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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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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滿洲 | Manchu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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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63> 중국어 <colbgcolor=#fff,#1f2023> 滿洲(정체자) / 满洲(간체자)
일본어 満州
만주어, 시버어 Manju(ᠮᠠᠨᠵᡠ)[1]
러시아어 Маньчжурия
몽골어 Манжуу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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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베이 3성  3시 1맹  스타노보이산맥 이남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만주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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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63><colcolor=#fff> 대륙 인문 아시아 / 유라시아
동아시아
지질 아프로-유라시아
위치 동아시아 동북부
면적 811,826 km² (둥베이 3성)
1,133,437 km² (내만주 포함)
2,234,754 km² (외만주 포함)
시간대 UTC+8
국가
[[중국|]][[틀:국기|]][[틀:국기|
속령
중국
]]

[[러시아|
러시아
러시아
]][[틀:국기|]][[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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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

[[북한|]][[틀:국기|]][[틀:국기|
속령
북한
]][2]
영유권 주장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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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틀:국기|]][[틀:국기|
속령
대만
]] (내만주)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평안북도 용천군 신도면)
민족 한족, 러시아인, 만주족, 슬라브족, 몽골족
한민족, 다우르족, 시버족, 니브흐족
윌타족, 오로치족, 울치족, 에벤키족
나나이족, 우데게족, 어룬춘족
언어 중국어, 러시아어, 몽골어, 한국어
만주어, 어웡키어, 니브흐어​, 우데게어
시버어, 다우르어, 나나이어, 오로첸어
인구 약 9,000만 명 (둥베이3성)
약 1억 2,887만 명 (외만주 포함)
최대 도시
[[중국|]][[틀:국기|]][[틀:국기|]]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자연지리
아무르판
기후 냉대 동계 건조 기후(Dwa, Dwb, Dwc)
냉대 습윤 기후(Dfa, Dfb, Dfc)
스텝 기후(BSk)
1. 개요2. 명칭과 기원 논쟁
2.1. 어원설2.2. 지명의 역사적 고증2.3. 정치적 측면에서의 분석
3. 범위4. 지리
4.1. 자연4.2. 기후4.3. 주요 도시들
5. 인구와 현황6. 민족7. 지정학8. 대외관계9. 역사
9.1. 만주에 존속했던 국가·정권들
10. 둥베이 지방 사람들의 기질11. 의식주와 문화12. 관련 문서1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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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만주(滿, Manchuria)는 오늘날의 중국 둥베이 3성과 내몽골 자치구의 3시1맹(三市一盟) 지역을 일컫는 지명이다. 한반도의 북쪽, 고비 사막의 동쪽, 시베리아의 남쪽, 사할린 섬의 서쪽에 위치하며, 각각 압록강두만강, 다싱안링 산맥, 스타노보이 산맥, 타타르 해협을 경계선으로 한다.

과거 청나라의 동삼성(東三省, dergi ilan golo) 지역이 해당된다. 이전에는 관동(關東/关东, 관둥)이라고도 불렀는데 이는 산해관 동쪽 지역이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당대에 쓰였던 우정식 병음으로는 Kwantung으로 적는다. 이 관동이라는 표현은 틈관동[3] 같은 용어나 일본 제국이 조차한 지역인 관동주, 이곳 군대인 관동군 등에서 사용됐다.

2. 명칭과 기원 논쟁

2.1. 어원설

'만주'의 어원에 대한 추측은 청나라에서 시작됐다. 청 황제 건륭제는《흠정만주원류고》을 편찬하면서 만주라는 지명이 문수보살의 원 명칭인 산스크리트어 단어 만주사리(Mañjuśrī)에서 유래했다고 규정했다. 그러나 이는 1792년 《어제라마설(御製喇嘛說)》에서 건륭제의 발언에서 보이듯이 몽골을 안정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티베트 불교 겔룩파를 후원하며 스스로를 문수보살대황제 및 전륜성왕으로 묘사하고자 한 그의 의중이 반영됐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일각에서는 《신당서》 흑수말갈전에 언급되는 말갈의 수장을 호칭하는 "대막불만돌(大莫拂瞞咄)"을 만주의 어원으로 보는데, 추수(酋帥)·군장(君長)·수수(首帥) 등을 의미하는 대막불은 만주어 다 마파(Da Mafa)로, 만돌(瞞咄)은 수장이란 뜻으로 풀이했다. # 실제로 사르후 전투 이후 후금에 억류됐던 강홍립이나 이민환 등은 누르하치를 만주(滿住)라 호칭했다고 기록해놓았으며, # 일찍이 오도일(吳道一, 1645 ~ 1703)은 《서파집(西坡集)》에서 "이른바 만주(满洲)란 옛날 노추(奴酋)[4] 중에 벌판에서 뛰어난 만주(满住)라는 자의 이름이 그대로 전습된 칭호를 말한다."라고, 성호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이만주를 언급하면서 "만주(滿住)라는 것은 이름이 아니고, 곧 가한(可汗)의 호칭과 같은 것"이라고 주석을 단 바 있다.

일각에서는 만주가 만(man)과 주(ju)의 조합어라고 여기는데, man은 강경하다는 의미의 만주어 망아(Mangga), ju는 강한 활을 의미하는 주(ju)이다.[5] 또, 파저강의 별명인 마저강(馬猪江)의 '마저'의 변음 혹은 포주강(蒲州江)의 포(蒲)자가 만(滿) 자와 유사하여 이를 혼돈한 결과라는 설 등이 제기된다.[6]

2.2. 지명의 역사적 고증

파일:盛京舆地全图1734.jpeg.jpg
《성경통지(盛京通志)》 〈성경여지전도(盛京輿地全圖)〉, 이 지도에서는 성경의 범위를 북쪽으로는 스타노보이산맥, 남쪽으로는 동해(남해), 동쪽으로는 오호츠크해동해(동해), 서쪽으로는 산해관에 이른다고 서술했다.
청 이전 만주를 주로 부르던 명칭은 넓은 의미로서의 "요동"이었다. 청이 들어선 이후, 청 정부는 만주를 묵던(盛京, 성경, Mukden)·닝구타(Ningguta)·기린(Girin)·사하랸 우라(黑龍江, 흑룡강, Sahaliyan ula) 등 각기의 지명을 사용했다. 옹정 ~ 건륭기에 이르러 성경, 닝구타, 사하랸 우라 즉, 삼장군이 관할하는 세 지방을 직성에 준하여 비공식적으로 동삼성(東三省, dergi ilan golo)라 통칭했다. 이외에도 성경이나 동북방(東北方, dergi amargi ergi), 관외(關外, furdan-i tule)라는 지명들이 사용됐다.[7]

만주라는 지명은 1747년부터 에마누엘 보웬(Emanuel Bowen)의 《A New & Accurate Map of ASIA》의 아시아 지도와 같은 일부 초기 지도에 지역 종족적 지명으로 나타났다.[8][9] 그 이전 17세기 ~ 18세기 유럽에서는 이 지역 일대를 여진(Niucehé)이나 숭덕제몽골어 존호인 복다(boɣda)를 딴 보그도이(Bogdoi)로 부르거나, 중국 타타르(Chinese Tatary), 동타타르(Tartarie Orientale)의 일부로 취급했다.
파일:MAP OF ASIA-18TH.jpg 파일:chiqyuzenzu_20201114_161147.jpg
영국의 조지 2세와 프랑스의 루이 15세의 왕립 제도사가 된 고유한 명성을 얻은 웨일스 지도 제작자 에마누엘 보웬(Emanuel Bowen, 1693 ~ 1767)이 1747년 런던에서 간행한 《A New & Accurate Map of Asia》의 확대 부분. 1782년 해상 조난 후 러시아로 갔다가 1792년 귀국한 이세국(伊勢国)의 뱃사공들의 체험을 난학자 가쓰라가와 호슈(桂川甫周)가 청취 후 작성하여 1794년에 간행한 《북사분략(北槎聞略)》의 〈지구전도(地球全図)〉의 확대 부분.
파일:Nipponv1.jpg
네덜란드 상관의(商館醫)으로서 1823~29년 까지 일본에 체류했던 독일인 필리프 프란츠 폰 지볼트(Philipp Franz von Siebold, 1796 ~ 1866)가 귀국하여 1832~52년 간행한 《NIPPON》 1권 〈일본변계략도(日本邊界略圖) 〉. 그와 교류하며 일본변계략도 등을 제공했던 다카하시 가게야스(高橋景保)는 지볼트의 귀국 과정에서 지도의 존재가 들통나면서 옥사했다.[10]

아마도 청 예수회 지도 프랑스 사본에 기초한 러시아 지도 또는 1751년부터의 네덜란드 지도 등에게 영감을 얻은 것으로 추정되는 가쓰라가와 호슈의 1794년 《아시아전도(亜細亜全図)》및 《지구전도(地球全図)》나, 다카하시 가게야스(高橋景保)의 1809년 《일본변계략도(日本邊界略圖)》 등 난학자들에 의해 일본에서도 만슈(满洲)라는 지명이 처음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으며[11], 이는 필립 폰 지볼트(Philipp von Siebold)에 의해 '만주리아'로 번역되어 네덜란드로 다시 전해지면서 유럽인들에게 확산됐다.[12] 프랑스에 기반을 둔 지리학자 콘라드 말트 브룬(Conrad Malte-Brun)와 애댐 멘텔(Edme Mentelle)은 1804년 《Ge'ographie mathe'matique, physique etpoIitique de toutes les parties du monde》에서 타타르보다 더 정밀한 용어로 몽골리아, 칼미키아 등과 함께 만주리아라는 용어를 장려했다.

2.3. 정치적 측면에서의 분석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오리엔탈리즘/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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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선양 사변을 일으키고 이듬해 만주국을 건국한 이시와라 간지 등 기획자들은 만주와 몽골(만몽)을 중국과 인종적, 종족적 계통이 전혀 다르다고 주장하는 동양사학자들의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때문에 국제 학계에서는 지명으로서의 만주는 논란이 되고 있다.[13] 빌 시웰(Bill Sewell)은 만주가 유럽인들에 의해 사용된 외래지명임을 지적하며, "진정한 지리적 용어가 아니다"라고 했으며,[14] 개번 맥코맥(Gavan McCormack)은 만주가 근대적인 창조물에 불과하다는 문제인식에 동의하며, 만주라는 용어는 일본이 중국과의 분리를 촉진하기 위해 장려한, 본질적으로 제국주의적인 명칭이라고 비판했다.[15] 만주국사 연구자 마리코 아사노 다마노이(Mariko Asano Tamanoi)는 만주를 거론할 때 따옴표로 그 용어를 써야 한다고 주장했으며,[16] 여진사 연구자 채드 D. 가르시아(Chad D. Garcia)는 만주라는 용어의 사용이 "작금의 학구적 실천(current scholarly practice)"에서 적절하지 않다고 주장하며, 만주를 대체하여 특정 지리적 특성이나 '북동부(the northeast)'라는 용어를 사용했다.[17]

중국 측은 이곳을 "둥베이 (东北, 東北)" 또는 한국어 발음으로 "동북"이라고 부르는데, 이 명칭은 청나라 시기에 만들어진 명칭이다. 명나라 시기에는 이곳은 산해관 바깥쪽이라고 해서 관외, 내몽고와 구별해서 관동지역이라고 불렸다. 이곳은 청나라의 발원지였기 때문에 봉금지역으로 묶어서 한족의 출입을 금했으며, 만주족들이 대거 관내지역으로 이동한 후 남아 있던 만주족만 거주하는 등, 인구가 희박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행정 기관도 설치되지 않았다. 그래서 청나라는 입관후에도 이 명칭을 계속 썼지만, 19세기 들어 러시아가 이지역을 탐내면서 이곳의 인구를 늘리기 위해 봉금령을 풀었고, 이때부터 한족들이 이 공백지에 대거 밀려들었다. 이 현상을 틈관동 (闖關東)이라고 하며, 이 때 이곳을 지칭하는 명칭으로 "관동"이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청나라는 이곳에 인구가 늘어나자, 멸망 직전인 1907년 이곳을 헤이룽장성, 봉천성[18] 지린성 3성으로 개편하면서 동북3성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즉, 동북이라는 말의 유래는 만주족이 다스리던 청나라 자신이 쓰던 말이다. 일본이 만주사변 이후 괴뢰국 만주국을 세운 이래 일본은 이곳을 "만주"라고 칭했기 때문에, 중국은 1930년대 이래로 이 지역을 '만주'[19]라고 부르는 걸 굉장히 꺼린다.

그렇다고 본래 지명이 아니라 종족명이었던 '만주'라고 부르자니, 그곳이 만주족만 사는 지역이 아니기에 다소 어색하다는 반론도 무시하기는 어렵다. 비슷한 사례로는 자바이칼 지방을 다우르족들도 살았던 이유로 '다우리아(dauria)'라고 부르고, 시베리아 중북부 에벤키족 등 퉁구스 제족들이 사는 곳들을 '퉁구스카(tunguska)'라고 부르지만 자바이칼에는 다우르족만 살았던 곳은 아니었고, 퉁구스카 역시 퉁구스인들만 사는 지역은 아니다. 그래서 중국이 만주라는 명칭을 꺼리고 이곳을 '둥베이'라 부르는 것에 어떤 정치적 의도가 있든 간에, 국제적으로 외래지명의 사용을 최소화할 것이 권장되고 있다는 점에서, 만주라는 명칭이 부적절하다는 주장은 주목할 만 하다고 볼 수 있다. 이성시(李成市)는 중국과 전후 일본에서 기피된 만주라는 지명이 한국에서는 구애 받고 있지 않는 것은 고찰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하면서, 10세기 이후 한반도 북부나 압록강 이북의 주민에 대한 멸시와 무관심과 어떠한 연관성이 있는지 연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20]

3. 범위

파일:manchuria1.jpg 파일:manchuria4.jpg 파일:満鉄 満洲 の巨人.jpg 파일:manchuria1844.png 파일:1929 Map of Manchuria from Nationtd Geographic Magazin.jpg

19세기 일본을 통해 서양에서 창출된 외래지명인 만주의 범위는 정치적 이유로 지속적으로 변해왔다. 만주라는 지명은 초기에 네르친스크 조약에 따라 스타노보이 산맥 이남의 성경·길림·흑룡강의 3개의 장군직(將軍職) 관할 지역을 가키켰으나, 1858년 아이훈 조약, 1860년 베이징 조약을 거치고 러시아의 남하와 한인의 대대적인 이주에 따라 1907년 3월부터 1914년 무렵까지 삼장군직과 지림맹(哲里木盟, Jirim ayimaɣ) 등을 폐지하여 봉천·길림·흑룡강의 3개의 성(省)이 설치되면서 그 범주는 크게 줄어갔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까지 지리공간적 지위가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지 않았다.

러일전쟁 전후 일본의 정치적 이해 관계에 따라 만주 북부나 내몽골의 어느 지역도 포함하지 않은 남만주 철도(SMR) 본선 이동의 남만주-한반도 지리를 묶은 지도나,[21] 러허성을 포함하지 않는 지도 등 매우 다양한 지도가 나왔다. 1932년 일본이 만주국을 건설한 이후에는 만주국 영토가 만주로 확립되어, 지금의 지린성, 헤이룽장성, 랴오닝성 3개 성과 내몽골 자치구의 동부 3시 1맹을 가리키는 고정관념이 됐으며, 이러한 지리 인식은 집단 의식 속에 확립되어 중국인들조차 만주를 번역에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22] 결국 만주라는 모호한 명칭은 아래의 지역들을 다양하게 포괄한다고 할 수 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Dongbei_China.png
파일:Northeast_China.svg
오늘날 중국 내에서 흔히 쓰이는 동북 지방의 정의는 동북 3성 또는 동북 3성 + 내몽골자치구 동부(동4맹)이다.

4. 지리

4.1. 자연

파일:만주 지리.jpg

남만주 지역은 산지비율이 매우 심한 편이다. 하지만 요동과 북만주 지역은 산지가 적고 평야가 많아 사람이 살 수 있긴 하나 춥다.# 지리적으로는 춥고 황량한 허허벌판이라는 이미지와는 달리 아무르강, 송화강이나 랴오허 같은 큰 이 흐르고 한카호 같은 거대한 호수도 있으며 풍성한 삼림이 우거져 있다.[26] 그리고 몽골 고원과 경계를 이루는, 해발 1,900m에 이르는 거대한 다싱안링산맥을 비롯한 여러 산맥들도 자리 잡고 있으며[27] (식량 확보를 위해 메꿔 버려 많이 사라졌지만) 늪지도 많다. 남부에서 대략 한가운데 둥베이 평원이 자리잡고 있다.

농업의 경우는 겨울이 길기 때문에 논 농사는 그다지 발전하지 못했다. 그러나 의지의 조선인들은 이주해서 논농사를 지었다.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지나치게 추워 한반도내 평야보다 농사에 불리하다는 인식이 있었으며, 곡창지대가 된 것은 20세기 중후반이다. 이 지역을 기반으로 성장한 국가는 반농반목 국가들이 많았다. 부여, 고구려 시절엔 기후가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나 고구려도 평안도 이남 한반도가 생산력이 높았다. 지금 농업으로 유명한 헤이룽장성의 싼장 평원도 원래는 거대한 늪지여서 농사짓기 어려웠으며, 해당 지역의 퉁구스계 주민들은 수렵채집으로 생활했다. 현대의 그 광활한 농장지대는 20세기 중후반 중국 정부가 수많은 인민해방군 병사들을 동원하여 십만이 넘는 사상자가 날 정도로 강하게 개간을 밀어붙인 결과이다.

현대는 남북 길이 약 1,000km, 동서 너비 약 400km에 달하는 중국 최대 평야 지대이자 전 세계에서 비옥하기로 손꼽히는 둥베이 평원이 위치해서 옥수수, , , , 사탕무, 등을 대규모로 재배하는 밭농사가 이루어진다. 대두의 원산지 중 한 곳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1910년대에 유럽이 전화를 겪으면서 이 지역에서 재배된 곡물이 엄청나게 팔려나갔고, 중개무역를 한 일본 상인들도 돈을 많이 벌었다. 당시 만주로 건너간 조선인들 또한 이런 식으로 돈을 번 이들이 꽤 있다.

또한, 일본이 전쟁을 위해 중화학 단지로 육성했다. 고구려, 청이 강력한 기병을 만주의 풍부한 광석 덕택에 육성했다는 이론도 있다. 심지어 석유가 조금 매장되어 있다. 1959년에 발견된 헤이룽장성 다칭유전이 개발되었으며, 이외에도 발해만과 라오허 일대를 중심으로 유전이 개발되었다. 하지만 세계의 메이저 석유 유전 지대에 비하면 만주의 석유는 매장량이 많은 편은 아니다.

동물은 한반도에 서식하는 생물의 90%와 비슷하며 10종에서 9종이 한반도와 같은 종류이다. 주로 우수리아시아흑곰, 아무르표범, 시베리아호랑이, 아무르삵, 노란목도리담비, 시베리아족제비, 청설모, 다람쥐, 한국멧토끼, 노루, 사향노루, 와피티사슴, 꽃사슴, , 직박구리, 메추라기, 부엉이, 참수리, 수리부엉이, 딱다구리, 구렁이, 개구리, , 나비, 나방, 딱정벌레, 메뚜기, 사마귀, 거미등이 주로 서식한다.

식물상 또한 한국 토착 식물 80% 이상이 만주 지역에도 자생하여 한국 토종이여도 학명에 만주를 뜻하는 "mandshurica"가 붙은 식물이 많으며 어류 역시 상당수 일치 한다. 나머지 20%는 한국에서 희귀하거나 멸종위기 판정을 받은 월귤 같은 고산식물들이다. 특히 내만주 최북단 모허는 중국 유일 야생 블루베리(들쭉) 산지이다.

4.2. 기후

만주의 위도는 북위 38~56°의 중~고위도로[28] 서유럽과 비슷한 위도임에도 불구하고, 겨울에 시베리아 기단이 직통으로 불어오는 지역이라 강한 대륙성 기후의 특징을 지니고 있어서 겨울이 길고 매우 춥다. 북만주 지역으로 가면 겨울 최저 기온이 -50℃까지 떨어지는 곳도 있다. 봄과 가을이 빠르게 지나가고 여름은 북만주 지역은 선선하나 랴오닝성 일대는 대한민국, 일본처럼 북태평양 기단의 영향을 받으므로 경악스럽게 덥다. 특히 차오양시의 경우 여름 낮 최고 기온이 35℃를 넘기는 경우가 잦으며 최고 43.3℃를 기록한 적도 있다. 즉 -50℃와 40℃를 극과 극으로 오고가는 기후라고 보면 된다.

각 지역마다 어느 정도 기온차가 있지만 겨울에 매우 추운 편이다. 동위도에서 가장 추운 지역이며 겨울 기온만 놓고 보면 정말 북극이랑 다를 바 없다. 만주에서 가장 따뜻한 다롄시(1월 평균 기온 -3.6℃)조차 냉대 기후를 띄고 있다. 그리고 선양시(-10.4℃)만 해도 남한에서 가장 추운 강원특별자치도 철원군 임남면(1월 평균 기온 -9.7℃)보다 평균기온이 낮아 남한 어느 지역보다도 추워진다. 만주 지역에서 기록된 역대 최저기온은 -58.0℃이며 역대 최고기온은 43.3℃이다. 즉, 연교차가 101.3℃이다.

그렇다고 날씨가 좋냐 하면 북반구 중위도 수렴대에 위치해서 온갖 저기압은 다 때려맞는다. 한반도를 지나가는 이동성 저기압의 중심은 대부분 만주지역에 위치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지경이다. 그리고 한여름에는 장마전선의 영향권 안에 드는 지역이며, 한겨울에는 발해만 저기압형 (중심이 만주에 위치) 대설이 내리기도 한다. 그리고 엄청난 한파가 따라온다.

이곳도 고위도 특성상 한반도나 중국 중심부에 비해 여름에는 해가 일찍 떠서 늦게 지고 겨울에는 반대로 늦게 뜨고 일찍 진다.

4.3. 주요 도시들

5. 인구와 현황

매우 추운 지역이지만 만주의 인구는 약 9,000만 명 이상인데, 2020년 인구 센서스 기준으로 동북 3성의 인구는 세계 16위에 해당하며, 일본 전체 인구와 유사한 수준이다. 동북 3성에 3시1맹, 청더시, 화이러우구, 아무르 주, 하바롭스크 지방 남부, 연해주, 유대인 자치주의 인구를 모두 더하면 1억 2,887만 명 정도가 나온다. 그중 면적의 절반을 차지하는 동북 3성의 인구는 1억 900만 명 정도다. 어쨌든 많다. 이 덕분에 변방이라는 이미지와 달리 중국에서 산업화가 가장 빨리 마무리된 지역 중 하나. 중국의 경제 중심축이 동중국해 해안으로 이동하기 전까지만 해도 중국 경제의 중추였고 요즘도 무시하지 못할 지역이다. 물론 그래도 지리적으로 해안 지역에 비해 불리한 건 사실이다. 중국 정부의 북방 지역 밀어주기가 없었다면 더 차이가 심하게 났을 가능성도 있다.[30]

21세기 들어서는 중국에서 산아제한이 엄격하게 시행된 베이징, 상하이 등 주요 대도시 지역과 더불어 고령화가 가장 빠르게 진행되고 있으며 인구도 급속하게 감소하고 있다. 이미 1980년대 중반에 출산율 2.1명이 붕괴됐고 1990년대에는 출산율 1.5명대를 기록했으며 2000년대 이후로는 이보다 더욱 낮아져서 인구 1,000명당 출생률은 5명대고, 합계 출산율은 0.8명대로[31] 매우 낮다. 게다가 단순히 출산율만 낮은 게 아니라 인구유출도 심해서 청년층들은 주요 대도시와 남부지역으로 빠져나가고 있고, 한국과 러시아로 가서 일하는 경우도 많으며, 청년층들뿐만 아니라 은퇴한 노인들도 남부지역으로 빠져나가고 있는 중이라 1년에 수십만 명씩 인구가 줄어나가고 있는 실정이며, 이는 노인 인구 비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고 인구는 비슷한 일본보다도 인구 감소 속도가 훨씬 가파르다.[32] 한 예로 인구 4,300만 명이라는 랴오닝성의 연 출생아수는 20만 명대에 불과하고, 지린성이나 헤이룽장성도 마찬가지로 출생아수가 10만~20만 명대인 수준이다. 동북 3성 일대의 출생아수를 다 합쳐도 60만 명대도 안 된다는 충격과 공포의 결과가 나온다. 덕택에 오래 지나지 않아 인구가 1억 명에 훨씬 못 미칠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이 나오고 있기 때문에 중국 당국에서도 젊은 인재들을 동북 지방에 배치시키는 식으로 대응하려하고 있지만 동북 지역의 소득수준이 동남부 지방에 비해 낮은지라 상황은 여의치가 않다. 헤이룽장성의 경우 출산율이 중국 내 최하위이자 전 세계 최하위다.

산업으로는 일본이 대륙 침략을 위한 병참 기지로 쓰려고 했기 때문에 중화학 공업이 매우 발달했으며, 중국 내에서 허베이성과 더불어 철도가 가장 많이 설치되어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오카베 마키오(岡部牧夫)의 만주국의 탄생과 유산에 따르면 일본이 만주에 투자한 금액은 일본 전체 해외 자산의 42%를 차지했다. 1945년 시점 즈음해서 만주의 인구는 중국 전체의 8% 정도였으나 생산력은 중국 본토를 크게 능가했다. 특히 철강과 석탄, 시멘트 등이 풍부하여 철강 및 기계공업 등 중공업 생산량이 중국대륙 전체의 90%를 웃도는 비중을 차지했다. 이렇듯 만주의 공업 인프라는 그 자체로 전략적 가치가 막대했다. 소련이 만주에 진입하고 일본이 패망한 직후에 국민당 정부, 중국 공산당, 소련 간에 만주의 막대한 공업 인프라를 두고 치열한 각축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는 국공내전의 발발과 전개양상에도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에도 개혁개방 이전까지 중국 최대의 공업지대로서 산업을 이끌었다.[33] 1980년대까지만 해도 소련, 북한과의 접경지역이라는 지정학적 중요도까지 더해 중국 제일의 산업지대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동구권이 붕괴되고 중국이 개혁개방을 실시하면서 동북지방은 개발에 뒤쳐지게 됐다. 현재는 산업 시설의 노후화, 부실한 금융 대출 등으로 개발에서 뒤쳐지는 바람에[34] 극심한 저출산과 인구 유출을 겪고 있어서 동북병이라 불리는 경기침체를 앓고 있다. 여기에 코로나19발 불황까지 겹치면서 말 그대로 '설상가상'이 된 상황이다.#

6. 민족

만주는 다양한 민족들이 거쳐간 지역이다. 퉁구스계 민족한국계 민족의 발상지이자 영토였으며, 유목민족들에게 있어서는 농업유목이 전부 가능한 몇 안 되는 귀중한 영토였다. 또한 한반도를 넘보는 중원 세력을 막는 보루이자 중원을 넘보는 수많은 민족들의 발판이었다. 그리고 이에 맞서는 중국 한족의 입장에서는 방위를 위해 무조건 확보해야 하는 지정학적 중요성을 지닌 지역이었으며, 산업화의 요충지였다. 제국주의 일본에 있어서는 마찬가지로 중원 진출의 기지이자, 가장 핵심적인 식민지이기도 했다.

그리고 유럽에서 부동항을 찾아 넘어온 러시아 세력의 진주로 인해 러시아인들 또한 큰 영향력을 구축했고, 여타 동유럽 민족들과 유대인들도 도피, 유배, 추방, 이주 등의 다양한 이유로 흘러들어와 크고 작은 흔적을 남겼다. 이 때문에 만주는 동아시아한자문화권과 유목문화권, 수렵채집민, 유럽 문화권이 모두 얽혀 있는 지역이다.

6.1. 유목·반농반목·수렵채집민족

만주의 원주 민족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이다. 내만주 지역은 청나라와 만주족의 발상지인 만큼, 현재도 2천만 명가량의 만주족이 존재한다. 또한 흥안령의 옛 동4맹 지역의 경우 몽골계 민족의 대표인 몽골족다우르족등이 거주한다.

러시아 지역에는 극소수의 퉁구스계 민족 윌타족, 오로치족, 울치족 등이 거주한다. 이 지역 또한 본래는 내만주와 같이 북방 민족들의 영역이었으나 러시아 제국이 외만주를 중국으로부터 획득한 이후 표트르 스톨리핀의 러시아인 이주 장려로 러시아인들이 유입되고 이오시프 스탈린의 강제 이주정책에 의해 원주민들이 상당수 강제이주되면서 인종 구성이 바뀌었다.

중국과 러시아 양측에 걸쳐있는 민족들은 에벤키족(어원커족), 나나이족이 대표적이다. 나나이족은 중국에서 허저족이라고 부르며, 연해주에 대부분 거주하는 우데게족들도 일부는 중국에 있으며, 이들은 허저족과 만주족으로 분류된다. 헤이룽장성 북부에는 어룬춘족도 거주하는데, 일부 어룬춘족 역시 러시아에 거주하기도 하며, 러시아에서는 오로치족으로 분류하여 오로치족에 포함시킨다.

다만 현재는 중국러시아의 주류민족인 한족러시아인이 이들을 밀어내고 주류를 점하고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서만주의 일부인 내몽골 동부의 흥4맹도 마찬가지로 비슷하게 현재는 모두 소수민족이 됐다.

6.2. 한족

중국티베트어족중국어를 사용하는 민족. 지역 방언으로 동북 관화를 사용한다. 내만주, 즉 동북 3성과 3시 1맹 지역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며, 해당 지역들의 인구 수를 합치면 9000만 명을 상회한다. 유교국가 무신론의 영향을 받아 지배적인 종교는 없으나, 그래도 불교는 여전히 교세가 꽤 되는 편이다.

전국시대 연나라가 최초로 요동 지역까지 진출하며 고조선 세력을 밀어냈고, 한나라 시기에는 아예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만주 남부와 한반도 북부에 한사군을 설치한다. 위진 남북조 시기에는 북방 유목 민족 세력을 거쳐 다시 고구려로 대표되는 한민족 세력에게 돌아갔다.

이후에는 천 년 가까이 요하 동쪽의 만주에서는 직접적 지배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사실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일시적으로 요하 동쪽의 남만주와 한반도 북부의 지배권을 획득했지만, 곧바로 발해에게 대부분의 영역을 빼앗겼다. 요서 정도만이 수당시대 때 확실한 지배권으로 통치됐으며, 당 멸망 이후 등장한 송나라는 아예 요서를 넘어 회북 일부까지 잃고 방위에도 급급해진다. 본격적으로 한족이 만주에 세력을 재구축하기 시작한 것은 명나라 때부터이다. 명나라는 요서와 요동 일대의 군사적 요충지를 통해 유목 제국을 견제하고 북방 국경을 안정화 시켰으나 그 이북은 여전히 전부 퉁구스 및 몽골계 민족들과 일부의 한민족 유민들의 생활 공간이었다. 청나라 건국 이후에도, 만주는 청 황실에서 보낸 일부 한족 이주민을 제외하면 청조 내내 봉금 지역이었다.

하지만 자연재해로 인한 난민 증가와 약해지는 행정력은 점차 봉금령의 붕괴를 일으켜 틈관동이라 불리는 이주 행렬을 만들었고, 19세기 말 봉금령이 완전히 풀리며 만주가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된다. 이때부터 중원(그중에서도 산둥성 일대의) 한족들이 대대적으로 이주해 현재는 만주의 주된 민족으로 자리를 잡았다. 특히 만주의 인구와 이를 기반으로 한 2차 산업, 넓은 처녀지에서 행해지는 농업은 수많은 한족 이주민들을 유입시켰다. 당시 만주를 기반으로 한 봉천군벌은 동3성 병공창 등의 기반을 바탕으로 중국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구축했을 정도였다. 만주사변으로 만주가 일본의 지배하에 잠시 넘어가기도 했으나 세계대전 이후 중국의 영역으로 돌아왔고, 중국 공산당은 이 지역의 소수민족들과 일본의 유산들을 기반으로 세력을 재편, 원정 온 국민당군을 섬멸하고 천하를 쥐었다. 그 이후로도 내만주는 확고한 중국 세력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현재는 원주민들의 유출 및 한족으로의 동화로 인해 현재 내만주에서 한족 비율은 90%가 넘는다. 대표적으로 만주의 중심인 헤이룽장성의 한족 비율은 96%이며, 일부 지역에서 소수민족 자치지역이 있으나 대부분의 도시에서는 한족이 절대 다수이다.

6.3. 후이족

이슬람, 그 중에서도 수니파하나피파 마드하브를 믿는 소수민족. 중국 서쪽의 투르크인이나 이란계 민족들에서 유래하지만 이슬람으로 개종한 한족들도 포괄한다. 다만 언어는 중국어를 쓴다.

중국의 동북 3성에 50만명 넘게 거주하고 있어 이 지역 소수민족으로 어느 정도 지분이 있다. # 심지어 랴오닝성에서는 조선족보다 인구가 많다.[35] 상당수는 청조 후기의 무슬림 반란으로 체포되어 동북 지방으로 유배된 후이족의 후손들이다.

6.4. 한민족

한국어족[36]한국어를 쓰는 민족. 지배적인 종교는 없다. 한반도의 지배민족이면서, 과거 만주 일대의 원주민 중 하나였다. 한반도 외 중국과 러시아 일대에는 연변 조선족 자치주블라디보스토크, 그리고 사할린 섬을 중심으로 거주한다.

만주 및 한반도 북부를 기원으로 하며, 만주 역사상 최초의 국가라고 추정되는 고조선을 세웠다. 고조선 멸망 이후에도 이탈과 흡수가 반복된 요동 지역 정도를 제외하면 북부여, 동부여, 북옥저, 고구려, 두막루, 발해 등의 예맥 계열 (후대의 한민족) 국가가 내만주와 연해주 지역을 직간접적으로 천년 가까이 지배했다. 특히 고구려는 요동의 패권을 쥐고 중원과 대등하게 겨룬 첫 번째 국가라는 정치적인 상징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고구려 멸망 이후에도 직계후손이라 할 수 있는 및 한국계 국가들 말고 여타 유목민족들도 고구려와의 직간접적인 계승의식을 내보이기도 했다. 심지어 근대 일본 제국마저도 고구려를 들먹이며 만주 지배를 정당화했을 정도니 말 다했다.

하지만 10세기경부터 유목민족들의 대대적인 발흥과 함께 발해가 멸망하며 한국계 정치집단의 지배적인 헤게모니는 무너졌고, 발해부흥운동마저 실패한 이후 한민족의 정치체는 한반도로 그 영역이 축소됐다. 심양왕같은 특이 케이스도 있었고 고려 말 제1차 요동정벌로 일시적인 진출에 성공했으나, 내우외환이 끊이지 않던 당대 국내외 정세의 한계로 만주 진출은 결국 무위로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한국계 정치집단의 영향력이 발해 멸망 이후 만주에서 일소된 것은 아니었다. 비록 직접 지배는 실패했으나, 한반도 국가들은 유목 세력과는 비교도 안 되는 한반도의 생산력과 인구 수를 바탕으로 만주 지역의 부족간 정치 지형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지역 강국으로 군림했기 때문이다. 특히 금 건국 이전이나 금 멸망 이후 ~ 영락제 이전까지 여진족이 부족 사회로 지내던 시절 부락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권은 고려-조선이 쥐고 있었으며, 수많은 여진 족장들이 고려-조선에 조공했다. 한국계 국가들 또한 답례를 내리거나 각종 정벌을 벌이며 여진 부락들의 지배권을 놓지 않기 위해 애썼다.

대표적으로 조선의 창업군주 이성계가 무장이던 시절 함흥의 전주 이씨 가문은, 세력권이 근거지인 함경남도에서 만주 중부 지역까지 걸쳐 있었다. 그렇기에 다양한 만주의 부족들이 이성계 가별초의 일원으로 동원됐고, 그 중에서는 훗날 청나라를 세우게 되는 아이신 기오로 가문도 포함됐다. 조선 건국 이후에도 수많은 만주 부족장들이 조선 왕실에 예를 표하고자 한양으로 상경하기도 했다. 그리고 명나라 또한 요동 반도 일대를 제외하고서는 여진족에 대한 직접적인 관리는 조선에 맡겼을 정도였다. 그렇기에, 만주에서 발흥하는 유목 국가가 중원을 넘볼 정도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우선 만주에 대한 한반도 국가의 통제력이 약화되어야만 했다. 여요전쟁 이후 금나라의 성장,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 청나라의 성장이 그 예시이다. 심지어 원나라마저도 동방 3왕가의 견제를 위해 심왕이라는 직위를 고려 왕실에게 맡기기도 했다. 달리 보자면, 이러한 역사적 사례들은 현대 중화인민공화국이 반중적인 한반도 통일국가의 탄생을 극도로 경계하는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중국 동북 지역의 안보는 한반도 국가, 또는 한반도를 지배하는 세력의 대중국 성향에 크게 좌우됐고, 이는 곧 베이징으로 대표되는 중국 수도권의 안보와도 직결되기 때문이다.

그 외, 발해부흥운동 시기 유민부터 시작해 고려 시대 난민 등이 후손을 이루며, 여전히 적지 않은 수가 만주에서 터전을 이뤘다. 그러다 조선 후기 시기에는 청나라의 등장으로 인한 만주의 성지화와 북방민족에 대한 조선의 우위가 붕괴된다. 이로 인해 만주에서의 영향력이 조선 전기 때보다는 약해진다.

근대에 다가서는 19세기경 한반도에서는 맬서스 트랩이 일어난다. 이 시점을 중심으로 한민족의 난민들이 본격적인 만주 재이주를 시작한다. 조선 정부 또한 여전히 직접적인 지배는 실패했지만 대한제국과 청나라 간의 국경 분쟁이 보여주듯 만주 진출을 완전히 포기했던 것은 아니었다. 의화단의 난 당시 러시아가 15만 대군을 만주에 진주시키고 청나라가 확연히 약화되자, 대한제국은 요동을 포함한 남만주 일대를 지속적으로 침략했다. 그레이트 게임의 일환이었던 이 분쟁은 러시아 제국프랑스 제3공화국의 직간접적인 지원을 받았으며, 대한제국군은 야전에서 연대급 규모의 청군을 박살내곤 선양 일대까지 관리를 파견하는 등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1904년 러일전쟁이 벌어지면서 대한제국 자체가 일본의 영향권에 들어가고 1909년 간도협약이 맺어짐에 따라 한반도 국가의 만주 재진출 시도는 실패로 끝나게 됐다.

하지만 이후에도 한민족의 만주 이주는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주로 농업이나 장사를 위해 중국령 만주나 러시아령 연해주로 향하는 이들이 다수였다. 이러한 이민은 1945년 일본의 패망 때까지 이어져왔다. 또한 일제의 남한 대토벌 작전경술국치 이후 다수의 독립운동 세력들은 이런 만주와 연해주의 한인 정착촌들을 중심으로 재편하여 항일 운동을 이어나갔다. 홍범도대한독립군, 지청천한국독립군, 김좌진북로군정서, 그리고 이용과 김홍일대한의용군 등. 만주와 연해주의 한인들은 이들에게 숙식과 정보, 그리고 인력을 제공했다. 하지만 1920년대부터 일본을 등에 업은 장쭤린봉천군벌이 탄압을 벌이고, 일본이 서서히 손을 뻗으면서 내만주의 독립운동은 점차 위축됐다. 연해주도 마찬가지로, 1922년경에는 러시아 내전이 거의 마무리되면서 소련 극동이 어느 정도 안정화됐다. 거기다 1930년대 만주사변이 벌어지면서 주요 항일 세력들은 중국 관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한국광복군이나 조선의용대로 다시 이동하고 말았다. 그리고 남은 한인들은 지역마다 분화되면서 중국과 러시아의 역사에 스며들어 크고 작은 족적을 남기게 된다.

6.5. 인도유럽인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그리고 일부 벨라루스인. 이들은 러시아 극동 지역의 절대다수를 차지한다. 또한 극히 일부이긴 하지만 러시아의 지배를 받던 폴란드인발트족 또는 독일계 러시아인들 또한 이주해왔다.

1600년대 러시아의 팽창기에 우크라이나 코사크들을 중심으로 시베리아를 개척하며 진출해왔으나, 청과의 국경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한 후 이들은 만주에서 밀려나 스타노보이 산맥 이북 시베리아에 설립한 소규모 정착지를 중심으로 자리잡았다. 따라서 이들이 본격적으로 만주에 이주해오기 시작한 것은 1860년대 베이징 조약으로 러시아가 청나라에게서 외만주를 뜯어낸 이후부터이다. 러시아는 부동항을 건설하고 극동에서의 패권을 확립하기 위해 다수의 도시를 건설했다. 특히 니콜라이 2세 치세에 총리 표트르 스톨리핀의 이주 장려 정책이 추진되면서 다수의 러시아인 및 우크라이나인들이 극동으로 이주해왔다.

주 거주지는 프리모리예 지방과 하바롭스크 지방 등 러시아령 극동이지만, 한때는 만주 전역을 러시아 제국이 세력권으로 삼으면서 남만주 랴오둥 성에 러시아령 다롄이란 이름의 군사적 식민지를 세운 적도 있다. 또한 하얼빈 등 중국 내만주 지역의 개발에도 일익을 담당했으며, 러시아 내전에서 패배한 백군 세력이 중화민국령 내만주로 탈출해 디아스포라 공동체를 세운 적도 있다. 다만 현재 중국령 동북 3성 및 3시 1맹에서 이들 잔존 백군 세력의 자취를 알아보기는 힘든데, 세계대전을 거치며 일본에게 탄압당하고 만주 작전으로 쳐들어온 소련군에 의해 대다수가 납치당하거나 해외 망명길에 올랐기 때문이다.

외만주의 러시아인의 비율은 90%을 넘어간다. 시베리아의 사하 공화국이나 추코트카 지역이 원주민 비율이 절반 이상인 것과 비교하면 러시아 극동에서 외만주 지역은 특히 러시아인이 많이 유입된 곳임을 알 수 있다.

6.6. 아슈케나지 유대인

동유럽, 특히 구 폴란드-리투아니아에 흩어져 살던 아슈케나짐 유대인들 중 러시아 제국 정부의 시베리아 개척 정책에 따라 극동으로 진출해 온 유럽인들 중에 섞여 있었던 이들을 뿌리로 한다. 하지만 보다 주된 기원은 1930년대 스탈린이 유대인 민족 자치구 설립 계획에 따라 이주해온 수만 명의 우크라이나/벨라루스/러시아 유대인들이다. 당시 소련 내의 모든 민족들은 민족적인 터전을 가지고 있어야 했는데, 나라 없는 민족으로 배척받기로 유명한 유대인들의 민족 자치 지역이 존재할 리가 없었다.

스탈린은 이 문제도 해결하고 겸사겸사 극동의 개발과 인구 부족 문제도 해결할 겸 유대인들을 만주로 이주시키고 유대인 자치주를 설립했다. 동유럽에 자치주를 수립하지 않은 이유는, 이들의 원 거주지인 폴란드-리투아니아 영역에는 민족 구성에 기반한 경제적 계급 격차로 인해 반유대주의가 만연했기 때문이었다.[37] 폴란드-리투아니아가 망한 후 독일 제국러시아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도 이런 상황을 방치하다시피 했기 때문에 아슈케나짐 유대인들과 주변 농민들의 사이는 매우 험악했다. 19세기 말부터 포그롬이 벌어졌고, 20세기에는 홀로코스트에서 주민들이 학살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만주의 인프라는 너무나도 열악했다. 유대인 자치주의 유대인들은 근처에 남아도는 침엽수를 베어다가 가내수공업으로 가구를 만들어 하얼빈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팔아서 입에 풀칠을 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 유대인의 민족국가인 이스라엘이 건국되고 1970년대 소련에서 유대인의 이민을 허락한 것을 계기로 외만주에 있는 유대인 자치주에 거주하던 다수의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이나 미국으로 이민하기 시작했다. 현재도 유대인 자치주는 여전히 남아 있으나 유대인 인구는 거의 없으며, 이 때문에 폐지 논의가 활발하다. 그 외 만주국을 지배하던 일본 제국에서 만주를 개발하기 위해 복어계획이라는 이름의 유대인 이주 정책을 추진했던 적이 있으나, 나치 독일과의 관계도 있고 해서 일부 소수의 인원들을 이주시킨 것을 제외하면 실패했다. 다만, 복어계획과 스기하라 지우네 등의 노력으로 인해 유대인들 일부가 극동으로 탈출하면서 홀로코스트를 피할 수 있었다.
유대인의 특성 상 폴란드계 러시아인, 독일계 러시아인과도 어느 정도 공통점이 있다. 언어는 독일어의 일파라고 할 수 있는 게르만어파의 이디시어를 입말 및 서면 언어로 사용했다. 유대인 자치주는 이디시어가 공용어로 지정된 세계 유일의 지역이다. 그 외 그들은 러시아어나 독일어, 폴란드어 등 출신 지역 민족들의 언어 또한 구사할 줄 알았다. 한편, 종교 제례 언어는 여타 유대 분파들과 마찬가지로 셈어파의 히브리어였으며 민족 종교는 당연하게도 유대교였다.

6.7. 일본인

일본 열도의 지배적 민족. 일본은 19세기부터 러시아의 남하에 맞서 사할린 및 만주 지역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태양신의 후예를 자처하며 단 한번도 외세의 지배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졌던 일본인들은 미국영국, 프랑스가 대포 몇 방으로 손쉽게 막부와 각 번들을 굴복시키는 모습을 보곤 역사상 처음으로 외세에 대한 안보 위협을 절실히 깨닫게 된다. 특히 영토를 맞대고 슬금슬금 남하하는 러시아 제국이 가장 큰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러자 일본은 제국의 방위를 위해 만주, 적어도 한반도만큼은 일본으로 편입하고자 했다. 이러한 안보적 불안감은 일본 제국주의의 시발점이 되어, 여타 식민제국들과 달리 경제적인 발전이 뒷받침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만주, 시베리아를 잇달아 침략하는 정신적인 동력원으로 작용했다. 이때 처음으로 시작된 것이 그 유명한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주권선-이익선 개념이었고, 그 대상은 한반도와 오키나와, 대만, 사할린, 그리고 남만주였다.

'만주'라는 지역을 최초로 규정지은 것도 일본인들이었다. 당시 떠오르던 비교언어학적 언어연구들은 각 민족의 뿌리를 밝히는 중요한 방식으로 각광받았으나 이는 곧 제국주의 침략에 이용되고는 했다. 예를 들어, 영국은 인도인들이 자신들과 같은 뿌리를 가진 인도유럽어족이라는 사실을 밝혀냈지만, 가장 발전되고 고대 아리아인의 순수성을 가장 잘 보존한 자신들이 뒤처진 친척인 인도를 계몽, 발전시켜주어야 한다는 논리로 인도 식민지배를 정당화했다. 일본 동양사학자들은 이러한 영국의 방식을 그대로 받아들여 조선과 만주에 적용했고, 독립된 지역으로써의 의미가 부족하던 동북 지역을 일본의 영향권으로 편입하기 위해 만선사관을 도입했다. 이로 인해 새로 규정된 '만주' 지역은 중국 및 유럽과 분리된 우랄알타이어족의 고유 영역이었으며, 알타이어족의 맹주이자 중국과 유럽의 장점을 모두 흡수한 선도문명인 일본이 이끌어 계몽하고 개발해야 하는 지역으로 선포됐다. 내선일체, 오족협화, 만주국 등이 이러한 논리의 산물이었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에 이르면 서남태평양 일대에도 이러한 시각이 확장되어 남양은 서구가 아니라 새로운 선도문명 일본이 주도하는 대동아공영권의 영역으로 선포됐다. 물론 이러한 허울 좋은 간판을 걸어놓은 만주 지배의 실상은 여느 식민제국들이 그렇듯 한국인 및 퉁구스계 민족들의 독립된 권리를 전부 부정하고 일본 제국의 독점적인 발전에 강제로 동원하는 것이었다. 일본 제국령 만주와 조선에서 '형제' 민족들의 권리는 없었고, 큰형님 일본이 모든 것을 결정하며 그것은 항상 옳았다.

여하튼, 이러한 서구 세력에 대한 안보적 불안감에서 시작한 일본의 제국주의적 확장은 청일전쟁러일전쟁, 그리고 대한제국 강제 합병으로 한반도와 남만주 및 남사할린에 영향력을 구축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한편 1920년대에는 러시아의 혼란을 틈타 시베리아로 출병하여 백군을 후원하며 러시아령 외만주를 일시적으로 점령했으나, 명분과 역량 부족 및 소비에트 러시아의 반격으로 인해 철수했다. 그러나 1930년대 만주사변을 일으키며 내만주 봉천군벌의 근거지를 전부 흡수하곤 괴뢰국인 만주국을 수립하면서 본격적으로 정착했다.

이 당시에는 만주 일대에 가장 강력한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영향력을 구축했으며, 만주를 중원 진출을 위한 전진 기지로 삼아 대대적인 산업화를 추진했다. 이 시절 일본인들이 건설한 대규모의 산업시설은 동아시아 최대 규모였고, 훗날 중화인민공화국 시절에도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으로 동남 연해가 개발되기 전까지 가장 중요한 산업지대였다. 가령 1930년대 후반 일제가 안산시의 철광맥 및 푸순시의 탄광을 바탕으로 건립한 '쇼와 제철소(昭和製鋼所)'는 당대 세계에서 손에 꼽히는 규모의 제철소였다. 만철에서 1910년대에 세운 안산제철소를[38] 기반으로 독일 크루프의 기술지원을 받아 본격적인 거대 일관제철소로 재탄생시킨 것인데,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가장 중요한 제철소 중 하나이기도 했다. 일본 패망 이후에는 중국에 소유권이 넘어가 오늘날까지도 중국 정부 소유의 '안산강철집단(안강)'으로 남아 있다. 현재도 세계 7위의 거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하지만 1945년 8월 소련의 만주 전략 공세 작전으로 인해 만주국과 북한 지역의 일본 세력은 일주일만에 축출되어 버렸다. 그리고 곧 일본이 일본 제국이 항복하면서, 만주와 한반도, 중원의 일본인들은 본국으로 탈출해야만 했다. 이들을 히키아게샤라 한다. 한편 관동군의 군인들은 소련군에 잡혀 시베리아 강제 수용소에서 10년간 노역에 시달리고 나서야 본국 땅을 밟을 수 있었고, 일부는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 간 내전에 자의반 타의반 가담하기도 했다. 그리고 일본이 남긴 군사, 산업 인프라를 장악하기 위해 공산당과 국민당의 만주를 향한 경주가 펼쳐지면서 2차 국공내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한때 만주의 패권을 잡았던 이들 일본인들은 현재는 만주에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극히 일부 남은 이들도 출신을 숨기고 살아가거나 동화된 상태이다. 민족 종교는 대승불교신토, 그 중에서도 일본 제국 시절에는 국가신토였으며 민족 언어는 일본어족일본어였다.

7. 지정학

일부에선 만주와 연해주 지역이야말로 세계의 화약고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북한, 중국, 러시아라는 핵 보유국 3국이 국경을 맞대고 있는데다 군사강국인 러시아, 중국, 일본, 미국이 이해관계가 있고, 군사강국은 아니지만 중국한테 이래저래 불만이 많은 몽골 또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 분쟁이 일어날 경우 핵전쟁으로 비화될 위험성이 다른 분쟁 지역보다 높기 때문이라는 게 그 이유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중러 양국은 현재 가깝지는 않지만 크게 상충되지는 않는 우호적인 관계에 있다고 보아야 하며[39] 북한과 몽골은 두 강대국에 맞설 수 있는 국력 자체가 없어서 사실상 무시해도 좋은 수준이긴 하다.

파일:fine_art_china.jpg

한편 중국 입장에서는 반드시 보유, 혹은 최소한 우호적인 정권이라도 들어서 있어야 하는 인식을 갖고 있다. 요나라, 금나라, 청나라가 이곳을 기반으로 건국됐다. 지도를 보듯이 만리장성, 연운 16주, 산해관 등의 방어선을 뚫을 경우 베이징은 물론, 이남의 중국 평원지대가 그대로 노출되기 때문이다. 즉, 이곳에 적대적 세력이 있을 경우 소위 중원이 직접적으로 위협받는다. 한국으로 치면 개마고원급 혹은 그 이상의 방어적 가치가 있는 셈이다.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에는 '동양의 발칸 반도'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중국 혹은 러시아, 일본과 치열한 전투가 있긴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만주/연해주의 소수 민족들이 내분을 일으키거나 아예 분리 독립을 이루어 국경 분쟁이 일어난다면 모르겠으나 어차피 이 지역들의 주민들 대다수가 이주해 온 중국인들이며, 다양한 소수 민족들이 있어도 중국인들과 러시아인들만큼 그 세력이 크지는 않다. 게다가 분리 독립을 강력하게 원하는 것도 아니며 사회주의 체제 시절의 영향으로 이들의 부족 문화 등이 세속화되면서 분쟁 가능성이 크게 완화된 상황이다. 만일 북한에서 내전, 쿠데타, 민중 봉기 등이 일어난다면 만주 지역의 불안정성도 높아질 위험이 크고 중국과 러시아가 북한의 불안정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만큼은 결사적으로 저지하려는 입장이기 때문에 이런 가능성도 높다고 보기 어렵다는 견해도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옹성(?) 같은 북한 내부에 외부 정보가 새어 들어가고 있으므로 특정 시점에 일시적으로 불안정하게 될 확률이 높다.

8. 대외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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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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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는 그 어원적, 지리적 모호함만큼이나 다양한 민족들이 거쳐갔기에, 어떠한 국가에도 역사적으로 명확히 귀속되지는 않는 지역이다.

9.1. 만주에 존속했던 국가·정권들


10. 둥베이 지방 사람들의 기질

현 둥베이 지방(지린성·헤이룽장성·랴오닝성) 사람들의 특징이 몇 가지 있다.
한국인의 기질과 비슷한 부분이 있다고 판단될 소지가 있다. 둥베이 3성 인구 1억의 대부분이 한국과는 별 문화적 연고가 없는 허베이 지방과, 산동 지방에서 이주한 한족[45]이기는 하지만, 산둥성이 바다 건너 한반도와 고대부터 상당히 교류가 밀접했으므로, 어느 정도 통하는 면이 있는 듯. 또한 200만 정도의 조선족은 구한말~일제강점기 때 올라간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민족적 기질은 쉽게 바뀌는 점은 아니라서 조선족 민족성도 한국인과 비슷한 면이 많다. 허나 이런 기질은 몽골인들도 가지고 있으니 북방의 기후가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

중국의 개방 이후 개발의 중심이 중공업이 발달됐던 둥베이 지방에서 동남 해안 지방으로 옮겨갔기 때문에 둥베이 지방의 경제적 전망이 어두워지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좀 자포자기하는 분위기라고 한다. 한편 둥베이 지방 사람들은 중국에서 가장 잘 교육받았다고 한다. 외지인이나 농민공이 적은 편이어서 그런지 베이징, 상하이보다도 교통 질서를 잘 지키는 편이다.

만주 사람들은 교자(흔히 말하는 만두)를 주식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일본군만두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만주에서 복무하던 시절 먹던 교자를 잊지 못해서 나온 음식이라고 한다.

한편 중국어 표준어인 보통화는 사실 북방 관화에 기초하여 규정한 것인데, 수도 베이징의 토박이들이 쓰는 북경어[46] 말씨보다 둥베이 지방 사람들의 발음이 보통화의 표준 발음과 거의 차이가 없다고 평가된다. 그 중에 특히 하얼빈 발음은 가장 또렷한 보통화란 평이 중론이다. 그래서 둥베이 출신 아나운서나 배우는 발음이 매우 좋다고 선호되는 편이고, 타 지역 사람들은 둥베이에 가면 평범한 아저씨 아주머니들도 말하는 건 꼭 아나운서 같다고 할 정도다.

어째서인지 만주족 등 만주지역의 수렵채집·유목 소수민족들 중에 미녀들도 있다는 인식도 적지 않으며 옛날에도 그랬다. 아이러니하게도 여진족, 야인이라 불린 북방변경의 이민족들은 반대로 조선에 미녀들이 많다고 여겼고, 두만강 이북의 여러 민족들이 조선을 약탈할 때 이런 이유로 여성들도 납치하기도 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또 둥베이 3성 지역은 조선족 거주 비율도 높은 편이다.

11. 의식주와 문화

만주 요리 문서로. 만주족과 퉁구스족들을 포함한 만주의 여러 민족들 요리로 구성됐으며, 중국, 러시아와 러시아 소수민족들, 몽골, 일본, 티베트, 후이족과 신장의 이슬람 민족들, 한국의 영향도 받았다.

주거지의 경우, 내몽골 및 몽골과 가까운 곳은 유르트를 치며 살았고, 연해주 등 동만주 일대는 움집이나 땅 밑의 굴을 만들거나 건초나 나뭇가지로 쌓은 원시가옥 형태인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중국과 한국의 영향으로 목조건축물을 짓는 경우도 나타났다. 외만주는 러시아의 영향으로 러시아 등 서양풍 건축물들과 도시가 생겨났다.

전통의상으로 만주족의 치파오가 가장 유명하고, 만주족을 비롯하여 만주제족도 이와 비슷한 의상이다.

퉁구스 원주민들을 포함한 여러 민족마다 자신들만의 고유 샤머니즘이나 애니미즘, 토테미즘, 내몽골 동부와 가까운 서부 지역은 몽골인들이 텡그리교을 믿었지만,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은 이후 유교, 불교(대승불교티베트 불교), 도교를 믿는 이가 생겼다. 만주족과 다우르족, 어원커족, 나나이족 중 티베트 불교를 믿는 사람들도 있다. 연해주와 하바로프스크, 사할린, 아무르 강 유역은 러시아 영토가 되면서 정교회 등 기독교 계열 종교가 들어왔으며, 일부 유대교이슬람교도도 있다. 다만 사회주의의 영향으로 세속화되어 신앙 활동이 활발하지 않다.

이런 역사적, 사회적 이유로 지리적으로는 동북아시아지만 문화적으로는 동서양 문화 양쪽 모두 있는 지역이다.

12. 관련 문서

1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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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만주 지역의 여러 소수민족들 및 퉁구스계 민족들도 '만주(manju)'라고 부른다.[2] 평안북도 신도군 황금평[3] 闖關東/闯关东, 촹관둥: 청나라 말기 한족들의 만주 대량 이주[4] 노추란 누르하치를 의미하지만 그 범주가 여진으로 확대됐다.[5] 2009,《族称manju词源探析》,长山作,刊载于《满语研究》, p. 1.[6] 陳鵬, 「“滿洲”名稱述考」, 『民族研究』, 2011, 제3기.[7] 이훈(2013), "17-18세기 淸朝의 滿洲地域에 대한 政策과 認識 : 건륭기 만주족의 위기와 관련하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8] John Karl Treiber(2004), 《Mapping Manchuria: The Japanese Production of Knowledge in Manchuria-Manchukuo to 1945》, p. 34.[9] 사실 조선에서는 압록강-두만강 이북의 닝구타 등지를 청의 발상지 내지는 고국으로 인식하면서 '만주(滿洲)'라 부르기도 했으나, 오늘날 만주 지명과 연속성이 없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10] 지볼트의 행적에 관한 글[11] Mark C. Elliott(2000), "The Limits of Tartary: Manchuria in Imperial and National Geographies", 《The Journal of Asian Studies》Vol. 59, No. 3; John Karl Treiber(2004), 《Mapping Manchuria: The Japanese Production of Knowledge in Manchuria-Manchukuo to 1945》, p. 34~35.[12] John Steinberg(2007), 《The Russo-Japanese War in Global Perspective: World War Zero, Volume II》, p. 514.[13] Norman Smith(2012), 《Intoxicating Manchuria: Alcohol, Opium, and Culture in China's Northeast》, p. 219.[14] David W. Edgington(2003), 《Japan at the Millennium: Joining Past and Future》 p. 114.[15] Gavan McCormack(1977), 《Chang Tso-lin in Northeast China, 1911-1928》, p. 4.[16] Mariko Asano Tamanoi(2000), "Knowledge, Power, and Racial Classification: The "Japanese" in "Manchuria" ", 《The Journal of Asian Studies》 Vol. 59, No. 2, p. 249.[17] Chad D. Garcia(2012), "Horsemen from the Edge of Empire: The Rise of the Jurchen Coalition", 워싱턴 대학교 박사학위논문, p. 15.[18] "봉천성"이라는 명칭은 중화민국때도 쓰이다가, 만주국이 심양의 이름을 봉천이라고 바꾸고 수도로 삼으면서, 금기시 됐고, 랴오닝(요녕)성으로 이름을 바꾸었다.[19] 다만 이는 심지어 만주족들에게도 만주가 본래 지역명이 아니었던 탓도 있다. 만주는 본래 지명보다 종족명으로서 먼저 쓰인 명칭이다.[20] 이성시(2004), "동북아시아 변경의 역사 - 발해사의 배타적 점유를 둘러싸고", 《근대의 국경 역사의 변경 : 변경에 서서 역사를 바라보다》, p. 144.[21] 세번째 지도로, 남만주철도 이동과 중국동부철도 이남을 만주로 표기하고 조선과 만주의 국경을 철도 노선보다 더 얇게 표시하여 남만주가 단지 물리적으로 조선과 인접할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인접해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22] John Karl Treiber(2004), 《Mapping Manchuria: The Japanese Production of Knowledge in Manchuria-Manchukuo to 1945》, p. 54~55, 92~94; 성근제(2011), "‘東北’인가, ‘滿洲’인가 - 근대 동북 지역연구과제 설정의 가능성 -", 《중국현대문학》 56.[23] 동4맹(東四盟/东四盟)은 츠펑시(赤峰市, 구 자오우다맹{昭烏達盟/昭乌达盟}), 퉁랴오시(通遼市/通辽市, 구 저리무맹{哲里木盟}), 후룬베이얼시(呼倫貝爾市/呼伦贝尔市, 구 후룬베이얼맹), 싱안맹(興安盟/兴安盟)을 한데 묶은 표현이다. 여기서 '맹'은 내몽골 자치구에만 있는 행정구역 단위인데, 현재는 행정 구역 개편이 되어 본래의 동4맹 중 3개가 시로 승격됐다. 현재도 이 네 곳을 묶을 땐 예전 행정 구역을 따서 동4맹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지만, 바뀐 행정 구역에 맞춰 3시 1맹(三市一盟)이라고 부르기도 한다.[24] 간혹 시린궈러맹도 몽동(蒙東)이라는 범위로 묶어서 만주로 포함시키는 경우도 있다.[25] 과거 중화민국 시절의 행정 구역 중 하나였으며 중심지는 청더. 지금은 내몽골, 랴오닝, 허베이 성에 각자 흡수됐다. 정확한 위치는 오늘 날 내몽골 자치구의 츠펑을 포함한 시라무렌강 유역, 랴오닝 성의 요서 북쪽과 챠오양, 허베이 성의 청더 시가 해당된다. 역사적으로 선비족, 오환족, 거란족이 거주했던 지역이었다. 다만 청나라 때도 이곳을 내몽골의 일부로 간주한 적이 있었고, 중화민국 시기에도 이곳을 동북지구가 아니라 내, 외몽골을 포함하는 지역인 새북지구로 분류했다.[26] 둥베이 평원(혹은 만주 평원)이 있긴 한데 풀만 있는 동네 정도는 아니다.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다만 아무르강 유역이나 내몽골 동북부 지역에는 초원이나 벌판이 조금 있다.[27] 다만 만주 전체에서 가장 높은 산은 남쪽 끝에 있는 백두산이다.[28] 내만주의 경우 북위 38~53°, 외만주의 경우 북위 42~56°[29] 실제로 로마자를 쓰는 외국어(주로 영어)로 이곳의 이름을 표기할 때 한어병음식으로 Ha'erbin이 아닌 만주어식인 Harbin으로 표기한다.[30] 중국은 정치를 경제보다 중요시하는 나라고, 아무래도 북방인들의 정권이라 남방 지역에 대한 차별이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광둥성의 경우 중국인 글로벌 슈퍼리치 톱100 15명 중 10명을 배출하고, 200억 원 이상의 자산을 보유한 부자가 다수 존재하고, 전국 31개 성급 지방정부 순위 가운데 압도적 1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게 지난 수십 년간 광둥성 출신 정치국 상무위원은 단 한 명도 없었다.[31] 중국 전체 출생률은 1,000명당 11~13명을 오가는 수준이고 합계 출산율은 1.6명대이다. 2015년에는 동북 3성 합계 출산율이 0.55명이었으나, 지금은 이보다 더 낮을 수 있다.[32] 러시아의 외만주 지역은 출산율이 러시아의 평균 수준이다.[33] 이 당시 동북지방의 별명은 공화국의 맏아들(共和国长子). 중국 당국이 동북지방의 공업을 얼마나 애지중지 했는지 알 수 있다.[34] 실제로도 만주는 '중국판 러스트 벨트'로 불린다.[35] 2000년 기준 후이족 264,407명, 조선족 241,052명[36] 비교언어학으로 고립어로 속한다.[37]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상인과 마름은 대개 유대인과 독일인이었다.[38] 현 중국 영토 내에 세워진 최초의 제철시설이었다.[39] 공동의 잠재적 적국인 '미국'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과거 중-소 이념 분쟁 사건도 실제로 있었던 만큼 매우 친밀한 것만도 아니며 지역 내 패권국으로서의 영향력을 서로 더 행사하려 들 가능성도 감안은 해야 한다.[40] 발해의 정식 대내 국호는 고려(高麗)라는 설도 있으나 기록이 부족한 관계로 정확히는 알 수 없다. 건국 초기에 일본에 국서를 보낼 때 국호를 고려라고 쓴 예는 있으나, 발해인들이 스스로를 고려라고 부른 적이 있다 해도 얼마나 지속됐는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41] 물론 먼 조상격인 몽올실위는 만주지역에서 나왔던 민족이다. 다만 나중에 몽골 지역으로 이주했으며, 그래서 이후 칭기즈칸 시대에는 몽골지역에 있었다.[42] 원나라 무종은 고려인이 상당 수 거주하고 있는 요양, 심양 등을 고려가 다스리게 하고 1310년 심양왕에서 심왕으로 격상했다.[43] 성조 영락제, 조선 태종[44] 동북역치 이후.[45] 이정기의 제나라 등을 보면 문화적 연고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다.[46] 북방 민족의 영향으로 얼 왈왈왈 발음이 붙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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