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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씨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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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b31c31> 상징 국기(일장기) · 국가(기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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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1945년(민족말살통치)
정치 조선총독부(청사) · 토지 조사 사업 · 헌병경찰제도 · 산미증식계획 · 국가총동원법 · 내선일체 · 창씨개명 · 농촌진흥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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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특징3. 배경4. 진행
4.1. 강제성4.2. 창씨개명의 주요 불이익4.3. 친일고위층은 거부한 창씨개명4.4. 광복 이후
5. 목적
5.1. 대내외에 밝힌 목적5.2. 실제 목적
5.2.1. 단순한 일본 이름 갖기가 아니다
6. 조선인들이 보인 반응7. 논란
7.1. 부정론
7.1.1. 반론
8. 사례
8.1. 창씨개명의 예외8.2. 성씨별 창씨개명 상황8.3. 저항 사례
9. 유명 인물의 창씨개명 목록10. 해외 사례
10.1. 독일계 미국인들의 개명
11. 유사 사례
11.1. 강요 차원11.2. 자발적인 개명 차원11.3. 번역 차원
12. 한국13. 번역상의 표기14. 참고 문헌

1. 개요

언어별 표기
한국어창씨개명
일본어[ruby(創, ruby=そう)][ruby(氏, ruby=し)][ruby(改, ruby=かい)][ruby(名, ruby=めい)](소시카이메이)
조선총독부에서 조선인으로 하여금 일본식 씨(氏)를 창설하고 일본식으로 개명하게 함으로써 일상생활 전반에서 조선식 성명 대신 일본식 씨명(氏名)을 사용하도록 정책적으로 강요한 일을 말한다. 교과서에서는 이해가 쉽도록 '일본식 성명강요'(日本式 姓名强要)라고도 하지만 역사학계에서는 창씨개명이라고 부르며 이쪽이 정책의 본질을 더욱 잘 나타내는 명칭이다.[1]

2. 특징

조선의 성명(名)을 일본식 씨명(名)로 바꾼 것이므로 창씨(氏), 즉 '씨'를 창제하는 일이 된다. 물론 개명(改名)이란 말을 보고 알 수 있듯 이름(名) 역시 함께 개명했다. 다만 창씨만 의무였고 개명은 자유였기 때문에 창씨만 하고 개명은 안 한 사람도 많았다.

이처럼 일본의 귀족 및 무사 계급은 원래 앞에서 언급한 4대 성씨인 후지와라나 미나모토 등 성을 가진 일족의 후손들이 각자가 소유한 장원이나 저택의 지명을 따서 각각 씨명을 정하는 식으로 성과 씨를 구분해 사용했다. 예를 들어 센고쿠 시대의 유명한 무가 다케다 가문은 가문의 시조가 소유한 장원이 위치한 곳이 히타치노쿠니에 있던 다케다 장(竹田莊)이었기 때문에 스스로 다케다 씨를 자처했다. 성과 씨의 차이 때문에 일본인은 예컨대 처가의 가업을 잇기 위해 사위가 씨를 바꾼다든지 하는 문제에 대해 한국보다 훨씬 덜 민감하다. 한국과 달리 씨를 바꾼다는 것에 조상을 부정한다는 의미가 훨씬 적기 때문이다.[2]

이후 메이지 시대에 와서 신분제 폐지 등 개혁의 일환으로 성 제도는 폐지되고 씨만을 사용하게 되면서 이전에는 성과 씨를 쓸 수 없었던 평민들에게도 씨가 부여되었다. 이때 씨의 개념을 조상의 근원을 나타내는 이름이 아니라 '한 가정(戶)의 구성원을 나타내는 이름'이라는 개념으로 보면서 한 가정의 구성원은 모두 씨를 통일시켰고 그래서 시집온 부인은 중국이나 한국처럼 본래 성씨를 쓰지 못하고 서양처럼 남편의 씨를 따른다든지, 반대로 데릴사위로 들어간 신랑은 처가의 씨로 개성한다든지 하는 일본식 부부동성 제도가 확고해졌다.

일본에선 성은 가문의 이름, 씨는 가문이 소유한 땅의 이름을 의미하기에 성은 덴노가 내리는 관직명의 개념이라 조선 사람들이 평민들도 전부 성을 갖고 있는 걸 되게 못마땅하게 봤다는 설도 있다. 성은 출생의 혈통을 나타내는 집단의 호칭이고, 씨는 동일 혈통의 사람들이 각지에 분산될 때 각 지역에 분산된 일파를 표시하기 위한 표지이다. 즉, 씨는 핏줄이 아니라 땅과 연계되어 있는 개념으로, 한국의 본과 유사하다. 한국의 성은 본을 필수요로 하여 각 성마다 한 개 이상의 본관이 있고, 성과 같더라도 본이 다르면 동족으로 보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국은 성과 이름을 성명이라 하는데 비해, 일본은 씨명(시메이)이라고 하는데, 일본의 씨는 지명에서 따온 경우가 많다. 일본은 성씨체계가 훨씬 복잡하고 개명이나 창씨도 흔했으며, 현대 대부분의 일본인은 성이 없고 씨만 있다. 묘지의 지가 씨를 일컫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하시바까지는 단순 씨고 성은 없는 상태였다가 고노에가의 양자가 되면서 고노에라는 성을 얻고, 천황한테서 도요토미 성을 받으면서 도요토미가 된다. 일본은 1870년까지 사무라이 아래 계급에서는 성씨를 가질 수 없게 하다가, 메이지 시대인 1875년에 '성씨 의무령'에 따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씨를 갖게 되면서 출신지의 지명이나 지형적 특징을 씨로 정한 것이 많아 한국이나 중국과는 그 역사적 의미가 사뭇 다르다.

3. 배경

그 기원은 1890년대 일본에서 메이지민법(明治民法)의 제정을 통해 폐성창씨(廢姓創氏)를 이뤄낸 이토 히로부미와 우메 겐지로(梅 謙次郎) 교수가 새로운 식민지가 될 조선의 새로운 민법을 구상하던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둘은 조선의 서구 문명화를 구실로 조선의 성 제도를 폐지하고 일본처럼 씨 제도로 바꿀 계획을 구상했는데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당하고 우메 교수도 급사하면서 이 계획은 흐지부지 되었다.

일제가 조선을 병탄한 후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정서 상, 일본식 성명을 강제하면 매우 위험하다'고 여겨 이를 시행하지 않다가 1919년에 창씨정책 시안을 수립했지만 얼마 후 3.1 운동(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 이 계획은 유보되었으며 이후 일본은 1923년 조선민사령을 통해 조선의 호적을 일본식 이에(家)를 중심으로 하는 일본식 호적제도로 개편했고 1929년에 다시 2안을 수립하는 등 재차 창씨개명을 시도했지만 본국의 만류로 그만두었다.

그러나 일본 입장에서도 조선인에게 일본식 이름을 부여하는 것에 대해서는 논쟁이 매우 많았다. 물론 도덕적, 인도적인 관점에서 반발한 것은 절대 아니고, 조선인이 일본식 성씨를 쓰고 일본에 동화되는 것, 즉 조선인이 일본인과 동등한 지위, 동등한 시민권을 가질 수 있다는 데 거부감을 표시한 것이다.# 무엇보다 조선인과 일본인은 같은 동아시아인이라 외형만으로 구분하기 어려워 조선인과 일본인이 섞여 순수 일본인이 사라질 것이라는 공포감이 있었다.[3] 실제로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에는 "15원 50전(じゅうごえん ごじっせん)"과 같은 구절을 말하도록 시켜서 어두에서 탁음 발음 가능 여부를 악용조선인을 구별하여 학살했다.[4] 이렇게 문화적 차이를 이용하지 않으면 조선인과 일본인을 구분하기 어려웠다는 뜻이다. 성명까지 일본식으로 바꾸고 호적을 교체한다면 더욱 조선인과 일본인을 분간하기 어려워진다.

이 때문에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은 구분을 위해 조선인이 일본식 성명을 쓰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였다. 1910년대에도 몇몇 친일파들이 일본에 충성한답시고 일본식으로 개명 신청을 하고 일부는 자식이 태어나자 일본식 이름을 지어 호적에 올리려고 했지만 당연히 이 자들도 예외 없이 퇴짜를 맞았다. 이는 식민통치 당시 일본인이 1등 신민으로서 조선인보다 우월한 지위를 차지해야만 했고 그런 만큼 적용되는 법률이나 형벌 등도 차별화되었기 때문이다. 일본 내에서 그런 입장의 반발이 점차 사라지고 일제 정책이 조선인의 일본인과의 확실한 동화, 즉 내선일체 정책으로 굳어진 것은 최소한 1930년대 이후의 일인데, 이때조차도 보수적인 일본인들은 내선일체 정책에 반감을 가진 경우가 적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그렇게 일본 내부에서의 내선일체 정책의 반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니토베 이나조 도쿄제국대학 교수를 필두로 조선의 점진적 동화를 주창하는 입장 또한 지속되어 왔다. 이들은 기존 무단통치의 가혹함이 오히려 조선 지배에 악영향이 됨을 지적하고 조선에 유화적인 통치를 펼쳐 조선인들이 자발적으로 일본을 우러러보게 한 다음 아예 일본인의 일부로 동화시켜 조선을 내지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을 2대 정무총감 미즈노 렌타로(水野 錬太郎) 등이 실정적으로 채택했으니 이것이 바로 문화통치다.

하지만 동시에 일본에서는 '식민지에도 자치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분화운동 역시 격렬히 제기되었고 이에 따라 동화와 자치를 동시에 추진하는 '자주협동정책'을 펼쳤다. 이는 과거 프랑스의 식민지배 방식인 연합주의를 일본 나름대로 벤치마킹한 것이었다. 프랑스도 열강 진입 초기에는 식민지에 강제적인 프랑스 동화를 강요했으나 격렬한 반발로 통치가 더 어려워지자 나중에는 동화와 거리를 두는 영국식 통치와 기존의 방식을 절충, 즉 자치와 동화의 병행 정책으로 노선을 틀었기 때문이다.

1930년대에 이르러 민족 말살 통치기로 접어들면 점진적 동화 정책이 사그라들고 본격적으로 일본이 야욕을 드러내더니 급진적 동화 정책으로 선회하였다. 1935년 일본의 국정교과서들은 조선인대만인일본인이라고 표기하는 등 이전보다 더욱 노골적으로 동화의 의지를 표명했다. 물론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침략의 정당성과 명분을 확보하기 위한 위선에 불과했다.

가령 관동군이 세운 괴뢰국의 사관학교였던 만주국육군군관학교에서는 당대 만주국에 국적법이 없음에도 일본인은 일계(日系), 조선·중국·대만인은 만계(滿系)로 구분하여 차별했다. 창씨개명과 다른 문제이긴 하지만 첨언하자면 물론 만주국육군군관학교에서 일본인과 다른 민족을 아예 별도로 구분해서 식사시간에조차 서로 마주칠 일이 없을 만치 분리교육을 했다. 이후 조선인 학생들이 항의하자 조선인을 중국인과 분리하여 일본인과 함께 일본인으로서 교육받도록 하였다.

조선인과 대만인에게 창씨개명을 시행하는 절차와 방법 등은 식민지 관습의 특수성에 의해서 영향을 받았다. 조선총독부는 1910년대 후반부터 조선인에게 일본 민법의 씨 제도를 시행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조선인들의 반발과 전통적인 가족제도와의 충돌 때문에 쉽게 법제화하지 못하였다. 이에 비해서 대만총독부는 1930년대 초반부터 행정기관과 사법기관 등을 동원하여 대만의 ‘家’를 일본 민법에 맞게개편하고 더 나아가 대만인의 姓 관습이 일본 민법과 동일하다고 선언하는 등 일본의 씨 제도를 사실상 시행하였다. 대만이 조선보다 씨 제도를 일찍 시행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는 대만 姓 관습이 일본 민법으로 전환하기에 좀 더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에서는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본정부가 각 식민지에 대하여 인적․물적동원을 강하게 요구하면서 창씨개명을 시행할 수 있는 사회적․정책적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조선총독부는 1939년에 조선민사령 제11조를 개정하여 조선인들에게도씨 제도 시행을 법으로 강제하고 더 나아가서는 일본인식 씨명으로 변경하도록 행정적으로 단속하였다. 조선총독부가 씨 제도와 함께 일본인식 씨명도 조선인에게 강요하자 대만총독부도 일본인식 씨명의 사용을 허가하였다. 다만, 조선과는 다르게내부적으로는 허가조건을 마련하여 일부의 대만인들에게만 일본인식 씨를 사용하도록 하였다.

조선과 대만에서는 씨 제도의 시행시기와 방법 등에서 차이가 있었고 일본인식씨명의 시행 방법도 큰 차이가 있었다. 대만에서는 씨 제도를 신관습이라는 이유로별도의 입법절차도 없이 시행하였고 또한 일정한 조건을 충족한 자들에게 일본인식의 개성명을 허가하였다. 이에 비해서 조선에서는 법적 수단을 동원하여 강제적으로씨 제도를 시행하고 일본인식으로 씨명을 개정하도록 단속하였다.

조선과 대만 구관의 차이와 함께 각 총독부의 관습법 정책의 차이 등에서 비롯되었다. 대만총독부는 신관습 정립의 방법으로 일본 민법의 제도를 대만인에게 이식하려 했으나 조선총독부는 일본 민법을 직접 의용하는 방식을 선택하였다. 따라서 대만의 경우에는 대만 구관에 영향을 받아서 일본 민법도 일정하게 변형하여 시행하였으나 조선은 일본 민법의 조항을 그대로 시행하였다.

4. 진행

1936년 8월 전 육군대신이자 관동군 사령관인 미나미 지로가 7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천황이 조선에 방문해도 좋을 정도로 조선의 치안을 안정시키며 조선인들에게 천황 숭배 사상을 가지도록 정신을 개조하여 '충량한 황국신민'으로 만드는 것과 조선에 징병제를 실시하고 조선 청년들에게 일본의 국방의 의무를 다하도록 교육의 확보를 목표로 삼았다. 그는 부임 직후 일본어의 생활화와 천황 숭배(궁성요배)를 방해하는 다른 종교들을 탄압했으며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보다 강경책을 펼쳐 조선 내부의 독립운동 세력을 완전 독립과 자치, 좌와 우를 가리지 않고 때려잡아 조선의 표면적인 안정화를 가져왔다. 미나미 지로는 황민화와 징병을 기반으로 한 동화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1937년 10월 황국신민서사가 발표되었고 조선인들에게 신사참배를 의무화시켰다. 1938년 2월에 지원병제를, 4월에 조선어의 상용 및 교육 금지 정책과 더불어 일본어 보급 정책을 폈다. 5월에는 일본의 국가 총동원령을 조선에까지 확대했다. 그리고 조선인의 천황에 대한 충성심 고취와 완전한 일본화를 통한 사법 행정의 일원화와 징병 및 국가 자원의 동원을 완성하기 위해 조선에 조선식 성씨를 폐지하고 일본식 성씨를 새로 만드는 폐성창씨(廢姓創氏)를 강요했다. 총독부는 이 정책이 차별을 완전히 철폐하게 만들 것이라 말했고, 그 증거로 일본식 이름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대대적으로 홍보했지만 극도의 반발로 '폐성창씨'의 대체어로 '개성명(改性名)'이란 용어를 대신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한편, 대만도 폐성창씨가 시행됐지만 일본 입장에서 대만은 조선에 비해 중요도가 떨어졌고 일본 본토와도 거리가 먼 곳이었기 때문에, 굳이 본토 일본인들의 반발을 감수하면서까지 적극적인 폐성창씨를 추진하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대만인은 조선인과는 다르게 허가를 받은 사람만이 일본식 성씨를 가질 수 있었다. 즉, 조선에선 치욕으로 여겨졌던 폐성창씨가 대만에선 일종의 특권으로 여겨졌고, 초기에 시행률이 매우 저조했었던 조선과는 달리 대만에선 일본식 성씨를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대만은 꽤 엄격한 자격을 필요로 하는 허가제였기 때문에 1944년이 되어서도 2%만이 폐성창씨를 했었다.)

목표 달성을 위해 일본은 먼저 조선의 지식인층을 겨냥해 수양동우회 사건흥업구락부 사건을 일으켜 좌우익을 망라한 조선의 수많은 지식인을 체포하고 고문을 거듭하면서 천황과 국가에 충성하는 황국신민이 되겠다는 전향서를 쓸 것을 강요했다. 매 앞에 장사 없다고 이광수를 비롯한 수백 명의 지식인이 사상 전향서를 쓰고 나서 겨우 풀려났다. 하지만 고문에도 불구하고 전향을 거부하고 구속된 조선 지식인들은 "조상을 욕되게 하는 폐성창씨를 강할 바에 차라리 우리들을 죽이라"고 미친 듯이 반발했다. 이들 대다수가 자존심이 강한 지식인들이었으니 일본식 성명의 강요가 더욱 치욕이었을 것이다. 이들의 반발에 놀란 조선총독부 경무국[5]미나미 지로에게 "일본식 성명을 강요하면 대규모 폭동(大規模な暴動)이 일어날 것이니, 일본식 성명을 강요하는 것을 불가능하다"는 보고서를 올렸다.

끝내 일본은 조선식 성을 완전히 없애는 것이 아니라 일본식의 새로운 성씨를 부여하는 것에 그치는 창씨개명으로 후퇴하는 수밖에 없었다.[6] 그렇게 1939년 11월 10일 제령 19호와 20호를 통해 창씨개명의 방침을 발표했으며 이는 1940년 2월 11일 기하여 효력을 발휘했다. 조선총독부는 기존의 '관습적 성명'과 더불어 일본식 씨명을 등재하고 일상생활에서 씨명을 쓸 것을 명령했다. 이렇게 호주의 아내와 어머니에게 집안의 성과 다른 성이 허용된 것과 달리 여자들에게도 같은 씨가 강요되었다.

조선총독부는 "6개월 안에 호주(戶主)가 의무적으로 창씨를 해야 한다"고 압력을 넣었다. 만약 호주가 응하지 않아도 직권창씨라고 하여 이름을 강제로 바꿀 계획이었다고 한다. 모든 조선인들은 제령 19호에 따른 법정창씨에 해당됐다.

총독부에서는 미나미 지로 총독의 부임 이래로 오랫동안 창씨개명을 준비해서 건국기원절[7]인 1940년 2월 11일에 맞춰서 6개월 시한을 주고 각자 스스로 창씨하라고 집중 광고를 때렸다. 총독부는 창씨개명 절차를 매우 편리하게 해 주었고 비용도 깎아 주었다.

총독부는 매우 느긋한 태도로, 조선인들이 열화와 같이 호응하며 엄청나게 신청하리라 예상하고 현장 격려 공문까지 발송했다. 하지만 2월 11일 하루 경성부에서 창씨개명한 사람은 고작 48명이었고 12일에도 겨우 43명에 불과했다. 12일 창씨 신고를 한 주요 인물로는 이광수, 이승우, 이원보, 조병상, 윤갑병, 최지환 등이 있었다. 예상보다 말도 안 되게 적은 수치에 총독부는 발칵 뒤집혔고 기존의 느긋한 태도를 버리고 전국의 유지, 지식인들에게 "모범을 보이라"고 갈구면서 창씨를 유도했지만 2월 말까지 창씨 비율은 겨우 0.26%였고 2달이 지나도 1.07%에 그쳤다.

전국의 유림문중의 강력한 반발로 접수율은 터무니없이 낮았고[8] 시한의 절반이 지난 5월 20일까지 창씨개명을 한 가구 수는 조선 전체 428만 2754가구 중 고작 32만 6105호(7.6%)에 불과했다. 당시 별 창씨개명 비율은 경상북도[9] 22.8%, 충청북도[10] 12%, 충청남도[11] 9.6%, 평안북도 7.7%, 경기도[12] 7.1%, 평안남도 6.7%, 황해도[13] 6.1%, 강원도[14] 5.5%, 경상남도[15] 4.8%, 전라남도[16] 4.6%, 함경북도 3.7%, 함경남도 3.6%, 전라북도[17] 1.8% 순이었다.
인천공립중학교의 반도출신 학생은 현재 66명으로 그 중 3분의 1은 창씨개명을 마쳤으나 나머지 3분의 2가 아직 완료되지 않았기 때문에 카지와라 교장은 내선일체 강화에 대비하여 이 제도의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적극적인 지도를 하여 늦어도 이달 중으로 완료할 것이며, 이와 동시에 인상창영, 송림, 야마토, 야마토, 츠루츠키, 쇼와, 다이쇼, 타이쇼, 기타 각 공립, 사립학교에서도 각각 지도를 철저히 하기로 하였다.
조선신보 1940년7월13일
창씨개명 제도가 발표되고 나서 교장선생님은 5분간 창씨개명의 중대한 의의를 설파하셨고, 그 결과 거의 모든 교직원과 학생들이 창씨개명의 기쁨을 경험하게 된 것은 정말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조선은 지금까지 같은 성씨가 많아 예를 들어 이씨, 김씨와 같은 성이 많아 곤란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왕이면 이 기회에 품위 있고 가급적이면 모두 같은 성씨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우리 학교 관계자들은 여러 가지로 고민이 많았습니다만, 어쨌든 창씨개명이 눈에 띄게 된 이 기회에 우리들은 마음을 새롭게 하여 황국여성으로서 재출발하고자 합니다.
경성일보 1940년8월 19일

이런 엄청난 무반응에 열이 뻗친 총독부는 강제로 창씨개명을 밀어붙여 나머지 3개월 동안 300만 가구를 창씨개명시켰다. 이당시 분위기는 그야말로 속도전을 방불게 하였는데 마감기한을 정해놓고 이장이 사람들을 불러서 이름을 부르면 서류에 적거나 교회, 학교, 가정방문을 통해 적절한 지도를 한다고 언급되어있다. 아예 5월 9일에는 창씨개명에 반대하는 반동적인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태형을 집행하는 일도 있는 자원아닌 자원이었다. 이에 따라 창씨개명 업무가 종료된 1940년 8월 10일에 집계된 통계로는 전체의 80.3%인 320만 116가구가 창씨개명이 완료되었다고 한다. 1940년 12월 법무국 조사과에 따르면 도별 창씨 호적수의 비율은 평안북도 87.3%, 강원도 85.0%, 충청남도 84.4%, 경상남도 84.3%, 경상북도 83.8%, 함경남도 83.5%, 전라남도 80.8%, 경기도 79.0%, 황해도 77.9%, 평안남도 77.3%, 전라북도 76.5%, 충청북도 70.5%, 함경북도 64.6% 이었고 전체 400만 8925가구[18] 중 80.5%인 322만 8931가구가 창씨를 완료했다. 그 이후로도 창씨개명 신청을 받아 1941년 81.5%로 늘어났다. 당시 신문들은 경쟁적으로 "xx군 oo% 달성!" 식으로 창씨개명을 독려하는 내용을 연일 선전하며 조선중앙텔레비죤을 방불게하는 내용들로 채워졌고 총독부의 강제력을 매우 절실히 입증했다.

4.1. 강제성

북지화북교통공사와 화북전자유한공사 양사에서 반도인 신입졸업생을 알선해 달라는 신청이 총독부 학무과장에 접수되어 재직 중인 전문학교 이상 학교의 올 봄 졸업생을 엄선한다. 성대 1명, 경성고상 2명, 보성전문 1명, 총 4명을 추천하여 양사 모두 흔쾌히 승낙하며 채용조건은 창씨개명을 제1조건으로 채용 후 내지인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게 되어 교통과 전기 분야에 각각 발령받게 되었는데 이는 반도청년북부지부 채용의 선두를 달리는 것으로 반도인 학도들에게 열린 빛이 될 것이다.
조선신문 1941년 4월 12일
서울 집. 조선의 거의 모든 가장들이 창씨개명 문제로 근심하며 갈피를 못 잡고 있다. 총독으로부터 말단관리에 이르기까지 당국자들은 이 문제가 어디까지나 개인의 선택에 맡겨질 일이지 결코 강제적인 일은 아니라고 단호하게 공언한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당국자들이 조선인들의 창씨개명을 원하고 있으며, 창씨개명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언짢아하리라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는 어제 사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창씨개명을 하는 조선인들의 수가 나날이 늘고 있다. 신(新)질서의 실현이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마땅히 이렇게 되어야만 한다. 편견을 가지고 이 운동을 방해하려는 자들은 당국에 의해 ‘철퇴’를 맞게 될 것이다. 이런 자들은 민족주의와 정치적 동기-조선독립, 곧 반일(反日)주의로-로 인해 창씨개명을 반대한다.” 그러니 당국자들은 조선 이름을 고수하려는 사람들을 반일분자, 즉 불순분자로 여길게 뻔하다.

윤치호 일기 1940년 2월 1일
서울 집. 지방에서는 경찰, 군수, 면장이 주민들에게 창씨개명을 하도록 강하게 압박하고 있다. 집을 짓거나 구입하려는 사람이 창씨개명하지 않은 경우에는 인가를 내주지 않는다. 일부 지역에서는 소학교에 입학하려는 아이들이 창씨개명하지 않으면 취학아동 증명서를 발부해주지 않는다고 한다.

윤치호 일기 1940년 5월 30일
사촌동생 치영이 전해준 바로는, 미나미총독이 10월 말에 해임될 거라는 소문과 함께, 우사미, 세키야, 마루야마, 다나카, 사카다니, 유아사, 고다마, 미즈노 같은 지도자들이 총독부가 조선인들에게 창씨개명을 강요하는 데 대해 적극 반대하고 있다는 소문도 나돌고 있다고 한다. 아울러 300여명의 학생 및 청년들이 창씨개명을 반대하거나 아버지에게 창씨개명 반대를 종용했다는 혐의로 서대문경찰서에 구금되어 있다는 말도 전해주었다. 그런데 이 소문들은 서로 앞뒤가 맞지 않는다. 총독과 정무총감의 자리가 흔들릴 정도로 도쿄 지도자들의 반대가 거센 게 사실이라면, 그들이 결코 경찰로 하여금 창씨개명에 반대하는 청년들을 괴롭히도록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윤치호 일기 1940년 7월 5일
그리고 민심을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는데요. 그 말씀은 옳은 말씀입니다만, 총독부의 윗사람은 이런저런 생각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하급자가 지방에서 활동하며 조선인에게 압력을 가할 수 있다는 말이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특히 재작년인가, 그 성씨령, 즉 이름을 바꾼다고 하는 일이 있었는데, 성과가 좋아서 거의 80%까지 일본식으로 이름을 바꾸는 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그들의 충심에서 나온 것이라면 좋겠지만, 때로는 경찰의 압박에 의해 한 것이다. 또는 학교의 학생을 이용해 학부모들에게 압력을 받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되었다는 불평도 들리는데, 요즘은 어떻습니까, 그런 쪽은 너무 무리하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 전 총독 시절에는 그런 쪽에 힘을 많이 쏟았다고 합니다만, 지금은 자연히 맡기고 있기는 하는 겁니까. 오늘은 그것은 어떠신지, 그 점을 여쭙고 싶습니다.
- 미즈노 렌타로 <귀족원 속기록 1943년 2월 26일 제81회 제국의회 귀족원 예산위원 제3분과회(내무성, 문부성, 후생성) 제2호> #

다음은 창씨개명 문제, 지원병 문제 등에 관변의 강압이라는 것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만, 이것은 저희도 말씀하신 바와 같이 같은 말을 듣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저도 그런 일에 대해 책임 있는 입장에 서게 되었기 때문에, 그런 일에 대해서는 잘못된 것이 있다면 시정을 하고 싶어서 여러 가지 사실의 진상을 조사해 보았습니다만, 반드시 그런 일이 절대 없었다고 말씀드릴 수는 없으며, 일부 유감스러운 사례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도록, 제대로 운영해 나가고 싶다고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 다나카 다케오(田中武雄) 당시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의 답변
창씨개명은 본인의 신청에 따라 허가하는 제도로서 내지에서는 남용을 허용하지 않는데, 조선 대만에서는 아동 입학 시 내지식 이름으로 개명하지 않으면 입학을 허가하지 않는 것으로 사실상 강제하는 것과 같은 취지를 보인다고 합니다. 또한 조선 대만에서 신문, 라디오 등 언론에 대한 탄압에 대해서도 비난을 듣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것이 과연 조선을 다스리는데 적합한지 심히 의심스럽다. 또한 아동 입학에 대해 성을 바꾸도록 강요하는 것과 같은 일이 있는지 여부를 함께 묻고 싶습니다.
이시즈카 에이조

조선에서는 성만 존재할 뿐인데 작년 2월에 성씨 제도를 창설하여 본인의 희망에 따라 일본인식 성으로 바꿀수 수 있게 하였고, 대만에서는 본래 성씨 제도는 있으나 호구규칙을 통해 일본인식 성으로 개명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습니다. 비록 폐단이 있더라도 통치의 실정과 민중의 희망에 부응하는 취지에서 나온 것이니, 이를 강제하는 것은 통치의 본 취지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정에 있어서는 반드시 비난의 목소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앞으로는 조금도 무리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다만, 대만에서는 씨 변경을 위한 사례가 아직 천백 건이 채 되지 않아 조선과는 조금 다른 점이 있습니다. 어쨌든 국민학교령 시행에 따라 강제적으로 성을 설정하거나 변경하는 일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조선, 대만의 신문과 라디오의 단속에도 충분히 주의를 기울여 민중으로 하여금 원한의 소리를 내지 않도록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아키타 키요시 <1941년(쇼와 16년) 3월 19일 추밀원 회의>
본 청원의 취지는 지난 쇼와 15년 2월 11일 기원절(紀元節)에 당시 총독이 조선 민령 개정에 의거하여 조선민족의 성을 일본식 성씨로 개명하는 정책을 강행한 것이지만, 사람들에게는 성을 변경하는 것은 조선반도 쪽의 자유의지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고 상당히 강제적으로 여러 가지 방법으로 강제하고 있는 것 같고, 이것은 물론 조선 사람들에게는 매우 악정(惡政)이라 하여 불만을 품고 있는 사실이 상당히 있는 것 같습니다.
아카오 빈의원

답변을 드리겠습니다...그동안 다소 말단 관리들 사이에서 다소 이 취지를 오해한 것 같으며, 강제를 했다는 사실이 없지 않았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이 점은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나카 다케오(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제81회 제국의회 중의원 청원위원회 제8호 쇼와 18년 3월 23일># 창씨개명 반대청원에 답변하며
내선일체 황국신민화의 진전에 따라 명실상부한 황국신민이 되기 위해 그 희망에 따라 창씨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다. 시행에 있어서 말단에 있어서는 다소 지나친 일이 없지 않으나 대다수는 그 희망에 따라 기꺼이 창씨하여 황국신민으로서의 결의를 굳게 다져 현재 내선일체 위에 좋은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고 믿는다.
<1945년 3월 6일 내무성 관리국 조선 및 대만 거주민 정치 처우에 관한 질의응답 문서>#
세상은 창씨의 기쁨을 만끽하며 내선일체 구현에 꽃을 피우고 있을 때, 때마침 이 사건은 불명예스러운 반민족적 악질 범죄로 세인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창씨 훼방 사건의 공판이 6일 오전 10시 대전지방법원 충주지청에서 열렸으며, 검사의 장시간에 걸친 격렬한 변론에 방청석에 꽉 찬 방청객은 긴장감을 감추지 못하였다. 피고인은 ○○군 ○○면 ○○리 ○○리 ○○○○○, 검찰 구형 징역 1년, 판결선고는 9일 오전 10시, 범죄사실은 다음과 같다.
피고인은 7년 6월 경성대학교를 중퇴하고 귀농 중인데 지난 3월 20일 오후 6시경 자신의 본적지 에서 동인외 3명의 면전에서 창씨에 대한 담화 중 창씨제도를 비방하고 내선일체의 대방침을 훼손하는 등 불온한 언동을 한 것. (중략) 창씨개명제도는 흥아대성업의 완수상 획기적인 것으로 실로 내선일체의 세기적 영단으로 지금 한반도 전역에 걸쳐 감격의 환호성이 넘쳐나는 현 상황에서 이런 불온한 반민족적 언행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신성한 우리 국체에 대한 불경행위일 뿐만 아니라 충성스러운 반도의 동포의 명예를 훼손하고 동포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 또한 매우 큰 일이다 (중략) 앞으로도 악의적인 언행에 대해서는 단호하고 엄중하게 대처해 나갈 것이다.
1940년 5월 9일자 경성일보
한반도 통치역사에 한 획을 긋고 옛 역사 사실로 거슬러 올라가 내선일체 환원을 웅변적으로 입증하고 있는 찬란한 창씨개명 연설에 대해 '조선민족'을 운운하며 비방하고 이 경사스러운 대사에 대해 반감을 품고 비반도인적인 언행을 일삼아 마침내 충주경찰서 직원에게 발각되어 치안법 위반으로 충주 고등계의 손에 의해 엄중한 조사를 받고 있던 ○○군 ○○면 ○○리 ○○○에 대한 제1차 공판은 지난 5월 6일 대전지방법원 충주지방법원 충주지청 공판정에서 사노 입회검사의 엄중한 논고와 함께 1년의 구형을 언급했으며 피고에 대한 판결은 5월 9일 노다 판사로부터 검사의 구형대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1940년 5월11일자 조선신문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 한국은 일본의 군사기지로 전환되었고, 모든 조직들은 군사적 성격을 갖게 되었다. 한국인들을 일본인화하기 위하여 일본인들은 일본인과 한국인 간의 결혼을 장려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결혼 비용을 제공해 줄 정도이다. 이렇게 결혼하는 사람들에게는 공적인 직위나 기타 특혜를 획득하는데서 우선권이 주어진다. 한국인들로 하여금 창씨개명을 수용하게 하고 한국어로 말하고 쓰는 것을 중지시키도록 강제하는 정치적 압력이 가해지고 있다. 이것은 3천만 한국인들을 일본의 노예로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 노예화 정책이 추진되는 것과 동시에 혁명이 진행되고 있다.
1944년 1월 25일 지청천 장군과 중국 언론과의 인터뷰

미나미 총독을 총독부 내외부의 거부반응을 우려한듯 강제가 아니라고 발표하였지만 그 말이 무색하게 조선인들이 자발적 참여를 해야된다고 끊임 없이 강조함으로서 강요아닌 강요를 하였다. 동시에 총독부 내부로는 각 도지사, 학무국장 등등에게 조선인들이 창씨개명을 어떻식으로 신청하게 만들라는 의미의 압박을 가하는 것을 반복하였으며 이때문에 각 도에서 창씨개명 완료율 경쟁을 하게 만들었다. 이로인해 각 도에서는 실적을 올리기 위해 온갖 수를 동원하기 시작했는데 동의없이 이름을 바꾸는 것은 기본이고[19] 각 공공기관과 도민들을 압박하기에 이르렀다.
"총독은 말로는 '억지로 시키는 것이 아니다' 라고 했지만 속마음으로는 강제로라도 시키고 싶어하는 식으로 말하는 경우도 있었지요” - 오노 로쿠이치로 당시 정무총감의 전후 녹취록#

한 예로 평안북도에서는 4월 하순 각 부군에 “창씨는 관리로부터 솔선” 구호를 시달하고, 이어 평북 부윤·군수회의를 통해 '창씨상담소의 활동 촉진에 관한 건'의 지시사항을 하달했다. 또 5월 10일 평북 도내 초등·중등학교 교직원에게 '창씨는 교직원으로부터', '한 사람도 빠짐없이 직원 모두가 창씨'를 목표로 솔선 창씨할 것을 통첩했고, 6월 11일 공립학교장 273명을 소집하여 “학교 직원의 씨 창정”을 지시했다. 이어 평북 학무과에서는 7월 말 학교 아동의 창씨 상황 조사하여 창씨개명 실적이 좋지 않은 학교의 블랙 리스트를 작성하였다.[20] 이런 상황속에 4월이후 부터는 창씨개명을 반강제로 신청하게 끔 하는 궐기대회가 자주 열렸음이 신문으로 확인되며, 아직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가정과 학부모의 경우 적절한 권유와 지도를 위한 방문이 시작되었다. 이 지도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 구체적인 증거는 없지만 타인에게 창씨에 대한불만 의견을 내비쳐도 처벌하던 당시 상황[21] 그리고 본토에서 창씨개명과, 조선지원병 신청을 받을 때 온갖 압박을 가했다는 점이 문제가 될만큼 이 적절한 지도가 어떻게 이루어 졌을지는 각자 상상에 맡긴다.

한예로 설진영은 자식을 퇴학시키겠다는 압박을 받자 이에 우물로 뛰어들어 자살했다.# 이를 바탕으로 일본 소설가인 가지야마 도시유키가 소재로 쓴 소설로 "족보"가 있는데 순창에 살던 설진영이라는 사람이 본인이 설씨 가문의 종손이라 면사무소 서기들이 찾아와 압박해도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했는데 그것 때문에 자기 아들이 창씨개명 안해서 학교를 못간다니까 결국 자기 자식 학교 보내려고 면사무소 가서 창씨개명하겠다는 신고서류를 작성하고나서 그 치욕을 이기지 못해 자결하는 내용으로 각색되었다.

이렇듯 당시 조선 내 학교는 대부분 총독부의 통제를 받는 공립 학교 였는데 여기다 공공기관인 면사무소, 경찰이 조선인 이름은 받아주지도 않았다는 윤치호 기록만 봐도 조선인 이름을 가진자는 공적업무에서 배제하는 현상이 일어났음을 알수 있으며 총독부는 본토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될때까지 실적 부풀리기를 하기 바빳다.
진주 진양군내에는 반도인 창씨제도의 획기적인 제도로 창씨할 수 있는 사람이 임씨, 류씨와 같이 그대로의 성씨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80%가 넘고 16개 면장은 말할 것도 없고 면의원과 같은 공직에 있는 사람은 모두 창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진주시의원과 상공회의소 의원 중에 창씨하지 않은 사람이 각각 2명씩이나 있으나 모두 동일인이므로 두 명의 공직자가 여전히 구성(舊姓)을 쓰고 있다. - 조선신문 1940년 9월 30일 “진주 내의 창씨 8할강 공직자 중 2명이 구성 ”

4.2. 창씨개명의 주요 불이익

아래는 창씨를 거부했을 때의 있을 수 있는 불이익의 예시다. 다만 친일 유사역사학자로 분류되는 문정창이 작성한 <군국일본 조선강점 36년>을 근거로 하고 있다는게 문제. 다만 문정창 본인이 일제시대의 인물이고 과장이 섞여 있어도 실제 확인되는 불이익 사례와 사건들도 존재한다. 이 시기는 각 지방이 창씨개명 실적을 올리기 위해서라면 온갖 수단을 동원하던 웃지못할 시대이기 때문에 문서화 증거라기 보다는 개인의 증언 정도로 참고만하면 된다.

빠스껫 볼에서는 스포츠 구단은 유니폼에 창씨개명한 이름만 적을 수 있고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선수를 구단에서 제명할 수 있다는 내용도 나왔다. 이 때문에 빠스껫 볼에서 민치호가 아사노 지코(淺野時子)라는 창씨명이 적힌 유니폼을 받은 것으로 설정된 것이다. 이외에 빠스껫 볼에서 몇몇 한국인 선수가 다나카 준페이, 요시다 다케시, 하세 료 등으로 창씨를 하기는 했다.

'창씨개명' 중 '창씨'는 강행규정을 통해 법적 강제가 있었고[22] 결과적으로 조선 전체 가호의 80%가량이 창씨를 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23] 창씨개명이 진짜 '강제'가 아니라 할 수 없다. '강요'는 했는데 '강제'가 아니라는 건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창씨개명의 강제성에 대한 반론으로 공무원 채용 명단에 조선식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거나, 알려진 인물 중에 끝까지 창씨를 하지 않은 사람을 제시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런 사례는 의미가 없는데, 스스로 신고하지 않은 경우 기존의 성을 기준으로 창씨가 부여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총독부는 창씨개명의 결과를 100%라고 발표한다.

창씨개명의 강제성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 측에서 자주 하는 큰 오해와 착각 중 하나가 창씨개명을 '이름과 성을 바꾸는 일'로 아는 것이다. 창씨(일본식 씨를 더하는 것)는 의무제였고, 개명(이름을 바꾸는 것)은 선택이였다. 새로운 씨를 선택해서 신고하면 그 씨를 사용하고, 아니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던 성이 일본식 씨로 추가되었다. 당시엔 '창씨'만이 의무였고 실적의 대상이었다. '씨설정'이 원래 창씨제도의 취지이므로 '개명'만 별도로 한 경우는 없었다. 다만 일본식 성과 같아 일본말로 읽을 수 있는 유(柳)=야나기, 남(南)=미나미, 임(林)=하야시, 계(桂)=가쓰라 등처럼 굳이 창씨하지 않고 개명만 한 경우는 있었다.

4.3. 친일고위층은 거부한 창씨개명

<해주>창씨제도 실시는 총후반도 민중에게 엄청난 감동의 폭풍을 일으켜 각계의 호평을 받고 있는데, 창씨자를 직업별로 살펴보면 쌀농사 소작인 56명 ▲쌀농사 자영업자 26명 ▲공무원 13명 ▲물품 판매업자 7명 ▲회사 직원 6명 ▲경찰관 3명 ▲관료 6명 ▲교직원 3명 ▲곡물 판매업 4명 ▲정미업 3명
1940년 4월 7일자 경성일보 <창씨는 소작인이 많다. 中>
조선의 귀족이나 부호 등 상류층은 조선 이름을 많이 쓰고 있고, 일본 성으로 개명한 것은 비율상 하층이랄까요.. 낮은 신분의 사람들입니다. 일본 이름을 붙인 사람은 모두 천한 사람이라는 식의 생각을 가졌기 때문에,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조선총독부에서는 성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궤변이라고 반발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고, 지금 여기서 이런 것을 결정해 버리면 장래에 큰 후회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때문에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어떻게든 그것을 취소해주셨으면 하는 것이 청원의 취지라고 생각합니다.
이리에 테츠네(入江為常)<1940년 3월 12일 제 75회 제국의회 귀족원 청원위원회>#
창씨하지 않은 거물 중에 손영목 전북도지사가 있는데, 창씨제도 발포 당시 기자단과의 기자회견에서도 창씨의 의의를 강조하고 스스로 그 모범을 보이는 듯한 입담으로 8월 10일까지 창씨절차를 밟지 않은 것을 두고 각계각층에서 여러 가지 추측이 나돌고 있지만, 일절 입을 다물고 그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측근은 “자신은 집주인이 아니기 때문에 당장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명하였는데, 효심이 깊은 지사에게 어떤 고충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24일 어느 자리에서 기자에게 한 왼쪽의 담화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1940년 8월 26일자 경성일보

정작 앞장서서 창씨를 종용했던 친일 고위층 대다수는 성을 바꾸지 않았는데, 가장 어처구니 없는 점은 창씨개명을 주도한 당시 조선인 출신 도지사 2명(충북의 유만겸, 전북의 손영목)은 본인들의 성을 끝끝내 바꾸지 않았다는 것이다. 참고로 유만겸은 각도의 창씨개명 실적 1위를 기록게한 인물이다. 거기다 1940년 8월 4일자 경성일보에 따르면 조선귀족 중 최초로 창씨를 한 사례는 남작인 김영수인데, 이건 창씨개명 신청 마감 기한인 1940년 8월 10일 직전에 한 것이었다. 이후 1941년에도 창씨개명은 한것은 남작가문 1곳이 유일했으며 종전 직전까지도 성을 바꾼건 10명 남짓 할 뿐, 조선 귀족 중 상당수가 성을 바꾸지 않았다. 애초에 총독부 운영에 직접적인 연관이 있던 고위층 친일파와 그 자체들은 총독이 직접 모범을 보이라고 압력을 가하지 않는 이상 바꿀 필요도 없을 뿐더러 족보있는 명문가 양반이라는 자존심 하나는 상당해서 이름만은 꼭 지키려고 들었기 때문이다.

총독부도 이들에게까지 굳이 강요할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창씨를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는 명분을 보이기 위한 것이었다. 결국 창씨개명을 강제해야 되었던 것은 대다수를 차지하는 밑사람들, 그중 인구가 가장 많은 소작농들이었고 일부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창씨개명의 강제성을 부정하는 근거로 쓰이긴 어렵다.

그 외 국민총력연맹 이사장이며 중추원 고문인 한상룡(韓相龍), 조선비행기회사 사장 박흥식(朴興植), 일본국회 대의사 박춘금(朴春琴), 귀족이며 자작인 윤덕영(尹德榮), 도지사가 된 김대우(金大羽) 등을 비롯해 이름난 친일파와 김석원(金錫源) · 이응준(李應俊) · 유승렬(劉昇烈) 등 고급 군인들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해방 이후 반민특위에 제일 먼저 연행된 '친일파 1호' 박흥식 화신백화점 사장(조선비행기주식회사 대표)이 대표적인 경우에 속한다. 방응모 조선일보 사장도 10여 개의 친일단체 간부로 활동했지만 창씨개명은 하지 않았다. 간도특설대 간부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 705인 명담에 포함된 김석범 역시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는데,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 최상단 바로 아랫줄의 적힌 그의 묘비명엔 "조상에 대한 신의로 창씨개명 아니한 오직 그 이름 김석범으로 이곳까지 왔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라고 적혀있다...친일파가 아님에도 강압에 의해 창씨개명해야 했던 사람들은 뭐가 되는걸까...

4.4. 광복 이후

1946년 10월 조선성명복구령(朝鮮姓名復舊令)을 제정해 창씨 개명 이전의 이름을 되찾을 수 있었으며 일부 제적등본(구 호적등본)에서도 해당 법령의 제정에 의거해서 수정한 흔적[24]을 찾아볼 수도 있다.[25] 모든 호적에 일괄로 정정한 사항이기 때문에 수기 호적인 시절에도 조선성명복구령에 의한 정정은 그냥 도장으로 다 찍어놓은 점이 이채로운 부분.

한때 한국 국적이나 조선적을 가진 재일동포나 중화인민공화국 또는 중화민국 국적을 가지고 있는 재일 화교들은 일본 국적으로 귀화를 신청할 때 "당신과 같은 성씨는 일본에 없다"는 이유로 여전히 일본식의 창씨개명을 강요받았다. 그래서 성을 갈기 싫은 사람들은 가네다(金田), 아키야마(秋山)[26] 등 자신의 성과 같은 한자가 들어간 성을 썼다. 내국인이 아니어서 생기는 불이익이 많으니 귀화를 결심하는 것이다. 특히 조선적을 가진 사람의 경우는 조선적 문서 참고.

다만 손정의는 일본 국적으로 귀화하면서 같은 이유로 거부당하자 '역창씨개명'을 시도했는데 일본에선 결혼하게 되면 보통 아내가 남편의 (데릴사위로 들어가면 그 반대) 성씨로 바뀌는 것에 착안해 일본인인 자기 아내를 손씨로 바꾸어서 일본인 중에 손씨가 있음을 증명하여 성명 한자를 그대로 두되 이름의 독음만 훈독으로 읽어서 '손 마사요시'가 되었다. 현재는 강희자전에 등록된 한자 + 인명용 한자 + 상용 한자 + 가타카나 + 히라가나라면 얼마든지 마음대로 창씨개명할 수 있다. 단, 이름은 상용 한자 + 인명용 한자 + 가타카나 + 히라가나만 쓸 수 있다. 하지만 읽기는 마음대로 신청할 수 있다.

그리하여 현재 한국인 중에 일본식 성씨, 예를 들어 山田, 金田, 松山 등을 사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5. 목적

5.1. 대내외에 밝힌 목적

미나미 지로는 창씨개명을 선포하면서 '조선은 이제 식민지가 아니라 내지다!' 라고 호기롭게 선언하면서 창씨개명을 실시하는 사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그리고 기존의 성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기존의 성은 그대로 남고 새로운 씨를 부여할 뿐이니 오해하지 말라는[27] 설명서까지 전국에 배포했다.[28] 그리고 이광수를 비롯한 지식인들을 대거 내세워서 창씨개명을 홍보했다.

5.2. 실제 목적

미나미 지로 조선총독 통치의 핵심은 선만일여와 내선일체, 즉 조선인의 황국신민화였다. 선만일여라는 것은 이미 매우 침략적인 표현이며, 실제로 당시 관동군 제4과와 연락하여 각종 문제로 조선의 군국화를 꾀했다. 내선일체 슬로건 실시에 있어서 가장 큰 실패는 세상에 널리 알려진 창씨개명과 국어(일본어)상용화 문제이다. 즉 조선인에게 일본의 성을 부여하여 가토 기요마사라든가 이시카와 고에몬이라든가 하는 이름을 쓰게 하는 것이다. 이름은 몸을 드러내는 것이므로 일본 이름을 쓰게 하여 그 속까지 완전한 일본인이 되게 하자는 것이었다.

물론 그 무렵은 만주사변에서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중대한 시기로 민족의식이 고양되고 군국주의가 고조되는 단계였기 때문에 조선인 중에도 창씨개명을 희망하는 사람이 상당수 있었다. 그 무렵 필자가 외유 중에도 유럽이나 미국에 체류하는 조선인, 중국인은 대부분 일본 이름을 쓰고 일본인이라고 칭하는 경우가 많았다. 호텔 레지스터 등에서 의외의 일본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런 경향도 있었기 때문에, 만약 진심으로 그것을 희망하는 사람이 많다면 위원회를 만들어 허가제를 실시하면 되었을 것이다.

미나미 지로 총톡은 그것을 전 조선에 강제했다. 각지에서 여러 가지 비극이 발생했다. 예로 법원 등에서 하루 종일 피고인 대기실에서 기다리다가 마침내 호출이 없었다. 그런데 판결은 결석 재판으로 유죄가 선고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법원은 창씨의 일본 이름으로 부르는데, 원래 그 이름은 본인이 개명한 것이 아니라 면장이나 주재소 순사 등이 마음대로 개명한 것이기 때문에 본인은 전혀 모르거나, 혹은 실수로 잊어버린 상태에서 일어나는 일이었다.
<카마타 사와이치로(鎌田 沢一郎) - 조선신화(1950년) 317-319p>

한반도를 "외지가 아닌 일본의 일부로 완전히 합병하기 위한 계획의 일환"이었다. 그래야 장기적으로 조선의 인력과 자원을 전쟁 등에 본격적으로 투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일전쟁으로 한창 군사력이 필요하던 시절에도 일제는 조선인을 믿지 못해 군인으로 써먹는다는 선택지를 피하려고 했고 징병 대신 특별지원병제도라고 하여 철저히 검증된 조선인들만 전장에 투입했다. 조선인들을 대규모로 군대에 보내서 병사로 삼았다가는 혹시 조선인들이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29] 조선인 징병과 징용을 하자 일부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 '드디어 우리도 황국신민으로서 맡은 바 의무를 다할 수 있게 됐다.'고 한 데는 이런 배경도 있었다. 그러다가 사정이 급하니까 '이제 차별하지 않는다.'는 떡밥을 교묘하게 끼워서 조선인을 전쟁에 동원하고자 한 것이다.

또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을 희석시켜 독립의지를 꺾기 위한 계획이었다. 표면상으로는 '일본식으로 개명한 조선인이 일본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는다'고 하였지만 일본은 끝끝내 '조선 거주 조선인과 조선 거주 일본인은 병역을 지지 않는다'며 내지인과 동등하게 취급하지 않았다. 반면 일본 거주 조선인은 병역 차원에서는 내지인으로 간주하였다. 해방 직전인 1945년에야 겨우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에게만 제국의회 투표권이 주어졌다.

창씨개명은 조선식 이름을 아예 없애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일본식 이름을 새로 만드는 것이었다. 창씨개명을 해도 원래 이름과 창씨개명한 이름이 나란히 호적에 오른다.[30] 또 현재 일본에서 재일교포들이 신상을 숨기고 활동하는 것이나, 부락지명총람사건을 통해 부라쿠민의 출신지를 죽어라 캐내는 현대 넷 우익들의 모습이나, 류큐인이나 아이누 같이 일본의 정복전쟁을 통해 일본화된 지역의 토착민족이 야마토 민족계 이주민들과 갈등하거나, 생물학적으로는 아이누의 후예지만[31] 이미 문화적으로 야마토 민족에 동화될 대로 동화된 도호쿠인들이 일본 극우 세력에게 에미시 취급을 당하는 모습을 보면 실제로 창씨개명을 전면적으로 했어도 조선인 차별이 없어졌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가끔 일본 극우들이 '창씨개명은 조선인을 위한 정책'이라거나 '조선인에게 일본인과 같은 권리를 주기 위한 관대한 조치'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같은 권리를 부여한다는 말은 같은 동원의 의무를 짊어지게 만들기 위해서 가져다붙인 것이다. 당시 조선인들 중 진성 친일파들을 제외한 대다수는 일본인이 되기를 혐오했다.당시 조선인들 사이에서는 '일본인'이라는 말보다 비하 단어인 왜놈이란 말이 더 통용될 정도였다.

친일파들마저도 일부는 정작 자신이 일본인이 되기를 싫어했다. 이상한 일은 아니다. 친일파들 중에는 진짜 일본이 좋거나 동경해서가 아니라 일본이 대세라서 일본 편에 선 기회주의자들도 굉장히 많았다. 또 그런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도 일반 조선인들처럼 일본인을 마치 일본인들이 조선인 보듯이 바라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그렇게 바라본 일본인이 자신이 되라니 일부 기회주의적 친일파들에게도 창씨개명으로 일본인이 되라는 말이 그리 달갑진 않았다.

식민지 조선에서 포교활동을 하여 유의미한 정도로 조선인 신자를 확보하는 데 유일하게 성공한 일본 종교가 바로 천리교였다. 그런데 천리교에 입교한 조선인 신자들은 가족이나 지인들로부터 '왜무당(일본 무당)이 되었다.'는 비난이나 욕설을 들었다는 증언이 많다. 조선인이란 정체성을 버리는 것도 아니고 단지 종교를 받아들이는 데만도 이 정도 반발을 감수해야 할 정도였다.

5.2.1. 단순한 일본 이름 갖기가 아니다

(1) 창씨개명은 단순히 이름을 바꾸는 것만이 아니라 가족관습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32]
(2) 창씨개명은 외지인으로서의 법적지위를 그대로 유지한 상태에서의 일본화였다.[33]

창씨제가 실시된 목적은 일본식 '家(이에)'제도를 도입하여 조선의 각 가정을 일본 천황을 종가로 하여 천황제를 지탱하는 기초로 삼는다는 것, 두가지 정치적 배경이 있게 된다. 조선의 가족제도를 서서히 내지화 해간다는 縱的展開와 함께 조선에서 皇民化政策의 실현을 통해 大戰에 동원할 징병제를 반드시 이루어 내겠다는 橫的구상이 창씨개명을 기초로 정책화되게 되었다.

그리고 같은 집안, 형제라도 호주만 다르면 각각 다른 성으로 바꾸도록 유도하였다. 호적법에 장남은 아버지가 사망하여야 호주상속이 되지만 차남은 결혼과 함께 법적으로 분가되며 동시에 호주가 된다. 이점을 노려 형제간에도 다른 성으로 창씨개명을 유도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과 이름을 일본어로 바꾸는 것에 그치지 않고 형제간에도 다른 성을 쓰도록 하여 우리 민족의 뿌리와 가족제도 자체를 없애려했다.

이름의 외양이나 씨제도 실시 여부와는 상관없이, 호적제도를 통해 조선인을 구별해 내서 차별을 가할 수 있는 구조는 변하지 않다. 이름의 구성원리를 성명에서 씨명으로 바꾸고 일본인 이름과 비슷하게 두 글자로 된 씨를 정하게 하되, 일본인의 것과는 구별을 두고자 했다.[34] 일제는 내선인의 구별을 위해 각각 준거법이 다른 호적을 이용하였다.[35] 민사정책의 수행과 군사, 교육 등 행정적으로도 내선인 간의 차이를 고려하여 내선간의 轉籍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창씨를 주저하게 만드는 현실적 이유로는 토지등기 문제가 있다. 특히 조선인 지식인이나 자산가, 유력자들 상당수가 주저했다. 창씨를 신고하면 호적에 기재된 법률적 이름이 바뀐다. 호적에 기재된 이름은 개인을 식별할 수 있는 유일한 칭호이며, 호적등초본은 가족관계나 개인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공증서였다. 따라서 부동산매매나 저당권설정 등을 위한 등기신청을 할 때에는 반드시 호적등초본을 첨부해야만 했다.[36] 그런데 당시의 호적등본은 호적계원이 호적부를 보고 일일이 베껴 적어야 하는 것으로, 말소사항은 기재되지 않았다. 따라서 창씨신고만 완료한 상태에서 호적등본을 발급받아 자기 소유의 부동산을 매각하거나 근저당설정을 변경하는 등의 업무를 처리할 수는 없었다. 등기부에 등재된 구성명과 호적등초본에 기재된 창씨명이 같은 인물임을 입증할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창씨신고 후 호적등본을 지참하여 등기소를 방문해 명의변경신고를 해야 했는데, 이 때 수수료가 발생했다. 1필지당 20전(당시 경성부내 버스요금이 5전이었다)이라는 수수료는 평상시의 명의변경을 감안한 액수로서, 창씨개명으로 인해 하지 않아도 될 명의변경을 추가로 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수수료 인하하는 등의 조치를 취할 법도 하지만, 기관에서는 이를 그냥 감수하라는 식의 태도를 보였다.

또한 소위 '지방유력자'들 상당수는 동성촌락의 문중에서 종손이나 문장(문중의 우두머리) 등의 지도적 위치를 차지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이들은 개인소유의 토지뿐만 아니라, 종중 토지와 임야를 자신의 명의로 등록하여 관리하는, 이른바 '명의신탁'된 토지도 적지 않게 갖고 있었다. 지역에 따라서는 그 지방의 사족가문들이 연합하여 형성한 서원, 사우, 누정이나 각종 계가 소유한 토지, 임야의 공유자로 등기되어 자신의 문중이나 동리의 지분을 대표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따라서 이들에게 창씨를 신고한다는 것은 적지 않은 부담을 주었을 것이다. 자칫 실수하여 명의변경 신고를 누락하는 지번이 있을 경우, 자신의 사유재산권에 손해를 입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명의로 되어있지만 실제로는 자기 소유가 아닌 종중토지나 공유지분에 문제가 생겨 지역사회에서 비난의 표적이 될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었다. 따라서 이들 '지방유력자' 상당수에게, 창씨는 '개성(성을 바꿈)'이냐 아니냐 하는 종족관념상의 문제임과 더불어 사유재산권에 결부된 문제이고, 종중과 동리 등 지역사회에서 차지하는 지위와도 관련되어 있는 심각한 사안이다. 그런데도 총독부는 무책임으로 일관하였다. 이러한 무사안일은 창씨는 성을 바꾸는 것이나 진배없다는 관념적인 거부감과 결합하여 자산가나 지방유력자층의 창씨 신고율을 낮추는데 기여했다.

또한 종중창씨의 문제도 있었다. 일가친척이나 문중 단위로 모여 새로운 씨를 정하고, 이를 신문광고, 우편, 통문 등을 이용해 알려서 다른 종중원들도 그에 따라 창씨토록 하는 방식이다. 종중의 종손가 중 상당수는 일제강점기 당시 해당 지역의 지주층으로서, 우월한 경제적 기반과 사회적 지위를 바탕으로 지역사회에 적지 않은 영향력이 있었다. 따라서 앞에서 언급한 지주층의 창씨개명 여부는 종중이라는 종족집단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단수히 지주로서의 우월적 지위나 종손이라는 촌락사회의 위치를 넘어서, 많은 주민들의 삶에 직접적 영향을 끼치는 존재였다. 춘공기에 곡식이 떨어지거나 자식이 태어나 이름을 짓고 출생신고를 할 때, 가족 중 환자가 있어서 약재를 필요로 하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지주집이나 종손댁은 머슴이나 소작인, 이웃의 일가들에게 도움을 주면서 사회적 네트워크를 형성해 왔다. 만일 창씨에 대해 극히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지주가에 의존하는 친척이나 소작인들이 면직원 등의 회유와 압력에 굴복하여 창씨 신고를 했다가, 창씨에 극히 부정적인 지주가로부터 경제적, 사회적 불이익을 당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는 의미다. 반대로 지주자가 솔선하여 창씨를 신고한다면 그 주변의 일가친척이나 소작인들도 뒤따를 개연성이 충분했다. 결국 창씨문제 역시 지방유력자이자 종손(혹은 그에 필적하는 사회적 지위를 가진 집) 이며 지주인 계층을 얼마나 포섭하느냐에 좌우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총독부는 사용가능한 갖가지 강압적 수단들을 사용해 지주층의 창씨신고를 하게 만들었지만, 종중창씨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창씨제도를 발안할 당시 '조선인들 가운데 같은 성이 많은데, 씨를 설정하면 집안 별로 다른 씨를 쓸테니 구별이 용이해질 것'을 기대했는데, 동성동본을 단위로 하는 종족집단이 같은 씨를 신고하게 되면 그 효과가 반감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씨제도를 도입한 의도 가운데 하나인 '종족집단 약화'라는 목적을 이루기 어려움을 의미했다. 급기야 법무국에서 "종중의 협의결정은 취지에 어긋나는 일"이라는 참고사항을 발표하고[37]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사설을 동원하여 종중창씨는 성과 씨를 혼동한 결과이므로 창씨의 정신을 어긋나게 하는 결과라고 비판하기에 이른다.[38]

1933년 당시 조선고등법원은 조선의 제사상속과 관련하여 제사는 상속이 아니고 단순히 道義上의 儀式이라고 판결하였다.[39] 즉, 호주상속과 재산상속 제도가 확립된 당시 제사상속의 관념은 先代奉祀와 조상제사를 주로 하는 도의상의 지위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결론 내리고 있다. 이는 결국 조선사회가 중시하여오던 嫡長子 중심의 제사상속을 법률상의 지위에서 배척해 버림으로써 전통의 가족관념과 家의 승계 등에 혼란을 야기하게 하였다.

부계혈통을 중심으로 제사를 상속하고 입양의 경우 同宗의 支子만을 양자로 들이면서 異姓不養원칙과 姓不變의 원칙을 고수해오던 조선의 전통법제와 관습을 크게 왜곡하며 훼손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었다.[40] 그래서 제사상속은 가족법상 조선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것으로 부계혈통의 후손들은 선조에 대한 奉祭祀를 도모하면서 지속적으로 가족 및 가문과 종중관념을 이어오게 되었던 것이다.

6. 조선인들이 보인 반응

창씨개명을 할 것인가, 아니면 조선식 이름을 그대로 고수할 것인가? 이 문제가 조선인들, 그 중에서도 특히 지체 높은 양반층에게 걱정거리다. 미나미 총독은 조선인들에게 창씨개명을 강요할 생각이 없다고 공식적으로 천명했다. 그래놓고는 똑같은 성명서에서, 만약에 조선인들이 일본식 이름을 채택하면 기쁘겠다고 분명히 시사하는 바람에 골치만 더 아파졌다. 나는 이처럼 열광적으로 조선의 모든 것을 일본 것에 맞추어 순응하도록 강요하는 처사가 아주 부질없고 지혜롭지 못한 정책이라고 본다. 다양성이야말로 삶에서 양념 같은 것이다. 일본이 열망하는 대제국은 반드시 다민족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다민족 구성원들에게 모든 면에서 정확히 똑같아지라고 강제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어리석은 정책이 아닐 수 없다.[41]
윤치호 일기 (1940년 1월 4일자)#

유학의 영향이 아직 강하게 남아서 조상과 가문이 절대적이었던 시절이고 직관적으로 '성을 갈아버리는 행위'니 창씨개명은 '민족의 정체성'에 앞서 '가문의 정체성'과도 직결되는 문제다. 유교적 관점으로도 '충(忠)'의 대상인 왕조가 사라져버린 아노미 상태였지만, 그의 반대급부로 족보와 가문에 대한 집착 및 자부심이 굉장한 시대였다.

전북 고창의 의병출신 설진영(薛鎭永, 1869~1940)은 창씨개명을 하지 않을 경우 아이를 퇴학시키겠다는 학교의 통보를 받았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가 울자 설진영은 할 수 없이 창씨개명한 뒤 자신은 조상을 볼 면목이 없다면서 돌을 안고 우물로 뛰어들어 자살했는데 이 설진영의 이야기를 일본인 소설가 카지야마 토시유키가 <족보(族譜)>라는 소설로 발표했고, 1978년에는 임권택 감독이 이 소설을 바탕으로 영화 족보를 만들었다.

창씨개명은 명목상으로는 어디까지나 '자발적으로' 행해진 것이었기 때문에 유명 인사 혹은 아이러니하게도 친일반민족행위자 등 '유·무형의 압박과 강요를 이겨낼 수 있었던 사람들'은 창씨개명을 거부할 수 있었다. 윤치호는 "당국이 이미 창씨개명하기로 결정한 이상, 조선인들이 창씨개명하도록 반드시 조치를 취할 것이다. 그들은 창씨개명을 거부하는 저명한 조선인들을 반일분자로 블랙리스트에 올릴 것이다."[42]라고 말하며 저명한 친일파들도 오래 못 버틸 거라고 봤고 실제 페널티도 있긴 했지만 성씨를 바꾼다는 반감으로 끝까지 버틴 사람들도 있긴 했다. 대표적으로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일본 제국 육군 중장까지 오른 홍사익 외에 경술국적 중 한 명인 윤덕영, 기업인 박흥식, 방응모 등 현재 친일인사로 분류되지만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던 사람들도 꽤 있다.

그러나 조선의 정체성이 희미해진 1930년대 이후 출생자들은 이미 창씨개명에 익숙하여 오히려 조선 이름보다 일본 이름을 더 세련되게 느끼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박완서의 자전소설인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 의하면 자신의 창씨개명하지 않은 보쿠엔쇼[43]라는 이름을 부끄러워하며 하나코·하루에 같은 일본 이름이 듣기 좋아 부럽다는 내용이 나온다. 실제로 이 세대는 1945년 해방되어서도 우리 일본이 패망하였는데 왜 기뻐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던 세대임을[44] 생각해 보면 일제강점기가 조금만 더 길었어도 창씨개명은 이전 세대에 비해 거부감 없이 널리 퍼졌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아메리카 원주민필리핀의 사례가 해당 대체역사에 가까운 대표적인 사례인데 앵글로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영미권 성명을 쓰고 라틴아메리카 원주민들이나 필리핀인들이 스페인어 성명을 쓰는 게 그 예다.[45]

창씨개명의 피해자들[46] 중에는 직업 특성상 개명된 이름을 불러야 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들은 80세가 다 되거나 심하면 팔순이 지나서도 서로를 창씨개명한 이름으로 부르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이렇게 창씨개명을 하고 제2차 세계 대전에 징집, 징용, 정신대 등으로 끌려간 많은 이들이 서류상으로 조선 말 이름이 아닌 창씨개명한 이름으로 등록되어 21세기에 이르기까지 피해자들의 신원 파악부터 적잖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7. 논란

7.1. 부정론


창씨개명 문제에 대해 뉴라이트, 일본 내 역사수정론자들이 주로 내세우는 관점. 해당 지적은 대표적으로 "홍사익 등 개명하지 않은 조선인도 존재하며 무조건 강제했다기에는 헛점이 보이는 부분이 많으니 창씨는 내지인과의 차별을 막기 위함이다, 차별된 건 아니다, 더나아가 피해를 본건 소수이며 창씨개명은 강제가 아니라는 주장을 하곤 한다.#일본어 위키유튜브 링크#

이는 창씨개명의 강제성을 설명할 때 자주 쓰이는 문정창의 주장이 교차 검증이 충분히 되지 않은 1차 사료이기에 나타나는 주장으로서, 차별이 만연했다는 내용과 달리 달리 당시의 기사 등 역사적 사료들을 보면 창씨개명을 거부함에 따른 불이익이 일관되고 강력하게 적용되었다고 하기에는 조선인 이름이 많이 보인다는 것을 근거로 한다. 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아카이브
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아카이브

아래는 이와 관련된 주장들이다.
파일:1941년 JODK 아나운서 합격자 명단.png 파일:1941년 보통문관합격자명단.png
1941년 경성중앙방송국 아나운서 합격자 명단 - 매일신보 1941년 보통문관합격자명단 - 매일신보
파일:1941년 경기공립중학교 합격자명단.png파일:1941년 만주국교원시험 선내합격자발표.png
1941년 경기공립중학교 합격자명단 - 매일신보 1941년 만주국교원시험 선내(조선출신[50])합격자 발표 - 매일신보
파일:1942년 치과의사시험합격자 명단.png
1942년 치과의사시험합격자 명단 - 매일신보
파일:1942년 전조선순사부장 체험좌담회 명단.png
1942년 전조선순사부장 체험좌담회 명단 - 매일신보
파일:1941년 조선총독부 직원록 9페이지.png
1941년 조선총독부 직원록 (9페이지) - 국립중앙도서관

7.1.1. 반론

창씨개명의 강제성 여부에 대해서 학계에서 다양한 논의가 있지만, 시대적 맥락을 무시하고 신문에서 조선 이름이 등장하는 단편적인 사실만을 가지고 창씨개명이 강압적인 성격을 부정하는건 분명한 한계가 있는 주장임의 유의할 필요가 있다. 우선, 총독부는 조선인의 신고가 기한내에 완료되지 않아도 법적으로 창씨정책을 마무리하겠다는 의도를 분명히 했으며[51] '창씨개명' 중 '창씨'는 강행규정을 통해 법적 구속력이 있었다.[52] 당시 조선총독부는 관보 등을 통해 일본식 이름으로의 개명을 강력히 종용했고, 일본식 이름이 없으면 말단 선에서 각종 법적, 행정적 행위에 제약을 가하도록 묵인한 정황이 포착이되며 이는 공문서, 학교, 회사 등 공적 영역에서는 창씨명 사용이 사실상 강제되음을 시사한다. 결과적으로 조선 전체 가호의 80%가량이 창씨를 했고 총독부에서는 100% 창씨를 했다고 선전한 점을 생각하면 [53] 창씨개명이 진짜 '강제'가 아니라 할 수 없다.

거기다 역사의 큰 흐름 속에서 창씨개명의 본질을 살펴 본다면 강제성은 더 명확히 지는데, 전시체제였던 일제 말기 조선인들은 철저히 총독부에 예속된 신민으로 취급받다는점, 황민화 정책에 거슬린다면 일개 연구단체도 내란죄로 감옥에 잡아 넣는 다는 점, 그리고 창씨개명, 조선지원병 자원을 압박한다는 점 등 강압적인 말살 정책이 극에 달했던 시기 였기 때문에 창씨개명에 응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불이익은 인맥없는 다수의 일반인들이었고 소수의 특권층들은 이것을 전부 회피한 정황이 포착되고 있다. 창씨개명을 주로 회피한 지주층은 총독부도 어느정도 눈치를 볼수 밖에 없었던 부류인데, 이는 제국주의 식민통치기관들이 자신들의 체제에 협력적인 현지의 토호, 혹은 현지의 원주민들과 적대적인 민족들의 편의를 봐주며 그들과 유착관계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소수의 열강들이 수많은 식민지를 지배하며 유지 할수 있던 것이고 또 토호들이 지방의 왕으로 군림하며 사회적 압박을 무시할수 있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식민지 특유의 사다리 걷어차기 식 교육 정책 덕분에 광복직전 1944년 중학교 학위 보유자가 전체 인구의1.41% 대학학위 보유가 0.05%이며# 당시 고등학교까지 진학할 수 있는 여유가 되는 사람들은 총독부가 손수 신경 써주던 조선귀족, 지주 출신의 상류층 뿐이었다[54]

이것이 조선 이름이 일부 확인된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창씨개명이 강제가 아니었다고 단정 짓기는 어려운 이유다. 신문에서 만명 중 한명 혹은 천명 중 한명의 사례를 가지고 와서 차별은 일부의 사례일 뿐이다, 강제한적 없다고 말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단편적 사실에 근거한 흑백논리적인 주장이며, '강요'는 했는데 '강제'가 아니라는 것 또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창씨개명의 강제성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 측에서 자주 하는 큰 오해와 착각 중 하나가 창씨개명을 '이름과 성을 바꾸는 일'로 아는 것이다. 창씨(일본식 씨를 더하는 것)는 의무제였고, 개명(이름을 바꾸는 것)은 선택이였다. 새로운 씨를 선택해서 신고하면 그 씨를 사용하고, 아니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던 성이 일본식 씨로 추가되었다. 당시엔 '창씨'만이 의무였고 실적의 대상이었다. '씨설정'이 원래 창씨제도의 취지이므로 '개명'만 별도로 한 경우는 없었다. 다만 일본식 성과 같아 일본말로 읽을 수 있는 유(柳)=야나기, 남(南)=미나미, 임(林)=하야시, 계(桂)=가쓰라 등처럼 굳이 창씨하지 않고 개명만 한 경우는 있었다.

애초에 창씨개명은 그 정책의 특성 상 이중성을 띌 수 밖에 없는 구조였다. 먼저 정책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선 강제성을 가져야했지만, 대외 선전 이미지를 고려해서 이 것이 강제가 아님을 계속 강조하는,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이였다. 창씨개명이 강제가 아님을 선전하기 위해 창씨개명을 강제할 필요가 없는 자들에 한 해선 창씨개명을 강제하지 않았다. 조선식 이름이 차별하지 않았다는 증거로 제시된 사료들(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출처)은 경성중앙방송국, 보통문관시험, 경기공립중학교인데 이 곳들은 총독부에서 직접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곳이기에 범죄이력 조회나 사상 검증, 가계 조회 등을 거쳤다. 만주국교원시험도 마찬가지인데, 만주국의 모든 권력은 관동군에서 나왔다. 구체적으로는 관동군 제 3과와 제 4과로 불리는 곳이 정무 지도등 거의 모든 지시를 내렸다. 또한 국적법도 없었다. 입법원은 정식으로 개설조차 되지 않았다. 이런 곳에 교원으로 지원하는 이들을 사전에 조사도 하지 않고 합격자를 받았을까?

위 주장과 관련해서 이런 의문이 나올 수 밖에 없다. '성과를 올리기 위해 창씨개명을 강요한 것은 명백하다.(위 주장에서도 이를 부정하진 못 하고 있다) 이왕 강압적으로 일본식 씨명을 이식하기로 했다면, 아예 일본인과 완전히 똑같이 만들도록 유도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 결과 창씨개명을 강요하는 과정에서 조선인들의 반감은 반감대로 커졌을 뿐만 아니라(심지어 신념형 친일파들조차 불만을 토로했다), 改姓(성을 고침)이라는 굴욕감을 감수하며 창씨개명을 했건만 조선인이라는 흔적이 이름에 남아서 차별은 차별대로 받지 않았는가?' 반감을 가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 것을 감수하고 강제성을 발휘하는데, 차별은 하지 않았다는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그러면 강제성이 어떻게 효력을 발휘한단 말인가?

우선, 조선인 차별을 위해서는 조선식 이름 차별을 해선 안 되었다. 차별을 위해서는 조선인과 일본인이 구별되어야 하는데, 위 배경 문단에서도 이미 설명됐지만, 조선인과 일본인은 같은 동아시아인이라 외형만으로 구분하기 어려워 조선인과 일본인이 섞이면 알아 볼 여지가 없다. 이 때 조선인과 일본인을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표식이 바로 성명이다. 그런데 성명까지 일본식으로 바꾸고 호적을 교체한다면 더욱 조선인과 일본인을 분간하기 어려워진다.[55]역설적으로 조선인과 일본인을 구별하고 조선인을 차별하기 위해서는 조선식 이름을 차별해선 안 되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은 구분을 위해 조선인이 일본식 성명을 쓰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였다. 1910년대에도 몇몇 친일파들이 일본에 충성한답시고 일본식으로 개명 신청을 하고 일부는 자식이 태어나자 일본식 이름을 지어 호적에 올리려고 했지만 당연히 이 자들도 예외 없이 퇴짜를 맞았다. 이는 식민통치 당시 일본인이 1등 신민으로서 조선인보다 우월한 지위를 차지해야만 했고 그런 만큼 적용되는 법률이나 형벌 등도 차별화되었기 때문이다. 일본 내에서 그런 입장의 반발이 점차 사라지고 일제 정책이 조선인의 일본인과의 확실한 동화, 즉 내선일체 정책으로 굳어진 것은 최소한 1930년대 이후의 일인데, 이때조차도 보수적인 일본인들은 내선일체 정책에 반감을 가진 경우가 적지 않았다.

“조선총독부 서기 김유탁(金有鐸)은 본월 7일 가네코 요시타로(金子吉太郞)로 성과 명을 바꾸다.” 일본의 조선 강제병합 직후인 1911년 7월12일자 조선총독부 관보에 실린 기사다. 이 시기에 조선인이 일본식 성명으로 바꾸는 일이 흔치는 않았는데, 대개 자발적 개명이었다. 일부 일본 신문도 이를 두고 조선인의 동화를 보여주는 것이라며 환영했다. 하지만 정작 총독부는 당혹스러워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조선인은 피부색, 얼굴 생김새가 일본인과 비슷한 데다 일본말을 배운 상태에서 이름까지 닮을 경우 둘을 구별하는 잣대가 없어질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총독부 입장에서 두 민족이 동등해져서는 안되는 노릇이었다. 결국 총독부는 1911년 10월 총독부령으로 조선인의 개명을 어렵게 하고 이미 개명한 조선인은 원래 성명으로 되돌릴 것을 종용했다. 일제 초 조선의 이름 정책은 차별화에 바탕한 지배질서 강화와 유지였다. 그리고 동일화 역시 지배질서 강화와 유지가 목적이였다. 일제가 초기에 가졌던 이름의 차별화 정책은 말기에 밀어붙인 이름의 동일화 정책과 모순되는 것 같지 않다. 시기별로 조선 통치의 필요에 따라 '타자(他者)'인 조선인들의 이름을 갖고 장난을 쳤다는 점에서는 동일선상에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배제'와 '동화'는 서로 배치되지 않는 짝패였다.

창씨개명에 문제가 되는 지점은 '이름(개명)'이 아니라 '성씨(창씨)'였다. 성씨가 의무제였고 이름은 선택제였다. 창씨(創氏)란, 씨를 바꾸는 게 아니고, 말 그대로 씨를 새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개명(改名)이란 당연히 이름을 바꾸는 것이었다. 총독부는 조선에 조선식 성씨를 폐지하고 일본식 성씨를 새로 만드는 폐성창씨(廢姓創氏)를 강요했지만, 극도의 반발로 '폐성창씨'의 대체어로 '개성명(改性名)'이란 용어를 대신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일본은 조선인에게 개명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중시한 것은 창씨였다. 일본의 '이에' 제도를 조선에 뿌리내리는 것이 커다란 목적이었기 때문에 씨를 신고한 사례는 전체 가구의 80퍼센트였던 데 비해, 개명 사례는 총인구의 10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했다.

조선인은 부계 혈통에 따른 성씨(姓氏)가 있어 그것은 죽어서도 바뀌지 않는 관습을 유지해오고 있었다. 조선인에게는 성의 3대 원칙이 있다. 첫째가 '성 불변'의 원칙이다. 둘째는 '동성 불혼'의 원칙이고 셋째는 '이성 불양'(다른 성을 가진 자는 양자로 삼지 않는다)의 원칙이다.

조선인의 '성'제도에 반해 일본에는 '씨' 제도가 있다. 그리고 씨는 개인이 아닌 집(家)에 붙여지는 표식과 같은 것이다. 당연히 호주 이하 가족 구성원 모두는 같은 씨를 사용한다. 이것은 일본이 조선인에게 '개명'이 아닌 '창씨'만을 문제 삼은 배경이었다. 요컨대 일본은 조선인에게 자기들의 씨 제도를 요구한 것이었다.

창씨개명의 핵심은 호적의 '본관'란을 '성급본관'으로 변경해 옮겨 적는 대신 (새로 창설되는) '씨+명'을 법률적 호칭으로 바꾸는 것이다. 총독부는 이 점을 내세워 '성이 바뀌거나 얿어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성을 바꾸거나 없애는 것이 아니라 호적에 남겨두었으며 동성동본 불혼관습은 종전과 같이 인정된다고 선전했다. 다만 새롭게 씨를 만들어 '씨+명'을 호칭으로 부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인의 입장에서, 대대로 이어받은 성을 부르지 못하고 갑작스럽게 씨를 새로 만들어서 그것을 법률적 호칭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자기의 이름이 바뀌는 것이다. 실생활 측면에서 생각한다면 '창씨는 강요가 아니며, 그대로 쓰고 싶은 사람은 신고서를 내지 않으면 된다'고 선전했지만, 씨제도가 적용되면(신고서를 내지 않아 법정창씨가 되는 경우) 여성들의 법률적 호칭은 혼인관계에 딷라 일괄적으로 변경되었다. 때문에 조선인들은 성이 바뀌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인식이 생길 수 밖에 없고, 씨제도의 법적인 의미나 파급효과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대다수의 조선인들은 창씨(씨를 새로 만듬)는 개성(성을 바꿈)과 같다고 여기기에 충분했다.

1940년 이전까지 일제는 조선에 '일본식 씨'를 만들려는 생각은 없었다. 당시 조선인은 일본식으로 개명할 수 없었으며, 이름을 통해 일본인과 조선인을 구별하고 차별할 수 있는 '차이화'를 추구했기 때문이다.[56] 1937년에 이르러서야 신생아에 한해 일본인풍의 이름을 지을 수 있었을 뿐이다.

일본풍 창씨개명을 주장하면서까지 내선일체를 강조한 미나미 총독 자신도 법률적인 차별 철폐는 단호히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결국 내선일체란 '조선=일본'이 아니라, 조선과 일본의 차별을 인정하는 가운데 조선의 일본화를 이루어 나간다는 의미였다. 이에 대해서는 창씨개명을 하더라도 가봉을 받을 수 없으며, 조선인이 일본 본토로 전적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한 점에서도 알 수 있다.[57]

창씨개명은 그들이 부르짖었던 내선일체의 일환으로 집행된 제도였다. 이를 가리켜 조선인들은 민족말살정책이라고 했다. 그러나 내선일체건 민족말살이건 모두 전시동원체제의 하위 개념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일본은 전쟁 수행을 위해 인적 자원이 더 필요했고, 그러기 위해서 조선 청년을 징집하기로 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창씨개명은 조선인 징집을 위한 술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일제는 성을 목숨처럼 여겼던 조선인에게 창씨개명이 무리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성을 바꾸지 말고 하나 더 만들라고 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개명 여부는 문제 삼지 않은 것이었다. 그래서 '이름'을 '강제하였지만 차별은 없었다'는 자가당착적 위 주장은 구차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8. 사례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을 할 경우 대체로 그 집안의 문중이 모두 모여서 회의로 정했는데, 마침(?) 씨(氏)의 유래 가운데 하나가 제후의 봉토를 의미하고 이게 본관하고 의미가 비슷하므로 조금이라도 고전을 읽어 본 문중 일원들은 고전에 맞추려고 본관과 비슷하게 창씨했다. 안동 권씨(安東權氏)[58]라서 안도(安東)[59], (盧)씨의 시조가 용강군(龍郡) 출신이라 오카무라(村), 하동(河東) 정(鄭)씨라서 가와히가시(河東) 혹은 가와토(河東) 등으로 창씨개명한 경우가 많다. 본관을 그대로 사용한 창씨개명이 가장 흔한 편으로, 지명이니까 일본어로 읽었을 때도 그다지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또 안도, 오카무라, 가와히가시·가와토는 일본에도 있는 성씨이므로 위화감이 없었다. 만약 본관을 일본식 한자음으로 읽어 다소 위화감이 있다면 본관과 본래 성을 합친 이름으로 개명하기도 했다.[60] 박정희고령 박씨다카기(高木)는 박(朴)의 목()자와 고령 박씨의 고()자를 따서 만든 것이다. 심영[61] 등의 청송 심씨는 본관인 청송(靑松)에서 글자를 따 와 아오키(靑木)로 창씨개명하였다.

이는 한국인과 일본인이 가지는 성씨에 대한 인식을 극명하게 보여준다고 할 수도 있다. 메이지 유신 때 평민들에게 일괄적으로 성씨를 부여한 일본에서는 성이 같은 것은 그저 '우연'이지만 한국은 성씨에 대한 관념 자체가 일본과 달랐기 때문에 그 심리적 반감이 만만치 않았다. 조선 후기에 우후죽순으로 생긴 성씨는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연고와 밀접한 관계인 것이 많았다.

본래의 한국식 성씨의 본관 + 성씨와 본관을 붙여 일본식 성씨로 바꾼 것 말고도 원래 한국식 성의 글자를 파자한 사례도 있다. 예를 들어 장(張)씨는 유미나가(弓長)로 창씨개명했는데, 파자한 유미나가의 한자를 합하면 弓 + 長으로 張이 된다. (朴)씨의 경우 마찬가지로 朴을 파자해 기노시타(木下)로 바꾸기도 했다.[62] 일부 최(崔)씨의 경우는 한자의 산 산(山)과 새 추(隹)를 분리하여 가야마(佳山)로 창씨하고 일부 정(鄭)씨도 한자를 파자하여[63] 사다무라 혹은 덴오(奠邑) 등으로 창씨하였던 사례가 있다.

혹은 성씨별 시조 설화에서 의미를 따 온 경우도 있었다. 박씨의 경우 위처럼 파자한 사례도 있지만 대체로 신라 박혁거세 신화에서 따와 '신라의 우물'(나정 참고)이라는 의미를 담아 아라이(新井)이나 마쓰이(松井)도 많이 썼다. 대표적인 인물이 재일동포 출신 중의원 의원인 아라이 쇼케이(박경재)였다. 경주 이씨는 시조 이알평이 시조설화에서 표암봉 바위에 내려온 것에서 따 와 이와모토(岩本)로 정하는 것을 고려했다고 한다.

전주 이씨는 대체로 아사모토(朝本), 미야모토(宮本), 구니모토(國本)[64]로 바꾸었는데, 이유는 조선 왕실. 종근당을 세운 이종근이 처음 만들었던 약방 이름은 '궁본(宮本) 약방'이었다.[65]

이밖에도 본래의 성씨나 본관에 일본 성씨에 굉장히 자주 들어가는 한자인 (다), (야마), (하라), (가와), (무라), (모토) 등을 합성한 예는 일제강점기에 흔히 쓰인 창씨법이다. 후술될 유명인의 창씨명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여자들의 경우 창씨개명을 할 때 이름 뒷부분에 (코, )자를 붙여서 했다고 한다.[66] 남자는 원래 이름 그대로 바꾸거나 원래 이름의 한 글자에 (오), (로), (야) 등을 붙여서 하는 경우가 많았다.

8.1. 창씨개명의 예외

남(南)씨·류(柳)씨·임(林)씨·계(桂)씨·오(吳)씨는 창씨개명을 안 해도 별 일 없이 넘어갔다는 듯. 일본에도 미나미(南)·야나기(柳)·하야시(林)·가쓰라(桂)·구레(吳)가 적지 않게 있어서 창씨개명이 큰 의미가 없었다. 총독부도 별 말 안 한 것 같고. # 다만 국민총력부락연맹의 이사장이었던 유대흥(柳大興)이라는 사람은 류(柳)씨이기에 창씨개명을 안 해도 되지만[67] 사람들에게 강제하는 입장이라 어쩔 수 없이 야나모토(柳本)로 창씨했는데 '나는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한 것이다. 나도 창씨개명에 반대한다'는 발언을 해 경찰에게 적발되어 잡혀갔다가 친일 경력 덕에 검찰에서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거꾸로 이 때문에 애먼(?) 일본인이 조선인으로 오해(?)받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 당시 조선과 조선인을 옹호하는 글을 많이 썼던 미술사학자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는 그 이름을 한국식으로 음독하면 유종열이고 위화감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광화문 철거를 반대하는 등 조선의 문화를 보호하는 운동을 맹렬하게 펼쳤는데[68] 그것 때문에 그를 싫어하는 일본인들이 저놈 이름하고 글쓴 거 봐도 영락없는 조선인 아니냐면서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다른 의미로 웃기는 사례로, 7대 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郎, 남차랑)가 부임하자 종씨가 보위에 오르셨다면서 인사를 드려야 한다고 남원에서 일가족을 이끌고 상경한 어떤 남씨가 있었다고 한다.

일본에서도 희성인 경우와 겹치면 이런 핑계(?)가 먹히지 않았다. 김(金)씨(金) 씨가 이미 일본에 있었지만[69] 일본에서는 희성인 데 반해 조선에서는 20%를 차지하는 아주 흔한 성이어서 조선인의 대명사로 여겨졌기 때문에 대부분은 창씨개명의 대상이 되었다. 안(安)씨차(車)씨 역시 일본에 야스(安) 씨와 구루마(車) 씨가 있기는 하지만 흔치 않은 성씨[70][71]다 보니 창씨개명을 했다. 당시 해당 씨가 그대로 일본에서도 통용된다는 증거를 행정을 집행하는 서기에게 제시하지 못하면 무조건 창씨개명의 대상이 되었고 고전이나 일본 사정에 통달하지 못한 일반적인 조선인이 이런 사례를 제시하기는 어려웠다.[72]

남궁(南宮)씨도 성이 2글자이고 일본식으로 읽으면 음독으로는 '난구'[73]가 되고 훈독으로는 '미나미야'[74] 정도가 되어 그럭저럭 일본 성씨하고 비슷하게 보여서 그대로 놔뒀는데도 이미 창씨개명을 한 줄 알고 아무 불이익도 받지 않고 그냥 넘어가기도 했다. 실제로 일본에도 이와테현에서 유래된 南宮씨가 있었으므로 이름만 그럴싸하면 창씨는 물론이고 개명도 하지 않아도 됐었다. 사실 남궁씨 뿐만 아니라 2글자로 된 성을 가진 사람들은 일본인과 큰 구분이 안 간다는 이유로[75] 창씨개명이 얼추 면제된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8.2. 성씨별 창씨개명 상황

성씨 순위 100위 이상만 기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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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金) 가네우미(金海、かねうみ), 가네오카(金岡、かねおか), 가네다(金田、かねだ), 가네모토(金本、かねもと), 가네시로(金城、かねしろ),
요시카네(慶金、よしかね), 가네야마(金山、かねやま), 가나에(金江、かなえ), 가네야(金谷、かねや), 가네자와(金澤、かねざわ),
가네가와(金川、かねがわ), 가네우라(金浦、かねうら), 가네하라(金原、かねはら), 가네무라(金村、かねむら), 가네이(金井、かねい),
가네키요(金淸、かねきよ), 가네모토(金源、かねもと), 가네코(金子、かねこ), 가나시마(金島、かなしま), 가네마쓰(金松、かねまつ),
가네바야시(金林、かねばやし), 가네미쓰(金光、かねみつ), 미쓰야마(光山、みつやま), 오카다(岡田、おかだ), 미쓰모토(光本、みつもと), 게이린(鷄林、けいりん)
2 (李) 미야모토(宮本、みやもと), 구니모토(國本、くにもと), 아사모토(朝本、あさもと), 마쓰야마(松山、まつやま), 이와무라(岩村、いわむら), 이와모토(岩本、いわもと)
마키야마(牧山、まきやま), 우시미네(牛峰、うしみね), 마시로(眞城、ましろ), 히라카와(平川、ひらかわ), 아오키(靑木、あおき),
니야마(丹山、にやま), 야마모토(山本、やまもと), 리무라(李村, りむら), 리노이에(李家, りのいえ), 나가카와(永川、ながかわ), 기고(木子、きご), 스모다(李田、すもた)
3 (朴) 아라이(新井、あらい), 아마모토(天本、あまもと), 이모토(井本、いもと), 무라이(村井、むらい), 보쿠하라(朴原、ぼくはら), 보쿠다(朴田、ぼくだ),
보쿠자와(朴澤、ぼくざわ), 보쿠야마(朴山、ぼくやま), 보쿠무라(朴村、ぼくむら), 마쓰가와(松川、まつがわ), 다케야마(竹山、たけやま), 기노시타(木下、きのした), 기모토(木本、きもと),
기야마(木山、きやま), 기무라(木村、きむら), 다카기(高木、たかぎ), 게이린(鷄林、けいりん), 미쓰야마(密山、みつやま), 마쓰이(松井、まつい)
4 (崔) 다카야마(高山、たかやま), 야마카(山佳、やまか), 가야마(佳山、かやま), 야마모토(山本、やまもと), 야마에(山江、やまえ),
오야마(大山、おおやま), 도야마(東山、とうやま), 와야마(和山、わやま), 즈이시로(隋城、ずいしろ), 사이(佐井、さい), 사이모토(崔本、さいもと), 야마우치(山内、やまうち), 쓰야마(津山、つやま)
5 (鄭) 지야마(智山、ちやま), 다메카와(爲川、ためかわ), 무카에다(迎田、むかえだ), 오카와(大川、おおかわ), 가와히가시(河東、かわひがし),
미쓰시로(三城、みつしろ), 미쓰야마(三山、みつやま), 덴오(奠邑、てんおう), 데이야(鄭家、でいや), 데이무라(鄭村、ていむら), 다케하시(竹橋、たけはし), 아키야마(秋山、あきやま), 요시모토(義本、よしもと), 마쓰오카(松岡、まつおか)
6 (姜) 신노(神濃、しんのう), 가미모토(神本、かみもと), 가미구모(神雲、かみぐも), 신야마(晉山、しんやま), 오카(岡、おか), 가미야마(神山、かみやま), 간다(神田、かんだ), 도쿠오카(德岡、とくおか), 교모토(姜本、きょうもと)
7 (趙) 도요타(豊田、とよた), 시라카와(白川、しらかわ), 조케(趙家、ちょうけ), 미나야스(咸安、みなやす), 다카모토(高本、たかもと), 도요하라(豊原、とよはら), 나카야마(中山、なかやま), 야마모토(山本、やまもと), 니시하라(西原、にしはら), 마쓰야마(松山、まつやま), 하야시가와(林川、はやしかわ)
8 (尹) 히라누마(平沼、ひらぬま), 이토(伊東、いとう), 이하라(伊原、いはら), 시게마쓰(茂松、しげまつ), 마쓰모토(松本、まつもと)
9 (張) 하리모토(張本、はりもと)[흥덕], 유미나가(弓長、ゆみなが)[인동], 나가타니(長谷、ながたに), 다마야마(玉山、たまやま), 나가야마(長山、ながやま), 하세가와(長谷川、はせがわ), 하리마(張間、はりま), 하리노(張野、はりの)
10 (林) 하야시(林、はやし)[비개명]
11 (韓) 기요하라(淸原、きよはら), 니시하라(西原、にしはら), 미모토(箕本、みもと), 아사카와(朝川、あさかわ), 오하라(大原、おおはら), 미노하라(箕原、みのはら), 기요모토(淸本、きよもと), 기요야마(淸山、きよやま), 마쓰바라(松原、まつばら), 이노우에(井上、いのうえ)
12 (吳) 구레(吳、くれ)[비개명], 구레야마(吳山、くれやま), 구레무라(吳村、くれむら), 도쿠야마(德山、とくやま), 구레시로(吳城、くれしろ), 미쓰이(三井、みつい)
13 (徐) 다쓰시로(達城、たつしろ), 오시로(大城、おおしろ), 오카와(大川、おおかわ), 오야마(大山、おおやま), 오하라(大原、おおはら), 조카와(徐川、じょかわ), 다쓰가와(達川、たつかわ), 조다쓰(徐達、じょたつ), 요시모토(義本、よしもと)
14 (申) 히라야마(平山、ひらやま), 히라타(平田、ひらた), 히라무라(平村、ひらむら), 사루모토(申本、さるもと), 다카타(高田、たかだ)
15 (權) 안도(安東、あんどう), 겐토(權東、けんとう), 곤도(權藤、ごんどう), 곤야마(權山、ごんやま), 곤모토(權本、ごんもと), 요시모토(吉本、よしもと)
16 (黃) 기하라(黃原、きはら), 요시무라(芳村、よしむら), 히야마(檜山、ひやま), 기타(黃田、きた), 기모토(黃本、きもと), 히로타(廣田、ひろた), 히라모토(平本、ひらもと), 히라우미(平海、ひらうみ), 나가미즈(長水、ながみず), 히로가와(廣川、ひろかわ), 마사하라(昌原, まさはら)
17 (安) 야스다(安田、やすだ)[80], 야스모토(安本、やすもと), 안도(安藤、あんどう), 다케야스(竹安、たけやす)[81], 야스야마(安山、やすやま), 야스키(安木、やすき), 야스쿠니(安邦、やすくに), 야스하라(安原、やすはら), 아다치(安達、あだち)
18 (宋) 노야마(野山、のやま), 무카야마(迎山、むかやま), 쓰보야마(壺山、つぼやま), 마쓰야마(松山、まつやま), 마쓰바라(松原、まつはら), 노다(野田、のだ), 오하라(大原、おおはら), 무네모토(宗本、むねもと), 소무라(宋村、そうむら), 온즈(恩津、おんづ), 야마모토(山本、やまもと), 기야마(木山、木山), 기가와(木川、きかわ), 소모토(宋本、そうもと)
19 (全) 에하라(江原、えはら), 마쓰야마(松山、まつやま), 마쓰바라(松原、まつばら), 마쓰다(松田、まつだ), 기쿠하라(菊原、きくはら), 젠케(全家、ぜんけ), 야마다(山田、やまだ), 젠모토(全本、ぜんもと), 젠이(全井、ぜんい), 젠시로(全城、ぜんしろ)
20 (洪) 난요(南陽、なんよう), 도요야마(豊山、とよやま), 도쿠야마(德山、とくやま), 히로카와(洪川、ひろかわ), 히로하라(洪原、ひろはら), 도코(唐洪、とうこう), 나가야마(永山、ながやま), 미쓰이(三井、みつい)
21 (柳) 야나기(柳、やなぎ)[비개명], 야나기사와(柳澤、やなぎさわ), 야나기가와(柳川、やなぎがわ), 야나기와라(柳原、やなぎわら), 야나모토(柳本、やなもと)
22 (高) 다카야마(高山、たかやま), 다카시(高志、たかし), 다카시마(高島、たかしま), 다카키(高木、たかき), 다카코(高子、たかこ), 다카다(高田、たかだ), 다카하시(高橋、たかはし), 요코시로(橫城、よこしろ), 도라(度羅、とら)
23 (文) 후미이와(文岩、ふみいわ), 후미히라(文平、ふみひら), 후미하라(文原、ふみはら), 후미아키(文明、ふみあき), 후미카와(文川、ふみかわ), 에시로(江城、えしろ), 난페이(南平、なんペい), 후미모토(文本、ふみもと), 후미야마(文山、ふみやま), 후미무라(文村、ふみむら)
24 (梁) 야나가와(梁川、やながわ), 요시하라(良原、よしはら), 난바라(南原、なんばら), 야나하라(梁原、やなはら), 야나모토(梁本、やなもと)
25 (孫) 오무라(大村、おおむら), 마쓰야마(松山、まつやま), 덴니치(天日、てんにち), 마고다(孫田、まごた), 시게야마(茂山、しげやま)
26 (裵) 다케모토(武本、たけもと), 호시야마(星山、ほしやま)
27 (曺) 마사야마(昌山、まさやま), 나쓰야마(夏山、なつやま), 다치야마(立山、たちやま)
28 (白) 시라카와(白川、しらかわ), 시라이시(白石、しらいし), 시로하라(白原、しろはら)
29 (劉) 다마가와(玉川、たまがわ), 가와니시(河西、かわにし), 에하라(江原、えはら), 시라카와(白川、しらかわ), 노베야스(延安、のべやす)
30 (許) 모토시마(許島、もとしま), 모토무라(許村、もとむら), 이시와타(石渡、いしわた), 이와무라(岩村、いわむら), 이와타(岩田、いわた), 마쓰야마(松山、まつやま)
31 (南) 미나미(南、みなみ)[비개명]
32 (沈) 아오마쓰(靑松、あおまつ), 마쓰모토(松本、まつもと), 아오키(靑木、あおき)
33 (盧) 오카무라(岡村、おかむら), 도요카와(豊川、とよかわ), 가미모토(神本、かみもと), 가와하라(河原、かわはら), 미즈하라(瑞原、みずはら), 우에다(上田、うえだ)
34 (丁) 자야마(茶山、ちゃやま), 조토(丁藤、ちょうとう), 마치다(町田、まちだ), 다케시마(武島、たけしま)
35 (河) 가와모토(河本、かわもと), 가와하라(河原、かわはら)
36 (郭) 쓰토야마(苞山、つとやま), 니시우라(西浦、にしうら), 마키노(牧野、まきの), 이와타니(岩谷、いわたに), 니시하라(西原、にしはら)
37 (成) 나리모토(成本、なりもと), 나리타(成田、なりた), 나리야마(成山、なりやま)
38 (車) 구루마다(車田、くるまだ), 나가타(永田、ながた), 다카타(高田、たかた), 도도로키(轟、とどろき)
39 (朱) 아케모토(朱本、あけもと), 모토시로(本城、もとしろ), 네이노(寧野、ねいの)
40 (禹) 니야마(丹山、にやま), 우모리(宇森、うもり)
41 (具) 아야시로(綾城、あやしろ), 아야하라(綾原、あやはら), 아야베(綾部、あやべ), 아야모토(綾本、あやもと), 구하라(具原、ぐはら)
42 (辛) 가라시마(辛島、からしま), 시게미쓰(重光、しげみつ), 미카와(三川、みかわ)
43 (任) 도요카와(豊川、とよかわ)
44 (田) 다무라(田村、たむら), 사와다(澤田、さわだ), 다나카(田中、たなか)
45 (閔) 빈하라(閔原、びんはら), 모토시로(本城、もとしろ), 이와무라(岩村、いわむら), 이와모토(岩本、いわもと), 가도후미(門文、かどふみ)
46 (兪) 유하라(兪原、ゆはら), 마쓰바라(松原、まつばら), 기젠(杞前、きぜん), 유무라(兪村、ゆむら)
47 (柳) 야나기(柳、やなぎ)[비개명], 야나기사와(柳澤、やなぎさわ), 야나기가와(柳川、やなぎがわ), 야나기와라(柳原、やなぎわら)
48 (羅) 도미타(富田、とみた), 우에무라(上村、うえむら), 마쓰시마(松島、まつしま)
49 (陳) 진나이(陳內、じんない), 진카와(陳川、ちんかわ), 진다(陳田、ちんだ), 미쓰야마(三山、みつやま), 오하라(大原、おおはら)
50 (池) 이케다(池田、いけだ)
51 (嚴) 이와모토(岩本、いわもと), 나시로(奈城、なしろ)
52 (蔡) 사이하라(蔡原、さいはら), 사이카와(蔡川、さいかわ), 히라오카(平岡、ひらおか), 히라마쓰(平松、ひらまつ), 히라모토(平本、ひらもと), 사카와(佐川、さかわ)
53 (元) 모토무라(元村、もとむら), 하라모토(原元、はらもと), 하라무라(原村、はらむら), 하라야마(原山、はらやま)
54 (千) 지하라(千原、ちはら), 지다(千田、ちだ), 지바(千葉、ちば)
55 (方) 가타야마(方山、かたやま)
56 (孔) 교쿠하라(曲原、きょくはら), 고무라(孔村、こうむら), 히하라(檜原、ひはら), 마사하라(昌原、まさはら), 고베(孔部、こうべ)
57 (康) 야스하라(康原、やすはら), 야스히로(康宏、やすひろ), 야스다(康田、やすだ), 야스나리(康成、やすなり)
58 (玄) 겐부(玄武、げんぶ), 노베야마(延山、のべやま)
59 (咸) 나리모토(成本、なりもと), 간네(咸根、かんね), 간하라(咸原、かんはら), 에하라(江原、えはら), 가와모토(河本、かわもと), 마쓰바라(松原、まつばら)
60 (卞) 벤다(卞田、べんだ), 구사타니(草溪、くさたに), 도쿠하라(德原、とくはら)
61 (廉) 미즈하라(瑞原、みずはら), 우메하라(梅原、うまはら), 다치하라(立原、たちはら), 이시카와(石川、いしかわ)
62 (楊) 야나기(楊、やなぎ)[비개명], 기요미즈(淸水、きよみず), 기요하라(淸原、きよはら), 와다(和田、わだ), 야나기하라(楊原、やなぎはら)
63 (邊) 하라베(原邊、はらべ), 하라카와(原川、はらかわ)
64 (呂) 미야하라(宮原、みやはら), 미야모토(宮本、みやもと), 로이(呂井、ろい)
65 (秋) 아키야마(秋山、あきやま), 아키타(秋田、あきた), 아키히타(秋常、あきひた)
66 (魯) 에무라(江村、えむら), 에모토(江本、えもと), 하나무라(華村、はなむら)
67 (都) 미야코(都、みやこ)[비개명], 미야코다(都田、みやこだ), 쓰모토(都本、つもと), 미야코가와(都川、みやこがわ)
68 (蘇) 구사카(草禾、くさか), 이소(伊蘇、いそ), 와다(和田、わだ), 아키타(秋田、あきた)
69 (愼) 마야마(眞山、まやま), 마하라(眞原、まはら)
70 (石) 이시하라(石原、いしはら), 이시카와(石川、いしかわ), 이시무라(石村、いしむら)
71 (宣) 요시카와(宣川、よしかわ), 나카하라(中原、なかはら)
72 (薛) 다마가와(玉川、たまがわ), 마쓰야마(松山、まつやま), 히로모토(弘本、ひろもと), 오야마(大山、おおやま)
73 (馬) 기가와(木川、きがわ), 아리마(有馬、ありま), 우마노(馬野、うまの), 바바(馬場、ばば)
74 (吉) 요시모토(吉本、よしもと), 요시다(吉田,よしだ), 데라사이(寺再、てらさい), 엔요(延陽、えんよう)
75 (周) 슈모토(周本、しゅうもと), 도쿠하라(德原、とくはら)
76 (延) 노부하라(延原、のぶはら), 나카야마(中山、なかやま), 나카모토(中本、なかもと), 노베야마(延山、のべやま)
77 (房) 후사하라(房原、ふさはら)
78 (魏) 나가모토(長本、ながもと)
79 (表) 오모다(表田、おもだ), 야마자키(山崎、やまざき), 신카와(新川、しんかわ)
80 (明) 아카시(明石、あかし), 아케가와(明川、あけがわ), 아카치(明地、あかち), 다치모리(日月、たちもり)
81 (奇) 이와사키(岩崎、いわさき)
82 (潘) 요네다(米田、よねだ), 가와무라(河村、かわむら)
83 (羅) 도미타(富田、とみた), 우에무라(上村、うえむら), 마쓰시마(松島、まつしま)
84 (王) 오모토(王本、おうもと), 오지마(王島、おうじま), 마쓰다(松田、まつだ), 마쓰시로(松城、まつしろ), 오야마(王山、おうやま), 오하라(大原、おおはら)
85 (琴) 고토가와(琴川、ことがわ), 가네다(金田、かねだ), 이마다(今田、いまだ)
86 (玉) 오하라(大原、おおはら)
87 (陸) 구다시로(管城、くだしろ), 구가미(陸海、くがみ)
88 (印) 시루시마(印島、しるしま), 다카키(高木、たかき), 다카무라(高村、たかむら)
89 (孟) 니하라(新原、にいはら), 마쓰오카(松岡、まつおか), 마쓰바라(松原、まつばら)
90 (諸) 에가와(穎川、えがわ), 우루시바라(漆原、うるしばら)
91 (牟) 무타(牟田、むた), 다니모토(谷本、たにもと)
92 (蔣) 기바야마(牙山、きばやま), 마쓰야마(松山、まつやま), 구니모토(國元、くにもと)
93 남궁(南宮) 난구(南宮、なんぐう)[비개명]
94 (卓) 다카야마(卓山、たかやま), 미쓰야마(光山、みつやま)
95 (鞠) 아오야마(靑山、あおやま), 아오타(靑田、あおた)
96 (余) 요시카와(宜川、よしかわ), 도미모토(富本、とみもと)
97 (秦) 하타(秦)[비개명], 난바라(南原、なんばら), 마쓰바라(松原、まつばら), 오쿠라(大倉、おおくら), 도요타(豊田、とよた)
98 (魚) 우오카와(魚川、うおかわ), 우오니시(魚西、うおにし), 니시카와(西川、にしかわ), 우오누마(魚沼、うおぬま)
99 (殷) 고슈(幸州、こうしゅう), 마쓰에(松江、まつえ), 에모토(江本、えもと)
100 (片) 가타야마(片山、かたやま), 가타모토(片本、かたもと)

8.3. 저항 사례

한편 일부 조선인들은 창씨개명에 아주 심한 반감을 느껴서 얌전히 창씨개명을 당하는 대신 DQN 네임 저리가라 할 정도로 온갖 개드립, 비웃음, 풍자가 섞인 개명을 하면서 언어유희역관광을 꾀했다.

9. 유명 인물의 창씨개명 목록

창씨개명을 한 사람들이 반드시 모두 친일반민족행위자인 것은 아니다. 1941년 기준으로 조선인의 81.5%가 창씨개명을 했는데 그렇다면 절대 다수의 조선인이 친일파란 뜻이 된다. 당시 거부자에 대한 엄청난 불이익 때문에 학교 진학 및 취직 등 현실상 어쩔 수 없이 했던 사람이 대다수이며 당시 미취학 아동이라 사실상 저항할 수 없었던 입장의 사람[95]도 상당수다. 항일 독립운동가 중에도 창씨명을 가진 사람은 많다. 대개가 일본인이나 친일파로 위장하기 위해 창씨개명한 경우이며, 위에서 보듯이 창씨개명을 지시한 조선총독부일본 정부를 조롱하기 위해 일부러 욕설로 창씨명을 만들기도 했다.

반대로 창씨개명의 자발성을 홍보하기 위해 친일반민족행위자들 중에도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경우 역시 종종 있다. 대표적으로 조선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제2차 세계 대전의 전범으로 기소되어 처형된 홍사익이나 일본 중의원 정치인과 정치깡패로 활동했던 박춘금 등이 있다.

아래의 목록에는 8.15 광복 이후에 활동을 한 사람도 있는데, 대부분은 재일 한국인으로 일본에서 나고 자란 탓에 현실적인 이유로 일본 귀화를 선택해야했던 경우에 속한다. 당연히도 이는 타국 귀화자들의 통상적인 개명과 같은 경우이므로 비난의 여지가 없다. 물론 일본의 우경화에 동조하는 신친일파의 사례가 없진 않으나, 모든 일본 귀화자가 이런 경우라고 보는 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일 뿐이다.

인물 성씨 기준으로 가나다순 정렬. 창씨개명 원리는 옆에 쌍점(:)을 붙이고 적으며 그 밖의 부연 설명은 창씨개명 원리 설명 뒤에 추가하기 바란다.

이름 표기 시 표준 외래어 표기법을 준수하여 표기하며 일제강점기 이후 출생한 현대 인물들은 이곳에 작성하지 말 것.

개명된 이름은 모두 리다이렉트 처리 바람.

===# ㄱ #===
===# ㄴ #===
===# ㄷ #===
===# ㄹ #===
===# ㅁ #===
===# ㅂ #===
===# ㅅ #===
===# ㅇ #===
===# ㅈ #===
===# ㅊ #===
===# ㅌ #===
===# ㅍ #===
===# ㅎ #===

10. 해외 사례

10.1. 독일계 미국인들의 개명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독일계 미국인들이 탄압을 피해 영국계 성씨로 개명을 하였다.
<rowcolor=#000> 前
슈미트(Schmidt) 스미스(Smith)
뮐러(Müller) 밀러(Miller)
슈나이더(Schneider) 테일러(Taylor)
피셔(Fischer) 피셔맨(Fisherman), 피셔(Fisher)
코흐(Koch) 쿡(Cook)
베버(Weber) 위버(Weaver)
치머만(Zimmermann) 카펜터(Carpenter)
플라이셔(Fleischer) 부처(Butcher)
비어만(Biermann), 브라우어(Brauer) 브루어(Brewer)
호프만(Hoffmann) 스튜어드(Steward)
융(Jung) 영(Young)
융커(Junker) 스콰이어(Squire)
슈마허(Schumacher) 슈메이커(Shoemaker)
파스빈더(Fassbinder) 쿠퍼(Cooper)
바그너(Wagner) 웨인라이트(Wainwright)
엥겔(Engel) 엔젤(Angel)
베커(Becker) 베이커(Baker)
베르크만(Bergmann) 마이너(Miner)
게르버(Gerber) 태너(Tanner)
개르트너(Gärtner) 가드너(Gardener)
헤르초크(Herzog) 듀크(Duke)
에거(Egger), 에거스(Eggers) 해로우(Harrow)
퓌르스트(Fürst) 프린스(Prince)
히르슈(Hirsch) 벅(Buck)
바이스(Weiß) 화이트(White)
슈바르츠(Schwarz) 블랙(Black)
브라운(Braun) 브라운(Brown)
푀르스터(Förster) 포레스터(Forester), 포스터(Forster)
크뤼거(Krüger) 포터(Potter), 크루거(Kruger)
예거(Jäger) 예거(Jager), 헌터(Hunter)
바흐(Bach) 브룩(Brook)
부슈(Busch), 보슈(Bosch) 부쉬(Bush)
게르스테(Gerste) 발리(Barley)
바스(Barth) 비어드(Beard)
아이히만(Eichmann) 오크맨(Oakman)
프리드만(Friedmann) 피스메이커(Peacemaker)
글뢰크너(Glöckner) 벨맨(Bellman)
트링크바서(Trinkwasser) 드링크워터(Drinkwater)
드룸프(Drumpf) 트럼프(Trump)
아이젠하우어(Eisenhauer) 아이젠하워(Eisenhower)
후버(Huber) 후버(Hoover)

11. 유사 사례

11.1. 강요 차원

11.2. 자발적인 개명 차원

11.3. 번역 차원

12. 한국

한국에서도 귀화인들에게 한국식 이름을 만들도록 시키긴 한다. 한국 민법에서는 1993년 이후 호적에서의 성명 글자를 성을 제외하고 5글자로 제한시켰기 때문이다. 다만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한국으로 귀화하러 오는 외국인의 수가 적었기 때문에, 특별히 귀화인을 겨냥했다기보다는 이름이 긴 사람이 속속 생겨나자[230] 업무를 처리하기 난감해진다는 이유 때문에 행정편의주의적인 관점에서 이름의 글자수를 제한시키기는 한다. 예외 규정이 둘 있는데, 1993년 이전 호적에 등록한 자, 그리고 한국 국적자와 외국 국적자의 혼인으로 출생한 자의 경우 외국 국적자 측의 성을 따르기로 결정하여 외국식 이름으로 한국 호적에 등록시킬 때는 5글자 초과가 가능하다. 없는 성을 만들어도 된다는 게 다르고 그렇기 때문에 일본인이 귀화할 경우 일본인으로써의 성씨를 그대로 써도 되기는 하다.

대신 한자를 한국 한자음이 아닌 방식으로 읽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된다.[231] 예를 들어 사토 마사요시()라는 일본인이 한국으로 귀화를 할 경우, 자기 이름을 한국어로 읽는 그대로 쓰고 싶다면 원칙적으로는 성명을 한글 '사토마사요시'라고 써야 하며,[232] 마치 인명용 한자 이외의 한자를 이름에 썼을 때처럼 한글로만 이름을 표기해야 한다. 물론, 佐藤을 성으로, 正義를 이름으로 등록시켜 사용할 수 있지만, 이 경우에는 성명을 한국 한자음대로 무조건 '좌등정의'로 읽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일본 성씨를 한국식으로 쓰는 예가 양산시에 거주하던 망절씨의 시조 망절일랑.[233] 호사카 유지도 귀화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발음 그대로 쓰고 있는데, 공문서에는 순한글 성씨 및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다. 한국 출생이지만 황목치승(荒木治丞)도 일본식으로 읽으면 '아라키 하루스케'라는 평범한 일본인의 이름이다.

네이버 지식iN에 '창씨~'등으로 검색하면 '제 이름은 ○○○인데, 제 창씨명이 궁금해요'라는 질문이 다수 나온다. '창씨'라는 것은 (성)씨를 '만든다란' 뜻이기에 창씨명이 '일본식 이름'이란 뜻이 아니라는 것을 차치하고서라도, 애초에 이름이란 고유명사이니 이름이 홍길동이면 일본에서도 홍길동(에 가까운 발음)이라서 굳이 일본식으로 음독/훈독할 필요는 그닥 없다. 현재는 洪吉童(ホン·ギルドン) 또는 シム·チョン(沈淸)처럼 쓰는 게 보통. 일본에 완전히 정착해서 자식 낳고 산다면 몰라도.[234] 사실 굳이 바꾸는 경우는 개인 취향 문제이거나 현지에서 상용하지 않는 한자이거나 해서 발음을 곤란해 한다거나 아니면 공식 성명은 아니지만 현지인과 친근하게 교류하기 위해 별칭으로써 재미삼아 만들어 붙이는 경우이다. 또는 드물지만 업무상/학술적인 이유로 불가피하게 재특회가 활개치는 지역에서 체류해야 하는 경우에도 (일본인으로 위장하기 위해)하는 경우도 있다 한다. 사실 그런 극단적인 경우는 아니더라도, 외지인 티가 나면 이지메하거나 배척하여 끼워주지 않으려고 하는 경우도 있다 한다. 물론 일본의 조직에 끼어들 일이 없는 단기체류자는 해당사항이 없다.

이는 미국 등 서양권 국가로 유학/이민/귀화한 사람들 중에서도[235], 가끔 로마자로 한국이름을 표기할 수 있음에도 "제임스 리" 라던지 "데이비드 킴" 같이 현지식 이름을 지어다가 붙이는 경우[236]가 있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한자를 파자해서 일본식/중국식 성명표기를 하고 싶으면 하면 되고, 하기 싫으면 안하면 된다. 온전히 상황과 주변 환경, 대인관계에 따른 개인의 선택일 뿐이다.

이름을 바꾸는 것은 아니지만 한자문화권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소개할 때 일본식 한자음을 빌어서 하는 경우는 많다. 예를 들어 이름이 성준이라면 '세이타의 成에 슌스케의 俊입니다.' 하는 식으로. 이건 단순히 표기법이나 뜻을 이해시키기 위한 차원을 넘어서 각종 지원서 등의 공문서에서는 비록 발음은 한국식, 중국식으로 후리가나를 달더라도 한자식 이름을 쓰는 외국인이라면 이름을 한자로 써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일본 내에서 한자와 독음이 잘 매치가 안 되는 성명을 가진 사람의 경우에도 똑같이 한다. 단, 이 경우는 다른 사람의 이름보다는 대중적으로 쓰이는 훈독음을 알려준다.

사실 저런 한국식 한자성명의 일본식/중국식 독음에 대한 문의가 넘치는 이유는, 해당국에서는 한자성명 사용자는 타국인이라 할지어도 한자 표기를 강요하며, 그렇게 표기된 한자를 현지인들은 자기들 멋대로 읽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중국, 일본국적/출신 체류자의 성명이 한국식 한자음으로 읽히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한자 표기를 아예 지우고 로마자 표기나 순한글 표기가 가능한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중국과 일본은 허락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는 로마자 표기가 우선이지만, 한자를 쓰는 경우가 이렇다는 것이다. 그나마 일본은 재류신고 등 공문서를 제외하면 한국식 독음대로 가타카나 단독 표기를 하는 것은 가능하나, 한어병음 단독 표기를 절대 불허하는 중국답이 없다.

13. 번역상의 표기

참고로 서양의 인물은 언어마다 이름을 다르게 표기하는 경우가 많고[237] 지금도 교황이나 왕족의 이름을 적을 때는, 요한 바오로 2세영어로 쓸 땐 John Paul II, 이탈리아어로 쓸 땐 Giovanni Paolo II, 우크라이나어로는 Іван Павло II라고 쓰는 것과 같이 언어마다 다르게 표기하는데 이 경우는 창씨개명처럼 취급하기 곤란할 듯하다. 호적상의 사람 이름을 고치는 게 아니라 그냥 과거 유럽의 관례를 따라 이름을 해당국 국어로 '번역'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마리 앙투아네트는 원래 마리아 안토니아였다. 그냥 마리아가 프랑스에서는 마리, 영국에서는 메리라고 자동으로 불리게 되었던 것. 같은 원리로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인물 이름들은 유럽권에서는 자국의 언어(표기 방식)로 '번역'된다.

따라서 만약 민족국가 형성 전, 여러 국가의 역사에 영향을 미친 인물의 이름이라면 차라리 당대의 공용어 격인 라틴어(또는 그리스어)로 표기하는게 중립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대표가 카롤루스 대제. 좀 경우는 다르지만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도 유사한 사례다.

한편 이런 '번역식' 인명표기는 한자문화권에서도 똑같다. 현대에는 원어를 존중하여 표기하는 경우가 많지만[238], 근대 이전 인명/지명은 그런 것 없이 자국의 방식대로 읽고 쓰는 게 보통이다. 현대 한국어에서 일본어 한자 읽기가 예외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건 역사적인 이유가 겹치면서 생긴 특수한 예이고, 한국도 근대 이전에는 일본의 인명/지명도 예외없이 한국식으로 읽었다. 근대 이전의 풍신수길, 이후는 이등박문을 생각하면 된다. 중국의 경우도 19세기 말~20세기 초 인물들은 한국식 독음과 중국식 독음 모두 통용된다. 표기법상으로야 신해혁명 이후 인물은 중국식 독음 표기가 원칙이지만 대략 이홍장원세개, 양계초 이후 인물들이 여기 해당한다. 손문, 장개석, 모택동이 대표적이고, 이들보다 후대 인물로 20세기 후반~21세기 초엽까지 활동한 등소평, 조자양, 강택민도 한국식 독음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최근 한국에서는 호금도, 습근평중국인들의 이름이 거의 한국식 독음으로 불리지 않는다. 단, 조선족들이나 북한에서는 여전히 한국식 독음으로 부르고 있다. 또 영화배우인 양조위, 장국영, 유덕화 등의 경우도 한국식 독음이 널리 퍼져 있다.

이렇게 읽는 법이 정착된 것은 외래어 표기법이 비교적 최근인 1987년에 발표된 영향이 크다. 중국인이건 일본인이건 일평생 한자 그대로 읽어왔는데 어느날 갑자기 싹 바꾸라고 하니 당시의 지식인들과 기자들이 이걸 어색해 해 그동안 읽던 방식 그대로 써 온 것이다. 그런 표기법이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이고, 이는 현재 우리도 '모택동, 등소평'이라고 쓰지만 않지 그게 누구인지는 다 알고 있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그 시절에 사회생활을 하시던 분들이 은퇴한 2000년대 이후에는 한자를 그대로 읽는 표기법은 점점 사라지고 중국, 일본식 독음대로 표기하고 있다. 앞으로 등장하는 일본인, 중국인은 100% 모국어 독음으로 표기될 것이다. 지금은 일종의 과도기라고 생각하면 될 듯 하다.

14. 참고 문헌



[1] 교육계를 위해 변호하자면 '창씨개명'이란 4음절 자체에는 강제성이 드러나지 않으므로 일본식 성명강요로 쓴 것이다.[2] 당장에 3대 천하인들도 보면 씨를 바꾼 경우가 많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바꾸기 직전의 씨는 하시바였고 또 그 이전에는 기노시타였다. 그밖에도 후지와라, 헤이지 등을 쓰기도 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어릴 적에는 마쓰다이라 이에야스였다.[3] 21세기에도 일본의 정치적 목표는 엘리트주의, 민족주의, 보수주의이며 외국인의 시민권 획득에 큰 제한을 두고 있다.[4] 조선인뿐 아니라 중국인, 오키나와인, 심지어 관서 출신 일본인과 청각장애인들도 상당수 살해당했는데 이들 역시 어차피 외형적 차이는 크지 않았고 저 발음들은 못했기 때문이다.[5]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치안을 담당했던 경찰기관.[6] 대조적으로 대만에선 기존의 폐성창씨를 그대로 추진했는데, 조선과는 달리 허가를 받은 자만이 일본식 성씨를 가질 수 있었다. 심지어 대만은 조선과 달리 폐썽창씨에 긍정적인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들 입장에선 자신들이 조선인에 비해 더 차별 받는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7] 초대 덴노인 진무 덴노가 일본을 건국한 것을 기념하는 날. 한국의 개천절 같은 기념일이다.[8] 다만 황도유림(천황과 일본 제국을 위해 헌신하라는 유학을 따르는 유림들)의 세력이 컸던 경상북도에서는 유림들의 참여율이 초기, 후기 가릴 것 없이 높게 나타났다. 2월에만 전체의 50%가 넘는 창씨개명이 경상북도에서 접수되었다. 초기 경상북도에서 유달리 창씨개명 참여율이 높았던 것도 이 때문인 듯. 창씨개명이 완료될 때까지 전체 경북 유림 2만 6842명 중 2만 6670명이 창씨에 참여하였다.[9] 지금의 대구광역시, 강원도 영월군 상동읍 덕구리 및 천평리,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 포함, 울진군 전역 및 영양군 수비면 본신리 제외[10] 지금의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 포함,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 제외[11] 지금의 대전광역시, 세종특별자치시(부강면 제외) 포함, 논산시 연무읍 고내리, 황화정리, 마전리, 봉동리, 안심리, 신화리 제외[12] 지금의 서울특별시, 인천광역시(옹진군 백령면, 대청면, 연평면 (서해 5도) 제외) 포함, 연천군 신서면 제외[13] 현재의 인천광역시 옹진군 백령면, 대청면, 연평면 (서해 5도)을 포함[14] 경기도 연천군 신서면, 경상북도 울진군영양군 수비면 본신리 포함, 영월군 상동읍 덕구리 및 천평리는 제외[15] 지금의 부산광역시, 울산광역시 포함[16] 지금의 광주광역시, 제주특별자치도 및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면 포함[17] 지금의 충청남도 금산군 전역과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 고내리, 황화정리, 마전리, 봉동리, 안심리, 신화리 포함, 부안군 위도면은 제외[18] 호주의 소재불명 등 창씨를 할 수 없는 호적 제외[19] 당시 창씨 신고율을 높게 보이게 하기 위해 호적수를 조작한 정황이 확인되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름이 바뀌었다는 증언이 많다. 해방 직후 조선의 문맹률이 78%이었던 걸 생각하면 그냥 면사무소 직원들이 원래 이름 베이스로 대충 그럴듯한 일본식 이름 짓고 당사자한테 통보했을 가능성이 높다.[20]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7집 창씨개명과 친일 조선인의 협력[21] 그저 반대했다는 이유로 잡아다가 처벌이 가능한건 당시 일본 본토가 파시즘화 상당히 진행되어 치안유지법을 근거로 정치적으로 마음에 안드는 사람들은 반동분자로 몰아 처벌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민사령이 적용되는 조선 또한 이전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았다.[22] 정주수.(2021).호적상담 사례로 본 일제강점기 창씨개명 이야기(2).사법행정,62(5),56-71.[23] 조선총독부, "朝鮮總督府 帝國議會說明資料. 第5卷", 東京, 不二出版, 1994, 75쪽. - 홍성표. (2022). 윤동주의 창씨개명(創氏改名) -연희전문 학적부 창씨 관련기록의 재검토-. 동방학지, 201, 143-168.에서 재인용[24] 朝鮮姓名復舊令에依하야名復舊 檀紀四貳七九年拾貳月貳拾四日改訂함(조선성명복구령에 의하여 이름을 복구함. 단기 4279년 12월 24일 개정함.)[25] "한국식 이름을 가졌던 사람이 일제강점기 창씨개명으로 일본식 이름을 가지게 된 경우라면 성명복구령에 의하여 당연히 종전의 한국식 이름으로 복구되었어야 하는데 아직까지도 창씨개명된 일본식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면, 그 창씨명은 이미 무효로 된 이름이므로 개명의 절차에 따라 개명할 사항이 아니고 호적 정정의 대상으로서 호적공무원이 직권정정절차에 따라 정정하여야 할 사항이고, 다만 그러한 창씨개명의 사실이 호적(제적)상에 명백히 나타나 있지 아니한 때에는 사건본인은 그러한 사실을 증명하는 서면을 첨부하여 직권정정을 촉구하는 의미의 호적정정 신청을 본적지 시(구)·읍·면의 장에게 제출할 수 있을 것이다."(구 호적선례 2-339).[26] 대표적으로 추성훈이 있다.[27] 이렇게 링크한 이유는 바로 밑 문단에 서술.[28] 다만 이는 사실 기만에 가깝다. 이미 일본에서도 성씨는 거의 합쳐져 있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씨고 성이고 다 갈아지는 것이나 다름없다.[29] 사실 일제 입장(...)에서는 이 우려가 기우는 아니였던 것이, 조선인 징병이 시행된 후 징병된 조선인들이 일본군에서 배운 기술이나 무기등을 가지고 탈출해 독립군측에 도움을 준 경우(...)도 많았고(당장 지청천 등이 해당 케이스다.) 쁘락치가 되는 경우도 많았다.[30] 원평등귤은 일본에서도 4대 본성이라고 하여 일본인도 개명하기 어려운 성씨이다. 도쿠가와 등의 유명 가문도 그러했기 때문에 해당 성씨로 창씨개명이 어려웠던 건 딱히 조선인을 차별했다고 볼 수 없다. 또한 '조선인임을 알 수 있는 성씨로만 창씨개명을 할 수 있었다'는 주장도 실제 개명 사례를 보면 사실이라고 보기 어렵다.[31] 다만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이 도호쿠 지방에서도 아이누-조몬인의 혈통은 높아봤자 9%정도다. 이들이 아이누의 생물학적 후예라 하긴 무리가 많다.[32] 김영달,{創氏改名の硏究}, 1997, 未來社[33] 이승일, "일제시기 조선인의 일본국민화 연구: 호적제도를 중심으로" 한양대학교 한국학연구소 34 : 2000[34] 미즈노 나오키, 조선총독부는 왜 창씨개명을 실시하였는가, 2004[35] 宮田節子, “창씨개명의 실시과정”, 정운현 편역, 창씨개명 (학민사, 1994), 71~4면, 100~2면.[36] 뿐만 아니라 출생, 혼인, 사망, 상속, 진학, 취직 등 개인의 법률적 행위에 있어서 필수적인 서류였다. 당시의 호적등본은 현재의 법적 서류에 비유하자면 딱 맞아떨어지지는 않지만 대체로 '가족관계증명서+혼인관계증명서+기본증명서+친양자관계증명서'에 주민등록등본의 기능까지 합쳐진 존재라고 볼 수 있다. 호적초본은 기본증명서+혼인관계증명서와 주민등록초본의 기능이 포함되었다고 이해하면 무리가 없다.[37] 매일신보, 1940.05.17, 석간 2면[38] 매일신보, 1940.06.29, 조간 2면[39] 朝鮮高等法院判決錄(1933.3.3.판결문)[40] 이와 관련하여 經國大典 법규를 참고. “文武官六品以上祭三代, 七品以下祭二代, 庶人則只祭考妣. 若嫡長子無後則衆子, 衆子無後則妾子奉祀”(經國大典 禮典 奉祀條) ; “嫡妾俱無子者 告官立同宗支子爲後....尊屬與兄弟及孫 不相爲後”(經國大典 禮典 奉祀條). 즉, 경국대전 '奉祀條'는 조부모 부모 등을 제사함에 있어 品階와 庶人을 구분하여 적장자를 원칙으로 제사를 받드는 것에 대해 규정한다. 그리고 '立後條'는 嫡妻와 첩이 모두 아들이 없는 경우는 官에 신고하여 성과 본이 같은 同宗의 支子를 세워 家를 이어가게 하는 원칙을 분명히 하고 있다. 더하여 존속과 형제 및 손자의 行列에서는 서로 立後(입양)하지 않음도 규정하고 있다.[41] 윤치호는 1940년 6월 17일, 성을 이토(伊東)로 바꾼 후 이토 치코(伊東致昊)로 개명했다.[42] 윤치호 일기:1916~1943(김상태 역, 역사비평사, 2001)463페이지[43] 당시 일제가 미군 공습에 대비하여 실시했던 '방공연습'의 일본어(호코렌슈)와 발음이 비슷해서 놀림을 받았다.[44] 물론 다 그랬던 것은 결코 아니다.[45] 무려 300년 이상을 지배받았으니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들 모두 스페인어를 아직도 쓰고 이름도 스페인 이름이거늘 전쟁까지 벌이며 독립했다. 스페인이 벌이던 차별에는 이들도 반발했고 시몬 볼리바르 같은 남미 독립 영웅도 심지어 스페인 계 핏줄이 흐르는 혼혈 귀족임에도 스페인과 남미는 다른 나라라고 주장해 독립전쟁을 이끌었다. 필리핀 독립을 이끌던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수백여 년 지나도 일본에 대하여 일본어나 이름은 낯설지 않아도 차별이 이어질 테고 결국 이렇게 될 가능성이 높다.[46] 현재 이들은 고인이거나 살아 있더라도 일제강점기에 갓난아기여서 '개명'을 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창씨개명 피해자들 중 중년층도 제법 되는 편이었으나 이들이 모두 65세를 넘는 200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창씨개명의 피해자들은 전원 노인이 되었으며 왠지 남자들이 많아 보이는 것은 당시 취학률은 남자 쪽이 여자보다 더 높았기 때문이었다.[47] 나머지 4명은 창씨개명을 한 조선인인지, 일본인인지 알 수 없으나 당대의 인구 분포 및 방송에서 조선어를 함께 사용했던 점을 미루어 본다면 이 4명 중에도 조선인이 한 명 이상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48] 이원구의 할아버지는 을사오적 이근택이다.[49] 당시 일본 제국의 4대 방송국은 도쿄 방송국 (東京, JOAK), 오사카 방송국 (大阪, JOBK), 나고야 방송국 (名古屋, JOCK), 경성방송국(京城, JODK)로, 경성방송국 역시 코드 넘버링을 A,B,C,D로 일관되게 했을 정도로 비중이 있었던 방송국이다. 이들은 NHKKBS로 계승된다.[50] 조선인과 조선 출신의 일본인[51] 미즈노 나오키. (2008). 창씨개명 - 일본의 조선지배와 이름의 정치학, 69, 80-82[52] 정주수.(2021).호적상담 사례로 본 일제강점기 창씨개명 이야기(2).사법행정,62(5),56-71.[53] 조선총독부, "朝鮮總督府 帝國議會說明資料. 第5卷", 東京, 不二出版, 1994, 75쪽. - 홍성표. (2022). 윤동주의 창씨개명(創氏改名) -연희전문 학적부 창씨 관련기록의 재검토-. 동방학지, 201, 143-168.에서 재인용[54] 예외로 의사는 최상류층 자제 출신이 적은 대신 되는것이 굉장히 어려웠다. 애초에 조선인 의사는 전문학교, 의대 출신을 전부 포함해 약 2~4천명 수준으로 조선내 의과 대학에서 조선인 보다 일본인이 더 많이 배출되던 직종이다. 거기다 부모가 고등학교까지 진학시킬 정도로 어느정도 수준이 되는 지주 여야 했고 일본의 차별 정책 때문에 조선인 출신으로서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자비로 유학을 가거나 외국인이 운영하던 세브란스병원을 통해 진학하는게 현실적이었을 정도다.# 당연히 1년 학비도 보통학교 선생의 연봉과 맞먹었다.[55] 지금도 혐한들은 범죄자 이름이 한국식 같으면 재일이 벌인 범죄라고 단정한다. 예로 당시 일본의 민예 연구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는 한국어로 풀이하면 유종열인데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기위해 광화문 철거하는 것을 결사 반대 하자 총독부 직원들이 조선인 아니냐고 흉을 봤다는 일화가 있다.[56] 1911년 조선총독부령 제124호 <조선인의 성명개칭에 관한 건>과 그에 관련된 통첩에 의하면, '일본인으로 혼동하기 쉬운 성명'으로 바꾸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다. 이 법규는 1939년 창씨개명에 관한 법령들이 발표되면서 폐지되었다.{미즈노 나오키, '조선인의 이름과 식민지 지배', 2007}[57] "(전략)~ 오해하여서 안 될 것은 조선사람이 내지식으로 씨를 붙이고 이름을 지으면 내지인과 같은 월급을 받을 수 있겠지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는 모양인데, 그렇게는 되지 않는다. 아직도 내지와 조선 사이에는 전적하지를 못함으로~(후략), '알기쉬운 씨와 양자-변호사 이승우씨의 해설', '매일신보 193911.11, 3면[58] 조선시대 당시 대표적인 명문가 중 하나로 유명 인물로는 권근·권람·권율 등이 있다.[59] 혹은 안토. 한자 표기는 같다.[60] 이를테면 안동의 안(安)과 권(權)을 따서 안켄(安權)이라고 한다거나.[61] 본명 심재설. 야인시대의 등장인물로도 나왔던 친일반민족행위자로서 심영이라는 예명으로 알려져 있다.[62] 소설 비명을 찾아서의 주인공 기노시타 히데요(木下英世 목하영세)도 조선식 성은 박씨다.[63] ex)鄭 = 奠+邑.[64] 현대 일본에서는 國 대신 国을 쓰지만 당시에는 國이 표준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일본에서 인명에서는 国을 안 쓰고 國을 쓰는 경우가 있다.[65] 그러나 전주 이씨를 제외한 다른 본관의 이씨 집안들은 창씨개명할 당시에 자나 자 등을 일본식 이름 작명에 사용하지 않았다는 의견도 있다.[66] 1930~40년대에 태어난 할머니 이름이 춘자(春子), 방자(方子)와 같은 이름이 많은 것도 그 이유다. 한국인이 듣기엔 촌스런 옛날 이름 이지만 일본어로 바꾸면 하루코, 마사코 등 지극히 평범한 여자아이 이름이 되기 때문이다.[67]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읽으면 야나기 다이코인데 일본 현지에서도 통할 정도였다.[68] 그래서 일제강점기 일본인임에도 불구하고 1984년에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받았다.[69] 재일교포와 상관없는 도호쿠 지방에서 종종 보이는 성씨. 실존 인물로는 전 야구선수 곤 히로아키 등이 있다.[70] 현대 기준 '야스'씨는 전국에 4000명, '구루마'씨는 전국에 1400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71] 사타케 요시시게·사타케 요시노부의 가신으로 구루마 쓰나타다(車斯忠)라는 사람이 있는데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에 등장하긴 하지만 사타케 팬이 아니면 기억에도 잘 안 남을 이 사람이 구루마 씨의 대표 인물로 소개될 지경이다. 현대인 중에서는 무술 지도자 겸 배우인 구루마 쿠니히데(車邦秀)#가 있다.[72] 그래서 반대로 이런 고전 쪽에 통달한 지식인들의 모임인 조선어학회의 회원 중에는 본인의 성이 일본의 씨로 쓰였다는 사례를 고전에서 찾아내 서기에게 제시했고 어쩔 수 없이 서기가 수용해서 그대로 넘어간 사례가 있다. 조선어학회는 당시 내로라하는 지식인들이 대거 집결한 곳이라 자연히 이 분야를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73] 음독 그대로 세키가하라 전투 때에 근처에 난구 산(南宮山) 이 있어서 일본인들은 한두 번 정도는 들어 본 지명이다.[74] 훈독(미나(미)+미야)[75] 일본의 성씨한국의 성씨와는 반대로 한자로 썼을 때 2글자인 성씨가 다수이다.[흥덕] 흥덕 장씨의 대다수는 하리모토로 창씨하였다.[인동] 인동 장씨가 주로 쓴 일본식 씨명으로, 베풀 장자를 파자해 장궁이라는 새 뜻으로 만든 것.[비개명] [비개명] [80] 순흥 안씨의 대다수는 야스다로 창씨하였다.[81] 죽산 안씨중에 타케야스로 창씨한 사례들이 있다.[비개명] [비개명] [비개명] [비개명] [비개명] [비개명] [비개명] [89] 倉衛는 의미상으로는 관계 없는 한자지만 '먹어라'라는 뜻인 喰らえ와 독음이 같다.[90] 이 때문에 일제강점기에 조선에서 이를 이용한 언어유희를 많이 했다고 한다. 이에 착안한 것인지 이준익 감독의 영화 박열에서 주인공 박열이 이 궁호를 빌미로 일본 교도관에게 천황을 욕보이면서 낄낄대며 개기다가 두들겨맞으며 고문당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했다.[91] 일본어로 "지쿠쇼"라고 읽히는 그 단어를 한국 한자음으로 읽은 것이다.[92] 대략 "엄이섭입니다." 같은 의미가 된다.[93] 여담으로 해당 성씨의 발음은 이와지(いわじ) 내지는 이와니(いわに)로 읽히게 된다.[94] 참고로 도요토미 가문을 무너뜨리고 에도 막부를 세운 도쿠가와의 성은 조선인들이 창씨명에 쓸 수 없게 했었다.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아들들이 일본 제국 본토에서 아직도 귀족 가문으로서 귀족원 의원, 귀족원 의장을 지내는 등 현역 귀족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요시노부가 대정봉환으로 스스로 메이지 덴노에게 정권을 넘겨줘서 도쿠가와 가문은 근대화 이후에도 메이지 신정부의 귀족 가문으로 편입되었었다.[95] 지금의 80대 중반~후반(1935~1941년생). 대표적으로 쓰키야마 아키히로(月山明博)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17대 대통령 이명박이 이 케이스다. 단, 이명박은 오사카 태생의 재일 한국인이었다.[96] 링크된 인물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음악인으로 활동한 인물이다.[97] LG그룹 2대 회장 구자경과는 동명이인인 1888년생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 경찰로 활동하였다.[98] 위의 인물과는 동명이인으로, 1906년생의 공산주의 계파의 독립운동가이다.[99] 성우 기영도와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였다.[100] 독립운동가, 1931~1932년생, 함경북도 경흥군 출신.[101] 독립운동가, 1925년생, 평안북도 자성군 출신.[102] 링크된 인물과는 동명이인인 1899년생의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 사회주의 계파 사회운동가 겸 언론인으로 활동했다.[103] 친일파, 1886년생, 황해도 재령군 출신[104] 독립운동가, 1915년생, 경기도 경성부 출신.[105] 대한민국의 가수 김명기와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106] 링크된 인물과는 동명이인인 1893년생의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 관료로 활동하였다.[107] 대한민국의 무술인 김명화와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108] 또는 당시 서울 용산역(山驛)에서 "전투에서 전사하여 기차에 실려 돌아오는 황군 장병의 시신에서 깊은 감명을 받아 슬퍼했다"는 경험을 토대로 용산역(山驛)을 이름에 반영했다는 의견도 있다.[109] 링크된 인물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였다.[110] 대한민국의 정치인 김봉두와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111] 링크된 대한민국의 기업인 김삼만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였다.[112] 독립운동가, 1896년생, 경기도 경성부 출신.[113] 독립운동가, 1910년생, 강원도 철원군 출신.[114] 대한민국의 양궁선수 김신애와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115] 김억 시인은 김소월 시인의 스승이었다. 김소월의 유명한 시 '삼수갑산 - 차안서선생삼수갑산운'의 '안서선생'이 스승 김억을 일컫는다. 번역하면 '안서선생께 보내는 삼수갑산 운(답시)'로, 김억의 시 삼수갑산에 대한 답시임을 나타낸다.[116] 링크된 인물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117] 친일반민족행위자, 1886년생, 경상북도 문경군 출신.[118] 독립운동가. 1915년생, 황해도 금천군 출신.[119] 친일반민족행위자, 1880년생, 한성부 출신.[120] 승려, 1884년생, 경상남도 함양군 출신.[121] 친일반민족행위자, 1888년생, 한성부 출신.[122] 독립운동가, 1915년생, 경상북도 김천군 출신.[123] 전자는 일본에서 일본인으로 위장해 생활할 당시에 사용하던 이름으로, 후자는 갑신정변 실패 이후 위험에 처하자 갑신정변을 주도한 개화파 세력들과 함께 떠난 일본행 망명길에서 승선한 지토세마루(千歳丸)호가 일본에 도착한 이후 헤어졌던 선원 쓰지 도주로(辻藤十郎)가 지어준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124] 가수 김재선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125] 대한민국의 국회의원 김재천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126] 한화그룹의 초대회장 김종희와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127] 독립운동가, 1902년생, 경기도 고양군 출신.[128] 링크된 인물들과는 동명이인1873년생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 관료로 활동하였다.[129] 독립운동가. 1921년생. 강원도 양구군 출신.[130] 독립운동가. 평안북도 후창군 출신.[131] 일제강점기 당시의 유명 배우. 독은기라는 예명으로 잘 알려져 있다.[132] 1877년생의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 관료로 활동했다.[133] 친일반민족행위자, 1902년생, 충청북도 제천군 출신.[134] 독립운동가, 1916년생, 경기도 경성부 출신.[135] 친일반민족행위자, 1896년생, 전라남도 여수군 출신.[136] 독립운동가, 1889년생, 경기도 경성부 출신.[137] 링크된 인물들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138] 1904년생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 법조인으로 활동했다.[139] 야구선수 박광명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140] 정치인 박광진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141] 1905년생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 언론인으로 활동하였다.[142] 김옥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갑신정변이 실패한 이후 떠난 일본행 망명길에서 지토세마루(千歳丸)호의 선원 쓰지 도주로(辻藤十郎)가 지어준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143] 박정희의 창씨개명이 오카모토 미노루(岡本 実)나 마쓰모토(松本)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가 실제로 창씨개명 시기에 정식으로 작명한 일본식 이름은 "高木正雄" 하나뿐인 것으로 추측된다.* 북한이 그의 친일행적을 비판하려는 목적으로 퍼뜨렸다는 주장도 있고, 일부 전문가들도 본관인 고령(高霊)과, 본명인 정희(正熙)의 "正"등을 가져와 본관과 본명을 일부 유지하여 "高木正雄"라고 창씨개명을 하였기에, 2차 개명을 하였단 걸 입증할 확실한 증거와 마땅한 이유가 없다는 점을 들어 이는 낭설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있다.[144] 대한민국의 트로트 가수 박태산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였다.[145] 링크된 인물과는 동명이인1883년생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 관료로 활동하였다.[146] 동명이인의 친일반민족행위자 박흥식과는 다른 인물로, 1900년대 중반 전라북도 남원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147] 대한민국 제 28대 법무부 장관을 지낸 백상기와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148] 1893년생. 일제강점기대한민국의 법조인으로 활동한 인물로, 1919년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암살할 목적으로 자신의 집에 찾아와 자금을 요구하던 의열단윤병구, 유석현, 김지섭 등의 독립운동가들을 일본 경찰에 밀고하여 체포하도록 하였으며, 1927년에는 일본인 교장을 배척하는 운동을 벌였던 박종운, 박일봉 등 주도 학생들의 재판에 판사로 참여, 같은 달 비밀결사 단원 김응선 등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이 체포되어 열린 재판에서 판사로 참여, 1931년에 일어난 광주학생운동을 계획하고 전개한 임종만, 고인환 등의 학생들의 검사 측의 항고로 열린 항소재판과 이들에 대한 면소결정을 파기하여 본래 법원으로 돌려보냈고, 1932년에는 무장 독립운동 단체인 국민부, 군사부의 김형건, 박차석 등의 독립운동가들이 체포되어 열린 재판에 참여하는 등 여러 친일 행적을 보인 인물로, 이러한 경력으로 1934년에 일본 정부로부터 훈 5등 서보장을 수여받는 등 일본 정부로부터 여러 차례 훈장을 받은 인물이다.[149] 1879년생의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 관료로 활동했다.[150] 독립운동가, 1908년생, 경기도 경성부 출신.[151] 독립운동가, 1913년생, 경기도 양주군 출신.[152] 링크된 인물과는 동명이인1900년생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 교육인으로 활동하던 인물이다. 여담으로, 친일파 김활란과는 학교 선후배 관계이다.[153] 역사학자 서중석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154] 링크된 인물과는 동명이인1890년생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 경찰로 활동했던 인물이다.[155] 1942년 일본으로 밀항하여 해방 이후에도 이 이름을 통명으로 삼았고, 일본에서 사업을 하는 동안 사실상의 본명으로 사용했으며, 현재도 일본에서는 이 이름을 쓴다. 그의 아들들 역시 일본 통명이 있다.[156] 교육인 신정균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경기도 포천군 출신 인물이다.[157] 교육인 신정균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전라북도 옥구군 출신 인물이다.[158] 친일반민족행위자임과 동시에 인도네시아의 독립운동가라는 독특한 이력을 가진 인물이다.[159] 링크된 인물과는 동명이인1890년생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 관료로 활동한 인물이다.[160] 링크된 인물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기업인으로 활동한 인물이다.[161] 링크된 인물과는 동명이인1889년생의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 관료로 활동했다.[162] 대한민국의 기업인, 정치인, 비서실장을 지낸 유영민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163] 영화감독 유영선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164] 중앙일보 연재 청와대비서실[165] 링크된 인물과는 동명이인1897년생의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 관료로 활동하였다.[166] 정치인과 기업인을 지낸 이경희와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였다.[167] 해발 152 m짜리 야트막한 산이지만, 헤이조쿄를 둘러싼 야마토 3산 중 가장 신성시되었다. 만요슈에서도 가구산을 자주 언급하며, 오늘날 일본도 중요성을 인정하여 역사적풍토특별보존지구로 지정하여 보존한다. 지금도 종교인들이 종교적 목적으로 가구산에 오르곤 한다. 진무 덴노가 도읍했다는 우네비산도 아니고 하필 가구산에서 이광수가 성을 따왔음은 가구산이 야마토 3산 중 가장 특별한 곳임을 알았다는 증거이다.[168] 그러나 이 설을 반박하는 의견 중 하나로, 당시 이광수가 자신이 살던 이북 지역의 묘향산(妙香山)의 지명을 가져와 가야마(香山)로 창씨하였다고 주장하는 의견도 있다.[169] 대한민국의 모델 겸 유튜버인 이남수와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170] 구한말 시기의 조선 관료인 이도재와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171] 링크된 인물과는 동명이인1897년생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 목회자로 활동하였다.[172] 위의 이동화와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당시 일본에서 활동한 사회기관단체인이다.[173] 참고로 이명박 형제는 '상' 자 돌림을 쓰고 있고(이상득-이상은), 이명박 역시 족보에는 돌림자가 사용된 '이상정(李相定)'으로 기재되어 있다. 호적상 성명과 족보상 성명이 다른 경우는 주변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실제 사례로는 조국[239], 김대건 신부[240], 이만희[241], 한동숙[242], 심대평[243], 정형돈[244] 등이 있다.[174] 대한민국의 작곡가 이민수와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175] 독립운동가, 1898~1899년생, 경상북도 상주군 출신.[176] 독립운동가, 1916년생, 평안북도 선천군 출신.[177] 이 사람의 아들.[178] 게임개발자 이승찬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179] 이영은으로 이어지는 인물들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180] 링크된 인물과는 동명이인1893년생의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 은행원으로 활동하였다.[181] 링크된 인물과는 동명이인1886년생의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 관료로 활동했다.[182] 국회의원 이재옥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였다.[183] 무협소설 작가 이재일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였다.[184] 국민의힘에서 활동하는 법조인 출신 정치인 이정만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였다.[185] 독립운동가, 1900년생, 경기도 파주군 출신.[186] 독립운동가, 1919년생, 경기도 고양군 출신.[187] 친일반민족행위자, 1885년생, 경상도 울산도호부 출신.[188] 독립운동가, 1914년생, 충청남도 연기군 출신.[189] 대한민국의 정치인 이주상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였다.[190] 대한민국의 야구선수 이진영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였다.[191] 친일반민족행위자, 1903년생, 경기도 한성부 출신.[192] 친일반민족행위자, 1909년생, 전라북도 전주부 출신.[193] 독립운동가, 1920년생, 경기도 수원군 출신.[194] 서정주가미카제 미화 및 찬양시 '마쓰이 오장 송가'의 주인공이다.[195] 학병으로 징집되었을 당시 일본 당국에 의해 작성된 육군전시명부에 창씨개명한 성 張安 옆에 가타카나로 하리야스(ハリヤス)라는 독음이 적혀져있다.[196] 대한민국의 초대 여성가족부 장관 장하진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197] 영화감독 전창근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영화감독과 배우로 활동한 인물이다.[198] 링크된 인물과는 동명이인인 1889년생의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 경찰관료로서 활동한 인물이다.[199] 지토세마루 선장 쓰지 가쓰자부로(辻勝十郞)의 아들로, 김옥균과 유혁로에게도 일본식 이름을 직접 지어줬다.[200] 대한민국의 드라마 감독 정대윤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201] 기업인 정상봉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202] 대한민국 제 7대 기상청장 정순갑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203] 뮤지컬 배우 정영주와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204] 대한민국의 제 22대 국방부 장관과 제 42대 내무부 장관을 지낸 주영복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205] 대한민국의 경찰공무원 최경락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206] 국회의원 최병권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207] 후백제의 관료 최승우와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였다.[208]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최윤경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였다.[209] 대한민국의 아이돌 가수 최준홍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였다.[210] 링크된 인물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였다.[211] 1892년생.[212] 1895년생.[213] 대한민국의 펜싱선수 하태규와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214] 일제강점기에 활동하였던 기업인이다.[215] 1885년생의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 관료로 활동했다.[216] 정치인 홍건표와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217] 제 4대 국군방첩사령관 황유성 중장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218] 위의 황종률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목회자로 활동한 인물이다.[219] 다 알다시피 이슬람교에서 돼지는 기피의 대상, 힌두교에서 소는 신성한 존재다.[220] 문제는 여기도 중국계 성씨는 너무 중국인 이름 같아서 화교나 그 후손으로 백프로 짐작할 수 있다는 점이다.[221] 가령 유명한 역도 선수 나임 술레이마노프(Наим Сюлейманов)는 나움 샬라마노프(Наум Шаламанов)로 변경되었다. 튀르키예로 탈출하고 나서 이름을 나임 쉴레이마놀루(Naim Süleymanoğlu)로 바꿨다. 해당 인물은 2017년 11월 사망.[222] 혈통상 불가리아계였지만 조상이 오스만 제국 시절 이슬람교로 개종하여 대대로 무슬림으로 살아가게 된 포마크인 또한 독립국가 불가리아의 무슬림 탄압을 피해 튀르키예계와 함께 지금의 튀르키예 땅으로 이주하는 경우가 많았다.[223] 공교롭게도 튀르키예인의 가까운 친척뻘 민족인 아제르바이잔인들 또한 독립국가 아제르바이잔에 사는 이들은 자신들을 지배했던 러시아 제국소련의 영향을 받아 튀르키예식(아제르바이잔식) 이름과 슬라브식 성씨를 쓴다.[224] 단순히 스웨덴의 지배를 받은게 아니라 스웨덴 입장에서는 건국 초부터 원주민인 핀인들을 정복하면서 편입된 그냥 '본토의 일부'였다.[225] 그래서 같은 우랄계 민족인 헝가리인들이 주변국 주민들에 비해 평균 신장이 작은 반면, 핀란드인들은 평균 신장이 주변국 주민들과 큰 차이가 없다.[226] 고대 유대인 사회에서는 성씨라는 개념이 없었는데 디아스포라 이후 유럽에 정착하면서 성씨 개념을 받아들이고 아무래도 현지에서 가장 익숙한 게르만/슬라브식 성씨를 만든 것이다.[227] 다만 중화권 출신 이민자의 경우 대개 전자를 택하는 편이다. 한자의 한국식 독음도 중국어의 방언 비슷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228] 이탈리아어 위키백과나 프랑스어 위키백과에서도 후안 카를로스 1세의 항목명은 Juan Carlos이다. 번역명을 썼다면 Giovanni Carlo나 Jean Charles로 기재되었을 것이다. 단, 폴란드어 위키백과에서는 Jan Karol이라는 번역명으로 기재되었다.[229] 영어권에서 에스파냐 국왕의 이름을 지칭할 때는 이사벨 2세까지는 번역명을 사용하고, 후안 카를로스 1세부터는 원어 그대로 표기한다. 그 사이에 재위한 알폰소 12세알폰소 13세도 원어 그대로 부르기는 하지만, 이 경우는 알폰소에 대응하는 영어 이름이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아 번역명을 사용할 수 없었다.[230] 예를 들어 박초롱초롱빛나리[231] 대한민국에서는 법률로 인명용 한자를 지정하는데, 인명용 한자의 음까지 같이 규정한다.[232] 귀화하는 외국인의 경우 순한글 성씨도 가능하다. 단, 성과 명 사이에 띄어쓰기는 불가능하다. 저술가로 유명한 박노자가 귀화할 때 이런 식으로 성명을 지어 그의 가족관계등록부상 정식 이름은 '티코노프블라디미르'다.[233] 아미키리 이치로(網切一郞)가 한국으로 귀화하면서 이름의 한자 표기를 그대로 유지하고, 한국식으로 읽은 '망절일랑'을 이름으로 사용한 케이스이다.[234] 그 경우도 귀화하지 않으면 한국 이름 그대로 쓰는 사람도 많다. 특히 성인이 돼서 넘어간 케이스. 당장에 김무영 같이 일본에 완전히 정착했는데도 한국 이름을 꿋꿋이 유지하는 사례도 있다.(이 사람은 부인이 일본인인데다가 미필이라 한국에 돌아오면 군대에 가야하기 때문에 그걸 회피하기 위해서 일본에 정착했을 수도 있다.)[235] 혹은 장기체류 하지 않더라도 그냥 재미삼아서[236] 물론 이런 경우는 사실 발음 문제가 크다. 구미권에서는 ㅓ나 ㅡ같은 모음의 발음을 어려워하기도 하고(우리에게 친숙한 언어 대부분은 ㅡ발음이 없다), 한국 이름 중 현지어로 이상하게 들리는 글자가 있는 경우(석-suck, 범-bum, 일-ill 등) 등이 있다.[237] 예를 들어 프랑스잔 다르크(Jeanne d'Arc)는 영어로 Joan of Arc로 적는 경우가 많다. 잔 다르크가 현대인이었으면 프랑스어 표기 그대로 적었을 텐데 옛날 사람이거나 현대의 인물이라도 왕족일 경우에는 전통적인 방법대로 이름을 '번역'한다.[238] 물론 쿨하게 씹고 전통적인 방식대로 '번역'하는 경우도 많다.