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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滿洲 | Manchuria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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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63><colcolor=#fff> 대륙 | 인문 | 아시아 / 유라시아 동아시아 | ||
지질 | 아프로-유라시아 | |||
위치 | 동아시아 동북부 | |||
면적 | 811,826 km² (둥베이 3성) 1,133,437 km² (내만주 포함) 2,234,754 km² (외만주 포함) | |||
시간대 | UTC+8 | |||
국가 | [[중국| ]][[틀:국기| ]][[틀:국기| ]] [[러시아| ]][[틀:국기| ]][[틀:국기| ]] [[북한| ]][[틀:국기| ]][[틀:국기| ]][2] | |||
민족 | 한족, 러시아인, 만주족, 슬라브족, 몽골족 한민족, 다우르족, 시버족, 니브흐족 윌타족, 오로치족, 울치족, 에벤키족 나나이족, 우데게족, 어룬춘족 등 | |||
언어 | 중국어, 러시아어, 몽골어, 한국어 만주어, 어웡키어, 니브흐어, 우데게어 시버어, 다우르어, 나나이어, 오로첸어 등 | |||
인구 | 약 9,000만 명 (둥베이3성) 약 1억 2,887만 명 (외만주 포함) | |||
최대 도시 | [[중국| ]][[틀:국기| ]][[틀:국기| ]]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 |||
자연지리 | ||||
판 | 아무르판 | |||
기후 | 냉대 동계 건조 기후(Dwa, Dwb, Dwc) 냉대 습윤 기후(Dfa, Dfb, Dfc) 스텝 기후(BS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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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만주(滿洲, Manchuria)는 오늘날의 중국 둥베이 3성과 내몽골 자치구 3시1맹(三市一盟) 일대를 일컫는 지명이다. 한반도의 북쪽, 고비 사막의 동쪽, 시베리아의 남쪽, 사할린의 서쪽에 위치하며, 각각 압록강과 두만강, 다싱안링 산맥, 스타노보이 산맥, 타타르 해협을 경계로 한다. 광의의 만주에 포함되는 외만주는 러시아 연해주를 포함한다.청나라에서는 동삼성(東三省, dergi ilan golo), 관동(關東/关东, 관둥 [3])이라고도 불렀는데 이는 산해관 동쪽 지역이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관동이라는 표현은 틈관동[4] 같은 용어나 일본 제국이 조차한 지역인 관동주, 이곳 군대인 관동군 등에서 사용됐다.
2. 어원
我國原有滿洲、哈達、烏喇、葉赫、輝發等名。向者無知之人、往往稱為諸申。夫諸申之號、乃席北超墨爾根之裔。實與我國無涉。我國建號滿洲。統緒綿遠。相傳奕世。自今以後、一切人等、止稱我國滿洲原名。不得仍前妄稱。
"우리나라는[5] 원래 '만주(滿洲), 합달(哈達), 오라(烏喇), 엽혁(葉赫), 휘발(輝發)' 등의 이름이 있었으나, 무지한 사람들은 종종 이를 '제신(諸申)'[6]이라 불렀다. 그러나 '제신'이라는 호칭은 석북 초몰근(席北超墨爾根)의 후예를 가리키는 것으로, 실제로 우리나라와는 무관하다. 우리나라는 '만주'라는 이름을 세우고, 그 혈통은 오랜 세월 이어져 전해 내려온다. 이제부터 모든 사람들은 우리나라를 만주의 본래 이름으로만 칭하도록 하며, 이전처럼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청 실록, 태종 - 천총(天聰) 9년(1635년)[7] 10월 13일 기사 #
만주라는 지명은 만주족에서 비롯했다. 이 만주족이라는 명칭은 1635년에 청 숭덕제 홍타이지가 자신의 민족인 여진족을 만주족이라 개칭하여 부른 것이 시초이다.[8] 그런데 이 과정에서 '만주'의 의미나 명명 경위에 대해서는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고, 정설을 알 수 없게 되었다."우리나라는[5] 원래 '만주(滿洲), 합달(哈達), 오라(烏喇), 엽혁(葉赫), 휘발(輝發)' 등의 이름이 있었으나, 무지한 사람들은 종종 이를 '제신(諸申)'[6]이라 불렀다. 그러나 '제신'이라는 호칭은 석북 초몰근(席北超墨爾根)의 후예를 가리키는 것으로, 실제로 우리나라와는 무관하다. 우리나라는 '만주'라는 이름을 세우고, 그 혈통은 오랜 세월 이어져 전해 내려온다. 이제부터 모든 사람들은 우리나라를 만주의 본래 이름으로만 칭하도록 하며, 이전처럼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청 실록, 태종 - 천총(天聰) 9년(1635년)[7] 10월 13일 기사 #
만주의 어원에 대한 고증 시도도 청나라 당대부터 시작되었다. 청 황제 건륭제는 1777년《흠정만주원류고》을 편찬하면서 '만주라는 명칭은 문수보살의 원 명칭인 산스크리트어 단어 만주사리(Mañjuśrī)에서 유래했다'고 규정했다. 그러나 이는 1792년 《어제라마설(御製喇嘛說)》에서 건륭제의 발언에서 보이듯이 몽골을 안정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티베트 불교 겔룩파를 후원하며 스스로를 문수보살대황제 및 전륜성왕으로 묘사하고자 한 건륭제의 의중이 반영됐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일각에서는 《신당서》 흑수말갈전에 언급되는 말갈의 수장을 호칭하는 "대막불만돌(大莫拂瞞咄)"을 만주의 어원으로 보는데, 추수(酋帥)·군장(君長)·수수(首帥) 등을 의미하는 대막불은 만주어 다 마파(Da Mafa)로, 만돌(瞞咄)은 수장이란 뜻으로 풀이했다. # 실제로 사르후 전투 이후 후금에 억류됐던 강홍립이나 이민환 등은 누르하치를 만주(滿住)라 호칭했다고 기록해놓았으며, # 일찍이 오도일(吳道一, 1645 ~ 1703)은 《서파집(西坡集)》에서 "이른바 만주(满洲)란 옛날 노추(奴酋)[9] 중에 벌판에서 뛰어난 만주(满住)라는 자의 이름이 그대로 전습된 칭호를 말한다."라고, 성호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이만주를 언급하면서 "만주(滿住)라는 것은 이름이 아니고, 곧 가한(可汗)의 호칭과 같은 것"이라고 주석을 단 바 있다.
일각에서는 만주가 만(man)과 주(ju)의 조합어라고 여기는데, man은 강경하다는 의미의 만주어 망아(Mangga), ju는 강한 활을 의미하는 주(ju)이다.[10] 또, 파저강의 별명인 마저강(馬猪江)의 '마저'의 변음 혹은 포주강(蒲州江)의 포(蒲)자가 만(滿) 자와 유사하여 이를 혼동한 결과라는 설 등이 제기된다.[11]
3. 명칭과 기원 논쟁
3.1. 지명의 역사적 고증
《성경통지(盛京通志)》 〈성경여지전도(盛京輿地全圖)〉 이 지도에서는 성경의 범위를 북쪽으로는 스타노보이산맥, 남쪽으로는 동해(남해), 동쪽으로는 오호츠크해와 동해(동해), 서쪽으로는 산해관에 이른다고 서술했다. |
청이 들어선 이후, 청 정부는 만주를 묵던(盛京, 성경, Mukden)·닝구타(Ningguta)·기린(Girin)·사하랸 우라(黑龍江, 흑룡강, Sahaliyan ula)[12] 등 각기의 지명을 사용했다. 옹정 ~ 건륭기에 이르러 성경, 닝구타, 사하랸 우라 즉, 삼장군이 관할하는 세 지방을 직성에 준하여 비공식적으로 동삼성(東三省, dergi ilan golo)라 통칭했다. 이외에도 성경이나 동북방(東北方, dergi amargi ergi), 관외(關外, furdan-i tule)라는 지명들이 사용됐다.[13]
만주라는 지명은 1747년부터 에마누엘 보웬(Emanuel Bowen)의 《A New & Accurate Map of ASIA》의 아시아 지도와 같은 일부 초기 지도에 지역 종족적 지명으로 나타났다.[14][15] 그 이전 17세기 ~ 18세기 유럽에서는 이 지역 일대를 여진(Niucehé)이나 숭덕제의 몽골어 존호인 복다(boɣda)를 딴 보그도이(Bogdoi)로 부르거나, 중국 타타르(Chinese Tatary), 동타타르(Tartarie Orientale)의 일부로 취급했다.
《A New & Accurate Map of Asia》[16] | 《북사분략(北槎聞略)》의 〈지구전도(地球全図)〉[17] |
〈일본변계략도(日本邊界略圖) 〉.[18] |
아마도 청 예수회 지도 프랑스 사본에 기초한 러시아 지도 또는 1751년부터의 네덜란드 지도 등에게 영감을 얻은 것으로 추정되는 가쓰라가와 호슈의 1794년 《아시아전도(亜細亜全図)》및 《지구전도(地球全図)》나, 다카하시 가게야스(高橋景保)의 1809년 《일본변계략도(日本邊界略圖)》 등 난학자들에 의해 일본에서도 만슈(满洲)라는 지명이 처음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으며[19], 이는 필립 폰 지볼트(Philipp von Siebold)에 의해 '만주리아'로 번역되어 네덜란드로 다시 전해지면서 유럽인들에게 확산됐다.[20] 프랑스에 기반을 둔 지리학자 콘라드 말트 브룬(Conrad Malte-Brun)와 애댐 멘텔(Edme Mentelle)은 1804년 《Ge'ographie mathe'matique, physique etpoIitique de toutes les parties du monde》에서 타타르보다 더 정밀한 용어로 몽골리아, 칼미키아 등과 함께 만주리아라는 용어를 장려했다.
이처럼 만주라는 이름이 붙은 데에는 만주족의 영향이 큰 것으로 보이는데, 만주에 만주족만 사는 것은 아님을 문제 삼는 시선도 있다. 다만 이 문제는 온갖 민족이 지나다니는 대륙 한복판에서 단일 혈통을 기대하기란 어려우며[21] 얼추 다수 민족의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흔하다. 자바이칼 지방을 다우르족들도 살았던 이유로 '다우리아(dauria)'라고 부르고, 시베리아 중북부 에벤키족 등 퉁구스 제족들이 사는 곳들을 '퉁구스카(tunguska)'라고 부르지만 자바이칼에는 다우르족만 살았던 곳은 아니었고, 퉁구스카 역시 퉁구스인들만 사는 지역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여진족-만주족으로 이어지는 퉁구스계 종족이 이 지역에 오래 거주했던 것은 명백한 사실이며[22] 종족 명칭을 붙인다고 한다면 여진족 혹은 만주족의 이름을 붙이는 것이 자연스러운 흐름이었을 것이다.
3.2. 정치적 측면에서의 분석
관련 문서: 오리엔탈리즘/일본, 만선사관
위에서 보듯 본 지역이 중원과 다른 역사를 지니는 별개의 지역이라는 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유럽 같은 동아시아 외 문화권이 아닌 동아시아에서 이 지역을 '만주'라고 부르게 된 것은 일본 제국이 1931년 만주 사변을 일으키고 이듬해 만주국이라는 괴뢰국을 설치하면서부터임은 부정하기 어렵다.[23]
근대 이전에 청나라에서 '만주'라는 지명에 대하여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후술하듯 지명의 유래가 된 만주족도 이 지역을 만주로 부르진 않았다. 여하간 그와는 무관하게 현대 중국인에게 '만주'라는 지명은 백년국치의 상징인 일본의 괴뢰국으로서의 만주국의 이미지가 지배적이게 되었고[24] 오늘날에 중국인들은 만주라는 지명을 극도로 꺼리게 되었다.
중국 측은 이곳을 "둥베이 (东北, 東北)" 또는 한국어 발음으로 "동북"이라고 부르는데, 이 명칭은 청나라 시기에 만들어진 명칭이다.[25] 명나라 시기에는 이곳은 산해관 바깥쪽이라고 해서 관외, 내몽고와 구별해서 관동지역이라고 불렸다. 이곳은 청나라의 발원지였기 때문에 봉금지역으로 묶어서 한족의 출입을 금했으며, 만주족들이 대거 관내지역으로 이동한 후 남아 있던 만주족만 거주하는 등, 인구가 희박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행정 기관도 설치되지 않았다. 그래서 청나라는 입관후에도 이 명칭을 계속 썼지만, 19세기 들어 러시아가 이지역을 탐내면서 이곳의 인구를 늘리기 위해 봉금령을 풀었고, 이때부터 한족들이 이 공백지에 대거 밀려들었다. 이 현상을 틈관동 (闖關東)이라고 하며, 이 때 이곳을 지칭하는 명칭으로 "관동"이 쓰였음을 알 수 있다.[26] 청나라는 이곳에 인구가 늘어나자, 멸망 직전인 1907년 이곳을 헤이룽장성, 봉천성[27] 지린성 3성으로 개편하면서 동북3성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때문에 국제 학계에서는 지명으로서의 만주는 논란이 되고 있다.[28] 빌 시웰(Bill Sewell)은 만주가 유럽인들에 의해 사용된 외래지명임을 지적하며, "진정한 지리적 용어가 아니다"라고 했으며,[29] 개번 맥코맥(Gavan McCormack)은 만주가 근대적인 날조라고까지 주장하며 만주라는 용어는 일본이 중국과의 분리를 촉진하기 위해 장려한, 본질적으로 제국주의적인 명칭이라고 비판했다.[30] 만주국사 연구자 마리코 아사노 다마노이(Mariko Asano Tamanoi)는 만주를 거론할 때 따옴표로 감싸 인위적 지명임을 표기해야 한다고[31] 주장했으며[32] 여진사 연구자 채드 D. 가르시아(Chad D. Garcia)는 만주라는 용어의 사용이 "작금의 학구적 실천(current scholarly practice)"에서 적절하지 않다고 주장하며, 만주를 대체하여 특정 지리적 특성이나 '북동부(the northeast)'라는 용어를 사용했다.[33] 다만 이러한 논의는 지나치게 나아가 "만주는 중국의 일부이다", "중국 기준의 지명인 '둥베이'(동북), '북동부'가 타당하다"라는 또다른 편견을 낳기도 한다.
한편 한국에서는 중국/일본과는 달리 이 지역을 만주로 부르는 것에 대한 별다른 문제 의식이 없는 편으로 "광활한 만주 벌판", "만주 웨스턴" 등의 표현이 종종 쓰인다. 침탈자(일본)과 침탈 대상자(중국)인 중일 양국과는 달리 한국으로서 만주국이란 "침탈자가 새로 세운 이웃 식민지"일 뿐이니 별다른 감정이 없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런데다 근대 이전에 만주 지역과 한반도가 그다지 사이가 좋은 편도 아니었으니 일본이 만주를 침략했다고 해서 딱히 안타깝거나 분한 감정을 갖기도 어려웠다. 여기에 더해 오랜 기간의 한국사 안에서 함께 교류해왔던 지역을 (과거부터 쓰여왔던 '요동'이라면 또 모를까)[34] 중국 입장에서 북동쪽을 뜻하는 '둥베이'라고 부르는 게 옳다는 주장도 한국인으로서는 썩 받아들이기 어렵다.[35]
17세기 말 나선정벌~네르친스크 조약을 즈음하여 이 지역에 당도한(러시아의 시베리아 정복 참조) 러시아는 1973년에 연해주 일대의 중국어-만주어 기원 지명을 대거 청산해버렸다.[36] 때문에 이 지역을 기반으로 한 지명인 '외만주', '외동북' 등의 표현을 전혀 쓰지 않게 되었다. '동북'도 중국 입장에서나 자칭이지 러시아로서는 '동북'이든 '만주'이든 타칭인 것은 매한가지이다. 만주는 아니지만 비슷하게 러시아에게 빼앗겨 현재는 중국령이 아닌 중가리아 인근의 일리 지역(카자흐스탄 일리 강 일대)을 외서북이라고 부르는데 이 지명 역시 중국 기준인 관계로 러시아에서는 쓰지 않는다.[37]
4. 범위
19세기 일본을 통해 서양에서 창출된 외래지명인 만주의 범위는 정치적 이유로 지속적으로 변해왔다. 만주라는 지명은 초기에 네르친스크 조약에 따라 스타노보이 산맥 이남의 성경·길림·흑룡강의 3개의 장군직(將軍職) 관할 지역을 가키켰으나, 1858년 아이훈 조약, 1860년 베이징 조약을 거치고 러시아의 남하와 한인의 대대적인 이주에 따라 1907년 3월부터 1914년 무렵까지 삼장군직과 지림맹(哲里木盟, Jirim ayimaɣ) 등을 폐지하여 봉천·길림·흑룡강의 3개의 성(省)이 설치되면서 그 범주는 크게 줄어갔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까지 지리공간적 지위가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지 않았다.
러일전쟁 전후 일본의 정치적 이해 관계에 따라 만주 북부나 내몽골의 어느 지역도 포함하지 않은 남만주 철도(SMR) 본선 이동의 남만주-한반도 지리를 묶은 지도나,[38] 러허성을 포함하지 않는 지도 등 매우 다양한 지도가 나왔다. 1932년 일본이 만주국을 건설한 이후에는 만주국 영토가 만주로 확립되어, 지금의 지린성, 헤이룽장성, 랴오닝성 3개 성과 내몽골 자치구의 동부 3시 1맹을 가리키는 고정관념이 됐으며, 이러한 지리 인식은 집단 의식 속에 확립되어 중국인들조차 만주를 번역에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39] 결국 만주라는 모호한 명칭은 아래의 지역들을 다양하게 포괄한다고 할 수 있다.
- 현 중국 동북 3성(둥베이 3성).
- 위 정의에 허베이성 북부의 옛 러허성 지역[42]을 포함. (# 구 중화민국 지도)
- 위 정의에 스타노보이 산맥 이남 지역(외만주)을 포함. 아무르 주, 하바롭스크 지방 남부, 유대인 자치주, 연해주에 이르는 러시아 영토에 해당한다. 이 지도에서 가장 옅은 붉은색으로 되어있는 러시아 땅에 해당.
- 그 외 만주 지방과 접하는 중국 청더시, 친황다오 동쪽 소수부분도 때때로 포함될 때도 있다.
오늘날 중국 내에서 흔히 쓰이는 동북 지방의 정의는 동북 3성 또는 동북 3성 + 내몽골자치구 동부(동4맹)이다.
5. 지리
5.1. 자연
남만주 지역은 산지비율이 매우 심한 편이다. 하지만 요동과 북만주 지역은 산지가 적고 평야가 많아 사람이 살 수 있긴 하나 춥다.# 지리적으로는 춥고 황량한 허허벌판이라는 이미지와는 달리 아무르강, 송화강이나 랴오허 같은 큰 강이 흐르고 한카호 같은 거대한 호수도 있으며 풍성한 삼림이 우거져 있다.[43] 그리고 몽골 고원과 경계를 이루는, 해발 1,900m에 이르는 거대한 다싱안링산맥을 비롯한 여러 산맥들도 자리 잡고 있으며[44] (식량 확보를 위해 메꿔 버려 많이 사라졌지만) 늪지도 많다. 남부에서 대략 한가운데 둥베이 평원이 자리잡고 있다.
농업의 경우는 겨울이 길기 때문에 논 농사는 그다지 발전하지 못했다. 그러나 의지의 조선인들은 이주해서 논농사를 지었다.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지나치게 추워 한반도내 평야보다 농사에 불리하다는 인식이 있었으며, 곡창지대가 된 것은 20세기 중후반이다. 이 지역을 기반으로 성장한 국가는 반농반목 국가들이 많았다. 부여, 고구려 시절엔 기후가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나 고구려도 평안도 이남 한반도가 생산력이 높았다. 지금 농업으로 유명한 헤이룽장성의 싼장 평원도 원래는 거대한 늪지여서 농사짓기 어려웠으며, 해당 지역의 퉁구스계 주민들은 수렵채집으로 생활했다. 현대의 그 광활한 농장지대는 20세기 중후반 중국 정부가 수많은 인민해방군 병사들을 동원하여 십만이 넘는 사상자가 날 정도로 강하게 개간을 밀어붙인 결과이다.
현대는 남북 길이 약 1,000km, 동서 너비 약 400km에 달하는 중국 최대 평야 지대이자 전 세계에서 비옥하기로 손꼽히는 둥베이 평원이 위치해서 옥수수, 콩, 조, 밀, 사탕무, 등을 대규모로 재배하는 밭농사가 이루어진다. 대두의 원산지 중 한 곳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1910년대에 유럽이 전화를 겪으면서 이 지역에서 재배된 곡물이 엄청나게 팔려나갔고, 중개무역를 한 일본 상인들도 돈을 많이 벌었다. 당시 만주로 건너간 조선인들 또한 이런 식으로 돈을 번 이들이 꽤 있다.
또한, 일본이 전쟁을 위해 중화학 단지로 육성했다. 고구려, 청이 강력한 기병을 만주의 풍부한 철광석 덕택에 육성했다는 이론도 있다. 심지어 채산성 있는 수준의 석유가 매장되어 있다. 1959년에 발견된 헤이룽장성 다칭유전이 개발되었으며, 이외에도 발해만과 라오허 일대를 중심으로 유전이 개발되었다. 하지만 세계의 메이저 석유 유전 지대에 비하면 상대적으로는 만주의 석유는 매장량이 많은 편은 아니다.
동물은 한반도에 서식하는 생물의 90%와 비슷하며 10종에서 9종이 한반도와 같은 종류이다. 주로 우수리불곰, 시베리아호랑이, 아무르표범, 스라소니, 아무르삵, 우수리아시아흑곰, 아시아오소리, 검은담비, 노란목도리담비, 시베리아족제비, 청설모, 다람쥐, 한국멧토끼와 만주토끼, 노루, 사향노루, 와피티사슴, 꽃사슴, 꿩, 직박구리, 메추라기, 회갈색올빼미, 참수리, 수리부엉이, 딱다구리, 구렁이, 개구리, 벌, 나비, 나방, 딱정벌레, 메뚜기, 사마귀, 거미 등이 주로 서식한다. 그 외에 북방족제비와 쇠족제비, 늑대, 붉은여우, 너구리도 있다.
식물상 또한 한국 토착 식물 80% 이상이 만주 지역에도 자생하여 한국 토종이여도 학명에 만주를 뜻하는 "mandshurica"가 붙은 식물이 많으며 어류 역시 상당수 일치 한다. 나머지 20%는 한국에서 희귀하거나 멸종위기 판정을 받은 월귤 같은 고산식물들이다. 특히 내만주 최북단 모허는 중국 유일 야생 블루베리(들쭉) 산지이다.
5.2. 기후
만주의 위도는 북위 38~56°의 중~고위도로[45] 서유럽과 비슷한 위도임에도 불구하고, 겨울에 시베리아 기단이 직통으로 불어오는 지역이라 강한 대륙성 기후의 특징을 지니고 있어서 겨울이 길고 매우 춥다. 북만주 지역으로 가면 겨울 최저 기온이 -50℃까지 떨어지는 곳도 있다. 봄과 가을이 빠르게 지나가고 여름은 북만주 지역은 선선하나 랴오닝성 일대는 대한민국, 일본처럼 북태평양 기단의 영향을 받으므로 경악스럽게 덥다. 특히 차오양시의 경우 여름 낮 최고 기온이 35℃를 넘기는 경우가 잦으며 최고 43.3℃를 기록한 적도 있다. 즉 -50℃와 40℃를 극과 극으로 오고가는 기후라고 보면 된다.각 지역마다 어느 정도 기온차가 있지만 겨울에 매우 추운 편이다. 동위도에서 가장 추운 지역이며 겨울 기온만 놓고 보면 정말 북극이랑 다를 바 없다. 만주에서 가장 따뜻한 다롄시(1월 평균 기온 -3.6℃)조차 냉대 기후를 띄고 있다. 그리고 선양시(-10.4℃)만 해도 남한에서 가장 추운 강원특별자치도 철원군 임남면(1월 평균 기온 -9.7℃)보다 평균기온이 낮아 남한 어느 지역보다도 추워진다. 만주 지역에서 기록된 역대 최저기온은 -58.0℃이며 역대 최고기온은 43.3℃이다. 즉, 연교차가 101.3℃이다.
그렇다고 날씨가 좋냐 하면 북반구 중위도 수렴대에 위치해서 온갖 저기압은 다 때려맞는다. 한반도를 지나가는 이동성 저기압의 중심은 대부분 만주지역에 위치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지경이다. 그리고 한여름에는 장마전선의 영향권 안에 드는 지역이며, 한겨울에는 발해만 저기압형 (중심이 만주에 위치) 대설이 내리기도 한다. 그리고 엄청난 한파가 따라온다.
이곳도 고위도 특성상 한반도나 중국 중심부에 비해 여름에는 해가 일찍 떠서 늦게 지고 겨울에는 반대로 늦게 뜨고 일찍 진다.
5.3. 주요 도시들
- 선양시
선양은 오랜 역사를 가진 도시로서,만주어에서는 버드나무 울타리를 둘렀다는 뜻의 묵던(Mukden, 한자로는 봉천(奉天)으로 음차.)이라고 불렸고 서양에서도 그렇게 부른다.
지금 이름인 선양은 혼하(渾河)의 옛 이름인 심수(瀋水)에서 딴 이름이다. 강북을 양(陽), 강남을 음(陰)이라하는데 심수 북쪽에 있어 심수지양(瀋水之陽), 줄여서 심양 곧 선양이라 부른다. 같은 이유로 서울특별시는 한강 북쪽이라 한양(漢陽), 중국 뤄양(낙양, 원음 락양)은 낙수 북쪽이라 뤄양이다.
선양 고궁, 청태조릉인 복릉(福陵), 속칭 동릉(東陵), 청태종릉인 소릉(昭陵), 속칭 북릉(北陵) 등 옛 만주족 유적들이 유명하다. 중국 내륙과 동북 3성, 한반도를 이어 주는 요충지이고 동북의 중심지이다. 인구 2007년 기준으로 766만.
- 창춘시
창춘은 먼 옛날에 농안~창춘, 지린시 일대로 비정되는 부여 중심지였고, 일본 괴뢰국인 만주국 수도였던 도시로 당시에 신징(新京)이라고 불렸고, 일본 관동군의 중심지였다. 국공내전 당시에 린뱌오의 인민해방군 동북 야전군이 포위하여 수십만 시민을 굶겨죽인 곳이기도 하다.
만주의 거의 중심에 위치해 있다. 철도 교통의 요충지이며, 중국조선족이 많이 사는 도시다. 인구는 2007년 기준 747만 명.
- 하얼빈시
하얼빈은 이름부터가 만주어 '하르빈(Harbin)'에서 유래한 도시[46]로 북방색을 강하게 띠고 있다. 이 도시는 러시아 제국이 만주 정복을 목적으로, 서양의 기술자들과 중국의 노동자들을 불러들여서 만든 도시이다. 당대에는 동양의 모스크바라고 불렸다. 때문에 한때는 중국인, 한국인, 만주족,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폴란드인, 독일인, 영국인, 유대인 등 수많은 민족이 살아가는 다국적 도시이기도 했으나 1945~47년 이후로는 중국인이 절대 다수다. 유명한 의거인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의 배경이 되는 도시이기도 하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 당시 해당지역에서 지역 주민들과 포로들을 상대로 끔찍한 생체실험을 자행했던 731부대가 여기에 있었다.
위치가 위치인 만큼 겨울엔 얼음이 한번 얼면 거의 안 녹을 정도로 매우 춥다. 이런 기후를 살려서 하얼빈 국제빙설제를 열기도 하는데 삿포로 눈 축제나 퀘벡의 윈터카니발에 비하면 국제화 수준은 떨어져서 고민이라고 한다. 인구가 2007년 기준 986만명으로 중국에서 10번째로 큰 도시.
- 다롄시
랴오둥 반도 끄트머리의 항구도시로, 과거 고구려의 비사성이 있던 곳이다. 청나라 북양함대의 군항으로 개발됐다가 19세기 말 러시아가 삼국간섭으로 조차하면서 러시아 태평양 함대의 군항이 됐다. 러일전쟁 당시에는 러일 양국 간에 끔찍한 공방전과 대학살이 벌어졌고, 이후에는 한동안 관동주란 일본 조차지의 수도로 기능했다. 안중근 의사가 처형된 곳도 이곳 다롄에 속하는 뤼순 형무소다. 만주어 'dalin'에서 유래
현재는 중화학 공업으로 유명하며 여전히 발해만의 주요 항구이다. 중국 인민해방군 북해함대의 근거지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인구는 약 590만.
- 블라디보스토크
러시아 프리모리예 지방(연해주)의 중심이자 극동 연방관구의 중심인 항구도시이다. 도시명은 러시아어로 동방을 정복한다는 뜻이다. 러시아의 동방 무역 창구이며,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통해 여타 지역으로 이어진다. 1860년대 러시아가 2차 아편 전쟁의 중재를 서 준 대가로 청나라로부터 얻어내면서 도시의 역사가 시작됐다. 러시아 태평양 함대의 핵심 주둔지이기도 했으나 현재는 군사도시 기능보다는 관광도시로 유명하다. 인구는 약 60만 명이다.
- 하바롭스크
러시아 하바롭스크 지방의 중심 도시. 극동 개척자 예로페이 하바로프의 이름에서 따왔다. 1858년 건설된, 극동 러시아에서 가장 큰 도시로 한때는 극동 연방관구의 행정 중심지이기도 했다. 현 인구 규모는 약 57만 명.
1860년 이전 이름은 보리\외래어 표기법\], 백력\[한국 한자음\](佰力, Bólì), 보호리(만주 문자: ᠪᠣᡥᠣᡵᡳ, 묄렌도르프 로마자 표기: Bohori)다. 당나라 때에 발리(勃利)로 음차되어 등장했으며, 거란(요나라) 때부터 剖阿里, 伯利, 頗黎, 勃利, 博和哩, 剖阿里로 음차 표기가 바뀌다 伯力으로 정착되었다.
6. 역사
자세한 내용은 만주/역사 문서 참고하십시오.만주는 그 어원적, 지리적 모호함만큼이나 다양한 민족들이 거쳐갔기에, 어떠한 국가에도 역사적으로 명확히 귀속되지는 않는 지역이다.
6.1. 만주에 존속했던 국가·정권들
- 고조선 - 한민족 최초의 국가이자, 만주 최초의 국가로 추정된다. 영토는 대릉하 유역, 요동 일대, 송화강 유역 일부, 한반도, 서북부 일대로 추정된다. 초기 중심지는 요동 일대로 추정되며, 주류학계 통설로는 기원전 4세기 연나라의 침입 이후에는 요서 대릉하 유역을 잃고 요동의 대부분을 상실한다. 이후 한반도 북부를 중심으로 재부흥하다가 전한의 침략으로 멸망한다.
- 옥저 - 한반도 동북부에서 연해주까지 광범위한 영역을 차지하던 한민족 국가.
- 부여 - 송화강 유역의 고대 한민족 국가이다. 고조선이 멸망하기 이전인 기원전 2~3세기 무렵에 동명왕에 의해 건국됐다. 중간에 북부여와 동부여로 갈린 것으로 추정된다. 3세기 무렵 부여는 동으로는 고대 퉁구스 제족과 접했고, 북으로는 송화강 일대를, 서쪽으로는 요하 상류 일대를, 남쪽으로는 남만주 휘발하를 경계로 고구려와 접했다 추정된다. 북부여는 선비족의 침입으로 국가가 쇠약해져 고구려의 영향 아래 있게 된다. 동부여는 5세기 초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정벌로 64성을 빼앗기고 멸망한다. 마찬가지로 북부여는 5세기 말에 나라를 들어 고구려에 바침으로 멸망한다. 북부여가 멸망하기전 일부 유민들이 송화강을 건너 두막루를 형성했다고 추정된다.
- 동호 - 흉노의 동쪽에 있던 유목 민족. 후일 오환족, 선비족, 거란의 조상이 된다.
- 고구려 - 만주, 한반도 북부 일대의 고대 한민족이 주류인 국가이다. 고구려의 주몽이 엄리대수(송화강 상류)를 건너 만주 동가강 유역의 졸본(랴오닝성 환인현)에 정착하여 해당 지역의 소국인 졸본부여의 왕이 되어 고구려를 세웠다. 통일 제국 중국 수나라, 당나라의 침입에 맞서다 당나라와 신라의 공격, 그리고 연씨 가문의 내전이 겹쳐 멸망. 현대에는 이 나라를 고구려라고 부르지만 실제로는 장수왕 이후에 국호를 고려로 바꾼 것으로 추정된다. 왕건이 세운 왕씨 고려와 혼동하지 말 것.
- 두막루 - 부여계로 추정되는 고대 한민족 국가라고 추정된다. 북만주 일대를 영토로 삼은 것으로 추정되며, 복식은 고구려와 같았다고 추정된다. 정치 제도는 부여의 사출도(마가, 우가, 구가, 저가)처럼 동물의 이름을 따서 관직명을 정했고, 지도자는 대군장이라고 불렸다. 언어는 본래 부여어를 썼다고 추정되나, 북방 유목 민족과 접하면서 북방 유목 민족의 언어와 유사해졌다고 추정된다.
- 연나라 - 중국 화하인(한족의 조상 중 하나)의 국가이다. 허베이성 동북부와 난하 유역을 영토로 삼았고, 고조선과의 전쟁에서 요동까지 진출한다.
- 진(춘추전국시대) - 연나라를 멸망시키고 요서, 요동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 전한, 후한, 서진 - 요서, 요동 일대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지배했다.
- 전진/전연 - 오호 십육국 시절 만주 일대를 차지했던 국가.
- 동연 - 189년부터 238년까지 요동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 최비 세력 - 서진 멸망 이후 일시적으로 요동을 점거했지만 모용선비에게 밀려나 고구려로 망명했다.
- 후연 - 선비계 국가. 난하와 대릉하 유역 중심.
- 북연 - 고구려인이 세운 요서 대릉하 일대의 국가. 다만 고운 사후 한족 출신인 풍발에게 왕위가 넘어가면서 한족 정권화됐다.
- 수나라 - 요서 지역을 지배.
- 소고구려/소고려: 고구려부흥운동으로 일어난 정권. 실체가 명확하지 않다. 이후 발해에 흡수됐다고 추정된다.
- 당나라: 고구려를 무너뜨리면서 안동도호부를 설치해 일시 지배.
- 발해 - 송화강 유역, 연해주 일대, 한반도 북부를 영토로 삼았다. 아무르강 이북에서도 성터와 유적이 발굴되고, 전성기부터 멸망하기 몇년 전까지는 요동 일대도 차지한 것으로 보인다.[47]
- 요나라 - 거란족이 세운 국가. 지금의 요서 지역을 중심으로 성장했다. 서쪽으로는 중앙 아시아, 동으로는 연해주 일대까지 대제국을 건설했다. 훗날 거란의 황족 중 일부였던 야율대석은 지금의 베이징에서 북요(北遼)를 세우다가, 북요 멸망 이후 투르키스탄에서 서요(西遼)를 건국했다.
- 발해부흥운동
- 동란국: 발해부흥운동이 맞는지는 애매하다. 요의 괴뢰국으로 보기 때문이다.
- 올야국 또는 오사국
- 후발해
- 정안국
- 연파국(燕頗國): 연파라는 장수가 세운 나라.
- 흥료국
- 대발해/대원국
- 고욕국(古欲國): 한국사로 보기 애매하다. 고욕이 발해 유민이긴 한데, 발해의 옛 땅이 아닌 거란의 한 주에서 일어난 반란이었기 때문.
- 금나라 - 여진족이 세운 국가, 요나라의 뒤를 이어 만주와 연해주를 장악하고 북송을 멸망시켜 북중국을 접수.
- 동요 - 거란족 출신 금나라 장수 야율유가가 요동에서 건국한 나라. 몽골의 칭기즈칸에 고개를 숙여 요왕에 봉해졌다. 칭기즈칸은 야율유가의 사후 야율유가의 아내에게 지배권을 인정해 그녀까지 2대만 존재했다.
- 후요(後遼)/대요수국(大遼收國) - 동요의 야율유가가 몽골에 숙이자 거란족 일부가 반발하여 세운 정권. 이들이 동요에 의해 망하면서 거란 유민들의 고려 침공이 발생했다.
- 동진/동하 - 금나라 장수 포선만노가 세웠던 나라. 처음엔 국호를 대진(大眞)이라고 해서 동진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이후 대하(大夏)로 바꾸어서 당대에 있던 서하와 구분하기 위해 동하라는 이름이 붙었다. 몽골이 포선만노를 정벌해서 멸망한다.
- 몽골 제국/원나라 - 몽골족이 세운 국가, 금나라의 뒤를 이어 만주와 연해주를 장악하고 이후 중국에 진출해 중국을 통일하고 고려도 사실상 복속. 훗날에 나올 명나라(명 이전에도 한나라, 삼국시대 위나라와 서진 등도 요동까지 점령했었다.)와 함께 1800년대 근대 후기 이전의 만주지역에서 기원하지 않은 세력, 국가[48]가 만주를 점령한 사례이다.
- 고려 - 고려사 지리 서문에는 압록(鴨綠: 압록강)을 한계로 동북은 선춘령(先春嶺)을 경계로 했고 서북은 그 이르는 곳이 고구려에 미치지 못했으나 동북은 넘었다고 이른다. 고려 후기에는 몽골에 의하여 요동에 대한 제약이 있었다. [49]
- 명나라 - 여진족 지배자들이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벼슬을 받아 실질 지배했다. 중국에서는 명나라 때 지도를 그릴 때 만주를 그냥 명나라 영토로 표시하는 경우가 많으나 실제 명나라가 만주를 지배했다고 보긴 어렵다. 그나마 요서와 요동 등 지금의 랴오닝 성에 해당되는 지역을 일부 가지긴 했다.
- 조선 - 명과 국경을 심양의 철령 이남부터 두만강 너머 7백리에 위치한 공험진과 선춘령까지로 확정짓고, 그 안에 있는 여진족의 통솔 역시 조선이 담당하는 것으로 합의했다.[50] 이후 영토에 대한 관리가 소홀하여 훗날 여러 분쟁이 됐다.
- 후금/청나라 - 만주족이 세운 국가, 압록강 북쪽 일대 건주 여진의 영역이 발원지이다. 만주 일대의 여진족을 통합하여 만주를 장악하고 서진하여 요동과 일대를 차지한다. 이후 이자성의 난을 틈타 중국 전역을 정복.
- 대한제국 - 간도에 대한 주권을 매듭짓지 못하고 일제에 의해 국권이 피탈됐다.
- 러시아 제국/소련/러시아 연방 - 아이훈 조약과 베이징 조약으로 청나라에게서 외만주(연해주가 포함된다.)를 획득해 현대까지 지배 중. 제국주의 시대에는 부동항 뤼순을 차지하고 하얼빈 등의 만주 내륙 지역을 세력권에 넣기도 했다. 궁극적으로는 만주 전역을 비롯해서 내몽골, 신강 일대를 병탄하여 중국과의 경계를 만리장성으로 정하는 것이 목표였으나 러일전쟁의 패전으로 좌절되고 만다. 그러나 소련 시절, 만주 전체를 8개월 간 점령했던 적이 있다. 현재는 러시아령인 외만주를 가지고 있다.
- 극동 공화국 - 소비에트 러시아의 괴뢰국이자 일본과의 완충지.
- 젤레나 우크라이나 - 우크라이나인들의 일시적인 자치 정부.
- 일본 제국 관동주 - 일제의 조차지. 다롄과 뤼순 지역.
- 봉천군벌 - 공식적으로 국가는 아니었지만 청나라 멸망 후 실질적으로 만주 대부분을 지배했던 세력. 일제에 의해 몰락하고 이후 괴뢰국인 만주국이 들어선다.
- 만주국 - 일본 제국이 만주를 접수하면서 청나라 마지막 황제 선통제를 내세워 세운 괴뢰 국가, 실질적인 통치 권한은 일본 제국에게 있었다.
- 중화민국(북양정부, 국민정부[51]) - 만주를 명목상 통치했던 국가. 하지만 실제론 봉천군벌이 지배하다가 일제 괴뢰국 만주국의 지배로 넘어가고 일제 패망 후에는 소련이 점령해 일시 통치했다. 그 후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서고 소련이 중국에 만주를 반환했다. 따라서 중화민국이 실질적으로 만주를 지배한 적은 없다고 볼 수 있다. 중화민국은 실질 영토가 대만과 그 주변으로 쪼그라든 현재도 명목상 헌법에 영토 안에 만주 일대를 포함시키고 있다(동북 9성).
- 가오강 세력 - 만주가 명목상으로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지배하에 들어갔지만 초기에는 가오강의 독립 영지나 마찬가지였다. 중공정계에서 저우언라이와 류사오치를 체지고 마오쩌둥 차기를 노렸으나, 권력투쟁에서 패해 숙청되고, 자살했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아주 쬐끔이지만, 만주 끄트마리의 황금평과 비단섬을 소유하고 있어 약간이나마 만주에 지분이 있다.
- 중화인민공화국
7. 인구와 현황
매우 추운 지역이지만 만주의 인구는 약 9,000만 명 이상인데, 2020년 인구 센서스 기준으로 동북 3성의 인구는 세계 16위에 해당하며, 일본 전체 인구와 유사한 수준이다. 동북 3성에 3시1맹, 청더시, 화이러우구, 아무르 주, 하바롭스크 지방 남부, 연해주, 유대인 자치주의 인구를 모두 더하면 1억 2,887만 명 정도가 나온다. 그중 면적의 절반을 차지하는 동북 3성의 인구는 1억 900만 명 정도다. 어쨌든 많다. 이 덕분에 변방이라는 이미지와 달리 중국에서 산업화가 가장 빨리 마무리된 지역 중 하나. 중국의 경제 중심축이 동중국해 해안으로 이동하기 전까지만 해도 중국 경제의 중추였고 요즘도 무시하지 못할 지역이다. 물론 그래도 지리적으로 해안 지역에 비해 불리한 건 사실이다. 중국 정부의 북방 지역 밀어주기가 없었다면 더 차이가 심하게 났을 가능성도 있다.[52]21세기 들어서는 중국에서 산아제한이 엄격하게 시행된 베이징, 상하이 등 주요 대도시 지역과 더불어 고령화가 가장 빠르게 진행되고 있으며 인구도 급속하게 감소하고 있다. 이미 1980년대 중반에 출산율 2.1명이 붕괴됐고 1990년대에는 출산율 1.5명대를 기록했으며 2000년대 이후로는 이보다 더욱 낮아져서 인구 1,000명당 출생률은 5명대고, 합계 출산율은 0.8명대로[53] 매우 낮다. 게다가 단순히 출산율만 낮은 게 아니라 인구유출도 심해서 청년층들은 주요 대도시와 남부지역으로 빠져나가고 있고, 한국과 러시아로 가서 일하는 경우도 많으며, 청년층들뿐만 아니라 은퇴한 노인들도 남부지역으로 빠져나가고 있는 중이라 1년에 수십만 명씩 인구가 줄어나가고 있는 실정이며, 이는 노인 인구 비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고 인구는 비슷한 일본보다도 인구 감소 속도가 훨씬 가파르다.[54] 한 예로 인구 4,300만 명이라는 랴오닝성의 연 출생아수는 20만 명대에 불과하고, 지린성이나 헤이룽장성도 마찬가지로 출생아수가 10만~20만 명대인 수준이다. 동북 3성 일대의 출생아수를 다 합쳐도 60만 명대도 안 된다는 충격과 공포의 결과가 나온다. 덕택에 오래 지나지 않아 인구가 1억 명에 훨씬 못 미칠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이 나오고 있기 때문에 중국 당국에서도 젊은 인재들을 동북 지방에 배치시키는 식으로 대응하려하고 있지만 동북 지역의 소득수준이 동남부 지방에 비해 낮은지라 상황은 여의치가 않다. 헤이룽장성의 경우 출산율이 중국 내 최하위이자 전 세계 최하위다.
산업으로는 일본이 대륙 침략을 위한 병참 기지로 쓰려고 했기 때문에 중화학 공업이 매우 발달했으며, 중국 내에서 허베이성과 더불어 철도가 가장 많이 설치되어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오카베 마키오(岡部牧夫)의 만주국의 탄생과 유산에 따르면 일본이 만주에 투자한 금액은 일본 전체 해외 자산의 42%를 차지했다. 1945년 시점 즈음해서 만주의 인구는 중국 전체의 8% 정도였으나 생산력은 중국 본토를 크게 능가했다. 특히 철강과 석탄, 시멘트 등이 풍부하여 철강 및 기계공업 등 중공업 생산량이 중국대륙 전체의 90%를 웃도는 비중을 차지했다. 이렇듯 만주의 공업 인프라는 그 자체로 전략적 가치가 막대했다. 소련이 만주에 진입하고 일본이 패망한 직후에 국민당 정부, 중국 공산당, 소련 간에 만주의 막대한 공업 인프라를 두고 치열한 각축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는 국공내전의 발발과 전개양상에도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에도 개혁개방 이전까지 중국 최대의 공업지대로서 산업을 이끌었다.[55] 1980년대까지만 해도 소련, 북한과의 접경지역이라는 지정학적 중요도까지 더해 중국 제일의 산업지대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동구권이 붕괴되고 중국이 개혁개방을 실시하면서 동북지방은 개발에 뒤쳐지게 됐다. 현재는 산업 시설의 노후화, 부실한 금융 대출 등으로 개발에서 뒤쳐지는 바람에[56] 극심한 저출산과 인구 유출을 겪고 있어서 동북병이라 불리는 경기침체를 앓고 있다. 여기에 코로나19발 불황까지 겹치면서 말 그대로 '설상가상'이 된 상황이다.#
8. 민족
만주는 다양한 민족들이 거쳐간 지역이다. 퉁구스계 민족과 한국계 민족의 발상지이자 영토였으며, 유목민족들에게 있어서는 농업과 유목이 전부 가능한 몇 안 되는 귀중한 영토였다. 또한 한반도를 넘보는 중원 세력을 막는 보루이자 중원을 넘보는 수많은 민족들의 발판이었다. 그리고 이에 맞서는 중국 한족의 입장에서는 방위를 위해 무조건 확보해야 하는 지정학적 중요성을 지닌 지역이었으며, 산업화의 요충지였다. 제국주의 일본에 있어서는 마찬가지로 중원 진출의 기지이자, 가장 핵심적인 식민지이기도 했다.그리고 유럽에서 부동항을 찾아 넘어온 러시아 세력의 진주로 인해 러시아인들 또한 큰 영향력을 구축했고, 여타 동유럽 민족들과 유대인들도 도피, 유배, 추방, 이주 등의 다양한 이유로 흘러들어와 크고 작은 흔적을 남겼다. 이 때문에 만주는 동아시아의 한자문화권과 유목문화권, 수렵채집민, 유럽 문화권이 모두 얽혀 있는 지역이다.
8.1. 유목·반농반목·수렵채집민족
만주의 원주 민족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이다. 내만주 지역은 청나라와 만주족의 발상지인 만큼, 현재도 2천만 명가량의 만주족이 존재한다. 또한 흥안령의 옛 동4맹 지역의 경우 몽골계 민족의 대표인 몽골족과 다우르족등이 거주한다.러시아 지역에는 극소수의 퉁구스계 민족 윌타족, 오로치족, 울치족 등이 거주한다. 이 지역 또한 본래는 내만주와 같이 북방 민족들의 영역이었으나 러시아 제국이 외만주를 중국으로부터 획득한 이후 표트르 스톨리핀의 러시아인 이주 장려로 러시아인들이 유입되고 이오시프 스탈린의 강제 이주정책에 의해 원주민들이 상당수 강제이주되면서 인종 구성이 바뀌었다.
중국과 러시아 양측에 걸쳐있는 민족들은 에벤키족(어원커족), 나나이족이 대표적이다. 나나이족은 중국에서 허저족이라고 부르며, 연해주에 대부분 거주하는 우데게족들도 일부는 중국에 있으며, 이들은 허저족과 만주족으로 분류된다. 헤이룽장성 북부에는 어룬춘족도 거주하는데, 일부 어룬춘족 역시 러시아에 거주하기도 하며, 러시아에서는 오로치족으로 분류하여 오로치족에 포함시킨다.
다만 현재는 중국과 러시아의 주류민족인 한족과 러시아인이 이들을 밀어내고 주류를 점하고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서만주의 일부인 내몽골 동부의 흥4맹도 마찬가지로 비슷하게 현재는 모두 소수민족이 됐다.
- 퉁구스계(숙신계) 민족
- 만주족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가 이끌던, 반농반목을 하던 건주 여진 일파의 직계 후손. 금나라의 멸망 이후에도 만주의 가장 외곽에 있었기에 동화를 피할 수 있었던 생여진 일파는 몽골 제국의 붕괴를 틈타 차츰 다시 남진하여 요동 반도 근처까지 다시 내려왔다. 그 중에서도 중국 및 조선과 가깝고 농업이 가능했던 건주 여진 부족들은 두 국가에 복종하고 협력하며 차츰 힘을 길렀고, 임진왜란 등 만력 3대정을 계기로 조선과 명나라가 약화되자 그 기회를 틈타 성장했다. 그리고 17세기 초부터 후금과 청나라를 세워 일부 야인여진을 제외한 건주, 해서 여진을 팔기 제도 아래 통일하곤 만주족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했다. 다만 여진족이 곧 만주족인 것은 아니었다. 팔기 제도 하에 편입된 주민들, 일명 '기인'들은 여진인과 몽골인이 다수이긴 했으나 조선인, 한족, 심지어는 극소수이지만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계 알바진인 출신자들도 있었다. 이들은 여타 한족과 분리된 구역에서 독립된 문화를 영유했으며, 팔기 제도가 보장하는 특권으로 뭉침으로써 공통의 정체성을 형성했다.
이들은 17세기 초반부터 명나라를 침공하여 중원을 차지한 뒤 티베트, 몽골, 신장과 만주 전역의 광대한 영역을 20세기 초까지 300년간 지배했다. 당시 만주족은 청나라의 독점적 지배민족이었지만 점차 한족의 입김이 강해졌으며, 서세동점의 19세기를 버텨내지 못하고 1911년의 신해혁명으로 멸망했다. 중화민국이 건국되면서부터는 일개 소수민족이 됐으며, 일본의 만선사관에 이용되어 만주국의 꼭두각시로 전락하기도 했다.
현재도 천만명 가량이 남아 있으며 50% 가량이 랴오닝성에 거주한다. 하지만 한족에 섞이는 것을 막기 위해 분리된 생활을 유지했음에도, 현재는 대부분이 한화되어 중국인에 동화되어 있다. 본인들이 만주족이라는 사실은 자각하지만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더 크며, 민족 언어인 만주어는 사멸 직전인데다 주급 이상의 민족 자치 지역을 보유하지도 않고 있다. 민족 종교는 만주 신화를 기반으로 한 샤머니즘, 그리고 티베트 불교이다. - 시버족
퉁구스어족의 시버어를 사용하는 수렵민족. 랴오닝성과 지린성의 및 헤이룽장성의 남부에 거주한다. 또 청나라 시기에 서북 국경 방위를 위해 강제 이주된 일파가 저 서쪽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차부차얼 시보 자치현에도 존재한다고. 스스로를 선비족의 후예로 여긴다. 이들의 언어인 시버어는 만주어의 한 방언이기 때문에, 현대 들어서는 사멸 위기인 만주어를 재구하는 데 쓰이기도 한다. 민족 종교는 샤머니즘과 티베트 불교이다. - 나나이족
퉁구스어족의 나나이어를 사용하는 수렵채집 민족. 중국에서는 허저족으로, 러시아에서는 나나이족이라 부른다. 흑수말갈의 후예로, 청나라의 발흥 당시 북동 국경을 방위하는 임무를 받아 헤이룽장성에 남았던 야인 여진 부족의 직계 후손이다. 이 때문에 나선정벌 당시 조선군과 만나기도 했다. 주로 어업과 채집을 통해 생활하는데 어업이 주된 산업이다. 물고기 껍질로 의복을 만들어 입을 정도. 러시아 제국의 외만주 점령 당시 일부가 러시아 지배 하에 들어가면서 현재는 중러 양국에 분할되어 있다. 민족 종교는 애니미즘 신앙이다. - 어웡키족
퉁구스어족의 어웡키어를 사용하는 민족. 주로 싱안링 산맥 및 내몽골자치구 북동부 일대에 거주한다. 지역별로 생활양식이 유목부터 수렵채집까지 다양하다. 세 갈래로 나뉘는데, 쑤어룬 어웡키족은 전체 어웡키족의 80%를 차지하며 유목에 종사한다. 퉁구스 어웡키족은 러시아 혁명 당시 러시아령 시베리아에서 넘어온 이들이며, 순록 유목에 종사한다. 마지막으로 야쿠트 어웡키족은 시베리아에서 넘어온 야쿠트인들의 후손으로 가장 원시적인 수렵채집 및 순록 유목에 종사한다. 샤머니즘과 티베트 불교 또는 러시아 정교를 믿는다. - 오르촌족
퉁구스어족의 오로첸어를 사용하는 민족. 주로 싱안링 산맥에 거주한다. 대실위의 후손들로, 명나라 시기에는 야인 여진의 일파로 취급됐으며 청나라에서는 색륜부의 일파로 분류하며 만주 팔기에 소속시켰다. 삼림에서 수렵을 통해 생활하며, 종교는 주로 토속 샤머니즘을 믿는다. - 오로치족
퉁구스어족의 민족. 러시아 하바롭스크 지방의 해안 지역과 사할린, 일본 홋카이도에 거주한다. 매우 극소수로 이미 민족어인 오로치어는 사멸했으며, 주로 러시아어를 쓴다. 일본에서는 아예 소수민족으로 인정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 - 우데게족
퉁구스어족의 민족. 러시아 하바롭스크 지방과 연해주에 사는 수렵채집 민족으로, 나나이족과 생활양식이 매우 비슷하다. - 윌타족
퉁구스어족의 수렵채집민족. 러시아 사할린, 일본 홋카이도를 중심으로 극소수 거주한다. 나나이족과 매우 유사하다. - 울치족
하바롭스크 지방에 거주하는 퉁구스어족의 수렵채집민족. 나나이, 윌타족과 매우 유사하다.
- 몽골계(동호계) 민족
- 몽골족
몽골 인민 공화국, 그리고 내몽골자치구를 기반으로 거주하는 유목 민족이다. 만주와 내몽골의 몽골인들은 몽골어족에 속하는 몽골어를 사용하지만, 키릴 문자를 사용하는 몽골국의 동족과는 달리 여전히 몽골 문자를 사용해 표기한다. 만주 지역에는 서부의 3시 1맹 지역과 랴오닝성에 주로 거주한다.
실위 계통, 그 중에서도 몽올실위 부족들이 대정복자 보르지긴 테무진(칭기즈 칸)의 강력한 권위를 통해 뭉쳐 생겨난 집단이다. 13세기에는 몽골 제국의 지배층으로 전 세계를 정복했으며, 이후 몽골 제국이 각 씨족의 영지로 분화될 때 만주 지역에는 카사르, 카치운, 테무게 옷치긴의 후손들인 동방 3왕가의 울루스들이 자리잡고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들 중 테무게 옷치긴의 울루스는 싱안링 산맥과 아무르 강에서 한반도 북부에 달하는 광대한 영역을 지배했기에, 대칸의 울루스인 원나라도 함부로 하기 힘들었다. 조선 왕실의 시조인 목조 이안사 또한 옷치긴 울루스에 항복했고, 그 밑에서 천호장으로 지내며 세력을 키웠다.
원나라의 몰락 이후에는 몽골 고원으로 돌아가 북원의 지배민족으로 명나라와 대립했고, 청나라 건국 당시에는 다수의 몽골 부족들이 만주족에게 원나라의 옥새를 넘기고 만주 팔기에 소속되어 중원 정복에 동참했지만 청나라에 저항한 부족들도 다수 있었다. 그렇기에 청나라는 친청 부족들을 묶어 내몽골로 규정, 높은 지위를 보장하며 청나라 황실과 통혼시키기도 했으나, 반란 분자들은 외몽골로 분류하여 별도로 관리했다. 근현대 들어서는 외몽골이 여러 차례 시도 끝에 몽골 인민 공화국으로 독립한 반면, 내몽골은 여전히 중국의 일부로 남아 있다. 민족 종교는 티베트 불교이다. - 다우르족
몽골어족의 다우르어를 사용하는 민족. 주로 내몽골자치구의 북부와 헤이룽장성에 넓게 퍼져 거주한다. 청나라 강희제 시기 국경 방위를 위해 이주된 일부 집단의 후손들은 저 서쪽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국경지대에도 거주한다. 거란족의 후예로 강력히 추정된다. 요나라의 멸망 이후 대다수는 중앙아시아와 이란으로 향해 서요를 세우거나 중국에 남아 몽골과 한족에 동화됐지만, 대하씨 부족으로 대표되는 일부는 북방으로 돌아가 자신들의 정체성을 보존했다. 그들의 후손이 바로 다우르족이다. 근세에는 만주 팔기에 소속됐지만 북방 국경 방위를 위해 남았고, 그 때문에 독립된 민족집단으로 남을 수 있었다. 수렵과 목축을 하지만, 친척뻘인 몽골인과는 달리 농사 또한 잘 짓는다. 종교로는 주로 토속 샤머니즘 신앙을 믿으며 티베트 불교를 믿는 사람들도 있다.
- 고립어 사용 민족
- 아이누
홋카이도 북부 및 남사할린과 쿠릴 열도를 중심으로 분포하는 민족으로, 고립어인 아이누어를 사용한다. 고아시아 인종으로 분류되며 크게 홋카이도 아이누, 쿠릴 아이누, 사할린 아이누로 나뉜다. 일본사에 큰 영향을 미쳤던 민족이지만 바다를 통해 외만주 지역의 수렵 민족들과도 교류하며 문화적, 경제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지녔었다. 퉁구스계 말갈족 해양민들의 일파가 전래한 오호츠크 문화가 특히 큰 영향을 끼쳤다. 홋카이도 아이누는 농경을 일부 했으나 대다수는 수렵채집으로 생활했는데, 특히 어업과 해달 사냥이 주된 생활 양식이었다. 아이누 신화로 대표되는 토테미즘과 샤머니즘을 믿는다. 조몬인의 직계 후예이며, 원래는 혼슈 동부에도 분포했으나 일본의 시조인 도래인계 야요이인들의 성장에 따라 일본 동북방으로 점차 밀려났다. 일본 조정이 이들을 에미시라 부르며 토벌군을 보내었기 때문. - 홋카이도 아이누들은 홋카이도가 마츠마에 번을 통해 일본의 경제권에 간접적으로 편입되면서 일본인들의 침략을 받게 됐고, 19세기 일본 제국의 성립에 발맞추어 홋카이도가 최초의 식민지로 편입되면서 이들도 강제적으로 동화됐다.
- 사할린 아이누는 오호츠크 문화를 흡수한 아이누인들이 사할린으로 진출하며 생겨난 집단이다. 청나라 지린성에 속해 있었으나, 근대 러시아와 일본의 사할린 지배 과정에서 대대적으로 탄압당했다.
- 쿠릴 아이누는 그 척박하고 고립된 환경 때문에 집단의 형성 시기가 사할린 아이누보다도 늦었다. 어업과 해달 사냥이 사실상 유일한 생활 양식이었으며, 러시아와 일본의 탄압으로 인해 현대에는 한 명도 남아있지 않다.
- 니브흐
고립어인 니브흐어를 사용하는 수렵채집 민족으로, 북사할린과 외만주의 아무르강 하류를 중심으로 분포한다. 아이누와 직접적으로 부대끼며 영향을 주고받았던 민족이다. 중국 동북과 러시아 극동의 이웃 퉁구스인들과 매우 유사한 생활상을 보이며, 주로 어업에 종사한다. 러시아와 일본의 사할린 지배 과정에서 수가 격감했다. 민족 종교는 토테미즘과 샤머니즘.
8.2. 한족
중국티베트어족의 중국어를 사용하는 민족. 지역 방언으로 동북 관화를 사용한다. 내만주, 즉 동북 3성과 3시 1맹 지역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며, 해당 지역들의 인구 수를 합치면 9000만 명을 상회한다. 유교와 국가 무신론의 영향을 받아 지배적인 종교는 없으나, 그래도 불교는 여전히 교세가 꽤 되는 편이다.전국시대 연나라가 최초로 요동 지역까지 진출하며 고조선 세력을 밀어냈고, 한나라 시기에는 아예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만주 남부와 한반도 북부에 한사군을 설치한다. 위진 남북조 시기에는 북방 유목 민족 세력을 거쳐 다시 고구려로 대표되는 한민족 세력에게 돌아갔다.
이후에는 천 년 가까이 요하 동쪽의 만주에서는 직접적 지배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사실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일시적으로 요하 동쪽의 남만주와 한반도 북부의 지배권을 획득했지만, 곧바로 발해에게 대부분의 영역을 빼앗겼다. 요서 정도만이 수당시대 때 확실한 지배권으로 통치됐으며, 당 멸망 이후 등장한 송나라는 아예 요서를 넘어 회북 일부까지 잃고 방위에도 급급해진다. 본격적으로 한족이 만주에 세력을 재구축하기 시작한 것은 명나라 때부터이다. 명나라는 요서와 요동 일대의 군사적 요충지를 통해 유목 제국을 견제하고 북방 국경을 안정화 시켰으나 그 이북은 여전히 전부 퉁구스 및 몽골계 민족들과 일부의 한민족 유민들의 생활 공간이었다. 청나라 건국 이후에도, 만주는 청 황실에서 보낸 일부 한족 이주민을 제외하면 청조 내내 봉금 지역이었다.
하지만 자연재해로 인한 난민 증가와 약해지는 행정력은 점차 봉금령의 붕괴를 일으켜 틈관동이라 불리는 이주 행렬을 만들었고, 19세기 말 봉금령이 완전히 풀리며 만주가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된다. 이때부터 중원(그중에서도 산둥성 일대의) 한족들이 대대적으로 이주해 현재는 만주의 주된 민족으로 자리를 잡았다. 특히 만주의 인구와 이를 기반으로 한 2차 산업, 넓은 처녀지에서 행해지는 농업은 수많은 한족 이주민들을 유입시켰다. 당시 만주를 기반으로 한 봉천군벌은 동3성 병공창 등의 기반을 바탕으로 중국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구축했을 정도였다. 만주사변으로 만주가 일본의 지배하에 잠시 넘어가기도 했으나 세계대전 이후 중국의 영역으로 돌아왔고, 중국 공산당은 이 지역의 소수민족들과 일본의 유산들을 기반으로 세력을 재편, 원정 온 국민당군을 섬멸하고 천하를 쥐었다. 그 이후로도 내만주는 확고한 중국 세력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현재는 원주민들의 유출 및 한족으로의 동화로 인해 현재 내만주에서 한족 비율은 90%가 넘는다. 대표적으로 만주의 중심인 헤이룽장성의 한족 비율은 96%이며, 일부 지역에서 소수민족 자치지역이 있으나 대부분의 도시에서는 한족이 절대 다수이다.
8.3. 후이족
이슬람, 그 중에서도 수니파의 하나피파 마드하브를 믿는 소수민족. 중국 서쪽의 투르크인이나 이란계 민족들에서 유래하지만 이슬람으로 개종한 한족들도 포괄한다. 다만 언어는 중국어를 쓴다.중국의 동북 3성에 50만명 넘게 거주하고 있어 이 지역 소수민족으로 어느 정도 지분이 있다. # 심지어 랴오닝성에서는 조선족보다 인구가 많다.[57] 상당수는 청조 후기의 무슬림 반란으로 체포되어 동북 지방으로 유배된 후이족의 후손들이다.
8.4. 한민족
한국어족[58]의 한국어를 쓰는 민족. 지배적인 종교는 없다. 한반도의 지배민족이면서, 과거 만주 일대의 원주민 중 하나였다. 한반도 외 중국과 러시아 일대에는 연변 조선족 자치주 및 블라디보스토크, 그리고 사할린 섬을 중심으로 거주한다.만주 및 한반도 북부를 기원으로 하며, 만주 역사상 최초의 국가라고 추정되는 고조선을 세웠다. 고조선 멸망 이후에도 이탈과 흡수가 반복된 요동 지역 정도를 제외하면 북부여, 동부여, 북옥저, 고구려, 두막루, 발해 등의 예맥 계열 (후대의 한민족) 국가가 내만주와 연해주 지역을 직간접적으로 천년 가까이 지배했다. 특히 고구려는 요동의 패권을 쥐고 중원과 대등하게 겨룬 첫 번째 국가라는 역사적인 상징성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고구려 멸망 이후에도 직계후손이라 할 수 있는 및 한국계 국가들 말고 여타 유목민족들도 고구려와의 직간접적인 계승의식을 내보이기도 했다. 심지어 근대 일본 제국마저도 고구려를 들먹이며 만주 지배를 정당화했을 정도니 말 다했다.
하지만 10세기경부터 유목민족들의 대대적인 발흥과 함께 발해가 멸망하며 한국계 정치집단의 지배적인 헤게모니는 무너졌고, 발해부흥운동마저 실패한 이후 한민족의 정치체는 한반도로 그 영역이 축소됐다. 심양왕같은 특이 케이스도 있었고 고려 말 제1차 요동정벌로 일시적인 진출에 성공했으나, 내우외환이 끊이지 않던 당대 국내외 정세의 한계로 만주 진출은 결국 무위로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한국계 정치집단의 영향력이 발해 멸망 이후 만주에서 일소된 것은 아니었다. 비록 직접 지배는 실패했으나, 한반도 국가들은 유목 세력과는 비교도 안 되는 한반도의 생산력과 인구 수를 바탕으로 만주 지역의 부족간 정치 지형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지역 강국으로 군림했기 때문이다. 특히 금 건국 이전이나 금 멸망 이후 ~ 영락제 이전까지 여진족이 부족 사회로 지내던 시절 부락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권은 고려-조선이 쥐고 있었으며, 수많은 여진 족장들이 고려-조선에 조공했다. 한국계 국가들 또한 답례를 내리거나 각종 정벌을 벌이며 여진 부락들의 지배권을 놓지 않기 위해 애썼다.
대표적으로 조선의 창업군주 이성계가 무장이던 시절 함흥의 전주 이씨 가문은, 세력권이 근거지인 함경남도에서 만주 중부 지역까지 걸쳐 있었다. 그렇기에 다양한 만주의 부족들이 이성계 가별초의 일원으로 동원됐고, 그 중에서는 훗날 청나라를 세우게 되는 아이신 기오로 가문도 포함됐다. 조선 건국 이후에도 수많은 만주 부족장들이 조선 왕실에 예를 표하고자 한양으로 상경하기도 했다. 그리고 명나라 또한 요동 반도 일대를 제외하고서는 여진족에 대한 직접적인 관리는 조선에 맡겼을 정도였다.
그렇기에, 만주에서 발흥하는 유목 국가가 중원을 넘볼 정도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우선 만주에 대한 한반도 국가의 통제력이 약화되어야만 했다. 여요전쟁 이후 금나라의 성장,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 청나라의 성장이 그 예시이다. 심지어 원나라마저도 동방 3왕가의 견제를 위해 심왕이라는 직위를 고려 왕실에게 맡기기도 했다. 달리 보자면, 이러한 역사적 사례들은 현대 중화인민공화국이 반중적인 한반도 통일국가의 탄생을 극도로 경계하는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중국 동북 지역의 안보는 한반도 국가, 또는 한반도를 지배하는 세력의 대중국 성향에 크게 좌우됐고, 이는 곧 베이징으로 대표되는 중국 수도권의 안보와도 직결되기 때문이다.
그 외, 발해부흥운동 시기 유민부터 시작해 고려 시대 난민 등이 후손을 이루며, 여전히 적지 않은 수가 만주에서 터전을 이뤘다. 그러다 조선 후기 시기에는 청나라의 등장으로 인한 만주의 성지화와 북방민족에 대한 조선의 우위가 붕괴된다. 이로 인해 만주에서의 영향력이 조선 전기 때보다는 약해진다.
근대에 다가서는 19세기경 한반도에서는 맬서스 트랩이 일어난다. 이 시점을 중심으로 한민족의 난민들이 본격적인 만주 재이주를 시작한다. 조선 정부 또한 여전히 직접적인 지배는 실패했지만 대한제국과 청나라 간의 국경 분쟁이 보여주듯 만주 진출을 완전히 포기했던 것은 아니었다. 의화단의 난 당시 러시아가 15만 대군을 만주에 진주시키고 청나라가 확연히 약화되자, 대한제국은 요동을 포함한 남만주 일대를 지속적으로 침략했다. 그레이트 게임의 일환이었던 이 분쟁은 러시아 제국과 프랑스 제3공화국의 직간접적인 지원을 받았으며, 대한제국군은 야전에서 연대급 규모의 청군을 박살내곤 선양 일대까지 관리를 파견하는 등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1904년 러일전쟁이 벌어지면서 대한제국 자체가 일본의 영향권에 들어가고 1909년 간도협약이 맺어짐에 따라 한반도 국가의 만주 재진출 시도는 실패로 끝나게 됐다.
하지만 이후에도 한민족의 만주 이주는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주로 농업이나 장사를 위해 중국령 만주나 러시아령 연해주로 향하는 이들이 다수였다. 이러한 이민은 1945년 일본의 패망 때까지 이어져왔다. 또한 일제의 남한 대토벌 작전과 경술국치 이후 다수의 독립운동 세력들은 이런 만주와 연해주의 한인 정착촌들을 중심으로 재편하여 항일 운동을 이어나갔다.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지청천의 한국독립군,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그리고 이용과 김홍일의 대한의용군 등. 만주와 연해주의 한인들은 이들에게 숙식과 정보, 그리고 인력을 제공했다. 하지만 1920년대부터 일본을 등에 업은 장쭤린의 봉천군벌이 탄압을 벌이고, 일본이 서서히 손을 뻗으면서 내만주의 독립운동은 점차 위축됐다. 연해주도 마찬가지로, 1922년경에는 러시아 내전이 거의 마무리되면서 소련 극동이 어느 정도 안정화됐다. 거기다 1930년대 만주사변이 벌어지면서 주요 항일 세력들은 중국 관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이나 조선의용대로 다시 이동하고 말았다. 그리고 남은 한인들은 지역마다 분화되면서 중국과 러시아의 역사에 스며들어 크고 작은 족적을 남기게 된다.
- 조선족(중국)
중국령 내만주에 있는 이들은 조선족이라 불리는데, 구한말부터 농업이민으로 넘어갔거나 항일운동을 위해 넘어간 조선인들 중 1945년 해방 이후로도 귀국하지 않고 남은 이들의 후손이다. 주로 평안도 및 함경도 출신이지만 헤이룽장성 무단장시의 조선족들은 특이하게도 한반도 남부의 경상도 출신이 다수이다. 이들이 조선족이라는 이름으로 한반도 국가와 분리된 한국계 중국인이 된 것은 1949년 국공내전 종결 이후로, 그 이전의 만주 조선인들은 한반도 내의 본토 조선인들과 크게 구별되지 않았다.
이들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에 큰 영향을 끼친 소수민족이기도 하다. 원래 옌안의 중국공산당에는 조선의용군, 동북항일연군 등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많이 분포해 있었다. 한편, 만주국과 일본의 지배를 받던 만주 조선인들은 1945년 이후 한반도로 자신들을 돌려보내려 하는 중화민국 국민정부를 좋아하지 않았기에, 역시 중국 공산당에 대거 가담했다. 이들은 만주 전역에서 국민당군의 진격을 저지, 전황을 반전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그리고 중국 공산당은 여세를 몰아 난징을 함락하고 국민당을 대만으로 몰아내는 데 성공한다. 이후에도 이후 다수의 조선인 부대들은 연안파를 구성하여 북한 정부 수립에도 참여했다. 연안파는 정통성이 부족하던 김일성이 8월 종파사건으로 일인 독재 체제를 세우자, 고려인 계통의 소련파와 마찬가지로 숙청됐다.
조선족들은 중국공산당에게 매우 큰 도움을 준 소수민족이었기에, 중국 최초의 자치구를 얻어내는 등 초창기에는 나쁘지 않은 대접을 받았다. 하지만 연변 자치구는 곧 자치주로 격하됐고, 문화대혁명 당시에는 북한의 간첩으로 몰려 홍위병들에게 대대적인 탄압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에는 여전히 중국 내부에서 나름 잘 사는 민족에 속한다. 북한의 쇄국으로 인해 교류가 줄어드는 반면에 한국과의 교류는 증가하는 추세이다.
지린성의 연변 조선족 자치주 및 장백 조선족 자치현에 다수가 모여 살고 있으며 그 외 도시에도 많이 거주한다. 지배적인 종교는 한반도의 한국인들처럼 딱히 없다. 이들의 한국어는 동북 방언(함경도)과 서북 방언(평안도)의 영향력이 강하다. 현대 들어서는 한국과의 교류 증가로 인해 대한민국 표준어의 영향력도 강해지고 있다. - 고려인(러시아)
러시아 지역에 있는 이들은 고려인이라 불린다. 19세기 말 러시아 제국령 극동으로 이주했던 이들을 기원으로 한다. 러시아의 연해주 개발 당시, 이들은 많은 농산물을 생산하고 대한제국과의 무역을 이끌면서 연해주에 생필품을 공급하여, 러시아 제국의 극동 지배를 안정화시키는 데 기여했다.
한편으로는 이들 역시 한국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러시아 혁명이 벌어지면서 레닌이 민족자결주의를 내세우고 백군을 일본이 지원하자, 이들 중 대다수는 소비에트 적군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백군과 맞서 싸웠다. 그러나 민족주의 세력은 자유시 참변으로 인해 살해당하거나 상하이로 떠나면서 와해됐다.
이후 1930년대 만주국이 수립되면서 소련 극동이 일본의 직접적인 위협에 노출되자 스탈린은 고려인 강제 이주 정책을 추진했으며, 이에 따라 고려인들은 중앙아시아로 쫒겨났다. 이 때문에 현재 이들은 구 소련을 구성하던 여러 공화국들 전역에 분포하며, 그 중에서도 특히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러시아 수도권에 특히 집중적으로 분포한다. 원 정착지였던 연해주 지역에 남은 이들은 상대적으로 소수이다.
강제 이주 이후 소련에서는 중앙아시아 농업 발전에 큰 족적을 남겼으며, 만주 작전 이후 소련군정의 실무자로 대거 참여하여 북한 정권 수립에도 소련파란 이름으로 참여했다. 하지만 여타 다른 파벌들처럼 8월 종파사건 당시 김일성에게 숙청당하고 말았다.
구소련 국가 무신론의 영향을 받아 이들 또한 민족적 종교는 없지만, 종교를 믿는다면 대부분 주로 러시아 정교를 믿는다. 언어는 함경도 동북 방언의 일파를 사용했지만 중심이 되는 민족 자치구역이 없었기에, 현대 들어서는 대부분이 러시아어를 사용한다. - 사할린 조선인(러시아 사할린 섬)
한편 사할린에 있는 한인들은 고려인과는 좀 다른 사할린 조선인이라 불린다. 이들은 1940년대에 일본 제국령 사할린에 노동자로 강제 징용되어 갔다가 1945년 일본이 철수하고 사할린이 소련에 넘어간 후에도 무국적으로 남겨진 이들을 기원으로 한다. 일본이 패전했기에 이들의 일본 국적은 말소됐지만 한국 또한 두 쪽으로 갈라졌던 것. 소련과 북한은 이들에게 북한 국적을 주려 했으나 사할린 한인들은 이를 거부했는데, 이들은 평안도, 함경도 출신이 다수를 차지하는 고려인이나 조선족과 달리, 한반도 남부에서 넘어간 이들이 대다수였기 때문이다. 절대 다수는 전라도와 경상도 출신이었지만 제주도 출신도 일부 있었다고. 하지만 대한민국은 소련과 적대 관계였던데다 소련은 남한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할린 한인들이 남한 국적을 딸 수도 없었다. 이런 애매한 상황에 무국적으로 남겨졌던 것. 이주 배경도 19세기부터 농업과 정착을 목적으로 이주했던 고려인과 조선족과 판이하게 다르다. 때문에 이들은 오히려 민단계 재일교포와 그 기원이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일부 1세대 사할린 한인들은 창씨개명의 영향으로 일본식 이름을 썼던 경우도 있다.
종교는 주로 러시아 정교를 믿는 편이다. 언어는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쓰이는 서남 방언 및 동남 방언의 일파를 사용하지만, 소련 시절의 영향으로 인해 표기는 북한 문화어 식으로 했다. 하지만 타 지역의 동포들과 마찬가지로 현대 들어서는 대한민국 표준어의 영향력이 매우 강해지고 있다. 2세 이후로는 러시아어를 주로 쓴다.
8.5. 인도유럽인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그리고 일부 벨라루스인. 이들은 러시아 극동 지역의 절대다수를 차지한다. 또한 극히 일부이긴 하지만 러시아의 지배를 받던 폴란드인 및 발트족 또는 독일계 러시아인들 또한 이주해왔다.1600년대 러시아의 팽창기에 우크라이나 코사크들을 중심으로 시베리아를 개척하며 진출해왔으나, 청과의 국경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한 후 이들은 만주에서 밀려나 스타노보이 산맥 이북 시베리아에 설립한 소규모 정착지를 중심으로 자리잡았다. 따라서 이들이 본격적으로 만주에 이주해오기 시작한 것은 1860년대 베이징 조약으로 러시아가 청나라에게서 외만주를 뜯어낸 이후부터이다. 러시아는 부동항을 건설하고 극동에서의 패권을 확립하기 위해 다수의 도시를 건설했다. 특히 니콜라이 2세 치세에 총리 표트르 스톨리핀의 이주 장려 정책이 추진되면서 다수의 러시아인 및 우크라이나인들이 극동으로 이주해왔다.
주 거주지는 프리모리예 지방과 하바롭스크 지방 등 러시아령 극동이지만, 한때는 만주 전역을 러시아 제국이 세력권으로 삼으면서 남만주 랴오둥 성에 러시아령 다롄이란 이름의 군사적 식민지를 세운 적도 있다. 또한 하얼빈 등 중국 내만주 지역의 개발에도 일익을 담당했으며, 러시아 내전에서 패배한 백군 세력이 중화민국령 내만주로 탈출해 디아스포라 공동체를 세운 적도 있다. 다만 현재 중국령 동북 3성 및 3시 1맹에서 이들 잔존 백군 세력의 자취를 알아보기는 힘든데, 세계대전을 거치며 일본에게 탄압당하고 만주 작전으로 쳐들어온 소련군에 의해 대다수가 납치당하거나 해외 망명길에 올랐기 때문이다.
외만주의 러시아인의 비율은 90%을 넘어간다. 시베리아의 사하 공화국이나 추코트카 지역이 원주민 비율이 절반 이상인 것과 비교하면 러시아 극동에서 외만주 지역은 특히 러시아인이 많이 유입된 곳임을 알 수 있다.
- 러시아인
러시아령 극동 지역의 지배적 민족. 외만주 인구의 90퍼센트 이상이 러시아인 및 우크라이나/벨라루스계 러시아인들이다. 내만주 지역 종족들이 한족을 중심으로 중국인 정체성에 동화되어 있다면, 외만주의 종족들은 러시아인에 동화되어 있다. 아무르 강 일대에는 17세기부터 진출했으며, 그 이남으로는 19세기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이주하여 정착했다. 러시아의 동방 창구인 블라디보스토크 항구와 하바로프스크가 가장 핵심적인 지역들이다.
내만주 지역에도 과거 러시아 제국의 남진 정책으로 인해 하얼빈과 다롄에 특히 많이 모여살았다. 두 도시는 사실상 러시아가 지은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 특히 하얼빈은 러시아 내전에서 백군이 패배한 후 해외로 도피한 백계 러시아인 수십만 명이 모여 사는 핵심적인 지역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은 만주국 수립 후 일본 관동군 731 부대의 범죄적 생체실험의 주된 희생양이 됐고, 1945년 만주 전략 공세 작전으로 소련군이 관동군을 박살내며 쳐들어오자 대부분 소련으로 압송됐다. 그래서 현재 내만주의 러시아인 집단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언어는 동슬라브어파의 러시아어를 사용하며, 민족 종교는 러시아 정교이다. - 우크라이나계 러시아인
러시아의 시베리아 개척 당시 동원됐던 우크라이나 카자크들을 기원으로 한다. 공식적으로는 하술할 폴란드계 소국인 야크사의 시민들 중 우크라이나어 사용자들이 다수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야크사와 알바진 요새가 청나라에 병합되자 해당 요새의 우크라이나인 카자크들은 베이징에 모여 살았고, 그 후손들은 현재까지 알바진인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본격적으로는 19세기 중반 외만주를 청나라에게서 할양받은 후 카자크 부대들이 국경 수비를 위해 정착하기 시작했고,차르 알렉산드르 2세의 농노 해방 이후 러시아 제국 정부의 극동 이주 장려 정책의 일환으로 우크라이나인 가구가 다수 이주했다. 19세기 말이 되면 연해주 인구의 20퍼센트 이상이 우크라이나인이었다. 때문에 러시아령 외만주 지역은 우크라이나어로 녹색 쐐기를 의미하는 젤레니 끌린(Зелений клин)으로도 불린다. 이는 러시아 내 우크라이나계 분포 지역 중에서도 남부 연방관구나 카자흐스탄 접경지대를 제외하면 독보적으로 우크라이나인이 많은 곳이다. 때문에 이들은 한때 젤레나 우크라이나라는 이름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기도 했으나 현재는 다수가 러시아인에 동화되어 있다. 언어는 과거에는 우크라이나어를 입말로 써왔으나 현대에는 주로 러시아어를 사용하며, 민족 종교는 역시 러시아 정교이다.
- 벨라루스계 러시아인
표트르 스톨리핀의 시베리아 이주 지원 정책 이후 다수가 이주했다. 주로 아무르 주를 중심으로 분포한다. 언어는 과거에는 벨라루스어를 입말로 쓰기도 했으나 현대에는 본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주로 러시아어를 사용하며, 민족 종교는 러시아 정교이다.
- 폴란드인/폴란드계 러시아인
17세기 중반 볼히니아의 폴란드인 귀족이었던 니체포르 체르니호프스키가 총독을 살해하고 도주하여 아무르 강변에 세운 야크사라는 자그마한 국가를 기원으로 한다. 그가 이끄는 폴란드인과 우크라이나인들은 청나라의 맹공격을 받은 후 반쯤 버려진 정착지였던 알바진 요새를 점거하곤 주변의 퉁구스계 야인여진 부족들을 규합하여 독립 국가를 선포했다. 외교 언어는 폴란드어였다. 그러나 20년 후 청나라령으로 병합됐다. 이후 폴란드인들은 19세기에 다시 한 번 대대적으로 이주한다. 당시 폴란드는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세 제국에 분할되어 있었기에 탄압이나 강제 이주, 또는 취업을 이유로 세 국가의 각지에 정착했다. 러시아의 영향권인 만주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얼빈과 중동로 철도를 설계하고 건설하는 데에는 폴란드인 기술자와 노동자들의 역할이 컸다. 또 독립운동과 반러 운동을 일으킨 폴란드인들도 다수 하얼빈에 모여들어 사회를 구성했다. 한 때 1만여 명에 달했던 하얼빈의 폴란드인 공동체는 불행히도 관동군의 731부대와 소련군의 만주 전략 공세 작전 등등 사건을 거치며 입지가 크게 흔들리게 됐다. 1937년에 소련과 만주국은 오직 양국 국적을 가진 국민만이 하얼빈 철도에서 일할 수 있다는 협정에 서명하는데 이 협정으로 인해 많은 폴란드인들이 철도청에서 쫓겨났고, 3년 후(1940년부로) 하얼빈 내 폴란드어 신문은 재정난으로 발행이 중단됐다. 1947년 중화인민공화국은 하얼빈에 남아있던 폴란드인들을 모조리 추방하기로 결정하는데, 당시 하얼빈에서 추방당한 폴란드인들은 슈체친에서 하얼빈 향우회를 만들어 운영하기도 했다.#
하얼빈에서 가장 큰 가톨릭 성당인 예수 성심 대성당은 하얼빈에 정착한 폴란드인들이 세운 성당이다. 중국 3대 맥주이자 한국에서도 유명한 하얼빈의 경우, 폴란드 마조비에츠키에 출신의 얀 브로블레츠키가 중동철도를 건설하던 러시아인 노동자들에게 팔기 위해 하얼빈에 맥주 양조장을 설립한 것이 시초이다. - 독일계 러시아인
러시아 내에 살던 독일인들, 그 중에서도 볼가 강 중류에 살던 볼가 독일인들이 주를 차지한다. 러시아 제국의 극동 개발과 함께 일부가 이주했다. 하얼빈에도 독일계 러시아인들을 위한 루터교회가 존재했을 정도다. 하얼빈 난강 기독교 교회는 원래 독일에서 온 루터교 이민자들을 위한 예배 장소였다고 한다.# 러시아계 독일인들의 본격적인 이주는 스탈린의 농업 집단화가 벌어지면서부터였다. 농업을 업으로 삼던 볼가 독일인들은 농업 집단화에 반발하며 외만주의 중-러 국경으로 이주해 탈출하곤 했다. 다수는 재세례파의 일종인 메노나이트 신도들이었는데 또 일부는 루터교 신자들이기도 했다고. 이들은 무일푼이었기에 하얼빈 일대 중국인 지주들에게 착취당하기도 하는 등 비참한 삶을 살았는데, 1930년대부터 세계 루터교회에서 이들을 탈출시켜 남미의 파라과이나 미국에 재정착시키는 것을 도왔다.
그 외 주로 귀족 계층이었던 발트 독일인들 중 백군에 가담했던 이들 일부가 하얼빈에 모여 반소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언어는 게르만어파의 독일어를 사용했으며, 종교는 루터파 개신교를 주로 믿었지만 볼가 독일인 출신자들은 재세례파가 다수이다.
8.6. 아슈케나지 유대인
동유럽, 특히 구 폴란드-리투아니아에 흩어져 살던 아슈케나짐 유대인들 중 러시아 제국 정부의 시베리아 개척 정책에 따라 극동으로 진출해 온 유럽인들 중에 섞여 있었던 이들을 뿌리로 한다. 하지만 보다 주된 기원은 1930년대 스탈린이 유대인 민족 자치구 설립 계획에 따라 이주해온 수만 명의 우크라이나/벨라루스/러시아 유대인들이다. 당시 소련 내의 모든 민족들은 민족적인 터전을 가지고 있어야 했는데, 나라 없는 민족으로 배척받기로 유명한 유대인들의 민족 자치 지역이 존재할 리가 없었다.스탈린은 이 문제도 해결하고 겸사겸사 극동의 개발과 인구 부족 문제도 해결할 겸 유대인들을 만주로 이주시키고 유대인 자치주를 설립했다. 동유럽에 자치주를 수립하지 않은 이유는, 이들의 원 거주지인 폴란드-리투아니아 영역에는 민족 구성에 기반한 경제적 계급 격차로 인해 반유대주의가 만연했기 때문이었다.[59] 폴란드-리투아니아가 망한 후 독일 제국과 러시아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도 이런 상황을 방치하다시피 했기 때문에 아슈케나짐 유대인들과 주변 농민들의 사이는 매우 험악했다. 19세기 말부터 포그롬이 벌어졌고, 20세기에는 홀로코스트에서 주민들이 학살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어졌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만주의 인프라는 너무나도 열악했다. 유대인 자치주의 유대인들은 근처에 남아도는 침엽수를 베어다가 가내수공업으로 가구를 만들어 하얼빈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팔아서 입에 풀칠을 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 유대인의 민족국가인 이스라엘이 건국되고 1970년대 소련에서 유대인의 이민을 허락한 것을 계기로 외만주에 있는 유대인 자치주에 거주하던 다수의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이나 미국으로 이민하기 시작했다. 현재도 유대인 자치주는 여전히 남아 있으나 유대인 인구는 거의 없으며, 이 때문에 폐지 논의가 활발하다. 그 외 만주국을 지배하던 일본 제국에서 만주를 개발하기 위해 복어계획이라는 이름의 유대인 이주 정책을 추진했던 적이 있으나, 나치 독일과의 관계도 있고 해서 일부 소수의 인원들을 이주시킨 것을 제외하면 실패했다. 다만, 복어계획과 스기하라 지우네 등의 노력으로 인해 유대인들 일부가 극동으로 탈출하면서 홀로코스트를 피할 수 있었다. 유대인의 특성 상 폴란드계 러시아인, 독일계 러시아인과도 어느 정도 공통점이 있다. 언어는 독일어의 일파라고 할 수 있는 게르만어파의 이디시어를 입말 및 서면 언어로 사용했다. 유대인 자치주는 이디시어가 공용어로 지정된 세계 유일의 지역이다. 그 외 그들은 러시아어나 독일어, 폴란드어 등 출신 지역 민족들의 언어 또한 구사할 줄 알았다. 한편, 종교 제례 언어는 여타 유대 분파들과 마찬가지로 셈어파의 히브리어였으며 민족 종교는 당연하게도 유대교였다.
8.7. 일본인
일본 열도의 지배적 민족. 일본은 19세기부터 러시아의 남하에 맞서 사할린 및 만주 지역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태양신의 후예를 자처하며 단 한번도 외세의 지배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졌던 일본인들은 미국과 영국, 프랑스가 대포 몇 방으로 손쉽게 막부와 각 번들을 굴복시키는 모습을 보곤 역사상 처음으로 외세에 대한 안보 위협을 절실히 깨닫게 된다. 특히 영토를 맞대고 슬금슬금 남하하는 러시아 제국이 가장 큰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러자 일본은 제국의 방위를 위해 만주, 적어도 한반도만큼은 일본으로 편입하고자 했다. 이러한 안보적 불안감은 일본 제국주의의 시발점이 되어, 여타 식민제국들과 달리 경제적인 발전이 뒷받침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만주, 시베리아를 잇달아 침략하는 정신적인 동력원으로 작용했다. 이때 처음으로 시작된 것이 그 유명한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주권선-이익선 개념이었고, 그 대상은 한반도와 오키나와, 대만, 사할린, 그리고 남만주였다.'만주'라는 지역을 최초로 규정지은 것도 일본인들이었다. 당시 떠오르던 비교언어학적 언어연구들은 각 민족의 뿌리를 밝히는 중요한 방식으로 각광받았으나 이는 곧 제국주의 침략에 이용되고는 했다. 예를 들어, 영국은 인도인들이 자신들과 같은 뿌리를 가진 인도유럽어족이라는 사실을 밝혀냈지만, 가장 발전되고 고대 아리아인의 순수성을 가장 잘 보존한 자신들이 뒤처진 친척인 인도를 계몽, 발전시켜주어야 한다는 논리로 인도 식민지배를 정당화했다. 일본 동양사학자들은 이러한 영국의 방식을 그대로 받아들여 조선과 만주에 적용했고, 독립된 지역으로써의 의미가 부족하던 동북 지역을 일본의 영향권으로 편입하기 위해 만선사관을 도입했다. 이로 인해 새로 규정된 '만주' 지역은 중국 및 유럽과 분리된 우랄알타이어족의 고유 영역이었으며, 알타이어족의 맹주이자 중국과 유럽의 장점을 모두 흡수한 선도문명인 일본이 이끌어 계몽하고 개발해야 하는 지역으로 선포됐다. 내선일체, 오족협화, 만주국 등이 이러한 논리의 산물이었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에 이르면 서남태평양 일대에도 이러한 시각이 확장되어 남양은 서구가 아니라 새로운 선도문명 일본이 주도하는 대동아공영권의 영역으로 선포됐다. 물론 이러한 허울 좋은 간판을 걸어놓은 만주 지배의 실상은 여느 식민제국들이 그렇듯 한국인 및 퉁구스계 민족들의 독립된 권리를 전부 부정하고 일본 제국의 독점적인 발전에 강제로 동원하는 것이었다. 일본 제국령 만주와 조선에서 '형제' 민족들의 권리는 없었고, 큰형님 일본이 모든 것을 결정하며 그것은 항상 옳았다.
여하튼, 이러한 서구 세력에 대한 안보적 불안감에서 시작한 일본의 제국주의적 확장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그리고 대한제국 강제 합병으로 한반도와 남만주 및 남사할린에 영향력을 구축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한편 1920년대에는 러시아의 혼란을 틈타 시베리아로 출병하여 백군을 후원하며 러시아령 외만주를 일시적으로 점령했으나, 명분과 역량 부족 및 소비에트 러시아의 반격으로 인해 철수했다. 그러나 1930년대 만주사변을 일으키며 내만주 봉천군벌의 근거지를 전부 흡수하곤 괴뢰국인 만주국을 수립하면서 본격적으로 정착했다.
이 당시에는 만주 일대에 가장 강력한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영향력을 구축했으며, 만주를 중원 진출을 위한 전진 기지로 삼아 대대적인 산업화를 추진했다. 이 시절 일본인들이 건설한 대규모의 산업시설은 동아시아 최대 규모였고, 훗날 중화인민공화국 시절에도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으로 동남 연해가 개발되기 전까지 가장 중요한 산업지대였다. 가령 1930년대 후반 일제가 안산시의 철광맥 및 푸순시의 탄광을 바탕으로 건립한 '쇼와 제철소(昭和製鋼所)'는 당대 세계에서 손에 꼽히는 규모의 제철소였다. 만철에서 1910년대에 세운 안산제철소를[60] 기반으로 독일 크루프의 기술지원을 받아 본격적인 거대 일관제철소로 재탄생시킨 것인데,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가장 중요한 제철소 중 하나이기도 했다. 일본 패망 이후에는 중국에 소유권이 넘어가 오늘날까지도 중국 정부 소유의 '안산강철집단(안강)'으로 남아 있다. 현재도 세계 7위의 거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하지만 1945년 8월 소련의 만주 전략 공세 작전으로 인해 만주국과 북한 지역의 일본 세력은 일주일만에 축출되어 버렸다. 그리고 곧 일본이 일본 제국이 항복하면서, 만주와 한반도, 중원의 일본인들은 본국으로 탈출해야만 했다. 이들을 히키아게샤라 한다. 한편 관동군의 군인들은 소련군에 잡혀 시베리아 강제 수용소에서 10년간 노역에 시달리고 나서야 본국 땅을 밟을 수 있었고, 일부는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 간 내전에 자의반 타의반 가담하기도 했다. 그리고 일본이 남긴 군사, 산업 인프라를 장악하기 위해 공산당과 국민당의 만주를 향한 경주가 펼쳐지면서 2차 국공내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한때 만주의 패권을 잡았던 이들 일본인들은 현재는 만주에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극히 일부 남은 이들도 출신을 숨기고 살아가거나 동화된 상태이다. 민족 종교는 대승불교와 신토, 그 중에서도 일본 제국 시절에는 국가신토였으며 민족 언어는 일본어족의 일본어였다.
9. 지정학
주변 지역에 비하면 역사적 주도권이 확고하지 않았다. 중원은 중국 한족계 국가가, 한반도는 한민족 국가가, 북쪽 시베리아는 저너머 서쪽에서 당도한(러시아의 시베리아 정복) 러시아가 확고한 지배력을 지니고 있는 것과 대조된다.[61]이는 근대 시기 만주족의 쇠퇴에서 기인한 바가 크다. 전근대 시기 이 지역의 종주권은 청나라의 지배민족인 만주족에게 있었으며, '만주'라는 이름 역시 이에 기반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근대 시기 러시아라는 신 세력의 등장 및 청나라 말기의 혼란과 그 사이에 일어난 만주로의 한족의 대규모 이주(틈관동), 일본 제국의 침략 등의 다양한 사건을 거치면서 만주족은 이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해버렸다. 당시에 국가 멸망의 기로에 있던 조선에서도 이주민이 몰려왔고, 오늘날에는 바로 직전까지 주도권을 지니던 만주족보다도 1000년 전에나 지배 민족이었던 한민족의 비율이 더 높아졌다.
그런 이유로 20세기 초 청나라가 붕괴하자 이 지역은 발칸반도에 준할 정도로 정세가 불안정해졌다. 특히 일본은 조선에 대한 지배력을 확립한 이후에 이 지역 역시 야심을 숨기지 않았고 청일전쟁으로 요동반도를 중국으로부터 뜯어내는데 성공하지만 일본의 승승장구를 좌시하지 못한 독일, 프랑스, 러시아에 의해 삼국간섭을 받아 일본의 세력 확장은 잠시 좌절되었다. 러일전쟁의 주요 전투 중 하나인 뤼순 공방전 역시 이 지역의 서쪽 끝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인 뤼순에서 이루어졌다. 일본 제국은 20세기 초 만주사변, 만주국 설치 등의 사건을 일으키면서 세력권을 확장했지만 할힌골 전투에서 보듯 소-일 사이의 힘의 격차는 명백했고 일본으로서는 소·일 불가침조약(1941-1945)을 맺어가면서 불안스러운 현상 유지를 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에 태평양 전쟁으로 붕괴에 다다른 일본 제국을 소련이 공격하면서(만주 전략 공세 작전) 일본의 주도권은 상실되고 이 지역은 다시 중국의 영역으로 돌아간다.[62] 중일전쟁 전까지 수세에 몰렸던 중국공산당 세력은 만주를 기반으로 대대적 반격을 가해 중국국민당을 대만으로 내쫓았으니(국부천대) 현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에도 만주가 큰 역할을 한 셈이다.[63]
그러나 지금은 20세기 초의 불안정함이 언제 일이었냐 싶을 정도로 안정적인 지역이 되었다.[64] 19세기 말 틈관동이 시작된 이래 100여 년이 지난 지금 이 지역은 중국 한족이 절대 다수인 지역이 되었다.[65]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완전히 패퇴하여 이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였고, 한국, 특히 이 지역에 면한 북한은 종종 미치광이 전략으로 중국을 곤란하게 하긴 하지만 전반적인 경제력은 파탄국가이기에 중국을 위협할 만한 위치가 되지 못한다. 유일한 변수는 러시아이지만 러시아 역시 냉전 시기에 (마찰이 종종 있긴 했으나) 공산주의 우방이었고 현 신냉전 구도에서도 반서방 진영으로서 협력하고 있는 상태이다. 만에 하나 북한이 붕괴한다면 인접한 이 지역 역시 혼란스러워질 가능성도 있으나,[66] 중국과 러시아 측에서는 북한의 존립이 자국의 국익에 유리하기 때문에 이러한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특히 중국이)[67] 노력하고 있다.[68]
중국으로서는 중국의 지배력이 확고한 현 상황이 중국에게 매우 이득이 된다. 지도를 보듯이 만리장성, 연운 16주, 산해관 등의 방어선을 뚫을 경우 베이징은 물론, 이남의 중국 평원지대가 그대로 노출되기 때문이다. 즉, 이곳에 적대적 세력이 있을 경우 소위 중원이 직접적으로 위협받는다. 한국으로 치면 개마고원급 혹은 그 이상의 방어적 가치가 있는 셈이다. 실제로 이 지역에 요나라, 금나라, 청나라 등 중국 한족 외 이민족의 국가가 성립되었을 때 중원의 지배권은 크게 위협받았다.[69]
물론 이러한 안정세는 중국과 러시아라는 이 지역의 양강 세력이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러시아가 서방과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마당이니 이 정세가 근 십수 년 내에 바뀔 일은 없을 테지만, 중러관계가 지금과 다르게 비우호적으로 바뀌는 순간 이 지역은 언제든지 20세기 초와 같은 세계의 화약고가 될 잠재성(?)을 지니고 있다. 외만주의 일부인 연해주도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러시아가 중국으로부터 빼앗은 땅이고 이로 인해 중국이 동해로의 접근성을 잃어버렸다는 것도 불씨 중 하나이다.[70] 2020년대에야 중러관계가 우호적이니 러시아가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 항을 중국이 쓸 수 있게 개방해주지만 (더이상 서방이 중러 패권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든지 등의 사태로 인해) 중러관계가 악화된다면 그런 배려 같은 건 당장에 사라질 것이고, 중국으로선 거리적 가까움을 활용해 연해주에 군사적 압박을 가하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71]
10. 대외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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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한 내용은 일본-만주 관계 문서 참고하십시오.
자세한 내용은 중화권-러시아-만주 관계 문서 참고하십시오.
자세한 내용은 청나라 치하 티베트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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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둥베이 지방 사람들의 기질
현 둥베이 지방(지린성·헤이룽장성·랴오닝성) 사람들의 특징이 몇 가지 있다.- 술을 사랑한다. 일단, 날씨가 추우니 술을 마셔 몸을 데우는 게 당연할 테고, 술 자체를 즐기기도 하고 인간 관계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그 덕분인지 하얼빈은 맥주로 유명하기도 하다. 둥베이 지방은 아니지만 둥베이 지방과 접해있는 러시아 연해주, 하바로프스크 역시 술을 잘 마신다.
- 중국의 다른 지역들과는 달리 우리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에게도 쓴다.
- 의리를 중시한다. 그래서 친해지기 쉽다 카더라... 다만 사업적인 마인드를 중시하는 자본주의의 흐름에는 장애물이 되기도 한다고.
- 화끈하다. 그 덕에 둥베이 호랑이라는 별명까지 갖고있다.
- 둥베이북 지방은 경작이 잘되는데 겨울은 기니 사람들이 늘어져서 할 일 없이 노는 시간이 길다.
- 틈관동 때 산둥 지방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 삶을 어렵게 꾸려나간 탓에 큰 꿈을 품기보다는 현세적이고 소극적이다.
- 둥베이 남녀에 대한 편견도 있는데, 남자의 경우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며, 여성의 경우에는 예쁘지만 고집있다는 이미지가 있다.
한국인의 기질과 비슷한 부분이 있다고 판단될 소지가 있다. 둥베이 3성 인구 1억의 대부분이 한국과는 별 문화적 연고가 없는 허베이 지방과, 산동 지방에서 이주한 한족[72]이기는 하지만, 산둥성이 바다 건너 한반도와 고대부터 상당히 교류가 밀접했으므로, 어느 정도 통하는 면이 있는 듯. 또한 200만 정도의 조선족은 구한말~일제강점기 때 올라간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민족적 기질은 쉽게 바뀌는 점은 아니라서 조선족 민족성도 한국인과 비슷한 면이 많다. 허나 이런 기질은 몽골인들도 가지고 있으니 북방의 기후가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
중국의 개방 이후 개발의 중심이 중공업이 발달됐던 둥베이 지방에서 동남 해안 지방으로 옮겨갔기 때문에 둥베이 지방의 경제적 전망이 어두워지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좀 자포자기하는 분위기라고 한다. 한편 둥베이 지방 사람들은 중국에서 가장 잘 교육받았다고 한다. 외지인이나 농민공이 적은 편이어서 그런지 베이징, 상하이보다도 교통 질서를 잘 지키는 편이다.
만주 사람들은 교자(흔히 말하는 만두)를 주식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일본식 군만두도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만주에서 복무하던 시절 먹던 교자를 잊지 못해서 나온 음식이라고 한다.
한편 중국어 표준어인 보통화는 사실 북방 관화에 기초하여 규정한 것인데, 수도 베이징의 토박이들이 쓰는 북경어[73] 말씨보다 둥베이 지방 사람들의 발음이 보통화의 표준 발음과 거의 차이가 없다고 평가된다. 그 중에 특히 하얼빈 발음은 가장 또렷한 보통화란 평이 중론이다. 그래서 둥베이 출신 아나운서나 배우는 발음이 매우 좋다고 선호되는 편이고, 타 지역 사람들은 둥베이에 가면 평범한 아저씨 아주머니들도 말하는 건 꼭 아나운서 같다고 할 정도다.
어째서인지 만주족 등 만주지역의 수렵채집·유목 소수민족들 중에 미녀들도 있다는 인식도 적지 않으며 옛날에도 그랬다. 아이러니하게도 여진족, 야인이라 불린 북방변경의 이민족들은 반대로 조선에 미녀들이 많다고 여겼고, 두만강 이북의 여러 민족들이 조선을 약탈할 때 이런 이유로 여성들도 납치하기도 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또 둥베이 3성 지역은 조선족 거주 비율도 높은 편이다.
12. 의식주와 문화
만주 요리 문서로. 만주족과 퉁구스족들을 포함한 만주의 여러 민족들 요리로 구성됐으며, 중국, 러시아와 러시아 소수민족들, 몽골, 일본, 티베트, 후이족과 신장의 이슬람 민족들, 한국의 영향도 받았다.주거지의 경우, 내몽골 및 몽골과 가까운 곳은 유르트를 치며 살았고, 연해주 등 동만주 일대는 움집이나 땅 밑의 굴을 만들거나 건초나 나뭇가지로 쌓은 원시가옥 형태인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중국과 한국의 영향으로 목조건축물을 짓는 경우도 나타났다. 외만주는 러시아의 영향으로 러시아 등 서양풍 건축물들과 도시가 생겨났다.
전통의상으로 만주족의 치파오가 가장 유명하고, 만주족을 비롯하여 만주제족도 이와 비슷한 의상이다.
퉁구스 원주민들을 포함한 여러 민족마다 자신들만의 고유 샤머니즘이나 애니미즘, 토테미즘, 내몽골 동부와 가까운 서부 지역은 몽골인들이 텡그리교을 믿었지만,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은 이후 유교, 불교(대승불교와 티베트 불교), 도교를 믿는 이가 생겼다. 만주족과 다우르족, 어원커족, 나나이족 중 티베트 불교를 믿는 사람들도 있다. 연해주와 하바로프스크, 사할린, 아무르 강 유역은 러시아 영토가 되면서 정교회 등 기독교 계열 종교가 들어왔으며, 일부 유대교 및 이슬람교도도 있다. 다만 사회주의의 영향으로 세속화되어 신앙 활동이 활발하지 않다.
이런 역사적, 사회적 이유로 지리적으로는 동북아시아지만 문화적으로는 동서양 문화 양쪽 모두 있는 지역이다.
13. 관련 문서
- 3대 마경
- 건국대학
- 동북사성(북중합병, 북한분할)
- 동북아시아
- 만주족
- 청나라
- 간도: 만주 영역 중 압록강~두만강 인근에 있어 한국인의 이주가 잦았던 지역을 한국 측에서는 간도(間島)라고 불렀다. 압록강 측을 서간도, 두만강 측을 북간도라고 했다. 간도 문서에서도 설명하듯 이 표현은 본래 한자 뜻대로 하중도를 의미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한국에서 남만주 지역을 가려면 압록강이든 두만강이든 강을 넘어야 하는데, 강의 완전한 저편이 아니라 강 사이에 있는 섬이라고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조선 측에서 국외 이탈자를 처벌하는 규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 뤼순
- 만몽독립운동
- 만주국
- 요동
- 연변
- 하얼빈역
- 중화인민공화국
- 러시아 연방
- 중러관계(중소관계 포함)
- 러시아계 중국인, 중국계 러시아인
- 만주 횡단철도
- 대흥안령 산맥, 소흥안령 산맥
- 러허성
- 청더
- 내몽골 자치구(동부 지역의 동4맹 한정)
- 러시아 극동, 극동 연방관구(남부 외만주 지방만 한정)
- 퉁구스
- 만주퉁구스어족
- 한국-만주 관계
- 몽골-만주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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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만주 지역의 여러 소수민족들 및 퉁구스계 민족들도 '만주(manju)'라고 부른다.[2] 평안북도 신도군 황금평[3] 당대에 쓰였던 우정식 병음으로는 Kwantung으로 적는다.[4] 闖關東/闯关东, 촹관둥: 청나라 말기 한족들의 만주 대량 이주[5] 원문의 國은 만주어의 '구룬'(gurun)에 해당될 것으로 추측되는데, 주 민족인 여진족의 종족적 정체성과 어느 정도의 거리감이 있었을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완전한 극단에서는 "청나라라는 국가의 정치체의 구성원일 뿐, 민족적 속성은 전무하다"라고 주장하고, 다른 극단에서는 "(여러 다른 종족이 개입하기는 했으나) 이전 시대의 종족적 정체성에 기반했다"라고 주장한다.# 만주족의 민족성에 관한 담론은 만주족 문서를 참조할 수 있다.[6] '여진'(女眞)과 마찬가지로 '주션'(Jusen)의 음역어이다.[7] 이 시기 청나라는 일세일원제가 아니었다. 이듬해(1636년) '숭덕제'라는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 연호를 '숭덕'(崇德)으로 바꾼다.[8] 다만 청나라의 성립을 즈음하여 만주족의 기준과 범위가 크게 달라졌기 때문에 여진족 = 만주족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만주족의 상당수가 과거 여진족이라고 불렸던 이들인 것은 맞지만 모든 여진족이 만주족이 된 것은 아니며, 반대로 만주족이라고 불린 이들 중에서도 여진족이 아닌 이들이 있었다. 극단적 소수인 여진족이 절대 다수인 한족을 통치하는 이민족 왕조인 청나라 입장에서 만주족의 대대적 확장은 안정적인 통치를 위해서라도 필수적이었다. 그러지 않으면 침투왕조가 그랬듯 정복의 영광은 잠시이고 삽시간에 동화될 뿐이다.[9] 노추란 누르하치를 의미하지만 그 범주가 여진으로 확대됐다.[10] 2009,《族称manju词源探析》,长山作,刊载于《满语研究》, p. 1.[11] 陳鵬, 「“滿洲”名稱述考」, 『民族研究』, 2011, 제3기.[12] 사하랸 우라는 후일 흑룡강 하구 건너편의 사할린의 유래가 되었다.[13] 이훈(2013), "17-18세기 淸朝의 滿洲地域에 대한 政策과 認識 : 건륭기 만주족의 위기와 관련하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14] John Karl Treiber(2004), 《Mapping Manchuria: The Japanese Production of Knowledge in Manchuria-Manchukuo to 1945》, p. 34.[15] 조선에서는 압록강-두만강 이북의 닝구타 등지를 청의 발상지 내지는 고국으로 인식하면서 일찍부터 '만주(滿洲)'라 부르기도 했다. 다만 서구에서 조선의 이 용법을 가져온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16] 영국의 조지 2세와 프랑스의 루이 15세의 왕립 제도사가 된 고유한 명성을 얻은 웨일스 지도 제작자 에마누엘 보웬(Emanuel Bowen, 1693 ~ 1767)이 1747년 런던에서 간행했다.[17] 1782년 해상 조난 후 러시아로 갔다가 1792년 귀국한 이세국(伊勢国)의 뱃사공들의 체험을 난학자 가쓰라가와 호슈(桂川甫周)가 청취 후 작성하여 1794년에 간행했다.[18] 네덜란드 상관의(商館醫)으로서 1823~29년 까지 일본에 체류했던 독일인 필리프 프란츠 폰 지볼트(Philipp Franz von Siebold, 1796 ~ 1866)가 귀국하여 1832~52년 간행한 《NIPPON》 1권 에 실렸다. 그와 교류하며 일본변계략도 등을 제공했던 다카하시 가게야스(高橋景保)는 지볼트의 귀국 과정에서 지도의 존재가 들통나면서 옥사했다. 지볼트의 행적에 관한 글[19] Mark C. Elliott(2000), "The Limits of Tartary: Manchuria in Imperial and National Geographies", 《The Journal of Asian Studies》Vol. 59, No. 3; John Karl Treiber(2004), 《Mapping Manchuria: The Japanese Production of Knowledge in Manchuria-Manchukuo to 1945》, p. 34~35.[20] John Steinberg(2007), 《The Russo-Japanese War in Global Perspective: World War Zero, Volume II》, p. 514.[21] 더욱이 이 지역은 유목민 혹은 반농반목이 보통이라 원주민의 거주지 이동이 일상적이다. 규칙 없이 아무데나 떠도는 것은 아니고 얼추 특정 범위에서 맴돌기는 하지만 각 지역의 종족 분포는 시시각각으로 조금씩 바뀌기 마련이다.[22] 중국 한족, 한국 한민족도 이 지역을 영유한 적이 없지는 않으나 여진족 계열에 비할 바는 못 된다. 당장에 이 지역의 지명부터가 대체로 만주어로 되어있다.[23] 위에서 보듯 1700년대 후반~1800년대 서양의 지도에서도 '만주'라는 명칭이 나타나므로 이것까지 일본의 획책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이다. 그러나 china에서 온 지나를 일본에서 사용하는 것이 문제가 되듯, 이 지역이 속한 동아시아 권역에서 지명으로 잘 쓰이지 않던 '만주'가 근대 시기에 자주 쓰이게 된 것은 별개의 차원의 문제이다.[24] 그런 맥락에서 중국에서는 만주국을 "가짜 만주"라는 의미에서 '위만주'(僞滿州)라고 부른다. 만주라는 지역이야 가짜이고 말 것이 없이 실제로 존재하는 지역이니, 이 '위'는 '국가가 아니다', 즉 괴뢰국임을 가리키는 용법이다. 북한에서 한국을 "괴뢰한국" 따위로 부르는 것과 동궤라고 할 수 있다.[25] 이는 만주족이 중원의 지배자였던 자신감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주족의 권세를 잃은 근대 시기에 러시아와 일본의 위협 등 여러 요인으로 만주족은 자신들의 근거지를 상실하고 소멸하면서 중원 중심적 지명을 개정할 기회를 상실하였다.[26] 일본 제국의 관동군 역시 여기에서 비롯된 명칭이다.[27] "봉천성"이라는 명칭은 중화민국때도 쓰이다가, 만주국이 심양의 이름을 봉천이라고 바꾸고 수도로 삼으면서, 금기시 됐고, 랴오닝(요녕)성으로 이름을 바꾸었다.[28] Norman Smith(2012), 《Intoxicating Manchuria: Alcohol, Opium, and Culture in China's Northeast》, p. 219.[29] David W. Edgington(2003), 《Japan at the Millennium: Joining Past and Future》 p. 114.[30] Gavan McCormack(1977), 《Chang Tso-lin in Northeast China, 1911-1928》, p. 4.[31] 이러한 현상은 적대 국가 사이에서도 종종 나타난다. 양안관계에서 양측은 상대측의 공식 직함을 종종 따옴표로 인용하곤 하는데, "(우리는 인정하지 않지만) 저들이 주장하기로는 이런 직위인..." 정도의 의미이다.[32] Mariko Asano Tamanoi(2000), "Knowledge, Power, and Racial Classification: The "Japanese" in "Manchuria" ", 《The Journal of Asian Studies》 Vol. 59, No. 2, p. 249.[33] Chad D. Garcia(2012), "Horsemen from the Edge of Empire: The Rise of the Jurchen Coalition", 워싱턴 대학교 박사학위논문, p. 15.[34] 아래 관련 문서에서 다루듯 만주 중 한국인이 대거 이주한 남만주 지역은 '간도'라고 부르곤 했지만 오늘날에 이 지명은 역사적인 맥락에서만 사용된다.[35] 실제로 한국에서 '둥베이'는 중국의 지역을 가리키는 표현으로만 쓰일 뿐, 본 문서에서 다루는 역사적 지명을 둥베이라고 부르는 일은 거의 없다.[36] 예로 KBS 어업기상통보에 나오는 연해주 지명인 테튜헤(Те́тюхе)는 이때에 달네고르스크(Дальнего́рск)라는 이름으로 바꿨다.[37] 이와 비슷하게 사할린의 아이누어 지명도 일본령 시절과는 달리 현재는 다 러시아식 지명으로 바뀌었다.[38] 세번째 지도로, 남만주철도 이동과 중국동부철도 이남을 만주로 표기하고 조선과 만주의 국경을 철도 노선보다 더 얇게 표시하여 남만주가 단지 물리적으로 조선과 인접할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인접해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39] John Karl Treiber(2004), 《Mapping Manchuria: The Japanese Production of Knowledge in Manchuria-Manchukuo to 1945》, p. 54~55, 92~94; 성근제(2011), "‘東北’인가, ‘滿洲’인가 - 근대 동북 지역연구과제 설정의 가능성 -", 《중국현대문학》 56.[40] 동4맹(東四盟/东四盟)은 츠펑시(赤峰市, 구 자오우다맹{昭烏達盟/昭乌达盟}), 퉁랴오시(通遼市/通辽市, 구 저리무맹{哲里木盟}), 후룬베이얼시(呼倫貝爾市/呼伦贝尔市, 구 후룬베이얼맹), 싱안맹(興安盟/兴安盟)을 한데 묶은 표현이다. 여기서 '맹'은 내몽골 자치구에만 있는 행정구역 단위인데, 현재는 행정 구역 개편이 되어 본래의 동4맹 중 3개가 시로 승격됐다. 현재도 이 네 곳을 묶을 땐 예전 행정 구역을 따서 동4맹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지만, 바뀐 행정 구역에 맞춰 3시 1맹(三市一盟)이라고 부르기도 한다.[41] 간혹 시린궈러맹도 몽동(蒙東)이라는 범위로 묶어서 만주로 포함시키는 경우도 있다.[42] 과거 중화민국 시절의 행정 구역 중 하나였으며 중심지는 청더. 지금은 내몽골, 랴오닝, 허베이 성에 각자 흡수됐다. 정확한 위치는 오늘 날 내몽골 자치구의 츠펑을 포함한 시라무렌강 유역, 랴오닝 성의 요서 북쪽과 챠오양, 허베이 성의 청더 시가 해당된다. 역사적으로 선비족, 오환족, 거란족이 거주했던 지역이었다. 다만 청나라 때도 이곳을 내몽골의 일부로 간주한 적이 있었고, 중화민국 시기에도 이곳을 동북지구가 아니라 내, 외몽골을 포함하는 지역인 새북지구로 분류했다.[43] 둥베이 평원(혹은 만주 평원)이 있긴 한데 풀만 있는 동네 정도는 아니다.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다만 아무르강 유역이나 내몽골 동북부 지역에는 초원이나 벌판이 조금 있다.[44] 다만 만주 전체에서 가장 높은 산은 남쪽 끝에 있는 백두산이다.[45] 내만주의 경우 북위 38~53°, 외만주의 경우 북위 42~56°[46] 실제로 로마자를 쓰는 외국어(주로 영어)로 이곳의 이름을 표기할 때 한어병음식으로 Ha'erbin이 아닌 만주어식인 Harbin으로 표기한다.[47] 발해의 정식 대내 국호는 고려(高麗)라는 설도 있으나 기록이 부족한 관계로 정확히는 알 수 없다. 건국 초기에 일본에 국서를 보낼 때 국호를 고려라고 쓴 예는 있으나, 발해인들이 스스로를 고려라고 부른 적이 있다 해도 얼마나 지속됐는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48] 물론 먼 조상격인 몽올실위는 만주지역에서 나왔던 민족이다. 다만 나중에 몽골 지역으로 이주했으며, 그래서 이후 칭기즈칸 시대에는 몽골지역에 있었다.[49] 원나라 무종은 고려인이 상당 수 거주하고 있는 요양, 심양 등을 고려가 다스리게 하고 1310년 심양왕에서 심왕으로 격상했다.[50] 성조 영락제, 조선 태종[51] 동북역치 이후.[52] 중국은 정치를 경제보다 중요시하는 나라고, 아무래도 북방인들의 정권이라 남방 지역에 대한 차별이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광둥성의 경우 중국인 글로벌 슈퍼리치 톱100 15명 중 10명을 배출하고, 200억 원 이상의 자산을 보유한 부자가 다수 존재하고, 전국 31개 성급 지방정부 순위 가운데 압도적 1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게 지난 수십 년간 광둥성 출신 정치국 상무위원은 단 한 명도 없었다.[53] 중국 전체 출생률은 1,000명당 11~13명을 오가는 수준이고 합계 출산율은 1.6명대이다. 2015년에는 동북 3성 합계 출산율이 0.55명이었으나, 지금은 이보다 더 낮을 수 있다.[54] 러시아의 외만주 지역은 출산율이 러시아의 평균 수준이다.[55] 이 당시 동북지방의 별명은 공화국의 맏아들(共和国长子). 중국 당국이 동북지방의 공업을 얼마나 애지중지 했는지 알 수 있다.[56] 실제로도 만주는 '중국판 러스트 벨트'로 불린다.[57] 2000년 기준 후이족 264,407명, 조선족 241,052명[58] 비교언어학으로 고립어로 속한다.[59]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상인과 마름은 대개 유대인과 독일인이었다.[60] 현 중국 영토 내에 세워진 최초의 제철시설이었다.[61] 단군 책임론에서 번외로 만주의 지정학적 요건에 대해서 잠깐 다루고 있다. 고조선 역시 만주에서 시작된 국가이기 때문이다. 문서의 결론은 "차지하면 좋지만 적이 너무 많다"라는 것이다. 결국에 만주족은 이 지역의 영유에 실패했고 중국은 인구 수로 돌파구를 찾은 셈이라고 할 수 있다.[62] 이 시기에 일본이 동시에 상실한 영토가 사할린인데, 일본인 이주민의 비율이 현지인에 비해 지극히 적었던 만주에 비해 사할린은 원주민의 수가 매우 적어 일본인의 비율이 매우 높은 지역이었다. 때문에 "내지"로 취급한 것이 아주 부당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이들은 모두 쫓겨났고 전후에 이주한 러시아인이 그 자리를 메웠다. 그 결과 극소수의 원주민을 제외하면 현재 사할린에서 가장 오랜 세월 동안 거주하고 있는 민족은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이 강제로 데려온 사할린 한인이다.[63] 이렇게 중국공산당이 만주로부터 확장한 것은 북중관계의 우호도에도 영향을 주었다. 아닌 게 아니라 중국조선족은 중국의 대다수 민족은 아니긴 하지만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에도 기여하여 충성심을 입증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조선족은 일찍이 자치주를 부여받았으며 대우도 나쁘지 않았기에 오늘날에도 반중 정서가 크지 않다. 만주에서 조선족과 벼랑 끝 시절을 함께 한 적은 없는 중국국민당이 중국을 통일했다면 조선족이란 "우리가 약한 틈을 타 불법으로 들어온 이민족" 정도의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실제로 만주국 시절에 조선인은 "일본인에 충성하는 앞잡이" 식으로 한족에게 썩 좋지 않은 이미지가 지배적이었다.[64] 후술하듯 불씨의 여지가 전무하다고까지 할 순 없지만 분쟁이 현재진행형인 신장 위구르 자치구, 시짱 티베트 자치구에 비할 바는 못된다.[65] 청나라도 자유 이주를 허락했다간 금세 이렇게 되리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봉금령을 내린 것이다.[66] 더 나아가 대한민국 위주의 한반도 통일이 성사된다면 중국조선족도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현 북중관계에 비하여 한중관계는 여러 불안정성이 크기는 하지만 경제적으로 북한에 비하여 대한민국의 규모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크기 때문이다.[67] 견해에 따라 "지금 북한이 붕괴하지 않는 것은 100% 중국의 지원 때문"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비율이 어느 정도인진 몰라도 중국이 없었다면 북한은 애저녁에 붕괴했을 것이 분명하긴 하다.[68]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붕괴는 이 지역의 혼란을 야기할 수 있는 변수 중 가장 확률이 높은 사건 중 하나이다. 중국에서는 북한의 붕괴를 막기 위해 물심양변으로 지원해주고 있긴 하지만, 근본적으로 북한의 통치까지는 내정간섭이라 대신할 수 없으며 북한도 자존심만 세서 이를 용납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으로서는 만에 하나의 사태를 대비해 정치적으로도 북한 붕괴 후 바로 중국의 영향력을 이어나갈 수 있는 상황을 최상으로 생각하겠지만 북한에서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두진 않고 있다. 물론 그렇다곤 해도 북한 붕괴 상황에서 중국이 제일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리라는 것은 자명하지만, 중국으로서는 100% 만반의 대비를 할 수는 없다는 점이 아쉬운 부분이다.[69] 어떻게 보면 나중에 한족들에게 엄청난 굴욕을 안겨주게 되는 요, 금, 청조를 세울 거란과 말갈족들을 고구려가 나름대로 잘 제어하고 있었는데, 중원 왕조들이 애꿎은 고구려가 위협이 된다 판단하고 멸한 결과 헬게이트가 열려버린 꼴[70] 만주/역사에서 다루듯 만약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했다면 만주 전역이 러시아의 영역이 되었을 수 있다. 만약 그렇게 됐다면 오늘날에도 제아무리 반서방의 가치를 공유한다 해도 빼앗긴 영토가 너무 많으니 중러관계도 썩 우호적이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71] 실제로 근대에 일본이 러시아-소련에 비해 줄곧 국력의 열세에 있었지만 동아시아에서만큼은 우세함을 유지한 것은 러시아의 핵심 지역이 동아시아에서 매우 멀다는 점 때문이었다. 이제 막 근대화를 시작한 일본이었지만 지구 반 바퀴를 돌아온 러시아 함대는 일본 함대를 상대하기가 매우 벅찼기 때문에 쓰시마 해전에서 일본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21세기에 중러 분쟁이 현실화된다면 오늘날의 중국은 20세기 초의 일본보다도 훨씬 강력하니, 근거리의 이점은 훨씬 더 크게 작용할 것이 분명하다.[72] 이정기의 제나라 등을 보면 문화적 연고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다.[73] 북방 민족의 영향으로 얼 왈왈왈 발음이 붙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