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10px 0px; color:#fff;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0, #6e6e6e); word-break:keep-all" 유언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tablewidth=100%> 실존인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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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실존 인물 중 한국인의 유언을 정리한 문서다. 다만 한국사에 관련된 외국인의 유언, 북한인의 유언도 포함되어 있다.2. 명단
2.1. 고조선
유언 | 인물 | 생몰년 |
처음에 누선장군에게 항복하려 했으나 그는 이제 잡혀 있고, 좌장군만이 홀로 병사들을 합하여 전쟁이 매우 격렬하니, 맞서 싸우기 두려운데도 왕은 항복하려 하지 않는구나. | 노인[1] | ?~BC108.4 |
2.2. 삼국시대
2.2.1. 고구려
유언 | 인물 | 생몰년 |
도(道)로써 나라를 잘 다스리거라. | 동명성왕[2] | BC58.4~BC19.9 |
지난번 황룡국왕이 강한 활을 보냈을 때, 나는 그것이 우리나라를 가벼이 여기는 것은 아닌지 우려되었던 까닭에 활을 당겨 부러뜨려 되갚았던 것인데, 뜻밖에 부왕으로부터 책망을 당하였다. 지금 부왕께서 나를 불효자라 하여 칼을 보내 자결을 명하시니, 어찌 아버님의 명을 거역할 수 있겠는가. | 해명태자[3] | BC12~AD9.3 |
신은 북명의 미천한 사람으로서 왕의 두터운 은혜를 여러 번 입었습니다. 비록 죽더라도 살아서와 같이 은혜에 보답할 것을 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 괴유 | ?~22.10 |
내가 만약 변명을 하면 이는 어머니의 그릇됨을 드러내어 왕께 근심을 끼치는 것이니, 이것을 어찌 효도라 할 수 있겠는가. | 호동왕자 | ?~32.11 |
내가 죽거든 반드시 이곳에 묻으라. 다시 능묘를 만들지 말라. | 민중왕[4] | ?~48 |
나는 이미 늙어 만사에 귀찮음을 느낀다. 하늘의 운수가 너에게 있다. 하물며 너는 안으로 국정에 참여하고, 밖으로 군사를 총괄하여 오래도록 사직에 공을 쌓았으며 신하와 백성들의 소망을 채워 주었다. 내가 부탁함에 있어 적임자를 얻었다고 가히 이를 수 있다. 너로 하여금 즉위하게 하니, 영원히 경사스러울 것이다! | 태조대왕[5] | 47~121[6] |
애통하고도 원통하도다! 내가 그 당시 선왕의 가까운 신하로서 어찌 반란을 일으키려는 무리를 보고도 잠자코 말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한스럽게도 선왕께서 내 말을 듣지 않으셔서 이 지경에 이르렀도다. 지금 임금은 이제 막 왕위에 올라 마땅히 정치와 교화를 새롭게 하여 백성에게 보여야 할 것이거늘, 의롭지 않게도 한 사람의 충신을 죽이려 하는구나. 내가 무도한 이때에 사는 것은 빨리 죽는 것만 못하다. | 고복장[7] | ?~147.3 |
지금 네가 차마 이 늙은 형을 해치려 들 수 있겠느냐? | 고발기 | ?~197.5 |
내가 올바른 행실을 하지 못했으니 장차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서 국양왕을 뵙겠는가? 만일 여러 신하들이 나를 차마 구렁텅이에 버리지 못하겠거든 산상왕의 능 옆에 장사 지내주기를 청하노라. | 왕후 우씨 | ?~234.9 |
장차 이 땅이 쑥대밭이 되는 꼴을 보겠구나. | 득래[8] | ?~242 |
우리 임금이 큰 나라에 죄를 짓고 달아나 바닷가에 이르렀으나 몸 둘 곳이 없습니다. 장차 귀국 진영 앞에서 항복을 청하고 죽음을 법관에게 맡기려 하는데, 먼저 소신(小臣)을 보내 변변치 못한 물건이라도 드려 군졸들의 음식거리나 되고자 합니다. | 유유[9] | ?~246.10 |
왕후가 저를 이 가죽 주머니에 넣어 바다에 던지려고 하였습니다. 바라건대 대왕께서는 저의 미천한 목숨에 은혜를 베푸셔서 집으로 돌려보내 주십시오. 어찌 감히 다시 대왕의 곁에서 모시기를 바라겠습니까? | 관나부인 | ?~251.4 |
선조 왕들은 오직 멀고 가까운 지역의 구민(舊民)들만을 데려다가 무덤을 지키며 소제를 맡게 하였는데, 나는 이들이 점점 몰락하게 될 것이 염려된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묘지기 일은 내가 몸소 돌아다니며 잡아온 한인과 예인들에게만 맡겨서 무덤을 지키고 소제하게 하라. | 광개토대왕 | 374~412.10 |
계립현[10]과 죽령의 서쪽 땅을 되찾지 못한다면 돌아오지 않겠다! | 온달 | ?~590 |
내가 죽은 후에는 대장이 되어 반드시 고구려를 멸망시키리라. | 추남 | ?~594? |
너희 형제는 고기와 물같이 화합하여 작위를 다투지 말라.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반드시 이웃나라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 연개소문[11] | ?~664.10 |
2.2.2. 백제
유언 | 인물 | 생몰년 |
나는 우둔하고 밝지 못해 간사한 자의 말을 믿어 이렇게까지 되었다. 백성은 쇠잔하고 병사는 약하니 위기가 오더라도 누가 기꺼이 나를 위해 싸우겠는가. 나는 마땅히 사직을 위해 죽어야 하지만 너는 이곳에서 죽어도 이로울 것이 없다. 어려움을 피해 국통을 이어라. | 개로왕 | ?~475.9 |
과인이 생각할 때마다 늘 고통이 골수에 사무쳤다. 돌이켜 헤아려 보아도 구차히 살 수는 없다. | 성왕[12] | ?~554.12 |
이는 내가 부리던 놈들이 저지른 짓이지, 신라에서 한 일이 아니다. | 일라[13] | ?~583.12.30 |
충신은 죽을지언정 임금을 잊을 수 없사오니, 원컨대 한 말씀만 드리고 죽고자 합니다. 신이 줄곧 때를 보고 변화를 살펴보았는데, 틀림없이 전쟁이 일어날 것입니다. 무릇 군사를 부릴 때에는 반드시 싸울 땅을 살피고 골라야 하는데, 상류에 자리잡아 적을 이끌어내야만 나라를 보전할 수 있습니다. 만일 다른 나라의 군사가 오거든 육로로는 침현을 통과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 기슭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십시오. 좁고 험준한 곳에 거병하여 그들을 막은 다음에야 이길 수 있습니다. | 성충[14] | ?~656.3 |
지난날 구천은 5,000명으로 오나라의 70만 대군을 격파하였다. 오늘 우리는 마땅히 각자 힘써 싸워 승리함으로써 나라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 | 계백 | ?~660.7.9 |
이 썩어빠진 개같은 미련한 놈아! | 귀실복신[15] | ?~663.6 |
2.2.3. 신라
유언 | 인물 | 생몰년 |
내가 죽은 후에는 아들과 사위를 따지지 말고 나이가 많고 어진 자로서 왕위를 잇도록 하라. | 남해 차차웅[16] | BC50?~AD24.9? |
탈해는 신분이 나라의 친척이고 지위는 날 보좌한 신하이니 공과 명성이 누차에 현저히 드러났다. 짐(朕)의 두 아들[17]은 그 재주가 그에게 한참 미치지 못한다. 내가 죽은 뒤에는 그로 하여금 대위(大位)를 잇게 하려 하니, 나의 유훈을 잊지 말라. | 유리 이사금 | ?~57.10? |
일찍이 듣기로 임금을 섬기는 도리는 위험을 보면 목숨을 바치고, 어려움에 임하면 몸을 돌보지 않는 것이라 하였다. 지난날 포상과 갈화의 싸움은 가히 위험하고도 어려운 일이었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목숨을 바치고 몸을 돌보지 않았음을 남들에게 알릴 수 없게 되었으니, 장차 무슨 면목으로 저잣거리와 조정에 나가겠는가! | 물계자 | ?~?[18] |
전일의 말은 희롱이었을 뿐이었다. 어찌 군사를 일으켜 이렇게까지 할 줄 생각하였겠는가. | 석우로[19] | ?~253.4? |
내가 계림에서 개돼지로 살지언정 왜의 신하는 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계림에서 매를 맞을지언정 왜의 벼슬은 누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계림의 신하다! | 박제상 | ?~419 |
나는 불법(佛法)을 위하여 형장에 나아가는 것이니, 부처님께서 만약 신통력이 있으시다면 내가 죽을 때 반드시 이상한 일이 있을 것입니다.[20] | 이차돈 | 507~528[21] |
대성법왕께서 불교를 일으키려고 하시므로, 제 목숨을 돌보지 않고 인연을 모두 버리겠습니다. 하늘에서는 부디 상서를 내려 사람들에게 두루 보여주소서.[22] | ||
내가 신하된 자로서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아 구하지 못하였다. 대왕께서 유희를 그치지 않아 패망하게 될까 두려우니 이것이 내가 근심하는 바이다. 죽어서라도 반드시 임금을 깨우치고자 하니, 나의 유골을 대왕이 사냥 다니시는 길 옆에 묻어라. | 김후직 | ?~?[23] |
내가 일찍이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았는데, 군사는 마땅히 싸움터에서 물러남이 없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어찌 감히 도망쳐 물러나 스승의 가르침을 저버리겠는가! | 귀산 | ?~602.8 |
우리 임금이 나에게 하나의 성을 맡겼으나 온전하게 지키지 못하고 적에게 패하게 되니, 원컨대 죽어서 큰 귀신이 되어 백제인을 다 물어 죽이고 이 성을 되찾겠다! | 찬덕[24] | ?~612.1 |
전에 나의 아버지가 여기에서 숨을 거두셨다. 내가 지금 또한 여기에서 백제인과 더불어 싸우니, 오늘이 내가 죽을 날이다. | 해론[25] | ?~618 |
그들이 그르고 제가 옳은데, 도리어 스스로 도망간다면 대장부가 아닙니다. | 검군[26] | ?~628 |
그대의 말은 타당하다. 그러나 나의 아버지가 나를 죽죽(竹竹)이라고 이름지은 것은, 나로 하여금 추운 겨울에도 시들지 말며 꺾일지언정 굽히지 말게 한 것이다. 어찌 죽음이 두렵다고 살아서 항복하겠는가? | 죽죽 | ?~642.8 |
나는 어느 해 어느 달의 어느 날에 죽을 것이니, 내가 죽으면 도리천에 묻어 주시오. | 선덕여왕 | ?~647.1.8 |
나는 오늘 위로는 국가를 위하여, 아래로는 나를 알아주는 이를 위하여 죽으려 한다. 나의 아들 거진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굳센 의지가 있어, 반드시 함께 죽으려고 할 것이다. 만약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죽으면 집사람은 장차 누구를 의지하겠는가? 너는 거진과 함께 나의 해골을 잘 수습해 돌아가서 어미의 마음을 위로하거라! | 비령자 | ?~647.10 |
아버지가 죽는 것을 보고 구차히 사는 이를 어찌 효자라 할 수 있겠는가? | 거진 | ?~647.10 |
나의 하늘이 무너졌으니 죽지 않고 무엇을 하리이까! | 합절[27] | ?~647.10 |
아마 미친 사람이려나. | 자장[28] | 590.4.8?~655? |
내가 듣건대 승려가 된 자는 먼저 학술에 정진하여 본성을 회복한 다음, 도(道)의 쓰임을 일으켜 타인을 이롭게 한다고 했다. 나는 겉모습만 승려와 유사할 뿐, 한 가지 선(善)도 취할 것이 없다. 종군하여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하는 것만 못하다. | 취도[29] | ?~655.9 |
대장부가 이미 몸을 나라에 바쳤으면 남이 알든 모르든 마찬가지다. 어찌 감히 명성을 구하겠는가? | 김흠운[30] | ?~655.9 |
그는 골품이 고귀하고 권세가 영화로워 사람들이 매우 사랑하고 아끼는 바인데도 오히려 절개를 지켜 죽었다. 하물며 나 보용나는 살아도 이익이 되지 않으며, 죽는다고 손해될 것이 없도다. | 보용나[31] | ?~655.9 |
삼가 명을 따르겠습니다. | 김반굴[32] | ?~660.7.9 |
내가 아까 적진에 들어가 장수의 목을 베고 깃대를 꺾지 못했으니 깊이 한스러운 일이다. 다시 들어가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으리라. | 김관창 | 645~660.7.9 |
충성스러운 신하와 의로운 사람은 죽어도 굽히지 않는다. 힘써 노력하라! 성의 존망이 이 한 번의 싸움에 달렸다. | 필부 | ?~660.10 |
2.3. 통일신라시대[33]
유언 | 인물 | 생몰년 |
공들은 힘을 다해 빨리 가십시오. 나는 나이가 이미 일흔이니 얼마나 더 살 수 있겠습니까? 지금이야말로 내가 죽을 날입니다. | 아진함 | 603~672.8 |
제가 신하로서 온 힘을 다하여 왕을 받들려고 하였으나 노복의 병이 이와 같이 깊으니, 오늘 이후에 다시는 왕의 용안을 뵙지 못할 것 같습니다. 신은 어리석고 못났으니, 어찌 국가를 이롭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다행히도 훌륭한 왕께서 저를 등용하면서 의심하지 않으셨고, 일을 맡기면서 다른 생각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왕의 현명함에 의지하여 작은 공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삼한이 한 집안을 이루고, 백성들은 두 마음을 가지지 않게 되었으니, 비록 태평함에 이르지는 못하더라도 조금 안정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신이 예로부터 왕위를 이은 군주를 보건대 처음에 잘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지만 끝까지 잘하는 사람은 드물어서, 여러 대에 걸쳐 쌓은 공적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없어지니 아주 애통한 일입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성공이 쉽지 않음을 아시고 그것을 지키는 것 또한 어려움을 유념하시어, 소인을 멀리하고 군자를 가까이 하셔서, 위로는 조정이 화목하고 아래로는 백성과 만물이 편안하여 화란이 일어나지 않고 국가의 기반이 무궁하게 된다면, 신은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 김유신[34] | 595~673.7.1 |
너희들은 신라에 침나의 아들 소나가 있는 줄을 아느냐? 나는 진실로 죽음을 두려워하여 살기를 도모하는 사람이 아니다. 싸우고자 하는 자는 어찌 나오지 않느냐! | 소나[35] | ?~675.9 |
짐은 죽은 뒤에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수호하고자 한다. 나는 세간의 영화를 싫어한 지 오랜지라, 만약 나쁜 응보를 받아 축생이 되더라도 짐의 뜻에 합당할 것이다.[36] | 문무왕 | 626~681.7.1 |
과인은 나라의 운이 어지럽고 전란의 시기를 맞이하여, 서쪽을 정벌하고 북쪽을 토벌하여 능히 영토를 안정시켰고 배반하는 자들을 치고 협조하는 자들을 불러 마침내 멀고 가까운 곳을 평안하게 하였다. 위로는 조상들의 남기신 염려를 위로하였고 아래로는 부자(父子)의 오랜 원한을 갚았으며, 살아남은 사람과 죽은 사람에게 두루 상을 주었고, 중앙과 지방에 있는 사람들에게 균등하게 벼슬에 통하게 하였다. 무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었고 백성을 어질고 오래 살게 하였다. 세금을 가볍게 하고 요역을 줄여주니,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들이 풍족하며 민간은 안정되고 나라 안에 걱정이 없게 되었다. 곳간에는 언덕과 산처럼 쌓였고 감옥에는 풀이 무성하게 되니, 혼과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았고 관리와 백성에게 빚을 지지 않았다고 말할 만하다. 스스로 여러 어려운 고생을 무릅쓰다가 마침내 고치기 어려운 병에 걸렸고, 정치와 교화에 근심하고 힘쓰느라고 다시 심한 병이 되었다. 목숨은 가고 이름만 남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므로, 갑자기 긴 밤으로 돌아가는 것에 어찌 한스러움이 있겠는가? 태자는 일찍이 밝은 덕을 쌓았고 오랫동안 태자의 자리에 있어서, 위로는 여러 재상에서부터 아래로는 뭇 관리들에 이르기까지 죽은 사람을 보내는 도리를 어기지 말고, 살아 있는 임금을 섬기는 예의를 빠뜨리지 말라. 종묘의 주인은 잠시도 비워서는 안되므로, 태자는 곧 관 앞에서 왕위를 잇도록 하라. 또한 산과 골짜기는 변하여 바뀌고 사람의 세대도 바뀌어 옮겨가니, 오나라 왕의 북산 무덤에서 어찌 금으로 만든 물오리의 고운 빛깔을 볼 수 있겠는가? 위나라 임금의 서릉 망루는 단지 동작(銅雀)이라는 이름만을 들을 수 있을 뿐이다. 지난날 모든 일을 처리하던 영웅도 마침내 한 무더기의 흙이 되어, 나무꾼과 목동들이 그 위에서 노래를 부르고 여우와 토끼는 그 옆에 굴을 팔 것이다.[37] 그러므로 헛되이 재물을 쓰면 서책에 꾸짖음만 남길 뿐이요, 헛되이 사람을 수고롭게 하는 것은 죽은 사람의 넋을 구원하는 것이 못 된다. 가만히 생각하면 슬프고 애통함이 그치지 않을 것이지만, 이와 같은 것은 내가 즐기는 바가 아니다. 죽고 나서 열흘 뒤에 고문(庫門) 바깥의 뜰에서 서국의 의식에 따라 화장하라. 상복의 가볍고 무거움은 정해진 규정이 있으니 그대로 하되, 장례의 절차는 힘써 검소하고 간략하게 하라. 변경의 성과 요새를 지키는 일과 주현(州縣)의 세금 징수는 긴요한 것이 아니면 마땅히 모두 헤아려 폐지하고, 율령과 격식에 불편한 것이 있으면 곧 다시 고치도록 하라. 멀고 가까운 곳에 널리 알려 이 뜻을 알게 할 것이며, 주관하는 자는 시행하도록 하라.[38] | ||
나의 두 형[39]은 이미 임금을 위해 죽어 불후의 명성을 남겼소. 내가 비록 어리석지만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여 구차하게 살 수 있겠소? 오늘은 그대와 살아서 헤어지지만 결국은 영원한 사별일 것이오. 상심하지 말고 잘 있으시오. | 핍실[40] | ?~684.11 |
적진에 임하여 용기가 없는 것은 《예기》에서 경계하는 것이니, 전진만이 있을 뿐 후퇴가 없는 것이 사졸의 마땅한 본분이다. 대장부가 일에 임하여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지, 어찌 반드시 무리만을 따르겠는가? | 김영윤 | ?~684.11 |
나의 관은 법류사(法流寺) 남쪽에서 태우고 유골은 동해에 뿌려 주어라. | 효성왕 | ?~742.5 |
잘 됐구나. | 장보고[41] | ?~841.11 |
모든 존재가 다 공(空)이니, 나도 장차 떠나려 한다. 일심(一心)이 근본이므로 너희들은 힘써 노력하라. 탑을 세워 나의 유해를 보관하거나 명문을 지어 나의 행적을 기록하지는 말라. | 혜소 | 774~850.1.9 |
과인이 자질이 부족하면서도 높은 자리에 있었으니, 위로는 지켜보시는 하늘에 죄를 얻을까 두렵고 아래로는 사람의 마음에 실망을 줄까 염려되었다.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전전긍긍하며 마치 깊은 연못과 얇은 얼음판을 건너듯이 하였다. 재상과 여러 신하들이 좌우에서 보필하는 데 힘입어 왕위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제 갑자기 병이 들어 열흘 정도가 되니, 정신이 혼미하고 멍한 사이에 아침 이슬보다 앞서 사라질까 두렵다. 생각하건대 앞선 왕들이 이루어놓으신 대업은 그 주인이 없으면 안 되고, 군사와 정치에 관련된 여러 사무는 잠시라도 중지할 수 없다. 돌이켜 보면 서불한 의정은 앞선 황제의 손자요 과인의 숙부로,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으며 총명하고 민첩하며 너그럽고 인자하다. 오랫동안 재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왕의 정사를 가까이서 도왔으니, 위로는 종묘를 받들 만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어루만져 다스릴 만하다. 이에 무거운 짐을 벗어 어질고 덕 있는 이에게 맡기고자 한다. 정사를 맡길 만한 사람을 얻었으니 다시 무슨 한이 있겠는가? 하물며 태어나고 죽는 것과 시작하고 끝맺는 것은 만물의 큰 법칙이며, 오래 사는 것과 일찍 죽는 것, 길고 짧은 것은 운명의 이미 정해진 분수이다. 죽는 것은 하늘의 이치를 이루는 것이니 살아있는 이들은 지나치게 슬퍼할 필요가 없다. 너희 여러 신하들은 힘을 다하여 충성을 다 바쳐서 죽은 이를 보내고 산 이를 섬기는 데 혹시라도 예에 어긋나는 일이 없도록 하라. 나라 안에 널리 포고하여 나의 뜻을 분명히 알리도록 하라. | 문성왕 | ?~857.9 |
과인은 불행하게도 아들은 없고 딸만 있다. 우리나라의 옛일에 비록 선덕과 진덕의 두 여왕이 있었다고는 하나, 그것은 암탉이 새벽을 알리는 일에 가까우니 본받을 수 없다. 사위 응렴은 나이는 비록 어리지만 어른스러운 덕성을 지녔으니, 그대들이 그를 왕으로 세워 섬긴다면 반드시 조상의 위대한 업적을 떨어뜨리지 않을 것이고, 과인이 죽더라도 이름을 오래 남길 것이다. | 헌안왕 | 822~861.1.29 |
만물은 봄에 나고 가을에 시드느니라. 나는 곧 돌아가리니, 앞으로는 너희와 함께 선(禪)을 이야기하거나 도(道)를 맛볼 수 없을 것이다. | 혜철[42] | 785~861.2.6 |
삶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니, 나는 먼 길을 떠나야 되겠다. 그대들은 구름 쌓인 골짜기에 편히 머물러 법등을 영원히 빛나게 하거라. | 도윤 | 798~868.4.18 |
나는 금생에 과보로 받은 업이 다하여 관에 들어갈 조짐이 이루어졌도다. 너희들은 마땅히 잘 지키고, 게으름에 빠지지 말지어다. | 체징[43] | 804~880.4.13 |
사는 것에는 끝이 있으니 나라고 어찌 끝이 없겠느냐? 너희들은 마땅히 게으름 피우지 말고 부지런히 수행에 힘써야 할 것이다. | 대통 | 816~883.10.5 |
병이 위급하니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불행히도 대를 이을 아들이 없으나 나의 누이 만(曼)은 천성이 명민하고 골격이 흡사 건장한 사내와 같으니, 그대들은 마땅히 선덕왕, 진덕왕의 옛일을 본받아서 그를 왕으로 세우는 것이 좋을 것이다. | 정강왕 | ?~887.7.5 |
이미 여든 살이 넘어버려 죽음을 피하기 어렵다. 나는 멀리 떠날 테니 너희들은 잘 지내거라. 배우기를 한결같이 하되 잘 지켜서 잃어버리지 말라. 옛 관리들 또한 이와 같았거늘, 오늘날의 선(禪)이야 의당 부지런히 힘써야 하리라. | 무염 | 800~888.11.22 |
내 이제 영결하고자 하니, 그대들은 세속의 부질없는 정분으로 어지러이 상심하지 말 것이며, 오직 스스로 마음을 닦아 큰 뜻을 깨뜨리지 말라. | 범일 | 810.1.10~889.5.1 |
나는 곧 떠나갈 것이다. 대저 인연을 타고 왔다가 그 인연이 다하면 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니, 어찌 이 세상에 오래 머물겠는가. | 도선 | 827~898.3.10 |
2.4. 후삼국시대
유언 | 인물 | 생몰년 |
삼계는 하나도 영원한 것이 없고, 만연은 모두 적적한 것이다. 나는 이제 떠나려 하니 너희들은 힘써 정진하여 선문(禪門)을 수호하고, 종지를 무너뜨리지 않는 것이 곧 나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니라. | 절중 | 826.4.7~900.3.9 |
어찌 거복[44]의 음모에 가담하겠으며, 어진 자는 은혜를 생각하거늘 어찌 상신의 악행에 어울리겠습니까. | 형미[45] | 864.4.10~917 |
왕공이 승리를 얻었다니, 내 일은 다 글렀도다.[46] | 궁예 | 869.5.5~918.6.16 |
드디어 하늘이 나를 버렸다.[47] | ||
모든 법은 공(空)하며 모든 인연은 고요하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마치 떠가는 구름과도 같다. 너희는 힘써 수행하며 삼가고 슬피 울지 말라. | 심희 | 855.12.10~923.4.24 |
올해 불법의 인연이 다할 것이므로 필시 다른 곳으로 떠날 것이다. 나와 대왕은 예전에 인연이 있어 이번에 만났으니, 마땅히 얼굴을 보고 이별하여 마음속 기약을 돕고자 한다. | 이엄 | 870~936.8.17 |
2.5. 고려 시대
2.5.1. 고려 전기
유언 | 인물 | 생몰년 |
등불은 스스로 존재하매 동자가 불을 붙이는도다. 별이 푸른 하늘 속에 펼쳐져 있으니 안에서는 어찌 알아챌 수 있겠는가. | 현휘 | 879.1.1~941.11.26 |
덧없는 인생은 예로부터 그러한 것이니라. | 고려 태조[48] | 877.1.4~943.5.29 |
생은 유한하고 멸은 정해져 있지 않다. 내가 이제 가고자 하니 너희들은 각기 뜻있게 잘 살도록 하라. 부처님께서 바라제목차가 너의 큰 스승이라 하셨는데, 나 또한 이 말씀으로 너희에게 당부하노니 너희들이 잘 받들어 행한다면 나는 죽지 않은 것이 되리라. | 윤다 | 864.4.5~945.2.2 |
나는 이제 떠나려 하니 대중들은 잘 지내도록 하라. 속세에는 귀천이 있으나 불문에는 높고 낮음이 없는 법이니, 물과 달처럼 마음을 맑게 하고 안개와 노을처럼 고상하게 살도록 하라. 옷은 계절에 맞추어 갈아입지 말고, 음식은 두 가지 이상 하지 말며, 마땅히 고사리 등 풀뿌리를 캐어 식량을 삼고 선정에 드는 기쁨으로써 포식을 삼을지니, 이렇게 하여야 나의 제자이며 나의 원에 적합할 것이다. 그 밖에 나의 도(道)에 무슨 별다른 수행이 따로 있겠는가. 또한 나는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으니, 너희들은 내가 죽거든 탑으로써 나의 유해를 간직하거나 비를 세워 행적을 기록하지 말아야 하며, 그렇게 해야만 내 명복이 넉넉할 것이다. | 경보 | 869.4.20~947.4.28 |
내가 서쪽에서 배우고 동쪽으로 돌아온 지 이미 36년에 이르렀다. 그동안 이 산을 택해 머물면서 후학을 이끌어 왔고, 푸른 산과 흰 구름을 빌어 길을 잃은 중생을 인도하되, 늘 불시를 독송하여 나라를 돕고 인연을 복되게 하였다. 이젠 늙어 바람 앞의 등불이요, 물위의 거품과 같아서 능히 오래 지탱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나는 떠나고자 한다. 각기 굳게 마음을 잡아 부처님의 가르침을 힘써 준수하라. 너[49]는 마땅히 선실(禪室)을 지어 계속 등불을 전하되, 전인들보다 더욱 빛나게 하여 서로 부촉하는 법통이 단절됨이 없도록 하라. | 긍양 | 878~956.8.19 |
산하 만상과 근진 사대는 허망하게 일어났다 허망하게 사라지지 않는 것이 없다. 나 또한 이제 근원으로 돌아가려 하니, 너희들은 슬퍼하여 울거나 사랑하여 그리워하지 말라. | 혜거국사 | 899.4.4~974.2.15 |
사람은 노소가 있으나 불법에는 선후가 없다. 부처님께서도 구시나가라 사라쌍수 밑에서 입멸을 고하셨으니, 만법은 마침내 공(空)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나는 곧 먼 곳으로 떠나려 하니 너희들은 잘 지내면서 여래의 계행을 잘 보호하고 부지런히 정진하라. | 탄문 | 900.8.14~975.3.29 |
한번 나고 한번 죽는 것은 현명한 이라도 벗어나기 어려우며, 목숨이 짧고 긴 것은 예나 지금이나 모두 같다. 과인은 앞선 4대 왕이 남긴 위업을 잇고 삼한을 다스릴 계획을 받아, 산천과 토지를 보전하며 종묘와 사직을 안정시키느라 나날이 삼가는 하루가 앞뒤로 7년 동안이었다. 이 노고로 말미암아 마침내 병이 생겼으니, 바라건대 이제는 짐을 내려놓아 정신을 편히 하고 장차 거룩함을 전함으로써 근심을 풀까 한다. 정윤 개령군 치(治)는 나라의 어진 종친이며 내가 벗처럼 아끼는 자이니, 반드시 선왕들의 대업을 받들고 국가의 창성할 기틀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아아! 너희 공경과 재신들은 나의 큰 동생을 공경하고 보호하여 우리 대국을 길이 편안케 하라. 과인이 늘 《예기》를 볼 때마다 "남자는 부인의 손에서 죽지 않는다"고 한 부분에 이르러서는 일찍이 글을 보며 탄식하고 하늘을 우러르지 않은 적이 없었기에, 오늘에 이르러 좌우의 궁녀를 다 막고 물러가게 하였다. 혹시 더는 목숨을 잇지 못한 채 갑자기 때가 이르더라도 다시 무슨 한탄할 바가 있겠는가? 상복을 입는 기한의 경중은 한제(漢制)에 맞추어 하루를 한 달로 계산해 13일 만에 주상(周祥)을 지내고 27일 만에 대상(大祥)을 지내며, 능원의 제도는 검약함을 힘써 따르도록 하라. 서경, 안동, 안남, 등주 등 여러 도에서 주둔의 임무를 받아서 군대를 거느리는 권한이 있는 자는 맡은 바가 가볍지 않으니, 어찌 마땅히 잠시라도 비울 수 있겠는가? 임지를 떠나 궐내로 오는 것을 불허할 것이니, 각자 임지에서 애도식을 거행하고 사흘 만에 상복을 벗도록 하라. 그 나머지는 모두 다음 임금의 처분에 맡긴다. | 고려 경종[50] | 955.9.22~981.7.11 |
사람의 생은 하늘에 달렸으니 어찌 죄 있는 자를 용서하여 연명하려 하겠느냐. 또한 내가 대사면령을 내리고 죽으면 나를 계승할 자가 무엇으로 새로운 왕의 은혜를 베풀겠느냐. | 고려 성종[51] | 960.12.26~997.10.27 |
요즈음 국고에 화재가 일어나고 변란이 갑자기 벌어졌으니, 모두 내가 덕이 없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지 다시 무엇을 원망하겠는가? 다만 바라는 것은 고향으로 돌아가 늙는 것이니 경은 새 임금에게 이 뜻을 아뢰고 잘 보좌하도록 하라. | 고려 목종 | 980.5.20~1009.2.3 |
너도 고려 사람이면서 어찌 그런 말을 하느냐! | 강조[52] | ?~1010.11.24 |
저는 우리나라를 감히 배반할 수 없습니다. 저의 죄는 만 번 죽어도 마땅하나, 살아서 대국을 섬기기를 원치 않습니다. | 하공진[53] | ?~1011.12 |
옛날 여래께서는 대법안(大法眼)으로 제자들에게 당부하셨다. 이와 같은 법안이 돌고 돌아 지금에 이르렀으니, 이제 이 법을 너희에게 맡긴다. 너희는 잘 지켜서 끊어지지 않도록 하라. 내 입멸한 후에는 또한 부음을 임금께 아뢰어서 국가의 제도를 어렵게 함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 지종 | 930~1018.4.17 |
짐의 병이 낫지 않고 이미 크게 위태로워졌으니, 마땅히 사랑하는 아우 평양군 형(亨)으로 하여금 보위를 잇게 하라. | 고려 덕종 | 1016.5.2~1034.9.17 |
짐이 선왕의 마지막 명령을 받들어 역대 성인의 대업을 계승한 지 열두 해가 되었다. 하늘의 편안함에 힘입어 나라도 안정되었으나, 봄과 여름 이래로 우환과 고생이 조화를 잃어 약과 침도 효과가 없더니, 마침내 병이 위급해졌다. 바라건대 신기(神器)를 유덕한 자에게 넘기고자 한다. 내사령 낙랑군 휘(徽)는 짐의 사랑하는 아우로 인자하고 효성스러우며 공경하고 검소하여 이웃 나라에까지 알려져 있으니, 마땅히 왕위를 전하여 광명을 드러내야 할 것이다. | 고려 정종 | 1018.7.18~1046.5.18 |
형체와 기운은 마침내 뱀이 허물을 벗듯 변선(變嬗)으로 돌아가는데, 소요향(逍遙鄕)이 어디에 있는가. 나는 세상에 오래 머무를 수 없으니, 이전에 인간한 대장경 한 부를 안국사에 보관하여라. | 결응 | 964.7.21~1053.4.17 |
대저 인생이란 마치 번갯불과 같이 신속하며, 바람과 같이 지나가고 별이 사라지면 해가 뜨는 것과 같으니라. 나는 이제 곧 무물의 세계로 돌아가려 하니 너희들은 슬퍼하지 말라. | 정현 | 972~1054.11.15 |
바깥 날씨가 어떤가? | 해린 | 984.12.30~1070.10.23 |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이정 | 1025~1077.5.13 |
짐은 부족한 몸으로 조상의 업을 계승하여 지켜왔다. 그러나 천명에는 끝이 있어 병세가 더하고, 애처롭게도 하늘이 이 몸을 돌보지 않아 이미 죽을 날에 이르렀다. 정사를 하루라도 비워둘 수 없으므로, 이제 군국정사를 전부 태자 훈(勳)에게 위임하고 왕위를 전하고자 한다. 그대들은 나의 간곡한 말을 받아들여 충과 효를 다하기를 힘써라. | 고려 문종 | 1019.12.1~1083.7.18 |
나의 소원은 정도(正道)를 중흥하는 것이나 병이 그 뜻을 뺏어갔다. 엎드려 바라건대 왕께서 지극한 정성으로 불교를 외호하여 여래의 유훈에 부합하면, 이는 죽어도 썩지 않는 공덕이 될 것이라. | 의천[54] | 1055.9.28~1101.10.5 |
도(道)가 행해지는 것도 운명이며 도(道)가 없어지는 것도 운명이니, 너는 어찌하여 근심하느냐. | 정목[55] | 1040~1105.5.19 |
너의 두 형과 두 조카는 정주에 가까이 있으면서도 벌벌 떨며 바짝 엎드려 있느라 아직도 한 번 와보지를 않았다. 생각지도 않게 우리 막내가 혈혈단신으로 가시덤불을 헤치고 호랑이 굴을 지나가며 나를 보러 와주었구나. 내가 오랑캐에게 사로잡힌다면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노역을 면치 못할 터인데, 이런 경지에 빠지면 곧 타향의 귀신이 될 것이다. 이제 다행히도 네가 왔으니, 비록 백골이라도 남쪽 나라로 가져가 준다면 오늘 저녁에 죽더라도 한이 없으리라. | 이연후[56] | ?~1110 |
신의 나이가 여든이므로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바라옵건대 주상께서 만년동안 재위하여 삼한을 영원토록 보전하소서. | 최사추 | 1036~1115.2 |
내 병세가 더욱 심해져 다시 낫지 못하겠다. 이에 중한 소임을 내려놓고 너에게 전하려 한다. 내가 되짚어 보건대 평생에 행한 일이 잘한 것은 적고 잘못한 것은 많았으니 부디 나를 본받지 말라. 오로지 옛 성현의 도를 생각하고 우리 태조의 교훈을 받들어, 지위에서 게을리 하지 말고 서민을 길이 편안케 하라. | 고려 예종 | 1079.1.7~1122.4.8 |
오래 살지 못할 듯하다. 내가 죽은 뒤에는 문인 조원(祖遠)이 이어서 산문의 주지가 되고, 조원 이후에는 도덕과 행실이 있는 자를 택하여 서로 이어 주지가 되게 하라. 사람의 목숨은 부질없는 것이니 태어나면 반드시 죽는다. 부디 슬퍼하지 말고 도를 마음에 품으라. | 이자현 | 1061~1125.4.21 |
내가 평생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어 권력자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이자겸, 척준경과 사이가 벌어졌으니 나간다면 반드시 해를 입을 것이다. 적의 손에 죽느니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 김진[57] | 1071~1126.2.26 |
이자겸과 척준경은 임금의 은총을 도적질하여 권세를 제멋대로 부리면서 백성에게 해악을 끼치는 것이 승냥이나 이리떼보다 더하며, 나아가 사직을 뒤엎으려 하고 있다. 너희 무리들은 모두 간사한 아첨을 부리며 그 놈들을 섬기니 이미 노예만도 못하다. 우리가 의거를 일으켜 우리 백성의 원수를 갚으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한 것은 하늘의 뜻이다. 의로운 선비가 어찌 너희같이 용렬한 놈들 손에 죽겠느냐? | 고보준[58] | ?~1126.2.26 |
군주가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하는데 내가 어찌 편안히 있으랴? | 홍관[59] | ?~1126.2.27 |
혹시라도 언젠가 그대가 궁궐의 섬돌에 서서 천자와 더불어 옳고 그름을 논쟁하게 된다면, 비록 가시나무 비녀에 무명 치마를 입고 삼태기를 진 채 살아가게 되더라도 또한 달게 여길 것입니다. | 염경애[60] | 1100~1146.1.28 |
선사께서 약속을 저버리지 않으셨구려. 내 갈 길은 결정되었소. | 윤언이[61] | 1090~1149.9.3 |
이제 노환이 홀연히 일어나 덧없는 죽음이 다가오려 하니, 지난날의 말을 돌이켜보고 내 뜻을 행하고자 하노라. 여러 제자들에게 훈계하노니, 내가 죽은 뒤 재계일이 되면 우리 불교에 의지하여 깨끗한 가사를 입고, 《대승경전》을 낭독하며 당래미륵존불(當來彌勒尊佛)을 읊어라. 마음을 깨끗이 하여 삼보를 공양함으로써 자비와 구원을 기도하라. 나에게 제사지내는 일은 오직 때에 맞는 약초와 향등으로 마치 고산에 풍월이 지나가듯 하여 끝내고, 무릇 그 뒷일에 대해서는 번잡한 일을 없애고 간편한 일을 따르는 것이 효라고 할 수 있으리라. | 덕겸[62] | 1083~1150.2.12 |
나는 곧 죽을 것이다. | 윤언민 | 1095~1154.3.9 |
우리 집안은 5대에 걸쳐 아들도 문장을 하고 손자도 문장을 했다. 선을 쌓은 집에는 반드시 경사가 남는다고 한다. 너희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문장을 업으로 삼은 지 오래되었으니, 후사들은 반드시 그 덕을 볼 것이다. 너희는 이에 힘쓰고 또 힘쓰거라. | 오인정 | 1100~1155.7 |
나는 태어난 지 57년이 되었으니, 근본으로 돌아가는 날은 바로 오늘이로다. 본성이 거처하는 곳은 모래처럼 무한하거늘, 어찌 여관 같은 속세에 본질을 기대겠는가. | 광지 | 1102.6.26~1158.8.12 |
내가 돌아갈 곳을 스스로 알고 있으니, 너희들은 각기 수도 정진에 전력하고 삼가 세속의 예를 따라 장례식을 번거롭게 하지 말라. | 탄연 | 1070~1159.6.15 |
나는 한뢰나 이복기와 같은 편이 아니니 진실로 죄가 없다. 다만 유시(流矢)의 변으로 인하여 화가 무고한 사람에게까지 미치게 했으니 내가 오늘 이 지경이 된 것도 마땅한 일이다. | 김돈중[63] | ?~1170 |
2.5.2. 고려 후기
유언 | 인물 | 생몰년 |
큰 일이 만약 성사된다면 너희들은 모두 높은 관직에 올라갈 것이다. | 이고 | ?~1171.1 |
문신들로서 모의하지 않은 자가 누가 있으랴? | 김보당[64] | ?~1173.9.13 |
나는 죽은 줄로만 알았거늘, 뜻밖에도 다시 너의 얼굴을 보는구나. | 공예왕후[65] | 1109.9.7~1183.11.22 |
만약 법으로써 이지순을 다스린다면 그 아비는 반드시 나를 해칠 것이요, 그러지 않는다면 적이 더욱 날뛸 것이니, 죄가 장차 누구에게 돌아가겠는가? | 전존걸[66] | ?~1193.7 |
사람이 오래 살기를 부러워함은 편안해질 것이라 생각해서인데, 지금 병세가 이와 같으니 죽어서 낫는 것만 못하다. | 류공권[67] | 1132~1196.7.19 |
일은 은밀하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으니, 부디 누설하지 말도록 하라. | 만적[68] | ?~1198.5.17 |
나는 28년 동안 욕되게 왕위에 있었고 나이도 이미 일흔둘인데 어찌 더 살기를 바라겠는가? | 고려 명종[69] | 1131.10.17~1202.11.17 |
오늘 이후로는 경들을 다시 보지 못할 것이니, 마땅히 각자 새 임금을 잘 도와서 선정에 이르도록 하라. | 고려 신종 | 1144.7.11~1204.1.13 |
너는 같고 다른 것만을 배웠구나. 일체의 모든 것이 이곳에 있느니라. | 지눌[70] | 1158~1210.3.27 |
내 병이 낫지 않을 것 같다. 형제간의 다툼이 있을까 염려되니 너는 다시 문병을 오지 말거라. | 최충헌[71] | 1149~1219.9.20 |
이 어리석은 놈아! 내가 평생 동안 게송을 한 번도 지은 적이 없는데, 이제 와서 무슨 게송이냐? | 승형 | 1171~1221.9.2 |
원컨대 한 마디만 하고 죽었으면 한다. 청하 백 번 따라주신 은혜 갚고자 동서남북 이 한 몸 모두 잊었었네. 어찌하여 하루아침에 하늘에게 버림받아 도성 사람이 벽해 사람 되었을꼬. | 김희제[72] | ?~1227.3 |
푸른 바다 광활하고 흰 구름 한가로운 곳이다. 터럭만큼도 그 사이에 덧붙이지 말라. | 지겸[73] | 1145~1229.7.8 |
지금이 몇 시인가? | 유자량[74] | 1150~1229.8.9 |
가짜 몽골군이니 절대 항복하지 마시오! | 문대 | ?~1231.8.15 |
어명을 받고 나왔으니 어찌 감히 조금이라도 지체하겠는가? 죽는 것이 바로 나의 할 일이다. | 정의 | ?~1233.5 |
요즈음 왼쪽 눈이 아파서 오랫동안 시를 짓지 못했노라. 여전히 오른쪽 눈이 남아있는데 어찌하여 이와 같단 말인가. 그대는 보았는가, 손가락 하나만 다쳐도 온 몸이 괴로워 견디기 어려운 것을. 눈이 병에 걸렸거늘 같은 무리로서 어찌 따라 아파하지 않겠는가. 흥취가 다시 어디에서 나와 힘써 시를 지을 수 있겠는가. | 이규보[75] | 1168.12.16~1241.9.2 |
50년 산 속에서 썩은 이 물건이 오늘 떠나가노니, 각자 노력하고 법을 위해 힘쓰거라. 이 생각이 동요하지 않으면 바로 이 자리에서 나타나나니 나는 가지 않아도 가는 것이며, 저들은 오지 않아도 오는 것이다. 서로 감응하여 도가 통하는 것이지 실상은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 요세 | 1163.10~1245.7.7 |
김효정이 나와 함께 모의하였는데, 정권을 왕에게 돌려주려고 했다. | 주숙[76] | ?~1250.3 |
너희들이 정녕 오랑캐가 되겠느냐? | 최린[77] | ?~1256.9.16 |
복사꽃 향기는 수천 집을 감쌌는데, 비단 장막 자욱하게 십 리에 비꼈구나. 난데없는 광풍은 좋은 일을 불어오니, 붉은 꽃비 휘날리며 긴 강을 지나가네. | 최항 | 1209~1257.4.2 |
나는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소! | 김충[78] | ?~1268.12.21 |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일찍이 임연을 죽였을 텐데... | 이종기[79] | ?~1268.12 |
역적에게 붙어 부귀를 누리느니 차라리 저승으로 가서 몸을 깨끗이 지니겠다. | 정문감[80] | ?~1270.5 |
나는 위득유 때문에 이 지경에 이르렀구나. | 노진의 | ?~1278.4 |
떠날 때가 다가왔으니 더 이상 이야기하지 말라. 태어남은 마치 옷을 입는 것과 같고, 죽음은 또한 옷을 벗어 버리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그 옷을 능히 벗고 입는 사람은 누구인가? 목우자가 일체의 모든 것이 이곳에 있다고 말한 것을 보지 못했는가! | 천영[81] | 1215.6.13~1286.2.12 |
이것은 이별의 잔이로다. | 주열[82] | ?~1287.11.26 |
뒷날에 돌아오면 다시 여러분과 더불어 거듭 한바탕 놀아보겠소. | 일연 | 1206.6.11~1289.7.8 |
내 평생의 행적을 기록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스스로 처음부터 끝까지의 대략을 적어 두 아들에게 남긴다. 세상을 떠난 날짜와 장사지낸 곳은 마땅히 이어 써서 무덤에 지(誌)로 남겨주기 바란다. 명(銘)하여 이른다. 1. 이 나약한 몸뚱이를 돌아보니 낮은 선비의 군더더기일 뿐, 바탕은 미약하고 성질은 우직하다. 학문을 이루지 못하고도 억지로 유학자라 일컬으니, 조정의 반열에서 외람되이 벼슬을 차지해 붉은 인끈을 걸쳤다. 2. 오랫동안 어명을 펼치는 일을 맡았고 요직에까지 올랐으니, 글재주의 쇠퇴를 가까스로 면하고 조정을 손가락으로 찍어 맛보았다. 정당문학으로 승진했으나 밀쳐져 물러나 노년을 보냈으니, 현달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으며 오래 살았다고도 할 만하다. 3. 아내의 인연에 힘입었으나 하나의 어리석은 살덩이가 되었으니, 이것은 무슨 물건이며 필경 어디로 가려는 것일까. 부르면 오고 밀어내면 가버리는 것이니 여기에서만 부딪힐 수 없다. 스스로 시말을 적어서 자식들에게 맡겨 남겨놓는다. 4. 하늘과 땅의 조화에 풀과 나무가 어찌 시들겠는가. 졸렬함과 완악함을 길렀으나 조물주는 나를 사사로이 여겼나 보다. 딸 하나와 아들 둘이니 적지도 않고 많지도 않으며, 천거된 인재들이 문하에 있으니 이 또한 자랑할 만하다. | 김훤[83] | 1234.6.30~1305.1.14 |
내가 상투를 틀면서부터 나라 일에 봉사하여 나이가 이제 일흔이 넘었고, 벼슬도 병졸에서 시작해 1품에 이르렀다. 죽고 사는 것은 운명이거늘 어찌 의원을 쓰겠는가. 나라를 다스리려면 먼저 집안을 다스려야 하는 법이다. 《시경》에 형과 아우는 서로 사이좋게 지내 탓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너희 집에는 형제자매가 아홉이나 있으니, 부디 분쟁으로 남의 웃음거리가 되지 말거라. 네 형제가 다 오거든 이를 자세히 가르쳐 주어 영원히 가법으로 삼도록 하라. | 조인규[84] | 1237~1308.4.25 |
훗날 자손들이 스스로에게 자식이 없다고 하여 대의를 돌아보지 않고 구차하게 욕심을 좇아 양자를 들여 자기 자식으로 삼으면, 골육지친을 길 가는 사람 보듯 여길 것이다.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노비를 하루아침에 가벼이 남에게 주거나 관직을 노리고 권세가에게 뇌물로 바치는 자가 혹시라도 있다면, 효순한 자손은 그를 관가에 고소하여 그 노비를 빼앗은 뒤 가문에서 영원히 끊어버리도록 해라. | 김사원[85] | 1257~1319.1.6 |
어느 곳에선들 서로 만나지 못하겠는가? 큰 물을 건너면 떼가 소용없느니라. | 만항 | 1249~1319.8.18 |
너는 마땅히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 | 최원직[86] | ?~1331 |
마지막의 하나를 붙이니 너희들은 나누어 갖도록 하라. | 충감 | 1275~1339.8.24 |
전에 했던 말대로 명(銘)을 짓게 하거라. | 이조년[87] | 1269~1343.5.5 |
오늘날 사람들이 흔히 형제간에 서로 화목하지 못하는 것은 다툼이 있기 때문이다. 화목하게 지내며 다투지 말라고 너희 자손들에게 훈계하라. | 윤선좌 | 1265~1343.10.1 |
우리 임금께서 어려서 정사를 재상에게 맡기셨는데, 저 자들이 분수에 넘치는 일을 맡고서는 앞사람의 실패를 경계하지 않습니다. 나는 저들과 함께 뭇 사람의 손가락질을 받고 싶지 않아 물러날 생각입니다. 그대는 응당 어찌하렵니까? | 나익희 | 1271~1344.9.3 |
신은 죽을 때가 가까운 일흔둘의 나이라, 가는 길에 쓰러져 밝은 어명을 욕되게 할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숨이 아직 붙어있으니, 죽기 전에 감히 힘쓰지 않겠습니까? | 김륜[88] | 1277.6.29~1348.2.2 |
나는 이 세상에서 오래 살지 못할 것 같소. 자네가 만일 나를 생각하거든 우리 아들을 잊지 말게나. 내 평생에 자랑거리가 없긴 하다만, 내가 네 번이나 법관이 되어 뭇 백성들 가운데 억울하게 노비가 된 자를 반드시 다스려서 양인으로 되돌려 준 것은 기록할 만한 일이네. | 안축[89] | 1282~1348.6.21 |
닭이 울었느냐?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 류돈[90] | 1274~1349.5.18 |
곧 마음이고 곧 부처인 강서의 늙은이여, 부처도 아니고 마음도 아닌 물외의 노인이로다. 날다람쥐의 소리 속에 나 홀로 가노니, 열반이나 나고 죽는 것이 본래부터 공이로구나. | 복구 | 1270.9.15~1355.7.27 |
어머니께서는 무양하신데 아우가 죽고 형님도 돌아가셨다. 나 또한 이와 같으니 어찌하랴, 어찌하랴. 운명이니 어찌하랴! | 안보[91] | 1302~1357.9.4 |
조금만 늦추거라. 주상 앞에 나아가 주머니 속의 글을 올리고 나서 죽여줬으면 한다. | 안우[92] | ?~1362.2.29 |
내가 지금 일흔 살이니 죽어도 무슨 여한이 있겠소. 남자는 부인의 손에서 숨을 거두지 않는 것이 예이니, 여종들과 함께 물러가 있으시오. 혹시라도 큰 소리나 다급한 말로 나를 어지럽게 하지는 마시오. | 김광재 | 1294.1.13~1363.3.14 |
나는 8년 동안 삼재(三宰)로 있으면서 원하는 대로 이루지 못한 것이 없었는데, 어찌 주상을 범하려는 마음이 있겠느냐? 다만 홍 시중[93]을 제거하고 싶었을 뿐이다. | 김용[94] | ?~1363.4.20 |
생각건대 임금과 아버지는 하늘과도 같으니, 하늘로부터 어찌 달아날 수 있으랴? 또 죽고 사는 것은 운명이므로 순순히 받아들여야 한다. 장차 어디로 도망치겠는가? | 류숙[95] | 1316~1368.12.21 |
우리 정헌공[96]께서는 한미한 가문에서 일어나 청백함과 충직함으로 한동안 이름나셨고, 아버지께서는 불행하게도 일찍 세상을 버리셨다. 내가 밤낮으로 그 뜻을 잇지 못하지는 않을까 두려워했는데, 어쩌다가 임금께서 알아주시어 총애와 녹봉이 분에 넘쳤다. 나이도 팔순을 넘었으니 이는 모두 선대의 숨겨진 덕이요, 정헌공의 청백함이 남긴 바이다. 너희들은 이를 굳게 지키고 떨어뜨리지 말라. 내가 만일 죽거든 장사 지내는 데 꺼리어 불교식 예법을 사용하지 말고, 사치스럽게 하지 말라. | 윤택 | 1289~1370.9.12 |
공은 부디 아기[97]를 보고 내 목숨을 살려주시오. | 신돈[98] | 1323~1371.7.11 |
재신이 죽으면 관아에서 장사를 치러주는 것은 나라의 두터운 은혜이다. 돌아보건대 나는 평소 터럭만큼도 나라에 도움을 주지 못하여 죽어서도 부끄러움만 남길 뿐이니, 그대는 나를 위해 관비를 사양하도록 하라. | 이인복 | 1308~1374.3.9 |
내가 내일 창릉에 배알하고 주정하는 체하면서 홍륜의 무리를 죽여서 입막음을 하겠다. 너도 이 계획을 알고 있으니 마땅히 죽음을 면하지 못할 줄 알아라. | 공민왕[99] | 1330.5.6~1374.9.22 |
어렵지 않은 일이니 나는 곧 떠나겠다. | 혜근[100] | 1320.1.15~1376.5.15 |
우리나라가 대대로 왕위를 전한 지 오래되어 500년이 되어 갑니다. 대저 임금들께서 모두 신료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바라건대 왕께서는 크게 의심나는 일을 살피거나 큰일을 결단해야 할 때 반드시 시중 경복흥, 이인임과 판삼사사 최영 및 여러 재상들에게 자문을 얻고 삼가서 급하게 바로 행하지 마십시오. 또한 왕의 거동은 반드시 기록되는 것이니 자주 놀러 나가서는 아니 됩니다. | 명덕태후[101] | 1298.7.18~1380.1.6 |
내가 재주도 없는 몸으로 현릉의 과분한 총애를 받고 시중의 자리에 있은 지 29년이나 되며, 나이도 벌써 일흔아홉이다. 나는 병이 자주 들어 반드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죽거든 사흘째 되는 날에 곧장 매장하여 관리들을 번거롭게 하지 말라.[102] | 염제신 | 1304.10.30~1382.3.18 |
그대는 노신을 대신해 주상께 말을 잘 전해다오. 주상께서 노신을 생각하신 것은 신이 선군을 좌우에서 모셨기 때문이네. 신은 이제 몸이 위태로우니, 주상께서는 날이 갈수록 더욱 신중하시어 하늘의 복을 영원히 받게 되시기만을 바랄 따름이네. 이것이 신의 소원이네.[103] | ||
도적놈아, 죽일 테면 죽이거라! 네가 이미 내 아버지를 죽였으니 나의 원수로다. 차라리 죽을지언정 너를 따라가지 않겠다. | 영산 신씨[104] | 1367~1382 |
너희는 나와 입장이 다르니 숙부를 도와서 충효를 다하라. | 이원계 | 1330~1388.10.23 |
내 평생 조금이라도 사사로운 욕심을 품었다면 내 무덤 위에 풀이 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풀도 나지 않을 것이다. | 최영[105] | 1316~1388.12 |
왕씨 일족에게는 겨드랑이에 용의 비늘이 있다! | 우왕 | 1365.7.25~1390.1.8 |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 정몽주 | 1337.11.22~1392.4.4 |
2.6. 조선 시대
2.6.1. 14~15세기
유언 | 인물 | 생몰년 |
죽고 사는 이치를 내 의심하지 않는다. | 이색 | 1328.6.17~1396.6.17 |
정도전은 남에게 미움을 많이 받는 사람이라 죽었지만 나는 미움 받을 짓을 안 했으니 괜찮다. | 남은[106] | 1354 ~1398.8.26 |
내가 이미 고려를 배반했는데 지금 또 이 편을 배반하고 저 편에 붙는다면, 사람들이 비록 말하지 않더라도 홀로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겠느냐? | 정도전[107] | 1342~1398.8.26 |
신은 본토(本土)의 사람으로 타국에서 죽사온즉, 시체를 불태워 도로 본토에 장사지내어 전하께서 신으로 하여금 본토의 풍속을 따르게 하소서. 또 전하께서 조심조심 덕을 닦아 영원히 조선을 보전하시기 바랍니다. | 이지란 | 1331~1402.4.9 |
나는 실상 죄가 없는데, 때리는 매[箠楚]를 견디지 못하여 죽는다! | 강상인[108] | ?~1418 |
앞으로 다시는 박씨 집안과 혼인하지 말아라! | 심온[109] | 1375~1419 |
내가 죽은 뒤에도 절대로 이숙번을 풀어주어선 안된다. | 태종 | 1367.5.16~1422.5.10 |
태평한 시대에 나서 태평한 세상에 죽으니, 천지간에 굽어보아도 부끄러운 것이 없다. 이것은 내 손자가 미칠 바가 아니다. 내 나이 70이 지났고 지위가 재상에 이르렀으며 성상의 은총을 만나[110] 간언하면 행하시고 말하면 들어주시었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다. | 허조 | 1369~1439.12.28 |
왜인과 야인을 대하는 것은 작은 문제가 아니다. 오랫동안 평안에 빠져 있다가 혹 해이해지지 않을까 심히 걱정되는 바이다. 언제나 하루와 같이 정신을 바짝 차려 조금이라도 해이해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 세종[111][112] | 1397.5.15~ 1450.3.30 |
정승의 몸으로 어찌 걸어가겠느냐! 초헌(가마)을 대령하라! | 김종서[113] | 1383~1453.10.10 |
까마귀 눈비 맞아 희는 듯 검노매라. 야광명월이 밤인들 어두우랴.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고칠 줄이 있으랴. | 박팽년 | 1417~ 1456 |
북소리 둥둥둥 목숨을 재촉하는데 서풍에 뉘엿뉘엿 해는 지려 하누나. 황천에는 주막도 없다 하는데 오늘 밤엔 뉘 집에 자고 갈거나(절명시). | 성삼문 | 1418~1456.6.8 |
나라의 예장을 받지 말며 묘비도 세우지 말것이며 상석도 놓지 말고 산소치장을 극히 검소하게 하라. | 양녕대군[114] | 1394~1462.9.7 |
(신하들이 예종에게 양위하는 것을 반대하자) 운이 떠난 영웅은 자유롭지 못한 것인데, 너희들이 나의 뜻을 어기고자 하느냐? 이는 나의 죽음을 재촉하고자 하는 것이다.[115] | 세조 | 1417.9.29~1468.9.8 |
석실은 유명무실한 것이므로 쓰는 것이 옳지 못하다.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무덤에 석실과 석곽(石槨)을 마련하지 말라.[116] | ||
영웅의 재주를 잘못 썼구나. | 남이 | 1441~1468.10.27 |
신이 어찌 매질을 참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좌우의 신하를 다 들어서 당여라고 하여도 믿겠습니까?[117] | 강순 | 1390~1468.10.27 |
전부터 발에 종기가 있어 좀 아프지만 지금은 많이 나아졌소. | 예종 | 1450.1.1~1469.11.28 |
아무쪼록 앞으로 일본과 실화(失和 : 분쟁유발)하지 마시옵소서.[118] | 신숙주 | 1417~1475.6.21 |
장례는 간소하게 치르고 불교의 법을 따르지 말며 저승 가서 읽을 책 몇 권을 관에 넣어 달라.[119] | ||
인생이란 여기서 그치는가![120] | ||
너희는 대학과 중용은 너무 많이 읽지 말거라. 죽을 때가 다 된 지금도 그 글들이 눈에 선하구나. | 김수온 | 1410~1481.6.7 |
처음 부지런하고 나중에 게으른 것은 인지상정이니, 원컨대 나중에 삼가기를 처음처럼 하소서. | 한명회[121] | 1415~1487.11.14 |
원자가 다행히 목숨을 보전하거든 이것으로 나의 원통함을 말해주고 또 나를 임금이 거동하는 길 옆에 묻어 임금의 행차를 보게 해주시오. | 폐비 윤씨[122] | 1455.6.1~1482.8.16 |
화장하지 말고 절 옆에 묻어주오. | 김시습[123] | 1435~1493.3.31 |
나의 사후 100년 동안 누구도 폐비 문제를 거론하지 못한다. | 성종[124] | 1457.7.30~1494.12.25 |
신이 바라는 것은 특별한 것은 없으나, 다만 경연에 부지런히 임하시고 형벌과 시사는 법도에 맞게 하소서. | 노사신[125] | 1427~1498.9.6 |
2.6.2. 16세기
유언 | 인물 | 생몰년 |
신이 중죄를 범하였는데 몸과 머리가 나누어짐을 면하게 되었으니, 성상의 은혜가 지극히 중한데 감히 조금인들 지체하겠습니까? | 이세좌[126] | 1445~1504 |
신이 이미 이렇게 될 것을 알았습니다.[127] | 윤필상 | 1427~1504 |
국가에서 신에게 죽음을 내리는 것이다. 신의 나이 70이 다 되고, 몸에 병이 쌓여 있으니, 죽어도 다른 생각이 없겠습니다만, 신이 소시부터 변방에서 일하였으며, 나라 일에는 크고 작은 것 없이 모두 진심 갈력하였습니다. 신이 반복하여 생각해 보아도, 한 가지 죄도 없습니다. 이 말을 주상께 전달하기 바랍니다. | 이극균[128] | 1437~1504 |
전하께서는 다리가 부러져도 걸을 수 있습니까? | 김처선[129] | ?~1505.4.1 |
죽어도 여한이 없으나, 다만 미인을 바치지 못한 것이 유한입니다. | 임숭재[130] | 1475~1505 |
중전이 보고 싶다… | 연산군[131][132] | 1476.11.7~1506.11.6 |
나라가 간신배에게 속아 공신을 죽이려 하는데 그대는 어찌하여 간언하지 않는가? | 신윤무[133] | ?~1513.10.24 |
내가 죽거든 관을 얇게 만들고 두껍게 하지 말아라. 먼 길을 가기 어렵다.[134] | 조광조 | 1482.8.10~1519.12.20 |
성상께서 내 목을 보전하고자 사약을 내리셨거늘 어찌 너희들이 내 목을 얽으려 하느냐![135] | ||
(자식들에게) 내가 헛된 이름으로 세상을 속였으니 너희들은 부디 이 글을 모두 태워 나의 허물이 더 무거워지지 않도록 해라. | 남곤[136] | 1471~1527.3.10 |
복성군과 박씨에 대해서는 신으로서는 아는 바 없다. 그러나 신(臣)이 조정에 죄를 짓고도 3∼4년을 연명하였으니 천은(天恩)이 중하다. | 이항 | 1474~1533.6.2 |
원수 김안로! 원수 김안로! 원수 김안로! | 심정 | 1471~1531.12.1 |
세자에게 자리를 물려 주고, 대신들이 따른 뒤에라야 내 노열(勞熱)이 덜해질 것 같다. 이러한 때에는 자리를 벗어나지 않을 수 없다. | 중종 | 1488.3.5~1544.11.15 |
경들은 내 기후[137]를 보라… | 인종[138] | 1515.2.25~1545.7.1 |
죽고 사는 이치를 안 지 오래이니 마음이 편안하구나. | 서경덕 | 1489~1546 |
내가 죽거든 관을 쓰지 말고 시체를 그냥 동문 밖에 내쳐두어 개미와 벌레들이 내 살을 뜯어먹게 하여 천하 여인들의 본보기로 삼으라. | 황진이 | ?~? |
내가 나쁜 짓을 한 일이 없는데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렀다. 너희들은 과거에 응시하지 말라. 무과일 경우는 응시할 만하면 응시하고 문과는 응시하지 말라.[139] | 임형수[140] | 1514~1547 |
그대도 한 잔 마시겠는가?[141] | ||
(누가 집안에 들어가서 사약을 마시기를 권하자) 나는 마땅히 천지의 신기가 둘러서서 환히 보는 데서 죽을 것이다. 어찌 음침한 곳에 가서 죽겠는가? | ||
남에게 제재를 당하느니 스스로 죽는 것만 못하다. | 정난정 | 1506~1565.11.13 |
내 기운은 마찬가지이니 문안하지 말라. | 명종 | 1534.5.22~1567.6.28 |
저 매형에게 물을 줘라. | 이황[142] | 1501.11.25~1570.12.8 |
하늘의 해가 참 맑구나. | 조식 | 1501.6.16~1572.2.8 |
근래에 조정에서는 딱히 잘못한 것도 없고 또 법에 어긋나는 일조차 없더라도 자기와 뜻이 조금이라도 다르면 상대를 배척하고 용납하질 않습니다. 그러니 전하께오선 이런 폐단이 사라지도록 힘쓰셔야 할 때입니다. | 이준경[143] | 1499~1572 |
널 내가 낳았구나… | 권철[144] | 1503~1578.8.1 |
내 몸은 다만 나라를 위할 뿐. 이로 인해 병이 심해져도 이 또한 천명이다. | 이이[145] | 1536.12.26~1584.1.16 |
올해는 내 나이 세 번째 아홉수에 해당하는 해인데 마침 오늘 연꽃들이 서리를 맞아 붉게 변했으므로 미리 말했던 것처럼 바로 내가 죽을 날이다. 내가 죽은 다음에는 내가 지은 시들을 모두 불태워 나처럼 불행한 여인이 다시는 조선 땅에 태어나지 않도록 해주기 바란다.[146] | 허난설헌 | 1563~1589.3.19 |
내가 죽거든 내 목에 있는 사마귀를 근거로 하여 내 시신을 거두도록 하거라. | 송상현[147] | 1551~1592.5.22 |
장부가 국난을 당하여 어찌 구차하게 살기를 바라랴. 이 땅이 나의 죽을 곳이다! | 조헌[148] | 1544~1592.8.18 |
김해 부사 이종인이 여기에서 죽는다! | 이종인[149] | 1556~1593.6.29 |
다만 나라가 있는 줄 만을 알았지, 내 한 몸이 있음을 알지 못했노라. | 김면 | 1541~1593 |
뜻을 먼저 이루지 못하고 몸이 먼저 가니 천명임을 어찌할 것인가. 또한 적이 도망쳐 물러가면 나라는 회복되겠지만 조정의 붕당은 누가 능히 깨뜨릴 것인가. | 김성일 | 1538~1593 |
이 녀석이 소용없는 짓을 하는구나. | 정철[150] | 1536.12.6~1593.12.18 |
충효로써 죽음을 삼은 죄밖에 없습니다. 다만 최담령 등이 죄 없이 옥에 갇혀 있으니 원컨대 죽이지 마시옵소서. | 김덕령[151] | 1594.2.1~1594.3.31 |
이 칼을 가지고 왜적을 찌르고 나의 시체를 거두어 내 애마에 실어주면 집에 가리라.[152] | 황대중[153] | 1551~1597 |
싸움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154] | 이순신[155][156] | 1545.3.8~1598.11.19 |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깃발을 휘두르고 북을 울려 내가 살아 있을 때처럼 하라.[157] | ||
적과 대치하고 있으니 죽음을 알리지 말라.[158] |
2.6.3. 17세기
유언 | 인물 | 생몰년 |
힘써 좋은 일만 생각하고 힘써 좋은 일만 행하라. | 류성룡 | 1542.10.1~1607.5.13 |
80년 전에는 저것이 나였는데 80년 후에는 내가 저것이구나. | 휴정[159] | 1520.3.26~1604.1 |
형제 사랑하기를 내가 있을 때처럼 하고, 참소하는 말이 있어도 듣지 말라. | 선조[160] | 1552.11.11~1608.2.1 |
사대(四大)로 이루어진 이 몸은 이제 진원(眞源)으로 돌아가려 한다. 어찌 번거롭게 오고가며 이 환영과 같은 몸을 수고롭게 하리오. 나는 이제 입멸해 자연의 변화에 순응하려 한다. | 유정 | 1544.10.17~1610.8.26 |
나라를 잘못 섬겨 이런 죄를 얻었구나. 내가 죽거든 조의(朝衣)로 염을 하지 말고 심의(深衣)와 대대(大帶)만 쓰라. | 이항복 | 1556.11.16.~1618.7.4(음 5.13) |
아직 할 말이 남아 있소!!! | 허균[161] | 1569.11.3~1618.8.24 |
하늘이 나의 무죄를 내려다보고 계실 것이다. 살아서는 효자이고 죽어서는 충신이다.[162] or 여러분, 한때의 가난을 한탄하지 말고 참고 견디시오.[163] | 이이첨 | 1560~1623.3.14 |
우리가 죽게 된 것은 모두 네 탓인데, 네가 어떻게 충신이며 효자가 될 수 있는가. | 이위경[164] | 1586~1623.3.14 |
이덕형[165] 등과 함께 힘껏 일해 보고 싶다. | 박홍도[166] | 1576~1623 |
무도한 임금이 독촉하여 그렇게 하게 하는데 내가 어쩔 수 있었겠는가. | 김순[167] | ?~1623 |
내 열다섯의 어려서부터 스승 남명(조식)에게서 학문을 배워 군신부자(君臣父子)의 대의가 무엇인지 알았다. 아! 슬프다. 구원(丘園)에 물러나 있은 지 지금 20여 년! 어지러운 세상일을 듣고 알려 하지도 않았다. 90세의 모진 목숨 아직도 죽지 않고 살아서 마침내 폐모(廢母, 인목왕후의 폐위)의 죄명을 얻으니, 이제 한번 죽음에 돌아봐 서운한 것은 없으나. 장차 지하에서 무슨 면목으로 선왕(선조)을 뵙겠는가? 그것이 두려울 따름이다. | 정인홍 | 1535.9.26~ 1623.4.3 |
조정에서는 내가 마음대로 군사를 훈련시키거나 기르지 못하게 했다. 강적을 대적했으니 죽는 건 내 직분이나 다만 그것이 한이로구나! | 남이흥[168] | 1575~1627.1.21 |
1. 후장(厚葬)하지 말 것 2. 여묘(廬墓)살이는 미속(美俗)이니 힘써 지킬 것 3. 초상에서 상제(祥祭)·담제(禫祭)로부터 기제(忌祭)까지 무당과 불도의 예를 따르지 말고 검소하게 지낼 것 4. 풍수지리설에 현혹되지 말고 일가의 묘소는 금천(衿川) 오리동(梧里洞)으로 모아 관리할 것 5. 시제(時祭)와 속절(俗節)의 묘제(墓祭) 제물은 10여 접시로 간소하게 할 것 6. 고조모 이하 직계 이외의 방친은 각 위에 배전(拜奠)만 할 것 | 이원익 | 1547.12.5~ 1634.2.26 |
속이 답답하니 담배를 피우고 싶구나. 불을 가져오라. | 김상용[169] | 1561~1637.1.22 |
외로운 신하 의리 바르니 부끄럽지 않고 성주의 깊으신 은혜 죽음 또한 가벼워라 이생에서 가장 슬픈 일이 있다면 홀로 계신 어머님 두고 가는 거라오. | 오달제 | 1609.7.8~1637.5.13 |
내가 죽으면 어머니 무덤 발치에 묻어 주어라. | 광해군[170] | 1575.4.26~1641.7.1 |
너도 똑같이 될 것이다. 이놈아! | 심기원[171] | 1587~1644.3 |
조정에서는 이미 천하의 일이 안정되었다고 생각하는가. 오늘 나를 죽인다면 반드시 후회가 있을 것이다! | 임경업[172] | 1594~1646 |
작은아버지[173]와 조 귀인이 이 어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으니, 너희는 커서 이 원수를 갚아다오! | 민회빈 강씨 | 1611~1646.3.15 |
내가 죽거들랑 내 눈을 뽑아서 남대문에 걸어 두거라! 이 나라가 망하는 꼴을 지켜보겠노라! | 김홍욱[174] | 1602~1654 |
김자점과 이시백은 나와 같이 대하라, 귀인 조씨의 형제들을 잘 보살펴주어라. | 인조[175] | 1595.11.7~1649.5.8 |
가귀가 아니었더라면 병이 위태로울 뻔하였다. | 효종[176] | 1619.5.22~1659.5.4 |
대경 8만 게송과 염송 30권이 충분히 자리(自利)와 이타(利他)의 두 이로움을 갖추었는데 어찌 게송을 따로 지을 필요가 있겠는가? | 각성 | 1575.12.23~1660.1.12 |
내 어찌 대신의 뜻을 모르겠는가. 다만 정신이 이러하여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 현종 | 1641.2.4~1674.8.18 |
내가 죽거든, 비갈을 세우지 말고 시호를 청하지도 말며, 다만 조그만 표석에 이름 석 자만 쓰라. | 송준길 | 1606.12.28~1672.12.2 |
나라에서 유학자를 쓰기 싫으면 안 쓰면 그만이지 죽일 것까지는 없지 않은가! | 윤휴[177] | 1617.10.14~1680.5.20 |
학문은 마땅히 주자를 바탕으로 삼고, 사업은 효종께서 하고자 하시던 뜻(북벌)을 주로 삼으라. 또는 "천지만물이 생긴 까닭과 성인이 만사에 응하는 길은 오직 직(直)자 한 자뿐이니, 이것은 공맹(孔孟) 이래 전해 온 것이다." | 송시열 | 1607.11.12~1689.7.24 |
2.6.4. 18~19세기
유언 | 인물 | 생몰년 |
너는 충무공 집안에 충의가 서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음을 듣지 못했느냐? 왜 나를 죽이지 않느냐! | 이봉상 | 1676~1728.3.15 |
흔들지 마라. 어지러워 못 견디겠다. | 사도세자[178] | (양력) 1735.2.13~1762.07.12 |
전교(傳敎)한다. 대보(大寶)를 왕세손에게 전하라. | 영조 | (양력) 1694.10.31~1776.04.22 |
수정전…. 수정전…. | 정조[179] | 1752.9.22~1800.6.28 |
앞서서 내전께 아들이 생긴 경사는 축복이었습니다. 천신(賤臣)이 다시 자식을 가져서 종사는 매우 다행이지만, 사심을 마음 속으로 억눌러 견뎌내지 못하여 근심하고 두려워했습니다. 이제 복이 지나치게 과분해서 끝내 병이 중해졌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마음에 차지 않으나 오직 오래도록 지닌 소원은 죽을 고비에 임하여도 아직 얻지 못하여 근심입니다. 그러니 정전에 자주 가시어 대를 이을 아들을 부지런히 구하면 경사가 있을 것이니, 장차 땅속에서도 즐거워하고 기뻐할 것입니다. | 의빈 성씨[180] | 1753.7.8~1786.9.14 |
땅을 내려다보며 죽느니 하늘을 쳐다보며 죽는 것이 낫겠다. | 복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노[181] | 1760~1801.4.8 |
깨끗이 목욕시켜다오. | 연암 박지원 | 1737.2.5~1805.10.20 |
인생에 끝이 왔으면 떠나야지. | 혜보 유득공 | 1748.12.24~1807.9.1 |
집 뒤의 동산에 매장하고 지관에게 물어보지 말라. | 다산 정약용 | 1762.6.16~1836.2.22 |
나의 마지막 시간이 다다랐으니 잘 들으시오. 내가 외국인과 연락한 것은 나의 종교를 위해서이고 나의 천주를 위해서입니다. 이제 내가 죽는 것은 그분을 위해서입니다. 나를 위해 영원한 생명이 바야흐로 시작되려 합니다. 여러분도 사후에 행복하려면 천주를 믿으시오.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 [182] 1821.8.21~1846.9.16 |
재물은 평등하기가 물과 같고, 사람은 바르기가 저울과 같다. | 가포 임상옥 | 1779~1855 |
죽는 기분 말인가? 처음 죽어보는 거라 잘 모르겠군. 내 죽은 다음에 다시 말해주지. | 정지윤[183] | 1808~1858 |
저… 등잔… 불을… 꺼 주시오… | 김삿갓 | 1807.3.13~1863.3.29 |
운현궁... | 민승호[184] | 1830~서력 1875년 1월 5일. |
늙은 신하가 역적을 키웠으니 나라에 큰 죄를 지었구나. | 홍순목[185] | 1816~1884 |
대원위 대감, 나를 제발 살려주십시오. | 민겸호[186] | 1838~1882.7.24 |
때가 오매 천하가 모두 한 힘이더니, 운이 다하니 영웅도 어쩔 수 없구나. 백성을 사랑하고 정의를 세운 것이 무슨 허물이랴. 나라 위한 일편단심 그 누가 알리. | 해몽 전봉준 | 1854~1895.3.30 |
시끄럽소! 일국의 총리로써 동족에게 죽는건 천명이야! 남의 나라 군인의 도움까지 받아서 살고싶지는 않소! | 도원 김홍집[187] | 1842~1896.2.11 |
차라리 물고기 밥이 될지언정 왜놈에게 죽을 수는 없다. | 해운당 김하락[188] | 1846~1896.7.13 |
2.7. 대한제국
유언 | 인물 | 생몰년 |
주상이 보고 싶구나. 아직도 오지 않았는가. | 흥선대원군[189] | 1820.12.21~1898.2.22 |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하였으니, 만 번 죽은들 무엇이 아깝겠는가(軍不能守國 臣不能盡忠 萬死無惜). | 박승환 | 1869.9.7~1907.8.1 |
바라건대 우리 동포 형제들은 억천만 배 더욱 분발하여, 의지를 굳건히 하고, 학문에 힘쓰며, 마음과 힘을 합하여 우리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한다면, 죽은 자는 마땅히 어두운 저승에서라도 기뻐 웃으리다. 아, 조금도 희망을 잃지 말라! 우리 대한제국 2천만 동포에게 작별하며 고하노라. | 민영환 | 1861.8.7~1905.11.30 |
서울에 가서 일의 결판을 기다려라. 어찌하여 죽임을 당하고자 하느냐?[190] 선비는 죽일 수 있으되 욕보일 수는 없다.[191] | 수당 이남규[192] | 1855.11.3~1907.09.26 |
나라와 백성의 욕됨이 이에 이르렀으니 죽지 않고 어이하랴. 아버지의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나라의 주권도 회복하지 못했으니 충성도 못하고 효도도 못한 몸이 죽은들 어이 눈을 감으랴. | 의병장 왕산 허위 | 1854.4.1~1908.10.21 |
형님, 형님! 누가 나를 찔렀소? | 신돌석[193] | 1878.11.3~1908.12.12 |
5분만 시간을 주십시오, 책을 다 읽지 못했습니다.[194] | 안중근 의사 | 1879.9.2~1910.3.26 |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195] |
2.8. 일제강점기
유언 | 인물 | 생몰년 |
죽기가 쉽지 않더군. 약을 마시려다가 입에서 약사발을 세 번이나 떼었다. 내가 이렇게도 어리석은가. 내가 죽은 후 내 글은 창강 김택영에게 맡기거라. | 매천 황현[196] | 1855~1910.9.7 |
나는 죽어 수십만 명의 이재명으로 환생하여 기어이 일본을 망하게 하고 말겠다! | 이재명 의사 | 1887.10.16.~1910.9.13 |
우리나라 대한제국은 망했습니다. 폐하는 모든 권력을 잃었습니다. 저는 적을 토벌할 수도, 복수할 수도 없는 이 상황에서 깊은 절망에 빠져 있습니다. 자결 외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오늘 목숨을 끊으렵니다. | 이범진[197] | 1852.9.3.~1911.1.13 |
나는 바보였나 봅니다. 혹시 속은 게 아닐까요. | 이용구[198] | 1868.2.14~1912.5.22 |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 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 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말라.[199] | 부재 이상설 | 1871.1.27~1917.3.2 |
비록 가보진 못했지만 우리 아버지 고향이 조선인데 8도라고 들었다. 내 한발 한발에 조선에 살고 있는 인민들, 노동자들의 미래에 대한 희망, 새로운 사회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겠다. 8보(步)만 걷게 해다오.[200] | 김알렉산드라 | 1885~1918.9.16 |
내 손톱이 빠져 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조선 독립 만세... | 유관순 | 1902.12.16~ 1920.9.28 |
내가 죽는다고 조금도 어쩌지 말라.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 내가 자나 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 강우규 | 1855.4.20~1920.11.29 |
독립운동이라고? 상해에 있는 놈들은 모두 폭도이다. 이 자들이 어떻게 독립을 시킨다는 것이냐? | 민원식 | 18867.12~1921.2.17 |
내 뜻을 다 이루었으니 지금 죽어도 아무 한이 없다.[201] | 박재혁 | 1895.5.17~1921.5.27 |
정부… 정부! | 예관 신규식[202] | 1880.2.22~1922.9.25 |
대한독립만세! | 김상옥[203] | 1889.1.5~1923.1.22 |
나의 병세가 심상치 않게 감각되오 만일 내가 살아난다면 이어니와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 동포에게 나의 몇 마디 말을 전하여 주오. 첫째, 독립운동을 하려면 전족적(全族的)으로 통일이 되어야 하고, 둘째, 독립운동을 최고 운동으로 하여 독립운동을 위하여는 어떠한 수단방략이라도 쓸 수 있는 것이고, 셋째, 독립운동은 오족(吾族) 전체에 관한 공공사업이니 운동 동지간에는 애증친소(愛憎親疏)의 구별이 없어야 된다. 우리가 이 귀중한 독립운동을 기성 시키려면 무엇보다도 첫째 전 민족의 통일을 요구하여야 되겠오. 一. 전족통일(全族統一)이라 함은 말로 주장하기는 쉬우나 실행하기는 물론 극란한 일이오, 그러나 제일 먼저 주의할 것은 적어도 우리 광복사업에 헌신하려고 자처한 건전분자들은 지중(至重)한 독립운동을 목표로 세운 이상에는 환경의 어떠함을 물문(勿問)하고 다 한데 뭉쳐야 되겠오. 물론 어떤 나라에나 각 당파의 분별이 없을 수는 없으나 적어도 일을 보는 민족들은 사당 혹은 붕당을 짓지 않음이 사실이니 여하튼 우리도 이 점에 크게 주의하여 장래 국가대업에 악영향을 끼치지 말아야 되겠오. 二. 독립운동은 우리의 제일 중대한 사업인 즉, 이를 기성코자 함에는 하등의 수단이나 방법을 가리지 못하게 됨이 사실이오. 바로 말하자면 즉 우리 민족의 체면이나 장래의 행복을 방해할 만한 위험성을 가진 일이 아니면 무엇이나 광복사업에 대하여 일호라도 이익 있게 보이는 일은 다 실행하도록 주의하여야만 되겠오. 이같이 말함은 다른 뜻이 아니라 즉 우리가 장래 우리 민족을 위하여 무슨 일을 하던지 제일 먼저 기초되는 독립국가라는 것이 있어야 되겠오. 三. 독립운동의 성패는 우리 민족 전체의 사활문제이니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이 일에 성공코자 하면 우리가 통일적 행동을 하여야 되겠으며 단결되어 일하려면 독립운동이라 하는 전민족을 살리려는 대사업에 목표를 두고 이 일을 진행함에 사개인(私個人) 사이에 교분 혹은 감정관계의 어떠함을 일체 돌아보지 말아야 되겠오. 나의 말한 몇 가지 일이 실행키에 어렵지 않음은 아니나 하려면 아니 될 것은 없고 잘 될 터이오. 이는 다른 말 아니라 우리가 금일까지 무엇이 아니되니 무엇이 어찌하여 아니되니 함은 통(統)히 우리가 일을 할 때에 성의를 다하지 못한 까닭이오. 아니 될 수야 어찌 있소. | 백암 박은식[204] | 1859.9.30~ 1925.11.1 |
일명(一命)을 겨우 보존한 짐은 병합 인준(認准)의 사건을 파기하기 위하여 조칙하노니 지난날의 병합 인준은 강린(强隣)이 역신(逆臣)의 무리와 더불어 제멋대로 해서 제멋대로 선포한 것이요 다 나의 한 바가 아니라. 오직 나를 유폐하고 나를 협제(脅制)하여 나로 하여금 명백히 말을 할 수 없게 한 것으로 내가 한 것이 아니니 고금(古今)에 어찌 이런 도리가 있으리오. 나 구차히 살며 죽지 못한 지가 지금에 17년이라. 종사(宗社)의 죄인이 되고 2000만 생민의 죄인이 되었으니, 한 목숨이 꺼지지 않는 한 잠시도 이를 잊을 수 없는지라. 유수(幽囚)에 곤(困)하여 말할 자유가 없이 금일에까지 이르렀으니, 지금 한 병(病)이 심중한 일언(一言)을 하지 않고 죽으면 짐이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리라. 나 지금 경에게 위탁하노니 경은 이 조칙을 중외(中外)에 선포하여 내가 최애최경(最愛最敬)하는 백성으로 하여금 병합이 내가 한 것이 아닌 것을 효연(曉然)히 알게 하면 이전의 소위 병합 인준과 양국(讓國)의 조칙은 스스로 파기에 돌아가고 말 것이라. 여러분이여, 노력하여 광복하라. 짐의 혼백이 명명(冥冥)한 가운데 여러분을 도우리라. | 순종[205] | 1874.3.25~1926.4.25 |
네 이놈들! 니들은 내가 뒈졌나 안 뒈졌나 보러왔지? | 월남 이상재 | 1850.10.26~1927.3.29[206] |
일본에게 속았다. | 이지용[207] | 1870.10.23~1928.6.30 |
할 일이… 할 일이 너무도 많은 이 때에 내가 죽어야 하다니… 그게 한스러워서… | 백야 김좌진 | 1889.12.16~1930.1.24 |
문간에 검정 말이 모는 검은 마차가 자신을 데리러왔으니 가야겠다. 어린이를 두고 가니 잘 부탁하오. | 소파 방정환 | 1899.11.9~1931.7.23 |
낙심하지 말고 겨레의 광복을 위하여 힘쓰라. 내 유해는 땅에 묻지 말고 생리 표본을 만들어 학생들을 위해서 쓰게 하라. | 남강 이승훈[208] | 1864.3.25~1930.5.9 |
사형은 이미 각오했으니 더 이상 남길 말은 없다. | 윤봉길 의사 | 1908.6.21~1932.12.19 |
나는 몇 달을 더 못살겠다. 그러나 동지들은 서러워 말라. 내가 죽어도 사상은 죽지 않을 것이며 열매를 맺는 날이 올 것이다. 형들은 자중자애하며 출옥한 후 조국의 자주독립과 겨레의 영예를 위해서 지금 가진 그 의지 그 심경으로 매진하기를 바란다. 평생 죄송스럽고 한 되는 것은 노모에 대한 불효가 막심하다는 것이 잊혀지지 않을 뿐이고, 조국의 자주독립이 오거든 나의 유골을 동지들의 손으로 가져다가 해방된 조국 땅 어디라도 좋으니 묻어주고, 무궁화꽃 한 송이를 무덤 위에 놓아주기 바란다. | 백정기 의사 | 1896.1.19~1934.6.5 |
나는 조선의 혁명이 성공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소. 동무들은 반드시 고려소비에트공화국을 성립하시오. | 성재 이동휘 | 1873.6.20~ 1935.1.31 |
내가 죽거든 시체가 왜놈들 발에 차이지 않도록 화장해 재를 바다에 뿌려달라. | 단재 신채호[209] | 1880.12.8~1936.2.21 |
멜론이 먹고 싶소.[210] | 이상 | 1910.8.20~1937.4.17 |
내가 죽거든 내 시신을 고향에 가져가지 말고, 선산 같은 데 쓸 생각을 말고, 서울 공동묘지에, 유상규[211] 군이 누워 있는 공동묘지에 나를 묻어주오. [212] | 도산 안창호 | 1878.11.9~1938.3.10 |
내가 죽거든 무덤을 만들지 말고 과일나무 아래 묻어 거름이 되게 하라. 나는 독립을 못 보아도 너희들은 꼭 볼 것이니… | 한서 남궁억 | 1863.12.27~1939.4.5 |
민족의 대동단결만이 광복을 단축시킬 수 있다. | 석오 이동녕 | 1869.2.17~ 1940.3.13 |
이놈들아! 천조대신보다 하나님이 더 높아! | 이기풍[213] | 1865.12.23~1942.6.20 |
내 삶이 유언이다. | 규암 김약연[214] | 1868.9.12~1942.10.29 |
여보, 따뜻한 숭늉 한 사발이 먹고 싶소.[215] | 소양 주기철 | 1897.11.25~ 1944.4.21 |
나는 이제 간다. 나는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가지만 조국이 얼마 지나지 않아 일제의 사슬에서 해방될 것이다. 그러나 해방이 된다하여 곧 바로 자주자립국가로 나아가지를 못하고 일제에 지배당하였던 기간만큼의 혼란의 시기를 지난 후에야 비로소 진정한 자주자립국가를 이루게 되고 세계 속에 우뚝 솟는 국가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 만해 한용운[216] | 1879.8.29~ 1944.6.29 |
2.9. 미군정
유언 | 인물 | 생몰년 |
모든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는 삼가라. | 윤치호 | 1865.1.23~ 1945.12.9 |
선비로서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이다. 이야기할 필요 없다.[217] | 김용환 | 1887.2.27~1946.7.10 |
가타야마 군,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게. 나는 나쁜 짓을 하지 않았네. 죽으면 곧바로 하나님에게 갈 걸세. 내게는 자신이 있네. 그러니까 아무 걱정하지 말게. 가타야마 군, 자네는 젊으니까 몸을 소중히 하게. 그리고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나님 계신 곳에서 만납시다. 구약성경의 시편 51편을 읽어 주시오.[218] | 홍사익 | 1889.3.4~1946.9.26. |
이보시게, 만공. 우리가 함께한 게 일흔다섯 해이나, 오늘로 자네와 내가 이별할 인연이 되었나 보구려. 그럼 잘 있게나. 부처님 사리로 모든 것은 넉넉하다.그리고 거기에 다 뜻이 포함되어 있다. 사리를 수습하지 말라[219] | 만공 선사 | 1871.3.7~1946.10.12 |
조국… 조선… | 몽양 여운형 | 1886.5.25~1947.7.19 |
2.10.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2.10.1. 20세기
2.10.1.1. 1940년대
1940년대 | ||
유언 | 인물 | 생몰년 |
지금의 임시정부는 약간의 진보 상태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나 자신으로 말하면 날마다 늙어가고 병드니, 상해 시대를 '죽자꾸나 시대'라 한다면 중경 시대는 '죽어가는 시대'라 하겠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어떻게 죽기를 원하는가?" 물으면, 나의 최대 소원은 독립이 성공한 후 본국에 들어가 입성식을 하고 죽는 것이며, 작은 소망은 미주·하와이 동포들을 만납고 돌아오다 비행기 위에서 죽으면 시신을 아래로 던져, 산중에 떨어지면 짐승들의 뱃속에, 바다 가운데 떨어지면 물고기 배 속에 영원히 잠드는 것이다. 세상은 고해(苦海)라더니 살기도 어렵거니와 죽기도 또한 어렵다. 타살보다 자살은 결심만 강하면 쉬운 듯하지만, 자살도 자유가 있는 데서나 가능한 것이다. 나도 옥중에서 두 번이나―치하포 사건으로 투옥되어 인천옥에서 장티푸스에 걸렸을 때, 그리고 17년 후 다시 인천감옥으로 돌아와 인천항 축항공사를 할 때 자살하려다 실패하였다. 서대문감옥에서 안매산(安梅山) 명근 형이 굶어 죽기를 결심하고 조용히 묻거늘 나는 찬성하였다. 그가 3~4일 동안 배가 아프니 머리가 아프니 하는 핑계로 음식을 끊었으나, 눈치 빠른 왜놈 간수가 알아차리고 의사에게 진찰케 하고 매산을 결박한 후 강제로 입을 벌리고 계란을 풀어넣었다. 결국 매산이 "자살을 단념하겠노라'고 통고를 한 것을 보면, 자유를 잃으면 자살도 쉬운 일이 아니다. 나의 칠십 평생을 회고하면, 살려고 산 것이 아니라 살아져서 산 것이며, 죽으려도 죽지 못한 이 몸이 끝내는 죽어져서 죽게 되었도다.[220] | 백범 김구 | 1876.8.29~1949.6.26 |
2.10.1.2. 1950년대
1950년대 | ||
유언 | 인물 | 생몰년 |
대한민국 만세는 모르겠고, 조선민족 만세를 부르겠소. | 학암 이관술[221] | 1902.4.25~1950.7.3 |
장관님께 내가 죄송해하더라고 전해주게. | 채병덕 | 1914.4.17~1950.7.26. |
어머니,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222] 저 많은 적들이 그냥 물러갈 것 같지는 않으니까 말입니다. 어머니, 죽음이 무서운 게 아니라, 어머님도 형제들도 못 만난다고 생각하니 무서워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살아가겠습니다. 꼭 살아서 가겠습니다. 어머니, 이제 겨우 마음이 안정이 되는군요. 어머니, 저는 꼭 살아서 다시 어머니 곁으로 가겠습니다.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찬 옹달샘에서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냉수를 한없이 들이켜고 싶습니다. 아! 놈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시 또 쓰겠습니다. 어머니 안녕! 안녕! 아, 안녕은 아닙니다. 다시 쓸 테니까요… | 이우근[223] | 1934~1950.8.11 |
나는 공산군이 아니오. 나는 석두명[224]이라 하는 나비 학자요! | 석주명[225] | 1908.11.13~1950.10.6 |
나는 나비밖에 모르는 사람이오! | ||
이런 동족상잔의 전쟁을 가져오게 된 것을 누구 탓할 것이 아니다. 3천만의 잘못이다. 특히 민족의 지도자들이 이걸 막아내지 못하고 남북의 통일도 되지 못하여 결국은 동족상잔이 전쟁을 가져오게 되었다. 어떻게 하든지 민족통일을 해야 되고 전쟁을 끝내야 한다. 나는 식민통치 때부터 민족해방을 위한 독립운동과정에 투신하였고, 해방 후에도 일관되게 민족통일을 주장하였다. 임시정부가 수립될 수 있었기에 때문에 그것을 위해 좌우합작 운동을 추진했고, 민족통일을 위해서 38선을 넘어 북에까지 갔는데, 민족의 대단합, 민족의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전쟁의 와중에 병으로 누워 소생의 길이 없다. 내가 살아온 생애는 하나부터 열까지 나라와 민족의 독립과 통일을 위한 것이었다. 한 걸음 한 발짝 걷고 옮길 때도 언제나 머리 속에는 그 생각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갈라진 국토와 민족의 통일을 위해서 남과 북, 좌익과 우익의 합작과 통일을 주장해왔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누구보다도 앞장서 노력해왔으며, 앞으로는 더 노력해서 기필코 민족의 통일을 이룩하고야 말겠다는 것이 신념이자 의지였는데 이렇게 되었으니 안타깝기만 하다. 내가 일어나지 못하고 이대로 쓰러지면 조국 통일의 완성은 누가 해 줄 것인가. 우리는 반드시 통일을 해야 한다. 남도 북도 같은 민족이고 좌익도 우익도 같은 민족이다. 조상과 핏줄이 하나인 민족이 왜 통일을 할 수 없겠는가. 반드시 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꼭 해야 한다는 의지와 책임감을 가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민족의 지도자로 자처하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그런 신념과 책임감을 통감하고 나라와 민족의 이익을 앞세우고 개인을 희생할 줄 알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통탄할 일이다. 일부 지도자들의 개인 정권욕에 의해서 통일도 못하고 민족끼리 피를 흘리며 형제간에 총부리를 겨누고 싸워야 하는 이 참극을 가져오게 되었다. 생각할수록 비분을 금할 수 없다. 민족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서 서로 화해하고 화합하고 합작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강대국으로 둘러싸인 지정학적 조건으로 해서 좌도 우도 아닌 중간노선, 중립노선을 확고히 견지해야만 나라의 진정한 독립도 보장하고 통일도 이룰 수 있다. 나라와 전체 민족을 위해서는 지도자건 국민이건 자기자신부터 먼저 죽여야 한다. 자기를 죽여야 한다. 우리 민족이 겪지 않았어야 할 참화와 재난과 동족상잔을 당하고 보니 원통하다. 조국과 민족의 장래가 걱정된다. | 우사 김규식 | 1881.1.29~ 1950.12.10 |
소대원을 모두 잃은 데 대하며 무한한 자책을 금치 못한다. 소대원이 잠든 이 고지에서 죽음을 같이하고 속죄하려 한다. | 김용호 중위[226] | 1929.9.16~1952.11.1 |
나라의 앞날이 걱정이오. | 인촌 김성수 | 1891.10.11~ 1955.2.18 |
오늘 죽을 것을 아니까 여러 가지 절차를 밟지 말고 간단하게 처리해주시오. 그런데, 수상께서 내 처와 두 아이를 외국으로 보내겠다고 약속해놓고 아직까지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소. 꼭 약속을 지켜달라고 수상께 전해주시오. | 이정 박헌영[227][228] | 1900.5.28~1956.12.5 |
독립과 통일의 제단에 나를 바쳤다고 후세에 전해다오. 우리는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으니 잘못하면 정치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우리의 귀중한 절개를 훼손당할 염려가 있소. 각자의 처신에 특별히 주의합시다. 삼균주의 노선의 계승자도 보지 못하고 갈 것 같아 못내 아쉽소. 이념과 사상을 후세에 전해주오. | 소앙 조용은 | 1887.4.30~1958.9.10 |
막걸리 한 사발과 담배 한 개비만 주시오.[229] | 죽산 조봉암 | 1898.9.25~1959.7.31 |
이 벼! 끝을 보지 못하고 내가 죽어야 하다니! | 우장춘 박사[230] | 1898.4.8~1959.8.10 |
2.10.1.3. 1960년대
1960년대 | ||
유언 | 인물 | 생몰년 |
시간이 없는 관계로 어머님을 뵙지 못하고 떠납니다. 끝까지 부정선거 데모로 싸우겠습니다. 지금 저와 저의 친구들, 그리고 대한민국 모든 학생들은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위하여 피를 흘립니다. 어머님, 데모에 나간 저를 책하지 마시옵소서. 우리들이 아니면 누가 데모를 하겠습니까. 저는 아직 철없는 줄 압니다. 그러나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길이 어떻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와 모든 학우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나선 것입니다. 저는 생명을 바쳐 싸우려고 합니다. 데모하다가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 어머니는 저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무척 비통하게 생각하시겠지만 온 겨레의 앞날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기뻐해 주세요. 부디 몸 건강히 계세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의 목숨은 이미 바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시간이 없는 관계상 이만 그칩니다. | 진영숙 열사[231] | 1946~1960.4.19 |
저 아우들을 먼저 치료해주세요. | 김치호 열사[232] | 1938~1960.4.19 |
나도 잘못은 있기에 억울하다는 말은 안한다. 그런데 죄다 나에게만 책임을 넘기고 자신은 억울하다는 이(대표적으로 임화수)들이 있다. 그들에게 적어도 자기 잘못은 인정하라고 말하고 싶다. | 이정재[233] | 1917.1.6~1961.10.19 |
늙으신 어머님을 두고 먼저 떠나게 되어 죄송스럽다. | 임화수 | 1921~1961.12.21 |
죽음을 앞에 두고 '조선어 첫걸음'을 시작하려 한다. 최후에 이르러 나는 나를 진우로 인식한 것이다.(옥중편지 중에서) | 이진우[234] | 1940~1962 |
화랑세기 필사본은 소중한 것이니 잘 간직할 것이며, 강역고<疆域考>는 자신이 직접 작성한 것이며, 나머지는 있으나 마나한 책이다. | 박창화[235] | 1889.05.09~1962.03.06 |
통일이 안 돼서... 유림들이 잘해 나가야... | 심산 김창숙 | 1879.7.10~1962.5.10 |
내 가슴에 붙은 죄수번호를 떼어달라, | 최영오 일병 | 1938~1963.3.19 |
점자책은 쌓지 말고 꽂아 두어라.[236] | 송암 박두성[237] | 1888.4.26~1963.8.25 |
천당이 가까운지 알았더니만 멀어… 멀어… | 박수근 | 1914.2.21~1965.5.6 |
잃었던 나라의 독립을 다시 찾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힘들었는지 우리 국민은 알아야 하며 불행했던 과거사를 거울삼아 다시는 어떤 종류의 것이든 노예의 멍에를 매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내가 우리 민족에게 주는 유언이다. | 이승만 전 대통령 | 1875.3.26~1965.7.19 |
더 일할 나이에 조국통일도 못 해보고 눈을 감으니 한스럽고 죄송할 뿐이다. 모름지기 평생의 소원인 통일 성업을 꼭 이루어 주기를 바란다. | 김종오 | 1921.5.22~1966.3.30 |
만일 부의금이나 내게 돌아오는 제물이 있을 때는 그것을 수족같이 부리던 상궁들의 조반석죽[238] 이라도 마련해달라.[239] | 순정효황후 윤씨 | 1894.9.7~1966.2.3 |
억울하다! 아직....더.. 아직 더 활동할 수 있어, 아직 죽긴 억울하다! | 김승호 | 1918.7.13~1968.12.1 |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240] | 이승복[241] | 1959.12.9~1968.12.9 |
2.10.1.4. 1970년대
1970년대 | ||
유언 | 인물 | 생몰년 |
탑승객이 다칠까 봐 몸을 던졌다. | 전명세[242] | 1931~1971.1.23 |
인간의 생명이란 불멸하여 육체가 없어지더라도 죽은 사람이 아니므로, 장례식 대신 화려한 승리의 길로 환송해 주는 환송예배를 해주기 바란다. | 김활란 | 1899.1.18~1970.2.10 |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마라! / 어머니, 내가 못 다한 일 꼭 어머니가 이루어 주십시오.[243] / 배가 고프다…[244] | 전태일 열사 | 1948.9.28~1970.11.13 |
손녀 유일링에게는 대학 졸업까지 학자금 1만 달러를 주고, 딸 유재라에게는 내 묘소 주변 5천 평 부지를 준다. 단, 그곳은 유한동산으로 가꾸며, 울타리도 절대 치지 말고 유한중학교, 유한공업고등학교[245] 학생들이 마음껏 뛰어놀게 하여 학생들의 티 없이 맑은 정신에 깃든 젊은 의지를 지하에서나마 더불어 느끼게 해달라. 아들 유일선은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자립해서 살아가라. 그리고 아내(호미리)의 노후는 재라가 잘 돌봐주기를 바란다. 내 소유 주식 14만 941주는 모두 '한국 사회 및 교육 원조 신탁기금'에 기증한다. | 유한양행 창립자 유일한 박사[246] | 1895.1.15~1971.3.11 |
어머니 품에서 땅에 묻힐 때까지, 나는 웃으며 행복에 넘쳐 살았다고 동서(東西)에 전해 주! | 윤을수 라우렌시오 신부 | 1907.10.2~1971.5.9 |
내 평생에 제일 큰 실수는 공산주의를 따른 것이다. 너희들을 두고 가자니 내 마음이 안 놓이는구나. 이 다음에 통일되면 나를 서울에 갖다 묻어 다오. | 심영 | 1910.9.3~1971.7.24 |
만화는 사람이 죽었다가도 살아나더라. 나도 한 번 죽었다 살아날 수 있는지 시험해 보고 싶다. | 정병섭 | 1959~1972.1.31 |
나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맨주먹으로 사업을 시작하여 오늘의 기아산업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나라와 내 민족의 덕이다. 나라가 독립되고 국력이 신장되지 않으면 아무 사업도 할 수 없다. 내가 좀 더 조국의 발전에 기여하지 못하고 떠나는 것이 한스럽다. 온 겨레가 잘살아보자고 일으킨 새마을운동에 적극 참여하길 바란다.[247] | 학산 김철호[248] | 1905?[249]~1973.11.22 |
나는 정말 바보였어요… 일본에서 태어난 것이 한스러워요. 일본에서 속고만 살아… 속아 살았어요. 속아 살아… 결국 이렇게 되어버리다니… 박정희 씨에게 정말 몹쓸 짓을 했어요. 육영수 씨와 죽은 분[250]에게는 정말 죽을 죄를 졌어요. 저도 그분들 곁으로 같이 보내주세요… 제 처에게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아직 나이도 젊으니 재혼해서 제2의 인생을 살도록 전해주세요.... | 문세광[251] | 1951.12.26~1974.12.20 |
지은 죄를 깊이 뉘우친다. 전과자에 대한 사회적 냉대가 시정되었으면 한다. | 김대두 | 1949.10.11~1976.12.28. |
이승에서 어머니를 못 뵙는다면 무덤에서 어머니를 뵙고 싶다. | 방영근 | 1948~1976.12.28 |
저는 절대로 죽이지 않았습니다. 저의 유언을 가족에게 꼭 전하여 제가 죽은 뒤에라도 누명을 벗도록 해주십시오. 여기 검사, 판사도 나와 있지만 저와 같이 억울하게 죽는 이가 없도록 해주십시오. 저는 기독교인으로 죽습니다. 천당가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나를 거짓으로 고발해 나를 죽게한 모든 사람들은 죽어 원혼이 되어서라도 반드시 복수할 것입니다. | 오휘웅[252] | 1945.03.02~1979.09.13 |
나는 괜찮아… | 박정희 대통령[253] | 1917.11.14~1979.10.26 |
김 부장, 김 부장 왜 이래![254] | 차지철 | 1934.11.16~1979.10.26 |
오늘 저녁도 못 들어갈 것 같아. 미안해.[255] 상황이 아주 급박합니다.5분 대기 소대 출동 지시를 했고 보안사에서 곧 밀어 닥칠 겁니다.[256] | 김오랑 | 1944.4.5.~1979.12.13 |
우리 중대장님 지시 없이는 절대 총을 줄 수 없다.[257] | 정선엽 | 1956.6.21~1979.12.13 |
2.10.1.5. 1980년대
1980년대 | ||
유언 | 인물 | 생몰년 |
사랑하는 내 조국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먼저 감사하며 내가 한 일들이 비록 미흡하고 아쉬운 점도 많았지만 그러나 나는 나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나도 헌신했지만 건군 초기에 나와 함께 일한 동지들을 잊을 수 없으며 그들은 누구보다도 바르고 굳건한 신념으로 해군을 만들어 보려고 힘써왔고 오늘날의 대해군의 발전에 좋은 밑거름이 되었다고 확신한다. 또 우리는 동족상잔의 전란을 몸소 겪었으며 일제의 탄압과 그 무서운 고문도 직접 겪었다. 따라서 바라는 것은 이 땅은 물론 세계 어느 곳에서도 자유를 억압하는 공산당의 학정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며 또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피로써 싸워준 UN군의 고귀한 희생에 감사해야 한다. 내 나라를 도로 찾으려고 고귀한 생명을 바친 우리 조상들의 사무친 한과 나라를 지키려고 싸우다 산화한 장병들의 넋과 한을 잊지 말고 다시는 내 조국을 남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잘 지켜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 손원일 제독 | 1909.6.22~1980.2.15 |
내 조국 대한민국은 희망 있는 국가요 또한 그 국민들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의 대업은 조국통일이며 조국통일에 목적이 있는 한 우리 국민은 어떠한 난관이 있더라도 이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민족의 새로운 번영과 발전을 이룩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번 시련도 온 국민이 수천년에 걸쳐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이를 슬기롭게 처리해온 위대한 민족혼을 발휘하여 서로 믿고 존중하며 하나의 목적을 위하여 단결하여 온 국민이 더욱 기쁜 마음으로 국가에 봉사하고 고락을 같이 하면서 이번 기회를 새로운 번영의 터전으로 삼아주길 빈다. 강한 성위요, 방패와 병기가 되신 주님께서 나를 키워주고 오늘 이 날 이 때까지 품어준 우리 대한민국 국군을 그 강한 오른팔로 지켜주시고 이끌어주서 간성으로서의 소금의 직분을 다할 것을 믿습니다. 부인에게 하고 싶은 말은 아이들을 떳떳하게 잘 길러서 나라에 봉사할 수 있는 인물을 만들어주기 바란다. 마지막으로 나를 위해 염려해 주시고 애써주신 분들에게 감사합니다. 대한민국 만세! 대한민국 만세! 대한민국 육군 만세!! | 박흥주[258] | 1939.12.15~1980.3.6. |
이 세상에 부끄러운 일을 절대 하지 않았다. 나의 최후진술을 자자손손 전해 다오. 그 속에 나의 진실이 있다.[259] | 김재규[260] | 1926.3.6~1980.5.24 |
우리의 죽음은 저들의 야만성을 증거할 것입니다. 우리는 언젠가는 이 땅에 민주주의란 이름으로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 윤상원[261] | 1950.9.18~1980.5.27 |
일본군 출신 정일권과 백선엽이 모함 공작을 벌여 광복군의 씨를 말렸다.[262] | 김홍일 장군 | 1898.9.23~1980.8.8 |
전체 재소자의 처우가 개선될 수 있다면, 어머니 나는 죽어도 좋아요. | 박관현[263] | 1953.6.10~1982.10.12. |
이기고 지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오로지 하나님의 사랑만이 진실하다. | 시라소니 이성순 | 1916.2.29~1983.1.25 |
내 죽거든 마당이 보이는 넓적한 곳에 묻어달라. | 김정호 | 1952.5.27~1985.11.29 |
내일 시청에 나가야 하는데… | 이한열 열사 | 1966.8.29~1987.7.5 |
형 잠시 나갔다 올게. 가수 됐다고 동창이 찾아왔는데 빨리 해치우고 올게~. | 유재하[264] | 1962. 6.6~1987.11.1 |
대한민국의 비리를 밝히고 죽겠다! 영등포 교도소에서 죽지 못한 게 한이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우리나라의 법이 이렇다! 나는 지금 무척 행복하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 있고, 내 할 말 다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있다. 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시를 한편 남기겠다. 내 유언을 한마디로 줄이면 나는 행복한 거지가 되고 싶었던 염세주의자이다!! | 지강헌[265] | 1954~1988.10.16 |
못 배운 놈이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 오직 한 마디 마지막 여인을 내 생명보다 더 사랑했다.[266] | 김성준[267] | 1953.6.3.~1989.2.3. |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 비전하가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 나라. 이구 씨가 보고 싶어요 | 덕혜옹주[268] | 1912.5.25.~1989.4.21. |
2.10.1.6. 1990년대
1990년대 | ||
유언 | 인물 | 생몰년 |
사장님, 저 괜찮으니까 오늘 퇴원해서 내일 녹음에 들어가야겠어요. | 가수 김현식 | 1958.2.18~1990.11.1 |
추락한다. 탈출하겠다. 아, 전방에 마을이 보인다. 탈출 불가. | 이상희 대위 | 1968~1991.12.13 |
보안과장님 금년엔 꼭 진급하십시오! | 윤도영[269] | 1953~1991.12.18 |
(울먹이며)피해 아동에게 미안합니다... 부모님께 너무 큰 죄를 졌습니다... | 홍순영 | 1967.03.02~1991.12.18 |
이 쓸모없고 하찮은 목숨에 아무런 미련 없습니다. | 윤용필 | 1959~1992.12.29 |
가난해서 변호사를 선임하지 못한 자가 있습니다. 국선 변호사는 형식적으로 얼굴만 내밉니다 검사님께 부탁합니다. (사건 기록을) 피해자 위주로 허위 작성하는 수가 있습니다. 작은 사건을 크게 만들 수 있고 가해자에게 인색합니다. 공직에서 뇌물 받아 먹고 돈과 배경없으면 처벌당하는 것을 재검토하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담배 한 대 피우게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 김삼중 | 1955~1992.12.29 |
참선 잘 하그래이. | 성철 스님 | 1912.4.6~1993.11.4 |
전두환만큼은 정말 나쁜 놈이다. | 정일권 | 1917.11.21~1994.1.17 |
내 소원은 죽은 다음 대성산혁명렬사릉 동지들 옆에 묻히는 것이다. 그렇게 해주겠다고 김정일 당 조직비서도 내게 약속했다. | 김일성[270] | 1912.4.15~1994.7.8 |
나는 범죄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습니다. 여론에 의해 심증으로 재판한 것을 부당하게 생각합니다. 제가 죄 지은 것은 달게 감당하겠습니다. 그러나 최고수의 죄를 개별적으로 낱낱이 따져 파악하지 않고 언론 보도에 의해서만 처형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 오태환 | 1959~1994.10.06 |
(불교식 삼배를 한 뒤) 나는 한겨례신문만 봅니다. 가장 정직하게 만든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유가족에게 죄송합니다 저를 마지막으로 앞으로 두 번 다시 사형 집행이 없기를 바랍니다. | 서채택 | 1946~1994.10.06 |
어머니께 내가 새 인생을 걷는다고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 김기환 | 1968~1995.11.02 |
죄인 주님 품에 안기기를 바랍니다. 이 죄인을 받아주옵소서 | 강동은 | 1972.10.27~1995.11.02 |
피해자 가족에게 용서를 빕니다. 나는 큰 죄를 짓고 죄인의 몸으로 이곳에 왔지만 내가 모든 것을 잃었다 할지라도 이곳에서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게 되어 기쁩니다. 여러분도 예수 믿고 천국에서 만납시다. | 김현양 | 1972.6.17~1995.11.02 |
...할 말 없습니다. | 문상록 | 1971~1995.11.02 |
소장님, 목사님, 자매님 여러분들로 인해 영안을 뜨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사형수는 세상 사람이 보는 것 같은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지금 나는 세상 사람이 보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 땅에 사형 제도가 없어지고 종신형으로 대체하여 재소자 위해 전도하고 살 수 있도록 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이날로 마무리하지만, 재소자를 위해 전도하며 살기를 원했는데… | 강문섭 | 1974~1995.11.02 |
저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여기 계시는 분들 중 예수님 안 믿는 분이 계시다면 꼭 예수님 믿고 구원을 받으면 좋겠습니다. 피해자 분께 죄송합니다. | 백병옥 | 1974~1995.11.02 |
제 몸을 실험용으로 필요한 데 쓰기를 바랍니다. | 온보현 | 1957.4.6~1995.11.2 |
엄마, 대성공이야~~ 낼 갈게.... 짐 다 싸 놨어 새벽에 갈게 엄마가 해주는 밥하고 김치 너무 먹고 싶어.....[271] 에..... 여러분들 저 이제 계속해서 열심히 할꺼니까요. 어... 잘 봐주시고 귀엽게 봐주시구요. 네. 감사합니다. 안녕~ [272] | 김성재 | 1972.4.18~1995.11.20 |
내가 하늘나라로 떠나거든 장례식은 치르지 말고 내 몸은 태워서 부산 앞바다에 뿌려주기 바란다. | 장기려 | 1911.10.5~ 1995.12.25 |
-내가 지금 이 모든 일을 한글로 적는 것은 아무래도 유서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그 누군가 이 글을 봤을 때 나를 이해하길 바래서이다. 내가 오랫동안 각오해 왔던 바이지만 드디어 용기를 내어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 나는 그동안 약을 복용해왔다. 그 이유는 안정을 찾기 위해서였다. 이 세상은 내가 존재하기에 너무도 험한 곳이고 더 이상은 견디기 힘들 것 같다. 2집 활동을 앞둔 나는 더 이상 자신도 없고... 활동 중 군대도 가야하고 내 가족들을 또 사무실 가족들을 책임지기엔 너무도 벅차다. 새해를 맞이해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게 차라리 나을 것 같다. 난 이제껏 진실하지 못했다. 하지만 몇 사람들에겐 정말 죄송하다. 하나님, 부모님, 전무님, 실장님, 정형.승만.세진(이 셋은 동등하다.) 태석이 등등 너무 미안하다. 그들은 남은 인생을 나처럼 살지 않길 바란다. 내가 못 이룬 꿈을 내 동생들이 이루었으면 좋겠다. 난 항상 생각해 왔다. 무엇이 날 이렇게 초라하게 만드는지... 그 무엇보다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못 이긴 것 같다. 연예인으로서, 또 한 사람으로서... 난 더 이상 힘이 없다. 차라리 미국에서 평범하게 공부나 했었으면 하는 생각도 든다. 세상에게 할 말은 뚜렷이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냥 진실한 세상이었으면 한다. 내 마음을 모두 표현 못 하겠지만 나를 정말 지켜오고 나를 아는 사람은 날 이해할 것이다. 그리고 그 아픔도 알 것이다. 나로 인해 피해를 보는 사람은 정말 없길 바란다. 전무님은 내가 죽은 뒤에라도 PR을 잘해 2집이 많이 성공적이길 빈다. 내가 이런 일을 저지를 것이라는 건 아무도 모르겠지. 난 항상 밝게 살아왔으니까..죄송하다... 정말 죄송하다... 정말, 사랑하고 싶었는데...그러고 싶었는데... 전무님께 정말 죄송하구요 실장님께도 죄송하구요 다른 바램은 아무것도 없구요.... 우리 어머니 좀 잘 돌봐주세요. 그리고 정현이 승만이 세진이는 정말 끝까지 책임져 주세요. 그리고 저 용서해주세요....그게 저의 마지막 바램이에요. 여러분 서지원이에요. 서지원입니다. 여러분 한 해 동안 저 사랑해주신 거 정말 감사하구요. 더 이상 저를 못 보게 되더라도 저를 항상 기억해주시구요. 여러분 다 몸 건강히 새해 복 많이 받으셨으면 좋겠구요. 여러분 사랑합니다. 그것만은 기억해 주세요. | 서지원 | 1976.2.19~1996.1.1 |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273] 음악에 눈이 뜨이는 것 같다. # | 김광석 | 1964.1.22~1996.1.6 |
간첩... | 이한영 | 1960.4.2~1997.2.25 |
돈 많은 자들을 증오한다. 나에게 죄가 있다면 가지지 못한 것뿐이다. | 김선자 | 1939~1997.12.30 |
내 사체를 병원에 기증하겠습니다. 여러분도 예수 믿고 구원 얻기를 바랍니다. | 유영택 | 1968~1997.12.30 |
내 시신은 화장(火葬)하고, 훌륭한 화장시설을 만들어 사회에 기증해 장묘문화 개선에 앞장서 달라.[274] | 최종현 | 1929.11.21~1998.8.26 |
2.10.1.7. 2000년[275]
2000년대 | ||
유언 | 인물 | 생몰년 |
안녕? 너는 내가 누군지 알고 있니? 환성이야. 정말 만나고 싶었어. 넌 내 목소리 듣고 싶지도 않았니? 제가 오늘 기분이 너무 좋아요. 그래서 저의 이 좋은 기분을 전해드리려고 이렇게 왔거든요. 어때요? 제 좋은 기분이 전해지나요? 조금 전까지 기분 나빠한 일이 있다면 이제부터는 기분 전환하면서 좋은 기분으로 하루 잘 보내세요. 아셨죠? | 김환성 | 1981.02.14~2000.06.15[276][277] |
2.10.2. 21세기
2.10.2.1. 2000년대
2000년대 | ||
유언 | 인물 | 생몰년 |
저 세상에 가서도 곁에서 모실 수 있도록 순정효황후 위패가 모셔져 있는 백운사에서 49재를 지내달라. | 성옥염 상궁 | 1920~2001.5.4 |
에이, 괜히 왔다 가네. | 중광 스님 | 1934.1.4~2002.3.9 |
"아들아, 내가 이제 가야겠다. 근데 너 내가 왜 죽는지 아느냐?" (장소팔) / "아니 아버지. 금방 회복되실 텐데 어찌 그런 말씀을… 돌아가신다면 몸이 아프셔서." (아들) / "아니다. 심심해서 죽는다. 너도 늙어봐라. 늙으면 진짜 할 일도 없고 심심해 죽겠다. 그래서 세상을 뜨는 거야(더 재밌는 게 없나 하고)." | 만담가 장소팔 | 1922~2002.4.22 |
엎드려! 쏘란 말이야...! | 윤영하 해군 소령 | 1973.11.24~2002.06.29 |
국민 여러분, 담배 맛있습니까? 그거 독약입니다. 저도 하루에 두 갑씩 피웠습니다. 하… 지금은 정말 후회합니다. 1년 전에만 끊었어도 말입니다. 국민 여러분, 담배는 가정과 건강을 파괴합니다. 국민 여러분, 담배 끊어야 합니다. | 이주일 | 1940.10.24~2002.08.27 |
예전처럼 집 거실에서 엄마 아빠랑 놀 수 있을까? 살려줘, 엄마. 죽고 싶지 않아. 집에 데려다줘...[278] | 박동혁 해군 병장 | 1981.8.25~2002.9.20 |
내가 죽거든 금메달과 마라톤 기념품을 반드시 한 곳에 모아 사람들이 나를 기억하게 해달라. | 손기정 | 1912.8.29~2002.11.15 |
잘 잤어요. 여긴 날씨 맑음. 오늘 하루 보고 싶어도 쬐금만 참아요.[279] | 송혜정[DG] | 197?~2003.02.18 |
...좀 있으면 중앙로역을 지난다. 곧 갈게. 조금만 기다려.[281] | 서동민[DG] | 1982~2003.02.18 |
저녁밥 맛있게 준비해 놓을 테니깐 오늘 빨리 퇴근해요![283] | 김인옥[DG] | 1974~2003.02.18 |
지현아 나 죽어가고 있어. 나를 위해 기도해줘.[285] | 허현[DG] | 1976~2003.02.18 |
엄마가 여기 와도 못 들어와![287] | 김귀순 씨의 딸[DG] | 1982?~2003.02.18 |
아... 안 돼... 안 돼![289] | 이현진[DG] | 1984~2003.02.18 |
불이 났어. 나 먼저 하늘나라 간다. 할렐루야...아멘.[291] | 김창제[DG] | 1935~2003.02.18 |
엄마 지하철에 불이 났어. (엄마: 영아야, 정신 차려야 돼.) 엄마 숨을 못 쉬겠어. (엄마: 영아, 영아, 영아...) 숨이 차서 더 이상 통화를 못하겠어. 엄마 그만 전화해. (엄마: 영아야, 제발 엄마 얼굴을 떠올려 봐.) 엄마 사랑해...[293] | 이선영[DG] | 1984~2003.02.18 |
어무이! 지하철에 불이 나 난리라예. (황점자 씨: 뭐하노, 빨리 나온나.) 못 나갈 것 같아예. 저 죽지 싶어예. 어머이 애들 잘 좀 키워주이소.[295] | 박정순[DG] | 1972~2003.02.18 |
열차에 불이 났다. 살아 나갈 수 없을 것 같으니 꿋꿋하게 살아라.[297] | 최금자[DG] | 1941~2003.02.18 |
내 한목숨 죽어서 동성애 사이트가 유해매체에서 삭제되고, 소돔과 고모라 운운하는 가식적인 기독교인들에게 깨달음을 준다면, 나 죽은 게 아깝지 않아요. | 육우당[299] | 1984.08.07~2003.04.26 |
명예회장님께서는 당신이 누구보다 진실한 자식이었습니다. 당신이 회장 모실때 보면 저희 자식의 한 사람으로서 부끄러웠습니다. 명예회장님께서 원했던 대로 모든 대북사업을 강력히 추진하기 바랍니다. 당신 너무 자주하는 윙크 버릇을 고치세요./지이 엄마, 모든 것이 나의 잘못입니다. 당신에게 모든 짐만 남기는군요. 지이, 영이, 영선, 이 아빠를 용서하기를 바랍니다. 어리석은 아빠를 용서하기를 바랍니다. 나의 유분은 금강산에 뿌려주기 바랍니다. 지이야, 오늘 보니 더 이뻐졌더군. 나 때문에 너의 생활이.... 사랑해. 영이, 너를 볼 때마다 어른이 되가는 것을 느끼는데 너는 굳건히 잘 살 것이야. 영선아, 너하고의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구나. 지이, 영이, 영선, 엄마 잘 모시고 행복하게 살아라.[300] | 정몽헌[301] | 1948.09.14~2003.08.04 |
나를 위해 정치를 하지 말고 나라와 민족, 지역을 위한 정치를 해다오. 恩義廣施(은의광시)요 人生何處不相逢(인생하처 불상봉)이다. 경행록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은혜와 의를 널리 배풀라. 살다 보면 언젠가 다시 만나지 않겠는가? | 김윤환 | 1932.6.7~2003.12.15 |
혜원 엄마,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서 몇 자 정리해두고자 합니다. 당신이 가장으로서 집안을 잘 이끌어 주시오. 세상에 한번왔다가 흔적, 보람 남기고자 했는데 안타깝소. 어머님 마지막 당신 책임이오. 사랑하는 당신께, 실감나지 않는 현실입니다. 많은 짐을 당신께 남기고 가는 사람 미워하시오. 사랑하오. 당신의 사람 상영 2004.01.02 | 안상영[302] | 1938.3.18~2004.2.4 |
落ち葉は秋風を恨まない(낙엽은 가을바람을 원망하지 않는다) | 장명부[303] | 1950.12.27~2005.4.13 |
노 대통령에게 나는 살고 싶습니다.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제발 이라크에 한국 군인들을 보내지 말아 주십시오. 제발, 이건 당신의 실수입니다. 이건 당신의 실수입니다. 많은 한국인들은 그들의 자식을 이라크에 보내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모든 한국 군인들은 이라크에서 나가야 합니다. 제발, 제발. 이건 당신의 실수입니다. 왜 당신은 왜 당신은 한국군을 이라크에 보냈나요? 고국에 게신 한국 동포들, 제발 저를 도와주십시오. 제발, 대통령님! 제발 부시! 제발, 노무현 대통령! 제발 이라크에서 나가 주십시오. 제발, 나는 살고 싶습니다. 나는 한국에 가고 싶습니다.[304] | 김선일[305] | 1970.09.13~2004.06.22 |
엄마 사랑해. 내가 꼭 지켜줄 거야. 일이 너무나 하고 싶었어.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게 돼버렸는데 인정하지 못하는 주위 사람들에게… 내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 힘듦을 알겠어… 엄마 생각하면 살아야 하지만 살아도 사는 게 아니야. 내가 꼭 지켜줄 거야. 늘 옆에서 꼭 지켜줄 거야. 누구도 원망하고 싶지 않았어. 혼자 버티고 이겨보려 했는데… 안 돼… 감정도 없고… 내가 아니니까. 일년 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어. 맨날 기도했는데 무모한 바람이었지. 일년 전이면 원래 나처럼 살 수 있는데 말야. 아빠 얼굴을 그저께 봐서 다행이야. 돈이 다가 아니지만 돈 때문에 참 힘든 세상이야. 나도 돈이 싫어. 하나뿐인 오빠. 나보다 훨씬 잘났는데 사랑을 못 받아서 미안해. 나 때문에 오빠 서운한 적 많았을 거야. 가고 싶은 곳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는데. 먹고 싶은 것도 많았는데. 가족끼리 한 집에서 살면서. 10년뒤쯤이면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하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 다 해보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가장 많이 가장 많이 사랑하는 엄마,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는데-. 내가 꼭 지켜줄게 꼭 지켜줄게-. 마지막 통화: 언니…고마웠고 미안했고 힘들었어. 꼭 오늘이어야만 한다고 했던 사람. 고마웠어-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날 사랑해 줬던 사람들-만나고 싶고 함께 웃고 싶었는데…일부러 피한 게 아니야. 소중한 걸 알지만 이젠 허락지 않아서 미안해. | 이은주 | 1980.12.22~2005.2.22 |
맛있어, 맛있어. (おいしい、おいしい。)[306] | 백남준 | 1932. 07. 20~2006. 0 1. 29 |
세상에 웃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 인간이 동물에 비해 우월한 이유도 웃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돈을 벌려고 애쓰는 것도 결국 웃고 살기 위한 것인데, 많은 사람들이 돈 버는 데 너무 신경을 쓴 나머지 웃지 못하고 산다.[307] | 김형곤 | 1960.5.30~2006.3.11 |
인성검사를 했는데, 답변들이 다섯가지야. 아주그렇다, 꽤 그렇다,보통 그렇다,그렇지 않다, 매우 아니다. 이런식으로 돼있는데, 질문에 대해 답을 체크할 때마다 내가 정신병자 일거 같은 느낌이 들어서 도중에 포기. | hugspa[308] | 1990?~2006.3.22 |
나 살고 싶다! | 김형은[309] | 1981.4.25~2007.1.10 |
여기 생활은 괜찮아. 한국 식당이 와서 밥 해주는데 반찬도 많고 군대 밥보다 맛있고 고기도 끼니마다 나와. … 여기 위험한 거 하나도 없으니까 걱정하지 말구 6개월 동안 건강히 있다가 갈 테니까 그때 봐요. 그럼 나중에 전화할게!-2006.9.29. 아프가니스탄에서 막내 장호가.[310] 또는 라덴이 형 잡으러 간다.[311][312] | 윤장호 하사(당시 병장, 사후 추서.)[313] | 1980.9.21~2007.2.27 |
나는 모세처럼 바다를 가르고 내 동포들을 이끌 것이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그냥 떠날 수도 도망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이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다. 나의 아이들과 형제자매들을 위한 것이다.내 삶이 이렇게 끝나기를 기대해왔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너희들이 나한테 해준 만큼 총알로 되갚아주마. 내가 이런 짓을 할 때까지 너희들이 나한테 한 짓을 생각해봐. 힘없고 약한 나의 형제자매들 박해받는 동양인들을 위해서 나는 괴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314] | 조승희 | 1984.1.18~2007.4.16 |
어머니… 어머니 아아, 어머니… | 권정생 | 1937.9.10~2007.5.7 |
제가 요즘 너무 악플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ㅠ.ㅠ 정말 제가 성형수술했다면 그게 말이 되요? 3개월만에 붓기도 다 빠지구 그러나요? 약먹구 뺐다면 오히려 약먹고 살찌신분들은 뭐가되요? 정작 본인들일 아니라고, 또 익명이라고 함부로 올리시는 글. 제가 언제까지 다 참아야하죠? 솔직히말하죠. 저 진짜 3개월내 굶고 뺐어요. 다들 아시잖아요. 성장기일때에요 키크는것도 포기하구 정말 죽어라 굶었어요. 한땐 정말 죽는게 나아서 옥상도 여러번 올라갔었구요.. 하루에 우유 한두컵씩 먹으면서 맨날 빈혈 일어나서 병원에 실려가면서 뺐습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되는데요 죽길바래요? ... 정말 힘듭니다.. 저두 사람이에요.. 정말 | 놀라운 대회 스타킹 출연자 40kg 감량 소녀 이 모 양[315] | 1992 ~ 2007.6.5 |
내일 천사들이 사는 동네로 이사가요. 열심히 기도하고 좋아진 모습으로 돌아올께요. 도시에서 벗어나서 시골에서 사는 것이기 때문에 핸드폰도 끓을 것 같아요. 저는 이제 기적을 믿어볼께요. 파이팅![316] | 이애정 | 1987.3.17~2007.9.6 |
아직 죽기는 이르다.[317] | 이언 | 1981.2.5~2008.8.21 |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 우리 선희 사랑해주세요. 욕하지 마시고 사랑해주세요. 우리 선희처럼 착한 사람 없어요. 어려운 가정 꿋꿋이 이끌어나가고 남편 잘못 만나 고생하면서도 얼굴 한 번 찡그린 적 없고 힘들어도, 자신이 가장 힘들 텐데도 웃으면서 격려해주고 이런 사람 없어요. 제발 저 대신 우리 선희 감싸주고 사랑해주세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중략) 선희야 사랑해. 이 방법밖에 없어서 미안해. 사랑해 선희야. 미안하고 미안하고 사랑해 미치도록…. 장기는 만약 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다 써주세요. 죽고 나서 빨리 발견되면 쓸 수 있을 텐데…. 기도할게요. | 안재환 | 1972.6.8~2008.8.22? |
세상 사람들에게 섭섭하다. 사채니 뭐니 나와는 상관이 없는데 나를 왜 괴롭히는지 모르겠다. | 최진실 | 1968.12.24~2008.10.2 |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 |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 | 1922.7.2~2009.2.16 |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밖에 없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이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318] 정토원에 들러 선(진규) 법사가 있는지 보고 오지.[319] | 노무현 전 대통령 | 1946.9.1~2009.5.23 |
인생은 생각할수록 아름답고 역사는 앞으로 발전한다.[320] | 김대중 전 대통령 | 1924.1.6~2009.8.18 |
아빠, 밖에 천둥이 쳐요. | 이석규[321] | 2003.08.26~2009.11.08 |
현재 사형을 폐지할 생각은 없다고 한다. 요즘 사형제도 문제가 다시... 덧 없이 왔다가 떠나는 인생은 구름 같은 것[322] | 정남규 | 1969.3.1~2009.11.22 |
2.10.2.2. 2010년대
2010년대 | ||
유언 | 인물 | 생몰년 |
Everything is good.[323] | 이태석 | 1962.10.17~2010.1.14 |
모든 분들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내가 금생에 저지른 허물은 생사를 넘어 참회할 것이다.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 있다면 모두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에 사용해 달라. 이제 시간과 공간을 버려야겠다. | 법정[324] | 1932.10.8~2010.3.11 |
오늘 안으로 모든 실종자들을 책임지고 구조해 내겠다. | 한주호[325] | 1958.9.8~2010.3.30 |
그동안 잘 대해줘서 고맙다.[326] | 손창섭 | 1922~2010.6.23 |
아버지 대신 내가 아파야 하는데… 미안해, 미안해. | 박용하 | 1977.8.12~2010.6.30 |
성도들에게 감사한다.[327] | 옥한흠 | 1938.12.5~2010.9.2 |
드디어 이사가끝났다 내군생활에도 말년에 편지를 써보는군 내일 날씨안좋다던데 배 꼭 뜨길기도한다.[328] | 서정우 병장 | 1989.8.13~2010.11.23 |
내가 죽으면 나를 청바지 입혀서 화장해 달라. | 트위스트 김[329] | 1936.4.6~2010.11.30 |
그동안 너무 도움 많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창피하지만, 며칠째 아무것도 못 먹어서 남는 밥이랑 김치가 있으면 저희 집 문 좀 두들겨 주세요. | 최고은[330] | 1979~2011.1.29 |
항공기 진동이 너무 심해서 고도 컨트롤이 안 돼... 곧 디칭(비상착수)할 것 같애... 아... | 이정웅[331] | 1969~2011.7.28 |
공을 던지고 싶다…. | 최동원[332] | 1958.5.24~2011.9.14 |
내려오다 죽을 뻔했네. 목표 A지점에 도착 실패. 눈과 가스를 동반한 낙석으로 운행 중단한다. 전진캠프로 하산할 예정이다. | 박영석[333] | 1963.11.2~2011.10.20? |
1. 미국과의 심리전에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 합법적인 핵 보유국으로 올라 미국의 영향력을 크게 악화시켜야 하며 국제제재를 풀어 경제 발전을 위한 대외적 조건을 마련해야 한다. 또한 6자 회담을 우리가 핵을 없애는 회의가 아니라 우리가 핵을 인정하고 핵 보유를 합법적으로 전 세계에 공식화하는 회의로 만들어야 하며, 제재를 푸는 회의가 되어야 한다. 2. 중국은 현재 우리와 가장 가까운 나라지만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국가이다. 그들에게 이용당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3. 자신의 유훈의 집행과, 김정남을 비롯한 친정 식구들의 거취, 국내외 자금관리책을 고모인 김경희에게 맡기도록 하라. 4. 너의 큰형인 김정남에게 배려해야 한다. 그 아이는 절대 나쁜 애가 아니다. 그의 애로를 덜어주도록 해야한다. 5. 내 시신은 영구 보존하라. | 김정일[334] | 1941.02.16~2011.12.17 |
모두들 안녕히 계세요. 제가 그동안 말을 못하지만, 매일 라면이 없어지고, 먹을 게 없어지고, 갖가지가 없어진 이유가 있어요. 제 친구들이라고 했는데 서원규하고 우재관이라는 애들이 매일 우리 집에 와서 절 괴롭혔어요. 매일 라면을 먹거나 가져가고 쌀국수나, 용가리, 만두, 스프, 과자, 커피, 견과류, 치즈 같은 걸 매일 먹거나 가져갔어요. 3월 중순에 XXX라는 애가 같이 게임(메이플스토리)을 하자고 했는데 협박을 하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그때부터 매일 컴퓨터를 많이 하게 된 거에요. 그리고 그 게임에 쓴다고 제 통장의 돈까지 가져갔고, 매일 돈을 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제 등수는 떨어지고, 2학기 때쯤 제가 일하면서 돈을 벌었어요. (그 애들이) 계속 돈을 달라고 해서 엄마한테 매일 돈을 달라고 했어요. 날이 갈수록 더 심해지고 담배도 피우게 하고 오만 심부름과 숙제를 시키고, 빡지까지 써줬어요. 게다가 매일 우리 집에 와서 고 나중에는 XXX이라는 애하고 같이 저를 괴롭혔어요. 키우라는 양은 더 늘고, 폭행 정도도 늘고, 수업시간에는 공부하지 말고, 시험문제 다 찍고, 돈벌라 하고, 물로 고문하고, 모욕을 하고, 단소로 두들겨 패고, 우리 가족을 욕하고, 문제집을 공부 못 하도록 다 가져가고, 학교에서도 몰래 따돌리고, 온갖 심부름과 숙제를 시키는 등 그런 짓을 했어요. 12월에 들어서 자살하자고 몇 번이나 결심을 했는데 그때마다 엄마, 아빠가 생각나서 저를 막았어요. 그런데 날이 갈수록 심해지자 저도 정말 미치겠어요. 또 밀레 옷을 사라고 해서 자기가 가져가고, 매일 나는 그 녀석들 때문에 엄마한테 돈 달라하고, 화내고, 매일 게임하고, 공부 안하고, 말도 안 듣고 뭘 사달라는 등 계속 불효만 했어요. 전 너무 무서웠고 한편으로는 엄마에게 너무 죄송했어요. 하지만 내가 사는 유일한 이유는 우리 가족이었기에 쉽게 죽지는 못했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제 몸은 성치 않아서 매일 피곤했고, 상처도 잘 낫지 않고, 병도 잘 낫지 않았어요. 또 요즘 들어 엄마한테 전화해서 언제 오냐는 전화를 했을 거에요. 그 녀석들이 저한테 시켜서 엄마가 언제 오냐고 물은 다음 오시기 전에 나갔어요. 저, 진짜 죄송해요. 물론 이 방법이 가장 불효이기도 하지만 제가 이대로 계속 살아있으면 오히려 살면서 더 불효를 끼칠 것 같아요. 남한테 말하려고 했지만 협박을 했어요.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쯤에 김○○이나 윤○○이란 애들이 자세하게 설명해줄 거예요. 오늘은 12월 19일, 그 녀석들은 저에게 라디오를 들게 해서 무릎을 꿇리고 벌을 세웠어요. 그리고 5시 20분쯤 그 녀석들은 저를 피아노 의자에 엎드려놓고 손을 봉쇄한 다음 저를 폭행했어요. 또 제 몸에 칼등을 새기려고 했을 때 실패하자 제 오른쪽 팔에 불을 붙이려고 했어요. 그리고 할머니 칠순잔치 사진을 보고 우리 가족들을 욕했어요. 저는 참아보려 했는데 그럴 수가 없었어요. 걔들이 나가고 난 뒤, 저는 제 자신이 비통했어요. 사실 알고 보면 매일 화내시지만 마음씨 착한 우리아빠, 나에게 베푸는 건 아낌도 없는 우리엄마, 나에게 잘 대해주는 우리 형을 둔 저는 정말 운이 좋은 거예요. 제가 일찍 철들지만 않았어도 저는 아마 여기 없었을 거에요. 매일 장난기 심하게 하고 철이 안든 척 했지만, 속으로는 무엇보다 우리 가족을 사랑했어요. 아마 제가하는 일은 엄청 큰 불효인지도 몰라요. 집에 먹을 게 없어졌거나 게임을 너무 많이 한다고 혼내실 때, 부모님을 원망하기보단 그 녀석들에게 당하고 살며 효도도 한번도 안한 제가 너무 얄밉고 원망스러웠어요. 제 이야기는 다 끝이 났네요. 그리고 마지막 부탁인데, 그 녀석들은 저희 집 도어키 번호를 알고 있어요. 우리 집 도어키 번호 좀 바꿔주세요. 저는 먼저 가서 100년이든 1000년이든 저희 가족을 기다릴게요. 12월 19일 전 엄마한테 무지하게 혼났어요. 저로서는 억울했지만 엄마를 원망하지는 않았어요. 그리고 그 녀석들은 그날 짜증난다며 제 영어자습서를 찢고 3학년 때 수업하지 말라고 XXX은 한문, XXX는 수학책을 가져갔어요. 그리고 그날 제 라디오 선을 뽑아 제 목에 묶고 끌고 다니면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주워 먹으라 하였고, 5시 20분쯤부터는 아까 한 이야기와 똑같아요. 저는 정말 엄마한테 죄송해서 자살도 하지 않았어요. 어제(12월 19일) 혼날 때의 엄마의 모습은 절 혼내고 계셨지만 속으로는 저를 걱정하시더라고요. 저는 그냥 부모님한테나 선생님, 경찰 등에게 도움을 구하려 했지만, 걔들의 보복이 너무 두려웠어요. 대부분의 학교친구들은 저에게 잘 대해줬어요. 예를 들면 윤○○, 김○○, ○○○, ○○○, 최○○, 이○○, 장○○, 황○○, 최○○, 전○○, 이○○, 장○○, 이○○, 김○○, 남○○, 유○○ 등 솔직히 거의 모두가 저에게 잘해줬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에요. 저는 매일매일 가족들 몰래 제 몸의 수많은 멍들을 보면서 한탄했어요. 항상 저를 아껴주시고 가끔 저에게 용돈도 주시는 아빠, 고맙습니다. 매일 제가 불효를 했지만 웃으면서 넘어가 주시고, 저를 너무나 잘 생각해주시는 엄마, 사랑합니다. 항상 그 녀석들이 먹을 걸 다 먹어도 나를 용서해주고, 나에게 잘해주던 우리 형, 고마워. 그리고 항상 나에게 잘 대해주던 내 친구들, 고마워. 또 학교에서 잘하는 게 없던 저를 잘 격려해주시는 선생님들, 감사합니다. 저희 집 도어키 번호를 바꿔주세요. 걔들이 알고 있어서 또 문 열고 저희 집에 들어올지도 몰라요. 모두들 안녕히 계세요. 아빠 매일 공부 안 하고 화만 내는 제가 걱정되셨죠? 죄송해요. 엄마 친구 데려온답시고 먹을 걸 먹게 해준 제가 바보스러웠죠? 죄송해요. 형. 매일 내가 얄밉게 굴고 짜증나게 했지? 미안해. 하지만, 내가 그런 이유는 제가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란 걸 앞에서 밝혔으니 전 이제 여한이 없어요. 저는 원래 제가 진실을 말해서 우리 가족들과 행복하게 사는 게 꿈이었지만 제가 진실을 말해서 억울함과 우리가족 간의 오해와 다툼이 없어진 대신, 제 인생 아니 제 모든 것들을 포기했네요. 더 이상 가족들을 못 본다는 생각에 슬프지만 저는 오히려 그간의 오해가 다 풀려서 후련하기도 해요. 우리가족들, 제가 이제 앞으로 없어도 제 걱정 없이 앞으로 잘 살아가기를 빌게요. 저의 가족들이 행복하다면 저도 분명 행복할 거예요. 걱정하거나 슬퍼하지 마세요. 언젠가 우리는 한 곳에서 다시 만날 거예요. 아마도 저는 좋은 곳은 못갈 거 같지만 우리 가족들은 꼭 좋은 곳을 갔으면 좋겠네요. 매일 남몰래 울고 제가 한 짓도 아닌데 억울하게 꾸중을 듣고 매일 괴롭힘 당하던 시절을 끝내는 대신 가족들을 볼 수가 없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눈물이 앞을 가리네요. 그리고 제가 없다고 해서 슬퍼하시거나 저처럼 죽지 마세요. 저의 가족들이 슬프다면 저도 분명히 슬플 거예요. 부디 제가 없어도 행복하길 빌게요. -우리 가족을 너무나 사랑하는 막내 권승민 올림- P.S. 부모님께 한 번도 진지하게 사랑한다는 말 못 전했지만 지금 전할게요. 엄마, 아빠 사랑해요!!!! | 권승민[335] | 1998.2.25~2011.12.20 |
2012년을 점령하라. | 김근태 | 1947.2.14~2011.12.30 |
아직도 봄날 반짝이는 햇살보다 눈부시게 빛나고 있는 당신을 난 가슴 한가득 품고 떠납니다. 지난 40년간 늘 나를 위로해 주던 당신에게 난 오늘도 이렇게 위로를 받고 있습니다. 미안합니다. 더 오래 함께 해주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 강영우[336] | 1944.1.16~2012.2.24 |
점점 골목. 왠지 수상 | 오카보노[337] | 1992~2012.04.30 |
모든 상황을 이겨내기 위해 나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 어머니 사랑한다. | 우정호[338] | 1988.9.30~2012.8.23 |
우선 아버지, 어머니 죄송합니다. 못난 자식이 그동안 가슴에 못을 박아드렸는데 이렇게 또다시 지워질 수 없는 상처를 드리고 떠나게 된 불효자를 용서하세요. 이젠 정말 사람답게 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한 아쉬움도 가져갑니다. 이 못난 아들 세상을 더는 살아갈 자신도 용기도 없어 이만 삶을 놓으려고 합니다. 행복한 날들 가슴 뿌듯했던 날들도 많았지만 더 이상은 버티기가 힘이 드네요. 사랑하는 우리 아들 딸 환희, 준희야. 너희에게 더할 나위 없는 상처를 아빠마저 주고 가는구나, 불쌍한 애들... 이 모자란 부모를 용서하지 말아라. 법적 분쟁을 위해[339] 저의 재산은, 누나 조성미에게 전부 남깁니다. | 조성민 | 1973.4.5~2013.1.6 |
고마워[340] | 임윤택 | 1980.11.15~2013 2.11 |
남자도 사람이다![341] / 믿고 싶다. 남성을 일으킬 수 있다니.[342] | 성재기[343] | 1967.9.11~2013.7.26 |
고향과 지역주민으로부터 큰 사랑과 은혜만 입고 보답도 못했습니다. 지역의 산하, 나무 한 그루 풀 한포기 그렇게 소중할 수 없습니다. 이 땅의 서민, 농민, 어렵고 소외받는 분들 눈물을 닦아주고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정치 하고 싶었는데... 부족하고 어리석은 탓에 많은 분들에게 무거운 짐만 지웠네요. 어려운 때, 진실의 촛불을 들어야 할 때도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과분한 사랑으로 맡겨주신 막중한 소임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민주당과 당원동지들에게 한없이 미안합니다. 부디 용서해 주시고, 어렵고 힘들더라도 새로운 희망을 찾는 노력 포기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저 미안하고 감사합니다.[344] | 김종률 | 1962. 12. 25~2013. 8.13 |
이 억울함. 제발 풀어주세요. 여군, 여군, 여군! 그놈의 여군 비하발언. 듣기 싫고 거북했습니다. 저는 명예가 중요한 이 나라의 장교입니다. 짓밟힌 명예로써 저는 살아갈 용기가 없습니다. 2009년 임관부터 지금까지 제 임무를 가벼이 대한 적 단 한번도 없습니다. 정의가 있다면 저를 명예로이 해주십시요.[345] | 오혜란[346] | 1985. 11. 24~2013. 10. 16 |
나를 파월 장병이 묻혀 있는 묘역에 묻어 달라. | 채명신 | 1926.11.27~2013.11.25 |
충사.. 죠죠.. 러브라이브.. 다음주까지 기다려야 겨우볼수있겠네요 어우 뭔 제주도를 3박4일로 가는지..링크 | 최민석(하루카씨)[SE][348] | 1997.07.24~2014.4.16 |
배가 출발해야 하는데 2시간째 대기중이네요 아~ 피곤해 링크 | 전현탁(건9왕)[SE][350][351] | 1997.04.15~2014.4.16 |
지금 타고 있다고요. 침몰하는 거에..살려달라고요.링크 | 최성호(레네미아(어르미))[SE][353] | 1997.06.23~2014.4.16 |
엄마. 엄마 미안해. 아빠도, 너무 미안하고. 엄마 정말 미안해. 그리고 사랑해 정말. | 김영은[SE] | 1997.10.29~2014.4.16 |
저 진환이 친구 준민인데 진환이한테 전해드릴게요. 별 일 없을 거예요. | 박준민[SE] | 1997.11.20~2014.4.16 |
걱정하지 마. 너희들부터 나가고 선생님은 나중에 나갈게. | 최혜정[SE] | 1990.11.26~2014.4.16 |
애들을 돌보느라 고생했다. 미안하다. | 고창석[SE][358] | 1974.07.31~2014.4.16 |
아이들에게 구명조끼를 입혀야 한다.[359] '배가 침몰해. 구명조끼 없어. 미안해. 사랑해....[360] | 전수영[SE][362] | 1989.7.4~2014.4.16 |
나가려는데 문이 안 열린다. 하지만 헬기도 오고 구조하고 있으니 걱정마라. 괜찮다. | 최창복[SE][364] | 195?~2014.4.16 |
배가 많이 기울어져 있어. 수협통장에 돈이 있으니까 아이 등록금으로 써. 지금 아이들 구하러 가야 해. 길게 통화 못 해. 끊어. | 양대홍[SE][366] | 1969~2014.4.16 |
진짜 레블리는 사랑입니다 ♥ | 은비[367] | 1992.11.23~2014.9.3 |
만약 사랑하는 사람에게 못다 하고 떠나게 될 것을 두려워하는 남자가 남기는 이야기 편지 또한 내 유언장이다. 결혼 전 자살 충동의 경향이 굉장히 센 편이어서 조절하는 훈련이나 치료를 받았는데 아이들이 생기고부터는 너무 행복해서 저절로 치유가 됐다.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나도 당신의 남편이 되고 싶고 당신의 아들, 엄마, 오빠, 강아지 그 무엇으로도 인연을 이어가고 싶다. 숨을 못 쉬겠어...[368] | 신해철[369] | 1968.5.6~2014.10.27 |
6개월만 더 있었으면... | 김자옥[370] | 1951.10.11~2014.11.16 |
언론인 들어라. 훌륭하신 분들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생활하시죠. 저널리즘! 이것이 언론인들의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부디 잃어버린 저너리즘을 찾아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새로운 삶에 대한 호기심이 나를 짓눌러 이렇게 극단적인 선택을 합니다. | 최경락 | 1969~2014.12.23 |
허태열 7억 홍문종 2억 유정복 3억 홍준표 1억 부산시장[371] 2억 김기춘 10만달러 이병기 이완구 | 성완종[372] | 1951.8.20~2015.4.9 |
짱구는 꼭 마무리짓고 싶다. | 오세홍[373] | 1951.7.17~2015.5.22 |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해서 희생이 필요하다면 감당하겠다. 드디어 직선제로 선출된 부산대학교 총장이 처음의 약속을 여러 번 번복하더니 최종적으로 총장 직선제 포기를 선언하고 교육부 방침대로 일종의 총장 간선제 수순 밟기에 들어갔다. 부산대학교는 현대사에서 민주주의 수호의 최후 보루 중 하나였는데, 참담한 심정일 뿐이다. 문제는 현 상황에서 교육부의 방침대로 일종의 간선제로 총장 후보를 선출해서 올려도 시국선언 전력 등을 문제 삼아 여러 국·공립대에서 올린 총장 후보를 총장으로 임용하지 않아 대학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일이 다반사란 점이다. 교육부의 방침대로 총장 후보를 선출해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후보를 임용하지 않는 상황이라면 대학의 자율성은 전혀 없고 대학에서 총장 후보를 선출하는 과정에서부터 오직 교육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는 점이 문제이다. 이는 민주주의 심각한 훼손이 아닐 수 없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상황에 대한 인식이 대학과 사회 전반적으로 너무 무뎌있다는 점이다. 국정원 사건부터 무뎌있는 게 우리의 현실 아닌가. 교묘하게 민주주의는 억압되어 있는데 무뎌져 있는 것이다. 진정한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상황이 이렇다면, 대학에서의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서는 오직 총장직선제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말이 된다. 민주주의 수호의 최후 보루 중 하나이며 국·공립대를 대표하는 위상을 지닌 부산대학교가 이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그래야 지금이라도 이런 참당한 상황을 변화시킬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현대사를 봐도 부산대학교는 그런 역할의 중심에 서 있었다. 총장 직선제 수호를 위해서 여러 교수들이 농성 등 많은 수고로움을 감당하고 교수 총투표를 통해 총장 직선제에 대한 뜻이 여러 차례, 갈수록 분명히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일종의 총장 간선제 수순 밟기에 들어가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이 너무 무뎌있다는 방증이다. 대학 내 절대권력을 가진 총장은 일종의 독재를 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교수회장이 무기한 단식농성이 들어갔고, 오늘 12일째이다. 그런데 휴가를 떠났다 돌아온 총장은 아무 반응이 없다. 기가 찰 노릇이다. 그렇다면, 이제 방법은 충격요법밖에 없다. 메일을 통해 전체 교수들에게 그 뜻을 전하는 것은 내부적으로 교수끼리 보는 방법으로 이미 전체교수 투표를 통해 확인한 바 있는 상황에서 별 소용이 없다. 늘 그랬다. 사회 민주화를 위해 시국선언 등을 해도 별 소용이 없다. 나도 그동안 이를 위해 시국선언에 여러 번 참여한 적이 있지만, 개선된 것을 보고 듣지 못했다. 그것보다는 8·90년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방식으로 유인물을 뿌리는 게 보다 오히려 새롭게 관심을 끌 것이다. 지금의 상황은 진정한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희생을 마다하지 않은 지난 날 민주화 투쟁의 방식이 충격요법으로 더 효과적일지도 모른다. 그 희생이 필요하다면 감당하겠다. 근래 자기 관리를 제대로 못한 내 자신 부끄러운 존재이지만. 그래도 그 희생이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하고, 그 몫을 담당하겠다. 대학의 민주화는 진정한 민주주의 수호의 최후의 보루이다. 그래서 중요하고 그 역할을 부산대학교가 담당해야 하며, 희생이 필요하다면 그걸 감당할 사람이 해야 한다. 그래야 무뎌져 있는 민주주의에 대한 의식이 각성이 되고 진정한 대학의 민주화 나아가 사회의 민주화가 굳건해질 것이다. | 고현철 | 1961.6.10~2015.8.17 |
건강하게 지내라. | 김상순 | 1937.10.20~2015.8.25 |
통합과 화합. | 김영삼 전 대통령[374] | 1929.1.14~2015.11.22 |
아…큰일을 마쳤네.[375] | 이기택 | 1937.7.25~2016.2.20 |
뒷일을 부탁합니다. | 김관홍[376] | 1973.6.20~2016.6.17 |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고 장례를 치러달라. | 김영한[377] | 1957.9.27~2016.8.21 |
코미디언 중에 어려운 사람들이 많으니 조의금을 받지 마라. | 구봉서 | 1926.11.5~2016.8.27 |
사기혐의로 피소된건 너무 억울하다. 사랑한다. | 하일성 | 1949.2.18~2016.9.8 |
박근혜는 내란사범 한 · 일협정 매국질 즉각 손 떼고 물러나라! 경찰은 내란사범 박근혜를 체포하라. 경찰의 공권력도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경찰은 해산하라! 나의 죽음이 헛되지 않기를... 나의 죽음이 어떤 집단의 이익이 아닌 민중의 승리가 되어야 한다. 제도화된 수사로 소신공양을 수식하지 마라. 나는 우주의 원소로 돌아가니 어떤 흔적도 남기지 마라! | 정원 | 1953.11.9~2017.1.9 |
Very painful, very painful, I was sprayed liquid.(매우 고통스럽다, 매우 고통스럽다. 액체 스프레이를 맞았다.)# | 김정남[378] | 1971.5.10~2017.2.13 |
긴급 상황입니다. 본선 2번 포트 물이.샙니ㅏ 포트쪽으로 긴급게 ㄱ울고 ㅣㅆ니다[379][380] | 폴라리스 쉬핑 스텔라 데이지호 조정익 선장 | 195?~2017.3.31 |
내가 죽고 나서 허례허식에 돈 쓰지 말고 배우란 직업이 그런 건 아니니까 그런 것에 돈 쓰지 마라. 그리고 연명 치료 하지 말고, 인공호흡기나 심폐소생술 같은 거 하지 마. | 김영애 | 1951.4.21~2017.4.9 |
유산은 내 시신을 발견한 가족에게 넘기고 시신 처리는 그 가족에게 맡기겠다. | 마광수 | 1951.4.14~2017.9.5 |
(전략) 세상과 부딪히는 건 내 몫이 아니었나봐. 세상에 알려지는 건 내 삶이 아니었나봐. 다 그래서 힘든 거더라. 부딪혀서, 알려져서 힘들더라. 왜 그걸 택했을까. 웃긴 일이다. 지금껏 버티고 있었던게 용하지. 무슨 말을 더해. 그냥 수고했다고 해줘. 이만하면 잘했다고. 고생했다고 해줘. 웃지는 못하더라도 탓하며 보내진 말아줘. 수고했어. 정말 고생했어. 안녕.[381] | 종현 | 1990.4.8~2017.12.18 |
그 과정에서 모멸감으로, 혹은 수치심을 느낀 제 후배들에게 먼저 마음깊이 사죄의 말을 올립니다. 덕분에 이제라도 저의 교만과 그릇됨을 뉘우칠 수 있게 되어 죄송한 마음과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끝으로. 청주대학교와 지금도 예술을 향한 진실한 마음으로 정진하고 있을 청주대학교 연극학과생들에게 부끄러운 사과문을 쓰고 있는 저의 사죄를 전합니다.[382][383] | 조민기 | 1965.11.5~2018.3.9 |
다시 패션 쇼가 하고싶다......[384] | 이영희[385] | 1936.02.24~2018.05.17 |
내가 죽으면 헬기 타고 8도 산하에 흩뿌려달라.[386] | 김종필 | 1926.1.7~2018.06.23 |
저는 감금, 협박, 성추행, 강요는 절대 없었으며 당당하게 진실이 밝혀질 거라 믿고 싶었지만 제 말을 믿지 않고 피해자라는 모델들이 거짓말에 의존한 수사, 일부 왜곡 과장된 보도로 인해 사회적으로 저는 이미 매장당했고 제 인생은 끝난 것입니다. 이러다가는 진실된 판결이 나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너무 괴롭고 너무 힘들어 죽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하지도 않은 일에 대한 억울한 누명은 풀리지가 않을 것 같아 정말 살고 싶었지만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합니다. 가족들에게 미안하고 신경 많이 써주신 지인 분들에게 감사드리고 죄송합니다. | 스튜디오 실장 A씨 | 1976~2018.7.9 |
많이 피곤했지, 고생했네.[387][388] | 노회찬[389] | 1956.8.31~2018.7.23 |
내가 병세 때문에 너무 예민했었다, 다 부질없는 일이었는데... 관대해져라. | 정미홍 | 1958.7.27~2018.7.25 |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즐거웠어. 사랑한다. | 서울 강서구 PC방 살인사건의 피해자 신모 씨[390] | 1997~2018.10.14 |
딸: 뭐 하실 말씀 없으세요? 재산 없다. 딸: 어머니에게 하실 말씀은요? 수고했고, 고맙고, 미안했다고 전해줘.[391] 프레임을 마친다.[392] | 신성일 | 1937.5.8.~2018.11.4 |
오늘 퇴원하기로 했는데 퇴 취소됐다..다음 주에 들어가는 항암치료를 내일 들어간다. 내 몸상태는 지금 어떠한지? 이제는 힘이든다. 어떻게든 먹어야한다. 체력이 떨어지면 안되고, 정신을 붙잡아야한다고 한다. 연락한 사람들과 면회온 사람이 용기를 준다. 오랜만에 sns해도 용기의 글을 읽는다. 그러나 솔직히 많이 힘들다..견딜 수 있도록 버티고 있다. 하루를 무사히 보내며 감사합니다![393] 사이클은 타지 마라.[394] | 이민혜 | 1985.10.11~2018.11.12 |
문자 지금 봤네. 씩씩한 후배들과 함께해서 행복하고 즐거웠어.[395] | 김일 | 1966.12.3~2018.11.18 |
세월호 사고시 기무사와 기무부대원들은 정말 헌신적으로 최선을 다했음. 5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그 때의 일을 사찰로 단죄한다니 정말 안타깝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았지만 전역 이후 복잡한 정치상황과 얽혀 제대로 되는 일을 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지금 모처럼 여러 비즈니스를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즈음에 이런 일이 발생하여 여러 사람에게 미안하다. 영장심사를 담당해준 판사님께 경의를 표하며 이번 일로 어려운 지경에 빠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검찰 측에게도 미안하며 내가 모든 것을 안고 가는 것으로 하고 모두에게 관대한 처분을 바랍니다. 군 검찰 및 재판부에 간곡하게 부탁합니다. 가족, 친지, 그리고 나를 그동안 성원해준 모든 분들께 정말 죄송하며 용서를 구합니다. 군을 사랑했던 선후배 동료들께 누를 끼쳐 죄송하고 다시 한 번 사과를 드립니다. 사랑하는 가족들도 더욱 힘내서 열심히 살아가길 바랍니다. 60평생 잘 살다가 갑니다. 모두들 안녕히 계십시오. | 이재수[396] | 1958~2018.12.7 |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해 끝까지 싸워주시오. 재일조선학교 아이들을 지원하는 문제를 나를 대신해 끝까지 해주시오.# | 김복동 | 1926.5.1~2019.1.28 |
내용도 안보고 서브컬쳐를 무시했다. | 영신중학교 학생 A군[397] | 2004~2019.03.25 |
가족과 잘 협력해 사이좋게 이끌라.[398] | 조양호 | 1949.3.8~2019.4.8 |
지금까지 남편 김대중과 자신을 사랑해준 국민 여러분들께 감사하다. 국민들이 서로 사랑하고 화합해서 행복한 삶을 사시길 바란다. 하늘나라에 가서 우리 국민을 위해, 민족의 평화통일을 위해 기도하겠다. 또한 동교동 사저는 대통령 사저 기념관으로 쓰고, 노벨평화상 기금은 대통령 추모사업 기금으로 사용해달라.[399] | 이희호 | 1922.9.21~2019.6.10 |
가족에게 미안하고 사랑한다. 장례는 크게 치르지 마라. 조용하게 치러달라. 여보 사랑해. | 정두언 | 1957.3.6~2019.7.16 |
그래도 행복했다. | 강한옥[400] | 1927~2019.10.29 |
항상 희망을 간직하십시오. 이제 모든 것을 하느님 뜻에 맡깁니다. | 차동엽[401] | 1958.5.31~2019.11.12 |
❄️[402] | 김성훈[403] | 1998.2.4~2019.11.23 |
잘자. 무섭다... | 구하라[404] | 1991.1.13~2019.11.24 |
2.10.2.3. 2020년대
2020년대 | ||
유언 | 인물 | 생몰년 |
당분간 키네써요 | YouTuBe 리튬 Li Gaming[405] | 2006~2020.06.07 |
멋진곡이 만들어질거 같아서 정말 기대되[406]요! #[407] | 4시 | 1996.02.01~2020.06.16 |
엄마, 사랑해. 그 사람들 죄를 밝혀줘. | 최숙현 | 1998.06.08~2020.06.26 |
저를 믿어주고 응원해주신 팬여러분 감사합니다. 의석아 내 뒤를 부탁한다. 꼭 뉴스커뮤니티 유영기를 법의심판을 받게 해줘. 유영기 때문에 피해당한 내 팬들 또는 지인 누나들 형님들의 분노와 억울함을 풀어주기 바란다. 천지암형님 제 억울한 원혼을 달래주세요. 제 삶은 여기까지 같습니다. 죽는게 두렵고 무섭지만 마음이 편안해지고 싶습니다. 저를 믿고 응원해주신 가족과 누나들 형님들 팬들에게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사람은 언젠가 죽습니다. 저는 단지 여려분보다 빨리 죽는 거구요. 천지암형님께서 제 장례를 치러줬으면 좋겠네요. 제 장례식은 웃으면서 재밌게 해주세요. | 진워렌버핏 | 1980.02.21~2020.07.08 |
모든 분에게 죄송하다. 내 삶에서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오직 고통밖에 주지 못한 가족에게 내내 미안하다. 화장해서 부모님 산소에 뿌려 달라. 모두 안녕 | 박원순 | 1955.02.11~2020.07.09 |
1. 전우에게 인사하고 싶으니 유해를 바로 묻지 말고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들러라. 2. 경기도 평택의 미군 부대를 찾아 부대 내 워커 장군 동상 앞에서 한미동맹 강화를 위한 메시지를 남겨달라.[408] | 백선엽 | 1920.11.23~ 2020.07.10 |
내가 과연 어떻게 돼있을진 잘 모르겠지만, 죽는게 쉽진 않겠지만.. 많이 미안해 엄마. 그냥 미안하단 말밖에 못하겠네. 내 얘기는 아무도 몰랐으면 해. 창피하고 못났고 한심하니까...[409] | 고유민 | 1995.02.09~2020.07.28 |
여러분 건강조심하세요..#[410] | ampstyle | 1987.05.23~2020.09.06 |
정말 모두에게 너무 미안하다ㅡㅡ 나 때문에 이유 없이 고통 받고 욕 먹는 크루들, 친구들 그리고 제일 사랑하는 가족들까지. 이제 더 이상 그 누구에게도 짐이 되지 않고, 내 갈 길로 떠나려고 함ㅡㅡ 끝까지 이기적일거니 차라리 미워하고 원망해주길 정말 지금까지 여한 없이 불행했고, 행복했으며 여러분들과 함께 하는 모든 날이 더할나위 없었던, 내 인생 전부이자 진심이었다. 마지막으로 조준기를 가족으로, 대표로, 친구로, 사랑하는 사람으로 대해줬던 모든 사람들에게, 이리 부족한 나를 항상 보듬아주고 응원해줘서 고마웠다고. 이렇게 얼굴도 못 보고 죄만 짓고 떠나 너무 가슴 아프다고 정말 너무 미안해 모두. 언젠가 길 위에서 다시 만나자! *추신 : 코로나 시국이니 장례식은 가족끼리만 해주고, 지인들 부조는 남은 우리 가족들+크루들 다시 잘 살아갈 수 있도록 ******-**-****** **은행 조준기(여행에미치다)로 보내놔주면 좋겠음ㅡㅡ **사건은 사건 그 자체만으로의 과실을 따져주길. 불필요한 인과들로, 불필요한 피해가 발생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크루들이 새로이 시작해 나갈 때, 부디 많은 도움과 응원도 부탁드립니다. 잘못은 내가 혼자 한건데, 나머지 19명 까지 같이 싸잡아 욕 할 필요 없잖아요? 얼마나 능력 있고, 성실하며 나보단 그얼마나 떳떳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인데:) 괜히 나 때문에 이들 또한 피해 본 사람들인걸요.[411] | 조준기[412] | 1989.08.19~2020.09.09 |
로이 뷰캐넌의.. 그 The Messiah Will Come Again 그것도 유명한 곡이죠.. or 항상 감사합니다^^ | 디젤집시[413] | 1972.04.29~2020.09.28 |
힘내. 가을이다. 사랑해.#(4:27~4:32) | 한원주[414] | 1926~2020.09.30 |
아니... 허... 나 조울증인가봐.. 내일 봐요.. 내일 봐요! 내일 킬게요~ 안녕~ 단바 단바~ 응.. 잘자고~ 안녕안녕! # | 단팽이 | 1996.02.13~2021.01.30 |
처음에 제 본명 보고서 신기하다 생각하면서 보셨던 분들도 많으셨을텐데... 처음에는 신비한 느낌 마사지 여신 막 이런 얘기두 듣고 그런걸로 도 많이들 좋아해 주셔서 감사드렸고 제가 좀 어 너무 섹시한 쪽으로 어그로를 끌렸고 해서 실망하셨던 분들한테도 죄송한 마음이고 너무 상업적으로 접근을 했던거 같아요. 저한테 마사지 한번 받아보고 싶다 하셨던 분들한테 한번씩 또 해드리면 참 좋았을거 같은데... 방송을 한다는 그런걸로 좀 몸값을 높이고 그랬어서 죄송해요. 결혼을 안하냐는 질문들이 많아서 이제... 하~ 마지막인데 이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마지막으로 신비감을 갖고 계시는게 좋을거 같아서 말을 안할게요. 저는 좀 상처가 많아요. 그래서 결혼을 할 생각은 없었고... 그리고 조울증이 있었어요 그러다가 이제 방송을 시작하고 그게 좀 다시 도져서 치료를 받았어야 했는데 정신과 약을 3년정도 먹다보니까 너무 정신과 약을 먹는게 싫어졌었거든요. 정신과 약을 안먹고 버텨오다가... 요즘에는 계속 무기력이 저를 좀 지배했던거 같아요. 자는게 제일 행복하고 아무것도 하기 싫고 누구와도 관계를 맺고 싶지 않고 스스로를 고립을 시키고 돈을 벌고 있는데... 나한테 잘해주지도 않고있었고 행복하다는 생각을 좀 많이 안하고 살고 있었어요. 그래서 이거를 '좀 그만하고 싶다.' 어디 따듯한 나라가서 유유히 혼자 살고싶다라는 생각을 많이했는데 코로나가 끝날 생각도 안하고 저는 점점 좀 많이 지쳐가고 그래서 좀... 옛날부터 모아니면 도 이런 편이었어서 이런 결정을 내리게 돼서 가족들이랑 저를 좋아해주셨던 분들이랑... 제가 책임져야할 숍식구들이랑 지인들한테 너무 미안하고... 그리고 그동안 많이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사드리려고 영상한 30번 찍은거 같아요. 외국팬분들한테도 영어로 좀 하면 좋은데... Hello, I'm Maetel. Thank you for loving me... Good bye.[415] | 메텔 | 1985.12.29~2021.02.03 |
노동해방 백기완[416] | 백기완 | 1932.02.29~2021.02.15 |
감사합니다. 행복하세요. 행복하게 사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 | 1931.12.07~2021.04.27 |
항상 좋은 그림위해 애써주시는 staff 분들. 감사합니다:)#[417] | 제이윤 | 1982.09.27~2021.05.13 |
어느 자리에 있든 쫓기는 사람은 계속 쫓기게 된다. 어떤 자리에 있든 즐기는 자가 돼서 낭만 있게 살아라. | 임영일[418] | 1961~2021.05.19 |
병원에서 나가면 이맘때 날씨가 되어있을까용???😍🌹#[419] | 이정주 | 1991.01.28~2021.05.30 |
대한민국을 밝혀라! 재신이 지도 하에 인화로 뭉쳐라. 기행복. 대한민국 해군만세. | 최영섭[420] | 1928.04.02~2021.07.08 |
충분해. 응 알았습니다. 엄청 추워. 엄청 추워. 오케이. | 김홍빈[421] | 1964.11.20~2021.07.19 |
아빠 우리 딸들 어떡해... | 강서구 일본도 살인사건의 피해자 김씨 | 1980~2021.09.03 |
우리 국민 모두 행복했으면... | 이완구 | 1950.07.16~2021.10.14 |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했지만 그럼에도 부족한 점 및 저의 과오들에 대해 깊은 용서를 바란다. 주어진 운명을 겸허하게 그대로 받아들여, 위대한 대한민국과 국민을 위해 봉사할 수 있어서 참으로 감사하고 영광스러웠다. 생애에 이루지 못한 남북한 평화통일이 다음 세대들에 의해 꼭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 노태우 전 대통령 | 1932.12.04~2021.10.26 |
잘가요 형님!!#[422] | 김준성(자비스)[423] | 199?~2021.11.[424] |
아깝네. 바이 운동하러감. # (1시간 21분 53초부터.) | 김경보 | 2001.07.21~2021.11.08 |
북녘 땅이 바라다 보이는 전방의 어느 고지에 백골로라도 남아 있으면서 기어이 통일의 그날을 맞고 싶다.[425] | 전두환 전 대통령 | 1931.01.18~2021.11.23 |
이제 내 사회생활은 끝났다. 검찰과 언론이 나를 죽였다. | 유한기 | 1955~2021.12.10 |
덕분에 행복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426] 내가 이기지 못하고 하늘로 가지만 너라도 끝까지 대학로를 지켜줘.[427] | 김철민 | 1967.01.20~2021.12.16 |
아이들은 평범한데 제가 이 일이랑 안 맞는 것 같아요. 하루하루가 힘들었어요. 죄송해요.[428] | 이영승[429] | 1996~2021.12.22 |
일단은.. 10시가 넘었네요 여러분, 짧게 한다고 했는데 꽤 많이 했어요. 그쵸? 내일 여러분 얼굴로 봅시다. (많이 해 줬다는 채팅을 보고) 많이 해주기는, 재밌어서 한거지, 뭘 해줘. 내일은, 얼굴 보고 놀자고~ 예쁜 옷 입고 올게요~ 그럼 다들 잘 자고~ 나처럼.. 이렇게.. 허약해지지 말고 잘 챙겨 드시고~ 운동도 많이 하시고~ 그럽시다. 영양제도 챙겨 드시고~ 저도 잘 먹을게요~ 이따 자기 전에 또, 먹고 자겠습니다~두끼 챙겨먹을 거야. (중략) 가끔, 뭐 휴방날이든, 뭐 아픈 날이든 못킬 것 같을 때 이렇게 한 번씩 키는 것 괜찮을 듯? 응. 뭐 별로 힘들지도 않고 심심하지도 않고. 그럼 갈게요~내일 얼굴 보고 봅시다 ~ (잘 쉬고 제발 오래 방송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내용의 도네이션을 보고) 네~ 알겠습니다 잘 쉬고 올게요. 어이고 10만원 너무 고마워요. (중략) 내일은 리액션도 몸 좋긴 하면 해 줄게. 그럼 내일 볼게 안녕안녕~ 트바트바~[430] | 잼미님 | 1995.01.07~2022.01.24 (추정) |
안녕...잘자....... 부디 그대 나를 잡아줘 흔들리는 나를 일으켜 제발 이 거친 파도가 날 집어삼키지 않게 부디 그대 나를 안아줘 흔들리는 나를 붙잡아 제발 이 거친 바람이 나를 넘어뜨리려 해 저기 우리 함께 눈물짓던 그때 그 모습이 보여 이젠 눈이 부시던 날의 기억 그래 그 순간 하나로 살 테니 부디 다시 한번 나를 안고 제발 지친 나를 일으켜줘 우리 사랑했었던 날들 아직 모든 것들이 꿈만 같아 부디 다시 한번 나를 깨워 제발 지친 나를 일으켜줘 다시 나의 손을 잡아줘 이제 잡은 두 손을 다신 놓지 마 제발 그대 이렇게 다시 떠나가는 날 이젠 언제쯤 다시 볼 수 있을지 우리 이렇게 헤어지면 언젠가는 또다시 부디 다시 한번 나를 안고 제발 지친 나를 일으켜줘 우리 사랑했었던 날들 아직 모든 것들이 꿈만 같아 부디 다시 한번 나를 깨워줘 제발 지친 나를 일으켜줘 다시 나의 손을 잡아줘 부디 다시 한번 나를 안아줘 부디 다시 한번 나를 안아줘[431] # | 김인혁 | 1995.07.14~2022.02.04 |
. . 그냥 날이 좋아서_,# | 선가희 | 2000.10.07~2022.03.04 |
적당히 살지 말고 믿음으로 살라. | 정필도 | 1941.07.27~2022.03.21 |
언젠가는 이 병이 나을수 있을 것이라고 막연히 기대해본다. 저에게 아낌없는 정과 관심 주시는 모든분들께 미안하다.[432] | 김희선[433] | 1992.01.17~ 2022.05.01 |
여러분 제 말 잘 들리시나요? 마지막으로 영상 올리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남깁니다. 제가 일주일 전까지 멀쩡했는데 일주일 사이에 상태가 많이 안 좋아져서 앞으로 일주일에서 한 달 정도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여러분 덕분에 유튜브 수익으로 맛있는 거 사먹고, 댓글로 응원받아서 행복했어요. 제 마지막까지 인스타에 기록 남길거니까 영상 더보기로 인스타 아이디 검색해서 찾아오시면 될 것 같아요. 너무 고맙고, 유튜브 하길 너무 잘한 것 같아요. 그러면 이만 영상 마칠게요. 모두들 안녕. 다음 생애에, 꼭 봐요. 제가 언제 태어나서 100만 조회수가 넘어보고, 8천~9천명이 저를 구독해주시겠어요. 모두 고마워. 안녕.[434] | 꾸밍 | 1999.06.18~2022.05.25 |
여러분들 오랫동안 시달리고 답답했습니다. 사실 이 화창한 계절이 돌아왔으니까, 여러분들 활짝 열린 세상 나오셔서 금수강산의 맛을 실컷 보시길 바랍니다. 저희들은 여기서 끝내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435] | 송해 | 1927.04.27~2022.06.08 |
먼저 가서 미안해. 특히 엄마 아빠 할머니 오빠 제일 미안해. 마음이 내 마음이 살고 싶지가 않다고 소리를 질러. 내가 없는 일상이 어쩌면 허전하겠지만 그래도 씩씩하게 살아줘.내가 다 지켜보고 있을게. 울지마. 몸 상해. 난 지금 하나도 슬프지 않아. 아주 의연하고 덤덤해. 아마 오랫동안 생각을 해와서 그런것 같아. 나는 너무너무 분에 넘치는 행복한 삶을 살아왔어. 그래서 그게 나에게 충분해. 이정도면 됐어. 그러니 아무도 탓하지 말고 살아줘. 나는 죽지 않았어. 그러니까 잘 살아 모두들. 내 장례식에는 많은 사람들을 불러서 다들 오랜만에 얼굴 보고 힘든 사람 있는지 살펴보면 좋겠어. 연기가 너무 하고 싶었어. 어쩌면 내 전부였고 내 일부였어. 근데 그 삶은 사는게 쉽지가 않았어. 다른 어떤것도 하고싶지가 않아. 그게 너무 절망적이었어. 하고 싶은게 있다는건 축복이지만 그것만 하고 싶다는건 저주라는 것도 깨달았어.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니까 지옥에 보내시진 않으시겠지. 내 마음을 헤아려주시고 앞으로 나를 돌봐주실거야. 그러니 모두들 걱정하지마. 그리고 사랑하는 내 가족들과 친구들 그리고 사랑들. 나 아껴주고 사랑해줘서 너무 고마워. 그게 나의 힘이었고 내 웃음이었어. 절대 잊지 못할 추억 가지고 끝까지 살았으니 나는 성공한 인생인것 같다. 부족하고 참을성도 없는 나를 품어주고 이해해줘서 너무 고마웠어. 표현 잘 못 해서 미안했어. 그래도 내 마음 알아줄거지. 그리고 나와 맺었던 모든 소중한 인연들 특히 선생님들 너무 감사하고 존경했어요. 인생의 수많은 것들을 알려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엄마 아빠 사랑해. 울지마. 부탁이야. | 유주은 | 1995.05.03.~2022.08.29 |
엄마 나 잘 키워줘서 고마워요.# | 포항 아파트 지하주차장 침수 사고 희생자 김 모 군 | 2008~2022.09.06 |
이철 의료원장, 2011년 10월 2일 내가 죽으면 장례식·추모식은 일체 생략하고 내 시신은 곧 연세대학교 의료원에 기증하여 의과대학생들의 교육에 쓰여지기를 바라며, 누가 뭐래도 이 결심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법적절차가 필요하면 미리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성명 : 김동길 주소 : 서울 서대문구 대신동 92[436] 생년월일 : 1928년 10월 2일# [437] 연세대 의대생들의 공부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뿐입니다. [438] | 김동길 | 1928.10.02.~2022.10.04 |
마날 점심에서 저녁 사이엔 너가[439] 환경을 위한 연대.[440] | 정태인 | 1960.02.07.~2022.10.21 |
😈 | 이지한 | 1998.08.03.~2022.10.29 |
뺄 수가 없어. 다 막혀서. 큰일 났다 야. 열 수가 없어, 지금 문을. 지금 난리야. #[441] | 전우영[442] | 1956~2022.12.29 |
네ㆍ치킨브랜드 담당자분에게 문의하니 검정고무신 캐릭터대행회사인 형설출판사 측에서 아무문제 없다고, 캐릭터 계약으로 어떤 문제가 발생할시 책임지겠다고 해서 계약했다고 메일을 보내오셨네요ㆍ원작자를 피고인으로 만들어 재판을 걸어놓고, 막무가내로 캐릭터사업을 하면서 아무 법적문제가 없다고하니 참 답답하네요ㆍ촌동네 양아치도 이들보단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0 # | 이우영 | 1972.04.14~2023.03.11 |
다음시간에 사과하라고 이야기하러 갔다가 욕만 얻어 먹고 왔으면 됐습니다. 욕값은 다받는셈이내요.# [443] | 조광현 | 1935.03.30~2023.03.27 |
잘 놀고 있엉#[444] | 배승아 | 2013.05.21~2023.04.09 |
웃자.....^^[445] | 정채율 | 1996.09.04~2023.04.11 |
갈게요. 아... 간다? 간다??[446] | 디시인사이드 우울증 갤러리 여고생 추락사 사건의 여고생 | 2007~2023.04.16 |
로하 민들레 꽃씨에요!!!😀 민들레 꽃씨야~바람 타고 널리널리 퍼져나가렴! 내 소중한 사람들에게 봄이 왔다고 살랑살랑 간지럽혀줘 #[447] | 문빈 | 1998.01.26~2023.04.19 |
존경하는 동지여러분 저는 자랑스런 민주노총 강원건설지부 양회동 입니다. 제가 오늘 분신을 하게된건 죄없이 정당하게 노조활동을 했는데 집시법 위반도 아니고 업무방해 및 공갈 이랍니다. 제 자존심이 허락되지 않네요. 힘들게 끈질기게 투쟁하며 싸워서 쟁취하여야 하는데 혼자 편한 선택을 한지 모르겠습니다. 함께해서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사랑합니다. 영원히 동지들 옆에 있겠습니다. # | 양회동[448] | 1973~2023.05.02 |
엄마, 나 오줌이 안 나와. 엄마, 내 목소리 왜 이래?[449] | 어린이날 구급차 뺑뺑이 사건의 피해 아동 | 2019~2023.05.06 |
자식 한(恨)이 많았지만 그래도 한평생 바르게 잘 살았다. 내가 먼저 아이들을 만나러 간다. 여자한테 잘 하는 방법을 몰라서 미안했다.[450] | 정광진[451] | 1937~2023.05.22 |
언젠간 남자가 사주겠지🥲 롤렉스 매장자체에는 아예 시계가 없더라 세번째 내 시계 그래도 나름 저렴해ㅋㅋㅋ🫠 #[452] | BJ아영 | 1990.06.11~2023.06.04 |
환자 상태가 좋아져 기분이 좋다. #[453] 나는 지금껏 원 없이 살았다. 수많은 환자들 수술해서 잘 됐고, 여러 가지 새로운 수술 방법도 좋았고, 하고 싶은 연구 하고, 쓰고 싶었던 논문 많이 썼다.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소명을 다한 듯하여 감사하고 행복하다. #[454] | 주석중[455] | 1962~2023.06.16 |
사랑하는 서하, 로하야
너희는 엄마 몸속에 왔던 그 날부터 지금 이 순간 까지도
엄마에게 너무 큰 행복이었고 가장 큰 삶의 이유였단다
사랑하는 내 딸들아 부끄러운 엄마여서 미안했고
너희들의 잘못은 단 하나도 없으니
앞으로 인생을 살아가면서 죄책감을 갖질 말길 바란다
내 목숨보다 소중했고 아끼고 빛나는 서하 로하야
미안하다 정말 많이 미안하다
앞으로 살면서 엄마의 빈자리를 느끼고 살지 않기를
제 전남편 김동섭에게 부탁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항상 너희들 곁을 지켜줄것을
약속할게.. 서하야 로하야 정말 미안해
그리고 항상 그 무엇보다 사랑해
(영상 속 육성: 그리고 나를 이용했던 그리고 죽고 싶게 만든 세자 서은석, 갓성은)
그리고 죽고 싶게 만든 세자 "서은석" 갓성은
(영상 속 육성: 썼다)[456]
임블리(임지혜)[457] | 1986.02.14~2023.06.18 | |
나 오늘 4만 3000보나 걸었다. 너무 힘드네.[458] | 김동호[459] | 1994~2023.06.19 |
안녕하세요 최성봉입니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제 삶의 마지막으로 팬분들께 보내는 글이면서 이 글이 보인다면 저는 이미 죽어있을 것입니다. 지난 2011년부터 현재까지 정말 많은 분들게 관심과 사랑을 받고 살아왔습니다. 진심으로 고맙고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마지막 글이라 이 분통함을 알리고 싶지만, 여러분께 지난 세월 받은 사랑이 더 커 마음속에 묻기로 결정했습니다. 저의 어리석은 잘못과 피해를 받으신 분들게 진심으로 죄송하고 거듭 잘못했습니다. 지난 2년여동안 후원금 반환문의 해주신 모든 분들게 반환을 해드렸습니다. 이제는 제 목숨으로 제 죗값을 치르려 합니다. 돌이켜보면 나름 어릴적부터 하루를 십년같이 최선을 다해 평범한 삶을 누리고자 노력을 했는데 결국 저는 안됐네요. 마지막 글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 그냥 제 형식대로 쓰겠습니다. 나의 숨이 비록 지금 멈추지만 찬란하게 살아온 삶의 여정에 후회는 없다. 최선을 다해 살아왔고 하루하루 행복을 갖기 위해 노력했다. 서른네살. 이번 생은 비극이지만 다음 생에는 행복한 삶으로 생을 마감하길. 나로 인해 피해받은 많은 분들에게 진심으로 죄송하고 이 목숨으로 대신 죗값을 치르겠다. 나를 도와준 많은 분들에게 미안합니다. 버틸때까지 버틴것 같다. 나를 잊기를. 그리고 각자의 삶터에서 행복하기를 인생이 찬란하길 안녕히 계십시오. 2023년 6월 17일 최성봉 올림 #[460] | 최성봉 | 1990.02.18~2023.06.20 |
울다가 웃고 아프다 괜찮아지는 걸 반복했던 두 달이었는데 어제 넘 좋은 사람들 덕에 병가 전 마지막 출근을 무사히 마쳤다. 상황이 벅찰 때가 많지만 늘 힘 날 수 있게 해주는 주변 분들 넘 고맙고 사랑해요[461] | 이연제 | 1996.09.22~2023.06.23 |
감기 조심해 😵💫😵💫😵💫 #[462] | 김마요 | 2002.03.23~2023.06.25 |
실시간... 좆소 점심 밥...jpg 죽고싶다... | 채리콥터 | 1995 ~ 2023.06.25. |
살려줘 제발 살려줘 ㅔ 기사님 제절 | 청주 궁평2지하차도 침수 사고의 익명의 희생자[463] | 1999~2023.07.15 |
아이고, 하느님.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464] 지하도에서 걸려버렸어, 여기. 물 때문에 못 가. 안돼, 안돼. <도저히 못 나와?> 응, 앞이 안 보여.[465] | 황말례[466] | 1955~2023.07.15 |
잘 자라줘서 고맙다. | 윤기중[467] | 1931.12.19~2023.08.15 |
결국 호스피스까지 왔네요. 꼭 일어나서 다시 호캉스하고 뛰어다니는 모습 보여주고 싶었어요. 호스피스에서 방송하기 편할 수 있지만, 그런 사람은 제가 한 번도 못 봤거든요.[468] 여러분들 정말로 사랑합니다.[469] | 암환자뽀삐(조윤주)[470] | 1988~2023.09.16 |
우리나라 스토킹 처벌법에선 직접적으로 저에게 연락이 오지 않는 한 처벌할 수 없습니다. 안녕하세요 ‘표예림’입니다. 저는 지난 12년간 초중고 학교폭력으로 고통받았던 사람 중 한 명으로 대중들에게 4월, 5월 이슈가 되었습니다. 유튜브 채널 '무엇이든표현하는남자'라는 채널을 통해 제작진이라고 말을 하며 하루에도 두세 개의 영상이나 커뮤니티를 통해 저를 저격하며, 다중의 인명으로 인신공격 및 흔히 말하는 조리돌림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이든표현하는남자'의 제작진이라 칭하는 사람과 저의 스토커는 동일인임에도 불구하고 분리하여 표현한 등의 행위를 하며 이젠 도를 넘어 저의 학교폭력이 거짓이다 주장합니다. 저에게 피고소인에게 꼬리 쳤다, 꽃뱀이다라고 말을 합니다. 제가 겪었던 폭력은 사실입니다. 단 한마디도 거짓말을 말한 적이 없습니다. 피고소인이 피해자분들을 통해 자신의 이익을 채우는 모습을 두고 볼 수 없음에 그 모임에 인물 중 한 사람에게 그와 관련된 기사를 보여주며 올바른 판단을 하길 바란다고 말을 했고, 그걸 빌미 삼아 스토커는 제게 사실적시 명예 훼손으로 고소를 했고 전 피의자 조사를 받았습니다. 이후 제 앞으로 접수된 건은 형사사법 포털 사이트상 없습니다. 하지만 스토커는 계속해서 저에게 고소를 했다 혹은 하겠다며 거짓된 게시글을 올리며 계속해서 저를 명예 훼손하고, 이젠 제가 겪은 학교폭력이 거짓이라고 주장하며 앞전 논란이 되었던 저의 가해자 폭로 영상이 제가 제작한 것이라 주장하고 또 자신에게 피해를 주장하며 판결문을 공개한 채널 박한울의 영상 또한 제가 제작한 것이라 주장합니다. 하지만 두 영상 다 제가 제작 유포하지 않았습니다. 하지 않은 걸 했다고 주장하니 그것을 증거로 내놓으라 하니 내놓을 증거는 없습니다. 하지만 정말 제가 하려고 했다면 굳이 프로필에 제 가게 상호를 쓰거나 제가 자주 사용하는 폰트를 사용하며 "나입니다."라고 티가 나는 영상을 제작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증거를 내놓으라 하니 해명을 하라고 하니 증거가 없기에 제 생을 그 증거로 사용하고자 합니다. 네, 이 글을 듣고 계실 때쯤이면 저는 생을 마감하려고 시도 중이거나 혹은 생이 마감되어 있을 겁니다. 부디 저를 살리려 하지 말아주세요. 이대로 죽을 수 있게 도와주시길 바랍니다. 앞전엔 누군지 모를 익명의 팔로워로 인해 살았지만 이젠 더 이상이 고통을 감내하고 이겨낼 자신이 없으며 그러고 싶지도 않습니다. 하루하루가 목이 막히는 고통으로 인해 삶을 지속해야 할 그 어떠한 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제발 부탁드립니다 "자살 쇼다"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습니다. 살려고 하는 이들을 살리기 위해 경찰이 힘써 주시고 의료계 분들이 힘써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로 인해 인력이 동원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기억의 시작점부터 지금까지 행복했던 기억은 없습니다. 아픔만 기억되고 있습니다. 힘듦만 기억되고 있습니다. 지금, 이 기억을 가지고 하루를 견디는 것은 제게 형벌과도 같습니다. 사후세계를 믿지 않기에 그저 지금이 고통이 멈춰지길 바랍니다. 많은 분들이 응원해 주시고 도와주셨지만 제 그릇이 너무 작아 다 품지 못했습니다.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SBS 제작진분들과 MBC 제작진분들, 카라큘라 제작진분들 또 저와 만남을 가졌던 그 모든 분들께 너무 죄송하고 감사했습니다. 제 변호사분께도 감사하고 미안하고 죄송할 따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염치없지만 제가 스스로를 포기하지만 제 사건을 포기하지 않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간곡히 부탁드리겠습니다. 유튜브에 저격을 하는 영상의 게재, 커뮤니티 게재는 제게 직접적으로 닿는 게 아니기에 스토킹이 성립이 될 수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박 변호사님께 제 민사 결과가 나오면 부디 스토킹으로 꼭 고소장을 새로 작성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국민 여러분께도 부탁드립니다. 제 죽음이 그렇게 크지 않을 수 있지만 적어도 저의 청원이 잊혀지지 않고 무사히 본회의에 통과가 되고 법이 개정이 될 수 있게 도와주세요. 스토킹 처벌법도 직접적이 아닌 간접적으로도 사람이 고통받을 수 있음을 알고 개정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정말 간곡히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를 응원해 주셨던 분들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부디 아프지 않길 바랍니다. 얼마나 힘들지 감히 짐작조차 안 되지만 지금 내 고통이 너무 커 이렇게밖에 할 수 없는 나를 이해하지 말고 차라리 미워하거나 원망을 하기 바래. 11월에 신부가 될 두 사람에게 너무나 미안하고 특히 나의 유일한 버팀목이자 나로 인해 걱정하느라 하루 세 시간도 못 잤을 언니가 조금이라도 덜 아프길 바라고 지켜주지 못했단 죄책감 대신 언니를 버리고 죽음을 택한 날 원망했으면 좋겠어. 그렇게 미워만 했으면 좋겠어. 아프지 않게 너무너무 바라고 바래 스무 살부터 이 순간까지 난 언니 덕분에 참 열심히 본받으며 살았다는 건 기억해 줘. 다른 내 친구들도 똑같이 나로 인해 힘들기보다는 나를 원망하길 바래. 나쁘지 않길 그 누구도 슬프지 않길 바래. 갑작스러운 나의 안부를 뉴스를 통해 보게 만들었다고 미워했으면 좋겠어. 친구의 부고 소식에 너무 많이 힘들지 않게 너희로 인해 내 하루가 조금은 버틸 만했고 그래서 너무 고마웠어. 마지막으로 나의 가족들 친척분들께 정말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못난 저로 인해 너무 오래 힘들지 않고 그저 잠깐 부는 바람처럼 잠깐 슬픔이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내 가족 엄마 아빠 죽은 순간에도 너무 미안하고 너무 죄송합니다. 잘못했어요. 살아야 한다. 살아야 한다. 네가 없으면 무슨 소용이냐 했지만, 그러지 못하고 감히 자식이 먼저 가는 슬픔을 짐작할 수 없지만, 그 고통을 드려 너무 죄송합니다. 별난 자식으로 인해 다 키워놓고도 하루하루를 불안하게 만들어 죄송합니다. 역설적이지만 죽음으로 인해 제가 편안해졌다 생각해 주시고, 가슴에 큰 상처를 남기는 못난 자식을 너무 오래 품지 말고 바람처럼 날아가게 잠깐 아프길 바랍니다. 죽는 그 순간에도 죄인으로 가겠습니다. 이번엔 모든 사람들에게 아픔을 주는 저입니다. 죄인임에도 제발 부탁드립니다. 이번엔 나를 살리지 말아 주세요. 부디 제가 죽을 수 있게 도와주세요. 그리고 나를 죽게 한 사람은 나이자 스토커이며, 나의 학교폭력 가해자들입니다. 그들에게 돌을 던져 주세요. 이상 ‘표예림’이었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471] | 표예림 | 1996.07.31~2023.10.10 |
안녕하세요. 연예부장이다. 그동안 저 때문에 많이 걱정 끼쳐 드리고, 실망을 드린 것 같아 너무 죄송하다. 저는 지금 부산에 있다. 지금 부산국제영화제 기간인데 사실 영화제는 이틀부터 참석을 했고 제가 가장 사랑하는 공간인데 지금 부산국제영화제를 즐기려고 부산에 있는 건 아니고 오늘 기사가 나와서 아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재판이 있어서 부산에 왔다. 결과가 안 좋다. 저희 변호사는 무조건 무죄라고 했다. 이건 무조건 무죄다. 그래서 저도 좀 처음에 판사님이 판결 선고할 때 좀 황당했고 저도 좀 억울한 마음이 들어서 제 페이스북에 저희 변호인 의견서도 올리고 지금 이런 정황이 있는데도 내가 유죄냐 그렇게 한번 하소연을 했는데 생각해보니 그게 결국은 다 제 문제였던 것 같다. 결과적으로 제가 잘못했고 자기 관리 못했고 제가 아무리 이렇습니다라고 설명해봤자 구차한 변명일 것 같고 그래서 그냥 내거 잘못했다라고 생각하면 괜찮다. 저는 내가 너무 방탕했구나, 그래서 반성하고 인정한다. 우리 변호사는 그 얘기를 하더라. 이거는 김부장이 유명인이 아니고서는 절대로 성립할 수 없는 범죄다. 근데 어쩌겠냐. 제가 이렇게 뭐 유명이라게 하기엔 뭐하지만 이렇게 기사가 나오는 주목받는 존재가 됐다. 제가 지금 여러분들께 해드리고 싶은 얘기는 뭐 제가 억울하다 힘들다 그런 얘기보다는 그냥 내가 잘못했다. 내가 더 많은 분들이 저를 사랑해주시고 저에게 기대를 했으면 제가 더 철저하게 자기 관리를 했었어야 되는데 그런 부분들에 대해 그러지 못했다. 반성하고 죄송하고 그런 얘기를 해드리고 싶었다. 참 외로웠던 것 같다. 저는 되게. 평생을 좀 외로웠고 그래서 제가 사람을 좋아했고 저는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한테 제가 최선을 다해서 제가 했는데 제가 힘들었던 거는 제가 좋아했던 사람들, 제가 믿었던 사람들이 그리고 제가 정말 진심으로 아껴줬던 사람들이 지금 저를 막 비난하고 저에 대해 폭로하는 그런 걸 봤을 때 솔직히 힘들었다. 내가 그 사람을 너무 쉽게 생각했구나. 그래서 처음에는 되게 화도 났는데 어찌됐든 다 제가 부족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랬다는 걸 알고서 이해는 못하겠지만 그냥 그들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하면서 그냥 받아들이려고 하고 있다. 그냥 저는 정말 열심히 했던 것 같다. 정말 열심히 했고, 제 입으로도 제가 얼마나 열심히 했다라고 얘기하면 좀 뭐 자기 자랑하는 것처럼 느끼겠지만 나름대로 역할을 했고 그걸 인정해주신다면 감사하고 근데 저는 항상 그 얘기를 했다. 제 역할이 필요가 없으면 저는 사라지겠다.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제 일을 하는데 이제 그게 더 이상 필요가 없으면 저는 그냥 사라지겠다. 그냥 제가 사라지는 것만으로도 안 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그냥. 예전에 어떤 국회의원이 그 얘기를 했던 것 같다. ‘가로세로연구소’는 사회적 흉기다. 제가 그 발언을 봤을 때 좀 생각을 많이 했다. 진짜 흉기다. 제가 좀 날카롭다. 제가 흉기가 된 것 같았다. 나는 그냥 열심히 했는데,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내가 정말 치명적인 흉기가 됐구나. 문제는 이 흉기가 정신병자의 손에 쥐어진 거다. 정신병자가 이 흉기를 휘두르는데 이렇게 날카로운 흉기를 철저하게 관리해서 정말 꼭 필요한 상황에서 카드를 휘둘러야 하는데 분노에 휩싸인 정신병자가 이 칼을 휘두르게 했다. 그게 이 불행의 시작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제가 이 이야기를 했다. 힘을 가져서는 안 되는 사람에게 힘을 준 것이 가장 후회된다. 나라는 흉기를 정신병자가 휘두르게 했으니 얼마나 많은 사회적 갈등이 일어났을까.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상처받았고 근데 결과적으로 그 책임은 다 제가 지고 있다. 제가 뭐 이런저런 재판에도 휩싸이고 실형을 받는 것도 있고 그 당시에는 저도 폭주했던 것 같다. 왜냐면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내가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그래도 나는 최선을 다해서 했는데 결과적으로 그 사람들이 나를 비난하는 모습을 보면서 좀 힘들었지만 어찌됐든 내가 한 행동에 대해서는 내가 책임을 진다. 저는 그렇게 생각을 했기 때문에. 예 그렇다. 저는 막 구구절절 변명하고 좀 그런 거 제 타입이 아니다. 근데 좀 제가 걱정하는 거는 그래도 많은 분들이 알아주길 거라고 믿어서 그래서 제가 구구절절 설명 안 하는 거다. 제가 뭐 이건 이렇가 이건 이렇다 이렇게 설명을 안 해도 그래도 알아주시는 분들이 많아서 제가 설명을 안 드리는 거다. 사실 제가 얼마나 많은 상황들이 있었겠냐. 저 이번에 경찰 수사받을 때도 경찰을 계속 회유했다. 경찰도 알더라. 여기는 내가 봐도 좋은 사람 같은데 왜 본인이 이 모든 것을 다 떠안으려 하냐. 근데 저는 제가 잘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인정하고 처벌받고, 근데 제가 잘못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오해받는 건 굉장히 힘들지만 그래도 내가 책임져야 되는 부분이 있다면 그냥 내가 안고 가는 게 맞다라고 저는 항상 생각하는 사람이다. 말 나온 김에 하나는 제가 솔직하게 말씀드리겠다. 지금 제가 연예인을 공갈을 했다 그렇게 기사가 나오는데 저는 그런 적이 전혀 없다. 그렇게 기사에 나오는데 검찰의 공소장에도 제가 연예인한테 공갈해서 돈 받은 내역은 전혀 없고 어떤 피부과 의사한테 달러로 얼마를 받았다. 그거는 제 이름을 팔아서 어떤 건달이 그 피부과 의사한테 돈을 뜯은 건데 그게 저한테 다 오더라. 솔직히 저는 좀 그랬다. 뭐 전과 몇 범인 사기꾼 건달 진술인데. 그 진실을 믿으면서 제 이야기는 믿어주지 않고. 근데 그럴 수 있다. 저쪽은 치밀하게 다 녹취하고 근데 저는 바보같지만 저는 사적인 대화는 녹취를 하지 않는다. 취재로 이렇게 공적으로 하는 녹음은 있지만 사적인 녹취는 안 한다. 근데 그쪽은 제 사적인 녹취를 다 갖다 부어서 그래서 그 건달이 그 피부과 의사에게 공가를 해서 돈을 뜯어냈대. 나도 최소한의 공조를 했다. 나도 알고 있었다. 그걸로 영장을 친 거다. 말도 안 되는 뭐 제가 영수증을 썼다 그거는 전혀 상관 없는 거다. 어찌됐든 대중은 시각적인 것과 청각적인 것에. 제가 그 얘기를 했다. 저는 제가 누구처럼 뻔뻔하지 못해서 저는 제가 잘못한 부분들에 대해서는 솔직하게 인정한다. 그거 갖고 구구절절하게 변명하지 않는다. 제가 정말 그 피부과 의사들 공격해서 내가 돈을 받았으면 저는 그거에 대해 제가 처벌받는 것에 대해 일말의 억울함도 없다. 절 팔아서 어떤 건달이 그 피부과 의사한테 돈을 뜯었는데 그걸 나고 알고 있었다, 나도 최소한의 공조를 했다, 그 혐의인데 지금 경찰 영장을 보니까 그 건달이 뭐 저와의 녹취와 카톡을 많이 냈더라. 근데 그걸 보면 그냥 나고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저는 오래돼서 기억도 안 난다. 내가 그런 얘기를 했는지도 기억 안 나도 녹취가 있다니까. 경찰도 알 거다. 저 건달이 주도적으로 했고 김용호는 이용당했구나. 하지만 그 건달은 유명하지 않은사람이고 나는 유명하니까 경찰은 유명한 저에게 모든 혐의를 다 뒤집어 씌워서 이렇게 기사를 내고 근데 거기다 연예인 얘기를 왜 하냐. 나는 연예인에게 돈 뜯은 적이 없다. 이렇게 해서 저는 연예인한테 공갈을 쳐서 몇 억을 치는 나쁜 사람이 돼 있다. 저는 이게 당연히 억울한 상황이고 저는 뭐 이런 상황을 통해서 제가 돈을 받은 것도 없고 경찰이 제 계좌를 탈탈 털었다. 제가 실제로 돈을 받았으면 제 계좌에서 돈이 나왔겠다. 제가 그 돈을 어디 땅에 파묻어 놓지 않은 한 근데 저는 돈은 안 받았고 당연히 그 증거도 없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뭐 이런 얘기를 해봤자 그냥. 사람은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믿는다. 저는 시각적으로든 영수증도 나오고 녹취도 나오고 이렇기 때문에. 저는 제가 실제로 진짜 부정적인 일을 했으면 저는 제 양심이 용납을 못한다. 근데 뭐 제가 이렇게 얘기해봤자 그냥 저를 미워하는 사람들은 그리고 저랑 같이 일했던 제가 그 누구보다도 챙겼던 사람이 가장 적극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나 돈 받았다고. 이런 상황에서 약간의 진실도 중요하지만 그 진실처럼 보여지는 것도 중요하다라는 얘기를 누가 했는데 그냥 내가 너무 순진했던 것 같다. 제가 이런 진실된 애기를 믿어주시는 분이 조금은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고 그럼 됐다. 됐고. 저는 그렇게 막 구구절절하게 변명하고 싶지 않다. 그냥 제가 다 철저하지 못했고 너무 많은 여지를 줬고 너무 사람을 많이 믿었고 사람들에게 이용당했다고는 하지만 그 빌미를 준 것도 내 불찰이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많은 분들 걱정 끼쳐드리고 실망 끼쳐 드린 것 죄송하다. 제 역할이 끝나면 저는 사라지려고 했다. 그 얘기를 제가 여러 번 했던 것 같은데. 강용석 변호사가 얘기하더라. 너무 유명해진 게 탈이다. 저는 뭐 그렇게 유명해지고 싶은 생각도 없고 권력도 없고 무주적인 욕심도 없고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라고 생각했던 사람인데. 그래서 제가 나름대로 역할을 했다면 그리고 그 역할을 인정해 준다면 감사한 건데 내 역할이 끝나면 나 사라지겠다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렇게 저를 쉽게 냅두지 않더라. 누가 저에 대해 비난하고 욕하고 폭로하고 그럼 괜찮다. 그건 나니까. 내 일은 제가 다 감당한다. 근데 저를 가장 힘들게 한 거는 저를 진짜로 힘들게 한 거는 만약에 상대방이 얘한테 치명적인 타격을 줘야겠다, 그걸 의도해서 했다면 성공한 거다. 나에 대해서 비난하는 거는 나에 대해서 폭로하는 거는 다 괜찮다. 내가 다 감당하면 된다. 근데 내 가족,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내 지인들 그것에 대해 얘기할 때, 내가 할 말이 없더라. 나는 괜찮은데 그들은 괜찮지 않다. 나 때문에 아무 잘못 없는 그들이 피해를 받고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냥 내가 사라져서 사람들이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사라지지 않으면 영원히 계속될 거라는 걸 알기에 그래서 그냥 제가 사라지기로 결정을 했다. 저는 내가 사라져서 그 많은 분노와 갈등이 해결된다면 그냥 내가 다 잘못했고 그냥 나 하나가 사라지면서 갈등이 해소될 수 있다면 그냥 내가 사라져서 이 정말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끝나겠구나. 그래서 제가 결정을 했다. 어떤 사람들은 저한테 왜 분노하지 않냐고 왜. 저는 그거는 신의 영역인 것 같다. 그냥 제가 이렇게 희생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이 최소한의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면 그럼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러지 않을 거다. 그런 공감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으면 지금 이 상황을 만들지도 않는다. 결국은 하늘이 알아 줄 거고 그래도 누군가는 이 상황에 대해 공감해줄 거라고 믿기 때문에 제 마지막 메시지를 남기는 거다. 그래도 저는 후회하지 않는다. 보람을 느낀다. 되게 힘든 시기에 제가 역할을 했고 요즘 뭐 부정선거 선관위 국정원 해킹 나와서 많은 분들이 이제는 드디어 이 부정선거의 진실이 밝혀지겠구나 이제 막 뒤늦게 숟가락 얻는 사람들 많더라. 근데 아시는 분은 알 거다. 그거 최초 제기한 사람이 저라는 거. 뭐 어찌 됐든 결과적으로 그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이 왔다는 것에 대해서 저는 보람을 느끼고 사실 그때 더 구체적인 정황도 있었다. 솔직히 그 내부자 제보도 있었다. 그때 전산 조작의 조작에 가담한 사람도 저한테 직접 연락이 왔었고 근데 이런 중요한 일을 하려면 제가 더 철저하게 자기 관리를 했었어야 되는데 제가 스스로 무너졌고 저를 무너뜨린 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저랑 같이 일했던 사람들, 제가 좋아했던 사람들, 제일 믿었던 사람들이 저를 무너뜨렸다는 것에 대해서 안타깝지만 하여튼 어찌 됐든 저는 사라져도 시간이 지났지만 결국 진실은 밝혀질 거다, 그 역할을 했다는 것에 대해서 저는 그냥 저 스스로는 그래도 만족한다. 참 제 주변에 나쁜 사람들도 많고 미친 사람들도 많지만 그래도 제가 이렇게 좋게 얘기할 수 있는 거는 정말 좋은 사람들이 더 많았다. 정말 진심으로 더 저 아껴주고 저 인정해 주고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는 정말 좋은 사람들이 많아서 물론 제가 사람들 때문에 상처도 받고 사람들 때문에 피해를 받았지만 그것보다는 제가 사람들 때문에 위로받고 사람들 때문에 감사했던 게 더 많기 때문에 저는 억울하지 않습니다. 제가 제일 힘들 때 누가 그 얘기하더라. 그래도 한 시대를 풍미하지 않았냐. 남자가 태어나서 이름 알리지 않았냐. 제가 생각했던 게 그런 건 아니지만 어찌 됐든 많은 분들이 저를 기억해주고 막 저에 대해서 이런저런 평가를 해주고 제가 물론 잘못한 부분도 많고 그런 것도 있지만 그래도 제가 역할을 했던 부분들에 대해서 인정해 주시는 분들이 있다라는 것을 제가 알고 있기 때문에 감사하다. 저는 최근에 아버지를 떠나 보냈다. 제가 큰 불효를 했다. 제가 아버지 상을 치르면서 제 생각을 많이 했다. 저는 아버지하고 정말 각별했다. 사실은 더 연명 치료를 하면은 더 아버지가 더 오래 사실 수도 있었는데 그 연명 치료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버지 너무 힘들어하는데. 그래서 제가 결정을 내렸다. 큰 불효다. 저도 마찬가지다. 앞으로 더 살면 얼마나 살겠나. 구차하게 억울함을 소화하면서 제가 연예부 기자를 하면서 정말 많은 죽음을 경험했다. 그래서 제가 장자연이라는 여배우의 죽음 비하인드를 제가 유튜브 첫 영상을 찍었다. 장자연이 죽기 전까지 장자연 알았던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 하지만 장자연의 죽음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던 사람들이 있다. 부산 좀 생각난다. 부산 영화제에서 또 화제가 됐던 어떤 여배우 그 여배우의 죽음을 두고서도 저랑 연관을 시켜서 또 이런저런 눈물을 퍼뜨리는 사람들도 있고 그걸로 믿는 사람도 있더라. 천벌받을 거다. 진짜 천벌 받을 거다. 사실을 알면서도. 저는 얘기하지 않는다. 왜냐 내가 얘기하는 순간 또 다른 피해들이 생기니까. 사실 이것 때문에 힘들어하는 주변 사람들이 많아서 제가 굳이 얘기 안 하려고 한다. 저는 거짓말 못한다. 거짓말을 해도 티가 난다. 어설프게 거짓말 못한다. 그리고 제가 지금 이 상황에서 여러분들에게 진실이라는 얘기를 왜 하겠냐. 그냥 저는 그냥 이 또한 지나가리 뭐 제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도 아니고 뭐 하루이틀 시끄럽겠다. 저는 뭐 분노도 없고 오히려 제가 제 능력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았다는 사실에 대해서 감사하고 제 역할을 했다는 부분에 대해서 뿌듯하고 제가 더 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는데 그걸 못했다는 부분이 좀 안타깝지만 그냥 그게 제 한계였던 것 같다. 저 나름대로는 그냥 이 정도면 됐다라고 생각을 한다. 하지만 마지막에 저하에 대해서 되게 부정적인 여러 가지 소송이나 뭐 여러 가지 뭐 그런 것들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좀 억울한 부분도 있고 그거에 대해서 내가 설명하려면 한도 끝도 없지만 만약에 궁금한 부분들이 있다면 저희 변호사님한테 얘기해달라. 지금 제 변호사들이 제일 억울해 한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게 있는데 하지만 그 나라는 존재가 이렇게 지금 사회적 갈등 요소가 됐다는 것에 대해서 저는 그 역할을 잘 인정하고 결국은 지금 대한민국이 극단적인 갈등 사회에서 결국은 누군가가 희생이 돼야 된다. 저는 만약에 저를 통해서 사람들이 좀 알아주었으면 좋겠다는 게 이제는 서로 극단적으로 갈등하지 말고 이제는 좀 상대방의 입장을 조금이라도 이해해줘라. 그 공감이라고 하죠 공감 좀 최소한의 공감만 있어도 그래도 조금은 그 세상이 나아지지 않을까. 제가 얼마나 많은 내용을 알고 얼마나 많은 상황에 대해서 제가 알겠냐. 정말 제가 누구 같았으면은 이것도 폭로하고 저것도 폭로하고 내가 아는 걸 다 폭로하지. 다 그 얘기하더라. 근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그리고 제가 보기 그렇게 대단한 존재도 아니고. 제 이 마지막 메시지를 많은 분들이 좀 공감해 주셨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들면서 전 이제 사라지겠다. 감사했고 특별히 뭐 슬퍼하거나 억울할 필요는 없다. 저는 그냥 제 역할을 다하고 가는 거니까. 그냥 제가 사라짐으로써 좀 좀 평화가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살아남은 삶은 잘 살아야 한다. 그리고 저는 제 존재 때문에 제 가족이나 제 사랑하는 사람들이 피해 받는 게 제일 싫다. 제가 이렇게 선택을 한 이유도 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피해 받는 게 싫어서 그렇다. 저는 괜찮거든요. 저는 괜찮은데 나 때문에 내가 사랑하는 다른 사람들이 피해받는 게 싫다. 내 욕을 하면 괜찮은데 그거는 뭐 나는 그걸 감당할 수 있으니까 그때 내 가족을 욕하고 내 사랑하는 사람들 욕해. 근데 그들은 그것 때문에 너무 힘들어 한다. 그래서 내가 사라져야지 그게 끝나겠구나 생각이 들어서 그래서 저는 이런 선택을 한 거다. 그러니까 제발 그냥 저는 그냥 잊어주시고 그냥 용서해 주시고 그래도 제 진정성을 조금만 이해해 주시고 이 또한 지나가리 떠나는 사람은 떠나고 살아남은 사람은 앞으로 잘 살 수 있게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 이게 제 마지막 이야기다. 그래도 이렇게 미흡하고 되게 부족한 저를 좋아해 주신 분들이 있고 마지막에도 저한테 여러 가지 메시지 보내주시고 그런 분도 있는데 그리고 끝까지 저 믿어주시고 저 챙겨주신 많은 분들 내 일일이 거명 안 해도 너무 사랑하고 너무 감사하다. 제가 그들 때문에 되게 편하게 정말 기쁘게 그냥 제가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저에 대한 그리움이 있다면 분노와 그런 억울함과 그렇게 하지 마시고 그냥 김용호 연예부장은 자기 역할을 끝내고 사라졌다. 그냥 그렇게만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겠다. 네 좀 말이 길었는데 그냥 이해해 주시고 감사하다. 안녕. | 김용호 | 1976.9.11~2023.10.12 |
아버지 이승만 대통령의 뜻을 받들어 자유민주주의 통일이 돼 북한 동포들도 자유를 누리고 배고프지 않게 잘 살기를 바랍니다. | 이인수 | 1931.9.1~2023.11.1 |
아무 걱정 마라. 주님께서 함께 하시고 우리를 지켜주시니 걱정할 일 전혀 없다. | 신구범 | 1942.2.2~2023.11.2 |
제가 코코초이 유투브 채널을 2020년 2월 첫주에 오픈했으니 이번주로 유투버가 된지 딱 3년 6개월이 되었네요. 그동안 단 한주도 빼먹지 않고 영상을 올리기위해 열심히 쇼핑도 하고 촬영도 하고 바쁘게 달려왔구요. 근데 이제 잠깐 쉬어가야할 때인거 같아요. 선선한 날씨를 즐기면서 컨텐츠도 정비하고 컨디션도 회복해서 보다 업그레이드 된 코코초이로 돌아오겠습니다.[472] | 코코초이[473] | 1994~2023.11.18 |
경찰분들께 검시할 필요 없습니다. 제가 스스로 인연을 달리할 뿐인데 CCTV에 다 녹화되어 있으니 번거롭게 하지 마시길 부탁합니다. 지강 주지스님 이곳에서 세연을 끝내게 되어 민폐가 많소. 이 건물은 상좌들이 복원할 겁니다. 미안하고 고맙소. 부처님 법 전합시다. 총무원장 스님께 끝까지 함께 못해 죄송합니다. 종단의 미래를 잘 챙겨주십시요. 상월선원과 함께해 주신 사부대중께 감사합니다. 우리 종단은 수행종단인데 제가 여러 소임을 살면서 수행을 소홀히 한 점을 반성합니다. 결제 때마다 각 선원에서 정진하는 비구 비구니 스님들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존중합니다. 해제 때마다 많은 선지식들이 나와 침체된 한국불교를 이끌어 가주시길 서원합니다. 탄묵, 탄무, 탄원, 향림 각자 2억씩 출연해서 토굴을 복원해 주도록. 25년도까지 꼭 복원할 것. | 자승 | 1954.4~2023.11.30 |
어쩔 수 없다. 이것밖에 방법이 없는 것 같다. | 이선균 | 1975.3.2~2023.12.27 |
하나도 안 어려워요, 겸손이라고 생각해요.[474] 겸손[475] | 홍세화 | 1947.12.10~2024.04.18 |
체제 위기에 놓인 대한민국을 지켜달라. | 노재봉 | 1936.02.08~2024.04.23 |
살아서 돌아올게요.[476] | 박태인 | 2002.9.5~2024.5.25 |
수술 잘 받고 와요.[477] | 쑥 싸완 말라팁 (주이)[478] | 1991~2024.06.24 |
광석이 기일날 하는 행사들과 재단 설립을 신경써서 잘해 달라.[479] 그저 고맙다. | 김민기 | 1951.03.31~2024.07.21 |
연기가 너무 심하고, 방안에 가득 차 밖으로 나갈 수가 없어.....[480] 5분도 못 버틸 것 같아. 내 물건은 다 버려줘. 내 몫까지 잘 살아야 해.[481] | 부천 호텔 화재 사고의 사망자 김 모씨 | 1997~2024.08.22[482] |
엄마사랑해 나 모텔불이나서 죽을것 같아 엄마 아빠 모두 미안하고 사랑해[483] | 부천 호텔 화재 사고의 사망자 A씨 | 2000~2024.08.22[484] |
가능한 일기를 써야 겠다. 어차피 내 블로그에 관심있는 사람은 적으니까 적어봤자 의미없는 행동을 했구나는 생각밖에 안 들어서 글을 거의 안 적고 있는데...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 써야 겠다. X월 X일 뭐 했는지 확인해보려면 가계부 기록 보는 수 밖에 없는데 그것도 없거나 기록이 불투명한 경우가 있다.[485] | 똥똥배(박동흥) | 1982.09.11~2024.08.24 |
3대 남았어 근데 차가 안와[486] | 김기현[487] | 2001.03.16~2024.8.12 |
안녕하세요. 유영입니다. <열무와 알타리>는 재충전을 위해서 잠시 휴식기를 가지기로 했습니다. 보내주시는 응원과 기다림에 보답해 드릴 수 있도록 열심히 준비해서 내년 초 새해 인사와 함께 찾아 뵙겠습니다. 열무와 알타리 잊지 말아 주세요!! 항상 감사힙니다.[488] | 이유영 | 1983~2024.09.23.[489] |
하나님이 저에게 좋은 일을 할 수 있게 이끌어주시고, 또 많은 분이 함께해서 꿈을 이룰 수 있었다. | 박승일 | 1971.05.21~2024.09.25 |
배구야, 안녕! 배구야, 넌 내가 만났던 친구 중 가장 나와 케미가 맞았던 친구야. 그야말로 우린 베프(베스트 프랜드)였지. 내가 너를 처음 만났을 때가 열세 살 중딩 시절이었으니 우리의 인연은 벌써 반세기가 훌쩍 지나 60년이 다 돼가는구나. 여느 친구들이 그랬듯 너와 내가 그 긴 세월을 함께하는 동안 왜 갈등이 없었겠니. 때론 내가 너를, 또 가끔은 네가 나를 힘들게 한 적도 있었지. 그 때마다 너와의 관계를 끊어버릴까 생각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지. 그러나 결국은 너도 나를 버리지 못했고, 나도 널 버릴 용기가 없었어. 그렇게 이어온 끈질긴 인연이 오늘에 이르렀네. 그런데 배구야, 이제 난 너와 더 이상 친구를 할 수가 없게 됐단다. 세상에 수많은 친구들 중 너에게 만은 내가 직접 이별통보를 해 주는 게 그동안 나와 함께 해 준 너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라고 생각해서 고통을 참으면서 이 편지를 쓴단다. 작년 말 발견하게 된 췌장의 암세포가 날 삼키려나 봐. 여러 암세포 중 췌장암이 제일 못된 놈이란 건 얘기를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내가 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1m70도 채 안 되는 작은 키로 배구도 했는데 그깟 놈 하나 못 이기겠어'라며 지난 1년 여를 호기롭게 맞서 싸웠지만 세상에는 안 되는 것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게 불과 며칠 전이야. "죄송합니다, 안될 것 같습니다" 주치의 선생님이 마지막 진단에서 미안해 하면서 내게 전한 말이야. 이제 내게 주어진 시간은 두달 남짓인가 봐.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지만, 아무 것도 이 현실을 되돌려놓을 수 없다는 걸 깨닫는 순간 난 모든 걸 받아들이기로 했단다. 이 단호한 결심은 오로지 나의 몫이야. 사랑하는 남편, 자랑스러운 딸들마저도 이 고통에 관한 한 국외자일 뿐이야. 그래서 내 스스로 내 삶을 정리하기로 했단다. 다른 모든 것들은 남아 있는 내 가족들이 잘 알아서 하리라 믿고 배구, 너에게 만은 내가 직접 이별통보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내 기력이 더 쇠하기 전에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솔직히 난 그동안 너와 함께 하면서 내가 먼저 널 떠나리라고는 단 한 번도 상상 조차 해 본적이 없었기에 너에게 조금은 미안한 게 사실이야. 배구야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나는 더 이상 너의 친구로 남아 있을 수가 없단다. 난 조만간 어디를 가야 해. 너와 함께 할 수 없는 저 머~언 곳으로. 넌 내가 없어도 또 다른 많은 친구들이 네 곁에 있어 외롭지 않을 거야. 섭섭하더라도 이제 나를 놓아 주렴. 나는 그동안 너를 만나 참으로 즐거웠고, 행복했어. 몬트리올에서, 이탈리아에서 너와 함께 한 여행은 내 인생의 꽃이었어. 그리고 대한민국 프로무대에서 너와 함께한 그 시간은 내 인생 최고의 데이트였어. 그까짓 암 덩어리 하나 이기지 못하고 너와의 이별을 고해야 하는 내가 조금은 밉지만 너와 내가 만나 즐겼던 한순간 한순간을 우리들의 추억으로 간직하고 갈게. 반세기가 넘는 너와 나의 관계가 어찌 이 한 장의 이별통보로 청산이 되겠니? 그러나 이제 내겐 너를 더 오래 붙잡고 있을 힘이 없단다. 고마웠던 내 친구, 배구야 안녕! | 조혜정 | 1953.03.05~2024.10.30 |
[1] 니계상 삼, 한음, 장군 왕협과 항복을 모의할 때의 발언이다. 모의 직후 앞서 언급한 인물들과 함께 한나라에 항복하러 가는 도중 전사하였다.[2] 광개토대왕릉비의 기록. 홀본 동쪽 언덕에서 용의 머리를 디디고 서서 하늘로 올라가면서 세자 유류에게 전했다는 고명(顧命), 즉 유언이다.[3] 고구려 2대 유리명왕의 둘째 아들로, 첫째 도절을 이어 태자에 올랐다. 이웃 황룡국에서 선물한 강궁을 꺾어 이웃 나라와의 화친을 깼다는 이유로 자결을 명받았다. 이 말을 한 직후 나가 여진(礪津)의 동쪽 들판에 창을 꽂고 말을 타고 뛰어들어 자결했다.[4] 죽기 1년 전인 47년 7월 민중원으로 사냥을 갔다가 석굴을 발견한 뒤 신하들에게 남긴 말이다.[5] 《삼국사기》에서는 146년 12월 아우 수성에게 양위하며 한 말로 기록되어 있으나, 태조대왕 후기 기록의 신빙성이 의심받는 현재로서는 《후한서》의 기록에 따라 121년 사망 당시 아들 수성에게 남긴 유언으로 보기도 한다.[6] 《후한서》의 기록으로, 《삼국사기》에서는 165년 3월에 승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7] 2세기 전반에 활동한 고구려의 인물로, 《삼국사기》에 따르면 123년 10월 우보(右輔)가 된 이후 좌보(左輔) 목도루, 왕의 동생 수성과 함께 정사에 참여하였다. 차대왕 즉위 직전인 146년 10월 태조대왕에게 수성의 숙청을 진언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이듬해 3월 차대왕에 의해 숙청되었다고 한다. 숙청 당시 멀고 가까운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애석해했다고 전해진다.[8] 패자(沛者)의 관직을 지녔던 고구려의 인물. 《삼국지》 및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 동천왕이 위나라를 공격하자 여러 차례 간언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이 말을 남기고는 스스로 굶어 죽었다고 한다.[9] 비류수 전투 당시 고구려를 상대로 승승장구하던 위나라의 군대를 혼란스럽게 만들기 위해 계책을 꾸며, 위군에게 거짓으로 항복하는 척하며 장수를 죽인 뒤 본인도 같이 죽은 충신이다.[10] 지금의 충주 계립령로 하늘재길로 비정된다.[11] 연개소문 사후 고구려는 연개소문 아들들의 권력 투쟁으로 멸망한다. 이 유언은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다.[12] 얼마 후 고도(苦都)가 명왕(明王)을 사로잡아 두 번 절하고 "왕의 머리를 베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명왕이 "왕의 머리를 노비의 손에 줄 수 없다"고 하니, 고도가 "우리의 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기면 비록 국왕이라 하더라도 노비의 손에 죽습니다"라 하였다. (다른 책에는 "명왕이 호상(胡床)에 걸터 앉아 차고 있던 칼을 곡지(谷知)에게 풀어주어 베게 했다"고 하였다.) 명왕이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하고 눈물 흘리며 허락하기를 "과인이 생각할 때마다 늘 고통이 골수에 사무쳤다. 돌이켜 헤아려 보아도 구차히 살 수는 없다"라 하고 머리를 내밀어 참수당했다. - 《일본서기》[13] 가야 탁순국의 왕자 출신으로, 백제에서 제2품 관등인 달솔에 올랐다. 왜국에 사신으로 파견됐을 때 백제의 쓰쿠시국 정벌 계획을 왜왕에게 폭로한 뒤, 백제인들을 쓰시마섬으로 유인해서 죽일 것을 건의했다. 이후 동행했던 백제인 덕이(德爾)와 여노(餘怒)에게 밉보여 살해당하기 직전에 이 말을 남겼다. 유언에서 신라가 언급된 것은 그때 마침 신라의 사신도 왜국에 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14] 옥사에서 굶어 죽어갈 때 쓴 상소문이다. 의자왕은 이 상소를 무시했고, 결국 백제가 생존할 수 있는 결정적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15] 백제 부흥군의 장군. 풍왕과 갈등하던 끝에 결국 제거되었는데, 복신의 처형을 망설이던 부여풍에게 달솔 덕집득이 반역자는 살려둬서는 안된다고 하자 덕집득에게 침을 뱉으며 한 말이다. 원문은 '腐狗癡奴'로, 《일본서기》에 기록된 일화다.[16] 《삼국사기》 〈신라본기〉 탈해 이사금 즉위 기사에 기록된 유리 이사금의 유언에서 '선왕(先王)의 고명(顧命)'으로 언급되는 내용이다.[17] 그러나 두 아들 모두 훗날 늦게나마 왕위에 오르니 각각 파사 이사금과 일성 이사금이다.[18] 현전하는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212년 포상팔국 전쟁과 215년 갈화성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음에도 왕족의 모함으로 논공행상에서 제외되었다. 이에 체념한 물계자는 아내에게 이 말을 남긴 뒤, 머리를 풀어 헤치고 거문고를 멘 채로 사체산(師彘山)에 들어가 영영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19] 나해 이사금의 아들로 이 시기 신라의 명장으로 유명하다. 왜국 사신 갈나고(葛那古)가 왔을 때 그의 무용을 띄워주자 술김에 "기회가 되면 너희 나라에 쳐들어가 너희 왕은 소금 만드는 노비로, 왕비는 부엌데기로 만들겠다"(…)라고 말한 것이 왜국 장군 우도주군(于道朱君)을 필두로 한 대대적인 침공의 빌미가 되었다. 이 말을 남긴 직후 왜왕에 의해 화형에 처해졌다. 그의 아내는 이를 한으로 여겨 왜국 사신이 왔을 때 접대를 자청하고는 똑같은 방식으로 화형시켜 버린다. 이 결과 다시 침공을 당하는데, 이번의 경우엔 격퇴할 수 있었다. 뒷날 우로의 아들은 흘해 이사금이 된다.[20] 《삼국사기》의 기록이다. 《해동고승전》에도 "나는 불법을 위해 형장에 나아가지만 부디 정의와 이익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부처님께서 만약 신통력이 있으시다면 내가 죽을 때에는 반드시 이상한 일이 있을 것입니다."라 하여 비슷한 유언을 전하고 있다.[21] 사망 연도인 528년은 《삼국사기》의 기록이다. 최치원의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에는 "양나라의 보살제가 동태사에 간 지(527년) 1년째, 법흥왕이 율령을 마련한 지(520년) 8년째에 존귀한 신하가 제 몸을 바쳐 불교가 널리 유행하기 시작했다"는 기록이 있어 이차돈이 528년에 죽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한다. 한편, 출생 연도는 《삼국유사》에서 9세기 초의 〈촉향분예불결사문〉을 인용해 순교 당시 이차돈의 나이를 22세라고 한 기록을 바탕으로 역산한 것이다.[22] 《삼국유사》의 기록이다.[23] 437년 출생한 지증왕의 증손이고, 580년 2월에 병부령에 임명되었으며 사망 당시 아들이 세 명 있었다고 한다. 이 기록들로 미루어 보아 김후직은 대략 580~590년대에 사망했을 것이라 짐작된다.[24] 신라 진평왕 때 가잠성 성주. 가잠성을 공격한 백제군과 싸웠으나 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이 말을 남기고 느티나무에 머리를 부딪혀 자결했다.[25] 찬덕의 아들. 아버지의 공덕으로 출세해서 가잠성을 탈환했다. 그러다가 다시 백제군이 성에 쳐들어오자 이들을 맞아 싸우다가 전사했다.[26] 사량궁(沙梁宮)을 관리하는 사인이자 화랑 근랑(近郞)을 따르는 낭도였다. 백성들이 자식을 팔아먹을 정도로 나라에 큰 기근이 들어, 사량궁의 다른 사인들이 창예창(唱翳倉)이라는 창고에서 곡식을 훔쳐 나눌 때 검군만은 홀로 받지 않았다. 사인들이 "양이 부족해서 그러냐"며 묻자 낭도로서의 양심을 버릴 수 없다며 거절하고 근랑의 집에 찾아갔는데, 사인들이 입막음을 위해 자신을 암살할 것임을 예감한 검군은 근랑에게 작별을 고하며 몇 가지 질문에 대답했다. 표에 적힌 유언은 근랑의 마지막 질문인 "어찌 도망가지 않는가?"에 대한 답변이다. 이후 검군은 사량궁으로 돌아가 사인들이 베푼 술자리에 참석했는데, 예상대로 음식에 독약이 들어 있었다. 검군은 이 사실을 알면서도 스스로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음식을 억지로 먹은 뒤 죽었다.[27] 비령자의 노비. 백제와의 무산성 전투에서 비령자가 죽고 아들 거진이 앞으로 나아가려 할 때 "대인께서 저 합절로 하여금 주인님과 함께 집에 돌아가 부인을 위로하고 편안하게 해드리라 하셨습니다. 지금 자식이 아버님의 명을 저버리고 어머님의 사랑을 버리는 것이 어찌 효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만류하며 말고삐를 잡고 놓지 않았으나, 거진이 칼로 합절의 팔을 자른 뒤 적진에 돌진해 죽자 이 말을 남기고는 같이 전사했다.[28] 《삼국유사》에 따르면 말년에 명주 태백산에 석남원을 창건하여 문수보살이 오기를 기다렸는데, 어느날 남루한 옷차림의 늙은 거사가 찾아와 자장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자 시종에게 이렇게 말하며 무시했다고 한다. 이에 시종이 거사를 내쫓으니, 거사는 "돌아가련다. 아집에 빠진 자가 어찌 나를 알아보겠는가."라고 꾸짖은 뒤 죽은 강아지로 둔갑시켰던 사자를 타고 빛을 내면서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거사가 문수보살의 화신임을 뒤늦게 깨달은 자장은 빛을 쫓아 남쪽 고개로 올라갔으나, 따라가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져서 죽었다.[29] 본래 신라의 실제사(實際寺)에 머물던 승려로, 법명은 도옥(道玉)이었다. 백제가 도비천성(刀比川城)을 점령했을 때 태종 무열왕이 직접 출전했음에도 승산이 없자, 동료들에게 이 말을 남기고는 승복을 군복으로 갈아입으며 환속했다. 이윽고 병부에 가서 중앙 군사조직인 삼천당(三千幢)에 속하기를 청하였고, 마침내 종군하여 전장에 도착했다. 창과 검을 가지고 적진에 돌격하여 적군 몇 명을 죽인 뒤 전사했다.[30] 도비천성 전투 도중 야음을 틈타 습격해온 백제군을 홀로 막아낼 때 대사 전지(詮知)가 "지금 적이 어둠 속에서 움직이니 지척에서도 분간할 수 없고, 공이 죽는다 하더라도 알아줄 사람도 없습니다. 하물며 공은 신라의 귀한 신분으로 대왕의 사위입니다. 만약 적군의 손에 죽는다면 백제의 자랑거리이자 우리들의 깊은 수치가 될 것입니다."라고 말리자 대답한 말이다. 이후 하인의 만류에도 개의치 않고 칼을 뽑아 휘두르며 적과 싸워 여러 명을 죽인 뒤 전사했다.[31] 도비천성 전투에 보기당주(步騎幢主)로 출전한 신라의 장수. 김흠운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적진에 달려가 서너 명을 죽인 뒤 똑같이 전사했다.[32] 아버지 김흠순이 반굴을 부른 뒤 "신하가 되어서는 충성보다 중요한 것이 없고 자식이 되어서는 효도보다 중요한 것이 없다. 위험을 보고 목숨을 바치면 충성과 효도가 모두 갖추어진다."라고 하자 이 말을 남기고는 적진에 뛰어들어 힘껏 싸우다가 전사했다.[33] 원래는 '남북국시대'가 옳은 용어이지만 아래의 인물들이 모두 신라인이라는 사실을 감안하여 편의상 '통일신라시대'라는 용어를 사용한다.[34] 673년 6월 병석에 있을 때 문병을 온 문무왕에게 한 말.[35] 말갈족이 아달성을 노략질하자 칼을 휘두르며 적을 향해 외친 말이다. 이후 분노하여 적진을 향해 돌진하자, 말갈인들도 감히 접근하지 못하고 멀찍이서 화살만 쏘아대는 바람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전투가 이어졌다. 끝내 고슴도치마냥 온몸에 화살이 박힌 채로 쓰러져 전사하였다.[36] 《삼국유사》 〈기이〉의 기록으로, 지의법사(智義法師)에게 앞의 문장을 말한 뒤 법사가 "용이란 축생보(畜生報)가 되는데 어찌합니까?"라고 묻자 왕이 뒤의 문장으로 대답했다고 한다. 한편 역시 《삼국유사》에 실린 감은사 사적에는 "문무왕이 왜병(倭兵)을 진압하고자 이 절을 처음으로 짓다가 다 끝마치지 못하고 죽어 바다의 용이 되었다"는 대목이 있는데, 문무왕의 유언에 왜구 토벌이 언급되었다는 속설은 이 기록이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37] '목동들이 그 위에서 노래를 부르고 여우와 토끼는 그 옆에 굴을 팔 것이다.'의 대목은 현재 부분적으로만 남아있는 〈문무왕릉비(682)〉에도 등장하여 1차 사료와 교차 검증이 가능하다.[38]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기록된 조서의 내용이다. 조서에서는 생략되었지만, 기사 본문에 따르면 신하들이 문무왕의 유언에 따라 동해 입구의 큰 바위 위에서 장례를 치렀다고도 한다. 《삼국유사》에도 "유조를 따라 동해 중의 큰 바위에 장사지냈다"라 하여 비슷한 기록이 전한다.[39] 핍실의 첫째 형 부과(夫果)는 671년 1월 백제부흥군과 싸우다 전사했으며, 둘째 형 취도(驟徒) 역시 655년 9월 도비천성 전투에서 백제군과 싸우다 전사했다.[40] 실복(悉伏)을 비롯한 보덕국의 고구려 유민들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러 떠나기 직전 아내에게 남긴 말이다. 핍실은 자신의 유언대로 적진에서 수십 명의 목을 벤 뒤 전사했다.[41] 《삼국유사》에 기록된 유언으로, 장보고의 반란을 진압하러 청해진에 들어간 염장에게 용건을 물으니 "제가 임금을 배반해버렸기에 해를 피하기 위해 공의 막하에 몸을 의탁하려 합니다"라고 밝히자 기뻐하며 한 말이다. 이후 장보고는 염장에게 연회를 베풀어 함께 술을 마셨는데, 염장은 장보고가 거나하게 취한 틈을 타 장검을 빼앗아 그의 목을 벴다.[42] 선각국사 도선의 스승으로 유명하다.[43] 884년 건립된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의 기록으로, 죽기 한 달 전인 880년 음력 3월 9일 의지사들에게 남긴 유언이다.[44] 중국 춘추시대 거나라의 태자 복(僕)을 일컫는다. 기원전 609년, 동생 계타(季佗)를 편애한 아버지 기공(紀公)에 의해 태자 자리에서 축출되자 민심을 얻어 기공을 시해한 뒤 노나라로 귀순했다. 이에 노나라의 대부 계손행보는 복의 패륜과 절도 행위를 비판하며 그를 국경 밖으로 쫓아냈다고 한다.[45] 후백제 출신이라는 이유로 궁예의 의심을 사 궁궐에 소환당하자 남긴 최후의 변론. 그러나 궁예는 이 말을 무시한 채 그를 끌고 가 살해했다. 부왕을 죽인 거복과 상신이 언급된 점을 고려하면, 당시 형미는 궁예를 시해하고 그 아들을 왕으로 옹립하려 했다는 누명을 썼을 것으로 보인다. 2년 전 궁예의 부인 강씨와 두 아들이 처형당한 것과 유관할 수도 있다. #[46] 《고려사》에 기록된 유언으로, 죽기 이틀 전인 918년 음력 6월 14일 왕건이 역성혁명을 일으키자 깜짝 놀라며 도망치기 직전 한 말이다.[47] 최남선이 1924년 매일신보에 연재한 〈풍악기유〉에 기록된 유언으로, 이는 당시 철원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 전해지던 설화를 인용한 것이다. 궁예가 삼방 골짜기로 도망갔을 때 우연히 만난 어느 스님이 "더 이상 도망칠 곳도 없는 이런 협곡에 들어와 살아남겠다는 것이 어리석다"고 말하자, 궁예는 절망하여 "드디어 하늘이 나를 버렸다"고 말하고 높은 곳에서 의연히 투신했다는 내용이다. 다만 사서에서 확인되지 않는 사실이라 궁예가 정말 그런 유언을 남겼는지는 확실하지 않다.[48] 죽기 직전 신덕전에서 학사 김악(金岳)에게 유조를 적도록 한 뒤 아무 말이 없자 신하들이 통곡했는데, 왕건이 "이게 무슨 소리냐?"라고 묻자 신하들은 "성상께서 백성의 부모로 계시다가 오늘 여러 신하를 버리고자 하시니, 저희는 애통함을 스스로 참을 수 없을 뿐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왕건은 웃으면서 "덧없는 인생은 예로부터 그러한 것이니라.(浮生 自古然矣)"라는 말을 남기고는 잠시 뒤 세상을 떠났다.[49] 훗날 원공국사 지종의 스승이 되는 수제자 형초(逈超)를 가리킨다.[50] 죽기 이틀 전 사촌동생 왕치를 불러 왕위를 물려주고 내린 조서. 이하 고려 왕들의 유조도 대부분 비슷한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이 문서에서는 생략한다.[51] 죽기 직전 대사면령을 내리자는 신하 왕융의 상소에 내린 대답.[52] 통주 전투에서 패하여 거란군에게 사로잡혔는데, 요 성종의 회유를 받자 고문을 받으면서도 이를 거절했다. 그러나 함께 잡힌 부장 이현운이 "두 눈이 이미 새 일월을 담았는데 어찌 옛 산천을 생각하겠습니까"라며 거란에 충성을 맹세하자 그를 걷어차며 일갈한 말이다.[53] 요나라에 볼모로 잡혀있을 때 자신이 구매한 말들을 몰래 고려로 가는 길에 배치해 귀국을 꾀했는데, 이 사실이 발각되어 요 성종의 국문을 받자 한 말이다. 하공진의 의리를 가상히 여긴 요 성종은 그를 풀어주며 요나라에 충성을 다할 것을 설득했으나, 하공진이 더욱 강경하고 모욕적인 말투로 완강히 거절하자 결국 그를 살해했다. 이때 한 말이 "나는 고려 사람이며 감히 두 마음을 갖지 않는다.(我是高麗人, 不敢有二心.)"라는 이야기도 있으나 그 출처를 알 수 없다.[54] 형 숙종이 직접 찾아와 "불가피한 일(죽음)이 있을까 두려우니 하고자 하는 바에 대해 말씀해 달라"고 부탁하자 답한 말.[55] 정항의 아버지. 차남 정점(鄭漸)이 곁에서 간호하면서 근심하는 빛을 보이자 한 말이다.[56] 1108년 여진족이 고려의 여진 정벌 당시 설치되었던 웅주성(雄州城)을 공격할 때 비장(裨將)으로 출전하여 성을 2년에 걸쳐 굳게 지켰다. 그러나 갑자기 병에 걸려 위독한 상태가 되었는데, 소식을 들은 막내 아들 이탄지(李坦之, 1085~1152)가 포위망을 뚫고 막사에 찾아오자 눈물을 흘리며 이 말을 남기고는 그날 밤에 사망했다. 이후 이탄지는 아버지를 화장한 뒤, 웅주성에서 가까스로 탈출하여 유골을 개경 북쪽에 안장했다. #[57] 고려 중기의 문신. 이자겸의 난 당시 숙직하다가 궁궐이 불타는 것을 보고 한탄하며 한 말이다. 말을 마친 직후 시종에게 문을 닫게 한 뒤 그대로 불에 타 죽었다.[58] 동지추밀원사 지녹연, 상장군 오탁과 함께 이자겸 일파 제거를 모의했던 대장군 고석(高碩)의 동생이다. 형을 포함해 모의에 참여한 이들이 몰살당할 때 오탁의 아들 오자승(吳子升)과 같이 북산으로 숨어들었는데, 이자겸이 보낸 박영(朴永)이 둘을 체포하려 하자 높은 바위에 올라 박영을 꾸짖으며 한 말이다. 고보준은 이내 하늘을 향해 울부짖으며 오자승과 함께 바위 아래로 몸을 던져 죽었다.[59] 이자겸의 난 당시 도성(都省)에서 숙직하다가 변란의 소식을 듣고 탄식하며 한 말. 그 직후 홍관은 서화문으로 가서 문을 두드렸고, 안에서 내려준 밧줄을 타고 들어가 인종을 곁에서 모시게 되었다. 만월대에 계속 불길이 번지자 이자겸이 인종을 핍박하여 연덕궁으로 나가게 했는데, 홍관은 늙고 병들어 걸을 수 없었으므로 뒤에 있다가 서화문 밖에 이르러 척준경에게 살해되었다.[60] 고려 중기의 귀족 여인으로, 남편은 아버지를 해친 호랑이를 죽여 복수한 일화로 유명한 문신 최루백(崔婁伯, ?~1205)이다. 묘지명에 따르면 1145년 봄에 최루백이 정7품 사직(司直)에서 종6품 우정언(右正言)으로 승진하자 "우리의 가난이 그치려나 봅니다."라며 기뻐했는데, 최루백이 간관은 녹봉을 지키는 자리가 아니라고 하자 이렇게 대답했다고 전한다. 그녀는 같은 해 9월 병에 걸렸고, 결국 소원을 이루지 못한 채 이듬해인 1146년 1월 28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61] 고려시대의 문신. 동북 9성으로 유명한 윤관의 아들로 김부식과 대립했다. 《보한집》에 따르면 말년에 은거하여 관승(貫乘)이라는 승려와 함께 풀을 엮어서 만든 암자에서 지냈는데, 관승은 윤언이에게 "먼저 가는 사람이 여기 앉아 죽으면 죽어서 변전한다"고 말했다. 죽던 날 식사를 마치고 관승에게 "내가 갈 때가 되었으니 작별을 고하오"라고 말했고 관승이 전송하자 이 말을 남기고 암자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암자 벽에 사세구를 써 놓고 앉은 채로 죽었다고 한다. 사세구/한국 항목 참고. 한편 윤언이의 묘지명에는 그가 군영으로 출근하던 도중 몸이 좋지 않아 집으로 돌아가서 아내와 대화를 나누다가 죽었다는 상반된 기록이 전한다.[62] 고려 중기의 승려. 이자겸의 아들인 의장이 현화사에서 권세를 믿고 횡포를 부리는 것을 비판하여 여러 차례 위협을 받았고, 이자겸의 난 당시 의장이 덕겸을 억지로 종군시키려 할 때도 병을 핑계로 사양했다. 이후 난이 진압되자 그의 절개를 가상히 여긴 인종에 의해 천흥사의 주지가 되었다. 의종 대인 1146년에는 현화사의 주지가 되었다.[63] 고려 시대의 문신. 의종과 김부식, 한뢰와 함께 무신정변의 원흉이기도 하다. "유시의 변"이란 1167년 김돈중의 말이 실수로 한 무신의 화살통을 들이받아 화살이 의종의 수레 옆에 떨어졌는데, 이를 암살 미수로 오해한 의종이 범인을 찾으려 하자 김돈중이 급하게 무신들에게 누명을 뒤집어씌워 유배보낸 사건을 일컫는다.[64] 고려 무신정권 초기 김보당의 난을 주모한 문신. 이의방 등에 의해 개경으로 압송되어 저잣거리에서 처형당하기 직전 자신만 죽을 수 없다며 내뱉은 말로, 이 한 마디 때문에 무신정변을 가까스로 살아남았던 문신들이 모조리 살해당했다.[65] 말년에 넷째 아들 충희의 부고 소식이 몇 달 늦게 전해지자 무신들에게 당한 것이라 생각하여 우울증에 빠졌고, 마침 치질에 걸려 한동안 문안 인사를 오지 않던 다섯째 아들 평량공까지 죽은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되었다. 이에 명종이 평량공으로 하여금 가마를 타고 태후를 알현하게 하니, 태후는 기뻐하면서도 울먹이며 이와 같이 말했다고 한다.[66] 김사미·효심의 난 당시 대장군에 임명되어 반군을 진압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함께 출정한 이의민의 아들 이지순이 도리어 반란 세력과 내통하고 기밀을 누설하는 바람에 관군의 토벌에 차질이 생겼다. 이에 분노한 전존걸은 화를 입을 것을 우려해 그의 처벌을 망설이다가 결국 음독 자살을 택했다.[67] 한림학사, 동지추밀원사, 정당문학 등을 역임한 문신이며 초서와 예서를 쓰는 실력이 뛰어나 명필로 이름을 떨쳤다. 공교롭게도 당나라의 유명 서예가인 유공권(778~865)과 한자까지 같은 동명이인인데, 이쪽은 해서에 능했다고 한다.[68] 만적의 난을 일으킨 노비. 1198년 5월 17일 흥국사에서 거사를 치르기로 했으나, 노비들이 예상보다 적게 모이자 나흘 뒤에 보제사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며 내린 명령이다. 그러나 그날 반란에 가담했던 순정이 주인 한충유에게 반란 계획을 밀고했고, 만적을 비롯한 100여 명의 가담자들은 결국 체포당해 강에 던져졌다.[69] 최충헌 형제에 의해 폐위된 후 창락궁에서 갇혀 살던 1202년 9월, 동생 신종이 보낸 내시가 "의원을 보내어 약을 올리고 싶사오니 누구로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라고 묻자 대답한 말.[70] 입적하기 전 한 제자가 유마거사와 지눌의 병이 같은지 다른지 모르겠다고 묻자 대답한 말.[71] 자신이 죽으면 누군가 자신의 가문에 반기를 들 것을 우려하여 내린 명령이다. 과연 최충헌의 예상대로 그런 이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최충헌이 부른다고 거짓말을 하여 최우를 유인하려 했다. 그러나 이미 최충헌이 문병을 끊으라고 말한 뒤라 먹히지 않았고 이내 진압당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60년에 달하는 최씨정권의 시작을 연 인물답다면 인물다운 유언.[72] 고려의 무신. 폐위된 희종을 복위시키려 했다는 누명을 쓰고 나주에서 체포당하자 이 시를 읊은 뒤 아들 셋과 함께 바다에 투신했다.[73] 임종게를 남긴 후 한 승려가 "옛사람이 이르기를 '훗날 밤에 달이 처음 밝을 때 내 홀로 가리라' 하였는데, 어디가 바로 화상께서 홀로 가실 곳입니까?"라고 묻자 대답한 말.[74] 유응규의 동생.[75] 죽기 사흘 전인 8월 29일에 쓴 마지막 시.[76] 고려 후기의 무신. 일찍이 최우의 심복이었는데, 최우가 죽자 왕정 복고를 노리다가 주변인들이 최항의 편에 붙는 것을 보고 같이 귀부하였다. 이후 최항의 신임을 얻어 후한 대우를 받았으나, 최항이 견자산(見子山)의 저택으로 이사가면서 이를 주숙에게 알리지 않자 최항을 의심하고 꺼리게 되었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최항은 낭장 임경(林庚)을 보내 주숙을 압송하여 섬으로 유배보낸 뒤, 웅천에서 물에 빠뜨려 살해했다. 주숙은 장군 김효정(金孝精)이 이 일을 꾸몄다고 생각하여 죽기 직전 이 말을 남긴 것이다. 이후 김효정 역시 최항에 의해 섬으로 유배당해 죽었다.[77] 죽기 직전 처자식이 "우리들은 누구를 의지하여 살란 말입니까?"라며 흐느끼자 미소를 지으면서 남긴 말. 그의 처자식들은 훗날 몽골군에게 모두 살해되었다.[78] 무신 집권자 김준의 동생. 무진정변 당시 형을 따라 정당에 들어갔다가 핏자국을 보고 달아나려 했지만 환관 김자후(金子厚)에게 붙잡혀 살해당했다.[79] 본래 영주 지역의 향리였는데 개경으로 도망쳐 와 뛰어난 체력으로 이름을 떨쳤다. 이후 김준의 부하가 되어 무오정변에 참여한 공로로 대장군의 자리까지 승진했으나, 김준이 암살당하면서 임연에 의해 제거되었다.[80] 고려 후기의 문신. 삼별초의 난 당시 삼별초에 의해 멋대로 승선(承宣)에 임명되자 저항의 표시로 강물에 투신하여 죽었다.[81] 진각국사 혜심의 제자이자 탁연의 도반이었다.[82] 고려 후기의 문신. 공정하고 청렴하기로 유명했으나 동시에 지독한 술꾼이기도 했는데, 죽기 직전 아내가 술을 내놓자 이 말을 남기고는 술을 바로 다 마신 뒤 죽었다고 한다.[83] 1271년 1월 금주방어사로 근무하던 중 밀성군에서 방보(方甫) 등이 삼별초에 동조하여 일으킨 반란을 몸소 진압한 인물이다. 1300년 4월에 아내와 사별한 후 죽음이 멀지 않았음을 직감하여 스스로 작성한 묘지명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84] 병에 걸렸을 때 곁에 있던 아들 조련(趙璉, ?~1322)에게 전한 당부의 말.[85] 증손자 김무(金務)가 1429년 12월 작성한 노비 상속 문서에서 언급되는 유서의 내용이다. #[86] 뒤에 나오는 최영 장군의 아버지.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가사에서 보이듯 이를 최영이 한 말로 잘못 아는 경우가 많다. 다만 최영 자신은 이 유언을 받아들여 검소하게 살긴 했다.[87] 죽기 전 손자 이인복에게 남긴 유언. 1339년 조적의 난 당시 죽음을 불사하고 충혜왕을 위기로부터 구출한 적이 있었는데, 이에 감격한 이제현은 "죽고 사는 일은 기약할 수 없지만 공은 저보다 스무 살 위의 어른이니, 돌아가실 때가 되면 감히 비루한 문장을 아끼지 않고 무덤에 명을 짓겠습니다"라며 묘지명을 지어줄 것을 제안했으며 이조년은 이를 승낙했었다. 그 약속대로 이제현은 이조년이 죽은 이듬해인 1344년에 그의 묘지명을 작성하게 되었다.[88] 충혜왕의 시호를 요청하러 원나라로 떠나고자 짐을 싸던 중 갑자기 풍질에 걸려 10일 동안 물도 마시지 못했고, 이후 주변인들의 부축을 받아 단정히 앉은 채로 죽었다.[89] 병석에 있을 때 문병을 온 이색의 아버지 이곡(李穀, 1298~1351)에게 눈물을 흘리면서 당부한 말. 이에 이곡은 슬퍼하며 "병은 다 낫지 않겠습니까. 말씀이 어찌 이리 급하십니까?"라 대답했다고 한다.[90] 류경의 손자.[91] 근재 안축(安軸)의 동생으로, 공민왕 대에 정당문학을 지냈다.[92] 공민왕을 알현하러 행궁 중문을 지나던 중 김용이 보낸 문지기에게 머리를 얻어맞자 차고 있던 주머니를 세 번 두드리면서 당부한 말. 주머니 속에는 김용이 어명인 척 안우를 속여 정세운을 죽이도록 사주한 문서가 들어있었다. 그러나 문지기는 이 말을 무시한 채 그를 몽둥이로 쳐서 죽인 뒤 뜰 아래로 끌어내렸고, 결국 주머니 속 글은 공민왕에게 전해지지 못했다.[93] 흥왕사의 변 당시 살해당한 홍언박을 일컫는다.[94] 계림부로 압송된 후 임견미, 김두, 이보림 등에게 대질받을 때 한 말. 하지만 안도치를 죽인 이유를 말하지 못하자 곧 거열형에 처해졌다.[95] 정도전의 스승이다. 공민왕 대에 뛰어난 학식으로 명망이 높았으나 신돈에게 숙청당할 것을 우려하여 관직에서 물러났는데, 결국 신돈의 참소로 재산이 몰수된 후 그가 보낸 자객에게 교살당하고 말았다.[96] 윤택의 할아버지인 윤해(尹諧, 1231~1307)를 일컫는다.[97] 《고려사》 원문은 아지(阿只)인데, 전근대 한국에서는 한자 只가 '기'로 읽히기도 했으며 기사 본문에서도 "우리말로 어린아이를 지칭한다"라고 명시했기 때문에 한국어의 단어 '아기'를 표기한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서의 아기란 신돈의 시녀 반야가 낳은 아들 모니노(당시 만 5세)를 일컫는 것이다.[98] 처형당하기 직전 손이 묶인 채로 옆에 있던 임박(林樸, 1327~1376)에게 애걸하며 남긴 말이다.[99] 그러나 최만생은 홍륜 일행에게 공민왕의 계획을 알려주고 같이 공민왕을 살해했다. 그후 홍륜과 최만생은 이인임에게 처형을 당했다.[100] 회암사를 중창한 일로 대간의 탄핵을 받아 영원사(瑩源寺)로 유배 가던 도중 병이 도져 여흥 신륵사에 머물렀다. 호송을 맡은 관리 탁첨(卓詹)이 다시 떠나기를 독촉하자, 혜근은 이렇게 말한 뒤 진시(오전 7~9시)에 조용히 입적했다고 한다.[101] 죽기 전날 밤 우왕의 손을 잡고 남긴 유언이다.[102] 죽기 2달 전인 1382년 음력 1월 현릉을 참배하고 돌아와 자제들에게 당부한 말.[103] 우왕이 판후덕부사 김실(金實, ?~1388)을 문병객으로 보내 궁중의 약과 술을 하사하자 김실에게 전한 말.[104] 낭장 신사천(辛斯蕆, ?~1382)의 딸이다.[105] 무덤에는 정말로 풀이 나지 않았지만 후세에 풀을 심었다고 한다.[106] 이는 무인정사 당시 무사히 도망쳤다가 자수하고자 할 때 주위에서 말리자 한 말로 실제로도 남은은 정도전과는 달리 별로 미움을 사지 않는 사람이었고 남은을 죽인 태종 이방원도 후에는 남은이 살아있었다면 좋았을 거라며 남은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허나 어쨌든 당시에는 제거대상이었는지 결국 죽었다.[107] 이방원의 습격을 받자 아들 정담이 "오늘 일은 정안군께 빌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라고 묻자 그에 대한 대답. 이보다는 절명시로 알려진 <자조(自嘲: 스스로를 비웃다)>가 유명하다. 사세구/한국 참고. 사실 기록상으로는 이보다 뒤에 정안군 앞에서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 나중이지만 이 부분은 의심을 받기도 한다.[108] 조선 초기의 무신. 태종 이방원을 도와 공신의 반열에 올랐으나 세종이 즉위하고 태종이 상왕으로 있을 때 세종의 장인 심온을 제거하려는 태종의 옥사에 휘말려 거열형으로 죽었다. 거열형을 당하기 직전에 한 말이다.[109] 야사에서 나오는 유언으로 태종과 붙어 자신을 죽이는데 일조한 박은을 두고 겨냥한 말이라는 얘기도 있다.[110] 그런데 사실 세종도 세종이지만 전대인 태종 역시도 허조에게는 은인이다. 그 허조를 직접 잘 쓰라고 세종에게 지시한 사람이 태종이기 때문. 물론 세종은 어차피 태종이 말 안 해줘도 알아서 잘 썼겠지만 그래도 아버지가 직접 골라준 인재라는 점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111] 세종실록 127권, 세종 32년 2월 14일 기축 3번째 기사 - 임금이 동부승지 정이한(鄭而漢)에게 이르기를, "왜인·야인을 접대하는 것은 관계되는 것이 가볍지 않은데, 평안한 것이 몸에 배어, 해가 오래고 날이 깊어, 모든 일에 게으르고 늦어질까 두려우니, 마땅히 삼가 조심하기를 항상 하루같이 하여, 혹시라도 조금도 허술함이 없도록 하라." 하고, 즉시 예조와 병조에 명하여, 해당되는 관리를 경계하여 신칙하라 하였다. 이 앞서 임금의 몸이 완전하게 평복되지 못하여서, 승정원(承政院)에서 사건을 아뢰지 않았으므로, 일이 지체되는 것이 많았는데, 이에 이르러 비로소 사건을 아뢰매, 모든 사무를 재결하는 데 처리하기를 물흐르듯 하되, 모두 끝까지 정밀하게 하기를 평일과 다름이 없었다. 밤 2고(鼓)에 이르러 도로 편치 않았다.(2월 14일은 음력 기준이며 세종이 숨을 거둔 것은 17일이지만 실록에 기록된 세종 본인의 발언으로서는 마지막 기록이다.)[112] 약 140년 뒤 조선은 왜인에게 침략을 당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왕이 야인에게 머리를 조아리게 되었다.[113] 수양대군에게 철퇴로 얻어맞은 다음 기적적으로 살아나자, 다시 살해하러 찾아온 수양대군의 부하들에게 자신이 투옥되리라 생각했는지 친 호통. 이 직후 살해되었다. 두 번 죽은 셈.[114] 석물을 세우지 말라는 유언에도 불구하고 그의 7대손 참판 만(曼)과 8대손 성항(性恒)이 상의하여 단출한 상석을 놓고 짤막한 묘비를 세웠다. 그러나 1910년 한일병탄 전야인 8월 26일 밤 갑자기 파괴되었다.[115] 그리고 다음 날 바로 세상을 떠났다.[116] 이 유언 때문에 기존의 석곽묘를 쓰지 않고 석회를 다져 넣었는데, 오히려 공기의 유입을 막는 이런 구조가 시체가 부패하는 것을 막는다고 한다. 이따금씩 발견되는 사대부 미라도 바로 그것.[117] 남이에게 왜 무고했냐고 따지고 남이가 대답한 일화의 뒤에 기록된 강순의 마지막 발언.[118] 징비록에 기록된 유언. 허나 약 약 120년 후 조선은 임진왜란의 전화에 휩쓸리게 된다.[119] 실록에 기록된 공식적인 유언. 평소에 책을 좋아하던 것으로 많은 일화를 남긴 신숙주다운 유언이라 할 수 있겠다.[120]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한 말이라고 한다.[121] 죽기 직전에 성종에게 올린 말. 이 말을 마치고 죽었다고 한다.[122] 사사 당시 자신의 어머니에게 남긴 말. 다만 이는 실록에 기록되지는 않은 야사의 기록이다.[123] 그후 3년 뒤에 사람들이 무덤을 파 보니 시체가 전혀 썩지 않고 살아있는 것 같았다고 한다. 이에 사람들은 김시습이 죽어 부처가 되었다고 여기고 화장을 해 사리를 봉안했다.[124] 그러나 겨우 10여 년 만에 그의 아들 연산군이 이 일에 대해 희대의 복수극을 펼치게 된다.[125] 세조~연산군 대의 문관. 글에 뛰어난 문사였다. 사림파에 강경한 태도를 취해 미움을 많이 샀으나, 무오사화 때는 "청론하는 선비는 조정에 있어야 한다"면서 한 사람이라도 살리려는 모습을 보여 후일 사림에게 욕을 먹지는 않았다. 연산군은 그를 무척 총애했으나, 그의 말을 듣지 않고 결국엔….[126] 연산군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의 사형 집행을 담당했었다는 이유로 자결을 명령받았는데, 죽을 상황에서도 '은혜가 지극히 중하다' 고 하는 것은 '몸과 머리가 나누어짐을 면하게 되었기' 때문. 조선 시대에는 그나마 시신을 온전하게 보전할 수 있는 사약형이 가장 명예로운 처형법이었고, 그 다음이 교수형, 그리고 다음이 참수나 능지처참 등이었다. 연산군이 이세좌를 숙청한 내용은 갑자사화 항목을 참고 바람. 참고로 연산군은 후에 죽은 이세좌의 머리와 몸을 나누는 것도 모자라 머리를 효수하고 그 효수한 머리가 썩어버리자 뼈를 으깨어 바람에 날려보낸다...[127] 실록 졸기에서의 전양필의 보고.[128] 이세좌를 위해 온건한 의견을 올렸으며, 연산군에게 검소와 절약을 권하는 이유로 죽음을 당했다. 금부도사에게 이 유언을 전해듣고 대노한 연산군은 이극균과 가까웠던 무사들을 변방으로 유배 보냈다.[129] 연산군의 학정에 간언하다가 전신에 화살을 맞았다. 그리고 광기에 휩싸인 연산군이 칼로 팔다리를 절단한 후 걸어보라고 명하자 처선이 조롱한 말. 그리고 이 말을 들은 연산군은 처선의 혀를 잘라버렸다.[130] 연산의 대표적 총신. 2012년 한국 영화 간신의 주인공이 바로 이 사람이다. 연산에게 수많은 미인을 바치며 그의 타락을 도왔으며 죽는 유언까지도 연산에 대한 아부였고 연산은 그를 매우 총애하여 그의 집으로 직통되는 길을 민가 수십채를 헐어 놓고 했으며 그가 죽자 매우 상심했다 한다. 바로 위의 사람과 참 대비된다.[131] 연산군은 중전 신씨와 같은 곳으로 유배되지 못했다. 신씨는 일찍이 연산군의 학정을 말리려 눈물을 흘리며 간했으나 연산군은 그 말을 듣지도, 그렇다고 그를 내치지도 않았다. 장녹수를 비롯한 난잡한 생활 속에도 황금에 중전의 덕을 기려 새기라고 명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외에도 연산군일기를 보면 연산군이 중전 신씨를 유달리 챙긴 일화가 꽤 있다. 심지어 아예 없는 예법과 절차를 만들면서까지 직접 옥책을 내리려 한 적도 있다.[132] 왕은 비록 미치고 포학하였지만, 매우 소중히 여김을 받았다.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에 기록된 문장이다. 미쳐 날뛰던 갑자사화 때조차 유일한 브레이크 역할을 한 것이 폐비 신씨이다. 연산군이 폐위 후 유배를 갈 때도 같은 유배지로 보내달라고 울부짖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133] 중종반정의 공신. 의정부 소속 종이었던 정막개의 고변으로 인해 역모 혐의를 받게 되었고 결국 매를 이기지 못한 끝에 혐의를 인정하고 능지처참당했다. 집행 직전에 대간이었던 집의 김협을 보며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하며 김협은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정막개는 이 불분명한 역모 고변으로 노비 신분을 벗어나 정3품 당상관 자리에 올랐다.[134] 공식적인 유언.[135] 사약을 받고 나서 절명하지 않자 집행을 빨리 끝내기 위해 나졸들이 조광조의 목을 줄로 얽으려고 하자 이런 말로 일갈했다. 곧 독한 술을 가져다가 잔뜩 마시고 나서 절명했다고 한다.[136] 초기에는 역시 촉망받는 신진 관료였으나 조광조 일파가 수구세력으로 몰아가면서 돌변하여 결국 기묘사화에 앞장선 인물. 이후 국정도 나름대로 무난하게 이끌고, 외교문서는 사실상 전담했으며 영의정 자리에도 올랐다. 하지만 조광조를 죽인 일을 후회하여, 자신의 글을 자식들에게 모두 불태우게 했다. 이로서 당대의 명필이자 뛰어난 문사였던 남곤의 글은 고작 시 한 수만 전해온다. 다른 기묘사화의 주도자들이 후에 조광조와 똑같은 방식으로 사약을 받고 죽은 반면, 남곤은 천수를 누렸는데 아마도 이런 반성이 원인이 아니었을까.[137] 몸의 상태를 뜻하는 표현으로 쓰였다.[138] 그 전에 유조로 조광조의 억울함을 신원하고 이복 동생 경원대군에게 전위한다는 명을 내렸다.[139] 파직되어 집에 있을 때 부모에게 절을 올린 뒤 임구(林枸, 1540~1613)를 비롯한 아들들에게 남긴 말. 임구는 이 유언을 따라 무과에 급제해 정산현감에 부임하기도 했으나, 글공부를 전혀 하지 않아서 무식자였다고 전한다. 결국 1578년 7월 2일에 글을 모른다는 이유로 파직당했다. #[140] 명종실록 6권, 명종 2년 9월 21일 기사를 참조했다. 번역은 국사편찬위원회의 것을 그대로 따랐다.[141] 그냥 평범한 유언같지만 사실은 사약 마시기 직전에 사약을 가지고 온 의금부 서리에게 농담으로 건넨 말이다.[142] 이황은 매화 사랑으로도 유명했는데 매화를 '매형(梅兄)', '매군(梅君)이라고 부를 정도였다.[143] 이준경이 죽기 직전에 선조에게 보낸 유서다. 이 유서를 듣고 사림들은 분개했고 심지어 이이도 이 말을 듣고는 이준경을 비난했는데 이준경의 유서는 얼마 안가 실현된다.[144] 권율의 아버지. 40이 넘도록 벼슬살이를 하지 않던 아들 권율에게 이 말을 남기고 죽었는데 이 말에 권율이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벼슬길을 위한 행보를 시작했다고 한다.[145] 죽기 이틀 전에 남긴 말. 북쪽 변경으로 부임가는 서익을 만나려 했는데 가족들이 이를 말리자 한 말이다. 서익에게 <시무 6조>를 써 주고 이틀 뒤에 사망했다.[146] 정확히 허난설헌이 생전에 어떻게 유언을 말했는지는 알 수 없다. 동생 허균은 "(누나 허난설헌이) 자녀가 없다보니 평생을 저술하여 매우 많은 글을 지었지만, 유언에 따라 불태워 버렸다."이라고 말했을 뿐, 유언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허균의 말을 기반으로 유언의 내용이 "평생을 저술한 글을 불태우라고 말했다"는 것이라는 정황을 추측할 수 있다. 장정룡, 허난설헌 평전 55쪽의 허균의 <난설헌집> 평 참고.[147] 북향사배를 끝내고 다시 전투에 임하면서.[148] 금산에서 1400여명의 의병으로 열 배의 적에 포위당했을 때 피신하라는 부하의 말에 대답.[149] 임진왜란 때 의병장.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수세에 몰리자 남강에 뛰어들어 자결했다. 왜병 두 명을 양팔에 끼고 강물에 뛰어들며 한 말. 이것은 선조수정실록의 기록이고 선조실록에서는 진주성 촉석루에서 분전하다가 이마에 탄환을 맞고 전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150] 숨이 끊어지기 직전 아들이 손가락에 피를 내어 그의 입에 넣어주자 한 말.[151] 무고하게 문초를 받다 죽기 직전 선조에게 부탁한 말. 이 말을 마친 후 세상을 떠났다.[152] 왜군의 총탄에 맞고 절명하기 직전 자신의 부장인 김완에게 했던 유언.[153]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휘하에서 활약했던 장수로 남원성 전투에서 적탄에 맞아 전사했다. '양건당'이란 호는 과거 그가 효를 위에 한쪽 다리살을 내놓았고, 이후 이순신 장군과의 전투 도중 다른 쪽 다리를 다치면서 붙어진 별칭이다. 유언대로 김완은 그의 시신을 수습해 말에 태우고, 그 말은 300리를 달려서 장군의 고향인 구상마을(전라남도 강진군 작천면 용상리)에 도착해 가족들에게 시신을 전달한 후, 시름시름 않다가 5일 후에 죽었으며, 그런 말을 기리기 위해 황대중의 가족들은 마을 입구 논 한 가운데에 큰 무덤을 만들었고 지금도 후손들이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관련 기사)[154] 1604년판 《징비록》의 기록이다.[155] 한국사에 있어서 가장 유명한 유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충무공행록》의 1712년과 1795년 판본에도 《징비록》 버전의 유언이 실려 있는데, 일각에서는 같은 책의 1643년 이전 판본에서 해당 유언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해 이순신의 유언이 후대에 임의로 붙여넣어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결국 《충무공행록》의 후대 판본에서 《징비록》을 인용한 것이라면 널리 알려진 유언의 출처는 《징비록》이 유일하며, 이 역시 류성룡이 당시 전황에 대한 정보를 제대로 접근할 수 없는 상태였으므로 믿을 수 없다는 논지이다. # 그러나 표에도 나와있듯 비슷한 내용의 유언이 《징비록》뿐만 아니라 17세기 당대의 문헌인 《동국신속삼강행실도》와 《승정원일기》에도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여전히 교차 검증이 되므로 이순신이 직접 남긴 유언이라는 사실이 최종적으로 확인된다.[156] 한편 여기서 한 번 더 와전되어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이 있는데, 이는 위인전의 창작이다. 불멸의 이순신에도 나와 유명해졌다. 상식적으로 적한테는 총사령관의 죽음을 당연히 알리지 말아야 하는 것이고, 잘 알다시피 여기서의 대상은 바로 아군이다. 전투 중 총사령관이 전사한 사실을 알면 병사들이 얼마나 사기가 떨어지고 당황하겠는가?[157] 1617년 편찬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기록이다.[158] 《승정원일기》 인조 9년(1631년) 4월 5일자 기사에 이원익이 이순신의 아들 이예로부터 전해들은 내용을 보고하는 대목에서 언급된다.[159] 사망 직전 자신을 그린 영정을 보고 한 말.[160] 죽기 직전 광해군에게 남긴 말. 그러나 그의 유언은 지켜지지 않았다.[161] 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이 반란(혹은 혁명)을 일으키려고 했다는 것을 부정했다.[162] 첫번째는 반정의 주모자인 이귀에게 처지를 하소연했으나 무시당하고 한탄에 차서 한 말. 당시 같이 참형당한 이위경이 아래처럼 반발했다고 전한다.[163] 두 번째는 이이첨의 유언으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것을 이위경이 했다는 설도 있다.[164] 처형 직전 이이첨에게 반발하며 내지른 말. 그러나 이해득실에 따라 요리조리 편을 바꾼 이위경이 이렇게 몹몰이 할 자격이 있을지는….[165] 한음 이덕형과는 동명이인이다.[166]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인조반정 때 반정군에게 잡혀 왔는데 인조가 군사에게 그를 묶으라고 하자 저 말을 하면서 애걸 했지만 군사가 발로 그의 입을 차며 네가 그래도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가라고 말한 후 박홍도를 살해하였다.#[167] 광해군 때의 조도사로 인조반정 이후 처형되었다.#[168] 조선 인조 때의 무신. 이괄의 난 진압 때에도 활약했으나 정묘호란 때 안주성을 지키다가 성이 함락되자 화약에 불을 지르고 자결했다. 자결 직전에 남긴 말.[169] 김상용은 지독한 혐연가였으나, 강화도가 청군에 의해 함락되자 화약고에 불을 질러 자폭하기 위해 불씨를 찾았는데도 없자 거짓으로 담배를 피우겠다며 불씨를 달라고 한 말이다. 이것 때문에 후일 조정에서 김상용이 자살이 맞네 아니네 논란이 일었다...만 자살이 아니라고 생각한건 인조 뿐이었고 대다수 신하들은 자살이 맞다고 주장했다. 결국 김상용의 손자 등의 증언이 뒤따르자 자살로 인정했다.[170] 유언대로 광해군은 어머니 공빈 김씨의 무덤 밑에 묻혔다.[171] 자신을 산채로 5토막 내서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한 김자점에게 한 말. 이후 김자점은 효종 즉위 후 반역을 꾀하다 처형되었지만, 심기원처럼 처형되지는 않았다.[172] 허나 이 유언은 실로 어이없는 것이었다. 물론 당시에 남명이 죽지않고 남아있었다만 그 남명이 임경업이 죽기 불과 1년 전, 수도인 남경을 빼앗겨 시한부 신세가 되어버렸다.[173] 小叔, 당시 봉림대군. 즉, 효종. 혹은 인평대군으로 보는 설도 있다.[174] 인조, 효종조의 강직한 신료로 김자점을 맨 처음 탄핵한 사람이기도 했다. 황해도 관찰사에 있을 때 효종의 구언 요청에 위의 민회빈 강씨의 죽음의 억울함을 지목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형신을 받고 죽었다. 심지어 구언의 기간이었는데도! 형장에서 김홍욱은 조정의 신료들에게 "말하는 자를 죽여놓고 무사한 나라가 있었소?"라면서 왕을 설득해줄 것을 청했으나 죽게 될 것이 자명해지자 평소 때 성격이 살아나면서 오자서의 유언을 본뜬 말을 남기고 죽었다. 여담으로 사후에 복권되었고, 그의 후손으로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 김씨의 5대조이자 추사 김정희의 7대조.[175] 김자점은 효종의 눈밖에 나있었기에 신속히 제거되었으나 이시백은 영의정까지 올라가며 중용되었고, 귀인 조씨의 자녀들(숭선군, 낙선군, 효명옹주)도 조씨와 효명옹주의 남편 김세룡(김자점 손자)이 역모에 연루되어 사사되는 와중에도 효종의 지극한 보호를 받아 귀양만 갔다가 숭선군과 낙선군은 1656년, 효명옹주는 1658년 해배되었다. 효종의 뒤를 이은 현종과 숙종도 이들을 배려해주어서 다들 천수를 누렸다.[176] 머리 위에 있던 종기를 어의 신가귀가 따서 피가 쏟아지자 한 말. 그러나 이 직후 과다출혈로 목숨을 잃었다.[177] 송시열의 전 친구이자 라이벌. 주자에 대한 해석을 두고 대립하여 송시열에 의해 사문난적으로 몰린 것으로 유명하다. 숙종 때 환국으로 인해 사약을 받았는데 사약을 받기 전 남긴 말.[178] 뒤주에 갇힌 지 7일째 되는 날 뒤주를 지키던 군사들이 세자가 살아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뒤주를 흔들자, 뒤주 속에서 세자가 한 말. 영화 사도에도 이 일이 재현되어 있다. 세자는 뒤주에 갇힌지 8일째에 사망했다고 발표되었는데, 실제로는 이날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179] 정조가 의식을 잃으며 되뇌었다는 말. 수정전은 당시 대비 정순왕후 김씨가 있던 곳이다. 정조 24년(1800) 6월 28일, "상이 무슨 분부가 있는 것 같아 자세히 들어보니 ‘수정전(壽靜殿)’ 세 자였는데 수정전은 왕대비(王大妃)가 거처하는 곳이다."란 기록이 있다. 독살설 떡밥과는 별개의 문제. 참고로 정순왕후 김씨는 정조가 승하하기 직전까지 정조의 병간호를 했다.[180] 《어제의빈묘지명》에 의하면, 사망하기 전날 저녁 의빈이 정조에게 한 마지막 말이다.[181] 정약용의 셋째 형. 이 말을 남기고 하늘을 바라본 채 참수형을 당했다.[182] 여기서부터는 그레고리력이다.[183] 정수동, 혹은 정만서로 알려진 조선 후기의 해학가. 죽기 직전 친구들이 그 기분을 묻자 이렇게 답했다고 하는데 그를 소개한 어떤 책에는 아내에게 질문으로 한 말인 "저승에서도 외상 술을 마실 수 있을까?" 라 소개되어 있다.[184] 폭탄으로 인한 암살 사건 당시 남긴 말. 운현궁은 당시 흥선대원군이 거주하던 곳이었다. 여러가지 정황으로 흥선대원군이 암살의 배후라는 설이 있으나 굳이 흥선대원군이 민승호를 죽여서 얻는 실익이 없다는 주장 또한 있다. 암살 사건의 범인과 배후는 결국 오리무중으로 남았다.[185] 홍영식의 아버지로,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이 말을 한 뒤 손자를 죽이고 자신도 자살했다.[186] 조선 말기의 대표적인 간신. 임오군란때 구식군인에게 처참히 난자당하기 직전에 흥선대원군을 보자 한 말.[187] 이후 순검이 휘두른 칼에 맞아 사망 혹은 고종이 불러들인 보부상들에 의해 정병하와 함께 구타, 사망하고 갈갈이 찢겨져 종로-광화문을 돌아다니게 된다.[188] 구한말 의병장으로 일본군에게 참패를 당한 후 폭우가 쏟아질 때 물에 빠져 순국하였다.[189] 대원군은 죽기 직전까지도 연신 고종을 찾았다고 한다. 하지만 고종은 끝내 부친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아 불효자란 오명을 쓰게 되었다.[190] 일진회의 밀고로 인해서 충남 아산시 송암면 냇가에서 일본군이 그와 그의 아들인 이충구를 체포하러 올때 아들에게 한말. 이 말을 마치자마자 일본경찰이 군도를 휘둘러 그를 피습했는데 이때 오른손으로 칼을 막아서 오른손의 손가락이 모두 절단되었다.[191] 1차 피습을 당하고 2차 피습으로 사망하기 직전에 한말. 이말을 마치고 군도에 목이 관통당하여 끝내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후 아들 이충구도 같이 일본경찰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192] 구한말의 의병장이자 애국지사.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항일 의병장인 민종식에게 거처를 제공해주고 그가 이끄는 홍주의진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로 인해서 일진회원의 밀고로 인해서 해당 유언을 남긴채 의로운 최후를 맞이하였다.[193] 다만 이는 야사에서 나와서 신뢰성이 낮다.[194] 죽기 전 남긴 마지막 말. 안 의사의 인품을 잘 알고 있던 간수들은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다.[195] 가족들에게 남긴 실질적 유언. 안타깝게도 안 의사의 유해는 현재까지도 행방을 찾지 못한 상황이며 효창원에 있는 묘는 가묘이다.[196] 경술국치로 나라가 망하자 절명시를 남기고 아편덩어리를 삼켜 음독자살하였다. 아편을 삼킨 직후에 한 말.[197] 이위종의 아버지이자 외교관.[198] 이걸 들은 우치다 료헤이는 "뒷날 모든 것이 명백해질 것입니다. 오늘은 어리석은 자이지만 뒷날 반드시 현자가 될 것입니다." 이라고 말했다 한다.[199] 그래서 이상설의 시신은 불태워지고 재가 바다에 날려졌다.[200] 일본군에 의해 처형되기 직전에 남긴 최후 진술[201] 대구형무소에서 죽음을 위한 단식 중 자신을 찾아온 의열단 동지 최천택에게 남긴 말.[202] 독립운동가로 신해혁명에 참가한 유일한 한국인.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중추적인 역할과 함께 쑨원의 국민당 정부로부터 정부 승인받도록 이끄는 데 커다란 활약을 했다.[203] 의열단 단원으로 1,000명의 일본 경찰과 맞서 싸우다 총알이 한 발밖에 남지않아 그 마지막 총알을 자신의 머리에 쏘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말.[204] 출처[205] 실제로는 아닐 가능성이 높다. 전해지기로는 순종은 이 유언을 이준구에게 남겼다고 하는데 이준구는 순종보다 한 달 정도 빨리 사망했다.[206] 사망 하루 전 병문안을 온 두 제자들에게 한 유언. 이 말을 하고 돌아누워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207] 도박으로 망하고 사망한다. 개명 전 동명이인인 이용구도 유사한 유언을 남김.[208] 일제의 방해로 지켜지지 않았다는 하나 성리학적 윤리가 남아있던 당시에는 시신을 해부하는 것이 금기로 여겨지던 터라 지켜지 않았을 수도 있다.[209] 그러나 그의 시신은 주변인들의 중론을 따라 국내로 들어와 안장되었다.하라고 한 사람은 못해주는데 하지 말라고 한 사람이 그렇게 됐다[210] 본래에는 "레몬 향기가 맡고 싶소"로 알려져 있었으나 후에 이상의 아내 변동림이 유언을 정정했다.[211] 독립운동가이자 외과의사로 안창호의 비서이자 제자이기도 했다.[212] 이 유언을 남기기 며칠 전에는 목인(睦仁)아! 목인아! 네놈이 큰 죄를 지었구나! 라고 외쳤다고 한다.[213] 한국의 장로교회 목사이자 순교자이다. 1907년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 7인 중의 한 사람이다. 한국인 최초의 목사가 되어 제주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1938년 일제의 신사참배(神社參拜)에 완강히 거부하며 호남지방 교회지도자들과 연대, 반대투쟁을 하다가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고 그 후유증으로 죽었다.[214] 독립운동가로 간도에서 교육 활동과 개신교 보급에 힘썼다. 제자들이 임종 직전 남길 말이 있냐는 말에 대한 질문. 김약연은 윤동주의 외숙부이기도 하다. 김약연은 간도 교육사업의 일환으로 명동학교를 세웠는데 윤동주, 문익환 등이 여기서 수학했다.[215] 평양 형무소에서 아내와의 마지막 면회 중 남긴 말.[216] 출처[217] 평생을 노름꾼이자 가문을 말아먹고 딸의 결혼식 자금마저 도박에 탕진한 파락호인 척 하고 주변 사람들 몰래 임시정부에 독립군자금을 송금한 걸 사람들에게 알리자는 친구의 말에 한 대답이다. 자세한 사항은 해당 항목 참조.[218] 시편 51편 1절만 옮겨보면 이렇다. "하느님, 선한 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어지신 분이여, 내 죄를 없애주소서."[219] 이 때문에 수덕사에서 다비식을 진행하는 경우 사리를 수습하지 않는 것이 덕숭산 수덕사의 가풍이자 문도들이 지켜야 할 불문율이 되었다.[220] 백범일지의 후기에 쓴 글.[221] 독립운동가, 노동운동가, 교사, 정치인.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으로 사망하였다.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의 대표적 학살 가해자인 헌병 중위 심용현이 "어이, 이관술. 죽는 마당에 대한민국 만세 부를 수 없나?"고 조롱하자 이에 응수한 대답이다. 그리고 바로 학살되었기 때문에 실제로 '조선민족 만세'란 말은 부르지 못했다고 전해진다.[222] 이 문장은 편지를 쓸 당시 상황을 영화화한 포화속으로 포스터에서 인용되었다.[223] 천주교 서울대교구 이문근 사도 요한 신부의 동생으로, 동성중학교에 재학하다 한국전쟁 발발로 학도병으로 입대하여 1950년 8월 10일 71명의 학도병만으로 인민군의 진격을 막은 포항여중 앞 전투에서 전사했다. 전사하기 직전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의 마지막 부분이다. 그리고 이 편지는 전해지지 못하고 사후 수습할 때 몸에서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이 편지 부분은 당시 포항여중 전투를 영화화한 포화속으로에서도 나온다. 극 중에서는 최승현(빅뱅의 T.O.P)이 쓴다. 근데 배역과 실제와는 나이와 학력 등 전혀 맞지 않는 아쉬움이 있다. 이문근 신부는 여러 성가를 작곡한 작곡가이다. 이우근도 가톨릭계 동성중학교에 재학하는 천주교 신자였으며, 피난 와중에도 김대건 신부의 무덤이 있는 미리내 성지를 들렀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224] 석주명의 고향인 평안도 사투리는 구개음화가 일어나지 않아 'ㅈ'를 'ㄷ'로 발음한다.[225] '나비 박사'로 유명한 나비연구가. 한반도의 나비를 깊이 연구하고 모든 종류를 정리했다. 그러나 6.25 전쟁을 만나 그가 평생을 기울여 채집한 나비 75만 마리로 만들어진 표본들이 불타버리고 말았다. 서울이 수복되고 국립과학관 재건회의에 가던 중 늦다고 빨리 가다가 대낮에 총 매고 술 먹던 청년과 스쳤는데 부딪힘을 당한 청년이 술김에 미쳐버렸는지 석주명을 향해 "저기 인민군 소좌(장교)가 간다!"라고 하며 붙잡는다. 이에 석주명은 이와 같은 말을 남겼으나 술 먹은 청년들은 말을 무시하고 "평안도 사투리를 쓰는 장교다! 나비나 인민군들이나 똑같은 버러지들이지."하며 석주명을 총으로 쏴죽이고 히히 웃고는 거적에 말아 개천 옆에 유기했다. 결국 그의 해명이 유언이 되어버린 참으로 안타까운 죽음.[226] 6.25 전쟁 때 경기도 장단지구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군인. 당시 소위 계급으로 임관하여 경기도 북부 장단지구 방어 임무를 수행 중이던 해병 제1전투단 11중대 3소대장으로 지휘하였으며 중공군이 2개 중대 병력을 동원해 포격을 앞세우며 33진지를 공격했다. 이때 그는 '나가자 해병대' 군가를 부르게 하는 등 대원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틀간의 전투 끝에 김 소위가 이끄는 3소대는 결국 중공군의 33진지 장악 시도를 성공적으로 무산시키고, 병력 및 화력의 열세로 적이 끝내 진지에 난입하자 죽음을 무릅쓰고 아군에 진지 내 사격을 요청하는 등 사투를 벌인 끝에 중공군을 격멸하는 전과를 거뒀다. 다만 해당 전투에서 아군의 인명 피해도 엄청나 소대원 중 70명이 전사하고 단 4명만 살아남은 모습에 큰 충격과 더불어 극심한 자책감을 느껴 위의 유서를 남기고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길을 택했다. 이 전공으로 인해서 중위로의 1계급 특진과 더불어 '충무무공훈장'을 추서했다. 국가보훈부에서는 2021년 4월 김 중위를 '이달의 전쟁영웅'으로 선정하였고, 전쟁기념관에서는 '2023년 11월의 호국인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227] 1956년 처형 직전 남긴 말.[228] 그러나 마지막 약속이자 유언은 이루어지지 않았는지 사망 이후 처와 두 아이는 소식이 없다.[229] 교수형 직전 남긴 말이다. 이 말에 간수들은 막걸리는 주지 않고 대신 담배는 허락하여 조봉암은 마지막으로 담배 한 개비를 피운 후 처형대로 올라갔다고 한다. 이승만 정권 하 대표적인 조작된 사건이자 사법살인. 자세한 내용은 진보당 사건을 참고.[230] 죽기 직전에 벼를 한번 보고 싶다고 제자들에게 말했고 제자들이 한국농업연구소에서 벼를 가져와 병상의 박사에게 쥐어주자 한 말. 왜 최후에 흔하디 흔한 벼를 보고 싶어했는지 의아해할 사람도 있을텐데, 당시 박사는 한 번 심어 두 번 거두는 이기작이 가능한 벼 품종을 개발하고 있었다. 쌀이 남아도는 지금과는 달리 당시에는 후에 통일벼까지 만들 정도로 먹고 사는 문제가 컸기 때문에 벼의 생산량이 중요했다. 벼의 이기작은 원산지에선 충분히 가능하지만 최소한 당시 한국 기후에선 겨울의 존재로 인해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지며, 2010년대에 들어 전라남도 등지에서 이 방법이 시범적으로 시행되고 있다. 하지만 역시 추위 때문에 성과가 나지 않고 있다.[231] 1960년 4월 19일 데모를 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어머니에게 남긴 편지. 미아리 고개에서 총상을 입고 사망. 당시 한성여중 2학년.[232] 1960년 4월 19일, 경무대 앞에서 경찰의 발포로 중상을 입었지만 같이 총상을 당한 고등학생들에게 응급처치를 양보하고 사망했다. 당시 서울대학교 수학물리과 3학년.[233] 1961년 사형 집행 전에 남긴 말.[234] 재일 한국인. 여고생을 강간 살해했다는 혐의로 학급 내 무기명 투표로 용의자로 지목되었다(당시 18세). 미성년자로서는 이례적으로 사형당했다.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2010년 12월 12일자 방송에서도 그를 다루었다.[235] 화랑세기의 저자로 유명한 떡밥왕. 아들에게 이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236] 점자책을 쌓아두면 책의 무게에 눌려 나중에 점자를 읽기 힘들어진다.[237] 한글점자인 훈맹정음의 창안자.[238] 아침에는 밥, 저녁에는 죽을 먹는 몸시 가난한 살림을 의미한다.[239] 심장마비로 사망하기 3개월 전에 작성한 유서로 입궁할 때부터 무려 60여년간이나 끝까지 믿고 의지했던 김명길 상궁에게 맡겼다. 그 후 순정효황후가 승하하자 김명길 상궁은 해당 유서를 장례식 때 낭독했고, 이 유서가 1966년 2월 4일자 중앙일보에 공개됨에 따라서 세상에 알려졌다.[240] 북한에서 온 남파 간첩이 이승복 어린이에게 '남조선(남한)이 좋으냐, 북조선(북한)이 좋으냐'고 질문하자 이승복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했고, 격분한 공비들은 대검으로 이승복의 입을 찢어 살해했다.[241] 실제로 이 말을 했는지는 논란이 있다. 자세한 것은 이승복 항목 참조.[242] 수습 조종사로서 대한항공 F27기 납북 미수 사건때 납치범이 갖고 있던 점화 된 폭탄을 몸으로 막아 큰 부상을 입어 사망했다. 후에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으며, 일등 보국훈장을 받았다.[243] 이 말은 모친 이소선 여사를 평생 노동운동가로 활동하게 만든 유언이 된다. 이 여사는 이 이야기를 듣고 "내 몸이 가루가 되어도 네가 원하는 거 끝까지 할 거다!" 라고 오열하며 대답했다고 한다.[244] 처음은 분신을 하면서 외친 말, 2번째는 분신 이후 쓰러지면서 남긴 말이고, 마지막 둘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남긴 말이다. 배고프다는 말 그대로 전태일은 분신을 감행하던 날 이틀 전에 라면 하나 먹은 이후로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고 한다.[245] 유한중학교는 중학교가 있으면 좋겠다는 지역 주민들의 희망사항 때문에 설립되었다가 점차 중학교가 늘어나면서 1978년에 폐교되고 대신 유한공업전문학교가 설립되어 지금의 유한대학교로 이어지고 있다. 유한공업고등학교는 지금도 건재.[246] 그런데 놀라운 점으로, 유일링의 아버지이자 유일한의 아들인 유일선은 그 1만 달러조차 안 받으려고 했다! (유일링은 당시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유일선이 그 1만 달러의 실질적 상속자였다.) 마지못해 받긴 했으나, 반만 쓰고 남은 돈은 사회에 돌려주었다. 그리고 이 유언에 따라 유일한 박사의 전 재산은 유한양행에서 설립한 재단에 증여되었으며, 유일한 박사의 딸 유재라 여사도 유언을 그대로 이행한 것을 넘어 1991년 타계하면서 아버지의 길을 따라 자신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였다.[247] 이 내용은 실질적으로 공개된 유언이고, 사망 2일 전인 1973년 11월 20일 장남인 김상문 전 삼천리자전거 대표(당시 기아산업 부사장)에게 한 말은 다음과 같다. "나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맨주먹으로 사업을 시작해 오늘의 기아산업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도 생각해보면 모두가 나라의 덕이다. 나라가 독립되고 국력이 신장하지 않으면 아무 사업도 할 수 없다. 부강한 조국을 건설하는 데 힘이 되기 바란다. 기업하는 사람들에게는 기업윤리라는 것이 있어야 한다. 종업원들은 남이 아니라 내 식구요, 동기간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항상 따뜻하게 보살피는 데 정성을 다하여라. 우리 회사에는 고생을 많이 한 임원들이 있다. 애비를 대하듯 그분들을 잘 모셔야 한다."[248]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자동차 회사인 기아자동차와 국내 최대의 자전거 제조사인 삼천리자전거의 창업주. 박정희가 주도해서 일으킨 5.16 군사정변 후, 부정축재자들에게 막대한 벌금을 물게 했을 당시 기아도 5천만원이라는 엄청난 벌금을 물었음에도 불구하고도 새마을운동에 적극 참여할 것을 지시했다. 평생을 기술자로 살아온 인물의 유언이었다.[249] 참고로 출생년도가 서적마다 다르다. 1905년이라 기록한 책도 있고 1906년이라 기록한 책도 있다. 일단 여기서는 1905년이라 기록했다.[250] 당시 합창단원으로서 광복절 기념식에 참가했던, 성동여자실업고등학교 2학년생 장봉화(1957-1974) 양.[251] 실제 진술은 일본어로 했다.[252] 실제로 그가 범인이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발견되지 않아 뻔뻔하게 잡아떼기보단 진짜 억울해서 남긴 말일 수도 있다.[253] 김재규에게 총을 맞고 주변에서 "각하! 괜찮으십니까?"라고 묻자 이 말을 했다고 한다. 흔히 박정희의 마지막 말로 알려져 있다.[254] 총격을 당하기 직전에 한 말.[255] 반란군 세력이 특전사를 습격하기 전에 아내에게 전화로 남긴 마지막 말. 배우자 백영옥은 이 '미안해'라는 말이 계속 귓전에 맴돌았다고 한다.[256] 특전사 보안대장이던 김충립이 실탄 장전하는 모습을 보고 위험할 수 있다고 만류하자 한 말.#[257] 반란군 세력이 B-2 벙커를 습격할 때 총을 내놓으라고 하자 이렇게 외치며 싸우다가 전사했다.[258] 김재규의 부하이자 10.26 사건의 가담자. 군사재판으로 1심 사형 확정 후 집행장에서 최후진술[259] 하지만 그의 유언과는 다르게 그의 최후진술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10.26 사건과 관련한 다른 진술들과 기록들이 있으며 이에 대한 해석이 다르고, 10.26 사건의 원인이 아직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260] 김재규의 최후진술을 듣고 싶은 이는https://www.youtube.com/watch?v=ftjlJ-kt_Dw&t=685s 이곳에서 들으면 된다.[261] 1980년 5월 26일 외신기자들과의 회견에서.[262] 박경석에게 남겼다는 말.[263]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전남대 총학생회장으로 민주화운동에 헌신했으며, 5.18 민주화운동이 끝난 뒤에 지명 수배되었다가 1982년 4월에 체포되었다. 이후 광주교도소에서 5.18 진상규명과 교도소 재소자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옥중 단식 투쟁을 하다가 사망하였다.[264] 이 말을 형에게 하고 동창회에 나갔는데,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로 사망하면서 결국 이 말이 유언이 되었다.[265] 88년도에 일어난 지강헌 일당 인질 탈주극 사건에서 지강헌이 했던말. 그 후에 비 지스의 홀리데이를 틀어달라고 하고서 그 음악을 들으며 그 후 유리파편을 목에 찔러 자살을 시도하다 경찰 특공대의 총에 맞아 병원으로 이송되어 치료를 받던 도중 사망했다. 이 사건을 자세히 다룬 홀리데이라는 영화를 참고할 것. 다만, 영화다운 허구도 섞여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266] 1989년 2월 3일 서울 남대문의 한 6층 빌딩 옥상에 올라가서 투신하기전에 쓴 글로 이 유서를 바지 주머니에 넣은 채 뛰어내렸다.[267] 대한민국의 권투선수로 전 WBC 라이트 플라이급의 챔피언. 소매치기에서 세계챔피언으로 성공했으나 은퇴 후에는 사업 실패 등의 굴곡진 삶을 살아가다가 투신 자살로 생애를 마감했다.[268] 사실 글 자체는 1983년 이전에 쓴 것으로 추정된다. 1983년에 KBS 뉴스파노라마 취재팀이 낙선재를 찾아 낙서에 가까운 친필 메모를 공개하면서 세상에 알려진 것이기 때문.[269] 그는 끝까지 폭행치사를 주장하고 실제로 논란이 많았지만 끝내 사형이 집행되자 이렇게 말했다. 해당 보안과장은 그날 잠을 못 이뤘다 한다.[270] 그러나 김정일은 우상숭배를 위해 유언을 무시하고 아버지를 엠버밍해서 주석궁에 박제했다. 김일성의 빨치산 출신 동지들이 수령의 유언을 지켜줄 것에 대한 공동명의로 된 제의서를 김정일에게 바쳤지만 묵살되고 말았다. 유언이 무시당하는 것은 한국사 태조들의 전통 게다가 김정일 본인은 아예 자신을 박제하게 했다.[271] 11월 19일 성공적으로 지상파 라이브 공연을 끝낸 다음 어머니에게 한 말. 저 말을 하고 난 뒤 다음 날 김성재는 의문사로 생을 마감했다.[272] 라이브를 마치고 대기실에 들어가기 직전에 팬들에게 말한 마지막 메시지. 결국에는 이것이 바로 그의 생전 마지막 인터뷰가 되고 말았다.[273] 사망 7시간 전 마지막으로 출연한 '박상원의 겨울나기'에서 부른 노래의 마지막 가사.[274] 시신 화장은 이루어졌으나 화장시설에 관한 사항은 님비현상과 대기업이 장묘 사업에 나서냐는 등의 부정적 여론으로 답보 상태였다가 세종특별자치시 은하수 공원에 화장터를 지어 기증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275] 2000년은 20세기에 속하며 21세기는 2001년부터이다.[276] 2000년 6월 10일 감기몸살로 입원, 걱정하는 팬들을 위해 사망 3일 전 음성사서함을 통해 남긴 말로 사실상 유언이 되었다. 놀란 팬들의 마음을 위로해주기 위해 평소 김환성이 팬들에게 자주 말하던 말투와 내용으로 음성메시지를 남겼다고 한다. 이 메시지를 남기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상태가 악화되어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3일 후 사망했다.[277] 이 날은 또한 6.15 남북공동선언이 진행되고 있던 날이었다.[278] 사지절단수술을 마치고 일반병실로 옮긴 뒤 모친에게 남긴 유언. 얼마 안가 다시 상태가 악화되어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결국 9월 20일 해전 발생 3개월만에 순국했다.[279] 대구 지하철 참사 사고 발생 7분 전(오전 9시 46분) 예비 신부 송혜정 씨가 예비 신랑 이호용 씨에게 보낸 문자메시지.[DG] 대구 지하철 참사 희생자.[281] 대구 지하철 참사 3분 전 오전 9시 50분, 서동민씨가 선배 송두수 씨에게 한 통화기록 중.[DG] 대구 지하철 참사 희생자.[283] 대구 지하철 사고 발생 4분 전(오전 9시 49분) 김인옥 씨가 남편 이홍원 씨에게 한 통화기록 중.[DG] 대구 지하철 참사 희생자.[285] 개신교 모임 강사 허현 씨가 강사 강지현 씨에게.[DG] 대구 지하철 참사 희생자.[287] 오전 9시 54분(사고 발생 1분 후), 대학생 딸이 어머니 김귀순 씨에게 한 통화기록 중.[DG] 대구 지하철 참사 희생자.[289] 오전 9시 58분(대구 지하철 사고 발생 5분 후), 어머니에게.[DG] 대구 지하철 참사 희생자.[291] 부인에게 한 마지막 말.[DG] 대구 지하철 참사 희생자.[293] 장계순 씨와 딸 이선영 씨의 마지막 휴대전화 통화 내용.[DG] 대구 지하철 참사 희생자.[295] 노모 황점자 씨에게. 이날 그는 직장을 얻으러 가는 중이었다.[DG] 대구 지하철 참사 희생자.[297] 아들에게 남긴 말.[DG] 대구 지하철 참사 희생자.[299] 청소년 동성애자이고 천주교 신자이다. 이 내용은 유서 중 일부분.[300] 전자는 김윤규 현대아산 사장에게, 후자는 가족에게 쓴 글이다.[301] 현대그룹 계동 사옥에서 투신하기 전에 쓴 글.[302] 스스로 목숨을 끊기 한달 전 구치소에서 부인에게 보낸 서신이다.[303] 죽으면서 자신이 운영하던 마작 하우스 벽에 남긴 글.[304] 실제 진술은 영어로 했다. 항목 참조[305]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의 전신인 유일신과 성전에게 납치되어 피살된 한국인 희생자.[306] 아내가 차려준 장어 덮밥을 먹으며 마지막으로 남긴 말.[307] 사망하기 하루 전 자신의 미니홈피에 남긴 글이다.[308] 네이버 지식iN 자살 사건의 사망자. 이 글은 자살 당일 블로그에 올린 인성검사라는 제목의 마지막 글이다.[309] 기사원문[310] 고인이 부모에게 2006년 9월 29일 보낸 편지 내용의 일부. 안타깝게도 이 편지를 보낸 지 1년도 채 안되어서 고인이 되었다.[311] 고인의 미니홈피 상단의 마지막 자기소개 문구.[312] 유서를 찾을 수 없어서 이 둘로 대체함.[313] 탈레반 연관 무장테러단체의 자폭테러에 휘말린 한국 군인. 2006년 9월에 다산부대 8진 소속으로 통역병으로 아프가니스탄에 파병, 2007년 2월 27일 바그람 기지에서 자살폭탄테러로 인해 전사하였다. 향년 27세. 통역병인 터라 현지인 기술교육 통역을 위해 기지 정문 앞에 나가 있던 중에 변을 당했다. 미군 1명과 현지인 20명 등이 사망한 테러였다. 사망 당시 병장 계급이었고 사후 하사 추서.[314] 해당 발언은 유언의 일부이다. 전체를 보고 싶다면 항목 참조[315] #[316] 사망 한달전인 2007년 8월 중순에 자신이 운영하는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남긴 마지막 메시지. 하지만 그로부터 한달후인 9월 7일에 그녀는 결국 진짜 천사들이 사는곳으로 영영 떠나고 말았다.[317] 사고나기 몇 달 전 미니홈피에 남긴 글.[318] 사저의 컴퓨터에 저장돼 있던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의 고통이 너무 크다" 란 이름의 HWP 파일의 내용.[319] 2009년 5월 27일 경찰의 발표 내용에 따르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사망 당일 새벽 5시 47분 경호관 한 명과 함께 봉화산 산행에 나섰고 6시 10분경 부엉이바위에 도착했다. 노 전 대통령은 경호관에게 "부엉이바위에 부엉이가 사나? 담배 있는가?"라고 물었고, 경호관은 "없습니다. 가져오라 할까요?"라고 되물었다. 이어 노 전 대통령은 "아니, 됐어요."라고 말한 뒤, 폐쇄된 등산로에 사람이 다닌 흔적을 보고는 "폐쇄된 등산로에 사람이 다니는 모양이네."라는 말도 했다. 6시 14분경 노 전 대통령은 경호관에게 정토원으로 심부름을 보냈고, 경호관은 3분 만에 갔다 돌아왔으나 그 사이 노 전 대통령이 사라졌다. 바위 아래 쓰러져 있는 노 전 대통령이 발견된 시각은 6시 45분경.연합뉴스KBS 경호관은 처음엔 노 전 대통령이 경호관에게 "저기 사람이 지나가네."라고 말해 시선을 돌린 뒤 갑자기 몸을 던졌다고 진술했으나, 이후 경호관이 진술을 번복하면서 허위로 판명됐다.[320] 일기장의 마지막 문구.[321] 탤런트 이광기의 둘째 아들. 사망 이틀 전 신종플루 판정을 받고 상태가 나아지지 않자 대학병원 중환자실로 옮겼는데, 인공호흡기를 끼고도 이광기와 정상적으로 소통을 했다고 한다. 대화 내용은 그저 퇴원하면 장난감을 사준다는, 흔히 부자가 나누는 대화를 했다고. 얼마 안 가 곧 의식을 잃었고, 의사들이 심폐소생술을 하려했지만 이광기가 석규 군의 얼굴이 너무나 평안해 보여서 편하게 보내주기 위해 그만하라고 했다고 한다. 글로는 저리 적었지만, 심폐소생술은 한 시간 동안 이루어졌다. 아마, 아버지로서 마지막만큼은 편히 보내고 싶은 심정에 나온 말로 보인다.[322] 자살 직전 노트에 남긴 메모. 이외에 별다른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다.기사 참조[323] 사망 직전에 남겼다는 말로서, 특이하게 영어로 유언을 남겼다. 의미는 "모든 일은 잘 될 것이다."혹은 "모든 것이 다 좋다.", "다 괜찮다."로 해석된다. 이 유언을 끝으로 손을 들어 모여있던 살레시오회 수도자들에게 강복을 준 후 사망했다.[324] 사망 전날 남긴 말. 유언장에는 '절대로 다비식 같은 것을 하지 말라. 이 몸뚱아리 하나를 처리하기 위해 소중한 나무들을 베지 말라. 내가 죽으면 강원도 오두막 앞에 내가 늘 좌선하던 커다란 넙적바위가 있으니 남아 있는 땔감 가져다가 그 위에 얹어 놓고 화장해 달라. 수의는 절대 만들지 말고, 내가 입던 옷을 입혀서 태워 달라. 그리고 타고 남은 재는 봄마다 나에게 아름다운 꽃공양을 바치던 오두막 뜰의 철쭉나무 아래 뿌려달라. 그것이 내가 꽃에게 보답하는 길이다. 어떤 거창한 의식도 하지 말고,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지 말라.' 고 쓰여있다.[325] 천안함 피격 사건 구조작전 중 순직자[326] 부인에게 남겼다고 하는 말.[327] 사망 며칠 전, 중환자실에서 수첩에 이 말을 적었다. 출처[328] 연평도 포격전 전날 싸이월드에 쓴 글[329] 1964년 영화 《맨발의 청춘》의 조연으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던 배우이다.[330] 시나리오 작가이자 영화감독. 2006년 영화 <격정 소나타> 제작 이후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다가 이웃집 문 앞에 이 말을 쓴 쪽지를 놓았는데, 이를 본 이웃 사람이 최씨의 집을 찾아갔지만, 최씨는 이미 숨져 있었다. 사망 전에 췌장염과 갑상선 항진증을 앓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건으로 국내의 복지 수준과 민생의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국민들의 분노를 일으켰다. 드라마의 제왕의 등장인물 이고은은 이 최고은 작가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331] 아시아나항공 991편 추락 사고 당시 부기장.[332] 가족들은 그가 의식을 잃을 때마다 야구공을 손에 쥐어줬는데, 혼수상태에 빠진 상태에서도 운명하는 순간까지 손에서 야구공을 꼭 쥐고 있었다고 한다. 그의 아들이 KCTC에 참여한 동영상도 존재한다.참조[333] 한국 등산가로 8천미터 14좌 산을 최단시간으로 등정하고 북극과 남극도 등정하여 세계 최초 탐험가 그랜드슬램으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그러나 2011년 10월 20일 안나푸르나를 새로운 등정로로 올라가서 그 날 마지막으로 실종되어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기에 사망 날짜가 정확하지 않다.[334] 그러나 이 유언 중 이루어진 것은 시신 영구보존을 제외하고는 단 하나도 없다. 미국한테 기싸움에서 눌려 빌빌 기고 있으며, 중국은 이미 북한을 이용해 먹었다. 또한, 김정남과 관련된 것은 전부가 간단히 씹혀버렸다. 그리고 김정남은 김정일이 사망한 지 6년 후 살해당했다.[335] 2011년 대구 중학생 집단괴롭힘 자살사건의 피해자.[336] 한국계 첫 백악관 차관보이자 한국인 최초 시각장애인 박사.[337] 서울 신촌 대학생 살인사건의 피해자. 살해당하기 직전 카카오톡으로 친구에게 날린 메시지. 이걸 남기고 곧바로 연락이 두절되고 살해당했다.[338] KT 롤스터 소속의 게이머, 향년 만 23세. 사망 직전 어머님에게 남긴 말이라고 한다. 포모스에서 25세라고 한 것은 출생년도인 1988년을 1살로 보았기 때문.[339] 문맥상 '법적 분쟁을 피하기 위해'.[340] 임윤택이 아내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라고 한다. 당시 일어나지도 못할 몸상태였지만 아내를 불러 있는 힘껏 안아주며 말했다고. 본인의 어머니에게는 "엄마" 라고 한마디 하며 돈봉투를 건네드렸다고 한다.[341] 마포대교에서 투신하기 전 남긴 말이라고 한다.[342] 투신하기 전 트위터에 올린 글.[343] 푸른늑대회(당시에는 남성연대)의 대표였다.[344] 투신 2시간 전 페이스북에 올린 게시글.[345] 자살하기 직전에 자신의 승용차에서 작성한 유서.[346] 2013년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킨 육군 15사단 노승원 소령 성추행 사건의 피해자로 약혼자까지 있는 상태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하였다. 최종 계급은 대위.[SE]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희생자.[348] 실제 유언은 아니고 마지막으로 루리웹에 올린 게시글. 사고 당일인 4월 16일에는 생사불명이었으나, 4월 20일 새벽, 결국 사망한 것이 확인되어 고인을 기리는 글로 가득 들어찼다.[SE]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희생자.[350] 세월호 사고 1일 전이자 세월호 출항 날이었던 4월 15일은 현탁 학생의 생일이었다. 당시 현탁 학생은 자신의 주민등록증이 이제 나온다면서 뽐뿌 사이트에 글을 올렸다.링크[351] 사고 당일에는 생존자 확인조차 서두르는 중이라 생사불명으로 확인했으나, 사고로부터 2주 후인 5월 1일, 결국 사망한 것이 확인되어 고인을 기리는 글로 차올랐다.[SE] [353] 최성호 군이 마지막으로 자신의 트위터에 업로드한 글이며, 이 글 이후로 지금까지 아무런 트윗이 올라오지 않고 있다. 역시 사고 당일에는 생사불명이었으며, 4일 뒤인 4월 20일, 결국 사망한 것이 확인되어 고인을 기리는 글로 가득 차올랐다.[SE] [SE] [SE] [SE] [358] 사망 당시 향년 43세였으며 끝내 세월호에서 나오지 못하다가 2017년 5월 시신으로 발견되었다.[359] 사고직후 어머니와의 통화중.[360] 침몰하는 상황 가운데에서 보낸 남자친구와의 마지막 문자.[SE] [362] 사망 당시 25세였으며 기간제 교사인 이지혜 국어교사와 함께 아이들을 구하고 5월 19일에 발견되었다.[SE] [364] 마지막으로 며느리와 한 통화라고 한다.[SE] [366] 당시 세월호 사무장.[367] 사망 4일 전 트위터에 남긴 멘션.[368]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신해철이 의식을 잃기 직전의 말. 신해철의 매니저가 언급한 말로 이 말이 결국 사실상 유언이 돼버렸다.[369] 2014년 10월 의료사고로 사망. 유서 자체는 그가 생전에 썼던 유언장에 적힌 내용이다.[370] 장남의 결혼이 이듬해 3월에 예정되어 있었다. 죽기 전 아들의 결혼을 매우 기대했고, 며느리가 될 사람도 매우 마음에 들어해 주변에 자랑했었다는 지인들의 말이 있었다.[371] 이 부산시장이 당시 현임이던 서병수인지, 전임 허남식인지는 끝내 미제로 남았다.[372] 자살 이후 주머니에 있던 쪽지로, 2015년 중반 정치권의 뜨거운 이슈였던 통칭 성완종 리스트이다.[373] 암 투병 중이었던 그의, 딸인 오소영 씨가 성우 갤러리에 글을 올리면서 그의 말을 대신해서 전했다. #[374] 죽기 전 차남 김현철 씨에게 필담으로 남긴 유언이다. 글을 넘기기 전에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 이라는 말을 남겼고, 이 글을 쓴 이후 건강이 악화되어 아무런 말과 글도 남기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375] 죽기 직전에 한 말은 아니고, 사망 전날, 6년간 집필해온 자서전의 원고 작업을 끝내고 사무실에서 나오면서 한 말이다.[376]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당시 시신을 수습한 민간 잠수사이다.[377] 박근혜 정부의 민정수석이었으나, 비서실장이었던 김기춘과의 갈등으로, 민정수석자리에서 내려왔다. 그 후 과음으로 간이 안 좋아져서 사망하였다.[378] 김일성의 장손이자, 김정일의 장남이다.[379] 맞춤법대로 수정하면 '긴급상황입니다. 본선 2번 포트에 물이 새고 있습니다. 포트 쪽으로 빠르게 기울고 있습니다.[380] 침몰사고 직후 선장이 선사 당직자에게 보낸 마지막 카카오톡 문자[381] 스스로 목숨을 끊기 9일 전 디어클라우드의 보컬 나인에게 유서를 전달했으며, 자신이 사망한 뒤에 공개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382] 실제 유서는 따로 존재하지만, 미공개 상태이다.[383] 자신의 행위를 후배를 위한 것이었다고 포장하며 잘못을 회피하는 듯한 내용을 보아 알 수 있듯이, 이 편지는 사망 직전은 아니고 2018. 2. 27의 공식 사과 입장을 밝히기 전인 26일에 보냈던 것으로 되어 있다. 네티즌의 여론은 반반이지만 대체로는 애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피해자들에게 제대로 된 사죄도 없이 이기적이고 비겁한 선택을 했으며 죄없는 피해자들에게 죄책감을 심기까지 했기 때문. 그외에도 언론의 과도한 여론몰이에 대해 성토하는 의견이 존재한다.[384] 임종 한시간 전에 가족들에게 한 말이다.[385] 대한민국의 한복 디자이너 겸 의상 예술가로 41살이던 1977년에 ‘이영희 한국의상’ 간판을 내걸어 뒤늦은 나이로 의상 디자인 일을 시작했고 47살에는 성신여대 대학원에서 염직공예학을 공부하여 한복의 대중화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사망후 국립서울현충원 사회공헌자 묘역에 안장되었다.[386] 자신의 외동딸인 예리 씨에게.[387] 투신 직전 자신의 수행 비서에게 마지막 격려를 한 마지막 말이다.[388] 유서에는 '어떤 청탁도 없었고 대가를 약속한 바도 없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다수 회원들의 자발적 모금이었기에 마땅히 정상적인 후원절차를 밟아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누굴 원망하랴. 참으로 어리석은 선택이었으며 부끄러운 판단이었다. 책임을 져야 한다. 무엇보다 어렵게 여기까지 온 당의 앞길에 큰 누를 끼쳤다. 이정미 대표와 사랑하는 당원들 앞에 얼굴을 들 수 없다. 정의당과 나를 아껴주신 많은 분들께도 죄송할 따름이다. 잘못이 크고 책임이 무겁다. 법정형으로도 당의 징계로도 부족하다. 사랑하는 당원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한다. 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당은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국민 여러분! 죄송합니다. 모든 허물은 제 탓이니 저를 벌하여 주시고, 정의당은 계속 아껴주시길 당부드립니다.'라고 썼다.[389] 정의당의 원내대표[390] 범인 김성수에게 기습당하기 1시간 전에 여자친구에게 보낸 카카오톡 메시지 내용.[391] #[392] #[393] 사망 6일 전 SNS에 마지막으로 남긴 글.[394] # 사망 직전 자신과 같은 사이클 선수를 희망하던 조카에게 남긴 유언.[395] 후배 성우 정재헌에게 보낸 생전 마지막 문자 메시지 내용. 이 문자를 보내고 난 뒤 심장마비로 급사하였다.[396] 박근혜의 동생인 박지만과 전인범의 육군사관학교 동기로 중장 예편.[397] 학생 본인은 현자의 손자를 읽고 있었다가 교사의 오해로 인해 얼차려를 받고 투신자살했다고 한다. 항목 참조[398] 이 유언은 지켜지지 않았다. 한진 그룹의 회장연임을 계속해서 희망하는 외아들 조원태가 사업에 다시한번 관여하려는 누나 조현아에게 으르렁 대기 시작했고 누나의 편을 들어준 여동생 에밀리 리 조에게까지 경영권 싸움을 시작하는 등 3남매가 졸지에 원수지간이 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뿐만 아니라 조원태는 이 문제로 인해서 어머니인 이명희 이사장의 집에서 꽃병을 깨뜨리고 난동까지 부린 것은 덤.[399] 하지만 차남 김홍업과 삼남 김홍걸이 동교동 사저와 노벨평화상 기금 상속/소유 문제로 다투고 있어 그녀의 유언은 지켜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김홍걸이 동교동 사저 부지를 국유화하겠다고 하면서 갈등이 깊어질 것으로 보이나 김홍걸이 더불어민주당에서 제명되면서 동교동 사저 부지 국유화는 무산되었다. 2021년 6월 9일 이희호의 2주기 전날에 김홍업과 김홍걸은 동교동 사저에서 만나서 극적인 화해를 했고 유언대로 동교동 사저를 대통령 사저 기념관으로 쓰기로 합의했다. 이후 2024년 김홍걸이 일방적으로 동교동 사저를 매각하면서 민간기념관으로 운영되게 되었다. 그러나 형제간의 갈등이 더욱 깊어지고 김홍걸의 이미지가 최악으로 떨어지는 등 유언이 제대로 지켜졌다고 보기는 어렵게 되었다.[400] 문재인 대통령의 모친. 문재인이 트위터 계정에 남긴 글에서 유언 내용이 대략적으로 공개되었다.[401] 무지개 원리로 유명했던 가톨릭 사제.[402] 눈[雪\]의 결정 이모지[403] 실족사 하루 전 인스타그램에 올린 글.[404] 자살하기 하루 전인 2019년 11월 23일, 인스타그램에 올린 글. 뒤는 비공계 계정.[405] 원주 아파트 일가족 살인사건의 피해자. 사망 몇 시간 전 유튜브에 업로드한 영상의 더보기란 내용이다.[406] 원문에 '되'요라고 써 있다.[407] 이후 올라온 자살기도문은 삭제되었으며, 사망 이전 트위터에 업로드된 해당 트윗이 마지막 트윗이다.[408] 장녀가 전한 두 가지 내용[409] 개인 컴퓨터에서 발견된 유서 전문[410] 입원 중 올린 마지막 트윗 내용. 트윗을 올린 지 3일만에 병세가 악화되어 사망하였다.[411] 9월 1일 인스타그램에 올린 유서 내용.[412] 여행에 미치다 대표[413] 심근경색으로 사망하기 3일 전 유튜브에 남긴 마지막 말과 자막.[414] 국내 최고령 현역의사.[415] 생전 유튜브 마지막 영상.[416] 생전 투병 중 마지막으로 쓴 글귀.[417] 2021년 4월 14일 마지막으로 올린 인스타그램 게시물의 글이다.[418] 야구선수 임찬규의 아버지[419] 림프종으로 투병하던 중 마지막으로 투고한 인스타그램 포스팅 내용이다.[420] 대한민국 예비역 해군 대령이자 최재형 국회의원(서울 종로구)의 부친.[421] 구조대가 전화기 배터리가 충분한지, 몸은 괜찮은지 물어본 것에 대한 답변. 남도일보[422] 사망 전 올라온 마지막 영상에서 박민규가 복불복에 걸려 강제 귀가하게 되자 한 말. 이 말이 영상 속 그의 마지막 말이다.[423] 더블비의 매니저 겸 카메라맨.[424] 정확한 나이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1994년생인 더블비 멤버인 장명준, 박민규에게 형님이라 부르고 진국이네 멤버인 1997년생 신일국, 1998년생 오진영이 형이라고 부르는 걸로 보아 김준성(자비스)는 1995~1996년생으로 보인다.[425] 생전 발간했던 회고록에 남긴 유서 내용. 회고록 이외에도 화장을 바란다는 의사를 표시한 적 있다. 최측근이 가장 최근에 만났을 때는 특별히 전한 말은 없었다고.[426] 사망 6일 전 남긴 그의 마지막 게시글.[427] 30년 지기 절친이었던 윤효상에게 남겼던 말.[428] 자살 직전에 휴대전화로 어머니에게 남긴 문자 메시지.[429] 의정부호원초등학교 교사 2인 사망사건의 피해자로서 자살로 생애를 마감했다. '의정부 호원초 페트병 사건'으로도 더 잘 알려져 있는데, 자살 이후 2023년에 발생한 서울서이초등학교 교사 사망 사건으로 인해서 전 국민의 공분을 사고 있는 가운데 2년 전인 2021년 하반기에 경기도 의정부시의 호원초등학교에서 교사 2명이 잇따라 극단적 선택을 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해당 사건이 재조명 되고 있다.[430] 사망 추정일로부터 3일 전인 2022년 1월 21일의 방송 마무리 중.[431] 심규선의 노래 부디의 가사이다.[432] 사망하기 이틀전인 2022년 4월 28일에 SNS에 올린 글.[433] 대한민국의 발레리나로써 신장 157cm라는 단신을 극복하고 세계발레 계의 정상이 되었으나 2022년 3월 말부터 병가를 낸 후 우울증으로 자살을 암시하는 글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434] 사망 6일 전 병상에서 스스로 남긴 마지막 유튜브 영상.[435] 2022년 5월 15일 방영된 전국 노래자랑(충남 당진시 스페셜로 스튜디오 녹화로 대체)에서 한 클로징 멘트이며, 그의 생애 마지막 멘트가 되었다.[436] 본 주소는 김옥길기념관으로 되어있으며, 도로명주소는 서울 서대문구 연대동문길 47-6 으로 되어있다.[437] 2011년 10월 2일, 당시 이철 세브란스병원 의료원장에게 보낸 편지.[438] 2011년 11월 21일, 위의 편지를 보내고 시신 기증인 유언서를 정식으로 작성할 때 '남기고 싶은 말씀'란에 적은 내용.[439] 사망 전 마지막 페이스북.[440] 병세가 악화하자 병상에서 유언처럼 남겼다.[441] 사고 14분 후 부인과의 통화 중.[442] 제2경인고속도로 갈현고가교 화재사고 희생자.[443] 2022년 11월 10일 '학교에서 친구와 부딪혀서 트러블이 생겼는데, 어떻게 현명하게 해결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마지막으로 남긴 네이버 지식iN 답변.[444] 엄마에게 마지막으로 남겼던 메시지 내용. 그러나 14분 후, 영영 돌아오지 못할 길을 건너고야 말았다.[445] 사망하기 이틀전에 인스타그램으로 화보촬영 사진과 함께 올린 마지막 메시지. 안타깝게도 현재 해당 게시글은 삭제된 상태이다.[446] 투신 직전의 라이브 방송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말.[447] 2023년 4월 11일 멤버 공용 트위터에 마지막으로 남긴 글이다. #[448] 민주노총 전국건설노동조합 강원건설지부 3지대장.[449] 어린이날 연휴에 고열로 응급실을 전전하다가 골든 타임을 놓쳐 숨진 만 4세 아이의 마지막 말. 이 말을 마지막으로 아이는 의식을 잃고 쓰러졌으며 병원에 도착한지 40여 분 만에 끝내 숨졌다.[450] 평소 연명치료를 거부하다가 사망하기 하루 전에 부인에게 한 말.[451] 법조인이자 삼윤장학재단 이사장. 1963년 제 1회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13년간 판사로 재직했으며 시각장애를 겪던 큰 딸의 시력 치료를 위해 1978년에 변호사로 전직했다. 그 후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당시 세 딸을 모두 사고로 잃고 그 보상금으로 세 딸들의 이름을 딴 장학재단을 설립했다.[452] 2023년 3월 23일 인스타그램에 마지막으로 남긴 글.[453] 사망 당일 아내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454] 장례 후 장남의 감사 인사를 통해 밝혀진 사망하기 얼마 전 아내에게 했던 말이다.[455] 서울아산병원 심장혈관흉부외과 교수.[456] 이후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화장실 욕조에서 자살 시도를 했다. 29초 후 세면대 위에 세워져있던 스마트폰 잠금 화면에서 가로 대칭 화면으로 (6월 11일 밤) 10시 28분이 떴고, 23~24분이 지난 후 임블리의 지인과 구급 대원이 도착하고 유튜브 실시간 방송이 꺼졌다. 다음 날인 6월 12일부터 뇌사 소문이 퍼졌고(뇌사에 가까웠다는 말도 있었다.), 6월 18일 사망했다.[457] 임블리 사망 생중계 사건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말과 유서. 캡처1, 캡처2(확대)[458] 사망하기 이틀 전에 집에서 어머니에게 하소연으로 했던 말. 해당 기사[459] 코스트코 하남점에서 발생한 온열질환 사고로 29세로 사망했다. 하지만 유족들은 코스트코 측으로부터 적반하장으로 '병을 숨기고 입사했느냐?'는 등의 막말과 모욕을 들어야만 했다.[460] 사망 전 유튜브 커뮤니티에 남긴 글. 현재는 자살을 조장하는 글 신고로 삭제된 것으로 추정된다.[461] 사망 일주일 전 본인의 인스타그램에 남긴 마지막 글의 메시지로 유족들에 의해서 2023년 6월 26일 공개되었다.[462] 2023년 5월 30일 인스타그램에 마지막으로 남긴 글.[463] 해당 기사에서 24세의 여성인 안 모씨로 확인이 되었는데 첫 휴가를 나왔다가 변을 당했고 사고 이틀날 결국 숨진 채로 발견되었다.[464] 블랙박스에 녹음된 육성으로 남편에게 전화를 걸기 직전에 한 말.[465] 흙탕물로 인해서 물이 차오른 상태에서 걸은 남편과 생전 마지막 통화육성.[466] 오송 지하차도 참사의 희생자.[467] 연세대학교 응용통계학과 명예교수이자 윤석열 대통령의 부친.[468] 9월 9일 마지막 유튜브 라이브 도중 한말.[469] 사망하기 하루 전에 지인들과 저녁을 먹으면서 남긴 말.[470] 난소암 판정을 받고나서 본인의 투병생활기를 올린 유투버 암환자 뽀삐의 운영자. 이 라이브를 마치고 7일후 운명을 달리했다. 그녀와 친한 유투버인 김쎄오는 사망하기 하루전날인 9월 15일 저녁에도 짜장면과 탕수육을 먹고나서 시청자 및 구독자들과 가족, 친구들에게 사랑한다는 인사를 남기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농담도 잊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9월 16일 새벽 2시 50분에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고 밝혔다.[471] 사망 당일 유튜브 채널에 올린 유서 영상 내용. 10월 11일 Youtube 약관에 의하여 삭제됐다.[472] 2023년 9월 마지막 항암치료를 받기전에 올린 영상. 하지만 이 영상이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473] 대한민국의 패션 사업가 겸 유튜버. 2023년봄에 골육종 진단을 받고 투병하다가 건강 악화로 눈을 감고 말았다.[474] 병상에서 김민섭 작가가 "선생님, 제가 살면서 누구에게도 이런 것을 물은 일이 없어요, 그런데 선생님께 꼭 묻고 싶습니다. 저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라고 묻자 힘들게 답한 말.[475] 김민섭 작가가 홍세화 선생에게 이 말을 적어달라 부탁하자 겸손 두 글자를 적어줬다고 한다.[476] PD수첩에서 유언이 공개됐다고 한다.[477] 공장에서 불이나기 한시간 전에 보낸 마지막 문자 메시지.[478] 화성 아리셀 참사의 희생자로 라오스에서 한국으로 귀화한 34세 여성이다.[479] 동료 가수 박학기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한 내용.[480] 화재 발생 시각 3분 만에 전화를 걸어서 아버지와 통화한 음성.[481] 그로부터 25분 뒤 아버지와 재통화때 남긴 마지막 음성.[482] 이 기사에서 28세라고 보도된 여성 사망자이다.[483] 불이 나고나서 15분 뒤인 오후 7시 49분에 어머니에게 보낸 마지막 문자 메시지. 긴박한 상황으로 인해서 띄어쓰기도 하지 않은 채로 문자를 보내어서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484] 해당 기사에서 25세라고 보도된 남성 사망자로 그는 호텔 7층 객실에서 심정지 상태로 발견돼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끝내 숨졌다. 여담으로 사망 다음날이 모친의 생일이었다고 하며 결국 모친은 자신의 생일을 아들의 장례식장에서 보내야만 했다.[485] 사망 2달 전 마지막으로 올린 블로그 글. 링크[486] 퇴근이 얼마 남지 않았을 무렵 어머니에게 메신저로 보낸 마지막 메시지.[487] 2024년 8월 12일 서울 아파트 공사현장에서 감전 사고로 목숨을 잃은 포스코 E&C 하청업체 소속의 청년 노동자로 CCTV 영상에 의해서 고압 전류로 인한 감전으로 쓰러지고도 무려 1시간 넘게 혼자서 방치된 것으로 드러나서 국민들의 공분을 사고있다.[488] 2024년 9월 12일 밤에 공개된 열무와 알타리 244화의 휴재 공지 안내문.[489] 웹툰 열무와 알타리 작가. 2024년 9월 12일에 244화를 올리면서 잠시 휴식기를 갖고 내년 초 새해 인사와 함께 찾아 뵙겠다고 공지를 올렸으나, 2024년 9월 23일 대전광역시 자택에서 잠을 자던 중 심정지로 사망하면서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고 열무와 알타리 역시 작가의 사망으로 미완성으로 끝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