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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 아테네 | 1900 파리 | 1908 런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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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 1988 서울 올림픽 | |
제24회 서울 올림픽 대회 Jeux de la XXIVe Olympiade™ Séoul 1988 Games of the XXIV Olympiad™ Seoul 1988 | |
[1] | |
<colbgcolor=#fa9e15> 대회 기간 | 1988년 9월 17일 ~ 10월 2일 |
개최지 | [[틀:깃발|서울특별시 경기도[2], 충청남도[3][B], 대구직할시[A][B], 부산직할시[A][8], 광주직할시[A][B] | ]][[틀:깃발| ]][[대한민국| ]]
유치 확정일 | 1981년 9월 30일 |
슬로건 | 화합과 전진 Harmony and Progress |
마스코트 | | 호돌이 |
주제가 | 손에 손 잡고 - 코리아나 (Hand in Hand - KOREANA) |
참가국 | 160개국 |
참가 선수 | 8,391명[11] |
경기 종목 | 27개 종목, 263개 세부 종목 |
개회 선언 | 노태우 대한민국 대통령 |
선수 선서 | 허재[12], 손미나[13] |
심판 선서 | 이학래[14] |
성화 점화 | 정선만[15], 김원탁[16], 손미정[17] |
개·폐회식장 | 서울올림픽주경기장 |
[18] 서울올림픽 자료실[19] |
[clearfix]
1. 개요
10분 만에 보는 1988 서울 올림픽 - MBC 스포츠탐험대 |
대회 운영방식 면에서 대륙별 종합 스포츠 제전 이후 곧장 2년 만에 치러졌던 전무후무 유일한 올림픽이며 그간 역사에서 아테네, 로마, 런던, LA 등과 같이 여러 모종의 사정을 비롯하여 오랜 기간이 지난 시점에서 다시 개최를 거두었던 도시들과도 그 의미가 엄연히 다를 정도로 올림픽 사상 전례가 없는 대회로도 기록된다.[23]
한국의 부흥을 상징하는 대회로서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거치면서 세계 최빈국으로 전락했던 한국이 불과 30여 년 만에 한강의 기적으로 일궈낸 눈부신 발전상을 과시한 올림픽이다. 또한 올림픽의 단순한 취지와 보통의 범주를 벗어나 냉전 종식의 밑거름이 되어 세계사의 흐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몇 안 되는 올림픽이며[24] 한국이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승리했음을 알린 대회이다.
2. 대회 상징
2.1. 마스코트
자세한 내용은 호돌이 문서 참고하십시오.<colbgcolor=#ffffff> |
2.2. 주제가
자세한 내용은 손에 손 잡고 문서 참고하십시오. 1988 서울 올림픽 대회 - 공식 음악 코리아나 - 손에 손 잡고 | ||
2.3. 메달 디자인
1988 서울 올림픽 금메달 |
1988 서울 올림픽 은메달 |
3. 유치 과정
자세한 내용은 1988 서울 올림픽/유치 과정 문서 참고하십시오.4. 공산권 국가에 대한 참여 설득
1976 몬트리올 올림픽은 남아공의 흑인 인종차별 문제로 아프리카 국가 26개국이 보이콧하였다.[25] 그 다음 1980 모스크바 올림픽에서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문제 삼아서 자본주의 진영의 서방권이 대거 불참하였다. 그리고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은 모스크바 올림픽 불참에 대한 보복으로 이번에는 공산주의 진영의 동구권 대부분이 참여를 거부하였다. 이렇듯 국가간의 갈등으로 올림픽이 연달아 파행되는 와중에 다음번 개최지가 분단국가인 대한민국 서울로 정해지자, 이번에도 공산권의 불참으로 또다시 반쪽 대회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었다.일단 중국이 1984년 7월에 가장 먼저 참가를 선언했지만, 애당초 이 당시 덩샤오핑 정권은 소련과 대립하면서 독자 노선을 걷고 있었기 때문에 공산권 전체에 별다른 영향은 없었다. 게다가 중국은 이미 1990년 아시안게임의 베이징 유치 및 이를 토대로 2000년 올림픽 유치를 노리고 있었기에 괜히 서울 올림픽에 불참해서 일을 그르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리고 1986 서울 아시안 게임의 경우 중국은 참가했으나 그 외의 소련과 관계가 돈독한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몽골 등의 아시아 공산주의 국가들이 죄다 불참했던 전례가 있었고, 비록 아시아 스포츠계에서 중국 한 나라의 위상이 워낙 크다 보니 딱히 다른 큰 문제가 없어 보일 수도 있겠지만 올림픽의 경우는 아시아만 국한된 대회가 아닌 그 이상의 국가와 의미를 포괄하는 대회이기 때문에 중국의 참가만으로는 공산권 전체의 참가에 대한 확신을 가지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그러다가 1985년 3월 동유럽의 대표적인 공산주의 소련의 대표적인 위성국가였던 동독이 참가를 확언하면서 실마리가 풀릴 것으로 기대했으나 이는 사실 동독 내에서 과거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을 보이콧했던 것을 두고 논란이 거셌던 것을 그저 무마하려는 목적으로[26] 소련과의 협의도 없이 발표된 상태였다는 것이다. 이에 결국 공산권의 참가 여부에 대한 최종 칼자루를 쥐고 있었던 것은 당연하게도 그들의 대표격이었던 소련이었다.
그러나 만약 이번에도 소련이 보이콧하게 될 경우 베트남이나 폴란드 등의 소련과 연관이 깊은 다른 공산 국가들 모두가 보이콧할 우려가 컸기 때문에 1987년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에 취임했던 김운용이 그것도 러시아어까지 배워가며[27] 당시 소련의 IOC 위원을 만나 집중적으로 그에게 올림픽에 참여해줄 것을 간곡하게 설득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에 부응하듯이 비록 본래 이념이 첨예하게 반대되는 적성 국가였지만 소련 자국의 언어까지 배워가며 설득에 나선 김운용의 모습은 도리어 소련 위원들에게는 좋은 인상으로 다가왔고, 때마침 1985년 당시 소련은 개혁파인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집권한 상황이었던지라 1985년에 대한민국 정부가 소련과 공산권의 올림픽 참여를 설득하기 위해 대소 유화정책으로 전환하면서 한소관계는 급격하게 개선되었다.
1985년 대한민국에서 개최된 유도[28], 양궁 세계선수권대회와 복싱 월드컵에 소련이 참여하자 대한민국 정부는 소련 비난을 중단했다. 소련도 1986년 4월에 소련 국가스포츠위원장 마라트 그라모프를 서울에서 열린 세계올림픽연합회 총회에 참석시켰으며 사할린 한인의 대한민국 귀환 문제도 검토해 보겠다고 유화적 태도를 취했다. 마침내 1988년 1월 12일에는 소련의 참가가 확정되었고 이에 여러 공산 국가들도 올림픽 참여 의사에 동참할 것을 밝히면서 서울 올림픽은 총 160개 국가가 참가하는 역대 최대 규모임과 동시에 8년 만에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이 함께 참가한 대회로 기록된다.[29]
허나 소련을 포함한 여러 유럽의 동구권 공산권 국가의 참가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계속 올림픽 보이콧 의사를 굽히지 않자, 급기야 우리 정부는 인공기 게양과 북한 국가 연주 허용이라는 엄청난 제시를 내세우며 북한의 올림픽 참가를 종용했다.[30]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결국 참가하지 않았다.[31] 또한 2018년에 공개된 외교문서에 따르면 당시 북한은 김영남이 이를 주도하여 동구권 공산주의 국가들에게 서울 올림픽에 대한 보이콧을 촉구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이와 반대로 북한은 같은 공산&사회주의 국가들에게 그저 냉담한 반응만을 전달받았다고 전해진다.#[32][33]
5. 성화 봉송
대한뉴스 제 1712호 | 대한뉴스 제 1713호 |
제주도 일주 봉송을 마친 성화는 대형 크루즈선인 올림피아호를 통해 부산항까지 해상 봉송됐고 8월 28일부터 올림픽 개막 전날인 9월 16일까지 전국 각지를 돌며 올림픽 개막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당시 올림픽 성화봉송이 이뤄진 코스는 아래와 같다. 굵게 표시된 지역은 성화가 하룻밤을 묵으며 문화축제를 치렀던 곳이다.
- 제주국제공항 → 북제주 → 남제주 → 서귀포 → 제주[37] → 부산 → 김해 → 진해 → 창원 → 마산[38] → 진주 → 사천 → 고성 → 통영 → 충무[39] → 여수 → 순천 → 목포 → 광주 → 담양 → 대구 → 영천 → 경주 → 울산 → 포항 → 영덕 → 안동 → 영주 → 점촌[40] → 상주 → 구미 → 김천 → 대전 → 순창 → 정주[41] → 전주 → 이리[42] → 군산 → 논산 → 공주 → 대천[43] → 온양[44] → 천안 → 청주 → 충주 → 제천 → 태백 → 삼척 → 동해 → 강릉 → 속초 → 고성 → 인제 → 춘천 → 원주 → 평택 → 송탄[45] → 수원[46] → 성남 → 과천 → 안양 → 안산 → 광명 → 인천 → 부천 → 임진각 → 동두천 → 의정부[47] → 서울시청 → 서울올림픽주경기장
6. 개회식
자세한 내용은 1988 서울 올림픽/개회식 문서 참고하십시오.7. 폐회식
자세한 내용은 1988 서울 올림픽/폐회식 문서 참고하십시오.8. 참가국
자세한 내용은 1988 서울 올림픽/참가국 문서 참고하십시오.9. 경비 활동
서울특별시 경찰국은 1988년 5월 17일부터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경비경찰조직 '88경비단'을 '88올림픽경비단'으로 개편했다. 이들은 요인경호대, 참가단 신변보호대, 제1~6지역대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경비대원은 근무복, 신변보호대원은 정장형 제복 및 목걸이형 신분증을 착용하였고, 공통적으로 가슴에 훈장형 기장을 달았다. 주 업무는 경기장 주변 경비, 선수단 신변보호, 대테러 작전수행 등으로 서울 및 지방 경기장 35개소, 선수촌 및 보도시설, 지정호텔, 주요 철도역 등 관련 시설 67곳, 연습장 73곳에 대한 시설경비와 각종 문화행사와 국제회의 경비 등을 담당했다. 대회 당시 투입된 경력은 전체 경찰관 중 총 47,194명이었으며 예산은 국고에서 353억 원, 조직위에서 47억 원을 각각 보조받아 약 4백억 원으로 전담부대 창설 및 운영, 장비보강 등에 투입했다.치안본부는 치안 대책기구로 치안대책위원회, 실무대책위원회, 간사위원회 등을 운영하며 자문기관으로 자문위원회를 운영했으며, 대회치안대책의 집행 주관은 제2차장 산하에 6개 실무대책부 및 7개 지원단으로 각각 짰다. 특히 서울시경은 종합치안대책위원회, 실무대책위원회, 간사위원회 등을 두고 집행기구로서 특별대책위원회(대책본부)를 두되 핵심시설 전담 경비는 88경비단장이 맡으며, 관할서의 3선 경비는 제2부장, 각 기능별 지원은 각기 다른 부서장이 맡도록 했다. 대회를 전후해 올림픽상황실을 운영하며 모든 진행상황을 올림픽상황실에만 보고토록 했고, 대책본부는 소관기관별 문제발생 시 해결책을 강구토록 했다. 상황실은 상황처리반 및 일보생산반으로 나누어 2교대 격일근무제로 하고 1988년 7~10월까지 운영토록 했다.
올림픽 개·폐회식 동안 철저한 안전을 위해 개최 12시간 전부터 경찰, 소방, 통신, 대테러 등 합동검측반을 동원해 안전검측을 실시했고, 경기장 주변 도로 등지에는 교통정리를 위해 순찰차 52대, 싸이카 74대를 각각 배치해 단계별 교통통제, 입·퇴장 승하차선 지정, 입·퇴장 시차제, 지정주차장제 등을 실시했다. 각종 우발적 사고에 대비해 대테러 특공대, 폭발물처리팀, 한전차, 구급차, 진압부대 등을 근접 배치해 출입문과 관람석에 관중 안전감시요원을 투입했다. 지방 선수분촌 경비는 선수, 임원 등 관계자 신변보호를 위해 시설주와 긴밀히 협조하며 안전활동을 수행하되 군·경 전담지역 책임한계를 구분해 경비를 맡았다. 공항·항만 경비도 군 주관 하에 군경합동으로 진행해 공항 내 청사, 화물청사, 자유지역 등은 경찰이, 기타 2~3선 지역은 군이 각각 맡았다. 그 외에 11개 기능 분야 경력의 집중 운용체계로 확립해내 전문성과 적응력을 고려해 핵심 경비 대상별로 배속·배분시켜 잔여 경력으로 중요도에 따라 증감·지원했다. 각 경비 대상별로 운용되는 경력은 해당 부대 지휘관이 맡았다.
올림픽 기간 중 북한의 방해공작이나 국제테러단체, 국내 반정부·반체제세력 등의 테러행위, 무장공비 침투 등에 대비키 위해 안전본부 산하에 군경합동 대테러 대응팀을 만들었으며, 시·도 대테러 대응팀은 시·도 국장이 맡아 운용했다.
- 출처: 유용원의 군사세계 게시글, 당시 복제, <국립경찰 오십년사(1995)> p425~431
10. 경기 종목 및 경기장
1988 서울 올림픽 경기 종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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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 서울올림픽주경기장 | 서울종합운동장 수영장 | |
개회식 | 개회식 육상 축구 승마 (장애물 개인전 결승) 폐회식 | 수영 | |
서울올림픽주경기장~마포대교[1] | 서울종합운동장 실내체육관 | ||
마라톤 | 농구 배구 | ||
서울특별시교육청 학생체육관 |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 | ||
권투 | 야구 | ||
올림픽체조경기장 | 올림픽수영장 | 올림픽펜싱경기장 | |
체조 (기계체조, 리듬체조) 핸드볼 (남자 결승전) | 수영 근대 5종 (수영) | 펜싱 근대 5종 (펜싱) | |
올림픽역도경기장 | 올림픽벨로드롬 | 올림픽테니스경기장 | |
역도 | 사이클 | 테니스 | |
몽촌토성~88잔디마당 | 장충체육관 | 서울대학교 체육관 | |
근대 5종 (크로스컨트리) | 유도 태권도 | 탁구 배드민턴 | |
태릉국제사격장 | 동대문운동장[철거] | 육군사관학교 화랑양궁장 | |
사격 근대 5종 (사격) | 축구 | 양궁 | |
한양대학교 올림픽체육관 | 88체육관 | ||
배구 | 배구 | ||
로얄볼링장[3] | |||
볼링 | |||
경기도 성남시 | 경기도 과천시 | 경기도 광주군[4] | |
성남공설운동장 | 과천승마공원 | 미사리 조정경기장 | |
하키 | 승마 근대 5종 (승마) | 조정 카누 | |
국군체육부대 상무체육관[철거] | |||
레슬링 | |||
경기도 수원시 | 경기도 고양군[6] | 경기도 파주군[7] | |
수원실내체육관 | 원당종합마술경기장 | 통일로 (통일교공원~봉일천사거리) | |
핸드볼 | 승마 | 사이클 (도로 경기) | |
충청남도 대전시[8] | 대구직할시[광역시] | 광주직할시[광역시] | |
대전공설운동장[철거] | 대구시민운동장 | 광주무등경기장[철거] | |
축구 | 축구 | 축구 | |
부산직할시[광역시] | |||
구덕운동장 | 수영만 요트경기장 | ||
축구 | 요트 | ||
| }}}}}}}}}}}} |
10.1. 정식 종목
- 근대 5종 - 과천 승마공원, 올림픽 펜싱경기장, 올림픽 실내 수영장, 태릉 국제 사격장, 올림픽공원 몽촌토성(크로스컨트리 종목이라 몽촌토성 언덕을 오르내리며 뛰어다녔다. 최종 결승점은 88잔디마당.)
- 농구 - 잠실실내체육관
- 레슬링 - 국군체육부대 체육관(위례신도시 개발로 경상북도 문경시 호계면 견탄리로 이전. 2023년 현재 유일하게 전면 철거된 장소이다.[48])
- 배구 - 한양대학교 올림픽체육관, 새마을체육관, 잠실실내체육관
- 복싱 - 서울특별시교육청 학생체육관
- 사격 - 태릉 국제 사격장
- 사이클 - 올림픽 벨로드롬, 통일로(도로경기)[49]
- 수영(경영, 다이빙, 수구,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 - 올림픽 실내 수영장, 잠실 수영장(잠실 종합운동장 지구에 위치)
- 승마 - 과천 승마공원, 원당종합마술경기장, 잠실 올림픽 주 경기장(대회 마지막 날 장애물 개인전 결승전만 여기서 했다.)
- 양궁 - 육군사관학교 화랑양궁장
- 역도 - 올림픽 역도경기장
- 요트 - 부산 수영만 요트경기장[우3동](현재도 이 근처에 올림픽동산이라는 공원이 있다.)
- 유도(남자만 정식 종목, 여자는 시범종목) - 장충체육관
- 육상 -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 한강 강변도로(마라톤)#, 주 경기장 주변도로(경보)
- 조정 - 미사리 한강 조정 카누 경기장
- 체조(기계체조 및 리듬체조) - 올림픽 체조경기장
- 축구 -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 동대문운동장, 부산 구덕운동장, 대전공설운동장, 광주무등경기장, 대구시민운동장
- 카누 - 미사리 한강 조정 카누 경기장
- 탁구 - 서울대학교 체육관(이로써 서울대학교 체육관은 세계 최초의 올림픽 탁구 경기장으로 역사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 테니스 - 올림픽 테니스경기장
- 펜싱 - 올림픽 펜싱경기장
- 하키 - 성남공설운동장
- 핸드볼 - 수원실내체육관, 올림픽 체조경기장(남자 결승전만)
10.2. 시범 종목
- 야구 -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
- 태권도 - 장충체육관
- 배드민턴 - 서울대학교 체육관
- 볼링 - 로얄볼링장(서울시 중랑구의 중화동의 현 로얄스포츠센터. 리모델링을 하면서 볼링장은 사라졌다.)[51]
11. 특징
- 태권도가 처음으로 시범종목으로 채택되었다. 태권도는 이를 발판으로 2000 시드니 올림픽 때 처음으로 올림픽 정식 종목에 합류한다.
- 탁구와 테니스가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다. 탁구는 올림픽 역사상 최초이고, 테니스는 1988년 당시 기준으로 64년 만의 합류였다.
- 배드민턴이 전시종목으로 채택되었고, 4년 후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 정식 종목이 되었다. 야구 역시 이 대회 시범종목이었다. 당시 한국은 야구에서 4위를 달성했다. 이때 금메달은 미국, 한 손이 조막손[52]인 투수로 유명했던 짐 애보트가 결승전 선발에서 맹활약하면서, 한국에서도 그에 대한 이야기들이 신문에도 오르내렸다. 은메달은 일본, 동메달은 푸에르토리코였다.
- 한국은 금메달 12개를 포함해 사상 최초로 종합 순위 4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1위 소련, 2위 동독, 3위 미국)
- 미국의 맷 비욘디는 남자 수영에서 5관왕을 차지했다. 다만 이 중에서 세계신기록이 없다는 게 흠. 동독의 크리스틴 오토는 여자 수영에서 6관왕의 위업을 달성하며, 한 대회에서 가장 많은 금메달을 차지한 여자 선수가 되었다.
- 비욘디의 6관왕을 저지한 남자 접영 100m 금메달리스트는 남미의 소국 수리남의 안소니 네스티다. 그의 조국에는 당시 수영장이 단 하나였다고 한다. 그는 올림픽 역사상 첫 흑인 수영 금메달리스트이기도 하다.
- 일본 수영선수 스즈키 다이치는 배영 100m에서 30m를 잠영으로 헤엄쳐 금메달을 땄다.
- 헝가리의 수영 선수 타마스 다르니는 한쪽 눈이 실명인데도 남자 개인 혼영 200m와 400m에서 2관왕을 차지하여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 여자 중장거리의 절대 강자로 등극하는 미국의 재닛 에번스가 처음 금메달을 딴 대회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16세.
- 역도의 나임 술레이마놀루는 자기 몸무게의 3배가 넘는 기록을 세우며 우승했다. 당시 체급이 -55kg이었던 그는 자기보다 더 위 체급의 선수의 1위 기록을 능가하는 기록으로 우승하며, 세계를 경악시켰다. 그 전까지는 3배 넘는 무게는 들 수 없다는 것이 정설이었기 때문인데, 이 선수는 용상에서 자기 몸무게의 3.18배인 190kg을 들어올려 당시의 과학적 통념을 깼다. 이 선수의 키는 겨우 147cm였기 때문에 '포켓 헤라클레스'라는 별명이 붙었다.
- 여자 테니스 단식 금메달 리스트인 슈테피 그라프는 그해 캘린더 골든 그랜드슬램(동일 년도 4대 메이저 테니스 대회 우승+올림픽 금메달)을 달성했다. 이때까지 이를 모두 이룬 선수는 그라프만이 유일할수밖에 없었던게 테니스종목은 1924년 이후 64년만에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으니 2024년 현재까지도 한 해에 골든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선수는 그라프가 유일하다(커리어 골든그랜드슬램으로 범위를 넓히면 안드레 애거시, 라파엘 나달, 세레나 윌리엄스, 노박 조코비치가 달성). 애초에 한 해에 4대 메이저 테니스 대회 우승이라는 캘린더 슬램을 달성한 사람이, 오픈 시대 이후 마거릿 코트, 그라프와 남자부의 로드 레이버 외에는 없는데, 거기에 4년에 한 번씩 하는 올림픽 금메달까지 겹쳤다.
- 대한민국 여자 핸드볼 팀은 한국의 구기 종목 중 사상 처음으로 올림픽 금메달을 차지했다.[53] 남자팀은 은메달.
- 레슬링에서는 그레코로만형에서 김영남이, 프리스타일에서는 한명우가 금메달을 차지했는데 김영남은 이 대회 후로 은퇴 예정이었고, 한명우는 국대 선발전에 탈락했다가 대회 직전에 최종 선발된 것이었기 때문에 두 선수 개인에게도 매우 뜻깊은 메달이었다.
- 양궁에서는 17세의 나이로 국가대표가 된 김수녕이 여자 개인, 여자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차지하여 2관왕에 올랐고 혼자 세계 신기록 3개를 갈아치웠다. 여자 개인전은 금, 은, 동 모두 한국이 가져갔다. 그리고 12년 뒤 2000 시드니 올림픽에서도 똑같이 재현되었다.
- 소련과 동독 및 서독 그리고 북예멘과 남예멘이 해당 국호를 사용한 마지막 대회로 기록되었다. 소련의 경우 다음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 독립국가연합으로 참가하였다가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 때 각각 러시아와 후신 독립국들로 분할하여 참가하였고 동독과 서독 그리고 북예멘과 남예멘은 1990년 각각 동서 및 남북 통일로 1992년 바르셀로나 대회부터 통일 국가 자격으로 참가하였다.
- 여자 4×400m 계주에서 소련의 세계신기록이 나왔는데 그 기록이 3분 15초 17이었다. 이 기록이 놀라운 이유는 2012 런던 올림픽까지도 깨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참고로 2012 런던 올림픽 해당 종목 1위 기록은 3분 16초 87(미국)이다. 스포츠 과학도 엄청나게 성장했을 텐데 그때 그 기록이 어떻게 나왔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불가사의하다.
- 당시 여자 펜싱은 플뢰레만 시행했다. 에페는 1996 애틀랜타 올림픽에 사브르는 2004 아테네 올림픽에 도입되었다. 또 사브르는 2004년에는 개인전만 진행했고, 단체전은 2008 베이징 올림픽 때 처음 시행되었다. 펜싱 여자 플뢰레는 개인전에서 서독 선수 3명이 모든 메달을 휩쓴데 이어 단체전에서도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이 부문에서 2관왕을 한 선수는 아냐 피히텔(Anja Fichtel)인데, 그녀는 당시 불과 20세였다. 여자 플뢰레 석권에 힘입은 서독은, 아언트 슈미트(Arnd Schmitt)의 남자 에페 금메달까지 합쳐 펜싱에서 금메달 3개, 은메달 3개, 동메달 1개를 획득하였다. 동독 또한 남자 플뢰레의 우도 바그너(Udo Wagner)가 은메달을 획득하였다. 독일은 역사상 처음으로 올림픽 펜싱에서 종합 1위를 달성하였다.
- 승마의 경우 당시 우리나라에는 방역 규정이 없어 승마만 다른 나라에서 개최할 뻔했다. 어떻게 보면 멜버른 대회[54] 이후 희대의 굴욕, 즉 흑역사가 될 뻔했다. 그러나 과천 경마공원을 짓고 또 방역 규정을 새로 만들어서 우리나라에서 승마 대회까지 개최하는 데 성공하였다.
- 종합마장마술에서 개인 금메달을 딴 마크 토드는 승마의 불모지인 뉴질랜드 대표였다. 원래는 경마 기수를 지망했으나 신장 187cm라서 너무 컸기에 장애물 비월과 종합마장마술 기수로 전환하고 1978년에 데뷔했다. 데뷔하기 전에 돈을 모으려고 농장에서 일했는데 그 농장에서 만난 말이 올림픽 2연속(84년 LA, 88년 서울) 금메달을 안겨준 카리스마였다. 스포츠 호스라고 분류하긴 했는데, 혈통을 따지면 서러브레드계(4분의 3 서러브레드, 4분의 1 웨일스 포니)다. 어릴 때부터 미친 듯한 식탐을 자랑해서 토드랑 처음 만난 게 아침 대신 먹던 사과를 카리스마가 와서 뺏어먹은 거였고 이후에 농장 일꾼들이 식사하는 장소에 와서 음식을 뺏어먹거나 졸졸 따라다니며 먹이 구걸을 했다. 나중에 대표팀 연락을 받고 토드가 데려와 훈련시킬 때도 다이어트가 주된 훈련이었다. 체중조절을 위해 먹이량을 줄였더니 목장의 잔디와 잡초를 뜯어먹고, 마방에 깔아놓은 지푸라기도 뜯어먹으려고 해서 신문지를 대신 깔았으며, 자기 새끼말이 먹는 목초나 각설탕도 기회만 있으면 먹으려고 했을 정도. 카리스마는 서울 올림픽을 끝으로 은퇴하고 토드의 농장에서 지내다가 2003년에 견갑골 골절로 30살에 안락사되었다.
- 컴퓨터가 광범위하게 사용된 첫번째 올림픽이기도 했다. 1984년도 경기까지만 해도 기록을 문서로 기록해 보관했으나, 1988년도 경기부터는 컴퓨터에 기록을 입력하고 컴퓨터 데이터로 기록을 관리하였다. 또한, 계측 부문에도 컴퓨터 측정 기술이 도입되어 1/100초 단위까지 측정하는 첫 번째 경기가 되었다.
- 1984년 사라예보 동계올림픽과 1988년 캘거리 동계올림픽 스피드 스케이팅 1,000m 2연패를 차지한 동독의 크리스티나 루딩 로텐부르거는 1988년 서울올림픽 싸이클 개인추발에 출전해서 은메달을 차지했는데 이로써 동ㆍ하계 올림픽에서 모두 메달을 획득한 최초의 여성선수라는 타이틀을 얻게 되었다.
- 축구는 비록 조별리그에서 탈락했지만 굉장히 잘 싸웠다. 우승해서 금메달을 획득한 소련을 상대로 무승부를 거뒀으며, 이후 미국을 상대로도 무승부를 했지만 3번째 경기에서 안타깝게도 아르헨티나에게 패배해서 미국과 같이 2무 1패로 탈락했다. 그나마 득실차가 미국을 앞서서 조 3위가 되었다. 한편 아시아 팀은 북중미 팀과 같이 전멸했는데 다른 아시아 팀은 이라크와 중국이 있었으며, 중국은 서독, 스웨덴에게 털리고 튀니지와 무승부를 거두면서 1무 2패 조 4위로 광탈, 이라크는 최약체 과테말라에게만 승리를 거둔 뒤 1승 1무 1패 조 3위로 탈락했다. 그래도 아시아는 그나마 이라크가 유일하게 1승이라도 거뒀지만, 북중미는 무승탈락 전멸이었다. 이후 대한민국은 계속 올림픽 본선에 개근했지만 중국은 다시 본선에 진출하기 위해서 20년을 기다려야 했으며, 이라크는 16년을 기다려야 했다.
- 수도권과 충청도는 지역 첫 금메달리스트를 여기서 배출했다. 강원도와 제주도는 88 올림픽까지 지역 출신 금메달리스트가 없었다.[55]
12. 메달 집계
1988 서울 올림픽 메달 집계 최종 집계 | |||||
순위 | 국가 | 메달 | 합계 | ||
금 | 은 | 동 | |||
1 | [[소련| ]][[틀:국기| ]][[틀:국기| ]] | 55 | 31 | 46 | 132 |
2 | [[동독| ]][[틀:국기| ]][[틀:국기| ]] | 37 | 35 | 30 | 102 |
3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36 | 31 | 27 | 94 |
4 | [[틀:깃발| | ]][[틀:깃발| ]][[대한민국| ]]12 | 10 | 11 | 33 |
5 | [[틀:깃발| | ]][[틀:깃발| ]][[서독| ]]11 | 14 | 15 | 40 |
6 | [[틀:깃발| | ]][[틀:깃발| ]][[헝가리 인민공화국| ]]11 | 6 | 6 | 23 |
7 | [[틀:깃발| | ]][[틀:깃발| ]][[불가리아 인민공화국| ]]10 | 12 | 13 | 35 |
8 |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 | 7 | 11 | 6 | 24 |
9 | [[프랑스| ]][[틀:국기| ]][[틀:국기| ]] | 6 | 4 | 6 | 16 |
10 | [[이탈리아| ]][[틀:국기| ]][[틀:국기| ]] | 6 | 4 | 4 | 14 |
11 | [[중국| ]][[틀:국기| ]][[틀:국기| ]] | 5 | 11 | 12 | 28 |
12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5 | 10 | 9 | 24 |
13 | [[케냐| ]][[틀:국기| ]][[틀:국기| ]] | 5 | 2 | 2 | 9 |
14 | [[틀:깃발| | ]][[틀:깃발| ]][[일본| ]]4 | 3 | 7 | 14 |
15 | [[호주| ]][[틀:국기| ]][[틀:국기| ]] | 3 | 6 | 5 | 14 |
16 |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 | 3 | 4 | 5 | 12 |
17 | [[틀:깃발| | ]][[틀:깃발|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 ]]3 | 3 | 2 | 13 |
18 | [[뉴질랜드| ]][[틀:국기| ]][[틀:국기| ]] | 3 | 2 | 8 | 13 |
19 | [[캐나다| ]][[틀:국기| ]][[틀:국기| ]] | 3 | 2 | 5 | 10 |
20 | [[틀:깃발| | ]][[틀:깃발| ]][[폴란드 인민공화국| ]]2 | 5 | 9 | 16 |
21 | [[노르웨이| ]][[틀:국기| ]][[틀:국기| ]] | 2 | 3 | 0 | 5 |
22 | [[네덜란드| ]][[틀:국기| ]][[틀:국기| ]] | 2 | 2 | 5 | 9 |
23 | [[덴마크| ]][[틀:국기| ]][[틀:국기| ]] | 2 | 1 | 1 | 4 |
24 | [[브라질| ]][[틀:국기| ]][[틀:국기| ]] | 1 | 2 | 3 | 6 |
25 | [[핀란드| ]][[틀:국기| ]][[틀:국기| ]] | 1 | 1 | 2 | 4 |
[[스페인| ]][[틀:국기| ]][[틀:국기| ]] | 1 | 1 | 2 | 4 | |
27 | [[튀르키예| ]][[틀:국기| ]][[틀:국기| ]] | 1 | 1 | 0 | 2 |
28 | [[모로코| ]][[틀:국기| ]][[틀:국기| ]] | 1 | 0 | 2 | 3 |
29 | [[오스트리아| ]][[틀:국기| ]][[틀:국기| ]] | 1 | 0 | 0 | 1 |
[[포르투갈| ]][[틀:국기| ]][[틀:국기| ]] | 1 | 0 | 0 | 1 | |
[[수리남| ]][[틀:국기| ]][[틀:국기| ]] | 1 | 0 | 0 | 1 | |
32 | [[스웨덴| ]][[틀:국기| ]][[틀:국기| ]] | 0 | 4 | 7 | 11 |
33 | [[스위스| ]][[틀:국기| ]][[틀:국기| ]] | 0 | 2 | 2 | 4 |
34 | [[자메이카| ]][[틀:국기| ]][[틀:국기| ]] | 0 | 2 | 0 | 2 |
35 | [[아르헨티나| ]][[틀:국기| ]][[틀:국기| ]] | 0 | 1 | 1 | 2 |
36 | [[칠레| ]][[틀:국기| ]][[틀:국기| ]] | 0 | 1 | 0 | 1 |
[[이란| ]][[틀:국기| ]][[틀:국기| ]] | 0 | 1 | 0 | 1 | |
[[코스타리카| ]][[틀:국기| ]][[틀:국기| ]] | 0 | 1 | 0 | 1 | |
[[인도네시아| ]][[틀:국기| ]][[틀:국기| ]] | 0 | 1 | 0 | 1 | |
[[틀:국기| ]][[틀:국기| ]][[미국령 버진아일랜드| ]] | 0 | 1 | 0 | 1 | |
[[세네갈| ]][[틀:국기| ]][[틀:국기| ]] | 0 | 1 | 0 | 1 | |
[[페루| ]][[틀:국기| ]][[틀:국기| ]] | 0 | 1 | 0 | 1 | |
[[틀:깃발| | ]][[틀:깃발| ]][[네덜란드령 안틸레스| ]]0 | 1 | 0 | 1 | |
44 | [[벨기에| ]][[틀:국기| ]][[틀:국기| ]] | 0 | 0 | 2 | 2 |
[[멕시코| ]][[틀:국기| ]][[틀:국기| ]] | 0 | 0 | 2 | 2 | |
46 | [[파키스탄| ]][[틀:국기| ]][[틀:국기| ]] | 0 | 0 | 1 | 1 |
[[콜롬비아| ]][[틀:국기| ]][[틀:국기| ]] | 0 | 0 | 1 | 1 | |
[[그리스| ]][[틀:국기| ]][[틀:국기| ]] | 0 | 0 | 1 | 1 | |
[[몽골 인민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 | 0 | 0 | 1 | 1 | |
[[지부티| ]][[틀:국기| ]][[틀:국기| ]] | 0 | 0 | 1 | 1 | |
[[틀:깃발| | ]][[틀:깃발| ]][[태국| ]]0 | 0 | 1 | 1 | |
[[필리핀| ]][[틀:국기| ]][[틀:국기| ]] | 0 | 0 | 1 | 1 |
미국령 버진아일랜드, 세네갈, 수리남, 인도네시아, 지부티, 코스타리카는 이 대회에서 사상 첫 올림픽 메달을 획득했으며 수리남은 첫 금메달을 따는데 성공했다.
13. 대한민국 선수단
- ▶대한민국 참가 현황: 임원 125명, 선수 477명 참가[56]
- 근대 5종: 강경효, 김명건, 김성호, 박성수
- 농구: 남자(김유택, 김윤호, 김현준, 박종천, 오세웅, 유재학, 이문규, 이원우, 이충희, 최철권, 한기범, 허재) 여자(김말련, 김혜연, 김화순, 박찬미, 박찬숙, 성정아, 우은경, 이금진, 이형숙, 정미경, 조문주, 최경희)
- 레슬링: 권덕용, 김기정, 김상규, 김성문, 김영남, 김용남, 김종오, 김태우, 노경선, 박장순, 안대현, 엄진한, 유영태, 윤경재, 이상호, 이재석, 조병온, 한명우, 함덕원, 허병호
- 배구: 남자(김사석, 김호철, 박삼용, 이명학, 이상렬, 이성희, 이종경, 이채언, 장윤창, 정의탁, 최천식, 한장석) 여자(김경희, 김귀순, 김윤혜, 남순옥, 문선희, 박미희, 박복례, 선미숙, 유영미, 윤정혜, 임혜숙, 지경희)
- 배드민턴[시범]: 김연자, 박성배, 박주봉, 이광진, 이상복, 정명희, 정소영, 황혜영
- 복싱: 김광선, 김유현, 박병진, 박시헌, 백현만, 변정일, 송경섭, 오광수, 이강석, 이재혁, 전진철, 하종호
- 볼링[시범]: 권종렬, 송경미
- 사격: 강혜자, 곽정훈, 권택렬, 김건일, 김영미, 김하연, 민영삼, 박정희, 박종신, 박철승, 방현주, 변경수, 부순희, 안병균, 양충렬[59], 이미경, 이은철, 이혜경, 임장수, 차영철, 홍승표, 홍영옥
- 사이클: 김경석, 김용규, 김주석, 김진영, 노염주, 도은철, 박민수, 박현곤, 신대철, 안우혁, 엄영섭, 여정훈, 유병헌, 이진옥, 정래진, 정점식, 조덕행, 홍영미
- 수영: 권상원, 권순근, 김기춘, 김길환, 김미진수, 김성은, 김수진[60], 김은정, 김은희, 김재연, 김진태, 박동필, 박상원, 박성원, 박영철, 박주리, 송광선, 송승호, 양욱, 유승훈, 윤주일, 이선기, 이재수, 이정석, 이택원, 이홍미, 장시영, 최선용, 최정윤, 하수경, 한영희, 홍순보, 홍지희
- 승마: 김성중, 김승환, 김형칠, 남관우, 문은진, 문현진[61], 박동주, 박소운, 서정균, 신창무, 최명진, 한정태
- 야구[시범]: 강기웅, 강영수, 권택재, 김경기, 김기범, 김동수, 김태형, 노찬엽, 박동희, 백재우, 송구홍, 송진우, 윤혁, 이강철, 이광우, 이석재, 장호익, 조계현, 최해명, 황대연
- 양궁: 김수녕, 박성수, 왕희경, 윤영숙, 이한섭, 전인수
- 역도: 김귀식, 김기웅, 김병찬, 민준기, 박태민, 이형근, 전병관, 전병국, 황우원, 황인동
- 요트: 김기환, 김해숙, 박기철, 박길철, 박병기, 신광수, 심규해, 오정렬, 이필성, 이한림, 한정미
- 유도: 김성혜, 김승규, 김재엽, 문지윤, 박정희, 박지영, 배미정, 안병근, 옥경숙, 이경근, 정선용, 조민선, 조용철[63], 하형주
- 육상: 권성락, 김미경, 김복섭, 김순자, 김영길, 김원탁, 김종일, 김진태, 김철균, 김춘희, 김희선, 노혜순, 류태경, 민세훈, 박미선, 박숙자, 박영준, 방신혜, 성낙군, 심덕섭, 양경희, 우양자, 유재성, 유춘옥, 윤남한, 윤미경, 이광익, 이미옥, 이상근, 이영숙, 이욱종, 이재복, 이주형, 임은주, 임춘애, 장재근, 정명호, 정미자, 정필화, 조진생, 조현욱, 지정미, 차한식, 최미선, 최세범, 한민수, 황홍철
- 조정: 강남구, 강민흥, 고광순, 공정배, 국인숙, 김갑식, 남상란, 박미정, 박승래, 양광재, 윤남호, 윤영호, 이경화, 이광순, 이병인, 이봉수, 이태환, 이현기, 이홍근, 임경석, 임재만, 장광수, 장명희, 장부영, 장인교, 장재원, 최장도, 하진식, 한혜순, 현승일, 홍철호
- 체조: 김남옥, 김은미, 김인화, 박종훈, 박지숙, 배은미, 송유진, 임혜진, 장진영, 주영삼, 한경임, 홍성희
- 축구: 구상범, 김용세, 김종건, 김주성, 김판근, 김풍주, 남기영, 노수진, 박경훈, 변병주, 여범규, 이태호, 정용환, 정해원, 조민국, 조병득, 최강희, 최상국, 최순호, 최윤겸
- 카누: 김동수, 김미숙, 김미자, 박경철, 박차근, 변상수, 서경석, 윤기수, 윤영대, 이도희, 이상용, 이용철, 장영철, 정미, 천인식, 최선형, 최창환
- 탁구: 김기택, 김완, 안재형, 양영자, 유남규, 현정화, 홍차옥
- 태권도[시범]: 권태호, 김소영, 김종석, 김지숙, 김현희, 박봉권, 박선영, 이계행, 이은영, 이화진, 장명삼, 장윤정, 정국현, 지용석, 추난율, 하태경
- 테니스: 김봉수, 김일순, 송동욱, 유진선, 이정명
- 펜싱: 고낙춘, 김상욱, 김승표, 김용국, 김진순, 박은희, 신성자, 양달식, 윤남진, 윤정숙, 이병남, 이상기, 이영녹, 이욱재, 이일희, 이현수, 이효근, 조희제, 탁정임, 홍영승
- 필드 하키: 남자(권순필, 김만회, 김영준, 김재천, 김종갑, 모지영, 박재식, 송석찬, 신석균, 유승진, 이홍표, 정계석, 정부진, 지재관, 한진수, 허상영) 여자(김미선, 김순덕, 김영숙, 박순자, 서광미, 임계숙, 서효선, 장은정, 정상현, 정은경, 조기향, 진원심, 최춘옥, 한금실, 한옥경, 황금숙
- 핸드볼: 남자(강재원, 고석창, 김만호, 김재환, 노현석, 박도헌, 박영대, 신영석, 심재홍, 오용기, 윤태일, 이경모, 이상효, 임진석, 최석재) 여자(기미숙, 김경순, 김명순, 김영숙, 김춘례, 김현미, 박현숙, 석민희, 성경화, 손미나, 송지현, 이기순, 이미영, 임미경, 한현숙)
14. 대한민국 하계올림픽 성적
- ▶대한민국 참가 성적: 금메달 12개, 은메달 10개, 동메달 11개 획득. 종합순위 4위.
- 금메달: 레슬링(그레코로만형 74kg) 김영남
- 금메달: 레슬링(자유형 82kg) 한명우
- 금메달: 복싱(라이트급) 박시헌
- 금메달: 복싱(플라이급) 김광선
- 금메달: 남자 양궁(단체) 박성수, 이한섭, 전인수
- 금메달: 여자 양궁(개인) 김수녕
- 금메달: 여자 양궁(단체) 김수녕, 왕희경, 윤영숙
- 금메달: 유도(60kg) 김재엽
- 금메달: 유도(65kg) 이경근
- 금메달: 남자 탁구(단식) 유남규
- 금메달: 여자 탁구(복식) 양영자, 현정화
- 금메달: 여자 핸드볼
- 은메달: 레슬링(그레코로만형 68kg) 김성문
- 은메달: 레슬링(자유형 68kg) 박장순
- 은메달: 복싱(헤비급) 백현만
- 은메달: 남자 사격(소구경 소총 복사) 차영철
- 은메달: 남자 양궁(개인) 박성수
- 은메달: 여자 양궁(개인) 왕희경
- 은메달: 역도(52kg) 전병관
- 은메달: 남자 탁구(단식) 김기택
- 은메달: 여자 하키
- 은메달: 남자 핸드볼
- 동메달: 레슬링(그레코로만형 52kg) 이재석
- 동메달: 레슬링(그레코로만형 62kg) 안대현
- 동메달: 레슬링(그레코로만형 82kg) 김상규
- 동메달: 레슬링(자유형 57kg) 노경선
- 동메달: 레슬링(자유형 90kg) 김태우
- 동메달: 복싱(페더급) 이재혁
- 동메달: 여자 양궁(개인) 윤영숙
- 동메달: 역도(82.5kg) 이형근
- 동메달: 유도(무제한급) 조용철
- 동메달: 남자 체조(도마) 박종훈
- 동메달: 남자 탁구(복식) 안재형, 유남규
15. 논란 및 사건사고
15.1. 인권 침해
<상계동 올림픽>의 캡처 이미지 |
허울 좋은 86, 88올림픽이 없는 사람 다 죽여요. 살고 있는 주민들 다 쫓아내고 어쩌겠다는 거예요? 이건 재개발이 아니고 투기개발이요, 투기개발.
- 말 1986년 7월 31일자 p49. <투기 개발에 저항하는 오금동 세입자들>.
- 말 1986년 7월 31일자 p49. <투기 개발에 저항하는 오금동 세입자들>.
서울 올림픽은 2008 베이징 올림픽에 이어 2번째로 많은 철거민을 발생시킨 올림픽이다. 유사 사례로 1978년 월드컵 당시 경기장 옆 건물에서 사람들을 고문한 아르헨티나, 2021년에 서울 올림픽 당시 한국 정부가 한 인권 침해들을 대부분 저지른 일본, 2022년 월드컵 경기장 건설 노동자들에 대한 인권 침해로 국제적 비난을 받은 카타르 등이 있다.
'86, 88'이라는 마법의 주문 아래 경기장 건설 및 달동네 환경정비 및 재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수십만에 가까운 주민들이 한순간에 길거리로 내몰렸다. 심지어는 "성화봉송 중에 불량주택이 보이면 곤란하다"며, 전국 성화봉송 루트 주변 경관에 보여지는 판자집이란 판자집은 전부 무단으로 철거해버렸다. 또한 부랑자, 거지, 지적장애인[65], 자폐성 장애인들을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거리에서 보이면 잡아다가 부랑자·장애인 보호시설에 수용시켰다. 사실 올림픽 개최 이후 장애인 올림픽인 패럴림픽이 열린다는 것을 생각하면, 올림픽 정신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과 같은 인권 침해 문제도 발생했다.
이미 1982년부터 대규모 건설자본을 끌어들인 대대적 재개발사업 '합동재개발'이 실시되면서 올림픽 선수들이 입국하는 관문 공항인 김포국제공항과 주 간선도로가 되는 국회대로와 안양천 주변의 판자촌 및 빈민가는 이때 모두 철거되어 자취를 감췄다.
다른 올림픽에서도 유사 사례들이 있는데, 2008 베이징 올림픽 때도 재개발 과정에서 150만 명이 넘는 서민들이 당국과 철거용역에 의해서 내쫓겼으며 민주국가들에서 펼쳐진 올림픽이라도 이러한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아서 이후에 치러진 2012 런던 올림픽과 2016 리우 올림픽 때도 경기장 근처에 있는 빈민촌을 재개발하고 거기서 살던 빈민들은 어쩔 수 없이 반강제적인 이주를 가든지 해야 했고, 심하면 당국과 건설업체에 의해 고용된 철거용역에 의해서 강제로 다른 곳으로 내쫓긴다거나 했다. 게다가 당시 달동네 터에 새로 지어진 아파트조차도 서민용이 아니라 중산층 등 가진 자들을 위한 주택이었는데, 당국이 재개발 계획에 10평 미만짜리 소형 아파트까지 추가시킬 시 입주 예정자들이 집값 떨어진다고 반대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투기꾼들이 달동네에 몰려와 불량주택을 사서 세입자를 내쫓고, 건설업체 사주를 받는 재개발조합 임원들까지 달동네 공동체사회까지 침해해가며 가담했다.
아울러 사격 경기가 열리는 태릉 국제사격장 인근의 빈민가 등 황량한 부지도 있어 보이기 위해 개발되었다. 이는 오늘날 각각 목동[66]과 상계동의 아파트 단지로 재개발되는 곳인데, 이 과정을 통해 허허벌판과 공장 지대이던 양천구와 노원구는 급격하게 풍경이 달라져 대규모 주거 단지이자, 8학군에 버금가는 명문 학군, 높은 인구밀도를 자랑하는 곳으로 탈바꿈한다. 아울러 경기도 부천시의 원미, 오정 일대도 역시 개발 바람을 피할 수 없었다. 이처럼 빈민가에서 거주하던 사람들은 점점 밀리고 밀려나 관악구 난곡동이나 서울 밖으로 쫓겨났다.[67] 이를 다룬 다큐 영화가 김동원 감독[68]의 <상계동 올림픽>인데, 1986년부터 2년 동안 만들었으며 1989년 제39회 베를린 영화제 포럼부문과 1991년 제2회 야마가타 국제영화제에 각각 초청되었다.
이때 상계동 천막촌의 철거 이유는 성화 봉송이 이쪽으로 지나갈 수도 있으니까 보기 좋으라는 식이었으나, 정작 주공아파트가 지어지고 나서 동일로에 신호등 설치도 안 하는 등 사건사고가 잇따라 터졌다. 심지어 전국 도시 노점상과 성남 모란시장같은 낙후된 전통시장들 역시 폐쇄 대상에 올랐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묵인이나 현대화를 하는 선에서 마무리가 됐다.
철거민, 노점상 등 도시빈민들을 쫓아내면서 겉보기에는 도시 미관이 좋아졌지만, 이미 광주대단지사건 등을 통해 1970년대부터 끓어오르던 하층민들의 분노를 더욱 키우고 말았다. 이로 인해 1986년 10월 31일 신당 6동 강제철거 당시 철거민 2명이 분신을 기도했고, 12월 4일에는 철거민 1명이 자살하기도 했다. 1986년 한 해 동안 사망한 철거민은 모두 5명이었으며, 1986년 4월부터 1988년 2월까지 사망한 철거민은 모두 14명이었다.[69]
그러나 철거민 문제가 비로소 본격화된 것이 된 계기가 바로 1988 서울 올림픽 준비 과정이었다. 결국 그 분노는 그대로 폭발하여 올림픽 개막 1년 전인 1987년에 서울지역철거민협의회(서철협)를 탄생시켰고, 이는 1993년 전국철거민협의회, 1994년에는 분파인 전국철거민연합으로 이어진 것이다. 1988년 6월 29일에 수도권 등 30여개 지역 주민들이 '반민중적 올림픽으로 탄압받는 도시빈민 규탄대회'를 열었고, 오후 8시 서울 정동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에서 서민주택 보장을 요구하며 단식농성을 전개했으나, 올림픽 열기에 밀려 파급되지 못했다.
게다가 1988년 8월 5일부터 제정/시행된 '올림픽의 평화를 지키기 위한 법률'에 따라서 현월 17일부터 올림픽 기간 중 전국 주요도시 특정구역에 '평화구역'이 선포되었고 해당 구역 내에서는 어떠한 집회/시위가 금지되었다. 그 증거로 8월 18일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광주지역 8개 재야단체들이 5.18 진상규명 투쟁을 벌이다 평화구역이란 이유로 경찰에 강제 진압되었고, 서울시내(당시 종로, 을지로, 충무로) 극장에서 열린 미국 영화 직배반대 투쟁도 휴관 형식으로 경찰과 대치해가며 시위를 펼쳤으나 이후 마찬가지로 무산되었다.
서양의 이목을 의식해 주요 도시에서 개고기가 금지된 때도 이 때. 수많은 서울 시내와 경기가 열리는 곳 주변, 대로변 보신탕 집들이 문을 닫았고, 보신탕이라는 이름 대신 사철탕, 영양탕, 보양탕 등으로 이름을 바꾸어 위성 도시나 변두리로 쫓겨나 음지에서 간신히 살아남았다.
서양의 개고기 반대론자들은 1988년 서울올림픽 당시 한국의 개고기 문화가 근절되지 않으면 올림픽을 보이콧하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동물보호 운동가인 프랑스 여배우 브리지트 바르도는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한국의 농촌장터에서 개를 도살하는 동영상을 공개하면서 “한국인은 야만인”이라고 공격한 이후, 1995년 3월 한·불 정상회담 당시 파리를 방문한 김영삼 대통령에게 “개고기 판매를 금지하라”고 요구하는 내정간섭을 저지르기도 했다. 또한 1996년에는 2002 월드컵 조직위원회에 “월드컵 기간 동안에 개고기 판매를 금지한다는 각서를 써라”고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또한 2001년 손석희 아나운서가 MBC 라디오 시사프로 <시선집중>에서 이 사람과 개고기 관련하여 전화 인터뷰 토론을 하기도 했는데 손 아나운서의 말에는 귀를 닫고 자신의 주장만 앵무새처럼 일방적으로 반복하는 무례를 보여주기도 했다.
위의 여러 가지 일들은 1988년 올림픽 직전에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올림픽의 예행 연습이라 할 1986년 아시안 게임 말고도 1983년 IPU 총회, 1986년 IMF 및 IBRD 총회 등의 국제행사가 우리나라에 개최된 것에서 기인한 것으로, 도시 빈민들과 힘 없는 이들에게 장기간 고통을 주었다. 위와 같은 참상은 월간 말이나 한겨레신문같은 언론을 제외하고는 보도되지 못했으며, "올림픽을 잘 치러야 한다"는 국민적 공감대(특히 중산층)가 너무나 강해 사회 구성원 중에 운동권에 가담한다든가, 자신에게 이러한 해당 사항이 직결되지 않는 이상 정부가 내세운 정책의 부당함과 힘 없는 이들의 고통에 관해 잘 직시하지 못했다.[70]
15.2. 부동산 투기와 인플레이션
서울 올림픽의 경제적 성공에는 어두운 이면도 존재했다. 올림픽 개최 과정에서 막대한 돈을 풀게 됨에 따라 부동산 투기가 횡행했고, 정부의 200만 호 건설 공약으로 서울 근교 및 지방 대도시로까지 투기 열풍이 확산되었으며, 대기업들도 비업무용 부동산 매입에 박차를 가했다. 1987년부터 1990년까지 부동산 가격은 매년 20% 이상 올랐으며, 전월세비도 급속하게 치솟아 서민들의 삶을 짓눌렀다. 이후 신도시 추가 건설 등[71] 뒤늦게 투기 억제 정책을 폈지만 큰 성과는 없었으며, 물가도 급속히 올라 1990~1991년 물가 상승률이 오일 쇼크 이후 최고 수준을 기록하기도 했다. 다만 토지 공개념 3법을 도입하거나 신도시 건설 규모를 확대하는 정책이 1991년부터 효과를 얻기 시작하면서 김대중 정부 초기까지 약 10년간 부동산 시장이 안정을 유지한 점은 아이러니한 사실이다.이렇게 올림픽으로 인해 형성된 거품 경제는 꾸준히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특히 코스피 지수가 1,000을 돌파했다가 바로 무너지는 등 여러모로 자산버블이 형성된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이런 분위기속에서 탐욕에 눈이 먼 재벌들은 기술 투자 대신 문어발식 사업확장과 부동산 투기에만 정신을 팔다가 1997년 외환 위기를 맞았다.
15.3. 복싱 편파 판정 논란
변정일 선수가 편파 판정으로 탈락한 후 좌절하는 모습 |
먼저 한국 복싱선수 변정일이 편파 판정으로 탈락했는데 당시 32강 2회전에서 변정일은 2회 경고만으로 2점 감점됐지만 상대방 불가리아 선수는 8회 경고를 받았으나 일절 감점되지 않았다. 변정일의 탈락으로 관중들의 분노가 폭발해버렸다. 당시 경기 영상 그러나 이때 한국 코치진이 링에 난입하여 심판진에 폭력을 행사하며 아수라장을 만드는 촌극을 벌였고, 변정일은 67분 동안이나 링을 점거하고 시위를 벌이면서 억울함을 호소했으나 한 번 내려진 판정은 번복되지 않았다.
결국 변정일은 경기 진행을 방해한 이유로 국제복싱연맹으로부터 5년간 자격정지라는 중징계를 받았고 당시 한국복싱연맹 회장과 김종하 대한올림픽협회장이 사임하기에 이르렀다. 그래도 변정일의 경우는 1990년대에 프로로 전향하여 선수로서 나름대로 성공적인 커리어를 유지했다.
시상대에 올라서 금메달을 받고도 멋쩍게 존스의 손을 들어주는 박시헌 |
당시 박시헌은 안 그래도 16강전에서 석연찮은 판정으로 이탈리아 선수를 꺾고 올라왔는데,[73] 결승전에서도 훗날 전설적인 복싱 선수로 거론되는 로이 존스 주니어에게 철저히 농락 당하고 말았다. 한국인들을 포함한 대다수의 관중들은 물론이고 박시헌조차 존스의 우승을 믿어 의심치 않았으나 심판진 5명의 판정 결과 2:3으로 박시헌이 금메달을 따는 역대 최악의 판정이 나와버렸다. 패배한 존스는 당연하게도 충격이 컸는지 항의 한마디 못한 채 링을 나와버렸고, 얼떨결에 금메달을 딴 박시헌조차 떨떠름한 표정으로 멋쩍게 관중들에게 인사했을 정도. 특히 판정이 나오자마자 박시헌이 존스를 껴안아줬을 때 두 사람의 표정과 몸짓을 보면 그야말로 어색의 극치를 달렸다.
이 때의 결과를 두고 존스가 지속적으로 IOC에 제소했으나 1997년 5월에 최종적으로 기각되었다. 당시 대한민국이 심판을 매수한 것이 아니냐는 논란이 있었으나 IOC의 조사 결과 대한민국 측의 심판매수 흔적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비디오 분석에서도 로이 존스에 딱히 손을 들어줄 만한 결과를 찾아내지 못했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존스의 유효타가 2배 더 많았다고 하지만 존스가 확실한 우위에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스텐딩 다운 판정 역시 박시헌이 바로 항의하고 나섰을 정도로 존스에 대한 판정 또한 석연치 않았다. 거기에 이때는 박시헌이 밀어붙이고 있었으며 마지막 라운드, 특히 종료 1분을 남겨두고는 박시헌이 경기를 주도하며 상당수 유효타를 성공시켰다. 거기에 홈 어드벤티지까지 감안하면 박시헌이 이기는 판정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다고 본 것이다. 즉 한국이나 박시헌 선수의 잘못이 아니라 심판의 잘못이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 경기에 대한 미국의 항의가 아마추어 복싱의 룰을 더욱 객관적으로 개편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도 당시 19세 아마추어에 불과했던 로이 존스 주니어는 이를 계기로 미국 전체의 관심과 격려를 받았고, 절치부심하여 이듬해 89년에 프로로 데뷔하면서부터 90년대 ~ 2000년대 복싱계를 미들급 타이틀 정복부터 시작하여 헤비급까지 평정하면서 복싱계에서 대스타로 발돋움하였고 이후 당대를 넘어 역대급 복서로도 평가받는 선수로 거듭난다.[74] 그리고 2001년에 래퍼로 데뷔하였다.
당시 이 판정에 대해 한국 국민들도 판정에 대한 비난을 쏟아냈으며 "국제복싱연맹이 어떻게 그런 불공정한 판정을 할 수 있느냐", "한국을 망신시키려는 것이 아닌지 어처구니가 없다"는 여론이 쇄도했다. 박시헌 본인도 자신의 패배를 시인했으나, 그에 대한 세상의 시선은 차가웠으며 그는 한참이나 죄인 취급을 당해야 했다. 우리나라 여론은 미국에 공식 사과를 해야 한다는 둥 모금으로 금메달을 만들어서 보내주자는 둥 박시헌의 편은 아무도 없었고, 그는 그 이후로 복싱 인생이 꼬여 국내외로 비난에 시달리다 조기에 은퇴하였고 결국 대인기피증에 시달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근황 지못미. 다행히 2014 인천 아시안게임과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복싱팀 감독으로 활동하는 등 슬럼프에서 벗어나고 있는 듯하다.[75] 당시 부심을 맡았던 자우트 그바자바는 "복싱은 도쿄 올림픽 때부터 가장 말썽 많은 종목이었다. 세계복싱연맹이 공정한 판정을 위한 근본대책을 세우지 않는 한 매대회마다 말썽은 더욱 커질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미국 언론에선 틈만 나면 이 사건을 들먹이며 부당함을 주장하다가 2004 아테네 올림픽 기계체조 남자 개인종합 결선에서 양태영 오심 사건이 벌어지자 귀신같이 태세전환하며 입을 닫았다.[76]
15.4. 도핑 사건
15.4.1. 벤 존슨의 약물 복용 사건
특히 남자 100m 경기는 올림픽에서 마라톤, 축구와 함께 가장 많은 세계적 관심이 쏠리는 핫 이슈 종목[77]이라는 점을 감안하자. 만약 남자 육상 100m가 아닌 다른 일반 종목이었으면 상대적으로 잠잠히 넘어갔을 가능성이 거의 확실하다.[78]올림픽 역사상 최악의 관중난입 사건으로 크게 이슈화된 것도 그가 마라톤 선수였기 때문이다. 만약 400m 트랙을 25바퀴 도는 10,000m 경기에서 관중이 난입하여 경기를 방해한 사건이 터진다 해도 리마 사건만큼 이슈화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만큼 남자 육상 100m가 올림픽의 꽃이란 의미다.
조선일보 2012년 6월 1일자 기사에 의하면 당시 벤 존슨이 "자신이 마신 음료에 스테로이드 약물을 타넣은 루이스의 음모로 인해 메달을 박탈당했다"고 주장함에 따라 논란이 일었다.
다만 벤 존슨 입장에서는 좀 억울할 수도 있던 것이 80년대까지는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권 국가대표 체육인들의 약물 복용이 만연했으며 한때 동독에서는 이를 적극 권장하기까지 했다. 물론 약물의 힘으로 금메달을 차지하려고 한 시도는 절대 정당화될 수 없지만, 벤 존슨의 경우는 서울 올림픽 당시 국내외 언론에서 지나치게 집중 포화를 퍼붓다 보니[79] 그 이후에도 전세계적으로 유명스타에서 졸지에 약물 스프린터라는 오명이 붙으면서 몰락하였고 출전한 대회에서도 요주의 대상으로 지목받게 되었으며 90년대에는 선수 자격까지 박탈당하여 다시는 트랙 위에 서지 못했다. 하지만 이런 우여곡절이 많은 육상 커리어에 대해 반성을 많이 했는지 벤 존슨은 반(反) 도핑 전도사로 활약하며 자신의 금메달을 박탈당했던 곳인 서울올림픽주경기장을 찾아오기도 했다. 최근에는 트리비아의 샘, 퀴즈 탤런트 명감, 수요일의 다운타운 등의 일본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서 빨리 달리기와 관련된 것이 나오면 땔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쓸데없이 거창한 소개에 비하여, 순방향으로 움직이는 무빙워크 위에서 달려도 10초대를 못 넘거나, 거대 송풍기를 등지고 달렸음에도 11초를 기록하는 등 최후에 고통받는 모습 같이 용두사미로 끝나버리는 게 다반사.
역으로, 한국과학기술연구원에서 벤 존슨의 약물 복용 사건을 밝혀내어 우리의 도핑 테스트 기술을 전 세계에 과시하기도 하였다. 그냥 듣보잡 선수 하나 잡아낸 수준이 아니라 올림픽 최고의 스타를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뜨린, 그리고 다시는 나와서는 안 될, 역대급 월척이다. 사실 100m 경기 자체가 올림픽에서 중계권료와 광고료 및 시간 비율과 주목도까지 모두 포함해 가장 비싼 종목임을 감안해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사건 덕분에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2011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 2018 평창 동계올림픽 등의 주요 대회에서도 도핑테스트를 우리 손으로 할 수 있게 된 밑거름이 되었다. 그러나 벤 존슨의 유죄를 밝혀낸 당시 수장인 박종세 박사는 이후 국민의 정부 초기인 1998년 3월에 식품의약품안전청장까지 올라갔는데 1999년 1월에 제약회사에 뇌물수수로 인해 집행유예를 받아 흑역사가 되었다.# 이후에는 2000년에 바이오 벤처기업을 열었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검색되는 근황은 없다.#
34년 후 이 사건보다 더 심각한 사건이 발생했다.
15.4.2. 기타 선수 논란
여자 100m 우승자인 그리피스 조이너에 대한 약물 복용 의혹도 끊이지 않았다. 그녀의 100m 올림픽 미국대표 선발전 기록인 10초 49는 여자의 기록이라고는 믿기 힘든 엄청난 기록이었으며, 아직까지 깨어지지 않고 있는 기록이다. 그리피스 조이너의 화려한 화장도 도핑을 감추기 위함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조이너 선수가 98년에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이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다.그 외에도 역도 선수들의 약물 복용 적발이 많았던 것도 바로 이 대회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이 대회 수영 6관왕을 차지했던 동독의 '크리스틴 오토' 역시 약물 복용 논란이 지금까지 끊이질 않고 있다.
10종 경기에 출전해 금메달을 수상했던 동독 선수 크리스티안 솅크는 2018년 9월에 도핑 사실을 자백했다. 그런데, 공소 시효가 끝나서 메달이 박탈되지는 않는다고 한다.
당시 소련 (현 러시아) 선수들에 대한 도핑 의혹 역시 끊이지 않았는데, 88올림픽 뿐만 아니라 이후의 2014 소치 동계 올림픽과 2016 리우 하계 올림픽까지 약물복용을 했다는 게 확실시되고 있다. 그리고, 그 의혹은 2016년 러시아 국가대표팀 도핑 스캔들이 발각되면서 더욱더 힘을 얻고 있다.
이외에도 육상 종목에서 미국 선수 특히 칼 루이스에 대한 말도 안되는 특혜도 논란이 되었다. 멀리뛰기 예선에서 가장 먼저 경기를 배정받은 칼 루이스가 진행요원들에게 온갖 육두문자를 퍼부으며 순서를 가장 나중으로 바꾸라고 요구했고 사실 이런 요구 자체를 들어주는 게 말도 안되는 상황이었지만 올림픽 최고 흥행카드에다 미국 선수라는 어드밴티지로 결국 루이스의 요구가 허용되는 상황도 벌어졌다.
16. 개최 의의 및 결과
16.1. 독특한 위상
개최와 유치 이전까지 북한을 자극하여 또 다른 이념 싸움이 될 것이라는 평가도 있었고, 1987년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등 북한의 온갖 방해와 로비에도 불구하고 겨우 6개국 정도만 북한의 입장에 동조했을 뿐, 당시 대한민국과 외교관계가 전무했던 국가들이 오히려 대거 출전해 처음에 우려했던 것에 비하면 그래도 참가국을 늘리고 많은 성공과 의의를 보인 서울 올림픽은 이전의 올림픽과는 상반되는 모습까지 더해 국내만이 아닌 국외에서도 성공적인 대회였다는 평이 일반적이다.이와는 별개로 완벽하게 모든 IOC 국가가 참가한 것은 아니라서, 쿠바와 에티오피아[80]를 비롯해 알바니아,[81] 마다가스카르,[82] 세이셸,[83] 니카라과[84] 등 올림픽 보이콧을 선언한 북한의 주장에 동조한 일부 사회·공산주의 국가들은 이에 대한 참가를 거부하거나 포기하면서 총 7개국이 불참했다. 이들 외에 불참 국가로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있는데 여긴 냉전과는 별개로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인종적 문제가 대두되면서 촉발되었던 사태로 인해 IOC에서 제명된 상황이었다. 그래서 이데올로기적 면에서 동서화합의 올림픽이었던 동시에 냉전 시기 마지막 보이콧이 벌어진 대회,[85] UN 비회원국에서 열린 마지막 대회라는 독특한 위상을 가지게 되었다.
16.2. 올림픽 유치 열기의 시작
사실 1936 베를린 올림픽이나, 1964 도쿄 올림픽처럼 정부 차원에서 대회를 주관하여 큰 성공을 거두는 사례는 서울 올림픽 이전부터 이미 있어왔고,[86] 이처럼 유치 초기부터 국가 중앙 정부에서 대규모 영역별 계획을 수립하는 경우가 존재하나, 모든 대회가 범국가적인 역량을 동원하여 개최되는 것은 아니었다. 서울 올림픽 전까지 본래 올림픽 유치는 국가적인 취지보다는 대부분 도시간 경쟁이었다. 또 지금도 올림픽은 유치하면 좋지만, 여전히 성공이 필수불가결인 대회이고, 만약 실패하면 도시 하나 내지는 한 국가에 각종 큰 문제를 불러일으키거나, 고혈을 빨아먹게 되는 양날의 검과 같은 사업이다.올림픽은 1896년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취소되기도 하고, 여러 과정을 거치면서 명맥을 유지해왔다. 그러다가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 1972 뮌헨 올림픽, 1976 몬트리올 올림픽, 1980 모스크바 올림픽, 1984 LA 올림픽까지 무려 5차례동안 드러난 개최지 선정 및 대회 개최 과정과 폐막 이후에도 벌어진 여러 문제적 행보[87]로 인해 당시까지도 전반적으로 만연했던 올림픽 개최에 관한 부정적 회의론이 극에 달했고, 이러한 상황에 대해 "아예 올림픽 자체를 폐지하자."는 극단적인 움직임까지 일어날 정도로 막강한 파장을 불러왔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당시 빈곤에서 막 빠져나와 신흥 개발도상국들 중 가장 고공으로 성장하던 대한민국이 개최한 1988 서울 올림픽의 과정과 결과를 보고, 상황이 반대로 급변하게 된다. 즉 과거 빈민국에서 엄청난 성장을 통해 비록 선진국은 아니지만[88] 중견국, 지역강국 수준의 경쟁력을 가지게 된 입장으로 단숨에 급부상하게 된 한국을 바라보면서 다른 많은 국가들에서도 올림픽 개최 자체에 대해 회의적인 견해만이 아닌 나름대로 시도해볼만하다는 긍정적인 평가들을 내리게 된 것이다.[89][90]
당장 88년 올림픽 개최지의 경쟁 도시였던 나고야는 일본 정부가 나서서 유치전을 지휘했다기보다는 체육계 인사와 나고야 시 차원에서 올림픽 유치 위원회를 발족시켜 진행시킨 반면, 대한민국은 정부 주도하에 많은 신경을 쏟았고. 대회 유치와 흥행 성공과 함께 많은 의의를 남기게 되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즉 유치 이전부터 이루어진 단순 수도 혹은 대도시를 중심으로 한 도시 차원의 계획만이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 올림픽 유치에 지원을 아끼지 않는 모습을 선진국도 아닌 개도국을 넘어 신흥공업국으로 진입한 대한민국의 대회 성공을 많은 국가들이 지켜보았고, 사실상 성공적으로 대회를 유치시키고 결과를 낸 서울 올림픽을 두고 많은 나라들이 주목하게 된 것은 실로 당연한 수순이 되었다.
한국과 크게 다를 것이 없던 여타 개발도상국들에게 있어 큰 영향을 주었다. 그 중 중국(중공)의 경우, 본격적으로 국가로서 인정받은 80년대 후반 이후부터 1990 베이징 아시안 게임 개최와 무려 2000년 올림픽이 개최되는 시드니와 연장전까지 가는 박빙의 경쟁구도 유치전을 벌이고, 결국 2008 베이징 올림픽 유치와 개최 성공으로 결실을 맺으면서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또 막강한 경제력과 경쟁력을 가지고 있던 선진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들에게도 세계 대회의 성공적인 유치와 확실한 결과를 내기 위해서는 도시 단일의 노력만이 아닌 국가의 역량을 총동원해야함을 일깨워주게 되었다. 사실상 서울 올림픽은 많은 국가들에게 있어 올림픽 개최 성공의 최근 사례이자 대표적인 직간접적 교본이 된 것이다.
1988년 서울 올림픽부터 범국가적으로 올림픽을 개최하는 추세는 1992년 올림픽 개최지 선정부터 바로 드러나게 되었다. 21세기에 들어서 2012년 하계 올림픽 개최지 선정 당시 영국 총리 토니 블레어가 런던 올림픽 개최에 대해 직접 프리젠테이션을 했던 것과 2014 동계 올림픽 유치 과정에서는 유력 도시였던 소치와 평창의 각 유치 지역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노무현 대한민국 전 대통령이 직접 나서는 초유의 사태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에 급기야 IOC에서 "국가 원수의 프리젠테이션 금지를 명문화하자"는 이야기가 언급되고, 일부 암묵적인 룰과 같이 여겨지는 계기가 될 정도로 올림픽 유치 열기가 과열된 것이었다.
이렇듯 서울의 이러한 성공적 올림픽 개최의 사례를 통해서, 국가적 위신을 높일 수 있다는데 착안한 다른 개발도상국들, 심지어 소위 선진국들까지도 개최에 국가적인 역량을 집결시키기에 이르게 된다. 이로써 올림픽 유치를 단순 도시 수준이 아닌 국가적 차원에서 개최 지원을 시작하게 된 것은 서울 올림픽이 최초는 아니었지만 가장 최근을 대표하는 사례가 되었고, 그간 흔들리던 올림픽 개최 운동의 일대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를 증명하듯 서울 올림픽 이후부터 대회 규모와 스케일이 비약적으로 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동안 개최 후보국에게 준비자금도 다 부담하게 하고 수익 대부분을 차지하던 IOC 갑질에서부터, 여러모로 경제적으로 올림픽 개최에 대한 부정적 여론도 커져 올림픽 개최에 대하여 여러 나라에서 여론 반발도 커지고 있다. IOC는 부랴부랴, 개최 후보국들에 모두 부담하던 돈을 이젠 IOC가 맡기로 하고 개최국 자유로 정식 종목을 추가로 임시 늘리면서 달래고 있을 판국이다. 덤으로 또 올림픽 자체가 몇몇 국가들에 의해 전형적인 선전을 위해 개최되고 있어 여러 부정적인 부분들을 드러내고 있고,[91]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를 계기로 경제적 수익도 적고, 전염병 여부로 이제 관광업도 활성화 되지 못하는 터라 올림픽 개최에서부터 여러 국제 스포츠 대회 개최 여론이 꽤 쇠퇴하게 된다. 2020 도쿄 올림픽도 그렇고, 오스트리아나 캐나다에서 겨울 올림픽 개최에 돈낭비라고 여론이 반발이 심해 개최를 포기한 사례도 그렇고, 당장 우리나라에서도 2000년대부터 부산 올림픽을 개최하겠다고 때에 따라 언급되고 있음에도, 여론 자체가 미적지근했다.
16.3. 대한민국의 발전상 및 각종 영향
16.3.1. 냉전 종식의 밑거름
1980 모스크바 올림픽과 1984 로스엔젤레스 올림픽이 냉전[92]으로 인해 각각 진영에서 보이콧을 선언하면서 그저 반쪽 대회가 된 것과 비교하여 서울 올림픽은 당시 사상 최다의 참가국(160개국), 최대 참가인원(8,465명)을 자랑했다.[93] 이 대회는 특히나 과거 6.25 전쟁, 베트남 전쟁으로 대표되는 공산주의-사회주의 진영과 자본주의-자유민주주의 진영간의 첨예한 대립을 벗어나 냉전시대가 녹아가고 화해의 무드와 진정한 의미의 데탕트가 전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의미로 확실하게 탈냉전 시대의 도래라는 상징적인 의미로 해석할 수 있었다.[94] 비록 북한은 올림픽을 반대하면서 불참을 선언하고 테러를 일으켰지만[95] 남한에서의 올림픽 개최, 그리고 이후 냉전의 종식을 고하는 주제곡 "손에 손 잡고(Hand in Hand)" 또한 그러한 의미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96]뿐만 아니라 공산권의 국기 게양 및 국가 연주가 이 대회에서 정상적으로 이뤄졌는데, 물론 국제 스포츠 대회의 대명사인 올림픽 특성상 정치 문제와 철저히 거리를 두는게 당연하다지만, 당시의 대한민국 자체가 이념 대립에서 비롯된 전쟁이 끝난 지 40년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의 철저한 반공 국가였음을 감안하면 공산권 국가의 여러 상징을 접한다는 것 자체가 경천동지할 법한 광경이었다. 그런데도 경기장을 가득 메운 한국인 관중이 소련, 동독, 중국을 비롯한 여러 공산권의 국가 연주 및 국기 게양 시 적대적인 반응은 커녕 오히려 선수단에게 호의적인 반응을 보여줬으며, 이는 곧 대한민국도 냉전 체제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상징하는 대목이기도 했다. 게다가 이는 북한의 불참으로 인해 더 돋보이는 측면도 있었는데, 만약 북한이 참가했더라면 대한민국 곳곳에 인공기가 게양되고 만약 금메달이라도 땄다면 북한 국가까지도 연주되었을 테지만, 북한 스스로 이 기회를 날려버렸다.
한편으로는 서울 올림픽이 동유럽 공산 정권 붕괴에 간접적인 기여를 했다고도 해석이 가능한데, 특히나 북한의 악의적인 프로파간다(선전)로 인해 대한민국을 헐벗고 굶주린 나라로 그동안 익히 알고 있었던 동구권의 동유럽 공산 국가들이 서울 올림픽을 통해 오히려 자유민주주의·자본주의 진영이자 시장 경제 체제를 도입하여 초고속 경제 성장을 이룩하여 자국보다도 더 풍요로운 대한민국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은데서 시작된 것이 지배적으로 나타난다.[97][98] 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공산 국가인 중국과 베트남 역시 마찬가지로, 서울을 거지 떼가 득실거리고 판자촌이 난무하는 빈민가 천지로 여겼는데[99] 정작 개회식 및 여러 보도를 통해 접한 서울의 모습이 도리어 자국의 번화한 도시보다 넘사벽으로 화려한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특히 당시의 중공이 2년 전인 1986 서울 아시안 게임에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는데, 올림픽 개최 4년 후인 1992년 한중수교 이후에 만난 한국인들에게 서울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을 언급한 중국인들이 많았다고 한다.
여담으로 사실 이 시기 1인당 국민 총생산(GNP)을 보면 1987년 기준으로 소련과 동독 모두 한국보다도 높았다. 그냥 높은 게 아니라 2배 이상인 $8,000~9,000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 이외의 동구권 유럽 국가들은 과거 미국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국가에 대한 봉쇄정책과 1980년대에 들어서 등장한 오일쇼크와 관련된 여파를 겪으면서 10년 넘게 경제가 침체 중이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그나마 유일하게 살만했다는 소련도 1980년대 중반 유가의 하락으로 경제가 하락세에 접어들었고,[100] 그나마 소련에 이어 두 번째로 잘살고 있던 동독은 그나마 서독, 일본과 교류를 통해 경제를 유지한 상태였다.
여기에 공산권 국가 특유의 고정환율에 의해 GNP 수치가 표기된 것도 고려해야 하는데, 일례로 1989년 당시 동독의 1인당 GNP는 무려 $13,000로 같은 시기 $6,000에 조금 못 미치는 (IMF 통계 기준 $5,927, 세계은행 통계 기준 $5,817) 대한민국의 2.2배 남짓이었지만 이는 동독 마르크와 서독 마르크를 1:1로 환산한 결과에 불과하였고,[101] 비공식 환율대로 환산하자면 $4,500 수준으로 오히려 한국보다 더 낮았다. 물론 공산주의 국가답게 동독의 생필품이나 공공요금, 임대료가 월등히 싸다는 걸 감안하면 동독의 구매력이 형편없다고는 말할 수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사치품을 사려고 한다면 발품을 팔아야 했다. 실제로 이 무렵 동독을 다녀온 서독 국민들은 "1인당 GNP $13,000의 나라가 왜 이리 못 사는가?"하고 의아하게 여겼다고 한다. 즉, 동구권 유럽 국가들 중에서 가장 형편이 좋았던 소련과 이러한 소련을 제외한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 위성국가들 중에서도 가장 경제력이 부흥했던 동독의 실질적인 경제 상황도 GNP 지표 수치와는 다르게 오히려 한국보다 우세한 상황이 결코 아니었던 것이고, 한국의 경제력과 국민 개개인의 생활수준이 동독, 소련 같은 동구 공산권의 대표적인 경제대국들과 맞먹거나 오히려 더 우위에 있었던 것이다.[102]
반면 한국은 일제 치하 35년의 긴 식민지 강점기를 지낸 것도 모자라 올림픽이 개최되기 불과 40년도 안 되었을 때 6.25 전쟁으로 인해 전 국토가 순식간에 쑥대밭이 되면서 전쟁 이전으로 복구되기까지 최소 100년은 걸릴 것이라는 추측이 나올 정도로 세계 최악의 빈민국 중 하나로 전락했음에도[103] 1970년대까지만 해도 별 차이 안 나던 공산주의 국가들을 추월하여 더 잘 사는 경제를 꾸려나간다는 걸 서울 올림픽을 통해 전 세계에 알린 것이다.[104][105] 고로 그간 수십여 년간 사회주의·공산주의 체제를 고수해 온 국가들은 한국을 본 뒤 자신들이 채택한 체제에 대한 회의감과 환멸감이 절정에 다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들 국가들은 이와 같은 시대와 역사의 흐름 속에서 자유시장 경제체제를 받아들이는 행보[106]를 이어가면서 결과적으로 이듬해인 1989년 동구권 공산정권 국가들의 연쇄 붕괴의 신호탄과 1991년 12월 소련의 해체로 말미암아 이념의 대립 경쟁에서 사회주의의 패배로 이어졌다.
그리고 한국이 폴란드 및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유고슬라비아, 체코, 슬로바키아[107] 등의 사회·공산주의를 위시한 동유럽 국가들과 대대적인 수교를 펼치기 시작한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의 시작 역시 1989년부터였으니, 사실상 1988년 서울 올림픽의 영향이 아예 없었다고 말할 수가 없을 정도로 올림픽 이후 일이 수월하게 돌아갔다. 고로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로 인해 전쟁과 기아, 가난이라는 키워드로 그간 알려져 있던 대한민국의 이미지가 크게 달라진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고,[108] 뿐만 아니라 국제 무대에서 한국의 외교력과 위상을 높이는 큰 계기가 되었다. 한마디로 한국이 성년에 진입하였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다.
16.3.2. 독재정권 종식 및 정치적 변화
또한 전두환의 제5공화국 정권의 종식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109] 당시 전두환 정권은 집권기간 내내 민주화 운동을 '좌경폭동'으로 매도하며 탄압했으나, 1987년 6월 항쟁 이후 사실상 항복을 선언했고 이후에 대통령 직선제로 개헌을 했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올림픽이었다. 올림픽 개최까지 불과 1년도 안 남은 상태에서 더 큰 유혈사태로 번진다면 대규모 보이콧 사태를 맞고 올림픽 개최 자체를 포기해야할 수도 있다 보니 전두환이 어쩔수없이 물러 나고 직선제를 수용한 것이다. 전두환 정부는 1981년부터 올림픽 개최를 통해 정권의 정당성을 홍보하려 했으니, 사실상 전두환 정권의 선전, 즉 프로파간다 목적으로 올림픽을 자기 입맛으로 어용하려는 것이었다. 전두환 정부는 아시안게임 및 올림픽 개최 준비를 하면서 이를 명목으로 들어서 야당과 민주화 운동 진영에서 논의되던 민주화 논의를 무시하고 있었다. 4.13 호헌조치를 발표했을 때도 서울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라는 이유가 들어가 있었다.
그러다가 1987년 6월 항쟁이 일어나자 전두환 정부는 본인 후임자를 선출하는 차기 대선을 6개월 앞두고 계엄령 선포 및 시위대 유혈 진압을 계획했다.[110] 그러나 이미 올림픽으로 외신들이 한국에 많이 들어와 있고 김수환 추기경, 정의구현사제단 같은 가톨릭계도 적극적으로 나서는 상황에 계엄령을 선포했다간, 곧바로 대규모 보이콧 사태에 직면하고 올림픽 개최가 취소와 더불어 개최지가 변경되면서[111] 지금껏 모든 수고가 수포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았다. 결국 정부는 시민의 압력에 굴해 6.29 선언을 발표해 민주화 개헌을 추진해야만 했다. 정권에 도움이 되라고 유치한 서울 올림픽이 오히려 정권의 명줄을 끊은 셈이었다.[112]
전두환 정권이 5.18 민주화운동 당시처럼 시민들을 유혈 진압해서 6월 항쟁을 끝냈다면, 바티칸의 교황청이 유럽과 라틴아메리카의 가톨릭 국가들에게 서울 올림픽의 전면적인 보이콧을 호소할 계획이었다고 한다.[출처필요] 함세웅 신부는 "만약 명동성당의 농성을 유혈 진압했을 경우 전 세계 1/3을 차지하는 남미 가톨릭 국가가 올림픽을 보이코트할 가능성이 농후"했다고 주장한다.[114] 게다가 앞서 상술했듯 IOC에서도 당시에 개최국 변경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었다고 한다. 자유주의 진영의 리더로서 공산권에 대한 견제 효과를 노린 미국의 입장에서도 서울 올림픽이 무산되면 뒷목을 잡을 일이라서 과거 5.18 민주화운동 때와는 달리 묵인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전두환을 압박했다.[115] 이런 국제적 압박 속에 올림픽 때문에 외신 기자들도 잔뜩 방문한 판국이라서 올림픽만큼은 어떻게든 개최해야만 했던 전두환은 결국 유혈진압을 포기함으로써 사실상 항복을 선언한다.
게다가 노태우가 '관중들이 전두환을 보고 야유를 하는걸 외국인들이 보면 국제망신이 될 수 있다'는 이유로 전두환을 올림픽 개회식에 참석 못하게 하는 아이러니한 일도 발생한다. 전두환은 결국 노태우가 올림픽 개회선언을 하는 것을 자기 집에서 TV로 지켜만 봐야했다.[116] 그리고 이때부터 전두환과 노태우의 관계는 험악일로를 걷게 된다. 이는 화합의 대제전인 올림픽이 오히려 두 사람의 사이를 완전히 갈라 놓았던 것이다. 그리고 또한 이것이 결국 백담사행의 서막을 올리게 된다. 그리고 서울 올림픽과 그 뒤 시작된 동구권과 소련의 붕괴는 한국 국내 강경 좌파 그룹들의 속성을 크게 변화시켰다. 사회주의보다는 사민주의를, 사민주의보다는 자유주의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늘어났으며, 그 가운데 가장 격렬한 변화는 민중당 계열에서 일어났다.[117] 운동권 출신 재벌총수 이의범 SG그룹 창업주도 해당 올림픽을 계기로 노동운동을 접었다고 밝혔다.
제5공화국(전두환 정부)에 반대했던 인사들도 서울 올림픽에 대해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은 1990년에 낸 자서전 <장정> 4권에서 올림픽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는 한편, 3년 전 자신을 총장직에서 쫓아낸 전두환에 대해서 "독재자로서 죄가 많지만, 올림픽 유치와 물가안정 등 공로도 있다"고 평가했다.[118]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도 1988년 9월 22일 중앙일보 창간기념 특별 서면회견에서 "올림픽으로 고양된 국민의 자부심과 사회의 다양성, 민주화의 자신감은 소수 군인들의 쿠데타 및 좌경민중혁명을 없앨 수 있다"고 발언했다.[119] 조영래 변호사도 서울 올림픽을 가리켜 "한민족 5000년사에 길이 남을 엄청난 쾌거"라고 평가한 바 있다.
16.3.3. 올림픽에 따른 각종 변화
공산권뿐만 아니라 서방세계에서도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대한민국의 경이로운 발전상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예외적으로 일본의 경우는 이미 1970년대부터 중고등학생 수학여행단을 비롯하여 수많은 관광객이 방한했기 때문에 그야말로 알거지 수준이었던 8.15 광복 직후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발전하는 대한민국의 실상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지만,[120] 미국이나 서독,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캐나다 등의 북미·유럽은 여전히 대한민국에 대한 정보가 한참 모자란 상황이었기 때문에 서울 올림픽은 서양인들에게 그야말로 엄청난 임팩트 그 자체로 비춰질 수밖에 없었다.심지어, 서울 올림픽은 북한 사회에서도 커다란 충격을 줬는데 북한이탈주민 출신의 도명학 작가는 출신성분도 나름대로 괜찮았던데다 대학교에서 교수직을 역임하면서 작가로 일을 하고 있었을 정도로 괜찮은 직업도 있었다. 그러나, 북한에서 친구와 같이 몰래 중국 방송으로 서울 올림픽이 방영되고 있는 장면을 봤는데 여기서 한국의 엄청난 발전상을 바라보면서 "아니, 어릴 때부터 서울에서는 거지들만 살고 있다고 배웠는데 어떻게 남조선에서는 강대국들만 하는 올림픽을 개최했는가?[121]미국과 소련이었으니 충격이 더 크게 다가왔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못사는데 서울은 저렇게 높은 건물도 많고 국민들도 잘 먹어서 영양 상태가 저렇게 좋은 것인가? 내가 북한 사회에 속았다!" 라는 의문을 품었고 얼마 안 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것을 바라보고 북한의 체제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에 배신감을 느껴서 탈북을 선택했다고 한다.#
그리고 1980년대 중반 들어서는 3저 호황에 따라 자산시장이 활성화되고 자가용이 차차 보급되기 시작했을 때였고, 사실상 서울 올림픽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공산권이든 서방권이든 가리지 않고 대외적으로 세계에 광범위하게 알린 대회이자 기폭제였다는 사실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122] 서울 올림픽 이후 도래한 1990년대 대한민국은 1997년 외환 위기에 직면하기 이전까지는 마치 1970~80년대의 일본처럼 그저 미래가 긍정적이던 국가였고, 당시 수많은 국민들이 이를 모두 인식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훗날 이 시대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번영을 누렸다고 회자되었던 시기였다.
사실 이 하계 올림픽 대회가 성공적으로 개최될지에 대한 여부는 해외에서는 물론이고 국내에서도 마찬가지였으며 미리 서두에서 부분적으로 설명이 되었지만 처음에는 정부 당국에서도 올림픽 개최에 회의적인 시선이 많았다.[123] 그러나 예상보다 빠른 시기에 성공적으로 올림픽이 개최되고 끝나면서, 대한민국의 경제 발전 신화의 큰 이정표가 되었다. 즉, 일본이 24년 전인 1964년에 먼저 올림픽을 개최하면서 누린 것과 거의 똑같은 효과를 본 것이다. 무엇보다도 당시 기준으로 독립한 지 고작 반 세기도 안 되었고, 1960년대까지만 해도 세계 최빈국이었던 나라가, 그나마도 한 차례 전 국토가 폐허가 되는 끔찍한 전쟁까지 겪으면서 재건되기까지 최소 100년은 더 걸릴 것이라고 여겨지던 국가가 한강의 기적이라는 말로 대표되는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루고 올림픽까지 개최했다는 사실은 이데올로기를 비롯한 각종 이념과 예상을 뛰어 넘고 전 세계를 그저 놀라게 하기에 충분한 일이었다.[124]
서울 올림픽의 성공과는 반대로 1989년 동구권 유럽 국가들의 붕괴, 1990년 서독과 동독의 통일, 1991년 소련의 붕괴로 공산진영은 자유진영과의 그간 체제 대결 구도에서 완전히 패배하면서 일부 국가를 제외하고 공중분해되었으며 이와 더불어 한국의 운동권은 크게 쇠퇴하게 된다.[125] 또한 본격적으로 혁신적인 정책보다 보수 안정을 추구하는 중산층이 늘어난 것도 올림픽의 여파라고 분석하는 경우도 있다.
당시 국내적으로는 1980년대 중반부터 엔화의 고점 현상과 3저호황도 함께 몰아닥쳤고 이 시기를 전후해 내수경제가 급신장했다. 기본적으로 3저호황의 영향이지만 1987년 6월 민주 항쟁 이후에 일어난 노동자 대투쟁으로 1988년 최저임금법 제정이 되어 임금이 높아진 영향도 있다.
특히 상업적인 부문에 있어서 광고시장이 크게 성장하고, 가처분소득이 크게 늘어나며 자가용 승용차가 1988년에 100만 대를 돌파한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대중화되기 시작했고, 외식부분도 괄목할 성장을 기록했으며 또한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가 이뤄지면서 여가산업이 크게 번창하여 많은 부분에서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 3저호황으로 이른바 1인 1차 시대라 부를 수 있는 마이카 시대가 열렸고 이에 따라 레저산업과 부동산 경제 활성화 및 각종 경제가 급성장한다.
올림픽 개최와 더불어 장발과 미니스커트 착용에 대한 단속이 중단되고 야간 통행금지 조치가 전면 해체되는 등 외부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이전에 비해 문화에 대한 제한이 상당부분 풀리고, 이미 앞서 언급된 내용처럼 프로 스포츠의 성행과 올림픽 준비과정에서 지하철과 도로, 경기장 건설, 서울 외곽지역 재개발 및 한강정비사업 등 각종 인프라 공사를 진행했기 때문에 올림픽 자체만으로도 문화적인 부분에서 변화가 컸지만, 때마침 올림픽을 앞두고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그간 한국 언론과 문화계를 억누르던 각종 정치적인 검열과 법적인 규제가 철폐되거나 완화되었다.
1997년 외환 위기 이전까지 당시의 생활환경부문에서 상당하게 변화했다. 사실 이 시기부터 대한민국이 일반 개발도상국을 넘어 선진국으로서 도약을 위한 변화를 많이 준비했다. 예를 들면, 그동안 경제발전에 집중했던 대한민국의 대기오염에 대한 실태와 개선 노력에 국가적으로 나선 계기가 이 올림픽 준비과정에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IOC에서 올림픽에 관련하여 대기오염 문제에 대한 개선 및 각종 요구사항이 내려오기도 했다.[126][127] 88올림픽 전후 서울의 도시미관 변화
또한 서울 올림픽 유치 이전부터 이미 신군부 세력의 제5공화국은 정부 출범 이후 사람들의 관심을 정치에서 떨어뜨려 놓기 위한 우민화 정책인 3S 정책을 실시하였는데, 그 중 특히 스포츠를 적극적으로 장려하였고,[128] 국풍81 등 각종 대형급 문화 행사들을 연달아 기획했다.[129]교통과 통신 면에서도 큰 발전을 볼 수 있다. 서울 지하철 2호선, 수도권 전철 3호선, 수도권 전철 4호선, 부산 도시철도 1호선이 올림픽 개최 전에 개통되면서 1기 지하철 계획을 성공적으로 완성하였으며, 동차형 새마을호 열차가 올림픽 대비용으로 제작되었다. 또 대한항공의 현행 하늘색 도색도 88 올림픽을 준비하던 시기에 도입되었다.[130] 카드형 공중전화 도입도 서울 올림픽을 위한 중요한 시설이었다.
또한 민주화에 따른 언론기본법의 폐기에 따라 신문발행이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뀌어 각종 신문과 잡지들이 신규로 창간하거나 복간되었고 12면으로 묶여있던 지면제한도 폐지되어 16면으로 발행면수가 증가했다. 특히나 기존 신문기본법이 적용되었던 1987년까지는 자원 및 외화낭비 방지라는 명목으로 신문지면 제한을 해서 특정한 날이 아니면 신문지면을 1일 12면씩만 발행할 수 있었고, 신문과 잡지도 마음대로 발행하지 못했지만 이러한 규제가 풀림으로써 언론계 입장에서는 광고비를 잔뜩 챙겨먹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생기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실제로 한겨레신문을 제외한 주요 언론매체들은 올림픽 특수를 광고 수익과 연결시켜 신문 쪽수를 하루 8면씩, 특히 경제지는 +4면씩 증면시켜 막대한 광고비로 짭짤한 수익을 올렸으며, 올림픽 특수의 맛을 본 주요 신문사에서 광고수익의 증가를 위해 신문지면을 적극적으로 늘리기 시작하면서 1990년대 중반에 이를러서는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한국일보[131]에서 발행부수를 48면까지 늘리고 다른 여타 언론사에서도 기본 20~30면으로 크게 늘어났다. 이에 따라서 신문광고 시장이 크게 번창했으며 신문에서 광고가 차지하는 비중이 급속히 늘어났다.
다만 방송광고시장은 생각보다 성장을 못했는데, 토요일 낮방송 허용을 제외하면 올림픽 이후로도 TV 방송시간 연장이 제대로 이루어지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상대적으로 못했다는 것이지 자가용 보급으로 라디오 방송 수요가 다시금 늘어나면서 풍선효과로 라디오 광고시장은 크게 성장했다. 기독교방송이 6월 민주 항쟁으로 보도기능을 회복했으며, 그 외의 종교방송이 개국되기도 했다.
생활환경 또한 급변했다.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당시 공중화장실 시설이 열악하기 짝이 없었던 데다가 설치했다 하더라도 관리가 잘 안되어 불결하기까지 했기 때문에 공중화장실을 이용하기 매우 불편했는데, 올림픽을 앞두고 공중화장실 시설을 대대적으로 확충시켜놓았다.[132]
올림픽을 앞두고 1988년 5월 20일에 도입된 바코드의 국가코드 '880'의 의미가 바로 이 서울 올림픽이 개최된 연도를 모티브로 하였다.
또한 패스트푸드가 활성화되어 가기 시작하는 등 외식문화가 진화단계에 접어들었고, 자국에 찾아올 외국인 관광객이 우리나라 음식을 전혀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한국전통음식에 대한 홍보를 위해 서울시의 음식점 대부분에 필수적으로 점포 밖에 음식 샘플을 비치하라는 당시 정부의 지시가 내려졌다.[133] 특히 9월에 올림픽이 개최되었기에 당시 날씨가 날씨였던지라 실제 음식을 두면 부패하기 때문에, 음식에 왁스를 넣고 가열하여 굳힌 모형음식 일명 '밀랍 음식모형 기술'을 일본에서 들여와 최초로 도입시켰고, 거기에 커피 자판기도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확산되었다.
게다가 올림픽 특수를 크게 탄 건 요식업, 숙박업, 관광·레저, 스포츠·여행장비 등 여가산업들이었는데, 당시 재벌기업들은 관광호텔 및 레저시설 건축 등 관광·레저사업과 스포츠용품·의류 등에까지 뛰어들었다. 당시 쌍용그룹 계열인 평창 용평리조트가 그간 10년 적자를 내다가 살아난 게 그 대표적인 예시였다. 이러한 대대적인 붐은 1990년대 중반까지의 국민소득 향상에 근거한 '여가의 상품화'에 편승했다는 견해도 있지만, 당시 기업들이 급증하던 노사문제로 리스크를 겪을 제조업 대신 인력 적고 관리가 편한 레저산업을 택했다는 측면도 있다. 더 나아가 골프장 개장과 허가 수도 1988년 들어 16개월 간 99개로 급증해 기업가들의 부동산 투기 열풍을 조성했다.
그리고 올림픽 유치를 기반으로 1980~90년대부터는 스포츠 기업인 아디다스, 그리고 라이벌이었던 나이키 및 외국 의류 기업 휠라, GUESS. 요식업계 기업인 KFC, 맥도날드, 피자헛 등등을 포함해 분야를 막론하고 각종 수많은 외국 브랜드 기업들이 대규모로 새롭게 입점하기 시작한다.[134]
16.3.4. 제3세계와 외교를 통한 저변 확대
미국과 같은 서방 세력과의 교류와 협력이 돈독해지고 91년 남북한 동시 유엔 가입등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었던 것과 그간 '적성국가'로 여겨지던 소련을 포함한 동구권 국가들 및 중공과 같은 공산주의 체제 국가들과의 수교 뿐만 아니라 반대로 중동 지역의 경우 197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중동 건설에 관한 대대적인 붐이 일어남으로 말미암아 1980년대 초에는 이미 우리나라의 다수의 유수 기업들이 대거 진출하여 한국인 특유의 성실함과 끈기로 현지인들에게 한국이란 나라를 대개 부지런한 국민성을 거론시킬 정도로 긍정적인 이미지를 각인시키고 있었다.거기에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전두환은 서울 올림픽 유치에 이바지하면서 성공을 도와주었던 국가들에게 관심을 갖게 되는데 이는 즉 당시 미국과 유럽과 같은 선진국 및 강대국들 못지 않게 새롭게 중동 및 아프리카 등의 제3세계 국가들과의 외교에 저변활동을 늘리는 것과 같은 상당한 공을 들이게된다. 물론 박정희 정부 때에도 체제경쟁과 석유수급을 이유로 제3세계 국가들에게 손을 내밀었기는 하지만 세계적인 축제를 개최한 만큼 더욱 공을 들이게 된것도 사실이었다. 또한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도 등장했던 1983년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을 중심으로 당시 국내 정세 및 현안이 너무 복잡했었던 까닭에 당시 전두환은 일정에 잡힌 제3세계 관련 순방외교를 취소하려고 했으나,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장이었던 노신영이 이들 제3세계 국가 덕분에 우리가 올림픽을 유치한 것을 생각하여 볼 때 절대 무시할 수 없다고 전두환을 설득해 결국 순방외교를 이어가게 한다. 심지어 북한과 수교국이었던 버마(미얀마) 순방 도중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라는 초유의 참사가 있기도 했지만 순방은 계속되었다.[135] 그리고 이와 별개로 국력 신장과 더불어서 이후 동남아시아권 국가나 서남아시아권의 국가들과도 교류가 이어지고 이를 통해 대한민국의 외교력은 한층 더 성장하였다.
16.3.5. 대한민국 전산 기술의 발전
'자이온스'란 이름의 올림픽 전산 시스템을 국내에서 개발해 사용했다. 카이스트 부설 시스템 공학센터에서 개발을 결정. 당시 88 올림픽까지는 5년 정도의 기간이 주어진 상황이었지만, 올림픽 조직위원장 노태우를 설득하기 위해 3개월 만에 거의 완성된 시스템을 만들었다. 그것으로 1983년에 64회 전국체전을 운영해 냈고 그리하여 올림픽 전산 시스템의 개발을 승인받았다. #1 #2 #3다만 아쉽게도 이 전산 시스템은 올림픽이 끝난 후 관심도가 빠르게 사라졌고, 개발 인원들도 하나 둘 대기업 연구원이나 대학교수 등으로 흩어지면서 사실상 일회성 시스템으로 끝나게 되었다.
17. 총평
이처럼 서울 올림픽은 분명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적 차원에서도 수많은 다변화의 과정을 만들어냈다. 이에 물론 과거 도시 재개발에 따른 철거민에 관한 문제와 노동자의 노동착취, 부동산 투기 등 당시 만연했던 한국 사회의 우울한 자화상과 각종 부정적인 문제점들을 모두 감추거나 모조리 무마시켰다는 비판이 이어지기도 하나, 또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면 올림픽이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안전한 지지대와 사회 발전의 촉매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또한, 서울 올림픽은 그동안 치러졌던 역대 올림픽 가운데서도 그 자체로 큰 의미를 지녔으면서, 개요부터 언급되었던 대한민국의 역사와 올림픽의 역사를 비롯하여 나아가 전 세계의 역사적 흐름마저 송두리째 뒤바꿔놓은 몇 안되는 올림픽으로 남게 되었다.참고로 1970년대 말, 실제로 추진되었던 충청남도지역 신행정수도 건설, 그러니 현재의 세종특별자치시 건설 도시에 관한 계획에, 1996년 올림픽 주 경기장 부지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당초 계획은 새로 지어질 행정수도의 정책에 따라 1988년, 1992년 유치전에 참여하여 국가와 신행정수도의 인지도를 높인 이후 1996년 올림픽 유치에 승부수를 띄우려는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만약 자국 내부의 사정에 따른 상황과 IOC의 의견을 수용해 1990년 중반대로 올림픽 개최를 연기했더라면, 그리고 각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1996 애틀랜타 올림픽, 2000 시드니 올림픽의 개최국이 어디였는지를 생각해보면, 당초 계획보다 경쟁을 피해 대회를 빨리 유치했었던 선택이 오히려 여러 방면에서 신의 한 수가 되었다는 관측이 많다.[136] 서울이 1988년 개최에 도전하지 않고 1996년 개최에 도전했으면 1981년보다 1990년 대한민국의 경제력은 더 좋았겠지만, 무조건 밀렸을 거라는 가설을 내세울 수 있다. 그리고 만약에 이를 더 미루었다면 역사가 바뀌지 않는 이상 엄청난 사건에 직면했을지도 몰랐을 것이고 거기에 더 이상 개도국의 후보지로서 여러 강점 및 메리트와 경쟁력이 사라지지 않았을까라는 부정적인 관측에 대한 유추가 가능하다.
그 때문에, 당시 노신영 외무장관은 적극적으로 올림픽 유치를 시도하였던 것이다. 또한 노 장관은 20세기가 지나면 중국이 급부상할 것이라고 내다보았으며, 우리가 1988년 올림픽을 유치하게 되면, 올림픽의 대륙 간 안배원칙을 고려할 때, 구미권 즉 서양의 선진 국가들은 12년 만에 아시아에서 다시 올림픽이 열리는 걸 탐탁치 않게 여길 것이기 때문에, 중국의 2000년 올림픽 유치를 크게 견제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을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견해를 바탕으로 1988년에 올림픽을 치렀던 것은, 21세기인 지금에 와서 보면 말 그대로 선견지명이 낳은 신의 한 수가 되었다.
즉 서울 올림픽이 한국 스포츠계의 발전과 단순 국제 대회라는 의미의 범주를 넘어, 전 세계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다시 상기해본다면, 또 올림픽 개최가 제대로 성사되지 못했더라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판도와 역사가 또 어떻게 바뀌었을지 실로 아찔한 대목이 아닐 수가 없다.
18. 방송
NBC 올림픽 엔딩 |
- 원래 대부분 개회식은 밤에 하는 것이 관례인데, 한국의 오전 11시가 미국의 프라임 시간인 저녁 시간대라서 NBC 방송의 요구로 대낮에 열렸다는 이야기가 많이 퍼져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서울올림픽까지는 모든 올림픽의 개회식이 낮에 열리는 것이 관례로 당장 바로 직전인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개회식도 현지시간 정오에 시작하였다. 이 관례는 4년 뒤에 열린 1992 알베르빌 동계올림픽 때 개회식을 저녁에 열면서 깨지게 되었고, 그 이후에는 계속 개회식이 밤에 열리고 있다. 사실 밤에 개최하면 다양한 조명 효과를 연출할 수 있기 때문에 더 효과적이다. 중간에 1998 나가노 동계올림픽 개회식이 낮에 열렸기 때문에 서울올림픽은 개회식이 낮에 열린 마지막 하계 대회이다. 하지만 NBC의 요구로 주요 결승전이 한국의 프라임시간보다 약간 뒤인 오후 9시에 치러지진 것은 사실이며, 미국인들에게 인기 있는 몇몇 종목은 자정이 지난 후 결승전이 끝나기도 하였다.[137]
- 1988년도 BBC Olympic Grandstand는 서방세계 제도권 방송사 타이틀에 한글이 등장한 거의 유일무이한 사례. 붉은색 한글로 '한국'이라고 써놓았는데 이 로고는 대회 내내 전 영연방에 방송되었다. 관련 영상
- 미국 프로그램 젠장뉴스에서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한강대교 보수공사를 하던 도중에 군인들을 동원했는데 군용 헬리콥터가 장비를 운반하다가 추락하면서 폭발하여 군인 4명이 사망했다는 내레이션과 같이 동영상(33초부터)을 방영한 바 있다. 그런데 이건 올림픽 이전이 아니라 2001년 5월 29일에 올림픽대교 위에 성화모양 상징물을 올려달라는 서울시의 협조 요청에 군이 응하여 치누크 헬리콥터로 장식을 올리는 데는 성공했으나, 다리 위에서 하강 기류가 발생하여 뜨지 못하고 계속 하강하다가 결국 다리 구조물과 장식에 충돌하여 추락 및 폭발한 사건이다. 이 프로그램이 잘못된 정보를 보여준 경우이다.
- KBS는 개막 전부터 ID마다 '서울올림픽 앞으로 XX일'이란 문구를 대문짝만하게 내걸었고, MBC는 개회식 당일 ID에서 서울올림픽 개막 시간인 오전 10시에 맞춰 북소리를 내기도 했다.
- 개회식이 열린 1988년 9월 17일 MBC 뉴스데스크의 강성구 앵커와 KBS 뉴스 9의 박성범 앵커 모두 1988년 9월 17일을 강조하는 멘트로 뉴스를 시작했다. 보통은 x월 x일 x요일로만 얘기하지만 올림픽 개회식이 대한민국 역사의 한획을 긋는거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막강한 존재감을 자랑하다보니.....
- KBS 뉴스 9의 경우 올림픽 기간동안 아예 올림픽 경기/행사 장면을 배경으로 오프닝을 내보냈다(위 영상). 특히 이 때 쓰인 오프닝 음악은 오히려 1990년대보다도 더 낫다는 평을 받는지라 올림픽 기간에는 더욱 그 간지를 자랑한다.
-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올림픽 대회 기간에는 방송 2사가 뉴스와 한두 개 정도의 드라마, 교양프로를 제외하고 하루 종일 올림픽 경기를 보여줬다. 심지어 올림픽 기간 중에는 교육방송인 KBS 3TV(현재 EBS의 전신)조차도 매일 정규방송 말미에 외국인을 위한 올림픽 안내프로그램을 영어와 프랑스어로 송출하고, 정규방송이 없던 아침~낮시간대에 사이클 도로경기, 승마 종합장애물 같이 경기시간 한참 걸리는 비인기 종목을 중계해 줄 정도였다. 케이블조차 없던 시절이다 보니[138] 휴방러시 때문에 드라마광인 아줌마들도 짜증냈고,[139] 양 방송사 통틀어 <메칸더 V>나 <또래와 뚜리>, <별나라 손오공> 같이 당대에 방영하던 만화영화 및 어린이 드라마를 못 봤던 국딩들도 짜증을 냈다. 하지만 당시 사회 분위기는 이에 내색할 수 없는 분위기였던 터라...[140] 근데 거꾸로 평소에는 안 하던 낮 방송을 계속 해주니 낮에 AFKN 말고 우리말 방송을 볼 수 있다고 좋아하던 사람들도 있긴 했다. 당시에는 평일엔 아침 6~10시, 저녁 5:30~새벽 1시에만 방송을 하였다. (KBS 3TV는 오전방송 없이 4:30~12:00)
- 서울올림픽은 TV와 라디오를 통해 개막식이 중계되었고 TV는 KBS 3TV를 제외한 1TV, 2TV, MBC를 통해 생중계되었으며 각각 캐스터와 해설자가 달랐다. 라디오는 AM방송뿐만 아니라 특이하게도 음악FM에서도 생중계했는데 클래식 채널인 KBS 1FM과 대중음악 채널인 KBS 2FM에서도 수중계했으며 2FM은 외국인들을 위해 프랑스어로 통역하여 생중계했다.
- 방송계 역시 서울올림픽 방송실시본부(SORTO)가 올림픽 방송제작용으로 신형 방송장비들을 개발해 방송기술 발전에 공헌했고, 방송사 내부에서도 올림픽을 앞두고 각종 방송시설을 들이면서 방송기술과 화면을 개선했다. 비디오 시장도 올림픽 전이던 1988년 4월 기준 VCR 보급대수 180만 대를 연말에 220~250만 대로 증가시켜 영화산업을 초월시켰다.
-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세계 최초로 HD 방송을 한 올림픽이다.[141][142][143] 17일 연속 중계를 진행했다고 하며, 영상을 보면 HD 영상소스가 존재한다. 출처[144], 아카이브 유튜브에 녹화본의 일부 영상이 올라와 있는게 있다. 수영, 유도 방송분, 수중발레 방송분 이외에도 당시 뉴스화면에서 잠깐 개막식 방송화면을 볼 수 있다.
#[145]
- 폐막 후 금성사가 '서울올림픽 하이라이트'란 명칭으로 VHS 비디오테이프 묶음을 발매한 바 있는데, 개막식 1~2부와 하이라이트 1~2부, 폐막식 등 총 5권이며 제작은 한국방송제작단이 맡았다.
19. 대한민국 측 중계
<TV가이드> 1988년 9월 24일자(8권 38호) 기사에 따르면 KBS의 경우 메인/IBC 앵커들은 1TV에서만 활동하며, IBC 앵커들은 1TV <올림픽경기 하이라이트>를 진행한다. 1TV는 보도 기능을 십분 활용해 전 경기 진행상황 및 속보편성으로 다양한 경기를 중계편성토록 하는 한편, 주로 한국 선수 승리예상 경기 및 선전 가능성이 있는 경기, 국내 인기종목, 세계적인 관심경기들을 중계토록 했다. 2TV는 오락 중심 채널이라는 점을 이용하여 국내 인기종목 중 구기 종목을 주로 중계토록 하며, 1TV와 중복되지 않은 세계적인 관심경기를 주로 편성토록 했다.[146]반면 MBC는 채널이 1개밖에 없어서인지 관심있는 주요 경기를 중심으로 현장 캐스터와 연결하여 신속한 정보를 전달토록 했고, <MBC 가이드> 1988년 9월호 p10 기사에 따르면 당사는 여의도 국제방송센터의 메인 스튜디오 및 자체 스튜디오를 복합 운영했다. 아울러 잠실야구장 2층 및 올림픽공원에 다목적 오픈 스튜디오를 설치한 바 있다. 국내 방송 전용차로 KBS가 5대, MBC가 3대를 각각 배치하여 한국 선수 중심의 특기 사항을 매일 제작하여 각 스튜디오로 공급하여 국제 신호와는 별개의 국내 UNI 제작 방식으로 한국 선수들의 모습을 생생히 내보낸다.
음성 제작의 경우, 개/폐회식을 비롯 육상, 마라톤, 축구 결승 등 15개 종목 중계는 양사가 각자 캐스터/해설진을 짜며, 부산 등 3개 지역 축구 본선 등 6개 종목 중계는 KBS 측 신호를, 잠실 및 동대문 축구 본선 등 4개 종목 중계는 MBC 측 신호를 분담 원칙에 따라 각각 공유한다. 그 외에 사격, 양궁 등 국제신호로 단독 중계가 곤란한 4개 종목은 별도 중계차를 마련해 요약 제작하고, 결과물은 각 방송사가 임의 사용한다. 또한 영국 BBC 등 외국 방송사 5개사가 각자 중계하는 역도, 승마, 사이클, 육상, 다이빙(수구 예선)은 KBS가 용역제작을 맡고, 체조와 요트는 조직위 방영권료에 넣도록 했다.
중계 등 각종 프로그램의 타이틀, 배경화면, 도표, 자막, 브릿지 등 그래픽 제작 면에서 KBS 측이 자체 개발한 문자발생기 'PRISM'을 사용했는데, 이는 해당 기기를 이용해 올림픽 방송사상 최초로 육상 등 8개 종목의 스위스 타이밍 데이터를 인터페이스화했다. 픽토그램은 3차원 입체 형태로 플라스틱 질감을 낸 뒤 국기는 물결처럼 휘날리는 입체감을 넣고 실크 광택을 냈다. 또한 각종 밴드는 입체 형태로 미국 NBC와 공동 제작토록 했다.[147] 1987년 11월 22일 KBS1 <방송의 현장>에서도 KBS 측의 올림픽 중계방송 준비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MBC 측은 오로라100과 더브너 사의 CB-GII, 솔거2000 외에 신규 기종인 페인트박스, 보쉬 FGS4500, 문자발생기 'Paragon' 등도 도입했다. 또 선거용 방송전산시스템 EDDS를 개량한 올림픽용 자동방송시스템 'MODS(MBC Olympic Data-Display System)'까지 도입했다.
19.1. KBS[148]
- 국제방송센터(IBC) 메인 스튜디오 진행자
- 성화 채화/인도식 그리스 현지중계
- 올림피아 헤라 신전 및 아테네 올림픽 스타디움: 이정부
- 아테네 ERT 스튜디오: 신은경
- 성화봉송 이동 중계
- TV: 김신환, 최영미
- 라디오: 황량, 허주
- 주경기장 오픈 스튜디오
- 라디오: 이영미
- 개/폐회식
- KBS 1TV: 서기원
- KBS 2TV: 이창호, 정미홍
- 라디오: 우제근, 손석기, 박경희, 정혜실
- 프레스센터
- 김동우, 이제윤
- 정식 종목 캐스터
- 육상: 서기원(선임), 이세진, 유수호, 김윤한, 김상준, 이명용, 황량, 윤성원, 김인주, 김신환, 윤영미, 김동우
- 농구: 소병규(선임), 원예종, 조춘제, 홍승택, 이정부, 이천규, 이명용, 최윤락
- 복싱: 원종관(선임), 박병학, 이정부, 김윤한, 이명용
- 양궁: 서기원(선임), 유수호, 김윤한, 황량, 윤성원, 김신환
- 카누: 원창묵(선임), 유수호, 손석기, 고광수, 김인주
- 사이클: 박기만(선임), 유수호, 정도영, 김윤한, 이천규, 박태남
- 승마: 원창묵(선임), 김영소, 황량, 허주, 강성곤
- 펜싱: 김윤한(선임), 박용호, 허주, 원종배
- 축구: 원종관(선임), 서기원, 우제근, 원예종, 조춘제, 홍승택, 박기만, 김윤한, 김상준, 박영웅, 이천규, 이명용
- 체조: 이세진(선임), 이정부, 허주, 이창호, 김인주, 손석기, 강성곤
- 핸드볼: 조춘제(선임), 홍승택, 박기만, 유수호, 김윤한, 박영웅, 이천규, 이명용
- 하키: 우제근(선임), 원예종, 조춘제, 홍승택, 유수호, 박영웅, 이천규, 이명용
- 유도: 이규항(선임), 이세진, 김상준, 윤성원, 손석기
- 근대 5종: 서기원(선임), 이세진, 유수호, 김윤한, 이천규, 황량, 윤성원, 김신환
- 조정: 원창묵(선임), 유수호, 박용호, 손석기, 고광수
- 사격: 김승한(선임), 서기원, 김윤한, 황량, 윤성원, 김신환
- 수영: 이세진(선임), 이정부, 유수호, 김윤한, 김상준, 허주
- 탁구: 이창호(선임), 유수호, 박영웅, 허주, 강성곤
- 테니스: 이창호(선임), 이정부, 이명용, 윤성원, 최윤락, 강성곤
- 배구: 임문택(선임), 김영길, 최평웅, 이계진, 유수호, 박영웅, 허주, 김신환
- 역도: 조춘제(선임), 김영소, 정도영, 최선규, 허주
- 레슬링: 이규항(선임), 이창호, 김윤한, 윤성원, 조춘제
- 요트: 원창묵(선임), 유수호, 박용호, 손석기
- 시범/전시 종목 캐스터
- 야구: 이규항(선임), 원창호, 이세진, 김영소, 유수호, 정도영, 전우벽, 박용호, 황량, 윤성원, 고광수, 손석기, 김인주, 강성곤
- 태권도: 소병규(선임), 이정부, 김윤한, 윤성원
- 배드민턴: 서기원(선임), 이정부, 박영웅, 허주, 김인주, 유수호
- 볼링: 이창호(선임), 유수호, 윤성원, 손석기
19.2. MBC
- 캐스터: 김용(개막식), 조일수(개막식/체조), 송재익-이정희(축구), 고창근-박상희(육상), 이현우-유협(복싱), 임주완(탁구), 김형주(체조), 신중섭-김학선(유도), 변웅전-이상영(농구), 최창섭-이광현(배구), 김준연-박미숙(수영), 송인득(레슬링), 김충식-신봉철(테니스), 김종완-김종희(핸드볼), 주상철(사이클/하키), 양진수(승마), 한광섭(태권도)
- 메인 MC: 김용, 차인태
- 해설위원: 이우현-김재한(축구), 김기봉-엄팔용(육상), 양행석(복싱), 박도천(탁구), 임찬규-정봉순-박희순(체조), 박순진(유도), 한창도[152](농구), 김덕규-유정혜(배구), 최인태-최윤정-권여성-조창제-송재웅(수영), 김봉조(레슬링), 주원홍(테니스), 박천조(핸드볼), 박정철-신형규-송완식(사이클), 최문호(승마), 문병용(하키), 김용희(태권도)
20. 역대 조직위원장
21. 스폰서
- 한국전기통신공사(現 KT)
- 한국외환은행[153](現 하나은행)
- 반도스포츠
- 삼성전자
- 금성사(現 LG전자)
- 농심
- 남코
- 동아연필
- 경인상사
- 롯데제과
- 빙그레
- 대한항공
- 현대자동차
- 미쓰비시자동차
- 롯데쇼핑
- 조선무약
- 행남사(행남자기)
- SKC
- 태평양화학
- 삼립식품
- 쌍방울
- 서울우유협동조합
- 미원
- 인켈
- 종근당
- 국제상사
- 금강제화
- 제일제당
- 오리엔트시계
- 대웅제약
- 호텔신라
- 삼성물산
- 롯데칠성음료
- 동양맥주
- 코오롱상사
- 현대전자(現 SK하이닉스)
- 현대정공(現 현대모비스)
- 삼성반도체통신
- 한국야쿠르트유업
- 효성기계공업(효성스즈끼)
- 한국데이타통신
- 한국화약
22. 게임
- '88 게임즈
- 골드 메달리스트
23. 기타
- 대한민국은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1988 서울 올림픽 이후 개최한 동 하계 올림픽에서 모두 금메달을 획득하게 된다.[155]
- 다이빙 종목 우승자인 그렉 루가니스는 당시 AIDS 보균자였다. 그는 다이빙 시합 도중 머리를 보드에 부딪혀 피를 흘렸는데, 이 당시 응급처치를 위해 의사가 별 보호장치 없이 그대로 그를 치료했다. 훗날 그가 AIDS 보균을 고백하면서 큰 파문이 일었다. AIDS 약도 당시 가지고 다녔는데, 대한민국을 떠나 출국할 때, 검역장에서 걸리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지만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라고 하니 공항에서 검역을 면제해 줬다고. 훗날 루가니스는 공식적으로 동성애자라고 커밍아웃을 했고 LGBT 운동가로 활동 중이다. 참고로 루가니스를 키워낸 코치가 바로 한국계 미국인이자 올림픽 영웅 새미 리.
- 부대행사처럼 여겨지던 장애인 올림픽이 비로소 기틀을 잡은 것이 바로 서울 대회였다. 이때부터 장애인 올림픽이 비로소 올림픽의 곁가지가 아니라 장애인들의 체육 행사로 자리잡게 되었기 때문에, 서울 장애인 올림픽은 상당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실제 서울 장애인 올림픽의 심볼 마크가 그대로 국제 장애인 올림픽 기구의 심볼로 1994년까지 쓰였으며, 그 이후 모양은 바뀌었으나 태극 무늬는 2004년까지 심볼 모양에 남아있었다.
- 1988 서울 올림픽의 대한민국 선수단 유니폼은 대한민국 의상 디자이너계의 거장으로 유명했던 앙드레 김이 디자인을 했다. 하늘색 재킷과 흰색 바지/스커트 형식이다. 여기에 소품으로 태극선(태극 무늬의 둥근 부채)을 접목했다.
- 서울 올림픽도 흑자를 봤는데, 순수 입장 수입으로 인한 흑자보다는 올림픽 복권 수입 및 선수촌 아파트 분양을 통해 적자를 메우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올림픽 개최로 인한 경제적 이득은 약 4,300억 원으로 알려져 있다.
-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에 파견된 공무원, 기업체 직원들은 막상 올림픽이 끝난 후에 돌아갈 곳이 없어졌다. 이미 그들 자리에 다른 사람들이 들어가서 일하고 있었던 것. 그렇다고 그들을 실업자로 만들 수도 없었기 때문에, 정부에서 나서서 서울올림픽 기념사업 목적으로 설립한 새로운 공공기관이 바로 국민체육진흥공단이다. 인적자원을 올림픽 조직위에서 그대로 승계받았다는 특수성을 고려하여 체육진흥공단에서는 지금도 그 전신을 올림픽 조직위로 삼고 있으며 정식 명칭도 '서울올림픽기념'국민체육진흥공단이다.
- 1989년에 북한 측은 서울 올림픽을 쫓아가려고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을 평양에서 개최했으나, 엄청난 비용 부담 때문에 경제난으로 이어져 훗날 1980년대 북한의 3대 실정 중 하나로 손꼽힌다.
- 소련 올림픽 농구 대표팀은 당시 아마추어인데도 세계 최강으로 인정받던 미국 농구 올림픽 대표팀[156]을 준결승에서 꺾고 결승에서도 승리해 금메달을 획득했다. 패배에 충격받은 미국은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프로농구(NBA) 스타 선수들을 총출동시켜 우승을 차지한다. 1991년 소련의 붕괴로 소련 농구팀이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출전하지 못해 소련 농구팀에게 설욕은 하지 못했지만 이때부터 미국 농구 대표팀은 '드림팀'으로 불리게 된다. 이것 때문에 1992년과 1988년 남자농구는 1~3위가 뒤바뀌었다. 1988년에는 소련, 유고슬라비아, 미국 순서였는데, 1992년엔 미국, 유고슬라비아의 후신 중 하나인 크로아티아, 소련의 후신 중 하나인 리투아니아가 나란히 1, 2, 3위를 차지했다.
- 세계 농구 역사로 보자면, 1980년대 중반부터 미국 NBA 스카우터들이 주목했던 소련, 유고슬라비아 출신 선수들이 큰 활약을 남긴 대회로 역사에 남겼다.
- 금메달을 땄던 소련 대표팀의 주전들 중 4명이 소련령 리투아니아 공화국 카우나스의 강호 농구팀 'BC 잘기리스' 소속이었으며, 그 넷은 리투아니아 독립 후 조국의 농구계 발전에 공헌하거나 정계 진출을 하기도 했다. 특히 당대 세계구급 최고의 센터로 이름났던 아비다스 사보니스가 팀의 에이스로 뛰었고, 동료였던 사루나스 마르셜오니스는 1989년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에 입단하여 리투아니아인 선수로서는 최초로 NBA 무대를 밟았다. 그러나 그 4명은 리투아니아인 입장으로서 점령국인 소련의 국기를 달고 뛰었기에 아쉬운 측면이 있었고, 4년 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비로소 독립국 자격으로 출전했지만 동메달에 그쳤다.
- 유고슬라비아 대표팀에는 훗날 1990년대 초중반 NBA 스타가 된 드라젠 페트로비치, 토니 쿠코치, 블라디 디바치 등이 뛰었다.
- 당시 소련 대표팀의 기수는 그 유명한 알렉산드르 카렐린이었다.
- 남자 200m 배영 메달 수여식에서 장내 아나운서의 실수가 있었다. 당시 금메달 수상자는 소련의 이고리 폴랸스키 선수였고, 한국어와 프랑스어로는 소련의 국가가 연주된다고 정확히 고지되었지만 영어 아나운서가 뉴질랜드의 국가가 연주된다고 실수해버린 것.[157] 동메달 수상자인 뉴질랜드 선수와 은메달 수상자인 동독 선수가 폭소를 터뜨리는 와중에 정작 묵묵히 서있는 소련 선수의 표정이 압권이다.
- 당시에는 소련, 헝가리, 불가리아, 유고슬라비아, 체코슬로바키아 등의 공산권과 외교 관계 자체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해당 국가의 선수 및 관광객 등이 올림픽 기간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 본국과 접촉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올림픽 기간 한정으로 공산권에서 한국에 외교관 혹은 연락관(attaché)을 파견하여 자국민 보호 업무를 맡았는데, 소련의 경우 개막 1개월 전에 영사급 외교관들이 김포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한 뒤[158] 올림픽 폐막 후인 10월 10일까지 쉐라톤 그랜드 워커힐 호텔에 머무르면서 소련 선수단과 관광객을 위한 영사 업무를 진행했으며[159] 헝가리 등의 다른 동유럽 공산 국가는 올림픽 선수단에 속한 연락관이 부영사 지위를 부여받아 영사 업무를 봤다.
- 이 당시 미국에 대한 한국 국민들의 반감은 의외로 심했는데, 안 그래도 미국 정부에서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노태우 당선에 대해 대놓고 축하 논평을 낸 것과[160] 경상수지 적자가 벌어진다면서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식의 간섭, 일방적인 영화시장 개방, 미국정부의 노골적인 정경유착 및 내정간섭 등에 시달린 데다, 서울 올림픽 직전 주한미군 자녀가 임산부를 폭행하고 주한미군 병사가 택시 기사를 폭행하는 등의 사건 사고가 터졌고, 개회식 입장에서 미국 선수들이 카메라에 대고 술취한 눈빛으로 욕설을 한다던지, 트랙을 벗어나 이상한 곳으로 걸어가는 등의 기행을 선보였고, 거기에다 올림픽 방영권을 지니고 있는 미국 NBC 방송이 올림픽 기간 내내 집창촌이나 미군 PX 물품 유출같은 한국의 부정적인 면만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보도를 일삼았다. 거기에 변정일 사건이 터졌을 때도 마찬가지로 일방적으로 편파 중계를 했고, 거기에 미국 선수 일부의 태극기 모욕, 그리고 미국 수영선수단의 절도 사건까지 벌어졌다. 이러한 NBC와 미국 선수들의 병크에 국민들은 "미국이 한국을 아직도 후진국으로 생각하면서 내리깔고 무시한다!!"고 분노했고, 안하무인격인 미국에 대한 비난(혐미)여론이 급속히 증폭되었다. 거기에다가 이 상황에서도 NBC 제작진이 대한민국과 변정일을 비웃는 티셔츠의 제작을 문의하는 일까지 알려지자 구설수에 올랐고, 결국 미국과 소련의 남자 농구 준결승전에서 대한민국 관중들이 소련을 응원하는 사태까지 가 버렸다. 그제서야 심각성을 깨달은 미국은 급히 한국인 달래기에 나서게 되었다. 그리고 미국 정부와 정치권에서 무분별한 반미감정은 한미관계에 도움이 안된다면서 자제에 나서달라고 부탁했으며 미국 선수단이 폐회식 때 한국을 달래주는 제스쳐를 취하면서 겨우 무마되었다. 그러나 NBC는 30년 뒤 한국에서 열린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평창 올림픽 개최 국가를 'North Korea'으로 오기하며 또 크게 사고를 쳤다.
다만 첨언하자면 미국과의 경기 당시 운동권이 해당 분위기를 조장했다는 증언이 있다. 황순원의 손자이자 당시 운동권에서 활동하던 황성준의 주장에 의하면 미국과 소련의 농구 경기가 치러질 때 자신이 현장 지휘하는 운동권 인원을 대거 투입해서 현장에서 소련팀을 응원하는 분위기를 만들어냈고, 그것이 성공하여 일방적인 소련 응원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 실제로 황성준은 그 후 소련팀 응원이라는 사건을 자기 성과로 상부에 보고한 소련 측 요원의 초청으로 소련을 방문하게 되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소련에 몇 년간 체류하게 되었다고 한다. 증언 영상
하지만 어찌 되었든, 운동권 외의 일반인들도 응원에 참가했던 만큼 당시로서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1984년 LA 올림픽에서 소련이 불참한 명목상의 이유가 '선수들의 안전'이었기 때문에 정부가 소련을 올림픽에 참여하라고 설득하기로 결정한 이후 언론은 KAL 007기 격추 사건을 보도하지 못했다. 올림픽이 코앞이던 1988년 9월 1일은 대한항공 007편 격추사건이 일어난지 5년이 지났으나, 언론은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을 전혀 보도하지 않았다. 소련이 북한을 버리고 올림픽 참가를 결정하면서 남북한의 체제 경쟁에서 남한이 승리했음을 알게 되고 충격을 받은 운동권 학생들도 많았다. 특히 정통 사회주의자라고 자처하는 PD계열이 그러했는데, 사실상 이때와 이후 진행된 동구권 몰락과 더불어 PD계열이 약화되었다. 김문수, 이재오 등의 PD 출신 보수 정당 정치인들이 사민주의를 거쳐 우파로 전향한 것도 이때쯤. 결정적으로 미국과 소련의 남자 농구 준결승전에서 한국인들이 일방적으로 소련을 응원하는 모습은 사회적으로 미국의 의미와 소련의 의미에 대한 고찰을 하게 만들었다. 당연히 소련인들은 멘붕하였고 "우리도 저 나라처럼 해보자" 하고 마음 먹고 옐친을 뽑았다가 신나게 말아먹고 말았다.
- 위 내용과 더불어 당시 소련 대표팀은 놀랍게도 엄청난 응원을 받았는데, 당시에는 아직 냉전이 끝나지 않았던데다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과 대한항공 902편 격추 사건까지 있었는데도[161] 일본 대표팀과의 경기에서는 관중들의 일방적인 응원을 받았다. 이 당시는 일본 문화 개방도 되지 않았고, 반일 감정 또한 컸을 때임을 감안해야 한다.
- 당시 공산권 국가들은 적극적인 체육 선수 육성을 통해 국제 스포츠 무대에서 제법 선전한 편이었는데, 이 대회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당장 여자 기계체조 단체전에서는 소련이 금메달을 따내면서 소련 국가가 연주되고 소련 선수 일부가 이를 대놓고 제창한 것도 모자라, 은메달과 동메달마저 각각 루마니아 인민 공화국과 동독이 차지해서 유럽 공산권 3개국의 국기가 대한민국의 경기장에 휘날리는 풍경이 펼쳐졌다. # 물론 정치와 스포츠는 철저히 분리하는 것이 올림픽 정신인데다, 1976 몬트리올 올림픽 이후 무려 12년만에 공산권과 서방권이 한 자리에 모여서 당대 최대 규모의 올림픽이 치러진만큼 당시의 대한민국 정부나 국민이나 공산권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 서울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를 기념하고, 서울 올림픽의 평화와 동서 화합의 정신을 살린다는 취지 아래 서울평화상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초기 수상자들은 완전 엉망이었다. 오늘날에는 좀 잠잠했지만, 수상 초기에는 정말 엄청난 비난을 받았고, 수상 재단도 내분에 시달렸다. IOC 위원장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가 있질 않나... 2020년에는 또 IOC 위원장 토마스 바흐에게 이 상을 주는 통에 차기 부산 올림픽 개최 뇌물이냐는 비아냥도 받고 있다.
- 정부가 86아시안 게임과 88올림픽을 정치 선전 자료로 지나칠 정도로 이용해 먹자 시인 김용택은 <팔유팔파>라는 시를 지어 이를 비판했다. 팔육팔팔의 오타가 아니고 진짜 제목이 팔유팔파다. 아래 내용은 그 중의 일부다. 과장된 내용 같지만 진짜 저렇게 팔육팔팔이 한국의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 줄 것처럼 선전해댔다.얘야팔유팔파오림픽이열리며는우리덜은뭐시그리좋다냐소값이나쌀값이나객지서노동일허는니동생임금이라도올라간다냐……그나저나오림픽이끝나며는저텔레비전속사람들이나왼갖치사와축사속의사람덜은무신소리로안정된선진조국과정의복지를위하여침을튀길까그러고우리덜은무신재미로살끄나무신희망으로와와절망하끄나. 해가떠도오림픽달이떠도오림픽빚이져도오림픽소값개값되어야도오림픽죽으나사나오림픽인디아아아아아그때는참말이제무슨절망으로아아대한민국아아대한민국허여무신재미로살끄나……그나저나팔유팔파오림픽이열리며는그누구의말대로거시기뭣이냐민족사의왼갖질곡과시련을극복하여그종지부를꽉찍을까그럴까우리하늘이저쪽끝에서저쪽끝까지훤하게갤까
- 서울 올림픽에 관련된 지명들이 서울특별시 시내에 여럿 남아 있다. 올림픽대로, 올림픽대교, 올림픽공원, 송파구 오륜동, 올림픽선수기자촌, 올림픽로[162], 88올림픽고속도로[163] 등. 한양대학교 서울캠퍼스 내부에는 '올림픽체육관' 이란 이름의 체육관이 존재하는데, 88올림픽 당시 학교 측이 부지를 제공하는 대신 국비로 체육관을 짓기로 해 실제 올림픽 당시 경기장으로 활용되었다. 현재는 예술/체육대학 단과대 건물로 활용 중이며 교내 행사 등에 자주 사용된다.
- 서울특별시 송파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일단 주경기장, 야구장 등이 있는 종합운동장과 펜싱, 역도, 체조경기장 등이 있는 올림픽공원이 모두 각각 잠실동과 방이동에 있다. 강동구에서 송파구가 분구되고 채 1년이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당시 여당이던 민주정의당이 올림픽을 기념한다며 송파구의 명칭을 올림픽구로 변경하려고 추진했지만, 대부분의 지역주민들이 "5백년 역사가 담긴 많은 유적지와 송파 산대놀이, 송파 답교놀이, 송파 나루터 등으로 옛날부터 전국적으로 알려진 ’송파‘라는 이름은 구 이름으로라도 마땅히 남아있어야 한다"며 맹렬하게 반대를 해 무산된 바가 있다. 다만 송파구는 1992년부터 서울올림픽 개막일인 9월 17일을 송파구민의 날로 지정하여 기념하고 있다.
- 당시 올림픽 기간에 추석 연휴가 겹쳤는데(9월 24~26일), 공교롭게도 30년 뒤에 대한민국이 개최한 2018 평창 동계올림픽 기간에도 설 연휴(2월 15~18일)가 겹치면서 대한민국은 자국에서 열린 두 번의 올림픽 모두 자국 최대의 명절과 함께 하게 되었다. 그리고 1988년 추석 당일에는 유도의 김재엽이, 2018년 설날 당일에는 스켈레톤의 윤성빈이 해당 대회에서 대한민국의 2번째 금메달을 획득했다. 이렇게 명절에 올림픽이 끼면서 김재엽은 한복을 입고 시상대에 올랐고, 윤성빈은 세배 세리머니를 했다. 이것은 한국의 명절인 추석과 설이 라마단 등의 명절과 달리 종교적 의미가 없어서 경기진행 및 시상이 가능했기 때문이다.[164]
- 나이키에서 1988 서울 올림픽 30주년을 기념하여 에어 조던 3 서울을 더 드로우 방식으로 발매할 예정이다. 3월 7~8일 동안 나이키 공식 홈페이지에서 응모를 하면 되고, 3월 9일에 발표를 한다. 대한민국(우리나라)에서만 발매하기에 외국인들도 뜨거운 관심을 보이고 있다.
- 바로 옆 나라에서 열린 올림픽이지만 의외로 일본에서는 이 대회가 흥하지 못했는데, 바로 개막 3일 뒤에 히로히토 천황이 쓰러졌기 때문. 이것 때문에 일본 사회 전체가 자숙(自粛) 무드에 들어갔는데, 일본 전역의 쾌유 기원에도 히로히토는 병세가 점점 악화되며 동년 12월 12일 혼수 상태에 빠졌고, 결국 이듬해 1월 7일 결국 사망했다.
- 개최 당시 기준으로 UN 비회원국에서 열린 몇 안 되는 하계 올림픽이다. 나머지는 1952 헬싱키 올림픽과 1972 뮌헨 올림픽.[165]
- 2019년에 공개된 외교 문서에 따르면 "중국이 서울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단을 열차에 태워 대한민국에 보내려 했으나, 북한의 반대로 무산됐다"는 중국 외교관의 증언이 나왔다. 중국 선수단이 열차편으로 서울에 오려면 북한을 경유해야 하는 건 둘째치고, 남북간 철도 연결 자체도 안된 상황이라서 애초부터 중국이 무리수를 둔 것. 경의선의 휴전선 인근 복원 사업은 서울올림픽 이후 약 14년이 지난 2002년 9월에 와서야 실현되었다.
- 88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학생 시위를 이유로 개최지를 변경해야 한다는 주장이 미 의회에서 제기됐고, 당시 우리 정부가 이 같은 주장의 확산을 막기 위해 적극적으로 대응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 통상 올림픽은 개최지 이름을 먼저 표시하는 것이 관례이다. 런던 올림픽, 평창 동계 올림픽 등. 그러나 웬일인지 86 서울 아시안게임과 88 서울 올림픽은 유난히도 대중들 인식이나 매체에서도 86 아시안게임, 88 올림픽과 같이 개최지를 빼고 말하거나 아예 "아시안게임", "올림픽" 식으로 고유명사화하는(ex: "올림픽 때 굴렁쇠 소년이...") 경우가 많다.[166] 이는 당시 5공 정권이 "86 88"이라고 아주 세뇌하듯 홍보전을 해댔기 때문으로, 위 문단의 김용택의 시도 그런 세태에 대한 반감을 드러낸 것이다. 그 시대 살던 사람들에게 "팔육팔팔 꿈나무"라는 말은 매우 익숙한 표어이기도 하다.
- 서울종합운동장이 준공된지 30여 년이 지나 노후화됨에 따라 리모델링을 통해 새로운 국제교류복합지구로 도약할 준비를 하고 있다. 2023년부터 공사에 들어간다.
- 미사리 한강 조정 카누 경기장에서 열린 남자 조정경기에서 이탈리아 대표팀이 금메달을 획득했는데, 기쁨을 주체하지 못한답시고 서로를 한강에 내동댕이치며 놀다가 다비데 티차노(Davide Tizzano) 선수가 도중 물에 빠지면서 금메달을 물 속에서 잃어버렸다(...). # 그래도 서울시 경찰국은 경찰과 119 수난구조대 등을 투입해 하루 만에 찾아주긴 했다. 메달을 잃어버린 선수는 경찰에 "내가 여자였다면 당신들에게 키스(...)를 해주었을 텐데요"라고 기쁨을 표현했다고 한다.
- 수리남 (수영 금메달), 지부티 (육상 동메달), 네덜란드령 안틸레스 (요트 은메달), 미국령 버진아일랜드 (요트 은메달), 인도네시아 (양궁 은메달), 코스타리카[167] (수영 메달 2개), 세네갈 (육상 은메달)이 올림픽 첫 번째 메달을 획득했다.
- 이 대회 올림픽 메달리스트 중 여자 필드하키 종목에서 은메달을 딴 김순덕은 이후 1999년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사고로 아들이 요절하는 아픔을 겪었고, 무성의한 정부 대책에 항의하며 자신이 딴 메달과 훈장을 모두 반납하고 뉴질랜드로 이민을 갔다.
- 서울올림픽 관련 각종 공식 사진 및 영상 자료는 지금도 서울올림픽지료실이라는 사이트에서 볼 수 있다.
2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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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른바 '삼태극'으로 불리는 휘장이며, 이 엠블럼은 KBS 신관 정면에도 붙어 있다. 올림픽 당시 국제 방송센터로 사용되었기 때문. 휘장 도안은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인 양승춘이 맡았다.[2] 과천시(승마), 고양군(현 고양시, 승마, 사이클), 수원시(핸드볼), 광주군(현 하남시, 조정), 성남시(하키)[3] 당시 충청남도 대전시. 올림픽 개최 이듬해인 1989년 충청남도에서 분리 후 대덕군과 통합하여 대전직할시로 승격, 1995년에 대전광역시로 행정명칭이 변경되었다.[B] 축구[A] 당시 직할시. 올림픽 개최 7년 후인 1995년에 광역시로 행정명칭이 변경되었다.[B] [A] [8] 축구, 요트(벡스코 2전시장 끝쪽에 요트경기가 열린 것을 기념하여 올림픽동산과 올림픽기념공원이 있으며, 수영공항이 사라진 뒤, 수비교차로의 명칭을 올림픽교차로로 바꾸기도 하였다.)[A] [B] [11] 남자: 6,197명, 여자: 2,194명.[12] 1965년생 남자 농구 국가대표 선수.[13] 1964년생 여자 핸드볼 선수.[14] 유도[15] 전라남도 신안군 가거도의 중학교 분교 교사.[16] 마라톤 선수. 2년 후 1990 베이징 아시안 게임 남자 마라톤 금메달을 획득했다.[17] 서울예술고등학교 무용과 학생. 대부분 손기정이 한 것으로 오해하는데 손기정은 성화를 올림픽주경기장까지 봉송하였고 점화는 전술한 3인이 했다.[18] 시기상 한국어 관련 홈페이지(입장권, 스토어, 안내, 뉴스 등)는 원래 없었으며, 올림픽 위원회 공식 홈페이지가 만들어져 있다.[19] 국민체육진흥공단에서 운영하는 아카이브.[20]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에서 1984년 12월 표어를 공모했으며 총 48,019개의 응모작품 중에 홍재훈 씨가 제출한 "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가 심사에서 최우수작으로 뽑혔으며 서울올림픽의 공식 문구로 선정되었다. 기사[21] 1988년 9월 17일 ~ 1988년 10월 2일, 총 16일간 서울특별시와 경기도 일부 수도권 지역 및 각 종목별로 주요 도시 지역에서 개최됐다. 축구 종목은 당시 수도권 뿐만 아니라 타 지역에서도 경기가 열렸고, 요트 종목의 경우는 부산 수영만에서 경기가 진행되었다. 1970년대 이후 열린 하계올림픽 중 가장 늦은 날짜에 열린 개회식이었다. 남반구에서 열린 2000 시드니 올림픽 개회식보다도 이틀이 늦다. 실제로 대한민국은 7~8월에 폭염과 폭우와 태풍의 빈발로 이 기간 중 국제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기가 불가능하다. 실제로 35년 뒤인 2023년 제25회 세계스카우트잼버리에선 태풍 카눈으로 인해 잼버리의 인원들이 전원 철수하는 사건이 벌어졌다.[22] 첫 번째 대회는 일본의 1964 도쿄 올림픽이며, 3번째 대회는 중국의 2008 베이징 올림픽.[23] 올림픽하고는 별개의 사례이지만 그나마 있다면 국가적으로 FIFA 월드컵과 이후 아시안 컵을 연속으로 개최한 카타르, 코파 아메리카와 FIFA 월드컵을 동시에 개최할 미국이 있다.[24] 대한민국의 실상을 제대로 몰랐던 동구권 국가들이 서울 올림픽으로 인해 각성하는 효과를 내었다. 자세한 내용은 하단 내용 참조.[25] 당시 남아공은 아파르트헤이트 때문에 국제 스포츠계에서 이미 퇴출된 상태였다. 그런데 몬트리올 올림픽을 얼마 앞두고 뉴질랜드 럭비팀이 뜬금없이 남아공에 가서 친선경기를 하면서 문제가 터졌다. 격분한 아프리카 국가들은 뉴질랜드에 대한 제제를 요구했지만, IOC는 냉담하게 무시했고 결국 아프리카 26개국이 올림픽을 전면 보이콧하게 된다.[26] 동독 뿐만 아니라 여러 공산권 국가의 경우 스포츠 대회에서의 좋은 성적을 토대로 국력도 과시하고 국민들을 단합시키는 효과를 노렸는데, 한편으로는 세계 스포츠 대회에 출전하면 사실상 해외를 자유롭게 다닐 수 있다는 점에서 관계자 및 선수들 또한 그 무대가 선망의 대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 나가지 못한데 대한 스포츠계의 실망은 엄청났고, 동독 또한 예외는 아니었던 것이다.[27] 이때 김운용 위원의 나이는 50대였다. 물론 기존에 5개 국어를 유창하게 했을 정도로 언어적 감각이 탁월한 인물이었지만, 새로운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이다. 또한 러시아어는 세계에서 어려운 언어 중 하나로 꼽힌다는 것도 감안해야 한다.[28] 직전 대회였던 1983년 유도 세계선수권대회는 소련에서 개최되었으나 대한민국은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에 대해 항의하며 불참했었다.[29] 소련, 서울올림픽 참가 공식발표[30] 지금이야 어느 정도 용인이 된다 쳐도,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와 정권의 반공 성향을 감안하면 대한민국에서 적성 집단(대한민국 헌법상 북한을 '국가'로 보지 않으므로 '적국'이라고 보지도 않았으며 이는 지금도 유효하다.)으로 인식되는 북한의 인공기를 게양하고 또한 북한 국가를 연주하는 것은 그야말로 경천동지할 일. 물론 북한은 엄연한 IOC 회원국이었기 때문에 만약 참가했다면 인공기와 북한 국가 연주는 무조건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스포츠는 정치색을 배제해야 한다는 것은 신성한 의무와 다름이 없기 때문이며, 실제로 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 대회 당시 북한 축구 국가대표팀이 본선에 진출했을 때도 북한을 적성 국가로 간주해 수교 자체를 하지 않은 영국의 경기장에서 북한 국가가 연주되고 국기가 게양되었다. 물론 영국 정부가 당시 한국 정부에 양해를 구했다.[31] 그리고 대한민국 실효지배 영역인 남한 지역에서 인공기가 게양되고 북한 애국가가 연주된 것은 14년 뒤에 열린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때에야 이루어졌다. 그리고 12년 뒤 시드니 올림픽에서는, 한반도기를 이용하여 동시에 입장하였고 30년 뒤인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에도 북한이 참가했으며 동시 입장 또한 성사되었다.[32] 당시 공산권의 중심인 소련은 1985년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집권하면서 개혁, 개방 노선을 걷고 있는 상황이었다. 비록 아프가니스탄 전쟁 등 미국과 소련 사이의 물밑 대결은 치열했지만, 공개적으로 1987년 중거리 미사일 감축에 대한 협정을 체결하는 둥 유례없이 분위기가 훈훈했다. 이런 데탕트 분위기에서 이념논쟁을 이유로 서울 올림픽을 보이콧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북한을 공산권 국가들이 곱게 봤을 리가 없다. 소련이 1988년에 들어서야 참가 선언을 선언했던 것도 나름 동맹국인 북한을 배려해서 시간을 끈 것이었다. 게다가 스포츠를 통한 국력 과시에 집착하던 소련과 동구권 입장에선 LA에 이어서 2회 연속으로 불참한다는 것은 국내외적으로 부담스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즉 LA와 서울의 개최 순서가 뒤바뀌었다면 반쪽 대회는 LA가 아닌 서울 대회였을 수도 있었다. 물론 LA는 제1세계로 대변되는 명백한 서방 진영과 자본주의 국가의 수장이자 소련의 최대 적국인 미국이고 서울 올림픽이 개최된 한국은 당시 기준으로 1세계에 속한 아시아 개도국 중 하나에 불과한 위상이기에 소련의 참가 여부가 국제 사회에서 큰 파급력을 가져올 수밖에 없음은 감안해야 한다.[33] 이후 북한은 올림픽에 참가한 소련과 중국을 향해 배신자라고 욕하면서 '우리 식대로 살자'란 운동을 펼치기에 이른다.[34] 제1회 하계올림픽 주경기장.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는 양궁 경기장이자 마라톤 최종 골인 경기장으로 쓰였다.[35] 당시 기종은 DC-10-30, 레지번호는 HL7329다.[36] 성화를 실은 DC-10-30 항공편의 최대 항속거리가 9,600km에 불과했기 때문에 한번에 그리스에서 대한민국까지 올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방콕에서 중간 기착한 뒤 대한민국 제주로 향했다.[37] 이 당시는 제주도 내에 제주시와 서귀포시 외에도 북제주군과 남제주군이 있었다. 제주공항이 있던 제주시를 출발해 북제주군과 남제주군을 차례로 거친 뒤 서귀포시를 찍고 다시 제주시로 올라와 하루를 묵었다.[38] 현재의 창원시로 통합되기 훨씬 전이다. 당시에는 진해시로 성화가 들어와서 창원시를 지나친 뒤 마산시로 향했다.[39] 현재의 통영시로 통합되기 훨씬 전이다. 당시는 통영군과 충무시로 나뉜 지역이었는데 성화는 통영군으로 들어와서 충무시로 향했다.[40] 1995년 문경군과 통합돼 문경시가 됐다.[41] 1995년 정읍군과 통합돼 정읍시가 됐다.[42] 1995년 익산군과 통합돼 익산시가 됐다.[43] 1995년 보령군과 통합돼 보령시가 됐다.[44] 1995년 아산군과 통합돼 아산시가 됐다.[45] 현재의 평택시로 통합되기 훨씬 전이다. 당시는 평택시와 송탄시가 나뉘어졌는데 성화는 평택시로 들어와서 송탄시를 거쳐서 나갔다.[46] 성남시로 진입 직전에 용인군(1996년 용인시로 승격)에서도 성화봉송을 했다. 물론 당시 수원IC를 경유하기 때문에 용인군에서도 봉송을 했다.[47] 의정부에서 서울로 오는 봉송로에는 동일로가 포함돼 있었고 그 길가에는 상계동 빈민촌이 있었다. 당시 서울특별시는 외국인들의 눈에 이 거리가 깨끗하게 보여야 한다는 이유로 빈민촌에 대한 강제 철거를 단행하는데 그 이야기는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졌다.[48] 축구 경기가 열린 광주 무등경기장도 사실상 전면 철거되고, 현재는 아예 야구장으로 바뀌어 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가 되었으나, 이쪽은 예산상의 문제로 성화대 주변의 극히 일부를 남겨놓고 구조 변경으로 처리해 만든 것이라 엄밀히 말하면 법적으로는 전면철거가 아니다. 동대문운동장도 거의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조명탑 2개가 남아 있으므로 역시나 전면 철거는 아니며, 대구 시민운동장도 새 축구전용구장을 지으면서 경기장 일부를 존치했다. 또한 문화재 문제(태릉, 강릉을 비롯한 조선왕릉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로 인해 태릉 국제 사격장이 철거 예정이다.[49] 정확히는 1번 국도-356번 지방도-39번 국도를 이용해 당시의 구파발-원당-벽제를 순환하였다. 현재 신도시 개발로 도로의 선형이 많이 바뀌어(특히 구파발역 인근) 당시의 도로와는 많이 다르다.[우3동] 마린시티 옆[51] 건물 입구에 올림픽 볼링 경기를 개최한 기념비가 있다.[52] 손가락이 없거나 오그라져서 펴지 못하는 손[53] 참고로 남자 단체 구기 첫 금메달은 20년 뒤인 2008 베이징 올림픽 야구에서 나온다.[54] 오스트레일리아가 아닌 유럽인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별도 개최[55] 그나마 강원도는 1968년 원주시 출신의 지용주가 은메달을 따기는 했다. 강원도는 1992년에 황영조(삼척)가 마라톤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최초 금메달리스트가 되었고, 제주도는 2008년에 베이징 올림픽 야구 국가대표팀 소속이던 강민호가 야구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최초 금메달리스트가 되었다.[56] 출처 국제스포츠정보센터[시범] 시범 경기 종목[시범] [59] 대한민국 선수단 중 최고령 선수. 1953년 2월 28일 출생 (당시 만 35세).[60] 대한민국 선수단 중 최연소 선수. 1974년 3월 18일생 (당시 만 14세).[61] 문은진과 문현진은 문선명의 자녀들이다.[시범] [63] 개막식 당시 한국 대표팀의 기수를 맡았다.[시범] [65] 구.정신지체[66] 목동신시가지아파트[67] 현재의 난향동 지역으로, 그 난곡도 2000년대 난곡뉴타운으로 재개발되었다. 여기 살던 빈민들은 아예 서울특별시 바깥으로 쫓겨났을 것으로 추정된다.[68] 1955년생.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 및 동 대학 대학원 신문방송학 졸업. 1983년부터 3년 동안 이장호, 정지영, 장선우 감독 등에게서 연출 수업을 받아 1987년부터 3년 동안 서강대 커뮤니케이션센터 상임연출가로 일했고, 1991년 '푸른영상'을 세워 <행당동 사람들(1994)>, <명성, 그 6일의 기록(1997)>, <또 하나의 세상 - 행당동 사람들 2(1999)>, <송환(2003)>, <내 친구 정일우(2017)>, <2차 송환(2022)> 등 독립영화 제작을 통해 민중 문화운동을 펼쳤고, 1991년 독립영화협의회 위원장도 맡았으며 1998년 '한국독립영화협회' 창설을 주도하며 5년 동안 초대 이사장을 맡았다.[69] 출처: <가짐없는 큰 자유: 빈민의 벗, 제정구의 삶(제정구를 생각하는 모임 저.)> 학고재. 2000. p180.[70] 영화 홀리데이의 모티브가 되는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당시 희대의 키워드를 곰곰히 생각해보자.[71] 일산신도시와 분당신도시도 이 때 건설이 추진되었고, 1991년부터 분양되기 시작했다.[72] 5위가 신아람 선수의 2012 런던 올림픽 1초의 기적, 4위가 2008 베이징 올림픽 태권도 여자 67kg 급 8강전, 3위가 2000 시드니 올림픽 남자 유도 100kg 이상급 결승전, 1위가 1972 뮌헨 올림픽 남자 농구 결승전[73] 8강, 준결승 당시에도 이런 판정이 있는지는 영상 매체가 없어서 알 수 없다.[74] 다만 나이 들어서도 은퇴하지 않고 꾸준히 경기를 뛰면서 전적에 흠이 많이 갔었다.[75] 앞서 언급했듯이 경기 직후 박시헌 본인이 전혀 환호하지 않는 모습을 통해 그가 금메달을 원하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난다. 이후 인터뷰에서 그는 경기 당시 이미 자기가 진 것을 알았으며 손이 올라가서 깜짝 놀랐다고 밝혔다. 박시헌 본인은 패배를 계속해서 인정했고 존스를 만나 사과하려고 했으며, 존스 본인도 훗날 인터뷰에서 "그(박시헌)의 탓이 아니다. 나만큼이나 그 역시 피해자"라고 말하며 그를 전혀 탓하지 않는다고 여러번 얘기했다. 실제로 박시헌은 전국적인 비난에 시달리다가 올림픽 직후 22세 젊은 나이에 떠밀리듯 은퇴를 했다. 이러한 사건은 2023년작 영화 <카운트>에서도 다뤄졌다.[76] 당시 미국 선수 '폴 햄'이 개인종합 도마에서 심판석까지 굴러 떨어질 정도로 크게 착지 실패를 하고도 0.049점을 양태영보다 더 얻어 금메달을 가져갔다. 이 오심으로 관련 심판 3명이 징계를 받았으며, 체조종목 체점 체계까지 바뀌었을 정도로 대사건이었다.[77] 육상 인기가 태생부터 좋지 못한 우리나라에서조차 2011년 대구 육상 선수권의 남자 100m 결승전은 가장 빨리 매진되었으며 암표가 가장 많이 들끓었던 종목이었다. 또한 마라톤이 워낙 핫 이슈 종목이기 때문에 훗날 2004 아테네 올림픽 남자 마라톤에서 브라질의 '반데를레이 리마'가 중반부터 압도적 선두를 달리다 결승점을 5km 남짓 앞두고 아일랜드 출신의 종말론자에게 습격을 당해 3위로 처진 사건이 국제적으로 매우 빠르게 이슈화될 수 있었고, 그가 자국에서 열린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성화 점화자로 선정될 수 있었다.[78] 위에도 나오는 당시 소련 팀이 낸 여자 1,600m 계주 신기록이 깨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 대부분 모른다. 상술한 주석에서 언급한 마라톤의 '반데를레이 리마' 사건이[79] 현재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한국은 대놓고 인종차별을 하던 나라여서 흑인인 벤 존슨이 피해를 입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위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100m 종목은 칼 루이스를 비롯하여 상위권에는 죄다 흑인 선수들이 포진해 있다. 흑인이라서 피해를 입었다는 건 어불성설이다.[80] 1974~91년까지 사회주의 공화국. 사실 내전으로 인한 불참이었다.[81] 1985년 사망한 엔베르 호자 시절에는 사회주의 공화국, 공산권 가운데서도 극단적으로 폐쇄적인 국가로 악명이 떨쳤고, 호자의 사후인 1980년대 후반에 다소 완화되었지만 그래도 공산권에서 폐쇄적인 국가로 꼽혔다. 이때 4회 연속 올림픽 불참국이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올림픽 참가에 관심이 없었을 가망성이 많다.[82] 1975~92년까지 사회주의 공화국. 당초 참가 의사를 밝혔으나 마감 시한까지 선수단 명단을 제출하지 않아 최종 불참 처리되었다. 북한의 로비가 있었으며 불참 해주는 조건으로 북한에게 쌀 1만 톤을 요구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2015년작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성덕선(혜리)의 올림픽 피켓 걸 출현이 좌절될 뻔한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후에 벌점자들의 대타로 우간다 선수들과 입장한다.[83] 1979~92년까지 사회주의 공화국. 이쪽은 당대에도 경제 상황이 괜찮았는데도 굳이 불참한 예이다. 다만 다당제 전환 이후로는 1993 대전 엑스포에는 정상적으로 참여했다. 집권 정당이 교체된 것은 아니고 정권이 교체된 것은 먼 훗날의 일이다.[84] 쿠바의 지원으로 1979~90년까지 사회주의 공화국. 사실 명목상으로는 다당제 민주국가였고 여타 다른 사회주의 국가와는 다르게 야당 세력이 합법적으로 존재했던 나라였기에 참가가 가능했겠지만 콘트라 내전으로 인해 국가가 혼란했던 상황에 따른 불참에 가깝다.[85] 물론 모든 IOC 국가의 참가가 실현된 것은 다음 대회인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또한 이들 중 북한과 알바니아, 마다가스카르는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는 선수단을 파견하게 된다. 한편 2022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외교적 보이콧이라는 이름으로 보이콧이 부활하였다.[86] 1936 베를린 올림픽은 1차 세계 대전 패망으로 허덕이던 독일의 부활을 알렸고, 1964 도쿄 올림픽은 역시 2차 세계대전 이후로 다시 과거 열강/선진국 반열에 재진입했음을 알린 대회였다.[87] 각 올림픽마다 굵직하게 터졌던 사건에 대한 설명과 이에 따른 부정적인 결과를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은 개막식 이전에 이뤄진 군부의 탄압에 의한 유혈사태와 검은 장갑 사건이 터지면서 당시 좋지 않은 쪽으로 이목을 집중하게 된다.
* 뮌헨 올림픽은 테러단체에 의한 이스라엘 선수단의 인질 억류 및 구출 실패라는 전무후무한 테러 사건으로 인해 2차 세계 대전 이후 눈부신 재건으로 라인강의 기적을 이뤘던 서독의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혔다.
* 캐나다 1976 몬트리올 올림픽은 개최 이전부터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로 인한 아프리카 국가들의 인종차별의 반발 및 보이콧과 더불어 뮌헨 올림픽의 여파로 인해 경비가 폭등하였고, 대회 폐막 이후 사상 최악의 적자로 파산하게 된다.
* 소련의 1980 모스크바 올림픽과 미국의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은 다시 촉발된 냉전과 이념 대립으로 공산 진영과 자유 진영 각각의 대회 보이콧이 대규모로 일어났고, 결국 두 대회 모두 반쪽자리로 전락하게 된다.[88] 한국의 선진국 진입은 서울 올림픽으로부터 약 15년 정도 지난 한일 월드컵 무렵(2002년)에야 성사되었다. 자세한 것은 선진국/대한민국 문서 참조.[89] 사실 이미 서울 올림픽 이전에 그리스의 아테네, 스웨덴의 스톡홀름, 핀란드의 헬싱키, 멕시코의 멕시코 시티처럼 열강 체급이 아닌 국가가 올림픽을 개최하는 사례가 있어왔다. 반대로 베를린, 도쿄와 같이 전쟁 직후 재건을 거쳐 올림픽을 개최한 사례가 있어왔다. 하지만 서울 올림픽은 언급된 2가지 항목에 전부 들어가는 올림픽이다. 즉, 오랜 식민지배를 겪은 직후 전쟁으로 인해 최빈국이 된 비 서구권 국가에서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한 최초의 사례이다.[90]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 올림픽 이후 신흥 개발도상국에서 치러진 올림픽은 2008 베이징, 2016 리우데자네이루 2번이 전부이며, 동계 올림픽까지 합해도 2022 베이징만 더해질 뿐이다. 또 중국, 브라질이 강대국급 국가들이었던 반면에, 전체적인 국력으로 봤을 때 잘 쳐봐야 지역강국 수준에 그치는 비유럽권 개발도상국에서 올림픽을 개최한 사례로는 현재까지도 1988 서울 올림픽과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 이렇게 단 2개가 전부다. 그리고 사실 대한민국은 서울 올림픽 당시 기준으로 GDP 순위가 세계 19위에 달하는 중견국이었고, 1인당 GDP는 세계 평균의 1.25배에 달하는 어지간한 공산권 국가와 약소국들을 뛰어넘는 수준의 중진국이었다. 즉, 여러모로 올림픽 개최에는 기본적으로 경제적인 역량과 인프라가 요구된다는 점은 변함이 없었으며 이는 현재 역시 마찬가지이다.(멕시코와 브라질, 중국(동계 한정)도 올림픽 당시 1인당 GDP가 세계 평균의 80%를 넘기던 중진국 중에서도 안정권이었다. 오직 2008 베이징 올림픽만이 후진국에서 개최된 유일무이한 올림픽에 속한다) 이렇게 올림픽을 유치할 수 있는 수준의 국가와 도시는 한정될 수 밖에 없으며, 개최비용 역시 상당한 부담이 되므로 2020년대 이후로는 개최 열기가 많이 식게 되었다. 이는 IOC에서 올림픽 어젠다 2020과 같은 대책들을 내놓아 개최국의 부담을 덜어주려는 시도의 배경이 되었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변함이 없어 앞으로도 문제가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91] 이러한 사례와 반대되는 대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여론에 대해 불을 크게 지핀 대회가 2018 러시아 월드컵,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 2022 항저우 아시안 게임과 같이 러시아와 중국과 같은 독재국가들에 한해 대회 과정에서의 민폐나 전형적으로 드러나는 노골적인 선전이 한몫했다. 이렇듯 비단 올림픽만이 아닌 다른 대회들에서도 부정적인 부분들이 드러나고 있는 상황이다.[92] 사실상 1970년대 전반에 걸쳐있던 데탕트의 분위기가 깨지고 갑작스럽게 냉전이 다시 촉발되던 시기였다.[93] 이는 개회식의 대미를 장식했던 손에 손 잡고 무대에서도 드러나는데, 이 대회 공식 마스코트인 호돌이 말고도 1980 모스크바 올림픽의 마스코트 미샤와 1984 로스엔젤레스 올림픽의 마스코트 샘이 함께 어울리는 상징적인 무대를 선보였다. 즉 냉전에 의한 보이콧으로 얼룩진 직전 2개 대회의 아픔을 역설적이게도 냉전의 상징인 분단 국가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 치유하게 된 셈이었다.[94] 그동안 이데올로기적 냉전의 연대기: 중공의 탄생과 6.25 전쟁 → 도리어 동구권 국가들의 공산화와 이에 대한 미국의 유럽에 대한 마셜 플랜, 동시에 소련에 대한 봉쇄정책 실시와 쿠바 미사일 위기 → 베트남 전쟁 → 탈냉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데탕트 논의, 자본주의 미국 & 공산주의 소련 세력과 별개인 제3세계의 출현 →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과 중국의 대립 & 공산 진영간의 제3차 인도차이나 전쟁 발발 → &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이에 대한 미국의 공작, 이후 소련의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개혁 개방 정책을 통한 소련의 급진적인 변화, 북한과 중국을 제외한 동구권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 국가의 붕괴 직전의 변화가 시작되던 시점이 바로 서울 올림픽의 개최와 시기적으로 맞물린다. 실제로 1990년대에 들어서 북한과 중국, 쿠바와 같은 일부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 국가를 제외하고 소련과 유고슬라비아를 포함한 대부분의 동유럽 국가들은 전부 무너졌다.[95] 1983년 아웅산 묘소 테러를 시작으로 1986년 김포공항 폭탄 테러와 1987년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등 굵직한 테러를 저질렀다.[96] 손에 손 잡고 가사중에 벽을 넘어서~라는 가사가 있다. 그리고 2년 뒤인 1990년, 독일에서 진짜로 벽을 넘게된다.[97] 다만, 올림픽 개최 전부터 동유럽에서는 한국의 실상에 대한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올림픽이 개최되기 몇 년 전에 비공식적으로 한국을 방문한 어느 동유럽의 체육인이 한국 코치의 집에 초대되어 식사 자리를 가졌는데, 며칠 후 갑자기 다시 한번 식사 대접을 해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이에 당황한 한국 코치가 그 요구에 응한 이후 부랴부랴 부인에게 연락해서 다시 식사 자리를 함께 했는데, 그 동유럽 체육인이 매우 미안해하면서 자신의 무리한 요구에 대해 이렇게 해명했다고 한다. "내가 듣기로는 한국이 헐벗고 못사는 나라인데 일개 체육인의 집이 너무 호화로워서 한국 정부가 선전을 위해 꾸민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무례를 알면서도 이렇게 갑자기 찾아왔다."[98] 1985년 지어진 63빌딩은 한때 아시아 최고층 마천루였으며, 지하철 노선 역시 수도 서울에만 4개, 제2의 도시 부산에 1개 있었다.[99] 정작 당시 베트남은 지구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 중 하나였고, 중국도 90년대 중반까지 최빈국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야말로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수준이었던 셈.[100] 여담으로 소련은 물론이고 그 후신인 지금의 러시아 또한 여전히 막대한 땅덩어리에서 나오는 석유를 주 수출 상품으로 외화벌이를 하는 상황이었다.[101] 당시 서독은 유럽 2위, 세계 4위의 경제대국이었는데 (순위로는 미국, 일본, 소련, 독일 순서였다.) 바로 한 단계 높은 순위였던 소련의 경우는 그 특유의 통계 뻥튀기까지 겹쳐서 단지 시장 규모라는 몸집만 컸을 뿐 내실이 별로 좋지 않았기에 실질적으로는 서독이 유럽 최고의 경제대국으로 보는 것이 옳다. 그러니 서독의 화폐에 감히 동독 마르크가 대등하다는 것은 실제로는 있을 수도 없던 일이었다.[102] 여담으로 당시 올림픽에 참여했던 국내 자원봉사자들의 수기 같은 것을 보면, 당시 소련이나 동독 선수단이 입고 있던 옷이나 신발, 가방, 그 외 여러 일상생활용품의 품질이 국산제품보다 못해보였다는 이야기가 있다.[103] 50년대 한국의 1인당 GDP는 2024년 가치로 환산해도 실질 가치가 고작 500~900달러 수준이었다. 다만 고정환율이 실질환율의 2배 가치라 1960년까지의 통계상으로는 전쟁으로 박살난 나라라 하기엔 높게 나온 편이었으며, 당시 세계의 평균적인 경제 수준이 지금보다 훨씬 안 좋았기에(세계 평균을 넘겼던 일본도 1인당 GDP가 현대 가치로 환산하면 인도네시아급인 5000달러 수준에 프랑스와 영국조차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세계 평균을 가까스로 넘기는 수준인 14000달러대였을 정도였다) 한국보다 가난한 나라들도 많았다.[104] 6.25 전쟁을 휴전한 직후의 대한민국은 경제력이 지금의 아프리카 빈민 국가들 수준이었고, 국제적인 평가도 매우 참담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냉전의 시발점이라고 여겨지는 전쟁을 겪었던지라 영화를 포함한 미디어 매체에서 여러 번 언급되면서 빈민국 이미지가 국외의 대중에게 각인되기도 했다. 그랬던 국가가 전쟁 35년 만에 1인당 GDP가 세계 평균을 넘기는 엄연한 신흥공업국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심지어는 올림픽 약 5년 후, 전쟁 40여 년 만에 선진국 수준 경제력을 갖추게 된 것은 물론(다만 IMF 외환 위기로 인해 실질적으로는 그로부터 약 10년 후에 선진국에 진입했다) 올림픽으로부터 약 사반세기 후, 전쟁 60여 년 만에 강대국의 최소에 준하는 지역강국 최상위권으로 더욱 발전을 거듭하게 되었다.[105] 오늘날로 치환하면 우크라이나가 2060년 이전에 전쟁 피해를 모두 복구하는 것을 넘어 엄연한 선진국으로 자리잡은 후 키이우에서 올림픽을 치를 거라는 것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수준으로 믿을 수 없는 수준의 일이었던 셈이다.[106] 대표적인 예로는 루마니아 혁명과 동구권 국가들의 혁명 그리고 사실 훨씬 그 이전에 벌어졌던 헝가리 혁명, 포즈난 항쟁, 프라하의 봄 등이 있다.[107] 당시의 통일 체코슬로바키아[108] 다만 2010년대 초반까지 서양인들 중에서는 한국을 동남아 국가와 비슷한 이미지로 여긴 경우가 있을 정도로 국력 대비 인지도가 심각하게 낮았다. 당연히 이때는 알 만한 사람들은 한국이 선진국이라는 사실을 다 알고 있었다.[109] 올림픽 개최 시도 자체는 박정희 정권 말부터 시작됐다.[110] 이때는 아직 6.29 선언 이전 즉 직선제 수용 직전 시점이기 때문에 기존의 5공 헌법(7년 임기)으로 대선 시행을 앞둔 시기였다.[111] 실제로 IOC는 6월 항쟁 상황을 예의주시하며 개최지를 1988 올림픽 유치 과정 중 최종 탈락한 일본 아이치현의 나고야시로 변경할 플랜 B를 만지작거리고 있었으며, 이에 더해 독일 베를린 또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게 올림픽 유치권을 이양하라는 압박까지 하고 있었다. 이는 당연히 민족감정상 좌시할 수 없는 일이었다.[112] 물론 그렇다고 해서 "국제적 시선도 있으니 군사정권은 어차피 물러났을 것"이라고 안이하게 판단할 수는 없다. 대형 국제 행사를 앞두고 국제적 시선이든 뭐든 상관 없이 유혈진압을 한 사례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멕시코는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를 앞두고 구스타보 디아스 오르다스 정권의 틀라텔롤코 광장 학살 사건으로 시위대에 있는 대학생들을 무자비하게 죽였으며, 아르헨티나는 1978 FIFA 월드컵 아르헨티나 중에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정권이 정치범을 잔인하게 고문한 것으로 인권탄압을 지속했다. 한국은 주한미군이 주둔하고 있다는 차이점이 있긴 하나, 1980년대 이전까지는 미국도 친미 독재 정권이 국익에 유리하다면 방관하곤 했기에 유혈사태가 없으리라고 단언할 수는 없었다.[출처필요] [114] 원 출처: <6월항쟁을 기록하다> 3권 p296~297.[115] 미국 외무부가 직접 움직이며 제임스 릴리 주한미국대사를 통해 레이건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고 전두환 대통령 앞에서 구두상으로 직접 경고하기까지 했으며, 전두환이 경고를 무시하고 국군을 투입할 상황에 대비해 주한미군사령관까지 미리 만나서 논의할 정도로 기민하게 움직였다.[116] 이건 2005년 MBC 주말특별기획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도 그대로 묘사되었다. 노태우가 개회식을 하는 것을 보면서 "재주는 누가 넘고 돈은 누가 번다더니"라며 분개해 하는 이순자, 착잡한 표정의 가신들, 그리고 회한으로 눈시울을 훔치는 전두환의 모습은 덤. 전임 대통령이자 개최에 큰 도움을 준 전두환을 귀빈석에 위치시키는 것은 별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노태우는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다.[117] 민중당 계열 그룹들은 1990년대 초반까지도 진보정당 운동에 매진하였다. 이들이 보수로 돌아서게 된 건 1996년 15대 총선을 전후해 김영삼이 이들 인사를 영입하면서부터였다.[118] 원 출처: <장정 4: 나의 무직 시절> p309~310.[119] 원 출처: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3권 p157.[120] 물론 직접 대한민국에 와 본 경험이 없는 일본인들은 2년 전인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시절에 이어서 또 다시 TV에 비친 서울과 그 외 대도시의 모습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일본에 감히 견줄 수준이 아니었는데 말 그대로 격차가 확 줄어버렸으니. 게다가 이때는 버블경제가 절정에 달한 시기라서 일본 경제가 최전성기 시절이었다.[121] 실제로 직전과 그 전의 올림픽 개최국이 다름 아닌 냉전 시기 양대 초강대국인[122] 큰 의의를 지닌 올림픽 개최의 성공과 동시에 개발도상국이었던 대한민국의 눈부신 성장은 수많은 국가들의 성장의 대표적인 본보기이자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의 위상을 끌어올리는 전환점이 되었다.[123] 1987년에 나온 대체역사물 소설 <비명을 찾아서>를 보면 저자인 복거일이 어떻게 서울 올림픽을 부정적으로 인식했는지를 알 수 있다.[124] 서독, 일본, 대한민국, 중국이 바로 이러한 범주에 속한다. 서독은 세계대전 후에 라인강의 기적을 이루어 내었고 일본은 1964 도쿄 올림픽 이후 선진국으로 진입, 대한민국 또한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등을 토대로 일본과 독일과 같이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냈다. 심지어 중국은 마오쩌둥 사망 이후 덩샤오핑의 주도 하에 국가적으로 개혁개방 시장 경제 체제를 부분적으로 도입하였고, 이후 베이징 올림픽을 기점으로 하여 일본을 제치고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에 들어서면서 초강대국 미국과의 양강 구도를 토대로 20세기 시절의 소련의 뒤를 이어 G2체제를 성립하게 되었다. 다만 애초에 일본과 독일, 그리고 중국은 꽤나 높은 위상을 가지고 있던 국가들이었다. 독일은 영국, 프랑스와 함께 19세기 후반부터 부상한 이후에는, 중국은 고대 시절부터 동아시아 전체를 휘어잡은 지역패권국이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승전국이기도 했다. 일본 또한 말할 것도 없이 개항과 메이지 유신 이후 러일 전쟁 승전으로 동아시아 패권을 잡고, 이후 1차 세계대전에서도 연합국 승전국으로 부상했으며, 2차 대전 때는 그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치르기도 했던 나라였고 아시아 유일의 식민제국을 건설했었다. 다시 말해 시대를 막론하고 강대국 반열을 차지했던 나라들이었던 것. 그러나 한국은 이전에도 중국 왕조의 조공국에 불과하였으며, 이에 더하여 일제강점기를 겪었다. 그런 나라가 올림픽을 개최할 수준까지 올라섰다는 것만으로도 그 당시의 외국인들에게는 굉장히 놀라운 일이었다.[125] 운동권은 특히 올림픽 개최를 3S 정책의 일환으로 보고 개최 반대 운동도 전개하고, 남북공동개최까지 주장했었던지라 그 충격이 더 컸던 것이었다. 그 전까지 그다지 드러나지 않았던 운동권 내부의 문제들(대표적으로 권위주의)도 운동권의 쇠퇴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말이다.[126] 실제로 통계상 이 시기의 미세먼지 농도가 지금보다 더 심각한 수준이었다고 추정되고 심지어 이 때문에 몇몇 외국인 선수들은 일본에서 기다리다가 개막 직전에야 한국으로 왔다고 할 정도. 그러나 1986년 아시안 게임 이전부터 중앙정부는 환경오염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였고 관련 법 제정 및 자체적으로 개최 기간 내에 차량 홀짝 이용제를 운영하는 등의 자제를 부탁하고, 거기에 길거리 쓰레기 및 각종 규칙을 지켜줄 것을 신신당부하면서 언급하고, 당시 국민들이 이러한 규칙을 성실히 이행함에 따라서 이후 오히려 인식이 굉장히 좋아졌다.[127] 반대로 20년 뒤 2008 베이징 올림픽 때는 베이징시의 공해로 인해 한국이 베이스 캠프 특수를 누렸다. 이 밖에도 시차, 지리, 기후상의 이점과 하계 올림픽, FIFA 월드컵, 아시안 게임 등을 개최하면서 구축한 뛰어난 체육 시설, 수준급 훈련 파트너까지 갖추고 있었으며, 여기에 각 지자체들이 적극적으로 협조하였기 때문이다. 베이징 올림픽, 한국 어부지리 현실화되나[128] 집권 3년차인 1982년에 야구에서는 아마추어 스포츠를 규합하여 비록 급조됐더라도 직업선수들이 오롯이 뛰는 프로리그를 창설하기에 이르렀는데, 1982년 프로야구 출범이 성공하자, 이듬해에 연달아서 축구 슈퍼리그와 프로민속씨름도 성공하게 된다. 거기에 겨울 인기스포츠인 농구와 배구는 비록 완전 프로화까지는 아니더라도 각각 1983년 농구대잔치와 1984년 대통령배 전국남녀배구대회(백구의 대제전)의 세미프로리그를 출범시켰다. 또한 여기에 스포츠 인재 양성을 위해 예술체육요원의 선발 범위를 더 넓히는 정책을 실시하여 수많은 스포츠인들을 양성한다. 지금이야 세월이 지나 나라가 발전해서 국가적으로 스포츠 시설 건설을 지원하지만 올림픽이 열리기 전만 하더라도 한국은 그야말로 스포츠 시설들이 부족한 국가였다. 현재를 기준으로 이 때 당시 지어진 시설들은 낙후되었지만 서울 올림픽 개최 전만 하더라도 여러 비인기 종목들의 시설들이 아예 없는 게 현실이었다. 그러나 올림픽 개최로 모든 올림픽 종목 시설들이 건설되면서 현재도 해당 시설들을 잘 활용하고 있다는 점을 봤을 때, 서울 올림픽은 대한민국 스포츠 발전에 엄청난 공헌을 했다고 볼 수 있다.[129] 이처럼 전두환 정권의 올림픽의 성공은 곧 3S정책의 달성해야 할 최대의 목표라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었다. 이렇듯 프로스포츠의 시대가 열렸고 지금껏 적지 않은 프로구단들이 올림픽 당시에 지어진 시설을 썼거나 쓰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분명 대한민국 스포츠계 및 문화계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아이러니하게도, 위에 서술했듯이 이 올림픽이 발목을 잡아 그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130] 다만 이는 (80년대 냉전의 대표 사건으로 간주되는)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의 영향이 컸다. 아이러니하게도 (냉전의 종결을 알린) 88올림픽 성화도 대한항공 소속 기체(DC-10)가 봉송했다.[131] 1990년대까지는 한국일보가 발행부수 200만부를 넘어서는 메이저급 신문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과도한 투자를 한데다가 IMF 외환위기로 직격탄을 맞고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한겨레와 경향에도 밀리게 되었다.[132] 물론 이용자의 의식 수준이 하루 아침에 바뀌는 것이 아닌지라 공중화장실 자체의 불결 문제는 그로부터 14년 뒤인 2002 한일 월드컵 때를 앞두고 나서야 비로소 개선되었지만, 그 이전까지 시설 자체가 매우 열악했던 것에 비하면 상전벽해 수준으로 개선되었다. 이는 과거 시골의 푸세식에서 도시의 현대식 화장실로 격변하는 과정이었다.[133] 그래서 당시 점주들이 이를 갖추느라 고생했다고 한다.[134] 이러한 현상은 서울 올림픽 이후였던 1990년대부터 급속도로 나타난다.[135] 물론 이는 전두환이 국내를 비롯해 미국 등의 강대국들로부터 자신의 정치적 입지에 관한 지지기반을 잘 다지지 못해, 안 좋은 국내 여론을 잠식시키고 제3세계 국가들과의 외교를 통해 이를 만회해 보려는 속셈이라는 부정적 평가도 있었지만, 그래도 우리나라의 국제적 지위향상과 더불어 외교노선 다변화에도 도움이 되는 등의 성공적이면서도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올림픽 유치 당시 참가하는 아프리카 국가들에게 저가로 전세기를 띄워주겠다고 약속했고, 실제로 그 약속은 서울 올림픽 당시에 지켜졌다. 이전까지 아프리카 지역의 경우 한국 대통령이 현지 국가에 공식 방문한 사례는 전두환이 최초였다. 전두환 이후 대한민국 대통령의 아프리카 국가 정상들과의 만남은 2006년 3월 노무현 대통령에는 아프리카 3개국 (이집트, 나이지리아, 알제리)의 국가 정상들이 종종 방한함으로써 이루어진 것뿐, 현지 방문은 없었다.[136] 미국 애틀랜타야 나라 그대로 '천조국' 클라스였고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전세계적으로는 올림픽 100주년이라는 확실한 명분이 있던 아테네의 올림픽 유치권을 '스틸'했다는 비판 여론이 지금도 만만치 않게 남아 있고, 스페인 바르셀로나는 당시 IOC 위원장인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의 고향이었던데다가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독재정권에서 벗어나 다시금 약진하던 스페인이었기 때문에 만일 올림픽 유치를 놓고 맞붙었다면 대한민국으로서는 쉽지 않은 상대였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그리고 1996년 올림픽의 경우에는 비록 미국의 상업적 로비에 놀아난 이유로 인해 애틀랜타가 유치했지만 경쟁국가 및 도시들 중 하나가 그리스의 아테네였다. 하필 1996년의 올림픽은 1896년에 고대 올림픽의 발상지인 아테네에서 올림픽이 부활하여 다시 아테네에서 개최한 것을 시작으로 한 근대 올림픽이 100주년을 맞는 해였다. 즉, 명분만 놓고 보면 당시 미국 월드컵을 개최한지 얼마 안된 상황에서 욕심을 내면서 유치전에 끼어들은 애틀랜타는 상대가 되지 못했던 상황이었고 거기에 실제로 전세계적으로 근대 올림픽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는 명분상 아테네에서 개최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보아 큰 지지를 얻었던 상황이었으며 실제 유치전의 흐름도 아테네가 주도했었을 정도였다. 그러다가 개최지 투표에서 3차 투표까지는 아테네가 1위였다가 마지막에 뒤집힌 것이었다.[137] 당시 서머타임이 적용됐다는 걸 감안한다면, 한국 시각으로 오후 9시~오전 12시는 미국 동부 시각으로는 오전 6시~9시였다. 미국 서부는 이보다 3시간이 더 이후인 오전 3시~6시였다.[138] 다만 케이블TV의 프로토타입이라고 할 수 있는 중계유선방송에서 당대 지상파 방송프로그램이나 비디오 같은 것을 틀어주기는 했다.[139] 다만 <TV 손자병법>으로 팬이 된 남성 시청자도 좀 있었다.[140] 그래서 비디오점이나 만화방, 만화잡지 파는 서점, 전자오락실 등의 매출액이 크게 증가했다는 후문이 있다.[141] NHK에서 아날로그 HD 영상 압축 방식인 MUSE Hi-Vision 방식으로 시범방송한 것이 그것. 참고로 일본에서 정식으로 아날로그 HD방송을 개시한 시기는 1989년이다.[142] 4년 뒤 1992 알베르빌 동계올림픽과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또한 아날로그 방식의 HD-MAC이라는 포맷으로 유럽 지역에서 HD 시험방송을 진행하였다.[143] UHD의 경우 30년 후 같은 대한민국에서 열린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이 세계 최초이다.[144] NHK 공식 홈페이지 50주년 연표에 서울 올림픽을 HD로 제공했다고 영어로 적혀있다.[145] 이 영상 링크는 IOC에서 35mm 영화필름으로 촬영된 것으로 HD급 화질로 스캔 된 것일 뿐 전자식의 실제 NHK의 MUSE Hi-Vision HD영상은 아니다. 실제 NHK 영상은 거의 요즘의 HD영상과 같은 수준이다.[146] 해당 기사 p40 참고.[147] 이하 출처: <KBS 연지 1989> p336~337.[148] 참고 자료: <KBS 연지 1989>, <KBS 저널> 1988년 9월호 p36~42.[149] 당시 KBS 스포츠국 스포츠취재부장 겸 <KBS 스포츠쇼> 앵커.[150] 당시 일간스포츠 편집위원.[151] 당시 일간스포츠 논설위원으로, 2TV <생방송 전국은 지금> 스포츠기사 해설 담당.[152] 1941~2015. 전 성균관대학교-이화여자대학교 농구부 감독. 1991년 이후 SBS 농구 해설위원 역임.[153] 패럴림픽은 서울신탁은행(現 하나은행)이 스폰서였다. 30년 뒤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서는 우연히도 두 은행이 합쳐져 하나의 같은 은행으로서 스폰서가 되었다. 패렬림픽의 스폰서도 같은 하나은행이다.[154] 소련뿐만 아니라 당시 모든 공산권 동유럽의 국가들도 모두 공산주의 체제 하에서는 마지막으로 참여한 올림픽이었다.[155] 중국은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서 첫 금메달을 땄고, 일본은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못 딴 대회가 몇몇 있었다.[156] 당시 해군 의무 복무 때문에 NBA 진출이 늦춰졌던 데이비드 로빈슨이 속해 있었다.[157] 그래도 해설만 잘못되었을 뿐이지 실제로는 소련의 국가가 제대로 연주되었다.[158] 이들의 입국 비자는 일본 주재 대한민국 대사관에서 발급되었다.[159] 물론 소련인들의 영사 업무만 진행했을 뿐, 한국인을 비롯한 외국인들의 소련 접촉은 일체 받지 않았다.[160] KBS, MBC 미국정부, 노태우 대통령 당선 축하논평[161] 이 사건 직후 모스크바에서 열린 세계유도선수권대회에 대한민국은 다음 대회 개최국이었음에도 불참했다.[162] 올림픽 주경기장에서부터 암사동 선사유적지를 잇는 도로. 테헤란로에서 이어지며, 서울 지하철 2호선, 8호선이 이 도로 지하를 달린다.[163] 88올림픽고속도로는 대구와 광주를 잇는 고속도로로 물론 서울시에 위치하지는 않지만 88올림픽 유치 직후 건설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역시 서울올림픽을 기념한다는 취지로 명명되었다. 2015년 12월 22일 선형 개량 공사 완료 및 4차로 확장 개통과 함께 광주대구고속도로로 전면개통했다.[164] 이 사례가 중요한 이유는 영미권 PC주의 국가들에서 공부하는 아시아계 유학생들이 추석이나 설 등의 명절을 이유로 데드라인 연기를 요청하기 때문이다. 호주나 캐나다 등에서 추석이나 설은 쉬는 날이 아니고 따라서 데드라인이 이 기간에 올 수 있는데, 아시아계 학생들이 문화다양성을 주장하며 민족명절에는 숙제를 낼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165] 핀란드는 1955년 12월 14일에, 독일(당시 서독, 동독도 같은 날에 가입했다.)은 1973년 9월 18일에 각각 UN에 가입, 그리고 대한민국은 북한과 같은 날 1991년 9월 17일에 UN에 회원국으로 가입했다.[166] 이는 2002년 한일월드컵 역시 마찬가지이다.[167] 재미있게도 코스타리카에서 88 올림픽 때 메달을 딴 선수들은 모두 니카라과 출신이다.
이른바 '삼태극'으로 불리는 휘장이며, 이 엠블럼은 KBS 신관 정면에도 붙어 있다. 올림픽 당시 국제 방송센터로 사용되었기 때문. 휘장 도안은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인 양승춘이 맡았다.[2] 과천시(승마), 고양군(현 고양시, 승마, 사이클), 수원시(핸드볼), 광주군(현 하남시, 조정), 성남시(하키)[3] 당시 충청남도 대전시. 올림픽 개최 이듬해인 1989년 충청남도에서 분리 후 대덕군과 통합하여 대전직할시로 승격, 1995년에 대전광역시로 행정명칭이 변경되었다.[B] 축구[A] 당시 직할시. 올림픽 개최 7년 후인 1995년에 광역시로 행정명칭이 변경되었다.[B] [A] [8] 축구, 요트(벡스코 2전시장 끝쪽에 요트경기가 열린 것을 기념하여 올림픽동산과 올림픽기념공원이 있으며, 수영공항이 사라진 뒤, 수비교차로의 명칭을 올림픽교차로로 바꾸기도 하였다.)[A] [B] [11] 남자: 6,197명, 여자: 2,194명.[12] 1965년생 남자 농구 국가대표 선수.[13] 1964년생 여자 핸드볼 선수.[14] 유도[15] 전라남도 신안군 가거도의 중학교 분교 교사.[16] 마라톤 선수. 2년 후 1990 베이징 아시안 게임 남자 마라톤 금메달을 획득했다.[17] 서울예술고등학교 무용과 학생. 대부분 손기정이 한 것으로 오해하는데 손기정은 성화를 올림픽주경기장까지 봉송하였고 점화는 전술한 3인이 했다.[18] 시기상 한국어 관련 홈페이지(입장권, 스토어, 안내, 뉴스 등)는 원래 없었으며, 올림픽 위원회 공식 홈페이지가 만들어져 있다.[19] 국민체육진흥공단에서 운영하는 아카이브.[20]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에서 1984년 12월 표어를 공모했으며 총 48,019개의 응모작품 중에 홍재훈 씨가 제출한 "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가 심사에서 최우수작으로 뽑혔으며 서울올림픽의 공식 문구로 선정되었다. 기사[21] 1988년 9월 17일 ~ 1988년 10월 2일, 총 16일간 서울특별시와 경기도 일부 수도권 지역 및 각 종목별로 주요 도시 지역에서 개최됐다. 축구 종목은 당시 수도권 뿐만 아니라 타 지역에서도 경기가 열렸고, 요트 종목의 경우는 부산 수영만에서 경기가 진행되었다. 1970년대 이후 열린 하계올림픽 중 가장 늦은 날짜에 열린 개회식이었다. 남반구에서 열린 2000 시드니 올림픽 개회식보다도 이틀이 늦다. 실제로 대한민국은 7~8월에 폭염과 폭우와 태풍의 빈발로 이 기간 중 국제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기가 불가능하다. 실제로 35년 뒤인 2023년 제25회 세계스카우트잼버리에선 태풍 카눈으로 인해 잼버리의 인원들이 전원 철수하는 사건이 벌어졌다.[22] 첫 번째 대회는 일본의 1964 도쿄 올림픽이며, 3번째 대회는 중국의 2008 베이징 올림픽.[23] 올림픽하고는 별개의 사례이지만 그나마 있다면 국가적으로 FIFA 월드컵과 이후 아시안 컵을 연속으로 개최한 카타르, 코파 아메리카와 FIFA 월드컵을 동시에 개최할 미국이 있다.[24] 대한민국의 실상을 제대로 몰랐던 동구권 국가들이 서울 올림픽으로 인해 각성하는 효과를 내었다. 자세한 내용은 하단 내용 참조.[25] 당시 남아공은 아파르트헤이트 때문에 국제 스포츠계에서 이미 퇴출된 상태였다. 그런데 몬트리올 올림픽을 얼마 앞두고 뉴질랜드 럭비팀이 뜬금없이 남아공에 가서 친선경기를 하면서 문제가 터졌다. 격분한 아프리카 국가들은 뉴질랜드에 대한 제제를 요구했지만, IOC는 냉담하게 무시했고 결국 아프리카 26개국이 올림픽을 전면 보이콧하게 된다.[26] 동독 뿐만 아니라 여러 공산권 국가의 경우 스포츠 대회에서의 좋은 성적을 토대로 국력도 과시하고 국민들을 단합시키는 효과를 노렸는데, 한편으로는 세계 스포츠 대회에 출전하면 사실상 해외를 자유롭게 다닐 수 있다는 점에서 관계자 및 선수들 또한 그 무대가 선망의 대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 나가지 못한데 대한 스포츠계의 실망은 엄청났고, 동독 또한 예외는 아니었던 것이다.[27] 이때 김운용 위원의 나이는 50대였다. 물론 기존에 5개 국어를 유창하게 했을 정도로 언어적 감각이 탁월한 인물이었지만, 새로운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이다. 또한 러시아어는 세계에서 어려운 언어 중 하나로 꼽힌다는 것도 감안해야 한다.[28] 직전 대회였던 1983년 유도 세계선수권대회는 소련에서 개최되었으나 대한민국은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에 대해 항의하며 불참했었다.[29] 소련, 서울올림픽 참가 공식발표[30] 지금이야 어느 정도 용인이 된다 쳐도,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와 정권의 반공 성향을 감안하면 대한민국에서 적성 집단(대한민국 헌법상 북한을 '국가'로 보지 않으므로 '적국'이라고 보지도 않았으며 이는 지금도 유효하다.)으로 인식되는 북한의 인공기를 게양하고 또한 북한 국가를 연주하는 것은 그야말로 경천동지할 일. 물론 북한은 엄연한 IOC 회원국이었기 때문에 만약 참가했다면 인공기와 북한 국가 연주는 무조건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스포츠는 정치색을 배제해야 한다는 것은 신성한 의무와 다름이 없기 때문이며, 실제로 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 대회 당시 북한 축구 국가대표팀이 본선에 진출했을 때도 북한을 적성 국가로 간주해 수교 자체를 하지 않은 영국의 경기장에서 북한 국가가 연주되고 국기가 게양되었다. 물론 영국 정부가 당시 한국 정부에 양해를 구했다.[31] 그리고 대한민국 실효지배 영역인 남한 지역에서 인공기가 게양되고 북한 애국가가 연주된 것은 14년 뒤에 열린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때에야 이루어졌다. 그리고 12년 뒤 시드니 올림픽에서는, 한반도기를 이용하여 동시에 입장하였고 30년 뒤인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에도 북한이 참가했으며 동시 입장 또한 성사되었다.[32] 당시 공산권의 중심인 소련은 1985년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집권하면서 개혁, 개방 노선을 걷고 있는 상황이었다. 비록 아프가니스탄 전쟁 등 미국과 소련 사이의 물밑 대결은 치열했지만, 공개적으로 1987년 중거리 미사일 감축에 대한 협정을 체결하는 둥 유례없이 분위기가 훈훈했다. 이런 데탕트 분위기에서 이념논쟁을 이유로 서울 올림픽을 보이콧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북한을 공산권 국가들이 곱게 봤을 리가 없다. 소련이 1988년에 들어서야 참가 선언을 선언했던 것도 나름 동맹국인 북한을 배려해서 시간을 끈 것이었다. 게다가 스포츠를 통한 국력 과시에 집착하던 소련과 동구권 입장에선 LA에 이어서 2회 연속으로 불참한다는 것은 국내외적으로 부담스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즉 LA와 서울의 개최 순서가 뒤바뀌었다면 반쪽 대회는 LA가 아닌 서울 대회였을 수도 있었다. 물론 LA는 제1세계로 대변되는 명백한 서방 진영과 자본주의 국가의 수장이자 소련의 최대 적국인 미국이고 서울 올림픽이 개최된 한국은 당시 기준으로 1세계에 속한 아시아 개도국 중 하나에 불과한 위상이기에 소련의 참가 여부가 국제 사회에서 큰 파급력을 가져올 수밖에 없음은 감안해야 한다.[33] 이후 북한은 올림픽에 참가한 소련과 중국을 향해 배신자라고 욕하면서 '우리 식대로 살자'란 운동을 펼치기에 이른다.[34] 제1회 하계올림픽 주경기장.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는 양궁 경기장이자 마라톤 최종 골인 경기장으로 쓰였다.[35] 당시 기종은 DC-10-30, 레지번호는 HL7329다.[36] 성화를 실은 DC-10-30 항공편의 최대 항속거리가 9,600km에 불과했기 때문에 한번에 그리스에서 대한민국까지 올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방콕에서 중간 기착한 뒤 대한민국 제주로 향했다.[37] 이 당시는 제주도 내에 제주시와 서귀포시 외에도 북제주군과 남제주군이 있었다. 제주공항이 있던 제주시를 출발해 북제주군과 남제주군을 차례로 거친 뒤 서귀포시를 찍고 다시 제주시로 올라와 하루를 묵었다.[38] 현재의 창원시로 통합되기 훨씬 전이다. 당시에는 진해시로 성화가 들어와서 창원시를 지나친 뒤 마산시로 향했다.[39] 현재의 통영시로 통합되기 훨씬 전이다. 당시는 통영군과 충무시로 나뉜 지역이었는데 성화는 통영군으로 들어와서 충무시로 향했다.[40] 1995년 문경군과 통합돼 문경시가 됐다.[41] 1995년 정읍군과 통합돼 정읍시가 됐다.[42] 1995년 익산군과 통합돼 익산시가 됐다.[43] 1995년 보령군과 통합돼 보령시가 됐다.[44] 1995년 아산군과 통합돼 아산시가 됐다.[45] 현재의 평택시로 통합되기 훨씬 전이다. 당시는 평택시와 송탄시가 나뉘어졌는데 성화는 평택시로 들어와서 송탄시를 거쳐서 나갔다.[46] 성남시로 진입 직전에 용인군(1996년 용인시로 승격)에서도 성화봉송을 했다. 물론 당시 수원IC를 경유하기 때문에 용인군에서도 봉송을 했다.[47] 의정부에서 서울로 오는 봉송로에는 동일로가 포함돼 있었고 그 길가에는 상계동 빈민촌이 있었다. 당시 서울특별시는 외국인들의 눈에 이 거리가 깨끗하게 보여야 한다는 이유로 빈민촌에 대한 강제 철거를 단행하는데 그 이야기는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졌다.[48] 축구 경기가 열린 광주 무등경기장도 사실상 전면 철거되고, 현재는 아예 야구장으로 바뀌어 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가 되었으나, 이쪽은 예산상의 문제로 성화대 주변의 극히 일부를 남겨놓고 구조 변경으로 처리해 만든 것이라 엄밀히 말하면 법적으로는 전면철거가 아니다. 동대문운동장도 거의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조명탑 2개가 남아 있으므로 역시나 전면 철거는 아니며, 대구 시민운동장도 새 축구전용구장을 지으면서 경기장 일부를 존치했다. 또한 문화재 문제(태릉, 강릉을 비롯한 조선왕릉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로 인해 태릉 국제 사격장이 철거 예정이다.[49] 정확히는 1번 국도-356번 지방도-39번 국도를 이용해 당시의 구파발-원당-벽제를 순환하였다. 현재 신도시 개발로 도로의 선형이 많이 바뀌어(특히 구파발역 인근) 당시의 도로와는 많이 다르다.[우3동] 마린시티 옆[51] 건물 입구에 올림픽 볼링 경기를 개최한 기념비가 있다.[52] 손가락이 없거나 오그라져서 펴지 못하는 손[53] 참고로 남자 단체 구기 첫 금메달은 20년 뒤인 2008 베이징 올림픽 야구에서 나온다.[54] 오스트레일리아가 아닌 유럽인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별도 개최[55] 그나마 강원도는 1968년 원주시 출신의 지용주가 은메달을 따기는 했다. 강원도는 1992년에 황영조(삼척)가 마라톤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최초 금메달리스트가 되었고, 제주도는 2008년에 베이징 올림픽 야구 국가대표팀 소속이던 강민호가 야구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최초 금메달리스트가 되었다.[56] 출처 국제스포츠정보센터[시범] 시범 경기 종목[시범] [59] 대한민국 선수단 중 최고령 선수. 1953년 2월 28일 출생 (당시 만 35세).[60] 대한민국 선수단 중 최연소 선수. 1974년 3월 18일생 (당시 만 14세).[61] 문은진과 문현진은 문선명의 자녀들이다.[시범] [63] 개막식 당시 한국 대표팀의 기수를 맡았다.[시범] [65] 구.정신지체[66] 목동신시가지아파트[67] 현재의 난향동 지역으로, 그 난곡도 2000년대 난곡뉴타운으로 재개발되었다. 여기 살던 빈민들은 아예 서울특별시 바깥으로 쫓겨났을 것으로 추정된다.[68] 1955년생.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 및 동 대학 대학원 신문방송학 졸업. 1983년부터 3년 동안 이장호, 정지영, 장선우 감독 등에게서 연출 수업을 받아 1987년부터 3년 동안 서강대 커뮤니케이션센터 상임연출가로 일했고, 1991년 '푸른영상'을 세워 <행당동 사람들(1994)>, <명성, 그 6일의 기록(1997)>, <또 하나의 세상 - 행당동 사람들 2(1999)>, <송환(2003)>, <내 친구 정일우(2017)>, <2차 송환(2022)> 등 독립영화 제작을 통해 민중 문화운동을 펼쳤고, 1991년 독립영화협의회 위원장도 맡았으며 1998년 '한국독립영화협회' 창설을 주도하며 5년 동안 초대 이사장을 맡았다.[69] 출처: <가짐없는 큰 자유: 빈민의 벗, 제정구의 삶(제정구를 생각하는 모임 저.)> 학고재. 2000. p180.[70] 영화 홀리데이의 모티브가 되는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당시 희대의 키워드를 곰곰히 생각해보자.[71] 일산신도시와 분당신도시도 이 때 건설이 추진되었고, 1991년부터 분양되기 시작했다.[72] 5위가 신아람 선수의 2012 런던 올림픽 1초의 기적, 4위가 2008 베이징 올림픽 태권도 여자 67kg 급 8강전, 3위가 2000 시드니 올림픽 남자 유도 100kg 이상급 결승전, 1위가 1972 뮌헨 올림픽 남자 농구 결승전[73] 8강, 준결승 당시에도 이런 판정이 있는지는 영상 매체가 없어서 알 수 없다.[74] 다만 나이 들어서도 은퇴하지 않고 꾸준히 경기를 뛰면서 전적에 흠이 많이 갔었다.[75] 앞서 언급했듯이 경기 직후 박시헌 본인이 전혀 환호하지 않는 모습을 통해 그가 금메달을 원하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난다. 이후 인터뷰에서 그는 경기 당시 이미 자기가 진 것을 알았으며 손이 올라가서 깜짝 놀랐다고 밝혔다. 박시헌 본인은 패배를 계속해서 인정했고 존스를 만나 사과하려고 했으며, 존스 본인도 훗날 인터뷰에서 "그(박시헌)의 탓이 아니다. 나만큼이나 그 역시 피해자"라고 말하며 그를 전혀 탓하지 않는다고 여러번 얘기했다. 실제로 박시헌은 전국적인 비난에 시달리다가 올림픽 직후 22세 젊은 나이에 떠밀리듯 은퇴를 했다. 이러한 사건은 2023년작 영화 <카운트>에서도 다뤄졌다.[76] 당시 미국 선수 '폴 햄'이 개인종합 도마에서 심판석까지 굴러 떨어질 정도로 크게 착지 실패를 하고도 0.049점을 양태영보다 더 얻어 금메달을 가져갔다. 이 오심으로 관련 심판 3명이 징계를 받았으며, 체조종목 체점 체계까지 바뀌었을 정도로 대사건이었다.[77] 육상 인기가 태생부터 좋지 못한 우리나라에서조차 2011년 대구 육상 선수권의 남자 100m 결승전은 가장 빨리 매진되었으며 암표가 가장 많이 들끓었던 종목이었다. 또한 마라톤이 워낙 핫 이슈 종목이기 때문에 훗날 2004 아테네 올림픽 남자 마라톤에서 브라질의 '반데를레이 리마'가 중반부터 압도적 선두를 달리다 결승점을 5km 남짓 앞두고 아일랜드 출신의 종말론자에게 습격을 당해 3위로 처진 사건이 국제적으로 매우 빠르게 이슈화될 수 있었고, 그가 자국에서 열린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성화 점화자로 선정될 수 있었다.[78] 위에도 나오는 당시 소련 팀이 낸 여자 1,600m 계주 신기록이 깨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 대부분 모른다. 상술한 주석에서 언급한 마라톤의 '반데를레이 리마' 사건이[79] 현재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한국은 대놓고 인종차별을 하던 나라여서 흑인인 벤 존슨이 피해를 입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위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100m 종목은 칼 루이스를 비롯하여 상위권에는 죄다 흑인 선수들이 포진해 있다. 흑인이라서 피해를 입었다는 건 어불성설이다.[80] 1974~91년까지 사회주의 공화국. 사실 내전으로 인한 불참이었다.[81] 1985년 사망한 엔베르 호자 시절에는 사회주의 공화국, 공산권 가운데서도 극단적으로 폐쇄적인 국가로 악명이 떨쳤고, 호자의 사후인 1980년대 후반에 다소 완화되었지만 그래도 공산권에서 폐쇄적인 국가로 꼽혔다. 이때 4회 연속 올림픽 불참국이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올림픽 참가에 관심이 없었을 가망성이 많다.[82] 1975~92년까지 사회주의 공화국. 당초 참가 의사를 밝혔으나 마감 시한까지 선수단 명단을 제출하지 않아 최종 불참 처리되었다. 북한의 로비가 있었으며 불참 해주는 조건으로 북한에게 쌀 1만 톤을 요구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2015년작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성덕선(혜리)의 올림픽 피켓 걸 출현이 좌절될 뻔한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후에 벌점자들의 대타로 우간다 선수들과 입장한다.[83] 1979~92년까지 사회주의 공화국. 이쪽은 당대에도 경제 상황이 괜찮았는데도 굳이 불참한 예이다. 다만 다당제 전환 이후로는 1993 대전 엑스포에는 정상적으로 참여했다. 집권 정당이 교체된 것은 아니고 정권이 교체된 것은 먼 훗날의 일이다.[84] 쿠바의 지원으로 1979~90년까지 사회주의 공화국. 사실 명목상으로는 다당제 민주국가였고 여타 다른 사회주의 국가와는 다르게 야당 세력이 합법적으로 존재했던 나라였기에 참가가 가능했겠지만 콘트라 내전으로 인해 국가가 혼란했던 상황에 따른 불참에 가깝다.[85] 물론 모든 IOC 국가의 참가가 실현된 것은 다음 대회인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또한 이들 중 북한과 알바니아, 마다가스카르는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는 선수단을 파견하게 된다. 한편 2022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외교적 보이콧이라는 이름으로 보이콧이 부활하였다.[86] 1936 베를린 올림픽은 1차 세계 대전 패망으로 허덕이던 독일의 부활을 알렸고, 1964 도쿄 올림픽은 역시 2차 세계대전 이후로 다시 과거 열강/선진국 반열에 재진입했음을 알린 대회였다.[87] 각 올림픽마다 굵직하게 터졌던 사건에 대한 설명과 이에 따른 부정적인 결과를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은 개막식 이전에 이뤄진 군부의 탄압에 의한 유혈사태와 검은 장갑 사건이 터지면서 당시 좋지 않은 쪽으로 이목을 집중하게 된다.
* 뮌헨 올림픽은 테러단체에 의한 이스라엘 선수단의 인질 억류 및 구출 실패라는 전무후무한 테러 사건으로 인해 2차 세계 대전 이후 눈부신 재건으로 라인강의 기적을 이뤘던 서독의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혔다.
* 캐나다 1976 몬트리올 올림픽은 개최 이전부터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로 인한 아프리카 국가들의 인종차별의 반발 및 보이콧과 더불어 뮌헨 올림픽의 여파로 인해 경비가 폭등하였고, 대회 폐막 이후 사상 최악의 적자로 파산하게 된다.
* 소련의 1980 모스크바 올림픽과 미국의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은 다시 촉발된 냉전과 이념 대립으로 공산 진영과 자유 진영 각각의 대회 보이콧이 대규모로 일어났고, 결국 두 대회 모두 반쪽자리로 전락하게 된다.[88] 한국의 선진국 진입은 서울 올림픽으로부터 약 15년 정도 지난 한일 월드컵 무렵(2002년)에야 성사되었다. 자세한 것은 선진국/대한민국 문서 참조.[89] 사실 이미 서울 올림픽 이전에 그리스의 아테네, 스웨덴의 스톡홀름, 핀란드의 헬싱키, 멕시코의 멕시코 시티처럼 열강 체급이 아닌 국가가 올림픽을 개최하는 사례가 있어왔다. 반대로 베를린, 도쿄와 같이 전쟁 직후 재건을 거쳐 올림픽을 개최한 사례가 있어왔다. 하지만 서울 올림픽은 언급된 2가지 항목에 전부 들어가는 올림픽이다. 즉, 오랜 식민지배를 겪은 직후 전쟁으로 인해 최빈국이 된 비 서구권 국가에서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한 최초의 사례이다.[90]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 올림픽 이후 신흥 개발도상국에서 치러진 올림픽은 2008 베이징, 2016 리우데자네이루 2번이 전부이며, 동계 올림픽까지 합해도 2022 베이징만 더해질 뿐이다. 또 중국, 브라질이 강대국급 국가들이었던 반면에, 전체적인 국력으로 봤을 때 잘 쳐봐야 지역강국 수준에 그치는 비유럽권 개발도상국에서 올림픽을 개최한 사례로는 현재까지도 1988 서울 올림픽과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 이렇게 단 2개가 전부다. 그리고 사실 대한민국은 서울 올림픽 당시 기준으로 GDP 순위가 세계 19위에 달하는 중견국이었고, 1인당 GDP는 세계 평균의 1.25배에 달하는 어지간한 공산권 국가와 약소국들을 뛰어넘는 수준의 중진국이었다. 즉, 여러모로 올림픽 개최에는 기본적으로 경제적인 역량과 인프라가 요구된다는 점은 변함이 없었으며 이는 현재 역시 마찬가지이다.(멕시코와 브라질, 중국(동계 한정)도 올림픽 당시 1인당 GDP가 세계 평균의 80%를 넘기던 중진국 중에서도 안정권이었다. 오직 2008 베이징 올림픽만이 후진국에서 개최된 유일무이한 올림픽에 속한다) 이렇게 올림픽을 유치할 수 있는 수준의 국가와 도시는 한정될 수 밖에 없으며, 개최비용 역시 상당한 부담이 되므로 2020년대 이후로는 개최 열기가 많이 식게 되었다. 이는 IOC에서 올림픽 어젠다 2020과 같은 대책들을 내놓아 개최국의 부담을 덜어주려는 시도의 배경이 되었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변함이 없어 앞으로도 문제가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91] 이러한 사례와 반대되는 대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여론에 대해 불을 크게 지핀 대회가 2018 러시아 월드컵,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 2022 항저우 아시안 게임과 같이 러시아와 중국과 같은 독재국가들에 한해 대회 과정에서의 민폐나 전형적으로 드러나는 노골적인 선전이 한몫했다. 이렇듯 비단 올림픽만이 아닌 다른 대회들에서도 부정적인 부분들이 드러나고 있는 상황이다.[92] 사실상 1970년대 전반에 걸쳐있던 데탕트의 분위기가 깨지고 갑작스럽게 냉전이 다시 촉발되던 시기였다.[93] 이는 개회식의 대미를 장식했던 손에 손 잡고 무대에서도 드러나는데, 이 대회 공식 마스코트인 호돌이 말고도 1980 모스크바 올림픽의 마스코트 미샤와 1984 로스엔젤레스 올림픽의 마스코트 샘이 함께 어울리는 상징적인 무대를 선보였다. 즉 냉전에 의한 보이콧으로 얼룩진 직전 2개 대회의 아픔을 역설적이게도 냉전의 상징인 분단 국가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 치유하게 된 셈이었다.[94] 그동안 이데올로기적 냉전의 연대기: 중공의 탄생과 6.25 전쟁 → 도리어 동구권 국가들의 공산화와 이에 대한 미국의 유럽에 대한 마셜 플랜, 동시에 소련에 대한 봉쇄정책 실시와 쿠바 미사일 위기 → 베트남 전쟁 → 탈냉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데탕트 논의, 자본주의 미국 & 공산주의 소련 세력과 별개인 제3세계의 출현 →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과 중국의 대립 & 공산 진영간의 제3차 인도차이나 전쟁 발발 → &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이에 대한 미국의 공작, 이후 소련의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개혁 개방 정책을 통한 소련의 급진적인 변화, 북한과 중국을 제외한 동구권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 국가의 붕괴 직전의 변화가 시작되던 시점이 바로 서울 올림픽의 개최와 시기적으로 맞물린다. 실제로 1990년대에 들어서 북한과 중국, 쿠바와 같은 일부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 국가를 제외하고 소련과 유고슬라비아를 포함한 대부분의 동유럽 국가들은 전부 무너졌다.[95] 1983년 아웅산 묘소 테러를 시작으로 1986년 김포공항 폭탄 테러와 1987년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등 굵직한 테러를 저질렀다.[96] 손에 손 잡고 가사중에 벽을 넘어서~라는 가사가 있다. 그리고 2년 뒤인 1990년, 독일에서 진짜로 벽을 넘게된다.[97] 다만, 올림픽 개최 전부터 동유럽에서는 한국의 실상에 대한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올림픽이 개최되기 몇 년 전에 비공식적으로 한국을 방문한 어느 동유럽의 체육인이 한국 코치의 집에 초대되어 식사 자리를 가졌는데, 며칠 후 갑자기 다시 한번 식사 대접을 해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이에 당황한 한국 코치가 그 요구에 응한 이후 부랴부랴 부인에게 연락해서 다시 식사 자리를 함께 했는데, 그 동유럽 체육인이 매우 미안해하면서 자신의 무리한 요구에 대해 이렇게 해명했다고 한다. "내가 듣기로는 한국이 헐벗고 못사는 나라인데 일개 체육인의 집이 너무 호화로워서 한국 정부가 선전을 위해 꾸민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무례를 알면서도 이렇게 갑자기 찾아왔다."[98] 1985년 지어진 63빌딩은 한때 아시아 최고층 마천루였으며, 지하철 노선 역시 수도 서울에만 4개, 제2의 도시 부산에 1개 있었다.[99] 정작 당시 베트남은 지구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 중 하나였고, 중국도 90년대 중반까지 최빈국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야말로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수준이었던 셈.[100] 여담으로 소련은 물론이고 그 후신인 지금의 러시아 또한 여전히 막대한 땅덩어리에서 나오는 석유를 주 수출 상품으로 외화벌이를 하는 상황이었다.[101] 당시 서독은 유럽 2위, 세계 4위의 경제대국이었는데 (순위로는 미국, 일본, 소련, 독일 순서였다.) 바로 한 단계 높은 순위였던 소련의 경우는 그 특유의 통계 뻥튀기까지 겹쳐서 단지 시장 규모라는 몸집만 컸을 뿐 내실이 별로 좋지 않았기에 실질적으로는 서독이 유럽 최고의 경제대국으로 보는 것이 옳다. 그러니 서독의 화폐에 감히 동독 마르크가 대등하다는 것은 실제로는 있을 수도 없던 일이었다.[102] 여담으로 당시 올림픽에 참여했던 국내 자원봉사자들의 수기 같은 것을 보면, 당시 소련이나 동독 선수단이 입고 있던 옷이나 신발, 가방, 그 외 여러 일상생활용품의 품질이 국산제품보다 못해보였다는 이야기가 있다.[103] 50년대 한국의 1인당 GDP는 2024년 가치로 환산해도 실질 가치가 고작 500~900달러 수준이었다. 다만 고정환율이 실질환율의 2배 가치라 1960년까지의 통계상으로는 전쟁으로 박살난 나라라 하기엔 높게 나온 편이었으며, 당시 세계의 평균적인 경제 수준이 지금보다 훨씬 안 좋았기에(세계 평균을 넘겼던 일본도 1인당 GDP가 현대 가치로 환산하면 인도네시아급인 5000달러 수준에 프랑스와 영국조차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세계 평균을 가까스로 넘기는 수준인 14000달러대였을 정도였다) 한국보다 가난한 나라들도 많았다.[104] 6.25 전쟁을 휴전한 직후의 대한민국은 경제력이 지금의 아프리카 빈민 국가들 수준이었고, 국제적인 평가도 매우 참담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냉전의 시발점이라고 여겨지는 전쟁을 겪었던지라 영화를 포함한 미디어 매체에서 여러 번 언급되면서 빈민국 이미지가 국외의 대중에게 각인되기도 했다. 그랬던 국가가 전쟁 35년 만에 1인당 GDP가 세계 평균을 넘기는 엄연한 신흥공업국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심지어는 올림픽 약 5년 후, 전쟁 40여 년 만에 선진국 수준 경제력을 갖추게 된 것은 물론(다만 IMF 외환 위기로 인해 실질적으로는 그로부터 약 10년 후에 선진국에 진입했다) 올림픽으로부터 약 사반세기 후, 전쟁 60여 년 만에 강대국의 최소에 준하는 지역강국 최상위권으로 더욱 발전을 거듭하게 되었다.[105] 오늘날로 치환하면 우크라이나가 2060년 이전에 전쟁 피해를 모두 복구하는 것을 넘어 엄연한 선진국으로 자리잡은 후 키이우에서 올림픽을 치를 거라는 것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수준으로 믿을 수 없는 수준의 일이었던 셈이다.[106] 대표적인 예로는 루마니아 혁명과 동구권 국가들의 혁명 그리고 사실 훨씬 그 이전에 벌어졌던 헝가리 혁명, 포즈난 항쟁, 프라하의 봄 등이 있다.[107] 당시의 통일 체코슬로바키아[108] 다만 2010년대 초반까지 서양인들 중에서는 한국을 동남아 국가와 비슷한 이미지로 여긴 경우가 있을 정도로 국력 대비 인지도가 심각하게 낮았다. 당연히 이때는 알 만한 사람들은 한국이 선진국이라는 사실을 다 알고 있었다.[109] 올림픽 개최 시도 자체는 박정희 정권 말부터 시작됐다.[110] 이때는 아직 6.29 선언 이전 즉 직선제 수용 직전 시점이기 때문에 기존의 5공 헌법(7년 임기)으로 대선 시행을 앞둔 시기였다.[111] 실제로 IOC는 6월 항쟁 상황을 예의주시하며 개최지를 1988 올림픽 유치 과정 중 최종 탈락한 일본 아이치현의 나고야시로 변경할 플랜 B를 만지작거리고 있었으며, 이에 더해 독일 베를린 또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게 올림픽 유치권을 이양하라는 압박까지 하고 있었다. 이는 당연히 민족감정상 좌시할 수 없는 일이었다.[112] 물론 그렇다고 해서 "국제적 시선도 있으니 군사정권은 어차피 물러났을 것"이라고 안이하게 판단할 수는 없다. 대형 국제 행사를 앞두고 국제적 시선이든 뭐든 상관 없이 유혈진압을 한 사례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멕시코는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를 앞두고 구스타보 디아스 오르다스 정권의 틀라텔롤코 광장 학살 사건으로 시위대에 있는 대학생들을 무자비하게 죽였으며, 아르헨티나는 1978 FIFA 월드컵 아르헨티나 중에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정권이 정치범을 잔인하게 고문한 것으로 인권탄압을 지속했다. 한국은 주한미군이 주둔하고 있다는 차이점이 있긴 하나, 1980년대 이전까지는 미국도 친미 독재 정권이 국익에 유리하다면 방관하곤 했기에 유혈사태가 없으리라고 단언할 수는 없었다.[출처필요] [114] 원 출처: <6월항쟁을 기록하다> 3권 p296~297.[115] 미국 외무부가 직접 움직이며 제임스 릴리 주한미국대사를 통해 레이건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고 전두환 대통령 앞에서 구두상으로 직접 경고하기까지 했으며, 전두환이 경고를 무시하고 국군을 투입할 상황에 대비해 주한미군사령관까지 미리 만나서 논의할 정도로 기민하게 움직였다.[116] 이건 2005년 MBC 주말특별기획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도 그대로 묘사되었다. 노태우가 개회식을 하는 것을 보면서 "재주는 누가 넘고 돈은 누가 번다더니"라며 분개해 하는 이순자, 착잡한 표정의 가신들, 그리고 회한으로 눈시울을 훔치는 전두환의 모습은 덤. 전임 대통령이자 개최에 큰 도움을 준 전두환을 귀빈석에 위치시키는 것은 별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노태우는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다.[117] 민중당 계열 그룹들은 1990년대 초반까지도 진보정당 운동에 매진하였다. 이들이 보수로 돌아서게 된 건 1996년 15대 총선을 전후해 김영삼이 이들 인사를 영입하면서부터였다.[118] 원 출처: <장정 4: 나의 무직 시절> p309~310.[119] 원 출처: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3권 p157.[120] 물론 직접 대한민국에 와 본 경험이 없는 일본인들은 2년 전인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시절에 이어서 또 다시 TV에 비친 서울과 그 외 대도시의 모습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일본에 감히 견줄 수준이 아니었는데 말 그대로 격차가 확 줄어버렸으니. 게다가 이때는 버블경제가 절정에 달한 시기라서 일본 경제가 최전성기 시절이었다.[121] 실제로 직전과 그 전의 올림픽 개최국이 다름 아닌 냉전 시기 양대 초강대국인[122] 큰 의의를 지닌 올림픽 개최의 성공과 동시에 개발도상국이었던 대한민국의 눈부신 성장은 수많은 국가들의 성장의 대표적인 본보기이자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의 위상을 끌어올리는 전환점이 되었다.[123] 1987년에 나온 대체역사물 소설 <비명을 찾아서>를 보면 저자인 복거일이 어떻게 서울 올림픽을 부정적으로 인식했는지를 알 수 있다.[124] 서독, 일본, 대한민국, 중국이 바로 이러한 범주에 속한다. 서독은 세계대전 후에 라인강의 기적을 이루어 내었고 일본은 1964 도쿄 올림픽 이후 선진국으로 진입, 대한민국 또한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등을 토대로 일본과 독일과 같이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냈다. 심지어 중국은 마오쩌둥 사망 이후 덩샤오핑의 주도 하에 국가적으로 개혁개방 시장 경제 체제를 부분적으로 도입하였고, 이후 베이징 올림픽을 기점으로 하여 일본을 제치고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에 들어서면서 초강대국 미국과의 양강 구도를 토대로 20세기 시절의 소련의 뒤를 이어 G2체제를 성립하게 되었다. 다만 애초에 일본과 독일, 그리고 중국은 꽤나 높은 위상을 가지고 있던 국가들이었다. 독일은 영국, 프랑스와 함께 19세기 후반부터 부상한 이후에는, 중국은 고대 시절부터 동아시아 전체를 휘어잡은 지역패권국이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승전국이기도 했다. 일본 또한 말할 것도 없이 개항과 메이지 유신 이후 러일 전쟁 승전으로 동아시아 패권을 잡고, 이후 1차 세계대전에서도 연합국 승전국으로 부상했으며, 2차 대전 때는 그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치르기도 했던 나라였고 아시아 유일의 식민제국을 건설했었다. 다시 말해 시대를 막론하고 강대국 반열을 차지했던 나라들이었던 것. 그러나 한국은 이전에도 중국 왕조의 조공국에 불과하였으며, 이에 더하여 일제강점기를 겪었다. 그런 나라가 올림픽을 개최할 수준까지 올라섰다는 것만으로도 그 당시의 외국인들에게는 굉장히 놀라운 일이었다.[125] 운동권은 특히 올림픽 개최를 3S 정책의 일환으로 보고 개최 반대 운동도 전개하고, 남북공동개최까지 주장했었던지라 그 충격이 더 컸던 것이었다. 그 전까지 그다지 드러나지 않았던 운동권 내부의 문제들(대표적으로 권위주의)도 운동권의 쇠퇴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말이다.[126] 실제로 통계상 이 시기의 미세먼지 농도가 지금보다 더 심각한 수준이었다고 추정되고 심지어 이 때문에 몇몇 외국인 선수들은 일본에서 기다리다가 개막 직전에야 한국으로 왔다고 할 정도. 그러나 1986년 아시안 게임 이전부터 중앙정부는 환경오염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였고 관련 법 제정 및 자체적으로 개최 기간 내에 차량 홀짝 이용제를 운영하는 등의 자제를 부탁하고, 거기에 길거리 쓰레기 및 각종 규칙을 지켜줄 것을 신신당부하면서 언급하고, 당시 국민들이 이러한 규칙을 성실히 이행함에 따라서 이후 오히려 인식이 굉장히 좋아졌다.[127] 반대로 20년 뒤 2008 베이징 올림픽 때는 베이징시의 공해로 인해 한국이 베이스 캠프 특수를 누렸다. 이 밖에도 시차, 지리, 기후상의 이점과 하계 올림픽, FIFA 월드컵, 아시안 게임 등을 개최하면서 구축한 뛰어난 체육 시설, 수준급 훈련 파트너까지 갖추고 있었으며, 여기에 각 지자체들이 적극적으로 협조하였기 때문이다. 베이징 올림픽, 한국 어부지리 현실화되나[128] 집권 3년차인 1982년에 야구에서는 아마추어 스포츠를 규합하여 비록 급조됐더라도 직업선수들이 오롯이 뛰는 프로리그를 창설하기에 이르렀는데, 1982년 프로야구 출범이 성공하자, 이듬해에 연달아서 축구 슈퍼리그와 프로민속씨름도 성공하게 된다. 거기에 겨울 인기스포츠인 농구와 배구는 비록 완전 프로화까지는 아니더라도 각각 1983년 농구대잔치와 1984년 대통령배 전국남녀배구대회(백구의 대제전)의 세미프로리그를 출범시켰다. 또한 여기에 스포츠 인재 양성을 위해 예술체육요원의 선발 범위를 더 넓히는 정책을 실시하여 수많은 스포츠인들을 양성한다. 지금이야 세월이 지나 나라가 발전해서 국가적으로 스포츠 시설 건설을 지원하지만 올림픽이 열리기 전만 하더라도 한국은 그야말로 스포츠 시설들이 부족한 국가였다. 현재를 기준으로 이 때 당시 지어진 시설들은 낙후되었지만 서울 올림픽 개최 전만 하더라도 여러 비인기 종목들의 시설들이 아예 없는 게 현실이었다. 그러나 올림픽 개최로 모든 올림픽 종목 시설들이 건설되면서 현재도 해당 시설들을 잘 활용하고 있다는 점을 봤을 때, 서울 올림픽은 대한민국 스포츠 발전에 엄청난 공헌을 했다고 볼 수 있다.[129] 이처럼 전두환 정권의 올림픽의 성공은 곧 3S정책의 달성해야 할 최대의 목표라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었다. 이렇듯 프로스포츠의 시대가 열렸고 지금껏 적지 않은 프로구단들이 올림픽 당시에 지어진 시설을 썼거나 쓰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분명 대한민국 스포츠계 및 문화계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아이러니하게도, 위에 서술했듯이 이 올림픽이 발목을 잡아 그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130] 다만 이는 (80년대 냉전의 대표 사건으로 간주되는)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의 영향이 컸다. 아이러니하게도 (냉전의 종결을 알린) 88올림픽 성화도 대한항공 소속 기체(DC-10)가 봉송했다.[131] 1990년대까지는 한국일보가 발행부수 200만부를 넘어서는 메이저급 신문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과도한 투자를 한데다가 IMF 외환위기로 직격탄을 맞고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한겨레와 경향에도 밀리게 되었다.[132] 물론 이용자의 의식 수준이 하루 아침에 바뀌는 것이 아닌지라 공중화장실 자체의 불결 문제는 그로부터 14년 뒤인 2002 한일 월드컵 때를 앞두고 나서야 비로소 개선되었지만, 그 이전까지 시설 자체가 매우 열악했던 것에 비하면 상전벽해 수준으로 개선되었다. 이는 과거 시골의 푸세식에서 도시의 현대식 화장실로 격변하는 과정이었다.[133] 그래서 당시 점주들이 이를 갖추느라 고생했다고 한다.[134] 이러한 현상은 서울 올림픽 이후였던 1990년대부터 급속도로 나타난다.[135] 물론 이는 전두환이 국내를 비롯해 미국 등의 강대국들로부터 자신의 정치적 입지에 관한 지지기반을 잘 다지지 못해, 안 좋은 국내 여론을 잠식시키고 제3세계 국가들과의 외교를 통해 이를 만회해 보려는 속셈이라는 부정적 평가도 있었지만, 그래도 우리나라의 국제적 지위향상과 더불어 외교노선 다변화에도 도움이 되는 등의 성공적이면서도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올림픽 유치 당시 참가하는 아프리카 국가들에게 저가로 전세기를 띄워주겠다고 약속했고, 실제로 그 약속은 서울 올림픽 당시에 지켜졌다. 이전까지 아프리카 지역의 경우 한국 대통령이 현지 국가에 공식 방문한 사례는 전두환이 최초였다. 전두환 이후 대한민국 대통령의 아프리카 국가 정상들과의 만남은 2006년 3월 노무현 대통령에는 아프리카 3개국 (이집트, 나이지리아, 알제리)의 국가 정상들이 종종 방한함으로써 이루어진 것뿐, 현지 방문은 없었다.[136] 미국 애틀랜타야 나라 그대로 '천조국' 클라스였고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전세계적으로는 올림픽 100주년이라는 확실한 명분이 있던 아테네의 올림픽 유치권을 '스틸'했다는 비판 여론이 지금도 만만치 않게 남아 있고, 스페인 바르셀로나는 당시 IOC 위원장인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의 고향이었던데다가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독재정권에서 벗어나 다시금 약진하던 스페인이었기 때문에 만일 올림픽 유치를 놓고 맞붙었다면 대한민국으로서는 쉽지 않은 상대였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그리고 1996년 올림픽의 경우에는 비록 미국의 상업적 로비에 놀아난 이유로 인해 애틀랜타가 유치했지만 경쟁국가 및 도시들 중 하나가 그리스의 아테네였다. 하필 1996년의 올림픽은 1896년에 고대 올림픽의 발상지인 아테네에서 올림픽이 부활하여 다시 아테네에서 개최한 것을 시작으로 한 근대 올림픽이 100주년을 맞는 해였다. 즉, 명분만 놓고 보면 당시 미국 월드컵을 개최한지 얼마 안된 상황에서 욕심을 내면서 유치전에 끼어들은 애틀랜타는 상대가 되지 못했던 상황이었고 거기에 실제로 전세계적으로 근대 올림픽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는 명분상 아테네에서 개최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보아 큰 지지를 얻었던 상황이었으며 실제 유치전의 흐름도 아테네가 주도했었을 정도였다. 그러다가 개최지 투표에서 3차 투표까지는 아테네가 1위였다가 마지막에 뒤집힌 것이었다.[137] 당시 서머타임이 적용됐다는 걸 감안한다면, 한국 시각으로 오후 9시~오전 12시는 미국 동부 시각으로는 오전 6시~9시였다. 미국 서부는 이보다 3시간이 더 이후인 오전 3시~6시였다.[138] 다만 케이블TV의 프로토타입이라고 할 수 있는 중계유선방송에서 당대 지상파 방송프로그램이나 비디오 같은 것을 틀어주기는 했다.[139] 다만 <TV 손자병법>으로 팬이 된 남성 시청자도 좀 있었다.[140] 그래서 비디오점이나 만화방, 만화잡지 파는 서점, 전자오락실 등의 매출액이 크게 증가했다는 후문이 있다.[141] NHK에서 아날로그 HD 영상 압축 방식인 MUSE Hi-Vision 방식으로 시범방송한 것이 그것. 참고로 일본에서 정식으로 아날로그 HD방송을 개시한 시기는 1989년이다.[142] 4년 뒤 1992 알베르빌 동계올림픽과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또한 아날로그 방식의 HD-MAC이라는 포맷으로 유럽 지역에서 HD 시험방송을 진행하였다.[143] UHD의 경우 30년 후 같은 대한민국에서 열린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이 세계 최초이다.[144] NHK 공식 홈페이지 50주년 연표에 서울 올림픽을 HD로 제공했다고 영어로 적혀있다.[145] 이 영상 링크는 IOC에서 35mm 영화필름으로 촬영된 것으로 HD급 화질로 스캔 된 것일 뿐 전자식의 실제 NHK의 MUSE Hi-Vision HD영상은 아니다. 실제 NHK 영상은 거의 요즘의 HD영상과 같은 수준이다.[146] 해당 기사 p40 참고.[147] 이하 출처: <KBS 연지 1989> p336~337.[148] 참고 자료: <KBS 연지 1989>, <KBS 저널> 1988년 9월호 p36~42.[149] 당시 KBS 스포츠국 스포츠취재부장 겸 <KBS 스포츠쇼> 앵커.[150] 당시 일간스포츠 편집위원.[151] 당시 일간스포츠 논설위원으로, 2TV <생방송 전국은 지금> 스포츠기사 해설 담당.[152] 1941~2015. 전 성균관대학교-이화여자대학교 농구부 감독. 1991년 이후 SBS 농구 해설위원 역임.[153] 패럴림픽은 서울신탁은행(現 하나은행)이 스폰서였다. 30년 뒤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서는 우연히도 두 은행이 합쳐져 하나의 같은 은행으로서 스폰서가 되었다. 패렬림픽의 스폰서도 같은 하나은행이다.[154] 소련뿐만 아니라 당시 모든 공산권 동유럽의 국가들도 모두 공산주의 체제 하에서는 마지막으로 참여한 올림픽이었다.[155] 중국은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서 첫 금메달을 땄고, 일본은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못 딴 대회가 몇몇 있었다.[156] 당시 해군 의무 복무 때문에 NBA 진출이 늦춰졌던 데이비드 로빈슨이 속해 있었다.[157] 그래도 해설만 잘못되었을 뿐이지 실제로는 소련의 국가가 제대로 연주되었다.[158] 이들의 입국 비자는 일본 주재 대한민국 대사관에서 발급되었다.[159] 물론 소련인들의 영사 업무만 진행했을 뿐, 한국인을 비롯한 외국인들의 소련 접촉은 일체 받지 않았다.[160] KBS, MBC 미국정부, 노태우 대통령 당선 축하논평[161] 이 사건 직후 모스크바에서 열린 세계유도선수권대회에 대한민국은 다음 대회 개최국이었음에도 불참했다.[162] 올림픽 주경기장에서부터 암사동 선사유적지를 잇는 도로. 테헤란로에서 이어지며, 서울 지하철 2호선, 8호선이 이 도로 지하를 달린다.[163] 88올림픽고속도로는 대구와 광주를 잇는 고속도로로 물론 서울시에 위치하지는 않지만 88올림픽 유치 직후 건설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역시 서울올림픽을 기념한다는 취지로 명명되었다. 2015년 12월 22일 선형 개량 공사 완료 및 4차로 확장 개통과 함께 광주대구고속도로로 전면개통했다.[164] 이 사례가 중요한 이유는 영미권 PC주의 국가들에서 공부하는 아시아계 유학생들이 추석이나 설 등의 명절을 이유로 데드라인 연기를 요청하기 때문이다. 호주나 캐나다 등에서 추석이나 설은 쉬는 날이 아니고 따라서 데드라인이 이 기간에 올 수 있는데, 아시아계 학생들이 문화다양성을 주장하며 민족명절에는 숙제를 낼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165] 핀란드는 1955년 12월 14일에, 독일(당시 서독, 동독도 같은 날에 가입했다.)은 1973년 9월 18일에 각각 UN에 가입, 그리고 대한민국은 북한과 같은 날 1991년 9월 17일에 UN에 회원국으로 가입했다.[166] 이는 2002년 한일월드컵 역시 마찬가지이다.[167] 재미있게도 코스타리카에서 88 올림픽 때 메달을 딴 선수들은 모두 니카라과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