상황이었다. 이는 여말선초를 다루는 드라마들의 특징과 연관되어 있으며 주로 이성계 측이 주인공이 되는데 정몽주가 있는 그대로 나오면 조선 건국의 정당성이 떨어지고 주인공이 악역스럽게 인식될 우려가 크기 때문. 정몽주의 생애는 애국과 애민 2가지가 공존이고 목숨을 다한 사람이며 마치 소설 속의 주인공 같은 행보인데 이런 정몽주의 모습이 나와버리면 "이런 인물을 죽여가면서까지 왜 조선을 건국한거야?"라는 모순이 발생한다.[44] 오늘날 대중들에게 조선 건국하면 결국 세종대왕으로 귀결되기에 이성계와 정도전이 보여줄 어두운 면을 납득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역사적 흐름이나 은폐하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내려진다. 허나 그런 복잡한 체제적 문제는 드라마로 담아내기도 어렵고 시청자들이 원하는 구도도 아니다.

그런 한편으로 이런 현대창작물에서도 정몽주를 딱히 악역으로 묘사하지도 않는 것이 특징이다. 주인공들과 정적으로 갈라지는 시점에서 중간보스 혹은 최종보스로서 다소 독한 모습을 보이는 정도. 조선건국세력을 주인공으로 한 사극들 중 고려말을 길게 다루는 경우 위화도회군까지 거의 권선징악 비슷한 흐름으로 가다가, 주인공들이 정몽주와 갈라서는 시점부터 극의 분위기가 느와르풍으로 바뀌기도 한다. 정몽주와 더불어 고려말 충신의 대명사인 최영이나 스승 이색이 경우에 따라 다소 과하게 완고하거나 심지어는 수구적인 인물로까지 묘사되기도 하는 것과는 대비된다. 이는 정몽주라는 인물이 가진 이중적 상징성 때문이기도 한데, 정몽주는 조선왕조 개창을 반대하고 고려왕조를 최후까지 지키려 했던 인물인 동시에, 후대 조선의 학문과 사상 등 정신문화 전반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으며 정신적 지주로 회자된 인물이기도 하다. 또한 공양왕 옹립 때까지 이성계, 정도전 등에게 친우이자 정치적 동지로서 여러 도움을 주었으며, 이성계 세력이 정몽주에게 공격당해 위기에 달하는 순간에 까지 이성계가 포기하지 못한 인재라는 것 또한 역사적으로 명백한 사실이다. 이런 이중적 상징성 때문에 조선건국세력의 입장을 조명하는 현대창작물에서도 정몽주의 충절과 그 의의를 폄하하지는 않는다. 어찌되었든 정몽주라는 인물의 입체성, 조선건국세력과의 관계는 그 자체로 흥미롭고 극적인 요소가 있기에 잊힐만 하면 사극의 소재로 쓰인다.

5.1. 드라마

5.2. 서적

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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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edc89,#670000><colcolor=#670000,#fedc89> 고려사(高麗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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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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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권 「폐행1(嬖幸一)」
유행간 · 영의 · 김존중 · 정세신 · 백승현 · 강윤소 · 염승익 · 이분희 이습 · 권의 채모 이덕손 · 임정기 (민훤) · 주인원 · 이지저 고종수 김유 · 인후 인승단 · 장순룡 차신 노영 · 조윤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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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임 · 임견미 · 염흥방 · 조민수 · 변안열 · 왕안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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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670000,#fedc89> 130권 「반역4(叛逆四)」 131권 「반역5(叛逆五)」
한순 다지 · 홍복원 (홍차구 홍군상 홍선 장위 류종) · 이현 · 조숙창 · 조휘 · 김준 · 임연 · 조이 김유 이추 · 한홍보 · 우정 · 최탄 · 배중손 조적 · 조일신 · 김용 · 기철 · 노책 · 권겸 · 최유 · 홍륜 · 김문현 · 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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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빛낸 백명의 위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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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대표 33인 김좌진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1]
기울임체 는 부정적으로 언급된 인물이다.
[1] 실제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후대 인물 허균이 창작한 의적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논란이 있지만 간접적인 언급으로 소설 홍길동전에서 대중화된 의적 이미지를 노래 가사로 사용했으므로 저자 허균을 생각하고 언급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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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려의 충신 이미지가 강해서 조선에서 추증한 관작은 조선시대에도 일반적으로 통용되지 않았다. 대체로 후대에 정몽주를 높여 부를 때는 (문하시중) 충의백이라고만 한다. 원래 충의 두 글자는 흥국사 9공신의 작위에 일괄적으로 붙은 미칭이었는데 아무래도 정몽주 하면 충의의 이미지가 강하다 보니 후대에 정몽주만 가리키는 것으로 굳어진 것이다.[2] 율리우스력 1월 13일[3] 정몽주는 본관이 영일이기는 한데, 고향영천시 임고면이라는 설과 포항시 남구 오천읍이라는 설 2가지가 있다. 그래서 영천시포항시는 서로 우리가 정몽주의 고향이라고 분쟁을 벌이기도 했다. 포항에는 정몽주의 호를 딴 포은중앙도서관포은중학교, 정몽주로가 있다. 영천시에는 포은초등학교포은고등학교(원래 금호여고였으나 2014년 남녀공학으로 전환하면서 교명을 변경했다.)가 있다. 현재 영천이라는 쪽이 우세한 편으로 영천에는 임고서원과 가설 선죽교, 새로 복원한 포은의 생가가 있다.[4] 율리우스력 4월 26일[5] 공양왕 2년에 이성계파가 옥사 사건을 주작해 왕을 끌어내리려 했는데 이를 정몽주가 막아내고 자신이 왕당파임을 드러냈다. 이에 왕은 고려조 최고위 품계 "벽상삼한삼중대광"과 함께 백작위를 봉하며 밀어줬다.[6] 조선 왕조에서 시호 문충공과 함께 추증한 군호. 동시에 조선조 최고위 품계 "대광보국숭록대부" 및 온갖 좋은 직위를 같이 추증했다.[7] 길재 등은 이들 사림파의 강력한 지지로 인해 결국 중종 대에 문묘에 배향되게 된다. 다만 정몽주와 길재의 관계는 의심스러운데 왜냐하면 정몽주의 문집 어디에서도 길재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정몽주의 제자와 문생들은 다수가 태조~태종에 조선에 출사했기 때문에 여말선초 정몽주의 학통 은거 세력이 학파로 실존했다는 증거가 사실상 없다.[8] 처음 사신으로 왔을 당시에는 태풍에 표류되었다 나중에 구조되었음에도 끝까지 서한만은 지켜내서 인상을 주었는데, 세월이 흘러 정몽주 반대파가 정몽주를 홍무제 손에 죽게 하려고 했을 당시 어떻게든 제 시간 안에 명나라로 도착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홍무제는 보통은 신경도 안 쓰는 문서를 쓴 시기를 보고 당시 정몽주의 상황을 알아차렸으며, 이전의 그 사신이라는 것을 알아보고 후히 대접했다고 한다. 홍무제는 관대할 때는 관대한 면모를 보이는 군주였다.[9] 횡으로 말해도 수로 말해도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 없다는 의미이다. 원래 이 말은 언변이 매우 뛰어나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10] 조운제도가 황폐화된 시절에는 각지의 세금이 걷히지 않아 재정에 큰 지장을 초래했다.[11] 훗날 숙종 대의 사육신 복권이나 영조 대의 추증, 두문동의 재발견도 이러한 맥락에서 보아야 할 듯하다. 다만 이 경우는 국왕이 필요에 의해서 써먹었다는 느낌이 매우 강하다.[12] 택리지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는데 조선에서 내린 의정부 영의정이라는 벼슬을 새긴 비석은 벼락을 맞았지만 고려의 문하시중이라 적힌 비석은 그대로 몇십년을 멀쩡하게 남아 있었다고 한다. 또 다른 의미에서는 학맥의 문제이기도 하다. 조선의 극초기를 제외한 거의 전 시기를 점령한 사대부들, 관학파, 훈구파, 사림파의 학맥에서 정몽주는 상당히 중요한 위치에 있다. 특히 정몽주와 비슷한 연배의 인물들이 조선 건국에 부정적이었고 비판도 강했던 데 비하여, 정몽주는 다른 사람도 아닌 태종이 괜찮게 말을 해줬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밀어줘도 부담이 없었던 케이스이다. 그래서 정몽주의 입지 회복은 엄청나게 빠르다.[13] 당시 정도전의 외조모가 우현보 일족의 종이라는 루머가 돌고 있었기에 더욱 차별받았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14] 그러나 염흥방처럼 변절 후 이인임과 결탁하여 토지침탈과 월권 등의 부정부패와 비리+횡포를 부리는 것도 아니었고, 이색처럼 이런 무리들과 친인척 관계를 맺고 친교를 가지면서 이들의 옳지 않은 행동(최영의 무리한 요동정벌과 북원과의 친교시도를 말리지 않은 것, 토지제도(과전법)개혁을 반대한 것 등)을 무조건 옹호하는 것도 아니었다.[15] 참고로 조선 건국 후 정도전은 정몽주 일파인 이숭인, 이종학 등에게 이 방법을 똑같이 행하여 보복한다. 공식적으로는 곤장 100대를 치게 한 다음, 엉덩이뿐만 아니라 몸통 전체를 때려서 죽게 만든 것. 참고로 이숭인의 경우는 그가 특별히 죄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의 뛰어난 문재를 정도전이 시기해서 죽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당시 고려의 상황을 보아야 한다. 정몽주가 죽기 직전 공양왕의 왕권은 이성계의 권력보다 훨씬 못한 수준이었고, 사실 거의 없다시피 했다. 이성계 입장에서는 명분과 정통성, 모양 좋게 선위 받아서 조선을 건국하고 싶었던 입장이었기에 이러한 상황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인데 수틀리면 이성계가 군사를 동원하여 역성혁명을 일으킬 수도 있던 상황이었다. 심지어 이성계가 정몽주를 죽이고 싶거든 언제든 처단할 수 있는 상황이었기에 공양왕과 정몽주로서는 무슨 짓을 해서라도 사직을 지켜내려고 하였던 것이다.[16] 일단 정몽주가 이성계의 우창비왕설을 지지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17] 일본은 남조북조로 갈라져서 남북조 시대무로마치 막부의 혼란기를 겪고 있었고, 중국은 원나라의 쇠퇴 이후 명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까지 여러 군벌들의 난립, 왜구홍건적의 난에 정신이 하나도 없던 동아시아 전역을 통틀어서 진 헬게이트였다.[18] 아무리 성리학자라도 여말선초에는 이 정도 융통성은 있었다. 가장 꼬장꼬장한 것으로 평가받는 사육신만 해도 계유정난 때는 소극적 참여 혹은 우호적 방관의 위치에 있었고 세조가 직접 왕위에 오른 다음에야 세조 일파를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정몽주에 비하면 좀 더 완고해졌지만, 조선 후기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인식과 실제 역사적 인물들의 행동은 차이가 있다.[19] 실제로 KBS 드라마 <정도전>에서는 직접 정몽주의 입을 빌어 이런 해석을 피력하고 있다.[20] 정확히 말하자면, 폭정을 할 그 권한마저도 전혀 없는 그런 상태였었다.[21] 또한 태종은 정몽주의 서출손녀를 자신의 며느리로 삼았으며 정몽주의 아들 정종성에 대해서도 자신의 측근과 마찰을 일으켰을 때 그를 두둔하면서 비교적 약한 모습을 보였다. 정몽주 암살에 찬동했던 그의 형 정종도 정몽주의 손녀를 며느리로 삼으며 후대했다. 이를 볼 때 정종과 태종은 정몽주를 암살하기는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싫어하지 않았으며, 나름대로 죄책감을 가지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애초에 정몽주는 아버지와 젊은 시절부터 친해서 자연스럽게 알고 지냈을 것이다.[22] 조선왕조실록에도 공식적으로 언급된 이야기이다. 사실 정도전은 권세를 다 손에 쥐고도 정승자리에도 오르지 못했다. 정승 자리에는 조선 건국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조준이 좌의정이자 조정의 1인자로 올랐다. 다만 나서기 보다는 묵묵히 자기 일을 하는 관료 스타일이고 정도전이 조선 건국 이후 워낙에 활발히 활동했을 뿐이다.[23] 이러한 관점에서 정몽주는 이성계가 최씨 정권 같은 무신집권체제를 노리는 정도로 평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이 있다.[24] 혹은 후실이지만 정보가 단종과 연루된 일로 첩으로 강등되었다는 얘기가 있다.[25] 한명회의 정실부인도 아닌 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외명부 1품 정경부인이었다고 한다.[26] 유배지 및 관련 사적은 경상남도 산청군에 남아있는데, 실제로 나중에 단성(現 산청군)으로 이배되었다고 한다.[27] 2007년 KBS2에서 방영되었던 북한 사극 <사육신>에서 정종성의 얼녀와 한명회의 관계에 대해서 어느 정도 각색해서 그렸다. 극 중 정종성의 얼녀는 ‘정소연’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이복오빠 정보와 친분을 가졌던 성삼문을 연모하고 있었다. 한명회는 당시 개경에서 경덕궁지기를 하고 있었는데 정보를 필두로 한 개경 사대부들에게 고작 경덕궁지기 따위라면서 욕을 있는대로 먹자 정보를 엿먹이고자 하는 차원에서 정소연을 다짜고짜 납치해버린 것이었다. 납치하고 나서 비록 겁탈은 하지 않았지만 이미 한 집에서 하룻밤 지낸 걸로만으로 이미 정소연은 한명회의 첩으로 낙인이 찍힌지 오래여서 결국 연모했던 성삼문과 이복오빠 정보에게마저 버림받아 결국 기생이 되어 버리는 처지가 된다. 그래도 실제 역사와 달리 한명회의 첩이 되지는 않는다.[28] 이게 그냥 보기에는 별로지만 사실은 엄청난 평가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가문의 명성이란 정몽주를 가리키는데 정몽주가 받는 평가를 생각하면 실로 어마어마한 평가.[29] 후에 사육신 사건이 일어나자 정보는 정윤화가 살아있었다면 반드시 이 일에 참여했을 것이니 차라리 일찍 죽은 것이 다행이었다고 말했다고 한다.[30] 조선의 명문인 연안 이씨 약 70개의 파가 되는 판사공파에서 단 5개 파를 제외한 나머지 파들은 다 이 사람의 후손들이다.[31] 신혜성은 예명이며 본명은 정필교로 포은공파 32세손 '教'자 항렬이다.[32] 꼭 그렇지만은 않았고 정도전이 정몽주에게 사적으로 보낸 서신에서는 격의 없이 자인 '달가'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 정도로 허물없는 막역지우였던 사이였다.[33] 당시 정도전은 이성계의 막료가 되어 막 함흥으로 나아가는 때였다.[34] 출처 : 여말선초 사상적 패러다임의 전환 탐구, 정성식.[포은] 선생이 태어나신 곳은 영천임이 분명하다. 포은 선생이 태어나실 때에 그의 외가에서 태어났다고 한다.(고려시대의 풍습도 또한 그와 같다) 포은 선생의 외가 후손들 또한 이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36] 고속도로가 통과하는 산이 마을 선산이었던지라 묘소가 많았는데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보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37] 이전에는 금호여고였으나, 남녀공학으로 변경되면서 이름을 바꿨다.[38] 지갑[39] 일부 사극 등의 영향으로 세종이 정도전의 영향을 받았거나 그의 사상을 이었다고 여기는 경우가 있으나 실제 사료에서 이를 뒷받침하는 기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면 세종이 정몽주의 손제자로 그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편이 맞다. 이외에도 세종 치세의 신하들 또한 정몽주의 학통이 대부분이다.[40] 대표적인 인물이 권근과 변계량 등이며 세종 시절의 명재상으로 이름을 날린 영의정 하연은 정몽주의 마지막 제자였다.[41] 다만 정도전의 후손들은 정도전과 무관하게 역적으로 멸문지화를 당하지 않고 대대손손 고관대작을 지냈다. 연산군 때 정도전의 증손자인 정문형이 우의정에 제수될 정도였는데 얼마 안 가서 대간의 탄핵으로 물러났다. 그때 대간이 꼬집은 이유도 정도전의 후손이라는 이유가 아닌 50년이나 벼슬하면서 큰 실적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정작 정도전 본인은 시체도 제대로 수습이 안됐고 장례는 치렀는지, 묘소는 어디인지 자손들도 모른다.[42] 이 시기에 전체적으로 원균, 광해군, 정도전 등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재평가 붐이 일어났었다. 이는 직전까지 군사정권 아래에서 대체로 고정된 이미지로 가르쳐진 역사와 인물들에 대해 정치적 입장과 더불어 새로 평가하게 된 경향이 있다. 그 때문에 한동안 이런 흐름이 지속되기는 했으나 다시 연구가 활발해지고 붐이 가라앉으며 객관적 시각이 늘어났다. 원균은 다시 개노답으로 내려왔고 광해군 역시 명암이 뚜렷한 인물이 되었다. 정도전은 드라마로 대표되는 재평가를 이어받았고 정몽주는 충신을 넘어서는 능력자로서 평가받고 있다. 결론적으로 1990~2000년대 역사의 재평가와 그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자리잡은 시기에 일어난 일들이다.[43] 드라마 태종 이방원에서도 정몽주의 죽음 이후로 이방원과 이성계의 사이가 점점 멀어지는 묘사가 나오고, 조선이 건국되고 이방석이 세자로 책봉되며 조만간 이방원이 큰일을 벌일 거라는 암시를 준다.[44] 애초에 학계 다수는 한국사 시대 구분론에 있어 고려나 조선이나 똑같은 중세로 구분하고 조선으로 바꿔야 개혁이 가능했다고 보지 않는다. 그럼에도 왜 정도전을 선택하여 역성혁명을 했냐면 가장 명쾌한 답은 이성계의 야망이다. 정몽주나 정도전이나 비전은 있지만 그걸 실행해줄 사람은 이성계인데 그가 고려의 중흥공신보다는 새 왕조의 왕이 되길 원한 것이었다.[45] 1996년 KBS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는 태종의 장인이자 세종의 외할아버지 민제 역.[46] MBC 특기로 1961년 데뷔한 원로 성우. 원로 성우답게 발성이 좋고 무게감있는 중신으로서의 모습을 잘 보여주어서 좋은 평가를 받는다.[47] 정도전이 천출이라는 이유로 관직에서 내쫓고 유배보내는 것 역시 그대로 나왔다. 천출 선언 때는 적어도 자신의 벗만큼은 자신에게 이런 소릴 하지 않을 것이라 여겼는데 그걸 먼저 썼다는 것에 일순간 충격에 빠질 정도로 묘사된다.[48] 왕의 명령까지 듣지 않고 독자적으로 첩자를 보내고 병사를 준비해 보내는 것과 동시에 탄핵과 체포를 한번에 하기 위해 왕명이라는 형식을 보이고 스승인 이색의 망설임을 비난하며 속전속결로 처리하려는 모습에 정도전도 감탄할 지경. 이 낙마 사건이 정도전과 이성계가 정몽주를 제외한 주변 인사들을 쳐내려는 준비한 계획이었음에도 불구하고도 정몽주 혼자만의 행동력으로 정도전을 포함한 정도전 일파가 왕궁에 모여서 한 번에 쓸려나갔다. 만일 병사들로 이성계까지 죽였다면, 말 그대로 대신들은 한 번에 다 쓸려갔을 것이고 남아 있던 군권을 지닌 인사들도 결국엔 무너졌을 것이다.[49] 작중에서도 묘사되는 것도 정몽주랑 정도전 중 누가 해주 길목을 먼저 가느냐라는 것으로 계획이 동일했으며, 누가 먼저 둬야 이기는 수 싸움이었으나 정몽주는 공민왕에게 윤허를 받고 지원을 더 받는 게 가능하다는 절차라는 게 있었기 때문에, 잡혀가면서도 그냥 조영무에게 지시를 내릴 수 있었던 정도전보다 대처가 늦어 버릴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나올 정도의 수 싸움으로 나온다.[50] 가장 현실적으로 표현했다는 태종 이방원은 물론이고 자신이 최종보스를 맡았던 정도전과 비교해서도 더 냉정하고 차갑게 이성계 세력을 대한다.[51] 이것은 대중들의 정몽주에 대한 인식이 고려에 대한 일편단심을 끝까지 지킨 노신의 이미지가 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극중에서 정몽주는 이제 본격적으로 자신의 이상을 펴보려고 하는 젊은 선비의 모습이니 마냥 어울리지 않다고 하기는 힘들다.[52] 실제 정몽주와 닮았다는 칭찬인지 비판인지 모를 애매한 평을 받았다.[53] 2001년 SBS 드라마 <여인천하>에서는 중종 역. SBS 사극에 주로 출연했으며 KBS 대하사극 출연은 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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