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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1 14:16:43

2000년대

00년대에서 넘어옴
연대
1980년대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 2020년대
세기
18세기 19세기 20세기[A] - 21세기[B] 22세기 23세기
밀레니엄
제1천년기 제2천년기[A] - 제3천년기[B] 제4천년기

1. 개요2. 정치
2.1. 대한민국2.2. 기타 국가
3. 경제/사회
3.1. 대한민국: 경제위기 수습과 후유증
3.1.1. 기후
3.2. 기타 국가
4. 문화
4.1. 교육
4.1.1. 서울과 경기도의 중학교 혼성반 의무화
4.2. TOEIC 등의 시험 유형 변경4.3. 출판계4.4. 문학4.5. 음악
4.5.1. 대한민국 음악
4.6. 언론4.7. 방송
4.7.1. 경영/정책4.7.2. 기술4.7.3. 드라마4.7.4. 예능
4.8. 패션4.9. 영화
4.9.1. 대한민국4.9.2. 기타 국가
4.10. 만화, 애니메이션
4.10.1. 대한민국4.10.2. 일본4.10.3. 영미권
4.11. 게임
5.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6. 이 시대에 시작되거나 만들어진 것들7. 이 시대에 쇠퇴한 것들
7.1. 세계7.2. 대한민국
8. 사건 사고
8.1. 한국8.2. 기타 국가
9. 2000년대에 들어가는 해10. 참고/관련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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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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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가 시작되기 직전, 1990년대의 마지막 날(1999년 12월 31일)의 제야의 종 타종식 영상
보통 서기 2000년부터 서기 2009년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넓은 의미로는 2000년부터 2099년까지로 말한다. 그 탓에 다른 말로 00년대라고도 한다.

이 시기 출생자들은 현재 [age(2009-12-31)]세~[age(2000-01-01)]세다.

20세기의 마지막 연대이자, 21세기의 첫 번째 연대이다. 21세기의 첫 시작은 2001년 1월 1일이지, 2000년 1월 1일이 아니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달력의 첫 시작이 AD 1년 1월 1일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100년을 한 단위로 하는 세기의 시작과 끝도 1년부터 100년이다.[5] 다만 100년 전 20세기의 시작을 놓고 독일은 정치적인 필요에 의해 새로운 세기를 알리는 행사를 1900년에 실시한 전례가 있다. 반면 영국은 독일의 20세기 시작 선포를 인정하지 않고 1901년에 따로 거행했다. 21세기와 새로운 밀레니엄 개시를 앞두고 세계시간의 표준이 되는 영국의 그리니치 천문대는 2001년새로운 세기의 시작이라는 입장을 고수하였다.[6][7]

이 연대에 음력 윤달이 끼는 해는 2001년 (4월), 2004년 (2월), 2006년 (7월), 2009년 (5월)이 있다.

2000년대에는 컴퓨터와 인터넷이 세계적으로 보급되며, 본격적인 디지털 시대가 개막했다. 초고속인터넷이 대중화되고 정보 지식화 사회의 기반을 마련했으나, 여전히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혼재하여 존재하는 독특한 시대성 특성을 가졌다. 이러한 시대적 특성을 바탕으로 이후 2010년대 중반부터는 아날로그가 완전히 쇠퇴하고 디지털 시대가 개막한다.

정치 및 경제적으로는 미국 중심의 국제질서와 1980년대의 데탕트와 1990년대의 세계화를 필두로 한 세계경제체제가 마지막으로 빛났던 시기이자, 본격적으로 21세기 초반의 국제갈등 및 분쟁과 경제적 위축 및 위기가 시작되기 직전의 황혼기였다고 할 수 있다.정치적으로는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국력을 소모하기 시작하였고, 이는 2010년대에 미국 중심의 국제질서가 약화되는데에 기여했다. 경제적으로는 2001년 미국의 IT 버블붕괴로 세계 경제가 둔화되기 시작했으며 결정적으로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인해 큰 타격을 입고 침체에 빠지게 된다.

이런 한편 중국인도를 포함한 신흥국들이 정치·경제적으로 급격하게 성장하여 세계 경제의 축이 이들로 상당 부분 옮겨지게 되었으며 미국 중심의 단극체제가 약화되었다.
2008년에 외국인 관광객이 여의도에서 찍은 영상이며 2000년대의 생활상을 대략 확인할 수 있는 영상이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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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정치

2.1. 대한민국

1998년 2월 25일, 김대중 정부가 출범한 이래 2003년 2월 25일에는 노무현 정부가 출범함으로써, 2008년 2월 24일까지 민주당계 정당(새정치국민회의-새천년민주당-열린우리당)이 10년 간 여당으로 집권했는데, 이는 헌정사상 최초이며[9] 보수 측은 그 시기를 잃어버린 10년이라 한다.

이원복 교수의 2002년 저서 <먼나라 이웃나라> 우리나라편에 따르면 2000년대를 한국 정치가들의 리더십이 혼돈 상태에 돌입한 때라고 언급했는데, 박정희식 수직적 권력구조가 힘을 잃은 대신 민주화로 일궈낸 수평적 구조가 드세지다가 두 가지 힘이 충돌해 혼돈이 생긴 것이다.

2000년 16대 총선에서 당시 야당 한나라당이 영남 유권자들의 힘으로 울산 동구 1석을 뺀 64석을 독식했으나, 총선시민연대의 낙선운동으로 낙천/낙선대상자 86명 중 59명이 떨어지는 성과도 있었다. 그러나 2001년 임동원 통일부장관 해임건의안 사태를 계기로 DJP연합은 깨졌고, 거기에 전년도 정현준과 진승현 게이트에 이어 2001년 이용호 게이트, 2002년 최규선 게이트 같은 권력형 비리사건들이 터져나오면서 DJ정권은 레임덕 상태로 치달았다.

2002년에도 두 아들 김홍업-홍걸 형제와 권노갑 의원 등의 비리로 레임덕 현상은 심화되어 김대중 당시 대통령은 민주당을 나갔고, 이회창 한나라당 대선후보의 약진으로 정권은 어려움을 겪는 듯했다. 그래도 DJ는 노무현 후보를 믿고 관료와 전문가 출신을 주로 내각에 기용하여 성공적으로 정권 재창출과 임기 마지막 시기를 마무리했다. 16대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가 '행동하는 네티즌'들의 지지에 힘입어 이회창 후보를 박빙 대결 끝에 역전해 당선했다.

2003년에 고졸자로서 최초로 대통령에 취임한 노무현은 16대 대선 들어 '탈권위주의'를 천명하여 국회와 여당에 자율권을 부여했고, 사법부에 대한 압력을 없애는 명목으로 권한을 강화한 책임총리제가 출현했다. 또 선거에서 금권을 배제하겠다는 명목하에 상향식 공천제를 도입한 후, '평검사들의 대화' 주재 등을 통해 국정원과 검찰의 중립성을 강화하려 했으나, 오히려 결과는 검찰 개혁 실패로 이어졌다. 또 언론에도 자율성을 부여하면서 이전 대통령과 같은 강압적 방법을 잘 안 썼기에 국경없는기자회 기준 언론자유지수는 2005년부터 34위로 30위권에 진입해 2006년 31위, 2007년 39위를 각각 기록했다. 다만 강동순 전 방송위원회 상임위원 등 일부 언론인이나 보수층은 2004년 탄핵정국 당시 KBS의 편파보도 등을 예로 들어 왼쪽으로 균형을 잃었다고 보기도 한다.

취임 초기에는 보수세력과 노무현을 고깝게 바라보는 기성 민주당계, 언론이 상고 출신 대통령의 이러한 개혁조치를 못마땅하게 봤고, 이 가운데 검란 파동과 대선자금 의혹, 이라크 파병 찬반논쟁, 불법 대북송금 사태, 대통령 측근비리, 민경찬 게이트, 굿모닝시티 사건 등으로 혼란이 있었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자유주의자들은 지역과 성향을 초월할 정당이 필요하다 하여 새천년민주당을 나선 후 작은 여당 '열린우리당'을 만들었다.

2004년에는 한나라당과 새천년민주당이 협공으로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발의하면서 고건 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서 잠깐 공백을 메꾸며 17대 총선을 치렀다. 이에 노무현 전 대통령은 탄핵 위기 속에서 야당측의 사과 요구를 거부했고, 유권자들도 사소한 문제로 대통령을 탄핵한다며 분노해 촛불 시위로 번지게 되었고, 총선 후 5월에 헌법재판소는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기각했다.

총선에선 신흥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영남에서도 강세를 보이다가 '박근혜 열풍' 때문에 한나라당에게 영남 주도권을 뺏기긴 했으나, 개표 후 열린우리당이 152석으로 승리하여 한나라당은 122석으로 졌다. 특히 한나라당과 함께 노무현 탄핵 정국을 주도했던 새천년민주당의 경우 민주당 지지자들이 대부분 열린우리당 지지자로 이동해 5석밖에 확보하지 못해 사실상 초토화되었다. 진보정당 민주노동당도 정당명부제 덕에 총 10석으로 제3정당이 되었고, 여성할당제의 도입으로 전체 의원 299명 중 여성 의원이 39명(13%)을 차지했다. 이 시기에 김종필 자유민주연합 전 총재가 정계를 은퇴함으로서, 대한민국 정치를 풍미했던 삼김시대가 막을 내렸다.

특히 노무현 정부 시기(2003년 ~ 2008년)에는 1980년대 운동권 출신 86세대들이 정계 입문 또는 정치 참여를 계기로 제도권 중앙정계에 대거 진출하였고, 이들은 국가보안법 폐지,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의 재산 환수, 과거사정리위원회 활동, 북한과의 화해 국면 조성과 개성공단 협력 등 1980년대에 형성된 자신들의 이념을 2000년대의 현실 정치 속에서 실현하기 위해 시도하였으나, 후술할 이원복 교수의 견해처럼 기성 정치인보다 정치 현장에서 역량이 떨어지다 보니 국가보안법 폐지 등은 현실 정치의 벽에 막혀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그 외에 2005년엔 헌법불합치 판결을 받은 호주제를 개정 후 3년 뒤에 폐지하여 가부장적 가정문화를 철폐했고, 그 해 3.1절 기념식에서 몽양 여운형과 유정 조동호, 오서 권오설, 근전 김재봉, 구연흠 등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101명에게 건국훈장을 추서하여 좌익 독립운동사의 재평가에도 기여했다. 다만 보수 정치인이나 학자 등은 친일청산 같은 과거사 청산 자체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흔들어 국민의 단합을 해치고 아픈 역사를 들춰내 역사의 상처를 더 후벼판다고도 하여 비판적으로 봤다.

지역적으로는 국가균형발전을 위한 지방분권에 더욱 힘을 기울여 수도권에 편중된 중앙 정부 및 공기업을 지방으로 이전하는 정책을 펼쳤고, 이에 따라 '국가균형발전법'과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 '지방분권특별법' 등 국토균형발전 3대 특별법을 제정했다. 그러나 신행정수도특별법에 따른 행정수도 이전 계획은 한나라당의 반대와 헌법재판소의 위헌 판결로 뜻을 못 이뤘고, 이 법은 '행정수도복합도시건설 특별법'으로 바뀌어 현재 세종특별자치시의 씨앗이 됐다. 수도 이전과 연계된 지방 균형발전을 위해 전남 나주, 경북 김천, 경남 진주 같은 지방의 성장거점 지역에 혁신도시를 조성한 뒤, 수도권에 편중된 공기업을 지방으로 이전해 지방별로 특색 있는 미래형 도시로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임기 중반기 들어 위기를 겪었다. 그는 임기 전반기에 탈권위주의를 천명하긴 했으나 점차 국정 운영에서 미숙한 점이 보였고, 평소 과격한 언사와 감정적 대응으로 불필요한 마찰까지 보여주며 언론도 제대로 장악하지 못해 오히려 언론에 많이 당하기도 하는 등 정당정치의 민주화는 성공했으나 제도화만큼은 실패했다는 평을 받았다. 또한 절대다수 여당이던 열린우리당은 여러 세력 간의 난립 문제와 리더십의 부재 등으로 국보법 개/폐 문제 등지에서 분란을 일으키며 정부와 같이 쇠퇴해 지리멸렬해졌고, 부동산 정책 면에 있어서 종합부동산세를 실시했다가 국민들의 반발을 샀다. 결국 그는 임기 종반으로 갈수록 측근 의존도를 높였고, 2005년과 2007년에 각각 내민 대연정과 대통령 4년 중임제 개헌 주장도 전부 해프닝으로 끝났다.

더 나아가 국민행동본부 같은 자생적인 우파 시민사회단체들은 2002년 북핵위기와 2003년 참여정부 출범을 계기로 '반핵반김국민협의회' 같은 걸 만들어 결집에 나섰고, 거리에도 나서기 시작해 '아스팔트 우파'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2004년에 신지호와 한기홍, 허현준, 홍진표 등 전향 운동권 인사들을 주축으로 '자유주의연대'를 창설한 걸 계기로 신흥 자유주의 보수세력 '뉴라이트'도 등장해 노무현 정부를 비판했고, 신혜식 <독립신문> 대표, 박찬성 북핵저지시민연대 대표 등처럼 한국자유총연맹과 대한민국재향군인회 등지의 기성 보수 호국/안보단체들과 다른 방향을 지닌 '신진 우파'들도 생겨났는데 초기 사상 기반은 기성 보수인사들인 조갑제지만원 등의 영향을 많이 받기도 했다.(참고)

반면 야당이던 한나라당은 2006년 제4차 지방선거에서 승리해 반전의 계기를 만들었고, 2007년 17대 대선을 전후해 여당 내에선 정동영과 손학규 후보 간에 경선이 진행되었으나, 세간의 관심은 한나라당의 이명박 vs 박근혜 후보 간의 경선에 쏠렸다. 이명박 후보가 BBK 사태와 자녀 불법입학 의혹 등에도 불구, 이미 서울시장 시절 청계천 복원 등의 강력한 추진력으로 호의적인 인상을 남긴 데다 '뉴타운 공약' 등을 내세워 경제 회복을 갈망하던 국민의 지지를 받아 12월 19일 대선에서 500만표가 넘는 표차로 대통합민주신당의 정동영 후보를 꺾어 승리했다. 2008년 MB정부 출범 후 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153석으로 승리하면서 2000년대 후반의 정치 지형은 보수 강세로 다시 변하게 된다. 반면 통합민주당은 81석밖에 못 얻었고, 민노당도 친박연대(14석)에게 밀려 5석에 그쳤다.

보수 강세 외에 2007~2008년의 중요한 정치적 흐름이 한 가지 더 있는데 바로 정치 불신이다. 2007년 17대 대선의 투표율은 63.03%에 그쳤으며 특히 20대의 투표율은 40%대에 그쳤다. 또한 2008년 18대 총선의 투표율은 46.1%에 그쳤다. 2000년에 열린 남북정상회담, 2002년의 거센 노무현 열풍과 반미 열풍 등 새로운 시대를 열망했던 한국사회의 열정은 부동산 문제와 같은 현실 문제들이 국민들에게 더 다가오자 오래 지나지 않아 제17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경제대통령이라는 현실을 내세운 이명박에 대한 압도적인 지지와 냉소적인 정치불신으로 사그라들게 되었다. 현대사학자 홍석률 등이 쓴 <한국현대사> 2권에서의 견해에 따르면 해당 대선은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적 시스템이 어느 정도 자리잡았다는 걸 보여줬다고 했고, 국민이 직접 투표로 여야 간 정권교체를 이루게 함으로써 어떤 정권이 집권해도 국민의 여론을 무시할 수 없게끔 했다고도 전했다. 또한 진보 정권의 경험 부족으로 인한 불안정한 상황으로 인해 한국 사회가 민주화에 이어 경제/사회적으로 안정된 시스템을 만들어내는 데에 관심을 기울이게끔 했다고도 견해를 밝혔다.

2000년대는 위의 정치 불신과 더불어 시민들의 정치적 무관심이 가장 심각했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2000년대엔 전국단위 선거가 총 7번[10] 있었는데 2002년 16대, 2007년 17대 대선은 각각 역대 대선 투표율이 뒤에서 2등, 1등이다. 또한 총선은 탄핵 역풍이 불어 60%가 넘는 투표율을 기록한 17대 총선을 제외하면 2000년 16대 총선은 총선 투표율 뒤에서 3등, 2008년 18대 총선은 총선뿐만이 아니라 모든 전국 단위 선거에서 현재까지도 투표율 꼴찌를 차지하고 있다. 지선도 이때 치러진 2002년 제3회, 2006년 제4회 두 번의 선거가 지선 투표율 뒤에서 1, 2등을 차지하고 있다.

이명박 정권은 집권 초부터 순탄치 않았다. 초기 내각부터 부동산 부자들이 많아 '강부자'로 불렸고,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이긴 뒤 미국과 맺은 쇠고기 협정이 MBC <PD수첩>의 과장보도를 위시로 한 광우병 파동이 터진 후 촛불집회로 번져 정권 존립에 위기에 처했다. 이에 놀란 MB는 대국민 사과를 한 후 한반도 대운하 계획을 철회하고 사업의 계획을 수정하여 이를 '4대강 사업'이라고 바꾼 후 재개했는데, 이마저도 대운하 프로젝트의 틀을 유지하여 정치/환경적으로도 논란의 여지가 지속됐다. 당초 세종시 무효화도 진행하려 했으나 2010년 지방선거 때 야당의 승리로 못 이뤘다.

한편 2009년 이른바 '박연차 게이트'가 터지고 자신의 아내, 딸, 아들이 비리에 연루되었던 노무현은 자신에 대한 검찰 조사가 진행되던 중인 2009년 5월 23일에 고향 봉하마을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당시 한나라당 세력에 밀리던 민주당 계열 정당들은 친노/진보세력의 결집과 노무현에 대한 동정여론으로 정당 지지율을 역전하기에 이른다. 이와는 별개로 하반기 글로벌 금융위기를 전후해 경제상황이 악화되어 당초 내걸었던 '747공약[11]'은 무산되었고, 경제성장률도 7% 근처에 못 갔으나, 하필이면 세계적으로 리만 사태로부터 촉발된 대침체가 이루어지던 시기다 보니 국제적으로 경제 상황이 나빴음을 고려한다면 매우 선방한 것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법질서 확립'과 '떼법 추방'을 명분으로 민주당계 정부 때 등장한 정책들을 돌려놓고자 언론이나 공권력 등을 보수주의 중심으로 바꿔서 경찰과 검찰을 이용해 국정원, 기무사, 대통령실 등을 동원해 민간인 사찰을 시도했다. 그 결과 2011년 프리덤하우스는 한국을 언론자유국에서 '부분적 언론자유국'으로 격하시켰고, 언론자유지수도 홍콩과 함께 70위를 찍었으나, 이는 한 국가의 자유를 판단하는 절대적 지표가 아니므로 이것만으로 민주주의의 후퇴라고 판단하기에는 이르다.

그는 경제정책을 재벌 중심으로 개편했으며 기존 좌편향 위주로 돌아가던 교육현장에 뉴라이트 성향 강사들을 투입시켜 우익사관 중심으로 교육을 시켰고, 역사 교과서에 대한 수정도 일삼았다. 또한 광복절을 건국절로 바꾸려고 시도하여 독립운동 유관단체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2000년은 남북관계와 북미관계에 대반전을 이룬 한 해였는데, 6월 13일 평양 순안공항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북한 지도자 김정일과 악수를 해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이 이루어져 동월 15일에 '남북공동선언'을 체결해냈다. 8월 15일에는 15년만에 서울과 평양에서 대규모로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져 국민들에게 큰 감동을 줬다. 9월에는 비전향 장기수 63명이 북송되기도 했다. 북미관계에선 전년도 '페리 프로세스'를 계기로 압박에서 대화를 중점으로 이뤄져 조명록 특사 방미와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 등의 방북으로 이어졌다.

남북관계의 역전으로 금강산 관광 확대와 개성공단 조성 등의 남북교류가 제한적으로나마 이루어진 시대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북한에 대한 인식이 동족, 통일의 대상 등으로 비교적 좋은 편이었다. 이미 1999년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 때 미군의 학살 정황이 폭로된 걸 비롯해 2000년 매향리 미군 공군사격장 사태와 2002년 미군 여중생 압사 사건 등으로 반미감정이 더해지기도 했다. 이는 1990년대 탈냉전 시대 이래 반공을 과거 독재정권의 낡은 이념으로 여기게 되었기 때문에 그 반대급부로 북한과의 화해를 역사적 과제로 여겼던 영향이 컸다고 볼 수 있겠다. 문제는 한국 말고도 다른 동맹국에도 그 여파가 컸고 정작 과거 공산권이었던 베트남과 중/동유럽은 오히려 미국과 관계를 본격적으로 강화했다. 공동경비구역 JSA, 웰컴 투 동막골과 같이 문화예술계에도 이와 같은 사회 분위기가 반영되었다.

그러나 2001년 클린턴 시대가 끝나고, 동시에 부시 행정부 집권 후 북한에 대해 강경 일변도의 태도를 유지함에 따라 핵실험 문제 등으로 한반도 긴장상황이 더 고조되었고, 2002년 제2차 연평해전까지 터지면서 또다시 긴장 상황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 국내적으로는 2001년 만경대 방명록 사건과 2003년 대북송금 사건 등으로 남남갈등까지 심해졌으며, 보수 측은 남북정상회담과 햇볕정책을 지속적으로 비판하였다. 2003년에 북한이 또 NPT를 탈퇴한 후 2006년 1차 핵실험 등으로 서서히 북한에 대한 여론이 나빠지기 시작하면서도 노무현 전 대통령은 '평화공존정책'을 펴며 햇볕정책을 이어나가 2007년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였으며,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7년 10월 2일, 1953년 정전협정 이후 대한민국 국가 원수로는 처음으로 걸어서 군사분계선(MDL)을 넘었다. 당시 이 장면은 CNN 등을 통해 전 세계에 생중계됐다. 그는 자동차로 평양-개성고속도로를 통해 평양에 도착하여 4·25문화회관으로 이동했으며, 이곳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이틀 후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10.4 남북공동선언)'을 발표하여 다시 호전되는 듯했다. 그러나 보수 측은 납북 국군포로 문제 등이 해결되지 않았다 하여 안 좋게 봤고, 이원복 교수도 주변 4대 강국의 실리 외교 속에서도 폐쇄적 민족주의로 일관하다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니 북한의 핵무기 위협에 무력해졌다며 부정적으로 봤다.

2008년에는 10년간의 민주당계 정당의 집권기가 끝나고, 새로 집권한 이명박 전 대통령은 '비핵-개방-3000원칙'을 내세웠으나 북한 측은 6.15 남북공동선언과 10.4 공동선언을 이행하라며 거부했다. 뒤이은 금강산 관광객 피살 사건을 비롯해 2010년 천안함 피격 사건연평도 포격전을 겪으면서 남북관계가 경색되고 북한에 대한 한국사회의 인식은 극도의 증오와 불신이라는 정반대의 분위기로 변하게 되었다. 또한 2009년에 북한은 정전협정의 전면 무효를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반면 교양만화가 이원복 교수는 2007년 1월 1일 <중앙일보>에 연재한 '세계사 산책' 14회에서 당대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전반이 혼란상황이라고 봤는데, 정치권은 무능한 아마추어들의 국정 운영으로 인해 수십년간 그토록 일궈 온 성과물이 무너졌다고 견해를 제시했다.

위와 같은 상황 속에서 이념, 계층, 연령, 빈부 등 모든 면에서 갈등이 터질 대로 터져 정치권은 리더십을 상실한 데다 주변 4대 강대국들은 실리 외교인데 한국 홀로 폐쇄적 민족주의만 고집하다 보니 핵 위기에 무력해졌고, 종합부동산세 같은 경제 포퓰리즘이 오히려 강남 부자들을 압박하는 데 치중하여 정작 서민들과 청년층은 각각 불경기와 취업난에 시달렸으며 국민소득도 1995년 이후 1만 달러선 이상을 못 넘었다고 견해를 제시했다. 또 국가의 지나친 개입으로 하향 평준화된 교육계에 실망한 사람들이 조기 유학을 하다 보니 '기러기 아빠'가 늘고, 법질서도 엉망진창에 공권력도 약해진 대신 헌법을 뛰어넘는 '떼법'이 판치고 북한 사람들은 김정일 치하에서 인권을 유린당한 채 여전히 굶주림에 시달리다 키가 작아져 인종마저 달라질 위기까지 나온다고도 했다. (참고)

2.2. 기타 국가

미국의 경우 2000년 11월 대선에서 앨 고어 민주당 후보가 총 득표수로 신승해서 빌 클린턴의 뒤를 이을 뻔했으나, 조지 W. 부시 공화당 후보가 선거인단 수로 우세해서 역전하여 민주당 8년 집권기를 끝냈고, 클린턴 행정부 때의 정책을 전부 되돌리려는 'ABC(Anything But Clinton)' 정책을 실시했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은 전년도 대선의 선거후유증에 시달리다가 9.11 테러 후 지지율이 90%로 급등했고 '테러와의 전쟁'으로 국면을 전환해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일으켜 탈레반 정권을 무너뜨렸고, 2002년에는 대량살상무기 개발 의혹이 있는 북한, 이라크, 이란을 악의 축으로 지목했다.

2003년에는 '대량살상무기 근절'을 명분으로 이라크 전쟁을 벌여 오사마 빈 라덴을 지지하던 사담 후세인 독재정권을 끌어내렸으나, 정작 대량살상무기가 발견되지 않아 '명분 없는 전쟁'이란 오명을 들으며 제2의 베트남전이 터지지 않을까 우려되었고, 2004년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 포로학대 사건으로 미국의 도덕성에 타격을 입혔다. 이 때문에 2004년 대선에서 부시는 '경제 회복'을 내세운 존 케리 민주당 후보의 돌풍으로 고전했으나, 박빙 상황에서 부시 대통령은 테러 불안에 시달리는 국민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아 연임에 성공했다. 2기 재임기 동안 2005년 관타나모 수용소 사건 같은 인권유린 사태가 터져 미국의 도덕성에 더 먹칠을 했으며 같은 시기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터질 당시 재난 대응에도 미숙함을 보여줬다. 야당인 민주당도 2006년 중간선거에서 승리한 뒤부터 부시를 레임덕 상태로 몰아넣었다.

미국은 두 차례의 전쟁에서 돈을 쏟아부어가며 이겼음에도 오히려 폭탄 테러와 무장단체의 공격은 지속되었으며, 2007년에는 무하마드 오마르를 중심으로 전열을 정비한 탈레반이 반격을 가하여 미국을 더 압박했다. 뒤이어 부시 대통령 임기 마지막 해인 2008년에 터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대침체 역시 행정부의 대처 미흡으로 부시 정권의 종말을 부추겼으며 그렇게 현직 대통령에 대한 비판이 나날이 증가하면서 차기 대선에서 정권교체는 기정 사실화되었다. 따라서 그해 11월 대선에서는 '변화'를 기치로 내건 아프리카계 출신의 40대 민주당 후보 버락 오바마가 세계금융위기 속에서도 지지를 망설이는 백인 유권자들까지 한데 포용해 900만표 이상으로 존 매케인 공화당 후보를 단번에 쓰러뜨려 유색인종으로서 최초로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2009년에 사상 첫 흑인 대통령으로 공식 취임한 오바마 신임 대통령은 전임 부시 대통령 시절에 발생한 세계금융위기 문제와 북핵문제, 이라크 문제, 이란 문제, 인종차별 등 온갖 문제를 해결하는 중대한 과제를 안고 임기를 시작해야 했다.

일본은 2000년 오부치 총리 급서 후 모리 요시로 총리의 어중간한 시기를 거쳐 2001년 총선에서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이끄는 자민당이 승리해 자민당 집권기가 더 이어졌다. 그는 포퓰리스트로서 우정성과 도로공단을 민영화하는 등으로 나라를 살리려 했으나 재정과 사회보장제도는 손을 보지 못했다. 또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매년 강행해 한국과 중국 등 이웃나라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또 9.11 테러를 계기로 2003년에 '유사법제 3법'을 통과시켜 전쟁 등 유사시 자위대 투입을 허용하는 길을 마련했고, 이는 군사대국화 급진전의 한 계기였다. 이후 아베 신조, 후쿠다 야스오, 아소 다로 등의 자민당 집권을 이어가다 2009년 9월, 민주당 하토야마 유키오가 승리하면서 정권교체에 승리해 변화를 시도했다.

중국은 급속한 경제성장 드라이브를 이어가며 2002 한일월드컵 본선 진출과 2008 베이징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 등으로 국가 위신을 드높여 미국을 위협하는 새로운 초강대국이 됐다. 그러나 한국처럼 빠른 경제성장 과정에서 드러난 짝퉁제품, 환경오염 등의 개발도상국적 문제로 인해 인터넷상에서 '대륙의 기상' 같은 조롱도 들어야 했고, 파룬궁 탄압과 2008년 티베트 독립운동 진압 같은 인권 탄압도 여전히 자행됐다.

2002년 인도네시아 치하였던 동티모르가 21세기 최초로 정식 독립을 했다. 다음으로 2006년에 세르비아에서 빠져나온 몬테네그로, 그리고 2년 후 독립한 코소보가 있으나 코소보는 미승인 국가이다. 탈레반 치하의 아프가니스탄은 2001년 미군의 침공 후 친미 정부가 수립됐지만 탈레반의 위협은 여전했고, 이라크도 2003년 미군에 의해 후세인 독재정권이 무너져 민주화의 길이 마련되었으나 민간정부로의 통치권 이양을 두고 수니파와 시아파 간의 권력다툼, 미군과 미국인에 대한 테러행위 등으로 혼란기에 접어들었다.

3. 경제/사회

3.1. 대한민국: 경제위기 수습과 후유증

경제적으로는 IMF 사태 이후 취업난, 비정규직, 공무원 열풍 등 2010년대까지 이어지는 문제들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김대중 정부 후반기인 2001년 8월 말에는 IMF 구제금융을 빠르게 졸업하여 이듬해 1만 달러선을 다시 회복했고, 노무현 정부 들어서는 당초 공약으로 내걸었던 '임기 중 7% 성장'을 내걸었으나[12] 그에 턱없이 못 미치는 임기 내내 평균 경제성장률 4.3%를 기록했다. 이는 동시기 세계 평균 경제성장률인 4.8%보다 낮은 수치였다. 2006년 수출 3천억 달러, 2007년 2만 달러선을 각각 돌파했다.

참여정부(2003년 ~ 2008년) 들어 웰빙 열풍이 나타나는 등 체감경기는 2010년대보다는 상대적으로 나았다는 평가가 있으나, 단순히 단어 하나로 시대상을 평가하기에는 무리다. 경제 문제는 정권 이양을 야기시킨 주요 요인이었기 때문이다. 서구식 신자유주의적 경제 질서의 도입으로 인해 IMF 사태 이전에 비해 빈익빈 부익부, 양극화 문제가 심화되어 OECD 1위 수준의 높은 자살률 문제 등이 이때부터 시작되었으며, 카드대란으로 인해 신용불량자도 급증했다. 노무현 정부 들어선 종합부동산세 같은 경제 포퓰리즘이 강남 부유층들을 압박하는 데 치중해 정작 서민들과 젊은이들은 불경기와 취업난 등으로 고통받았다. 임기 말인 2007년에는 진보세력의 반대 속에서 한미 FTA 체결을 강행해 해외 경제 의존을 벗어나지 못한 현실적 한계도 지녔다.

코스피 2000 시대에서 보듯이, 급격한 체질개선으로 중견 규모 이상의 기업은 크게 약진했다. 그 아래 종사자들도 경제적 과실을 그대로 누렸다. 경제적으로 아쉬울 것 없던 당시의 20~30대 화이트칼라들이 훗날 민주당과 친노의 제일 큰 지지기반이 된다. 그러나 그 외의 국민들은 경제 성장을 체감할 수 없었고, 노무현 정부에게 등을 돌리는 계기 중 하나가 된다. 당시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보수적인 언론사들도 이 점을 이용해 정권 비판을 강화했다. 현 시점과 비교하면 괜찮았지만 당시에는 아니었다.

2000년대에는 세대 갈등이 심각했다. 지금 역시 중장년층이 젊은층에게 꼰대 소리를 듣지만, 한국 최초로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자라난 세대였던 당시의 20~30대[13] 사원들과 군사독재권위주의를 직격으로 겪던 당시 50대 이상 연령대의 세대 차이는 지금과 비교할 수가 없을 정도로 극심했다.

또 김대중과 노무현 시대를 거치며 재벌은 정부와의 관계에서 균형을 깨고 정부를 움직일 정도로 힘이 더 세졌다. 이때를 빛낸 정치인 김근태는 이를 두고 ''패자부활전 없는 사회를 만들었다"고 한탄하기도 하였다. 이미 외환위기 이후부터 구조조정에 따른 대량 해고로 비정규직이 문제가 폭증하자 2001년 7월 정부는 노사정위원회 산하에 비정규직근로자대책특별위원회를 설치 후 기간/파견제, 단시간/특수형태 근로 등을 다룰 분과위원회를 만들고, 2002년 5월 근로감독 강화, 사회보험 적용 확대 등을 담은 비정규 대책에 관한 합의문을 발표했다. 2006년 11월에는 2년차 이상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와 무기근로계약 등을 골자로 한 '기간제 및 단시간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등 일명 '비정규직 3법'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노력으로도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긴 역부족이었다. 비정규직보호법조차도 비정규직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파견제, 기간제 고용형태를 사실상 법적으로 보장했기에 '비정규직 양산법'이란 비판을 받았고, 2001년 기준 990만명이던 정규직들은 2006년까지 별로 증가하진 않았지만 오히려 비정규직은 2001년 기준 364만명에서 5년 후 500만명을 초월했다. 비정규직의 월평균 임금은 정규직의 62.8%고 사회보험 수혜인원비율도 40%밖에 안 돼 오히려 고용불안은 더해갔다. 이는 소득불평등에 따른 사회 양극화를 더욱 고착화시켜 2001~2002년 기준 11.8%밖에 안 된 도시 노동자 빈곤층이 2003년 12.0%, 2005년 13.8%로 각각 늘었고, 상류층은 2003년 22.7%에서 2005년 21%, 중산층은 2003년 52.4%에서 2005년 51.2%로 떨어졌다. 반면 중하층은 2003년 12.9%에서 2005년 13.2%로 각각 늘었다. 특히 최상위 1% 소득 집중 속도는 더더욱 높아져 기업소득과 가계소득 격차의 확대가 더 두드러졌다.

구조조정 바람 때문에 노동운동도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여전히 강성을 띠었으나 회사와 정부는 가차없이 강경 대응했다. 김대중 정부는 2000년 롯데호텔 및 사회보험노조 파업, 2001년 대우자동차 총파업과 화섬3사 총파업 등을 공권력으로 짓눌러 서민층과 노동자들 사이에서 비판을 받아 '인권 대통령'이란 타이틀에 먹칠을 했고, 후임 노무현과 이명박 정부도 2003년 화물연대 및 현대자동차 파업, 2006년 포항건설노조 파업, 2007년 이랜드 총파업, 2009년 쌍용자동차 파업 등을 공권력으로 탄압했다. 이에 따라 구속 노동자 수도 더욱 증가해 DJ정권 5년 동안 총 892명, 참여정부 동안 총 1,052명 등으로 각각 늘어났는데, 특히 참여정부 때는 비정규직이 구속 노동자의 절반 이상이었다. 또 이 시기 동안 배달호, 김주익, 이용석 등과 같이 죽음으로 저항한 노동자들이 나오기도 했다.

출산율의 경우 현재까지 이어지는 인구절벽 문제가 본격화된 시대인데, 당시 2000년에는 밀레니엄 베이비 붐이 있어서 전년대비 출산율이 1.48명으로 소폭 증가해 90년대 후반의 1.4명대의 출산율, 60만명대의 출생아 수가 그대로 유지되었으나, 2001년에는 유일하게 출산율 1.31명, 출생아 수 50만 명대로 감소하더니[14] 불과 1년 후인 2002년부터는 출산율이 1.3명 아래인 1.18명으로 떨어지기 시작해 초저출산 시대에 진입하고, 출생아 수 또한 1970년 통계 작성이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절반 아래인 40만 명대로 떨어졌다. 따라서 초저출산이 시작된 이 때부터 2020년대에도 문제되고 있는 대한민국의 저출산 문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연대라고 할 수 있다.

3.1.1. 기후

2000년대의 경우 대한민국 기후는 지구 온난화로 매우 온화해졌으나 반짝 한파가 찾아오기도 했다. 또 여름에 비가 많았던 것이 특징이며 그로 인해 일조시간도 적은 해가 많았다. 2000~2003년, 2007년의 경우 일조량이 부족했으며 7월을 중심으로 매우 흐렸다.[15] 또한 이 영향으로 7월은 대체로 시원한 편이었다. 23~24도대를 기록한 7월이 대다수인 편. 게다가 2003년 같이 강수량이 매우 많은 해도 있으며 한국에 상당한 피해를 태풍도 많이 왔다. 그리고 2000년대의 특징이 2월의 이상 고온이 타 연대에 비해 심했다는 것이다.[16] 또한 5월의 온난화가 심해지면서 5월이 여름이라는 인식이 강해지기 시작했다.

3.2. 기타 국가

전 세계적으로 '자본주의 3.0'의 황혼과 쇠퇴기로 여겨지는 시대이기도 하다. 밀레니엄을 맞이했다는 기대감과 함께 IT 버블 붕괴로 전 세계적으로 주가가 대폭락하는 공포감도 생성되는 등 전 세계인들은 기대 반 우려 반으로 2000년을 보냈고, 당시까지만 해도 1990년대의 영향으로 호황 덕에 주가와 부동산 가격이 대폭 올라 주식을 사려는 사람들이 뉴욕 월스트리트를 메우는가 하면, 월스트리트 증권가 직원들은 두둑한 연봉과 보너스를 받으며 미국인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어 신자유주의는 절정에 달했다.

하지만 그 이듬해인 2001년9.11 테러가 터지면서 세계 질서의 중대한 변화를 예고했다. 부시 행정부는 동년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2003년 이라크 전쟁 등을 오랫동안 치르느라 막대한 국가 재정을 쏟아부어 부족한 돈을 끌어 써서 재정 적자가 심화되는가 하면, 한국과 중국 등 아시아 경제가 발전하면서 무역적자까지 혹처럼 달고 지냈다. 이렇게 경기가 악화되다 보니 주가와 부동산 가격이 팍팍 떨어져 회생 불능자가 늘어났고, 2007년 뉴센추리파이낸셜 파산으로 신호탄을 쏘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터지고, 2008년 9월 15일 리먼브라더스 파산으로 인해 대침체가 야기됐다. 이로 인해 AIG, 제너럴 모터스, 씨티그룹 등도 직격탄을 맞아 국가의 구제금융을 받아 근근이 버텼다.[17]
(2000~2009)브릭스G7의 명목 GDP 흐름[18]2000년2001년2002년2003년2004년2005년2006년2007년2008년2009년
단위: 10억달러(약 1조원)
미국 전체 명목 GDP: G7 10,284 10,621 10,977 11,510 12,274 13,093 13,855 14,477 14,718 14,418
중국 전체 명목 GDP: 브릭스 1,192 1,317 1,455 1,650 1,944 2,287 2,793 3,504 4,547 5,105
일본 전체 명목 GDP: G7 4,731 4,159 3,980 4,302 4,655 4,571 4,356 4,356 4,849 5,035
독일 전체 명목 GDP: G7 1,891 1,882 2,013 2,428 2,729 2,771 2,905 3,328 3,640 3,306
프랑스 전체 명목 GDP: G7 1,372 1,383 1,505 1,851 2,126 2,207 2,327 2,666 2,937 2,700
영국 전체 명목 GDP: G7 1,496 1,485 1,623 1,877 2,221 2,324 2,486 2,858 2,709 2,217
이탈리아 전체 명목 GDP: G7 1,107 1,124 1,229 1,517 1,73 1,789 1,874 2,130 2,318 2,116
브라질 전체 명목 GDP: 브릭스 644 554 506 552 663 882 1,089 1,366 1,653 1,622
캐나다 전체 명목 GDP: G7 739 732 752 887 1,018 1,164 1,310 1,457 1,542 1,370
인도 전체 명목 GDP: 브릭스 476 493 523 618 721 834 949 1,238 1,223 1,365
러시아 전체 명목 GDP: 브릭스 259 306. 345 430 591 763 989 1,299 1,660 1,222
대한민국 전체 명목 GDP 561 533 609 680 764 898 1,011 1,122 1,002 901

같은 시기 브릭스(BRICs: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라 불리는 4개 국가들이 크게 약진하며 미래의 강국으로 부상했고, 특히 2001년 이후 중국의 급격한 성장은 불과 8년만에 4배의 성장을 기록하는데, 이 때 중국의 엄청난 성장과 함께 대한민국에는 엄청난 중국발 초미세먼지를 동반하게 되고 2010년대 이후 해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2000년부터 유로화를 도입한 유럽연합도 이 시기에 크게 팽창했다가 2008년 말부터 시작된 금융위기에 가장 직격탄을 맞아 그 후 유로화 사태를 초래해 경제성장이 크게 위축이 되는 다음의 10년기를 맞이하게 된다. 한국은 이 시기부터 경제성장률이 조금씩 떨어지면서 신흥공업국이었던 70~80년대처럼 10년 단위로 수배씩 경제규모가 커지던 고도성장시대의 종말을 고했으며 1990년대부터 시작된 인터넷, 핸드폰 등의 IT가 본격적으로 한국인들의 생활에 차츰 자리잡기 시작했다. 핸드폰의 경우 스마트폰이 대중화되기 이전 시기로서 오늘날 피처폰이라 불리는 형태의 폴더폰, 슬라이드폰 등이 주로 사용되었는데 스마트 기기가 득세한 2010년대와는 구별되는 2000년대 고유의 풍경 중 하나다.

4. 문화

한국 영화계에서는 전 분야의 걸쳐 발전을 이뤄냈으며 지금도 화자되는 살인의 추억, 올드보이 등의 명작들이 탄생했으며 게임계는 넥슨, 엔씨, 넷마블, 한게임 등, 음악계는 JYP, YG, SM엔터테인먼트 같은 대형 대중문화 기업들도 생겨났다.[19]

출판만화는 정부의 철퇴와 스캔본 등의 문제로 몰락했지만, 대신 그 인력들이 아동서적으로 흘러들어가 <Why? 시리즈>,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 같은 걸출한 결과물이 나오기도 했다. 또한 2010년대 초반에는 웹툰이라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등 여러 분야에서 진일보가 있었다. 덕분에 그 시기에 유치원생이랑 학생 신분에 속했던 세대라면 세계 유소년처럼 풍부한 문화생활을 즐기며 성장할 수 있었다.

1992년에 세계 최초의 스마트폰이 출시되었고, 1999년에 인터넷폰과 PDA가 출시되었으며, 2002년에는 블랙베리 등 여러 회사에서 스마트폰이 출시되었다가 2007년에는 스마트폰의 개념을 새로이 정립한 현대와 동일한 류의 스마트폰이 등장하긴 했지만 이들이 한국 사회에 보급되고 널리 사용하여 문화적, 시대적 풍경이 뒤바뀐 것은 이 다음 시대인 2010년대 초반이다.[20]

인터넷이 널리 보급됐지만 스마트폰으로 대표되는 모바일과 스마트 문화가 없었던 시기가 바로 이 시기인 2000년대인데, 이는 흔히 '아날로그'의 정수로 평가받는 1980년대1990년대와도, 스마트폰이 보급되어 완전한 디지털 세상이 정립되어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고 평가되는 2010년대와도 차별화된, 특유의 2000년대만의 고유의 감성을 낳았다고 볼 수 있다.[21]

4.1. 교육

4.1.1. 서울과 경기도의 중학교 혼성반 의무화

서울경기도 소재의 남녀공학중학교들이 이때부터 모두 혼성반 학교로 고정되었다. 학교의 연혁과 전통 상관없이 공립학교라면 전부 남녀 합반으로 변경되었다. 이때부터 남중여중은 있어도 남녀분반 중학교는 없게 되었다는 뜻이다.

서울과 경기도 교육청은 청소년기에 남녀가 같은 교실안에서 생활하면서 이성에 대해 알아가는 걸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그렇기에 고등학교 정도는 면학 분위기 조성을 위해 별 수 없이 남녀분반을 해도, 중학교 하나만큼은 무조건 모든 학급을 합반으로 운영하자는 게 서울과 경기도교육청의 지침이었다.

1990년대까지는 서울과 경기도가 중학교 남녀합반을 실험적으로 적용했다. 2000년대처럼 3년 내내 합반으로 운영은 안했고, 일부 학년만 하나씩 운영했다. 한창 사춘기중학생들이 같은 교실에서 생활하면 면학분위기가 저하될까봐 많은 학부모들이 우려했지만, 오히려 공부가 더 잘 되었고 같은 성별끼리 있을 때 막 나가는 행위를 막을 수 있었다.

다만 사립학교들은 22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남녀 분반으로 운영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충암중학교는 사립학교이기 때문에 남녀 각반이었다. 교육청의 간섭을 받는 학교는 사립학교가 아닌 공립학교이니 당연한 결과다. 그러나 사립 중학교라고 해서 다 분반도 아니다. 2022년까지 서울에서 남녀 각반으로 운영되는 중학교는 충암중학교중대부중으로, 단 두 곳만이 확인되었으나, 2023년부터 충암중도 남녀 합반으로 전환되었다. 나머지는 사립 중학교여도 3년 내내 혼성반으로 운영된다.

그렇기에 이때 학교를 다닌 서울과 경기도 사람들은 고등학교는 몰라도 중학교만큼은 공립학교만 다녔다하면 3년 내내 합반 루트만 탄 경우가 수두룩하다. 이때부터 서울과 경기도 소재의 남녀공학 중학교들이 남녀 분반으로 운영되는 곳은 사립학교들이나 해당하지, 공립 중학교라면 남녀분반인 곳은 단 한 곳도 남지 않게 되었다.

4.2. TOEIC 등의 시험 유형 변경

4.3. 출판계

2000년 들어 가장 크게 불거진 문제는 바로 '도서정가제 문제'였다. 문화관광부가 9월 도서정가제 의무화를 담은 '출판 및 인쇄진흥법안'을 입법 예고하면서 논란이 시작됐다. 해당 제도의 핵심 문제는 '온라인 서점의 할인을 인정할 것인가, 막을 것인가'란 문제였는데, 논란 끝에 10%까지 허용하는 걸로 결론이 나 2003년 초부터 시행됐다. 당년 초부터 관심사로 떠오르기 시작한 e북이 7월부터 첫 선을 보였다. 예스24는 첫 e북 상품으로 이순원 소설작품 <모델>을 내놨고, 9월에 구효서의 <정벌>, 백민석의 <러셔>가 각각 이어서 나왔다. 이에 골드북닷컴은 이인화 소설 <려인>을, 에버북닷컴은 이문열의 소설 <하늘길>을 각각 e북으로 내놨다. 동년도 최대 베스트셀러는 1~3위를 석권한 <해리포터> 시리즈였으며,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시리즈, <가시고기>, <영어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 <국화꽃 향기>도 뒤이어 50만 부 이상을 기록해 베스트셀러 지위를 굳혔다.

2002년 출판계 화제는 바로 MBC <느낌표> 코너 '책, 책. 책, 책을 읽읍시다'란 코너였는데, 해당 프로에 소개된 <괭이부리말 아이들>, <봉순이 언니>,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등 대다수가 밀리언셀러 지위를 얻었고, 타 도서들도 수십만 권씩 팔려 'TV 매체의 위력'을 선보였다. 느낌표 선정도서들이 상위권을 차지하자 출판계에선 이 프로그램을 두고 찬반 논쟁이 치열했으나, 국민적 도서 열풍을 조성하는 데 공헌했다. 그 외에도 KBS1 <TV, 책을 말하다>, MBC <행복한 책읽기> 등 책 소개 방송 프로그램의 확대, 일간신문의 북 섹션 안정화, 시민단체들의 독서운동 확대 등에 힘입어 출판시장이 오랜만에 활성화됐으나, 그 이면엔 출판사 간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화됐다. 게다가 같은 해 종로서적이 부도를 내 충격을 안겨 준 반면, 온라인 서점은 나날이 급성장했다. 이들은 할인 판매 등으로 정가제의 반사이익을 누리며 매출을 늘렸지만 대다수는 적자만 냈다.

2003년 들어서도 출판계는 여전히 불황에 시달렸다. 경기침체와 맞물리면서 출판시장 위축이 뚜렷이 드러나 전년도에 비해 5.1%로 줄었고, 분야별로는 아동 및 총류가 큰 감소세를 보였다. 거기에 논란이 됐던 도서정가제가 2월 27일부터 시행됐으나 마일리지 등 변형된 할인제가 성행했다. 당시 인기도서로는 '10억 만들기'나 '부자되기', '청년 창업' 등 재테크 관련 도서가 강세를 보였으며, 인터넷 소설 및 카툰 에세이 역시 인기를 끌어 귀여니의 <그놈은 멋있었다>나 <파페포포 메모리즈> 같은 게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다.

2004년 들어서 출판계에서 두드러진 걸로는 독자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는 추리소설이 인기를 끌었다는 점이다. 역사적 사실과 허구를 더한 '팩션' 류가 인기도서 목록 윗자리를 차지했는데, 이들 중 <다빈치코드>가 단연 돋보였으며 <천사와 악마>, <단테클럽>, <진주귀고리 수녀>, <4의 규칙> 등도 서점가를 휩쓸었다. 심지어 KBS 대하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열풍에 힘입어 김훈의 <칼의 노래>, 김태훈의 <이순신의 두 얼굴> 같은 소설들이 연속으로 나와 서점가에도 때 아닌 '이순신 열풍'이 불었다. 그 외에 땅 투자와 관련된 실용서들이 인기를 끌었고, 중국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중국 관련 책들도 나왔다. 2003년 11월에 나온 학습만화 <마법천자문>이 2백만 부나 팔려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인기를 이어 주었다.

2005년에는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주빈국 행사를 치르느라 바빴는데, 출판계 내부적으론 불황이 지속되는 가운데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화됐다. 대형서점의 등장과 온라인 서점의 할인경쟁으로 동네 중소 서점들이 고사 위기에 처했으며 출판사들도 대형 출판사들이 높은 가격을 제시해 해외 저작물들을 독점하다시피 하여 양극화가 가속화됐다. 이 시기 처세/취미/실용도서나 경제/경영서가 인기를 끈 반면, 인문/사회과학은 위축됐다. 이들 중 <살아 있는 동안 꼭 해야 할 49가지>가 100만 부 이상 출고되면서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고 <블루오션 전략>이 사회 전반에 신드롬을 일으키자 베스트를 기록했다.

2006년 들어서 유명인을 내세운 대리번역 논쟁이 안팎의 관심을 끌었다. 이밖에 인문학 교수들의 인문학 위기 선언에 이은 출판사 대표들의 인문서적 위기 선언, 동화서적 폐업 중단, 그린비의 공개 리콜 실시 등도 주요 관심사로 떠올랐다. 당시 출간도서 중엔 <행복>, <행복한 이기주의자> 등 '행복'을 주제로 한 책들이 많이 나와 인기를 끌었고, 성공 우화의 경제학, 20대 여성의 자기계발서/자녀교육서, 논술서, 글쓰기 방법을 제시한 책이 주목받았다.

2007년 출판계는 제도적 차원에서 큰 변화를 맞이했다. 저작권 보호기간 연장과 도서정가제 유지 등으로 관련법이 개정되었고, 다양성을 추구하는 시대적 경향에 따라 경제경영서가 강세를 보이는 중에도 더 폭이 넓어졌다. 예컨대 스티븐 핑커의 <마음은 어떻게 움직이는가>라던가 토마스 윌리스의 <영혼의 해부> 등 뇌와 마음에서 일어나는 작용에 관심을 갖는 책들이 주목받았고, 마이클 더다의 <오픈 북>, 니콜 하워드의 <책, 문명과 지식의 진화사> 등 책 자체에 화두를 던진 책도 마찬가지였다. 그 외에 고령화사회를 대비한 노년 대비 지침서, 시니어 마케팅을 다룬 책, 불신의 시대에 자꾸 의심해보라는 메시지를 던져보라는 회의주의적 시각을 강조한 책, 자기계발서 <시크릿>처럼 행복을 넘어 현명성을 추구하는 책 등이 인기를 끌었다.

2008년 상반기 들어 촛불시위로 광우병이 이슈화되면서 관련 서적들의 매상이 올라갔고, 세계금융위기의 여파로 수많은 출판사들이 구조조정을 하거나 문을 닫았으며 인터넷서점 매출도 30~40%에서 10%로 하락했다. 게다가 국방부 불온도서 선정으로 표현의 자유 문제도 크게 제기되었다. 서적들 중 자기계발서와 재테크 책 매출이 하락한 대신 경제위기 관련 서적 매출이 올라갔다.

2009년 들어서 김대중, 노무현, 김수환 등 유명인들의 사망으로 서점가에까지 추모 분위기가 퍼져 <바보가 바보들에게>, <동행>, <후불제 민주주의> 등이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빅뱅의 <세상에 너를 소리쳐>나 구혜선의 <탱고> 등 연예인들이 쓴 에세이가 인기를 끌기도 했다. 아동도서는 일제고사와 신종플루 등으로 매상이 줄어들었으나 예림당 학습만화 <Why?> 시리즈가 2천만 부를 돌파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심지어 서구권에서 유행한 전자책 상용 서비스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져 삼성전자와 아이리버 등이 전자책 단말기를 출시했고, 교보문고 같은 인터넷 서점들도 전자책 서비스를 위한 부서를 만들기도 했다. 또 대형서점들과 출판사들이 합작해 '한국이퍼브'를 세우기도 했다.

4.4. 문학

2000년 들어서도 한국 문학은 IMF의 그늘에서 못 벗어났고, 인터넷의 확산과 더불어 문자매체의 위기감을 실감케 했다. 출판시장에서 문학이 차지하는 비중이 5%도 안 될 정도로 문학의 비중은 양적으로도 두드러졌다. 이 와중에도 이문열의 <아가>, 최인호의 <상도>, 김원일의 <가족>, 이문구의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 등 중견작가들의 건재함이 돋보여졌고, 특히 조선 후기 거상 임상옥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상도>는 출간 석달 만에 50만 부가 팔려 드라마화까지 성사해내 대중적으로 큰 성공을 거뒀다.

반면 순수문학 쪽은 침체를 면치 못했다. 이문열이나 신경숙, 황석영 책이 10만 권을 넘었을 뿐 다른 작가들은 1만 권을 넘기 힘들었다. 대신 <해리포터> 시리즈와 <가시고기>, <국화꽃 향기> 등 대중소설들이 인기를 구가했다. 이 시기 '문학권력 논쟁'도 이슈가 되었는데, 근원은 일부 문학동인과 출판사에 의한 파벌주의에 대한 비판이었다. 특히 <조선일보>가 주최한 '동인문학상' 논쟁은 문학권력 논쟁을 더욱 가열시키는 역할을 했으며, 황석영 작가가 그의 작품 <오래된 정원> 후보 등재를 거부해 파문이 확산됐다. 다만 이문구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이 이 상을 받으면서 논란은 정점에 달했다. 한편 신예 평론가 이명원은 김윤식 서울대 교수가 쓴 평론문이 일본의 가라타니 고진 평론문과 유사하다고 비판을 제기해 표절 문제가 불거졌다. 이러한 문제는 한국 대학사회에 고착된 가부장적 도제 시스템에 대한 비판까지 확장됐다.

2001년 들어 황석영이나 김원일 등 중견 작가들이 원숙미로 건재를 과시했는데, <손님>, <슬픈 시간의 기억>이 그 예였다. 30대 작가 김연수와 김운하도 치밀한 고증력과 형식파괴 실험으로 <굳빠이 이상>과 <137개의 미로 카드>를 각각 내 주목을 받았고, 오수연 연작 장편 <부엌>도 한국일보 문학상을 받아 주목을 받았다. 시에선 대산문학상을 받은 이성부(지리산), 동서문학상의 허수경(내 영혼은 너무 오래 되었으니),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수상자 나희덕(어두워진다는 것), 김수영문학상의 이정록(제비꽃 여인숙) 등이 호평받았다.

문학권력 논쟁은 전년도에 이어 더욱 가열되어 문학평론가 권성우의 <창작과비평>에 대한 상업주의 비판, 그리고 <문학동네> 편집위원 남진우 시인의 권성우 비판으로 격렬히 진행됐다. 이명원은 권성우와 함께 <사회비평> 가을호에서 <창작과비평>에 대해 진보 권위주의, 진보 상업주의, 기회주의에 매몰되어 있다며 혁신을 촉구했다. 이러한 비판은 그동안 쉬쉬하던 진보 문학계의 '문학권력화' 논란이 수면 위에 오른 것임을 의미하며, 더 이상 비판에서 예외가 없음을 보여준 일대 사건이다.

인터넷과 디지털 영상 등 대중매체 확산으로 문학에도 대중화가 가속도를 더해 류시화의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같은 감성적인 소녀풍의 시들이 인기를 얻으며 정통 시집들을 밀어냈다. 다만 김춘수, 고은, 신경림, 마종기, 도종환, 김지하, 강은교 등 중견 및 원로 시인들이 여전히 창작을 계속했는데, 특히 신경림은 시집 <뿔>을, 고은은 전집 38권을 각각 냈으며 김지하도 <화개>로 만해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대산문학상을 잇따라 수상해 뒤늦게나마 문단으로부터 대우받았다. <화개>는 미발표작 100여 편 모음집으로 "이념이나 사상보단 병고를 거친 반독재 투쟁가의 외로운 내면을 서정적으로 드러냈다"는 평을 받았다.

소설계에선 1990년대를 주도했던 여성작가들이 위축된 반면, 중진작가들의 활동이 상대적으로 두드러졌다. 김주영은 <홍어>에 이어 <멸치>를 내놓아 김동리문학상을 받았고, 한승원 작가도 고향 전남 장흥 해안가를 소재로 한 <물보라>를 내놓았으며, 딸 한강과 함께 어른을 위한 동화 <우주 색칠하기>와 <물보라>를 각각 내놓아 주목을 받았다. 박상륭 작가도 캐나다 이민생활을 접고 귀국해 <잠의 열매를 매단 나무는 뿌리로 꿈을 꾼다>로 특유의 형이상학적 세계를 선보였으며 박영한 작가도 자신의 가족사를 토대로 한 소설 <카르바>를 내놨다. 이 외에 김원우는 <객수산록>으로 대산문학상을, 김원일은 중편 <손풍금>으로 황순원문학상을 각각 수상해 저력을 보여줬다. 또 2002년경에는 조세희 소설집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150쇄를 기록해 화제를 모았다.

당대 신예 작가 중 권지예가 <꿈꾸는 마리오네뜨>로, 전혜성이 연극적 요소를 도입한 장편소설 <트루스의 젖가슴>으로 각각 주목을 받았다. 또 198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희곡부문 당선자로 2001년 <세계의 문학>에 단편소설을 내 데뷔한 정미경 작가도 장편 <장밋빛 인생>으로 '오늘의 작가상'을 받아 스타 반열에 들었다. 또 성석제는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로 동인문학상을, 은희경은 소설집 <상록> 수록작품 '누가 꽃피는 리기다소나무 숲에 덫을 놓았을까'로 한국일보 문학상을 각각 냈다. 김하기도 출소 이래 오래간만에 <복사꽃 그 자리>를 냈고, 하성란, 조경란, 이혜경 등이 소설집을 냈다.

2002년 시공사 계간잡지 <문학인>은 한국문예창작회와 공동으로 '20세기 한국문학사 10대 사건 및 100대 소설' 선정을 겨울호에 발표해 논란을 일으켰다. 이 설문조사는 지난 한국 문학사 100년 간 특기할 만한 문학적 사건과 소설작품을 선정키 위해 대학 국문학과 및 문창과 교수, 문학평론가 등 관계자 109명을 대상으로 진행했으며, 조사 결과 작가 중 1등은 황석영이고, 최고 문제작은 조세희의 <난쏘공>이었다.

2003년 신진 여성작가 정이현의 데뷔작 <낭만적 사랑과 사회>가 개인주의적 글쓰기를 뛰어넘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줬고, 그 외엔 김영하의 <검은 꽃>, 박만규 데뷔작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 각각 주목을 받았다. 또 이청준, 송기숙, 박상륭, 윤흥길, 이경자, 최윤 등 중견 작가들도 건재를 과시했다. 젊은 작가들 중에는 <무서운 밤>의 임영태, <이발소에 두고 온 시>의 김형수, <토란>의 이현수, <새는>의 박현욱, <누가 커트 코베인을 죽였는가>의 김경욱 등이 대표적이었고, 시에서는 정현종, 이성복, 김광규 등 중견들이 시집을 내기도 했다. 또 시인 겸 작사가 조명암과 이찬 등 월북 문인들의 시집이 나오면서 그동안 묻혀왔던 월북 문인들의 작품세계가 재조명되기도 했다. 같은 해 이라크 전쟁이 터지자 민족문학작가회의 등 재야 문인단체들은 미국의 이라크 침공과 한국군 파병을 반대하는 성명서를 내고 가두행진 등을 통해 반전 여론을 설파했으며, 특히 시인 오수연과 박노해가 전쟁터까지 직접 나서 현장소식을 전했다.

2004년 들어 김영하는 동인문학상-황순원문학상-이산문학상 트레블을 달성해 문단계에 폭풍을 불어일으켰으며, <오빠가 돌아왔다>나 <보물선> 등의 단편을 내 문단에 활기를 불어넣았다. 50대 중반 들어 문단에 늦게 데뷔한 김훈도 <칼의 노래>, <현의 노래> 등을 내 신선함을 선사했다. 또 창비가 주관한 제19회 만해문학상에서 북한 작가 홍석중[22]의 장편 <황진이>가 처음 수상작으로 선출됐는데, 이는 남북교류가 활성화된 데 따른 상징적 사건으로 역사에 기록됐다. 창비 측은 금강산에서 상금 1천만 원을 수상자에게 직접 전달했고, 해당 소설은 남한에서 편집되어 2권으로 나왔다.

소설계에선 박완서, 이청준, 김원일 등 중견작가들이 활발히 활동했는데, 특히 박완서 작품 <그 여자네 집>이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으며 정도상도 연작소설 <실상사>를 냈다. 정찬은 서구 종교와 신화를 파고든 <빌라도와 예수>를, 임철우도 <봄날> 이후 6년 만에 근현대사 100년의 아픔을 함축한 <백년여관>을 각각 냈다. 시에서도 김지하가 9번째 시집 <유목과 은둔>을 낸 걸 비롯해 신달자, 문정희, 정호승, 백무산 등이 여전히 시집을 냈다.

2005년 7월 20일부터 5일간 북한 평양, 백두산, 묘향산을 오가며 '6.15 남북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민족작가대회(남북작가대회)'가 개최됐다. 이 대회는 2004년에 열릴 예정이었으나 정치상황이 경색돼 무기한 연기됐다가 이때 열린 것이다. 행사 기간에 남측의 고은, 황석영, 백낙청 등 10여명이 북한 작가 오영재, 홍석중 등과 백두산 천지에서 해맞이를 하며 민족 문학과 통일을 기원했다. 같은 해 김별아가 역사소설 <미실>로 제1회 세계문학상을 받았고, 김원일이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다룬 소설 <푸른 혼>을 지어 만해문학상을 받았다. 또 조세희의 <난쏘공>이 출간 27년만에 200쇄를 돌파했고, 성석제, 공지영, 윤대녕, 이승우 등 중견작가들이 여전히 활동했다.

시에선 전통적 서정성이 강세를 이뤘는데, 문태준이 <누가 울고 간다>로 미당문학상을 받았으며 강화도에 거주하는 함민복도 <말랑말랑한 힘>으로 박용래문학상과 김수영문학상을 받았다. 장석남도 5번째 시집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를, 박형준 역시 4번째 시집 <춤>을 각각 냈다. 여러 문인들과 출판사들도 침체된 문학을 살리기 위해 재정지원을 받았는데,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복권기금 52억 2천만 원을 확보해 문학회생프로그램을 가동해 우수문학도서 구입과 배포에 42억, 문예지 게재 우수작품 원고료 지원에 3억 2천만, 우수문예지 구입과 배포에 6억원을 각각 지원했다.

2006년엔 '주제의 무거움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파격적인 작품들이 연속으로 나왔다. 특히 박민규의 <핑퐁>은 왕따 중학생들이 핑퐁으로 인류의 미래를 결정짓는 얘기이며, 김종광의 <낙서문학사>는 한국 문학계 자체를 표적으로 삼았다. 조정래도 비전향 장기수 노인들을 소재로 다룬 <인간연습>을, 최인호도 가야사를 복원한 <제4의 제국>을, 복거일도 지식인의 고뇌를 담은 <보이지 않는 손>을 각각 냈다. 같은 시기 공지영의 눈부신 활약도 부각됐는데, 사형수의 이야기를 다룬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우행시)>, 산문집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가 각각 베스트셀러 반열에 들었다. 특히 <우행시>는 영화로도 나올 정도로 좋은 흥행성적을 기록했다.

북한 핵실험 여파에도 남북한 문인교류는 지속되어 '6.15 민족문학인협회'가 공식 출범됐으며, 고은 시인은 2005년 및 2006년에 각각 노벨문학상 후보로 오르기도 했다. 그는 연작시집 <만인보> 21~23권과 <부끄러움 가득>을 각각 내 건재를 과시했다. 2007년 11월 8일부터 7일 간 전북 전주에서 '아시아-아프리카 문학 페스티벌(AAIF)'을 개최해 한국 문학의 위상을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떨쳤고, 한중작가회의, 한중문학인대회 등으로 중국 문인들과의 교류도 활성화됐다.

2007년은 역사소설이 다시 인기를 구가한 해이기도 한데, 김훈의 <남한산성>을 비롯해 신경숙의 <리진>, 김별아의 <논개>, 이정명의 <바람의 화원>, 김탁환의 <열하광인> 등이 대표적이고, 박완서 소설집 <친절한 복희씨>, 황석영의 <바리데기>, 공지영의 <즐거운 나의 집>이 각각 인기를 끌었다. 같은 해에는 한국 최초의 현대시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나온 지 100주년을 맞는 터라 전국 곳곳에서 다채로운 행사가 열렸고, 민족문학작가회의도 세계화 등 시대변화에 발맞추어 '한국작가회의'로 단체명을 변경했다.

2008년 문학계에선 박경리 작가 타계라는 슬픈 소식이 있었으나, '인터넷 연재소설'과 '청소년 문학'이 큰 주목을 받은 기쁜 때이기도 하다. 대표적으로 김려령의 <완득이>, 배유안의 <스프링벅>, 김해원의 <열일곱 살의 털>, 전아리의 <직녀의 일기장> 등이 대표적이다. 청소년 소설 역시 각광을 받아 사계절의 '1318 문고', 창비의 '창비 청소년 문학'에 이어 문학동네도 '원더북스', 문학과지성사도 '푸른문학' 등을 각각 신설했으며, 작품 중에는 황석영의 <개밥바라기 별>이 큰 주목을 받았다. 이외수 작가도 문학 외에 방송, TV광고 등에 출연해 '라이터테이너'로 각광받았으며, 에픽하이 멤버 타블로가 쓴 소설 <당신들의 조각들>이 히트쳐 기성 문인들에 맞섰다. 무명작가 인아 역시 2년 전에 낸 <아내가 결혼했다>의 영화화로 단숨에 스타 작가가 되기도 했다.

2009년에는 신경숙 장편소설 <엄마를 부탁해>가 발매 10개월 만에 100만부를 돌파해 '엄마 신드롬'을 불러일으켰고, 인터넷 소설의 강세도 여전해 공지영의 <도가니>, 김훈의 <공무도하>, 정이현의 <너는 모른다>, 공선옥의 <내가 가장 예뻤을 때>가 히트를 쳤으며, 용산 참사와 노무현 대통령의 자살 등 정치/사회적 이슈로 문학인들의 사회참여도 두드러졌다. 그해 11월 서울 연희동 시사편찬위원회 건물에 '연희문화창작촌'이 개설돼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시의 경우 서정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움직임이 활발했다. 기존 시의 문법을 파괴하거나 탈피한 시인들이 소위 미래파라 불리며 크게 이름을 떨쳤는데, 이에 해당하는 시인들은 황병승, 김경주, 이장욱, 장석원 등이었다. 사실상 한국 현대시의 문을 열었다고 불리는 시인들.

4.5. 음악

음악적으로는 이 시기에 잠시 포스트 펑크 리바이벌포스트록의 열풍이 불었으나 1990년대의 그런지브릿팝 등의 영향력에는 미치지 못했으며, 2000년대 후반 이후로는 그야말로 하나의 정형화된 음악적인 흐름이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 이는 다시 말하면 다른 어느 때보다도 다양한 음악들이 나타나는 시기였다고 할 수도 있다. 이 무렵부터 인디 음악이 인터넷과 기술의 발전으로 크게 성장하기 시작하여 아케이드 파이어애니멀 콜렉티브 같은 거대 그룹들도 등장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 흥행한 뮤지션들은 오히려 1990년대에 음악적 기반을 둔 콜드플레이 같은 포스트 브릿팝 그룹들이었다.

2000년대에는 이모셔널을 섞은 뉴메탈얼터너티브 메탈, 포스트 그런지의 전성기였다. 락 씬 전체적으로, 멜로디컬하거나 리드미컬하면서 '리릭'에 방점을 많이 둔 대중적 뉴메탈얼터너티브 메탈포스트 그런지 록 음악들이 인기를 끌던 시절이었다. 당시의 락 차트들과 락 판매량들과 락 콘서트들과 락 페스티벌들은 주로 린킨 파크, 파파로치, 푸 파이터스같은 밴드들이 휩쓸었다. 또한 미국의 포스트 그런지는 상업적인 측면에서 원류인 1990년대의 그런지/얼터너티브 록에 비해 큰 성공을 거뒀다. Creed - With Arms Wide Open, Vertical Horizon - Everything You Want, Nickelback - How You Remind Me 등이 빌보드 Hot 100에서 1위에 오르는가 하면, Lifehouse - Hanging By A Moment가 빌보드 연말 차트 1위를 차지하는 등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그리고 록음악은 2000년대 최후전성기를 마지막으로 그 힘을 다하게 된다.

브리트니 스피어스가 최고의 아이돌로서 2000년대 초반을 휩쓸었다. 그녀의 라이벌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역시도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아메리칸 아이돌 초대 우승자인 켈리 클락슨은 2000년대 중반을 완전히 휩쓸며 메가히트곡들을 배출해냈다. 또한 혜성처럼 나타난 에이브릴 라빈은 독보적인 컨셉으로 2000년대 초중반 신드롬을 일으켰고 이미지 변신 후에도 큰 인기를 얻으며 2000년대 틴팝계를 지배했다.

다만 이 무렵부터 대중음악의 주류는 락을 중심으로 한 백인음악에서 흑인음악으로 서서히 넘어가게 되었다. 솔로데뷔를 한 비욘세는 말그대로 '아이콘'이 되었으며 1990년대를 휩쓸었던 팝의 여왕 머라이어 캐리는 2000년대 초반 암흑기를 겪은 후 힙합과 R&B를 적극적으로 결합시켜 다시 정상의 자리에 올랐고 전성기 시절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다. 1990년대에 황금기를 맞이한 힙합은 여전히 메인스트림에 건재했으며 빌보드를 지배했다. 이 시기에 성공한 대표적인 아티스트로는 JAY-Z, 카녜 웨스트, 에미넴, 아웃캐스트 등이 있다. 또한 장르에 있어서도 2000년대 후반에 들어서 기존의 올드 스쿨, 붐뱁 장르가 아닌 사우스 힙합을 기반으로 한 트랩뮤직이 등장하기 시작한 시대이다. R&B 장르의 성장 역시 두드러져 앨리샤 키스에이미 와인하우스와 같이 소울에 기반을 둔 여성 싱어송라이터들이 성공을 거두기 시작하였다.

또한 산타나, 리키 마틴, 엔리케 이글레시아스, 제니퍼 로페즈, 마크 앤소니, 샤키라 등의 라틴팝이 메인스트림에서 인기를 얻기 시작한 시기도 2000년대 였다. 이후 라틴팝은 그 자체보다는 댄스음악이나 힙합에 적지않은 영향을 주기도 했다. 포스트 펑크 리바이벌로 시작된 옛 것을 가져다가 현대식으로 조합하는 복고 열풍은 현재까지도 장르를 가리지 않고 위세를 떨치고 있다.

2007년엔 세계 3대 테너 중 하나인 루치아노 파바로티, 2009년에 마이클 잭슨이 각각 사망하며 음악계에 큰 슬픔을 주기도 하였다.[23]

인터넷 문화와 컴퓨터 음악의 발달에 힘입어 인디와 메이저의 경계가 점차 희미해지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이 무렵부터는 방구석 인디 밴드라고 해도 자신들의 음악을 당시 흥했던 마이스페이스 등의 인터넷 매체를 통해 올리는 것으로 자신들을 알릴 수 있게 되었고, 이를 통해 인기를 얻는 경우도 생기게 되었다. 이러한 사례 중 가장 큰 성공을 거둔 것은 정말 엄청난 데뷔 시절 인기를 보여준 악틱 몽키즈. 또한 DAW나 신디사이저의 발전 등으로 개인이 음악을 쉽게 만들 수 있게 됨에 따라 여러 개성있는 소규모 그룹 혹은 원맨 밴드 등이 인디에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인디 신의 성장을 바탕으로 피치포크 미디어의 영향력이 커지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다만 인터넷이 발달함에 따라 1990년대에 정점을 찍었던 피지컬 앨범 시장이 급격히 축소되기 시작한다. 1990년대엔 간혹 나오던 3천만장 돌파앨범도 단 1개밖에 없었다. 다만, 천만장 이상 판매된 앨범들은 많이 있었다. 2000년대 후반엔 본격적으로 디지털 시장이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2010년대 초반의 디지털 시장 황금기의 기반이 다져진 시기이기도 하다.[24]

일본 대중음악(J팝)은 에이벡스 계열의 위세가 잠시 주춤한 사이, 2000년대 중반까지 J-힙합, J-레게 등의 음악이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 대표적으로 GReeeeN, FUNKY MONKEY BABYS, 케츠메이시 등의 아티스트들이 대중성을 바탕으로 장르의 지평을 넓혔다. 또 애니송계에선 JAM Project가 사실상 독주했다. 그러나 2000년대 에는 음반 시장의 쇠퇴, 그리고 새로운 아티스트의 부재로 인해 J팝 전반이 침체기를 맞았다.

4.5.1. 대한민국 음악

2000년 당시 대중음악의 아이콘은 조성모의 독주, 서태지 컴백, 일본 대중음악 3차 개방, 중국행 한류열풍 등이었다. 조성모가 9월에 낸 <아시나요>가 190만 장, 이에 앞선 리메이크 앨범 <가시나무>가 165만 장을 각각 기록해 독주해왔고, 4년여간 은둔해 온 '문화대통령' 서태지도 그해 8월 29일 철통같은 경비 속에서 귀국해 9월 초에 정규 6집을 냈다. 반면 <Sad Salsa>로 인기를 얻은 백지영의 비디오 사건으로 인터넷 사생활 침해 논란이 불거지기도 했다. 클론과 안재욱, NRG, H.O.T.도 전년도 홍콩 및 대만에 이어 중국에도 진출해 한류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2001년에는 음반판매의 부진으로 침체기를 보여줬는데, 기존 음반시장이 쇠퇴한 대신 mp3 등 디지털 음악시장이 더욱 활성화됐다. god, 조성모, 김건모, 브라운아이즈, 쿨, 왁스 등이 나름 활약했고, 장르 중에서 R&B가 약진했다. 그 와중에 MBC <시사매거진 2580>이 '연예계 노예계약' 파문을 보도하자 한국연예제작자협회 소속 회원들이 MBC 출연을 거부했고, 걸프렌드의 대리녹음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동안 성행하던 립싱크에도 메스가 가해져 MBC <생방송 음악캠프>가 올라이브 무대로 전환했으며 타 방송사 음악프로들도 라이브 비율을 늘렸다.

2002년 한 해 동안 국내 음반시장은 침체기였다. 홍보비 파문에 따른 검찰 수사와 소리바다 파장 등이 일면서 전체 음반시장 규모가 줄어버린 데다가, 전년도만 해도 밀리언셀러가 3개나 되었으나 당년도에는 쿨의 정규 7집이 65만장을 기록한 게 최고 기록이다. jtL, 코요태, 장나라, 보아, 성시경, 왁스, 윤도현, 신승훈, 이수영, S.E.S., 자우림 등이 40만장 이상을 기록했다. 다만 해외 음반시장에선 일본 시장을 노린 보아가 그해 3월 정규앨범을 처음 발매해 일본 음반판매 1위를 기록해 승전보를 울렸다. 반면 신화는 싱가포르, 조성우는 미국, 윤미래는 일본 등지에 각각 진출했다. 또한 중국 인민라디오방송(CNR)과 일본 스카이퍼펙 TV 등지에서 한국가요 전문 프로그램이 전파를 탈 정도로 한국 가요의 위상이 드높아졌다.

2003년에도 가요계는 여전히 불황이었다. 당시 음반시장에서 김건모 8집이 52만장으로 최고치였고, 그 뒤는 이수영 5집(42만 5천장), 조성모 5집(39만 8천장), 휘성 2집(36만 8천장)이 각각 뒤따랐다. 음반업계의 불황에 따라 온라인 음악사이트에 대한 저작권 관련 법적대응이 두드러졌는데, 법원의 판결은 음반업계에 유리했음에도 해결책은 없었다. 같은 시기 아이돌 멤버들의 솔로 전향과 연기자 전업이 전보다 더 두드러졌는데, S.E.S. 멤버 전원이 솔로로 전향하는가 하면 핑클, 신화 등지 멤버들도 개인활동을 했는데, 특히 이들 중에는 이효리가 신드롬을 일으키며 솔로로 우뚝 섰다. 발라드 가수 이수영이 앨범 2장으로 66만장을 팔아 개인 판매량 1위를 기록했으며, 보아도 한일 양국을 왕복하며 가교 역할을 했다. 또 김건모, 세븐, 조성모, 빅마마, 휘성 등도 최선을 다해 활약했다. '가왕' 조용필도 서울 잠실주경기장에서 데뷔 35주년 기념 콘서트를 열어 매진을 달성해 건재를 과시했다.

2004년에도 대중가요 음반 중 50만장을 기록한 게 하나도 없었다. 서태지 7집이 48만 2,066장으로 최고를 기록했고, 이수영의 리메이크 앨범인 5.5집 <클래식>이 38만 868장으로 2위, 이승철 7집도 35만 2,323장으로 3위를 각각 찍었다. 유명 음원사이트 벅스와 한국음반제작자협회 양측은 음원을 유료화하기로 합의했고, 소리바다도 2005년까지 유료화하는 데 합의했다. 같은 시기 국내 가요계에선 '7080 열풍'과 함께 기존 히트곡들의 리메이크 열풍도 같이 불었는데, KBS1 <열린음악회> 1월 25일자 방송분 '7080 추억의 그룹사운드' 및 3월 2일 방송분 '7080 보고싶다'가 각각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해당 에피소드 2편은 DVD로 발매되기도 했다.

2005년 1월 저작권법 개정에 따라 음원의 유료화 움직임이 점진적으로 진행돼 가요시장이 회생될 가능성을 보여줬다. 음원의 불법 사용에 대한 저작권단체의 법적 소송, 이동통신사의 온라인 유료 음악시장 가세 등으로 온라인 음원시장이 빠르게 성장했다. 이에 이동통신사들도 온라인 음원의 중요성을 깨달아 음악펀드를 조성했고, 이 자금이 가요계에 유입돼 신인과 기성 가수들의 음반이 쏟아졌다. 해외에선 비, 세븐, 장나라 등이 아시아의 스타로 거듭났고, 국내 무대에선 SG워너비, 버즈, 김종국 등 발라드 가수들이 인기를 얻기도 했다. 윤도현, 조성모, 테이, 신혜성, 휘성 등도 같이 최선을 다했다. 전년도에 장윤정이 트로트곡 <어머나>로 스타가 된 걸 계기로 한물갈 줄 알았던 트로트도 경쟁력을 다시금 얻었고, 이루 같은 신인들도 트로트 시장에 대거 뛰어들었다.

2006년 가요계에선 발라드 편중 현상이 일어났는데, 백지영의 <사랑 안해>를 시초로 발라드 곡이 대거 쏟아졌으며 손호영, 김태우 등 아이돌 출신 솔로들도 맹활약했다. 10~11월에 걸쳐 비, 세븐, 동방신기, 신승훈 등 톱가수 수십 명이 음반을 내 '별들의 전쟁'이 터졌다. 이와 더불어 음반에서 음원으로 산업 구조가 전환돼 CD가 아니라 디지털 싱글로 신곡을 내는 사례가 많았다. 그에 따라 CJ뮤직, SK텔레콤, KTF 등이 온라인 음악시장에 뛰어들어 디지털 음악시장이 3천억원 규모를 뛰어넘었다. 반면 음반시장은 갈수록 쇠퇴해 동방신기 3집이 34만 9,317장, SG워너비 3집이 31만 1,642장으로 30만을 겨우 넘었고, 이수영 7집 및 신화 8집이 20만장을 넘었다. 같은 시기 가수 비가 미국 뉴욕시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동양인 가수로서 최초로 단독 공연을 열었으며, 그해 5월에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에서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선정됐다. 박진영도 미국 뉴욕에 체류하며 아시아를 넘어 팝의 본고장에 진출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다.

2007년 가요계에선 판매량 20만장을 찍은 음반이 한 개도 없는 반면, 디지털 싱글이나 싱글/미니음반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장르별로는 빅뱅과 원더걸스 등 아이돌 세대가 대세를 이뤘고, 박진영, 윤상, 토이 등 X세대의 우상들이 컴백해 건재를 과시했다. '문화대통령' 서태지도 데뷔 15주년을 맞아 라지 피자박스 크기의 CD 10장짜리 기념 앨범을 내 광속 매진을 기록했으며, 매진 후 2009년 1~7집 리마스터링 앨범이 나오기 전까지 옥션 같은 경매사이트에서 몇십, 몇백만 원까지 부를 정도로 희소가치를 기록했다. 또 하반기 들어서 원더걸스의 '텔미춤'이 국민 응원춤으로 격상했다. 이는 미국에서 음반작업을 하던 박진영이 원더걸스에게 보낸 '원격 안무지도' 동영상이 기폭제가 돼 폭발적 인기를 불러왔다.

2008년에는 가요계 세대교체 와중에도 1992년 데뷔한 서태지가 4년 만에 컴백하며 <Atomos Part Moai> 등 싱글 2장을 내 폭발적 인기를 불러와 이듬해까지 '서태지 신드롬'은 식지 않았고, 신승훈도 2년만에 프로젝트 앨범 <Unexpected Twist>를 내 건재함을 과시했다. 원더걸스는 <So Hot>과 <Nobody>가 그야말로 폭발적인 반응으로 메가 히트를 하게 되었다. 다른 한편 비의 <Rainism>, 동방신기의 <주문 - MIROTIC> 등 일부 곡이 선정성을 이유로 '청소년 유해매체물' 판정을 받았고, N.EX.T의 <아! 개한민국>, 마이티마우스의 <꽐라송>, 엄정화의 <Kiss Me> 등 많은 노래들이 무더기로 청소년 유해매체물 판정을 받았다. 이에 따라 주 고객인 청소년과 음반사들이 성토했고, 표현의 자유 논쟁도 또다시 불거졌다. 상반기부터 원로가수 나훈아의 야쿠자 신체훼손 루머가 퍼진 데다 락 밴드 '산울림'의 드러머이자 막내동생 김창익을 비롯해 먼데이키즈 멤버 김민수, 거북이 메인보컬 터틀맨, 엠스트리트 멤버 이서현, 승무원 출신 가수 이라 등의 안타까운 사망 등 안 좋은 이슈들이 많았다.

2009년 가요계는 이전의 2007~2008년의 발라드와 아이돌의 과도기가 끝나고 소녀시대, 투애니원, 브라운 아이드 걸스, 2PM, 티아라, 카라 등의 본격적 2차 아이돌 전성시대가 시작되었다. Gee, 소원을 말해봐, I Don't Care, Fire, Abracadabra, Sorry, Sorry, Again & Again, Heartbeat, TTL (Time To Love), Bo Peep Bo Peep, 미스터 등의 굵직한 아이돌 히트곡들이 무수히 쏟아졌다. 다른 한편 안 좋은 일들도 많았는데, 디지털 음악시장의 활성화로 싱어송라이터가 몰락했으며 막 솔로로 데뷔한 G-DRAGON의 표절 논란도 있었고 2PM 멤버 재범의 탈퇴 파동도 있었다. 동방신기도 멤버들 간의 불화가 터져 믹키유천 등 멤버 3명이 'JYJ'로 홀로서기를 했다.

아이돌의 세대교체도 이 때부터 일어났는데, 2002년을 끝으로[25] 1세대 아이돌들이 물러가게 되었고 한동안 공백 상태이던 가요계를 브라운 아이즈를 시작으로 SG워너비, 플라이 투 더 스카이, 테이, 씨야 등의 미디엄 템포 발라드[26], 버즈를 위시로 한 비주얼계 락발라드 장르들이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1세대 아이돌 그룹들은 해체 또는 침체기를 맞았지만 2000년대 초반은 여자 솔로 가수들의 전성기였으며 장나라, 보아, 이효리, 이수영 등이 전성기를 맞이한 시기였다. 그나마 남자 솔로 가수는 와 남자 아이돌들은 동방신기, 슈퍼주니어, SS501 등이 데뷔하면서 큰 인기를 얻고 명맥을 이어갔지만 이 시기에 걸그룹 시장은 말 그대로 초토화였다. 그나마 남아있었던 게 쥬얼리 정도이며 아이돌 공장이라 불리는 SM 엔터테인먼트마저 걸그룹 히트에 연달아 실패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 열풍도 그렇게 오래가지는 않았다. 2017년 히든싱어, 슈가맨 등의 프로그램으로 '그 때 그 시절이 좋았다..' 같은 추억보정을 얻고 있지만 소몰이창법 항목을 들어가보면 알 수 있듯이 그 당시 가요계는 식상하다, 감정을 낭비한다 등의 지탄을 받고 있었고 매 곡마다 짜는 듯한 목소리로 대중들의 귀도 지쳐있던 상황이었다. 또한 2000년대 초반 이후, 음반 시장은 몰락한 가운데 아직까지 음원 시장이 제대로 커지지 않았기에 여러모로 시장성에 있어서도 크게 위축되었던 암흑기였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고 있던 2007년 상반기엔 아이비의 유혹의 소나타가 포문을 열었고, 그해 가을에는 원더걸스Tell Me가 엄청난 반응과 폭발적인 히트를 기록하며 제2세대 아이돌 시대를 열게 되며 이후 빅뱅, 원더걸스, 소녀시대, 카라 등의 2세대 아이돌들이 미디엄 템포 발라드, 락발라드 가수들을 대체하면서 소녀시대, 투애니원, 브라운 아이드 걸스, 2PM, 티아라, 미쓰에이, 카라 등의 본격적인 2차 아이돌 전성시대가 2009년부터 시작되었다.

특히 2007년 ~ 2008년엔 그 어느 때보다도 가요계의 색채가 다양했던 시기인데 바로 소몰이 창법과 발라드의 마지막 전성기와 2세대 아이돌의 시작점이 교차하던 과도기여서 음악장르가 다양했었다. 원더걸스는 <Tell Me>, <So Hot>, <Nobody> 등의 공전의 3연타를 기록하며 2세대 아이돌의 시작을 알렸고, 발라드 쪽에서는 소몰이 창법이 마지막 불꽃을 자랑하며 아이돌과 발라드가 공존하며 음악장르가 다양했다. 이렇듯 2007~2008년 시기에는 아이돌 음악과 발라드가 1위를 양분했지만 소녀시대 Gee 열풍 이후인 2009년부터 발라드의 쇠락과 아이돌 후크송의 전성기가 시작되면서 발라드가 아이돌에게 완전히 자리를 내어주고 현재의 가요계 구도가 자리잡혔다. 2009년 Gee 이후로는 이전의 발라드가 예전같은 위풍을 자랑하지 못하게 되고 현재와 같은 본격적인 아이돌 전성시대가 시작하게 된다.

인디 음악계는 그야말로 흥망성쇠를 거듭한 시기로, 한창 성장하고 있던 시기에 카우치 사건으로 한번 큰 타격을 입었으며, 이후 2000년대 후반 들어 장기하와 얼굴들 등 2세대 그룹들이 등장하면서 점차 인디 신 자체를 부활시키기 시작하였다.

민중가요계는 1990년대 중후반부터 운동권의 몰락으로 침체기에 빠졌는데, 대다수 대학 노래패들이 이와 같은 이유로 해산하거나 대중가요를 부르는 밴드가 됐으며 '조국과 청춘'과 '천리마' 등은 활동을 중단하거나 해산하기도 했다.

다만 1999년에 한선희, 백자, 강상구 등이 결성한 '우리나라'와 남총련 노래단 '한반도'가 이 시기 집회현장에서 활발히 활동했고, 꽃다지와 소리타래, 희망새 등도 건재를 과시했다. 윤민석이 2002년에 지은 <Fucking USA>가 당대 반미 열풍을 타고 빠르게 유명세를 탔고, 2005년에 박성철이 짓고 부른 <맥아더>도 인천 맥아더 장군 동상 철거논쟁과 맞물려 파장이 일었다. 심지어 피엘송닷컴, 밥자유평등평화, 송앤라이프 등 인터넷 민중가요 사이트들도 생겨 중년이 된 386 세대들의 향수를 자극시켰다.

그동안 동요로 취급받으며 찬밥신세가 된 애니송 분야도 서서히 '대중가요'의 범주에 들기 시작했는데, 온미디어 공채 5기 성우 이용신이 <달빛천사>, <캐릭캐릭 체인지> 등지의 주제곡을 불러 '한국의 미즈키 나나'로 등극했고, 유정석이 부른 <쾌걸 근육맨 2세> 주제곡 '질풍가도'도 2000년대 후반 야구장 등지에서 응원곡으로 널리 불리며 재조명되었으며 2007년 SBS 드라마 <쩐의 전쟁>에서 박신양이 <파워레인저 매직포스> 주제곡을 불러 화제가 되었다. 버즈나 동방신기, SS501, 이수영, 이소은, 쥬얼리, 파란 등 대중가수들도 전과 달리 애니송 시장에 활발히 뛰어들었다.

2000년 6월 제1차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그 전까지 간헐적으로 시도해 본 남북한 음악교류도 더욱 활성화되었는데, 1999년 12월에 열린 '2000년 평화친선음악회'에 이어 2003년에 KBS1 가요경연프로 <전국 노래자랑>이 '평양 노래자랑'이란 명칭으로 북한 평양에서 최초로 현지 녹화방영되었으며, 2005년에 조용필 콘서트가 평양 류경정주영체육관에서 열려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2008년 이명박 정부 수립 후 남북관계가 경색되어 한동안 음악교류가 끊겼다. 반면 2000년에 배우 길정화가 '통일소녀'란 예명으로 <휘파람>을 불러 '미지의 영역'이던 북한 노래에 대한 관심이 한때나마 형성되기도 했다.

이 시기의 한국 음반시장은 카세트테이프CD음반이 공존하고 있었지만 소리바다프루나, 당나귀로 대표되는 불법 P2P 프로그램이 성황을 이루던 2000년대의 타격과 연이은 아이리버, 코원, YEPP, iPodMP3 플레이어의 공격으로, 2000년대 들어서 카세트테이프로 음악 듣는 시대는 사실상 끝이 난다. 물론 2020년대 초반인 지금도 CD 판매고를 차트 산정의 주요 척도로써 인정하고는 있지만, 1990년대의 판매량에 비하면 무시해도 될 수준인 경우가 많고, 몇몇 아이돌 그룹이 기록하는 음반 판매량은 음악을 듣기 위해서라기보다는 해당 그룹의 차트 순위를 높이기 위한 팬들의 화력지원일 뿐, 실질적으로 CD로 음악을 듣는 팬들은 몇몇 마니아들을 제외하면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사실 팬들 입장에서는 음원 판매량도 음반 판매량만큼이나 중요하게 여겨지는 까닭에, 어차피 CD를 샀더라도 음원을 구입하게 되므로 굳이 귀한 CD를 개봉하여 상품성을 낮추느니 음원으로 듣는 게 훨씬 속 편하기도 하기 때문. 따라서 음반 제작사에서는 음반을 구매한 경우에만 얻을 수 있는 각종 특전(예를 들어 화보사진, 카드나 보너스 트랙 같은)을 부여하기 시작했는데 이것도 2000년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현상이다.

4.6. 언론

1990년대 내내 '밤의 대통령'이니, '무관의 제왕'으로서 마음껏 위세를 떨치던 언론권력에 제동이 걸리기 시작했는데, 바로 2001년 상반기에 터진 '언론사 세무조사'였다. 조사 전에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일본 도쿄에서 7년 전의 언론사 세무조사를 언급하며 "언론의 존립이 위협받는 결과가 나왔으며, 세금의 일부를 징수했다."고 하며 권언유착 의혹이 나왔으나, 국세청은 23개 중앙언론사를 상대로 조사인력 400여 명을 투입하며 이중 15개 언론사는 조사기간을 30일간 더 연장해 6월 19일까지 했다. 당초 국세기본법 등에 따라 비공개를 원칙으로 했으나 언론계와 정치/시민사회단체, 일반 국민들의 관심이 증폭되자, 국민의 알 권리와 유언비어 등 불필요한 오해를 배제한 채 공개 관행의 범위 안에서 23개 언론사 및 계열사, 대주주 등에 대한 조사 결과 총 탈루소득액 1조 3,594억원과 탈루법인세 5,506억 원을 공개했으나, 이는 조중동, 대한매일, 한국일보, 국민일보 등 6개만 공개했지 나머지 17개는 공개하지 않았다.

다만 공개된 6개 언론사들의 추징액이 사주 부분을 포함해 총 3,048억원에 달하는 등 전체 조사대상 언론사의 추징세액 중 60%를 차지함으로써 조사 자체에 대한 찬반 양론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제기돼 온 거대언론의 병폐 및 부도덕성이 폭로됐다. 이후 6개 법인과 사주 3명이 검찰에 고발돼 김병관, 방상훈, 조희준이 구속됐으며 공정거래위원회도 13개 언론사에 대해 조사 후 과징금 242억원을 부과했다. 민언련 등 시민사회단체 측은 언론사가 부정과 비리로 얼룩진 과거사를 씻고 반성을 촉구했지만, 일부 언론재벌들은 '언론 탄압'이라고 비난했다.

2003년 참여정부 출범 후 조중동 등 보수언론들이 정부와 적대적 긴장상태를 내내 유지했다. 이들은 참여정부의 특검 수용, 이라크 파병, 한미 FTA 등 일부를 빼곤 대다수 사안에 대해 반대 스탠스를 취했고, 기회를 노려 비판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에 노무현 정부는 정정보도 및 반론 요청, 언론중재위원회 중재 요청, 나아가 법적 대응까지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이러한 대응은 노무현 대통령 본인이 직설적이고 감정이 앞선 스타일에서 연유했는데, 그는 언론에 대한 타협을 떳떳하게 거부하고 정정보도부터 최대 법적대응까지 요구하는 그런 식이었다. 이러한 참여정부와 보수언론 간의 대립이 오히려 보수언론의 위상만 높여줬다는 비판점도 있는데, 그냥 무시해도 될 것을 사사건건 대응하다 보니까 본질에서 벗어난 지엽적 문제까지 논란이 됐다. 또한 어떤 경우 인정하고 넘어가는 게 나은 것도 보수언론을 염두에 두고 끝까지 대응논리를 하다 자기 성찰이 부족해진 면도 있다. 이에 대해 언론학자 강준만 전북대 교수도 2005년에 이를 '몰입의 위험성'이라 봤다. 아무리 보수 신문들이 찌라시 수준으로 노무현 정부를 헐뜯었다는 건 사실이라 쳐도, 정부 역시 보수언론과 감정적으로 일일이 맞서서 힘을 낭비하지 않는 것도 필요했다.

2000년대 내내 인터넷 매체들의 등장과 활약, TV 등 방송의 영향력 때문에 주류 신문들의 영향력은 미미했다. 특히 오마이뉴스, 민중의소리, 프레시안 등 영향력 있는 인터넷 신문들의 활약과 온갖 인터넷 매체의 활동으로 언론의 영역이 더욱 확장됐다. 이들은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반대 촛불시위 등을 주도해 인터넷을 통한 여론 조성과 정치 활동으로 사회의 한 부분을 만들어냈지만 인터넷을 통한 과장·허위 사실에도 취약했던 탓에 2008년 미국산 쇠고기 협상 무효화 촛불문화제 등 과장보도에서 비롯된 광우병 관련 음모론을 현실로 끌고 와 파란을 일으켰다. 또한 우편향 조중동에 맞서기 위해 좌편향이 된 언론들이 속출했기 때문에 오히려 좌우 간의 감정이 악화되고 좌우를 막론하고 보고 듣고 싶은 언론만 보고 듣는 확증편향을 가진 네티즌들도 증가했다.

'만년 관영언론'이던 대한매일은 2002년 우리사주조합이 대주주로 승격하면서 1차 민영화를 단행했으며, 2004년 '서울신문'으로 제호를 환원하였다. 뉴스통신 분야에선 2001년에 뉴스공급업체 뉴시스가 3년여 간의 법정투쟁 끝에 대법원으로부터 승소를 얻어내 뉴스통신 사업을 본격적으로 개시해 '연합뉴스 독주'를 깼고, 1990년대 말부터 논의돼 온 '연합뉴스 소유구조 개편'도 2003년 '뉴스통신진흥에 관한 법률안'이 국회를 통과돼 현실화되자 2년여 간의 산고를 거쳐 2005년 법 제정 후 '뉴스통신진흥회'가 구성돼 연합뉴스의 새 대주주가 되어 '국가기간뉴스통신사' 지위를 따냈다. 한동안 뉴미디어 중심으로 사업을 확장해 온 언론재벌들도 2006년 헌법재판소의 '신방겸영 금지' 합헌 판결로 방송업계 진출이 수포로 돌아갈 듯했으나, 이명박 정부 초기인 2009년 하반기에 '미디어법'이 여야와 언론계에서의 치열한 대립 끝에 통과돼 종합편성채널 탄생의 토대를 구축했다.

4.7. 방송

4.7.1. 경영/정책

2000년에 구 방송법과 종합유선방송법을 통합한 개정 방송법(통합방송법)이 제정되자, 방송위원회와 종합유선방송위원회 2개 심의기구에서 '통합 방송위원회'로 일원화되어 일관된 방송심의 체계를 갖추기 시작했다. 아울러 문화관광부가 갖던 방송정책 결정권도 회복해 명실상부 방송계에서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2001년에 지상파 영화, 외화, 애니 등 일부 프로그램에 먼저 등급제도가 도입되었고, 2002년 드라마로 확장됐다가 2007년부터 시사/보도를 제외한 전 프로그램에 등급제도가 완전 도입됐다. 아울러 2004년에 화면해설방송을 개시해 시각장애인들도 TV 시청의 수혜를 얻기 시작했다.

그동안 관행으로 여겨졌던 공영방송 사장 내리꽂기에 도전이 가해진 것도 이 시기인데, 2001년에 방송문화진흥회가 청와대의 입김을 받지 않고 진보 언론인 김중배를 MBC 사장으로 자체 선임하면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2003년 노무현 참여정부 집권 후 KBS에선 언론인 서동구가 사장직에 임명되었으나 그가 전년도 16대 대선 때 노무현 캠프에 소속되었다는 이유로 노조가 이를 '낙하산 인사'로 규정하며 파업을 벌여 서 사장을 퇴진시켰다. 이후 KBS 이사회는 언론단체, 노조, 시민사회단체의 의견을 수렴해 진보 언론인 정연주를 사장에 선임했다.

2008년 상반기 이전까지 KBS, MBC, YTN 등 공영방송들은 제작진들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하여 <미디어 포커스>를 비롯해 <인물현대사>, <생방송 시사투나잇>, <김미화의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 <세계와 나 W>, <돌발영상> 등 성역에 도전하는 진보적인 프로그램들이 보수측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편성돼 '관영방송'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듯했으나,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인 2008년 '광우병 파동'과 이로 인한 촛불집회를 계기로 정권의 존립이 위험해지자, 동년 5월 구본홍 YTN 사장 선임을 신호탄으로 8월 정연주 KBS 사장 해임 및 이병순 사장 임명, 2009년 7월 김우룡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 선임 등으로 점차 방송 장악과 인위적 개편의 기틀을 마련했다.

4.7.2. 기술

스카이라이프 CF - 전인권 편(2003)

2000년 1월 14일에 MBC가 드라마 사상 최초로 <사랑한다고 말해봤니?>를 HD로 제작해 시험 방영한 뒤, 7월에는 방송위원회 산하에 디지털방송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8월 31일에는 SBS가 처음으로 HD 시험방송을 개시했으며, 9월 3일 KBS와 MBC도 뒤따랐다. 이에 따라 한국에서 스카이라이프지상파 방송사들이 시험방송을 끝내고 본격적인 디지털방송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하지만 UHD 논쟁처럼 방송방식을 DVB VS ATSC 논쟁 때문에 시청자의 HDTV 전환 시기를 놓치게 했으며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우여곡절 끝에 한국디지털위성방송은 2002년 3월 1일에 스카이라이프 본방송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HDTV가 보급률이 높지는 않았다.(2002년 기준 HDTV의 보급률은 단 2%에 불과했다.) 이후 LCD와 TV 앞면이 볼록한 텔레비전의 생산이 중단된 2005년경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2006년 10월 5일에는 MBC, SBS, EBS가 먼저 지상파 다채널 서비스(MMS) 시험방송을 개시하고 2008년에 대중적인 디지털 방송 전환을 위해 방송사와 산업계, 학계, 소비자 등으로 구성된 비영리기구 (사)한국지상파디지털방송추진협회(DTV코리아)가 설립되었다.

TV 방송장비 분야에서는 2004년까지만 해도 아날로그 테이프가 취재용 또는 스튜디오 촬영 당시 쓰였었는데 여러 방송사에서 2005년쯤에 완전히 디지털화되었다. 그리고 라디오 방송의 경우도 2004년 하반기~2005년 초 사이에 아날로그 오픈릴 테이프에서 디지털 테이프리스 시스템으로 물갈이되었다. 방송자료실 역시 2004년 개발된 KBS의 KCMS와 같은 웹 기반 방송콘텐츠 통합검색시스템을 구축하는가 하면, 멀티미디어 정보시스템(MMIS) 서비스, 오디오아카이브 시스템 등을 구축했다.

일본에서도 2000년에 BS디지털이라고 위성방성을 이용한 디지털방송이 시험방송되었다. 이때부터 인텔 펜티엄4 시리즈[27]와 nVIDIA Geforce FX 또는 ATi Radeon 9500의 보급으로 720P영상[28]을 컴퓨터로 볼 수 있었고 HD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16:9모니터와 디지털방식의 TV[29]도 같이 보급이 이루어졌다.

HD로 인한 와이드 스크린 열풍 때문에 16:10모니터도 나왔을 정도이며 부작용도 생겼는데 배우의 얼굴에 잡티까지 나와서 HD방송을 위한 화장법(?)도 생겨났다. 케이블 방송도 2005년에 CJ헬로비전을 시작으로 2000년대 후반 들어 모든 사업자가 디지털 채널의 운용을 개시하였다. 2006년에 다채널방송(MMS)[30]을 시험방송하면서 위 영상의 화질은 물건너 갔다 카더라. 휴대전화에서도 2005년도에 DMB라는 규격이 개발되어[31] 언제 어디서든지 TV를 볼 수 있다. 때문에 이듬해에 개최된 2006 독일월드컵2002 한일월드컵과는 또 다른 분위기를 만들었다.[32]

4.7.3.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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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의 한류열풍을 이끈 겨울연가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명작 드라마들이 많았던 시대이기도 했다. 대표작으로는 겨울연가, 올인, 인어 아가씨, 천국의 계단, 야인시대, 파리의 연인, 발리에서 생긴 일, 미안하다, 사랑한다, 풀하우스, 내 이름은 김삼순, 소문난 칠공주, 거침없이 하이킥, 커피프린스 1호점, 미우나 고우나, 베토벤 바이러스, 아이리스 등이 있다. 겨울연가, 대장금 등은 해외로까지 수출되어 한류 열풍을 이끌기도 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막돼먹은 영애씨를 제외한 케이블 방송 드라마 같은 경우 크게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고 대부분의 인기 드라마는 지상파 드라마였다. 아직 인터넷 다시보기 서비스 등이 활성화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시청률이 30~50%에 달하는 드라마들이 여럿 나올 수 있었다.

이 때 드라마들의 특징으로는 첫째, 명대사가 많았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대표적으로 "사랑은 돌아오는 거야(천국의 계단)" "밥 먹을래! 나랑 같이 죽을래!(미안하다, 사랑한다)," "이 안에 너 있다(파리의 연인)" "애기야(파리의 연인)" 등이 있다.

다음으로는 특히 초중반의 멜로 드라마를 중심으로 주인공들이 평범하기보다는 특별하고 극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설정되었다는 것이다. 출생의 비밀, 환생, 기억상실, 죽음, 재벌 등 주인공들은 평범하기보다는 매우 다사다난한 인생을 사는 모습으로 그려지는 작품이 많다.[33] 이러한 극적인 스토리 전개는 등장인물들의 개성을 부각시키며 드라마에 극적인 긴장감 및 감동을 더해주는 요소로 작용했다.

마지막으로 대부분의 드라마에 OST가 삽입되기 시작하였으며 또한 명곡이 많았다는 특징이 있다. 천국의 계단보고싶다, 미안하다, 사랑한다눈의 꽃, 쾌걸 춘향응급실[34], 베토벤 바이러스의 들리나요..., 아내의 유혹용서 못해 등이 유명하다.

결론적으로 2000년대의 명작 드라마들은 주인공들이 결코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아가면서 명대사를 통해 감정을 풍부하고도 애절하게 표현하는 모습이 시청자들의 흥미를 자극하는 한편 큰 감동을 주었기 때문에 인기를 끌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OST까지 명곡이 많았기 때문에 작품에 완성도를 더해주었다. 이후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드라마는 2000년대와 같은 무거운 정통멜로보다는 잔잔한 일상을 다루거나 로맨틱 코미디와 같은 장르가 유행하면서 변화를 겪게 된다.

또한 시트콤의 전성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00년대 전반기(2000~4년)에는 세친구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순풍 산부인과의 뒤를 이었고 논스톱 시리즈가 젊은 세대 사이에서 좋은 인기를 얻었고, 00년대 후반기(2005~9년)은 올드미스 다이어리, 하이킥 시리즈가 공전의 히트를 쳤다. 논스톱은 당시 대학생활을 배경으로 하여, 10대에게 쓰잘데기 없는 대학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었다. 이후 레인보우 로망스에도 청춘 시트콤에 대한 영향을 주었으나, 이는 흥하지 못했고, 그 이후 나온 거침없이 하이킥은 말 그대로 초대박. 가족 시트콤이지만 러브라인도 갖춰져 있고, 내용들도 한편한편 손에 꼽을 정도로 재미있어서 지금까지 회자되는 레전드 시트콤이다. 지붕뚫고 하이킥은 전작보다는 인기를 얻지 못했지만 그래도 매우 흥했다.

사극의 경우 기존의 조선시대 정치극 위주에서 벗어나 고구려, 발해, 고려 등 고대~중세의 북방계 국가들이 많이 다뤄졌다. 또한 이러한 사극들에서 스케일이 큰 전투장면들이 다수 등장하게 되었다. 왕건의 후삼국 통일을 다룬 태조 왕건이 이러한 경향의 시작을 이끌었으며 무인시대, 대조영, 연개소문, 주몽 등이 이러한 경향의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또한 이때까지는 아직 정통 사극도 많았지만 퓨전 사극이 본격적으로 제작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태왕사신기 등이 있다. 물론 조선시대나 신라 등을 다룬 작품들도 여전히 많았으며 허준, 여인천하, 명성황후, 대장금, 선덕여왕 등이 인기를 끌었다.

4.7.4. 예능

2002~2006년 사이에는 짝짓기 예능이 단연 흥했다. 강호동의 천생연분, 연애편지, X맨을 찾아라 등등 커플이 되어 게임을 하는 스튜디오 예능들이 예능계를 평정했다. 이로 인해서 생겨난 폐해들도 많은데, 당시는 팬덤 문화가 지금처럼 성숙하지 않아서, 짝짓기 예능에 우리 오빠(...)와 커플이 되는 것을 보지 못하던 일부 빠순이들이 상대 여성의 홈피에 막말 테러를 하는 일도 빈번했다. 대표적인 피해자로는 강은비. 당시 X맨에서 시아준수믹키유천의 호감을 받았단 이유로 미니홈피는 고사하고 인터넷에 강은비의 루머를 퍼뜨리며 온갖 테러를 단행했다. 심지어 본인들의 오빠들이 먼저 좋다고 한 건데도 먼저 꼬리를 쳤다며 없는 말까지 지어냈다(...).[35] 이로 인해 강은비는 연예계에 발도 디디지 못하고, 우울증과 공황장애에 걸려서 자살생각까지 했다고 했을 정도이니, 이들의 만행을 짐작할 수 있다. 짝짓기 예능뿐만 아니라 쟁반노래방, 야심만만 등 토크쇼 예능들도 화수분처럼 쏟아져 나왔다.

1990년대부터 2006년 상반기까지는 스튜디오 예능이 대세였던지라, 야외에서 하는 예능들은 정말 손에 꼽았을 정도인데, 이 예능의 판도를 바꾼 것이 무한도전이다. 리얼 버라이어티를 표방하는 취지로 스튜디오보다는 직접 야외로 나가 몸을 쓰는 모습들로 많은 사랑을 받자 이후 예능들도 우후죽순처럼 야외 예능의 대열에 합류했다. 그 후 1박 2일 이라는 리얼 야생 버라이어티가 생겨나면서, 스튜디오 예능에서보다 친근한 모습의 연예인들을 보여주며, 60대 이상의 노년층에게까지 어필했다. 당시 무한도전이 10~30대의 젊은 세대의 지지층이 두터웠다면, 1박 2일은 연령을 불문하고 사랑을 받았다. 그렇지 않아도 유재석vs강호동의 국민 MC 대립구도가 팽팽했는데 타 방송사의 인기 프로그램들을 각자가 진행하면서 라이벌 기믹이 생겼고,[36] 실제로 당시 커뮤니티에서는 무한도전 빠들과 1박 2일의 빠들의 의미없는 경쟁이 판을 쳤다.[37] 두 개의 예능프로그램이 흥하면서, 개나소나 리얼버라이어티를 들고 나왔지만 대부분 도태되었다. 그 덕분에 스튜디오 예능은 손에 꼽다시피하고, 토크쇼 형식의 예능은 멸종 위기에 처해있다.

1999년부터 KBS2에서 방송된 <개그콘서트>의 성공으로 공개 코미디 열풍이 불자 MBC도 2000년에 <코미디하우스>, SBS도 2003년에 <웃음을 찾는 사람들>을 각각 방영해 맞불을 놨다. <개그콘서트>는 '사바나의 아침' 성공 이후 잠깐 MBC에게 밀렸으나, 2001년에 '박성호의 뮤직토크', '수다맨', '꽃봉오리 예술단' 등 히트작들을 양산하여 다시 반등했다. 2002년 '갈갈이 삼형제'의 성공을 계기로 박준형, 정종철, 이승환 등 '갈갈이 패밀리' 사단을 중심으로 황금기를 구가하기 시작했다.

반면 1990년대 중반 이후 하위권에 머무르던 SBS 개그 프로그램도 2003년에 <웃찾사>를 편성하면서 박성호, 김대희, 심현섭 등 초기 개콘 멤버들을 끌어들여 기틀을 다졌다가, 2004년 들어 김기욱, 정만호, 박상철, 김필수, 김형인 등 '박승대 사단'과 컬투를 중심으로 '그런거야', '그때그때 달라요', '행님아' 등 히트작들을 내놓아 개콘에 도전장을 던졌다.

4.8. 패션

국내에서 '일본 스타일'이 대놓고 유행했던 유일한 시절이기도 하다.[38] 니뽄삘이라는 식의 드립도 흥했다. 심지어 국내 연예인들도 일본 유명 연예인의 스타일을 따라하거나 참고하는 경우도 있었다. 일본 구제 패션, 일본 액세사리, 일본 화장품등이 옷가게와 온라인에서 특수를 누렸던 시기. 그래서 이후 세대들이 이 시기 사진을 보면 일본 같은 느낌이라는 반응이 달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2010년을 기점으로 한류의 인기와 함께 한국이 아시아 트랜드를 선도하게 되었고, 현재는 상황이 완전히 역전되어 일본 젊은층에서 '한국 스타일'이 유행 중이다.

2000년대 헤어스타일은 시기와 남녀를 불문하고 샤기컷울프컷이 유행이었다. 당시 거의 모든 젊은 스타들의 머리 스타일도 대부분 이런 식의 머리였다. 소위 말하는 여자 일진들은 앞머리를 눈썹이 보일 정도로 짧게 자른 후, 샤기컷을 한 다음 볼륨을 한껏 넣는 것이 유행이었다. 이 역시 유행이 바뀐 후대 기준으로는 일본 스타일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기도 한다. 2008년에는 여학생들 사이에서 일명 '서인영 머리' 스타일이 급증하기도 했다.

패션 스타일은 얼짱출신인 반윤희가 유행시킨 스포츠 브랜드 티셔츠+카고바지 스타일링이 유행이었다. 스키니진은 2009년 ~ 2010년 즈음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유행이 되었고, 그 전에는 교복바지를 줄여입는 경우를 제외하면[39] 거의 통이 넓은 바지를 입고 다녔다. 가수들의 패션들도 유행이었는데, 2004년에서 2008년에는 힙합 패션, 2009년 ~ 2010년 사이 이후 부터 2016년까지 소녀시대 gee 열풍으로 인한 컬러 스키니진 패션이 유행이었다.[40] 2005년 이후 EPL 등 해외축구의 대중화로 학교 운동장 등지에서 맨유나 레알 마드리드 같은 유명 축구팀 레플리카나 바람막이를 입는 사례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또한 2007년 말에서 2008년 사이 즈음부터 2014년 무렵까지 노스페이스의 바람막이와 패딩은 당시 중고교 학생들 사이에서 이른바 국민 교복으로 자리매김을 하였었다.

또, 2000년대 화장법은 1990년대의 과감한 메이크업에 대한 반동으로 진한 화장을 촌스럽게 여기고 자연스럽고 옅은 화장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했다. 파우더처럼 뽀얀 피부 표현과 색조가 강하지 않은 립글로스를 사용한 '투명 메이크업'이 대세가 된다.[41] 그러다 후반부인 2009년 브라운아이드걸스가인이 유행시킨 진한 스모키 화장이 열풍이었고 이것이 2010년대의 스타일로 이어진다. 이후 2020년대 들어서는 다시 화장이 옅어진다.

2000년대부터 로드샵이 대거 생겨나면서 화장품 가격대가 저렴해졌고 자연히 화장을 시작하는 연령대도 낮아지게 되었다. 중고등학생 층에서 소위 '얼짱 메이크업'이라 불리는 화장법이[42] 크게 유행하기도 했다. 재밌게도 이 얼짱이란 용어는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지만, 한류를 타고 세계적으로 퍼지면서 중국과 일본은 물론 서양권에서도 Uljjang이라며 한국식 메이크업의 대명사로 불리고 있다.

4.9. 영화

4.9.1.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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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보이 촬영장의 송강호[43]
2000년에는 전년도의 <쉬리>의 성공으로 인한 비약적 발전을 발판삼아 영화계 질과 양 모두 안정기로 돌입했다. 동년도 국산영화 제작편수는 57편, 시장점유율은 32%였다. 비록 시장점유율은 전년도에 비해 떨어졌으나 다른 나라들과 비교하면 굉장했다. 이 해를 대표하는 작품은 9월 9일 개봉된 <공동경비구역 JSA>인데, 한국 영화 역사상 최단기간인 개봉 보름 만에 서울관객 100만명, 10월 26일 200만명을 각각 넘었고, 2001년 1월 4일에는 244만 8천명을 찍어 <쉬리>의 기록을 깼다. 이 영화의 성공에는 영화적 요소 외에 사회적 요인도 컸는데, 멀티플렉스의 등장으로 서울에선 40개 이상의 개봉관을 지닐 수 있었으며 제1차 남북정상회담 이후 북한에 대한 친밀감이 높아진 것도 이에 한몫했다.

위와 같은 약진으로 금융자본의 영화투자도 더욱 활발해졌고, 7월 22일에 북한 SF영화 <불가사리>가 분단 55년만에 합법적으로 개봉됐다. 비록 서울관객 283명에 그쳤으나 처음으로 정식 상영한 북한 영화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2001년 한 해 동안 국산 영화가 시장점유율 46.1%, 1천만 관객, 해외수출고 1천만불을 각각 찍어 전성기에 돌입했다. 상반기부터 <친구>가 전국 820만명이란 대기록을 세우며 <공동경비구역 JSA>를 제친 후 <엽기적인 그녀>, <달마야 놀자>, <조폭마누라> 등이 흥행 행진을 벌였다. 다만 흥행을 이어간 몇몇 영화들이 스크린을 독점하는 부작용이 있었는데, 이 때문에 <와이키키 브라더스>와 <고양이를 부탁해> 등 저예산 영화들이 개봉 1주일만에 간판을 내리는 등 영화계의 '빈익빈 부익부'가 더 부각됐다. 그 증거로 국산 영화를 본 서울 관객 약 1,600만명 중에 53.7%가 상위 5위권 안에 속하는 영화를 본 걸로 나타났다.

동년도 한국 영화를 대표하는 키워드는 바로 '조폭'인데, <친구>를 비롯해 <파이란>, <달마야 놀자>, <두사부일체>, <신라의 달밤>, <조폭마누라> 등 흥행 영화 상당수가 조폭을 소재로 했다. 이는 경제침체 및 정치 혼란 등 한국 사회의 현실을 반영한 면도 있지만, 진부한 기획과 인기에 편승하려는 얄팍한 상업주의 등 한국 영화계의 잘못된 현실을 보여주는 한 예이기도 했다. 반면 해외진출도 활발해 베니스 영화제 장편 경쟁부문에 송일곤 감독의 <꽃섬>과 김기덕 감독의 <수취인불명>이 각각 초청됐고, 송일곤 감독은 감독상을 받았다. <나비>의 주인공 김호정은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파이란>의 송해성 감독도 영국 리즈 영화제에서 국제신인감독상을 각각 받았다. 심지어 일본에서도 <쉬리> 외에 <반칙왕>과 <공동경비구역 JSA>가 개봉돼 흥행하기도 했다.

2002년에는 한국 영화의 성공신화는 계속됐는데, 특히 해외 영화제에서 크게 드러났다. 5월 말에 열린 프랑스 칸 영화제에서 <취화선>을 만든 임권택 감독이, 9월 초엔 <오아시스>를 만든 이창동 감독이 베니스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각각 받는 등 질적인 성장과 양적인 성장을 모두 해냈다. 내수 시장점유율도 45.2%를 기록해 여전히 순항했으며, <가문의 영광>을 비롯해 <집으로...>, <광복절 특사> 등이 각각 흥행에 성공했다. 특히 <집으로...>는 개봉 초기에 흥행에서 망할 것이 예상됐으나, 자극적이지 않은 소재와 따뜻한 시선으로 전국 413명을 동원했다. 같은 시기 관객 1억명 시대가 되면서 극장시장의 경쟁력은 치열해졌고, 21세기 들어서도 표현의 자유에 대한 논란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 같은 해 개정 영화진흥법 시행에 따라 '제한상영가 제도'가 도입돼 70대 노인들의 사랑과 성을 다룬 영화 <죽어도 좋아>가 제한상영가 판정을 받아 논란이 됐다. 결국 이 영화는 3차례에 걸친 심의 끝에 '18세 미만 관람불가' 판정을 받아 개봉됐다.

2003년에는 <실미도>의 첫 천만관객 돌파로 내수 점유율이 전국 51.6%, 서울 49.97%를 각각 기록해 처음으로 전국에서 50%대를 넘기 시작했다. 이후 2007년까지 내수점유율 50% 이상을 각각 기록했으며 2004년에는 최고 66.8%를 찍기도 했으나, 2008년에는 스크린쿼터 축소의 여파 등으로 40%대로 회귀했다. 2008년 이전까지 한국 영화가 반 이상의 시장점유율을 보인 1차 요인은 영상세대의 등장 때문인데, 2000년대 내내 천만관객 이상 영화는 <실미도>를 비롯해 <태극기 휘날리며(2004)>, <왕의 남자>, <괴물(이하 2006)> 등 4편이며 500만명대 영화는 <공동경비구역 JSA>, <친구(이하 2000)>, <가문의 영광(2002)>, <살인의 추억(2003)>, <웰컴 투 동막골, <가문의 위기 - 가문의 영광 2(이하 2005)>, <투사부일체>, <타짜(이하 2006)>, <화려한 휴가>, <디워(이하 2007)> 등 셀 수도 없이 많다. 반면 손익분기점인 200만명 이상 관객을 동원한 영화는 손에 꼽는다.

두 번째 요인은 토종 영화업계가 치밀하게 구축해 놓은 영화제작/공급 시스템인데, 이는 감독, 배우, 스태프, 시나리오 작가 등 영화의 질을 담보할 만한 풍부한 인적 자원 덕에 시장점유율 확충이 가능했다. 영화제작에서 예술/기술적 외에 산업적 측면에서 뒷받침할 자본의 참여가 있었다. 제작비가 1백억원을 상회하는 영화가 즐비한 상황에서 CJ나 오리온 같은 대기업의 직접참여가 없었으면 대형 영화는 꿈도 못 꾼다. 아무리 좋은 영화를 만들어도 배급망을 갖추지 못하면 실패하는 건 매한가지다. 그런 점에서 영화를 산업으로 보고 접근한 영화자본은 제작 외에 다양한 콘텐츠의 개발, 참여, 배급망 확충 등에 기여하여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와 대등히 겨룰 수 있는 조건을 마련했다. 마지막 세 번째 요인은 스크린쿼터 같은 보호장치 덕인데, 이 제도가 성공으로 연결되는 건 아니지만 미국의 거대 영화자본들의 공격을 막아주는 방어막 역할을 해줬다.

당연히 미국 입장에선 1990년대 이래 스크린쿼터 제도 자체를 좋지 않게 여겼다. 본격적으로 문제가 제기된 게 노무현 정부 출범 뒤부터인데, 2003년 초부터 스크린쿼터를 없애야 한다는 의견이 관료와 국회의원들 사이에서 퍼졌다. 미국도 당연히 WTO 서비스분야 양자협상이나 한미 재계회의 등지에서 압력을 적극적으로 행사했다. 이에 영화인들과 시민사회단체가 7월 '영화인대책위원회'를 구성해 전면투쟁에 나서자 정부도 11월에 한발짝 양보했다. 문화관광부도 대안책으로 점유율과 연동해서 스크린쿼터 문제를 결정하자며 불씨를 살렸으나 이마저도 영화인들의 반대로 무산됐다. 그러나 정부는 2006년 1월 26일부터 한미 FTA를 앞두고 스크린쿼터를 146일에서 73일로 줄인다고 발표하자, 영화인들이 격렬히 반대운동을 전개했으나 이마저도 흐지부지됐다. 정부도 7월부터 스크린쿼터 축소를 시행했다. 굳이 스크린쿼터 축소 때문이라 단정할 순 없지만 이 때를 기점으로 한국 영화의 시장점유율은 40%대로 하락했으며, 여러 측면에서 한국 영화의 위기 징후들이 나타났다.

그 외에도 한국 영화계가 성장할 수 있었던 요인으론 국제적 위상 상승이다. 이 시기 동안 한국 영화계는 세계 유수의 국제영화제에서 수많은 수상작들을 탄생시켜 국제적 위상이 높아졌고, 외국인들도 한국 영화에 관심을 보여 세계 각국에서 한국 영화들을 활발히 수입하여 한국은 영화 수출국으로 점차 변모해나갔다. 이에 따라 한국 영화계도 흥행 외에 예술적 측면에도 집중하며 온갖 장르의 영화에도 관심을 지니는 긍정적 효과를 거뒀다. 또한 부산국제영화제 등 국제 영화제들의 성공적인 개최도 이에 한몫했다.

2003년에는 장준환 감독의 <지구를 지켜라>가 모스크바 영화제 감독상을,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이 산 세바스타인 영화제 및 토리노 영화제, 도쿄영화제 등을, <바람난 가족>도 스톡홀름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문소리) 및 촬영상, 플랑드르 국제영화제 감독상, 베르겐 국제영화제 최우수작품상을 각각 석권했으며, 전년도 작품 <집으로...>도 블라디보스토크 영화제 최우수작품상을 받았다. 2004년에 김기덕 감독이 <사마리아>와 <빈 집>으로 베를린영화제 및 베니스영화제에서 각각 감독상을 받았고,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도 칸 영화제 심사위원상을 받아 '3대 영화제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심지어 성백엽 감독의 극장애니 <오세암>도 프랑스 안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 대상을 받았다. 이 외에도 한국 영화들은 영화 319편이 해외 영화제에 824회나 출품돼 66개가 수상작에 올랐다. 같은 시기 한류 열풍이 불면서 일본에서 배용준, 최지우, 이병헌 등이 스타로 등극했고, 한국 영화가 일본에서 상영되기도 했다. 2007년에는 프랑스 칸 영화제에서 이창동 감독 작품 <밀양>에서 주연으로 열연한 배우 전도연이 여우주연상을 받았는데, 이는 1987년 <씨받이>의 주연 강수연이 베니스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지 20년만에 이룬 쾌거였다.

다만 위와 같은 한국 영화의 성공 뒤에는 그림자가 있는데, 초대형 성공작의 상영관 독점과 저예산 영화 등 다양한 영화들의 개봉기회 박탈, 안정적인 영화 제작/배급 시스템의 문제, 스크린쿼터 축소에 따른 부작용, 유명 스타들의 과도한 개런티와 제작비 상승, 묻지마식 투자와 제작 및 극심한 경쟁에 따른 수익률 저하, 영화 시나리오의 원천 콘텐츠 부족, 극장 수입과 DVD 판매 등에 의존하는 수익구조 등 적지 않은 문제가 산재해 있다.

이 시기를 대표한 영화배우 송강호, 최민식 등은 국민 배우 반열에 오르며 인기를 누렸다. 임권택, 강제규, 곽경택 등의 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반 이름을 날렸던 감독들에서 봉준호, 나홍진, 박찬욱 등 2000년대 중반을 대표하는 감독들도 끊임없이 발굴되는 등 인재풀도 상당했다.

80~90년대 최고 부흥기를 누렸던 홍콩 영화가 빠르게 몰락했던 이유는 영웅본색 이후의 양산형들로 인해 영화들 자체가 식상해진데다 1997년 홍콩 반환 때문에 홍콩 영화계 전체가 혼란스러워진 탓인데, 반면 90년대 말까지도 질적으로 암담했던[44] 한국 영화계는 쉬리 이후부터 이 시기에 대폭 성장하여 스릴러, 액션, 로맨스, 사극 등 장르의 다양성을 겸비하여 현재까지도 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그 외에도 2004년에 영화진흥위원회가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서비스를 시작해 종전에 극장별로 집계했던 관람객 집계시스템을 일률적으로 통일시켜 한국 영화산업의 투명성을 더 높이도록 했고, 같은 시기에 인터넷의 발달로 P2P나 웹하드를 통한 영화의 합법/불법공유가 성행하기 시작했으며 아마추어 자막러들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2009년 12월에는 외국영화 최초로 아바타가 천만관객을 동원했다.

4.9.2. 기타 국가

반지의 제왕, 해리 포터, 캐리비안의 해적, 스파이더맨 트릴로지, 다크 나이트 트릴로지, 트랜스포머 시리즈 등 수많은 시리즈물이 흥한 2000년대부터는 타이타닉 이후 명맥이 끊겼던 10억 달러 흥행 돌파 영화도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아바타는 무려 27억 달러라는 초대박을 벌었다.

선술한 다크 나이트의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은 이 영화는 물론 이전에도 메멘토, 인섬니아, 프레스티지 등 명작 내지 수작들을 연이어 탄생시켰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여전히 건재해 마이너리티 리포트, 캐치 미 이프 유 캔, 우주전쟁, 인디아나 존스와 크리스탈 해골의 왕국을 가져왔다. 이 외에도 잭 블랙(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 킹콩, 스쿨 오브 락 등), 크리스찬 베일(아메리칸 사이코, 다크 나이트 트릴로지 등) 등 신인 배우들과 짐 캐리(브루스 올마이티 등), 톰 행크스(터미널, 캐스트 어웨이 등) 등 유명배우들은 계속해서 영화에 출연해 다양한 작품들이 나왔다.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에서 드림웍스는 2000년대 후반까지 슈렉, 슈렉 2, 마다가스카 등으로 디즈니를 앞섰고, 픽사몬스터 주식회사, 니모를 찾아서, 라따뚜이, 월-E, 으로 최전성기를 맞았다. 지브리 스튜디오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벼랑 위의 포뇨, 하울의 움직이는 성 등 명작들을 대거 쏟아냈다.

4.10. 만화, 애니메이션

4.10.1. 대한민국

대한민국 만화계에선 출판만화 시장이 쇠퇴한 대신 실험 단계였던 웹툰이 발달했다. 2000년에 라이코스코리아가 최초로 무료 온라인 만화방을 개설한 후 '네이버 웹툰', '다음 만화속세상', '야후! 카툰세상' 등 후발주자들이 우후죽순 생겨났으며, 대원씨아이 등 기존 만화출판사들도 만화잡지를 줄이는 대신 '캔디33' 같은 유료 만화사이트를 열고 네이트 툰도시 등 포털사이트나 휴대폰 무선인터넷 등지에 유료로 콘텐츠를 공급하기도 했다. 학습만화계에선 <살아남기 시리즈>를 비롯해 <무서운 게 딱! 좋아!>,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 <Why? 시리즈>, <마법천자문>, <코믹 메이플스토리>, <보물찾기 시리즈> 등의 불후의 명작들이 쏟아져나왔다.

한국 애니메이션은 2001년에 동우애니메이션이 제작한 <유니미니펫>이 SBS를 통해 방영되면서 같은 방송사의 <포켓몬스터>의 시청률을 추월해 KBS2 <파워디지몬>에 이은 시청률 2위를 차지해 저력을 보였고, 이후 아이코닉스와 오콘 등 각 애니 제작사들도 용기를 내어 <올림포스 가디언>, <뽀롱뽀롱 뽀로로>, <선물공룡 디보>, <냉장고 나라 코코몽> 등을 제작해 중흥기를 맞이했으며, 2000년 <알렉스의 모험>을 시초로 해외 합작애니 제작 편수가 점차 늘기 시작했다. 특히 완구업체 손오공은 <탑블레이드> 한일합작을 계기로 애니메이션 제작 노하우를 쌓아갔다.

이 당시 나온 일본 애니메이션투니버스를 통해 활발하게 더빙 방영되기도 했으며, 무디 신동식을 필두로 신길주, 최방옥, 김이경 등 걸출한 더빙 PD들과 여민정, 시영준, 이용신, 신용우 등의 빼어난 자사 성우들이 활약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애니 제작사 대원C&A홀딩스도 2001년 자회사 대원디지털방송을 세워 과거 애니/특촬 제작과 수입, 캐릭터 판권 사업 등으로 축적된 역량과 콘텐츠를 바탕으로 2002년 '애니원', 2005년 '챔프'를 각각 개국해 투니버스의 독주를 견제하기 시작했고, 특히 대원은 애니 전문 PP업체로서 '일본 애니 자막방송'을 타 채널보다 먼저 시작했다. 2006년에 일본 애니채널 최초로 '애니맥스'가 한국에 진출했다.

거기에 니켈로디언이나 카툰네트워크, 디즈니채널 등 영미권 애니 채널들이 블록 등의 형태로 한국시장에 진출했고, 어린이 교육채널 재능TV대교어린이TV도 애니 편성을 늘려 다크호스로 급부상하기도 했다. 심지어 클럽박스프루나 등 인터넷 웹하드 및 P2P의 활성화로 합법/불법공유가 늘기 시작했다. 반면 지상파 방송국들은 2005년 7월 애니메이션 쿼터제 첫 시행을 계기로 애니메이션 시간대를 줄이고, 해외 애니 대신 국산 애니의 시간대 비율이 점차 커지다 2012년 쿼터제 적용 대상이 케이블 방송종합편성채널로까지 확대되면서 절정을 찍게 되었다.

4.10.2. 일본

일본 만화계에서는 1990년대의 전성기를 이어받아 <이누야샤>, <강철의 연금술사>, <하야테처럼!>, <레이브>, <금색의 갓슈> 등의 명작들이 나왔다. 특히 소년만화계에서 주간 소년점프가 <원피스>, <테니스의 왕자>, <나루토> 등에 이어 <블랙캣>, <블리치>, <아이실드 21>, <데스노트>, <은혼>, <디 그레이맨>, <가정교사 히트맨 REBORN!> 등을 연속으로 히트시켰으며, '원나블' 라인업도 이 때 편성되었다. 당시 잡지만화계에서 비주류였던 4컷 만화계도 <아즈망가 대왕>과 <딸기 마시마로> 등의 애니화 성공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애니메이션계에선 2000년대 초반부에는 <강철의 연금술사>, 2006년에는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 <오란고교 사교클럽>, <데스노트>, <코드 기어스: 반역의 를르슈> 등의 인기작이 연달아 나오며 일본 애니메이션의 황금기라고 불렸으며, 건담 시리즈에서는 <기동전사 건담 SEED 시리즈>, <기동전사 건담 00>의 연달은 성공으로 비우주세기가 부흥하게 된다. 2000년대 후반부에는 <러키☆스타>, 등의 흥행으로 모에에 치중한 애니메이션이 일본 애니메이션의 주류로 올라서게 되며 이런 경향은 2010년대에 더 커지게 된다. 반면 <아따맘마>나 <개구리 중사 케로로>, <프리큐어 시리즈> 등 대중적인 애니메이션들도 여전히 나왔다.[45] 극장 애니 분야에선 지브리 독주 속에도 신카이 마코토호소다 마모루 같은 신예 애니제작자들이 나왔다.

4.10.3. 영미권

영미권 애니메이션에서는 2000년대 초반부터 월트 디즈니 컴퍼니드림웍스 애니메이션, 블루스카이 스튜디오 등 후발 주자들과 지브리 등 일본 애니의 약진으로 쇠퇴를 거듭해 2004년 <카우 삼총사>부터 2009년 <공주와 개구리> 이전까지 2D 애니메이션 제작이 중단됐고, 대신 픽사 합작 애니가 상승세를 더하는 기현상을 보여주었다. TV 애니계에선 니켈로디언이 <네모바지 스폰지밥>[46], <티미의 못 말리는 수호천사>, <도라도라 영어나라>, <천재소년 지미 뉴트론>, <대니 팬텀>, <아바타 아앙의 전설> 등을 히트쳤고, 카툰네트워크도 <벤10> 등으로 건재를 과시했다. 영미권의 히어로물들은 예나 이때나 인기도가 매우 높았다.

4.11. 게임

2004년 E3 당시 닌텐도 DS 발표영상
한국 PC게임계는 단연 '온라인 게임의 황금기이자 독무대'라 할 수 있는데, 1999년 ADSL 보급으로 인터넷이 대중화됨에 따라 온라인 게임이 기존 패키지 게임과 ARS 게임 시장을 압살했으며, 특히 게임업체 중 넥슨-한게임(NHN)-넷마블(CJ인터넷) 3파전이 가장 주목을 받았다. 이 외에 네오위즈, 엠게임, 윈디소프트, 구름인터랙티브, 이플레이온, 라온엔터테인먼트, 나우콤, KTH(파란), SK커뮤니케이션즈, 조이온, 그라비티 등 국내외 CD 게임개발사나 포털업체 등 후발주자들도 온라인 게임시장에 뛰어들어 각축전을 벌였다.

닌텐도의 경우 게임큐브 때 암흑기를 겪었으나 닌텐도 DSWii를 통해 부활했고 이 시대에 출시된 신작들은 전작들에 비해 저평가를 받아 왔던 시대였고, 마이크로소프트엑스박스 시리즈엑스박스 / 엑스박스 360이 등장하여 많은 인기를 얻었다. 소니플레이스테이션 시리즈의 경우 초중반의 전성기중후반의 암흑기를 동시에 겪었던 시대다.

2000년 일본문화 3차 개방 후 일본산 게임 수입이 허용되어 2002년 들어 소니컴퓨터엔터테인먼트코리아와 한국마이크로소프트가 플레이스테이션 2 등 해외 게임기들을 정발하기도 했다. 반면 닌텐도는 2002년 대원씨아이를 통해 게임보이 어드밴스, 게임큐브, 닌텐도 DS 등을 수입했으나, 한글화 미비에 경쟁사들의 텃세, 온라인 게임들의 인기 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2006년에 콘솔 수입권 등을 신설법인 한국닌텐도에 넘겼다.

5.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

근미래 배경의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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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시기에 제작된 작품들 제외. 가상역사/SF물인경우 ▼.

6. 이 시대에 시작되거나 만들어진 것들

7. 이 시대에 쇠퇴한 것들

이전 시대에 나와 지속적으로 쓰인 것들을 적을 것. 가나다순으로 정렬한다.

7.1. 세계

7.2. 대한민국

8. 사건 사고

8.1. 한국

8.2. 기타 국가

9. 2000년대에 들어가는 해

10. 참고/관련 문헌


[A] 2000년[B] 2001년~2009년[A] [B] [5] 그래서 2000년은 2000년대에 포함되는 해 중 유일하게 21세기가 아닌 20세기에 포함되는 해이다.[6] 그러나 2000년에 시행한 밀레니엄 행사에는 그리니치 천문대의 주요 인사들도 참가했다.[7] 네이버 지식백과 21세기의 시작 (매일경제, 매경닷컴)[8] 2008년 11월에 찍은 영상이며 모두가 앞을 주시하면서 걷는 모습과 지하철 입구쪽에 설치된 신문 보관함을 보면 당시에는 지하철 무가지가 전성기를 누리던 시기이면서 스마트폰이 보급되기 전 시대임을 알 수 있다.[9] 사실 1960년 8월~1961년 5월까지 9개월 가량 집권했던 장면 내각 진보정부가 있었지만 집권기간이 너무 짧았기 때문에 사실상 이 때를 최초로 본다.[10] 대선 2번, 총선 3번, 지선 2번[11] 경제성장률 7%, GDP 4만불, 세계 7대 경제대국 입성이 목표였다.[12] 사실 이건 당시 상대 후보였던 이회창이 6% 성장을 공약으로 내걸자, 노무현이 즉흥적으로 1% 더 올려 7%로 공약을 낸 것이었다. 사실 대선 당시인 2002년 성장률이 7%를 넘긴 했지만, 이건 월드컵 특수로 인한 예외적인 결과였고 참여정부 출범 첫 해인 2003년에는 다시 추락했다. 훗날 노무현도 퇴임 연설에서 7% 성장률 제시는 실수였다고 간접적으로 언급하기도 했다.[13] 현재의 4050들이 젊은 시절이었다.[14] 출생아수 통계 집계가 시작된 1970년 이래 유일하게 50만 명대 이상을 기록한 해였고, 출산율도 1.3명을 초과한 것과 더불어 출생아 수가 절반 이상을 유지했기 때문에 이때까지는 비록 출산율이 떨어졌지만 초저출산 수준만큼 하락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 있어서 이전의 인구 영향이 어느정도 유지된 마지막 해로 평가한다.[15] 서울의 경우, 7월은 매년 흐렸고, 대부분의 해가 일조시간이 100시간을 넘지 못했다. 특히 2006년에는 34.3시간으로, 낮의 길이까지 감안하면 맑은 날이 3일이 채 되지 않을 정도로 낮았다. 이렇게 적은 일조시간 추세는 2011년까지 이어졌다.[16] 특히 2007년에는 서울 기준 무려 4.0℃를 기록했다. 당연히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는 역대 1위 기록이다.[17] 이때 국가의 구제금융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그대로 놔두고 파산하게 두다가는 나라가 망할 수 있어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는 평도 있다.[18] (2000~2009)일본과 주요국가의 명목 GDP 흐름[19] 언급된 기업들은 다들 1990년대 말에 설립되긴 했지만, 대중들의 인기를 얻고 대형 기업이 된 건 2000년대 중반 이후이다.[20] 한국에는 2011년 ~ 2013년 사이부터 본격적으로 스마트폰이 대중화되기 시작하여 각 거리 풍경이 스마트폰을 보는 풍경으로 180도 뒤바뀌어 현재에 이르게 된다.[21] 90년대 즈음이 되면 '디지털'로 분류될 물건들이 슬슬 나오던 시기이다. 정리하자면 90년대는 아날로그가 여전히 우세한 가운데 디지털화가 시작되는 시기, 2000년대는 디지털로 대체되어가지만 아날로그가 제법 남아있던 시기 정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아날로그 아이템들의 쇠퇴에 쐐기를 박은 것이 스마트폰을 필두로 한 스마트 기기인 셈.[22] 벽초 홍명희 선생의 손자.[23] 마이클 잭슨의 사망은 인터넷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건으로 기록되었다.[24] 물론 디지털 시장도 유튜브의 엄청난 성장과 스포티파이등 스트리밍 서비스의 성장으로 2010년대 후반에 들어서서는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25] 1세대 아이돌의 대표주자로 불리는 H.O.T.는 2001년 2월 해체, 젝스키스 2000년 5월 해체했다. 1세대 걸그룹으로 불리는 핑클과 S.E.S의 경우 S.E.S는 2002년 12월 19일 해체했고, 핑클은 공식 해체는 하지 않았지만 2002년 이후 완전체로서의 활동이 전무해 사실상 해체와 다름없는 상태가 되었다.[26] 소위 소몰이창법으로 유명한 R&B 색깔이 가미된 웅장한 발라드[27] 팬티엄 3에서도 메모리빨로 재생된다는 소리가 있다.[28] 이때는 720P영상을 제대로 돌리기가 어려웠고 대다수 영상들은 아날로그 방송을 녹화하거나 480p급으로 다운스케일링을 해서 시청하였다. 이건 당시 나왔던 DVD디코더의 영향도 있다. 본격적인 720P 동영상 열기는 NVIDIA Geforce 6시리즈와 ATi Radeon R400계열의 보급, 유튜브의 등장과 함께 이루어졌다. 그리고 컴퓨터의 성능상 720p동영상만 재생이 가능했지만 2010년쯤 인텔 코어i 시리즈가 출시되자 1080p동영상도 재생할 수 있었다.[29] 디지털방식 말고도 HDReady라고 디지털방송은 지원하지 않지만 HD영상은 지원하는 TV도 판매되었다.[30] Multi Mod Service의 약자, 유럽에서는 Multiplex를 줄여서 MUX라고 한다.[31] 개발까진 아니고 DAB를 뜯어 고친거다.[32] 2002 한일월드컵 당시에는 휴대폰에 DMB는 물론 없었으며, 절반 이상의 사람들이 흑백 화면이 달린 휴대폰을 사용했었다. 즉, 2002년에는 아무데서나 볼 수는 없었던 셈[33] 당장 위에 언급된 대표작들 중 상당수가 위의 요소들이 하나 이상씩은 꼭 들어가 있다. 특히 천국의 계단, 미안하다, 사랑한다 등이 이러한 특징이 강하게 나타나는 드라마다.[34] 특히 이 노래는 오늘날까지도 노래방 애창곡으로 손꼽힌다.[35] 물론 예능으로 짜고 쳐서 상대방을 선택한 것이므로 오해하지 말 것.[36] 과거 2002년에 KBS 방송국에서 방영된 '공포의 쿵쿵따'에서 유재석이 강호동과의 딱지치기에서 연속으로 이기며, 강호동의 열등감을 부추기게 되고, 강호동은 자신이 이판에서 지게되면 진 사람은 서로 마주칠 때마다 딱밤 맞기 즉, 유재석과 함께 촬영할 때마다 영원히 유재석에게 딱밤을 맞겠다며 조건을 걸게된다. 결과는 유재석의 승. 이후로 유재석과 강호동은 같은 프로그램에 안나오고, 서로 경쟁프로그램의 MC 자리를 맡게된다. 무한도전과 1박2일이 경쟁프로그램이 된 이유는 MC들과의 경쟁이 가장 큰 원인이였던것 같다.[37] 진짜 의미가 없었던 것이, 무한도전은 토요일에 방영되었고, 1박 2일은 일요일에 방영되었다.[38] 물론 그 전에도 일본 스타일은 한국에 영향을 주긴 했지만 대중문화 개방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영향은 한정적이었다.[39] 교복바지와 치마는 2000년대 초~중반에도 이미 일진이나 패션에 관심 있는 학생들은 딱 붙게 줄여 입었다. 교복은 한창 성장기인 청소년 특성상 일진이 아닌 일반 학생들은 좀 크게 맞추는 경우가 일반적이라 반대로 통을 바짝 줄이는 것이 '특별'하기 때문.[40] 일명 소시지(소녀시대+gee)룩.[41] 이 투명 메이크업의 창시자는 정샘물이다.[42] 일자로 그린 눈썹, 눈꼬리를 쭉 내려서 그린 검은색 아이라인, 빨간색 틴트가 특징이다.[43] 이 사진에 대한 이야기는 올드보이(2003) 문서 참고.[44] 그 당시 국내 영화는 사전검열 등 여러 요인으로 창작의 폭이 좁은 탓에 대중들 사이에서 극장에서 돈주고 보기 아깝다는 정서가 만연 했을정도로 인식이 안 좋았고, 왕가위같은 홍콩 영화 스타일을 표절할만큼 수준 저하가 심했다.[45] 하지만 2000년대 후반 들어 아동용 애니나 대중적인 애니가 감소한 것도 사실이다.[46] 시작 자체는 1999년이지만 2000년대에 더 큰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여기 언급된 TV애니들 중 가장 오래 방영된 애니다.[47] 고증 오류가 있어 2007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도 하다.[48] 게임보이 어드밴스의 뒤를 잇는 2000년대 휴대용 게임기의 대표 선두주자였다.[49] 2008년에 개봉한 아이언맨(영화)이 시작이다.[50] 당시 대한민국에서는 다모임, 엠군, 엠엔캐스트, tv팟, 판도라TV 등 국산 동영상 사이트가 대세였다.[51] 2년 전인 1998년 안산 경원여객에서 먼저 시험 도입한 적이 있었으나, 2000년 서울시에서 대대적인 보급을 시작하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52] 다만, 자가용만 해당됨. 자가용 외 모든 영업용은 지역명이 여전히 표기됨[53] Windows 2000, Windows XP[54] 기사[55] 2006년 내장재 개조 이후에 2호선 초기형 멜코초퍼는 4량이 가연재였고, 2호선 초기형 GEC초퍼는 2량 또는 8량이 가연재였으며 3호선 초기형 GEC초퍼는 6량이 가연재였다.[56] 기사[57] 기사[58] 기사[59] 기사[60] 현재로 따지면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시대에 일부 폴더폰을 사용하는 어르신이 있다면 2007~2008년까지는 폴더폰과 슬라이드폰을 대중적으로 사용하는 시대에 일부 중장년층은 안테나 폰을 사용한 것이다.[61] 대표적으로 요정 컴미, 매직키드 마수리에일리언 샘이 있다.[62] 2002 월드컵 은행도 주택은행이 선정되었으나 국민은행으로 이관되었다.[63] 일본과 서양권 시장은 콘솔이 주류다.[64] 2004년 CBS <60 Minute>를 통해 처음 폭로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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